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영화 리뷰: 두번 본 영화 - 옥자 (2017) / 글. 가람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 꽃, 라디오 같이~ / 글. 고수진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 크레파스와 오일파스텔 / 글. 사탕고양 만든다오 - 03. 엄마와 매실청 / 글. 사진. 진선 백림서신 - 03. 용기(勇氣) / 글. composer B 건축이 좋아 - 40. 저 멀리 남산위에는 / 글. 사진. aoikasa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수면을 걷는 사람들 - 6. 필 下 / 글. 장수양 사진. @photo.j.keith 지진파 - 악마기자 정의사제, 옹호자들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밸런스 / 글. 민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또 제가 인사드립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던 한 달간 도시는 별 일이 없었지만 농촌 에서는 농사를 포기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일상은 너무 편안하죠. 저도 도시에 기생해 있습니다. 하지만 저 멀리에는 갈라지는 땅을 손놓고 볼 수 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다는 것을 한번 쯤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편집장 빼고 다 잘되는 잡지. 이제는 저도 좀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무모함과 신뢰의 아이콘인 월간이리에서는 늘 여러 필 자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안락한 이메일 응대와 자유로운 방향성을 보장합니다.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DAW 및 각종 프로그램 사 용법,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 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설마 이런걸 연재가 될까? 하는 것들 다 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다음달에는 아마 편집이 끝날 즈음이면 휴가도 끝이 났을 테니 미리 인사드립니다. 즐길 때는 즐기고 지랄할 때는 지랄 합시다. 그럼이만~
@exxx2x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영화리뷰 : 두번 본 영화
옥자 (2017) 감독: 봉준호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영화입니다. 저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를 가장 좋아 하고, 설국열차(2013)를 가장 재미없게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감독이 한국인이면 한국을 배경 으로, 한국인의 정서를 그리는 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영화 의 스토리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정서와 감정을 시각화하는 과정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요. 설국열차는 그런 점에서 감독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옥자를 기다리는 시간은 저에게 혼란스러웠습니다. 감독 봉준호의 신 작이 기대되면서도, 티저 영상들이 하나씩 공개될 때마다 제2의 설국열차를 만나게 될까 봐 걱 정이었던 거죠. 영화의 절반이 외국을 배경으로 하고, 주요 인물들 중 외국인 캐릭터가 훨씬 많 은 영화이니까요. 결과적으로 보자면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만큼은 아니지 만 즐겁게 봤습니다. 영화는 미란도 컴퍼니의 수장 루시 미란도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작합니다. 루시는 할아버지-아 버지-쌍둥이 자매 낸시가 만든 부패 기업의 이미지를 벗고자(루시의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 쓰 인 네이팜 폭탄 폭탄을 생산했고, 낸시는 독성 공장 폐기물을 강에 흘려보냈습니다), 인류의 식
량부족을 해결할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론칭합니다. 미란도 컴퍼니는 슈퍼 돼지 스물여섯 마리 를 세계 각국의 농부(농장)에 한 마리씩 보내고 10년 뒤, 가장 건강하게 자란 돼지를 선정하는 대 회를 열 계획을 하죠. 옥자는 그 26마리의 돼지 중 한국인 주희봉(변희봉)에게 보내진 돼지입니 다. 아들 내외를 잃은 주희봉은 혼자서 손녀 미자(안서현)를 키우고 있는데요. 미자와 옥자는 둘 에게 친구가 되어주며 교감을 나눕니다. 하지만 미란도 컴퍼니가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옥 자를 다시 뉴욕으로 데려가 강제로 헤어지게 되죠.
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약 50분은 한국을 배경으로, 그리고 나머지 50분 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합니다. 초반 30분 정도는 옥자와 미자의 일상과 둘의 교감을 보여주 는데, 이 부분은 어린이 영화라고 느낄 정도로 판타지 동화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그 와중 에도 감독 특유의 긴장감과 유머가 적절히 섞여 있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미란도 컴퍼니가 옥 자를 데리고 뉴욕으로 간 이후부터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내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대중 의 사랑을 받는 인기 동물학자 닥터 조니(제이크 질렌할)는 세상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옥자를 학대합니다. 미란도 컴퍼니가 뉴욕 시내에서 용역 깡패를 고용해 동물해방전선 시위대와 시민 들을 무기로 내려치는 모습은 한국의 불편한 현실을 아주 잘 반영했습니다 (미국에서도 공공연 하게 일어나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영화는 자본주의의 무능력함도 꼬집습니다. 경영권 세습으로 회사를 대물림해 온 미란도 기업은 자매간 권력 싸움으로 흔들리기도 하고요. 슈퍼 돼지 종을 개 발하고 만들어낸 회사이지만, 이 종이 놀라운 교감능력이 있다는 것, 지능이 뛰어나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합니다. 회사의 관심은 오로지 값싼 식료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죠. 영화가 가장 초점을 맞추는 메시지는 ‘동물권’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편의대로 동물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것을 옥자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보여줍니다. 루시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계획대
로 옥자를 뉴욕의 실험실로 데려옵니다. 거기엔 닥터 조니가 있죠. 닥터 조니는 실험실에서 옥 자를 다른 슈퍼돼지와 교배시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30분 동안 옥자와 미자가 교감해 온 걸 본, 그리고 옥자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걸 안 관객들이라면 이 교배씬을 ‘강간씬’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장면을 보면서 홍준표 때문에 한창 이슈가 됐던 ‘ 돼지 발정제’가 생각났습니다. 당시에는 ‘돼지 발정제를 간강을 목적으로 사람한테 사용하려한 것’에 분노했지만 영화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축을 발정 유도제를 써서 교배를 시 키는 것 역시 강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행되어 온 추악한 행 위들을 마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혹자는 지나친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를 반복 해서 보는 과정에서 그 생각은 더 커졌습니다. 전 그동안 가리는 것 없는, 아주 열성적인 육식 주의자(?)로 살아온 사람인데, 영화를 본 후에는 마트 정육 코너에 놓인 고깃덩어리만 생각해도 속이 메슥거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요즘 한창 꽂혀서 냉장고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쟁여두던 소 시지도 더이상 손이 가지 않더군요. 이 한 씬만으로도 옥자는 제가 근래에서 본 아주 강력한 메 시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가장 큰 강점 중의 하나는 역시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틸다 스윈튼이 1인 2역을 한 루시/낸시 자매가 가장 눈에 띕니다. 낸시 미란도가 전형적 악덕 기업인이라면, 모든 사건의 발단인 루시는 전형적 악인은 아닙니다. 불법적이고 끔찍한 동물 실험을 통해 슈퍼돼지 를 만들어냈지만, 반면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인류에게 자행한 끔찍한 짓들을 옹호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신에게 옥자를 빼앗긴 미자에게도 동정심을 느끼죠. 어떤 장면들에서 는 천진하면서도, 동시에 애정결핍이 있는 소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전형적 악인이 아닐 뿐,
루시는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려는 자본주의의 추악함을 대변하는 캐릭터로서 충분합니다. 직 원들에게 비상식적으로 무례하고, 성가신 모기 한 마리 죽이듯이 노동자를 해고하며, 공권력(경 찰)을 자신의 필요에 맞게 사용하기도 합니다. 닥터 조니 윌콕스(제이크 질렌할)는 자본주의 형 지식인의 폐해를 보여줍니다. 미디어를 통해 기업을 옹호함으로써 돈을 벌고, 학문적 연구보다 는 쇼맨십을 통한 인기 얻기에 몰두합니다. 동물해방전선 멤버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이(폴 다노)와 K(스티븐 연)를 제외하면 작은 역할들이지만, 레드(릴리 콜린스). 실버(데번 보스틱), 블 론드(대니얼 헨셜) 모두 각각의 개성이 있습니다. 미국 TV 시리즈 워킹데드의 글랜 역을 인상 깊 게 봤지만, 프랑스 영화처럼(2016)을 보고 스티븐 연의 영화 연기에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옥자 를 통해서 영화배우로서도 손색이 없는 배우란 생각했습니다. 감독은 전작들과는 다르게 옥자의 많은 캐릭터들을 의도적으로 과장해 연출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캐릭터 전체가 가벼워진 느낌도 있고, 감독의 강점이 사라진 느낌도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할리우드 배우/캐릭터에는 잘 녹아든 듯 보이지만 윤제문 배우에게는 그다지 득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로 액션씬을 해낸 안서현 배우도 참 기특하게 느껴지지만,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하녀(2010)에서만큼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12세 관람가이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교배씬은 직 접적으로 보이지 않음에도 개인적으로 너무 끔찍함을 느꼈기 때문에 부모님이라면 아이들과 함 께 보시기 전에 먼저 한 번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울의 미란도 컴퍼니 건물 안 에서의 추격씬과 지하상가 추격씬은 괴물(2006)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있어 반갑고 친근한 즐거움도 느낄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실망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우선 너무 걱정 마시고 일단 한 번 보시길.
