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영화 리뷰: 두번 본 영화 - The Piano (1993) / 글. 가람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 유화 / 글. 사탕고양 백림서신 - 04. 정진(精進) / 글. composer B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 01. 워라밸에 대한 단상 / 글. 권근혜 만든다오 - 04. 언니의 바다 / 글. 사진. 진선 뼈와 살들 / 글. 그림. 준가 건축이 좋아 - 41. 만주철도, 넌 대체 뭐니?? / 글. 사진. aoikasa 수면을 걷는 사람들 - 7. 유 上 / 글. 장수양 사진. @photo.j.keith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손끝으로 전할 수 있을까 / 글. 민하
더우시죠. 저도 덥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달에는 새로운 필자가 들어오셨습니다!!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이라는 코너의 권근혜 님이십니다. 마케팅 리서처로 근무해 오면서, 그리고 작가의 꿈을 동시에 다져가면서 느낀 점들을 연재해 주실 것입니다. 재미가 없을 수 없겠지요. 이달로 준가님의 <뼈와 살들>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동안 흥미로운 그림을 연재해 주 셨는데, 이달로 그림의 연재를 마치고 다음 달부터는 동화책과 관련된 코너로 돌아오 시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담당하던 <지진파>는 이달에 제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아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택시 운전사의 흥행에 발맞추어 <오월의 사회과학>이라는 책을 슬그머 니 이 자리를 빌려 추천해 봅니다. 저는 아직 읽지 않았는데, 트위터에서 이 책을 소개 하시는 분이 쓰신 문장이 너무도 진솔해 분명 좋은 책이라는 믿음이 있어 확신을 갖고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식물의 분류나 생태, 인간 관련 의학, 퀴어 관련, 무속, 종교, DAW 및 각종 프로그램 사 용법, 소설 이나 시와 같은 문학 관련, 사진, 일러스트 혹은 적어놓은 것 이외에도 무언 가를 꾸준히 기고하실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주세요. 설마 이런 게 연재가 될까? 하는 것들 다 되게 만들어 드립니다. 이제 휴가도 끝나고 근무만 남아 아득하시겠지만. 또 어영부영 지내다 보면 다음달이 온답니다. 화이팅!
월간이리 exxx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영화리뷰 : 두번 본 영화
The Piano (1993) 감독: 제인 캠피온 (Jane Campion)
영화의 주인공 에이다(홀리 헌터)는 6세 이후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예닐곱 살 배기 딸이 있는 엄마이죠. 하지만 남편이 없는 에이다는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서 뉴질랜드에 정착 중 인 한 귀족 남성에게 재가합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죠.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에이다는 피아노로 소리를 냅니다. 솜씨가 워낙 남다른 덕에, 에이다의 버 지는 딸이 말을 못하게 된 게 바로 이 불길한 재능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스코틀랜드에서 뉴질랜 드로 먼 길을 떠나는 에이다는 그 무거운 피아노도 함께 가지고 갑니다. 하지만 남편 스튜어트 (샘 닐)는 피아노를 해변가에 두고 다른 짐들만 챙겨 떠납니다. 자신에게는 사치품일 뿐인 피아 노를 산 속의 집까지 운반하기에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죠. 베인즈(하비 카이텔)는 뉴질랜드에 정착해 원주민들을 고용해 부리며 사는 남자입니다. 식민지 시기 유럽인들이 스튜어트처럼 땅을 사들여 영역을 넓히고 자신들의 ‘우등한’ 문화를 일방적으 로 오지에 심고 퍼뜨리려고 했다면, 베인즈는 자신이 원주민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처럼 얼굴에 문신을 새기며 원주민들과 동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온 귀족/상인 들과 원주민 사이에사 가교역할을 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죠. 에이다의 짐을 나르기 위해 스 튜어트가 데려온 원주민들도 모두 베인즈가 임금을 주며 부리는 사람들입니다. 에이다는 남편이 마우리족의 땅을 사러 먼 길을 떠난 동안 베인즈를 찾아가 자신을 피아노가 있는 해변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딸과 함께 하루종일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보내 죠. 그날 이후 베인즈는 에이다에게 매료됩니다. 결국 베인즈는 스튜어트에게 자신이 가진 80에
이커의 땅과 해변가의 피아노를 거래하길 제안하고, 스튜어트는 제안을 받아들임과 동시 에이 다를 베인즈의 피아노 선생으로 보내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베인즈의 두번째 거래를 제 안. ‘당신이 피아노를 치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면 매 방문마다 피아노 키를 하 나씩 주겠다.’ 에이다는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후 베인즈는 에이다에게 ‘치마를 걷어 올리고 피아노를 쳐라, 자켓을 벗고 피아노를 쳐라, 침대에 누워라, 너와 옷을 벗고 침대에 눕고 싶다’ 등 성추행/성폭 행이라 표현할 수 있을만한 만행을 저지르죠. 이후에 에이다는 결국 베인즈와 사랑에 빠집니다. 종국에 두 사람은 스튜어트와의 갈등 끝에 함께 뉴질랜드를 떠나게 되죠.
영화 피아노는 여성영화(페미니즘 영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여성영화’ 타이틀은 영화 각 본이나 연출 외적으로 감독이 여성인 것, 게다가 이 영화를 통해 제인 캠피온이 칸에서 황금종려 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감독이 되면서 더 견고해졌죠. 또 제인 캠피온은 자신이 직접 쓴 이 각 본으로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받았고요. 에이다를 연기한 홀리 헌터는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 상을, 딸 플로라를 연기한 9살 연기자 애나 패퀸은 여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피아노(1993)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지탄을 받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평단에선 영화를 ‘1800년대 중반의 한 여성이 여성 억압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는’영화로 평가하는 반면, 꽤 많은 여성운동가들은 이 영화를 ‘성폭행범과 사랑에 빠진 이해할 수 없는 여 자’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두 성폭행범 사이에서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채 선택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여성’의 이야기로 보이기도 하고요. 저는 피아노가 페미니 즘 영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영화를 ‘억압받는 여
성이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피아노는 조금 더 보편적인 여성의 권 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에이다는 1800년대 중반의 귀족여성입니다. 당시 귀족 집안의 여성들은 엄격한 가부장적 제도 의 통제하에 자랐죠. 아버지의 말, 집안 어른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큰 죄악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이다는 지고지순한 여성상, 순종적인 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 대한 힌트는 영화 곳곳에 깔 려 있는데요. 우선 딸 플로라(애나 패퀸)와 에이다가 주고받는 대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플로라 는 아빠가 있지만 에이다는 플로라의 아빠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말은 즉, 플로라는 사 생아, 에이다는 미혼모라는 말입니다.
