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201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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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 도사하산 (2015) 백림서신 - 09. 인사 / 글. composer B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 필기구 / 글. 사탕고양 만든다오 - 09. 메리 새해 / 글. 사진. 진선 체니사이드 - 02. 농담 中 / 글. 사진. 장수양 건축이 좋아 - 43. 마지막황제 ‘푸이’ 그의 삶터들 / 글. 사진. aoikasa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심심해서 그랬어요 / 글. 사진. 민하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I MB U 5화. 가마꾼들 / 글. EXXX


2016년과 2017년을 생각하면 정말 드라마틱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각자의 삶의 무게 이외에도 공공의 영역에서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요. 온몸으로 그 시간들을 버텨오신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18년은 좀 더 편안하면서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되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에 빠지거나 직업적 성취를 이루는 등 외부의 불안함 없이 편안함 가운데 삶의 굳 건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그렇게 되길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한 해였다고, 연말에 사람들에게 다가가 악수도 하고 선물도 건네고 싶습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올해에 월간이리는 새로운 독자 영입 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공수표 전문가에 가까워서 여차하면 잡혀갈 판이지만 뭐 새해니까 계획 정도는 괜찮 겠지요? 아참, 매번 좋은 전시를 하는 고궁박물관에서 이번에도 멋진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창덕궁 희정당 벽화라고 이제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희정당 안의 금강산 벽 화를 보여주는 전시 입니다. 당장은 금강산에 갈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보는 것도 좋 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서울을 방문하시거나 서울에 계신분들은 한 번씩 들 러 구경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럼 다음 달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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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도사하산 (2015) 감독 첸카이거

KIM님이 6월에 돌아오신다는 이야기에 EXXX가 영화 코너의 단기 알바로 들어왔습니다. 솜씨는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한시적인 코너인 만큼 오늘은 이용자가 많은 넷플릭스에서도 보실 수 있는 영화로 골라보았습 니다. 특정 서비스를 강하게 어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용자가 많고 고정 팬층이 많은 서비스임을 고려해 (재미가 없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 첫 작품으로 골랐으니 부담 없 이 시작하시고 얼른 꺼버리셔도 좋습니다. 좀 더 예술적이라고 이야기될 만한 아름다운 풍경과 그럴듯한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를 추천하 면 좋겠지만 그것은 꼭 제가 아니어도 세상에 추천할 분들이 너무 많으니 5달 동안은 제가 여러 분이 평생 돌아보지도 않을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괴이한 코너의 첫 번째 영화는 <도사하산>입니다. <패왕별희>로 유명한 첸 카이거 감독의 2015년 작입니다. 예술영화도 아니고 복잡한 스토리도 아닙니다. 가난한 주인공이 밥을 얻어먹 으려고 도사가 되었다가 더 이상 끼니를 책임질 수 없다는 사부의 말에 따라 속세로 내려와 이 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매력적이지도 않고 영리 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카타르시스도 주지 않습니다. 그저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는 인물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겁니다. 여기에 보통 선호하지 않는 무협이라는 소재마저 담겨 있으니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표지만 봐도 “PASS!”라고 외칠만한 영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저는 이 영화가 기억에 아주 강렬하게 남았고 누군가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슬 그머니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대신에 “취향에 안 맞을 수는 있어.”라는 말은 빼놓지 않습니다. 이


멋 있 는 포 스 터 대 작 의 기 운 이 느 껴 진 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저에게 비난을 하거나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저는 진지하게 이 영화를 좋아하고 높게 평가합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요? 네이버 평점을 보면 어떨까 합니다. <도사하산>의 네이버 관람객 평점은 6.35로 높지 않습니다. 제가 어마어마하게 비난을 했던 <군함도> 7.35보다도 낮은 점수입니다. 평가하는 글도 그리 좋 지 않습니다. 아주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아주 산만한 영화’ ‘주인공이 매력 없는 영화’ ‘감독이 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하다가 끝낸 영화’ 등등 여러 가지 악평이 있습니다. 뭐라고 제가 치켜세우더라도 사실 영화의 완성도는 네이버 평점이 꽤 정확한 편이라고 생각합 니다. 아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도 6.35의 점수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저 점수가 이해는 됩니다. 꼼꼼하게 보통의 사람들이 평점을 주는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도사하산>은 6.35의 점 수가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강렬한 매력을 느꼈던 인물 연출이나 이야기를 제외하면 아마 산만하고 밋밋하다고 하실 분들이 많은 영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 를 최근에 본 영화 중에 인상 깊은 작품으로 꼽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우선 이 영화 자체에서 크게 성공하기 위한 공식 같은 게 엿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패한 연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평점을 보면 티가 나지요. 영화를 봐도 그렇습니다. 영화는 뭐 이렇다 할 포인트 없이 죽죽 흘러갑니다. 주인 공은 멍청하고 애정 넘치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갈 뿐 큰 꿈도 없고 실제로 끝까지 이렇다 할 욕 망이나 돌진 포인트가 없습니다. 솔직히 저에게 누가 이 영화를 만들라고 대본을 던져준다면 저 는 분명 이 대본으로는 못 만든다고 손을 저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배짱 있게 결과 물로 나온 작품에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스토리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작품으로 완성시켰어?’라는 감탄도 조금 있습니다. 저는 <도사하산>을 보면서 각각의 상황과 번뇌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주인공 안에서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하는 질문을 던져보 았습니다. 삶에는 어떤 목표와 결과가 있는 것일까? 정말로 대단한 것이 되기 위해 지독하게 뺏고 버텨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이 보시기에 적당한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힐링이나 치유가 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재미없는 영화라고 하실 분들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 니다. 무협이나 중국 영화의 패턴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정말로 재미없고 못 만든 영화 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강렬한 재미가 있는 기기묘묘한 오락영화도 아닙니다. 다만 긴 흐름 안에서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 있고 이런 영화가 나온 중국의 영화산업이 어떤 면 에서는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평점이 극과 극을 달리는 것 아닐까요? 넷플릭스에서 20분가량 보시면서 마저 보실지 멈출지를 결정하면 가장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추천해 봅니다. PS. 포스터는 멋있지 않나요?


