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백림서신 - 15. 저, 저, 하는 사이에 / 글. 사진. composer B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 서던 리치 (2018) 만든다오 - 14. 홀리데이 아즈마 / 글. 사진. 진선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체니 사이드 - 4. 과나 1 / 글. 사진. 장수양 건축이 좋아 - 45. city of batavia 먹고 기도하고 ‘사랑’ 하라 / 글. 사진. aoikasa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사진. 철민 하늘 사진 - 사진. 민하 민주주의 투어 프로젝트 - 글. 사진. 박주원 Ping Pong - 06. 목욕 / 글. 황정운 이훈보
남북 정상회담부터 북미 정상회담 지방선거 월드컵까지 강렬한 인상의 일정들이 이 어니고 나니 요즘은 왠지모르게 기운이 빠지는 것 같습니다. 날이 더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꾸벅꾸벅 졸면서 쓰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최근 일 중에 정신 이 번쩍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당시 계엄령 계획이 정말 세워졌 었다니요. 군대가 도시 안으로 들어와 시민들을 제압하는 계획이 체계적으로 수립되 었다는 끔찍한 현실에 할 말이 없습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날씨의 변화, 나무 의 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인디 잡지에서 이런 흉악한 반란 공모를 이야기 해 야 한다는게 너무 씁쓸하지만 또 그런 이야기를 해야 월간지 다운 것 같아 여기서라 도 슬쩍 적어둡니다. 소소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얼마 전 저희 외할머니가 98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워낙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가서 증손 자가 대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다되었었죠.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본어 교육을 받기도 했었고 광복을 맞고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419 516 518 삼당합당 IMF 월드컵 등등 어 지간한 한국의 풍파는 다 겪었다고 할 수 있는 나이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역사적 사건 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 또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집 안 살림을 운영하면서 열심히 살다 가셨으니 호의호식한 삶은 아니었던 것이죠. 살아 계신 동안 참 별일이 많았다 싶으셨을 겁니다. 할머니를 묘소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한동안은 밤길을 걸어도 왠지 모르게 헛헛하 고 전혀 다른 차원에 뚝 떨어진 것 같아서 적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워낙 오랜 시간 을 알고 지낸 탓이겠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살면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 하나는 사 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 있는 동안 아끼는 것 같습니다. 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사랑하시기를 기원하며 이만 물러갑니다. 월간 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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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15. 저, 저, 하는 사이에
잘 지냈어? 나는 요즘 또 한 번의 바쁜 일들을 마무리 짓고 온전한 휴식을 즐기는 중이야. 최근 두 달 동안은 짬짬이 쉰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쉬는 것 같지가 않았고, 이 일들을 대체 언제 끝내려나- 하고 한숨만 나왔었는데…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너무 비장했나? 굳이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여튼 세상 모든 것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리가 지나고 있는 수많은 지점들은 곡선 그래프상의 점과 같아서, 그 선의 ‘끝’에 도달해야만 내가 지나온 곳들이 어떤 곳이었는지, 또 그 곳에서의 변화들이 여기로 오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말해 그 점이 ‘변곡점’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건 나중의 일이란 거지. 그리고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댄 편안한 자세로 이규리 시인의 시, 「저, 저, 하는 사이에(2014)」를 읽어본다. “…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어떠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변곡점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을 갖곤 해. 아마 영화였다면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흐르고, 드라마틱한 배경과 분위기 전환도 따라오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늘 그런가? 적어도 내 경우는 좀 달랐던 것 같아. 내 삶을 변화시킨 일들이 시작되거나 전개되던 순간의 나는, 오히려 아무런 저항이나 격렬한 심리적 동요를 느끼지 못하고 저 시의 화자처럼 그저 ‘어…? 어…?’ 하고만 있었던 것 같거든. 그 ‘어…? 어…?’가 이끌어준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되는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고, 그때 왜 상황을 바꾸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없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도 한참 나중의 일이었어. 또한 나의 어떠한 행동들 때문에 그 일이 벌어지게 된 건지, 그 퇴적물들을 차근차근 걷어내 살펴보는 것 또한 한참 뒤의 일이고. 거기에 그 어떤 극적인 배경 전환이나 특수 효과, 음악 따위는 없어. 그저 내가 감히 컨트롤 할 수도 없는 힘들이 나를 또 다른 점으로( 변곡점일지, 그냥 직선상의 점일지는 모르겠어) 끌고 가는 것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할 뿐인 것 같아. 그리고 나는 그 점으로의 이동을 위해 가방을 챙기면서 ‘저, 저, 하는 사이에’ 하지 못했던 말과 마음들, 그리고 무수한 고민의 시간들을 욱여넣고 또 욱여넣고 있겠지.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방을 챙겨야 할까? 그리고 그 가방에는 어떤 못 다한 말들이 들어가 있게 될까? 말이 길어졌네. 또 편지할게.
김도향 - 시간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서던리치 : 소멸의 땅 (2018) 감독 알렉스 갈렌드 오늘은 오직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서던리치 : 소멸 의 땅> 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현대 구독형 VOD 형태의 대명사이자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넷플 릭스의 독점 콘텐츠를 이야기 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서던리치 : 소멸의 땅>이라는 영화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왜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짚고 가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듯 한데 한국에서는 <옥자>가 넷플릭스 독점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훨씬 더 시끄러웠고 인상적인 논 쟁을 끌고 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옥자>는 넷플릭스가 제작의 지원과 유 통을 맡아서 그렇지 영화 자체는 극장에 더 적합한 영화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55인치에서 75인치 사이의 화면 크기로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는 연출이 중간 중간 보이고 기본적으로 ‘옥자’라는 캐릭터 또한 크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영화 전반에 크기 의 감각이 무척 중요한데 그런 감각을 체감하기에 화면의 크기가 반드시 필요 한 것 같습니다. <옥자>가 넷플릭스 독점이라는 이유 그리고 대중적으로 넷플릭스 논쟁에 서막을 열었다는 사 실만으로 다루는 것은 소규모 잡지에서 까지 다루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옥자>보다 더 넷플릭스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형태의 영화가 필요했고 <서던리치: 소멸의 땅>이 나오기 까지 기다린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넷플릭스에 대해 이야 기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넷플릭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넷플릭스는 핵심적 인 기능인 컨텐츠와 유저 인터페이스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컨텐츠를 우선 살펴보면 넷플릭스는 전통적인 TV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드라마, 다큐멘터리, 영화, TV쇼 그러니까 넷플릭스가 자리잡고 있는 영역 자체는 전통적인 TV 에 가깝죠. 회사의 초기 영업방식이 비디오 대여 업체였었고 TV라는 가정용 수상기의 출력에 기 대고 있기 때문에 사업의 발전 방향에 그 특징을 지우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TV라는 가정용 수 상기에서 벗어나서는 큰 돈이 될 여지도 적으니 말입니다. 다만 여기에 인터넷과 같은 통신망이 발달함에 따라 단말기가 휴대전화나 태블릿 컴퓨터 모니터 등으로 확장되고 각각을 연동하는데 있어 놀라운 최적화를 통해 승승장구 하고 있는게 현재의 넷플릭스 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넷플릭스를 가정에서 실제로 체험하는 화면 크기는 프로젝터와 같은
영사기 형태 또는 수천만원대의 고가 대형 TV가 아니면 100인치 이내로 한정되는 것입니다. 이 는 전통적인 TV의 역할에 가깝고 그 목적은 편리하게 계속해서 컨텐츠를 보는 형태를 구현하는 것이죠. 쉽게 설명하자면 소파나 침대에 누워서 주구장창 리모컨을 돌리면서 컨텐츠를 감상할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목적에 맞춰 넷플릭스의 인터페이스는 발달해 왔습니다. 시리 즈물을 쉬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인트로와 아웃트로 영상을 건너뛸 수 있게 구성해 놓았고 단말기 를 바꿔가며 다시보기를 하는 경우 최종 장면을 어느기기에서나 이어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그러니까 넷플릭스의 목표는 컨텐츠의 소비가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유도하고 구독을 갱신하는 데 망설임이 없도록 일종의 중독에 가까운 형태를 구축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것이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듯 사람이 드라마와 같은 시 리즈물 만을 주구장창 볼 수도 없기에 드라마와 같이 이해가 쉽고 자극적 컨텐츠를 즐겨 보는 사 람들도 사이 사이에 전국노래자랑이나 뉴스 채널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컨텐츠를 접하게 되고 또 그런 경험을 통해 채널을 돌리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처럼 넷플릭스 또한 유 저들의 취향에 알맞은 컨텐츠를 제공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는 컨텐츠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이 독점 영화 콘텐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똑같은 독점 콘텐츠라 해도 드라마와 영화는 각기 역할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지요. 한쪽은 끊임없이 연속하는 것을 유도하고 다른 한쪽은 중간중간 리프레쉬를 담당하 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 또한 다른 영화로 이어질 수 있게 인터페이스가 제공되지만 감상 경험 이 무제한적 연결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넷플릭스 독점작 <서던리치: 소멸의 땅>을 접근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할 만 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살펴보면 <서던리치: 소멸의 땅>은 <서던리치>라는 소설3부작의 1편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원미국의 특정 지역에 이상현상이 발생하고 ‘쉬머’라 불리우는 그 지 역이 점점 커지는데 주인공인 리나 (나탈리 포트만)의 남편이 탐사대로 안에 다녀온 이후 이상 한 일이 발생하고 돌아온 남편이 이상행동을 보이기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 리나와 연구진(심리학자, 생물학자, 측량사, 인류학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며 일어나는 이 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이 3부작 인것과 달리 영화는 1편으로 종결되며 감독 또한 후속작 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신경쓰면서 작업에 임했다고 합니다. 영화의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쉬머’라는 지역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생명이 이상 진화를 하거나 서로 융합하고 전자장비자 작동하지 않는 등 현 대 사회에서 쉽게 보기 힘든 여러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영상미가 무척 뛰어납니다.
