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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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영화 리뷰: 두번 본 영화 - 꽃잎 (1996) / 글. 가람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 수채화 / 글. 사탕고양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 채봉 감별곡 / 글. 고수진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 02. 일반인이 예술을 대할 때에 / 글. 권근혜 만든다오 - 05. 바로도 거꾸로도 청귤청 / 글. 사진. 진선 건축이 좋아 - 42. 동주를 찾아서 / 글. 사진. aoikasa 수면을 걷는 사람들 - 8. 유 下 / 글. 장수양 사진. @photo.j.keith 백림서신 - 05. 멋진 하루 / 글. composer B 지진파 - 주진우의 이명박 추적기, 테라로사 커피로드 I MB U / 글. EXXX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괜찮아 3 개월 / 글. 민하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더울 때는 그렇게 에어콘 틀어놓은 실내가 좋더니 바깥이 좀 시원해 졌다고 실내에 앉아 있는 것이 그저 답답하고 궁상맞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인생이라는 연을 가을 바람에 띄우고 싶다고 해야할까요. 그저 열매를 맛보고 살이 찌 고 싶어 산과 들로 뛰어다닌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하늘이 높아지고 마음은 가라앉 을 날이 없는 가을의 초입 입니다. 좀 지나면 또 춥다고 벌벌대다가 그때 그 산에, 그때 그 강에 가지 못한 것을 한탄하 고 앉아있겠지요. 여러분 놀 수 있을 때 노셔야 합니다. 좀 번거로워도 이때다 싶으면 가차없이 뛰어나가십시오. 월간이리가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이달에는 신기하게도 필진 분들의 원고가 고르게 조금씩 양이 늘어 있더군요. 왜일까요. 더워서 였을까요? 아니면 좀 여유가 생겨서 였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난달과 비교해도 작년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코너들로 채 워두었습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저희 원고의 질적 향상을 위해 이달도 틈나는대로 노 시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영화리뷰 : 두번 본 영화 꽃잎 (1996) 감독 장선우

최근 5.18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 (2017/장훈)가 개봉 한 달도 채 안 돼 1100 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 역사적 자신감과 관심이 한껏 끓어 오른 이 시 국에 주목하기 아주 좋은 영화인 듯합니다. 독재자의 딸이 정권을 휘두르며 과거 군사권을 미화 하려는 시도를 우리 모두 적나라하게 목격한 직후여서 그런지, 5.18항쟁의 정당함과 처참함을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려는 영화의 노력에 관객도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것 같습니다. 택시운전사가 어떤 영화인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지만, 저에게 ‘5.18’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는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입니다. 최윤 작가의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를 영화로 재해석한 작품이지요. (안타깝게도 저는 아직 소설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이 영화 의 장점 중에 하나는 바로 배경입니다. 5.18 직후의 대한민국. 영화 꽃잎은 당시 독재 정권에 대 한 시민들의 조직과 맞섬이 얼마나 정당하고, 그를 탄압하는 과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보다는, 그 사건이 직후에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주목합니다. 당시 참혹한 상황은 영화 초반부터 거친 편집으로 갑자기 등장하는 주인공 소녀(이정현)의 꿈이나 회상으로만 등장합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에서 20분 가량 아주 긴 회상씬이 나오긴 하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5.18 민주 항쟁 현 장에 있었던 소녀의 ‘현재 삶’입니다.


소녀의 오빠는 전두환 정권 당시 강제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그 사 건을 계기로 어머니는 독재 정권에 맞서는 집회에 나가게 되는데, 그 자리에 주인공 소녀가 동 행하죠.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고, 소녀는 엄마와 함께 도망치지만, 엄마는 결 국 총에 맞아 죽습니다. 그 이후 소녀도 광주에서 사라지죠. 이 사라진 소녀를 오빠의 네 친구 ‘ 우리들(설경구, 추상미, 박철민, 나창진)’이 찾아 나서는 게 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이 ‘ 우리들’과 함께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반면, 장선우 감독의 카메라는 사라진 소녀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사라진 소녀는 지금 ‘미쳐’있습니다. 5.18의 경험이 소녀를 그렇게 몰고 간 것입니다. 엄마의 죽 음을 목격한 것보다 더 소녀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엄마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 감입니다. 이른 아침, 엄마는 죽은 아들을 기리는 하얀 소복을 입고 시내에 나갈 준비를 합니다. 소녀는 엄 마가 어디에, 뭘 하러 가는 줄도 모른채 매질을 하며 따라오지 말라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 고 기어이 버스에 올라타고야 맙니다. 시내에 도착해서도 엄마는 후미진 골목, 한 건물 안에 딸 을 데려다 놓고 다시 올테니 기다리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소녀는 결국 거리까지 따라나서죠.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한 중간에 엄마의 손을 꼭 붙잡은 소녀가 있습니 다. 그러던 중 총성이 울리고, 시위대는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도망가는 사람들은 하나 둘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은 군홧발에 짓밟히거나 몽둥이질 당하며 죽어갑 니다. 엄마 손을 붙잡고 달리던 소녀는 결국 넘어집니다. 소녀를 일으켜 도망가려던 엄마는 총에 맞아 쓰러지죠. 클리셰에 따르면 소녀는 쓰러진 엄마 옆에 주저앉아 울거나, 일어나 함께 도망치 자며 엄마를 깨우려고 부질없는 노력을 하겠지만 장선우의 영화에 그런 클리셰는 없습니다. 소 녀는 자신의 손목에 휘감긴 엄마의 굳센 손가락들을 거칠게 뜯어내기 시작합니다. 소녀는 그렇 게 살아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꽃잎(1996)을 보면 군사 정권의 독재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5.18이 얼마나 끔찍한 ‘역 사적 사건이었는지’ 보다,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끔찍하게 바꿔 놓았는지를 더 생각하게 됩니 다. 아마 꽃잎이 ‘죽은 자’들에 대한 영화가 아닌 ‘살아 남아’ 비극을 회상하는 자들에 대한 영화 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성근이 연기한 ‘장’은 그런 면에서 아주 핵심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도 소녀처럼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미친 소녀가, 동료 인부들이 이야기하 는, ‘광주에서 벌어진 불길한 일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합니다. 하지만 구태 여 알려고 노력하진 않죠. 장은 영화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이 자신과 동일시해야 했던 인물이 기도 할 것입니다. 16년 전, 광주에서 무언가 불길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고 있지만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혹은 그저 마음 편하게 남한군이 북한의 무장공비들을 때려 잡았다는 뉴 스를 믿어버린 사람들. 그들의 무심함, 무지함, 혹은 함께 맞서 싸우기엔 한없이 부족했던 자신 감은, 광주에서 죽음을 당하고 목격한 사람들보다, 훗날 그들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을 것 입니다. 마치 영화의 종장에 소녀를 잃은 장이 이성을 잃은 채 정처없이 떠도는 것처럼 말이죠.

글. 가람

봤던 영화 또 보는 게 취미인 학생입니다. 두 번 이상 본, 개취 영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akakk_@naver.com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수채화 크레파스를 쓰고 난 다음 가지게 되는 색칠 도구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수채화다. 물로 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간편해서란 이유일 것이다. 수채화의 간편함은 여행지나 카페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수채물감은 과거엔 기록과 삽화에 쓰였던 마이너한 재료였으나 이 간편함으로 인해 주요 그림 도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사실 알고 보면 제일 어려운 수채화 먼저 수채화의 정의부터 좁히고 이야기하자. 수채화를 넓게 말하면 물로 녹여 쓸 수 있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통틀어 말한다. 먹, 동양화 물감, 카세인 물감, 과슈, 포스터칼라도 수채화고 심지어 아크릴 물감도 물로 희석해서 그리기에 수채화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수채화라고 하면 투명수채화를 이야기한다. 투명 수채화는 우리가 흔히 접했던 팔레트에 굳혀 놓은 후 물에 녹여서 칠하는 방식의 그림이다. 투명하다고 해서 완전히 투명한 건 아니고 물감을 칠했을 때 그 밑에 있는 것이 비치는 정도다. 투명수채화는 아라빅검 혹은 비슷한 물질을 미디엄으로 사용해 만들어 굳어도 다시 녹여 쓸 수 있는 물감이다. 주로 아리빅검을 쓰긴 하지만 요즘은 아퀴졸 등의 합성 물질로 만들기도 하고 과당 시럽을 쓸 수도 있다. 물론 과슈 같은 불투명 수채물감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투명수채화는 빠르면 유치원 시절, 늦어도 초등학교

사용하니

쉽다고

생각한다.

시작하기가 쉬울 뿐 제대로 쓰기 가장 어려운 그림 도구다. 물의 번짐을 이용해 그리다 보니 종이에 올려진 물과 붓에 있는 물의 양에 따라서 변화무쌍한 얼룩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수정도 거의 안 된다. 자신이 딱 원하는 대로 그리는 걸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나 바로 그 부분이 수채화의 매력이다.

