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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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 컴퓨터 / 글. 사탕고양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내가 좋아하면 너도 좋아하니까 / 글. 사진. 민하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 07. 디테일의 힘 / 글. 권근혜 백림서신 - 11. 꿈에 관한 소고 / 글. composer B 만든다오 - 11. 사랑의 계절 / 글. 사진. 진선 체니사이드 - 03. 아무 上 / 글. 사진. 장수양 건축이 좋아 - 44. 그 섬에 갔다 / 글. 사진. aoikasa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철민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 방황하는 칼날 (2014) Ping Pong - 02. 인문 / 글. 황정운 이훈보


평창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남북 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는 요즘입니다. 통일이 되면 분명히 차 끌고 유럽 가겠다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백두산 언저리에서 차 막힐 때 오징어 파는 사람들이 있겠죠. 저는 통일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그 생각들 을 합니다. 통일이 된다면 어쩐지 그런 일이 생길 것 같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통일 이 아주 불안한 무엇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좋습니다. 통일이 단순한 것은 아니겠죠. 한국을 둘러싼 주변 국들의 힘싸움도 무시무시합니다. 아래로 일본 위로 러시아 동쪽으로는 미국 캐나다 서쪽으로는 중국. 억울하기까지 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용합니다. 비록 국가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요만한 나라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발전한 것을 생각할 때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습니다. 한국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 섬과 같은 구조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했다는 의견도 있고 그것도 틀린 분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폐쇄 공간의 안정감이란 것이 분명 있으니 까요. 이것이 깨지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기적 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해질 수도 있겠죠. 남북교류나 통일로 인해 부담할 비용의 문제 도 있을 수 있고요. 하지만 저는 그래도 통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통일까 지는 아니어도 교류 정도는 자동차를 타고 중국이나 실크로드 근처까지는 편하게 다 녔으면 합니다. 그건 그냥 개인적인 관광 욕구 때문은 아니고 한국 사람들의 창의력과 에너지를 보았을 때 단기적인 손해를 뛰어넘는 활발하고 긍정적인 결과가 나을 것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북 대화라는 소식에 괜히 아무 힘도 없으면서 길게 늘어놓아 봤습니다. 이달로 연재가 마무리되는 사탕고양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월간 이리 EXXX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컴퓨터 요즘은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컴퓨터가 많이 쓰인다. 컴퓨터의 이미지 때문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컴퓨터로 그린다면 어떤 기능을 이용해 그림을 뿅 하고 만들어내는 줄 아는 사람도 있다. 워드프로세서가 글을 쓰기 위한 편리한 기능이 많지만 결국 글 내용은 사람이 생각하고 써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도 편리한 기능이 있는 것뿐 손으로 그려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림에 쓰인다면 컴퓨터도 수채화나 유화물감 같은 그림 도구일 뿐이다.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컴퓨터인 것뿐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손그림과 컴퓨터 그림이라고 구분하지만 사실 컴퓨터도 결국 손으로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조차 컴퓨터는 수채화나 연필로 그리는 그림과는 뭔가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 구분하기 쉬운데, 유화물감이나 수채물감같이 그림 그리는 도구가 컴퓨터인 것뿐이다. “종이에 잘 그려야 컴퓨터로도 잘 그린다”란 말이 있기는 하나 정확하게는 잘 그리는 사람이 컴퓨터로도 잘 그린다는 이야기다. 연필로 잘 그리는 사람이 수채화를 배우면 도구에 익숙해지는 시간만큼 자기 실력을 못 내지만 수채화에 익숙해지면 자신의 실력만큼 잘 그리게 된다.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도 마찬가지다. 단지 기능이 많기 때문에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릴 뿐이다.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컴퓨터 그래픽 처음 등장했을 때가 1961년이고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 후반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컴퓨터는 그림을 표시하기엔


같은 시리즈 게임의 1993년 출시작(좌)과 1997년 출시작(우) 4년 차이에 그래픽 기술 발전이 느껴진다. 컴퓨터의 처리속도도 느렸다. 컴퓨터 그래픽이 꾸준히 발달했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컴퓨터 그림이 종이에 그리는 그림을 대체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비웃었다. 컴퓨터로는 감성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때로선 당연한 반응이다. 당시 컴퓨터의 성능으론 사진조차

선명하게

표시할

없었고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그린 그림은 제한된 색과 낮은 해상도로 표현의 한계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시도는 꾸준하게 있었다. 90년대부터 컴퓨터의 처리속도는 비약적으로 올라가 2000년쯤에는 향상된 처리속도와 메모리 용량으로 1천6백만 색의 고해상도 그래픽을 쉽게 구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컴퓨터가 본격 사용됐다. 세계 최초의 게임 그래픽

특히 상업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선 순식간에 자리를 차지했다. 실수하면 뒤로 돌릴 수 있고 색도 형태도 배치도 쉽게 바꿀 수 있어 너무나도 효율적이었다. 지금은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의 대부분은 컴퓨터로 그려진다. 컴퓨터 그래픽에서 말하는 해상도의 비밀 컴퓨터가 만든 그래픽은 모니터에 표시할 때 사용되는 최소한의 단위를 픽셀이라고 한다. 모니터를 가까이서 자세 히 보면 작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픽셀이다. 픽셀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된다. 컴퓨터 그래픽을 구현하 는 수많은 방식이 있지만 최종 출력물은 픽셀로 표시된다.


모니터의 스펙을 보면 해상도라고 표시된 부분이 있는데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모니터는 1920x1080 해상도이다. 가로로는 1920개의 픽셀로 세로는 1080개의 픽셀을 표시하고 전체 화면을 총 2,073,600개의 픽셀로 화면을 표 현한단 말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말하는 화소 수가 바로 픽셀의 개수다.

모든 컴퓨터 그래픽은 최종적으로 픽셀이라 불리는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표현된다

디지털 카메라의 화소수가 높을수록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처럼 컴퓨터로도 픽셀의 개수가 많아야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물론 컴퓨터 처리속도의 한계가 있기에 무조건 높일 수는 없다. 픽셀 수가 많을수록 그림의 해상도가 높아지지만 컴퓨터 그래픽에서 말하는 해상도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픽 셀 숫자를 말하는 해상도와 인쇄시의 해상도다. 포토샵이나 그림 프로그램에서 볼 때에 해상도(resolution)라고 표시돼 있는 부분은 인쇄시의 해상도를 말한다. 이것의 의미는 인쇄했을 때 단위 길이를 몇 개로 표현할 것인가이다. 보통 DPI라는 단위를 쓰는데 ‘Dot Per Inch’ 의 약자. 1인치 길이를 표시하는 점(픽셀)의 개수를 의미하는 단어다. 칼라 인쇄물은 300DPI가 기본인데 1인치 길 이를 300 픽셀로 표시한다는 의미다. A4 규격 종이를 300dpi의 해상도 일 때의 픽셀 수를 계산하면 2480x3508이란 수치가 나온다. 그러나 2480x3508 픽셀의 그림을 300dpi로 A4 지에 인쇄하나 72dpi로 A4 지에 인쇄하나 같은 품질이 나온다. 컴 퓨터로 그리는 그림의 선명함을 결정하는 해상도는 픽셀 수치라서다. DPI로 표현되는 해상도는 물리적인 크기를 픽 셀로 환산할 때 참고하는 수치일 뿐이다. 픽셀 수치가 같을 때 DPI를 아무리 높여봐야 선명해지지 않는다. 단, 인 쇄물을 만들 때 사용되는 사진들의 DPI는 같아야 편하다.


컴퓨터가 주요 그림 도구가 될 수 있게 한 ‘디지타이저’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은 보통 타블렛을 쓴다. 판모양이서 타블렛(tablet)이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물건이기에 타 블렛이란 말로 정착된듯 하다. 정확한 명칭은 디지타이저(digitizer). 이 단어도 사실은 디지털화 장치란 뜻이 포함 돼 있어 정확하게 지칭하려면 그래픽 태블릿이라고 부르면 된다. 타블렛이라 하면 이 디지타이저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디지타이저는 타블렛, 태블릿PC는 태블릿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펜과 판이 서로 통신을 해 판 위에서의 펜의 절대 좌표를 인식한다. 해당하는 좌표에 해당하는 위치에 마우스 커서 를 위치시킨다. 펜으로 쓰면 왼쪽 클릭. 떼면 마우스 왼쪽 버튼을 놓는 것과 똑같이 작동한다. 물론 펜에는 압력 감지 센서가 있어서 누르는 압력 신호를 컴퓨터로 보낸다. 정밀하지 못하다면 256단계, 정밀하면 8192단계를 인식한다.

