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2016 Korean Language Arts: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G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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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 2016 The 4th Edition

APIS Korean Language Arts Program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Cover art: Jae Min Kim (Grade 10)



Asia Pacific International School

2015-2016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Philippians 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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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4 OF THE APIS KOREAN LANGUAGE ARTS PROGRAM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WAS PUBLISHED BY THE KOREAN LANGUAGE ART CLASS WITH THE HELP OF MANY STUDENTS, TEACHERS, AND STAFF MEMBERS IN SEOUL, SOUTH KOREA, IN THE YEA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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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ic Achievement Award and Dedication to the APIS Community as Artist for the APIS Korean Magazine Cover Contest

Grade 12 서지희 Ji Hee 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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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활동기록>

나는 행복을 미루지 않기로 결심했다 Grade 11 김리아 Lia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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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활동기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Grade 11 강준우 Joon Woo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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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Artistic Achievement Award and Dedication to the APIS Community as Artist for the APIS Korean Magazine Cover Contest / 서지희 • 3

나는 행복을 미루지 않기로 결심했다 / 김리아 • 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강준우 • 5

시작하는 글 Principal of school / Mr. Bruce Knox • 12 학생대표 인사말 / 장승빈 • 14 졸업생 축사 / 김현준 • 16

11학년 나의 하루 / 황정호 • 20 시골 / 김민규 • 21 생선 가시 / 김지민 • 22 낭만 없는 음악 / 박천진 • 23 부유(富裕) / 이규연 • 24 엄마를 부탁해 / 조기완 • 26 동의보감 / 안예지 • 31 의지와 성취감 사이의 상관관계 / 조기완, 박현지, 김다연, 김유리, 최윤진, 서수민 • 35 행복의 정의와 조건 / 윤세라, 오승윤, 배병준, 박형빈 • 38 한국 사회의 이민문화 / 배병준 • 40 대한민국의 진정한 선율 / 윤세라 • 43 말의 힘 / 임나연 • 46 말의 영향력 / 박혜정 • 48 국화 / 박성재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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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눈 / 엄대웅 • 52 나는 브라질로 간다 / 박정윤 • 55 시간을 파는 상점 / 최석영 • 57 The One Thing / 오서현 • 59 우리는 모두 김밥 / 김영은 • 61 추억의 된장찌개 / 김현주 • 63 공차 / 손승한 • 66 감자전 / 정승수 • 68 오당고 / 윤희재 • 70 탕수육 / 김찬우 • 73 To APIS SEOUL / 김리아 • 75 새 한 마리 / 김현준 • 79 약속 / 강가은 • 81 현금이의 방학 / 조남윤 • 83 단짝 친구 / 이희연 • 86 새로운 시작 / 황윤재 • 92 잔소리 없는 세상 / 장재근 • 96 벙어리 / 조하은 • 100 7월의 포츠담에 부는 겨울바람 / 최재원 • 103 흔들리며 피는 꽃 / 홍형기 • 111 끊긴 전화 / 이예경 • 113 혼자사랑 / 손승모 • 116 담쟁이 / 설정환 • 119 만무방 / 김윤수 • 122 만무방 / 서수민 • 126 만무방 / 최윤진 • 132 개화와 FTA, 나는 개방을 찬성한다 / 김준현 • 139 개화와 FTA, 나는 개방에 반대한다 / 구재모 • 141 흥선대원군, 그는 야망이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다 / 김기환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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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그는 현실적인 실리주의자였다 / 유석현 • 144 갑신정변 속으로 / 11학년 • 145 흥선대원군이 후손에게 전해주는 교훈 / 이희웅 • 154 임오군란 중 구식군인의 항변 / 윤설빈 • 156 최제우의 유서 / 오승윤 • 158 격문을 읽으며 / 박현지 • 160 농민군의 절규 / 정승현 • 162 전봉준은 너희들에게 고한다 / 김유리 • 164 1894년, 전봉준으로부터 / 이신영 • 166 전봉준으로부터 / 이채영 • 169 명성황후의 일기 / 이송원 • 171 헐버트 박사를 생각하며 / 박형빈 • 174

12학년 시사만평 ‘회의’ / 유예담 • 178 소년과 나무 / 김예린 • 179 내가 살고 싶은 나라 / 김예린 • 180 세월호 침몰 사건 / 이수연 • 182 익명성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 / 이진수 • 185 허, 그거 술맛 한 번 좋다 / 최성욱, 김도한, 임유완, 이예린 • 189 한국의 우아함, 그 이름 궁궐 / 김채화 • 192 판소리, 그 저항 정신 / 오가운 • 19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서지희 • 197 그것이 알고 싶다, 에밀레종 / 전현오 • 200 Do you know ‘한글’? / 김윤성 • 202 선비정신을 잇다 / 정지원 • 205 한국의 집, 세계를 꿈꾸다 / 이동환 • 207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 / 박선규 • 209 단원 김홍도 소개 / 서로마 •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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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싶은 나라 / 조세용 • 215 시일야방성대곡 / 김도한 • 217 반복되는 역사, 그 안에서 우리는 / 한규영 • 219 1.21 사태 / 강태현 • 221 삼풍 백화점 사건 / 최하언 • 224 위안부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홍성아 • 226 내가 원하는 나라 / 최유정 • 228 한 수험생의 실없는 고충 / 유석훈 • 230 어느 농민군의 일기 / 김형철 • 232 전쟁일지 '발견' / 김지원 • 236 전쟁일지 '할아버지의 일기' / 정유나 • 244 전태일의 외침 / 김수영 • 247 응답하라 대한민국 / 12학년 • 249

2014-2015 백일장 수상작 다섯 명의 아이들 / 이송원 • 264 5월의 벚꽃 / 박성환 • 266 새벽 다섯 시 / 김영은 • 267 올해도 오래도록 / 김지원 • 269 그저 다섯 손가락 / 유석훈 • 272 다섯 시 / 오승민 • 275 오만 가지 생각 / 유유진 • 277 사라진 지문 다섯 개 / 김유리 • 278 다섯 가지의 추억 / 채수민 • 280 못생긴 손가락 / 김리아 • 285 압구정 5번 출구 / 조세용 • 287 AP 5점 / 정승혜 • 288 시인(時人) / 정예진 • 291 5빠 / 윤세라 • 294 다섯 손가락에서 배운 교훈 / 석민 •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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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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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for opening this book! What you hold in your hands represents an enormous amount of work from a considerable number of people, and it is something I hope you take time to explore and enjoy. Having been a teacher of writing for many years myself, and having worked with teachers of writing for many more, it is amazing how powerful a “published book” can be for young writers. The idea of opening a book and reading a story they have written is a very powerful motivator. It creates an opportunity for young writers to take their good ideas and turn them into great stories, great poems, great biographies. It creates an opportunity for young writers to imagine you - the reader - sitting somewhere with this book in hand, reading their work. It creates an opportunity for young writers to imagine themselves as something more than just a writer. They begin to imagine themselves as “authors”, and this, more than anything, is a magic ingredient in turning good stories into great stories. And this is one of the reasons why so many people devote so much effort to produce this book. As you read through this edition you will meet young authors who are on their journey from good to great, some closer to one end than the other, but all of them on the journey. As the reader, you now have a role in helping these young authors take their next step in their own writing journey by giving them feedback. Just as the “book” is a powerful motivator, “hearing from the reader” is similarly inspiring. If you have a chance, please let these young authors know that you have read their work, and take a moment to let them know what you thought of their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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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honest. Comment on their choice of words. Share a particular sentence you enjoyed. Wonder how a more vivid description of a character would have helped your imagination. Simply share that as you read their story you couldn’t help but smile. There are many ways to inspire young writers to become great young writers. This book is one of those ways.

Enjoy.