야외에서 시작된 현대 수채화 물로 물감을 희석해 그리는 그림의 역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선사시대부터다. 아마 최초의 물감은 물로 갠 진흙이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도 물로 개어 만든 물감을 사용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그린 그림도 일종의 수채물감이다. 현대 수채물감의 시작은 르네상스 시대로 본다. 독일의 화가 알버레히트 뒤러가 현대 수채화의 서막을 열었다고 알려진다. 당시 수채화는 본격 적인 작품용이라기 보다는 스케치나 도면을 그 릴 때 채색용으로 사용했다. 손쉽게 채색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인지 야외스케치, 식물 세밀화, 야생동물이 수채화의 주요 소재였다. 오늘날에 도 보테니컬 아트 같은 세밀화는 수채화로 주 로 그려지고 있으며 지금 유행인 어반스케치의 주사용 재료가 펜과 수채인 걸 생각하면 아직도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봐도 된다. 수채화로 유명한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산 수채 화 재료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다. 영국에서 수채화가 발전한 이유는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엘리트와 귀족 계급의 교양 중 하나였으며 지도 제작자, 장교, 기술자들이 지형을 묘사하고 공공 작업을 위한 프로젝트를 보여주기 위한 자료 제작 등에 쓰였다. 영국은 전 세계에 많은 탐험가와 군 대를 보냈는데 그때 지형도를 작성하기 위해서나 유적지, 유물 등을 그리는 용도로 수채화가 많이 쓰였다.


여행과 함께하는 수채화 영국에서 실용적인 요소로 널리 퍼졌으나 그만큼 많은 사람이 수채화를 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자연스 럽게 예술적으로나 다양한 매체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18세기 후반 영국 성직자 윌리엄 길핀 은 잉글랜드 농촌을 묘사한 수필에 자신의 흑백 수채화를 더했다. 영국의 여러 작가가 수채화 작품을 그려 냈다. 존 셀 코트만, 앤소니 코플리 필딩, 사무엘 팔머 등의 예술가 가 대표적인 수채화 화가다. 접근이 쉬운 수채화답게 아마추어 예술가들의 활동을 이끌었고 중산층의 수채 화 작품 구입에 힘입어 1804년 영국 수채화 협회가 탄생하기도 했다. 일찍이 수채화가 시작된 영국과 달리 유럽에서 수채화는 인기가 덜 한 재료였다. 유럽에서 수채화 유행은 영국이 패권을 차지한 19세기에 시작됐다. 그러나 그 인기는 금방 위기를 맞이했다. 수채화는 물에 의해 채 색이 망가지는 문제와 빛에 노출되면 급속하게 퇴색돼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작품으로 인식됐고 이는 부정 적인 평가로 이어져 수채화 유행 쇠퇴를 불러일으켰다. 수채화가 다시 유행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다. 화학이 발달하며 빛에 강한 안료가 속속 개발돼 퇴색 이 잘 된다는 단점이 없어졌다. 자동차의 발달도 수채화가 주요 그림도구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 니아의 화가들은 자동차로 다양한 곳을 다니며 캘리포니아 내의 다양한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지금도 여 행지에서 수채물감으로 풍경을 그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수채화 도구의 핵심, 종이와 붓 수채화가 접근하기 쉽다 보니 다른 그림도구보다 저렴하단 인식이 있다. 하지만 같은 급에서는 수채화 도 구들이 비싸다. 물론 사용자의 폭이 가장 넓다 보니 아주 저렴한 도구에서부터 비싼 것까지 다양하게 있다. 학생용이라고 하더라도 약간 가격 부담이 있는 유화보다 접근하기 쉽다. 같은 급의 물감끼리 비교하면 용 량당 가격이 수채물감이 가장 비싸나 물에 희석해 그리기 때문에 튜브 하나로도 아주 오래 그릴 수 있어 그 점은 쉽게 상쇄된다. 문제는 종이다. 수채화는 물을 많이 쓰기에 종이가 우그러들거나 섬유가 일어나거나 하기에 최소한 어느 정 도 두께 있는 종이를 써야한다. 특히나 제대로 색과 물번짐을 표현하려면 수채물감용 사이징돼 있는 종이 가 필요하다. 수채화지는 명반과 젤라틴을 따뜻한 물에 녹여 종이에 바르는 일종의 코팅처리를 거친다. 명반이 가진 발 수성에 의해 안료가 종이 틈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하고 색을 더 진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수채 화는 여러 도구 중 종이를 가장 중요하게 꼽는다. 손이 많이 가다보니 수채화 종이는 비싸다. 물론 캔버스보다야 싸지만 사용량을 생각하면 그리 싸지 않다. 수채화에 적합한 종이는 나무 섬유로 만든 펄프보다는 코튼으로 된 종이가 좋다. 코튼지 중에서도 수채화를 할 수 있게 처리가 된 종이라야 하는데 재료 가격이 비싸다 보니 A4 크기에 약 천원 정도 한다. 수채화 붓은 부드럽고 끝이 잘 모일수록 좋다. 수채화에 가장 적합한 붓은 담비털로 된 붓이다. 부드럽고 물 을 많이 머금어서다. 담비털 중 콜린스키라 불리는 시베리아 담비털을 최고로 친다. 추운 지방에 사는 담비 털일수록 좋은데 가격 문제로 대부분의 콜린스키 붓은 중국 북부 지방에서 키운 담비털로 만든다. 한 자루 에 몇만 원에서 몇십 만원씩 한다. 가격 때문에 족제비털붓을 쓰기도 한다. 다람쥐털 붓도 많이 쓰는 수채붓 중 하나다. 힘이 없고 뾰족하게 모이지 않지만 물과 물감을 아주 많이 머 금기에 넓은 면적에 칠할 때 자주 사용된다. 꼭 이런 붓만 써야 하는 건 아니고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붓이 필요해 때에 따라 합성모 붓을 쓰기도 한다.


고체케익물감과 튜브물감 한국에서 수채물감이라 하면 튜브물감을 짜서 굳혀 쓰는 걸 의미했다. 최근 들어 어반스케치와 캘리그라피 의 영향으로 고체케익물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채물감은 팬물감이라고도 부르는데 접시(팬)에 담겨 있 어서다. 해외에선 보통 팬물감을 주로 사용한다. 튜브물감이 발명되기 몇백 년 전부터 수채화물감은 블록 형태로 유 통됐다. 튜브물감을 굳혀 쓸 수 있는데도 팬물감을 쓰는 이유는 미리 굳어져 있고 밀도가 높아 온도와 습도 가 높은 여름에 용해되지 않고 높은 습도에 의해 곰팡이가 피지 않아 편리하게 쓸 수 있다. 튜브 물감은 그 때그때 짜서 쓰는 쪽이 깔끔한 색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같은 브랜드의 같은 등급 물감이라면 튜브와 팬 물감의 색과 특성 차이가 없다. 일본에서 워터브러시의 발명이 더해지며 아주 간편하게 수채도구를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작은 팔레트와 물감, 워터브러시, 키친타올, 작은 컵, 엽서 크기의 수채지만 있으면 된다.

제 블로그(soulcreator.blog.me)에 저의 그림 도구 덕질을 올리고 있습니다. 많이많이 놀러 와 주세요. 그리고 주말에 함께 카페에서 같이 그림 그릴 사람들을 찾해요. ‘ㅅ’// 안부 게시판에 남겨주세요. 글 사탕고양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채봉 감별곡 글. 고수진

어젯밤 바람소리 금성이 완연하다.

무너진 줄 몰랐으니 끊어질 줄 알았으랴

고침단금 홀로 누워 상사몽 훌쩍 깨어

양신에 다마함은 예로부터 있건마는

죽창을 반개하고 맥맥히 앉았으니

지이인하는 조물의 탓이로다

만리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홀연히 부는 바람 화총을 요동하니

천년강산에 찬 기운 새로워라

웅봉(雄蜂)자접(雌蝶)어이하여 애연히 흩단

심사도 창연한데 물색으로 유감하다

말가

정수에 부는 바람 이한을 아뢰는 듯 추국에 맺힌 이슬 별루를 머금은 듯 잔류남교 봄바람에 춘앵은 이귀하고 소월동령 달밝은데 추원이 슬피 운다. 임 여의고 썩은 간장 하마터면 끊이리라. 삼춘에 즐기던 일 예런가 꿈이런가 세우사창요적에 백년 살자 굳은 언약 단봉이 높고 높고 파수가 깊고 깊어 오늘 함께 읽어 볼 작품은 ‘채봉감별곡’이다. 이 작품은 작가와 창작시기가 모두 불분명한 고전 소설이다. 그러나 작품의 흐름이나 여주인공 ‘채봉’의 성격, 작품에 보이는 사회적 분 위기, 그리고 기존 고전소설에서 보았던 우연성을 거의 탈피한 점(주인공이 집을 나왔는데 우연히 조력자급을 만나 위기 극복과 관련한 도술이나 꿀팁을 제공 받는다든가, 우연히 헤 어졌던 사랑하는 님을 만나는 장면이라든가) 상당히 진보된 애정관을 보면 조선후기 후기도 거의 막바지에 창작되지 않았을까 추측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이 지은 ‘추풍감별곡’이 있는데 고전 작품은 인물의 감정을 시를 지어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 작품의 제목은 채봉이 지은 ‘추풍감별곡’에서 따 왔다고 볼 수 있다. 제목을 풀이 하자면 ‘가을 밤 이별노래’ 이 정도로 해석 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을 추풍감별곡이라고도 하고 채봉이가 주인공이고 채봉이 부른 시 이기 때문에 채봉감 별곡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을 읽어 볼 이유는 내가 최근에 본 VIP 때문이다. 정말 너무 불쾌했다. 엄마랑 막 바지 여름휴가 겸 데이트로 영화관을 찾았다가 마침 개봉한 영화였고 신세계 감독이라 해


서 솔깃했다. 개인적으로 홍콩 느와르영화를 엄청 좋아하기도 하고.. 그런 영화인 줄만 알았지. 이날 이후 나는 새로 나온 영화는 3주 후 어느 정도 정보가 풀리면 봐야지 라는 깊은 각오를 하 게 되었다. 와...C

먼저 줄거리를 보자. 여주인공 채봉은 평양성 밖 김진사의 딸로, 봄날 꽃구경에 나섰다가 전 선천부사의 아들 강필성을 만나 서로 호감을 갖게 된다. 필성은 채봉이 수줍어 도망하다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주워 연정을 담은 시를 써서 시비 추향에게 전한다. 이를 받아 본 채봉이 화답시를 보낸다. 채봉의 어머니 이부인이 채봉을 질책하자 채봉이 사실을 고한다. 필성이 어머니를 통하여 채봉의 집에 매파를 보내자, 채봉의 아버지 김진사가 서울 가고 없는 동안에 부인이 혼자 결정하여 약혼한다.

