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입니다. 비밀동시 / 사진. 글. beamil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 60, 61 / 사진. 글. @Ahopsi 영화로 읽는 시공간 - 연인 (장 자끄 아노, 1922)으로 보는 죽음과 섹스 그 경계 / 글. 곡주대비 회사옆 미술관 / 글. 강세기 웹디자이너 생존 매뉴얼 - 패션의 생존 매뉴얼 / 글. 그림. 김성연 뼈그림 - 샌드타이거 상어의 턱뼈 / 글. 그림. 왼손이 여기 문학이 필요한시간 - 김시습 ~ 금오신화 / 글. 고수진 0,0,0 / 글.그림. Night Planet 독신자의 독서일기 - 중국, 만리장정 / 그림. 이다솜 글.권고마 물질과 비물질 - 1.물컵, 이불 / 사진. 황은정 글. 김종소리 건축이 좋아 - 삶과 죽음의 경계에 Skogskyrkogården Cemetery / 글. 사진. aoikasa 우울한 청춘 / 그림. 글. 철민 부산오뎅 이야기 - 귀찮은 애들 / 글. 사진. odeng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 소개소 / 글. 신당동 파르한 국가란 무엇일까? - 1회 / 글. exxx 무엇이 들어 있을까요? 바다비 일요 시극장 광고 뒷 표지 / 그림. 지인
누군가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 수 있는 순간을 만들 어보자고 만들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벌써 3년이 넘 었습니다. 좌절도 했다가 희망도 가졌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하다보니 꽤 추억이 쌓였습니다. 여러분은 지난해 많은 추억을 쌓으셨나요? 어떤 추 억이 쌓이고 그것들이 여러분께 어떤 변화를 만들 었을지 궁금합니다. 많은 것이 변하고 언젠가 여러분도 낙엽처럼 질 날 이 있겠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떠나도 남아있을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존재가 됩시다. 어금니가 다 닳도록 깨물고 또 깨물 어 완벽한 가루가 되 봅시다. 마법의 웃음 가루라면 더 좋겠죠. 2014년을 맞아 월간이리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beamil 님과 김종소리님의 연재가 비밀동시와 물질 과 비물질로 바뀌었습니다. 국가란 무엇일까? 라는 연재도 시작되었습니다. 뒷표지를 담당하시는 지인 님의 그림 주제도 조금씩 변화가 있을 예정입니다. 익숙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 다.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월간이리 exxx 드림.
편집: 이훈보 공식트위터 @postyri
표지: 이주용, 한지인
비 밀 동물시 (童
詩)
Animal Poem
2014년에는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아이의 시각에서 바라본 동시(산문형과 기존의 시가형식, 그때 그때 다릅니다.)와 그림, 팩트를 뒷받침하는 기사와 간단한 의견을 씁니다. 많이 공감해주세요. 제보도 감사합니다.
B c
Breeder’s ‘ credential 키우는 동물을 중성화 수술 시키지 않고 상습적(한번도 힘든 출산으로 일 년에 서너번, 한 번에 한 마리부터 많게는 대여섯마리의 새 끼가 탄생한다.) 으로 교배시켜 판매하는 가짜 브리더들이 있다는 소리는 익숙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 경우는 내가 동물문제에 관 심을 갖게 된 지도 몇 년, 처음 보는 경우였다.
SNS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기사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사건이 있다. 고양이를 관심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코티쉬 폴
드’라는 품종묘의 이름을 들어봤거나 생김새를 알 것이다. 스코티쉬 폴드는 동그란 얼굴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가장 큰 특징인
접힌 귀는 동그란 얼굴을 더 동그랗게 보이게 해 귀여운 외모에 방점을 찍는 셈이다. 글쓴이도 한 때 스코티쉬 폴드를 로망묘라고 칭 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영국 품종묘 스코티쉬 폴드는 당연히 비싼 값에 팔리고 또 잘 팔린다. 이 경우는 이러한 애묘인들의 심리를
이용한 가짜 브리더의 파렴치한 동물학대이고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학대자는 발뺌 중이고 동물보호협회는 확실한 물증 , 심증이 많은 경우라도 늘 조심스럽기 때문에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그런데도
단정지어지는 건 왜일까? 매직아이 보듯 보더라도 사진 속 고양이의 귀는 잘린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브리더라 불리우는 자들의 법 적인 자격 문제, 더 나아가 개취 부재의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이는 말한다. 실수로 잘라버린 고양이의 귀는 슬프다고.
동물사랑실천협회 CARE
Coexistence of Animal Rights On Earth
“얼마 전 고양이 귀를 자른 뒤 스코티쉬폴드라 속여 6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에 분양하려 했던 사건을 동물사랑실천협회가 고발하여 현재 담당 수사기관에 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어제 오후 해당 분양자와 통화를 하였습니다. 통화 결과 해당 분양자는 학대를 인정하지 않 았고 저희 동물사랑실천협회는 -학대가 아니라면 함께 동물병원에 가서 해당 고양이들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보자- 요청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통화하기로 했던 해당 분양자는 연락두절 상태입니다. 스스로 고양이 귀를 자른 학대자임을 인정하는 것일까요?? 분양자는 계속해서 고양이들이 장난치다 귀에 상처가 난 것이라 주장하고 있고 해당 분양 자는 자신의 해명글에 댓글조차 달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상황입니다...”
CBS 노컷뉴스 ⓒ CBS 노컷뉴스 (www.nocutnews.co.kr) 유원정 기자 판매자가 커뮤니티에 올린 고양이의 수는 총 3마리로 모두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스코티 * 고양이 분양글 속의 고양이. (네이버 카페 캡쳐)
쉬폴드 종이다. 수컷 2마리와 암컷 1마리로 이루어진 이 고양이 남매들은 태어난 지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판매자가 올린 사진 속의 첫번째 고양이는 회색털과 흰색털이 섞인
수컷 고양이로 한쪽 귀가 심하게 훼손돼 거의 반 이상 없는 상태다. 분양가격은 수컷이 60만 원, 암컷이 45만 원이다. 그는 “아가들(고양이들)끼리 물고 빨고 장난친다고 귀를 물고 놀아서 상처가 조금 났다”면서 “의심스러우면 병원에 같이 가 드린다. 상처 가 심하지도 않다”라고 설명했다. 바로 아래에는 막내로 태어난 암컷 고양이가 보인다. 이 고양이는 검은털과 흰색털이 섞여 있으며 육안으 로 보았을 때 귀의 단면이 고르지 못한 것이 확인된다. 마지막 사진에 등장하는 샴포인트를 가진 스코티쉬폴드는 더욱 이상한 귀 모양을 하고 있다. 스코티쉬폴드의 경우 귀가 자연스럽게 접혀야 되지만 인위적으로 절단한 것처럼 크기만 작은 귀가 꼿꼿이 서 있다. 뿐만 아니라 귀 위를 덮는 털이 고르지 못하고, 한쪽 귀에는 연골이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판매자는 “역시 귀에 딱지가 조금 있다”면서 “첫째랑 두 녀석이 서로 물고 빨고 정신이 하나도 없이 논다”고 전했다. 글이 게시되자마자 카페의 회원들은 “판매자가 스코티쉬폴드로 종을 속여 고양이를 판매하기 위해 귀를 절단했다”고 의혹을 쏟아냈다. 한 회원은 “우리 고양이가 5개월 차일 때도 질긴 음식을 잘 못먹었다”면서 “그런데 2개월 된 어린 고양이들이 귀를 뜯고 논다는 게 이상하 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다른 회원은 자신이 판매자로부터 받은 부모 고양이의 사진을 올려 “아빠가 회색 스코티쉬폴드, 엄마가 브리티쉬 숏헤어”라고 밝혔다. 부모 고양이의 사진을 접한 회원들은 두 고양이가 교배해서 샴포인트 스코티쉬폴드 종이 나올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 다. 고양이의 교배에서 스코티쉬폴드 3마리가 나올 확률도 적을 뿐더러, 아빠인 회색 스코티쉬폴드의 외향이 전혀 샴고양이와 근접하지 않다 는 것. 회원들은 각 동물협회에 게시물과 판매자를 신고·제보했다.
