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NESTY MAGAZINE 앰네스티인 * 2012 * 001호
© Managak
editorial cartoon 앰네스티만평
AMNEST Y M AG AZIN E
안녕하세요, 남영진 입니다.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사회 새해의
앰네스티인 * 2012 * 001호
화두는 ‘소통’입니다. 교수신문은 2011년을 4자 성어로 ‘엄이도종’(俺耳盜鐘: 자기 귀를 가리고 소리 나는 종을 훔침)을 선정했습니다. 10년 간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4자 성어를 반추해보면
남영진 이사장
contents
2001년이 ‘오리무중’, 2002년은 이합집산, 2003년 은 우왕좌왕이었습니다. 그 만큼 한국사회가 큰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겁니다. 국제적으로도 혼돈입니다. 지난해 북아프리카 튀니지로부터 시작된 재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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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cartoon 앰네스티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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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review 뉴스리뷰 국제인권뉴스 / 굿뉴스
혁명은 이집트, 리비아를 거쳐 예멘, 시리아까지 확산됐지만 아직도 ‘중동의 봄’ 은 오리무중입니다. 새해엔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미국의 대선과 권력이양기 를 맞아 국제정치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것이며 “영원한 적과 동지가 없는” 국제정치의 게임에 따라 이합집산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21세기 들어 더욱 심화된 신자유주의 파고로 인해 이제는 국 가적인 G7이나 G20의 독점이 아닌 전세계적으로도 1%의 부자가 99%의 빈자 를 지배하는 고대사회적 형태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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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now 행동하세요 평화의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수감된 양심수, 요한 테테리사
영국의 역사학자인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인류 역사는 점차 넓혀지는 지평선이며 그것은 자유의 확대과정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정치적 자유의 확대과정이었습니다. 1991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 전세계는 자본주의로 단일화되는 것 같았지만 이후 20년간 신자유주의가 풍미해 경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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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표지이야기 한국지부 40주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양극화를 넘어 중산층이 몰락하는 ‘1% 사회’가 도래했습니다. 19세기말 칼 마 르크스가 예견한 고대농경사회, 산업자본주의, 그리고 금융독점자본시대의 도 래라는 역사과정이 에드워드 카보다는 경제적으로는 더 맞아떨어진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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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앰네스티가 만난 사람 뒤돌아보니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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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여론 칼럼 /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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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nesty news 활동소식 지부활동소식 / 회원활동소식 / 함께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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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ber story 회원이야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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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신입회원명단
국제앰네스티도 지난 50년간 국제적 흐름에 대응해 인권신장을 위해 투쟁 해 왔습니다. 60-80년대가 양심수석방, 사형제도폐지, 고문금지 등 정치적 자 유의 신장에 주력했다면 90년대에는 여성폭력금지, 표현의 자유 등 사회권쪽 으로 관심을 확장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무기통제, 이주노동자, 생명권을 추 가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나는 존엄하다’ 캠페인을 통해 경제·사회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네덜란드에서 열린 2011 국제대의원총회에서는 ‘One Amnesty’ 라는 기치 아래 인도, 중국, 브라질, 러시아 등의 인권상황을 포함해 앰네스티 가 전세계적으로 인권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영향력 있는 운동을 전세계적으 로 전개하자’라는 결의가 통과되었습니다. 이는 곧 국제분담금 구조의 변화로 이어 졌습니다. 이런 변화는 한국지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예정입니다. 지 난 8년간 사무국을 이끌어 온 김희진 전 사무국장의 결단으로 시작된 F2F(face to face) 캠페인이 성공해 회원의 규모가 10배 이상 성장하였고, 이제 분담금 규모가 상위 20위 가까이 되는 큰 지부가 됐습니다. 그러나 한국지부 활동을 이끌어가는 활동회원의 성장은 그에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사회는 국가보안법, 양심적 병역거부에 의한 양심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사형제도는 아직도 존속해 있으며 촛불집회, 한미FTA반대시위, 정봉주
※ 이번호 재정보고는 오는 5월에 발간될 연례보고서 내용과 동일하기에 빠집니다.
전의원의 구속 등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태는 여전합니다. 하지만, 시민들 은 소셜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해 억압에 맞서고 있습니다. 인권침 해에 도전하는 이들을 탄압하는 정부가 존재하는 이상, 여전히 권리와 자유를 중요시하는 개인들이 국내에서 그리고 국경을 넘어 연대해야 할 필요성도 큽
2012 * 001호 통권 제41호 발행일·2012년 2월 1일 발행인·남영진 발행처·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니다. 국제앰네스티는 2012년 한국지부 회원 여러분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비
주 소·서울 종로구 광화문우체국 사서함 2045호
롯한 전지구적 인권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배가할 것입니다. 그 길에 함
홈페이지·www.amnesty.or.kr
께 동행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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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 남영진 드림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전 화·02. 730. 4755 편 집·사무국 디자인·the DNC
미국
영국
오레곤 주시사, 사형 모라토리움 선언
News review 뉴스리뷰
다우케미컬, 런던 올림픽 계약 따내
© AP
존 키츠하버 오 레곤 주지사가 11월 22일 개리 호겐의 형 집행 을 취소했다. 개 리 호겐은 살인 죄를 선고 받은 후 항소를 포기해 12월 6일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키츠하버 주지사는 오레곤 주의 정책을 본인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개 리 호겐과 사형수 36명을 감형하지는 않았다.
거대 화학기업인 다우케미컬이 런던 올림픽 계약을 따냈다. 다우케미컬은 1984년 발생 한 20세기 사상 최악의 인권재앙으로 불리 는 인도의 보팔지역 참사에 대한 책임을 회 피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로마족 강제퇴거 위험
11월 1일 세르 비아 뉴베오그 라드 61블록 비 공식 정착촌에 살던 로마족은 48시간 이내 퇴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거주하던 이들 대부분 은 퇴거에 대한 협의를 거치지 못했거나 대체거주지 를 제공받지 못했으며 퇴거 대상자 중 다수가 어린 이다. 인권옹호자 두 명이 강제퇴거를 저지했다는 이유로 공무방해 혐의를 적용받아 체포되었다.
© Praxis
미국 미국 기업 이집트로 시위진압무기 조달
news review
© NameerGalal_Demotix
11월 26일 미국 업체가 이집트로 최루탄 및 발 연탄과 같은 시위진압용 무기를 조달해 준 사실 이 드러났다. 12월 1일 미 국무부 대변인도 “미 국 업체 두 곳에 이집트로 시위진압용 무기 수출허가를 내주 었다”고 확인했다.
국제인권뉴스
굿뉴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정보보호법 통화 © GalloImages
국가정보보호법이 11월 22일 의회를 통과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가기밀 정보를 언론에 공개한 자에게 최대 징역 25년 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태국 문자메시지에 징역 20년 형 © AP
얌똔 땅노빠꾼이 국왕모독죄와 컴퓨터 관련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징역 20년 형을 선고 받았 다. 2010년 얌똔 땅노빠꾼은 전 총리 보좌관의 휴대전화에 네 건 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혐의로 기 소됐지만, 정작 그는 문자를 보내는 방법도, 수신인이 누구인지도 모 른다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중국 토지수용에 항의 후 구금 중 사망 © afp-getty620-310
쉐진보가 12월 11일 구금 중 사망했다. 쉐진보는 중국 광둥 성 남부에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 며 폭력적이고 불법 적인 토지수용에 항의하다 구금됐다.
한국 일본군 ‘위안부’ 시위 1000회 맞아 © 연합
아제르바이잔 페이스북 양심수, 석방되다
1992년 1월 8일 시작된 일본군 성 노예제의 한국인 생존자와 지지자 들의 시위가 12월 21일로 1000회를 맞았다.
페이스북에 정부비판적인 글을 올렸 다 마약소지라는 날조된 혐의로 수감 되었던 자바 사발란이 석방되었다.
미얀마
사우디아라비아
도그셀에 정치수 가두고 물도 안 줘 © AndrewA.Shenouda
지난 10 월 항소 법원이 베두인 족 남성 6명에게 고속도로에서 강도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손-발목 절단형’을 내린 판결을 유지하는 결 정을 내렸다.
교도소 당국이 10월 26일부터 단식투 쟁을 시작한 일부 정치수에게 물 제공 을 중단했다. 그 결과 단식투쟁참가자 들은 탈수로 인한 사망위험에 처했으 며, 11월 1일 두 명은 병원으로 호송됐 고, 나머지 여덟 명은 ‘도그셀(Dogcell)’ 이라 불리는 징벌방에 갇혔다.
미얀마
‘다마스쿠스의 봄’ 활동가 석방
10월 12일 정치수 120명이 대거 석방됐 다. 이 중에는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인 권단체가 석방캠페인을 펼쳤던 자가나르, 수수네이, 조텟코코가 포함됐다.
© AAPPB
자가나르, 조텟코코, 수수네이 석방
시리아
© iStockphoto.com_helenecandada
고속도로 강도행위에 ‘손-발 절단형’ 선고
시리아 저명 반체제인사이자 양심수인 카말 알 랍와니가 징역 6년을 살고 11월 15일 석방됐다. 이 국제인권뉴스와 굿뉴스는 201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2012년 1월 9일 현재
News review 뉴스리뷰
중동-북아프리카의 인권 상황
월) 년1 2011 ~ 1월) 2월 당한 ) 011년 년1 2 0 처형 1 ~ 0 이후 2 월 로 ( 2 월 1 부 3 망 지 망 튀니 00명 사 (2010년 포거 011년 3 리아 사망 (2 대 발 금중사 상 시 소 위 부 최 시 구 명 명 0 0 70 간인 4,41 210명 최소 및 민 . 최소 력하 함 탈영 려노 지포 으 까 막 짐 사람 이어 위를 까지 비아 련 등 시 말 라 연 마 디아 로 사우 법 초안 심으 러 를중 테 부 반 동 으나 고있 ) 이후 2월 년 1 인 (201 바레 사망 명 8 4
망 명사 수천 가) 아 불 인 비 리 민간 확인 사법 및 수 병사 망자 절한 한 사 래서 적 의 수는 (정확 아 사람 정부 금된 구 과도 없이 절차 명 ,000 약7
트 망 이집 48명 사 ) 8 2월 최소 월~ 년1 1 1 0 사망 (2 83명 ~12월) 소 최 10월 1년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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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원 업데이트
자바 사발란 © Private
아제르바이잔의 자바 사
미얀마 당국이 2011년 10월 120명의 정치수를 포함해 6,359명의 수
발란(Jabbar Sabalan)이
인을 석방했습니다. 석방자 명단에는 표현의 자유를 행사했다는 이
12월 26일 석방되었습니
유만으로 65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된 88세대 학생그룹 활동가 조
다! 페이스북에 대통령
텟 코 코(Zaw Htet Ko Ko), 미얀마 최고의 코미디언이자 양심수인
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
자가나르(Zarganar) 그리고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양심
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
수 수 수 네이(Su Su Nway)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모두 국제앰
혔던 수감된 그를 위해
네스티가 집중적으로 석방운동을 펼쳤던 미얀마의 양심수로, 이들의
전세계 앰네스티 회원 및 지지자들이 2011 편지쓰기마라톤을 통해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에게 수 만 통의 탄원편지를 보냈습니다고 그 결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국제앰네스 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미얀마 정치수 120명 석방
석방소식에 국제적 연대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한 테테리사(Johan Teterissa)는 2007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앞에서 말루카 독립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평화시위를 주도했다가 15년의 징역형을 받고 수감중인 양심수 입니다. 당시 요한 테테리사와 21명의 독립운동가들은 행사장에 들어와 유도요노 대 통령이 참석한 기념행사에서 말루카 전통춤을 추고 말미에 말루카 독립 깃발
© Private
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평화적인 춤의 대가는 구타와 고문 그리고 오랜 수감생활이었습니다. 시위직후 경찰에게 끌려간 이들은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강제로 기어가야 하 거나 채찍질 당하는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국가 전복죄 로 7~20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고 이를 주도한 혐의를 받은 요한 테테리사
지금 인도네시아 법무·인권부 장관에게 요한 테테리사의 즉각 적인 석방을 요구해주세요!
