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리더십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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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리더십 아카데미 <율곡의 제자가 되라!>


아카데미 일정 구분

시간 08:20~ ~09:00

2일차

수원 출발

장소

비고

수원 중기센터

성균관 도착

09:00~10:50

【체험 프로그램】 ① 우리옷 바로 입기(학생만) ② 배례법 및 성균관 탐방

11:00~12:00

지지향 HOTEL 이동

12:00~13:00

숙소배정 및 점심식사

~13:50

1일차

일정 및 내용

성균관

성균관 전례위원 예절강사 인솔강사 차량 내 설명

지지향 HOTEL 內

자운서원 도착

전용버스

14:00~17:00

【견학 프로그램】 ① 자운서원 (율곡기념관, 가족묘, 서원 견학) ② “율곡과 신사임당을 찾아서”게임 ③ 화석정

17:00~17:40

지지향 도착

18:00~19:00

저녁식사

지지향 HOTEL 內

19:00~20:30

【강의 프로그램】 ① 특강: 글로벌 시대와 율곡사상 ② 나의 포부→발표

지지향 HOTEL 內 (2층세미나실)

성신여대 한문학과 교수

20:30~22:00

'레크레이션 및 골든벨 퀴즈 대회'

지지향 HOTEL 內 (강당)

레크레이션 강사

22:00~

취침

07:00~08:00

아침식사, 산책

지지향 HOTEL 內

08:00~09:30

【특강 프로그램】 “율곡을 취재하라" 율곡이 된 나의 모습 (발표)

지지향 HOTEL 內 (2층세미나실)

전문강사

09:30~11:00

【체험 프로그램】 명상 및 기체조 또는 다도체험 등

지지향 HOTEL 內 (강당)

전문강사

11:00~12:00

수료식 및 후기쓰기

지지향 HOTEL 內 (2층세미나실)

인솔강사, 담임

12:00~13:00

점심식사

지지향 HOTEL 內

13:00~15:20

【견학 프로그램】 임진각, 오두산 통일전망대 견학

임진각, 오두산전망대

15:20~16:00

성균관 도착

일부해산

16:00~17:00

경기관광공사 도착

수원 중기센터

자운서원, 화석정 등

문화관광해설사

문화관광해설사, 영상관람, 견학


제 1부 성균관이란? 1. 명칭

성균관은 고려말부터 국자감의 명칭을 개칭하여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를 조선시대에 도 계승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간혹 국학(國學), 태학(太學), 국자감(國子監), 반궁(泮 宮), 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명칭의 뜻과 유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균관 명륜당> 2. 뜻과 유래

- 국학(國學) : 국가가 건립한 학교라는 뜻. 중국 [주례]의 '국유학(國有學)'에서 유래했다. - 국자감 (國子監): 귀족 자제의 전용대학이라는 뜻. '국자'란 주(周)나라 귀족의 적자 를 우대하 여 부르던 이름. 중국 고대에 15세 이상의 천자의 자식들과 귀족의 적자, 그리고 민간인 중에서 매우 우수한 자를 대학에 입학시켰는데, 입학자가 많아지자 고급 귀족의 자제만을 위해 국자학을 따로 세웠다. - 반궁(泮宮) : 성균관 터는 전례적으로 물이 둘러 흐르는 곳을 택하였음. 개경과 서울 의 성균관은 모두 서쪽에 개울이 있다. - 현관(賢關) : 대학은 어진 선비의 길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뜻. 중국 [한서]의 "대학 자(大學者) 현사지소관야(賢士之所關也)"에서 유래했다. - 성균관(成均館) : 음악의 가락을 맞춘다 혹은 균등하게 한다는 뜻. 중국 [주례]에 오 학(五學)이 있는데, 동(東)은 동서(東序), 서(西)는 고종( 宗), 북(北)은 상상(上庠), 중 (中)은 벽옹(酸雍), 남(南)은 성균(成均). 특히 남쪽의 성균은 음악으로 교육적 성과 를 내기 위해 음악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한다. - 태학(太學) : 태(太)는 대(大)의 극(極)을 의미. 따라서 태학이란 매우 큰 대학이라는 뜻이다.


