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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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영화 리뷰: 두번 본 영화 - 걸어도 걸어도 (2008) / 글. 가람 백림서신 - 06. 만약에 우리 / 글. composer B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 포스터 칼라와 과슈 / 글. 사탕고양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 03. 적응의 기술 / 글. 권근혜 만든다오 - 06. 세면대 부재중 / 글. 사진. 진선 I MB U 2화. 사대강 / 글. EXXX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줘 / 글. 민하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유례가 없는 긴 휴일이 지나고 모두 일상으로 돌아간 지금에야 편집을 마칩니다. 10월 초순이라기 보다 중순이죠. -_-a 그렇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휴가 특혜를 이용해 게으른 월간 발행의 새 지평을 열었습 니다. 이른 마감을 한 필자는 아니 책 나온지 며칠 되었는데 또 원고를 내라고 하냐고 항의 할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날씨가 참 좋아요. 말을 돌리면서 도망치기도 좋은 계절입니다. 저는 요즘 자전거를 즐겨타는데 정말 자전거 타기 좋은 날씨 입니다. 어린시절이 생 각나는걸 보면 조금 늙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무튼 동심을 유지하면서 사시 기리를 기원해 봅니다. 늘 다짐하듯 다음달에는 정신차리고 돌아오겠습니다. 이런 이야기 술 마시고 들어온 아버지 한테 많이 들었었죠... 쩝

월간이리 exxx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영화리뷰 : 두번 본 영화 걸어도 걸어도 (2008) 감독 고에레다 히로카즈

요코야마 집안의 장남, 준페이의 15주기를 맞아 집안에 온 가족이 모입니다. 노부부 내외와, 딸 지나미네 가족, 막내아들 료타네 가족이 전부이긴 하지만 이렇게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날은 일년 에 한 번 남짓한 일. 차남인 료타는 부모님 댁으로 가는 것이 불편합니다. 물론 차 없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한다는 물리적인 이유만은 아닙니다. 얼마전 자신과 결혼한 ‘애 딸린 과부’를 부 모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척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요. 오래 전부터 진로 문제로 아버지와 갈 등을 겪어 사이가 좋지 않은데, 지금 자신이 실직 중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죠. 요코야마 가족의 1박 2일을 보여주는 영화 걸어도 걸어도 (2008, 고레에다 시로카츠 감독)는 아 들과 아버지의 갈등 외에도 노부부의 관계, 시모와 며느리의 관계, 시모와 사위의 관계, 할아버 지와 손주들의 관계 등 가족 안에서 다양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형성되는 갈등과 감정을 사실 적으로 그려냅니다. 그래서인지 여느 가족드라마를 생각하며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당황스 러울 수 있습니다. 현실의 가족이 어떤 모습인지를 떠나서, 관객들이 ‘가족드라마’에서 기대하는 가족의 모습은 따뜻함에 기반을 두고 있을 테니까요. 어떤 갈등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족드라 마의 결과는 늘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며 눈물을 찔끔 흘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걸어도 걸 어도 (2008)의 전반에 깔린 분위기는 화목, 따뜻함보다는 가족의 서늘함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 속 서늘함의 중심에는 어머니이자 할머니, 요코야마 도시코가 있습니다. 도시코는 자식들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가슴에 굳은살이 단단히 배긴 전형적인 어머 니상입니다. 세상에서 내 아들, 딸이 가장 잘나고 예쁜 엄마이기도 하죠. 마흔이 넘어 애를 둘이


나 낳은 딸에게 “네 얼굴이 얼마나 예쁜데. 이마를 보이게 해야지”라며 앞머리를 넘겨주기도 하 고요. 변변치 않은 살림에 혼기를 훌쩍 넘어 재혼 여성과 결혼한 둘째아들에 대해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골라 갈 텐데”하며 안타까워하하죠. “고르다 고른 게 하필이면 중고라니”, 혹은 “아이를 낳으면 헤어지기 힘들어”같은 걱정을 자식들 앞에서 굳이 입밖으로 꺼내야 직성이 풀 리는 성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어머니 캐릭터를 가장 서늘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죽은 큰 아들에 대한 상실감일 것 입니다. 15년 전 바다에 빠진 요시오라는 학생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죽은 준페이. 그 이후 어머 니는 매년 준페이의 기일마다 요시오를 집에 초대합니다. 한 끼 밥을 지어 먹이고 그간의 안부 를 묻지요. 15주기날 밤, 작은아들 료타는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료타

저기. 요시오군은 이제 그만 와도 되지 않아요? 이제 그만 부르자고요.

도시코 왜 그래야 돼?