글. 가람
봤던 영화 또 보는 게 취미인 학생입니다. 두 번 이상 본, 개취 영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akakk_@naver.com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꽃, 라디오같이~」
너는 이상해씨 나는 왜 꼬부기냐. 글. 고수진
이번 호는 고전 소설을 살펴보려 했으나 현대시 2편으로 수정하였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시 험기간이다. 상문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 내신 대비를 해주다 문득 재미있는 작품을 보게 되어 이리 독자들과 함께 읽어보고자 급히 노선을 수정하였다. 오늘 볼 작품은 김춘수의 ‘꽃’과 장정 일의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이다. 두 작품은 형식적인 측면이 동일하다. 김춘 수의 시 구조를 장정일의 시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먼저 시의 내용을 살펴보자.
꽃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김춘수
장정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와서 나의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사랑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라디오가 되고 싶다.
이 2개의 시를 보면 ~하고 싶다 소망의 어조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우 선 ‘꽃’이란 시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명명철학을 모티브로 시를 창작했다고 한다. 명명철학이란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곧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사물의 이름이란 곧 그 사 물의 본질을 뜻한다.
‘난 꽃을 좋아해.’ 이것 보다는 ‘나는 장미를 좋아해.’라고 명명했을 때 그 수많은 꽃 중에 내게 장미란 매우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곧 인식의 시작이고 그리고 곧 내게 다가와 의미 있는 존 재 즉 꽃이 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름을 부르기 전 그것은 의미 없는 몸짓일 뿐이다.
그리고 화자 또한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라고 소망하고 있다. 나에서 너로 우리로 의미를 점차 확장시키고 있다.
두 번째의 시는 구조는 동일하나 내용은 아주 다르다. 시적 화자는 라디오의 전원 단추를 누 르면 전파가 흘러 라디오가 작동되는 것처럼 내 사랑도 이렇게 단추를 누르듯 쉽게 끄고 켤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사랑의 행위라는 추상적 개념을 라디오의 전원단추를 누르는 구체 적 행위로 표현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렇게 쉽게 시작하고 쉽게 끝맺을 수 없다. 마음을 주는 행위가 쉽겠는가? 우 리 모두 찌질한 사랑의 역사를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은 사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현대인들의 사랑을 풍자하는 시이다. 사랑을 참 쉽게 하는 사람들도 보면 주위에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까칠한 한방을 날리고 있다. 표현법은 그 런 사랑을 하고 싶다지만 작가는 허구적으로 설정한 화자를 통해 주제를 한 번 더 뒤틀어 풍 자하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남자 친구와는 작년 1월에 겨울에 만났다. 그 당시 남자 친구는 두바이에서 약 2주의 휴가를 얻어 한국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내 동생은 먼저 결혼을 했기에 아무래도 누나의 미래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동생은 대학교 동창모임에서 우리 누나와 소개팅할 만한 남자가 없냐며 친구들에게 수소문 했고, 동생의 친구가 마침 회사 동기인 형이 한국에 휴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동생 은 그 자리에서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소개팅을 잡아 버렸다.
‘이 형 두바이에서 일한데. 건설회사고 어차피 또 두바이 가니까 부담 없이 만나봐, 누나 계속 일만 하면 연애세포 죽어.’라는 말에 욱해서 누구보다 편한 차림으로 삼성역 한식집으로 갔다. 그 당시 그는 해외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소개팅을 하겠다고 한 내가 너무 궁금했고(얼마나 없어 보였을까.. 흐헝) ‘스파게티 그만 먹죠.’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때는 1월 겨울이었고 우리 는 뜨끈한 미역국에 산뜻한 나물반찬, 그리고 정갈한 생선구이가 있는 점심을 먹고 밤 12시 가 다 되어서 헤어졌던 첫 만남.
그리고 이 만남이 결혼까지 이어질 줄 몰랐다.
남자 친구는 내가 어떤 몰골로 나오건 예쁘다고 해 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이다. 두 바이에서 일하기에 4개월을 떨어져 톡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아도 그는 언제나 살뜰히 챙긴다. 단 한 번도 아침인사 저녁 통화를 거른 적이 없다. 시차가 안 맞지만 언제나 내 시간에 맞추려 노력을 한다. 그리고 2주의 휴가 기간 동안 우리는 낮에 만나 밤 12시에 헤어진다. 4개월간 못 한 데이트를 몰아서 하는 기분. 그래서 우리는 꽤 애틋한 커플이다. 남들은 나에게 1년을 사귀었지만 말이 1년이지 4개월씩 떨어져 있다가 2주 보는데 어떻게 결혼하기로 결심했냐고 한다. 흔히 말하는 종이 울렸냐? 광채가 났냐? 이런 얘기를 참 많이 듣는다.
광채도 종도 없었다.
저기 김춘수의 시 구절을 인용하자면 그저 그는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나는 그에게로 가 꽃이 되었기 때문이다.