월간이리에서는 새로운 필진을 찾고 있습니다. 차분 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듯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이것이 될까 싶은 연재들도 가능한 연재 할 수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습니다. 연재와 관련해서 문의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 주시면 정말 정말 친절 응대 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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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09. 인사

잘 지냈어? 새해야. 사실 난 새해라는 핑계로 난리법석을 떠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올 한 해에는 모두가 건강하고 원하는 일들이 잘 풀렸으면 해. 새해에도 즐겁게 지내자. ‘인사’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인상깊게 생각하는 부분이 몇 가지 있대. 그 중 하나가, 만났을 때 하는 인사와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같다는 거야. 같은 아시아라고 하더라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만났을 때 하는 인사를 똑같이 하지 않지만, 우리는 사람들과 만났을 때 ‘안녕 ~?’하고 인사를 하고, 헤어질 때도 ‘안녕!’ 하며 헤어져. 물론 성조(?)를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침, 점심, 저녁 인사가 다른 건 기본이고,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따로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인상깊다 못해 의미심장한 생각이 들기도 할거야. 만남과 헤어짐이 다르지 않고, 시작과 끝에 대해 그 어떤 차이도 두지 않는 다는 느낌이랄까? 지금 우리가 헤어진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고, 또 지금 함께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헤어질 수 있지만, 그 와중에도 상대의 ‘안녕(安寧)함을 우선으로 생각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그 단어. 신기하지 않아?


난 그래서 ‘안녕’이라는 단어가 좋아. 영어의 ‘See you later’나 중국어의 ‘짜이지엔(再 見)’ 혹은 독일어의 ‘아우프 비더제엔(Auf Wiedersehen)’같은 인사도 좋지만, 만남과 작별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양면성에 끌렸나봐. 아무튼 지난 해를 ‘안녕!’ 하고 보냄과 동시에 새로운 해를 ‘안녕?’ 하고 맞을 수 있는, 좀 더 의연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어. 세상은 갈수록 예측하기 힘들어지고, 어지간한 기반이 없다면 하루 하루를 버티는 것 조차 쉽지 않은 시절을 우리는 겪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지치지 않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내려면, 우리 스스로가 일단 ‘안녕’하기를 빌어야 하지 않을까. 좀 없어 보이긴 해도, 일단 안녕하고 볼 일이다. 달리 할 말은 없어. 새해에도 변함없이 네가 보고 싶고, 또 네가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2017년의 좋았던 추억이든 아팠던 기억이든,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어. 물론 아팠던 기억만 던져 놓고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겠지. 좋았던 추억도 어쨌든 던져 놓고 와야만 해. 그래서 오늘은 정연승의 “좋았던 추억도, 아팠던 기억도”를 너와 같이 듣고 싶어. 내가 겨울만 되면 늘 듣는 곡으로, 새해 첫 인사를 건넨다. 말이 길어졌다. 또 편지할게.

정연승의 ‘좋았던 추억도 아팠던 기억도(feat.노영채,송인애)’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필기구 볼펜으로 글을 쓴다. 끝의 볼이 굴러가며 잉크를 종이 위에 남긴다. 볼펜이라 하더라도 주변이 조용하면 마치 만년필처럼 종이와 마찰하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린다. 선은 글자가 되고 글자가 모여 문장이. 문장이 모여 글이 된다. 글을 쓰다가 한쪽 구석에 그림을 그린다. 필기구는 글을 쓰는 도구인 동시에 그림도구이다.

필기구는 모두 그림도구 필기구는 글을 쓰는 도구, 그림도구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라 생각한다. 필기구와 그림 도구 사이엔 정확하게 구분되는 선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모든 필기구는 동시에 그림도구다. 싼 모나미 볼펜으로도 그림을 그리는 데 문제가 없고 저가 볼펜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있다. 연필도 진한 색이 있는 고급 연필을 미술용 연필로 쓰는 것뿐이다. 필기구가 처음 발명됐을 때는 글자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림을 “쓰기” 위해서였다. 아직 글자가 발명되지 않았던 때라서 기록을 그림으로 남겨서다. 그림들은 점차 모양이 변해 글자가 됐고 그림을 그리고 쓰던 도구는 글자를 쓰는 도구가 됐다. 동양에서는 붓이 필기구로 쓰였고 서양에서는 펜이 필기구로 쓰였다. 이집트에서는 갈대에 잉크를 찍어 파피루스에 글을 남겼고 중국에선 붓에 먹을 찍어 글을 남겼다. 붓은 서양에서는 그림도구로 쓰였고 동양에서는 산업시대를 지난 이후엔 서예나 캘리그라피를 쓸 때만 붓이 쓰이게 되다보니 결국 전 세계에서 글씨를 쓰는 도구는 펜으로 통일됐다. 그런고로 이번에 다루는 필기구는 펜에 한정된 이야기다.


잉크를 찍어 쓰는 딥펜 펜의 원형은 갈대다. 이집트에서는 갈대를 깎아 펜을 만들어 숯검댕을 모아 만든 잉크를 찍어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펜이란 이름은 갈대가 아닌 깃털에서 나왔다. 서양의 중세시대를 다룬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깃털을 깎아 만든 펜으로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약 천 년 동안 글씨 를 쓰는 도구는 거위의 날개 깃털을 잘라 만든 펜이었다. 잉크를 찍어(dip) 글씨를 쓴다고 해서 딥펜(dip pen)이라고도 부른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공업제품이 나왔는데 금속 펜촉(pen nib)도 그중 하나다. 이전에는 금속으로 된 펜촉은 장인이 만든 일종의 명품이었다. 장인이 금속을 두드려 만들었고 깃털펜보다 오래 썼지만 영구적 인 것은 아니다 보니 그만큼 가격이 비쌌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으로 금속 펜촉이 나오게 되면서 저렴한 가 격으로 필기에도 그림에도 쓰이는 기본적인 도구가 됐고 깃털펜은 매니아나 쓰는 필기구가 됐다. 펜촉의 종류는 아주 많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세 가지다. 가장 가느다란 선을 그리 맵핑펜(마루펜이라 고도 부른다), 선 굵기 조절이 어느 정도 가능하면서 도 다루기 쉬운 스푼같이 동그란 모양의 스푼펜, 다 이나믹한 굵기를 표현할 수 있지만 그만큼 다루기가 어려운 G펜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본적인 펜촉들 이다. 이 펜촉은 구하기도 쉽고 가격도 싸다. 이 세 가지 펜촉은 만화를 포함한 펜화를 그릴 때 에도 쓰인다. 다이나믹한 메인 선은 G펜으로 그리 고 간단한 그림들은 스푼펜으로 그린다. 명암의 묘 사는 맵핑펜을 쓴다. 물론 G펜으로 다 할 수 있으 나 아주 미세한 힘 조절이 필요해 세가지 펜을 같이


