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제교류재단 공공외교 번역총서 시리즈 003
새 시대의 공공외교
Public Diplomacy in a Changing World
새 시대의 공공외교 제프리 코원・니콜라스 J. 컬 엮음 최영종 감수
인간사랑
Public Diplomacy in a Changing World by Geoffrey Cowan and Nicholas J. Cull Copyright ⓒ 2008 by SAGE PUBLICATIONS, INC.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3 In-Gan-Sa-Rang Publishing Company This Korean language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SAGE PUBLICATIONS, INC., Thousand Oaks, USA through BF Agency, Seoul. 이 책은 BF Agency를 통한 저작권자와의 독점계약으로 도서출판 인간사랑에 한국어판 저작권이 있습니다. 신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목
차
발간사
9
감수의 글
11
서문 : 변화하는 세계 속의 공공외교
14
제프리 코원 Geoffrey Cowan, 니콜라스 J. 컬 Nicholas J. Cull
1부 공공외교 이론
19
1장 독백에서 대화로, 대화에서 협동으로 : 공공외교의 세 층위
20
제프리 코원 Geoffrey Cowan, 아멜리아 아르세노 Amelia Arsenault
2장 공공외교 : 분류학 및 역사
3장 공공외교 이론의 모색
99
에이탄 길보아 Eytan Gilboa
4장 신공공영역 : 글로벌 시민사회, 통신망, 그리고 글로벌 거버넌스
58
니콜라스 J. 컬 Nicholas J. Cull
140
마누엘 카스텔 Manuel Castells
목차
5
5장 공공외교와 소프트파워
조셉 S. 나이 주니어 Joseph S. Nye Jr.
6장 하드파워, 소프트파워, 스마트파워
167
194
어니스트 J. 윌슨 3세 Ernest J. Wilson III
2부 공공외교의 수단
221
7장 장소 브랜드 구축 : 현황
222
피터 반 햄 Peter van Ham
8장 신기술과 국제방송 : 적응 및 변화에 대한 고찰
먼로 E. 프라이스, 수잔 하스, 드류 마골린
Monroe E. Price, Susan Haas and Drew Margolin
265
9장 정의할 수 없는 것 도해(mapping)하기 : 국제관계
6
이론과 교류 프로그램의 연관성에 대한 고찰 자일스 스캇-스미스 Giles Scott-Smith
새 시대의 공공외교
306
3부 공공외교의 국가별 사례연구와 논평
345
10장 국제교류 그리고 미국의 이미지
346
낸시 스노우 Nancy Snow
11장 부에나 비스타 연대와 원조의 축 : 쿠바와 베네수엘라 공공외교
마이클 J. 부스타만테 Michael J. Bustamante,
줄리아 E. 스웨이그 Julia E. Sweig
12장 공공외교와 중국 소프트파워의 부상
453
위웨이 왕 Yiwei Wang
13장 공공외교 : 학문 분야로의 부상
390
484
브루스 그레고리 Bruce Gregory
글쓴이에 대하여
515
목차
7
Public Diplomacy in a
3부 공공외교의
국가별 사례연구와 논평
Changing World 9장_정의할 수 없는 것 도해(mapping)하기
345
* *
10장 국제교류 그리고 미국의 이미지
낸시 스노우 Nancy Snow
이 글은 국제교류 프로그램과 미국의 이미지에 대해 『연보(The Annals)』가 다뤄 왔던 네 권의 특집호 재검토에 목적이 있다. 이 4권의 특집호는 약 40년간의 냉 전기간 동안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이뤄진 국경을 초월한 인적 교류(personal contact)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이 글은 냉전시대의 국제 대면교류(international face-to-face contact)가 21세기에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에게 특히 중요한 공공외교의 교훈을 남긴다고 결론내린다. 당시에 발전된 공공 외교의 방법들은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것으로 편견이나 고정관념들을 극복 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이념적 대립 속에서 미국의 국가적 평판을 회복 하는 데 필요한 대화의 중요성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 글은 국제인적교류의 역 사에 대해 고찰하고 이를 통해 국제인적교류에 대해 재평가하고자 한다. 핵심어 : 미국, 교육교류, 국제교육, 문화 간 교육, 국제관계, 해외교육, 인적 교류, 풀브라이트, 외국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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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O wad some Power the giftie gie us To see oursel’ s as ithers see us!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로버트 번즈 (Robert Burns)
『미국 정치 및 사회과학학술원 연보(The 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 )』는 ‘국제교류 프로그램과 세계 속에서의 미국
이미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여러 해 동안 여러 권의 특집호를 출간하 였다. 앞서 출간된 연보들을 재검토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 다. 첫 번째는 지난 연보 네 권을 살펴보고, 냉전시대의 국경을 넘어선 인적 교류로서 이 네 권의 연보들이 국제교류 프로그램의 접근방식에 어 떤 시사점을 제공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늘날 국가적 혹 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공공외교 노력에 대한 현행 논의의 수준을 높이고 확장시키는 동시에 국제 인적 교류에 대한 향후 연구를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는 것이다. 위의 논의와 관련 된 질문은 아래와 같다. 1.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대면접촉 교류활동들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이 공공외교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2. 냉전 시기가 국제 인적 교류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3. 오늘날 어떠한 연구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 4. 국제 인적 교류 프로그램에 대한 재평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 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볼 네 권의 『연보(Annals )』는 다음과 같다. 「외국인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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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서 본 미국(America through Foreign Eyes)」(제295권, 1954년 9월), 「국 제교육에 대한 늘어나는 수요(The Rising Demand for International Education)」 (제335권, 1961년 5월),
「인적 국제교류 : 재평가(International Exchange of Per-
sons : A Reassessment)」(제424권, 1976년 3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과 학술교
류 (The Fulbright Program and Academic Exchanges)」(제491권, 1987년 5월). 이 가 운데서 제 491권에 다뤄진 「풀브라이트 프로그램과 학술교류」는 내가 직 접 풀브라이트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연방공화국에서 지내다 돌아 온 바로 몇 년 뒤에 출간한 글이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고르 바초프 대통령에게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릴 것을 간청했었지만, 당시 어 느 누구도 2년 뒤에 그 베를린 장벽이 실제로 무너진다거나, 그 장벽의 파편들을 역사의 한 부분을 기억하길 원하는 여행객들이 가져가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1954년 : 외국인의 눈을 통해 본 미국
미국 해외공보처(USIA)는 1953년 8월 1일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한국 전 휴전으로 인해 미국의 개입이 중단된 지 일주일이 채 안 된 시점이었 다. 미국 정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 해외공 보처는 국제사회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려는 소련의 이념적 영향을 점차 받고 있던 외국의 청중들에게 공식적이긴 하지만 미국의 이 야기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 기관은 도서관 책자들, 미국의 소리 방송, 전시회, 다큐멘터리 영화, 인적교류 프로그램들, 특히 풀브라 이트 프로그램 등과 같이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해외로 정보를 전파 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Dizard 200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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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본주의와 소련 공산주의 간의 냉전 대립구도는 1950년대 중 반에 이르러 한창이었다. 국제사회 속에서 미국의 평판과 이미지에 대한 평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일본의 갑작스런 진주만 공격을 견뎌냈던 미 국의 고립주의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특히 이러한 평가의 적절 한 수단으로는 미국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한 조사였 고, 그 대상으로는 특히 미국에 유학 중이거나 일시적으로 방문 중인 외 국인들과 외국에서 공부하거나 방문 중인 미국인들을 접한 외국인들이 해당되었다. 이러한 문화 간 관점들(intercultural perspectives)은 당시 국가안 보와 지정학적인 힘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1954년 9월 『연보』는 「외국인 을 통해 본 미국」(제295권)이라는 제호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수년 전인 1948년에 헨리 스틸 코매거(Henry Steele Commager)가 저술한 『미국의 총체 적 모습 : 외국인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America in Perspective : The United States through Foreign Eyes )』에서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연
보』의 편집자 리처드 램버트(Richard D. Lambert)는 미국에 대해 얻은 정보 의 양은 미국에 대한 호의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믿음을 표명 하였다. 그가 공공외교에 관해 만든 금언(aphorism)은 “우리에 대해 안다 는 것은 우리를 좋아한다는 것이다”와 같았다. 사랑과 같이 이보다 더 깊 은 감정은 아마 너무나 자기도취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외국인들이 미국인들의 특정한 매너나 관습, 관계양식 등에 대해서 이해하면 할수록 국제 관계가 더 평온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 다. 다른 국가들이 우리의 제도들을 본받아 모방하는 것이 잘한 일이라 고 우리가 느끼든 아니든 간에, 상대방이 우리를 제대로 이해만 할 수 있다면, 우리 국가가 수행하는 정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나 마찰은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의 정책이 수행되는 방식의 세련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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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그 전제조건은 모두 같다. 우리는 우리의 외교정책에 있어 우호증진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선택하였다(Lambert 1954, vii).
이 책의 기고자들 중 한 명인 아비드 브로더슨(Arvid Brodersen)은 저 명한 외국 방문자들이 제기한 원대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방문자들 모두 미국 사회와 미국인들에 대해 매우 확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브 로더슨은 외국 방문자들이 미국에 대해 갖는 이미지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을 언급했다. (1) 세계적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영향력과 지배 력, (2) 미국이 가지는 거대한 영토와 부, (3) 미국의 과학과 기술에의 강 조, (4) 미국의 아량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각각의 특징들은 외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의 연속성 속에서 도 출된다. 예를 들어 세계무대에서 미국이 ‘국민국가’라는 인식은 보편적이 었지만, 미국을 방문하는 모두가 미국의 높은 위상에 대해 달가워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은 글로벌 리더로서 미국의 미성숙과 경험 부족에 대해 우려했다. 유보적인 마음은 특히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 면에서 성 숙함과 숙련된 경험의 부재 때문이었다. 언론과 사상, 종교의 자유를 포 함한 평등과 자유의 원칙들이 미국 민주주의의 원리로 내세워졌지만, 브 로더슨은 미국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훗날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부상 시킬 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결론내렸다. 즉 “미국의 민주주 의에 대해 부정적인 강력한 편견이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었지만, 이전 시대의 국민들처럼 민주주의를 모델로서 따를 정도의 깊은 정서적인 신 뢰가 있다는 증거 역시 거의 없었다”(Brodersen 1954, 30). 미국의 사회 풍조에 대한 외국의 시각은 미국의 계급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미국의 가족과 가정생활에 대한 관찰과 오히려 인종관계에 보 다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은 외국인에게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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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빠르게 변화하는 곳이며,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무력과 폭력 을 지향하는 곳으로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나라로 여겨졌다. 사회 풍조 와 관련하여 부차적인 주제인 사회 변화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긍정적 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미국 사회가 혁신과 새로움을 연상시키기 때 문이다. 방문자들에게 미국의 미숙함과 경험 부족, 그리고 청년다운 특 성은 외교영역에서 불안요소로 비춰졌지만, 경제와 기술 분야에서의 혁 신과 실험에 있어서는 크게 걱정할 거리로 보이지 않았다. 미국을 방문 한 외국인들은 우리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미국의 기업가적 기질’이라고 일컫는 것에 대해 기대를 했었기 때문에, 그들이 영화에서 보이는 폭력 에 대해 비난하는 것처럼 이를 비난하려 들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미 국의 ‘아량’과 관련해서는 사회변화와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이 자신을 보 는 시각 만큼이나 미국인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싶은지를 반영 했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년 동안 강력한 정치적 파워 로 자리잡았으며, 부와 뛰어난 기술력 및 친화력을 가졌고, 또한 대인 커 뮤니케이션도 개방적이었다. 브로더슨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몇몇의 방문자들은 특정한 제도적·물질적인 측면으로 인해 미국 민 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으나, 미국인들은 심리적으로 민주주 의적인 사람들이고, 서로간에 친근하고 편안한 대인관계를 조성할 줄 아는 천부적인 능력을 지녔으며, 외국인들에게도 친절하다는 점 에 대해 일반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Brodersen 1954, 32).
브로더슨은 베를린 공수작전(Berlin Airlift)이나 마샬플랜(Marschall Plan) 과 같은 프로그램들은 국경을 뛰어넘는 국제 인도주의적 관계에서의 심 리적인 개방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외국인 방문자들의 눈에는 오직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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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이 프로그램들을 주도할 능력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위의 두 경제사절단 활동에 있어 미국이 명백 한 국익과 냉전 상의 이득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아 량’은 전쟁 이후 1980년대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사람 대 사람 사이의 교육적·문화적 교류에 대한 장기적 지원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또 다른 논문 「유럽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에서, 스위스 역사학자 자크 프레이몬드(Jacques Freymond 1954, 40)는 유럽에서 선정된 세 국가들(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미국에 대한 인상을 다룬 그 의 글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미 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브로더슨의 연구결과 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즉 젊고 미숙한 미국이 규율이 잘 되고 사려 깊은 성숙한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때때로 사탕가게에서 마구 떼를 쓰는 어린애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개 입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전리품은 승자에게 돌아간다는 말처럼, 미국만이 물질적 부와 과시적 소비를 누릴 수 있는 위치를 선점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거의 10년이 지 났을 무렵에 프랑스 주둔 미국 군인들이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는 매정 한 야유를 듣는 것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또한 프레이몬드는 관광 객들과 군인들이 미국이 가진 가장 적합한 공공외교 사절단의 대표적인 예는 아마 아닐 것이라고 언급했다(Freymond, 35). 덧붙어 그는 해외 거주 미국인들과 유럽인들 간의 이러한 긴밀한 접촉은 고정관념(stereotypes)을 깨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 고착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프레이몬드가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탈 리아계 미국인들과 이탈리아 사이의 접촉이 긴밀할수록 이탈리아 사람 전반이 미국에 대하여 갖는 정서에 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사람들은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가족적인 연대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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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로 여겼었지만, 사실은 미국을 보다 현명하고 성숙한 손위의 영국이 보살펴줘야만 하는 어린 동생으로 보았던 것에 더 가깝다. 미국을 방문 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미국을 지적 탐구심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 라 기술과 기계의 진보를 선호해서 비판적 분석을 오래전에 포기한 나라 로 여겼다. 프랑스인들은 미국 대학들이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있으며, 미국의 “고급 문화”(예술, 인문학, 저술)는 취약하거나 상업화될 수 있는 문 화에 가려져 퇴색되었다고 생각했다. 극도의 자본주의화 혹은 당시에 미 국화로도 불렸던 미국적 현상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이 그 당시 존재했었 다. 미국화라는 용어는 1990년대에 들어 벤자민 바버(Benjamin Barber 1992) 가 사용한 맥월드(McWorld)라는 용어로 지칭되었다. 이후에 토마스 프리 드먼(Thomas Friedman 2000)은 분쟁해결에 관한 맥도널드 가설(the McDonald’ s thesis of conflict resolution, 역주 : 맥도날드 레스토랑이 있는 나라들끼리는 싸우 지 않는다는 주장)을
제시하여 지나친 미국화로 맥월드를 우려하는 세력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유럽 사람들은 고급 문화에 대한 걱정보다는 특히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들썩였던 “적색공포(Red Scare)”에 대한 걱정이 더 컸는데, 이는 맥카시 청문회(MaCarthy hearings)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 프 레이몬드가 지적하듯이, 유럽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공산당원들을 색출 해내는 행위를 자신의 그림자조차 두려워하는 공포와 미숙함에 의해 조 정되는 국가의 전형이라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포의 산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맥카시즘(McCarthyism)을 설명할 수 있을까? 프랑스는 매카시즘을 초기의 미국 식 파시즘으로 보지만, 아마 영국에게 매카시즘은 그 정도는 아닐 것 이다. 이는 영국인들이 미국 사회에 대한 그들의 저항 능력에 대해 보 다 낙관적인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영국인들은 지속적으로 더 거세지고 최근까지 별다른 해법이 없어보였던 이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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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매카시즘은 차츰 유럽에서 미국에 대 해 설명할 때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이주민과 자유의 땅이라는 미국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가 사회에 동화하지 않 는 것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여기는 나라라는 이미지로 대체되었 기 때문이다(Freymond 1954, 39).
미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각은 애매한 부분이 있으나, 소련의 미국 에 대한 이미지에는 그런 부분이 없다. 소련의 관점에서 미국은 공격적이 고 사악한 자본주의 제국의 리더로서 레닌, 막스, 엥겔스, 스탈린과 같은 미래지향적 사상가들이 구상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도전하려고 혈안 이 되어 있는 나라로 간주된다. 프로파간다와 미디어 이미지 관리에 있 어 구소련 체제의 우월성은 프레더릭 바군(Fredereic Barghoorn)이 쓴 「미 국에 대한 소련의 이미지 : 의도적으로 왜곡된 이미지(The Soviet Image of the United States : A Deliberately Distorted Image)」(1954)란 논문에 잘 나타난다.
소련의 선전활동은 “내부적으로는 최대의 단결과 화합을, 외부적으로는 최대의 분열을 꾀하는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활동영역이다(p. 43). 경찰국가는 정보에 대한 독점적인 통제 권한을 행사하면서 외부세계
를 통해 정보에 대한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킨다. 이런 면에서 미국은 소련이 통제하는 수준만큼의 정보통제나 정보를 활 용한 기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소 련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마다 그럴싸한 슬로건을 만들어내는 히트 제조기로서 명성이 높았는데, 베를린 봉쇄, 마샬플랜, 트루먼 독트린, 한 국전쟁이 진행되었던 시기를 “양 진영 간의 투쟁(struggle of two camps)”이 라 불렀던 것 등이 그 슬로건들이다. 바군은 소련이 한국 전쟁의 여파를 잘못 계산했다고 주장했는데 한국전쟁 시기는 미국의 전쟁 역사상 처음 으로 모든 미국인들이 소련의 공격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것이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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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시 봉쇄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때이기 때 문이다(p. 44). 한국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스탈린은 자본주의가 본질적 으로 가지고 있는 모순들로 인해 동서 간의 전쟁보다는 자본주의 국가 들 간의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크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p. 45). 1950년 대 중반 스탈린 집권 이후가 되자 소련의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소련과 타협하지 않는 훼방꾼 국가의 모습이 되었다. 노버트 뮐렌(Nobert Muhlen)의 「독일인들의 눈으로 본 미국과 미국의 주둔(America and Ametrican Occupation in German Eyes)」(1954)이란 논문은 독 일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매한 이미지에 대해 설명한다. 뮐렌에 따르면 “미국에 대한 독일의 견해는 ... 미국은 모호하고, 불안정하며, 오 해와 염려로 가득차 있고, 때로는 모순적이기도 하다”(p. 52). 미국에 대 한 긍정적 시각은 미국에 이민 온 독일인들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러 나 다른 유럽인들이 미국 이민자들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처럼 몇몇 독일 이주자들 또한 나중에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선량한 시민으로 서 모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자들로 인식되기 보다는 오히려 실패할 가능 성이 큰 ‘약속의 땅,’ 요란하게 선전된 모험의 나라로 도피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으로 인식되었다. 독일인들은 미국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나 라라고 여기는 것에 대해 실망하였는데, 독일인들의 눈에 마치 쇼비니즘 (극단적 애국주의)의 극치로, 미국이 독일을 “지배자 민족(the master race)”의
주동자라고 표현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독일 국경 너머로 퍼져나간 미국인에 대한 또 다른 고정관념은 미국인들이 완전히 미쳤다거나, 적어 도 이해하기 힘든 존재라는 것이었다. 비록 가장 적대적인 고정관념은 아 니라 해도 저자는 이런 인식이 미국이라는 괴물에 대한 유럽의 우월감 을 고양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상을 갖게 된 부분적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이 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이 말했던 바와 같이 미국은 “해방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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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정복자로서”(Muhlen 1954, 54) 독일을 지배했고, 소련의 베를린 봉쇄 이후에야 고통 받고 굶주린 베를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애로운 나라로 탈바꿈했다는 점에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미국의 재교육 프로그램은 일 부 독일인들에게 오만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뮐렌(Muhlen 1954, 57)은 “[ 독일을] 방문했던 미국인 강연자, 저술가, 공연기획자 등의 무리는 독일 인들에게 민주주의는 기적이며, 효율적이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설명했 는데 독일인들의 눈에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맹목적으로 숭배해서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는 집착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설명 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히틀러의 반대가 반드시 미국 식 민주주의는 아니라고 믿었다. 독일에서 미국의 비나치화(de-Nazification) 프로그램은 독일의 안정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했기 때문에 수용할만했 으며 적절했다고 평가되지만, 도가 지나쳤던 시도들의 경우에는 독일인 들로 하여금 어린애같이 취급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했으며, 미국이 가진 개혁 권한 행사의 정도를 넘어섰다는 비판을 받았다. 외국인 학생들이 미국에 대한 인식에 대한 주제로 쓴 일련의 글들 은 「외국인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라는 제목의 연보를 완성하게 했다. 이 글들을 바탕으로 했던 비교문화 사회심리학 조사는 1950년대 초기에 만든 것 치고는 내용의 깊이나 범위 면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 나 냉전이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난관의 봉착과 냉전 시대의 국가 이 미지와 평판에 대한 강력한 집착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연구들은 서구 와 동맹관계에 있던 국가들(인도, 멕시코, 스웨덴, 일본)로부터 온 외국 학생 들이 가지는 정치적 및 개인적인 태도를 측정하기 위해 중요한 연구 수단 으로서 간주되었다. 유네스코 헌장에 따르면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에 서 시작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지배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과학자들은 미래의 전쟁을 막고 갈등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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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고 부심했다. 이와 관련한 실용적인 연구 주제는 “국제적 상호 이해를 저해하는 긴장 요인들에는 무엇이 있는가?”였으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종종 문화 집단 간의 장벽을 만들어내는 부정적 고정관념으로 생각되었 다. 유네스코의 텐션 프로젝트(Tension Project)의 후원을 받은 뷰캐넌과 캔트릴(Buchanan and Cantril)의 획기적인 연구는 「국가들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How Nations See Each Other)」(1953)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 다. 이 연구는 유럽 6개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서독)을 포함하여 총 9개국(그밖에 미국, 호주, 멕시코)에서 천 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외국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측정했다. 응답자들은 12개의 형용사들 이 적힌 리스트에서 그들의 상대국뿐만 아니라 미국인과 러시아인들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도록 요청받았다. 1940년대 이후로부터 미 국은 서구권 국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로 여겨져 왔는데, 이 연구는 그런 국제적인 여론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미국인들은 가장 많은 존경을 받았고(33%), 그 다음으로는 영국(12%),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8%) 순이었다. 반면에 러시아인들은 가장 호감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36%), 그 다음이 독일(16%), 마지막은 일본(7%)
순이었다. 유네스코 연구
는 동-서 블록의 라인에 따라 분명하게 갈리는 극도로 단순화된 카테고 리로 나누어진 태도를 보여주었다. 서구 국가들은 러시아인들이 근면하 지만 잔인하고, 후진적이며, 군림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근면하면서 동시에 관대하고, 진 보적이며 실용적이라고 평가받았다. 미국에 대한 이러한 우호적인 평가 는 서유럽 16개국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경제 원조 계획인 마샬플랜과 베를린 물자공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동구권 국가들에서는 찾아보 기 힘든 이타적인 특성들이었다. 유네스코 연구는 국민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갖게 되는 고정관념은 대체로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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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유용하다. 이 경우, 조사에 참여한 9개국의 응답자들 모두 자기 동포들을 평화를 사랑하는(peace loving), 근면한(hardworking)과 같은 형용 사를 사용하여 매우 우호적으로 평가했다(Oskamp and Schultz 2004, 350).
유네스코 헌장에 따르면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시작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지배적인 시각을 반영 한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과학자들은 미래의 전쟁을 막고 갈등을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 고 부심했다.
앞서 살펴본 유네스코의 연구는 외국에 대한 태도를 조사한 것인데 반해, 루스 유심(Ruth Hill Useem)과 존 유심(John Useem)의 연구는 외국 학 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로서 『연보(The Annals )』에 소개되었다. 이 연구 는 교류를 통해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접촉은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이러한 고정관념의 탈피는 교류 참여자 가 주최국과 본국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 을 보여주었다. 특히 교류 참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그들의 견 해나 관점이 주최국 사람들에게 더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이 밝혀 졌다. 그러나 교류 프로그램 참여자가 너무 미국화되거나 영국화되어 너 무 많이 변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 이 본국에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은 약해질 것이다.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본국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서구 주최국의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에서부터 본국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비하 행위까지 포함된다.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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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집단에서 영향력이 있다고 간주되는 개인들은 [외국의] 문화를 강매 하는 뻔뻔한 상인처럼 행동하지 않는다”(Useem and Useem 1954, 80). 미국에 있는 외국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중간자 역할을 담당하기 위 한 동기 부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사회는 사회적 지 위나 계층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일부 외국인들은 이를 불쾌하게 느 끼거나 그들이 미국 내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미국인들의 경향은 외국인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인 동시에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도 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 출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사회계 층과 계급의 구분이 뚜렷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공부하 고 있는 외국인들은 대개 상위계층 출신들로 사회적 지위에 대한 미국인 들의 무관심은 서로 간의 관계를 공고하게 만들 잠재적 가능성을 훼손시 킨다고 보았다. 램버트와 브레슬러(Lambert and Bressler 1954)는 긍정적이거 나 부정적인 태도의 형성은 “민감영역 콤플렉스(sensitive area complex)”의 결과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주최국 국민들이 외국인들의 신분 관계에 대해 보이는 민감성이 주최국에 대한 긍정적 태도의 형성에 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국제교류 프로그램 등을 통한 일시적인 국제이주 과정은 그 특성상 방문자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 문화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도록 만드는 데, 이는 자신의 모국에 대한 강한 일체감이나 동일화, 모국의 지위에 대 한 증가된 민감성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인도의 한 학생은 미국을 방문 한 초기에 미국에서 볼 때 인도는 물론 본인 자신까지 낮게 평가될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인도에 대해서 그와 이야기하던 미국인들은 카스트제도, 불가촉천민, 인구증가와 같은 특정한 주제에 대 해 언급했는데, 이 주제들은 식민지배 그리고 반동적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런 주제들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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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조차도 방문자들로 하 여금 미국인들이 인도에 대해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 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감정은 방문자들이 미국에 대해 전반 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든다(Lambert and Bressler 1954, 71). 램버트와 브레슬러(1954)는 국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국가에서 (비서구 국가나 저개발 국가를 지칭)로부터
온 학생들은 주최국과 본국 간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 설계된 적극적인 공공외교 선언이나 외교정 책 이니셔티브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우호관계 를 위해서는 접촉만으로는 부족하며, 특히 장기적인 접촉이 단지 낮은 지위에 있는 국가들의 자긍심에 일련의 공격만을 가하는 셈이 될 때 더 욱 그러하다”(p. 72). 일본, 멕시코,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학생들의 태도에 관한 연구는 사 회과학연구단체연합회(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 소속의 위원회였으나 지금은 사라진 비교문화교육위원회(Cross-Cultural Education)에 의해 수행되 었고, 카네기 회사, 포드 재단, 록펠러 재단에서 그 연구비용을 부담했 다. 이러한 연구의 일반적인 결론은 미국에서의 교류 경험이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이 학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미 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고정관념에 기반한 반응보 다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장단점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경향을 보였다(Humphrey 1954, 124-125 ; Sewell, Morris, and Davidsen 1954, 135). 교류 프로그램 참여자 중 일부에게는 본국 사회와
문화로의 재통합 과정(reintegration process)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었 다. 예를 들어 미국의 환경이 꽤 자유롭고 개방적이라고 여긴 일본의 “여 성 반란자(women rebel)”는 성에 따는 역할 구분이 더 뚜렷하고, 이에 순 응해야 하는 전후의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1950년대의 관행적인 언어의 일부가 오늘날과의 비교를 어렵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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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일본으로 되돌아간 여성 방문교수에 대한 다음 과 같은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녀가 운이 좋다면 단순히 집에서 힘들고 단조로운 가사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아내로 선호하는 남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Passin and Bennett 1954, 99).
1961년 : 국제교육에 대한 증대되는 수요
전쟁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교류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원 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을 제창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우리와 다른 나라 모두 군사적 조치보다는 문화적, 경제적 원조를 통해 자유로운 세계의 힘과 안정성, 그리고 연대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 하고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1956). 케네디 행정부 시 기에는 선교사, 군인, 학생, 교수, 외교관, 관광객, 회사원, 기술자 등의 교 류를 포함한 인적 교류의 역할과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확대되 었다. 이들 두 대통령은 생각의 자유로운 교환이 가지는 소프트파워적인 가치와 이러한 교류가 군사력과 경제력 등의 하드파워를 통한 힘의 과시 보다 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60년대 초는 인적 국제교류가 꽃필 수 있는 최적의 시기가 될 가 능성이 있었다. “추악한 미국인(Ugly American)”이란 이미지는 백악관의 교 양 있는 젊은 부부(역주 : 케네디 부부)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이미지였다. 미국의 대통령은 불어를 할 줄 아는 30대의 아내가 있었으며 그녀는 남 편과 마찬가지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었다. 이 젊은 대 통령은 개인적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세계 속에서 더 큰 미국의 역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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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생각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 「국제교육에 대한 증대되는 수요 (The Rising Demand for International Education)」를
다룬 『연보(Annals)』 통권
335호가 1961년 5월에 출간되었을 때 미국은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선 지 4개월째 되던 때였고,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간 암살사건이 있기 18개월 전이었다. 미국의 쿠바 피그만(Bay of Pigs) 침공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그 해 4월, 베트남 전쟁은 초기 단계에 있었다. 조지아주 아틀란타의 32살 된 목사가 주도한 미국 민권운동(The 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s)이 국 가적인 관심을 지배하고 있었다. 소련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케네디는 상 하원 합동연설회에서 미국이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며, 이를 60년대 말까지 완료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은 시작한 지 15년째였다. 2개월 전인 1961년 3월 1일 케네디 대 통령은 세계평화와 우호 증진을 위해 젊은 남녀를 오지로 파견하는 평화 봉사단을 출범시켰다. 국제교육은 그 당시 미국의 대외원조 프로그램의 일부로 인식되었 고, 세계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마 샬플랜의 경제원조가 유럽을 재건하는 것은 물론, 미국의 무역을 위한 시장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하였던 것처럼, 국제교육 역시 그에 상응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미국의 생산성과 영향력에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정서가 커지고 있었다. 당시 대외원조에 대한 미국 일반 대중의 이해는 군사 및 경제 원조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 정신에 입각해 무 지를 극복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국제 교육이 점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교육의 효과는 군사 및 경제 원조 프로그램과는 달리 쉽게 파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존 멜비(John F. Melby 1961,3 )는
「국제교육에 대한 증대되는 요구」라는 제호에 실린 그의 논문
에서 “국제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개인과 기관들 가 운데, 다른 사람들의 교육과 문화에 노출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시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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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견을 갖는 곳은 거의 없었다”고 진술했 다. 이러한 국제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는 국 제교육 후원에 대한 명백한 반대가 있었는데 이러한 반대는 현재까지 지 속되고 있다. 이는 최근 오프라 윈프리가 시카고에 있는 그녀의 고향이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젊은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짓겠다고 했을 때 받았던 비난과 유사하다. 당시의 이러한 편협한 지역주의에도 불구하 고, 많은 사람들은 국제교육의 절실한 필요성과 국제교육이 외교정책과 국가안보에 대해 갖는 관계에 있어서 시급함을 강조했다. 칼드웰(Caldwell 1961, 113-14)은
“국제교육은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
치약도 아니며, 항상 평화를 창출해내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인적 교류 가 가지는 중요성은 이러한 교류들이 교육과정의 일부분이고, 교육은 국 가적 및 국제적 차원의 정책에서 주요한 수단이라는 점에 있다”고 제안 했다. 미국은 공산 진영이 사회주의적 시민이란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젊 은이들을 세뇌시키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육받은 친서방 시민들을 길러내는 것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교류의 수단 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미국과 비교했을 때 소련에게는 불리했는데, 이는 영어가 세계 제2언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국제교류 와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서 예술, 문화, 스포츠를 활용하는 능력은 미 국을 훨씬 능가했다. 말리크(Malik 1961,132)는 “이성을 신뢰하고 진실을 환 영하는, 따라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주의적 정신은 “공산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법이다”라고 주장한다. 더 나 아가 말리크는 세상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기를 쓰고 진실을 알려고 하 기” 때문에 미국은 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 학 생들의 교육을 위한 체류는 미국의 외교적 목적을 더 많이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이 책의 다른 저자들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한다. 미국은 외국 학생들이 그들의 본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동포들에게 미국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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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정확한 그림을 그려줄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킬 책무가 있다. 말 리크는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 는 반면에 미국은 자신들의 국제 문화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필요한 만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더 이 상 목표 없이 즐겁게 유랑할 수는 없으며, 또한 모든 일이 결국에는 저절 로 잘 될 것이라며 태연하게 기대할 수도 없고, 또한 당신의 뜻이 선하고 당신의 마음이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제대로 이해해 줄 것이라고 순진하게 가정할 수는 없다”(p. 138). 특히 미 국인이 스스로를 자국 정부의 외교정책으로부터 아무리 잘 분리하려 해 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좋든 싫든 간에 “외국에 가면 당신은 본래 자 신의 정부를 대표하게 된다”라고 그는 기술했다.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반 미국 시민이 150 만 명 정도 되었다. 또한 150만 명의 미군과 그들의 가족들 역시 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외국 거주 미국인은 대개 6개월이나 그 이상 미국 밖에 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며, 여기에 단기 여행자나 임시 출장자 는 제외된다(Rubin 1966, 2). 평화봉사단을 통해 외국에서 거주하며 일하 는 자원봉사자 수는 1966년 사상 최고인 15,000명에 이르렀다. 그 해 베 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이 더욱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미국의 국 제적 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외국에 있는 미국인들은 공 산주의에 맞서고 서방동맹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조치를 담당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어떤 서방 국가도 미국에게 주어진 안보적 책무를 담당 할 의지나 능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Tarr 1966, 42). 미국은 풀브 라이트 교류와 평화봉사단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인들과 학생들 을 이용하여 세계 속의 실추된 미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자 다양한 노력 을 기울였다. 굴라혼과 굴라혼(Gullahorn and Guallahorn 1966)은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400명 이상의 미국 학생들과 미국 국무부의 국제교육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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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비스(International Educational Exchange Service)가 후원한 5,000명 이상의 풀브라이트 교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는 1950년 대 존과 루스 유심(John and Ruth Useem)의 연구에 필적할 획기적인 연구 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이르러 문화 간 인적 교류에 대한 미국 정부 의 지원은 맹렬한 반전운동과 인종폭동에 직면해서 줄어들었다.
