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editorial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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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작가 강지민요약본

신경숙 지음

강지민 그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존경한다고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


사랑하는 어머니, 이제는 더 행복해지시기를 바라며 드림


차례 1장.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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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엄마와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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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결국,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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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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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사진 강지민 작가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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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무도 모른다. 잃어버린 엄마,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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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잃어버린 엄마, 그리고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오빠집에 모여 있던 너의 가족들은 궁리 끝에 전단지를 만들어 엄마를 잃어버린 장소 근처에 돌리기로 했다. 일단 전단지 초안을 짜보기로 했다. 옛날 방식이다.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그것도 엄마를 잃어버렸는데, 남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 은 몇가지 되지 않았다. 실종신고를 내는 것, 주변을 뒤지는 것, 아무나 붙잡고 이 런 사람 보았느냐 묻는 것,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는 남동생이 인터넷에 엄마를 잃 어버리게 된 이유와 잃어버린 장소와 엄마의 사진을 올리고 비슷한 분을 보게 되 면 연락해달라고 게시하는 것. 엄마가 갈 만한 곳이라도 찾아다니고 싶었으나 이 도시에서 엄마 혼자 갈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니 문안 작성은 네가 해라, 오빠가 너를 지명했다. 글을 쓰는 사 람. 너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귀밑이 붉어졌다. 과연 네가 구사 하는 어느 문장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 엄마의 사진을 어느 걸 쓰느냐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최근 사진을 붙여야 한다 는 데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누구도 엄마의 최근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너는 언제부턴가 엄마가 사진 찍히는 걸 매우 싫어했다는 걸 생각해냈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엄마는 어느 틈에 빠져나가, 사진에는 엄마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아버 지 칠순 때 찍은 가족사진 속의 엄마 얼굴이 사진으로 남은 가장 최근모습이었다. 그때의 엄마는 물빛 한복을 입고 미장원에 가 업스타일로 머리를 손질하고 입술 에 붉은빛이 도는 루주를 바른,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사진 속 엄마는 실종되 기 전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그 사진을 따로 확대해 붙여본들 사람들이 그 사람이 이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것이 네 남동생의 의견이었다. 인터넷에 그 사진을 올렸더니 어머님이 예쁘시네요, 길을 잃어버릴 분 같지 않은데요,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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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올라온다고 했다. 너희는 각자 엄마의 다른 사진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찾 아보기로 했다. 큰오빠는 너에게 문구를 더 보충해보라고 했다. 네가 큰오빠를 물 끄러미 바라보자 좀더 호소력 있는 문구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호소력 잇는 문구. 어머니를 찾아주세요, 라고 쓰니 너무 평범하다고 했다. 어머니를 찾습니다, 라고 쓰니 그게 그거고 어머니라는 말이 너무 정중하니 엄마, 로 바꿔보라고 했다. 우리 엄마를 찾습니다, 라고 쓰니 어린애스럽다고 했다. 윗분을 보면 꼭 연락 바랍니다, 라고 쓰자 큰오빠가 넌 대체 작가라는 사람이 그런 말밖에 쓸 수 없냐! 버럭 소리 를 질렀다. 큰오빠가 원하는 호소력 있는 문구가 무엇인지 너는 생각해낼 수가 없 었다. 호소력이 따로 있어? 사례를 한다고 쓰는 것이 호소력이야, 작은오빠가 말 했다. 사례를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 라고 쓰자 사례를 섭섭지 않게? 이번엔 올 케가 그렇게 적으면 안된다고 했다. 분명한 액수를 적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다고. - 그럼 얼마를 적을까요? - 백만원? - 그건너무적어요. - 삼백만원? - 그것도 적은 것 같은데? - 그럼 오백만원. 오백만원 앞에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너는 오백만원의 사례금을 드리겠습 니다, 라고 적고 마침표를 찍었다. 작은 오빠가 사례금: 오백만원으로 고치라고 했 다. 남동생이 오백만원을 다른 글자보다 키우라고 했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 엄마 의 사진을 찾아 보고 적당한 게 있으면 바로 네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했다. 전단지 문안을 더 보충해서 인쇄하는 일은 네가, 그것을 각자에게 배송하는 일은 남동생 이 맡기로 했다. 전단지 나눠주는 아르바이트생을 따로 구할 수도 있어, 네가 말하 자, 그건 우리가 해야지, 큰오빠가 말을 받았다. 평일엔 각자 일을 하는 틈틈이, 주 말엔 모두 다함께. 그렇게 언제 엄마를 찾아? 네가 투덜거리자 큰오빠는 해볼 수 있는 일은 다하고 있어, 이건 가만있을 수 없으니까 하는 일이다고 했다. 해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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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는 일 뭐? 신문광고. 신문광고가 해볼 수 있는 일의 다야? 그럼 어떻게 할까? 내 일부터 모두 일을 그만두고 이 동네 저 동네 무조건 헤매고 다닐까? 그렇게 해서 엄말 찾을 수 있다고 보장만 되면 그리해보겠다. 너는 큰오빠와의 실랑이를 그만 두었다. 지금까지의 습성. 오빠니까 오빠가 어떻게 해봐라! 고 늘 미루는 마음이던 습성이 이런 상황에도 작동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의 가족들은 큰 오빠 집에 아버지는 두고 서둘러 헤어졌다. 헤어지지 않으면 또 싸우게 될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줄곧 그래왔다. 엄마의 실종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상의하러 모 였다가 너의 가족들은 예기치 않게 지난날 서로가 엄마에게 잘못한 행동들을 들춰 내었다. 순간순간 모면하듯 봉합해온 일들이 툭툭 불거지고 결국은 소리를 지르고 담배를 피우고 문은 박차고나갔다. 너는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얘길 처음 듣자마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식구들 중에서 서울역에 마중나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고 성질을 부렸다. -그러는 너는? 나? 너는 입을 다물었다. 너는 엄마를 잃어버린 것조차 나흘 후에나 알았으니까. 너의 가족들은 서로에게 엄마를 잃어버린 책임을 물으며 스스로들 상처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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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본사람이 있다. 파란 슬리퍼와 엄마의 눈