Bruce Knox Principal Asia Pacific International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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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the president of APIS for the 2015~2016 school year, I am especially determined and resolute. First, I would like to thank all of my fellow students who supported and enabled me to devote myself to the important matters of the school. Furthermore, I feel honored to take part in the development of our school. Later in my life, I would like to able to look back and be proud of my role in helping make happy and valuable experiences and memories for students and teachers alike. With APIS, I have grown and matured over the past nine years. The high emphasis on learning Korean at APIS has allowed me to stay in touch with my Korean heritage. In addition, learning Chinese has better prepared me for the up and coming pacific century. I feel certain that all of my friends in APIS will value this moment as a great opportunity to learn and to develop as global leaders. Under persistent progress towards its ultimate goal, APIS is where unlimited possibilities are provided to its students. I truly hope that every student would cultivate their academic strength and develop their self-identity as they strive for success. As I sincerely hope that we will produce more meaningful and valuable work in the future, I would like to thank the Korean Department Faculty for collecting our best writing into this book. APIS 학생회장을 맡은 올해 2015년, 나의 마음은 어느 해보 다 벅차고 비장하다. 우선 학교의 중요한 일들을 대표하여 일 할 수 있도록 나를 지지해준 학우들에게 고맙다. 더불어 많은 분들의 권익과 학교의 발전에 동참 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른다. 사랑하 는 후배들과 동기들 그리고 선생님들 모두, 이 곳 APIS에서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면 그것이 올 해 나의 자랑이자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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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년 동안 나는 APIS와 함께 성장했다. APIS의 시작과 성장에 내가 함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나도 동시에 성숙해 갔다. 무엇보다 세계 언어인 영어뿐만이 아니라 모국어인 한국어에 능통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부상하는 동아시아의 언어인 중국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가장 큰 행운이자 기회였다. 세계 곳곳으로 나아갈 우리 APIS의 친구들 모두, 이 배움의 기회와 주어진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글로벌 리더로서의 자신감을 다 할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계 곳곳에서 APIS의 동문 들이 하나 둘씩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그 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 학생회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그 시작이자 모델이 되고 싶다. APIS는 발전하고 있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이 배 움터에서 모두가 하나 되어 실컷 배우고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치며 누구보다 즐거운 학교생활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의 그 정체성을 잘 확립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앞으로 쓰 게 될 삶의 기록들은 지금 여기에 담긴 내용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기를 바라며, 그 역사의 주인공들이 쓴 글들을 한 권의 책 안 에 담아 주신 한국어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5년 겨울 APIS 학생회장 장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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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내는 작은 인사

사랑하는 후배 여러분, 올 해로 벌써 네 번째로 발간하게 되 는 APIS 한국어 문집을 통해 다시 한 번 여러분과 만나게 되어 반갑 습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은 밤 12시,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의 도서관입니다. 침묵이 흐르니 고독 하면서도 나름 많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묵상의 시간이 저는 참 즐겁 습니다. 작년부터 APIS에서 한국어 수업 때 한국 역사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참으로 반 갑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APIS를 다녔을 때 한국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네요. 그 래도 지금 여러분에게 배움의 기회가 있으니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 다. 외국은 항상 중세사, 유럽사, 미국사 등 큰 나라 위주로 역사 교육 을 하는데, 세계사에서 우리나라의 이야기는 잘 다뤄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우리나라에도 화려하고 숭고한 5000년 의 역사가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2015년 7월에 한국 중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중국 만주 땅에 갔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기마민족이었던 고구려 유적, 발 해 시대 유적, 항일 광복군을 기리는 전적비, 시인 윤동주의 생가, 그 리고 우리 민족의 발원지인 백두산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에까지 우리나라는 광대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땅 을 잃고 분단의 아픔이 있지만, 후배 여러분, 우리나라의 위대한 역사 를 공부하고 잊지 말며 늘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러 분이 배운 지식과 함께 우리나라의 위상을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처 럼 넓혀 갑시다. 온 세상에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를 널 리 알리며 자부심을 키워가기를 바랍니다. 제일 중요한 건, 역사를 잊지 말자는 겁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근에 히트 친 영화 ‘암 살’에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독립지사 김원봉이 독립 직 후 백범 김구 선생에게 ‘이제 저희는 잊혀지겠지요?’ 라고 하며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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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바라봅니다. 역사는 곧 우리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입니다. 이를 잊는다면, 우리나라는 사실상 필요가 없고 의미가 없죠. 역사가 있기 에 우리의 정체성 또한 존재합니다. 저와 제가 쓴 글 자체는 잊으셔도 문제는 없지만, 부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잊지 말아주십시 오. 2011년에 작고하신 제 외할아버지께서는 늘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 중 대다수는 사회단체 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전하는 것도 사회에 대한 봉사이고 나라에 대한 애국 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관련된 글을 쓰는 학생, 역사 교육을 받는 학생, 또한 이를 가르치는 선생님, 모두 다 사회봉사를 하며 애국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는 제 할아버지와 우리나 라 역사의 한 줄기를 숭고하게 이어가려 애쓰고 헌신하신 분들 모두가 흐뭇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저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 다. 여러분을 위하여 항상 기도합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기 회를 주신 김은주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드리고, 지금 대학 원서를 쓰 느라 바쁜 제 형제 함제호, 제게 동생처럼 가까운 김채화, 그리고 볼 때마다 항상 즐거운 대화를 나눈 Lina에게 특별히 깊은 응원을 보냅 니다. 화이팅!

2015년 9월 10일 존스 홉킨스 대학교 2학년 김현준 (2014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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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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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의 하루

Grade 11 황정호 Ryan Hwang

어제는 여기서 베이고 오늘은 저기서 베인다 찢어질 것 같은 내 마음 약이라도 먹은 것 같이 쓰다

축구공처럼 이리 차이고 족구공처럼 저리 차인다 그럴수록 더 쓴 약을 먹은 것 같다 나는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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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골 Grade 11 김민규 Min Kyu Kim

그늘 아래에서 책을 내다 보네 바람이 솔솔 불어와 책창을 넘기네 강물은 옆에서 물고기와 같이 흘러가네 아이들은 냇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네 물고기들은 이리저리 아이들의 손을 피해가네 그래도 아이들은 열심히 고기 잡으려 애쓰네 저 멀리 마을에서는 부모님이 아이들의 저녁을 준비하네 한 엄마가 강물로 내려와 아이들에게 내려오라 손짓하네 아이들은 고기를 못 잡아도 즐겁게 바람과 같이 집으로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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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생선 가시 Grade 11 김지민 Grace Kim 배를 채우려 생선을 우걱우걱 먹다보니 어느새 ‘컥’ 하고 목이 막힌다 아픈 목을 달래려 물을 넘겨보아도 이미 삼켜버린 가시는 빠지질 않아 이미 막혀버린 목구멍은 점점 아려온다 목을 아프게 간지럽히는 가시가 마치 그 친구와 같아 삼켜버릴 수도 토해낼 수도 없다 다툰 후 어색함과 불편함을 피해봤지만 목에 걸린 가시처럼 힘들게 한다 다른 음식을 삼켜봐도 가시의 고통은 넘어가지 않는다 이 거슬리는 어색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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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낭만 없는 음악 Grade 11 박천진 Chun Jin Park

