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글로벌청소년글짓기대회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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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격려의 글 ◆ 발간사 / 백암복지재단 이사장 / 이원준 ······································································ 5 ◆ 대회장 대회사 / 지구촌모두하나로 글짓기대회장 / 원순자 ···································· 7 ◆ 중국지회장대회사 / 모두하나로 중국지회장 / 박순엽 ·············································· 9 ◆ 수상자 목록 ······················································································································· 11 ◆ 모두하나교육회 글짓기 사업추진 모습 ······································································· 12

Ⅱ. 우수작품 소개 ⅰ. 지구촌모두하나로글짓기대회 우수작 ◈ 최우수상 ◇ 나의 꿈 / 로준석 / 심양시 구조선족소학교 4년 ··················································· 15 ◇ 내가 걸어가야 할 길 / 김려명 / 해림시 조선족중학교 ········································ 18 ◇ 달 밝은 밤의 사색 / 김광원 / 길림성 연변 제1중 3학년 ··································· 21 ◇ 민들레꽃씨, 봄을 기다리다 / 장예령 /장춘시조선족 고중3학년 ························ 27 ◇ 날개짓 / 김연진 / 길림성 / 연변 제1중학교 ·························································· 30 ◇ 달콤한 꿈 / 김희주 / 칭다오 한글학교 ···································································· 33 ◇ 비범한 아이의 엄청난 꿈 / 서정원 / 선양한국국제학교 ······································ 34 ◇ 공부해서 남 주는 사람 / 황현경 / 청도한국국제학교 11학년 ··························· 37

ⅱ. 조선족 ◈ 초등학교 우수작 ◇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아 / 최은혜, 최은총 / 상지시 조선족소학교 6년 ·········· 41 ◇ 나에게는 이런 꿈이 / 량수영 / 연길시 중앙소학교 5년 ····································· 44 ◇ 나의 꿈 / 이은진 / 심양시 화신조선족소학교 ························································ 46 ◇ 꿈에 관한 일기 세편 / 박청림 / 길림성 도문시 제2소학교 ······························· 47 ◇ 나의 꿈 / 조가예 /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소학교 1년 ····································· 49 ◇ 꿈 / 강건위 / 심양시 소가툰 조선족중심소학교 6년 ··········································· 50 ◇ 나의 꿈 / 서우비 /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학교 2년 ········································· 51 ◇ 나의 꿈 / 림은혜 / 심양시 소가툰 조선족중심소학교 6년 ································· 52 ◇ 나의 꿈 / 오선미 /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소 6년 ············································· 53 ◇ 나의 아름다운 꿈 / 황림방 /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소학교 1년 ··················· 54


◇ 나의 꿈 / 리지민 /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소학교 2년 ····································· 55 ◇ 약속 / 오효월 / 료녕성 안산시 조선족소학교 5년 ··············································· 56 ◇ 사랑, 나눔 / 김은영 / 심양시 오가황조선족소학교 6년 ······································ 57 ◇ 꿈 / 묘해조 / 심양시 오가황조선족소학교 6년 ····················································· 58 ◇ 나의 소박한 꿈 / 최윤나 / 심양 화신조선족소학교 ·············································· 59 ◇ 나의 꿈 / 김은령 / 철령시 은주고조선족소학교 6년 ··········································· 60 ◇ 미래의 나 / 류청여 / 대련시 조선족소학교 ···························································· 61 ◇ 나의 미래 / 리용건 /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소학교 3년 ································· 62

◈ 중학교 우수작 ◇ 내가 이루고 싶은 꿈 / 박은지 / 흑룡강성 오상시조선족중학교 ························ 63 ◇ 20년 후의 나의 모습 / 박진원 / 룡정시 제5중학교 ············································· 66 ◇ 나는 행복 전도사 / 박주단 / 심양시 조선족 제3중학교 ····································· 68 ◇ 하얀 꽃 / 최원재 /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학교 ·················································· 70 ◇ 20년 후의 나 / 오혜민 / 장춘조선족중학교 ··························································· 71 ◇ 내가 좋아하는 편의점아저씨 / 백양 / 심양시 조선족 제2중학교 ····················· 73 ◇ 엄마가 될 거야 / 김진주 / 룡정시 제5중학교 ······················································· 74

◈ 고등학교 우수작 ◇ 기로 그리고 귀로 / 황연 / 길림성 연변제1중학교 ··············································· 76 ◇ 안녕, 미래 / 리아경 / 길림성 연변제1중학교 ························································ 81 ◇ 나의 미래는 나의 꿈이 아니다 / 김의정 /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 84 ◇ 노력하면 꿈은 이룰 수 있다 / 리송학 / 장춘시조선족중학교 ···························· 87 ◇ 인생의 올림픽 / 석설령 /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 88 ◇ 이팔청춘, 꿈에 미치다 / 김정 /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 90 ◇ 어머니의 다리가 되어드리고 싶다 / 우최봉 /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 94 ◇ 남자대장부의 꿈 / 신대경 /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고2 ··································· 96 ◇ 색 바래져가는 꿈을 구하라/ 김령 / 길림성 연변 제1중 고2 ··························· 100

ⅲ. 유학생 ◈ 초등학교 우수작 ◇ 꿈과 미래는 변한다 / 박성현 / 선양한국국제학교 ············································· 103 ◇ 화석발굴대장 / 박이현 / 선양한국국제학교 ························································· 105 ◇ 부모의 꿈 나의 꿈 / 송동하 / 청도이화한국학교 ··············································· 107 ◇ 나는 나중에 / 고준오 / 청도이화한국학교 ··························································· 108 ◇ 20년 후 / 정예슬 / 청도이화한국학교 ··································································· 109


◇ 나의 꿈 / 정정민/ 심양한국국제학교 ····································································· 110 ◇ 2032년의 나 / 장대호 / 청도이화한국학교 ·························································· 111

◈ 중학교 우수작 ◇ 나의 꿈 나의 미래 / 허보연 / 청도국기외국어학교 ··········································· 112 ◇ 사랑을 나누는 요리사/ 박미래 / 칭다오청운학교 ··············································· 115 ◇ 누라 뭐라해도 난 국어지킴이 / 윤지환 / 선양한국국제학교 ··························· 117 ◇ 나의 꿈은/ 김필원 / 선양주말한글학교 ································································· 119 ◇ 나의 작은 소망 / 박채린 / 선양한국국제학교 ····················································· 121 ◇ 나의 꿈은 의사 / 박예명 / 선양주말한글학교 ····················································· 123 ◇ 꿈꾸는 아이 / 윤지현 / 선양한국국제학교 ··························································· 125 ◇ 나의 길 / 김유빈 / 선양한국국제학교 ··································································· 128 ◇ 국제적인 희망전도사 / 김호영 / ISQ(MTI) ··························································· 131 ◇ 그 날을 꿈꾸며 / 박희원 / 심양한국국제학교 ····················································· 133 ◇ 나의 꿈 / 오송주 / 선양주말 한글학교 ································································· 135

◈ 고등학교 우수작 ◇ 나의 꿈 나의 미래 / 부원식/ 청도국기외국어학교 ············································· 137 ◇ 꿈은 이루어진다 / 박찬근 / 심양사범대 부속예술고 ········································· 140 ◇ 나의 꿈 인류의 꿈 / 김건기 / 선양한국국제학교 ··············································· 143 ◇ 나의 꿈 나의 미래 / 김은지 / 청도국기외국어학교 ··········································· 147 ◇ 행복을 디자인하는 사람 / 김송의 / 청도국기외국어학교 ································· 150 ◇ 나는 이루어낼 것이다 / 박공현 / 선양한글학교 ················································· 153 ◇ 후회하지 않을 나의 미래를 위해 / 최효원 / 북경 바추이쌍어학교 ··············· 157 ◇ 나의 미래 나의 꿈 / 유예리 / 선양한글학교 ······················································· 159 ◇ 나의 미래 나의 꿈 / 김유리 / 청도국기외국어학교 ··········································· 163 ◇ 내가 걸어가는 길 / 김승환 / 심양국제학교 ························································· 166 ◇ 나의 가장 큰 행복 / 장아름 / 청도이화한국학교 ··············································· 169 ◇ 호텔리어 / 김가연 / 선양한국국제학교 ································································· 172 ◇ 나는야 도시의 책 편집인/ 변수진 / 선양한국국제학교 ····································· 175 ◇ 사람답게 산다는 것 / 최하나 / 선양한국국제학교 ············································· 178 ◇ 더 높은 꿈 더 큰 손 / 강예지 / 선양한국국제학교 ··········································· 181 ◇ 보이지 않는 전쟁, 기아 / 박근형 / 선양한글학교 ·············································· 184 ◇ 2012년의 소연이에게 / 윤소연 / 선양한국국제학교 ·········································· 189 ◇ 소소리바람/ 지은찬 / 선양한국국제학교 ······························································· 192 ◇ 지금과는 다르게 나의 꿈을 향해 / 정선경 / 선양한국국제학교 ····················· 196


발 간 사 『 꿈, 미래로 가는 안내자 』

백암재단 이사장

이 원 준

한글을 통해 우리 모두를 하나의 마음으로 엮어 보자는 소박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덧 ‘글로벌 청소년 글짓기대회’가 4회를 맞이하게 되었습 니다. 매년 글쓰기 주제도 달랐고 참가하는 학생들도 달랐지만 차곡차곡 모여드는 원고들을 보면서 같은 꿈을 꾸는 학생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곤 했습니다.

올해 글짓기 주제가 ‘나의 꿈 나의 미래’로 정해지면서 저 또한 문득 어릴 적 나의 꿈은 무엇이었나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바쁘게만 살아온 때문인지 가 슴 어딘가 숨어 있던 저의 꿈을 기억해 내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 것에 조 금은 놀라고 정작 저의 꿈을 돌아볼 시간은 없었다는 것이 잠시였지만 저를 당황하 게 만들었습니다.

꿈이란 것은 나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 지 알려주는 안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으로 긴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지도와 나침반은 정말 중요한 준비물이 될 것입니 다. 내가 길을 잃거나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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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여러분들은 어떤 꿈을 꾸고 어떤 미래를 계획하고 계신가요? 무엇을 꿈꾸 던, 어떤 미래를 계획하던 그것은 분명 청소년 여러분을 원하는 곳에 정확히 안내 해 줄 훌륭한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꿈을 꾸지 않는 삶은 몰입 없이, 영혼을 집에 남겨둔 채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되돌이 킬 수 없는 젊은 시절,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간 바쁘 다는 이유로 잊고 지냈던 저의 꿈을 다시 꺼내어 책상 앞에 붙여 놓으려 합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청소년 여러분의 꿈과 미래를 우리민족의 우수한 문자인 한글 로 만나보게 된다는 생각에 2013년의 봄, 저는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끝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빛내 주시는 최정숙 회장님과 원순자 교장선 생님 그리고 심사 및 지도에 열정을 다하고 계신 경기도교육공동체봉사단 불씨 훈 장님들과 멀리 심양에서 큰 열정으로 본 대회를 이끌어 주시는 박순엽 선생님께 존 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매년 수상자들에게 우수한 한국 문구제품을 부상으로 지원해주시는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과 한국문구유통업협동조합에게도 감사를 표합 니다. 감사합니다.

2013. 03. 06.

백암복지재단 이사장 이 원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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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장 대회사

한민족청소년 글짓기대회장

원 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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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는 연변의 신동소학교에 도서관을 지어주고 한글로 된 책을 공급해 주는 프로그램을 <우리민족서로돕기>와 힘을 합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신동소학교에 <네모상자>라는 이름의 도서관을 지어서 개관식에 참여하였을 때, 눈 빛이 초롱초롱한 학생들을 보면서 좋은 책을 많이 읽고 꿈을 키우고 생각을 키워서 당당한 청소년으로 자라서 나의 일을 찾고 가족과 인류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서울과 경기도의 각 학교에서 배우고 남은 헌 교과서를 수합 매각 하여 그 기금으로 동북3성에 있는 조선족학교에 도서관을 지어주고 필요한 도서를 구입 또는 학교에서 걷은 동화책과 여러 도서들을 분류하여 보내주는 프로그램입니 다. 물론 도서관을 유지 운영하기 위해서 도서관 사서선생님을 한국으로 초빙하여 도서관 운영 방법을 배우고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 계속하여 2차 3차 도서관이 계속 세워질 것이며, 많은 학생들이 그 도서 관에서 책을 읽고 생각을 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민족글짓기 대회에 참여하는 조선족 학생들도 이런 도서관을 이용하여 독후감 도 쓰고 생각을 나누는 기회도 갖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번 글짓기대회에서는 많은 학생들의 꿈과 소망들을 보았고, 그 꿈들이 튼실하 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꿈은 꾸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과 가 오지 않습니다. 비젼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실천하는 사람에 게만 꿈은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자신의 꿈에 대한 생각을 해본 학생들은 그 꿈을 향해 한 발짝 더 나아 간 것이며, 마음이 더 자라서 또 다른 꿈을 꾸게 되어도 다른 사람보다 꿈을 잘 이 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꿈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 보다 많은 사람들과 인류에게 도 움이 되는 것일 때에는 더욱 자존감을 가지게 되어 그 일에 더욱 열정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꿈이 이루어질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더불어 언어학자들이 인정한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을 세계 곳 곳의 사람들이 배우고 활용하는 날들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몇몇 학생들의 작품은 생각이 탁월하고 표현마저 깊이가 있어서 조금만 공부하면 수필집이라던가 짧은 단편을 모은 책으로 발간을 해보아도 될 것이라 여겨지므로 지속적으로 글짓기에 매진하여 실력을 키워나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201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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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회장 대회사 제4회 한민족 글로벌 청소년글짓기 공모대회를 마치고

(사)모두하나교육회 중국지회장 박 순 엽

흘러간 역사의 여울목에서 만난 우리 후예들의 마음 밭을 알고 싶어서 4년 동안 글짓기 공모대회를 실시해 왔습니다. 제1회 대회는 ‘부모 및 가족사랑’에 대해서, 2회 대회는’환경에 대한 나의 자 세’, 3회 대회는 ‘바른말, 바른 습관’에 대해 청소년들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글 을 통해 그들은 작지만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큰 희망의 동력을 발견하는 모습 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며 변화시킬 미래 리더들이니 그 자체가 희망이었 고, 우리 민족의 튼실한 뿌리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도 발견하였습니다. 해가 갈수록 응모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 중 가장 마음 아픈 것은 한글(조선어)을 제대로 사용하는 학생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참 큰 일입니다. 아마 5년도 못되어 조선어(한글)는 이 땅에서 사라질지 도 몰라요” 어느 조선어문교사가 한숨과 함께 걸어온 전화 내용입니다. “학교는 학생이 줄어 폐교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학생들은 조선어를 제대로 구사 할 줄 몰라서 작문수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실정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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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니 이대로 가면 결과야 뻔한 사실 아닙니까?” “이번 작문시합에서도 글쓰기를 독려 했지만 글을 써오는 학생이 많지 않았으며, 그나마 쓴 것들을 보니 수준이 한심하여 감히 응모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여서 여기 두 편만 제출합니다.”라며 안타까워하는 속내를 털어놓는 일선 조선족학교의

조선

어문 선생님의 떨리는 목소리는 내 마음을 갈래 찢어 놓는 듯 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이곳 저곳에서 일어난 지 오래되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는 30년 전 만해도 20여 곳의 조선족학교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통폐합되어 한곳 만 겨우 남아 있는 현장을 보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정신 없이 먹고 살기 위해 달려온 세월 속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사 실을 이제는 깨닫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한글을 되살리어 한글을 한글답게 사용하 는데 마음을 더 모아야 할 것입니다. 뜻있는 단체, 개인들이 백일장을 통하여, 때로 는 주말 한글학교를 통하여, 또는 기타 우리말 사랑 행사를 시행하여 한글 보급에 앞장서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후배들을 키워서 미래를 다시 설계해야 할 것 입니다.

이번 행사에 좋은 글로 응모해주신 중국 내 유학생 및 조선족학생들과 세계 각국 에서 한글을 사용하고 한글을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가장 우수하고 과학적인 우리말을 살리느라 온몸으로 외세를 막으며 고군분 투 하시는 일선 교사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사)모두하나교육회에서는 작은 힘이나마 “우리말 사랑”에 보탬이 되기 위해 최 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 2. 28 심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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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제4회 한민족 청소년글짓기대회 입상자 포상명

초 등

조선족 중 등

고 등

민주평화통일자문 회의 사무총장상 서울시장상

백암복지재단 이사장상

남경필 국회의원상

경기도지사상

장예령 (장춘) 김연진(고1) (연변 제1중) 김광원 (연변 제1중)

로준석(4학년) (훈남신구) 오선미(6학년) (훈남신구) 황림방(1학년) (훈남신구) 김은영(6학년) (심양시오가황) 묘해조(6학년) (심양시오가황)

최은혜,은총 김려명(중2) 황연 (6학년) (해림시) (연변 제1중) (흑룡강성상지시) 량수영(5학년) (연길시중앙)

박은지(중1) 리아경 (흑룡강성 (연변 제1중) 오상시)

림은혜(6학년) 김진주 김 령(고2) (심양시소가툰) (룡정시 제5중) (연변 제1중) 류권진(3학년) 박진원 김의정 김진표 국회의원상 (심양시소가툰) (룡정시 제5중) (연변 제1중)

남서울대총장상 수원시장상 한민족글짓기 대회장상

고 등

김희주 서정원 황현경(고2) (칭다오한글) (선양한국) (청도한국)

경북도지사상

연변과학기술대학 총장상

초 등

유학생 중 등

이은진 (심양시화신) 박청림

박주단 (심양시 제3중)

최원재

리송학(고3) (장춘시) 석설령

(도문시 제2) (훈남신구) (연변 제1중) 조가예(1학년) 오혜민(중3) 김 정 (훈남신구) (장춘) (연변 제1중)

박성현

허보연

김건기

(선양한국)

(청도국기)

(선양한국)

장아름(고1) (청도이화) 김가연 (선양한국) 강예지 (선양한국) 장대호 (청도이화) 박근형(고1) (선양한글) 부원식/김은지 (청도국기) 박미래 (칭다오청운) 박찬근 (심양사범대) 김송의 (청도국기) 윤지환 (선양한국) 박공현(고1) (선양한글) 고준오 박희원 김승환(고2) (청도이화) (심양한국) (SYIS심양국제) 김필원 (선양주말한글) 박채린 (선양한국) 박예명(중3) (선양주말 한글) 박이현 윤지현 최효원 (선양한국) (선양한국) (북경바추이) 송동하 김유빈 (청도이화) (선양한국) 김호영(중3) 유예리(고2) ISQ(MTI) 선양한글학교 김유리 (청도국기) 윤소연 (선양한국) 지은찬 (선양한국) 정예슬 (청도이화)

강건위(6학년) 우최봉 (심양시소가툰) (연변 제1중) 서우비(2학년) 백양(중2년) 신대경(고2) 중부일보사장상 (훈남신구) (심양시 제2중) (연변 제1중) 최윤나 (심양 화신) 김은령(6학년) (철령시 은주구) 모두하나 류청여 교육회장상 (대련시) 리용건(3학년) (훈남신구) 리지민(2학년) 오송주(중2) (훈남신구) 대구경북한중교류 정정민 (선양주말 (심양한국) 오효월(5학년) 협회중국지회장상 한글) (료녕성 안산시)

정선경 (선양한국)

변수진 (선양한국)

최하나 (선양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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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모두하나 교육회 글짓기 사업 추진 모습 제1회 대회 시상식 스케치 제1회(2009년)대회 - 대상(교과부장관상)포함 53명이 수상함

요녕성환인현조선족중학교에서

특강 및 시상식거행(2010년 4월)

<현지언론 스케치>

한민족청소년글짓기대회, 번시(환인)서 시상식 신문 게재 [2010-05-01, 19:16:15] 온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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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기사 내용> ▲ 번시시 환런현에서 열린

1회 한민족청소년글짓기 대회

모두하나교육회와 경기도교육자원봉사협의회가 주최한‘제1회 한민족청소년글짓기 공모대회’시상식이 지난달(4월) 19일 번시(本溪)시 환런(桓仁)현조선족학교(교장 박 태근)대강당에서 열렸다. 100여 명의 학생이 모인 시상식에는 모두하나교육회중국(선양)지회에서 준비한 ‘나의 정체성발견’이라는 특별강의에 이어 대상을 받은 푸순(抚顺)조선족1중 한송 철 학생을 비롯한 9명에게 상장과 기념품 전달식이 진행됐다. 모두하나교육회 선양지회장 박순엽씨는“환런(환인) 지역이 고구려 첫 도읍지라는 상징성을 감안해 환런에서 시상식을 거행됐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모두하나교육회는 통일부등록 비영리교육단체로서 한민족청소년 인재 발굴과 양성의 목적으로 조선족과 한국유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글짓기대회를 실시 하고 있다. 제2회 대회는 9월중에 구체적인 요강을 공지할 예정이다. [온바오 정은지]ⓒ 중국발뉴스&정보-온바오닷컴(www.onbao.com)

제2회 대회 시상식 스케치 (2011년 4월 9일)

특강시간

우수교사상

2회 대회 현수막

최우수학생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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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국회의원상(외교통상남경필의원)

경기도지사상(김문수)

상장, 작품집, 기념품을 전국으로 우송 작업하는 모습

제3회 대회 시상식 스케치 (2012년 5월7일)심양조4중, 한국국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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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최우수상> 서울시장상 심양시 동릉구(훈남신구) 조선족학교 소학부 4학년 로 준 석

나의 꿈 어른들은 나보고 “너의 꿈은 무엇이냐?”라고 묻곤 한다. 학교 선생님들도 집에 부모님들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눈검사 하러 갔을 때 병원의 의사선생님까지도 물어 보았다. 당연 나도 이젠 어엿한 4학년생이니 어른들이 말하는 꿈이 잠 잘 때 꾸는 그 꿈이 아니라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하는 뜻인 것 쯤은 잘 알고 있다. 자꾸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 문제이고, 방금전에도 생각해본 문제이지만 나는 매 번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대답도 못하고 얼굴이 달아올라 끙끙 거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다 못해 “꿈이 없으면 안되지. 꿈이 없으면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수 가 없는 거야!” 하면서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는 사람도 있는데 참 속상하다. 때로 는 “한창 철딱서니 없이 까불거릴 때지!”하면서 꿀밤까지 딱! 하고 한대 먹여주 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칫! 나도 꿈이 있다구요! 알지 도 못하면서... 엉! 엉! 우리 집은 25층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집에서는 내가 공부하는 학교도, 할빈에서 대련까지 통하는 고가철도위로 쌩! 하고 달리는 고속렬차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가족들과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원래 살았던 단층집을 빨리 찾기 시합을 하기도 한다. 무더운 여름에도 창문만 활짝 열어놓으면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와 선풍기도 필요 없다. 하지만 전기가 자주 나가군 한다. 나는 폴짝폴짝 뛰면 서 쉽게 계단을 올라가지만 할아버지는.”어이구, 이럴거면 집이나 높게 짓질 말던 가, 늙으면 죽어야 되… 아이구…” 하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계단의 란간에 기대여 몇 번이나 쉬여야 25층까지 올라올 수가 있다. 내가 대신 올라가 줄 수도 없고 참!

럴때 나는 비오는 날 하늘을 쫘아악! 가르면서 번쩍거리는 번개를 붙잡아 가두어 놓 았다가 전기가 필요한 곳으로 보내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할 아버지, 할머니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안하게 집으로 갈수 있고, 우리 모두 불빛 이 환~한 집에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텔레비죤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을 쏘고 폭탄을 던져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 고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는 뉴스를 여러 번 보았다.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어린이 들이 폭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여 죽어가는 것도 보았다. 얼마나 무섭고 아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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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불쌍하고 끔찍했다. 우리도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싸우군 하지만 금방 화해하 고 친해진다. 어른들이 왜 서로를 죽이면서 싸우는지 몰라서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양보할 줄 모르고 남의 것도 자기 것으 로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로 양보하고 도우면서 착 하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만약 이 세상에 평화를 유지하는 약이 있으면 얼 마나 좋을까? 그러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수 있을거니까. 나는 빨리 커서 사람들이 천사로 될수 있는 평 화를 유지하는 약을 만들고 싶다. 우리반의 지호전 친구가 부주의로 눈을 심하게 다쳐 학교도 못나오고 입원하여 치 료받고 있는 중이다. 형이 안과에 입원하여 눈치료를 받을 때 나도 며칠동안 병원에 서 형과 함께 지냈었는데 친절한 간호사누나들이 맛있는 것도 주고 가족들도 함께 있었지만 병원은 웬지 모르게 무섭고 싫었다. 지호전도 얼마나 외롭고 답답할까 하 는 생각이 든다. 나는 훌륭한 의사가 되여 친구의 눈을 치료해 줘서 친구가 빨리 학 교에 나와 우리랑 같이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으면 좋겠다. 심양에는 눈이 자주 내린다. 거위털 같은 함박눈은 뿌~연 하늘을 뒤덮으면서 내 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도 황량한 벌판도 모두 은빛세계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그 은빛 세상에서 눈사람도 만들고 친구들과 눈싸움도 하면서 신나게 논다. 나는 눈 꽃이 흩날리는 것만 보아도 이 모든 것이 상상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콧노래가 흥 얼흥얼 절로 난다. 하지만 거리청소부들은 꼭두새벽부터 추위에 떨면서 삽과 비자루 로 거리마다 쌓인 눈을 치워야 함으로 눈을 즐기기는 커녕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 만 들어도 팔자타령을 하면서 한숨부터 에 눈을 다 치울 수가 있지?

풀~풀 내쉰다. 어떻게 해야 눈깜짝할 사이

눈이 아스파트에 떨어지는 순간 녹아버려 맑고 깨끗한

물로 변하여 지하로 스며들어 우리의 생명수인 지하수로 되여 물이 모자라는 곳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직 구체적인 것은 떠오르지 않지만 나는 계속 생각 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혼난 적도 있는데 엘리베이터 카드, 집 열쇠, 버스카드… 주렁주렁 열쇠들이 매달려 있는 열쇠꾸러미는 너무 무겁고 건사하기도 힘들다. 만약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자동으로 문을 열어주고 걸어주는 음성인식 자 물쇠를 만들면 열쇠를 집안에 두고 문을 잠궈버려서 다른 가족이 오기를 문밖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일도, 열쇠를 잃어버려서 혼나고 자물쇠도 바꿔야 하는 일도 다 없을 테니까. 그리고 몸에 바르기만 하면 아무리 심한 감기라도 뚝 떨어지는 물약도 만들고 싶 다. 나도 몇 번이나 감기에 걸려 열도 나고 기침도 콜록콜록 해서 주사를 맞았었는 데 주사 맞는 건 너무너무 괴로우니까. 우리 아빠도 다른 친구 아빠들도 자주 술을 마시는데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면 안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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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은 세 살짜리 애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 다가

인명사고를 내는 일들이 뉴스에 자주 나오는데 사고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여 보지는 못했지만 머리, 팔다리, 오장육보가 짓이겨져 끔직하고 비참하다고 한 다.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고 웩! 구토가 나올려고 한다. 만약 술을 마신 사람이 운전석에 앉아서 “목적지는 집!” 하고 말만 하면 집에 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 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는 차를 만들 수 있다면… 나는 훌륭한 천문학가가 되어서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고 이 별나라에서 저 별나라 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우주인들과 친구도 사귀고 싶다. 지금은 지구에서 제일 가 까운 별나라 금성에도 최저 460도를 넘는 온도와 지구보다 100배 이상 강한 대기압 때문에 갈수가 없지만 공부하고 노력을 하다보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길거야! 나는 또… 아이참! 내가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사람은 뭐가 이렇게도 많을까? 할아버지께 말했더니 할아버지는 “에키 이놈아, 꿈만 자꾸 꾸면 뭐해! 노력을 해야 지!” 하신다. 아빠는 씨익 웃으면서 나를 번쩍 들어올려 내가 어질어질 해지도록 빙~빙~ 돌려주었다. 고모는 “그래, 이루고 싶은 거 다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좋은 꿈도 많이 꾸고, 생각도 많이 하면서 건강하게 부쩍부쩍 잘 커라…” 하면서 나 를 꼭 안아주었다. 선생님은 “꿈만 있다고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부 터 좋은 책도 많이 읽고, 친구들도 많이 도와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실패도 두 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만 꿈들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준석 학생이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라고 하셨다. 나는 아직 꿈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꿈은 계속 커가고 있다. 나는 그 꿈들을 현 실로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또 노력할 것이다. 나의 꿈들이여! 내가 간다! 지도교원 : 전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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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남경필국회의원상 흑룡강성 해림시 조선족중학교 초중2학년 김 려 명

내가 걸어야 할 길 “려명아, 큰 다음에 꼭 대학교교수가 되기 바란다.” 엄마의 말씀이다. “우리딸은 명품대학의 교수가 되어야지. 아빠처럼 되지 말고...” 아빠의 쓸쓸한 말씀이시다. 언제나 나의 꿈이라면 그 어떤 것 도 다 좋다고 응원해주던 아빠가 어느 날부턴가 엄마와 단짝이 되여 교수가 되라고 한다. 나의 아빠는 오상조선족 사범을 졸업하고 고향인 남라고촌의 산하소학교(山河小 学)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어느 한때는 친절하고 자애로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교장선생님이셨다. 아빠는 남라고촌의 흥성흥성하던 학교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비 록 학생이 20명도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심을 다하여 학생들을 교육하고 보살펴 주셨다. 나무책상과 나무걸상이 낡을대로 낡아서 삐걱삐걱 소리가 날 때면 집에서 망치와

찌를 들고 직접 손수 고쳐준다. 겨울이 되면 학생들이 추워할가봐 새벽에

학교에 나가셔 난로불을 지펴 놓는다. 체육시간에 학생들이 놀것이 없어 반에서 그 냥 손을 쬐는 것을 보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스케트 신발의 칼을 뽑아 나무판에 고정해 썰매를 만들어주셨다. 그 썰매덕분에 학생들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를 모른 다. 집이 먼 학생들이 배고파 할까봐 삶은 달걀을 집에서 가져다 하나씩 쥐어주던 아빠였다. 그 학교를 다니는 딸인-나를 위해서라도 꼭 학생들에게 남 못지않은 즐 거운 동년을 주고 싶은 것이 아빠의 소원이었다. 다른 학교들처럼 학교에 컴퓨터를 놓겠다고 새벽 두시까지 학교에서 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조선족학교에 조선 족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의 그 책임감으로 조선족학교를 잘 꾸려보겠다고 노력에 또 노력을 다 하였다. 엄마도

아빠의 옆에서 언제나 말없이 받들어주시고 응원해주셨다. 어느 날 아빠

가 유치원을 관리할 사람이 없다고 한숨을 푹푹 내쉴 때 엄마가 자진하여 유치원교 사로 일하겠다고 하여 학교가 폐쇄 될 때까지 엄마도 일하셨다. 엄마와 아빠 두 사 람은 손을 잡고 그 어떤 애로점도 마다하고 함께 이 학교를 끝까지 꾸려나가려고 버 티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가치가 있다고 항시 웃으며 즐겁게 출근하시던 아빠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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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런 행복한 날은 얼마가지 않았다. 언제부터 아빠의 얼굴에 근심걱정이 어려있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울적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엄마가 다급히 물어보자 아빠가 대답했다. “학교가 폐쇄됐소.” “예?” 엄마는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서 듣던 나도 어안이 벙벙해 아빠만 쳐다 보았다. 아빠는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 가셨다. 축 처진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 내 마음이 아파났다. 그렇게 애쓰고 버티던 아빠의 모든 기대가 물거품으로 되지 않 았는가, 집안은 어느새 생기를 잃었다.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다. 어찌 그렇지 않으 랴. 낭랑한 글 읽는 소리대신에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교정에서 들린다는 것은 얼마

나 슬픈 일인가? 그날 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서럽게 울었다. 한족사람들이 와서 막 무가내로 학교를 공장으로 운영하겠다고 하여 그만 응낙하고 말았고 학교는 이제 영 영 문을 닫게 되었다는 아빠엄마의 말씀을 다 엿들었으니... 이리하여 엄마와 아빠가 심혈을 기울였던 학교, 그 마을의 유일한 조선족소학교가 폐쇄된 것이다. 엄마는 “학 교가 폐쇄된 후 마을의 기둥이 없어진 것 같았다.”고 하신다. 엄마는 골목에서 멍하 니 학교 쪽을 내다보실 때가 많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립고 자전거를 씽씽 내달 리며 학교 가는 길을 누비던 아이들의 모습이 그립다고 한다. 이 글을 지도하신 선 생님께서 나에게 물어보셨다. “아빠가 마지막수업시간에 무엇을 했다했어요?” 그 말에 난 말문이 막히었다. <<아빠, 그래 마지막수업시간에 뭘 했어요?>> << 개학할 무렵 학교를 폐쇄한다고 하여 마지막 수업도 못 봤어.>> <<그럼?>> <<학교주위를 둘러본 것이 나 마지막 수업이야.>> 불쌍한 우리 아빠, 가련한 내 아빠! 도데가 쓴 ”<<마지막수업>>에서의 아멜선생 님은 그래도 학생들에게 자신의 마음속의 말을 다하실 수업시간이 차례졌지만 가련 한 아빠는 그런 기회마저 잃어버렸으니...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저 혼자서 학교의 모든 것을 쭉 돌아보는 것을 “마지막수업”으로 하셨단다 ... 그것이 한이 되여서인지 아버진 끝까지 이렇게 말하신다. <<학교가 무너지지 않 았어.” 에누리없이 잡아떼는 아빠의 대답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빠는 북나고의 학교에 조동되어 가 다시 교편을 잡게 되였다. 드디어 시름을 놓고 학생들을 가르쳐 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매일 자신의 돈을 팔면서 택시를 구해타고 학교로 출근 하시는 것도 매우 행복하다고 하시면서 항시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학교 가 자신이 필요하다면 앞에 불바다가 있어도 뛰어 넘을 정도로 열정으로 넘쳤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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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교마저도 폐쇄되었다. 원인은 바로—학생이 너무 적 다였다. 아빠에겐 실로 청천벽력이었다. 이번엔 아빠는 향정부에 배치 받아 갔었다. 이젠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칠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은 허전하고 처량하기 그지없는지 며칠 밤잠을 설치면서 묵묵히 담배만 태우셨다. 두 번이나 자 신이 아끼시던 학교가 폐쇄되는 아픔을 맞아야 하는 그 아픔의 검은 그림자는 아마 도 아빠의 평생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리라.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고고학자로 되고 싶다는 말을 듣더니 아빠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바로 서두에서 쓴 것이다. 어쩌면 아빠와 엄마가 나보고 대학교교수가 되라는 것도 단지 순수한 부모가 자녀 에 대한 기대만이 아닌 것 같다. 또 어떻게 보면 사라져가는 우리 조선민족의 문화 를

구하라고 하는 의도에서 이렇게 제기 한 것 같다. 물론 학생재원이 적어 학교가

문을 닫는 일이 우리민족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지만 조선족으로서 조선민족의 문화 와 교육이 진통을 겪는다는 이점만은 감안해야 할 것 같아 난 자기의 꿈을 두고 생 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나는 조선족이다. 나의 꿈은 원래 고고학자였는데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고 있는 아빠와 엄마를 보면서 조선민족학교에서 혹은 대학교에서 교원으로 되려는 꿈 을 굳혔다. 내가 이후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빠가 겪고 있는 이런 비극을 될수록 피 면하면서 우리 민족의 글과 말을 가르치는, 나아가서 민족의 얼을 지켜가는 일을 하 는 것이다. 이 길이 고독하고 힘든 길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드팀없이 걸으리라 . 그 것은 이는 단순한 나의 꿈, 부모님의 염원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미족의 꿈이 아닐까! 그래서 남들이 수학, 영어를 보충수업 하느라 바삐 돌지만 나는 조선어문보 충수업을 하면서 우리말 글짓기를 열심히 배운다. 지도교원 : 김봉선, 신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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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3학년 김 광 원

달 밝은 밤의 사색 가로등도 희미하게 잠에 겨워 졸고 있고 이따금 고요를 부스러뜨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미약하게 울려와 귀전을 간지럽힌다. 은은한 빛을 던지는 달은 기억의 쪽배 런듯 파도무늬의 엷은 구름 속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뭇 새들이 보금 자리에 든 지도 오래다. 자정이 넘어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왠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꿈의 왕국으로 젖어들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고요는 나를 깊은 사념에 잠기게 하고 나로 하여금 마음의 창을 열어 흘러간 지난날을 더듬어보며 휘황할 래 일을 그려본다.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은 고작해야 스무나문 호 남짓한 한적한 시골마을이었지만 고 향의 산과 들은 말 그대로 우리 조무래기들의 천당이었고 낙원이었다. 봄이면 진달 래꽃 만발한 산기슭에서 나물을 캐고 여름이면 자기또래의 발가숭이들과 함께 해종 일 좁다란 개울물에서 물장구를 치며 미역을 감았고 또 황금나락 설레이는 가을이면 머루따기에 성수났다. 입김이 하얗게 새여 나오고 처마 밑에 고드름이 얼어붙을 때 면 사내애들은 얼어붙은 강에서 팽이치기가 한창이었다. 사내애고 여자애고 서로 나 무람없이 지내며 철없이 뛰어 놀았었는데. 시름없는 그 나이에 백사장에서 뒹굴며 알몸뚱이로 냇가에서 즐기던 그 시절이 지금에 와서는 사무치게 그리워 난다.”잠자 리 꽁꽁 앉은 자리에 앉아라 먼데 가면 죽는다”라고 하면서 잠자리잡이에 정신이 팔 려 울바자에 걸채여 코방아를 찧던 일이며 “보배 보배 시집가라”고 하면서 날려보낸 무당벌레가 어느 누구의 뒤 잔등에 앉으면 “새각시다”고 환성을 울리며 깔깔대던 우 숩강스러운 일들이 여직껏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벌써 아득한 옛말로 되였다. 어제날의 시름없던 웃음은 자 취를 감춘지도 벌써 오랜 옛일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세월이 류수같다고 철 부지 어린애가 이젠 열아홉 고중생이 되였으니 말이다. 만월이 되여 둥그렇게 배부 른 달이 눈부신 빛을 뿌리는 것처럼 고중시절은 가장 빛나는 시기라 생각된다. 아카 시아내음 풍기는 싱그러운 시절이고 아름다운 색깔로 영롱한 화려한 시절이고 이팔 청춘 아름다운 희망으로 차넘치는 한가슴 가득 꿈으로 부푼 우리 고중생들의 꽃시절 이다. 나도 이젠 코밑에는 어느샌가 까아만 새싹이 돋아나고 목에 작은 봉우리가 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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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면서 신체의 자람이 종료되고 완성된 육체의 향기가 짙어지는 청춘기에 들어서 면서 내 꿈도 점점 커져가고 있다. 철부지 동년시절 이 세상은 동화세계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사회 는 그렇지 않았다. 백성들의 피로 향긋한 포도주를 만들고 백성들의 살을 긁어내어 맛있는 산해진미를 마련하는 탐관오리들이 있는가하면 수많은 빈곤한 사람들은 여전 히 사회 최하층에서 허덕이면서 수시로 기아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난쟁이를 비롯한 불구자들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경시와 업신여김의 눈빛 속에서 힘들고 외롭 게 살아가고 있으며 많은 연인들은 금전만능의 이 사회에서 돈이라는 고약한 놈 앞 에 머리를 수그리고 어제날의 약속은 잊은 듯 그 아름답던 사랑꽃이 시들어가는 것 을 적지 않게 보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도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도 마음은 병든 사람이 있다. 각종 세력들의 명쟁암투, 엄청난 빈부차이, 지칠 줄 모르는 욕망과 추구로 사리사욕을 채워가는 암흑한 사회분위기이 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고 더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이를 악무는게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거연히 솟은 높은 봉우리 뒤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도, 뻐꾹새 우는 울울창창한 고 향산도, 황금의 물결 출렁이는 논벌과 사과배 주렁진 과수원도 여기 도시에는 없다. 뒤뚱뒤뚱 엉덩이를 틀며 다니는 오리들도, 무수한 벌떼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고 꽃나비들이 담장 위를 분주히 넘나들던 소박한 그림도 도시에는 없는 것이다. 논밭의 구수한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냄새, 전야에서 풍겨오는 밀의 향기도 맡을 수 없는 것 이다. 내 탯줄이 묻힌 고향, 잔뼈를 길러준 고향을 떠나 도시에 온지도 꼭 5년이 된 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고층건물의 높이는 점점 높아만 간다. 그러나 태양에 비껴진 그림자는 더욱더 길어졌고 짙어졌다. 전선대에 다닥다닥 붙인 광고들은 모두 특효 밀방이라며 허위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저 약방의 문턱만 자꾸 닳아질 뿐이다. 소비 가 피둥피둥 살이 져서 물가가 소비자의 목을 조르고 공기가 검은색이었을까? 도시 참새의 깃털은 날따라 까맣게 그을린다. 거리 여자들의 치맛자락은 점점 올라붙고 남자들의 머리카락은 점점 내리 길어진다. 결혼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지만 이혼은 얼굴을 떳떳이 쳐들고 손가락질 앞에서 산책을 한다. 윤리는 가끔 정욕한테 강간당 하고 도덕은 가끔 금전 앞에 허리 굽혀 절한다. 맥주점 밖의 담벽구석에서는 문명을 등진 사람이 고주망태가 되여 벽에 대고 속에서 타는 불을 끄고 있다. 이처럼 내가 본 현재는 빗방울같이 허무하고 문란하다. 더는 잃고 싶지 않다. 하얀 색깔의 우리 말, 언제 들어도 따스한 정이 꽃처럼 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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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우리말이기에 역사와 떼여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귀중한 재부이다. 그런데 내 살점처럼 소중한 우리말이 구겨지고 오염되고 있는 요즘의 세태-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옛날엔 일제가 우리 말, 우리글을 무참히 짓밟았지만 오늘날엔 우리 민족 스 스로가 자기 말, 자기 글을 포기하고 천시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말과 글은 우리 모두를 지켜주는 보루기도하고 우리 민족의 얼이요 본질이 다. 우리말과 글에는 황금의 운률이 있고 도라지 빛깔의 온기가 있고 우주만상을 포 용하는 불멸의 생명이 있다. 또한 우리말과 글은 민족과 민족문화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가장 귀중한 밑천이며 재부이다. 때문에 그것의 포기는 곧바로 우리 민족의 죽 음인 까닭에 나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더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을 빛내고자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미풍양속 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여 세상에 널리 이름이 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웃어른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등 훌륭한 예의범절을 고유하고 있 는가하면 년중 행사로서의 전통적 민속명절과 다양한 놀이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맞이 첫 명절인 설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우선 조상을 기리 는 숭경의 마음으로 차례를 지내고 집안의 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무병장수를 기원한 다. 또한 추석이면 성묘하러 가서 조상의 은혜와 은공에 감사할 줄 아는 우리 민족인 것이다. 그리고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도 한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풍속은 조상들의 아름다운 정신과 소원, 생활정서와 모습을 고스란히 나타내 고 있는바 우리 민족 문화의 발전과 함께 대대손손 계승, 발전되었다. 저 굽이굽이 흐르는 두만강과 함께 긴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왔고 앞으로도 더욱 잘 계승되고 발전해야 할 것이다. 헌데 유감스러운 것은 우 리 민족의 풍습이 점점 빛이 바래져가고 도외시되는 것이다. 세배는 세뱃돈을 받기위 해 대수간히 엎드리는 정도로, 한복 옷고름도 맬 줄 모르는 게 우리 새 조선족들의 현주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을 시대에 뒤떨어진 케케묵은 물 건으로 간주하면서 언녕 내버려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민족의 미풍량속 도 헌신짝 버리듯이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민족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가? 내가 개변하련다. 점점 병들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 점점 삭막해져만 가는 우리 감정세계의 오아시스가 되여 우리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하고 생기와 활력을 띠게 하 고 싶다. 하늘아래 제일 문명한 민족이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우리 한민족의 전통을 잃지 않고자 민족의 역군으로 성장할 것이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던 암흑의 년대에 우리 겨레들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 너서 동북3성의 광활한 대지에 찾아와 새 삶의 터전을 잡고 백의민족의 뿌리를 내 렸다. 천만년 잠자던 황폐한 땅을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개척하여 가꾸었으며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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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얼을 널리 알렸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두 손에 의해 황무지도 황금파도 설레이 는 옥답으로 변했고 민둥산도 사과배 주렁진 과원으로 변했다. 또한 산마다 울긋불 긋 선열들의 피로 물든 진달래가 피였고 마을마다 백의겨레의 넋인양 렬사비가 하늘 높이 솟아 해와 더불어 민족의 정기를 뿜고 있다. 또한 푸른 산, 맑은 물에 둘러싸인 우리 고장에는 천태만상의 장엄하고도 아름다 운 경치로 이름난 우리 민족의 성산이며 겨레의 산인 백두산이 있다. 오늘도 백의민 족의 하얀 넋을 온 세상에 자랑하듯 백두정상은 사시장철 하얗게 단장하고 있다. 언 제나 변함없는 백설단장, 너무나도 우리 민족을 닮은 성산이다. 천지물은 우리 민족 의 깨끗한 얼을 닮아 거울같이 맑으며 쉬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자손들에게 대대손손 우리 민족의 얼, 우리 민족의 기백을 전하려고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세 인들의 심금을 울린다. 천길 나락이 앞을 막으면 백두폭포의 기상으로 흰 옷자락 날 리며 서슴없이 뛰어 내리고 험산준령 첩첩하여 나아갈 길이 멀고멀면 세차게 흐르는 두만강, 압록강마냥 씩씩하게 나아가는 민족이기에 우리는 백의민족 , 그 이름도 자 랑찬 나는야 조선족이다. 물질적부를 위해 허덕이지 않는 우리 민족답게 난 “작은”것이 좋다. 여는 사람들처 럼 목걸이도 굵직한 것에, 반지도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것에 눈독을 들이는 지 금에 와서 나는 뭐든지 자그마한 게 좋다. 장미보다는 진달래가 좋고 함박꽃이나 모 란꽃보다는 냉이꽃이나 제비꽃이 좋다. 여하튼 나는 뭐든지 자그마한 게 좋다. 키도 작고 눈도 작고 뭐든지 다 작게 생긴 사나이다. 사나이라지만 담도 작고 통도 작도 소갈머리도 작다. 그렇다고 기죽어 살지는 않는다. 고추는 작아도 맵다했고 농축된 것도 정화라고 했거늘. CF에서 많이 등장하는 문이 두개 달린 대형 랭장고만 봐도 그렇다. 문만 나서면 당장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싱싱한 채소며 과일을 톡톡 튕기며 고를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욕심 사납게 한가득 사서 랭장고 안에 쌓아놓고 먹는단 말인가? 맛도 가고 전기세도 나가고 일거량실인 것을 화초로 멋들어지게 꾸 며진 정원이 있고 사람들이 동경해마지않는 큰집도 나는 부럽지가 않다. 운동장처럼 휑그렁한 집보다는 올망졸망 작은 내 집이 좋다. 여지저기 조롱조롱 작은 액자 걸어 놓고 요기조기 앙증맞은 꽃들로 장식을 하고 알른알른 빛이 나게 닦아놓은 아담한 집이 내 적성에는 안성맞춤이다. 집이 작은데다가 식구도 많아 거실에서 엉뎅이를 비비고 들어앉아 텔레비죤을 봐야 하고 코구멍만한 부엌귀퉁이에서 겨우 들여놓은 밥상에 앉으면 코가 맞다을 지경이지만 그 시간이 내겐 외려 행복한 시간들이다. 집 이 좁다보니 동생녀석들의 엉뎅이를 슬쩍슬쩍 만져보는 재미 또한 둘도 없는 즐거움 이다. 번쩍번쩍 윤을 낸 자동차도 나는 사절이다. 좁다란 공간에서 비비적댈게 뭐 람?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대통로든 오솔길이든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짧은 내 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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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너무 좋다. 드바쁜 아침시간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자가용족들에게 실웃음을 날 리기도 하고 “요즘은 걷기가 유행이란 것도 모르는가봐”, 코웃음도 날려본다. 게다가 기름값이 하늘로 치달아오르는 요즘이니 시간절약, 돈 절약, 건강 확보, 이거야말로 일거삼득이 아닌가? 그러나 유일하게 욕심을 부리고 싶은 게 있다면 우리 민족의 아리랑가락을 보충하 고 다듬고 싶다.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래온 “아리랑”에 결부된 내용은 흔히 봉건통 치배들의 핍박에 의한 부부간의 이별, 정조를 앗아가려는 통치배들에 대한 홀로 남 은 아내의 투쟁, 부역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아내의 정조에 대한 오해와 질책으로 서의 버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원망과 자결, 아내의 자결로 인한 남편의 참회가 대 부분으로 조금은 구슬픈 우리 민족의“아리랑”이다. 내가 우리 민족 전통민요의 “아리랑”에 새 주제를 부여하련다. 우리 민족의 새 하얀 숭늉의 향기도 보태고, 티없이 맑은 마음으로 우리 민족의 순결함을 넣어 윤색 되게 하고 싶다. 민족적 향기가 무르녹는 서정성으로 우리의 민족성분을 나타내면서 말이다. 장미가 싫은 것도 아니고 진달래가 미치도록 좋다는 게 아니다. 화려한 식단이 나 쁘다는 것도 아니다. 전기 밥가마 대신에 촌에 내려가 가마솥에서 밥을 지어 구지 숭늉을 마시자는 것도 아니다. 도시사람들은 나쁘고 촌사람들이 좋다는 것도 아니 다. 차를 타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큰집에서 살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딱딱하게 우 리말과 글을 구식으로 전해나가려는 것도 아니다. 무턱대고 명절마다 춤추고 장구치 고 떠들썩하게 즐기자는 것도 아니다. 전통 그대로를 인습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 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그에 발맞추어 가다보니 옛날 그대로를 고스란히 계승할 수가 없다. 현시대에 와서 일부는 번잡하고 고루한 것이 있어 그대로 답습할 수도 없다. 이렇다하여 우리 민족의 얼을 영영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너무도 심하게 민 족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민족의 색이 바래져 가는 시점에서 오늘날의 민족후계자들 은 각성해야 할 것이다. 나는 백의겨레의 후손으로서, 한민족의 후예로서 민족의 미래를 떠메고 갈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부터 바르게 하고 언제나 민족의 운명을 념두에 둠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세계 여느 민족에 게도 뒤지지 않고 우리 민족의 얼을 지켜가며 문명한 민족으로 세계촌의 대가정속에 서 우리만의 발전역사를 찬란히 엮어가야 할 것이다. 한민족의 강력하고 든든한 토대 를 닦는 문화사명을 짊어지고 우리 문화의 새로운 휘황을 창조하기 위해 나는 노력할 것이다. 이젠 민족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민족의 본색을 잃지 않도록 우리 민족 의 넋에 빛을 더하고 색을 짙게 할 것이다. 반드시 정시해야할 시대적과제로서 한민 족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엮어나갈 것이다. 한민족의 새하얀 선율을 울려갈 것이다. 저 백두 산정에 울려 퍼지는 아리랑의 메아리소리, 저 해란강반에서 들려오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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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좋은 가야금소리, 저 두만강 백사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씨름군들의 포효소리가 한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는 희망찬 날갯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흙속에 묻힌 보석이 빛을 잃지 않듯이 연변의 진달래는 올해에도 붉게 피어날 것이다. 참대가 마디마디 이어 자라 하늘을 찌르듯 우리 민족의 앞날도 대를 이어 지킬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민족의 역군으로 자라나기에는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 다. 일월이 교차되고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이 밀려가면서 반복되는 일상 속에 몸도 마 음도 지칠 때가 있다. 벽시계의 두 바늘이 천정을 향할 때까지도 잠 못 이루고 시험폭 격 때문에 눈가풀이 천근만근이 되어야하고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는 알람소리를 들으 며 무거운 몸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만하고 다람쥐가 챗바퀴를 돌듯이 바삐 돌아 치며 솜뭉치로 목구멍을 꽉 틀어막을 듯한 답답함과 감당하기 어려운 억눌림 속에서 마음의 느슨함도 없이, 마음의 여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고 사회에 진출하면 부 모친척 없이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하고 한발 떼기가 무서운 캄캄한 밤을 헤치며 갈팡질 팡할 것이고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아주 간고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역경은 약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큰 산이며 강자를 단련시키는 용광로이며 인재로 되게 하는 지혜의 숫돌이라 했다. 계속 톺아 올라야 할 학업의 길에서 평탄 치 않은 성공의 길에서 치열한 경쟁시대에 든든히 발을 붙이고 살아가려면 폭풍우도 두렵지 않는 견강함의 참뜻을 깨닫고 지레대만 주어지면 지구라도 들어 올릴 수 있 는 힘찬 용기로, 젊음의 패기로 완강한 의력과 만강의 열정으로 자신만의 탄탄대로 를 넓혀가며 성공의 대문을 향해 힘차게 질주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온실속의 여린 새싹이지만 부단히 영양분을 섭취하고 따스한 해살을 받으며 가지를 튼튼히 하고 속 잎을 키우며, 아직은 조롱 속에서 높은 하늘을 목마르게 바라보고 있는 작은 새지만 멀지 않은 훗날에 신주대지에 깊이 뿌리 내린 거목으로, 푸른 하늘을 고고히 날아예 는 수리개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이가 비록 나 한사람이라도 괜찮다. 작은 유성일 지라도 밤 하늘의 적막을 깨뜨릴 수 있고 하나의 물방울일지라도 태양의 빛을 굴절시킬 수 있 다 했거늘. 미래를 겨냥하여 희망의 불씨를 연소시킬 것이다. 나만의 섬광점에 빛을 더하고 색을 짙게하여 우리 민족의 역군으로 되련다. 선배들이 이룩해놓은 거창한 성취와 기름진 밑거름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 후계자로서 이어갈 계주봉을 자신있 게 넘겨받아 이 나라의 튼튼한 기둥으로, 민족의 훌륭한 인재로, 세계의 출중한 위 인으로 자라나 부모님한테 진 사랑 빚을 갚고 힘든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 오 늘은 떫지만 달콤한 내일을 위해 분투할 것이다. 눅거리 맹세가 아닌, 구중천에 날 려 보낼 맹세가 아닌 내일의 아름다운 설계도를 그리고 발전의 템포를 다그치고 도 약의 그라프를 긋기 위해 노력하고 찬란한 우리 민족의 발전을 위한 분투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소년의 장한, 구름처럼 높고 매화의 향기마냥 엄한 속에 풍기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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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서울시장상 장춘시 조선족중학교 고중3학년 장 예 령