1976 : 인적 국제교류 : 재평가
1970년대 중반 『연보』는 인적 국제교류에 대한 미국의 후원에 대해 재평가하고, 지난 10년간 기대했던 성과와 의욕적인 확대 계획에도 불구 하고 이에 대한 실질적인 자금지원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고 결론 내 렸다. 크니스 홀란드(Kneeth Holland 1976, vii)가 그 제호의 서문에서 지적 한 바와 같이, “우리가 수십억 달러를 군대에 투자하고 외국으로의 프로 파간다 활동을 위해 수억 달러를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지만, 세계의 평 화와 미국의 미래를 위한 활동 유지를 위해 드는 몇 천만 달러를 행정부 와 의회로부터 얻어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1976년의 인력 교 류에 대한 국무부의 자금지원 수준은 1967년 수준과 동일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프로그램의 기획과 평가 부분에서 개선이 있었는데, 이와 같 은 변화가 더 많은 자금을 확보하는 데 유용하게 작용할 것으로 기대되 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의 교류는 1961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 았으며, 1971년 소위 말하는 핑퐁외교의 시대 전까지 미국과 중국사이 의 교류는 제도화되지 않았었다. 이 시기에는 예술교류가 국제교류의 한 형태로 포함되었다. 중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의 첫 교류는 탁구선수들 에게서 시작되었다. 1970년대는 또한 국제 인적교류에 대한 국제적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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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평가 또한 긍정적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풀브라이트(J. William Fulbright) 는 「국제 인적교류 : 재평가」라는 논문에서 풀브라이트 동문들의 중요성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하였다.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자 신이 속한 사회나 다른 사회에 대한 지식이 많은 해설자로서 역할을 하 고, 현명한 결정을 통해 갈등의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방문한 나라에 대한 평가를 전달하는 여론형성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Fulbright 1976, 3).
풀브라이트는 그의 이름을 건 풀브라이트 프로그램과
같이 정부가 후원하는 국제 교류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이미지를 제 고하기 위한 선전목적에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교 류프로그램의 가치는 지식과 지혜, 그리고 공감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 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풀브라이트는 그의 이름을 건 풀브라이트 프로그램과 같이 정부가 후원하는 국제 교류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 한 선전목적에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교류프 로그램의 가치는 지식과 지혜, 그리고 공감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 회를 제공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엘리스 프랫(Alice Reynolds Pratt 1976)은 1976년 발간된 『연보』에서 “민 간 외교관”의 부상에 대해서 다루었다. 민간외교관이란 세계문제협의회 (World Affairs Councils),
국제자매결연도시(Sister Cities International), 국제교육
기관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Foreign Student Advisers)와 교회 집단 등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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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지역사회의 수많은 봉사 단체를 통해서 국제 방문자를 환영하는 사 람들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러한 지역사회 조직들이 “인적 접촉이 세계 를 구한다거나 즉각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하 지만 그들의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상호 협력에 보다 우호 적인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언급했다(p. 106). 마이클 플랙(Michael Flack 1976)은 교류에 대한 연구자들이 교류의 긍 정적인 효과가 체류, 그 자체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단순하게 가정하는 경 향을 보이는데 이러한 경향때문에 교류 프로그램이 가져오는 효과를 정 확하게 측정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스폴딩과 함께 저술한 「미국에 체류하는 외국학생들에 대한 중요 연구」(Spaulding and Flack 1976)는
결과를 (1) 개인, (2) 주최기관과 사회, (3) 본국, (4) 국
제관계의 네 종류의 성과로 나눈다. 미국에 체류하는 외국학생들의 개인 적인 성과로는 영어능력, 미국 학위 취득을 통한 사회적 신분 상승, 전공 분야의 전문성, 다양한 사회제도와 가치에 대한 의식 개선 등을 포함한 다. 플랙은 외국 학생들이 대학에 미친 영향은 매우 작다고 보았는데, 주 된 이유는 문화 간 상호 작용이나 학습 효과를 측정할 수 있는 그 어떤 연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국학생들이 그들이 교류했던 개별 가족들 을 제외하고 주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측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 가 거의 없었다. “해당 지역의 학교나 대학교에서 외국 학생들을 정보나 교수 수단으로서 체계적으로 활용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p. 115). 외국 학생들의 본국 측면에서는 많은 성과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유심(Useem) 이 일찍이 내렸던 결론인 “서방세계에 대한 단순한 새로운 신념체계가 아 닌 사고와 삶의 새로운 준거틀”이 포함되었다. 1970년대 개발도상국 중 많은 나라들이 신생독립국으로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 사례를 보면 위의 유심이 내린 결론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나라들이 외국에 서의 교육과 학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특화된 지식과 전문성을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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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플랙은 국제관계에 대한 효과를 측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냉전기에 사람 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경쟁적 투쟁의 정도를 주최국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나 여론 정도로만 측정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외국 방문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미국인을 좋아했다는 등 미국에 대한 다양하고 긍 정적 태도를 보여주는 설문조사가 무수히 많았지만, 플랙은 “수많은 연 구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복적으로 미국의 특정 외교정책이나 차 별, 사회 복지, 문화생활 수준, 다른 사회에 대한 무지 등과 같은 미국 사 회의 특정한 면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비판도 있었음을 발견하였다”(p. 116).
1987 : 풀브라이트 경험과 학술 교류
『연보(The Annals)』는 미국이 후원하는 교육교류 프로그램 가운데 가 장 권위 있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의 1987년까지의 활동을 검토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1987년에 40주년을 맞이했고, 156,000명의 풀브라이트 학 자들(2007년까지는 대략 300,000명)을 배출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1987)는 「풀브라이트 경험과 학술 교류」라는 논문 서문에서 “나는 학생들의 교 류, 그리고 문화 간 교육이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들의 생존에 있어 수소 폭탄이나 전략적 방어 이니셔티브(SDI)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술했다(p. 10). 풀브라이트에 따르면, 1980년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의 최고 교육적 성과 중 하나는 다양한 정부 후원 교류 프로그램의 확대였다. 풀브라이트는 이러한 변화에 만 족스러워하면서도, 세계 군비지출에 비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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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의 숫자에 대해 한탄했다. 그 연보의 후반부에 랄프 포겔(Ralph Vogel 1987, 13)은 “마샬플랜과 더불어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은 2차 세계대
전 이후 세계에서 행해졌던 가장 관대하고 창의적인 것들 중 하나이다” 라는 아놀드 토인비(Arnold Tonybee)의 문장을 인용한다. 뉴웰(Newell 1987, 135)은 “현재의 국제적 관점이 필요한 때”라고 주장하면서 미국 학생들이
세계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였다. 특히 재계와 군사 커뮤니티는 외국어와 국제적인 전문지식 분야의 프로그램 확대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을 공유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국내총생산의 4분의 1은 해외 무역으로 비롯된 것이었으며, 미국 기업의 이윤 중 3분의 1은 국제적 비즈니스 활동의 결 과였다(p. 136). 이 연보의 편집자인 리차드 램버트(Richard Lambert)는 국방부, 국무 부, 그리고 USIA,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평화봉사단, 그 리고 각각의 공공 또는 민간 기관 파트너를 포함, 모든 연방기구들이 관 장하는 교류 프로그램들 사이의 더욱 긴밀한 협력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그는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1980년대의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서 언급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1982년 USIA가 만든 국제교류자문단(Advisory Panel on International Exchange)으로 그들의 임무는 “미국 정부(the U.S. Government),
비영리 민간부문(the private non-profit sector in the United States),
영리추구 민간부문(the private for-profit sector), 그리고 고등교육기관(higher education)
등의 여러 분야에서 추진하는 국제교류 프로그램의 목적과 규
모, 형식을 결정하는 것”이었다(Lambert 1987, 143-44). USIA 자문단은 그 들의 최종 보고서의 권고사항에서 궁극적으로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권고사항 역시 미국 회계감사원 의 “의미있는 조정의 촉구”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실행되지 못했다. 즉 프 로그램 참여자에 대한 후속조치, 교류활동의 합의점 도출, 실무자를 위 한 교류사업 평가수단 제공 등의 보고서 권고사항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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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ats 1978, 12).
교류 프로그램 간의 조정에 대한 권고는 중앙 통제의 필요를 의미하 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수요를 고려할 때 개별 프로 그램의 목적을 평가하고 발전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램버트(1987)는 주된 교류의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1) 기술훈련과 미국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경험, (2) 미국의 공공외교 목적 아래 외국인들을 미국 사회에 직접 노출시키는 것, 즉 미국에서의 그들 의 경험과 미국에 대한 친근함이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 및 성향을 강화할 것이란 희망, (3) 미 식품의약청(FDA), 질병관리본부(CDCP), 그리 고 미항공우주국(NASA) 등의 연구를 포함, 자연과학과 보건과학에 대한 전문가적 지식과 기술적 숙련의 초국가적 공유, 그리고 교류의 네 번째 기능은 아직 덜 활용되었지만 국가 간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에 대한 훈련 지원과 국제 및 비교연구 지원이다. 이러한 연구는 풀브라이트의 방 문 연구학자 프로그램과 일맥상통하며, 스미소니언 연구소(the Smithsonian Institution),
국립인문학재단(the 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 국립
과학재단(the National Science Foundation) 등에서도 유사한 사업을 하고 있 다(p. 150-3). 1987년 발간된 연보에 실렸던 마지막 논문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에서 발표되었던 글들을 당시 국제학 자교류위원회(the Council for International Exchange of Scholars, CIES) 의장이었 던 케네스 파이(A. Kenneth Pye)와 1970년대 초 대외장학이사회( the Board of Foreign Scholarships, BFS)의
의장을 역임하였고 후에는 의회 도서관장으
로 임명된 바 있는 제임스 빌링턴(James H. Billington)이 제안한 관점에서 소개한다. 정치학자이자 전 BFS 멤버였던 폴 시버리(Paul Seabury)는 풀브 라이트 프로그램이 외교정책의 목적과 보다 분명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국가 간 상호 이해를 구축하기 위한 젊은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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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 간의 교류는 구시대의 유물이며, 미국의 국익 추구를 위해서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외교정책을 주도하던 주류 기관들과 학자 교류 프로그램을 보다 심도 있게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네스 파이는 정반대 주장을 했다. 그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의 비정치적 성향 이야말로 지속적인 성공의 열쇠였다고 보았다. 그는 정부와 대학, BFS와 같은 감독기관 간의 협력 하에 이루어지는 교류프로그램에 대한 초당파 적인 후원은 어떤 정치적인 색채를 띨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 음과 같이 말했다. “프로그램의 목적은 공공외교에 있으나, 국무부, 미국 국제개발처 (USAID), 또는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포함한 미국 공보처와 같은 방식은 아니다. 타국이나 미국 학계의 관점에서 볼 때 공공외교의 정당성은 대체로 미국 외교정책의 직접적인 수단이 아니 라는 인식에 달려있다”(Seabury et al. 1987, 157에서 인용).
빌링턴은 누군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도록 촉구했고, 만약 글이 쓰여진다면 “미국 초창기의 대이주가 어떻게 사상 의 전달이라는 새로운 이주로 계속되었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Seabury et al. 1987, 161에서 인용). 프로그램의 본산인 고등고육기 관은 그 프로그램을 “가장 가치있는 천연자원”으로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 가치에 걸맞게 다루어져야 한다. 빌링턴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은 미 국 국무부나 공보처가 아닌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과 유사한 보다 권 위 있는 기관에 의해 관리될 가치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제안 의 이유로 정부의 입김이 아니라 정부 관료조직이 안고 있는 내재적인 무능함과 비효율성을 지적하였다. 그의 생각은 당시 스미소니언 연구소 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관할할 수 있도록 요청했던 풀브라이트 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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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의 견해와 매우 유사하였다. 빌링턴은 “우리는 진정한 리더를 찾아낼 수 있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이는 미국과 미국이 지향하는 자유라는 가치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는 새로운 리더십 세대를 찾는 것 을 쉽게 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p. 163).
국제교류에 대한 『연보』 네 권에 대한 개관
본 논문은 지난 40년 동안 『연보』의 특정 호에서 다루었던 인적 국 제교류의 효과에 대해 분석하였다. 40년이 넘는 냉전시대 동안 위와 같 은 국제교류는 이념적인 전쟁과 미소 갈등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마 음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제 이 역사적 고찰을 통해 얻은 네 가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대면접촉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공공 외교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2001년 9월 11일 미국을 향한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이에 따른 미국 의 “테러와의 전쟁” 선포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국가 안보에 있어 공공외 교 전반과 특히 교류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제2기 부시 행정 부의 공공외교 분야의 우선 순위는 미국의 공공외교 전략과 전략적 커 뮤니케이션이란 맥락 속에 “결정적 교류들(critical exchanges)”을 포함시키 는 최근 경향을 보여준다.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및 공공외교정책 조정위 원회(the Strategic Communication and Public Diplomacy Policy Coordinating Committee)에서 2007년 6월 발행한 보고서는 “미국 정부는 지난 50년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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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공공외교정책 수단으로 볼 수 있는 결정적 교류 프로그램에 대 한 최근의 자금지원 증대 추세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p. 6).
결정적 교류는 젊은이, 여성, 미래의 지도자, 그리고 사회의 핵심
여론 주도층(기자, 사업가, 과학자, 정부와 군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 로그램을 포함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류 프로그램이 강조되는 이 유는 그들의 교류 프로그램 경험이 그들이 속한 사회에 더 큰 파급효과 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연보』 4권이 제안하는 교류 정책의 정당성과 근거는 교류 프로그램 이 특정 정부의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직접적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개 인적인 동기, 제도적인 연계, 그리고 국가의 목적의 복합적인 산물이라는 데에 있으며 이 모든 요소들은 시기에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룰 수도, 대 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가 안보와 동서 간 이념 대결을 강조했던 냉 전시대와 보다 최근의 테러와의 전쟁과 폭력적 극단주의에 대항한 전세 계적 투쟁으로 대표되는 현재, 이 두 시기는 모두 선과 악으로 양분된 준메시아적인(quasi-messianic) 투쟁을 반영하고 있다. 9.11 테러와 이에 대 한 대응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국토안보(homeland security) 조치에 따라 미 국 정부는 비자 정책에 보다 많은 규제를 가하고 외국 학생들과 교류 방 문자들을 더욱 면밀히 조사했다. NAFSA나 국제교육자연합(Association of International Educators)과
같은 국제 교류 기관들은 이와 같은 정부의 정책
이 열린 사회 정신을 훼손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2003, 7). 미국 정부의 대응 정책은 결국 국경 강화와 문 호 개방 정책(Secure Borders and Open Doors)으로 그 타협점을 찾았으나, 여 전히 안보와 개방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정치적 목적 사이의 갈등은 존재했다. 위의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9.11 사태 이후의 현실주의자 관점에서 보면 평화와 상호 이해라는 명목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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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더 이상 국제 교류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풀브라이트 프로 그램의 목적인 상호 이해의 구축과 평화적인 핵심 중재자 그룹의 형성 은 항상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1995 년 아칸소주 상원의원이었던 그의 죽음으로 인해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의 목적과 이념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연보』의 국제교류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은 인적교류에 대한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인적교류의 근거는 상호 이해와 갈등 해소란 거시적 차원의 목적 보다는 훨씬 실용적이고, 개인적이며, 전문적인 것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교류의 근거가 상호성의 형성에서 국가안보 의 증진으로 그 중요성이 이동하더라도 인적 교류의 목적을 설명하는 데 있어 풀브라이트 의원이 강조한 가치와 목적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그 는 50년 동안 미국정부가 후원한 교류 프로그램의 얼굴이자 비공식 대변 인이었다. 풀브라이트는 교류가 우리를 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합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항상 진보적인 이상주의자였다. 이 는 그가 실용성보다는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종종 사용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는 “교육 교류는 국가를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이것은 인간다운 국제관계 를 형성하는 데 있어 다른 어떠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도 할 수 없는 공 헌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Fulbright 1994, 14 ; Rinehart 2006). 무역적자와 산 업 쇠퇴, 고등교육의 학습 실험장으로 다른 나라들이 보다 부상하고 있 는 현실에 직면한 가운데, 미국의 국제 교류 초점은 평화와 상호 이해 추 구의 이상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점차 경제력과 글로벌 경쟁력의 제고라 는 다자적인 목적의 추구로 이전하고 있다. 국가적 이득과 경제적 성과 를 위한 미국 정부의 교류 프로그램 조정 역할은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 장시키기 위한 근거로 그 입지를 점차 공고히 해나갈 것이다. 반면 교류 자체를 위한 교류나 미국과 다른 국민들 사이의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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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를 옹호하는 논리는 교류의 정당성 부여에 있어 그 근거가 날로 약 화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적교류에 대한 이와 같은 논문 모음은 과거에 외국 사람 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았는지 알기 위해 실제 설문조사 결과보다는 단순 히 사람들의 이야기나 개인적인 글에 의존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9/11 사건 이후 교류 효과의 측정을 강조하는 것은 상 대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다. 1980년대, 인맥이 넓었던 전 할리우드 프로듀 서이자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찰스 위크(Charles Z. Wick)는 국제 교류를 옹호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오늘날 국제 교류 분야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학자와 실무 종사자들은 국제 교류의 효과를 실제 사례를 통해 증명하고 그 필요성을 입증해야 한다. 실제로 교류의 효과를 자료로 보여주거나 측정할 수 없다면 아무리 교류가 중요 하다고 주장한다 해도 충분치 않다. 지난 수십 년간의 『연보』를 되돌아 보는 것은 새로운 연구주제 모색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1950년대에는 유심(Useem) 팀이나 1960년대의 굴라혼(Gullahorn) 팀이 수 행했던 중요한 설문조사 연구를 되돌아보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 을 것이다. 4권의 『연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에 대한 보다 많은 양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001년, 미국의 설문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 실시한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호감도 조사는 오늘날의 설문조사 방법과 전통적인 국 가 이미지 연구방법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의 한 예이다.
2. 국제 인적교류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냉전시기는 어떤 영향을 미 쳤는가? 냉전시대에 국제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중요도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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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국제교육의 국가안보적 성과에 프로그램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 던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국제적인인적교류는 1950년대 중반에서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는 제대군인원호법(G. I. Bill : 전쟁 참가 재향군인들이 사립이든 공립이든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는 상환권을 주는 제도)
이나 마샬플랜과 같이 정부가 후원하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가져온 긍정 적인 효과에 의해 고무된 것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창설된 구세 주 평화봉사단은 집단안보의 정신 아래 경제적 원조와 지식 이전에 대한 미국의 약속의 상징이었으며, “반공주의 외교정책의 산물”이었다(Wetzel 1966, 1). 하지만 냉전시대의 국제교류가 위의 예처럼 단순히 이타적인 목
적, 그 하나만을 위해 행해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가장 이상주의적인 실천가들과 가장 실용주의적인 참여자들조차도 미국의 교류와 국제교육 에 대한 몰두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이는 교육, 기술, 그리고 열린 가치라는 측면에서 소련에 대한 미국의 우월성 을 과시하기 위한 외교 정책적 노력과 맥락을 같이했다. 1953년 아이젠하 워 대통령이 설립한 미국 해외공보처(USIA)는 국제교육 교류에 대해 다음 과 같은 이중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 하나는 외교정책 목표와 결부된 일 방적인 반공주의 정보 트랙이었고, 두 번째는 쌍방향적인 상호 문화 이 해 트랙으로서 외국의 도서관, 연설자 프로그램(speaker programs), 전시회 등에 대한 후원을 포함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변 되는 “적색공포(Red Scare)” 시기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사회 모델에 대 한 미국의 지나친 전념에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미국 주도의 자유 사회 란 소련과는 대조적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고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국가 및 외교정책 속에 서로 대립되는 견해를 함께 흡수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그의 후임자였던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은 베트남 전쟁이 야기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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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설립한 미국해외공보처(USIA)는 국제 교육 교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중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 하나는 외교정책 목표와 결부된 일방적인 반공주의 정보 트랙이었고, 두 번 째는 쌍방향적인 상호문화 이해 트랙으로서 외국의 도서관, 연설자 프로그램(speaker programs), 전시회 등에 대한 후원을 포함했다.
국제교류는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며, 이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당선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공격적인
반공주의 외교정책은 미국의 민주당원뿐만 아니라 필자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체류한 독일을 비롯하여 많은 미국의 동맹국 국민들에게도 논란이 되었다. 냉전이 정점에 이르렀을 무 렵 교류의 평화와 상호 이해 목적은 약해지고 이데올로기적 목적이 강화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본인과 친분이 깊고 본인의 두 차례에 걸친 임 기 동안 해외공보처의 수장을 지낸 찰스 위크(Charles Wick)와 함께 정부 후원 교육 및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소련의 “악의 왕국(Evil Empire)”이미 지에 직접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아칸소 주의 진보 적인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국제교육 지원 전반에 대한 비공식적 대변 인으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담당했지만, 레이건 행정부의 국가안보 및 외 교정책 일부에 대해서 직접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그가 교육교류와 국제교육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커다란 기대가 있 었다. 풀브라이트는 조지타운대학교에 다니는 젊은 청년이었던 빌 클린 턴의 멘토였으며, 그가 로즈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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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수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클린턴 대통령은 로즈장학생 동료들을 자 신의 행정부에 많이 고용하였으며, 비록 냉전은 끝났으나 구소련의 신생 독립국가들에게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교육시킬 수 있는 기회 가 미국에게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들과의 경제적 개입(economic engagement)을
우선적으로 강조함에 따라 정책 입안자들과 교류 지지자들
이 힘을 합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나, 후에 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 이 된 당시 제시 헬름스(Jesse Helms) 상원의원이 주도하던 비용절감 운동 으로 인해 미국 해외공보처는 도마 위에 올랐고, 결국 1999년에 폐지되 었다. 교류 관련 종사자들 중 일부는 국제주의자인 대통령이 정부 지원 교류 프로그램의 공식 책임 기관인 해외공보처 폐지결정을 내리자 배신 감을 느꼈다. 클린턴 독트린은 경제성장과 미국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시 장 확대를 강조했으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통과를 추진하기 위 해 USIA가 닦아 놓은 교류망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NAFTA의 성공적인 체결 후, USIA는 그 생명력을 상실했으며 폐지를 막기 위해 동원할 수 있 는 국내 지지층도 없었다(Snow 2002). 오늘날 교류 지지자들에게는 접근 성을 저하시키는 엄격한 비자 제약과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의 승리 그리고 국가 안보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교류를 통한 열린 사고 의 증진을 저해할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 와는 달리 국무부 공공외교 차관(2005-2007)이며 부시 대통령의 오랜 친 구이자 조언자인 캐런 휴스(Karen Hughes)는 전보다 더 두드러지게 국제 교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무부 예산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교류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계속적으로 증대되었음을 보여준다(표 1을 참 조할 것).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시대인 오늘날, 냉전 시대의 미국과 마찬가 지로 교류는 국가안보 목표달성에 있어 그 존재의 정당성을 상당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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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인정받는다. 냉전시대의 미국인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냉전의 목적 을 지지했었다. 반면 오늘날 미국인들은 냉전시대때와는 달리 대이라 크 전쟁을 포함하여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 전반과 그 목표에 대해 약한 국민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로 인해 현 정부의 결정적 교류에 대한 지원정책은 냉전기 반공주의 아젠다 보다도 수용하기 힘든 것으 로 보인다(Pew Global Attitudes Project 2007).
[표 1] 교육문화공무처의 교육·문화교류 프로그램(ECE)
(단위 천 달러)
연도
ECE
2000
204,155
2001
231,576
2002a
247,000
2003
243,711
2004
316,633
2005
355,932
2006b
431.275
2007c
465,671
2008 대통령의 요청
486,400
a. 미국에 대한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대한 추가적인 회복과 대응을 위한 2002년 회계연도 추가예산 (The Fiscal Year 2002 Supplemental Appropriations for the Further Recovery from and Response to Terrorist Attacks on the United States)으로부터 1천만 달러 포함(미 공법 PL107-206에 제정). b. 국방, 테러와의 전쟁, 허리케인 복구작업을 위한 비상추가예산(Emergency Supplemental Appropriations Act for Defense, Global War on Terror, and Hurricane Recovery 2006)으로부터 5백만 달러 포함(미 공법 P.L.109-234). c. 미군 준비태세 향상, 참전용사 복지, 카트리나 복구, 이라크 책임을 위한 비상추가예산으로부터 2천 만 달러 포함(Emergency Supplement-US Troop Readiness, Veteran’ s Care, Katrina Recovery, and Iraq Accountability Appropriations Act, 2007, P.L.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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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날 어떤 연구방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 본 연구에서 검토한 네 권의 『연보(The Annals )』 모두 국가 이미지의 진실성과 평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95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 끝난 후 유럽 내 미국의 전투지역에서 그들의 이미지에 대해 걱정하 였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같은 곳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과 비슷 하다. 1960년대 미국은 양키 제국주의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추한 미국 (The Ugly America)”(Lederer and Burdick 1958)이라는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서 평화봉사단이나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 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미지와 평판은 미 국의 월남전 개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이 한창이었던 시기(1965-1975)에 동맹국들 사이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며, 1980년대 레이건 정부 하에서 미국이 그레나 다와 레바논에 군대를 파병했을 때 서부유럽은 미국의 공격적인 자세를 두려워했다. 미국은 좌익 정권에 반대하고 투쟁하는 우익반군에게 불법 무기거래 등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가장 최근에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후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급증했다(Oskamp and Schutz 2004, 351). 국가 이미지의 중요성은 수십 년간 인식되어 왔지만 정교한 연구방
법을 사용하여 국가 이미지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1950년대와 비교할 때, 오늘날에는 미국에 대한 해외 여론을 지 속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 방법이 존재한다. 오늘날 국무부 에 있는 신속 대응 부서(Rapid Response Unit)는 인터넷(the World Wide Web) 을 통해 미국 정책들에 대한 외국 미디어의 반응을 조사하는데, 이것은 「외국인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이라는 글에 제시된 국가 이미지 평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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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목적을 수행하는 새로운 도구로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헬무스, 폴, 글렌(Helmus, Paul and Glenn)이 수행한 미 국 랜드(Rand) 연구소의 연구, 「매디슨 가의 협조 얻기 : 작전지구에 있어 서 대중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마케팅 접근법(Enlisting Madison Avenue : Th e Marketing Approach to Earning Popular Support in Theaters of Operations )」(2007)은
『연보』에 실렸던 「외국인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American through Foreign Eyes)」과
「풀브라이트 경험과 학술교류들(the Fulbright Experience and Aca-
demic Exchanges)」에서
주장한 문화적 감수성 훈련과 자각의 필요성에 대
한 최신 연구물에서 볼 수 있다. 랜드 연구소의 연구는 “어떤 것들은 제 대로 번역되지 못한다. 유사성을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결론지었다 (p. 23).
그 보고서의 메시지는 목표 대상의 문화를 아는 것이 미국이 독
일을 점령했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것 이다. 1956년과 1987년 사이의 교류에 대한 담론을 재검토해 보면, 교류 프로그램 대상자들이 자신의 본국 문화와 교류 주최국의 문화를 비교해 서 평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그들이 본국 동포들에게 돌아간 후 교 류 주최국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냉전시대 동안 교류에 대한 연구방법들은 개인 인터뷰, 출구조사, 학술교류 사전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 등과 같은 질적 조사방법들이었 다.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이 교류에 대해 보다 정확한 연구를 가능하게 했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몇몇 대규모 연구들의 연구비를 지원했 던 후원 재단들의 관심과 후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문화 간 교육을 위한 자금지원 기회는 국가안보 서클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 의 주어지지 않는다. 조셉 나이(Joseph Nye 2002, 29)가 언급했듯이 국무부 의 국제업무 예산은 군 예산과 비교했을 때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교류 지지자들과 교환학자들은 적은 돈으로 굉장히 많은 일들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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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요구받는다. 즉 그들은 교류가 국가의 안보를 증진시키고, 미국의 가치를 제고시키며, 세계 속의 미국의 이미지를 개선시킨다는 점을 입증 해서 보여주어야 하며, 이 모든 것을 매우 적은 예산 안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교류가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식의 자기 보고 시대는 끝났다. 학생 수가 천 명 정도에 불과한 최소 규모의 인문학 중심의 대학에서부 터 고도로 다양화된 대규모의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이나 플로리다 대학 에 이르기까지 고등교육 공동체는 국제교류, 해외수학 프로그램, 그리고 학생들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 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 국제인적교류의 개별적 혹은 경제적 효과를 측정하기 위한 연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학계는 고등교육 기관이 주 장하는 그들의 세계화 정도에 걸맞는 세계적 수준의 교류 영향력과 효 과성 연구 및 조사가 행해질 수 있도록 고등교육 행정가들에게 지속적인 압력을 가해야 한다.