석양을 보며 가는 길 빛으로 가득한 버스 멀어가는 눈 가까워지는 집 귀에 가득찬 물 낭만 없는 익숙한 소리 탄산을 마시는 듯 쏴한 느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퍼지는 조연의 조용한 움직임 얼음을 깨무는 듯한 드럼소리와 함께 오는 낭만 익숙하지 하지 않아도 익숙한 소리 점점 없어지는 탄산 석양을 보며 녹아내리는 얼음 멀어가는 눈 가까워지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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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유(富裕) Grade 11 이규연 Edwin Lee 富裕, 흔히 말하면 돈이 넉넉한 걸 뜻하는 것이다 살면서 누군가는 원하는 富裕한 삶 하지만 돈은 현악기이다 돈이란 것을 잘 다룰 줄 모르면 불협화음을 듣게 된다 돈은 운동한 다음 마시는 물이다 아무리 마셔도, 자꾸자꾸 원하게 된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근본적인 갈증은 해결할 수 없다 돈은 인간을 완성시키지 않는다 다만, 잠시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 쓰는 화장품일 뿐이다 세상에서 그럼 가장 富裕한 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돈이 많은 ‘국가’일까? 아니면 부자가 사는 ‘집’일까? 이 모든 것들은 ‘돈’이란 자본을 바탕으로 富裕한 곳을 정의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은 ‘무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무덤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이 묻혀 있는 무덤 무덤, 수많은 가능성이 묻혀있기 때문에 부유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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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물질적인 것들은 없어진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은 남아있다 두려움은 가장 미묘하고, 파괴적인 인간의 모든 질병이다 이 질병은, 사람들을 멈칫하게 하고 결국에는 죽을 때까지 꿈을 펼치지 못하게 한다 가끔은 두려움을 이기고, 처음 나는 아기 새처럼 무식하게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길 바란다 ‘돈’이란 인간이 만든 작은 틀에 집착하지 않고 ‘성공’이란 목표 지향적인 생각을 버리며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富裕한 곳을 찾길 바란다 富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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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활동기록-시>

엄마를 부탁해 Grade 11 조기완 Leo Jo 아무도 모른다 그녀가 떠났다 아무도 모른 채 서울역에서 우리는 그녀를 잃어 버렸다 그녀는 나에게 의지했다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서울로 올라갔을 때, 그녀가 외로울 것이란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녀의 딸이 아닌 손님이 되어 있었다 그녀와 대화하는 법도 달라졌다 나의 중학교 입학 후 그녀의 반지가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부엌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이 정도로 난 엄마를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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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시점) 형철아, 미안해 30년 전쯤, 검사가 되겠다고 무턱대고 용산으로 올라온 내 아들, 형철이 온 힘을 다해 돕고 싶었다 형철이가 취직을 해도 기뻐하지 않았다 형철이가 검사가 되길 나도 바랐다 내 아들 꿈은 바로 나의 꿈이니까 형철아, 미안해 (형철 시점) 엄마가 사라졌다 용산동으로 올라와 그녀의 소식을 들었지만 아이들이 본 그녀의 모습은 비참했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 때문에 집을 나간 엄마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검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평범한 회사에 취직하게 되고 엄마는 되려 계속 나의 꿈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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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검사가 되길 꿈꾸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 했지만 항상 엄마는 나에게 미안하다 말했다 나, 왔네 소망원에서 날 찾아왔다 적금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던 45만원은 매달 아내가 소망원에 기부하고 있었다 그녀는 담당자에게 딸의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매일 집과 떨어져 살던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빈 집, 형철이 엄마, 아니 내 아내는 실종되었다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허나 불러볼 때마다 생각나는 건 나 자신의 과오뿐 딸에게 전화가 왔다 네 엄마를 부탁한다 딸의 울음소리에 나도 따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또 다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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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집들이 다들 똑같이 보인다 오늘따라 아들 딸이 더욱 그립구나 둘째야, 이 애미는 너 때문에 정말 기쁘다 남들처럼 잘 커줘서 고맙다 커서 날 광화문에 데려다 주고, 영화도 보여줘서 정말 고맙구나 내 남편, 당신이 내 평생 동무가 될 줄은 정말 몰랐네, 지금까지 고마웠소 이제 당신을 놔 줄게요 집에 돌아온 나는 지쳐서 주저앉았다 내 엄마가 나를 보고 있다 나에게도 평생 엄마가 필요했던 것을 알고 있을까? 장미묵주 9개월 째, 엄마가 실종되었다 이탈리아에 있는 큰 딸은 여동생의 편지를 읽고 있다 눈물로 얼룩진 이 편지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전화기에 대고 엄마의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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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했다 얘기한다 가족들은 슬슬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묵주를 구한 큰 딸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을 보았다 “엄마를 부탁해….”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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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동의보감 Grade 11 안예지 (현대인은 바닥에 누워 자는 중. 허준은 무대로 걸어 나온다.) 허준: 허허, 지금이 바야흐로 2015년이로구나. 과연 2015년에 사는 사람들이 건강한 생활을 살고 있으려나? 오늘의 목적은 사람들 에게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야! 열심히 그들에 게 내가 아는 건강법들을 전달해 볼 것이야! 어디보자…. 오호! 저기 2015년을 사는 누군가가 누워서 자는 구만. 아이고, 대체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자는 건지. (허준은 현대인을 향해 걸어가서 현대인을 흔들어 깨운다.) 허준: 이봐요! 해가 중천에 떳소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 적인 생활 습관을 길러야 건강에도 좋아요. 몸도 좋아지지만, 머리도 얼마나 좋아지는데… (현대인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에 벌떡 일어남) 현대인: 누구세요? 허준: 나는 조선시대 어의 허준이라 하오. 당신에게 해준 이야기는 다 제가 쓴 이 동의보감에 기록된 말들이지요. 현대인: 동의보감이요? 허준: 이 책은 백성들이 자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이 쓰인 쉽게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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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 그러면 혹시 이런 증상도 왜 일어나는지 동의보감에 나와 있 을까요? 제가 요즘 배가 불러 오르고 여기가 (윗배를 가리킴) 아프고 속이 더부룩하고 특히 양쪽 옆구리에 그런 답답한 느낌 이 있어요. 갈비뼈도 좀 아픈 것 같고, 그리고 음식이 잘 넘어 가지 않고 잘 내려가지도 않아요. 허준: 위병이 걸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인 것 같습니다. 음식이 잘 넘어가지도 잘 내려가지도 않는 이유는 위 속에 미생물 때문인 것 같네요. 현대인: 정말요? 꼭 인터넷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는 것과 비슷하네 요! 아, 근데 원인을 알았으니 저는 병원에 빨리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현대인 무대 밖으로 뛰어감. 불이 꺼졌다가 켜짐) 안녕하세요, 오늘은 동의보감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설가: 안녕하세요, 허준 선생님!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동의보감 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허준: 그럼요. 동의보감은 백성들에게 건강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편찬된 책이지요. 이 책은 몸속의 건강을 살피는 내경편, 몸 겉의 건강을 살피는 외형편, 사람이 아픈 이유를 알 수 있는 잡병편, 우리나라 약재에 대한 설명이 담긴 탕액편, 몸을 치료 하는 방법들이 담긴 침구편과 탕액편,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 눠진 서적입니다. 해설가: 이 서적을 언제 쓰기 시작하셨나요? 허준: 당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는 1593년에 서울로 돌아와 전쟁 피해 복구에 힘 썼다고 합니다. 전쟁 때문에 당시 민간에서 사용되던 서양의학 서적들이 없어 지게 되고 책을 구하기 힘든 형편에 처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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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맞아요. 그래서 선조가 가장 믿음직한 의사인 나, 허준에게 새 의학서적을 편찬하라고 지시하셨죠. 해설가: 이 엄청난 규모의 연구와 정보가 포함되어있는 이 동의보감 은 대체 어떻게 쓰신 거에요? 허준: 저를 비롯해서 당시 이름을 떨쳤던 의사들 양예수, 이명원, 김 응탁, 정예남이 모여서 동의보감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의원들이 모여서 이런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고려시대 이후로 처음이었죠. 해설가: 하지만 한참 작업하던 중, 1597년에 일본이 다시 쳐들어와 편찬 작업이 중단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1601년이 되어서 허준 선생님 혼자서 동의보감 편찬을 재개하시고 1610년에 드 디어 완성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해설가: 동의보감 편찬에 대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 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어요? 허준: 네,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이고 병이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이 첫 번째였어요. 병을 예방하 는 목적이 컸죠. 해설가: 아하, 그러네요. 민중들에게 중요한 것은 병에 걸려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인 것 같아요. 허준: 그리고 두 번째는 ‘무수히 많은 처방들의 요점만을 간추린다.’ 이었죠. 너무 복잡하게 하면 민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잖아요. 해설가: 정말 백성들을 위해 편찬된 책이군요. 허준: 마지막으로 세 번째 원칙은 ‘국산 약을 널리, 쉽게 쓸 수 있도 록 약초 이름에 조선 사람이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이었 습니다. 어려운 약재 이름 말고 널리 쓰이는 약초들을 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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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백성들이 병을 쉽게 고칠 수 있게 하려고 노력을 했답니다. 해설가: 우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이렇게나 많은 노력이 들어간 줄은 전혀 몰랐어요.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에는 정말 인터넷도 없고, 근처에 병원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편리한 동의보감을 만들어내면서 국민건강을 지키려 했다는 것 때문에 동의보감의 가치가 정말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중국에서도 30번이나 출간이 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 례 출간이 되었다고 해요! 바로 우리나라 동양의학을 대표하는 종합의서가 된 것이지요. 현재까지도 한의학에서 인용되고 있 는 책이지요. 또, 동양에서만 인정받은 동의보감이 아니라 국 제적으로도 그 기여를 인정받아 2009년 7월 제9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바베이도스)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 화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동의보 감은 2년 전 2013년에 영어로도 출판이 되었다고 해요. 허준: 정말 나의 책이 그렇게까지 인정을 많이 받았소? 정말 감동이 요. (운다) 내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니. 해설가: (허준을 토닥거리며) 오늘 우리나라의 국보 제319호 동의보감 에 대해서 많이 배우셨나요? 백성들을 위해서 대단히 노력하신 허준 선생님께 박수를 드리며 이 시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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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논설>