판형 디지타이저와 액정형 디지타이저 디지타이저의 큰 단점은 입력하는 곳과 그려지는 곳의 괴리감이다. 손은 다른 곳에서 움직이는데 그림이 그려지는 곳은 모니터 위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디지타이저로 그림 그리는 걸 어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다. 이 괴리감을 해결하기 위해 디지타이저와 액정을 결합해 PC 화면을 바로 보고 그릴 수 있게 한 액정형 디지타이 저가 나왔다. 화면을 바로 보면서 그릴 수 있기에 실수가 줄어든다. 선화의 경우 액정형 디지타이저를 쓰면 작업 속 도가 두 배까지 빨라진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판형 디지타이저가 액정형 디지타이저에 비해 안 좋은 건 아니다. 선화가 아니라면 작업속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액정형 디지타이저는 화면이 미끄러워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고 강화유리 때문에 화면과의 오 차나 펜과 커서의 불일치가 눈에 크게 띈다. 판형 디자타이저에 익숙해진다면 손이 그림을 가리는 일이 없어 편하 고 목 디스크도 예방할 수 있다. 그림용 모니터는 따로 있다 컴퓨터의 내용을 표현하는 모니터. 모니터에 출력되는 어떤 모니터를 봐도 똑 같은 색을 출력할 것 같지만 사실 다르다. 같은 브랜드라도 모니터 모델이 다르면 미묘하게 색이 다르다. 같은 모델이라도 생산 시기나 생산 라인에 따라 색이 다르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구입한 같은 모델 모니터도 색이 다르다 심지어 같은 곳에서 산 똑같은 모델의 모니터를 동시에 놓고 써도 색이 다르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건 LCD의 태생적 문제라 어쩔 수가 없다. 내 컴퓨터에서 보는 색과 남의 컴퓨터에서 보는 색은 똑같지 않다. 모니터를 보고 그린 그림을 휴대폰으로 옮기면 색이 다르게 표시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색이 정확히 표시되는 그림용 모니터는 화면을 출력하는 부품인 패널 중에서도 고급 패널 따 로 모아 만든다. 거기서 한층 더 나가 색을 정확 하게 출력할 수 있도록 조정된다. 모니터의 기 본 사양인 색 재현율은 넓게 말하면 자연의 색 을 표현할 수 있는 비율을 말하고 좁게 말하 면 정해진 규격의 색을 표현할 수 있는 비율 을 말한다. 가장 많이 쓰이는 규격이 sRGB이다. 마이크로 소프트와 HP가 협력하여 만든 모니터 및 프린 터 표준 색 공간이다. 도표에서 색이 있는 부분 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색의 영역이고 가운데 삼 각형이 sRGB로 표시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림


에서 보듯 sRGB는 인간이 볼 수 있는 영역 중에서 극히 일부이나 그림용 모니터의 최소 기준이 이 sRGB 를 커버할 수 있는가이다. 즉, 그림용 모니터가 아니라면 이 영역조차 제대로 표시하기 힘들 다는 뜻이다. 깊게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지기에 간단하게만 설명한다. 모니터의 색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선 조정 과 정이 필요하다. 이 조정 과정을 캘리브레이션이라 부르는데 색을 정확하게 표시하는 그래픽용 모니터가 아 니라면 색이 더 이상해지기에 안 하는 게 좋다.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고 그림용 모니터가 되려면 광역색 패널(IPS나 VA등)이어야 하며 sRGB를 99% 이 상 지원하는 것이 기본, 포토샵을 만든 회사인 Adobe에서 만든 규격인 AdobeRGB를 지원하는 것이 좋 고 색 표현 정확도를 의미하는 델타값이 2 미만이어야 한다. 그런 모니터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 기 쉬운데 높은 색 재현율과 정확도를 지원하는 모니터는 비쌀 뿐 아니라 지원한다고 대문짝만하게 광고한 다. 최소한 30만 원이고 비싸면 몇 백만 원까지도 한다.

그림도구로써 컴퓨터를 설명하려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지금의 이 설명도 많은 분들이 이해하 기 쉽지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구의 특성을 파악하지 않아도 그림은 그릴 수 있지만 도구의 특성을 파악 한다면 더욱 잘 그릴 수 있기에 컴퓨터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

글 사탕고양 제 블로그(soulcreator.blog.me)에 저의 그림 도구 덕질을 올리고 있습니다. 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연재는 컴퓨터를 마지막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림 도구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제 블로그에 글 남겨 주세요.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내가 좋아하면 너도 좋아하니까”



여행 중인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다. 그동안 다녔을 많고 많을 장소들 중에서도 내 마음을 정확하 게 울릴 그 한 곳의, 눈이 시원해지는 광경이었다. 역시 넌 나를 잘 안다고 했더니 친구는 말했다. 내가 좋아하면 너도 좋아하더라고. 비슷한 게 좋을까 서로 다른 게 좋을까. 연애에 대해 말할 때면 자주 등장하는 화제다.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그냥 친구들끼리 편하게 모인 자리에서도.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서로 편 하고 익숙해서 좋다고도 하고, 서로 다른 사람끼리 만나야 부족한 점을 서로 채워주고 보완해줄 수 있어서 좋다고도 한다. 또, 상극인 사람들끼리 끌린다는 말도 있고, 나랑 너무 비슷하면 화가 난다 고들 하는 동족혐오라는 말도 있다.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그렇듯 이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상충되는 연구 결과들이 있지만, 전반적으 로는 “비슷하면 좋다” 쪽이 훨씬 강세다. 비슷한 게 좋아요, 장기적으로는.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렇다. 애초에 비슷한 사람들끼리 엮인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봤을 때, 나랑 비슷한 점이 있으면 호감도가 훨씬 높아진다. 사람들은 사람을 가린다. 좀 더 나아가서 관계 가 발전하면, 비슷한 두 사람이 만났을 때가 진지한 연인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결혼 은 더더욱이 그렇다. 외모 등의 신체적 특성이든, 교육수준 등의 인구학적 특성이든, 성격 등의 심 리적 특성이든 대체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재미있는 논문이 있다. 객관적인 유사성도 중요하지만, ‘주관적으로’ 내가 내 파 트너와 유사하다고 느끼는 것 또한 관계의 만족도나 지속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약 간은 착각일지라도. 즉,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실제보다도 더 근사하게 보이는 콩깍지가 어느 정도 는 관계를 지탱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듯, 실제로 두 사람이 공유하는 유사성의 정도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한다고 느낄 때 관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자신의 사회 관계망 속에서 가족 외에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파 트너에게서 지나치게 이질감을 느끼면,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지고 관계에 위협을 느낀다. 반면에 서로 “우리끼리만 통하는 게 있지”라며 어느 정도 일치감, 유사성을 느낄 때면 무엇보다도 상대방 이 나를 잘 이해해준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거다. 아마도 이게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 었을까 싶다. 우리는 나와 통하는, 나를 닮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 낀다. 그리고 그 효과는 관계에서 느끼는 만족도라든가 관계의 지속성 같은 관계 그 자체의 향방에 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요지는 이렇다. 결국 우리는 나를 닮아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고, 나와 닮 은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도 살아가고 있을 그 누군가는 아마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다. Murray, Holmes, Bellavia, & Griffin (2002). Kindred Spirits? The benefits of egocentrism in close relationships. 글, 사진: 민하 (ㅇㅅㅌ @min.ete ㅇㅁㅇ minha@berkeley.edu)


월간이리에서는 새로운 필진을 찾고 있습니다. 차분 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듯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이것이 될까 싶은 연재들도 가능한 연재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니 연재와 관련해서 문의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 주시면 정말 정말 친절 응대 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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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디테일의 힘 요즘 한국은 미투로 뒤덮여 있다. 워낙 말하기 좋은 이슈라 내가 아니어도 말할 사람은 많을 것이니 그냥 두고 보기만 한다. 다만 한가지 새로운 발견에 반가워 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라는 외침 에 대한 반기이다. 남성이 권력을 쥐고 그 권력을 이용해 다양한 부가혜택을 누리는 것을 넘어, 권력이 없 거나 적은 상대방 특히 여성을 성적욕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오래된 악습의 패턴이다.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 오래됐고 너무 일반적으로 넓게 퍼져있어 (popular하여) 굳이 지적하는 것 조차 생소한 그 런 이슈였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넘긴 이슈. 무례한 사람이라면 ‘좋은 게 좋은 거니 그냥 넘어가’라고 말 할 그런 이슈에 대해 하나 둘씩 반기를 들고 있다. 그 점이 신기해서 미투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무심함을 무던함으로 오해하는 우리 사회의 ‘무식한’ 사리 분별은 결국 ‘권력 성폭력’ 문제가 사회 각처에 꿈틀거리 며 달라붙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띄어 내야 할지 모를 상황을 낳았다. 그냥 해오던 패턴대로, 좋은 게 좋은 대로 지내는 것은 설사 정말 좋은 일이었다 해도 긍정적인 삶의 방식은 아닌 듯 하다.