/한여자가 본 엄마 한 여자는 주춤주춤 그 앞으로 와서 저기요, 용산2가동 동사무소 앞에서 이분을 본 것 같아요, 전단지 속 그의 엄마를 가리켰다.여자는 발등에 상처를 입고 있었어요, 라고 말햇다.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슬리퍼가 엄지 쪽 발등을 파고 들어갔고 살점이 떨어져나가 패어있었다고 했다. 고름이 밴 상처 부위에 자꾸 파리가 날아와 앉으니까 귀찮은지 손을 뻗어 쫓곤 했어요. 아플 것 같 은데도 상처엔 무심한 듯 동사무소 안을 기웃기웃 거리고 있었어요. 일주일 전 일 이긴 해요. /사내아이들이 본 엄마 그가 막 대문을 나서려 할 때 닫힌 방문이 다시 열리고 사내아이가 저기요! 그를 불러세웠다. -이 할머니 며칠 전에 여기 때문 앞에 앉아 있었던 거 같은데... 그가 다가가자 또 한 사내아이가 얼굴을 내밀며 아니라니까! 부정했다. -이 할머닌 젊잖아. 그 할머닌 아주 쭈그렁쭈그렁 했어. 머리도 이렇게 안 생기 고... 거지였잖아. -그래도 눈이 닮았잖아. 눈만봐봐. 눈이 이렇게 생겼었잖아....찾아주면 진짜 오백 만원 줘요? -찾지 못해도 얘기만 정확히 해주면 사례를 하겠다. 그는 사내아이들을 방 바깥으로 불러내었다. 방문은 닫은 처녀들이 문을 열고 내 다보았다. -그 할머니는 저아래 호피집 할머니야. 치매 걸려서 집에 가둬놨는데 몰래 나와서 길을 잃었나보던데. 호프집 어저씨가 와서 데려갔어요. -그 할머니 말구 이 할머니도 봤는데... 발등이 찍혀서 고름투성이였어요. 자꾸 바 피가 달라붙으니까 쫓고 있었는데....냄새나고 더러워서 자세히는 못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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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디로 갔는 지도 봤냐? 그는 다급히 사내애에게 물었다. -아뇨 난 그냥 들어왔죠. 자꾸 따라들어오려고 해서 대문을 쾅 닫았는데.... 사내애 말고는 엄마 같은 사람을 봤다는 이가 없었다. /약사가 본 엄마 -근데 어쩌다가 어머니를 잃어버렸소? 혹시 치매요? 여동생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언제 보셨어요? 제 엄마 같아요? 여동생이 전단지를 내밀며 엄마를 가리키자 약사는 엿새전에 보았다고 했다. 약국 건물 삼층에서 살고 있다는 그 약사는 새벽에 약국 셔터를 열려고 내려왓는데 옆 건물 분식집 쓰레기통 옆에 늙은 여자가 자고 잇었다고 했다. 파란색 슬리퍼를 신 고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엄지 쪽 발등이 깊이 패어 뼈가 들여다보일지 경이었다고 했다. 상처가 곪아터지고 또 터져서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햇 다. -내가 약사인데 그 상처를 보고선 그냥 둘 수가 없었오. 낯선 사람인 내가 발을 만 지는 데도 무기력하게 가만있었소. 그 정도 상처면 소독할 때 비명을 질러야 옳은 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내가 다 의아했소. 염증이 오래되어 농이 계속 흘러 나왔소. 냄새도 지독히 났소. 소독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르오. 소독을 마치고 약을 바르고 밴드로는 안되겠기에 붕대로 감아주었소. 아무래도 누가 보호를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경찰에서 전화를 걸려고 안으로 들어와 전화를 걸려다가 혹시 누구 아 는 사람이 있나 불어나 보려고 다시 나왔더니 배가 고픈지 쓰레기통에 버려진 김 밥을 집어먹고 있습디다. 내가 밥을 먹게 해줄테니 그건 버리라고 해도 안 버려서 내가 뺏어다 버렸소. 버리라고 해도 안버리더니 뺏으니까 도 가만있습디다. 우선 약국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소. 말을 못 알아 듣는지 그래도 가만있습디다. 그 이후로 아무에게도 엄마를 봤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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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엄마와 가족의 추억 엄마는 아팠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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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추억, 큰딸 큰딸의 기억회상