의지와 성취감과의 상관관계

Grade 11 조기완 Leo Jo 박현지 Sarah Park 김다연 Dayeon Kim 김유리 Stephanie Kim 최윤진 Christine Choe 서수민 Michelle Sumin Suh

평소 학교와 집을 오가며 늘 똑같은 일상을 보내던 우리에게 지난 3월 봄방학과 학교 행사로 수업이 없던 약 두 주 동안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주어졌다. 일주일간의 봄방학 이후 몇 몇 학생들처럼 Global Citizenship Program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 하는 선택사항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우리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일주일이나 더 긴 자유 시간을 만끽하는 기쁨을 누렸다. 봄방학이 시 작되기 전,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자로 잰 듯 정확히 짜인 일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우리들은 이 특별한 휴식의 시간을 줄곧 고대해 왔다. 기대감과 흥분은 방학이 시작되는 토요일에 가까워질수록 더 커져만 갔다. 그 동안 쌓여왔던 스트레스를 모두 해 소시킬 수 있다는 기쁨과 오래간만에 맛보는 자유에 마음껏 게을러지 고, 나태해지기로 마음먹은 우리였다. 새벽까지 원하는 것을 하며 시 간을 허비하고, 하루 종일 걱정 없이 인터넷에 몰입도 해보고, 친구들 과 놀면서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갔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게으르고 싶은 욕구를 만족시키던 우 리는 점점 지루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새로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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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망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우리 여섯 명은 그 동안 미뤄두었던 숙제와 과제를 끝내고 각자 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않았 던 일들을 실행에 옮겼다. 대부분은 밀려있던 과제를 끝내며 보람을 느끼면서도, 그 동안 제때 일을 끝마치지 못한 자기 스스로를 원망스 러워했다. 우리를 더 고되고 암울하게 만든 원인은 다른 그 무엇도 아 닌 자신의 나태한 모습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그토록 나태해지기를 기 대하고 바라왔으면서도 그 나태함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자신의 모습 을 직시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나태함에 대한 원망과 회의감은 우리의 시계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자신을 발전시키는 일은 어떤 것 일지 고민하게 만들었고, 고민은 곧 행동으로 이어져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 다. 그 이후 우리는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매일 아침 상쾌하게 애완동물과 산책도 해보았고, 영화를 보거나 그림 을 그리기도 하였다. 자발적 의지로 행하는 자기계발은 즐겁고 행복했 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은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었고, 그런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반려동물들은 소소한 행복감으로 하루를 가득 채워주었다. 상쾌한 기 분으로 시작한 하루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갔지만, 다른 날들 처럼 쓸모없이 느껴지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 속 숨어 있는 교훈들과 사소한 이야기들 하나하나까지도 벅차고 감동적이었다. 우리 중 한 명은 고난주간 동안 부모님의 강요로 인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늦잠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가야 했지만, 하루하루 지날 수록 더 기쁜 마음으로 새벽 기도에 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기도 하였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새벽 기도와 금식에 기쁜 마 음으로 참여하면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새로운 즐거움과 영적 충 만함의 기쁨을 배웠다. 우리의 소모적이던 일상이 이제는 하루하루 새 로운 만남과 결실로 가득한 무궁무진한 배움의 터전이 되어가고 있었 다. 매일 걷던 익숙한 거리와 익숙한 아침을 맞이하던 낡은 침대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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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새롭기 그지없었다. 항상 알람 소리에 짜증을 내며 어둑어둑한 방 에서 눈을 떠야 했지만, 이제는 기분 좋은 아침햇살을 자명종 삼아 스 스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여가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스 스로 나누고 행하며 주어진 자유 속에서 스스로 성취를 이뤄가는 법을 배워갔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외부적 강요로 인해 정해진 일상을 살아가던 우 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이 시간은 즐거움과 행복이기도 했지만 더 큰 책임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스스로 선택해서 한 행동들로 인해 얻는 결과가 어떠하든, 책임은 선택을 한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 구의 강요와 방해도 없이 여유를 가지며 스케줄을 정해 살아갈 수 있 게 된 우리는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보았고, 그 안에서 느낀 동일한 감 정은 그 무엇보다 큰 ‘성취감’ 이었다. 물론 좋은 성적을 받고, 선생님 께 인정 어린 찬사를 들으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즐거운 일이지만 그 보다 더 벅차고 가슴 설레는 깨달음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의 한 계를 넘어보고자 하는 행동에서 오는 성취감이었다. 자발적인 의지로 ‘나’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보는 것은 우리를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해주었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있는 넓은 세계에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의 연장선에서 새롭고 생산적인 일들 을 해 나가며 얻는 성취감은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만큼 충분히 경 험해 볼 가치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 성취감을 얻 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준비물은 바로 우리의 의지라는 것이다. 긴 시 간도, 돈도, 계획도,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다. 단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시작할 의지, 그 하나만 있다면 이미 성취를 향한 여행의 준비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우리는 계 속 자유 안에서 성취를 이루어 낼 것이고, 자발적 의지로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일들을 해 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비록 방구석 어딘가에 머물렀다 할지라도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 들만의 자유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만나 그의 강인한 의지로 무엇인가 를 성취해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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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논설>

행복의 정의와 조건 Grade 11 윤세라 Sarah Yoon 오승윤 Seung Yoon Oh 배병준 Byoung Joon Bae 박형빈 Hyung Bin Park