요즘 나는 해오던 일에서 조금 벗어난 일을 하고 있다. 내 주요 경력은 소비자 리서치인데, 지금은 계약직 으로 빅데이터 관련 스타트 업에 다니고 있다. 소비자 리서치는 고객사의 요구사항에 맞춰 조사를 기획하 고, 그에 맞춰 설문지나 인터뷰 시나리오를 구성한다. 그리고 조건에 맞는 응답자를 찾아서 그들에게 설문 을 하거나 인터뷰를 해서 궁금한 답,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원하는 답을 얻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 고 해석하여 나름의 결론을 끌어내는 보고서를 써 주면 끝이 난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그 접근이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빅데이터는 A.I나 머신러닝 (machine learning)같은 공학적인 접근이 아닌 소비자 행동을 알기 위한 빅데이터, 즉 SNS 소셜 데이터나 CJ-one card 같은 멤버쉽 데이터, 혹은 신용카드 지출 데이 터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이터들 역시 소비자 행동을 이해하고 마케팅 전략을 도출하기 위한 것이 니, 내가 예전에 했던 소비자 리서치의 대안으로 여기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부푼 꿈을 가지고 온 것도 사 실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면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고객도, 이 회사의 임원들도 빅데이터로 무엇을 분석 하고 제안할 수 있는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고객사 미팅에 갔다가 담 당자로부터 “회사에서 빅데이터가 화두라서, 뭔가는 해야 할 것 같아요”라는 황당한 말까지 들었다. 아무 도 왜 빅데이터가 중요하고, 이것이 기존의 소비자 리서치를 통해 얻은 데이터보다 무엇이 장점이고, 무엇 이 약점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많은 양의 데이터이니까, 혹은 다들 빅데이터가 4차 혁명의 핵심이 라고 하니까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4차 혁명의 핵심으로 회자되는 빅데이터는 소셜이나 고객멤버쉽 데이터라기보다 앞 서 잠깐 언급한 A.I 나 머신러닝 같은 분석이 들어가는 것이며, 이때 사용되는 데이터는 모바일 로그 데이 터, GPS 데이터와 같은 trace data (흔적 데이터)이며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양이 축적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에도 A.I를 통해 무슨 혜택 (benefit)을 주고, 어떻게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사무실에서 드는 생각

즉, ‘빅데이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 (value)를 추구하는가’라는 고민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데 여전히 사람들은 ‘하던 대로’의 방식과 ‘그들이 하니까’라는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하다. 중요한 것 은 도구가 아니라, 사고 방식인 것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물어보면 정말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히 설명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반찬에 아침을 먹었고, 학교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났으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쉬는 시간에 는 누가 싸웠는지, 그들은 무슨 일로 싸웠는지까지…… 정말 소상히 묘사를 한다. 그런데 어른들에게 어제 의 일을 물어보면 맥 빠진 문장이 들려온다. ‘그냥 매일 그렇지 뭐.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출근한 길에 누구를 봤는지, 그날의 회사일을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할 필요도 못 느낀다. 그저 그 패턴에 맞게 이동할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매 순간 정말 같은 상황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삶에 거대 한 이벤트가 없다는 이유로 세세한 부분에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 다른 영역이지만, ‘권력 성폭력’(미투 운동을 이렇게 제대로 명기하고 싶다)에 대한 긴 시간의 묵인, ‘ 빅데이터’라는 핫 이슈에 대한 무기력한 동조, 그리고 매일매일의 삶에 대한 ‘동일한 기억’이라는 세 영역 에 게으른 무심함이 일정수준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 내가 쓴 책 앞장에 싸인을 할 때 사용한 문구가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고심해서 만든 것이었는데, 바로 ‘청년같은 마음으로 지내 세요’ 였었다. 청년 같은 마음. 모든 것에 관심이 가고, 나와 상관없는 이슈에 내 의견을 담으려고 하는 마 음. 사회에, 세상에, 깨어있는 그 의식 있는 젊은 마음 말이다. 그것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논쟁은 절대 필 요가 없다고 본다. 그저, 그런 논쟁에 열려 있고, 이슈를 논할 정도로 깨어 있는가.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패턴은 행동을 전제하는 습관과 달라서 생각과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 생각과 사고는 훨씬 자유롭기 때 문에 좋은 패턴도 지속이 되면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으로 나쁜 패턴으로 변형될 수 있다. 그래서 주요 패 턴 (Main pattern)이 포함할 수 있는 해왔던 방식, 남들이 하는 양식, 그리고 반복되는 대부분의 양식에 대해 한번쯤은 구체적인 언어로 나만의 묘사를 할 필요는 있다. ‘나는 오늘 직장에서 무엇을 했는가’, ‘나 는 빅데이터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같은 질문에 구체적인 언어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 람의 견고함과 허술함은 금세 드러나게 된다. 내 삶에 중요한 문제가 아닐수록 더욱 명확하고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삶의 가치, 삶의 주관 같은 거시적인 문제는 누구나 디테디테일 그럴 듯 하 게 표현할 수 있다)

조금 피곤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매사에 이렇게 패턴을 재 점검하고 그 목적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을, 더 욕심 내어 우리 사회를 견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디테일의 힘이다.

권근혜 (lynnox78@gmail.com

과거 마케팅리서처 / 쿠바다이어리 저자


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11. 꿈에 관한 소고

잘 지냈어? 한국은 한 달 동안 동계올림픽 덕분에 분위기가 좋았다며? 이 곳 독일에서도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TV나 라디오를 켜면 예전보다 더 자주 한국에 대한 소식이 들려서 반갑네. 나는 요 몇 주 동안 쌓였던 일들을 해치우고 간만에 휴식을 즐기고 있어. 공부 같은 건 저 멀리 제쳐 놓고 대낮부터 홀가분한 마음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하고, 영화나 드라마도 마음껏 보고 있지. 물론 내가 하는 공부도 좋아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내 분야와는 상관 없는 것들을 접하는 동안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돼. 그래서 나는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다. 얼마전에는 지인의 추천으로 <태릉선수촌>(2005, MBC)이라는 드라마를 봤어. 벌써 13년 전 작품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작품이 가진 흡인력이 대단한 데다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어.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릉 선수촌에서 올림픽을 목표로 준비하는 선수들의 치열한 삶과 사랑을 다룬 작품이야. 시간이 된다면 한 번쯤 보기를 권해.


내가 이 13년전의 드라마를 보는 동안에, 어떤 부분에서 현재와 가장 큰 괴리를 느꼈는지 알아?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폴더형 휴대폰? 배우들의 풋풋한 모습? 그럴 수도 있지. 그것보다 더욱 큰 온도차이를 느끼게 했던 건 바로, ‘꿈’에 대한 태도야. 드라마든 영화든 현실이든, 우리는 언제 부터인가 더 이상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됐어. 설령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 비현실 적인 것’의 상징처럼 취급되거나, ‘돈’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곤 하는 것 같아. 점점 더 유니콘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고 해야하나? 그런 세태가 잘못됐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야. 물론 각자가 가진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라면 정말 행복할 것이고, 나도 그런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라고 믿기는 해.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도 힘들고, 우리 모두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뒷배가 좋은 것도 아니니까. 그런 시절이니 만큼,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인 선택을 한 이들에게 왜 그리 용기가 없다고, 그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는데 말야, <태릉선수촌>같은 테마나 스토리 라인을 가진 드라마들은 특정 시기-주로 2008년 이후-부터 쉽게 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이후 드라마들의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꿈’에 대한 태도는 마치 박물관의 유리장 속에 전시된, 아주 오래된 유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거든. 물론 당시의 초라한 젊음들에게도 ‘꿈’이라는 것은 이루기 힘들고, 감히 넘보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었어. 뭐 그건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간동안 대체 무엇이 그렇게 달라졌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히 ‘내 꿈을 이룰 수 있다(혹은 없다)’ 의 차이는 아니었을 거야. 어쩌면, 그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고 ‘세상 물정도 모른다’며 손가락질하는 일이 지금보다는 적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도 다르지 않았다고? 그래, 그랬을 거야. 그때도 그들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이었던 건, 그게 특별했기 때문이기 때문이니 그랬겠지. 대세와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젊음들은 적어도 자신의 꿈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물론 자신이 꿈꿨던 그대로 앞날이 흘러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을 거라는 대책 없는 낙관이랄까 그런 것들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 용기에 대해서 응원의 눈길로 응답해줄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도, 대략 그 때쯤 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태릉선수촌>의 꼴통 연습생 민기가 무모하리 만치 자신을 믿고 덤벼들어서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던 건, 단지 그의 타고난 성격 덕분일까? <메리 대구 공방전>의 메리가 ‘내 꿈은 충치야. 갖고 있어도 아프고 빼 버리기도 아파’ 라고 했던 건, 단지 그녀가 포기를 몰라서 그랬을까? <뉴하트>의

