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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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별일 없이 산다 초판1쇄 발행 2013년 4월 13일 인터뷰 시나몬(황수연) 알리(임상옥) 쟈스망(김경진) 쩡(김은정) 각주 박가분(박원익) 시나몬(황수연) 알리(임상옥) 윰(김예은) 사진 이기범 황태현 총 편집 알리(임상옥) 표지 시나몬(황수연) 내부 디자인 시나몬(황수연) 펴낸곳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 주소 136-701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 5가 고려대학교 인문캠퍼스 학생회관 207호 생활도서관 전화 02 921 0484 홈페이지 http://www.kulifelibrary.net 인쇄 한울타리 * 이 책은 비매품입니다. * 잘못 만들어진 책은 생활도서관에서 바꾸어드립니다. * 내용이나 운영위원 활동과 관련된 문의는 010 9134 1690(황수연) 혹은 010 7112 3361 (임상옥)으로 연락주시면 친절히 답해드립니다:)


글 순 서 005

글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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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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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교수님

010 015 021 025 029 030 031 036 045 050 057 058 064 071 078 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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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87학번’ 인문학 사용법 대학, 실수와 공상의 공간 새내기에게 보내는 메세지

오인영 교수님 1. 2. 3. 4. 5.

생활도서관을 아시나요? 교수님의 대학생활 – 대학 그리고 운동? 이론과 실천에 관하여 대학과 인문학? 한국 사회와 대학 그리고 대학과 나

조재룡 교수님

1. 학창시절 – 바바리와 두꺼운 사전 2.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대학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곳” 3. 타자에 대한 욕구, 앎에 대한 욕구 – 연애와 공부 4. 인생의 책들

함돈균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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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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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도서관 운영위원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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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앞에서의 좌절과 내면으로의 복귀 대학에서의 독서 전공을 선택한 계기 공부와 먹고 사는 문제 대학은 어떤 공간인가? 새내기에게 추천하는 도서, 그리고 수업이라는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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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하는

“니가 깜짝 놀랄만한 /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 뭐 별다른 걱정 없다.”

* 인용된 구절은 장기하와 얼굴들 1집 수록곡, <별일 없이 산다>의 첫 부분 이다.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진 사람에게(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전 애인일 가능성이 높다) “나 엄청 잘 살고 있거든?”이라고 말하는 가사가 조금은 찌 질하게 느껴지면서도 속으로는 많이들 공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질문자는 “별일 없이 산다.”라는 상대방의 답변에 깜짝 놀 랄 수 있다. 특히 화자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절대로 기쁘 게 듣지는 못할’ 것이다. 별일 없이 사는데 걱정이 없다는 것. 생존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해야하는 팍팍하고 퍽퍽한 오늘날의 대학 사회에서 배부른 소리이고, 철없는 소리이다. 뭐하고 지내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별일 없이 산다.”라는 말 보다는 적어도 “어디 영어 학원 다녀”, “A사 자소서 준비하 고 있어”라는 대답이라도 해야 체면이 서는 하루하루다.


열한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직도 학교에는 ‘단체로’ 별일 없이 사는 학생들이 있 다.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이하 생도) 운영위원들이다. 듣는 이에 따라서 는 이름마저도 생소할 수 있는 이 도서관에서 하는 일들은 운영위원의 장 래를 걱정해주는 친구나 부모님에게 도무지 말할 것이 못 된다. 인문·사회 과학 책 구입하기, 데스크 지키기, 취업과는 관계없는 책 읽고 토론하기, 원하는 주제로 강연회나 영화제 개최하기 등 별일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 는 일들만 골라하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

다. 물론 이번에 펴낼 <희망의 인터뷰>*도 별일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누군가 도서관에 서 뭐하냐고 물어본다면 이들이 할 수 있는 대답

*

지난 ‘희망의 인터뷰’는 고려대

학교 생활도서관 홈페이지(http:// kulifelibrary.net)에 공개되어 있 습니다.

은 딱 하나 뿐이다. “별일 없이 산다.” 별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별일 없이 살기 때문에, 혹은 별일 없이 살기 위해서 생도 운영위원들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특히 생도에서는 중심적인 주제가 되지만 생도 밖의 공간에서는 더 이상 별일이 되지 못하는 ‘인문학’ 은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한때는 당위성까지 지닌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너무나 쉽게 시간 낭비로 치부되어 버리는 ‘학생자치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그렇다면 지금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어떤 가능성 을 가진 공간인지 등등. 여러 가지 질문에 머리마저 아파왔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운영위원들은 단순히 가르치는 존재, 나를 평가하는 존재이기 전에 한때는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 기대되는 교수님들을 찾아뵈었다. 그 리고 그분들의 이야기와 운영위원들의 고민을 담아 마침내 열한 번째 <희 망의 인터뷰>가 나왔다. 운영위원들은 인터뷰의 형식을 빌려 평소 갖고 있 던 고민들을 토로하였고, 그에 대한 교수님들의 답변과 동시에 그들의 고 민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터뷰를 통해 우리의 ‘ 별일 없이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교수님들도 학창시절 때 우리와 꼭 같 이 했던 고민이고, 지금도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그때의 고민들에 대한 답 변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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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지고 보면 ‘별일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비단 생도 운영위원들만이 아니 다. 생도가 위치하고 있는, 수많은 동아리들이 상주하고 있는 학생회관만 둘러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별일로 내세울 수 없는 것들을 주 제로 진지하게 공부하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으며, 별일이 되지 못하는 일들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며 연습하는 학생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학점과 취업의 압박감을 벌써부터 느끼면서도 한 번쯤은 별일 없 이 살기 위해 동아리에 가입한 새내기들도 보인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학번에 상관없이 별일이 되지 못하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별일 이 되는 것과 되지 못하는 경계에서 계속 고민하고 갈등한다는 점에서 그 들과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는 ‘새내기’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새 내기’들을 위한 인터뷰 집을 만들자는 마음에서, <‘새내기’를 위한 희망의 인터뷰-별일 없이 산다>를 이 책의 제목으로 정한 이유이다. 물론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큰 틀을 잡은 인터뷰이기에 모든 ‘새내기’들에 게 명쾌한 답변이나 고민 해결의 물꼬를 터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 문학이라는 것이 교수님들의 학창 시절 하고 싶었던, 그러나 별일이 되지 못하여 고민하고 갈등했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고민 행위에 대 한 위안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고민한다는 일이 나만의 유별난 행 위가 아니라는 사실과 ‘고민‘이 본인 삶에 있어 의미 있는 행위가 될 수 있 다는 가능성을 함께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만 더 욕 심을 부려보자면, 이 인터뷰집이 왠지 끌려서 집어든, 혹은 우연히 보게 된 모든 이들이 인터뷰집을 통해 지금보다 즐겁게 ‘별일 없이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길 바란다. 노래의 앞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한 것처럼 노래의 마지막 부분을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 지으면 어떨까.

“나는 별일 없이 산다 /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아주 그냥 ”


권보드래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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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교수님은 학교에서 <한국 근대문학 의 형성>, <현대 작가론>, <현대 소설론>등을 강의 하셨습니다. 권보드래 교수님의 수업은 예상하기가 어 렵습니다. 수업 방식 면에 있어서 매학기 달라지기 때문에 오 티 날 당황하기 일쑤입니다. 수업 내용에 있어서는 학생들에게 쉴 새 없이 질문들을 던지시기 때문에 수강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내용을 받 아 적는 필기는 포기하게 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교수님은 ‘인터뷰이’로 서 ‘인터뷰어’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지극히 정형화된 저희의 질문에 예상치 못한 답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교수님과의 인터뷰는 수업 오티 날 만큼이나 예상치 못한 부분이 많아 즐거웠던 인터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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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문과 87학번’

생활도서관(이하 생도): 학교에서 보면 생활도서관이나 학생회 혹은 동아리 차원의 자치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거 같아요. 교수님도 저희가 조금은 이상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실 수도 있고, 저희 스스로 도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이고요. 그래서 혹시 교수님들도 학부시절 때 비슷 한 고민이나 활동들을 하지 않았을까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뷰를 기획해 보 았습니다. 교수님은 학부시절 때 뭐 하셨어요?

전 87학번이거든요. 그러니까 87년도에 들어오자마자 격변이 있었던 딱 그때예요. 권보드래(이하 권): 아 깜짝이야. 요즘 뭐하냐고 물어보는 줄 알았어요. 우리 학부 시절 때요?(웃음)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하면 한이 없고요. 전 87학번이 거든요. 그러니까 87년도에 들어오자마자 격변이 있었던 딱 그때예요. 우리 들어왔을 때는 85년까지 전경들이 학교 복도 안에까지 있었어요. 학교 복도 바로 앞까지 전경들이 지키고 서있고, 학교에선 몇 명이 모여서 시위하면 잡 혀가고 입 막고 끌려가고 그런 상황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목격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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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때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는데도 교문 검문 이런 게 불시로 벌어지던 때 였어요. 교문 앞에서 “가방 열어 보세요”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다 갑자 기 87년 6월이 와버려서 굉장히 어리둥절해하는 와중에서들 지냈고. 저는 대 학 신문사에 있었어요. 저는 고대 출신이 아니라 서울대학교 출신인데, 대학 신문사에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들어가서 그쪽에 좀 있었고. 동아리 쪽 친구 들하고는 대동제 기획 이런 걸 같이해서, 그런 때 많이 만났죠 뭐. 요즘은 어 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거 말고는 우리 때는 주로 ‘언더’라는 지하조직, 여 전히 지하화 되어있는 조직들이 많았거든요. 지금은 뭐 fam이라고도 부르고 family라고도 부르고(웃음) 왜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흉내는 잔뜩 내고 분위기는 사실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냥 꽤 안전하게 지냈고. 생도: 87년까지 그러한 단체들이 있었나요? 권: 어유, 87년까지가 아니라요, 90년대 중반까지 있었을 거예요. 제가 91년 도까지는 그쪽에 속해있었으니까. 그래도 87년 이후,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굉장히 흉내는 다 내는데 실제로 무릅써야 할 위험은 굉장히 적었던 세대예 요. 우리 앞에 김근태 뭐 그런 분들, 김근태 선생이 6학번? 그 정도 될 텐데 그 때 학번들, 그러니까 60년대 한 중반부터 70년대 중반, 후반까지 학번들이 정말 많이 고생했고요, 우리는 흉내는 잔뜩 내고 분위기는 사실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냥 꽤 안전하게 지냈고 뭐 감옥살이하고 이런 친구들이 좀 있었지 만 보통은 그렇게 길게 안하고 한 3개월 하고 집행 유예로 나오고 그랬던 시 절이라 우리 학번은 믿으면 안돼요. 말하는 것 있으면 한 1/10로 깎아 들으면 대략 맞을 거예요. 이런 거 말하는 거 맞아요?(웃음) 생도 : 네(웃음). 저희로서는 교수님들의 학부시절 상상이 안 되잖아요. 뭔가 공부만 하셨을 것 같고.

정말 쫙 당당하게 걸어 나왔는데 너무 부끄럽잖아요. 민망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하고 나와 버렸어요. 권 : 어우 공부요? 우리 학번 때는 공부 진짜 안했어요. 요즘 사실 학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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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너무 열심히 들어와서 사실 좀 부담스러워요(웃음). 그런데 해본 놈들 이 더 심하다고, 수업도 안 들어간 우리가 제일 깐깐하게 굴기는 하는데, 우 리는 수업을 한 번도 안 들어가고 끝낸 수업도 있거든요. 또 뭐 수업 거부, 시 험 거부 이런 것도 워낙 많았거니와 그런 것 없었더라도 어떤 사회학과 수업 인가는 정말 한 번도 안 들어가다가 기말시험 보는 날 딱 한번 들어갔는데 교 수가 안 왔더라고요. 그때 한 400명쯤 듣는 대형 강의였는데 교수가 안 오는 거에요. 한 15분인가 지났는데, 옆에 같이 다니던 친구랑 있다가 처음 들어왔 는데 교수도 안 오고 말이야, 기분이 나쁘잖아요. 그래서 “야, 나가자”하고 둘 이 걸어 나가는데 입구에서 딱 교수랑 마주쳤어요. 조교가 시험지 들고 들어 오는데, 그런데 정말 쫙 당당하게 걸어 나왔는데 거기서 돌이켜 가서 다시 앉 아 시험을 보기가 너무 부끄럽잖아요. 민망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하 고 나와 버렸어요. 그래서 시험도 안 봤는데, 그때 기말 리포트가 있어서 리포 트는 냈어요. 그런데 그 수업이 내가 기억하는 게 맞으면 B-인가가 나왔어요.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지내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수업 관리하는 시 스템 자체가 달랐고, 교수들이 수업을 평가하는 방법도 달랐고, 좀 특이한 교 수들도 많았고. 그런데 뭐 공부 그 자체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세미나는 막 8 개씩 하고 그랬어요. 수업도 안 들어가고, 온갖 세미나.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냥 다 소위 과장은 있을 텐데, 내 기억나는 한에서는 사실에 가깝게 말하려고 할게요. 축약 적으로 말하자면 그래요.

뭔가를 계속 쓰고 읽고 이러면서 살고 싶더라고요. 생도: 교수님은 학과제로 국문과를 택하신 건가요? 권: 네, 우리 때는 다 학과제였어요. 저는 일찍 국문과를 선택했어요, 중3땐 가 어느 날 선택을 해서, 그 후로는 별로 흔들리지 않았고. 뭐. 그때도 국문 과는 먹고 살기는 어렵다는 생각은 했거든요. 그런데 이거 뭔가를 계속 쓰고 읽고 이러면서 살고 싶더라고요. 왜 그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음 막 상 국문과로 가니까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긴 했지만 그 나름대로 꽤 재밌기 는 했어요. 생도: 그러면 학부시절이 끝나고도 비슷한 생각으로 계속 국문학을 공부하 고 싶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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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권: 저희는 아버지 쪽에 교수들이 많은 집이예요. 교육 부르주아 집안이죠, 말하자면은. 좀 균질하지는 않아서 할아버지 때부터 잘살았다 뭐 이런 집은 전혀 아니고. 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때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시고 생활 능력도 없으시고 이런 집이었는데 양쪽 다 자식들이 머리가 좀 좋고 학벌로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을 한 거죠. 우리아버지가 국문과 교수였고. 아버지 가 그쪽이기 때문에 그 공부를 하기가 참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제일 망 설여졌던 거였고.

처음엔 대학원 가는 게 되게 당연한 전제처럼 돼있었어요. 그런데 와보니 대학원이 그렇게 당연하지가 않은 거예요, 전혀. 어쨌든 그래서 일단 처음에 국문과에 들어가면서는 대학원 가는 게 되게 당 연한 전제처럼 돼있었어요. 그런데 들어가서 학부시절에 여러 가지를 겪으 니까 대학원이 그렇게 당연하지가 않은 거예요, 전혀. 우리 때까지만 해도 이 른바 현장 들어간다고 해서 공장에 들어가는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그땐 약 간 한물 간 다음 한 85학번들까지가 제일 많이 들어갔을 텐데. 벌써 학부 1학 년 때 들어간 친구들도 있었고, 한 10년 이렇게 오래 견딘 사람들, 뭐 누구는 신발 밑창 만드는 공장에 들어가서 일도하고 등등으로 버틴 사람들도 있었거 든요. 그런걸 보니까 대학원이라는 것이 하나도 당연하지가 않은 거죠. 거기 는 자세하게 얘기하면 되게 복잡한데, 어쨌든. 대학원 들어가는 생각이 그래 서 어떤 점에선 전혀 없었고. 이제 집을 나와서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쯤 제가 일했던 조직이, 말하자면 조직 원들이 계속 구속이 되고 이러면서 거의 무너졌어요. 그래서 갑자기 끈이 끊 겼어요. 몇 달 동안. 그래서 그때 ‘음, 그렇다면 할 일도 없는데 대학원 시험 을?’(웃음) 그래서 대학원을 가게 됐어요. 생도 : 보통 대학원 갈 때 무엇을 공부할지 어떤 주제? 같은걸 정하고 가잖 아요. 권: 그런데 그때는 제가 정말 대학원을 가려고 생각 하다가 제일 결정적인 시 기에 딴 것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대 학원 들어가서 되게 헤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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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분위기가 교수를 별로 대단하게 생각을 안했어요. ‘저 기성의 보수적인 집단’ 대부분의 교수를 이런 정도의 시선에서 봤고. 생도 : 지금 대학원 간 선배들을 보면 들어가자마자 하는 말들이 “시간이 너 무 없다.”, “논문쓰기도 바빠 가지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 권: 그렇죠. 스트레스 많이 받더라고요. 오늘도 지도학생들 만났더니 다들 장 염에 위염에 난리가 아닌데. 공부하는 게 사회적인 보상은 별로 없지만 뭐 그 거 자체로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굉장히 어렵잖아요. 그때는 대학원이랑 학 부 분위기가 요즘하고 달랐던 게, 제가 졸업할 때 까지는 계속 좀 유지 됐던 것 같아요. 일단 교수를 별로 대단하게 생각을 안했어요. 그러니까 ‘저 기성 의 보수적인 집단’ 대부분의 교수를 이런 정도의 시선에서 봤고. 우리는 뭐 카프 문학 공부하고. 정말 지금 얘기하면 다 정말 다 생뚱스러운 얘긴데 어쨌 든, 다른 새로운 문학 새로운 글쓰기 뭐 하여간 문학도 아닌 새로운 세계 이런 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너무 고리타분한 세계 속에서 있는 것 같 고. 그런 점에서도 별로 교수를 존경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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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문학 사용법

생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저희 인터뷰 주제 부분으로 넘어가 볼게요. 가 끔씩 교수님들 수업을 처음 들을 때 “아, 이런 좋은 강의를 새내기 때 들었으 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인터뷰가 새내기를 위한 것인 만큼 교 수님들이 새내기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권: 아 혹시 그러면 그중에서 인문학 전공이면, 저한테 무슨 얘기 들었으면 좋 을 것 같다 이런 게 있지 않으세요? 생도: 네, 사실 요즘 인문학을 공부하는 게 본인의 의지만으로 선택하기 힘든 부분도 있잖아요. 인문학은 아무런 효용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래서 인문학 범주에 포함되는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해도 인문학은 꼭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서 어떤 지점들을 고민하며, 혹은 어떤 생각이 방향성을 가지고 대학생활을 하는 게 좋을 지 교수님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권: 아, 인문학? “인문학을 해서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수 있을까”와 같은 질 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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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문학을 사랑하지만, 현실이 인문학이라는 데에 고급인력이 많이 몰려있었던 그런 시절은 아닌 것 같다는 거죠. 생도: 인문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

*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

생 데모가 4·19로 절정에 이른 뒤,

르겠다는 이야기들이 많아서요. 그리고 내가 공부 하는 것이랑 실제 사회가 돌아가는 부분과 괴리되

1960년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

는 측면도 많은 것 같고요.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

대표들이 모여 시국수습을 위한 선

서 교수님들께도 여쭈어보고 싶었어요.

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사건 을 말한다. 27개 대학교수 258명 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

권: 저는 일단 기본적으로 인문학 전공하는 사람 자

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

체는 조금 줄어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 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불문과가 없어질 수도 있고 국문과가 없어질 수도

요지의 14개항의 시국선언문을 발

있다는 생각은 하거든요. 뭐 좀 다르게 생각할 수도

표했다. 이어 교수들은 <4·19의거

있잖아요. 내가 퇴직할 때 내가 국문과에서 퇴직을

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서 울 시가를 행진했다. 이 4·25교수 단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밤부터 다 시 시민·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 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 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한학자·금석학자. 성균관대학교 재직 중에 4·19가 일어나자 ‘4·25 교수데모’를 주도해 성명서에 “대 통령은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문 구를 넣을 것을 주장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 글씨

할까? 그리고 국문과에서 퇴직을 하고 싶은가? 이 런 걸 잘 모르겠어요, 사실. 그러니까 인문학이 필 요하다는 걸 부정하는 건 전혀 아니고, 저는 인문학 을 사랑하지만, 현실이 인문학이라는 데에 고급인 력이 많이 몰려있었던 그런 시절은 아닌 것 같다는 거죠. 그런 게 좀 있어요. 뭐 국가정신 같은걸 만드 는 시절이기도 했고, 왜 4·19때 이승만 대통령 하야 하잖아요, 하야할 때 제일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사 건이 대학 교수단 시위*였잖아요. 그때 보면 국학

하던 임창순 선생* 같은 분들이 시위에 앞장서고 그러거든요. 이게 어떤 점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를 직접 썼다. 4·19 이후 민족자주

목표로 하고 살아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을 때 이

통일 중앙협의회에 통일방안 심의

사람들이 국가가 나아갈 길, 사람들이 나아갈 길,

위원으로 참가해 활동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이 단

이런 걸 기획해주고 뭐 이런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체에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

그래서 80년대 정도까지는 인문학이 위세가 등등

속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해직되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인문학자들이 자기

었다. 1964년에는 ‘인민혁명단’사 건에 연루되어 다시 한차례 옥고 를 치렀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까닭도 있고, 4·19 같은 상황이 있을 때 우리가, 다시 말하면 교수들이 그렇게 시위


열한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앞에 나갈 수 있을까? 난 아닐 것 같거든요. 오늘날 교수의 사회적 지위 같 은 게 달라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교수라는 자리는 공동체의 영혼 같은 건데, 공동체가 이쪽으로 가야한다고 보여주는 영혼 같은 건데, 어떤 점에서는 예 전처럼 경제 사회 정치 외교 이러한 모든 분야의 노하우가 필요한 시절이 이 제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지금 사는 세상이 다 조금씩 못마땅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한 준비는 훨씬 더 필요할 것 같기는 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될 지점도 있어서 저도 좀 헷 갈려요. 그러니까 테크놀로지 수준에서의 인문학의 수요는 줄어드는 게 맞는 것 같고. 그렇지만 지금 사는 세상이 다 조금씩 못마땅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한 그런 준비는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해요. 그런 데 그게 지금 같은 방식으로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이 늘어난다거나, 교수가 확충된다거나 이래서 해결될 수 있는 일 같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나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그래서 우리도 우리끼리 얘기 굉장히 많이 해요. 뭐 교수들끼리도 비슷한 생 각 하는 사람들끼리는 앉아서 뭐 최근에는 협동조합 논의를 마구 열렬하게 얘기를 하다가, 우리끼리 협동조합을 만들면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이 야기도 하고 그래요. 옛날 조직 같은 게 다 안 먹혀드는 시절이거든요. 매력 적이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옛날 조직 노선들이 하나도 안 먹히고, 옛날의 삶 의 양태가 하나도 안 먹히고 이러는 때인 데. 거기에다가 뭘 해야 될 진 불분 명 한 거잖아요. 원래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걸 제일 예민하게 파악하고 뭔가 입안을 해야 하는데 우리부터 막 헤매면서 이러고 있는 와중이니까.