잘 알려진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의 막내 딸 이윤형 씨가 2005년 11월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국내 여성 갑부 7위를 기록할 정도로 부자의 삶을 살았던 이윤형 씨는 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끊었을까? 사람들은 당연히 돈과 재벌가의 명예가 인생 의 뒷받침을 해주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 과는 달리 이윤형 씨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 는 것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유학생활,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남자친 구가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이유로 결혼반대의 갈등이 이윤형 씨를 괴 롭혔다. 그녀는 말했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구나…” 누 구나 동경할 만한 재벌가의 딸이었던 이윤형 씨에게는 남들이 부러워 할 만 한 돈, 명예가 있었지만 행복은 없었다. 그럼 물질적 풍요로움 을 떠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듯이, 저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만족을 하지 못하고 공허함에 차있다 면, 과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성 프란체스코의 사례를 보자. 그는 부유한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으나 자신의 삶에 만족을 못하여 결국엔 자신의 행복을 찾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교인 의 길을 걷게 된다. 누군가 성 프란체스코와 이윤형 씨의 사례들은 물 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묻는다면, 이러 한 풍요 또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을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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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야 한다. 또한 결국 그들의 결말은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듯 행복은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시대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지위와 물 질적인 풍요는 행복과 별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조건들에 대 해 느끼는 만족의 정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존경 받는 직 업, 부러움을 사는 집, 비싼 차 등 모두 갖추더라도 그런 것에 만족을 하지 못하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보자. 국민소득이 2000달러에도 미치지 못 한다는 부탄에서는 2012년 기준으로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답하며 OECD 국가 중 행복지수 1위를 기록했다. 물론 이 수치에는 물질적인 것 이외에 여러 요소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물질만능주의적인 우리 사회에 깨우침을 주는 사실은 당연하 다. 만약 부탄의 국민들이 주변에서 급격한 경제 성장을 하며 경제적 으로 풍요로워지는 주변 국가들의 국민들을 보며 2000달러도 벌지 못 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으면 이러한 수치는 절대 나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제 차,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직업, 큰 집 없이도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며 행복을 찾는 부탄 국민들의 태도는 누 구나 충분히 본받을 만하다.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았듯이 물질적인 풍요는 결코 행복에 비례한다 고 볼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이 진정으로 만족감을 느낄 때 나 타나는 것이지만, 막상 자신이 행복만을 위해 살아보려고 노력한다면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위와 같은 생각들은 실제 행동으로 옮 기기에 매우 이론적이다. 자신이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남들이 동경하 는 일이라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삶을 살 수 있겠지만 반대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남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을만한 일이라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있어서 어려울 것이다. 대학도 남들 눈치 보며 가는 이 사회 속에서 남들의 시선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사는 것은 어 려운 일이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과 각자를 존중하며 생각해주는 따뜻하고 행복한 사회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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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분석>

한국 사회의 이민 문화 Grade 11 배병준 Daniel Bae

우리나라는 2011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15번째로 높은 GDP를 기록 할 만큼 많은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 피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항상 이렇게 좋지 않았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우리나라는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었으며 일제 강점기가 끝난 후에도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하 지만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엄청난 경제 발전을 단기 간에 해냈고 그렇기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경제가 발전하면서 우리나라 이민 문화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 동안은 우리나라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이민 현상이 있었다. 먼저, 일본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많 은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로 이민을 갔다. 그 당시 중 국 땅을 밟는 한국인들에게 불리한 여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894 년까지만 해도 78,000명에 불과했던 한국 인구가 한일 합병 당시 100,000명으로 올랐다. 또한 많은 애국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 운동을 펼치고, 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만주 등지로 많이 이주했다. 물론 일본이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 동안 중국으로의 이민은 계속 늘어났다. 이와 동시에 몇 백 명의 학생 들이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가기도 했으며 독립운동을 위해 정치 망명자들도 미국 땅을 찾았다. 반면, 개인의 자유를 위한 이민도 있었지만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이민도 적지 않았다. 100만 명 이상이 일본에서 가혹한 노동조건 아래 에 일했으며 그 외에도 몇 만 명이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부조 리한 강압 밑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자신의 자유와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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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을 위해 찾아 나선 사람도 있었던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 수도 굉장히 높았다. 2차 세계대전과 일제 강점기가 지나간 후에도 우리나라의 경제 상 태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일자리와 보 다 나은 교육을 위해서 서양 여러 나라로 떠나기 시작했다. 공부를 위 해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도 많았으며 독일과 같이 경제가 발전한 나라에 ‘손님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일하기도 했다. 반면, 여전히 우리 나라로의 이민 수는 늘지 않았다. 이러한 추세가 20년 정도 진행 되었 을 때, 우리나라는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정부주도형 경 제 발전을 이루며 일자리를 위해 국민들이 우리나라를 떠나는 일이 줄 어들었다. 또한 1980년대 말까지 유지된 높은 출산율에 의해 우리나라는 서방 국가들과 달리 이민자들의 노동력 없이 나라를 꾸려나갔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에서의, 그리고 우리나라로의 이민이 활발하지 않았 다. 하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일반인의 외국과의 교류가 늘고 1990년대에 들어오며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떨어지며 외국인 노동자의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따라서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우리나라에 도움 의 손길을 보낸 나라들이 이제 경제 발전을 위해 우리나라로 노동자를 보내는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또한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국내 외국인 유학생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언어, 교육 등 중소기업 노 동 외에 다른 직업에 의해 우리나라 땅을 밟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늘 어나고 있다. 이러한 외국인들의 한국으로의 이주가 진행되면서 1997 년에 39만 명 내외였던 외국인 수가 2007년 기준으로 100만 명 이상 이 되었다. 경제발전에 따라 우리나라 내에서의 이민도 점차 변화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다른 강대국들과 같이 국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현상이 나 타나기 시작하면서 도시 외곽 주변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농 촌 인구는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하며 젊은 층의 여자들이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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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많이 빠져 나갔다. 자연스레 농촌 청년들은 결혼을 위해 해외 여 성들을 결혼상대로 생각하게 되며 많은 해외 여성들이 결혼을 위해 우 리나라를 찾아오는 일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과 도시를 찾는 농촌 인구처럼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화에 따라 경제적인 이유와는 무관하게 해외를 찾는 우리나라 국민의 수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보다 나은 교 육을 위해 이민을 가는 해외 유학생들의 수가 점차 올라가면서 2012 년 기준으로 유네스코에 따르면 한국이 세 번째로 많은 해외 유학생을 배출했다. 이외에도 보다 나은 삶, 넓은 직업의 폭, 자녀 교육, 살기 좋은 자연 환경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해외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동포들이 이미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어 예전에 비해 이민이 수월해진 것도 사실이다. 현재는 해외이주자 신고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이 미 우리나라는 세계화되어 많은 나라들과 소통하는 국가이다. 우리나 라에 사는 외국인, 그리고 외국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몇 십 년 전보다 훨씬 늘어난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앞으로 세계 각국 어느 나라 사람이 와도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공평한 삶을 제공하 는 나라가 되는 것을 기대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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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분석>