민들레꽃씨, 봄을 기다리다 바야흐로 봄이 옵니다. 길가에 듬성듬성 피여 있는 민들레꽃이 보입니다. 겨울기운 이 채 가셔지지 않은 싸늘한 봄바람이 스쳐지나가고 여린 꽃씨들은 힘없이 바람에 쓸 려 산산이 흩어져버립니다. 그리고 시들시들 꽃줄기만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집니다. 몇 백년 전, 조선반도의 들판에도 봄이 왔고 민들레꽃이 만발했습니다. 아무리 거 센 비바람이 몰아쳤어도 민들레꽃씨들은 봄이 오면 기특하게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가 그곳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민들레꽃들은 조선반도라는 마을에 뿌리를 깊 숙히 내렸고 꾸준히 대를 이어나가 자신만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창조해내였습니 다. 그러던 19세기 말기의 어느 하루, 전례 없었던 강풍이 몰아쳤고 조선반도는 캄 캄한 어둠이 휩싸고 있는 두려움과 추위에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잔혹한 바람은 쉽 사리 그치지 않았고 인정사정없이 조선반도를 휩쓸고 뒤흔들었습니다. 민들레꽃들은 송두리 채 뽑히고 산산이 흩어져 바람에 몸을 맡기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 니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던 꽃씨들은 자 신들만의 사연을 가슴깊이 묻은 채 중국의 동북지구에, 조선반도의 남북에 뿔뿔이 흩어져 심어졌습니다. 자신의 피붙이를 울며 겨자 먹기로 떼여내야만 했던 정신적인 고통과, 낯선 땅 우에 접목의 아픔을 견뎌내고 뿌리를 박기까지, 일제침략의 북새통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했었던 절박함과, 돌이킬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을 이겨내고 새 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 자리를 잡기까지, 민들레 꽃씨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야만 했고 완강한 의지와 끈질긴 생명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하 늘 아래 다른 땅 우에 심어진 꽃씨들은 멀리 떨어져 피땀을 흘리고 있을 자신의 피 붙이를 그리워하며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으로 애잡짤한 마음을 달래였습니다. 혹여 나 겨레의 비분이 담긴 이 가락이 천리밖에 떨어져있을 자신의 반쪽한테 닿아서 심 금을 울리지 않으려나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많고 많은 꽃씨들 중의 하나 일 따름입니다. 저는 그저 똘똘 뭉친 꽃씨로 아름다운 민들레꽃을 활짝 피워 낼 수 있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미세한 존재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달이 흐르고 해가 바뀌어 새봄이 찾아왔고 본래 한 민족이었던 민들레꽃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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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러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꽃씨들도 자신들의 뿌 리가 태초에는 모두 한곳에 내려졌었고 이어졌었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버리게 됩니 다. 봄은 왔지만 민들레는 꽃을 피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꽃씨들이 너무 멀리 떨어 져 있어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꽃씨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 는 차가운 담벽이 생겨나 서로를 가로막았습니다. 중국에 심어진 꽃씨들은 싹을 틔 워보지도 못하고 썩어버린 것도 많았고 꽃을 피웠어도 수분이나 해빛이 모자라 이내 시들어 버린것도 많았습니다. 하여 그들은 살길을 찾고저 조선반도의 남쪽-대한민 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의 꽃씨들은 모양새는 다르면서 비슷한 언어를 쓰는 이들을 반갑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글타글 노력해서 발전시킨 대한민국 땅 우에 “빌붙어” 사는 이들을 “가짜”라고 생각했고 싸늘한 시선으로 대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으로 살길을 찾으러 오는 꽃씨의 수는 불어만 갔고 오 해는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렇게 새봄은 찾아왔건만 꽃씨들의 만남은 드라마틱했고 꽃을 피우기는커녕 서로를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꽃씨들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드리워 서로를 가로막는건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적도 적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불법로동자로 취업한 꽃씨들도, 야멸차게 서로 등을 돌린 꽃씨들도, 접목의 아픔을 이겨내고 중국 땅에 발을 붙인 꽃씨들도, 대한민국 땅 위에서 아글타글 열심히 살아가는 꽃씨들도... 그들의 할아버 지의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의 할머니가 서로의 이웃이자 친구였으며 한마을 사람이 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허나 소 닭 보듯 하는 꽃씨들의 무관심은 력사가 남긴 아픔으로 서로의 가슴을 쑤시며 지금은 슬픈 현실로 저한테 다가옵니다. 중국 에 심어진 꽃씨든 대한민국에 심어진 꽃씨든 모두 후손들에게 조선민족의 전통문화 를 계승시키고 세종대왕의 걸작인 훈민정음 -한글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와 언어가 사라지지 않고 문화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공동한 임무 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뿐더러 지금은 조금 다른 그들이지만 한때는 같은 뿌 리를 가졌었던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그저 조금 다른 역사를 지녔을 뿐입니다. 그러나 일란성쌍둥이 만큼이나 그들은 닮았고 같이 아팠고 같이 성장했습니다. 완강한 생명력으로 일제의 모진 침 략과 접목의 아픔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고 끈질기게 뿌리를 박고 인고의 시간 을 견뎌내서 장성한 민들레 꽃씨입니다.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만 같았던 심연 속에서도 꿋꿋이 머리를 쳐들고 하나의 민족으로, 하나의 언어를 가진 민족으 로, 어엿한 민족으로 장성한 민들레꽃씨 입니다. 사이좋게 지켜야할 언어가 있고 문 화가 있는 한민족인 우리가 지금은 서로 갈라서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습니 다. 고작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고작 한곳에 발을 붙이지 못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역사가 남긴 소용돌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오해의 실타래만 얽어가면서 우리의 두 손으로 우리의 선조가 지켜왔던 언어와 문화를 산산조각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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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이 꽃씨들이 우리의 민족 령혼이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한글을 치렬한 세계민족문화의 경쟁에서 맥 한번 추리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버리고 마는 여느 언어들 마냥 한토막 한토막 조각내어 버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 입니다.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조선민족이란 산산이 부서진 이름도 아니고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도 아닙니다. 응당 똘똘 뭉쳐야 할 이름이고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이름입니다. 헌데 지금은 이지러지고 력사에 스러진 민들레꽃을 보노라면 가슴이 미여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미풍에도 힘을 추스르 지 못하고 휩쓸려 가버리고 마는 미미한 분자 -민들레 꽃씨란 말입니다. 이러한 제 가 꿈꾸는 봄이 현실로 실현될 수는 없는 허황된 공상입니까? 민들레 꽃씨들이 머리 에 머리를 맞대고 조선족 개체 또는 대한민국 개체가 아닌 조선민족공동체의 민족문 화와 언어를 계승시킬 수 있는 봄, 그 봄이 온다면 력사가 남긴 아픔 따위는 그전의 무관심 따위는 우리가 그려나가는 미래 속에서 인멸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력사 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 미래는 우리가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꽃씨와 조 선반도의 꽃씨들 서로 다른 나라 다른 형태의 꽃씨들이지만 우리의 전통문화와 우리 의 글이 유대로 된다면 우리 조선민족이라는 이름도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을 것 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때 즈음이면, 만물이 소생하는 따사로운 봄기운이 완 연해질 즈음이면 우리 민들레 꽃씨들도 새하아얀 꽃을 활짝 피워낼 수 있을 텐데 말 입니다. 민들레 꽃씨의 청초한 아름다움이, 그 청초함속에 잠들어있는 끈질긴 생명력이, 그 끈질긴 생명력 속에 잠들어 있는 민들레 꽃씨의 아름다운 령혼이, 그 령혼이 기 나긴 동면에서 깨어날 수 있는 봄이 왔으면, 그래서 민들레꽃이 활짝 핀 바람 불지 않는 평화로운 봄이 왔으면, 담담하면서도 소박한 민들레꽃의 새하얀 향기가 널리 퍼질 수 있는 봄이 왔으면, 그런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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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서울시장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김 연 진

날개짓 “Pyeongchang” 가슴 떨렸던 그 순간, 모든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했던 그 순간, 저에게는 꿈의 씨 앗이 조용히 마음속 한구석에서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2011년 7월 6일 현지시각 17시 22분에 열린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 발표 에서 평창이 비로소 개최지로 선정될 때 같은 민족으로서 저는 더없는 희열과 감동 에 젖어있었습니다. 동시에 꿈이라는 또 다른 기쁨은 저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짓게 하였습니다. 나승연 대변인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 알른거리면서 가슴은 무지 빨리 뛰고 있는 것 이였습니다. 떨려오는 가슴이여, 이것은 첫사랑 순정의 떨림도 아니요, 만인을 앞둔 초조의 떨 림도 아니요. 이루 설명할 수 없었던 떨림, 바로 꿈을 갖게 된 감격의 떨림이였고 기쁨의 떨림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한테는 외교부대변인이라는 꿈이 마음속에서 씨앗을 내밀기 시 작하였고 마음속 가득 나승연 대변인에 대한 존경과 동경으로 차넘치기 시작하였습 니다. 꿈, 저한테도 다가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꿈, 저한테도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날 밤 저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침상에 누워 가까스로 떨리는 가슴 을 눅잦히며 머리 속 온통 나의 꿈을 그리며 저는 그렇게 꿈속에서 저의 꿈을 이어 갔습니다.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신비의 마력을 부린듯 꿈이 있게 된 저는 많은 것이 달려졌습니다. 마치 날개짓을 터득한 독수리마냥 저만의 꿈이란 날개로 무한한 날개 짓을 하게 되였습니다.  호기심에 찼던 그 첫 날개짓 대변인이 꿈인 것만큼 저한테는 좋은 롤모델이 필요했습니다. 참으로 행운스럽게 저는 조심히 나승연 대변인을 저의 롤모델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롤모델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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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에 바빴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의 꿈은 무엇이었을지 프레젠테이션이 끝 난 후의 그는 어떤 모습일지…… 갓 세상을 알게 된 어린애가 모든 것을 궁금해 하 듯 저는 그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게 되였고 검색창에 수없이 “나승연”이라는 세자 를 쳐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든 크든 그에 관한 것을 알게 될 때면 자기도 모 르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자셨구나, 역시 말재간이 남다르셨다 했어” “아버지가 외교관, 역시 가족의 영향을 받았구나 좋으시겠다” “지금은 꿈에 관련 된 프레젠테이션 마케팅을 하고 계시는구나. 근데 꿈 관련 프 레젠테이션 마케팅이 뭐지?” 하나하나 호기심을 만족해가며 그렇게 저는 꿈에 대한 호기심 찼던 그 첫 날개짓 을 하고 있었습니다.  기대와 환상에 부풀었던 그 두 번째 날개짓 매일매일 그날을 그리며 저는 그 여느 때 보다 열심히 일상에 매진하고 있었습니 다. 그러다가 많이 힘들어진 고중생활에 지치고 때론 철없이 그냥 손 놓아 버리고 싶 을 때 저는 항상 꿈에 대한 무한한 기대와 환상에 다시금 힘들 얻을 수 있었습니다. 외교관이 되여 있을 십여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의 내일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말 이죠. 참 꿈이란 이처럼 큰 힘이 될 줄을 몰랐던 저한테는 너무도 신기한 한편 고마 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둘 저만의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 가슴 떨렸던 나승연 대변인의 프레젠테이션을 수십 번 뒤풀이하는 것 은 기본이었고 서투르지만 따라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빠르진 않아도 그만큼 다부지게 나아갔습니다. 그 매 한 자국이 너무도 작을진 몰라도 시내 물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그 강들이 모여 언젠가 바다를 이루게

될듯 그 작은 한발

자국이 언젠가 그 꿈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좋은 디딤돌이 될 거라고 믿으면서 말입 니다.  일락천장을 방불케 했던 그 추락… 롤러코스터를 타본 적이 있다면 당연히 떨어진다는 것, 어떤 기분이도 어떤 상황일 지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기분을 저는 얼마 못가서 느끼게

되였고 롤러

코스터보다 엄청 더 심한 충격과 공포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한창 꿈에 대한 나만 의 아름다운 상상을 하고 있을 때 한순간 모든 상상을 물거품으로 만든 한마디가 있 었으니: “니가 중국에서 외교부에 들어간다고? 그것도 조선족인 네가? 택도 없는 소리!” 그냥 지나가는 류언비어라는 생각이 맨먼저 들면서 내 자신을 다시금 다짐하고 흔 들리지 않게 노력해 보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결코 부정할만한 말은 아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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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인 것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아니 너무도 힘들고 허무한 일이라는 사실이 더욱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확실히 중국 땅에 발 붙여 살면서 그것 도 조선족이라는 탈을 쓰고 살아가면서 외교부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쩌면 더 힘들고 허무맹랑한 일일 수 있습니다. “휴...” 늘어가는 한숨과 뉘엿뉘엿 서산에 지는 해님의 햇살마냥 꿈에 대한 저의 희망도 어느덧 희미해져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그만 꿈을 찾아가는 길에 벼랑 끝에 서게 되였고 일락천장을 방불케 한 추락을 겪게 되었습니다.  다시금 날아올라…… 뜻만 있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속어가 있지 않았던가? 나는 정말 이리도 나약하 고 힘없던 존재였던가? 아니다 아니다 결코 이렇게 끝 낼 거라면 내가 아니다. 저는 일어섰습니다. 다시 힘차게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신들메를 조였습니 다. 다시금 두 주먹 불끈 쥐였습니다. 왜냐? 결코 저는 저의 꿈을 그토록 쉽게 버릴 순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저의 꿈의 씨앗을 결코 무참히 짓밟을 수 없었기 때 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이루어 가면서 좌절을 이겨내고 실패를 거스르며 피타는 열 정을 몰부엇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들을 하나둘 머리 속 영화 컷처럼 떠올리면서 저 는 할 수 있다는 그 한마디만을 모토로 삼고 재출발을 하였습니다. “Nothing is impossible.” 불가능은 없다. 저는 다시금 날아올랐습니다. 다시금 날개 짓을 시작하였습니다. 꿈이 없는 자의 청춘은 청춘이 아니고 꿈이 없는 자의 일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 라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꿈, 저는 무한한 꿈에 대한 희망을 꼭 품 고 노력의 피땀으로 응결된 꿈에 대한 희망을 꼭 안고 성장과 성숙으로 잉태된 꿈에 대한 희망을 꼭 쥐고 무한히 앞만 보고 달릴 것입니다. 망망한 대해에서도 방향을 가르쳐 줄 나침반이 있고 앞을 밝혀줄 등대가 있듯이 꿈도 저의 삶에 슴배여 시시각각 저를 채찍질하고 선도하고 언젠가 승리의 역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꿈, 그렇게 저는 이루어 갈 것입니다. 모든 시련을 버티어내고 실패를 경험삼아 꼭 꿈을 이룰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저도 만인의 앞에서 우리 자랑찬 민족과 조국을 대표하여 모든 이의 마음을 대변하게 될 것 이니라! 무한한 동경과 함께 저는 지금도 꿈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꿈, 이룰 수 있는 것이 꿈이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꿈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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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총장상 칭다오한글학교 5학년 김 희 주

달콤한 꿈 꿈이란 무엇일까? 내가 하고픈 일, 그리고 미래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20년 후, 나는 달콤한 향이 나는 커다란 사탕공장에서 일을 할 것이다. 기계는 유 리병 속에 알록달록한 사탕을 가득 채울 것이다. 마치 무지개를 담는 듯하였다. 빨 간 사탕, 주황 사탕, 노란 사탕, 연두 사탕, 파란 사탕, 보라 사탕, 분홍 사탕…… 이 사탕들은 나와 아이들을 연결해주는 무지개 다리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탕들을 어 린이들에게 보내줄 것이다. 트럭 속에는 커다란 상자가, 상자 속에는 유리병이 가득, 유리병 속에는 가지각색 의 사탕이. 부릉부릉, 아이들의 기대를 담으며 출발한다. 드디어 유치원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와 사탕을 받으러 달려온다. 서 로 먼저 얻으려고 밀치며, 다투며 몰려온다. 통통한 손이 쉴 틈 없이 보인다. 금세 상자 속 유리병이 하나 둘씩 사라진다. 아이들은 너 하나 나 하나 사이좋게 사탕을 나눠 먹는다. 사탕을 먹는 모습이 아주 행복해 보인다. 입 안 가득 사탕을 넣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사탕을 아껴먹으려고 천천히 빨아 먹 는 아이도 있었다. 또 가족과 함께 먹으려고 남 몰래 가방 속 집어넣는 아이도 있었 다. 다 먹은 후 아이들은 껍질을 버리기 아까운지 조심스레 펴서 책갈피로 사용하거 나 눈썹에 붙여 껍질 색을 음미하였다. 달콤한 사탕 하나로 만족하는 아이들이 재미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내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준 뒤 다시 트럭을 타고 공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 는 길에 한 아이가 “꽈당”하고 넘어졌다. 나는 급한 마음에 얼른 내려가 사탕 하나를 건 내 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 통통한 손으로 사탕을 건네받았다. 손으로 눈물을 다 닦은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뒤뚱뒤뚱 달려갔다.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나는 뿌듯했다. 마치 어릴 때의 나를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나는 잘 울었다. 하지만 사탕 하나로 울음을 금방 그쳤다. 왜냐하면 사 탕의 달콤함은 엄마의 자장가 같았고 아빠의 포근한 포옹 같았다. 그것이 사탕의 묘 한 매력이 아닐까? 또, 평상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여 속상 했는데 이런 달콤함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 너무 기쁘기 때문이다. 이런 사탕, 아프고 힘들 때 다시 자신 있게 만들어주는 마술 같다. 그리고 내 임 무는 하나하나의 마술을 어린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찾아주는 아주 특별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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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총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서 정 원

비범한 아이의 엄청난 꿈 나는 참 비범한 아이이다. 남들이 싫어하는 수학과 경제를 좋아하고, 남들과 다르 게 음치 몸치 박치를 모두 가지고 있는 아이이다. 가끔은 ‘이런 애는 과연 커서 뭐 가 될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직 뚜렷한 목표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 면서 나의 미래를 정해 보기로 한다. 나는 이제 중학교에서도 허리부분인 중2이다. 이 정도 되면 음악이나 스포츠 등 공부 이외의 길을 선택하기엔 늦었다. 아니, 그쪽으로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하기 엔 도저히 무리다). 하지만 공부를 통한 나의 미래는 아직 늦지 않고 열려있다고 생 각한다. 그래서 나의 성향과 직업의 안정성을 고려하여 나의 장래희망을 공무원으로 정해 보았다. 공무원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요즘 세무공무원 이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평소에 돈의 흐름, 그러니까 나라 의 경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 전의 꿈도 경제학자였을 정도로 경제에는 해 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래서 세금을 걷는 세무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내 눈길을 끌었 다. 그렇다면 내가 왜 세무공무원이 되고 싶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첫 번째 이유로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한 나라의 경제에 대한 것을 대중 매체 를 통해 볼 때에는 참 흥미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계의 경제는 어떻고 또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다. 지금 구독하고 있는 경제관련 잡 지도 배송 되오면 너무 재미있어서 그 자리에서 다 통독을 한다. 생각해보자. 경제 에 대해 보기만 해도 즐거운데 직접 나라의 경제에 개입을 해보면 이보다 더 즐거울 수(즐거운 일이 또) 있겠는가? 늘 너무나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다고 자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기업이 아닌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기 때문이다. 기업이 잘 되 는 것은 그 기업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나라가 잘 사는 것이고 그것은 어느 특정한 누군가만이 아닌 국민 모두가 잘 사는 것이어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라가 돌아가는 데에 필요한 돈인 세금을 거두고 관리하는 일이 나라에 있어서는 매우 가치가 있고 중요한 일이기 때 문이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없다면 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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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 번째 이유로는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원에게는 야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공무원은 6시 칼 퇴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이유는 처음 들었 을 때는 ‘아 이 녀석이 일은 많이 하고 싶지 않고 연봉은 높게 받고 싶구나. 이런 괘씸한 녀석!’ 이라고 생각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유에는 이러한 이유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다. 바로 우리 기정을 생각하는 가장이 되고 싶기 때 문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려면 나의 아이들에게도 또한 잘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러한 가장이 되려면 야근이라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한편 집에서도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세무공무원이 되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는 세무공무원이 되기 위해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다짐을 해보자. 그동안 나는 미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을 즐기며 살아가기에 바쁜 그냥 평범 한 애송이였다. 그러나 세무공무원에 대해 조사해보고 ‘이렇게 놀다가는 후회하겠 구나. 지금부터라도 미래를 위해 일해야겠다!’라고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 곳 심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에 경희대의 회계/세무학부에 들어가서 4년 대학과정을 마칠 것이다). 경희대의 회계/세무학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학점 관리가 중요하다. 지금처럼 하면 안 되기 때문 에 공부에 몰입을 해야 된다는 점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공부에 매진을 해서 원 하던 대학에 입학한 후 군대를 다녀오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 짧으면 1년, 길면 3년 동안 공무원시험에 준비해서 공무원시험에 합격한다. (이 때 가산점을 받기 위 해 자격증을 1~2개 정도 따놓는다). 그래서 세무서나 국세청에서 취직을 하여 공무 원을 시작한다. 나의 희망은 부패하지 않은 맑고 깨끗한 사회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 에 그러한 소망의 실천의 일환으로 기부도 꼬박꼬박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청렴하 게 살아가는 공무원 생활을 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맑고 깨끗한 공무원 의 대명사로 유명세를 타면서 인정을 받으면서) 점차 높은 급수의 세무공무원이 되 어서 부유하고 번성하는 나라를 위해 뛰어나고 꼭 필요한 일을 한다.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고, 그 동안의 삶을 성찰하며 나의 자서전을 낸다. 뛰어난 일을 한 공무원 으로 후세에도 영원히 남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나의 롤모델은 안철수 교수님이다. 안 교수님은 컴퓨터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해 백신을 개발하셨고, 그것을 모든 사람이 사용 할 수 있도록 무료로 배포하셨다. 나 는 그처럼 사람들과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세무공무원이 되고 싶은 이유를 정리하여 보았다. 이 글을 쓰면서 부패가 없는 맑고 깨끗하고 누구에게나 공정한 정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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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한 아이가 국가를 위한 일을 생각하다가 유난히 경제부분에 관심이 많은 본인 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나도 다른 사람들 처럼 부패한 정치 속에서 썩어가지는 않을까? 요즘 뉴스에서 부패한 정치 때문에 사과박스가 오고가는 현상이 공무원들에게 종종 있던데... 그리고 부자들이 세금을 안내려 버티고 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또 어떻게 해서 세금을 걷어야 하지?’라는 생각도 들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겠다고 나 자신과 다짐하면서 소신껏 노력을 다해 살면 하나하나 어려움도 해결해나갈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커서 ‘맑고 깨끗한’ 세무공무원이 되어 보다 살기 좋은 우리나라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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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총장상 청도한국국제학교 11학년 황 현 경

공부해서 남 주는 사람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 너의 평생이 편하지! 네가 고생하는 것도, 우리가 너 뒷바 라지해주는 것도 다 너를 위해서야.”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부모 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똑똑한 인재도 많은 21세 기,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세상이 바라는 최고와 최상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학생들은 명문대를, 직장인들은 보다 안정적인 상위권의 지위를 바라며 더 높게, 더 멀리 뛰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토록 이루길 원하는 꿈과 비전은 무엇일까? 무엇을 바라며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이 질문에 나중에 내 자신이 조금 더 편하고, 더 안정적인 미래를 갖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말도 다 너의 이득을 위해 지금 고생한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한 명문대와 호화로운 직장지위로 내 인생을 더 빛내고,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세상이 흔히 말하는 “성공”을 얻기 위해서 달린다 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꿈”이란 단어의 뜻은 이제‘내게 주어진 시간으로 나의 기초를 단단하게 쌓아서 나중에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 것 같다.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는 “나”또는 “나 자신” 이라는 단어다, 하지만, 나는 꿈이란 단어에는 조금 더 깊 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꿈이 남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으면 한다. 나는 중학교3학년 때 학교에서 태국으로 봉사활동을 갔던 적이 있다. 당시 3명의 외국 선생님들과 12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는데,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간 봉사활동이 라 포기한 만큼 더욱더 갚진 것을 얻고 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갔었 다. 태국이란 나라, 나에게 많이 낯선 땅이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따 뜻했다. 길을 물어볼 때도, 물건을 살 때도,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태국사람들의 세 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비록 서로 말은 안 통했지만, 항상 미소로 회답하며 손을 흔 들어주셨다. 봉사활동첫째 날, 우리의 일정은 아동센터의 아이들과 놀아주고, 영어를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태국에는 높은 빌딩들이 위엄을 뽐내지는 않았지만, 크고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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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있었고, 햇빛은 굉장히 뜨겁게 내리쬐었다. 나는 썬 크림 을 듬뿍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너무 따가웠지만, 신기하게도 주변에 태국아이 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흙먼지를 날리며 길가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길가에서 해맑 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가던 걸음을 계속 가려던 찰나, 누군가 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한 태국 꼬마아이였다. 처음 보는 내가 낯설지도 않은지, 그 아이는 당당하게 한 손으론 찢어진 종이컵을 내밀면 서 다른 한 손으론 돈을 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를 한참 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일곱, 여덟 명 정도의 태국아이들이 나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도 종이컵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일 제히 선생님을 쳐다보았고, 선생님은 싱긋 웃어보이며 우리에게 근처 슈퍼에서 아이 들에게 맛있는 것을 하나씩 사주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이름도 모르는 태국 꼬마아이 의 손을 잡고 들어가 슈퍼에서 오렌지 주스를 하나 사주었고, 그때 그 아이의 표정 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한 그 미 소, 까무잡잡한 얼굴에 하얀 이가 다 들어나도록 씩 웃던 그 아이의 미소, 정말 너무 나도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며 나도 미소를 지었지만, 가슴 한쪽은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 자세히 보니, 이 아이는 아까 뛰어 놀던 아이들과 달 리 센달을 신고 있지 않았다, 옷 또한 찢어져있었고, 팔과 다리에도 곳곳에 상처가 나있었다. 하지만, 눈은 정말 호수같이 맑았고, 웃을 땐 그 누구보다도 예뻤다. 우리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 나오자, 아이들도 뒤따라 나와 우리들을 졸졸 따라 왔다. 서로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우리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는지 아이들은 어느 새 우리와 팔짱을 끼고 손을 잡으면서 걷고 있었다. 아이들과 장난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아동센터에 도착하였고, 정말 놀라운 것은 이 아이들이 바로 아동센터의 아 이들이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이들의 형편이 넉넉지 않아 이제 겨우 여덟, 아홉 살짜리 아이들이 이렇게 아침마다 나가서 구걸을 해야만 했다. 또한 아이들이 너무 많아 아동센터에서 식사와 놀이방은제공해주지만, 잠은 다른 곳에서 자야 했다. 아 동센터의 놀이방 시설도매우 뒤떨어졌다, 몇 권의 헌 책과 인형, 로봇모형 등이 전 부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아동센터는 자기들에게 집보다도 따뜻하고 좋은 보금자 리라고 말하였다. 나는 아이들이 이러한 환경에서도 너무나도 즐겁게 뛰어노는 걸보 며 정말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 아이들에 비해서 나는 받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힘들면 언제든지 찾아갈 부모님도 있었고, 따뜻한 보금자리도 있었으 며, 내 꿈을 향해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 아래 있었다. 이 아이들에 비해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었고, 너무나도 많은 것을 빛을 진자였다. 아이들과 술래잡기도하고, 카드게임도하면서 나는 얘들과 많이 친해졌다. 그리고 태국어에 능숙한 한 선생님의 도움으로, 몇몇 얘들에게 “너희들의 꿈은 무엇이니” 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수줍어했다.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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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의 물음 끝에 다양한 꿈들이 나왔다, 학교 선생님, 의사선생님, 예술가 등, 일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확신에 찬 눈빛이 아니라, 의심이 가득한 눈빛이었 다. 나는 수많은 아이들 중 한 아이의 답변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한 태국 남자아 이가 이렇게 말했었다, “물론 저에게도 꿈이었어요, 바로 과학자가 되는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어린 제 동생을 보살펴주고, 저희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제 꿈은 과학자가 아닌, 제 동생이 잘 크고 저희 가족이 화 목하게 잘 사는 거에요. 과학자의 꿈은…… 그 꿈은 그냥 정말 잠잘 때 꾸는 꿈 같은 존재에요, 이루어질 수 없는, 말 그대로 꿈이죠…… 붙잡기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 아요”태국 말이라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 이 아이의 말을 듣고 나는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여태까지 바라보며 달려왔던 나의 꿈 과 내가 그리는 미래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단지 위 대한 사람이 되어서 남에게 나 자신을 과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재능으로 남을 도와주며, 나의 도움을 통해 한 사람이 다시 꿈과 희망을 갖는다면 이것이야말 로 정말 귀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처럼,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싶어 하고 있을까, 그 사람들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이 아이들은 우리가 이렇게 와서 놀아주고,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데,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렇게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날, 세상을 보는 나의 시각과 관점에 큰 변화가 생겼다. 매번 공부하기가 힘들 때마다, 내가 나의 노력과 재능으로 다른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더 열심히 달려왔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그 꿈이 소박하 든, 거창하든, 누구나 꿈을 꿀 자유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할 권리가 있다. 하 지만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꿈을 꿀 자유조차 잃어버리게 되는 사람들, 또 이 험난 한 세상의 억압에 못 이겨 본인이 꿈을 놓아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우리의 재능으로 희망과 꿈을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꿈과 비전 아닐까? 나는 내가 바라보며 살아가는 목표와 꿈이 나 자신만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도 위하는 것이 되어야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내 자신의 희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타인 을 돕는다’는 개념은 어떻게 보면 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 또는 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야 한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꿈을 꾸고 싶어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꿈을 꿀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고, 그들의 가능성을 찾게 해준다면, 이것이 결국 사회를 바꾸고, 나 자신에게도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즉 그 사람들의 꿈이 꿈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성이 되고,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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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하나의 희생이 작은 불씨가 되어 큰 불꽃이 솟아 오르는 것처럼, 한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에 변화를 주어 사 회를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하나의 전쟁터이다, 나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일어서야만 하는 그런 사회구조 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아직 학생의 신분인 나 또한 그려지는 사회의 풍경은 별 다를 바 없다, 반에서 서로 일, 이 등을 다투며 치열하게 경쟁하 는 나의 반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사회의 변화를 절실히 느낀다. 경직된 사회 구 조와 체제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작은 변화를 꿈꾼 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작은 희망을 품고 달려간다 : 나의 꿈 그리고 우리 모두의 꿈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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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경필국회의원상 상지시 조선족소학교 6학년 최은혜 ․ 최은총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아 우리 아버지는 상지시 주하교회의 오랜 목사이고 신학원원장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우리 쌍둥이 형제에게 이렇게 물어 보신 적이 있습니다. “은총아 은헤야”, 너희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니? 엄마의 갑작스런 물음에 우리 형제는 머리가 땡해나며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한참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어머님이 바라는 정답이 무엇지를 찾아냈습니다. 그 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로 있으면서 남을 많이 도와주는 사람!” “그래 그렇지. 너희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너희들 아버지야말로 참으로 남을 많이 도와줬지 왜 그러는지 아니?” 라고 하면서 어머니께서 우리 형제에게 아버지의 래력을 들려주셨습니다 …….. 아버지의 고향은 한국 경상북도 영천이라고 하는데 두 살나던 해 부모님을 따라 중국으로 오게 되였다고 합니다. 어머님의 말씀이 우리 가정은 예로부터 예수를 신 앙해온 가족으로 외할아버지 되시는 분께서 일찍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퍽 전인 1931년에 벌써 장로가 되셨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가족 은 중국에 들어와서도 계속 교를 믿었는데(기독교) 한때 당국으로부터 믿지 못하게 엄하게 단속했어도 교인들끼리 몰래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한시기 불편을 겪은적도 있다고 해요. 한 집식구들끼리도 믿음 이 다른지 할머니는 교인인데 할아버지는 공산당원이고 마을 책임자여서 상급에서는 할아버지에게 집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기에 그 자녀들은 대학에도 갈 수 없다하 여 할아버지와 할머니사이가 좋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당에 할 아버지역시 교를 믿게 되였고 이런 가족의 영향으로 아버지께서는 어릴 때부터(어머 님께서 이런 것을 모태신앙이라고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였고 그리하여 고중을 졸업한 후 제1기로 심양신학원을 졸업한 후 상지로 돌아와 상지시 주회교회를 창설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버지께서 예수를 믿는 보통 사람이라면 우린 이 글을 쓰지 않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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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허지만 어머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를 믿으시는 목적은 그 누 구들처럼 죽어서 천당에 가기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착하고 바르고 부지런하게 살 면서 남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꿈을 한 발작 한 발작 이어가면서 지금까지 어렵고 약한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돈이 많아 부자가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 부 자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한국, 미국등지를 부지런히 오가며 그곳의 교회와 자선단체 로부터 돈을 얻어다가 그 돈으로 상지땅에 52여개 교회당을 지어 예수를 믿고 싶어 도 장소가 없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믿도록 하였습니다. 그뿐이 아니지 요. 시림들이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바르고 착하게 살면서 남을 도와주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어서 아버지는 자신부터 본보기가 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 어 려운 사람, 고아들 장애자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뻗쳐 2007년까지 롱아아이 3명

장애자 학생 7명에게 한 해에 도합 6만원씩의 생활비와 학비를 대주었답니다.

그리고 가정생활이 아주 어려워 학교를 못 다니거나 학교에 다니지만 점심밥도 제대 로 못 먹는 아이들에게 정도에 따라 다달이 80원, 120원, 220원씩을 지불하여 (20 여명 )공부를 하게 하는 일을 7년 동안이나 해왔습니다. 지금도 일요일 날엔 가정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는데 그런 애들에게 밥도 무상으로 준답니다. 그리고 저 먼 남방에서까지 청년들 이 와서 무려로 궁부를 하는데 그런 학생이 열여섯이나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조선족이 살아갈 앞날을 누구보다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며 상지시의 조선족교육과 문화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하였습니다. 상지진에는 조선족소학교가 하나 있는데 학교경비가 모자라서 석탄을 많이 사들이 지 못한데서 교원과 학생들이 가뜩이나 추운 북방의 겨울을 더욱 춥게 지내야했습니 다. 이런 사정을 아신 아버지께서 석탄을 사서 불을 지피라고 3만원 돈을 선뜻 내놓 기도 하였답니다. 2004년 상지시에서 조선족체육운동회와 함께 제 2차로 되는 카라오케 노래시합을 하게 되어 운동장에 무대를 설치해놓고 숱한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운동회를 즐기었는데 그때 “주하컾 카라오케 노래시합”에 5천원의 돈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 리고 조선족 로년협회에서 문구시합을 할 때(게이트 뽈) 기타 활동을 하면서 경비가 모자랄 때 2천 원, 3천 원, 5천 원씩 여러 번 대주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자선사업을 하셨는데 우리형제는 나이 어린데다 아버지께서 자랑 을 하시지 않아 많은 것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남을 열심히 돕지만 자 신이 도와준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만나서 내가 너희들을 도와 주었다고 하면 마치 유세를 부리는 것 같기 때문이라지요.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하려고 아버지께서는 미국에 가서 강의하고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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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강의비며 지어는 자신이 론문을 써서 받은 원고료,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중국 에서 많지 않은 신학박사칭호까지 받으면서 목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론문을 주요로 심사해주는데 거기서 받은 심사비 역시 모두 사회에 기부하는데 썼다고 합니다. 우리 형제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도 아주 끔찍합니다. 특히 우리 쌍둥이 를 무척이도 아껴주지요. 우리 형제자매는 모두 넷인데 누구보다 자녀들의 전도를 생각하는 아버지께서는 미국이나 한국에 가서 돈 벌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모두다 우리를 위해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자녀들을 모두 조선족학교에 보내 어 우리말과 글을 배우게 합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자신뿐 아니라 우리 자식들도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언니더러 장차 유아와 로인복지를 하는 사람이 되라며 한국에 류학을 보냈는데 언니는 지금 한국에 가서 사회복지학석사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빠는 지금 고중 2학년학생인데 오빠보고는 장차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을 위해 더 많은 것을 베푸는 목사가 되라고 하는데 오빠도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쌍둥이들이 모두 의사가 될 것을 바랐어요. 돈을 벌기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좋은 의사가 되라하여 우리 형 제는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그 무엇보다 착하고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서 아버지께서는 늘 우리더러 공부도 일등이지만 마음은 더구 나 일등이 되여야 한다고 하시지요. 우리 이름을 특별히 은혜. 은총으로 지은 것도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남에게 은혜를 베풀며 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우리에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고 사람이 사는 목 적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요 지금 아버지께서는 나눔을 많이 실천한데서 사회의 인정을 받아 상지시 정협위원 까지 되어 가끔씩 지방 일을 의논하는데도 참여한답니다. 아버지는 아직 꿈이 많지요. 상지시의 늙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만년에 더 편 안하고 안전하고 행복하고 부모 없는 고아들의 좋은 보금자리가 되기 위해 상지시에 서 제일 크고 넓은 양로원을 짓겠다고 합니다. 지금 만평의 땅을 사놓고 거기에 집 을 짓고 로인들과 고아들을 수용하여 봉사할 계획을 세웠는데 금년 47세인 부친께 서 57세까지 이 일을 완성할 목표를 세웠답니다. 아버지의 꿈은 우리들의 꿈이지요.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아 20년 30 년 지나면 큰 병원을 짓고 어려운 사람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어요. 국내에 서 뿐만 아니라 형편이 안 좋은 아프리카 사람들도 치료해주고 싶어요. 그들도 우리 처럼 건강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면 된다는 결심을 갖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2012. 12. 지도교원 (김수남, 강효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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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기도지사상 연길시 중앙소학교 5학년 량 수 영

나에게는 이런 꿈이 있어요. 카나예바의 찬란한 웃음이 지금도 선히 떠오른다. 금년 런던 올림픽무대에서 리듬체조 금메달을 받아 안고 관중을 향해 손을 젓던 그 자랑찬 모습 말이다. 리듬체조는 언제나 나를 가슴 설레이게 한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도 리듬체조만 은 마지막 결승까지 한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마치 선수가 되기라도 한 것처 럼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리본을 손에 들고 연주곡에 맞춰 시종 율동을 함께 했다. 어머니, 아버지도 이 시간만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자유공간을 열어주셨다. 유치원때부터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주말이면 목단향 춤쎈타에 데리고 갔다. 언니 가 키가 작은 것이 항상 걸린다며 나는 꼭 키가 커야 한다면서… 그 덕인지 소학교에 들어와 키도 또래 애들에 비해 한 뼘이나 더 컸고, 어디에 가나 춤에 소질이 있다는 말 을 늘 들었다. 학교체조시합에서도 1등을 하여 선생님들 의 사랑을 함뿍 받아 안았다. 중간체조시간에는 주석대 에 올라가 전교사생들이 주목하는 앞에 서서 체조 이끔 이가 되는 영광도 안게 되였다. “수영이는 리듬체조선수로 국가대에도 나갈 수 있겠다” 앞에서 열심히 체조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며 언젠가 체 육선생님이 하시던 말씀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말씀이 나의 잠재의식을 깨워주고 리듬체조의 여왕으로 국가대표로 되려는 꿈 심어 주었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이번 런던 올림픽을 보면서도 더욱 리듬체조의 매 력에 흠뻑 빠졌다. 동부아세아계 리듬체조 기적의 력사를 만들어낸 손연재 언니처럼 나는 요즘 풀릿도 열심히 련습하고 있다. 아버지도 내 꿈에 날개를 달아주셨다. 리 듬체조 리본을 사기위해 엄마와 함께 동분서주하다가 사지 못하고 풀이 죽어 집에 들어온 나를 보고 생일 케이크 포장끈을 갖고 리본을 멋들어지게 만들어주신 아버지 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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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어가기란 쉽지 않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동계올림픽에 자주 나오는 피 겨왕 김연아언니도 무릎이 다 터지고 발바닥이 곪아가도록 아픔을 이겨가며 연습에 연습을 하였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깐. 세계올림픽무대에서 리듬체조왕의 자리에 서고 싶다. 국가대표로 나가 그 영광 빛 내고 싶다. 카나예바 앞에서 나의 자랑찬 모습도 보이면서 관중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도 받고 싶다. 넘 환상적인 꿈 일가? 환상이라도 좋다, 나에게는 이런 꿈이 있다는 것이 가슴 뿌 듯하기만 하다. 나는 지금 꿈이 있기에 더욱 뜨겁게 자신을 도야해 나간다. 이런 아름다운 꿈을 갖 도록 그 씨앗을 뿌려준 가족과 주위 분들의 사랑을 나는 영원히 잊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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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연변과학기술대학총장상 심양시 화신조선족소학교 5학년 이 은 진

나의 꿈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동물, 식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작디작은 깃털까지... 더구나 우리 친구에게는 밤하늘의 반짝이는 새별처럼 형형색색의 꿈이 있다. 의사, 경찰, 과 학자… 나에게도 역시 꿈이 있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친근한 요리사가 되고 싶다. 친구들은 요리사라는 직업이 힘들뿐만 아니라 너무 평범하다고 한다. 그렇다! “요리사”라는 직업은 유명한 배우, 가수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지만 나 에게는 “요리사”라는 직업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만약 내가 요리사가 된다면 건강에 좋으면서도 맛도 끝내주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난해서 끼니도 겨우겨우 때우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내가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은 3학년 때부터 움트기 시작됐다.“스타킹”이라는 프 로그램을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을 때 아시아 최고의 요리사 3명이 나오는 내용을 방영했다. 평소에 요리프로에 관심이 있던 나는 시선이 TV쪽으로 쏠렸다. 3명의 요 리사 중 단 한 명만이 여성요리사였는데 “분자요리”라는 요리를 선보였다. 이 요 리가 과학적 요리라는 소리를 들은 나는 과학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TV화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소개에 따르면 분자요리는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맛도 독특하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가장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군침 이 입안을 휩쓴다. 그 후로 “요리사”라는 꿈을 이루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나는 가끔 인터넷에서 레 시피를 찾아서 간단한 요리를 시도했다. 엄마는 내가 만든 음식을 맛보실 때마다 만 족한 미소를 띠며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 하는구나!”라고 연신 칭찬하신다. 동생도 서진이도 덩달아 “언닌 최고요리사야”라고 손뼉을 치며 나름대로 칭찬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유명한 요리사가 된 것처럼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멋지고 아름다운 꿈이 있다. 또한 그 아름다운 꿈을 위해 열 심히 살아가고 있다.

나도 요리사가 되겠다는 나만의 멋진 꿈을 위해 지금 앞으로

달린다. 꿈을 향해 달리고 달려서 꼭 꿈을 이루어 낼 것이다. 여러분 저의 멋진 요 리 기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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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서울대총장상 길림성 도문시 제2소학교 3학년 박 청 림

꿈에 관한 일기 세편

2012년 2월 6일 날씨: 추움 오늘은 보름날이다. 휘영청 둥근달 아래서 우리는 친척들과 한자리에 화목하게 모 였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앉기가 참 오랫만이다. 정말 신났다. 우리는 서로 맛나는 음식상도 나누고 전통놀이인 윷놀이도 즐겼다. 그리고 두만강 변에서 있은 불꽃축제도 구경하였다.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뿌리를 박고 피어나는 예쁜 꽃 같았다. 너무 멋있고 아름다워서 나는 “야호!”하고 환 호까지 하며 퐁퐁 뛰었다. 같이 구경을 나간 친척의 얼굴에도 웃음이 어려 있었다. 나는 오늘 정말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렵게 한자리에 모인 친척들이 래일이면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아쉬운 리별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나는 나만의 꿈을 꾼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한집에서 살아갈 수 있게 돈을 많이 벌어 내 손으로 아주 큰집을 지으리라고… 그래서 온 집안에 웃음이 사철 끓어 넘치게 할 것이라고…

2012년 3월 24일 날씨: 흐림 나는 일찍 일어나 습관대로 독서를 시작했다. <아동세계>잡지를 읽다가 룡에 관한 글을 보게 되였다. 잡지를 통해 룡에 대해 얼 마간 료해를 했지만 궁금한 점이 많았다. 룡이 과연 세상에 존재했을까? 아니면 상 상속의 동물일까? “할머니! 룡이 세상에 있는 동물인가요?” 나는 궁금증을 풀려고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할머니는 세상에 없는 상상 속 동물이 라며 머리를 저으셨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도 어쩐지 궁금함은 풀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 궁금증을 풀 수 있을까? 아, 맞다. 공부를 열심히 해여 내가 직접 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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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연구를 하면 되지… ) 난 아름다운 꿈에 빠져 내가 룡을 연구하는 먼 훗날의 내 모습을 그려본다.

2012년 5월 3일 날씨: 개임 오늘은 우리학교 학생들이 기중시험을 치는 날이다. 백점을 목표로 삼고 학교로 가는 나의 마음은 매우 긴장하고 설레었다. 시험을 칠 때였다. 5반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우리반 시험현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조선어문시험을 쳤는데 문제요구를 참답게 읽고 답을 썼는데 몇 문제는 아리숭하여 제대로 답을 적지 못했다. 다음은 수학시험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바빴다. 시험문제를 리해하기가 힘들었고 게다가 덤벼치다보니 틀리게 적은 답이 있었다. 그다음은 한어였는데 제일 자신이 있다고 여겼던 한어마저도 백점을 맞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렇게 되여 백점을 목표로 한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꼭 복습을 잘하여 나의 백점 맞는 꿈을 이루고 말 것이다. 지도교원 : 윤춘애, 박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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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수원시장상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소학교 1학년 조 가 예

나의 꿈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날씨는 나의 기분처럼 상쾌하고 맑았습니다. 오전에 나는 엄마와 함께 공부를 하고 아빠는 옥상에서 나물을 말리고 있었습니 다. 숙제를 마친 나는 아빠를 도우려고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제가 돕겠다고 하자 아빠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귀염둥이 딸이 다 컸네. 할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한참 나물을 손질하던 아빠가 불쑥 물 었습니다. “우리 가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수학선생님 이 되고 싶어요.” 라고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빠는 궁금한 표정으로 “선생님이라 고 하면 되지 왜 꼭 수학선생님이라고 하니?”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야

기했습니다. 나는 “수학귀신”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수학귀신이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 에게 밤마다 꿈속에서 수학을 재미나게 가르쳐주어 나중에 그 친구들은 다 수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된 이야기를 아빠께 들려주었습니다. “나도 나중에 커서 수학선 생님이 되여 이처럼

친구들에게 간단하면서도 재미나게 배워주어 우리반의 민국이와 명준

수학을 싫어하는 친구들이 수학을 좋아하게 만들 거예요.” 내가 정색하게

말하자 아빠는 허허 웃으시며 나를 칭찬했습니다. “우리 딸 참 기특하구나. 그런데 꿈만 있으면 안돼. 꿈을 실현하자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 실패와 눈물을 견딜수 있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아빠의 말씀을 다 리해하지는 못했지만 머리를 끄덕이었습니다. 묵묵히 나물을 널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졌습니다. “그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할거야.”