4. 국제적인 인적교류의 재평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 가? PCC(2007)가 제시한 공공외교와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활동의 목적은 국제 인적 교류에 대해 새롭게 강화된 책임감을 제시했는데, 이는 다음 과 같은 영역에서 미국 정부의 요구의 부응에 도움을 준다. • 모든 인간의 자유, 인권, 존엄성, 평등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강조 한다. • 우리와 이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지지한다. • 미움과 억압의 사상을 신봉하는 이들과 맞서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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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C는 “개입의 동반자 모델(a partnership model of engagement)”의 개요 를 “우리의 파트너와 함께 모든 국가, 문화, 종교의 문명화된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적 극단주의자들을 고립화시키 고 약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서술한다(p. 3).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교류는 사회의 더 많은 부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며, 여기에는 인터넷상에서의 대화, 다큐멘터리, 유튜브, 뉴스 매체 등과 같은 신구 미디어 기술을 이용해 그들의 활동 을 기록할 수 있는 교류 참가자들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2007년 8월 야 구의 전설로 불리는 야구 선수 칼 립킨 주니어(Cal Ripken Jr)가 미 국무부 스포츠 특사(State Department Special American Envoy for Sports)로 임명된 사 실은 국무부 웹사이트는 물론이고 뉴스 미디어와 유튜브를 통해 대중에 게 알려졌다. 영어교육에 대한 보다 큰 강조는 젊은이라는 핵심적인 청 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며, “실천 외교(diplomacy of deeds)”의 홍보는 보건, 교육, 재난구호, 그리고 기타 영역에서 행정부의 훌륭한 성과을 부 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미 국무부 PCC는 공공외교와 공공업무 담당 차관보에 의해서 주도 된다. PCC는 테러리스트들의 이데올로기를 저지하는 미디어 메시지와 전략들을 개발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는 국무부 산하 대테러 커뮤니 케이션 센터(Counterterrorism Communication Center)와 함께 중앙집권적 계 선을 따라 조직화되어 있다. “부처 간 위기커뮤니케이션팀(An Interagency Crisis Communication Team)”은 munications Office),
백악관 커뮤니케이션실(the White House Com-
국가안보위원회 고위급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대변인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senior communications director/spokesperson),
백악
관 언론담당비서관(the White House press secretary), 미국무부의 공공외교 및 공보업무 담당(State Department Public Diplomacy and Public Affairs)과 국방 부의 공공업무(Defense Department Public Affairs) 관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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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간 위기 커뮤니케이션팀은 정부의 공식 성명을 조정하고, 두바이, 브뤼셀, 런던과 같은 각 지역 미디어 중심지의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 하고 전 세계의 여론을 파악하는 일을 주로 담당한다. 그리고 교류는 이 념적 전쟁과 국가안보 우선이라는 맥락에서 검토된다. 미국은 국제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해외에서 미 국의 정책에 대한 외국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보다 폭넓고 정교한 커뮤니케이션과 공공외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러한 투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정부의 자금지원 측면 에서 공공외교 역시 국방, 국토안보, 군사정보 등과 함께 국가 안보의 우선 순위로 다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공공외교 프로그램과 전 략적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에 대한 자금지원을 상당 규모로 지속적 으로 증대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 간 교류와 같은 중 요 프로그램을 위한 긴급 자금지원이 필요하다(PCC 2007,11).
오늘날의 대테러 전쟁이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 기 위한 전투의 양상을 보임에 따라 교류 프로그램은 다시 한번 국가 안 보 이니셔티브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그의 두 번째 임기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보다 훨씬 더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임 기 말에 있는 부시 대통령보다 쉽게 강압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교류를 증진시킬 수 있었다. 2007년 12월 중순에 공공외교 차관보에서 물러난 캐런 휴스가 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노력들은 공공 외교에 대한 지도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미국 정부를 방해하는 세력에 대 항하는 정도에 그쳤다. 따라서 공공외교 목적에 기여하는 국제교류의 미 래 전망은 정부 기관들 뿐만이 아니라 개인과 사적 기관(영리 그리고 비영 리 모두 포함)에도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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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사람들 간의 접촉은 사람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가 장 중요한 기회이며, 이를 통해 오늘날 하락하고 있는 미국의 이미지를 적어도 어느 정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 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국인들을 보게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해법은 없지만, 『연보』에 발표된 말리크(Malik 1961,140)의 다원주의적 세 계에 대한 관찰은 발표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며 그 의미가 크다. 국제문화교류는 첫째는 사람이 자신의 선함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가, 둘째는 타인의 선함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가, 셋째는 자신과 타인 의 선함에 기초하여 창의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겸손함과 우아함, 자 기 확신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 하는 세 가지 조건에 달려있다. 친구들 이여, 이는 모든 문제의 이면에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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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장 부에나 비스타 연대와 원조의 축 : 쿠바와 베네수엘라 공공외교 마이클 J. 부스타만테 Michael. J. Bustamante 줄리아 E. 스웨이그 Julia E. Sweig
새로운 반미 “연합(axis)”이 주는 센세이셔널한 호소력을 이용하는 데 혈안이 되 어 있는 국제언론은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정신적으로나 행동적인 면에서 떼려 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투영시키고 있다. 이러한 인 식은 해외에서 각자의 국가 이미지를 홍보하는 방식에서의 차이를 희석시키는 것은 물론 홍보의 성공에 있어서도 그 차이를 축소시킨다. 비록 쿠바와 베네수 엘라는 그들의 반미성향 및 세계관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같은 방식의 공공외교를 수행하고 있으나 쿠바 정권은 특히 희생양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켜 그들의 행동에 대한 국제적 정당성을 제고시키려 하고 있다. 쿠바는 다양한 정치적ㆍ외교적ㆍ경제적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문화적 상품을 활용하 는 데 매우 세련된 접근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목적들 가운데 대부분은 엄격 하게 볼 때 반제국주의 또는 반세계화 운동의 목적보다는 시장지향적인 목적에 기여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핵심어 : 쿠바, 베네수엘라, 공공외교, 미디어 외교, 해외 원조, 연대, 반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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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2005년 8월 30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멕시코만 연안 지역을 강타한 지 이틀 뒤,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Hugo Chávez)는 태풍 피해자들에게 식량과 물 그리고 오일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 를 따라 며칠 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역시 피해 복구작업을 위해 천 명 이상의 쿠바 의사와 의료품 지원 의사를 밝혔다(Rondon Espin 2005 ; Bachelet 2005a).
그러나 미국 관계당국은 이러한 도움의 손길을 환영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어떠한 제안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의 확언에 도 불구하고(Green 2005에서 인용), 백악관 공보비서 스콧 맥클렐런(Scott McClellan)은 특정한 국제 원조를 받을 것인가에 대한 정부의 결정에 다양한
정치적 사안들이 고려되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스콧 맥 클렐런은 “쿠바와 관련해 우리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전할 말은 단 하나 뿐이다. 그는 쿠바 국민들에게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McClellan 2005).
아마 많은 미국인들에게 맥클렐런의 공식적 발언이 매우 강경하게 들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쿠바와 라틴아메리카 시민들에게는 더 비정하 고 가혹하게 보였을 수도 있다.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는 미국사회에 존재 하는 계층간, 인종간, 그리고 사회 경제적 차이를 글로벌 미디어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게 했으며, 이로 인해 미국사회의 자유와 정의의 수준 역 시 국제사회의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플로리다주 연방 상원의원인 멜 마르티네즈(Mel Martinez)는 쿠바계 미국인으로서 카스트로 정권의 강 력한 반대자였지만, 하바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미 정부에 촉구했 다(Adams 2005). 태풍 피해자들은 고통속에 방치되고, 정부의 재난 대처 노력이 실패했음에도 미국은 쿠바의 원조를 수용하지 않았다. 미국 관료들은 베네수엘라의 제안에 대해서는 좀 더 실용적으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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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했다. 2005년 9월 8일 베네수엘라 주재 미국 대사인 윌리엄 브라운 필드(William Brownfield)는 미국이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Petróleos de Venezuela : PDVSA)와
이의 미국 자회사인 Citgo를 통해 지원
하기로 한 5백만 달러의 연료지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Bowman 2005).
그러나 당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미국 연방 정부의 늑
장 대응으로 인해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고 난 뒤였다(Sweig 2006, 78).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베스는 이동식 건강진료소와 여타 보급품을 지원 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무시한 미국의 관료들을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Cambell 2005),
미국 자본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미국의 저소득
층과의 유대를 확대시켜 나갔다. 태풍이 지나가고 몇 주 뒤 미국 멕시코 만 연안의 정유공장이 입은 태풍피해로 인해 미국 내 오일 가격이 폭등 했고 이때 차베스는 미국의 몇몇 도시에 난방용 기름을 할인된 가격으 로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미 국의 많은 의회 지도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쿠바와 베네수엘라 두 나라 모두 국내적으로 심각한 빈곤문제에 시 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미국의 태풍 피해자들을 위한 잠재적 후원자로 생각하고 그들을 돕고자 했다. 겉으로 보기에 이타적인 두 나라의 제안은 미 정부의 원조 거절과 대비되어 국제사회에서 미국을 부끄럽게 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쿠바와 베네수엘라 정부의 이타주의적 인 모습은 저절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었다(Tobar 2005 ; Ruiz 2005 ; Smith 2005).
넓은 의미에서 이 에피소드는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공동의 적에 대 항하기 위한 일환으로 연합전선을 표방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떻 게 공공외교를, 특히 그들의 지역 내에서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두 나라 는 자본주의, 자유무역, 신자유주의 그리고 오늘날 거대 미국의 침략을 계속해서 비난해오고 있다. 하바나와 카라카스에는 보통 쿠바와 베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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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의 깃발이 함께 걸려 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의 오랜 투병생활 동안 차베스가 그의 멘토 카스트로를 포옹하는 모습은 대중매체를 통 해 전 세계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는 카스트로의 신체적 노쇄화에도 불 구하고 두 나라의 유대감과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새로운 반미 축(Anti-U. S. axis)의
선정주의적인 면을 이용하는 데 혈안이 된 미국과 남미, 그리
고 다른 수많은 국제언론들은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정신적으로나 실제 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식을 더 널리 알렸다. 비록 쿠바와 베네수 엘라의 정치적 모델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지 만 세계 자본주의와 불평등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 많은 이들이 계속해 서 귀기울이고 있으며,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와 쿠바를 함께 하나의 좌익 축으로 보는 것은 그 두 나라가 자신의 이미지를 해외에 알리는 방식이나 목적 달성 정도에서 보이는 둘 사이의 상당한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다.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여러 가지 동일한 전략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쿠바 정권이 희생양의 역할 을 하는 데 더 성공적이었으며, 쿠바 정권은 이를 이용하여 정권의 국제 적 정당성까지 높였다. 이러한 쿠바의 성공은 쿠바가 제3세계와의 연대 구축과 세계무대에서 반미 저항의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데 더 오랜 경험 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쿠바가 처한 상황의 결 과이기도 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에 직면해 있는데, 2007년 8월 조그비(Zogby) 여론조사에 따르면 56%의 미국인들이 이에 반대하는 것 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봉쇄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은 유럽연합(the European Union),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의(the Ibero-American summits), 유
엔총회에서 매우 자주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1 ) 그 결과 쿠바의 국제 보 건 프로그램들이 현금이 부족한 쿠바 정권에 달러와 같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를 벌어주었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이 타적으로 비춰진다. 쿠바는 또한 다양한 정치적·외교적·경제적 목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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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달성하기 위한 문화상품 이용에 상당히 능숙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들 중 상당 부분은 엄밀하게 말해 반제국주의 또는 반세계화적 목적 달성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지향주의적 목적달성에 기여하기 위해 사용되 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쿠바를 함께 하나의 좌익 축으로 보는 것은 그 두 나 라가 자신의 이미지를 해외에 알리는 방식이나 목적의 달성 정도에 서 보이는 둘 사이의 상당한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공공외교에 대한 논의는 종종 그들의 특정한 이니셔티브가 연대를 위한 진정한 의사표현인지, 단순한 프로파간다 술 책인지에 대해 논쟁의 성격을 보인다. 위의 두 입장 모두 어느 정도 사실 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은 다음에 대한 검토를 하고자 한다. (1)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그들의 국내 및 국제 정치적 안건을 위해 국제 연대를 어떻 게 동원하는가? (2)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자신들의 영향력과 정당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국제원조 프로그램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3) 각 나라 는 영화나 음악과 같은 문화상품을 어떻게 국제무대에서 효율적으로 사 용하는가? 쿠바의 경우 지난 15년간의 사례에 주로 초점을 맞춰 분석할 것이며, 베네수엘라의 경우 차베스 대통령의 공공외교 전술만을 집중 분 석할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권위 있는 역사적 설명의 제공이 아니라 주된 경향과 패턴을 설명하는 데 있다. 공공외교라는 용어는 전통적으로 각국 정부가 외국 사람들이 그들 에 대해 갖는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원조, 문화 프로그램,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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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교류활동 등을 활용하는 방식을 지칭한다(Tuch 1990 ; Schneider 2005). 그 러나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공공외교에 관한 분석은 보 다 전통적인 형태의 국가 간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와 분리되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둘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상 업적・정치적 외교의 성격이 공공외교가 우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범 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성 공적인 공공외교란 단순히 정부가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외적 상황이나 외부 행위자들에게 정부가 반응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는가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는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아이디어, 문화, 예술, 그리고 기타 메시지를 창출하는 시민, 비정부기구, 기업들의 다양한 활 동들을 포함한다(Nye 2002, 2004 ; Ruggie 2004).
쿠바 연대 (Cuba Solidaria)
아르헨티나(Argentina)에서 안달루시아(Andalucía)에 이르기까지, 15 명 정도의 회원을 둔 소규모 모임에서 수백 명이 참석하는 거대한 회의 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은 쿠바 혁명 지지의 목 소리를 내고 있으며, 미국이 현재 쿠바에 취하고 있는 경제 봉쇄에 대 해 놀라울만큼 일관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이 찍혀 있 는 티셔츠들이 전 세계 도처에 깔려 있다. 2007년 퓨 국제 여론 조사(Pew Global Attitude Project)에
의하면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심지
어는 캐나다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를 위해 좋 은 일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Pew 2007a, 75-82). 쿠바 혁명의 이득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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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논란은 제쳐두고, 보건과 교육 분야에서 쿠바가 거둔 성과들이 상당 히 인상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2 ) 쿠바에 대한 전 세계적인 대중적 지지 가운데 어느 정도가 쿠바 정부의 구체적인 공공외교 노력에 대한 지지인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쿠바에 대한 상당한 대중적 지지 중 어느 정도까지 사실상 실효성이 떨어지고 인기가 없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세계 대중의 저항의 표시인가?3 ) 또한 이런 사람들이 나 집단이 갖는 비전이 정치적으로는 얼마나 중요한가? 쿠바의 정치 지도자들은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자신의 사회주의적· 반제국주의적 목표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좌익 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좌익 측 무장 반란을 직 접 지원하려 했던 쿠바정부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특히 서구에서 쿠 바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미주기구(the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와 같은 국제기구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미국의 개입에 의해 위협 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외교관계를 뛰어넘어 이념적 동맹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혁명적인 쿠바 정부의 정당성 을 유지하고, 자신에 대한 막대한 재정 후원자인 소련으로부터 외관상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도 중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쿠바에게 국가 대 국가 관계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많은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은 점차적으로 다른 국가와 직접적 외교관계를 재구축했으며, 쿠바 역시 수십 년간 자신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 동유럽권(the Eastern bloc)의 나라들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에 기 대왔다. 사실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들과 쿠바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국 제적 연대 증진 목적 아래 쿠바가 수행한 공공외교 정책 중 다수는 공산 당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과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제 6회 청년・학생 세계 축제(The 1957 6th 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 이 행사는 이후에 1978년 하바나에서 개최되었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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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소련의 공공외교 정책
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기가 있었던 서벌턴(Sulbatan) 운동은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양극 대립구도와 명목상 직접 관련이 없는 운동이었 기 때문에 쿠바 혁명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 간의 지속적인 연 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쿠바는 바 르샤뱌 조약의 회원이 아니었으며, 그 대신 비동맹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불
확실하고, 때때로 팽팽한 긴장감까지 유발했던 그 당시 서구의 외교환경 은 쿠바의 이러한 접근법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강화시킬 수 밖에 없었 다(Domínguez 1989, 111-83). 하바나의 관료들은 쿠바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만 한 여러 가지 계획을 수립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바로 OSPAAAL(the Organization for Solidarity with the Peoples of Asia, Africa, and Latin America : 아시 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사람들과의 연대기구)이다.
OSPAAAL은 세계적으
로 잘 알려진 정치 포스터를 이용한 홍보 캠페인과 Tricontinental이라는 잡지 등의 정보 전달 매체 등을 통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민족해 방운동에 대한 쿠바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일부 민족해방운동은 쿠바로 부터 경제적, 기술적, 혹은 군사적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각각의 무장투 쟁에 대한 쿠바의 지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식민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경제적 착취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세계 각지의 민중들이 그들이 마주 하고 있는 공통의 억압에 대항해 힘을 합칠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 이다. 연대라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다. OSPAAAL 역시 매년 “쿠바와 연대 의 날(Day of Solidarity with Cuba)”을 개최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 날에 는 전 세계적으로 쿠바를 지지하는 운동가들이 주권과 사회정의를 추구 하는 쿠바 혁명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시위를 벌였다(Cushing 2004, 67-99 ; Domínguez 1989, 268-72 ; Kunzle 1975).
또한 쿠바 관료들은 쿠바의 사회경제적 모델의 장점을 외국인들에 게 보여주는 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1960대 말, 하바나는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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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연대 단체들(international solidarity brigades)의 창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 데, 이 단체의 목적은 서방 정부에 의해 알려진 쿠바에 대한 그릇된 정 보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아직까지 이러한 11개 단체가 세계 민중들과 의 우정을 위한 쿠바연구소(the Cuban Institute for Friendship with Peoples)의 산하에 남아있으며, 여기에는 미국 출신의 잘 알려진 단체인 벤세레모스 (Venceremos Brigade)가
포함되어 있다. 이 연구소는 아미스투르(Amistur)라
는 여행사도 운영하고 있는데, 이 여행사는 쿠바를 찾은 방문객들이 쿠 바의 보건, 교육, 농업, 그리고 여성 인권과 관련된 최근 성과를 견학할 수 있도록 여행계획을 세우고 준비한다(Domínguez 1989, 269 ; Cuban Institute for Friendship with Peoples n.d. ; Amistur n.d.).
이러한 노력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쿠바는 국제 미디어를 통해 그들 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역시 심혈을 기울였다. 1959년과 1961년 사이에 아직 신생 정부였던 쿠바 혁명 정부는 프렌사 라티나(Prensa Latina, 쿠바 국 영통신사)와
라디오 하바나 쿠바(Habana Cuba)를 설립했는데, 이들은 미국
의 소리(Voice of America) 또는 라디오 모스크바(Radio Moscow)와 비록 그 영향력은 다르지만 설립 취지와 목적은 유사한 언론매체였다. 오늘날 프 렌사 라티나는 세계 총 22개국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으며, 국제방송 을 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국을 보유하고 있고, 쿠바의 반제국주의 세계 관을 홍보할 수 있는 웹사이트도 가지고 있다(Prensa Latina n.d.). 마찬가 지로 인터넷의 출현은 쿠바 온라인 신문인 그란마(Granma)를 비롯해 쿠 바의 다른 출판물들이 국제적으로 폭넓은 독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남미 내의 다른 대안 언론 매체들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 었다.4 ) 주로 이런 매체들을 통해서 쿠바는 쿠바 정부의 장점인 보편 의 료 서비스와 교육 시스템의 성공을 세상에 알린다. 이와 유사하게 쿠바 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출판사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예로 호주에 본사를 둔 Ocean Press가 있으며, 이는 쿠바에 유일하게 사무실을 두고 있는 외국 출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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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을 이끈 과거와 현재 지도자들의 정치적 견해를 외국의 대중들 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그러나 쿠바 정부의 공공외교 전략에 있어 위에 언급된 언론매체나 정치적 단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는 미국의 쿠바 경제봉쇄 그 자체 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쿠바 정권 관계자들에 의해 늘 되풀이된 피해자 쿠바의 이미지와 이야기는 신뢰성을 잃었을 것이다. 실제로 쿠바는 지금 까지 전 세계로부터 과도할 정도의 동정과 이해를 받아온 것이 사실인 데, 이는 쿠바의 정치·경제적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라 쿠바 정권의 안 정을 위태롭게 하는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는 쿠바의 노력 때문이었다. 미국 간섭주의 정책의 긴 역사를 가진 남반구에서 미국에 대한 저항은 본질적인 정치적 가치를 가질 수 밖에 없다(McPherson 2003 ; Sweig 2006, 2-17).
수년간 계속된 미국의 피델 카스트로 실각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
델 카스트로가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점은, 비록 쿠바 정부가 표현의 자 유를 비롯한 여타 정치적 권리들에 대한 기본적인 국제규범을 지키지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주와 전 세계의 많은 시민들에게 크게 존경할 만 한 것으로 보여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실제적인 혁명의 본보기로서 쿠바 의 역할은 반미저항세력으로서 쿠바가 갖는 상징적 중요성으로 점차적 으로 대체되었다(Norris 2006).5 ) 소련의 붕괴, 연이은 쿠바의 갑작스런 경 제적 몰락(1989과 1993년 사이에 쿠바의 GDP는 35%나 떨어졌다 ; Pérez Villanueva 2004, 49), 점차 강화되는 미국의 경제봉쇄(1992년과 1996년은 물론이고 부시 대 통령 정부 때에도 수차례에 걸친 경제봉쇄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해내는 쿠바 정부의 능력은 미국의 공격을 견디는 쿠바의 저항력에 대한 신화화를 더욱 강화시켰을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과 동유 럽 공산권 국가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바와 같은 약자(underdog)의 지위를 결코 향유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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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냉전의 여파로 인한 경제 침체의 압박 속에서 세계 시장과 상당한 정도의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가 지나면서 워싱턴 컨센서스의 불평등성, 불공정성, 그리고 불합리함에 대해 비판하 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바는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더 많은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서 반세계화 운동에 주목했다. 쿠바의 지도자들은 쿠바를 외국투자에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외국 관광회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지속가능한 개 발(sustainable development)”과 “생물학적 다양성(biodiversity)”의 언어도 포 용했다(Medioambiente.cu n.d. ; Pérez Roque 2002). 그들은 또한 멕시코의 자 파티스타(Zapatistas )나 볼리비아의 코칼레로스(cocaleros )와 같은 발생 초 기의 정치운동에 대해 연대감을 표명했으며,6 )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자 유무역협정들을 비난하는 역내 행위자들과 한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Harris 2003). 이러한 맥락에서 쿠바의 교육과 의료 프로그램은 세계의 보
편적인 문제들을 민중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쿠바의 헌신의 상징이자 증 거로서 그 중요성이 점차 커졌다. 이로 인해 연대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고, 쿠바의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새로운 동조의 물결을 일으켰다(Erikson 2004).
쿠바 정부의 공공외교 전략에 있어 위에 언급된 언론매체나 정치 적 단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소는 미국의 쿠바 경제봉쇄 그 자체 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쿠바 정권 관계자들에 의해 늘 되풀이된 피 해자 쿠바의 이미지와 이야기는 신뢰성을 잃었을 것이다. 실제로 쿠 바는 지금까지 전 세계로부터 과도할 정도의 동정과 이해를 받아온 것이 사실인데, 이는 쿠바의 정치·경제적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라 쿠바 정권의 안정을 위태롭게 하는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는 쿠바의 노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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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사태 이후 부시 행정부의 국제 반테러리즘 운동은 쿠바 가 해외 대중들에게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했다. 주로 마이애미를 본거지를 둔 피델 카스트로 정부 반대자들은 정부 구성원들을 오랫동안 위협해왔으며, 심지어는 수차례에 걸쳐 쿠바 시민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가장 잘 알려진 테러는 1976년에 발생한 쿠 바항공(Cubana Airlines) 비행기 폭파사건이었고,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는 당시 전직 CIA 요원이었던 루이스 포사다 카릴레스(Luis Posada Carriles) 였다. 포사다는 계속해서 장기간의 투옥이나 체포를 피해왔다. 1980년대 초 1976년 폭파사건에 대해 베네수엘라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중 그는 감옥을 탈출했다. 그리고 2000년 피델 카스트로 암살 기도로 파나마 법 원에 기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2004년에 당시 퇴임하는 미레야 모 스코소(Mireya Moscoso)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Bardach 2002, 171222 ; 2005).
따라서 포사다가 2005년 4월 미국에 다시 등장했을 때, 그는
오직 경미한 이민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만 죄값을 받았다. 이는 쿠바에 게 쿠바의 “테러와의 전쟁”을 홍보할 수 있는 완벽한 구실을 마련해 주었 다. 2년 이상의 감옥생활 후에 포사다는 이민 당국에 의해 불법적으로 심문을 받았다는 이유로 텍사스 주의 한 판사에 의해 석방되었다(이에 대 해 연방정부가 항소 중이다).
하바나에서는 포사다가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범죄들에 대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요구가 정부 언론매체와 국 제포럼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Cuba Contra El Terror n.d.). 이런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 바로 쿠바가 “라 레드 아비 스파(La Red Avispa)”라는 마이애미의 쿠바 스파이 단체 활동에 연루되어 1999년 투옥된 다섯 명에 대해 벌인 국제 석방 캠페인이다. 쿠바 당국은 그 다섯 명이 단지 추방자 조직들의 쿠바에 대한 테러공격 계획에 대한 정보를 캐려고 했을 뿐이었으며, 이런 테러행위들은 역사적으로 미국 당 국에 의해 보호받거나 사주된 것들이었다고 주장했다.7 ) 쿠바 정부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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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투옥에 대해 광범위한 국제 미디어 캠페인을 감행하면서 공격적으 로 대응했다. 투옥자의 아내들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해외 투 어에 나섰으며, 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Misión Contra el Terror [Mission against Terror]> (2004)는 쿠바 외교관과 독립 운동가들에 의해 널리 유포되었다. 또한 다섯 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위원회가 전 세계에 생겨 났고,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의회를 포함한 주요한 장소들에서 시위가 벌어졌다(National Committee to Free the Cuban Five n.d. ; Antiterroristas.cu n.d.). 쿠바의 “테러와의 전쟁”은 명백하게 정치적 술책이었지만 상당한 지 지를 얻어냈고, 심지어는 전통적인 외교 포럼에서도 구체적인 성과를 거 두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05년 10월 스페인의 살라만카에서 개최된 제15차 이베로-아메리칸 정상회의(Ibero-American Summit)에서 라틴 아메리 카 전역에서 온 국가수반들은 테러리즘에 대한 워싱턴의 “선별적인 접근 (selective approach)”에
대해 비난했고, 포사다의 범죄에 대해 재판을 요구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Giles 2005). 요컨대 연대란 개념에 대한 쿠바식 접근법은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쿠바의 공 공외교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주로 외부조건에 반응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을 또한 알 수 있었다.8 ) 하바나가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조건을 이용하여 기회로 만든 쿠바정부의 공공외교 접근법 은 미국의 쿠바 봉쇄조치 사례에서 잘 볼 수 있다. 쿠바 정권은 미국의 무역금수 조치에 반대하는 캠페인, 다큐멘터리, 문건 등을 활용해 미국 정책의 희생양 이미지와 이야기를 퍼뜨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Cuba vs. Bloqueo n.d.).
이와 비슷하게 포사다 사건과 쿠바 5인 석방사건
과 같은 과거의 분쟁 역시 9/11 테러 공격과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 쟁공포와 같은 일련의 외부 사건들에 의해 그 국제적 중요성과 현안과의 관련성을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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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 쿠바 공공외교의 정치적 영향력은 다소 제한적으로 보 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쿠바 5인은 여전히 감옥에 있고, 포사다 카릴은 감금상태에서 벗어났으며, 미국의 무역 금수 조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 나 쿠바에게 연대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 무역 금수 조치에 대한 반 대의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는 물론 심지어 미국 의회 내에서도 점점 커 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또한 유엔총회는 매년 거의 만장일치로 이 정책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Bachelet 2007b ; Mack 2005). 다른 성과들은 이보다 덜 직접적이지만 그렇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 니다. 미첼 바첼렛(Michelle Bachelet)과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실바(Luiz Inacío)
Lula da Silva)와 같은 소위 “실용 좌파(pragmatic left)”부터 더 전통
적 반미주의자인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에 이르기까 지 현재의 많은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이 피델 카스트로는 물론 여타 고위급 쿠바 정부 관료들과 오랜 유대관계를 이어왔다. 이는 쿠바가 군사 독재에 의해서 박해를 받은 다양한 이념적 신조들을 가진 좌파 운동가 들에게 쿠바가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제공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9 ) 그들의 정치적 신념이 진화하여 어떤 경우에는 경제정책, 인권, 그 리고 민주주의 원칙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쿠바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크게 다르기도 하지만, 여전히 쿠바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중도좌파의 많 은 정당원들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 결과 미국의 입장을 지 지한다고 보이는 정책의 경우에는 정치적 위험성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쿠바의 국제 원조 및 지원 노력(outreach efforts)이 비로소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많은 남아메리카 사람들 사이의 강한 결속력과 깊은 연대의식을 구축시킴으로써 쿠바의 리더십은 외국의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강경한 반 카 스트로 정책이 추진되지 못하도록 예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빈센테 폭스(Vicente Fox)가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시절 멕시코와 쿠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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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눈에 띄게 멀어졌는데, 이는 멕시코의 전 집권당이었던 제도혁명 당(the 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 PRI)의 구성원들을 격분시켰다. 왜 냐하면 제도혁명당원들은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고수했으며 하바나와 특 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에 대해 오랫동안 큰 자긍심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반발이 점점 거세지자 취임을 앞둔 펠리 페 칼데론(Felipe Calderón) 대통령은 새 정부의 신속한 양국 회담 재개 의 지를 밝혔다(Bachelet and Hall 2006). 쿠바가 오랜 기간에 걸쳐 구축해 온 타국과의 연대 의식은 피상적이나, 실제로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정치 적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공공외교에 대한 쿠바식 접근법은 쿠바의 중 앙집권적인 정부에게 정치적·이념적 보호막이 되지만 우고 차베스(Hugo Chavez)의 베네수엘라에게는 이런 보호막이 없었다.
볼리바리안 이상들(Bolivarian Ideals)
오랫동안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양당제 민주정치를 남미의 온건한 통 치 모델로서 존중하였다. 그러나 일약 권좌에 오른 우고 차베스는 이 시 스템의 약점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쿠바의 반미저항 본보기에 의해 고무된 지도자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당시 차 베스 정부가 하바나의 공공외교 성공을 본받으려고 노력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차베스는 과거 쿠바의 혁명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시대에 정권 을 장악하였다. 쿠바는 냉전종식 이후 달라진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쿠 바의 공식적 위치를 조정하도록 강요받았던 반면에 우고 차베스는 신자 유주의의 붕괴를 설득력 있게 밝히고, 오랜 세월 동안 지독한 불평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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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적인 부패에 환멸을 느낀 많은 가난한 베네수엘라인들에게 반 세계 화에 대한 호소를 확대해 나갔다. 또한 차베스는 카스트로와는 상당히 차별화된 수단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했다. 1992년의 군사 쿠데타의 실패 에도 불구하고 결국 차베스는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 뒤 에도 두 번 더 재선되었다. 믿을 만한 국제 정보원들은 세 번의 선거 모 두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뤄졌다고 보고 있다. 2007년 봄 야당 성향의 텔 레비전 방송국 RCTV에 대한 강제 철폐 조치와 같은 강한 제제를 비롯 해 방송매체는 상당히 제한을 받았지만, 베네수엘라의 신문들은 대체로 선거운동에 있어 자유로웠고 야당들도 공개적으로 활동을 지속할 수 있 었다.1 0 ) 차베스 대통령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였으며, 대 부분의 정부 기관들을 그의 개인적 영향력 아래 복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그의 선거 승리는 국제 사회에서 차베스 정부에게 정 당성의 기반이었다. 베네수엘라 정부 관료들은 다양한 매체에서 행정부 가 다른 모든 정부 기관에 대한 통합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이를 활용하였다(Gott 2001 ; Lapper 2006 ; Shifter 2007). 쿠바와 마찬가지로 베네수엘라 관료들 역시 해외 방문객들이나 청 중들에게 베네수엘라가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 모델의 장점들을 보여주 고자 노력했다.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익스체인지(Global Exchange)와 같은 비영리기구(NGOs)와의 제휴를 통해 베네수엘라는 협동
적 소유(cooperative ownership), 토지 재분배, 지역 통합 그리고 에너지 분 야에 베네수엘라식 새로운 접근법을 탐색해 보고자 하는 정치적 관광 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사절단 (misiones , 영어로는 missions)”에
의한 활동이다. 사절단은 국가의 전통적인
복지 시스템에 의해 충분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외곽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보건, 교육을 비롯 기타 복지 서비스들을 지원하는 공공 기관이다. 베네수엘라를 찾는 일반 방문객들이나 중요한 귀빈들의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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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은 볼리바리안 혁명(Bolivarian Revolution, 볼리바르는 19세기 베네수엘라의 장 군이요, 정치가이며, 스페인으로부터 남미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 다 : 역자 주)의
공동체주의적 정신을 직접 볼 수 있는 사절단을 방문하게
된다(Forero 2006b). 차베스 집권 동안에 국가 빈곤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 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개발학자들, 유명인사들(예를 들어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와 같은 저명한 가수)을
비롯하여 베네수엘라의
사절단을 방문한 사람들은 본국 사절단 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이유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불공평하게 소득이 배분되는 나라 중 하나인 베네수엘라에서 이 기관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이 고 가시적인 이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Weisbrot, Sandoval, and Osnick 2006).