료타

왠지 불쌍해서요. 우리 보는 거 괴로워하는 것 같고

도시코 그래서 부르는 거야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료타

요시오 군이 죽인 건…

도시코 그게 그거지. 부모가 볼 땐 똑같아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가 “저런 하찮은 녀석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니” 역정을 내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과 달 리, 어머니 도시코는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담아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슬픔과 분노를 표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서늘하고, 조금은 섬뜩하기도 한 방법으로 말이죠. 그럼에도 우리가 도시 코를 비난하거나 손가락질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어머 니의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주들이 오면 하루종일 식사는 물론 간식까지 내와 하루 종일 먹이기 바쁜 할머니의 모습. 자신의 그릇에서 밥과 장어를 덜어주는 어머니의 모습. ‘그 사 람 이름이 뭐였더라?’ 하루 종일 머릿속 기억을 짜내는, 늙어가는 어머니의 모습. 가족들을 위 해 어머니가 희생해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의 단점을 목격한 순간에도 무어라 나무 랄 수 없는 것이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번쯤은 마주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라다 요시오가 연기한 아버지이자 할아버지, 교헤이 역도 아주 전형적인 아버지상을 보여줍 니다. 젊은 시절 일이 바빠서 가족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은퇴한 후에 도 가정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고맙니다. 어쩌다 한 마디 내놓는 말은 늘 자식과의 관계 혹은 아 내와의 관계에서 갈등의 씨앗이 되어버리곤 하죠. 이 영화가 ‘사실적’인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 고 표현한 것은, 이런 갈등 속에서도 가족들이 서로의 연을 완전히 끊어버린다거나 아주 등돌 리지는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자식들은 여전히 1년에 한 번이라도 부모님을 뵈러 고향집에 들러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고,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들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손주들에 게 용돈도 챙겨주며 가족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임무를 충실히 해냅니다. 그런 점 에서 이 영화가 가족의 따뜻함을 아예 배재하고 있진 않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처음에 언급했듯 이 대가족은 작은 세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노부부 내외, 지나미네, 그 리고 료타네. 그 중 딸 지나미네 가족은 이 영화에서 화목한 가정의 표상으로 그려집니다. 가정 주부인 지나미와 자동차 딜러인 남편 가타오카 노부오, 초등학생인 사츠키와 무츠 남매. 자본주 의의 가장 이상적인 가정 형태입니다. 첫째 아들을 잃은 노부부, 재혼 가정인 료타네와 굳이 비 교하지 않아도, 지나미네 아주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특히 지나미 캐릭터가 인상적입니다. 이해심많고, 밝은 성격의 지나미는 엄마, 남동생, 올케, 남 편 등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가 서늘한 말을 내뱉을 때 ‘그건 너무 심하 다’며 친구처럼 나무라기도 하고, 아버지의 방문을 두드리면서 ‘오랜만에 모였는데 가족들이랑 얘기좀 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붙임성까지 갖춘 딸. 그리고 남동생이 ‘어머니 아버지가 안사람 에 대해서 무슨 말 안해?’라며 넌지시 물어볼 수 있는 누나. 가족간의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도, 또 준페이의 죽음 뒤에도 요코야마 가족이 완전히 와해되지 않았던 것에는 지나미의 역할이 가 장 컸을 것입니다. 걸어도 걸어도 (2008)의 시네마토그라피는 완벽에 가깝습니다. 집에 들이치는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하여 연출한 집 전체의 분위기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영화 속 가족들의 서먹하고 데면데면 한 분위기에 안 맞게, 영상이 너무 따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 아름다워 감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손때묻은 오래된 집의 내부는 가족이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특히 사위도, 아들도 끝내 고쳐놓지 않은 화장실의 망가진 타일은 서로가 조금씩 엇나간 채 머물러있는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것 같죠. 영화의 마지막, 료타 가족을 배웅하고 계단을 올라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아베 히로시(료타 역)의 내레이션이 덮인 이 장면은 노부부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 을텐데요. 부모님을 회상하는 료타의 덤덤한 목소리는 감독이 영화의 초반부터 설정한 요코야 마 가족의 어색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동안 감정 과잉의 가족드라마에 지 친 분들이 계셨다면 걸어도 걸어도 (2008)를 보시길 추천합니다. 커다란 사건 없이 처음부터 끝 까지 잔잔한 영화이지만, 곳곳에 한 번씩 터지는 그러나 전혀 억지스럽거나 과장되지 않은 유머 들이 있어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의 장점입니다.

글. 가람

봤던 영화 또 보는 게 취미인 학생입니다. 두 번 이상 본, 개취 영화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akakk_@naver.com


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06. 만약에 우리

잘 지냈어? 나는 지금 노래를 들으며 이 편지를 쓰고 있어. 그러다가 몇몇 노래의 가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쩌자고 난 널 알아봤을까, 또 어쩌자고 난 너에게 다가갔을까…”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서로를 만나…”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그건 무슨 희한한 장난일까? 서로를 모르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난다는 것 말이야. 사실 몰랐던 사람을 마주치는 행위 자체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지. 물론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다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거리를 가다가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나 편의점에서 마주친 계산원 같은 사람들과는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하잖아? 그 숱한 만남들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더 특별한 사람을 찾아내게 돼. 서로의 이름을 알고, 연락처를 주고받고, 취미와 관심사를 알게 되고, 밥과 술을 먹으며 지난 성장과정과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서로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알게 되면서 더욱 가까워지게 되지. 그것이 친구여도 좋고, 연인이어도 좋고,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이라고 해도 상관 없어.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쳐가며 서로의 삶에 더욱 더 깊숙이 들어가고, 그러면서 의지가 되어 주거나 혹은 상처를 주고받아. 재미있는 건 말야, 가끔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실은 그 전까지 ‘서로를 몰랐’던 우리가 과거에 한 시공간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걸 확인할 때가 있어. 가령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 그때! 나도 거기 갔었는데?” “아 그래? 그날 거기 되게 좋지 않았어?” “끝내줬지! 아니 근데 그때 정확히 어디에 있었어?” “그 어디어디 쪽 출입구말야, 난 주로 거기 있었지!” 뭐 이런 대화가 나오는 상황 말이야. 신기하지 않아? 지금 이렇게까지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이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구보다도 서로를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 때는 새카맣게 몰랐다는 것 말이야. 지금과 같은 강렬한 친밀감을 느꼈다면,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서로 스쳐 지나갈 때 무언가 ‘쎄’한 느낌이라도 있어줘야 하는거 아니야? 그랬다면 나에게 항상 위로가 되는 말을 건네주는 너를 조금이라도 더 일찍 만났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너 또한 언제든지 달려 나올 준비가 되어있는 나를 놔두고 애먼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헛수고를 덜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 『첨밀밀(甛密密,1996)』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 어쩌면 우리의 만남도 그 영화처럼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어느 시간, 어떤 곳에서 이미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곤 해. 영화의 그 장면이야 좀 감상적이고 유치하고 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것이 우리의 삶인데 그건 또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우리의 만남이 조금 빨라지거나 늦어졌을때의 결과도 도저히 장담할 수 없는 것일 것 같아. 만약에 우리가 서로를 스쳐갔던 그날, 그때 어떤 방법으로든 서로를 조금 더 일찍 알아보고 가까워 졌다면, 그래도 지금처럼 즐겁고 행복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 어떤 알지못한 변수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미워할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그때 만나지 못했었다면? 너, 혹은 나보다 더 재미있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서로의 존재 따위는 상관도 없이 즐겁고 평온한 일상을 보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훨씬 외로웠을까? 그건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기에 부질없는 가정만 세워본다. 말이 길어졌다. 또 편지할게.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포스터칼라와 과슈 초등학생 시절 미술시간엔 꼭 포스터 그리기가 포함돼 있었다. 포스터를 그리기에 쓰는 물감은 포스터칼라. 작은 병에 담긴 물감을 프라스틱 스푼으로 퍼내 팔레트에 퍼담고 색을 만들어 도화지에 그려나간다. 밝게 만들 땐 흰색을 섞는다. 조금씩 칠하다 보면 어느새 한 장의 포스터가 완성된다. 그러나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포스터 칼라는 포스터 그리는 용도로만 써야 하나?’