은성이가

어두운

성장환경과

밀리는

학벌로도

명문

대학병원에서 꿋꿋이 살아 남았던 것이, 그저 캔디 근성 때문일까? 영화 <후아유>의 벤처 게임 기획자 형태가, “다시 63빌딩으로 돌아 오고야 만다!”고 소리칠 수 있었던 용기는, 그냥 근성이 좋아서? 몇 해 전, 웹툰 <무한동력(2008)>의 작가인 주호민 작가가 이런 내용의 트윗을 남겼던 적이 있어.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대사인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라는 대사는, 당시에 ‘꿈’에 방점을 찍고 썼던 것이지만 그 사이에 세상이 너무 변했다- 라고 말이야. 그리고 그 뒤에는 “밥을 먹어야 꿈도 꾸겠지요”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더라. 앞으로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세상은 밥과 꿈,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최소한의 희망을 갖거나 최소한의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곳 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는, 너와 나의 푸르른 꿈이 스스로 퇴색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설령 빛이 바래 지거나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한 번 씩 웃으며 새로운 걸음을 디딜 용기를 가지게 될 수 있기를 기원해. 말이 길어졌네. 오늘 같이 들을 노래는 너도 잘 아는 노래야. 진부한 노래 골랐다고 욕하지 마. 때론 익숙하던 것에서 답이 나오더라. 또 편지할게.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11. 사랑의 계절

언제부터였을까? 누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고 하면, 봄이라고 답하게 됐다. 벚꽃이 피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공기 중에 아직 겨울의 잔재가 조금 남은 듯한, 여름으로 넘어가기 직전 찰나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명으로 가득 찬 계절. 그 중심에 딸기가 있었다. 봄딸기를 보면 행복해진다. 달큰하고 새큰한 향기에 빨갛게 윤기나는 자태까지. 씻는 순간부터 행복해진다. 과일 가게 앞에 딸기 박스가 쌓이고, 마트에서 딸기가 진열되고, 사람들은 그 근처를 서성이다 장바구니에 딸기를 담는 다. 잘 무르는 과일이라 오래두고 먹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 그야말로 봄 그 자체인 과일이다. 딸기철이 되면 난 조금 바빠진다. 1년치 먹을 잼도 만들어 놔야하고, 여름까지 먹을 청도 만들어 놔야한다. 오래 오래 딸기를 만끽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는 것이다.


딸기를 씻는다. 하나하나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히. 꼭지를 따내고 다시 헹궈낸다. 다치지 않도록. 아기를 다 루는 일인 것만 같다. 온 집안에 딸기 향이 퍼져나간다. 딸기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이유를 찾으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한다. 그저 딸기는 딸기니까 좋다. 보기만 해도 좋고, 한 입 베어 물면 더 좋다. 그녀와 함께 산지도 6년이 넘었다. 우리는 조금씩 늙어갔고, 조금씩 닮아갔다. 더 이상 처음처럼 많은 말을 나누 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고, 살갗이 닿으면 더 좋았다. 본래 하나였다는 듯이 매일을 붙어있었다. 많은 곳을 함께 다녔고, 함께 여행했으며, 희미한 미래에 스케치를 덧대가며 함께 꿈을 꿨다. 습관과 경험이 응축되어 우리만의 역사가 됐다. “언니들은 제 롤 모델이예요.” 갓 사랑을 시작한 친한 동생 둘이 차를 마시다 말고 말했다. 언니들처럼 살고 싶다고. 이윽고 질문들이 날아온다. 어떻게 만났는지, 다투긴 하는지. 질문은 귀결된다. 어떻게 서로를 운명의 상대라고 확신하는지. 운명의 상대라는 확신은 없다. 그저 운명의 상대라고 정했을 뿐이다. 평생을 같이 호흡하며, 예뻐하며, 전력으로 마음을 나눌 각오를 했을 뿐이다. 배려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먼저 베푸는 것에 아까워하지 않을 뿐이다.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녀를 과일에 비유하자면 단언코 딸기다. 열렬히도 내가 사랑하는, 좋아해마지 않 는, 내 인생의 봄 그 자체다.


좋아하는 것들을 좀 더 오래보고 싶은 마음은 같다. 그런 마음에서 나는 딸기를 저장하기 시작했다. 좀 더 원형에 가깝게, 오랫동안 먹을 수 있도록. 이번에 만들 것은 내맘대로 콩포트다. 콩포트는 과일을 설탕에 조려 만든 프랑스식 디저트로, 과일청보다는 잼에 가깝다. 원래라면 푸딩처럼 만든 뒤 오 랫동안 보관하기는 어렵지만, 설탕을 더 첨가해서 시럽에 졸인 딸기처럼 만들 예정이다.

먼저 딸기를 하나하나 씻는다. 잘게 자르면 잼이 되어버리므로, 원형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한다. 설탕은 과일 무 게의 절반이다. 상큼한 맛을 더하고 싶어 난 레몬 반개의 즙을 넣었다. 딸기에 설탕을 넣고 즙이 빠져 나오길 기다 린다. 중간중간 조금씩 뒤적여주다보면 1-2시간 안에 설탕이 딸기에 모두 녹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대로 냄비에 넣고 살짝 끓인다. 거품이 떠오르면 제거한다. 하얀 거품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 병에 담았을 때 하얀 이물질이 껴 있는 것처럼 보여,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이다. 한소끔 끌어오르면 냄비에서 내려 반나절 정도 식히며 숙성시킨다. 이 과정을 지나면 묘하게 맛이 더 좋아진다. 숙성이 끝나면 과일과 시럽을 분리해, 시럽을 따로 끓여 졸인다. 1/2 정도 졸여지면 과육을 넣고 뒤적인다. 뜨거운 시럽의 온도로 과일이 투명해진다. 맛이 베여드는 게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이제 끝이다. 뜨거운 물로 소독한 유리병에 담아서 냉장실에 넣고, 두고두고 꺼내 먹으면 된다. 잼과 달리 과육을 씹는 맛도 있으며, 시럽은 우유에 타먹으면 맛있는 딸기 우유가 된다. 무가당 그릭요거트에 넣 어 먹으면 고급스러운 요플레를 먹는 느낌도 날 것이다. 봄은 이제 시작이다. 부지런히 만들어 향긋한 나날을 준비해야겠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체니사이드

글. 장수양


3 아무 上

과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유지와 나를 알고 이해해주는 유일한 친구다. 그는 조용하고 말이 많아서 과묵한 수다쟁이 같은, 기묘한 인상을 준다. 과나는 근처에 살았으므로 만나러 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지금 상태로 지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과나에게 말해도 좋은 부분을 가능한 과장하거나 거짓되지 않게 얘기했다. 안전장치처럼 서두를 늘어놓지도 않았고 오해를 경계하여 섣불리 말을 보태지도 않았다. 한 가지, 농담에 대 해서만은 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말했다. 과나의 현실적인 걱정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내 말을 다 듣고 과나는 말했다.

―유지에 관해 더 이상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돌아온다면 돌아올 테고, 넌 다시 만날 유지가 어 떤지 아직 모르니까. 지금부터 돌아오지 않는다면, 하고 가정하는 것도 소모적이야.

과나는 처음부터 이것에 대해 피력하려고 마음먹은 듯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가능할지 몰 랐지만 나는 수긍했다.