는 종신형을 선고 받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테테리사는 2008년 종신형에서 15년 형으로 감형되었만 동 자바섬 마디 운 감옥에서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Dear Minister, I am writing to express my concern about the case of Johan Teterissa from Maluku. Johan Teterissa was sentenced to 15 years in prison on 4 April 2008 for peacefully expressing his political opinions. I urge you to release Johan Teterissa immediately and unconditionally, as well as all other prisoners of conscience in Indonesia and ensure that Johan Teterissa is not tortured or otherwise ill-treated while in detention and that he has access to medical treatment if he requires it, lawyers of his choosing, and visits from family members. I also call on you to ensure that prison conditions and the treatment of prisoners meet standards provided for in Indonesian law as well as UN Standard Minimum Rules on the Treatment of Prisoners. Finally I urge you to ensure that prison conditions and the treatment of prisoners meet standards provided for in Indonesian law as well as UN Standard Minimum Rules on the Treatment of Prisoners and ratify and implement the Optional Protocol to the Convention against Torture which is intended to establish a preventive system of regular visits to places of detention. Thank you for your kind attention to this urgent matter. Yours Sincerely, (서명)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보내는 곳
파드리알리스 아크바 법무·인권부 장관 (Patrialis Akbar, Minister of Justice and Human Rights) Jl. H.R. Rasuna Said Kav No. 4-5, Kuningan, Jakarta Selatan 12950, Indonesia
※ 홈페이지(amnesty.or.kr)에서 온라인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Act now 행동하세요
평화의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수감된 양심수, 요한 테테리사
Cover story 표지이야기
한국지부 40주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2009년 8월 9일 서대문 형무소 앞, 사형제도 폐지 앰비언트 광고 캠페인 ‘Stop Executions’ ⓒ Amnesty International
AIK
© Amnesty International
국제앰네스티, 한국땅을 밟다. 언론인 송지영.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내란음모죄로 사 형을 선고 받지만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진다. 그 는 국제앰네스티의 설립 후 첫번째 캠페인의 대상자 중 한 명이 었다. 세계각지에서 그에게 사면을 베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탄 원서가 한국정부에 끊임없이 도착했고,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0년 여름, ‘국제펜클럽대회’에서의 우 연한 만남은 한국땅에 국제앰네스티를 데려왔다. 서울에서 열린 이 행사는 세계 각국의 문인들과 언론인들이 참석하는 자리로 당시 권력집단을 ‘오적’ 1)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쾌하게 풍자하다 구속된 김지하 시인과 잡지발행인, 편집장 등을 위해 영문으로
K @40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된 호소문을 뿌리던 청년은 한 외국인참가자에게 국제앰네스티 를 소개받는다. 그들은 전 한국지부 이사장이었던 윤현 목사와 연세대학교의 브라이덴쉬타인 교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세브란 스 병원에서 근무하던 캐나다인 베일리스 선교사가 합류하여 1970년 10월, 한국위원회 설립의 승인을 국제앰네스티에 요청 한다. 당시 ‘지부’(section)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액의 분 담금을 내고 양심수 3명을 배정받는 그룹2)이 3개 이상 있어야 했다. 회비를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외화송금이 불가능했고 당
1) 오적(五賊)은 국회의원, 장성, 재벌, 고급공무원, 장차관을 지칭함. 2)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앰네스티그룹은 활동할 양심수를 배정받아 석방될 때까지 지속적으 로 캠페인을 진행함.
시 한국의 상황에서 타국의 양심수에 대한 활동을 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위원회’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 수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국제앰네스티
밖에 없었다. 이것이 논란이 되어 국제집행위원회는 한국위원 회의 인준을 지체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윤현 목사는 세 차례
“외로운 길을 동행하자던 지기들이 고개를 돌리고 친구들이 무
에 걸쳐 국제앰네스티의 뉴스레터를 한국어로 번역, ‘앰네스티
력할 때, 그리고 조금은 쓸쓸하다는 한 줄기의 감회가 고개를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소식지를 간행한다. “줄판 위에 원지를
드는 감옥의 오후 같은 때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의 이념을 생각
올려놓고 철필로 한 자 한 자를 새긴 다음, 등사판에 걸어놓고
하고 용기를 더해 보곤 했습니다.”
손으로 한 장 한 장을 민다. 그렇게 등사한 종이를 모아 표지를
1973.10.16 소위 전남대학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붙여서 만든 소책자 200부를 법조인, 학자, 언론인, 종교인, 노
출감한 학생이 국제앰네스티에 보낸 서신
조간부, 정치인에게 우송했다.”3) 박정희 정권의 탄압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결성에 역 1972년 2월 6일, 국제집행위원회가 드디어 한국위원회를 승인
설적인 공헌을 하였다. 유신 반대투쟁으로 구속사태가 확산되
한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8일, 서울 YMCA 식당에서 국제앰
고 시민들에 대한 탄압이 늘어나면서 양심수 석방, 사형제도폐
네스티 한국위원회 발기인회가 열렸다. 그리고 열흘 뒤 3월 28
지, 고문철폐, 수감자처우개선을 주된 활동목표로 삼았던 국제
일, 서울시청부근의 뉴코리아호텔 식당에서 한국위원회 창립
앰네스티의 이념과 활동은 한국사회에서 상당한 공감을 불러
총회가 열린다. 참석자 중 이항년, 양윤식, 이병린, 한승헌, 민
일으켰다. “한국앰네스티는 정치적 억압에 저항하는 각계의 반
병훈, 송도영은 변호사이고, 윤현, 문동환, 베일리스, 김재준,
정부 민주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는 결과적으로는 반독재 재야
함석헌은 종교인이며, 양수정, 송지영, 부완혁, 이영희는 언론
세력의 집결체처럼 보였고, 유신정권의 감시탄압대상이 되었
계출신이었다. 국제앰네스티의 29번째 정회원지부는 이렇게
다. 경찰, 정보부 형사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행미행하며
창설되었다.
지방강연까지 따라와 방해를 일삼았다.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
© Amnesty International
1
1 사형폐지운동
2 5
3
4
2 앰네스티 회원들의 구속 3,4 앰네스티 회지 검열 5 노벨평화상-인권옹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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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 위문품 전달
는 임원과 회원이 끊이질 않았다. 다시 말해 ‘양심수를 돕는 양
1978년 8월 15일 국제앰네스티의 지원대상자로 확인된 긴급조
심수들의 단체’가 되어 버렸다.”4) 정치적수인의 재판방청을 통
치 위반자 4명이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였고. 이들의 형량과 지
해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고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것도 앰네
원그룹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현배씨(무기징역) – 오스트
스티 활동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일례로 1972년 ‘문인간첩단’
레일리아 제14그룹, 유인태씨(무기징역) – 서독지부 제48그
사건 때에 일본의 나카타 히라 변호사가 런던 국제사무국의 의
룹, 김효순씨(징역20년) 오스트레일리아지부 제4그룹, 추영현
뢰를 받고 서울에 와서 공판을 방청하고 그 결과를 런던에 통
씨(징역12년) – 미국지부 제1그룹
보하기도 하였으며 그러한 활동이 신문에 짤막하게 실리기도 하였다.
한국의 앰네스티 회원들은 국제앰네스티가 선정한 타국의 정 치범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엽서를 보내는 일부터 했다. 각
국제앰네스티의 각국지부들은 한국의 상황개선을 위한 많은
국의 앰네스티는 자국 정치범에 대한 지원활동은 엄격히 허용
활동을 하고 있었다.
되지 않았지만 다만, 한국의 정치범을 위한 구호기금의 설치
1974년 12월 11일, 국제사무국과 7개 지부(서독, 미국, 스위스,
운용은 가능하였다. 국내외에서 기탁된 구호금으로 구치소에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벨기에)가 긴급조치위반자
수감중인 무의탁자들에게 겨울내의를 보내고, ‘민청학련사건’
72명에게 관대한 처분을 베풀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대법원
피고인 류근일, 김지하씨 등 20명의 변호사 수임료를 지급했으
장에게 보내왔고 1978년 12월,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에 계류중
며, 긴급조차9호 위반으로 수감중인 김대중 전대통령의 가족생
인 리영희씨 (전 한양대 조교수, 본회 창립 회원 및 이사)가 국
계보조금도 지원하는 등, 구속자의 수임료, 영치금, 가족생계
제앰네스티의 ‘이달 탄원운동 대상자’로 선정되어 회원들은 탄
보조금 등을 지원했다.
원편지를 보내왔다. 1979년 8월에는 국제앰네스티가 문익환 목 사를 8월의 양심수인으로 선정 발표하고 그해 12월 세계적인 석방운동에 힘입어 석방된다. 유럽지역과 미국의 앰네스티그 룹들은 개별 수인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 예로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3) “한국앰네스티 30년! 인권운동 30년!” p140 4)5) “한국앰네스티 30년! 인권운동 30년!”,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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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사형반대, 고문철폐 캠페인을 전개하여 대대적인 서 명운동과 여론조성에 나섰으며 서울을 비롯한 부산, 광주, 전주, 인천 등 각처에 지부를 두고 수감자 지원, 각종 캠페인활동 등을 지 역별로 분담케했다. 하지만 앰네스티의 자국활동에 대한 한계는 민주화 운동세력과 회원들의 불만을 샀다. “당장 눈앞에서 내 형제 들이 박해의 표적이 되어 고난을 당하고 있는 판에, 그것이 자국문 제라고 눈감은 채 그저 외국의 정치범들을 위한 엽서나 띄우고 앉 아있기는 매우 답답했던 것이다. 결국 앰네스티가 내세우는 국제 품앗이의 원칙 및 자국활동에 대한 까다로운 원칙과 한국의 절박한 인권 현실 사이에서 회원들과 임원들은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5) 그리고 이러한 앰네스티의 활동원칙을 알았던 중앙정보부는 한국 앰네스티의 활동을 제약하는 구실로 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1980년 한국 앰네스티 신년교례회는 1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 례 없이 밝은 분위기 속에 진행된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으므로 양심수도, 불법구속도, 고문도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에 차 더 욱 열심히 활동했고 한국위원회의 활동은 점점 더 활발해진다. 당 1
네스티 운동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함께 벌였다. 그러던 중 5.17
1 서울구치소에 내의를 전달하는 윤현 목사와 한승헌 변호사 2 82년 4월 안동, ‘인권의 밤’ 행사에 참석한 회원들 3 1회 대중 강연에 나선 이항녕 박사 4 초대 이사장 고 김재준 목사
시 회원은 전국적으로 560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은 각 지역에서 앰 사태가 터지고 그날 전무이사 한승헌 변호사는 ‘남산’으로 끌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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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를 받는다. 조사관들은 앰네스티의 내부사정에 대해 놀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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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알고 있었다. 한변호사뿐 아니라 다른 이사들도 수사정보기 관에 붙들려가서 이사 사퇴서를 쓰도록 강요당하고 변호사들은 휴 업을 강요당한다. 한국앰네스티 사무실은 기관원들이 난입해 수색 을 벌였으며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강기종과 간사들은 회원명부와 통장 등 중요한 문서를 안고 피신한다.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1년 간 수배를 겪으면서도 광주에서 벌어지는 대학살에 관한 자료와 사 진들을 국제사무국에 두세 차례 보낸다. 그 후 한국위원회는 앰네스티의 자국활동원칙을 부득이하게 받아 들여 국내 양심수 지원활동을 점차 줄이고 국내 양심수 재판방청도 자제하게 된다. 국제 인권운동 대열에 한국도 당당히 한몫을 다하 는 것은 좋았지만 당시 많은 회원들은 이 원칙을 받아들이기 어려 웠다. 1985년 7월 10일 국제앰네스티의 국제집행위원회는 한국위원 회 기능의 일시정지를 통보한다. 그리고 8월24일, 임시총회가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개최되어 한국지부 자진해산을 하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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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모이다.
7 5 97년 ‘사형폐지국가 선포식’에서 명일여고 학생들의 사형퍼포먼스
“앰네스티에 가입을 하자 참으로 할 일은 무한정 많고 다양했다. 강연회를 따라다니며 인권에 대해 공부도 하고 긴급구명활동을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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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멕시코에서 열린 2007 ICM에서 7 세계인권선언 60주년 기념 콘서 트에 참가한 스티브 바라캇
역해서 소식지에 싣기도 하고, 그룹의 활동을 돕는 일 등을 했는
하였다.