너의 엄마는 몇해 전부터 내 생일은 따로 챙기지 마라, 했다. 아버지의 생일이 엄 마의 생일 한달 전이었다. 예전엔 생일이나 다른 기념할 일이 생기면 너를 비롯한 도시의 식구들이 j시의 엄마 집으로 이동하곤 했다. 다 모이면 직계만 스물둘이었 다. 엄마는 식구들이 모이는 왁자한 상태를 좋아했다. 식구들이 모이게 되면 며칠 전에 새 김치를 담그고, 시장에 나가 고기를 끊어오고, 치약과 칫솔들을 준비했다. 돌아갈 때 한 병씩 나눠주려고 참기름을 짜고 참깨 들깨를 따로 볶아 찧었다. 가족 들을 기다릴 즈음의 너의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나 시장통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 야기할 때 단연 활기를 띠었고 은근히 자부심이 배어나는 몸짓과 말투를 보였다. 헛간에는 엄마가 철따라 담가놓은 매실즙이며 산딸기즙이 담긴 크고 작은 유리병 들이 즐비했다. 도시의 식구들에게 퍼줄 황석어젓이며 멸치속젓이며 조개젓갈 들 이 엄마의 항아리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양파가 좋다는 말이 들리면 양파즙을 만들어서, 겨울을 앞두고는 감초를 넣은 늙은 호박즙을 짜서, 도시의 식구들에게 보냈다. 너의 엄마 집은 도시의 식구들을 위해 사시사철 뭔가 제조하는 공장과도 같았다. 장이 담가지고 청국장이 발효되고 쌀이 찧어지는, 언제부턴가 도시 식구 들이 J시에 가는 일보다 엄마가 아버지와 함게 도시로 오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가 아버지와 엄마의 생일도 도시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 걸로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움직임이 단출하긴 했다. 급기야 엄마는 내 생일은 아버지와 함께 쇠자, 했 다. 한여름이라 날도 더운데다 이틀사이로 지내야 하는 여름제사가 두 번이나 있 는 그틈에 언제 생일을 다 챙기겠느냐고 했다. 처음에 너의 가족들은 엄마가 그리 주장해도 그게 무슨 소리냐며 엄마가 도시에 오지 않으려 하면 몇몇이라도 시골집 에 내려가 엄마 생일을 챙기곤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 생일에 엄마의 선물까지 함 께 사기 시작했고 엄마 생일 당일은 슬그머니 지나가게 되었다. 식구들 숫자대로 양말 사기를 좋아하던 엄마의 장롱엔 가져가지 않은 양말들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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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에게 퍼줄 황석어젓이며 멸치속젓이며 조개젓갈들. 엄마는 양파가 좋다는 말이 들리면 바로 양파즙을 만들어서, 도시의 식구들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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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식구들에게 퍼줄 황석어젓이며 멸치속젓이며 조개젓갈들이 엄마의 항아리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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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추억, 아픈엄마 큰딸의 기억회상