제가 이 <서던리치>라는 영화를 넷플릭스에 특화된 영화라고 이야기하는 이유 또한 전적으로 영화의 독특한 아트워크 때문입니다. 화려하고 디테일이 뛰어난 영상미 넘치는 장면들이 있는 데 이 화면들이 요구하는 선명도가 극장에서 상영되었다면 전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100인치 이내의 최신 LED나 OLED 와 같은 고해상도 패널 화면에 특화 된 영 상미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첨부된 이미지들을 살펴보면 디테일이나 화려함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K 라는 고해상 도 영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이런 저화질로 소개해드릴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상미를 통해서 <서던리치>라는 영화를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크기’ 라는 손실을 ‘선명도’로 보완하는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지 요. 우리가 전통적으로 비디오와 같은 가정용 영화감상 체계 안에서 큰 불만이 없었던 것을 생 각하면 집에서 봤을때 특출난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이 더해진다면 넷플릭스를 통해 독점 영화 를 감상하는 매리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기술의 발달에 따른 시대의 변화 양상을 실감하기에 무척 적당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추천 해 보았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가능하면 밝은 4K나 돌비비전이 지원되 는 대형 TV를 추천합니다.
끝.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14. 홀리데이 아즈마 가죽가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건 흐물흐물한 천 가방. 문양이 독특하면 더 좋다. 재질은 면이거나 캔버스일 것. 더러워지면 세탁하면 되는 점이 좋다.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샐러리맨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천가방을 들고 다니는 점이 좋았다. 뭔가 과시하지 않고, 수수한 옷차림들이 나를 안심시켰다. 각양각색의 문양들이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거리에서 흔들거렸다. 선물가게 에 들어가서는 유레카를 외쳤다. 쨍쨍한 색상, 독특한 문양, 한국에서는 잘 보지 못하는 가방 형식. 녀석의 이름은 아즈마부쿠로(アズマ袋)였다.
아즈마부쿠로, 일명 아즈마백. 아즈마는 일본어로 동쪽, 즉 관동지방, 에도를 뜻한다. 부쿠로는 후쿠로의 연음으로, 보따리다. 일명 에도보따리, 정도로 보면 되겠다. 아사쿠사 시타마치 상점가만 돌아도 정말 다양한 무늬의 아즈마백을 만날 수 있다. 밥에 풀떼기만 먹다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호화롭게 등장한 느낌이랄까. 선택의 폭이 갑자기 넓어져서 난 계속 망설였고, 끝내 결정하지 못한 채 닛포리로 발을 옮겼다.
닛포리는 서울의 동대문같은 곳이다. 원단가게가 수없이 이어져있다. 재미삼아 들어간 곳이었지만, 나올 때 양 손 은 무거웠다. 한국에 와서는 재봉틀도 샀다. 초보자용의 저렴한 녀석이었지만, 한 번도 재봉틀을 잡아보지 못한 나 에게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난 이걸로 직접 아즈마백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아즈마백 만드는 방법을 검색했다. 연속 하는 정사각형 3개. 단순한 도안이었다. 우리가 사온 천은 총 4종류. 3종류는 무지개 천이었 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천이라 첫작품으로 건드리고 싶 지 않았다. 결국 1m에 100엔이었던 녀석을 집어 들 었다. 이거라면 실패해도 안심이다. 단순한데 뭐, 라며. 나는 도안도 없이 거침없이 가위 질을 시작했다. 심지어 재봉가위도 없다. 종이도 직선 으로 자르는 게 힘이 드는데, 천인데 오죽할까. 직선이 라고 잘랐는데 삐뚤빼뚤하다. 도안, 만들걸, 그제야 후회가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자가 칼을 빼 들었으면 무 라도 썰어야지. 올이 풀리지 않게 마감할 부분을 다리미로 표시한다. 이미 천을 삐뚤빼뚤 잘라서, 정확한 너비를 재는 게 무의미 하다. 에라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완성되겠지, 될 대로 되라지. 거침없이 꾹꾹, 다리미로 시접을 다린다.
시침핀 따위는 없으므로, 표시해놓은 시접이 사라지기 전에 재봉 질을 시작했다. 노루발을 내리고 ON! 속도를 ‘Low’로 했지만 드르 륵-드르륵- 엄청 빨리 박힌다. 잠시 한눈팔면 삐뚤 해진다. 드륵드 륵, 지금은 밤 10시 반, 가정용이라 힘이 약하긴 하지만, 시끄럽다 고 뭐라고 하면 어쩌나, 살짝 걱정이 된다. 민폐끼치긴 싫은데, 이미 벌여놓은 일을 중간에 그만하고 싶지도 않다. 이럴 때는 스피드. 빨 리 끝내 버리는게 최고다. 도안대로 모두 이어 붙였다. 그런데 문제다. 커도 너무 큰 것이다. 사실 이 전에 더 작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의 2/3 크기. 한 폭을 3등분했었다. 하지만 뭔가 물건을 넣기에는 작아보였고, 조 금 더 큰 것이 있었으면 했다. 결국 한 폭을 2등분하고, 그거 반만큼 을 추가했다. 박음질 할 곳은 늘었지만, 그만큼 물건을 많이 넣을 수 있는 가방이 된다는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이건 커도 너무 크다. 크리스마스 파티 할 때 썼던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크기라니!
심지어 티비도 가려진다.