베네수엘라 정부는 쿠바의 사례를 따라 2005년 설립된 볼리바리 안 통신사(Bolivarian News Agency)를 통해서 국제 미디어에게 자신의 시각 을 알리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는 베네수엘라 홍보사무소(the Venezuela Information Office)가
사회 프로그램의 성과 홍보를 담당, 차베스
정부의 공공외교 노력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http://www.rethinkvenezuela.com를 참조할 것).
또한 베네수엘라 관료들은 사절단의 성공을 널리
알리고 베네수엘라의 석유와 그 수익금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향상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주요 국제 정기간행물의 광고 캠페 인을 이용했다(Forero 2004).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잠재적으로 더 큰 영향을 갖는 것은 바로 2005년 설립된 텔레수르(Telesur)라는 텔레비전 네 트워크이다. 텔레수르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대상으로 한 매체로, CNN 을 비롯한 다른 서구의 주요 방송매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라틴아메리카의 뉴스와 문화 프로그램에 중점을 둔 텔레수르는 “현재 자 신을 아는 것 이상으로 세계의 다른 부분도 잘 아는 지역의 통합에 도 움이 되는 도약대로서의 역할을 하기를 희망하고 있다(Gould 2005). 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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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르는 베네수엘라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베네수엘라가 51%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아르헨티나, 쿠바, 우루과이, 그리고 볼리비아는 소 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로 인해 텔레수르는 차베스 정부의 프로파 간다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것이라는 의혹을 자연스럽게 받을 수 밖 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텔레수르는 상당한 정도의 독립성을 보여주 었다. 텔레수르의 좌파적 성향과 지역 지도자들의 비밀회의 영상을 방송 하라는 차베스의 요구를 운영진들이 받아들인 부적절한 사건에도 불구 하고 텔레수르는 대부분의 국가 소유의 프로파간다적인 뉴스 통신사들 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텔레수르의 독립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유지하면서 민중 차원의 친사회적 변화를 포용하는 것은 텔레수르가 베네수엘라 정부의 교묘한 공공외교 도구로서의 유용 성을 결정짓는 데 매우 중요할 것이다. 네트워크가 창설된 첫 해에 텔레 수르는 라틴아메리카의 17개 국가에서 방송되고 있었으며, 네트워크 경 영층은 미국의 히스패닉 시장에도 차츰 눈독을 들이고 있다(Pearson 2006 ; Sreeharsha 2005).
보다 더 정치적인 차원에서 베네수엘라는 차베스가 말한 주로 미 국으로부터 비롯되는 외부 위협들과 도발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이 에 대응하기 위해 볼리바리안 혁명과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전 세계의 시 민들을 동원하는 데 앞장서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는 1960년대 쿠바의 OSPAAAL과 아주 비슷한 정기적인 “볼리바리안 혁명과 연대를 위한 세 계 모임(World Gatherings in Solidarity with the Bolivarian Revolution)”을 조직했 고, 국제적인 “볼리바리안 서클(Bolivarian Circles)”과 “베네수엘라를 내버 려두라(Hands Off Venezuela)”라는 국제 네트워크(http://www.handsofvenezuela.org)와도 결속을 강화했다. 이 조직들은 모두 미국이 공모했다는 의혹
이 공공연했던 2002년 차베스의 면직을 위해 발생했던 쿠데타 이후에 생 겨났다. 쿠데타 발생 이후 차베스 정부는 또한 제3세계의 지속가능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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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증진과 세계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더 광범위한 목표를 가 진 다양한 행사에 직접 참가하거나 후원을 했다. 가장 주목할 한 것은 베네수엘라가 2006년 “다중심주의(polycentric)”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의
한 분과 회의를 유치한 것이었다. 세계사회포럼은 매년 다보스
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 대항하기 위해 2003년 창설되었다. 여기서 베네수엘라 관료들은 6만 명 이상의 회의 참가자들 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 기회로 삼았다. 예를 들어 카라카스의 주요 도 로에서 벌어진 “혁명적 민주주의 축제(festival of revolutionary democracy)”에 서는 차베스 정권의 건강, 교육, 여러 사회 프로그램을 부각시켰으며, 실 외 영상 스크린에서는 친 차베스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Frasquet 2006).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정부였고, 최 근 몇 년간 석유 가격과 수출 수익이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베네수엘라 의 경제 수준이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가 위협받 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신적인 지원과 지지가 필요하다는 호소는 국제 적으로 그다지 절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관료들은 미 국이 2002년 쿠데타를 공모하였다는 점을 이용해서 전 세계적으로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이 국무부 서반구 차관보(U.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Western Hemisphere Affairs)로 토마스 샤(Thomas A. Sha)를 임명한 이래로 미 관료들은 베네수엘라에 대해 약간 더 온건한 입
장을 취했다. 베네수엘라에게는 쿠바경제봉쇄와 같이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일관된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볼리바리안 연대 단체 들은 분열된 모습을 보였고, 그들의 메시지 또한 긴박하게 보이지 않았 다. 더구나 베네수엘라가 원유 수출의 50% 이상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 다는 사실은 차베스의 반미주의에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것이 차베스가 국제사회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차베스는 유명 연예인과 같은 대우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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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khatib 2006). 2007년 봄 부시 대통령이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했을 당 시 차베스는 미국 대통령의 등장에 반대하기 위한 대규모 옥외 집회를 주재했다(Cormier 2007). 차베스는 무모하게 행동하고 경솔하게 말하는 경 향이 있었는데, 언론에 공식 성명서를 발표할 때 일반적으로 매우 정확 한 표현을 사용하는 쿠바 지도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 정도가 심했다. 일 례로 2006년 유엔 총회에서 차베스는 그의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을 “악 마”(the devil)라고 지칭했는데, 이러한 극단적인 언사는 홍보 측면에서 볼 때 참사에 가까웠으며,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가 유엔 안보리에서 의석 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Hoge 2006). 또 한 차베스는 이웃 나라의 좌파 입후보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편애를 드러 냈는데, 이는 미국이 반 차베스 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는 자 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페루의 2006년 대선에서 좌 파 후보자 올란타 후말라(Ollanta Humala)에 대한 베네수엘라의 소란스런 지지로 인해 민족주의적 반발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알란 가르시아(Alan García)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Romero 2006).
차베스 정부는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 정부였고, 최근 몇 년간 석유 가격과 수출 수익이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베네수엘라의 경제 수준이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가 위협 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신적인 지원과 지지가 필요하다는 호소 는 국제적으로 그다지 절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와 같은 사건들로 인해 차베스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수그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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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퓨 국제 여론조사(Pew Global Attitudes Project)에 따르면, 대다수의 베네수엘라 국민들과 다수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베네수엘라 대통령 에 대해 신뢰를 표명했지만, 볼리비아 국민들의 59%, 브라질 국민들의 74%, 멕시코 국민들의 66%, 페루 국민들의 70%, 칠레 국민의 75%는 차 베스의 리더십에 대해 “별로” 혹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라 틴아메리카 대륙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차베스에 대한 신뢰도는 비슷 하게 낮았다. 비록 그가 프랑스(37%), 레바논(40%), 아이보리코스트(53%), 그리고 말리(50%)와 같은 나라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베스는 “자국 밖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디에 서도 별로 신뢰를 얻지 못했다”(Pew 2007b, 61, 64-65).1 1 ) 그러나 차베스의 ‘쿠바판 테러와의 전쟁’ 참여와 후원은 공공외교 관점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쿠바는 미국과 공식적으로 범죄자 인 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베스 정부는 포사다가 1976년 쿠바 항공기 폭파 혐의에 대해 다시 재판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로 송 환되어야 한다고 청원했다. 하지만 이 송환요청은 지금까지 거부되고 있 다. 미국 정부의 포사다 송환 건에 대한 무관심과 이민법 위반이라는 경 미한 혐의처분 결정은 베네수엘라의 도덕적 권위만을 높여주는 격이 되 어버렸다(Bachelet 2005b).1 2 ) 쿠바와 베네수엘라 관료들에게 단순히 공감이나 연대를 요구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제부터 우리는 양국이 국제원조를 통해 어떻게 개발도상국의 보다 나은 경제적, 사회적 미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국제원조 프로그램이 없다면 쿠바나 베네수엘라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 있어 도덕적인 이정표 역할을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피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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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의료 사절단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쿠바 역시 국제 지지를 얻기 위해 해외원조를 오랫동안 활용해왔다. 그러나 원조 그 자체가 공공외교의 자 원이 되는 것은 아니며, 제3세계 연대를 위한 인도주의적 사회 프로그램 의 일환으로서 원조가 지원·홍보·수용되는 특정한 방식이 공공외교 관 점에서 더 중요하다. 미국은 세계의 많은 지역과 국가에 물질적인 원조 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중 하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 은 종종 잘 홍보되지 않거나 효율성이 떨어졌다(Easterly 2002, 223-50 ; Hollander 2004, 16-23).
민간과 종교 재단들, 비정부기구들, 그리고 빌 & 멜린
다 게이츠 재단과 월드 비전과 같은 다른 인도주의적 기관들이 미국에 대한 신뢰도를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수는 있지만, 미국 외교정책의 다른 논란거리들 때문에 발생한 반미정서 극복에는 부족했다. 이는 특히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문제였다. 국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02년 이래로 32 개국 중 26개국에서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던 응답자의 비율 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Pew 2007b, 3). 장학금 및 여타 교육지원과 더불어 국제 의료 프로그램은 오늘날 쿠 바의 대외원조의 핵심적 요소이다. 이전에 실시되었던 쿠바의 많은 기술 지원 프로그램들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지만, 국제 의료활 동은 냉전종식 이후 지속된 경제위기 속에서도 크게 늘어났다. 1985년 에 약 2500명의 의료진들이 해외에 파견되었는데(Feinsilver 1989, 14) 오늘 날 그 숫자가 1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28,000명에서 40,000명 사이로 추 정되는 쿠바 의사, 간호사, 각종 의료 요원들이 전 세계적으로 70여 개 국에서 일하고 있다. 15,000 내지 20,000명 정도 되는 의료진이 베네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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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국내 의료 프로그램에서 일하며, 나머지는 의 료 서비스를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할 정도로 외지고 빈곤한 지역에 세 계 전역에 걸쳐 두루 분포되어 있다. 쿠바의 의료 봉사단은 의료 기술 뿐 만이 아니라 재난 대처 기술에 대해서도 잘 훈련받았다. 이는 최근 지진 으로 폐허가 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페루에서 그 진가가 발휘되었다 (Bachelet 2007a, Goodman 2007).
그리고 1999년에 설립된 하나바의 라틴아메리카 의대(Latin American School of Medicine)는
미주대륙 전역에서 온 1만 명 이상의 의대생들에게
수업료과 기숙사 면제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100여명 정도는 미국 학생들이다. 쿠바 전체에는 약 2만 내지 3만 명의 외국 학생 들이 유학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는 의학에 대한 쿠바식의 독특하고 정 치적인 의식을 가진 접근법으로 훈련받고 있다(MEDICC n.d.). 이에 더해 쿠바는 외국인들 역시 쿠바의 선진 의료 기술과 치료를 저렴한 비용으로 누릴 수 있도록 했다(Feinsilver 1989, 20 ; Morris 2005).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쿠바 정부의 이러한 광범위 한 노력들은 쿠바 정부의 국내 실패와 인권유린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 으로 돌리기 위한 포퓰리즘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다.1 3 ) 반면 쿠바 원조 수혜자들과 쿠바 정권 지지자들에게 오랜 기간 제3세계에 제공된 쿠바 의 의료 서비스는 쿠바 혁명의 국제주의와 개도국의 헐벗은 민중과의 연 대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쿠바의 해외 의료 봉사는 쿠바의 의 사들에게 있어 사명감을 가지고 자선을 베풀 수 있는 봉사의 기회인 동 시에 소수의 쿠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과 경험의 기회이다. 왜냐하면 외국에 파견된 의사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국내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을 수 있으며, 쿠바에서는 구할 수 없 는 물건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쿠바 정부 통계에 의하면, 이런 보 상 때문에 해외에 근무한 의사 중 2% 정도 만 다른 나라로 망명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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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Dudley 2006 ; Salud 2006). 여기에는 쿠바 의사들이 영원히 가족을 떠나기를 꺼려하는 것도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 했다.1 4 ) 분명 상징주의는 쿠바의 의료외교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자 동인 이다. 미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 출신 학생 100여 명이 하바나에서 무 료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다. 이들의 사례는 미국 의대의 천문학적인 학 비에 대해 논하는 국제 신문에 인용되어 선진국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 한 쿠바 정부의 비판에 힘을 실어준다(Jimenez 2005 ; Griffith 2006). 쿠바는 국내 보건분야의 성공을 홍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국제 의료사 업 역시 홍보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쿠바가 쿠바의 국내 의 료보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최근 사례로는 미국 애틀랜타에 본부를 둔 Medical Education
Cooperation with Cuba 란 단체가 쿠바 보건 당국과 제휴하여 만든 <살 루드(Salud )>(2006)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서아프리카의 감 비아(Gambia)와 같은 외지에서 일하는 쿠바 의사들의 일을 소개하면서 쿠바의 의료 국제주의 이면에 존재하는 철학이 세계 보건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마이클 무어의 2007년 작인 인기 다큐멘터리 <시코(Sicko)>는 9/11 때 부상당한 구조대원들이 현재 미 국의 의료 서비스와 보험체계로는 도저히 받기 어려운 치료를 받기 위해 하바나로 이송된 상황을 담고 있다. 이것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가 장 유명한 최근 사례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홍보물은 쿠바에서 제작 이 되었든 아니든 제작처를 막론하고 쿠바의 정치적·경제적 부족에 대 한 미국의 오래된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쿠바의 제 3세계 지원 프로그램을 지지하고 이에 찬사를 보내는 문건에서 쿠바는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경제적·사회적으로 피폐해진 나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히려 이와 같은 인식 때문에 쿠바가 해외나 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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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인적 자원이나 장비, 물자 등을 제공하는 것이 더욱 용기있는 행동 이자 진정한 희생으로 여겨졌다. 쿠바 의료진들이 현장에서 보여준 행동 또한 공공외교 수단으로서 그들의 성공에 기여하고 있다. 서구 선진국들의 구호활동과 비교했을 때 그 수나 재원 면에서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진으로 황폐해 진 파키스탄에서 쿠바 의사들은 노동자 거주구역에서 지내거나 텐트에 서 생활하며 검소한 생활을 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파키스탄 대중 들로부터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구의 구호 기관들은 모금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자신들의 운영비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Akhtar 2006). 사실 미국 원조 프로젝트들은 국내 계약자들에게 위임되어야 하고, 그 계약자들은 원조자금으로 미국 산 물자나 잉여농산물을 구입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 개발사업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집행되었다고 보기 어렵다(Berríos 2000, 35-53). Morales)가
이와 비슷한 현상이 볼리비아에서도 에보 모랄레스(Evo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일어났다. 미국은 볼리비아 양자 원조
의 최대 공여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장기적인 목표만을 중시 한 나머지 가시적이고 시장성 높은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Bridges 2006).
이러한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쿠바의 의료 사절단은 자신의 업무
를 수행함에 있어 공동체 중심의 접근을 하도록 훈련 받았기 때문에 전 세계의 빈민들에게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 람들의 마음과 공감을 효과적으로 얻는 데 탁월하다. 미국이 세계적으 로 원조와 복구작업에 훨씬 더 많은 자금을 제공하고 있을지는 모르지 만 쿠바는 그들이 투자한 돈에 비해 확실히 더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쿠바의 의료외교에 있어서 뛰어난 점은 바로 자선으로 포장 된 것들이 사실 순수한 차원에서의 자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쿠바 정부가 장학금을 지급하고 해외로 의사들을 보내는 데 필요한 비용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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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를 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몇몇 경우 구호 서비스에 대한 비용은 수혜국들이 부담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좋은 예는 베네수엘라인데, 차 베스 정부는 쿠바 의료진들의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저가로 석유를 지원 했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99년 이래 전국 병원에 쿠바 의사들 을 고용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직접 지불했다(Salud 2006 ; Schweimler 2001 ; Feinsilver 2006). 이러한 조건으로 해외에 파견된 쿠바 의사들에게 쿠바 정
부는 민간 의사보다 상당히 적은 금액을 지불했다. 이와 같은 사업의 재 정적인 측면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일부만이 쿠바 의사들에게 돌아가 는 것이 일반적이다. 쿠바에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치료, 쿠바 생명공학 기술 라이센싱과 수출, 그리고 해외 의료사절단 운영 등을 아우르는 쿠 바의 의료 서비스 수출은 최근 몇 년간 쿠바 경제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자리잡았으며, 몇몇 통계에 의하면 그 수익금이 관광수입에 버금가는 정 도에 달했다고 한다(Feinsilever 1989, 19 ; Morris 2005 ; Ernst & Young 2006).
쿠바의 의료 외교에 있어서 뛰어난 점은 바로 자선으로 포장된 것 들이 사실 순수한 차원에서의 자선은 아니라는 점이다..... 쿠바의 의료 서비스 수출은 최근 몇 년간 쿠바 경제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자리잡았으며, 몇몇 통계에 의하면 그 수익금이 관광수입에 버금가 는 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카스트로 정부의 해외 의료 프로그램들은 국제 주의, 상징 정치, 그리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업적 동기의 성공적인 결 합을 대변한다. 이런 요소들은 각기 쿠바가 국제적인 포럼에서 높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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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를 얻도록 돕는다.
석유외교와 그 너머 : 베네수엘라의 대외원조 활용
1999년 정권을 잡은 이래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다 양한 형태의 의료 지원을 시도하였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Operación Milagro(Operation Miracle, 기적의 작전)라는 프로그램으로 베네수엘라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만 주로 쿠바 인력으로 운영되었다. 이 프 로그램은 돈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환자들에게 무료 눈 수술을 제 공한다.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을 포함, 남미 전역에서 3만 명 이상의 환자들이 백내장을 비롯해 다양한 눈 관 련 수술을 받았다(Miami Herald Staff 2007). 또한 차베스 대통령은 쿠바를 따라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부터 학생들을 모집하여 공동체 차원의 의 사로 훈련시킬 수 있는 의대를 최근에 개설했다(ELAM n.d.). 최근 베네수엘라의 국제원조는 전반적으로 그 분야와 원조대상의 범위가 쿠바보다 더욱 넓어졌는데, 이는 차베스 대통령이 가용할 수 있 는 돈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석유가격이 전례 없이 급등하 면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정부 석유수입의 상당 부분을 다수의 국제원 조, 자금지원, 대출 그리고 보조금 프로그램 등에 투입했다. 예를 들어 차베스는 볼리비아에 150만 달러를 투자해 농촌지역 토착민들의 문맹퇴 치를 위한 교육방송을 할 수 있는 라디오 네트워크의 개설을 돕기로 약 속했다. 마찬가지로 자메이카의 경우에는 2억 7천 3백만 달러를 들여 간 선도로를 닦아주고, 스포츠 시설 단지와 시민회관(civic center)을 건설해 주기로 했다. 또한 차베스는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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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니아(Mauritania), 니제르(Niger)에는 가뭄 구호사업을 위해 3백만 달러 를 지원하기로 했다(Miami Herald 2006). 베네수엘라가 나눠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산은 석유인데, 차베 스 정권은 이 분야의 해외원조 프로그램을 가장 성공적으로 제도화시켰 다. 2005년 6월 카리브공동체(CARICOM)의 15개 회원국 중에서 12개국이 쿠바 및 도미니카 공화국과 더불어 페트로카리브(PetroCaribe)라는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 조약을 통해 참여국들은 베네수엘라의 석유에 대한 우선 변제권을 보장 받았다(Williams 2005). 베네수엘라가 제안한 또 다른 두 개 의 이니셔티브인 Petrosur(남미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그리고 브라 질을 묶는 기구)와
Petroandina(안데스 지역의 콜롬비아,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그
리고 에콰도르를 대상으로 하는 기구)
역시 유사한 금융지원을 제공하고 지역
내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서 더 강화된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 나 이들 중 어느 것도 페트로카리브만큼 제도적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는 데, 페트로카리브에서는 베네수엘라만이 유일하게 에너지 대량 생산국 으로서 실질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협력방식 역시 베 네수엘라에 의해 더 직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Arriagada 2006 ; The Economist 2005).
2006년 카라카스에 본부를 둔 경제연구센터(Center for Economic Research)는
차베스 정부 집권 이후 해외에 250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고
추정했고, 또 다른 통계는 그 액수를 160억 달러로 추정하고 있다(Forero 2006a).
AP통신에 따르면 차베스는 2007년 다양한 국제원조와 금융지원
에 88억 달러를 약속했는데, 그 대부분은 주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을 위한 것이었다(Pearson 2007a). 이러한 약속들이 모두 제대로 이행될 것 인지 그 여부가 불확실하고 금융지원은 이론상 다시 상환될 지원금이지 만 어떤 방식으로 측정해도 베네수엘라는 워싱턴보다 더 많은 직접 원 조를 라틴아메리카에 제공했다. 2007년 3월 부시 대통령은 2006년 라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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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해외 원조가 16억 달러에 이르렀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차베스가 이 지역에 지원한 석유 보조금만으로도 미국의 총 원 조액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미국 원조의 큰 부분이 일반적 인 개발원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안데스 지역의 마약퇴치를 위해 사용된 다.1 5 ) 혹자는 베네수엘라 원조 프로그램의 규모, 범위, 그리고 재정적인 혜 택 등을 고려할 때 이 프로그램이 쿠바의 의료봉사 활동이 가져오는 공 공외교적 이득을 능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명백 하지 않다. 규모가 그 자체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베네수엘라의 광범위한 외교정책 현안 속에 서 어떻게 인식되는가 하는 것이다. 차베스 정부의 국제 행동주의 중 눈 수술을 해주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주택자금을 대출해 주거나 재난구호 자금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측면은 수원국 내에서 베네수엘라의 이미지 와 평판 향상의 이득을 분명하게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베네 수엘라의 석유 이용과 같은 특정한 문제에 있어 공동체 관계 증진과 과 감하지만 그다지 현명하지 않은 상업 전략을 구분하는 것은 때때로 매 우 어려운 일이다. 베네수엘라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유가를 보조해 주는 것뿐만 아 니라 수많은 국제사회 파트너들과 에너지 및 비에너지 관련 교섭을 극적 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는 브라질과 2005년부터 정 유소 건설 및 근대화 작업을 비롯하여 베네수엘라 연안의 공동 석유탐 사를 위해 협력하고 있다(Wertheim 2005, 28). 베네수엘라의 관료들은 좌파 적인 차베스주의(Chavismo)의 협력자가 아닌 콜롬비아 정부와도 베네수엘 라의 아시아 석유 수출 증대를 목표로 양국을 잇는 송유관 건설을 추진 하고 있다(Marques 2004). 또한 베네수엘라는 중국, 이란과 에너지 협력의 범위를 확대시켰는데, 이러한 진전은 미국 내에서 큰 관심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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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2007년 여름 중단되었지만 차베스는 지난 몇 년간 여러 수많은 이웃 국가들과 협력하여 베네수엘라 이남으로 전 남미 대륙을 지나는 10,000킬로미터나 되는 천연가스 수송관을 건설하기 위 한 계획을 추진해 왔다(Lapper 2006, 14-18). 차베스는 에너지 이외의 분야 에도 재정 지원을 확대시켜 나갔고, 특히 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 정 부는 50억 달러 이상의 채권을 사들였다(Associated Press 2007 ; Barrionuevo 2007).
차베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련의 프로그램들은 실 현가능성이 낮고 베네수엘라 경제나 국민들에게 장기적인 이득을 가져 다 주지 못하는 정치적 투자라고 보고 있다. 반면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 러한 이니셔티브들을 연대의 정신 아래 지역의 독립적 발전의 기초를 다 지고 더 나아가 남아메리카의 경제적·사회적 통합을 강화하기 위한 투 쟁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Operación Milagro와 페트로카리브 같은 프 로젝트들 역시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베네수엘라의 광범 위한 노력들은 차베스 정부의 외교전략의 이념 측면 뿐만이 아니라 실용 측면 또한 잘 보여주는데 구체적으로 베네수엘라의 수입원을 다변화시키 려는 욕구, 미국의 석유구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시도, 그리고 이 지역의 주요한 경제적 행위자로서의 영향력 증대 등과 같은 것이다. 베네 수엘라는 국제 무역 활동범위가 넓고 정부가 금융자원을 외국에 공격적 으로 투입했는데(차베스는 석유수출국 기구에서 가격 인상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 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차베스를 제3세계의 혁명가라기보다는 파워
브로커로서 간주한다. 베네수엘라가 미국을 적대화하기 위해 이란, 시리 아와 맺은 외교 이니셔티브는 논란이 분분하며 이러한 인식을 더욱 강화 시키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쿠바는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 덕분에 스 스로를 미국의 골리앗에 대항하는 영원한 약자 다윗으로 쉽사리 묘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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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후한 원조 규모를 위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면 베네 수엘라의 리더십은 영향력을 돈으로 사려고 한다는 비난이나 지역 내 국 가간 상하관계를 구축하고 이에 의존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에게 더 큰 걱정거리는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프로그 램들이(공공외교적 측면에서 이같은 프로그램들은 잠재적 이득이 더 크다.) 차베스 주의자들의 힘에 의한 세계 정치의 이타주의적 확산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쿠바의 원조 프로그램도 유사한 비난을 받았다. 하 지만 쿠바는 미 제국의 희생양이라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자신의 확고한 기존 이미지에 쉽게 의존할 수 있으며, 또한 쿠바가 무역, 에너지, 상업적 문제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쿠바의 국제 원조 활동에 내재된 정치공작이 베네수엘라만큼 전략적이었음에도 불구 하고 훨씬 덜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차베 스의 수많은 원조 프로그램이 이뤄낸 긍정적인 공공외교 효과들을 무시 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베네수엘라의 공공외교 전략의 취약 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포퓰리즘적 관대함이 너무 지나칠 경우 굉 장히 선심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이는 미국이 해외 원조 프로그램 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종종 봉착하게 되는 문제이다.
쿠바의 원조 프로그램도 유사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쿠바는 미 제국의 희생양이라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자신의 확고한 기 존 이미지에 쉽게 의존할 수 있으며, 또한 쿠바가 무역, 에너지, 상 업적 문제들에 있어 그 중요성이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쿠바의 국 제원조 활동에 내재된 정치공작이 베네수엘라만큼 전략적이었음에 도 불구하고 훨씬 덜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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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취약성들은 차베스 본인이 직접 만든 것과 다름없다. 차베스는 외국 선거에서 공공연히 특정 후보자들을 지지하는 것 이외에도 종종 베네수엘라 정부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대외원조를 이용한 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차베스는 니카 라과의 2006년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산디니스타(Sandinista :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린 니카라과 민족해방전선을 지칭)가
통치하는 지역에 비료와 값
싼 석유를 제공했던 것이다. 차베스 정부는 미국의 베네수엘라 내정간섭 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를 해왔는데 이렇게 차베스 정부가 타국의 선거 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행동을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이를 위선적으 로 보았다(Wyss 2006). 반면에 쿠바의 원조 프로그램들은 국내 선거 정치 에 이처럼 직접적이고 공식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베네수엘라가 쿠바와 비교해서 확실하게 우세를 보이는 분야는 베네 수엘라의 미국 내 해외 원조 프로그램으로,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베 네수엘라는 미국 전역에 걸쳐 총 9개의 영사관을 가지고 있으며, 차베스 는 PDVSA(브라질의 최대 석유회사)의 계열사인 Citgo의 미국 내 지사에 중 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차베스와 Citgo는 2005 년 태풍 카트리나가 엄습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직 하원의원 조셉 케네 디(Joseph Kennedy)가 운영하는 비영리 단체인 “시민들의 에너지(Citizens’ Energy)”와
협력하여 동절기 미국의 가난한 가정들에게 저가에 난방유
를 제공했다. 2007년 한 해 동안 1억 갤런의 석유를 16개주의 40만 가 구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공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뉴 욕 및 보스톤을 포함한 미 주요 도시의 심장부에 살고 있는 많은 저소득 층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163개 원주민 부족들도 이 프로그램 의 혜택 대상자였다. 이와 같은 일화는 베네수엘라의 이니셔티브가 성공 적으로 인적 교류 포럼을 만들어내고, 계급 간의 연대감을 조성했으며, 수혜자들 일부에게 차베스 모델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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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준다.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들은 교류여행을 위해 카라카스로 모였는 데, 사실 이 여행은 차베스 정부의 업적 과시를 위한 의도로 계획되었다. 2007년 초 Citgo는 심지어 국영 텔레비전에 광고 캠페인까지 시작했는 데, 유가 보조를 받은 수혜자들이 Citgo와 베네수엘라 정부의 아량에 감 사를 표하는 내용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은 지역의 미국 하원 의원들인 찰스 랑겔(Charles Rangel, D-NY), 호세 소란토(Jose Serrano, D-NY), 윌리엄 델라헌트(William Delahunt, D-MA)등은 이 프로그램에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직도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차베스의 리더십을 불신하 고 있지만(Pew2007b, 64), 차베스의 너그러움이 불러일으킨 물질적이고 상 징적인 영향력들은 상당히 컸다. 한 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자기 국민들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해 외 원조를 요청하고 있는 모습 속에서 베네수엘라는 우리[미국] 시스템의 중요한 실패를 보여준다”(Featherstone 2007).
공공외교와 쿠바 문화의 정치
쿠바 역시 많은 문화진흥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활동들의 동기나 목적이 명백하게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냉전 종식 이후 쿠바의 예 술, 음악, 영화의 해외 홍보는 관광객 유치나 현금수입과 같은 국가의 또 다른 중요 목표 달성에 기여했다. 쿠바가 해외로 판매하거나 판촉한 문 화상품 대부분이 정부가 운영하는 문화기관들을 통해 유통된 것이었지 만 정치 행위자나 전통적 외교정책 목적들과의 연관성은 적은 것으로 보 였다(Fernandes 2006, 9-16). 국내 문화산업에 대한 이러한 국가 개입의 동 기는 그 자체가 정치적이지 않다. 유럽 전역의 국가 후원 영화 보조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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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영화 감독들이 할리우드의 엄청난 경제적·문화적 힘에 맞설 수 있도록 돕고 있다(Cowen 2002, 73-82). 그러나 쿠바의 문화 당국은 쿠바 혁 명의 초기 단계부터 예술가들이 전달하는 이야기나 메시지들의 형태에 대해 엄중하게 검열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화가, 영화 제작자, 음악 가 모두 무엇이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지 그 범위를 매우 잘 알고 있다 16)
(Aguirre 2002 ; Fernandes 2006, 47-51).
계속되는 검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쿠바 정부와 예술계의 관계는 엄격하게 위계적이지는 않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이 다루는 주제와 그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들은 쿠바 국내 정치의 다른 영역과 비교해 볼 때 유연성을 가진 것들이었다. 냉전종식 이후 쿠바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국내 문화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해외 파트너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쿠바는 자연스럽게 국제시장의 상업적 요구 에 더 많이 노출되게 되었다. 관광산업이 쿠바 경제의 전략적 부문으로 재탄생하면서 과거 문화분야의 관료들이 탐탁지 않게 여기던 주제들도 새롭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세계화된 경제 속 문화적 담론의 흐름과 어떻 게 쿠바 정부가 쿠바 문화의 확산에 영향을 미치고, 이익을 얻을 수 있 을지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할 것이다. 쿠바 문화 당국은 제작될 예술이 나 음악의 형태를 단순히 통제하기보다는 정부의 목표에 부합되도록 민 중의 문화트렌드를 재계획하거나 이에 적응해야 한다(Fernandes 206, 33-41 ; Moore 2006, 251-65).
