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에세이
바다가 옷을 벗을 때 김화영 문학평론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갯
벌은 바다의 속살이다. 하루 두 번, 수평선을 한껏 부풀렸던 밀물이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면 바다는 그 신
비로운 속살을 드러낸다. 문득 갯벌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구석구석에서 잠들었던 생
명들이 깨어난다. 물새의 부리 끝에 물린 물고기의 비늘이 은빛으로 파닥거린다. 집게발을 쳐 들고 춤을 추던 게는 갈매기가 다가들자 ‘게 눈 감추듯’ 재빠르게 구멍 속으로 숨는다. 물이 빠졌다가 다시 들어오기까지 짧은 몇 시간, 이 터전에 의지하여 살아온 사람들이 바빠 진다. 널빤지 뻘차를 밀어 갯벌을 가르며 아득히 미끄러져간다. 호미와 갈쿠리와 망을 실은 비 닐 바구니로 무장한 아낙들의 눈에 빛이 튄다. 물이 들어오기 전에, 해지기 전에 그물에 걸린 고 기를 건지고 뻘 속의 낙지와 바지락을 캐야 하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도회지로 나가고 노인들 만 남아 이 갈퀴 같은 손으로 자식들의 희망을 고단하게 길어 올린다. 그래도 갯벌은 그들의 일 터이며 낙원이다. 한반도의 서해와 남해에는 경사가 완만하고 굴곡이 심한 해안과 조류와 파도, 그리고 육지 에서 공급된 퇴적물 덕분에 광대한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이 갯벌에 플랑크톤을 포함해 수백 종에 이르는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으며, 지구의 남북을 오가는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가 되 기도 한다. 그 규모와 생태계의 다양성이라는 가치의 측면에서 한국의 갯벌은 미국 동부의 조 지아 연안 등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간척과 개발로 인하여 갯벌의 면적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조급한 인간은 근 시안이어서 훼손한 자연이 자정 작용에 의해 복원될 시간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갯벌의 생태는 인간 생명의 지속가능을 가늠하는 척도다. 여름 휴가철이면 바닷가 마을들은 ‘갯벌체험’ 프로그램으로 도시 사람들을 부른다. 농업용 트랙터에 승객차량을 이어 붙인 ‘갯벌마차’를 준비해놓고 장화와 조끼, 장갑은 물론 갈쿠리나 호미, 그리고 수확한 어패류를 담는 망을 돈을 받고 대여한다. 관광객들은 그 갯벌에서 낙지나 게 같은 생물을 채취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원초적 생태 환경의 유기적 순환 과정 속에서 발견하는 생명의 귀중함도 체험하고 가길 바랄 뿐이다.
이사장 인사말
Koreana 30돌에 즈음하여 한국의 문화전통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리기 위해 9개 언어로 출판되고 있는 Koreana는 2017년 여름호로 서른 해
발행인
이시형
편집인
김광근
편집장
이경희
편집자문위원
고미석, 김영나, 김화영, 배병우, 베르너 사쎄, 송영만, 송혜진,
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Koreana는 지난 30년간 한국문화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 여, 오늘날 가장 많은 언어로 다양한 분야의 한국문화를 깊이 있게 해외에 소개하는 잡지로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 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외국어로만 출판되었던 Koreana를 2017년 여름호에 한정하여 한글판으로
찰스 라 슈르, 최영인, 한경구 영문 감수
마티아스 리만, 조윤정, 테레시타 리드
영문 번역
민은영, 박현아, 서정아, 정명제, 황선애
출판하였습니다.
편집
Koreana는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7년 가을에 영문판으로 창간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일본어판이 발간되 었고, 한-중 수교 직후인 1993년에 중국어판이, 곧이어 스페인어판과 프랑스어판도 발간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 어 한류 붐이 일기 시작하자 Koreana는 러시아어, 아랍어, 독일어, 인도네시아어로도 출판되어 한국문화에 대한 세
김삼, 노윤영, 박도근
국문 감수
이창기
디자인
이영복, 김지현, 김남형, 엽란경
편집 및 제작
김형윤편집회사
계의 관심에 부응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매체의 등장에 따라, 인쇄본으로 시작한 Koreana는 전자책과 웹진으로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7길 44 www.gegd.co.kr
도 전 세계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특히, Koreana 웹진(www.koreana.or.kr)은 한글과 베트남어를 포함한 11개
전화: 82-2-2278-0202 팩스: 82-2-335-4743
언어로 전 세계 네티즌들과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Koreana에서 다룬 한국의 문화와 예술은 구석기 유적에서 최신 미디어 아트나 설치미술까지, 조선시대의 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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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궁중 문화에서 오늘날의 길거리 문화까지, 문학에서 영화까지 다양합니다. “국민과 함께 세계와 소통하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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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교류재단은 Koreana를 통해 세계의 독자들에게 한국문화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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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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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지층을 벗겨내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AD 660년에 신라와 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을 때 수도 사비성은 이레 동안 불타올랐고 거 의 모든 건축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백제의 유적지에 서면 흔히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가슴으 로 느끼는 것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백제 특집은 코리아나 편집기획팀이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어왔던 계획 중의 하나이다. 기원 후 첫 번째 천년의 상당 기간 동안 한민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 고대국가 중 하나인 백제의 중요성 때문이다. 이번 호 특집은 이 오래 된 계획의 결실이다. 고대 왕국의 역사와 문화적 면면을 한정된 지면에 조명하는 것은 상당한 도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는 비록 주변 국가들의 군사력에 의해 파멸했지만 많은 한국인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고 살아 있다. 백제가 이룬 문화적 업적의 흔적이 일본에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이는 두 나라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결과이다. 이 교류의 실상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국의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세계사를 “양파”로 보았는데 이 생각은 고대 한일 교류사에 도 적용된다. 두껍고 불가사의한 역사의 지층을 한 번에 벗겨내려 한다면 지나친 포부일 것이다. 특집에 실린 다양 한 이야기가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일깨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한 코리아나 창간 3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호 가 특별히 흥미롭게 읽히기를 바란다. 표지 이경희 편집장
정림사지오층석탑. 유윤빈, 2011, 한지에 채색, 30x30cm
KOREAN CULTURE & ARTS 2017 여름호
기획특집
포커스
백제, 잃어버린 왕국의 자취를 찾아서 기획특집 1: 백제 역사
04
백제, 망각을 거부하다 이창기 기획특집 2: 한성백제
빌딩과 아파트 숲 사이에서 사라진 왕도 찾기
12
무령왕, 백제를 말하다
백제 유불선의 완전체, 금동대향로
20 26
김정완 기획특집 5: 일본 속의 백제
교류, 동맹, 이주로 본 백제의 대일 관계 하종문
인터뷰
뮤지컬 빅뱅을 주도하며 한류의 새로운 대안을 꿈꾸는 음악감독 김문정
30
길 위에서
충주, 풍경과 삶이 어우러진 이상향
42
이 사람의 일상
이춘숙 씨의 즐겁고 오래된 가위질
식재료 이야기
46
삶는 이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문어 요리
52
여고 동창회, 반세기를 이어가는 10대의 우정
연예 토픽
58 ‘북한의 솔제니친’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두 한국 이야기
냉장고 속에서 부활한 기막힌 요리 VS 신선한 토크
김학순
김연옥
스포츠 캐스터로 사는 ‘대한미국’ 사람 울프 슈뢰더 김현숙
82
김유경
성기숙
한국의 벗들
78
설호정 라이프스타일
움직이는 전통 한국 춤, 새로운 경계에 서다
74
김서령
강신재 아트 리뷰
66
곽재구
원종원
옹기장 이현배의 ‘생각하는 손’
김태식 기획특집 4: 금동대향로
정재숙
전통 유산 장인
최연 기획특집 3: 무령왕릉
‘한글의 미래’를 본 사람과 ‘한글’에서 미래를 읽는 사람들
36
62
86
기획특집 1 백제 역사
백제, 망각을 거부하다 4 KOREANA 2017 여름호
이창기 시인, 문학평론가 안홍범 사진가
금강 건너편 공산성에 어둠이 내리자 성곽을 따라 등불이 켜졌다. 공산성은 475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백제인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은 총 길이 2660m에 이르는 왕성이다.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백제 고분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1970년대부터다. 오랜 동안 백제는 달빛 아래 있었다. 그 흐릿한 실체와 모호한 시각으로 백제는 자신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이들의 시대정신과 가치관에 따라 내면화되고 파편화되었다. 왜곡되긴 했으나 잊히진 않았고, 소외되긴 했으나 버림받진 않았던 백제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 어려움과 위기의 순간을 겪을 때마다 신화처럼 되살아나 한국인의 사유와 감성을 일깨운다.
KOREAN CULTURE & ART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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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년 7월 8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
되는 북쪽의 풍납토성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5년의 대홍수 때이지만
산위원회에서는 동아시아의 문명 형성에 이바지한 백제의
이곳에서 다량의 백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
유적지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묶어 세계유산으로 지정했
은 1997년의 아파트 단지 조성 공사 때문이고, 도성의 시가지를 이루
다. 이 유적지구는 모두 여덟 곳으로 충청남도 공주 공산성과 송산리
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남쪽의 몽촌토성 역시 1980년대에 발굴되었다.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
오랜 침묵을 깨고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유적과 유물들
여 나성, 그리고 전라북도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다. 이 가운
은 7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유불선 사상을 토대로 뛰어난 건축 기술
데 공산성과 부소산성, 그리고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미륵사지의 서석
과 독특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고
탑(西石塔) 정도가 부서지면 부서진 대로, 기울면 기운 채로 햇빛과 바
대 왕국들과 교류한 증거가 됨으로써 세계 유산으로의 보존 가치를 입
람과 눈비를 맞으며 적어도 1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인들의 삶
증했다. 깊은 진흙 속에 파묻혀 있거나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
을 지켜보았다.
다 너무도 우연히 발견된 놀라운 객관적 증거물들의 가치와 의미를 되 새기고 강조하는 일은 학자나 연구자들에게 미루고, 대신에 나는 이런
부활하는 옛날의 지배자들
물증들과 무관하게 백제가 한국인의 사유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 나머지는 얼마 전까지 땅속에 있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에 하
그 일단을 보여주려 애쓸 것이다.
나가 백제의 무령왕릉으로 확인되면서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1971
이 시도는 야심차지만 나의 자산은 아마추어적인 관심이 전부다.
년 여름이고, 부여 능산리 고분군 주위 능사(陵寺)에서 백제금동대향
내 관심의 단초는 햇빛에 노출되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들은 항상 흐
로 등이 출토되어 왕실 묘지임을 추인한 때는 1993년 12월이다. 토성
릿하고 모호한 비가시적인 것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인 탓에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부여 나성은 1975년 발굴 조사에 들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내면화된 과거를 부둥켜안는다. 좀처럼 늙지도
간 이후 지금까지 주변에서 크고 작은 유물들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망각을 거부한다. 그럼으로써 옛날을
익산 미륵사지의 동탑지는 1974년에 윤곽이 드러났고, 왕궁리 유적은
지배한다.
1989년 이후에야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번 세계유산 등재 신청에서는 빠졌지만,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한국전쟁의 치유와 화합에 소환되다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세우고 농업과 철기 문화를 발전시킨 건국 후
1955년 4월 18일, 부여에서는 백제를 기리는 ‘백제대제(百濟大祭)’ 행
초기 500년의 역사를 지닌 한성백제 시대의 대규모 토성을 포함해도
사가 처음으로 열렸다. 봄비가 뜻하지 않은 폭우로 변해 예고된 개막
사정은 다르지 않다. 백제 최초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比定)
일을 이틀이나 미룬 뒤였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포 함해 여섯 왕이 123년을 통치한 백제의 고도(古都)다. 역대 제왕의 추 모제로 시작된 백제대제는 망국의 슬픔으로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삼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재(水陸齋)를 끝으로 닷새 동안 벌어졌다. 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2만여 명의 구경꾼들이 몰려 부여읍내의 여관과 음식점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당시의 사회 여 건과 교통 환경을 고려하면 엄청난 인파였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위패를 봉안하는 삼충제였다. 이 제례 행렬에는 수백 명의 학생과 군민들이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구경 꾼이 더해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부여의 백마강과 ‘삼천 궁녀의 낙화암’이 그 시절에도 이름난 관광 지였다는 점에서 보면 이 행사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모 든 지역민들이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고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했다 는 증언을 납득하기는 충분치 않다. 이때는 매장된 백제의 유적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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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되기 이전이므로 문화적 자긍심도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명분
1 능선과 계곡을 따라 오르내리며 이어지는 공산성 성곽길은 강바람을 맞으며 공주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걸을 수 있는 좋은 산책길이다. 2 7세기 중엽에 건립된 높이 8.8m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옛 백제 땅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 석탑 2기 중 하나이다. 백제인들은 목탑의 형식에 석재를 이용해 새로운 석탑 양식을 만들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이를 기반으로 한국의 전형적인 불탑양식이 완성되었다. 국보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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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ULTURE & ARTS 7
저녁 어스름이 밤의 경계를 넘어설 때면 공산성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이때 검푸른 하늘빛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어깨를 드러내는 성곽의 실루엣은 멀리 강 건너편에 서 있는 누군가를 부른다. 밤이 되어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호명하지 않아 돌아갈 곳을 잃은 부재자들의 짧은 생애가 있는 것이다.
지원을 받으면서 지역 문화제로 성격이 바뀌고 그 규모도 커졌다.
은 결국 ‘단결과 화합의 장’인가? 유엔군이 처음으로 참전한 한국전쟁은 3년간의 치열한 전투로 300
부여군 은산면에서 전승되어 오는 은산별신제의 유래를 얼개로 삼
만이 넘는 사망자를 냈다. 이중에는 내전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범들
은 오태석의 희곡 <백마강 달밤에>(1993)는 굿을 연극의 요소로 활용
에 대한 대량 학살과 남과 북 부역자들의 희생도 포함됐다. 1953년 휴
해 주목을 받은 문제작이다. 은산별신제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 은산
전이 되자 혈연과 지연으로 얽힌 지역사회가 해결해야 할 내밀한 과
에 역병이 돌았는데 한 노인의 꿈에 백마를 탄 한 장수가 나타나 백제
제는 이 분열의 상처를 봉합하고 보듬는 일이었다. 부여도 사정은 다
병사들의 주검이 사방에 흩어져 돌보는 이가 없으니 이를 거두어 장례
르지 않았다. 이때 부여의 유지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낸 스토리텔
를 치러주면 이 마을의 역병을 그치게 해주겠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
링이 외세에 의해 스러져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삼충신과 삼천
이 꿈에서 이른 대로 흩어져 있는 백골을 수습하고 굿을 해주었더니
궁녀의 충절을 기리는 일이었다. 이로써 이들의 위령제는 자연스럽게
역병이 사라지고 마을이 평안해졌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분열된 부여 주민들의 가족과 이웃을 위한 위령제로 치환될
2014년 여름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백마강 달밤에>가 새로 공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축제는 10년 뒤인 1965년부터 정부의 전폭적인
연될 때, 연출가이자 원작자 오태석은 “초연에 비해 백제 병사와 의자 왕, 그리고 순단(마을 굿을 주재하는 노무당의 딸. 백제 의자왕을 찌른 신라 첩자의 환생)의 화해에 집중함으로써 갈등과 서사의 전개가 담
1 부여 백마강 유람선이 높이 40m의 절벽인 낙화암을 지나고 있다. 660년 백제가 망할 때 ‘삼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이 절벽 중턱에는 11세기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그들의 원혼을 달래는 암자인 고란사가 세워져 지금까지 내려온다. 2 능산리 고분군은 사비(부여) 도읍기 백제 왕들의 무덤으로 현재
백하고 명료해졌다”는 평을 들을 만큼 원작을 대폭 수정했다. 그 과정 에서 한국 전쟁과 백제 패망을 연결 짓던 ‘흐릿하고 모호한’ 연결고리 는 사라졌다. 마을 어귀의 옛 백제 성터 자리인 솔매 성벽 아래서 열일 곱 유해가 발견되는 장면에서 “백제 병사가 됐든, 인공 때 잘못된 떼죽 음이 됐든”이란 절묘한 중층적 표현도 삭제되었다. 역사적 알레고리가 빠진 틈새를 작가는 특유의 말놀이와 해학으로 채웠다. 무엇이 70대의 노작가에게 이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7기가 보존되어 있으며, 해발 121m의 능산 남쪽 경사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현진건(1900-1943)은 한국 근대 소설의 정착기에 사회와 역사 문제 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사실주의 문학의 전범을 보인 뛰어난 작가다. 일제 강점기에 신문기자로도 활동한 그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자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 보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를 만 큼 민족의식도 뚜렷했다. 그러나 이 행동의 결과로 그의 생활은 완전 히 달라졌다. 그는 신문사를 그만두어야 했고, 집을 처분해 양계업 등 을 하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사업은 신통치 않 았고 무엇보다 그가 지병인 결핵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 기간도 그 리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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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기에 발표한 장편소설 <무영탑>(1939)에서 아사달(阿斯達)
2
과 아사녀(阿斯女)라는 백제의 석공 부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
귀족의 딸 주만, 그리고 기다리다 지쳐 부여에서 남편을 만나러 경주
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현진건은 <무영탑> 이후로 백제를 역사적 배
로 온 아내 아사녀의 관계가 <무영탑>의 기본적인 갈등 구조다.
경으로 한 <흑치상지>(1940)와 <선화공주>(1941)라는 두 편의 장편소
일제 강점기에 부여에서 나고 자란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시
설을 잇달아 집필했다. 그는 <흑치상지>의 연재를 앞두고 “과거가 현
는 부여라는 장소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이유가 단지 “상여집
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띠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이나, “살구나무 마을선/ 시
라고 믿으며,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다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
절 모를 졸음” 같은 고향의 체험에 근거한 서정 때문은 아니다. 그의
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며 역사소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의지를 밝
역사적 상상력은 그를 백제에서 삼한, 고구려, 부여라는 상고 시대로
혔다. 그러나 외세의 승리에 불복하고 백제의 부흥기를 이끈 장수를
이끌다 훌쩍 동학과 3.1운동, 한국전쟁, 4.19혁명 같은 근현대사의 현
주인공으로 한 <흑치상지>는 동아일보에 연재 중에 일제의 압력에 의
장에 내려놓는다. 아사달과 아사녀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적
해 강제로 중단됐으며, 백제 무왕의 전설로 알려진 <서동요>를 소재한
대상 혹은 화자다. 그는 현진건이 <무영탑>에서 구축한 이 허구적 인
<선화공주> 역시 월간지 춘추에 연재했으나 미완으로 중단했다.
물들의 설정과 상황을 이어받은 뒤 아사달과 아사녀를 전쟁과 가난으
현진건이 신라의 수도 경주로 끌려와 불국사의 석탑을 만드는 부여
로 수난 받는 이웃이거나, 분단 체제의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다.
의 한 석공을 주인공으로 정한 것은 다수의 백제 목공이나 석공이 신
그의 역사에 대한 휴머니티는 서사시 <금강>에서 절정을 이룬다.
라에 절이나 탑을 짓기 위해 동원되었다는 여러 기록에 근거한 것이지
그는 “반만년 쫓기던 민텅구리 죄 없는 백성” 같은 이웃들에 대한 연민
만, 그에게 아사달이란 이름을 준 것은 현진건이 처음이다. 이 이름을
과 분노로 과거의 사건들을 구조화함으로써 역사를 통찰하려 했다. 그
짓고 혼자 득의양양했을 그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사달은
의 성공이 역사를 현재화한 것이라면, 그의 실패는 그 역사의 관념성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나오는 시조 단군이 나라를 세울 때의 도읍지
이다. 다음의 시구는 이런 나의 감상에 대한 반론으로 들기에 적절한
로, ‘아침 햇빛의 땅’이란 뜻을 가진 일종의 한민족의 상징이기 때문이
예다.
다. 나라 잃은 백제의 보잘것없는 석공인 아사달과 그를 사랑한 신라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KOREAN CULTURE & ARTS 9
전라북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백제의 석탑형식에 통일신라 양식을 가미하여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궁리는 지명이 말해주듯 백제의 새로운 도읍으로 기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현재 높이는 8.5m로 국보 제289호이다.
곳//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신동엽, <금강> 23장 부여 부소산성에서 금강 기슭으로 이어진 나성 터에 가면 가난과 연민으로 “아픈 조국을 앓고” 간 그의 시비가 서 있다.
고쳐 써야 할 패자들의 이야기
‘가짜 뉴스’에 대한 논란은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존재했다. 언제나 승 자들의 이야기는 과장되어 널리 퍼지지만, 패자들의 이야기는 늙은 여 인들의 한숨에 섞인 푸념처럼 이어진다. 백제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 다. 승자의 지략과 용맹 앞에 패자의 무능과 타락은 강화되었으며, 이 단순한 구도는 시대를 떠돌다 사실보다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 사이에 과거는 이를 기억하고 바라보는 이들의 시대정신과 가치관에 따라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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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되고 파편화되었다. 비극적인 전쟁의 현장이었던 타사암(墮死岩)
않고 달밤을 기린다. 이 의식에는 늘 ‘백마강’과 ‘물새’와 ‘고요’와 ‘일엽
이 ‘삼천 궁녀의 낙화암(落花岩)’으로 변질되고, 부소산성 정상의 사
편주’ 그리고 ‘종소리’가 빠지지 않는다.
자루(泗泚樓)가 사비루(泗沘樓)의 오기임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쉽사
언론인이자 소설가 이병주(1921–1992)는 대하소설 <산하>의 서
리 바꾸지 못하는 소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 객관적 사실 관
문에 이런 표현을 옮겨놓았다. “태양 빛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
계에 의한 서사 구조는 굳이 필요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다.
