월간이리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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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수면을 걷는 사람들 - 2.소라 / 글. 소한집 사진. @photo.j.keith 축구 사랑 유전자 / 글. 김대성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영화 수업 - 다시 SF의 시대!: 2010년대의 SF(Sci-fi) 영화 / 글. KIM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옆사람 인터뷰 - 22. 멜버른에서의 일상 /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 35. 도쿄 타워 / 글. 사진. 그림. aoikasa 지진파 - 기술 중독 사회, 어촌자본주의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대선을 앞두고 굴림체로 - 1. 부모님 설득하기 / 글. exxx


2016년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제게 2016년은 많은 사람과 상황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몰랐던 나를 마주하는 한 해였어요.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주변을 잘 돌아 보지 못하고 혼자 빠져나갈 구멍만 찾기 급급했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을 스스로에게서나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동시에 느꼈기 때문에 유독 더 지독하지 않았나 싶어요. 괴로움이 해가 바뀌었다고 거짓말처럼 사라지지는 않 겠지요. 어쩌면 깊숙이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고 모든 걸 내려놓고 멈 추지는 않으려고요. 지난날의 나에게도 미안하지 않으려면 계속 나아가야겠지요. “선택이 가닿는 곳은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삶이 선택의 갈림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촘촘한 쓸쓸함에 삶이 포박당해 있다는 뜻이다. 기적처럼 빛나는 순간을 꿈 꾸며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을 무시로 그리워하면서, 우리는 모래 같은 삶을 더 잘게 바수어 그저 살아간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선택들을 기록하고 기억 하는 일이다. (..) 우리는 사상 최장의 탐사보도를 선택했다. 그 때문에 놓쳐버리는 것이 있다 해도, 쓸쓸한 길이라 해도 그저 나아갈 뿐이다. 1년 뒤 그대와 나는 어떻 게 변해 있을까. 어쩌면 혹시 기적처럼 빛나게 될까.”

한겨레 안수찬 편집장의 글을 보고 메모해두었는데 여기서 다시 꺼내게 되네요. 앞으로 또 어떤 것을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적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기 를 바라며.

2017년 1월

호지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수면을 걷는 사람들

글. 소한집(@condensed_bold) 사진. @photo.j.keith 2 소라 흰 옷을 입으면 하얀 기분이고 파란 옷을 입으면 붉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분홍 옷을 입으면 살결에 가까운 기분이다. 분홍색은 사람의 피부와 비슷한 종류의 온기를 가지고 있다. 살색보다 더 솔직한 색이다. 따뜻하면서 애착이 가고 때에 따라서는 징그럽기도 하다. 그런 것까지 사람 같다. 분홍 교복이었다면 운동장이 우리로 가득찰 때 어떤 기분이 들까, 소라는 궁금했다. 스케치북에 사람을 많이 그려 보았다. 분홍색 옷을 입은 학생들은 그러나 학생 같지 않았고, 소라는 기뻤다. 버섯 같다. 독 있는. 침대에 앉아 있던 시리가 말했다. 소라는 고개를 들어 시리의 입술 아래 있는 작은 점을 보았다. 우리가 독버섯이라면 아무도 꺾지 않겠네? 소라가 묻자 시리는, 난 사진조차 찍히고 싶지 않아, 라고 말했다. 소라는 시리의 얼굴 앞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었다. 소라는 어제 시리가 공중에 떠오르는 듯한 사진을 찍었다. 시리가 그걸 지워 버렸다. 소라는 아쉬웠다. 시리의 손목에서 이어진 링겔이 위로 이어져 있었다. 소라는 그 선에서부터 시작하여 스케치북에서 펜을 떼지 않고 시리의 얼굴을 그렸다. 둥글고 평온한 얼굴이다. 잠들기 직전처럼 시리는 깊고 불안정한 수면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소라는 시리가 곧 퇴원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어디가 어떻게 치료되었는지를 모르겠다. 시리는 교통사고는 원래 그렇다고 한다. 잘 안다는 듯이 말이다. 웃으면 갈비뼈가 아프다고 말하는 주제에.


처음 사고가 났을 때 시리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한 순간 붕 나는 듯하던 시리는 엉덩이부터 과속방지턱으로 떨어졌다. 아직 차가 지나다니는 차도에서 몸을 털고 일어나 조금 이상한 자세로 뛰어 인도로 들어왔다. 소라가 괜찮아? 하고 크게 묻자 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뒤에야 시리는 이상을 느꼈다. 화장품 가게에서였다. 마음에 드는 색의 섀도우를 손등에 두드리듯 발라 보는 소라의 옆에서 시리가 갑자기 어정쩡하게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소라가 내려다보자 시리는 바로 다시 일어났다. 둘은 화장품 가게를 나와 로데오거리를 얼마쯤 걸었다. 약간 어두운 낮이었다. 사람들이 많았고 건물에는 간혹 네온사인 불빛이 어색하게 켜져 있었다. ――아파? ――아닌데. 불편해. ――어떻게 불편한데? 시리는 잠깐 멈춰서 자세를 바꾸어 보았다. 허리를 기울여 보고 몸을 꼿꼿이 펴보거나 신발을 급하게 신을 때처럼 발끝을 바닥에 털어보기도 했다.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시리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잠깐이면 견딜 수 있지만……. 건너야 할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시리는 잠깐 건물의 계단에 앉아 쉬었다. 3층에 사우나가 있는 건물이어서 비누와 샴푸가 든 바구니를 낀 사람이 젖은 머리를 털며 지나다녔다. 맞은편의 편의점에서는 캡모자 아래로 긴 갈색 머리를 내놓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서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소라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운전자에게 전화번호를 받아둔 게 다행이었다. 시리는 스케치북에 있는 그림을 오랫동안 보았다. 선이 뒤엉켜 눈 코 입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시리는 그림이 사진보다 재미있다고 말하곤 했다. 사진은 아무리 아름다운 장면이어도 무서웠다. 그림이 사진보다 무서워질 때면 시리는 현재의 불행에서 보지 못한 다른 각도의 모습들을 마주치게 된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보는 사진들은 불행하고 슬퍼서 무섭거나, 과장되게 예뻐 보여서 무섭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시리는 무엇으로든 남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난 해에는 무엇이 남았지? 소라는 스케치북을 넘겨 보았다. 장마다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우산을 줍는 사람과 뒷모습만 존재하는 사람이 있었다. 스케치북 속의 사람들은 기뻐 보이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았지만 아직은 사람 같았다. 그건 분명 중요하다고 소라는 생각했다. ――누워 있던 애 기억 나? 소라가 물었다. 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커튼을 치고 병원복을 벗었다. 오래 되지는 않은 일이었다. 방과 후에 사람 없는 교실에서 창문 밖을 내려다 보았을 때 건물 앞을 둘러싼 작은 화단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다. 긴 머리에 피부가 하얀