플로라: 아빠에 대해 더 말해주세요. 엄마의 선생님이었죠? 위의 대사에선 플로라의 아빠가 에이다의 가정교사였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에이다의
피아노 키에 옆면에 새겨진 ‘A♡D’가 말해주듯, 프롤라의 아빠는 에이다의 피아노 선생님이었 을 것입니다. 에이다는 아마도 신분이 다른 혹은 이미 유부남인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져 아이 를 낳게 된 것이죠. 이런 배경은 에이다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표출하는 여성임을 알 려줍니다. 여성을 억누르는 당대의 질서에 반항적인 여성이라는 말도 됩니다. 에이다의 반항성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질서를 만들고 휘두 르는 귀족남성들, 만들어진 질서에 순응하는 여성들과 노동계급 남성들, 즉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고, 또 그들에게 무례합니다. 첫 장면에서 에이다는 자신을 뉴질랜드 해변에 데 려다준 승무원이, 비바람을 피해서 배에서 하루 더 머물지 않겠냐 물었을 때, 에이다는 ‘원주민 에게 잡혀 산채로 끓는 물에 넣어지더라도 다시는 그 더러운 배에는 안 돌아간다’고 대답합니다. 남편 스튜어트와의 관계에서 에이다는 남편에게 순응하기보단 그를 경계하고 멀리합니다. 자 신의 몸을 만지지도 못하게하고, 가벼운 굿나잇 키스조차 허락하지 않죠. 베인즈와의 관계에서 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에이다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은 베인즈였지만 자세히 보면 그 관계 에서 주도권을 갖는 것은 에이다입니다. 처음에 베인즈는 방문 한 번에 피아노 키 하나 씩을 준 다고 했지만 에이다는 검정 키로만 거래를 하겠다고 하죠. 둘의 관계가 지속될 수록 더 고통스 러워하는 것도 에이다가 아닌 베인즈입니다. 결국 베인즈 거래가 다 끝나기도 전에 ‘이 관계를 지속하는 건 당신을 창녀로 만들 뿐이고 나를 형편없는 놈으로 만들 뿐이요’라며 에이다에게 피 아노를 그냥 돌려주고 그동안 정착했던 뉴질랜드를 떠나기로 결심하죠. 심지어 에이다는 자신의 딸에게도 불친절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영화에 나오는 ‘어머니’ 캐릭터에게서 ‘모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보통 영화에서 불륜
에 관계에 얽힌 ‘엄마’ 캐릭터의 경우, 자신의 아이를 위해 불행한 결혼을 지속하길 고민하거나, 마침내 찾아온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에이다는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기만 할 뿐이죠. 영화에서 플로라와 에이다의 관계는 모녀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깝게도 보이고요.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플로라가 엄마인 에이다를 기존 질서에서 벗 어나지 않도록 통제하려 듭니다. 엄마에게 반항적이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모습은 어쩌면 관객 들이 보지 못한 에이다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죠. 결론적으로, 에이다는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성폭행범과 사랑에 빠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 는 여자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감독이 배치해 놓은 힌트들을 잘 맞춰보면, 에이다는 자신 을 욕구를 억누르지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가부장적 질서가 억누르는 여성들의 인간 으로서의 권리에 온 몸으로 맞서 온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맞섬의 방법이 현명하든 현명 하지 않든 말이지요. 피아노(1993)의 여성해방 쟁점은 유럽의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과도 연결이 됩니다. 글 가장 앞 에서 언급했듯 스튜어트와 베인즈는 식민지를 지배하는 전략에서 차이를 보이죠. 그 방법들은 두 사람이 각각 아이다를 대하는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스튜어트는 뉴질랜드의 토지를 사들여 법적 제도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에이다의 아버지와 결혼정략을 맺어 에이다를 아 내로 맞는 것과 같죠. 그리고 자신의 규율을 아이다에게 강요합니다. 그리고 에이다가 그 규율들 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관찰하며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체벌하면서 시간을 갖죠. 반면 베인즈 는 자신이 마오리족과 동화되었던 것처럼 에이다와 동화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에이다의 피아노
를 사들여 배우려고 합니다. 에이다를 범하기 위해 조건을 맞춰가며 거래도 하죠. 결과를 차치 하면, 방법만 다를 뿐 두 남성은 결국 여성의 삶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침탈을 한 합니다. 즉, 일 본이 세계대전 패망으로 조선식민정책을 실패한 것을 동정할 수 없듯 아내를 빼앗긴 스튜어트 를 동정할 수 없고, 식민지 시절에 경제 성장률이 높았다고해서 식민통치를 옹호할 수 없듯 사 랑에 빠진 베인즈를 옹호할 수도 없죠. 영화가 다소 불친절할 수는 있으나 집중하고 본다면 보는 재미를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영화입 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중 하나는 뉴질랜드의 자연을 아름답게 담은 시네마토그라피인데 요. 특히 뉴질랜드 밀림의 숲에 에이다가 나올 때는 배경과 인물이 동화된 듯 보이는 특징이 있 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옷을 입고 풀로 무성한 숲에 서 있으면 눈에 뜨이기 마련인데, 신기하게 도 아이다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숲 한 가운데 있어도 전혀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 연에 동화된 듯한 느낌이 신비롭습니다. 해변가에서 에이다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 할 수 있고요. 세상과 동떨어져 혼자만의 세상을 사는 에이다를 연기한 홀리 헌터의 연기가 엄청납니다. 감 독의 연출이 불친절한 반면 에이다의 연기는 아주 친절해서 영화를 읽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됩 니다. 데뷔작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9살 애나 패퀸의 맹랑한 연기도 혀를 내두를 정도 이고요. 깊이 생각하고 곱씹으면서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글. 가람
봤던 영화 또 보는 게 취미인 학생입니다. 두 번 이상 본, 개취 영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akakk_@naver.com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유화 삐뚤게 쓴 베레모. 물감이 덕지덕지 붙은 앞치마, 알록달록한 물감이 올려져 있는 팔레트. 빛이 잘 드는 자리. 이젤엔 커다란 캔버스가 올려져 있다. 화가의 손은 붓에 물감을 찍어 커다란 캔버스에 한 덩어리씩 올리자 조금씩 완성된 형태가 캔버스에 올라간다.
그림 그리는 이들의 로망, 캔버스에 그리는 유화 많은 사람이 유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화가라고 하면 동그란 팔레트를 들고 베레모를 쓰고는 커다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화가=유화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유화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 600년부터 지금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면 거의 유화물감을 사용했으니 ‘화가라면 유화’란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음이 자연스럽다. ‘참 쉽죠’란 말을 한 밥 아저씨가 그린 것도 유화다. 유화가 로망이지만 도구가 많이 필요해 보여 도전하기 어렵게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려보면 필요한 것이 많을 뿐 밥 아저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렵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안다. 그리고 접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가 보인다. 집에서 그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무엇이 어려울까? 일단 기름을 쓰기 때문에 냄새가 많이 나 방안에 기름 냄새가 가득하게 된다. 냄새 없는 기름을 쓴다 하더라도 환기하지 않으면 두통을 일으키기 쉽다. 또, 마르는 시간이 길어 그동안 손이나 물건이라도 닿으면 그림도 망치고 청소 거리도 늘어난다. 점성이 있어서 잘 튀지 않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잘 튄다. 유화를 그리는 화가의 작업 사진을 보면 앞치마에도 토시에도 바닥에도 이젤에도 튄 물감을 볼 수 있다. 환기가 잘되는 전용 작업 공간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바로 유화이기에 더욱 화가의 아이템으로 보인다.
미술계를 석권한 유화의 탄생 유화는 색을 내는 물질인 안료와 린시드 오일(아마씨유)를 섞어 만든다. 현대 유화의 시조로 알려진 사람 은 벨기에 화가 반 얀 에이크다.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손꼽힌다. 반 얀 아이크가 현대 유화의 시조 라고 말하기는 하나 그전부터 존재했던 기법을 정립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오래된 기록에서 유화를 언급 하는 내용이 있고 2008년엔 7세기의 유화가 발견됐다. 오래전에 유화물감이 사용됐으나 세월이 가며 잊 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유화는 이전에 범용적으로 쓰이던 방식 인 에그템페라에서 태어났다. 에그템페라는 안 료를 신선한 달걀 노른자와 섞어 그리는 그림이 다. 달걀 노른자는 튼튼한 도막을 만들어 안료 를 고정한다. 에그템페라 그림을 보존하기 위해 달걀과 린시드를 섞어 바니시로 사용하는데 반 얀 에이크는 바니시를 연구하다 힌트를 얻어 안 료와 린시드와 다른 재료를 섞어 만든 유화 물 감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금방 새로운 물감에 익숙해졌다. 16 세기가 되자 기본적인 물감으로 유화가 정착됐 고 금새 유럽의 거의 모든 화가가 유화로 그림 을 그리게 됐다. 그 뒤 600년 동안 화가가 그리 는 그림하면 유화를 의미했다.