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달 노피곰 도 샤”로 시작하는 <정읍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이 말에 답례를 하자면, 백제는 달빛 아래에 있다. 저녁 어스름이 밤
가요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속악의 가사로 불려졌다. <고려사>에 의
의 경계를 넘어설 때면 공산성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이때 검푸른 하
하면 정읍의 한 행상인이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
늘빛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어깨를 드러내는 성곽의 실루엣은 멀리 강
자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건너편에 서 있는 누군가를 부른다. 밤이 되어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밤길에 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정읍
자들이 있는 것이다. 호명하지 않아 돌아갈 곳을 잃은 부재자들의 짧
시립국악단은 이 노래를 기념하기 위해 매월 보름에 다채로운 국악 공
은 생애가 있는 것이다. 백제의 달빛은 이 훼손되고, 누락되고, 왜곡되
연을 연다. 그러고 보니 백제를 노래한 작금의 대중가요들은 빠뜨리지
어 버린 눅눅한 산하의 흔적들을 감싸고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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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 한성백제
빌딩과 아파트 숲 사이에서 사라진 왕도 찾기 최연 지리학자, 인문학습원 서울학교 교장 안홍범 사진가
백제는 삼국시대 때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한강 유역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나라다. 그 백제가 지배 체제를 갖추고 건립한 도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이제 먼 옛날 백제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지혜와 노동으로 세웠던 도시는 사라지고 그 주변에는 올림픽 경기장이 들어서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그 빌딩과 아파트 숲 사이 공터에 경계를 세우고 고개를 숙인 채 흙 바닥을 긁고 있는 이들이 있다. 사라진 왕도와 그곳을 활보했던 옛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보려는 그 마음으로 서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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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식 돌무덤인 석촌동 3호 고분은 백제를 강국으로 일으킨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의 형식을 닮아 백제와 고구려 지배계층의 깊은 연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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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한의 전체 인구 5000만 중 대략 2000만 명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살고 있다. 기원 전 한반도의 심장부를 왕도로 삼아 건국한 백제로부터 21세기 ‘강남스타일’까지 2000여 년에 걸친 다양한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 깊은 도시가 서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깊이와 넓
이를 온전하게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이 서울이기도 하다. 고려시대(918-1392)에 잇따른 거란(契丹)과 몽골(蒙古)의 침략,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1598)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으로 이 나라의 많은 문화유산이 불타 없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서 는 식민통치에 이어 한국전쟁으로 또 다시 전국이 초토화되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유산의 상당 부분 도 산업화와 개발의 거센 바람 속에 많이 유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들이 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 점들을 선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로 면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로 재구성하여야 서울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 유역에 세운 최초의 국가
동양에서는 모든 생명의 삶을 하늘과 땅과 사람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인식해왔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과 강으로 이루어졌는데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맞물린 역상(逆像) 관 계이며 상생 관계이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땅을 따라 흘러가 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 물길 주변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한반도에서 고대 3국이 길항하던 시대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삼국의 쟁패에 앞서 가장 먼저 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나라가 백제이다. 백제의 건국을 두고는 몇몇 이설이 존재하 나 골자만 간추리자면 그 시조는 만주 일대의 부여(夫餘)로부터 떨쳐 나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남하한 비 류(沸流)와 온조(溫祖) 형제다. 그들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들로 동생인 온조는 한강유역에, 형인 비류 는 미추홀(彌鄒忽)이라고 불리었던 지금의 인천에 자리 잡았다. 온조는 자신을 도운 10명의 신하를 내세워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다가 미추홀의 형이 죽고 그의 백성들이 자신의 치하로 오자 이들을 받아들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이들은 더 남쪽으로 나아가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자리 잡은 마한연맹체 (馬韓聯盟體) 54국 중 맹주인 목지국(目支國)으로부터 100리(40km)의 땅을 할양 받아 지 역연맹체를 형성하고 그 세력을 키운 뒤 목지국을 병합했다. 마한연맹체의 새로운 맹주가 되어 마침내 국가의 기틀을 세운 것이다. 초기에는 5부 체제로 왕은 왕성(王城)이 있는 직할 지만을 통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5부장(部長)을 통해 간접 통치하였으나 곧 고대국가의 지 배체제를 갖추었고, 늘어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제도 강화하기 위해 도성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이다. 지형상으로 풍납토성은 평상시에 주거하는 평지성이고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비상시에 대 비한 산성이며 방위상으로 왕궁을 기준으로 풍납토성은 북쪽에 있어 북성(北城), 몽촌토성 은 남쪽에 있어 남성(南城)이라 하였다. 지금의 만주에 터를 잡았던 고구려의 국내성(國內 城)과 환도산성(丸都山城) 같은 남북 이성체제(二城體制)를 갖춘 것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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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은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토성이다. 전체의 둘레가 3470m, 높이는 6m에서
2 1 몽촌토성의 북쪽에는 성벽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세웠던 목책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2 몽촌토성의 해자는 지금은 연못으로 가꾸어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들이 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잦은 외침과 개발 정책 때문이다. 그 점들을 선으로 잇고, 그 선들로 면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로 재구성해야 서울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KOREAN CULTURE & ARTS 15
13.3m, 성벽의 넓이는 30m에서 70m에 이르고 성 밖에는 물길을 내어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는 넓은 해자(垓字)가 둘러쳐져 있다.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정 도이며 서벽은 1925년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로 유실되었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있다. 성은 네 곳이 끊겨 있기 때문에 당시 성으로 통하는 문이 4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안에는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을 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집단취락시설의 주변과 성곽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환호(環濠)가 3겹으 로 둘러싸여 있었고 각종 생활유물들도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되었다. 도로의 유구(遺構)와 수혈(竪穴) 등 이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왕궁 내에 많은 국가시설물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풍납토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700m 거리에 있는 몽촌토성은 주변의 높은 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의 지형 을 이용해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축조한 독특한 토성이다.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필요에 따라 경 사면을 급하게 깎는 등 인공을 가하기도 하였다. 북쪽으로는 목책(木柵)을 세웠으며 그 외곽에 해자를 둘렀는데 이 해자는 현재는 연못으로 가꾸어져 있 다. 성벽의 총길이는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총 2285m 이고,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外城)이 약 270m의 직 선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높이는 대체로 30m 안팎이다. 북측의 외곽경사면과 외성지의 정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고 동측의 외곽 경사면은 깎아 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해자를 설치하였던 점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기지 구실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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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 복원 전시된 풍납토성 성벽 단면은 백제인이 켜켜이 쌓은 흙 단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2 올림픽공원 안에 위치한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인이 한강 유역에 터를 잡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백제에 이어 한강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와 신라 시대까지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한성백제 기행 광나루역
천호대교 풍납토성
한강 올림픽공원 북문
몽촌토성
몽촌역사관
올림픽공원 세계 평화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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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박물관 삼전도비
석촌호수
서울 속 백제 유적 둘러보기 백제고분군-한성백제박물관-몽촌역사관-풍납토성
백제고분
잠실에 있는 대형 레저쇼핑타운 롯데월드를 감싸고 있는 석촌호수는 본디 한강의 물줄기였으나 1970년대에 홍수에 대비하여 물줄기를 곧게 바꾸는 바람에 호수가 되었다. 동호와 서호로 나뉜 이 호수의 서호 언덕
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에 병자호란(1636–1637)의 상흔 삼전도비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를
특히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저장혈(貯
출발점으로 삼아 서호를 반 바퀴쯤 돌아 나와 남쪽으로 밀집된 주거지역
藏穴)의 유구와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판축성토대지
사이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백제고분군이 나온다. 여기서 적석총을 비롯
(版築盛土臺地)와 같은 군사시설들이 발굴되어 이곳이 왕성
한 다양한 한성백제의 무덤양식을 둘러보고 올림픽공원으로 이동한다.
이 아니라 비상 시기에 대피하는 국방의 최후 보루였을 것이 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최근에는 몽촌토성의 발굴조사과정에서 백제에 이어 고구 려 시대까지 사용된 폭 18.6m의 2차선 도로가 발견되었다. 이 는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시대 도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 이자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2차선 도로로서 몽촌토성 안쪽에서 북문을 지나 바깥으로 연결되는데, 몽촌토성과 풍납 토성을 잇는 대로(大路)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남쪽으 로 수도를 옮긴 후 고구려 영토가 된 후 세 차례에 걸쳐 수리와 증축을 거치면서 발굴 당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 다. 돌, 풍화토, 점토 등을 섞어 포장한 이 도로는 워낙 단단하 여 수레바퀴 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서 발굴된 또 다른 중요한 유물로는 관청을 뜻하는 ‘관(官)’자가 새겨져 있는, 목이 짧고 입이 곧은 백제 항아리 조
올림픽공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주변에 주요 실내경기장들을 건설하면서 몽촌토성을 공원으로 가꾼 곳이다. 이곳에서 한성백제박물 관과 그 앞뜰에 전시되어 있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조각 작품들을 둘러본 뒤, 도심 속 트레킹 코스처럼 완만한 언덕을 이루고 있는 몽촌토성을 걷 는다. 청소년 대상의 백제 역사 현장체험 박물관인 몽촌역사관에 들를 수도 있다. 올림픽 공원 북1문으로 나와 강동구청을 지나 큰길을 건너면 영파여 자고등학교가 나온다. 학교 담벼락을 따라 주거지역으로 조금 들어가면 풍납토성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거대한 토성으로 우뚝 서 있다. 위의 순서로 한성 도읍기(기원전 18–475) 백제의 문화 유적을 걸 어서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를 잡아야 한다. 조금은 고된 하루가 될지 모 르나 현대와 고대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이 지역을 음미하기엔 걷기가 최 고의 방법이다.
각이 있다. 백제시대 유적에서 이런 글씨가 새겨진 토기가 발 KOREAN CULTURE & ARTS 17
견된 것은 처음으로, 몽촌토성이 단순한 방어성이 아니라 도성을 겸하였음 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무덤의 양식으로 시기와 신분을 살피다
2개의 도성 남쪽으로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는 당시 지배층의 묘역 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제 3권에는 이 지 역에 지상에서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분묘가 흙무지[토축(土築)]로 된 것이 23기, 돌무지[적석(積石)]로 된 것이 66기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 금은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함께 널무덤[토광묘(土壙墓)], 독무덤[옹관묘 (甕棺墓)] 등 30여 기가 남아 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이곳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 여준다. 이 지역에는 또한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무 덤도 섞여 있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된 것도 있다. 석촌동 일대에는 대체로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다양한 계급의 묘지 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 고분군에서 제일 큰 3호분은 긴 변 45.5m, 짧은 변 43.7m, 높이 4.5m규모의 사각형 기단식돌무덤[기단식적석총(基 壇式積石塚)]으로, 기단은 3단까지 남아 있으며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시대 백제를 강력한 고대국가로 일으켜 세운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무덤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5세기 후반 공주(公州) 천도 이후 지배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로 바뀐다. 1971년에 극적으로 발굴된 무령왕릉 (武寧王陵)이 바로 최초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이며 이 즈음부터 삼국의 보편적인 왕실 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라진 역사의 빈칸을 찾아서
1970년대에 잠실지구 종합개발이 시작되면서 백제의 타임캡슐이라 할 이 지역은 개발과 보존 논리가 혼재하는 격변기를 거쳐야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이 지역이 1988년 서울올림픽 경기장 부지로 선정돼 주경기장을 비롯한 각종 경기장과 부대시설들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2천 년 전 역사문 화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는 백제의 옛 도읍 터에서 20세기의 지구촌 축제 인 올림픽이 열린 것이다. 먼 옛날 수백 년에 걸쳐 백제인들의 지혜와 노동력으로 세워졌던 도시 는 사라지고 오늘날 그 주변에는 서울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고층 아파 트들이 늘어서 있다. 아파트 재건축, 도로 건설, 올림픽 시설 건축과 같은 적극적인 개발과 도시 정비가 지하 유적 발굴의 계기로 작용한 긍정적 측 면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라진 왕도와 그곳에서 살았던 옛 사람들 의 모습을 점에서 선으로, 다시 선에서 입체로 복원해내기 위한 노력은 지 금도 계속되고 있다. 18 KOREANA 2017 여름호
몽촌토성은 1980년대에 여섯 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진 역사유적지이자 서울시민의 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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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3 무령왕릉
무령왕, 백제를 말하다 ©국립공주박물관
1971년 여름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백제의 한 왕릉이 발견되었다. 무령왕의 것으로 밝혀진 이 무덤은 한국의 고대 국가 왕실 능묘 중 피장자가 확실하게 밝혀진 유일한 경우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한국고대사의 암흑과 같았던 백제사를 망각에서 건져냈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 덕분에 백제사는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생생한 물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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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문화재 전문 언론인,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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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1년 여름에도 어김없이 장마철이 돌아왔다. 장마는 대체로 문화유적 현장에서는 재앙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해 공주에서는 크나큰 축복이었다. 기원전 18년에 나라의 초석을 놓은 이후 70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고대 삼
국시대를 이끌었던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인 충청남도 공주에는 ‘송산리 고분군’이라고 부르는 백제 왕릉지 구가 있다. 한반도 중부의 젖줄인 금강이 북쪽에서 감돌아 흐르는 공주 시내를 기준으로 서북쪽 낮은 산 남 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이 고분군에는 부드러운 곡선의 오래된 봉분들로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곳에서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 부부를 안치한 무덤이 기적처럼 발견된 것이다.
“어느 왕인지 알지 못한다”
송산리 고분군은 16세기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에도 “향교는 주의 서쪽 3리에 있고, 서쪽에 옛 왕릉이 있다. 전하기를 백제 왕릉이나, 어느 왕인지 알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조선시대부터 백제 왕 들의 무덤으로 주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일제 강점기에도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거쳐 각 무덤의 주인까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웅진 도읍 시기(475–538) 백제 왕가의 공동묘지였다는 사실은 밝혀진 터였 다. 1971년 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곳에는 왕릉으로 짐작되는 봉분 6기가 노출돼 있었고, 국가 지정 사적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이 고분들은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로 곤욕을 치렀다. 뒤편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분 안으로 스며들곤 했기 때문이다. 대처 방법에 골머리를 앓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는 특히 동서 방향으로 봉분이 인접한 제5호와 6호분을 침수에서 보호하고자, 그 뒤편으로 3m 가량 떨어진 지점 언덕을 평행으로 파서 배 수로를 내기로 했다. 공사는 장마 전선이 한반도 남해안 쪽으로 북상하기 시작한 6월 29일 시작되었다. 장 마가 오기 전에 공사를 끝낸다는 계획이었다. 공사 시작 일주일째인 7월 5일 오후 2시쯤, 배수로를 파내던 인부의 삽날에 강돌 하나가 걸렸다. “이런 돌 이 땅속에서? 퍼뜩,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강돌은 무덤돌이거든요. 과연 계속 파내려가다 보니깐 벽돌로 잘 쌓아 올린 구조물이 나오는 거예요. 또 파낸 흙을 보니깐 석회도 섞여 있었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곡괭이 가 탁 하니 뭔가를 쳤습니다. 전돌이었죠.” 당시 공사를 맡았던 삼남건업 현장소장 김영일 씨의 회상이다. 이 것이 바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화려한 왕릉 출현의 전조였다. 이때 건드린 것은 내부를 모두 벽돌로 쌓 아 올려 만든 무덤 내부로 통하는 무덤길의 남쪽 천장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벽돌로 쌓은 점과 그 구조를 볼 때, 알 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왕릉일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일었을 뿐이다. 그 바로 앞쪽에 위치하는 6호분의 구 조와 빼다 박은 듯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발굴 중에 쏟아진 폭우
새롭게 드러난 이 벽돌 무덤을 어찌할 것인가? 현장소장은 곧바로 이를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현 국립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에게 알렸다. 박물관에서는 다시 이 사실을 즉각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해 발굴 허 가를 받아야 했지만, 새로운 백제 왕릉 출현에 흥분한 나머지 이런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현지의 몇몇 고고 1971년에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무덤방을 무덤길 쪽에서 들여다본 모습이다. 여러 문양의 벽돌을 맞물려 구축한 아치형 천장 아래의 직사각형 공간에 백제 제25대 무령왕 부부의 목관이 오랜 세월의 무게로 내려앉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학자들과 함께 서둘러 발굴을 시작했고, 과연 이 무덤이 백제시대 왕릉급 벽돌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에 이르렀다. 이런 사실은 공주시를 통해 이튿날인 7월 6일 문화재관리국에도 보고됐다. 문화재관리국은 현장에 담당 직원을 보내 실태 파악을 한 다음, 배수로 공사 중지와 무단 발굴의 즉각 중단을 명령하는 한편, 정식 발굴단 KOREAN CULTURE & ARTS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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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은 100여 종의 유물 3000여 점을 쏟아냈다. 그중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음이 분명한 물건들도 있었다. 왕과 왕비의 목관은 지구상에서 오직 일본 열도 한 군데서만 자생한다는 금송(金松)임이 밝혀졌다. 이는 백제가 바다를 무대로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물을 주고받았으며 특히 백제 왕실이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22 KOREANA 2017 여름호
1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의 금제관 꾸미개로 얇은 순금판을 인동넝쿨무늬로 오려내 전체적으로 불꽃같은 인상을 준다. 높이 30.7cm, 너비 14cm, 국립공주박물관. 국보 제 154호. 2 왕비의 관 안쪽 머리 부분에서 발견된 왕비의 금제관 꾸미개. 높이 22.2cm, 너비 13.4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155호. 무덤길 전면에 차곡차곡 쌓아 막은 벽돌을 하나하나 걷어내기 시작했다.
을 조직해 발굴조사에 착수키로 했다. 7월 7일, 현장에는 발굴 지휘를 맡은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원룡, 문화 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실의 발굴조사를 담당하는 조유전, 지건길 학예연구사 등이 도착했다. 정식 발굴 조사는 이날 오후 4시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발굴 시작 두 시간 만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 기 시작한 것이다. 발굴 현장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자칫하면 빗물이 무덤 안으로 쏟아져 들어갈 판 이었다. 비는 밤새 퍼부었다. 조사는 중단되었고 공사 인부들만 칠흑 같은 밤에 고인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 해 급히 배수로를 만드느라 고군분투했다. 발굴조사단은 결국 이튿날 조사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무덤 초입에 돌짐승 하나가 떡하니
다행히 이튿날에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화창하게 개었다. 7월 8일 오전 5시, 발굴 작업을 재개한 조 사단은 마침내 무덤방으로 통하는 아치형 무덤길 전면을 완전히 노출하는 데 성공했다. 또 하나의 백제시대 왕릉임이 명백했다. 오후 4시, 북어 세 마리와 술로 소박한 제상을 차려놓고 무덤 개봉에 앞서 무덤의 주인 에게 제례를 올리고는 마침내 무덤길 전면을 차곡차곡 쌓아 막은 벽돌을 하나하나 걷어내기 시작했다. 어두 컴컴한 무덤길 내부가 천오백 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순간, 한여름 자동차 에어컨을 켤 때 나는 것과 같은 서늘한 바람이 흰색의 연기처럼 무덤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통로가 확보되자 조사 책임자인 김원룡과 공주분관장 김영배 두 명이 백열등을 들 고 무덤 안으로 진입했다. 작은 사람 키 만 한 높이의 터널 같은 벽돌 무덤길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천장에는 아카시아 나무뿌리가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이 터널 중간쯤 바닥에는 이마에 뿔이 하나 돋은 돼지를 닮은 험상궂은 돌짐승 하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사악한 기운에서 무덤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으로 보였다. 터널을 통과하니 역시 아치형 천장에 바닥이 직사각형인 무덤방이 나타났다. 무덤방은 그리 크지 않았 고 어두워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는 시커먼 나무판자들이 어지럽게 깔려 있었다. 목관이 시간의
2
KOREAN CULTURE & ARTS 23
1
1 왕의 관 안쪽 발 부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 길이 35cm, 국립공주박물관. 2 무덤길 한가운데서 발견된 묘지석 두 장 중 하나. 땅의 신에게서 무덤으로 사용할 토지를 매입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 틈새로 금빛 나는 유물들이 보였다. 한 번도 도굴꾼이 다 녀가지 않은 상태임을 직감한 김원룡과 김영배는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백제 무덤을, 그것도 왕릉을 발굴하다니!” 두 사람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비 41.5cm, 길이 35cm, 두께 5cm, 국립공주박물관. 국보 제163호. 3 무덤길에서 발견된 진묘수. 길이 47cm, 높이 30cm, 너비 22cm, 국립공주박물관. 국보 제162호. 4 국립공주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원상태에 가깝게 복원된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진묘수 등의 전시 유물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무령왕의 작호를 확인하다
이런 흥분 상태는 무덤방에서 다시 무덤길로 돌아 나오는 과정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조금 전에 본 그 우락 부락한 돌짐승 앞에 넓적한 돌판 두 장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백열등을 비추자 한문으로 새 긴 글자들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이름이 보였다. “영동 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동쪽을 평안케 한 대장군인 백제의 사마왕이라는 뜻이다. 이는 다름 아닌 당시 중국의 남조 양(梁)나 라 황제가 백제 무령왕에게 내린 작호(爵號)였다. 이 순간을 나중에 회고하면서 김원룡은 “그 순간 내 머 리가 돌아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무덤의 주인을 확인하면서 이성과 판단이 흐려진 김원룡은 무령왕릉 발굴 을 고고학 사상 유례없는 졸속 발굴로 몰아갔다. 경험 있는 고고학자라면 당연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발굴을 중단한 다음, 치밀한 발굴조사 계 획을 세워야 마땅했다. 그러나 김원룡은 즉각 발굴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역사적인 발굴을 보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무덤 밖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던 어수선한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이렇게 해서 무령왕릉은 무덤 주인공을 확인한 직후 곧바로 발굴 작업에 들어가, 단 하 루만인 이튿날 7월 9일 아침 8시에 내부는 텅 비고 말았다. 당연히 어떤 유 물이 어떤 상태로 어느 위치에서 발견되었는지 등에 대한 정보는 거의 기 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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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교역국임을 드러낸 3천 여 점의 유물들
무령왕릉의 발굴은 이후 두고두고 한국 고고학계의 비판과 자성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 성과만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 31명의 백제 왕, 27명의 고구려 왕, 그리고 삼 국 통일을 이루며 천 년을 이어간 신라의 56명의 왕까지 합하면 모두 114명의 삼국 및 통일신 라의 왕들 가운데 현재까지 무덤이 밝혀진 경우는 백제의 무령왕 단 하나뿐이었다.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망각에서 건져냈다. 백제는 한국고대사의 암흑과도 같았다. 관련 문헌 기록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는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천지신령에게서 토지를 매입하여 왕과 왕비를 매장했다는 내용 을 새긴 두 장의 지석을 통해 백제 사람들의 경건한 장례 습속도 알 수 있게 되었다.
3
무령왕릉은 100여 종의 화려한 유물 3000여 점을 쏟아냈다. 그 중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음이 분명한 물건들도 있었다. 왕과 왕비의 목관은 수종 분석 결과 지구상에서 오직 일본 열도 한 군 데서만 자생한다는 금송(金松)임이 밝혀졌다. 이는 백제가 바다를 무대로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물을 주고받았으며 특히 백제 왕실이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 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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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4 금동대향로
백제 유불선의 완전체, 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은 백제 금동대향로의 규모와 아름다움에 반해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세 부분으로 이뤄진 향로는 용 받침대 위에 연꽃 봉오리가 얹혀 있고, 봉황이 앉아 쉬고 있는 산봉우리 모양의 뚜껑이 그 위에 덮여 있다. 백제의 뛰어난 금속 공예는 백제인들의 내세관을 담아 표면을 장식한 정교하고 다양한 도상들에서 절정을 이루며,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일깨운다. 김정완 고고학자, 전 국립대구박물관장
앞
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막 피어
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지점 바깥에 왕과
다. 3개의 작업실로 이루어진 공방 중 2개 방
나는 듯한 연꽃봉오리를 물고 있다.
왕비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
의 바닥 중앙에는 작업용 화로의 강한 열에
꽃봉오리 위에 얹힌 수많은 산봉우
군이 있다. 나성과 고분군 사이, 아래쪽은 습
그을리고 굳어진 흙더미가 길게 타원형을 이
리들은 상상 속의 선계를 이루고, 그 꼭대기
지, 위쪽은 계단식 논을 이루고 있었던 좁은
루고 있었다. 대향로는 가운데 방의 바닥에
에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앉아 있
지대가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은 1993년 백제
나무로 지은 저수조로 추정되는 물웅덩이 바
다. 용 받침대, 연꽃 봉오리 본체, 최정상에 봉
문화권 유적 정비사업을 위한 사전 조사와 발
닥에 뚜껑과 몸통이 약간 떨어진 상태로 잠겨
황이 앉아 쉬고 있는 겹겹의 산봉우리 모양
굴 작업 때였다. 그 과정에서 이 터에 중문, 목
있었고, 그 위로는 여러 종류의 토기와 기와
의 뚜껑이 서로 어우러져 절묘한 아름다움을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고 회랑이 이
조각, 소형 금동제품 등이 덮여 있었다.
이룬다. 몸체와 뚜껑이 맞닿는 부분의 둘레는
를 감싼, 전형적인 백제 사찰이 들어서 있었
황급한 상황에서 대향로를 수조에 감춘
인동당초문으로 장식되어, 향로를 닫으면 두
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나왔다. 절터 맨 뒤
뒤 그 위를 많은 토기와 기와 조각으로 덮어
줄의 문양 띠가 서로 맞닿는다.
