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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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백림서신 - 02. 이국(異國) / 글. composer B 영화 리뷰: 두번 본 영화 - Moulin Rouge! (2001) / 글. 가람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 성북동 비둘기, 시조 1편 / 글. 고수진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 연필 / 글. 사탕고양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수면을 걷는 사람들 - 6. 필 上 / 글. 장수양 사진. @photo.j.keith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만든다오 - 02. 전애인, 벽돌책장 / 글. 사진. 진선 건축이 좋아 - 39. 언젠가 이발관 / 글. 사진. aoikasa 지진파 - 신들의 연기 담배 , 맛의 천재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A안과 B안 / 글. 민하


인사말

이번 달부터 기고하기 시작한 사탕고양입니다. 집 근처에 Y 카페에서 월간 이리를 본 후 월간 이리에 글을 올리고 싶다고 이야기 한 것이 3년 전의 일인데 이제야 첫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때 쓰고자 했던 주제와 지금의 주제가 크게 다르지만 지금의 주제가 더욱 마음 에 듭니다. 그때는 일과 관련된 내용이었지만 이번은 온전히 저의 취미와 관련된 내용이거든요. 직업으로의 글은 ‘써야 하는 일’이었지만 지금 글은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모든 컨텐츠가 두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작가가 되려면 자신의 속에 품은 이 야기를 남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라고 들었어요. 듣고 보니 정말 그러합니다. 여기에 실린 글과 그림을 읽으며 각자 마음에 품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생각해보 곤 합니다.

사탕고양 올림

공식트위터 @postyri


백伯 림林 서書 신信

Composer B

02. 이국(異國)

잘 지냈어? 여기 베를린은 얼마 전부터 갑자기 날씨가 더워 지기 시작했어. 사람들의 옷차림이 단 일주일 만에 패딩 점퍼에서 반팔로, 구두에서 샌들로 바뀌었네?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만, 내가 다니고 있는 독일어 학원의 수업도 계절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게 됐어. 수업이 새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그 전까지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들 중에서 몇 명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는 새롭게 등록한 사람들이 들어오기 마련이야. 그리고 이번 주 월요일에도 어김없이 몇 명의 사람들이 새로 들어왔어. 그런데 말야, 월요일에 새로 들어오게 되는 사람들 중에서 그 수업을 끝까지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 무슨 얘기냐구?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수업을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샘플 강의를 듣기 위해 들어오거나,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의 수업이 다음 주나 되어야 자리가 비기 때문에 남는 시간이 아까워 임시로 들어온 사람이 많거든. 물론 그들도 스케줄이 어찌될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난 이번 주 지나면 다른 반으로 옮길 거야’ 라는 소리를 굳이 하지는 않아. 다만 아쉬운 건, 나처럼 예전부터 수업을 계속 듣던 사람들이야. 보통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면 반가운 마음에 어느 나라에서 왔고 어떤 공부를 하는지 그리고 왜 독일에 오게 됐는지 등을 물어보며 친해지게 되거든. 그러면서 서로의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더 가까워 지기도 하구. 하지만 딱 일주일동안 수업을 듣고 떠나는 사람들과 아무리 많은 공통분모를 발견한다고 한들, 얼마나 친해질 수 있을까? 서로 잘 통하지도 않는 독일어로 애써 웃고 얘기하면서 ‘아, 이 친구하고는 말이 좀 통하겠네’ 싶다가도, 다음주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앉아있는 걸 보면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언제부터 인지는 잘 모르겠어. 우리 세대는 불확실한 미래를 이겨 내기 위해서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 ‘잡 노마드(Job Nomad)’라는 용어도 그 때문에 생겨 났을테고. 실제로 이 곳의 어학원에 등록을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도 자신의 그런 미래를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언어 하나라도 더 배워 볼까?’하는 마음에 등록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이래저래 깊은 인간 관계를 맺을 시간을 갖기가 힘든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도 그들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또 깊게 마음을 주지 않게 되는 것 같더라. 어차피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배우면 그만인 곳인데 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가 정말로 점점 얇고 얕아지고 있는 걸까? 사실 내 생각은, 어느 쪽이 되었든지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편에 가깝기는 해. 세상의 큰 흐름이 바뀌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 변화가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네. 대인 관계 뿐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돌아볼 때도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 왜 외로운 일인지를 실감하는 요즘이다. 험한 일이나 궂은 일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 옆에 있는 이 사람도 결국 언젠가는 떠나겠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어지간한 인간 관계에 대해서는 의욕이 없어지게 돼. 한때는 모든 인간 관계가 너무 버겁게만 느껴진 나머지, 차라리 아무 때나 끊겨도 서로 크게 상관하지 않거나 마음 상하지 않는 그런 관계가 낫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사람이 간사한 존재라는 말이 맞긴 한가봐.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인이고,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인이며, 세계에서는 유태인이다.” 라고 말이야. 격동하는 시대에 태어나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살아가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말이지. 물론 내가 말러처럼 스스로를 천덕꾸러기처럼 여긴다는 뜻은 아니야. 그저 뭐랄까… 이국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할지라도, 문득 물 위에 뜬 기름 같이 겉돌고 있는 스스로를 마주하는 순간을 맞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야. 너무 징징거렸나? 하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이국 생활에서 배우게 되는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다만 어딘가 이야기를 하거나 적어 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얘기해본거야. 어쩌면 아직 내가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서 살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어. 물론 나도 언젠가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겠지만, 아직까지는 영 낯선 것 같다. 그래도, 적응은 빠른게 좋겠지? 말이 길어졌다. 또 편지할게.


영화리뷰 : 두번 본 영화

Moulin Rouge! (2001) 감독: 바즈 루어만 (Baz Luhrmann)

바즈 루어만 감독의 물랑루즈(2001)의 내러티브는 클리셰로 무장한 사랑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영국 작가 크리스틴(이완 맥그리거)은 파리 물랑루즈 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춘부 새틴 (니콜 키 드만)을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사랑은 ‘산소’라고 믿는 이 보헤미안 작가는 그 순수하고 불같은 영혼으로 사랑은 돈으로 사고 파는 ‘게임’이라고 믿는 새틴의 마음을 사로잡죠. 하지만 둘의 사 랑엔 두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물랑루즈1)에서 새로 제작하는 새틴 주연, 크리스틴 작(作) 공 연에 투자하는 대신 새틴의 독점 소유권을 갖게된 백작이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 하죠. 게다가 새틴은 폐결핵으로 죽음을 향해 서서히 다가갑니다. 불같은 사랑과 역경, 질투, 그리고 끝내 새 드 앤딩에 도달하는 주인공들. 이보다 흔한 사랑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물랑루즈는 흔한 사랑 ‘이야기’이긴 하지만 흔한 사랑 ‘영화’라고 단정지을 순 없습니다. 바즈 루 어만 감독의 레드 커튼 삼부작 (Red Curtain Trilogy)2)의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세기를 넘나 드는 온갖 대중문화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의 플롯은 소설 두 편, 그리고 오 페라 한 편에서 왔습니다. 보헤미안 작가가 폐결핵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프랑스 작 가 앙리 미제르 (Henri Murger) 의 보헤미안의 삶 (La Vie de la Boheme)에서, 진정한 사랑을 배