잠자고 있는 개에게도 들이대봤다. 개도 들어간다. 이래서야, 휴대폰이든 지갑이든 화장품이든, 들어가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는 블랙홀이다. 곤란하다. 어떻게든 사이즈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아랫부분 양 모서리를 안 쪽에서 살짝 묶었다. 그리고 다시 반대로 펼쳤다. 조금 줄어들었다. 하지만 한층 더 보따리스러워졌다. 어께에 매어보니 그야말로 보따리다. 끈을 조금 더 길게 해서 크로 스로 맸다면, 순식간에 시간여행자 느낌. 난 어쩌자고 이렇게 커다 란 가방을 대책없이 만들어 버린걸까. 언니가 말했다. 음식하는 손만 큰 게 아니구나. 차라리 이렇게 큰 손으로 매실이나 담글걸, 차가운 매실차를 홀짝 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뭐가됐든 이미 만들었다. 그리고 느낀다. 전문가는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뭐든 처음부터 쉬웠고,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다면 전문 가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가방을 잘 개어서 신발장 서랍에 넣었다. 나중에 OFO(공유자전거) 빌려서 시장 갈 때, 자전거 바구니에 쏠랑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마트 에 두부를 사러 가야겠다며. 그런데 비가 온단다. 어쩐지 바람이 심상찮았다. 태풍 지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태풍때 만큼 거센 바람이 분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디멘터가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만 같다. 한 여름인데, 아무리 그래도 밤인데, 기온이 20도도 채 안된다. 그리고 좀전에 갓 완성시킨 아즈마백을 본다. 뭔가에 단단히 홀린 것이 분명하 다. 이렇게나 큰 가방을 만들다니. 미쳤나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온 말. 언니와 나는 한바탕 깔깔깔 웃고 말았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체니사이드
글. 장수양
4 과나 1
1 내가 사는 아파트는 P시에서 가장 외진 이차선 도로 옆에 있었다. 날씨가 흐린 날이면 나는 위험한 운전을 고집하는 승용차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이차선 도로의 측면에 세워진, 거대한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머지 않은 곳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나 자신을 평범한 초등학생이 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경향 아파트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체육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운동장에서 가장 시끄럽고 요란하게 뛰어다녔던 나는, 아파트로 돌아오는 이 건 널목을 넘어서면 학교에서의 왁자함이 완벽하게 자취를 감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겼다. 나는 나의 환경에 불만이 없었다. 내 나름의 기준에서 타협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이다. 아버 지가 죽고 난 후부터 어디가 마비된 것처럼 매일 매일 화를 내는 할머니, 나는 할머니 덕분에 이 해하려는 노력이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할머니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버 리자 우리 할머니는 내 눈에 늙고 지친 모습으로 비춰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할머니의 핍박을 흘려버릴 수 있었다. 동생도 만만치 않았다. 언제나 평온한 시끄러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 달리 동생은 스스로 선택한 조용하고 격렬한 불행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그런 동생을 놀 려대곤 했지만, 가끔 이 까탈스러운 어린애에게 예술가의 기질을 느끼고 기뻐했다. 특히 딱지나 동전 따위를 주머니 속에 가득 넣고 다니지 않아서 좋았다. 동생은 마음에 드는 색깔의 나뭇잎이 있으면 주워다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책, ⌜상차림 에티켓과 매너⌟의 중간쯤에 끼워넣고 한 계 절이 지난 후에 예쁘게 눌린 것을 꺼내어 나에게 주곤 했다. 내가 받아들다가 그 귀한 잎의 귀퉁 이를 부수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지만 동생의 예민함은 도화선이 또렷하 게 보였으므로 조금 조심하기만 하면 그리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엄마가 없다는 점은 이런 환경에서 결과적인 사실처럼 느껴졌다. 전부터 엄마가 없었던 게 아 니라, 내가 알고 있는 이러저러한 환경에서 엄마가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없다. 쉬 는 시간이면 나는 칠판 위에 동그란 타임 테이블을 그려보고 그 안에 마구잡이로 점을 찍어 내가 있는 시간과 과거의 일들, 미래에 일어날 일들까지 한데 뒤섞어버리곤 했다. 시간이 지루한 일직 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이 뒤바뀌고 엄마가 저 앞으로 멀어지다가 내 등뒤로 돌 아온다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무작위로 정했던 미래의 일들은 현재나 과거보다 더 분명한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9월의 일요일에 벌어진 일을 단순한 호기심에 의한 행동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일요일. 그건 동생과 나의 동반 외출 아니면 꽝을 의미했다. 할머니는 나보다 세 살 어릴 뿐인 동생이 어디서든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나는 일요일에 간절하게 나가 놀기를 원했 다. 할머니가 성당을 간 후엔 늘 동생과 나 사이에 일방적인 설득과 무시가 잇따랐다. 대부분의 경우 동생은 집에 있겠다는 주장을 꺾지 않았고 나는 거실에서 주부들을 위해 놀이터의 CCTV 화면을 보여주는 텔레비전 채널을 멍청하게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그 날따라 동생이 함께 나가주겠다고 말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변덕일수도 있지만, 나도 나름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듯이 동생도 그 날 미묘한 무언가를 통해 나가도 좋다는 결론을 얻었 을 것이다. 날씨나, 아침상에 오른 국의 온도, 할머니가 나갔을 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의 크기, 어쩌면 내가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바보 같아 보였을지도 모르겠 다. 아무튼 동생은 밖에 나와주었고, 내겐 날씨가 흐린 탓에 조금 눅눅한 모래를 탑처럼 쌓았다 가 부숴버릴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케이크와 천문대와 동굴을 똑같은 크기로 만들어놓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동생은 미끄럼틀과 그네를 번갈아 타다가 곧 실증이 났는지 가만히 있었는데, 한참 후에 보니 시소의 한쪽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아무도 앉을 일 없는 맞은편을 노려보 고 있었다. 놀이터를 울타리처럼 감싼 쥐똥나무들 사이로 어떤 사람의 다리가 보인 건 그때였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애들이 오갈 수 있는 통로가 나 있었다. 나는 동생의 구부정한 등 뒤로 펌프스힐―난생 처음 컴퓨터를 만져봤을 때 나는 이 구두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인터넷 검색 을 했다―이 번들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건 내가 가진 물건들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우 아한 베이지색이었다. 그는 살구색 스타킹을 신고 주름이 두 번 잡힌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과거 어느 시점에 이 사람을 한 번쯤 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섬광처럼 내 등골을 스치는 깨달음 같은 게 아니라, 꿈에서 처음 보는 인간을 위화감 없이 대하듯 원래부터 심어져 있던 정보를 자연스레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내 앞에 늘어선 케이크와 천문대와 헐거 워진 동굴을 차례차례 무너뜨리면서 그것에 열중한 척했다. 이윽고 그 사람의 모습은 쥐똥나무 들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이제 모래라든지, 동생이라든지, 동생이 앉은 시소의 맞은편이라든지, 여러 가지 것들 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나는 거의 무너지고 있던 동굴을 마지막으로 밟아버리곤 그대로 쥐똥 나무 통로를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부드럽고 날카로운 펌프스힐은 나에게 또각 또각 하는 소리 를 남겼다. 따라가기는 수월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그를 좇으면 서 헨젤과 그레텔이나 빨간 구두 같은 오래된 동화책들을 떠올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동화책 을 읽어본 적이 없다. 꽤 오랫동안 그 사람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틀림없이 나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 했다. 나를 알고 있는 성인 여자로는 선생님이 있었지만, 그 사람은 선생님이라기보단 승무원 같았다. 조금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비행기를 탈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더 다급히 좇을 수밖 에 없었다. 그 때는 알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집요하게 미행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했던 최초 의 음흉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다른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내가 성장했을 때 그 일 은 내게 술자리에서 꼭 한명씩 털어놓곤 하는 사춘기의 도벽과 비슷한 종류의 일이 되어있었다.