더는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와 연관된 기억이나 감정이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그것에 알은 척하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다른 부분을 더듬어야 한다. 유지를 감지하는 촉수를 마비시켜야 한 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건 조금 둔감해지겠다는 것이다. 생각은 둔해지는 동시에 예민해지는 게 가능하다. 나는 처음에 시각적인 부분을 염려했다. 아직까지 농담은 우리 집에 있다. 그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응. ―우울하거나 식욕이 없지는 않아? ―식욕은 없어. 과나는 내가 뭔가 조금만 무기력하다 싶으면 식사를 거르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며칠째 제대 로 된 식사를 한 일이 없었다. ―이제 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혼잣말처럼 나는 휴대폰에 대고 중얼거렸다. ―천천히 고민해 봐. ―이럴 때 사람들은 뭘 하지. ―자아 찾기 여행. ―절대로 하기 싫은 어감. ―해외로 나가거나? ―여윳돈이 부족하다.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거나. ―그런 재미없는 일. ―이건 나도 하기 싫다.

나는 내내 웃고 있었다. 과나는 과자를 씹고 있는 듯했다. 발음이 어눌했다. 아마도 벌집 피자나 녹차맛 티티일 것이다.

―고향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곳에 가서, 부모님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과나가 뭔가를 우적우적거리며 말했다. ―그건 좋다. ―나라면 고향에 가는 것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 거야. ―너는 어딘데? ―토성. 너는? ―난 여기서 가까워. ―혹시.

과나가 탄식 같은 소리를 냈다. 그는 어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전화를 끊은 나는 이불을 어 깨에 두르고 거실로 나갔다. 어른의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처럼 이불이 바닥에 끌렸다. 농담은 러 그에 몸을 비비며 자고 있었다. 차마 유지의 방을 쓰라고 할 수는 없어 소파에 커버를 새로 깔아 주고 제법 두꺼운 이불도 내려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농담은 잠자리를 잘 이탈했지만 한 번 이탈 한 후에는 시체처럼 얌전하게 잤으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자고 있는 동안 농담은 매우 수상한 모습이다. 그는 반쯤 녹은 거대한 무지개색 카라멜처럼 보 인다. 과나의 희망 출처인 토성처럼 띠가 생기기도 하고 색의 경계가 흐릿하게 마블링을 그리기 도 한다. 플러버 같은 질감이어서 러그에 얼룩이 남지는 않는다. 이 상태의 농담은 멸종 동물처 럼 희귀하게 느껴진다.

자고 있는 모습을 오래 보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나는 부채를 들고 그를 깨웠다. 바람을 쐬자 카라멜이 여러 색의 무늬로 화과자처럼 화려하게 변하더니 농담이 깨어났다. 그는 눈(이라고 하 면 좋을 법한 무늬)으로 나를 퉁명스럽게 보다가 귀찮아하는 태도로 구르듯 러그에 몸을 비볐다. 그가 바닥에 구겨놓은 이불을 주으려고 하는 사이에 그는 유지와 닮은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비를 맞는 진흙과 비슷한 움직임으로 그는 사람이 되었다.

―안녕.

농담은 밝게 인사했다. 그렇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는 이 집에 고정적으로 머물면서 생활 패턴이라는 것을 새로 만들고 있었다. 취침 시간, 기상 시간 따위가 전부 거북한 듯했다. 내가 강


요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규칙을 세운 것도 아니었다. 단지 방금 전에 들 린 새소리를 흉내내듯이 아무 저항 없이 일정 한 패턴을 유희하고 있었다. 얼마 후면 깨끗이 그만두고 분방하게 지낼지도 모를 일이다. 물 론 그 ‘분방함’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갈 곳이 있어. ―알겠어.

농담은 일어나서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 는 어제의 차림 그대로였다. 유지가 자주 입는 회색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 저건 유지의 옷 이 아니라 농담의 몸에 해당했다. 그는 선반 위 에 얹어둔 야구모자를 썼다. 그것만 내 거였다.

―다른 모습이어도 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농담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같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려면 농담이 조금 다른 눈금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캡모자를 벗기고 먼지를 털어낸 뒤 농담에게 다시 씌워주었다.

오전의 향이 났다. 새벽에 비가 와서 인도의 벽돌이 축축했다. 평소보다 진한 분홍색과 회 색이었다. 농담은 내게서 한두 걸음 떨어져 걷 는 중이었다. 최대한 캡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나는 마음 속으로 농담이 가능한 유지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이제는 그를 보아도 유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지금의 농담이 유지와 얼만큼 비슷한지 가늠하기가 쉽


지 않다. 어느 샌가 농담은 나를 앞질렀다. 캡모자 바깥으로 흘러 나온 긴 머리카락이 울타리에 걸쳐 자라는 넝쿨 식물처럼 무연하 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과나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이 아니야. 불안이야. ―괜찮을 테니까. ―고마워. ―사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응. ―좋을 대로 괜찮아. ―응.

과나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그는 낯간지러운 말도 정량을 잰 위 로도 싫어한다.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은 상태처럼 보였던 모양이 었다. 나는 몰랐다. 나 자신이 안 좋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했더니 과나는 웃었다.

―좋지 않은 게 아니라 중요한 거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 다.

―비로소 동일해진 거라고 생각해.

뜻밖에 과나는 이런 말을 했다.

―유지와? ―응. ―어디가. ―유지는 경주에 갔으니까.

경주는 유지가 태어난 곳이다. 이렇게 어중간한 때에 어떤 일로 그 곳에 갔을지 나는 궁금했었다.


―유지가 네가 모르는 일을 하는 동안 너도 모르는 일을 해야지. ―고향이었으면 하는 곳에 가서? ―응.

유지는 내가 태어난 곳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만났다.

―여기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유지만큼 모르는 일을 만들어.

과나는 드라이브를 하는 사람처럼 시원스레 말했다. 서로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은 연인이 우리가 걷는 길을 거슬러 갔다. 색만 다른 후드티를 맞춰 입고 있었다. 인도가 좁아 한 사람의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내 귓가를 스쳤다. 가슴 한 켠이 서 늘해졌다. 하나 걸러 한산한 차도에 지저분하고 귀여운 잿빛 봉고차가 콩벌레처럼 지나갔다. 농 담은 인도 바로 아래에서 딱 붙어 걸으면서 봉고차의 차면과 차창에 순간적으로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유지와 나의 집은 비교적 한산한 곳에 있었는데 모퉁이 하나를 돌아 건널목을 지나면 분위기가 반전되며 번화가가 나왔다. 유난히 고요한 밤에는 착각처럼 아득하게 들리는 번화가의 소음이 계속해서 멀어지곤 했다. 그 시끄러운 골목에 다다르기 직전, 사거리의 한 구석에 있는 건물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농담이 웅덩이에서 물을 잘못 걷어찼다. 탁한 빗 물이 젖은 벽돌에 새로이 튀었다. 얼룩이 남자 새벽비로 진해진 벽돌 색이 도로 옅어졌다. 우연 처럼 농담은 알맞은 위치에 정지했고, 연이어 나도 멈췄다.

이 건물은 사방에 계단이 있어서 모바일 게임 모뉴먼트 벨리monument valley를 연상시킨다. 물 론 그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조금 다운그레이드 버전 같다. 깨끗하지 않은 무채색과 쇠 난간에 낀 뿌연 먼지, 간결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설계가 그렇다. 건물의 간판에 한글로 적힌 ‘블루아 몬드’가 어떤 회사인지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블로그나 트위터에 특별한 후기가 심심 찮게 올라오는 블루아몬드 수영장이 천안에 두 곳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서울의 지점만 수영장 이 아니라 목욕탕인지는 잘 모르겠다. 건물 외벽을 살짝 휘감은 철제 비상계단과 내부로 직접 향 하는 밝은 회색 계단. 잘못 짠 아이스크림 같은 경사로. 그 옆에 바짝 붙어, 잘 보이지 않는 짧고 비스듬한 계단. 건물 뒤의 주차장 쪽에서 바로 이어지는 흡연실 분위기의 꽉 막힌 계단. 오랜만 에 왔는데도 블루아몬드 건물의 모든 계단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속으로 하나하나의 층계 를 만져보았다. 오르고 싶은 곳을 선택했다. 끝


건축이 좋아 44. 그 섬에 갔다. aoikasa 소설 ‘당신들의 천국’ 에는 소록도가 주무대로 등장한다. 소록도에 새로 부임해 온 조원장은 이 곳을 나환자들(한센병환자들)의 천국이라 만 들겠다 약속하며 간척사업을 실시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소록도에서 있었던 오 마도 간척사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우리가 살 곳을 우리가 스스로 만든다’라는 취지하에 행해진 간척사업, 그러나 간척사업이 끝나자 그 땅은 전라남도로 이관되 었고 그들의 희망도 사라졌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섬 소록도. 바닷가의 곡물창고 사슴을 닮은 작은 섬, 소록도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군에 속한 남쪽의 작은 섬이다 . 사슴을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 소록도. 2009 년 소록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녹동항에서 배로만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소록대교와 거금대교로 녹동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소록도