데 특히 매달 한번씩 소식지를 접고 봉투에 넣고 주소를 붙이고 봉해서 우표를 붙이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고은태 현 국제집행위원
거의 매달 이어진 크고 작은 캠페인들은 그룹에 의해 조직되고, 회원들은 탄원편지와 긴급구명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이 시 기에는 국제적 이슈들과 다른 국가의 인권개선을 위한 활동이
지부가 폐쇄된 후 지역의 그룹들은 직접 런던과 연락하면서 활
주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사형제도와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대한
동을 전개하던 중 1988년 2월, 서울과 대구, 광주의 그룹들은
운동은 중요한 캠페인이었다. 매년 열리는 인권캠프와 인권학
‘연락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각 그룹은 정기적인 모임을 하며 더
교, 전국회원교육대회, 그룹대표자워크숍 등은 회원들이 활동
욱 효율적으로 캠페인을 할 수 있게 된다. 지부의 재건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였다. 대중을 관심을 높이고자 여러 행
‘연락위원회’를 ‘조절위원회’로 개칭하였고 체계적인 조직운영을
사도 진행되었는데 95년 ‘세계인권사진전’, ‘96년 ‘세계인권포스
통해 그룹의 유대를 더 강화하고 사업이 원활히 수행될 수 있도
터전’, 97년 ‘난민사진전’, 99년 ‘수난 받는 여성전’ 등의 전시회
록 하였다. 이때에도 앰네스티활동은 당국의 주요 감시 대상이
를 도시를 순회하며 열었고 ‘세계인권선언50주년 기념콘서트’를
었고 모임이나 집회에 경찰들이 오는 것은 물론 형사들도 자주
비롯한 몇 차례의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놀랍게도 50주년 콘서
찾아왔다.
트에는 김건모, HOT, 젝스키스 등 인기가수가 출연했고 MBC 에 녹화방영 되었다. 학생회원들이 중심이 된 열정이 넘치고 희
1992년 1월 26일, 대전에서 열린 한국조절위원회 정기총회에서
망에 찬 나날들이었다.
지부규약을 통과시켰고 1993년 3월, 국제집행위원회는 한국지 부를 승인한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이름으로 활동이 시
이러한 일들을 하고, 또 좀 더 잘하기 위해 항상 돈은 필요했다.
작된다. 당시 회원은 200명이 채 안되었고 실무자는 오완호 사
90년대 중반부터 한번도 흑자인 적이 없었으니 늘 필요한 돈을
무국장 1인, 그리고 1년 예산은 약 1,200만원 정도였다. 모든 회
모으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카드 판매와 티셔츠
원들은 그룹에 속해있었고 각 그룹의 대표는 집행위원으로 참여
판매, 일일호프, 후원요청편지가 재정적인 도움을 주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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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도움은 후원회원들이었다. 97년 한겨레21에 광고를 통
2008년은 국제앰네스티가 한국사회에 새로운 역할로서 받아들
한 후원회원모집을 해서 1년 동안 1,500명의 후원회원이 모였
여진 해이다. 일명 ‘촛불집회’에서 무리하게 사용된 경찰의 폭력
다. 96년 말 200여명에서 2001년엔 2,500명, 그리고 2005년부
에 대한 조사를 위해 런던에서 조사관이 파견되고 보고서가 나
터 시작한 거리회원모집캠페인을 통해서 오늘날 회원 1만
오는 과정을 거치면서 국제앰네스티는 한국정부의 미움을 받게
2,000명의 조직이 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한국위원회 시절
되었다. 반면, 한국 시민들에게는 작게나마 인정을 받게 되었
의 저명한 회원들에서 국제품앗이 인권운동을 하는 평범한 사람
다. 국제앰네스티의 자국활동원칙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에 대한
들로 북적거리는 국제앰네스티가 된 것이다.
회원들의 불만도 여전하다.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우리 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한다면 국제품앗이 운동으로서의 역 할과 자국의 인권침해개선을 위한 역할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더 큰 꿈을 위한 시동을 걸다.
을 경험한 사건이었다. 경찰청장이 앰네스티를 명예훼손으로 고 소하겠다고 했을 때 한국지부의 회원들은 흥분했다. 우리가 드
“국제앰네스티죠? 지금 제 앞에서 한 여학생이 경찰에게 맞
디어 싸울 상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좋은 일하는 단체’에서
고 있는데 좀 도와주세요.”
‘영향력 있는 단체’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2008년 이후,
“네?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어디세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표현과 집회의 자유에 대해 적극적으
“종로1가인데, 제가 지금 보는 게 현실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로 활동하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부분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
무서워요.”
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사회에 더 많은 인권의 지지자들이 생기기를 기대하며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한국
2008년 6월 1일, 아침에 한국지부 사무국으로 한 통의 전화가
지부가 지금의 상황에서 안주하지 않고 더 앞으로 가려고 하는
걸려왔다. 그 사람은 두려움에 결국 울어버렸고, 당장 할 수 있
것은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하루하루
는 것은 없었다. 단, 한국의 시민들이 이러한 두려운 상황을 알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더 큰 꿈, 한국사회에 인권의 가치가 뿌
릴 곳도, 기댈 곳도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리내리기 위한 시동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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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앰네스티가 만난 사람
뒤돌아보니 운명이었다
한국 인권사의 산 증인 ‘시국 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1972년 10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허울로나마 유지하던 민주주의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유신헌법을 선포하며 독재체제를 굳건히 합니다. 하지만 그 해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출범하며 한국 현대사에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이 태동된 해이기도 합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그늘 속에서 인권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할 수 있다는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앰네스티 한국지부 탄생의 중심에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시국사건1)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억울한 이들을 변호해온 변호사 한승헌이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시대의 상처를 묵묵히 보듬어 온 한승헌 변호사는 현재 법무법인 광장에서 고문으로 일하며 법조계와 시민사회의 원로로서 고언(苦言)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고은태 국제집행위원이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산파 한승헌 변호사를 만나 앰네스티의 지난 발자취와 한국 인권사를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은태 집행위원 (이하 고)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40주년을 맞이했습
한승헌 변호사 (이하 한) 제가 검사에서 변호사로 전업한 시기가 1965년
니다. 한국지부 40주년은 앰네스티 전체적으로도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
입니다. 당시는 한·일 회담,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이 절정에 이르
니다. 전세계 앰네스티 지부들 중에서도 굉장히 빠른 편이고요. 지난 20
고, 월남파병이라든가, 국내에서 여러 사회 갈등이 격화된 시기입니다.
여 년간 한국지부처럼 발전한 지부가 하나도 없습니다. 초기에 생긴 소위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독재적인 탄압을 다반사로 감행했고 그 결과로
선진국 지부들은 쭉 성장해서 자리를 잡았고, 그 외에 제3세계의 지부들
많은 정치범, 시국사범, 양심수들이 양산이 된 때입니다. 억울한 피해자,
은 어려움만 계속 겪어 왔거든요. 한국지부가 20여 년 만에 작은 지부에
박해 받는 사람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그들을 변호해줄 변호
서 큰 지부로 성장해서 세계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40주년
사가 많지 않았어요. 그때 마침 내가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는데, 시국
의 산 증인이신 한승헌 변호사님께 인터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사범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독재의 칼날이 제일 처
한승헌 변호사님은 한국 인권운동의 1세대, 개척자라 말씀드릴 수 있
음 표적으로 삼은 것이 작가라든가 언론인이라든가 학자들이었고, 내가
을 거 같은데, 처음에 시국사건 변호라든지 인권문제에 관여하시게 된 계
아는 한 작가의 소설 한 편2)을 놓고 반공법으로 처벌을 하려고 한 것이
기가 어떤 것인지요.
제가 시국사건의 변호인석에 서게 된 계기가 되었죠. 한마디로 60년대
1)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통혁당 사건, 보도지침 폭로 사건,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등 2) 소설 <분지>의 작가 남정현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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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라는 말에 굳이 인권이란 말을 얹는다는 것은, ‘공 잘 차는 축구선수’ ‘헤엄 잘 치는 수영선수’라는 말처럼 동의어의 반복이고, 듣는 저로서는 민망스럽습니다. 그냥 변호사, 변호인, 그것으로 족합니다.
고 국내 상황이 국제적인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시대인 70년대 초에 앰네스티 운동에 투신을 하셨는데, 그 시절에 어떻게 앰네스티를 접 하고 참여하게 되셨는지요.
한 5.16 쿠테타로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련의 초헌법적인 조치로 헌정을 유린하는 사태를 야기시키게 되죠. 60 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3선 개헌과 같은 정상적인 헌정에서는 도저히 상 상할 수 없는 그런 일이 터집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71년이었던가, 순천의 윤현 목사로부터 앰네스티 통신이라는 팜플렛이 하나 배달이 되 어서 그걸 읽고 ‘앰네스티’라는 국제 인권 기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 뜻이 있는 몇 분이 모여서 이야기를 시작을 하게 되었죠. 한국 앰네스 티는 그 출범단계에서부터 폭넓은 각계의 지지와 참여를 얻을 수 있었는 데, 그 공로는 박정희씨에게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처럼 군사독재 적인 폭압정치를 반복하지 않았다면 한국 앰네스티에 대한 호응의 폭이 나 정도는 그렇게 강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의 한국의 상황이 앰네스티 가 추구하는 목표하고 역설적으로 잘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박 정권시대 엔 정치범에 대하여 사형까지도 서슴지 않는 가혹한 형벌이 남발되었고, 많은 고문이 행해졌습니다.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감자들이 비인도적인 처우를 받았습니다. 이런 참이라서 국제앰네스티 가 내세우는 활동 목표가 한국의 반민주적 반인권적 상황에 딱 맞춘 것처 럼 느껴진 거에요. 그래서 ‘이거다’하고 앰네스티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 죠. 다만 당시 한국 앰네스티는 외국과 달리 출범 초부터 구성원들의 면 면이 지도자급 내지 명망가 중심의 조직이 되어있었어요. 이건 한국 앰네 중반 박정희 대통령 독재 탄압에 의해 양산된 시국사범과, 변호사로서의
스티의 아주 특이한 점이었는데,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장점이기도
사명감이 맞닥뜨려서 그 후 연달아 시국사범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
하고 조직의 구성 체질상의 문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덕분
선 난데없이 당한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쫓아간다, 이런 심정이었는데 예
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상과 달리 탄압과 저항이 장기화 되다 보니까 제가 본의 아니게 많이 끌 려 다니는 변호사가 되었죠.
또 하나는, 비록 독재 치하에서도 국제기구라는 이름을 내세워 활발한 활동을 할 수가 있었어요. 독재정권이 국내에서는 강하지만 국제적인 면 에서는 의외로 나약한 데가 있습니다. 그걸 파고 든 것이죠. ‘이건 국제단
고 저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권 변호사’라는 개념이 생기기 10년 전에 이
체의 활동의 일환이다.’ 라는 걸 내세워 유신의 틈에서도 활기를 살릴 수
미 시작을 하셨는데, 검찰 출신으로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려웠던 점은 앰네스티 활동에 참여하고 지
서 결심하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원하는 사람들이나 세력들이 앰네스티가 일종의 투쟁기구가 되길 기대한 것이죠. 우리도 시작할 때 정확히 그것을 분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한 그때 정권에 미움을 받거나 억압된 사람들을 위해 변호하겠다고 나서
앰네스티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이상 앰네스티의 활동원칙을 준수하려
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권력에 핍박을 받고
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자 앰네스티 외부에서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맨몸으로 법정에 섰을 때, 누군가는 변호도 하고 위로도 하고 힘도 실어
앰네스티가 일반 투쟁단체처럼 그렇게 나서주기를 기대하고 촉구하는 사
주고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람들이 일부 있었습니다. 윤현 목사님을 비롯한 한국 앰네스티 운영의 중
언론이나 세간에서는 제가 정의감이나 용기가 남다른 사람인양 미화 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우선 당장 어려움을 호소하고 핍박에 신음
심에 있던 몇 사람은 중간에서 고민도 하면서 앰네스티 본래의 활동방식 에 대해서 이해를 시키고자 상당한 노력을 했죠.