아이었는데 소라와 시리가 놀라서 내려가자 부스스 일어났다. 한 번 누워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도 소라와 시리는 한동안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화단에는 사람의 모양으로 주저앉은 풀들이 서서히 바람에 흔들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며 무엇을 떠올렸던 것인지 두 사람은 어렴풋이 알았다. 시리는 교복 단추를 잠그고 종이봉투 안에 물병과 몇 권의 책을 넣었다. 간호사가 왔다. 시리가 퇴원 수속을 밟는 동안 소라는 병원의 답답하고 독특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천천히. 밖으로 나갈 때까지 계속. 병원의 밖에는 검은 교복을 입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시리는 기침을 하면서 가슴 언저리를 더듬거렸다. 횡단보도 앞에서 그들은 멈췄다. 깜빡거리던 파란불이 꺼졌다. ――왜 저러지? 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호등은 아무런 불빛도 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멈칫했지만 어느 순간 다시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소라는 스케치북을 쥔 손바닥으로 스프링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하늘과 건물에 둘러싸인 채 소라는 시리의 표정을 살폈다. 후유증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리는 뜻밖에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그림자가 옅어지고 거리의 불빛이 켜져갔다. 밖은 눈이 오기 직전처럼 추웠다. 작은 두 사람은 건널목을 벗어나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다음 페이지에 소개될 김 대성님의 원고는 우편으로 보내주신 원고지 50매를 타이핑 한 것입니다. 월간이리를 어느 미용실에서 우연히 보시고 보내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존의 연재 방식과 다른 접근에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손으로 긴 원고를 쓰 는 것이 얼마나 많은 열정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알기 때문에 가능한 원본을 건드리지 않는 선 에서 옮겨 놓았습니다.

정식 연재는 아니지만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성님의 노력과 내용을 보았을 때 충분히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릴 만한 글이라고 생각하여 싣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축구사랑 유전자 글. 김대성

내가 7살이던 1977년 봄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국제 대회 경기를 관전한 일이 있다. 그 경기는 1978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제 11회 월드컵 축구 대회, 아시아 지역 1차 예선, 우리 대한 민국 vs 이스라엘의 경기였다. 내가 1남 3녀의 막내인데, 부모님과 첫째 누나는 못가시고, 나와 둘째 누나와 셋째 누나가 같이 가서 봤다. 이 경기는 우리 외삼촌께서, 관전 시켜 주셨다. 이 경 기는 우리나라의 홈경기로,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렸다. 경기 전날, 외삼촌께서 오후에 집 에 오셨다. 그 경기가 열린 날이, 1977년 3월 20일 일요일로 기억난다. 경기 전날 우리 집에 오 신 외삼촌께선, 부모님에게, “누나, 매형 내일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우리나라가 이스라엘 하 고, 월드컵 축구 아시아 예선 경기를 해요, 내가 내일 그 경기 보러 가려고 하는데, 애들 데리고 가서 보여 주려고 해요, 누나하고 매형도 같이 가요” 하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간질과 류마티스 관절염, 기관지 천식에 시달리셨고, 첫째 누나는 정신박약아로 태어나서 지능이 거의 없다 시피 해서, 부모님이 돌봐 주셔야 했고, 만성 대장염 때문에, 설사가 잦아서 늘 기저귀를 차고 지냈다. 어머니도 허리 디스크 때문에 힘드셨다. 우리 어머니께서, “큰 애도 아프고, 니 매형도 아프셔 서, 가긴 힘들어, 나도 허리가 아프고 말야, 도저히 못가.” 라고 하셨다. 우리 3남매는 가고 싶었 다. 축구를 좋아하시던 아버님께서 당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TV가 없었지만,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축구, 야구, 농구, 배구, 핸드볼, 프로 복싱 세계 타이틀 매치 등, 우리나라 각 종목 국 가 댚 선수들의 국제 대회 시합 날마다, 중계방송을 들으시며, 우리 선수들을 열렬하게 응원 하 시는 모습을 우리 3남매가 보고 자랐다. 그래서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던 그 때이다. 특히 아버지 께서 축구를 매우 좋아 하셔서, 우리 3남매는, 축구 관전을 하고 싶었다. 우리 3남매가 축구 관전 을 같이 가고 싶어 하자. 부모님께서 허락 하셨다. 가끔 친척 분 댁에 가서, 축구, 야구 등 스포츠 중계를 TV로 봤는데, 주로 국가 대표팀의 국제 대회 출전 경기를 본 것이다. 아버님께서, 이북 황해도 봉산이 고향이신 실향민이시고, 이산 가족이셔서, 우리는 친지가, 본가가 아무도 안계시 고, 다 외가뿐이다. 어머니께서 경기도 평택이 고향이시다. 주로 외삼촌 댁과, 외할머니 댁에 다 니며 TV 봤고, 동네에 외삼촌이 자주 우리 가족을 불러 주셔서 TV 봤다. 그 날 부모님께선 외삼 촌에게 애들 잘 데리고 갔다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우리 둘째 누나, 셋째 누나, 그리고 막내 인 나는, 외삼촌을 따라 외삼촌 댁인 경기도 평택 서정동에 가서 하룻밤을 잤다. 외숙모께서 저 녁을 차려 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 외삼촌 댁에서 아침을 먹고, 3월 말, 아직 쌀쌀한 기운이 감돌아서, 외숙모 께서 점퍼를 사서 입혀 주셨다. 우리 3남매는 외숙모가 사주신 점퍼를 입고 서정동 기차 역에 갔다. 내가 외삼 촌이 세분이신데, 축구 관전 시켜 주신 외삼촌이 막내 외삼촌 이시다. 그날 첫 째 외삼촌의 맏아 드님인 형님도 같이 가게 되었다. 우리 3남매, 막내 외삼촌 내외분과, 막내 외삼촌의 어린 두 딸. 그래서 모두 8명이 같이 가게 되었다. 서정동에서 오전 11시 기차를 타고 2시간 여를 달려 동대 문 역에 도착했다. 외숙모께서, 미리 멀미약을 사 먹이셔서 잘 왔다. 동내문 역에서 내려서, 우리


일행은 택시 두대에 나눠 타고, 한 대는 외삼촌과 우리 3남매, 한대는 외숙모와 외사촌 형과 외 삼촌의 두 딸이 타고, 동대문 운동장에 도착했다. 큰 운동장에 압도 되었고, 발을 디디기 힘들 정 도의 엄청난 관중 수에 놀랐다. 귀가 멍 할 정도로, 경기 전 인데도, 응원 소리가 매우 컸다. ㅍ를 산 우리는 경기장에 들어가서, 표를 내고, 자리를 잡았다.