학생 시절, 추억의 물감 포스터칼라 학생 때 포스터 칼라를 만져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금도 학교에선 포스터칼라로 포스터를 그리곤 한다. 포스터칼라가 만들어지자마자 교육 현장에 투입됐으니 학교 책상 서랍에 포스터칼라가 들어있던 역사는 아주 길다. 물로 명암을 조절하는 수채화보단 포스터칼라가 미술 교육에 더욱 적합하다 말한다. 포스터칼라는 색이 정확하며 색조절이나 혼색이 쉽고 비율만 잘 지키면 거의 같은 색을 재현해 낼 수 있어서다. 포스터칼라의 탄생은 칼라 인쇄물에 직접적 영향에 받았기에 칼라 인쇄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한적인 색상을 쓴 인쇄물의 역사는 길지만, 제대로 된 칼라 인쇄가 처음 등장한 건 1710년이다. 프랑크푸르트의 화가 ‘야곱 크리스토프 르 블론’은 3색만으로 모든 색상을 구현하는 인쇄 방법을 발명했으나 완성된 이미지를 3색으로 분해하고 그걸 다시 인쇄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확실한 풀칼라 인쇄가 등장한 건 몇 십 년 뒤인 1798년에 발명된 석판인쇄법부터이다. 제작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이 저렴해진 시기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인 1880년대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상업도 함께 발전했고 이는 홍보의 필요성으로 이어졌고 칼라 포스터에 대한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이 시기에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예술가 ‘쥘 세레’가 3색 석판 인쇄법(3 stone lithographic process)을 발명했고 이후 거리와 서점엔 색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대량 인쇄된 포스터의 등장으로부터 10년쯤 지나자 칼라 잡지가 등장했다. 인쇄 수요가 탄생시킨 물감, 포스터칼라 이때부터 일러스트레이션의 수요가 폭증했다. 포스터, 잡지, 책에 필요한 그림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포 스터를 요구하는 곳이 많아졌다. 동시에 일러스트레이션과 포스터 제작에 적합한 화구의 필요성이 대두했 다. 많이 사용하기에 가격이 저렴해야 했고 인쇄용 원본을 만드는 것이기에 내광성이 낮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색의 정확성은 높아야 했다. 그 요구에 맞게 탄생한 물감이 포스터 칼라다. 포스터 원본을 그릴 때 많이 썼기에 붙은 이름이다 물론 포스터 칼라는 포스터 만들 때만 쓰는 물감은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교육으로도 사용됐으며 인쇄 와 관련된 그림이나 미술 연습용으로도 사용됐다. 포스터 칼라는 인쇄물 시장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포스터칼라 탄생 100년 후, 포스터를 비롯한 인쇄물 제작에 컴퓨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쇄물이라도 그 림은 물감을 써야 감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금방 컴퓨터에 자리를 내줬다. 그 뒤 포스터 칼라는 인쇄 쪽에서 할 일이 없어졌고 교육과 작품용으로만 사용됐다. 기술 발전으로 저렴하고 내광성 높은 안료가 나온 덕분에 내광성과 내구성이 올라가 지금은 작품용으로 써도 손색없다.


쥘 세레는 본격적인 풀칼라 광고 포스터 시대를 열었다


포스터 칼라는 수용성이라 물로 희석해 사용할 수 있고 광택이 없으며 불투명해서 색이 진하고 밑색을 완전히 가 릴 수 있다. 명암은 흰색을 섞어 조절한다. 이런 특징을 가진 물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과슈다. 과슈는 불투명 수 채물감을 말한다. 실제로 포스터칼라가 발명되기 전 인쇄용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과슈가 쓰였다. 과슈는 투명수채물감에 비해 저렴 한 편이나 예술 작품을 만들 때도 쓰이는 물감이라 어느 정도의 내구성과 높은 내광성을 가지고 있다. 즉, 대량 사 용을 위해 가격을 낮춘 과슈가 바로 포스터칼라다.

오랜 기간 은근히 사랑받아온 물감 과슈 그렇기에 과슈를 처음 접한 사람은 한가지 궁금증을 가진다. ‘이거 포스터칼라랑 다른 게 뭐지?’ 느낌만이었겠지만 앞서 말했듯 사실이다. 포스터칼라는 과슈에 들어가는 재료의 저렴한 대체제들이 들어 있을 뿐인 사실상 같은 종 류의 물감이다. 과슈가 사용된 기간은 근 600년 정도 된다. 수채물감과 거의 같은 시기다. 과슈는 불투명 수채화를 그리는 용도의 물감이다. 불투명 수채물감이라면 투명수채물감에 흰색을 섞어 그리는 그림도 포함된다. 그러나 투명수채물감에 흰 색을 섞어 그린 불투명 수채화와 과슈로 그린 불투명 수채화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슈는 모든 물감이 불투명 하다. 불투명한 수채물감과 달리 밑색을 숨긴다.

과슈는 크게 유행이었던 적은 없지만 은근한 인기를 누려왔다.