같이 시간을 나누고 같이 추억을 더 만들고 싶은 사람.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우울하고 시니컬한 내면을 보여줘도 거리낌이 없이 편안함과 신뢰의 사이.
..............그래도 결혼은 같이 준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휴우, 다음 시간에는 고전소설을 살펴보자. 지각하면 보강이다.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크레파스와 오일파스텔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 가지고 오셨어요.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잠이 들고 말았어요”
어릴 때 그림을 그려 본 사람이라면 꼭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크레파스. 색색들이 들어 있는 통에서 하나씩 꺼내 꽃도 그리고 거북이도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도 그려본다. 그림의 세계로 이끄는 초대장 크레파스. 크레파스는 두꺼워서 어린 손으로도 잡기 쉽고 종이 위에도 잘 올라간다. 두 겹 이상 칠해서 긁어내는 스크래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리고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조금씩 크면서 수채물감이나 포스터컬러를 사용하며 크레파스와는 차츰 멀어진다.
크레파스 = 오일파스텔 어른이 되고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 중 몇 명은 오일파스텔에 관심을 가진다. 파스텔이란 친숙함과 오일이란 이름에서 유화의 느낌이 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찾아보면 많은 종류의 오일파스텔이 있다. 전부 오일파스텔이란 이름을 가졌지만, 가격 차가 엄청나다. 그래서 일단 구입하는 제품은 저렴한 가격의 문교의 오일파스텔이지 싶다. 그 오일파스텔을 써보고 드는 생각은 ‘크레파스네?’이지 싶다. 당연하다. 크레파스가 오일파스텔이니까.
오일파스텔은 그림도구 종류 이름이고 크레파스는 상품명이다. 아동용 오일파스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크레파스라 대표적인 이름으로 알려졌을 따름이다. 어릴 때 XX 크레파스라고 적혀있던 건 그 이름을 쓴 회사도 몰랐겠지만, 무단 상표 도용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표명을 가진 회사도 딱히 신경 쓰진 않고 있을 듯하다. 100년 가까이 써온 이름이라 일반 명사화된 점도 있다.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크레파스, 피카소도 빠져들다 크레파스란 이름의 오일파스텔을 만드는 회사는 학생용 화구와 문구로 유명한 일본의 사쿠라다. 이 회사의 풀 네임은 ‘주식회사 사쿠라크레파스’. 일본의 교육자였던 Rinzo Satake와 그의 사위 Shuku Sasaki는 아이들이 가능한 많은 색상으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라며 1921년에 자신들이 개량한 크레용을 만들고 판매하는 회사를 만들었다. 크레용 같은 파스텔이란 뜻에서 크레파스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본인들이 만든 크레파스는 안료 농도가 낮고 혼색이나 질감 표현이 어려웠다. 점도가 높은 크레파스를 만들기로 하고 1924년에 팜오일, 파라핀, 스테아르산과 안료를 혼합해 만든 새로운 그림도구를 만들었다. 추우면 잘 굳고 더우면 녹아서 여름용과 겨울용을 따로 만들었으나 1927년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했다. 크레파스는 어린이용 화구로 유럽 각국에도 보급됐다. 이 새로운 제품의 상업적인 성공을 보고 다른 그림도구 제조사들도 오일파스텔을 속속 만들어 냈고 피카소도 이 새로운 화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전문가용 오일파스텔이 개발된 건 그 뒤로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1949년에 프랑스의 전문회사인 시넬리에에서 점도와 질감, 안료의 품질을 개선한 예술가를 위한 최초의 오일파스텔을 만들었고 1965년에 까렌다쉬에서 특허받은 폴리에틸렌 왁스를 사용한 네오칼라를 출시했다. 어린이용 그림도구로 시작됐지만 전문 회화 작가도 애용하는 그림도구가 된 오일파스텔. 사용자의 폭만큼 오일파스텔의 질감도 폭넓다.
가격만큼이나 성능도 극과 극 오일파스텔은 아주 다양하다. 다이소에서 살 수 있는 이름 없는 브랜드, 캐릭터가 그려져 있거니 향이 나는 어린이 용 오일파스텔도 있다. 좀 전문적인 느낌을 가진 화방에서 살 수 있는 오일파스텔은 48색 기준 9천원부터 10만원 까지 극과 극의 가격을 형성한다. 이렇게 까지 극과 극의 거리가 먼 화구는 잘 없다. 성능도 극과 극이다. 싼 오일파스텔은 크레파스와 같은 느낌이지 만 가격이 오를수록 비싸고 진해져 최고 가격인 시넬리에 오일파스텔은 마치 유화 물감을 종이에 바르는 느낌이다. 아주 부드러워 종이에 칠하고 손가락으로 색을 섞을 수도 있고 유리창에 그릴 수도 있다. 물론 그만큼 빨리 닳기에 선 하나 그을 때마다 지갑이 슬퍼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초크아트를 하려면 어느 정도 부드럽고 은폐력이 좋 은 오일파스텔이 필요하다. 비쌀수록 좋지만 마구 쓸 수는 없다. 그래서 넓은 면적의 바탕칠은 약간 저렴한 문교 소프트 오일파스텔이나 그것보다 비싼 펜텔 전 문가용 오일파스텔을 쓴다. 세부 묘사나덧칠 용으로 는 더 비싼 브랜드로, 오일파스텔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흰색 하나만은 까렌다쉬나 시넬리에의 오일파 스텔을 쓰면 돈을 아끼면서 묘사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오일파스텔은 아주 많은 브랜드에서 만들어지고 판 매된다. 더웬트, 파버카스텔, 홀베인, 스테들러 등에 서도 만든다. 아이들부터 예술가까지 사용하는 폭넓 은 매체라 그만큼 인기도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 판 매되는 전문가용 오일파스텔의 종류가 그다지 많지 않은 건 아직 어린이용이란 인식 때문이지 않을까 생 각한다.