지도교원 : 리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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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한민족글짓기대회장상 심양시 소가툰구 조선족중심소학교 6학년 강 건 위

꿈 나의 꿈은 여우처럼 자꾸 180도로 변해요. 언젠가는 노벨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었 고 언젠가는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비행원도 되고 싶었어요. 꿈? 도대체 내 꿈은 무엇일가? 유치원때 나는 태권도를 배워 주먹이 좀 센 편이었어요. 그래서 애들과 놀다가도 조금만 나를 건드리기만 하면 무조건 그 애들에게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뜨리군 했 어요. 그래서 선생님에게 있어서 난 눈에 든 가시였어요. 그때 가장 컸던 《꿈》이 라면

과학자도 의사도 아닌 바로 코피가 터지는 것이었어요. 누군가가 코피가 터지

는 날이면 그 애는 선생님의 특수한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소학교에 올라오자 아마 유치원 때 가슴 아팠던 추억때문인지 나보다 어린 동생 들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어요. 그래서 이젠 학교의 어엿한 대대장이 되였어요. 나 는 1학년 학생들의 도시락을 날라다준다든가 그 애들의 시시콜콜한 일을 두고 시비 를

가르느라

무척 머리를 앓고 있어요. 하여 내가 복도에 나서기만 하면 꼬마들은

우르르 나한테 몰려들어 고자질을 하느라 야단법석이었어요. “대대장오빠, 저 애가 나를 밀쳤어요.” “대대장형님, 애들이 나를 왕따시켜요.” “대대장오빠, 쟤는 밥 먹을 때 홍당무우를 골라내요.” 꼬마들의 진지한 모습에 나는 더욱 열성스레 뛰어다녔어요. 지금도 가끔씩 그 애 들의 《지혜주머니》노릇을 하느라 행복한 《고민》을 하군 하죠…… 이런 영문인지 나는 전보다 훨씬 밝아졌고 학교생활이 즐겁게 느껴질 때가 점점 많아졌어요. 따라 서 나의 꿈은 또 한번 변했어요. 바로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산소와 같이 리로운것 들을 만들어줄 수 있는 나무같은 사람이 되는 게 꿈으로 변했죠. 지금은 어린 묘목이지만 언젠간 무성하게 자라 누군가에게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이 되어주고 무더울 때는 그늘이 되어주는 그런 나무로 말이에요. 나의 모든것을 아낌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랑은 나눌수 록 커진다잖아요. 어느덧 내 눈앞에는 한그루의 사랑나무가 풍경처럼 펼쳐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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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중부일보사장상 심양시 훈남신구(동릉구)조선족학교 소학부 2학년 서 우 비

나의 꿈 나는 꿈이 많은 애입니다. 국가팀의 탁구선수로 되여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따고 싶고 또 유명한 무도가가 되여 우리 민족의 춤 문화를 널리 알리고 싶으며 또 이름 난 바이니스트도 되여 아름다운 멜로디를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지게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국가 팀의 탁구선수가 되는 것이 나의 꿈입니다. 겨울바람이 쌀쌀 불어오는 오늘도 나는 큰 희망을 품고 탁구 훈련장으로 향하였습 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훈련받는 날입니다. 팔목이 끊어질듯 아팠지만 나는 교련원 의 지도하에서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탄 정령언니를 생각하면서 송골송골 나오 는 땀을 닦으며 퐁퐁 뛰면서 잽싸게 대방의 탁구공을 받아쳤습니다. 치면 칠수록 흥이 났고 구슬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교련원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 면서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하루 훈련을 끝마친 나는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며 금메달을 안은 리효화 언니의 웃음 띤 얼굴을 련상하면서 탁구선수의 꿈을 담아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래일도 모 래도… 나의 꿈은 계속될 것입니다. 지도교원 : 최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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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북도지사상 심양시 소가툰구 조선족중심소학교 6학년 림 은 혜

나의 꿈 오늘도 숙제를 마치고 컴퓨터를 열었다. 문득 세계적으로 스트레스때문에 자살하 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난 정말 우물 안에 개구리였다. 세 상이 이렇게 무섭게 변해가고 있는데도 난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었다. 난 너무 나 큰 충격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생활을 했기에 난 항상 기뻤고 즐거웠다. 스트레스가 있기도 하지만 교회 가서 기도하면서 다 푼다. 이런

상처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늘 고민하던 중 나만

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사랑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는 심리의사였다. 사람들이 심리가 건강해야 무얼해도 신이 나고 즐거워 질수가 있기 때문이다. 내 가 이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겠는가? 사는 게 힘이 들고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일 것이 다. 서로서로가 다른 사람의 립장에 서서 생각을 하면 세상이 많이 행복해질텐데… 어제 결혼식장에서

시들은 백합과 백장미를

집으로 가져왔다. 이튿날 잠에서 깨

어난 나는 향기로운 꽃향기에 도취됐다! 이 꽃들은 마치 천국에서 자라난 꽃들 같이 싱싱하고 예뻤다. 어떻게 이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꽃에게는 물이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꽃들은 이미 시들고 썩어버렸는데 물을 주면 또 살아날 수 있었을까? 아 니, 이미 죽어버린 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살아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 의 사람이 “죽기”전에 구해내야 한다. 그래서 난 전문 심리에 상처입은 사람들을 품어주고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려 한 다. 사람의 마음이 더 아름답게 변할 수 있도록. 한 사람마다가 아름답고 건강한 주 인공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이런 나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마음의 상처는 다 사라지고 꿈과 희망이 있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조금만의 힘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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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심양시 훈남신구 (동릉구) 조선족학교 소학부 6학년 오 선 미

나의 꿈 어렸을 때 나의 꿈을 물어본다면 나는 무용가, 가수라고 선뜻이 대답한다. 하지만 지금 나의 꿈은 선생님이다. 1학년 때부터 매일 바뀌던 담임선생님이 매년마다 바뀐다. 4학년에 와서야 우리는 지금의 선생님인 윤선생님을 맞게 되였다. 그날 이후로 나의 꿈도 선생님으로 바뀌 여 진 것이다. 윤선생님은 엄격한 분이시다. 우리의 잘못을 조금도 봐주지 않는 엄하신 분이시 다. 나에게는 숙제를 한 번씩 빼먹는 나쁜 습관이 있다. 예전 선생님 같으시면 잔소 리 몇 마디에 끝날 판이다. 허나 윤선생님은 바로 저의 엄마를 불러다 보도실에서 숙제를 완성하도록 하였다. 숙제인 이상 학생뿐만 아니라 가장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엄마는 나의 숙제를 매일 체크하셨고 나의 숙제를 빼먹는 습관도 없어졌다. 그때는 선생님 이 얄미웠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나쁜 습관을 고쳐준 선생님이 고마웠다. 하여 나의 꿈은 엄격한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윤선생님은 또한 책임성이 강한 분이시다. 5학년때 일이다. 하학하였는데도 엄마가 마중오지 못하셨다. 외할아버지가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는 바람에 나의 마중시간을 넘긴 것이다. 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자 엄마는 외할 아버지의 일은 말하지 않고 그냥 지금 가고 있는 길이니 전화를 저에게 바꿔주라고 만 하셨다. 실은 엄마가 나에게 마중오지 못하니 혼자 뻐스를 타고 오라는 것이다. 눈치를 알아챈 선생님은 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따뜻한 밥까지 지어주고 숙제까지 봐주었으며 제가 잠든 후 어머니가 돌아오셔서야 집으로 가셨다 고 한다. 나는 그날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느끼게 되였다. 또한 책임성이 강하고 사 랑이 많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다시금 결심했다. 선생님 훌륭한 제자, 아니 후배가 될 그날을 기대하세요. 지도교원 : 윤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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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소학교 1학년 황 림 방

나의 아름다운 꿈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너는 장차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한 적이 있었어요. 의젓한 1학년 소학생이 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늘 듣는 말이 있었어요. 그것은 바 로 “너의 꿈은 무엇이냐?” 이지요. 그때마다 나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는 무슨 뜻인지 를 잘 리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참뜻을 알게 되였어요. 전에는 커서 의사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어요. 엄마는 영광스러운 인민교사예 요.

엄마는 항상 학교에 제일 일찍 등교하고

늦게 퇴근하시지요. 퇴근한 후 저녁

준비를 하시고 설거지를 하시고 나의 숙제를 검사해주시고 방안청소까지 하신 후 쏘 파에 앉으면 소금에 절인 오이처럼 되셔서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시지요. 그때마다 나는 커서 의사가 되여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줘야지 하면서 의사의 꿈을 키워왔던 거예요. 하지만 요즘은 꿈이 전과 달리 많아졌어요. 매번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차근차근 글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커서 선생님이 되어서 학생들에게 글을 배워줘야 지.”하면서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이 마음 밭에서 뾰족하게 싹 트는 거 있죠. 소학교 에 올라오면서 미술공부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미술선생님께서 저보고 그림을 제법 잘 그린다고 앞으로 노력하면 유명한 녀화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지요. 그 칭찬때문에

나는 커서 훌륭한 미술가가 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고향을 필로 아

름답게 그려내고 싶은 충동이 또 생겼어요. 이렇듯 내 꿈은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알 록달록하게 변해가네요. 아직까지 최종 결정은 내리지 못했지만 나는 아름다운 내 꿈을 소중히 키워 갈 거 예요. 지도교원 : 리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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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대구경북한중교류협회중국지회장상 심양시 훈남신구(동릉구)조선족학교소학부 2학년 리 지 민

나의 꿈 우리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의 꿈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초불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명한 서예가가 되려는 것이 꿈입니다. 하지만 나의 꿈은 의사가 되는것입니다. 사 람들에게 흔히 불리우는 “백의 천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얀 옷을 입고 환자의 병을 치료해주며 최선을 다하는 좋은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환자들을 친형제처럼 살뜰하게 보살펴주겠습니다. 특히 몸에 종양이 생겨 고생하는 환자들의 고통을 감소시키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머리에 종양이 생겨 그토록 검 고 많던 곱슬머리가 다 빠져서 민대머리로 되였으며 병마에 시달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처럼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더 잘 보살펴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의사가 되겠습니다. 지도교원 : 최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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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대구경북한중교류협회중국지회장상 료녕성 안산시조선족소학교 5학년 오 효 월

약 속 방과 후 친구들이 엄마 손잡고 다정히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부러웠 다. 그래서 한국에 간 엄마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엄마가 한국에서 돌아오셨다. 뜨거운 포옹한 후 나는 끝내 소원을 말하였다. “엄마, 래일 오후 4시에 하학하는데 저를 마중올수 없나요?” “우리 월이 5학년생이 아니니? 엎어지면 집인데 그래도 마중 가야겠니?”워낙에 자 립능력을 강조하시던 어머닌지라 쾌히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학하고 친구들이 부모님이랑 손잡고 오손도손 이야기도 나누며 집에 가는 것이 제 소원이었어요. 엄마, 마중 나와 줄 수 있죠?” 오래만에 보는 엄마한테 응석을 부 렸는데 좀 멋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소원이라면 가야지. 약속하마!” “약속!” 나는 엄마랑 약지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었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하자부터 하학하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다. 엄마랑 같이 집에 가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며 하루 종일 흐뭇해있었다. 그런데 얄밉게도 강한 바람 이 불더니 7교시부터는 우박같은 비방울이 설대같이 내리질렀다. (아빠가 오시겠지? 비람이 세서 엄마는 못 나오실거야.) 나는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방과하자 친구들은 파도마냥 교실 문을 밀치고 나갔는데 나만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월아!” 분명 엄마의 목소리였다. 순간, 눈앞이 환해지며 밝게 웃으시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비바람이 이렇게 센데 어떻게 오셨어요?” “우리 월이랑 어제 약속했잖아, 비가 아니라 칼이 내리질러도 우리 보배 딸 마중 와야지.” “엄마!”나는 그만 목이 메여 아무 말도 못했다. 엄마는 나를 품에 꼭 껴안으셨다. 엄마 품이 너무 따뜻했다. 엄마의 따스한 품속에서 나는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였다. 바로 약속을 하였으면 꼭 지켜야 한다는 도리를! 나는 꼭 엄마처럼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될 거야! 지도교원 : 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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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료녕성 심양시우홍구오가황학교 6학년 김 은 영

사랑, 나눔 20년 후의 나의 모습을 그려볼 때 행복감으로 차넘친다. 20년 30년 후에 나는 곤 란한 애들을 입양시켜 내 친자식처럼 키우고 자주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며 행복함과 웃음소리에서 살고싶다. 내가 여덟 살 나던 해, 집에서 텔레비죤을 보며 슬픔과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사 천지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집을 잃고, 길거리에서 생활하고, 부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가족을 잃어 통곡하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엄마, 애들 너무 불쌍해요! 내가 도움 줄 수 없을까요?”라고 어머니한테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응, 당연히 도와줘야 지. 학교에서 재해복구를 위한 의연금 모으기 활동을 할 거야!” 나는 그들에게 사랑 의 손길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평시에 모아두었던 세뱃돈 500원을 꺼내어 의연하 였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을 때 나의 마음은 그토록 행복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재다시 느끼면서 20년, 30년 후 나의 가장 행복한 모습 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등 지역에 가서 불쌍한 학생들에게 학교를 지어주 고, 희망의 싹을 틔워주는 선생님이 되고, 그들에게 충족한 음식과 음료수 등 생활 용품을 지원해주겠다. 부모님을 잃고 혼자 생활에 허덕이며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 는 애들을 입양하여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겠다. 20년, 30년 후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 질 것이다. 그때 나의 모습을 떠 올리면서 난 또 다시 행복 속에 잠긴다. Belive, l can ! 지도교원 : 김원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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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료녕성 심양시우홍구오가황학교 6학년 묘 해 조

꿈 나는 커서 어떤 사람으로 될 것인가. 헤아릴 수 없는 뭇별처럼 나도 꿈이 많다. 모델, 녀승무원, 의사, 선생님, 가수, 작가…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되고 싶은 것은 " 의사 이다. 이 꿈을 가지게 되는 데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고 난과 절망 속에서도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친구가 …. 지금 우리반에 “전성희”라는 학생이 있다. 희귀 난처병으로 다리가 불편한 그는 휠 체어를 타고 우리와 함께 6년 동안이나 한 교실에서 공부해왔다. 우리 반의 모든 친 구들은 그의 손발이 되고 선생님들께서는 그를 업고 전용교실로 오가군 하신다. 나 는 매일 아침 성희의 책가방을 받아서 제 자리에 놓고 차천명은 성희의 점심도시락 을 책임지고 챙겨준다, 전번주 중대활동 때 성희는 친구와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편지글로 써서 읽었다. 우리는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성희의 꿈은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 다만 건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의사가 되여 꼭 성희의 병을 치료해주어 그가 자기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겠다. 나는 의사가 되여 아픈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 싶 다. 작은 일이라도 남을 도와주면 기쁨을 얻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모습으로 많은 사람에게 건강과 행복, 기쁨을 주며 살아갈 것이다. 20년 후 나는 소외감을 느끼게 될 환자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안겨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행복감에 부풀어 오른다. 지도교원 : 김원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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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모두하나교육회장상 심양화신조선족소학교 5학년 최 윤 나

나의 소박한 꿈 누구에게나 파란만장한 꿈과 미래가 있다. 우리 학급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은 알록달록 아름다운 꿈을 지니고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다. 유명한 배우, 명가수, 아나운서, 디자이너, 과학자, 검찰관…이렇게 멋진 꿈을 갖고 말이다. 그런데 친구 들의 아름다운 꿈과 달리 나의 꿈은 아주 소박하다. 교정의 화단에 만발했던 무궁화가 수줍은 듯이 얼굴을 감추기 시작하는 9월이었 다.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한손엔 막대사탕을 들고 유치원으로 들어가던 그 정경이 아직도 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그 꼬마시절에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언 젠가는 씩씩하게 소학교교문에 들어서는 언니, 오빠들처럼 큼직한 책가방을 메고 싶 었다. 그러던 새싹이 자라서 묘목이 되고 단풍잎이 또다시 물들어가던 가을에 나는 드디어 1학년생이 되였다. 그해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엄마가 한국으로 떠났 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나에게 새 어머니를 찾아주셨다. 그때부터 나 에게는 또 새로운 꿈이 내 가슴속의 가장 자리에 고스란히 자리를 잡았다. 언젠가는 엄마랑 같이 살고 싶은 것이 바로 내 꿈이다. 내가 열심히 학습해서 좋은 성적을 얻 으면 돌아온다는 엄마의 약속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오늘도 열심히 학습하고 있다. 그런데 교정의 새싹이 자라서 지금은 기둥감으로 자라났지만 난 아직 이 꿈을 이루 지 못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에 가느다란 전화줄로 전해온 엄마의 반가운 목소리 에 반겨 새 학기에 나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희소식이 전해온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어찌 변 화보다 빠를 수 있으랴! 꿈이 실현되는가 싶었는데 종종 원인으로 삽시에 물거품으 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꿈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

해 지금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좋은 성적으로 한 국의 유명한 학교에 입학하여 엄마랑 행복하게 살 것이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내 친구들은 내 꿈이 유치하다고 생각하겠 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소박하고도 소중한 꿈이다. 행복한 앞날을 그리며 나는 오늘 도, 래일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 까지 파이팅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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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모두하나교육회장상 철령시 은주구조선족소학교 6학년 김 은 령

나의 꿈 현재 나에게 하루 빨리 해결하고 싶은 간절한 꿈이 하나 있다. 3학년 때의 일이였다. 그날 나는 하학하자마자 친구들과 인사할 겨를도 없이 백점 을 맞은 조선어문시험지를 들고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얼른 엄마, 아빠한테 달려가 자랑하고 싶었다. 이런 딸이 있어 자랑감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칭찬받을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며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내가 문을 열고 “엄마, 아빠!”부르며 막 들 어가려는데 귀에 익은 아빠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는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 는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지만 달려가 아빠의 팔을 흔들며 싸우지 말라고 말렸다. 허사였다. 계속 핏대를 세우며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우리 집은 마치 “전쟁마당”을 방불케 하였다. 나는 소리 지르시는 아빠와 우는 엄마 를 번갈아보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전쟁”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실망, 분노, 괴로움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나는 시험지를 힘껏 뭉개고 침실로 들어가 눈 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었다. 엄마와 아빠가 왜 싸우는지 리해가 안 간다. 그 후 우리 집은 흩어지고 합했다가 다시 부서지고 하였다. 내가 이불속에서 우는 날이 얼마나 되는지 나도 모른다. 거리에서 부모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가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나의 가슴속에 쫓으려해도 쫓아버리지 못할 소원이 파고들어왔다. 나 자 신보다도 더 소중한 가족의 화목과 평화를 되찾아 오고 싶은 것이다. 지금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곧 떳떳한 중학생으로 된 나는 나의 힘으로 꼭 우리 가정의 화목을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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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모두하나교육회장상 대련시조선족학교 5학년 류 청 여

미래의 나 매 사람은 다 자기가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을 것이다. 나도 내가 바라는 꿈이 있다. 나의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들처럼 명문대학에 꼭 가야 한다며 매일 공부하라 학원 에 가라 잔소리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아프지 말고 친구의 입장에서 배려할 줄 아 는 사람,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서 장래 효도하는 딸, 그리고 남의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그럼 나의 꿈은 무엇일가요? 바로 책을 척척 써내는 작자가 되고 싶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공부하고 지식을 쌓아가겠다. 튼튼한 나무로 자 라기 위해서는 나무에도 양분이 필요하듯 어린이가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 책은 지식의 원천이다. 책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지식이 숨어있다. 이 다음에 유명하고 이름난 작가가 되면 나는 이런 책을 쓰겠다. 애들이 잘 리해하는 책, 조상의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문학작품을 많이 쓰겠다. 이런 책들은 애들에게 많은 방조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자기의 꿈을 향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 람은 자신만의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한술 밥에 배부를 수 없듯이 계속 열심히 하면 언젠가 작가가 될 수 있는 날이 오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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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모두하나교육회장상 심양시 훈남신구(동릉구)조선족학교 소학부 3학년 리 용 건

나의 미래 4년 전에 아빠와 엄마가 리혼해서 엄마와 살다가 중국 이모의 집으로 온지 벌써 2년이 되었다. 중국에 금방 왔을 때에는 한마디 중국말도 모르는데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으나 차츰 중국생활이 몸에 배였다. 오늘 엄마의 전화를 받게 되였는데 엄마는 나한테 참으로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 셨다. 엄마가 새 아빠를 찾았는데 2월 달에 한국에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 생활이 적응된데다 새 아빠하고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국으로 가기 싫어 몇 번 이나 이모랑 안가겠다고 얘기했지만 이모는 그럴 수가 없다고 하셨다. 엄마랑 같이 있는 건 좋은데 또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다시 적응해야 할지, 새 아빠 는 어떤 분이실지 나를 미워하시지나 않을지 참담했다. 왜 엄마 아빠는 리혼을 선택해야 하는가? 왜 남들 부모처럼 사이좋게 지내지 못 하고 흩어져 살아야 하는가? 나는 엄마 아빠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나의 성격이 이렇게 거칠어진 건 아시기나 하는지? 만약 내가 십년, 이십 년 후 결혼을 선택한다면 리혼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부 모가 리혼한 자식들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절대로 리혼해서 자식에 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작자가 되고 싶다. 지금 리혼 률이 날로 늘어가는 시기에 리혼의 위해성, 자식들의 감수 등을 알아보기 쉽게 글로 적어 사람들이 결혼할 때 신중히 할뿐더러 리혼하지 말고 자식들을 상처투성이 로 만들지 말도록 이끌어 주고 싶다. 그렇게 가고 싶었지만 이젠 가기조차 싫어진 한국, 그래도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은 아닌 것이다. 가서 새 아빠랑 사이좋게 지내는 거로 새 출발해야겠지. 이게 나에겐 힘든 일이지만 엄마 속을 끓이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리라. 지도교원 : 리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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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기도지사상 흑룡강성 오상시조선족중학교 초중 1학년 박 은 지

내가 이루고 싶은 꿈 꿈은 희망입니다. 꿈은 자신이 전진해야 할 동력입니다. 꿈이 있기에 우리 인생은 더욱 값지고 삶은 더욱 즐거운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학교 1학년 때 나는 우연히 텔레비죤 아동프로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이 이쁜 무용복을 입고 나풀나풀 흥겨웁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나서 금시 어머니에 게 달려가 무용을 배우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도 춤을 잘 춰서 텔레비죤에까지 나와 온 집안 식구들이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그래 서 힘든 것도 마다하고 과외무용학교를 토요일 일요일만 되면 열심히 다녔던 것입니 다.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내가 지은 글 <<파아란 꿈>>을 전반에서 읽어주면 서 아주 독특하게, 개성이 엿보이게 잘 썼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글짓기에서 싹 수가 보이니 글짓기를 게으름 없이 하면 장래에 유망한 작가로도 될 수 있다는 아름 찬 고무격려도 잊지 않으시면서 말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이 내준 글짓기숙제 는 무엇보다 더 참답게 완성하였고 글을 잘 지으려면 우선 과외서적을 많이 탐독해 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과외서적도 부지런히 사들여 읽었습니다. <<빨간 머리 앤>> <<로인과 바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어린 왕자>> 등 등 책들은 나에게 작가로 될 꿈을 더 야무지게 키워주었습니다. 6학년 때 장춘에 있 는 친척이 우리 집에 놀러오면서 집에서 기르는 예쁜 강아지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강아지가 어찌나 귀여웠던지 수업시간에도 눈앞에 자꾸만 밟혀왔습니다. 그 친척이 떠나는 날 나는 그 강아지와 헤어지기가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나에게 동물에 대한 애착이 그렇게 깊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서 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 강아지가 마치 전생에 사귀였던 친구처럼 그냥 그 강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한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한국에서 전화로 무엇을 갖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나는 선뜻 이쁜 강아지를 사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요구하면 군말없이 다 들어주던 아빠가 할머니께서 그런 동물을 좋아하지 않 으니 그것만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오래동안 할머니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꿈은 그 후의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멋진 여 자 동물사양원이 되는 것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흥, 사주지 않으면 나혼자서도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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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든지 가질 수 있으니 두고봐요 하고 속으로 벼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꿈이란 참 변하는 속도가 빠른가 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저의 꿈은 그렇게 견고성이 없었구나 하는 것을 알고는 어딘가 서운한 마음도 잠간 씩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멋지고 새로운 꿈의 유혹으로 그런 서운함도 잠시 뿐이 었습니다. 새로운 꿈은 언제나 더없이 큰 매력과 마력으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게 다가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저의 가슴에 자리 잡은 꿈은, 제가 이루고 싶은 꿈은

어쩜 저의 평생의 꿈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 위해 저는

꼭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 꿈인즉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빠의 얼굴에 그늘이 지 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소학교 3학년 때 아빠와 엄마는 리혼을 하였습니다. 그 후 아빠는 한국으로 나가셨고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겉으로 는 밝아보였지만 마음한구석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였습니다. 아침 에 이불속에서 눈을 떠서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지는 때가 많았고 집에서 혼자 있는 공간이 생기면 나는 멍하니 앉아서 우울의 늪을 방황했던 것입니다. 괜한 일에도 그냥 분통이 터져날 때가 많았고 그래서 친구들과도 잘 버성겨졌습니다. 할 머니께서 동에 가라하면 저는 서에 가고 공부가 점점 싫어져나기만 했습니다. 그런 저 때문에 할머니의 잔소리와 한숨소리는 늘어만 갔고 아빠의 전화도 더 자주 건너 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무덤덤해져 갔습니다. 초중에 올라와서 치는 제1차월고시험입니다. 나는 사십명 학생 중에서 삼십등을 하였습니다. 점점 내리막길로 줄달음쳐가는 나의 성적이었지만 나는 그냥 강건너 불 보듯 하기만 하였습니다. 외려 그런 나의 성적에 잘코사니라도 부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에게서 이 소식을 들은 아빠가 글쎄 그 이튿날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처음엔 그냥 아빠혼자 무슨 일 있어서 왔으려니 하였는 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날 저녁 여덟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하기 바쁘게 먼저 담임 선생님한테 전화부터 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나의 학습 성적, 학교에서의 표현 등 을 물으시고 그런 나 때문에 가슴이 아파 한국에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엄 마가 옆에 없어서 사춘기의 방황과 고민이 더 큰 애이기에, 적어서 초중을 졸업할 동안만은 옆에서 아빠노릇 한번 단단히 해보려고 왔습니다. 애가 비뚠 길로 들어서 지 않게, 더 밝게 자라나게 선생님께서도 저에게 많은 방조를 주어야겠습니다. 선생 님 부탁드립니다. 저 때문에 애가 저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하시는 아버지의 전화를 엿들은 저는 가슴이 쿵해나고 찡 해나고 뭉클해나고 아픈 감같은 그런 오가잡탕의 씁쓰레한 느낌이었습니다. “……너 아빠도 쉽지가 않아, 이혼하고 싶어서 한 것 아니란다. 그러니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너의 아빠는 네가 대학교에나 가면 그때 다시 새엄마를 찾을련지나 모르겠 다. 너의 아빠는 아직 젊단 말이야… 다 너 때문이다… 네가 공부 잘하고 네가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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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너의 아빠도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야…”평소 할머니의 이런 잔소리 가 그때 머리 속을 세차게 때려왔습니다. 나의 기쁨이 곧 아빠의 기쁨과 직결되었고 나의 슬픔 고통 원망 우울 분노가 곧 아빠의 가슴에 박힌 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 다. 나는 자신이 어느 사이엔가 갑자기 훌쩍 커져버렸다는 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공부에 열심하고 밝은 모습으로 생활해 나가는 것이 아빠의 제일 큰 바램이리라. 내 가 아빠의 이런 소원하나 들어주지 못한다면 커서 무슨 일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그런 오돌찬 생각이 온 가슴을 꽉 채웠습니다. 당연히 아빠는 지금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저도 뒤질세라 지금 학교 에서 더욱 당찬 모습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의 꿈은 저 혼자의 몫이 아 니기에 저는 더 분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루 고자 하는 저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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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김진표국회의원상 룡정시 제5중학교 3학년 박 진 원

20년후의 나의 모습은 어떨가? 만물이 고요와 정적 속에 묻힌 어느 깊은 밤, 한 백발이 성성한 로인이 혜성같이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누구세요?” “운이 좋군 ,학생 난 시간의 신이라네. 우연히 만나니 반갑군. 소원 하나를 들어 주겠네.” (시간의 신? 그럼 앞날을 볼수 있단 말인가? 거짓이 아닐까?) “날 이십년 후의 저의 모습을 보게 해주세요.” “그래 들어주지.” 불현듯 눈을 찌르는 푸른 섬광이 톱날같은 선을 긋더니 나는 고층빌딩이 수풀처럼 일떠선 도시복판에 서있었다. 아츠랗게 솟아오른 빌딩꼭대기에 중앙병원이라고 멋진 간판도 보였다. (역시 나의 미래는 이렇게 찬란하였구나! 나는 끝내 나의 의사로 되려는 꿈을 이 루어서 이렇게 멋진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있구나.) 어깨까지 으쓱해하며 나 자신에 도취되어 있는데 별안간 저쪽에 사람이 까맣게 모 여 있었다. 다가가보니 경찰들이 한 도적을 붙잡아 경찰차에 싣고 가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련환 도적이라네, 경찰들이 몇 달 동안 애쓴 끝에 겨우 붙잡았다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나? 이젠 발편잠 잘 수 있게 됐네.” (저런 도적은 감옥에 넣어 영영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해야 돼!) 나도 이렇게 동감 을 표시하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백발로인의 소리였다 “저 사람이 바로 너란다!” 난 대경실색하였다 “아니예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거짓말 마세요. 난 공부도 괜찮게 하고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나의 리상은 의사가 되는 거여요.” 나는 억울해서 부르짖 었다. “자네는 컴퓨터에 빠졌었지. 일시는 학업을 따라 갈수 있었지만 후에는 점점 게 으름을 피우며 컴퓨터에만 정신이 팔려 학업을 끝내 망쳤다네. 부모님의 안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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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도, 선생님의 내심한 교육에도 자네는 귓등으로만 들었지. 완전히 pc방에 파 묻혀 버렸지. 그러다 돈이 떨어진 자네는 도적질을 하기 시작했지!” “아니요! 안돼요! 제발 미래를 바꿔주세요! 전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의사가 될 거예요.” 나는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며 로인의 옷자락을 마구 흔들며 손이 발이 되 게 빌고 또 빌었다.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꿈은 자연히 의지가 동요되면서 초심과 어긋나게 되네. 3살 때의 대통령 꿈을 50년 동안만 견지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네. 명심하 게.” 말을 마친 로인은 연기처럼 내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 할아버지를 붙잡으려고 나는 정신없이 앞으로 달렸다. “쿵-” 나는 그만 침대에서 떨어졌다. (어우 아파? 엉? 꿈이네. 참 무서워!) 컴퓨터는 파란불이 계속 켜져 있었다. 나는 바삐 컴퓨터 전원를 껐다. 그래도 성 차지 않아 아예 전선까지 뽑아버렸다. (네가 내 미래를 망쳐? 당치도 않은 말이지.) 꿈속 할아버지 말씀이 천만번 지당하였다. 오로지 자신만의 꿈나무를 흔들림 없이 키워야만이 미래로 향하는 희망의 불씨가 일게 되는 것이다. 현실 속 유혹에 흔들리 지 말고 자기의 꿈을 가지고 자신의 방향을 견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후회없는 선 택인 것이다. 나의 미래는 나의 손에 쥐여있다. 책상 위에는 내가 진절머리 나게 싫어했던 산더미같은 교과서들과 복습제강들이 다. 다시 숨막히는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젠 모든 유혹과 모든 곤난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병으로 고통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선물하는 백의천 사, 환자가 신뢰하는 백의천사가 되려는 간절한 소망이 있기에 나는 넘어지면 먼지 털고 핏자욱 어루쓸며 다시 일어나 씩씩하게 꿈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나 자신이 곧 떠냐야 할 려정 앞에서 인젠 정말로 두려움 없는 새로운 자세로 꿋 꿋이 설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나의 아름다운 꿈을 향해 내가 할 일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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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연변과학기술대학총장상 심양시 조선족 제3중학 9학년 박 주 단

나는 행복 전도사가 되고싶다.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웃에게 웃음과 희망을 선사하는 행복전도사가 되는 것이다. 그 어느 책에서 나는 사람은 “행복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다”라는 글귀를 본적이 있다. 실로 마음에 와 닿는 말인 듯 싶다 세 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가 힘겹지 않으랴마는 삶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 가 그 사람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보아진다. 어떤 사람은 억만장자로 되여 고래등같은 별장에 살고 매일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도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빗물이 줄줄 새는 초가집에서 간장에 감자를 찍어먹으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즉 불행과 행복이란 절대적인 개 념이 아닌 바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판단에 따라 다가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 이다. 다시 말하면 금전과 재산이 아닌 마음의 부자가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 자기만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면 거울속의 자신을 보고 한번 웃어보라 그러면 그 웃음으로 인해 우울했던 자신의 하루의 기분이 저도 모르게 바뀌 여 지고 또 남을 돕고 배려하는데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전에 나는 가끔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걸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휴식날이나 방학이면 엄마 아빠와 같 이 공원놀이를 간다고 야단이지만 오래전부터 부모님이 외국에 나가 일하고 있는 나 는 공원에 가도 방학이 되여도 말동무도 없이 고독하게 집구석에 혼자 들어박혀 다 만 텔레비죤을 보고 컴퓨터로 께임을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텔레비죤에서 리위라는 소년이 태여날 때부터 량쪽 팔이 없지만 두 발을 리용하여 피아노를 치면서 아름다운 선률로 세계명곡들을 연주하여 수많은 관중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모습과 2008년 4월 12일 중국 사 천성 문천대지진참사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아이들, 그리고 귀로 듣을 수 없는 10 명의 녀무용 배우가 아름답고 화려한 춤으로 중국전통명절인 설날에 최고의 무대에 올라 완벽한 연기력으로 사람들에게 최대의 감동을 주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이러 한 정경은 언제나 부모님이 옆에 없어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던 저에게 크 나큰 충격을 준 동시에 무한한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1메터60의 키에 말끔한 얼굴 그리고 두 다리와 량쪽 팔이 다 성성한 그만하면 그래도 오관이 단정한 꽃다운 소녀다. 량쪽 팔이 없는 리위와 롱아로 태어난 그 무용배우에 비기면 난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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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이고 너무나도 행운한 아이가 아닌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나 자신을 자꾸만 불행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때로 부터 나는 나 자신이 더는 불행한 사람이 아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행복한 아이로 생각되었고 또 나처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희망과 신심을 얻게 하여 행복을 느끼게 하는 행복 전도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였다.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될 때 나보다 더 못생 긴 사람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우월감이 찾아오고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될 때 나보 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하면 행복이 찾아드는 법이 인생의 철학이고 자연의 섭리 가 아닐까? 지금 우리 사회는 급격한 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물질적부는 날마다 쌓여가고 있지 만 정신적으로는 공허하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파다히 존재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일해야 하는 직장인 시장 경제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최고경영자 모두가 치렬한 경쟁으로 하여 스트레스가 하 루하루 쌓여가고 있으며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더 심하면 자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자살” 을 거꾸로 쓰면 “살자”요 “살자”를 거꾸로 쓰면 “자살”이요 이두 단어는 우리에게 극 과 극을 이루는 인생가치관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그 누구나 다 사랑을 받기 위 해 태어난 사람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행운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본 자신 이 또 행복이 아닐까? 이 세상에 온 이상 당신이란 존재는 이제는 더는 자신 한사람 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가족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다. 인생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서 자살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것은 용서 할 수 없는 무책임한 행 동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실로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이고 더 나 아가서 전 인류의 참담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진정한 고통은 육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극을 막고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심리치료사와 정신치료사가 더더욱 절실히 필요 한 것이 아닐까? 사회의 진보와 문명이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행복전도사라는 캐릭 터는 앞으로 국가와 민족 리념을 초월하는 미래산업으로 자리매김 할 날이 꼭 다가 올 것이라 나는 믿는다. 무성한 숲이 되려면 큰 나무사이에 틈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어린 나무를 위한 큰 나무의 배려다. 마찬가지로 푸른 세상은 사람들의 호상 배려하는 마음이 모여 만 들어진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은 행복할 수가 없다.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 의 것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남의 배려를 받지 못하며 따라서 행복해질 수 없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 남에게 나눔을 베풀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인 것처럼 생각할 때 이세상은 더 아름답지 않을까 힘겨운 삶에서 살아가는 우 리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한마디의 말이다. 기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생각을 달리하면 세상이 바뀌어진다. 불행 한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듣기만 해도 나 자신이 저절로 행복해지고 마음이 뿌 듯해난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행복을 온 누리에 선사하는 행복전도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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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서울대총장상 심양시 훈남신구 조선족학교 9학년 최 원 재

하얀 꽃 배꽃같이 하얗고 햇솜같이 가볍고 부드럽게 송이송이 내려와 대지를 덮어주는 그 것, 난 지금 깨끗한 백설세계의 선경에 취하여 있다. 백설세계에서 난 그 전날의 백설처럼 깨끗한 향기를 힘써 맡아본다. 동년시절의 날들, 난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친구랑 같이 이 새하얀 눈을 한웅큼 씩 던지고 맞던 그 날들, 비록 손은 새빨갛게 얼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차가움이 라는 것을 모른 채 웃음의 메아리로 꽉 찬 그 시절, 어머닌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원재야, 마치 언젠간 이 세상이 새하얗고 차가운 눈에 덮히게 되는 것처럼 너도 따 라서 차가워지겠지만 또 다시 따스함으로 찬 봄이 되찾아오는 것처럼 너도 지금의 따뜻함을 되찾아오길 엄마는 바란다.” 난 그저 어머니의 품에 안겨만 있었고 이 말 에 담긴 뜻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고 있었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어머니의 품만은 따뜻하다는 걸. 아, 나의 동년을 키워주신 어머니—조국의 품도 저 백설처럼 포근하다. 하여 난 저 흰눈을 바라보면 몰아치는 눈보라처럼 나의 마음도 설레인다. 난 이 수정처럼 깨 끗한 눈을 사랑한다. 이 솜털같이 포근한 담요우를 달릴 때면 동년시절, 그 순진함 과 웃음의 메아리가 내 귀가에서 맴돈다. 그는 얼마나 맑고 티없이 아름다웠던가! 지금 난 이 백설세계에 있지만 그때의 향기와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따뜻함을 느끼 지 못한다. 난 메아리가 아직도 맴도는 그곳에서 다시 한웅큼의 눈을 잡아보았다. 이 젠 그 백설이 아주 차갑기만 하다. 이것이 진정 내가 느끼고 내가 사랑하던 백설인가? 이 백설이 진정 내가 본 것과 같이 수정같이 깨끗할까? 아님 내가 차가워진 것인가? 이 백설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그 시절 그대로 이지만 변한 건 나 자신이다. 우 리 모두이다. 그립다, 나의 동년이여. 난 이 새하얀 «담요»우에서 막 뒹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의 온몸이 눈에 덮 혀 흰 눈의 한부분이 되고 싶다. 이 백설이 다시 나의 그 따뜻함을 되찾아줄 것이라 고 믿는다. 차가움을 느껴야 따뜻해지는 법을 깨닫고 각성하니깐. 나의 체온으로 이 백설이 조금의 따사로움을 갖고 나의 이 신념으로 백설이 진정 티없이 깨끗하길 바란다. 천지간의 모든 추악하고 더러움들이여, 이 흰눈속 땅속깊 이 영영 잠들어주길, 그리고 흰 눈꽃이여! 수정처럼 맑고 백옥같이 아름답고 너의 차가움이 이 천하의 따스함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노니라! 지도교원 : 심용숙(沈勇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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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수원시장상 길림성 장춘시 조선족중학교 초중 2학년 오 혜 민

20년 후의 나 “아휴~힘들다!” 하루의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푹신푹신한 침대에 “대”자형으로 누 웠다. 나는 너무 피곤한 나대지 그대로 잠이 들었다. “혜민아, 빨리 일어나 손님 오셨다.” 엄마의 부드러운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잠에서 깨여 나 객실로 나가보니 어떤 낯선 녀인이 쏘파에 앉아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엄마의 친구 인줄알고 인사를 드렸더니 그 녀인은 나보고 이렇게 말했다. “안녕! 난 20년 후의 너야!” “응! 20년 후의 너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 나와 함께 미래로 가볼래?” 나는 “20년 후의 나”와 함께 타임머신에 올랐다. …… 타임머신의 문이 열리더니 나의 앞에는 또 하나의 세계가 나차났다. 큰 길 량옆에 는 나무가 무성히 자라 나와 인사하는 듯 하였고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이 드문드문 서있었다. “어? 왜 차가 없지?” 나는 큰 길에 달리는 차가 보이지 않자 의아해서 물었다. “지금 여기서 달릴 수 있는 차는 태양능자가용차이고 20년전의 차들은 지하에서 달 리고 있어.” 20년 후의 세계는 지구의 온난화를 방지하고 공기의 께끗함을 보호하기 위해 이 런 대책을 내세운 것이었다. “자, 그럼 이제 학교로 가 볼가?” “응? 학교는 왜……” “20년 후의 넌 학교의 선생님이거든.” 나는 그와 지하로 가서 택시를 타고 학교로 출발했다. “20년 후의 나”는 나를 데 리고 학교를 방문하였다. 모든 교실엔 흑판이 사라지고 그걸 대신한 것은 고급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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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어장비였다. 그리고 교실도 20년 전의 2, 3배나 되였다. 매학생의 손에는 교과서 대신에 손으로 터치할 수 있는 노트북으로 변했다. “선생님, 출근하셨네요? 굿모닝-!” “응, 너도 굿모닝-!” “상쾌한 아침이에요! 선생님-” “응. 상쾌한 아침!” 학교를 참관하는 동안 수많은 학생, 선생님이 “20년 후의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나 바꿔 말해서 20년 후의 넌 전국 모범교사에 뽑혔어. 그리고 론문도 많이 발표 되었거든.” 그는 나의 마음속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파르릉 파르릉…” 나는 잠에서 깨여났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 20년 후의 나, 20년 후의 세계, 20년 후의 학교, 모든 것이 20년 이후에 다 이루어지길 바란다. 지도교원 : 박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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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중부일보사장상 심양시 조선족 제2중학교 초중2학년 백 양

20년 후 나의 모습 가끔씩 멍하니 앉아서 내 2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한다. 교단 위에 서서 많은 학생 을 마주하며 강의 하고 있는 내 모습. 그렇다. 내가 20년후 하고 싶은 직업은 바로 교사이다. 내가 아직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어린이었을 때 선생님이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내 주변에 많은 애들이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나 역시 마음속에 서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커가고 있는 내 주위의 대부분 친구들은 텔레비에 나오는“스 타”가 되겠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커가면서 선생님이 되여야겠다는 의지가 더욱 굳세졌다. 내 마음속의 교사라는 직업은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다. 하지만 꿈만 꾼다고 자기의 모든 바람이 이루어지겠는가? 자기의 목표와 전진할 동력이 생겼다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우선 자기의 장점과 단점들 을 찾아야 한다. 그 다음 자기의 장점들은 발양해야 하고 부족 점들을 개진하여야 한다. 그리고 많은 활동에 참가하여 자기 자신의 경력을 쌓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여 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자기의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의 관건이다. 20년 후에 자기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원한다면 지금의 노력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지금 나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20년 후 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그때면 내가 교단위에 서서 많은 학생을 마주하며 강의하 고 있지 않겠는가? 지도교원 : 리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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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북도지사상 룡정시 제5중학교 3학년 김 진 주

나는 커서 엄마가 될거야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돈 많은 부자? 능력이 있는 사람? 하나하나 떠올리다보면 이런 것쯤은 노력만 한다면 내 생애에서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꿈일 것 같다.