국가가 관리의 양성을 위해 세운 대학을 고구려에서는 '태학', 신라에서는 '국학'(경덕 왕, 747년에는 '대학감'), 고려에서는 '국자감'(→'성균감' → '성균관' → '국자감'으로 명칭 변경)으로 불렀다. 3. 설립

조선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태조 7년(1398)에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자리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종 2년에 불타버리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1592) 다시 불타버리고, 선조 34년(1601)에 대성전(大成殿을), 39년(1606)에 명륜당(明倫堂)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시설

성균관의 시설물은 문묘(文廟)와 명륜당이 가장 중요한 건물로, 문묘는 대성전과 동서 양재(兩齋)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자와 72현을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명륜당은 대강의실이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유생이 거처하는 재(齋)가 있 고, 그 밖에 서고인 존경각(尊經閣), 공자와 수제자의 부친을 제사하는 곳인 계성사(啓 聖祠), 불교 금지의 상징인 비천당(丕闡堂), 일양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대사례(大 射禮)를 행하는 육일각(六一閣)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부속 시설물이 있으나, 여기 서는 생략한다. 5. 직제

태조 7년에 개정한 것을 기준으로 하면 다음과 같다. 즉, 지사(知事:정2품) 1인, 동지사 (同知事:종3품) 2인, 대사성(大司成:정3품) 1인, 사성(司成:종3품) 2인, 제주(祭酒:종3품) 2인, 사예(司藝:정4품) 3인, 직강(直講:정5품) 4인, 전적(典籍:정6품) 13인, 박사(博士:정7 품) 3인, 학정(學正:정8품) 3인, 학록(學錄:정9품) 3인, 학유(學諭:정9품) 3인 등으로 되 어 있다. 6. 입학 자격

생원ㆍ진사를 원칙으로 하고, 이들만으로 부족할 경우 13세 이상의 4부 학당의 학생 으로 소학과 4서와 1경에 능통한 자, 일찍이 문과나 생원ㆍ진사 또는 향시와 한성시에 합격한 자, 현직 관리로서 학문에 뜻을 둔 자, 공신의 적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서 울과 지방의 나이 어리나 우수한 자 중에서 선발했다. 7. 학생 정원

200명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100명도 못되던 때도 있었다. 8. 수업 연한

4년 반이 원칙이나 실제로는 8년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9. 교육 과정

4서와 5경 및 제사(諸史)의 강독과 제술 및 서법을 익히도. 노장(老莊)ㆍ불서(佛書) 및 백가(百家)ㆍ잡류(雜類) 등은 읽지 못하게 하였다.


10.학칙과 생활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원점절목(圓點節目)ㆍ권학사목(勸學事目)ㆍ학교사목(學校事目) 등 여러 가지 규칙이 있었으며, 이 규칙들에는 교육과정과 성적 평가방법 및 일상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매월 1일에 문묘를 참배하고, 매일 일 정한 시간에 북소리에 맞추어 일어나고 식사하고 강의를 듣고 독서하도록 되어 있고, 규칙을 위반할 경우 엄격한 벌을 받고 심하면 쫒겨나게 된다. 한편 성균관 유생에게는 자치활동에 대한 자유가 주어져 있어서 스스로 대표를 선출하 고 대표의 주재 하에 재회(齋會)를 열어 필요한 사항을 결정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 가의 정책에 대하여 유소(儒疏)를 올려 의사표시를 하고, 정부의 반응이 온당치 못할 경우 권당(捲堂:식당에 들어가지 않음)ㆍ공재(空齋:기숙사를 비움)ㆍ공관(空館:성균관에 서 물러나는 것, 즉 동맹휴학) 등과 같은 행동으로 의사표시를 하였다. 공관을 단행하 면 시정의 상점도 문을 닫고 이에 호응하였고, 국가에서도 유생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른 유생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학자를 존중하는 기풍에서 비롯된 것 이다. 11. 장학 재원

태조 때부터 양현고를 두로 성균관의 재원을 관리했다. 세종 때 이미 섬학전으로 1,035 결(結)의 학전(學田)이 있었고, 13년(1431)에 추가로 965결을 더 지급했다. 이보다 앞서 세종 원년에는 성균관에 노비 10명을 주어 노역을 담당케 했고, 세종 12년에는 이미 주어진 체전 5결에 1결을 추가하였다. 종합해 보면 성균관의 양현고는 2,000결의 토지 와 300여명의 노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재, 서재>


제 2부 서원이란? 1. 기원

서원의 기원은 그 명칭과 관련해서는 중국 당나라 현종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조와 기능상 서원의 위상을 확립한 시기는 송대이며 특히 주자에 의해 특 히 강화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선조 중기에 해당하는 중종 38년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후학양성과 함께 고려말 대유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의 서원을 설립한 것이 그 효시이다.