오일파스텔 활용법 오일파스텔의 장점이자 단점은 굵기다. 굵기 때문에 어린이도 잡기 쉬워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는 반면에 굵어서 작은 그림을 그리기 힘들다. 아빠 얼굴만 그린 그 작은 종이에 연필이나 펜으로 그렸다면 그다지 작지 않았으리라. 문제를 알면 해결방법도 있는 법. A3보다 큰 종이에 그리면 된다. 굵기는 그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장점 이다. 그림도구가 굵을수록 선이 덜 민감해지고 다루기 쉽다. 사용방법은 칠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약간 겹쳐 칠한 후에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서로 섞인다. 이 방법은 싼 오일파스텔론 힘들다. 그러나 약간 가열하면 잘 녹기에 외국에서는 전용 가열판을 팔기도 하고 고기 구울 때 쓰는 핫 플레이트에 알루미늄 호일을 깔아 그 위에 종이를 놓고 그리기도 한다. 드라이기에도 잘 녹지만 드라이기의 바 람을 쐬면서 그리기엔 손이 너무 뜨겁다. 드라이기는 일단 칠하고 열풍을 쐰 다음 따뜻할 동안 손가락으로 문질러 섞을 수 있다. 꼭 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일파스텔은 유성. 유성 도구들은 다 마찬가지지만 기름에 녹는다. 그림용으로 나온 화이트 스피릿이나 테레핀, 페트롤에 녹여서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런 미술 전용 제품이 아니더라도 매니큐어 리무 버나 콩기름이나 알코올에도 녹는다. 수성 색연필이나 물감처럼 되진 않지만 그래도 꽤 특이한 효과를 낸다. 단지 이 방법이 극적인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다. 역시 좋은 게 좋다. 오일파스텔로 쉽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기법이라면 크레파스로 어릴 때도 많이 했던 기법 중에서 스크래치라는 것이 있다. 먼저 도화지에 색색이 예쁜 색으로 빼곡히 칠한다. 이때는 밝은 색 위주로 칠하는 것이 좋다. 다 칠했
다면 검은색을 그 위에 한 겹 깐다. 먼저 칠했던 색이 보이지 않도록. 그리고는 약간 날카로운 도구로 검은색 위를 긁으면 검은색 칠이 벗겨지며 밑에 색색이 칠한 색이 보인다. 오일파스텔은 그림을 오래 그려도 손목에 무리가 적어 많은 화가들이 다시 오일파스텔을 쥐기도 한다. 어릴 때 추 억을 되살려 오일파스텔을 다시 꺼내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보다는 잘 그릴 것이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표면을 부 드럽게 만들고 그라데이션을 만드는 기술을 쓰면 있어 보이는 그림을 그리기도 쉽다.
글. 사탕고양 그림도구 덕질을 소소하게 제 블로그(soulcreator.blog.me)에 올리고 있습니다. 물감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돼 세 세트가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이제 쓰는 물감 색상의 절반 정도는 만들어 쓸 듯 하여 아직 쓰지 않은 새 물감을 처분 중이에요. 그림 그리기보다 글을 더 많이 써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3.엄마와 매실청 엄마랑 시장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좌판마다 푸릇푸릇, 초록색 망에 담긴 매실들은 꼭 쥐면 손에 들어올 것 같은 앙증맞은 크기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식탁 의자에 앉으면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던 아주 오래 전, 매미 소리를 들으며 마셨던 매실차가 생각났다.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다가 이내 아찔하게 단 맛이 뒤통수를 때리는 맛이었다. “할머니, 매실 이거 하나 얼만데요?”
#3. 엄마와 매실청
엄마가 앞서가다 멈춰섰다. 엄마랑 시장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좌판마다 푸릇푸릇, 초록색 망에 담긴 매실들은 꼭 쥐면 손에 들어올 것 같은 “니 매실 담그게?” 앙증맞은 크기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식탁 의자에 앉으면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던 아주 오래 전, 매미 소리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생각났다. 끄덕였다. 코끝을 등이 굽은 할머니는 손가 이내 아찔하게 단 맛이 뒤통수를 때리는 맛이었다. 들으며 마셨던 매실차가 시큰하게 만들다가 락을 3개 펴 보였다. “할머니, 매실 이거 하나 얼만데요?” “매실 힘든데. 고모한테 받은 거 있는데 줄까?” 엄마가 앞서가다 멈춰섰다. “아니. 내가 담궈 보려고.” “니 매실 담그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등이 굽은 할머니는 손가락을 3개 펴 보였다. 3만원을 드렸는데 매실망이 두개 따라온다. “매실 힘든데. 고모한테 받은 거 있는데 줄까?” “큰 기 개복숭, 짝은 기 황매실.” “아니. 내가 담궈 보려고.” 어깨가 뻑적지근하게 매실을 지고 집으로 가는 길, 알록달록한 장바구니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아줌마들이 얼마 3만원을 드렸는데 매실망이 두 개 따라 온다. 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옆에서 뭐라고 하는 엄마가 없었으면 좀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큰 기 개복숭, 짝은 기 황매실.”
어깨가 뻑적지근하게 매실을 지고 집으로 가는 길, 알록달록한 장바구니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아줌마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옆에서 뭐라고 하는 엄마가 없었으면 좀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연신 ‘덥고 무거운데 사서 고생한다’, ‘귀찮고 힘든데 만다꼬 담을라꼬’, ‘그 시간에 니 할 일이나 하지’, ‘어차피 시집 가면 다 할 낀데’라며 궁시렁거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면서 엄마는 ‘다 만들면 엄마도 줘’라고 상큼하게 웃었다. 조금은 레시피를 기대 했었는데...
덥고, 무겁고, 고생스러운 건 맞지만, 그 과정이 마냥 귀찮고 힘들진 않을 것 같 았다. 뭔가 만드는 것은 내 취미생활이고, 언니와 사귄 뒤 벌써 5년 째 같이 살 고 있다. 말대꾸를 따박따박하며 잔소 리 폭격을 막고 싶었지만 힘들어서 뚫린 입에서는 더운 숨만 나왔다.
집에 와서 보니 매실은 각각 5kg가 넘었고, 그날 한 낮의 날씨는 30도였다. 6월 초 밖에 안됐는데 지구가 미쳤다.
정작 매실은 샀는데 병이 없다. 물기를 뺄 채반도 없다.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부랴부랴 바쁜 일을 쳐내기 시작했다. 유리병과 설탕, 대나무 채반 도 왔지만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다 끝 내고 나니 나흘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매실을 뒤적여 보니 많이도 물렀다. 지 나친 충동구매였나, 그제야 후회한다. 후회해봤자 지나간 시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매실부터 씻기로 한다. 욕실에 앉아
샤워기에 물을 틀어 손으로 뗄 수 있는 꼭지는 하나하나 떼 가면서 깨끗하게 씻는다. 그러고는 채반에 올려 물기를 뺀다.
··· 물기가 다 마르는 데는 반나절 정도 걸렸다. 매실은 다시 솜털 가득한 애기 볼따구처럼 보송보송해졌다. 이제 거실에 자리를 잡는다. TV를 튼다. 알쓸신잡 재방송이 나온다. 이쑤시개로 매실 꼭지를 파내고, 포크로 매실 살을 콕콕 찌른다. 꼭지는 이물질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떼는 거고, 포크로 찌르는 건 매실이 더 잘 베어 나오게 하기 위해서다. 상한 것을 골라내도 양은 많았다. 중간에 물러 터진 것들은 칼로 잘라내서 버려가며 하다보니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이순신 장군의 숨결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지, 계산해보았다는 정재승 박사의 말에 깔깔 웃다가, 불현 듯 진짜 아줌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TV와 산더미처럼 쌓인 매실이라니. 하지만 아줌마스러운게 나쁘지만은 않다. 이미 나이도 30대고. 매실을 다듬는 것 자체만으로도 조금 더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설탕과 매실을 1:1로 담는다. 매실 알갱이가 크기 때문에 유리병 가득히 매실을 쏟아 넣고 설탕을 와르르 붓는다. 매실은 딸기나 복숭아처럼 수분이 많지 않아서, 다 만들어 놓고 나면 ‘이거 언제쯤 청이 되나’ 싶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최소 100일이다. 100일이면 여름은 다 끝났다. 내년이나 되어야 매실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
그러고보니 엄마는 매실청을 담그는 걸 본 적이 없다. 여름이면 항상 어디선가 매실청이 왔다. 할머니표, 고모표, 이모표, 옆집 아줌마표. 철마다 엄마를 어여삐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홈메이드 식품들이 가득했다. 어린 날 마셨던 기억 속의 그 맛도 다른 집의 맛이었을 것이다. 한 모금 마시면서 나는 ‘엄마가 만들었다면 더 맛있었을 거야’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던 것 같다. 속눈썹이 길고 예뻤다.