김진사는 세도가 허판서의 문객 김양주를 통하여 벼슬할 생각을 한다. 김양주는 김진사에게 과년한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딸을 허판서의 애첩으로 들여보내고 그 대가로 벼슬을 하도록 권한다. 김진사가 주저하던 끝에 승낙하고 허판서에게도 약속을 하고 온다. 돌아온 김진사는 부인에게 딸을 데리고 상경하자고 하니 부인은 대경실색하고, 채봉은 눈물만 흘린다. 부인과 채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진사는 전답과 기타 가산을 정리하여 상경한다.

김진사 일행은 도중에 화적을 만나는데, 이때 채봉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평양으로 되돌아온다. 김진사는 화적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허판서에게 사정을 알리지만 허판서는 대노하여 김진사를 옥에 가둔다. 부인은 할 수 없이 채봉을 찾으러 다시 평양으로 온다. 채봉은 평양에서 시비 추향의 집에 묵고 있었는데, 기생어미가 그녀에게 기생되기를 권하나 거절한다.

채봉의 어머니는 추향의 집에서 딸을 만나 아버지가 하옥되어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상경하자고 조른다. 채봉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기생으로 몸을 팔기로 작정하고 기생어미로부터 돈을 받아 어머니에게 준다. 그런 허판서는 이를 거부한다.

기명을 송이라고 한 채봉은 강필성에게 화답하여 보낸 한시를 내놓고 그것을 풀이하는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겠다고 하지만 아무도 풀지를 못한다. 이런한 일화가 유명해지고 전해들은 강필성은 기생 송이가 제시하였다는 한시를 듣고 놀람을 감추지 못한다. 하도 신기하여 찾아갔다가 채봉을 만나고, 그 뒤 밤마다 찾아가서 사랑을 속삭인다.

한편, 평양감사는 송이의 서화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와 곁에 두고 서신과 문서를 처리하는 일을 맡긴다. 필성은 채봉을 잃고는 채봉을 그리워하며 고민으로 지내다가 감영의 이방이 되기를 자원하여 채봉을 만나고자 한다. 채봉은 별당에 거처하면서 필성을 날마다 그리워하고 있다가 어느 달 밝은 밤에 〈 추풍감별곡 〉 을 지어서 부른다. 이 노래를 들은 감사가 채봉을 불러 천한 이방을 사모한다고 질책한다.


이에 채봉은 현재 이방으로 와 있는 필성과의 관계를 고백한다. 감사는 두 사람의 사랑을 가상히 여겨 필성을 불러서 상면하게 하고 감사 자신이 혼례와 관련된 일들을 주관하여 두 사람의 지난날의 인연을 성취시켜준다. 한편 허판서는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삼족이 멸해지고 김진사는 평양감사가 보낸 문서 덕에 풀려나와 평양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 속 채봉은 굉장히 근대적이고 걸크러쉬가 느껴지는 그런 여성이다. 이 작품 속 아버지 는 악인으로 등장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출세욕을 위해 딸을 첩으로 시집보내는 잔인성을 보여 준다. 기존의 고전소설에서 볼 수 없는 윤리의식을 과감히 버린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요즘 기사들을 보면... 이보다 더 타락한 세상도 없지만. 조선시대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전개이다. 또한 후반부에 평양 감사가 직접 기생이 된 채봉이를 사들여 관원으로 고용하는 파격적 전개도 흥미롭다. 이후 평양감사가 조력자가 되어 강필성과 만나도록 도움을 주고 이후 둘의 혼인을 주 도하고 주례까지 서는 장면은 묘한 쾌감도 선사한다. (고생고생한 여주가 다 이루는 장면이니 그런 느낌이 든다. 채봉이 하고 싶은 거 다해~)

채봉이의 모습을 보면 주체적 개인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어지러운 이 세상 ‘부귀공명’이 무엇이냐며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의 모습을 벗어난 행동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 집안의 위기에서는 가문을 구하기 위해 과감하게 기생이 되기까지 한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근대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기생이 되었어도 끝까지 자신의 목표를 잃지 않고 강필성을 찾아내고 뛰어난 문장 실력을 인정받아 기생에서 관 원으로까지 올라가는 모습은 채봉의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아버지는 돈과 딸 로 벼슬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는가.

왜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런 작품이 없는지 모르겠다. 내가 본 기억은 착한데 눈치는 없는 주인공이 본부장이나 회장의 아들을 만나 역경 속에 사랑을 이루거나 능력이 있는 여성은 꼭 나쁜 년인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는 뭐 말 할 것도 없다. 강간당하고 칼로 난도질 당하고 사 이코 만나 개고생하고 사랑 없음 죽을 것 같은 그런 모습들 뿐 이다. 하여튼 희생의 난도질이다. 보브아르, 제 2의 성(교과서 천재교육 고전)은 여성과 남성은 신체적으로 차이가 없이 태어난 다고 한다. 다만 교육과 사회가 그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교과서에 이런 지문이 실 려 있어서 놀라웠고 나 또한 수업을 하며 반성한 점도 많았다.

너무 불쾌한 영화를 봤다. 아 내 눈.... 그냥 팝콘이 날아다닌다는 에나벨이나 볼 걸...

지각하면 보강이다.


#2. 일반인이 예술을 대할 때에 “이제 뭐 할거니?” “글 써야지”

“다시 취직 안하고?”

“글쎄. 일단 글은 써야 할 것 같아. 여행 떠나기 전부터 글은 쓰려 고 했었어. 이제 다녀왔으니 써야지.” “돈은……?”

“아직 조금 남아 있어” 한창 경력을 쌓아야 할 30대 중반. 난 4개월간의 쿠바 여행에서 돌

아온 뒤에도 사회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난 리서치 경력을 끊고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했었다. 그렇게 모진 다짐을 한 뒤, 마음먹

었던 쿠바 여행기에 매진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6월. 막 여름이 시 작되는 그 때 한달 간 여독을 풀고 여행기 집필에 들어갔었다. 하 지만 긴 세월 사무실 에어컨 보호 아래서 여름을 보낸 나였다. 그

런 나에게 사무실 밖의 여름은 마치 온실 속에서 야생으로 나온 것 처럼 너무 힘겨웠다. 그래도 난 글을 놓지 않았다. 글 쓰기에 적당 한 장소를 찾아 까페, 도서관 그리고 낮 동안 비어 있는 친언니의

아파트까지 전전했고, 몸에 밴 근대적인 성실함 덕분에 하루에 써 야 할 양을 조금씩 채워나갔다. 그렇게 글을 쓴 날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뿌듯함이 꽉 차 올랐었다. 하지만, 철저히 혼자였고, 단조로움은 견디기 힘들었다. 조용한 언니의 아파트에서 글을 쓰다

들려오는 야채트럭의 ‘감자, 양파’의 외침. 그 뒤의 공허함은 내 마 음속에 공명이 되어 울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까페와 도서관, 그리고 일산의 언니 아파트를 전전 하는 방식은 영 불편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상수동으로 출근하 는 친구의 소개로 회사건물 1층의 까페를 소개받았다. 나는 하루 몫

을 끝내고자 이른 시각에 가서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사장은

토요일 일찍부터 찾은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글 쓰는 내내 힐끗 힐끗 쳐다봤다. 나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지금은 글 쓰는 사람인데요” 그 후, 그는 나에게 부쩍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외로웠던 나는 그의 대쉬를 날름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었고, 나는 까페


를 작업실 삼아 매일 드나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전문 사진작가였다. 까페도 갤러리를 겸하고 있었 는데, 사진학과 학생들에게 무료로 전시공간을 대여해주기도 했다. 나보다 12살이나 많은 그는 대학에 강의도 하고 사진 공모전 심사

위원으로도 나가는 전문가였지만, 사실 딴따라였다. 그는 태생적으

로 자유롭고 감성적이었다. 까페 운영시간 동안 나는 구석에 앉아 글을 썼고, 문을 닫은 후 저녁을 먹지 못한 그를 따라 여기저기 술

집을 전전했다. 그렇게 수만은 날들, 긴 시간을 그의 사진과 나의 여행과 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1년 간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고, 내 원고는 출판사에 계약이 되었 다. 좋은 결과였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다시 취직을 했다. 1

년 만에 돌아온 리서치 업계는 여전했다. 야근은 많았고, 팀장의 잔

소리, 클라이언트들의 갑질이 반복되었다. 익숙해야 할 이 상황에 서 알 수 없는 삐걱거림은 나로부터 나왔다. 여행기를 쓰고, 한량

같은 생활을 보내고 온 나는 ‘어느 정도의 예술가’가 되었다는 자의 식으로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점심시간에 맛집이나 아파트 시세를 얘기하는 동료들보다 예술과 삶, 인생의 가치를 고민하는 내가 더 고결한 것 같았다.