2. 기능 및 배경

<소수서원>

서원의 역할과 기능은 그 설립배경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서원은 사림세력에 의해 선현배향과 후학양성이라는 고유의 목적하에 설립되었다. 교육적 측면에서는 유 교적 소양을 배양시키기 위한 내용들이 주였으며 따라서 교재의 측면에서는 대동소이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대체로 소학과 가례를 입문으로 삼았으며 사서와 오경을 근본으로 삼았다. 또다른 서원의 기능으로는 해당 사림세력의 향촌 자치기구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서원은 해당 사림세력의 존속 및 발전을 위한 자치기구로서 자 신들의 실력을 배양하는 동시에 동일한 정치사회적 목표하에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협력하던 곳 즉 장수처藏修處였던 것이다. 그럼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서원의 발생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조 건국이후 사림 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확대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창제社倉制, 향음 주례鄕飮酒禮등의 행사를 지속적으로 거행해 왔었다. 그리고 성종이후 사림의 정계진


출을 계기로 사회적 활동을 강화하려 했으나 훈척세력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 다. 16세기이후 사림세력의 재기와 더불어 서원설립이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그 배경 에는 사림세력이 주창한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교학체계敎學體系의 혁신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사림세력은 도학정치의 구현을 위해서는 대유현성大儒賢聖 에 대한 존경이 뒤 따라야 하며 이에 대한 실천으로 제향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3. 전개 및 역사

풍기군수 주세붕에 의해 설립된 백운동 서원은 사묘를 위주 로 한 것이었으며 서원이라는 명칭은 유생들이 과거 준비 등을 위해 공부하는 건물을 지칭하는 정도였다. 서원의 정착 과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황에 의해 가능했다. 그는 교화의 대상을 일반대상으로 확대하는 한편 그 활동의 주체를 사림으로 규정하면서 사림세력의 재정비를 요구하는 한편 서원활동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했다. 풍기군수로 부임 되면서 서원의 공인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백운동 서원 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한 결과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제하의 현판을 하사 받았으며, 사액과 더불어 사원에 배속된 노예 그 리고 서적 등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등록되게 된 것이며 이후 명종연간에만 18개에 이르는 사액서원이 건립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 로 서원은 기본적으로 사림세력의 자치 기구인 까닭에 국가가 개입하거나 재정적 지원 을 할 필요성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액서원의 위상은 기타 서원에 비해 상당히 월등했으며 그에 속하는 사림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와 같은 사액서원은 숙종대에 이르러 무려131개소 이르는 등 서원의 사회적 위상과 세 력은 전국적으로 확장되었으나 서원의 정치적 역기능으로 인해 영조대에 이르러 통제 의 대상이 되었다. 영조는 1741년 서원 철폐령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이 상실되기 시작하면서 서원의 대민 착취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행 되는 등 적 지 않은 폐단을 야기 하다가 1864년 대원군에 의해 대대적인 서원철폐가 진행되어 47 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이 폐쇄 되었다. 4. 구조와 배치

이제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들을 살펴보자. 우선 서원의 고유기능중의 하나인 성 현배향의 기능을 담당하는 사당이 있다. 그리고 교육기능을 담당하는 강당, 그리고 서 원에 기숙하던 원생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이외에도 문집 혹은 서 적을 펴내던 장판고藏版庫와 책을 보관하던 서고서고, 제사에 사용되는 기물을 보관하 던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 등을 담당하던 고사庫舍, 시문을 짓거나 담 화를 나누는등 다양한 행사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누각 등이 있다.