현재 동물사랑실천협회는 대전에 사는 분양업자 가족 모두를 만나고 아기고양이 세 마리와 집 안의 다른 고양이들도 직접 본 상태라 고 합니다. 동물 전문가들이 모인 동물사랑실천협회 관계자들은 직접 본 이후에도 ‘아기 고양이들의 귀는 마치 핏불테리어의 귀를 일부러 잘라버린 것과 같은 형태로 머리에 귀가 거의 붙어 있었으며, 보톡스를 넣은 것처럼 상당히 딱딱했습니다.’라고 쓰고 자른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고 글을 게재했습니다. 분양업자가 주장한 동물병원 의사의 소견 또한 만나서 들어봤을 때 맥락이 상당히 달랐 고 몇몇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해외 유명 브리더들에게 문의한 결과 모두 이런 폴드 종의 고양이는 없다는 의견을 받아내기도 했지만 동물판매업 등록증도 없는 가짜 분양업자와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말 바꾸기와 이중적인 태도, 모른다로 일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년 특집 19금
연인 (장 자끄 아노, 1922)으로 보는 죽음과 섹스 그 경계
영화로 보는 시공간 _ 글. 곡주대비 (hjkanjy@gmail.com)
중학교 2학년땐가 3학년 때 장자끄 아노 감독의 ‘연인’ 이란 영화를 비디오로 대여 해 보았다. 아버지가 심부름 시킨 것처럼 태연하게 가서 빌렸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말도 연습한 대로는 (?)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는 이미 1992 년에 개봉된 상태였고 당시 중학생이었지만 이 영화에 대한 ‘명성’ 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사실 야하다고만 해서 호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화제가 되었던 소녀의 초상화가 메인 이미지인 눈길 가 는 포스터와 홍콩영화에 빠져있던 내가 숭배하고 있던 배우 양가휘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도 변변치 않은 핑계라면 핑계일까. 줄거리를 일단 뒤로 미뤄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이 영화를 보고 몇날 며칠을 잠을 설쳤더랬다. 이 대목에서 상상 하시는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다. 사실 영화는 광고 된 바처럼 야하지도 않았고, 파격적인 설정도 아니었다. 그 당시 제 인 마치가 맡았던 소녀의 역할이 16이나 17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녀가 가졌던 스캔들 같은 짧은 로맨스가 나에게도 진짜 일어날수 있는 일은 아닐까 하는 망상에 가까운 희망이 날 설레게 했다. 그런 환상을 가질 때 마다 조 건 반사처럼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는 데 , 양가휘가 아편에 쩔어 정약결혼을 하는 자신을 붙잡아 주길 바라는 마음 을 소녀에게 비칠 때 보였던, 그 처절하고 (남자 관객들은 ‘찌질’ 로 표현할 수 도 있을듯하다) 나약한 모습이 나에겐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평생 처음으로 목격한 ‘섹시한 남자’의 표상이랄까. 영화는 한 가난한 소녀가 베트남의 중국인 갑부의 아들과 만나 나누는 짧은 여정을 그리는 이야기이다. 굳이 사랑이 라 표현하지 않고 ‘여정’ 이라 하는 이유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둘은 육체적인 사랑만 나누는 것이 아닌 소녀는 여성 으로 남자는 누군가의 남편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학교를 다니는 소녀는 배 안에서 부유한 중국인과 만나게 되고 소녀는 그가 베푸는 물질적인 호의와 사춘기 소녀가 가졌던 성적인 환상을 동시에 즐길 수 있게 된다. 영화가 진 행되는 동안 소녀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필요할 때 마다 자신의 육체를 쿨하게 빌려 (?) 주고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정약결혼을 그들의 계약 만료일 정도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사춘기 가 슴이 유리처럼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 바로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였다. 영화 말미에 소녀는 그를 처음에 만났 던 같은 배를 타고 프랑스로 떠나게 되고, 먼 발치, 아주 먼 거리에서 검은 세단 안에 미동 조차 없는 그 남자의 그림자 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제서야 소녀는 배 안에서 오열하며 눈물을 쏟아내는 데… 난 지금도 기억 한다.. 내가 쏟아낸 눈물이 제인 마치의 그것보다 더 많았다는 걸. 난 이 “연인” 이라는 영화를 내 친구들 모두에게 소개했고, 정말 볼 때 마다 가슴이 아파 죽겠는데 그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라는 캐치 프레이즈 까지 붙여서 모두가 한번씩 돌려 보게 하는데 성공했다. 주변 친구들 다 보게 하는데 까
지 한 6번 정도를 더 봤던 것 같다. 물론 중2때 감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 6번의 감상 동안 한 번도 그 강렬함이 덜해지진 않았던 것 같다.. 정말 마법 같은 영화 라고 생각 했었다. 이 영화는 줄거리보다도 그 이미지들로 기억이 되는 작품이다. 제인 마치가 속옷조차 입지 않고 걸친 베이지색 실크 원피스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의 실루엣. 작은 얼굴을 다 덮어 버릴 것 같은 중절모. 그녀를 관음증 적으 로 바라보는 검은 피부의 남자. 처음 사랑을 나누고 그녀의 몸을 조각하듯 수건으로 닦아주던 남자의 손길. 반쯤 꺼져 가는 촛불 아래서 아편에 찌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남자가 소녀를 올려다 보던 힘없는 눈빛. 이 작품으로 힘입어 장 자끄 아노는 에픽 이미지로 승부를 내고자 했던 “티벳에서의 7년”이나, “베어” 같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한 동안 별 큰 흥행작을 내지 못했다. 아니면 그가 거둔 그 이후의 소소한 흥행작들이 내 마음에 심어둔 “연인” 을 제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철학자 조르쥬 바타이유 (Georges Bataille) 는 인간의 에로티시즘을 죽음과 같은 것 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끝나는 의미의 죽음이 아닌 인간의 mortal 한 삶이 가진discontinuity (불연속성) 에 continuity (계속성) 즉 eternity (영속성)을 부여 하는 행위 ; 다시 말해 뭔가 지극히 “내면적이고 영속적인 행위” 라고 주장했다. 처음 그의 책 Eroticism 을 읽었을 때 섹스를 죽음에 비유한 그의 사상을 당췌 이해 할 수 없었다. 섹스라는 것은 살아있는 육신들의 전유물이 아닌가. 하지만 영화 막바지에 양가휘가 정략 결혼을 앞두고 소녀에게 울부짖듯 내뱉는 대사가 이 어려운 철학자의 책을 한 줄 요약 해주는 듯 하다: “널 간절히 원해. 널 내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난 힘이 없어. 난 죽은 거야. 너를 향한 욕망도 없어. 내 몸은 사랑하지 않는 이를 원치 않아.” 그가 그녀를 만나고 함께 있었던 시간은 그의 삶이고 그녀와 헤어져 다른 이와 함께 있을 시간은 죽음 이므로, 그를 앞 으로 ‘죽음’을 살아야 하는 형벌을 감내 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보내질 그의 육체에게 그녀와 나누는 섹스는 영 속성을 줄 것이다. “연인”은 Marguerite Duras 의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자전적 소설이라 믿고 싶다. 누군가의 실제이야기가 아니 라면 더 욕심 부려 다시 태어나서 1년만 살다 죽어도 좋으니 이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 아직도 장 모로의 쉰 목소리로 읽는 나레이션과 양가휘의 흔들리는 눈빛이 전신을 나른하게 한다…
회사 옆 미술관
<라이언 맥긴리, ‘청춘, 그 찬란한 기록’> 전시장 을 가득 메운 젊은 관람객을 보며 미술 취향에 대 한 편중도가 매우 심각함을 여실히 느꼈던 전시였 글. 강세기
누군가가 SNS에 갈겨 쓴 메모가 생각났다. ‘나이
다. 한편으로는 미술애호가의 저변도 넓어질 수 있 겠구나라는 바늘구멍만한 가능성 역시도.
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이유는 특별히 기
비평공모 참가를 막무가내로 선언하고 자료실과
슬프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
던 비평가들의 작업물을 존경의 눈, 배우고자 하
억할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짧은 메모에 자극 받아 대충 쓰던 일기도 정성들여 쓰게 되었다. 미술에서도 지나가면 놓칠 2013년 의 기억을 한 올이라도 긇어 모아 본다.
갤러리 방문이나 독서를 통한 미술로의 노출이 이
전보다 특별히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은 더 골똘히 보고 생각하려 했다는 점에서 예년과는 달
리 한 작가 한 전시를 아로새길 수 있었다. 그래 서 그런지 일천한 지식에서 누군가와 나눌만한 얘
깃거리가 나올 리는 만무하다는 점 역시 깨달았 던 시기였다.
<정서영,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전> 작업에 공감하기 위해 많은 자료와 관련서적, 그리 고 작가와의 대화까지 참여하는 등 조금은 진지하 게 다가갔던 작가의 전시가 아니었나 싶다.
책을 뒤지면서 그림만 훓어보고 스킵하기 일쑤였 는 마음으로 대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내가 느낀
감흥을 공감하게 하는 글쓰기가 쉽지는 않구나란 생각이다.
< 김장언, ‘미술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비평가 역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주력 분야가 다 양하다. 올해 비평가들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나 는 ‘행동파’ 비평가에 매력을 느꼈다. 자신이 생각 하는 미술판을 직접 짜는 그런 사람. 게다가 우리 나라 동시대 미술에 대한 나름의 통찰까지 덧입은 김장언의 이 책은 내게 큰 도전이었다.
<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 뒤적거리는 미술잡지, 도서, 인터넷 사이트 할 것 없이 등장하는 큐레이 터이다. 내가 앞으로 어떤 분야에 흥미를 느낄 지 알지 못하듯이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따라서 현 시원은 내게 ‘비치 매트’ 큐레이터이다. 전쟁나면 해병대 상륙할 때 길 깔아주는 그런 장비를 비치 매트라고 한다. 가고 싶은 길을 만들어 가는 사 람… 멋있다.
미술판이 지금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 읽어보고 싶 은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숲을 보면 나무도 더 재 밌게 즐길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 그 방법으로 미
술잡지를 빠르게 넘기며 어떤 작품들이 주목을 받 는지 큰 그림을 찾아보려 하기도 했다. 시간이 허
락된다면 전 세계 미술관과 갤러리의 전시를 DB
화 해서 나름 빅데이터로 써먹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언젠가는 해보고 싶은 작업이다.
< 김달진, 서울 아트 가이드 > 두말할 필요가 뭐가 있으랴. 미술을 업으로 하던 일 년에 한번 잠간 들 르건 상관없이 서울 아트가이드를 한번이라도 펼 쳐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가히 우리나라 미 술의 ‘론리 플래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미술정보의 데 <출처 : http://magazyn.co.kr> < 경향 아티클 > 다른 미술잡지와 달리 여기는 보 다 비평글에 중심축이 많이 쏠려있다. 그래서 그 런지 깨알 같은 이야기 거리들이 매월 넘쳐난다. 이런 작은 주제들이 쌓여서 큰 담론이 되는 거겠 지. 참고로 <아트 인 컬쳐>의 내년 기획 역시 기 대가 많이 된다.
이터베이스화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정서영 작가와 비평공모를 위한 데이터 서치에서 이런 데이터베이스(또는 아카이브)의 필요성을 절 실히 느꼈다. 어떤 작가의 전시 도록을 일목요연하 게 보려해도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 여기까지가 얼기설기 긁어모은 2013년에 대한 기 억이고, 2014년에 대한 기대도 빠질 수 없겠지?
미술이 무슨 주식도 아닐진데 artist to watch, 기 대주, 블루칩…과 같은 인스턴드성 관심보다는 기
존 작가에 대한 재발견을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 다. 될성부른 싹을 만날 기회는 아주 많다. 위의 제
목에 나오는 작가들은 물론, 유명 레지던시 참여 작가, 젊은 큐레이터와 메이저 갤러리들이 경쟁적
으로 내세우는 대안공간 전시작가들만 봐도 향후 10년의 플레이어들을 어림짐작 할 수 있을거라 생 각한다. 하지만 4-50대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중간 허리’ 기획전일 뿐 상업 갤러리는 과천현대미술관의 상설전시장에 걸리는 익숙한 작가들의 회고전만 되풀이한다. 젊은 큐레
이터들이 좀 새로운 시각으로 발견하면 어떨까?