유화를 그릴 때 쓰는 기름 유화에서 쓰는 기름은 두 가지. 건성유와 속건유 다. 건성유는 마르면서 점성이 증가해 고체가 되 는 기름을 말하며 속건유는 휘발성이 강해 빠르 게 마르는 기름을 말한다. 건성유는 접착제 역할 을 한다. 산소와 접하면서 분자들이 서로 연결 되며 안료를 캔버스에 고정한다. 속건유는 물감 의 유동성을 높이고 빠르게 마르게 하나 광택을 제거하고 물감의 접착력을 떨어트린다. 건성유에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린시드오일 외에 호두씨유, 해바라기씨유, 양귀비씨유 등 이 있고 속건유에는 터펜타인(테레핀) 오일, 페 트롤, 화이트 스피릿(미네랄 스피릿) 등이 있다. 많이 쓰는 것은 린시드와 터펜타인이지만 다른 기름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
린시드 오일은 아마씨에서 추출한 기름이다. 건조 속도가 빠르고 색상을 선명하게 유지하며 희석에도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하지만 마르면서 약간 누렇게 변하기에 마무리 단계에서 밝은색 물감을 쓸 때엔 양귀비 씨유(뽀삐오일) 사용을 권장한다. 뽀삐오일은 말라도 투명함을 유지하지만 건조 속도가 느리고 비싸기에 한 정적으로 사용한다. 호두씨유 등의 다른 기름은 린시드유와 뽀삐유의 중간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에선 미술용으로 구하기 힘들다.
터펜타인 오일은 소나무에서 채취한 송진을 증류해 만든다. 휘발성이고 냄새가 많이 난다. 유화를 그릴 때 나는 기름 냄새가 바로 터펜타인 냄새다. 물감을 희석하는 용도 이외에 튄 물감을 지우거나 도구나 붓을 쓸 때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냄새가 많이 나고 수지 성분이 있어 밝은 화면에선 약간의 황변을 일으킨다. 그래서 페트롤이나 화이트스피릿을 쓰기도하는데 냄새와 수지 성분이 적으나 접착력도 터펜타인보다 떨어 진다. 그러나 수지 성분이 남지 않아 깔끔하게 마른다.
유화를 그리기 위한 도구 유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도구가 필요하다. 유화물감, 캔버스, 린시드오일, 터펜타인오일, 기름통 두 개, 젯소, 붓씻는 기름과 그 기름을 넣을 통, 넓은 면적을 칠할 붓 둘, 유화 붓 세필 하나, 필버트 붓( 1,4,8,12,18 호), 팬 붓 하나, 팔레트. 페인팅 나이프, 사포가 필요하다. 먼저 젯소를 물에 희석해 약간 걸쭉하게 만들어 캔버스에 바른다. 한 번 바르고 말리는 걸 4~5회 정도 반 복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 두께가 되는데 사포로 균일하게 깎아준다. 이 과정이 귀찮다면 미리 젯소가 발린 캔버스를 구입하면 된다.
캔버스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면으로 된 천, 아마로 된 천이다. 아마천으로 된 캔버스가 더 고급이다. 아사천이라고도 부른다. 연습용으론 면으로 된 것 이면 충분하다. 면 캔버스의 단점은 습도에 따라 수축과 팽창 정도가 크다. 캔버스 틀은 네 부분이 완전 고정이 돼 있는 것과 크기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전자를 가와꾸라 부르고 후자를 정와꾸라 부른다. 가와꾸 캔버스는 나무가 약한 편이라 잘 휘고 나무가 닿는 부분의 천을 변색시킨다. 정화꾸 캔버스를 사면 8개의 나무 조각이 들어있다. 이 조각을 틀 모서리의 홈에 끼워 넣은 후 캔버스 천이 습기를 먹어 늘어났을 때 약하게 두드려 넣 으면 캔버스 틀이 벌어져 천을 팽팽하게 당긴다.
팻 앤 린과 글래이징 기법 요즘은 옛날처럼 고려할 것이 많진않다. 꼭 지켜야할 것이라면 팻 오버 린(fat over lean)이다. 기름기가 적은 표면 위에 기름기가 많은 물감을 칠하란 이야기다. 그림을 칠하는 초반에는 터펜타인 같은 속건성 기름 의 비율을 높여(린시드3:터펜타인7 정도) 빨리 마르게 하고 덧칠하는 물감일수록 먼저 칠한 물감보다 기름 기가 많게, 즉 건성유의 비율을 높인다(린시드7: 터펜타인3). 이 비율이 중요한 이유는 마르는 속도다. 속건유의 비율이 높 을수록 빨리 마르고 건성유 비율이 높을수록 느리게 마르는데 밑층이 먼저 말라야 그림 표면이 갈라지지 않는다. 그림을 얇 게 그린다면 딱히 상관없다. 유화의 중요한 기법 중 하나가 글래이징이다. 글래이징은 투 명한 물감의 성질을 살려 린시드나 뽀삐유를 섞어 덧칠해 밑 색이 덧칠한 색을 통과해 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으로 에그템페라를 사용하던 이전과는 다른 풍부한 색감과 깊이 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밝은 색으로 밑 칠을 하고 완전히 말린 후 투명한 성질의 물감을 희석해 덧칠하면 된다. 투명한 물감은 물감 튜브 옆 에 적혀 있는데 투명한 물감은 □, 불투명한 물감은 ■표시 가 있다.
글 사탕고양
소소한 그림도구 덕질을 제 블로그(soulcreator.blog.me)에 올리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은 junenyanko 이에요. 조만간 일러스트레이터를 위한 팟캐스트를 진행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때가 되면 많이들 들어주세요.
백伯 림林 서書 신信
Composer B
04. 정진(精進)
잘 지냈어? 오늘은 사전에서 ‘정진’이라는 단어를 찾아 봤어. ‘정할 정(精)’에 ‘나아갈 진(進)’. ‘ 힘써 나아감’ 혹은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음’ 이란 뜻을 가지고 있네. 우리가 무감각하게 쓰던 단어들도 그 안에 담긴 뜻을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숙연해지고 무거워지기 마련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그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겠지. 쓸데없이 비장하고 심각해지는 분위기 말야. 사실 내가 그런 성격이었어. 어렸을 때는 비장하고 심각한 분위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곤 했었지. 아까 말한 ‘정진’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던 것 같아. 어떤 큰 일을 준비할 때만 되면 흡사 일본 야구만화에나 나올 법한 ‘정신통일’이나 ‘정신일도 하사불성’따위의 비장함 혹은 순간의 집중이 있어야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어떤 일에 있어서 ‘정진’이라는 건, 그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행해지는 사소한 일들의 총합이라고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 쌓아 나가는 날들, 또한 무언가 약속되어 있지 않아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등대삼아 조금씩 나아가는 그 나날들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얼마전에 읽은 어떤 글이 생각난다.
이화여대 교육학과의 오욱환 교수가 쓴 글인데, 제목은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라는 글이야. 제목에는 ‘학문’이라고 되어있지만, 학문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가 일상을 보내면서 염두에 두어도 좋을 만한 부분들이 참 많더라구. 내가 그 글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조언은 ‘걸작이나 대작보다 습작에 충실하십시오’라는 부분이었어.
나도 그렇지만, 공부를 해 나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어서 부끄럽고 또 감사했어. 특히 불안정하고 낯선 타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큰 거 한 방’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것 같아. 학문적 성취가 됐든, 그로 인한 금전적 보상이 됐든, 모두가 주목하고 또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공부나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리라 생각해. 우리는 항상 ‘길게 보자’ 라든가 ‘ 큰 그림을 그리자’라고 말을 하지.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고 시간 또한 유한하기에 늘 조바심을 낼 수 밖에 없는 것 같아. 흡사 장기간의 부상에서 회복한 운동 선수가 신체의 컨디션과 경기력을 동시에 끌어올려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부담감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런지, 걸작이나 대작 보다는 습작에 충실하라는 오욱환 교수의 충고가 더욱 따뜻하게 다가오더라. 꿈을 크게 가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야. 하지만 매일 매일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은 그 큰 꿈을 이루기 위한 야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일상에서의 사소한 노력이 없는 야망은 그저 허세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 그리고… 나 8월 한달 동안 잠깐 한국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던 가족들과 지인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 나도 너를 보고 싶다. 네가 시간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만나서 편지에 다하지 못했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어. 망원동 어딘가에서 맥주 한 잔 해도 좋고, 효자동 어딘가에서 해물 모듬에 소주 한 잔 하면서 회포를 푸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만나 줄거지?
도착하면 연락할게.
#1. 워라밸에 대한 단상 - 사무실과 공방의 이중생활 “차장님, 저 매주 목요일마다 뭘 좀 들으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뭐? 무슨 소리야?”
“아, 그게요. 평소 듣고 싶었던 강의가 개강을 하거든요. 매주 목
요일마다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하는데, 장소가 동국대학교라 7시에 는 나와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무슨 강의인데?”