이러한 서원 건축물들은 음양오행과 풍수사상등에 기반을 두고 물과 산 그리고 주변 지형의 흐름등을 고려하여 합당한 위치에 배치되었다. 남북을 축으로해서 좌우대칭구 조를 가지고 있으며 남쪽으로부터 정문, 강당, 사당의 순서로 배열 되었으며, 사당은 별도의 담장을 둘렀고 그 앞에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강당 앞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배치된다.대부분의 건물은 선비정신에 따라 간소함을 중시하여 복잡한 문양과 장식을 피하였으며 주변의 공간적 특성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5. 서원 교육의 목표와 내용

서원은 훈고학적 성리학자들의 세속적 입신양명의 경향에 대한 반발과 성리학의 거경 궁리居敬窮理적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기반성을 요구했던 성리학자들에 의해 성립 된 것이다. 즉 성리학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성현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이 그 출발 점이자 핵심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선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것 이야 말로 모든 배움의 시초라고 생각했다. 이황의 생각을 엿보면 서원의 교육목표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서원을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현을 존경하고 그 뜻을 높 이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들이 신봉했던 도학을 밝게 설명하고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요?” 라고 역설했다. 즉 성현을 본받는 것이 서원 교육의 목표였던 것이다. 성리학자들의 이러한 내적 목표가 완성되었을 때 이의 사회적 실천이 바로 관 료로서의 활동이며 이를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과거준비를 위한 교과목의 교육이 진행되었다. 위의 두 가지 교육목표는 이상적인 성인의 체현이라는 법성현法聖賢의 목 적과 현실주의적인 측면에서 관리가 되어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관인양 성이라고 하는 유교자체의 교육목적과도 상응하는 것이었다.


제 3부 자운서원 자운서원 [紫雲書院]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 문화재지정: 경기도기념물 제45호(1973.07.10지정)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경기도유형문화재 77호(1978.11.10지정) ♢ 배향인물: 이 이(李 珥), 김장생(金長生), 박세채(朴世采) ♢ 창건연도: 1615년(광해군 7년) ♢ 사액연도: 1650년(효종 1년) ♢ 향 사 일: 양력 10월 초순 ♢

<자운서원 문성사> 1. 연 혁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으로 1615년(광해군 7)에 김장생 등이 주도하여 파주 호명산(虎鳴山) 아래에 창건하였다. 그 후 자운산 아래로 이건하였고, 1650년(효종 1)에 사액되었다. 1695년에는 파주 유학(幼學) 정수하(鄭綏夏)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를서원에 합향 할 것 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어 1713년(숙종 39)에 유생 조익주(曹翊周) 등이 김장생 (金長生)의 추가배향과, 박세채(朴世采)의 합향을 배향으로 강등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후 영조·정조·순조 등 역대 임금이 자운서원에 치제하게 할 정도로 보살핌을 받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 서원 철폐 후에는 서원 터에 제단을 세워 제사를 이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 괴되었다. 그 뒤 자운서원은 1970년대 국난국복의 문화유적과 선현유적에 대한 보수 ·


정화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복원되고 성역화 되었다. 1970년에 국가의 지원과 유림 의 모금으로 사당을 복원한데 이어 1973년에는 경내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화하였다. 서원에서는 음력 8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렸으나, 최근에는 파주시 향토문화예술축제인 율곡문화제 개최를 알리는 추향제례로서 양력 10월 초순에 지내고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최근의 것이고,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사당 앞 양쪽에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였다. 동서재 안쪽 옆으로 서 있는 두 그루 느티나무는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판을 보면 왼쪽 것은 수령 306년이라고 적혀 있고, 오른 쪽 것은 수령 360년이라고 되어 있으며, 둘 다 1982년에 지정되었다. 수령이 300년이 넘은 것이라면 아마도 이 서원이 건립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심어졌던 것으로 보인 다. 2. 중요물건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경기도유형문화재 제77호 (1978.11.10)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이다. 자운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학자 인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광해군 7년(1615)에 지은 서원으로, 이이의 묘와 그 조상들의 묘가 있는 파주지역에 건립되었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 박세채의 제사도 함께 지냈 던 곳으로, 효종 즉위년(1649)에 왕이 자운이란 현판을 내리었다. 비는 서원의 자운문 바깥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2단으로 이루어진 받침돌은 아랫단은 4장의 돌로 짜 맞추고, 윗단은 옆면과 윗면에 각각 구름과 연꽃무 늬를 두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비의 명칭은 김 수항이 썼다.