아니면 중견급 큐레이터들이 젊은 작가들을 추려서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는 시도가 될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초대박 전시가 하나 터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삼청동을 떠났던 갤러리들이 다 시 좀 돌아왔으면 좋겠다. 듣고있나 pkm, 아라리오 갤러리… 좀 억지스럽고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강남
과 강북 나눠지면 갤러리 돌아다니기 진짜 힘들다. 사실 강남은 거의 못간다. MOCA 서울관이 강남의 미술판을 쏘옥 빨아먹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부자아줌마들은 차있고 시간되시니 강북오기 편하잖우~ 내 맘이 그래서인지 강남에서 철수하는 갤러리들이 슬슬 생겨나고 있다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 다. 아무튼 요즘 말 많은 서울관의 개관전시가 졸속이라는 논쟁들에 대해서는 컨텐츠에 대한 기대는 차 지하고 일단은 그곳에 미술관이 생긴 것 하나에 감사하자.
개인적으로는 다짐은 항상 그랬듯이 보다 더 많은 갤러리와 미술책을 읽는 것이다. 앞서 아쉬웠던 점, 미처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것들을 이행하는 것은 물론이다. 미술관련 수업을 좀 들어보고 싶다. 미술 강좌란 것이 대부분 오전에 하다 보니 들을 기회가 당췌 오질 않는다. 누군가에게 배우고 싶은 마음 굴 뚝같지만 정히 그러지 못하면 미술대학교 실라버스라도 구해다가 배우는 시늉이라도 낼 터이다.
월간이리 2014년 1월 글, 강세기
Chapter 7 {패션}의 생존매뉴얼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디자이너 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긴 머리에 여성스러운 제스쳐? 전위적인 옷차림? 며칠 전 디자이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주위 디자이너들과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흥미로운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의견은 디자인하는 분야에 따라 디자이너의 이미지가 달리 표상된다는 것이었다.
잘 다니던 4년제 대학을 때려치우고 서울로 상경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 패션디자이너는
발 빠르게 2년제 디자인 과를 졸업.
올블랙의 옷차림에 한쪽 눈을 가릴 만큼의 긴 머리를 하고
막상 졸업하고 나니 받아주는데도 불러주는데도 없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슬랙스에 시크하게 집어넣은 모습이
그때부터 이 악물고 익힌 갖가지 처세술과 생존법을 이용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건축디자이너는
처음 취직한 회사에서 2년여 만에 팀장으로 승진했다.
짧은 울프컷 머리에 올리버 피플스의 안경을 쓰고 로만 칼라 셔츠를
앞으로 수주에 걸쳐 별 볼 일 없는 스펙으로 몸 건강히
맵시있게 차려입은 모습이 떠오르며, 웹디자이너는
살아남는 방법을 쓸 예정이다.
데님셔츠에 셀비지 데님을 매치하고 워커부츠와 백팩을
거의 모든 텍스트가 주관적 경험에 의거한 것이기에 관점에
맨 현대적인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따라 비판적 지점들이 상당 부분 형성될 여지가 크다.
뜻밖에 그래픽 디자이너는 커다란 뿔테안경에 다소 수더분한
국내의 많고 많은 웹디자이너 중 하나의 개별적 사례로
이미지가 떠오른다고들 했고 광고 디자이너는 스킨헤드에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루즈한 옷과 워커가 떠오른다고 했다. 우리는 여성 디자이너의 이미지는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외향적인 꾸밈에 있어 남성보다 자유로워 추상화하기가 다소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자리에 모인 디자이너들 대부분이 남자였기에 여성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추상화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라는 견해도 컸다.) 문 듯 나는 (남자) 디자이너의 직군에 따라 달리 표상되는 이미지의 발원점이 궁금해졌다.
패션 / 올블랙, 시크함, 머리가 길다. 건축 / 짧은 울프컷 헤어, 동그란 안경테, 셔츠 웹 / 데님셔츠, 백팩, 셀비지 데님 그래픽 / 뿔테안경, 수더분한 이미지 광고 / 스킨헤드, 루즈한 옷
그날 나온 이미지들을 위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물론 그날 모인 디자이너들의 머리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미지들의 종합이라 자료의 정확성은 대단히 떨어진다. 하지만 디자인 분야와 그에 상응하는 이미지 고리에서 일련의 법칙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광고라는 범주와 광고 디자이너 사이의
그러니까 쉽게 말해 디자이너는 자유와 규제 사이를
이미지 고리에서 스킨헤드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위태롭게 외줄 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 고리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빅앤트
이러한 경계적 성격의 디자이너 이미지가 가장 잘 체현된
인터네셔널의 대표 박서원이 떠올랐다.
분야는 아무래도 패션 쪽인 것 같다.
그래픽과 그래픽 디자이너의 이미지 고리에서 뿔테안경
또한, 진보적 미디어와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이미지는 단박에 슬기와 민을 상기시켰고 패션의 이미지
디자이너의 복식 또한 현대적으로 표상되는 것 같았다.
고리에서는 한 사람이 아닌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의
흥미롭게도 건축과 같이 상대적으로 역사성이 깊은
젊은 참가자들 혹은 홍대 놀이터의 청년들이 생각났다.
디자인 분야와 디자이너 사이의 이미지 고리는 오랜
또한, 건축과 이미지 고리에서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역사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현학적인 이미지로 많이들
승민(엄태웅)이 떠올랐고 웹의 이미지 고리에서는 국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굴지의 포털에 근무하는 반듯한 디자이너들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디자이너의 경계적 이미지를 토대로
문 듯 그날 자리에 모인 디자이너들이 동시에 추상한
쌓아 올려진 세분된 디자인 직종에 공시적인 성격의 문화적
디자인 분야와 디자이너 사이의 이미지 고리에는 오랫동안
아이콘이 더해져 현재의 이미지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닌가
축적되어온 ‘시간의 켜’보다 현시적인 ‘문화적 아이콘’을
하는 생각도 든다.
더 크게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디자이너 자신들은 자신의 직종에 세공된 무늬에 대해
예를 들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패션디자이너
어떠한 견해를 가질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앙드레김의 순결한 흰색이었다. 그것이 현재에 와서 흰색의 대극점에 서 있는 색상인
팀장 시절 내가 다니던 회사는 불황 때문인지 크지 않은 규모에도
검정으로 변용된 것은 실로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불구하고 꽤 많은 면접자가 매일 같이 지원해왔다.
그렇다면 시대가 지나도 불변하는 디자이너의
나는 매일 하루에 네다섯 명의 사람들과 어색한 면접자리를
고정적인 이미지는 없을까?
가져야만 했는데, 수많은 사람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내가 만나본 바로 비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외향적으로 스타일이 아주 특이했거나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이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뭉뚱그려서 예술가의 사회적 타협
제작한 디자인이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어 보이는
버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었다.
며칠 전 동료 디자이너들끼리 추상한 웹디자이너의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타자들을 도덕적 규탄의 대상으로
이미지처럼 그 당시 남자 지원자들은 데님 셔츠나
치부해 버리고 공포라는 수단으로 사회를 통치한다.
셀비지데님 그리고 백팩을 매고 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자유를 추구하고 일탈적 일상을 그리던
여성들의 경우 전형성이라는 것이 파악되지 않을 만큼
예술가 혹은 디자이너의 이미지는 몇 년 사이 미디어에서
개성이 넘쳤다. 여성 지원자들의 모습에서 나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회적 통념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충분히
조르주 아감벤은 신자유주의가 위기 담론을 통하여
고려하고 착장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사회적 타자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추방하기 위한 전략으로
상대적으로 남성 지원자들의 경우 사회적으로 형성된
법치주의를 구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법치에 의해 추방당한
디자이너의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려는 경향이 많은 것
잉여인간들이 바로 벌거벗은 삶이며 이 벌거벗은 삶이
같아 다소 경직돼 보이기도 했다.
도처에서 지배적인 삶의 형태가 되어버렸다고 전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면접 코디라고 치면 나오는 무수히 많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위기 담론은 가장 먼저 대중매체에
레퍼런스들은 대게 대기업이라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흡수되어 더 이상의 불필요한 예외적 상황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그러한 반면 디자(여성)이너들의 면접 풍경은 천편일률적인
성 소수자, 부랑자, 외국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회적 울타리의
대기업의 모노크롬한 풍경보다 농담이 풍부한 수채화에
경계에 서 있는 디자이너와 예술가마저 사회적 타자들로
더 가까워 보였다.
규정짓기 시작한 것이다. 플라톤이 이상 국가를 위해 주장한 시인 추방론은 이천여 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힘이 세다.
나의 경우도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갈 때와 피티를 할 때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디자이너의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요즘 광고디자인과 학생들에게 졸업하면 어떠한 인물이
차용하는 편인데, 이는 상업디자인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대다수가 광고천재 이태백의
클라이언트들이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이너다움을
실존인물인 이제석씨를 롤모델로 꼽았다고 한다.
암묵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제석씨는 지방대를 나온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이너다움은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연이은 국내취업 실패 후 동네에서 간판 디자인 일을 기점으로
일구어놓은 성과라기 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광고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자 뉴욕으로
디자이너의 왜곡된 이미지일 확률이 크다.
유학을 결정했고 그 결과 뉴욕에서 다수의 공모전에 수상해
이윽고 왜곡상들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오해가 되고
한국으로 금의환향한 인물이다.
구축된 오해의 이미지는 공공연하게 추구되어야 할 사회적
얼핏 보기에도 이제석 씨의 성공 이면에는 전형적인 고전서사의
지향점이 되고 만다. 이 오해의 늪에서 클라이언트는
귀향 공식이 적용되어 있다.
물론이고 디자이너 자신들마저도 침윤되었단 사실을
하지만 이 오래된 서사의 전형이 현재의 모서리와 부딪힐 때
망각하고 그 흐름에 몸을 내맡기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나타나는 표정에는 신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노동의 신성화라는 무표정이 깃들어있다. 그 무표정한 입으로 신자유주의는
점점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디자이너의 이미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자아 성취를
자유로운 미적 주체로서의 이미지로부터 반듯하고 윤리적인
꼭 이루기 바래. 다만 월급은 작단다.”
비즈니스맨 디자이너의 이미지로 옮겨가는 듯하다.
우리는 작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대해 끝없는 권능을
아마도 이러한 이미지의 보수화 너머에는 신자유주의가
부여한다. 성공이 예외적 상황이고 실패가 당연시 여겨지는
내포한 정치의 도덕화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이제석 씨의 서사가 현실과 이상간의 멀고 먼 거리감을 봉합하는 충실한 마취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퍼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자리에
결국, 그 사람과 일을 하게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날의
나가는 내 옷차림을 보고 사회적으로 추상된
면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디자이너다움에 충실히 부합하려는 윤색된 열정을
어쩌면 그 당시 갑갑함을 느꼈던 내 현실이 그 사람의
발견하고는 이내 또 다른 자괴감에 빠져든다.