이런 생각에 힘을 보탠 건 내 남자친구였다. 그는 한번도 출퇴근을 해 본적이 없는 완벽한 자유인이었다. 욕망과 감각에 충실했고, 자

유를 갈구했다. 그 앞에서 나는 작아졌고, 1년 전에 끌어올린 예술

적 감성이 팍팍한 현실에 좀먹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럴수록 나는 연애와 글에 더욱 집중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의 감정은 일종의 질주였다. 예술가가 되 고 싶다는 욕망의 질주 말이다. 예술가. 하찮고 탐욕스러운 현실의

고민을 초월하고,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자족하며 자유로워지

는 삶. 고차원적으로 보이는 그 삶을 나는 학문이나 명예를 탐하듯 이 그렇게 욕심을 냈었다. 하지만, 그것은 탐닉의 반복이었다. 즉,

나는 예술가인 남자친구가 알려준 영화나 음악을 무비판적으로 흡

수했고, 그가 알려준 장소는 마치 성지처럼 여겨 내가 회사생활에 지칠 때마다 그곳을 방문했다. 그러면 나는 예술가인 남자친구처럼 예술가가 되는 것 같았다. 글에 대해서는 더욱 심각했다. 여행기

를 마친 후로, 실제로 글을 자주 쓰지 않았다. 그나마 쓴 글은 생

각날 때마다 쓰는 일기와 아주 가끔 올리는 브런치 글뿐이었다. 더 구나 여행기 이후의 작품에 대한 주제나 형식도 전혀 생각이 없었

다. 즉, 나는 여행기 계약 후 회사생활 동안, 사진작가인 남자친구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와 가끔 올라오는 여행기의 반응에 기대 실제의 글은 없고, 예술인 자의식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올해 건강이 악화되어 회사를 그만두고, 남자친구와도 헤어 졌다. 나에게 남은 것은 그렇게 쓰고 싶었던 글을 쓸 수 있는 충분

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여행기 이후

내가 탐닉한 것은 ‘글’이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 더 나아가 ‘글 쓰 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나의 예술적 취향을 발 전시키기보다 타인(남자친구)의 그럴듯한 취향을 모방했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 나의 자존감의 근간은 역설적이게도

‘쿠바 다이어리 작가’라는 타이틀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내 가 한 없이 초라해졌다.

나는 왜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동경 안에는 예술가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삶의 하찮은 고민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나에게 예술가는 이랬고, 직 장인은 그 반대 위치에 있었다. 비록 회사를 다니지만 책을 낸 경 험과 예술인 남자친구가 알려 준 문화활동을 하면서 예술가의 삶을 산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의 큰 착오는 예술 행위와 예술가, 그리고 예술적인 삶에 대한 총

체적인 혼란이었다. 내가 동경한 것은 예술가였고, 그것을 위해 예 술적 삶을 탐닉했고, 그럴수록 내 예술 행위(본질)는 멀어져 갔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말과 글이 가진 정의 로움과 힘을 믿었다. 글을 아꼈고, 내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쩌다 예술가에 대한 비굴한 동경과, 거품이 가득 찬 자의식만 남았을까.

사실 나만의 얘기는 아닌 듯 하다.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로 ‘원고

투고’가 꽤 많이 들어왔었다. 대부분의 사연은 은퇴를 하고 명예로 운 일을 하고 싶다, 고로 내 이름으로 낸 책 한 권을 내고 싶다는 거였다. 그만 둔 회사 팀원 중 한 명은 내가 입사를 하자마자 여행

기를 내는 과정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는 살면서 자기 이름 으로 박힌 책 한 권은 내고 싶고, 여행기는 출판사 지원도 받으면 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행학교, 여행작가, 글쓰기 교실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비단 글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일상적인 생활의 무료함을 해소하기 위해 오는 이들도 많다.


그런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행위를 하는 과

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그 결과 섣부른 결과물을 내려 고 하는 경우를 우려할 뿐이다. 보통의 취미활동, 즉 운동이나 영

화보기 같은 활동은 소박하게 그 행위를 즐기는 데에 만족한다. 하 지만, 특히 글쓰기는 계속하고 잘 쓰려고 할수록 남의 평가에 민감 해지고, 작가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마약만큼이

나 너무 은밀하고 유혹적이어서 좀처럼 빠져 나오기 쉽지 않다. 여 행기를 쓴 뒤, 남자친구와 연애를 지속할 때 난 그렇게 중독되었다.

도대체 예술행위란 무엇인가. 직장인들이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 그 림, 음악, 글 등을 즐기는 것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난 그들이 유

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를 바란다. 예술행위라는 말을 붙이는 순 간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유희가 소소한 즐거움 추구 라면, 절절한 자기성찰을 담아낸 것이 예술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직장을 다니든, 전문적인 예술가(백수)이든 말이다. 여행기를 쓰는 동안 나는 자기성찰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고백에는 충실

했었다. 그 과정의 외로움과 불안함을 억누르며 글 앞에서 나체가 된 것 같은 솔직함을 견뎠다.

최근에 예술이 대중화 되고, 향유자보다 창작자가 증가하는 시대 이기 때문에 더 말하고 싶은 부분이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이 쓴 ‘

예술인간의 탄생’에서 역사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예술의 의미 도 달라져 제도 예술의 대안으로 비예술 같은 예술 오락이 등장한

다고 말했다.(예술인간의 탄생, 조정환) 이런 상황에서 예술의 하 향평준화가 우려되기 때문에 예술의 묵직한 자기고민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시대, 예술적 행위가 하나의 스펙처럼 실용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더 예술이 지닌 무게 감을 주장하고 싶다. 예술이 우리의 감성을 발전시켜주었고, ‘누구 나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기에 어느 정도의 수준과 행위자의 순수함을 유지했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라고 말이다. *글쓴이_권근혜 (lynnox78@gmail.com)

현재 백수 / 과거 마케팅리서처 / 쿠바다이어리 저자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5.바로도 거꾸로도 청귤청 그녀와 함께한지 3년차, 우리는 평생 서울에 살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날은 살던 집에 누수가 생겼고, 집주인 은 나몰라라했으며, 자주 가던 카페와 미용실이 사라진 날이었다. 모두가 타인인 서울바닥, 친절한 무관심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선인장이 되는 길 밖에 없어보였다. 탐스럽던 잎은 뾰족한 가시로, 가냘픈 줄기는 통통하게,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하게. 부모님의 지원 없이 학자금 대 출과 아르바이트로 점철된 20대를 살아온 나는 이미 만신창이로 지쳐있었다. 고향은 떠나왔고, 서울은 힘들었으며, 우리는 지쳤다. 불황에 실업난에 물가는 치솟고, 뭣도 없는 레즈비언 커플 이 살아가기엔 벽이 너무 높았고, 우리의 기반은 연약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었다. 나와 그녀의 첫 제주, 2015년 5월이었다.


제주의 하늘과 땅은 낮게 맞닿아있었다. 바다 수평선은 눈높이에 있었으며, 불어오는 바람에는 서울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청량함이 섞여있었다. 폐 깊숙하게 제주 공기를 밀어 넣고, 나는 몸이 푸르러지는 걸 느꼈다. 풀 한 포기, 능선의 굴곡, 파도소리, 오래된 집들, 돌담길, 그 모든 것이 힐링 그 자체였다. “여기서 살까?”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밥 먹으러 갈까, 라는 말처럼, 가볍게 가볍지만은 않게 내뱉은 말. “그러고 싶네.” 마침표 뒤에는 뿌리 깊은 한숨이 묻어있었다. 그녀가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찻잔 안에 푸른 귤 한 몇 조각이 가라 앉아 있었다.

청귤은 덜 읽은 귤로 풋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통 11월부터 제주에서는 감귤을 수확하는데, 청귤은 그보다 2~3개월 빨리, 완전히 노랗게 익기 전에 수확한다. 청귤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불과 2년여 전까지만 해도 청귤은 고품질의 감귤을 얻기 위한 ‘열매솎기’의 대상이었다. 좀 더 크고 튼실한 열매에 영양분이 집중될 수 있도 록, 작은 청귤들은 가위질 한 번에 내쳐졌다. 2년 전 까지만 해도 청귤을 제주 밖에서 만나는 것은 어려웠다. 제주도 조례로 미숙과는 유통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를 찾는 여행자들이 많아지면서 청귤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게스트하우스나 카페에서 이를 맛본 사람들이 청귤을 찾게 되었고, SNS에서는 청귤을 활용한 레시피들이 넘쳐났다. 맛과 향, 영양이 뛰어난 청귤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제주도는 지난해 조례를 개정하고 청귤의 유통을 허용했다.


우리는 제주가 아닌 부산으로 이사 왔다. 드럭스토어 에서 화장품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가기 위해, 마트를 가기 위해 차를 끌고 한참을 나갈 필요는 없다. 높은 빌 딩, 수많은 사람들, 도로에 차가 꽉꽉 들어차있지만, 이 도시에서는 바다가 보인다. 그녀와 나는 바다가 보이는 오래된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베란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파도가 보인다. 수평선 너머에 제주가 있고, 서울보다 좀 더 가깝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제주에서 감귤농사를 하고 있는 블로거를 통해 청귤을 구매한 것은 8월 중순이었다. 10kg에 2만5천원. 출하를 기다렸다 배송 시작된 지 이틀 만에 청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녀석들은 새파랗고 단단했다. 얼핏 라임인가, 싶 을 정도의 비주얼. 껍질을 스르륵 만졌다. 제주의 강렬하게 더운 여름이 손 끝에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10kg나 되는 이 녀석들을 모조리 청귤청으로 담그기로 했다.