제 4부 율곡과 신사임당 1. 율곡 이이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 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 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 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 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 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 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 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 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 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 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 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 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 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 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 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 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


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 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 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처] 이이[李珥] 네이버 백과사전 2.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강원도 강릉 태생으로 그의 생가 오죽헌 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사임당의 형제 중에는 아들 은 하나도 없고 딸만 다섯이었는데, 사임당은 그 중에 서 둘째 딸이었다. 본명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 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 씨 집안의 선비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 (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그래 서 작가 오귀환은 사임당이라는 호에는 신사임당의 혁명을 꿈꾸는 기상을 가진 여인으로서의 기상이 담 겨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 졌다고 한다. 1522년 덕수 이씨의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여 사위가 처가댁에 머무는 전통에 따라 강릉에서 계속 살다가 서울로 이사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사임당은 뛰어난 화가로서 7살 때 세종 시대의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 따서 그림을 그렸고, 숙종, 송시열, 이형규 등 여러 지식인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발문 을 쓸 정도였다.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 詩)를 여러 편 지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도 있어서 벼슬을 하지 못한 이원수가 세도가 인 이기를 찾아다니자 이를 만류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기는 소윤의 영수 윤원형과 결 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킴으로써 많은 선비들을 숙청한 인물이었다. 별세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다. 사임당의 업적과 교훈

1) 자녀에게 가장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현모(賢母)


① 자녀에게 위인의 행실을 들려주고 본받게 함 ② 엄할 때는 서릿발과 같았음 ③ 자녀에게 사람다운 행실을 갖출 것을 강조함 ④ 셋째 아들 율곡은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고 뒤에 주자의 성리학을 발전 시켜 동방의 성인으로 불리게 됨. 2) 남편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명한 아내 ① 마음이 착하고 어질지만 의지가 약하고 끈기가 없는 남편을 안타까워하며 용기 를 북돋워주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함 ② 남편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선도함 3) 강한 의지의 소유자 ① 엄격했던 조선 시대의 여성에 대한 차별고 한계 속에서 낡은 시대의 풍조에 얽 매이지 않고 여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한 의지가 있음 ②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함 3. 화석정

율곡 선생의 본향 마을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

율곡 이이(李珥)선생의 본향인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화석정(花石 亭)은 원래 고려말 대유학자인 길재(吉 再)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기록은 없다. 그후 세종 25년(1443)에 율곡선생의 5 대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 晨)이 정자를 세운 것을 성종(成宗)9년 (1478)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이숙함(李叔咸)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 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때 불타없어져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14년(1673)에 율곡선생 의 증손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다시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 양식은 팔작 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있으며 내부 뒷면에 는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가 걸려있다.


《 八 歲 賦 詩 》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숲속정자에 가을이 이미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빛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 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제 4부 황희정승 1. 황희

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厖村). 초 명 수로(壽老). 시호 익성(翼成). 1363년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 瑞)의 아들로 개성(開城)에서 출생했다. 1376년(우 왕 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 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으나, 신왕조의 요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고 세자우정자(世子右正 字)도 겸임하였다.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 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이후 형조·예조·이조·병조 등의 정랑(正郞)을 지냈다. 1402년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하였다.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 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하였다. 1409년 이후 형조·대사헌, 병조(1411), 예조(1413), 이조판서(1415)를 역임하였다. 송사(訟事)문제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호조판서로 복귀하였고, 1416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 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로 전임 복귀되었다. 이어 평양 판윤을 거쳐, 1418 한 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에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충녕대군 세자 책봉)을 극력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 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남원(南原)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422 년(세종 4) 상왕(태종)의 진노가 풀려 참찬에 기용되었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강 원도 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였다. 1426년 이조판서·우의정 거쳐 1427년 좌의정에 올랐다.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 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1449(세종 31)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국정을 관리하였다. 그의 업적은 다양 하다.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 방어책), 4군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진흥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국가의 법이 혼란스러운 것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였다. 태종은 물론 세 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 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1452년(문종 2)년에 세종묘(世宗廟)에 배향되었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상주(尙州)의 옥동서 원(玉洞書院)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 이 있다. [출처] 황희 [黃喜 ] | 네이버 백과사전


2. 반구정

황희 선생이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 반구정(伴鷗亭)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문 신이며 명상(名相)인 방촌 황희(黃喜 1363∼ 1452)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 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 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 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애석하 게도 한국전쟁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이 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 가 1967년에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1975년에는 단청을 하고 축대를 손보았다. 그 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등을 목조건물로 개축하였다. 이곳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안(江岸)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허목(許穆) 의 『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 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기러기가 손으로 온다. 서 쪽으로 바다는 20리 이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제 5부 특강 및 토론 <특강 #1> 주제 : 글로벌 시대와 율곡 강사 :

【특강내용 메모】


<조별 토론>

주제 : 【토론내용】


<특강 #2> 주제 : 율곡과 21세기 리더십 강사 :

