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화, 한국 건축의 혼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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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화, 한국 건축의 혼을 담다

김영택


펜화, 한국 건축의 혼을 담다 1판1쇄 발행 2013년 12월 10일 글 그림 | 김영택 펴낸이 | 김형근 펴낸곳 | 서울셀렉션㈜ 편

집 | 진선희, 김유진

디자인 | 손홍경, 신은지

등록 | 2003년 1월 28일(제1-3169호)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105-2 출판문화회관 지하 1층 (우110-190) 편집부 | 전화 02-734-9567 팩스 02-734-9562 영업부 | 전화 02-734-9565 팩스 02-734-9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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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김영택

ISBN 978-89-97639-38-0 07650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 없이 책의 일부 또는 전체를 인용, 발췌,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펜화, 한국 건축의 혼을 담다 김영택


김영택 金榮澤 Kim Young-Taek

인천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숭실대학교 중소기업대학원 졸업(경영학 석사) 수원과학대학 산학교수 역임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작품 연재

2009~현 재 중앙일보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문화재 펜화기행> 연재 2007~2008 중앙일보 <김영택의 펜화기행-펜으로 복원한 문화재> 연재 2004~2005 주간조선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연재 2003~2006 아름다운 국립공원 <김영택의 펜화기행> 연재 2002~2004 중앙일보 <김영택의 펜화기행> 연재 법보신문 <김영택의 펜화기행> 연재

경력 2012 경주시 초대전(국제펜클럽대회를 위한 특별전) 한양대학교 박물관 초대전 국가브랜드위원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선정 중등미술교과서에 한국 대표 펜화가로 수록

2005 현대백화점 전국 순회전 2004 학고재 제1회 초대전 기업은행 초대전 LG그룹 2005년 캘린더 발간

한국펜화가협회 제2회전 개최 <알파갤러리 초대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대형작품 8점 상설전시 2011 갤러리 라메르 <스케치전> 한국펜화가협회 창립전 개최 <알파갤러리 초대전> 한국펜화가협회 설립, 초대회장 취임 2009 통인화랑 초대전 국립청주박물관 특별초대전 2008 문화재청 2009년 캘린더 『옛 도성의 문과 루』 발간 울산시 초대전 2007 단행본 『펜화기행』 발간

2003 통도사 2004년 캘린더 발간 2002 통도사 주요 건축문화재 16동 펜화 기록 작업 통도사 2003년 캘린더 발간 2001 캘린더 2종 발간 1999 삼성물산 펜화작업 1994 제1회 국제 로고 디자인 비엔날레 초대 작가로 선정 1993 국제상표센터(International Trademark Center)에서 전 세계 그래픽 디자이너 54명에게 수여하는 ‘디자인 앰배서더(Design Ambassador)’ 칭호 받음 1992 기업은행 펜화 작업

마산 문화방송 연말 특별초대전 마산 문화방송 2008년 캘린더 발간 석가탄신일 기념전 <영축총림 통도사> 2006 학고재 제2회 초대전 2007년 펜화기행 캘린더 발간

1991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심사위원 1982 하나은행 펜화 작업 1974 대한항공 펜화 작업


한국적 펜화에 담은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 조선백자에 만든 이의 낙관이나 서명이 있으면 무조건 가짜랍니다. ‘내 작품이니 멋지게 만들

고, 산맥과 지맥 끊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자연을 극복의 대상이 아닌 ‘공생 관계’로 생각한

겠다.’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조선 장인의 특성을 보여주지요. 세계의 석학들이 ‘무아無我의

것이지요. 건물을 지을 때는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하고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였습니다.

미’라며 조선 공예품을 ‘공예 예술 최고의 경지’라고 극찬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내 것, 내 작

서양 건물이 자연 속에서 툭 불거져 보이지만 우리 건물은 푹 파묻혀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품이란 의식이 있을 때 욕심이 생기고 때가 묻어나는 법이지요.

런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환경 파괴에 따른 엄청난 재앙에 직면한 현대 사회가 본받아야 할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 건축처럼 개성이 두드러지는 한옥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건축은 우리 선조가 추구하였던 건축 사상에 그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한옥은 어딜 가든 비슷한 모양이지요. 예를 들어, 여러 절의 대웅전을 정면에서 찍은 다음,

제가 펜화에 담고 싶어 하는 우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세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무

배경과 현판의 글씨를 지운 사진을 죽 늘어놓으면 주지 스님도 자기 절의 대웅전을 쉽게 찾

아의 아름다움’이며, 세계의 건축이 추구해야 할 ‘자연이 우선하는 건축’입니다. 펜화는 감성

지 못할 것입니다. 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함양의 거연정과 농월정, 거창의 요수정 등 많은

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인 그림입니다만, 솔직하고 정확하며 세밀하게 우리 건물의 특성을 그

정자의 배경을 지워 버린다면 역시 구분하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전통 한옥은 현대

대로 옮겨 담을 수 있습니다. 건축도면처럼 그리는 서구인들의 펜화 기법이 아닌, 제 나름의

건축가들이 당연시하는 ‘내 작품 내 건물’과는 전혀 다른 ‘무아의 미’ 그 자체입니다.