큰 대야에 청귤을 모조리 쏟아 붓고 식초와 베이킹파우더를 투하했다. 당 구공을 만지듯이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씻어준다. 잔여 농약이 묻어 있을까 봐 세 번 정도 깨끗한 물로 따로 헹궜다. 살충제 달걀이니 뭐니, 요즘 하도 난리라, 샤워기 출력을 최대로 해서 다시 한 번 세척하고, 뜨거운 물로 헹궈 내보기도 한다. 깨끗한 수건으로 청귤 하나하나마다 물기를 제거하고 꼭지를 딴다. 꼭지 는 앞꼭지와 뒷꼭지 모두 제거해줘야 한다. 나중에 청을 담그게 되면 그 부 분만 따로 분리되어 나와서 둥둥 떠다니게 될 수도 있다. 마시면서도 이게 벌레인가, 하며 의심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번거롭더라도 해주는 게 좋다. 10kg 분량을 다 제거 하고나니 뒷목이 뻐근하다. 라임도 조금 준비했다. 청귤과 함께 놔두니 색이 많이 차이나지 않지만 향은 완전 다르다. 청귤은 친숙한 귤냄새 가 어렴풋이 나는 반면, 라임은 라임의 존재감을 뿜고 있다. 갑자기 모히또에 청귤과 라임을 함께 넣어 먹으면 맛있 겠다는 생각이 들어 베란다에서 허브를 뜯어 한 잔 만든다. 휴가가 별 거 인가 싶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슬라이스. 잘 드는 칼을 더 날카롭 게 갈아서 청귤을 슬라이스하기 시작했다. 얇게 슬라이 스하면 금방 과즙이 우러나서 빨리 먹을 수 있지만, 나 중에 과일의 모양이 제멋대로다. 이번에는 애쓰지 않고 두꺼우면 두꺼운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과일청을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밀폐유리병 안에 과일과 설탕을 켜켜이 쌓아나가는 것과, 큰 통에 과일 과 설탕을 넣고 뒤적이면서 우러나게 한 뒤에 병에 넣는 것. 두 가지 방법 다 과일과 설탕의 비율은 1:1으로 해야한다. 나는 주로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한다. 설탕을 계량해서 슬라이스 한 청귤과 버무리고 조금 있다 또 뒤적이고, 또 뒤적인다. 과일이 다치지 않게 살살. 주 걱으로 하는 것보다는 위생장갑을 끼고 뒤적이는 게 편리하다. 다음에는 과일청용 고무장갑을 사놓아야겠다. 뒤적 일 때마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것 같았다. 4kg짜리 과일청 밀폐용기가 3개가 가득 찼다. 사흘 뒤, 차를 한 잔 내어봤다. 아직은 가을의 초입, 찻잔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한 모금 넘겨본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 던 서울의 봄, 그에 비해 너무도 청량했던 제주의 봄. 어 떻게든 둘이서 잘 살아보고 싶었지만 긴긴 터널의 끝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더듬거렸던 그 봄이 떠오른다.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지는 않다. 대한민국의 70%는 산이고, 터널은 너무도 많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건축이 좋아 42. 동주를 찄아서. aoikasa

윤동주를 좋아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 윤동주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그 때부터였을까 . 막연히 그냥 하늘과 바람 , 그리고 별을 노래하던 시인이 좋았고. 자신을 미워했다가 가여 워했다가 하는 시인의 마음이 뭔지 왠지 알 듯 하여 ( 그 어린 마음에도 ) 동질감을 느끼기 도 했고, 교회당에 걸린 십자가를 보 며, 그 언젠가 십자가를 노래하던 시인을 떠올리기도 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되 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윤동주의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 핀슨홀과 정 병옥 가옥, 그리고 용정 윤동주 생가까지. 최근 삶 속 깊은 곳에 들어와 버린 동주의 장 소들을, 동주를 찄아 이야기해보려 한다.

윤동주의 기일인 2 월 16일의 윤동주 시비와 핀슨홀 풍경


핀슨홀 윤동주가 다녔던 연희전문, 현재의 연세대학교 안에는 ‘ 서시’ 가 쓰여진 윤동주시비가 있고 그 뒤편으로는 윤동주가 살았던 핀슨홀 이 위치하고 있다. 오랜 시간 그 곳을 지나면서도 사실상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핀슨홀에 관심이 생긴 건, 어느 날엔가 이 곳이 윤동주 가 살던 기숙사였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동주가 머물렀을 방의 위치 등은 알 수 없지만 , 그래도 이제 몇 채 남지 않은 교내의 오래된 건 물 속 그의 흔 적을 찾아보고 기억해보고 싶었다. 1917 년 연희전문이 현재의 신촌캠퍼스에 자리잡게 되며 1922 년 기숙사로 지어진 핀슨홀 . 석조 3 층으로 지어진 이 기숙사는 50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근처의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 아펜젤러관에 비해 장식도 없고 비교 적 단순하고 정갈한 이 건물은 아마도( 현 재는 그 형태가 다소 변해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 1 층 부분의 모습으로 추 정하는 바) 중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방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곳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은 바로 3 층 다락층의 창문 이다. 경사지붕 사이로 튀어나온 도머창으로 보 이는 하늘은 이 건물에 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 이제는 건물들로 가득찬 교내이지만, 유독 이 곳에서 보이는 풍광은 그 복잡함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만약 동주가 3층의 이 방을 썼다면 , 아마도 이 창을 통해 푸른 어둠 속 의 하늘을, 그 가운데 빛나는 별을 보았겠지. 당시 이 기숙사가 위치한 곳은 숲 속이었으 니, 이 창을 통해 숲 속의 바람도 불어왔겠지 . 이 창을 바라보며, 동주가 하늘과 바람과 별을 바라보고 느꼈을 상상을 해 본다.


정병욱 가옥 정병욱 가옥을 알게 된 건, 김응교 시인이 쓴 ‘ 처럼’ 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윤동주의 유 고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정병욱의 고향집. 이 집의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결국 망덕포구에 위치한 정 병욱 가옥에 방문하였다. 정병욱 가옥은 섬진강 하류 의 망덕 포구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상 서울에서부터의 거리가 매우 멀기에 정병욱 가옥을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 그 힘듦은 망덕 포구를 바라 보자마자 다 풀 리고 말았다 .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의 드넓은 섬진강과 그 주변의 작은 집들, 이전 그대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은 포구로, 그 자체 로도 매우 아름답다. 망덕포구에서는 봄에는 벚굴, 가을에는 전어를 맛 볼 수 있다고 하 니, 눈과 입이 다 즐거울 수 있는 곳이다. 정병욱 가옥은 이 망덕포구에 위치한 1925 년에 지어진 양조장을 겸한 점포주택인데 , 이 건물이 유명한 건 , 정병욱 의 징병 이후 윤동주의 시집을 이 곳의 마루 아래에 보 관했기 때문이다 . 목조로 된 이 집은 망덕포구에 면한 쪽은 상점이, 그 뒤편으로는 집이 위치하 는 구조를 가졌는데 , 뒤편으로 돌 아가면 양조장으로 사용하던 시절 사용하였을 듯한 아 궁이와 굴뚝들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은 도로 확장으로 망덕포구와 조금 떨어졌지만 , 이 전에는 집 바로 앞의 포구를 통해 술을 실어 날랐을 것이라 상상을 해 본다. 근대문화재 등록 이후 다소 그 외관이 변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점포주택이 이젠 거의 없는 상황에 서 이 집의 존재는 반갑기만 하다.


명동촌 그리고 윤동주생가 간도의 명동촌은 19 세기 중반 이후 흉 년을 피해 간도로 간 사람들의 정착지 중 하나이 다. 이번 여름 만주에 갔다가 연길을 들 리게 되었고, 연길에 간다면 가장 가고픈 곳은 단 연 용정이었기에 짧은 일정 속에서 백두산도 마다하고 용정으로 향했다. 영화 ‘동주 ’ 속 동주와 몽규가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던 그 길자락의 풍경을, 밤 늦게 백석의 시집 을 필사하던 밤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용정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곳을 찾으면, 대성중학교와 명동촌이 나온다. 대성중학교 앞에 가면 윤동주의 흉상과 시비가 서 있다 . 동주가 다닌 학교라는 소개와 함께 윤동주 교실 을 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 사실상 동주가 다닌 건 은 진중학으로 엄연하게 말하면 이 곳에서 동주가 수업을 듣고 학교를 다니진 않았다 . 다만, 은진중학이 이후 대 성중학으 로 통합되었기에 대성중학교가 동주의 모교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은 1996년 복원 된 것인데 , 이전의 형태가 얼마나 남아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알 수가 없을 거 같 다.


(명동교회와 윤동주 생가. 언덕 위의 한옥집이 명동교회이고, 언덕 아래 툇마루가 있는 집이 윤동주 생가이다.)


