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백림서신 - 01. 풍경 / 글. composer B 영화 리뷰: 두번 본 영화 - 마더 / 글. 가람 수면을 걷는 사람들 - 5. 해니 / 글. 장수양 사진. @photo.j.keith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 현대시 2편 / 글. 고수진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만든다오 - 01. 그래도 낑깡 / 글. 사진. 진선 건축이 좋아 - 38. 정동에는 우리도 있다오. 정동의 (덜 알려진) 이쁜이들 / 글. 사진. aoikasa 지진파 - 김대중 평전, 객주 윤식당 뭘까? 대선을 앞두고 굴림체로 - 5. 겨울은 왜 / 글. exxx
영업 비밀이긴 하지만, 월간이리는 매달 원고 순서가 왔다갔다 합니다. 이달의 원고 배치에 역대 최고 수준의 심혈을 기울였으나, 보시기에는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왜 이놈이 이렇게 해놨지 하면서 앞뒤로 몇 번씩 왔다갔다 하시면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달에도 보석같은 원고가 많습니다. 꼼꼼히 읽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사기치지 않는 거간꾼이 되겠습니다.
월간이리 편집인 올림.
공식트위터 @postyri
백伯 림林 서書 신信
Composer B
01.풍경
잘 지냈어? 워낙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가? 봄이 올 것 같지 않던 이 곳 베를린도 며칠 전부터 공기가 따뜻해지더니 여기 저기서 꽃이 피기 시작했어. 물론 밤에는 여전히 쌀쌀하고, 이따금 눈이나 우박이 내리는 바람에 든든히 챙겨 입어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낯간지러운 인사를 건낸다. 얼마 전에 인쇄용지를 사기 위해서 ‘자투른(SATURN)’1) 에 들렀을 때의 일이야. 건너편 진열대에서 물건을 고르던 손님이 종업원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소리가 들리더라. 사실 너무나도 일상적인 풍경이기에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나는 곧 건너편 진열대를 향해 슬쩍 눈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어. 대답을 하는 종업원의 발음은 어딘지 모르게 어눌했고 발걸음 소리는 불규칙한 데다가 필요 이상으로 컸기 때문이야. 고개를 들어보니 그 종업원은 손님과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긴 하지만, 섬세한 동작이나 언어 구사는 하기 힘든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어. 얄팍한 호기심이 생겨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종업원이 최선을 다 하고는 있었지만 손님의 모든 질문에 일일이 충실한 대답을 해 줄 수는 없는 상황인 듯 하더라구. 그러자 그 종업원은 근처에 있던 자신의 동료를 불렀어. 장애가 없는 동료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더니 다른 진열대로 함께 가서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찾아 건네 줬고, 만족한 손님은 인사를 하고 떠났지. 그리고 동료 종업원도 장애를 가진 종업원에게 이런 저런 추가적인 조언과 함께 피드백을 해주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 갔고.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이었어. 다만 한 가지 낯선 것이 있다면, 처음 질문을 받았던 (장애가 있는)종업원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던 것 같아. 질문을 했던 손님은 장애가 없는 대다수의 종업원들을 대할 때와 같이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질문을 했고, 그 종업원도 최선을 다해 접객을 하다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종업원으로서의 능력이 아닌-부분을 마주하게 되자 동료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정도?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매끄럽게 처리되었어.
1. 독일 전역에서 활발히 영업중인 전자 제품 전문 쇼핑센터
그 누구도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해결되었지. 그는 남들보다 몸이 불편했지만, 유니폼을 입고 종업원의 자격을 가진 그 순간만큼은 장애가 없는 동료들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그것은 손님에게도 마찬가지였어. 불편한 자세로 걸어 다니는 그를 보고서 ‘저 사람에게 물어봐도 괜찮을까’라고 망설이지는 않았던 것 같거든. 몸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종업원으로서의 능력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은 0.01g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야.
나는 어땠을까? 물론 나 역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 왔지만, 그들을 대할 때면 자꾸 ‘어떻게 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부끄러웠어.
늘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동정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고, 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도움을 ‘받을’일은 딱히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게를 나와 거리를 걷는데, 나의 기분 탓이었을까? 평소보다 더 많은 수의 휠체어와 안내견 그리고 흰 지팡이가 눈에 들어오더라. 분명 배려는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유난스러움으로 비춰지지 않는 사회. 자연스러움이 지나쳐 무례함이 되지 않는 사회. 아니 그 전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일상의 풍경 속에서 더 자주 보이고,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한 부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도 만들 수 있을까? 꼭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어. 말이 길어졌네. 또 편지할게.