처음에 그의 행로는 나에게 익숙했다. 그러나 모퉁이를 몇 번 돌고 난 후에 그 길들은 처음 등 을 보여준 사람처럼 훌쩍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를 놓칠까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쉼 없이 걸으면서도 급격한 길의 변화에서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길에도 표정이 있고 그것이 바뀌는 것이 보였으며 어느 순간 악마나 귀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는 게 기억난다. 그는 찌그러진 상가가 끝없이 이어지다가 문득 의식한 것처럼 뚝 끊어지고, 다시 횡단보도와 함 께 방금 전과 비슷한 상가의 입구가 등장하는 코스를 줄곧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지나친
버스정류장과 가로등의 개수를 셌다. 그가 뒤돌아볼 경우, 그리고 나에게 뭔가 질문을 할 경우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 개수를 이야기해줄 생각이었다. 나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지나친 버스정류장과 가로등의 개수가 궁금했을 뿐이라구요.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조금 후에 그는 일부러 고르지 않고는 갈 맘이 들지 않는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나는 카운터 아래에서 괜히 빨간 미니쉘을 손에 들었다가 놓았다. 그가 카운터로 돌아오자 나는 가판
대 사이로 들어갔다. 그는 부탄가스를 샀다. 부 탄가스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한 보랏빛 숄 더백에 들어갔다. 보라색 지퍼를 꾹 잠그면서 그는 다시 길거리로 나갔다. 나는 이 작은 수퍼 마켓이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수퍼마켓인 걸 깨 닫고는―거기엔 아이스크림 통조차 없었다―이 제 슬슬 집에 갈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가 나가자 내 발은 기계적으로 뒤따랐다.
조금 후에 그는 어딘가로 전화 한 통을 걸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쯤은 백미러에 내 얼 굴이 비쳤을 것 같은 흔한 승용차가 도로에 섰 다. 유리창은 깨끗하게 닦여 있어 광택이 났지 만 검게 틴팅을 해서 안을 볼 수 없었다. 시꺼 먼 승용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회사원이나 가로등처럼 보이는 수직선의 사람이었다. 여섯 번째 정도 되는 버스정류장의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 일으켰다. 자기 좋을 대로 여기까지 걸어온 주제에 그는 너무 많이 지쳐있었다. 회사원이 열어준 차문 앞에서 양 손 으로 얼굴을 감싸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불행 하지? 이만큼 걸었으면 조금 더 놀랍고 재미난 곳으로 날 안내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골목길에 서 나는 마치 벽돌 던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몸을 낮추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조금 멀었다. 부 드럽고 연약한 색채를 입은 그와, 끌고 온 승용차의 유리창처럼 검은 실루엣뿐인 수직의 사람이 서로 포개졌다. 나는 그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만, 그 사람의 백 속에는 부탄가스가 있다구,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들 속에는 부탄가스 같은 게 품어져 있단 말이야, 난 그걸 안단 말이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추웠고, 내 모습은 볼품없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서는 길 하나 제대로 못 찾는 무방비한 어린애라는 걸 알았다. 그는 한동안 실랑이를 했지만 결국 회 사원의 차에 올라탔고, 둘은 골목길에 웅크린 날 두고 가버렸다. 되돌아가는 길 같은 게 그에게 중요할 리 없었다. 내키는대로 돌아다닌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간신히 아까 그가 들렀던 구멍가게까지의 길을 되짚었다. 그 이후부터는 세었던 버스정류장, 가로등의 수를 감해가며 걸 었다. 꽤 오래 헤맸는데도 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기 싫었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다니는 눈에 익은 버스가 힌트처럼 방향을 흘렸다.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저녁이었다. 해가 짧아져 노을이 일찍 드리웠다. 그를 쫓아갈 때는 이렇 지 않았는데, 길이 어떻게 꼬인 건지 나는 그 건널목을 건너야 했다. 길고 지루한 횡단보도, 봐도 봐도 바뀌지 않는 아파트. 깜빡거리는 파란불을 보고 뛰어든 차도에서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 다. 나는 그 횡단보도 위를 달음박질치며 정말로 이 곳을 지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했다.
아무리 길이 꼬여도 이 길을 지나고 싶지 않았 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허깨비처럼 서있는 아파트로 들어가기 위해 이런 식으로 열심히 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나치 게 숨이 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파트에 사 는 과나라는 애는 내가 아니다. 동생을 두고 모 르는 사람을 미행하다 소득 없이 돌아온 그 애 는 내가 아니다. 나는 머릿속에 늘 있다고 생각 했던 일종의 지평선 너머로 도망쳤다. 그건 마 치 오랫동안 끊임없이 맡았던 냄새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과 같았다. 나는 그날 처음 으로 할머니에게 따귀를 맞았다. 파출소에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던 동생은 앞으로 일요일에 외출할 일이 없을 거라고 딱딱하게 말했다. 동 생은 그런 말을 허투루 하는 애가 아니었고, 그 말은 동생이 혼자 있어도 되는 나이가 될 때까 지 정말로 지켜졌다. 나는 일요일이면 아침식사 후 놀이터 CCTV는 절대 보지 않고, 책상 의자에 앉아 두꺼운 ⌜상차림 에티켓과 매너⌟ 사이에서 붉고 푸른 나뭇잎들을 꺼내어 차례차례 바스라트 렸다. 매일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루 치의 꿈이 부서져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끝
건축이 좋아 45. City of Batavia,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aoikasa 오래 전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제목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ᅠ 동명의 책도 읽었지만, 이탈리아와 인도, 그리고 발리의 풍경이 생생히 담긴 영화를 조금 더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줄리아 로버츠의 시원시원한 미소가 있어 더 좋은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사랑'을 담당하는 발리가 있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 카르타에 다녀왔다.ᅠ 줄리아 로버츠가 발리의 구루 '케투'와 만나 '균형있는 삶'에 대해 이야 기하던 인도네시아는 어떤 곳일까.
네덜란드 식민기의 바타비아와 순다 끌라빠 항구 ( 해양박물관 전시물)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8시간 가야하는 적도 아래의 섬나라. 수없이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중에서도 자카르타는 자바 섬의 북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대항해 시대의 다른 동남아시아 도시들이 그랬듯이, 이 도시 역시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이다 . 식민 이전의 자카르타는 순다 끌라빠Sunda Kelapa라는 이름의 순다 왕국의 무역항이었다. 1527년 이슬람의 왕자 파따힐라가 포르투칼을 격파함으로 자야(승 리)+ 까르따 (번영 )라는 뜻을 가진 자카르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인 1619년 네덜란드
의 동인도회사가 이 곳에 진출하게 되며 이후 400년 이상 자카르타는 '바타비아'라는 이름 으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었다. 다시 자카르타라는 이름을 쓰게 된 건 1942 년 일 본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우리보다 2 일 늦은 1945 년 8월 17 일 자카르타 역시 독립을 하 였고, 그 이후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 시절 18,000 여개의 섬을 통일하여 현재의 인도네시 아가 되었다.ᅠ 자카르타의 시작, 순다 끌라빠. Sunda Kelapa. ᅠ
한 때는 수없이 많은 배가 드나들었을 순다 끌라빠 항구와 동인도회사의 창고
한국어를 능숙하게 하던 가이드 조코 아저씨의 표현에 따르면 '작은 깡패'가 많다는 순다 끌 라빠 항구.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매일 수 백 여척의 배가 드나들었을 정도로 엄청난 교역 량을 자랑하는 항구였다. ᅠ동인도회사는 1799 년 철수하였고, 항구의 기능 역시 현대건설이
지었다는 신항으로 다 옮겨 갔지만, 당시 동인도회사가 사용하던 조선소, 창고, 감시탑 건물 들은 아직도 남아 순다 끌라빠의 옛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소였던 건물은 현재는 Gelagan이라는 레스토랑으로 , 창고 건물은 해양박물관으로, 감시탑은 해양박물관의 전망대 로 사용되고 있다. 관광객들은 많이 찾지 않는 곳이라 한적하고 여유로운 이 곳에서는 시간 조차도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고양이에게조차 문턱이 낮은(?) 해양박물관에서는 순다 끌라빠를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 파타힐라부터 마르코 폴로, 쿠빌라이 칸과 등에 관한 이야 기들, 무역상품들과 무역선들에 관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품 자체나 전시기법이 뛰 어난 건 아니지만, 그 투박한 전시와 오래된 창고건물의 느낌에서 알 수 없는 날 것의 매력 들이 느껴진다. 박물관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전시품 옆에서 자고 노는 고양이들을 보는 재
미도 있고. ᅠ몇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에는 까페도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느긋이 둘
러봐도 좋을 듯. 창고와 조선소 사이에는 감시탑이 위치하고 있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오르 면 바타비아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수많은 자원을 가진 인도네시아였기에 이 항구는 많은 이들의 표적이 되었고, 따라서 이 감시탑에서는 해적이 나타나는지 철저하게 감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위에 올라가면 조선소도 보이고 쭉 연결되는 운하도 보이니 조금 덥고 힘들더라도 올라가볼 것을 추천하는 바.
