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_Eun-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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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 미


풍경, 결 이은미 Lee, Eun-Mi

2011. 8. 24 - 9. 6 글 : 고지혜 편집 : KC Communications T. 2277_5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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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결 이은미 Lee, Eun-Mi

2011. 8. 24 - 9. 6


L 50Ă—60cm oil on canvas 2011



외딴 곳 50×65cm oil on canvas 2011



빛의 의존Ⅰ 53×66cm oil on canvas 2011


빛의 의존Ⅱ 53×66cm oil on canvas 2011


문 50×65cm oil on canvas 2011



집 53×73cm oil on canvas 2011



문 45×53cm oil on canvas 2011



겹Ⅰ 97×130cm oil on canvas 2010



겹Ⅱ 146×112cm oil on canvas 2010



한 권 130×162cm oil on canvas 2011



바람(風)과 볕(景), 그 사이와 그 너머 고지혜

1. 여기,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긴 바지에 긴 소매의 옷을 입고 가방을 멘 채 등을 돌리고 서 있 는 사람. 동그스름한 몸의 윤곽이나 약간 긴 단발의 머리는 이 사람이 여자임을 짐작케 한다. 부드 럽고도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그림자. 마치 물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이 사람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 히고 있다. 얼핏 보면 물을 마시는 것도 같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 언가를 잡은 그녀의 두 손이 눈높이에서 멈춰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 기, 어쩌면 망원경, 아니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녀가 지금 ‘바깥’으로 나 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은미의 다섯 번째 개인전의 맨 앞자리에 있는 <L>1 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몇 해 전 네 번째 개인전에서 이 작가는 ‘실내’라는 공간에 자리하고 있던 ‘사물’들을, 그 사물과 함께 호흡하고 있 던 이미지들이 만들어 내는 서사들을 오롯이 마주했었다. 이제 <풍경, 결>이라는 표제로 작가가 처 음 제시한 작품에는, 실외에서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L’은 작가 자신을 암시하는 것이 리라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사실 ‘L’이 무엇을 의미하더라도 혹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작가가 닫힌 공간의 정물에서 열린 공간의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는 사 실이다. 그러므로 <L>을 보며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떠한 정경이나 장면을 나타내는 말로 두루 쓰이는 ‘풍경(風景)’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경치를 일컫 는 말이다. 바람(風)과 햇빛(景)의 공명으로 인해 펼쳐지는 것이 풍경이라면, 풍경이라는 말에는 보 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혹은 가려진 것과 드러나는 것이 공존하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질감, 빛, 색, 모양, 움직임, 깊이 등을 아울러 우리는 ‘풍경의 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풍경, 결>에서 <L>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이 저마다 표현하고자 하는 풍경의 결, 그것이 <L>의 그 녀가 포착하고 응시하던 것일지도 모른다. 2. <풍경, 결>에 나오는 소재들, 즉 문과 벽, 집과 나무, 그림자와 하늘 등은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것 1

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익숙한 소재를 내세우되 일부러 이들의 색을 낯선 것으로 바꿔 놓았다. 물빛