쓰는 쪽이 편하다. 현대에 나오는 모든 펜촉은 규격 화돼 있어서 맵핑펜촉을 제외하고는 모든 펜홀더에 끼워 쓸 수 있다. 펜으로 그리는 그림은 기본적으로 선과 면으로 묘사 한다. 명암의 표현은 크로스햇칭과 점묘로 표현한다. 잉크선의 밀도에 따라 점점 어두워지므로 빗금의 간 격이 좁아질수록, 여러 각도로 그을수록 점점 더 어 두워진다. 점묘도 찍은 점이 촘촘할수록 어두워진다. 생각보다 밀도를 미묘하게 조절하기 어려우므로 펜 화의 명암 단계는 보통 6단계 정도다.

처음으로 잉크를 내장한 필기구 만년필 만년필은 딥펜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생긴 것이 비 슷할 뿐인 다른의 필기구다. 물론 펜에서 직접 발전 하긴 했다. 펜은 잉크를 찍어 쓰기만 하면 되지만 주기적으로 잉 크를 찍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이런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펜촉에 잉크를 공급하는 저장소를 몸통에 만들면 된다는 간편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아이디어 자체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 다. 동양에서도 먹물을 내장한 붓이 있었다. 천 년 전쯤에 잉크탱크를 내장한 펜이 있다는 기록 이 남아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에는 만년 필로 보이는 스케치가 남아 있고 어떤 메모는 딥펜으 로 글씨를 쓸 때 보이는 잉크가 흐려지는 흔적이 없 기에 실제로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던 것으로 짐작된 다. 기록상에는 천 년 전이지만 실제론 그 전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잉크가 새거나 너무 많이 흐르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만년필의 역사는 천년이 넘지만 제대로 된 개량은 19세기나 되어야 이루어진다. 그쯤에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가공 기술이 갖추어졌고 온도와 공 기압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만년필이 만들어진 시기는 1850년대다. 만년필은 그림도구로 쓰기엔 약간의 문제가 있다. 만년필이 막히는 문제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잉크가 한


정돼 있는데, 만년필 잉크는 수성의 염료 잉크라 물에 닿으면 번지고 내광성이 낮아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 진다. 이 문제를 감수하고 번지는 것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거나, 내광성과 내수성이 있는 특수한 종류의 만 년필용 잉크를 그림용으로 쓸 수 있다. 특수한 잉크는 만년필을 자주 사용하고 자주 청소해야 하는 등, 더 욱 관리가 필요하다. 볼펜의 등장으로 만년필은 급격하게 사라졌다. 볼펜의 저렴함과 편리함에 만년필은 비교가 안 돼서이다. 하 지만 만년필은 고급필기구로 살아남았다. 장인이 한땀 한땀 만들어내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 정도의 가격 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엔 다시 만년필이 유행하며 몇천 원 정도의 저가 만년필이 출시되고 있다.

필기구의 대명사가 된 볼펜 볼펜은 심의 끝에 금속으로 된 공(ball)이 있어 튜브에 든 잉크가 볼을 따라 굴러가며 종이에 적히는 방식의 펜이다. 1888년 거친 표면에 쓸 수 있는 필기구로 처음 만들어졌다. 가죽 같은 거친 표면에는 사용할 수 있었으나 종이에 쓰기엔 너무 거칠어 금방 사라졌다. 볼펜이 다시금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다. 초기의 볼펜은 잉크가 균일하게 전달되지 못해 잉크가 많이 나오거나 잘 안나오거나 하는 일이 흔했다. 1938년에 특허를 신청한 새로운 볼펜은 유성 잉크가 튜브 속에서 마르지 않으면서 적절한 흐름으로 나와 부드럽게 쓸 수 있게 했다. 볼펜이 처음으로 나왔을 때엔 볼 만년필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표준적인 필기구는 만년필이어서다. 초기의 볼펜은 유성 잉크를 사용했으나 금방 수성 잉크 볼펜이 나왔고 요즘에 많이 쓰는 젤펜은 안료나 염료를 고정하는 젤 형태의 바인더가 혼합된 형태의 잉크로 중성펜이라고도 불린다. 볼펜 중에서도 유성펜은 한가지 특성 때문에 다른 펜과 달리 명암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 살짝 연하기도 하며 일명 볼펜 똥이라고 불리는 종이에 묻지 않고 남은 잉크를 펴 발라 진하기를 조절할 수 있어서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유성 볼펜으로 그린 그림은 다른 펜화와 달리 명암이 좀 더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사인펜과 마카 사인펜은 내장된 잉크 탱크에서 펠트로 된 심으로 잉크가 전달되 쓸 수 있는 필기구다. 보통 수성 잉크를 사용한다. 사인펜은 겹쳐지 는 부분에 색이 진하게 나오기에 그림에서 쓰는 일이 제한적이다. 선은 그을 수 있어도 면은 칠할 수 없어서다. 그래도 다양한 색의 라인 드로잉이 가능하기에 소소하게나마 그림도구로 쓰이고 있다. 전문가용 사인펜도 존재한다. 사인펜은 다른 잉크와 달리 마른 후 방수성을 가진 잉크를 사용할 수 있다. 밀리펜이라고도 불리는 피그먼트 라이너류가 바로 그것이 다. 마르면 마카에도 물에도 번지지 않아 채색 전 선화용으로 많이 쓰인다. 근래의 라인아트나 펜화, 잉크 선화는 이 피그먼트 라이너