과슈는 수채물감과 같이 아라빅검을 바인더로 사용한다. 수채물감과 다른 점은 안료의 입자가 커 불투명하 고 불투명도를 더 높이기 위해 석회가루같은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어주는 첨가물을 추가한단 점이다. 과슈라 고 하면 생소한 사람이 많지만 몇백 년 전엔 그림보다 실용적 목적에서 더 많이 쓰였던 투명수채물감과 달 리 과슈는 작품용으로도 많이 사용됐다. 물만 있으면 쓰기 편하고 사용법이 사실상 다른 물감과 다르지 않 아 사용하기도 편리하고 내광성이 수채화보다 좋은 편이다. 투명수채화가 영국에서 유행하고 있을 때 유럽 대륙에서는 수채화라 하면 과슈로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과슈가 사용된 이후 대 인기를 끈 적은 없지만 꾸준하게 사용된 스테디한 물감이다. 여러 부분에서 아주 편 리해서다. 삽화나 광고용 일러스트레이션, 예술 작품, 애니메이션 풍경, 디자인 작업 등에서 폭넓게 사용되 고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 뻑뻑하게 유화처럼 바를 수도 있으며 투명수채화처럼 물을 많이 섞어 표 현도 가능하다. 물론 투명수채화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다. 과슈는 종이를 그다지 가리지도 않아 약간 두 꺼운 노트에도 칠할 수 있다. ‘마르크 샤갈’의 많은 작품들이 과슈로 그려졌으며 오일파스텔을 사랑한 ‘피카소’도 과슈를 사용해 많은 그 림을 남겼다. 최근에는 아크릴과슈가 개발돼 겹쳐 칠했을 때 수채과슈와 달리 밑색이 녹아 올라오지 않게 됐고 내구성이 더 높아졌다.

과슈로 그릴 때 알아둬야 할 점 과슈와 포스터칼라를 쓰는 법은 유화나 아크릴과 비슷하다. 흰색으로 명암을 조절하고 물을 조금씩 섞어 묽 지 않은 상태로 얇게 바르면 된다. 과슈는 아크릴이나 유화보다 빨리 마르나 굳으면 물로 다시 녹여 쓸 수 있다. 유화나 아크릴과 비슷하다고 해서 뻑뻑한 상태로 칠할 필요는 없다. 바르기 쉬울 정도로 물을 섞는다. 단, 물을 많이 섞으면 얼룩지므로 농도 조절이 필요하다. 명암을 조절할 때 쓰는 흰색은 두 가지다. 징크화이트와 티타늄화이트. 징크 화이트는 색조를 적게 변화시키 며 명암을 조절할 때 쓰고 티타늄화이트는 밑색을 강하게 은폐하므로 완벽한 커버가 되는 대신 색을 파스 텔톤으로 만든다. 흰색을 너무 많이 쓰면 밝은색이 아니라 회색이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같은 안료로 만든 물감이라도 투명수채화와 과슈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과슈 채색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수채화처럼 구역을 나눠 색을 칠해야한다는 점이다. 유화나 아크릴은 다 른 색 위에 덧칠해가며 올려가도 되나 과슈는 밑색이 덧칠한 물감의 수분에 의해 녹아 덧칠한 색과 혼색 되는 점을 기억하자. 과슈가 포스터칼라와 비슷하다고 해서 완벽히 불투명한 상태로 채색을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과슈도 일 종의 수채화 물감이기에 약간 물을 많이 발라 부드럽게 칠할 수도 있으며 투명 수채화와 같은 스타일로 채 색이 가능하다. 두 가지 기법을 모두 활용하는 것이 과슈를 100% 활용하는 방법이다.

샤갈의 과슈를 쓴 그림 Fantastic Horse Cart (1949) 제 블로그(soulcreator.blog.me)에 저의 그림 도구 덕질을 올리고 있습니다. 최근 팟캐스트와 유투브를 시작했어요. 팟캐스트는 팟빵이나 애플 팟캐스트에서 ‘일팟’이라 검색하면 나오고 유투브는 ‘사탕고양’이라 검색하면 나와요. 제 블로그에도 링크를 걸어놨어요. 글 사탕고양


샤갈의 그림과 쥘세레의 포스터 들


#3. 적응의 기술 망가진 건강과 일상을 정리해보고자 회사를 그만뒀지만, 사무실 에어컨 밖의 여름은 무시

무시했다. 무더운 날씨 속에 직접 밥을 해 먹고, 청소, 빨래 같은 집안일을 하다 보니 가 라앉은 컨디션이 더 나빠지는 듯 했다. 결국 나는 이 모든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필요했 고, 습관처럼 여행을 떠올렸다. 출장으로 모은 마일리지로 갈 수 있는 나라들을 리스트업

해봤다. 출장을 일년에 2-3번씩은 다닌 덕에 미국, 유럽 등 왠만한 국가들은 갈 수 있었

다. 그 중 한국에서 가장 멀고 물가가 저렴한 곳을 찾으니, 한 국가가 나왔다. 체코. 그 렇게 떠나온 동유럽에 한달 째 체류 중이다. 체코로 들어왔지만, 내륙국가의 장점을 살려 버스로 국가를 옮겨 다니고 있다. 그렇게 폴란드, 에스토니아를 돌았고, 지금 마지막 국 가인 독일의 드레스덴이다.

여행을 꽤 다녔고, 출장도 많이 다녔지만, 이렇게 이동이 많은 경우는 없어서, 짐을 싸고 새 호스텔에 적응하는 것에 매번 힘들어하고 있다. 헌데 무엇보다 어려운 게 국경을 넘을 때이다. 쉥겐조약 국가들이라 비자나 여권 심사는 없지만,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이질감 은 매번 생소하다. 같은 유럽권이지만, 체코, 폴란드는 소련 지배를 받은 동유럽 대표국

가이고,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틱 3국으로 분류된다. 독일은 나치

정권이라는 지울 수 없는 역사를 가진, 그러나 서독동독의 분리를 해결해 낸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강대국이다. 이렇게 주변 정세가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그 결과 사는 수준

도 다르다. 주요 관광지가 모인 올드 타운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지만, 조금 더 골목 안쪽 으로 들어가면 그 나라만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문화 코드를 금새 느낀다. 예를 들면

체코 사람들은 정말 무뚝뚝하고 불친절한데, 유럽국가에서 흔히 하는 눈인사도 절대 하지 않는다. 그게 부끄럽거나 타이밍을 못 맞춰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사를 안 하는 것 같은 데, 어쩌다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면 되려 이상한 애를 보는 듯한 기분 나쁜 눈초리를 받

게 된다. 반면, 인접한 폴란드는 미묘하지만 다른 분위기이다. 그들 역시 무뚝뚝하지만,

적당한 타이밍에 눈이 마주쳐도 눈을 피하면 되려 불쾌한 듯한 반응이 돌아온다. 그러다 가 북유럽과 인접한 에스토니아로 갔다. 그곳은 사람이나 도시가 너무 고요해서 내가 떠들