대한민국의 진정한 선율

Grade 11 윤세라 Sarah Yoon

현대 사회에서 우리나라 전통 문화들은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문화들은 정신문화, 유형문화, 생활문화, 이렇게 세 가 지의 부류로 나뉘어져 있다. 정신문화는 각종 민속놀이 또는 예술에 대한 문화이고, 유형문화는 건축물이 중심이 되어있는 고인돌 유적, 또는 수원화성 같은 것들이 유형문화이다. 마지막 생활문화는 먹거리, 옷, 살림살이 등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문화이다. 이 세 가지 전통 문화 중에서 정신문화의 하나인 음악, 대중가요가 그 중 하나의 큰 변 화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노래는 판소리가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판소리는 북 장단에 맞추며 소리꾼이 약간의 몸짓을 섞어 가면서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우리 민족 고유의 극적인 노래이다. 판소리가 언제부터 시작되 었고 어떻게 계속 이어 나가는지 그 이유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 았지만,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에서 제 5호로 지정 될 만 큼 독창적인 한국인만의 특유 음악이다. 또 2003년 유네스코 무형유 산에 등록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는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대중가요의 시작은 서양음악의 수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하여 찬송가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1885년에 들어오자, 서양의 노래들이 자연스럽 게 번안이 되었다. 이어 일본음악과 선율이 자연스럽게 접근이 되며 가요가 출발되었다. 우리나라의 대중가요는 다른 나라에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다. 1960년대의 특징은 비틀즈 음악의 영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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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팝송, 그리고 흔히 말하는 ‘로큰롤’등이 젊은 층에 파고든 것은 사실이다. 창작가요의 시작 즈음 대부분 신(新) 민요풍의 가요가 특징 으로 나타났다. <봄맞이>, <맹꽁이타령>, <노다지타령>, <노들강변>, , 오동나무> 등 그때 널리 알려진 가요들인데, 제목들이 모두 순 우리말 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자 노래들도 변했다. 지금까지 외 국에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21세기의 대중가요는 더 발전되 고 있다. 그 발전된다는 의미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만 점점 한 국노래의 의미가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크송이나 표절 의 혹 곡들이 판매순위 및 인기순위를 점령하는 현 가요계의 실상에 실망 하고 불만을 느낀다.’ 라고 가요계의 대선배 ‘마왕’ 故 신해철 씨는 가 요계를 직설적으로 말하였다. 어느덧 다른 나라의 노래와 비슷한 노래 가 한국에서 유명순위에 오른 것이 우리나라만의 음악이 상실되고 있 다는 것의 반증이다. 대한민국의 전통 악기인 장구와 같이 장단을 맞추며 부르는 노래인 판소리는 이야기도 담겨있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 다. 20세기까지의 대중가요, 흔히 말하는 7080노래들도 뜻 깊은 가사 들과 제목들이 담겨있다. 현대 사회의 대중가요는 우리말과 거리가 먼 외래어뿐만 아니라 외래어도 아닌 의미가 없는 ‘외계어’를 쓰는 바가 있어 한국의 음악문화에서 더 멀어졌다. 이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옛날 노래들을 듣는 것을 더 많이 추구하고 있다. ‘유치한 가사에 자극성만 강조한 멜로디를 건 네받아 시키는 대로 입만 벙긋거리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대중가요 수준이다.’ 라고 故 신해철 씨는 다시 직설적으로 밝혔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취향이 완전 달라진 현대 사회에 전통을 살리는 것은 어 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은 가질 수 있다. 만약 지금 세대의 유명한 가수가 옛날 노래를 다시 편곡해 부른다거나 같이 부른다면 다 시 한 번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금 사회 에서 유명한 아티스트 아이유는 옛날 그룹 산울림의 곡 <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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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김광석의 <꽃>을 다시 편곡해 부르고 같이 듀엣을 부르는 것으 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 신선함과 새로운 대중가요를 만들어나 가고 있다. 또 최근에는 ‘소리아’ 밴드라는 국악밴드그룹이라는 새로운 가수가 등장했다. 지금 사회의 대중가요 취향과 우리나라의 특유 음악 악기인 국악을 살려서 연결한 그룹이다. 대한민국 전통음악을 다시 살 려낸 이런 가수들에게 관심을 더 가진다면 우리 한국음악은 다시 그 전통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전통 요소가 가미된 음악들을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 볼 필요가 있다. 그냥 외래어와 외계어가 들어간 기계음 노래를 들을 뿐 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진정한 음악은 무엇인지 잘 고려하며 전통의 모습을 되찾는 것 또한 우리 민족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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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독자투고>

말의 힘 Grade 11 임나연 Cathy Lim

청소년들의 언어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욕’이다. 은어, 비속어를 비롯하여 입에 담기 거북한 욕들이 청소년들 의 기본적인 대화를 장악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었다. 하 지만 어른들이나 우리 사회가

이런 청소년들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방관적이며,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태연하다. “얘야, 욕하지 마렴.” 과 같이 언지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한 번 흘깃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수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이 자신, 그리고 남에게 줄 수 있는 어마어마 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생사의 기로 사이에서 한 사람을 죽 음으로도 몰아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말인데, 사회는 여전히 청소년의 부정적 언어 사용에 대해 방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청소년들에게 묻는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 좋지 않 은 언어 습관에 대해서는 나무라지 않으면서도 언론이나 미디어에서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부 정적인 언어에 대한 책임을 정녕 청소년들만이 안고 가야 하는 것일 까? 어른들이 청소년들의 언어 태도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유를 곰 곰이 생각해본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른들도 청소년들과 같은 시기를 거친 사람들이기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본인들도 욕을 써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청소년들도 마찬가 지로 ‘어른들도 욕을 쓰는데 우리라고 쓰지 말라는 법 있느냐’ 라는 주장이다. 국립국어원의 2010년 통계에서도 나와 있듯, 청소년들이 비 속어를 사용하는 이유 중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기 때문"이 가장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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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을 차지했다. 비속어 사용에 여러모로 둔감해지는 것이 기성세대 부터 전해진 관습처럼 지금의 청소년들에게서 그대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경쟁이라는 거푸집으로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과도한 경쟁과 비교에 물들어 이리저리 서로를 흠집 내고 욕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익숙한 일이다. 비교를 하며 남을 깎아내리는 것 이 습관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욕과 비속어 사용은 그런 남들을 비교하며 헐뜯을 수 있게 해주는 ‘무기’와도 같은 것이며, 우리 모두 또한 남들을 공격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 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이른바,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면모들이 언 어에 투영되어 서로를 비방하고 왜곡되어 지키려 한다. 하지만, 근본 적으로 우리 사회의 병폐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 내, 실천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자, 노력해 나아가야 할 의무이다. 우리 사회가 조금이나마 긍정적이고, 유연한, 그래서 다양한 의견과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수용해 줄 수 있는 여유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 서는 우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성별, 지역을 초월하여 많은 사 람들을 환영해주면서도 건설적인 비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환경으로 만드는 데에 우리 모두 이바지하여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노력해 나아갈 때야 비로소, 우리의 언어와 언어 사용 또한 훨씬 더 바람직하고 긍정적으로 바뀌어 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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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독자투고>