P.S. 편지를 쓰고 난 뒤에, 어느 독일 언론의 기사를 보게 됐어. 뮌헨에 사는 한 시각 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 마트에 들어 가려다 제지를 당했다는 기사야. 기사를 쓴 기자가 후에 마트에 전화를 해서 해명과 함께 사과비스무레한-를 받기는 했다지만… 그리고 그 기사를 읽기 전에는 카페의 손님(놈…?)들이 장애인 직원의 서비스를 꺼림칙하게 생각했다는 한국의 기사도 읽었구. 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영화리뷰 : 두번 본 영화
마더 (2009) 감독 봉준호
엄마와 밥을 먹던 도준(원빈)이 집 밖을 나섭니다. 한약이 든 사발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도준 을 좇던 엄마(김혜자). 버스 정류장 앞 담벼락에 노상방뇨 중인 도준의 입에 사발을 들이밀어 기 어이 약을 먹입니다. 버스가 오자마자 야속하게 떠나버리는 도준. 혼자 남은 엄마는 보라색 슬리 퍼를 신은 발로 아들의 소변이 뭍은 땅을 쓸어대다가, 이내 넓은 벽돌 하나를 줏어와 그 흔적을 가려버립니다. 영화 마더를 단 한 씬으로 줄인다면 아마 이 장면이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들의 치부를 가려주는 엄마. 여러 의미에서 참으로 끔찍한 모성애입니다. 영화가 모성애를 만날 때. 이야기는 주로 오래된 클리셰를 반복합니다. 우리 사회는 모성애를 훼손할 수 없는 신성의 영역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 도덕, 희생, 숭고함. 이 지 고지순의 사랑을 이야기로 엮다보면 영화가 가질 수 있는 플롯과 분위기는 아주 단순하고 한정 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친정엄마 (2010, 김해숙 주연), 엄마 (2005, 고두심 주연), 말아톤 (2005, 김미숙 주연)은 사회가 포장한 ‘모성애’를 아주 적극적으로 반영한 영화입니다. 열한번째 엄마 (2007, 김혜수 주연)는 (아이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을 것이라 추정되는) 계모 캐릭터를 우리에 게 친숙한 모성애의 틀에 꾸역꾸역 집어 넣습니다. 오로라 공주 (2005, 엄정화 주연)나 세븐 데 이즈 (2007, 김윤진 주연), 돈 크라이 마미 (2012, 유선 주연)에는 살인과 폭력으로 점철된 엄마 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범죄 동기는 ‘자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이죠. 사회가 부당하 게 용서한 범죄자를 제 손으로 심판하는 벼랑 끝의 정의와 도덕 역시 영화가 모성애를 다루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2009년 작 마더는 지금까지 영화에서 다뤄왔던 모든 엄마들의 모성애를 종합해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종합한 결과는 기존의 영화들이 보여준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감동이야
당연히 없고요. 불편함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조금 차원이 다른 불편함이죠. 오로라 공주나 세븐 데이즈를 보면서 관객들이 ‘나라도 저러고 싶겠다’라며 발끈하게 된다면, 마더는 보면서는 ‘나라 도 저럴 것 같아…’하며 결국 상상 속의 추해진 나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런 상황이 나 에게는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작은 시골마을에서 약재상을 하는 혜자(김혜자)는 동네에서 야매 침을 놔주며 억척스럽게 아 들 도준을 키운 엄마입니다. 어느날 마을에서 여고생 살인 사건이 나고, 경찰들은 확실한 증거 도 없이 지적장애인인 도준을 체포해 진술서를 받습니다. 경찰을 찾아가 빌어도 보고, 우리 아 들은 파리 새끼 한 마리 못 죽이는 애라며 애원도 해보지만 이미 수사를 종결해버린 경잘들은 혜자가 귀찮기만 합니다. 결국 혜자는 범인을 직접 잡겠다며 나섭니다. 하지만 그날 아들의 행 방과 죽은 피해자의 흔적을 따라가 마주친 것은 결국 도준이 진짜 범인이라는 진실입니다. 진실 을 마주한 순간의 충격과 공포는 엄마 혜자를 살인범으로 만들죠. 아이러니하게도 혜자가 모든 진실을 마주했을 때, 경찰은 진범을 잡았다며 도준을 풀어줍니다. 경찰이 지목한 진범은 도준보 다 심각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부모가 없는 종팔이입니다. 종팔을 면회한 혜자는 결국 진실 을 속에 묻어버립니다. 영화의 플롯이 불편하고 끔찍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여성들을 짓눌렀던 모성애의 미신과 환상을 이 영화가 깨뜨린 것만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플롯이 매력적이고 반갑게 다가왔습 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모성애를 감싼 예쁜 포장지를 벗겨버립니다. 이 영화 속 모성애에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아들을 위해 했던 엄마의 모든 행동들은 아들이 진범임이 밝혀지 는 순간 엄마의 모든 행동은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관객들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혜자를 만납 니다. 오히려 아들이 살인자가 된 것은 엄마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하죠.
도준:
나 무시하는 놈들 반드시 족치라매
혜자:
그래. 무시하면?
도준:
작살낸다
혜자:
한 대 치면?