거나 크게 웃으면 소란을 만들지 말라는 식의 눈초리가 돌아온다. (정말 수다를 떠는 사 람을 한 명도 못 봤다)

여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물가 역시 다르다. 단순히 저렴하고 비싸다는 차이가 아니라, 편

차의 수준이 달랐다. 체코는 관광지에 의존하는 국가인 만큼 관광지의 물가와 아닌 곳의 물가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하지만, 폴란드는 어디를 가도 물가가 비슷해서 여러 곳을 돌며 더 저렴한 곳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미묘하게 다른 나라들로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이동하다 보니, 도착하면 허둥대다가 적응할만하면 다시 떠나야 하는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가 여행 2주차쯤. 폴란드 크라크푸 시내에서 좀 떨어진 싸구려 에어 비앤비에서 잠

을 자려는데, 갑자기 내가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아마, 길에서 웃

어준 사람들에게 몇 번 무시를 당하고, 상점 점원에게 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다고 질책을


받은 뒤였던 것 같다. (체코는 끝자리의 잔돈을 맞춰 주면 싫어하고, 폴란드는 잔돈이 있 으면 맞춰 달라는 식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그 나라의 문화나 언어, 하다못

해 소소한 관습은 모른 채 동물적 본능활동-즉 식사, 수면-과 관광만 반복되니 마치 원 숭이가 된 것 같았다. 즉, 그곳 문화나 관습에 적응을 하지 못해 허둥대는 것에 뭔가 인

간적 자존감 같은 게 무너졌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이 기분 나쁜 느낌을 극복하고

자, 크라크푸에서는 잔돈을 맞춰주고, 베를린에서는 길을 묻지 않는 식으로 눈치껏 행동

하게 되었다. 그 곳의 사회적 언어, 에티켓을 이해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고, 그렇게 행 동하는 데 꽤 신경을 썼었다.

그러다가 크라크푸에 인접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갈 수도 있지

만, 왠지 그 곳은 투어를 통해 제대로 봐야 할 것 같았다. 한 곳 한 곳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수용소를 둘러보니 눈물과 비애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직 살인만을 위해 구축 된 시설.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죽이기 위해 설계된 그 곳에서도 인간은 삶을 이어갔고, 살아 남은 생존자도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잔혹한 시설 벽 하나 너머에 있는 독 일군 관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인간의 악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그 악에 어디까지 우리는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들었다. 사진에서 본 독일군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자각

하지 못하는 자의 흐릿한 웃음이 들어있었다. 그 웃음을 봤을 때, 마냥 그 독일군을 비난 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이 올라왔다. 그렇다. 인간은 여행지에서 눈인사나 돈 계산의 서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투름에 적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은 이토록 엄청난 악(惡)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사실 그 상황 안에 놓이면 선과 악, 옭고 그름에 있어 객관적인 판단이 서기 힘들다. 그 만큼 개인의 도덕성과 주관은 적응이라는 이름 아래 유약한 것이다.

내가 이 얘기를 이토록 길게 하는 이유는, 이런 성향은 회사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

다. 회사를 여러 번 옮긴 나는, 입사 후 제일 먼저 할 일은 ‘사무실 분위기 파악’이었다. 서류 결제 시스템, 동료 간의 분위기, 그리고 임원들 성향까지 파악해 두어야 경력직원의

어설픈 실수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이직 덕분인지 입사 한 회사마다 분위 기 파악은 1~2주 안에 완료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대부분의 회사 조직이 도덕

적으로 완벽하지 않기에 분위기를 파악할수록, 즉 속내를 알아갈수록 수용과 거부의 기로 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어, 부당한 인사나 합리적이지 못한 인사고과는 비일비재하지만, 경력자의 빈약한 입지를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을 눈 뜬 장님처럼 모른 채 할 수 밖에 없었

다. 사실 아는 채는 하더라도 무기력하게 수용할 뿐이었다. 사실 나뿐이 아니라, 조직 내

에는 눈 뜬 장님이 대부분이라 그런 부당한 일은 회사 분위기와 뉘앙스에 적절히 섞여 자

연스럽게 처리가 된다. 사실 여기까지는 조직에 대한 일이고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는 변명으로 그냥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업무에서도 이런 이슈는 빈번히 도래한다. 보고서를 내보내기 전, 내가 하던 방식이 면 밤을 새워서라도 오타와 데이터 에러를 체크하지만, 팀 분위기에 따라 이 과정을 생략할

것을 강요 받는다. 클라이언트가 에러를 발견하지 않으면 다행이니, 보고서를 빨리 마치고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가라는 것이다. 말끝에는 ‘효율성 추구’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또한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간혹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게 데이터를 고쳐서 내보내라는 강요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지속적인 상사의 요구에 못 견뎌 리서처의 양심을 운운하며 퇴

사 한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이쯤 되면 적응의 이슈를 넘어 판단의 이슈로 넘어온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갓 들어온 경력사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고민이 더 크게 일어난 다. 이런 식의 충돌을 겪었고, 부당함과 부조리함 앞에서 매번 퇴사를 했다. 몇 번의 충돌

을 겪은 뒤, 리서처의 무력감과 회사 방침에 대한 무자비함 등을 뒤섞어 퇴사이유를 만들

었다. 더 나아가 퇴사하면서 ‘난 이런 조직에 적응하는 것을 거부했다, 더 솔직하게 말해, 이런 부조리에 적응한 인간들과 다르다’는 묘한 자위적인 당당함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적응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적응에 실패한 것이다. 물론 부

도덕에 대한 적응은 조심해야 하지만, 무조건적인 거부 역시 지속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내가 정착할 조직이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좁은 리서치

업계에서 이직을 여러 번 하고 나니, 지금 나에게 입사하지 않은 회사가 몇 남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수용과 무조건적인 거부, 그리고 나의 색깔을 유지하는 것. 이 세 가지는 신중 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여행 하는 중 한 pub에서 맥주를 마시고

계산하려는 데, 점원이 굉장히 불친절하게 굴었다. 여행하면서 느꼈지만, 탈린에는 부유한 유럽 여행객이 많아서인지, 사실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좀 심하게 있었다. 나는 그 불친절 *글쓴이_권근혜 (lynnox78@gmail.com)