지난 가을까지만 해도 너는 너의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 하는지, 엄마가 화났을 때 어떻게 해야 누그러지는지, 엄마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지. 누가 지금 엄마가 뭘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으면 고사를 말리고 있을걸 요, 일요일이니 성당에 가셨겠는데, 십초내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의 생 각은 지난가을에 조각이 났다. 엄마에게 너란 존재가 딸이 아니라 손님이 된 듯 한 기분을 느낀 것은 엄마가 네 앞에서 집을 치울 때였다. 어느날부턴가 엄마는 방 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걸었고, 식탁에 음식이 떨어지면 얼른 집어 냈다.. 예고 없 이 엄마 집에 갈 때 엄마는 너저분한 마당을, 깨끗하기 못한 이불을 연방 미안해했 다. 냉장고를 살피다가 네가 말려도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엘 나갔다. 가족이란 밥 을 다 먹은 밥상을 치우지 않고 앞에 둔 채로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일을 할 수 있 는 관계다. 어질러진 일상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엄마 앞에서 네가 엄마에게 손님 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메워진 우물 위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작은 문안으로 들어서며 엄마! 하고 불렀으 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막 기울기 시작한 가을볕이 서향집 마당에 가득 차 있었 다. 집안으로 들어가 살폈지만 거실에도 방에도 엄마는 없었다. 집은 어수선했다. 식탁 위 물병 뚜껑은 열려 있고 물컵은 개수대에 놓여 있었다. 거실 바닥에 깔린 돗자리엔 걸레바구니가 엎어져 있고 소파엔 아버지가 벗어놓은 듯 때묻은 셔츠가 팔을 벌리고 걸려 있었다. 서향집인 탓에 사위어가 는 중인데도 강한 빛이 빈 공간 에 스며 있었다. 엄마! 텅비었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엄마! 하고 한번 더 불러보았 다. 그러곤 현관문을 열고 되나오다가 옆마당의 문이 달리지 않은 헛간에 놓인 평 상위의 엄마를 발견했다. 엄마는 평상에 누워 있었다. 엄마!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 다. 처음에 너는 엄마가 잠이 들었나? 생각했다. 엄마는 낮잠을 자는 분이 아니었 다는 생각에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엄마는 이마에 손등을 얹고서 무언가를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엄마의 입술은 벌어져 있고 어찌나 이마를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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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찌푸렸는 지 미간에 굵은 철사 같은 주름이 져 있었다. -엄마! 네가 불러도 엄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엄마!엄마! 네가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엄마를 마구 흔들자 너의 엄마가 실눈을 떴다. 눈이 붉게 충혈되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너의 엄마는 네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 고통에 짓눌린 채 엄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보 이지 않는 어떤 음흉한 것이 엄마의 머리를 찍어내리고 있지 않음에야 지을 수 없 는 표정이었다. 너의 엄마는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 너는 너도 모르게 평상에 올라 엄마의 비참한 얼굴을 너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엄 마의 얼굴이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리지 않도록 겨드랑이에 팔을 넣었다. 어떻게 엄마가 이렇게 혼자 두는가. 누가 엄마를 거기 헛간에 내버리고 간 듯 너의 의식이 분한 생각이 순간 스쳐갔다. 인간이란 그렇게 이기적이다. 그 순간 너는 엄마를 헛 간에 내버린 사람이 따로 있기라도 한 듯 노여움을 느끼며 분개했으니 말이다. 너 의 엄마를 헛간에 혼자 둔 건 다름아닌 너이기도 한데. 지나치게 놀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앰뷸런스를 불러야 하나, 엄마를 방으로라도 옮겨야 하나, 아 버진 어디 갔나? 생각들이 두서없이 오갔으나 너는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엄 마를 무릎에 누이고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고통에 일그러진 엄마의 비참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이마를 찍어누르는 듯한 엄마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엄마 는 맥이 빠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이 짓누를 때 안간힘을 쓰며 거기에서 벗어 나보려고 했던 기장이 한순간에 풀린 듯 엄마의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엄마! 엄마 의 육체를 끌어안으려 하는 너의 심장이 뛰었다. 너는 처음으로 엄마가 이렇게 죽 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눈을 뜬 엄마의 통공이 네게서 멎었다. 왜 네 가 눈앞에 있는지 놀랄 만도 한데 너의 엄마의 동공은 동요가 없었다. 무엇에 반응 하기에는 힘이 달려보였다. 얼마 뒤에야 엄마는 생기를 잃은 무감각한 얼굴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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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너는 귀를 기울였다. -나는 니 이모가 죽었을 때 울 수 조차 없었단다. 핏기를 잃은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 공허해서 너는 뭐라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그랬어? 울고 싶으면 울지. 무감각해 보이긴 하지만 점점 네가 알고 있는 엄마의 얼굴로 돌아오는 것에 조금 은 마음이 놓인 네가 물었다. 너의 엄만 눈을 무심하게 껌벅였다. -나는 이제 울 수 조차 없어. -.............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퍼 너는 석양빛을 받으며 너의 무릎에 얹힌 엄마의 얼굴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응시했다. 엄마가 두퉁을 앓았었나? 울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곧 송아지를 낳을 암 소처럼 빛나고 둥글던 엄마의 검은 눈은 주름 속에 거의 감춰져 작아져 있었다. 붉 은 기가 사라진 두툼한 입술은 건조한 채 부르터 있었다. 너는 이모의 죽음 앞에서 도 울 수 없을 만큼 엄마가 극심한 두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너는 평 상에 홀로 떨여져 있는 엄마의 외로운 팔을 들어 배에 얹어 주었다. 일생을 노동에 찌든 엄마의 손등에 퍼진 검버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날 밤 너는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머리에 손을 얹고 잠들어 있었 다. 맨발이었다. 추운지 열 발가락이 안으로 오므라들어 있었다. 소박한 밥상을 차 려 저녁을 먹은 시간과 엄마와 함께 집을 사이에 두고 마당을 돌며 나눈 얘기들이 산산 조각나는 느낌이었다. 11월의 새벽이었다. 이불을 가져와 엄마에게 덮어주었 다. 양말을 꺼내와 맨발에 신겨주었다. 그리고 엄마가 정신이 들 때까지 엄마 옆에 앉아있었다. 너는 더 이상 엄마를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두통은 수시로 엄마의 육체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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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니 이모가 죽었을 때 울 수 조차 없었단다. -왜 그랬어? 울고 싶으면 울지. 핏기를 잃은 엄마의 얼굴이 너무나 공허해서 너는 뭐라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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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이 심해진 엄마 병원을 가다