우게 되는 매춘부 캐릭터는 프랑스의 대중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3)의 춘희 (La Dame du Camelias)에서 차용된 설정입니다. 그리고 지하 세계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구해내 려는 남자의 이야기는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오페레타4) 천국과 지옥 (Orpheus in the Underworld)에서 왔죠. 세 이야기는 당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받았던 작품들입니다. 루어만 감독은 이 세 이야기를 뮤지컬 형식으로 묶었습니다. 원래는 음악 감독이 루어만의 로미 오와 줄리엣을 위해 만들었던 곡 Come What May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어권 국가에서 크게 히 트를 친 곡들이죠. 데이빗 보(David Bowie)가 부른 냇 킹 콜의 (Nat King Cole)의 Nature Boy는 영화의 가장 도입부에 쓰이며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고요. 한국에서는 한 예능프로그램 테마송 으로 더 잘 알려진 팻보이 슬림(Fatboy Slim)의 Because We Can,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 릴 킴(Lil’ Kim) 등이 부른 Lady Marmalade, 그리고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 이 어울어진 메들리는 몽마르트의 밤문화와 물랑루즈의 댄서들의 화려함을 잘 보여줍니다. 극 중에서 크리스틴이 새틴을 보며 지은 즉흥시로 나오는 엘튼 존(Elton John)의 Your Song. 새틴 의 코끼리 타워에서 크리스틴이 사랑을 고백할 때 부르는 노래 Elephant Love Medley는 비틀 즈(The Beatles)의 All You Need is Love, 키스(KISS)의 I was Made for Loving You 등 세기의 사 랑 노래들이 한 데 어울어져 있죠. 제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시퀀스 이기도 합니다. 감독의 이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열거한 이유는 바로 이 지나간 이야기와 음악들 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즈 루어먼은 레드 커튼 삼부작으로 영화 영사에서 손에 꼽히는 컬트 영화감독의 반열에 올 랐습니다. 첫 번째 작품, 댄싱 히어로는 클리셰로 점철된 사랑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좀 조악하 고 산만하게 엮였다는 흠이 있습니다. 또 감독의 연기 연출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 죠. 하지만 영화를 거듭 발표하며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과감하고 화려한 색깔의 사용이 나, 의도적으로 구성된 드라마틱하고 과장된 에피소드들은 댄싱 히어로에서도 충분히 그 존재감 을 드러냅니다. 두 번째 시리즈, 로미오와 줄리엣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클레어 데인즈 주연) 은 캐릭터 설정과 에피소드 구성이 더 진화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디카프리오가 문어체 로 연기한 로미오 역할은 이 영화를 비로소 완성시킨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의 백미입니다. 과 감한 색감과 음악이 어울어진 화려한 파티 시퀀스는 헐리우드 자본 도입으로 완성도 높게 만들 어 졌습니다. 하재만 개인적으로 루어먼 감독의 레드 커튼 삼부작 중 물랑루즈를 가장 높게 평 가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과거 대중 문화에 대한 오마주가 당대의 관객 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고요. 영화의 큰 컨셉부 터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예를 들면 캉캉 시퀀스에 나오는 수많은 캉캉 댄서들이 자신만의 캐 릭터 컨셉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 루어먼 감독 특유의 스타일과 체계가 반영된 듯한 느낌 이 들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반영도 아주 훌륭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사촌, 타이볼 트 카풀렛을 연기하며 아주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를 보여줬던 존 레귀자모(John Leguizamo)는 물랑루즈에서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 역할을 맡았습니다. 물랑루즈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 로트렉을 오마주한 이 캐릭터는, 장애로 키가 150센티 남짓이었던 로트렉의 외형 까지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Nature Boy를 부르는 것도, 영화 중반에 영화의 화려함과 즐거움에 푹 빠져있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 깨워 주는 것도 바로 이 툴르주 캐릭터입니다.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세 가지 이야기로 서술된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 인 크리스틴과 새틴의 사랑 이야기는 이미 비극이 끝난 시점에서 크리스틴이 과거를 회상하며 들려주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회상 속에서 크리스틴과 새틴은 인도의 무일푼 시타 악사 그리고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춘부를 연기하죠. 물론 그 이야기 속에는 둘의 사랑을 방해 하는 악한 ‘마하라자’도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는 크리스틴의 회상과 물 랑루즈의 공연 무대를 넘나들며 전개됩니다. 애초에 플롯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감독은 영화의 도입부부터 캐릭터의 대사, 미장센 등을 통해 영화가 어떻게 끝날 것이 라는 것을 모두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반의 상영 시간동안 이 이야 기에 지루함 없이 집중하게 되는 게 물랑루즈의 매력입니다.


뮤지컬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팬들이라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는 영화에 사용된 음악들을 찾아 들으며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오리지 날 사운드트랙 음반을 듣는 것도 영화를 즐겁게 곱씹는 즐거운 과정이 되고요. 개인적으론 그동 안 이완 맥그리거를 트레인스 포팅 (Trainspotting)으로, 니콜 키드먼을 그저 예쁘기만 한 배우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물랑루즈를 본 후에는 두 배우에 대한 기대감과 이미지가 바뀌기도 했습니 다. 특히 이완 맥그리거는 사랑에 빠진 남자를 인상적으로 연기합니다. 배우의 표정 연기도 주의 깊게 살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끝.

1) 19세기 말, 프랑스 몽마르트 지구에 문을 연 카바레 2) Strictly Ballroom (댄싱히어로, 1994) Romeo+Juliet (로미오와 줄리엣, 1996) Moulin Rouge! (물랑루즈, 2001) 3) 호두까기 인형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장 등을 쓴 프랑스 작가 4) 뮤지컬 코메디의 전신인 코메디가 가미된 오페라. 자크 오펜바흐는 오페라의 대중적인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페레타의 창시자입니다.

글. 가람

봤던 영화 또 보는 게 취미인 학생입니다. 두 번 이상 본, 개취 영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akakk_@naver.com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성북동 비둘기, 시조 1편」

아파트 전셋값이 너무해. 글. 고수진 요즘 내 고민의 80%는 집이다. 남자친구의 직업이 건설 쪽인데 해외근무가 잦은 편이다. 지 금도 그는 두바이 이름 모를 섬에 갇혀 있다. 4개월마다 2주 휴가를 받아 나오는데 그 2주 동 안 바짝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집뿐이다. 우리 예산으로 서울 전세는 너무 너무 너무 비싸다. 평균 4억대다. 전세인데 4억이다. 강남 쪽 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우리가 본 지역은 답십리, 명일, 천호일대다. 다른 동네도 비슷하다고 한다. 2억 후반에서 3억 8천 사이이다. 어느새 부동산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 결국 은행에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야 한다. 은행과 결혼하는 기분이다. 은행 만세.. 그런데 서 울 전세 너무 비싸다. 빌라는 나중에 이사 갈 때 집이 잘 안 빠져서 아파트로 가는데 아파트 너 무 비싸다. 우리가 보는 아파는 평수는 실 평수 18평인데 말이다. 3억 후반 대라니.... 수원이 나 동탄은 이 정도면 집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남자친구의 고향인 부산은 45평대 산다고 한다. 이정도면 비정상적 인거 아닌가? 요즘 나는 남자친구를 대신해 집을 보러 다닌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인지 지루성피부염 이 생겼다. 면역체계가 뒤틀리면 온다던데.. 지루성 피부염에 콜린성 두드러기까지 와서 스테 로이드 연고를 처방 받고 알약 또한 항히스타민제라 스테로이드가 있다. 약도 연고도 스트레 스천국이다. 역시 결혼이란.....