【특강내용 메모】


제 6부 DMZ 견학 임진각관광지, 오두산통일전망대 임진각 관광지

주 소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1번지 연락처 : 031-953-4744(임진각관광안내소) 임진각관광지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민족대립으로 인한 슬픔 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임진강지구 전적비, 미국군 참전비등 각종 전적비가 있으 며, 남북 분단 전 한반도 북쪽 끝 신의주까지 달리던 기차가 이곳에 멈추어 전시되고 있 다.(이곳의 임진철교는 2개의 다리가 나란히 있었으나 전쟁 시 하나는 파괴되어 철교의 교 각만 남아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음) 이 곳에는 망배단이 있는데 망배단은 휴 전선 북쪽에 고향을 가진 실향민들이 매년 설날과 추석때나 가족이 보고싶을 때에 고향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이곳에서 이북에 계신 부모, 조부모에게 배례하는 장소이다. 소식이 끊 겨 생사도 불명확한 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산가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곳은 분단 의 아픔을 되새기며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안보관광지로 매년 수백만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하고 있 다.


자유의 다리

자유의 다리는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다리로 1953년에 한 국전쟁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였기 때문에 명명된 다리이다.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하행 두 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 있었는데 전쟁 포 로들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서쪽 교각위에 철교를 복구했고 그 남쪽 끝에 임시교량을 가 설했다. 당시에는 포로들이 차량으로 경의선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 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는 6경간(經間)으로 이루어진 목조 평교(平橋)형식으로 길이는 83m, 폭은 4.5~7m, 높이는 8m 내외이다. 순수한 목구조는 아니고 인장력을 많이 받는 부분에 철재를 병용하여 만든 혼합 구조이다. 통나무가 4개씩 4열로 세워진 교각 위에 사각 받침목과 I형 강(鋼)으로 만든 철제 보카 井자형으로 짜올려지고 그 위에 장선(長線) 이 놓인 후 나무로 만든 상판이 올려져 마감되었다. 구조적인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수평 재와 가새가 많이 사용되었다. 자유의 다리는 임시로 가설한 교량이므로 건축적으로 뛰 어난 점은 없으나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대표적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등록문화재 제78호, 2004년 2월 6일 지정)

종류: 마터2형 증기기관차 제작: 가와사키(일본) 제작년도: XXXX년 무게: 80톤 크기: 15m(길이), 3.5m(폭), 4.0m(높이) ‘철마는 달리고 싶다’ 로 유명한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중 피폭·탈선된 후 반세기 넘게 비무 장지대에 방치되어 있었던 남북분단의 상징물이다. 2004년 아픈 역사의 증거물로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로 등록된 후 포스코의 지원으로 녹슨 때를 벗겨 내고 역사교육자료로 활 용하고자 하는 경기도(경기관광공사)의 적극적 의지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당시 이 열차를 운전했던 기관사(한준기, 1927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군수물자를 운 반하기 위해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도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후진하여 장단역에 도착했을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기관차에 있는 1,020여개의 총 탄 자국과 휘어진 바퀴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오두산통일전망대

주 소 :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59번지 연락처 : 031-945-3171, 3173, 2390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임진강의 합류 지점 에 위치한 해발 118m의 고지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관미성터(오두산성)가 있는 곳으로 사적 제351호로 지정된 과거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이다. 1992년 개관한 이래 매년 수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임진강 건너로 보이는 북한의 황해북도 개풍군 관산반도 (약 3.2km) 주민들의 생활을 망원경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서, 통일교육의 살아있는 체 험교육장이다. 건물은 대지 5,195평, 건평 2,645평의 5층 석조건물로 1층 로비에는 각종 기획전시를 하는 기획전시장이 있고, 2층에는 북한영상실(좌석 300석)이 있다. 또한 2층 영상실에서는 새터 민(탈북 직원)에 의한 북한실상 질의응답 및 매주 일요일 (15:00)에 「참여하는 문화마당」 란 주제로 수준 높은 전통공연 및 현대 무용을 감상할 수 있다. 3층 300석, 4층 170석(외국 인전용 설명장) 규모로 전면이 유리로 된 원형 전망실에서는 모형지형도와 북한지역의 요 소요소를 대형 TV 카메라에 담아 모니터화하여 영상으로 직접 보면서 북한의 실상을 설명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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