개인으로서의 욕망은 이미 꽃 피웠는데 이게 해결될 길은 점점 막혀가는 사회였다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하죠. 하여간 새로운 생각이 필요한데 이게 머리가 굳어서 잘 안 움직이는 상황 같 아요. 보통 그러면 젊은 세대가 그걸 확 깨면서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러면 기성세대에서 호응하고 리드하고 이러면서 세상이 바뀌어 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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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말을 못하는 게 내가 수업시간에 그 얘기는 자주 하지만 우리 때는 일단 취업이 잘됐어요. 국가성장률이 10% 안 팎이었던 시절이에요. 워낙 취직이 잘됐고, 학점이 2.0 이래도 취직이 되는데 뭐. 그러니까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이 어떻게 보자면 아 무리 자기가 수업 안 들어가고 개기고 학생 운동하고 별 짓을 다해도 자기가 먹고 사는 기반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자신감이 있어서 그랬어요. 아마 우리 때가 대학 진학률이 20%가 조금 안됐을 거예요. 그런데 보통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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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공투회의를 의미한다. 전

학공투회의는 1960년대 일본 학 생운동 시기에, 1968년에서 1969 년에 걸쳐 각 대학에 결성된 주요 각파의 학생이 공동 투쟁한 조직 이나 운동체를 말한다. 일본 공산 당을 보수정당으로 규정하고 동경 대를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학 생운동이다. 전공투와 같은 1960 년대 말 일련의 일본 학생운동을 통틀어 전공투 운동이라고 부른다.

적으로 대학 진학률이 20프로를 넘어가면 그때부 터는 지식인으로서의 존재, 집단적 의의는 사라진

다고 그래요. 그래서 일본에서도 68년 투쟁*이 있 었을 때를 기점 같은 걸로 삼거든요. 그게 우리가 흔 히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달라” 뭐 이런 식 의 요구가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대학생들의 흔들 리는 불안 같은 것들이 표출된 현상이었죠. 개인으 로서의 욕망은 이미 꽃 피웠는데 이게 해결될 길은 점점 막혀가는 사회, 이런 걸 본 사람들의 토로였다 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하죠.

요즘 학생들이 고민 없이 사는 학생도 많다고들 이야기하는데, 고민하는 걸 두려워하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때는 어쨌든 앞으로 잘 나갈 것 같고 여기서 아무리 젊은 시절에 반항 해도 결국은 우린 잘 살 것 같고. 사실은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도 전제가 되 어 있어서 그만큼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안 그러잖아 요? 이 형편없는 취업률을 살펴보면, 문과대 같은 경우에는 학과마다 다르지 만 뭐 취업률이 50% 안 되는 학과도 있는데. 일단 자기가 먹고 살고 생존을 해내야 하는데, 거기에다가 넓은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어 렵잖아요. 요즘 학생들이 고민 없이 사는 학생도 많다고들 이야기하는데, 나 는 잘 모르겠어요. 고민하는 걸 두려워하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막상 고민을 하면 또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니까 나도 뭐라고 얘기해야 될지 모를 때가 많아요. 시절이 20여년 사이에 너무 달라졌고, 나도 지금 다시 대학을 다닌다면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고, 오히려 요즘 현실에 비하면 정말 의기를 꺾지 않고 뭐든 해보려고 하고 계속 시도하고 이런 학생들이 내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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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치보다는 많아서 나는 학생들에게 늘 많이 미안해요. 우리는 벌써 개인으로선 잘 먹고 잘사는 보수 세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아 무리 이 머리로 이걸 넘어서려고 해도 안 되는 데도 있어요. 그러니까...우리 는 뭘 했으면 좋겠어요? 교수들에게 뭘 바라나요? 우리는 교수들 말 정말 더 럽게 안 들었거든요. 그래서 대학원 분위기도 달랐다니까요? 뭔가 전설로 전 해지는 이야기들 중에 그때 신임 교수가 왔는데 시 전공이었대요. 그런데 약 간 뭐랄까 정치 사회적 텍스트 해석 이런 걸 안하는 분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들어왔는데 대학원생들이 들어오긴 했는데 다 삐딱하게 앉아 있어가지고 그 교수가 처음이라 더 벌벌 떨면서 “자 여러분 시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이 랬더니 아무도 대답을 안 하고 있다가, 제일 마지막에 어떤 학생이 ”시는 분 신자살입니다.“ 딱 이래버리고(일동 웃음). 교수와의 관계가 전혀 달라요. 그 래서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거 진짜 많아요. 존경해야 할 분을 존경을 안 하 고, 알아보지 못한 경우들이 많거든요. 내가 굉장히 새로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을 했고, 별거 하지도 않으면서.

그때는 학생처장 했던 선생님이 앞에서 막으신 거죠. 못 들어간다. 애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거고 범법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들어가려면 나를 먼저 어떻게 처리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때쯤은 고대가 정말 좋은 학교였어요. 내 생각엔. 고대가 자랑할 만한 점이 정말 많았어요. 한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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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95, 고려대학교의 6

대, 8대 총장. 1975년 박정희 정

까지. 김상협* 총장, 김준엽* 총장 뭐 이때까지?

권의 군 병력이 학생 시위 진압을

예를 들어서 79년에 12·12 쿠데타 나고서 군인들이

에 항의,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2

기숙사 들어가서 학생들 팬티바람으로 벗겨 내가지 고 구타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고대만 아마 그런 일 이 없었을 거예요. 90년 정도에는 북한영화 상영하 는 게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의 일환으로 유행이어서 학내에서 행사가 많았어요. 그런데 북한 영화 상영 을 하면 전경들이 학교 안으로 치고 들어왔어요. 서 울대는 그 때 중앙도서관에서 상영을 해가지고 전 경들이 도서관 안에까지 결국 들어왔던 걸로 기억 해요. 그런데 고대는 정경관에서 상영을 했는데, 그

위하여 고려대학교에 난입한 사건 년 동안 쉬었다가 1977년 다시 고 려대학교 총장으로 복귀하였으며, 1982년 국무총리에 임명 될 때까 지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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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2011, 고려대학교의 9대

총장. 일제시대에는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고려대학 교에서 조교수와 교수를 거쳐 82 년 고려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총 장 재직시절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과 대립하다 1985년 강제적으로 사임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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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학생처장 했던 선생님이 앞에서 막으신 거죠. 못 들어간다. 애들이 그걸 알고 싶어 하는 거고 범법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들어가려면 나를 먼저 어떻 게 처리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 뭐 그런 전설이 많았어요, 고대가 그런 전설 이 제일 많아요. 그때 김성수 선생 동상이 있던 곳에서 연합 집회를 많이 했거 든요. 70년대, 80년대에는 친일파라 그래서 학생들이 술 마시면 김성수 선생 동상에 몰려가서 막 오줌 싸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런데 학생들이 그렇게 해 도 총장들이 그걸 그냥 봐줄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잖아요. 학생들이 다 그렇 지, 젊은 시절엔 다 그렇다. 젊은 시절에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바보다, 뭐 이 런 생각들이 기성세대에게도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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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3. 대학, 실수와 공상의 공간

생도: 다시 생각해봤을 때, 교수님께서 학부시절에 보냈던 상황이랑 지금 상 황이랑 많이 다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라는 공간이 중요시 생각 되는 부분도 확실히 있는데, 저희가 새내기를 대상으로 대학이란 공간에 대 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 교수님께서는 대학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규정 혹은 이야기하고 싶으신지 궁금해요.

그런데 공상은 여러분이 저보다 당연히 더 많이 해야 하잖아요. 공상 많이 안 해요? 권: 글쎄요, 즐거운 공동체가 됐으면 제일 좋겠는데, 조한혜정*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수업 공동체 이런 얘기도 하잖아요. 그 양반도 기운이 넘쳐나서 그러 는 거예요. 수업을 한 학기를 하면은 그동안은 우리 가 공동체다 이러고 여러 가지를 해보고 그러는 건 데, 나는 그렇게 하면 그 수업 끝난 다음이 너무 두 려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수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수업 끝난 다음에 학생들이

*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문화 인류학과 교수. 역사와 생활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문화분석적인 탐 구를 줄곧 해왔고, 현재는 교육 현 장과 대중적 담론의 영역을 떠나 지 않고 탈식민화를 위한 상호 커 뮤니케이션 작업을 중심으로 비평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자세한 정 보는 http://chohanlab.net/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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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도 이런 경험이 좋았어.” 이렇게 생각하는 숫자가 더 많을까, 아니면 “그렇게 공동체라고 떠들고 그래봤자 결국은 다 등 돌리고 나면은 아무것도 없구나.”이렇게 생각하는 숫자가 더 많을지 잘 모르겠어요. 벌써 대학 진학 률은 80프로가 넘었고, 옛날처럼 대학이라는 게 지식인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근거는 정말 전혀 없고, 그렇다면 즐겁게 여러 가지 실 험을 해보자, 그런 정도밖에 할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잖아요? 나도 공상은 잘하기 때문에 별별 공상은 다해요, 이층집을 쫙 짓는 거야, 그래서 일층에는 작은 가게들을 내어 가지고 학생들한테 공모를 걸어서 하고 싶은 대로 코너 를 주는 거예요. 예컨대 와플 굽는 학생도 있고, 커피 만드는 학생도 있고, 수 공예나 사진하는 학생도 있고 등등으로 해서 이걸 해봐도 재밌겠다, 이런 생 각도 하고 그래요. 이런 공상을 하죠. 그런데 공상은 여러분이 저보다 당연히 더 많이 해야 하잖아요. 공상 많이 안 해요? 생도: 하긴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공상 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계속 공상을 얘기하면 친구들부터도 배부른 소리 한다, 참 순진한 소리 한다 그래, 너 그래서 2년 뒤에 뭐 해먹고 살건데? 하면 숨이 턱 막히는 것도 사실이고. 권: 그런데 공상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인 것 같아요. 생도: 사실 생활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도 선배들의 공상일 수 있고, 또 그 과정에 저희의 공상이 들어가서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희는 지금 학번이나 기수제 같은 것 없이 평등한 협의체를 지향하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대단해 보이는 제도지만 그 당시의 누군가의 새로운 시도로 생겨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해요. 권: 그런 걸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 건 우린 정말 전혀 안 하던 시도에요. 그 런데 그 말이 맞잖아요, 사실 생도도 어떤 공상의 산물이고 대학 자체가 그 렇죠. 수업시간에 가끔 하는 이야기를 소개해 보자면, 100년 전을 상상해봐 라, 아니면 60년 전만 상상을 해봐도 대학이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100년 전엔 대학이라는 건 한국 땅에 거의 있지도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대단해 보 이는 제도지만 그 당시의 누군가의 새로운 시도로 생겨난 것이라는 이야기 들을 하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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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생도: 공상 얘기하니까 생각나는 게 교수님 수업을 처음 들으면 다들 낯설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왜냐하면 교수님은 학생들한테 질문도 되게 많이 하시잖아요.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까 매번 매학기 수업방식 이 바뀌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공상이랑 연결 지어서 말하자면, 교수 님도 수업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게 학 생들에게 바라는 게 있기 때문에 하시는 거잖아요. 구체적으로 그런 시도들 이 교수님이 그러한 시도들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요.

매번 학생들이 다르니까 강의도 매번 다를 수밖에 없어요. 권: 일단, 내가 지루한 걸 못 참아요. 학생들 생각을 하는 거에 앞서서, 똑같 은 수업 두 번 하라 그러면 돌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똑같은 수업을 못해요. 그리고 수업을 들어가 보면 수업 계획안을 다 짰더라도 첫날 들어가서 학생 들 얼굴 보면 또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왜냐하면 학생들이 미묘하게 그 때 그때 달라요. 그런데 수업을 한다는 게 정말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것도 많고, 같이 만드는 거지 내가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건 전혀 아닌 것 같거든 요. 매번 학생들이 다르니까 강의도 매번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나마 수업을 할 때도 대체로 내가 이미 알고 있고 결론 낸 내용을 얘기하는 것 보다 내가 지금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들 가지고 주로 얘기를 하려고 노력을 하는 편인 데 그래서 싫어하는 학생들도 많아요. ‘교수가 가르쳐주지를 않고 계속 질문 만 던지네?’ 같은 반응인거죠. 특히 첫 학기에는 반발이 심했어요. 그나마 학 생들이 조금씩 적응을 해줘서 나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강의 중에 학생들 이 던져주는 문제가 의외로 많거든요? 특히 고대 와서는 그런 걸 더 많이 느 껴서 그건 좀 신나는 일이에요. 학생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잘 던지고 생각하 게 해주는 게 많아서.

“다음엔 다른 실수를 하자.” 어디에 있든지 조금씩 실험은 할 수 있는데, 실험이라고 하면 되게 거창하다. 실험 방법도 갖가지인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학기마다 강의를 모두 바꾸는 건 아니고, 저는 비교적 조금씩 계속 바꿔가는 편인데도, 결과적으론 사실 학 기마다 계속 실수를 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몇 가지 표어 중에 하나가 “ 다음엔 다른 실수를 하자.” 이런 건데, 이 표어 좋아하는 사람들이 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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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인간이 실수를 안 할 수도 없고 실패를 안 할 순 없죠. 그래서 제가 한 일들도 주로 실패했어요. 뭐 학부 때 운동하고 그랬던 것도 사실 실패한 거고.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는지 지금도 술 마시면 20년이 지났 는데도 울면서 그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실패죠. 그리고 아마 협동조합 이런 거 해봤자 또 실패할 것 같아요. 그래서 잘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만 그게 또 선배들이 할 일이 아니냐. 뭔가 해보고 실패하고 저러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그런 것도 의미 있는 것 아니냐. 죽을 때도 굉장히 후회스러울 것 같아요. 제대로 한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을 것 같고. 저는 좀 그런 캐릭터예요. 나는 내가 워낙 실수를 많이 하고 허점투성이라서 그냥 ‘그런 걸 내 존재론으 로 하면 되겠다.’라고 어느 순간에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게 필요한 사람들 도 있을 거다. 그렇잖아요. 저렇게 실수를 많이 하는 인간도 저런 일을 할 수 있더라, 뭐 그러한 위안이 필요한 사람도 있을 거고. 위안이 됐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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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별일 없이 없이 산다 산다

4. 새내기에게 보내는 메세지

생도: 그러면 좀 마무리 지으면서 교수님께서 새내기들에게 만약 영상편지 를 보내신다면, 어떤 메시지를 전하시고 싶으신가요. 응원의 메시지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대학생활에서 꼭 해보면 좋을 것 같은 두 가지 일을 같이 포함해주세요. 권: 과 진입할 때 많이 해봤으면 좋겠는 것? 음, “하늘을 많이 봐라!“ 생도: 예, 그런 것도 좋아요! 권: 하늘을 많이 보고 많이 걸어라 뭐 이런 거(웃음). 생도: 너무 좋아요! 저희가 “맨날 걷자” 이런 말 많이 해요. 이런 거 좋아해 서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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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실수 안 해보면 평생 실수 못한다. 권: 그래요? 어우 그럼 다행이네요. 여기 이 사람들만 좋아하면 안 되는데. 젊 었을 때 실수 안 해보면 평생 실수 못한다. 뭐 그런 거? 그 정도 일 것 같고, 엊 그제에도 엄마와 함께하는 도서관 산책 이런 책을 누가 보내줘서 봤는데 도 서관에 가기 전에 알아야 할 계명 10가지 이런 걸 써놨더라고요. 1번, 책을 읽 지 않을 권리. 2번, 건너뛰면서 읽을 권리, 이런 식으로 해서 제일 밑에 가서 는 열 번째가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여기까지 있어요. 얼마 전 에도 진중권 씨 책을 보는데, 진중권 씨가 약간 유머를 섞어서 ‘내 책을 사기 만 하고 읽지 않는 그 많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 책만 산다면 독서 시장이라는 게 얼마나 줄어들겠는가. 내 게 있어서 최상의 독자는 내 책을 산 다음에 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 심지어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한 번 더 사는 사람들이다.’ 라고 썼더라고요. 생도: 굉장히 솔직하네요(웃음).

하루 종일 계획을 잔뜩 세운대요. 이렇게 5년 치 계획을 세웠다가 저녁에 한 순간에 와장창 무너뜨리는 쾌락을 느낀대요 권: 근데 그런 거죠. 나도 그런 말을 들으면서 막 해방감이 들더라고요(웃음). 예전에 루소의 『고백록』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도 그 비슷한 해방감이 있었 는데, 루소 같은 대단한 사람이 그런 얘길 썼더라고요. 하루 종일 계획을 잔 뜩 세운대요. 몇 월부터 몇 월까지는 무슨 저서를 몇 페이지를 완성을 하고 언 제는 어디 가서 뭘 하고, 이렇게 5년 치 계획을 세웠다가 저녁에 한 순간에 와 장창 무너뜨리는 걸로, 무너뜨리는 쾌락을 느낀대요(웃음). 그런데 그걸 읽는 데 해방감이 막 밀려오는 거예요.

저는 만화책을 되게 많이 봤거든요.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리는 좀 고급스러운 거부터. 생도: 마지막으로 새내기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권: 책이요? 새내기들이 읽어야 될 뭐 특별한 책이 있나? 어떤 거 읽었으면 좋 겠어요? 만화책들?(웃음) 요즘 뭐 만화책도 너무 안 읽어서. 그런데 저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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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웹툰을 안 봐요. 웹툰은 이건 또 적응이 잘 안되기도 하고, 이건 완전히 종이 만화책하고 다른 세계인 것 같더라고요. 저는 만화책을 되게 많이 봤거든요. 그래픽 노블이라고 불리는 좀 고급스러운 거부터. 생도: 생활도서관에도 좀 있어요! 저 안쪽에. 권: 여기는 지역 주민들도 신분증 가지고 오면 빌려줘요?(네) 어쨌든 그런 것 도 많이 보면 좋고. 『쥐』, 『기생수』 뭐 이런 것들. 『기생수』! 좋지 않아요? 그 래서 다음 학기 핵심교양 때는 선생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꼭 만화를 조 금 해보려고요. 생도: 정말요?

어제도 책 한 권을 읽다가 모든 걸 번역자 탓으로 돌리고 결국(웃음). “번역이 분명 잘못됐어!” 그렇게 탓을 하고 탁 덮었죠. 권: 지금은 만화 수업이 체육교육과 학생들만 듣게 돼있는 수업 딱 하나 있더 라고요. 다른 건 뭐가 있을까요? 요즘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이 뭐있지? 요 즘 제가 무슨 책을 재미있게 읽었을까요. 그래도 나는 그래도 플라톤이 제일 재밌었던 것 같아요. 플라톤 재밌잖아요, 나름 재밌어요. 나는 플라톤의 말이 어렵지 않아서 재밌어요. 요즘 프랑스 철학자들처럼 말 많이 안 꼬잖아요. 요 즘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 읽으면 머리에 쥐나는 것 같아요. 너무 어렵죠. 어 제도 책 한 권을 읽다가 모든 걸 번역자 탓으로 돌리고 결국(웃음). “번역이 분명 잘못됐어!” 그렇게 탓을 하고 탁 덮었죠.

그 수업에 모든 사람을 만점을 준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웃음) 생도: 아 아까 수업 얘기 하실 때 학생들 얘기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학 생 있으세요? 가장 오묘하고(웃음). 권: 아 가장 오묘하고(웃음). 지난 학기에 수업에서 평점을 학생들과 같이 매 겼어요. 저도 평점을 매기고 학생들도 다 채점을 해서 그걸 합산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 수업에 하나도 안 빠지고 들어와서 모든 사람을 만점을 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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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있었어요.(웃음) 그게 굉장히 재밌었던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 몇 번은 몰랐어요. 그런데 이게 20점 만점으로 해서 개인 점수를 주고 조 점수를 주고 뭐 이래서 합산을 하고 이러는 거라서 나름대로 굉장히 학생들이 열심히 정 말 불타는 눈으로 보고 열심히 채점을 하고 저도 열심히 소심하게 채점을 하 고 이러는데 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수업에 들어와서 20,20,20,20. 이렇 게 주고 나가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마지막 수업 때 그 얘길 하려고 그랬는 데 잊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런 학생도 있었다. 내 생각엔 이런 식의 평점 같은 것에 난 참여하기 싫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해석 을 잘못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난 그것도 굉장히 재밌었다. 예컨대 그런 학생? 그 정도면 되나? 지금도 기억나는 학생들은 많죠. 그렇긴 한데 하여간 제일 최근에 경험했던 독특한 사연은 방금 말한 학생이었어요.


오인영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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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오인영 교수님은 학교에서 <과학 혁명과 근 대사회의 형성>, <유렵 지성사>, <영국사> 등을 강 의하셨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는 힘들기로 유명합니다. 일단 강의와 관련하여 읽어야 할 책들이 일주일에 한권 정도 로 많은 편입니다. 나아가 단순히 책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이해하 는 것을 넘어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가지고 학생 자신의 고민들과 견주어 사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 교수님의 수업은 단순히 지식을 ‘ 전수’하는 강의라기보다는 스스로 사유하도록 ‘유도’하고 ‘독려’하는 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도 생활도서관 운영위원들은 ‘자기 삶의 주인공’으 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사유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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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활도서관을 아시나요?

생활도서관(이하 생도) : 교수님은 혹시 저희가 먼저 인터뷰를 요청하기 전 에 생활도서관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요? 오인영(이하 오) : 아 대학원 다니는 ○○○ 학생이라고, 2007년에 한 번 정 도 수업을 들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 학생 덕분에 생도가 있는 걸 처음 알게 된 거 같아요. 2007년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사실 시점은 자신이 없어요. 하여간 있는 건 그 때부터 알고 있었고. 그 밖에는 학생들이 자치적 으로 운영한다는 것 정도? 어떤 사업을 하는지 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어요. 생도 : 사실 ○○○학생이 사학과가 아니어도 교수님 수업을 꼭 들어보 라 추천을 해줘서 생활도서관 친구들이 교수님 수업을 많이 들었거든요. 오 : 밥을 한번 사라고 해야겠네요.(웃음) 솔직히 학생들이 제 수업을 많이 들으면 힘들죠. 채점해야할 양도 많고 하니까요. 제 생각엔 한 20명 정도 듣는 수업이 정상적인 것 같아요. 그 학생이 가지고 있는 집중적인 문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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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식을 집중적으로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이 좋을 거 같은데, 실제 수업은 한 80명 안짝일 때도 있고. 전공하니까 그건 또 좋더라고요. 전공 수업을 할 때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타이트하게 할 수 있으니까. 생도 : 갈수록 사람들이 사라지던데 (웃음) 오 : 그게 정상이죠. 왜냐하면 과일도, 먹을수록 줄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가 처음에 조금 먹어보고 이 맛이 아닌데 그러면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은 것 이고. 끝까지 먹는 사람은 점차 줄어드는 거죠.

2. 교수님의 대학생활 - 대학 그리고 운동?

제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좌파는 다 왼쪽이었어요. 학생회관에 있었고. 생도 : 선생님 학부시절에는 생도 같은 공간이 있었나요? 오 : 우리 학생 때에는 문과대 건물(서관) 지하에, 녹두공간이라는 이름의 이런 공간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근데 과나 도서관하고는 잘 안 친하게 지내 서. 전 주로 학생회관에서 지냈어요. 생도관의 전신일지는 모르지만 하여 간 그 시절에도 문과대 건물 안에 학생들이 도서관처럼 운영하는 공간이 있었던 거 같아요. 사회과학계열이었던 것 같은데, 책도 좀 있었고요. 그 족 보를 잘 아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네요. 추정컨대 있었던 것 같아요. 생도 : 그러면 교수님은 학관에서 무슨 활동을 하셨나요? 동아리? 오 : 제가 호박회라는 동아리였는데 그 동아리가 83,4년쯤 이름이 바뀌었 죠. 지금은 호박회라는 동아리가 또 따로 생긴 것 같더라고요 학교에.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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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다닐 때에는, 좌파는 다 왼쪽이었어요. 학생회관에 있었고. 공부 열 심히 해서 출세하려고 하는 우파들은 법대를 포함해서, 오른쪽으로 갔고요 (웃음). 저는 주로 학교에서 좌 쪽에 있었죠. 그렇다고 해서 좌파는 아니지 만, 하여간 그 시절에는 학생회관이 생활 근거지였으니까요. 생도 : 그렇다면 세미나도 많이 하셨을 텐데, 주로 어떤 커리큘럼으로 공 부하셨어요?