쿠바 정부의 공공외교 목적 달성에 기여한 주목할 만한 초기 문화 운동 가운데 하나가 바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 쿠바의 저항적 노래운동)라는
음악 스타일이다. 서반구 전체에 걸쳐
서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이라는 저항가요의 위세가 점점 높아지 는 것을 목도하면서 쿠바 당국은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음 악이 국내외의 청중들을 단합시키는 데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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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인식하게 되었다. 언더그라운드 출신으로 정부의 의심을 받아온 파블 로 밀라네스(Pable Milanés)와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íguez)와 같은 예 술가들은 결국 정부 기관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들은 체 게바라를 비롯 하여 다른 뛰어난 혁명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쿠바 혁명 을 이끈 인도주의적이고 이타적인 정신과 동일시되었다.1 7 ) 그들의 노력을 후원하기 위해 가장 잘 알려진 쿠바의 출판사 겸 문화사인 “Casa de las Americas”는 “the Centro de la Canción Proesta(Center for Protest Song)”라 는 저항가요 센터를 설립했다(Fairly 1984 ; Moore 2006, 135-69). 리나 벤마요 르(Rina Benmayor 1981, 11)가 말했듯이 가사가 명백하게 정치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에 속하는 가수들은 종종 “외국 청 중들에게 혁명의 살아있는 상징으로 비춰졌고, 그들의 음악은 혁명의 역 사, 투쟁, 사랑, 문제, 꿈에 대한 문서로 들렸다.” 오늘날까지 밀라네스와 로드리게스는 모두 세계적인 예술성과 막강한 시장성은 물론 쿠바 내 정 치적 영향력까지 지닌 중요한 문화적 인물로 남아 있다.1 8 ) 영화는 쿠바가 괄목할 만한 국제적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분야이 다. 정치에서의 혁명은 문화분야에서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자극 받은 피델 카스트로 정부는 정권을 잡은 지 83일 만에 쿠바 영화예술 산업연구소(the Cuban Institute of Cinematic Arts and Industry, ICAIC)를 설립했 다. ICAIC가 지원한 작품은 놀라울 정도의 정교함과 독립성을 과시했다. 특히 유명한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Tomas Gutiérrez Alea) 감독이 제작 한 영화는 쿠바 혁명과 그 발전과정을 단순하게 승리자의 모습으로 묘 사한 것 이상이었다. 일부 쿠바 관료들은 쿠바 혁명이 쿠바 사회에 가져 온 급속한 변화를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는 한 젊은이를 미묘하게 묘사한 작품인 <저개발의 기억(Memorias del Subdesarollo / Memories of Underdevelopment)>(1968)이나
혁명이 낳은 비효율적인 관료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
을 담고 있는 <어느 관료의 죽음(La Muerte de un Burócrata / Death of a 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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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ucrat>(1966)과 같은 작품들을 불편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다른 동구권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사실주의와 비교했을 때 이러한 쿠바의 영 화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성은 비록 쿠바 내 정치범 억압에 대한 숱 한 보도들이 넘쳐났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활력 있고, 자극적이며, 지 적인 창조 과업으로 보일 수 있도록 기여했다(Schroeder 2002). 냉전종식 이후 ICAIC는 국제적 배급사나 외국 감독들과 파트너를 맺어야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 쿠바 영화는 여전히 풍부한 사회적 콘텐츠를 담고 있으며 시장성도 충족시킬 수 있는 이야기 를 포함하고 있다. 쿠바는 최근 각광받는 여행지로서 다시 부상했는데, 그 위상에 맞게 음악과 춤, 섹스, 검은 피부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종종 쿠바가 지지하는 정치적 담 론을 강화하는 이야기와 연계되어 있다. 예를 들어 2005년 스파니아드 베니토 잠브라노(Spaniard Benito Zambrano)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겸한 <하바나 블루스(Havana Blues)>
라는 영화는 스페인 회사와 공동제작해서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상영되었지만 쿠바 내에서만 촬영되었으며, ICAIS의 전적인 투자로 유명한 쿠바 배우들이 출연했다.1 9 ) 이 영화는 하바나의 가난에 좌절하고 록 뮤지션으로서 세계적인 성공을 결심하는 루이(Ruy)와 티토(Tito)라는 두 명의 절친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희망했던 대로 루이와 티토는 외국 음반사로부터 계약 제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계약조건 중 에는 더 큰 홍보효과와 상업성을 위해 그들이 반정부적 망명자들로 해 외에서 홍보될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는 “훌륭하게 잘 만들 것인가” 와 “잘 팔리도록 만들 것인가” 사이의 본질적인 딜레마가 글로벌 상업주 의와 애국주의 사이의 선택으로 변형된 것이었다. 루이는 결국에 자신의 조국을 택하고 쿠바에 남기로 결정한다. 이 영화는 쿠바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해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영화 속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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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 뛰는 리듬, 성적으로 자극적인 춤, 그리고 쿠바 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묘사 등은 쿠바의 이국적인 매력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쿠바를 관 광객의 소비 상품으로 그려낸다. 물론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쿠바의 공 공외교 이익에 기여한다. 결국 쿠바는 루이가 포기할 수 없는 서민들의 이상인 동시에 외국 사람들이 도피를 위해 방문해야 할 섬인 것이다(Del Pozo 2005).
다른 동시대의 쿠바의 영화들도 이와 유사한 이중성을 갖는다. 예를 들면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인생은 휙 하고 지나가는 것(La Vida Es Silbar/Life is to Whistle)>(1998)이라는
영화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쿠바에
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냉전 후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에서 느끼게 되는 소외감을 다루고 있다. 결국 이 영화에 등 장한 다양한 인물들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쿠바의 미래에 대한 희망 을 회복한다. 아프리카계 쿠바인은 쿠바의 “다름”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국제 시장에서 관객들에게 높은 상품성을 가지는 요소인데, 이 영화 역 시 아프리카계 쿠바인의 정신적인 측면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Fernandes 2006, 61-71).
쿠바 음악의 최신 동향들 또한 이와 유사한 모순과 미묘함을 많이 가지고 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1997)은 영국의 음반제작자인 리 쿠더(Ry Cooder)가 쿠바 혁명 이후 사라진 아프리카 계통의 쿠바 전통음 악을 부활시키기 위해 만든 5인조 밴드이다. 이 밴드는 1990년대 전 세계 에 수백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고, 그래미상의 영예까지 거머쥐었으며 수 많은 후속 앨범들이 제작될 정도였다. 밴드의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가 지고 있는 정부 소유의 Ediotra Musical de Cuba 출판사는 해외 음반매 출을 통해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정부는 이 프로젝트가 활성화 시킨 관광산업으로 더 많은 수익을 얻었다. 부에나 비스타의 엄청난 성 공은 음반에서 영화로 이어졌다.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이 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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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은 쿠바를 “1950년대부 터 온전히 잘 보전된 곳으로 향수를 자극하는 판타지(a nostalgic fantasy)” 로 묘사하고 있다(Fernandes 2006, 94). 여행객들에게 친숙한 구 하바나의 오비스뽀 거리(Obispo Street)에 있는 카페에서 소규모 밴드들이 부에나 비 스타의 유명한 노래들을 연주하는 것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 있어 국제성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 밴드가 쿠바에서 처 음 공연을 가진 것은 음반 출간 후 무려 4년이나 지난 2000년이었다(New York Times 2000 ; Neustadt 2002).
부에나 비스타가 이러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던 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쿠바의 랩뮤직 역시 부상했다. 수자타 페르난데스(Sujatha Fernandes)의 『쿠바여 자신을 표현하라!(Cuba Represent! )』(2006)라는 저서에 의
하면 쿠바의 래퍼들은 일반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상업적 래 퍼들로 현재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오리샤스(Orishas)라는 그룹(구성 원들은 현재 유럽에 거주하고 있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쿠바를 춤과, 럼주,
담배, 섹스로 가득 찬 이국적인 땅이자 관광객들을 위한 이상적인 환락 의 도피처로 묘사하는 반면 명백하게 정치적인 주제들은 회피하는 경향 을 보인다.2 0 ) 다른 하나는 아노니모 콘세호(Anónimo Consejo)와 옵세시온 (Obsesión)
등과 같은 정치화된 그룹들이다. 이들은 민중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미국, 물질주의, 세계화 같은 주제에 대한 쿠바 정부의 비판을 노래한다. 이러한 비상업적 그룹들 중 다수는 국내 이슈 를 다루기도 한다. 이들은 인종문제를 대담하게 공론화시키기도 하고, 쿠 바가 점차 세계 경제로 편입되면서 불거지는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쿠바 지도자들이 연루되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가 자세하게 서술한 바와 같이 쿠바의 문화기관들은 이런 비 판을 적정한 수준에서 효과적으로 수용 및 봉쇄해왔다.2 1 ) (pp 85-134). 쿠바 정부는 특정 문화현상의 확산으로 확실히 국제적으로 이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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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다. 쿠바의 문화진흥 활동의 일부는 소련의 사례를 직접적으로 모방 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소련과 쿠바는 각자 국립 발레단을 해외에 집중 적으로 홍보했고, 쿠바는 아직까지도 이것을 지속하고 있다. 쿠바는 과 거에도 현재에도 공산주의 국가 중 가장 독특한 나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보다 대중적인 예술의 형태를 성공적으로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 다(Nye 2004, 74 ; Gould-Davies 2003). 그러나 쿠바의 문화정치를 공공외교로 분석하기에는 여러가지 독특한 어려움이 있다. 쿠바 정부기관이 문화정 책, 경제정책, 외교정책을 어떻게, 어느 정도 균형 있게 조정하는지 불분 명하기 때문이다. 여러 정부 부처들이 쿠바 공산당의 중앙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지만 문화 당국이 그들의 예술정책을 평가하는 데 이용했던 기 준에 암묵적인 이해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반면 쿠바 정부가 모든 측 면에서 높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특히 국제시장의 요구 에 직면하거나 예술가들이 작품의 주제와 관련된 이슈들을 다루는 속도 가 점점 빨라진 최근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임에도 의도적인 조작 이나 운 아니면 양쪽 모두로 쿠바는 정부의 평판 제고와 주된 소득원 유 지라는 두 가지 상충하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조정, 달성해왔다. 그리고 쿠바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휙 하고 지나가는 것(La Vida es Silbar)> 같은 영화나 “Obsesión”의 음악은 쿠바 혁명에 대한 이상이 끊임없이 진화하며 결코 완전하게 부적절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 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면서 쿠바의 힘을 강화시켰다.
베네수엘라의 국가 문화부흥
쿠바와 비교했을 때 베네수엘라는 공공외교 목적 달성을 위해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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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화를 해외로 홍보하는 데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60년대 의 쿠바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차베스 정부는 그들의 국민 음악 스타일을 새롭게 평가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 법 규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의 반은 베네수엘라 음악이어야 한다고 규 정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수도 카라카스의 젊은이들이 별로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은 전통 음악들도 포함된다. 문화부는 박물관 및 Misión Cultura라는 문화재단(앞서 언급된 misiones 네트워크의 일부)과 협력하여 국내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거나 전시할 기회를 많이 부여하려 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의 결과, 사이먼 디아즈(Simon Diaz)나 안 셀모 로페즈(Anselmo López)와 같은 베네수엘라의 민속 음악가들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Forero 2005). 베네수엘라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전국 네 트워크는 32년 전에 설립되었으며, 오늘날 차베스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 원을 받음으로써 국제적인 공연들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국제적인 호 평을 얻고 있다(The Economist 2007). 베네수엘라 정부는 쿠바의 사례를 모 방해서 사회적으로 비판의식을 가진 랩뮤직이나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환영받는 포럼을 설립하기 위해 많은 재원을 투입했다(Brosnan 2006). 그 렇지만 그 어떤 인물이나 문화현상도 쿠바의 Nueva Trova 음악가들이 쿠바 혁명의 개인 사절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국제적인 볼리바르 혁명과 결부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베네수엘라는 점증하는 국내 영화생산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쿠바의 ICAIC와 유사한 기구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화마을 (Cinema Village)”로
알려진 4,200만 불짜리 프로젝트는 “사회적 임파워먼
트(권능부여), 라틴 역사, 베네수엘라적 가치 등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는 영화를 연간 최대 19편 정도 제작하고자 한다. 또한 늘 그렇듯이 이 프 로젝트 역시 차베스 정부의 의도된 또 다른 프로파간다 수단이라는 비 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프로젝트 조직자들은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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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내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목적 자체는 숭고하다고 강변하고 있다(Llana 2007). 그러나 이러한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초기 단계에 있으며, 국제무대 에서보다는 베네수엘라의 국내 문화정치에서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 고 있다. 베네수엘라 영화 가운데 쿠바 영화 수준의 국제적 인기를 누리 거나 베네수엘라 정부의 공공외교 이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경우 는 드물다. 관객들뿐만 아니라 비평가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은 최 근의 성공사례는 2004년에 제작된 <푼토와 라야(Punto y Raya )>라는 영화 로, 이는 베네수엘라의 정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함축하고 있다. 이 영 화는 콜롬비아 군인과 베네수엘라 군인이 양국 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 속에서 예상 외의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이 이야기 를 통해 “관용의 부족, 권력욕, 소통의 부족 등으로 인해 갈등이 만연한 세계 속에서” 연대의 중요성, 즉 볼리바리안 혁명 지지자들이 혁명을 통 해 구현하려는 인도주의적 가치를 진작시키고자 한다(Press Book n,d., 4). 동시에 이 영화에서 공격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변국들과의 끊 임없는 갈등과 긴장을 야기하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공개적 비난과 부분 적으로 연관성이 있다. 반면 2007 아카데미상 최우수 외국 영화의 후보 작이었던 <마로아(Maroa)>(2006)란 영화는 베네수엘라 정부가 후원한 음 악프로그램이 카라카스 빈민가 출신의 가난한 소녀의 삶에 미친 영향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정치적 함축성은 소녀 개인의 이야기 보다 훨씬 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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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성공, 실패, 그리고 소프트파워의 추구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정부는 이념적 지향점과 목적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지만 공공외교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양국이 서로 다르다. 차베 스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성향은 그의 파워브로커로서의 평판과 과시적 인 시혜와 함께 베네수엘라의 공공외교는 사람들의 갈채를 받기 위한 수 단에 지나지 않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들 양국에 대한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은 공공외교의 성공이 언제나 투입한 재원의 양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쿠바의 야망은 매우 소박해 보여 진정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이것은 아이러니한 결과다. 결국 우리는 국제 여론이 어려움에도 선거정치와 자유시장에 답하려는 국가 보다 일당독재국의 국제 홍보노력에 더 비판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본 논문에서 지적하듯이 양국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국제 사회의 신뢰를 상실한 미국의 경제봉쇄에 대항함으로써 쿠바가 지지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반면 베네수엘라는 미국과 지속적인 석유 거래뿐 아니라 선진국과의 상업적 연계를 강화하면서 이들과의 교 류에 크게 의존했다.2 2 ) 그 결과 차베스 정부의 미국에 대한 반대는 뿌 리가 얕고, 항구적이지 않으며, 진정한 혁명을 위한 희생이 아닌 그럴듯 해 보이기 위한 명목상 희생인 것처럼 보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역 사도 쿠바에게 유리했는데, 쿠바 혁명은 이미 국제적으로 확실한 신화적 위상을 세운 반면에 베네수엘라의 경우 차베스의 오랜 전통은 아직 그렇 지 못하기 때문이다. 쿠바의 원조와 여타 대외 지원 프로그램의 핵심은 반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쿠바의 공공외교 노력의 목표와 범위는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지정학적으로 큰 영향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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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새롭게 떠오르는 나라로 베네수엘라의 의도와 동기는 매우 불순하 게 비춰지고 있다. 우리가 공공외교를 세계무대에서 상징적 자본의 형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베네수엘라와 쿠바 모두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 었다. 그러나 쿠바는 상징적 자본의 축적 외에도 공공외교가 상당량의 물적 자본(material capital)을 얻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 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쿠바의 국제 의료 프로그램들은 상당한 국 가 수입원이 되고 있으며, 쿠바의 영향력 있고 광범위한 문화적 확산은 쿠바 관광의 잠재성을 증대시키는 이야기들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미국 에 대한 쿠바의 공공연한 반항은 쿠바가 관광지로서의 유명세를 얻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정치 관광객들이 베네수엘라를 방문할 수는 있지만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베네수엘라의 재정증대와 연관 성이 없다. 공무원들은 종종 공공외교를 조셉 나이가 정의한 바와 같이 “소프 트파워”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제시하는데, 여기서 소프트파워는 강제나 유인 제공보다는 매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능력 을 일컫는다(Nye 2005, x). 나이의 연구는 대체적으로 미국 국력의 대외적 투영에 초점을 맞추지만 쿠바는 다른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이 개념의 타당성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특히 소련으로부터 보조금이 끊긴 이 후에는 더욱 그러했지만, 쿠바의 보잘 것 없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쿠바가 이루어낸 최근의 외교적 성공은 전적으로 쿠바의 소프트파워 덕 분이라 할 수 있다. 쿠바의 소프트파워는 쿠바의 문화·사회적 성과, 혁 명적 신화에 대한 공감을 형성해내는 다양한 담론들의 투영과 점진적이 고 지속적인 국가 브랜딩에 그 성공의 요소가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쿠 바 관료들은 쿠바의 교환 프로그램이나 인도주의적 원조 노력 혹은 문 화적 활동들이 세계무대에서 어떤 종류의 힘을 축적하기 위해 만들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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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의견에 반대할 것이다. 이는 쿠바가 조심스럽게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쿠바의 피해자 이미지, 즉 쿠바 정권의 공적 정체성을 훼손할 것이다. 그러나 쿠바 지도자들은 공공외교가 국제적 정당성과 영향력의 근본적 인 원천인 동시에 국내 정권 유지에도 중요하다는 점을 잘 인지하고 있 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해외 원조 프로그램들은 나이의 이론 가운데 가장 통찰력이 있는 부분 중 하나인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 간의 구분 이 분명치 않다는 점 또한 잘 보여준다. 해외 원조를 제공할 수 있는 능 력은 궁극적으로 경제적 자원에서 나오기 때문에 하드파워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인도주의적 제스쳐 이상으로 알려진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원조 프로그램들은 양국의 정부와 반제국주의, 제 3세계 연대, 사회정의라는 요소들과의 연계성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투입된다. 이를 통해 세계무대에서 각 나라의 국가적 위치를 제고하게 된 다. 따라서 하드파워의 수단이 소프트파워 추구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 다. 역으로 쿠바의 사례의 경우 영화와 음악 같은 소프트파워의 요소가 하드파워의 한 형태인 상당한 양의 현찰을 벌어들이도록 도와주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미국과 비교해서 쿠바와 베네수엘라 공공외교의 또 다른 특징은 국 외에서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 사용되는 기술이나 수단, 메시지가 국내 홍보 수단으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반 미국 시 민들이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활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미 국의 소리” 방송을 들어본 적이 없을 수 있지만,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관료들은 자신의 사회적 업적, 문화적 상품 그리고 혁명 연대의 이야기 들이 국제적 지지와 국내적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활발하게 마케팅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갈등도 존재한다. 국내적인 의료 수준에 실 망을 느끼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공론의 장이 없는 쿠바 국민들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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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 수천 명의 의사를 해외에 파견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대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2006년 선거 운동기간에 많은 베네수엘라 사람들 은 국내적으로 빈곤이 지속되었지만 해외로 많은 돈을 지출하는 것에 대 해 불만을 표출했다(Kraul 2006). 다시 말해 일부 국가에서는 공격적인 공 공외교가 국민들이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지나친 물질적 희생을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또한 프레이밍 이론(framing theory)을 포 함하는 접근법의 유용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한 나라가 다양한 공식적 담론을 동시에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쿠 바는 혁명적인 동시에, 관대하며, 피해자이며, 문화수준이 높고, 관광객 에게 친근하며, 섹시하고, 심지어는 반테러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역 적 맥락에 대한 이해도 역시 중요한데, 이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생성되는 배경이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영향을 미 치는 범위, 세련된 정도, 강력한 반미성향, 그리고 쿠바의 경우에는 장기 성(longevity) 측면에서 독특하지만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공공외교 노력들 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매스미 디어에 의한 “왜곡된” 메시지들이 양국 공공외교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 며, 수동적인 라틴아메리카 대중들에 의해 공공외교가 수용되는 것도 아 니다. 이 지역 내에는 브라질에서부터 콜롬비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 들이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인식해 가고 있다. 종종 라틴아메리카에 있 는 국가들은 친미/친자유시장/친민주주의와 친쿠바/친베네수엘라/친사 회정의로 양분된 담화 사이에 줄타기를 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라틴아메리카의 공공외교에 대한 체계 적인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어떤 때는 반제국주의, 다른 때는 세계 정치에 있어서의 다극성을 중시하는 것을 보면, 소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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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인도, 인도네시아의 공공외교 전략에 대한 비교역사적 연구가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2 3 ) 쿠바의 공공외교는 여러 면에서 베네수엘라의 공공외교보다 덜 취 약하지만 모든 측면에서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2003년 75명의 독립된 언 론인(independent journalists)들을 투옥시킨 행위는 국제적인 분노를 불러일 으키는 동시에, 오랜 기간 동안 쿠바의 체제를 옹호하던 많은 이들이 정 부의 억압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도록 했다. 쿠바 정부의 지속적인 인적· 물적 원조 프로그램은 미국에 대한 저항에 있어서 지정학적인 성공과 더 불어 쿠바 정부가 새로운 유엔인권위원회(UN Human Rights Council)와 그 전신인 유엔난민기구(UN Commission on Human Rights)의 회원국이 되는 데 충분할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갖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 바의 개탄스러운 인권실태는 미국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기구들, 다른 국 가들, EU, UN, 미국 내 쿠바인 공동체에 의해서도 정기적인 점검이 이루 어지고 있다. 아직도 민주주의의 실천이 한 국가가 국제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하고 있 는 시대에, 일당독재 국가인 쿠바가 국제무대와 UN, 유네스코, 세계 보 건기구, 비동맹 운동 등과 같은 국제기구 속에서 신뢰받고 소중한 파트너 로서 계속 간주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쿠바의 공공외교, 즉 쿠바의 소 프트파워는 쿠바가 국가 규모나 전략적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국 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조치나 2002년에 베네수엘라에서 일어 난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명백한 지지를 넘어서는 미국의 국제적 실수들 은 쿠바 및 베네수엘라의 가장 강력한 공공외교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이들 국가가 아무리 많은 연대 캠페인이나 국제사회에 대한 원조를 행한 다 해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 아부그라이브에서의 고문 스캔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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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타나모 베이에서의 학대 의혹 만큼 양국의 공공외교에 도움을 줄 수 는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그 연계성이 직접적이지 않아도 전반적인 미국 외교정책의 실패가 쿠바와 베네수엘라에 의한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비 판이 확산되고 새로운 개종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사적(rhetorical)·논제적(thematic)·담론적(discursive)
배경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따
라서 소프트파워는 적극적으로 국가의 매력을 키우는 문제만이 아니라, 기성의 정치적 담론에 대한 삼각 측량(triangulation)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얻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맥락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쿠바 및 베네수엘라의 현재 정치적·경제적 모델들이 비난받거나 매 도되어도 양국은 우리가 사는 동안 지속적으로 반미의 순간(anti-American moment)을
포착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풍조가 변하기 전에는 미국이 동
맹국들에게 힘을 합쳐 쿠바에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고 우고 차베스를 견 제하자고 아무리 요청해도 동맹국들은 주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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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2007년 2월 초 AP-Ipsos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62%가 쿠바와의 외교관계 재개 를 지지했지만, 응답자의 약 48%만이 쿠바와의 무역관계 전면 복구를 지지한다고 밝혔 다. 필자가 아는 한 미국의 금수조치에 대한 포괄적인 국제 여론조사는 거의 없다. 2. 보건 분야에서 가장 흔히 언급되는 성공사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아사망률로서, 쿠 바는 미국(1000명 가운데 5.6명 사망)보다 수치가 낮았고, 수명에 있어서는 미국(77살) 과 비슷하였다. 또한 쿠바는 2005년 당시에 159명에 1명꼴로 의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Feinsilver 2006). 쿠바의 교육 시스템은 높은 학교 진학률, 낮은 성인 문맹률, 대학교를 포함해서 학교 내 여성 비율, 높은 기술적 기반 등 의 측면에서 찬사를 받았다(Gasperini 2000). 3. 심지어 쿠바계 미국인들도 그 정책이 비효과적이라고 인정한다. 2007년 플로리다 인 터내셔널 대학교의 쿠바 여론조사에 따르면, 쿠바계 미국인들의 23.6%가 금수조치가 효과가 있었다(“worked well”)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7.5%는 제재조치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4. 예를 들어 2001년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 해 기자 회의에서 프렌사 라티나(Prensa Latina) 대표는 서반구 전역의 진보적 견해를 수집하는 웹페이지인 Visiones Alternative의 개설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http://www.visionesalternativas.com). 5. 호헤 카스타녜다(Jorge Castañeda)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과 보건분야에서 쿠바가 거 둔 성공은 쿠바 GDP의 25%에 달하는 소련으로부터의 엄청난 원조 때문이며,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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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보조금이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게는 지원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 문에 … 나는 쿠바 혁명이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에게 실질적으로 그 가치와 의미를 상 실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쿠바는 본받을 만한 모델이 아니다. 카스트로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주의와 반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상이 되었다. 나는 어린 아이 들이 이런 점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가 혁명가가 아니라는 사실과 쿠바가 실패했다는 사실도 안다. 그들은 현재 하바나에 존재하는 정권을 절대 받아들 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는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니까”라고 말한다(Norris 2006에서 인용). 6. 적어도 사파타주의자(Zapatistas)들의 경우에는, 쿠바 관료들이 반군에게 어떤 물질적 인 도움도 제공하지 않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분명하게 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 요하다. 7.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있는 국가안보 문서보관소의 연구는 미국 정부와 수많은 쿠바 망명 테러리스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최근의 연구는 CIA가 1976년 쿠바여객기를 폭파하려는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사전지식을 보 유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포사다의 활동에 대한 미국의 정보를 보기 위해서는 다음 사이트를 방문할 것. http://www.gwu.edu/57Ensarchiv/NSAEBB/NSAEBB153/index. htm. 8. 쿠바의 공공외교 대응성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는 바로 1999년 말 어린 엘리안 곤잘레 스(Elián Gonzalez)가 미국 땅을 밟았을 때 하바나가 보였던 반응이다. 쿠바 당국은 뒤이은 양육권 분쟁을 최대한 활용해서 자신들이 “가족가치”를 소중히 생각한다고 보 여주려고 했다. 결국 엘리안이 하바나로 귀환하게 된 것은 쿠바 정부가 쿠바계 미국인 적들에 대해 거둔 커다란 공공외교의 승리였다(De la Torre 20003, 1-13). 9. 예를 들어 브라질 노동당(Workers Party) 전 당수이자 룰라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 낸 호세 디르세우(JoséDirceu)는 브라질 군사정권으로부터 망명 중 쿠바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Maxwell 203). 또한 룰라 대통령은 카스트로와 20년 이상을 개인적으 로 알고 지냈다. 미첼 바쉐렛(Michelle Bachelet) 칠레 대통령은 아버지가 살바도르 아 옌데(Salvador Allende) 정부의 각료였으며, 아옌데 이후 쿠바를 방문하는 최초의 칠레 수반이 되겠다는 그녀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표명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녀는 이번 방문을 피노체트(Pinochet) 독재의 난민들을 쿠바가 받아준 것에 대한 감사의 제스처 로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 난민 중에는 그녀가 속한 칠레 사회당(Partido Socialista de Chile) 당원들도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다(Garland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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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언론에 대한 제약들로는 방송 컨텐츠에 대한 지나치게 엄격한 제약을 가한 2004년 미 디어법과 반대 언론인들을 세금 포탈 혐의로 괴롭힌 사례들을 들 수 있겠다. RCTV의 폐쇄는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비난과 저항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차베스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Tal Cual 과 같은 신문들은 계속 발행되었다. 11. 차베스의 리더십에 대한 의견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나 베네수엘라의 사 회적 발전과 정부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과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들은 없다. 12. 베네수엘라와 포사다 사건의 관련성은 카라카스에서 열린 재판의 실패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 포사다는 CIA에서 근무하면서도 베네수엘라의 악명 높은 정보 국인 DISIP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하바나와 긴밀하 게 연계된 게릴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13. 쿠바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주요 인사들은 전문 의료진으로 구성된 카스트로의 의료팀 이 널리 칭찬을 받는 쿠바의 보건의료 시스템에 내재된 불평등성을 감추는 것을 돕는 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그들은 일반 의약품의 심각한 부족현상, 수많은 의료 시설의 열악한 상태, 그리고 오직 관광객과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병원 및 부대시설과 의약품 을 의미하는 “보건차별정책” 등을 든다. 쿠바 관료들은 의약품과 장비의 부재가 미국 의 금수조치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를 부인한다. 14. 미국 정부가 해외에 살고 있는 쿠바계 전문 의료인들에게 신속한 입국을 보장하기로 결정한 2006년 가을부터 망명 건수가 급속하게 증가했다는 이야기들이 많다. 2007년 3월현재 이 프로그램은 지원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고 보고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관 료주의로 인해 지체되는 서류처리 때문에 이들이 법적지위 없이 제3국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로 남아있다고 불평하고 있다(Bachelet 2007a). 15. 여기에는 몇가지 제약 조건이 있다. 첫째, 부시 대통령이 언급한 숫자의 정확한 출처 가 알려져 있지 않고 그의 추정치에 해외원조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확실치 않 다. 2006년 1월 의회 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2006년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 배정된 미국의 원조액은 19억불에 달하며 이 가운데 43%는 마약 퇴치나 군사원조에 쓰였다(Veillette, Ribando, and Sullivan 2006). 2005년 “밀레니엄 도전”(Millennium Challenge)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에는 식량원조보다 무기원조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치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의 직접 원조는 워싱턴의 노력을 여전 히 능가한다. 부시 행정부는 2008년 이 지역에 대한 원조 예산을 8.5% 감축하여 책정 했다(Oppenheimer 2007). 미국의 민간투자와 자선단체들의 활동들은 의심의 여지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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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지역의 안녕과 번영에 기여를 하고 있으며, 그들의 원조 규모는 베네수엘라나 미 국 정부에 의해서 제공되는 원조의 양을 넘어선다. 그러나 이런 자금을 미국 정부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되도록 활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16. 쿠바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경험했던 검열의 정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다. 1961 년 피델 카스트로가 남겼던 “혁명이 전부이며, 혁명에 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유명한 단언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초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적 자유 를 누릴 수 있었다. 이는 쿠바의 국가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폭발 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71년과 1975년 사이의 기간은 “암울한 5년(five gray years)”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당시 쿠바 당국의 예술적 독단주의는 훨씬 더 심했다. 17. 예를 들어 로드리게스는 비틀즈와 밥 딜런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표출했다. 당시 쿠바의 지도자들이 서양의 약탈적인 소비주의로부터 자신의 문화를 되찾기 위한 싸움 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이러한 말들로 그는 어선에서 강제노역을 부과받았다. 또한 밀 라네스(Milanés)는 한동안 기피 인물이 되어 정치적·사회적 반체제인사들을 가둔 악 명 높은 UMAP 캠프에 보내졌다. 18. 더 최근에는 많은 사건들이 누에바 트로바와 쿠바 혁명 사이의 상징적 유대감을 시 험했다. 하나의 사례가 1990년 밀라네스의 자체 수입으로 독립된 재정으로 운영되며 쿠바의 젊은 음악가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파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es) 재단의 설립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다. 1995년에 쿠바 관리들은 갑작스럽게 그 재단을 폐쇄했는데, 아마 이 재단이 쿠바 정부로부터 누렸던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 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밀라네스와 로드리게스 둘 다 이러한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 재단은 1년 뒤 소규모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밀라네스는 2005년과 2006년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문화상(national cultural awards)을 획득하는 등 정부 기관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Moore 2006, 303; El Mundo 1995; La Ventana 2007). 누에바 트로바의 젊은 세대 예술가들은(대표적인 인물로는 Carlos Varela가 있 다) 자신들의 노래 가사가 담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지로 인해 정부 당국과 어려움을 겪었다. 로빈 무어(Robin Moore 2006, 162)는 바렐라(Varela)가 “사회주의 정부를 지지 하면서 동시에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비평가로서 상당히 견고한 중립적 입장을 견지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쿠바계 미국인들의 블로그는 2007년 가을 하바나에서 열린 바렐라의 콘서트에서 사람들은 ”자유, 자유!“하는 구호를 외치며 카스트로 정권에 대 한 공개적 항의를 했다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Cuba Watch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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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하바나 블루스(2005)는 활발한 국제적 참여(대부분의 쿠바 영화들은 전형적으로 국제 영화 순회 페스티발에 참가한다)와 광범위한 상업적 성공을 통해 “쿠바 영화”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썼다. 이 영화는 외국인이 구상을 했지만, ICAIC에 있는 쿠바의 문화업 무 담당공무원들과 상의 후에 제작되었고, 더욱 중요한 부분은 이 영화가 당시 쿠바의 독특한 이미지 창출에 관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쿠바의 공공외교와 관련해서 논 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공적 행위자와 사적 행위자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이야말로 현재 세계화 시대의 공공외교의 원천이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20. 그룹 오리샤스와 쿠바 정부 사이의 관계는 더 곤혹스럽다. 영향력 있는 언더그라운드 그룹인 아메나자(Amenaza)에서 시작된 오리샤스는 두 명의 아메나자 멤버가 교육교 류 탐방 차 프랑스에 왔을 때 추방된 다른 쿠바계 음악인들을 만나 결성되었다. 이 그 룹은 계속 해외에 거주하면서 거대한 음반계약을 체결하고, 영화 프로젝트와 관련해 서 전 세계적인 협력을 추진하며,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들은 쿠바 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가장 잘 알려진 노래들 가운 데 하나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피델 카스트로를 개인적으로 만나기까지 했 다. 쿠바 언론들은 해외에서 이들을 쿠바 청년문화를 대변하는 정통성 있는 대표로 홍 보하고 있다. 그들은 공연 시 쿠바 국기를 흔드는 등 민족주의적 행동을 하지만, 명백 한 정치적인 활동은 보통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쿠바계 미국인 래퍼이자 카스트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자인 핏불(Pitbull)과도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다(Fernandez 2005; Orishas.n.d.). 21. 물론 두 범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예술가들도 있다. 예들 들어 에밀리아 메노칼 (Emilia Menocal)과 주레치 사이자르비토리아(Jauretsi Saizarbitoria)가 공동 제작한 2006년 다큐멘터리 영화 <하바나의 동쪽(East of Havana)>은 알라마(Alamar) 출신의 세 명의 MC들에 대한 삶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은 상업주의도 민중 차원의 좌파적 신 조도 포용하지 않는 극도로 개인주의적이며 때로는 반정부주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 고 있다. 22. 금수조치에도 불구하고 예외로 취급되는 미국의 쿠바에 대한 식량 수출은 2006년에 총 3억 4천만 불 이상이었으며, 이로 인해 쿠바는 자신의 식량안보를 미국에 크게 의 존하게 되었다(U.S.-Cuba Trade and Economic Council 2007). 그렇지만 2006년 전체 교역량을 볼 때, 쿠바의 수입에서 미국의 비중은 겨우 5.9%에 불과하다. 반면에 미국은 베네수엘라 수입의 20.2%나 차지하고 있다(CIA World Facebook.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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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 정치학, 국제관계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학자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 의 공공외교 요소들에 대해 연구했다(Kingsley 1967; Fein 1998; Roorda 1998; Fejes 1896). 학자들은 심지어 그 지역에서의 중국의 공공외교에 대해서도 연구했다(Ratliff 1969).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의한 라틴아메리카 공공외교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많이 부족하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니카라과의 산디 니스타 정부가 미디어 캠페인과 다른 전략들을 통해서 미국 여론의 환심을 사려고 했 던 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연구 주제일 수 있다. 브라질도 마찬 가지로 반드시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브라질은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적극적으로 문 화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예로 고전적인 브라질/포르투갈 영화 스타 였던 카르멘 미란다의 세계적인 매력을 담은 1995년 다큐멘터리 <Banana Is My Business>가 있다), 오늘날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원조”무대에 등장, 국가의 소프트파워를 증 대시키기 위해 생물(바이오) 연료와 관련된 전문가적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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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공공외교와 중국 소프트파워의 부상
위웨이 왕 Yiwei Wang
최근 들어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시하던 하드파워를 소프트파워와 함께 보완하 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점점 더 공공외교에 주의를 기울이 고 있다. 이제까지 중국 정부의 공공외교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 는데, 이를 외부세계에 대한 프로파간다의 수단이거나 국내 미디어 홍보의 형태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해가 중국이 공공외교 분야의 숙련된 행위자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정 치의 핵심 측면들이 중국 공공외교에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미국과 비교해 보 았을 때 중국은 보다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공공외교 전략이 필요하고, 현대적인 미디어를 보다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중국 국가대전 략(grand strategy)의 평화적 부상과 평화적 발전 정책은 중국의 평화로운 부상 을 위해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통합을 모색한다. 핵심어 : 공공외교, 중국, 소프트파워, 소프트라이즈
12장_공공외교와 중국 소프트파워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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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중국에 거주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발전을 둘러싼 각종 이슈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애널리스트 조슈아 쿠퍼 라모(Joshua Cooper Ramo)는 “오늘날 중국의 가장 심각한 전략적 위협은 바로 중국 자
신의 국가 이미지”라고 단언한 바 있다. “브랜드 차이나(Brand China)”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중국의 “이미지 주권(image sovereignty)”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학자들 역시 라모 박사와 같은 생각을 이미
갖고 있었다. 실제로 중국에서 공공외교는 과거에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 었으나 최근 몇 년 사이 많은 중국 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주요 주제가 되었다. 점차 많은 대학원생들이 공공외교를 논문 주제로 선택하고 있으 며, 중국의 신문과 잡지들이 이에 대해 빈번하게 거론하기 시작했다. 공 공외교에 대한 논의 중 대부분은 중국이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중 국위협론”이 야기하는 위험을 상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 고 있다. 그리고 소프트파워라는 개념은 학자, 관료 그리고 기자들에 의 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2007년 중국 외교백서는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제17차 중국 공산당 전당대회 보고 서는 “인민의 기본적인 문화적 권리와 이익을 보다 잘 보장하기 위해 중 국 소프트파워의 일부로서 문화를 증진시킬 것”을 촉구했다(Hu 2007). 중 국 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이 발행한 문서에서 “소프트파워”에 대해 이야 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단어만큼 서구의 국제관 계 용어가 중국 언어에 깊고 넓게 파고든 사례는 거의 없다.1 ) 2006년 말, 상하이 홍보협회 부회장이자 상하이 외국어대학 총장인 우 유푸(Wo Youfu)는 중국이 용보다는 판다곰을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중국 본토와 해외에 있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즉각적으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비난을 받았 다.2 ) 이러한 논쟁의 배경에는 중국적 개념들이 문화적으로 너무 특수해 서 외국인들이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중국인들의 추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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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있다. 이러한 의견은 국제관계의 주된 담론들이 너무도 서구화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중국 정부가 일반적인 국제관계의 용어로 자신을 표현하면, “중국다움”을 상실하고 너무나 서구화되었다고 중국 국민들로부터 비판 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칼 마르크스가 19세기 프랑 스 농민들을 보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 의해 대표되어져야만 한다”고 지적한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다(Marx 1852). 중국은 지금 공공외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고, 자국의 소프트파 워를 증진시키고 자신을 세계에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는 증대되는 중국의 소프 트파워와 하드파워 그리고 이를 통한 중국의 부상에 우려를 하고 있다. 이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첫 번째 절에서는 중 국이 공공외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공공외교 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오해를 분석하고, 특히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소 프트파워와 공공외교에 대한 중국의 이해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절에서는 중국의 공공외교 전략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중국의 기본적인 전략적 사고에서부터 현재 중국의 ‘화평굴 기’ 전략 촉진 임무의 전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공공외교 전략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세 번째 절에서는 공공외교에 대한 논의를 넘어 중국의 화평굴기를 위한 국가대전략(grand strategy)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네 번 째 절에선 중국의 공공외교의 실제와 전략에 초점을 맞추면서 소프트파 워와 공공외교를 통합시켜 볼 것이다. 중국의 공공외교는 중국의 부상을 “경성부상(hard rise)”에서 “연성부상(soft rise)”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왔 다. 다시 말해, 중국은 평화적으로, 평화적 수단을 통해, 평화를 위해 부 상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중국 공공외교의 장기적인 과제는 중국이 부상 을 성취한 이후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세상에 정확히 알 리는 것이다.