도준:
두 대 깐다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격하게 반응하는 도준이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조금은 간지럽기도 하지만, 피해자를 살해하는 도준의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적절한 영화적 장 치였다고 생각합니다. 공포영화는 한 번 보면 이미 그 속임수를 다 알게 되어 무서움이 덜하게 되죠. 하지만 마더는 보면 볼 수록 무서운 스릴러 영화입니다. 어딘가 흐리멍텅하고 푸르스름한 영상의 색감은 낮 씬에서조차 영화의 어두운 분위기를 발산하는데 한 몫 합니다. (참 언급하기 짜증나지만) 이병 우의 영화 음악 역시 영화의 불편함과 긴장감을 탁월하게 배가합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영화 를 혼자 볼 때마다 귀신이 나오는 영화가 아닌대도 뭔가 쎄한 두려움에 몇 번이고 공허한 등 뒤 로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 한 줄, 컷 하나 쓸모없는 게 없습니다. 감독 본인은 싫어하는 별명 이라지만 ‘봉테일’에 대한 찬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관 미선, 도 준이 친구 진태, 경찰 제문 같은 비중있는 조연들 뿐 아니라, 고물상 노인, 아정 할머니, 맨하탄 딸 미나, 그리고 마지막에 딱 한 씬에서 나온 기도원 종팔이까지. 하나 필요 없는 캐릭터가 없 습니다. 이 영화에는 인물들을 보여줄 때 클로즈업이 굉장히 많이 사용합니다. 배우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찰 때, 가장 큰 감정을 일으키는 건 역시 주연배우 김혜자와 원빈입니다. 클로즈업을 통해 배우 김혜자의 방황하는 눈동자를 만날 때는 감정이입이 돼, 내가 마치 그 상황에 있는 것처럼 불안한 두려움에 휩싸이고요. 원빈의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빛을 만날 때는 ‘저 무지몽매 한 것이 또 어떤 말을 내뱉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원빈은 경력에 비해 필모그래피가 빈 곤한 배우라 최고작을 꼽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마더에서 보여주는 바보 연기는 섬 짓하게 탁월합니다. 배우로서의 매력을 뽐내기보단 그저 잘생기기만 했던 그 배우의 얼굴에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이미지를 찾아냈는지. 배우를 꿰뚫어보는 봉준호 감독의 눈썰미가 놀랍습 니다. 김혜자 배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국민엄마’라는 칭호를 지켜 올 정도로 ‘전형적 엄마’ 역할만 하던 배우가 유약하면서도 무지하고 광끼 가득한 엄마 ‘혜자’ 역할 을 아주 훌륭하게 해냅니다. 영화가 개봉하기 5년 전인 2004년부터, 김혜자 배우를 염두해두고 썼던 시나리오라는 말을 들으니, 다시 한 번 봉준호 감독의 눈썰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네요.
영화는 불편하지만 꼭 마주해야할 진실들에 대해 말합니다. 이 글에서 충분히 언급한 ‘만들어 진 모성애’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쌀을 받고 떡친다’는 쌀떡소녀 문아정에 대한 설정도 그렇습니 다. 이 설정은 영화 개봉 당시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2009년 이후로 (물론 이전에도) 작은 읍내에서 마을 남성들이 한 여성을 지속적으로 윤간한 사건은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는 걸 보면 그 비판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어디 맞아서 멍이 들 대 오히려 시원할 때
가 있잖아요. 관객들이 사전정보 없이 어버이날 영화인줄 알고 보셨다가 가슴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서 나갔으면 좋겠어요.” (봉준호, 맥스무비와의 인터뷰 중) 이 글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충격 이 덜할 수도 있겠지만,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한동한 멍이 든 것처럼 얼얼한 영화입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망설이지 마시길.
끝.
글. 가람
봤던 영화 또 보는 게 취미인 학생입니다. 두 번 이상 본, 개취 영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akakk_@naver.com
수면을 걷는 사람들
글. 장수양(@condensed_bold) 사진. @photo.j.keith
5 해니 지난주 일요일부터 해니는 더 이상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창문에 비치는 사람 그림자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해니는 무늬가 없는 커튼을 치고 방안에 있는 선인장 화분을 베란다에 내놓았다. 해니는 살아있는 것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컴퓨터를 했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을 마주쳐야 했다. 해니는 컴퓨터의 전원을 꺼버리고 다시는 켜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서 서랍에 넣었다. 사람의 눈 같은 액정 불빛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두운 편인 방의 형광등을 껐다. 스텐드도 껐다. 해니는 어둠 속에 잠겨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해니는 단 한 사람만이 방안에서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은 꺼버릴 수 없었다. 다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해니는 숨소리를 낮추고 방안의 날씨를 감각하였다. 기온이 낮았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침이나 밤 같지도 않았다. 해니는 감은 눈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 겹겹이 감은 눈꺼풀 속에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해니는 조용함의 깊이를 잴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한 공간 안에 있던 침묵은 물결치듯 움직였다. 해니는 눈을 감은 채 일요일에 있었던 일들을 얕은 침묵 위에 기록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작은 글씨들이 허공에 떠올라 한 장면을 펼쳐 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해니는 그 안에서 불티처럼 반짝이는 분노를 발견했다. 그 감정은 타인의 것이었다. 해니는 어둠 속 한 개의 초처럼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질문들이 떠올랐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인사를 했었지? ――나는 사람의 어디에 손을 얹고 끌어안았지? ――내가 가장 사람이던 순간은 언제였지? ――진과 있을 때야. 유리가 말했다. 유리는 진의 귀와 귀 사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고양이와 있을 때 나는 사람 같아져. 유리가 다시 한 번 말하자 해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윤기가 나는 검은 털과 흰 발을 가진 고양이. 유연한 모습으로 휘어져 그루밍을 하는 진은 유리에게 무심해 보였다. 해니는 너무 많은 시선으로 유리를 만지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은 진을 계속 그루밍할 수 있도록 두고 방을 나왔다. 두 사람은 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바다에 가서 바다는 전혀 보지 않고 서로만 봤다. 유리는 해니를 보며 잃어버린 친구들을, 연락이 끊어지고 서로 미워하고 다신 볼 수 없게 된 친구들을 하나씩 짚어갔다. 해니는 유리가 그런 관계에 아직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마른 몸에 커다란 옷만 입고 다니는 유리가 마치 날개만 있는 유령처럼 보였다. 해니는 유리가 들썩거린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유리는 떨고 있었다. 해니는 해변에서 가까운 카페로 유리를 데려갔다. 커피 머신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몇 없어서 그 소음은 허공에 큰 구멍을 내는 것처럼 존재감이 컸다. 해니는 유리를 안쪽에 앉히고 일어서서 카운터로 갔다.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오자 유리는 의자의 쿠션에 등을 기대고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해니는 얼음과 커피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해니는 유리가 단지 손가락에 벤 땀이나 물기 때문에 잠시 반지를 벗어두었으리라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니는 알았다. 함께 있는 시간동안 유리의 무엇도 해니에게 이해받지 못했다는 것을. 물론 그것은 해니의 죄가 아니며 모자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죄도 모자람도 아니라면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해니는 유리에게 잔을 밀어두었지만 유리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얼음이 녹았다. 유리는 잠깐 해니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 속에서 유리는 분명히 해니에게 슬픔을,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해니가 늘 기다려왔던 애정을 보였다. 찰나였으며 아마도 마지막이었다. 해니는 어쩐지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뭐야? 해니가 물었다. ――뭐가? ――지금. 고양이가 없을 때.