묘한 균형감에 특별함을 부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누군가 나에게 디자이너의 본질적 이미지라고 말해주었던 규제를 지키는 자유로움이란 자본에
디자인에 있어 누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포박당한 한 마리 작은 새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물어보면 반사적으로 맥락(Context)이라고 답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 사람에게 매혹됐던 것은 따로 떨어진 부분들이
면접 당시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있다.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전체를 조율하는
날씨가 무척이나 덥던 여름날로 기억하는데 면접시간이
절묘한 균형감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나도 면접자는 오지 않았다.
그러한 균형감은 자신의 외향적 이미지에서부터
내가 단념하고 자리에 돌아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말버릇, 앉은 자세,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작업까지
면접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면접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상태였고 손에는
노련한 마에스트로를 내면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수줍게 내미는 면접자의
디자이너의 이미지라는 것이 불가피하게 현시적 아이콘의 지배를
능청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와버렸다.
받고 있고 시대적 이념 탓에 점점 더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보통 면접시간에 늦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성실도를
그날 마주친 면접자의 모습처럼 대응해 보는 것은 어떨까.
맨 얼굴로 드러냈다고 생각하기에 위축되기 쉬운데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의 작업을 분리하지 않고 삶 그 자체를
이상하게도 그 사람에게는 그러한 잣대가 적용되지
매개하여 연결짓는 태도.
않았다. 면접자의 외관은 성격처럼 자유로워 보였는데
이러한 맥락 끝에서 탄생한 디자이너의 고유한 이미지는
우선 머리가 어깨까지 길었으며 펌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지막 해독자를 잃어버린 고대의 문자처럼
불구하고 풍성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미스터리 하면서도 순결하다.
지저분하지 않을 만큼의 수염을 길렀고 다소 밋밋한 이목구비를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프레임이 조금 두꺼운 갈색 안경을 착용했다. 상의는 색이 조금 바랜 파란색 옥스퍼드 셔츠를 착용했고 하의는 검은색 슬랙스를 입었다. 면접자는 셔츠를 하의에 집어넣은 상태였고 몸이 마른 탓인지 남자가 하기에 다소 얇은 벨트로 허리를 졸라맸다. 슬랙스의 밑단은 정확하게 복숭아뼈 근처에서 떨어졌고 여름에 신기 좋은 버건디 색상의 페니 로퍼를 신고 있었다. 면접이 시작되자 색이 바랜 파란색 옥스퍼드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고 이내 입가에 진지함이 퍼져 나갔다. 그가 내게 보여준 디자인들은 특별하게 뛰어난 것들은 아니었지만
블로그 clichecliche.blog.me
누가 봐도 그 사람 자체와 닮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꽤 긴 면접시간이 끝났고 나는 오래된 친구와 재회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메일 clichecliche@naver.com
여기, 문학이 필요한 시간
김시습 ~ 금오신화
소설은 한 세계를 현실 세계에 놓는 것이다.
벌써 2014년 1월호 이다. 올 해 첫 시작을 금오신화로 문을 열게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들여다보니 우리나라 소설사의 시작인 작품을 다루게 되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총 5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주어진 분량 안에 5개의 단편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압박이 살짝 있지만, 부지런히 써내려 가보겠다. 김시습은 5세 때 세종대왕 앞에 불려가 시를 지을 정도로 신동이었다고 한다. 미래가 기대되던 그 신동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머리를 깎고 승려를 자처하여 10년 가까이 방랑했다. 전국을 방랑하며 성리학의 환멸을 느꼈고, 불교와 신변잡기류의 문학에 심취한 듯 보인다. 그 작품 중 하나가 중국의 『 전등신화』인데 거기에 영감을 받아 30세 때 금오신화를 썼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전등신화』는 귀신과 인간의 으음? 아잉~ 오호홋, 루루룻 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다 알잖아 내가 굳이 글로 안 써도 알자나자나
김시습은 ‘귀신’, ‘운명론’, ‘별(別)세계’ 등을 소재로 끌어와 그만의 언어로 좀 더 창의적으로 표현하였다.
자, 이제 그 5개의 단편들을 한 번 읽어보자.
<만복사저포기> 양생이라는 젊은이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 동쪽 방에서 홀로 거처하면서 외로움을 하소연하는 시를 지어 읊 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상과 가상으로 주사위놀이를 제안하며 아름다운 여인을 점지해 달라 소망하였다. 주사위 를 자신의 몫, 관세음보살의 몫으로 두 번을 던져 양생이 이긴다. 그리고 깜빡 잠이 드는데 아리따운 여인의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그녀를 관세음보살이 보내준 것이라 믿은 양생은 그녀와 연을 맺는다. 그러나 그녀는 전쟁 중 에 죽은 귀신이었고, 외로운 혼으로 이승을 떠돌다 양생의 소원을 듣고 인간의 모습으로 온 것이라 말한다. 이승과 저승의 법도가 엄연히 다르기에 둘은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양생은 이후 산 속에 묻혀 그가 죽었는지 삶을 이어가 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전해진다.
<이생규장전> 이생은 글공부를 하러 서당에 다니다가 널뛰기를 하는 최씨 처녀에게 반해 시를 주고받으며 연을 맺고 혼례를 치 른다. 홍건적의 난으로 최씨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이생은 홀로 몸을 피하다 갈대숲에서 귀신이 된 최씨 를 만나다. 귀신인줄 알지만 너무도 사랑한 아내였기에 함께 다시 살림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승의 시간과 저승의 시간을 다르고, 최씨는 서로가 다른 세계에 살아야 함을 강조하며 떠난다. 이생은 슬퍼하다가 병을 얻어 죽고 후세 에 사람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감동했다.
<취유부벽정기> 송도의 상인 홍생이 평양을 찾아 부벽정에서 취해 놀다가 선녀를 만난다. 그녀는 기자조선 마지막 임금의 딸이라 말하며 나라가 망한 사연을 들려준다. 그녀와 울분과 감회를 나누고 그녀를 따르게 되어 이승의 삶을 정리하고 그녀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니까 홍생 역시 귀신에게 홀려 죽은 거임;;)
<남염부주지> 경주에 사는 박생이라는 선비가 꿈에 저승으로 가서 염왕을 만나 엄연히 사후세계가 존재함을 본다. 현재의 삶에 서 못된 짓을 하면 불지옥에 떨어진다는 염왕의 이야기를 들으며 실제 지옥의 모습을 눈으로 본다. 박생은 성리학 이 우주의 진리라고 믿고 있었으나 자신의 배움이 짧았음을 깨닫는다. 염왕은 박생이 ‘정직하고 항거라는 뜻이 있 어 세상에 살면서 굽히지 않은’줄 알고 만나고 싶었다고 한다. 박생은 염왕과 제왕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에 대해 담소를 나눈다. 염왕은 박생의 의견에 동조하고 자신의 뒤를 이어달라고 제의하고 박생은 꿈에서 깬다. 박생은 만 약 꿈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곧 죽는 것임을 깨닫고 삶을 정리하고 정말 모월 모일에 박생은 죽는다. 박생이 죽는 날 옆집 사람 꿈에 어떤 동자가 나와 박생이 저승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용궁부연록> 한생은 글 솜씨가 매우 뛰어난 중인이었다. 그는 양반집 선비들의 부탁으로 글을 대신 써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는 용궁으로 초대를 받아 글 짓는 재능을 마음껏 자랑하고 용왕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꿈에서 깬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부자리를 보았는데 꿈에서 받았던 진귀한 보석들이 옆에 있었 다. 세상의 평가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명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줄거리로는 제시할 수 없지만 금오신화는 인물의 심리를 ‘시’로 표현하여 그 외로움이나 삶의 절절함을 더욱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다. 도적 떼 밀려와서 처참한 싸움터에 몰죽음을 당하니 원앙도 짝 잃었네. 여기저기 흩인 해골 그 누가 묻어 주리. 피투성이 그 유혼(遊魂)은 하소연도 할 곳 없네. 슬프다 이내 몸은 무산(巫山) 선녀 될 수 없고 깨진 거울 갈라지니 마음만 쓰라리네. 이로부터 작별하면 둘이 모두 아득하네. 저승과 이승 사이 소식조차 막히리라. 그래요, 사진은 ‘천녀유혼’ 이예요. 국영찡ㅠㅠ
최씨와 이생이 정말 영영 이별하는 장면 -이생규장전
아마 줄거리를 읽어가면서 어느 순간 김시습 자신의 처지와 울분이 ‘귀신, 환상과 저승’ 등의 소재 안에 적절하게 섞여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소설이란 ‘나’를 둘러싼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각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금오신화가 소설의 면모를 갖추었기에 우리 문학사에서 소설의 효시, 소설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김시습은 특히 귀신을 통해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이원화 시키지 않았다. ‘귀신’은 얼마 동안 이승을 떠도는 것이고 용궁이나 저승을 가도 ‘꿈’이라는 매개체가 등장하는 것은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 이야기의 결말은 주인공들 모두 현실로 돌아와선 지금의 처지를 비관했고, 결국 좌절된 미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인물들은 그 안에서 자아를 돌아봤고 그리고 이런 세상에 안주해서 사는 것은 더욱 비참하기에 가장 최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선택은 주체적이고 신념 있는 삶이다.
이렇게 우리 고전문학은 읽을수록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그리고 항상 마음으로 새기게 한다.
아직 소설시대는 오지 않았는데 고독했던 김시습은 선구자적인 작품을 썼었고, 그의 작품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책을 지어 석설에 감추어두고 후대에 자기를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겠다고 했다는 말은 참 가슴이 아프다. 아마도 김시습은 소설을 쓰면서 자기해방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함께 그의 작품을 다시 추억하고 있다. 신년에 말이다.
우리는 시나 소설은 쓰기 어려우니 신년의 목표를 세우며 약간의 자기해방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꼭 이루지 못해도 되지 않을까? 원래 삶이란 내일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까 목표자체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설레는 1월이다. 주먹을 불끈 세우며 나를 둘러싼 일과 휴가, 카드 값(ㅠㅠ), 취미를 잘 조율해 보자구요!!
다음시간에는 다시 현대 문학으로 넘어와 이문재의 시 「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를 살펴보자.
지각하면 보강이다.