맨 뒤쪽이라 관중석에서 경기장 까지 꽤 멀어 보였다. 3월 말, 아직 누르스름한 잔디에서, 경기 가 시작되기 전, 외삼촌 외숙모께서 카톨릭 신자이셔서 두 손 모아, 간절하게 기도 하셨다. 붉은 색 상의, 푸른색 하의를 입은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과, 하늘색 상의 검정색 하의를 입은 이스라 엘 선수들이 입장하자, 관중석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이어 양국 국가가 나왔다. 이스라엘 국가 가 먼저 나오고, 뒤이어, 우리 애국가가 나왔다. 나와 두 누나도 기독교 집안이어서 우리가 승리 하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다. 외사촌 형도 천주교를 믿어서 같이 기도 했다. 진영이 결정 되고, 우리 선수들이 둥글게 모여, 필승 의지를 다졌다. 이영무 선수가 두 손 모아 기도 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외삼촌이, 이영무 선수가 기독교 인이라고 하셔서 알았다. 드디어 전반전이 시작 되었 다. 경기 초반 우리 선수 하나가 상대와 부딛혀서 부상을 입고 누웠다. 외삼촌은 김강남 선수라 고 하셨다. 김강남 선수가 부상이 심해서 실려 나오고, 다른 선수로 교체 되었다. 외삼촌은 교체 된 선수가 박상인 선수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김강남 선수가 실려 나올때 울음이 터졌고, 외사 촌 형이 달래셨다. 전반 중반, 우리의 첫 득점이 나왔다. 이영무 선수가 상대 키를 넘기는 패스를 올려 주자, 문 앞에서 차범근 선수가 받아서 왼발로 반대쪽 구석으로 낮게 깔아 차서 득점 했다.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 였다. 정말 그 일어서서 박수 치면서 함성을 지르는 관중들의 소리에 귀 가 멍했다. 우리 선수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환호하고, 차범근 선수 위로 여러 선수가 올라타는 게 보였다. 외삼촌이, 이영무 선수가 패스 주고, 차범근 선수가 차 넣었다고 말씀 하셨다. 외삼촌 과, 외사촌 형이, 내가 궁금해서 여쭤 보는 것을 잘 설명해 주셨다. 전반전은 1대 0으로 우리가 앞선 상황에서 끝났다. 우리 일행 8명은, 손 꼭 잡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후반전은 좀체로 득점 이 안나오고, 계속 밀고 밀리는 경기가 거듭 되었다. 그러다가 후반 중반,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중거리 슛을 허용 해서, 1 대 1 동점이 되었다. 관중석 에선 아쉬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외삼촌 도, 외 숙모도, 외사촌 형도, 우리 3남매도 아쉬워 했다. 경기는 1 : 1로 계속 유지 되며, 10여분 이상 흘렀고,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 되었다.

외삼촌과 외숙모, 외사촌 형은 계속 손목 시계를 보시며, 초조해 하셨다. 지난번 이스라엘 원정 에서 0 대 0 으로 비겨서, 오늘 꼭 이겨야 된다고, 외삼촌이 그러셨다. 이대로 비기는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종료 5분 남기고, 통쾌한 연속 득 점이 연달아 나왔다. 우리의 공격 때, 이스라엘 선수 몸 맞고, 터치라인 아웃 돼서, 우리가 드로인 을 얻었다. 드로인을 길게 문전에 던져 주자. 헤딩으로 공을 떨어뜨려 주었고, 그 공을 박상인 선 수가 강력한 오른 발 발리 슛을 차서 득점 했다. 박상인 선수가 점프 하며 환호 하고, 우리 선수 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얼싸 안고 기뻐했다. 관중석에서 박수 치고, 만세 부르며, 엄청난 환호성 이 일어났다.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외삼촌도, 외숙모도, 외사촌 형도 일어나셔서, 아기를 안 은 채, 환호성을 올리셨다. 우리 3남매도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외삼촌이 박상인 선수가 골을 넣


었다고 하셨다. 이어서, 중앙선을 넘자 마자, 최종덕 선수가 강력한 오른 발 중거리 슛을 날렸다. 엄청난 힘이 실린 공은, 이스라엘 골문 구석 중단을 꿰뚫었다. 통쾌했다. 다시 관중석은 모든 관 중이 일어나서 환호 했고, 만세 소리, 함성 소리, 박수 소리가 매우 컸다. 귀가 멍하고 아팠다. 외 사촌 동생 둘이 울기 시작했다. 외삼촌, 외숙모, 외사촌 형도 일어나서 아기를 안고 환호 하셨고, 우리 3남매도 환호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외삼촌은 이번 득점은 최종덕 선수가 넣은 거라고 말씀 하셨다. 막내 외삼촌은 축구와 배구를 아주 좋아하셨다. 축구 마니아 이셨다. 최종덕 선수가 손을 흔들며 환호하고, 우리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골을 보며, 나는 너무 그 골이 멋있어서, 그 후, 최종덕 선수의 팬이 되었고, 우상이 되었다. 중거 리 슛의 명수였고, 수비를 잘 보셨고, 국가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프리킥과 페널티 킥을 전담 하 던 분으로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최종덕 선수가 대표팀에서 은퇴 한다는 뉴스를 보 고 서운해서 운 기억이 난다. 친척 분인 외삼촌 할아버님이 식당을 하셨고, 신문을 보셨는데, 다 보신 신문 중, 스포츠 기사만 내가 빼서 집에 가져 와서, 다 읽어 보고, 최종덕 선수에 관한 기사 를 오려서, 스크랩 하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그게 어디 갔는지 없다. 드디어 종료 휫슬이 울리고, 경기가 3 대 1, 우리 나라의 통쾌한 승리로 끝났다. 처음으로 본 축구 대표팀 경기 관전의 추억 이다. 경기가 끝나고도 관중들은 신이 나서 환호하고, 춤을 추는 분들도 많았다. 우리 일행은 손 을 꼭 잡고, 경기장을 빠져 나오며, 잠시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고, 택시 두대에 나눠 타고, 동대 문 시장으로 갔다. 외삼촌, 외숙모는 우리 3남매와 외사촌 형을 데리고, 소머리 국밥집에 가서, 소머리 국밥을 사 먹이셨다. 난생 처음 먹어본 소머리 국밥 이었다. 이어서, 외삼촌, 외숙모는 우 리를 데리고 옷가게로 데려가셔서, 우리 3남매에게, 남방 셔츠와 T셔츠, 점퍼, 바지, 치마, 트레 이닝 복 등, 옷을 골고루 여러 벌 사 입히셨다. 너무 신이 나고 감사 했다. 이어서 우리 3남매를 학용품 가게로 데리고 가신 외삼촌 내외분은 동화 책도 몇 권 사 주시고, 노트, 연필, 볼펜, 미술 준비물 (물감, 스케치 북, 색종이, 책받침, 붓, 파레트, 물통, 판화, 조각도) 등을 골고루 글씨와 그 림 공부 하라고 사주신 것이다. 정말 감사 했다. 이어서 우리 3남매를 데리고 신발 가게로 데리고 가신 외삼촌 내외 분은, 당시 가정 형편이 많이 어려워서, 운동화도 못신고, 검정고무신 신고 다 니던 우리 3남매에게, 당시 최고급 운동화인 월드컵 운동화를 한 켤레씩 사서 신켜 주신 것이다.

나는 푸른 색, 두 누나는 붉은 색 이었다. 그 날도 우리 3남매는, 경기장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경기 보러 간 것이다. 우리 3남매 로선 정말 감사하고, 감격 스럽고 신나는 날이었다. 당시 모 전 자 회사에 다니시던 외삼촌은, 우리 조카들을 위해서, 돈을 무척 많이 쓰신 것이다. 아기 줄 분 유도 가게에 들려 사셨다.