“그게…… 여행작가 과정이요. 제가 예전부터 듣고 싶어 했던 거 라서요”
신사동에 위치한 우리 회사의 공식적인 근무시간은 9시 30분부터 6
시 30분이었다. 하지만, 마케팅 리서치회사에서 근무시간은 별 의 미가 없었다. 보고서 마감 때는 12시를 넘기는 야근은 물론이고,
해외 업체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는 사무실에서 잠을 자며 시차를
맞추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을 예측하기 힘든 마케팅 리서치회사에 서, 그것도 허리급에 해당하는 과장이 저녁 7시에 칼퇴근을 하겠다 는 건 파업 선고나 다름 없었다. 팀장님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게, 네가 예전부터 그렇게 배우고 싶었다는, 그 수업이니?”
지난 번 회식 때 술에 취해 말한 게 생각났다. 각자의 꿈이나 희 망 같은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분위기여서 나도 모르게 말했 던 것이다.
“아, 네……”
“휴~ 그래 알았다. 어쩔 수 없지 뭐. 대신 월화수금 야근은 권과장 이 맡아놓고 하기야~!”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차장님이 낮게 말했다. “그런데 네가 그걸 정말 할 줄은 몰랐다”
이미 반쯤은 돌아선데다 차장님 말투가 혼잣말 같아 뭐라 대꾸하기 가 애매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장님의 그 말속에는 약간의 부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누구나 가슴 속에 ‘이루지 못한 꿈’ 같은 것 하나 정도
는 품고 산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만두가게 사장, 유도선수가 꿈
이었던 음식점 사장님 같은 인물은 드라마나 만화에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대조는 아니어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화이트 컬러 들도 현실화 시키지 못한 꿈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글
을 쓰고, 다시 업계로 복귀한 나에게 쏠린 관심이 그것을 증명했다.
여행을 다녀오고, 글을 쓰느라 2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나는 운이
좋게 업계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인 면에서 운이 좋 은 것이지, 작가의 길에 들어설 생각까지 했던 나로써는 이런 turn back이 현실에 타협한 것 같아 내내 불편했었다. 괴로웠고, 나름대
로 퇴근 후 글을 쓸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리서치회사는
바쁘게 돌아갔고, 격무에 시달린 나는 집에 돌아와 골아 떨어져 잠 들기 바빴다. 이런 이질감과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진 것 같은 패
배감에 젖은 내 심경과 상관없이, 임원들과 클라이언트들은 나의 이 력을 매우 신기해 했다. 동시에 ‘작가 리서쳐’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일도 하는 능력자’라는 낯부끄러운 말들로 나를 치켜세웠다. 아무래도 그들의 심리에는 예전 차장님의 한마디 같은 속내 즉, ‘밥벌이도 하면서 마음 속 꿈꾸었던 하고 싶은 일도 하는’ 것에 대한 은근한 부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한 임원
은 회식 때마다 나를 앞에 두고 대학 때 당신 꿈이 작가였다고, 그
런데 나는 벌써 그것을 이루었다며 부러움이 잔뜩 담긴 칭찬을 해댔 다. 그럴 때마다 취업 이후 전혀 글을 쓰지 못하는 내 안의 자괴감
은 증폭했고, 동시에 회사 임원한테서 회사 업무가 아닌 다른 일로 칭찬을 받았을 때 드는 묘한 공허감도 올라왔다. (그것은 마치 일 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 회식 술자리 분위기는 잘 띄운다며 칭찬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종교처럼 여겨지는 개념이 있다. 바로 ‘Work & Balance’. 일에 매립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균형 있게 유지해가는 상태이다. 복귀 후 나를 두고 한 말은 하나같이 ‘Work & Balance
를 이룬, 즉 리서치와 글쓰기의 발란스를 이룬 좋은 예’라는 것이었
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둘은 절대 ‘&’개념으로 연 결되는 동시진행형이 아니었다는 것을. ‘and then’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순차진행을 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두 영역은 모두 고된 노동 즉, ‘Work’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하루의 1/3 (물론 대부분의 업계가 이 수준을 넘기지만)을 ‘Work’에 사용하고, 통근, 식사, 샤워 같은 잡다한 일에 1/3은 자
연스럽게 사용된다. 그리고 나머지 1/3은 내일을 위한 숙면에 쓰인
다. 이렇게 상식적인 일상만 가정해도 Balance에 소싯적 꿈을 이루 기 위한 활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그것은 그저 일상을 온 전히 굴려가기 위한 여유 시간(Buffer)인 것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 주변에는 1/3 시간을 할애할 만큼 관심사를 자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극하는 강의들이 즐비하다. 퇴사학교, 인생학교, 가죽공방, 가구공
방, 인문학교실, 글쓰기교실, 캘리그래피 등등. 우리는 왜 사무실 에서 벗어나 다른 삶에 탐닉하는 것일까. 상대적으로 비싼 수업료 를 내고 공방이나 취미활동 모임에 달려가는 우리의 속내는 무엇일
까. 이것들을 배우는 이들이 오래 전부터 정말로 이 분야를 흠모 해왔기 때문일까? Work & Balance를 유지하기보다, 워크플레이스
(Workplace)에서 잃어버리고 상처받은 자아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
는 것처럼 보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작가과정을 다닐 당시 내 상 황이 떠올라서인지 퇴근 후 시간에 집중하는 그들이 내 눈에는 뭔 가 절박하고 불안해 보였다.
물론 이러한 활동이 호기심을 충족해 삶의 활기를 주고, 혹은 제 2 의 인생을 시작할 만큼 견고한 계획에서 시작한 것이라면 문제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절박하고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사무실 안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반동적 활동 같아 보이
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여가 활동은 제로섬 게임에 그칠 것이다. 즉, 사무실 밖에서의 다양한 활동이 하루의 1/3을 보내는 사무실에서 쌓인 불만의 해소구가 되면 그것은 찰나의 쾌락에 그치
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가끔 글을 쓸 때, 나
는 어떤 깊이나 사유도 없이, 사무실에서 쌓인 불만 혹은 표출하지 못한 속내를 퍼 붓는 식의 유치한 글들만 쏟아냈었다. 사무실에서의
상황이 정돈되지 못하니, 정성껏 고수해 온 글이라는 취미에도 정상 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무실 라이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무실 밖에 서의 보상적 행위가 아닌 사무실 안에서의 삶을 생계적 이유 외에
좀더 깊은 의미를 가지도록 꾸려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일과 관심
분야’, ‘회사와 나’라는 두 영역을 허무하게 넘나들기 보다, 두 영역 을 융합할 수 있는 창의적인 시도는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급진적이기는 하지만, 자아실현을 중심에 두고 ‘현실적 삶’을 흡수시 킨 시도는 여럿 있었다. ‘여행하는 삶’이라는 책의 저자 ‘왕영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공간에 얽매이지 삶을 실현하고자 여행과 삶 을 접목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시도를 했고, (한때 여행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들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 탕으로 최근에는 태국의 시골 오두막에서 9개월간 살기도 했다. 물
론 이런 분야의 대선배 격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부터 4-50대 중년 남성의 열렬한 시청을 이끄는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 상상했을 자급자족의 삶. 하지만, 이러한 대안은 그
물망 같은 인간관계에 매여 있는 우리 같은 속세인들에게 현실적으
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자족적인 삶 즉, 세속적 삶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삶을 관철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에 따라 포기하는 행복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만 큼 우리는 세속적 삶에, 의식주에, 그리고 (가족을 포함한)인간 관 계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그러기에 인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무실에서의 삶에 자아를 스며들게 하는 시도는 어떨까. 한국 사회의 관료주의, 취업난 등을 무시하고 철없이 하는
말은 아니다. 물론 조직과 시스템의 이기적인 성향을 이길 수는 없 겠지만, 옷을 입거나 데스크를 꾸미는 데 내 취향을 반영하는 것,
내 업무처리방식을 고수하고, 비합리적인 일에 목소리를 내려고 노 력하는 것, 그리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들이 예가 될 수 있 다. 그리고 그 일을 선택할 때 작용했던 내 안의 연결점을 다시 생
각해보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적성에 어느 정도 맞는 일을 하는 경 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 조차 없이 일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잘
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자아를 유지하는 것과 무관할 지 모르나, 하루의 1/3에 해당하는 사무실 안에서의 삶에 내
색채를 투영할 수 있는, 조금은 생산적인 노력은 될 것이다. 사실 비정규직과 조기은퇴가 횡행하는 생존의 전쟁터에서 이러한 시도가
말은 쉽지만 쉽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런 노력 없이 사무실의 시간 을 내 영역이 아닌 것처럼 방관적으로 대하기에는 이것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무자비한 그 곳에 서도 우리는 삶을 보낸다. 사무실 안의 삶을 응원하고, 그 삶의 중
요성을 인정하기에, 그리고, 더 이상 벗어나고 싶은 ‘그 곳’으로 남 지 않기를 바라기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본다.