로 그려지고 있다. 다른 펜에 사용되는 잉크와 달 리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연해지지 않기에 작품용 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사인펜 중 마카라고 불리는 그림도구는 만화풍의 그림 채색에서 많이 쓰인다. 원래 디자인계통에 서 쓰던 채색도구였는데 만화 채색에 많이 써서 만화용으로 인식이 굳어진 도구다. 마카라고 하 긴 하지만 이것은 일본식 발음이고 원래는 마커 (Marker)다. 이름 그대로 표시를 하기 위해서 만 들어진 심이 굵은 형태의 필기구다. 우리가 매직이 라고 부르는 굵은 필기구들이 전부 마커에 속한다. 그림용 마커는 알콜 베이스의 염료를 사용하고 있 다. 알콜 베이스는 종이 틈으로 번지며 얼룩이 지 는 일을 감소시킨다. 사용된 염료는 자외선에 분 해되면서 약간 빛을 내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도 구와 달리 종이보다 더 밝은색 표현이 가능하다. 알코올 베이스 마커 그림의 색이 화사한 이유다. 이 과정은 염료가 분해되는 과정에 의한 것이기에 마커로 칠한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연해진다. 애초에 디자인에서의 그림은 인쇄물이나 제품을 제작 하기 전까지만 색이 유지되면 되기에 내광성보단 사용하기 빠르고 편리한 것을 중시해서 낮은 내광성은 큰 단점은 아니지만 작품을 만들기 위한 용도엔 적합하지 않다. 마커는 색조절이나 명암 조절이 거의 되지 않고 번짐도 제한적이기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사용하려면 200 색 이상이 필요하고 가격이 싼 편이 아니라서 비용이 많이 드는 채색도구다.

글 사탕고양 제 블로그(soulcreator.blog.me)에 저의 그림 도구 덕질을 올리고 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 있으시면 팟캐스트인 일팟을 들어주세요. 팟빵과 팟캐스트에서 일팟이라 검색하면 나옵니다.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9. 메리 새해 드롭박스에 백업된 사진을 뒤적인다. 자그마치 10,812장. 우리의 지난 겨울, 봄, 여름, 가을이 폴더 하나에 빼곡하다. 위, 아래, 좌, 우. 키보드의 버튼 을 연신 눌러가며 ctrl+c, ctrl+v. 한 달에 한 장만 가능하다. 쓸 수 있는 사진은 총 12장. 우리의 지난 2017년을 대 표하면서도 다가 올 2018년을 위한 달력에 쓰일 사진들이다. 달력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다. 2016년 겨울, 이것저것 만들다보니 나무판이 남았고, 잘못 주문한 볼 트와 너트는 공구 상자 안에서 한 뭉텅이씩 굴러다녔다. 불현듯 떠오른 게 달력이었다. 그저 나무와 나무를 볼트와 나사와 너트로 이어서 종이를 끼우면 되는 간단한 구조를 떠올렸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작업은 사진을 고르는 일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사진 선택 기준이 있었 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질이 좋을 것. 밤에 찍거나 셀카로 찍어서 화소가 깨지는 건 아무리 프린터 인쇄라도 별로다. 올해 한 달 내도록 봐야할 사진이니 완전 프로는 못되더라도 아마추어도 호사라도 일반인 티를 팍팍 내고 싶진 않았다. 이 사진을 찍은 순간 만큼은 나도 사진작가, 라는 느낌을 가진 사진을 찾아야만 했다. 두 번째, 계절감이 느껴질 것. 여름에 찍었는데 골방에서 담요 두르고 있는 사진이라던가, 겨울에 수영장 같은 경 우는 패스. 세 번째, 우리만의 추억이 담겨있을 것. 나 혼자 찍은 사진은 의미 없다. 그녀와 나 두 사람이 함께한 장소에서 찍 은 순간만이 의미 있다. 매달 저 때가 언제인지 추억할 수 있도록. 네 번째, 개 사진은 배제할 것. 사진의 절반 가까이가 개 사진이었다. 애 키우는 사람은 아마 이 만큼이 애로 도배 되어 있겠지, 싶을 정도로. 우리가 키우는 견공의 얼굴 사진이 우리 사진보다 아마 10배로 많았을 것이다. 견공의 사진을 넣고 싶다면 견공의 사진만 넣은 달력을 따로 넣는 것이 낫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포토샵을 이용해서 사진을 배치해서 달력을 만들었다. 사진 보정이 어느 정도 필요해서 포토샵을 사용했지, 텍스 트만 들어간다면 포토샵은 필요 없다. 텍스트를 정렬하는 데는 익숙한 한컴오피스가 딱이다. 파워포인트가 편한 사 람은 파워포인트를 써도 좋을 것 같다. 뭐가됐든 프로그램의 고급 기능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달력이란 그저 날짜를 기입하고, 기념일을 적고, 정렬만 잘 되어있으면 그만일 뿐이다. 내가 이번에 만든 달력은 벽걸이와 탁상형 두 가지다. 벽 걸이는 A4 사이즈로 윗부분을 묶어 벽에 거는 형식이고, 탁상형은 A5사이즈보다 조금 넉넉하게 자른 목재에 볼트 와 너트로 지지대를 만들어 세우는 방식이다. 벽걸이용 달력에는 월별로 원하는 사진을 넣었고, 탁상달 력에는 텍스트만 넣었다. 나와 그녀의 생일, 우리 부모님들 의 생신, 친구들의 생일, 기념일 등이 손글씨가 아닌 폰트 로 인쇄되었다. 지워지지 않는 기계적인 글씨에 위안 받는 다. 사소한 우리의 역사가 기록물로 남는 느낌이 다소 감격 스럽기까지 하다. 먼저 벽걸이. 윗부분을 지지하는 나무판은 접착용 패널로 쓰이는 것으로 아주 얇다. 볼트를 넣을 구멍을 뚫으려다가 금이 가서 못쓰게 된 경우도 많았다. 구멍을 뚫을 때는 아 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앞뒤 방향으로 돌려가며 뚫어야 한 다. 한쪽에 힘이 치우치면 균형이 깨져서 무슨 일이든 망가 지고 마니까. 200g이 넘는 종이 12장이 모여봤자 두께가 2cm도 채 되지 않는다. 볼트의 길이는 3cm 정도 되어도 충분하다. 햄버거를 만들 듯이 나무판에 볼트를 넣고, 달력종이 12장 을 끼우고, 다시 마감 나무판을 넣고, 볼트로 고정한다. 접 착제 하나 없이 완성. 사진을 고르고 달력을 정리하는 시간 에 비해 무척 간단하다. 탁상형의 지지대가 될 나무는 나왕으로 결이 거칠어서 스테인칠을 좀 했더니 빈티지한 멋이 살아났다. 머리가 7mm가 넘고 길이는 7cm가 넘는 큰 볼트로 지지대를 직 각으로 세울 것이다. 볼트가 들어갈 구멍은 드릴로 먼저 뚫 어준다. 바닥에 못 쓰는 나무를 대고 구멍을 뚫어주면 편하 다. 이 작업은 이미 작년에 끝냈기 때문에 올해는 패스. 거 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어서 기쁘다. A5 크기로 만든 탁상달력 종이는 모두 같은 크기에 맞게 커터로 재단한다. 이번에 보급형 작두를 사면서 고무매트 와 30cm 투명자로 종이를 자르던 시절과 과감히 작별했