두통은 너의 엄마를 갉아먹는 듯했다. 너의 엄마는 급속히 활달함과 생기를 잃고 누워 있는 일이 많아 졌다. 몇 안되는 즐거움이던 백원짜리 화투치기에도 너의 엄 마는 집중할 수가 없는 듯했다. 더불어 너의 엄마는 모든 일에 무감각해졌다. 한번 은 행주를 삶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도 너의 엄마는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빨리를 삶는 솥이 바짝 눋고 급기야는 행주가 타서 부엌이 연기 에 잠기는데도 너의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기가 치솟는 걸 보고 옆집 사 람이 이상하게 여겨 들여다 보지 않았다면 집이 불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의 엄마는 큰오빠에게 알리지 않으면 너를 따라 서울에 가갔다고 겨우 대답했 다. 너를 따라 집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오빠네에 알리지 않을 것을 다짐받았다. 엄마의 두통의 원인을 찾으러 다니다가 의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오래전에 너의 엄마가 뇌졸중을 앓았다는 것이다. 뇌졸중이라니?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엄마의 뇌를 촬영한 사진 속의 한 점을 가리키며 뇌졸중이 지나간 흔적이 라고 했다. 뇌졸중이 어떻게 본인도 모르게 지나갈 수 있단 말인가. 의사는 본인이 모를 수는 없다고 했다. 피가 고여 있는 걸로 보아 본인도 그 충격을 감지했을 거 라고 했다 의사는 엄마의 몸은 항상 아파왔다고 했다. 엄마의 몸은 늘 진통이 함꼐 하는 상태라고 했다. -늘 아프다니요? 엄만 건강한 편이었는데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감춰둔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와 너의 손등을 찍어 내리는 것 같았다. 엄마의 뇌 속에 고여있는 피를 빼냈지만 엄마의 두통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사 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두퉁이 밀려들면 마치 금방 깨지는 유리항아리를 받쳐 들듯 두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대문을 열고 들어와 헛간의 평상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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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몸은 늘 진통이 함께하는 상태라고 했다. 엄마의 몸은 항상 아파왔다고 했다. 너는 더 이상 엄마를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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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엄마 엄마는 진짜 부엌을 좋아했을까