“쓸

데없는” 아름다운 고민을 하며 나는 텔레비죤에 마주앉았다. 기중시험 방금 끝낸 일요일이라 쏘파에 몸을 깊숙이 맡기고 오랜만에 달콤한 여유 를 즐겼다. 마침“사랑으로 가는 길”이라는 프로가 시작 되였다. 텔레비죤 화면에는 “더러워진”옷을 입은“바짝” 마른 남자애가 나타났다. 애수에 찬 남자아이의 우울한 눈빛이 지금도 내 눈앞에 생생하다. 어머니는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지력장애로 앓 고 있었다. 땅이 꺼지게 한숨 쉬는 78세 되는 할머니, 엄마 없는 아이를 기르다가 힘겨워 고아원에로 보냈는데 손주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다시 데려다 키운다는 것이 다. 눈물이 흘렀다. 자식을 향한 세상 어머니 마음은 다 똑같다 하지 않았는가? 저 애 의 어머니는 얼마나 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자식을 두고 가는지? 어디 가 서 발편잠 잘까? 령혼을 잃어가는 애들의 희망은 어디에 있으며 누구한테서 위안을 받아야 하나? 자신의 꿈을 꿀 기회와 자격조차 가지기 힘든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 른들은 밀려오는 부끄러움으로 응당 아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조차 미안해해야 할 것이야. 순간 나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마른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저녁 늦게까지 힘든 삯일을 하셨지만 힘든 티 하나 없었다. “오늘은 무얼 먹을래? 메뉴를 말해봐” “공부 잘하는 우리 딸 축하프로야. 짜장- 선물” 하며 항상 유쾌한 웃음 보이시 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밖에 모르는 철부지의 삶이였지만 슬프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었다. 유쾌, 활발의 대명사였던 나는 그 유명세를 빌어 부반장직무를 떠메고 있 다. 고달픈 삶을 살던 어머니는 몇 년전 한국으로 떠났다. 멋진 아빠트도 구입하여 내 가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해 주고 이쁜 옷, 이쁜 선물을 끝없이 붙여주셨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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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만큼은 부끄럽다. 항상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던 지난날들, 어머니한테 끝없는 사랑을 탐하던 지난날들, 난 무엇으로 보답할까? 잠자던 내 가슴속에서 회오리바람이 일며 하나의 꿈을 굳히게 한다. 나는 엄마같 은 엄마가 될 것이다. 나는 나쁜 엄마가 아닌 훌륭한 엄마가 될 것이다. 어머니란 이름을 갖는 그날부터 엄마로서의 책임감을 안고 내 자식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부러움 없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할 것이다. 커다란 뻐스에서 한 중년 녀인이 내린다. 다름 아닌 소학교에 다니는 아들딸을 데 리러 온 나이다. 토끼같은 아이들이 나를 발견하고 해시시 웃으며 “엄마”를 부르며 뛰어온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야? 한두 명이 아니라 십여 명 애들이 우야- 하고 뻐스에 다투어 오른다. 저녁이면 나는 애들한테 따뜻한 밥과 반찬을 마련해준다. 볼 이 메게 먹어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는 맑은 샘물이 흘러든다. 밥을 먹 고 난 나는 애들의 숙제를 하나하나 체크해 준다. 백점 맞은 애들에게는 선물로 사 랑의 키스를 안겨준다. 그렇다, 나는 세상의 불쌍한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버렸다. 버림받은 애들, 불쌍한 애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꿈과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고 사랑을 아낌없이 듬뿍 안겨주 는 엄마가 된 것이다. 엄마 사랑에 목말라 하는 애들이 당당히 이 땅에 설수 있도록 엄마가 되어준 것이다. 세상에는 부족한 아이가 없다. 부족한 부모가 있고 부족한 어른들이 있을 뿐이다. 어떤 환경에 처해있던 아이들은 배움의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어른들은 그 기회를 부여해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따스한 햇빛이 되 여 가슴속 깊이까지 비쳐주는 엄마, 방향을 잃은 애들의 가슴속에서 봄날의 아지랑 인양 희망이 피어오르도록 봄비를 뿌려주는 엄마가 될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정,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부모가 되여 애들이 자신의 재능과 사명을 스스로 발견할 줄 아는 기적을 만들어야겠다.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 생활 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아이들을 기르겠다. 나는 그런 “자식부자”로 점차 이름을 날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너무 달콤한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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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경필국회의원상 길림성 연변 제1중 1학년 황 연

기로, 그리고 귀로. 누구나 그러하듯, 인간은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 속에서 소망하는 영생과는 격리된 채 살아간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공이 유한하기에, 그들은 생의 괴리와 사의 공허를 품에 안은 채, 삶의 순간순간을 달려, 죽음에로 박두한다. 다만, 수많은 인간이 모두 하나의 형상일수 없듯이, 그들이 지닌 보폭과 속도역시 천차만별 하다는 것, 그것 하나만이 현재의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각인 시켜줄 뿐이다. 그러한 혼돈 속에서 꿈을 꾸며 그 꿈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는 그 모든 것이 나에 겐 모종의 고통이지만, 그만큼 성공을 한 후의 귀로가 아름다울 것이기에, 난 오늘 도 꿈을 향한 기로에 서서 내 미래의 아름다운 귀로를 꿈꾼다.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가장 기초적인 기로에서 방황하는, 나의 꿈을 꾼다. [2032년. 프랑스] “올해의 여우주연상!” 초조한 배경음이 깔리고, 모든 이가 그 찰나의 영광에 귀를 기울인 순간. 적막이 감도는 칸의 분위기가 사람들을 긴장 속에 잠재운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프랑스 의 한 도시에, 5월의 밤하늘에 내 이름이 울려 퍼진다. 환호하는 사람들과, 두 손을 모은 채 감격하는 친인척들 속에서. 나는 가장 빛나 는 미소를 머금은 채 특설무대로 걸음을 옮긴다. 나에게로 전해오는 상패와, 그에 이은 사람들의 선망의 눈길. 그 모든 것이 나를 감격스럽게 하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게 한다. 시상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나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발길을 옮겨 스텐드 마이크 쪽으로 다가선다. “일단 제가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길지 않은 수상소감의 끝자락을 잡고, 난 눈물을 머금은 채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 로. 이 말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년 전의 저에게,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삶의 용기를 잃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까지 자신안의 별을 찾아 뜻을 이루기 위해 희망 하고 또 노력함으로서 이 자리에 닿도록 발걸음을 떼여준 20년 전의 저에게. 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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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을 돌립니다.” 박수소리가 칸을 채우고, 프랑스를 채우면서, 20년 전의 나로 채워진다. 나는 저 멀리 빛나는 카메라의 불빛들과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고마워.” [2012년. 중국] “선생님..” 엄마의 목소리가 닫혀진 문밖으로 애틋하게 떨려온다. “저희로서도 어쩔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나아진다는 보장역 시 없구요. 그저 시간을 두고 지켜 볼 수밖에...” 새하얀 문으로 격리됐지만 공기의 원망스런 소리전파에 의해 들려올 수밖에 없는 엄마와 의사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를 무너지게 했다. 왼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 싸 쥐고서,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담담한 듯, 또 무덤덤한 듯 마주하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내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후들거리는 두 다리가 설명해줬다. 얼마 전부터 이상한 두통과 어지럼증, 그리고 단기간의 짜증을 억제 못해 이상증 세를 보이는 증상들이 나한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기증이려니 하고 넘겼던 내 과거가 시간을 끌자 보란 듯 정신발작을 일으켰고, 난 급히 북경의 큰 병원으로 찾 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나에게 내려진 진단은 의난병에 속하는, 과도한 감정기복으 로 인해 찾아오는 분렬증세였다. 그에 의한 나 자신과 부모님의 충격은 대단했다. 종래로 술이라곤 입에 대시지도 않으시던 엄마가 저녁에 맥주를 드시고서 잠을 청하시는 것을 보면서, 아빠는 많이 가슴아파하셨다. 사람이 병을 보이고 나면 더 많이 아프다더니, 북경에 가서 병을 보인 다음부터, 난 평소엔 아무 일 없이 건강하다가도,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압력을 받으면 “미쳐”버렸다. 하지만 의난병이라서, 어째서 생겼는지도 모르는 병이라서 난 그 어떤 치료방법도 써보지 못한 채, 시간을 두고 관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말고사를 얼마 앞둔 어느 날 저녁,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내가 반 친구들에게 끝내는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이고 말았다. 기말복습에 압력을 받 을 대로 받은 내가 발작을 일으켰던 것이다. 책상이 엎어지고 연필들이 친구들에게 흩뿌려졌으며, 양동이가 엎질러지고, 양동이속의 물이 교실바닥을 적셨다. 나는 미친 듯, 아니 미쳐서 발광했다. 친구들은 처음 겪는 공포에 몸을 떨었고, 나는 그런 모습 을 보면서 성큼성큼 창문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 창문턱을 지탱하고 섰 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위태롭게 굴었다. 그 모든 것을 병실에서 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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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친구들에게 들었을 때, 온몸으로 파고드는 공포를 뒤로 한 채, 그제서야 나는 내 병에 대해 실감이 나는듯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머리 속에 각인 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심해야할 건, 이런 증세의 환자들의 삶이 자의에 의해 짧아질 수도 있다는 점. 그 점은 특별히 신경써야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퇴원을 했지만 아직도 난 가끔씩, 심각하진 않더라고 종종 이상증 세를 보이곤 한다. 물론 그러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이지만,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조금 더 “보호”라는 울타리에 좁게 갇힌 나에게, 꿈은 사실상으론 사치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언제든지, 또 어떻게든 삶의 끝을 만들 수도 있는 게 나니까, 그런 사람은 꿈보다는 아프지 않을 현실을 만들어야 하는 게 급선무니까. 어려서부터 나는 극인(剧人)이 꿈이었다. 한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여러 사람의 인 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그런 꿈을 꾸었었다. 하지만 지병으로 인해 도전할 수 있는 여건조차 안 되는 현실은 나를 더 조여오고, 속박해오기를 반복했다. 물론‘세계적인 예술거장들은 모두 조금씩은 정신질환을 갖고 있어’라는 위로 아닌 위로들도 많이 들었지만, 그것들로 인해서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그 어떤 피해나 걱 정도 끼치지 않은 채 꿈을 향해 도전하고, 얼마나 험난할지 모르는 꿈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꿈을

꿀 수 있는 자

유조차도 빼앗겨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엄마와 함께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과거의 꿈이 생각나 옆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엄마를 향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엄마, 엄만 내가 이제 커서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해요?”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엄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 그 한마디를 듣는데, 순간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서 오랫동안, 오랫 동안 울었다. 언제부터 내가 동년배들과는 조금 다른 길로 끝을 향해 가야하는 운명 을 가진 건지, 언제부터 미래를 향한 동경으로 인해 나오는 희망 가득한 꿈이 아닌, 가장 기초적인 현실을 바라봐야하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진 건지, 모든 것이 나를 혼 란스럽게 하고, 또 서글프게 했다. 하지만 시간은 나에게 한 치의 동정도 없이, 흘러갔다. 내가 꿈에 대한 괴리를 풀 지 못 했을 때에도, 시간은 무정히, 그리고 차갑게 내 곁을 스쳐 지났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 학교에서 주제반회 경연을 주최해 연극을 꾸밀 시점이 돌아왔 다. 극인이 꿈이었던 나에게 이번 행사는 큰 행복이자 작은 부담이기도 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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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에서 자신의 꿈을 안고 천천히 성장해가는 한 무명가수의 역할을 맡았다. 그토 록 하고 싶었던 주인공을 맡게 되자, 나는 내 모든 열정을 연극에 쏟아 부으리라 다 짐했다. 그리고 연극을 준비하기 시작하던 날 저녁,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와서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엄마께 말씀드렸다. “엄마, 있잖아요. 저희가 이번에 연극을 하는데요. 제가 주인공으로 뽑혔어요. 잘 했죠?” 해맑게 웃는 내 모습 앞으로, 엄마의 섬뜩한 눈빛이 스쳤다. “뭐…뭘 한다고?” “연극이요. 제가 주인공이라구요.” 잘됐다고, 잘 할 수 있을거라고 칭찬과 격려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생각이 엄 마의 침묵으로 인해 조금씩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 말거라.” “예?” 엄마의 두 눈에서 나온 단호함, 그리고 내 귀전으로 들려온 그 한마디에 나는 순 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 말거라. 담임선생님한텐 아파서 못한다고 하고, 연극에 정신이 팔려서 연습을 하려면 또 한참을 신경쓰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할 텐데, 그러다가 또 일나면 어떡하 니. 하지 말거라.” 잠시의 랭기가 우리사이를 지났고, 차가운 기류가 엄마와 나사이의 공간을 지나, 저 멀리서 빙글거리다 사라졌다. 하지만, 차마 엄마한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엄마의 말씀들이 모두가 사 실이었기 때문에. 그 점은 나도 많이 자신을 의심을 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날, 나를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은 엄마의 말도, 그 어떤 외적 리유도 아니었다. 내 가 스스로 꿈을 꾼다는 것과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다는 현실을 외면했다는 것. 오 로지 그 하나의 리유가 나를 아프게 했다. “아무런 걱정 말고 공부도 적당히만 해. 엄마가 다 알아서 해 줄테니까. 대학교 졸 업하면 엄마 학교 와서 선생님하고. 미래에 대해선 걱정할거 하나도 없어. 넌 그냥 고민없이 건강하게만 살면 돼.” 대학교 디자인학과 교수인 우리엄마가 내가 아프고 난 다음부터 계속 하시던 말씀 이다. 나를 생각해서 하신, 하지만 나에겐 너무나도 큰 상처인 말씀이다. 어쩌면 그래서 인지도 모른다. 며칠 후, 나는 엄마를 비롯한 수많은 가장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이 지켜보 는 가운데서 연극의 주인공인 로이젤역을 연기해냈다. 마지막장면에서“봐, 로이젤. 너는 할 수 있어! 이렇게… 해냈잖아..”라는 대사를 하면서 울먹이는 내게, 많은 사람 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내가, 누구도 아닌 내가 스스로도 부정하고 타측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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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히 배제당한 꿈을 향해, 한걸음 도전의 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 번의 성공까지는 한 친구의 말이 큰 도움이 됐다. 엄마와 상의를 한 이튿날, 선생님께 주인공역을 포기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는 소 식을 들은 친구가 내게 찾아와서 작은 메모지를 전해주고 갔었다. “너에게 꿈을 접어야하는 비극이 생긴다면, 그 리유는 환경도, 인위적 요소도 아 닌. 너의 나약함 때문이야. 난 널 믿어. 넌 나약하지 않으니까. 내가 장담하니까.” 그 메모지를 손에 쥐고,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끝에 자리를 박차고 선생님 사 무실로 사력을 다해 뛰어가는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스스로를 부정했다는 사실을, 결국은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을 시작점에 다가 서기도 전에 묵과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날의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자. 내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스타트선이였다. 그렇게. 현실과 꿈이 교차하는 기로에서, 난 긴 시간의 머뭇거림 끝에 꿈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아직도 가끔씩 머리가 아프고 이상증세를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내게 차려진 가장 슬프 지만 소중한, 세상의 저주어린 축복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그로인해 두려 울 것도, 머뭇거릴 리유도 없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세상의 끝에 서서 삶의 결속에 닿아 있을 때, 나는 후회없이 다시 한번 태초의 삶으로, 가장 처음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귀로에 흔쾌히 설 수 있 을 것이다. 인간은 완성된 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얻는 것을 통해 완성 되는 존재이기에, 내가 살면서 행해나갈 꿈을 향한 도전과 그에 이은 성과들이, 나 의 귀로를 더욱 밝게 비출 수 있으리라고 믿기에, 내 귀로는 누구보다 찬란할 것이 라고 생각한다. 포기할 줄 모르는 것, 오직 그것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기에. 나는 지금의 기로 에서, 내 꿈을 펼쳐, 아름다운 귀로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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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기도지사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3학년 리 아 경

안녕, 미래 어린애들에게 어른들이 가장 많이 묻는 물음중의 하나가 바로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였다. 아직 애고사리같은 손에 연필도 겨우 쥐는 어린애가 자신의 미래 에 대해 무엇을 알겠냐만은 어른들은 항상 이 물음을 묻기를 즐긴다. 알 수 없는 한 생명의 미래에 대한 신비감과 그것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와 동 경 때문이 아닐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언제나 인기가 식지 않는 이 물음에 어른들은 어린애의 입에서 나오는 당돌한 대답에 대견스러워하거나 황당한 대답에 웃음을 터 뜨리군 한다. 어릴 때에는 이런 물음을 들을 때마다 외할머니가 배워주시는 대로 과학자라는 말 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외워서 대답했다. 그래서 그때는 과학자란 도대체 무엇을 하 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망연하게 나는 커서 과학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군 했 다. 그때 나에게 미래란 산꼭대기에서 피어난 꽂과도 같았다. 저 높은 곳에 꽃이 있다 는 것이 보이기는 하지만 산이 까마득히 높아 잘 보이지가 않는다. 다만 지나가는 행인들이 꽃이 참 아름답더라 하는 말에 어렴풋한 동경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나이를 한 살 두살 먹어가면서 철부지 코흘리개가 어느덧 어엿한 학생으로 되었 다. 철없기는 마찬가지였고 미래나 꿈에 대해서는 아직도 안개 속에서 꽃 보듯 잘 알지를 못했다. 그러나 어린 내 마음에도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있었나보다. 내 입 에서 더이상 앵무새처럼 곱씹던 “과학자”가 아닌 “작가”라는 말이 오돌차게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는 이 기 묘하고 매력적인 세계에 푹 빠져버렸다. 책속에는 무엇이나 다 있었다. 우주의 신비 한 비밀을 탐색하다가 바다 밑 2만리를 다 돌아볼 수 있고 옛사람과 시공간을 뛰어 넘는 력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도 헬렌 켈러의 꿋꿋한 의지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나는 완전히 책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때부터 밥을 먹을 때 책을 보는 습관을 들였는데 이제 와서는 밥 먹을 때 책이 없으면 소화가 되지 않기라도 하는 느낌이 들기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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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황금집이 있고 책속에 미인이 있다.”란 옛말이 있다. 정말 책속에서 집이 나오고 미인이 나올 리 만무하지만 책이 내게 펼쳐준 세계는 그것보다도 더 아름답 고 황홀한 세계였다. 비가 내리는 오후, 밖은 음침하지만 집안은 포근하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내가 좋아하는 책 한권을 집어든다. 푹신한 쏘파에 내 몸을 맡긴다. 창밖에선 빗물이 유리를 때리는 토닥토닥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나 내 손에 쥔 책은 소리없이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준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옛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 내 온몸과 마음을 다 담근다. 그러다 어느덧 비가 끊고 햇빛이 창 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실 지경이다. 나도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다. 채가시지 않은 여운에 조용히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긴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 면 만족감과 충실감, 그리고 행복감이 밀물마냥 밀려와 나를 감싼다. 이보다 더 행 복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 내겐 책속에 빠지는 일만큼 즐겁고 편안한 일이 더 없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도 책을 쓰고 작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 했다. 겨울내내 얼었던 땅에 봄 풀싹이 비집고 나오듯, 땅땅 얼어붙은 샘이 녹아내 리며 물이 용솟음쳐 나오듯 내 마음속에 그 생각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나를 감동시키고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그런 훌륭한 작품을 써내고 싶었다. 한때 방황하기도 했었다. 태산처럼 밀려오는 공부압력 때문에 내가 최고의 행복으 로 느꼈었던 독서시간마저 빼앗기고 교과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아야 했을 때, 나는 오리무중에 빠진듯했다. 과연 내게 작가가 가장 어울리기는 할까? 작가는 성공하지 못하면 안정한 수입도 없는데 차라리 안정한 직업을 고르는 것이 어떠할까? 이런 생 각들이 무시로 내 머리 속에 떠올랐고 내가 왜 작가로 되려 했던 지를 잊었었다. 어 둠속에서 헤매듯, 만장심연 속에 빠져있듯 길을 찾지 못했던 나는 내 꿈의 줄을 놓 으려고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스탕달의 묘비명을 보게 되였다.“나는 살았었다. 나는 썼 었다. 나는 사랑했었다.”평생을 문학에 바쳤고 문학을 사랑했던 그의 일생에 대한 고 도의 개괄이 아닐까 싶다. 이 말을 보는 순간 무엇인가가 내 머리를 탁 치는 것 같 았고 울컥하고 치미는 것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문학을 사랑하고 또 계속 사랑할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를 즐기고 글을 쓰면 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성공 못하면 어떠하리, 큰돈을 벌지 못하면 어떠리? 애당 초 내가 작가라는 꿈을 가질 때 돈이나 명예를 바라고 가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 는 단지, 글을 쓰고 싶을 뿐이고 내 생각과 내 세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뿐 이지 않는가? 필을 들게 되면 내 머리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생각들과 내가 독자 들에게 펼쳐 보일 환상적이고 신비한 세계들이 내 필 끝에서 장강이 사품치며 흐르 듯 자유로이 흘러나온다. 다만 이 때문에 작가란 꿈을 가진 것이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미래의 어느 날, 어느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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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저도 몰래 가벼이 무릎을 치며 “아”하는 경탄을 뿜어내 는 것이다. 그 경탄은 혹은 가슴 깊은 곳 가장 연약한 부위를 다쳐놓음으로 하여, 혹은 코난 도일이 만들어 놓은 범죄 트릭마냥 절묘한 구상 때문에, 혹은 글마디마디 에 감춰진 내 생각에 느끼는 동감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고 가식도 없는 그 짧은 경탄 속에 모든 것이 포함 되여 있다. 이 경탄은 내 모든 노력이 보람 있음 을 인정하는 것이고

내 작품에 대한 가장 큰 찬양일 것이다. 더 이상, 많은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가끔 가만히 앉아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경탄을 터뜨리는 것을 상상하군 한다. 그럴 때마다 저도 몰래 흐뭇해지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이런 내 꿈, 내 미래가 현실이 되도록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쉬임없이 노력하고 있 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소박하나 화려하기도 한 내 꿈, 이 꿈이 있기에 나는 항상 나라는 시계가 늦어지지 않도록 태엽을 감고 또 감는다. 현실은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될 수가 없고 나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 다. 아무리 힘들고 하기 싫은 것이라도 내 앞에 응당 주어진 내가 꼭 해야 할 일들 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내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인생의 갈 림길에서 곧은 길을 버리고 가시가 돋힌 길로 가려는 힘든 선택을 내린 것도 바로 그 가시 돋힌 길의 끝이야 말로 내가 진정 바라고자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리해하지 못할지라도, 모두가 곧은 길로 가라고 나에게 권고할지라도 나는 동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꿈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나는 믿는다. 내 미래는 밝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또 그런 미래는 꼭 현실로 될 것이라는 것을 곧 다가올 미래에게 인사를 해본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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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김진표국회의원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1학년 김 의 정

나의 미래는 꿈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꿈에 대해 말을 한다 꿈을 이룬 뒤 펼쳐질 장밋빛 세계에 대해 말을 한다 모든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흘려야 할 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꿈은 그 땀으로 이뤄지는데도 말이다 정우식의 <<하루 첫 생각>>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끌었던 글이다. 꿈을 이룬 뒤 의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흘렸던 땀방울과 그 속에서 노력으로 갈고 닦아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미래는 더없이 휘황찬란 할 것이라고 꿈을 꾼다. 하지만 자 신의 들여야 할 노력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은 꿈을 꾸 려고만 하지 실현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룰 수 있는, 아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꿈을 꾼다. 나는 허황한 꿈을 꾸지 않는다. 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그런 꿈을 꾼다. 가슴이 뛰다 못해 아주 취해 버릴 것 같은, 그런 꿈을 꾼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에서 꿈 하나가 가만히 커가기 시작했다. 천진함속에서 평화 로움 속에서 나는 나의 꿈을 무르익혔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 시 간이 흘러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흐릿하던 그 꿈이 한개 점에 집중되더니 윤곽 또한 선명해졌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할까봐 차마 입 밖에도 내지 못했던 그 꿈을, 이제는 용기내어 말해보련다. 나는 기업인을 꿈꾼다. 나는 성공한 기업인을 꿈꾼다. 그것은 나에게 아름다운 동 경보다도 한가슴 뿌듯한 정열의 힘과 확고한 신념을 안겨준다. 내가 지금 나의 꿈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은 갈 길이 막연하여 방황하는 나에게 의미심장한 충고를,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었 으며 내가 티 없이 맑고 참된 인간으로 될 수 있도록, 나약함을 잊고 견강해 질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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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하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이는 중국의 올림픽영웅 등아 평 탁구선수가 인터뷰 때에 한 말이다. 등아평은 어릴 적부터 탁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국가대표가 되려는 꿈을 안고 매일마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 가면서 탁구에 열중해왔다. 작달막한 키와 체형때문에 국가대표팀에 배척된 적도 있 었지만 이런 작은 곤난 때문에 용기를 잃을 그가 아니었다. 등아평은 그것을 동력 삶아 매일 똑같은 동작을 수 백 번 반복했고 간고하게 련습하였다. 남을 놀라게 하 는 의지력과 노력이 끝내 그의 꿈의 커텐을 열어젖혔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동 안 세계정상을 차지한 올림픽선수로 되였고 총18개의 금메달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 의 걸출한 성과는 그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탁구팀의 국가대 표선거표준 즉 키가 커야한다는 관념도 철저히 개변시켰다고 한다. 그는 탁구에만 이렇듯 몰두 한 것은 아니다. 그는 24살에 청화대학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따내고 그 후로는 영국의 캠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인민인터넷검색주 식회사의 총경리직을 맡고 있는 그다. 그가 이렇듯 휘황한 성과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견인한 의지력과 초탈한 신념, 생명을 불태우리만치 뜨거운 열정 그리고 그의 아낌없는 노력이 아닐까싶다. 오직 가슴속 깊은 곳에서 황홀한 빛을 뿌리는 아 름다운 념원, 그 신념만을 안고 지금까지 달려온 그다. 등아평의 사적을 읽으면서 나는 그에 대한 존경을 금치 못했다. “절실하게 원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 시킨다면, 그 어떤 것이든 가질 수 있다.”언제나 들어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기업인, 그것을 꿈꾼다면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내가 꿈을 이루기 위해 할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꿈은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동안의 노력의 결실이 다. 꿈, 나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필을 든다. 그리고는 책상에 마주앉아 내 미래의 모습을 그리며 마음을 다잡고 책을 펼친다. 나의 미래, 그것은 아직 미지수이다. 그것은 어떻게 조종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 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내가 앞만 보고 내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 어떤 좌절 앞 에서도 무릎 꿇지 않을 것 이라고, 아름다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오늘도 공부하고 있다. 힘들 때도 많다. 공부가 싫어져 지 겨울 때도 한 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짜증난 마음을 달래며 다시금 나를 깨우쳐 주 는 것이 바로 나의 꿈이다. 중국의 영의인, 리자성과 같은 대기업인들의 사진들을 보며 또 한번 결심을 내린다. 꿈을 이루기전에 내가 흘렸던 눈물은 꿈을 이룬 뒤 내 얼굴에 나타날 미소로 변할 것이다. 그 순간, 꿈을 이룬 그 순간, 나는 그것이 좌절 속에서 련마된 날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때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될 것이다. 16살, 아직은 미숙하지만 꿈이 있는 나이, 이런 나에게 있어서 세상은 모험과 충 동으로 충만되어 있다. 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나에겐 꿈의 하늘에서 훨훨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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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 수 있는 억센 날개를 키워갈 것이 필요하다. 비록 아직은 미숙하지만 좌절 속에 서 억세게 단련된 날개로, 꿈을 이루고 말리라는 뜨거운 열정으로 내가 속하는, 나 에게만 속하는 나만의 꿈의 하늘, 그 하늘을 열고 싶다. 수많은 좌절을 겪어야하겠 지만 그래도 괜찮다, 넘어져도 난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나의 꿈을 위해 내달릴 수 있으니,나의 꿈은 내가 창조해 나가는 것이니 말이다. 꿈은 마음이라는 토양에 심어진 한 알의 종자이다. 그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뿌리 가 자라고 꽃이 피게 된다. 꿈이 없다면 황량한 황무지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다. 하 루하루가 랭랭하고 활기가 없다. 우리가 추구할 수 있고 분투할 수 있는 것은 꿈이 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은 두 갈래라 한다. 하나는 자신 의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어리석음이다. 애어린 심령속의 새파란 묘목이 나날이 성장한다.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아름다 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것 이라는 것 을 그렇다, 나의 미래는 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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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연변과학기술대학총장상 길림성 장춘시 조선족중학교 고중 3학년 리 송 학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 나에게는 올망졸망한 꿈주머니들이 많고도 많다. 오색찬연한 꿈주머니들을 《노 력》이라는 줄에 꿰여가면서 점차 성숙으로 다가선다. 파란 꿈 파룻 파릇 돋아나는 새싹처럼 나의 동년의 꿈은 연두색 꿈이었다. 그 꿈 많던 동 년의 하늘은 푸른 드넓은 바다였다. 그 속에서 자유로이 떠도는 하얀 구름떼들은 풍 랑을 헤쳐가는 쪽배와도 같았다. 그 하얀 구름을 보면서 나는 자유로운 한마리 새가 되여 자꾸자꾸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아빠, 엄마로부터 《꿈___ 노력》글자의 쓰기 법을 배우게 되었다. 더 높이, 더 멀리 푸른 하늘을 자유로이 날 아예는 한 마리 새가 되려면 힘든 비행 련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노란 꿈 푸른 잎새 속에서 노란 꽃이 환한 얼굴을 내민다. 노란 꽃을 피우기까지의 고충을 다소나마 알게 되는 십대다. 두터운 땅을 힘겹게 뚫고나왔을 씨앗의 힘, 꽃샘추위도 용감히 이겨낸 잎사귀의 견강함, 그 속에서만이 자기의 어여쁨을 자랑할 수 있을 예 쁜 꽃인가 보다. 그 무렵, 노력과 분투로 휄체어에 앉아 생명의 가치를 창조해낸 걸출한 물리학자 호킹을 알게 되였고 또한 노력과 분투로 기적을 창조해낸 프랑스의 장애인 화가 두 지나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 나는 호킹처럼, 두지나처럼 사회에 유용 한 사람이 되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 또한 꿈을 갖기는 쉽지만 그것을 실현하기란 쉽지 않으며 피타는 노력만이 휘황찬란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근본이라는 것을 마 음속으로부터 느끼게 되였다. 하얀 꿈 어느덧 하얀 꽃씨를 맺으며 멀리멀리 려행 떠날 꿈을 꾼다. 앞으로 혼자 가야만 할 려행 도중에 그 어떤 시련, 그 어떤 혹한이 차례질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박차고 벼랑에, 길가에, 벌판에서도 다시금 뿌리내리고 예쁜 꽃을 피 울 마음의 준비가 다 되였기에 그 어떤 난관도 두렵지 않다. 땅속을 파헤쳐 나오는 아픔, 길가에서 뭇사람들의 발길에 밟히는 고통, 바람에 여 기저기 날리며 부딪치는 애로를 모두 이겨가면서 오직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는 황홀 한 꿈을 안고 파랗게, 노랗게 그리고 하얗게 나의 꿈은 영글어만 간다. 영화로움을 갈망하지도 않고 간난신고 속에서도 로고와 피땀도 개의치 않는 수수 하고 평범한 민들레꽃인생의 꿈은 동그랗게 영글어만 간다. 지도교원 : 김태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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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서울대총장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1학년 석 설 령

인생의 올림픽 내가 태어나서 기억이 있으면서부터 내 기억의 백지장에 적혀져있는 올림픽은 달 랑 3차례 올림픽 밖에 없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2008년 북경올림픽, 2012년 런 던올림픽, 이런 올림픽의 빛나는 성과들과 휘황한 력사들, 그리고 하나하나의 에피 소드들과 이런 훌륭하면서도 또 어찌보면 훌륭할 것 없는 올림픽 뒤에 숨겨진 선수 들의 땀과 열정까지 생각해보면 올림픽이란 신성한 이름 뒤에 참 많은 것이 감춰져 있는 것 같다. 올림픽에 대해 글을 써내려가노라니 어느새 나는 사색의 여울목에 멈 춰서 잠시 내 인생의 올림픽에 대해 사색하게 된다. 올림픽은 각국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들이 수 십차례의 좌절과 역경 속에서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 동안의 고된 훈련을 거친 후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올림픽 에서 프로의 정신으로 꿈을 향하여, 최고를 향하여 최선을 다해 실력을 발휘하군 한 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올림픽은 언제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개최되고 진행될까? 길고 고달픈 인생길에서 수많은 곤난과 역경 속에서 넘어지고 또 다시 일어나는 오 뚜기처럼 굳센 의지로 올림픽 경기장에 도달했을 때 가장 멋있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의 꿈을 향한 올림픽을 멋지게 진행해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지금 10년도 썩 넘어서야 개최될 나의 올림픽을 위해 열심히 강도 높은 련 습과 고된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저녁에 눈을 감기 전까지 항상 책이라는 무서운 코치님의 지도하에서 나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거리를 좁혀나 가고 있다. 때론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다 때려치고 그냥 편하게 아무 생각도 없이 살고 싶은 생각이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북받쳐올 때가 많지만 그래도 하루를 빼곡히 자리 잡고 있는 무서운 코치님과의 공부스케줄이 있어 하루를 보람차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코치님은 비록 무섭기는 해도 나의 정치가라는 꿈의 금메달을 위하여 정성껏 도와주고 계신다. 꿈을 좇는 자는 어 느새 그 꿈과 닮아가게 된다던 어느 책속의 한구절이 떠오른다. 지금 이시간이 많이 힘들고 싫을지라도 계속 꿈을 향해 좇다보면 점점 그 꿈과 닮아가게 되고 그 어느 순간에는 어릴 시절에 꿈꿔 왔던 멋진 사람으로 변해 있겠지…… 그리고 가끔씩 상상의 쪽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10년 뒤 올림픽을 위한 련습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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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마치고 올림픽 경기장에 가 섰을 때 나의 모습, 의젓하고 멋진 모습으로 사람들의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나의 실력을 멋지게 발휘하는 내 모습, 뭇사람들의 감탄과 칭 찬 속에서 행복에 젖어하는 내 모습……나의 멋진 미래의 모습에 웃음주머니가 흔들 거리기도 한다. 정치가라는 금메달을 따낸 후 그대로 나의 자리에서 묵묵히 정치가 로서 부끄럽지 않은 깨끗하고 티없는 맑은 정치를 하면서 이 사회에 계속 존재하고 있는 불공평하고 부정한 정치의 세계를 개변하고 싶다는 대담하고 주제 넘는 꿈을 꾸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충실히 인생 올림픽을 진행하다가 창고엔 점 점 쌀이 쌓여가고 금고엔 점점 돈이 넘쳐갈 땐 나를 도와준 고마운 분들, 나를 길러 준 사회를, 그리고 그 순간에도 지옥같은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꿈의 나래를 펼쳐나 가는 나의 후배들을 잊지 않으련다. 자선을 행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리 굉장한 부자 일지라도 맛있는 요리가 즐비한 식탁에 소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라고 했다. 내 가 살만 할때엔 정치가로서 주위의 곤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 아직까지 중국에서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정말 힘든 일일수도 있다. 올림픽장에 가는 길이 정말 많이 험난하고 고달픈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생각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토크쇼 의 여왕 오프라 원프리도 수많은 좌절 끝에 끝내 미국 최초의 흑인 앵커로서 멋지게 성공하여 세계를 놀래키지 않았는가! 꿈을 향한 굳센 의지와 신념만 있다면 그 언젠 가는 오프라 원프리나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처럼 위대한 성공을 불러올 수 있 을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어느 날, 중국의 정치무대에 소수민 족으로서 떳떳이 등장하여 금메달을 향한 나의 질주가 또 세상을 놀래킬 지도...... 내 인생 올림픽...... 생각에 잠길수록 너무나도 황홀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나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지금 엄청난 땀과 눈물들을 쏟아내야 할 것임 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시시하게 살길 원치 않으면서 어찌 평범하게 노력할 수 있으 랴! 그래서 지금은 코치님과 함께 매일매일 지속되는 고된 련습을 하루도 늦추지 않 고 게으름 피우지 안으면서 열심히 견지해 나가련다. 먼 훗날에 개최될 나의 화려한 인생올림픽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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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수원시장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1학년 김 정

이팔청춘, 꿈에 미치다 - 꿈에 대한 보고서 16세, 흔히들 이팔청춘이라고 하는 나이다. 불안하고, 막막하고, 흔들리고, 외로운 청춘, 그래서 나는 꿈을 꾼다. 내 미래는 어떨까,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생각해봤을법한 이야기다. 꿈은 청춘 의 전속물이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부터, 이제는 노을이 비낀 노인들까지, 꿈은 모 두가 꿀 수 있는 것이다. 그저 그 의미만 다를 뿐이다. 아기와 노인의 꿈이 같다면 그건 거짓말, 나와 다른 아이들의 꿈이 같다면 그것도 거짓말. 같은 나뭇잎은 없고 같은 사람은 없으니 같은 꿈도 없다. 오직 비슷한 꿈만 있을 뿐이다. 10대라는 청춘 의 갈림길에 놓인 아이들은 다 비슷한 꿈을 꾼다.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무사하게 졸 업후 대기업에 취직, 혹은 공무원시험으로 안정하고 탄탄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 아니면 대학으로 가 석사, 연구생, 박사학위까지 따려는 아이들, 심지어 박사 후까지 하겠다는 기특한 아이들도 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려하는 “모 범생”이 아닌가. 그 외의 부류는, 나 같은 아이들이다. 탄탄하고 확실하고 빵빵한 미 래보다는 꿈을 좇는 부류, 소위 말하는 스펙따위 던져버리고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삼겠다는 아이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직업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어른 들이 치기어리다고 나무라는 아이들, 난 그런 부류이다. 사람의 재능은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재능을 가졌지만 정작 시험이라는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공부라는 재능을 못 가진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공부라는 재능을 가 져 시험은 상위권에서 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재능계의 까막눈”인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재능과 공부,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난 세 번째 에 속해있다. 솔직히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재수없다고 야유를 받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내 성적이 나름 괜찮게 나온다고 생각한다. 재능도 마찬 가지, 내 미술 실력은 어디가서 자랑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다. 내 입으로 이런 소 릴 한다는 게 민망하지만 글쓰기도 떨어지지는 않고, 논술, 피아노, 내놓아도 부끄럽 지 않다. 재능과 공부를 다 가졌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본인은 죽을 맛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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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선택 왜서 죽을 맛일까, 얼마나 좋은가, 공부면 공부, 재능이면 재능, 앞으로 발전가능 성도 많고 직업선택에서도 좋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피아노학원, 미술학원에 다니 면서 어렵게 배우고 있는 아이들보다는 행복하겠지.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 배부 른 소리일 뿐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아이들에게, 특히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제시하는 루트는 거개가 비슷하다. 좋은 대학에 가서 졸업하고 석사를 마치든 뭐든, 아무튼 직업부터 좋을걸 찾아라, 그리고 그 좋은 직업에는 변호사, 판사, 의사, 교사, 아무튼 사자 들어간 직 업들이 포함되어있다. 물론 이 모든 직업들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다. 직업에는 귀천 이 없다면 왜 다른 사람보다 좋은 직업을 찾아라고 하느냐며 반항할 나이는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물쭈물 거릴 수밖에 없는 건, 내가 아직 어리다는 증거일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반항이라도 좋다. 유치하다고 질책해도 좋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상담 심리학, 내가 원하는 미래이다. 디자인, 내가 가고 싶은 길이다. 작가, 내가 잘하는 거다. 질책 받을 지도 모른다. 비웃음 받을지도 모른다. 뭔 꿈이 그렇게 많냐, 그게 꿈이 냐 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나에게 있어 꿈이란 하고 싶은 거다. 난 심리학을 전공 하고 싶다. 디자인을 겸해서 배우며 글도 쓰고 싶다. 그뿐만 아니다. 아프리카 같은 데서 아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꿈이다. 난 내 꿈을, 내 미래를, 내 인생 을 단순한 변호사, 공무원, 판사 등의 두 세 글자로 함축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그 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단순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꿈, 방황 어릴 때부터 나름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일까, 난 금전적으로 강박관념에 얽 매이는 성격이 아니다. 심하게 사치스럽지도, 심하게 쪼잔한 것도 아니다. 부모님 돈 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난 내 미래를 금전과 연결시키고 싶은 생각 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가 나온다. 과연 내 꿈이 옳은 선택일까? 사회가 발전하면서 봉사업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상담심리학도 주목을 끌기 시 작하지만 금융이라던가, 법률같은 과목보다는 떨어져도 한참을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학과를 졸업하고 상담사가 되려고 한다면 직업찾기가 엄청나게 어려울 수도 있 다. 안타깝지만 특히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상담사라는 직 업은 좋은 길이 아니다. 디자인이나 작가도 마찬가지. 안나 수이나 칼 라거 펠드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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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명품브랜드의 디자이너나, 베스트셀러 작가 조앤 K. 롤링, 노벨문학상 수상자 막 언같은 작가가 아닌 이상 엄청난 부를 창조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내 재능에 자 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재능이라는 게 나 혼자만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사실 심리학 상담사, 디자이너, 작가같은 직업보다는 변호사 를 선호하신다. 아버지가 변호사라서 많은 분들은 “너희 아버지가 길을 펴놓았으니 넌 가기만 하면 돼.”라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솔직히 나도 한때는 그런 길을 원했으 나 어쩐지 탐탁지 않을 뿐이다. 어른들이 권하는 길이니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완벽한 미래를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걸 알면 서도 마음은 계속 물어보는 것이다. 그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혼자서 막연하게 생각도 해보고, 고민도 해보았다. 하지만 부모님에게도, 선생님에 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다. 내 꿈이니까, 내 미래니까, 내 인생이니 까. 내 주위 사람들이 도와 줄 순 있어도 대신 살아줄 순 없는 내 삶이니까. 태어나 서부터 죽을 때까지 영원히 내 옆에 함께 해주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다. 나라는 주 체를 하나로 생각한다면, 사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한동안 머물고 가는 인연이 아 닐까. 불효막심하고 발칙하고 당돌할 수도 있겠지만, 내 인생의 키는 내 손에 쥐여 져 있으니까. 그래서, 그냥 가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인생이라는 한장의 시험지에서, 미래라는 선택문제에서, 굳이 정확한 답안을 고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답안을 고를 필요가 없었다. 내 인생의 답안은 내가 써 넣는거니까. 틀릴 수도 있다. 빵점을 맞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냥 난 내가 적어 넣은 길을 가 고 싶다. 누군가 듣는다면 이팔청춘의 패기라고 웃을 수도 있다. 아직 사회를 못 겪 어봐서 사회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회라는 게 한 사람이 꿈을 포기하고, 한 사람의 꿈을 빼앗아가는 그러한 것이라면, 나는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다. 그런 “비정의적”인 것 따위 보기좋게 이기고 말 것이다. 건방지다고 생각해도 계속 갈 것이다. 내 꿈을, 내 길을.

꿈, 미래 꿈, 얼마나 좋은 어감의 단어인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부푸는 그런 단어- 꿈. 그 러면 그 꿈을 이룰 때의 미래는 어떠할까. 당연하지만 미래의 일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상상하고픈 게 사람의 마음이다. 내 미래는 어떨까? 20년 후의 나는 어쩌면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향긋한 에스 프레소의 향이 나는 방안에서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얀 종이 에 무엇인가를 적어가며 상대와 눈을 맞출 때마다 미소를 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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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런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30년 후의 나는 패션쇼의 무대에 서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박수를 받으며 살아갈 수도 있다, 내 연필아래에서 나온 옷이 다른 사람에게 입혀지는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도 있다. 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고 싶은 게 많으니 내 미래도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러고보니 내 꿈은 참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너무나 행복한 피곤을 가져다 준다. 이 모든 것이 다 한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나눠서 일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하나 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 내 미래에 대해 확신하는 게 있다면, 반드시 웃고 있을 거라는 거다. 연봉이 억에 달하는 상위 0.0000001%보다도 몇 백 배, 몇 천배, 몇 만배 더 화사하고 행복하게 웃고 있으리라. 소박하든 화려하든, 붉 은색이든 흰색이든 내 꿈이 여전하다면, 내 꿈을 단 한순간이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면, 난 꼭 웃고 있을 거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게 같으면 사는 게 즐겁다지 않은 가. 난 그런 케이스가 될거다. 심리학이든, 디자인이든, 작가든, 어디하나 빠짐없이 완벽하게 잡아 챌거다. 힘들겠지. 탄탄하고 보장되지 않으니까 불안하겠지.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후회할거면 선택도 하지 않을 거니까. 아직은 20년도 채우지 못한 10대지만 그래도 청춘의 갈림길에 서있던 내가 정한 길이니까 납득하고 걸어 갈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힘들어 잠시 멈출지언정 뒤를 돌아보지는 않겠다. 꿈을 이루는 과정은 원래 험난하고 막막하니까.

꿈, 현재진행형 이팔청춘은 피가 끓는 시기다. 감정파동이 가장 많은 시기이다. 가장 유치할 시기 지만 가장 성숙한 시기이다. 가장 순수한 시기이고 가장 영악한 시기이다. 이렇 불 안정한 시기에 벌써부터 꿈을 정한다는 게 어쩌면 미숙한 결정으로 보일수도 있겠지 만, 난 그래도 꿈을 계속 꾼다. 누군가가 웃어도, 누군가가 도리머리를 쳐도, 불안할 수도 있는 미래를 위해 노력한다.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웃어준다고 했던가. 설사 웃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웃을 수 있으면 되니까. 내 꿈은 나를 위한 것, 나와 마주하고 있는 거울속의 당신을 위한 것. 이팔청춘이 여, 꿈에 미쳐라. 대학도 아니고 성적도 아니고 직장도 아닌 꿈에 미쳐라. 꿈은 미래 를 결정하는 게 아니고 미래의 나를 만들 뿐이다. 나 자신, 내 연극의 주인공, 충분 히 사랑받을 수 있는 나를 만든다. 모든게 류수처럼 흘러가도 여전히 남는 꿈-이팔청춘, 꿈에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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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한민족글짓기대회장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1학년 우 최 봉

어머니의 다리가 되어드리고싶다 많은 학생들은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과학자, 외교관, 선생님 등을 말할 것이다. 사실 나도 이른바 “사”자가 들어간 직업, 즉 의사, 검사, 판사처럼 뭇사람들의 촉망 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나의 꿈을 어머니의 다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꿈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우리 어머니는 선천적인 소아마비증을 앓고 계신다. 무능력한 아버지 덕분에 어머 니가 불편 하신 몸을 이끌고 삯바느질을 하여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계신다. 53년 평생 그이는 손에서 일손을 놓은 적이 없었으며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팽이 마냥 늘 바쁘게 돌아친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어머니의 다리가 되어 드리고 싶었고 그것이 진정 내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꿈-어머니의 다리가 되어드리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자식으로써 당 연한 것이다. 6년전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일은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오래도록 잊지 못하게 하며 꼭 꿈을 이루라고 채찍질해준다. 그날 나는 처음 입학하 는 날인만큼

어머니더러 같이 가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소나무껍질처럼

거칠거칠 해진 손으로 나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연신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면 네가 놀림을 받을 것이 뻔한데.. 너 혼자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나도 쉽사리 머물러 서지 않고 징징거리며 같이 가달라고 졸라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결국 어머니도 항복하시고는 나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어머 니의 예상이 적중이나 한 것처럼 학생들은 비웃음이 담긴 눈빛으로 우리 모녀를 바 라보았으며 절뚝거리는 어머니의 다리를 손가락질하면서 수군거렸다. 나는 순간 눈 물이 솟구쳐 올랐으며 가슴으로 차올라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는 어머니의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한쪽만 허옇게 닳은 신발과 지팡이 나사에 긁혀 흠집이 난 어머니의 바지가 나의 마음을 더욱 미여지게 하였다. 나의 꿈-어머니의 다리가 되어드리는 것은 어머니의 자신감을 되찾아 드리는 것 이다. 매년 설이 되면 우리 친척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새해 의 축복을 전하는 자리를 만들군 한다. 대기업에 출근하는 이모는 과일이며 음료수 며 한꾸러미 들고 오고, 삼촌은 값비싼 와인을 들고 오며, 고모는 음식장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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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며 아예 돈을 내놓으신다. 하지만 우리 식구만은 늘 빈손이다. 그래서인지 어머 니는 다른 친척들이 식사할 때면 주방에서 묵묵히 설겆이만 하시며 나와서 수저를 들라는 고모의 권유에도 안 나가신다고 고집을 부리신다.. “아유 어서가. 나는 주방이 편해. 음식 식기 전에 어서 가서 들어.”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에 비낀 쓸쓸함은 나의 착각인걸까? 하지만 나는 알 것 같았 다. 어머니가 주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일 만하는 것이 아무것도 내 놓지 못한 미안 함이며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자비감이라는 것을... “국 한 그릇 더 가져와요!”라며 우리 어머니를 가정부 취급하는 친척들을 뒤로 하고 나는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사실 어머니는 학창시절에 학년에서 앞자리를 차지할 만큼 공부를 잘하여 지금의 “엄친딸”로 불리우군 했었는데 장애자란 이유로 대학진학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 가서 좀 드시지요. 제가 이제 커서 아주 멋지고 훌룡한 사람이 되어서 어 머니의 다리가 되어 드릴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밝게 비치는 달빛에 어머니의 눈물고인 두 눈이 반짝거린다... 내가 어머니의 다리가 되고 싶다는 것은 결코 다리를 이식해 드린다는 것이 아니 라 내가 앞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훌룡한 사람이 되어서 어머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뜻이다.“꿈은 이루어진다.”는 명언처럼 만약 내가 훌룡한 인재가 되여 성공한 다면 어머니도 더 이상은 친척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셔도 되고 조금은 더 당당해지 실수 있지 않을까? 난 오직 그날을 위해,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위해 하루 하루를 알차고 보람차게 살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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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중부일보사장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고2 신 대 경

남자대장부의 꿈 고중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정든 시골을 떠나 산 설고 낯선 연길이란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남자대장부의 꿈을 하나하나 익혀가고 있다. 한반에 쉰여명씩 열여섯개 반에 도합 팔백오십 여명 학생, 모두다 하나같이 우수하였기에 만만치 않은 상대자 들이였다. “최고를 위해 최선을 다 하자.” 반주임 선생님께서 늘 입버릇처럼 외우시는 말씀이 신데 시종 나의 귀전을 울렸다. 하지만 마음은 불같았지만 현실생활은 마음처럼 쉽 지 않았다. 기초가 약하고 나이가 어린 탓인지 선생님들의 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오 지 않고 말뜻을 리해하기 어려웠다. 고중에 입학한 후 첫 자모회에서 돌아온 어머니 얼굴은 근심에 쌓여있었다. 입학 할 때 성적으로 보면 반에서 30등 좌우라 학년 500등에 가깝다고 말문을 여시였는 데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집을 떠나 타곳에서 공부하는 보람이 없었다. 부모 는 부모대로 고생, 나는 나대로 고생. 당장이라도 이불짐을 싸들고 현성고중으로 가 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남자대장부답지 않게 한번도 도전해보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는 것은 부모님들과 고향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기대에 어긋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를 깨물었다. 엎어지더라도 다시 자리에서 일 어날 각오로 현실에 부딪쳐야 했다. (남자대장부다와야 한다. 힘들더라도 나절로 한 발작씩 높이 올라야한다.) 나는 몇 번이고 속으로 곱씹고 또 곱씹었다. 칼바람이 쌩 쌩 불어치는 겨울방학에도 전차를 갈아타고 다니면서 학원반에 다녔다. 어마어마한 학원비가 나를 긴장 속에 떨게 했지만 한시 급히 도시생활에 적응해야 했고 기초가 약한 학과부터 보충수업을 받아야 따라갈 수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면 교과서 에 선생님말씀을 하나도 빠뜨릴 새라 빼곡이 써넣고 모르는 문제는 자체로 풀 때까 지 풀고 또 풀었다. 매주 토요일,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어울릴 새 없이 책상에 마주 앉아 한주일 학습을 검토해보고 각 학과마다 지식체계를 세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는 다시 한번 검토해보고 눈을 감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첫 기중시험에서 학년 167등, 반에서 11등으로부터 학년 47등, 학년13등, 학년10등으로 줄달음쳐갔 다. 하여 학년 25명으로 조직된 코기러기반에 참가했고 반에서 학습위원으로 활약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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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선생님께서는 성적이 많이 제고되었다고 전반 학생들 앞에서 칭찬해주셨다. 여 러 차례 시험가운데서도 고중1학년 기말시험 때 있은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첫날 시험을 무사히 추리고 이튿날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아니? 어쩌면 글쎄 첫날 추 린 한어작문시험지가

그대로 책상위에 놓여있었다. 어제 분명 두장 시험지를 똑바

로 놓고 나갔는데--“선생님, 한어작문시험지가 책상위에 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여 선생님께 말했 다. 선생님도 놀라시는 눈치였다. “범수야, 어제 대경이 시험지를 거두지 않았니?”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선생님, 오늘 아침 대경의 시험지가 책생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나도 보았습니다.” 뒤에 앉은 영순의 증명으로 일은 잘 마무리 되였지만 범수에 대한 고까운 생각, 선생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은 몹시 언짢아졌다. “따 르릉 따르릉---“ 시험을 알리는 종소리마저 야속했다. (사내대장부가 이만한 일에 이것저것 고민하고 친구를 의심하다니? 대경, 힘내 아무 일도 없어 빨리 정신을 가 다듬고 시험을 잘 추려야지.) 나는 스스로 질책, 위안하면서 시험지에 아는 것만큼 열심히 써넣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이번 시험에서 반에서는 2등 전교에서는 13등자 리까지 차지했다. 시골에서 시험을 볼 때면 두명 밖에 안 되니 시험지를 거둘 때도 퍽 쉬웠다. 큰 학교라 한반에 쉰 여명씩 앉아 추리니 시험지를 거둘 때 가끔 학생들 이 교원을 방조하여 줄별로 시험지를 거두어들이는데 서두르다가 두 장을 다 쥐지 못하면 한 장은 남게 되는 것이다. 근데 왜 하필 나한테서 이런 일이 발생한담? 리 해 못할 일도 아니었고 친구를 의심할 일도 아니었다. 비록 이 일이 지난지도 몇 달 이 되지만 가끔 생각할 때면 황당하고 잠시나마 친구를 미워했던 자신이 후회스럽 다. 앞으로 뜻밖의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침착하게 남자대장부답게 대바르게 똑똑하 게 령활하게 처리해야함을 스스로 깨달은 인생공부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민족력사에 관심이 비교적 많았다. 일 년 전, 어느 하루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셔서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모회사에 출근하는 분이 모교를 잊지 못해 후한 상금을 내걸고 제1차 우리민족 력 사 퀴즈경연을 조직한답니다. 의향이 있는 학생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선생님, 제가 참가하겠습니다.” “선생님,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친구들이 하나 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나도 뒤질세라 손을 번쩍 들었다. “대경이는 비록 시골에서 왔지만 그 누구보다도 대담하고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 응하는 학생입니다.”라고 선생님께서 높이 칭찬하셨다. 나는 흥취가 있는 력사경연 이라 토요일, 일요일 시간을 금싸락처럼 아껴가며 연변대학도서관으로부터 민족도서 관, 교육서점, 신화서점을 참빗질라면서 우리 민족력사 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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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속에 기억했다. 그리고 먼 친척에게 부탁하여 서점에서 책도 사달라고 부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각 학과 공부압력도 컸기에 력사지식이나 력사 년대를 기억 했다가는 참새 방아간 지나간 듯 머리 속이 새하였다. 할수 없이 부모님들이 물어보 면 대답하는 방법으로도 기억해보았다. 드디어 시험을 추리게 되였다. 시험지를 받 아드니 떠오를까 말까 하는 문제들이 몇 문제가 되였는데 850명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경연결과를 발표하는 날이 되였다. “이번 력사퀴즈 경연 에서 우리 반에 학년 일등이 있습니다.” 선생님말씀에 우리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살 폈다. “신대경 력사퀴즈 경연에서 학년 일등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격동과 기쁨에 겨운 목소리였다. 교실에서는 “와”하고 환성이 터졌다. 나 는 몇 백명 학생들의 축복의 꽃물결속에서 남자대장부답게 가슴을 쭉 펴고 상금 2000원과 생화묶음 및 영예증서를 받아 안았다. 번쩍번쩍 여기저기서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했다. 난생처음 이렇게 큰 무대에 서보았고 상을 타본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뛰고 고무풍선처럼 하늘에 붕 떠오른 기분이다. 나는 학습에는 신심이 있지만 체육에는 별로다. 반에서 키도 제일 작고 힘도 제일 약해 체육시간이면 꿔온 보리자루 신세이다. 축구를 차도 그렇고 배구를 쳐도 내 이 름을 찾는 학생이 없다. 슬그머니 반발심이 나기도 했다. 학습에서는 뒤떨어지지 않 는데 체육에서 꼴찌 축에 속하니 말이다. 9년 동안 시골에서 학습하다보니 4학년일 때 제일 많아서 열두명이었고 5학년부터는 일곱명, 여섯명이던 것이 결국 중학교를 필업할 때 두 명만 남은 졸업반이었다. 4학년까지는 그래도 남 녀학생이 어울려서 축구를 찾지만 5학년부터는 녀학생들이 축구뽈과 멀리하였기에 체육시간이면 자유 시간이 더 많은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나의 정황을 료해한 반주임 선생님께 서는 가끔 나를 찾으셔서는 “대경이 신체단련을 잘 해야 고중3학년에 올라가서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체육단련을 해야됩 니다.” 고 부탁하셨다. 나는 선생님 말씀에 마음 을 굳게 먹었다. 저녁 밤자습이 끝나 집에 돌아오면 밤 9시를 조금 넘는다. 나는 무 서움도 뒤로 물리치고 옷을 갈아입고 가로등 밑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래일을 위한 준비겠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에 들어서면 9시반 부랴부랴 세수하고 공부에 달라붙는다. 토요일과 일요일 짬시간을 리용해서는 베드민턴도 훈련한다. 노 력의 열매는 단것인가 본다. 돌아오는 국경절 학교에서 조직하는 건교 60돐 맞이 운 동대회에서 달리기선수로 뽑혔으니 더없는 기쁨이다. 부모님들은 나 때문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신다. 매주 금요일저녁 부모님들은 직장 에서 퇴근 후 이 물건 저물건 챙겨가지고 차를 갈아타면서 3시간이나 달려 나를 보 러 오신다. 1년하고도 몇 달이 지난 지금 나는 휴식 일에 집에 가본적은 단 추석 한 번뿐이다. 나와 반대로 우리 반 어떤 학생들은 책가방을 멘 채로 부랴부랴 차를 갈 아타면서 집으로 돌아가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내가 피곤하다면서 어김없이 연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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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다. “대경아, 많이 먹어라, 신체가 근본이다.” “공부 힘들지, 좀 쉬면서 하거라.” “아들 참 장하다. 혼자 기숙사생활을 하면서도 씩씩하게 공부를 잘하고 있으니.” “우리는 너만 보아도 힘이 솟는다.”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관심해주시는 부모님들의 사랑이 계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내 눈에 항상 젊어 보이고 아름답던 우리 부모님들도 인제는 머리가 희끗희 끗해지기 시작하였고 눈가에도 이마에도 잔주름이 패이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남은 2년 부모님들은 백번도 넘게 연길에 왔다갔다 하시면서 로심초사 하실 것이다. 2년 세월을 그려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엿한 고중생답게, 당당한 남자대장부답게 인제는 부모님들 근심을 덜어드리고 싶다. 요즘 제법 찬 기운도 옷깃을 스며든다. 더는 부모님들이 쌀쌀한 바람을 헤치며 미끄러운 눈길을 헤치며 주말마다 오실 것을 생각하니 부담스럽고 미안하다.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부모님, 보아도 보아도 자꾸 보고 싶은 자애로운 부모님 얼굴, 그리움을 꾹 참고 태연한척 할 것이며 두 달에 한 번쯤 오셔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남은 2년 고중생활, 나는 자립 자강하면서 중국의 6대 명문대학을 겨냥하고 도전 에 도전을 거듭하면서 남자대장부의 기백을 빛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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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북도지사상 길림성 연변 제1중학교 고2 김 령