다. 큰 종이를 자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 게 무단히 종이를 재단할 일이 많을 때는 편하다. 가격도 5,000원 이하. 기쁜 가격이다. 빈티지한 느낌의 커다란 집게로 종이를 고정해도 좋겠지 만, 나는 작년처럼 나사로 고정하기로 했다. 펀치로 구멍을 뚫은 종이를 나무판에 박은 나사에 걸어준다. 펀치 크기와 나사못 머리 크기가 비슷해 헐겁게 빠지진 않는다. 불현 듯 새해 목표를 정하기 힘들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 랐다. IMF를 어린 시절에 겪고, 보수정권 10년을 20대로 보내며 희망을 캐내듯 살아야 했던 우리. 각 세대가 지닌 십자가가 있다지만, 때때로 십자가에 짓눌려 쉽게 버리지 도,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창 한 것이 아닌 그저 소박하게 입에 풀칠 할 정도면 되는데, 그조차 아등바등해야 얻을 수 있는 거라는 걸, 나라 경제를 위해 금붙이를 팔던 그 시대 때는 몰랐다. 나도 내 어머니 의 나이가 되면 그저 금붙이 몇 개쯤은 있을 줄 알았던 것 이다. 그래서 올해 목표도 버티기다. 아직은 태풍이 지나가지 않아서, 섣불리 움직였다간 옷도 젖고 다칠 것만 같다. 가 만히 멈춰 서서 초조하다. 누군가는 이 비를 뚫고 먼저 도 착할 것 같아서. 저마다 도착지가 다르고, 비교는 무의미하 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심장은 쿵쾅쿵쾅 뛴다. 지난해 나는 어떤 다짐을 했던가. 아직은 두꺼운 달력을 바라본다. 새해, 1월이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체니사이드

글. 장수양(@condensed_bold)


2. 농담 中

몸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의 몸이 아닌 혼자인 몸에 대해서다. 혼자인 몸은 다른 누구와 비슷하거나 아주 다를 필요가 없다. 부위별로 나누거나 어떤 기준을 세우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서 인지해본다. 그게 기능적인지 성숙한지 미적인지 가늠하지도 않는다. 몸이 움직인다고 해서 움직임의 범위를 긋지 않는다. 몸이 감각한다고 해서 감각의 섬세함에 집중하지도 않는다. 몸이 내가 놀러가는 장소여서 그곳의 날씨를 알 필요가 있는 것처럼 자주 변하는 온도와 습기를 고려해본다. 내게 가장 편안한 자세를 하고 그 자세를 유지하기를 포기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분류가 없는 하나의 몸 자체에 몰두하여 생각한다. 한참을 그러다 보면 손가락나비에게 온몸을 덮인 날처럼 된다. 가만히 있을지 움직일지 예고하거나 약속하지 않아도 좋다. 다른 어딘가에 나를 옮기지도 않아도 좋다. 몸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내가 만난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둘 다 아닌 것들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제부터 알아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게 있었던 지난 일들이 지금 여기로 한 걸음씩 나를 몰아왔을 테니까 말이다. 농담은 유지의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내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극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처럼 두려움이 잦아들었다. 나는 겨우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농담이 물었다. ―너와 만난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지금 말한 ‘돌아오지 않는다’의 의미는 내가 알던 것과 다를 거라고 생각해. 농담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머쓱하게 서있었다. 우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새로운 국면이란 반드시 다른 공간에서 시작되야 한다는 것 같았고, 의식하고 나니 이 상황이 조금 실없게 느껴졌다. 점퍼를 꽉 잠갔는데도 추웠다. 피부가 아파서 오늘의 날씨가 나를 싫어하는 기분이 들었다. 속이 안 좋아 보이는 하늘이라든지, 함께 걷고 있는 농담의 낯선 표정이라든지, 차도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이라든지 모든 것들이 버려진 필름 안의 영상으로 값어치 없고 희소하게 나를 지나갔다. 농담은 시시때때로 유지의 모습에서 그 일부를 조금씩 바꿨다. 긴 머리, 짧은 머리, 큰 키, 작은 키, 그는 여자이기도 했고 남자이기도 했고 한 가지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자연현상 같았다. 햇빛, 아지랑이, 눈, 비, 진눈개비처럼. 그는 손쉽게 사람의 집을 무너뜨려도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는 재해일 수도 있었다. 그런 농담을 보며 나는 유지와 함께 살던 동안 빼곡하게 생겨났던 보기들―친구, 연인, 룸메이트를 비롯하여 많은 관계의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어떤 모습에 어떤 이름이 잘 맞는지 매치해보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옆에 나의 모습을 짝지어보고 있었다. 농담이 조금씩 바뀔 때마다 나도 조금씩 바뀌었다. 유지와 내가 일정하고 분명한 하나의 관계 형태여야 한다는, 나의 편협함이 괴로웠다.