*글쓴이_권근혜 (lynnox78@gmail.com)
현재 백수 / 과거 마케팅리서처 / 쿠바다이어리 저자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4.언니의 바다 전 애인이 결혼을 한다. 말이 전 애인이지 그 언니를 전 애인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애매하다. 분명 교제는 했으나 거리가 멀어 자주 만나 지 못했고, 난 그 언니에게 ‘네가 동생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아’라는 말들을 들어가면서까지 애써 붙잡고 있었으니. 그저 나만 놓으면 아무것도 아닐 관계, 연인이라는 이름조차 사치였었다. 비수였던 말들이 먼 훗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는 걸, 그 때는 짐작조차 못했었다. 서로 사랑한 적 이 없으니, 전애인이라는 말도 사치다. 그저 그녀는 나에게 언니다. 알고 지낸지도 10년이 훌쩍, 서로의 어릴 때 모 습을 알고 있는 가족 같은 사람이다. 언니는 바다를 좋아했다. 답답하면 바다를 보러갔다.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차를 타고 동해바다로. 여름 바다보 다는 겨울 바다를, 기왕이면 푸르게 넘실대는 바다를 좋아했다.
언니와 바다에 간 적은 단 두 번. 11년 전 초여름의 해운대와 1년 전 초봄의 제주도. 다소 한적한 바닷가에서 언니는 천천히 걸었다. 걸음은 잔잔한 파도처럼 느긋했다. 나는 언니를 뒤따라서 걸었다. 한 발짝, 두 발짝, 같은 속도로. 조금 걷다 바다를 보고, 사진을 찍다가, 다시 언니 를 보다, 다시 바다를 봤다. 그러다 문득 파도처럼 밀려온 생각 한 줌. 나만 변했구나.
건강하길, 행복하길, 평안하길. 언니는 오래전부터 나의 안녕을 빌었다. 나 역시도 당연히 언니가 안녕하길 바랐다. 관계의 이름이 연인일 때도, 친구일 때도, 하물며 그 사이 아무것도 아니던 그 모든 시간을 통틀어 이 세상 속에서 서로가 안녕하길 바랐다. 관 계의 시작이 그 무엇이든 본질은 같았다. 수평선이 그 자리를 지키고, 파도가 치고, 물이 들어찼다 빠지는 것처럼.
레즈비언에게 전애인의 결혼이란 보통 헛헛함 이상의 감정을 동반한다. 성소수자 동지 하나를 잃은 상실감, 이성 애 중심의 세상 속에서 상대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같은. 하지만 메신저로 언니가 웨딩사진을 보내왔을 때, 그 어떤 헛헛함도 상실감도 날 찾아오진 않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에, 새하얀 드레스에 나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저 언니가 이 결혼으로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랐다. 언니가 항 상 나의 안녕을 빌어왔던 것처럼.
작은 베틀을 잡았다. 미니베틀은 부산으로 이사왔을 즈음 샀던 것이다. 보 이는 풍경을 어떤식으로든 물건으로 만들어내고 싶었 던 찰나, 때마침 유행하고 있던 아이템이었다. 잡지 한권 정도의 크기로 작은 벽걸이 장식물이나 컵 받침을 만드는 것만 가능하지만, 수동으로 실을 교차 시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지대가 되는 날실을 건다. 두꺼운 면사를 썼다. 날 실은 단단한 실을 쓰는 것이 좋다. 팽팽하게 당겨야 씨 실도 자리를 잘 잡을 수 있다. 얇거나 약한 실을 썼다 가는 잉아를 돌리다가 실이 끊어질 수도 있다. 직물을 짜는 도중에 씨실이 끊어지면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 니 꼭 튼튼한 실을 사용해야만 한다. 북에 파란실들을 휘감는다. 하늘색, 바다색, 파도색, 모래색을 골랐다. 바다색은 실 여러개를 함께 감았다. 실이 무작위로 엉켜가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바다를 표현하기 딱 좋 다. 모래사장을 표현하는 실은 각각 다른 재질의 실을 섞 었다. 보풀이 있는 베이지색 특수사와, 베이비코튼, 아 이보리색 램스울이다. 다양한 원료가 섞이거나 실에 방울이 달려있는 특수 사는 한 번 생산한 후에 다시 제작하는 경우가 드물어 같은 종류의 실을 다시 찾기가 어렵다. 내 특수사도 다 시 구매하려고 들어갔더니 '품절' 표시가 떠 있었다. 다 시 구하기 어려운 실, 희귀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아낌 없이 털어넣는다. 잉아를 교차하며 하늘부터 짜내려간다. 모래사장부 터 올라가면 전체 그림을 만들기 편안하지만, 베틀에 씨실이 걸린 부분을 살려서 그 속으로 나뭇가지를 넣 을 예정이라 거꾸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나는 언니 신혼집에 걸리리 바다를 짜고 있다.
날실 사이로 북이 통과하며 씨실이 한 줄 한 줄 더해 간다. 하늘부터 먼바다, 그리고 모래사장에서 부서지 는 파도, 알알이 모래알까지. 씨실을 짤 때는 너무 팽팽하게 당겨서는 안된다. 바 디로 씨실을 빗어내리기 전, 실은 직물에서 45도 각도 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좋다. 직조를 한 지 반 년이 넘었지만, 그 여유를 주는 게 잘 되지 않는다. 헐거워서 풀어져보일까봐, 점점 조금 씩 팽팽하게 힘을 주게 된다. 그러다 중반쯤 보면 잘록 한 허리처럼 날실이 당겨져 온 것을 눈치채고, 그제서 야 급하게 헐겁게하려고 애쓴다. 하늘 끝실과 바다 첫실, 바다 끝실과 파도 첫실을 단 단히 동여맨다.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모든 직물들이 그렇듯, 실이 풀어져버리면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다. 매듭 부분을 다시 직물 사이로 밀어넣는 방법도 있지 만, 자연스러운 멋을 살리기로 했다. 다른 마감 부분에 는 올 봄에 주워온 벚나무가지를 넣었다. 언니의 인생 에 멋진 꽃이 피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 바다는 어쩌면 해운대, 어쩌면 월정리다. 어쩌면 오래전 함께 가보자 했던 동해 어딘가 일지도 모른다. 그 바다가 어디든 언니를 떠올리며, 언니가 행복하 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짜냈다. 또 계속 우리가 서로의 안녕을 바라길 바라며, 각자가 안녕하길 간절히 기원 했다. 결혼을 하더라도 또 어딘가의 바다 앞에서, 같은 시간, 같은 물결을 보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부적이다. 행복한 인생을 기원하는, 언니를 닮은 바다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살들 그림 / 준가 junga.pic@gmail.com
건축이 좋아. #41. 만주철도, 넌 대체 뭐니?? aoikasa
퇴직을 한 후 여행을 떠났다. 그 것도 다른 곳도 아닌 만주로. 퇴직 후 만주라니 지나치게 기개가 넘치는 듯 하지만 사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대련에서 하얼빈으로, 하얼빈에서 장춘으로 기차 이동을 하지만 몇날 며칠이 걸리는 옛날 기차가 아닌 고속철이라 이동시간이 5시간이 넘지 않는다. 꽤나 야심차게 떠난 듯 하지만 사실 별 거 아닌 이 여정길에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건 바로 만주철도이다. 만주철도, 대체 이 거 뭘 까 싶은 압도적인 스케일. 만철과 만철의 도시들, 그리고 만철의 건축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
만 주철도. 러시아가 시작하고 일본이 완성하고. 만주철도, 즉 만철은 사실 다롄-창춘(신징) 사이의 남만주철도와 창춘(신징)-하얼빈 사이의 동청철도를 합 친 말이다. 남만주철도와 동청철도 모두 러시아가 부설을 시작하였으나, 남만주철도의 경우는 1908년, 동 청철도의 경우는 1935년 각각 일본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남만주철도는 일본의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 회사가 경영하였는데, 남만주철도의 본진은 대련에 있었다. 대련에는 남만주철도회사의 본사와 지어질 당 시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는 철도병원, 그리고 철도직원사택 및 철도 공장 등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 규모 와 위용을 보노라면 20세기 초반 이 곳에서의 만철의 힘과 위상을 느끼게 한다.