의 문, 보라색 그림자, 초록 지붕과 분홍 벽 등. 이는 이 작가가 풍경을 그리는 목적이 단순히 자연을 모사(模寫)하거나 재현(再現)하는 데 있지 않음을, 좀 더 섬세하게 말하자면 재현되는 대상보다 재현 하는 자의 의도와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낯선 색을 입은 익숙한 소재들은 하나 의 공간에서 친근함과 생소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 색들이 낯선 감각의 환기만을 의도한 것이 었다면, 이들은 좀 더 강렬한 빛을 띠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그렇게 보일 것을 염려했 기라도 한 듯 투명하고 맑다. 소재의 친근함과 색이 만들어 내는 생소함은 겹쳐지고 미끄러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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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확언(確言)이 아님을, 고정된 의미란 어디에도 없음을 드러낸다. <풍경, 결>의 풍경들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일렁임’을 감각한다. 이 일렁임을 가시화하는 것은 그림 자라 할 수 있는데, 그림자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작품은 네 점 정도이다. 햇빛으로 인해 그림자 는 존재하게 되고,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의 모양은 변한다. 그러나 이은미는 이를 ‘빛에 의존’이 아닌 ‘빛의 의존’이라 명명했다.2 빛의 존재 또한 그림자에 깃들어 있음을, 빛과 그림자가 함께 만들 어 내는 것이 풍경임을 이 작가는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자들이 모두 나 무 그림자라는 점이다. 언뜻 불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그림자들은 정지해 있는 듯이 느껴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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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이들은 벽을 타고 오르고 있거나(<빛의 의존Ⅰ>), 계단을 내려오고 있으며(<빛의 의존Ⅱ>), 집 을 잠식하려는 듯 집의 외벽에 다가가고 있다(<집>). 나무 그림자들의 일렁임, 이 움직임은 고정된 형태나 윤곽을 지우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이는 <집>3 에서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바닥을 뒤덮고 있는 것은 움직이는 그림 자 같기도 하고, 흔들리는 수풀 같기도 하다. 또 이것은 출렁이는 물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의도 된 모호함은 고정된 어떤 형태로 호명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색과 움직임만으로 자신을 드러내 고자 한다. 크고 부드러운 흔들림, 그것은 <빛의 의존> 연작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나무 그림자들의 일렁임과 유사하다. 무언(無言)의 일렁임은 집을 향하고, 집을 둘러싸며, 집의 윤곽마저도 흐리게 만 든다. 이러한 윤곽의 처리는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와 관점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의 공간은, 단 순히 그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사물을 담기 위한 그릇이 아니다. 풍경화의 경우 이는 더욱 자명한 사 실이 된다. 풍경화에서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고 배경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대상과 배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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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배경’이란 말은 대상에게 봉사하는, 대상을 ‘위해’ 그 무엇이 존재함을 의 미한다). 하늘과 집과 나무와 그림자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풍경이다. 그러므로 이들 각각 의 형태와 위치를 구분하고 구획하는 경계를 흐릿하게 표현하는 것, 이는 삶 혹은 세상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이는 이 작가가 ‘벽’과 ‘문’이라는 소재를 자주 다루고 있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번 전시에는 <문> 4