쪽에 위치한 강당과 그 인근의 회랑 및 공방
위장했는데 그 뒤 이 건물 전체가 불타버렸
터를 조사하던 중 서쪽회랑 바깥쪽으로 연결
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는 향불
된 공방 터에서 백제 공예의 백미라고 할 금
것은 14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백제는 사비(현 충청남도 부여) 도읍 시기
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대향로가 전혀 부식되지 않고, 완벽한 형태
(538-660)에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외곽의
공방은 불에 타 무너진 것으로 보였고 앞
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지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다. 이 나성의 동문
쪽은 지붕에서 내려앉은 기와로 뒤덮여 있었
에서 약 4m 정도 깊이의 지하에서 물에 잠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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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백제 금동대향로는 용 한 마리가 연꽃봉오리를 물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 옆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높이 61.8cm, 무게 11.8kg, 국립부여박물관. 국보 제287호. 2 향로의 뚜껑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구슬 장식 위에 앉아 있다. 봉황의 가슴 양쪽에 연기 구멍이 있다.
있어서 외기의 온도변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상태로 산소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으 로 보였다. 이어진 발굴 조사를 통해 이 터에 절이 세 워졌던 내력이 드러났다. 목탑지(木塔址) 중 앙 지하에서 탑의 심주와 심초석, 그리고 백 제창왕명 사리감(百濟昌王銘 舍利龕, 국보 제288호)이 발견된 것이다. 사리감 입구 양쪽 에 음각된 20자의 한자 명문은 “창왕(위덕왕 재위 554-598) 13년인 567년에 그의 누이가 되는 공주가 발원하여 사리를 공양했다[百濟 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媒兄公主供養舍利]” 고 전하고 있다. 창왕은 백제 제27대 왕으로, 중흥군주 성 1
©국립부여박물관
왕(재위 523-554)의 아들이다. 성왕은 554년 KOREAN CULTURE & ARTS 27
성왕은 554년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할 때, 위기에 처한 아들 창을 구원하러 갔다가 신라 매복군에게 습격을 당해 전사했다. 나성의 바깥쪽 왕릉 옆의 협소한 습지에 절을 세운 점과 명문 내용,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이 절이 불교 도량이 아니고 전사한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 창왕이 세운 능사(陵寺)이며, 대향로는 이 능사에서 거행된 예식에 사용되었을 의기임을 알 수 있다.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할 때,
은 녹여서 빼낸다. 그 공간에 액체 상태의 주
음 주조할 때는 여기에도 작고 둥근 구멍만을
위기에 처한 아들 창을 구원하러 갔다가 신라
물을 부어 굳힌 뒤 거푸집을 부수어 뜯어내
뚫었는데 사용해본 결과 연기가 기대만큼 원
매복군에게 습격을 당해 전사했다. 나성의 바
는 방법이다. 향로의 금속성분을 조사한 결
활하게 배출되지 않아 나중에 억지로 구멍을
깥쪽 왕릉 옆의 협소한 습지에 절을 세운 점
과, 주조된 바탕금속은 구리 81.3퍼센트, 주석
확장한 듯한 느낌을 준다.
과 명문 내용,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
14.3퍼센트의 배합이었고, 주석에 섞여 들어
뚜껑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크고 작은 중
해 보면, 이 절이 불교 도량이 아니고 전사한
간 불순물인 납, 은, 니켈, 코발트, 비소 등도
첩된 산악문양 사이에는 여러 인물상과 동식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 창왕이 세운
미량 확인되었다.
물상 등이 돋을새김 문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능사(陵寺)이며, 대향로는 이 능사에서 거행
내부의 구조를 살펴보면, 뚜껑 속의 연기
인물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바위 위에 바
는 봉황이 딛고 선 둥근 구슬을 관통하여 봉
른 자세로 앉아 명상에 잠긴 사람, 숲 사이를
황의 양 발 사이로 연결된 관을 타고 올라와
걸어가는 사람, 뛰어가는 말 위에서 뒤쪽으로
이상향을 담은 도상들
가슴 양쪽에 뚫린 작은 연기구멍으로 흘러나
활을 쏘는 사람, 폭포 옆에서 머리를 감는 사
이 향로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으로 만
오게 되어 있다. 봉황의 턱 아래에는 여의주
람,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사람과 이를 배
든 후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하여 만들었다.
를 괴어서 유려한 외관을 유지하면서 구조를
웅하는 듯 절하는 사람, 호수 위의 바위에서
그 복잡한 형태와 정교하게 이루어진 수많
튼튼히 했다.
낚시하는 사람, 코끼리를 타고 가는 사람, 말
된 예식에 사용되었을 의기임을 알 수 있다.
은 굴곡은 밀랍주조법으로만 가능했을 것이
향 연기는 뚜껑 표면의 산악문양 뒤쪽에
을 타고 가는 사람 등이 있다. 동물은 곰, 호
다. 즉 먼저 밀랍으로 향로의 형상을 만든 후
고른 간격으로 뚫린 10개의 구멍을 통해서도
랑이, 새, 사슴, 뱀, 멧돼지 같은 실존 동물들
그 주변을 거푸집의 재료인 모래로 감싸고 열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 구멍들은 봉황 가슴의
도 있지만 상상 속의 동물도 많다. 산봉우리
을 가하여 거푸집을 고정시키면서 속의 밀랍
연기 구멍과 달리 그 상태가 매우 거칠다. 처
사이사이에는 바위, 나무, 시냇물, 폭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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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의 뚜껑 위쪽에는 겹겹이 이어지는 산봉우리 사이로 다섯 명의 악사가 저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등이 표현되어 있다. 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이뤄져 있다.
한 바다에서 용이 하늘로 치솟는 듯 힘찬 느
큰 산을 배치한 점 등은 음양오행설과 연관
낌을 준다.
지을 수 있다. 또, 바다 한가운데 신선이 산다
꽃잎 사이사이 여백에는 물고기와 물새, 물
고 전해지는 중국 전설 속의 박산(博山)과 신
고기를 먹는 새, 물고기를 먹는 동물 등 주로
효에 불교와 도교를 더하다
선의 세계가 뚜껑 표면에 펼쳐지는 점도 도교
물가나 물속에 사는 동물들이 등장하여, 수
이처럼 다양한 도상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
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향로의 제작을
중선계(水中仙界)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하는지 그에 대한 해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
주도하고 사용했던 왕실을 비롯한 최상위 귀
해석된다.
다. 이 방면의 많은 연구자들은 향로에 새겨
족층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도 널리 퍼져
반구형의 향로 본체와 용 형상의 받침대
진 각종 동물들은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이 꿈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를 연결하는 것은 용이 입에 물고 있는 간주
꾸었던 신비한 상상의 세계를 상징하며, 중국
이 대향로의 용 모양 받침대, 여러 단의 산
(竿柱)이다. 이 간주가 본체 중앙을 지나는
고대 신화집이자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
악문양으로 장식된 뚜껑, 꼭대기의 봉황 등
둥근 관과 연결되어 있다. 엑스레이 검사 결
에 나타난 동물들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고
주요 요소는 중국 한대의 박산로(博山爐) 전
과 본체와 관, 그리고 간주를 물린 용을 각각
있다. 또 봉황 및 각기 다른 산봉우리에 앉아
통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서한전기시대에
따로 주조한 다음 이들을 결합하여 전체 형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기러기 모양의 5 마리
시작되어 한반도 북쪽 낙랑 유적에서도 발견
를 완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뚜껑과 뚜껑 위
새는 천제(天帝)와 오제(五帝)로 함축되는
되는 중국의 청동제 박산로의 유행은 수, 당
의 봉황 및 구슬 장식 또한 각각 따로 주조한
동양적인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견
대에 쇠퇴했다. 더욱이 월등히 큰 규모와 화
다음 접합한 것이다.
해가 지배적이다.
려하고 정교한 제작 기법뿐 아니라 시기상으
받침대가 절묘하다. 한 마리의 용이 한 다
이 향로에는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어우
로도 차이가 있어서 이 향로를 중국의 박산로
리는 위로 치켜든 채 나머지 세 다리로 향로
러져 있다. 불교왕국이라고도 불릴 만한 사비
와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
를 떠받치고 있는데, 바닥에 닿는 곳은 세 발
도읍기 백제의 절터에서 사용된 의례용 향로
고 이 향로의 도상이 백제만의 독창적인 것도
목 부분뿐이며 이 세 지점이 정삼각형을 이
였다고 보면 전반적으로 불교와 깊이 관련된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산해경>뿐만 아니라
루어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준다.
것이 분명하지만, 꼭대기에 양(陽)을 상징하
5세기 중국 북위시대 유적인 윈강석굴 벽화
용의 세 다리와 몸통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는 봉황을 두고 받침부에는 음(陰)을 상징하
에도 같은 도상들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물결무늬, 구름무늬, 연꽃무늬 등도 서로 균
는 용을 둔 것, 5마리의 새, 5인의 악사, 5단으
때 이 도상들은 당시 동아시아에 널리 알려져
형을 이루고 있으며, 연꽃이 떠다니는 화려
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문양, 각 단마다 5개의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KOREAN CULTURE & ARTS 29
기획특집 5 일본 속의 백제
교류, 동맹, 이주로 본 백제의 대일 관계 고대 일본은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를 키우고 국가의 기반을 닦은 반면 백제는 국방력을 높이기 위해 한자문화와 불교를 활용해 일본과의 유대를 적극 도모했다. 아직기는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왕인은 한학을 가르쳤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한 뒤 결집한 백제부흥군의 요청에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4만의 병력을 보내 동맹을 지켰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퇴각하는 일본 배에 몸을 실은 백제인의 수는 기록으로만 봐도 3천 명이 넘었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 안홍범 사진가
1 나라 호류지(법륭사)의 대보장원에 모셔진 백제관음상. 7세기 초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09cm다. 특이한 광배와 8등신의 호리호리한 몸매, 부드러운 어깨와 허리 곡선, 우아한 미소 등이 백제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2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백제왕신사는 백제왕씨 씨족 사당이다. 7세기 오사카 남부로 건너간 백제 왕실 후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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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에 이곳으로 옮겨 자리 잡은 뒤 역대 백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백제사와 이 사당을 지었으나 모두 없어졌고 지금의 사당은 2002년에 개축된 것이다. ©소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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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10월 4일 금강 하구. 7세기를 이어온 백제의 명운이 걸
을 닦았으며, 9세기 초의 시점에서도 일본 지배층의 한 축은 백제 이민
린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려던 참이었다. 660년 수도 부여가
자의 후예로 채워졌던 것이다.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했지만, 나라를 되살리려는 부흥운
동은 각지에서 끊이지 않았다. 부흥군은 동맹국 일본에 지원군 파병을
세 차례의 이주
요청했다. 이에 일본은 두 차례에 걸쳐 4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냈다.
백제인은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현해탄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첫
백제-일본 연합군과 신라-당 연합군의 싸움은 바다와 육지에서 치
이주는 4세기 중반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잇단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열하게 벌어졌다. 고대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이라 할 만했다. 결과
백제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일본과의 유대를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그
는 신라-당 연합군의 대승이었다. 백제는 한반도의 삼국 중 가장 뛰어
런 국제 정세 속에서 백제는 아직기와 왕인 두 학자를 일본으로 보냈
난 외교 감각을 자랑하던 문화강국이었으나, 멸망의 비운을 벗어나지
다. 먼저 아직기가 말 두 필과 더불어 건너가 승마술을 가르쳤으며, 경
못했다. 어떤 면에서 일본의 구원군은 백제의 탁월한 국제성을 웅변하
서에 밝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아직기의 천거로 일본의 부름을 받
는 마지막 카메오였다.
아 뒤따라 도일한 왕인 박사는 한학을 가르쳤다. 한자와 유교를 상징
백제 멸망 후 일본과의 밀접한 관계는 꾸준히 이어졌다. 815년, 일
하는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것이 바로 일본인들이 와니라고 부르는 왕
본의 유력 가문의 계보를 출신별로 정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인이었다. 특히 왕인의 후손은 대대로 궁중의 문서 작성과 기록, 출납,
이 천황의 명령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이들 중 3분의 1이 이
재정 등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일본 열도에 뿌리를 내려갔다.
민자인 제번(諸蕃)이었으며 대부분은 백제에 뿌리를 둔 것으로 밝혀
475년, 백제는 강성해진 고구려에게 수도인 위례성(한성)을 함락
졌다. 고대 일본은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를 키우고 국가의 기반
당해 수도를 남쪽의 공주로 옮겼는데 두 번째의 대규모 이주는 이 시 KOREAN CULTURE & ARTS 31
기와 연관된다. 고구려의 위협으로 백제와 일본의 동맹관계는 한층 긴
며, 고위 관료도 60여 명이 확인된다. 이들은 7세기 후반 일본에서 중
밀해졌으며, 백제는 군사적 지원의 대가로 선진 문물을 체득한 전문가
앙집권적인 고대국가 건설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핵심 기술 관료로 활
를 일본에 대거 파견한 것이다. 특히 무령왕(재위 501-523), 성왕(재
동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위 523-554) 치세에는 일본과의 교류가 왕성했다. 일본이 불교를 받 아들이던 이 시기에 백제에서는 주로 불교 관련 장인을 포함한 새로운
문화 전파의 가교가 되다
기술과 학식을 겸비한 기술자와 전문가 그룹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한반도 삼국은 이보다 앞서 한자로 번역된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사
들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 열도에서도 호족 연합체를 넘어서는 국가적
상적 통일과 왕권 강화, 문화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일본도 마찬가
기틀이 구축되어 갔고, 아스카시대의 화려한 불교문화가 꽃을 피우게
지였다. 수서(隨書)에는 일본이 백제에서 불경을 전해 받은 뒤에 비로
된다. 8세기 말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하며 헤이안(平安) 시대를 열었
소 문자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6세기 중반 백제의 성왕은 처음으로
던 간무(桓武) 천황은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었으며, 2001년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전했으며, 이후 불교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꾸
아키히토 일왕이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여 화제가 되었다.
준히 관련된 인적 자원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가장 오랜 사찰인 아스
그리고 백제 멸망을 전후하여 또 다시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이 대
카데라(飛鳥寺)의 건립을 위해 승려는 물론 건축 전문가에 화가까지
거 일본 열도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일본서기> 663년의 기록에
묶어 파견했다. 절이 준공되자 당대의 위정자 100여 명이 백제의 옷을
따르면 그들은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묘가 있는
입고 즐거워했다고 전한다. 초기의 일본 불교는 백제와의 긴밀한 교류
곳을 어찌 또 갈 수 있겠는가”라고 절규하며 퇴각하는 일본의 배에 몸
를 바탕으로 하여 아스카를 중심으로 기반을 다져나갔다.
을 실었다. 그 숫자는 사료를 근거로 산정된 것만 해도 3천 명을 넘으
백제는 대일 외교에 한자와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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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그치지 않고 중국과 일본을 잇는 다양한 문화 전파의 가교 역 할을 했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가랑비녀는 U자 모양을 한 금속
일본 속의 백제 유적 둘러보기
제 비녀를 가리킨다. 3세기 이후 중국의 무덤에서 존재가 확인되는 이
오사카-나라-교토
비녀는 백제를 거쳐 일본에 유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긴키 지역(교토,
일본 속의 백제는 긴키 전역에 산재한다. 서일본의 관문 간사이국제공항을
오사카, 고베 인근) 백제계 고분의 부장품 속에서 자주 발견되기 때문
나와 며칠간 백제 산책에 빠져보자.
이다. 일본 열도에 둥지를 튼 백제 유민은 동아시아 첨단의 패션 아이 템까지 소개했던 것이다.
제일 먼저 들를 곳은 일본 제 2의 도시 오사카이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 (禪廣)은 백제 멸망 후 일본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그의 성은 백제왕(百濟 王, 구다라노코니키시)씨였다. 그를 비롯한 왕족의 후예는 유민들과 함께
두 불상의 미소
그 이전부터 도왜인이 모여 살았던 오사카 시 남부 백제군(百濟郡)에 자리 를 잡았다. 현재도 재일 한국인은 이 지역에 해당하는 이쿠노(生野)에 많
앞서 말했듯이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현실 속의 백제는 사라
이 산다. 인근에서 백제라는 명칭이 들어간 역, 다리, 초등학교를 쉽사리
졌다. 하지만 문화강국이던 백제의 면모는 일본 열도에서 되살아났다.
찾을 수 있다.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불교
백제왕씨는 증손인 경복(敬福) 대에 이르러 오사카 북부 히라카타(枚
문화의 보고인데, 백제의 흔적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도다이지를 대
方) 시로 거점을 옮겼다. 나라 도다이지의 대불 건조에 금을 기부한 사람이
표하는 국보 대불을 만든 사람은 백제 멸망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유 민의 손자였다. 그리고 백제 왕족의 후손은 금광을 개발하여 대불 도 금에 필요한 금을 기부했다. 백제가 갈고 닦은 불교문화의 정수는 일
바로 경복이다. 그는 씨족의 절로서 백제사라는 큰 절을 세웠으나 화재로 불타 없어져 이 자리에는 현재 공원이 들어서 있다. 부근에는 그 무렵 함께 건립되었던 백제왕 신사(구다라오진자)가 개축되어 있다. 이어서 찾을 곳은 나라이다. 남쪽의 아스카에는 아스카데라가 있지만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기는 어렵다. 수도 이전과 더불어 그들의 절도 나라 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자리를 잡은 곳은 간코지(元興寺). 나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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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는 도다이지, 고후쿠지(興福寺)와 더불어 대사찰로 이름을 날렸으나, 중세 이후 쇠락하여 지금에 이른다. 국보인 본당 지붕의 기와는 꼭 눈여겨 봐야 한다. 백제 장인의 손길이 닿은 아스카시대의 기와가 일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간코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다이지를 둘러본 뒤에는 호류지(法隆寺) 로 이동한다. 넓은 경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국보로 가득하지만, 백제의 향기를 느낀다는 의미에서 백제관음상을 놓치지 말자. 높이 2m가 넘는 목조상은 인체의 미의식을 체현했다는 절찬을 받으며 예술 창작의 영 감을 불러일으켜왔다. 1997년 프랑스와 일본이 각각 자국을 대표하는 국 보급 미술품을 교환 공개하는 행사를 열었을 때, 루브르 미술관에 이 백제 관음상이 전시되었다. 이제 교토행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기요미즈데라(清 水寺)를 보지 않고는 교토를 말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 절 또한 백 제와 무관하지 않다. 사카노우에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는 간무 천황 시절 도호쿠(東北) 지방을 정복한 영웅이면서 기요미즈데라의 창건을 실 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 국보인 본당은 그의 집을 개축한 것이다. 사 카노우에(坂上)씨는 앞서 언급한 아야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천황의 외척 이 백제왕의 후손이었던 시대에 이들은 군사 부문의 요직을 맡으며 헤이안 시대를 열고 일본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나갔다. 마지막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교토 시내를 돌아 들를 곳은 고류지이
1 4세기 중반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왕인 박사는 일본 고대 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고 일본 땅에 묻혔다.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그의 묘역(추정)은 오사카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비석에는 ‘박사왕인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다.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을 포함한 불상들을 눈에 담으며 불교문화의 극치 를 음미하고 망국의 한을 곱씹어야 했던 백제 유민의 애환을 더듬어보자.
2 오사카시 남부 히가시스미요시구에 있는 백제대교. 이 밖에도 이 지역에는 역, 학교 등 다양한 ‘백제’가 들어간 명칭들이 남아 있고 지금도 한국계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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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일본의 동맹이 무너지면서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유대의 끈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불행한 결별은 이후의 한일 관계에도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특히 20세기 일제의 강점기로 인한 역사의 생채기는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지금껏 욱신거린다. 앞으로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어떤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을까? 한일 양국이 1500년 전 조상들의 개방성과 우의, 국제 감각을 떠올린다면 좀 더 빨리 답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본 땅에서 면면히 맥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어 있다. 두 불상의 미소는 너무나 흡사하며,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백제계 도왜인 중에는 크게 두 개의 유력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오
분명치 않은 점까지 닮았다. 한일 양국의 닮은 불상을 놓고 만든 사람
사카 부와 나라 현 인근 기나이에 정착한 아야(漢) 씨이다. 마구, 견직
이 신라인인지 백제인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그 그윽한
물, 토기, 대장장이 등의 기술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아야씨와 더
미소가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분명 백제, 신라, 일본을 너머 모든 인간
불어 도왜인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것이 하타(秦)씨이다. 이들은 기나
의 구원이었을 것이다.
이 북부의 교토 부와 근처에 자리를 잡았으며, 대대로 양잠, 직물, 치 수 등의 분야를 담당했다. 후손들은 다양한 성으로 분화되어 갔는데,
새로운 한일 관계를 꿈꾸며
1994년 80대 수상을 역임한 하타 쓰토무(羽田 孜)도 이들의 후예라고
백제와 일본의 동맹이 무너지면서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유
한다.
대의 끈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불행한 결별은 이후의 한일 관계에
603년 창건된 고류지(廣隆寺)는 원래 하타씨 가문의 사찰(氏寺, 우
도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16세기 말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엄청
지데라)이었다. 교토 북쪽에 자리한 이 고찰에는 국보로 지정된 불상
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강제적으로 식
이 여섯개나 있다. 그 중에서 으뜸은 역시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이다.
민지로 삼았다. 이후 35년 동안 식민지배로 인해 초래된 역사의 생채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아낸 불상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
기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지금껏 욱신거린다. 앞으로 한반도와
을 매료시켜왔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를 두고 “인간 실존의 최고
일본 열도는 어떤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을까? 한일 양국이 1500년
의 모습”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그런데 쌍둥이 같은 금동 미륵반가사
전 조상들의 개방성과 우의, 국제 감각을 떠올린다면 좀 더 빨리 답을
유상이 지금 한국의 국보 83호로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안치되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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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라 간코지(원흥사) 본당(오른쪽)과 선당의 지붕 기와에는 아스카시대 백제 장인이 만든 것도 일부 전해진다. 아스카에서 나라로 도읍을 옮기면서, 6세기 말 백제인의 기술로 지어진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데라를 이축(718년)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나라 호류지(법륭사) 오층탑. 607년 창건된 호류지가 670년 불에 타 없어진 뒤 8세기 초 재건될 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높이가 약 32.5m로 7세기 백제 목탑 양식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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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훈민정음과 한글디자인” 특별전
‘한글의 미래’를 본 사람과 ‘한글’에서 미래를 읽는 사람들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느니,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는 세계인의 찬사를 들으면 어깨가 으쓱해지다가 곧 머쓱해지고 만다. 공기나 물처럼 익숙한 덕에 그 가치를 잊고 소홀히 하진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다. 오래전 간송 전형필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글의 미래를 내다보고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보존했듯이, 지금의 디자이너들이 ‘한글’의 글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전시회를 가졌다. 그 시도가 여간 고맙지 않다.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안홍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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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의 “훈민정음과 한글디자인” 전시장 입구에, 1446년 새 문자의 창제를 발표할 때 백성들에게 문자의 원리와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펴낸 <훈민정음> 해례본 33면을 네온 처리한 투명 아크릴판 설치물이 어둠 속에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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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족의 대표 문화유산인 한글의 역사와 가치를 일깨우는 전시 관이자 배움터인 국립한글박물관은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문을 연 뒤 다양한 기획전과 특별행사를 통해 한글의 독창성과
유용함을 알려왔다. 세종대왕 탄신 620주년을 기념한 이번 전시의 들머리 에는 총 33면의 <훈민정음> 해례본 원형이 낱장 설치물로 펼쳐져, 관객들 로 하여금 한글 창제의 현장으로 들어서는 타임머신에 올라타는 듯한 기분 을 느끼게 한다.