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응급처치라도 한다고 뛰어 다닌 것뿐인데, 미화 된 측면이 있습니다. 세인들이 ‘인권변호사’ 라는 말을 쓰는데, 저는 사실
고 앰네스티 70년대 소식지의 명단을 보면, 마치 한국의 민주화 운동세력
그런 용어에 대해서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한번도 제 자신을
의 총 집결체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인권변호사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변호사란 게 본시 인권을 지키고, 인권을 부축해주고, 인권침해를 막는, 그것이 본시 부여된 직분인데, 변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한 한국의 반독재 민주세력은 편의상 크게 정치권과 비정치권(재야세력)
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두 세력을 하나로 포괄하는 그런 자리에 앰네
결국 앰네스티에 연관된 조사는 없었던 걸로 하고, 저는 계엄법 위반으로
스티가 있었습니다. 정치권의 이른바 거물들, 그리고 재야의 원로 지도자
기소가 되었지요. 어쨌든 초기에는 앰네스티를 잡으려고 했어요.
들이 다 앰네스티에 들어왔는데, 출범 당초의 직능별 인적구성을 보면 크 게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 인사로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제도언론에서 쫓
고 대한민국의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80년대 들어와서 시작된 것처럼 말
겨난 해직 언론인들도 참여하였는데, ‘한국언론에 비친 앰네스티 5년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료를 보면 이미 70년대 초에 한승헌 변호사님을
에 실린 당시의 기사를 보면, 압제의 체제하에서도 언론의 반응이 제법
중심으로 앰네스티 한국지부를 비롯해서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활발한
괜찮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형제도 폐지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전개되었나요?
고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영어로 된 백과사전을 사오셨는데, 백과사전 이 중간중간 시커멓게 먹물로 칠해져 있더군요. 뉴스도 아니고 신문도 아
한 한국에서 사형제도의 가장 비극적인 현상은 6.25전란 당시 ‘비상사태
닌 백과사전이. 그렇게 요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던 시절
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의한 단심제 사형의 집행 남발이었
인데요, 그런 시절 앰네스티 활동에는 여러 가지 어려웠던 일들이 있었을
습니다. 동족상잔의 격앙된 전란 속에서 단심재판만으로 불복의 기회도
것 같습니다.
없이 억울한 사형 집행이 횡행 했으니까요. 국가폭력이 아주 절정으로 치 달아 이렇게 야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도 되겠느냐면서 사
한 해외 출판물, 신문 잡지 단행본 등을 까맣게 지우는 건 다반사였습니
형제도 자체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 처음에는 해괴한 짓에 분개하다가 나중에는 냉소를 하면서 둔감해졌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진보당 사건을 조작하여 조봉암 선생을 처형한 것
습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들어올만한 간행물들은
은 사법살인의 대표적 사례였지요.
어떻게든 들어오고 우리가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검정에 덮인 부분이 있
이런 일들로, 누가 꼭 이론으로 정립하거나 운동으로 세력화하진 않았
으면 ‘아, 여기야 말로 우리가 읽어 봐야 할 대목이구나’ 하고 더 눈여겨
지만 사형제도라는 것이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광범하게 형
보게 되지요. 결국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고, 우리는 알 것은 다 알고
성되어 갔습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그런 사형반대운동을 한 단체의 운
있었습니다. 해외정보를 우리가 접하는 경로는 주로 선교사나 목사님들
동 목적으로 내걸고 처음으로 국가권력을 향해서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을 통해서였습니다. 종교계는 전면적으로 탄압은 못하니까 상대적으로
한 것은 한국 앰네스티였습니다. 한국 앰네스티 출범 후에 첫 사형폐지
운신의 폭이 남아 있는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은 해외와의 소통이나 왕래
캠페인이 있었는데요, 그 때 사형폐지에 관한 대정부 대국회 건의문이 한
가 유지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 편을 통해서 정보나 자료를 입수할 수
국 앰네스티 이름으로 나갔는데, 그 건의문을 제가 작성했습니다. 저는
있었습니다.
현직 검사 때도 사형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 고, 앰네스티 활동과 별개로 사형제도와 관련한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고 앰네스티 활동을 하시던 분들 중에는 내란음모의 혐의로 잡혀가신 분
제가 75년 당국의 김지하 변호인 사퇴 요구를 거부했다가 반공법으로 잡
들도 있었지요?
혀갔는데, 그때 불씨가 된 것이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수필 한편이었죠. 검사 기소 내용을 보면 “당신은 사형폐지를 주장했다. 따라서 남파간첩의
한 한국 앰네스티는 여러모로 많은 감시와 회유, 탄압을 받으면서도 제
사형도 반대하는 거니까, 용공이다” 이런 논리였습니다.
할 일을 상당히 잘해나갔습니다. 정치범,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어려움
그 뒤에 한국 앰네스티가 사형폐지 캠페인을 거듭 펼쳐 왔음에도 불구
을 겪는 분들에게 국내외에서 보내온 도움으로 변호인 선임도 하고, 영치
하고 인혁당 사건의 비극 등이 반복되어 나왔지만, 그러나 결국 김대중
금이나 영치물도 넣어주고, 가족에 대한 생계보조와 석방된 사람들에 대
정부 이후 10년을 사형 집행 없이 지난 것으로 사실상 사형폐지국이 되었
한 직업훈련도 지원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캠페
잖아요. 이제 사실상이 아니라 법률상으로도 사형을 폐지하는 그런 나라
인을 통해 사형폐지와 고문반대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그런 면
로 나아가는 게 절실한 과제인데, 어떤 정권은 엄단을 내세워서 역시 사
에서는 한국 앰네스티가 민주화와 인권의 향상에 이바지 한 바가 상당하
형은 집행해야 한다, 사회질서나 국가방어를 위해서 사형은 필요하다고
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정부 권력, 특히 ‘남산’으로 별칭 되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큰 흐름이랄까, 대세는 사실상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감시와 공작, 회유의 대상이 되어왔었죠. 한국
폐지에서 법률상 폐지로까지 나아가는 걸로 가닥이 잡혔다고 생각합니
앰네스티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어려운 국면이 많았습니다.
다. 아직도 사형 폐지에 관한 법률이 국회에 살아있지요? 사형제도는 역
특히 80년 5월 정기총회를 3일 앞두고 제가 5.17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시 법률의 문제로 귀착이 되니까 앞으로 의회가 새로 구성이 되고 권력이
으로 남산에 붙들려가서 계엄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 맨 처음엔 한국앰네
새로 재편이 되면 우리가 열망하는 사형폐지가 법적으로 실현되지 않을
스티 활동이 ‘용공적’ 이라는 혐의를 가지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한국에
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서 당신네들이 말하는 양심수라는 것은 반국가사범이다. 반국가사범을
결국 사형폐지나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을 범죄로 보고 처단까지 하는
돕는 것은 이적, 용공이다.” 라는 식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인혁당이
그런 시대는 어쨌든 지나갔지 않습니까. 지금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사형
나 남민전 사건까지 다 도왔거든요. “이건 천하가 다 아는 반국가적 범죄
폐지와 국가보안법을 폐지를 권고한 이런 시대니까 그만큼 진전이 있는
인데, 이걸 도와주고 가족의 생계비 보조까지 한 것은 완전히 이적이다.”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형제가 살아있냐, 없어졌나, 둘 중 하나만 놓고
라고 하면서 몰아붙이려 하더군요. 그리고 나서 또 횡령사건으로 얽으려
단정적으로 어떤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겉은 아직 남아 있다 하더라도 실
고 했지만, 그것도 잘 안되자 이번에는 형법상의 내란죄를 들이대더군요.
질적으로는 거의 폐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흐름을 살려나가야 합니다. 그
리고 그런 변화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 역사의 진전 에는 우리들 자신과 선대 및 동시대의 많은 분들의 절규와 고난이 결코
Mini Interview 시대의 양심을 가장으로 둔 가족들은 한승헌 변호사 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가장 가까이서 바라본 ‘아버지’ 한승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헌 변호사를 ‘아들’ 한규훈 교수가 이야기 합니다.
고 60년대부터, 저희 앰네스티 역사로 보면 지난 40년 동안, 한승헌 변호 사님께서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혹은 인권 운동에 늘 가장 가운데서, 제 일 앞에서, 탄압 받는 위치에서 몸을 던져 오셨는데, 지금 한국의 인권의 수준의 발전 정도, 발전과정에 대해서 총평을 해주신다면.
나의 아버지 ‘한승헌’ 아버지는 변호사라는 이성적이고 냉철함이 요구되는 직업을 갖고 계시 지만, 본래 감성적이고 따뜻하면서 항상 위트가 넘치는 분이세요. 두 번의 옥고와 변호사 자격정지라는 고초를 겪으시면서 얼마나 많 이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아버지 와 어머니 모두 자식들 앞에서 약하신 모습, 힘겨워 하시는 모습을 보
한 제가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앞장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성격상 리더십, 즉 먼저 일어나 앞장서서 끌고 나가는 힘은 없는 사람입니다. 제 가 읽은 글 가운데 지금은 진보성향의 정치인이 된 유시민씨가 학생시절 에 써낸 항소이유서가 생각납니다. 명문이었어요. 거기 보면 자기처럼 평 범한 학생이 어떻게 해서 이런 투사가 되었는가를 말하면서. “왜 이 세상
이신 기억이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에게 바르고 떳떳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그것은 저희 4남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정신적 유산입니다. 아버지는 또한 부드러운 권위와 리더십을 지니신 가장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시면서 가정 의 질서를 만들어 가셨죠.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을 위해서도 평생
이 나 같은 사람을 투사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저는 온건
을 헌신하신 분이시기에 저의 아버지 한승헌 변호사를 더욱 존경하고
파이고 앞장서 나서는 성품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앞에 나서는 경우가
사랑합니다.
거듭되었습니다. 뒷전에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속출했는데, 특히 87년 6월 민주항쟁 때 변호사들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 참
고 그렇다면 오늘의 앰네스티가, 이 다음 단계에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떤
여하고 제가 그 상임공동대표가 되어 사상 초유의 변호사 가두 시위에 두
게 있을까요.
번이나 앞장선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변호사들의 전례 없는 집단 가두 시위의 선두에서 진압경찰이나 백골단과 맞부딪치다 보니 평소 저답지
한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많이 성장했지만 한국사회에 더 넓게 뿌리를 내
않게 야성적으로 변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극단적인 행태였고, 제
렸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분야에 앰네스티의 얼굴과 흔적이 뻗어나가는
본바탕은 조용한 심성에 있습니다. 다만, 몇 십 년이고 양심의 대열에서
것이 참 중요하거든요. 두 번째로는 지난날 우리나라는 해외 앰네스티에
이탈하지 않고 꾸준히 행보를 이어오면서 내가 옳다고 믿는 대의를 좇아
걱정만 끼치고 도움을 받아왔는데 이제 우리도 이만큼 민주주의와 인권
온 데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운동에는 독불장군식이 아닌
을 확립한 나라의 앰네스티답게 해외의 양심수와 압제의 피해에 대해서
대중적 참여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6월 항쟁이 그만한 성과라도 거둘
더불어 걱정을 하고 비단 탄원엽서를 보내는 것 말고도, 상대국에 필요한
수 있었던 것은 종래의 시위, 데모세력이 아닌 계층-부류의 사람들이 참
여러 가지 지원도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인권상황이 열악한 국가가
여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원이나 의료인들, 상공인들이 그때 국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거기에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손길을 뻗치고 보다
본 참여 성명을 내고 많이 합류를 했거든요. 그야말로 범국민적인 투쟁의
적극적인 도움을 주자는 말씀입니다. 앰네스티 운동을 저는 ‘국제적 품앗
실질을 갖추었기 때문에 6월 항쟁이 그만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
이’라고 표현합니다. 국제적인 품앗이를 하는데 우리가 이제 좀 더 선도적
다. 과거 민주정부 10년을 놓고 이런저런 평가도 하지만, 민주세력들이 실
인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로 국정에 참여하여 자기 역량을 발휘할 기회도 있었고, 그때에 시민사 회가 많이 성장하고 체력 단련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넓게 보면 그들이
고 만약 인생을 다시 산다 해도 그 힘든 길을 다시 가실 건가요? 아니면
다 나라를 바르게 끌고 나가는 힘의 원천들이거든요. 흔히 사회형성의 큰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으신가요?