와 이어서 거금도로 진입이 가능하다. 소록도의 위쪽으로는 삼시세끼로 유명한 득 량도가 있다. 소록도는 득량도보다 2 배 정도 큰 섬. 삼시세끼를 통해 본 득량도가 아름다웠듯 , 소록도도 너무나도 아름답다. 오랜 시간 그 섬이 가진 슬픈 역사를 반 영하듯 , 그 섬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소록도에 한센병환자들이 수용되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의 일이었다. 당시엔 한센 병이 아닌 나병환자, 아니 그렇게도 아니고 문둥이라 불렸다. 1916 년 소록도에 자 혜의원을 설치하고 1917년 처음으로 환자 수용을 시작했다. 이전에도 서양인 선교 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병원들이 있었지만, 일제는 소록도 병원을 만들면서 이에 대항하고 국가적인 한센병 관리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센병 환자의 격리 수용 은 20 세기 초반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식민지에서의 그 것은 일본 본국 이나 서양 보다 훨씬 더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었다. 강제로 수용된 환자들은 한센병이 유 전병이 아닌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종수술을 받았어야 했으며, 혹여 아이 라도 태어나면 철저하게 격리한 채 키워져야 했다 .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 두 줄로 늘어서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사진은 보기만 해도 가 슴이 아픈데 그 곳에 선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물 론 마땅한 한센병 치료제가 당시에 개발되지 않은 상태라 격리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 여수 나병원(애양원)에서와 비교해보면 이는 분명 식민지 의료의 한계이 자 폭력성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소록도에서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을 뿐 아니라 , 한센병 연구를 위한 실험체로서 고통을 당했다 . 이 곳은 치료시설이자 수용시설이었기에 규범에 어긋나면 감금실에 감금되었고 , 감옥에 가두어지기도 했 다 . 이들은 헤어진 가족을 다시 한 번 보지 못한 채 죽어서까지 그 곳을 떠날 수 없었다.

소록도 검시실.


서생리 자혜의원과 목욕탕


서생리 마을. 남아 있는 병사(病舍)와 서생교회


1916년 처음 만들어진 자혜의원은 소록도의 중앙에서 약간 남서쪽에 위치한 서생 리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서생리는 그러니까 소록도의 첫 번째 마을인 셈이 다 .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이 곳에는 처음 만들었던 소록도 자혜의원과 1920-30 년대 및 1970년대 경에 만들어진 1-2 층 규모의 병사 (病舍)들이 위치하고 있다 . 병원의 동측 약간 높은 지대에는 공중목욕탕이 있고 , 그 옆에는 사무실이 있 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록문화재인 자혜의원을 제외하고 서생리 마을은 언제부 터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버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5 년 전쯤 이 곳에 방문하게 된 조성룡 건축가와 성균건축도시설계원이 이 곳을 돌아보고 , 이 곳의 기록을 남기며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멸하는 그 과정을 돕는 작업을 시작했다 . 그들이 택한 방식은 관광객을 끌어 모아 이 것 저 것 물건을 팔며 그 곳의 시간과 기억들 을 다 사라지게 만드는 재생이 아닌 그 곳의 시간과 기억들을 고 스란히 남기며 ‘건축의 소멸’을 돕는 방식이었다. 1933 년 소록도는 전체 섬의 규모로 확장되었고 , 제 4 대 수오 ( 周防正季) 원장의 취 임 이후에는 소록도 내에 벽돌공장을 만들고 환자들을 동원해 확장 공사를 시행하 였다 . 현재 관광객의 접근이 허가되는 중앙공원이 바로 수오 원장 당시에 만들어진 공원인데, 공원의 중앙에는 수오원장의 동상이 있었다. 수오원장은 그 혹독한 통치 로 인해 결국 환자였던 이춘상에게 피살당하였다. 중앙공원은 말 그대로 소록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얘기

해서는 병사지대와 관사지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섬의 동측, 그러니까 녹동항

에서 오는 배가 닿는 항구가 있는 지역은 관사지대로 소록도를 관리하는 인원들이 사는 곳이다. 이들은 관사에 살며 녹동항을 통해 육지로 출입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었다 . 반면 섬의 서측 , 즉 병사지대에 사는 이들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 일단

그 곳에 들어오면 나갈 수 없었다. 소록도라는 갇힌 공간에서 평생을 살아가야했던

이들은 소록도 내 벽돌공장에서 스스로 만든 벽돌을 쌓아 집을 만들고 , 자신들의

신체에 맞춰 생활용품들을 만들어 사용했다. 병사지대 안에는 첫 마을인 서생리 마

을을 비롯하여 7개의 마을이 있었고 , 그 중 2-3 개의 마을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현재 소록도에 사는 주민들은 한센병 완치자들이다.)

중앙공원 옆에는 새로 건립된 소록도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 내에는 소록

도의 역사 뿐 아니라 환자들의 이야기들, 환자들의 생활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데 그들이 직접 만들었던 온갖 생활기구들을 보노라면 그 곳에서 살아갔던 이들의 삶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 소록도박물관과 중앙공원까지는 일반 관광객의 접근이

허용된다. 마을 중 하나는 사라지고 현재는 주차장이 되었는데 , 그 가운데 남아있


던 병사 하나가 소록도 안내소가 되어 서 있다. 조성룡 건축가가 주차장에 홀로 남

아 있던 이 건물을 고쳐 안내소로 만들었는데, 매 칸마다 담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 다. 소록도 내에는 다양한 시설들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작은 신사도 여 전히 남아 있고, 곡물창고와 학교, 교회와 성당, 감금실과 검시실, 감옥 등 많은 건

물들이 남아 있다. 또한 건물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소록도의

주민들이 하나하나 가꾼 아름다운 자연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소록도의 풍경을 완 성한다 . 이 곳은 지금까지는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기에 이렇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소록도의 인구는 점차 줄고 있고 고흥군에서는 이 곳을 거금도 와 연결시켜 고흥 관광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한다. 소록도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도 이 곳의 시간과 기억을 남기면서, 이 곳에 살았던 주민들을 존중하며 조 금씩 변화를 꾀할 수는 없을까. 조성룡 건축가와 성균건축도시설계원의 작업이 앞 으로도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센병은 해방 후 DDS 등의

보급 등으로

감소하였 고 ,

점차

1990 년대에

이르러서 한국에서는

센병이 종결되었다는

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한센병에 대한 편 견은 이미 병이 나은 사 람들에게도 계속 되어 한 센병 환자들은 병이 낫고 난 후에도 상대적으로 인 가에서 떨어진 곳에 정착

촌을 만들고 축산업, 주로

중앙공원. ‘나병’을 ‘한센병’으로 바꾸어 쓴 게 눈에 띈다.

돼지를 치며 살아갔다 . 그렇게 스스로를 격리하고 살아갔음에도 이들에겐 늘 문둥

이라는 편견의 시선이 따라다녔다. 전국에 100 개가 넘었던 정착촌도 이제 점점 소

멸해가고 있다. 부디 , 정착촌에서 나온 이들은 더 이상 편견없이 살아갈 수 있길 .

소록도와 정착촌의 소멸이 기억을 지워내거나 소비하는 일이 되질 않길. ‘ 한센병은 낫는다’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방황하는 칼날 (2014) 감독 이정호 2014년 그 해는 명량의 해였습니다. 이 정도로만 정리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열품을 몰고왔었죠. 2014년 국내 박스오피스 기록에 따르면 방황하는 칼날은 50 위 98만 9593명이 관람한 영화입니다. 그 위로는 아마도 많 은 사람들이 보지 않았을 <슬로우 비디오> <빅매치> <찌 라시> <인간중독> <해무> <두근두근 내인생> <피끓는 청 춘> <제보자> <기술자들> <용의자> <표적> <끝까지 간 다> 이 영화는 잘 만들었죠. <신의 한수> 이 영화도 잘만들 었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역린> <타짜 2> <군도> <국제시장> <변호인> <수상한 그녀> <해적> <명 량> 과 같은 한국영화가 있습니다.