호박회라고 하는 서클은 분류하자면 인문학 서클이었어요. 오 : 호박회라고 하는 서클은 분류하자면 인문학 서클이었어요. 사실 80년 대 중후반에 나왔던 많은 서클들은 사회과학 서클들이었죠. 그러니까 사회 과학 서클들이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분석하는 데 집중을 했다면, 호박회라는 인문학 서클은 주로 다양한 영역의 책들을 가지고 토론을 했어요. 시도 하고, 소설도 하고, 철학서도 하고. 이를테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도 하고, 최인훈의 『광장』도 하고, 『소외론』도 하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호박회는 주로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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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

서 토론하는 서클이었어요. 독서 토론을 하는 와

문과와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

중에 아마도 누군가가, 우리 동기 중에 누군가가

사과정을 마쳤다. 1971년 『현대문 학』에 「박두진 시론」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고, 주요 저서로는 『문 학과 문학사상』, 『비평의 원리』등 이 있다. 현재 고려대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가 강의했던 <현대 비평론> 수업은 많은 학생들이 꼭 듣고 싶어 하는 수업 중 하나였다.

문화, 독서, 토론, 이런 영역보다는 실천, 운동 이 런 게 더 강조돼야 하는 시절이 아닌가 하고 생각 해서 다른 동아리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한 거 같아요. 그 바뀌게 된 과정은 제가 군대 간 시절이 어서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서클 생활을 했었다 그러면 그냥 호박회를 했다고 하죠. 호박회가 한

* 1945년 전라남도 목포 출생. 고 65학번 선배들이 만든 서클이거든요. 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

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 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비

생도 : 정말 오래 됐네요!

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주요 저서 로는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 현된 불행』 가 있다. 현재 한국번 역비평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 고 있다.

오 : 네, 국문과에 김인환* 선생. 불문과에 황현 산* 선생 같은 선생님도 있었고. 그중에는 지금 공 부하는 학자인 선생님도 많고, 고려대에 자리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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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은 선생님들도 많아요. 하여간 그 선배들이 우리를 기죽이려고 했던 소리 인지는 모르지만, 65년도 서클을 만들 때에는 단과대 수석들이 모여서 만 든 서클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사실 자격이 되지 않으므로 많이 배워야한 다, 이렇게 늘 세뇌했던 거 같아요.(웃음) 제가 81학번으로 입학할 때는 76학번이 복학해서 4학년이었고, 79들이, 그러니까 3학년들이 이제 서클 실에서 주로 신입생을 받았었죠. 양운덕 선 생님이 79학번 이셨죠.

인문학이라는 걸 생물학적으로 의인화한다면 양운덕이 아닐까요? 생도 : 양운덕* 선생님이 『피노키오 철학』 쓰신 분 이시죠? 오 : 네. 『피노키오 철학』 쓰시고, 『보르헤스의 지팡 이』 쓰시고, 『문학과 철학의 향연』도 쓰시고. 제가 아는 한 고려대학교에서 가장 인문주의자다운 인문 주의자세요. 인문학이라는 걸 생물학적으로 의인화

* 1960년 경상북도 상주 출생. 고

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고 철학 과 대학원에서 헤겔을 중심으로 사 회철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연구 실 ‘필로소피아’에서 일반인을 대 상으로 다양한 철학과 문학의 고 전들을 폭넓고 깊이 있게 소화하 기 위한 모임과 강의를 하고 있다.

한다면 양운덕이 아닐까요? (웃음) 제가 아는 사람, 김인환, 황현산, 최동 욱 이런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나 피타고라스처럼 접해보지 않은, 생활의 지 평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죠. 제가 대학 들어올 때 이미 그 사람들은 강의를 하고 계셨으니까. 그런데 양운덕 선생님은 제가 지켜본 분이었으니까. 우 리를 가르치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교사를 가르치는 교사 같은 분이세 요. 지금도 나이는 1년 위지만 ‘존경’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분이에요. 정 말 학자로서 한국 사회를, 한국인이 도달할 수 있는 문명의 높이를 체화하 려고 하는, 놀라운 정신의 소유자시죠. 인품도 있으시고. 책도 잘 쓰시고.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존경할 만한 분에요. 이런 양운덕 선생님이 당시 서 클에 계셨었어요. 그래서 호박회 활동을 주로 했었죠. 생도 : 사학과 활동은 따로 안하셨나요? 오 : 사학과에서는 그때 학회가 있었는데 사실 전 하나 하기도 바빴죠. 유능 한 사람은 학교 서클도 하고 연합 서클도 하고 그랬었는데, 전 그러진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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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사실 그게 가치가 있는 지도 모르겠어요. 1학년 때는 다른 학교랑 같 이 하는 연합서클도 하고 그랬었는데 지나고 나니까 이름이 없어요(웃음). 서로 이름도 잘 모르고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도 모르는 거죠. 그냥 모여서 공부만 하고, 연락만 쪽지로 가끔 하고, 언제 어디로 모여라, 이렇게(웃음). 생도 : 혹시 지하조직? 오 : 네, 그랬나 봐요. 그래서 저는 지하생활자가 되기 싫어서(웃음). 그건 일학년 때까지만 하고, 이학년 때부터는 안했어요. 저는 지상에 사는 걸 좋 아하는 사람인데, 이게 너무 지하라서(웃음). 한번은 연대 집회가 있었는데, 한 선배가 자기만 따라오라고 했었어요. 아 주 신화적인 선배였죠. 집회를 나가면, “튀어! XX들 오니까, 튀어!“가 제일 빨리 나오는 말이었어요. 중요한 건 이 선배는 ”튀어!“라는 말을 하고 없어 지는 게 아니라 사라진 다음에 튀라는 말이 나와요(웃음). 그러니깐 한 번 도 잡혀간 적이 없었던 거죠, 이 사람은. 그래서 그 사람 별명이 ”튀어!“ 였 죠. 튀라는 말을 듣고 뒤돌아보면 없어졌어, 벌써.(웃음)

하여간 우리 시절의 운동이라는 것은, 한국사회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하여간 우리 시절의 운동이라는 것은, 한국사회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누구나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혹은 공동체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제 가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데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 러니까 아주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나만 잘살자가 아니라 너도 잘살고 나 도 잘살자는 거죠. 다시 얘기하면, 부자로 살 순 있으나 해치는 부자는 되 지 말자는 게 최저라인이라면 그 위에 높은 라인은, 배부르게 사는 삶과는 다른 삶이 있다는 거였어요. 아마도 “사회의 금기는 반드시 깨진다.” 그런 걸 대학생활하면서 배웠던 거 같아요. 사회의 금기는 반드시 깨진다. 그러 니까 ‘전두환이 쳐놓은, 한국사회가 쳐놓은 금기. 분단이라는 금기, 반미 라는 금기, 혹은 자본주의라는 금기, 그런 금기어들이 금기어가 아니라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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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분히 논의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 지고 대학생활을 했던 거.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뜻은 아니고, 그런 생각 을 했던 거죠.

‘직접 싸우는 건 아니지만 싸우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생각의 자유를 줄 수 있는 공부를 해야 되겠다’ 또 그 시절에는 대학에서 운동하다가 노동현장으로 가는 친구들도 많았고, 그래서 그런 친구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강한 부채의식이 있었어요. 그 친 구들이 감옥을 가거나 혹은 그 친구들이 훨씬 어려운 생활을 할 때 공부를 한 다는 것이, 다만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직접 싸우는 건 아니지만 싸우 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생각의 자유를 줄 수 있는 공부를 해야 되겠다’, 뭐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시대와 연관 지어서 이야기하자면, ‘80년대’라고 하는 시절이 있었던 거 죠. ‘80년대’라는 시대를 살았던 20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대학을 왔던 안 왔던, 현장에 있던 안 있던, 시대가 주는 중압감이 되게 무거웠던 시절이었 거든요. 그래서 연애를 잘 못한 거 같아요. 그게 제일 아쉬워요(웃음). 시대 가 주는 중압감이 너무 무거워서 연애를 잘 못했던 것 때문에 내가 수업 때 학생들에게 연애를 많이 하라고 강조하는 게 아닌가(웃음).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에게 결여 돼 있는 걸 꿈꾸거든요. 제가 이제 육체적으로 노쇠하니 까 연애할 수 없으므로, 윤리적으로 육체적으로 허락하지 않으므로, 가능 한 친구들에게 훨씬 많이 강조하는 게 아닌가(웃음). 그 시절에는 미팅이라는 걸 했었는데요. 한 번이었나 두 번이었나. 두 번! 다시 돌아가면 열심히 하고 싶죠. 주말에 한 번씩(웃음). 틀림없는 사실은, 그래도 결혼은 우리 집사람과 결혼했을 겁니다. 이 얘긴 꼭 넣어줘야 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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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론과 실천에 관하여

생도 : 시대가 주는 중압감이 있었고, 학교 내 학생들도 부채 의식을 가지 고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반대로, 편견일 수 도 있지만 대학원을 간 다는 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서 바로 졸업을 하거나 학교를 다니던 도중에 노동현장으로 가는 게 어떻 게 보면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여겨졌을 거 같은데 교수님은 어떤 생각 을 가지고 계셨나요.

“현장에서 싸우는 실천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어떤 게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을 다투는 싸움에서도 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오 : 그 당시 첫 번째 마음은, 어린마음에 현실 속에 들어가서 나를 지킬 자 신은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현실 속에 들어가서 치열하게 싸우기에는 소 심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었고요. 그러면 현실과 완전히 벗어나는 건 아니 지만, 반쯤은 현실에 걸치면서도 현실을 조망해서,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주는 중압감에서 반쯤은 자유롭고, 그 현실이 주는 중압감이라는 억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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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걸 밝혀보면 좋겠다, 라는 생 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시절에 읽었던

* Louis Althuser, 1918~1990, 마 르크스 사상에 구조주의적 해석을

책 중에 루이 알튀세르*라고 하는 프랑스의 마르

제시,「과학적 마르크스주의」로 불

크스주의자이자 교수인 사람이, 꼭 그 말뜻은 아니

토대를 다진 창시자이다. 그는 ‘

었으나 제가 스스로 사유화해서 해석하기를, ‘이데 올로기적 실천’이란 말을 했었어요. “현장에서 싸 우는 실천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어떤 게 옳고 그름

리는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 한 그람시,루카치 등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고 과학으 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했다.

이라고 하는 것을 다투는 싸움에서도지지 않는 것 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의 자유주의는 반공이라고 하는 것 이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고 내세우는 게 당시 현실의 지배 담론이었다면, 반공이 자유주의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밝혀내는 싸움도 중요하고, 반공이 어떻게 자유주의와 등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유주의 중에서도, 과일 이 있으면 사과와 포도는 과일이라고 하는 자유주의에 있는 하나의 유형이 거나 종류이지, 자유주의 일반이 반공주의라는 것으로 등치될 수 있겠는 가. 제휴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주장하는 싸움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 싸움의 승부는 오래가고, 오래가면 결국은 누가 오래 더 버티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는 윤리적인 지식인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대학원을 다니면서 느꼈던 것 중에 하

나는 뭐 계속 자기합리화를 한다면,(웃음) 그람시* 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자면, 정말로 중요 한 싸움은 단기전으로서 싸우는 그런 전투가 아니 라 지구전이 될 것이고, 참호전이 될 것이다. 그렇 게 되면 이 싸움의 승부는 오래가고, 오래가면 결 국은 누가 오래 더 버티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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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Gramsci, 1891~1937,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통일을 주 장했으며 상부구조의 이론을 발전 시키고 자본주의가 발달한 시민사 회에서 사회혁명이 일어나는 조건 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성의 논 리와 그 실천적 기구에 대해 참신 한 이론을 전개했다.

까, 그런 점에서는 뭐 다들 아시는 것처럼 윤리적 인 지식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윤리적인 지식인이 되면 이론 적인 싸움, 헤게모니(Hegemony)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을 때 이기 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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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믿는 사람이 훨씬 많아지는 것도 싸워서 이기는 싸움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박근혜가 얘기하는 경제 민주화라는 담 론과 혹은 그 다른, 이를테면 뭐 진보신당이나 노동자 출신의 후보가 얘기 하는 경제 민주화라는 담론은 말은 똑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일 수 있 으니까요. 근데 말하자면, 사실 유력한 후보가 내세우는 경제민주화라고 하는 말만이 진짜 경제민주화의 속 알갱이인 것처럼 생각되고 다른 것은 이상이거나 터무니없거나 현실과 괴리되거나 먼 미래의 일처럼 막 이야기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그렇지 않다, 그것도 현실적인 것이다, 이런 말 을 할 수 있는 게 또 힘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대학원 졸업할 때 는 생각했던 게 싸우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근데 자기 를 희생해서 싸우는 방법은 이게 최저, 그러니까 마지막 수단일 것이라고 생각했죠. 지금도 결사항전, 이런 거 잘 못해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살기를 각오하고 싸워야죠. 잘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지 죽으려고 싸우 는 건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그냥 뭐 이렇게 자기 소모적인 싸움만 있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만약 정의와 불의라는 게 있다면, 정의가 불의를 이 기는 게, 꼭 정의가 살신성인해서 싸워서 이기는 방법밖에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러니까 정의를 믿는 사람이 훨씬 많아지는 것도 싸워서 이기는 싸움 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개인적인 성향이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이고, 소심한 사람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영역이 공부가 아닐까 했던 것이죠. 그래서 정리하면 대학원에 가게 된 것은, 첫 번째는 개인적인 성향이 소심 하고 겁이 많아서이고, 정당화하자면 싸움의 전선은 여러 개가 있을 테니 까 제일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소심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공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죠. 공부를 하다 보니 싸움이라고 하 는 것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혹은 여러 가지 종류의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론적인 싸움은 긴 싸움이 될 것이므로,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싸움과 이 론적인 싸움 사이에 원래부터 우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물론 실 천이 이론보다 중요하지만, 이론이 없는 실천은 좋은 실천이 되거나 올바 른 실천이 되거나 힘 있는 실천이 되기는 어렵다, 그랬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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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역사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 있었죠. 생도 : 그러면 공부하실 때, 전공을 여러 가지 선택할 수도 있잖아요, 근데 그 중에서 사학으로 무기를 정하신 거 같은 데, 이 무기가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으신지? 오 : 개인적인 동기, 시대적인 동기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처 음부터 어느 대학을 갈지는 모르지만 과는 역사학과를 가고 싶어 했어요. 역사학과를 가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마음에는, 역사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 있었죠. 사랑, 배신, 연애, 불륜, 전쟁, 평화, 패배. 인간사회 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역사 속에 다 들어 있더라고요. 더 놀라운 건 역사 밖에 있는 초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이라고 하는 영원성이라는 것마저 역사 속에 있어요. 대학에서 공부를 해보니까. 가령 서양 중세 천년동안 사 람들을 지배한 건 영원이라고 하는, 역사 밖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한, 역사 라는 시간과 역사라는 세계라는 현실 공간 밖에 초월적인 구원을 꿈꾸는 것도 역사와 절연된 것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세계 안에서의 초 월과 영원이지. 그러니까 그 때 어린생각으로는 영원이라고 하는 것도 역 사성에 낙인 찍혀있구나 싶었어요. 신학 하는 사람은 반대로 말할 수도 있 겠지만. 그래서 역사 속에 모든 게 다 들어있으므로, 역사가 제일 쉬울 것 이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니까(웃음) 이렇게 첫째로는 내가 원 하는 것을, 아무거나 원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그 관점에 서 역사가 가장 폭넓은 선택지를 주는 것 같았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로운 사회를 토대로 해서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자는 게 마르크스의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 두 번째는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 쓸 때에는 칼 마르크스의 제 1차 인터 내셔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라고 하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썼었어요. 그 후에 박사학위 논문을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쓰려고 했었는데, 석사학위 딱 쓰고 나니까 소련이 망했어요(웃음). 그래서 생각 해 봤더니 망한 나라 의 원인을 분석하기 보다는 흥한 나라의 원인을 분석하는 게 취업에 유리 할 것 같더라고(웃음). 사회주의 공부를 나름대로 짧게 한 2년 반 정도 해보 니까 마르크스의 아이디어에는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체주의나 혹은 국가주의나 이런 요소도 들어있지만,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회의 가장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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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규정은 전체의 평등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저마다의 개인의 자유가 성립된 토대 위에서 사회구성원 전체의 자유 로운 연합. 그게 공산주의 사회더라고요. 그러니까 공산주의라는 말을 쓰 지 않더라도, 풀어 말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로운 사회를 토대로 해서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자는 게 마르크스의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마르크스라고 하는 사람은 부르주아 사회를 부정한 게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를 지양한 사람이더군요. 다들 알겠지만 지양이란, 100% 부 정하는 게 아니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고도화되고 가장 선진화된 좋은 점을 받아들여서 더 발전시키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회주의 속에 들 어있는 자유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굉장히 궁금해졌죠. 그리고 사회 주의라고 하는 것의 본령이 평등보다는 개개인의 사회적 자유라고 하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고요.

세금을 한 푼도 안내고 혁명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절세하면서 사회를 개혁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 변한거 하고도 비슷하게 맞물려요. 아까 얘기했던 시대변화도 있었지만, 박사과정에서는 자유주의를 공부했

*

어요. 사학과에서. 그때의 자유주의는 뉴리버럴리즘(newliberalism)이라 Milton Friedman, 1912~2006,

자유방임주의와 시장제도를 통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주장한 미국 의 경제학자. 1976년 노벨 경제학 상을 받았다.

*

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 국 경제학자. 화폐적 경기론과 중

고 해서, 오늘날 프리드먼*이나 혹은 하이에크* 나 홉하우스*라고 하는 사람과 같이 19세기말 20 세기 초에 영국이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는 과정에 서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들을 말해요. 흔히 사 회적 자유주의자, 소셜리버럴리즘(socialliberalism)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흐름 속에서 나온 사람

립적 화폐론을 전개하였고, 신자

들이고요. 영국식으로 얘기하면 자유주의자에 좌

유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계획경제

파,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우경화돼서 사회민주주

에 반대하였다. 1974년 노벨 경제 학상을 수상하였다.

*

John Atkinson Hobson, 1858

~ 1940, 영국의 사회경제학자. 저 서 《실업의 경제학》으로 소득분배 의 불균형이 과잉저축과 과소소비 를 초래하고, 그것이 경기후퇴와 실업을 초래한다고 하여 제국주의 와 경기변동론에 관하여 이론적으 로 공헌하였다.

의가 나왔다면, 자유주의가 좌경화되어서 사회적 자유주의가 된 것이지. 그러니까 사회적 자유주의 자와 사회민주주의자는 많은 부분에서 내용적으로 겹치게 되는데, 기본적인 국유화라든지, 개인의 기 본적인 자유가 경제적 평등을 토대로 하지 않으면 형식적 자유로밖에 그칠 수밖에 없다든지 하는 것 들이 그런 내용들이죠. 그래서 박사과정에서는 소


열한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위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것을 공부했고 그것은 아마도 다르게 얘기하면 내 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세금을 한 푼도 안내고 혁명을 하고 싶은 마 음에서, 결혼하고 사회인이 되면서 절세하면서 사회를 개혁하고 싶은 사람 이 되고 싶다 이렇게 변한거 하고도 비슷하게 맞물려요.

근본적인 변화를 할 수 있는 세대가 자라날 때까지 점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쪽으로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대학원 과정이야 뭐. 술 많이 먹고, 남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혁명을 하기 위해서 하여간, 어린 마음으로는, 한국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막 생 각하려고 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꿈을 막 꾸고 있는데, 보이는 건 빨 간 십자가만 보이더라고요.(웃음) 이를테면, 어린 마음으로, 사회주의가 아 니어도 한국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 오려면 모든 기득권의 표상이 교 회는 아니지만, 내 어린 마음엔 그 네온사인의 붉은 십자가가 한국사회의 기득권을 표상하는 것들이었죠. 그 붉은 십자가를 전부다 순교자로 만들면 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의도하지 않은 희생 같은 게 생겨날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미필적 고의 에 의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마 실존적으로는 그때 서울 시내 켜져 있는 빨간 빛을 보고, 근본적인 변화를 할 수 있는 세 대가 자라날 때까지 점진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쪽으로 노력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죠. 이렇게 저렇게 돌려 말해도 사실은 성격적인 요인이 커요. 겁이 많고 소심하니까요. 음, 대학원 끝날 때쯤에는 실존적으 로는 그냥 우리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그렇지 만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시기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에 변화도 있었고, 지적 관심으로는 평등이라고 하는 문제 에서 개개인의 자유라는 것에 더 강조점을 찍으면서 박사과정 마칠 때까지 자유주의라고 하는 문제를 고민했었던 것 같아요. 생도: 아까 그런 얘기 하셨잖아요. 현실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탐구해보고 싶으셔서 대학원에 가셨다고. 그런데 대선과정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은 ‘ 누군가는 이론을 만들지만 사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볼 여유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앞서 말씀 하신 경제 민 주화를 다시 예로 들면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경제 민주화’의 뜻이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사실 경제 민주화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들한테는 제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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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거 같거든요.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언급 했느냐, 안했느냐가 중 요하지,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했느냐가 그렇게 중요하게 와 닿지 않는 것 같아요. 박근혜 후보 같은 경우, 대선과정에서 김종인 씨를 영입을 했잖아 요. 사람들은 김종인 씨를 영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크게 와 닿는 것 같 더라고요.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물론 이론도 중요하지만, 이론이 정말로 어떤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그 런 고민들이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하지만 이론도 실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오 : 이론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짝을 이루는 단어를 찾으면 실천이란 말 이 있을 수 있겠죠. 이론이 실천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제일 중요한 건 실천이죠. 하지만 이론도 실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이론이라는 말을 조금만 더 범주를 키워서 추상화하 면 지식이라는 말로 바뀔 수 있을 거고, 지식이라는 말을 조금 더 키우면 앎 이라고 하는 말로 바꿀 수 있을 테고, 앎이라고 하는 말을 바꾸면, 제가 좋 아하는 표현으로 생각이라고 하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생각만으로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거지요. 이를테면 내가 담배를 많이 피는 헤 비 스모커인데, 담배를 끊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담배가 해롭다는 것도 알 지만, 안다고 해서 담배를 끊지는 못하죠. 여기엔 습관이라는 게 붙어있고, 또 중독이라는 게 현상으로 따라다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 임없이 ‘아, 담배를 피는 게 해롭구나, 이렇게 해서 내가 중독되었구나.’라 고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주는 것도 중요한 것은 틀림없어요. 그 러면 좀 덜 피게 되고 적게 피게 되고.