탄생의 기록을 가진 유일한 문자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 문자를 빌려 쓰다 비로소 나라 문자를 만들어 널리 선포하는 국왕의 가슴 벅찬 순간이 전해져 온다. 자주, 애민, 실용의 정신이 우뚝하다. 세종을 도와 새 문자를 만든 신하들 또한 감개무량했으리라. <훈 민정음>에는 그 학자들 중 한 명인 정인지(1396–1487)의 서문도 실려 있 는데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을 마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 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는 구절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한글에 대해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찬사는 세계에서 가장 젊고 과학적 인 언어의 가치를 새삼 일깨운다. 동아시아 언어학자인 로버트 램지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는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고 했다. 노벨문학상 수 상자인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는 “한글은 깨치는 데 하루면 족하고, 매우 과학적이며 의사소통에 편리한 문자다”라고 평했다. 영국 역사 저술가 존 맨은 저서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Alpha Beta)>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 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한글은 창제 관련 정 보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자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다. 자연의 온갖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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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
를 쉽게 담을 수 있으나 모양이 단순하고 글자 수가 적었다. 점, 선, 원의 기본 형태를 이용한 자 음 글자 17개와 모음 글자 11개를 합쳐 모두 28개 글자로 이뤄졌다. 전시 1부 ‘쉽게 익혀 편히 쓰니: 배려와 소통의 문자’는 이런 훈민정음의 구성을 보여준다. 우선 자음을 보자. 인체의 각 발음 기관이 소리를 낼 때 움직이는 형상을 본떠 만든 5개의 기 본 글자는 17개의 자음 글자가 되었다. 소리 세기에 따라 기본 글자에 일정하게 획을 더하는 가 획(加劃)의 원리가 적용됐다. ‘ㄴ’보다 조금 센 소리는 획을 하나 더해 ‘ㄷ’, ‘ㄷ’보다 더 센 소리 는 다시 획을 하나 더해 ‘ㅌ’이 되는 방식이다. 소리의 특성이 글자에 그대로 반영되는 논리적 글자다.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하는 •, ㅡ, ㅣ 3개의 기본 글자는 11개의 모음 글자가 되었다. 자음 글 자 17개, 모음 글자 11개로 이루어진 28개 글자를 서로 합하면 10000개 이상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 무한한 글자 조합이 가능한 셈이다. 첫소리 글자, 가운뎃소리 글자, 끝소리 글자를 합해 글 자를 이루는 독특한 글자 운용 방식이다. 다시 정인지의 서문을 인용하자면 그는 “이 스물여덟 글자를 가지고도 전환이 무궁하다(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고 썼다.
“전환이 무궁하니”
이 전시의 2부는 바로 이 무궁 전환의 경연장이다. ‘전환이 무궁하니: 디자인으로 재해석된 한 글의 확장성'이란 제목으로 23개 팀 디자이너들이 30여 점 신작을 내놨다. 평면과 입체로 나눠 훈민정음의 원형과 내용을 협업으로 풀어냈다. 한글이 예술적으로 얼마나 큰 영감을 주는 주제인지 탐색한 그 여정이 흥미롭다. 이제 첫발 을 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도인데, 북 디자이너이자 글꼴 연구자인 정병규 씨가 “훈민정음으 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실체를 여기서 본다. 그는 “우리의 무의식에 오래 깃들어온 서양 기조 (基調)를 깨는 데 한글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강구룡의 <힘, 믈>은 서로 다른 소리의 기운을 표현했다. ‘힘’이 가진 수직구조, ‘믈’이 지닌 수
1 채병록(Chae Byung-rok)의 <톱>은 글자를 초성 ㅌ, 중성 ㅗ , 종성 ㅂ 으로 나누고 톱의 이미지로 그 글자의 의미를 표현한 작품이다. 2 하지훈(Ha Jee-hoon)의 <장석장>은 조선시대 전통 목가구에 금속 장식 요소가 어우러지는 점에 착안해서 금속으로 제작한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가구 표면을 장식했다. 3 유명상(Yu Myung-sang)의 <버들(Willow)>는 글자가 이미지에 어느 정도 녹아들 수 있는지 실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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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의 2부는 무궁 전환의 경연장이다. ‘전환이
평 구조를 이용해 글자의 의미와 이미지를 엮었다. 한글이 모양 자체
무궁하니: 디자인으로 재해석된 한글의 확장성'이란
로 뜻과 정서를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줘 재미있다.
제목으로 23개 팀 디자이너들이 30여 점 신작을 내놨다. 평면과 입체로 나눠 훈민정음의 원형과 내용을 협업으로 풀어냈다. 한글이 예술적으로 얼마나 큰 영감을 주는 주제인지 탐색한 그 여정이 흥미롭다.
박연주의 <파리를 사랑하세요?>는 ‘파리’라는 하나의 표기 안에 ‘파 리(Fly)’ ‘파리(Paris)’ 등 7개의 다른 뜻이 담겨 있음을 응용해 익숙하면 서도 낯선 언어 파생을 시도했다. 문장의 글줄을 바꾸고 섞어 반복해 배치하는 와중에 그들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느낌이 신선하다. 유명상의 <버들>은 글자가 이미지에 어느 정도 녹아들 수 있는지 버들잎의 이미지로 실험한다. 이미지 중심 디자인에 쉽게 섞이지 못하 는 글자의 한계를 넘어서보려는 작업이다. 장수영의 <감>은 한글 창제 당시에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성조점 이 표기되었다는 역사성을 되살렸다. ‘감’이라는 글자의 평성, 거성, 상 성에 해당하는 발음을 음원분석기를 통해 그래프로 뽑아내고 이를 목 판에 부조로 깎아냈다. 하지훈의 <장석장>과 황형신의 <거단곡목가구 훈민정음> 연작은 한글의 조형성을 생활 가구에 적용한 시도로 많은 관람객의 눈길을 끌 었다. 하지훈은 전통 조선 목가구에 금속 소재 장석이 장식 및 개폐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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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수영(Jang Soo-young)의 <:감>은 한글 창제 당시에 중요한 문자 요소였으나 이제는 사라진 성조점을 되돌아보자는 작품이다. 목판에 글자를 풀어 새겼고 발음의 높낮이와 길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소리가 지원된다. 2 관람객이 한글 자모음의 다양한 조합을 보여주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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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부착되는 점에 착안해서 가구 표면을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장식
정음> 해례본 원본의 존재를 알고 눈물 겨운 노력을 기울여 그것을 비
했다. 황형신은 한글의 획과 점의 모양새를 본뜬 스툴, 벤치, 의자를 제
밀리에 거금을 들여 사들인 다음 해방을 맞기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내
작했다. 그것들의 배치에 따라 글자가 만들어지는 재미있는 구상이다.
었던 걸출한 문화재 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은 “한글의 미래
이 전시는 2016년 10월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처음 열었던 같은 이
를 내다보며 광복 국가의 신념을 굳혔다”고 했다. 그 해례본 원본을 볼
름의 전시를 국내로 옮겨온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국립한글박물관의
수 있는 “훈민정음·난중일기 전: 다시 바라보다”가 4월 13일부터 10월
관련자들이 2016년 3월부터 7개월에 걸쳐 젊은 디자이너 그룹 23개
12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고
팀과 여러 차례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공유했다. 앞으로 이런 기획과
있다.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두 고전의 원본을 눈으로 확
작업이 지속될 수 있다면 왜 국립중앙박물관 옆에 국립한글박물관이
인할 수 있는 귀한 자리다.
따로 있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존재증명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 노
간송이 광복의 빛을 <훈민정음>에서 보았듯, 분단 70년 두 동강 난
력의 결과물이 박물관 전시에 그치지 않고 문화예술계와 사회 전반에
민족의 허리를 버텨주고 있는 것 또한 한글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온다. 5월 15일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이다. 1965년부터 이 날을 스 승의 날로 정해 겨레의 스승을 기려 왔다. 그리고 10월 9일은 훈민정음
<훈민정음>과 <난중일기> 원본이 보고 싶다면
이 반포된 날을 기억하기 위한 공휴일이다.
한글은 한민족의 자존심이자 자랑거리였지만 지난 수세기에 걸쳐 수
질곡의 20세기를 극복하는 큰 힘이 한글이었듯, 21세기 수많은 도
난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우리 말과 글 수호 투쟁은 가
전을 이겨내는 민족적 저력의 원천으로서 한글 창제를 다시 바라보는
장 뜻깊은 독립운동의 한가지로 꼽힌다. 일제 암흑기인 1940년 <훈민
지혜가 필요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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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난중일기 전: 다시 바라보다 2017.4.13-10.12 서울동대문플라자 디자인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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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뮤지컬 빅뱅을 주도하며 한류의 새로운 대안을 꿈꾸는
음악감독 김문정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를 비롯해 <맘마 미아!>, <레 미제라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레베카> 등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뮤지컬 빅뱅 시대를 이끄는 주역 중 한 사람 김문정.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들의 음악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해온 그녀가 창작 뮤지컬에 애착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뮤지컬 인생과 포부를 들어본다. 원종원 순천향대 신방과 교수, 뮤지컬 평론가 손초원 사진가
뮤지컬 음악감독 김문정은 “나의 체력을 유지해주는 것은 호흡이 잘 맞는 배우와의 짜릿한 순간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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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국의 뮤지컬 산업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2001년 <오페라의 유령> 한국어 공연이 막을 올린 이래 거의 해마다 17-18퍼센트의 높은 매출 신장을 이어가고 있다. “무대 는 배고픈 예술”이라는 말은 적어도 이 시장에서는 이젠 잊힌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어른 관객을
대상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막을 올리는 뮤지컬의 작품 수효만 연간 160여 편에 이른다. 제작되는 작품 의 수효만으로 이야기하자면 세계 5대 시장의 하나쯤으로 꼽힐 만하다. 이런 뮤지컬 빅뱅의 시대를 이끄는 주역 중 한 사람인 김문정은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를 비롯해 <맘마 미아!>, <엘리자벳>, <맨 오브 라 만차>, <모차르트>, <에비타>, <레 미제라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레베카>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 든 흥행 뮤지컬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해왔다.
노래극을 만들던 어린 시절 원종원 여전히 바쁘시죠? 올해는 주로 앙코르 무대들이라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나요? 김문정 워낙 작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데다 방송 출연과 대학 강의까지 겹치긴 하지만 그
래도 요즘 비교적 여유를 찾았습니다. 바빠도 그만큼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납니 다. 관객이 없으면 공연도 의미가 없잖아요. 원 흔치 않은 분야인데 뮤지컬 음악감독이란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김 지금 생각해보면 자랄 때의 집안 분위기가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아직 사람들이 뮤지컬을 잘 모르
던 어린 시절 외사촌들과 왕래가 많았는데, 특히 외할머니 생신이면 모두 모여서 노래극을 만들어 어른들 께 보여드리곤 했거든요. 그때도 저는 반주를 맡았어요. 노래와 극이 늘 동경의 대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그 사촌오빠들이 광고와 드라마 음악감독, 뮤지컬 평론가가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원 언제 처음 뮤지컬을 경험했나요? 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아가씨와 건달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어요.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구경
을 갔는데 코미디 뮤지컬이라서 즐거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 아마 1980년대 중후반으로 민간극단들이 앞다퉈 각기 다른 버전의 번안 뮤지컬을 무대에 올리던 때
였죠. 김 그러고 보면 요즘 뮤지컬 같은 라이브 연주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어요. 원 나중에 대학에 진학해서는 실용음악을 공부하셨지요? 김 맞습니다. 졸업 후 건반 세션 연주자로 활동을 하다 1992년에 우연히 뮤지컬 <코러스 라인>에 피아노
반주자로 참여하게 됐어요. 솔직히 돈벌이는 변변치 않았지만, 그 이전에 광고음악 등 틀에 짜여 있는 음악 을 하다 무대를 접하니 그 자유로움에 단번에 매료되었죠. 4–5분 길이의 대중음악보다 호흡이 길어서 희로 애락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뮤지컬 쪽 일을 기회가 닿는 대로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1997년 <명성황후> 연주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에 뛰어들었죠. 박칼린 음악감독에 의해 발탁됐는데요, 정말 즐겁게 작업을 했습니다. 나중에 제작사인 에이콤의 윤호진 연 출께 인정을 받아 이 작품의 음악감독까지 맡게 됐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참 고마운 인연입니다.
첫 LA 공연
<명성황후>는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던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격랑 속에 사라져간 왕비를 주인공으로 삼은 뮤지컬이다. 전통 한국식 감각의 무대미술과 의상, 정서를 담아내 막을 올릴 때마다 큰 흥행을 기록해왔다. 김 KOREAN CULTURE & ARTS 43
문정 감독은 이 작품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국내는 물론 미국과 영국
가 높아지며 작품 수도 많아지고 배우도 많이 늘어서 흥미로울 것 같아
등지에서도 큰 갈채를 받은 바 있다.
흔쾌히 동참했는데,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기뻤어요. 방송 때문에
원 음악감독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뭔가요?
제 삶 자체가 크게 바뀐 것은 없지만, 그래도 요즘 길거리에서 지나가다
김 2003년 <명성황후> LA 공연 때의 체험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작
가 저를 알아봐주시는 분들도 있어 즐겁게 웃으며 인사하곤 합니다. 심
품을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이유로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야 하
사위원석에 앉아 있지만 음악감독의 눈으로 출연자들의 성장을 돕는
는 중책을 맡게 된 터에 외국 공연이 잡힌 거죠. 미국에는 연주자 노조
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하는 출연자들의 모습이 눈
가 있어서 그곳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반드시 미국 연주자들을 반주자
물나게 감동적이었습니다. 앞으로 무대에서 함께 작업하고픈 배우들도
로 고용해야 합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가슴이 떨려요. 엉뚱하
많았고요.
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영어를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
원 가장 안타까웠던 참가자는요?
니다. 말이 어설프면 기선을 제압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일부러 통역을
김 중학생이었던 이준환 군이죠. 실력은 정말 좋았지만 프로그램의
거쳐 의견을 전했습니다. 음악감독이라면 카리스마를 보여야 한다고
최종 목표가 4인조 팝페라 팀을 만드는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중간에 탈
생각했어요. 솔직히 그만큼 긴장했다는 의미도 되겠죠. 호의적인 멤버 도 있었고, 긴장 관계가 계속됐던 연주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공연까지 마쳤을 때, 반주자들이 기립박수를 보내줬던 일은 정말 뿌듯 한 체험이었습니다. 원 마음 아픈 작품도 있겠죠?
뮤지컬 <레 미제라블> 연습 광경. 음악감독 김문정 (오른 쪽 사진 맨 오른 쪽)이 오케스트라단원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김 처음 작곡까지 겸했던 창작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은 참 잘 만
들었다고 자부했고 상도 많이 받았는데, 정작 흥행까지 이뤄내진 못했 어요. 요즘 인기가 높은 조정석 배우가 주인공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 도 티켓 파워가 큰 배우는 아니었거든요. 언젠가 다시 막을 올리면 좋겠 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원 그 작품으로 2008년 한국뮤지컬대상 작곡상을 받으셨죠. 그러나
그 뒤로는 음악감독으로서의 작업에 훨씬 더 치중해 오신 것 같습니다. 김 그래도 작곡 일을 놓지는 않고 있어요. 트로트 음악으로 만든 뮤
지컬도 구상 중입니다. 원 흥행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편인가요? 김 뮤지컬에는 대중문화적 성격이 있어요. 관객이 한번 외면하면
다시 내보이기 어렵게 되죠. 제작비가 적지 않다 보니 그런 현상이 더 욱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음악감독의 눈으로 원 최근 케이블 종편 채널인 JTBC에서 방송됐던 오디션 프로그램 <팬
텀 싱어>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오 디션 프로그램 형식인데, 가창력이 뛰어난 출연자들이 많이 등장하더 군요. 김감독이 보여준 심사위원으로서의 카리스마도 무척 인상 깊었 습니다. 김 뮤지컬 시상식 연출을 많이 했던 김형중 PD가 프로그램을 만들
며 제안을 해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요즘 뮤지컬이 인기 ©심규태
44 KOREANA 2017 여름호
락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춤도 잘 추고 예술성도 뛰어났는데 정말 힘
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드라마로도 사랑 받았던 <모래시계>와 작고
든 결정이었습니다. 모두 안타까워했어요. 저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미
한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들로 꾸민 <광화문연가> 새 버전을 준비하고
래를 크게 기대합니다.
있습니다. <서편제>, <레베카>, <루돌프>, <마타하리> 같은 인기작들의
원 새 시즌에도 참여하시나요? 김 제안은 받았어요. 시작을 함께 했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감춰진
배우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보람도 느끼기에 참여하는 게 좋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앙코르 공연들도 잡혀 있습니다. 원 해외 진출에 대한 음악감독으로서의 포부도 있겠죠? 김 대한민국 뮤지컬 관계자라면 누구라도 공감하겠지만, 저도 우리
뮤지컬로 해외시장에 진출하고픈 욕심이 있습니다. 이만큼 성장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글로벌 관객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요. 물론 지
창작 뮤지컬에 대한 애착
금도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공연장을 많이 찾아주고 있고, 한국
원 요즘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뮤지컬을 보기 위해 해외에서 오는 외국인들도 꽤 있지만, 보다 많은
김 많은 작품들을 제안 받지만 외국 작품보다 창작 뮤지컬에 더 관
이들에게 우리가 창작한 뮤지컬을 경험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한류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평가도 욕심나고요.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곧 가능 한 일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서양의 뮤지컬이 1900년대를 전후로 대중적인 성격의 상업극들 — 예를 들어, 보드빌이나 민스트릴 쇼, 벌레스크 등 — 에서 영향을 받아 건전한 가족오락물로서 정체성을 지니게 됐다면, 한국의 뮤지컬은 속 요, 탈춤, 굿이나 판소리, 악극 등 옛 연희 형식을 밑거름 삼고 있다. 브 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같은 영미권 공연시장과는 다소 결이 다른 정 체성과 매력을 지니게 된 배경이다. 수많은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들의 음악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해온 그녀가 창작 뮤지컬에 여전 히 애착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김감독이 꿈꾸는 한국 뮤지컬의 내일이 ‘맑 음’이라는 사실이다.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포부와 행보에 뜨거운 박수 를 보내는 이유다. 자연스레 그녀가 만든 멋진 다음 무대와의 만남이 더욱 궁금해진다.
KOREAN CULTURE & ARTS 45
전통 유산 장인
옹기장 이현배의 ‘생각하는 손’
강신재 자유기고가 안홍범 사진가
지난 세대의 전통공예 장인들이 도제식으로 기술을 체득하고 오로지 결과물로만 말했다면, 옹기장 이현배(李鉉培)는 새 세대 장인이다. 그는 옹기를 말과 글로 배웠고 옹기를 빚어내는 과정 하나하나를 뜯어 사유하며, 전통에서 현대적인 쓸모를 재창출하는 일에 정성을 기울인다. 1
46 KOREANA 2017 여름호
의 말을 듣는 것은 읽기에 가까웠다. 그가 앞말과 뒷말을
그
한편으론 그 몰아붙이는 사유의 한 자락에 어떤 안간힘이 양각처럼
잇는 사이에 내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나서 고이고 흩어
돋아나기도 해서, 그를 보는 마음은 간단치 않았다. 전통의 영역에 잠
지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옹기점에서 일한 지 5개월째의
긴 옹기를 어떻게든 오늘에 부양시키려는, 더불어 그것으로 오늘 위에
얘기가 그랬다. 그는 깨진 옹기를 보면서 “순간 불끈 솟는 어떤 힘”을
새겨진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려 애쓰는 안간힘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느꼈다고 했다. 옹기를 만든 적도 없었고, 옹기점의 실무를 맡으며 이
동력 삼아 늘 움직이는 듯한 그는 단단해 보였다. 1000도가 넘는 불길
따금씩 물건 보는 법을 익힐 때였다. 그것을 “개안(開眼)”이라 표현한
을 견디면서도 뭉개지지 않는 흙 구조물 옹기처럼.
그는 말을 보탰다. “왜 거기서 그런 기운을 느꼈을까 나중에 생각해봤 는데, 깨진 옹기 뚝배기 옆 단면을 보면 정자 모양인 거예요. 옹기의 상
방황 중에 마주친 산골 옹기점
단에 말린 이 부분을 ‘전’이라 하는데 전은 머리, 금 간 부분은 꼬리 모
“어렸을 때 별명이 ‘골배’였어요. 골이 비었다고… 생각 좀 하고 살라는
양이죠. 정자의 머리가 모든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듯이, 옹기에 대한
얘기도 줄곧 들었죠.”
정보도 다 전에 있습니다.”
그는 얼굴에 주름을 팬 채로 크게 웃었다. 쑥스러운 과거를 돌이키
옹기와 생명력이라는 주제로 맞춘 듯 수렴하는 이야기, 옹기 빚는
는 말끝에 다녀가는 웃음이었다. “눈 뜨면 어디론가 가 있을 줄 알았는
솜씨로 매끈하게 빚은 이야기였지만, 물음표가 슬며시 떠오르기도 했
데, 매일 눈 뜨면 제 자리였어요. 속에서 불이 끓어서 악을 쓰고…. 돌
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퍼내는 이야기의 한 삽에 불과했다. 때론 예상
아서면 공허하고 그랬죠. 혼자 난리를 치다가 뛰쳐나가서 둑 위에 올
하는 이야기의 반경을 넘어설 때도 있었다. 물레를 말하면서는 “물레
라서면 물소리가 들렸어요. 정신이 들 때 처음 들리던 소리였던 거죠.”
를 앞에 두고 봤을 때, 엉덩이를 붙이는 앉은개는 빛이 들어오는 쪽을
그래서 첫 아이 이름도 ‘물’로 짓고 정착지도 섬진강 발원지에서 찾
오른쪽으로 둬요. 그러니까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서 물레를 왼발로
았다는 그가 말했다. 정리되지 않는 마음에 이끌려 다니던 그는 십대
당기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가운데 그릇의 오른쪽, 그릇의 바
후반 무작정 집을 떠나 서울로 향하기도 했고, 고물상 리어카를 끌며
깥쪽을 봐요”라며 물레를 다루는 현장의 시선까지 세밀하게 논했다.
고향 땅을 떠돌기도 했다. 호텔에 취직해서 초콜릿을 만들며 넉넉한
지극함의 여러 방향을 오가던 옹기장 이현배의 답에선 숙성의 시간
연봉으로 살 때도 있었지만, 그 호텔 로비의 조소작품에 매료돼 뒤늦
이 보였다. 즉흥적인 말은 없었다. 그는 옹기를 이루는 모든 가닥을 낱
게 조소를 배우며 새 삶을 고민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여행길에 전남
낱이 나눠 그 각각에 의미를 새긴 것 같았고, 옹기와 함께 산 26년 역시
벌교의 옹기점 징광옹기에 들르면서 그는 변곡점을 맞았다.
옹기라는 주제로 재편한 것 같았다. 게다가 그것을 머릿속 한켠에 그
“옹기점에서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데, 느닷없이 옹기 배우고 싶어
저 몰아둔 것을 넘어, 선명하게 언어화하는 과정을 마친 듯했다. 그 사
서 왔다는 말이 나와버린 거예요. 말하고선 저도 깜짝 놀랐죠. 1970년
유의 총량이 보였다.