글, 고수진(gomin19@hanmail.net)
<0,0,0>
야행성Night Planet
twitter : @hitchhiker_j
대학가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 자취집
<열번째집(2011-2013)>
미국체류 1년을 꼬박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 을 모아놓고 서울의 한 호텔에서 결혼식을 했다. 지난 궁상스러웠던 세월을 청산하는 의식과도 같 이 호화로운 결혼식이었다. 미국에 가기전에 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서 3개월쯤을 혼자 지내다 복학 에 맞춰 학교 앞으로 방을 얻어 이사했다. 열번째 집은 대학가의 오래된 다세대 주택 반지하 자취 방이다.
학교 근처 원룸 시세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부동산 아저씨가 금액에 맞춰 보여주시는 집들은 예상 보다 상태가 더 안좋았다. 일단은 죄다 반지하였다. 어둡고 눅눅했다. 어떤 집은 욕실 천장고가 너 무 낮아서 샤워하는 내내 목을 숙이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쩌다 반지하가 아니다 싶으면 갓 지 은 원룸 건물에서 번듯한 방들을 쪼개고 남은 짜투리 방이었다. 몸 뉘일 공간을 빼면 가구 하나 놓 기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원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집을 얻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돈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보고 온 집들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내가 원하는 조건들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 할 수 없는 조건을 생각해보는 건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당시 가장 중 요하게 생각했던 건 넓은 공간이었다. 대부분의 짐을 본가에 남겨두고 몸과 간단한 짐만 싸서 이사를 나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도 그랬고, 친구들이 와서 함께 작업하고 편하게 자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 각했다. 타의로 혼자 집에 남겨졌던 3개월이 꽤나 외로웠다.
동네는 학교에서 지하철로는 한 정거장, 버스로는 두 정거장, 걸어서 는 1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근처에 두개의 대학이 있고, 언제나 들썩 들썩한 번화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정거장 차이로 한적함 의 축복을 받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동네 중심에 시장이 있는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동네 수선집 아주머니는 수선하려고 가져간 치마가 너 무 얇다며 아직 추워서 이런거 입음 안된다고 하시고, 속 쓰려서 갔던 약국에는 밥 잘 챙겨먹고 정크푸드 먹지말라고 잔소리 하시는 약사 아 주머니가 계셨다. 큰 공원도 지척인데다 조용한 동네가 마음에 들어 산책을 자주했다. 오래된 주택들 사이로 난 골목을 걷다보면 멀리로 대공원의 관람차도 보였다. 그렇게 조용했던 동네에도 개발 바람이 불 어서 작은 주택들이 헐리고 원룸형 상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사 는 내내 두 집 건너 한 집은 공사중이었다.
곰팡이 서식지: 곰팡이는 열이 새는 곳과 가구 뒤를 좋아한다.
발품을 팔아 얻은 집은 오래된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 방이었다. 대문을 들어와 건물을 끼 고 왼쪽으로 꺾으면 담 옆으로 좁은 길이 있었다. 길 위로 고개를 들면 좁고 기다란 하늘이 보이 고, 길 끝에는 쓰지 않는 철제 계단이 있어서 집에 사람이 없을 땐 택배 기사님이 알아서 여기에 택배 상자를 감춰주시곤 했다. 길을 따라 주욱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부실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문 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반지하층에는 우리집을 포함해 세가구가 살았 고, 1층에 한 가구, 2층에 주인집이 살았다. 부실한 철문을 열고 고개를 숙여 집안으로 들어오면 계단 두개를 내려가야 현관이었다. 현관에서 바로 한 쪽 벽에 싱크대가 달린 거실이 이어지고, 안 쪽으로 방이 하나 달린 간단한 구조였다. 거실에는 길이 1800mm짜리 테이블을 두개 붙여서 작업실 처럼 쓰고, 안방은 침실로 썼다. 욕실은 현관 오른쪽에 있었는데 의아했던 건 옆집 욕실과의 사이 에 나 있던 창문이었다. 전에 사시던 분이 돗자리를 잘라 뚫린 곳을 잘 막아두긴 했지만 옆집과 욕 실 사용 현황을 소리로 서로 중계하며 살았다.
반지하라 여름에도 집안이 서늘해서 에어컨도 안켜고 지냈지만, 겨울이면 열이 어디로 다 새나가는 건지 넓지도 않은 집에 가스비가 13만원씩 나왔다. 부모님이랑 같이 살 땐 난방비 무서운 줄 모르 고 겨울에도 반팔, 반바지에 보일러 펑펑틀며 살았는데, 가스비가 온전히 내 차지가 되고 보니 집 에서도 패딩 잠바를 입고 전기장판에서 덜덜 떨며 지냈다. 창문은 거실에 두개, 안방에 한개가 있 었는데 거실에 있는 창문 밖으로는 주인집에서 담과 벽 사이에 지붕을 씌우고 창고로 쓰고 있어 빛
이 안들어왔다. 안방에 있는 창문 밖으로는 폭 70cm 정도를 두고 담이 있어서 역시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빛이 잘 들어오는 집이 많이 사람들에게 선호되곤 하지만 밤에 주 로 활동하고 아침에 해 뜨는걸 보면서 잠들던 내게는 오히 려 낮에도 밤 같은 이 집이 적합했다. 곰팡이만 없었다면 말 이다. 장마철엔 온 집안이 습해서 주로 가구 뒤, 그리고 장 롱 속까지 곰팡이가 생겼고, 겨울에는 실내와 실외의 온도차 이 때문에 개구부 주변과 벽과 지붕이 만나는 부분, 땅에 묻 혀 있는 벽, 그러니까 열이 새는 모든 곳에서 곰팡이가 생겼 다. 집에 들어오면 늘 곰팡이 냄새가 났다.
반지하에 곰팡이가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이 집을 꽤 좋아했 다. 바랬던 대로 집에는 늘 친구들이 북적거렸다. 일년 가까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았던 친구도 있고, 카우치 서핑 사이트를 통해 집에 와서 자고 간 배낭여행객들도 있다. 졸업을 앞두 고 친구들과 같이 작업을 한답시고 매일같이 집에 모여서 시 덥잖게 낄낄대며 지냈다. 밤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댔으니 옆 집, 윗집으로부터 주의도 많이 받았다. 마치 가족처럼 즐겁게 지낸 시간이 따뜻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드나드는 친구들 숫 자와 비례해서 정신은 늘 들쑥날쑥이었다. 안정감 없이 항상 방방 떠있었다. 그렇게 일년을 질리도록 집에 친구들을 끌어 들였다. 친구들과 이 집에서 계속 멍청한 시간을 보낼 수 있 을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갑자기 끝이 찾아왔 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한 친구는 유학을 떠났고, 다른 친구 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또 다른 친구는 취업을 했다. 항상 같 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다들 그렇게 제 갈 길을 생각한 걸 까 싶었다.
그런가하면 나는 졸업 후에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백수 로 남았다.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 만큼은 벌고 시간도 자유 롭게 썼지만,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인지는 몰라도 집안의 어둠 속에서 자주 삶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 어둡고 눅눅하 고 햇빛도 들지 않는 소외된 공간인 이 지하방이 마치 내 인 생처럼 느껴져서 두려웠다. 그렇게 마음에도 스멀스멀 곰팡이 가 피어올랐다.
중국 만리장정 홍은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바깥의 일로 기뻐하지 말고 스스로의 일로 슬퍼하지 말라(不以物喜 不以己悲).” (범중엄, 『악양루기』, 『중국 만리장정』 64쪽에서 인용)
본래 기행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행문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다. 낯선 사회에 발 들인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 익숙지 않은 원칙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 하려는 새로운 관점, 그의 관점으로 접하는 한 사회의 모습이다. 내 생각에 첫 번째는 오랜 경험과 진지 한 성찰 없이는 감상적인 일기가 되기 쉽고 뒤의 두 가지는 날카로운 관찰이나 풍성한 사실로 뒷받침되 지 않으면 내용 없는 글에 그친다.
『중국 만리장정』은 오십 대 중반의 한국인 남성이 60일 동안 중국을 자전거로 여행하고 쓴 기행문이 다. 상하이에서 서쪽의 시안까지, 시안에서 북쪽의 베이징까지, 거기서 다시 남쪽의 항저우까지 삼각형 모양을 그리며 4800여 킬로미터를 달렸다. 책의 형식은 특별하지 않다. 짧은 글을 마흔여섯 개의 장으 로 묶고 장을 절로 나누어 절 제목을 달았다. 본문 곳곳에 저자가 찍은 사진이 컬러로 들어 있다. 때문에 본문 전체를 4도, 즉 컬러로 인쇄했다. 전형적인 여행서의 모양새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저자의 전작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한겨레출판) 때문이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은 미국 동부의 대서양 연안에서 서부의 태평양 연안까지 6천 킬로미터를 자전거로 여행하고 쓴 기행문이다. 3년 전 군대에 있을 때 버스에 책을 실어 대여해 주는 이동도서관에서 무심코 골라 읽었다. 제목과 표지 모두 특별할 것 없었고 저자의 이름도 낯설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겨우 몇 주 전까지도 몸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몸이 나를 끌고 가려고 한 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뀌어가고 있다. 전부 터 나는 내 몸을 손님처럼 잘 모셔야 할 별도의 존재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몸이 점차 주인이 되고 그 전에 내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정신이 몸의 지시를 따라간다. 이번 여행의 주제가 몸의 발견으로 변해간 다. 원래부터 몸과 정신이 분리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움직임을 통해 합쳐지는 자기의 두 가지 질료 인지도 모른다.”(『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245쪽)
당시 근무하던 사무실이 남향으로 되어 있어서 등 뒤로 해가 가득 비쳤다. 사무실에는 갖가지 음료가 구비되어 있었고 주말이면 두 다리 쭉 뻗은 채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곤 했다. 그때 『아메리카 자전거 여 행』을 읽고 이렇게 썼다. “읽기 본래의 실상을 인정하지 않고 그 이상으로 과도하게 기대해서도 안 된 다. 마치 더 많은 책을 읽기만 하면 무조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거나, 더 지혜로운 사람 혹은 더 이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정신은 정신만으로 독보적이 지 않다.” 미국 동부에 있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꾸역꾸역 넘어가는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괴로운 육체의 운동을 정신이 견딘다. 육체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손쉽게 변한다. 적어 도 정신보다는 쉽게 변한다. 우리는 흔히 육체가 정신에 길들여진다고 생각하지만, 가혹한 여행 동안 저 자의 정신은 육체에 길들여졌다.