대성중학교를 나와 20 여분을 차로 달리면 드넓은 옥수수밭이 펼쳐지다 명동촌 이 나온다. 그야말로 장소의 기운이 좋은 곳이랄까. 도로에서 아래로 펼쳐지는 마을을 바라보노라면, 터가 좋은 마을의 형세를 느낄 수 있다. 이 곳에서 동주와 몽규가 자라났겠구나, 이 곳에 서 규암 김약연 선생님이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통해 간도의 조선인들을 가르치고 보살 폈겠구나 생각하며 마을 입구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로 향했다. 한참 단장을 한 결과일까 , 윤동주 생가는 꽤나 화려하게 (?) 포 장이 되어 있었고 잘 정돈 된 권역 안 곳곳에는 동주의 시가 한국어로 그리고 중국어로 쓰여 놓여 있었다 . 입구로 들어가면 처음 만나는 건 명동교회와 규암 김약연 선생의 비. 성경책을 펼쳐놓은 듯한 비 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버릴 수 밖에 없을 듯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고, 명동교회는 아직 복원을 하지 않아서인지 시골의 작은 교회와 같은 모습이었다. 명동교 회 를 지나면 윤동주 생가라는 한옥이 나오는데 , 이 한옥은 북부형 민가, 즉 대청마루가 없 이 가운데 정지간(부엌)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그 리고 앞뒤로 방이 위치하는 겹집의 구조 를 가지고 있었다. 추운 지역이기에 한옥의 중 심공간이라할 수 있는 대청이 없는 건 당연 한 일 . 대신 불을 쓰는 정지간이 중심이 되는 북부형 겹집은 남한의 우리에게는 낯설기도 신기하기도 하였다. 재밌는 건, 이 윤동주 생가도 사실상 진짜 윤동주가 살았던 곳은 아 니라는 점이다. 인근마을에 있었던 비슷한 집을 옮겨놓은 거라는 데 , 그 어디에도 그 런 설 명은 없어서 모르고 보면 정말 윤동주가 살았던 곳이구나 오해할 듯 하다. 아무튼 이렇게 비슷하게 생긴 집에서 100년전, 정확하게 100년 전에 동주가 태어났겠구나 싶어, 그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이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윤동주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이제 복원을 거의 마친 명동학교가 서 있다. 검은 벽돌의 단층 건물. 당시에도 이리 멀끔한 외관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이 작은 학교에서 어린 동주와 몽규가 김약연 선생에게 배웠을 것이다. 이 곳에 서 있노라면 간도의 땅에서 추운 겨울과 뜨거운 여름을 나며, 민족을 잊지 않았던 그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이 곳에서는 윤동주를 조선족 애국시인이라 부르는데 , 그에 대해 거


부감을 표하는 한국인들이 꽤 많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명동촌에서 나고 자란 윤동주가 지금의 조선족들의 선조격인 건 분명한 일, 우리는 그토록 동주를 민족 시인이라 일컫고 자랑스러워하면서 과연 조선족들에게는 그 것의 반, 아니 반의 반만큼이라도 관심 을 가지고 있을까. 관심이 아닌 혐오가 오히려 퍼져 있는 현재를 생각해보니 괜히 더 미 안해지고 안타까워진다. 명동학교에서 나와 골목을 돌아나오면 송몽규의 집이 보인다. 동 주의 집에서 뛰어서 5 분도 안 될 거리, 그 거리를 둘은 수도 없이 뛰어다녔겠 지. 그렇게 이 곳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 푸른 옥수수 밭을 바라보며 자란 둘은 끝 없이 이 곳의 하 늘과 바람을, 이 곳의 별을 그리워했겠지 .

동주와 몽규의 묘소까지 가고 싶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해 결국 가지 못했다. 이 국 땅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두 분의 영혼이 고향에서 비로소 쉬고 있을 그 곳을 가보 지 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난 약 2 년간 동주를 따라다니던 그 여정에 마침표 , 아니 쉼표 하 나를 찍어보았다. 간도의 파란 하늘을 보며 동주가 이야기하던 하늘이 무 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하늘은 여전히, 그 곳에 , 있었으니 말이다.


수면을 걷는 사람들

글. 장수양(@condensed_bold) 사진. @photo.j.keith


7 유下

유영은 멍하니 창밖을 본다. 지금은 뿌연 먼지로 바깥 풍경이 흐릿한데 그 날은 창밖의 모든 사 람의 얼굴이 뚜렷하게 잘 보였다. 그래서 창문이 표정과 인상으로 득실거리는 것 같았다. ―가는 길에 소나무 꼭 찍자. ―응. ―까먹으면 안 돼. ―사실, 안 찍어도 상관없어. ―중요한 곳이야. 보리차를 마시던 유영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손수를 보고 있다. 손수는 여전히 산채비빔밥에 숟가락을 넣고 다 먹은 것도, 먹고 있는 것도 아닌 채로 눈을 깜빡인다. 뒤석여 있다. 더없이 뒤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서 색깔이 다른 나물들을 헤집는다. 유영은 그렇게 중요한 곳인가, 하고 중 얼거린다. 소나무에 관해서는 그늘에 누워 잠을 잤던 것 말곤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그늘의 가장 어둡고 시원한 곳을 찾아 풀밭에 등을 대고 눕는다. 오랜 친구인 쌍둥이가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 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잠들기 직전 유영은 눈을 감은 채로 손유와 손수의 목소리를 구분해 본다. 늘 함께 있어서 말투마저 비슷해진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비슷하다. 유영은 오랜 시간 끝 에 그것을 잘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보다 높고 잘 들리는 쪽이 유의 목소리다. 톤은 비슷하지만 수의 목소리는 더 낮고 희미하다. ―어디서 왔지? 유는 테니스 공을 들고 소나무 가지 너머를 바라본다. 어디선가 이 공이 날아왔다. 수는 물을 마시다가, 너도 마실래, 라고 묻는다. 유는 고개를 가로젓고, 공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본다. 수는 그 공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하지 않다. 유가 먼 하늘을 가로지르는 로켓 구름에 시선을 빼앗길 무렵 수는 다시 물을 마신다. 병은 투명하고 안에 있는 물은 찰랑거린다. 끊임없이. 흔들림이 멎 을 때까지 자신도 멎어 본다. 병 속의 수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수는 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 해 여름에 짧게 자른 유의 단발머리가 작은 움직임에도 넓게 흩어진 다. 여름의 공기가 이동한다. 짧은 바람이다. 흰 공을 쥔 유가 수를 보면서 웃는다. 어떤 비밀을 말할 것 같다. 조용한 말투로. 그들이 있는 곳 은 그늘이다. 불거진 뿌리의 일부를 벤 채 유영은 자고 있다. 수는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수묵화 에 들어갈 법한 소나무, 산등성이 같은 나무의 허리. 그 곳에 곧잘 눕곤 했다. 불편해져도 좋아. 나 비밀이 있어. 쌍둥이는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다.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서로의 표정을 알기 때문이다. 저기 언니들 봐봐. 유가 손가락으로 벤치 주변을 가리킨다. 무심한 표정의 무리가 음 악을 듣거나 작은 소리로 말하고 있다. 소나무 그늘에 불던 짧은 바람이 거기까지 닿은 듯 사람들 이 담겨 있는 화면은 일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수는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 금요일이면 자 유공원에서 그들끼리 무리를 짓는 것도. 그러면서도 별다른 유대감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것도. 저 사람이야. 유가 말하자 그 중에 한 사람이 마치 부른 것처럼 고개를 든다. 사귀고 있어. 유 의 말에도 수는 놀라지 않는다. 유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본다. 유와 같은 짧은 단발, 흡연구역


의 잔디처럼 잿빛이다. 그 사람은 사진기를 손에 쥐고 있다. 곧 찍을 것처럼, 렌즈를 눈에 가져다 댄다. 이쪽을 겨냥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소녀는 이쪽을 향해 서있다. 수는 사진기 속에 담 기고 싶지 않다. ―어때? ―뭐가. ―내가 싫어졌어? 수는 멀리 있는데도 곁눈질로 키가 큰 사람을 본다. 유보다 한두살 많아 보이는 그 사람은 언 뜻 유의 뒷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짧은 바람 같은 그런 비밀이라고, 수는 생각한다. ―테니스 공 돌려주러 가자. ―이거?


유는 테니스 공을 쥔 채 웃고 있다. 마지못해 웃는 것일까. 그렇게 웃고 있는 사람은 수일지도 모른다. 유영은 부스스하게 일어난다. 소나무 가지에서 막 뛰어내린 사람을 보며 영문도 모르 고 웃는다. 누군가 그늘 속의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라고 해도 이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늘 속의 세 사람은 사진기 속에 담겼을까.