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해니가 그런 것을 물을 줄 몰랐다는 듯이. 해니는 커피 속의 얼음 몇 알에 알 수 없는 작은 형상들이 맺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너는 내가 뭐 같아? 해니는 유리를 보았다. 유리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을 관찰하며 했던 다짐을 잊고 시선으로 유리를 온통 만졌다. 지문이라도 남길 것처럼 오랫동안. 해니는 입을 열었다. ――당연히……. 유리는 불을 켰다. 일이 끝난 후 집에 바로 오는 것은 습관이었다. 유리의 방안에는 여섯 화분에 나란히 담긴 다육식물이 있었다. 화분은 모두 접착제로 책상에 붙여놓았다. 요새는 그러지 않지만 진이 처음 유리의 방에 왔을 때 날렵한 몸짓으로 쳐 넘어뜨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유리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침에 급하게 씻느라 치우지 않은 머리카락을 수챗구멍에서 끌어내 변기에 버렸다. 다시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었다. 시간을 들여 미온수로 몸을 적셨다. 유리는 자신의 몸을 만지는 타인의 손을 생각했다. 얼마 전에 헤어져버린 사람. 그보다 전에 잃어버린 사람. 유리의 애인. 유리의 친구.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들. 어째서 헤어져 버렸을까. 유리는 온몸으로 그들을 안고 싶었고 영원이 있다면 그 너머까지도 함께하고 싶었다. 물론 지금 와서 후회하고 있지는 않았다. 유리는 잘 준비를 하며 서랍장 위에 놓인 달 모양 스텐드를 켰다. 진이 유리의 주변을 돌았다. 유리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고 침대에 누웠다. 진은 유리의 가슴을 밟고 창틀에 올라 앉더니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자신이야말로 이 도시를 감상하고 있다는 듯이. 얼마를 그러고 있던 진은 유리가 누운 침대로 후다닥 내려왔다. 진은 유리처럼 베개에 머리를 두고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유리는 조용히 웃었다. ――사람 같아. 진의 검은 눈동자에 유리의 얼굴이 차올랐다.
작년 12월부터 수면을 걷는 사람들을 연재하고 있는 소한집입니다. 5월부터는 장수양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대상에 대한 관찰, 시 창작의 시작. 글. 고수진
오늘 우리가 볼 문학은 현대시 2편이다. 조지훈의 [승무]와 고재종의 [수선화, 그 환한 자리] 이다. 두 작품을 함께 보는 이유는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 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시가 대상에 대한 관찰을 기본으로 하지만 이 두 작품은 섬세한 작가 의 관찰력과 고풍스러운 표현이 눈에 띈다. 굉장히 여성스러운 느낌이다. 거두절미하고 조지 훈의 [승무]를 먼저 보자.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여승이 승무를 추기 직전의 모습을 시작으로 손을 뻗어 올리며 춤을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하 며 시상을 전개하는 이 시는 전통적인 소재와 예스러운 표현, 휘몰아치듯 이어지는 춤 선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섬세하게 시어들을 다듬어 독자들에게 서정적 분위기를 안겨준다.
승무가 시작 된 시간은 삼경, 밤 11시~새벽 1시 사이이다. 4연에 황촉 불은 말없이 녹아가고 달빛은 더욱 깊어지는 깊은 밤이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새롭게 태어난 여인은 자신의 파르라 니 깎은 머리를 고깔에 감추고 세속적 번뇌를 이제 막 종교적으로 풀어내려던 참이다. 그 얼굴 빛을 화자는 고와서 서럽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왔던 속세의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제 그녀 는 여승이 되었기 때문에 화자는 연민의 정서를 서럽다라고 표현했다. 역설적 표현이며 이 시 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소매는 펄럭이며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리고 빠른 발놀림 사이로 날렵한 외씨버선이 보인다. 고 깔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이 살짝 비치며 곧 번뇌를 저 하늘 별 빛에 모두 던져 버린다. 5~8연은 춤사위의 동작을 긴박감과 한편으로 정지해 있는 듯한 정적 인 이미지를 교차해 묘하게 시적 긴장감까지 읽혀진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승무가 눈앞 에 그려지는 것 같다.