나는 엄마가 공주님처럼 느껴졌다. 한 번은 그렇게 말했더니 ‘신발공장 다닌 공주도 있 냐며’ 되려 핀잔을 들었다. 종잡을 수 없고, 잘 삐지고, 예민하고, 섬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 없다. 씁쓸하면서도 달게 미소지어서일까. 엄마의 미소는 매실을 조금 닮았다.
매실청을 담가두고 공주같은 엄마와 4박5일 여행을 떠났다. 아빠와 남동생도 함께하는 가족 여행이었다. 7번 국도와 강원도 산길을 달리면서 깨달은 한 가지. 엄마는 좀처럼 내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아빠는 ‘신랑’, 동생은 ‘우리 아들’인데 나만 ‘야’, ‘너’다. 공주님에게는 또 다른 공주보다는 왕자님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엄마가 뭘 먹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알아내기 위해 눈치를 살폈다. 아빠도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엄마는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나 사랑받는 줄 몰랐다. 점점 더 몰랐다.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갔지만, 반대로 조금씩 아이가 되어갔다. 살아오면서 생긴 상처들은 제대로 아물지 못한 채 가시돋힌 말로 뱉어졌다. 반박을 해봤자 새로운 상처를 만들 뿐이다. 뚜껑을 꽉 닫은 유리병처럼 나는 입을 닫았다. 창문 밖으로 동해바다가 넘실거렸지만 체한 것처럼 목이 메었다.
여행에서 돌아왔더니 매실청이 폭발해 있었다. 매실 알맹이 하나하나가 가스를 내뿜어, 뚜껑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바닥은 매실청으로 끈적거렸다. 공기와 맞닿아 있던 열매에는 곰팡이가 핀 것도 있었다. 짐을 대충 집어 던져 놓고 수습을 시작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유리병 뚜껑을 연다. 좁은 병 입구로 주걱을 넣어 뒤적거린다. 덜 베어 나온 매실향이 온 집안에 가득하다. 아득히 멀고 먼 여름이 병 안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백伯 림林 서書 신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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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용기(勇氣)
잘 지냈어? 한국은 무척 덥다고 들었어. 물론 이곳 독일의 날씨도 많이 더워졌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보냈던 여름에 비하면 ‘덥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하네. 나도 그동안은 개인적으로 바쁜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몇 가지의 일들을 처리하고, 다른 도시에 가서 사람들과 부대낀 다음 베를린으로 돌아와 나머지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겪고 나니 홀가분함과 허전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단순히 그 과정을 넘겼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된다’와 ‘안 된다’로 판정받는 일이다 보니까 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나 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은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노력의 크기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걸 배워왔지. 그리고 나 역시 여전히 그 말을 믿는 편이고. 물론 ‘노력’이 ‘노오력’으로 변질되면서 무책임과 착취를 상징하는 단어처럼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적어도 사전적 의미 너머의 뜻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거든. 하지만 ‘노력’이라는 것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앞서 말했듯 노력의 크기만큼 원하는 것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보니 오히려 요즘 들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용기’라는 생각이 들어. 앞날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없는 시간 속에서, 눈에쉬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정확한 수치로 계산되지 않는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용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
만약 누군가 나에게 ‘외국에서 일상을 살면서 가장
이후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지? 설령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용기를 잃게 하는
그것이 정말 실수였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에게 ‘
일들이 끊임없이 생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라고 속삭일 용기를 낼
이방인으로써 차마 다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누르며
수 없었기 때문에 애써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사는 것들, 공부를 하든 취직을 하든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나의 능력에 대한 물음표들,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 ‘용기’를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걸까?
그 속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흔들림 없이
조카뻘 되는 초등학생들이 장래희망으로 공무원을
걸어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닌 것
꼽으면서 “솔까 그게 존나 안정적이잖아요”라고
같아. 물론 국경을 초월해 나를 인정해주고 따뜻한
말해도 아무런 말을 해줄 수 없는 건 왜 일까?
시선으로 봐주는 사람들도 많지. 하지만 어느
그 아이들이 되바라져서? 아니면 우리가 실수를
순간부터 스스로의 마음속에 ‘내가 과연 할 수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데 눈감고 묵인해서?
있을까,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쉽게 답을 하기가 참 힘들다.
시작하면 아마 주변의 격려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될 꺼야.
감점과 가점이 아닌, ‘그 의견도 좋지만이건 어때?’ 로 대화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 학생이 아니라
아마도 예전에 히딩크 감독이 그런 말을 했던 걸로
사회인이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기대에
기억하는데 말이야,
부합하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해서 압박하고
‘경기 중에 실수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주지 말고 다시 한번 더 생각하고 도전할
그 실수 때문에 위축되어있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따지고
라고 했었지. 내가 한국을 떠나 다른 환경에서
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그 거창한 발견과 발명들도,
살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이 어떤 것인지 알아?
숱한 실수와 시행착오 끝에 발견한 것이 아니겠어?
실수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하다는 거야.
우리는 오랫동안 위대한 실수들과 다시 도전했던 용기를 칭송해왔어.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실수’는 음주운전 따위의 실수를
위인전, 교과서, 그리고 선생님과 부모님이 들려줬던
말하려는 것이 아니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근엄한 예화들로.
위해 노력하다가 발생한 시행착오를 말하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왜, 정작 가까이에 있는 실수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거쳐온 역사 때문일까?
대해서는
한국인들은 ‘실수’와‘절박함’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
그렇게도 박했던 것일까?
부여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인간이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만 생각해봐. 우리가 살면서 했던단 한 번의 실수
결국은 용기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때문에 인생이 크게 뒤틀렸다고 할 만한 것이 정말
말이 길어졌다.
얼마나 될까? 우리가 그때 했던 그 행동이 과연 ‘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실수’
또 편지할게.
건축이 좋아. #40. 저 멀리 남산 위에는… aoikasa
(남산 1호 터널을 지나다 보이는 서울시청 남산별관,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유독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장소가 있다. 이런 걸 ‘음기’라 하는 걸까. 30도가 넘는 때 이름 폭염의 6월 햇살 아래에서도 유독 서늘한 기운이 느껴 지던 곳. 분명 시민에게 열린 곳이건만, 괜히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걸을 수 밖에 없던 곳. 옛 중앙정 보부(안기부) 건물들이 위치한 남산 1호터널 서측 언덕 예장동 이야기이다.