대 후반을 풍미했던 민중문화 잡지 <뿌리깊은 나무> 과월호를 밤마다
1 이현배 옹기장이 전라북도 진안에 있는 손내옹기 작업장 물레 앞에 앉아 옹기를 짓고 있다. 2 이현배 옹기장이 잘 마른 옹기들을 굽기 위해 아내와 함께 가마에 재고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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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울 때 불을 뜸들이듯이 지긋이 때어야 해요. 산조 가락이나 재즈 같은 느낌으로. 불을 때는 패턴과 발효의 패턴은 비슷해요. 같은 생명 활동이라서 그래요. 현대식 가스 가마에서 그저 익히기만 한 그릇과 장작 가마에서 일주일 가까이 뜸들이듯 구운 그릇이 같을 수 없겠죠. 발효의 기능이 전혀 달라요.” 48 KOREANA 2017 여름호
읽던 시절이었는데, 옹기 기사를 보고선 ‘이거, 할 일은 아니구나’ 생각하기도 했거든요. 제가 어려서부터 배고픈 걸 제일 싫어했는 데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나와 있길래….” 플라스틱의 대중화, 전통 오짓물(잿물이라고도 부르는 자연유 약) 대신 사용한 화학성분의 광명단 유약의 납 검출 파문 등으로 옹기는 믿음도 효용도 잃던 시기였다. 징광옹기 역시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1990년부터 시작된 징광옹기에서의 2년 7개월은 가지런한 언어로 풀기 어려운 무엇이었다. 장인의 초기 생애에 빠지지 않는, 절대적인 스승 아래 기식하며 어깨 너머로 습 득하던 도제식 배움의 사연도 없었다. 관리자로 물건이나 정리하 고 관리하던 시절이었고, 가끔씩 오가던 옹기장 박나섭의 작업을 드문드문 마주할 뿐이었다. 그때를 돌이키던 이야기에서 유독 반 복되던 두 이름은 한창기와 한상훈. 전자는 앞에 말한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이고, 후자는 그의 동생이자 징광옹기의 대표였다. 그는 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미적 관점을 틔웠다며 이렇게 말했다. “옹기점 안에서는 한창기를 큰 선생님, 한상훈을 작은 선생님이라 고 불렀어요. 그런데 옹기장이 박나섭은 영감님이라고 불렀죠. 이 후에 생각했어요. 나는 왜 옹기장이를 스승으로 못 두고 말쟁이를 스승으로 두며 이 일을 익혔나. 그런데 옹기를 제일 쉽게 하는 방 법이 말로 배우는 것이기도 해요.” 그 일정하지 않은 배움으로도 그는 당장 가게에 공급할 옹기를 만들어야 했다. 눈대중으로 알아차려 만든 옹기는 때론 불 속에서 내려앉기도 했고, 눈앞에서 가마가 통째로 무너지기도 했다. 하지 만 무질서에서 한시라도 빨리 질서를 찾아 올려야 하는 절박함이 앞섰다. 그것을 이기고 넘으니 “1994년 이후로 물건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진안에 손내옹기를 열고 자신의 옹기를 내 어놓기 시작했다. ©이솔
그 혼란스러운 몇 년만으로도 배움에 부족함은 없었을까, 왜 더 배우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질문을 받고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답한다. “그런데 그… 옹기 만드는 기술이란 건, 단순해요.”
흙, 불, 바람, 그리고 볕
단순하다면 단순할지도 모른다. 흙으로 형태를 만들고 오짓물을 입혀 불에 구워낸 것이 옹기니까. 하지만 옹기장은 흙, 불, 공기와 고루 마음을 통해야만 한 개의 온전한 옹기를 내놓을 수 있다. “죽 은 흙이 있고, 산 흙이 있어요. 색깔만 봐도 알아요. 죽은 흙은 맛이 이현배 옹기장이 가마의 터진 구멍으로 장작을 던져 넣어 불을 한껏 키우고 있다. 가마에 밑불을 넣은 뒤 달구어진 옹기의 표면에 묻어 있는 유약을 녹이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이레 정도가 걸린다.
다르고 특유의 냄새가 있어요. 그건 힘을 못 써요. 그릇을 만들 때 느낌이 아래로 자꾸 처지죠. 전체 중량은 같은 그릇이라도 들 때 KOREAN CULTURE & ARTS 49
1
더 무겁구요. 불에 들어가서도 견디질 못하고 우그러지고….” 그럼 옹기는 어떤 흙으로 빚을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옹기의 재료로 쓰는 흙은 흔하다고 했다. 사는 곳의 반경 2-3km 안에서 구할 수 있을
은 새지 않는데 통풍은 되어야 하는. 그러니 흙의 구조가 치밀해서는 안 되죠. 고운 입자, 굵은 입자가 섞여있으면서 적당히 어설픈 것이어 야 통풍이 되죠.”
정도로. 들의 흙은 무르고 산의 흙은 강한 반면 산과 들이 만나는 그 지
그는 자신과 옹기를 그렇게 낮추며 덧붙였다. 그 구조는 자기와 차
점의 흙이 적당하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어느 지역의 흙이 가장 좋을
별되는 옹기 고유의 특성이라고. 강도를 높이고 색을 얻기 위해서 입
까. “작업하기에 조금 나은 흙이란 건 있어요. 다만 어른들은 어느 지역
히는 자기의 유약은 옷을 입힌 듯 유리질화해서 일종의 코팅막을 치지
이건 세 군데의 흙을 섞어 쓰면 탈이 없다고 그래요. 옹기는 한약처럼
만, 오짓물 유약은 흙과 한 피부가 되어 숨구멍을 틔운다는 것이다. 발
생각하면 딱 맞아요. 조화에 의해서 나오는 힘이지, 단일한 성분이 자
효 음식이 신선도를 유지하며 덥고 습한 여름과 춥고 건조한 겨울의
기 주장이 강해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는 거예요.”
양 극단을 이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그러면 어떤 질감의 어떤 흙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고른 흙
그는 거기서 불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다. 옹기는 여름에 늘어지는
은 결국 결과물에서 어떤 차이를 보이는 걸까. 흙을 자꾸만 파고들어
것, 겨울에 추위로 파열되는 것까지 흡수하는 유연성을 갖는데 그 힘
물으니 그는 한 걸음 물러선다. “옹기일 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게
은 불에서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 불이나 그 힘을 내려주진 않는
옹기는 ‘숨 쉬는 그릇’이다 해서 영험한 그릇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다. “구울 때 불을 뜸들이듯이 지긋이 때어야 해요. 산조 가락이나 재즈
알고 봤더니 아무것도 아니야. 옹기가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옹기에 담
같은 느낌으로. 불을 때는 패턴과 발효의 패턴은 비슷해요. 같은 생명
긴 게 숨을 쉬어요. 옹기는 기능적으로 발효를 위한 그릇이잖아요. 물
활동이라서 그래요. 현대식 가스 가마에서 그저 익히기만 한 그릇과
50 KOREANA 2017 여름호
장작 가마에서 일주일 가까이 뜸들이듯 구운 그릇이 같을 수 없겠죠.
한 식기와 조리도구들이 다양했다. 그는 옹기가 실용성과 조형미를 모
발효의 기능이 전혀 달라요.”
두 구현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현대의 생활용품 중 옹기적인 요소를
흙과 불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전개한 그는 바람과 볕의 이야기도
가진 대상을 찾아 옹기로 만드는 시도를 지속한다고 했다. 그의 달항
끌어온다. 형태를 완성한 흙이 불을 만나기 직전, 바람에 건조되는 며
아리와 전골솥이 2008년 유네스코 우수 수공예품으로 선정된 것은 그
칠의 이야기다. 그는 빚은 그릇을 아침이슬이 깨기 전에 내어 그늘에
노력의 결과다.
뒀다가 해를 보게 한다. 그래야 옹기가 안정적으로 마른다고 했다. 해
그것이 끝이 아니다. “옹기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때 시대를
를 보고 가마에 들어간 그릇과 해를 못 보고 들어간 그릇이 다르다고
16세기 이후 조선 중후기로 상정했어요. 오지그릇이 형성된 게 이 때
도 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지만.
였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아이들과 가족회의를 하면서 시대를 몇 세기 올려 고려로 소급해보자고 했어요. 사회에서 생산되어 개인에게 보급
가족이 함께하는 옹기 실험
되는 그릇 개념이 아니라 개인이나 가정에서 자작자족(自作自足)으로
“갓 태어난 아기의 태를 담는 태항아리, 밥을 담는 오모가리, 똥을 담는
얻는 그릇 개념으로 풀 수 있으니까요. 고려 도기를 빚어서 장을 담아
합수독아지, 시신을 담는 옹관까지 한반도 사람들의 처음과 중간과 끝
보기 등 여러 일을 기획하고 있어요.”
을 담는 모든 것이 옹기입니다.”
미적 영감을 제공하는 회화전공자 아내, 도예를 배워 그와 일을 함
옹기 속에서 인간사를 보는 그가 말한다. 어디 그뿐일까. 장을 담는
께 꾸리는 아들, 조각을 전공해 생활 소품과 음식 등의 아이디어를 주
저장고지만 동시에 우리의 고유한 발효문화의 원형까지 함께 담아온
는 첫째 딸, 출판 편집을 공부하며 모든 작업의 언어화를 고민하는 둘
장독, 어둠을 밝히던 등잔, 숯을 피우던 화덕, 술을 증류시키던 소줏고
째 딸 모두 그의 지원군이다. 옹기를 같이 만드는 것은 물론, 각자의 차
리 등 옹기로 만들었던 생활용품은 끝이 없다.
별된 시선과 경험에 기반해 전승 옹기 문화의 체계와 방법을 논하기도
그래서 지난 겨울에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오늘
하고, 범주를 넓혀 식생활 문화 전반까지 함께 궁리하기도 한다. 음식
의 옹기: 이현배> 전에서 만난 그의 새로운 옹기들이 반가웠다. 소박한
을 함께 배우고 함께 만들어 먹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공부다. 그것은
형태의 국수상, 서양식 상차림을 위한 식기, 에스프레소잔과 커피로스
‘패밀리 비즈니스’라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터, 한약 한 첩을 데워 먹기 편한 약손 등 현대의 식문화를 옹기로 해석
멈출 줄 모르는 그가 오늘 향하는 곳은 뜻밖에도 플라스틱 가게와 공구상이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기 전에 종 종 가는 곳이에요. 거기서 물건들의 구성 원
1 지난 겨울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오늘의 옹기: 이현배> 전시에 선보였던 다양한 옹관들은 그가 2008년부터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와 함께 진행해온 영산강 유역 고대 옹관 제작 기술 복원 프로젝트의 결실들이다. 2 <오늘의 옹기: 이현배> 전시에 나온 규모를 달리한 세 벌의 장독 세트는 장인의 옹기 작업이 현대 주거 여건과 식생활에 맞춰 이뤄져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보여준다.
리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보는 거죠. 이런 물건엔 사심이란 게 없잖아요. 기능에 충실할 뿐이니까. 그런데 여기에 시간을 더하 면 전통이 되죠. 가끔 박물관에도 가는데 박 물관에서 시간을 빼면 현대가 있어요. ” 그는 끝으로 “생각하는 손”을 말했다. 옹기 와 함께 하며 몸에 축적해온 모든 기억과 사 유와 행위가 녹아 있는 손을 말하는 것 같았 다. 사족 달지 않고 오직 작품으로 얘기하겠 다는 여느 무형문화재들은 논하지 않는 개념. 그는 옹기라는 결과물로 사는 옹기장이가 아 니었다. 옹기장이로 살아온 시간을 함께 살아 가려는 옹기장이였다. 그 시간 속에 진짜 이 현배, 그리고 그의 진짜 옹기가 있다.
2
KOREAN CULTURE & ARTS 51
아트 리뷰
움직이는 전통 한국 춤, 새로운 경계에 서다 52 KOREANA 2017 여름호
국립무용단의 <회오리>는 한국무용계에 제목처럼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무대 한쪽에 자리잡은 음악집단 비빙은 이 작품이 추구한 전통의 해체와 재조합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립극장
국립무용단의 <회오리> 두 번째 국내 공연이 지난 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렸다. 초연에 견주어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정교해지고, 외국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무대의 완성도는 더 높아졌다. 전통 무용에 기반을 둔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소임에 머물던 시절을 생각하면 국립무용단의 도전과 실험은 기대 이상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무용평론가
KOREAN CULTURE & ARTS 53 2
몸체를 가볍게 감싼 간결한 디자인의 의상들은 움직임의 자율성을 극대화했다. 단아한 치마저고리, 비녀머리와 버선발이라는 한국 춤의 관습과는 거리가 먼, 하늘거리는 얇은 천으로 몸체를 휘감은 의상은 신체 움직임의 해방을 추동했다.
국
립무용단의 두 번째 국내 공연작인 <회오리>는 그동안 추구해온 기존 안무 스타일과 완전히 차
1, 2 윤성주 안무의 국립무용단 <묵향>이
별화된 무대를 보여주었다. 태초의 몸짓을 추구하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종횡무진 예측할 수
페스티벌에서 공연되고 있다. 2013년
없는 형상을 그리면서 80분간 강렬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파격을 이끌어낸 주역은 핀란드 출
신 안무가 테로 사리넨(Tero Saarinen)이다. 일찍이 중국의 경극과 일본의 부토 등을 배우고 익혀 그의 창작 작업에 귀중한 자양분으로 삼아온 이 안무가는 이번 작업에서도 그 경험을 의미 있게 적용했다.
깊이를 더한 춤과 성공적인 협업
<회오리>의 안무 모티브는 태고(太古)이며.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은 제의성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의 회귀를 추구하는 몸짓들에는 ‘지금 여기’라는 현대성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초반의 무대에는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이 교차한다. 물오른 몸짓으로 반전의 묘미를 한껏 구현하는 무용수들의 춤에서 깊은 내공을 엿볼 수 있었다. 몇몇 남성무용수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몸 짓은 질박미가 더해져 독특한 미감을 안겨줬다. 군무의 움직임은 민첩하면서도 격정적이었으며, 원초적인 ‘날 것’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몸체를 가볍게 감싼 간결한 디자인의 의상들은 그리스 튜닉을 연상케 하면서 움직임의 자율성을 극대화 했다. 단아한 치마저고리, 비녀머리와 버선발이라는 한국춤의 관습과는 거리가 먼, 하늘거리는 얇은 천으로 몸체를 휘감은 의상은 신체 움직임의 해방을 추동했다. 고전발레의 완고한 형식을 파기하고 모던댄스라는 혁신적 사조를 탄생시킨 이사도라 덩컨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음악은 장영규가 이끄는 비빙(Be-Being)이 맡았다. 천재성과 탁월한 감각으로 무용음악의 새로운 지평 을 열어가고 있는 이 연주집단의 발탁은 신의 한 수였다. 전통악기 해금, 피리, 가야금을 재해석해 연주하는 비빙의 구성원들은 신들린 듯 고요와 신명, 격정을 넘나들었고 소리꾼 이승희는 무대를 압도했다. 현대적이 면서도 완고함의 전통이 깃들어 있어서 가벼운 듯 중후한 비빙의 음악은 제의적 분위기를 극대화하면서 이 국적 감성까지 자극했다. 스웨덴 출신 무대미술가 미키 쿤투(Mikki Kunttu)의 무대디자인과 조명도 눈여겨볼 점이다. 무대 왼쪽 옆 막을 걷어내고 악단을 앉히는 파격을 선보였다. 다만, 이러한 배치로 무용수들의 등장과 퇴장이 자유롭 지 못했고, 그로 인해 무대의 흐름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다. 조명은 제의성을 바탕에 깔면서 때론 몽환적 이고 때론 환희에 차 있어서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높여주었다. 그가 왜 세계적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라 있 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54 KOREANA 2017 여름호
2016년 6월 프랑스 리옹 레뉘드푸르비에르 초연된 이 작품은 이어 앞서 2016년 2월 홍콩아트페스티벌에도 초청되었다.
1 2
KOREAN CULTURE & ARTS 55
1
1 의상디자이너 에리카 투루넨은 주름 잡힌 의상 속에 마이크를 숨겨 무용수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바람 소리와 음악이 어우러지게 했다. 2 조명과 무대 디자인을 맡은 미키 쿤투는 무대 바닥을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 간결한 검정색 배경과 강렬한 대조를 꾀했다.
두 갈래 실험
<회오리>의 초연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수적인 전통을 고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국립무 용단은 2013년 새로운 실험에 도전했다. 기존의 무용극의 틀에서 벗어나 이른바 이미지댄스, 즉 추상 개념 을 구현하여 새로운 공연미학을 창출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작업은 두 갈래로 시도되었다. 우선 한국 전통춤이 아닌 현대무용 전공자에게 안무를 맡겼다. 안무가 안성수의 <단(壇)>(2013)이 그 첫 결실이었다. 두 번째가 국립무용단 55년 역사에 처음으로 외국인 안무가를 투입하는 시도였고, 테로 사리넨이 처음 으로 발탁되었다. 세계무용사에 이름이 남을 현대무용가 카롤린 칼송이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알려지면 서 호기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유럽에서 이미 독보적 안무가로 정평이 나 있던 그가 과연 한국 관객들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가? 공연 전 무용계 안팎의 시선은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회오리>의 초연은 성공적이었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혼재되어 상호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다 름과 낯섦이 교차하는 절묘한 무대미학으로 주목 받았었다. 이번 재공연은 초연에 비해 예술적 완성도가 훨씬 높아졌다. 우선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 정교해졌다. 장르를 초월한 움직임은 내면화를 통해 밀착된 교감을 이끌어냈다. 김미애는 단연 돋보였다. 한국춤 고유의 몸짓에서부터 모던한 움직임까지 능숙하게 소화했다. 탁월한 기량과 근성으로 무대를 누빈 송지영, 황요천, 이석준 등은 차세대 주역을 예고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음악, 조명, 의상 등 국경을 초월한 아티스트들 의 협업은 공연 횟수를 더할수록 공연미학적 가치를 드높이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견인했다.
56 KOREANA 2017 여름호
2
‘전통의 현대화’라는 가능성과 한계
새로운 시도들에 힘입어 국립무용단의 해외공연 기회가 늘고 있다. 2015년 <회오리>가 칸댄스페스티벌에 초청됐고, 2013년 초연되어 한국춤은 물론 전통한복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주목 받았던 윤성주 안무의 <묵 향>은 2016년 홍콩아트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조세 몽탈보 안무의 <시간의 나이>는 2016년 3월 국립극장 초연 석 달 뒤 파리 샤요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과거 국립무용단의 해외공연이 주로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소임 수행에 머물렀던 점을 감안하면 최근의 이런 해외공연들은 국제성을 인정받았다는 징표로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만큼 국립무용단의 키가 훌 쩍 자라나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회오리>는 한마디로 저명한 해외 안무가의 힘을 빌어 ‘전통의 현대화’를 구현한 작품이다. 전통춤, 신 무용, 창작춤의 경계를 자유롭게 뛰어넘어 한국춤의 흐름을 오로지 창작의 영감으로만 삼을 수 있었던 것도 외국인 안무가였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 어떤 움직임도 자유자재로 허용한 결과 한국춤 고유의 몸 짓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때로는 몸짓 그 자체만 남겨두었다고 느껴질 만큼. 창작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한 국립무용단의 도전과 실험은 이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무용에 기반을 둔 이 무용단의 예술적 이념과 지향성이 어디까지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회오리>의 사례가 앞으로 의미 있는 잣대가 되길 기대한다.
KOREAN CULTURE & ARTS 57
두 한국 이야기
금년 초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판된 북한의 익명작가 반디의 소설 <고발>의 표지 이미지들은 폐쇄된 전체주의 사회 북한의 실상에 대한 저자의 고발 내용을 다채롭게 표현하고 있다.
‘북한의 솔제니친’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최근 ‘북한의 솔제니친’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반디’라는 필명을 가진 북한작가의 소설집 <고발>이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이 말고도 탈북한 시인 장진성, 소설가 김유경의 작품집이 그들만의 비극적인 체제의 실상과 체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해외에 소개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해외의 뜨거운 반응과 달리 정작 남한에서는 이들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다. 무엇이 우리의 시선을 한쪽으로 돌려놓은 것일까. 김학순 언론인,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58 KOREANA 2017 여름호
서
방세계가 알고 있는 북한 문학은 대부분 3대를 이어온 김일
는 청년 지식인, 과학자, 기술자들이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가치 있는
성 일가의 독재체제를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도구에 불과하
삶을 형상화하면서 남녀 간 애정 윤리를 다룬 작품이다. 이혼 문제를
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 문학은 여전히 최고지도자의 통치
다뤄 북한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소설 <벗>은 2011년 프랑스어로 번
이념에 따라 창작의 큰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 새해 첫날 발표되는 지
역 출판돼 해외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북한 문학 작품이 유럽에서 출
도자의 신년사가 해마다 문학의 방향과 작품 내용의 바탕이 된다.
판되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2004년 남한에서 출간됐던 또 다른 북한 소설인 홍석중(洪錫中)의 <황진이>는 2002년 당시 평양의 독서
찬양과 사회비판 사이
계를 석권한 인기 역사물이었다. 홍석중은 남북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그렇다고 찬양 문학작품 일색이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북한의 공인
받았고 널리 읽힌 역사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洪命熹
문인 조직인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 분과에 소속돼 문예 활동을
1888–1968)의 손자이기도 하다.
하다가 1998년 탈북한 최진이 시인(58)의 다음 증언은 통념과 조금 다 르다. “남한에서는 북한 작가들이 찬양 문학만 한다고 여기기 쉬운데
세계가 반디의 <고발>에 주목한 까닭
그렇지 않다. 북한이 독재 사회여서 겉으로는 체제 찬양적인 문학이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 반체제 문학 작품을 내놓는 건 금기다. 체제를
많아 보이지만 체제를 찬양하는 작가를 극단적인 아첨주의자이며 문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작품이라면 북한 특유의 정치범 수용
학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다고 여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소 행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들도 친한 사람끼리만 모여 있을 땐 이따금
이런 상황에서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얼굴 없는 작
체제에 대한 완곡한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있다고 최진이 시인은
가의 문제작이 최근 들어 남한과 서방세계에서 부쩍 주목 받기 시작했
말한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찬양시를 지나치게 많이 쓴 한 작가가 동
다. ‘반디’라는 필명을 쓰는 북한 작가의 단편소설집 <고발>이 그것이
료들로부터 지청구를 들었다. “너는 짬만 나면 김일성 부자 욕을 해대
다. 이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들에서 더욱 각광을 받
더니 찬양시는 어찌 그리 많이 쓰느냐.” 그러자 그 작가는 “난 김일성
고 있다. 프랑스에서 처음 붙여진 ‘북한의 솔제니친’이라는 별명 덕분
부자가 아니라 내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어쩔래” 하고 둘러
에 유명세가 한층 더해졌다.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
댔다고 한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한번은 작가동맹의 찬양시를 보
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
고 나서 “닭살이 돋는 것 같다”며 물리친 적이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명이다.
북한 작가들은 문학 본연의 내적 자율성과 사회주의 체제유지를 전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제로 한 사회비판이 조심스럽게 허용되면서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애정, 직업선택, 이혼, 도시와 농촌의 격차, 세대 이질성과 같은 다양한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문제에도 관심을 쏟게 됐다고 한다.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의 문
남대현의 <청춘송가>(1987), 백남룡(白南龍)의 <벗>(1988)은 1990
학이 외부 세계에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솔제니친이 스탈린 독재
년대 후반 남한에도 소개됐을 정도로 탈이념적 소설이다. <청춘송가>
체제의 만행을 고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을
KOREAN CULTURE & ARTS 59
발표하면서부터다. 북한의 반체제 문학이 해외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 한 것도 반디의 소설집 <고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고지는 1960-1970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질이 좋지 않았다. 오래전 쓰인 것을 보여주듯 갈색으로 바랜 원고지 위에 볼펜
<고발>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실린 일곱 편의 단편에는 북한 체제
이 아닌 연필로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했다고 한다. 작가는 원고의
아래 생활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핍진하게 묘사돼 있다.
제목을 ‘고발’이라고 스스로 정해서 써 놓았으며, 반디라는 가명도 본
각기 다른 소재와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김일성 시대에 대한 비판’
인이 정했다. 반디는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1950년생 남성이고, 조선
이라는 큰 주제에 하나로 묶여 있다.