말(言)의 영향력 Grade 11 박혜정 Claire Park

‘Ask.fm’이라는 익명 사이트가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 한참 유행 이었다. 이 사이트에선 사람들이 익명으로 다른 사람에게 질문이나 글 을 남길 수 있다. 물론, 질문을 받는 사람은 질문자의 정보에 대해 아 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앞에서 말하기 부끄러운 칭찬이라든가, 평소에 면전에서 하기 곤란했던 말들을 털어 놓기 위해 이 사이트를 기회 삼 아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할 수 있다. 하지만 욕설과 비방이 가득한 질문들을 보내는 경우가 있었고, 이로 인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나의 ‘ask.fm’에도 얼마 전에 어떠한 익명의 질문이 왔다. ‘재수 없네. 못 생겼으면 성격이나 좋아야 되는데, 넌 성격도 나쁘더라.’ 처음 이 질문 을 접했을 때에는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볼수록 화가 차올랐 고 결국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참 여드름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 나에겐 이런 말은 너무나도 큰 상 처가 되어 버렸다. 우리 사회가 부정적인 말과 폭력적인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욕을 함으로써 욕을 하는 사람의 인 성이 나빠짐과 동시에 욕을 들어야 하는 사람에겐 그 욕설들이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면서 지나 가면 ‘멋지다’, ‘존경스럽다’라는 느낌보다는 ‘폭력적이다’, ‘안타깝다’ 라는 생각이 든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ㅅㅂ’과 ‘ㅈㄴ’와 같은 부정적 인 욕설들이 듣기에 마냥 즐겁고 반가운 말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기 걸그룹의 멤버인 A양이 상대 연예인에게 욕설을 하는 영상이 유출되어 큰 이슈가 되었다. 예능 프 로그램이기 때문에 재미를 위해 욕설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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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그녀의 욕설을 마냥 환영해 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비판했고, 심지어 그녀의 펜들까지도 그녀를 외면하는 아주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녀의 욕설을 본 사람들은 마냥 착해 보이고 반듯한 이미지를 자랑하던 그녀가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 는 것을 보니 의외인 것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인성마저 좋지 않아 보 인다고 비난을 했다. 결국 그녀가 무심코 취한 행동은 그녀를 인기 아 이돌 걸그룹의 멤버에서 모든 이들이 비판하는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몰아갔다. 욕설은 피해자에게 독이 될 수가 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제 일 높은 국가인 한국에선 상당수의 학생들이 매년 자살을 시도한다. 어린 학생들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 이유는 바로 학교 따돌림 때문이 다. 이 따돌림은 육체적인 피해로 학생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폭력적인 글과 욕설로 인해 정신적인 피해로 학생들에게 상처가 될 수 도 있다. 부정적인 언어가 줄 수 있는 상처는 상상 그 이상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한 사람이 무심코 던진 욕설이 다른 사람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자신감 하락 뿐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큰 지 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상대로 한 어떤 설문조사에 따 르면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보통의 학생들도 한 번쯤 은 상처로 남는 욕설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욕설이 사 람들에게 줄 수 있는 피해는 엄청나다. 부정적인 말과 폭력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서 욕설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상처다. 욕설을 습관처럼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를 이대로 방치해두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결코 좋은 방법 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욕설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 욕 설을 사용해서 한 사람을 몰아세우기 보단 대화로 상대방과 화해를 하 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이보다 제일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욕설뿐만이 아니라 어떤 말을 하든, 그 말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생각을 해 본 다음에 그 말 을 꺼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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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국화 Grade 11 박성재 Sung Jae Park 국화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셨다. 홀로 남 은 국화는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외갓집도 넉넉하지는 않았다. 국화는 곧 부잣집에 수양딸로 보내진다. 이렇게 보면 국화는 참 불행 한 인물이다. 하지만 수양딸로 보내져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되고 여러 가지 삶의 교훈을 깨닫게 된다. 국화가 수양딸로 보내진 집에는 할머니와 양어머니가 계셨다. 처음 에는 두 분 다 쌀쌀 맞았기에 국화는 그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적응해나간다. 이런 면에서는 국화가 참 대단하 다고 생각했다. 매일 혼나고 잔소리 들어도 계속 할머니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신을 고쳐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국화는 처음에 수양딸로 왔을 때 할머니와 양어머니에게 사소한 일 로 하나하나 다 혼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양어머니와 사이가 좋 아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쌀쌀맞으셨다. 자기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분이라 많이 힘드셔서 그런 것 같았다. 국화, 양어머니, 할머니의 공통점이 있다면 세 명 다 자신들이 사랑 하는 사람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른다는 거다. 국화의 경우, 아 버지가 징용에 끌려가셔서 안 돌아오셨고, 양어머니의 남편, 즉 할머 니의 아들 또한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알고 처음에는 싫 었던 할머니가 갑자기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양어머니가 국 화를 친딸처럼 아끼는 것도 매우 인상 깊었다. 결국에는 할머니의 아 들, 양어머니의 남편은 돌아가시고 국화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 비 극적인 결말으로 끝나지만 국화와 할머니의 관계는 더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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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많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국화의 아버지는 돌아오 는지, 그리고 국화는 사촌들의 집으로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 만 스토리가 끝나지 않았고 궁금증도 안 풀렸다. 내 생각에는 작가가 독자들이 알아서 만들어내는 열린 결말을 원한 것 같다. 과연 국화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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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늑대의 눈 Grade 11 엄대웅 Justin Um 다니엘 페나크가 지은 책, ‘늑대의 눈’은 슬픈 느낌이 드는 책이었 다. 책을 읽은 후의 여운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 주인공의 이름은 ‘아프리카 은비아’, 그리고 늑대의 이름은 ‘푸른 늑 대’이다. 흑인 소년은 늑대를 계속 눈으로 쫓는다. 그리고 그 흑인 소 년은 매일 같은 자리에 똑같이 서 있다. 늑대는 그 소년을 보며 생각 한다. ‘저 소년이 왜 저러지?’ 하지만 그는 관심 없는 척을 한다. 이 늑대는 인간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서 처음엔 소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이 자기 앞 에 계속 서 있자 늑대는 소년을 라이벌로 느낀다. 그래서 늑대는 ‘누 가 이기나’하고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런데 늑대에게는 예전에 사람들로 인해 입은 상처가 있다. 바로 한 쪽 눈이 실명된 것이다. 그 걸 알게 된 소년도 한쪽 눈만으로 늑대를 보려고 한다. 하지만 소년은 두 눈이 있어서 늑대는 그것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소년도 한쪽 눈을 감는다. 그때 늑대는 감동하게 되고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늑대는 눈으로 이야기를 한다. 소년은 눈을 바라보며 듣는다. 늑대 는 꿈의 북부 알래스카에서 살았다. 같이 살던 여동생 늑대의 이름은 ‘황금 깃털’이었다. 그리고 다갈색 늑대들이 그의 남매들이다. ‘검은 불꽃’은 이 남매들의 엄마인데 큰 늑대, ‘검은 불꽃’의 남편이 죽은 후 혼자 남매들을 보살핀다. ‘검은 불꽃’은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황금 깃털’은 세고 날렵하다. 또한 눈이 빠르고 청각과 후각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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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을 잘한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늑대를 잡으러 왔다. 푸른 늑대와 남매들, ‘검은 불꽃’은 이 사람들을 피한다. 하지만 ‘황금 깃털’ 은 너무 궁금해 못 참고 사람들 앞에 다가가다가 잡히고 이를 본 푸른 늑대는 ‘황금 깃털’을 살리려다가 대신 잡힌다. 그래서 혼자 동물원의 갇히게 된다. 푸른 늑대는 10년 동안 동물원에 갇혀있게 된다. 그러던 중 동물원으로 늑대 암컷이 온다. 그녀 이름은 ‘자고새’. 둘은 서로 고 향 이야기를 하다가 친해지지만 자고새는 결국 죽게 된다. 그리고 소 년을 만날 때까지 푸른 늑대는 혼자 지내게 된다. 이젠 늑대가 ‘사람의 눈’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프리카 은비아’는 예전에 아프리카에 살았는데 어쩔 수 없이 엄마 곁을 벗어나 상인 ‘토 아’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토아’는 심술이 많았다. ‘토아’의 낙타는 ‘아프리카 은비아’와 친해지고 아프리카는 낙타를 ‘냄비’라고 부른다. 하지만 심술 많고 돈만 밝히는 ‘토아’는 ‘냄비’를 판다. 하지만 아프리 카와 낙타는 약속했다. 절대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기로. ‘토아’는 ‘아프리카 은비아’까지 팔게 되고 소년은 양치기로 팔린다. 소년은 양 치기 할아버지를 ‘임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소년의 이야기를 잘 했 기에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소년 의 친구인 ‘하이에나 치타’로 인해 ‘임금’이 사랑하는 비둘기가 없어지 는 사건이 발생하고 아프리카는 쫓겨난다. 아프리카는 초록 아프리카 로 간다. 차를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초록 아 프리카에 도착한다. 이렇게 고생하며 늑대처럼 계속 버려지던 아프리 카는 맘씨 좋은 ‘마마비아’, ‘파파비아’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산다. 하지 만 서양인들이 초록 아프리카의 나무를 베어가서 나무는 없어져 가고 ‘파파비아’와 ‘마마비아’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어느 날 동물원에 간 아프리카는 낙타 ‘냄비’를 발견했다. ‘냄비’는 아프리카의 약속을 지켜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고 했다. 아프리카 는 기뻤다. 그리고 비둘기를 잡아먹은 줄 안 ‘치타 하이에나’도 동물원 에 있었다. 치타는 비둘기를 지키려다가 동물원에 잡혀왔다고 했다. 비둘기도 동물원에 있었다. 거기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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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아’도 봤다. 여전히 그는 심술이 많았다. 그래도 그들은 모두 만났 다. 모두 다 슬픈 사연과 함께. 인간의 욕심으로 모두들 동물원에 끌 려온 것이었다. 소년과 늑대는 서로의 사연을 눈으로 알게 되고 늑대의 눈은 상상한 다. 동물원이 없어지고, 다시 하얀 눈이 있고, 알래스카가 있다. 그리 고 ‘황금 깃털’, ‘갈색 늑대’, ‘검은 불꽃’, ‘치타’가 행복하게 살고 있 다. 그리고 ‘낙타’도 있다. 상인 ‘토아’는 성난 전갈에게 쫓기고 있다. 하이에나는 크게 껄껄거리며 웃는다. 모든 것을 덮어주는 조용한 알래 스카의 눈을 푸른 늑대는 생각한다. 짜잔, 늑대의 눈이 떠진다. 짜잔, 소년의 눈이 떠진다. 갑자기 눈을 뜬 늑대를 본다면 동물원 수의사는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늑대는 사람들의 욕심이 보기 싫어서 눈은 감고 있었지만 소년을 알 게 되고 소년의 이야기를 듣다가 알래스카를 상상하면서 ‘이건 볼 만 하군.’하는 생각에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소년도 같은 생각으로 눈을 뜬 거였다. 내가 읽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나름대로 정리해 보니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많은 생명들 을 아프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내 옆에 있는 자연 한 조각, 한 조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낄 수 있게 해 준, 그리고 느린 호흡으로 주변의 것들을 살펴 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책을 한 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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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나는 브라질로 간다 Grade 11 박정윤 Eugene Park 한정기 작가의 ‘나는 브라질로 간다’라는 책은 축구에 관한 책이다. 한국에서 사는 준혁이라는 아이는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 축구를 시작 한다. 하지만 한국 학교의 나쁜 문화와 안 좋은 환경 때문에 준혁이는 할 수 없이 브라질로 가게 된다. 브라질에서는 한국과 달리 선배들의 옷을 빨고, 맞고, 눈치를 보지 않는다. 브라질의 좋은 환경은 준혁이에 게 큰 도움이 된다. 나중에 준혁이는 브라질에서 성공하게 된다. ‘나는 브라질로 간다’를 읽으면서 한국과 다른 나라들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굳이 다른 말로 말하자면 한국 문화의 단점을 알게 된 셈이다. 보통 미국이나 스페인 등 외국의 학교에서는 선배 학년과 후 배 학년이 친하게 지낸다. 후배에게 심부름을 시키지도 않고, 후배들 은 선배들에게 꾸벅 꾸벅 인사 또한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한국 학교, 특히 한국의 고등학교는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강하게 잡혀 있다. 한국 고등학교에서는 선배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축구부 같은 곳은 그 문화가 더더욱 심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한국 학교의 나쁜 점들을 깨달았다. 한정기 작가도 이 책을 쓰면서 한국의 나쁜 점들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준혁이는 착한 아이인데 나쁜 환경 때문에 ‘십이신 자’라는 조폭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 때문에 브라질에 가야 하는 상황 이 생긴다. 왜 하필 준혁이는 그런 나쁜 단체에 들어갔어야 했을까? 왜 작가는 이 장면을 책에 썼고 준혁이가 브라질로 간 원인으로 썼을 까? 이런 질문들을 계속 생각하다가 작가는 한국의 나쁜 환경과 문화 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 알았다. 또한, 브라질로 가서 성공을 한 준혁이도 신기했다. 어떻게 한국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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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에만 있던 학생이 브라질로 가서 세계의 유망주들을 제치고 성공 할 수 있었을까? 왜 진작 한국에서 성공하지 못 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한정기 작가는 한국 축구부의 불공평한 상황을 말하고 싶 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브라질로 간다’라는 책은 그냥 축구 선수가 꿈인 어느 보통 학생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건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한국의 불공평함은 선배들의 군기도 될 수 있고, 열악한 환경 이 많은 시골을 고려하지 않는 정책을 펼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축구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여러 가지 불공평 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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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감상문>