이 차별에서 나온 것임을 직감했고, 그냥 넘기기 싫어 불쾌하다는 식의 눈길을 1~2초간 쏘

아 붙였다. 그랬더니 그 점원이 이전과 다른 굉장히 친절한 어투로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수용과 거부, 그리고 나의 감정이나 의지를 표현하는 것 중에 마지막 것을 나는 ‘성공적

인 적응’이라 말하고 싶다. 조직의 생리는 부조리할 수 밖에 없다. 허나, 이 부조리 안에 서도 나의 가치체계에 근거한 판단의 안테나는 작동되어야 한다. 물론 받아들일 것과 거 부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 이것을 분별하고 행동하는 것은 녹록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 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게 되어있고, 그렇게 한번

적응하고 나면 그 사회에 대한 가치판단 센서는 무뎌지게 된다. 즉, 숲 속에서는 숲을 보 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아우슈비츠만큼은 아닐지언정 참담하고 정당치 못한 환경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맹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때문에 성공적인 적응 을 위해 이 녹록하지 않은 내적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다. 하 지만, 이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일이다.

현재 백수 / 과거 마케팅리서처 / 쿠바다이어리 저자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6.세면대 부재중 처음 세면대를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 것이 아니라 빳빳하게 서서, 손에 있는 힘껏 힘을 줘서 수도꼭지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살짝 위로 수전을 올리면, 하얀 도기로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졌다. 머리 위에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나를 비추고, 고개를 들면 말간 얼굴의 내가 거울에 비췄다. 청결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 다. 작은 욕실 속에서 연극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기뻤던, 8살의 나. 현대아파트 109동 1004호의 작은 여자아이 는 그렇게 말끔한 환경이 주는 기쁨에 익숙해져갔다. 엄마가 어디선가 가져온 인테리어 업체의 시안 책자를 보면서, 나는 먼 훗날 어른이 됐을 때, 그 때 내 집을 어떻 게 꾸밀 건지 상상했다. 큰 욕조, 샤워부스는 따로, 비데가 있는 변기, 맨발로 다녀도 발끝에 물이 묻지 않는 보송 보송함. 그리고 화장실 안으로 드는 큰 채광. 무엇보다도 세면대는 두 개였으면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란히 서서 양치질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각자의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기초 화장품을 바르면서, 말간 맨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며 깔깔거리고 싶었다. 그런 드라마 같은 미래는 내가 어른만 되면 당연히 따라올 것만 같았다.


내가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을 때, 아버지의 사업은 천천히 하향 길을 걸었다. 저녁마다 안방에서 아버지의 격양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고, 그때마다 엄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는 피아노와 미술학원을 포기해야했고, 동생은 우주소년단 활동 을 관둬야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항상 급식비를 제때 내 지 못했고, 남들 다 다닌다는 입시학원은 꿈도 못 꿨지만, 난 여전 히 꿈꿨다. 인테리어 책자에 나올 것 같은 그런 욕실이 있는 나의 집.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도 스무 살인 나에게 그런 집은 꿈에 불 과했다. 학교 후문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던, 대학가라고 부 르기에는 너무도 애매한 동네에 자리한 보증금 100에 25만원이 었던 그 집 화장실에는 욕조도 샤워부스도 하물며 세면대도 없었 ▲ 가난한 학생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욕실. 변기

다. 나는 매일같이 쭈그려 앉아서 세수를 했다. 무릎과 가슴께에 옆에 세탁기라도 들어가면 샤워 할 때마다 세탁기와 물이 튀어서 세수를 한 번하고 난 뒤에는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 함께 씻는 기분이 들어 외롭지 않다. 다. 깜박 잊고 양말을 신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그 길로 양말을 벗어야만 했다.

다음번에도, 또 그 다음번에도 집을 구할 때마다 욕실을 살폈지만, 세면대가 있는 신축 원룸은 좁았고 그에 비해 비싸기만 했다. 그래,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다짐하기를 반복하다보니 10년이 지나 있었다. -홍대에 살아보자 홍대는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 곳이었다. 레즈비언 술집과 클럽 이 있었고, 그 거리에서는 짧은 커트머리의 그녀와 내가 손을 잡 고, 더러 서로를 끌어안아도 공격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보는 사람 이 적었다. 그렇게 우리는 번화한 길에서 조금 벗어난 한산한 주 택가, 1층이라고 소개를 받고 들어간 반지하에서 우리는 동거생활 2년차를 시작했다. 90년에 지어진 빌라, 방 2칸에 거실에 부엌, 크기나 채광으로나 나무랄 데는 없었지만, 욕조와 세면대가 있었 을 법한 욕실에는 변기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세면대가 없네요? 혹시 넣어주실 생각 없으세요? -그냥 세수 바닥에 앉아서 하면 되죠. 필요하면 사시는 분이 알 아서 해 넣고 쓰세요. 투기 목적으로 집을 구매한 것뿐이라는 40대 남자는 그렇게 전 ▲ 큰 길 하 나 만 건 너 면 있 던 합 정 번 화 가 . 밤이되면 휘양찬란한 간판으로 뒤덮였던 일본선술

화를 끊었다. 나의 그녀는 세면대가 없는 집은 처음이었다. 나야 집 '어시장3代'는 몇 년 전 한글날 '사라져가는 한글 10년을 없이 살았으니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녀가 아침마 간판' 을 주제로 뉴스에 나왔었다. 다 쭈그리고 앉아서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만은 내키지 않았다.


서두가 길었다. 우리는 세면대를 만들 각오를 다졌다. 욕실 아래에는 하수배관이 매몰되어 있다. 세면대를 설 치하기 위해서는 이존의 하수배관 외에 세면대 하수배관 이 필요했다. 욕실배관공사 시공업체에 전화해서 견적을 물어보니 최소 100만원이라고 한다. 타일을 다 뜯어내고 배관을 새로 한 뒤, 새로 시멘트를 타설하고, 그게 마르기 를 기다렸다가 다시 타일을 붙여야 한다. 최소 며칠은 걸 리는 대공사로, 시작하면 욕실 전체 리모델링을 하는 꼴 이었다. 내 집도 아니고, 심지어 전세도 아닌데 그 정도 ▲ 욕실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 전 욕실의 모습. 타일 줄눈도 없고 청소도 포기한 것 같은 느낌.