작가동맹 소속 작가라고 도희윤 대표는 증언한다. 그렇지만 이 증언에
첫머리에 놓인 ‘탈북기’는 몰래 피임약을 먹는 아내를 의심했던 한 남자가 대물림되는 출신성분제에 절망해 끝내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는 작가를 보호하려는 의향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도 대 표는 우여곡절 끝에 2014년 5월 이 희귀한 작품집을 세상에 내놨다.
하고 그 과정을 친구에게 알리는 편지 형식의 단편소설이다. ‘유령의
사실 남한에서는 이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작가가 탈
도시’는 거리의 김일성 초상화만 보면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세 살배
북민이 아니라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원고 반출 과정만 무성한
기 아이 때문에 창문에 커튼을 쳐놓았다가 ‘수령님 모독죄’로 평양에
화제를 낳았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반디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서 지방으로 쫓겨난 가족 이야기와 함께 병영국가의 실상이 담겼다.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작품이 지닌 진정
‘지척만리’는 여행증 없이는 이동이 금지된 북한에서 몰래 기차를 타
한 가치와 문학성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고 고향 초입까지 갔다가 검문소에서 막혀 노모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 아들의 애달픈 사연을 그렸다.
이처럼 냉담했던 한국 내 반응과 달리 2016년 프랑스어 번역판이 나오면서 해외 반응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어판 발문을 쓴 북
마지막에 수록된 ‘빨간 버섯’은 공산당의 당사를 ‘독이 든 빨간 버
한인권운동가 피에르 리굴로 프랑스사회역사연구소장이 작가 반디를
섯’으로 규정하고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
‘북한의 솔제니친’이라고 표현하자, 외국 언론들이 한결같이 이를 인
서 영원히”라고 절규하는 북한 기자를 등장시켜 김씨 정권 타도를 촉
용하기에 이르렀다. 리굴로는 ‘작은 반딧불이지만 희망은 크다’는 의
구한다. 일곱 편의 작품 순서는 탈북이라는 소극적 저항에서부터 프롤
미의 제목을 붙인 발문을 썼다. 일간지 르피가로, 리베라시옹, 라디오
레타리아 독재의 산실인 공산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단계까지 작
방송 앵테르, 앵포, RFI, 잡지 마리안느 같은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
가의 면밀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게 보도했다. 번역자 임영희(57) 씨는 “한국 소설을 오랫동안 번역했 지만 <고발>만큼 지적인 희열을 느낀 적이 없었다”면서 “소설의 구성
‘북한의 솔제니친’
이 아주 훌륭하다”고 상찬했다.
이 소설집의 원고가 2013년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은 첩보작전을 방
<고발>은 2017년 3월을 전후해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
불케 하는 또 하나의 드라마였다. 반디의 친척 여동생이 탈북에 성공
다, 독일, 스웨덴, 포르투갈 등 21개국에서 19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
해 서울로 들어왔다. 몇 달 뒤 그가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에
었다. 한국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겨 맨부커 인터내셔
게 원고 얘기를 꺼냈다. 도 대표는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인 친구를 통
널상을 받은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30)가 영어판 번역을 맡았다.
해 ‘원고를 건네 달라’는 편지를 반디에게 전했다. 편지를 읽은 반디는
이 영어 번역본 <The Accusation>은 영국 펜(PEN)이 선정하는 2016년
비밀장소에 감춰두었던 원고 뭉치를 꺼내 체제 선전용으로 제작, 배포
하반기 번역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미국 뉴욕에서는 반디를 노벨 문학
된 <김일성 선집>, <김정일 노작> 같은 북한선전용 책자와 함께 싸 보
상 후보로 만들기 위한 재미동포 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북한에 살고 있는 익명의 작가 반디가 쓴 반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명이다.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60 KOREANA 2017 여름호
2017년 3월 30일 경기도 파주 비무장 지대 남쪽에 위치한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열린 <고발> 낭독 행사에서 세계 여러 나라 출판 관계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승환(다산북스)
체제 이야기들은 베일에 싸인 독재 정권에서 나타난 매우 보기 드문
“북한 문학작품은 저항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작품이다. 전 세계적인 문학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평을 내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다른 탈북 문학인들의 작품도 국내보다 오히려
놓았다. 문학전문지 더밀리언즈는 <고발>을 ‘2017년 가장 기대되는 작
해외에서 더 주목 받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탈북시인 장
품’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 서평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불가해한 북
진성은 북한 주민의 실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시집 <내 딸을 백 원에
한의 삶을 다룬 매우 드문 작품”으로,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은 “폐
팝니다>로 2012년 영국 옥스퍼드대 렉스 워너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쇄된 일당 독재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한 매우 감동적이고 놀라운 픽션
2014년 출간한 수필집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는 영국 도서판매 순위
으로 휴머니즘에 대한 희망을 시험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로 평양에서 활동하다
영국판 출판사 서펜츠 테일 발행인 한나 웨스트랜드는 “권력 앞에
2000년 탈북한 김유경이 2016년 출간한 장편소설 <인간모독소>는 프
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솔제니친을 떠올리게 하고, 통렬한
랑스 출판사 필립 피키에와 판권 계약을 맺었다. 탈북 문학인의 작품
풍자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를 연상하게 한
이 해외에서 조명 받는 것은 실제 경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리얼리즘
다”고 평가한다. 김종회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기교적 측면에
때문으로 보인다.
서는 한국 현대작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북한에서 문학의 공식
북한 문학작품에 대해 남한에서 상대적으로 호응이 낮은 것은 호기
적 목표가 김일성 가계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심과 절박감의 정도 차이에서도 오는 듯하다. 한국인들은 북한과 휴전
기교만으로 수준을 판단할 수는 없다.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저항
선을 맞대고 있는 데다 언론을 통해 북한의 비극적인 실상을 일상적으
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로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문학작품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기
서방세계의 뜨거운 반응과 동시에 한국에서는 발간 3년 만에 출판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이 북한의 핵무기 위협이나 한반도 전쟁
사를 옮겨 재출간되었다. 새로운 표지와 더불어 작가의 최초 원고를
가능성을 높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도 남한 주민들은 ‘위기의 만성화’
충실하게 살려 작품이 지닌 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 개정판을
로 말미암아 체감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일부 보수
출간한 다산북스는 “3년 전 출간됐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이
적인 평론가들은 북한 문학을 이념론, 나아가 ‘색깔론’으로 바라보는
다. 시장성도 충분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KOREAN CULTURE & ARTS 61
한국의 벗들
e스포츠 캐스터로 사는
김현숙 케이무비러브 대표 안홍범 사진가
‘대한미국’ 사람 울프 슈뢰더
울프 슈뢰더는 전세계 온라인 게임 애호가들이 관전하는 e스포츠 프로리그를 중계하고 해설하는 프로 캐스터다. 어릴 때 스타크래프트 게임 전략 정보를 나눠주는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온라인 게임에 빠져 살다가 대학 때 토너먼트 게임을 운영하고 중계를 한 인연으로 한국의 케이블 방송국에 스카우트되어 6년째 이 길을 걷고 있다.
통
합 스타크래프트2 리그인 ‘SSL시리
중계의 관전, 그리고 이와 관계되는 커뮤니
스타1을 탄생시킨 것은 블리자드이지만 온라
즈 2017’ 경기가 있던 4월 3일 밤, 불
티 활동 등의 사이버 문화 전반 또한 e스포츠
인 게임을 스포츠로 진화시킨 것은 전적으로
빛이 화려한 강남의 한복판 넥슨 아
활동에 포함되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
한국인 유저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e스
레나 스튜디오를 찾았다. 20명의 한국 선수
의 e스포츠는 관중 문화가 대단히 발달해 있
포츠 열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들이 9주 동안 대결하는 풀 리그 중 한 경기
다. 경기가 서울 시청 앞 광장이나 해운대 바
경기를 앞두고 넥슨 아레나 스튜디오의 분
로,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인데도 객석에는 벌
닷가의 특설무대에서 열릴 때는 모여든 수천
장실에서 만난 울프 슈뢰더는 누구보다도 이
써 관객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었다. 대부분
명 관중의 함성과 비탄이 행사장을 압도한다.
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은 남녀들이고 외국인들도 상당히 눈에 띄
e스포츠의 종주국이라 할 한국에서만 볼 수
“입장료가 저렴한 피시방에서 무료로 할
었다. 입장료는 3천 원. 네이버, 스포티지게임
있는 그림은 또 있다. 스타크래프트를 위시한
수 있는 게임이었으니까요. 온게임넷이라는
즈, eSports, 유튜브로 생중계와 VOD 서비스
히트작들을 낸 미국의 대표적 글로벌 게임업
회사(지금의 OGN)가 2000년에 온게임넷 스
가 이루어지지만 이렇게 직접 경기를 보러 오
체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새로운 게임을
타리그(OSL)라는 토너먼트를 공식적으로 만
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출시할 땐 반드시 한국에서 발표를 한다.
들어서 2012년까지 운영했어요. 그 인기가
지난 3월 26일 강남 코엑스에서 블리자드
높아지면서 시청률이 올랐고 KT, SKT 같은
한국의 e스포츠 열기에 반하다
엔터테인먼트의 CEO 마이크 모하임은 올 여
빅 스폰서가 붙기 시작했어요. 이동통신업체
e스포츠란 컴퓨터 및 네트워크, 기타 영상장
름 출시될 스타크래프트1 리마스터를 최초
들에 이어 웅진, 삼성, 하이트맥주까지 팀을
비 등을 이용하여 온라인으로 겨루는 게임을
로 공개했다. 그는 한국이 새 상품의 성패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온게임넷이 스타크래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전파를 통해 전달되는
가를 중요한 한 축임을 잘 알고 있다. 1998년
트를 TV중계하자 MBC게임이라는 채널이 탄
62 KOREANA 2017 여름호
생합니다.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 프로선수들 의 게임이 게임 전문 케이블 채널로 중계되는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 세계에 한국만큼 e스포츠가 인기를 끄는 나라는 없 습니다. 한국 선수들의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그런 분위기가 지금까지 계속되는 거지요.” 그는 마치 그 시절의 시작부터 한국에 살 았던 사람처럼 한국의 온라인 게임 역사를 꿰 뚫고 있었다. 아울러 한국이 e스포츠를 선도 하는 이유로, 유럽이나 미국 선수들에 비해 코치의 말에 순응하는 태도, 연습량, 합숙을 통한 팀워크도 들었다.
게임에 빠진 애틀란타 소년
한때 스타크래프트는 자식이 공부에 전념하 기를 바라는 한국 부모들을 어지간히도 애태 우게 만든 중독성 강한 오락의 대명사였다. 이 게임의 마법은 미국 애틀란타에 사는 한 소년의 운명에도 깊이 개입했다. 10살 때 이 게임을 접하고 흥미를 느꼈던 울프 슈뢰더는 학교 친구들 중 자기보다 한 수 위인 한국 아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배틀넷 멀티플레이(사용자 대전)를 즐길 뿐 만 아니라 에디터를 이용해 직접 맵을 개발하 는 수준이었다. 게임만 잘하는 게 아니라 수 학도 잘했다. 이들과 친해지면서 울프는 스타 크래프트의 세계로 푹 빠져 들어갔다. 그 친 구들의 집에 놀러 갔다가 저녁때가 되면 친구 어머니가 차려주는 한식을 먹을 수 있었다. 불고기, 신라면, 뿌셔뿌셔, 초코파이 맛을 그 때 알았다. 울프는 조지아 스테이트 유니버시티에 진학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딴 ‘오픈 울프 컵
슈뢰더의 e스포츠 중계는 선수들의 개인사를 적절히 섞어가며 숨막히는 한판 승부를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점에서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KOREAN CULTURE & ARTS 63
울프의 독보성은 적절한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평면적인 경기 전달에 그치지 않고 선수들의 개인사를 적절히 들려주어 한 판 승부를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평소 해외 선수들이나 해외 팬들 눈에 한국 선수들이 기계나 로봇처럼 여겨지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이다.
(Open Wolf Cup)’이라는 토너먼트를 만들어
1 앞면에 태극기를 부착한 모자를 쓴 슈뢰더가 카메라
서 온라인으로 아마추어 1인 방송을 시작했
2 통합 스타크래프트2 리그인 ‘SSL 시리즈 2017’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경기가 진행 중인 넥슨 아레나 스튜디오에서 프리랜서
다. 밑천은 컴퓨터와 마이크 하나. 첫 토너먼
e스포츠 캐스터 울프 슈뢰더(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브렌던 발데스(Brendan Valdes)와 함께
트에 128명이 지원했다. 우승자에게는 개인
외국인 중계석에서 경기를 중계하고 있다.
돈으로 마련한 상금 50달러도 줬다. 다른 사람 들이 만든 토너먼트에 중계자나 해설자로 봉
1
사해주기도 했다. 130명 정도가 출전한 14개 토너먼트에 중계는 100여 번 정도 경험했다. 스타크래프트 1세대 아나운서라고나 할까. 그러던 대학 2학년 때, 한국의 한 방송사 로부터 믿기지 않는 제안이 날아들었다.
실시간 중계하며, 중계를 위한 해외 출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영어 중계 팬 중에는 한국인도 많다.
“곰TV에서 한국으로 오라는 거예요. 스타
e스포츠 캐스터로서 울프의 독보성은 적
크래프트2 중계를 할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
절한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평면적인 경기 전
는데, 라이브 토너먼트 중계 1인 방송을 하
달에 그치지 않고 선수들의 개인사를 적절히
고 있는 제가 딱 적임자로 보였던 거지요. 그
들려주어 한판 승부를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의
때까지 쭉 혼자 집에서만 했지 스튜디오에서
이야기로 만들어준다. 평소 해외 선수들이나
오프라인으로 중계해본 경험은 사실 한 번밖
해외 팬들 눈에 한국 선수들이 기계나 로봇처
에 없었어요. 드디어 중계를 본격적으로 할
럼 여겨지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이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거예요. 바로 한국에
게임 기술이 워낙 좋기 때문에 이미지가 그런
서요!”
식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선 수들은 “울프, 방송할 때 내 얘기 잘해줘”라고
온라인 게임을 인간들의 이야기로
부탁하곤 하지만 그는 한국 선수들과는 거리
2011년,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에 온 울프는
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개인적으로 친해지
곰TV 전속 캐스터로 1년간 계약을 했다. 1년
면 중계할 때 자칫 객관성을 잃을까 걱정하기
계약이 끝난 후에는 혼자 충분히 헤쳐 나갈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미디어나 주변 지인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줄곧 프리랜서로
을 통해 선수들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일한다. 지금은 곰TV, 아프리카 TV, SpoTV에
울프의 인지도가 올라가자 2016년 케스
서 일주일에 대여섯 게임을 중계한다. 스타
파(KeSPA)컵 대회 중계 때 주최 측에서는 한
크래프트2, 히어로즈, 오버워치가 주종목이
국인 캐스터 세 사람과 외국인 캐스터 두 사
다. 전 세계 관객들을 위해 유튜브를 통해서
람을 묶어 5인 중계 방식을 시도했고, 결과는
64 KOREANA 2017 여름호
성공적이었다. 그때까지 외국인 캐스터로서
"Thorin" Shields), 파파스미디(Christopher
은 폭발적이다. 포크보다 젓가락이 편하다며
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울프는 이때 유창한 한
"PapaSmithy" Smith)를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
포크 두 개로 젓가락질하는 사진에도 그의 장
국말로 선수들과 즉석인터뷰를 하며 ‘김을부’
물로 꼽았다. 모두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난기에 화답하는 폭풍 댓글이 이어진다.
라는 한국 이름을 얻을 만큼 관객들의 주목을
of Legends)의 해설가이자 캐스터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 때는 광화문
받았다. 이후로 울프는 한국어로 트위터와 인
그는 “제가 스토리텔링 면에서 나름 잘해
촛불집회에 나가 인증 샷을 남겼다. 파면이
스타그램, 페이스북을 통해 적극적으로 팬들
온 편이라면 이들은 분석 스타일, 빠른 전개
확정된 날에는 “축하해, 대한민국. 춥고 힘들
과 소통하고 있다.
와 정보 전달 능력이 정말 놀라워요”라고 그
어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미래 위해 밖에서
들의 강점을 진지하게 짚었다.
고생했기 때문에 오늘 이길 수 있었어”라며
서울에는 울프 같은 국제적인 명성의 캐 스터들이 열 명 남짓 살고 있다. 울프는 선수
“오늘 맛있는 것 먹고 좋은 하루 보내”라고 올
들을 멀리하는 대신 그들과 아주 가깝게 지
한글과 한식으로 팬들과 소통하기
렸다. 이를 본 한국인들은 “역시 대한미국사
낸다. e스포츠에 관한 한, 한국에서 최고이면
그는 자칭 ‘대한미국 사람’이다. 한국 음식을
람, 우리 김울프”라며 ‘좋아요’를 수천 개 눌
세계에서 최고이다. 캐스터의 경우도 마찬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SNS에 올려 한국인 팔로
러준다. 고국인 미국을 다녀 오면서도 “한국
지다. 이 10명 중 그는 몬테크리스토(Chris-
워들의 식욕을 자극한다. 미국 출장 때 한국
집이 최고”라며 익살을 부린다.
topher "MonteCristo" Mykles), 토린(Duncan
음식을 싸간다는 포스팅에 대한 팬들의 반응
“한국음식이 젤 맛있어요. 여기 살기 때문 에 늘 먹을 수 있어요. 향이 강하고 뜨겁고 매 워요. 첨에 여기 왔을 때 한국사람들이 말하 길, 미국 가서 음식 먹으면 너무 밍밍하다고 하더니 제가 지금 그래요. 게다가 가격은 또 얼마나 착한지요? 미국 가보면 한국 양념치 킨 값이 두세 배 더 비싸요. 소주 한 병에 10 달러라니요?” 한국에 온 첫날 곰TV 직원들이 데리고 갔 던 마포의 한 식당에서 먹은 숯불구이 돼지고 기 맛을 그는 아직도 못 잊는다. “닭갈비도 좋아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음식 은 부대찌개예요. 사실 온갖 종류의 찌개가 다 맛있구요. 식사 끝 무렵 나오는 볶음밥도요.” 그의 한국 음식 사랑이 널리 알려지자 음 식 관련 프로그램 출연 요청, 인터뷰 요청이 이어지지만 이 스물여덟 살 청년은 중심을 잡 을 줄 안다. 거기 쓸 시간도 없을 뿐더러 자신 은 어디까지나 e스포츠 캐스터라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산 지난 6년 동안 첫 직장 인 곰TV 근처 목동에서 시작하여 조금 더 나 은 집을 찾아 여섯 번 이사해 지금은 상수동 에 산다. 이즈음은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 드를 열면 한강이 보이는 집”을 꿈꾸며, 그 꿈
2
이 곧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일한다. KOREAN CULTURE & ARTS 65
길 위에서
충주, 풍경과 삶이 어우러진 이상향 충주는 한반도의 중원이라 불린다. 그 위치가 단순히 한 가운데 있어서가 아니라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한강의 남쪽 상류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남과 북을 가르고 또 잇고 있다. 자연히 물류와 군사, 생활의 요충지로 오랜 동안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잦았다. 그 덕에 충주에는 승전을 기리는 비와 탑이 유난히 많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비경도 많아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이 많이 내려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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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 안홍범 사진가
충청북도 충주시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7층 석탑인 중앙탑은 높이가 14.5m로 탑 주변에는 충주호를 끼고 너른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KOREAN CULTURE & ARTS 67
비
가 소복소복 내렸다. 옛이야기처럼 내리는 비는 여행자에게 반가운 선물이다. 산과 들이, 꽃과 나무가 촉촉
한 빗 속에 고요히 스며들 때 여행자의 마음도 잠시 삶의 그물에서 놓여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충주시 중앙탑면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차를 세웠다. 깊게 숨을 들이키며 마 음 속으로 인사를 했다. 한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심호흡을 하는 것은 내 여행의 묵은 버릇이다. 고 통과 환희, 슬픔과 그리움, 꿈과 절망. 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이 이 공기 속 어딘가 떠돌고 있다 생각하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오래전부터 나는 한 도시가 지닌 최고의 문화유 산은 그 도시를 떠도는 공기라고 생각했다. 충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도시를 중원(中原)이라 부르길 좋아한다(예전에는 실제로 중원군 이 있었지만 1995년 충주시에 통합되었다). 지리적・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행자가 충주에서 두 밤만 묵고 나면 이 생각은 쉬 이해된다. 남한강을 따라 형성된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묵은 탑과 비이다.
탑과 비의 도시
중원에서 나의 첫 참배 대상은 고구려비였다. 지금은 새 행정 지명에 따라 공식 명칭이 충주고구려 비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중원고구려비라고 더 많이 부르고 있는데,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 한 고구려 석비이다. 이 비는 지금의 만주 남부에서 건국한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확장 한 5세기 중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면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 “고구려와 신라가 형제와 도 같은[여형여제(如兄如弟)] 관계였으며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라고 하여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은 고구려 역사 교육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3D 컴퓨터로 복원된 안악3호 분(북한 국보 28호, 현 황해남도 안악군 소재) 벽화에는 고구려의 정예병사인 개마무사(鎧馬武士)의 모습이 선명하다. 말에 쇠로 된 갑옷을 입히고 역시 갑옷으로 중무장한 개마무사는 공격 때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대였고 방어 때 적의 공격을 막는 방호벽 역할을 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5만 명 이상
1 충주고구려비는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시대 석비이다. 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03m이다. 2 충주호를 따라 단양으로 가는 강변길에서는 기암괴석을 스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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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KOREANA 2017 여름호
흘러가는 남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유람선을 타면 단양팔경을 가까이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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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개마무사를 보유했다고 한다. 서양사에는 이보다 훨씬 뒤인 1221년
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구려와 신라 백제 세 나라를 생각했다. 세
페르시아와 몽고의 전투 기록에 처음 개마가 등장한다.
나라는 서로 각축하며 문물과 역사의 발전을 꿈꾸었지만 최종 승자는
고구려가 한때는 신하로, 한때는 동생으로 여겼던 신라에게 망한 것 은 668년의 일이다. 중원 거리에 우뚝 서 있던 고구려비가 그 이후 어떤
신라였다. 탑을 도는 동안 알 수 없는 신비한 에너지가 탑으로부터 스 미어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대접을 받았을 것인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박해를 염려한 고
옛 탑으로부터 스미어 나오는 에너지를 나는 사랑한다. 인도 카주
구려 유민들이 이 비를 땅에 묻었을 거라 생각하는 이도 있고 비문이 뭉
라호의 돌로 만든 스투파(석탑) 그늘 아래 앉아 한나절에 30편의 시를
개진 채 대장간의 밑돌로 망치질과 풀무질을 견디어냈을 거라 추측하는
쓴 적이 있고 아그라의 타지마할 곁에서 역시 수십 편의 시를 하루에
이도 있다.
쓴 적이 있다. 묵은 탑 그늘을 돌면 오랜 세월 이 탑을 돌며 꿈꾸고 노
중원에서의 두 번째 참배를 위해 탑평리 7층석탑으로 걸음을 옮겼
래했던 사람들의 숨결이, 그 냄새가 느껴진다.