오늘 볼 작품은 현대시 ‘성북동 비둘기’와 송순의 시조를 준비했다. ‘성북동 비둘기’는 70년 대 후반 도시화로 인해 무분별하게 아파트가 만들어지며 파괴되어 가는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파트가 문제다. 시조 ‘십 년을~’은 안분지족, 안빈낙도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조선시대 양반시조이다. 아파트 전세에 놀란 가슴, 성북동 비둘기의 모습과 동병상련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이 시에서 비둘기는 세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파괴된 자연, 소외계층, 도시화로 인해 파괴된 인간성. 세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되지만 결국 공통점은 도시화로 인해 파괴된 대상들이란 점이 같다. 작가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표현법에 주목해 보자. 인간들에게는 번지(주소)가 생겼으나 비둘기의 보금자리(번지)는 사 라졌으며 문명의 이면에는 자연 환경의 파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통해 도시 문명의 부작용을 절제된 목소리로 경고하며 무분별한 개발이 우리 인간의 삶에 끼 친 영향을 독자에게 생각하게 한다.


조선시대 송순의 시조 ‘십년을~’를 보자. 이 작품은 조선 중기 때 문인 송순이 창작한 가사작 품이다. 그는 대대로 명문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41세까지 순탄한 관직생활을 했다. 물론 1 번의 귀양살이를 하긴 했으나 그 당시 4대 사화가 일어났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정도면 순탄 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품이 너그럽고 음율을 잘 탔다고 전해진다. 그의 관직생활이 순탄했음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알 수 있다. 대체로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거나 임금님께 감 사하는 연군의 작품들을 다수 창작 했다. 이 작품은 시적 화자의 여유롭고 욕심 없는 삶의 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0년 동안 정계 에 있으며 3칸짜리 집을 만들었는데 되게 아름다운 집인 것 같다. 나는 조경까지 바라지도 않......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 나 ᄒᆞᆫ 간 달 ᄒᆞᆫ 간에 청풍 ᄒᆞᆫ 간 맛져 두고 강산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는 사대부들의 모습을 그려낸 전형적인 양반시 조이다. 3칸짜리 방에 달 한 칸 주고, 시원한 바람에게도 한 칸 주고 강산은 더 이상 방이 없어 병풍처 럼 둘러두고 보겠다라는 시적 화자에게서 여유로움과 물아일체적 삶이 느껴진다. 아.. 부럽다..

새로운 정부는 이 미친 부동산 값을 잡아 주어야 할 텐데.

다음 이 시간에는 고전소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각하면 보강이다.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연필

화실에 연필 긋는 소리가 가득 찬다. 평소라면 음악이 흘렀겠지만 오늘은 모든 소리를 끄고 연필 소리에 집중해보라며 음악을 껐다. 연필심은 종이 표면을 지나며 소리를 낸다. 필기구가 종이를 지나는 소리를 녹음해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연필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진동은 손을 타고 전해져 온다. 때론 힘을 빼고 연한 선을, 때론 힘을 줘 진한 선을. 수천 번의 선을 그으면 선명한 이미지가 완성된다. 지금도 사람들은 연필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그림 도구가 연필이고 연필은 그림의 시작이자 무엇을 그리더라도 함께하는 동반자다.

그림 도구가 될 운명이었던 흑연 연필을 이루는 핵심인 흑연이 이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그랬다. 흑연은 지하에서 커다란 압력을 받으며 생겨난 순간부터 먼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릴 용도로 사용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채광되는 흑연의 단 7%만이 연필로 만들어지고 나머지는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있긴 하다. 필기구 종류가 부족했던 과거엔 더욱 많은 비율이 연필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연필은 종이의 표면을 지날 때마다 검은 선을 남긴다. 그 선 하나하나는 무엇하나 같은 것이 없다. 긋는 힘의 정도에 따라, 각도에 따라 속도에 따라 미묘하게 선의 굵기와 진하기가 바뀐다. 연필을 잘 다루는 고수라면 한 번 긋는 선에 많은 변화를 줄 수 있을 정도다. 또, 변하지 않기에 연필로 기록되고 그린 그림은 종이에 문제가 생겨서 사라질 때까지 보존된다. 그렇기에 과거부터 미래까지 사랑받는 도구일 듯하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영화의 대본을 쓰는 것과 음악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손과 어깨에 힘을 빼고 아주 연하게 선을 그어 계획을 잡아 나간다. 처음 연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이 연하게가 힘들다. 어깨에서 힘을 빼자 그림도 글도 운동도 공부도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의 틀을 잡고 수직 수평을 측정하며 계획을 잡는다. 모든 계획이 그러하듯 머릿속에서만 완벽하다. 종이로 옮기는 순간부터 틀어진다. 그래서 선을 연하게 긋기가 중요하다. 연하게 그으면 지우기 쉽다. 사실 지울 필요도 없다.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 더 강한 선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된다.


흑연으로부터 연필이 될 때까지 연필심을 영어로 Black Lead라 부른다. 말 그대로 흑연(黑鉛), 검은 납이다. 이름은 납이지만 납과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다. 흑연은 탄소로 이루어져 있어 구성된 원자 자체가 다르며 납같이 유연하지 않아 쉽게 부러지고 가루가 된다. 전기가 잘 통한다는 점은 비슷하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다.

그럼에도 납이라 부르는 이유는 흑연이 등장하기 전, 중세 유럽에서는 나무 조각 사이에 납 합금을 끼워 넣어 지금의 연필과 비슷하게 썼기에 그 도구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또 흑연은 영어로 graphite라고 부르는 데 쓰기/그리기란 뜻의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이 녀석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용도라 칭하고 있다. 처음부터 흑연이 필기구나 그림 도구였던 것은 아니다. 1565년 영국에서 대규모 흑연광산이 발견되기 전에는 소량이 도자기를 장식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광산이 발견된 직후엔 군사용으로 사용됐지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데 더 사용하기 좋아 조각들이 밀반출됐다. 결국 문장가들과 예술가들의 열광적인 사랑으로 필기구로의 흑연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랫동안 연필은 영국에서만 생산됐다. 영국 이외의 국가에서 질 좋은 흑연 광산을 발견할 수 없어서 기도 했다. 당시에는 흑연 덩어리로만 연필을 만들 수 있었다. 영국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흑연 조각 정도.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고, 흑연 조각에서 연필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개발됐다. 1790년대에 프랑스의 니콜라스 자크 콩테(Conté 창업), 오스트리아의 조셉 하드머스(Koh-INoor 창업)가 흑연과 점토를 혼합해 가마에서 굽는 방법을 발명했다. 이 두 회사는 지금도 연필과 그림도구를 만드는 회사다. 점토를 혼합해 굽는 방법은 연필의 진하기를 원하는 대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이 두 회사만이 아니라 전부터 세계 곳곳엔 연필 공장이 세워지고 있었다. 흑연 가루로 연필심을 만드는 기술이 보급되자 말 그대로 연필이 세상에 뿌려졌다. 대량생산에은 규격화가 필수다. 파버카스텔에서 연필의 제조 방법을 표준화해 6각형. 174mm 길이 H, B라는 경도 단계 등을 만들어 냈고 이 표준안은 지금도 모든 연필에서 사용된다.