사실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인데, 모든 갈대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는 건 아니라는 게 문제라는 거죠.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하면, 생각이란 말을 더 잘 설명하면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규정은 개인적으로 파스칼이 말한, ‘생각하는 갈대’ 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갈대라고 하는 물질적 육체성이 보여주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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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약함, 환경에 대한 취약함. 그런 갈대와 같은 존재인 인간이지만, 다른 종 들과 달리 350만년에 걸쳐서 자연적 진화의 과정에서 문명적 진화라는 걸 새롭게 만들어냈다라고 하는 그 힘은 ‘생각’에서 나온 게 틀림없어요. 질 문에 대한 대답을 하자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출발이 제 생각에 전제이고, 현실이 가지고 있는 모순은, 생각하는 갈대로 서의 인간이라는 전제를 부인하는 것이 실천에 취약하고 현실에 대한 분석 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닌가가 맹점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 대인데, 모든 갈대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는 건 아니라는 게 문제라는 거죠. 그러니까 생각의 힘이 실천보다 약하다기 보다는, 우리 모 두에게는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자기정체성이 인간의 본질인데, 놀랍게도 우리사회는 갈대라면, 누구나 다 있는,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쓸 수 있는 여 유가 부족한 거죠. 그 여유는 일용직 근로자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생활의 공분을 메꾸기 위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노동에 투여하기 때문에 없을 수도 있고, 혹은 일시적 쾌락에 몸을 던져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생각하는 힘을 줄 것인가 아닐까요. 여하튼 우리사회의 문제점은 모든 갈대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지, 생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힘이 실천 이라는 힘보다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생각하는 힘을 줄 것인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생각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그래서 공약을 비교해 보거나 그 사람이 살아 온 내력을 본다면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살기 바빠서 혹은 하루하루 일상에 치여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쇼킹한 거 를 말해야 되니까 눈에 띄는 이슈를 말하게 되고, 그것이 구호로 집약되고, 그 구호를 누가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내놓느냐에 따라서 눈길을 끄는 일시적인 현혹이 사람들을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싶어요.

생각의 힘은 그대로 본원적인 힘이 있으나, 그 생각하는 힘을 모든 사람이 끌어낼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는 데에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제 생각에는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독립운동 가 신채호 선생을 예로 든다면, 조선독립을 위해서 무장투쟁을 하는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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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선생이 글을 쓰는 것이나 실천의 무게는 똑같다고 생각해요. 신채호 선생이 글을 썼다고 해서 그건 이론이고 그것은 무장투쟁보다 값이 덜하 다 이렇게 말하긴 좀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중요한 건 생각의 힘은 그 대로 본원적인 힘이 있으나, 그 생각하는 힘을 모든 사람이 다 누리고 개 발하고 끌어낼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는 데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있 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하여간,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포괄적으로 생각을 하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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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학과 인문학?

생도 : 근데 이론과 실천이라는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힘에 대해서도 잘 모를뿐더러 “그거 공부해서 어디다 써 먹을래.” 라든지, 아니면 약간 사 치스러운 거 아니냐고 많이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런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엄청 냉소적인 거 같기도 하고. 분위기가. 근데 선생님이 공부하셨 을 때도 비슷한 문제를 겪으셨을 거 같은데, 이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 부를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만으로 현실사회에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게 첫 번째 고민이죠. 오 : 인문학을 공부하겠다, 혹은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때 제일 커 다랗게 대두되는 게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떼어내고 내가 인문학을 공 부하는 것만으로 현실사회에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게 첫 번째 고민이죠. 이를테면 경제학이나 법학은 우리사회에 어디선가 쓸모나 쓸데가 있어서 취업이 가능하지만, 인문학, 학부과정이던 석사박사과정을 하던 간에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효용이나 유용성이라고 하는 게 우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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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에선 쓸모나 쓸데가 거의 없는데 그걸 하니 지적 사치이거나 허영이거나 혹은 유한계층의 지적 놀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혹은 인 문학이라는 걸 그것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대단히 본원적이고 근본 적으로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내 생계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갈등하게 되기도 하구요.

첫 번째, 원래 인문학이란 쓸데없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인문학의 효용성이라는 것으로 문제를 조금 키워서 말한다면, 첫 번째, 원래 인문학이란 쓸데없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쓸 데도 없고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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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돌아가신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의 말을 빌 1942~1990. 서울대학교 불문

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 불문 과를 졸업하였다. 실존주의 사상 의 영향을 받아 실존적 정신분석 방법에 기초를 둔 비평을 여러 문 예지나 잡지에 발표했다. 한국 문 학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주요 저서에는 『존재와 언어』, 『한국문 학사』 등이 있다.

려 김현 선생님이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쓸모에 대 해서 이야기 한 걸 인문학이라는 말로 문학의 자리 를 대신해서 말한다면,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돈 이 29만원 밖에 없다고 하는 전직 대통령을 처단하 는 총이 될 수도 없고, 배 굶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를 배부르게 해줄 수도 없고, 또 송전탑에서 칼바 람을 맞아가며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따듯한 한 끼 의 밥이나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어떤 비방이

되기도 어렵지요. 더군다나 인문학은 정치적으로 출세하거나 경제적으로 돈을 버는 데에도 무용하고요. 누가 여러분보고 역사학 과목에서 A+맞았 다고 하면 기업에서 안 뽑으려고 그러죠. “어우~ 역사학에서 A+받아서 너 무너무 훌륭해.”, “우리 이런 역사적으로 통찰력 있는 사람이 좋아요.” 가 아니라 “이거 왜 들었어?”, “자네 좀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하지. 취업하 는 데에도 불리하죠. 오히려.

인문학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염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으로 만드는 힘이지요. 그런데 인문학은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데,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데, 사 회적으로 진출하는 데에 쓸모도 없고 쓸데도 없지만, 바로 그 쓸모없고 쓸 데없다고 하는 것을 써먹는 것이지요. 그걸 어떻게 써먹나 비유를 들자면, 인문학은 여러분이 아름다운 한편의 시를 읽고 아름다운 음악한곡을 듣고 아주 아름다운 그림한 점을 보았을 때, “아, 이렇게 아름다운 것, 이렇게 좋 은 것, 이렇게 훌륭한 것을 아름답다고 훌륭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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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이 사회에는 있구나.” 라고 하는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줄 수 있 지요. 지구에서 1달러가 있으면 하루를 굶지 않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문명이라는 것을 알고 그 문명 앞에서 내가 인간으로서 부끄러 움을 느끼게 하는 힘을 환기시켜주지요. 그러니까 인문학이란, 기아에 허 덕이는 어린아이를 구할 순 없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문명사회에 기 아에 허덕이는 아이가 아직도 있다는 사건을, 그런 현상을 부끄러운 현상 으로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는 거지요. 다시 얘기하면 인문학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염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으로 만드는 힘이지요.

인문학이 가르쳐주는 것은, 내가 순간에 현실적인 삶을 위해서 유예시킨 질문은 반드시 되돌아와요. 이를테면, 파이어 아벤트*라고 하는 유명한 과학 자가 이런 이야길 했어요. 과학적 합리성으로 똘 똘 뭉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냉정하고 계산적으 로 대해서 싸움을 하지만,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것 을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길에서 만 나면 서로 비켜주고, 모르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고. 어떤 삶이 더 훌륭한 삶인가, 어떤 삶이 더

* Paul Feyerabend, 1924~1994,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과학철

학자이다. UC 버클리에서 철학 교 수를 역임하며 현대 과학철학에 크 게 공헌했다. 과학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방법론을 거부하였 으며, 과학적 지식을 다른 종류의 지식과 구분할 수 있는 어떤 특성 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가치 있는 삶인가, 바람직한 삶인지 물을 때, 우리 는 이해타산에 밝고 과학적 합리성에 근접한 삶이 문명적 삶에 근접한 삶 이거나 편리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게 꼭 바람직한 삶이라고는 답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문학은 쓸모도 쓸데도, 치부에 도움이 되 지도 않지만, 자기 삶을 두텁게 만드는 데에는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주 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인문학은 질문을 하는 학문이죠. 철학과 문학의 고전(古典)에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이 있다고. 인문학이 주는 그 질 문을 유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왜 사는가?”, “내가 소설을 왜 읽는가?”, “내가 이 시를 왜 읽지?” “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어!” 세월이 지 나면 시간의 침식을 받아서 아름다운 소설도 잊어버리고 감동받았던 영화 도 잊어버리고 자기가 대학시절에 혹은 학창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하고도 소원해질 수 있어요. 모든 것은 시간의 침식을 받아서 그 때 중요했 던 질문들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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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질문하는 힘이지요. 그 질문하는 힘은 답이 아니기 때문이 쓸모와 쓸데가 없어요. 하지만 인문학이 가르쳐주는 것은, 내가 순간에 현실적인 삶을 위해서 유 예시킨 질문은 반드시 되돌아와요. 유예된 질문은 언젠가 다시 되돌아와서 자기에게 또 질문을 한다고. 그러니까, 스무 살 때 던진 인문학적 질문이 현 실적 삶 앞에 치여서 현실적 삶을 선택했다면 그 치여서 덮어둔 인문학적 질문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숨었다가 30이 되어서 나올 수도 있고 40이 되 어서 나올 수도 있고 죽기 전에 나올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인문학은 근원 적인 질문을 던지는 질문하는 힘이지요. 그 질문하는 힘은 답이 아니기 때 문이 쓸모와 쓸데가 없어요. 절대로 답을 주진 않는다고요. 그리고 답을 찾 는다고 하는 것도 탐 크루즈의 미션임파서블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딱 맞 는 매뉴얼의 정답은 없어요. 성경에도 없고 불경에도 없고 코란에도 없죠. 답은 만들어 가야되는 거에요.

인문학이 주는 힘은 내가 꿈꾸는 이상이 말 그대로 이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거죠. 인문학이 주는 장점이 있다면 내가 꿈꾸는 미래는 내가 예측하는 데서 오 는 게 아니라 내가 꿈꾸는 미래를 내가 만들어갈 때 내가 가장 잘 미래를 예 측하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인문학이 주는 힘은 내가 꿈꾸는 이상이 말 그 대로 이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거죠. 그게 이상이란 걸 알아요. 하지만 그 이상이라고 하는 것에 인도받지 않는 현실이란 비루해질 수 있다는 것 을 환기시켜주는 것뿐이지요. 그런 인문학은 오늘날과 같은 시장전체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현실적 가치와 경제적 유용성과 이해 타산적 합리성이라 고 하는 측면에서는 쓸모없고 쓸데가 없어요.

결론은, 인문학은 쓸모없는 것, 쓸데없는 것, 바로 그것을 써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거에요. 그래서 “인문학을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라는 세속적인 지혜가 인문 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울 때에 인문학을 하니?” 라는 우려의 말로 나 올 수도 있고, 그런 세속적인 현실에서도 인문학을 하겠다고 한다면 “먹고 살만한가보다”라고 하는 시기어린 비아냥으로 나올 수도 있고요. “살만한 모양이네, 인문학을 다 하다니.” 라고 해서 일종의 현실 위에 덧붙여 있는 메타학문처럼 말하지만, 결론은, 인문학은 쓸모없는 것, 쓸데없는 것,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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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로 그것을 써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거에요. 멋있게 얘기하면 무용지용, 용도 없음에 용도 있음 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말한 김에 하나를 더 비 유를 들면, 내가 길을 걸어갈 때 내가 확보할 수 있는 길은 한 1.5m의 폭만 있으면 그 안에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지요. 근데 1.5m의 길 빼놓고 나머 지 길은 내가 걸어가는 데 아무 필요 없다고 거기를 개발해서 높은 빌딩을 쌓거나 혹은 그거를 개발해서 관광지로 만들겠다고 1.5m의 길만 남겨놓 고 나머지 양 여백을 한 백 미터를 싹 파가지고 거기다가 고대 지하광장처 럼 지하광장 만들겠다고 파 놓아보라고. 그러면 내가 걸어가는 길은 1.5m 만 있으면 내가 걸어가는 길이지만 양 옆을 개발이란 이름으로, 쓸모없는 땅이란 이름으로 그걸 쓸모 있게 만들겠다는 이유로 그거를 길에서 분리시 켜서 떼어내면, 100m 위에 있는 길, 폭이 1.5m인 길을 용감하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무서워서 발 못 뗀다고요. 그 폭이 3m가 돼 도 무서울 거야 우리는.

인문학은 현실 속에서 다른 것과 붙어있는 1.5m의 길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인문학은 현실 속에서 다른 것과 붙어있는 1.5m의 길이겠지 요. 그게 별반 소용없다고 1.5m 인문학을 쓸모없다고 고립시키고 떼어내 버리면, 그래서 이를테면 인문학 과목이 필요 없다고 지방 어느 대학처럼 철학과 없애고 영문학 없애고 문학과 없애고, 그렇다면 아까 파이어 아벤 이 얘기한 것처럼 사회는 편리하고 좀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지는 모 르지만 그게 꼭 바람직한 사회가 되리라는 보장은 가져올 수 없는 것이지 요. 인문학은 무엇이 바람직한 사회인가 그 바람직한 사회에 도달하기 위 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환기시켜주는 힘 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전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영어 로 얘기하면 expert라고 하는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intellectual이라 고 하는 지식인의 영역일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직업적 전문가 시 대의 인문학은 축소되는 현실이 되지요. 그래서 인문학을 하면 먹고살 수 있다고 하는 장담을 주거나 희망을 내가 보여줄 수는 없으나, 인문학이 가 지고 있는 본원적인 힘은 여전히 중요하므로 전공을 하든 안하던 인문학 적 질문 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힘은 반드시 놓칠 수 없는 질문이 될 것입 니다. 먹고 산다는 보장은 없어요. 역사엔 원래 보장이 없지요(웃음). 역사 는 보험회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택을 했다는 거에 대해서 개런 티는 아무것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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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 사회와 대학 그리고 대학과 나

생도 : 대학이라는 공간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예를 들어 사회에서는 “인 문학을 왜 하냐?”라는 질문이 나와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사회가 됐잖아 요? 실용성, 유용성이 우선인 사회가 됐기 때문에. 그렇지만 적어도 대학 은 인문학을 왜 하냐고 했을 때, “이러 이러해서 한다.“라고 하면 인정받 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잖아요. 예 를 들어서 친구가 대학원을 가면 대학원 왜 가는지 누구도 잘 이해해주지 못하는 공간으로 바뀐 것 같거든요. 사회마찬가지로. 예전에는 대학을 수 식하는 가장 거창한 표현이 ‘인문학의 요람’, ‘진리의 상아탑’ 같은 것들이 었는데 지금의 대학들은 그런 비유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어느 대학 이든지 취업률을 우선시하고, 학생은 반쯤은 떠밀려 학점 챙기기에 바쁘 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대학이라는 게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과일을 먹어본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먹어본 건 사과나 포도나 배나 딸기와 같은 구체적 과일이지. 오 : 음, 질문이 너무 크네요(웃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되게 큰 질문인데.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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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에는 제가 답하기는 어렵구요. 대학 언저리에서 한 30년 살아본 사람이 느 끼는 대학, 그러니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지평에서 하는 말이라는 전제를 꼭 달고 한다면, 그래서 일반화의 오류 가능성이 늘 있다는 전제 하 에서 말한다면, 저는 학생들이 대문자로서의 인간이나, 또 대문자로서의 사회나 대문자로서의 대학에 대한 고민을 하는 거 보다, 소문자로서의 인 간이나 소문자로서의 사회나 소문자로서의 대학을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 다고 생각해요. 풀어서 얘기하면, 우리가 인간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질문이 너무 커서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사랑만 예를 들어도, 사랑이라고 하는 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구체성이라 고 하는 것이 핵심이므로, 사랑에 관한 theory, 사랑에 관한 이론은 있을 수 있으나, ‘사랑학’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어요. 학문적 엄격함을 확립 시킬 수 있는 논리적 정합성이 부족하니까요.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추 상적인 것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과 일을 먹어본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먹어본 건 사과나 포도나 배나 딸기와 같은 구체적 과일이지.

대학이라는 공간은 한 구체적 개체로서의 인간이, 정신적 성장을 돕는 지식과 전문적인 영역을 향해 나아가는, 실용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겹쳐서 공부하는 공간일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학이란, 고려대학교를 포함해서 한국의 대학은 이를테면 뭐 한해에 대학가는 학생들이 48 만 명 50 만 명 가까이 된다 그러면, 그 50 만 명이 느끼는 대학은 다 저마다의 대학일 수 있지요. 저마다의 대학. 그 래서 어떤 사람은 고려대학교를 왔는데 너무너무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어 떤 사람은 고려대학교 왔는데 이거밖에 못 왔다고 막 울면서 입학하는 사 람도 있고. 그래서 첫 번째 전제는 “대학 일반이 한국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답하기 보다는, 내가 그 질문을 받는다면 혹은 질문하는 여러분에게 다시 비겁하지만, 다시 되짚어 질문하는 게 더 답을 찾기 쉽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즉 ”나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나 는 이 대학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라는 질문 을 던져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대학이라는 공간은 한 구체적 개체로서의 인간이, 정신적 성장을 돕는 지식과 전문적인 영역을 향해 나아가는 실용 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겹쳐서 공부하는 공간이 대학일 것입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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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대학은 물론, 직업세계로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도 줘야 되 고,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끊임없이 자극할 수 있는 정신의 자양분도 제공 해야 되는 것이고, 그 정신의 자양분이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의 전당의 역 할도 해야 되는 것이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에게 취업에 도움을 줘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회에 진출하는 전문가를 배출하는 공간인 것도 사실인거 같아요.

진짜 중요한 것은, “고려대학교에 2학년 3학년 4학년인 나는, 지금, 여기서, 왜 대학생활을 하는가?”라는 질문이겠죠.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국사회에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 진다고 해서 대학 생활하는 나에게 답이 오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 답은 그냥 머릿속 답이지 않을까요. 진짜 중요한 것은, “고려대학교에 2학년 3 학년 4학년인 나는, 지금, 여기서, 왜 대학생활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명료한 답을 얻을 질문이겠죠. 사과를 먹어봐야 과일의 맛이 어떤 것인가 가 일반화 되는 것이지, 과일 맛을 볼 수 없는데, 과일이라는 맛이 무엇인 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머릿속에서는 과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읽은 답 만 나오는 거지요. 그렇게 말하면 저는, 고려대학교에서 제 수업을 듣는 학 생에게만 제가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게 이제 마지막 한계 에요. 일반화가 아니라.

대학생이 대표 학생 아니에요? 학생은 반드시 대학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근원적인 욕망의 뿌리로 내려가 보아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제 수업을 듣는 학생에게만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지요. 제 수 업 때만. 3시간 안에서만. 제가 어떤 과목에 강의를 하던 간에 꼭 학생들에 게 대학에서 한번쯤은 도전해 보라고, 한번쯤은 해보라고 하는 꼭 하나의 말은, “네가 역사의 위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네가 꼭 2040년에 한국을 이끌어갈 주도자가 안 될 수도 있어. 네가 꼭 세계적인 사상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 그게 훨씬 가능성이 높아, 사실은. 그래서 네가, 역사의 주인공 이거나, 역사의주체이거나, 한국사회의 동력이거나 혹은 세계문명을 이끌 어가는 인류의 선각자가 되진 못할 수도 있지만, 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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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다. 네 삶에, 스타일리스트가 될 수 있다. 최소한 네가 개인의 삶이 사회영 역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보다는 내 가 살아가는 나 자신의 구체적인 대학 생활이라고 하는 것만큼은 다른 어 떤 영역보다도 가장 많은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삶을 자기가 스타일링 할 수 있지. 디자인 할 수 있지“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질문은 ‘나는 왜 대학은 다니는가?’ 이고, ‘내가 다니는 고려대학에서 나는 어떻게 대학 생활을 하는가?’이고, ‘그 대학을 다니는 이유와 대학생활을 할 때의 하루 하루의 일상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배우는 공부, 익히는 지식, 이런 것들이 정말로 내가 내 삶을 내 꿈에 맞추어, 내 비전에 맞추어 디자인하는데 필요 한 걸 배우는 것인가?’, ‘필요하지 않은 걸 배우는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내가 역사를 만들 수도 없고, 한국사회 를 이끌어갈 수도 없고, 세계적인 문호나 세계적인 사상가가 될 수는 없을 지도 모르지만, 내 삶에 주인공은 나고, 내 삶에 주어는 나다’라는 거 에요. 그러니까 대학생이라면 그것이 학생의 대표잖아요. 대학생이 대표 학생 아 니에요? 중학교,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이 정말 대표 학생이잖아요. 그 렇지요?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한국을 대표하는 축수선수라면 한국의 대학 생이 학생을 대표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프로페셔널 학생이라면, 학생은 반드시 대학생활을 통해서 자기가, 아까 얘기했던 근원적인 욕망의 뿌리로 내려가 보아야 하는 거지요. ‘나는 왜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나는 왜 국 회의원이 되고 싶어 하지?’ ‘나는 왜 경제학을 전공하지?’ 혹은 ‘왜 내가 공 무원이 되고 싶어 하지?’되고 싶어 하는 거에는 뭔가가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사회에 나가서 어떤 직장에 다닐까?’하는 건 하위질문이잖아. 사회적인 삶, 내가 직장인이라고 할 때에 사회적인 삶은 많이 쓰는 표현이 지만 삶이라고 하는 것보다 다 작지요. 내 삶이라고 하는 거에는 직장인이 면 직장인의 삶이 있고, 학창생활의 삶이 있고, 가족으로서의 삶이 있고 혹 은 친구와의 관계로서의 삶이 있는 것과 같이 삶이라고 하는 큰 집합 안에 는 교우관계, 가족관계, 학교에서의 생활과 같은 게 다 부분집합, 부분으로 들어있는 요소들이잖아요. 근데 우리가 질문을 던질 때, 대학에서 ‘내가 사 회에 나가서 어떤 직장에 다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 까?’ 중에 영역을 나누자면, ‘어떤 사회적인 삶을 살까?’라는 질문이에요. 그 질문은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종속된 서브질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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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질문이잖아. 그러니까 그 질문은 상위질문에 의해서 규정을 받는 거 죠. 그렇지 않나요? 그렇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실험 공간이 바로 대학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사회에 나가서 직장 가진 다음 에 던지면, 절차가 번거롭잖아요. 하지만 아직 어떤 사회적 삶을 살 것인가 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면, 대학에서라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할 여 유가 있잖아요. 즉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실험 공간이 대학이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대학에서 자기가 일인칭 주인공으 로 자기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나중에 사회에 나아가서 그 질 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아까 얘기한 대로, 유예한 질문은 언 젠가, 반드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돌아옵니다. 유예된 질문의 귀환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대학 때 근본적으로 알아보지 않으면, 그 귀환이 아프게 오지요. 대학 때 알아본 질문을 다시 만나면 그때는 반갑게 오는 거고요. 그때는 자기의 본질을 찾는 거니까. 오십 때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자기가 사회적 삶을 종식하고 사회적 삶을 자기 삶의 전체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 면, 그때는 하고 있는 일이 곧 ‘나’에요. 그런 바보 같은 게 어디 있어요. 일 이 곧 나라니. 나의 삶 중에 일부가 일인 것이지요.

나머지 16시간을 8시간이라는 일의 종속상수로 만들어버리면, 그건, 하위적인 삶이 상위의 삶을 종속시키는 거니까요. *

William Cuthbert Faulkner,

1897 ~ 1961, 미국의 작가로 노벨 문학상(1949), 퓰리처상 2회 수상 자이다. 작품은《우화》,《자동차 도 둑》등이다. 미국 남부사회의 변천 해온 모습을 연대기적으로 묘사 하였다.

그래서 이를테면 윌리엄 포크너*라고 하는 사람 은,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 중에, 즉 하루에 8시간 할 수 있는 건 일 밖에 없다고 그랬어 요. 하루 8시간 먹을 수도 없고, 사랑을 할 수도 없 고, 하루에 8시간 잘 수도 없고, 규칙적으로 하루에 8시간 할 수 있는 건 일밖에 없다는데, 바로 거기

에 모순이 있다, 인간 삶에. 우리가 규칙적으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으 나, 일에만 매여 있다면 나머지 16시간은 어떻게 할 겁니까? 나머지 모두 를 8시간이라는 일의 종속상수로 만들어버리면, 그건, 하위적인 삶이 상위 의 삶을 종속시키는 거니까요. 사과라는 부분이 과일보다 훨씬 크다고 하 는 형용모순이 생기겠지요. 그래서 저는 대학생들이 문제의식은 너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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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은데, ‘오늘날 2013년 한국사회에 대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너무나 좋은 질문이지만, 그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는 ‘나는 2013 년 대학생활을 할 때 어떻게 내 삶에 주인공이 될 것인가?’ 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다보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질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래서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가야지, 추상에서 구체로 내려가기는 좀 어려 울 것 같아요.