요소로 국가권력, 기업, 그리고 시민세력을 이야기하는데, 힘 있고 당당한 시민세력이야 말로 우리나라 민주화와 정의사회 확립을 위한 큰 디딤돌
한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변호사는, 자기 생활을 지탱하
이요, 재산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현 정부 들어와서 민주주의도
면서 맘만 먹으면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헌신을 할 수가 있는 직업
역진하고 퇴색했다고 말하는데, 거기에 구세주로 나타난 것이 SNS입니
입니다. 변호사에게는 본래의 변호사 업무뿐 아니라 변호사의 전문성과
다. 정치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치만큼 세상을 바로잡는데 중요한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해야 될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 지식인들이 정치에
그리고 다시 태어나서 변호사가 됐는데 그 때도 역시 박정희 군사 독재를
무관심하고 거기에 참여를 안하고 투표장에도 안 가는 것이 마치 고고한
비롯한 탄압정권이 생긴다면 저는 또 예전의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겠지
초월주의자 같이 잘못 생각되던 그런 풍조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특히
요. 내가 과거 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시국사범 변호라는 것은, 처음엔
20~30대의 저조한 투표율에서 많은 실망과 개탄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
운명이 아니고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십 년 지난 뒤에 되돌아보니까
데, 이제 SNS 같은 새로운 혁명적인 이기(利器)에 의해서 많은 젊은 세대
그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고 내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지난 날의 운명처
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투표장으로 가고 일상적인 여러 문제에 의사형성
럼 내 변호사란 직업과 독재정권이라는 권력악이 또 만나서 부딪친다면
을 하는 것,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를 바로 잡는 데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나는 결국, 지난 몇 십 년 동안 걸어온 그런 길을 다시 갈 수 밖에 없지 않
새로운 큰 흐름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 생각하면서, 그건 나한테 선택이면서 동시에 운명이라고 마음에 새겨 두겠습니다.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국가보안법은 오랫동안 남용되어 왔다 칼럼
한국 수사 당국은 북한의 트위터 계정인
© Amnesty International
Opinion 여론
샘 자리피(Sam Zarifi) 국제앰네스티 아시아·태평양 국장
‘우리민족끼리’의 “김정일 만세”라는 메시지를 리트윗한 단순한 행위 하나만으로 국가 안보에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사회당 당원
표현물을 인터넷에 게재해 국가보안법 제 7조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외에도 현재 당국이 ‘이적행위’로 간주한 북한 관련 자료를 인터넷에 게재한 혐의로 다수의 사람들이 수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참여연대의 경우는
박모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북한과 뚜렷한 노선적 접점이 없는 활동에조차
그러나 박씨가 소속된 사회당은 북한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이러한 터무니없는 사건은 비단 박씨의
사례다.
사례뿐만은 아니다. 한국정부는 안보를
2010년 6월 11일, 참여연대는 천안함 침몰
명목으로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너무나
사건에 대한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오랫동안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를 제한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공개질의서와 보고서를 유엔
시민사회에 재갈을 물려왔다. 국가보안법은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했다. 참여연대는
인권 기준에 맞게 조속히 개정되어야 하며, 인권기준에 맞춘 개정이 될 수 없다면 반드시 폐지해야 할 것이다.
column
공개질의서에서 남북 양측에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어떠한 도발 행위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같은 해 6월 16일,
물론이고, 가입시도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참여연대를 상대로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감되었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한국 사회에 결사와
국가보안법 제 7조 위반, 즉 “이적행위” 혐의를
사법체계 내에서도 고문, 강요에 의한 자백 및
표현의 자유를 위축(chilling effect) 시키고
갖고 수사에 착수했다.
불공정한 재판 등이 횡행했다. 군정 시절이야
있다. 사소하고 해가 되지 않는 행위만 해도
군사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국가보안법이 적용된 사건의 경우 판결까지
과거의 일에 불과할지라도, 여전히 국정원과
당국이 나서서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수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사이 실제 수사나
검찰, 경찰은 국가보안법을 정부에 반대하는
위협하고 탄압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재판, 진정 결과와는 관계없이 단체는 활동
사람들, 특히 대북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을
것이다. 지난 3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중단을, 개인은 침묵할 것을 강요당할 우려가
묵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 7조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판의
자’에 해당해 체포되었다. 이 조항에 따라
목소리를 잠재우는 용도로 국가보안법이
우려가 있는 경우에 정부가 표현과 결사의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악용되는 사례가 줄어드는 추세였으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만,
선전했다는 혐의로 유죄가 선고되면 7년
2008년부터 개인 및 단체에 대한 수사, 체포
비판이나 반대 의견을 평화적으로 표현하는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찬양’, ‘고무’,
및 고발이 다시 증가일로에 있다. 특히 최근
것까지 제한하지는 않는다. 한국 정부는 국가
‘선전’을 정의하는 기준은 각자의 해석에 달려
남북관계 변화를 감안할 때 한국 정부가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다.
북한과 관련해 중대한 안보 우려를 갖고
국제인권법은 국가 안보를 위협할 정당한
국민을 위협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기
일례로 지난 2011년 3월 21일,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가
위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까지 국가보안법을
자본주의연구회 회장을 포함한 관계자 3명이
평화적 논쟁과 정치적인 반대까지 금지하는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회장
법률이 존재하는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될
최 모씨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3월 21일
것이다. 인권을 침해하고 오랜 시간 남용되어
규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 2조에서
혐의 없이 풀려났다. 경찰은 회원 12명의
온 국가보안법의 오용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규정하고 있는 ‘반국가단체’라는 용어에는
자택을 압수수색, 대안경제체제를 다룬 문서가
이를 폐지하거나, 국제인권법과 기준에 맞도록
“국가를 변란(變亂)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포함된 소프트웨어를 압수했다. 경찰은
대폭 개정하는 것뿐이다.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해석의
자본주의연구회의 ‘행동강령’이 ‘이적(북한)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반국가단체’ 가입은
행위’라고 보았고, 회장 최씨는 이러한 ‘이적’
국가보안법은 범죄행위를 모호하게
1월 2일 코리아 헤럴드에 기고한 글입니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을 통해 시작된 것 시론
타리(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
© Private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성소수자들은 작년 말 조례 심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에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로비를 점거하였다. 성소수자들은 처음으로 입법기관에 농성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대표적인 반인권세력으로 부상한 집단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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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가 서울시의회에서 심의되는 과정에서도 반인권세력의 압박에 못 이겨 성적지향과 임신출산을 삭제하자는 수정안이 기정사실화되었던 시점도 있었다. 그리고 그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정해진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나갈 것인가를
머리모양과 복장을 강제로 갖추고, 자신이
두고 다양한 운동 세력의 입장이 갈리며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는 교과과정에 참여하며
갈등이 발생되기도 했다. 피땀 흘려 통과시킨
생활지도에 따라야 하는, 그것을 따르지 않을
나서고자 하는 요구였다. 조례 발의 과정을
주민발의안이 하루라도 빨리 시행되기를
때에는 벌을 받아야 하고 신체에 가해지는
통해서 문제에 직면하고 그를 해결해나가는
절실히 바라는 염원과 더 이상 인권이 부정된
고통의 방식도 감내해야 하는, 집회 결사의
과정에서 청소년 인권과 청소년 운동에 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절규가 타협과
자유 등 헌법에서 정한 기본권과 차별 받지
강력한 시대적 바람을 일구어왔다. 이러한
조정이 전제된 (협소한) 정치의 과정에서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제지 당할 수 있는
요구에 맞선 반대자들의 논리는 두발복장
강제적으로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었던 순간도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자율화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 체벌금지로
있었다.
시도이다.
인한 교권추락, 휴대폰 사용으로 인한 수업
결과적으로는 작년 12월 19일, 서울시의회
붕괴, 집회자유로 인한 좌파생산 등의
본회의를 통과했다. 성적지향과 임신·출산이
교육관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을까
수준이다. 이러한 주장을 조직화,
차별 받지 않을 권리에 명시되었고, 복장과
의심스럽지만 학교를 ‘예외적’ 공간으로,
정치화하면서 부상한 집단은 종교사학을
집회자유에 대해 단서조항이 달리긴 했지만
학생을 ‘특수한’ 신분으로 여기고 있는 태도는
사유재산처럼 운영하는 사학재단과 그와
집회자유를 최초로 명시했다는 의미가 크다.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아동·청소년기는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정치적, 경제적
‘미성숙’하기 때문에 특별히 보호를 받아야
기득권층이다.
어떻게 이렇게 비이성적이며 반인권적
숨가쁘게 진행된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되새김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일이 많다.
하며, 그에 따라 결정권을 줄 수 없다는 근대적
그들은 성소수자에게도 특별한 집단이다.
기준의 발명과 학교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2007년 정부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할
열게 된 학교, 학생신분, 청소년과 인권의
조응으로부터 연원한다. 하지만 지금의 학교는
때부터 동성애 허용법을 용인할 수 없다면서
결합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를 조례 시행과
학생에게 결정권과 존중이 마련되지 않은
반동성애 담론 확산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발맞추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인권의 문제를
상황으로 인해서 ‘닥치고 경쟁’이라는 전
차별금지법이 종교와 학교시설 운영의 자유를
제도화할 때 어떻게 다양한 의견을
사회적 신자유주의 규범이 전면적으로
침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왔다.
수렴하면서도 기본적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투영되는 공간이 되고 있는 것 같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학생이
할 수 있는지, 유엔차원의 인권기준에 단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나열한 내용 중에 성적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절실한
성공시켰던 청소년 활동가들의 절절한
지향과 임신·출산이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요구로 주장할 수 있는지 본격적인 고민을
목소리는 ‘조례’라는 형식을 통해서 인간으로
‘동성애와 임신 조장하는 학생인권조례’라는
시작해야 한다.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무엇보다 조례제정을 통해서 이제 겨우 말문을
지부활동 소식
+
제9회 세계사형반대의날 기념 포스터 전시회
ADPAN 새 보고서 “아시아에서의 치명적 불의: 불공정 재 판을 멈춰라, 사형집행을 중단하라” 발표 우리 지부가 회원단체로 함
© ADPAN
© Amnesty International
AMNESTY news 앰네스티 뉴스
+
께 하고 있는 지역 사형폐 지 운동 연대체인 사형반대 아시아네트워크(ADPAN)는 지난 12월 6일 「정의가 실 패할 때: 수천 명이 불공정 재판 이후 사형집행 당하다」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 하고 아시아 국가들의 조속
2011년 10월 10일, 제9회 세계사형반대의 날을 맞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된 포스터 전
한 사형폐지를 촉구했습니
시회에서 의원들이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다. 이 보고서는 중국, 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는 10월 10일, 제 9회 세계사형반대의 날을 기념
도,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
해 김형오, 주성영, 김부겸, 박선영 의원과 함께 국회 의원회관에서 포
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파
스터 전시회 “Death is not Justice(사형은 정의가 아닙니다.)”를 개최했
키스탄 등 8개국에서 수천
습니다. 이번 포스터 전시회는 파리에 본부를 둔 Poster for Tomorrow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변호사
가 사형제도를 주제로 진행한 2010 포스터 프로젝트, “Death is not
의 도움을 받을 권리, 무죄
Justice”에 출품된 작품들의 초청 전시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국회
로 추정 받을 권리, 고문이나 기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 등 기
에서 열린 전시회 개막식에는 김형오 의원 등 십여 명의 의원들과 알프
본적 권리들을 보장 받지 못한 채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암울한 현실을
덥스 영국 상원의원이 참여해 국회 내 사형폐지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의 요약 보고서는 아시아 11개국 언어로 번
보여주었습니다. 국회에 이어 서강도서관, 동대문 구청에서도 같은 전
역 출간되었으며, 한국어판 요약 보고서는 한국지부 홈페이지에서 내려
시회가 개최되어 사형제도의 부당함을 많은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받으실 수 있습니다.