우리 두 누나는 당시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녀서, 놀림을 많이 받았고, 체 육 시간에 고무신 신고 뛰어 늘 꼴찌 하고, 실수도 많았다고, 집에 와서 운동화를 신고 싶어 했 다. 우리 3남매는 그 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일행은, 택시 두 대로 나눠 타 고, 동대문 기차 역에 도착해서 표를 사고, 기차에 올랐다. 우리 3남매는 나란히 앉아, 평택 서정 동 역에 올 동안, 신이 나서 계속 재잘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어둑 어둑 해 졌다. 경기 가 2시에 시작 돼서, 4시 가까이 돼서 끝났고, 시장에서 이것 저것 사주시는데 5시가 다 됐다. 동 대문 역에서 5시 10분 기차를 탄 기억이 난다.


7시 20분 쯤 서정동 역에 도착했다. 외삼촌 내외 분이, 우리를 서정동의, 버스 종점에 걸어서 데 려다 주시고는 “애기 때문에 못데려다 준다. 너희가 알아서 가라.” 하시고, 둘때 누나에게 차비 를 주시며 “니가 언니니까 동생들 데리고 잘 들어가라” 하시고, 우리가 버스에 타고, 버스가 떠 나자 손 흔들어 주시고 가셨다. 우리 동네인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 어연 1리’ 마을까지, 30여 분을 비포장 길을 달려서, 우리 고향 마을 어연 1리에 도착했다. (1990년 2월 현재 주소지로 이 사왔다.)

어연 1리 버스 정류장이, 바로 우리 외삼촌 할아버님이 하시는 식당 앞이었다. 버스에서 우리 3 남매가 내리자, 우리를 반겨 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바로 우리 부모님이, 아픈 첫째 누나를 데리 고, 외삼촌 할아버님 댁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우리를 맞아 주셨다. 외삼촌 할아버님 내외 분도 우리가 온 걸 아시고, 나오셔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잔 정이 많으셨던 외삼촌 할아버님 내 외 분 께선 평소 형편이 어려워서 TV가 없던 우리 가족을 자주 불러, 음식도 공짜로 주시고,TV 보게 해주셨다. 우리가 집에 가려고 하자. 외삼촌 할아버님이 붙 드셨다. “애들 배 고플텐데, 여 기서 저녁 먹고 가라고 해.” 하셨다.

외숙모 할머니께서 두부 찌개와 함께 밥을 차려 주셔서 부모님과 같이 먹었다. 저녁 먹는데, 외 삼촌 할아버님 께서, “우리 애기들, 오늘 축구 재미있게 봤니? 이 할애비는 오늘 테레비로 축구 봤다. 니들 아빠 엄마도 같이 와서 봤지. 오늘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3대 1 로 이겼다. 우리 애기들도 신났지? 재미있었어?” 하셨다.

우리는 정말 신났고, 좋았다고 대답했다. 외숙모 할머니 께서 우리가 낑낑 거리고 들고 온 짐을 보시고는 “아유, 이게 다 뭐야? 공책에, 옷에 뭐 이렇게 여러 가지야? 외삼촌이 사줬니?” 하셨 다. 우리는 외삼촌이 옷도 사주시고, 학용품도 사주시고, 운동화도 사주셨다고 했다. 외숙모 할 머니께서 “아이구, 우리 애기들 좋겠네, 외삼촌이 큰 선물 해 주셨구나, 응” 하셨다. 아버님도, “ 처남도 애기들 하고 힘들텐데, 돈 꽤 많이 썼겠는데” 하셨다.

어머니는, 외삼촌 할아버님 댁에서 외삼촌 댁에 전화를 걸어, 왠 우리 애들 선물을 그렇게 많이 사줬냐고 하시며, 고마움을 전하셨다. 외삼촌 할아버님 댁 가게 앞에 내린 시간이 저녁 8시가 좀 넘은 시간인데, 칠흙 같이 어두운 시간이었다. 외삼촌 할아버님 댁 흑백TV 에서는 낮에 본 축구 하이라이트가 나왔다. 동네에서 온 손님들도 몇 분이 축구 이야기를 하셨다. 집에 오니 밤 9시 가 넘었다. 선물 받아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당시 7살의 미 취학 아동이던 내가 어느새 46세가 되었고, 그해, 12살로 초등학교 5학년 이었던 둘째 누나는 51살이 되었고, 그해 10살로, 초등학교 3학년 이었단 셋째 누나는 49살이 되었고, 그해, 13살 이었으나, 거의 식물 인간으로 지내던 첫째 누나는 1986년 22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해 42세 이셨 던 어머니는 81세가 되셨고, 그해, 54세 이셨던 아버님은 1989년 66세의 연세에 폐 결핵 까지 겹치셔서 돌아가셨다. 그해 39세 이시던 막내 외삼촌 께선 1998년 60세의 연세에, 약주를 너 무 좋아하시다가, 간 경화증으로 돌아가셨고, 그해 29세 이시던 막내 외숙모는 68세가 되셨고,


그해 19살로 고 3이던 외사촌 형은 58세가 되셨다. 그해 3살 이던 외삼촌의 첫째 딸은 올해 42 살이 되었고, 공무원 이다. 그해 태어난지 100일 넘은 둘째 딸인 내 외사촌 동생은, 40살이 됐 고, 유치원 선생님이다. 이후 막내 외숙모는 2녀 1남을 더 낳으셔서 1남 4녀 이다. 막내 외삼촌 의 셋째 딸은 37살로, 회사 다니고, 막내 외삼촌의 넷째 딸은 34살로 병원 간호사이고, 막내인 외사촌 남동생은 31살로 회사 다닌다. 그 때 뛰던 축구 대표 선수들은 환갑이 넘으셨을 듯 하다.

그 당시 나에게 축구 관전의 추억을 안겨 주신 외삼촌도 돌아가시고, 추억의 장소인 동대문 운 동장도 철거 돼서, 나는 추억을 만드어 주신 분도, 추억을 만들어 준 장소도 잃은 나이다. 그 후, 나느 축구에 더욱 매료되어, 축구 없이는 못 사는 축가 마니아가 되었다. 지금은 축구 대표팀 경 기는 꼭 보며, 가늘 그날의 날짜 장소, 대회명, 상대 국가, 결과(스코어), 우리 득점 선수와, 그 선 수의 득점 수(매 경기마다)를 일기에 기록하는 일을 초등학교 1학년 부터 2010년 까지 기록했 고, 축구 협회에 문의 해서, 우리 남여 성인 대표팀의 통산 A매치 기록을 요청, 자료 받아서 내 그 후 경기 부터 기록 중이다. 우리 아버지도 축구 마니아 이셨다. 대표팀 축구 경기를 라디오로, TV로 애청 하시면서, 응원 하신 것이다. 외삼촌 할아버님도 축구 대표팀을 열렬히 응원하셨고, 규정에도 박식 하셔서 많이 배웠다. 어른들의 축구 사랑을 배운 나다.