12장_공공외교와 중국 소프트파워의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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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외교에 대한 중국의 이해
“공공외교”는 중국에서 낯선 개념이다. 중국인들은 공공외교란 말보 다는 대외 프로파간다로 번역할 수 있는 “대외선전(對外宣傳, dui wai xuan chuan)”이라는
말을 더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이는 중국이 성취한 바를
널리 알리고 해외에서의 국가 이미지 신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중국어 의 ‘선전’이라는 단어는 영어의 ‘propaganda’와는 달리 뉴스의 발표, 이 데올로기의 형성, 혹은 광고 등과 같은 본질적으로 중립적인 활동과 연 관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선전’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 는데, 하나는 내부 프로파간다를 나타내는 내선(內宣 nei xuan)이고, 다 른 하나는 해외에서 중국의 이미지 제고를 의미하는 외부 프로파간다 인 외선(外宣 wai xuan)이다. 중국에서는 국가 선전 시스템이 매우 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반면에 공공외교는 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한 수 준이다. 이러한 이유 중 하나는 외부 선전과 내부 선전을 혼합하는 중 국 정부의 관행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민간외교(people-to-people diplomacy)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공공외교를 이해하고 있다. 중국
어 용어 사전은 외교라는 개념을 또 하나의 핵심 개념인 외사(wai shi, 外 事, foreign affairs)와
나란히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모든 공공 조직
에는 외사 담당 부서가 있다. 주은래가 남긴 유명한 “외사에 있어 사소 한 이슈는 없다”는 말은 여전히 중국 외무계의 신조로 영향력을 발휘한 다. 이외에도 중국 공공외교의 관행은 미국식 미디어 외교 접근법보다는 프랑스식 문화 교류 및 문화 외교 접근법을 강조한다. 이는 중국의 문화 는 높은 수준으로 발달된 반면에 중국의 미디어는 아직 전 세계적으로 통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기념비적인 교류 및 문화 외교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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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는 2004년 중-불 문화의 해, 2005년 중-러 국가의 해, 2006 중-인도 친선의 해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중국인들은 최근 공공외교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 다. ‘공공외교(gonggong waijiao)’라는 개념이 『해외외교(Diplomacy Abroad )』 라는 책(이는 중국 외무 대학의 Qipeng Zhou 교수가 편집한 책이다)에 처음 등장 했는데, 이는 1990년에 국제공법 백과사전에 나온 “공공외교”라는 말을 번역한 단어이다(Zhou and Yang, 1990). 다음으로 위 루(Yi Lu) 교수가 그의 책 『일반 외교 입문(General Introduction to Diplomacy )』에서 이 개념을 분석 했으나, 번역은 “공중외교(公众外交 gōngzhòng wàijiāo)”로 했다. 중국학자들 은 여전히 ‘공공’과 ‘대중’이라는 개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데, 영어 의 ‘public’이라는 말을 중국어로 번역하면 ‘비영리적인’ 혹은 ‘비차별적 인’이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런 번역상의 문제는 중국 학계에서 드 문 일은 아니다. 중국 공공외교의 실제에 대한 논의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이것이 실 제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개혁개방” 시기였던 1983년 중국의 뉴스 대변인 제도 도입부터였다. 첫 뉴스대변인은 중국 외교부에 서 공보부를 담당했던 첸치천(Qian Qicheng, 錢其琛)이었으며, 곧이어 다른 정부 기관들도 이 관행을 따르기 시작했다. 1991년 1월에는 국가 정보 관 리위원회가 설립되어 뉴스 대변인 시스템을 새롭게 제도화했다. 한편 지 방 정부가 중앙 정부의 선례를 도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최초의 지방 뉴스 대변인 시스템은 2003년 6월이 되어서야 상하이 지방 정부에 의해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31개의 성과 74개의 국가위원회 기 구들, 그리고 공산당 산하 7개의 중앙 기관이 상하이 정부의 선례를 따 라 자신만의 뉴스 대변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북경에서는 각 자치구를 대변할 지역 시스템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반을 가지고 있 음에도 중국 정부는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 사건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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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공공외교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중국 사회에 서는 미국 내부를 비롯한 그 밖의 지역에서 벌어지는 미국식 공공외교에 대한 비판이 만연했음에도, 미국은 중국의 공공외교를 위한 주요한 모델 이었다. 2003년 9월 26일 중국 공공외교의 등장을 알리는 의미에서 필자 는 중국 외교부의 초청을 받아 “공공외교의 이론과 실제”라는 주제로 외 교부 정책기획국과 정보국이 공동으로 주관한 공공외교 시리즈의 첫 번 째 강연을 한 바 있다. 2004년 3월 19일 외교부 산하 신문사(新聞司 : The Information Department)에 공공외교처가 생겨났다. 새로운 조직의 출범을 알리면서 당시 외
교부 차관 셴 구오팡(Guofang)은 공공외교를 “외교 업무에서 매우 중요 한 분야”라고 정의했다. 그는 “공공외교의 기본적인 목표는 외교정책에 대한 공공의 이해와 지지를 지도하고 확보하기 위해 인민과의 교류와 상 호작용을 증진시키기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중화민주주의공화국 외무부, 2004).
외교부 장관 자우징 리(Zhaoxing Li)는 “우리는 그동안 중국 인민들
에게 외교정책과 활동들을 홍보함으로써, 공공외교를 적극적으로 수행 해왔으며, 이로 인해 인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Li 2005). 이들에게 “공공(public)”이라는 말은 “중국 인민(Chinese public)”을
의미하고, 공공외교라는 말은 미국에서의 공보(public affairs)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런 단어 사용법의 차이는 보기만큼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 니다. 중국 정부는 외교정책은 국내 정책의 연장선에 있어야 하며 외교는 국내정치에 기여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공보와 공공외교가 이처럼 혼합된 것은 중국의 정치체제에서 그 뿌 리를 찾을 수 있다. 중국에는 공공외교를 전담하는 단일 조직이 없으며, 미국의 공공외교 및 공보 담당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이 없다. 중국의 공 공외교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내의 국제 커뮤니케이션국과 전국 인민대표자회의와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의 해외연락 사무소,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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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문화부의 대외문화국, 외교부의 신문국 등이 함께 수행하고 있다. 전통적인 중국 외교는 고위급 인사들의 정치를 강조하고 풀뿌리 차 원의 정치를 무시하였다.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도 중국의 경험에 비추 어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중국의 관리들과 인민들은 모두 중-미 관계가 최고위급 차원에서 잘 풀린다면 모든 미국 국민들이 중국에 호의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미 백악관에서 중국에 대해 우호 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미 의회가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시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80년대의 개혁개방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중국은 주류 국제사회로 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는 전적으로 중국 국내정치 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었다. 이후에도 중국의 국내정치는 여전히 매우 중 요하고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서구와 중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국내 영역 에 있으며, 특히 일당체제, 인권, 언론의 자유 등과 같은 요인이 핵심적이 다. 다른 주요 차이는 국가 통일 이슈와 타이완과 티베트의 지위을 둘러 싼 의견 불일치이다. 과거에 중국은 국제사회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 해 소극적이었고 거부감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이제 지나갔 다.
전통적인 중국 외교는 고위급 인사들의 정치를 강조하고 풀뿌리 차 원의 정치를 무시하였다.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도 중국의 경험에 비추어 이루어졌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국제적 이미지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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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항목 간에 내용이 겹칠 수는 있지만 전형적인 오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중국은 국력이 국제 이미지의 척도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만약 한 나라가 충분히 강하고 크면 다른 나라들이 자연스럽게 그 국가 를 존경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스위스나 북유럽 국가 들의 경우 크기가 작고 군사적 힘도 약하지만 이들 국가의 이미지 는 매우 좋은 반면, 강대국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들이 부정적으 로 본다는 역설 앞에 그 타당성을 잃게 된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나라의 중흥을 꾀하는 데 소프트파워를 키우기 위한 노력보다는 GDP를 증가시키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 국의 발전이 결국은 수출과 외국인 직접투자 등으로 인한 경제 성 장에서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중국의 외교는 너무 실용지향적인 성향이 짙다. 결국 중국은 타국의 국민 들과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하는 것을 게을리 했고, 이는 결국 중 국위협론을 불러왔다. 2. 중국은 국가 이미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등한시하고 자신의 국제 적 위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고 있다. 고대 중화제국의 조공 시스 템에서 황제와 조정은 중화 제국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에는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다. 3. 중국은 문화를 간과하고 중국 경제를 국제적으로 팽창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설사 문화를 고려해도 중국 정부는 전통문화 확산 에만 집중할 뿐 문화 교류를 통해 해외에서 시민사회를 육성하는 것은 무시하였다. 4.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홍보하기에 중국인들은 너무 겸손하다. 5. 중국인들은 중국이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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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 인들은 이런 역사적 중요성이 자동적으로 현재의 영향력으로 이어 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위에 열거한 오해는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아 주 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서구의 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가 지고 있는 몇 가지 역설과 일치한다. 중국에 대한 서구의 견해는 아래와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1. 서양인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는 좋아하지만 너무나 정치적이고 문화적 소양이 결여된 현대의 중국은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2.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은 좋아하지만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좋아하 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3. 서양인들은 “중국”이라는 개념은 좋아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라는 개념은 공산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 다. 4. 서양인들은 중국을 여행하고 중국에 투자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중 국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해 그들은 중국의 발전이 가져다 주는 혜택을 향유하고 싶어 하지만, 이러한 중국의 부상이 초래할 환경오염과 같은 비용을 치루고 싶지는 않는 것처 럼 보인다.
중국에 관한 오해 중 일부를 해소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중국 문 화는 효과적인 공공외교 구축에 있어서 상당한 장애가 되고 있다. 이러 한 문제의 원인은 덕에 의한 통치라는 전통에 있다. 중국인들은 다른 사 람들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려 할 때, 자아 성찰과 자발적인 변화를 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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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한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서양인들은 개인을 세계를 이 해하는 단위로 보고, 선과 악과 같이 절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 이 있다. 또한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타인은 이단이며 타협불 가능한 적으로 간주된다. 반면 중국적 사고방식에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 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 안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중국식 생각에서는 타인이 내가 될 수 있다. 이 러한 이유로 “서양의 철학은 객관성(objectivity)의 원칙을 가정하는 반면 에 중국 철학은 주관성/타자(subjectivity/other)의 원칙을 가정하는” 것이다 (Zhao 2005).
다른 말로 서양의 정치적 담론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
문을 먼저 던지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 문제와 결부되는 것으로, 적을 구 분하고 친구를 만들고 우리와 남을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구분과 나눔에 기반을 둔 세계관이다. 반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우리는 누구인 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서 “전 세계는 한 가족”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화합의 창조를 강조한다. 그 결과 서양인들의 관심사는 싸움을 규제하거 나 촉진하는 반면에 중국인들의 관심사는 얼마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 한가 하는 것이다(Zhao 2005). 이미지에 대한 중국식 접근법은 외적인 표현 영역보다는 내적인 세 계에서 시작한다. 중국의 내적인 감성(inner/feeling) 문화는 서양의 외적탐 색(external/exploring) 문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중국인들은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모습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에서 “힘 (power)”에
대한 이해가 독특하기 때문에 공공외교에 대한 접근법이 더
혼란스러워진다. 같은 논리로 중국인들이 “소프트파워”라는 개념을 이해 하고 활용하기란 매우 힘들다. 서구 정치에서 힘이란 개념은 행위자나 조 직이 다른 행위자나 조직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는 다윈(Darwin)의 논리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데, 힘 을 가지는 존재는 ‘주체’로 규정하는 반면에 힘이 없는 존재는 ‘객체’로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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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다. 하지만 사실 힘을 올바르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힘을 가진 주체 의 능력 뿐만 아니라 객체가 그 힘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지도 역 시 고려해야 한다. 이는 고대 동양의 조공체계와 근대 서양의 국제체제가 갖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한편 중국에서 힘이라는 말은 대개 중국어의 ‘权力 [quánlì, 권력]’로 번역된다. 실제로 전통 중국어에서 ‘권력(权力)’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 다. 명사로는 “강재 적치장(steel yard)”이고, 동사로는 “원칙에는 찬성, 성 서에는 반대(against scripture while for principle)”란 의미이다. 실제로 ‘권력(权 力)’은
항상 전술 혹은 전략을 뜻하는 말인 ‘권술(拳术, [quán-shù])’과 연관
되어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춘추전국시대(기원전 475-221)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것은 지배 체제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추진한 전 략에 의해서였다. 철학적으로 중국의 힘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도덕성과 연관되어 있다. 중국 전통철학의 여러 학파들은 이 두 개념 사이의 상관 관계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순자(荀子[Xúnzî] 기원전 313-238)는 힘이 도 덕성과 상반되는 것이라 여겼다(君子以德 小人以力 ; 力者 德以役也 : 군자는 덕 으로써 행하고, 소인은 힘으로써 행한다).
반면에 공자(Confucius, 기원전 551-478
년)는 “내적으로 현인이 되고 외적으로는 왕이 되라”고 주장했다(內聖外王).
다른 말로 하면 내적인 도덕성이 외적인 힘을 가져온다는 뜻이다. 공자 는 또 “자기 스스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이에게 지우지 말라(己所 不欲,勿施于人「顔淵」”고
이야기했다. 노자(기원전 854-770년)는 “자연을 거
스르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스리라(無爲而治)”고 가르쳤다. 즉 힘은 자연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힘은 도덕성에서 비롯되고, 도덕성은 자연에서 비롯된다 는 것이 힘에 관한 중국의 전통 사상이다. 중국의 전통적 조공체계는 힘 과 도덕성을 통합했다.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국가, 국민국가, 주권, 혹은 국제체제라는 개념은 없었고 다만 “천하(天下, all under heaven)”라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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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있을 뿐이었다. 힘과 도덕성을 분리시켰던 마키아벨리가 중국에는 없 었기 때문에, “중국식 국제관계 이론이 없다”는 주장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Wang, 2005).
중국의 공공외교 관행
중국의 부상으로 소프트파워의 관점에서 국가를 생각할 필요성이 생겨나면서 중국 정부는 공공외교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 다. 2004년 3월 19일에 출범한 “중국의 공공외교에 관한 학술 세미나”(the academic Seminar on China’ s Public Diplomacy)에서
중국 공공외교 전략의 기
틀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공공외교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첫째는 현명한 전략적 사고 및 방어적인 이유에서 의 역할 수행이고, 둘째는 중국의 소프트파워 강화를 도모하는 시급한 업무 담당이다. 중국은 평화로운 발전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자 국에 대한 세계의 시각을 바꾸고, 소위 말하는 ‘중국 위협론’을 바로잡으 며, 세계가 중국의 부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중국 외교는 정부 간의 접촉에만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 외교모델 을 넘어서 외국의 시민사회에 관여하는 공공외교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필요성을 인정한 후진타오 주석은 2004년 8월 30일 베이 징에서 개최된 제10차 해외 파견 외교사절단 컨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현재 그리고 가까운 장래의 중국 외교업무의 근본 과제와 기본 목표 는 모든 면에서 상당히 부강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도록 ‘전략적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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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 특징지워지는 중요한 발전기를 계속 유지하고, 평화롭고 안정적 인 국제 환경, 우호적이고 친선적인 환경, 공정한 상호 이득을 위한 협 력의 환경, 객관적이면서도 우호적인 홍보환경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 하는 것입니다(People’s Daily 2004).
중국의 지도자가 “객관적이고 우호적인 홍보 환경”이 중국 외교의 근본적인 목표라고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러한 목표의 천명 은 중국 외교관들이 공공외교를 전략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기반 을 제공하였다. 이후 우호적인 외부 환경을 만들려는 열망은 중국 외교 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의 공공외교도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중국의 급속 한 경제성장 및 정치적 발전은 전 세계의 관심과 집중을 불러 일으켰다.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감 있는 이해당사자 (responsible stakeholder)’가
되기를 독려하고 반기고 있으며, 미디어 전문가
를 포함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방문하거나 중국에 거주하 고 있다. 공자학원(The Confucius Institute)의 보고에 따르면 점점 더 많은 외 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공공외교에 더 많은 자 원을 투입하고 있다. 예를 들면 2006년 중국의 해외 원조 예산은 14% 증 가해서 11억 달러에 달했다. 둘째, 중국은 거대인구라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전 세계적 으로 수백 개에 달하는 공자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수천 명의 중국어 교사들을 파견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은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수 천 명의 경찰을 파견했으며,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로서 유엔 평화유지군에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을 파견했다. 리베리아에서만 600명 의 중국 경찰들이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 이외에, 중국 경찰은 해당 지역 주민들을 돕는 자원봉사 활동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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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리베리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The Economist 2006). 셋째, 중국은 강력한 정부는 물론 엄청난 정치, 경제, 문화적 자원 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공공외교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 문에, 사람들은 중국이 조만간 효과적인 공공외교를 조직할 것이란 점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 의 개발도상국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자랑하고 있다. 2006년 11월 아프 리카 53개국 중 48개국 정부수반 및 대표단이 참석하여 성공적으로 개 최된 중국-아프리카 정상회담의 예만 보아도, 중국이 수출과 외국인 직 접투자만을 강조하는 접근법에서 수입과 소프트파워에 초점을 맞춘 접 근법으로 외교 방식을 조정한다면 세계가 우호적으로 반응할 것이란 점 을 알 수 있다. 중국은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세계 엑스포를 통 해 공공외교를 실행하고 중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계획했다. 엑스포 담당 대사 저우한민(周漢民)은 한 인터뷰에서 “공공 외교가 무엇입니까? 매우 간단합니다. 이번 엑스포에 다른 나라들 이 참여하도록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사 람들에게 우리를 알리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Hang 2002). 중국의 공공외교는 이와 같은 기회와 장점을 갖고 있지만 몇가지 중 요한 난관과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 먼저 중국의 정치체제가 민주적 중앙집권 하에서 운영되긴 하지만, 중국의 외교력은 그렇게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다. 중국의 외교 시스템은 많은 부서와 집단이 참여하고 있어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공공외교를 실행하기 위한 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어렵다. 공산당의 중앙외사공 작영도소조는 단순히 외교정책 결정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뿐이고, 중 앙위원회 소속 대외선전부는 정규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다수의 기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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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공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진하 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부에서는 문화 외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국무 원 및 외교부 산하의 신문국에서는 미디어 외교를 담당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대외연락부는 당 대 당(party to party) 외교 및 대 사 회주의 국가 공공외교를 맡고 있고, 12개의 정부 단체를 하나로 통합한 국제 중국어위원회에서는 전 세계에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에 더하여 중국은 전통적으로 정부는 강하고 시민사회는 약하기 때문에, 중국이 통합된 공공외교를 수행하기 위해 NGO와 다국적 기업 이라는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이다. 또한 중국은 미디어 외교를 수행하기 위해 자국 미디어를 활용할 필 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부, 국무원 신문판공관 실, 외교부의 신문국, 신화 뉴스 통신, 중국국제라디오(China Radio International),
중국중앙방송(CCTV)의 영어국제방송 채널(CCTV-9)과 차이나 데일
리(China Daily) 등과 같은 매체들이 중국의 발전상과 정책을 세계에 알리 고 외국 시청자들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엄격한 미디어 규제로 인해 그 경쟁 력을 잃은 중국 미디어가 광범위한 해외 시청자층을 사로잡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Rumi 2004). 또 다른 측면에서 중국은 미디어 외교를 수행하기 위해 해외 매체를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2007년이 되어야 비로소 올림픽 준비의 일환으로 외국 미 디어가 중국 관계 당국의 허가 없이 개인과 단체를 인터뷰하는 것을 허 용하였다.3 ) 둘째, 세계 뉴스의 대부분이 서양의 개념과 이데올로기 틀 안에서 표현되고 영어를 사용하는 미디어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은 담론의 헤게모니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이 경제적, 문화적 힘을 향유 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서양의 미디어에 어떻게 묘사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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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제할 방법은 없다. 예를 들면 중국 정부와 짐바브웨의 무가베 정권 과의 관계는 서양의 미디어에 의해 크게 비난을 받았다(Pan 2006). 다르푸 르 사태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수단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 자, 몇몇 그룹들이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운동을 시작했다.4 ) 론 슬리(Rawnsley 2007)가 말했듯이 “문화 및 경제 외교가 외교정책 목표의 실현으로 쉽사리 혹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들은 빠른 성공과 즉각적인 혜택을 열망하고, 운만 좋으면 단번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근시안적인 행동은 개혁개방 시기의 중국 실용주의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 시기에 경제적 이익이 외교 정책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특성은 중국의 공 공외교 관행에서도 역시 드러나고 있다. 괴테 인스티튜트(Goethe Institute) 와 알리앙스 프랑세즈(Alliance Francaise)를 따라 설립한 ‘한반(Hanban)’은 애초에 전 세계에 100개의 공자학원을 설립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이 목 표는 신속하게 초과달성했다. 첫 번째 공자학원은 2004년 11월 서울에 세워졌고, 그 후 2007년 12월 11일까지 64개국에 총 210개의 공자학원 이 개설되었다. 그런데 중국인 교사 공급이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 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2010년까지 중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의 수를 1억 명까지 지금의 4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5 ) 이 발표 이후 중국의 이러한 과도한 목표 설정에 대해 경고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비평가들은 품질의 문제와 이런 계획이 가져올 결과를 고 려하여 어느 정도 실현가능한 목표를 설정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Wang 2007).
셋째로, 중국 외교관들의 수준이나 생각이 개선되고, 중국 관료제 도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내의 잘못된 관습이 중국이 공공외 교를 실행할 때 그대로 해외로 전파되기 때문이다. “외교영역에서 사소한 이슈는 없다”는 슬로건 아래 교육을 받은 중국 외교관들은 지나치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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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는 경향이 있으며 창의력이 결핍되었다. 국제 마케팅에 대해서는 아 는 바가 거의 없고 대외선전에 대한 시대에 뒤쳐진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다. 한 외국 관찰자는 “최근 사스와 조류독감 전염병의 사례는 중국의 공공외교가 적극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본질적으로 수동적이고, 방어적이 며, 비밀스럽고, 잠재적으로 부정직할 가능성이 있고, 전적으로 정치적 편의를 위한 것이며, 이미 외국의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지고 있는 위기 에 대해 너무 조심스럽고 천천히 대응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Rawnsley 2007).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중국의 외교관과 지도자들은
대개 말은 느리지만 행동이 빠르다. 그들이 공공외교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시급하게 기량을 연마하고 현대 미디어와 기술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세계 뉴스의 대부분이 서양의 개념과 이데올로기 틀 안에서 표현되 고 영어를 사용하는 미디어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담론의 헤게모니에 직면하고 있다.