이번 책 『중국 만리장정』은 저자의 네 번째 저서다.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과 비슷한 콘셉트이지 만 길과 길을 달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줄고 여행하며 보고 들은 삶과 그에 대한 생각이 늘었다. 언 론사에서 일한 이력이 있는 저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문장이 간결하고 명료하다. 중국에 관한 지리적, 역 사적 사실을 수시로 곁들이면서 현대 중국 사회를 설명한다. 학문적 책임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기행 문으로서는 수준 높은 글이다.
“한국의 단군신화가 건국신화인 반면 중국은 황허문명의 발상지답게 창세신화가 있다. 특이한 점은 기 독교의 창세기와 달리 중국에서는 천지를 창조한 반고가 피곤해서 죽었다는 점. 이것은 중국의 내세관 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신이 죽어서 자연이 된 나라와 이 땅에 신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사는 나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는 한시나 서화 모두 자연을 그린다.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 은 있어도 하늘을 위해 그렇게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177쪽)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글은 읽을수록 좋은데 책 으로서의 만듦새, 즉 편집이 탐탁지 않았다. 기존의 여러 여행 서적을 닮도록 본문 곳곳에 컬러 사진을 넣고 별면(별개의 면)을 삽입해 본문 속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사진을 아기자기하게 배치했다. 내가 편 집자였다면 아기자기한 별면 대신 여행의 동선을 자세히 보여주는 지도 이미지를 보강했을 것이다. 본 문 전체에서 지도는 책 맨 앞의 중국 전체 지도 하나뿐이고 그마저 많은 정보가 생략되어 있다. 저자가 지리 및 역사적인 사실을 곁들여 중국 사회를 설명하는데 정작 독자는 황허의 위치와 모양새를 모르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최근 들어 중국 지명을 표기할 때 현대 중국식 발음을 따르게 되면서 대부 분의 중국 지명이 한국 독자들에게 생소하다. 그럴수록 지도가 중요하다.
책의 만듦새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편집자는 원고, 즉 나중에 책의 내용이 될 것을 가지 고 그것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 즉 책의 꼴을 설계해야 한다. 편집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독자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 편집자가 가장 잘 아는 독자, 그리고 유일하게 아는 독자는 자기 자신이다. 결국 편집자는 독자인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한다. 매번 실패하는데도 그렇다.
<끝>
아는 형님이 언젠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너 아저씨랑 아저씨가 아닌 남자의 차이가 뭔지 알아?” “글쎄요……. 결혼하고, 안 하고요?” “그렇게 단순한 거면 내가 물어봤겠냐?” “그럼 뭔데요?” “사랑을 대하는 태도야.”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사... 사랑을 대하는 태도요?” “응. 결혼은 중요하지 않아. 남자가 아저씨가 되는 순간은 사랑의 긴장감이 사라질 때야.” 형님은 쌍꺼풀 진 느끼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네가 만약 저기 저 여자가 마음에 든다고 해보자. 네가 아저씨라면 아무렇지도 않 게 가서 말을 걸 거야. “혹시 시간 있으시면 같이 놀지 않을래요?” 뭐 이렇게. 여자가 오케이하든 오케이하지 않든, 그런 건 별로 상관없지. 왜냐면 세상에 여자는 많거든. 꼭 저 여자가 아니어도 되는 거야. 그런데 네가 아저씨가 아니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긴장 을 하거든. 왜냐고? 저 여자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거든. 그런데 생각해봐. 너도 연애 몇 번 해봤으니 알 거 아냐. 연애할 때는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지? 그런데 헤어 지고 나니 어때? 또 다른 여자 만나서 연애했지? 안 그래? 다 그런 거라고. 이걸 알 게 되는 순간, 남자는 아저씨가 되는 거지.” 나는 형님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영원한 사랑’따위를 믿는 건 아 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연’이랄까? 아무튼 이 여자든 저 여자든 상관없다는 식 의 태도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형님의 ‘아저씨론’은 맞는 말이기도 했다. 결국 누구든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그날 형님은 술에 취해서 주변 테이블 여자들에게 함께 놀자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나는 형님에게 아저씨처럼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형님은 내 이야 기를 듣지 않았다. “야 인마. 나는 이미 아저씨가 된 지도 한참 됐어. 알아?” “형님. 그래도 그만 하세요. 그냥 저희끼리 조용히 먹다 집에 가요.” “넌 몰라, 이 새끼야. 아저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지 아냐?” 나는 형님을 보며, 여자에게 막 대하는 것보다는, 꼬장 부리고, 꼰대짓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아저씨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형님에게서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아님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즈음부터 나는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데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만 나면 만나는 것이고, 헤어지면 헤어지는 것이었다. 형님의 말대로 세상에 여자는 많고, 꼭 그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얼마 전, 연말을 맞아 친구들이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우린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셨고, 친구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할 때쯤 함께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 여자와 조금 더 술을 마시고 싶었다. “한 잔 더 할래?” “우리 집에 가자.” “집 어딘데?” “여기서 가까워.” 여자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린 편의점에 들려 맥주 두 캔과 소주 한 병을 샀다. 그렇게 여자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멀찍이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형님이었다. “야.” “형님. 오랜만이시……” “퍽!” 오랜만에 보는 형님은 반갑다는 인사 대신 내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 “왜 그러세요!” “오빠, 내가 이러지 말랬지!”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어!” “우린 끝났어. 끝난 지가 벌써 언젠데 왜 이래 진짜! 오빠 미쳤어?” “그래, 미쳤다. 그래. 나 미쳤다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소리를 질러가며 싸웠다. 나는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결국 여자는 형님을 밀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형님 괜찮으세요?” 내가 말을 걸자 형님은 나를 노려보았다. “야, 네가 뭔데 쟬 건드리냐?” “전 몰랐어요.” “야, 네가 뭔데……” 형님은 말을 잇다 말고 훌쩍이더니, 급기야 쪼그려 앉아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형님은 그 여자와 헤어진 뒤로 일도 그만 두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집에서 계속 그 여자 생각만 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그나마 잠도 수면제 덕분에 잔다고 했다. 눈 뜬 시 간이 너무 괴롭다고, 그래서 그 전날에는 이불 곁에 물컵과 수면제를 두고서, 32시간 을 잤다고 했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형님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 을지 알 수 없어 그저 형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형님을 집에 바래다주고, 나는 다시 그 여자의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함께 술을 마시며 나는 여자에게, 아저씨와 아저씨가 아닌 남자의 차이점을 알려주었다.
- 물질과 비물질 1. 물컵 , 이불 <끝>
건축이 좋아. #5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Skogskyrkogå rden Cemetery
12월이다. 매해 12월이면 늘 이 한 해가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aoikasa
2013의 죽음, 그리고 2014의 새로운 생.
언젠가부터 내게 매일매일의 삶은 곧 ‘죽음’을 향한 매일매일의 발걸음이라는 의미로 자리잡았다. 그 때문일까, 내겐 어떻게 사느냐(좀 더 직접적으로는 살아 남느냐)보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 아니 어떻게 죽음을 향해 갈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같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보면 늘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좇아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장소.
스웨덴의 Skogskyrkogå rden Cemetery.
Skogskyrkogå rden Cemetery. 발음조차도 어려운 이 곳의 다른 이름은 Woodland Cemetery이다. 대학 다닐 때 들은 현대건축 수업에서는 ‘ 숲속의 화장장’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곳으로, 20세기 초 스웨덴 건축의 대표자 격인 Eric Gunnar Asplund가 Sigurd Lewerentz와 함께 1914년(그의 나이 무려 29세!!) 현상설계에 당선된 후, 1917 년부터 건축을 시작하여 1940년에 완성하였다. 이 곳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의 남쪽에 위치한 이 곳은 도심공원이자 묘지인데, 1994년 UNESCO Heritage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Skogskyrkogården Cemetery 홈페이지에 나온 건물의 짧은 역사. 1914 국제현상설계, 1915년 당선작 발표, 1920년 첫 건물인 Woodland Chapel (Asplund 디자인) 신축, 1925년 두 번째 건물인 Chapel of Resurrection (Lewerentz 디자인) 신축, 1939년 Granite Cross 신축(Asplund 디자인), 1940년 화장장과 세 개의 채플 신축 그리고 3개월 후 Asplund 사망… )
그런데 도심공원이자 공동묘지라는 이 장소에 대한 설명을 보면, 과연 이 두 시설이 공존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에게 ‘공동묘지’란 어렸을 적 보던 ‘전설의 고향’에나 등장하던, 그야말로 이질적이고도 두려운 이미지가 강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뭐랄까, 한 맺힌 귀신들의 집 같은 곳에서 산책하고 운동할 수 있을까라는 느낌.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안에는 공동묘지가 설치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가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수구문이라 불리던 서소문과 남소문 뿐이었다고 하니, 공동묘지가 우리에게 낯설고도 두려운 장소인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스웨덴의 공동묘지에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1년 전, 2002년 여름의 일이었다. 북유럽 건축 답사 중 두 번째로 들렸던 나라, 스웨덴.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진다던) 복지의 나라에서 과연 죽음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대체 이 나라의 무덤은 어떤 것일까’라는 물음을 가지고 이 곳을 찾았다기보다는 그저 연구실 선배들이 짜 놓은 일정표를 따라 좇아갔었던 것이었지만 이 곳을 둘러보는 동안 ‘과연 이 곳에서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계속 했었던 것 같다.