다. 충주 사람들은 이 탑을 중앙탑이라 부르기 좋아한다. 아예 탑의 면 소재지 명칭을 중앙탑 면으로 바꾸었다. 오랜 전쟁 끝에 삼국을 통일
꽃 피는 밤에 빗소리를 노래함
한 신라는 자랑스러운 새 나라의 기상을 상징하여 국토의 한가운데에
탄금대는 이 지역의 역사지리적 의미를 새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
이 탑을 세웠다. 해질 무렵 나는 이 탑을 세 바퀴 돌았다. 횟수에 의미
다. 552년 신라 진흥왕 때 우륵(于勒)이라는 사내가 귀화한다. 그는 KOREAN CULTURE & ARTS 69
신라의 남쪽, 예악을 중시한 가야라는 작은 나라에 살며 12줄을 지닌 악기를 만들었고 12개의 아름다운 곡을 만 들었다. 12줄은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왕은 그를 손님으로 받아들여 중원에 머물게 하였으 며 음악의 기초를 가르치게 하였다.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 바위다. 굽이치는 남한강의 절경과 우륵 의 가야금 연주는 절묘하게 어울렸을 것 같다. 국가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예악을 숭상하게 한 옛 왕들의 처사가 따스하다. 이상향이란 무엇인가. 예나 지금이나 인간 삶의 큰 가치는 변함없는 것이다. 충주에는 무학시장이라 불리는 상설시장이 있다. 시장은 발려진 생선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척추에 해당 하는 긴 통로가 있고 좌우로 가시들이 펼쳐진다. 척추를 따라 걷다 샛길을 찾아들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길을 잃 어버렸다. 저자거리를 구경하다 길을 잃는 것은 그럴 듯하지만 차를 세워놓은 곳을 알 수 없으니 문제였다. 헤매 다가 반선재라는 한옥집을 보았다. UN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씨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이라 한다. “반듯하고 착하게 살자”는 꿈이 담긴 집이란다. 시장 안에서 길을 찾지 못한 내가 마침내 선택한 방법은 시장 밖으로 나와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두 시간 만에 차를 찾았을 때 반가움과 시장기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칼국수집의 아낙이 칼국수에 밥 한 공기를 더 내밀었다. 내 배가 많이 고픈 것을 안 것이다. 여관의 창을 열고 밤새 빗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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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KOREANA 2017 여름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없다면 절경은 한쪽의 아름다움밖에 지니지 못한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곳에 넋을 부린 사람들의 숨결이 있을 때 이상향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1 희고 푸른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힘차게 싹 터 오르는 죽순을 연상시킨다는 옥순봉은 단양팔경 중에서도 뛰어난 절경으로 꼽힌다. 2 조선시대 남한강 수운의
신라나 고구려의 옛 사람들 중에도 밤새 창을 열고 빗소리를 들었던 이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지 고 없는 우륵의 12곡 중에도 혹 빗소리를 노래한 곡이 있지 않았을까. 꽃 피는 밤에 빗소리를 노래함. 있었을 것 같다. 비는 아침에도 자박자박 내린다.
중심이었던 목계나루에서는 요즘 관광객들을 위한 강배 타기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옛 나루터에서
강을 낀 599번 지방도로를 따라 목계나루로 향했다. 이 나루에는 조선시대부터 남한강 물길의 제일 큰 장 이 섰다. 서해와 동해의 물산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충청 강원 경상 세 도의 세곡선이 물길을 따라 흘렀다. 3 월부터 11월까지 뱃길이 열렸는데 7, 8월 물이 많은 철에는 큰 상선도 오르내렸다 한다. 물길을 따라 서울로 가는 길은 12-15시간이 걸렸으며 물길을 거슬러 목계로 오는 데는 5일에서 2주일이 걸렸다 한다. 조선시대 에 800호가 모여 살았고 100여 척의 상선이 머물렀다니 나루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옛 나루터의 언덕에 는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운이 좋았다. 이곳에는 매월 네 번째 토요일에 리버마켓이 선다. 내가 목계에 들어선 날이 그날이었다. 일 종의 벼룩시장인 셈인데 파는 물건은 모두 수제품이었다. 물건들이 다 내 마음을 붙들었다. 한글과 한자로 두 개의 도장을 팠는데 몹시 마음에 들었 다. 청국장과 된장, 유자잼을 샀으며 목각 인형과 손지갑을 샀다. 열쇠고리 같은 기 념품도 몇 개 사는 동안 지갑이 비었다.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정성’이 될 것이다. 정 성을 다하는 사람은 어질고 어진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바탕이라 할 것이다. 그들은 내게 4월이면 나루가 유채꽃으로 덮인다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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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CULTURE & ARTS 71
년 4월에 꼭 다시 오라고 했다.
충주호의 유람선
충주호를 따라 단양으로 가는 강변길의 아름다움 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길은 강변을 따라 끝없 이 이어진다. 시작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끝을 지 니기 마련이다. 보슬비 속에 이어지는 길은 포근 하고 따스하다. 한없이 가도 끝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한 시간쯤 달려 장회나루에서 차를 멈춘다. 오래전부터 이 나루에서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싶었다. 그런데 빗방울이 굵어진다. 유람선이 다 닐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승객들이 많다. 배를 가득 채운다. 단양팔경 중에서도 제일 절경이라는 구담봉 과 옥순봉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조선 시대에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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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은 이곳의 경치를 보며 진 경산수화를 그렸고 퇴계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은 이곳의 경치가 중국의 소상팔경보다 뛰어나다고 적었다. 그러나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우산을 쓰고 유람 선 객실 밖으로 나갔다. 물안개와 비구름이 깊게 스미어 절경을 볼 수 없으니 아쉬움이 크다. 단 한번의 여행 으로 어찌 천하의 절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1980년대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나루>를 처음 읽었을 적부 터 보고 싶었던 두 봉우리와의 만남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내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절경”
강변길을 따라 달리는 동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눈앞에 도담삼봉이 들어온다. 남한강 상류의 물굽이에 세
충주 주요 관광지
서울 130km 충주
무학시장
탄금대 온달산성 충주호
72 KOREANA 2017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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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람선으로 도담삼봉을 지나 상류로 200m쯤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 강변으로 마치 강을 품은 바위 굴과도 같은 석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2 도담삼봉은 남한강 상류 한가운데 세 개의 기암으로 이뤄진 섬이다.
개의 바위 봉우리가 솟구쳐 있다. 19세기 말 이곳을 찾은 유명한 여행자가 있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 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였다. 그는 여행기 <한국과 이웃나라들>에 이곳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적었다. “한강의 아름다움은 도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낮게 깔린 강변과 우뚝 솟은 절벽. 그 사이 푸른 언덕배 기에 서 있는 처마가 낮고 지붕이 갈색인 집들이 그림처럼 줄지어 있는데 내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절경이었다.” 비숍 여사가 본 풍경은 두 가지다. 도담의 그림 같은 풍경과 언덕배기의 초가집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이 없다면 절경은 한쪽의 아름다움밖에 지니지 못한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은 그곳에 넋을 부린 사람들의 숨결이 있을 때 이상향의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지금은 초가집 대신 몇 개의 비닐하우스들과 현대식 집들 이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다. 도담에서 가파른 산기슭 계단을 300m쯤 오르고 다시 100m를 내려가면 석문(石門)이 나타난다. 바위 굴 사이로 푸르게 흐르는 한강의 모습이 보인다. 자연이 지닌 이상 세계의 품격이 있다. 교통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을 19세기 말 비숍 여사는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을까. 요즘 여행자의 내공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다. 강마을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빗 기운 속에 반짝이는 마을의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KOREAN CULTURE & ARTS 73
이 사람의 일상
이춘숙 씨의 즐겁고 오래된 가위질 좋은 미용사를 오래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미용사를 친구로 두었다면 그 행운은 당신의 것이다. 손님을 오랜 친구로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미용사를 소개한다. 두세 시간 정도 머물다 가는 미용실을 편안히 쉴 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그녀의 비결이다. 김서령 오래된 이야기 연구소 대표 하지권 사진가
이
춘숙 씨는 10시에 출근한다. 자신의 개명한
올려둔다고 했다.
이름을 간판에 내건 서울 이문동 ‘이지은 미
올해 62살인 이춘숙 원장은 26살에 미용 일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용실’로. 가게 안엔 거울 걸린 벽을 가운데에
인근 석관동에 터 잡아 오래 일하다가 그 지역이 재개발에 들어가는 바람에 이문
두고 양쪽에 네 개씩 모두 8개의 미용의자가 놓여 있
동으로 옮겨왔는데 수십 년 단골손님들을 거의 잃지 않았다. 그들에게 미용실은 머
다. 이 자리들이 손님으로 꽉 채워지기까지 걸리는 시
리를 감거나 손질하고 두피 마사지를 받는 틈틈이 음식을 나눠먹고 밀린 이야기를
간은 날마다 다르다. 어제가 오전부터 손님이 끊임없
나누며 스트레스를 푸는 사랑방이기 때문이다.
이 이어져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면 오늘은 점심시 간 이후 부쩍 손님이 몰리는 식이다.
“원래 동네 손님보다 멀리서 오는 손님이 더 많을걸요. 가까운 의정부에서부터 멀리는 천안, 대전, 심지어 광주에서도 와요. 그분들이 꼭 머리 손질만을 위해 오는 것은 아니죠. 얼굴 보려고 오고, 얘기하려고 오고…”라고 말하며 이 원장이 환하게
미용실의 사랑방 손님들
웃는다.
홀의 한쪽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다. 손님들의 쉼터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 염색약을 바른 머리를 랩으로
스타일보다 중요한 머릿결
휘휘 감은 사람, 크고 작은 로드(rod)를 머리에 알록
전에는 머리칼 손질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호칭이 ‘미용사’였는데 최근에는 ‘헤
달록 매단 사람이 긴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잡지
어디자이너’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 원장은 용모 전체를 아름답게
를 뒤적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엷은 졸음에 빠져
만드는 기술자라는 의미의 예전 호칭을 더 좋아한다. 자신의 이름이 간판에 내걸기
있다. 탁자 위에는 커피, 과일, 사탕, 비스킷, 초콜릿 같
에는 촌스럽다고 여겨 좀더 현대적인 이름으로 바꿔 간판에 내걸었지만 새록새록
은 간식거리들이 보인다. 겨울에는 한구석에 고구마
원래 이름이 훨씬 더 정답고 푸근하게 느껴지듯이.
를 아예 박스째 갖다 놓고 탁자에 고구마 굽는 기계를 74 KOREANA 2017 여름호
몸이 야물고 행동이 민첩하고 피부가 흰 이 원장은 첫눈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
이춘숙 원장이 수십 년 단골손님들의 머리손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손님의 모발 건강이다. 그녀는 좋은 인상은 좋은 머릿결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KOREAN CULTURE & ARTS 75
렵다. “손님들 머리 모양을 예쁘게 가다듬는 일에 푹
를 다시 묶어주곤 했어요. 그러면 내가 묶은 것과는 다르게 뭔지 더 이쁘고 세련된
빠져 지내다 보니 늙을 새도 없었나 봐요. 머리칼을
모양새가 됐죠.” 강릉여고 동창생인 손님의 기억이다. “춘숙이 머리 빗는 솜씨를 못
다루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롭고 잔잔해져요. 마무리
잊어서 평생 머리를 맡긴다”는 고향 친구가 이 동창생 말고도 여럿 더 있다고 한다.
할 때 성취감이랄까 묘한 기쁨이 찾아오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직장 다닐 때 친척 한 분이 일본에 다녀오면서 전기 고데기
그는 사람을 볼 때 우선 머릿결부터 본다.
를 선물했어요. 그걸로 아침에 머리를 빗고 나가면 다들 제 머리가 너무 이쁘다고
“나는 손님들의 머리칼을 아껴요. 펌은 일년에 세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여직원들이 제가 일하는 경리과에 와서 머리를 빗겨달라고
번 이상은 절대 못 하게 해요. 어차피 내 손님이니까
할 정도였어요. 직업으로 하면 어떨까 싶어 퇴근 후에 미용학원에 다니며 공부했어
머리칼 상하면 나만 손해잖아요. 아무리 스타일이 멋
요. 그때는 미용사 시험 합격자 명단이 서울시청 게시판에 나붙었어요. 200명이 응
지고 좋은 옷을 입어도 머릿결이 나쁘면 초라해 보이
시해서 11명이 붙었으니 꽤나 치열했지요.”
거든요.”
1981년에 처음 미용실을 열어 세월이 이만큼 흘렀다. 임신 중에 드나들던 손님
머리칼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넘쳐난다.
이 아기 엄마가 되어 아이를 업고 오면 그 아기가 울어도 전혀 시끄럽지 않았다. 자
“머리칼도 늙거나 낡아요. 현미경으로 보면 속에 구
신의 두 아이들도 미용실에서 키웠으니까. 대학생이 된 딸은 시간 날 때마다 엄마
멍이 뻥뻥 뚫려 있어요. 좋은 단백질로 그 구멍을 채워
미용실에 나와 일손을 거들곤 한다.
주고 약산성을 유지해줘야 결이 좋아져요. 머릿결이 좋으면 커트만 잘해도 스타일이 살아나거든요. 머리
‘윤시내 머리’에서 ‘가볍고 젊게’
말리는 방법도 중요해요. 머리를 숙이고 마를 때까지
“직원이 보조까지 모두 7명이에요. 20년 넘게 같이 있는 언니도 셋이나 돼요. 이 언
부드럽게 꼼꼼히 타올 드라이를 하는 게 가장 좋죠.”
니들은 자기 손님이 각자 따로 있지요. 제가 월급을 주는 게 아니라 도구, 약품, 장
그는 젊어서 한때는 가회동의 예식장 안에 미용실
소만 제공해요. 각자 수입에서 일부만 내게 떼어주고 개인사업자 형식으로 운영해
을 따로 운영할 만큼 번창한 적도 있었다. 수입도 많
요. 경력도 많고 솜씨도 좋아서 대충 한달 수입이 350-400만 원 정도 돼요. 제 몫
아서 교회 헌금으로 수백만 원을 내기도 했고 백화점
은 그들보다 훨씬 못해요. 내 나이가 있으니 나를 보겠다고 찾아오는 단골들이 고
의 VIP고객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사치도 누렸다.
마워서 하는 거죠.”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결국엔 허망하데요. 남는
이 원장이 처음 미용실을 열었을 때는 머리칼을 되도록 부풀리는 ‘윤시내 머리’
건 그저 손님들 머리를 예쁘게 손질해내는 기분 좋은
가 유행이었다. 펌이든 세팅이든 불륨을 어떻게 키우느냐가 관건이었고 그 기술로
순간이라는 걸 알았어요. 머리칼을 만지면 손님은 대
미용사의 실력을 판가름하곤 했다. 같은 펌이라도 컬을 강조하고 한번 만들어진 컬
개 잠이 들죠. 그럴 때 가위질을 하고 있거나 두피 마
이 오래 가는 것을 선호하던 시절이었다. 생머리 그대로 나다니는 사람들이 자칫
사지를 하고 있으면 나도 참 편안해져요.”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점차로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을 선호하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어 요즘은 오히려 금방 미용실에서 나온 듯한 머리를 부자연스럽다고 기피하
“춘숙이의 머리 빗는 솜씨”
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 원장의 미감도 당연히 변해왔다.
이 원장은 강릉의 바닷가 마을에서 자랐다. 고등학생
유명 프랜차이즈 미용실들에 치이지 않으려면 소규모 독립 미용실들도 손님의
때부터 남의 머리 손질하는 것이 좋았다. 학교 가면
감각을 앞에서 이끌어가야 한다. 원하는 대로 잘라주되 결과는 그 이상이 돼야 한
친구들의 머리를 노상 빗겨주곤 했다. “춘숙이가 머리
다. 파마 기법만 해도 해마다 새롭게 개발된다. 커팅 기법은 더 자주 바뀐다. 부지
이젠 머리칼만 만져봐도 안다. 그 사람이 고집이 센 사람인지 아닌지.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미용사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마음을 만지는 직업이에요.”
76 KOREANA 2017 여름호
런히 배우고 익혀서 손님들에게 새로운 기분을 안겨
어딘지 더 예뻐 보이거든요. 변화나 유행을 기피하는 손님에게 미세한 변화를 살짝
줘야 한다. 최근에도 이 원장은 세미나에 참석해 올
선물하는 겁니다. 같은 단발이라도 커팅법에 따라 느낌이 천차만별이니까요.”
해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배워왔다 고 했다. “제 손님들이 나이가 든 분이 많아서 머리털이 가 벼워 보여야 해요. 가볍고 젊게! 그게 올해 헤어스타
미용사에게 머리를 통째로 내맡기는 사람과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요구하는 사 람은 언제나 반반의 비율이다.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이나 잡지 모델의 머리 모양 그대로 해달라고 주문하는 손님도 많다. 그럴 때 본인의 두상과 얼굴형에 어울리지 않는 요구이면 부드럽게 설득하는 노하우도 필요하다.
일의 모토예요. 머리 모양에 보수적인 손님일수록 새
이젠 머리칼만 만져봐도 안다. 그 사람이 고집이 센 사람인지 아닌지. 새로운 스
로운 기술로 커팅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빗었을 때
타일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미용사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마음을 만 지는 직업이에요. 머리 손질하는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든 입을 꾹 다물고 있든 미용실은 치유의 공간입니다. 제가 휴게실을 크게 만들고 간식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파마나 염색을 하려면 손님은 두세 시간을 머물고 갑니다. 그 시간 동안 ‘세상에서 젤 편안하다!’는 느낌으로 쉬게 해드리고 싶어요.” 이춘숙 씨는 내일도 아침 10시면 가게 문을 열고 손님들 간식거리를 탁자에 차
이 원장이 새로 방문한 손님과 머리 모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 기울여 듣는 일로 시작된다.
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KOREAN CULTURE & ARTS 77
식재료 이야기
삶는 이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문어 요리 문어의 종류는 3백 종이 넘는다. 그중에 한반도 연안에서 나는 것은 참문어와 대문어 2종뿐이다. 말리면 모두 몸이 붉어져서 ‘피문어’라고도 부른다. 경북지방에서는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참문어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릴 만큼 귀하게 여기고, 여수 지방에서는 피문어 요리를 고급으로 친다. 수입산 문어가 들어오면서 문어 요리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대중화되고 있다. 설호정 자유기고가
78 KOREANA 2017 여름호
맛
이 매력적이고 영양이 풍부한 문어 요리의 핵심은 무엇일까? 문어는 구이를 할 때조차 먼저 삶아서 굽는다. 삶는 솜씨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렸다고 할 만하다.
더 연한 살을 얻으려는 노력
문어는 삶기 전에 먼저 정성 들여 씻어야 한다. 미끈거리는 몸을 소금으로 골고루 문질러 씻는다. 특히 강력한 흡반들을 속까지 잘 닦아야 한다. 거친 소금으로 오래 문지르면 살에 상처가 나고 간이 밸 수 있 으니 설탕으로 문지르라고 조언하는 이도 있다. 아예 세정 효과가 큰 밀가루로 말끔히 닦아내기도 한다. 지중해 연안에서는 삶기 전에 거치는 과정이 한 번 더 있다. 세탁기처럼 생긴 ‘문어 통돌이’에 넣고 빨 래하듯 마구 돌리거나 아니면 전용 망치로 문어를 북어처럼 두드린다. 그리스 해안의 사람들은 바위에 문어를 사정없이 내리쳐서 살의 부드러움을 얻었다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문어를 부드럽게 삶아내기 위해 반드시 무를 쓴다. 강판에 무를 갈아 그 즙으로 문어의 온 몸을 꼼꼼히 비비고 두드려주기도 하지만, 문어를 삶을 때 반드시 무를 넣는 것이 포인트다. 무즙은 문어 의 잡내를 없애고 살을 부드럽게 한다. 그런가 하면 곶감을 넣고 삶기도 한다. 문어 살이 연해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무와 함께 녹차나 팥을 한 움큼씩 넣고, 이태리에서는 와인병의 코르크마개를 넣고 문어를 삶는다. 곶감, 녹차, 팥 그리고 코르크마개에 묻은 와인에는 다 탄닌 성분이 들어 있다. 이것이 문어 살에 조화를 일으키는 모양이다. 문어의 종류는 3백 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 한반도 연안에서 잡히는 것은 작은 문어인 참문어 (Octopus vulgaris)와 큰 문어인 대문어(Octopus dofleini), 이렇게 2종밖에 없다. 그 크고 작은 문어는 말 리면 모두 몸이 붉어져서 피문어라고 부른다. 껍질을 벗겨 희게 말린 것은 백문어라고 한다. 동해 먼바다에서 잡히는 대문어는 다 자라면 무게가 50kg, 다리 길이가 3m에 이르기도 한다. 참문어 는 남해안의 육지 가까운 얕은 바다의 돌 틈에서 산다. 다 자라도 무게가 3.5kg 정도밖에 안 된다. 문어는 둥글고 큰 머리(실제로는 내장 주머니)와 짧은 몸통(여기 두뇌와 눈이 있음), 여덟 개의 다리로 이루어 졌다. 한국과 일본은 문어를 남김없이 먹지만,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머리는 잘라 버린다.
‘귀한 대접’에서 고급 요리로
한국인이 ‘문어’하면 맨 먼저 떠올리는 요리는 잘 삶은 문어를 얇게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문어 숙 회다. 요즈음 시중에서 사고파는 문어 숙회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모로코, 중국에서 건너온 삶은 냉동 문어이기 쉽다. 한반도 연안에서는 갈수록 문어의 수확량이 줄고 있다. 그만큼 가격도 올랐다. 아무튼 문 어는 양식이 어려워 원산지는 달라도 아직은 모두 자연산이다.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잔칫상과 제상에 참문어 한 마리를 삶아서 통째로 올린다. 특히 양반 고을로 알 려진 안동에서는 문어를 제사와 손님을 모실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최고의 음식으로 친다. 다만, 음복 때 고사리나물과 문어를 함께 먹으면 체하기 쉽다고 경계한다.
KOREAN CULTURE & ARTS 79
1 전남의례음식장 서용기 씨가 국화꽃 모양으로 오린 문어조. 말린 피문어를 갖은 형상으로 오린 문어조는 의례상의 웃기로 쓰여온 전통음식이다. 2 문어 숙회는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문어요리이다. 문어를 잘 삶아 얇게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대문어를 말린 피문어로 갖은 형상을 오린 ‘문어오림[문어조(文魚條)]’도 의례상의 웃기로 요긴하게 여겨져 왔다. 피문어를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 킨 뒤 잘 드는 공예 칼로 국화꽃과 공작새 같은 모양을 정교하게 오려 낸다. 이 일은 대개 남자들의 몫이었지만 이제 이 전통을 이어가는 집도 매우 드물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제상에 올릴 탕에 피문어를 잘라 넣어 깊은 맛을 더한다. 또 산모를 위한 죽의 재료로 귀히 여겨지고 있다. 불린 피문어와 대추를 넣어서 쑨 죽은 산모의 회복을 돕는다. 제주도 문어죽은 물질을 앞둔 해녀들의 보양 1
식이기도 하다. 쌀을 볶다가 절구에 찧은 생문어를 넣고 끓인 뒤에 문어를 건져서 가늘 게 찢어 다시 넣고 끓인다. 문어 껍질의 붉은 색이 죽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문어를 씹는 감촉이 더없이 부드럽다. 전라남도 여수 지방에서는 피문어를 깨끗이 씻어 미지근한 물에 2시간 정도 불 린 뒤 갖은 양념을 넣은 양념장에 하룻밤 재웠다가 쪄내는 피문어찜을 고급 문어 요리로 친다. 그 밖에 얇게 썬 문어 숙회에 오이를 넣고 갖은 양념으로 무친 문어회무침, 일본식 조림장을 넣고 조 린 문어조림 등 요리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좋은 식재료가 거의 그렇지만 문어는 약재로도 쓰인다. 옛 민간요법에 따르면 문어 삶은 물로 두드러 기나 동상을 치료했으며, 쇠고기를 먹고 체했을 때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문어가 혈관 질환과 알츠하이머의 예방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마른 문 어나 오징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가루가 타우린인데, 연체류 중에서 문어에 가장 많다고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젯상에 올릴 탕에 피문어를 잘라 넣어 깊은 맛을 더한다. 또 산모를 위한 죽의 재료로 귀히 여겨지고 있다. 제주도 문어죽은 물질을 앞둔 해녀들의 보양식이다.