수고를 들이는 건 무리였다. 차선책으로 세면기와 배관을 설치해서 바닥에 그저 물 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세면기 가격도 만만찮았다. 최소 10만원. 세면기 수전까지 달 생 각을 하면 가격은 20만원으로 훌쩍 뛰었다. 결제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마다 집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투기 목적 으로 샀을 뿐이라서. 그런 이유로 집에 어떤 하자도 해결 해주지 않으려고 들던, 사는 사람이 알아서 고치라던, 그 뻔뻔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며 온 몸에 물이 튀어 흠뻑 젖을 때면 다시 세면대 생각 이 간절했다. 양칫물을 뱉을 때마다, 집에 손님이 올 때마 다, 그래도 최소 세면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럼 최

▲ 욕실용 핸디코트와 방수 바니쉬를 바르고, 남는 타일을 거 울 가장자리에 붙여 리모델링한 욕실의 모습. 세면대만 있으 면 진짜 딱인데...

소한의 비용으로 만들어보자. 우리는 그렇게 타협했다. 인터넷 DIY 쇼핑몰에서 스테인레스 세면볼과 배관, 세 면볼 크기만큼 컷팅한 원목, 브라켓을 구매했다. 오일스 테인과 방수바니쉬, 실리콘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했다. 주문 컷팅한 원목은 사포로 결을 다듬어준다. 200방, 400방, 800방. 숫자가 커질수록 사포 표면은 곱다. 숫자 가 적은 순서대로 사용하면 된다. 사포질이 끝나면 오일 스테인을 발라준다. 원목에 색을 입히고 내구성을 높이는 작업이다. 오일스테인을 발라준 뒤 하루 정도 건조과정 을 거친다. 다 마르면 방수바니쉬 칠을 하는데, 이 역시도 2-3번 발라줘야 하므로 최소 하루 이상 소요된다. 목재

▲ 인터넷 쇼핑몰에 '스텐 원형 세면볼' 이라고 입력하면 위 사 진과 같은 제품을 찾아볼 수 있다. 스탠딩타입으로 거치대도 함 께 구입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욕실 바닥이 하수구 쪽으로 기울 어져 있는 걸 고려해야한다

를 가공하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타일은 일반 벽과 달리 깨질 수 있으므로 구멍을 뚫기 가 조심스럽다. 타일과 타일사이 줄눈에 구멍을 뚫는 건


괜찮지만, 수평을 유지하려고 하다보면 쉬운 위치에만 뚫을 수 없다. 투명테이프를 붙인 후, 전동드릴로 천천히 구 멍을 내면 타일을 덜 손상시키고 구멍을 뚫을 수 있다. 구멍을 뚫으면 칼브록을 넣는다. 나사가 잘 고정될 수 있도 록 완충재를 넣는 것이다. 나사가 들어갈 위치에 구멍을 다 뚫어 놓으면 브라켓을 다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가공한 목재에 세면볼을 넣고 앞뒤로 실리콘으로 고정한다. 배관은 동봉된 설명서를 보고 조립하면 된다. 완성된 세면대를 브라켓과 연결하면 세면대는 완성. 배관의 끝은 하수구 근처로,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구조다.

▲ 2년 동안 거뜬했던 우리의 세면대

▲ 언젠가는 꼭 이런 욕실을...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면서, 계속 집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바닥에 앉아서 하면 되죠 그러는 당신은 아침저녁으로 어떻게 세수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45평짜리 신축 아파트에서 은은한 조명을 받 으며 아침 저녁으로 세면대 앞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산 것 뿐이라던 그의 뻔뻔스러움에 치가 떨린다. 한 달에 그의 통장으로 꽂히고 있는 40만원, 우리는 그 집에 3년을 살았다. 1,440만원. 그녀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일한 돈, 내가 밤을 새워가며 적은 글, 커피를 내려가며 번 돈의 상당수가 그의 지갑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그 사이 점점 늙어갔다. 위층에서 누수가 생겼으나 그 누구도 책임지려하지 않았고, 우리도 책임질 수 없 었다. 세대마다 소유주가 다른 다세대 주택에서의 누수문제는 답이 없다. 집주인은 우리가 좀 더 윗집 주인에게 강 력하게 요구해야한다고 말했다. 윗집 주인은 '아가씨 집도 아니잖아'라고 말했다. 하늘이 뿌옇다. 나날이 심해지는 미세먼지로 하늘 한 번 제대로 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는 곳,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베란다와 세면대. 충분한 햇빛, 깨끗한 공기,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와 모래사장. 부산으로 이사온 뒤 같은 가격으로 우리 손에 들어온 것들이다. 리모델링한 오래된 아파트라 꿈꾸던 욕조와 별도의 샤워부스는 없지만, 그래 도 만족한다. 그리고 여전히 꿈꾼다. 언젠가는 햇빛이 잔뜩 내려쬐는 한낮의 욕조에서 목욕을 즐길 수 있기를.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I MB U 2화. 4대강

글. exxx

<노무현 입니다>를 봐서 그 이야기를 쓰려고 하다가 우리에게 MB 가 남긴 선물이 산더미 같은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것 같아서 한 달 더 물고 늘어집니다. 이달은 예술 잡지를 표방하는 만큼 예술과 아주 조금 연관 있는 이야기를 해 봅니다. 지난달 우연히 주진우 기자의 MB 추적기를 다룬 <저수지 게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당시 그 문제에 엄청 열을 올리며 정보를 탐색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책을 읽고 그 다음으로 극장에 가 영화를 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화를 내다 팟캐스트를 듣고 극장에 가서 어금니를 깨물며 다큐멘터리를 보았죠. 그리고 어느 밤인가 자전거를 탔습니다. 한강에서 아라갑문으로 그리고 아라뱃길을 따라서 정서진까지 편도 35km. 자전거를 타고 그렇게 멀리 가본것은 처음이었습니다. MB MB 하면서 부들거린것이 무색하게 길이 좋더군요. 기분도 상쾌하고 좋았습니다. MB 덕을 봤다면 봤다고 해야할지도 모를 미묘한 상관관계의 가운데에 서 노래를 부르며 페달을 밟았습니다. 너무 멀리까지 길이 이어져 있어서 돌아올 때는 자연히 욕이 튀어나왔지만 그것은 저질 체력 때문이고 길을 달리는 기분은 솔직히 좋았습니다. 또 가고 싶다고 해도 좋을 만큼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참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이 사업이 참 좋다고 잘한 일이라고 해야할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같은 길을 달리는 자전거 족들과 산책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강아지들도 많았습니다. 다들 저처럼 즐거워 하는 마음이 전해지더군요. 그런데 그 길을 달리던 저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것이니 다닌 것이고 다니다보니 마음이 즐거운 것’이지 그것이 결여되어 불행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매할 때는 선후관계가 중요하지요. 쉽게 말하면 없어도 별로 떠오르지 않은 아쉽지도 않고 갖고 싶지도 않았던 자전거 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길을 달려보면 길은 좋지만 우리의 삶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 길이 놓여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여기를 평소에