-엄마는 부엌이 좋아? 언젠가 네가 묻자 너의 엄마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엌에 있는 게 좋았냐고 . 음식만들고 밥하고 하는 거 어땠었냐고. 엄마가 너를 물끄러미 보았다. -부엌을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냐? 해야 하는 일이니까 했던 거지. 내가 부엌에 있 어야 니들이 밥도 먹고 학교도 가고 그랬으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믄서 사냐? 좋고 싫고 없이 해야하는 일이 있는 거지. 너의 엄마는 왜 그런 걸 묻느냐? 하는 표정으로 너를 보다가 좋은 일만 하기로 하믄 싫은 일은 누가 헌 다냐?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뭐?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너의 엄마는 깊은 숨을 내쉬어었다. -그래도 니들이 자랄 때가 좋았어야. 머리에 수건을 고쳐쓸 틈 조차 없었어도 니 들이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숟가락 부딪치며 밥 먹고 있는 거 보믄 세상에 부러울 게 뭬 있냐 싶었재. 다들 소탈했어야. 호박 된장 하나 끓여줘도 맛나게들 먹고, 어 찌다 비린 것 좀 쪄주면 얼굴들이 환해져서는...다들 먹성이 좋아서 니들이 한꺼번 에 막 자랄 때는 두렵기도 하더라. 학교 갔다오믄 먹으라고 감자를 한솥 삶아놓고 나갔다 오믄 어니새 솥이 텅 비어 있곤 했으니까. 그야말로 광의 쌀독에서 쌀이 줄 어드는 게 하루가 다르게 보일 때도 있었고 그 독이 빌 때도 잇었어. 저녁밥 지을 라고 양석 꺼내려고 과에 갔는디 쌀독 바닥에 바가지가 닿을 때면 아이구 내새끼 들 낼 아침밥은 어쩐디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시절이니 부엌일이 싫고 자시고 도 없었고나. 큰 솥 가득 밥을 짓고 그옆의 작은 솥 가득 국 끓일 수 있음 그거 하 느라 힘들단 생각보다는 이거 내새끼들 입속으로 다 들어가겠구나 싶어 든든했지 야. 니들은 지금 상상도 안될것이다마는 그르케 양석이 떨어질까봐 노심초사하던 시절이 우리 시절이네. 다들 그러고 살았다. 먹고사는 일이 젤 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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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부엌이 좋아? - 부엌을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냐? 먹고사는 일이 가장 중하던 그때가 인생에서 행복한 때였다고 말하며 웃던 너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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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얼른 대문을 들어선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소리치다시피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나왔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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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남편이 느끼는 빈자리