펜화 기법을 하나하나 터득하여 ‘한국적 펜화’를 만들어가고 있지요. 그 노력이 결실을 이루

우리 목조 건축기술은 백제 때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때 지은 황룡사 9층 대 탑이 그 실증으로서, 현대의 기술로는 5층 이상 지을 수 없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기록된 일본 나라 현의 호류 사 금당과 5중탑을 백제 장인들이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

는지, 제 펜화에서 ‘조선백자의 향기가 난다’, ‘한국화 같다’고 합니다. 우리 건축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펜화에 담아서 전 세계인에게 자랑도 하고, 함께 보고, 느 끼고, 즐기고, 배우게 하고 싶습니다.

다. 세계 최대 목조 건물로 손꼽히는 나라 현의 도다이 사 금당도 우리 선조가 지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건축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선조는 ‘어떤 모양으로 짓느냐’ 보다 ‘무 엇을 위해 짓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우리 건축 문화재에는 ‘내 것’이라는 욕심 이 없는 선조의 마음 자세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자신의 삶보다 남의 삶을 중요시하였던 아 름다운 장인정신이 보이는 것입니다. 구한말, 조선을 다섯 차례나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는 조선 땅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옥하다 했습니다. 이런 천혜의 자연에서 살아온 우 리 선조는 이 땅과 자연을 살아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큰 바위나 오래된 고목을 존경했

2013년 12월



차례 1장 건축, 역사를 품다

2장 건축, 문화를 담다

3장 건축, 종교를 안다



건축 역 사를 품다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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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 역사를 품다

경복궁

오백 년 조선왕조의 찬란한 유산

서울시 종로구


광화문 되살아난 우리 민족 불멸의 상징 조선 태조가 1395년에 창건한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으로 나 라의 권위를 상징하였습니다. 서울 도성 8개의 문과 궁궐의 문 중 유일 하게 3개의 홍예문을 갖추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4년 고 종 때 재건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27년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우측으 로 이건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것마저 6·25전쟁에 문루가 소실되어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제자리에 옮겨 지은 것을 2006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2010년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문 앞 월대는 도로 사정 으로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광화문 옛 사진 중에 월대 앞 층계 와 소맷돌이 온전하게 찍힌 것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그동안 수집한 20여 장의 사진을 참고하여 1890년경의 광화문 모습을 되살렸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 앞에 해태를 두어 강력한 왕권 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수가 한껏 기량을 펼쳐 만든 것으 로, 조형미가 뛰어난 조각 작품입니다. 이 해태 앞에서는 어떤 신하라도 말 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답니다.

광화문(1890년대) | 종이에 먹펜 |

33 x 60cm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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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 역사를 품다

근정전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자 석조 동물원 우리나라에서 돌로 만든 짐승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십 니까? 경복궁입니다. 광화문 앞 해태 2마리부터 시작하여 경회루 난간석 과 근정전 월대까지 수많은 동물 조각이 있어, 석조 동물원이라 부를 만 합니다.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자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景福宮에는 서 울의 여러 궁궐 중 유일하게 상·하 월대에 모두 난간을 둘렀습니다. 이 난간 기둥과 계단 기둥에 갖가지 동물을 조각하였습니다. 이들을 법수라 고 하는데, 12지신과 오방신입니다. 북쪽에는 쥐, 동쪽은 토끼와 소와 뱀 을, 남쪽에는 말과 호랑이를, 서쪽은 닭과 양을 두어 근정전을 지키게 하 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궁궐을 지키는 수호 동물이라면 모두 험상궂은 얼굴이어야 하는데 순하디순한 얼굴이라는 점입니다. 한국 동물 조각의 특징이며 한국인의 특성입니다.

근정전 청룡 | 종이에 먹펜 |

27x 38cm | 2004

근정전 천록 | 종이에 먹펜 |

36x 48cm | 2004

근정전 해태 | 종이에 먹펜 |

35x 48cm | 2004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근정전 | 종이에 먹펜 |

41x 58cm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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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 역사를 품다

향원정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임금의 휴식 공간 경복궁 후원 향원지 가운데의 둥근 섬에 향원정香遠亭이 화려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육모 정자에 기둥도 육모로 무척 드문 구조입니다. 2층 정 자는 더욱 드뭅니다. 아래층은 온돌이고 위층에는 마루를 깔아서 전천후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아亞자살 창호 아래 궁창에 장식한 꽃무늬가 화려 합니다. 위층 창호는 들어열개문으로 모두 들어서 들쇠에 걸 수 있습니 다. 아래층 툇마루 난간은 평난간이며, 위층은 계자각으로 투각 무늬가 정교합니다. 지붕 꼭대기에 청동 절병통을 올렸습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함께 지었다고 합니다. 경복궁 경회루가 대형 연회를 위한 것이라면, 향원정은 임금 개인의 휴 식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리가 남쪽에 있으나 원래 북쪽 건청궁 입구 와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6·25전쟁 때 부서진 것을 새로 놓으면서 남쪽 에 둔 것입니다. 임금이 없으니 건청궁과 연결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향원정 | 종이에 먹펜 |