Black의 B, Hard의 H 연필이 규격화됐더라도 거기서 나오는 글과 그림은 규격화되지 않았다. 아니 규격화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린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그림이 다르다. 그림용 연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흑연이 균일하게 갈려 있어 그림을 그릴 때 걸리는 것이 없고, 겹쳐 쌓을 때 미끄러지지 않는 고급연필이면 된다. 고급연필이란 기준이 무척 높을 듯하게 느껴지지만 한 자루에 700원짜리 T 브랜드의 연필이면 충분하다. 몇 배의 가격인 연필이 많이 있지만 결과물은 모두 한결같으며 차이는 온전하게 그리는 사람만 느낄 수 있다. 비싼 연필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다. 연필심이 종이를 지나는 감각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계속 손끝으로 전달되는 감각이며 연필을 더욱 사랑하게 만다. 연필은 HB를 중심으로 진하고 B에 붙은 숫자가 클수록 더 진해지며 H에 붙은 숫자가 클수록 연해진다. 최대 9H부터 중간의 HB와 F를 거쳐 9B까지 20단계가 있는데 표준화된 것은 아니라 어떤 브랜드는 단지 몇 단계밖에 없기도 하고 진하기도 다르다. 같은 4B라 하더라도 어떤 브랜드는 연하고 어떤 브랜드는 더 진하다. 진하기가 다르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필압을 변화로 아주 연한 색부터 완전히 검은색까지 표현할 수 있어서다. 다양한 진하기의 연필을 사용하는 쪽이 더 편하게 명암을 표현할 수 있다. 스케치나 피부의 표현은 연한 2H나 H로 하고 더 진한 어두움은 6B로 그리면 쉽게 명암 단계를 낼 수 있다.

연필그림이 기초인 이유 그림을 시작하면 연필로 그림을 그리라 하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연필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 필압과 속도로 변화무쌍한 진하기와 굵기를 표현하는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엄청난 단계의 명암표현으로 ‘흑백’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다. 인간은 색의 차이보다 명암의 차이를 더 먼저, 그리고 잘 느낀다. 생물이 눈을 가지가 된 이후 수억 년 동안 본 것은 명암의 세계고 포유류 중에서 가장 색을 잘 구분하고 볼 수 있게 된 지금도 명암의 차이를 더 잘 본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명암의 구분이 중요하며 색이 달라도 같은 명도라면 금방 구분할 수 없다. 좋은 그림은 흑백으로 사진을 찍어도 명확하게 보인다. 그래서 연필로 그리는 수십 수백 단계의 명암으로 그리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것을 연필로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그림 팁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흑백으로 찍었을 때 명암이 다양하고 구분하기 쉽다면 가독성이 좋은 그림이 된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이 종종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자신의 그림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 연습에 많은 도움이 된다.


연필로 그림을 그릴 때 팁은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선을 그을 때 조금씩 연필을 돌리면 균일한 굵기의 선을 그을 수 있다. 긋는 중에 돌리는 건 힘들어서 연필을 땔 때 육각형의 한 칸씩 돌리면 된다. 유명한 U모 회사의 샤프도 이런 원리로 샤프심을 균일하게 닳게 해 선의 굵기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또 하나의 팁은 연필로 처음 색을 깔 땐 연필을 뉘어 칠하는 것이 좋다. 흑연이 종이 표면에 살짝 올라와 있어 지우기 쉽고 종이에 잘 남지 않는다. 진하게 하고 싶다면 연필심을 뾰족하게 깎은 후 연필을 세워 다양한 방향으로 칠하면 거의 완벽한 검은색을 만들 수 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은 종이에 단단히 밀착돼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종이 위에 올려져 있거나 종이 섬유에 끼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손가락이나 종이로 문지르면 번진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연필 선을 손가락이나 찰필로 문지르면 선을 부드럽게 펼 수 있는데 부드러운 명암 표현은 물론이고 실력이 더 좋아 보이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연필그림은 양장 노트에 그리자. 스프링제본 노트에 그리면 종이가 문질러지며 연필 그림을 희미하게 만들어서다.

글. 사탕고양 그림 도구 덕질 과정을 열심히 제 블로그(soulcreator.blog.me)에 올리고 있습니다. 수집욕이 어느 정도 사그러드니 이젠 물감 만들기를 시작했네요. 본업은 글쓰기고 그림이 취미지만 다들 제 본업이 그림이고 글은 쓰는 줄도 모릅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작가 그룹이 일러스트레이터 그룹인 ‘그림벨트’거든요.