어느새 승무는 끝나고 고요히 귀뚜라미 소리만 맴돈다.
조지훈 시인은 1930년대 시인이다. 그는 우리의 예스러운 소재들을 활용하여 한국의 여인상 의 모습, 주권상실의 서러움을 그만의 시 언어로 창조 하였다. 오늘 이 [승무]를 읽고 아름답 다고 느꼈다면 [고풍의상], [봉황수]도 읽어보길 바란다.
다음은 고재종 시인의 [수선화, 그 환한 자리]이다.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올리다니!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이 시의 화자는 수선화가 피어나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바탕으로 화자의 내적 성찰을 함께 담 아낸 시다. 먼저 구조를 보면 1-2연에서 개화에 대한 긴장과 몰입을 얘기하고 있다. 수선화를 ‘너’라고 표현하며 친근감을 이끌어 내고 ‘문득’이라는 시어를 통해 ‘어라?’ 잠시 가던 길을 멈 추고 수선화의 꽃이 피어난 순간을 목격한다. 3연에서 수선화가 피어나는 순간의 모습을 통 해 화자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영탄적 어조로 말한다. 올리다니! 그리고 4연에서 수선화의 오 롯한 개화로 인해 엄정해지는 세상을 느낀다. 여기서 ‘엄정’이란 엄격하고 엄숙함을 뜻한다. 수선화가 피어나며 화자는 자연의 놀라운 광경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 느낌을 ‘서늘한 기운’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 전체가 마치 변화하는 듯한 기분이다. 개화를 보며 느낀 감탄을 시 언어로 재창조한 셈이다.
그리고 화자는 더 높은 인격을 위해 더 치열하게 살겠다며 내면의 다짐을 하며 시를 마무리 한다. 간결하고 견고한 구조를 통해 개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대한 집중과 몰입이 더욱 부각되 고 있다.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은 시의 시작이다. 화창한 5월 우리도 시인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 까?
다음 이 시간에도 계속 현대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편집장 빼고 다 잘되는 잡지. 성공을 향한 알미늄 사다리. 이만한 명당 드뭅니다.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설마 이런걸 연재가 될까? 하는 것들 다 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
살들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1. 그래도 낑깡 길을 가다 낑깡을 봤다. 부산진시장 건물 앞 과일 노점이었다. 500원짜리 동전만한 동그란 작은 귤. 버젓이 금귤이라는 말이 있지만 왠지 낑깡이 익숙하다. 돌아가신 할머니 입에서도, 엄마와 이모들의 입에서도 송곳니가 훤히 보일 정도의 ‘낑깡’이라는 말이 뱉어져왔으니까 일본말이라도 어쩔 수 없다. 빨간 다라이 안에 담긴 낑깡을 보며, 황금빛으로 반질거리는 껍 질을 흐르는 물에 살살 씻어 입에 톡, 집어 넣는 상상을 한다. 쌉쏘리하면서도 달큰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콩알만 한 씨앗이 벌써부터 혀끝에서 맴도는 것만 같다. “이모 낑깡 한 다라이 얼마예요?” 낑깡은 일본식 발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귤, 동귤이라고 부르는 게 올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금귤의 금은 황금 금(金), 동귤의 동은 아이 동(童)으로, 황금빛 귤이고, 어린 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동아시 아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으니 딱히 일본에서 건너 온 과일도 아니다. 우리에게 낑깡이라는 발음을 남긴 일본에서는 정작 나이든 어르신들이 민간요법으로 먹는 것에 그치는, 잘 먹지 않는 과일이라 젊은 사람들은 낑깡이 뭔지도 잘 모른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낑깡은 잘 보지 못했다. 아마도 나무가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서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기까지가 낑깡에 대한 팩트.
여하튼 나는 낑깡을 사왔다. 1kg 한 다라이. 알알이 흐르는 물에 씻으면서, 나는 씨앗을 다 빼서 먹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이 많은 것들을 슬라이스하 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은 알맹이 하나에 씨가 기본 4개는 들어있었다. 씨를 빼고 나면 열매는 홀쭉해진 가방처럼 쭈그러들었다. 10분, 20분, 30분. 부엌 싱크대 앞에 꼿꼿하게 서서 낑깡 1kg와 사투를 벌인지 1시간 만에 온전한 알맹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노랗고, 싱그럽고, 달큰한 봄 그 자체다. 그러다 문득 봄을 박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존하거나 저장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컴퓨터 윈도우에서는 복구지점을 만드는 것이고, 조선왕조실록을 작 성하는 사관이 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기 넘치고 향긋한 생명을 그 상태 그대로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나는 낑 깡으로 과일청을 만들기로 한다. 손질한 과일을 볼에 담고 설탕을 붓는다. 설탕은 과일과 같은 양을 넣는 것이 좋다. 흰설탕으로만 담그면 인위적 인 과일맛이 날까봐 메가마트에서 사온 신선도원 비정제 설탕과 코스트코에서 사온 유기농 설탕을 함께 사용한다. 천일염을 조금 넣어준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서 뒤적거린다. 설탕의 당분때문에 과일에서 수분이 빠져 나올 때까지 천천히. 1시간, 2시간, 3시간. 서걱거리던 설탕 알갱이는 그제서야 사라졌다. 끓는 물에서 소독한 유리병에 낑깡청을 담근다. 이로서 나의 3월, 초봄, 그리고 길을 가다 문득 만 났던 봄이 박제되었다. 두어 스푼 떠다가 탄산수를 넣고 에이드를 만들어 본다. 엷은 낑깡의 향이 스멀 스멀 올라온다. 낑깡, 하고 발음해본다. 20년이 걸려 돌아온 부산 에서의 첫 봄이 밀려온다. 어쩌면 낑깡은 일본말도 한국말도 아닌 부산말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봄바람처럼 밀려온다. 끝.