조선총독부가 있던 예장동 예장동이 우리 역사의 중심에 들어온 것은 1885년 일본공사관이 이 위치에 자리잡고부터이다. 1882년 처음으로 서울에 들어와서 거주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당시 서울의 중앙이었던 북촌으로의 진출을 노 렸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해 1883년 세운 일본공사관이 불타버리며 다시 남촌, 즉 남산 언덕 일대로 돌아 왔다. 1885년 왜성대라 불리던 남대문 동측 남산 언덕위에 공사관을 설치한 일본은 이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서울의 북쪽으로 점점 그 근거지를 넓혀 갔으며, 결국 조선을 식민지화하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
치되며, 현재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위치에 새롭게 통감부 청사가 건축되었으며 공사관은 통감관저가 되었다. 1910년 이후 통감부는 총독부로, 통감관저는 총독관저로 이름을 바꾸고 1926년 광화문으로 이 전하기 전까지 남산 위에는 조선총독부가 위용있게(?) 혹은 서슬퍼렇게 서 있었다. 조선총독부 옆에는 총독관저를 비롯하여 총독부 관리들을 위한 관사, 그리고 경성신사(현재의 숭의여대 자리)와 노기신사(현재의 리라초등학교 자리) 등이 위치하였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그 터를 표시하는 표석들과 당시 사용되었던 석재와 석물들의 일부만 남아 있다.
‘남 산에서 온 사람들’과 ‘사라지는 사람들’ 1926년 이후 조선총독부는 과학관(박물관)으로 활용되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이후 1961년 6월 10 일에 발의된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 정보/수사기관인 중앙정보부가 남 산 예장동 일대를 차지하였다. 중앙정보부(1980년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지금의 국정원)가 차지했던 땅 은 2만 3천여평에 이르렀으며, 건물 동수도 41개동나 되었으니, 중앙정보부 건물들이 남산 1호 터널 서 측 일대의 경관을 지배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중앙정보부, 줄여서 중정은 1970-70년대 남산과 거의 동일어로 사용되었다. 남산에서 사람들이 왔다라 는 것은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잡으러) 왔다는 것이었고, 남산으로 간다는 것은 중앙정보부로 (끌려) 간 다는 것이었으니 군사정권 시절 남산은 곧 중앙정보부가 위치한 곳, 일종의 공포의 장소였던 것이다. 사 실 그 시절을 경험해보지 않은 나에게는, 남산하면 남산타워와 남산자동차극장, 그리고 국립극장 등이 먼저 떠오르지만 불과 나보다 10여년을 먼저 살아간 사람들에게 남산은 곧 고문과 억울한 죽음의 장소 였다니. 내가 너무 무관심했던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너무 잘 숨겼던 것인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1995년 5월 9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안기부 청사 이전 및 남산 청사 철거에 대한 기사에 나온 사진)
현재도 남산1호터널의 북측편에서 바라보면 서 울시청 남산별관과 서울유스호스텔, 소방재난본 부 건물이 턱 하고 남산을 가로막고 있다. 1995 년 안기부 청사가 이전하면서 이 일대를 소유하 게 된 서울시는 남산을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려 주겠다는 의도로 이 일대를 공원화하고자하였다. 옛 중앙정보부 건물들의 경우 안기부의 철거 요 구에 따라 제 1별관은 폭파되었으나, 비교적 상
(19960805 한겨레신문 기사 중 안기부 제1별관 폭파장면)
태가 양호했던 24개동은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등으로 전용하여 사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옛 중앙정보부 건물들은 중앙정보부 남산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 5별관(현 서울시청 남산별관), 지하3층이 건물의 전부인 6별관(현 서울종합방재센터), 유치장(현 소방재난본부), 안기부 요 원 실내체육관 (현 남산창작센터), 중앙정보부장 관저(현 문학의 집), 경호원 부속건물(현 산림문학관) 등이다. 소방재난본부 앞에 있었던 감찰실(TBS방송국이 사용하던 곳)과 고문장소로 유명한 제 6국(서 울시청 도시안전본부로 사용)은 작년에 철거되었다.
중앙정보부 본관은 그 앞의 6별관, 현재의 서울종합방재센터와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즉 서슬퍼런 중앙 정보부로 끌려가면, 지하 3층 규모의 지하벙커의 지하2층 취조실로 가서 조사를(고문을) 받게 되는 것이 었던 것이다. 이 곳이 현재는 각각 서울유스호스텔, 그리고 서울종합방재센터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중앙정보부 본관은 안기부 청사 이전 이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사용 하다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이전한 이후에는 소방방재본부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나, 2001년 중구 주 민들이 이 곳을 도서관 혹은 유스호스텔로 사용할 것을 요구한 데에 이어 2003년 당시 이명박시장이 민 간자본을 유치하여 이 곳을 유스호스텔로 리노베이션함으로서 현재의 서울유스호스텔이 2006년 개관하 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뒷골이 서늘해지는 곳 아닌가. 망국의 한(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장소 가 바로 통감관저였다)이 서린 곳인데다가, 수없이 많 은 영혼들이 고문을 받았던 곳이 그 시절의 기억들은 모두 감춰두고 청소년 유스호스텔로 사용된다니 말이 다. 1973년 이 건물에서는 소위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의 참고인으로 불려왔던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사건이 벌어졌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조사를 받던 최교 수가 스스로 간첩임을 고백하고 7층 화장실에서 뛰어 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하였으나 사실은 고문치사였다.
(1988년 10월 20일 동아일보기사)
(옛 중앙정보부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과 지하벙커(현 서울종합방재센터))
(옛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제5별관, 현재의 서울시청 남산청사))에 이르는 터널)
(옛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제5별관, 현재의 서울시청 남산청사)과 안기부 체육관(남산창작센터))
서울유스호스텔과 서울종합방재센터 사이의 주차장을 지나 남산으로 오르는 길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체육관 건물이 하나 보인다. 옛 안기부 직원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는 이 곳은 현재는 남산창작센 터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조금 더 오르면 보이는 터널. 이 터널을 통과하면 중앙정보부 제 5별관이었 던 현재의 서울시청 남산별관 건물이 나온다. 이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매우 묘한데, 뭐랄까 이 터널을 지나 저 곳에 가면 왠지 다시 못 나올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곳은 대공
수사국으로 악명높은 고문이 자행된 곳이었는데, 1989년 방북했던 임수경 전 국회의원도 이 곳에서 고 문을 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중앙정보부 6국은 주로 학원감찰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다. 중앙정보부 6국은 1974년 2차 인혁당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이 곳에서는 어두운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수없이 많은 청춘들이 고문당하고 쓰러져갔다. 이 건물과 TBS방송이 쓰던 감찰실은 작년에 모두 철거되었는데, 다행 히도 6국이 있던 장소에는 메모리얼홀인 ‘기억6’가 들어선다고 한다. 이처럼 중앙정보부의 각 건물들에 서는 많은 이들이 인권을 철저히 유린당하며 짓밟혀갔고, 그들 중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이들 의 시체는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남산 언덕 아래 은밀한 출입구를 통해 외부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이 곳은 남산의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공간인 것이다.