살들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수면을 걷는 사람들

글. 장수양(@condensed_bold) 사진. @photo.j.keith


6 필上 하루 일과가 끝나고 필과 이와는 홍제천 근처의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벽돌색이 거뭇한 단독주택. 건물의 한 면을 비스듬하게 감은 계단을 올라가면 쪽문이 있다. 여기 살며 두 사람은 그 문만 이용해왔다. 방에는 전기장 판이 깔린 매트리스가 두 개 있었다. 옷을 걸 수 있는 메대도 하나. 비교적 깨끗하고, 불필요한 게 없다는 건 장 점이다. 필은 백팩을 메대 아래 내려놓은 뒤 멀티탭에 충전기를 꽂았다. 스위치를 누르자 주황색 불이 들어왔다. 이와 는 옷을 갈아 입지 않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날씨가 더워졌는데도 밤에는 아직 추웠다. 필은 검고 뻣뻣한 셔 츠를 벗어 메대에 걸어놓았다. 세면도구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필은 늘 이와보다 먼저 씻는다. 방음이 안 되는 이곳에선 샤워기를 트는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 칵, 하는 소리는 누군가 침을 뱉는 소리 같기도 하고, 숨이 멎 는 소리 같기도 하다. ―깜짝이야. 방으로 되돌아온 필이 말했다. ―샤워해. 옆 방 사는 사람. 필은 약간 젖은 손으로 세면도구를 매트리스에서 멀찍이 내려놓았다. 옆 방 사람은 두문불출해서 이제껏 시 간이 겹치는 일이 없었다. 필은 잠시 기다리는 듯 하더니, 이어폰을 꽂고 매트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와는 이불 에 푹 싸여 눈을 감았다. 옆 방 사람은 오래 씻었다.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매번 필의 샤워가 끝나기를 기다 리는 내내 물소리를 들어서인지 이와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그대로 바닥에 부딪치는지, 몸을 적시는지를 구분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머리를 감거나 몸에 비누칠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일 없이 한 자리에 줄곧 물을 맞으 며 서있는 듯했다. 물세가 너무 많이 나오면 엉덩이가 무거운 주인 부부가 올라와 하숙생들에게 주의를 줄 지 도 모른다. ―학원은 재미있어? 이어폰을 끼고 있는 채로 필이 생각난 듯이 물었다. 물어놓고 필은 천장을 빤히 보았다. 자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한 달 뒤엔 그만둘 거야. 필은 고개를 돌려 이와를 쳐다보았다. 며칠 전에 이와는 충동적으로 발레 학원을 끊었다. 후회했지만 환불하지 않았다. 성인들이 취미로 다니는 곳 이었다. 사람들은 레이스가 달린 발레복이 아니라 몸에 붙는 타이즈나 연습복을 입고 있었다. 강사는 이 자세를 잘하게 되면 허리에서 허벅지까지의 라인이 예뻐져요,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콘솔의 차가운 감촉, 사용하지 않 던 근육의 낯선 존재감, 토슈즈의 끈을 맬 때 발끝이 살찍 당겨지는 느낌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첫 수업 때 이와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실수를 했다. 크게 휘청거리면서 콘솔을 붙잡았다. 강사는 웃으면서 힘을 빼고, 라고 나긋하게 말했다. 발레 학원을 끊기 전에도 이와는 발레에 대하여 자주 생각했다. 어릴 적에는 또래들 중에서 가장 칭찬을 많 이 받았다. 금방 그만두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작의 표본으로서 다른 아이들 앞에 설 때면 가슴이 부풀곤 했다. 밤이면 꿈 속에서 무겁고 압도적인 붉은 막이 있는 무대를 상상하고, 그 막이 올라간 자리에 서있는 자신 을 보곤 했다. 수업을 마친 후에는 필을 만나 비어있는 야외 주차장에서 발레 동작을 연습했다. 필은 그 때마다 유난을 떤다며 싫어했지만 기분이 좋을 때면 가끔 이와가 하는 동작을 따라 발을 뻗었다. ―다했나봐. 물소리가 끊어졌다. 필은 이어폰과 휴대폰을 매트리스 아래 내려놓았다. 옆 집 사람이 잠긴 문 앞을 지나간다. 장판에 물기 어린 발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 필이 일어섰다. ―빨리 씻을게. 필이 세면도구가 담긴 바구니를 끌며 나갔다. 이와는 방충망 없는 창문을 쳐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이와는 발레에 관한 꿈을 꾸었다. 여러 가지 꿈이 뒤엉켜 잘 기억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꿈 이다. 필에 관한 부분도 섞여 있는 모양이다. 그 부분만은 어쩐지 떠올릴 수가 있다. 연습실에서. 이와는 거울로 된 한쪽 면에 벌어진 양 발을 삼각형이 되도록 붙이고 있다. 긴 머리를 높게 틀어올린 필이 뒤에서 이와의 엉덩 이를 발로 지그시 누르기 시작한다. 조금씩 다리가 벌어진다. 다리를 찢으려면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거울벽과 이와의 사타구니 사이에는 두 뼘 정도의 틈이 있다. 거울에 입김이 어리고, 이상한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무릎 이 자꾸 굽혀지려고 한다. ―아직 아냐. 골반이 거울에 딱 붙을 때까지야. 필이 이와의 엉덩이를 힘주어 누른다. 이와는 신음하지도 않고 천천히 몸에 힘을 뺀다. 기어이 골반을 거울에 딱 붙인다. 다리가 하나의 선분처럼 되 도록. ―잘하네. 필이 말한다. 거울에 비친 이와의 모습은 어쩐지 부끄럽다. 입김이 얼굴을 지워버린다. 그런 꿈이다. 기억하는 것은 한 번이지만 반복해서 꾼 것만 같다. 새벽에 서리가 내렸는지 땅이 젖어있었다. 차갑지 않은 아침 공기가 낯설었다. 이와는 일찍 일어나는 걸 좋아 했다. 직장에 나가는 여자들의 갓 메이크업을 끝마친 얼굴들이라든지, 버스정류장에 줄 서있는 사람들, 하나씩


불 켜지는 건물과 가게, 신문이 던져지는 소리, 어제의 흔적을 수거해가는 쓰레기장. 그런 것들을 보고 듣는 게 좋았다. 필은 이와의 이런 점에 대해 한 마디로 건설적이다, 하고 평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태도로. 아 침의 광경 따위에는 관심없다는 말투였다. 오늘 아침에도 필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의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 굴로 계속해서 잠을 잤다. 이와는 영양분을 섭취하듯이 잠을 빨아들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나왔다. 필 은 주말이면 더 피곤해하는 것 같았다. 이와는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델리만쥬 냄새 가 났다.


**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편집장 빼고 다 잘되는 잡지. 무모함과 신뢰의 아이콘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음악,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설마 이런걸 연재가 될까? 하는 것들 다 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2.전애인, 벽돌책장 책을 가진다는 것은 헤어진 애인을 못 잊는 질척거리는 것과 비슷하다. 언제든지 그 사람의 근황을 확인할 수 있 도록 친구의 친구의 또 그 친구의 타고 넘어갈 수 있는 SNS 계정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이미 다 읽은 책을 바라보 며, 이건 그런 내용이었지, 저건 저런 내용이었지 하며, 물리적으로 곱씹을 매개체를 만들어 놓는 일이다. 글 쓰는 전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는 것 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를 할 때 마다 책을 싸 짊어지고 다니는 까닭은 그 어마어마한 무게들 마저 없다면 내가 공부한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 닌 것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부담감, 죄책 감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나 에쿠니 가오리 같은 사소설부터 시작해, 전공 서적, 시집 몇 권과 책장 한 칸을 꽉 채우 는 여행, 에세이집들. 그 모든 책들을 버리게 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와 그것들을 섭취했던 나의 시간까 지 모조리 무(無)로 돌아갈 것 같았다. 황량하게, 허무 하게, 자고 일어나면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 모든 것 들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 공부 못하는 애 들이 펜은 예쁜 걸 잔뜩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는 책을 버리지 못했다. 책을 끼고 산다는 건 꽤 불편한 일이다. 한쪽 구석에 쌓아둘 것이 아니라면, 책장이라는 녀석이 필요했고, 선반이 꽤 튼튼하지 않으면 책의 무게에 못 이겨 쉽게 휘어지기 때문이다. 지은 지 25년 된 13평짜리 빌라에 이사 와서는 본격

▲완성된 벽돌 책장의 모습

적으로 책을 수납하기 위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꽤 튼튼한 책장은 비쌌고, 마음에 드는 가구가 있다고 한들 설치 할 공간의 너비보다 컸다. 가구들을 테트리스 하듯이 이리 놓아보고 저리 놓아봤지만, 좀처럼 각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벽돌책장을 만들기로.


서론이 너무도 길었다. 무언가를 만들 수밖에 없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던, 기나긴 변명이다. 그러니 재빠 르게 재료를 사는 이야기부터 해보자. 바야흐로 DIY시대, 목재를 원하는 만큼 재단해서 배송해주는 쇼핑몰이 넘친다. 나는 그 중 손잡이닷컴을 선택했 다. 문고리닷컴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목공·철물 쇼핑몰이며, 목재뿐만 아니라 페인트, 경첩, 시트지, 핸드드릴 등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다. 손잡이를 선택했던 이유는 내가 구매하려고 했던 목재가 아주 조금 더 저렴했기 때문이 었다. 수급 상황에 따라서 문고리 닷컴이 더 저렴한 목재도 있었다. 책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는 두께가 2cm는 넘 어야 할 것 같아서 22T 짜리 미송 집성목을 6개 주문했다. 철물 쇼핑몰에서 팔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벽돌이다. 벽돌에도 종류가 많다. 일반 적벽돌, 시멘트 벽돌, 그

▲손잡이닷컴의 목재재단 서비스. 원형가공도 된다. 리고 코팅벽돌. 적벽돌은 장당 500원에서 1,000원 정도다. 실내에 놓을 것이니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는 코팅벽 돌을 구입할 생각이었지만 인근에서 파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코팅벽돌이 없어 일반 적벽돌을 구매하게 됐지만, 문제는 운반이었다. 소량으로 용달을 하자니 운반 비용이 구매 비용을 훌쩍 뛰어 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는 소셜카셰어링 서비스 SOCAR에서 짐을 실을 공간이 넉넉한 차를 빌려 직접 실어 날랐다. 재단되어 온 목재는 그대로 써도 되지만 가공이 필요하다. 거친 강도가 다른 사포로 표면을 다듬고, 스테인을 칠