―뭐해? 농담이 물었다. ‘걷고 있잖아’라고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고 있어. ―무슨 생각? ―유지를 좋아하던 내 마음이 훨씬 기분 나쁜 것이었다는 생각. 그러자 농담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가로수를 받쳐놓은 나무토막에 발을 찧을 뻔 했다. 농담의 손은 차갑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다. 그 점이 온전히 기뻤다. ―비밀이 생긴 것 같다. ―어떤 비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유지에게 너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자신이 없었다. 전에는 확신할 수 있던 것들이 어느 샌가 블라인드로 덮이거나 촘촘한 체로 수십 번이나 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놔두면 다시는 예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와 농담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아직 손을 잡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농담은 이제 나이를 줄였다 늘이고 있었다. 손안에 있는 농담의 손이 작아지고 커졌다. 그가 변할


때마다 유지에게 뭔가 잘못을 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전에, 가만히 있어주면 안돼? 고개를 똑바로 들 수가 없어. 나는 조용하게 말했다. ―제일 어려운 부탁이다. 농담은 불평하면서도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는 열두 살의 유지인 채로 변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농담으로서는 계속 바뀌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만히 있는 상태인지도 몰랐다. 나는 참기로 했다. ―이제 유지와 나는 전과 달라질까? ―언제나 전과 다르니까. 결국 언제나 똑같잖아. 농담은 내 손을 펴고 손금을 들여다보았다. 곧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는 이제 서른 살 정도였다.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르지 않아야 하는 거야? 농담이 물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쇄골에 잠깐 닿았다가 여전히 가까운 위치에서 흔들렸다. ―계속 남자인 유지가 필요해? 이 질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굳어졌다. 나는 처음부터 유지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었고 유지와 함께 있고 싶은 나의 마음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건축이 좋아 43. 마지막 황제 ‘푸이’. 그의 삶터들. aoikasa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 ‘마지막 황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작은 소년 푸이가 자금성을 배경으로 서 있던 풍경. 그 작은 몸체와 큰 자금성이라는 공간이 너무나도 대조적이라서, 어린 마음에도 저 소년이 너무 안 되었다, 저 소년이 진 짐이 너무 크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의 내용은 다 잊어도 그 장면 하나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아마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거 같다. 2017년의 여름과 가을, 오랜만에 ‘푸이’가 다시 떠오르는 장소들을 방문하였다. 장 춘의 위만주국황궁과 텐진의 정원(静園). 겨우 2세에 청나라의 황제가 되어 자금성 에 갇쳐 살다가 쫒겨나고, 이후 위만황궁의 꼭두각시황제가 되기까지 그가 거쳐 간 공간들을 통해 그의 삶을 조금 엿보기로 하자. 텐진의 정원(静園), 청조복벽을 꿈꾸며 서양식 생활에 젖다. 텐진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1860년 개항하게 된 도시로 개항 이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의 제국 열강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각축을 벌였다. 텐진역 과 철도를 기준으로 남측에는 각 국 조계지들이 설치되었는데, 하이허(海河)강을 중심으로 북측에는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조계지가, 남측에는 일본, 프랑스, 영국, 독일 조계지가 설치되었다.

텐진의 일본인 거류지

푸이가 텐진에서 처음에 머물렀던 장원(張園)

만 2년 10개월에 황제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갔다가, 1924년 출궁한 푸이는 자신을 비호해주기로 한 일본의 약속에 따라 1925년 일본인 조계지 내에 있는 장원(張園)


으로 이주하였다가, 2년 후에 역시 같은 조계지 내의 정원(静園)으로 이주하였 다. 이 곳에서 푸이는 복벽운동을 전개하며 일본 관동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냈다. 1931년 청조복벽을 조건으로 만주국의 집정으로 취임하는 것에 동의한 푸이가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 푸이와 푸이의 두 왕비는 이 곳에 머물렀으니, 약 7년의 시간을 텐진에서 보낸 것이다. 거의 갇혀서만 지내던 자금성에서와 달리 텐진에서의 푸이는 훨씬 더 자유롭게, 그 리고 적극적으로 중국인, 일본인 뿐 아니라 서양인들과 교류하며 청조의 복벽운동 을 꿈꾸었다. 일본 조계지 가운데에 위치한 정원(静園)은 그에게 훌륭한 주거지이

자 사교공간이 되었다. 자금성에 비해서는, 그리고 후에 그가 살게 된 위만황궁 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작고 초라한 이 공간에서 그는 어떤 삶을 누렸을까? 무 엇이 이 곳에서의 그를 자유롭게 해 주었을까?

텐진의 정원(静園), 귀여운 푸의와 완룽 인형이 입구에서 맞이한다.

자금성에서 만난 존스턴의 영향으로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자전거를 즐겨 탔으며, 부인 역시 영어와 불어를 할 줄 아는, 그리고 퀵스텝도 밟을 줄 아는 현대적 여성 을 원하던 푸이는 텐진의 스페인풍 2층 저택인 정원(静園)에서 비로소 그가 꿈꾸

던 현대적인 서양식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 않았을까? 1921년 건축된 이 건물 은 세 개의 정원을 가진 스페인풍 목조건물로 붉은 기와지붕이 돋보이는 주택


이다. 중앙 정원에는 커다란 분수가 있고, 서측 건 물은 도서관으로 사용하였으며, 푸이와 그의 황비 완룽(婉容), 그리고 후궁 원슈(文繍)는 중심건물인 주루에서 주로 기거하였다. 건물 곳곳에는 그들의 서구 지향적인 성향을 반영하는 가구들과 생활용품 들이 가득하였고, 서양풍 옷과 장신구로 한껏 치장 한 그들의 사진은 조금이나마 이 곳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햇살이 가득 차 환하게 밝은 2층의 메인 홀 공간은 아마도 푸이와 그녀들이 텐 진의 여러 사람들과 사교를 즐기는 공간이었을 것 이다. 푸이의 방 바로 옆에 완룽의 방, 그리고 원슈

텐진에서의 푸이와 완룽

의 방이 이어지는 이 기괴하고도 신비로운 동거는 이들의 관계에 대한 상상력 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마지막 황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원슈는 완룽의 경쟁 자라기 보다는 친구에 가까웠고, 그 둘은 부의를 공유하는 사이였던 듯 하나, 무슨 연유인지 텐진에서 원슈는 이혼을 요구하여 청 왕조 최초의 이혼한 후궁! 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 었던 자금성에 비해 텐진의 이 집에서는 ‘서로 간의 거리’가 전혀 확보되지 않 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나도 어렸던 원슈에게 텐진에서의 생활은 새 로운 세계를 맛보게 해주지 않았을까? 문을 열고 나가면 펼쳐지는 프랑스풍 거 리와 영국풍 건물들, 백화점과 쇼핑공간들 등. 당시의 텐진은 너무나도 국제적 이며 너무나도 진보적이었을테니 말이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푸이는 실 제로 텐진에서의 생활을 꽤나 즐겼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 까 싶다. 아무 것도 못한 채, 자금성 내부에만 갇혀 사는 황제보다, 청조복벽이 라는 대의를 꿈꾸며, 그토록 원하던 서양식 생활을 하며 사교활동을 즐길 수 있었던 텐진 생활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 아니었을까?