우리 아버지는 반공 포로 출신이시다. 1914년 생이신 우리 아버지는 북한 황해도에서 결혼 1녀 를 두셨으나, 북한 공산단에 의해 인민군에 강제 징집 되어 끌려 이남에 오시며 이산 가족이 되 셨다. 전쟁 중 포로로 잡히셔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용 되신 아버님이시다. 고향 황해도 에 서, 공산당에게 강제 노동에 끌려 다시시고, 그 힘든 강제 노동 현장에서 공산당 에게 자주 폭행 당하시며 시달리신 이유로 공산주의 사상에 환멸감과 염증과 분노를 느끼신 아버지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공산당이 싫으셔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전향 하신 반공 포로 출신이 시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1953년 6월 18일 석방 되셨다. 거제도 포로 수용 소에서, 우리 나라로 전향 하시는 과정에서 , 거제도 포로 수용소 내의 친 공산당 포로들에 의해 서 반동 분자로 몰리셔서, 모진 폭행을 당하셨다. 이 때, 머리에 큰 부상을 당하신 아버님 이시 다. 평택에 정착, 40세 이시던 1963년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시니, 이북의 본 아내 분과는 전쟁 으로 헤어져 못 만나시고, 이남에서 다른 분을 아내로 만나 결혼 하신 것이다. 우리 1남 3녀를 이남에서 두시니, 내가 아버지 연세 48세, 아머니 연세 36세에 태어난 늦둥이 외아들이고 막내 이다. 아버님께서 건강이 안좋으셨던 것이 아오지 탄광 석탄 채굴 노역 등 여러가지 강제노동에 끌려 다니시며 공산당에게 시달리시고, 자주 폭행 당하신 데다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또 친 공산당 포로에게 폭행 당사시면서 건강을 잃으신 것이다. 30년대 초 중반 일제 시대에, 황해도 봉산에서 일본인 소학교에 다니신 아버님이신데, 그 일본인 소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다고 한다.

축구가 재미있으셨던 아버님은 축구부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기관지 천식으로, 숨이 가쁘셔서, 잘 뛰지 못하셔서, 일본인 감독에게 자주 야단을 맞으셨단다. 그러다가, 6개월 만에 축구부를 그 만두라는 감독의 말을 들으시고, 축구를 더 못하게 되신 것이 서운하시고, 아쉬우셔서, 많이 우 셨다고 한다. 그 일로 아버님께선 생전에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하신 것이 한이 되시고 아쉬우시


고 서운 하셔서, 축구에 취미를 붙이시고, 축구 대표팀 중계때 열광적으로 응원을 하신 것이다. TV가 없던 우리 집에 TV가 생긴 것은 1984년 2월 말, 그때 내가 14살로, 초등학교를 졸업 하 고, 중학교 입학을 앞둔 때, 77년 축구 관전을 시켜주신 막내 외삼촌이 흑백 TV를 갖다 설치해 주셔서, 더 열광하며, 축구 대표팀을 응원한 아버지와 우리 3남매 이다.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85년에 열렸는데, 우리가 일본을 꺾고 월드컵 축구 본선에 진출 하던 그날, 폐 결핵, 류마티스, 간질, 천식으로 힘드신 데도, 아버님은 우리 선수들의 경기 를 보시며, 열렬히 응원 하셨다. 마침내 승리가 확정 되고, 본선에 진출 하자, 아버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며, 그간 우리가 계속, 월드컵 본선에 못 올라서, 내 소원이 죽기 전에 월드컵 진 출 하는 것을 보는 거였는데, 드디어 내 소원이 이뤄졌다고 하시며 감격해 하셨다. 86 멕시코 월 드컵을 보신 후, 아버님은 더는 월드컵 축구 대회를 못보시고 돌아가셨다. 86 멕시코 월드컵이 내가 16살로 중 3때 열렸는데, 아버님이 보신, 우리가 뛴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여서, 나는 그 대 회를 추억 하면 눈물이 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4강에 오르던 날,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과 외삼촌 할아버지(1995년 뇌출혈 타계)와 외삼촌이 생각나서 울었다. 이 감격스러운 모습을 세 분이 보셨으면 얼마나 감격스러워 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이 감격스러운 모습을 못보시는 것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우리 축구 대표팀이, 남녀 모두,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안 컵과 아 시안 게임에서 우승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축구 사랑의 피를 물려 받은 나는 축구 없이는 못 사는 축구에 단단히 미친 놈이다.




영화수업

장르의 탐구 : 다시 SF의 시대!: 2010년대의 SF(Sci-fi) 영화 영화 매체의 탄생 이래로 지금까지 공상과학(Science Fiction)영화는 가장 인기 있는 장르 중 하나이다. 할리우드의 황금기인 30년대부터 50년대 사이에는 공상과학 영화의 전성기도 함께 진행됐다. 프랑켄 슈타인 (1931), 킹콩(1936) 같은 고전 SF부터 처음으로 외계인의 비행접시를 영화에 등장시켰던 The Flying Saucer (1950)도 이 시기에 등장한 영화다. 하지만 황금기의 SF영화는 적은 예산에 영화 예술성도 낮은 B-movie(B급 영화)로 분류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SF 영화에 대한 이런 인식을 바꾸어놓은 것이 68년개봉한 스탠리 큐브릭의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다. NASA의 보고서를 참고해가며 우주 공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며 영화 기술 발전을 적극 보여준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 예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미장센과 영화 음악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9) 이후 SF 영화는 B급 무비 생산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다 다시 부활한 것이 10여년 정도 후인 70년대 후반. 이 시기에 SF영화가 흥행했던 것은 여러가지 산업적, 사회적 요인이 있다. 먼저 영화 외부적 요인으로는, 69년 7월 20일, 인간의 우주 여행이 현실화된 후 우주 탐사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과 욕망이 활발진 것. 영화 산업 내부적으로는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처음 선 보인 CGI 기술과 카메라 기법 등이 많은 영화 감독들에게 영감을 준 것이다. 물론 10년동안 CGI 기법은 더 한 층 발전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영향은 50 년대부터 성장한 TV산업과의 경쟁에 밀리던 영화 산업이 70년대에 새롭게 내놓은 블록버스터 (Blockbuster) 전략의 등장일 것이다. 영화학자들은 이 시대를 ‘뉴 할리우드(New Hollywood)’ 라 지칭하는데, 이때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TV 영화와 홈비디오에 빼앗겼던 관객들을 다시 영화관으로 이끌기 위해 엄청난 제작비와 마케팅비를 투자하고, 스타 배우들을 대거 등장시키고,


글.kim

다양한 세대를 동시에 타겟팅하는 대중적 스토리라인을 가진 영화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이때 SF 장르도 블록버스터 대열에 합류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SF영화가 바로 스타트렉(1979),

스타워즈(1979) 등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는 SF 시리즈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1977), E.T. (1982) 같은 흥행 역작들이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뉴 할리우드가 기반을 닦은 후, 90년대 매트릭스(1999),

아마겟돈(1998) 그리고 2000년대 아바타(2009)와 마블의 SF 히어로 물들을 보면 각 시대마다 걸출한 SF 영화들이 꾸준히 나오긴 했지만, 현재 2010년대 SF 영화들의 성과는 과거의 그 어느때보다도 경이로워 보인다. 한 예로, 아무리 스페이스 오딧세이나 블레이드 러너(1982)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든다고 해도, 개봉 당시 아카데미/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SF 장르가 작품/감독상 부문에서 수상하거나 심지어는 노미네이트 되지 못했다. 기껏해야 기술상, 시각 상 등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2010년, 인셉션이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13개 부문에서 주요 수상작으로 점쳐진 것을 시작으로 (아쉽게도 당시 아카데미 작품/감독상은

킹스 스피치가 모두 가져갔다.) SF 로맨틱 코미디인 허(Her)가 2014년 각본상을 수상, 같은 해 그래비티가 감독상(드디어!)을 수상했으며, 2015년엔 리들리 스콧의 마션 역시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분명 SF 영화의 범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는 대목이다.