▲건재상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벽돌을 만날 수 있다


해 나무에 색감을 더한다. 천을 염색하는 것처럼, 나무를 염색하는 것이다. 오크 색의 오일스테인을 한 번씩 바르고 건조시키고, 또 덧바른다. 그렇게 하루 정도는 말린 뒤 코팅제 격인 바니쉬를 칠한다. 제대로 건조 시키고 하려면 하루는 족히 걸리는 과정이다. 나무 선반과 벽돌을 준비했으니, 이제 쌓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조차 녹록치 않았다. 벽돌이란 원래 미장을 동

반하는 재료. 미장 없이 그대로 쌓으려니 수평이 맞지 않다. 애터지게 쌓아놨다가 자칫 책장이 무너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집에 뒹굴던 핸디코트와 백시멘트를 섞어 벽돌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마저도 바닥 수평이 맞지 않아 애를 먹었 다. 왜 사람들이 신축 집을 선호하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옛날 집은 바닥이 울퉁불퉁해 가구 하나 놓으려면 바닥 에 뭔가 많이 괴어야 한다. 다시 벽돌 쌓기로 돌아와서. 전문 미장이가 아니다보니까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결국 벽돌과 벽돌 사이에 남는 장판을 잘라 넣어 놓는 식으로 수평을 맞췄다. 아슬아슬, 어떻게든 쌓아진다. 벽돌책장의 좋은 점은 내가 원하는 만큼 책장 높이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잡지가 들어갈 칸, CD가 들어갈


칸, 일반 소설책들이 들어갈 칸 높이에 맞춰 제각각 만들 수 있다. CD는 벽돌 3장, 소설책은 4장, 잡지는 6장이다. 안전을 위해서 가로 세로를 교차하며 벽돌을 쌓았다. 붉은 가루가 떨어진다. 아마 앞으로 계속 떨어질 것이다. 책을 애 지중지하는 사람이라면 학을 뗄 것 같지만, 책장 속의 책이란 서서 히 헌책이 되어가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한 단, 두 단, 세 단. 스걱스걱, 깡, 깡. 마찰하고, 다시 수 평을 재고, 2시간 넘게 벽도를 쌓았더니 천장에 닿을 정도가 되었 다. 중간중간 넣은 나무 선반에는 붉은 벽돌 가루가 가득했다. 사 용하는 내내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완성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차라리 완제품을 살 걸 그랬다며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만들어 놓고 보니 뿌듯하다. 붉 은 벽돌과 원목의 조화가 꽤나 빈티지해서 예뻤다. 이렇게 3년을 썼다. 그사이 책은 훌쩍 더 늘어서 보조 책장을 하나 더 사야 할 지경이었다. 문제는 다시 찾아 온 이사. 그렇다. 20대 후반은 유목민 마냥 세입자라는 이름으로 마구 떠도는 시기고, 우리는 좀 크게 서울에 서 부산으로 떠돌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결국 벽돌책장을 분리했다. 벽돌들과 나무판 을 이삿짐 트럭에 실어 부산까지 가지고 오는 것은 무 리였다. 책을 꺼내고, 선반과 벽돌을 내리면서, 이 책장 은 결국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것만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진 게 없어서 결국은 이별해야만 했던 벽돌책 장. 그 속에 들어있던 방대한 책은 추억마냥 남았다. 다 시 시작이다. 세상에는 알고 싶은 것들, 느끼고 싶은 것 들이 너무도 많고, 나는 커피 한 잔 마시듯이 책을 사서 모을 것이다. 헌책 냄새가 켜켜이 쌓여갈 때라도 좋다. 그 언젠가 다시 벽돌책장을 마주하고 싶을 뿐이다. 끝.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건축이 좋아. #39. 언젠가 이발관. aoikasa

(정릉의 부흥주택가에 있는 작고 오래된, 이발관. 언젠가 이발관.)

제목만 봐도 왠만한 월간이리의 독자분들은 알 듯 하지만, 그러니까 이 글은 대놓고 팬심으로, 대놓고 그들의 6집을, 그들의 마지막 앨범을 기억하며 쓰는 글입니다. 지면을 통해 대놓고 팬심을 표한다는 건, 왠지 그러면 안 되는 일 같지만, 월간 이리의 나름 오랜 코너, '건축이 좋아'를 계속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실 거니까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 봅니다. '건축이 좋아' 첫 호 테시마미술관부터 지난 여름 호시하나빌리지까지, '건축이 좋아'가 다루는 공간의 BGM 로 종종 소개 되던 언니네 이발관이 2017년 6월 1일 무려 9년만에 6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을 내 놓았고,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내가 사랑하던 장소에 늘 함께 하던 그들의 음악을 기념하기 위해 이번 달 월간 이리 ‘건축이 좋아’ 원고는 그들의 음악과 그 음악의 배경이 될 만한 장소들의 소개로, 작정하고 이루어집니다. 장소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사진과 함께, 노래들도 들어봐 주세요. 어울리는지 생각해보시면서.


1. ‘생일기분’ _ 영화 이터널선샤인 속 그 바다. 몬탁. 묘하게도 내가 언니네이발관 1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바로 ‘생일기분’이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에는 매번 생일 때마다 내가 느끼던 그 감정, 그러니까 함께 있어도 홀로인 듯 한 그 기분과 축하를 받아도 그 공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생일은 아니었지만 어느 겨울날, 화려한 도시 뉴욕이라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다 훌쩍 떠났던 그 바다, 몬탁.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짐 캐리가 어느 날 갑자기 직장으로 향하는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의 LIRR을 타고 갔던 그 바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닷가와 그 주변의 방갈로들. 겨울이라 아무도 찾지 않는 미국 동부의 이 작은 마을에는 영화 속에 나오는 다이너를 포함하여 식당이 2개가 있었고, 이 외엔 여름에만 장사를 하는 서핑샵들 뿐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있고, 수도 없이 좋은 건축들과 언제든 갈 수 있는 미술관들이 있는 뉴욕에서 느끼던 외로움과 공허를 떠나 찾았던 몬탁의 그 바다는 ‘울면서 달리기’ 하기에도 딱이었고, 아무도 몰라서, 아무도 찾지 않아서 묘한 안도감이 있는 곳이었다.