색바래져가는 꿈을 구하라 <<너는 꿈이 뭔데?>> <<나? 에이, 그런거 없어…>>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꿈이 뭔지 묻는 말에 없다고 대답하는 이런 친구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나도 예전에는 그 부류에 속해있 었다 꿈이 없다… 그건 누구나 아는 뻔한 거짓이다. 미국의 랑만주의 시인 롱펠로가 쓴 <<인생례찬>>에서는<<마음은 항상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이니. 모 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모든 것은 그리우리라.>>라는 말이 나온다. 고 달프고 힘든 현재지만 꿈과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이 사람이다. 그렇다면 꿈이 있다는 말인데 그 꿈들은 언제 존재했던 것이고 또 어 디로 간 것일까? 그 꿈들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 존재했던 것이고 지금은 색이 바래질대로 바래져서 당신들의 마음속의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단지 당신들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 문이다. 누구나 소학교시절 선생님께서 <<꿈>>에 대해서 당신들에게 질문한 적이 있을 것이다. 소학교시절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그날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선생님께서 <<오늘 주제반회에서는 <꿈>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러자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선생님의 부름을 기다렸었다. 선생님이 <<김령학생, 말해보세요.>>라고 하자 나는 일어서서 <<저의 꿈은 법관이 되는 것입니다. 리유는 나쁜 놈들에게 고통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세상을…>> 그 화창한 봄날의 꼬마 녀자애의 아름다운 꿈을 간직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 학교에 가면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고 바른 길로 가는 모범생이 되리라고 다짐했건마 는 꿈조차 잃어버리고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나의 꿈을 또 한번 일깨워준 것은 중학교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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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법정에 선 때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혼합의를 하셨고 동생과 나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하셨다. 이 에 어머니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셨고 법원에서는 나를 어머니께, 동생을 아버지께 준다고 판결을 했다. 나와 동생은 갈라지기 싫어서 펑펑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끝내 동생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아버지를 따라서 갔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으셨지만 동생의 내음이 다분한 동생의 방으로 들어가시 더니 오열을 토하셨다, 말도 못하시고 눈물만 흘리시던 어머니를 보는 내 가슴은 찢 어지는 듯 했다. 나는 그때 뒤에서 조용히 어머니를 껴앉으면서 말씀드렸었다.<<엄 마, 제가 법관이 되면 꼬옥 이사건 다시 판결해서 우리 인이 데리고 올 께요. 꼭이 요, 그러니까 잠시 떨어져 있는 것 뿐이예요. 그때까지 인이 보고 싶어도 참을 수 있죠?>>그때 어머니께서는 나의 어깨를 안 고 더욱 서럽게 우셨다. 그렇게 강인하시던 어머니도 그 순간에는 자식을 뺏긴 한낮 불쌍하고 가련한 어머니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때 어머니께 했던 다짐은, 동생을 꼭 다시 찾아오겠다는 다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바래져갔다. 고중에 올라간 뒤 나는 또 기로에 들어서게 되였다. 선생님의 교육과 어머니의 훈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방황하고 있는 나를 잡기 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서 아무생각도 없이 어머니의 책궤를 뒤지 다가 편지 한 뭉치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동한 나는 제꺽 편지를 펼쳐보았다. <<사랑하는 인이(나의 동생)에게 : 엄마는 잘 있단다, 누나도 잘 지내고 있지. 우리 인이는 잘 지내지? 추우니까 감 기 조심하고 아버지말씀 잘 듣고 우리 인이 이제는 학교에 입학했으려나. 엄마가 잘 해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그 뒤로는 눈물로 얼룩져있어서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순간 나는 마음이 찡해났 다. 눈물이 핑 돌더니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두볼을 적셨다. 어머니께 했던 그날의 맹세가 떠올랐다. 분명히 그날에 동생을 다시 찾아 올꺼라고, 내가 그렇게도 원하는 법관이 꼭 되어서 동생의 부양권을 되찾아 오리라고 맹세했던 그 아이는…. 지금은 그 꿈, 그 맹세를 잊어버리고 청춘을 랑비하고 기로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 다. 이튿날, 나는 이른 아침부터 교무실로 갔다. 그리고 선생님께 방황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나를 붙잡아주려고 애쓰셨던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 그리고 나의 꿈과 그 꿈을 위해 지불할 나의 노력에 대해 말씀드렸다. 그리고 이때 선생님이 메모지 한장 을 건네주셨는데 그 메모지의 내용이 아직도 머리에 선하다.<<할 수 있습니다! 할 것 입니다!>> 선생님은 메모지를

건네주시면서 <<힘이 들 때면 이 메모지의 말

을 큰소리로 웨쳐 보거라. 그러면 무궁무진한 자신감과 용기가 한줄기의 강한 힘이 되여 너를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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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나는 정말 피타는 노력을 했다. 성적은 조금씩 올라갔지만 기초가 약한 탓에 갑자기 성적이 눈에 띄게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 힘들고 가장 포기하고 싶을때 <<할 수 있습니다! 할 것입니다!>>라는 말 을 큰소리로 왜치면서 보고 싶은 귀여운 우리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다짐한다. 어머니께 했던 동생을 꼭 다시 되찾아오겠다는 다짐과 그 화창한 봄날의 바르고 아 름다운 세상을 동경했던 꼬마 녀자애의 아름다운 꿈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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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서울시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6학년 박 성 현

꿈과 미래는 변한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꿈이 있다. 하지만 꿈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꿈을 이 루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노력을 하는 지 안 하는 지에 따라 다르기 때문 이다. 또 포기한 사람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깡패같이 웃어른에게 대드는 사람도 마 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나처럼 꿈을 아직 못정한 사람도 있다. 꿈은 없는 것이 아니 라 아직 못 정한 것이다. 나는 옛날에는 꿈이 있었고 계속 바뀌면서 살아왔다. 1학 년 때는 경찰 이였다.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나쁜 도둑을 잡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2학년 까지 꿈이 계속해 왔는데 3학년 때는 꿈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경찰 이 아니라 축구선수였다. 그 이유는 축구는 재미있고 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 문이다. 하지만 6학년이 되고 나서 꿈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다른 것을 원한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나의 꿈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말 속 에서는 꿈을 빨리 가지지 않으면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꼭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꿈은 계속 바뀌기 때문에 천천히 생각해도 될 것 같다. 나는 ‘노력’을 통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포기’라 는 것을 산택하면 그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미래에 가서 후회된다고 했을 것이 다. 하지만 ‘노력’이랑 ‘HARD’등의 뜻을 가지면 그 사람은 미래에 가서 열심 히 자신의 알맞은 것을 선택해서 후회 없이 살 것이다. 이처럼 나도 노력을 하면 성 공 하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임시적으로 꿈을 축구선수라 할 것 이 다. 그 이유는 나의 최근의 꿈이고 앞에 나온 것처럼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기 때문 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미래가 어떤지 절대 볼 수가 없다. 만약 타임머신이 진짜 있으면 미래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미래를 보고나서 만약에 그 사람의 미래가 안 좋으면 그 사람은 계속 시간을 아깝게 보낼 것이다. 솔직히 사람 의 미래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타임머신이 실제로 있으면 과거만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의 미래는 그 사람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말에서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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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역시 사람의 꿈과 미래는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꿈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는 도중에 꿈꾸는 것도 있고 축구선수나 선생님 같은 직업이라는 뜻도 있다. 또 자신이 하지 않았던 일도 있다. 예를 들어 시험 올 백 맞기나 핸드폰 사는 것 등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꿈은 샐 수 없는 만큼 많다. 나는 커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이 될 것 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늙으면 어 차피 하늘로 가버릴 텐데 나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꼭 노력을 해서 나의 꿈을 이룰 것이다. 만약에 못 이룰 경우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 해서 반드시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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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서울대총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2학년 박 이 현

화석 발굴대장 박이현 점심시간에 우리 반 친구들은 즐겁게 축구하는데 나는 도서관에 가서 화석책을 찾 는다. 나는 동물, 화석책을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이 책으로 간다. 나는 화석책을 자 세히 본다. 그러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내 꿈은 화석발굴자이기 때문 이다. 책을 한참 보다가 그러다 종이 치면 깜짝 놀란다. 나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화석을 좋아했다. 나는 공룡책을 많이 보고 공룡도 많이 그렸다. 내가 그린 공룡그림들은 우리집 현관문에 가득 붙어있다. 공룡책 중에서 특 히 ‘공룡x를 찾아라’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했다. 왜냐하면 이융남 대장이 화석을 발굴하고 일하던 것을 일기처럼 써서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융남 대장이 왜 자 랑스럽냐면 캐나다, 영국 과학자도 왔지만 이융남 과학자가 그 중에 대장이었기 때 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나도 이융남 대장처럼 화석 발굴하는 것을 일 기처럼 쓰고 싶다는 거다. 나도 세계 과학자들 중에서 대장이 될 거다. 이융남 대장 처럼 여행을 하면서 무시무시한 육식 공룡, 초식 공룡을 발굴하고 싶다. 그래서 나 도 유명한 박이현 발굴대장이 되고 싶다. 아직 나는 화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나는 매일 아침에 엄마랑 어린이 명심보감을 읽는데, 천리 길도 한 걸음 부터라는 글이 있다. 이백이 10년을 공부하기로 했다가 5년이 지나자 자신이 생겨서 집으로 가다가 어떤 할머니를 만났 다. 그 할머니는 쇠방망이를 숫돌에 갈고 있었다. 10년을 갈아서 좋은 바늘을 만든 다고 했다. 이백은 깨닫고 10년을 채워 공부해서 중국을 대표하는 대시인이 되었다 고 한다. 나도 아직은 화석을 잘 모르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니 나도 계속 계 속 10년을 화석에 대해서 많이 배우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석 대장이 될 수 있 을 거다. 그리고 화석책을 보다가 또 알게 된 게 있는데,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석이 다. 그것은 바로 벨로키 랩토르가 프리케라톱스를 잡아먹다가 땅이 무너져 벨로키 랩토르가 프리케라톱스와 싸우는 모습이 그대로 화석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화석 은 정말 유명해 졌다. 내가 봐도 정말 멋졌다. 그런데 아빠가 벽에 붙인 중국 지도를 보니까 바로 그 고비사막은 몽골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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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가까웠다. 나는 그 유명한 고비사막이 가까이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꼭 가 서 보고 싶었다. 중국과 몽골이 가까워서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신났다. 또 나 는 중국에 있으니 중국어를 많이 배워서 몽골에 찾아 가고 싶다. 나는 화석 발굴자가 되면 화산 폭발로 죽은 공룡화석을 발굴하고 싶다. 그리고 고 비사막에서 싸우다 화석이 된 벨로키 랩토르, 프리케라톱스 화석보다 더 멋진 화석 을 발견하고 싶다. 그리고 또 나는 가죽이 남아 있는 공룡 화석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세계 다른 과학자들을 데리고 화석을 발견하는 나를 상상해 보면 너무 멋지다. 오늘도 다른 애들은 축구를 하는데 나는 도서관에 재미있는 화석책이 또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도서관에 간다. 나는 공룡백과를 펴서 티라노 사우르스 렉스와 친 타오 사우르스를 보면서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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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수원시장상 청도이화한국학교 6학년 송 동 하

부모님이 바라는 꿈, 내가 이루고 싶은 꿈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축구선수다. 내가‘축구선수’라는 꿈을 꾸게 된 이유는 공을 드리블하는 것이 멋지고, 축구를 하는 과정이 치열하기도 하고 그것이 더 심해 지면 싸우기도 하는 것이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축구선수가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축 구 선수가 되려면 기본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한다. 마냥 TV에서 볼 때는 쉬워 보이지만 패스 하나 하는 것도 어렵다. 처음에 축구를 처음 시작 했을 때는 정말 어 려웠다. 하지만 4학년 쯤 됐을 때 어느 정도 기본기가 되어 간다는 걸 느꼈다. 그리 고 5학년 때는 한국에 가서 축구를 배웠는데 그 때는 거의 체력훈련을 했다. 그렇게 고단한 훈련을 하루하루 보내며 지내더라도 나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오로지 축구선수라는 목적지로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내 목적 지는 멀었다. 어떨 땐 목적지의 앞만 보고 달리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축구만 보고 달리다가 부모님께서 축구를 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할 때가 내가 넘어지는 때이 다. 그럴 때는 공부할 때 집중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공을 찰 때의 감각을 잃지 않으 려고 모래주머니를 차고 공부하기도 한다. 부모님이 내게 바라는 꿈은, 공부를 열심히 잘 하는 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만 내가 4학년부터 축구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아빠는 내가 공부 잘하는 축구선수가 되길 바라신다. 특히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유럽에 가면 기성용, 박주영, 지동원, 손흥민, 박지성 등의 유명한 선수들이 영어를 잘해서 그 곳 축구 선수들과 대화가 잘 되고 축구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보다 더 심하게 반대하신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에 키는 141㎝ 고 몸무게가 32kg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학년에 비해 신체, 체력이 딸린다며 엄 마는 반대하신다. 그리고 코치님도 “너희는 학생이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축구만 하면 안 된 다. 너희들은 지금 축구선수가 아니다.”라고 축구부 전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 어른들이 내 꿈을 반대하는 이유도 정확히 모르겠다. 나의 꿈을 헛되게 하기 싫지만 어른들 말씀도 중요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냥 매일 공부 보다는 축구만 하고 싶지만 지금은 공부 시간 반, 축구 시간 반이다. 고단해도 축구하는 것은 즐겁다. 이렇게 해서 내 꿈을 꼭 이루고 싶다. 꿈을 꼭 이루어 커서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서 1년에 300억씩 벌어서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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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북도지사상 청도이화한국학교 6학년 고 준 오

나는 나중에 나의 20년 30년 후의 모습은 과학자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과학자가 되기 위해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 여러 가지의 과학 중에서도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주는 기구 같은 것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 이유는 내가 이렇게 편리하게 해 주는 가구를 만들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더욱 더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기 때 문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과학자가 되면 돈도 많이 벌어서 내가 도 다른 발명도 하 고 부모님께 효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과학자가 돼서 발명하고 싶은 것은 예를 들어 인공지능 소파, 장애인들을 위한 휠체어, 인공지능 자동차다. 인공지능 소파는 내가 집에 들어가서 그냥 아무데나 앉으려고 할 때 소파가 달려와 주어 내가 그 소파 위에 앉는 것이고, 장애인들을 위한 휠체어는 엄청나게 속도도 빠르고 편안 하게 장애인들이 가고 싶은 곳을 데려다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 자동차는 내 가 자동차에게 가고 싶은 곳을 말하면 나는 편안하게 쉬면서 자동차는 그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발명하면 내가 유명해지면서 나는 다시 발전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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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청도이화한국학교 6학년 정 예 슬

내가 20년 후에는 나는 내가 20년 후에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20년 후의 내 모습을 생각해서 그려도 보고 써도 보고 직접 재연도 해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20년 후의 내 모습은 유명한 박사가 되어 TV에도 나오고 큰 회사 도 차릴 것 같다. 박사 일을 하다가 은퇴를 하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 나서는데 그 때 갑자기 나에게는 큰 시련이 닥쳐온다. 그것은 바로 내가 이름 모를 병에 걸린 것 이다. 하지만 나는 그 병을 견뎌 내려고 하지만 점점 병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죽을 처지에 이르는데 그 때 동료 박사가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해 낸다. 그래서 나는 다시 건강해져서 새로운 일을 찾는데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요리사 구함이라는 문구! 그래서 나는 요리학원에 다니게 된다. 요리학원에서 1년간 요리를 배운 후 다시 그 레스토랑에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요리사를 구했고 나는 좌절을 한다. 이때 걸려온 전화 한통! 그 전화는 로또에 당첨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 이냐면 때는 한 달 전 나는 로또를 샀다. 그게 지금 전화가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으로 큰 빌딩을 짓고 요리사가 된다. 5년 후 나는 30대의 문턱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데 그 때 나에게 행복이 찾아온 다. 바로 대기업의 CEO가 된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떻게 CEO가 되었을까? 4년 전 나는 길거리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 사람은 바로 대기업 사장이었다. 얼굴은 쪼 글쪼글하고 아주 늙어 보였다. 알고 보니 3년 전 헤어진 아빠였다. 그래서 나는 CEO가 된 것이다. 하지만 10년 후 나는 50대가 되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불치병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생애를 마감할 위기까지 왔지만 마지막 수술 을 마친 후 다시 건강해졌다. 나는 핸드폰을 개발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판 스티브 잡스가 된 후 행복하게 사는데 20년 후 70세 때 불치병에 걸려 병을 치료하지 못하 고 생애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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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대구경북한중교류협회중국지회장상 심양한국국제학교 2학년 정 정 민

나의 꿈 나의 꿈은 화가 나의 유치원때 꿈은 피아니스트였어요. 그리고 1학년 때 꿈은 스케이트 선수였어요. 지금의 나의꿈은 ‘화가’가 되는 거에요. 화가란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는데 “그림 그리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이 라고 되어있었어요. 그래서 난 나중에도 그림을 그리는 직업를 가지면 참 좋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사람들이 기쁜 표정으로 보는 게 정말로 좋으니까요. 1학년 때 서울 지하철 미술관에서 그림을 전시했어요. 그리고 몇일 뒤에 엄마랑 상을 받으러갔어요. 상도 받고 꽃다발도 받았어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난 대학교도 미술대학을 가고 싶어요. 내가 생각하는 걸 그림으로 그리고 그걸로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어서 좋아 요. 또 그림을 그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많을 것을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아요. 난 지금 중국에서 살아서 전시회를 많이 볼 수가 없어요. 엄마는 많은 그림을 봐야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난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어요. 그것을 항상 그림으로 그려요. 이다음에 꼭 화가가 되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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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청도이화한국학교 6학년 장 대 호

현재 2032년의 나 나는 현재 삶에 굉장히 만족한다. 내가 가진 것은 아주 작은 시골집, 밭 조금, 강 아지 3마리와 아내와 아이 2명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평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한 구멍가게 덕분일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7년 전 나는 군대를 다녀온 후 여자 친구와 길을 걷던 중 어떤 구 멍가게에서 팔고 있는 로또를 샀다. 나는 운이 좋게도 3등 –천만 원에 당첨됐다. 상 금으로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무엇인가를 사고 싶었지만 그 것보다 창업을 결심하게 되었다. 손에 칩만 부착하면 사람의 심리를 읽어 생각대로 컴퓨터가 작동되는 상품 을 발명했다. 물론 보기 좋게 망했다. 그 후에 나는 우울증 때문에 술에 미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돈을 다 쓰고 거지 가 되어 길거리를 떠돌며 구걸을 2년 동안 했다. 물론 그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여자 친구도 날 떠났다. 나는 하루하루 구걸과 신문지 줍기 등 잡일을 하면서 살아갔다. 어느 날 길거리를 떠돌던 중 노동자를 구한다는 전단지를 보고 그 곳에 찾아가 일꾼 으로 들어가 막노동을 했다. 그리고 그 첫 월급으로 중고 휴대폰을 사서 한동안 연 락이 끊겼던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부모님 집에 찾아갔다. 나는 시골로 귀농을 하면 집을 공짜로 준다는 말에 근처 시골로 귀농을 하고 10평 정도의 땅을 사 농사를 시작했다. 나는 주말에는 농사일을 평일에는 막노동을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손에 굳은살이 생겼다. 요즘은 아이들도 손에 굳은살이 있 다. 물론 다른 이유이긴 하지만 말이다. 바로 게임이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손 이 굳은 살 투성이다. 나는 처음으로 곡물을 수확해서 팔았다. 느낌이 묘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벌었고 땅을 늘렸다. 뭐 아직도 이렇지만 그래도 내가 창업에 성공했으면 더 욕심이 생겨 많은 것을 탐내지 않았을까 싶다. 난 이 평범한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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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서울시장상 청도국기외국어학교 7학년 허 보 연

나의 꿈 나의 미래 “네 꿈은 무엇이니?” 요즈음 어린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꿈, 아니 직업이라고 해 야 마땅한 공무원입니다. 어린이라면 한 번쯤은 상상해 볼 만한 거대한 꿈도 아니고 꿈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직업’을 그들은 꿈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라시안은 꿈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인형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꿈이 성공으로 한 발 나아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요즈음 어린이들은 꿈이라곤 모르는 인형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늘 꿈을 키워왔습니다. 하지만 커가면서 꿈꾸기만 했던 것을 이 루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르던 저에게 ‘꿈 너머 꿈’이라는 책은 많은 도움이 됐 습니다. 고도원이라는 작가가 쓴 이 책은 꿈을 가지고 다음에 내가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무엇이 되느냐를 넘어서 무엇이 된 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이 책 속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릴 적부 터 막연히 꿈꿔왔던 ‘커서 이런 직업을 가지고 살고 싶다’가 아닌 진정한 나의 꿈 을 깨닫게 해 준, 어쩌면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준 책이었습니다. 비로소 나의 꿈 을 찾게 된 것입니다. 고도원 같은 작가, 사람들에게 ‘꿈’이란 것을 알려주고 꿈 을 이루게끔 도와준 작가처럼 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인터넷으로 소설들을 읽으며 나도 재미를 주는 작가가 돼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란 내 미래의 직업이었습니 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작가가 되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깨닫고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힘든 사람에 게 글로써 위로를 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꿈 너머 꿈’이라 는 책에서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소년, 소녀 시절부 터 키워왔던 꿈을 이룬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책을 읽으면서 꿈을 이룬 나의 모습이 상상되며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이처럼 남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책을 쓰는 작가, 고도원 같 은 작가가 되는 것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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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루어진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꿈은 이루어진 다는 희망이 있어야 사람들이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꿈은 마냥 꾼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꿈꾸고만 있다면 꿈이라는 말 그대로 나만의 환상 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실천해야합니다. 만일 꿈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나의 바람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을 실 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꿈이 작가라면 글을 많이 읽고 글을 써 봐야합니다, 나의 꿈이 패션디자이너라면 패션잡지를 읽고 나만의 옷 을 만들어 봐야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서 비로소 나의 꿈이 실현되는 것입니 다. 성취하려면 행동뿐만 아니라 꿈을 꾸어야 하며, 계획을 세울 뿐만 아니라 그것 을 믿어야 한다고 아나톨은 말했습니다. 먼저 꿈을 가지는 게 중요하지만 그 뒤에 이 꿈을 책임지고 실천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꿈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가 더욱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라는 나의 꿈을 위해 독서와 글 쓰는 노력을 많 이 하면 글이 보다 자연스러워집니다. 저의 마음에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무엇인 가 계속 노력해나가고 있다면 반드시 작가라는 꿈이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에 저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책을 쓰고 있거나 희망을 주는 책을 쓰고 있 을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궁금해 하는 미래에 대한 용기를 심어주는 글을 말 입니다. 작가가 된 내 모습을 꿈꾸면 나의 꿈에 한발자국 더 나아가는 기분이 듭니 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뿌듯한 일입니다. 미래의 제 가 고도원 작가와 같은 도움을 주는 작가가 된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 릅니다.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가끔은 글을 쓰는 것이 벅차 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나의 꿈을 멋지게 이루어 낼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가끔은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 다. 하지만 사사로운 일조차 나의 도움을 받아가며 해결한다면 그건 더 이상 ‘나의 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이 하나의 마라톤이라 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완주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도에 너무 힘들어 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꼴찌를 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중간 중간 놓여있는 물을 마시며 완주를 목표로 열심히 뛰어갈 것입니다. 꿈이라는 출발선에서 실현이라 는 목표까지 제 미래를, 인생을 달려 나갈 것입니다. 때로는 과연 내가 꿈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꿈을 이룬다는 게 너무 크고 멀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라는 직업이 멀게 느껴질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부를 위한 직업이 아니다, 이는 나의 명예를 위 한 것도 아니다. 내가 좋고 원하기에 선택한 나의 꿈인 것이다. 꿈을 꾸는 자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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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없는 자보다 낫지 않는가. 내가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나은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나에게 꿈이 존재함으로써 내가 보다 나은 사람 이 된다고 스스로에게 꿈의 필요성을 얘기해 주는 것이다. 또한 내가 좋아하고 원하 는 것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크고 멀게 느껴졌던 꿈을 가까이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다. 고도원 작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꿈은 이루어집니다. 멈추지 않고 미친 듯 이 달려가는 이에게 꿈은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옵니다.’ 꿈을 이루게 된다면 그 때 저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꿈과 미래는 자신이 생각하고 이루어 나가는 것입 니다, 꿈에 대한 열정을 갖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과 정성을 다한다면 어느새 꿈 과 미래는 당신 앞에 웃으며 다가와 있을 겁니다.’라고 말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 꿈 너머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을 먼저 말하는 데에서부터 시작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이 듣고, 세상이 듣고, 이웃이 들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서부터 꿈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소심하고 용기도 없는 나이지만 꿈을 위해서 주어진 환경에 도전해 봅니 다. 하루하루, 글을 쓰는 지금도 용기를 내어 나의 꿈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한 걸 음 한걸음 꿈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새롭고 벅차기만 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미래, 작가가 되어 남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나의 모습을 꿈꿔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미래가 행복해 보여 이런 기회를 준 고도원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내가 누군가 에게 도움이 되는 작가가 되었을 때 고도원 작가를 보고 느낀 나와 같이 누군가도 나를 보고 꿈을 키워나가지 않을까합니다. 앞으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노력 해 나의 꿈을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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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경필국회의원상 칭다오청운학교 중3학년 박 미 래

사랑을 나누는 요리사 오늘도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것은 마치 시침이 1분을 만들기 위해, 1시 간을 만들기 위해 달리는 것 같다.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닦고 또 닦아, 정상에 오르기 위하여 달리고 또 달린다. 나도 역시 내 미래를 향해, 오늘도 새로운 내일을 만들고 있다. 내가 3살 할머니는 식당을 운영하셨다. 식당안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맴 돌 때, 나는 그들의 미소 속에서 나의 꿈을 찾았다. “나도 할머니의 음식처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사람들을 웃게 만들 고 싶다.” 비록, 어렸지만 내가 무엇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속에 무엇가 끓오르는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리사, 사람들에게 맛을 전하는 사람, 향기를 전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마음 먹었다. 그 꿈은 13년 지난 지금, 내심 장 한편에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우고 있다. 때론 사람들이 내 꿈이 보잘 것 없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요리사 말고 더 좋은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어떠냐며 그러나 나는 그 꿈이 몇 백명을 혹은 몇 천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내 꿈을 계속 지켜 나갔다. 요리사, 음식을 통해 감정을 전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행복 을 전하는 사람. 나는 내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제빵학원을 다니며 내 꿈에 한 발작 더 다가갔다. 빵굽는 냄 새, 향긋한 그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 준다면 이는 금상첨화다. 나는 빵을 만들면 그 빵을 내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분들에게 나누워 주었다. 학원 선생님, 할머니, 그리고 우리 언니. 내 빵을 먹은 사 람이 내게 고맙다 말 할 때 나는 고맙단 한마디에 내 심장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 다. 그 후로 나는 무엇을 만들던 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내 사랑의 요리를 전해주었 다. 나는 미래의 사랑의 요리사가 되고 싶다. 요즘 수많은 사람들이 궁핍함과 배고픔 에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이 너무나도 황폐해져 그들이 살아남기 힘들어 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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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나는 요리사를 꿈꾼 뒤 사람을 위한 요리사가 되기로 다짐했다. 사람을 행복 하게 만들기 위해선 내 도움이 필요 할 것이라고. 배고픔에 몸부림 치고, 가난함에 몸부린치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오랜 시간 생각해본 결과, 나는 사랑을 나누는 밥차를 실현시키고 마음 먹었다. 아름다운 음식 을 만드는 요리사가 아닌 맛있고 사랑을 전하는 요리사가 되는 것이다. 기아가 되버 릴 것만 같은 우리 불쌍한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 행복을 느끼게 한다면, 그 것은 기아의 배고픔을 덜어준 것 뿐만이 아닌 세상에 따뜻함을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세상을 정화시키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또한 10년 뒤 내가 밥차를 운행하고 음식점을 운영한다면, 나는 꿈이 있는 어린이 들 혹은 배고픔에 굶주린 사람들을 나의 조수로 고용할 것이다. 마치 물고기를 주는 새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어미새가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떤 길을 가야하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눈앞의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들의 꿈을 무럭무럭 크게 도와줄 것이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다시 희 망을 찾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나는 세상의 등불이 되어줄 따뜻한 요리사가 될 것이다. 세상을 빛나게 해주고 아 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그런 사랑스러운 세상을 비춰주는 요리사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는 내 꿈을 잃지 말고, 세상을 향해 날개짓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내 꿈은 사랑을 나누는 요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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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민족청소년 글짓기 대회수상작 모음집

<우수작> 경기도지사상 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윤 지 환

누가 뭐라 해도 난 국어지킴이 처음에 이 글짓기 대회에 참가할 때는 그냥 평소에 학교에서 하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글의 주제가‘나의 꿈 나의 미래’라는 것을 듣고 글을 어 떻게 써내려갈지 막막하였다. 과거에 있던 일을 주제로 하면 단순하게 기억을 되살 리면서 그것에 살을 붙여 가면서 쓰면 되고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나 피부로 느 낄 수 있는 것이라면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만 꿈과 미래와 같은 확실하지도 않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을 주제로 정해서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하루 이틀이면 끝 날 줄 알았는데 벌써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3번째 반복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일주 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써내려갈지는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 었다. 그래서 결국은 이제까지 했던 모든 생각들을 버리고 단순하게 나의 꿈이 무엇 인지 생각해보았다, 평범한 장래희망이 아닌 내가 이루고 싶은 꿈들을 말이다. 그 수많은 꿈들 중에 하나가 바로 국어이다. 학교에서 많은 과목들을 배운지만 나 는 그 중에 국어가 가장 재밌고 흥미롭다. 미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꿈은 확실한 법 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나의 꿈은 바로 국어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국어가 나의 꿈이라고 해서 단순하게 국어공부나 국어선생님 되겠다는 것이 아니고 나의 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적어도 우리 나라 사람들만이라도 영어 공부보다 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드는 것이 내 최 종적인 목표이나 꿈이다. 현재 한국의 학생들도 그렇고 학부모님들도 대다수가 국어 공부를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 학원 수만 놓고 봐도 국어를 가르치는 학원에 비하 면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내가 이런 꿈을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현실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한국말을 가장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내 의견이 다. 당연히 한국에서 살거나 한국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다보면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 라 영어의 문법이나 어려운 단어들은 많이 알지만 정작 우리말의 문법이나 우리말에 있는 어려운 단어들은 모르고 있고 심지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 질 않은 거 같다.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 과목이 수학인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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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하고 잘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 국어라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나라의 학자들도 인정한 것처럼 우리말은 세계 에서 가장 과학적인 말이고 또 가장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말 중에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말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생각 하는 것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사람들은 국어를 잘한다는 것보다 영어를 잘한다고 했을 때 더 인정해 준다. 만약 나처럼 국어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으면 주위 사 람들이 학교에서 국어선생님이나 하려고 하냐고 비웃는다. 우리의 고유보다는 외래 어가 더 고급스럽고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중간에 외국어와 섞어 쓰면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상관없지만 우리 말로 대체할 수 있고 심지어는 우리말에도 있는 단어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외국어를 쓰려고 한다. 우리나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다른 나라에 침략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침략을 이겨내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뻔한 위기에 도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서 우리말과 우리나라를 지켜왔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실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한 것도 아 니고 누가 침략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스스로 우리말을 파괴시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어가 없어지는 지경에도 이를 수 있다. 5000년의 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나라 그리고 그 5000년 동안 수없이도 많은 침략을 받아왔고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목숨을 바쳐서 지켜온 나라를 우리가 우리 손으로 망하게 만든다면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그분들이 얼마나 억울하실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 이런 생각에 대해서 아무리 비난해도 나는 그분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말을 지켜나갈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미래는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이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에게 미래가 계속해서 주어지는 한은 나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하고 생각한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 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꿈을 향해 달려가면서 중간에 포기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꿈을 채 이루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믿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 꿈을 이 루어낼 거라고 사람들은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가 이룰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그런

꿈을 꾸냐고 물어보겠지만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그 꿈 을 이루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꾸고 있는 꿈은 충분히 실현될 수 있고 잘못된 꿈이 아니기 때문에 실 낱같은 희망이라도 있고 나에게 미래가 계속 주어지면 그 누가 뭐라 해도 절대로 이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사람들이 영어의 어려운 단어들보다 국어의 어려운 단어 들을 알고 있는 것을 더 높게 평가해주기 전까지는 내가 무슨 직업을 가지든지 어디 서 살아가고 어떻게 살아가도 누구랑 살던지 간에 나는 나의 꿈을 향해 달려갈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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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김진표국회의원상 선양 주말 한글학교 중3 김 필 원

나의 꿈은 안녕하십니까? 저는 9학년 김필원 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제 꿈에 대한 발표를 하려 합니다. 비록 제가 말주변이 없고 뜻이 확실하게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께서 참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저의 꿈은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자신이 하고 자 하는 바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 작가가 써내려 간 글을 읽고, 그 글과 글 에 담긴 마음에 매료되었습니다. 제가 이 꿈을 갖게 된 계기는 김원희 라는 작가가 쓴 책을 읽고 난 후였습니다. 처음으로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그 책은 저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매력이 있 었습니다. 묘한 매력이라 함은, 심양에 와서, 말도 통 하지 않는 중국학교에 다니며 심각한 스트레스와 사춘기가 겹쳐 혼란스럽고 격동적이며, 변덕적이고, 매우 컨트롤 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그 책을 통해 저에게 전해진 마음의 파동은 제 마음 속을 마 치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절망 속에 빠진 저를 구원해내는 한줄기 빛과도 같았습니 다. 사실 그 책은 다른 책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별다른 특징은 없을 정도로 평범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그 책을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고, 저도 모르게 큰 감동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책은 한 열다섯 살 사춘기를 지나 방황하는 소년의 가슴 커다란 포부를 심어주었습니다. 그 책을 다 읽은 후 제 가슴속에는 큰 파문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작가라는 원대한 포부를 제 마음 깊이 새겨놓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부터 저는 수많은 책들을 찾아 제 스스로의 글과 다른 작가 분들의 글을 비교해 보며, 또 제 스스로의 글을 써 내려가며 아직은 미숙하지만, 작가만이 느끼는 희열 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희열은 정말 무언가에 매료되어 오로지 그것만 바라보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식음을 전폐 하고, 오직 스스로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거는 것처럼, 저 역시, 한 명의 글쟁이로써, 글을 사랑하고, 아끼며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준비가 되어갈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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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리고, 저의 현재 글을 쓰는 작가로써의 목표는, 바로 제 마음을 글에 담는 것 입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의 글 속에서 제 마음 깊은 곳의 아픔과 감동, 그 리고 슬픔과 기쁨까지 모두 느낄 수 있는 그런 글을 써내려 갈 수 있을 때까지, 저 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렇듯, 저의 작가로서의 사명은 제가 느꼈던 그 글의 전율을 다른 사람들이 제가 쓴 글을 통해 동일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 이, 글의 전율은 무언가에 목숨마저 걸 수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전유물입니다. 하 지만, 만약 그 글을 읽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지금 꿈을 읽고 방황하는, 저와 같은 청소년들에게 진정한 자신만의 꿈을 경험하고, 그 꿈을 전심을 다해 사랑하며, 실패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가진 한 명의 훌륭한 위인으로써 성장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제 글이 아직은 많이 미숙해서인지 저는 항상 글을 쓴 후, 제 글들이 너 무나도 부족함에 스스로 절망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제 가슴속에 자리잡 은 그 뜨거운 글의 전율이 쓰러지려는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생기를 불 어넣어주곤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쯤은 자신의 꿈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 꿈이 바뀌었든 아니 면 현재 그대로이든, 그 꿈을 성취한 자신을 상상하며 행복해한 경험이 다들 한번쯤 은 있을 것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이라도 좋습니다. 만약 그 꿈을 향해 달려가 는 길에 장애물이 많아서, 넘어지고 쓰러진다 할지라도, 당신의 마음속에 그 꿈에 대한 전율과 꿈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당신을 굳건히 붙잡아줄 반석이 될 것 입니 다.저 역시 한 명의 청소년으로써, 저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저의 용 기와 비전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글은 제 인생에 있어서 인생의 인도자 같은 존재이며, 동시에 제 삶속 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제가 전율을 느낀 것처럼 자 신의 꿈을 두고 모종의 전율을 느끼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그 전율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변치 않는, 굳건한 반석이 됨으로써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붙잡을 수 있게 되어, 그들이 그들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은 비록 어리고 많은 부분이 미숙하지만, 나중에는 훌륭한 작가로 성장해서 작가 김필원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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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연변과학기술대학총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박 채 린

나의 작은 소망 우선 우리 엄마를 보면 미술을 좋아해서 화가가 꿈이었다고 하신다. 하지만 지금 은 그냥 엄마라는 인생으로 사는 게 아쉽다고 하신다. 나에게 말하길 너가 좋아하 고, 앞으로 네가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종종 말씀하셨고,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공부 는 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셨다. 엄마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꿈 은 있어야 하니까 꿈은 가지라고 하셨다. 막상 중학생이 되니 꿈이 뭔지는 몰라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주, 하늘, 별 이런 천문학 쪽에 약간 관심이 있었다. 내가 7살 땐가 겨울에 아주 추울 때 ‘현암사’라는 출판사에서 천 체 만원경으로 별보는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깜깜한 밤에 갔기에 화성과 달 등 밤에 보이는 행성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어렸을 때 갔기 때문에 행성들이 뭐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이 점이 너무 안타깝다. 별들을 다 보고 별자리에 관한 책과 태양계에 관한 책을 사고 그 작가 분께서 직접 싸인을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 책은 간직하며 시간 이 날 때 조금씩 읽고 있다. 하지만 커가면서 선생님, 디자인 쪽에 관련된 직업 등 다른 직업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문학자가 꿈이라는 게 왜 그랬는 진 모르겠지만 조금 부끄러웠 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봐도 어렸을 때 별보는 체험을 해서 그런지 다른 직업보단 천문학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중국 선양으로 오게 되어 영어, 중국어 공부를 하다 보니 천문학에 관심은 있었지만 많은 체험을 못했던 게 아쉽다. 이제부터라도 기회가 된다면 많은 체험을 하고 싶다. 가끔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주에 가봤으면 좋겠고 우주에 가서 무중력도 한번 체험 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과학시간에 배우던 행성들과 별 그리고 천체를 실제로 봤 으면 좋겠고 한번 달에 가서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도 실제로 보고 싶지만 무섭고 두렵다. 잘못하다간 우리 몸이 부풀어 오르면서 터질 수도 있고 위험하기도 하고 우주미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까봐 더 무섭고 어쩌면 날아다니는 천체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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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주와 지구의 시간이 다르다고 하던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무섭 다. 이러한 것들은 아인슈타인에 대한 만화책에 나온 것들이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 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것들만 빼면 우주에 가는 게 참 재미있을 것 같다. 이런 꿈 들을 이루기 위해서 앞으로는 천문에 관한 것들을 더 공부할 것이고 혹시 너무 어려 워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않고 꼭 열심히 공부해서 천문학자가 되고 싶다. 나의 계획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천문학자에 관심이 있으면 용인에 있는 경희대학 교 천문학과 캠퍼스에 다니고 싶다. 이유는 2011년 여름 방학 때 G-20 해외동포에 뽑혀서 경희대 캠퍼스 기숙사에서 열흘 동안 지내봤고 그동안 경희대 캠퍼스에 있었 기 때문에 익숙할 것 같고 나무가 많아 공기도 좋고 운동장도 크고 그 안에 버스도 다녀서 편리해 호감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도 많이 벌어서 예쁘게 꾸며지고 시설이나 구조가 좋은 집이나 오두막집 같은 곳에서 살고 싶고 무엇보다도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 하지만 그만큼 돈을 못 벌 것 같다. 세계 일주는 아니어도 그냥 딴 나라에 가고 싶다. 특히 유럽 쪽이나 하 와이, 호주, 러시아 아니면 이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남극, 북극에 가서 펭귄들이나 남극 또는 북극에 사는 동물들과 놀거나 사진도 찍어보고 싶다. 그리고 동화책 하이 디에 나오는 알프스 산맥에도 가고 싶다. 거기서 양떼들과 같이 놀아보고도 싶고 아 름다운 경치도 구경해보고 싶다. 또 신선한 공기도 들이마셔 보고 싶고 몽환적인 숲 에도 가보고 싶고 물이 투명하고 예쁜 바다나 수영을 못해도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몸이 둥둥 떠지는 사해에 가보고 싶다. 아니면 잠수함타고 아름다운 바닷속을 탐험 해 보고 싶기도 하다. 이 모든 걸 혼자서는 무섭고 가족과 함께 가보고 싶다. 하지만 나의 미래는 이렇 지가 않을 것 같다. 뭔가 힘들 것 같고 이 많은 것들을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 경험 해보지 못할 것 같지만 좋고 아름다운 곳이나 내가 가고 싶은 곳들을 몇 개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 천문학자는 돈을 많이 못 버는 것 같다. 이 점이 아쉽지만 그래 도 천문학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이라도 있다. 솔직히 천문학자가 뭐하는지는 자 세히는 모른다. 지금까지 되고 싶다고 말만했지 정작 뭐하는 직업인지 찾아보지도 못 했다. 너무 과분한 직업이면 잘 해 나가지도 못할 텐데 빨리 찾아봐야 될 것 같다. 앞으로는 계획을 세워 활용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그래서 공부 때문에 힘들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자신이 없다. 내가 과연 정말 천문학자가 되어 연구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많은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 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그 일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중요한건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돈도 많이 벌었으면 좋 겠고, 내가 가고 싶은 모든 곳에 갈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꿈과 나의 미래를 위해 꼭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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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연변과학기술대학총장상 선양 주말 한글학교 중3 박 예 명

나의 꿈은 의사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저의 꿈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혹시 예전에 방송되었던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프로그램을 아십니까? 저의 꿈은 우연히 본 이 다큐멘터리로 인하여 저의 꿈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프로그램은 예능에 비하면 너무나 재미도 없고 지루한 프로그램이 라는 생각 때문에 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부르시 더니 이 프로그램을 같이 보자고 하셨습니다. 어른들께서 보시는 이런 프로그램은 너무나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냥 무심 코 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본 이 아프리카의 눈물은 어느 예능 프로그램보다 흥미 진지하며 제가 모르는 나라의 현실을 알게 해준 충격적인 프로였습니다. 제가 본 장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지금 그 곳의 아이들은 한 끼 해 결하는 것이 꿈 일 정도로 매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약품조차 없고, 병원은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가고 있습니 다. 그것을 본 후,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도와야겠다. 어떻게 도와야 저 아이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을 바로 치료해 줄 수 있는 의사! 바로 의사가 되어야 겠다 다짐 했습니다. 의료 기술로 치료해 주는 의사도 되고 싶지만 더 나아가 여기에서 열심히 돈을 모 아서 돈을 모으는 이유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들을 위해서 모으고 싶습니다. 그래서 훗날에 그곳에서 의료봉사도 하고, 병원이 없는 그 곳에 제 손으 로 아름다운 병원을 짓고 싶습니다. 생명이 죽어가는 그곳을 새 생명의 장소로 만들 고 싶습니다. 같은 나이의 친구들과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이 질병에 고통 당하면서도 제때 치료 받지도 못하고 병원에 가려면 이틀은 꼬박 걸어야 작은 보건소에서 겨우 진찰 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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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습니다. 그나마 말라리아 약이 남아 있는 경우는 치료 받을 수 있지만 약이 모 자라 떨어지거나 하면 아이는 치료도 받지 못하고 다시 이틀을 꼬박 걸어 자기 마을 로 다시 걸어갑니다. 먼 길을 걸어왔음에도 약이 모자라 치료도 받지 못하고 너무 큰 병이라 손쓸 도리가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그 들의 뒷모습을 볼 때 내가 지 은 병원에서는 약이 모자라 그냥 돌려보내진 말아야지 손쓸 도리가 없다고 그냥 집 으로 돌려보내진 말아야지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마음이 생기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기독교 인 입니다. 이 지구촌에는 귀한 선교사님들이 각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계십니다. 저는 의사인 동시에 그분들을 도와서 그분들의 힘이 되고, 조력자가 되어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정말로 하 나님의 말씀으로 부흥되는데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것이 제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저와 같이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직업이지, 타인의 존경과 돈을 구하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학생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저는 꼭 사명감이 투철한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직 어리지만, 이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키워나가고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꼭 저의 이 아름다운 꿈을 응원해주시 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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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서울대총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윤 지 현

DREAMING CHILD 모두가 그랬듯이 어릴 적부터 나는 꿈이 자주 변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초 등학교 시절엔 선생님, 가수, 뮤지컬 배우 등이 되고 싶었다. 그때 그 직업들의 공 통점은 ‘인기’였던 것 같다. 나는 예전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4학년 때쯤 꿈이 뮤지컬배우 였었고 또 가수가 꿈 이였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연극을 해보다보니 노래보단 연극이나 영화, 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현재 꿈은 영화감독이다. 처음엔 단순히 연기 쪽에 관심이 있는데 뭔가 배우라는 직업은 아닌 것 같다, 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은 영화감독이란 꿈은 내겐 너무나도 멋있고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계속 품을수록 영화감독이란 꿈은 더욱더 매력 있는 것 이었다. 영화란 것 자체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고 장르도 다양하며 자유롭고 메시지도 담 을 수 있는 정말 대단한 매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고 교훈을 얻거나 느낌을 얻고 재미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을 되돌아볼 수 도 있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나는 중앙대학교 영상영화과에 지원하고 싶다. 이유는 일단 중앙대학교의 영상영화과 자체가 유명하고 영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열심히 배우고 싶다. 기술 같은 것 도 배 우고 싶지만 내 나름대로의 영화를 찾았으면 좋겠다. 무엇을 찍을 것 인지에 대해.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나서 ‘다른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김기덕 감독처럼 한국 영화에선 잘 그리지 않는 영화들, 더 다양한 영화의 세계를 말이다. 그 영화가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장르인지,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하게 영화를 그리고 싶진 않다. 내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어떤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질진 모르겠지만 내영화속의 현실이 참혹하거나 아프고 악한 것이 아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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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망이 있다. 또 너무 종교적인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영화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싶다. 내가 기독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을 하고 싶다. 앞서 말한 듯 예전엔 인기를 목적으로 꿈을 정했다면 이제는 비전을 목적으로 꿈을 정하고 싶다. 나중에 나의 꿈이 바뀔 수 도 있고 이 꿈이 흐지부지 해질 수 도 있겠지만 어느 직업이라도 나는 쓰임 받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 물론 영화감독이 되는 길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꿈 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끝까지 노력해서 꼭 꿈을 이루고 싶다. 그 꿈을 위해 지 금부터노력하고 나아가고 싶다. 물론 영화감독이 되고나서도 어려움은 찾아올 것 이 라 생각한다. 얼마나 힘들진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일어서서 슬럼프를 이겨내고 싶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래에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어느 자리에 있을지 그리고 내 주위 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 언니와 나는, 그리고 우리가족은 나중에 우리가 집을 짓고 그곳에서 다 같이 살기로 했다. 또 주위에는 서로 친한 가족들과 작은 마을을 이루며 살고 싶다고 하였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좋은 집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꿈은 나의 수많은 꿈들 중에서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바라는 미래이겠지만 나는 화목한 가정 속에서 살고 싶다. 간 간히 들려오는 소식 중에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는 등 그런 일의 주인공은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할머니가 되서도 서로의지하고 놀고 웃는 친구가 있길 바란다. 또 60세가 되면 남편과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해외든 국내든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 만 그때는 몸이 젊지는 않을 것이기에 조심하며 천천히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여행을 다니며 만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기부도하고 아프리카의 어린이 들도 도와주며 그동안 번 돈들을 좋은 곳에 쓰고 싶다. 아직 직접 아프리카나 빈민 국가에 가서 봉사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나중에 그런 용기가난다면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또 만약 먼 훗날 내가 이글을 보고 있다면 그런 나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이글을 보고 있을 미래의 지현이 에게. 지현아 안녕? 난 15살의 지현이야. 지금 네 모습은 어떨까 참 많이 궁금해. 어릴 적 꿈인 영화감독이란 꿈을 이루었는지, 또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지, 어떤 새 로운 꿈을 꾸고 있는지 말이야.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만약 그때 네가 여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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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유로 지쳐있다면 이 글을 보고 힘을 내줬으면 하기 때문이야! 알잖아 어느 때라 도 꿈만은 잃지 말라던 이야기들을. 그러니까 좀 더 힘내고 이 글을 보고 다시 힘을 얻었으면 좋겠어. 아 물론 그때에 지쳐있지 않다면 더 좋고! 그리고 그때는 주변사 람들을 더 챙기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해. 예를 들 어 촬영장 분위기를 띄운다거나 늘 웃는 그런 사람 말이야! 참 신앙도 잘 지키고 있 지? 다른 사람들처럼 중간에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일은 정말 안 생겼으면 좋겠어. 꿈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이고 꿈을 이루려는 이유도 하나님이이잖아. 그리고 자만 하지 마, 늘 겸손하고 노력하는 윤 지현이 되자! 그때는 멋진 내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어! 공책에 적어둔 Dream list에 있는 꿈들 이룰 수 있는데 까지 이뤄줘! 만약 너의 꿈이 바뀐다 해도 그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포기하지 마. 그리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에 집중하는 그런 네가 되길 바래. 늘 힘내고 응원할게! 안녕!