저 멀리 항구 끝까지 보이는 감시탑과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는 동인도회사의 옛 조선소
네덜란드 식민기의 유산, 파타힐라 광장
순다 끌라빠에서 남쪽으로 운하를 따라 내려오면 유럽식 건물로 둘러싸인 유럽식 광장, ᅠ파 타힐라 광장이 나타난다. 관광객으로 가득 찬 이 곳은 Old Batavia의 중심이다. 16세기 네
덜란드가 이 도시를 건설할 때의 모습을 살펴보면, 항구의 윗 부분에 ᅠ별처럼 생긴 성채가
있고 중심에는 운하가 있어 배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 전체 도시는 삐죽삐죽 튀어나온 성벽 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같은 도시의 구조는 방어를 위해 건설된 전형적인 중세 유 럽 도시의 형태이다. 도시가 확장되며 성벽은 사라졌지만, 광장과 운하, 길과 건물들은 아직 도 그대로 남아 사용되고 있다. 파타힐라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은 각각 네덜란드 식민 시절 의 시청사, 법원, 교회, 우체국, 그리고 총독 관저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시청사를 닮 은 바타비아 시청사 건물은 현재는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며, 법원은 도자기 박물관, 교회는 와양박물관으로 , 총독 관저는 까페 바타비아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으로 사용 중이다. (우체국은 그대로 우체국으로 사용중이다.) 이 시청사에서는 네덜란드(VOC,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배 통치 관련 협정들이 맺어지기도 했고, 이에 반대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공 개 처형되기도 했으며, 1942 년 이후에는 일본 군대가 이 곳에 머물렀다. 지금도 지하에는 낮은 층고의 감옥들이 남아 있어 식민 통치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다.ᅠ 해가 지면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든다.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오가기도 하고, 버스킹 을 하기도 한다 . 비눗방울을 부는 아이들, 각종 음료와 마실 것들을 파는 거리의 상인들로 가득찬 광장에서는 식민의 상처보다는 유럽풍 광장의 낭만이 느껴진다.ᅠ
파타힐라 광장과 광장을 둘러싼 옛 바타비아 시청사, 법원 , 교회, 우체국 그리고 까페 바타비아
Central Jakarta, 수카르노 대통령의 흔적들 .ᅠ 모나스광 장과 대통령, 관공서로 가득한 자카르타의 중심인 센트럴 자카르타. 이 곳은 19세 기
바타비아가
남쪽으로
확장하며
만들어진
도시이다.
이
곳의
중심인
모나스광장
(Meredeka(독립)광장)에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기념하는 모나스탑(독립기념탑)이 서 있다. 도금된 횃불모양의 탑 윗부분이 인상적인 이 탑은 1945 년 8 월 17일 종전과 독립을 기념하 며 1961 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탑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이자 초대대통령이었던 수카 르노 대통령의 기획하에 만들어진 기념비였다. 이 기념탑 외에도 수카르노 대통령의 기획 하에 1960년대 초반 만들어진 기념비들을 도시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기념비들 을 건설하게 된 것은 건축학도였던 수카르노 대통령이 1950 년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기념 비들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자카르타가 1962년 제 4회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팔렘방에서 또 한 번 아시안게임 을 개최한다.) 로타리 혹은 고속도로 한 가운데 서 있던 기념비들. 자카르타에 온 걸 환영하 는 ᅠSelamat Datang Monument,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전쟁에 나가는 농부에게 도시
락을 가져다주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 영웅동상(Tugu Tuni), 그리고 건설의 일꾼을 묘사한
건설청년동상 등 수업이 많은 동상들이 자카르타의 곳곳에 서 있어 이 땅이 지나온 독재의 시간(수카르노가 20여년 , 그 이후 수하르노가 30 여년 )을 짐작하게 해 준다.ᅠ
Selamat Datang Monument(환영기념탑)과 자카르타 의회 앞 수카르노 동상
관공서들은 대부분 네덜란드 식민시기의 건축물들을 사용하고 있다. 모나스광 장 남쪽으로는 네덜란드인들이 살던 고급 주택가가 위치하 였는데, 그 건물 중 일부는 관공서로 일부는 여전히 저택으로 사용 중이다. 붉은 기와지붕에 베란다가 있는 전형적인 식민지 양식의 건축물들 뒤편으로는 새로운 기능을 담기 위한 고층의 현대건축이 들어서고 있다. 국립도서관의 경우 기존의 건물은 전시실로 사용하 고 그 후면으로 라데팡스의 그랑아치를 닮은 고층 빌딩이 들어서 도서관으로 사용중이다. 고층빌딩들이 빠른 속도로 지어지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식민기의 건물들 그리고 1960 년대의 기념 비들이 남아 이 도시가 겪어온 시간들을 보여준다.ᅠ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
자카르타에서 만나는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없어도 괜찮은 삶'ᅠ 대부분의 관광객이 인도네시아에서 찾는 곳은 단연 발리이다. 바다로 지는 노을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섬 발리, 가보지 못해 머리 속에서 상상만 할 뿐이지만,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자카르타 역시 매력이 가득한 도시이다. 지하철이 아직 다 건설되지 않 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데 비해 1,000 만 이상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어 어마어마한 교통 체중에 시달리고, 여전히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도 많고, 고급 쇼핑몰이나 식당을 제외하고는 에어콘 가동도 잘 안 되어 어디서나 덥고 사람들은 느리고 시스템 역시 너무 부족하지만, 그래서 문명화된 사회가 익숙한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비문명화'된 곳으로 보일지 모르겠지
만, ᅠ길고양이들이 사람을 피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보하고, 길가에 나온 사람들이 고양이들
을 쓰다듬으며 미소짓는 이 나라가. 조금은 느려도, 또 조금은 없어도 그 삶 역시 충분히 괜 찮지 않을까.ᅠ
추신. 자카르타를 오가는 비행기에서 '고양이'라 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었다. 린 이빈이의 집사로 많은 부분을 공감하며 또 많은 부분을 감동하며. 소설가의 마지막 추 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ᅠ "멋진 소설가 클로드 클로츠에게 존경의 마 음을 전합니다. 기자 시절에 자택에서 그를 인터뷰할 때, 그의 곁에 맴도는 고양이를 보면서 < 나를 지켜보고 내게 영감을 주는 고양이와 함께 집에서 조용히 일하는 것, 이 게 바로 내가 꿈꾸는 삶이야> 하고 생 각했습니다.“
ᅠ
대학원 이후일까. 무엇을 하고 살고 싶냐는 질문에 늘 건축과 도시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살고 싶다고 답했다. 어쩌면 나는 이 미 꿈을 이룬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몇 명 보지 않아도 ) 건축과 도시에 대한 해양박물관에서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며 느긋한 오 이야기들을 하고 사는 데다가 린이빈이까지 후 시간을 보내던 친구 고양이들. 자카르타의 고양이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지. ᅠ
들이 어디서든 느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글. 사진. 그림. 철민
사진: 민
하
2018/6/13 4:15 pm 한남동
민주주의 투어 프로젝트 나는 일을 미루는 고약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중학교 때 중간고사도 일주일 전에 공부를 시작했으며 대학
원서도 마감 하루, 아니 당일에 제출했다. 처음에는 뼈까지 박힌 게으름을 탓했는데 여러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완벽주의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완벽하고 흠 없이 하고 싶어서 내가 못 할 것 같거나 잘하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은 아예 시작도 안 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민주주의 투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거의 두 달이 걸렸다. 외국인 관광객들과 1980년도 민주항쟁을 나타내는 장소를 투어 하면서 ‘민주주의’라는, 어쩌면 어렵고 무거운 단어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프로젝트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창한 계기나 목표는 없다. 굳이 두 가지를 꼽자면 1) 두 번의 퇴사 이후 회사에 기대지 않고 혼자 무언가를 기획해서 진행하고 싶었고 2) 여행사를 운영하는 홍콩 친구가 부러워서 나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내게 자극을 준 홍콩 친구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 홍콩 정부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지루하다고
일을 그만두고 삼년 전 여행사를 차렸다. 독특한 점은 사람들에게 잘 안 알려진 여행지 -- 이라크, 북한(!), 벨라루스 등 -- 으로 여행객들을 안내한다는 점이다.