조재룡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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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조재룡 교수님은 학교에서 <프랑스문학과비 평의흐름>, <프랑스문학과번역>, <20세기 프랑스 문학>등을 강의하셨습니다. 교수님 수업은 매 학기 수강 신청마다 빠른 속도로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본 격적인 수업 내용으로 들어가면 수업은 정신없이 빠르게 진행됩니 다. 방언처럼 쏟아내시는 수업 내용에는 교수님의 깊은 연구과 비평 경 험이 녹아있어 받아 적기에도 버거울 만큼 수업이 어렵기로도 유명합니다. 그 럼에도 최근 읽었던 좋은 시나 글귀를 소개해 주실 때에는 마냥 문학소년 같은 모 습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바바리코트를 즐겨 입으시고, 비오는 날이면 하염없이 시 를 베껴 쓰셨다는 교수님의 학창시절, 어떤 고민들을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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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창시절 - 바바리와 두꺼운 사전

생활도서관(이하 생도) : 학창시절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간단하게 말씀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조재룡(이하 조) : 원래 저는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해서 문예창작과, 신 방과, 국문학과를 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불문과로 넣어서 그 렇게 들어가게 되었죠. 그렇게 공부하다가 졸업할 즈음 계속 문학을 공부 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침 그때 <문학과 지성사>라는 출판 사에 들어가라는 권고를 받아서 출판사에 들어갔어요. 그러다가 3,4일 만 에 그만 두고 유학 준비 공부를 하게 됐어요. 그리고 프랑스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고.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니 불문학 전공하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 요. 제가 궁금했던 건 시적 언어와 산문의 언어가 어떻게 다른 지였거든요. 물론 시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시도 쓰게 되었고요. 프랑스 시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더라고요. 엄청 정교하고 분석적이라서 그 시기에 푹 빠졌던 거 같아요.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됐는데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넥타이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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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고 직장을 다니는 것 보다는 내가 하는 일이 백배는 가치가 있는 거다, 어 쨌든 노동을 하니까’하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의 젊음을 담보 잡혀서 공부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자학적이 되는 거예요.

그런 오기 같은 게 있어서 괜히 바바리 입고 다니고 두꺼운 사전 들고 다니고 그랬어요. 비 오는 날이면 도서관 커다란 창문 있는데 가서 시집 놓고 하루 종일 베꼈던 것 같아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불문과를 갈 거 같아요. 그 때 우리는 세상에서 공부할 만한 학문은 세 개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언어를 연구하거나 문학을 연 구하거나 철학을 연구하거나. 이거 외에 나머지는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조합하는 논리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타 학문에 대한 경외감이 워낙 증 대해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어쨌든 그 때는 아주 순수한 물리학 화학 외 에 경제학, 경영학, 이런 건 말이 안 된다고 본 거예요. 어릴 때는(웃음). 지 금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거죠. 그 때는 ‘돈 잘 벌겠다고 하는 장사의 논리 를 배우는 것을 어떻게 대학에서 하느냐’ 이런 치기가 있었던 것 같았어요.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은 학문적 사유의 대상은 아니다’, ‘법철학을 제외한 다면 법학이라는 것은 법전 외우는 거다’, ‘의학은 경험에 의해서 칼로 쪼 개는 거고 굉장히 무식한 작업이다.’ 그런 오기 같은 게 있어서 괜히 바바리 입고 다니고 두꺼운 사전 들고 다니고 그랬어요. 담배 막 피고 시 베껴 쓰고 비 오는 날이면 도서관 커다란 창문 있는데 가서 시집 놓고 하루 종일 베꼈 던 것 같아요. 그게 유일하게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병적으로 생각했던 사 람들이 있었고(웃음). 그랬던 사람들이 대부분 한 달에 30만원을 벌면서도 시를 써요. 그 다음날 죽어도 시를 써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앎 외의 권위를 내세울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났던 게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대학 때 불문학 공부를 하면서 희곡을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시를 쓰거 나 평론을 쓰거나 뭐 이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학 문학상 한두 개 받은 게 전부였고 신춘문예는 매번 떨어졌어요(웃음). 프랑스 가서는 그걸 접 고 공부를 했던 것 같고. 프랑스 가서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너무너 무 전투적인 사람들을 만났어요. 지도교수의 경우에는 과도한 독서로 눈 에 병이 났고요. “아 이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죠. 대학 에서 수업을 듣는데 자기가 잘났다고 절대 생각을 안 해도 지적 권위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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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고요. 그렇게 제도적인 장치로 그런 사람들이 대학에서 가르치게 만 들고. 앎 외의 권위를 내세울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났던 게 너무너무 행복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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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대학 교수라는 게 프랑스에서 별로 명예로운 직이 아니잖아요. 월급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계

층을 일컫는 말

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아 인텔리

겐차*~“ 이러고 비꼰다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존

경심이 있어요. 9·11 테러 같은 사건이 나면 대학교수에게 물어보잖아요. 우리가 예상치 못한 일을 겪을 때 어떤 사유의 영역을 가지고 뭔가 얘기해 주길 기대 받는 사람이라는 영예가 있어요. 굉장히 추레한(?) 영예인데 그 런 영예가 있어요. 지도교수가 논문 거의 끝나도 일대일로 지도해 줬어요. 500 페이지를 한 페이지씩 다 지도해줬고 나중에는 논문 심사가 거의 되었을 때 병원에 있 다고 해서 가봤어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여름이었는데 손을 잡으면서 “ 미안하다, 이번 여름에 못할 것 같다.”라고 하더라고요. 걱정하지 말라고, 왜 그러냐고 하니까 과도한 독서로 인한 안구 파열로 실명할 뻔 했대요. 어 우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한 번은 수업 시간에 두 시간을 늦게 오는 거야. 애들 한 명도 안 가. 조교가 전화 해보니까 아 책을 읽다가 졸았다고 그러더라고요.

담배를 피다가 태양이 떠오르는데 갑자기 허무해지는 거예요. 갑자기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더라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자면, 군대를 제대하니까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문 학으로도 괜찮을 지 너무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아침 6시에 눈이 떠지고. 나중에는 외시를 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새벽에 6시 반에 하는 노량진 외국 어 학원에 다녔어요. 그리고 신림에 오후에 한 과목이랑 해서. 외시 책을 다 사고 ‘그래 공무원이라도 하자, 외국에도 나가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 러다가 어느 날 1교시를 듣고 8시 반쯤에 겨울에 노량진 외국어 학원 옥상 에 가서 4층짜리 건물인가 그랬는데 담배를 피다가 태양이 떠오르는데 갑 자기 허무해지는 거예요. 갑자기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더라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그래서 복학을 해서 다시 문학을 하 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 때 너무 정신적인 방황을 많이 했는데 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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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기를 그 때 겪은 거 같아요. 중학교 초등학교 때는 사춘기 별로 없었거든요. 그냥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어느 날 집에 와보니까 세상은 내가 생각하 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 때부터 소설책 같은 걸 읽었던 것 같아요. 4학 년, 5학년. 선생님들이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날이 명 확하게 기억나는데 막 애들이랑 놀다가 4시쯤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아무 도 없었어요. 엄마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고 아버지도 나가 있었고. 혼자 배고파서 밥을 꺼내서 먹는데 조용했어요. 그 때 이렇게 말하면 조숙한 천 재처럼 들리겠지만 절대 오해하진 말아요. 갑자기 인생을 다 산 느낌을 받 았다니까요. 근데 그런 느낌을 그 때 다시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어디로 갈지 모르고 외롭고. 그래서 좋아하는 선배들한테 막 전화하고 술 도 엄청 마시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와중에서도 열정을 갖고 하는 일이 내게는 연애와 공부였던 것 같아요. 그 와중에서도 열정을 갖고 하는 일들이 나에게는 연애와 공부였던 것 같 아요. 아우 쪽팔려. 그래서 연애도 하고. 제가 『사랑예찬*』이라는 책을 번 역하면서 후기에 그 때 얘기를 좀 썼어요. 사랑이 라는 것은 턱없이 이기적인 것이지만 그런 욕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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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의 저서

동지를 만들 수 있는 거예요. 혁명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하나로 묶으 면. 근데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애와 공부 이 두 가지가 할 만한 것 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 때 혁명사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지 금 개정판이 며칠 전에 나왔는데 성대 교수였고 서울대 교수였던 노명식 교수가 쓴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 책을 밑줄 박박 긁으면서 읽었고 『대 장정』이라는 책도 읽었던 것 같아요. 마오의 책을 읽었던 것 같고. 그리고 주체사상 읽었고 당연히 마르크스 책도 읽었고. 왜 그랬냐 하면 뭔가 공동 체적인 것을 갖고 싶었는데 혁명은 뭔가 굉장히 매력 있잖아요. 칠레 혁명 사, 그리스 혁명사, 혁명사는 다 찾아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불문과로 서 프랑스 혁명을 제일 좋아했는데 그건 정말 어마어마한 사건이더라고요.

그 다음은 연애. 연애라는 거는 너무너무 재밌고 너무 좋고. 연애할 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해지더라고요. 그 다음은 연애. 연애라는 거는 너무너무 재밌고 너무 좋고. 연애할 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해지더라고요. 같이 몰두하게 되면 유아기적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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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나는 거예요. 주로 문학하는 친구들과 연애를 많이 했는데 별별 나쁜 짓도 많이 했고. 나쁜 짓이란 건 그런 거죠. 난 6개월 이상은 연애 안한다. 딱 6개월만 하자. 그러면 웃으면서 쫓아와요. 그러고 정말 6개월 뒤에 절교 를 해요. 그런 미안한 짓도 하고. 연애면 답도 없고 무궁무진하고. 그래서 지금도 사랑이라는 거 자체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고 글도 쓰고 그래요. 그 거랑 공부. 공부도 지겹지가 않아요. 카드도 많이 쳤지만 지겨워지고. 당구 도 제가 재수할 때 300을 쳤거든요. 이것도 재미가 없어. 근데 책 읽는 거 앎이라는 거는 정말 재밌는 게임인 거라 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학창시 절에는 그 두 가지를 가지고 **발광했던 것 같아요.

놀기도 잘 놀았고. 잘 노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한다는 게 제 주의에요. 자신을 뭔가에 허용할 줄 아는. 책을 많이 읽으려고 했고 특히 고전을 읽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철학도 강 성일 선생이 번역한 『서양 철학사』 두 권을 놓고 무식하게 읽었던 것 같아 요. 그리고 문학 서클 하면서도 문학은 보들레르 시를 놓고 방탕한 걸 흉 내 내는 게 아니라 공부하는 거라면서 법대 도서관에 7시쯤 나와서 12시 까지 있고. 복학할 때 문학 서클에서 짱을 했는데 그 때 후배들이 문학사회 학을 세미나 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첫 날 갔는데 읽어온 사람이 없는 거 예요. 그래서 책 던지고 나갔어요. 내가 지금 너희들 때문에 시간 할애해 서 나왔는데 시간 아깝게. 그 때 공격성이 있어서 책을 면전에 던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악명도 높았고. “왜 항상 노동해방문학만 읽느냐, 난 역사 적으로 생각할 때 모더니스트가 가장 치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커리큘럼 짜서 같이 읽게도 하고. 내내 소설도 읽고. 한편 철학은 문학 연구에는 도 움은 안 되는데 그런 글도 읽고. 놀기도 잘 놀았고. 잘 노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한다는 게 제 주의에요. 자신을 뭔가에 허용할 줄 아는. 알코올을 허용 한다든지. 그래서 그 때 책상에 불어로 “나는 모든 가능성에 도전한다.”라 는 글을 붙여놨어요.

약간 반달리즘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철없는 짓을 했던 거예요. 선생한테도 굉장히 미움 받기도 하고.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대학교 3학년 때 제사지내러 시골에 내려가서 대가족 이 쭉 모여 있는데 제사 지내는데 갑자기 담배를 폈어요. ‘후~’ 했더니 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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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버지가 눈을 비비고 보시더라고요. 그런 약간 반달리즘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철없는 짓을 했던 거예요. 선생한테도 굉장히 미움 받기도 하고. 왜 냐하면 어떤 강사 선생이 복학생들을 우습게 보고 얘기를 한 거예요. “자 네들은 뭐 매춘 같은 것도 하나” 이런 식으로. 그래서 “선생님은 사모님이 랑 일주일에 섹스를 몇 번이나 하세요?”라고 물었죠. 선생님이 저희의 사 적인 것을 궁금해 하니까 저도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라고. 그래서 그 선 생이 교수가 됐는데 나중에도 잊지 못하겠다고. 많이 반성했다는 거예요. 한 번은 사회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의사랑 환경미화원이랑 다른 가치를 생 산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은 교수이기 때문에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을 생산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서 대판 싸우다가 결국 D를 주더라고요. 너 무 공격적이어서 심지어는 어떤 국문과 수업을 들으면 국문학과 학생들이 자기 발표할 때 질문 하지 말아달라고도 하고. 언어학 수업 들으면 언어학 젊은 선생들이 긴장하기도 하고. 그랬다가 4학년 되면서 좀 온화해지고. 왜 사는지 모르니까 발버둥 쳤던 시기가 2학년, 3학년이고 4학년 때는 약 간 원숙해졌다고 할까. 나 자신에 대해서도 관용도 생기고. 그 땐 유학 준 비를 하면서 프랑스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거기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갔 어요.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별다른 경험도 없고 기억나는 건 연애랑 책 읽 은 것 두 가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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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야기 “대학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곳” 생도 : 그러면 교수님이 공부하실 때는 대학원 진학에 대한 분위기가 어땠 나요. 왜냐하면 요즘은 대학원을 고민하는데도 여러 가지 압박감이나 부담 감 때문에 선택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는 것 같고요. 고민을 뒤로 미 루는 친구들도 많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게 공포를 조장하면서 학문 성취의 자유라는 가치들을 생각하지 못하게끔 만들었고. 기업은 너무 비겁한 게 대학이 산업인력을 만들어야 된다는 수치스러운 말을 하잖아요. 조 : 어떻게 얘기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제가 대학 다닐 때는 대학 레벨에 따 라서 취직이 다 됐는데, 서울권 대학을 나오면 대부분 취직이 잘 됐어요. 이 게 IMF 이후의 이데올로기라는 거죠. 사실 현대자동차 6명이 근무하던 데 서 4명으로 줄이고 더 늘리지 않는다고. 제 친구 얘기에요. 그만큼 적은 인 원으로 풀가동을 하면서 대기업의 꾀병을 용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봐 요. 그렇게 공포를 조장하면서 학문 성취의 자유라는 특히 문과대의 가치 들을 생각하지 못하게끔 만들었고. 기업은 너무 비겁한 게 대학이 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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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력을 만들어야 된다는 수치스러운 말을 하잖아요. 노무현도 그랬고. 백번 양보해서 대학이 산업인력에 기여해야 한다면 기업은 당연히 대학에 투자 를 해야 돼요. 그런데 정작 안 해요. 프랑스도 심지어 그렇게 해요. 이공대 학생들이 우리 기업에 와서 일할 인력이면 등록금을 대준단 말이야. 그런 데 대학에서는 공포분위기만 조장을 하죠. 취업률 높이라고, 취직하라고, 산업인력이 되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는 근간이라 든지 그런 것들을 미국만도 못한 거예요.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답게 대출 해서 담보로 쭉 가는 제도가 있어서 학비 걱정을 안 해도 되게 나름 시스템 을 만들어 놨다고. 서유럽은 반대로 국가가 담보해서 가르치면서 기업으로 끌고 가는 수요-공급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요. 한국은 도대체 뭔데. 협박 만 하는데. 이데올로기 문제잖아요. 대학에 들어와서 정말 용기가 있어야 돼요. 누구나 공부를 하면 안 되겠지. 그런데 내가 선택하는 것을 사회가 압박하는 그런 공포를 끌어안는 형식 으로는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학생들을 일대일 면담을 해요. 외 시를 본대. 왜 보냐고 물으면 그냥 그게 나의 출세의 길을 보장하기 때문 이라고 하고. 내가 진짜 어떤 동기(motivation)가 있어서 외시를 보는 것 과 어떤 구조적인 모순이 있고 그래서 제도개혁을 하고 싶다 그래서 행시 가 필요하다, 이건 오케이. 사회는 굉장히 연역적이어야 되거든요. 내가 이 렇기 때문에 세상을 나 중심으로 돌려놓는다. 근데 그건 환경미화원을 하 건, 은행에서 일을 하건, 뮤지션이 되건, 어떤 사회 분야에서 일을 하건 마 찬가지거든요.

“수업 듣는 35명의 학생들 중에 10명이 문학을 한다면 난 다 말리겠다, 당신들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한 번 생각을 해보고 취직해야 한다, 문학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아라” 그 중에서 대학원이라는 선택은 문과대만 얘기하자면 내가 좀 더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해 가는 하나의 진로에요. 일기를 보면 알아요. 아 27의 한 국 남성이 프랑스에 문학을 공부하러 간다는 자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 인지 아는 거예요. 넥타이 매고 다니는 사람을 제가 존경했다고 했잖아요. 이 사람들은 10년 있으면 어떤 준거집단에 속하게 될 거라고.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정년도 보장되고. 이 물질적인 걸 포기하면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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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면서 공부했어요. 절반은 돈을 벌면서. 그것에 그만한 가치부여를 해 야 가겠지. 나중에 후회도 많이 했어요. IMF가 왔어요. 그만두려고 했어 요. 그 시절에 집도 망했고 절반이나마 대주던 돈도 못 대줬는데 어쨌든 일 을 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할 때는 선택에 굉장히 당당해야 되요. 공부는 어쨌든 내 생각을 걸고 싸우는 거거든요. 문학이 됐건 철학이 됐건 공대가 됐건 어쨌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으면 대학원 없어도 되거든. 특히 문사 철을 공부할 때 어떤 미래를 본다는 것들은 후차적으로 주어지거나 소급해 볼 수 있는 어떤 현실적인 가능성이지 그것들을 가지고 갈 수는 없다는 생 각을 해요. 단지 하나, 필로소피아(Philosophia), 지(知)에 대한 애정이죠. 애들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업 듣는 35명의 학생들 중에 10명이 문 학을 한다면 난 다 말리겠다, 당신들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한 번 생각을 해 보고 취직해야 한다, 문학 될 수 있으면 하지 말라”라고 그래요. 가식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렇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으니까. 물론 문학을 공부해도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 조장된 공포는 IMF이후에 생긴건데, 굉장히 집단적인 거예요. 너무너무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 많아요. 그게 한편으로는 되 게 놀라운 거예요.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 조장된 공포는 굉장히 집단적 인 거예요. IMF 이후에 생긴 공포인데 여러분들도 나도 다 느끼잖아요. 직 장에서 쫓겨날 공포라는 것은 내가 굶어죽을 수 있는 공포를 느끼게 해 주 니까. 그걸 학력은 더 이상 담보를 못해요. 제가 학교 졸업할 때는 외환은 행 같은 데 시시해서 안 갔어요. 그런데 이제는 구조조정이다 뭐다 말이 많 죠. 그게 결국 누구를 위한 구조조정인가요? 기업경영은 복잡한 문제이지 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부와 기업이 결탁해서 학생들을 공포의 도 가니로 모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근본적으로 개혁을 할 이유가 없다 고 생각하는 거야. 예를 들어서 정치가들은 절대 정치적인 것들을 생각하 지 않거든. 맨날 민주주의와 대의만을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자기의 모 토를 가지고 헤게모니(Hegemony)를 잡는 게 정치가라고. 기업도 마찬가 지거든. 그리고 정부도 마찬가지거든. 복지를 위한다? 절대 그렇게 안하 거든요. 그러면서 결탁을 통한 이윤 창출. 한국처럼 대기업을 선호하는 나 라가 어디 있나요. 프랑스 사람과 아무리 얘기해 봐도 이런 나라는 한국밖 에 없다고요. 일본도 그렇지 않지. 거기다가 집단적으로 조장해서 대학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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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체를 서열화해 버렸잖아. 프랑스는 예를 들어서 전문대가 점수가 더 높아 요. 거기가 취직이 더 잘 된다고 줄을 선다고요. 경쟁률도 더 높고. 유니버 시티는 아직까지도 학문을 담보로 하는 곳이라고 한다고. 우리는 다 서열 화해 버렸으니까 그런 것도 없어요. 어쨌든 문학이나 다른 인문학을 공부 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때는 본인의 물음에 굉장히 떳떳해야하고 아니 라면 그만둬야죠.

예전에 고대 하면 시골의 가난한 수재들이 오는 학교였어요. 생도 : 그러면 교수님이 방금 말씀하신대로 많은 대학생들이 겁에 질려서 취업을 위해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대학이라 는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조 : 소위 메이저 대학의 횡포라는 게 있어요. 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 이 대, 서강대 등등. 예전에 고대 하면 시골의 가난한 수재들이 오는 학교였어 요. 그런데 지금은 대학이 특권층을 위한 재생산을 하는 공간이라는 생각 을 지워버릴 수가 없어요. 입시제도에도 여러 가지 구멍이 있어요. 그런 제 도 덕분에 변호사, 의사, 교수 자제들, 자본가들의 자제들에게 유리한 측면 이 있죠. 그리고 한국의 돈 있는 기득권층은 굉장히 똑똑합니다. 미리 주판 을 튕겨요. 자식이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되면 한국이라는 사회에서는 아이 비리그 나오는 것 보다 스카이를 나오는 게 좋은 자리에 올라가는 데 유리 하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자식이 잘해야 중위권대학 갈 거 같으면 주판을 튕겨서 조기유학을 보내요. 그러면 미국에서 하버드 대학을 들어가. 그런 데 그 가치가 한국에서 메이저 대학이랑 같기 때문에 갔다가 돌아와서 글 로벌 인재나 그런 걸로 다 뚫고 들어와요. 너무 기가 막히게 계산을 하죠. 그래서 졸업장을 따고 다시 위에서 끌어주는 식으로 해서 계속 순환제도가 있는 거예요. 일단 그것은 메이저 대학의 과오인 거죠.

그럼 이런 상황에 대학을 다니면서 무슨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각자 찾아야 하는 거겠죠. 자, 그럼 대학 자체가 이런 상황인데 대학을 다니면서 무슨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각자 찾아야 하는 거겠죠. 어쨌든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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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친구들은 좋아해요. 면담을 하면 경영 공 부한대. 그런데 고민이 있대. 자기는 음악을 하고 싶대. 보컬을 하고 싶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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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o, 국내 유명 재즈보컬리스

트. 1998년 데뷔.

요. 그래서 제가 연락을 해줬어요. 말로*씨 정도면 너가 능력이 있는지 테스트해줄 것 같다. 연락을 해

서 보내줬어요. 그런데 결론은 말로가 음악 안하고 공부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싹 접고 경영학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잘하고 못하고를 떠 나서 그렇게 꿈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예를 들어 수 업시간에 『미생』이라는 만화를 보라고 했어요. 『미생』보면 그런 말 있잖 아요. “나만의 바둑을 두어야 한다.” 나만의 바둑을 둬야 하는데 면담할 때 2학년 3학년 들이 늘 고민하여 물어보는 게 그런 거예요. 뭔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못하고 있다는 거.