15살의 지현이가나는 이곳에 쓴 꿈들보다 더 많은 꿈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꿈들이 언젠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꿈을 꾸고 싶다. 그리고 그 꿈들 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한발 한발 나아가고 싶다. 물론 넘어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훌훌 털어내고 잘 일어났으면 좋겠다. 몇 십 년 후에 이글을 보며 웃 고 있을 나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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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수원시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김 유 빈

나의 길 사람들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저마다 다 각자의 꿈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 꿈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과정 중 많은 사람들이 노력 큰 대가를 원 한다. 또 자신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꿈을 점점 낮추고 작게 만든다. 지금 현재 대부분의 청소년들의 미래가 학교 성적으로 결정된다. 내 생각에도 학 교 성적이 참 많은 것을 나타내고 공부를 하는 과정이 우리를 더욱 성장하게 만든다 는 것을 알지만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나 과할 정도로 교육과 성적에 집 착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신의 꿈과 밝은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선 청소년에 게 시험만을 위한 공부가 아닌 살아가면서 자신의 꿈을 위한 정말로 필요한 공부를 하게하고 마음껏 책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눈부신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일 공부를 하면서 내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 하고 있다. 놀고 싶 기도 하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나이지만 이미 나는 공부라는 길을 걷고 또 내 미래를 향해 차근차근 한 발 짝 식 그 길을 걸어 가고 있기에 다른 유혹 들을 이겨 낼 수 있는 것 같다. 어른들 은 내게 어느 대학에 가고 싶냐 고 물어 본다. 그럴 때 마다 난 ‘아직 잘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 한다. 난 정말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떤 대학에 맞을지 어 떤 대학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 뭐가 될 거냐고 내게 물어 볼 때도 자신 있게 대답 한 적이 없다. 내가 대답할 기회가 올 때 마다 이렇게 의기소침해서야 어떻게 꿈을 이루겠냐고 내 자신을 타이르지만 아직 까진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이 정말 내가 꿈 꾸던 그런 미래를 가득 채워줄지 아니면 정말 내게 즐거움으로 다가 올지 잘 모르지 만 지금 나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해준 것은 패션 에디터라는 꿈이 다. 내가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를 잘 하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 안 타깝다. 공부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조건으로 다가 오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깨달았을 때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점수를 얻었을 때 나는 그 점수를 지키기 위해 그 점수를 넘기 위해 항상 아등바등 노력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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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이것도 잘해야 되고 저것도 잘해야 된다. 이것도 내 것 이면 좋겠고 저것까지도 내 것이면 좋겠다. 그래서 인지 난 매사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후회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행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너무 많이 부족하다.

내 행동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내가 꿈꾸던 결과가 나랑 너무나도

때 나는 ‘내가 너무 척만 했나?’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내 미래의 내 꿈을 설계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린 것만 같은데 다들 내게 ‘곧 어른이네?’ 라고 말한다. 그 럴때 마다 내 꿈과 미래에 준비가 덜된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갈 수도, 가만히 앉아서 움츠러들 수도 없는 불안. 이게 바로 내 마음을 누 르는 감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말은 하나 같이 다른데 난 어떤 길을 걸어서 꿈을 이뤄야 모르겠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께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라고 하셨으나 나 혼자만의 길은 너무너무 외롭고 무서울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조금씩 천천히 나만의 길을 걷고 있 지만 가끔씩 길을 잃을 때면 너무 너무 힘이 든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꿈은 패션잡지 회사를 세우는 것이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는데 일단 내 계획은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영어를 마스터하고

hsk 6급

도 따서 내 경쟁력을 높일 계획이다. 대학생이 되면 패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한국 에서 대학생활을 하다가 미국 대학에 편입하거나 이탈리아에서 잠깐 공부를 할 예정 이다. 그 후 코디로 일하면서 바닥을 쌓고 에디터로 활동하면서 정말 유용하고 좋은 잡지를 독자에게 제공할 것이다. 마지막엔 보그(Vogue)처럼 사랑받는 잡지를 만드 는 회사를 세우고 싶다. 내가 행복하게 미래를 계획한 것처럼 내 꿈이 나에게 다가 오도록 정말 노력해야 겠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 힘든 일도 많이 겪을 나에게 난 이러한 편지를 써서 날 응원하고 싶다. 더욱더 빛날 유빈이에게 유빈아 안녕! 난 아직 꿈이 많은 열다섯 살 욕심 많은 십대 유빈이야 넌 니 꿈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지? 여태까지 정말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 할 꺼니깐 힘내! 넌 어렸을 때부터 사랑받는 아이였고 널 사랑하고 널 응원하는 사람은 많으니깐 조 금만 더 분발하자. 그리고 내가 태어남으로 인해 작게는 한 사람의 인생 크게는 사 회를 조금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 알겠지? 항상 사랑받는 사람이 되길 바랄게 사실 나도 요즘 힘들어. 공부는 해야 되는데 숙 제만 하면 시간은 다 지나가고 또 웃기지만 요즘 과식을 해서 얼굴이 터질듯해 지금 은 훌쩍 커버린 너에겐 아마 웃긴 얘기겠지만 난 정말 고민이란다. 꼭 내가 어렸을 때 피아노 치는 게 어려워서 엉엉 울어 버렸던 것처럼 넌 날 그렇게 생각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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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고민과 걱정은 배로 늘어 버리는 것 같다. 난 벌써 오지도 않은

래가 무섭다 어떻게 하지? 힘내고 꼭 열다섯 살 유빈이한테 자랑스러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진심으로 바랄게. -고민이 많은 열다섯 살 유빈이가 나는 절대 엄마가 나의 가능성을 봐준 사랑 아빠가 나를 믿고 이끌어준 믿음을 헛 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내 이름 金愈彬 더욱더 빛나라는 아빠의 바램을 저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항상 내 옆에서 내편이 돼주는 내 동생 수빈이, 엄마, 아빠가 있기에 앞으로도 내 삶은 쭉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꿈을 위해서 내 미래를 위해 내 이름을 위해서라도 나는 앞으로 남은 길을 보 람차게 또 빛나게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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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한민족글짓기대회장상 ISQ(MTI) 9학년 김 호 영

국제적인 희망 전도사 어느덧 이십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난 이십년을 돌아볼 때 나는 충분히 후회없 이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빈곤함으로 인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 을 내밀었고 세계 각지의 지쳐 희망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속 에 ‘희망’이란 단어를 심어주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앞으로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계각지의 학생들, 지금까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도움을 주었던 나의 선 생님,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아내를 위해서 오늘도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아주 어릴 적부터 중국이란 외지에서 여러 가지 힘든 환경을 극복해 나가야 했던 나는 어른들조차도 겪어보지 못했던 숱한 연단들을 피눈물과 함께 겪어야만 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이겨내야만 했던 그 힘든 환경은 나에게 적응력이란 귀한 인 생의 선물을 가져다주었고 열심히 노력한 나는 결국 외교관이 되어 대한민국 역사에 한 줄기 빛이 되는 수많은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지금 현재, 나는 대한민국의 외무 장관이 되었고 세계최고 강대국인 한국과 중국의 공동 경제발전과

더 나아가 전세

계 국가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있다. 현재까지 내가 성취했던 가장 영향력 있는 업적을 꼽으라면 아마도 북한과의 성공 적인 타협으로 통일을 이뤄냈던 게 아닐까 싶다.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이 쿠데타로 무너지고 있을 시기, 나는 대한민국의 외무장관으로서 북한에게 최악의 경우, 최적 의 필요와 국제적인 보안을 보장했다. 길고 지루했던 타협의 결과, 북한의 지도자는 통일을 합의했다. 뉴스로 그 장면이 발표되는 순간, 대한민국의 오천만 국민, 전세계 의 대한민국 재외교포와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자유진영의 시민들은 환호했다.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한반도기를 흔들며 한 목소리로 통일가를 부르며 반세기 가 넘도록 억압됐던 통일의 기쁨을 서로의 가슴속에 새겼다. 대한민국의 외무장관으 로서, 이 장면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선 이미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결과, 북한의 굶주리던 수많은 농민들은 구원의 손길을 얻었고 한국 또한 북측에 매장되어 있던 어마어마한 자원을 수출하며 양측모두 최상의 조합을 이룬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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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취했던 또 다른 영향력 있던 업적을 꼽자면 아마 세계최고 강대국인 중국과 의 자유로운 무역활동일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이후 다급해진 중국은 하루하루 강대 국이 되어가는 한국을 보고 하루빨리 자유무역을 시작해야겠다고 느꼈을 것이다. 결 국 긴 타협 끝에 육지와 바다를 통한 자유로운 무역무대가 만들어졌고 양국은 한층 더 자유로워진 무역활동으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시민들의 삶 이 향상됨으로 더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업적 또한 내가 어릴 적 에 중국이란 외지에서 피눈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항상 발전해 왔고,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역사 속에서 꾸준 히 연단들을 극복해 왔다. 그리고 세계 최고 강대국이 된 2030년 지금까지, 역사속 에서 그 진가를 꾸준히 증명해 왔다. 나의 비젼은 우리나라를 세계 많은 나라들 속 에서 꾸준히 발전시키고 우리의 문화를 전세계화 시키는 것에 계속 힘쓰고 싶다. 뿐 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층을 정신적, 문화적으로 잘 교육시켜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도록 해야겠다. 이 일을 계속 해 나갈 때마다, 나는 더 나은 세 대를 꿈꾸며 힘들 때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끝까지 버텨 나간다. 여태까지 많은 일들을 성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산 더미다. 일단 동아시아에도 유럽의 EU 못지않은 경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단체설 립이 한창이다. 이 단체의 설립으로 세계에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입지를 확실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굶주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널려있고 문화적 또는 종교적 박해로 어두운 현실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다른 나라들과의 적절한 소통이 필요한 것을 느낀다. 서로간의 문화차이를 이해하고 모두가 진정 사랑으로 감싸줄 때야 비로소 이 세계는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외무장관으로서 나는 국가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주요적인 문 제들을 해결하는데 평생을 바치겠다. 국제적인 외교활동 이외에도, 나는 우리나라의 힘들어하는 많은 청소년들을 돕는 데도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많은 재능있는 청년들이 힘든 가정환경, 열악한 생 활환경과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미래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이 루는 것을 포기한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본 나는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 다. 그래서 나는 틈이 있을 때마다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강연을 한다. 청소년들이 국제정세를 알아가고 또 희망을 얻는 것을 보고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힘과 희망을 얻는다. 수많은 힘든 연단의 시간들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청 소년들, 하지만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나도 똑같이 그 과정을 겪었고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고. 마치 쇠검이 날카로워지기 전에 뜨거운 화로에 던져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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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북도지사상 심양한국국제학교 8학년 박 희 원

그 날을 꿈꾸며…… 처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초등학교 3학년 때 쯤 알게 되었다. 태어나서 줄곧 중국에서 생활한 나는 가끔 나도 모르는 정체성에 빠지곤 했다. 아 빠의 주재원 생활로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가족과 함께 시작한 중국 생활 벌써 그 렇게 15년…… 8학년이 되었다. 앞으로 15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엄마가 원하는 한의사 혹은 아빠가 원하는 치과 의사? 그렇게 나는 가끔 나와 상관없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꿈을 중국의 대륙에서 펼쳐보고 싶다. 급성장 하고 있는 대륙, 13억 인구의 큰 시장이 향후 15년 후에는 우리의 큰 무대가 될 거라 믿는다. 중국은 과연 15년 후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나의 꿈만큼이나 커져 있을 것 같은 중국. 그 곳에 있을 나를 그려본다. 처음 중국의 심양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양을 보고 중국을 판단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심양은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나 역시 2년 전 아빠를 따라 이동한 중국의 남동쪽 상하이 생활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정말 그곳은 내가 알고 있는 중국이 아니었다. 170년 전 어촌에 불과했던 작은 도시.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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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맨하탄에 버금가는 화려함과 역동성을 지닌 상하이는 중국 4대 직할시 중 하나로 현재 북경보다 경제적 중요도가 높다고 한다. 천지개벽을 이루어낸 상하이의 마천루 사이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황푸강이 와이탄과 푸동을 동서로 가르지르며 최첨단 미래와 천년 역사의 조화를 이루며 동방의 빛으로 약진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느끼지 않고는 판단할 수 없는 또 다른 중국이었다. 나는 국제 무역의 주역이 되고 싶다. 아빠는 가끔 중국의 역사 그리고 현대사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 하시곤 한다. 1992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은 나라. 중국의 역사 속 조선 왕조 500년과의 관계.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대륙 그 속에 작지만 큰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15년 후에는 나의 꿈을 펼치고 있을 이 땅,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 대표 선수는 아니지만 내 가슴속 태극기는 15년 후 중국을 무대로 멋지게 휘날리고 있을 것이다. 그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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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대구경북한중교류협회중국지회장상 선양한글학교 중학교 2학년 오 송 주

나의 꿈 ‘꿈’이라는 단어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정말 친해져야 하는 단어다. 어렸을 때 는 거창한 꿈, 청소년 때는 현실적인 꿈,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꿈을 찾고 갈망해야 한다. 청소년기에 찾은 나의 꿈이 나의 미래를 거의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그 ‘꿈’이란 단어와 평생 친구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리 ‘현실’이 아닌 ‘꿈’이라지만 가끔은 나의 꿈이 현실보다 내 숨통을 더 조이기도 한다. 몇 주 전, 주말 한글학교에서 “나의 꿈 말하기 대회”가 있었다. 나의 꿈에 대해 생각해 보던 나는, 나를 포함한 내 주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꿈이 없다고 하기에 솔 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사람들 앞에 서서 “여러분, 저는 꿈이 없습니다.”라고 크고 당당하게 외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차례 전에 발표한 애들은 모두 다 자신 만의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강단에 올라서자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한심했다. 나보다 어 린 친구들도 자신의 꿈을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저 ‘꿈이 없는 아이’로 보이기 싫었다. 결국 생에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큰 실 수를 했고, 다시 한 번 발표할 때 결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번 말하기 대회는 나를 내 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도 와줬다. 사실 나는 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저 마음속 깊이 들어가면 꿈 한 두 개쯤 은 분명히 있을 것 이다. 하지만 그 꿈들은 현실적이지도 아닌, 비현실적이지도 아 닌 애매한 꿈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비판이나 비웃음 받을 까봐 꽁꽁 숨겨둔 꿈 들이다. 다른 말로, 내가 정말로 찾던 꿈들이다. 하지만 내가 찾은 나의 진정한 친 구가 좌절되는 것을 보기가 두려워 세상에 소개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예전에는 나의 이 소중한 꿈을 원망했었다. 왜 나의 꿈은 평범한 공무원이나 회사 원이 아닌 걸까, 나는 왜 이런 꿈을 가져서 부모님과 나를 실망시켜야 할까. 그렇지 만 이런 생각들은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 동안 아무리 이상적인 꿈을 찾으려고 해도 내 진정한 꿈을 져버릴 수 없었다. 결국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자리로 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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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런 나를 보며 답답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이다. 네가 정말로 원하는데 왜 세상에 소리치지 못하냐고 나에게 소리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것 이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우려하는 것은 따로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진정한 친구’는 충 분히 현실적이다. 세상에 잘 소개된다면 꿈에서 현실로 상승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 다. 내가 정말로 우려하는 것은…… 난 그 ‘진정한 친구’와 평생 같이하며 사랑할 자신이 없다. 나는 예전까지만 해도 꿈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하는 애였다. 한 사건이 터질 때마 다 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지금 내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생각 하면 할수록 계속 내가 말하는 그 ‘진정한 친구’가 그저 다른 꿈들 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이는 아니었는지 걱정이 된다. 계속 이런 생각이 들수록 내 진정한 친구가 떠나가지 못하게 자물쇠만 더 채우고 결국은 내 마음속 깊이, 그 누 구도 풀 수 없는 귀중한 애물단지가 되고 만다. 내가 이럴수록 시간은 내가 그 수많 은 자물쇠들을 다시 다 푸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서도 계속 망설이게만 된다. 나도 이런 나를 보면 답답하다. 그냥 괜찮으니까 세상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인생은 단 한번만 살기에, 내 인생을 좌우 할 지도를 선택할 때 “그냥 마음대로” 하면 누구든 정말로 몹시 불안할 것 이다. 이럴 때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싶지만 조언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 다. 어른들에게서 조언을 듣자면 내 소중한 꿈이 들통나고 핀잔만 받을 까봐 두렵 다. 나는 이런 아이들이 나 외에 더 많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로 돕고 싶지만 나도 해결 방법을 모르니 서로를 다독일 방법밖 에 없다. 비록 훗날에 내가 내 ‘진정한 꿈’의 자물쇠를 다 풀고 내 품 밖으로 데리고 나 왔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아이들을 돕고 싶다. 그 아이들의 고민을 듣고,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아이들에게 정말로 좋은 충고를 해주고 싶 다. 내 이야기를 들려줄 때,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값 지는지 말해주고 싶다. 아무 리 내가 나의 진정한 꿈을 실현하지 못했더라도, 좌절하지 말라고, 내가 노력하면 점점 현실이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난 지금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 지만, 그 아이들에겐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과, 두려움은 다른 아이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내가 내 진정한 꿈의 자물쇠를 다 풀지 못해 세상과 대면하지 못했더라도 후회 하거나 속상해 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꿈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내 소중한 꿈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희망이었고 기쁨이었고, 말 그대로 소중했고 진심이었다. 그런 진심이 담겨있는 꿈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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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경필국회의원상 청도국기외국어학교 11학년 부 원 식

나의 꿈 나의 미래 저는 어려서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호주, 3 살까지는 제주도, 4살부터는 비행기를 타고 동남아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인도네 시아, 베트남, 스리랑카, 싱가폴 등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입니다. 아직도 필름 처럼 장면, 장면이 다 기억이 날 정도로 부모님께서는 제가 많은 경험을 하도록 신 경 써주셨습니다. 5살 때 한국에 돌아와 유치원에 다녔는데 많은 나라를 돌아다닌 탓에 당시에 한글이 아닌 소련말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교육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는 저를 학원에 보내시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고, 공교육을 믿고 학생스스로가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만 수면시간, 성당 가는 것, 지각, 봉사활 동, 거짓말 하는 것 등 행동에 있어서 많은 꾸중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교육관 때문에 피아노, 태권도, 수영을 제외한 공부와 관련된 학 원을 다녀본 적이 없고, 항상 수업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들었고, 혼자 힘으 로 공부했지만 늘 반에서 공부도 잘하는 편에 속했습니다. 또, 초등학교 때 어머니 께서 사주셨던 자장면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초등학교 때 저희 반에 저보다 한 살 많은 정신지체친구가 있었는데,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아이들도 따돌리고, 저도 같이 있기 싫어서 어머니께 물어보니 “다른 아이들보다 생각주머니가 작을 뿐이란 다. 다른 것은 모두 너와 같단다.” 라고 말씀해주시면서 아픈 친구니 잘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리기 싫었고 그 아이에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계속 옆에서 놀아주고, 같이 그림도 그리고 어디 갈 때도 잘 챙겨주었습니다. 학기 끝날 때쯤에는 그 친구를 위한 전담 선생님이 와서 잘 챙겨주지는 못했지만, 아무 이유 없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회만 되면 챙겨주려고 노력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저를 계속 봉사 활동에 보내셨는데 어릴 땐 ‘왜 가야하지?’ 라는 생각뿐이었지만 지금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갈 정도로 의미를 찾았습니다. 부모님은 저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당시엔 이 말의 뜻을 몰랐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부모님이 저에게 바라는 모습이 무엇인지 알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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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되, 자만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면 사는 것! 그리고 정직하게 자기가 속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이것이 부모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어릴 때 ‘블랙홀’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우주가 너무나도 신기한 곳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무시되는 곳도 있구나, 우리의 인지를 뛰 어넘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도 많이 존재하는 구나’ 새로운 것들을 배울 때 마다 저는 감탄했습니다. 하나의 지식으로 하나의 이름으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설 명하고 가능케 하는 지식들이 놀라웠습니다. 마음속으로 ‘나도 저런 훌륭한 법칙을 찾아내서 간직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수학자가 되 고 싶었습니다. 제가 중국학교를 다니면서 방황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한참 방황하던 와중에 책을 읽다가 ‘당신은 당신의 삶에 만족했다고 자부할 수가 있는가?’ 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를 다니면서 모든 일에 싫증을 느끼고 있을 때였는데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매일매일 허무하게 보내면서 허황된 꿈을 쫒다가 내일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 스 스로가 나에게 너무 무책임한 것은 아닐까? 나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는 것 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삶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 너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국에 와서 이런 저런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유학 생활 에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런 친구들과 헤어져야 되는 상황이 올 때마 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중국 선생님들은 말 못하는 한국 학생들을 단지 골칫거리 취 급만 했는데 저는 이러한 중국 선생님들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선생 님들에게 잘 보이려고 항상 열심히 공부하는 척을 했고, 친구들과는 그 아이들의 노 는 방식을 싫어하고 재미없는데도 억지로 같이 놀고 같이 웃으면서 지냈습니다. 그 러면서 제 자신과 저희 가족에게 점점 소홀해져 갔습니다. 중2 때 저는 중국 학교에서 꽤나 유명했습니다. 제가 피아노 치는 사진이 학교 정 문에도 붙어 있었고 한국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수학, 영어, 국어, 정치 모둠조장을 했으면 수업시간에도 열심히 발표했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어설픈 사투리로 친구 들을 웃겨주고, 반에서 상장도 가장 많이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중국 현지에 100% 적응 했지만 저희 학교에 있는 거의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은 한국인끼 리만 놀고, 중국 애들과는 툭하면 싸우고 술과 담배에 빠져서 방황하는 친구들의 많 았습니다. 저는 그런 친구들을 도와주기는커녕 놀 때만 같이 놀아주고, 친구들이 적응하는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중3 쯤 되니까 한국 친구들이 거의 모두 학교를 떠 나게 되었는데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중국 선생님, 중국 아이들을 대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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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민족 아이들을 도와주고 올바른 길로 가게끔 도와주지 못 했을까?”하고 많이 후회했습니다. 공부할 땐 중국 친구들과, 놀 때는 한국친구들과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을 열심히 들으면서, 집에서는 먹고, 자고, 놀기만 했습니다. 부모님께는 대들고 친구 어머님들께는 무척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모든 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 동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저를 위한, 진짜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 했는데 이러한 위태로운 일상들은 저를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수학에 몰두하도록 만 들었습니다. 현실의 많은 생각들을 수학을 푸는 동안은 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수학 에 너무 빠져서 밖에서는 여전히 좋은 학생이었지만, 집에서는 수학문제를 푸느라 가족들과 대화를 하지 않았고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가족과 내 자신을 소홀히 여겼 고 내가 아닌 주위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아! 내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구나!” 느꼈고 그 구절을 제 좌우명으로 삼고 만족할 만한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지 금은 제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좌우명> 으로 인해서 내가 만족할 만한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을 건 수학 논문을 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수학가가 되는 것, 그것이 바 로 저의 꿈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정 저를 위한 삶이고, 이래야만 제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설령 제 이론이 허황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제 이론을 무시하고 욕해도 저는 제가 했던 모든 것에 대해 만족 할 수 있습니다. 단 지, 논문을 낼 수 있는 용기와 그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그 자세에 제 자신이 만족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인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성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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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경필국회의원상 심양 사범대학교 부속 예술고등학교 3학년 박 찬 근

꿈은 이루어진다 “재미가 붙으면 열정이 생기고 열정이 생기면 잘하게 된다” 얼마 전에 읽은 책 중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반기 문 유엔사무총장은 UN에서 동양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유엔사무총장이 되신 분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언젠가 세계대통령이 되리라는 꿈을 꾸면서 자신의 스팩을 쌓아서 기회를 만들어 갔다. 결국 그는 기본에 충실한 성품을 갖추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마 침내 전세계의 대통령이 되었고, 지구 위의 산재된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진정성을 가지고 해결해 보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빈곤국가 문제와 기후 환경변화 문제에 관 해 아주 큰 성과를 만들어 세계인들로 하여금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러한 반기문총장님의 생애설계를 보면서 내가 잘하는 특기를 살려 꿈을 이루 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나에게는 세 가지의 꿈이 있고, 그 꿈을 향해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 첫 번째 꿈은 내가 만든 멋진 드럼(Drum)을 전세계로 널리 알려 좋은 음악을 꿈 꾸는 많은 음악인들이 나의 드럼으로 영혼을 담은 예술과 음악적 소양을 분출시키게 하는 벤처기업가이다. 나 자신만의 노하우나 기술을 창안하여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 어 널리 펴서 많은 음악인을 매료시키고 또한 수출로 나라의 경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나는 드럼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치기 시작했다. 음 악을 너무 좋아해서 키타, 일렉, 피아노도 독학으로 마스터 하였다. 고등학교는 중 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명한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중국전통악기인 ‘얼후’를 전공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나는 대로 작곡, 편곡도 하고 있다.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심벌을 한 장 만들어내었다. 버리는 심벌을 가져다가 갖가지 도구와 온갖 방법을 총 동원하여 힘겹게 만들어낸 심벌이었다. 주변 친구들 과 선배님들의 반응도 좋았다. 나의 꿈은 이미 정해졌지만, 당시 나는 어려서 벤처 기업이라는 것도 몰랐고 이 다음에 커서 나만의 드럼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 라는 막연한 꿈만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몸과 마음이 성숙 해질 때쯤에 너무나도 높은 벽에 부딪치게 되었 다. 인터넷에서 나와 같이 자신만의 드럼을 만들고 연주하는 동영상을 찾게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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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 영상을 보는 순간 아주 큰 충격적인 느낌을 받았다. 동영상에 연주되어 나오는 드럼소리가 너무나도 좋았던 것이었다. 말로 표현 못할 만큼의 훌륭한 소리 였다. 게다가 너무나도 많은 드럼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수많은 회 사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이겨낼 수 있는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어 두운 마음이 든 것이었다. 영상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우물 안의 개구리’ 라는 생각 밖에 나질 않았다. 자 신감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다시 열정 을 불 러왔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부딪혀 보지도 않고 포기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유약한 모습인가, 반기문 총장이 하신 말씀처럼 “재미가 붙으 면 열정이 생기고 열정이 생기면 잘하게 된다” 는 마음으로 오히려 드럼에 대해 전 문적인 지식을 배워야겠다는 의욕으로 더욱 더 전문서적과 사이트를 찾아가며 지혜 를 얻고 있다. 사라졌던 자신감도 다시 살아나고 더욱더 좋은 악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해본다. 그것들을 모두 다 이뤄내기 위해서 포기라는 생각의 낭비를 버리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 나의 꿈과 목표를 이뤄 낼 것이다. 두 번째 꿈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든 드럼을 무상 으로 나눠주고 그들을 위해 든든한 후원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런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교회목사님이 드럼을 구입하기 위해 적혀있는 가격을 보고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본 후이다. 나는 알고 있다, 목사님이 왜 한숨을 쉬는지를... 가지고 있는 예 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악기는 필요하였던 것이다. 목사님의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 때 다짐했다 기업인이 되면 반드시 무상으로 어려운 교회를 위해 드럼을 나눠주겠다 는 것을…. 교회뿐 만이 아니라 가난한 환경 속에서 음악 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후 원자가 되어주고 싶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음악활동을 하면 악기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 더욱 그들을 후원하고 싶고 아름다운 음악 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가기를 소망하면서 그들을 지지해 주기 위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온 힘을 다하며 달려갈 것이다. 세 번째 꿈은 전세계에서 선교하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 선교센터를 세우고 싶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이나 호주 등 선진국에는 선교센터가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 는 중국에 선교센터를 세우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중국에서 자란 내가 이곳에서 만 난 선교사분들이 대부분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분들을 위해 선교센터를 세우고자 한다. 센터의 이름을 ‘힐링캠프(Healing Camp)’라 짓고 싶다. 지친 몸 이 회복되는 장소, 메마른 영혼에 생기를 불어주는 장소가 되고 싶다. 선교의 꿈을 향한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곳, 물론 이용료는 없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물적 으로 필요를 요하는 사람들을 향해 빛이 되어주고 힘을 실어주는 꿈을 향하여 달려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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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꿈은 물론 천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막연한 희망사항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실천해 나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겠다. 시간도 아껴 틈틈이 실력을 쌓아가며, 새로 운 정보를 놓치지 말고 적용하고 활용 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이런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키워주신 부모님과 주위의 분들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 중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시작한 외롭고 힘든 유학생활을 보내면서 방황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이’꿈’이 나를 잡아주 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음악을 하는 것이 재미있다. 재미가 있으면 열정은 물론, 잘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그날을 위 해 끝까지 노력한다면 결과는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한 번 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명언을 마음속에 새기고 싶다. “재미가 붙으면 열정이 생 기고 열정이 생기면 잘하게 된다”는 말, 머지않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드럼기업가, 그리고 존경 받는 선교사라고 닉네임이 붙은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많은 어 려운 사람들에게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다가서 있는 가치로운 삶을 엮어가는 나의 모습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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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서울시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김 건 기

나의 꿈, 인류의 꿈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하며 진화해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언어로 구체 적인 의사소통을 하며 정밀한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기존의 모든 학문들을 배우고 또 새롭게 창조하면서 고도로 발전한, 그리고 복잡한 사회를 만들었다. 인류를 개인 으로 본다면 그 개인의 능력은 생태계의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을 찾기 힘들다. 인간은 말처럼 빠르지도 않고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 런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은 야생에 세계에서 가장 잡아먹히기 쉬운 맹수들의 먹잇감 의 불과한 생명체이다. 하지만 인류는 다른 모든 동식물이 가지지 못한 걸 가졌는 데, 그것은 바로 꿈이다. 동물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힘들면 쉰다. 사람도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이기에 똑같이 배고플 땐 먹어야 되고 졸릴 때 자야 된다. 그러 나 사람은 보다 큰 뜻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 과 다르다. 사람은 대의를 위해서 단식을 하기도 하고 더 많은 것을 배워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졸음, 피곤과 싸우면서 공부하기도 한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생물학적인 욕구를 이겨내 사람다운 삶을 영유하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꿈이 다.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목표를 세우며 꿈을 꾼다.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통째로 바치기도 한다. 지금 수많은 사람 들이 꾸는, 그리고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꿨던 그 꿈들이 오늘날의 문명사회를 만 들었고 또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개개인이 개개인의 꿈을 향해 달려갈 때 나오는 에너지가 온 세상을 활기차게 만들며 사회를 새로운 꿈으로 인도한다. 나 또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꿈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는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자라면서 점점 선명해지는 그런 꿈이다. 내 꿈은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 드는 것이다. 비록 인간 사회는 외형적으로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듯이 보이지만 속 에서는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인간의 욕심으로 계속해서 더 높은 곳을 향해 쌓다가 무너진 바벨탑처럼 말이다. 산업혁명 이후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 로 빠른 발전을 해오고 있는 인류는 미래의 인류를 어떠한 이념체계에 맡길지를 두 고 20세기 첨예한 갈등을 일어났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애 초부터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지 않은 추상적인 학문을 현실 세계의 적용하려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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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20세기의 이데올로기 전쟁은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보다 인간의 본성에 입각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하여 새롭게 맞은 21세기 고도의 정보화 시대는 재물, 즉 돈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는 배금주의 성향을 띄고 있다. 오늘날 인류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결코 옳은 방향이라고 할 수 없다. 빈익 빈 부익부 현상은 나날이 심해졌고 전문가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더욱더 복잡해진 금융 시스템이 등장했다. 그 때문에 돈이 중심이 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돈의 개념 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기형적인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인간의 욕 심은 끝이 없는 것이기에 노예 해방자로서 유명한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금융가들의 욕심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만한 악이라고 경고하고 경계하였다. 지구가 수많은 나 라로 갈라져 있어 각 지역마다 법과 행정 체제가 다르기에 범지구적으로 공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는 금융가들을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이들은 사회의 불평등을 초래하며 사회적 약자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빼앗은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운다. 사실 지구상 거의 대다수의 부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어있다. 인간이 모두가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똑같은 기회를 부여 받을 권리는 있다. 지구의 한 쪽에서는 셀 수 없는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을 때 지구의 다른 한 쪽에서는 사회에 보급되고 남은 여분의 식량이 창고에서 썩고 버려진다. 이는 대 다수의 자유주의 국가들이 처음 등장할 때 주장되어졌던 천부인권 사상에도 어긋난 다.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더 이상 우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미 그 징후 는 여러 금융위기를 통해 나타났다. 이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사회 체제에 대한 지나친 안심을 경고하고 있다. 내가 경제학을 전공하려는 것은 나 자신이 직접 온 세상을 혼란에 원인이 되고 있는 근원지로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들끼리 칼부림 나는 것도 예삿일인 시대가 우 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인륜에 어 긋나는 행동을 일삼는 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불평등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묵인되는, 소수가 대다수의 부를 독점하는 현대 사회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돈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인간다움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이제 바 뀌어야 한다. 인류는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와야 된다. 현대 사회에서 누적되고 있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은 과거에 있었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르다. 전혀 새로운 문제들 이 빠른 속도로, 더 많이 쌓여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는 비단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총체적으로 바뀌어야 됨을 일깨워주는 신호이다. 내 꿈은 보 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인간을 인간다움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이 사회를,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 그리하여 인류를 새로운 밝은 길로 이끌고 싶 다. 그런 의미에서 내 꿈은 나 개인의 꿈이기 이전에 인류의 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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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그 자 체에 내재되 있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절제시켜 그 에너지만 긍정적으로 사 회의 선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기는 커녕 그 욕망을 더욱 더 부추겨 인간을 인간다움 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회에 있다. 인간의 본성은 타고난 것이라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는 의지 또한 가지고 있다. 우리 는 이 의지를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 게 주어진 기회에서 정당한 노동으로 얻은 소득으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독재자의 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독재자가 된다. 독재자를 만들지 않 는 유일한 방법은 독재자의 자리를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인간 모두가 공공의 이익을 곧 자신의 이익으로 여기는 그 때가 오면 이 세상은 분명 지금 보다 나은 세 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난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자유와 평등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권의 가장 핵심 요소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덧 책 속에서나 존재 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당장 멀리 안가고 자기 자신을 보더라도 주위에 만연한 불 평등과 부조리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 이 혁명 은 정부를 뒤엎는 것이 아니고 사회를 송두리째 뒤집는 그런 혁명도 아니다. 바로 우리 의식의 혁명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변화가 곧 사회 전체의 변화임을 깨닫고 자유와 평등의 이념으로 개인의 삶을 살아간다면 사회가 있고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있고 사회가 있는 것이기에 변화된 개인들의 꿈이 변화된 사회 를 만들 것이다. 사회 전체에 새로운 의식의 혁명을 일으켜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 를 변화 시키는 것. 이것이 나의 꿈이다. 하지만 인생에 대해, 존재에 대해, 세상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고 찰해봐야 할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학업과 취업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좇느라 세상 의 참된 면을 보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의 참 모습을 볼 기회를 빼앗기고 만다. 이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인간과는 다른 동물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시대,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지 충분히 알아야 되고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해도 깊이 사고해봐야 된다. 당장 눈앞의 일이 보이더라도 더 멀리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자신의 꿈을 당장 눈앞에 나무에 국한 시키는 우를 범하진 말아야 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으로 위대하다. 나무를 꿈으로 삼기 보다는 그 나무가 속한 숲을 꿈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된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이 가까운 미래의 자신의 이득만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를 위한, 진정 나 자신을 위한 길을 보며 삶으로써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되는 것. 이것이 나의 꿈이다. 인류의 위대한 선조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 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자기 자신의 피를 기꺼이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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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재단에 바침으로 인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내었다. 난 지금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가 새로운 혁명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분명 우리가 앞 으로 살아갈 미래는 우리 전 세대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 다. 변화를 인지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의 초점을 맞추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맞이할 새 세상이 모두에게 유익한 세상이 되는 것. 이것이 나의 꿈이다. 나의 꿈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나의 꿈이며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나의 꿈은 곧 인류의 꿈이기도 하다. 나는 만들고 싶다. 정 당한 노력에 의한 소득만이 인정받으며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얻는 그런 사회를 말 이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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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경필국회의원상 청도국기외국어학교 11학년 김 은 지

나의 꿈 나의 미래 저의 꿈은 낯선 사람이 지나갈 때,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매력적인 향을 만드는 조향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저의 꿈 역시도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간 난 아기였을 때부터 저희 어머니는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오셨어도 저만은 꼭 깨 끗이 씻기고 좋은 향이 나도록 로션을 발라주시고 저와 같이 잠드셨다고 합니다. 늘 주변 어른들께서는 무슨 아기한테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냐면서 늘 저희 어머니께 칭찬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중, 고등학교에 입학 했을 때도

항상 주변 친구들은 저에게서 좋은 향이 난다고 했고 당연히 친구들은 좋은

향기가 나는 저를 좋아했습니다. 저 또한 좋은 향기가 나는 친구들에게는 더욱 호감 을 느끼곤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향에 민감하다는 것을 아시는 어머니께서는 항상 집에 아로마 향초를 구비해 두셨고 저는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향기로운 아 로마 향기를 맡으며 그 날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자연히 더욱 좋은 향만을 찾게 됐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향에 민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 니라 저는 보통 또래 아이들이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 때 저는 좋은 향을 맡으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남들은 좋은 향을 맡는다고 해서 정말 스 트레스가 해소가 되는지 의아해 했지만 아기 때부터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맡아온

향들을 맡는 일은 저에게 있어서 제일 편안한 일이였습니다. 저에게 사춘기가 찾아 왔을 때 저는 향에 대해 좀 더 예민해졌습니다. 저와 맞지 않은 향을 맡을 때면 어지러움도 느꼈었고, 새로운 향을 접했을 땐 행복함도 느꼈습 니다. 때문에 저는 얼굴에 바르는 스킨, 로션부터 바디 로션까지 향을 신중히 고려 하며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선물 받은 향수를 시작으로 하나 씩 하나씩 수집하다보니 또래에 비해 많은 향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여러 가지 관련 제품들의 특징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향수 관련 제품을 많이 접하다 보니 다양한 향을 접할 수 있었는데 시향을 할 때면 항상 그 향을 뿌렸 을 때 나는 첫 향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중간 향 그리고 그 향수의 마지막 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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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향일까 하며 생각하는 일은 늘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향들이 제게 입혀졌을 때 저를 어떤 사람으로 변신시켜줄지 상상하는 것만큼 저를 설레게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향수는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한번 본 사 람이라도 그 사람이 지닌 향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면 자연히 그 사람을 떠올리 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향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계열의 향수를 고집하던지 한가지의 향수만 고집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의 분위기나 기분은 그 날 그 날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날 그 날 저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다르게 뿌리곤 합니다. 크게는 계절별 로 날씨별로 뿌렸고 그 날의 기분에 따라서도 뿌렸습니다. 하지만 향수가 아무리 많 아도 저의 감정을 모두 다 표현하기엔 소장하고 있는 향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학생이라 많은 종류의 향수를 소장하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향 보다 더 많은 향을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향수를 레이어링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향을 레이어링 한다라는 것은 향수 위에 다른 향수를 덧 입혀 또 다른 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처음엔 물론 실패 하 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어떤 식으로 향수를 레이어링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서 주 변에 조언을 구하고자 했지만, 주변에 저처럼 향수나 향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언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분위기를 담은 저만의 향을 만들고 싶다는 열의가 강했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열 심히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향수 관련 기사나 잡지를 읽기 시작했고, 저와 같이 향수 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알아내서 그 사람들의 방법을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미숙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따라 레이어링 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원하던 향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역한 향을 낸 적도 있고, 오래 유지하고자 해서 뿌렸던 향은 너무 진해 다른 사람들 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 적도 있었고 또는 오히려 금방 날아가 버린 적도 많았습니 다. 하지만 실패하면 할수록 포기 하자라는 생각 보다는 오히려 그 원하는 향을 만 들어내고자 하는 열의만 더 생겨났습니다. 나만의 새로운 향을 만들어 낸다는 그 생 각에 마구잡이로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봐 선뜻 생각 한 대로 시도 해 보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시도 해 볼 수 있는 곳을 찾다 가 집에서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전 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마음 놓고 저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수없이 시도 한 결과 전문가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제가 원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향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그날 저의 감정은 달랐기 때문에 표현된 향도 같 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향이 마음에 들어도 다시 같은 향을 만들기 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뿌렸던 날의 날씨도 달랐고 종류도 달랐고 시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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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랐고 그리고 위치까지도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표현 했던 향을 다시 표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던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일기처럼 공책에 적 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종 종합니다. 어차피 뿌린 종류만 알면 되는 것 아니냐는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향수는 그 날의 날씨가 더웠는지 추웠는지, 습했는지 건조했는지에 따라 향이 지속되는 시 간이 다르고 퍼지는 농도가 달라집니다. 또한 시간차를 얼마나 두고 뿌리냐에 따라 서 향이 다르게 입혀지기 때문에 얼마만큼의 시간차를 두고 뿌렸는지 또한 매우 중 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일기처럼 상세하게 적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양이 쌓이면서 저의 향수 일기장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 습니다. 그렇게 늘어난 저의 일기장을 펼쳐서 읽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일 기장 안에는 그날의 기분을 알 수 있었고 날씨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그런 저의 노력의 산물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보면서 사람들이 그 날의 저의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랐고, 그 날의 저의 감정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물론 “아 그래서 네가 이런 스타일의 향을 뿌린거구나! 오늘은 기 분이 좋구나, 오늘은 날씨와 너의 분위기가 너무 잘 맞는 것 같아!” 하며 공감하고 알아주는 사람도 많았지만, 자신들에게 맞는 향수를 추천해달라고 사람들이 더 많았 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어울릴만한 향수를 추천하는 일도 정말 재밌었습니 다. 각각의 향수마다 가지고 있는 스토리가 있는데, 누군가를 위한 향수도 있고 누 군가를 모티브로 한 향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분위기를 아는 제가 그 사람 에게 어울리는 향을 찾아 그 향이 지니는 스토리와 그 사람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져 그 향이 그 사람을 더욱 빛나게 할 때 마치 제가 저에게 꼭 맞는 향수를 찾은 것 과 같이 기뻤고, 자신들의 향을 찾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매우 설레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이 지니는 향은 그 어떠한 향이라도 그 사람을 표현해주고 돋보이게 해주지만 정말 자신 본연의 향에 만족하는 사람은 몇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 문에 자신을 좀 더 돋보이고 표현할 수 있는 향수를 찾지만 자신에게 맞는 향수를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찾던 그런 향수를 만들어주어서 저만의 느낌과 생각을 담은 향기를 전 세계의 사람 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느낌을 담은 향을 지님으로 인해서 그 사 람이 빛날 수 있게 됐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엔 아직 잘 닦여지지 않은 조향사라는 길을 걸어 우리나라에 서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향수를 탄생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꿈이자 저 의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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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기도지사상 청도국기외국어학교 11학년 김 송 의

행복을 디자인 하는 사람 제 꿈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입니다. 처음엔 그저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좋 아서 막연히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좋아하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 입는 순간은 잠시뿐이지만 기억 속에 항상 남아있을 옷은 웨딩드레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웨딩드레스야말로 가장 특별한 순간에 단 한 번 입는 특별한 옷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웨딩드레스는 제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옷입니다. 웨딩샵을 운영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은 늘 바쁘셨던 어머니를 따라 집이나 놀이터보 다는 어머니의 작업실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장난감이 없었기에 저는 어 머니께서 만든 드레스들을 장난감 삼아가며 재밌게 놀았고, 잘 때는 이불로도 사용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초등학교 2학년 저의 생일날의 특별했던 생일파티입니다. 다른 집 친구들처럼 음식을 만들어주거나 어린이 식당에 데려가 생일파티를 해주실 수 없으셨던 어머니께서는 제 생일날 저녁 조금 일찍 문을 닫으시고 제 친구들을 불 러 모두에게 드레스를 입혀주시고 작은 왕관을 씌워 주시며 그날 하루 저와 제 친구 들을 공주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도 부러웠던 한상 가득한 생일상도, 고깔 모자와 폭죽도 없는 생일파티였지만 어머니께서 시켜주신 피자를 먹으며 친구들과 어설픈 신부 흉내를 내며 놀았던 그때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깊게 남아있습니다. 그 렇게 이 드레스들은 저를 공주 옷이 많은 아이라며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기 도 하고, 때로는 어머니를 밤새 잡아두어 원망거리가 되기도 하며 저와 19년을 동고 동락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어머니께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라는 사실이 꿈을 심어주는 감사한 일이지만, 유년시절의 저에겐 원망스러운 일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학예회 나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어머니와 함께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웠었고 가끔 출장 이라도 가실 때면 떠밀리듯 할머니 댁에 맡겨져 하루 종일 울기도 했었습니다. 속상 한 마음에 누군가 “너는 꿈이 무엇이니?” 하고 물으면 “하루 종일 집에서 딸만 기다리는 예쁜 엄마요.” 라고 대답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만큼은 제 마음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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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잡던 고운 드레스들이 제 자리를 빼앗는 흉한 것들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어머니께서 그려놓으신 새 드레스의 디자인 스케치를 보거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웨딩드레스를 볼 때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이 드레스는 이제 어떤 장식들이 더해질까 또 누구에게 입혀질까 모든 것이 다 너무너 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어머니께 여쭈어보면 어머니께서는 항상 이 드레스들이 다 저를 위한 것이지만 다른 예쁜 신부언니들에게 잠시 빌려주는 것이라 고 대답해주시고는 나머지 부분을 마저 만드시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러 면 제 것을 누군가에게 빌려 준다는 말씀에 투덜대기도 했지만 얼마안가 내일은 또 어떤 예쁜 언니가 와서 이 드레스를 입어보는지, 언니는 얼마나 예쁜지 끊임없이 조 잘대며 다시 또 어머니 곁에 다가앉아 자투리 천으로 바느질 놀이를 하고는 했습니 다.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아직도 짬짬이 어머니의 작업실 에 놀러가 남은 원단들로 혼자 이것저것 만들어보기도 하고 제가 만들고 싶은 드레 스에 대해서 재잘대기도 하며 저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고 어머니의 가게에는 결혼을 앞둔 행복한 커플들의 행복한 기운들이 가득합니다. 물론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로서의 어머니의 삶을 지켜봐 왔기에 제 꿈 한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화학 약품으로 처리된 원단들이 손끝을 스치며 갈라지게 하고 화려한 보석들을 수놓는 작은 바늘들 이 그 끝을 파고들어 찔린 상처들로 가득했던 손과 끊임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해내 야만 했던 무거운 어깨, 원단과 부자재를 찾아 이곳저곳 헤매고 다녔던 부르튼 두 발, 그리고 주말에도 편히 쉬지도 못하시고 홀로 밤을 지새우며 재봉틀을 돌리시던 뒷모습은 제가 가장 많이 보아온 어머니의 디자이너로서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막 연히 화려한 드레스들과 어머니의 명함 끝 디자이너란 수식에 환상을 품고 선망의 눈길을 보냈었지만 저는 그 뒤에 서서 어머니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셨던 옷 뒤의 작은 실밥들을 떼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알 면서도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자꾸만 커져갔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 데 자꾸만 “이런 드레스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끼적여 보기도 하고, 어느 날 인터넷에 올라온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신부를 처음 맞이 한 신랑들의 표정을 모아놓은 사진들을 보며 흐뭇해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제 마음속 한편에 는 피하고만 싶은 비겁한 마음이 남아있었습니다. 과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이것밖에 없을까? 시작했다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으면 어떡하지? 내게 재능 이 있는 것일까? 수많은 질문들이 계속해서 저를 혼란스럽게 했고, 꿈과 현실 사이 에서 자꾸만 갈팡질팡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는 고민하다가 어머니께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겉보기만 화려하지 그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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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을 왜 선택하셨냐고.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물론 옷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들이는 시간과 수고는 감당하기가 힘들 때도 있어.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해주는 것인가 고민될 때도 있 고. 게다가 그렇게 애써 만든 자식 같은 드레스를 손님에게 보내야만 할 때면 서운 하기까지 해. 하지만 그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환한 웃음과 신부를 바라보는 신랑의 눈을 바라볼 때면 역시 이게 내 천직이구나 싶어. 그래서 엄마는 아직도 이렇게 열 심히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거야.” 시작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 걸어오신 그 길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겁내고 주 저하던 저에게 어머니의 대답은 충격이었습니다. 문득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분명 어렵고 힘든 부분이 존재할 터인데 저는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하면서 어떤 어 려움도 감당할 자신이 되어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 워졌습니다. 단지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도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었는데 정작 저는 제 꿈과 욕심사이에서 타 협하고만 있는 겁쟁이일 뿐이었습니다. 이날 어머니의 대답은 제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옷을 만들면서 어떤 희생이 뒤따르든 행복할 수 있을까?”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꼭 되고 싶었지 만 타고난 재능 면에서도, 앞으로 해야 할 엄청난 노력들도 모두 감당할 자신이 없 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꿈이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디자이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래서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지금 내가 무엇을 해 야 하는지, 존경하는 디자이너들의 삶은 어땠는지 찾아보고, 서툴지만 상상뿐이었던 제 머릿속의 드레스들을 스케치하고 메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교 축제 때 제가 직접 의상을 만들어보면서 제 확신은 굳어졌습니다. 디자인을 하 고 그 옷을 만드는 순간에 그 어느 때 보다 몰입하고 행복해하는 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토록 겁내고 피해가려고만 했던 것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제 꿈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 금은 돈과 명예만을 좇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꿈을 찾아가는 사 람이 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 꿈에 확신을 갖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 과정은 훗날 제가 또 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계속 달려가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어줄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향한 길은 저의 생각보다 훨씬 거칠고 긴 여 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의 최고의 순 간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뜁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에게 행복을 디자인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꿈이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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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기도지사상 선양한글학교 10학년 박 공 현