이라는 제목을 단 두 작품이 있다.4 문과 벽은 안과 밖의 경계이자,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동시에 안 과 밖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문은 열려 있으나 그 안을 엿볼 수는 없다. 문 안 쪽의 보이지 않는 곳은 마치 심연처럼 어둡고 깊다. 담벼락에 있는 문은 닫혀 있지만 담장 너머로 보이는 연한 빛깔의 하늘은 문 안쪽의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즉 이 두 문은 이쪽과 저쪽을 모두 보여줌으 로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상상하게 한다. 이쪽과 저쪽뿐만 아니라 이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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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저쪽 그 사이까지도 포착하려는 시도는 <겹>에서도 잘 나타난다. ‘겹’이란 면과 면 또는 선과 선 이 포개진 상태,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말이다. <겹Ⅰ>과 <겹Ⅱ>에는 식물들의 뿌리와 줄기가, 이 파리와 꽃들이 서로 겹겹이 포개어져 있다.5 <겹Ⅱ>에서는 점점이 하얀 꽃이 피어 있다. 그러나 상 대적으로 밝은 하얀 색에 의해 이것이 꽃송이라는 것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이 꽃의 세세한 모양 을 알 수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침범하듯, 얽혀있는 줄기와 이파리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더욱 깊어지는 색. 이는 <겹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는 줄기와 이파리들 각각이 만들어 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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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낱의 움직임과 이들이 한데 엉켜 만들어 내는 무성한 움직임이 공존한다. 거대한 물결과 같은, 이 러한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이 안에 바람이 존재함을 느낀다. 바람은 줄기를, 이파리를 흔들며 자신 을 드러낸다. 줄기와 줄기 사이, 줄기와 이파리 사이로 바람은 스며들고, 그 겹겹의 바람은 크고 묵 직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3. 실제로 이 작가는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색을 덧입히며 작업을 진행한다. 한 번의 붓이 지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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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의 붓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 그것은 물감이 마르는 동안의 물리적인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 그 사이, 작가는 기다리고 고민하고 망설인다. 그러므로 색이 색을 덧입는 것만은 아니다. 캔 버스에는 작가의 기다림이, 기다리는 동안의 사색이, 사색 뒤에 오는 머뭇거림이 덧입혀진다. 그리 고 그러한 시간들은 붓이 지나간 흔적을 지우는 쪽으로 작가의 손과 마음을 이끈다. 이로 인해 바람 의 기척이, 빛의 자취가, 그림자의 움직임이 겹겹이 흐르는 시간과 함께 다층적으로 담겨진다. 이번 전시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한 권>이다.6 <한 권>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친밀함과 낯섦, 넓이와 깊이, 모호함과 분명함, 머뭇거림 과 일렁임 등 이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이 모든 풍경의 결이 겹쳐 있다. 이 작품의 아래쪽에는 드넓 은 평원의 지평선 혹은 나지막이 솟아있는 산맥의 능선처럼 보이기도 하는 수평의 선이 존재한다. 이 작품의 안정감과 고요함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이 어두운 녹색은 시선의 무게중심을 아 래쪽에 두게 하여 분홍색의 하늘이 무한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 <한 권>의 하늘이 그저 가 벼움, 혹은 산뜻함만으로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분홍색에 스며있는 회색이 만들어 내는 진중함 때문 일 것이다. 겹겹이, 켜켜이 중첩되는 분홍색과 회색 사이사이로 구름들은 피어오른다. 구름의 기본 적인 속성은 무정형과 변화라 할 수 있는데, <한 권>의 구름들은 끊임없이 흩어지고 모이고를 반복 하며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어 낸다. 구름을 움직이게 하고, 변모하게 하는 것은 바람이다. 이 작품에 는 부드럽지만 광활한 바람이 느껴진다. 거칠지도 거세지도 않은 이 바람은 마치 그림 속에 스며들 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 바람과 구름 사이에서 팔랑거리며 한 권의 책이 떨어진다. 책은 유한한 형태를 가지되 무한 함을 담을 수 있는 상징적인 사물이다. 이 책의 책등을 유심히 살펴보노라면, ‘끝과 시작’이라는 책의 제목이 희미하게 보인다. ‘시작과 끝’이 아닌 ‘끝과 시작.’ 시작과 끝이라고 했을 때, 이 시작과 끝 사이 에는 어떠한 기간 혹은 주기의 닫힌 체계가, 어떠한 움직임의 종결 혹은 마침이 존재한다. 그러나 ‘끝 과 시작’에서 중요한 것은 끝이 아닌 ‘시작’, 그리고 끝과 시작 그 ‘사이’이다. 이때의 끝은 다시 시작으 로 이어지기 위한 끝이며, 이는 어떠한 일 혹은 그 움직임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한쪽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며, 아마도 그 문은 더 광활하고 더 심오한 세계로 나 있는 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어젖힘이야말로 이 작가가 풍경의 결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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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Lee, Eun-Mi 1965 충북 청주 출생 1992 수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2008 경희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회화전공) 졸업 개인전 2011 ‘풍경, 결’ 사이아트갤러리 2006 ‘숨이 깃든 사물’ 관훈갤러리 2001 ‘숲에서 잠들다’ 갤러리룩스 1997 ‘태양에서 온 편지’ 관훈갤러리 1996 관훈갤러리, 서울

무심갤러리, 청주

그 외 다수의 그룹, 기획전 참가

서울시 송파구 풍납2동 현대리버빌아파트 307동 1005호 HP. 010 4245 5287 E-mail. namu65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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