아이들이 부모가 욕망하는 걸 욕망하면 안 된다고 봐요. 대학생들도 사회가 욕망하는 걸 욕망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발현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고요. 그래서 대학은 일단 뭔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 어요? 요즘에는 자기주도형 학습이 입시에서 중요하다고 해요. 그런데 그 것도 엄마들이 만들어 주는 거잖아요. 아이들이 부모가 욕망하는 걸 욕망 하면 안 된다고 봐요. 대학생들도 사회가 욕망하는 걸 욕망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발현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고요. 나는 무엇보다도 거 인의 어깨위에 앉아있는 난장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세 상엔 내가 모르는 것이 있고 내가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게 아니라 타자라는 게 있고, 내 안에도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 을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자본주의 세상에 서 그런 생각을 해도 법적 인간은 될 수 있어요. 법만 위반 안하면 되잖아. 대학생들 모두 법을 위반 안하면서 방탕하게 살 수 있다고요. 저는 솔직히 방탕한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러면서 되게 영악하게 살 수 있어요. 내가 10만 원짜리 스테이크 먹는 게 왜 법을 위반한 거야. 내가 토플 공부를 무 지 하면서 살 수 있고 내가 주말마다 여행갈 수가 있고 아버지 차 BMW 모 는 것도 문제가 없고 뭐라고 안 해요. 그런데 법이 포용하지 못하는 ‘도덕’ 이라는 문제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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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교수 어디 가서 재화를 창출하는 인간이 못돼요. 노동자처럼 건장하게 뭐를 조립해서 도움을 못 주죠. 대학 교수의 입장에서 얘기 하자면 이런 생각을 해요. 글을 쓰다 보면 ‘왜 이런 미친 짓을 할까’ 생각해요. 논문 한두 편 적당히 쓰고 헬렐레 술 먹으 면 될 텐데. 그래서 저는 교수라는 거에 콤플렉스가 있어요. 교수 어디 가 서 재화를 창출하는 인간이 못돼요. 어디 가서 노동자처럼 건장하게 뭐를 조립해서 도움을 못 주죠. 그것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고. 되게 무서운 일 인 거예요. 그럼 내가 뭘 생산한 건가? 나는 문필노동자인가? 뭔가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해야 되는데 볼펜 한 자루 만든 것 이상의 가치를 생산했는 가를 볼 때 의심스러워요. 내가 쓴 글이 그만큼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그 러면 겁이 나요. 사제 같은 마음을 갖게 돼요. 공부하는 인간들은 인문학 하는 인간들은 그런 인간보다 못한 인간일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를 들볶고. 매번 이렇게 사춘기 소년처럼 지낼 때가 있어요. ‘도덕’의 문제란 그런 게 아닌가 해요.

나도 모르는 내가 나를 점령하고 나를 움직이는 거죠. 개인 안에도 공동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학생들도 뭔가 내가 사회의 인간이면 쓸모가 있는 일을 해야 되는데, 노동을 해도 좋고 뭐를 해도 좋은데, 어쨌든 세상엔 내가 모르는 내가 있는 거예요. 법적인 영역 외에도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지점들이 있고, 이건 내가 전적으로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자네를 쌩 까도 돼. 그거 가지고 법이 구속은 안한다고.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게 나에게 스트레 스를 줘야 되거든요. 대학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받은 건데 직장 들어 가면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어요. 나 안에는 나도 모르는 뭐가 있는 것이고 나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하고 선배이기도 하고 교수이기도 하 고 한 명의 아저씨이기도 하고 어디가면 소비자이기도 하고 문학 비평가 이기도 하고 소설 읽는 독자이기도 한 거죠. 나도 모르는 내가 나를 점령하 고 나를 움직이는 거죠. 개인 안에도 공동체가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은 법 적 주체로는 생각 못하는 것들이지만 도덕을 고민하는 데 중요한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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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서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갈 수 있냐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대학생이에요.

내가 세상에서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갈 수 있냐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대학생이에요. 그래서 운동권 논리에서 대학생은 어떤 계급이 아니 라 어떤 계급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예요.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이런 유일한 자유의 공간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저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딴 걸 못하잖 아요. 저는 양심선언하고 나갈 용기도 없는 인간이에요. 그래서 내가 모 대 선후보가 당선되면 망명 간다고 공언했는데 여기 나가면 스카이프로 강의 는 해야지. 돈은 벌어야 되니까. 그래도 제가 시인들은 술 사주고 밥 사주 고 합니다. 나의 고민을 대신해주는 사람들이니까요. 시인들을 만나면 짜 릿짜릿해요. 새벽 2시쯤 돼야 진심이 나와요. 진짜 이상한 인간들이에요. 너무 짜릿해요. 시인들만 만나면 맨날 놀아. 그게 행복해요. 술도 엄청 먹 고. 그때 반짝반짝한 얘기들이 나와요. 굉장히 행복한 시간이에요. 문학한 다는 인간들이 제일 순진하고요. 제일 겁 없고. 용산참사 때도 진은영*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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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2000 『문학과 사회』 「커

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갔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

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

면 플라톤이 국가에서 시인들을 제일 먼저 내쫓으

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려고 했던 게 이해돼요. 왜 내쫓으려고 했겠어요.

이성으로 정치를 해야 되는데 얘네들은 말로 연민과 공포를 조장하니까 내 쫓아야 한다고. 이상한 존재에요. 여하튼 대학이 그만큼 자유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사유를 좀 했 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봉사하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타인이 얼마나 교 묘한데. 전 동정 절대 안 해요. 내 자신이 갖고 있는 입장에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상대를 성실하게 이해하는 것 자체가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 해요. 그래서 제가 아는 한에서 유일하게 타자를 위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속이지 않고 내 글 쓰는 일을 잘 하는 거예요. 웃기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 게 저한테는 타자에 대한 윤리거든요. 타자한테 옷벗어주는 게 아니라 타 자의 정체성으로 나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 래서 타자를 생각한다는 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고요. 대학생활은 어쨌든 그런 고민을 하는 장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아는 장소. 뭘 해 도 자기가 원하는 게 뭐다는 걸 알게 되면 성공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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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3. 타자에 대한 욕구, 앎에 대한 욕구 - 연애와 공부

생도 : 혹시 교수님은 대학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들 중에서 딱 두 가지를 꼽아서 이건 대학 끝나기 전에 꼭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으신 거 있 나요?

연애는 타자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성적인 의미에서도요. 대학생들이 연애를 했으면 좋겠어요. 조 : 아까 말했는데, 첫째로는 연애. 연애는 타자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성적인 의미에서도요. 대학생들이 연애를 했으면 좋겠어요. 연애라는 게 되게 웃겨요. 문학작품에서 연애가 빠지지 않아요. 그런데 연애 상황에 빠 지면 현실에서 없던 게 생겨나요. 예를 들어 19세기 스탕달의 『적과 흑』 읽 어봤어요? 이상한 소설이에요. 젊은 놈이 가정교사로 갔는데 유부녀랑 바 람이 나. 그런데 멀쩡한 여자가 바람이 나면서 하지 않을 짓을 하면서 이상 한 공간이 열려. 다른 현실이 열리거든요. 다른 체험을 하게 해줘요. 연애 라는 건 무지막지한 경험이에요. 그러니까 반대하는 부모랑 싸우면서 부모 의 다른 면을 볼 수도 있고. 또 연애하다가 타인이 얼마나 잔인한지도 느낄 수 있고.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건지 알 수 있고. 얼마나 사람 속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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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지 알 수도 있고.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가 까이 갈 수 있는지. 그래서 과연 인간이 뭔가 고민하게 되고. 누구를 위한다 는 건 뭔가. 그리고 나의 에너지가 타자의 에너지와 어떻게 상충하면서 욕 망이란 뭔가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고. 저는 연애할 때 어쩔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을 받았어요. 두려운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래서 지금 집사람 이랑도 연애할 때 미치는 줄 알았어요. 그건 반드시 여자뿐만 아니라 시를 읽을 때도 그런 것 같고요. 그래서 이거 되게 저속한 표현인데 어떤 시인이 사석에서 “조재룡 선생님은 텍스트의 속살로 들어가서 텍스트랑 섹스하는 것 같다”라고 하더라고요. 그거 굉장한 극찬인데(웃음). 시 평론을 쓰다보 면 언뜻 미치겠어요. 이 사람이 좋아서. 굉장히 사랑스럽죠. 내가 알아가는 만큼.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짠하고 뭔가가 느껴져요. 그 사람을 사랑하 게 되는 거지 내가. 시 비평을 쓰다보면 사랑하는 지점을 한번 돌고 나와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형식적으로 써야 되는 글들을 쓰게 돼요.

뭔가 분출하면 그만큼 힘들어지거든. 정념, 정열. 열정. 이런 것들을 발휘할 때 수난을 겪는 거죠. 어쨌든 연애는 반드시 해야 돼요. “사겨라!” 막 그러는 게 아니라. 그렇게 가까워지는 관계 안에서 나의 위치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고. 그리 고 정념이라고 하는 것, passion이잖아. 예수의 수난 할 때 passion of christ라고 해요. 정념은 수난이라는 거잖아요. 어원이 똑같아요. 뭔가 분 출하면 그만큼 힘들어지거든. 정념, 정열. 열정. 이런 것들을 발휘할 때 수 난을 겪는 거죠. 술도 먹어야 돼요. 술도 보면 현실에서 벗어난 감각 같은 게 필요할 때 마셔야 되는 것이고. 내가 아닌 감각에 나를 허용하는 게 사 랑입니다.

그 다음은 앎에 대한 추구. 앎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한번쯤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은 앎에 대한 추구. 저의 경우는 복학해서 갈등한 게 뭐냐면 ‘아버 지가 만들어준 나를 제외하면 나는 뭔가.’였어요. 되게 콤플렉스가 많았어 요. 우리 집 굉장히 잘 살았거든요. 사업해서 돈도 많이 벌고. 아버지가 학 비도 대주고. 장학금 받아도 안 받았다고 뻥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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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였어요. 그런데 도저히 모르겠는 거 예요. 그런데 그것을 글 안에서 책 안에서 아주 사소한 것부터 알려고 했 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여학생들에게 먹어줘요(웃음). “너는 왜 사냐?” 이러면 애들이 굉장히 반짝반짝해. 코드가 겹치는 거야. 그래서 앎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한번쯤 가졌으면 좋겠고. 그러면 나중에 알려고 하는 분야 가 좁혀지겠죠. 저한테는 이상한 책도 많아요. 지금은 문학책 위주인데 예전에는 수학책 도 많았던 것 같고요. 가우스의 논리라든지. 칸토로 같은 사람은 저한테 굉 장히 많은 영감을 줬어요. 특히 무한이라는 것에 대한 사유가. 이번에 한비 석이라는 시인의 비평을 썼는데 수학과 나온 시인이에요. 무한 가지고 시 를 쓰는 사람인데 칸트로 글을 써서 제가 감동받았어요. 그게 interdisciplinary(간학문적)인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저희 때가 행복했던 것 같아 요. 반드시 어떤 낭만이나 추억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대학에 들어 갈 때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하면서 취직도 생각하는 게 요새 어디 있어요. 고시공부 하는 애들은 우리가 볼 때는 루저였다고. 더 좋은 대학교 못 간 콤플렉스로 고시한 애들 많았으니까요. 어쨌든 그 때는 처음부터 ‘나는 누 군가’를 찾아갔던 것 같아요. 동아리 아니면 과 생활해서 같이 모여 다니고 그러면서 스터디도 많이 하고. 학과 안에 소모임들이 많이 있었어요. 불문 과 안에도 문학 연구반, 샹송 연구반, 철학사상 연구반, 한 10개 정도가 있 었는데 다 왕성하게 굴러갔어요. 그렇다고 공부만 한 건 아니고 주로 놀았 어요. 그걸 빙자로 덜떨어진 자기 고민들 얘기하고. 별짓 안했어요. 여러분 들보다 더 공부 안했어요.

대학 때가 앎에 대한 욕망을 발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게 어떤 종류의 앎인지 얘기는 못하겠고요. 어떤 조건 없는 앎도 있을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대학 때가 앎에 대한 욕망을 발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게 어떤 종류의 앎인지 얘기는 못하겠고요. 어떤 조건 없는 앎 도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저는 역사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특히 한 국사 자체에 전폭적인 불신이 있어가지고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진 역사책 으로 넘어가는 것도 있고. ‘장준하라든지 이승만이라든지 권준은 누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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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도대체 주사파가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과연 30년대 40년대 태어 났으면 월북을 했을까?’ 이런 물음을 가졌어요. 궁금하니까 주체사상도 읽 었어요. 지금도 그 책 여기 있어요. 이런 책들 예전에는 금서였는데 지금 은 다 볼 수 있어요. 여러분들도 그 때 대학생이었으면 다 그런 생각 해봤 을 텐데. ‘한국사회의 모순이 뭔가.’ 그때 사람들은 통일이 안 돼서 모순이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때 주사파가 그랬어요. 통일이 안 되니까 국 방비가 늘어나고 등등 모든 악의 근원은 통일이다. 정통성은 북에 있다. 어 쨌든 김일성이 항일투쟁 했잖아요. 경제상태도 6-70년대에는 북한이 훨 씬 좋았고 인권도 있었고. 그러다가 망한 거거든요. 남한이라고 더 나은가. 더 심했지. 요즘에 절망해서 더 이상 그런 얘기를 안 하는 것 같은데 자본 주의가 먹어버렸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재간이 없는 것 같아요. 합리적으 로 자본주의 하자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 같아요. 부패하지 말고 기업 도 윤리 지키면서 하자.

당시에는 고등학생들이 입시에 덜 시달렸죠. 덕분에 독서수준이 굉장히 높았어요. 프로이트도 읽고. 그런 앎에 대한 추구가 요즘에는 끊겼을 가능성이 높아요. 당시에는 그런 고민을 했는데 그게 앎에 대한 궁금증과 맞물려있던 사유에 요. 그 때 유행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때 거기까지가 제일 궁금했던 거 죠. 그게 고등학교 때도 스트레스 주는 질문들이었던 거예요. 고등학교 때 이미 찌라시 돌리고 그랬어요. 이미 칸트 읽는 사람도 있었고요. 지금처럼 입시에 많이 안 시달리고. 웬만큼 공부하면 대학을 갔거든요. 반에서 15등 10등 안에만 들어도 이름 있는 대학가고 그랬어요. 인구도 많지 않았고, 대 학 가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그래서 고등학교 때 독서수준이 굉장히 높 았어요. 프로이트도 읽고. 그런 앎에 대한 추구가 요즘에는 끊겼을 가능성 이 높아요. 제도권 교육이 계속 조장하니까요. 우리나라 입시는 바칼로레

* Baccalaureate

프랑스 대학입

학 자격시험. 지원하려는 대학의 전공분야에 맞춰 계열별로 시행되 지만, 역사, 철학 등은 공통 필수과 목에 속한다.

아*랑 다르잖아요. 틀리라고 낸 문제를 자꾸 문제 를 맞히라고 하잖아. 웃기는 거지. 직장 다니면서

그런 걸 잘 못하니까 대학 때 앎에 대한 욕구를 터 뜨려보라는 거죠.

생도 : 교수님은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한테 전하고 싶은 메시지 같은 게 있


열한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나요? 또 혹시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으신지.

“여태까지 생각되어온 것이 이만큼이다, 그러면 조금만 더 나가자.” 조 : 비트겐슈타인* 예를 듭시다. 비트겐슈타인은 살아생전 책 한 권 딱 쓰고 죽으려고 했었어요. 철 학적 문제는 언어를 잘못 구사해서 생기는 거고, 그 래서 철학이 제기했던 문제가 거짓말이라고 얘기

*

BWittgenstein, Ludwig Jo-

seph Johann, 1889~1951. 논리 적·언어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철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 을 끼친 철학자.

했던 거죠. 그런데 그 책이 수업시간에 일정한 사

*

람들을 초대해서 자기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한 문

사물들 간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

장씩 얘기한 거예요. 소쉬르*가 언어학에서 어마

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전체 체계 안에서의 는 구조주의의 선구자. 언어학자.

어마한 개혁을 일으켰던 책도 강의를 정리한 거예요. 원론적으로 인문학적 인 강의는 그러면 좋겠어요. 그런데 학부수업은 그렇게 창조적일 수가 없 어요. 그건 프랑스도 마찬가지에요. 일정부분은 지금까지 학문의 역사가 밟아온 것을 정리해줘야 한다는 게 있어요. 프랑스의 대학원 첫 학기 수업 의 경우에는 “여태까지 생각되어온 것이 이만큼이다, 그러면 조금만 더 나 가자.” 이걸 얘기해요. 적어도 이만큼은 읽어오자고 교수들이 제시하고 여 기서 한 발씩 더 나가자고 제안해요. 그래서 1년 정도 세미나를 하면 2-3년 후에 책이 나와요. 대학원에서는 그런 식으로 수업을 하면 돼요. 저도 번역 이론이라는 책을 수업을 통해 내놓았어요. 우린 강독이라는 문제가 있어서 여러 가지로 복잡하지만 그래도 창의적인 수업이 있었으면 좋겠고요. 그리 고 문과대 수업은 지식측정 경연대회 하는 수업이 아니에요. 예전에 제가 국문과 수업을 들었어요. 4학년 수업을 2학년 복학하고 들었는데 ‘김수영 의 시세계에 대해 써라’ 하는 시험문제가 나왔어요. 저는 한 줄 썼어요. “김 수영의 시는 지금 논의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보여줬다.” A+ 받았는 데 운이 좋았던 거죠. 그 사람이 왜 A+줬는지 알겠어요. 한 번도 결석 안하 고 발표도 엄청 잘했거든요. 결석하고 그랬으면 F 맞았겠지. 그런데 진짜 2시간동안 앉아있는데 모르겠더라고요. 썼다가 지우고. 되게 나대는 학생 이었는데. 그건 되게 창의적인 답안지거든요. 물음도 그렇고.

학부 때는 그런 식의 자극을 주는 수업을 많이 하고 싶어요. 예전에 제가 수업할 때 인상에 남는 게 20세기 프랑스문학 강의할 때 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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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카뮈 이방인의 첫 문장을 적었어요. “오늘 엄마가 죽었다. 혹은 어제일 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줄 쫙 적어주고 이것에 대해 쓰라고 그랬어요. 별별 얘기가 다 나와요. 그런데 이게 시제가 복합과거예요. 엄마가 죽은 게 과거의 사건과 묶여요. 그래서 어떤 학생은 “엄마의 죽음과 직접적인 체험 을 객관적인 사건으로 치환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화자의 상태를 부 각시킨다.” 이렇게 야부리를 깠어요. 잘 썼더라고요. 학부 때는 그런 식의 자극을 주는 수업을 많이 하고 싶어요. 대학원은 약간 좀 엄해요. 읽어올 것도 많고 융단폭격처럼 일방적으로 강의를 해요. 그래서 학부에서 인상을 갖고 대학원에 온 애들이 약간 당황할 때도 있는데 진심을 알아주면 되게 고맙죠. 대학원은 발표 거의 안 시켜요. 이번에는 리듬에 관해서 강의했어 요. 리듬이 뭔가, 이러니까 당황하더라고요. 그래서 8명 중에 2명 쫓아 왔 어요. 그래도 2명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안 쫓아오는 애들은 고민을 안 해 봐서 못 쫓아오는 거고. 문과대 학생들은 자기가 하려는 것에 따라 수업에서 얻을 수 있는 포인트 가 다른 것 같아요. 제가 3학년 때 「현대 프랑스 철학특강」을 들었어요. 이 원복 교수라고 지금 한양대 계신 분인데 귀국하자마자 한 수업이 굉장히 생생한 거예요.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 등등 미치겠더라고. 어마어마하게 많이 배웠어요. 교수님들 중에서 막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렵더라 도 그 사람들의 영혼의 주머니를 훔치려고 하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철학 과 정인교 교수님 수업이 그래요. 우리나라 최고의 논리학자거든요. 문과 대 서관에서 전기료가 제일 많이 나간 사람이 그 사람이랑 나. 정인교 선생 님은 저보다 10살 많아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해요. 저 같으면 대학 때 들었을 것 같아요. 학점 F로 깔아도 되잖아. 학점이 뭐가 문제야.

그러면 무조건 골 때리는 수업을 들어야 돼요. 당황하게 하는 수업을 들어야죠. 내가 궁금한 것들을 나를 괴롭히면서 삐딱한 시선으로라도 줄 수 있는 사 람들. 자기의 말의 최면에 빠져서 학생들을 속이지 않는 사람들. 파워포인 트를 자랑하면서 마케팅을 가르치지 않는 수업들. 문학, 철학, 어학, 언어 학 그러면 무조건 골 때리는 수업을 들어야 돼요. 당황하게 하는 수업을 들 어야죠. 저는 여기 와서 황현산 선생님 수업을 들었어요. 어마어마하게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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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이 배웠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시에요. 외부에서 고대 문과대의 정신 은 누군가 했을 때 세 분 얘기를 해요. 황현산, 김인환, 김우창. 다시 말해 서 이 양반들이 창의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 수 업은 지금도 청강을 하러 많이 와요. 시인들도 많이 오고. 외부에 있는 교 수도 많이 와요. 그런 수업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누가 말에 약을 타서 요 약될 수 없는 것들을 요약하는가. 이런 생각할 때 골 때리는 거죠. 문학은 요약할 수 없는 거니까. 문제를 제기할 뿐이거든요. 문제를 끄집어내서 사 유하게 해주는 거고. 그래서 훌륭한 학생이란 자신이 읽은 것을 고스란히 베껴 쓰는 게 그것들을 모티프로 삼아 다시 다른 것에 적용해서 새로운 질 문을 던질 수 있어야 돼요. 그런 학생들이 되게 좋은 것 같고. 문학 수업은 창의적인 수업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제 수업들은 학생들은 알 거 에요. 리포트도 그런 식으로 내줘요. 골 때리게. 애들도 싫어하고 멘붕에 빠지기도 하고.