나는 이루어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도를 한다.‘제발 저의 꿈이 이루어지게 해주세 요’처음 기도를 시작했을 때완 다른 어색할 정도로 커져버린 두 손을 마주잡고 오늘 도, 이루어 내고 싶은 그래서 이루어낼 나의 꿈이 현실이 되는 달콤한 상상을 해본 다. 비록 항상 같은 기도문이지만 나의 간절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늘까지 올라 갈 것이란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해가며 끝도 없이 빌어본다. 나의 꿈은 굿네이버스의 일원이 되는 것 이다. 굿네이버스는 굶주림 없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1991년 한국에서 설립되어 전세계 25개국에서 전 문사회복지사업과 국제구호개발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NGO 단체이다. 내가 이 꿈을 가지게 된데에는 하나의 계기가 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다른 아 이들과 다름없이 의사, 선생님, 아나운서 등 조금 더 크게는 국회의원이 꿈인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1년 뒤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나의 생각, 나의 미래 심지어 나의 인생까지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개학식 날이었다. 학교는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로 인하여 시끌벅적했고, 여느 때 와 다름없이 친근한 종소리와 함께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선생님께서 책을 꺼내심 과 동시에 한 순간 조용했었던 아이들은 다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엔 고개를 저으시던 선생님께서도 결국 별수 없다는 듯이 웃으시며 한편의 다큐멘터리 를 틀어주셨다. 다큐멘터리는 서부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먹을 게 없고 마실 물이 없 어서 죽어가는 내용이었다. 과연 처음에는 나 몰라라 하며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던 아이들도 점점 다큐멘터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물론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고 그렇 게 본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정말 안타까웠다. 굶주림과 갈증에 지친 아이들은 생명 의 끈을 잡아낼 힘이 없었다. 심지어 에이즈, 말라리아 같은 큰 병도 아닌 그저 작 은 감기 하나로도 생명의 불씨는 너무나도 쉽게 꺼져만 갔다. 나는 그때 본 그 다큐 멘터리 속의 아이들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배고픔에 지쳐 우는 모습, 눈뜰 힘 이 없어 눈을 반만 뜨고 있는 모습, 갈증으로 허덕이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겨우 물 한 컵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냥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 나는 아직도 기도를 할 때면 이 다큐멘터리 속의 아이들이 생각나곤 한다. 이 다큐멘터리로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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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본 직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나는 많은 아이들이 돈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를 앓고 있고, 5세 미만으 로 사망하는 아이들의 30%는 영양실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영양실조를 예방하는 가격이 고작 1달러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좋은 대학 좋은 회사를 꿈꿀 때 그 아이들은 한 번이라도 배불리 먹어보기를 꿈꾸고, 우리들이 야채가 먹기 싫다며 반찬 투정할 때 그 아이들은 흙으로 만든 과자를 먹으면서도 감 사하며 웃는다. 그리고 우리들이 늦잠을 자기 위해 애쓸 때 그 아이들은 더 이상 말 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끌고 일터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잠깐의 헤어짐에 통 곡하며 슬퍼할 때, 그 아이들은 갑작스레 맞이하는 영원한 헤어짐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만 쥐어짜고 있다. 우리는 꼭 이러한 것들을 깨우쳐야 하고 같은 인간으로서 항상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 자료를 수집하던 중 나는 내가 발견한 또 하나의 사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 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는 국제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해외 원조에 인색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전쟁이 끝난 후 1990년까지 무려 130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해외 원조금을 받았고, 심지어 1960년대에는 한 해의 원조 액수가 우리나라 보건사회부 예산의 두 배를 능가하기 도 하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현재 한국의 대외 원조금은 여전히 세계 주요국 가운 데서는 가장 낮은 수준이다. 개발 공헌지수(CDI)는 원조, 무역, 안보 등 7개의 분야 를 평가하여 매긴다. 각 정책 분야별 점수의 평균치인 총점은 스웨덴이 7.7점으로 종합 1위로 평가 된데에 비해 한국은 총점 3.1점으로 최하위권을 형성하였으며 2008년 이래 4년 연속 종합 꼴찌라고 한다. 한국은 원조정책 분야에서도 1점이라는 매우 낮은 점수를 얻었으며 국내 총생산(GDP)대비 원조 비율은 0.09%로 22개국 중 최하위다. 이런 것을 알아가며 느끼는 재미에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컴 퓨터로 그런 아이들에 관한 책, 다큐멘터리 그리고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찾아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던 중 나는 ‘사랑의 빵’이라 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유난히 눈에 익은 물건에 대한 관심이 었다. 어디서 보았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학교에서 몇 번 나누어 준적이 있었던 조그 마한 노란색 집 모양의 저금통이었다. 그것을 기억해 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내가 과연 이런 꿈을 꿀 자격이 있는 것 일까…… 혹시 말로만 불쌍하다, 안타깝다, 도와주고 싶다고 하 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일주일 내내 이 꿈을 버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난 그 꿈은 정말 이루어내고 싶었고, 이 룰 자신이 있었으며 정말 진심으로 그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고 싶었다.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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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가장들에게는 그들을 지탱해주는 기둥이 되어주고 싶었으며 아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또 병이 있어 사람들이 피하는 아이들은 한 번씩 꼭 안아주어 그들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마침내 이 꿈을 계속 꾸겠다는 확신이 섰고, 드디어 나 자신에게서 그렇게 갈망하 던 일명’꿈 자유이용권’을 얻어내었다. ‘꿈 자유이용권’이란 내가 내 자신에게 이 꿈을 마음껏 꿔도 좋다는 동의의 뜻으로 주는 허가증과 같은 것이다. 간신히 내 자신에게서 허락을 받아낸 나는 이 마음가짐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도 빠지 지 않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또 더 많은 자료를 알아보며 내 꿈에 한걸 음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나는 월드비전이라는 한 구호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월드비전은 한국전쟁 중 미국인 밥 피얼스 목 사와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의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에 대한 구호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월드비전은 1950년에 인도와 대만, 홍콩, 인도네시아, 월남 등지에서 구호사업 을 시작하여 1960~1970년대에는 아시아 이외의 다른 대륙으로 확대하게 되었고 구 호사업도 규모가 커지면서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월드비전이라는 단체에 반하였고 그 속의 긴급요원이라는 직업이 너무나도 멋있어 보였다. 그러던 중 나는 한 언니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한비야 작가님이 쓰신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한비야 작가님은 긴급요원이라는 이름하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시 며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주었고 그 책은 나 같은 아이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믿 을 수 있을 정도로 나의 꿈과 매우 유사하였다. 그 책을 본 후 나는 더욱더 열의를 불태우며 언젠간 나도 이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나의 꿈을 키워나갔 다.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중국유학을 제안하셨고 이로 인해 나는 또 다시 고민의 길로 빠져들었다. 솔직히 나는 낯선 곳 보다는 내 나라 내 땅에서 더 꿈을 위해 달리고 싶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전에 한번은 내가 이렇게 자료만 수집할 게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그런 아이들을 구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미친 듯이 인터넷을 뒤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찾아본 사이트에는 어 디든지 ‘나이제한’ 이라는 말이 따라다녔고. 그 글자는 너무 많이 본 이유 때문인 지 내 눈앞에 선명하게 떠다녔다. 억울하기만 했다. 겨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컴퓨터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억울했고, 나도 잘할 수 있 는데…… 하는 생각만이 계속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만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별수 없이 몇 년 후를 기약하며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외국이라니! 이러면 나의 꿈에 도착하기 위한 계단 중 하나를 건너뛰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 계단을 하나라도 그냥 건너고 싶지 않 았고, 모두다 밟아가며 올라가고 싶었으며 타지로 간다는 것은 내 꿈에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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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내게 있어 엄청난 기회였다 전 세계의 60억 인구 중 약 8억 명이 영어를 1, 2차 언어로 사용한다고 한다. 거기에 내가 중국어까 지 하게 된다면 나는 전세계사람 중 약 21억 2700만 명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것이 내 꿈에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워지는 느 낌이 들었다. 나는 역시나 내 계단을 하나라도 지나치고 싶진 않았지만 겨우 눈앞의 작은 계단으로 인해 그 뒤의 큰 계단을 넘을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하여 결국 중국유학의 길로 향했다. 중국에 온 후부터 나는 내 꿈에 가 까워지는 느낌에 하루하루가 뿌듯하기만 하고 이렇게 중국어를 배워 나중에 나의 꿈 에 더욱 큰 이바지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비록 나의 계단 하나는 별수 없이 지나쳤지만 그것은 포기한 게 아니다. 그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조금 뒤로 미뤄졌을 뿐……. 그리고 나는 오늘도 우리나라가 이제는 도와주는 국가로 성장하기를 희망하 고 그 속에서 항상 웃으며, 아이들을 위해 어디든지 달려갈 나를 꿈꾸며 한걸음 더 과감히 나의 미래에 다가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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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남서울대총장상 북경 바추이 쌍어학교 한어부 10학년 최 효 원

후회하지 않을 나의 미래를 위해... 미래의 나의 모습이란 솔직히 말하면 생각하기만 해도 정말 막막하기만 한 것만 같 다. 한사람의 인생이 70~80년이란 세월이 길다고 하면 길수도 있고 짧다면 짧을 수 도 있겠지만 인생의 길이보다는 내가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 인지 내가정말 하고 싶은 일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 가는게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중국 유학을 하면서 생각해온 나의 미래와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중국으로 유학을 온 후로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과거 몇 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를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어렸을 때 생각했던 몇 년 후 가까운 미래의 나의 모습은 나름대로 예측하기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당연히 대학생이 되겠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를 졸업하고 나는 아빠의 사업으로 전혀 예기치 못하게 중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 고,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언어를 배우면 서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중국에 처음 왔을 때 설렘과 기대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안고 중국에 들어왔다. 새로운 나라에서 생활을 시작 한다는 기대감과 설렘도 있었 지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중국유학이라는 선택이 나의 미래와 꿈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곧 희망으로 바뀌어 갔다. 비록 한국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도 떨어지고, 같은 생활 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학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남들과 다르게 현지 에서 언어와 그곳의 문화와 정서를 배운다는 것은 나에게 아주 큰 기회고, 정말 좋 은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초등학생 때 나는 확실한 꿈이 없었다. 그저 막연히 꿈에 대해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막연히 ‘무엇이 되면 멋있겠구 나.’라고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었다. 그것이 때로는 의사가 되기도 했고, 과학자, 선생님 등이 되기도 하였다. 확고한 꿈도 없었고, 나의 꿈을 찾기 위한 터닝 포인트 도 없었던 나에게 중국유학은 나의 인생과 나의 꿈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중국 유학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중국어로 수업을 하고 중국친구들과 교류하지만, 방학기간에는 한국에 가고, 방과 후에는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독서도 함으로써 한국, 중국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좋은 여건이다. 따라서 나는 중국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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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을 교류하며 서로의 나라를 알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푸신이라는 곳으로 단체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우리 를 반갑게 맞아주며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한국말 인사를 서툴게 하기도 하였다. 나 는 그 모습을 보고 그 아이들에게 한국의 좋은 면들을 알리고 한국을 좋아할 수 있 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대학 진학 후 중국어의 기본기가 더 탄탄해진 다면 다시 중국을 찾아 한국을 알리고 싶다고 생각 하였다. 어쩌면 지금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에게 이 꿈은 이루기에 희망적인 점이 많다. 어릴 적부터 중국 에 살아온 나에게는 언어만이 아닌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터득했다는 점이 가장 큰 경쟁력이다.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며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중국과 한국 은 경제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밀접하다. 하지만 아무리 가깝다 해도 나라간의 문화 차이는 존재한다. 이런 문화차이에서 중국 현지에서 직접 부딪혀보고 생활하며 익히 고 깨달은 중국에 대한 이해는 내가 앞으로 중국에 한국을 알리고, 교류 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좋은 점들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만으로 나의 미래를 장담 할 수는 없다. 경험만 쌓고 아무런 깨 달음이 없거나 그에 따른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학교선생님께서 하신말씀이 있다. “미래의 네 모습을 알고 싶다면 현 재의 네 모습을 보아라. 과거의 네 모습 속에 현재의 네 모습이 담겨있었고 현재의 네 모습 속에 미래의 모습이 담겨있다.” 선생님께서 하신 이 말은 내 가슴에 비수 처럼 꽂혀 와 닿았다. 나는 항상 미래를 걱정하기만 했지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거 나, 과거의 지나쳐온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과연 지금 의 나는 미래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후회 하지 않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 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고,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 궁금증은 나중 에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돌이켜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저 후 회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 일 것이다. 나는 중국어를 더 공부하고, 중국에 대해서 더 알아 가야하고, 한국역시 더 공부 해야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가 최고가 될 수 있는 지름길 이 아닌가 싶다. 노력이 없으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목표도 실행할 수 없을 것이 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의 미래도 내 뜻대로 잘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한 바람과 목표를 설계했으므로 그에 맞도록 지금부터 노력해서 하겠다. 어느 학자가 그랬던가, 최고보다는 최선이라고... 그 말이 이 시점에 서있는 나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좌우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중국 유학의 시간이 낭 비되지 않게,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 노력해서 꼭 꿈을 이룰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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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한민족글짓기대회장상 선양한글학교 고등학교 2학년 유 예 리

나의 미래 나의 꿈 지금 밤10시 책상 앞에 앉아서 숙제를 하고 있다. 근데 어머니께서 저를 다급하게 거실로 부르셔서 뛰어나갔다. 그랬더니 텔레비전 앞에 앉으라고 하셨다. 텔레비전에 선 국토대장정이란 프로그램 시작을 하였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다른 아무 말도 없 으시고 그냥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무 말없이 어머니 옆에 앉아 같이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을 봤다. 국토대장정 하는 군인들은 남자인줄 알았는데 여자였다. 나는 당 황했다. ‘여자도 군인이 될 수 있구나 여군이 있었는데 왜 한번도 생각해 본적도 들어 본적도 없었지…’ 하는 마음에 혼란스럽고 당황했습니다. 여군들은 등에 무거 운 장비들을 지고 하나가 되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가도 서로 격려하며 위로 해주면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었습니다. 몇 여군들은 장시간 걸은 탓인지 발 에 물집이 생기고 발톱이 빠지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것을 참고 계속해서 걸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걷고 있었는데 무심하게도 비가 쏟 아져 내렸습니다. 여군들은 빗길이 미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힘들다는 내색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는 생각보다는 ‘멋지다’라는 생각을 했 습니다. 여군들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저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습니다. 비 때문에 젖은 제복도 군화도 제 눈에는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였 을 것입니다. 하늘의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면 마음이 굳건해지고 ‘여군’이라는 단어 를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제복과 군화를 보면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지키는 여군이 꿈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멋진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정확한 꿈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 은 꿈을 정하자 하루하루 허무하게 보낼 수 는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1분1초가 소중 하고 아까웠습니다. 이제서야 꿈을 세웠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인생의 갈림길에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좀 늦어졌을 뿐 이제는 정한 길로 앞으로 달 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저는 지금 여군이 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살 을 7Kg를 뺐지만 더 빼야하고 체력을 튼튼하게 단련하고 있고 공부도 열심히 하려 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꿈은 단지 텔레비전을 통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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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경찰이었습니다. 등교하고 하교 할 때 마다 교통정리를 해주는 경찰들을 항상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경이 사거리 중간에 검은 제복을 입고 까만 썬글라스 쓰고 서있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반해버렸습니다. 단정하게 제복을 입고 카리 스마가 넘치는 여경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었을 때 교통 관리하는 언니들을 보다가 공항에서 근무하는 특수경찰들을 보고서는 그 자리에서 주위에 다 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오로지 특수 경찰들만 보였습니다. 거기에다가 같이 있는 여자 특수경찰을 보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특수경찰을 여자도 뽑을 수 있나’하고 말이죠. 그렇게 여자, 남자 특수경찰들이 같이 걸어가는 모습이 웃음기 가 득한 얼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경찰이 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등교하거나 하교할 때 호기심이 자꾸 발동해서 사거리 한 중간에 서있는 경찰한테 가서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기고 악수 한번 해보고 싶고 옆에 가서 같이 서있는 모습들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진짜로 가면 인사를 받아 줄지 악수를 해줄지 진진하게 고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내려 야 할 버스정거장을 놓치거나 길에서 사람하고 부딪치는 일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 다. 이렇게 경찰에 대한 학창시절을 꿈을 꾸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그 해 저는 모든 것이 허탈해지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경찰대는 특별전형인 학생을 받 지 않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특별전형으로 대학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꿈이 허탈하게 없어지고 나서 자꾸 마음속에 무엇인 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 열심히 공부 를 했습니다. 학생이 해야 할 일은 공부밖에 없었으니깐요. 그러다가 그 날 텔레비전으로만 보았던 멋있는 여군들을 한국 가서 우연히 기차역 에서 실제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여군들이 제복을 입고 선 짐을 들고 무언가를 사는 평범함 모습마저 멋있었습니다. 솔직히 멋있었지만 마음은 부러운 마음이 가득 했습니다. 나도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싶은데, 막상하게 되면 그 과정이 얼마나 힘 들고 고될지 알기 때문에 쉽게 도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길은 정해져 있는 데 두려움 마음에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 이었습니다. 특별전형에서 문제가 되었던 일로 허전함을 느껴보았던 저는 소심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꿈의 대한 자신 감과 기대감이 없어지면서 혼자 속으로 앓고 있었을 때 부모님께서 어떻게 알고 계 셨는지 항상 많은 격려와 자신감을 주셨습니다. 어떤 꿈을 가지든지 부모님께선 ‘너 자신이 하고 싶고 언제나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나 찬성이다’라고 하시면서 많은 지지와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잠깐 슬럼프가 찾아왔 었을 때 부모님의 도움으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많은 것을 해보았습니다. 나에게 맞는 것을 천천히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해보 았지만 즐겁고 흥미롭기도 한데 그렇게 간절한 마음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근데 유 독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제복, 군화, 태극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꿈을 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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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정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도전하려 합니다. 꿈을 다시 키워나가며 이번에 는 나의 꿈을 접는 일이 없도록 매일같이 기도하며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가 끝나고 방학 때 한국에 가서 대학을 알아보러 다녔습니 다. 육군사관학교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또 다른 곳에 어떤 한 과들이 있고 어떠한 서류들이 필요한지 알아보려 다녔습니다. 성균관 대학교부터 시작해서 대학교 한 곳 한 곳 직접 다니면서 실감을 했습니다. 대학은 무엇인지, 무엇을 더 깊이 공부하고 어떤 것을 느끼고 배워나가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한 곳 한 곳 다니면 서 빈 강의실에 앉아보기도 하고 수업이 진행중인 강의실 문 앞에 붙어서 몰래 들어 보기도 하면서 도서실은 못 들어가지만 밖에서 언니, 오빠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 면서 저의 대학생활을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대학근처 식당에 가서 먹어보고 대학교에 다시 들어가는 같은 길을 계속 반복해서 걸어 다녀보았습니다. 기분이 묘 했습니다. ‘나도 이제 대학교 가는 나이가 됐구나 나도 대학생이 되는구나’ 속으로 신기해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그것이 꿈이었고 작은 소망이었는데 지금은 신기하 게도 진짜로 대학생이 된다는 생각에 말이 나오지 못할 만큼 벅찬 느낌이었습니다.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각 학교의 특징과 전통들이 너무 눈에 쏙쏙 들어오고 캠퍼스 도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있는 캠퍼스를 다 돌아보고 나서 마지막으 로 육군사관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더 오래 기억하고 느낌이 쉽게 사라지 지 않게 남기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방문했습니다. 입구에 들어갔을 때 눈 앞에 꿈에 그리던 장면들이 펼쳐졌습니다. 그 날 가이드 봉사하시는 분과 화랑정신이 깃든 역 사 박물관도 둘러보고 육군사관학교의 교육방식, 생활규칙, 훈련날짜, 각 생활할 방 들, 공부하는 교실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육군사관학교의 많은 전통문화를 알게 되었 고 화랑에 정신을 더 깊이 느끼고 알게 되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운동장을 뛰어다 니면서 여러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상상을 하면서 얼굴에 웃음꽃이 저절로 피어나온 것인데 제 옆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부모님과 가이드께서 같이 옆에서 제가 웃겼는지 웃으시기만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념품사는 곳에 가서 기념품을 고르는데 옆에 서 문구를 사는 군인오빠들이 너무 부러워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기념품에 계시는 아주머니께서 저를 보시더니“저 오빠들이 그렇게 잘생겼니?”하고 물어보셨는 데 제가”네 너무 멋있어요!” 하고 큰소리로 애기했더니 오빠들이 당황 하셨는지 급 하게 물건을 구입하고 사라졌습니다. 저희 가족이랑 아주머니랑 서로 마주보시면서 웃다가 육군사관학교마크가 새겨진 기념품을 구입했습니다. 그것을 들고 집에 가는 길에 나의 꿈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자면서 다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쉬웠지만 육군사관학교 건물들과 방문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머리 속에서 계속 떠 올랐습니다. 저는 당시 내 마음이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구나 하면서 허전함을 채웠습니다. 저 는 경찰이든지 여군이든지 단지 겉모습이 멋있어서 꿈으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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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외국에 살면서 힘든 일들을 많이 겪고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것은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라고 놀리고 약간의 인종차별도 당했을 때 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수록 외국에 나와 있는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을 먹칠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외국아이들과 최대한 잘 지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아이들이 저를 많이 도와주고 이해해줍니 다. 또 우리나라의 대한 많은 관심을 가져줍니다. 서로 존중해주며 오히려 저를 더 많이 챙겨줍니다. 이렇게 저는 외국에 나와 살면서 우리나라를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까’ 하 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여군이 되어 나라 지키는 일로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나라에 대한사랑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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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중부일보사장상 청도국기외국어학교 11학년 김 유 리

나의 꿈 나의 미래 “다른 친구들에게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세계적 인......” 이라고 대답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친구들과는 다르게 세계적이진 않아 도 저의 요리를 먹고 바로 저를 떠올릴 수 있는 색깔 있는 한식 요리 연구가 되는 것이 꿈 입니다. 남들은 저에게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며 왜 세계적인 요리사가 아 닌 색깔 있는 요리사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저는 제가 만든 요리를 사람들이 먹고 행복해 한다면, 또 외국에 한식의 우수성과 맛을 알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꿈을 가지게 된 계기는 요리를 잘하시고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영향이 큽 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친구들과 달리 만화책이나 소설책보다는 어머니께서 보고 계신 요리책을 보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각기 다른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접시위에 예쁘게 놓여있는 것이 신기했고 나도 저런 음식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어 머니는 저의 생일 아침이면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제 생일상을 차려주셨는데 막상 어 머니의 생신 때는 생신 상을 차려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마다 마 음이 아팠습니다. 어머니께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정성껏 요리해주시는 것처럼 저도 제 사랑을 담아 어머니께 정성 가득한 요리를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 는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저에게 요리란 사랑을 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생 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드는 요리가 가장 따뜻하고 정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에 요리를 시작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음식을 태우고, 뜨 거운 불에 손도 데이고 칼에 베이기도 하면서 ‘아 나는 요리에 재능이 없구나.’ 라는 생각에 자신감을 잃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마다 어머니께서는 “유리가 다른 꿈을 가져도 좋지만 재능이 있든 없든 잘하든 못하든 네가 좋아하고 행복을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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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해라” 라고 하시면서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를 많은 생 각을 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저는 그저 어머니가 하시는 요 리 모양새만 따라하려 했지 그 요리를 만드는 기본조차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었습니다.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않고 힘들다고 투정만 부렸던 제가 너무 부끄러워 졌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은 제가 큰 결심을 하게 해주는 전환점이 되었습니 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기시작하면서 전에는‘아 요리는 그냥 잘 맞추어 만들면 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요리란, 그저 맛있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요리 를 시작할 때부터 완성하는 과정까지 정성, 시간, 노력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느끼 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누군가 먹어줄 때 그 사 람들이 기분 좋은 표정이나 “잘 먹었다.”, “맛있었다.”라고 말해 줄때면 그 어 느 때보다 보람을 느끼고 요리를 하며 힘들었던 그 순간들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라 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요리 뿐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재료를 고를 때조차도 행복합니다. 색감, 신 선도, 맛을 고려하는 것이 즐겁고 이렇게 고른 재료들로 요리를 하는 것은 더욱 신 이 납니다. 제가 그렇게 요리한 음식이 예쁜 접시에 담겨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보면 마음이 두근두근 거리고 행복하면서도 뿌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부터 어머니가 시장에 가시면 꼭 따라가서 야채는 어느 것이 싱 싱한 것인지 계절 채소와과일은 무엇인지 고기는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배우고, 집 에 와서는 어머니가 요리를 하실 때면 옆에 앉아 칼 잡는 법과

주방에 가서 불의

세기, 양념, 농도, 음식의 색감까지 요리 과정을 차근차근 배워나갔습니다. 처음엔 어렵고 힘들었지만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면서 제가 요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볶음밥 하나 만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제가 그토록 해드리고 싶었던 어머니의 생일상을 차려드릴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웠 습니다. 더 나아가 고등학생이 되고난 후부터 바쁜 중에도 주말이 되면 꼭 시간을 내서 저만의 요리법으로 레시피 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요리의 재료부터 시작해 서 만드는 과정, 완성된 후의 모습까지 사진을 찍고 친구들의 의견과 요리과정 중 실수하지 말아야할 것들도 적어 넣으면서 차곡차곡 저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 다보니 제가 실수 했던 것 들을 다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다음에 다시 만들었을 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요리 외에도 제 레시피북에는 다른 사람 블로그에 올려져있는 레시피와 맛집 정 보, 후기들과 유명한 메뉴들이 메모되어 있습니다. 제 요리만이 훌륭한 요리가 아니 라 다른 사람들의 훌륭한 요리들을 참고하고 공부하는 것도 좋은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한식에 관심이 많아서 한식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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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 살았기 때문에 다양한 한식을 접할 길이 부족했는데 인터넷에 소개된 맛집과 후기들을 읽어보고 기회가 될 때 마다 한국에 나가 전에 보았던 맛집의 가장 유명한 음식을 먹어보며

후기와 맛 평가를 내리기도하고 다른 블로거들의 후기와 비교해

보기도 하면서 저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깨달아 가는 것은 요리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게는 이 레시피북이 한발 한발 꿈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소중한 것입니다. 이 책을 만드는 매 순간순간이 모두 소중 하고 행복합니다. 제 레시피 북은 제 꿈을 이룰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제가 꿈을 이 룬 뒤에도 계속 채워져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요리를 그만두는 그날, 제 이름 을 걸고 이 레시피 북을 책으로 출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식품조리학과에 진학 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대학 진학 후엔 지방 곳곳을 다니며 그곳의 특색 있는 한식의 조리법을 연구하고 배우고 싶습니다. 특히 외국인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한식을 연구 개발하 고 싶습니다. 외국에 나와 사는 동안 늘 우리 한식을 널리 알리고 싶었는데 외국인 들은 한식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막상 접할 기회가 되어도 입맛에 맞지 않아 어려워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식을 너무나도 좋아하는데 외국 인들이 몇몇의 대표적인 한식만 알뿐 맛있고 건강한 음식인 우리 한식을 잘 알지 못 한다는 것이 항상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외국인들에게 우리 한 식을 좋아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던 중에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의 음식을 우리 입맛에 맞춰 조금씩 그 요리법을 바꾸듯이 저도 우리 한식을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 춰 바꾼다면 외국인들도 쉽게 한식을 접하고 더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실제로 제가 중식이나 양식을 접목하여 새로운 퓨전 한식 요리를 만들어서 주변 중국 친구들에게 대접하였을 때 친구들은 맛있다고 하며 한식을 더 먹어보고 싶다고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때 말로 다 표현 못할 만큼 큰 자부심이 생겼 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식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요리까지도 연구해 서 한식에 외국의 음식을 접목하는 식의 퓨전 한식 요리사가 되어 우리 한식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마치 비빔밥이 각기 다른 재료가 어우러져 맛을 내듯이 저도 저만 의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존의 한식, 그리고 다른 나라 음식들의 장점들을 모아 세상 에 둘도 없는 퓨전 한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저는 제 꿈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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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경북도지사상 심양 국제 학교(SYIS) 11학년 김 승 환

내가 걸어가는 길 우리 모두 언제인가 한 번쯤은 자기 자신의 장래희망에 대해서 생각해 봤을 것이 다. 우리는 살면서 앞을 멀리 바라다보면서 가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갈 길이 아주 멀다. 지나온 길이 어떻다고 말하기보다 앞길에 무엇이 있을까 살펴봐야 한다. 우리 는 갈 길이 아주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그 길은 나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릴 적엔 모두 동심에 그냥 멋 있다는 이유로 직업을 골랐을 것이다. 허나, 크면 클수록, 현실이라는 큰 벽에 마주 하게 된다. 모든 것이 다 절대로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나도, 초등학교 다닐 적엔 항상 친구들에게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될 거야!” 라 고 말하며 다니곤 했다. 하지만, 점점 성장해가며, 무조건 높은 직위의 직업이 제일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은 내 뇌에서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직업을 선택할 때, 그 어느 것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직업의 의무와 자신의 적성이 딱 맞아떨 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열정과 신념 등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적성에서 나올 수 있다고 들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고, 많은 사람들을 부려 먹을 수 있는 직업 도 좋다. 하지만, 그런 직업들은 적성이 안 맞는다면 쉽게 질릴 것이다. 그 일을 하 면서도 왜 그 일을 하는 지 모를 것이다. 자신의 궁극적인 행복과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하는 일마다 즐거움을 주고 후회 없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나는 내가 걸어갈 길, 즉 진로를 결정할 때, 나의 적성과 또 내가 그 직업을 어떻 게 활용하여 이 세계에 큰 공헌을 할 지도 생각을 해보고 나서야 결정을 하였다. 나 는 장차 회계사로 살아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숫자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였다. 복잡하고 함정 있는 긴 글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딱 한가지의 답이 있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 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배운 여러 가지의 공식들을 응용하고 조합함으로써 한 문 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나는 10살이 되던 해에 중국에 오게 되었다. 중국에서 잠깐 국제학교를 다니고 중 국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처음 중국학교를 다닐 적에, 다른 언어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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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 아이들과 선생님들 때문에 기가 많이 죽어있었다. 모두 다 내가 못 알아듣 는 언어로 말하고 소통을 하니, 나 혼자 고립되어 있던 것 같았다. 중국어, 사회, 과학 등등 모두 중국어로 문제가 나오고 중국어로 답을 써야 하니 정말 죽을 맛 같 았다. 점수도 항상 낮게 나왔다. 그러나 내가 다 못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잘하는 것도 있었다. 바로, 수학과 영어였다. 수학은 문제가 거의 숫자로 나오고 공식만 대 입하면 되니, 수학은 나에게 너무나도 쉬웠고, 또 나에게 제일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수학에 대한 자신감은 어딜 가서나 잃지 않았다. 또, 중국 얘들이 점점 나 를 인정해주고, 영어나 수학문제를 물어볼 때 마다, 남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14살이 되던 해에, 어떨 결에 형, 누나들과 함께 고입 검정고시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 검정 고시 학원에서 한 수학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개성이 뚜렷하고, 재 미있게 수업을 해주시고, 항상 열정적인 모습으로 수업에 임해주셨다. 빠지면 빠져 들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 개념과 공식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나는 이런 선생님이 참 멋있어 보였다. 우리가 몇 분이나 걸려 푼 어 렵고 난해한 문제를 선생님은 공식을 정확하게 이용하고 답을 금방 찾으시니, 내 눈 에는 마치 동화 속에서만 보던 마법을 부리는 마술사 같으셨다. 그런 선생님을 보면 서, 수학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에 몰두하기로 결심 한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수학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수학적인 직업도 많아서 어느 직업을 미래에 할지 결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직업에 한창 고민에 빠져있을 시절, 운이 좋게, 아는 대학생 형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기회를 삼아, 요즘 뜨는 직업이 무엇이냐 고 물어보았다. 그 형의 답은 바로 “회계사”였다. 회계사 (CPA: Certified Public Accountant)는 매일 숫자로 나타나져 있는 돈을 다루는 직업이다. 이 직업은 경영과 관계가 많다. 한 회사의 돈의 흐름, 재무 상태를 관리하고, 그 현금의 흐름을 판단하 여 회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다. 즉, 회사의 감사와 경영을 진단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 회계사라는 직업을 듣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글자 보다 숫자가 더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의 경영은 돈을 무조건 아껴 쓰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곳에 잘 쓰는 것을 이야기 한다. 나는 평소에도, 잘 걸어 다니며, 돈을 불필요한 곳에 잘 안 쓰는 아끼는 습관이 있어서, 회사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이익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잘 기록하며 쓸 데 없는 곳에 돈이 쓰이지는 않는 지 확인하고 정말 필요한 곳에 돈을 사용하도록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이다. “그럼 회계사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에 대한 정보를 찾아가기 시작하였 다. 그러나 정보를 찾기 위해 타자치는 손이 점점 더 굳어져갔다. 공인회계사가 되 기 위해선,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주는 시험을 쳐야 하는데, 사람들 모두가 다 그 시 험이 어려웠다고 한다. 공인회계사 자격시험을 치기 전에도 대학교에서 우수한 학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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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고 있어야 하고, 또 2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그 시험의 양이 어마 하다고 듣게 되었다. 또, 영어도 잘 해야 한다. 회계사 시험은 주로 경영학, 경제학, 세법, 그리고 회계학을 포함한다. 정말 갈수록 걱정이 태산이다. 공인회계사가 되고 입사하며는 개인시간이 거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어려우면 더 어려울 수록 노력하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지만, 합격자들도 많으니, 분명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인의 특유의 도전정신과 의지를 보여주 겠다! 내가 만약 회계사가 된다면, 내가 쉬지 않고 일하면서 번 돈으로 남들을 도우면서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진정한 행복은 남들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 이다. 혼자 있으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은 정말 외로울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 같이 얘기하고 놀면, 그 땐 항상 웃고 행복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는 여태 껏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도움과 과분한 사랑들을 정말 많이 받았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도움과 사랑을 돌려주고 싶기에, 형편이 어렵지만 열심히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조금 더 많은 희망을 보면서 살아가게 하고 싶기 때문에, 나는 기부를 많이 할 것이다. 아마, 미국국제학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많이 갔던 것이 이 런 영향을 미쳤나 보다. 저번에 필리핀으로도 봉사활동을 갔었는데, 필리핀에서 많 은 가족들이 아주 방 한 칸만한 집에서 살고 있었고 홍수와 기근으로 힘들게 살아가 고 있었다. 집을 지어주는 일을 도와주고 나니 마음이 기뻐졌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 을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고아원에서도 일하였는데, 고아들은 눈이 초롱 초롱 밝았으며, 자원봉사자들을 정말 많이 좋아했다. 그 만큼 사랑이 더 필요하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돈처럼 쓰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생긴다. 이외에, 나는 조국을 떠나 멀리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도 많이 도울 것이다. 나도 유학생이었던 것만큼, 유학생들이 겪는 외로움과 힘듦을 알기에, 유학생들이 서로의 상황들을 들어가며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캠프를 많이 주최할 것 이다. 모두 자기 장래희망을 추구하는 과정에, 현실이라는 벽을 수없이 많이 마주할 것 이다. 그러나 이런 벽은 정말 완벽하게 구멍 없이 단단한 벽은 아니다. 우리에겐 희 망, 이상, 노력 등등 많은 무기가 있다. 앞길은 보이지 않기에 더 어렵게 느껴지고 벽이 두텁게 느껴지나 보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 꿈, 희망, 열정, 사랑, 노력, 긍정의 마음은 쓰면 쓸수록 더 커지니 우리에겐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현실과 마주치더 라도 자신의 꿈을 향한 열정과 노력만 있으면, 그 흘린 땀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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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청도이화한국학교 고1 장 아 름

나의 가장 큰 행복 오늘날,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꿈과 미래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하지만 꿈과 미래를 가슴에 품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에 더 많은 학생들은 아무런 꿈도 없이 부모님의 생각으로만 움직이는 로봇과 같이 생활합니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생 활하는 학생들은 과연 행복할까요? 기계적으로 부모님의 지시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꿈과 희 망, 그리고 삶의 목표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데로 생활하게 되면 삶의 즐거움이 사 라지게 됩니다. 아무리 부모님이 꿈을 가지고 살라고 몇 번이고 말씀을 하셨지만 꿈 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외국으로 나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낯선 환경에 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과 열심히 공부만 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꿈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초등학 교 때는 부모님 또는 어른들이 좋아하고 바라는 꿈을 꾸며, 내 자신이 원하는 꿈과 삶의 목표도 없이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중학교를 가서 처음에는 다양한 활동, 예를 들어 임원활동 대회참가 등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2가 되면서 공부를 해야 될 필요성을 점점 잊어가게 되면서 조금씩 공부와 멀어지기 시작했습니 다. 그렇게 1년 반이 지나, 부모님께 큰 실망감을 안겨 드리고 커다란 고민까지 안 겨주었습니다. 그 고민은 바로 더 이상 공부도 하지 않는 저를 중국 로컬학교를 보 낼지 아님 국제학교를 보낼지...... 몇 달을 걸쳐 고민한 결과는 어차피 중국 로컬 고등학교로 진학을 한다 해도 공부를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대학을 위해 국제학교 로 전학시키기로 부모님은 맘을 먹었습니다. 어느덧, 고등학교를 갈 나이가 되었고 전학을 가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전학을 하 기 위하여 면접을 보는데 자신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을 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는 중국에 오래 생활하다 보면 가 장 잘하는 것이 중국어일 테니 동시통역사라는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른 들께서 꿈이 무엇이냐 물어보시면 동시 통역사라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 는 중국에 오랫동안 생활하였지만 중국어를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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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아닌 이해와 풀이를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중국어를 암기 과목이라 생각하며 이해를 하지 않고 외우기만 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직업을 꿈으로 가지고 살아왔는데 진정 그것이 나의 꿈, 미래, 목표인지 헷갈렸기 때문입니다. 과연 좋아하지도 않는 분야의 직업을 갖게 된다면 행복할지...... 확신 이 들지 않았습니다. 우여곡절을 통하여 합격을 해 국제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국제학교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떠들면서 재 미있게 놀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같이 마주보며 밥도 같이 먹고...... 그리고 전학을 온지 얼마 되지 않고 난생 처음 진학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저는 그저 모르겠다고 부모님이 가르쳐준 꿈은 있지만 저의 진 정한 꿈은 없다고 말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한참을 고민 하시더니 먼저 좋아하는 것 부터 찾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저의 꿈 찾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선 생님과의 상담을 몇 번 더 하고 나니 지금까지 세뇌 당한 꿈은 진정한 꿈이 아니라 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수업을 계속 들으면서 나의 꿈을 찾고 있 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제 자신이 중국어가 아닌 수학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꿈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학 온 국제학교에는 CA 라는 club activities 인 부서활동 시간이 한 달에 한 번씩 있었습니다. 다양한 부서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봉사 부, 영화 감상 부, 당구 부, 농구 부, 축구 부, 생활 수학 부, 보드 게임 부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고 싶었던 발도르프 인형 부는 인원이 너무 많아 신청할 수 없게 되었고, 남은 부서는 농구, 축구, 봉사, 생활수학 등 이런 부서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에는 수학 이라도 하자라는 심정으로 생활 수학 부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CA시 간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니 수학 공부가 아닌 창의력수학을 배우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생활 수학 부에서는 수학을 이용하는 보드게임, 공간적 감각을 길러주 는 입체퍼즐, NASA에서도 쓰이는 종이 접기 수학 등 창의력을 길러주는 수학을 배 우는 부서였습니다. 생활 수학 부에는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들 즐기면서 수학 을 하는 모습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입체퍼즐을 했을 때 직접 나무 조각 하나씩 하나씩 붙여서 하나의 큐브를 만드는 그 시간은 너 무 나도 행복했습니다. 계속 한번 더 딱 한번 더 놀고 싶다는 생각만 머리를 잔뜩 채웠습니다. CA 를 계속 하다 보니 난생 처음으로 공부하면서 들뜨고 즐거움을 느 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 꿈이 점점 더 정확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제가 본 그 꿈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미래에 창의력을 길러주는 수학 교구를 개발하여 아이들에게 창의 력을 키워주며 수학을 하나의 공부가 아닌 놀이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후, 그 꿈 을 위해 삶의 목표도 세웠습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학을 더욱 더 열심 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의력 수학과 관련된 게임이나 교구들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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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입체퍼즐 같은 경우 직접 나무 조각을 구입하여 만들어 보기도하면서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열리는 창의력올림피아드 대회도 신청하여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팀원들이 협동하여 하니 너무 너무 행복하였고 팀의 리더로서 리더쉽도 키워 나갔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하여도 꿈이 없는 로봇과 같은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 도 움을 받아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었고 꿈과 미래, 삶의 목표까지 찾았습니다. 로봇 같이 생활했을 때 보다 훨씬 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한 걸 음 한 걸음 다가가는 기분은 날개를 펼쳐 하늘 높이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단계별 로 세운 목표를 하나씩 달성할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성취감을 느끼며 자신감도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꿈과 미래가 사람을 이토록 행복하게 변 화 시켜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또한 로봇같이 기계적으로 생활하는 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미래를 깨닫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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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김 가 연

“48살의 세계 유일 7성급 호텔 버즈 알 아랍의 호텔리어 엄마가 18살의 딸에게 쓰는 편지” 우리 사랑하는 내 딸 연경이에게, 안녕? 사랑하는 내 딸 연경아, 엄마야. 오늘 엄마가 우리 연경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해. 우리 연경이가 대학 준비를 하며, 1차적으로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지금, 엄마의 어릴 적, 엄마가 너 나이 때 했던 고민들 과 계획했던 그때 당시의 미래의 꿈에 대해서 너에게 들려주어 너의 자아가 한 층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해. 고3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18살, 한창 힘든 대학 준비와 사춘기시기로 인해 고민도 많고, 엄마에게 미쳐 다 말할 수 없는 고충이 많다는 것도 알아. 엄마도 18 살 때, 여러 많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상처도 받아봤고, 사랑도 받아보며 파란만장 하게 성장해 왔기 때문에, 너의 심리적 상황을 너무나 잘 이해 할 수 있는 것 같아. 어린 시절, 엄마도 너처럼 해외인 중국에 나와서 지내면서 힘든 외국 생활을 겪어 본거 알지? 말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생활하며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끼면서 사춘 기 시절을 보냈었어, 엄마가 살았던 때의 중국은 지금과 달리 개발도상국 수준이었 기에 선진국에 다다른 우리나라와 달리 문화적 수준이 차이가 많이 났었단다. 그럼 으로 인해서 심화되었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이 엄마를 많이 외롭고 힘들게 했었 어. 그렇지만 엄마의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는 장점을 가지고 좌절하지 않고 두려 워하거나 피하지 않고나의 특유의 친화력과 외향적인 성격으로 중국 친구들과 빨리 친해지며, 그 곳을 적응했었어. 엄마는 너 또한 잘 이겨 내리라 믿는단다. 엄마 때 문에 한국을 떠나 힘든 두바이 생활을 해내야 하지만 우리 연경이 만의 남을 즐겁게 해주는 매력으로 외국 친구들에게도 융화되어 잘 지낼 것이야 ^^. 연경이도 당당하 게 모든 상황을 대담하게 마주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한단다. 엄마는 공부도 했지만, 장난도 많이 치고, 좌충우돌 많은 일들을 겪으며 성장해 왔단다. 너 나이의 학생일 때, 신분에 맞지 않은 일들도 많이 하며, 부모님 속도 썩 혀 보았고, 친구들과도 다투게 되며 서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였어.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여러 인간관계에서의 도리와 예의,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는 방법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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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득하기도 했어. 엄마는 우리 연경이도 엄마같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하나 하나 다 잊지 않고, 그 속에서 많은 걸 배워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이젠, 엄마가 어린 시절에 어떤 꿈과 미래를 계획하였으며, 어떻게 실천하여 이루 어 냈는지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엄마는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고, 계획 을 세우 길 좋아하는 아이였단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러 갈 때도, 항상 시간 계획 과 할 일들을 미리 미리 정해 놓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알차게 보낼 수 있었어. 이러한 엄마의 습관은엄마가 지금 현재 두바이에 위치한 세계 유일의 7성급 호텔인 버즈 알 아랍 (Burj Al arab)의 호텔리어로서 꼼꼼하게 일하게 된 기본 바탕이 되어 준 것 같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 이는 무엇보다 필요한 성공으로 가는 길이란 다. 그러나 그걸 현실로 만들어내는 용기가 없다면, 무용지물이야. 내 스스로를 이 끌어 나아가고 도전하며 변화시키는 그런 용기가 있어야만 해. 엄마는 실패를 두려 워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면이 있어. 이번에도 버즈 알 아랍 호텔이란 한 층 더 높고 넓은 곳으로 발을 내딛기 위해, 신라호텔에서의 안정감을 포기한 채 겁 없이 무작정 막무가내로 지원서를 넣고 경력서를 넣으며 가슴 졸였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지만, 그때도 실패를 두려워하진 않았단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글까라는 말이 있듯이 엄마는 실패가 두려워 더 나은 방향으로 전환 하지 못하 는 소심함을 이겨내야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봐. 우리 연경이 또한 진취적이고 도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해. 딱 너 나이 때, 너네 아빠를 만나게 되었어. 어린 나이였지만 친하게 지내며, 서 로의 길에 맞게 서로를 밀어주며 지냈었단다. 그러다가 대학을 가게 되며, 서로의 상황에 의해 멀어져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대학 생활을 보냈어.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던 나이기에, 음악 동아리에 들어 취미 생활을 즐기던 와중, 다른 학교의 대학 동아리와 만나게 된 적이 있는데, 그때 약 2 년만에 너희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되었단다. 너무나도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서로의 감정이 워낙 깊었던 터라, 스스럼 없이 다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다가갔기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다시 발전 많은 좋은 사이로 바뀌었단다. 엄마는 말이야, 우리 연경이도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 하고, 표현 할 줄 아는 그런 멋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남이 나를 알아주기보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나를 드러내는 것도 할 줄 알아야 이 사회에서 빛나는 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더 큰 고비를 맞아야만 했어. 우리 은경이가 이해하기엔 조금 힘든 부분이겠지만, 아빠는 전라도, 엄마는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이 집안의 반대를 불러 일으켰거든.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전라도와 경상도는 대립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돈 지간을 맺고, 가정을 이루기가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란다. 우리가 예 상했던 바와 같이, 우리 또한 집안의 반대에 무릅써야 했어. 네 아빠와 나는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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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지역의 차이점을 인정했고 편견을 버렸기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이겨냈지만, 몇 십 년을 다른 지역감정으로 살아오신 기승세대 이신 너의 외가 친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그 편견을 깨시기 어려우셨던 것이야. 그래서 우리는 온 사 력을 다해 맘을 돌려 놓기 위해 노력을 했단다. 그 결과, 끝내 인정하셨고, 지금은 그 어느 집안 보다 화목하게 지내고 있어. 엄마는 이런 글로벌 시대에, 네가 만약 저런 지방색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적 편견이 있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 해. 남을 인정할 줄 알고, 나와 다르다고 하는 것이지, 결코 틀렸다고 하면 아니 된 다는 것을 네가 꼭 가슴 속에 깊이 새겨 두길 바래. 너를 낳고 난 후, 네 아빠는 너를 너무나 예뻐했단다. 우리 연경이는 엄마와 아빠 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고, 앞으로도 뒤에서 널 늘 응원 할 거란다. 엄마와 아빠는 너에게 남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앞으로도 더욱 노력하며 살 것이야. 아까 엄마가 말한, 무조건 도망가거나 피하기보다 당당하게 상황을 마주하 는 것, 살아가는 1분 1초를 낭비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많은 것을 배워가는 것, 계 획할 줄 알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생각 했던 것을 현실로 만들 어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진취적이고 도전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 남에게 다가갈 줄 아는 것, 이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꼭 가슴속에 담아두고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여태도, 앞으로도 너의 뒤에서 힘이 되어주고 사랑해줄 엄마의 마음 잊지 않았으 면 좋겠다. 힘든 일도 많이 있겠지만, 늘 현명하게 대처하며 멋있는 삶을 사는 우리 연경이가 되었으면 해. 사랑한다, 이연경. 2042년 11월 11일……. -연경이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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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대구경북한중교류협회중국지회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변 수 진

나는야 도시의 책 편집인 아침 7시 30분.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알람으로 잠 에서 깼다. 물론 잠이 많은 나에게 이른 아침의 기상은 언제나 힘겹다. 초고속으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지 만 나는 사람들에게 ‘지옥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지하철의 풍경이 좋다. 어렸을 적 ‘향수병’이라는 단어도 잘 몰랐을 때 중국으로 가 생활해서 그런지 한국의 일 상적인 모습들이 자주 특별한 것처럼 다가오곤 한다. 중국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마 치고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한지 어느덧 8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휴가철이면 자주 중 국에 돌아가 중국 친구도 만나고 또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회사에 도착하니 8시 40분. 내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메일함을 확인하니 중 국에 있었을 적에 친했던 친구의 메일이 와있다. 처음 중국에 가서 사교성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던 터에 많은 친구를 깊게 사귀지는 못했지만 이 친구는 한류에 관 심이 많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말이 잘 통했고, 공통 관심사도 가지고 있어 쉽게 친 해졌었다. 거의 유일하게 문화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친해진 친구였다. 몇 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취직까지 했지만 띄엄띄엄 메일을 주고 받아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간단하게 답장을 보내고 오늘의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한 출판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직접 쓴 글은 아니라도 내 손 을 거쳐 한 책이 완성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점심시간. 비록 일이 바빠 학창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점심시간을 기다리는 동안은 시계초침 소리가 느리게만 들린다. 점심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전 초밥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회전 초밥은 돌아가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후 시간의 일을 힘내서 소 화하기 위해서 맛있는 점심은 필수 에너지 이다. 오후에는 이번에 출판하게 될 책에 대한 회의를 했다. 이번 책을 쓴 작가는 내가 어릴 적 정말 좋아하던 책의 작가라서 작업을 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 다. 어릴 적 중국에 가서 제 2외국어는 확실히 익혔다고 생각했고 중국에 가서도 한 국어 책은 종종 읽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언어에는 큰 걱정이 없었지만 사실 영어 에는 실력도 자신감도 부족함 투성이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책 중에 영어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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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이 많았고 비록 영어 번역이 내 일은 아니지만 출판사에서 일을 하는 입장에서 더 이해하고 책을 만들고 싶어서 영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 때문이 아니라도 현대 사회에서 영어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영어 를 배우는 일은 언제나 끝이 없다고 느껴진다. 6시 반. 회의가 일찍 끝나 모처럼 이른 퇴근을 하였다. 집에 가는 길에 서점에 들 려 새로 나온 책도 보고 잡지도 한권 샀다. 사실 저번 달에 한 잡지사에서 우리 출 판사의 여성 직원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했었는데 쑥스럽지만 나에 대한 인터뷰도 조 금 들어가 있다. 이번 달 호가 출간되고 출판사로 몇 부 보내져 왔지만 소장용으로 한 부 더 사서 책장에 꽂아 놓으려고 한다. 차가 막혀 집에 도착하니 7시 반이 다 되었지만 할머니께서 저녁을 드시지 않고 나를 기다리셨다. 옛날부터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던 나지만 엄마로부터 공수 받은 천연 조미료로 오늘은 꽁치 김치찌개를 해먹었다. 사실 김치찌개는 김치만 맛있다면 반은 성공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것이 나의 장래희망 이였다면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것도 오랜 바람이었다. 다른 집에서는 어떤지 잘 모르 겠지만 우리 할머니는 세대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신세대셨고 옛날이나 지 금이나 나와 같이 책을 보고 또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같이 보러 다니곤 하신다. 주말에 영화를 예매해서 할머니와 같이 보러가는 일은 소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이다. 저녁을 다 먹고는 아까 샀던 잡지를 폈다. 256쪽 한 켠에 내 이름이 조그맣게 인 쇄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다른 직원들에 비해 분량은 짧지만 내 인터뷰 부분을 몇 번이나 계속해서 읽어 보았다.