전철역에서 나와 푸른 잔디밭의 언덕을 오르노라면, 저 멀리 언덕 위의 십자가와 그 옆의 작은 화장장과채플이 보인다. 고요하고 평화롭다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는 장소. 조용히 그 언덕을 오르다보면 십자가가 점점 커지며 다가온다. 자칫하면 억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장면이 주변의 푸르름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이 이 건축 (엄연히 말하면 Landscape Architecture일테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건물’로서의 건축은 이 곳에서 그닥 중요한 것이 아니니…)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언덕을 오르는 기분은 당시 여행 기록에 써둔 글귀처럼 ‘삶과 죽음의 그 가운데’ 에 있는 바로 그 기분이었다. 죽은 자만을 위한 공간도, 산 자만을 위한 공간도 아닌…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뒤섞여 있는 듯한 느낌. 삶과 죽음이 모두 그저 자연의 품 안에 스며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입구에서 십자가로 오르는 길, 십자가와 그 오른편 언덕 사이의 매끄러운 곡선의 잔디밭이 너무나도 포근한 품처럼 느껴진다. 출처: Holger.Ellgaard, “Svenska: Skogskyrkogården i Stockholm, landskapet med Meditationslunden och granitkorset”, 2009, http://en.wikipedia.org/wiki/File:Skogskyrkog_2009.jpg)
십자가로 오르는 길이 마치 이 묘지이자 공원의 끝인 듯 느껴지지만, 사실 이 곳은 그 시작점에 불과하다. 십자가 좌측의 벽을 쭉 따라오며 만나는 건물은 바로 화장장, 그리고 거기에 속한 세 개의 채플, Faith, Hope, the Holy Cross 채플이다. 십자가 그 너머 부터는 본격적으로 무덤들의 공간이 시작된다. 이 무덤들의 공간이란, 울창한 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어 나무와 묘비들이 한 데 어우러진 환상적인 장소이다. 그리고 숲 속 중간 중간에 위치한 Woodland Chapel, Service Center, Resurrection Chapel 등의 건물들. 이들은 모두 자연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들어가 버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특히 Skogskyrkogå rden Cemetery에서 처음 세워진 Woodland Chapel은 마치 원시 오두막을 떠올리게 한다. 뭔가 너무나도 북구스러운 풍경. Nordic Landscape의 진수를 보여준달까.
그런데 대체 이 곳에서는 어떻게 이리도 평화로운,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동묘지의 구현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 것은 아마도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 그리고 ‘매장’방식의 차이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싶다.
먼저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인 듯 하다. 아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차이가 있겠냐만은 ‘죽은 자’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우리의 장례 풍습을 보면 ‘죽은 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잘 보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 하다. 이는 죽은 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표현일 뿐 아니라 죽은 자가 원한을 품고 이 땅에 남을까봐 두려워여서인 듯 하기도 하다. 그 수도 없이 많은 옛날 이야기들이 ‘원한을 품고 저승에 가지 못한 귀신들’의 이야기인 걸 봐도 말이다. 그렇기에 죽은 자의 공간인 묘지는 산 자의 공간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권인 서양에서는 ‘죽은 자’는 ‘천국에 들어간 자’이다. 따라서 산 자들은 죽은 자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에 나도 그 곳에 가서 곧 만날 이들로 여긴다. (물론 서양에도 귀신 이야기는 많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죽은 자의 공간과 산 자의 공간이 공존하는 것이 어쩌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한편, ‘매장방식’의 차이 역시 공원으로서의 공동묘지가 우리에게 낯선 이유가 될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오며 한국에서도 공원묘지가 잠시 유행했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이 ‘공원묘지사업’에 투자했다 망했다.. -_-;) 실상은 공동묘지인데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곳도 많고, 납골당과 공원을 결합시킨 형태들도 다수 나타났다. 묘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의도에서건, 좁아터진 이 땅에서 더 이상 묘자리를 둘 여유가 없었던 경제적 의도에서건 간에 공원묘지라는 이름으로 산 자들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시설이 아닌 산 자들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그런데 봉분(그러니까 동그란 언덕같이 생긴 묘)에 관을 매장하는 전통을 가진 우리로선 아무리 묘지를 공원으로 하려 해도 공원이라기보다는 묘지로 보이는 듯 하다. 게다가 땅값 비싼
한국적 현실에서는 이 공원을 표방한 공동묘지들에서조차도 죽은 자의 공간은 빽빽히 일렬로 구획된 사각형 묘자리에 놓일 뿐이니 과연 어찌 이 곳을 공원과 묘지가 자연스레 어울린 공원묘지라 할 수 있을까. 번호로 구획된 이 사각형 묘자리를 (게다가 거의 똑같은 모습의 봉분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직육면체의 아파트에서의 삶의 공간이 그대로 옮겨간 듯한 기분마저 든다. 납골당의 경우도 마찬가지. 다 똑같이 생긴 사각형 납골함에 죽은 자의 공간은 가두어져 버린다. 다른 이유들이 더 있겠지만, 이 같은 이유들로 여전히 우리에게 공원묘지, 공원이자 묘지인 공간은 낯선 듯 하다.
외국 여행을 가면 (일부러는 아니지만) 그 동네 공동 묘지에 자주 들르곤 했다. 아주 작은 공원 묘지부터 엄청 큰 사이즈의 공원 묘지까지… 각기 다른 디자인의 비석에 쓰여진 글귀를 읽노라면 내가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 사람의 인생에 아주 조금 들어갔다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는 죽은 자들이 주는 위로와 평화에 나도 모르게 따스해진 마음을 품고 돌아온 기억이 많다.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 늘 난 이 곳이 떠오른다. 무언가의 끝을 생각해도 언제나 이 곳이 떠오른다. 그 끝에 무엇이 있건 그 경계에 서 있는 게 불안한 외줄 위가 아니라 푸르른 초원 위라는 기분이 주는 위안. 삶과 죽음의 경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공존. Skogskyrkogå rden Cemetery.
(2002년의 기록 #1.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듯한 슬라이드 필름들)
(2002년의 기록 #2. (유치원생 그림)같은 스케치와 기록들)
그리고 남은 이야기. 29세에 Skogskyrkogå rden Cemetery를 설계하기 시작한 Asplund는 그가 55세 되던 해, 그러니까 1940년 화장장과 세 개의 채플들을 완공함으로 Skogskyrkogå rden Cemetery를 비로소 완성하였던 그 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이 곳의 숲 속에 묻혔다. Skogskyrkogå rden Cemetery에 건축가로서의 일생을 다 바치고 또 그 곳에 영원히 잠들다니… 이 곳은 그야말로 Asplund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아무튼 R.I.P. Asplund…
<끝>
우울한 청춘
글. 그림. 철민
부산오뎅 이야기 ( 귀찮은 애들 )
어느 날부턴가. 심상찮은 비주얼의 두 청년이 우리 가게에 가끔 와서는 오뎅과 정종을 먹으며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다가 나 한테 한마디씩 건네다가를 며칠하더니 대뜸 친구를 하자고 했다. 내 나이를 물어보곤 자기들과 나이가 똑같다며 게다가 동향이라며... 동향인건 말투를 들어서 믿겠으나 동갑이라는 건 도저히 믿지 못했다. 그들이 나에게 비친 첫인상은 나보다 적어도 10살은 많은 형들이 장난치는 것 쯤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암튼 친구 요청이 오긴 왔는데 수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나 수락을 안 하면 해꼬지를 할 것 같기도 해서 찜찜했지만 친구 수락한다고. 내가 이들을 자주 볼지 안 볼진 알 수 없고 안보면 끝나겠 지 하는 마음에 마지못해 수락을 해주었다.
요즘도 나는 내가 먼저 친구하자고 하는 적도 별로없고 남들이 나에게 친구하자는 경우도 별로 없다. 친구... 학창시절 친구 말곤 동갑내기가 흔하지 않아서인지 현실세계의 친구보단 소셜 네트워크 친구가 많아서 친 구가 피곤한 건지 친구 맺는 방법을 몰라서인지 굳이 친구가 맺는 것 보단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에 비 중을 둬서 동갑 친구는 별로 없다. 그들도 내가 볼 땐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걸로 지금도 추정 할 뿐이긴 하지만 그들이 그때 왜 나한테 친구를 하자고 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뭐 굳 이 알고 싶지도 않다. 나이가 들어서 친구를 사귀면 꼭 친구가 아니더라도 어릴 때 만나는 것보다 신중히 만나려고 하고 장점 속 단점을 부각해서 보려고 하고 또 그 단점이 일정시간이 지나 오랜 만남을 가진 사람들의 단점보다 더 크게 부각시키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나만의 고집은 다들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비주얼이 엄청나게 형 같았던 것 말곤 첫인상의 느낌은 무채색 같았던 얘들이랑 친구를 맺은 게 잘 한건가 라고 생각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까페를 차렸다며 놀러오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10년이 지 난 지금까지도 까페를 하고 있다. 부산오뎅이랑 누가 누가 오래하나 내기를 하 듯, 옆에 서로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듯...참 니네 오 래 해먹는다 암튼 이리 까페 10주년 축하해~~
신당동 파르한의 음악소개소 신나는 로큰롤 음악도 당연히 좋지만 한 앨범 안에서 센 노래들에 비해 비교적 고요한 노래는 백이면 백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조용한 노래들이 모여있는 앨범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이번 달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것 또한 로큰롤이다!’가 되겠습니다. 신당동 파르한 (@chungchoon98) 1. 처연 로다운 30 <1>(2012), 트랙 4 올해 락 페스티벌에서 펜스를 잡고 로다운 30의 무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가를 몰라봤는데 우연히 2집에서 보물같은 노래를 발견했다. 나는 평소에 노래를 들을 때 자연스레 베이스 소리에 집중했는데 노래 중반에 나오는 기타 솔로가 좋다.
2. 개가 말하네 크라잉넛 <고물라디오>(2002), 트랙 12 크라잉넛의 노래 중 ‘말달리자’와 ‘룩셈부르크’ 밖에 모르는 친구가 있다면 이런 노래도 있다고 말 해줄 것이다. ‘차가운 사람들 속 어찌하나’와 ‘허무한 세상 속 꿀 단지 하나’를 듣고 있으면 가사가 딱 맞게 떨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가 감탄스럽다. 이 노래만큼은 가사의 힘이 다른 어떤 요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3. 잊혀진 그 사람 슈퍼8비트 <Boy ‘N’ Girl>(2011), 트랙 3 솔직히 처음에는 관심 없었지만 무수히 많은 음악 중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노래. 귀여운 목소리가 락과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디사이저 소리가 돋보이는데 특히 가사가 잠시 멈췄을 때의 빈틈을 채우는 소리가 아주 멋지다. EBS <2011 올해의 헬로루키> 본선에 섰을 당시, 다른 곡을 먼저 연주하고 이어서 이 노래가 나오는데 그 조합이 자연스럽고 좋다.
4. 따뜻한 외로움 포브라더스 <세기말 반동자>(2013), 트랙 10 이 노래역시 비교적 조용한 노래이지만 원래 색깔이 잘 드러난다. 포브라더스의 다른 노래와 마찬가지로 코러스가 노래를 돋보이게 하고 보컬의 목소리가 줄어드는 부분과 커지는 부분이 잘 구분되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된다. 그야말로 하나의 앨범에 잘 녹아든 노래라고 생각한다.