학생들이 과제를 통해 굉장히 좋은 모티브를 주기도 해요. 그러면 속으로 ‘아싸~’ 하죠. 생도 : 저도 그런 수업 듣고 멘붕(?)했어요. 조 : 한 학기 동안에 배운 내용을 요약해서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 어요. 수업시간에 배운 문학 기술을 사용해서 소설로 리포트를 쓴 학생도 있었어요. 어떤 애는 형이상학적 글을 썼어요. 진짜 잘 썼어요. 어떤 애는 2인칭 서술로. 수업시간에 얘기한 것들이었거든요. 수업을 딱딱하게 요약 한 글들은 기본적인 점수를 줬죠. 요약을 하려면 예술적일 수밖에 없거든 요. 내 수업을 존중해서 가장 주관적인 형식을 취해서 요약을 하는 게 정답 이었어요. 거기 든 사람 5명 있었어요. 그런 것을 시험해보면 매번 함정을 주는데 범생이 학생은 잘 못 좇아와요. 다른 학생들은 발전의 가능성이 있 죠. 굉장히 좋은 문장은 타이핑을 해둘 때도 있어요. 거기서 모티브를 얻어 서 쓸 때도 있어요. 수업은 공동으로 하는 거예요. 제가 박사 공부를 할 때 프랑스에서 배운 것들도 같이 하는 거예요. 학생들도 저에게 좋은 걸 줘요. 좋은 주제를 주기도 해요. 그러면 속으로 ‘아싸~’이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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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생의 책들

생도 : 인터뷰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장르로는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저는 성서를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조 : 장르로는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저는 성서를 많이 읽 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구약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의 시작이거든. 완전 개뻥이거든요. 그런데 죽여요. 특히 프 랑스어로 읽었던 것 같아요. 운문과 산문의 구분이 없어지는 문장들. 이상 한 문장들이야. 말로 읽어야지만 큰소리로 읽어야지만 들릴 수 있는 문장 이고. ‘아, 이래서 유대인의 전통이 생기는 구나’ 했고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강준만 선생이 역사에 대한 글을 써요. 정말 쓰잘 데기 없는 쪼가리 글까지 다 찾아가지고 인용문으로만 글을 썼는데 그게 열권짜리 『한국 근대사산책』이에요. 이 책은 한국 역사에 대한 바이블 같 은 책이에요. 개화기부터 해방 전까지. 저는 읽으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구 체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은 거시담론이 지배하고 있어요. 사건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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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으로 기술한단 말이죠. 이 양반은 그 당시 출간된 광고 쪼가리를 뒤져서 그 때 어떤 게 표상됐는지를 재밌게 썼어요. 서문에도 “이 책은 자기 글이 아 니다, 다 인용한 거다.”라고 나와요. 마치 벤야민 같이. 저는 굉장히 중요한 텍스트라고 봐요. 역사를 쉽고 재밌게 쓰면서 한편으로는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선입견이 없어요. 보고서 형식으로 글을 쓰는데 나에게는 해방 전까지의 역사를 아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책 이었어요. 다음으로는 저 개인적으로 혁명사에 대한 책을 좋아하니까 혁명사 책을 읽 었으면 좋겠어요. 『대장정』같은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요. 마오쩌둥 에 대한 전기라든지. 마오쩌둥 되게 웃긴 인간이에요. 프랑스 혁명사에 대 한 책. 프랑스가 지금도 인류에게 근대라는 산물을 가져다줬다는 의식이 있어요.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꼬뮌까지』라는 책도 있는데 혁명 입장에서 되게 감정적으로 쓴 글이에요. 그걸 정독을 해봐요. 물론 번역된 투가 많아 서 어렵긴 한데 상관없지 뭐. 고전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지금도 베르길리우스라든지, 여러 가지가 있는 데, 고전은 읽어볼만한 것 같아요. 『향연』이라든지 『국가』죠. 『국가』는 결 국 문학에 대한 책이에요. 플라톤도 읽으면 좋을 것 같고. 아리스토텔레스 도 읽으면 좋을 것 같고. 고전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할게요. 파스칼의 『잎 새』라는 책도 그렇고. 제가 글 막히면 꼭 찾아보는 책들. 『루쉰 전집』도 재 밌게 읽었고요. 독서일기에 대한 책 중에서도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언급할 만하고, 재 밌게 읽었고. 시는 얘기할 필요가 없겠고요. 보편적으로 얘기하자면. 아껴 둔 책이 많은데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고등학교 때는 『장길산』 읽고 감명 받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김현의 글. 전집. 프랑스 문학을 하는 사람이니 까 더 읽었겠죠. 그 정도 얘기하면 될 것 같아요. 다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 이 묘하네요. 생도 : 저희도 교수님께 직접 학창시절 어땠는지 물어볼 기회가 없으니까 요.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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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정육점에 걸린 돼지고기만 못할 수 있어요. 그런 생각하면 겁나지 않아요? 조 : 그런데 이 얘기는 하려고 했었어요. 인간이 정육점에 걸린 돼지고기만 못할 수 있어요. 그런 생각하면 겁나지 않아요? 그런 생각 지금도 해요. 내 가 돼지고기면 남의 입이라도 즐겁게 해주지. 근수라도 나가잖아. 그것만 도 못한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는 것 자체가 징글징글한 거예요. 왜 내가 태어나가지고. 진짜 힘든 것 같아요. 진짜 엿 같아서 평생 고민할 수 는 없지만 그런 물음을 한 번쯤 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함돈균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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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함돈균 교수님은 학교에서 <현대 비평론>, < 현대사상과 문학>을 강의하셨습니다. 교수님 수업 은 국문과 전공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전공 학생들 이 찾아 들을 만큼 인기가 많습니다.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인 기가 많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학생들은 대체로 교수님의 수업 을 어려워합니다. 게다가 교수님은 수업을 ‘사유의 전쟁터’로 간주하시 기 때문에 수업 분위기가 가볍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학생들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또 교수님은 왜 수 업을 ‘사유의 전쟁터’라고 간주하실까요? 생활도서관은 교수님과 인터뷰를 기회로 그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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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 앞에서의 좌절과 내면으로의 복귀

생도 : 교수님은 학부 시절 어떤 활동들을 하셨나요?

저는 학교 안에서는 활동이라 할 만한 게 전혀 없었어요. 그리고 고려대가 선배, 후배 형태의 유대관계가 강했던 편인데, 그런 풍토에서 출현한 제일 예외적인 케이스처럼 살았던 사람이에요. 함돈균 선생님(이하 함) : 저는 학교 안에서는 활동이라 할 만한 게 전혀 없 었어요. 그리고 고려대가 선배, 후배 형태의 유대관계가 강했던 편인데, 그 런 풍토에서 출현한 제일 예외적인 케이스처럼 살았던 사람이에요. 술 먹 는 것도 안 좋아하고. 집단적인 학교 문화에 대한 반발도 되게 컸고. 그래서 학교 내에서 같은 동기 선배, 후배 형태로 연결돼서 활동을 하는 것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까 학교생활이라고 할 만한 게 없네(웃음) 이 학교 전체 풍토 내에서 보면 정말 개인적이고 예외적인 삶을 살았고, 그 래서 선배 또는 동기들한테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어떻게 보면 왕따처럼 보일 수 있는 게 있었거든요. 그리고 약간 문화적인 감각도 달랐어요. 지금 은 고대가 이제 서울 사람이 많고 그랬지만, 제가 있었을 때는 지방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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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이 대다수였어요. 문화적인 감각도 그래서 전체적으로 잘 안 맞았어요. 그 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오해도 좀 받고. 쟤 이상하다. 저 친구는 뭐냐. 그리 고 그게 사회적으로 보면 학생운동이 거의 마지막으로 끝나갈 무렵에 대 학에 들어왔어요. 그 세대에 고학년에 있었던 선배들이 이제 저를 보면 새 로운 세대의 전형 같은 것처럼 보기도 했고. 아, 그리고 저는 옷도 이상하 게 입고 다녔어요. 생도 : 어떻게요?(웃음) 함 : 사실 저는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 검열을 되 게 많이 하는 편이에요(웃음) 기본적으로 제가 수업을 진지하게 하다보니 까 학생들이 상상을 잘 못하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되게 명랑하고 펀한 사 람이에요. 그런데 공부를 하고 그러다 보니까 세계관이 많이 비관적인 방 향으로 기운편이에요. 원래 체질 자체는 명랑한 사람인데. 그래서 감각적 인 것에도 예민한 편이고. 어쨌든 개인적으로 그렇 게 살았어요. 그러면 그렇게 개인적으로 살 때 무엇을 했냐면 약 간 이런 것에 대한 사회적인 맥락을 말해야 될 거 같은데, 제가 대학을 들어오던 무렵 그리고 학교를 다니던 그 무렵에 91년도에 아실지 모르겠지만, 강

경대 사건*이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그게 한국에 서 학생운동과 대학이 진보적인 운동들을 주도했 던 흐름 속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고, 그 사건 이후 에 학생운동이 완전히 궤멸되었어요. 그리고 이제 92년도에 서태지가 등장했고요. 그리고 아시다시 피 국제적으로 90년을 전후해서 사회주의가 완전 히 몰락을 했잖아요. 그래서 학문적으로 보면 사회 과학 분야가, 즉 학문적인 형태의 명확한 지표나 정 치적인 이념을 가지고 역사상 한 걸음 나아갈 수 있 다는 관점 같은 것들이 완전히 붕괴하고 있었어요. 그런 무렵에 제가 대학을 들어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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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제 개헌 후 형식적인 민주

화가 달성된 1987년 직후 여전히 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에 여전히 ‘더 많은 민주 주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고, 당 시 전국적인 등록금 인상 문제 역 시 심각했다. 그러나 6공화국 정권 은 백골단을 동원하며 학생과 시위 대를 강경진압하는 등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일관하였고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경찰과 거리에서 격렬하 게 충돌하였다. 그 와중에 강경대 열사는 4월 24일 등록금 인하를 주 장하는 연세대학교 집회에 백골단 의 쇠파이프를 이용한 무차별 구 타로 인해 두부에 심각한 타박상 을 입고 사망하게 된다. 이후 분노 한 학생들이 잇달아 몸을 불사르며 분신정국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극 단적인 정치적 항의에 대한 평가 는 엇갈렸지만, 강경대 열사의 죽 음이 분신정국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87년 절정에 달한 학생 운동이 점차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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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서태지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그 이전의 집단 적인 이념의 좌표 가 무너지면서 개인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걸 의미하거 든요. 개인주의적인 형태의 어떤 것들. 사실 90년대 이전은 개인의 개성 같 은 것들이 완전히 무시됐거든요. 여학생들이 치마입거나 화장하면 손가락 질 당하고. 그래서 정치, 사회적인 이념들이라거나 사회과학적인 신념이 완전히 붕괴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주의의 시대가 출현한 거죠.

내가 대학을 나와서 살아갈 시기는 10년 후의 세계이다. 그 10년 후의 세계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또 학문적으로는 사회과학이 퇴조하니까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명확한 집단 좌표나 이념 대신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 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바로 90년대에 인문학이 등장하기 시작 해요.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면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70년대 80년대에 는 없었어요.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2000년대까지가 인문학의 전성기 였고. 인문학이라고 하는 건 사회가 이렇게 가야한다고 제시하는 게 아니 라 인간에 대해서 깊이 있는 통찰을 근원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 한 것들에 통찰을 하던 시기가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였어요. 그러한 시기에 저는 특정한 동아리 활동이라든가, 선후배 관계 속에서 지 내기보다는 대학의 모든 생활을 다 공부하는데 다 보냈어요.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내가 대학을 나와서 살아갈 시기는 10 년 후의 세계이다. 그 10년 후의 세계는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할까. 저는 그 10년 후의 세계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저는 10년 후의 세계는 돌 던지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어 요. 물리적인 방식으로 개인이 돌 던져서 바꿀 수 있는 세상을 아닐 거라고 본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뭘 알아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공부 를 했어요. 그래서 저는 공부하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고요. 지금도 주 위 사람들한테 농담 삼아서 얘기하는데, 저는 20대 때 공부한 것을 가지고 지금까지 먹고 살아요. 어느 시기부터는 글을 쓰느라 책도 잘 못보고 되게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이 돼버렸는데. 20대가 저를 먹여 살리는 거에요. 20 대 때 공부에 열정을 다했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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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2. 대학에서의 독서

생도 : 그럼 그때 공부하실 때는 주로 어느 분야를 공부하셨어요?

학부땐 문학보다는 철학, 사회과학 도서를 많이 읽었어요. 사회와 세계,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함 : 학부 다닐 때는 국문과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어 요. 오히려 사회와 세계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이해해야 되겠다고 생각하 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그 중에서 제일 많이 본 책은 철학 책이 었고. 사회과학 책도 많이 봤죠. 제가 공부한 목록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 은 유용성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 연구자들 도 책을 많이 보지만 대부분은 현실의 유용성이 있을 것 같은 걸 바탕으로 독서목록을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현실이랑 은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책들을 그 시기에 많 이 읽었어요. 그리고 그런 종류의 책들은 20대 때 밖에 못 읽어요. 이제 서양에 보면 미셀 푸코*라는 철학자가 있는

*

Michel

Paul

Foucault,

1926~1984. 프랑스의 철학자. 정 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으 며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 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소외된 비이성적 사고의 의미를 연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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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 사람이 왜 독특하냐면, 그 사람은 자신을 한 번도 철학자나 역사학 자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을 철학자로 보아도 이상하고 역사학자 로 보아도 이상하다는 것은 그 두 개의 범주에도 없는 영역을 탐구하거든 요. 가령 광기라든가, 감옥, 정신병원. 푸코 이전에는 그것이 학문의 범주 에 들어갈 수 없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책을 읽느냐면 대학 도서 관에 들어가서 알파벳 순서대로 책들을 쭉 보는 거에요. 그렇게 하다보니 까 그 사람은 자기 학문의 범주 안에 없는 굉장히 잡다한, 무용해 보이는, 같은 학자들이 보기에도 이해가 안 되는 책들을 보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 들은 그런 지식의 목록, 독서의 목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영역 을 개척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 프랑스에서는 푸코의 ‘이상한 7년’이라고 그 사람이 아무 저술도 발 표하지 않고 강의만 한 7년의 기간이 있는데, 그 강의록이 나오고 있어요. 그 강의록을 보면 그 사람이 진짜 이상한 강의를 했더라고요. 인구에 대한 조사라든가, 전염병에 대한 조사. 그런 다양한 강의들은 목록들은 자신의 독서목록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구성되는 거죠. 그거다 젊었을 때 읽은 것들이에요. 저는 그 사람과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직접적인 실용성, 학문적으로도 실용성이 있는 형태의 패키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약간 넓은 범주의 목록을 저는 학부시절 때 가지고 있 었어요. 그리고 고전에 대한 독서목록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힘으로 글을 쓰고, 사유를 하고.

공부는 독서목록을 잘 구성해야 된다는 것. 좋은 독서목록. 말하자면 사유의 오리지널리티가 어디 있는지 계보를 잘 구성하는 걸 이야기해요. 생도: 그런 독서목록을 바탕으로 한 공부는 다 혼자하신 건가요? 함: 다 혼자 한 것은 아니고요, 대학원생에서 무료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 기도 했어요. 뭐 공부는 양가적이라고 생각해요. 공부는 근원적으로는 혼 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공부는 또 절대 혼자 할 수가 없어요. 제가 공부하는 사람들, 대학원생들,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라 도 꼭 권해주고 싶은 것은 공부는 독서목록을 잘 구성해야 된다는 것.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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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독서목록. 어떠한 사유라는 것은 다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요. 말하자면 좋 은 독서목록을 구성한다는 것은 사유의 오리지널리티가 어디 있는지 계보 를 잘 구성하는 걸 이야기해요. 공부를 잘하는 것은 책을 읽을 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거에요. 글 을 쓰는 사람이 두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쓰거든요. 첫째는 내 사유 의 오리지널리티가 어디서 왔는가, 그 기원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죠. 사유 의 기원들이라는 게 있어요. 서양에서는 그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이다. 푸코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지만, 푸코는 니체가 없었으면 나오지 못했을 거에요. 또 하나는 글을 쓸 때 내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스파링 파트너를 알고 명확히 하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단순한 원론을 쓰는 게 아니고, 내가 글을 쓴다면 내가 쓰는 글이 지금 우리 사회 2013년 겨울이라는 시점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질문. 무엇을 돌파하려고 이 글을 쓰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는 편이에요. 푸코도 니체도 그러한 문제의식이 너무나 분명했죠. 그 두 가지 를 잘 염두에 두는 형태의 독서목록을 구성하면, 뭐 그게 전문가가 되건 그 렇지 않든 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러한 형태의 독서 목록을 구성하려고 애를 썼어요.

또 그를 위해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해요. 그 선생은 본인이 찾아야 되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독서 목록을 만드는 데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게 결정적 으로 중요해요. 인생에서, 우리 나이 때는 20대라는 것은 정말 폭발적인 에 너지가 있어서, 40대 50대에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하고는 다르거든요. 그 시기에 누구를 만나냐는 것이 정말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거 죠. 그게 운이기도 하고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전적으로 운으로 되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선생이 있어도 모든 학생들이 그 선생이 훌륭한 스승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이 제도 세계에 있으면서, 이 대학이 가지고 있는 커리큘럼을 순전히 제도적인 통과의례라고 생각하 면, 대학이 주는 선물 같은 것을 못 볼 수도 있어요. 그 선생은 본인이 찾아 야 되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학점이 신경 쓰여서, 그리고 또 어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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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은 인생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아니면 스펙 따는 거에 관심이 있으 면 좋은 선생이 있어도 알기가 어렵죠. 제가 수업시간에 한 이야기가 있는데, 푸코가 1978년도에 프랑스에서 강 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뭐라고 그랬냐면, 그 시기가 68혁명이 좌절된 시 기인데, 학생이 물어봤거든요. 왜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그때 푸 코가 한 말이 “이 강의실이 전쟁터다”라고 그랬거든요. 우리가 부수고 돌 파해야 할 장애물도 여기에 있다. 대학의 강의에서 교수도 그런 마음으로 가르쳐야 하고 학생도 그런 강의를 찾아야 해요. 그게 제도 안에서 만들어 진 커리큘럼이지만, 우리가 지금 직면해있고 넘어서지 못하는 지점들은 확 인하고 그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과목 자체가 전쟁터 가 되어야 해요. 그래서 교수도 중요하지만 학생도 그러한 교수님을 찾아 야 되죠.

*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풍부한

저는 학부 때 그런 선생님을 찾았고, 그런 선생님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고전과

들이 강의 시간에 언급했던 책들, 쓴 책들에 붙어

인접 학문을 폭넓게 참조하는 비평 으로 유명해졌다.

*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번역비

평학회 명예회장. 대표작으로는 『 잘 표현된 불행』 등이 있다.

* 고려대 철학과 교수. 『피노키오

의 철학』 등의 저서로 대중들에게 철학을 알렸다.

있던 주석들을 중심으로 독서 목록을 만들었죠. 김 인환* 선생님이나, 황현산* 선생님들, 또는 양운 덕* 선생님들의 독서의 목록을 따라가면서 공부했 고, 개인적으로 또 따라다니면서 공부를 했죠. 대 학원 다니면서도 그렇게 지냈고. 거의 모든 시간을 그렇게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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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3. 전공을 선택한 계기

생도 : 그러면 전공을 국문과로 택하시게 된 계기는 뭔가요? 함 : 국문과는 저는 그냥 무조건 국문과였어요. 그냥 막연한 건데 문학이 우 리에게 뭔가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 같은 게 있었 어요. 학부 때는 철학 공부를 많이 하면서 사실은 대학원 진학을 할 때는 국 문과로 진학하는 게 아니고 전과를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유학 준비를 했 고, 이제 유학을 가서는 정신분석을 공부하려고 했어요. 한국에는 정신분 석이라는 게 대학원 전공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려고 한 거죠. 한국에서는 이제 정신분석이 심리학과랑 관련된 학문으로 돼있는데, 심리 학이랑은 다른 거죠. 서양에서는 철학의 한 분류라고 볼 수도 있고. 이제 그걸 전공하려고 상당히 완성된 단계의 유학을 준비를 하다가 우연한 계기 에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어요. 정신분석이랑 문학이 그렇게 다르다 고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생도 : 그때 만약에 유학을 가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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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

자.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 석하는 이론을 정립하여 ‘프로이 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함 : 그러면 이제 저는 자크 라캉* 같은 사람이 되 는 거죠(웃음)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생도: 대학원에서 시인 이상을 공부하신 걸로 알

고 있습니다. 함 : 예. 그런데 이제 이상만을 공부했다기 보다는 대학원에서는 기본적으 로 여러 분야를 공부해요. 그리고 그 중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을 선택해서 논문을 쓰면 이제 그 분야를 전공한 것으로 되는 거죠. 제가 이제 평론가로 서 가지고 있는 포지션, 연구자로서 가지고 있는 포지션은 전위적인 위치. 저는 전위의 사고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제가 이제 평론가로 서 실제의 결과와 무관하게 제가 한국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전 위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전위라는 건 가장 앞서서 싸우는 돌격대 라는 뜻인데, 그것은 둘째 셋째에 있어도 안 되는 거에요. 그러면 전위라는 건 어떤 거냐. 전위라는 거는 우리가 제도적인 것이든, 세계에 대한 이해든 간에 우리의 통상적인 사고가 갈 수 있는 가장 한계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 는 거에요. 제가 생각하는 문학이 가질 수 있는 고유성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통상적 사고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쓰면서 이제 자기가 통상적 사고에 대해서 의심 을 하겠다면서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던 부분에 대해서 철저히 의심을 해요. 그렇게 해서 남는 게 뭐가 있느냐. 코기토(cogito)* 만이 있다고 그

*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해도

랬는데, 문학과 철학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여전히 남는 ‘의심하는 나’로서의

생각해요. 그리고 문학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유주체를 의미한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통상적인 사고에 대해서 질문

을 던지는 자리. 그게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삶의 자유를 확장하는 길이라 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이렇게 사 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아. 저런 종류의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야.

우리가 수많은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사는데, 철학과 문학은 그 한계에서 그것 너머를 질문할 수 있는 자리거든요. 우리가 수많은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사는데, 철학과 문학은 그 한계에서 그것 너머를 질문할 수 있는 자리거든요. 합법과 비합법이 뭐냐, 정상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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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정상이 뭐냐, 인간과 비인간이 뭐냐. 그런 점에서 저는 문학에서 전위의 자 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저는 그 자리를 사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 고 개인적으로 글을 쓸 때, 혼자 개인적으로 책상 위에서 쓰지만, 어떤 형 태의 글이든 간에 통상적 사고와는 타협하면 안 되고 항상 저는 제가 물러 서면 우리 사회가 가질 수 있는 전위적 사유의 경계지점이 축소된다는 책 임감을 가지고 글을 써요. 그리고 그런 지점에서 문학에서 제가 관심이 있 는 것은 그런 전위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문학은 사실 답 을 주지는 못해요. 답을 주려는 문학치고 좋은 문학이 되지 못해요. 문학 은 질문을 던지죠. 사회가 이렇게 가는 게 맞느냐. 그럼 어떻게 가는 게 좋 은 거냐. 그게 문학을 다 할 수는 없고, 그건 다른 어떤 철학 경제학 혹은 경영학의 몫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문학은 그런 전위의 지점에서 질 문을 던지는 자리에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상이라는 작가가 중요하 다고 봐요. 이상 같은 사람이 한국 문학사에서 전위적인 인물이죠. 제가 볼 때는. 이상 의 <오감도>가 말이 많은데, 그게 총 몇 편인 줄 아세요? 그게 총 15편이 에요. 연작이고, 중간에 쓰다가 중단한 건데. 1934년 조선, 중아일보에 연 재되다가 독자들의 항의에 의해서 중단됐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직도 그 15편 전 작품을 모두 해석한 책이 한 권도 없어요. 전위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작가가 역사적 인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문학작품을 욕하는 사람들 중에서, 난해한 작품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들 이 많거든요. 그런데 문학작품이 난해한 이유는 표현이 난해해서가 아니 라, 통상적인 사고를 배반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에요. 이상 작품을 보면 그 사람이 꼬아서 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초등학생처럼 쓴 건데 이해를 잘 못하는 거에요. 왜? 표현이 어려운 게 아니라 통상적 사고를 전복해서 쓰 기 때문에. 이상의 <오감도>에 이런 작품 있거든요. “싸우던 사람은 싸우 지 아니 하던 사람이고, 싸우지 아니하던 사람은 싸우는 사람이고, 싸우는 사람은 싸우지 아니 하던 사람이었으며...” 이런 식으로 나가는 작품이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작품인데, 그 표현들 중에서 어려운 게 뭐가 있어요.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 요. 여기에 앉았던 함돈균은 방금 전까지는 이 자리에 앉지 않았던 함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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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이 자리에 앉지 않았던 함돈균은 앉았던 함돈균이고, 우리가 시간성 을 개입해서 놓고 보면 여기에 앉았던 임상옥은 앉아있지 않았던 임상옥이 고, 두 시간 전만해도. 그러니까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비유나 상징을 통해 서 세계를 압축하는 거거든요. 그게 되게 단순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게 오이디푸스 질문하고 같은 거거든요. 수수께끼를 풀었던 오이디푸스 왕은 사실은 자기가 누군지 몰랐던 오이디푸스고,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근 치상간을 한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이기도 하고. 인간이 가진 다면성을 이상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거에요. 표현이 어려운 게 아니라 상식적 사고를 배반했기 때문에 어려운거에요. 나중에 인터뷰 정리 가 많이 어렵겠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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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부와 먹고 사는 문제

생도: 한 가지 궁금한 게, 현실적으로 전위를 통한 질문과는 별개로 먹고 사 는 문제가 있잖아요. 지금 같은 경우도 많은 대학생들이 대학원가서 공부 를 하고 싶지만, 대학원 나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을 하는데, 교수님 같 은 경우는 그런 고민은 없으셨나요?