위만황궁, 만주국 황제의 또 다시 갇혀버린 삶. 1931년 11월 청조 복벽을 꿈꾸며 만주국의 황제 취임 제안을 수락한 푸이는 텐진 을 떠나 뤼순으로 우선 향했다. 뤼순에서는 항구 근처의 야마토호텔에 머무르다가 1932년 3월 9일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함으로써 연호를 대동(大同), 수도를 창춘, 즉 신징(新京)으로 하는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신징은 그야말로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신도시’였다. 일본 관동군·만주 철도·만주


국 국무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새로운 만주국의 수도 신징에는 만주국을 상 징하는 황궁과 큰 대로가 필요했고, 황궁은 신징의 중앙에서 약간 서측에 계획 되고 그 앞으로는 팔대부라 하는 국무원, 법원 등 주요 관공서가 양옆으로 위 치하는, 커다란 가로수가 늘어선 대로(프랑스식 불바드)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황궁은 1945년에 이르기까지 지하층밖에 건설되지 못하였고 일본의 패망 이후 에야 비로소 건축되어 현재는 ‘길림대학 지질궁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주국지질궁(新宫廷府), 1938 & 1953

지질궁에서 바라보는 팔대부

만주국 건국 당시 황제인 푸이가 머무를 황궁이 건설되지 못하였기에, 그는 우 선적으로 길림-흑룡강 교통국 청사였던 곳을 수리하고 확장하여 황궁으로 사용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적으로 마련한 황궁이라고는 하지만 그 규모는 실로 어 마어마해서 지금도 다 둘러보려면 몇 시간이 걸린다. 팔대부에 늘어선 만주국 정부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위만황궁 역시 독립국으로서의 만주국을 인정하는 의미로 ‘중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는 일본이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의 총독부 및 정부 건물들을 완전히 ‘서양식’으로 지은 것과 상당 히 대조적이다.) 위만황궁은 크게 서측의 경마장이 있는 부분과 동측의 궁궐 부분으로 나뉜다. 궁 궐안에는 푸이가 부인들과 함께 주로 머무르며 연회 등을 즐겼던 집희루(緝熙樓)와 푸이가 강덕제(康德帝)로 즉위한 후 집무를 보던 근민루(勤民樓), 1937년 일본인

건축가의 설계로 중국풍과 서양풍이 혼합된 양식으로 지어진 동덕전(同德殿) 등

이 있었다. 가장 크고 화려하며, 위만황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동덕전

이나 정작 푸이는 관동군의 도청을 염려하여 이 곳에서는 거의 생활을 하지 않

았다고 한다. 동덕전 앞에는 동어원(東御園)이라는 크고 작은 연못과 정자,

폭포와 가산(假山)이 있는 일본식 정원이 있으며 이 정원 뒤편으로는 전쟁용

대피소로 만들어진 방공호가 마련되어 있다.


위만황궁의 근민루(勤民樓)

근민루(勤民樓) 중정

위만황궁 동덕전(同德殿), 1937

위만황궁 동덕전과 동어원 연못


비록 팔대부 앞의 황궁은 만주국 패망까지도 건설되지 못하였으나, 임시로 황궁을 건설하였던 위만황궁도 자금성 부럽지 않게 크게 화려한 궁궐이었다. 만주국 황제 라는 위용에 맞게 중국풍을 가미하여 건축된 이 크고 화려한 궁궐에서 과연 그는 이 곳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까? 매일 관동군 사령부에 보고를 해야 하고, 일본 인들에게 하루하루 감시당하던 공간, 도청을 두려워하여 황제의 침전으로 건축된 건물에서 생활을 할 수도 없었던 그는 1945년 일본군 패망까지 이 곳에서 살아가 게 된다. 위만황궁의 규모와 그 화려함을 보면, 괴뢰국 황제라도 황제는 황제구나 하는 생 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이가 가장 행복한(?) 생활을 하였던 곳은 텐 진의 정원이 아니었을까? 그 곳에서는 어쨌거나 ‘청조복벽’을 꿈꿀 수 있었고, 일 본의 감시를 받기보다는 지원을 받는 입장이었을테니, 그리고 그와 함께 꿈꾸던 이 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에게 ‘자유’가 있었을테니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마지막 황제’를 다시 본다.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외국인 감독에 의해서 모두 영어 대사로 이루어진 것 역시 참 아이러니하다. 영어로 듣게 되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 이야기라니!