41x 58cm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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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 역사를 품다

서십자각 지금은 사라진 동십자각의 짝 경복궁 오른쪽 모서리 길 가운데 동십자각東十字閣이 외롭게 서 있습니 다. 원래 경복궁 동남쪽 담장 귀퉁이에 서 있던 망루인데, 왜 길 가운데 에 나 앉았을까요? 서쪽에 있던 서십자각西十字閣은 어디로 갔을까요? 일 제는 경복궁의 전각을 무려 4,000여 칸이나 헐어냈습니다. 남은 건물이 10분의 1 정도였지요. 1923년에는 경복궁에서 열리는 조선부업품공진회 를 위해 전차 선로를 광화문 앞에서 영추문 쪽으로 놓으면서 서십자각은 담장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림은 1900년대 서십자각의 모습을 재현한 복원도입니다. 서십자 각은 궁궐의 권위를 살리려고 화려하고 견고하게 지었습니다. 장대석을 쌓은 축대 윗부분과 여장 사이에 당초문을 둘렀으며, 기둥과 창방 아래 에 화려한 문양의 낙양각을 붙여 치장했습니다. 지붕 꼭대기에 올린 절 병통은 연꽃잎과 당초문 조각을 넣은 보기 드문 걸작입니다. 사모 지붕 의 양성 마루에 용두와 잡상 7개를 배치하였습니다. 광화문도 복원했는 데, 서십자각을 되살리는 것이 어떨까요?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서십자각(1900년대) | 종이에 먹펜 |

43x 58cm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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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 역사를 품다

종묘 정전

제사의 격식과 장엄함을 건축예술로 승화시킨 세계문화유산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신주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궁 궐보다 먼저 짓습니다. 선대왕들의 신주를 왕권의 근간으로 보았기 때문 입니다. 1395년에 지은 종묘는 7칸의 태실에 4대 조상을 모셨습니다. 신 주가 늘어나자 영녕전永寧殿을 추가로 짓고, 정전正殿을 여러 번 증축하여 정전은 태실 19칸에 협실 각 3칸, 동·서월랑 각 5칸씩 덧붙인 길고 아름 다운 건물이 되었습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49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영녕전에 34분이 있어 총 83위의 신주가 있습니다. 종묘의 정문인 창엽문을 들어서면 길 가운데 박석을 깐 길이 있습니 다. 가운데 높은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향로랍니다. 그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이고, 왼쪽은 왕세자의 세자로입니다. 이 박석길은 정전에 들어서면서 진한 회색의 전돌로 바뀝니다.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지내는 종묘제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이며, 제례 때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역시 세 계문화유산입니다.

서울시 종로구 종묘 정전 | 종이에 먹펜 |

40x 58cm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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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 역사를 품다

진해루

영욕의 역사를 겪은 강화도의 관문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서 서울을 방어하는 천혜의 요새이지만, 영욕의 역 사를 겪은 곳이기도 합니다. 1231년 몽고가 침입했을 때도, 1627년 정묘 호란 때도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을 합니다. 이후 조선의 효종과 숙종은 강화 해안에 보와 진, 돈대, 포대, 봉수대 등을 쌓아 방위에 온 힘을 쏟습 니다. 그러나 서구와 일본의 침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866년 고종 때 프랑스군이 갑곶나루에 상륙하여 진해루鎭海樓 부근의 고지를 점령하고 강화도를 짓밟습니다. 1871년에는 미군이, 1875년에는 일본군이 침략하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합니 다. 1893년 고종은 진해루 안쪽에 조선수사해방학당이라는 해군사관학 교를 세우고, 50명의 사관생도와 500여 명의 수병을 양성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신식 해군의 꿈은 2년도 못 넘기고 물거품이 됩니 다. 진해루 앞을 흐르는 염하는 약소국의 설움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진해루(1900년대) | 종이에 먹펜 |

36 x 50cm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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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 역사를 품다

진주성과 촉석루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백성의 정신이 남아 있는 성

임진왜란 때 관군이 패하고 임금은 피난을 갔어도 백성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습니다. 1592년 10월, 일본군 2만여 명이 진주성晉州城을 공 격합니다. 조선 관군과 의병 3,800여 명은 6일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칩니다. 백성까지 나서서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부으며 싸워서 성 안에는 기와와 돌이 남아 있지 않았답니다. 이를 ‘진주대첩’이라 합니다. 진주성 안에는 임진왜란과 관련한 유물들이 많습니다. 남강 변 언덕 위에 있는 촉석루矗石樓는 당시 전투 지휘소였습니다. 1241년 고려 고종 때 창건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8년 광해 군 때에 중건하였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때 다시 불에 타 1960년에 다시 지었습니다. 촉석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넓이가 20칸인 큰 누각입니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과 촉석루 | 종이에 먹펜 |

26x 60cm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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