―누구한테 찍어달라고 하자. 어느 여름이라는 것만은 달라지지 않은 채, 손수는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소나무의 품은 생각 만큼 아늑하지 않다. 소나무의 잎은 풍성하지 않고, 그늘의 폭은 생각보다 좁다. 소나무 밑에 팔 다리를 뻗고 온힘을 다해 끌어안으면, 그늘은 가슴에도 온전히 다 드리울 것 같다. 손수는 그늘 에서 시선을 떼고 공원의 탁 트인 터를 응시한다. 자유공원에는 테니스 코트라든지, 자전거 도


로나 식물원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저 탁 트인 터와 가장자리를 빼곡하게 메운 나무들이 있을 뿐 이다. 간간히 터를 비집고 둥글게 깎인 잔디밭과 그것을 휘감은 산책로가 있다. 이제는 밤에도 자동차극장의 불빛을 볼 수 없는 주차장, 자세히 보면 양각으로 꽃이 세겨진 벤치들, 따뜻한 김 이 새어나오는 포장마차들, 엇갈려 있는 횡단보도……가로등이 촘촘해지는 구간을 지나 주차장 의 모서리를 감싸고 먹자골목이 뻗어있다. 사람이 가장 북적거리는 곳. 창가에 앉으면 공원의 정 경이 곧바로 보이는 음식점들은 모두 오래되었다. 장사가 잘 되는 위치다. ―사람 참 많다. ―그러게. ―너무 많아서 누구한테 부탁할지 모르겠어. ―너만 찍어. 내가 찍어줄게. 내가 널 찍을게. 손수가 유영에게서 사진기를 가져가려 하자 유영이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흔든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있다. 사람들이 그들 곁을 지나간다. 손수와 유영 둘만 찍은 사진 은 아직 없다. ―나무만 찍을까? ―그래. 유영이 사진을 찍는 동안 손수는 그를 등지고 선다. 이미 해가 지는 중이다. 어두운 와중에 검 고 곧은 그림자가 땅 위에 대각선으로 뻗었다. 그것은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다. 사방에서 사방 으로. 조금씩 겹쳐지면서. ―지금은 어디에 있어? ―소나무 가지에 앉아있어. ―유령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어? ―아니. 돌아서서 손수는 유영의 뒤통수를 본다. 땀에 젖었다가 말라서 약간 뻗친 머리카락을 본다. 손 수는 문득, 유령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유령이 실제로 있지 않다면 유영은 단지 유령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인 게 아닐까, 그러면 유령은 거기에 없는 걸까. 유영은 소나무를 열중해서 여러 번 찍는다. 찰칵 찰칵 소리가 난다. 플래시가 터지기도 하고 그러지 않기도 한다. 유영은 소나무를 향해 서있다. 소나무보다는 손수가 유영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손수는 유영의 등 뒤에서 사진의 좁은 프레임 속에 담길지도 모를 유령을 생각한다. 여기에서 뭘 하는 걸까. 손수는 입속으로 말한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면 앞으로 뭘 하려는 거지? 사람들의 걸음소리가 빗소리처럼 촘촘하다. 상점에서, 건물과 간판과 먼 아파트에서 초저녁의 어중간한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걷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통이 도시의 윤곽선을 이루 고 있다. 음영을 받아 표정과 눈빛이 보이지 않는다. 실루엣만 남은 사람들의 무리는 흔들리고 움직이는 뿌연 것들로 빼곡하다. 그것은 비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지 사이에 누워있던 사람 사실은 나야. 손수는 유영의 뒷모습에 대고 자신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그녀는 한 걸음씩 옅어진 그늘 바깥으로 물러난다. 흘러가는 선들 속에 자신이 묻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그릇이나 틀 속에, 알아볼 수 없는 환영과 유령 속에 잠기고 있다. 잡음을 헤아리거나 거리의 사 람 수를 세지 않듯 손수는 긴 무심함 속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복잡해서 너무 단 순해져버린 저녁 냄새와 색채들이 멀어진다. 유영은 소나무를 보며 손유의 결혼식을 떠올린다. 손수는 혼자 자신의 집 식탁에 앉아있던 유영에게 다녀왔어, 라고 문자를 보냈다. 정말 그와 결 혼했을까, 정말 손유가 호주에 있을까 하고 가끔씩 의문이 들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일어 난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자주 대화하지 않는다. 피곤하거나 속이 좋지 않을 때 그저 혼잣말처 럼 말해볼 뿐이다. 몇 년 전 손유의 생일날 손수와 유영은 연락이 뜸했던 손유와 함께 날을 샌 일이 있다. 자유공 원의 한 켠에서다. 나풀거리는 파란 원피스를 입은 손유의 어깨부터 목덜미까지 기다란 상흔이 보인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친 상처라고 손유는 말한다.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었어. 그렇지만 깨닫고 나서는 이미 낯설게 느껴졌어. 낮에 마시기 시작한 것이 밤까지 이어져 그들은 새벽을 하얗게 샌다. 모든 일은 처음 같다. 첫 대화와 첫만남, 첫인상과 첫경험처럼 낯설고 신비 로운 일이다. 모든 기억이 희미하게 날아가서 더 그렇다. 그 밤 손유는 호주에 정착할 것을 털어 놓는다. 만나자마자 술 한 잔 하자고 말했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수는 이유를 묻 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유영은 잠자코 술을 마신다. 그와 손유는 한 달 전에 결별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수은등 빛과 풀냄새를 잊어버리기 위해 유영은 말없이 술 을 마신다. 정신을 놓아버릴 만큼 마시면서 유영은 지금껏 그가 만지고 더듬던 견고한 막이 깨어 져 버리는 소리를 듣는다. 잡음 속에 섞여 잘 들리지는 않지만, 손유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작게


말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지금껏 해왔던 모든 일을 싫어해. 정말 미안해. 그렇지만 이해해주지 않아도 돼. 쌍둥이는 격렬하게 대화를 나누고 어느 순간에는 싸운 것 같기도 하다. 거짓말처럼 웃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선물은 뭘 살까?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손수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촘촘하게 뒤석여 흘러가는 사람들이 보 인다. 유영은 다만 거리에 놓여져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도 잡히는 것이 없다. 유영은 사진기 를 목에 걸고 자유공원을 응시한다. 만연한 밤이라 네온사인과 헤트라이트가 선명하게 빛을 올 린다. 불빛의 한 가운데 자유공원은 어쩐지 에코 효과처럼 울리는 소음을 품고 있다. 유영은 문 득 오늘이 손수의 생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그늘이 사라진 소나무 밑에 털썩 앉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유영이 혼잣말처럼 말한다. 풀밭을 짚은 손 근처에서 모기가 엥엥거린다. 밤의 화려한 불빛과 혼잡함을 유영은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그는 저항 없이 눈을 감고 작아진 나무에 등을 기댄다. 눈꺼풀 속에선 아직도 옅은 불빛이 흔들리고 있다. 그는 눈 속에서 오늘 먹었던 산채비빔밥과, 만났을 때 약간 취기가 감돌던 손수의 표정을 볼 수 있다. 누군가와 닮았지만 다른, 이제는 흐려지고 있는 표정……유영은 많이 지쳐있다. 손수도 손 유가 떠나고 나서 흔들렸을 것이다. 무엇으로 인한 흔들림인지에 대해 유영은 한동안 생각한다. 그리고 흔들려도 계속 서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주먹을 쥐어 풀잎을 조금 뜯어 낸 뒤 손바닥을 펴본다. 짧은 바람에 손바닥 위의 풀잎들이 날리는 것이 느껴진다. 생일 축하해. 유영이 말한다. 그의 곁에 유령은 보이지 않는다.


백伯 림林 서書 신信

Composer B

05. 멋진 하루

잘 지냈어? 나는 간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식사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사람들도 나만큼 즐겁고 행복했기를 바라. 어쩌면 사람에 따라서는, 내가 그들과 겨우 6개월 만에 만났다는 걸 알면 나를 좀 유난스럽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 6개월 보다 훨씬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만날 수 있게 된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과 함께 하루 종일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생각났던 영화가 있어. 혹시 하정우와 전도연이 출연했던 영화 『멋진 하루(2008)』를 본 적 있어? 영화는 희수(전도연 분)가 헤어진 전 남자친구인 병운(하정우 분) 에게 빌려줬다가 받지 못한 돈 350만원을 받아 내기 위해 1년만에 병운을 찾아가면서 시작돼. 병운은 급전이 필요한 희수에게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이 말을 경마장에서 참 잘도 하더라), 지인들을 찾아가 돈을 받아서 바로 갚아 주겠다며 희수의 차를 타고 하루 종일 서울 시내를 함께 돌아다니지. 영화는 자가용으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는 두 사람과 그들이 나누는 지나간 이야기들 혹은 지금의 모습들을 느린 템포로 그려낸단다. 그들의 지나간 이야기는 딱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궁상 맞지도 않아. 지금의 모습들 역시 화려하거나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에게 더 잘 보이려고 허세를 부리거나 악의에 찬 가시 돋친 말을 내뱉지도 않고 말야. 헤어진 연인들이 그렇듯 은연중에 빈정거리는 말을 하기는 해도, 그 역시 서로에게서 왠지 모를 ‘짠’한 모습을 읽어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가 가장 잘 표출된 장소는 ‘승용차’라는 공간의 운전석과 조수석이 아닐까 싶었어. 두 사람은 분명 같은 공간 안에 있긴 하지만 서로 다른 입장과 상황에 처해 있고, 그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옛날엔 이랬지, 지금은 이렇지’ 하는 헤어진 연인의 그것이잖아. 멀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가깝다고 할 수도 없는 거리. 분명 손을 뻗으면 쉬이 닿을 것 같지만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둘 다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기에, 어쩌면 평생동안 망설일 것만 같은 그 거리. 거기서 유발되는 ‘ 나른한 긴장감’이 참 매력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음… 매력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이상한 만남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쩌면 희수의 목적인 ‘350만원’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야. 나는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답답한 상황에 처한 희수가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병운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서, 혹은 미처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350만원이란 핑계를 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어쩌면 이 영화에서 350만원은 ‘맥거핀’ 비슷한 거라고 해도 좋을 것 같고. 시종일관 즉흥적이고 주책 맞아 보이는 병운이 희수의 구두끈을 묶어주는 장면에서 하는 말이 있는데, 희수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견인 당한 차를 찾기 위해 함께 탄 지하철에서 병운의 꿈 이야기를 듣는 희수는 단순히 병운이가 꿈 속에서 “너 괜찮아? 많이 힘들지?” 라는 말을 들었다는게 안쓰러워서 눈물을 흘렸던 걸까? 희수가 단순히 떼인 돈 350만원을 받기 위해서 병운을 보러 간 사람이었다면 그토록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하루 종일 멋지고(?) 피곤한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의 하루는 희수가 병운을 늦은 밤의 지하철역에 내려주며 끝나게 돼. 병운은 희수의 차에 마늘즙-희수가 딱히 반기는 것 같지는 않지만-을 두고 내려. 그리고 희수는 유턴을 해서 돌아가는 길에 거리의 시음 코너에 들른 병운을 사이드 미러로 슬쩍 쳐다본 뒤 자신의 갈 길을 가. 그러다 피식 미소를 지어.