*글쓴이_진선(@ss_jinsun)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애견인/페미니스트/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건축이 좋아. #38. 정동에는 우리도 있다오. 정동의 (덜 알려진) 이쁜이들. aoikasa
정동길.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길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도 그저 걷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올 리는 길은 정동길이다. 덕수궁의 돌담과 주변 벽돌 건축물들의 오래된 정취. 차량 통행이 없어 걷기도 좋 고, 벚꽃나무, 라일락 나무 등의 봄꽃들도 아름답다.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혼잡한 서울의 도심으로 들어서게 되지만 이 곳만큼은 그저 평화로운 느낌이랄까.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근대적 교육이 시작된 곳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 서양인들이 처음 서울에 들어와서 살던 흔적들 역시 남아 있으며, 정동교회, 한성교회, 작은 형제회 성프란치스코 회관과 조금 떨어져 있긴 하지만 성공회성당까지 유독 소외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종교시설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정동이다. 근대교육, 외교, 종교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그 기능을 이어가는 곳. 정동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고 그래서 많이들 알고 있는 곳이지만, 오늘은 정동길의 숨은 장소들, 문화재는 아니지만 그리고 아주 오래된 곳은 아니지만 오래된 정동과 발을 맞추어 가며 그 곳에 스며든 장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신아빌딩, 작은 형제회 성프란치스코 성당, 그리고 정동아파트 이야기이다.
오래된 벽돌의 시간을 품은 신아빌딩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배재정동빌딩쪽으로 난 길 방향에는 벽돌로 된 오피스빌딩이 하나 서 있다. 저 건물 은 뭐지? 싶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건물. 네모난, 그리고 정동에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오피스빌딩임 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전혀주지 않는 외관과 분위기. 울툴불퉁하게 쌓인 벽돌의 오랜 느낌이 건물의 연도를 짐작하지 못하게 하는 이 건물은 1982년 지어진, 그러니까 35년밖에 되지 않은 정동에서는 꽤나 젊은 건물이다. 정동길 방향으로 쭉 뻗은 캐노피로 오르는 계단의 왼편에는 건물의 연혁을 설명해주는 머릿돌이 있는데 여기에 쓰여 진 글귀가 꽤나 재미있다.
“이 땅은 황화방 확동이라 불렸다. 이조 유학자 김장생의 거가였다. 개 화 때 전국을 측량했을 때에 측량아문이 여기서 일했다. 1965년 5월 신 아일보사가 창간되다. 이 집은 1982년 4월 준공되고 여기 쓰인 벽돌은 1904년 영등포 기관고에서 가져왔다. 골조 등은 모두 새 것으로 지었다.” 이 머릿글을 보니 의문이 풀렸다. 겨우 35년 된 건물이 100여년 된 것처럼 보였던 이유. 바로 저 오래된 벽돌이 가진 시간때문이었구나. 경향신문 1980년 4월 16일자 기사에는 1904년 영등포에 설치했던 철도 기관고(1980년대엔 공작창이라 부름)를 1980년에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그 기능은 대전에 공작창을 신 설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어 이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신아일보는 1965년 창간하였다가 1980년 언론 통폐합 정책으로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었는데 이 건물이 짓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아마도(?) 사 옥으로 사용할 예정이 아니었을까 싶으나 1982년 이 건물이 준공되었을 당시엔 이미 신아일보가 사라진 이후였기에 이 곳은 환경청이 사용하기도 하였고, 1985년에는 (한국)국민당의 당사가 사용하기도 했던 건물이다. 당시로선 법원 바로 앞이었으니 임대 빌딩으로서는 꽤나 인기있는 자리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 다. 현재도 항공사와 여행사 등이 다수 자리잡고 있어 외국인 회사나 대사관 등이 많은 정동의 분위기를
드러내주고 있다.