이에 자극을 받아 4월 말쯤부터 나만의 투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시작했지만 막상 실행을 하자니 막막했다. 장소 선정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장소를 방문해보고 계획을 더 촘촘히 짜 봐도 실제로 투어를
진행해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노하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냥 지르자 하는 마음으로 투어를 시작했고 부닥치면서 피드백을 받고 투어를 보완했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시행착오에 대한 이야기 이다. 의미가 있고, 내게 익숙하고, 외국인에게 너무 낯설지 않고, 스토리텔링까지 가능한 장소를 찾으려고 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장소들을 하루종일 돌아다녔다. 하필이면 장소 탐색을 하는 날마다 비가 추적추적 왔다.
몇 장소는 아쉽게 탈락했다. 제일 아쉬웠던 장소는 신촌에 있는 이한열 기념관이다. 기념관을 둘러본지
십분도 안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비치된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는 반복적으로 민주항쟁에 관련된 동영상이 상영되었고 열사가 입고 있던 야구 잠바는 세월을 간직한 채 벽 한쪽에 걸려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든 설명은 한국어로 되어있었고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아니면 거의
없는 외국인에게 열사의 옷과 “호헌철폐 독제타도!”라고 울부짖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심금을 울릴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끝에는 두 장소가 선택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투어를 ‘테스트’ 할 외국인 관광객 모집이었다. 내 외국인 친구들에게는 진정한 피드백을 못 받을 것 같아서 나와 안면이 없는 외국인들을 찾고 싶었다. 주위에 물어봐도 딱히 사람이 없어서 답답해하던 와중 광화문 앞에서 전도를 하는 몰몬교 남자 선교사 두
명을 우연히 접했다. 내 투어에 참석하면 공짜로 음식과 와인을 제공하고 한국 역사까지 가르쳐 준다고 꼬드겼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거절을 했다. 모르몬 교 교리 상 금주를 해야 하고 외부인 ‘자매’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짓길래 내가 더 미안했다. 결국 한국에 사는 엑스팻 (expat) 페이스북 그룹에서 수소문을 한 결과 스웨덴과 네델란드에서 온 외국인 세명을 모집했다.
서서히 더워지던 6월 초, 신촌역에서 연세대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던 스웨덴 출신 친구와 서먹서먹하게 인사를 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나머지 두 명이 늦는다고 해서 둘만 먼저 첫 번째 장소인 ‘ 훼드라’로 향했다.
40년 넘게 신촌 현대백화점 옆 대로변을 지킨 ‘ 훼드라’는 얼핏 보면 동네 담배가게 같지만
들어가면 음식과 술, 그리고 담배를 판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최루탄 해장라면’인데 먹으면 최루탄 가스를 맡은 것처럼 눈물이 줄줄 날만큼
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80년대 데모장을 나타내는 매서운 최루탄 연기를 풍자한 의미도 있는 만큼 내 투어에는 적합한 메뉴였다. 실제로
대학생들이 70~80년대에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을 밤새 벌였다고 한다. 작고하신
사장님께서
데모하던
대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하셨는데 그때부터 24시간 영업을 하신다고 했다.
통성명과 태어난 곳, 자란 곳, 한국에 온 이유, 내가 투어를 시작한 이유 등을 말하고 나니 대화 주제가 동이
났다. 공기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일단 라면을 먼저 시켰는데 스웨덴 친구는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어색함에 목이 탔나… 그냥 매워서 물을 계속 마셨다고 믿고 싶었다.
40분 후, 복잡한 신촌역사에서 길을 잃은 네델란드에서 온 커플과 합류했다. 르네와 그녀의 남자친구
에밀의 직업은 프리랜서 기자라고 했다. 서울역에 한 달간 둥지를 틀고 한국에 관한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둘은 낙서로 가득한 ‘훼드라’의 벽면을 신기한듯 사진을 찍으며 벽면 액자 안에 자리한 이한열 열사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다.
해외에서 유년기를 보낸 내게 한국 근대사는 낯선 시공간과 인물들로 가득하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근대사 책을 사서 몇 번 반복해서 읽었지만 긴장된 마음은 여전했다. 6월 항쟁을 설명 할 때는 아이패드를
가지고 와서 사진과 같이 설명할 껄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아쉬웠다. 첫술에 배불르랴 하며 애써 나 자신을 다독였다.
비는 더욱 매섭게 왔다. 라면을 먹은 후 두 번째 장소 -- 구 남영동 대공분실 (현 경찰청 인권센터) - 로 향했다. 투어를 하기 전 나는 이 곳을 4번 정도 방문했다. 첫 방문 때는 입장 시간이 오분 남아서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첫 방문 후 나는 우연히 대 공분실 건물의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책을 접했고 덕분에 이어지는 방문 때 건물의 사소해보이던 details들을 좀 더 주의깊게 볼 수 있었다.
본래 치안본부 대공보안분실로서 건물은 1976년 10월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서 지어졌다. 원래 5
층이었지만 1983년에 7층으로 건물은 증축되었다. 한동안 ‘해양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용도를 위장했다고 한다.
‘천재 건축가’라 불리던 그는 5.16 군사쿠데타 주도 세력과 막역했다고 한다. 김수근은 건물을 취조 및
고문을 위한 공간으로서 적합하게 설계했다. 피해자들은 차량에 실려 대문과 건물 정문을 지나 건물 뒤로 끌려갔다. 행정 업무와 취조를 위한 동선을 분리하기 위해서다. 끌려들어 간 피해자는 엘리베이터 대신 나선형 계단을 통해 취조실로 올라가야 했다. 이 또한 눈이 가려진 피해자가 끌려온 방향이나 끌려 올라간 층수를 기억하기 쉽지 않게 설계된 것이다.