왜 였을까? 더 이상 웃어줄 수 없는 사람을 보고서 웃은 이유는. 뭔 놈의 영화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하냐구? 그날 하루를 보낸 뒤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 그랬어. 내가 돈을 빌렸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저 영화 생각이 나기도 했고. 아무튼 나는 이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때까지 각자의 삶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길, 그리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만남이 우리의 숱한 만남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도 많이 슬프지는 않을 것 같아. 보고싶지 않다거나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그는 언제나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거든. 그 삶의 구석진 어느 자리에 우리의 멋있었던, 혹은 불편했을 수도 있었던 하루가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지. 그냥 나 혼자만의 낭만이려나? 어쨌든 나의 친애하는 적에게(『My Dear Enemy』) 꼭 건승과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어. 지극히 주관적으로,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 중 가장 멋진 사람 중 한 명이기에,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 시켜줬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들어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하진 않겠어.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이 길어졌다. 또 편지할게.


지진파

재미있다.

책을 펴기 시작하면 속도가 붙고 읽지 않을 수 없게 독자를 밀어붙인다. 내가 주진우 기자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정말 남들이 알기 힘든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목적이 오직 자신의 이익 때문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 쉽 게 사는 방법, 그도 찾으려고 들면 분명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버틴다. 사람이 버티 는 것 만큼 슬픈게 없다.

사람들이 눈치채지는 못하지만 주진우 기자의 문장은 깔끔하고 좋다. 심지어 왠만한 작가들도 없는 자신만의 문장 리듬도 있다. 읽지 않을 이유가 있겠나.

가치관과 실천 글 자체의 재미와 문장력이 있는데 뭐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두번 사라.


타라로사에서 근무하는 이윤선 씨가 지은 책으로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만으로 부족함을 느끼거나 보다 다양한 맛에 눈 뜬 사람들이 찾 는 드립을 생각하다 보면 원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럴 때 재미있게 볼만한 책.

기본 지식이 있다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초심자가 보기에는 어렵거나 이해 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내용이 많은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여러가지 원두를 테 스트 해본 경험이 있고 맛을 기억하고 있지는 못해도 커피의 맛에서 원두에 대한 고민 을 하고 호기심을 가져본 사람들이 보기 좋은 중급자용 도서.

같은 맥락에서 이런 도서가 흔치 않기 때문에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I MB U 글. exxx

주진우 기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쫓느라 한창인 와중에 관련 책을 내고 관련 영화가 나왔다. 책은 <주진우 기자의 이명박 추적기> 라는 제목으로 영화는 < 저수지 게임> 이라는 제목이다. 여기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주 기자의 지인인 이승환은 <돈의 신> 이라는 음악을 내놓았다. 음원의 높은 수준이나 놀라운 사운드, 믹싱 기술이야 그렇다 치고 그중 필자의 머리를 때린 가사가 있으니 한번 살펴보자. - 늬들은 고작 날 욕하거나 조롱이나 하지 ( 부러워 하지 ) <돈의 신>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비디오 속의 인물이 가사를 읊조리는 형태의 연출이 되어 있는데, 이 중“부러워 하지 .”라는 구절이 흥미롭다. 여기서 이 글은 시작된다. 사람들은 흔히 MB를 조롱하거나 비난한다. 각자의 소신과 재임기간 중 MB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패배자의 마음으로 접근해서 그런거라도 안하면 답답하고 억울해서 그거라도 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가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승복해야 한다거나, 솔직하게 그의 실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의 인간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고 당선된다는 것은 일정 부분 사람들이 그 사람의 안에서 뭔가를 보고 느끼고 공감하고 또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하나의 극점이라면 우리는 그 스펙트럼이나 방향성의 어디쯤에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걸 인정하자는 이야기이다. 혹자는 “나는 MB와 다른데? MB는 끝 간데 없이 돈을 쫓거나 집착하는데 나는 안그래.” 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우리 또한 얼마나 집착하고 노력하는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범죄나 그것 보다 미약하지만 지탄 받을 만한 행동을 쉽게 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는 MB 공통점이 없을까.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을까? 투표로 당선이 된다는 것은 독재로 인한 당선이 아닌 이상 우리 모두와 일정부분 닿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선의 공정성이나 각자의 지지와 상관없이 박근혜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 박근혜를 지지했을까 그리고 나에게는 그런 고집이나 무능, 삐뚠 마음이 없을까? 종교 국가에서 강한 원리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 역사를 사과할 줄 모르는 총리가 득세하는 것 모두 일정부분 궤를 같이 한다. 돈이나 선전에 의한 지배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로 그것이 전부이고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단 한 순간도 지지한 적은 없지만 그가 돈을 쫓는 것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하려 하는 것, 비열한 수를 쓰는 것, 거짓말을 하는 것 등등 여러 부분에서 나와 닮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와도 닮아있고 어머니나 아버지와도 닮아있다. 그것은 아주 크지 않지만 내 안에 어떤 면모들이 어느 순간 극대화된다면 저런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정말로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솔직히 누구도 자신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대박나세요.” “부자 되세요.” 등의 유행어를 광고나 매체에서 신나게 쓰던 시대를 거쳐오지 않았는가. 농담같은 이야기지만 그 모든 열망이 모여서 MB가 된 것 아닐까. 그런 이유로 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법적인 처벌을 받는다고 사회가 극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벌을 받을 일이 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하고 양형의 크기도 한 일을 생각했을 때 커야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앞으로 가기 위해서라면 단순히 누군가 처벌을 받는 정도로는 바퀴는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사람 잘못 봤네 정도가 아니라. 더 깊숙한 곳 자신의 안쪽에 내밀하게 자리하게 두었던 어두운 부분들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누고, 돌아봐야만 우리는 정말 앞으로 갈 수 있다. 마음을 발로 쿡쿡 눌러 땅을 다지고 다음 계단을 올라야 하는 것이다. 어떤가 우리는 정말로 MB를 시기질투 하지 않는가? 내 안의 MB를 인정하고 있을까? 언젠가 MB의 잘못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법적인 처벌을 받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정말로 함께 반성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손가락질 이나 좀 하다 말까? 나 와 너를 잇는 ENVY 를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괜찮아 3 개월

인생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줄까. 마음에 구멍을 내버리는 이별, 환희로 들뜨게 하는 반가운 소식, 도저히 그 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만 같은 나쁘고 좋은 일련의 사건들. 우리의 과거를 채색한 그 지난 일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걸까. 또 앞으로 일어날,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힘든 그 작고도 큰 일들은 또 얼마나 우리를 흔들까. 좋게든 나쁘게든. “벌써 일년”이란 노래가 있다. 너랑 헤어진 지 벌써 일년이 됐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들 했지만 난 아직도 안 괜찮아. 아직도 널 기다려. 그런데, 사실 유효기간은 3개월 쯤이라고 말하는 논문이 있다. 삶의 사건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행복감에 오래도록 영향을 주지 못한다며.


논문은 2년 간의 종단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종단 연구란 쉽게 설명하자면 시간에 따른 변화 추이를 지켜보는 연구 방식이다. 이 연구의 경우에는 2년 동안 참가자들의 행복감을 삶 만족도와 정서로 나누어서 측정하며 그 변화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최근, 즉 근 6개월 이내에 일어난 일들은 현재의 삶 만족도, 긍정적 정서, 부정적 정서에 영향을 주고 있는 데에 반해 상대적으로 먼 과거(정확히 말하자면 7개월에서 4년 사이)의 사건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현재의 삶 만족도나 정서에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6개월 이내의 사건들 중에서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실상 3개월 이내에 발생한 사건들만이 삶 만족도, 긍정적 정서, 부정적 정서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일들이 평균적으로는 현재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면, 각자의 행복에 지속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건 참가자들의 성격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고 나쁜 일들은 물론 그 당시에는 우리를 흔들어놓지만, 그 영향이 생각만큼 오래 가지는 않는다. 한 3개월쯤 지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기본적인 상태(기저선 혹은 baseline)로 돌아간다. 평균적으로는 그렇다. 다만 예를 들어 실직처럼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 자신의 전반적인 일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사건이라면 예외가 될 수 있다. 잘 읽다가 마지막 줄을 읽고 나니 당신도 그 예외에 속할 것 같다고? 이별의 흔적이 일상의 모든 곳에 있다고? 일단 3개월을 견뎌 보시라.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가끔은 야속하게도.

Suh, E. M., Diener, E., & Fujita, F. (1996). Events and subjective well-being: Only recent events matter.

글. 민하 : minha@berkeley.edu 재밌는 거 뭐 있나 늘 딴 짓을 하고 싶지만 현업인 심리학을 하는 와중에 재미있게 읽은 논문들을 야매로 소개합니다. 재미는 좋은 거니까, 그리고 이것도 일종의 딴 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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