남 만주철도회사 본사 대련의 중산광장에서 5분 정도 걸어내려가다보면, 거대한 파르테논 신전 같은 파사드를 가진 석조건물을 만나게 된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 쳐다보는데, 바로 옆에 거의 같은 모양의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이 곳이 바로 남만주철도회사가 본사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현재도 철도회사가 사용하고 있다.) 거대한 파사
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2층에 작은 전시실이 하나 있어 철도의 역사를 알려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을 안내하는 사람들은 일본어로 안내도 해 준다. 거의 대부분의 장소에서 일본을 지워내버린 것과 달리, 이 곳에서는 먼저 다가와서 일본어로 대화를 거는 게 흥미롭다. 아무튼, 이 거대한 위용의 건물은 본래 러시 아가 학교로 사용하려고 지었던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일본이 1908년 차지하였고, 그 이후 남만주철도의 본사건물로 사용한 것이다. 남만주철도회사는 고토 신페이라는 사람이 운영했는데, 이 고토 신페이라는 사람. 본래는 의사였지만, 1895년에 타이완에 가서 민정국장으로서, 타이베이의 도시계획을 거의 처음으 로 만들고 시행한 사람이다. 그랬던 그 사람이 1908년 이후에는 남만주철도회사를 운영하며 만주에 철도 를 놓고 각종 철도 시설을 건립하였으니,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도시 역사에서 고토 신페이는 빼놓을 수 없 는 사람일 것이다.
철 도병원 '건축이 좋아’ 3회차였던가에 다루었던 용산철도병원처럼, 철도가 가는 곳곳에는 병원이 생겼다. 철도병원 은 철도공사 혹은 철도운영시에 발생한 부상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도 했지만 ,철도에서 일 하는 직원과 그 가족의 건강을 위해, 좀 더 넓게는 철도가 있는 지역의 일본인들의 의료를 담당하기 위해 만 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남만주철도본사가 있던 대련의 철도병원(현재의 대련병원)은 그 사이즈부터가 남 달랐다. 1925년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로 지어진 이 병원은 거의 대학병원급의 크기와 수 준을 자랑한다. 스크래치 타일 이 붙어 있는 외관에 핑거형(손 가락처럼 건물이 계속 튀어 나 와 있는 구조) 평면을 가진 이 건물은 현재도 병원으로 잘 사 용되고 있다. 현재는 철도병원 이 아닌 대련의 중앙 병원으로 역할을 하는 중이다. (대련병원(만주철도병원)과 그 앞의 노먼 베쑨 동상)
철도사택과 노동자주택 철도는 사실상 어마머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도시기반시설이다. 철도부설 뿐 아니라 운영에도 수많은 인 력을 필요로 하기 떟문에, 철도가 부설된다 함은 그 도시에 철도부설 및 운영 인력 역시 엄청나게 많이 유입 된다는 의미였고, 그들이 살아갈 곳이 필요한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철도병원이 있는 부분의 북측에 철
도관련 구락부와 사택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대련의 서측에는 철도 공장과 이들을 위한 노동자주택 이 대규모로 있었는데 이들 중 일 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노동자주택을 방문했던 날, 집 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 니가 막 손짓을 하며 따라오라고 한다. 우리가 구경하고 있던 그 집 이 바로 그 아주머니가 2층에 사 는 집이며, 1층에는 무려 한국분이 살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 두 분 덕에 집안 샅샅이 구경도 하고, 이야기도 들었다. 원래는 철도에서 일하 는 고급관리 가족을 위한 집이었지만, 해방 이후 한 집을 여러 개로 쪼개어 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있었던 나무마루바닥, 테라스, 계단 등이 이전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에는 얼마나 좋은 집이었을 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집의 남측에는 4-5층 규모의 집합주택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중 벽돌로 쌓인 몇 개 동은 처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재밌는 것은 전체가 없어지고 대규모 개 발을 한 게 아니라, 한 동 한 동씩 새로 지었는지 어떤 동들은 이전 그대로, 어떤 동들은 새로운 모습 으로 지어진 상태이다. 노동자주 택 마을의 서북쪽 끝에는 구락부 (클럽)으로 사용한 큰 건물까지 있었으나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철 도호텔 철도역이 있는 곳에는 숙박시설이 함께 있기 마련이다. 일종의 근대의 역참이라 할 수 있는데, 만주철도가 있던 곳에는 만주철도의 호텔, 즉 야마토호텔들이 자리잡았다. 대련과 장춘에는 여전히 야마토호텔들이
각각 대련빈관, 춘의빈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숙박할 수 있었는데 대련의 야마토호텔은 정말 시간이 멈 춘 듯한, 그 때의 그 풍경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중산광장에 면한 9개의 건물 중 하나인 대련빈관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게이트웨이를 지나 내부로 들어오 면, 그 시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법한 로비가 나온다. 이 곳의 2층에는 커피숍이자 바가 있는데 이 곳의 테라스에서 보이는 중산광장의 풍경이 꽤나 볼만하다. 밤에는 다소 화려한 조명 속의 중산광장 및 광 장에서 춤추는 이들도 볼 수 있다는. 당시 호텔의 위상만큼 유명한 이들도 이 곳에서 많이 묵었는데, 그들 의 사진 역시 이 곳에 걸려 있다. 1914년에 지어진 호텔이 여전히 그 건물 그대로 운영 중이라니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장춘의 춘의호텔은 이보다 이른 시기, 1909년에 지어진 호 텔이다. 2층의 귀빈관이 바로 그 건물인데, 내부는 상당히 많이 고쳐 이전의 형태는 알아보기 쉽지 않다. 그래도 전체 적인 공간 구조 등은 그대로이다. 장춘역의 바로 앞에 있어 여행객들에게는 편리한 위치이다. (장춘역 바로 앞에 위치한 춘의빈관)
대련에서 철도란 곧 도시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준 요인이자 도시를 지배하는 구성 요소였다. 하얼빈 역시 마찬가지. 동청철도의 본사와 구락부, 직원사택 등 다수의 건물이 남아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를 저격했던 하얼빈역은 공사중이라 아쉽게도 볼 수 없었지만, 그 주변의 동청철도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 볼 수 있었다. 그 중 동청철도 부국장 집이었던 곳은 남강구박물관이 되어 있어 하얼빈의 도시 발전사 를 볼 수 있었는데, 역시나 철도가 큰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었다.
(하얼빈철도본사와 하얼빈철도사택)
(하얼빈 동청철도 부국장 사택과 내부 계단)
대련과 하얼빈을 보고 나니 ‘만철, 대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의 상징과 같은 철도는 단순히 도시 와 도시를 잇는 교통수단이 아닌 근대도시의 출발점이자 원동력이 된 것이었다. 만주국의 수도로 건설된 장 춘과는 달리 경제, 무역 도시였던 대련과 하얼빈에서는 철도가 도시 건설의 중심에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도시를 구성하고 있다.