계단 옆에는 승강기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1층부터 5층까지 바로 연결이 되어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호송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문은 5층에서 진행되었다).
5층의 창문은 다른 층의 창문들과 넓이나 폭이 확연히 다르다 -- 너비가 겨우 30cm인데 환기가
잘 안 되서 성인 여성 키만 한 환풍기가 방마다 자리하고 있다.
사소한 디테일들은 5층이 고문을 위해 최적화된
장소임을 보여준다. 보통 문들과는 다르게 5 층의 문들은 밖에서만 열수 있다. 렌즈도 밖에서
안으로만 볼 수 있다. 문들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해 동시에 문이 열렸을 경우 건너편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게 설계했다.
새싹을 상징하는 연두색으로 칠해진 문들과 고요한 복도에서 죽음의 냄새는 맡기 힘들었다. 박종철이 사망한 509호실을 제외하고 1990년 모든 방을 개조했기 때문이다.
509호는 개조된 다른 방들과 다르게 욕조가 있었는데 소름이 돋았다. 왜냐면 그 시대에 욕조를 사용하는
집안은 드물었기 때문에 철저히 물고문을 위해 설치된 욕조였고 박종철 군은 목적대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김수근이 그 후 유명한 경동 성당과 교회도 디자인을 했다. 어떻게 그렇게 상반된 성격의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르네는 경악을 했다. 김수근은 어떤 마음으로 건물을 설계했을까. 대공분실 앞을 지나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짧은 투어였지만 추적추적 비가 계속 내린 날이라 그런지 다들 피곤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끝낼지 고민했는데 지하철에서 쿨하게 Bye!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네덜란드 출신인 르네와 남편
에밀한테 이메일로 한 장의 피드백을 받았다. 네덜란드 문화 특성상 코멘트가 “직설적”일수도 있으니 양해해달라는 문구로 그녀는 이메일을 시작했다.
1.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는 관광객들에게 한국 근대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보면 좋을 것 같아. 아예 하나도 모르면 처음에 간략히 설명하고 본격적으로 8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 것 같아.”
2. “우리가 음식점에서 대공분실로 이동하는 동안 좀 더 이한열과 박종철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아. 그들이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취미가 뭔지 등 개인적인 이야기들 말이야.” 조만간 만나 갈비를 먹자며 그녀는 이메일을 마무리했다. 급작스러운 홍콩행이 결정되면서 내가 계획했던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겼다. 일단 프리랜싱은 7월 말까지
하고 접을 것 같고 투어도 원래 좀 더 완성시켜서 Airbnb에 올리고 싶었는데 홍콩을 가서 아쉽지만
불가능 할 것 같다 (Airbnb에서 요즘은 투어도 예약할 수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투어를 기획하고 실행을 한 내 자신에게 별 모양 스티커를 주고싶다.
예정되었던 세번째 프로젝트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원래의 계획은 나만의 에코백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이었는데 홍콩 갈 채비와 적응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엄두가 안난다. 아마 세번째 프로젝트는
홍콩으로 이주하는 준비과정과 적응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순조롭게 됐으면 좋겠지만, again, nothing is perfect.
* 유월호에 기고 못해서 죄송합니다. 북미 정상회담 때문에 프리랜서 피디로서 싱가포르에서 노동(?)을 하느라 도저히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시간이 없었습니다.
글. 박주원 www.brunch.co.kr/@pjw7109
PinG
06
PonG
‘목욕’ 황정운
이훈보
보내는 공
선생님께,
오후 1시. 유모차에 앉은 아이는 아직 잠에 들지 않습니다. 휴일을 맞아 아이와 함께 회사를 찾 은 뒤 근처 교보문고 광화문점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아무도 없는 회 사 사무실에서 우유를 마시고, 웃고, 과자도 먹었는데 아무도 없어 아이의 소리는 뻗어 나가지 않고 공간은 조용했고 시간은 평온했습니다. 밖에 나와보니 교보문고로 향하는 길에 깃발을 든 노인들이 보입니다.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보입니다. 6월 6일을 맞아 광화문 일대 에서 보수단체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를 열던 중이었죠. 깃발에는 대한민국수호 비상국민 회의, 구국결사, 드루킹 댓글부정, 대통령 탄핵,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아내와 저는 유모차를 끌며, 그들을 피해, 그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를 손으로 헤치며 걸어갔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저 들이 모두 죽고 사라져서 진보 성향의 사람들만이 남을까, 세상이 정말 바뀔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더운 날이었습니다. 집에 가서 씻고 싶어졌습니다.
저녁 9시. 집 근처 목욕탕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는 오후에는 잠을 자지 않더니 이제서야 깊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목욕탕에 혼자 있으니 오후의 소란은 사라지고 제 존재 에 대한 자각만 선명해집니다. 목욕은 생명의 세탁이야. 자의식이 뚜렷해지던 중학생 때 푹 빠 졌던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1995)> 대사처럼, 그 대사를 읊던 주인공의 성향처럼 저는 목욕 을 참 좋아합니다. 목욕(沐浴)은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행위인데 샤워와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 집니다. 샤워가 씻는 것이라면 목욕은 씻는 시간과 경험입니다. 단순히 몸을 씻고 말리고 떠나 는 것이 아니라 씻을 때의 물의 온도, 피부의 팽창, 심장의 수축, 꼬리를 무는 생각들. 모든 것들 이 좋습니다. 결혼 전에는 금요일 밤부터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지내다가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 야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하곤 했는데 월요일을 앞둔 나만의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갠지스 목욕이라고 불렀어요. 정말 목욕은 생명의 세탁이었습니다.
조금 시간을 되돌려볼까요? 사실 저는 남자들이 갖고 있는 아버지와의 목욕에 대한 추억이 거 의 없습니다. 아버지와 서먹해서가 아니라 동네 목욕탕에 함께 다녔던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 인데요. 아, 한 가지 인상적인 순간이 떠오릅니다. 가족 여행을 자주 다녔던 저희는 유성 온천에
간 적이 있었어요. 목욕을 마치고 나온 저와 아버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어머니와 누나를 기 다리며 근처 카페에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기다리다 아버지가 담배를 한 대 그리 고 두 대 피웠는데, 집이나 자녀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담배 연기가 흩어지는 것을 보며 저는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 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고민이 있어서 담배를 피우는 걸까. 그래서 어머니가 나타났을 때 아버 지한테 무슨 큰 일이 있다고 울상이 되어 말했습니다. 제가 열 살 무렵이니 아버지는 마흔 중반 이었겠군요. 그 뒤로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진 못했습니다.
늦은 밤 11시. 목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면도기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기 면도기로 바꾸어 쓰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요즘 수염이 잘 깎이지 않아 내부를 청소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아내는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고, 저는 거실에 앉아 면도기 를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냄새지? 갑자기 면도기에 코를 갖다 댔습니다. 이상한 냄새가 아니라 낯익은 냄새가 났거든요. 너무나도 낯익은 ...... 제가 유성 온천에서 아버지를 걱정하던 나이에, 아버지가 지금보다는 이십 년 젊으셨을 때 종종 거실에 앉아 당신의 전기 면도기를 분 해해서 청소하시곤 했죠. 저는 그 곁에 앉아 괜히 부품을 들고 냄새를 맡아 보고 관심을 보였습 니다. 그때 맡았던, 면도기에 배어있던 아버지 수염의 냄새. 익숙한 그 냄새였습니다. 전혀 생각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하던 일을 제가 하고 있었어요. 성격도 관심도 취향도 조금씩 다르지 만 그 다름 속에서도 나이가 들며 비슷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달과 6펜스>로 유명한 서머싯 몸은 장편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에서 삶을 이렇게 규정합니 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태어나서 각자의 방식대로 고생하고 살다가 죽음을 맞 이하는 것. 인간의 삶은 남들보다 조금 윤택한 삶도 있고 조금 흐트러진 삶도 있겠지만 生은 본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목욕을 할 때는 어떻게든 크게 달라지지 않는 나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점차 아버지를 따라가는 나의 모습. 아이를 키우며 부모가 되는 나의 모 습.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며 성격과 태도를 바꾸며 더 그럴싸한 사회인으로써 진화하는 듯 해도 내면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나의 모습. 결국 달라지지 않는다. 저에게만 국한된 이야긴 아니 겠죠. 광화문 거리를 가득 채운 구국결사대 역시 10년 전에도 있었고 20년 전에도 있었고 또 앞으로 20년 뒤에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들도 목소리를 높였던 그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 저마다 몸을 씻고 목욕을 했겠지요. 꽤나 더운 날이었습니다.