Q. 너무 흔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출판사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을 때나 즐거울 때는 언제인가요?

A.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하는데 저는 제 일을 할 때 마다 항상 즐겁고 활기를 느낍니다. 어렸을 적에는 책을 좋아해서 작 가가 되고 싶기도 했는데 글을 쓰는 것에 눈에 띄는 소질은 안보였어요. 그런데 저 는 작가로써 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것 이외에도 그 작품을 세상에 내 놓기까 지의 과정 또한 무척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책의 표지 하나에도 그 책을 어떻게 나타내고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이 저는 정말 즐겁습니다. 물론 책이 완성돼서 서점에 진열돼 있는 것을 보면 보람도 느끼고요.

Q. 듣기로는 번역일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A. 네. 물론 손에 꼽을 정도 이기는 하지만 제 전공을 살려서 번역을 한 적이 있 습니다. 어릴 적 중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도 중국어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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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Q. 번역을 할 때는 평소의 출판사 일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나요? A. 자주는 아니지만 번역이라는 일을 하면서 책임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무 슨 일이든 책임감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번역을 할 때 혹시나 작가님의 의 도나 미묘한 뉘앙스를 제대로 옮겨내지 못할 까봐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백퍼센트 완벽한 번역은 있을 수 없지만 끊임없이 가장 가까운 뜻으로 번역하려고 노력하고 또 그만큼의 성과가 보인 다는 것을 느끼면 힘든 만큼 보람도 큰 고요. 원래는 꼼꼼한 성격이 아니었는데, 한 번 눈감고 넘어가서 조금이라도 왜곡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제 단점도 고쳤습니다.

Q.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이전의 생활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무척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전에는 좋아하는 책이 있으면 밥 먹을 때도 옆 에 두고 보면서 자주 무엇인가를 흘리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습관이 없어진 것 같습 니다. 제가 책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책에 흠집이 가거나 책이 더러워지는 것에 더 신경이 쓰이게 되고 더 주의하게 되는 것도 있고요. 책을 더 소 중히 하는 것이 달라진 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를 읽고 나니 일상이었던 매일 매일의 내 직업이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다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렸을 적 매일 손에 들고 다녔던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면서 언젠가는 이 책만큼이나 인기를 얻는 재미있는 책을 쓰는 것이 내 꿈이야. 라고 생 각하곤 했었다. 하지만 꼭 크게 이름을 떨치고 큰 업적을 세우는 것만이 성공은 아 닌 것 같다. 나는 내 장래 희망도 있었지만, 그 장래 희망을 이루는 것만이 내 꿈의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또 집에 오면 할머니와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모든 소소한 일상은 작지만 내 꿈에 빠져서는 안 될 필수 요소였던 것 같다. 요즘과 같은 백세 장수 시대에 아직 이른 생각 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내 인생에 한번은 성공 한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즐거 움에 속단 하지 말고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은 두 번째, 세 번째 성 공에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밤 11시,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하고 베게 위에 수건을 깔고 누웠다. 머리를 안 말리고 자는 버릇은 옛날부터 아직까지도 못 고친 버릇중 하나다. 내일 울릴 알 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 하다. 오늘 밤 꿈에서는 10년 후, 아니 20년 후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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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대구경북한중교류협회중국지회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최 하 나

‘사람답게’ 산다는 것 피카소 유치원에 다니던 7살 나의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가난한 가정에게 새 집 을 지어주는 내용을 담아낸 MBC 프로그램, ‘러브 하우스’의 열혈 시청자였던 10 살 나의 희망 직업은 건축가였으며,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만큼 유명세를 타고 싶 던 14살의 나는 한 방에 인생을 뒤집어 버릴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여느 어린 아이 가 그렇듯, 어릴 적 나는 되고 싶은 것이 셀 수 없이 많았고, 아직도 어린 나는 하 고 싶은 것이 많다. 여전히 세상 물정 모르게 무모하고 어리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 으나, 지금의 내가 예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18살이 된 나는 나의 구체적 인 진로를 설계해 놓은 상태이다. 나는 4년제 대학에 입학해 냉철한 공학도가 되어, 시대를 풍미하는 전자 계열 회사를 운영할 것이다. 나의 진로는 확고하고, 장래 희 망에 대한 경로를 탐색하는 데에 쏟아 부었던 아깝지 않은 내 어린 17년 시간의 매 듭을 지었다. 그러고 나니 나는 다시 꿈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데 내 꿈은 뭐지?’ 얼핏 황당할 수 있지만, 이는 결코 요상한 질문이 아니다. 말하 건대, 나에게 있어 ‘꿈’이란 하고 싶은 일, 또는 되고 싶은 것과는 별개의 목표이 다. 내가 말하는 ‘꿈’은 나의 삶의 방식, 또는 가치관의 이상향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누구나 삶을 살다 보면 거짓말과 같이 비양심적이거나 지나친 사리사욕의 추구로 인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고, 위선자가 되어버 린 본인의 모습에 분개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내가 위와 같은 행동을 저지를 때면 나의 어머님은 항상 이런 말로 나를 혼내셨다.“너 공부는 뭣 하려 하냐? 공부 때려 쳐, 인간 되는 게 먼저야.”그렇다. 인간이 되는 것, 바로 나의 꿈이다.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 꿈까지나 된다는 것이, 여느 학생들의 것 마냥 원대하 기보다는 비교적 소박하다 할 수 있으나, 내 꿈에 대해 내가 스스로 부여하는 의미 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도 훨씬 가치 있고 소중하다. ‘사람답게 산 다.’는 것이 사실 워낙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표현이라 사람에 따라 의미 해석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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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라질 수도 있다. 혹자는 선하게 사는 것, 혹은 즐기며 사는 것을 ‘사람다운’ 인생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확실컨대, 적어도 나의 어머니와 나에게 있어 ‘사람답 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 고조선으로 올라가 보자.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기 록된 단군 신화에 따르면, 한반도 최초의 국가, 조선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弘益 人間)’이었다. 홍익인간이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다.’라는 뜻으로 즉,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한다. 단군이 의도했던 이념대로, 조선인들은 위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더불어 살 줄 알았다. 높은 문명을 갖고 이웃에 그 문명과 문화를 나누어 줄줄 아는 후덕함이 있었으며, 하늘을 섬길 줄 알고 땅을 사랑할 줄 알았다. 이로부 터 알 수 있듯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서로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상부 상조(相扶相助)의 사회상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요즘의 우리 사회는 옛 우리 선조 들이 추구하던 국가 사회의 이상향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현대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람들은 ‘더 빨리’, ‘더 많이’와 같이 ‘더, 더, 더’라 외치며 갈수록 경쟁적 인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신속한 경제발전을 이뤄낸 우리 대한민국 사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비롯 되는 지나친 경쟁의식은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여서라도 이기고파 하는 인간의 과 도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지나친 욕구는 욕심이 된다. 욕심이 보편화 되어버린 현 대 사회 속에서 우리들 대부분이 점 찍어 둔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부와 명예 이다. 실로 부와 명예는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의 것을 제공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해 비싼 차와 옷으로 특별함을 드러낼 수도, 고개를 한껏 치켜 세워 눈 밑의 세상에 대한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부와 명예는 인간의 쾌 락을 충족시켜 줄 최상의 수단일 뿐이다. 진정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옛말에 ‘콩 한 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라.’고, 나눔은 인간의 가장 큰 미덕이다. 아무리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호화로운 명예 속에 있다 한들, 사람 됨됨이 가 바닥이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드라마나 기사를 보면 간혹, 세상 것에 눈이 멀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세상의 중심이 본인이고, 다른 이들은 얼핏 조연 비슷하게 여기며 사는 그런 사람들. 비교하자면, 숙제가 있는 아 이가 숙제를 미뤄두고 컴퓨터 오락에 빠진 상황과도 같다. 숙제는 아이가 해야 할 도리이지만, 오락은 아이의 쾌락을 위한 수단이다. 선생님의 칭찬은 당연 숙제를 끝 낸 아이의 몫이다. 아이가 숙제를 다 마친 후에 오락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 이듯,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한다 하더라도 후의 일이다. 인생의 우선순위로 둬야 할 것은 바르게 사는 것과, 함께 사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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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끄트머리에서야 깨닫게 되는 지, 참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젊은 날에 는 꽃다운 청춘을 다 바쳐 자신만을 위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으려 안간 힘을 쓰다 가 노년이 되어서야 손에 쥔 부와 명예를 쏟아 잃어버린 인심(人心)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살아가는 방식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는 하나, 젊어 서 출발하던, 백발이 되어서야 출발하던 모든 인간의 종착역은 ‘나눔’이라는 것 을,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잘 먹고 잘 살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성공한 인생을 흔히 ‘잘 산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물론, 그 기준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 의 일반적인 이상향이자 인생의 목표인, 부와 명예이다. 하지만, 진정 인간이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지키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가면서 나와 같 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눔’을 실천하며 지내는 것, 곧, 사람답게 살 때이다. 나는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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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강 예 지

더 높은 꿈 더 큰 꿈 “I have a dream.” 이것은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에 적힌 첫 문장이다. 마틴 루터 킹은 백인과 흑인 평등의 꿈을 꾸었고, 끊임없는 노력과 위험을 감수하며 결국 그 꿈을 이루게 되었 다. 나에게도 꿈이 있고, 미래가 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학생의 본분에 맞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지만 그 과정 속에 서 파도를 만나기도 하고 거친 풍랑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좌절하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 역경을 겪어야만 더 강한 내가 되고,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 직시’라는 말 이 있다. 현실에 직면하고 그것이 과연 맞는 건지 판단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꿈과 미래에는 현실 직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현실 직시를 했더라 면 나는 내 꿈을 꿀 수도, 내 미래를 설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Dream)과 미래(Future)를 연관 지어 생각한다. 꿈이 곧 미래가 된다는 생각 때 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 높은 꿈과 더 큰 꿈을 꾼다. 나의 꿈은 의사이다. 어렸을 적부터 꿈꿔오던 나의 미래이다. 다섯 살의 어린 소 녀였던 나는 ‘슈바이처’의 위인전을 읽고 의사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먹을 거 하 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을 거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하는,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을 위해, 그들이 사는 곳에 가서 그들을 도왔다. 그것은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이 었다. 그 때에 ‘슈바이처’라는 단 한 권의 책은 나에게 높고 큰 꿈을 심어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멋진 꿈을 가졌다고 칭찬해주기도 했고 격려해주며 응원해주었다. 내 가 순수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그런 달콤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가 의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점차 자라기 시작했고, 의사라는 직업은 성적이 상위 1%에 들어야만 할 수 있는 명품 직업임을 알게 되었다. 내 성적으로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 부모님의 믿음과 응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꿈을 창피해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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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자랑스러웠고 당당해했다. 하지만 내가 자존심이 강한 나이가 되었을 때, 내 가 절대 놓지 않고 자랑스러워했으며 응원 받았던 내 꿈이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네가 무슨 의사를 해?” 그 순간, 단 한 번에 어렸을 적부터 꿈꿔오던 내 꿈이 무 참하게 깨져버렸고 함께 자라오던 내 미래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런 순간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정말 나의 눈앞에서 유리조각처럼 의사라는 꿈과 나 자신이 깨져버 렸다. 무심코 던진 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한 마디에 처음으로 의사라는 꿈 을 가진 나 자신을 창피해하기 시작했고 ‘나는 안 되고 할 수 없구나.’ 라는 생각 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말을 한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는 분노도 느꼈지만 그건 외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머릿속과 마음속은 ‘넌 안 돼, 너의 꿈은 웃음거리야.’ 라는 말만 외쳐댔다. 그러나 절망의 늪에 빠진 건 이 때 뿐이었다. 절망은 오히려 디딤돌이 되어 산산 조각 나버린 내 꿈은 전보다 더 강하게 붙어버렸다. 물론 시간은 걸렸지만 나는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고 덕분에 내 가 더 강해지는 시간이 되었으니 말이다. 현재 나는 한국에 있는 또래친구보다 대학 에 갈 시간이 6개월 정도가 더 남았다. 긴 시간이라면 긴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릴 만큼의 짧은 시간이다. 아직까지도 내가 의사가 되기 위한 조건에는 한참 미달이다. 하지만 더 이상 절망할 시간은 없 다. '현실 직시'도 없다. 내가 얼마 남지 않을 시간 동안 해야 할 일은 2배, 3배로 노력하는 것 아니 후회하지 않을 만큼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의사라는 꿈을 이루게 되면 이루고 싶은 목표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의사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을 권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치료받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내 환자'니까 의사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사로서의 명 령을 내린다. 이건 아주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외친 의사로 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의사와 환자 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서로 사랑함 으로써 치료하는 것이지 의학의 기술만 가지고는 사람을 치료하지 못한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마치 이웃처럼 가까이에 있는 ‘사람 냄새나는’ 의사가 되어 환자를 더 높이는 내가 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둘째, ‘슈바이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의 제 2의 미래이기도 하다. 아직도 몇몇 나라에서는 우리 돈 3000원으로 치료 할 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다가 결국 더 악화 되어 사망에 이른다. 나는 그러한 나라에서 봉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의 제 2의 미 래이다. 의사라는 직업으로 충분히 누구보다 더 높은 곳에서 살아갈 수 있다. 명예 를 가지고 명성을 높이며 거기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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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소의 것으로 사람들을 최대로 도와줄 때에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치료만 하는 것뿐만 아니 라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쳐주고 나눠주며 ‘함께’살아가는 것이 나의 제 2의 미래가 될 것이다. 나는 공부를 하면서 내 미래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꿈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꿈꿔오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 하며, 결국 그 꿈을 이루고, 그 꿈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축복받은 우리의 인생 길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 ‘한 방’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방’만 을 기다리는 건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짓이다. 꿈을 향해 후회 없이 노력하자. 그리 고 꿈꿔오던 미래 속에서 멋지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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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백암복지재단이사장상 선양한글학교 10학년 박 근 형

보이지 않는 전쟁, 기아 난 지금 침대에 누워 내가 어제 빌린 책들을 만져본다. 내가 어제 빌린 “왜 세계 의 절반은 굶주려야하는가”,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나에게서 우리 로” 등의 책들은 모두 한 주제를 가리킨다. 바로 ‘기아’이다. 난 평소 이런 문제 에 관심이 많아 종종 이런 책들을 보고 세계의 기아문제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곤 한다. 나는 어릴 적 다큐멘터리에서 폐지 파는 할머니가 평생 모은 돈을 기부한 일, 자 장면 배달부의 기부, 노숙자 할머니에게 신발을 벗어 신겨준 아저씨 등을 보게 되었 고 이런 일로 나는 기부나 봉사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세계 기아 문 제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왜 우리들은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이 상황에서 다이어트를 결심하는데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는 최소한의 영양분 조차 섭취하지 못하고 죽어가야만 하는 것 일까? 예전에 홀로 거실에 앉아 두서없이 채널을 돌릴 때 내 눈에 들어온 다큐멘터리 방 송이 있었다. 그건 바로 중년정도의 아주머니 아저씨 부부가 우리나라의 각 지역을 돌며 굶주린 아이들을 도와주는 내용이었다. 그 부부는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차 에 딸려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진 굶주린 아이들을 찾아 무료 나 눔을 하며 낮 동안 번 돈으로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부부가 풍요롭게 사는 것도 아니었다. 잠은 언제나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며 식사 는 자신의 포장마차에서 해결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는 풍요로울 때조차 봉사 하는데 아까움을 느끼며 자신만이 더 잘살기를 원하는 데에 비해 자신은 힘들지언정 남들이 조금이라도 편한, 희생과 봉사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 했다. “우리가 자신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며 우리 자신을 잃는 것이다.” 라고…….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극히 이기적인 현대 사람들은 이를 실행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 두들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는 이런 사람들은 존경 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난 이 프로그램을 보며 나도 커서 존경받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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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그때 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점차 세계 기 아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고 그 뒤로부터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많 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UN농업기구는 2005년 기아로 인한 희생자 수를 집계했다. 결과, 10세 미만의 아 동이 5초에 1명씩 굶어죽고, 비타민A의 부족으로 시력을 잃는 사람이 3분에 1명꼴 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계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천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 조에 시달리고 있다. 만성영양실조란 영양실로로 인해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신체 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로 서서히 죽음을 맞거나 평생을 중증장애에 시달리며 살아가 는 것이다. 즉 이 병에 걸릴 경우 정상적으로 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블랙아프리 카의 경우 전 인구의 36%가 굶주림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다. 2000년에서 2005년 까지의 5년간 1200만 명의 기아 인구가 늘어난 것으로 보아 지난 7년간 얼마나 많 은 기아가 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우리의 이웃나라 북한도 별 다른 상황은 아니다. 북한인구의 다수가 ‘미량 영양 소’라는 만성 영양 부족에 힘들어하고 15세 미만 아동의 37%가 심각한 만성 영양 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아기를 낳은 수유모의 30%가 영양실조로 인해 빈혈 증세를 보이며 아기들에게 충분한 젖을 주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북한주민들은 이런 극악한 현실에서 땅의 풀을 뜯어먹거나 지나가는 쥐를 잡아먹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 이런 기아문제의 원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 다. 그중 세계적인 빈부격차가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부유한자들은 더욱더 부유 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은 더욱더 가난해지는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갈수록 심화 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한계이기도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까지도 많은 노력과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확실한 해결책도 매우 찾기 어려운 문제인 것으로 알고 있다. 빈부격차의 아이러니한 점은 가진 자들은 가진 것이 넘쳐흐를 때 에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는 부스러기조차 없어 기아와 가난의 고통에 허덕이다 아사 에 이르는 현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한 나라의 문제일 뿐 만 아니라 각 나라 간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문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가진 자는 더욱더 비만해져서 각종 성인병, 소아비만 같은 영양과잉 으로 인한 병에 시달리고 있는 반면, 지구의 반대편의 어느 가난한 이들은 하루에 한국 돈 천원도 되지 않는 일당을 벌기위해 10살도 안된 어린아이들마저 하루 종일 무거운 벽돌을 나르며 그 돈으로 일가족 6, 7명의 하루 끼니를 연명하고 있는, 현재 도 없고 미래는 더 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암울한 기아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이런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공평하지 못한 교육의 기회도 문제이다. 가난한 자들은 보통 농사를 지으면서 생 계를 유지하는데, 그중 많은 농부들은 기후, 종자, 해충 등의 각종 농업지식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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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들인 노력에 비해 매우 적을 소출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단 농 업지식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교육도 부족하여 사회경제적 지위상승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전에 필리핀의 어느 가난한 수상가족 이야 기를 본적이 있다. 그들은 한 쪽에선 대소변을 강물에 쏟아내고 옆에서는 그 물을 떠서 아무런 여과 없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각종 피부질환 이나 질병에 시달리는데, 그 피부질환이나 질병들이 어쩔 수 없이 그냥 방치되어 더 큰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지도자의 개혁의지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부르키나파소라는 작은 나라에 상카라라는 개혁자이자 국가의 대통령이 있었다. 이자는 국내의 30개 행정구 를 자치제로 전환시키고 주민들 자신이 그 지역을 다스려 도로건설이나, 수도 사업, 보건의료사업 등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공공서비스를 실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실행시킨다. 그리고 상카라는 철도는 건설하는 사업이나 국가의 인두세를 폐 지시키는 정책 등 국가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에도 착수한다. 그중 인도세의 폐지는 가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는다. 상카라는 이외 개간 가능한 토 지의 국유화 등 기아문제를 해결시키기 위해 많은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이런 상카 라의 무단한 노력으로 4년도 지나지 않아 농업생산량이 크게 늘고 국가지출이 줄어 도로나 상수로 건설, 농업교육들에 우선적으로 투자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눈에 띄는 지도자들은 다른 나라의 눈총을 받기 마련이었고 젊은 나이에 주위 국가의 사 주로 죽임을 맞는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를 발굴하고 지킬 수는 없는 것일까? 지구의 환경파괴가 초래한 사막화문제 또한 기아문제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현재 계속되는 사막화의 진행으로 인해 수많은 농민들이 목초지나 경작ㅈ를 잃고 생 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세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도 제 시해 보았다. 그러나 후에 막대한 자금문제에 부딪히게 되자 모두 손 놓고 말았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사막화가 기아문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줄 모르고 그저 먼 이야 기로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책에서 읽은 내용은 내게 사막화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책속의 사막화 문제에 맞닿은 사람들은 먹을 게 없어 흰 개미라도 먹기 위해 땅에 쭈그려 앉아 개미집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난 왠지 책을 읽으며 그 모습이 자꾸 상상이 가서 읽는 내내 눈물이 흘렀었다. 이런 사막화문 제... 우리가 생활 속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위에 열거한 기아의 원인인 빈부격차나 교육의 부족, Leadership의 부재와 환경 적 기후 변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며 어 떠한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 일까? 몇 달 전에 법률스님이 나온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법률스님이 언젠가 인도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을 때 인도의 카스트제도의 가장 아랫자락, 소, 돼지의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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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취급조차 받지 못하며 언제나 짓밟히고 동냥하는 것조차 맘 편히 하지 못하였고 스님은 이런 불가촉천민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해야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저 기부를 하고 가버린다면 지금으로부터 며칠 정도만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내리신 결론, ‘먹을 것 등을 주긴 줘야한다. 그렇지만 거지가 되지 않게 도와줘야한다’ 스님은 아이들이 올바르 게 성장할 수 있게 돕자는 구호의 원칙을 세운다. 그리고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학교 를 지어 그들을 교육시키고, 급식 등을 나눠주어 주말에 배 굶을 아이들을 위해 봉 사하였다. 실로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도운 법률스님의 모습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단순한 봉사나 기부보단 좀 더 근원 부터 도와 그들이 스스로 일어 설 수 있게 해주는 것. 언제나 금전적인 기부 따위만 생각하던 나에게 법률스님의 방식은 큰 놀라움이었고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기부란 꼭 엄청난 돈을 기부해야만 그렇게 불리 우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속에 박혀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옷이나 화장품을 하나 사 지 않아서 모은 3만원이 5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될 수도 있고 학교를 가고 싶 지만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학비가 될 수도 있으며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비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없어도 있어도 그만인 이 돈들이 한 가족의 생계유지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봉사도 마찬가지다. 지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짐을 들어드리는 것도 봉사이고 불편하신 분이 길 건너는 걸 도와주는 것도 봉사이다. 이렇게 기부나 봉사는 꼭 무리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천으로 큰 도움을 주는 것 이라고 생 각한다. 난 언제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현재는 인터 넷 사이트를 열어 비밀게시판으로 익명의 사람들의 고민들을 받고 그것들을 조금이 나마 위로해주고 있으며 가끔씩 택배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들도 보내 주고 있다. 이런 건 기부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여 그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또 한 가끔 있는 기부에도 빠지지 않고 계속하여 참여하고 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중국, 내가 이 커다란 나라 중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도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중국친구 들에게 세계의 기아 문제에 대해 알리는 것이었다. 내 부족한 중국어 실력으로는 세 계의 참혹한 현실을 완벽히 설명해 줄 수는 없지만 최대한 그들의 슬픔을 알려주고 자 노력 중에 있다. 그리고 이런 내 노력은 조금씩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중국아이들끼리 모여 학교도서관에 들려 기아에 관련된 책들을 빌려보고 그것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을 보았고, 내가 어떻게 기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냐고 물었었 다. 그리고 그때 친구들의 내 덕분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는 대답은 나에게 큰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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쁨을 주었다. 그 조그만 성과에 내가 느낀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이 렇게 조그만 것이지만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이 참혹한 현실을 더 열심히 알려보고자 한다. 또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중국어나 영어공부에 좀 더 힘을 쏟아서 원 어민처럼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일본어도 배우고 여러 국가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과 책을 접하여 그 나라의 기아문제에 대한 대응방식도 알아보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국가에서 실행하는 국제적인 봉사활동에 참가하여 그들의 슬픔을 몸으로 느 껴보고 책으로는 느낄 수 없던 감정도 느껴보는 것이 내 계획이다. 후에는 나도 내가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의 부부처럼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가 난한 아이들을 찾아 잠시라도 그들의 굶주린 삶을 따뜻하게 해주며 내가 살면서 배 웠던 모든 것들을 가르칠 것이다. 비록 내가 조금 힘들지라도 남들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은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우리들의 기아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나의 작은 소망은 그저 누군가 이 글을 읽고 그 불쌍한 아이들을 진정 아이들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봤으면 하는 것 이다. 누군가는 끝내야 할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실천할 수 있었으 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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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모두하나교육회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윤 소 연

2012년의 소연이에게 소연아 안녕? 난 20년 후의 윤소연이야.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위해 준비하는 가 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너에게 내가 조언을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썼 어. 믿지 않을 너를 위해 몇 가지 물어볼게. 지금 넌 혹시 너의 진로에 대하여 갈피 를 못 잡고 우왕좌왕 하고 있지 않니? 겉으로 드러내는 너의 모습과 실제 너의 자 아와의 괴리로 괴로워하고 있지 않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귀찮아서 미루 다가 결국 마무리 짓지 못하는 너의 게으름을 혐오하지만 고치지 못해 고민하고 있 지 않니? 넌 아마 정곡을 찔려 당황하고 있을 거야.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하는 이 야기들 잘 봐줘. 난 2012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꿈이 없었어. 지금 너의 모습이지. 확고 한 목표와 신념을 갖고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했었어. 하지만 그거 아니? 이제 망설일 수 있는 시간은 없어. 넌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 에 책임을 져야 해. 넌 곧 성인이니까. 너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아니? 생각을 너 무 많이 한다는 거야. 강을 건널 때 용기 내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사람이 있 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 강을 건너는 것의 위험성과 갖가지 변수들을 생각하다가 지레 겁을 먹어. 그리곤 이 강을 꼭 건널 필요가 있나? 내가 이런 위험을 무릅쓸 정 도로 가치 있는 일인가? 하고 생각하며 결국 건너지 못하고 돌아가지. 이게 바로 너 의 현재 모습이란다. 너의 자기 합리화가 단기적으로 너에게 긍정적인 힘을 줄진 몰 라도 결국은 너의 정신력을 파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것을 명심해. 실패를 두려 워하는 사람은 절대 성공하지 못해. 넌 앞으로도 살면서 계속 여러 강들을 만나게 될 거야. 그 때 그냥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가봐. 넌 어느새 강을 다 건넜을 걸? 모든 일이 그래. 생각은 인간을 겁쟁이로 만든단다. 사실 막상 부딪혀보면 정말 별일 아닌데 너의 생각이 그 일을 크게 만드는 거야. 너 의 최종 목표는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고 싶지만 생각 하면 할수록 가야 하는 길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만 느껴져 너의 목표가 너무 거대하 고 높아 보일 거야. 무엇을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답답하고 제 자신이 너 무 작고 하찮게 느껴지고.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지? 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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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세워보렴.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는 성취감을 느껴봐. 세상이 달라 보이고 살 맛 날걸? 그러면서 네가 정해 놓은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거야. 너에게 있 어 현재 최종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거잖아. 그렇다면 단기 목표는 무엇이 좋을 까? 일단 숙제를 꼬박꼬박 해가고 수업시간에 성실하게 참여해서 선생님께 칭찬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봐. 그리곤 목표를 더 나아가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성적 잘 받 기로 정해봐. 하나씩 그리고 하나씩 이뤄 나가다 보면 어느새 실력이 쌓여 있을 테 고 넌 네가 가고 싶어 하던 대학교의 교정에서 학생증을 매고 산책하고 있을 테니 까. 이젠 너의 내면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 요즘 네가 주로 고민하는 내용 이 뭐니? 난 너의 나이 때 선생님들로 부터 참 과분할 정도의 평가와 칭찬을 받았 던 걸로 기억해. 하지만 넌 그 평가가 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왜냐하면 넌 너의 행동들이 다 가식이라고 생각하니까. 집에서는 부모님께 대들면서 밖에서 다른 어른들껜 예의 바르고 공손한 소연이, 착한 소연이라고 정의됐다는 모순에 머릿속이 많이 복잡할거야. 하지만 소연아 이거 하나만은 꼭 명심해. 넌 가식적이지 않아. 부 모님께 가족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너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 하지 않았던 거 고, 편하니까 집 안에서 밖에서는 못하는 행동들을 하고 그랬던 거잖니. 그렇다고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해. 넌 매우 잘못 행동하고 있는 거니까. 이제부터 집 에 들어가서 엄마 집안일 좀 도와 드리고 너의 마음도 좀 표현해 봐. 짜증도 내지 말고. 이렇게 집에서의 네 모습을 조금씩 계속해서 바꿔 나가봐. 언젠간 밖에서의 소연이와 네가 생각하는 너 자신의 모습이 일치되어 있을 거야. 그 땐 마음껏 주변 어른들의 칭찬에 기뻐하렴. 마지막으론 널 좀 혼내야겠다. 너의 고질병인 게으름. 아침에도 오 분만 더 자겠 다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가 깜빡 잠들어서 지각을 하곤 하잖아. 사실 그건 아직 지금의 나도 완전히 고치지 못했지만 넌 현재 학생이야. 학생이 수업시간에 늦는다 는 것은 본인의 본분을 잊었다는 것 아니겠니? 앞으론 그런 일 없도록 해. 공부할 때도 너의 그 게으름은 한 몫 하지. 넌 선생님께서 장기적인 숙제를 내주시면 그간 너는 어떻게 해왔니? 거의 매번 숙제 검사하기 하루 이틀 전에 몰아서 했잖아. 이 게 얼마나 아까운 낭비인줄 아니? 넌 너의 능력도 제대로 발휘 못했을 뿐더러 더 쉽게 힘 덜 들이고 할 수 있었던 일을 더 힘들게 한 거야. 이심전심은 없다고 네가 아무리 속으로 잘나고 영리하다고 해도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넌 그냥 그런 평 범한 아이로 기억되는거야. 사람들은 결과로 그 사람을 정의내리거든. 너의 그 게으 름을 달리고 있는 너의 발목에 달린 모래주머니라고 생각해보렴. 더 빨리 달릴 수 있는데 넌 왜 그 모래주머니를 풀지 않고 있는 거지? 너는 달리는 것도 모자라서 훨훨 날아가야 할 때 인데 그 시간들을 아깝게 흥청망청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미래 의 너로서 정말 화난다. 지금 나에게 그 시간을 준다면 난 정말 소중하게 그리고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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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후회 지금 와서 소용없겠지. 이제부 터, 그러니깐 지금 네가 이 편지를 다 읽는 순간부터 시간을 절대 헛되이 쓰지 말고 의미 있게 보내봐. 그리고 좀 더 계획적으로 살아봐. 넌 지금 즉흥적인 너의 삶에 나름대로의 만족을 하고 있지만 너의 여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이 너의 다시 오지 않을 젊은 날을 갉아 먹고 있다는 사실 알아둬. 여유로운 삶은 언제든지 네가 원할 때 살 수 있어. 하지만 치열하고 생산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잖니. 네가 빈둥거리며 보내는 시간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획을 짜서 생활 하는 거 야. 이렇게 계획적으로 생활하다 보면 네 생활의 생산력은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 게 될 테니까. 내 얘기 어땠니. 혹시 기분 나빴니? 좋은 약이 입에 쓰듯이 내 이야기도 너에게 도움이 됐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편지를 쓰면서 잠깐 이나마 어린 시절로 되돌 아간 것 같아 너무 즐거웠단다. 너 지금 정말 보석 같은 나날을 살고 있다는 거 아 니? 그 소중한 시간을 작은 일에 화내고 신경 쓰면서 보내기엔 아깝지 않아? 이쯤 에서 나에게 묻고 싶겠지. 당신은 지금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배우자를 만나서 어 떻게 살고 있냐고. 미안하지만 난 이것들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을 거야. 나 의 말에 네가 한정되고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 너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열어놓고 싶어. 그리고 네가 앞으로 안정적인 삶보단 도전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소연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넘어지는 것을 두 려워하지 마. 넘어지는 너의 모습을 초라할 지라도 나중에 더 큰 네가 일어설 테니 까.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성공은 아니듯이 오늘의 실패도 내일의 실패는 아니란다. 넌 젊으니까 뭐든지 맘만 먹으면 할 수 있어. 너 자신을 믿고 자신감을 갖고 당돌하 게 살길 바라. 힘내. 파이팅. 2032년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윤소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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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모두하나교육회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1학년 지 은 찬

소소리바람 결국 버튼을 눌렀다. 안쪽 용수철이 헐거워져 누르면 들어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컴퓨터 본체 전원 버튼이다. 바탕화면의 인터넷 아이콘을 빠르게 더블클릭하고는 평소처럼 지뢰 찾기 게임을 실행한다. 그사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창이 열렸다. 갑자기 모니터 안에 붉은색인지 녹색인지 모를 무언가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부산항에는 소소리호가 정박되어 있었다. 배 중간에 높이 솟은 크레인과 일관성 있는 회백색의 선체가 저 멀리 동쪽에서 비치는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장엄하고 청 량해 보인다. 이곳의 오랜 텃새인 괭이갈매기들은 엷게 불어오는 해풍에 몸을 맡겨 오륙도 등대섬에서부터 날아오는 모양이다. 곧 선원이 모두 올라탄 배의 닻이 오른다. 소소리호는 ‘불타는 얼음’이라고 불 리는 엄청난 잠재적 가치를 가진 차세대 연료인 메탄 하이드레이트 채굴에 최적화된 대한민국의 초대형 시추선이다. 지난 2023년 세계 최초 시험채취 성공 후 수 년이 지나 오늘 본격적으로 엄청난 양의 가스가 매장된 동해 연안으로 채굴을 나간다. 승 선한 이백여 명의 여러 나라에서 온 전문적인 기술자 선원들 중 유독 건장한 서양인 들 틈에 비교적 왜소한 체구의 젊은 한국인 한명의 모습이 눈에 띈다. 짙은 잿빛 제 복의 금빛 견장이 그를 그렇게 두드러져보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가슴 오른쪽에 패 용된 명찰에는 흰색 바탕에 검정색 고딕체로 ‘지 은 찬 / JI’라고 적혀있었다. 8 년간 노르웨이 원유시추선에서의 경험과 함께 승선한 기관사 은찬은 가스저장소 관 리자이자 기관 총괄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배의 육중한 출항을 느끼고 있다. 두 달 후, 독도에서 정남쪽으로 80해리 떨어진 곳에 위치를 잡은 소소리의 선중 사우나에서 은찬은 노르웨이 해양플랜트 지질학자 베링 씨와 함께 온탕에 몸을 담근 채 출항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베링 씨는 은찬의 소소리호 2 인실 숙소 룸메이트이자 지난 원유시추선 작업 때도 같은 배에서도 잠시 같이 일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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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동료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이제 시추위치도 잡았으니 심해 배 밑쪽 바닥에 빨대를 꽂아야겠군요.” 베링 씨가 얼굴가득 활기를 띄며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베링 씨는 이제 할 일이 끝나 다시 육지로 되돌아가실 생각에 무척 기쁘신가봅니다.” 은찬이 베링 씨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부러운 듯이 말하였다. “아,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더욱 고생하실 분을 앞에 두고 저도 모르게…….”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두 달 동안 수고하신 포상을 받으시는 게 당 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방금 말하신 빨대는 몇 호 파이프를 말씀하시는 것 입니까?” 은찬은 앞으로 자신이 짊어질 이 혁신적인 일에 부담을 느꼈는지, 일상적인 대화대 신 지질학적 조언을 구하고자 베링 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메탄 하이드레이트의 낮은 압력과 고체로써의 특성을 볼 때 3호가 가장 적당하다 고 봅니다.” “3호라고요? 그 정도로 가는 지름의 드릴파이프로는 달걀로 바위치기 격으로 동 해 지각에 흠집조차 내지 못 할 텐데요?” 은찬은 베링 씨의 견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는지 흥분하며 탕에서 벌 떡 일어서며 말하였다. “아닙니다. 비록 제가 그 쪽에 대해 미스터 지 당신보다 기관적인 지식은 짧을지 모르지만 제가 지난 30년간 시추작업을 겪어온 바로는 동해와 비슷한 두께의 지각 을 3호로 뚫어 성공적으로 채굴되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신이 지금껏 계획하고 생각해 왔던 결정을 굳게 믿고 있던 은찬이었지만, 해양 지 질학부문에서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는 베링 씨가 명백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 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새벽 3:47, 바로 당일 예정된 시추작업에 써야 할 드릴파이프의 적합성 때문에 은 찬은 밤을 설치며 독방 작업실의 공학 컴퓨터 앞에서 모니터를 앞에 두고 고뇌에 빠 져 있었다. 잘못되면 시추선이 침몰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 지만 지금껏 해왔던 작업을 지체할 수는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전에 성공했 던 2023시험채굴 또한 사실상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는 지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 에 유래가 없는 이번 동해 채굴은 소소리호의 기관장 지은찬, 역시 그의 책임이 막 중한 상태이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계산에 문제가 있지 않다면 파이프는 5호를 써야만 가스 추 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니라면? 만약 지난 2013년 일본의 아이치현~미에현 해저 시험채굴의 실패 때처럼 재해가 발생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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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은 지난 2013년 일본의 세계 최초로 메탄하이드레이트 시험채굴 중 비슷한 문 제로 발생한 진도4.7의 지진을 떠올렸다. 지진에 항시 대비 중인 일본이라 인명피해 는 없었지만, 재산피해는 적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만약 이 시추작업으로 그와 같은 일이 생기게 된다면 일본에 비해 대비가 미흡한 한국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 인지 는 짐작하기 힘들다. 또한 발생할 재해의 정도 역시 예측 불허이기 때문에 강진이나 심지어 해일이 발생할 지도 모를 사정이다. 아마 커다란 피해를 비껴갈 수 없으리 라. 은찬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위해 걸어온 시간들은 잠 시 되뇌어 본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장본인은 원치 않 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은찬의 누나가 입학함으로 처음 접했던 한국해양대학교. 곧 꿈을 해양플랜트 기관사로, 해사대학 진학을 목표로 설정하여 중국 선양이라는 타국 에서 공부했던 고등학교 2,3학년 시절. 대학 생활이 만만하지 않아 멀리계신 어머니 와 통화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던 일. 실습 기관사로 브라질에서 생활했던 2년과 그 후 정식 기관사로 노르웨이 시추선에 승선했던 날들. 그리고 오랜 인내 끝에 자신이 뚫은 지각 밖으로 기름이 처음으로 분수처럼 솟던 장면……. 번쩍, 순간 은찬의 눈이 뜨였다. 굳은 결심을 한 듯. 잠시 후 그는 진정된 모습으 로 다시금 눈을 감고 무릎 위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다. 소소리호 선체 위 구름 한 점 없는 상공에는 몇 대의 헬리콥터가 떠 있다. 카메라 가 달린 헬기도 두어 대 보인다. 정착된 소소리 하반부에서부터 바다 바닥까지 이르 는 거대한 파이프의 형체가 이제 보니 마치 박테리오파지가 숙주세균에게 붙어있는 모습을 꼭 닮았다. 해저 지각에 드릴파이프를 꽂은 지 이틀째인 현재, 나선형의 파 이프는 지구의 중심 쪽으로 아주 조금씩 깊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아 무런 변화나 미동조차 감지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은찬은 초조한 마음으로 소소리 난간에 기대어 있다가 중천에 높이 떠있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눈살 을 찌푸리며 4층 기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관실 안에는 모든 작업이 자동화 시 스템으로 운영되는 모습이 모니터링 되고 있었고, 기관사들은 그것들을 유심히 살피 고 있었다. 근무 중인 기관사들을 격려하고 기관장실로 들어간 은찬은 자신의 의자 에 털썩 앉았다. 그러나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문 밖 기관실에서는 갑자기 웅성거리 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관장님! 지금 레이더에 정체불명의 물체가 감지되었습니다!” “정체불명의 물체라기보다는… 너비 13m, 높이 1500m의 거대한 회오리바람, 곧 용오름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네 시 방향 8km 밖에서 출몰하여 시속 121km로 소소 리호를 향해 3분 내로……” 은찬은 급하게 기관장실 문을 열고 나가 레이더를 확인했다. 틀림없다. 소소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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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소소리호가 기관을 돌리며 뿜은 열 때문에 생성된 놈이 분명하다. 비껴간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만약 중추부에 관통이라도 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높다. 현재로써는 고정되어있는 시추선 안에서 어찌할 방도가 없다. 선장실에 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모든 기관의 가동을 중지하고 무사히 바람이 비껴나가길 바 랄 수밖에. 다행히 바람은 중간에 경로가 살짝 바뀌어 소소리호 측면에 가벼운 손상을 입혔을 뿐 중추부의 피해는 없었다. 은찬은 다시 시추 작업 가동을 시작하기 위해 기관장실 의 녹색 재가동 버튼을 누르기 위해 오른쪽 검지를 가져갔다. 버튼을 누르려는 순 간,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의 눈앞에는 활성화가 되지 않은 모니터가 마지막 불꽃까지 다 태워버린 벽난로 속의 잿더미처럼 간절히 생명을 바라고 있는 듯 보였다. 결국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모니터 안에 붉은색인지 녹색인지 모를 무언가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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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모두하나교육회장상 선양한국국제학교 10학년 정 선 경

지금과는 다르게 나의 꿈을 향해 달려갈 것 입니다. 어느 사람들이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번쯤 자신들의 꿈과 미래를 생각해본다. 나 또한 지금 이 [한민족 글짓기 공모전]을 통해서 자세히 나의 꿈과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나는 아직 삶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17년 동안 살아왔고, 10년 가까이 학교를 다 니며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워왔다. 그리고 수 많은 꿈들을 가지고, 나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상상을 해왔었다. 물론 어릴 때 말이다…. 어릴 적 즉, 내 가 초등학교 생활을 해왔을 때는 아무것도 몰라 철없이 이 꿈, 저 꿈들을 생각했지 만 지금은 많이 다르다. 현재 지금의 나는 예전 어릴 적과는 다르게 생각만 가지는 것이 아닌 나의 꿈과 미래를 확실히 정해야 할 시간이다. 나는 지금까지 고등학생이 라는 신분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다양한 진로교육들과 여러 테스트들을 봐왔지만 아 직까지 확실한 꿈을 정하지 못해 나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살짝 조급하면서 천천히 나의 꿈을 생각하려고 한다. 나는 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의 꿈은 한의사로 결정짓고 있었다. 정말 지 금 생각해보면 우습기만 하지만 한의사가 꿈이었을 때는 정말로 간절하고 현실성이 없었지만 이것저것 따져 보면서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어서, 대학 특례, 대학 졸업, 한의사가 되는 길, 한의사 자격 등 여러 가지들을 따지고 인터넷으로나마 알아보았 었다. 아마 내 주위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공부도 열심히 하 지 않고, 내신 관리도 하지 않고 꿈만 크게 가졌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이 다가와 큰 꿈이었던 한의사란 목표는 산산이 부서지 면서 포기를 했다. 꿈을 크게 가져도 현실성이 없으면 그 꿈은 모두 헛된 것이라 생 각이 들었다. 그럼 한의사가 꿈이 아닌 현재는 솔직히 나도 나의 꿈과 목표를 잘 모른다. 다만 그냥 생각만 해둔 목표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현재의 목표도 지금의 나에게는 무리 일 듯 싶지만 노력은 해 볼만 하다. 나의 현재 목표이자 꿈은 사회복지사이다. 어떻 게 보면 단순 별 것 아닌 꿈같지만 나에게는 좋은 꿈이자 목표이고 나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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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복지사가 현재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꼭 있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된 다. 우선 사회복지학이란 산업화와 현대화에 따른 가족 및 아동문제, 노인문제, 청 소년 비행문제 등 많은 사회문제들의 해결방법을 연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학문이다. 이로서 사회복지사는 사회에 정말 꼭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만 약 사회복지사란 직업 자체가 없다면 ‘사람들의 수많은 고민과 사회적 갈등을 누가 해결해주고 누가 알아주냐’라고 생각된다. 나도 포함해서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 면서 많은 갈들을 겪고, 많은 감정들이 생기면서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과 갈등이 생길 때, 도와주는 사람들이 바로 사회복지사들이다. 나는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 이는 직업이지만 이 사회복지란 정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사회복지사 라는 꿈을 가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우선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서는 석사과정의 자격증이 있으면 제일 유리하다고 하는데, 현제 나의 실력으로는 너무나도 크게 무리일 듯싶다. 솔직히 지금 나는 현 재 공부도 안하고, 쉬는 시간이 있다하면 핸드폰을 꺼내 친구들과 문자메시지를 주 고받으면서 수많은 잡담을 하고,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작 나에게 불필요한 것들만 들여다보고 있다. 또한 이런 한심한 짓들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있지 만 아쉽게도 나는 저 무리 속에 속하지가 않을뿐더러 내신관리는 전혀 하지 않고, 특례에 관여된 공부란 공부는 시작도 하지 않고 전혀 손을 놓고 있다. 순간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의 내가 쓸 떼 없이 꿈만 크게 가지고 어 리광과 고집만 부리는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꿈을 꾸면 서, 미래를 상상하면서 한 일을 전혀 한 가지도 없었다. 예전에 내가 한의사란 꿈에 정신이 팔렸을 때도 그 한의사에 대한 정보 몇 가지만 알아보고, 좀더 자세하게 파 고들면서 나의 꿈을 위해서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실천하는 따위의 노력도 하지 않으 며 심지어 꿈을 위한 준비라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냥 그렇게 꿈만 크게 꾸는 것이었다. 그저 어린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처럼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어린아이와도 같이 생각되면서 지금부터라도 나의 꿈을 위해서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된다. 이번에도 한 발자국, 한 걸음씩 나의 꿈과 미래 를 위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저번 한의사의 꿈처럼 산산이 조각나는 꿈이 될 것 같 다. 그런 일은 다신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스스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고, 한 걸음씩 내내딛어 할 것 같다. 나는 며칠 전 학교에서 [사람들의 꿈]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의는 내가 들어왔던 명사초청 되셔서 강의를 들려주신 분들과 다른 강의였다. 그 강의는 다란 강의들처럼 누구나 아는 ‘공부만이 살 길이다’ 또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실력을 쌓아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말들의 내용이었지만, 며칠 전에 들은 강의는 꿈을 ‘크게 오래 꾸면 언젠가는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명언과 강사 님의 꿈이 이뤄진 사례들을 들려주시면서 꿈을 간절하게 꾸면서 조금만이라도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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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반드시 늦게라도 꼭 이뤄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는 말씀들을 많이 해 주셨다. 이에 나는 순간 ‘나도 꿈을 크게만 가지지 말고 길게 꾸면서 간절 히 원하면 이뤄질까? 나도 나의 꿈을 위해서 조금만이라도 노력해볼까? 내가 지금 까지 노력해보는 것들은 결코 후회되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더욱이 발전하는 사회에 꼭 필요한 사회복지학은 여성들에게 좋은 직업으로 꼽히고 있으면서 경쟁력이 세지고 있는 가운데 내가 계속 게으름을 피우면 나는 절대로 나의 꿈을 이룰 수 없을 거라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이 꿈을 위해 한 발자국 두 발자국씩 나아갈 때 나는 어서 빨리 나만 의 꿈만을 위해서 달려갈 수 있도록 기초부터 한 걸음씩 걸어야 할 것이다. 또한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설마 내가 또 말만 거창하게 하고, 실제로 실천하지 않겠지?’ 라는 생각들이 드는데, 정말 이번에는 말 뿐만이 아닌 사회복지에 관한 정보들을 모으면서 내신준비도 하며, 틈틈이 나의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길들을 찾아서 좁혀가 나의 꿈을 꼭 이뤄야 하겠다. 내가 지금까지는 정말로 진실로 꿈만 꾸면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나의 미래가 다가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루라도 빨리 나의 길을 찾아 달려 나가야 할 것이다. 우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사회복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보다는 학교 생활 을 충실히 하면서 내신관리를 척척 해야 한다. 어느 곳을 가도 제일 중요한 것은 학 창시절이라 했다. 학창시절을 알아보는 것은 생활통지표…. 따라서 내신성적만이라 도 잘 관리하면 나의 학교 생활은 거의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으니 다른 공부를 못 하더라도 학교 내신만 잘 봐야 될 것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에 온지 얼마 되지가 않아 나는 한국의 수능 과 재외국민 특별 전형인 특례와 엇갈리고 있다. 나는 처음 중국에 오기 전에는 특 례전형이 수능보다 지필고사는 많아야 세 과목 정도만 보니 아주 쉬울 것이라 생각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특례전형이 수능보다는 여유로워 보여도 특례는 특례전형으로 가는 사람들, 또는 같은 학과끼리는 경쟁력이 세고, 지필만이 아닌 면접 또한 있어 긴장 감은 수능보다 몇백 배가 될 것 같다. 따라서 조금 힘들더라도 나는 내 꿈을 절대로 저번과 같이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한 걸음 나의 꿈과 미래에 다가가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꿈을 꾸며 준비를 하면 언젠가는 꼭 반드시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3, 4 년 정도 뒤면 내가 대학생활을 하고 있고, 내가 원하는 사회복지학과에 들어 가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사회복지와 관련된 자격증들을 취득하기 위해 또 많은 공부를 할 것이다. 대학생활은 현재 고등학교보다 힘들겠지만, 잘 적응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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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사회생활을 위해 많은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나의 성격은 지금보다 더 활발해서 사람들을 잘 대하여 사회복지사에 걸맞는 멋진 대학생 여자가 돼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자니 가슴이 두 근 두 근 세 근 네 근 설레고 있다. 평소에는 꿈과 미래에 대해서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지만 이 [한민족 글짓기]를 통해서 생각할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 솔직히 처음에 이 글짓기 공모전에 제출할 이 글을 쓰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닌 학 교 국어담당교사 선생님의 제의로 썼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마치기 전에는 ‘이 글을 왜 써야 하나 이 글을 써서 뭐가 좋을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만이 있었다. 하 지만 정말 이 글을 마치고 나니 내가 글솜씨는 아주 많이 없지만 글을 쓰면서 나의 꿈과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에게도 꿈이 있구나’라는 기쁜 마음이 든다. 다음에 또 이 글짓기 공모전이 열리면 나는 누구보다 먼저 글을 멋있게 쓰고 다시 한 번 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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