신아빌딩은 여름이면 담쟁이 덩쿨로 뒤덮이며, 오후의 햇살에 따라 울퉁불퉁 튀어난 벽돌의 세로줄눈이 만들어내는 햇살의 질감이 매력적인 건물이다. 또한 강직해보이는 파사드와는 달리 옆면과 뒷면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 각 방향에서 바라보이는 모습도 다르다. 신아빌딩 후면 주차장에는 벽돌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이 벽돌들도 1904년의 벽돌들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좀 더 정동길로 들어가면 지금은 등록문화재가 된 신아일보의 별관이 있다. 1930년대 미국 싱가(Singer) 재봉 틀 회사의 사옥으로 지어졌다가 1969년 이후 신아일보가 사용했던 이 건물 역시 벽돌조의 단아하고 소박한 건물이다. 신아일보가 사용하면서 3,4층을 증축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사옥을 짓기 위해 신아빌딩을 지은 게 아닐까 추 측해본다. 이내 곧 통폐합되어 신아일보는 역사 속으로 사 라지고 말았지만….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준, 작은형제회 성프란치스코 성당과 회관 신아빌딩이 정동길의 남쪽 끝에 서 있는 벽돌 오피스 빌딩이라면, 정동길의 북쪽 끝에 가까운 곳에는 작 은 형제회 성프란치스코회관이 있다. 이 건물 역시 벽돌 외장을 가지고 있는데 지어진 시기는 신아빌딩과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벽돌이 새 것이다 보니 신아빌딩의 오래된 느낌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건물이 또 하나의 정동의 이쁜이 건물로 소개된 것은 이 곳에 위치한 산 다미아노라는 까페, 그 앞 에 놓여 있는 소녀상, 그리고 이 건물 후면에 있는 정확한 건립년도를 알 수 없는 (아마도 1960년대나
70년대가 아닐까 추정한다.) 건물과 그 안의 작은 성당 때문이다. 뭐 하나 특별할 건 없지만, 소소하게 정동이라는 길에 스며들면서 정동길의 문화를 만들어 내는 곳. 사회적 약자들을 안아주는 곳, 종교시설 의 까페이지만 그 누구나 편하게 쉬고 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그리고 열려 있는 1층의 까페까지. 이 곳이 주는 매력은 별 거 아닌 소소함의 매력이다.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고, 종교를 결코 강요하지 않 는 그 느낌. 그 옛날 아씨씨의 성프란치스코가 보여줬던 검소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랄까. 정동 길을 걷다가 부담스럽지 않게 들려 커피 한 잔 하며,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언젠가 한 번은 살아보고픈, 정동아파트
성프란치스코회관 바로 옆에는 정동아파트가 있다. 정동길 주변에는 주로 교육시설이나 종교시설, 그리 고 상업시설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독특하게 서 있는 6층의 아파트가 바로 정동아파트이다. 1960년 건 립된 이 아파트는 건립 초기에는 1층 역시 주거 기능이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전면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구가건축의 아카이브가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동네 슈퍼가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건축 당시에는 주변 에 이미 상업시설이 있기 때문에 상업시설은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전용주거시설로 지었을 것이나 대로변에 면해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1층에 대한 주거 선호도가 적었을 것이고, 또한 주변에 소매점이 없었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 1층부가 상업용도로 전용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 아파트가 재밌는 건 4면의 얼굴이 다 다르다는 점이다. 정동길에 면한 부분은 콘크리트 건물의 외피 를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치장벽돌을 쌓아 정동의 분위기에 대응하고 있으며, 이 면은 대로변에 면해 있기 때문에 각 세대의 화장실 창만 귀엽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평면도를 보면 가운데
출입구와 계
단을 기준으로 북측으로 2세대, 남측으로 4세대, 즉 각 층에 6세대가 배치되어 있는데 코어를 제외한 동측으로는 외기에 면한 복도가 이어져 있다. 이 복도 부분은 프란치스코 회관 안 마당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는데, 복도의 끝부분에는 외기에 노출된 비상계단이 이어져 있다. 남측으로 향한 면은 남측 4개 세대의 베란다와 방의 창호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각 세대들이 50년 넘는 시간을 거치며 증개축을 한 결과 이 면은 현재의 정동아파트에서 가장 다이나믹하게도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오래된 아파트이지
만, 왠지 매력적인 정동아파트. 언젠가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정동아파트 바로 옆에는 고 이종호 건축가의 유작, 이화정동빌딩이 있다. 정동길에서 가장 신상(?)이지 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배경이 되어주는 듯한 건물이다. 벽돌로 된 외관과 같은 크기의 창호의 반복 은 정동의 푸른 하늘을 담아내기도 하고, 주변의 풍광을 담아내기도 한다. 정동길에 대한 존중과 묵직 한 울림이 느껴지는 건물이랄까. 또 하나 정동길에서 사랑하는 건물이 생긴 듯 하여 반가운 기분이었 다.
정동길에는 유독 참 좋은 건물이 많다. 길 자체도 매력적이고, 그 곳에 위치한 건물들도 매력적이다. 그 리고 그 길을 걷는 이들도 참 매력적인 경우가 많다. 밤 9시면 깜깜해지고 조용해지는 곳. 서울 도심에 서 이런 곳이 얼마나 있을까 싶은 이 곳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용히 정동길의 배경이 되어주며 이 곳을 지켜준 건물들도 많다. 그 이쁜이들을 오늘만큼은 주인공으로 소개하고 싶었다. 신아빌딩, 성프 란체스코회관, 정동아파트 그 곳에 있어주어 고아운, 그리고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정동의 이쁜이 들.
지진파
어떤 문제를 돌아볼 때는 충분히 시간이 지난 뒤에 보는 것이 좋을때가 많다. 문제를 둘러싼 이익관계도 얼추 정리되어 간섭하는 이도 없고 보는 이의 마음도 훨씬 흔들림 이 덜하다.
좀 늦었다고 생각해도 여생을 생각한다면, 지나간 시대는 돌아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쓰레기를 뒤적이는게 아니라 미래를 다지는 일에 가깝다. 숲의 어디쯤을 헤메는지 알 고 싶다면 나무를 유심히보고 기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김주영 원작소설로 1979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것을 이두 호가 만화로 엮은 것이다. 79년 연재가 시작되었고 이야기 배경이 조선 말기라 언어 표현을 보는 맛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다이나믹함이 왕좌의 게임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리듬이나 이야기가 늘어지고 연관성이 떨어지는 것 은 신문 연재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던 듯. 신문 연재 중단 때문에 작가가 구상한 이야 기가 종료되지 않아 2013년 10권이 출간되며 완결되었다 . 만화의 내용은 소설판 9 권까지의 내용. 이야기를 더 보고 싶은 사람은 꼭 마지막 권을 읽어야 한다.