몇명이 다닐까? 주변에 집도 없는데 여기를 누가 나올까? 길을 잇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을까? 그렇습니다. 달릴 때 호젓함에 즐겁긴 하지만 그 노력과 비용은 누가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에서 이 그지같은 놈들 자전거 도로도 부족하니까 우리가 원조해줄께. 공사비용으로 고용창출도 하고 좋잖아? 한게 아닙니다. 세금이지요. 이런 사고의 순서에 따라 이번 나와 당신 사이의 MB는 ‘비용’ 입니다. ‘돈’ 그 중에서도 ‘세금’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의 틈에서 MB는 무슨 돈을 썼을까요? 우선, 복잡하지 않게 한권의 책이 있습니다. <MB의 비용> 알마 출판사에서 나왔고 고기영, 박창근, 김용진, 김학진, 이후천, 박선아, 강병구, 유종일, 김연철 등의 필자가 참여해서 나와 당신 사이에 연결고리로 존재했던 대통령 MB가 일으킨 손해에 대해 꼼꼼하게 따져갑니다. 책을 소개하는 뉴스 제목에는 최소 189조 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제가 그날 달린 아라뱃길의 비용도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억울함을 늘리기 위해 이 돈을 다른데 썼으면 어땠을까요? 그 사람도 많이 안다니는 여가용 길 같은 것 말고 다른 곳 말입니다. 예술 이야기를 한다고 했으니 여러분이 꼭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의 진행비용은 어떻습니까? 물론 그것이 자전거 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무엇이 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생각 해봅시다. 그것 말고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거나 더 나은 교육 경험을 제공하거나 최근 들어 시행된 독립유공자의 후손에게 집을 제공하는것은 어떻습니까? 생각하면 많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쓸려고 들면 돈 쓸 곳이야 수두루 빽빽하죠. 너무 많아서 생각을 다 적지 못할 판입니다. 작년에 염장을 지른 한일합의에서 이야기한 위안부 기금 10억엔 (약 100억) 같은 것도 우습습니다. 강 안팠으면 그깟 돈 안받고도 잘 보상하고 지낼 수 있습니다. 담배값을 안올렸을 수도 있겠죠. 무상급식 가지고 싸울 필요도 한결 줄어들 것입니다. 돈이란 것이 교환가치인 만큼 쓸려고 치면 쓸 곳이야 많습니다. 두번째 말하지만 다만 없어서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MB와 감정적으로, 관상에 따른 감정변화로 얽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벼운 주머니로 먼지날리는 갈라진 교차로를 지나야 하고 얼른 고쳐지 않는 꺼진 가로등 밑에서 배를 곯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당장 당신이 덜 춥고 덜 배고프다고 괜찮을까요? 안전망에 대한 잠재적 위협과 빈곤의 공포, 사회에 누적되어가는 끊임없는 스트레스가 당신과 연관이 없을까요? 길가다 갑자기 마주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의 안에 그 비용이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면 참담합니다. 왜냐하면 제목에서 쓰여진 나와 당신 사이에 MB 가 있듯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이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2화 끝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줘


힘든 일을 겪으면 가까운 친구를 찾게 된다.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때로는 그냥 있어주는 것만으 로 위안이 된다. 이런 걸 두고 심리학자들은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라고 말한다. 기존에는 보통 사회적 지지라고 하면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공감해주거나 혹은 아예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안하거나 문제 해결을 직접 도와주는 걸 지칭했다. 일종의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인 셈이다. 그런데 Erica Slotter는 말한다. 우리는 이 안전망 속에서 서로의 정체 성을 뒷받침해주기도 한다고. 사람들은 대체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이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나름의 안정된 생 각, 이미지, 혹은 지식을 갖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들은 이런 생각을 더욱 강 화시키거나 혹은 조금씩 변화시키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역시 난 이런 사람이었어” 하며 기존의 정체성을 재확인할 테고, 후자의 경우에는 “나한테 이런 면도 있었군” 하고 스스로의 정 체성을 나름 재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건들은 눈에 보이는 실패 혹은 손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뒤흔들고 지나 가기도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지” 하고 스스로에 대해 혼란스러워지는 순간들. 이걸 두고 Slotter는 정체성 혹은 자아에 대한 위협(self-threat)이라고 표현한다. 논문의 요지는 바로 이럴 때도 우리의 소중한 친구들이 다시 일으켜 세워 준다는 것이다. 단, 이 렇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는 단순히 공감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 라는 게 저자의 말이다. 기분은 좀 나아지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에 대해 겪는 혼란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 자신감이 떨어지니까. 이럴 때 필요한 건,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하고 다시금 원래의 정 체성을 상기시켜주며 정체성의 혼란을 잠재워주는 것이다. 이렇듯 이 논문에서 저자는 알베르 까 뮈의 문구를 인용한다. 친구는 내 가슴 속에서 흐르고 있는 노래를 알고 있고, 내가 그 노래를 잠 시 잊었을 때 내게 다시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Slotter & Gardner (2014). Remind me who I am: Social interaction strategies for maintaining the threatened self-concept.

글. 민하 : minha@berkeley.edu 재밌는 거 뭐 있나 늘 딴 짓을 하고 싶지만 현업인 심리학을 하는 와중에 재미있게 읽은 논문들을 야매로 소개합니다. 재미는 좋은 거니까, 그리고 이것도 일종의 딴 짓이니까.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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