넷째, 중국의 공공외교는 세계와 의사소통에 있어 높은 언어적·문 화적 장벽을 넘어야 한다. 중국의 정치적 담론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란 매우 어렵다. 예를 들면, 중국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저자세) 전략과 과 학발전관(科學發展觀)은 모두 중국식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를 직역 해서 옮기면 너무 모호해지며, 상상의 여지를 크게 남기게 된다. 화평굴 기(和平崛起), 화해세계(和諧世界), 전략적 기회 등의 중국어들은 그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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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표현하면서 영어로 번역할 방법이 없다. 전 외무부 차관 센 구아 팡(沈國放)은 번역 과정에서 혼동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한 미국인 식물학자가 “Dazhai flower”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방문을 신청했는데, 그는 이것이 중국 정부가 다자 이 지역(Dazhai area)을 꽃피워(flower) 그 혜택을 중국 전역으로 퍼트리기 위한 농업진흥모델이라는 것을 몰랐다. 더 중요한 것은 언어 뒤에 숨겨져 있는 사고 방식이다. 중국은 전 세계에 “굴기(rising, 崛起)” 이후 정확히 무 엇을 할 계획인지, 특히 미국의 헤게모니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국어의 “화평굴기”라는 한마디로 쉽게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대단한 회생은 중국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인지 모르지만 중국의 이웃들에게는 과거의 조공 체계의 부활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소프트파워와 중국의 화평굴기
중국의 공공외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교 차원을 넘어서 중 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중국의 소 프트파워와 평화적인 부상에 대해 논할 것이다. 중국의 소프트파워 증대는 전 세계의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학 자들이 소프트파워를 둘러싸고 중국과 미국 간의 경쟁구도가 생겨날 것 이라고 예측했다. 조셉 나이(Nye 2005)는 미국 소프트파워의 쇠락과 중국 소프트파워의 부상을 매우 걱정스럽게 지적했다. 어떤 학자들은 베이징 컨센서스가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소 위 말하는 중국 모델이 2006년 중국-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가장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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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받은 주제가 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중국의 평화적인 부상 혹은 평화적인 발전전략 안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나름대로 개념화했다. 화평굴기 전략이란 중국의 힘 이 부상할 때 외부 세계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이 다. 미국 헤게모니의 중심 기반을 연구하면서 중국은 미국의 경험으로부 터 하나의 단순한 모델을 도출했는데, 그것은 바로 “나라에 공헌하고”, “역내 평화를 위해 공헌하며”, “세계를 위한 법적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합리적 이익을 추구하고, 만족할 만한 국제질서를 만들며, 정당한 패권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 미국의 “세계 거버넌스” 핵심이다.6 ) 또한 중국은 한 나라가 합리성, 적법성 그리고 헤게모니적 대의에 상응 하는 목표를 갖춘다면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배워서 알고 있다. 이 세 요인들이 합치되지 않거나 상호 충돌이 일어나면 파멸이나 자기 패배를 가져올 것이다. 평화적인 부상을 추구하는 중국은 평화라는 목표에 부응하는 합리적이고 적법한 힘을 갖 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의 성장 이전의 중국을 둘러싼 역내 환경을 고려해보면 중국의 성장 방식, 중국 부상 이후의 영향 그리고 중 국의 진보는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합법적이며 평화로운 것이다. 진정으 로 평화의, 평화에 의한, 평화를 위한 부상이었다(Wang 2004). 그러나 중국의 소프트파워 증진은 결국 공공외교의 몫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중국의 공공외교는 단지 사회주의권 국 가들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 외선전에 한정되어 있었다. 중국은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함께 싸울 동맹국을 찾고 있었다. 중국의 국영방송사인 신화통신의 지사들이 세계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중국 내에서는 영어, 러시아어, 일본어, 불어 등으로 발간되는 각종 잡지를 발간했다. 1950년에 인민일보를 창간한 것 을 시작으로 1951년에 건설 중국(China Construction )을, 그리고 1958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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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주보(北京周報, Beijing Review ) 등을 만들었다. 오늘날까지도 북경주보 는 중국 정부의 입장을 소개하고, 중국의 정치·경제·문화 뉴스 홍보에 있는 활용되는 대표 주간지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의 대외선전은 개혁ㆍ개방 시기 이후로 크게 발전했다. 종과 왕 (Zhong & Wang 2006)
교수의 요약에 따르면 :
과거에는 중국 정부가 공공외교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채 이를 실행했다. 중국 공공외교의 발전기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목표와 임무는 각 단계별로 다르다. 첫째 단계는 새로운 중 국을 선전하고 세계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둘째 단계는 개혁과 외부 세계에 대한 중국 개방을 가속화시키고, 세계 평화를 지키는 것 이었다. 셋째 단계는 중국이 위협적인 존재라는 생각에 대해 반박하 면서 평화로운 발전을 옹호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현대적 의미의 공공 외교가 과거 선전의 개념을 대체하면서 오늘날 중국 공공외교의 관행 으로 점차 자리잡게 되었다. 중국은 평화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협 력적이고 친근하며 책임감 있는 나라라는 국제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p. 69).
최근에는 “중국위협론”이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증진시키는 데 있 어서 가장 큰 방해물이 되고 있다. 실제로 해외의 중국 위협에 대한 인식 과 중국의 기회 및 부상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 사이에는 역설적인 관 계가 있다. 헨리 루체 재단(Henry Luce Foundation)의 부회장 테릴 라우츠 (Terill E. Lautz)가 이를 잘 표현했는데, 그는 “중국이 약하고 분열되어 있을
때, 미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는 꽤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점차 강해지고 대외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되자, 중국 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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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따라서 중국은 강한 것은 필연적으로 위험하다는 논리에 대한 다
른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켜 국제사회가 중국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 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중국은 강대국으로서 모든 책임을 가지고 국 제적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중국 공공외교의 관행과 전략
냉전 종식 이후 중국의 공공외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목 표를 추구하였다. (1) 중국 정부의 성명과 주장을 보다 강하게 세계에 공 표한다. (2) 중국에 대한 바람직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3) 중국에 관한 해외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반박자료를 낸다. (4) 중국을 둘러싼 국제 환경을 개선한다. (5) 외국 정부의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Zhan 1998).
중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중국과 국제사회 모두 서로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다. 먼저 국제사회는 중국의 국가 상황과 이데올로기적 소외나 불신 등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중국 역시 외부 세계의 반응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스스로 를 알리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해가 매우 제 한적이란 것을 인식한 중국 정부는 중국의 정책적 입장을 설명하는 백 서 발행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2004년에 발간된 중국의 인권 개선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이래로 중국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국제협약”을 비롯해 인권과 관련된 21개의 국제협약에 가입했으며, 협약에 명시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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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조치를 채택했다. 또한 UN 협약이 규정하고 있는 조항들을 적절하게 이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 고서를 적기에 제출하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진지하고 책임감 있 는 자세로 “시민의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범”을 채택하는 것을 적 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Permanent Mission 2004).
이런 보고서들은 중국 정부에 대한 외국 대중의 비판을 성공적으로 감소시키고, 중국의 국제 이미지 증진에 기여했다. 물론 중국은 중국의 국제적 이미지과 관련해서 여전히 많은 어려 움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의 이웃 국가인 인도, 한국, 베트남 등은 여전 히 전쟁이나 조공체제와 같은 부정적인 과거의 기억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중국의 대외 원조는 중국의 이미지를 증진시키는 측면도 있 지만 이를 해치기도 한다. 가장 큰 방해물은 바로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매력 공세 :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Charm Offensive : How China’ s Soft Power Is Transforming the World )』의 저자 조쉬 커
랜트지크(Joshua Kurlantzick)는 관련된 논문에서 “비록 중국이 다른 나라 들에 대해 부드러운 영향력(soft influence)을 발휘해도 중국은 여전히 권위 주의 국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썼다(Kurlantzick 2007). 중국의 공공외교 에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연구자인 잉그리드 도게(Ingrid d’ Hooghe 2005) 역시 “어떠한 공공외교 정책도 중국이 인권침해 국가라는 인식을 바꿔놓 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말로 중국 공공외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 와 비슷하게 파이낸셜 타임즈지의 가이 드 존퀴리(Guy de Jonquières)는 다 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의 “소프트파워”에 대한 중요성은 과대평가되고 있다. 중국이 취 하는 대부분의 외교적 시도들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필요에 의한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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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특히 에너지와 천연자원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의 해 움직인다. 지금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중국 의 의심할 여지없는 정치 마케팅 기술 때문이 아니라 워싱턴이 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효과적인 소프트파워는 본질적으로 어 필할 수 있는 국가적 이상과 원칙, 가치에 기초하고 있을 때만 가능하 다. 비록 부시 행정부가 이런 자산을 터무니없이 낭비해 버렸지만 선 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현대 중국이 제시하 는 극도의 제약, 가차 없는 물질주의, 영적인 궁핍보다는 비록 퇴색 되 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2007).
이러한 서양 학자들의 논평과 같은 견해가 중국 학자들에게서도 나 타난다. 예를 들면 칭화대학의 얀 쉐통(Xuetong Yan 2007) 교수는 최근 “소 프트파워의 핵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힘이며, 이는 내적· 외적인 정치적 동원 능력을 포함하는 정부의 전반적인 동원능력을 지칭 하는데, 이 또한 국가의 신용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공공외교를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역사적 경험 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중국은 중국의 사상과 자원 그리고 공공외교와 관련된 문제점들을 탐구하여 중국적 특성을 갖는 체계적인 공공외교 전 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대강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목표 : 자신감 있고, 믿을 수 있고, 협력적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중국이란 이미지가 바로 중국 공공외교가 목표로 삼아야 할 기본적인 목표이다. 이 이미지는 중국의 “부유하고, 강하고, 민주적이며, 문명화된 책임감 있는 국가”라는 장기적인 발전목표 달성에 도움을 줄 것이다(Wen 2007). 중국의 공공외교는 국가발전 전략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국제 사
회에서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부정적에서 중립적으로, 나아가 긍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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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점차 바꿔야 할 것이다. 2. 수단 : 중국 공공외교의 핵심은 친밀하고 민주적인 정부라는 이 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해외에 주재하는 중국 정부기관은 우선 모든 중국 시민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것이다. 둘째, 문화 교류와 방송 등을 통해 중국 이미지에 대한 홍보활동을 해야 한다. 방송의 경우 해외 중국 교포, 유학생, 중국에 투자하고 있는 외국계 기업 등의 도움을 받 아 각국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중국 뉴스와 각종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창조적인 중국(Creative China)”활동과 문화 마케팅 활동 은 모두 활기차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인도주의적인 중국의 이미지 를 만드는 동시에 중국이라는 브랜드 구축을 도와줄 것이다. 3. 초점 : “오늘날 중국의 국제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미국 미디어 에서 악마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리우 강(Liu Kang)의 주장을 고려할 때 (Global Times 1999), 중국 공공외교는 중국에 비우호적인 미디어들이 조성
한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 전 세계의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미 국과 유럽의 각종 미디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중국은 자신의 목소 리를 내기 위해 유엔과 같은 다자 협상 무대를 충분히 활용해야 할 것이 며, 비정부기구와 세계 시민사회와 의사소통에 능숙해지도록 지속적으 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외교에 관한 전통적인 역설을 깨고, 국 내 이슈를 수동적으로 연루시키는 차원을 넘어 능동적으로 국제 이슈에 개입하면서 중국은 ‘책임 있는 강대국’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조직 : 중국의 외교 시스템 속에 공공외교가 통합되고 조정될 수 있도록 조속히 외무부 차관이 공공외교와 공보 담당을 맡아서 중국 외 교 자원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은 국제 커뮤니케이션을 전 담할 국무원 정보국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중국은 중국 인민 대외우호협회(Chinese People’ s Association for Friendship with Foreign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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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AFFC)
같은 비정부단체를 활용해야 한다.
결론 : 소프트파워에서 평화로운 부상으로
중국이 국제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과 어려움 들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공공외교 정책을 취하도 록 했으며, 공공외교의 실천을 국가 전략의 핵심에 올려놓았다. 성공적 인 중국의 공공외교를 위한 장기적인 도전은 중국적 트렌드(trend)와 서 구적·미국적 트렌드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즉 중국은 자 신의 방식대로 스스로를 표현해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세계가 이해할 수 있고 원하는 방식으로도 스스로를 표현해야 한다. 미국과 비교했을 때 중국은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공공외교 전략이 더욱 필요하며, 공공외 교를 수행하기 위해 현대적인 매체와 수단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중국의 부상은 이제 단순히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브랜드 수준을 넘어 “창조하고 선도하는 중국(Create/Initiate in China)”이라는 역동적인 브 랜드로 전환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중국의 발전은 중국의 기준, 중국 의 브랜드, 중국 경제력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는 중국 공공외교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또한 비즈니스적인 필요란 관점에서 도 중국의 공공외교가 새로운 방식의 연구와 관행을 모색함으로써 많은 잠재적인 이득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공공외교는 중국의 부상에 있어 다음과 같은 세 역할을 담당한다. (1) “대외선전”에서 공공외교로의 전환은 중국에 호의적이고 조화로운 국제환경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이 부상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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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매제가 될 것이다. (2) 공공외교는 21세기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이미지 를 창조하고 중국의 부상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중국의 매력과 친절 함을 세계에 보여줄 것이다. (3)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구축하고 중국의 부상을 하드(hard)한 것에서 소프트(soft)한 것으로 바꿔주면서(즉 시장만이 아니라 규범 측면에서도 부상하며, 상품만이 아니라 가치 면에서도 부상)
공공외교
는 중국의 부상과정에서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다. 중국의 평화적인 발전은 회복과 근대화 달성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공공외교는 국가 이미지와 소프트파워를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방 법이 된다. 중국의 목표는 과거 조공체계 하에서의 영화를 다시 회복하 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사고를 국가발전의 목표로 삼는 것이 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은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덕에 의한 지배”를 옹호했다. 따라서 중국은 성공적인 공공외교를 통해 중국의 소프트파워 를 더 잘 구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국력에 대한 이해의 폭 을 높여 소프트파워(soft power)에서 평화로운 부상(soft rising)으로 역사적 인 전환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부상은 이제 단순히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브랜드 수준을 넘어 “창조하고 선도하는 중국(Create/Initiate in China)”이라는 역동 적인 브랜드로 전환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용이하게 했다. 이와 비슷하 게 중국 소프트파워의 부상은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의 공동부 상에 의한 세계 다원화 추세의 덕을 보고 있다. 세계는 현재 전환기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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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책임 전가에 대해 비난 을 받게 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중국의 비약적인 부상은 중국을 희망의 대상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중국의 이미지는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서 6자회담을 여섯 번 주최하면서 상당히 증진된 반면, 미국의 이미지는 이 라크 침공과 안정화 실패로 크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중국 소프트파워의 부상이 단지 미국 소프트파워의 쇠락 때문이라고 본다면 너무도 단순한 생각이다. 실제로 세계화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미국과 중국, 두 국가 모 두 세계화를 추동한 핵심 세력인 동시에 세계화의 주된 수혜자라고 비난 하고 있다(Dombey and Pignal 2007). 미국과 중국 양국 간 건전한 경쟁이 존 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두 국가는 궁극적인 “Win-win” 상황의 이득을 누릴 수 있도록 조화로운 세계를 구축하기 위 해 협력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중국은 국제체제에서 책임감 있는 구성 원으로서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국제 사회를 만족시키거나 적어도 국제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평화로운 부상”을 이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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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Asia Times의 알렉스 버코프스키(Alex Berkofsky)는 “그러나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1990년에 나이 박사가 도입한 기존의 소프트파워 개념과 관련성이 없다”고 말한 바 있 다. Alex Burkofsky, “China : The Hard Facts on Soft Power,” Asia Times, May 25, 2007. 2. http://book.qq.com/a/20061205/0000034.htm을 참조할 것. 이에 따르면 90%의 중국 인들이 용을 중국의 상징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 다. 3. http://www.olympic.cn/news/olympic_comm/2007-11-07/1300603.html을 참조할 것. 4. http://www.thepetitionsite.com/4/boycott-the-2008-beijing-olympics을 참조할 것 5. http://www.hanban.edu.cn/en_hanban/kzxy.php.을 참조할 것 6. Yiwei Wang(2006, chap. 16)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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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공공외교 : 학문 분야로의 부상
브루스 그레고리 Bruce Gregory
공공외교는 분석적 경계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는 정치적 도구이긴 하지만 과연 이것을 하나의 학문분야로 볼 수 있는가? 국가와 국가의 연합체, 비국가 행위자들은 공공외교를 문화와 태도,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관계를 맺고 관리하 기 위해, 그리고 이익과 가치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의견과 행위에 영향을 주 기 위해 사용한다. 이 논문은 보통 의도하지 않았지만 공공외교 연구와 의미 있 는 연관성을 갖는 학계의 활동과 공공외교 현장에서 도출된 분석적이고 정책적 인 문헌들의 검토를 목적으로 한다. 20세기 냉전시대와 냉전종식 후의 이념, 전 쟁, 글로벌리즘, 기술, 정치적 압력, 그리고 전문가적인 규범들이 공공외교의 수 행방식을 결정했고, 학자들과 현업 종사자들이 작성한 저술들에 영향을 미쳤다. 21세기에는 더욱 심화된 세계화 추세와 네트워크 구조,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 공공외교와 관련된 학계, 거버넌스 구조, 국가 주도의 공공외교라는 성격을 변 화시키고 있다. 분석틀에 대한 합의 가능성과 상당한 양의 학문적·실무적 저작 들의 존재는 새롭게 등장하는 이 학문분야의 미래를 밝게 하고 있다. 핵심어 : 공공외교, 학문분야, 학자, 현업 종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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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외교가 학문의 분야가 되고 있다는 명제는 종종 두 가지 반응 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는 공공외교의 의미가 진화하고 있지만 아직 공공 외교의 분석적 경계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 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학문분야로서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려내기가 어려 워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국정운영의 도구로서 공 공외교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또 관련 문헌들 대부분을 공공 외교 실무자나 특정 정책에 대한 옹호자들이 썼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과 연 이를 학술적인 연구로 볼 수 있는지, 공공외교에 하나의 학문분야라 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학술적인 저작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반응은 모두 장점이 있다. 공공외교가 프로파간다(선전)의 신호체계인지 아닌지에 대해 분석가들과 실무자들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공공외교는 문화외교를 포함하는가? 또 공공외교는 공보 (public affairs)나 홍보(public relations, PR)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다양한 이
해관계자들이 활동하는 세계화 시대에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 가 더 유용한 것 아닌가? 공공외교와 관련된 다양한 학문분야의 학문적 인 연구기록은 충분하지만, 최근까지 공공외교에 관한 직접적인 학술자 료나 연구가 거의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Lord 2005). 이 글은 공공외교와 타당한 연관성을 갖는 학계의 활동과 공공외교 현장에서 도출된 분석적이고 정책적인 문헌들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 로 한다. 이는 방대한 자료에 대한 요약이나 평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 히려 새로운 학문분야 발전에 있어서 학자들과 실무진들 사이의 보다 광 범위한 공동작업 기반 제시를 목적으로 한다. 이 과정에서 크게 두 가 지 가정을 하려고 한다. 첫째, 이념, 전쟁, 글로벌리즘, 기술, 정치적 압력, 전문가적인 규범이 학문적·실천적 탐구를 형성했다. 둘째, 학자들과 실 무 담당자들의 작업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로 별도의 경로를 밟으면서 발 전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학계에서도 공공외교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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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이는 추세이고, 실무진에서도 학문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수가 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학문영역의 교육, 연구, 실무 영역에서의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공공외교의 정의
공공외교라는 말은 1970년대 미국의 외교관들이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 프로파간다라는 말을 대체하기 위해 채택한 것으로서, 미국 정 부의 국제적 정보 및 문화활동, 방송활동 전반을 통칭하는 개념이었다 (Cull 2006 ; Roberts 2006, 1994). 30여년이 지난 후 오늘날 이 용어는 전 세계
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 각국 정부는 규모가 크든 적든 공공 외교 전담기관을 설립했다. 정치지도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목적을 위해 공공외교를 활용하고 있다. 분석가들은 공공외교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 히 무엇인지에 대해 열심히 논의하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이해관계와 정치가 이슈를 형성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1990년대 세 계화된 탈냉전 시대, 공공외교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던 미 국인들은 9/11 이후 전 세계에 만연한 반미정서와 테러리즘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공외교가 가지는 적절성에 대해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 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공공외교 를 통해 자국의 경제를 향상시키고, 자국의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투사하 며,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공외교에 관한 미국의 담론에 대해 세계가 보여준 열렬한 최초의 관심은 이라크 전쟁을 비롯하 여 미국의 말과 행동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를 목격하면서 점차 수그러들 고 있다(Melissen 2005 ; de Gouveia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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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공공외교에 대한 생각과 의견은 이익, 가치, 정체성, 기억, 전 략지정학(geostrategic) 맥락 등의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현재 일어나고 있 는 갈등이 항상 우리 생각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기 마련이고, 공공외 교는 전쟁의 원인 및 결과와 확실하게 관련이 있다. 국가 및 비국가행위 자들은 거버넌스, 경제성장, 민주주의,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 국경을 사 이에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위협과 기회 등과 같은 다양한 이슈를 이해 하고, 이에 관여해 영향을 미치기 위해 공공외교를 활용하고 있다. 공공외교의 목적과 개념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다양성에도 불구하 고, 공공외교는 분석적 경계가 있고 나름대로 독특한 특징을 지닌 정치 적 도구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공공외교는 국가와 국가 연합체, 비국 가 행위자가 문화와 태도 및 행위를 이해하고 관계 형성과 관리를 위해, 그들의 이익과 가치를 증진시키고 대중의 의견과 행동에 영향을 주기 위 해 사용하는 각종 방식과 수단을 지칭하는 말이다. 정치행위자들도 정 치적 선택의 결과를 이해하고, 정치 의제를 설정하며, 시민사회의 각종 담론에 영향을 주고, 비용, 리스크, 편익 간의 균형을 필요로 하는 전략 들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공공외교를 활용한다. 따라서 공공외교는 광범위하게 정의된 ‘거버넌스’에서 사용되는 커뮤 니케이션 수단인 것이다. 즉 공공외교는 교육, 저널리즘, 광고와 홍보, 브 랜드 전략 또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동원하는 다 른 수단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공공외교는 시민사회로부터 방법과 담론 규범을 가져오고, 공공외교의 성공 역시 시민사회와의 견고한 관계에 달 려있다. 열린 커뮤니케이션의 한 종류로 진실성과 신뢰성으로부터 실질 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공공외교는 도입된 규범(예를 들어 학문 적 교류에 있어서 학술적 성과에 따라 결정을 내리거나 국제방송에서 저널리즘의 가 치를 존중하는 것 등)을
보호하는 구조적 장치나 정치행위자들이 활용하는
비밀 수단이나 속임수 기법 등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할 수 있는 방어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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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로 한다. 공공외교는 행위, 관계, 이미지, 언어를 통해 시간별 뉴스 흐름, 중요 정책에 관한 중기적인 캠페인, 그리고 장기적 관여라는 세 가 지 시간틀 속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개념틀은 제안 차원으로 학문분야 의 분석적 경계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윌슨과 레닌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1920년대는 현대적 의미의 공공외교에 대한 연구의 유용한 시발점으 로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세계 질서를 끝내고 우드로 윌 슨의 14개 조항, 국제연맹,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독일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20세기 중반의 지정학을 결정한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산업시대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통해서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빅 아이디어”를 이 용해서 다른 나라의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태도와 행동에도 영향을 주려고 했다. 전신전보, 단파 라디오, 해저 케이블 등을 가지고 각국 정 부는 외국의 외교부는 물론 다른 나라의 국민들과도 직접적으로 커뮤니 케이션할 수 있었다(Roberts 2006 ; Wasburn 1992 ; Nickles 2003). 이는 월터 리 프먼(Lippmann [1992]1997)이 썼듯이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처음으로 “인 류의 모든 결정요인들이 같은 사상이나 적어도 사상에 대한 같은 이름 들에 대해 동시에 생각할 수 있도록 동원될 수 있었다. 케이블, 라디오, 전신, 일간 신문이 없었다면 윌슨의 14개 조항 실험은 불가능했을 것이 다”(p. 133). 제1차 세계대전은 또한 문화외교를 통한 관계구축과 관리에 대한 연 구의 발판의 역할도 하고 있다. 현대전의 공포와 미래의 전쟁을 방지하려 는 간절한 바람은 교육 및 과학기술의 교환을 통한 글로벌 문화 관계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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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관심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정부의 공보 및 문화부 서에서 공공외교를 담당했던 유럽식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당초 공공외교를 민간 주도의 자선단체 및 교육기관에 의존했다. 카네기 국제 평화재단(the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록펠러 구겐하임 재 단(the Rockefeller and Guggenheim Foundation), 국제교육협회(the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ducation)등이
미국의 공공외교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기관들
이다. 1930년대 독일, 소련, 일본에 의한 공격적인 문화외교는 미국이 더 이상 시민사회 주도의 공공외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 했다. 민간의 자발성은 정부의 자본지원 필요성과 더 체계적인 접근법의 필요성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1) 자체 심사라는 자유주의적 규범과 학문적 정직성을 지키기 위한 대학 및 민간기관에 의한 실행, (2) 의회에 의한 자금지원, (3) 공공외교의 과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던 기 관들의 계승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 혼합 문화외교 모델을 채택했다.
현대전의 공포와 미래의 전쟁을 방지하려는 간절한 바람은 교육 및 과학기술의 교환을 통한 글로벌 문화 관계 육성에 대한 관심을 널 리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정부의 공보 및 문화부서에서 공공외교 를 담당했던 유럽식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당초 공공외교를 민간 주도의 자선단체 및 교육기관에 의존했다.
조직적인 국가주도 공공외교의 근간을 이룬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학문영역은 프로파간다 연구와 리프먼(Lippman)과 존 듀이(John Dewey)
간의 논쟁을 포함한다. 프로파간다에 관한 연구물은 상당히 많
다. 그 중 한 접근법은 프로파간다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연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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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Brown, 2006 ; Hueber 1968, 197-200). 프로파간다를 적대적이거나 숨 은 의도가 있는 정치적 옹호(Smith 1989), 기술발달에 따른 불가피한 결 과(Ellul 1965), 국가 관료제의 엘리트화에 의한 조작적인 결과(Herman and Chomsky 1988)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프로파간다를 모
든 정치행위자들이 목적 달성을 위해 활용하는 중립적인 도구로 간주하 며(Bernays [1928] 2005) ; Lasswell [1936] 1958, 1980 ; Taylor 2003), 이에 대한 정 치적·도덕적 판단은 목적 그 자체의 평가에만 국한시킨다. 동기, 정보원, 의도, 방법, 내용 설명(descriptive label), 역사적 맥락, 인식, 관찰자들의 정 치적인 견해 등이 초기 프로파간다 연구의 유형 분류체계와 규범적 판단 의 근간을 형성했다. 이들은 모두 오늘날 공공외교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공공외교에 대한 지속적인 관련을 갖는 다른 학문적 연구는 여론 (public opinion)에
대한 리프먼의 저작들(Lippmann [1922] 1997)과 리프먼의
엘리트 주도 정치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대해 존 듀이가 제기한 담론 기 반(discourse-based)의 이의 제기(Dewey 1922, [1927] 1954), 그리고 이 두 학자 가 향후 미디어 및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미친 영향에서 그 토대를 찾을 수 있다. 리프먼은 시간 제약과 인식 한계로 인해 고정관념 없이는 대중 들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외부 세계를 현대의 기술이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대중들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데 정치 지 도자들이 무슨 수로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정치적 동의를 얻어낼 수 있 단 말인가? 리프먼은 이에 대한 해답이 대중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협 조를 얻고, 그들의 행동과 의견에 영향을 미치려고 믿을 수 있는 상징을 이용하는 신임을 받는 권위체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있다고 했다. 윌슨 의 14개 조항의 주 저자이자 저널리스트였고, 대통령 보좌관이며 20세기 의 위대한 지식인 중의 하나였던 리프먼은 학문세계와 실제세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의 저작은 수십 년간 미디어 연구 및 여론조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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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을 미쳤으며, 필립 컨버스(Philip Converse)의 중요한 통계적 기법 및 대중의 신념체계에 관한 기타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Holsti 1996 ; Noellec-Neumann 1984 ; Bennett 2006).
또한 리프먼의 연구는 공공외교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대중의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그의 평가와 정치 커뮤니케이션 영향력 모델(influence model)에서 그의 기 여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저작이 오늘날 공공외교에 관한 과목에서 핵심 문헌으로 빈번하게 포함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 니다. 듀이(Dewey)는 리프먼을 존경했다. 그는 리프먼의 커뮤니케이션 혁 명, 여론에 관한 심리학적 모델 등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리 프먼의 “하향식(top down) 모델”은 강하게 반박했다. 듀이에게 있어 진실 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정보는 ‘주고받기 식(give and take)’ 토론을 통해서 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었다. 듀이는 전문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지만 과학공동체이든 정치공동체이든 어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지식은 대 화를 통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도 틀릴 수 있으며, 이 기적인 이유로 대중을 호도할 수도 있다. 또한 여론을 형성함에 있어 감 정과 상상이 정보와 이성보다도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결과적으로 ‘대화’가 공적인 영역에서 매우 중요해지며, 언론은 대중의 태도를 형성할 아이디어를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를 촉진시 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듀이의 “상 향식(bottom up)” 모델은 대화와 상호 이해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듀 이의 견해는 후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사상 및 커뮤니케 이션 행위 이론(the communicative action theory)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리 프먼의 연구가 공공외교에 있어서 도구적 커뮤니케이션(instrumental communication)의 기반을 마련한 것과 같이 듀이와 그를 추종했던 학자 및 시
민사회 운동가들은 공공외교 참여와 담론의 논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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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시기에는 현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쓴 출간물들이 연구의 다른 축을 형성했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문헌들은 강점과 약 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실무자들은 현장과 밀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학자들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 워하는 사건과 조직문화의 미묘한 부분까지도 이해가 가능하다. 동시에 이러한 밀접성은 부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몇몇 실무진들이 쓴 저작은 본질적으로 그저 한 개인의 커리어를 일기로 남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 는다. 어떤 이들은 관료사회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자신의 출판물을 이용하기도 하고,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조직을 대표하 겠다는 마음에서 맹목적으로 조직 옹호에 전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 한 맹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경험을 통해 습득한 통찰력 있는 분석 을 제공하고, 대상으로부터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또 이들 저작 중 일부는 한때 정부 기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학자가 쓴 경우도 많이 있다. 미국 정부의 국제 문화·정보·방송 조직은 전쟁이나 전쟁의 위협 이 있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크릴위원회(the Creel Committee), 국무부의 문화국(the State Department’ s Bureau of Cultural Affairs),
미 대륙 간 업무조정관 사무소(the Office
of the Coordinator of Inter-American Affairs), Information)가
생겨났고,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미국의 소리 방송(the
Voice of America), Agency),
전쟁정보 사무소(the Office of War
그리고 냉전기에는 미 해외공보처(the U.S. Information
자유유럽방송(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 RFE/RL) 등이 설립되
었다. 전쟁과 같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이들 모두의 공통분모였다. 그러 나 국내 정치적 압력과 미국 국정운영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각각의 조 직이 조직의 목표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법을 택하게 했고, 각 조직의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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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관련하여 우선순위 선정과 조직 설계에 대한 열띤 토론을 불러일 으켰다. 또한 각 조직은 시민사회로부터 운영방식과 규범 등을 도입했다. 교육·과학·예술 공동체 등의 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미국의 문화외교 는 민간조직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으며, 정부의 지속적인 자금지원 이 외에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려고 했다(Mcmurry and Lee, 1947 ; Thomson and Laves 1963 ; Frankel 1966). 국제방송은 뉴스 취재와 보도에 있어서 민간
저널리즘의 관행을 도입했다. 초기의 활동양상은 정부와의 경쟁을 꺼려 하는 상업방송국들의 두려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던 정치지도자들은 국내의 압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저널 리즘의 규범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쓰면서 해외방송에 대해 열광적인 반 응을 이끌어내기를 희망했다(Shulman 1990 ; Gregory 1970 ; Heil 2003, 32-57). 광고 및 홍보산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미국의 언론 및 홍보기관은 미 디어와 홍보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기존의 외교부 문화와 마찰을 빚었 다(Thomson 1948 ; Barrett 1953 ; Lawson and Gregory 1970). 이렇게 역사적·규 범적 차이가 불명확한 정부의 역할, 비항구적인 다수의 조직들, 높은 직 업적 충성도와 협력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동시에 갖는 조직문화를 주된 특징으로 하는 공공외교에 대한 독특한 미국식 접근방식을 만들어냈다.
냉전기
냉전시대의 전략과 정치는 이전과 크게 달라졌지만, 국가 주도 공공 외교의 두 가지 근본적 특징에는 변화가 없었다. 첫 번째 특징은 공공외 교 추진의 원동력이 외부 위협이고, 두 번째 특징은 정부기구는 다양한 전문성이 있으며 정치적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학문 분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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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공외교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활동은 정부보고서와 의회 청문회 문 서와 같은 실무진에 의해 작성된 자료들의 도움을 받았다. 공공외교라는 학문적 연구를 발전시키려는 초기 노력들은 공공외교에 관심을 두고 있 던 몇몇 학자들의 연구와 미국의 대학에서 짧게나마 복무한 경험이 있는 소수의 외교관들의 강의와 저술을 통해 이루어졌다(Roth 1984 ; Staar 1986 ; Tuch 1990).