(중산광장의 춤추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대련빈관)
수면을 걷는 사람들
글. 장수양(@condensed_bold) 사진. @photo.j.keith
7 유上
한낮과 한 잔이라는 말은 어감이 비슷하다. 한낮에 한 잔 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한 잔 할래, 라는 말은 한낮에 농담처럼 들린다. 손수에게는 낮이든 밤이든 한 잔 할래, 라는 말을 하던 쌍둥 이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사람이 하나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 과거의 손수는 별 로 생각해본 바가 없었다. 일은 햇빛처럼 이른 시각에, 별안간 들이닥친다. 어떤 집이 비는 일, 그 집이 차는 것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일. 단지 몇 년이 지났지만 많은 것이 달라졌다. 손수가 한 낮 에 홀로 한 잔 하는 일이 많아진 것도 그 중 하나다. 손수가 벤치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로 조금씩 몸을 흔들면서 한 잔 하고 있을 때 유영은 약속시간을 십 분 넘긴다. 유영이 오면 손 수의 한 잔은 끝이 난다. 아직 그가 오지 않았기에 손수는 벤치에 앉아 여전히 몸을 흔들고 있다. 그 움직임은 미세해서 누구든 오랫동안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다. 공원에 접한 대로변 에서 사람들은 벤치를 지나가면서 땀을 닦는다. 하늘색이 찌를 듯이 밝아서 다들 눈을 찌푸리고 있다. 저녁은 물리적으로 먼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런 한낮이다. 여기 자유공원에서 손수는 벤치 밑에 드러누워 잔 일이 있다.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신 그 날에 대 해 아무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그 때 쌍둥이동생 손유와 평소처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만 알 고 있다. 평소와 같은 이야기, 다를 바 없는 말들. 그렇다고 쓸모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손수는 그 날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금요일 밤, 서로에게 무심한 인터넷 정모와, 달고나 장 수와, 귀걸이 가판대가 느리게 오가는 이 곳에서 우리는 무엇에 대해 주로 얘기했나. 특히 손유 는 어디를 쳐다보면서 어떤 어조로 이야기를 했을까. 누가 주로 얘기했고 누가 주로 들었나. 이 런 의문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손수는 밥을 먹는다. 주로 찬밥이다. 손수는 뜨거운 것을 싫 어한다. 손부채질을 하던 그녀가 먼 내리막에서 막 정수리를 내민 유영을 본다. 껑충한 키에 덜 렁거리는 사진기를 목에 건 채로 올라오고 있다. 손수는 유영이 오랜만이다. 벤치 앞에서 유영은 숨을 몰아쉰다. 그는 정장을 입고 있다. 더워 보여. 손수가 말한다. 더워, 라 고 거리의 누군가가 대답한다. 손수는 일어나서 들고 있던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밥을 먹 으러 가자고 말한다. 유영은 앞서가는 손수의 뒤꽁무니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여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자유공원이니까. ―우리 여기서 술을 마신 적 있었나. ―손유 생일날. ―그랬구나. 유영은 눈을 깜빡인다. 그는 줄곧 찌푸리고 있었던 것을 막 깨달은 것처럼 억지로 인상을 편다. 구김이 가신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선해 보인다. 그래 참 선해보인다고 손수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서 만나기로 했더라. ―손유의 생일선물을 사기로 했어. 공원 사진도 찍어서 부쳐주기로 했잖아. ―어디로? ―호주.
손유는 호주에 살고 있다. 믿기지 않지만 벌써 아기도 있다. 올 봄에 첫 돌이 지났다. 유영은 종 종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들을 때마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묻는다. 손수는 그런 유 영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손유가 호주로 아주 가버리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유영은 손 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세 시. ―나 유령이 보여. 이후 유영은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오늘처럼 더운 날에는 더위를 먹은 것 같고, 추운 날에는 녹 지 않는 얼음처럼 영원히 정지할 것 같다. 손유가 떠나고 유영 혼자 남은 그 집에서 똑같이 창백 한 약통들을 본 후로 손수는 유영에게 매일 전화를 건다. 오늘 아침에도 손수는 유영에게 전화 를 걸었다. 유영은 피곤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피곤한 얼굴의 유영이 열기가 올라오는 아스팔트 를 힘주어 걷는다. 지탱하려는 듯이. 앞서 걷던 손수는 보폭을 좁혀 유영과 걸음을 맞춘다. 넘친 얼음의 굳은 표정을 본 적 있니 그릇 밖으로 사랑해사랑해* 손수가 입속으로 중얼거려 보는 시의 첫 문장이 희미해진다. 유영이 정장의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다. 흰 와이셔츠 곳곳에 땀이 얼룩 져 있다. 손부채질을 하면서 둘은 걷는다. 자유공원은 어릴 때만큼 넓지 않지만, 곧잘 앉아있던 나무 벤치부터 주차장 바깥의 먹자골목은 그 때보다 멀다. 손수를 만나기 전에 자유공원과 버스 정류장을 잇는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온 유영은 얼굴빛이 좋지 않다. ―편의점 있다. 물 마실래. ―아니야, 괜찮아. ―너 쓰러질 것 같다. ―안 쓰러져. 짧은 바람이 불어서 손수는 잠시 멈춰선다. 소나무 냄새가 난다. 유영이 앞서가게 되자 그의 등 이 약간 젖어 있는 것이 보인다. 젖은 등이 잠시 멈춘다. 유영은 셔츠의 소매단추를 끄르고 소매 단을 걷는다. 바지런히 소매를 접는 뒷모습을 손수는 짧은 바람을 맞으며 보고 있다. 이윽고 둘 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김미정 「잠의 실루엣」에서 변용.
―저 소나무에서 놀았던 것 기억나? ―침대처럼 그늘에 누웠던 것만. ―찍을까. ―돌아오는 길에 찍자. ―그래. ―가지 사이에 누웠던 사람 누군지 기억나? ―손유. 유영은 예전의 손유에 대해 말할 때 망설이지 않는 다. 손수는 입을 다문다. 예전의 손유…그걸 생각하 면 손수는 어린 날의 베란다가 떠오른다. 그 때 손수 와 손유가 살았던 집의 베란다에는 하늘색 물풀이 있었다. 둘의 엄마가 돌보던 작은 화단도, 어두워지 기 전까진 둘이서 원하는 만큼 뛸 수 있던 트램폴린 도 있었다. 그만큼 넓은 베란다였다. 방수 카페트를 깔아도 좋고, 타일을 닦아놓아도 그런대로 좋았다. 슬리퍼는 항상 펄이 들어간 투명 파랑이었다. 아직 도 그 슬리퍼는 손수의 집에 있다. 투명했던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뿌옇게 더럽혀진 채로. 곰팡이가 슬어 타일의 귀퉁이가 이지러진 지금의 베란다에 서 문득 슬리퍼가 눈에 띌 때면 그 기억이 난다. 어 린 손유가 미지근한 물을 받은 물풀 안에서 손수가 건네는 수박 한 쪽을 받아들던 기억. 아슬아슬하게 잠기지 않은 흰 겨드랑이 아래 분홍 오리가 있었다. 손유가 움직이면 물풀은 푸딩처럼 퉁퉁거렸다. 손 유 한 명으로 그렇게 복작거리던 물풀은 손수의 머 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손유는 햇빛을 받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어둡다고는 할 수 없는 깊은 음영 속에서, 손유는 아직도 잠겨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이 남아있으면 좋을 텐데. ―뭐가? 손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 때의 손유를 유영은 알 지 못한다. ―아직도 유령이 보이니. ―응. ―지금도? 고등학생 때도 자주 가던 들꽃 식당 앞에서 유영 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글씨가 뿌옇게 흐려진 입
간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진을 찍는다. 카운터에는 얼굴이 낯선 여자가 있다. 마지막 으로 온 게 1년 전인데 어느새 주인이 바뀌었다. 그대로였으면 찍었을 텐데, 하며 유영은 사진 기를 집어넣는다. 산채비빔밥 두 그릇을 주문하고 그늘진 창가쪽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있다. 그 늘진 창가쪽. 신기한 장소다. 하지만 어느 가게에나 있다.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를 들으면서 땀을 식힌다. 어디에 앉았어? 손수가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보리차를 따르며 묻는다. ―뭐가? ―유령. 어디에 앉았냐고. ―네 옆에. ―하나도 안 무서워. ―무서우라고 한 말 아냐. 손수는 어깨를 으쓱한다. 유영은 드물게 웃는 표정이다. 지금은 네 바로 뒤에 있어, 이제 네 머 리를 만진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영의 얼굴빛이 여전히 창백해서 손수는 꾸밈없이 웃을 수가 없다. ―키는 이 정도야. 유영은 나무의자에서 일어나 제 어깨를 짚어보인다. 손수는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손유는 나보다 키가 컸어. ―그럴 리가. 유영은 다시 제 어깨를 짚어본다. 손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영의 옆에 선다. 손수의 키는 유영의 귓불 정도다. 정말이야. 나보다 키가 커. 유영은 말이 없다. 산채비빔밥이 금색 그릇에 담겨 나온다. 녹색 앞치마를 맨 여주인이,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한다. 