50위 안에 든 24편의 영화 중 제가 본 것은 15개 정도 되네요. 그 중에서 오늘은 <방황하는 칼 날>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우선 감독은 이정호 감독으로 각색을 맡은 영화들을 보면 <석조저택 살인사건> <더 폰> <탐정 > <방황하는 칼날> <간첩> <용서는 없다> 이고 감독을 맡았던 영화는 <베스트 셀러> (잘 만 든 영화죠) 과 <방황하는 칼날> 이 있습니다. 스릴러나 추리 추척 물에 장점을 보이죠. 이런 경우 기본적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의 톤이나 임팩트가 나쁘지 않습니다. 이미 전작이었던 <베스트셀러>로 증명을 한 바도 있으니까 어찌보 면 <방황하는 칼날>을 언젠가 보는 것은 예견된 사실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인지 <방황하는 칼날>은 개봉 당시부터 흥미롭게 지켜보던 영화였습니다. 흥행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이게 결국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 꽤 높 은 점수를 줍니다. 여기에 감독의 탄탄한 연출 및 촬영 점수가 붙으니 무조건 봐야할 영화 중 하 나가 됩니다. 하지만 원작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란 것과 사적 복수를 다룬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 기 때문에 어느정도 예견된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이야기 구조를 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 몇 년을 묵혀두었습니다. 화면 색과 같은 것들이 빼어난 것은 이미 예고편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 더 긴 시간을 들여서 영화를 본다는 것에 적잖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포 스 터 만 봐 도 기 본 기 가 좋 다

이 경우 비용 대비 효율 이라는 지점이 필요하고 결국 몇 년 뒤 넷플릭스를 통해 이 영화를 보 게 되었죠.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딸을 둔 아버지의 사적 복수를 다룹니다. 원작 소설에서 소년법을 중요하게 다뤘던 것과 달리 영화는 그것 보다 간결하게 감정에 호소하며 이야기에 힘을 싣습니 다. 사적 복수를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따뜻하고 친근감 있는 배우 정재영과 2012년 <골든 타임> 을 통해 진한 인간미를 보여준 배우 이성민을 이용해 감독은 관객들을 잘 이끌어 갑니다. 이야기 좋고 화면 좋고 연출 좋은 영화죠. 배우들의 연기는 또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다만 기본적인 구조의 매력이 조금 약한 것 뿐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영화가 취향이 타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추천을 할 수도 있고 전혀 눈길도 주지 않는 영화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영화가 가져야할 기본기가 무척 잘 갖춰진 영화 입니다. 잔 혹한 장면도 있지만 그것도 사적 복수의 처절함과 주인공의 감정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잘 쓰 여졌고 전체적으로 화면의 연출이나 안정감 그리고 장면간 리듬이 뛰어납니다. 그렇게 생각하 면 추천할 만한 영화지요. 영화 내부의 이야기야 영화를 보시게 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니 이정도로 하고 또 다른 지점의 이야기를 해볼 까 합니다.


왜 이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을까요? 이 영화의 흥행 순위는 망작이라고 하는 여느 작품들보다 낮습니다. 단순 흥행만이라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영화 외적인 부분이 작용하지 않았나 합 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달에 언급했던 <골든 슬럼버> 한국판이 <골든 슬럼버>에서 중요하게 생각 하는 일본에 뿌리 깊은 정서를 옮겨 내지 못해 흥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은근한 예측과 맞닿은 지점이 있습니다. <방황하는 칼날>의 경우 원작 소설이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것을 생각해 보면 한국과 일본 각 국가의 사람들이 느끼는 사법 체계에 대한 느낌의 간격을 감안했을 때 흥행 요 소가 조금 약하지 않았나 합니다. 상대적으로 사적복수에 대해 공감하기에는 한국의 사법체계(현실을 보면 사법체계에게 조금 미 안하지만)의 구조가 일본과 조금 차이가 있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주인공에게 그래 잘했어! 라고 무조건 공감하기보다 그건 그거고 사회를 바꾸자! 는 에너지가 더 큰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한국은 정치적인 면에서 일본과 다르게 개선된 부분들이 많으니 까요. 이런 부분들이 일본에 비해 더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면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런 작품이 폭 넓은 감동과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어찌 보면 좋은 일일수도 있지요. 상대적으 로 사회 구조에 대해 신뢰도가 높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어찌되었든 감독의 캐스팅 능력과 연출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차기작을 기대해 봐야겠지 요. 저는 솔직히 차기작이 무척 기대가 됩니다.

다음 달에 만나요


의미없는 이야기 글. 그림. 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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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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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황정운

이훈보

보내는 공

삼 년 전입니다. 점심을 먹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습니다. 교보문고에 저 혼자 간 것은 아니었고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였습니다. 함께 간 동료 중에 어떤 선배가 각자 원하는 책이 있으면 한 권씩 선물해줄 테니 마음껏 책을 고르라고 말을 건넵니다. 각자 시간은 십 분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입구에서 흩어져 십 분 뒤에 읽고 싶은 책 한 권씩 들고 서점 내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십 분 뒤. 각자의 손에 책 한 권씩 들려 있습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다른 선배의 책을 보니 <나이 서른에 시작하는 인문학 …… > 이런 제목으로 기억합니다. 이 제목으로 찾아봐도 정확히 책이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아 아마 비슷한 제목이었던 듯 합니다.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선배는 평소 인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인문학에 관심이 참 많아, 라고 대놓고 홍보하는 사람도 드물겠습니다만. 원래 크게 관심은 없었고 조금 늦은 듯 하지만 이제라도 인문학이라는 것에 조금 관심을 가져볼까. 그런 마음으로 그런 제목의 책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저는 그때 윤난지 교수의 <현대미술의 풍경 (한길아트, 2005)>을 골랐습니다. 유독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던 무렵이기도 했지만 글쎄요. 그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책을 읽는다고, 나는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다고, 나는 인문학을 잘 알고 인문학에 빠진 사람이라고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때 선배가 들고 있던 그 책을 흘깃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문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도 인문학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짓눌린다는 것. 그리고 정말 인문학을 그 한 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인문학은 모든 사람이 신앙처럼 가까이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스쳐갔던 교보문고의 기억이 스쳐갑니다.

저 역시 인문학의 무게에 짓눌린 적이 있습니다. 햇수로 8년째에 접어들었으니 순간의 짓눌림이라고 하기엔 꽤 긴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짓눌림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저는 2010년부터 지금의 직장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스물 여섯의 나이였죠. (올 해는 벌써 서른 넷이 되었습니다.) 여하튼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듬 해부터 <1년에 인문학 책 읽기 100 권 프로젝트>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1년에 인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 100 권을 읽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어쩌면 책에 대한 예의라곤 없어 보이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사실 엉뚱한 이유에서입니다. 직장 상사가 1년에 책 100권을 읽으면 100만원을 주겠다며 호언장담하길래 반발심에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시작한 책 100권 읽기. 사실 100권을 읽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요구하기도 하고 100권을 모두 인문학 책으로 구성하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100만원을 내건 상사는 제가 그 해 11월 무렵 100권을 모두 읽었습니다만 끝내 100만원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결혼식 주례를 봐주셨으니 저 역시 불만을 표하기도 어렵겠습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현실과 타협해서 <1주에 책 한 권 읽기>가 되었습니다. 100권에서 52권으로 반 토막 났지만 지난 8년간 책을 읽으며 저만의 생각이 뭐라도 정리되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조금은 거짓말이겠죠. 인문학 책을 가까이하며 저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은 100권의 책이 아니라 단 한 권의 책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혹은 단 한 명의 작가라고 바꾸어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의 화두는 인문에 대한 것이지요. 저는 그 작가에 기대어 인문에 대한 저의 생각을 꺼내보려 합니다.