(2010년대 두각을 나타낸 SF 영화들)


2011년 아카데미상 유력 수상후보였던 인셉션 고배를 마셨을 때 영국 타임아웃(Time Out) 지의 영화 에디터 데이브 칼혼(Dave Calhoun)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스타워즈를 보면서 배우의 연기를 보진 않는다. SF 영화는 영화 제작의 기술적 진보를 시연하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또 많은 SF 영화들이 소설에 그 기반을 두는 만큼, SF 영화가 문학적인 이야기 혹은 스타일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은 영화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적인 평을 남겼다. 하지만 마션과 그래비티가 모두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동안 걸출한 SF영화들이 영화제에서 고배를 마신 것은 과거 ‘B급 장르’ 딱지가 붙었던 SF 영화에 대한 편견이 최근까지도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 스타워즈나 에일리언 같은 과거의 SF 대작들이 유행처럼 시퀄/프리퀄을 만들어나가며 그 영광을 되살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완성도에 있어서 분명 반길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SF 영화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신인 감독들의 등용이다. 70년대 이후 SF 장르가 블록버스터의 전형으로 떠오르면서 어마어마한 기술 제작비가 투자되었고, 이 기술력은 각 영화/영화사의 가장 주요한 무기였다. 때문에 SF는 늘 조지 루카스나 스필버그, 리들리 스콧 같은 검증받은 거장들에게만 허용된 영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젊은 신인 감독들도 막대한 제작비 없이 높은 퀄리티의 CGI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닐 블롬캠프(Neill Blomkamp) 같은 신인 감독이 디스트릭트9(2009)으로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으며, 이후 엘리시움(2013)과 채피(2015) 같은 흥미로운 SF 영화들로 자신의 기반을 착실하게 닦고 있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기보다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는 최근 계속되는 SF 영화의 흥행과 영화 제작 접근성으로 봤을 때 앞으로 더 흥미운 영화들을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들지 않을 수 없다.


**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설마 이런걸 연재가 될까? 하는 것들 다 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


살들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옆 사람 인터뷰 22_ 멜버른에서의 일상

walker, 여행하며 음악하기

대학교 1학년 교양수업에서 처음 희진이를 만났다. 우리는 꽤 친해졌지만 희진이는 곧 대학교를 그만두고 호주에 갔다. 이후 1년에 한 번 정도 만났을까. 참한 외향을 가졌으면서도 단단하고 강인한 희진이는 여전히 내게 가까운 친구다. 오랜만에 영상

통화를 걸었다. �� ���� ���� ���� ���

�� ��� 밤�� �� ��� ���� 결

각이 스쳤다. 어디에 가도 되었다. 있 호주에 간 지 5년이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요, 사람으로 펼쳐진 시공간이

고 만나고회사 있는 사람들 일하고 또한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 매니저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즐겁다. 일 재무팀에서

의 하나였다. 여행을 을 하러 가기 이야기하 싫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이외에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과외도 하면서 바쁘게 지낸다. 나

만의 시간이 없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까, 여유가 있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

여행해볼 작정이라고. / 호주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주변에 유학을 간 사람은 많았지만 이후 취업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워 보이더라. 새삼 대단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는 다양한 삶이 오고갔다. 그 나도 취업 고민이 많았다. 호주 유학을 결정한 이후로 쭉. 유학생으로서 이것저것 걱정할 게 많았고, 가장 큰 고민거리는 비자 온 장기 투숙객이었는데, 여 문제다. 여기서 큰 회사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일단 영주권 이상의 자격을 갖춰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다. 취업 준비뿐 아니라 는 그의 하루가 꽤 정적이었 비자 준비, 커뮤니케이션 기술, 호주 직장 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준비할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간에서 편의점 음식을 먹거나

모아 놓은 교본을 옆에 두고 호주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서 좋은 기회인 것 같다고 내게 얘기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듣고 부럽기도 다. 내가 그의 반려자와 다름 했지만, 무엇이든 주어진 것들을 잘 소화해내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다면 무 동강 내기 전까지는(당분간 는 비틀즈와 로드리게즈 만큼이나 그의 노래를 엇인가.

겠다고 설칠 일은 없으리라).

좋아한다.

한국에서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든 생각은 이거였다.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 몇 년을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막상 대학

람들은 그가 것을 교에 의사가 들어가니될 내가 원하는 대학생활이 아니었다. 비싼 학비를 내고 다니는데 배우는 게 없는 느낌. 과제를 해도 이게 내가 배

운 내용과 있는 건지, 시험을 봐도오래 과연 머물 이게 정말 수업시간에시드니에 배운 내용이 때부터 그는 음악을관련이 꿈꾸었다 조금 더 줄 알았는데 갔맞는 건지 의문으로 가득 찬 1년이었다. 그

외국에서 공부해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지내고 받았다.있나.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외국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 살아 보고 싶 오랜 시간와중에 그대로였으나 대학 보는다. 요즘은 어떻게 다 이런음악을 꿈이 있었는데 그는 온전히 하기로 그 제안을 통해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의욕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나도 오래 있고 싶었지만 관광비자만으로는 그 당분간 호주에서 지낼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늙어서는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싶다던 말이 생각난다. 럴 수 없었다. 한국에 다시 가고 싶고 그전까

로 본 날, 직접 녹음한 아홉 지 시드니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비행기 전반적으로 한국이 더 살기 좋은 것 같다. 여기는 해가 지면 가게 문을 다 닫고, 할 게 없다. 호주의 직장 문화가 정말 잘 되어 있 장을 선물로 받았다. 요즘 나 표를 사기 위해 잠시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 기 때문에 지금은 이곳에서 살고 싶지만 일을 하지 않을 무렵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에서도 한국의 뉴스를 접하지 않나. 정치적 이슈가 많은 요즘 타국에서 한인들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더라. 정치적인 이야기는 지인들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한국인이라면 타국에 있는 것과 상관없이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비 상식적인 일이 일어났고 민주주의가 퇴보한 것 같아 안타깝다. 변화를 위해서는 일단 나라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각기 다른 계층이 자기 의견을 표출해서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2년 전 터키와 그리스로 함께 떠난 배낭여행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특별하다. 외국에 있으면 여행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다 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때의 배낭여행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여행에 대한 시각은 나이가 들수록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여행을 다닐수록 달라질 것 같은데, 글쎄, 지금 나에게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 삶에 에너지가 필요할 때, 색다 른 것을 해 보고 싶을 때 필요한 거다. 새해다. 새해 소망이 있다면. 스스로 계획한 일이 정말 많다. 우선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자기계발 코스 수강하기. 건강 챙 기기. 물 많이 마시고, 외식할 때는 건강한 옵션 선택하기. 예를 들면 햄버거가 먹고 싶을 때 먹더라도 패티를 선택할 때 조금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 하하 그리고 가족여행도 가고 싶고, 주변 사람들을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더욱 믿고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새해 소망 중 하나다..