>> 언니네이발관 1집 ‘생일기분’ https://www.youtube.com/watch?v=sdYueED-W1k 2. '어떤 날’ _ 뉴욕의 센트럴 파크 주말 기분과 휴일의 밤을 노래하는 언니네 이발관 2집의 ‘어떤 날’이라는 노래. 이 노래의 후렴구는 “인생은 너무 긴 하루 / 하루를 보내는 우리의 짧은 이야기 / 사랑은 너무 긴 노래 / 노래를 부를 땐 쉬었다 가야 해요” 이런 가사로 이루어져있는데, 묘하게도 이 노래를 들으면 난 공원이 떠오른다. 1년 간의 짧은 유학 시절. 적응도 안 되고 모든 게 힘들기만 했던 그 시간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나를 숨쉬게 해 주던 곳, 학교 앞에 있던 뉴욕의 센트럴 파크는 이 노래와 참 많이 닮아 있다. 하루하루 시간이 쫲기던 그 시절의 나는, 오늘은 몇 시간 공부했을까, 오늘은 몇 페이지를 읽었을까 마음을 졸이며, 어쩌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뉴욕에서의 1년이라는 시간을 누리기보단 그저 보내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 그 곳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바로 센트럴 파크이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간단히 점심을 먹으러, 혹은 도서관에 몇 시간이나 있다 머리가 아파져서 그저 잠시 걸으러 그 곳에 가면 평일이어도 휴일같은 기분이, 학기 중에도 방학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각자의 포즈를 취한 채 책을 읽는 사람들, 강아지와 노는 사람들, 그냥 누워서 자는 사람들… 생각해보면 그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여유롭게 쉬어가며 ‘숨을 쉬고’ 살았던 거 같다. 그 곳에서 보냈던 ‘어떤 날들’. 뉴욕의 센트럴 파크는 도시의 허파이자 (꽤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맞는 말이니) 나같은 외롭고 갈 곳없던 유학생의 쉼터, 쉬었다 가야하는 그 순간의 깃들 곳이었다. 뉴욕에서 센트럴파크란 어쩌면 뉴욕이라는 도시 그 자체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 곳이 만들어진 것은 1858년의 일이었다. 1821년부터 1855년까지 약 34년의 기간 동안 뉴욕시의 인구는 4배가 되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듬에 따라 도시의 공지들은 모두 채워져 갔다. 도시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욕시는 결국 남북으로 59번가에서 110번가에 이르는 778에이커(약 95만평)의

대규모의

부지를

사들여

고원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1857년

프레드릭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와 칼베르트 보 (Calvert Vaux)의 설계로 완공되었다. 공원 내에는 동물원과 MET(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그리고 거대한 호수가 있고 공원 주변부에는 다양한 종류의 박물관, 미술관 등이 위치하여 뉴욕 중심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건축가 렘콜하스가 정신착란의 도시라 불렀던 뉴욕(Delirious Newyork)의 유일한 플랫랜드(flat land)이며, 유일한 숨쉴 곳인 센트럴파크는 그 ‘어떤 날’에도 휴일의 기분을 만들어 주는 듯 하다.

(1875년 뉴욕 센트럴 파크 가이드맵, https://commons.wikimedia.org/)

>> 언니네이발관 2집 ‘어떤 날’ https://www.youtube.com/watch?v=QR2ZoTW3l90 3. ‘헤븐’ _ 호시하나 빌리지, 치앙마이 작년 여름, 그러니까 2016년 8월 드디어 방문한 치앙마이의 호시하나빌리지. 꿈만 같았던 그 곳에서의 시간 동안 제일 많이 들었던 노래는 ‘순간을 믿어요’와 ‘헤븐’. “그대 나의 헤븐, 잊지 말아요. / 다시는 볼 수 없다 해도 이제는 만날 수 없어도 / 알 수 없는 기분 난


잊지 못할 걸” 아마도 이 노래 가사의 그대는 사람이겠지만, 적어도 내게 이 가사 속 ‘그대’는 별이 쏟아진다는 그 곳 호시하나 빌리지였다. 별이 쏟아지던, 이 아닌 별이 쏟아진다는 이라는 표현을 쓴 건, 나는 우기에 그 곳을 가서 별이 쏟아지는 풍경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 노래 가사처럼 볼 수 없어도 만날 수 없어도, 마치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본 듯한 그 알 수 없는 기분. 그리고 잊지 못할,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그 곳의 하늘과 바람, 소리, 오두막집은 그 자체로 내게 ‘헤븐’ 이었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거겠지.

>> 호시하나빌리지에 대해서는 2016.10월 ‘월간이리’ 에 자세한 이야기가. >> 언니네이발관 3집 ‘헤븐’ https://www.youtube.com/watch?v=0x8XSVhnI9w 4. ‘순간을 믿어요’ _ 니시자와 류에의 테시마 미술관 '건축이 좋아’ 첫 번째 장소였던 테시마 미술관. 이 미술관 하나를 보기 위해 오카야마에서 우노항으로, 우노항에서 나오시마를 거쳐 테시마까지 가는 수고를 했지만, 그 수고가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여겨지게 만든 아름다움 그 자체였던 테시마 미술관. 한 때는 쓰레기섬이었던 이 곳은 주민들의 노력과 아트프로젝트로 새롭게 태어난 생태섬이 되었고, 그 곳에 새로 문을 연 니시자와 류에가 설게한 테시마 미술관은 작은 섬을 닮은 얇은 쉘 구조로 된,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고, 공간에 굴러다니는 작은 물방울들의 움직임과 하늘로 향해 뚫린 구멍으로 불던 산들바람 자체가 작품이 되는 곳이었다. 사진도, 스케치도 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그 곳에서의 시간과 공간에 집중하라던 스태프의 말에 따라 맨발로 보드라운 콘크리트 바닥을 밟으며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느끼며 새소리, 나무소리에 귀기울이던 그 순간. 마치 순간이 영원이 될 거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순간을 빸어요’를 수십번 반복하여 들었다.


아무 것도 없는 그 곳이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지는 그 순간을 경험하며, 그 순간의 경험이 내 일생 속 아마 가장 빛나는 한 순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곳의 소리와 그 곳의 바람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 순간을 믿어요.

>> 테시마미술관에 대해서는 2013년 9월 ‘월간이리’에 자세한 이야기가. >> 언니네이발관 4집 ‘순간을 믿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cEO0j1Kbn0E 5. ‘인생은 금물’ _ 올림픽공원 수변무대 그리고 서울역사편찬원 개인적으로는 언니네 이발관 노래 중 가장 사랑하는 노래. 지친 하루를 마치고 터덜터덜 집에 들어올 때 들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던 노래. 그럼에도 이 노래의 메세지는 이석원이 아닌 이능룡이 부르는 뒷 부분, “살아간다는 것은 별이 되어가는 것이라네’ 라던 이발사들의 얘기처럼, 결국 인생을 또 살아내고 사랑하게 되는 이 노래는 아마도 내 평생의 주제곡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건, GMF와 언젠가의 수변 월요병 무대였던 올림픽 공원 수변무대, 그 곳의 해질녘 풍경이다. 그 곳이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가면서 들리던 음악소리. 그리고 그 호수 뒤편으로 보이는 서울역사편찬원. 남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공간이겠지만, 서울의 역사를 공부하는 내겐 그 풍경이 마치… (역사가로서의) 인생은 금물이지만 그럼에게도 불구하고 별이 되어가기 위해 애쓸 수 밖에 없는 숙명처럼 느껴졌달까.