-나, 왔네! 당신은 얼른 방문을 열어보았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왔단 말일세... 텅빈 방을 향해 혼자 웅얼거리던 당신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 어째 그런 생각 이 들었을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뭐하러 가느냐며 기어이 기차를 타고 이집으 로 올 때 당신의 마음 한켠에 도사리고 있던 희망은 이집에 들어서며 안에 있는가? 나, 왔네 하면 방을 닦다가 혹은 헛간에서 채소를 다듬다가, 부엌서 쌀을 씻다가 인제 오요! 예의 그 목소리고 아내가 반겨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집은 텅 비어 있 었다. -이봐 ......나 베고픈디. 뭐 좀 먹었으면 좋겄는디. 당신은 헛간에 놓여있는 빈 평상을 향해 웅얼거렸다. 하던일을 하다가도 당신이 뭐 좀 먹으면 좋겠다고 하면 주저없이 하던 일을 멈추 고 당신 곁으로 와서는 두릅전부쳐볼까? 자실라요? 하던 아내. 아내한테 미역국 한번 끓여줘본 적 없으면서 아내가 해주는 모든 것은 어찌 그리 당연하게 받기만 했을까. 당신은 이집을 내키는 대로 떠났다가 돌아오면서도 아내가 이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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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내를 잃고 나서 자신의 빠른 걸음걸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 했다. 평생을 당신은 늘 아내보다 앞서서 걸었다. 어느 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모퉁 이를 돌기도 했다. 뒤처져서 아내가 당신을 부르면 당신은 왜 그리 걸음이 늦느냐 고 타박했다. 그러는 사이 오십년이 흘렀다. 그런데 한 걸음이나 두 걸음 늦었을 뿐인 그 서울역에서 당신이 먼저 탄 지하철이 출발해버린 뒤로 아내는 여태 당신 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내는 그토록 아팠던 것을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부턴가 아내가 개밥을 주러 간다면서 우물가로 향한다는 것을, 어딜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는 대문앞에 우두커니 서있다 방으로 돌아오기 일쑤라는 것을 당신은 알았다. 당신은 기진맥진 한 듯 아내가 방으로 기다시피 들어와 겨우 베개를 찾아 베고 이마를 찡그린 채 드 러눕는 것을 보기만 했다. 언제나 아픈사람은 당신 이었고 그런 다신을 보살피는 사람이 아내였다. 어쩌다가 아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당신은 나는 허리가 아프 다고 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아프면 아내는 이마를 짚어보고 배를 쓸어보고 약국 에서 약을 사오고 녹두죽을 끓이고 하였으나 당신은 약 지어다 먹으라곤 하곤 그 만이었다. 당신은 이제야 아내가 장에 탈이 나 며칠씩 입에 곡기를 끊을 때 조차 따뜻한 물 한 대접 아내 앞에 가져다줘 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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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제야 아내가 장에 탈이 나 며칠씩 입에 곡기를 끊을 때 조차 따뜻한 물 한 대접 아내 앞에 가져다줘 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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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저편에서 딸애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버지...사람들이 다 엄말 잊어버렸나봐. 엄마가 그날 왜 그렇게 머리가 아프셨 는 줄 알아요? 저보고 나쁜년이라고 하셨거든요... 생신인데 저는 참석도 못할 거 같고 해서 제가 중국서 전화를 걸어서 뭐 하시느냐 고 물었더니 병에 술을 담고 계신다잖아요. 막내 갖다준다면서, 막내가 술 좋아하 잖아요. 모르겠어요. 그럴 일도 아닌데 순간 너무나 화가 났어요. 막내는 진짜 술 좀 끊어야하는데..엄마는 그저 아들이 좋아하는 거니까 가져다 주고 싶어서 또 챙 기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엄마한테 그 무거운거 가져가지 말라고, 그거 먹고 또 취해서 술주정하면 엄마가 책임질거냐고 제발 좀 현명하게 굴라고..그랬거든요. 엄마가 힘없이 그렇구나 하시며 그럼 읍내로 떡이나 맞추러 가야겠다고 하셨는 데..해마다 아버지 생신날 올라오시면서 떡 해오셨잖아요. 또 제가 떡은 무슨 떡이 냐고 그 떡 해와야 아무도 안 먹는다고 엄마 앞에서는 나눠가지고들 가서 냉동실 에 처박아 놓는다고 촌스럽게 굴지말고 그냥 올라가시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저 보고 냉장고에 떡 처박아놨느냐고 물으시길래 그렇다고 삼년 전 것도 그대로 있다 고 했더니 엄마가 울어요. 엄마 올어? 물으니까 엄마가 너는 나쁜년이다....그러셨 어요. 난 엄마가 좀 편히 움직이시라고 한 얘기였는데. 엄마한테 나쁜 년이란 소릴 들으니까 제 머리꼭지가 돌았었나봐. 신경질이 너무 나서 그래, 엄마는 나쁜 딸 낳 아서 좋겠다! 그래! 나는 나쁜 년이야! 소리를 팩 치구선 전화를 끊었지 뭐예요.. -..... -엄마 소리지르는 거 너무 싫어하시는데....모두들 엄마한테 소리지르잖아요, 우 리는. 전화를 다시 걸어서 사과하려고 했는데 그만 밥먹고 거기 구경다니고 사람 들하고 얘기하느라고 깜박 잊어 버렸어요.다시 전화를 드려서 사과만 했어도 엄마 가 그리 머리가 아프진 않으셨을 텐데..그랬으면 아버지 뒤를 잘 따라다니셨을 텐 데. -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나는 평생 니엄마한테 말을 안하거나 할 때 를 놓치거나 알아주겄거니 하며 살었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 딸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당신의 얼굴도 눈물범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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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람들이 다 잊어도 딸은 기억할 것이다.

아내가 이세상을 무척 사랑했다는 것을, 당신이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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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결국, 이별 엄마의 작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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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편지 식구들 모두에게