영화 ‘마지막 황제’ 속 한 장면. 황제 즉위 후 뛰어나가는 푸이.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사람은 왜 가만히 있지 않고 뭘 할까. 왜 돈을 벌고, 왜 유명해지려 애쓰며, 연구는 또 왜 할까. 시카고 경영대(Booth School of Business, University of Chicago)의 Christopher Hsee 교수는 말한다. 심심해서 그렇다고. 이를테면 이렇다는 거다. 알고 보면 사람이 제일 못 견뎌하는게 바로 권태(idleness)고, 그래서 사 람은 계속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그냥은 안 하고 그 행위를 하는 걸 정당화해주는 이유를 필요 로 한다고. 권태의 싸이클을 끊어주기 위해 뭔가 행위를 하는 건 그렇다 치고, 권태를 벗어나는 것 외의 이유로 정당화는 왜 해줘야 하는 걸까. 그 이유를 저자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찾는다. 진화심리학 쪽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이야기가 ‘현대사회를 미처 따라잡지 못한 인간’인데 이 논문에서 제시되는 저자의 관점 또한 그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속성들은 주변 환경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방향을 향하여 진화한 것인데, 문제는 이거다. 사실 급속한 산업화 이후로 고도로 발전된 현대사회의 문명은 전체 인간사에서 보면 극히 짧은 기 간에 불과하기에,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많은 기제들은 미처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아직 원시사 회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저자는 말한다. 현인류의 조상들은 희소한 자원들을 두고 벌어지는 살벌한 생존 경쟁을 위한 에너 지를 비축해두어야 했다. 이유 없이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건 곧 생존에의 위협을 의미했다. 하지만 발전된 생산 수단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진 현대 사회의 인간은 더 이상 생존에 필 수적인 것들을 확보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 결과로 우리는 남아 도는 에너지를 갖게 되었고, 우린 이 남아도는 에너지를 무언가 행위를 함으로써 써버리길 좋아한 다. 단지 예전부터 우리의 몸과 정신에 각인된, 에너지를 아껴 쓰고 비축해야 한다는 기제 탓에 이 유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피하려 할 뿐이다. 결국 간단한 실험들을 통해 Hsee는 보여준다. 사람들은 정당화할만한 이유가 없을 땐 바쁜 것보 다 가만히 있기를 택하지만, 행위를 정당화할 만한 아주 하찮은 이유만 제공되어도 사람들은 가만 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걸 택한다는 것을. 그리고 가만히 권태롭고 심심한 채로 있는 채로 있는 사람보다는 대단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바쁜 사람이 더 행복해한다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던가. 인간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하지만 어쩌면, 권태 그 자체가 가장 큰 고통일지도 모른다.

Hsee, C., Yang, A. X., & Wang, L. (2010). Idleness Aversion and the Need for Justifiable Busyness. 글, 사진: 민하 (ㅇㅅㅌ @min.ete ㅇㅁㅇ minha@berkeley.edu)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I MB U 5화. 가마꾼들

글. exxx

사람이 어떤 지위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쉽지도 않을뿐더러 혼자 힘으로 가는 경우도 드물지요.

선거를 예로 들면 우선 표를 받을 후보가 있어야 하고 후보의 지근거리에서 후보를 돕는 비서와 보좌관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 외에도 금전적 거래가 없이 돕는 정치적 동지가 있고 표나 후원금 또는 봉사활동을 통해 힘을 나눠주는 지지자들도 있습니다.

이는 좋은 후보 나쁜 후보로 이야기하는 사회의 평가와도 관련이 없고 그저 선거라는 전쟁터에 서 각자의 진영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진영에 있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정치 인의 요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후보와 함께 하는 사람과 후원자와 지지자들.

그리고 그 숫자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비약적으로 늘어갑니다. 그러니까. 쉽게 예를 들면 피라 미드 구조를 생각하면 됩니다. 피라미드의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표면적 만큼 사람들이 쌓여 있다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여기서 일말의 상관도 없이 표를 던지는 수준의 팬이나 지지자를 제외하고 한 시대를 함께 먹고사는 사람들도 생기는데 정치권에서는 흔히 가신들이라는 표현 을 쓰는 듯합니다. 누구누구 계라고 도 하지만 보다 확실하고 오늘의 상황에 적절한 표현은 가 신이 아닐까요?

이런 정치의 한 복판 MB는 서 있었습니다. 연전연승까지는 아니어도 결정적인 승리를 몇 번 거 둔 끝에 우리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MB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MB가 그 자리에 올라 국가의 여러 가지 상황들의 판을 벌일 때 조율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사대강을 팔 때도 펜대의 자존심을 꺾어가며 줄기차게 옹호하던 학자들과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실무자가 있었고 DAS와 옵셔널 벤처스 사이의 돈을 찾아오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닌 공공기관의 인력들, 그 이전에는 MB의 자서전을 매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관계자, 국정원장이 되어 댓글 조작을 가동한 이, 자원외교를 통해 실패의 성과를 고의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나 차기 선거에 개 입하기 위해 댓글 활동을 하던 군대 조직을 운영하던 사람들 등등 그러니까 MB와 일련의 문제 라고 이야기되는 여러 가지 사항들의 말단 실행조직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중에서 도 TV에도 좀 나오고 자살 의혹으로 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고 지금도 TV 인터뷰 마이크를 받으


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적폐라고 하는 그 일련의 세력들과 MB를 이야기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어찌 우리가 MB를 이야기하면서 그를 어깨에 떠 메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던 가마꾼들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수고와 노력 끝에 모두가 등 따시고 배부르게 된 것은 아닐 테지만 누 군가는 쏠쏠하게 취직도 하고 고기 좀 씹고 이를 쑤시며 다녔을 것입니다. 악취도 풍기고 험악한 이빨도 드러냈겠지요.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아득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삶이 부유하고 또 끼리끼리 하나의 유람선 안에서 흥겨웠다고 하면 저는 좀 아찔합니다. 슬프기도 하고요. 그 불공정하고 문제가 될만한 사고방식이 순차적으로 누적되 고 오랫동안 퍼졌다는 것이 말입니다.

뭐랄까. 그것은 기회를 잡은 훌륭한 사냥꾼의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서로가 눈 감아줘야 하는 사 회의 섭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서 혹시 관계자나 꿀의 한 모퉁이에 있 던 분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저에게 이야기해주시면 깊이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피라미드.

최근의 뉴스들을 보면 가신들은 MB를 향한 정권 차원의 표적수사가 극심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적이 아니라 그냥 문제의 제일 끝에 혹은 문제의 시작점에 MB와 MB의 집단들이 있는 것뿐입니다. 한강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태백산 어느 산골짜기의 작은 샘 하나를 덩그러니 만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개도 없어요 하나입니다.

소심하게 칭얼댈 것 없이 시원하게 나와서 소명을 해도 되고 억울하다고 찬바람 부는 거리에서 가두 행진을 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정말로 그럴싸하게 긴 칼 옆에 차고 MB 스스로가 나 하나로 마무리 짓자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그를 가마에 태웠던 여러 사람이 구제받을 여지가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원하지는 않지만요...

MB를 위해 뛰어다녔던 무수한 가마꾼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다리몽둥이를 다 분질러 버리고 싶 은 마음뿐이지만 한편으로는 MB가 인생에 한 번 정도는 드라마틱하게 악셀을 밟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가마꾼들에게 진 그 빚 다 언제 갚습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화이팅.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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