[끝]
황정운 9년째 석유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글쓰기와 현대미술을 좋아합니다. https://brunch.co.kr/@aboutexpression
돌아온 공
안녕하세요 정운님.
정운님은 이달의 주제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로는 뜬금없다고 하셨지만 반대로 저는 주제를 받고 ‘띵’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말씀하지는 않으셔도 매번 핵심을 짚어내는 주제에 내공이란 것이 느껴집니다.
‘목욕’은 아무것도 아닌 주제 같지만 저의 경우에는 인문학적 접근의 시발점과 같은 단어입니 다. 상당히 오래되고 중요한 단어지요. ‘목욕’은 제가 인문학을 생각하는데 하나의 시발점이자 축과 같은 단어였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입니다.
이제부터 차근 차근히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만 언제나처럼 능력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제가 인문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 은 시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마 대학생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볼까 고민하던 중 고대 중국의 역사를 소설처럼 엮어놓은 <열국지>를 골라 읽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 책이기도 했었고 개인적으로도 고대 중국의 역사가 궁금하기 도 하여 챙겨보았습니다. 그중 어느 지점에서 ‘하루가 행복하려면 무엇을 하고... 일주일이 행복 하려면 목욕을 하고 한 달이 행복하려면...’ 이런 형식의 구절을 보았습니다. 중국의 속담을 인 용한 것이었겠지요. 당시 저는 학교를 다녔으니 아침마다 샤워를 했었고 그 구절을 보면서 목 욕이라는 것이 이렇게 오랫동안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 다. 그리고 대체 그 시절에 목욕이라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학생 시절 저는 아침마다 샤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집에서는 샤워기에서는 끊임없 이 따뜻한 물이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이전에 그러니까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저희 집에 는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기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도 마찬가지로 목욕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다녔으니까. 중간에 샤워 를 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낯설었습니다. 여름에는 등목이라는 것을 했었죠. 그래서 책에서 읽은 일주일이라는 기간이 크게 낯설지 않았지만 목욕은 워낙 일주일마다 반복되는 일상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딱히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끝나고 먹는 바나나 우유의 맛은 각별했습니다. 하지만 목욕 그 자체가 행복했던 것도 아니었고 목욕 이후의 오랜 기간까지 행복이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보니 누군가는 목욕이 행복하다고 하 고 또 그 기간이 1주일이 지날 때까지 이어진다고 하니까 저는 그게 참 이상했습니다. 그 한 구 절로 매일 목욕을 하는 저와 과거에 1주일 간격으로 목욕을 했던 저와 과거의 누군가의 목욕에 대한 인식의 비교를 하게 된 셈이죠.
왜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봐야겠지요. <열국지>라는 기원전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것을 생각하면 목욕이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우선 지금과 같은 플라스틱 욕조도 없을뿐더러 대야 라고 부를 만한 것도 마땅치 않았겠지요. 기껏해야 박으로 만든 바가지 정도. 아마 수도도 없었 을 겁니다. 개울가에 들어가 씻거나 우물가에서 물을 퍼올려 씻거나 혹은 항아리 같은 것에 담 아둔 물로 씻거나 정도였겠지요? 부잣집이라면 하인들을 시켜 불을 때 데운 물에 들어가 몸을 씻은 호사를 누렸을 것입니다. 환경도 지금과 다르죠. 다른 생각을 한 김에 현대 도시의 생활을 떠올려 볼까요? 아파트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귀갓 길. 흙먼지라고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있어봐야 아스팔트에서 떨어진 가루나 화단의 흙, 자동차의 미세먼지 일 겁니다. 흙을 밟을 일도 없고 원한다면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아파트 건 물 입구에서도 먼지를 털어내고 정돈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을 지나 신발을 벗고 깨끗한 집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다음 화장실에 들어가면 깨끗한 타일이 반겨줍니다. 스테인리스의 매끈 한 단면과 잘 닦인 혹은 적당히 물때가 낀 내부구조가 있습니다. 그래 봐야 과거의 시설들에 비 교하면 어마어마하게 깨끗합니다.
과거의 목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면 야외에서 씻는 경우는 물에 들어가 씻고 나와서 먼지가 있는 돌에 앉아서 몸을 잘 말립니다. 집에는 말을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혹은 신발이 라고 하기 힘든 것을 신고 산이나 마을 입구를 지나 흙과 제대로 구별도 되지 않는 계단을 올라 마루에 걸터앉아 쉬다가 밥을 먹고 부엌이나 창고의 문을 닫고 는 것과는 다르죠. 시골의 거실 이나 마루가 흙이 잔뜩한 것을 떠올려보면 좋습니다. 혹은 간혹 들르는 바닷가 민박집 방바닥 이 버석버석한 것도 좋고요. 이런 과거의 대지위에 놓인 집의 씻는 공간은 또 어떻습니까? 대부 분의 경우 집의 안쪽 깨끗하고 또 은밀한 정도뿐인 공간에서 문을 닫고 목욕을 합니다. 현대의 욕실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요.
물 온도를 맞추기도 쉽지 않고 공간도 깨끗하지 않고 나와서도 아주 상큼할 정도로 개운하지 않고 따로 로션 같은 것을 챙겨 바르지도 못해 팽팽하게 당길 뿐인 목욕을 하면서 좋다고 생각 하고 그 즐거움 (개운 함이겠지요?)이 일주일을 간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목욕 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참 감탄스러웠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목욕을 할 수 있다! 는 사실 만으로는 크게 행복하지 않지요. 왜일까요?
목욕을 생각하면 우리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크게 당연하지도 않고 누군가 의 노력, 문화의 발전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하수도가 발달하고 보 일러와 펌프가 발달하고 정수시설, 타일과 인테리어가 발달하는 등등등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중첩되어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 낸 것이죠.
그 생각을 하고 보니까 저는 그날 이후로 목욕을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중간중간 흔들리는 일도 있지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늘 있는 것과 누적된 것을 견주어 보면서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정운님이 가볍게 던져주신 ‘목욕’이 저에게는 너무도 크고 소중한 인문학적 한때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원작의 어디쯤에서 그런 구절을 보았는지 확인해 보려고 검색을 아무리 해봐도 마땅히 그런 구절이 없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습니다. 비슷한 영국 속담은 있는 것으로 나오네요.
하루만 행복하려면 이발을 해라. 일주일 동안 행복하고 싶거든 결혼을 해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정직하여라.
이것도 조금은 이상하기는 합니다. 오히려 이 말이었으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 아 제가 본 것은 이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제는 원전을 찾을 수 없지만 저는 그 당 시 그런 고민을 했었답니다. 마무리가 좀 급작스럽지만 이달에도 좋은 주제 주셔서 즐겁게 쓸 수 있었습니다.
다음 달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훈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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