나는 이제 갈란다.... 사랑하는 내 딸. 얼굴을 좀 펴봐라아. 이렇게 고단한 얼굴을 하고 잠을 자면 주름 이 진다. 동안이던 네 얼굴은 사라지고 없구나. 몸이 내뜻을 따라주지 않았으나 정 신이 맑을 땐 니생각을 많이 했고나. 이제 걸음마를 뗀 막내까지 세 아이를 길러야 할 너를, 네 인생을. 그럴 때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김치를 담가 부쳐 주는 거 밖에 없다는 게 참 미련스럽게 느껴지곤 했다아. 간혹 정신이 맑아질 때면 너와 네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할일이 생각났어. 그때면 살아갈 의욕이 생기기도 했 었는데...이리되었네. 내가 신고 있는 굽이 다 닳아 버린 파란 슬리퍼를 벗고 싶어. 내가 입고 있는 먼지투성이 여름옷도. 이제는 나도 이게 나인지 알아볼 수 없는 이 몰골에서도 벗어나고 싶어. 머리통이 깨지는 듯하고나. 자, 얘야. 머리를 들어보 렴. 너를 안고 싶어. 나는 이제 갈거란다. 잠시 내 무릎을 메고 누워라. 좀 쉬렴.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라. 엄마는 네가 있어 기쁜날이 많았으니. 나는 이제 갈라요..... 집이 꽁꽁 얼어 있네. 문은 왜 잠가놨을 꼬. 동네 아이들이 들어와 놀기라도 하게 열러두지. 온기라곤 일절 없네. 얼음덩어리 같아. 눈이 이리 내렸는데 아무도 눈을 쓸어주지 않았구나. 마당 가득 흰눈이네. 내가 없다고 누구도 이집을 들여다보지 않는 모양이네. 인기척이 끊긴 지 오래되었군. 형철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오토바 이가 럿간에 세워져 있네. 이런, 꽝꽝 얼었네. 제발 오토바이 좀 타지 말았으면 하 요. 어디, 그 나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시우. 서울에 갔소? 거기서 나를 찾고 있소? 큰딸애가 일본에 가면서 내려보낸 책들이 쌓여 있는 방도 냉방이구려. 글을 배우 러 다닌다고 당신한테 말할 수 없어 외롭기도 했네. 그런 말을 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소. 글을 배우게 되면 딸이 쓴 책을 내 눈으로 읽는 거 말고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었네. 내가 이리되기 전에 식구들 모두에게 각각 작별편지를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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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봄날 새싹들 처럼 정신없이 솟아나는 이 기억들을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모르 겄네. 잊혀진 온갖 것들이 다 몰려오네. 부엌 살강에 엎어진 밥그릇이며 장꽝의 크 고작은 항아리들이며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좁다란 나무계단이며, 흙담 밑에서 태 아나 담장을 타고 무성히 뻗어나가던 호박넝쿨까지. 집을 이렇게 꽁꽁얼게 두지 말아요. 힘겨우면 작은 며늘애에게 동울음 청해보든 지라. 형철 아버지 당신은 몇해 전 취해 있을 때 누군가 집이 어디냐 물으니 역촌 동 그럽디다. 형철네가 그 역촌동에서 떠난 지 이십년이 지났는데요. 형철이가 서 울에서 역촌동에 첫집을 가졌을 때도 그저 묵묵히 있더니 당신 마음에도 무척이나 대견했던 게지라오. 그래서 취중에 이 집은 잊어버리고 기껏 일년에 많아야 서너 번 손님처럼 들러서 하루나 길어야 이틀 자고 오던 그 집을 댔겠재요. 딸애가 깨끗하게 닦아놓은 하얀 운동화짝 같은 것이 햇볕 아래 말라가는 풍경이 이리 아른아른 거릴까나. 물을 긷다가 우물가에 턱을 고이고 있는 모습이 저기 서 있는 것만 같네. 잘있어요... 난이제 이집에서 나갈라요. 지난여름 지하철 서울역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내겐 세살 적 일만 기억났네. 모든 것 을 잊어버린 나는 걸을 수 밖에 없었네. 내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니까. 걷고 또 걸 었어. 모든 게 다 쁘옜네. 세살 때 내가 뚜어놀던 그 마당이 선명히 떠올랐네. 나는 걸을 수 있는 껏 걸었네. 그렇게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어디였나. 세살 때 뛰어놀던 그 마당이었을까. 저기, 내가 태어난 어두운 집 마루에 엄마가 앉아 있네.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 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에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 는 것을. 우리엄마도 엄마의 여린 딸이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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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Thank you, M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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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엄마를 부탁해 중 / 엄마와 삼남매

엄마를 부탁해 39


그리고 우리 엄마도 엄마의 여린 딸이였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세상 모든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엄마에게 기대는 동시에 밀어낸 우리 자신의 이야기아직 늦지 않은 이들에겐 큰 깨달음이 되고, 이미 늦어버린 이들에겐 슬픈 위로가 되는, 이 아픈이야기.

-이적

대중음악가, 지문사냥꾼 저자

www.chang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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