글. 정리. 이내


건축이 좋아. #35. 도쿄타워 aoikasa

“세상에서 가장 슬픈 건 비에 젖은 도쿄타워이다." -

에쿠니 가오리, ‘도쿄타워’ 중에서


이 구절로 시작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 타워라는 소설을 읽은 후부터였을까. 아니면 크리스마스의 예쁜 도쿄 모습은 다 나오는 듯한 'すべては君に逢えたから’라는 영화를 보고 난 이후부터였을까. (이 영화 한국어로는 두근두근, 도쿄! 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듯)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에 도쿄타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에펠탑을 갔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도쿄에 가면 꼭 도쿄타워가 보이는 곳 에서 묵으며, 도쿄타워를 바라보며 걸어보고 싶었다. 사실상 별 것 없는 방송전파탑. 이제는 그 높이도 주변의 고층빌딩에 비해 크게 높게 느껴지지도 않고, 그닥 아름다울 것도 없는데, 왜 그리 가보고 싶었을까. 이젠 높이며, 야경이며 전부 스카이트리에 밀릴텐 데…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속에서 보던 도쿄의 이미지는 ‘도쿄타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듯 하다.

(롯폰기 미드타운, 롯폰기 힐즈, 게이오대학 앞에서 바라본 도쿄타워. 길 끝엔 항상 도쿄타워가 있었다.)

도쿄타워. 1958년 완공된 높이 332.9m의 방송전파탑. 타츄 나이토(多仲内藤)의 설계로 에펠타워를 모델로, 에펠타워보다 9m 가량 높게 지은 이 타워는 에펠 타워나 남산타워가 그러하듯, 방송 전파를 송수신하기 위한 타워이자, 도시의 중심에서 도시의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다만, 남산타워가 남산 위에 높이 솟아 있어 저 높곤 먼 곳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반면, 도쿄타워는 미나토구 시바코엔 바로 옆 작은 언덕 위에 솟아 있어 주변 도로 어디에서도 보이는 그런 곳이다. 또한 에펠타워가 지어질 당시 해괴한 것이 생긴다고 반대하던 파리 사람들과는 달리, 에펠탑을 대놓고 모델로 하여 만든 이 타워는 약 60여년의 시간동안 일본인들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에쿠니 가오 리가 언젠가 도쿄타워가 바라보이는 풍경을 가진 곳에서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했을 정도로) 가지는 장 소이다.


‘타워’이야기 도쿄타워는 에펠탑이 그렇듯, 이 구조물은 사실상 대부분이 비어 있고 150m 지점과 250m 지점에 사람 이 올라갈 수 있는 특별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대전망대는 1,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에 는 아래를 투시할 수 있는 창이 있어 150m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에펠탑이 지어질 즈음, 이런 종류의 방송전파탑들이 세계 각 처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방송전파탑은 전파 송수신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되도록이면 도시의 높은 곳에 자리 잡았고, 최대한 높게 지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도쿄에서는 디지털방송이 시작된 이후, 도쿄타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도쿄 스카이트리를 만들었다고.)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그 옛날 바벨탑부터 계속 되었던 것이지만, 사실 이 탑들의 역사는 그와는 사실 조금 다른, 더 높은 곳에서 아무런 방해없이 (전파를) 쏘기 위한 것 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그 ‘높이’라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이라는 수식어를 쓰기 위하여) 아무튼, 19세기 말에 등장한 철강이라는 재료는 이렇게 ‘높은’ 구조물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을 가능케 해 주었고, ‘거주’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 아닌 높은 곳에서 전파를 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인 이상 채 워지거나 덮어질 필요가 없었기에, 이 구조물은 살없이 그 뼈대만 그대로 그러낸 형태였다.

뼈대만 그대로 드러낸 거대한 구조물. 사람들은 그 자체에 경악했고, 또 환호했다. 파리와 도쿄의 이 야기이다. 70년의 간극이 있긴 하지만, 두 개의 닮 은 건축물이 태어나는 시점, 그 것을 바라보던 사 람들의 반응은 너무나도 달랐다. 뼈대를 그대로 드러낸 건축물은 19세기 말, 사람 들의 ‘공간’에 대한 감각조차 뒤틀어버렸다. 벽돌로 혹은 돌로 된 표피 안에 둘러싸여 외부로부터 보호 받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건축의 최대 목적이 었던 지난 2천여년의 시간을 뒤로 한 채, 유리와 철 이라는 재료는 그 것이 만들어지는 구조 자체를 민 낯 그대로 드러냄도 모자라, 외부와 내부가 서로 관통하고 아래와 위가 서로 관통하는 그런 불안하 고도 다이나믹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당시 방송전


파탑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철골 구조들 사이로 관통하는 공간을 찍는 게 유행했을 정도로 이 공간 감은 20세기를 향해가던 근대인들에게 충격이었고 환희였던 것이다.

아무튼 10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도쿄타워 대전망대의 1층 투시창을 둘러싸고 환희하고 또 경악하 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근대’의 산물인 방송전파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낮의 도쿄와 밤의 도쿄. 낮에는 후지산이, 밤에는 오다이바와 레인보우브릿지가 보이는 풍경)


‘도쿄’이야기 도쿄타워는 도쿄의 중심부, 천황이 살고 있는 황거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도쿄타워가 있는 지역은 에도시대 ‘시타마치(下町)에 해당하는 곳인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랫마을’ 정도인 곳이다. 에도가 근 대국가 일본의 수도가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도로를 정비하고 벽돌과 돌로 만든 서양식 건축물들을 짓고 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 국가의 수도’로서의 대개조가 필요하였다. 1872년 긴자벽돌거리 건설부터 시작된 에도의 대개조는 황거를 중심으로 한 도쿄의 도시 구조를 만들어 냈다. 그 결과 황거 남측의 히비야 관청가, 남동측의 상업거리인 긴자, 도쿄의 관문이 되어준 황거 동측의 도쿄역, 그리고 북 측의 유락지인 우에노 공원과 아사쿠사까지. 긴자의 아카렌가도오리(붉은 벽돌 거리)는 이제 다 사라지 고 없지만, 국회의사당이 있는 히비야 관청가와 국립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이 있는 우에노 공원, 그리 고 도쿄역은 여전히 그 모습과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130여년 전 계획되었던 도쿄는 여전히 그 형태 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도쿄이야기를 하면서 도쿄타워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건물은 바로 히비야 관청가의 서측 끝에 속해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 이야기이다. 역덕인 내게 ‘도쿄’하면 떠오르는 세 개의 건물은 바로 ‘도쿄타워’ ‘도쿄역’ 그리고 바로 ‘국회의사당’ 건물이었다. 다섯 개를 꼽자면 르꼬르뷔지에가 설계한 서양국립미술 관과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국호텔.