>> 언니네이발관 5집 ‘인생은 금물’ https://www.youtube.com/watch?v=sfs7vWJHUNg


6. ‘홀로 있는 사람들’ _ 플라자호텔 그리고 리차드의학연구소 마지막 앨범을 기다린지도 4년 정도인 듯하다. 그 언젠가 GMF에서 내년에 마지막 앨범을 내고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을 거다, 40이 되니 더 이상의 창의력(?)이 나오지 않는다라는 돌발 발언을 하고 나서 또 한참을 기다린 앨범. 앨범 발매 전, 앨범 자켓을 보고 가슴이 쿵했다. ‘홀로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에 더 이상 어울리는 것을 찾기 어려울 듯한 장소. (이 곳은 서울시청 앞 플라자 호텔이다.) 그 곳에 각각 홀로 서 있는, 그러나 함께 존재하고 있는 이발사들의 모습은 루이스칸의 리차드의학연구소를 떠오르게 했다. 이 연구소를 설계할 때 루이스 칸은 연구자들이란 집단적으로 일하기도 하지만, 혼자서 일하는 시간도 많기에 ‘방’과 ‘방’의 개념을 연구소에 도입하여 연구소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서 공부를 하다 나와서 불켜진 다른 방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길 원하였다고 한다. 리차드의학연구소 뿐 아니라 이 연구소의 성공 이후 이어진 프로젝트인 ‘솔크생물학연구소’에서 역시 이와 같은 그의 배려를 느낄 수 있다. 바다를 향해 난 연구원들의 방은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는 중정을 둘러싸고 서로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어, 연구를 하다 중정을 향해 난 테라스로 나서면 서로의 방이 살짝 시선이 엇갈리며 보이게 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대학원을 다닐 때가 떠오른다. 공대 대학원생들이 다들 그러하듯, 밤낮없이 주말없이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뭐랄까 어떤 존재 자체의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유일하게 위로가 된 건 누군가와의 통화도 아니었고, SNS 속 풍경들도 아닌 불켜진 다른 연구실의 불빛이었다. 우린 모두 홀로 외로운 싸움들을 하고 있지만, 그리고 우린 모두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가 각자 홀로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함께 하고 있다는 그 기분. 그 기분을 언니네 이발관 6집 씨디 자켓을 보며 다시 떠올렸다.

그래요,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모두 홀로 그 시간들을 견뎌 냈군요. 오랜 시간 고마웠어요. “언젠가 끝나고 말겠지. 그래도 난 아직 여기에. 너와 함께. 우리 함께 계속 노래해” -언니네 이발관 6집, ‘홀로 있는 사람들’ 중에서 >> 루이스 칸과 솔크연구소에 대해서는 2013년 10월 ‘월간이리'에서 자세히. >> 언니네이발관 6집 ‘홀로 있는 사람들’ https://www.youtube.com/watch?v=DPwnxlkQ3aU


지진파

사람마다 책을 고르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나는 보통 도서관에서 관심있는 단어를 중 심으로 이것 저것 뽑아 보다가 책을 고르는데, 운이 좋으면 이렇게 훌륭한 책을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이 책을 고른건 너무 큰 행운이었다.

<신들의 연기, 담배>가 정말 훌륭한 이유는 담배의 흥망성쇠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 는 것과 함께 현대의 지궐련(종이 담배) 시대를 다루는데 있어 미국 시장의 역할이 중 요한데, 저자가 미국인인 관계로 본토의 자료들이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흡연자와 비흡연자 무관하게 누구나 읽기에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올해 이 책을 뛰 어넘는 책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제목과 표지 디자인, 그리고 내용까지 잘 어우러지는 책.

음식에 관한 책이라 하면 주제에 따라 다소 산만한 전개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오직 이탈리아 음식만을 고집하면서 중심을 잃지 않았다. 필자가 중요한 음식을 선정 하고 각 음식의 역사적 흐름을 경쾌하게 쫓아가는 구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보는 내내 피자와 커피와 와인과 스파게티가 생각이나고 실제로 많이 챙겨 먹었다.

이것 이외에 더 할 말이 있을까? 고심하지 않고 가벼운 음식 방송을 본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아주 즐겁게 볼 수 있다.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A안과 B안 “인생은 선택의 연속.” 자주 듣는 말이다. 인생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내놓는다. 뭐든 하다 보면 는다고, ‘선택’을 하는 능력에도 전문성이 쌓일 법하다. 그런데 왜 자꾸 후회하고 만족하지 못할까? 내가 한 선택인데. 심리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의사 결정(Judgment and Decision Making)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아니나, 필자는 그 분야의 학자들 중 시카고대학 비즈니스 스쿨에 있는 Christopher Hsee의 연구들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다. 위트 있으면서도 또렷한 통찰력을 담고 있어, 누구에게나 시사하는 바가 있는 연구들을 하기 때문이다. Hsee는 질문한다. 왜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선택을 하고, 종종 실망하고 후회하는지. 잘못된 선택이라는 표현 역시 자주 듣는 말이지만, 사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게 있을까. 선택은 선택일 뿐이고, 그 이후 우리의 만족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인간은 적응(adaptation)의 동물로 진화해 왔고, 따라서 그 어떤 정서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선택을 뒤따르는 만족감에는 차이가 있고, 그 하나 하나의 선택들이 쌓여 한 사람을 이룬다. Hsee의 연구는 사람들이 선택을 할 때 종종 간과하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선택을 하는 순간과 선택을 한 이후의 시간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선택을 할 때 우리는 보통 두 개 이상의 옵션을 놓고 저울질을 한다. 완벽주의자일수록 가능한 모든 옵션을 상세히 비교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는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 주요 옵션이 두 개인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A안과 B안 중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생각할 때, 우리는 A안이 B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갖는 장점과 단점, 또 반대로 B안이 A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갖는 장점과 단점을 비교한다. 이 장점, 단점들은 정도에 따라 사회적으로 주입된 가치와 통념에 얽매여 있기도 하고, 그저 나한테만 중요한 장점과 단점들이기도 하다. 그 각각의 장점과 단점들의 경중을 고려한 후 최종적으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만족감을 가져다줄지 가늠하여 결정을 내렸다. A안 고! 그랬다면 최대한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게 Hsee의 말이다. 왜? A안을 선택했다고 가정해보자. 정작 선택을 하고 나면, 한때 비교대상이었던 B안과 견주었을 때 A안이 갖던 ‘상대적인’ 장점이나 단점 같은 건 더 이상 부각되지 않는다. 그저 내가 고른 A안 그 자체의 절대적인 장점과 절대적인 단점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결국 Hsee는 제안한다. 두 개 이상의 옵션을 놓고 상대적으로 비교하지 말고, 각각 하나 하나의 옵션들을 놓고 그것이 유일하게 남았을 때의 만족감을 가늠해 보라고. 미래에 내가 어떻게 느낄지 예측(affective forecasting)하려는 사람들의 시도 역시 상당히 부정확하다고들 여러 연구가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각각의 옵션을 따로 떼어 놓고 하나씩 가늠해본 이후의 만족도가 더 높다고. 그게 선택 이후의 시간들과 그나마 더 가까우므로. 그러니까 예를 들면, 카메라를 살 때 포털이 제공하는 신박한 “비교하기” 기능에 감탄하며 최근에 출시된 모든 기종을 온갖 기준으로 일일이 다 비교한 후 그 결과 제일 좋아 보이는 카메라를 살 것이 아니라, “왠지” 끌리는 몇 개의 기종만을 놓고 그 하나 하나를 (다른 기종들은 잠시 잊어둔 채) 샀을 때 어떨지를 생각해보라는 거다. 그게 후회를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이제와서 얘기하지만 정작 정서(emotion) 연구자인 필자, 나는 애초에 의사 결정 같은 거 합리적으로 하려는 시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저 찰나의 느낌을 믿지만….

Hsee & Zhang (2004). Distinction bias: Misprediction and mischoice due to joint evaluation Hsee & Hastie (2006). Decision and experience: Why don’t we choose what makes us happy?

글. 민하 : minha@berkeley.edu 재밌는 거 뭐 있나 늘 딴 짓을 하고 싶지만 현업인 심리학을 하는 와중에 재미있게 읽은 논문들을 야매로 소개합니다. 재미는 좋은 거니까, 그리고 이것도 일종의 딴 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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