냉전시대의 공공외교와 특별히 관련성이 높은 학문분야로는 여론조 사연구, 문화인류학, 사회심리학, 미디어 및 정치 커뮤니케이션학, 그리고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 등이 있다. 주로 국내 여론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여론에 대한 학문적 연 구가 외교정책분야에서 진행되고, 이와 같은 여론조사가 미국 정치에 활 용되자 미 국무부와 공보처에서는 작게나마 여론조사 연구팀을 만들었 다(Holsti 1996, 13-21, Kull and Destler 1999, 9-12 ; Hinkley 1992, 3-7). 의회가 지 속적으로 외국에 대한 여론조사에 대해 자금지원을 했지만 그 액수는 매우 적었다. 많은 외교관들이 여론조사의 가치를 인정하긴 했지만 이 를 공공외교 전략에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외 여 론조사의 불편한 결과나 경향이 보다 많은 교환 프로그램이나 해외 방 송 또는 기타 활동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학자들은 여론과 정책 간의 관계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들리 칸트릴(Hadley Cantril), 조지 갤럽(George Gallup), 에버렛 칼 라드(Everett Carl Ladd), 아서 닐슨(Arthur Nielsen), 유진 위트코프(Eugene R Wittkopf),
대니얼 얀켈로비치(Daniel Yankelovich) 등 미국의 선도적 여론조사 기관들 은 외국의 여론을 이해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접근법에 관심을 보였다. 당시 갤럽과 닐슨은 현재 미 공공외교 자문위원회의 전신인 미 정보자 문위원회의 구성원이었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이들이 작성한 연례 위원 회보고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된 것은 바로 외국 여론과 미디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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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정책 수립과 정책 커뮤니케이션에 활용해야 한다는 권고사항이었다. 여론조사는 공공외교의 실행과 관련이 있지만 밀접하지는 않은데 국제관계의 문화와 심리에 대한 연구도 공공외교에 있어 여론 조사와 비 슷한 역할을 한다. 학자들은 분쟁해결과 미국과 소련 간 경쟁에 있어서 의 심리학적 요인들에 대해 연구했다(Kelman 1965 ; Klineberg 1964). 이들 은 국제관계와 의사결정 이론들의 심리학적 차원에 대해 체계적으로 저 술했다(Janis 1982 ; Jervis 1976). 그들은 국가의 문화 및 하위문화에 대해 평 가하고, “국제관계의 문화적 정의”를 모색했다(Iriye 1997, 8-9, 131-176). 학 자로서는 물론이고 외무부 관리로서도 신망이 높았던 글렌 피셔(Glen H. Fisher)는 이러한 이론적 연구의 가치에 대해 많은 글을 썼으며, 학자들의
추상적 연구와 실무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 사이의 큰 간극에 탄식했다. “공공외교”라는 말을 처음으로 제목에 사용한 학술서적(Cull 2006)을 포함 한 그의 저작들은 외교 담당자들이 실제 업무수행에서 갖는 마음가짐과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정당화시키면서 이론과 실제의 간극 을 메우려고 노력했다(Fisher 1972, 1988). 선출된 공무원들과 기업, 비정부 기관 활동가들은 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수단 으로 수십 년 동안 여론조사와 문화분석 기법을 사용해오고 있다. 태도 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이러한 다양한 시도는 비록 아직까지도 공공외교 의 주된 연구분야는 아니지만 지속적인 관심 아래 계속 늘고 있는 추세 이다. 프로파간다에 대한 연구와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미디어와 커뮤니 케이션학 역시 상당한 관련성이 있었다. 캐나다 출신의 두 학자, 마샬 맥 루한(Marshall Mcluhan)과 해롤드 이니스(Harold Inis)는 학계와 진보적인 실 무자들 모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지구촌(global village)”이나 “매체가 곧 메시지다(medium is message)”라는 등의 개념으로 유명한 맥루한의 이 론들은 한 시대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1960년대에는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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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제임스 캐리(James Carey 1989)는 이니스의 연 구야말로 “이 대륙에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했다. 이니스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변화는 이익구조, 상징의 성격, 공 동체 속성 모두를 변화시켜 문화를 바꾼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공동체 란 장소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상징, 형식, 이익 등에 의해 연결되어 원 거리에서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Carey 1989, 142, 160).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필립스 데이빗슨(W. Phillips Davison) 엘리후 카츠(Elihu Katz), 폴 라자펠드(Paul Lazarsfeld), 해롤드 라스웰(Harold Lasswell) 루시엔 파이(Lucien Pye), 이델 드 솔라 풀(Ithiel de Sola Pool), 윌버 슈람(Wilbur Schramm)
등과 같이 상당한 역량을 가진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의
사소통 과정과 대중매체의 힘,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갖는 한계 등에 대해 통찰력 있는 분석을 했다(Davison 1965, 1974 ; Katz and Lazarsfeld 1955 ; Lasswell [1936] 1958, 1980 ; Pool 1963 ; Pye 1963 ; Schramm 1980). 이들이 내놓은 커뮤니케이션의 2단계 이론(the two step flow theory),
주의 깊은 대중과 소극적인 대중, 미디어와 구전 커뮤니케이션의
관계, 거리와 문화적 차이가 미치는 영향, ‘미디어가 수용자의 태도를 바 꾸기보다는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등의 내용은 많은 USIA 종사자들 의 기획, 프로그램, 우선순위 선정 등에 영향을 끼쳤다(Carter 1970 ; Dizard 2004 ; Fulton 1980 ; Crespi 1974).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하나인 위르겐 하버마스 는 공공외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방대한 학술 문헌들을 집필했다. 1962년의 공공 영역에 관한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을 시작으 로 규범에 근거한 의사소통 행위에 대한 그의 “이상적 담화(ideal speech)” 모델은 미디어와 시민사회에 관한 사고 자체를 바꾸었다(Habermas [1962] 1989, [1992] 1998 ; Calhoun 1992 ; White 1995).
그의 이론은 거버넌스와 정치
적 의지 형성에 관한 숙의적(deliverative 심사숙고 한다는 의미)이고 도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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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담론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그의 사상은 실무자들이 문화와 태도에 대한 이해, 문화 간 대화, 인적교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에서의 공통점 찾기 등의 중요성에 대한 근거를 제공했다. 학자와 실무자들은 21 세기 정보 환경과 정치 및 공공외교분야에서 숙의적 가치와 비숙의적 가 치 사이의 연계성을 검토하는 데 하버마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 다(Dahlgren 2001 ; Gregory forthcoming). 실무자들이 냉전기 공공외교에 대해 쓴 저작들은 크게 (1) USIA와 대안적인 제도 모형과 같은 조직 연구와 (2) 문화외교 및 국제방송에 있 어서 미국과 소련의 경쟁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 분류할 수 있다. 전직 실무자들이 수행한 USIA에 대한 수많은 연구는 진화해 가는 임무, 기능, 구조, 해외활동, 민간부문과의 관계, 워싱턴에서의 관료적 투 쟁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Dizard 2004 ; Tuch 1990 ; Malone 1988 ; Green 1988 ; Henderson 1969 ; Sorenson 1968).
USIA의 역할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시간
이 흘러 보관 문서 기록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지면 더 많이 이루어질 것 으로 기대된다(Cull forthcoming). 과거와 같이 이러한 두 범주의 연구는 모 두 미국의 “프로파간다” 부서에 대한 혐오, 예산 삭감과 조직 재편 제안, 그리고 공공외교 담당 부서의 조직 문화 갈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 졌다. 토론은 대개 USIA를 (1) 해외에서 수행하는 정보 및 문화활동 (문 화활동의 경우 1977년까지 국무성에서 관할했다), (2)
워싱턴 기반의 홍보 및 언
론활동, (3)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의한 국제방송, (4) 자주 있는 일은 아 니지만 대통령, 국가안전보장위원회, 국무장관에 대한 자문역할 등의 책 임을 가진 독립기관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조직 차원 에서 항상 제안되는 대안은 기본적으로 USIA의 언론 및 홍보 활동은 유 지하면서 독립적 방송 조직을 만들되, 문화 프로그램은 스미스소니언 협 회나 의회도서관 같은 다른 정부 기관 혹은 준정부 기관 산하에 두자 는 방안을 약간씩 변형시킨 것이었다. 미국이 어느 정도까지 조직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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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문제와 공공외교에 투자할 것인지에 관한 토론은 의회 예산 청문회에 서 자주 일어났고, 이에 대해 이례적일 만큼 전반적인 검토가 미 공공외 교 자문위원회와 그 전신 기관인 정보·국제교육·문화위원회, 단테 파셀 (Dante B. Fascell)이 이끄는 감시 청문회, 1975년의 전 CBS
사장 프랭크 스
탠톤(Frank Stanton)이 이끄는 패널, 임시 자문위원회의 보고, 미국 대학에 서 짧은 기간 근무하면서 발행한 몇몇 외교 현업 종사자들의 보고서 등 을 통해 이루어졌다(U.S. Congress 1977 ; U.S. Advisory Commission on Information 1977 ; Panel on International Information, Education, and Cultural Relations 1975 ; Roth 1984).
냉전기 미국 공공외교 수행의 두 번째 범주와 관련된 저작은 주로 미국과 소련 간의 이념 대결에 초점을 두었다. 몇몇 연구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주목하거나, USIA와 국무부의 문화적 활동에 주목했다(Heil 2003 ; Arndt 2005 ; Richmond 2003).
또 다른 연구진들은 자유유럽방송(RFE/RL)에
의해 행해지는 대리 방송과 문화자유위원회(Congress of Cultural Freedom)의 수많은 정보 및 문화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두 기관은 20년 이상 CIA가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한 조직이다(Nelson 1997 ; Dizard 2004, 139-44). 미국과 소련의 자료 보관소가 공개되면서 학자들은 실무적인 내용을 담 은 문헌을 많이 저술하고 있다(Caute 2003 ; Pells 1997, 64-82).
글로벌리즘, 네트워크, 거버넌스
20세기는 냉전시대를 전후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지만 공공외교를 연구하고, 실행하는 데 근간이 되는 중요한 요인들은 거의 비슷했다. 우 선 국가가 국제관계를 주도했으며, 비국가 행위자들의 역할은 거의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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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적 세계관 사이에서 “거대사상(big ideas)”들이 세속의 우위를 놓고 다투었다. 두 시기 모두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시스 템은 아날로그 기술을 사용했다. 계층구조가 정치 및 사회의 주된 구조 였으며, 국가의 군대들이 산업시대의 무기를 가지고 전쟁터에서 싸움을 했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었다. 여전히 국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관 행적이다. 물론 국가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과거와 같지 않다. 현재 많은 형태의 거버넌스가 국가 위, 아래,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다(Scholte forthcoming ; Keohane and Nye 2000).
한층 더 심화된 글로벌리즘, 비국가 행위
자들,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거대사상’의 다양한 조합, 정치·사회적 네트 워크, 디지털 기술, 그리고 시민사회 안에서의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의 세력다툼과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은 과거의 세계 질서를 변형시켰다. 인 간의 필요 및 욕구는 점차 국가와 국가 하위조직, 그리고 민간부문의 조 합에 의해 충족되고 있다. 정보가 아니라 관심(attention)이 희소자원인 다 양한 새로운 행위자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공공외교가 일어나고 있다 (Nye 2002, 2004). 네트워크 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이 기존의 조직적 계층구
조에 도전하고 있다(Castells 1996). 이 모든 것으로 인해 거의 한 세기 전 인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가 주도적인 공공외교의 모델의 등장과 비견 될 수 있는 커다란 변화가 공공외교에서 생겨났다.
정보가 아니라 관심(attention)이 희소자원인 다양한 새로운 행위자 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공공외교가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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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공외교의 영역에서도 여론조사나 사회적 네트워크 분석 및 인터넷 마이닝(mining)과 같은 새로운 도구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 문 화인류학과 사회심리학, 그리고 의사소통적 행동 이론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최근의 정체성 이론과 구성주의 미디어 프레이밍, 정치 커뮤니케이션, 거버넌스와 힘, 외교 등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 역시 공공외교에 가지는 의미가 크다. 문명이 탈냉전기 시대의 갈등 및 정체성의 주된 원천이 될 것이라 는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견해는 국가의 상호작용하는 맥락 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문화와 종교가 경제적 이익과 세속적 이데올로기 를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그의 이 론에 대해 반대의견도 많은데, 주된 근거는 같은 문명권 안에서도 갈등 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과 사람들은 이성적 선택, 국민성, 입지, 계급, 직업, 사회적 지위, 언어, 젠더, 정치, 다른 많은 조건들에 의해서 결정되 는 다중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점이다(Sen, 2006). 국제관계 연구에서 사 상과 문화, 규범, 정체성, 공유된 신념체계 등을 강조하는 혁신적이고 영 향력 있는 구성주의 이론은 정치행위자들의 전략 및 그들의 공공외교가 갖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 통찰력있는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Lord 2005 ; Katzenstein 1996).
새로운 세대의 미디어 및 정치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급진적으로 변화된 미디어 환경과 정부 및 시민사회 행위자들이 커뮤니케이션 전략 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 주목해 연구하고 있다(Iyengar and Kinder 1987 ; Bennett and Entman 2001 ; Bennett 2007).
미디어 프레이밍이란 개념은
색인 모델(indexing model, 엘리트 간 의견 불일치와 관련된 뉴스 프레임), 헤게모 니 모델(hegemony model, 대중들의 논의를 제한하는 정부의 뉴스 전략), 사건 위 주의 뉴스(event-driven news)를 포함한다. 정치학자 로버트 엔트만(Robert Entman 2004, 4-22)은 이 프레임 이론을 자신의 “캐스케이드 활성화(casc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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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공공외교
activation)”
모델을 통해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 모델은 아이디
어를 공식적으로 프레이밍하기 위해 다투는 과정과 이런 프레임이 어 떻게 정치지도자와 엘리트, 미디어, 대중에 의해 지지 및 반박되고, 또 한 변화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 는 초국가적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전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Keck and Sikkink 1998 ; Tarrow 2005 ; Bob 2005).
테러리즘과 이라크 전쟁이
정부와 미디어, 대중 간의 관계에 관한 21세기의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Norris, Kern, and Just 2003 ; Bennett, Lawrence, and Livingston 2007).
이런 연구
가 공공외교에 던지는 질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과연 프레 임 분석(framing analysis)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초국가적 활동 가들이 사용하는 방식 중 어떤 것이 정부에게도 유용할까? 국내 및 해 외 청중들에게 성공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전략을 정치지도자들이 어떻 게 개발할 수 있을까? 거버넌스와 힘에 관한 연구(Held and McGrew 2002 ; Keohane and Nye 2000)
또한 공공외교에 대해 중요한 이슈를 제기한다. 거버넌스가 점차
로 글로벌 및 지역 차원의 기구나 지방정부 간 연합체, “국가 내의 국가” (예를 들어 퀘벡이나 쿠르디스탄), 시민사회에서의 비국가 행위자들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국가 주도의 공공외교가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Scholte forthcoming)? 이밖에도 조셉 나이(Joseph S. Nye)의 하드파워 및 소프트파워(양자 사이의 관계는 정비례나 반비례 할 수 있으며 최근 에는 스마트파워란 라벨 속에 포함되어 있음)란
개념들도 지속적인 연구가 필
요하다. 좁은 의미로 정부가 가진 소프트파워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사 회가 자신들의 문화, 가치, 그리고 각종 실천을 통해 얻기도 잃기도 하는 소프트파워를 과연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정보기술이 “국가와 주권, 통 제 등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켰기 때문에 군사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 안이 줄어들어 기존의 정치 행위자들이 “신뢰성의 정치에 더 많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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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기울여야” 하고, 또 “새롭게 권한이 강화된 비정부 행위자 및 개인과 정치무대를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Nye 2002, 76 ; 2004) 이것은 공공외교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이런 의문들과 다른 여러 고려사항들이 외교의 성격과 장래에 대 한 연구를 이끌어가고 있다(Hocking 2005 ; Henrikson 2006). 최근에는 학자 들이 대표(representation), 커뮤니케이션, 인정(recognition), 협상(negotiation) 등과 같은 외교의 “구성적 차원(constitutive dimensions)”에서 중요한 차이 를 발견하고 있다(Jonsson 2006). 사회적 공간이 더 이상 영토적 의미의 장 소, 거리, 국경 등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외교는 외교관이 나 외교부 관료 이외, 여러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연결 관계를 포함한다 (Scholte 2000). 외교란 개념을 확장하여 국가와 비국가행위자들 사이의 관
계를 포함해야 하며, 많은 비국가행위자들은 민족, 계급, 종교, 문화, 꿈, 기억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구성되는 비영토적 정체성을 가진다. 기술 또한 외교적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 투명성, 속도, 규모 그 리고 급격히 하락한 운송비는 미디어를 포함한 제3자와의 경쟁과 다양 성을 크게 증대시켰다. 종이와 글로 쓰인 메시지는 그 중요성이 점차 감 소하고 전자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 사운드, 몸짓, 배경 등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Scholte forthcoming ; K. M. Lord 2006, 45-56, 115-132). 이전 에는 외교관들이 정보나 흥정관계에 대해 상당히 큰 통제권을 가지고 있 는 문지기(gatekeepers)였지만, 이제는 줄어든 통제권을 가지고 빠르게 변 화하는 환경 속에서 더 많은 사안을 처리해야 하는 “바운더리 스패너 (boundary spanner, 경계확장자)”가 되어가고 있다(Hocking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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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또한 외교적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 투명성, 속 도, 규모 그리고 급격히 하락한 운송비는 미디어를 포함한 제3자와 의 경쟁과 다양성을 크게 증대시켰다. 종이와 글로 쓰인 메시지는 그 중요성이 점차 감소하고 전자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 사운드, 몸짓, 배경 등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공공외교에 대한 최근 연구는 이런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학자들은 현재 공공외교의 분석적 함의와 공공외교라는 용어 그 자체를 놓고 고 심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사용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에 대한 연 구로 관심을 돌리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전략적 공공외교”나 “전략 적 커뮤니케이션” 등과 같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Manheim 1994 ; C. Lord 2006). 그런가 하면 “외교”와 “공공외교” 사이의 구분이 지속
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신공공외교”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 자들도 있다(Melissen 2006). 이에 반해 글로벌리즘의 부상과 더불어 국가 주권이라는 전통적인 원칙의 쇠퇴로 인해 외교에 관한 과거의 “클럽 모 델(club model)”이 덜 위계적인 “네트워크 모델’로 대체되는 것과 마찬가지 로 양자 사이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Heine 2006).
현재 외교의 어느 정도까지가 공공외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견
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외교적 관행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 고, “신외교”와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분석은 많은 학자와 실무 자들이 해볼 만한 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실무자들의 경우는 이런 새로운 질서에 대해 ‘회복’이나 ‘변화’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했다. 회복을 선호하는 이들은 1999년에 USIA를 미 국무부에 통합한 것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후회하며 자신들에게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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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했던 과거의 조직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개혁을 촉구했다. 이들에게 공공외교란 외무부 관료나 문화외교관, 혹은 국제방송인들이 과거에 잘 해왔으며 종종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한 분야이다. 반미주의와 “아랍과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공할 만한 공공외교의 위기” 로 규정될 수 있는 현재의 위기들은 “과거에 이미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 된 공공외교 기제”들을 다시 회복시키거나 수정하기만 해도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Rugh 2004, 156). 9/11 테러와 미국의 정책 에 대한 외국인들의 우호적 태도가 전례 없을 만큼 하락하고 있다는 결 과를 보여주는 여론조사들은 민간기관, 정부 자문기관, 의회위원회 등에 의한 30개 이상의 연구를 촉발시켰다(Epstein and Mages 2005). 이들의 결과 보고서는 공통적으로 공공외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책과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존의 문제에 대해 개탄하며, 개략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함 을 주장하고, 주로 정부 조직이나 프로그램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 는 정도이다. 두 번째 실무자 그룹은 변화를 강조한다. 일찍이 1991년에 미국 주재 캐나다 대사가 외교는 “이미 상당한 정도 공공외교이며, 전통적인 외교 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기술과 테크닉, 그리고 태도를 필요로 한다”고 쓴 바 있다(Gotlieb 1991, vii). 이후 실무자들과 싱크탱크 의 분석가들은 “가상외교(virtual diplomacy)”와 “인터넷 외교(net diplomacy)” 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추세에 대해 검토하면서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외교를 새롭게 만들어낼” 것을 주장했다(Fulton 1998 ; Ronfeldt and Arquilla 2000 ;Leonard 2002).
국방과학위원회(the Defense Science Board), 외교협의회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미회계총국(the General Accountability Office)
등에서 진행한 연구들은 공공외교가 새로운 사고, 새로운 도구, 정부의 위계적 조직이 네트워크 능력을 갖추도록 적응하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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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보다 강력하고 창의적인 관계구축 등을 필요로 한다고 결론내리고 있 다(Gregory, forthcoming). 현재 미국 대학에서 공공외교나 이에 관련된 강 의를 가르치는 실무자들의 숫자가 상당한 수준으로 늘어났다는 점이 이 런 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추세는 1960년대에 터프츠 대학 (Tufts University)에서
에드워드 머로우 공공외교센터(Edward R. Murrow Cen-
ter of Public Diplomacy)를
설립한 것을 기점으로 최근에 더욱 강화되고 있
다. 학생들의 흥미와 미디어의 보도, 전 세계적인 공공외교에 대한 관심 증대 등에 힘입어 보다 많은 대학에서 공공외교에 관한 강의를 개설하고 있으며, 여러 대학이 이미 학위 프로그램을 만들었거나 계획 중이다.
결론
분석틀에 대한 도달 가능한 합의가 있고, 유의미한 학문적 및 실무 적 연구가 상당 정도 이루어져 있으며, 학습, 지식 공유 그리고 실무의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존재한다는 세 가지 근거에 의해 공공 외교를 새로운 학문분야로 인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는 많다. 공공외교가 기반을 두 고 있는 학문분야의 학문적 기준을 충족시키면서 공적 영역에 의미를 갖는 동시에 종합적인 하나의 분야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교수 진과 학생을 두고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학교 안팎의 라이벌들 사이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협력이 가능할 것인가? 과연 학자들이 학습을 진전시키고 외교 실무자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맞추는 방향으로 연구하고, 사례연구를 발전시키며, 강의과목을 개발하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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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자들이 학자들에게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고 타당성 있는 학문적 연 구를 활용하려고 할 것인가? 논쟁의 여지가 큰 정치 이슈들과 연관되어 있는 이런 분야에서 과연 학자와 실무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 식을 학습과정과 공공영역에서의 토론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향으 로 활용하려고 할 것인가? 만일 위의 질문과 이외에 다른 의문점들에 대 해 우리가 긍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면 그 해답은 공공외교의 학문적 연구와 실무에 상당히 큰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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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에 대하여│
제프리 코원 (Geoffrey Cowan) 제프리 코원은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교수이다. 코원은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대학(Annenberg School for Communication)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같은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석좌교수(Annenberg Family Chair in Communication Leadership)이자 언론리더십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다. 코원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 부임하기 전, 1994년부터 1996년까지 클린턴 행정부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국 국장을 역임 했다. 저서로는 See No Evil : The Backstage Battle over Sex and Violence on Television과 The People v.
Clarence Darrow : The Bribery Trial of America’s Greatest Lawyer 가 있다.
아멜리아 아르세노 (Amelia Arsenault)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애넌버그 대학의 박사과정생이며 대학원생 연구원이다. 아르세노는 또한 아넨버그 대학 공공외교연구소의 협동연구원(research associate)으로 재직 중이다.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짐 바브웨 하라레(Harare) 소재 짐바브웨 국제영화제 트러스트(Zimbabwe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rust)의 영화 코디네이터로 근무했다.
니콜라스 J. 컬 (Nicholas J. Cull) 니콜라스 J. 컬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대학과 국제관계 대학의 공공외교 교수이 며 공공외교석사과정의 주임교수이다. 컬은 The Cold War and the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 US
Propaganda and Public Diplomacy, 1945-89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의 저자이다.
에이탄 길보아 (Eytan Gilboa) 에이탄 길보아(Eytan Gilboa 하버드 대학교 박사)는 이스라엘 소재 바르일란 대학교(Bar-Ilan University)의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Communications Program) 교수이자 학장이며 국제 커뮤니케이션 연구소(Center for International Communication) 소장이다. Begin-Sadat 전략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며 서던캘리포니 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공외교학 초빙교수이기도 하다. 국제 커뮤니케이션, 공공외 교, 미디어 외교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 2001년 국제 커뮤니케이션 학회(International Communication Association)의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마누엘 카스텔 (Manuel Castells)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은 2003년부터 LA 소재 서던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the Southern California) 월리스 애넌버그 석좌교수(Wallis Annenberg Chair Professor of Communication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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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Society)로 재직하고 있다. 파리대학의 교수로 12년 재직 후 12년 간 몸담았던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의 사회학과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또한 MIT대학 기술과 사회(technology and society) 학과 객원교수이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 블랙웰(Blackwell)에서 22개 언어로 번역하여 출간된 3부작 The Information Age :
Economy, Society, and Culture 를 포함하여 25권의 책을 출판했다. 열다섯 개의 명예 박사학위와 대학교 메 달들을 수상했다. 유럽학술원과 스페인 왕립 경제학술원의 특별회원이며 영국 학술원의 객원 특별회원이다. 국제연합 사무총장에 의해 국제연합과 글로벌 시민사회의 관계에 관한 저명인사 패널로 2003년에 지명되어 2004년까지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국제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해 왔다.
조셉 S. 나이 주니어 (Joseph S. Nye Jr.) 조셉 S. 나이 주니어는 하버드 케네디 공공정책 대학원의 명예교수이자 전임 원장이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최우등으로 졸업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수학하고 하버 드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 국가정보위원회 의장, 그리고 안보지원 및 과 학기술 담당 부차관보에 재직 중이다. 2004년에 Soft Power : The Means to Success in World Politics and
The Power Game : A Washington Novel 을 2008년에는 The Powers to Lead를 출간했다. 미국 예술과학학 술원(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영국 학술원(the British Academy), 그리고 외교학술원(the Academy of Diplomacy)의 특별회원이다.
어니스트 J. 윌슨 3세 (Ernest J. Wilson III) 어니스트 J. 윌슨 3세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월터 H. 애넌버그 석좌 교수(Walter H. Annenberg Chair in communication)이며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대학 학장이다. 국가안전 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와 미국 해외공보처(the U.S. Information Agency)의 고위참모직을 역임 했다. 주 : 저자는 본 논문에 대한 모비우스(Lauren Movius)와 코원(Geoffrey Cowan)의 유익한 조언에 대해, 그리 고 리체인(Ted Richane)과 암스트롱(Matt Armstrong)에게 감사를 표한다.
피터 반 햄 (Peter van Ham) 피터 반 햄은 헤이그에 위치한 네덜란드 국제관계 연구소 “Clingendael” 소속 글로벌 거버넌스 연구 책임 자이며 벨기에 브뤼헤에 위치한 유럽대학(the College of Europe) 교수이다. Global Non-proliferation and
Counter-terrorism (Brookings 2007)과 European Integration and the Postmodern Condition (Routledge 2001)을 비롯한 여러 편의 책을 저술하거나 (공동)편집했다. 현재 국제정치에서 사회적 힘의 역할에 관한 책 을 준비 중이다.
먼로 E. 프라이스 (Monroe E. Price) 펜실베니아 대학교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대학의 글로벌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카르도조 법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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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dozo School of Law)의 법학 교수, 그리고 런던의 스탠호프 언론정책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 는 옥스퍼드 대학의 비교 미디어법 및 정책학(Comparative Media Law and Policy)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그 는 미국 대법원의 포터 스튜워트(Potter Stewart) 부대법관의 서기와, 워츠(W. Willard Wirtz) 노동부장관의 비서를 역임했다.
수잔 하스 (Susan D. Haas) 펜실베니아대학교 애넌버그 커뮤니케이션 대학의 박사수료생이다. 그녀는 전직 언론인으로서, 박사논문 주 제는 냉전시기 RFE/RL(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에서 수행된 저널리즘에 대한 연구이다. 이 연구를 위해 전직 언론인, 망명 언론인, 정책 담당자 및 관련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 중이다.
드류 마골린 (Drew Margolin)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애넌버그 커뮤니케니이션 대학의 박사과정생이다. 그는 조직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 크 진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자일스 스캇-스미스 (Giles Scott-Smith) 자일스 스캇-스미스는 루즈벨트 연구 센터의 연구원(Senior Researcher)이며 루즈벨트 아카데미의 강사 이다. 루즈벨트 연구센터와 루즈벨트 아카데미 모두 홀란드의 미델베르흐(Middleburg)에 위치해있다. 그 의 연구 영역은 비국가 행위자와 공공외교가 국가간, 특히 대서양 연안 국가들의 관계를 유지에 있어 그 역 할과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적 “이념전쟁”에 기여한 바를 포함하며, 동서의 경쟁구도는 물론이고 서구 사회 의 구성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출판물로는 Networks of Empire : The US State Department’s Foreign
Leader Program in the Netherlands, France, and Britain 1950-70 (Peter Lang forthcoming 2008) ; The Politics of Apolitical Culture : The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 the CIA, and Post-war American Hegemony (Routlege 2002)와 같은 책 외에도 British Journal of Politics and International Relations, Cold War History, Revue Francaise d’Etudes Americaines, Journal of American Studies, Diplomacy and Statecraft, Intelligence and National Security 등의 저널에 발표된 다수의 연구논문이 있다.
낸시 스노우 (Nancy Snow) 낸시 스노우(Ph D, 국제관계, 아메리카대학교)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공공외교센터 선임연구원이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풀러턴 분교 커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 전공 부교수이다. 1992년에서 1994년까 지 미국홍보처 문화업무 및 교육교류 전문가로서 근무했다. 그녀는 독일 풀브라이트 장학생이었고, 미국에 서 문화적 매개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풀브라이트 학자들에 대한 분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저서로는 『미국의 힘의 오만(The Arrogance of American Power )』, 『정보 전쟁(Information War)』, 『선전주식 회사(Propaganda Inc.)』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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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E. 스웨이그 (Julia E. Sweig) 외교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넬슨과 데이빗 록펠러 선임연구원 겸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소 장이다. 최근의 저서로는 Friendly Fires : Losing Friends and Making Enemies in the Anti-American Centuries 가 2006년 4월 Public Affairs에의 출간되었다. 그녀의 저서 Inside the Cuban Revolution : Fidel Castro and the Urban Underground(Harvard University Press, 2002)가 미국역사학회가 주는 Herbert Feis Award를 받았다.
마이클 J. 부스타만테 (Michael J. Bustamante) CFR의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연구조교이다. 2006년 5월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 및 국제학 학사를 받았다. 2005년 여름에는 하바나 쿠바역사연구소의 방문연구자였다.
위웨이 왕 (Yiwei Wang) 위웨이 왕은 중국 상하이 소재 푸단 대학의 미국학 센터의 부교수이자 국제문제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있다. 그는 예일 대학에서 Fox Fellow로 재직했고(2000-2001), 한국학 연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서 방문 교수를 지낸 적이 있다(2005). 그는 2001년에 푸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영국, 인도, 일본, 한국, 중국 등지에서 5권의 책과 80여 논문을 출판한 바 있다. 주로 국제관계이론, 인구(人口)와 국제관계, 공공외교, 미 국 외교전략과 미-중 관계, 중국 외교정책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브루스 그레고리 (Bruce Gregorg) 브루스 그레고리는 조지워싱턴 대학의 미디어·공공관계활동대학(School of Media and Public Affairs) 겸 임조교수이자 동 대학 공공외교연구소(the Public Diplomacy Institute) 소장이다. 그는 2004년, 2007년 국방과학위원회(the Defense Science Board) 회원으로 전략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참여 했으며, 외교협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공공외교 프로젝트팀, 공공외교협회(the Council on Public Diplomacy)의 회원이다. 그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국방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5년부 터 1998년까지 미국 공공외교 자문위원회 이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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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김남수 現 미국 메릴랜드대학 정치학과 방문 연구원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서울대 외교학과 석사, 박사과정 재학 중
이화연 연세대학교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UN평화대학원 석사 연세대 영어영문학/신문방송학과 졸업
김나현 現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제학술협력 연구협력관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사과정 UN ESCAP 연구인턴
새 시대의 공공외교 발행일 1쇄 2013년 4월 30일 지은이 제프리 코원・니콜라스 J. 컬 감 수 최영종 펴낸이 여국동
펴낸곳 도서출판 인간사랑 출판등록 1983. 1. 26. 제일-3호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1178-1번지 2층 전화 031)901-8144(대표) | 977-3073(영업부) | 031)907-2003(편집부) 팩스 031)905-5815 전자우편 igsr@naver.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igsr 인쇄 인성인쇄 출력 현대미디어 종이 세원지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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