80 KOREANA 2017 여름호
소문난 문어 요릿집
1955년 영동선이 개통되면서 강원도의 항구와 경상북도 내륙이 철도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동해에서 잡은 문어가 영동선에 실려 종착역 영주로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완행열차에 실려 가는 동안 삶은 문어 는 실온에 숙성되어 풍미가 더 깊어졌다. 그 때문에 영주 문어가 신기하게 맛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냉장 유통이 보편화된 요즈음에는 동해안에서 산 문어를 가져다가 삶은 뒤 살짝 숙성시켜서 판다. 영주 시장 안의 <묵호 문어집>이 유명하다. 서울 신사동에 있는 <산호>라는 해산물 식당의 문어 숙회는 특별히 부드러운데다 향이 생생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산에서 올라온 문어를 먼저 압력솥에서 10분간 삶고, 다시 쪄서 식감을 살린다고 한다. 삶는 물에 녹차가루와 곱게 간 무, 그리고 문어의 내장을 함께 넣는 것도 이 집만의 비법이다. 서울 역삼동의 <고래불>에서 내는 문어 숙회는 겉만 살짝 익힌 것이 특징이다. 속을 덜 익힌 만큼 입 안에 날 것의 비릿하면서 신선한 뒷맛이 남는다. 문어를 다시마와 무를 넣고 끓인 물에 넣었다 뺐다 하면 서 천천히 겉만 익힌다. 영덕에서 잡은 대문어를 쓴다.
2
KOREAN CULTURE & ARTS 81
라이프스타일
여고 동창회
반세기를 이어가는 10대의 우정 한국에 서양식 교육제도가 도입되어 여성들도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130년이 지났다. 여기서 비롯된 여고 동창회는 여성들이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우정을 넘어서 세상 물정을 알아가고 체득하는 소통의 발판이기도 했다. 이제는 여성들의 삶도 많이 바뀌었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이 미약했던 중장년층의 여성들에게 발랄했던 10대를 함께 보낸 추억과 인연은 여전히 인간관계의 중심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김유경 언론인 최정선 사진가
고
등학교 시절은 많은 이들에게 학창
합창, 그림 등 여가 활동도 하게 되었죠.”
을 배경으로 추억이 집약된 시절이
한국에서 여성 교육의 가장 오랜 역사를
다. 특히 남녀 학교가 엄격히 구별되
지닌 이화여고를 졸업한 송혜영 씨는 애초에
었던 시절 여성들에게 이 기간에 형성된 친
동기동창회를 만들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구들과의 연대감은 ‘여고 동창’이란 이름으로
동창회의 활동 내용은 학교마다 대체로 비
졸업 후에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길게 이어
슷하다. 주로 거주 지역을 바탕으로 정기적으
진다. ‘보석 같은 꿈의 날개’, ‘작별의 날이 왔
로 소규모로 모이는 한편, 이따금 공식 동창
네, 행운을 빌며 안녕, 친구여 안녕-’ 하는 노
회의 이름으로 특별한 큰 행사도 진행한다.
래들은 이 시절 여성들의 꿈과 졸업의 감성을 잘 표현한 것이다.
어떤 규모로 모이든 만나면 떠들고 먹고 강연도 듣고 운동도 하고 춤 을 추고 노래를 하고 여행을 떠나고 모교를 위한 일도 한다. 특별한 날
주소록 완성까지 5년
을 위해서는 미리 춤과 노래를 연습한 뒤 호텔 볼룸 같은 데서 모이기
“우리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1960년대는 각자 앞에 펼쳐진 신세
도 한다. 어느 학교든지 동창회 모임에서 다들 동감하는 것은 졸업 후
계에 돌입하던 시기이니 동창들끼리 관계가 그리 밀착되지 않았어요.
수십 년 간 못 본 친구도 보자마자 옛 정이 되살아나 쑥스럽지 않게 어
20년쯤 지나 대부분 생활이 안정되면서 모임의 필요성을 느끼고 쉽게
울리게 된다는 것이다.
연락되는 10여 명이 매달 모이기 시작했죠. 동기 4백여 명 전체의 주소 록을 만드는 데 한 5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식지도 만들고 졸
고향 음식에 우정을 담아
업 30, 40, 50주년 행사를 치르고 취향대로 소규모 그룹에 들어 운동,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통영여고의 동창회에서는 아름답고 특이한 행
82 KOREANA 2017 여름호
사 하나를 이어왔다. 해마다 4월 9일 개교기념일에 열리는 동창회에서
꽃술을 뺀 진달래꽃잎을 찹쌀가루로
통영식 진달래꽃부침과 쑥비빔떡을 함께 만들어 즐긴다.
진달래꽃부침(왼쪽 면)은 다른
동창 이정연(李正連) 씨는 “이맘때면 통영 시장이 온통 꽃시장이 됩니다. 고향 동창들이 행사 전에 타지에서 미리 내려온 동창들과 함 께 장에 나가 진달래꽃과 찹쌀을 사다 반죽하고 햇쑥에 멥쌀을 버무려
버무려 반죽해서 기름에 부치는 지역에 비해 봄꽃이 일찍 피는 경남 통영의 통영여고 동창회를 상징하는 별식으로 자리잡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동문들이 모교 교정에 모여 앉아 함께 만든 이 음식을 먹으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개성에서는 설 날에 가늘게 뺀 가래떡의 한가운데를 대 칼로 잘룩 들어가게 조여서 끓인 조랭이 떡국을 차례상에 올리고 식구들이 나누 어 먹었다. 먹는 것 사치한 개성사람들이
반달모양으로 익혀내는 쑥비빔떡도 만듭니다. 해마다 잊지 않고 이 음
니 월남해서도 그 전통을 지킨다. 개성
식을 만들어 내놓는 동창회가 고맙게 느껴집니다”고 했다. 진달래꽃부
호수돈여고 졸업생들은 설 전날이면 모여서 같이 이 조랭이떡을 빚어
침에 덧붙이자면, 주변의 산골 사람들이 진달래꽃을 따서 독소가 있는
여기저기 선물로 보내곤 했다. 이제 그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지만, 그
꽃술을 빼낸 다음 소쿠리 가득 담아 이고 시장에 나와 파는 걸 사다가
후손 며느리들이 더러 빚기도 하는 것을 십수 년 전까지 볼 수 있었다.
찹쌀가루가 안 보일 정도로 꽃을 많이 섞어 반죽해서 먹기 직전 활짝
서울의 여고 동창생들은 다른 방식으로 전통을 잇는 일에 뭉친다.
핀 분홍색 꽃처럼 부쳐낸다. 통영에선 집집마다 봄이면 이 음식을 해
이희석(Lee He-suk 李姬石) 씨는 마당 넓은 남향집에 살면서 초중고
먹는다.
교를 통해 친한 친구들 십여 명과 메주로 장 담그는 일이 주요 연례행
배도수(裵道守) 통영여고 동창회장은 “손이 많이 가고 수백 명에게
사이다. 두어 달 후 장을 뜨면 모두들 정갈한 장 항아리 하나씩을 안고
대접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지만 ‘동창회 가면 꽃부침과 쑥비빔떡 먹겠
돌아간다. 풍문여고 천이향 (千李香) 동창회장의 40년 지기 친구들은
지’ 기대를 갖고 먼 데서도 오는 동문들이라 연년이 만들어낸답니다.
외출이 불편한 친구를 배려해 집에 모여서 만두를 빚어 먹는 송년파티
예전에 봄이 되면 우린 이런 음식을 먹었지 하는 기억을 길이 살려보
를 한다. 저마다 만두의 재료들을 한 가지씩 마련해 오고 선물도 교환
려고요”라고 하며 “꽃반죽을 선물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하는데 창의적인 묘안들을 내가며 마치 수십 년 전 여학생으로 돌아간 KOREAN CULTURE & ARTS 83
듯 장난끼와 유머로 떠들썩한 하루를 즐긴다. 주고받는 선물은 더 이
다. 여행이나 모임의 진행, 물품 준비와 우편물 처리, 연락, 회계 등 잡
상 집에 잡다한 물건 들여놓기를 피해 떡, 예쁜 그릇, 비누 같은 소비재
다한 일에 돌아가며 나선다. 사회 활동 경험이 전혀 없는 주부도 이런
에 치중한다. 이 시간에 전화를 받는 사람은 벌금을 낸다.
일들을 하면서 사회에 눈 뜨고 시류에 맞춰가는 감각도 기르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비용은 꼭 필요한 경비만 추렴해 그날 쓰고 끝내는
동창회 대화방 시대
식이다. 흔히 회비 3만 원으로 점심값과 그 달에 걸린 경조사비를 조달
이순(李順) 씨의 30년 동창들은 한 달에 한 번 전철 신도림역에서 합
하고 적립금을 쌓아두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동창회도 바꿔놓았다. 모
류한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친구들의 교통이 편리한 지점으로 만남의
든 연락은 스마트폰 단체 대화방을 통해 오가는 게 대세이다. 동창회
장소가 굳어진 것이다. 근처 백화점으로 이동해 점심을 같이 먹고 수
소식지를 인쇄해 우편으로 부치던 것은 이제 옛일이고 10여 년 전부
다를 떨고 회의도 하고 영화도 한 편 같이 보며 하루를 보낸다.
터는 인터넷 동창 카페를 운영하는 방식이 우세했는데 한두 해 전부터
“이 역에는 이런 동창회 모임으로 사방에서 오는 이들이 많아요. 근
단체 대화방이 소통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처의 어지간한 식당은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니까요. 만나서 새로운
아무 때나 스마트폰 신호음을 울려대는 동창들의 수다로 이미 국내
정보도 교환하고 주변 사람들 근황도 알고 무엇보다 살림하는 법을 배
와 해외 간의 거리감은 사라져버린 듯하고 소식은 순식간에 전달된다.
워갈 수 있고 기분이 쇄신돼요.”
부정적인 면이라면 모든 참가자들에게 온갖 개인 잡사까지 확인하게 몰
어디나 살림을 똑소리 나게 잘하는 이들이 끼어 있다. 사소한 생활
아가거나 수많은 대화방의 단체 대화가 공해 수준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의 팁부터 재테크까지 다양한 정보가 오간다. 시류를 탄 정치적 주장
대화방 여러 개를 드나드느라 헷갈린 동창이 다른 방에 보내야 할
에 열 올리는 사람이 꼭 하나둘 있어 적당히 대꾸해 넘기다가 참기 힘
메시지를 잘못 보내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은 내용도 넘쳐나니 어떻
든 순간도 만들어진다. 봉사 정신이 발휘되는 것도 동창회의 미덕이
게 대응할지를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체 안에서 말 전하는
“고향 동창들이 행사 전에 타지에서 미리 내려온 동창들과 함께 장에 나가 진달래꽃과 찹쌀을 사다 반죽하고 햇쑥에 멥쌀을 버무려 반달모양으로 익혀내는 쑥비빔떡도 만듭니다. 해마다 잊지 않고 이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 동창회가 고맙게 느껴집니다.”
중년 여성들이 여고 시절 함께 수학여행을 왔던 신라 고도 경주를 다시 찾아 왕릉 근처 잔디밭에서 ‘수건돌리기’를 하며 놀고 있다. 추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여고 시절 교복을 다시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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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 소음 처리나 대화 내용을 삭제하는 방법 같은 건 필수적으로 알
포즈가 아주 자유로워 반쯤 눕기도 하고 다들 편안히 웃고 있다. 50주
아야만 한다. 처음엔 간편하고 신기해서 쉽게 활성화되었던 여고 동창
년 기념일은 여고 동창회의 정점을 이룬다. 대규모 파티가 마련되고
회 대화방에도 이제는 사회화의 기술이 필요하다. 큰 방에 모여 얘기
국내외에서 많은 동문들이 최대한 성장을 하고 모인다. 장학금 지원
하는 듯한 단체 대화방에서 빠져나가 일상을 한갓지게 유지하는 동창
같은 일의 규모도 커진다. 갖가지 장기자랑은 숨겨져 있던 재능이 빛
들도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을 발하는 순간이다.
때로는 지난 세월 받은 교육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50년 세월의 성과는 이런 것만이 아니다. 몇몇 학교는 당시 시대상
가장 회의적인 평가는 왜 국악이나 한국사, 한국미술, 재래 건축 같은
을 기록한 문집을 발행했다. 이화여고 1965년 졸업생들은 동문들을 통
우리 고유문화를 내버리고 서양 것만 가르침 받았나 하는 것이다. 국
해 1946년부터 2015년까지 각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 3백여 장과 이에
외에서 사는 동창들은 이 점을 더욱 아쉬워한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붙이는 글을 모아 복식사 책 <황홀한 앨범 Fashion History of Modern
어느 순간 내보여준 따뜻한 미소와 말, 잘못을 감싸주는 관용, 학교 건
Korean Women 1946-2015>을 발간했다. 패션과 유행의 시대사 등 현대
물과 정원 등의 환경을 통해 오늘의 자신이 완성되었음을 감사하며 전
한국 여성의 미적 감수성과 산업구조, 사회규범을 직업 모델 아닌 전문
인적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기도 한다.
직업여성이나 주부들이 실생활의 옷차림으로 보여준다. 유명 디자이너 들에 대한 추억과 정보도 술회되었다. 50년 쌓아 온 동문의 역량을 활용
아직은 어려운 60주년 모임
한 학문적 자산이다. 여고 동창 60주년 모임도 없진 않다. 그러나 더 나
동창 모임에도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흐름이 보인다. 한 여고에서 졸업
이가 들면서 모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80이 되면 관절염으로 걸음이
한 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동기들 전체가 모여 찍은 사진은 참석자 모
불편하거나 병원 신세지는 친구들이 늘어나 모임이 거의 끊긴다. 여고
두 자리에 근엄하게 똑바로 앉거나 서 있다. 40주년 기념사진에서는
동창회는 그렇게 추억 속으로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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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토픽
냉장고 속에서 부활한 기막힌 요리 VS 신선한 토크 냉장고 속은 주인의 식성, 취향, 생활 습관, 심지어 교우 관계와 연애 상태까지 보여주는 매우 사적인 공간이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그 영역의 금기를 깨고 유명인이 쓰는 실제 냉장고의 내용물을 코를 킁킁거리며 샅샅이 까발린다. 여기서 획득한 재료로 일류 셰프들이 제한된 시간에 자존심을 건 요리 대결을 펼치는 틈틈이 팝콘처럼 터지는 이야깃거리는 이 프로그램의 신선도를 끌어올린다. 김연옥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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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근 환경부에서 발표한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한국
목할 일이다. 여자 요리연구인이 나와 조근조근 요리 과정을
가정의 냉장고에는 평균 34종의 음식물이 보관되어
설명하는 전통적인 요리 프로그램과는 아예 출발이 다르다.
있으며, 그중에 채소류의 12.5퍼센트, 과일의 5.7퍼센
여자로는 미국의 요리학교 CIA를 나온, 메이저 리거 출신 야구
트, 냉동식품류의 4.1퍼센트가 버려진다고 한다. 케이블 채널
선수 박찬호의 아내 박리혜가 유일했다. 한국의 쿡방은 남자
JTBC의 <냉장고를 부탁해>는 유명 연예인, 스포츠 선수, 패션
들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모델의 냉장고를 통째로 스튜디오로 옮겨와서 시청자 눈앞에 서 문을 활짝 열어젖힌 다음, 그 안의 재료만으로 셰프들이 15
연예인들은 뭐 해먹고 사나…
분 요리 대결을 한다는 기발한 발상으로 요리 예능의 최고 히
냉장고는 녹화 전날 게스트 의뢰인의 부엌에서 옮겨온다. 그
트작이 된 프로그램이다.
들은 냉장고가 없어서 간밤에 맥주도 못 마시고 물도 못 마셨 다고 투덜대곤 한다. 냉장고는 아이스박스에 옮겨 담은 내용
셰프테이너의 등장
물과 함께 이삿짐 차량으로 스튜디오로 옮겨진 다음 미리 찍
“처치곤란 천덕꾸러기 냉장고 재료의 신분 상승 프로젝트!”
어놓은 사진에 따라 원래 상태로 복원된다. 고무장갑까지 낀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들이 당신의 냉장고를 탈탈 털어드 립니다!” 2014년 11월 17일, 첫 방송은 두 남자 진행자의 떠들썩한
MC들이 ‘수사’에 돌입하여 냉장고 주인과 짓궂은 실랑이를 벌 이며 내용물을 탈탈 터는 과정이 프로그램의 전반부 웃음을 담당한다.
오프닝 멘트와 함께 시작했다. 지난해 10월에 100회를 돌파하
소녀시대 멤버 써니의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막걸리와 비
고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도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잘
닐봉지에 싸인 설렁탕이 나오고 ‘패셔니스타’로 알려진 방송
담은 이 오프닝 멘트는 그대로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한
인 김나영의 냉장고에서 개미가 죽어 있는 꿀단지가 나온다.
셰프는 첫 방송을 앞두고 제작진과 사전 모임을 한 뒤에 길게
장어즙이니 양파즙이니 파우치에 담긴 건강 보조 식품들은 왜
가야 6회일 거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지? 유통 기한이 몇 년씩 지난 식재료는 예사이고
과연 어느 연예인이 자기 냉장고를 번거롭게 스튜디오까지
뜯어먹고 남은 뼈가 그대로인 족발, 악취 나는 생선전, 곰팡이
끌고 나와 공개할 것이며 자존심 강한 최고 셰프들이 요리 대
꽃이 핀 고기, 물러서 잼이 되어가는 딸기 등을 보면서 연예인
결이라는 이런 포맷에 응할지, 또 15분 동안에 할 수 있는 요리
들은 뭐 해먹고 사는지 궁금해 했던 시청자들은 잘 나가는 아
가 몇이나 될지….
이돌도 들여다보면 끼니 챙겨 먹을 시간조차 없는 썰렁한 청
그러나 <냉장고를 부탁해>는 2015년을 쿡방(cook과 방송
춘들임을 느낀다. 그래도 텔레비전에 나간다는데 저렇게 정리
을 합친 말로써 요리를 소재로 한 예능 방송을 일컫는 신조어)
안 된 냉장고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제작진은 “그 집 냉
의 해로 규정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JTBC의 간판 예
장고의 가감없는 실상이 재미를 주는 요소라는 걸 알기 때문
능 프로그램으로서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에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해명했다.
아시아를 겨냥한 푸드 버리아어티 쇼에 주력하겠다며 설립된
남편이 유명 셰프인 배우 소유진이나 빅뱅 멤버 지드레곤
한 컨텐츠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만든 책임 프로듀서를
의 냉장고에서처럼 어란이며 송로버섯, 푸아그라, 캐비어 같은
데려갔고, 중국 인터넷 기업 텐센트와 공동 제작한 리메이크
진귀한 재료가 나와 셰프들을 흥분시키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프로그램 <배탁료빙상>은 최근에 시즌2까지 방영되었다. 프
그러나 유명인의 냉장고도 대체로 평균 한국인의 냉장고와 내
로그램이 인기를 얻자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출연을 희망하는
용물에서 별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며 본격 요리대결로 들
이들이 줄을 이었고 최현석, 샘킴, 이연복, 미카엘 등 고정 출
어간다.
연 셰프들 또한 요리 실력을 넘어서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 며 ‘셰프테이너’로 자리잡았다.
최고 셰프들의 요리 대결
특히 이 프로그램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이 소문난 식당의
요리의 주제는 그날의 냉장고 주인이 주문한다. 한 가수는 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이름 있는 남자 셰프들이라는 점을 주
서트를 앞두고 먹기에 좋은, 달지도 짜지도 맵지도 않은 그러 KOREAN CULTURE & ARTS 87
JTBC 인기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 ‘셰프테이너’들이 유명인사의 집 냉장고에서 나온 식재료들로 즉흥 요리 대결을 펼치고 있다.
면서도 힘 나는 음식을 주문하고, 연로한 어머니 얘기를 하며
식을 내놓아 갈수록 승률을 높이고 있다. 먹을 수 있는 식재료
눈가를 적시던 탤런트는 어머니 생신에 만들어드릴 보양식을
가 거의 없었던 인피니트 멤버 성규의 냉장고 편에서 그가 으
배우고 싶다고 요청한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아 냉동실을 가
깬 토마토와 달걀물만으로 만들어낸 초간단 해장 요리는 ‘토
득 채우고 있는, 먹기에는 엄두가 안 나고 아까워서 버릴 수도
달토달’(토마토와 달걀에서 한 글자씩 딴 이름) 이라는 재미있
없는 옥수수나 반건조 오징어를 ‘부탁’하기도 한다.
는 이름을 얻었고 ‘SNS에서 가장 따라하기 좋은 음식’으로 꼽
여기서부터 프로그램은 요리를 소재로 한 스포츠 중계로 바
혔다.
뀐다. 15분에 맞춘 전광판 시계의 숫자가 숨가쁘게 변하고 셰 프들의 칼질이 현란해진다. 진행자 김성주는 탁월한 스포츠 캐
대용량만큼 커진 재미
스터이기도 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해서 박진감 넘치는 중계
가정에서도 충분히 해볼 만한 15분 간단 요리 레시피를 전달
를 펼친다. 그 자리에서 반죽한 생면으로 파스타를 만들거나
한다는 것도 분명히 처음 제작 의도 중에 하나이기는 했다. 그
각종 약재를 넣은 돌솥밥을 짓고 수삼을 무치고 미역국을 끓여
러나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에 나
한상 차리는 게 진짜로 15분에 가능할까? 보면서도 믿어지지
온 요리를 해 먹어봤다는 주부는 그리 많지 않다. 난다 긴다 하
않는 장면에 시청자들이 가장 많이 품는 의문이 바로 그것인데
는 셰프들의 화끈한 정면 승부 끝에 나온 요리를 일반인의 부
답은 ‘진짜’이다. 제한 시간의 압박감은 대단해서 셰프들이 손
엌에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정확한 조리 분량
을 덜덜 떠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43년 경력의 중식 대
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 또한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시청자들
가 이연복이 칼에 손을 베어 피가 나기도 한다.
도 쏟아지는 쿡방 속에서 요령껏 필요한 대목을 챙긴다. 이를
마침내 완성한 음식을 냉장고 주인이 신중하게 시식하고
테면 간단 레시피는 <집밥 백선생>이나 <오늘 뭐 먹지>, <삼시
버튼을 눌러 승부를 결정한다. 이긴다고 해서 상금이 있는 것
세끼>에서 구하고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아이디어와 소스,
도 아니고 작은 별 모양의 배지를 하나 가슴에 달아줄 뿐인데
플레이팅을 눈여겨본다는 식이다.
미슐랭 원스타를 받은 식당의 총괄 세프 출신인 한 셰프는 “미 슐랭 별을 딴 것보다 더 기쁘다”고 즐거워했다.
1960년대에 처음 등장할 때 용량이 120리터였던 한국의 가정용 냉장고가 점점 대형화하더니 이제는 문이 네 개 달린
방송 후에 화제가 되는 음식이 최고의 셰프들보다 오히려
900리터가 넘는 것도 나온다. 식구 수가 줄고 1인 가구가 늘지
유일한 아마추어 요리사인 웹툰 작가 김풍이 만든 것인 경우
만 여전히 한국인은 대용량 냉장고를 선호한다. 혼자 사는 유
가 더 많다. ‘자취 요리’의 대가라는 캐릭터로 확실히 자리잡
명 연예인들의 냉장고도 한결같이 크고 그 안에는 얘깃거리
은 김풍은 엉성한 조리 과정에도 의뢰인의 입맛에 딱 맞춘 음
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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