먹고사는 문제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데, 정말 굶어 죽을까봐 질문을 하는 건가요? 저는 그 질문이 조금 더 정직했으면 좋겠어요. 함 : 그것은 되게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제가 명확하게 답을 하는 게 힘 드네요. 그래도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요. 먹고 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로 생각을 하느냐. 객관적인 차원에 서 대학생은 상층부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에요. 그러 면 먹고사는 문제가 문제가 된다고 하는데, 정말 굶어 죽을까봐 질문을 하 는 건가요? 저는 그 질문이 조금 더 정직했으면 좋겠어요. 얼마만큼 우리 가 먹고 사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인가. 진짜 굶어 죽을까봐 걱정을 하는 것 인가. 아니면 연봉 얼마 이상의 직장들 같은 인생의 경제적 조건에 대한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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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해보았으 면 좋겠어요. 또 하나는 제 개인적인 선택과 관련 있는 건데, 저도 이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서 생활의 부담을 물리적 부분이나 객관적 부분에서 느 끼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 같은 경우는 그걸 고려하지 않았어요. 그게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어요. 왜 그랬는가? 이건 대학원을 선택을 하 든,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저는 제가 이 사회 에 살면서 어떤 형태의 직업적 선택을 하건, 혹은 삶의 태도 방식을 선택하 건 가장 중요한 게 본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야하는데, 인간이 스스로 생각할 때 자 기 자신의 인간적 품격을 지니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게 제 가 삶을 사는 방식과 어떤 것을 선택하는데 가장 중요한 가치였거든요. 우 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돈 없이 살수는 없지만, 저는 제가 돈 벌러 지 구에 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돈 벌러 지구에 왔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물론 돈이 삶에 중요하 긴 하죠. 그래도 그것이 삶의 제1조건이 되는 것은 인간적 존엄 내지 품격 을 지키는 일에 위배되는 일 같아요. 저는 옷 사는 거 좋아하거든요. 운동 화도 되게 많고. 어쩔 때는 돈이 더 있으면 신상 살 수 있을 텐데 싶기도 하 고(웃음) 한 달에 50만, 60만 받으면서 살 때도 있었는데, 나중에 10년 동 안 시민단체에 기부한 돈을 나중에 정산해보니까 천 만 원이 넘더라고요. 연봉을 몇 백 만원 받을 때도 있었는데. 왜 세상의 잣대가 항상 먹고사는 문 제가 항상 1순위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게 있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모든 직업적 선택이나 삶의 선택에는 내적인 필요성이 있어야 돼 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가 아니라, 나는 이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내 적인 필연성이 있다면 저 같은 선택을 하게 돼요. 그냥 그것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데 우리는 내적인 필연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우리 바깥에 있는 정황적인 게 우선적인 기준이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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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학은 어떤 공간인가?

생도: 대학이 어떤 공간인지에 대하여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경험 을 가지고 질문을 하자면,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하냐고 물어보면, 생활도서관을 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바로 되돌아오는 질문이 생활도서관은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어봐요. 그럴 때 마다 저희 운영위원들은 하나 같이 질문에 답하기가 너무 어려운 걸 느끼고. 그러한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대학 공간 자체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그 러기도 한 거 같아요. 대학의 분위기도 예전과 지금은 너무 다르고. 그래서 저희는 지금의 대학이 어떤 공간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해 요. 예전에는 학생사회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했는데, 요즘은 그런 용어 자체가 어색해진 상황이잖아요. 지금의 대학은 어떤 가능성을 가진 공간일까요? 혹은 될 수 있을까요? 함 : 인터뷰한 다른 교수님들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렇게 어려운 질문 에 대해서. 그것도 궁금하네요(웃음) 그래도 제가 그런 질문에 대해서 답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대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는 대학을 구성하는 구성원들 전체의 자각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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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부분의 노력만으로는 어떻게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학교라는 것은 여 러 형태의 주체가 있잖아요. 선생, 학생, 이사장 등의. 사실 대학이라는 공 간이 70·80년대 사회 변혁이라든가 진보를 견인하는 형태의 전진기지처럼 되었던 시절이 있었죠.

2013년에 대학은 어느 정도 의무교육과정의 일부가 됐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이 사회에 무엇을 견인하고 그러는 것도 무리고 비현실적인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항상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거는 사실 대학에게 대 학 이상의 것을 부과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학생들이 나가서 수업 안 듣고 학생운동하고, 수업 한 두 번 들어오고 이게 대학의 좋은 시절인가? 그건 아닌 것 같거든요. 그리고 70·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 소위 말하 는 386세대 그 사람들이 제일 취직 잘한 세대들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대 학생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그 시기의 대학생들은 어떤 특권 적인 위치에 올라갔을 수 있는 자리를 점하고 있기도 했죠. 그런데 2013 년에 대학은 어느 정도 의무교육과정의 일부가 됐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이 사회에 무엇을 견인하고 그러는 것도 무리고 비현실적인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무엇을 해야 되는가? 여기서 제 대답은 명확하지만 너무 원론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회복하지 않으면, 대학만이 가지는 고유성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유럽에 가보면 모두 대학 에 가지 않거든요. 독일 같은 데 보면 대학에 안가는 사람이 더 많아요. 요 리학교, 그림학교 등 전문 직업학교들이 훨씬 많고. 대학에 가면 손해에요. 오히려 엔지니어들이 더 돈을 많이 벌고. 그러면 그 사회에서 대학을 가는 사람이란 누구냐. 대학하고 전문 직업학교는 어떤 차이를 갖느냐. 이런 것 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에서 전문 직업학교랑 대학 간의 경계가 없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학과 전문 직업학교의 차이는 무엇이냐. 대학은 기본적으로는 부분적인 형태의 공부를 하는 곳이에요. 하지만 그 분화된 공부들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자기의 전공과 그 전 공을 통해서 부분적인 지식을 얻는 과정이지만, 그 다음에 꼭 필요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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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이 그러한 부분적인 형태의 공부가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 가치와 어떤 관 련을 맺는지에 대한 고민이에요. 부분적인 공부와 궁극적인 것 간의 매개, 성찰. 말하자면 우리가 한국이라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이거는 그냥 섬으 로 독립해 있는 게 아니라, 전체 지도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그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전공, 앞으로 가질 직업, 그리고 지식이라는 게 내 인생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제 방식대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삶이 존 엄하게 되는 것과 어떤 연관을 맺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이 대학이거든요. 또, 약간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부분적인 지식이 이 사회 전체의 공공적인 가치, 사회가 나아가야하 는 방향과 어떤 형태의 매치가 가능한가, 어떤 방식의 기여를 해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을 하는 곳이 대학이라고 봐요. 많은 사람들이 물리학과 화학 을 공부하지만 원자폭탄 만드는데 기여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예전에 80년대 학생운동 많이 하고 있을 때 어떤 학생이 그랬거든요. 교수가 학생 한테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니까 학생이 하는 말이 자기 는 삼양화학에 들어가겠다고 그랬대요. 삼양화학은 당시 최루탄 만드는 회 사인데, 화학과 나와서 최루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한 거죠.

저는 이 대학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혁명을 일으키고 이럴 수는 없는 세계이고, 기본적으로 ‘공부’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이 대학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혁 명을 일으키고 이럴 수는 없는 세계이고, 기본적으로 ‘공부’하는 공간이라 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공부라는 게 부분적인 형태의 진실과 지식의 추구 가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것과 어떻게 매치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능케 하는 공부라는 거죠. 또 그러한 질문들을 촉발시킬 수 있는 교육을 교수가 해야 하고요. 그러면 어떤 전공을 선택하든지, 학생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는 수업을 접했던 사람들은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든 간에, 다시 한 번 그 질 문들을 하게 되거든요. 지금은 어떤 한 영웅적인 개인이 어떤 곳에 나가서 사회 변화를 이끌기는 어려워요. 그건 망상에 가깝죠. 각자가 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각자가 잘할 때 그것이 궁극적인 가치에 대한 질문과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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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형태의 질문을 촉발시키는 경험을 대학이 해야 된다고 봐요. 교수도 그런 역할을 해야 되고, 학생도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조금 원론적이지만 저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들이 지금 시점에서 가 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아, 생활 도서관에 대해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대학이 여전히 가 치 연대를 도모하는 걸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제가 인터뷰 를 하는 것도 여러분과 일종의 가치 연대를 하는 방식이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가치연대를 할 때 참신한 기획이 요구된다는 거. 그래 서 어떻게든 더 많은 학생들이, 사람들이 함께 가치 연대를 할 수 있는 방 안을 모색을 해야 되죠. 그러니까 우리가 각각에 있는 자리 안에서 어떤 방 식으로든지 참신해야 돼요. 예를 들어, 생활도서관 사이의 연대를 통해서 인문 기획 같은걸 해보아도 좋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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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새내기에게 추천하는 도서, 그리고 수업이라는 전쟁터 생도 : 새내기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까도 잠깐 언급하셨지만 다시 한 번 여쭤볼게요. 새내기들에 꼭 권하고 싶은 두 가지 활동이 추천하신다면, 어떤 것 들이 있을까요? 함 : 아까 했던 이야기의 중복일 수도 있는데, 졸업하면서까지 현실적인 실용성 과는 무관한 독서의 지도나 목록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 어요. 그걸 가지려고 애써보았으면 좋겠다는. 그 독서목록을 만들려면 좋은 선 생님을 찾아야 되는데, 좋은 선생님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그리고 저도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것은 의지대로 안 되겠지만(웃음), 연애를 꼭 해보기를. 연애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요. 끝까지 가는 연애를 해 보라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요즘은 연애를 할 수 있는 기회 는 되게 많아졌는데, 끝까지 가는 연애를 하는 경우는 되게 드물어졌거든요. 왜 냐하면 연애가 오히려 쉬운 게 되니까. 쉽게 만날 수 있고, 쉽게 헤어질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인간이 덜 소중해지고 덜 중요해진 거잖아요. 또 어떤 사회적 조건 들을 고려한 연애도 많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사람이 전적인 게 아니라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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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고려의 대상으로 개입하는 거니까 사람이 쉬워진 거죠. 그래서 인간 대 인 간으로서 끝까지 가는 연애를 추천하고 싶어요. 끝까지 간다는 말이 무슨 말인 지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연애의 경험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한계라는 것을 성찰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계기가 돼요. 생도 : 끝까지 간다는 게 오래가는 연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혹시 감 정의 끝을 달리는 연애를?(웃음) 함 : 그게 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그런데 제가 왜 자꾸 끝까지 가는 연애 를 왜 해보라고 그러냐면, 끝까지 가는 연애의 경험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한계 라는 것을 성찰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계기가 돼요. 어떤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보다도. 그런데 그것은 끝까지 가는 연애를 통해서만 가능해요. 연애는 정말 우리가 서로 모르는 타인과 만나서, 아무 조건도 없이 전적인 타자와 만나면서, 그 타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거든요. 그 타인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되 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타인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뿐만 아니라, 내 자신 도 내 마음대로 컨트롤이 안 되는 경험이거든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분열도 겪고, 자기 자신의 한계도 알게 되요. 모든 유명한 문학 작품들이 대부분 다루는 소재가 연애에요. 그런데 그 연애의 내용 중에서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어요. 나이 40먹은 번듯한 대학 교수가 13살 아이에게 감정을 느껴서 마지막에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가 『롤리타』(Lolita)에 요. 어린 애를 보고서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파탄과 지탄을 당할지 교수 본인 도 알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죠. 연애에 정상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 어요. 다 불륜이죠(웃음)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연애의 경험을 통해서만이 세 계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인간의 지 성, 이성, 법이나 도덕이 가지는 무력함. 그런 것의 심층적인 것들을 연애에서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어떤 형태의 합리주의자 이성주의 혹은 도덕주의자도 연애를 하게 되 면,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도덕의 잣대나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법 과 가치라는 것들이 사실은 인간 삶의 진실과는 무관하고, 때로는 인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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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를 억압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돼요. 연애는 인간 탐구와 동시에 무엇보다도 자기탐구를 하는데 도움이 돼요. 그런데 물론 그게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 니지만(웃음). 그래서 ‘끝까지 가는’ 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어요. 제 이야기는 비슷해요. 우리가 모두 어떤 한계를 경험해 보아야한다는 거에요. 그래야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 도덕, 법 제도 같은 것의 허위를 알게 되거 든요. 그래서 문학이 제일 무서워요. 문학은 그러한 것들이 허위라고 말해주거 든요. 생도 : 교수님 수업과 관련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수업시간을 ‘사유의 전쟁터’ 라는 말로 표현하셨는데, 학생들이 교수님만의 사유를 따르면 전쟁터가 될 수 없잖아요? 교수님도 교수님 나름의 사유가 있고, 학생도 본인 나름의 사유가 있 고. 그게 충돌이나 대립할 때가 있어야 전쟁터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고. 그런 데 사실 대학이전에는 그런 수업을 접하기가 어려워서 처음 교수님 수업을 듣 는 학생들에게는 수업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 학에 올라와서 앞으로 교수님 수업을 듣게 될 학생들한테 수업과 관련해서 특 별히 해주고 싶을 말씀이 있으신지? 함 : 제 수업도 그렇지만 문학도 그래요. 문학도 좋은 수업도 답을 주는 게 아니 에요. 오히려 각자의 자기 방식 안에서 너무나 당연시했던 삶의 관행들에 돌직 구를 던지는 거죠. 68혁명이 있을 때 하이델베르그 대학생들이 써놓았던 낙서 들 중 유명한 게 그거잖아요. 세계가 잘 돌아가는데 잘 돌아가는 세계라는 기 계에 기름을 칠하지 말고 모래를 뿌리라고. 무언가 제동을 거는 게 중요해요. 인문학은 제동을 거는 거에요. 질문에 답은 각자가 찾아야 되고 영원히 못 찾을 수도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이 이장욱*씨인데 『 생년월일』이라는 시집에 나온 내용을 보면, 세계의 끝

* 고려대 출신 교수 겸 시인. 94년 『현대문학』에 등단.

이라는 시가 있거든요? 세계의 끝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세계의 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거 같아요? 그 시를 보면 세계의 끝은 그냥 여기에요. 길에 횡 단보도가 있고 신호등이 있어서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면 건너가고, 이 사회 에 제도적인 관행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일상 이 세계의 끝이라는 거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계가 세계의 끝이라는 거에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계는 질문을 던지지 않거든요. 올더스 헉슬 리가 쓴 『멋 진 신세계』가 왜 멋진 신세계에요? 소마라는 알약을 먹으면 행복감에 젖어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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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던지지 않거든요. 인문학자들이 보는 세계의 끝이라는 것은 질문 없는 세 계에요. 전쟁터가 된다는 것은 제가 답을 준다는 게 아니라 수업시간에도 이야 기하지만 제가 하고 있는 것은 답이 아닌 질문을 촉발시키는 것이고. 자꾸 질문 을 던지는 게 되게 중요하죠. 대학 수업이 또 그렇게 되어야 하고. 제가 존경한 교수님들의 수업이 그랬어요. 내가 잘 사는 것 같았는데, 잘 사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수업들. 이장욱의 시를 보면 또 그런 내용이 있거든요. “삐 라도 사라지고 인공위성도 상상하기 어려운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보험을 들었 다. 적금을 들었다.” 우리가 적금 드는 것 보험 드는 것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면 서 살잖아요. 보험과 적금을 드는 삶이라고 하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생각해보았 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 어떻게 보면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삶의 만족과 행복을 유예시키는 방식이거든요. 소비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죠. 내일의 안정망을 만드는 식으로 오늘 누려야 할 즐거움을 항상 포기하잖아요.

모두가 안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데, 문학은 거기에 의문을 던지는 거죠. 오늘 한국사회가 그렇잖아요. 고등학교 때는 연애도 하지 말고 놀지도 마라, 대 학교가면 다 해결 될 거야. 그런데 대학 오면 다들 영어공부하고. 회사 들어가면 다 될 거라고 하는데 회사 들어가면 집 걱정해야 되고. 20평 대 아파트 사면 30 평으로 옮겨야 하고. 모든 삶의 순간순간의 만족과 즐거움을 계속 적금되는 방 식으로 유예하는 삶이라는 거죠. 저는 적금통장이 없어요. 제일 이상한 삶을 사 는 거죠. 보험도 없고, 적금도 없는 삶을. 넌 늙어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국민 연금이 있잖아요(웃음) 모두가 질문 없이 관행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모두가 안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데, 문학은 거기에 의문을 던지는 거죠. 생도 : 마지막으로 꼭 추천하고 싶으신 책이 있다면? 함 : 20대에 제일 많이 읽고, 궁극적으로도 제 삶과 연관되었던 책이 몇 권 있어 요. 그 중 제일 중요한 3권을 뽑으라면 첫째로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그리고 마 르크스의 저작에서 파생된 모든 이들. 그게 되게 중요한 독서의 목록이었어요.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과의 만남. 프로이트나 라캉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 고 마지막 하나는 니체. 니체를 만나면서 명랑했던 제가 인생관이 약간 좀 비극 적으로 변했어요(웃음) 그래서 목소리 톤도 좀 낮아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색깔


열한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도 잿빛이 되고. 그런데 사실 니체는 그런 것을 말한 건 아니에요. 니체는 세계는 잿빛이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다. 가짜다. 그런데 이 세계가 가 짜라는 것에 절망하지 말고 가짜라는 세계에서 춤을 춰야한다고 말했어요. 그 게 제 인생의 큰 화두였어요. 그런 삶이 진짜로 가능한가. 그래서 제가 국문과 에서 강의할 때 제일 중요하게 강의했던 목록이 니체 부분이었어요. 그 세 가 지 부류의 책들은 잘못 만나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책들이죠(웃음)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이고. 본인도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책은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세계이든 인간의 내부이 든 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본질은 모순이라는 거에요. 마르크스의 자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무리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자본을 제어한다고 하더 라도, 그 자본의 운동과정에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일정한 형태의 불협화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 자본 중에서도 대자본과 소자본 내부의 계급투쟁도 있거든요. 그것의 불협화음을 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하나의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이야기하는 것도, 인간의 이 성이 아무리 합리적 조직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내 자신이 나하고 화해 가 안 된다는 거에요.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이고. 본인도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 그 런데 중요한 건 모순이라서 다 멸망한다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의 세계 가 불가능하다는 걸 말해주는 거죠. 이 세계가 온전한 하나의 사회가 가능하다 는 생각을 가지고 시스템을 꾸리면 전체주의가 되거든요. 그런데 저런 걸 이해 하게 되면 이게 불가능한 걸 깨닫고,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타협할 수 있는 계기 를 마련하게 돼요. 우리가 반드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 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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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쩡(김은정)

* 생활도서관은 운영위원들끼리 평등한 상태를 지향하여 나

이,학번에 관계 없이 말을 낮춘다. 이 과정에서 본명에는 흔히 ‘오빠’ “언니’ 등의 호칭이 붙기 때문에 별칭으로써 이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

이번 희망의 인터뷰에는 ‘새내기를 위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만 질문을 넘어서는 풍부한 답변들로 기대 이상의 인터뷰집이 나왔습니다. 새내기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대학생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볼거리가 많이 담겨있습니다. 저 희가 선생님들의 지혜를 잘 전달했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인터뷰에 응해 주신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대학이라는 공간과 대학생의 역할을 고 민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인터뷰집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생한 생 도 운영위원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열한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알리(임상옥)

처음 인터뷰를 기획했을 때 인터뷰 예상 시간은 30분이었습

니다. 인터뷰에 응하는 교수님들의 대답도 한결 같았습니다. “해줄 수 있 는 말이 많지는 않지만, 일단 하겠습니다.” 짧고 간결한 대답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네 분의 교수님 모두와 2시간 이상씩 인터뷰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느꼈던 점은 ‘교수님들’ 과 (서문에서 밝힌 바 있는)저 혹은 저희의 고민의 결이 다르지 않다는 사 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고민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동시에, 당신들 나름대로 고민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지니고 있었던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고민이 저 혼자만 하는 의미 없는 고민은 아니라는 확 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희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 이 인터뷰 집 을 본 읽으신 분들도 아무쪼록 조금이나마 확신을 가지고 더 즐겁게 자신 들의 고민을 심화하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같이 고민을 나누며 활동하 고 싶다면 생활도서관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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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스망(김경진 )

안녕하세요, 희망의 인터뷰에 (잠깐이나마) 참여했던 쟈

스망입니다.:) 새내기들을 위한 희망의 인터뷰, 방황하는 새내기 시절을 보 냈던 본인이라 꼭 참여하고 싶었고, 그만큼 의미 깊었던 기획 사업이었습 니다. 그래서 개인사정으로 끝까지 참여하지 못해서 더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직접 인터뷰를 하고, 녹취록을 풀면서 제가 얻었던 도움이 곧 여러 분이 몇 분 혹은 한두 시간 이 책자를 읽으면서 얻으실 도움 혹은 깨달음이 겠지요. 조금 욕심을 낸다면 추후의 희망의 인터뷰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세요. 물론 함께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요. 생도로 오세요! 새내기 여러분, 우리 하고 싶은 거 하고, 할 말하고 살아요. 파이팅!

가분(박원익)

편집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교수님들의 학창시절과, 본인

들이 생각하는 대학의 의미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좋 았다. 새내기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알찬 인터뷰였다. 권 보드래, 조재 룡, 함돈균, 오인영 교수님 모두 특색이 다른 분들이지만 의외로 비슷한 말 씀을 하셔서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연애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대학의 역


열한번째 희망의 인터뷰

별일 없이 산다 할이라든가, 학창시절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바라보았던 시각이라든가. 대학 내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문화적 간극을 좁히는 이와 같은 기획이 앞 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이후에는 사회과학으로도 영역을 넓히면 좋 을 것 같다.

시나몬(황수연 )

편집이 마무리되어가고 인쇄가 다가오면 항상 초조한 마음이

듭니다. 어디 오류 난 부분은 없을까, 인터뷰이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 하는 부분은 없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유난히 큰 것을 보니 모르긴 몰라도 이 작은 책에 마음을 많이 썼나봅니다. 교수님들의 학창시절은 나와는 온전히 다 른 종류의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얼굴에 ‘곧 교수’라 붙여놓고 친구도 안 만 나고 연애도 패스, 책에만 몰두하지 않으셨을까 상상해왔습니다. 때문에 나와 는 너무 다르고, 그래서 사실 우리의 고민엔 공감해주지 못하실 거란 마음도 있 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들 역시 지금 나의 고민을 같은 시기에 지니셨다는 이 야기를 들으며, 또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너무나도 공감하며, 놀라움도 일었 지만 무엇보다도 따뜻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신 교수 님들과, 덕분에 반짝이는 기억을 함께 만들어간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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