5. 도롱뇽 쏜애플 <난 자꾸 말을 더듬고 잠드는 법도 잊었네>(2010), 트랙 5 새벽에 들으면 좋다. 잔잔한 연주에 보컬이 잘 녹아들었는데 특별히 센 부분 없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조금 변화가 있다면 똑같은 기타 연주가 반복되다가 중간에 ‘아~’ 하는 가사와 함께 멜로디가 바뀌고 곧이어 다른 악기들의 연주도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콘트라베이스 소리가 잘 들린다.
6. 캐롤라이나 서교그룹사운드 <우리들은>(2012), 트랙 7 한동안 신선한 로큰롤이 없어서 심심했고 로큰롤은 다 비슷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청년들의 노래를 들으면 로큰롤은 참 무궁무진한 것을 알게 된다. 신기한 것은 새로운 로큰롤 음악도 사람들을 춤추게 한다는 것이다. <EBS 스페이스 공감>의 말처럼 그들의 음악은 참 시원시원하다.
2014년은 더욱더 로큰롤스러운 시간들이 되길 바랍니다.
국가란 무엇일까? (1회)
나는 태어나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4가지를 받았는데, 국적, 나이, 부모, 이름 이것들이 그 4가지이다. 뭐 어떤 식으로든 바꾸려 들면 바꿀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가는 그것들이다. 요즘 세상에 천부적이라니.. 하하 이것 참. 이렇게 나는 어느 나라의 누구네 자식 몇 살의 모군이 된 것이다. 여기서 대뜸 국가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야기가 좀 애매해지니 지금부터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보자. 예수님이 탄생한 ad 0. 기왕 생각이란 타임머신을 탔으니 그것보다 훨씬 이전의 시절로 가보자. 아주 아주 오래 전, 원숭이가 손가락질 하면서 너와 내가 닮았다고 하는 그 시절로 말이다. 발등에 털이 수북하고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잔뜩한 발을 하고 부드러운 풀들이 이슬 냄새를 풍기는 들판에 서 있는 상상을 해보자. 당연히 옷도 없고 몸 여기저기에 털이 조금 더 풍성한 그런 상태로 서있는 거다, 그때, 국가는 어디에 있을까? 한 몇 시간 정도 맨몸으로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너른 바위에 앉아 알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국가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알게 된다. 여기에 그런 건 없다. 지금이라도 동굴을 찾아야 한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동굴에 들어가 있어야 언제 올지 모를 비라도 피할 수 있고 차가운 밤 바람이라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재수 없게 시베리아 호랑이가 먼저 들어가 있는 동굴을 고른다면 이번 생은 그것으로 끝이다. (이쯤에서 지금의 대한민국 영토가 이 글의 지역적 배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릿속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면 생각을 다시 동굴 입구로 불러내 이어가 보자. 짜잔- 이제 호랑이는 안에 없다. 밤의 추위와 새벽의 이슬을 피하고 나면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고 몇 년 정도 사냥과 채집, 정말 재능이 있는 당신이라면 경작까지 해 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은 거기서 고착화 된다. 지금 우리가 직장을 잡고 눌러 앉아 아이를 낳고 하는 수준과 다르지 않다. 원시시대는 원시시대의 수준으로 안정적이기만 하면 괜히 이동할 필요도 딱히 걱정할 것도 없이 한 인생이 끝난다. 시간이 남고 심심했다면 동굴에 벽화 정도는 끄적 였을 수도 있다. 이번 생은 어영부영.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하고 백발과 함께 이가 빠지다가 갑자기 서서히 잠이 온다. 나는 죽어간다. 한 번의 죽음을 마치고 (혹시 동굴 입구에서 호랑이 때문에 죽었었다면 두 번의 죽음을 마치고) 다시 시작한 인생, 이번에는 들판에서 헤매지 않고 바로 동굴로 달려간다. 빠르게 경작지를 확보하고 채집과 사냥을 마치고 벽에 그림도 그리고 편안하게 산다. 두번 째 살아보니 여유가 생겨 주변을 탐사하다 운이 좋게 짝을 만나 새끼를 낳았다. 동굴은 가족의 집이 되고 또 행복하게 잘 살다가 죽는다. 전에는 혼자 동굴 천장을 보며 잠들 듯이 죽었는데, 이번에는 나의 새끼들이 끽끽 거리면서 손을 잡아주었다. 전생은 너무 외로웠으니 내세에는 자식의 자식. 지금 내 손을 잡아주는 자식의 아이로 태어나 보자. 태어날 때부터 유복하지는 않지만 입에다 젖을 먹여주는 큰놈이 있고 사냥을 데리고 다니는 큰놈이 있고 음식을 나눠먹는 식구가 있다. 한참 추운 밤에는 같이 껴안고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오순도순 자라는 당신의 동굴에 갑자기 왠 놈들이 들이닥친다. 동굴을 내놓으라고 실갱이를 하다가 전부를 몰살시켜버렸다. 그렇게 이번 생이 끝났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에 우리 말고도 다른 인간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랬으니 지난번에 짝을 지었겠지만...
이번에는 점령당한 동굴을 벗어나 우리 가족을 몰살시켰던 원수 부족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부족 국가를 이루었다. 불행하게도 족장과는 영 거리가 있는 부족의 최하층이다. 그래도 족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안전하다니 실제로 좀 겁도 나고 해서 어영 부영 이번 생은 안정적으로 가봐야 겠다는 계산을 마치고 족장을 따른다. 호랑이도 같이 잡으러 다니고 천둥이 치면 족장은 벼락이 떨어지지 않게 기도를 해주었다. 사냥에 나가기 전에는 해를 향해 절을 하고 족장은 주문을 외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어지간한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졌다. 족장이 전임 족장을 위해 큰 집을 만들겠다는 말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하기 싫어서 도망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도망가서 먹고 살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괜히 도망치다 잡혀 죽는 것보다는 좀 힘들어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하긴 했는데. 죽은 다음에는 큰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지어주다니 그게 무슨 의미일까? 가셨으니 땅 파고 올라오지 말라는 뜻인가? 물어봤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힘이 들어도 무척 드는 일이었다. 아무 의미 없이 서있는 큰 돌을 보며 생각했다, 국가는 이것일까? 생각을 하기도 전에 또 늙어서 죽어간다. 다음에는 족장으로 태어나고 싶다. 족장으로 태어나 보니 완전 나의 세상. 제사를 지내고 뭔지 모를 축복을 내려야 하는 것이 귀찮긴 하지만 내가 하는 행동에 거리낄 것이 없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먹을 것이 모자란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비가 덜 내렸다나. 사냥이 덜 된다나. 기도발이 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도 서서히 들린다. 다른 부족을 공격해서라도 먹을 것을 구해줘야 한다. 지난번 호랑이와 싸울 때 입은 상처에서 붉은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아랫것들이 영 실망하는 눈빛을 보였다. 위대한 족장인 나에게 천박한 붉은 피라니... 가뜩이나 힘이 떨어지고 먹을 것 투정하는 녀석들이 많아지는데 이 사실이 널리 퍼지기전에 그것을 본 녀석들을 없애야겠다. 국가는 곧 내가 아닌가. 숙청을 마치고 회합의 자리에 한 녀석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따뜻한 곳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먹을 것이 많아서 동물들도 살이 올라 조금만 잡아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과일도 많답니다.” 귀가 솔깃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겨우 이 추운 동네에 요만한 부족을 이끌려고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가자 남쪽으로. 몇 명의 족장을 죽이고 부족들 통합했지만 여전히 넘지 못한 산은 무수하고 그 뒤에는 어느 놈들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산을 또 넘기에는 내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 이제 불만을 말하는 놈들도 없고 지금의 부족을 다 돌아보는 데 열흘도 모자라다. 몇 년 전 점령한 산 너머 부족에 힘이 센 전사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 녀석은 나중에 나를 위협하지 않을까? 미리 없애야 하나? 조금 더 있다 가야 하나? 그곳에 가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오늘은 일단 자자. 잠을 자는 사이 나의 목이 달아났다. 그간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녀석들이 나의 목을 가져가 버렸다. 이대로 국가는 사라지는가? 아. 너무 몰입해 있었다. 어디서부터 다시 태어나 볼까, 그러고 보니 국가가 뭐였더라?
글. exxx
TIP. 일베를 하는 친구와 대화를 해야할 일이 생긴다면..
사실 친구관계를 멈추는 것이 가장 쉽고 간단하지만 그래도 최후의 끈을 잡고 싶다면 정치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대화하면 좋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팩트를 이야기 하라고 하고, 계속 반박을 하고, 설명을 해도 말이 안통하는 것 같을 때 쓰시면 좋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세요.“너는 어떤 나라에서 살고 싶니?” 그리고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들어보시고 주장하는 형태의 국가에서 살다가 지금 자신이 주장하는 것들에 스스로 몰 리게 되었을 때 딴소리 안 할 자신 있냐고 물어보세요. 그리고 자신 있다고 하면, 그냥 그 즈음에서 그만 만나시는게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정치란 것이 누가 옳고 그런것이라고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물론 그른 것은 있지만) 그래도 개인이 그렇게까지 험난한 각오하고 산다는데 뭘 더 어쩌겠습니 까. 나중에 딴소리 안한다는데요. 근데 이 대화법은 부모님과 대화할 때도 적용됩니다. 하하.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이달에도 재미있는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PDF를 보시면서 누르셔도 되고 스마트 폰으로 찍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월간이리 내 원고의 일부분이나 필진 이름, 블로그 주소등을 누르시는 경우 해당 페이지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우리끼리 싸워 무엇하나
바다비 일요 시극장
바다비 일요 시극장 2014.1.26 http://cafe.daum.net/badabie
월간이리에서 필진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식물, 생물, 무속, 종교, 역사, 의학, 과학, 철학, 패션, 요리, 에세이, 연애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필진을 구하고 있습니다. 함께 볼 수 있는 다양한 글을 싣는 책이 되고 싶습니다. 그간 월간이리를 재미있게 봐오셨거나 알게 모르게 끌리시는 분들, 망설이는 친구를 옆에 두신 분들은 언제든 연락주시면 친절하게 안내해 드립니다. exxx2x@gmail.com 으로 메일 부탁드립니다.
올해에도 안정적이면서 똘기있는 잡지를 만들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37호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8호에 뵙겠습니다.
그림. 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