2011년 12월 6일, 사형반대아시아네트워크는 아시 아 지역에서 불공정 재판과 사형제도를 집중 조명 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 평화군축박람회준비위원회
제2회 평화군축박람회 “지금 평화를 이야기하자” 2011년 10월 22~23일, 서울 보신각 앞 광장에서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등 17개 단체들과 국회의원 33인의 공동 주최로 제2회 평화군축박람회가 개최 되었습니다. 2010년에 이어 2회째 열린 이번 평화 군축박람회에서는 집속탄, 핵무기 등 비인도적 무 기, 제주해군기지건설문제 등 평화와 군축 분야의
위 2011년 10월 22일, 제2회 평화군
여러 이슈들에 대한 전시가 이루어졌으며 우리 지부
아래 2011년 10월 22일, 제2회 평화
는 ‘강력한 무기거래조약의 체결’을 주제로 참여했습 니다.
축박람회 전시물들 군축박람회 개회식에서 인디뮤지션 ‘시와’가 노래하고 있다.
+
가 부자국가들만의 회의가 되지 않고, 원조가 빈곤퇴치 등에 제대로 쓰 일 수 있도록 전세계 시민활동가들이 부산에 모여 ‘세계시민사회포럼’ 을 열었습니다. 약 500여명의 활동가들은 부유한 국가들의 원조자금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정의회복을 향한 1000번의 외침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데 쓰이지는 않았는지 되묻고, 보다 효과적인 © Amnesty International
원조와 개발을 위한 논의를 펼쳤습니다. 여기에 한국지부도 참여해 빈 곤퇴치의 핵심이 인권증진이라는 메시지를 알리고, 빈곤퇴치에 원조자 금을 제공하는 국가들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사회 목소리 에 힘을 보탰습니다.
+ 네팔 이주노동자 보고서 발간 © Amnesty International
1000회 수요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1992년 1월 8일 시작된 수요시위가 2011년 12월 14일로 1000번째를 맞 았습니다. 1000차 수요시위를 맞아 일본대사관 앞에 수많은 인파가 모 여 할머니들의 정의회복을 한 목소리로 요구하였습니다. 국제앰네스티 의 살릴 세티(Salil Shetty) 사무총장도 역사적인 1000차 수요시위를 맞 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60년이 넘도록 가장 끔찍한 폭력으 로 고통 받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할머니들
네팔 당국의 도움을 구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의 정의요구는 계속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용감한 여성들이 생을 마감 하기 전에 자신의 의무를 이행해야만 한다”고 밝혀 국제적 연대를 보여
11월 13일 ‘거짓약속: 네팔이주노동자의 착취와 강제노동’ 보고서 발간
주었습니다.
에 맞추어, 한국지부도 네팔 이주노동자 캠페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 다. 네팔 이주노동자 캠페인 프로젝트는 이주노동자의 근본적인 인권
+
개선을 위해서는 한국과 같은 목적국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에 대응하 는 것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이주를 시작하는 송출국에서부터 인 권침해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특히
보다 나은 개발을 위해: 세계시민사회포럼
이번에는 국문과 함께 캠페인 자료를 네팔어로도 발간해 국내 네팔 이 © KoFid
주노동자 공동체들에 배포했습니다. 2012년에도 탄원 캠페인 등 여러 캠페인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 립니다.
+ 라지브 조사관 방문 라지브 나라얀 동아시아 담당 조사관이 12월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약 한 달 간의 방문 일정 속에서 라지브 나라얀 조사관은 변호사, 교수 등 국가보안법 전문가들을 만나 최근 국가보안법 적용 양상에 대한 인터 세계시민사회포럼
뷰를 진행했습니다. 아울러 국가보안법 피해 당사자 및 그 가족 등을
지난해 11월 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만나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등의 유명인사가 세계원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찾았습니다.
12월 3~4일에는 제주도 강정마을을 방문해 해군기지저지 싸움을 하고
OECD 국가 가운데 다른 나라에 원조를 하고 있는 국가들이 보다 나은
있는 마을 주민 및 활동가들을 만나 모니터링을 진행했습니다.
원조를 하기 위해 만든 고위급회의가 바로 이번 총회입니다. 이번 회의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 2011 2차 온라인 인권대학 ‘우리의 이름으로 죽이지 말라!’ www.amnesty.or.kr/mobileaction 강의내용
앰네스티 모바일액션 신청자가 4,000명이 되었습니다. 매월
2011 2차 온라인 인권대학 ‘우리의 이름으로 죽이지 말라!’
2회 진행되는 문자서명에 꾸준히 참여해주시는 열성회원들
1강. Renny Cushing의 이야기 ㅣ Renny Cushing, MVFHR 사무국장 2강. Jennifer의 이야기 ㅣ Jennifer Bishop-Jenkins, MVFHR 전 이사
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11월에는 한국지부가 야심 차게 준비한 모바일액션 광고영상이 네이버 메인에 노출되기도
2011 2차 온라인 인권대학 ‘우리의 이름으로 죽이지 말라!’가 진행됐습
했습니다. 2012년에도 잊혀진 양심수들을 위해, 지구촌 곳
니다. 이번에 진행한 온라인인권대학은 한국의 사형집행중단 5000일을
곳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한국 사회의 인권의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인권을위한살인피해자가족모임(Murder Victim’s
식 증진을 위해 모바일액션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들 개
Family for Human Rights, MVFHR)’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온라인 인 권대학은 10월 10일과 25일 총 2회 실시되었으며, 1강 레니 쿠싱의 이
개인의 목소리는 미미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행동이 모여 인
야기(Renny Cushing, MVFHR 사무국장), 2강 제니퍼 비숍-젠킨스의
권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사람들을 상당히 부담스럽게, 불편
이야기(Jennifer Bishop-Jenkins, MVFHR 전 이사)로 구성되었습니다.
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잠깐의 귀찮음을 이기고 지금
MVFHR 대표단은 영상을 통해 앰네스티 회원들에게 사형제도가 피해
바로 행동해 보세요! 지금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은 휴대폰이
자 유가족들의 권리실현과는 무관하며 또 다른 살인일 뿐이라는 메시 지를 전했습니다.
아니라 인권이니까요. #1961
한편 온라인 인권대학은 웹을 통해 인권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비수도권 지역 회원들에게까지 인권교육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도록 작년에 처
*모바일액션은 휴대폰 문자로 인권보호를 위 한 서명에 참여하는 활동입니다. 문자서명은 신속하게 수천 명의 서명을 모을 수 있다는 점 에서 인권보호에 매우 효과적입니다. 휴대폰 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 든지 쉽게 모바일액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지난 보기
댐 건설 반대하다 구금되어
우리들의 학교를 없애지 말아
구타당한 이란의 여성 인권활
요! 철거위험에 처한 팔레스타
동가
> 2011.10.5
531
명
문자서명 참여 수
지(http://www.amnesty.or.kr/humanrightscollege)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국가보안법 제정 63주년 집중행동 주간
> 2011.10.19
521
명
12월 1일은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63년 되는 날입 니다. 한국지부는 2011년 12월 1일부터 10일까지 국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위 ‘위
가보안법긴급대응모임이
의 의자는 아직도 비어 있습
안부’ 피해 할머니들의1,000
주관한 ‘N o! 국가보안법
니다 >
2011.11.11
문자서명 참여 수
번째 수요일 >
422
명
문자서명 참여 수
2011.11.23
Stop! 국가보안법 집중행
571
명
짐바브웨 여성들이여, 일어나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시작되
라! 여성인권단체 워자
는 거짓 약속: 네팔이주노동자
(WOZA)의 평화행진 2011.12.9
문자서명 참여 수
>
306
명
착취와 강제노동 >
문자서명 참여 수
2011.12.18
동주간’에 참여했습니다. 한국지부는 라지브 나라얀 동아시아 담당 조사관과 함께 12월 1일 기자회견과 민주화운동실천가족운동협 의회(민가협) 집회에 참여 했습니다. 12월 5일에도 한
357
명
국지부인턴, 회원 등이 홍제동 보안수사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습 니다.
© Amnesty International
문자서명 참여 수
인 초등학교
음 시도되었습니다. 온라인 인권대학 자료는 앰네스티 한국지부 홈페이
+
벗어나 모둠운영을 통해 참가자들이 직접 참여하고 조사함으로써 차별 이슈를 자신의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써 ‘차별은 나쁘다’라는 막연한 인식에서 나아가 참가자 스스로가 차별의 주체 또
이렇게 회원활동을 시작해보세요! 새내기회원모임
는 대상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고, 교육과정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특정 © Amnesty International
한 경험을 차별로 해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1월 18일(금)부터 19일(토)까지 1박 2일의 워크숍으로 문을 연 인권대학 이슈과정은 차별금지법 제정의 쟁점이 되는 5개 주제의 강의로 구성되 었습니다. 한편 참가자들은 4~5명이 모여 매주 수요일 강의가 끝난 이 후에는 이주노동자, 가족형태, 성소수자, 낙태이슈를 둘러싼 여성인권,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12월 28일(수)에는 그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를 공유함으로써 참가자들 이 스스로 준비하는 강의로 7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 “앰네스티에 후원은 하고 있지만, 무엇을 할 수 있지?”
당신의 편지가 누군가의 삶을 바꿨습니다
지난 10월 29일,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회원님들께서 쌀쌀한 날 씨에도 불구하고 새내기회원모임을 찾아오셨습니다. 모두가 처음 만나 금한 점을 질문과 자세한 답변이 오가면서, 후원에서 한발 나아간 회원 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새 내기회원모임은 모든 새내기 회원뿐만 아니라, 사무국을 방문해보고 싶
“국제앰네스티 회원은 12월 이면 전세계 양심수와 인권 침해 피해자를 위해 편지를 씁니다.”
으신 분, 실질적인 활동을 희망하는 분 등 모든 회원도 참여가 가능합 니다. 조만간 진행될 따뜻한 봄날의 새내기회원모임에서 회원님을 기다 리고 있겠습니다!
2011년 12월에도 어김없이 편지쓰기마라톤이 열렸습 니다. 전세계 최대의 인권
+ 2011 인권대학 이슈과정 ‘내 안의 차별과 맞짱뜨기!’ 강의내용 1강. 차별을 다르게 생각해 보기 ㅣ 박건, 지구지역공동행동 2강. 차별금지에서 혐오범죄가 갖는 의미 ㅣ 몽, 언니네트워크 3강. 차별금지법의 쟁점, LGBT 바로알기 ㅣ 병권, 동성애자인권연대 4강. 복합차별 사례를 통한 차별금지의 이해 진경, 장애여성공감 ㅣ 신기루, 한국여성민우회 5강. 대담: 권력관계를 통해 한국사회의 차별보기 배융호,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 ㅣ 박진옥,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캠페인인 편지쓰기마라톤 에서 올해 경이적으로 100 만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 습니다. 한국지부에서도 2만 1,610 통의 편지를 모았습니다!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나이지리아 포트하커트 주민들, 페이스북 글 때 문에 감옥에 갇힌 아제르바이잔 대학생, 평화시위를 했다고 괴롭힘 당 하는 짐바브웨 여성단체, 진실을 밝히려다 살해된 러시아 인권활동가, 터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군인에게 성폭행 당한 멕시코 여성 등 총 6개의 사례에 대해 집중 탄원편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12월 11일 일요일 저녁, 대학로에서는 무한 편지쓰기의 밤 ‘레터나잇 (Letter Night)’이 열려 약 100여명의 회원들이 함께 편지를 쓰고, 이야
2011 인권대학 이슈과정 ‘내 안의 차별과 맞짱뜨기!’가 지난 11월 18일
기도 나누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또한 고양시와 포항 한동대학
(금)부터 12월 28일(수)까지 7주 동안 광화문 사랑의 열매 세미나실에서
교에서 회원들이 각 100여명 규모의 레터나잇을 열었고, 전국 56개 학
진행됐습니다. 인권대학 이슈과정은 인권 심화학습 과정으로, 인권의
교의 선생님과 학생들도 참여해주셨습니다.
보편성을 침해하는 차별실태를 점검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
이 같은 참여에 힘입어 지난해 12월 26일에는 페이스북 양심수, 자바
한 제도 마련에 보다 많은 사람들과 동참하고자 국제앰네스티 한국지
사발란이 감옥에서 풀려나는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더 많은
부와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공동주최했습니다.