아무튼 이 건물 그 탄생 과정이 복잡하고도 험난하였다. 우리나라도 국회의사당 건축을 둘러싸고는 참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았는데,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근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이라고 믿 어지는) 국민의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으로서의 위용과 국가 이미지 등을 모두 표상하는 공간이기 때문이 겠지만, 한국의 국회의사당이 설계안이 다 결정된 이후 돔을 추가해라, 돔을 높여라 등등의 국회의원들 의 요구에 의해 어찌할 줄 모르다 탄생한 괴 상한 변이체라면, 1936년 ‘제국의회의사당’ 으로 건립된 일본의 국회의사당은 다쓰노 긴 고(도쿄역의 건축가)로 대표되는 건축학계파 와 쓰마키 요리나카로 대표되는 건축관료파 가 충돌하며 표류하다 거의 40여년간의 대 립 이후 탄생한 건물이었다. 건축학계는 도 쿄역과 같은 순수한 ‘서양식'을, 건축관료파 는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화양절충식’ (히비야 관청가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나오는 일본 국회의사당. 이 건물의 재료로 사용한 일본산 석재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깎 은 거라고… 일본 법정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을 주장했고 이와 같은 과정에서 일본 근대 건축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들이 생산되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오랜 시간 겪고 결국 세


워진 세 번째 건물인 ‘제국의회의사당’은 그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매력보다는 이 건축물이 탄생 하기까지의 담론 생산과정에 가치가 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도쿄가 파괴되는 영화들에서 첫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것이 도쿄타워이고, 두 번째 가 국회의사당 건물이라하니 뭐, 도쿄를 대표하는 두 개의 건물은 맞을지도. 아무튼 도쿄이야기는 너무 길어질 듯 하니 이쯤에서 중략.

어쨌거나, 해피 뉴 이어. 비에 젖은 도쿄타워를 보진 못했지만, 유독 맑았던 오전 도쿄타워에 올라 ‘후지산’을 보는 행운을 얻었다. 롯폰기 힐즈 너머로 하얀 뚜껑을 쓴 듯한 후지산을 바라보는 건, 생각보다 기분 좋았던 경험. 사실상 대낮에 도쿄타워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메트로폴리스 도쿄를 느끼기엔 충분하지만, 아주 아름답 거나 하는 인상을 주진 않는데, ‘후지산’이 보인다면 이 풍경의 색과 질이 달라진다. 왜 그리 많은 에도 를 그린 그림들에 후지산이 배경으로 등장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갈 만큼, 멀지만 강렬한 느낌. 빌딩숲에 둘러싸이기 전, 과거의 에도 사람들은 아마도 저 후지산을 바라보고 살았겠구나 싶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무튼 도쿄타워를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방문하며 도쿄를 바라보고, 또 매일 숙소를 드나들며 에쿠니 가오리가 말하던 도쿄타워가 바라보이는 풍경 속에 며칠을 지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의 한 마디 를 떠올려 본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한 해 되시길…


지진파

솔직히 말하면 책 표지가 예뻐 읽기로 마음먹은 책으로 내용도 어렵지 않고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면에 적힌 빌게이츠의 소개글도 인상적이었다. “토야마의 연구 는 우리로 하여금 천편일률적인 해법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기술을 통해 세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켜주려고 한다면 반드시 인간 행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소개글은 좀 뜬금 없는 듯 하지만 책을 읽은 저 문구를 보면 책을 잘 설명한 글 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잘 읽힌다. 읽는 것 만이라면 이 책은 잘 읽히고 어렵지 않다. 읽 는 동안 의도도 파악 되고 알기도 쉽다.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례가 촘촘하며 적 절한 분석을 곁들였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좀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다 덮고 비로소 이 책을 추천 하기로 마음 먹었을때, “아 이 책은 많이 어려운데..” 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 어나왔다. 그 이유를 오늘 여기에 적지는 않겠지만 혹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왜 이런 생각을 했을지를 한번 쯤 곱씹어 주면 참 고마울 것 같다.


이 달의 책은 유독 표지 때문에 읽은 책들로 선정되었다. 이 책은 특히 제목의 폰트와 물결의 색이 마음에들었다. 뭘 이야기 하고 싶은지에 대한 호기심도 일었다.

<어촌자본주의>는 끊임 없이 자연을 관리하면서 공생하는 어촌의 삶에 대해서 이야 기하는 책이다. 어떤 방식으로 자연을 소모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공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사례를 들어 이야기 하는책이다.

하지만, 그것은 초반부 1/3 가량에 해당한다. 책이 TV방송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초반의 근거와 재미와 사례는 충분하지만 중 후반부로 갈 수록 여러가지 물 음표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충분한 여유 페이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애 매한 부분을 남겨두고 마무리 된다. (심지어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초반에 다루는 사례와 작자의 생각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한번 쯤 보고 고민해 볼 만하다. 그래서 후반부를 별로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대 부분의 사람들이 어촌에 대한 고민은 평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추천 해 보았다. (혼자만 당할 수 없다는 그런 불순한 마음은 정말 없다.)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대선을 앞두고 굴림체로 글. EXXX

1화. 부모님 설득하기

2017년 연재를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대선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 “아무런 무게감도 없이 가자!”는 의미로 이 제목을 골라보았습니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적어도 5개월 안에 코너를 갈아 치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희망도 곁들였습니다.

인터넷에서 글을 읽다보면 부모님 정치적 견해가 달라 말이 안통한다거나 싸웠다는 글을 종종 보곤 합니다. 댓 글을 보아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언젠가 한번은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어서 오늘 적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달에는 저에게 주어진 페이지가 적기 때문에 오늘은 핵심만 적어봅니다. “오 그런 방 법이 있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결론만 이야기 하자면 없습니다. 되면 이미 설득했을테지요. 그 리고 이 글을 보고 혹하고 있다면 이미 설득할 만큼의 말재주가 없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ㅠㅠ) 그렇다면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원한다면 노력을 조금은 해보아야지요.

1. 우선 이야기를 듣는다. 뭔가 앞뒤가 안 맞고 마음이 답답해도 반박을 해서는 안됩니다. 듣고 또 듣습니다. 정말 답답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는 반드시 입가에 미소를 띄고 천천히 말한다. 비웃음 x 도발 x 비아냥 x 반론의 뉘앙스 x

2. 충분히 들은 다음 어떤 나라에 살고 싶으신지 의견을 물어본다. 부모님도 생각하는 나라의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냥 듣기만 합니다. 질문이 생기면 말투는 공손하고 따뜻 하게 묻습니다.

3. 수 차례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한 뒤 선거 일이 다가오면 제발 도와 달라고 읍소한다. 네 읍소전략입니다! 충분히 들어주고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끼신 그 시점에 바로 읍소가 들어가야 합니다. 과거 총선에서 새누리 의원들이 길바닥에 엎드리는 것 보셨지요? 그 정도로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솔직히 이런 글을 보면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게 까지 해야하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한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표를 얻어도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을 들 여도 스스로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으면 읍소라도 해야 합니다. 앞서 여러분의 노력이 가상해 보였다면 조 금은 더 유효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뭐 그렇다면 내가 이번엔 도와주지! 그렇다고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야!” 같은 반응이 나온다면 참 좋겠지요. 안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자유 의사에 따라 투표하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위의 1.2. 번의 노력이 조금은 유효했다면 투표 당일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습니다. (안마를 곁들여도 좋 습니다.) 이상 오늘은 부모님 설득하기 편이었습니다. 다음에는 페이지 여유가 생기면 보다 체계적인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추신.간혹 부모님께서 기존 보수의 정책이나 인간관계를 통해 이익을 보는 분이라면 그것은 정말 인정해야 합니 다. 하지만 인정은 하더라도 한번만 도와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해볼만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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