(유치장이었던 소방재난본부 건물과 철거되고 터만 남은 제 5국과 감찰실 자리)
사라지는 건물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시간들 41개동이었던 중앙정보부 건물들은 이제 10동 내로 줄어들었다. 이명박 서울시장 당시의 민자유치에 의 한 개발, 오세훈 시장 시절의 남산 르네상스 프로젝트는 오랜 시간 남산을 지배했던 공포의 ‘남산’ 이미 지를 지워냈고,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하지만 이 곳의 어두운 역사 그대로로 기억하 고자 하는 노력들이 이어졌고, 이 노력들에 의해 이 일대는 최근 인권교육의 장소로 재탄생중이다. 2017 년 6월에 와서 비로소 이 것이 실현되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 같다.
솔직히 이 곳의 건물들은 남산을 들이막고 있어 남산의 경관을 해칠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전혀 아름답 지 않다. 설계자가 누군지도 알 수 없으며, 건축물대장에 기록된 이들의 승인년도는 모두 서울시 소유로 이전된 이후인 1995년이어서 정확한 건립년도도 알 수 없다. (딱 하나, 제 5별관 (현 서울시청 남산별관) 만 1977이라 쓰인 정초석이 있어 건물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다.) 고문과 수사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철저하게 기능적이며 그 딱딱하고도 아무 장식없는 강직한 파사드는 (이 곳의 이 아픈 역사를 모르더라
도) 지나가는 모든 이를 긴장시킨다. 건축이 좋아!라고 외치기 참 어려운 건물이지만, 이조차도 우리의 역사이기에 결국은 지워버리지 말고 기억해야 할 대상들일 것이다.
[관련기사들] 남산 할퀸 ‘독재의 흔적’ 인권배움터로 (한겨레 20120426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0207.html [단독] 부끄러운 역사 흔적 돌아보는 여행 … 서울 남산 ‘다크 투어 코스’ 생긴다 (중앙일보 20170620 기사)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약탈과 인권유린 공간… 기억하기 싫은 역사를 기억하다 (서울신문 20170628 기사)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629029001&wlog_tag3=naver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629029001&wlog_tag3=naver"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629029001&wlog_tag3=naver
살들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수면을 걷는 사람들
글. 장수양(@condensed_bold) 사진. @photo.j.keith
6 필下 - 한 번 더.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습실을 울렸다. 공기는 습기로 무거웠다. 바깥에는 비가 오지 않는데 실내에서 비 냄새가 났다. 이와는 강사의 눈을 피하며 젖지 않은 이마를 팔로 쓸어냈다. 달콤함은 사라지고 연습실 벽마다 붙은 타인 의 체온이 물기로 다가오는 듯했다. 아마도 저번주에 벗어둔 성인들의 연습복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우리가 고 스란히 입고 있는 이 옷들에서. 눅눅한 냄새. 이와는 눈을 또렷이 뜨고 연습실의 한 면을 차지한 거울 속 낯선 사람을 보았다. 강사는 이와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오늘 수업에는 여섯 명의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동작을 취해도 몸이 이루는 윤곽은 서로 다르다. 차가운 콘솔을 쥐고 선 이와는 양 발끝이 같은 선상에 놓이도록 두었다. 수업마다 반복되는 기본적인 자세였다. 발레를 하면서 가장 많이 가다듬는 것은 몸의 선이다. 발레의 수많은 동작들은 몸의 선을 간결하게 하는 데 집 중하고 있다. 발끝을 세워 걷는 동작은 몸을 지우고 선을 내미는 일이기도 하다. 휘청이지 않고, 불필요한 도움 동 작을 가능한 덜 노출시키면서 선을 유려하게 흐르도록 한다. 몸의 방향과 시간성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다. 동 작은 일시적으로 유일해진다. 흔들림 없이 버텨 내려는 첨예한 격동을 들켜서는 안 된다. 어렸을 때 이와는 발레 선생님의 단순하고 엄중한 요구 속에서 이 선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 순간이라면 버틸 수 있지만 흐르듯 자 세를 바꾸지 않으면 무너져버리고 만다. 사람의 몸이었다. 언제까지나 선으로 머물 수 없었다. ―조금만 쉴게요. 이와는 콘솔을 놓고 거울과 벽이 맞닿은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 클래스에는 주부들이 속해 있었고 자주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어릴 적에는 발레 클래스를 하며 쉬는 일이 많지 않았다. 쉼 없이 몸을 단련하는 몇 시간 의 교습이었다. 이와는 자신이 자꾸만 이전을 떠올리는 것이 우스웠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망설임 끝에 환불 받지 않은 이 수업은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왜 계속 듣고 있는 걸까? 이와는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가져다댔다. 굳어진 몸도 함께 배우는 사람들의 습기도 무엇 하나 전과 같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리던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차가운 콘솔 앞을 오히려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투박한 발레슈즈를 매만졌다. 자신의 발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은 채로. 알맞은 순서를 찾은 비가 내렸다. 예고했으므로 거리낌 없다는 듯이 빗방울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무겁지는 않은 비였지만 이와가 하숙집에 도착했을 때는 옷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필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샤워 도구 를 챙겨 바구니에 담아놓고 이와는 복도를 살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옆 방에 사는 사람이 었다. 이와는 매트리스에 앉아 물소리가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잠깐일 줄 알았는데 꽤 오랜 시간이었다. ―비. 필이 옆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이와는 종이처럼 작은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빗방울은 아까보다 굵어져 있었다. 복도에 나가 보았다. 어디서든 물소리가 났다. 이와는 문을 닫고 도로 앉았다. 눈을 감았다. 설마하니 샤워 소리와 빗소리를 헷갈리진 않았으리 라. 일찍 외출해 일찍 돌아왔는데도 어딘지 지쳤다. 눈을 깜빡이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 위해 이어폰을 찾기도 했 다. 바닥을 굴러다니곤 하던 이어폰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와는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와는 샤워를 하고 있는 사람이 어제처럼 가만히 선 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을 맞고 있다 는 걸 알았다.