좋은 소식이 나올 수 있도록 올해에도 많이 참여해주세요!
23명의 참가자와 함께 한 인권대학 이슈과정은 일방적인 강의형식에서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 Amnesty International
는 자리였지만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앰네스티에 대해 궁
-2011 편지쓰기마라톤
회원활동 소식
+
진행 중인 2009년 ‘용산참사’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으며, 11월에는 마 약·도박 등의 사례를 통해 개인의 자유영역과 국가 개입 범위에 대하 여 광범위한 의견 교환이 있었습니다. 12월 모임에서는 탄원쓰기활동을
55(민들레) 그룹
통해 ‘편지쓰기마라톤’에 동참했고, ‘국제앰네스티 조직과 활동’에 대한 © Amnesty International
55(민들레) 그룹은 2011년 10월
학습을 진행했습니다.
22일에 1박 2일으로 강원도 홍천 비발디파크에서 워크샵을 개최했
+
습니다. 워크숍에서는 인권의 역 사에 대한 세미나와 회원들만의
촛불모임
국제앰네스티 50주년 기념 파티 를 진행했습니다. 11월 정기모임에선 헌법의 기본권에 대해, 12월에는
앰네스티 촛불모임은 서울지역과 수도권지역에 거주하는 앰네스티 회
2011년 탄원사례들과 결과에 대해 함께 공부했습니다.
원들이 한 달에 한번씩 정기모임을 갖고, 지속적인 인권활동 참여뿐 아
55(민들레) 그룹은 2011년 11월 19일자로 예비그룹 활동을 마치고 정식
니라 회원들간의 친목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룹으로 승인 받았습니다. 2012년 상반기에 55그룹은 사무국의 홈페
촛불모임은 지난 12월 11일 사무국의 주최로 열린 ‘편지쓰기마라톤 레터
이지 개편과 FAQ 작성을 도울 예정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이윤
나잇’ 행사에 참여하여 여섯 통의 탄원엽서와 한 통의 연대엽서를 썼습니
중 대표(@eyunjung, eyunjung@naver.com), 박종옥 총무(@
다. 레터나잇에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은 각자 탄원엽서와 연대편지를 작
ForsythiaNsmile)에게 문의해주세요.
성하여 개별적으로 발송하기도 했습니다. 앰네스티촛불모임 정기모임은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5시에 신촌 토즈(아트레온점)에서 열립니다.
+
촛불모임의 활동에 함께하고 싶으신 분은 아래 주소로 찾아와주세요. 네이버카페 http://cafe.naver.com/amnesty2nd 블로그 http://amnesty2nd.tistory.com 트위터 @amnesty2nd
고양앰네스티가족모임 © Amnesty International
현재 고양앰네스티가족모임은 내 부사정으로 가족모임을 따로 진
+
행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신 온 라인모임 활동과 연계해 매월 셋
대학생네트워크
째 주 일요일에 온라인모임 정기 © Amnesty International
모임에서 진행한 탄원사례를 일 산 풍동에 있는 ‘동녘교회’ (http://dongnyuk.org) 의 예배시간에 소개하 고 교인들에게 서명을 받는 것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10일 ‘세 계인권의날’에는 ‘동녘교회 인권을 생각하는 고양시민의모임’ 주최로 백
국제앰네스티 대학생네트워크(이 하 앰대)는 다양한 인권이슈를 배 우고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 하고 있습니다. 10월 정기모임에
석동에 있는 청소년문화공간인 ‘동녘꿈터’에서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서는 지난 몇 년간 국가보안법 피
‘편지쓰기마라톤’을 개최하였습니다. 한국지부의 지원 하에 개최한 이번
해 사례들을 살펴보고, 문제점이
‘편지쓰기마라톤’에는 총 50여명이 참석해 탄원편지를 쓰고 동녘교회의
무엇인지 토론을 거쳐 11월 홍대 거리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교인 및 가족들이 준비한 다채로운 공연(기타 동아리, 청소년 통기타, 피
피켓팅 및 전시 거리 캠페인을 기획, 실행했습니다. 또한 가을을 맞아
아노, 청소년들의 방송댄스, 성악, 사물놀이 등)을 감상했습니다. 다시 한
MT도 떠났는데요, 앰대의 전통 ‘공부하는 MT’의 일환으로 일본군 ‘위안
번 행사를 위해 수고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부’ 생존자 할머니들께서 거주하고 계시는 나눔의 집에 방문해 전쟁에 의한 인권 침해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이어 12월에는
+ 대전모임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열린 제 1000회 수요시위에서 공연도 열 었습니다. 이처럼 앰대는 전쟁 피해 여성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 지고 연대하고 있습니다. 앰대는 새해를 맞이하여 이주노동자의 입국 전 에 발생하는 인권 침해에 대해 토론하고, 보고서를 발간하는 프로젝트를
대전 모임은 대전 지역에 거주하는 앰네스티 회원들이 탄원편지쓰기,
진행할 예정입니다.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은 유스 회원들
인권에 관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누구나, 언제나 환영합니다.
대전모임은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정기모임을 갖습니다. 지난 10월 정
싸이월드 클럽 club.cyworld.com/amnestyact
기모임에서는 서서히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으나, 아직도
트위터 @amnestyact 페이스북 facebook.com/amnestyact
함께하는 사람들
+
+
이우중학교 총학생회 기부금 전달 (2011년 5월)
도서출판 탐 ‘넌 자유롭니’ 기부약정 (2011년 10월) © Amnesty International
© Amnesty International
도서출판 탐(대표: 이재일)은 청 소년 서적 《넌 자유롭니?》의 판 매수익의 10%를 한국지부에 기 부하기로 약정하였습니다. 이재일 대표는 이 책을 출판하면 서 국제앰네스티와 인권의 가치 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직은 기부경험이 많지 않지만 이번 기 회를 시작으로 출판사_내에서도
경기도 성남시 이우중학교 총학생회는 교내행사인 ‘2011 인권환경주간’
나눔 문화가 확산되었으면 한다
의 수익금 전액을 한국지부에 전달했습니다.
고 밝혔습니다.
김호수 총학생회 회장은 직접 인권을 위한 행사를 계획하고 진행하는
《넌 자유롭니?》는 ‘이오인 콜퍼’ 등 세계유명청소년문학 작가 열 다섯
것이 뿌듯했다며, 처음에는 행사를 홍보하는 것이 힘이 들기도 했지만
명이 국제앰네스티와 함께 들려주는 인권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이 행사를 통해 친구들이 인권이라는 주제를 좀 더 가깝게 느끼게 되어
담긴 도서로 청소년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인권의 가치를 되새겨 보
서 기뻤다고 밝혔습니다.
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우중학교 학생들의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지부 블로그(blog.amnesty. or.kr)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김보미 회원, ‘해피에너지’ 선정 (2012년 1월)
+
© Amnesty International
김세원 회원, 장학금 기부 (2011년 10월) © Amnesty International
초등학교 교사인 김보미 회원의 이야기가 ‘해피에너지’로 선정되어 네이 버 메인페이지와 해피빈(happybean.naver.com)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김세원 회원(서문여고 1학년)은 장학금 전액을 한국지부에 기부했습니다.
김보미 회원은 ‘편지쓰기마라톤’ 참여가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통해 배
사무국에 방문한 김세원 회원은 고등학교 진학 후 캠페인에 참여할 시
우는 ‘인권’을 실제로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경험
간이 부족해 아쉬웠던 중 기부를 통해서도 참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담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편지쓰기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물질적 성공
들었다며, 처음으로 받은 장학금이기에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었다는
만을 위한 공부가 아닌,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길
말을 하면서 밝게 웃었습니다.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쁜 생활 속에서도 앰네스티 캠페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큰
김보미 회원의 자세한 이야기는 해피빈 *해피에너지에서 확인하실 수
활력소가 된다며 한국지부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김세원 회원
있습니다.
의 자세한 인터뷰 내용은 한국지부 블로그(blog.amnesty.or.kr)에서 확 인하실 수 있습니다. * 나눔을 실천하는 기부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네티즌들이 함께 기부할 수 있는 해피 빈의 코너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Member story 회원이야기
© Amnesty International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본인의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저는 ‘불온법무관’입니다. 2008년 10월에 헌법재 판소에 군내 불온서적과 관련한 소송을 냈고, 2009년 3월에 옷을 벗었습니다. 그렇게 파면을 당하고 나와서는 민변에 회원으로 가입했고요. 3 월 말쯤 연거푸 패소를 하면서 민변 사무처에 와 서 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자유 권을 위한 투쟁을 해보고자 한 것이죠. 공식적으 로 2011년 8월 16일 항소심에서 파면 취소판결 받고 군법무관으로 복직했지만, 바로 정직을 받 았습니다.
어떻게 앰네스티에 관심을 갖고 회원이 되셨 나요? 기본적으로 인권문제에 있어 국제연대에 가장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파면되어 있는 기간 동 안에 UN인권이사회에 가기 위해 앰네스티 리포 트를 보면서요. 앰네스티에서 뭔가를 함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기부도 하고 싶었고요. 군법무관을 하면서부터 제가 결심을 한 것이 내 월급의 2%는 꼭 기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말이죠. 군법무관 당시 200만원을 받 았는데 이 중 4만원을 후원하면서, 그렇게 기부 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부터 후원을 늘
불온서적 파면
리기 시작했고요. 지난 12월에 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NCCK) 인권상을 받고 상금으로 3백 만 원이 생겼는데, 이것도 서울영상집단부터 인권
군법무관 박지웅 회원을 만나다
센터 건립, 표현의 자유 연대기금 등에 다 기부 했어요.
군법무관 되기 전, 사법시험 합격 전에 어떤 학 생이셨나요? 제가 성격이 괄괄하고 술 좋아하는 사람이었죠.
베스트셀러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 23권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국방부의 결정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파면을 당했던 전 군법무관 박지웅 회원님을 기억하시나요? 박지웅 회원님을 만나 그 동안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도 좀 계산적인 사
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테 유리하게 짜여있죠. 그래서 많은 변호사들이
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시를 붙어야 하기 때문
강했어요.
그들을 위해서 일해야 돈을 버는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러다 보면 법 자체를 점점 더 가진
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집약해서 공부를 할까라 는 생각들이 많았죠. 주변의 관계들도 그렇게 정
‘내부절차’라는 것을 어떻게 걸치셨나요?
사람들에게 더 유리한 세상이 될 수 밖에 없잖아
리가 되었고요. 사시는 고시공부 2년 반 후 24살
내부절차라는게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전부입
요. 이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생각이 많아
에 합격했어요. 고시가 전부였던 제 대학 생활에
니다. ‘문제가 있다. 시정해달라.’라고 요구했지
요. 이 사회의 기회균등이라는, 자유 못지 않게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만 시정 안 하죠. “너한테 해당되는 사항도 아닌
중요한 평등문제, 이런 걸 변호사가 고민해야 한
데 왜 그러냐”라는 말만 돌아 왔고요. 군인들이
다고 생각해요.
불온서적의 헌재소송, 무섭지 않으셨나요?
이런 생각이 있어요. 제가 다른 병사들처럼 영내
2009년 당시 제 나이가 만 27살이었습니다. 행
생활하는 것도 아닌데, 특권 다 누리면서, 피해
동에 있어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저는 젊었
도 없으면서 왜 그러냐는 거죠. 헌법재판소에서
고, 순수하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
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현실적으로 군
니다.
법무관한테 피해가 없다고요. 만약 1천 명의 지
지영준 변호사의 경우 저와 띠동갑입니다. 40이
역주민이 수해를 입었고, 이중 1명 만이 소송을
다되어가는 나이에 그런 결정을 하셨죠. 행동은
냈다고 해서 나머지 999명이 피해를 입지 않은
지식을 통해 얻어지는 것도 있지만, 성격에 내재
것은 아니잖아요. 헌법재판소가 이 말을 하고 있
되어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의욕심이 있거든요.
는 거죠.