윤식당 뭘까 ? <꽃보다 ##> 시리즈가 나올 때만 해도 뭐 잘사는 사람들이 여행다니면서 조금씩 고생하나보다 했고, <삼시세끼> 가 나올 때는 농사를 지나치게 쉬워보이게 하는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다가도 이렇게라도 보여주는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신서유기>는 뭐 전에 하던걸 다시 하나보나 했었다. <신혼일기>야 <삼시세끼>의 연장선이니... 그런데, 윤식당을 마주했을 때는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졌다. 우선 이 예능의 기본 포멧이 자영업이라는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당장 네이버에서 자영업이라는 검색어만 입력하더라도 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뉴스가 수두루빽빽하고 자영업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려 들면 자영업 폐업, 자영업 대출, 자영업자 고용보험, 햇살론 등등 부정적인 키워드가 한 바탕인 시대에 잘 생긴 연예인들을 데려다가 느긋하게 장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대체 무슨 생각인가? 하는 의아함이 있었다. 그렇다면 자영업을 향한 고군분투. 메뉴개발이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일단은 유명 세프의 조언으로 기본 레시피가 만들어졌다. 보통 쉐프들에게 컨설팅 받는 경우 비용을 생각하면, 다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의문이 인다. 현지에 도착 했을때 이미 가게는 완성되어 있고 주변 풍경과 다르게 깔끔한 주방이 펼쳐져있다. 가게를 꾸리는 비용은 얼마였을까? 윤식당은 장사가 되지 않아도 만리타향의 누구도 심히 좌절하지 않는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숙소는 가게보다 깨끗하고 멋지다. 일꾼이 한명 늘었지만 임금 걱정은 없고 손님이 없어도 그러려니 하다가 매장이 부숴지는 상황에서도 눈물이 나올 뿐 금전적 걱정이 없다. 그저 옆으로 이동하면 새로운 가게가 더 번듯하게 있으니 연속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가게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가게는 전보다 넓고 쾌적하고 준비가 잘 되어 있다. 장사가 안되어도 여전히 좌절하지 않는다. 생존이 아닌 방송 분량의 고민은 전혀 무게감이 없다. 조금 고민하다가도 저녁식사 자리에서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다음날 오는 손님도 인도네시아를 찾아 온 유럽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거 진짜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에 더해 굳이 이미 연기로 일가를 이룬 배우를 불러다가 요리를 시켜야 했을까? 생존을 위해 벌이를 하는 것이라면 그 역할을 하는 것을 그러려니 하겠지만, 던져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70세 어르신이 지나치게 고생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촬영하고 또 보여줘야 했나 하는 의문이 있다. 예능에 예민하게 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프로가 그냥 웃어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괴상하다고 생각한다. 윤식당의 아이디어는 분명 그림이 될 수 있다. 이미 비슷한 그림이 담긴 영화들이 만들어진 사례가 있으니까. 거기에 약간의 웃음과 친근함을 더한다면 충분히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이 섰을 것이다. 나도 그 계산값의 손익이 눈에 훤히 보인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이 프로그램의 기획이 통과된 것은 문제가 있다. 소도구도 이름을 붙여 작은 것에도 애착을 갖게 하는 연출을 하면서 정작 더 큰 현실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은 아이러니 하다 못해 끔찍하지 않은가. 연출자가 웃음이 비실비실 새 나올 정도로 상승하는 시청률도 무섭다. 모두가 선을 넘었다.
대선을 앞두고 굴림체로 글. EXXX 5. 겨울은 왜
사전투표가 끝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난 겨울들이 떠올랐다.
봄에는 먼지가 좀 있어도, 여름은 좀 더워도, 가을은 좀 추워도 그래도 광장에서 버틸만 했는 데 겨울이면 얼마나 사람들이 고생을 해야 했던가. 나는 사계절을 좋아하지만 광장의 사람들 이 떨어야만 하는 겨울이 참 싫었다.
겨울만 되면 일이 불거지고 여름의 일도 일부러 곪게 두었다가 겨울에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 는 잔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얼마나 들렸는지 모른다.
바람이 불고 비가와서 옷이 젖고 추위에 이가 갈릴 지경이면 그들은 얼마나 신을내며 술을 데 워 마셨을까. 맛있는 안주에 티비를 틀어놓고 뉴스에 보도되는 시위 모습을 보면서 세상 저런 등신들을 보라며 얼마나 낄낄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겨울이라도 좀 안왔으면 싶었다.
막을 수 없는, 그저 흐를뿐인 행성의 흐름을 잡아 무너뜨리고 싶었다.
겨울은 올해도 올것이고 그런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올해도 누군가 서있을 지도 모른 다. 우선 날이 좀 덜 추웠으면 좋겠다. 이건 우주가 좀 도와줬으면 한다. 그리고 잠깐 어디 들 어가서 추위를 피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문제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낄낄대며 술마시는 사 람보다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골머리 썩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인생은 계속되고 겨울은 반복된다.
ps. 대선이 종료되었으므로 여러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