적어도 오늘은 필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예고나 전조 없이 이와는 깨달았 다. 연습실 안에서 느꼈던 눅눅한 기운처럼 이 공간의 기억이 말해주는 게 있었다. 이와 는 일어나 붙박이장을 열었다. 밖에 꺼내둔 옷들은 모두 이와의 것이었다. 붙박이장에 는 필의 옷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평소 자주 입던 몇 벌의 외투나 상의가 없 었다. 방 안 구석에 있던 커다란 가방 두어 개도 없었다. 매트리스의 위의 이불은 깨끗 이 정돈되어 있었다. 이와는 다시 자신이 있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젖었던 몸이 마르도록 옆 방 사람은 샤워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샤워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가만히 선 몸에 부딪치고 벽을 타고 흐 르듯이 바닥으로 줄줄 내려간다. 아니, 끝에 이르러서는 물이 바닥을 두들긴다. 그 집 요한 물소리에 몸의 한 켠이 서늘해진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수챗구멍의 짤 막한 비명 소리. 이와는 뒤늦게 수건을 하나 꺼내서 머리칼에 묻은 빗방울을 털었다. 이미 말라 있는 두피가 당겨왔다. 하나도 젖지 않은 수건을 쥐고 오늘 배운 동작들을 떠올려 보았다. 강사는 수업의 끄트머리에 앞으로 배우게 될 동작과 그렇지 않은 동 작들을 시범으로 보여주었다. 아주 많고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선들이었다. 강사는 연 습실의 가장자리에서 짧게 준비동작을 했다. 도움닫기라고 부르면 어울릴 순서였다. 오래 발레를 한 사람답게 자세가 높았다. 호리호리한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긴 다리 가 허공에서 완벽하게 일자로 펴졌다. 무언가를 뛰어 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랑 주떼grand jete. 허공으로 도약하여 다리를 일자로 펴는 동작이었다. 이 동작을 하기 위해서는 도약을 위한 충분히 넓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발끝이 벽 에 부딪히고 몸을 다치게 된다. 이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비어 있는 액정은 언제나처럼 빛을 내면서 도 반짝거리지는 않았다. 바깥 계단의 비스듬한 난간에 기대 위를 올려다 보았다. 비가 그쳤다. 한낮이었다. 주 인 없는 거미줄에 촘촘하게 이슬이 맺혀 있었다. 매일 오르내리는 계단이 낯설어 보였 다. 이와는 난간에 닿은 옷이 약간 젖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대로 서있었다. 멀리서 앰 뷸런스의 다급한 소음이 들려왔다. 필은 어디에 있을까? 차가워지기 시작한 휴대폰은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는 누군가 걸어 온 전화를 받듯 휴대폰을 귀 가까이에 대 보았다. 귀가 차가워졌다. 발레는 자신보다 필에게 더 어울린다고 이와 는 언제나 생각해왔다. 다시 발레 학원을 끊은 날 그 말을 들은 필은 아주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투명한 미소는 한 순간 머물다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지. 이와는 조용한 휴대폰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진파
어쩌다보니 주진우 기자가 참여한 책 3권을 전부 다 읽게 되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이나 꺼내는 말들이 나는 꽤 마음에 드나 보다.
표지만 보면 이 책의 킬링 포인트는 이미 다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중세시대 악마상이 생각나는 주진우 기자의 옆모습과 대비되는 사제의 대결구도! 함세웅 신부님의 사진 이 조금 더 위트있게 성스러운 연출을 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이 책은 현대사를 이야기 한다고 하고 실제로 현대사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나는 개 인적으로 훌륭한 종교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역사 안에서 사제가 어떻게 갈등하고 부 딪히면서 종교인의 삶을 관철하는 것에 대해서 쉬우면서도 힘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함세웅 신부님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종교인이다.
사제라는 직업도 직업이지만 한 명의 신자로 시대를 어떻게 거쳐왔는지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야기 하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그런 이유로 혹시 종교에 대한 고민이 있 는 분들이라면 한번 쯤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늘 이명박 시대를 막연하게 떠올리고 느낌적인 느낌으로 비난하지만
<옹호자들>은 권력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뭘 흐트러트리고 어떻게 세상을 흐려놨는지 를 명확하게 이야기 해준다. 이미 몇년이 지난 이야기여서 관계자들의 흥망성쇠를 검 색해보기 좋은 것 또한 느즈막히 책을 만나는 독자들의 즐거운 경험이다.
미네르바 사건, 정연주 KBS 사장 해임 사건, [PD수첩] 사건, 국방부 불온서적 사건,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전교조 명단 공개 사건, 2009년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 용산 참사의 절차적 쟁점, 용산참사의 실질적 쟁점에 대한 법적 다툼의 흐름과 중요 지점 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 사건의 담당 변호사들이 쉽게 적어놓았다. 시대를 곱씹어볼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지 보기 좋다.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밸런스 관계는 밸런스의 연속이다. 두 사람 사이의 적정 밸런스도 필요 하지만,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도 나름의적정 밸런스가 필요하다. 개인의 자아(self) 혹은 정체성(identity), 그리고 그 개인이 타인들과 맺는 친밀한 관계 (closerelationships) 사이의 다이내믹을 주로 연 구하는 사회 심리학자 Erica Slotter는 말한다. 사람은 종종 상충되곤 하는두 가지 욕구를 갖고 있다고. 독립된, 고유한, 그리고 자유로운 ‘나’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소중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상호 의지하며 ‘우리’ 로존 재하 고자 하는 욕구. “행복은 ㅇㅇ이다”여러 얘기가 있지만 지금까지 쌓여 온 막대 한 양의 연구들은 말한다. 성인 이후 행복의 한가운데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맺는 든든한 관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 날 수 있는 자유도 필요하고 돌아가 마음 편히 기대 쉴 수 있는 둥지도 필요하다. 혹은 같이 날 수 있는 친구.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와‘우리’ 사이의 경계는 점차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두 욕구 간의 긴장, 갈등은 이때부터 진짜 시작이다. 우리가 커질수록 그 걷잡을 수없이 중요해져
버린 우리를 잃게 되어 혼자 남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반대로 그 비대해진 우리 속에서 흐릿해지고 있는 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번갈아 피어오르곤 한다. Slotter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나름의 적정 밸런스를 유지하려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실제 연인과 너무 비슷해졌다고 느끼도록 유도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다음주에 연인과 평소보다 더 적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응답했다. 두 사람이 과하게 밀착되는 것보다는 각자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며. 반대로 자신이 실제 연인과 너무 이질적이라고 느끼도록 유도되었을 때 사람들은 다음 주에 연인과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응답했고, 각자의 독립성 못지않게 두 사람 사이의 유대를 강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Slotter는 설명한다. 결국 이런 두 가지 반응 모두 ‘나’와 ‘우리’ 사이에서 한쪽으로만 너무 치우치려 하는 균형을 되찾고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 속에 함몰되어나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되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 말이야 쉽지만. 결국 두 가지 반응 모두 ‘나’와 ‘우리’ 사이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지려 하는 균형을 되찾고 유지하려는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면 그 속에 함몰되어나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되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 말이야 쉽지만.
Slotter, Duffy, & Gardner (2014). Balancing theneed to be “me” with the need to be “we”: Applying the optimal distinctivenesstheory to the understanding of multiple moves within romantic relationships
글. 민하 : minha@berkeley.edu 재밌는 거 뭐 있나 늘 딴 짓을 하고 싶지만 현업인 심리학을 하는 와중에 재미있게 읽은 논문들을 야매로 소개합니다. 재미는 좋은 거니까, 그리고 이것도 일종의 딴 짓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