“저 대신 맛있게 드셔주세요”
요. 헌재소송을 내면서 ‘좌천되겠다’, ‘징계 받을
파면되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수 있겠다’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파면될
파면되고 나서, 또 계속 패소하면서 부엉이바위
영국에서 공부 중인 Y회원님께서 안흥찐빵 을 보내주셨습니다~ 국원들은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 둘 우걱우걱~ 냠냠 냠~ 음냐음냐~ 얏호! 감사합니다!!!
것이라고까진 생각을 못했죠.
에 오를 생각도 했었어요. ‘패소 당한 놈이 무슨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어
지난 연말 회원님들께서 사무국으로 찌~인한 감동의 선물들을 보내주셨어요~ 회원님들의 응원에 힘입어 사무국은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 사무국소식 첫 번째!
사무국소식 두 번째!
힘이 있나’ 싶었죠. 왜 해결이 안됐을까. 내가 이
달콤한 초코렛이 배달왔어요~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회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
‘용기’라는 걸 낼 때,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 판
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민변에서 생각을
단이 있어야 했고, 그 왜라고 하는 순간의 답을
정리하고 계획하고. 어떻게 싸우는지를 보고 있
55그룹(민들레 그룹)의 박종옥님께서 신년 선물을 보내주셨어요~ 달콤달콤 초코렛 먹고 남은 2011년도, 앞으 로 올 2012년도 화이팅하겠습니다!
내는 것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습니다. 여러 예
어요.
상 가능한 위험부담들이 있으니까요. 불이익이 라는 부분들을 어떻게 감수할 것인가에 대한 문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으세요?
제가 있었죠. ‘이건 아니지 않나. 누군가는 해야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닮고 싶어요. 교과서적인
하는데, 내가 해야겠다면 감수하겠다.’라는 생각
이야기긴 하지만. 변호사법 1조에 기본적 인권을
에 도달했죠. 매년 군대에서 150명씩 죽고 있습
옹호해야 한다고 나와요. 인권옹호가 당연한 건
니다. 군대의 특수성 인정하기 위해서 왜 군인들
데, 많은 변호사들이 그렇게 생각 안 하죠. 법이
의 기본적인 권리를 제한해야 하는 건지, 이 부
라고 하는 건 사회 규율 체계인데, 가진 사람한
Am n e s t y Inter national Kor e a
사무국소식 세 번째!
공정무역커피 선물~ 감사합니다 사무국에 공정무역 커피가 왔어요. 우와아 달려든 국원들은 저마다 “목 넘김이 다르다” “한번 더 우려먹으면 안되는거냐”며 수선을 떱니다. 드립커피는 우아하게 마셔야 하건 만!!! 그윽한 커피향기에 사무국원들을 취하게 해 주신 회원님! 향기로운 선물. 감사합니다.
2011.11.01~2011.12.31
Welcome 신입회원명단
강경철 강동실 강리나 강미선 강민성 강백천 강병완 강보라 강석영 강수정 강수지 강수현 강은규 강주원 강지현 강지훈 강진경 강창민 강형준 강호연 강 희 강희상 강희영 고경휘 고려진 고미진 고성혜 고영선 고영수 고준형 고지훈 고진일 고추선 고태훈 고해욱 고현빈 고효선 공대혁 공진영 공혜원 공효빈 곽수진 곽승철 곽시은 곽연영 구금회
구정하 구종우 권누리 권미정 권별빛 권성환 권수지 권순이 권아름 권오형 권유정 권은혜 권의진 권정은 권태연 권현정 권혜원 기용진 길원숙 김가영 김가영 김건호 김경선 김계숙 김관식 김관해 김광송 김광현 김규한 김그림 김근선 김근하 김기동 김기숙 김나리 김나연 김나희 김다솔 김다영 김다정 김단비 김단비 김단영 김대년 김덕래 김도현
김도현 김수호 김도형 김순임 김동민 김슬기 김동욱 김승로 김두리 김승현 김두환 김시은 김명진 김신영 김문규 김신일 김미나 김신희 김미란 김아롱 김미숙 김안나 김미영 김애나 김미진 김연구 김민경 김연주 김민상 김연희 김민수 김영례 김민영 김영은 김민정 김영제 김민정 김영조 김민지 김영준 김민진 김영훈 김민진 김영희 김범령 김예은 김범일 김용달 김병찬 김용한 김보라 김우리 김보현 김우석 김복숙 김우전 김상연 김우중 김상영 김원찬 김새롬 김위지 김서라버을김유경 김서연 김유나 김서윤 김유라 김선규 김유용 김선영 김윤관 김선우 김윤정 김선유 김은비 김선하 김은영 김선화 김은정 김선화 김은혜 김성민 김은희 김성배 김응태 김성빈 김의태 김성유 김인경 김성은 김일애 김성희 김잔디 김세구 김장우 김세근 김재성 김세미 김재원 김세영 김정민 김세은 김정석 김세정 김정선 김세진 김종은 김세환 김종현 김소연 김종희 김소연 김주연 김소영 김주연 김소윤 김주예 김소정 김주희 김소희 김주희 김수영 김준영 김수정 김준영 김수정 김준희 김수정 김지상 김수현 김지선 김수현 김지성
김지순 김지연 김지영 김지우 김지은 김지은 김지은 김지인 김지혜 김진석 김진아 김진아 김진영 김진영 김진완 김진원 김찬연 김창겸 김초롱 김춘식 김충열 김태경 김태림 김태혁 김통일 김하은 김현숙 김현영 김현우 김현주 김현중 김현진 김현진 김형근 김형우 김혜민 김혜수 김혜연 김혜열 김혜영 김혜원 김혜진 김혜진 김효근 김효정 김훈석 김희재 김희진 나누리 나샛별 남관덕 남선우 남성우 남소연 남연주 남유영 남윤성 남정윤 남희석 노미숙 노민경 노성빈 노연지 로렌지니 나 라 류겨울 류미류
류예린 류인경 마혜림 명경희 명다은 명효영 문경두 문경란 문경연 문대승 문동현 문성진 문손평 문일주 문자운 문재연 문정서 문지선 문지영 문지예 민소영 민 솔 민수정 민율홍 민정원 민지현 박건영 박경주 박근향 박근형 박근희 박금순 박남석 박동석 박두리 박명화 박문순 박미선 박민지 박민혁 박병선 박보성 박상준 박상하 박서영 박선영 박성경 박성민 박성욱 박성원 박세연 박소희 박수진 박수환 박슬기 박승현 박시내 박신형 박연우 박영광 박영서 박영숙 박영은 박영찬 박영탁 박예경 박옥숙
박용희 박원영 박윤수 박은숙 박재동 박재희 박정준 박정희 박종건 박종우 박종윤 박종준 박종현 박주희 박준태 박지은 박지훈 박진경 박진아 박진희 박찬석 박충욱 박태은 박하늘 박현미 박현욱 박현진 박혜림 박혜민 박혜연 박혜정 박효영 박효진 반영관 반은아 방민영 배경민 배수연 배온유 배재흥 배주희 배진호 배현정 배혜영 백은열 백지원 백하영 변바른 부성필 산 자 서동국 서보배 서상수 서수교 서승환 서영범 서예윤 서의립 서의환 서일훈 서정순 서지현 서진주 서청원 서춘희 서혜선 서호진
설형준 성국용 성민선 성승택 성시우 성옥희 성준학 소유미 손대운 손선영 손연주 손예지 손한울 손혜민 송기득 송성아 송승찬 송승희 송예은 송지훈 송혜민 송화숙 신경식 신동경 신동이 신미정 신선아 신세미 신소영 신순성 신예준 신윤아 신은수 신은정 신재영 신정이 신종호 신태현 신현욱 신혜경 신혜리 신홍근 심규석 심대준 심미선 심보현 심상기 심어진 심연지 안경원 안나래 안나현 안병효 안상은 안성우 안숙용 안윤정 안재붕 안정훈 안지윤 안지은 안지혜 안지호 안효성 안효성 양가연 양기훈
양병순 양병훈 양선아 양승현 양영희 양우진 양인형 양진성 엄인경 여수빈 여지혜 염찬희 예레미 오가연 오성봉 오세욱 오세호 오수진 오승아 오예근 오윤석 오은지 오정학 오주현 우미령 우 솔 우종일 우태원 원예진 원유경 원종필 원주희 원지혜 원형규 유경란 유경상 유동건 유미진 유민수 유 빈 유빛나 유석경 유선홍 유소연 유수연 유지영 유진영 유하나 유하영 유한나 유현정 유혜민 유 호 유호진 유화연 육영준 윤경빈 윤그린 윤도일 윤미래 윤삼병 윤상연 윤석민 윤성진 윤세희 윤용첩 윤재영
윤정미 윤종흠 윤주영 윤준영 윤지수 윤지원 윤지은 윤지혜 윤혜성 이가현 이가혜 이강복 이강준 이건준 이광육 이교림 이근우 이근희 이나경 이나현 이다민 이다은 이대철 이도윤 이도희 이동구 이동연 이동욱 이동호 이루리 이명선 이명진 이명훈 이미나 이미래 이미영 이민섭 이민우 이민호 이민화 이상미 이상은 이상주 이새봄 이서란 이서호 이석중 이선 이선경 이세은 이세인 이소연 이소영 이소영 이솔빛 이수보 이수인 이수정 이수지 이숭규 이슬기 이승연 이승용 이승주 이승현 이승환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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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이태봉 이택훈 이하나 이하나 이하늘 이하연 이한솔 이현승 이현정 이현정 이현정 이현주 이현철 이현홍 이혜림 이혜미 이혜민 이혜선 이혜연 이혜우 이혜윤 이호빈 이호정 이환용 이희수 이희원 이희준 인주영 임그린 임그림 임근호 임민혁 임성준 임수진 임외순 임재화 임정화 임준성 임지연 임지영 임지유 임홍성 장대영 장동섭 장문선 장민정 장세연 장순석 장애정 장예은 장우준 장원준 장유진 장 인 장주광 장주희 장현주 장현호 전국원 전명혁 전석환 전안성 전예원 전예진 전은민 전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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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형 최태희 최현지 최효임 최희라 최희정 최희종 편하경 표기윤 하동엽 하종희 하헌호 하현정 한강희 한경희 한민섭 한 봄 한성민 한 솔 한윤아 한지은 한진각 한창헌 한혜진 한희진 함경선 허세은 허유정 허은지 현관송 홍건희 홍민선 홍성욱 홍수만 홍연실 홍영근 홍은기 홍진우 홍진희 홍혜란 홍휘곤 황광연 황보배 황보영 황선혜 황애경 황자영 황지영 황지은 황진하 황태준 황혜연 황혜영 Abdul Yasir Rickie Ball Shelley Collins
2012년정기총회 회원 축제의 장, 2012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정기총회가 실시됩니다! 이번 2012년 정기총회에서는 앞으로 한국지부를 이끌어갈 임원을 선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1년간 한국지부가 추진했던 사업의 결과를 보고받고, 앞으로의 2년 혹은 중장기 사업계획에 관해 제안하고 토론하며, 앰네스티 회원의 활동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정기총회 축제의 주인공으로 오실 회원님을 기대합니다.
●일
시 2012년 3월 10일(토) 13:00 ~ 11일(일) 16:00
●장
소 하이서울유스호스텔(영등포동 소재)
●대
상 회원이면 누구나! 단, 의결권은 회원가입 후 6개월 경과, 기부금 미납이 없는 회원에게 부여됨
●참가신청 신청기한 ~ 2월 22일(수), 참가비를 납부하셔야 신청이 완료됩니다. 참가회비 - 수도권 거주회원 : 3만 5천원(숙박, 1박3식) / 2만 5천원(무박, 3식) - 지방(수도권 제외) 거주회원 : 5천원 2월 8일(수)까지 입금 시 3만원/2만원으로 각 5천원 할인 취소 및 환불 : 2월 29일(수)까지 가능 참가비 입금 계좌 : 신한은행 100-021-322995(예금주: 사단법인앰네스티) ●문
의 02)730-4755(2001), govern@amnesty.or.kr
당산삼성아파트 영등포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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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중초등학교 영등포구청역
영등포시장역 중앙어린이공원
5호선 영등포시장역 1번 출구 (도보 5분) 2호선 영등포구청역 4번 출구 (도보 8분)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7가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