서경식 작가. 재일조선인 2세이자 지금은 도쿄 경제대학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서경식 작가는 조금은 각별한 가족사가 있습니다. 1971년 한국에서 공부하던 두 형이 서울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됩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흘러 1988년과 1990년에야 두 형이 비로소 석방됩니다. 그 형들이란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인 서승과 인권운동가인 서준식입니다. 그 사이 삼 형제의 어머니는 투병 끝에 사망합니다. 서경식 작가는 이런 비극적인 가족사와 재일조선인이라는 배경으로 디아스포라(離散)를 삶의 화두로 끊임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서경식 작가가 사회운동가처럼 들릴 수 있겠죠. 그러나 그는 매우 의욕적인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언어의 감옥에서>, <난민과 국민사이>, <역사의 증인, 재일조선인>,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와 같은 책에서는 날카로운 논객의 면모를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나의 서양미술 순례>, <나의 서양음악 순례>, <고뇌의 원근법>,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 힘>, <내 서재 속 고전>과 같은 인문 혹은 예술 책에서는 한없이 섬세한 에세이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나 生을 관통하는 자신만의 작가가 있겠죠. 저 역시 그렇습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신준형 교수(미술), 씨네21 김혜리 기자(영화), 황정은 작가(소설) 그리고 서경식 작가(인문) 가 저에게는 삶을 관통하는 나만의 작가들입니다. 제가 서경식 작가를 처음 만난 건 2011년. 인문학 책 읽기를 처음 시작했던 때입니다. 이제서야 부끄럽게 고백하지만 200페이지 남짓한 얇은 분량 때문에 그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집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시작된 서경식 작가와의 同行 …… 서경식 작가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가 서른 살 무렵에 처음으로 유럽에 몇 달 머물며 보았던 서양미술 작품 감상을 다룬 책입니다. 출판사 창비에서 1992년에 펴냈으니 출간된 지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뭐랄까요. 책에서 전해지는 그의 생각, 생각의 온도, 생각이 전해지는 문체 모든 것들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서경식 작가가 자신의 가장 어두운 뒷골목으로 저를 초대해서 아무 말도 없이 침묵 속에 함께 걸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대학 3학년생이 되었을 뿐인 스무 살 때에 형들의 투옥사건을 만난 나에게는, 형들을 구출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는 것이 그 후의 ‘생활’로 되었다. 그것은 좀더 보편적인 대의( 大儀)에 이어지는 길이기도 할 터이었다. 허나 그것은 또한 스스로의 무력함과 왜소함을 알게 하는 나날이기도 했다. 나는 단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이 운명의 형태를 속속들이 지켜보도록 스스로에게 명령해왔을 따름이지만, 그 과정에서 역사와 인간, 민족과 개인, 고향과 유망(流 亡) 그리고 고통과 죽음 같은 것들에 대해서 거듭거듭 많은 것을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나 죽음이란, 그것이 내 자신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언제나 내 몸 가까이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한 느낌이나 생각은 모름지기 명확한 언어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도 불분명한 ‘ 응어리’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럽을 여행하면서 온갖 종류의 서양미술에 접하고 그것들과 마음 속에서 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내 속에 있던 불분명한 ‘응어리’가 조금씩 표현의 형상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나의 서양미술 순례> 에필로그 부분, 서경식 씀, 창비 펴냄

이 책을 읽고 제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양 미술작품에 대한 안목. 서경식 작가처럼 오랜 기간 유럽에 머물며 이름난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동경. 아닙니다. 저에게는 서경식이라는 작가,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남았습니다.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세상에서 무엇을 읽고 느끼는지 그 시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뭐랄까요. 오늘 뭐랄까요, 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의 수 많은 단어들. 사회, 예술, 현상, 군상, 정치, 도덕, 고뇌, 희열, 추억 이런 것들을 자신의 몸에 투영시켜 체로 한 번 거른 것들, 체로 한 번 짜낸 축축한 것들을 남몰래 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축축한 찌꺼기들이 무척 좋았습니다. 서경식 작가가 느끼는 슬픔의 정서, 고뇌의 정서, 반성의 정서라는 것이 제가 삶을 이해하고 느끼는 방식과 매우 유사했던 겁니다. 저를 알던 어떤 변호사가 ‘정운아 너의 글에서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나’ 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인지 서경식 작가와 저의 유사함이 반가웠고 그래서 더 이 사람에게 친밀함을 느끼고 동화되고 싶었습니다. 오늘 길고 긴 이야기의 종착역이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저는 서경식이라는 작가를 통해 저를 만났습니다. 글을 읽으며 나 자신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저는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아니고 너도 아니며 나라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나는 무엇을 싫어하고 이런 것들을 나의 생각과 언어로 그려나가는 것이 인문학이 전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인문학을 구성하는 것들은 이렇습니다. 문학, 사회, 철학, 예술, 종교, 윤리 …… 끝도 없겠군요. 동양과 서양에서 수 천 년에 걸쳐 축적된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지혜들의 교집합이 인문학이라고 불립니다. 교집합이기 때문에 인문학은 흔히 보편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수 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은 소설이 고전 소설, 그러니까 클래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수 백 년 시간 동안 수 백 만 명 보편적인 마음에 호소되는 것이 고전 소설에는 분명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보편이라는 것에 조금 거부감을 느낍니다. 나는 결코 너와 같아질 수 없고 나는 나로


존재할 것인데, 내가 일생에 걸쳐 그나마 조금씩 더듬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나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에게 인문학은 보편이 아니라 개별에 대한 것입니다. 보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을 거울 삼아 나라는 개별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확인하는 과정.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각자는 조금은 이기적일 수도 있겠군요.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 구절처럼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최초의 악수’를 건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서경식 작가에 기대어 이야기를 시작하여 인문학에 대한 제 생각을 들려 드렸으니 제 언어에 기대어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몇 년 전 스스로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점차 피로해지는 직장생활의 반발심에 작성한 것이지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한 번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2년 전 독립잡지 <월간 그런사람>을 창간하며 실은 선언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편지가 조금 길었습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지는 법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나를 아끼고 좋아할 때 마음이 있을 때 인문학에 발걸음을 옮기는 것 아닐까요.

나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의 언어라고 믿어진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행복이 더 이상 희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분투였다. 그래서 누군가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최소한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고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붕괴하고 조립하며 살아남은 내 안의 타자를 나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 너는 무슨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자신의 언어로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싶은, 그런 과정에서 나 자신을 좀 더 명확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기 바라는, 중립적인 정보보다는 주관적인 의미로 삶을 쥐어 짜내고 싶은, 이런 것을 이해해주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라고, 나는 마침내 말하고 싶어진 거다.

[끝]

황정운 9년째 석유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글쓰기와 현대미술을 좋아합니다. https://brunch.co.kr/@aboutexpression


돌아온 공

안녕하세요 정운님.

보내주신 글을 보고 무슨 내용을 써야 할까 하다가. 제가 최근에 하고 있는 생각들을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인문학 책을 많이 보지 않아서 글솜씨가 많이 모자랍니다. 근거도 없이 막 할 이야기들이 뜬금 없이 이어져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보내주신 글을 보고 저는 인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제가 본 책들 가운에 인문과 관련된 것들이 뭐가 있을까? 하고 떠올려 보니 몇 권의 마케팅 서적과 몇 권의 인지 관련 혹은 뇌과학 서적이 떠오르더군요. 그것 다 해 봐야 10권이 안될 겁니다. 그외에는 이것저것 관심사를 따라 주섬주섬 끌어모아서 담아둔 것들이 인문의 조각들로 남아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인문학이라고 할 만한 장르의 책은 별로 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술사 같은 책을 보기는 했지만 딱히 기억하고 있지 않고 비평에 관한 서적도 거의 초기 서적 한 권 정도 보았습니다. 인문학 고전들은 대부분 안본 것 같습니다. 철학 같은 것은 정말 한권도 보지 않았습니다 ㅠㅠ 역사 관련 책은 아주 조금 봤고요. 전체적으로 대학생 수준이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교양 점수를 잘 받은 누구보다도 수준이 낮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식하고 배짱 좋게 내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에 대한 생각을 가만히 하고 있자니 저는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지 심리나 인지 과학이 나왔고 마케팅 서적도 있고 뇌과학 관련 책도 있는데 인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아주 긍정적이고 좋은 답변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케팅의 요소가 아니라 정말로 인문학이라고 할 부분이 남아 있을까요? 어쩌면 제가 어려운 책을 볼 때 이해를 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궁금합니다. 과연 현대의 인문이라는 것은 뭘까요?

이것과 연관지어서 이런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책이 많은데 인간은 왜 이렇게


더딜까? 물론 그 많은 책들을 서로 공유하고 학습하고 또 전파되지 못해서 일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닌 잘못된 정보가 노이즈가 되어 끼어들어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겠지요. 마치 허리 디스크 관련 스트레칭 가운데 실제로는 디스크 환자가 하면 안되는 스트레칭이 여전히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들이 수정되고 말끔하게 퍼져 잘못된 스트레칭이 구전으로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조금 더 디스크 환자가 줄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현재 갖고 있는 질문은 이런 상황입니다. 제대로 전달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요즘 ‘인문’과 관련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조금 슬프기도 하고 쓸쓸해 지기도 합니다. 쓸쓸함이 다할 때 쯤이면 저는 무덤 근처에 가 있을까요. 어떨까요.

인문이라고 하니 워낙 머리속에 정돈이 된 내용이 아니어서 글이 길지는 않지만 제가 최근에 달고 다니는 질문들은 얼추 다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이 글이 부디 재미있기를 기원합니다.

이훈보 드림

https://brunch.co.kr/@e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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