그녀가 쟁반에서 산채비 빔밥을 하나씩 내려놓고 카운터로 돌아갈 때까지 유영과 손수는 테이블 옆에 엉거주춤 서있다. ―먹자. 새싹이 올려진 산채비빔밥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풀냄새가 나고, 약간 맵싸한 소스 냄새도 난 다. 유영은 언제 고였는지 알 수 없는 땀을 목덜미에서 닦아낸다. ―사진 찍는 거 깜빡했다. 손수가 숟가락을 든 채로 말한다. 바보 같이. 유영은 아쉬워하는 손수를 쳐다보다가 묵묵히 산 채비빔밥을 먹는다. 다음에 찍지 뭐. 들꽃 식당의 창문이 참 크다. 아까 드리워져 있던 차양이 서서히 기울어 이제는 둘이 앉은 자 리에도 햇빛이 들이닥치고 있다. 창밖에 꽤 많은 사람들이 무성영화처럼 기묘한 잡음만을 들려 주며 지나간다. 오랫동안 닦지 않았는지 빼곡하게 먼지가 서려 사람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다. 그들의 얼굴은 뿌옇거나 비어있다. 윤곽선만 잡아놓은 그림 같다. 손수는 입안에서 씹히는 산채비빔밥의 나물이 묘하게 퍽퍽하다고 생각한다. 역시 주인이 바뀌어서 그래. 이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유영이 아주 조용하게 식사를 해서, 손수는 말을 하면 그의 식사를 방해하 는 것만 같다. 유령과의 식사를. 손수는 창밖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 다고 생각한다. ―그 날 얘기 해줄까? 유령을 처음 본 날. 유영이 비운 그릇을 옆으로 밀며 말한다. 손수는 창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에는 착각했다고 생각했어. 그 날 너도 함께 있었거든. 자유공원에 마지막으로 온 날이 야. 우린 지금처럼 창가에 앉아있었는데. 네가 화장실에 갔을 때. 창문으로 여자들이 엄청 많이 지나갔어. 난 카페 ‘은요일’ 모임이라고 생각했지. 금요일이면 종종 모이곤 했잖아, 아주 오래전 부터. 이상하게 그애들 서로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 같더라. 한 번도 한 명 한 명을 따로 본 적이 없어서 그랬나? 그 날만은 자세히 볼 수 있었어. 그런데도 그애들은 다 똑같아 보였어. 알았던 거 야. 내 눈이 잘 볼 수가 없다는 걸. 손수는 유영의 창백한 얼굴을 본다. 유영은 그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의 강한 집중력처럼 기묘한 몰입감으로 유영은 말하고 있다. 손수는 테이블의 어딘가에, 어쩌면 자신의 옆에 앉아서 유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유령을 상상한다. 자신의 첫 목격담을 별로 흥미롭지도 않다는 듯이 듣고 있는 모습을. 그러나 손수는 유영이 말하는 유령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 다. 손유는 호주에 멀쩡히 살아있다. 유영이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의 유령이라는 걸까. 손수는 유 영의 창백한 얼굴이 무엇보다 유령같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우르르 지나가는 무리들 가운데, 유령이 있었어. 날 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정확하 게 알아봤어. 너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다른 옷을 입고 있었거든. 파란 원피스. 손유가 자주 입던 옷. 유영은 말의 끄트머리에는 비로소 입을 벌리고 웃어버린다. 얘기를 하는 도중에도 자신이 참 이상하다는 걸 아는 눈치다. 정작 손수는 유영을 평이하게 바라보고 있다. 손수는 그를 여러 해 보아왔고, 새벽에 전화를 받은 날 이후로는 유영과 마주앉은 테이블에서 유영이 태연하게 자기 옆자리의 유령과 눈을 마주치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상하지 않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손수는 되뇌인다. 자신도 가끔 거울 속에서 호주에 가있는 손유를 보곤 한다. 착각이 아니다. 분 명히 자신이 아니라 손유를 본 것이니까. 손수는 잘 넘어가지 않는 산채비빔밥을 은수저로 뒤 적거린다. ―그걸 유령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손끝으로 전할 수 있을까
마음은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말로 하면 되지, 하고 언어가 제일 먼저 떠오르기 십상이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한다. 그게 기본이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게 고마운 거라고. 토를 달고 싶어지지만 직접 경험을 통해 상당히 그러하다는 걸 점점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로망도 있지 않던가. 눈빛만으로도 알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이. 필자는 정서(emotion)를 연구한다. 대체 이모션이 뭐냐, 어떻게 정의해야 되냐, 하는 것부터 온갖 심리학자들이 계속해서 싸워대고 있지만 그 못지 않게 계속 고민이 필요한 건 그럼 그 이모션이라는 놈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우린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보고, 그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도출된 공통된 결과를 향해 수렴해 가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어떻게 느끼십니까, 하고 직접 사람들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심장박동수, 호흡, 호르몬 수치 등의 생리적인 측정치를 얻어내기도 하고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나 몸의 자세, 동작 등을 수치화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상 생활에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때, 언어는 엄청난 정보량 중의 일부를 담당하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어차피 다 아니까 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적으로 의식적인 컨트롤이 용이한) 언어 외에도 얼굴 표정으로 눈빛으로 목소리의 높낮이로 몸의 자세와 움직임으로 우리의 마음을 내비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느날 Matthew Hertenstein은 생각했다. 단지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기쁨, 슬픔, 화남, 사랑, 연민 등 각각의 정서를 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는 “만지기(touch)” 실험을 하게 되었다. 결과는 흥미진진했다. 실험의 참가자들은 상대방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팔을 모르는 사람이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어떤 정서를 전하려 하는지 상당히 정확하게 구분해냈다. 어떤 정서인지에 따라 평균적인 정확도에 차이가 있었지만 화남, 두려움, 사랑, 고마움, 그리고 연민은 랜덤 수준 (즉 “찍어서 맞힐” 확률) 이상으로 정확했다. 미국에서나 스페인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 실험에서 Hertenstein은 참가자들이 앞선 실험을 녹화한 비디오를 보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어떤 정서를 전하려 하는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구분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우린 얼굴을 마주보고 하는 소통을 위협할 정도로 아주 많이, 모바일 메신저나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이메일 등으로 소통한다. 하지만 이런 대화는 다채로운 비언어적 단서로 언어와 언어 사이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오프라인 대화에 비해 오해의 소지가 훨씬 높다고 최근의 논문들은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이모티콘의 등장과 잦은 사용은 반길 만한 일이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이모티콘들은 제법 생생하게 실제 얼굴 표정이나 몸짓이 담당하는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해 준다. 물론 얼굴 표정이 더 다채롭고 눈에 띄는 사람이 있고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사람이 있듯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정도에도 개인차가 있다. 그럼에도 당신과의 대화에 그가 이모티콘을 더 많이, 다양하게, 생생하게 사용한다면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전하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일일이 글자를 타이핑하기 귀찮아서 하나 날려버릴 때도 있지만. 하지만 아무리 귀여운 유료 이모티콘을 요렇게 저렇게 사용한다 한들, 온라인으로는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소통의 수단이 있다. 스킨십. 우리의 손은 고도로 발달된 감각 기관이고, 관계는 마주보는 눈빛에서 싹트기 시작해 마주잡은 손에서 비로소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글. 민하 : minha@berkeley.edu 재밌는 거 뭐 있나 늘 딴 짓을 하고 싶지만 현업인 심리학을 하는 와중에 재미있게 읽은 논문들을 야매로 소개합니다. 재미는 좋은 거니까, 그리고 이것도 일종의 딴 짓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