시간을 파는 상점 Grade 11 최석영 Hannah Choi 누구의 아버지보다도 더 자랑스럽고 멋졌던 주인공 은조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였던 은조는 아버지가 소방관으로 다 른 사람을 구해주려다 돌아가심을 알고 나중에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울며 지내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그랬던 건지, 은조는 다른 아 이들보다 더 성숙하게 자랐고,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하실 어머니를 생 각하면서 집안일을 도우려고 노력하는 아이가 되었다. 은조는 누구보다도 충실하고 집안일을 잘 돕는 평범하지만 착한 아 이였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두 번의 실패를 맛보 게 된다. 그 후, 인터넷에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카페를 만든다. 그곳은 쪽지나 이메일로 의뢰를 해오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부탁을 들 어주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어느 날, ‘들꽃자유’라는 사람의 편지 배 달과 할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하는 부탁을 들어주면서 은조는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고 다시 한 번 은조는 성장하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짧은 시간에 작가는 은조라는 아이를 통해서 시간과 그 사이에 있는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었다. 읽다보니 작가 는 똑같은 명언을 반복해서 쓰는데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시간은 ‘지금’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을 또 다른 어딘가로 안내해 준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시간을 놓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 했지만, 책을 거의 다 읽어갔을 때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작가가 계속 은조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할 때마다 너무 마음에 와 닿았는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미움 을 그 명언을 통해서 표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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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갖고 있는 것들이나 받는 것들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사소 한 일 하나에, 그리고 또 사람 한 명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면서 살고 있다. 그 런데 이 책, ‘시간을 파는 상점’을 읽으면서 생각을 해보니, 이 책의 주제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 인지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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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활동기록>

The One Thing Grade 11 오서현 Sally Seo Hyun Oh

기업인으로서 게리 켈러와 제이 파파산이 공동 저술한 ‘원씽’ 이라 는 책은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오직 그 일 하나에만 파고 들으라는 내용이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이 책의 내용로 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사실 내가 이 책에 끌린 이유는 앞표지의 짧은 문구 때문이었다.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힘, 한 가지에 집중하라!’라는 문장을 읽고 어쩌면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생 각하는 인생에 대한 조언이 담긴 책이 아닌 사업에 관한 책이라 이해 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게리 켈러가 가르쳐 준 이 방법들 을 사업 말고 인생에 적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10학년 한 해, 나는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육체적으로도, 또한 정신적으로도 꽤 긴 시간을 낭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입 시 스트레스, 잡으려 해도 도저히 잡히지 않는 공부와의 끈질긴 싸움, 일어날 생각도 안하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무기력한 나에게 이 책은 복잡한 생각을 버리는 법 을 가르쳐 주었다. 게리 켈러는 자신이 성공한 이유가 중요한 단 하나 의 일에 목표를 두고 그 길에서 남보다 뛰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깨닫거나 자신이 해 온 일들을 그래픽으로 책에 많 이 남겼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나는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모든 게 다 중요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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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도 놓칠까봐 항상 긴장을 하며 살아간다. 이 그래프는 보기에는 정말 간단하지만, 그만큼

이해가

빨리 되었다. 큰 원은 나에게 중 요하고 내가 하 고 싶어 하는 ‘단 하나’를

의미하

고, 그 안에 있는 작은 원은 초점, 즉 나의 ‘단 하 나’를 이루기 위 해 지금 당장 시 작할 수 있는 일 을 뜻한다. 이 그래프를 보고 지금 현재 나에게 가장 중요한 단 하나를 생각해 보았다. 성적, 건강, 가족관계, 친구관계, 대학 등을 종합적으로 보았 을 때, 역시나 제일 중요한 것은 ‘대학’이 아닌가 싶다. ‘대학’을 나의 단 하나로 잡았을 때,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나의 단 하나는 너무 나도 당연하고 현실적이고 뻔하다. ‘공부’라는 주제는 분야가 너무 넓 기 때문에 그 안에서도 구체적으로 나눌 수가 있지만, 일단 한 학년을 무사히 마치는 것에 나의 목표를 두었다. 나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데에 있어 상당히 겁이 많다. 그리고 도전 정신 또한 많이 모자라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원 하는 ‘단 하나’를 위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씩 하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면 어느 샌가 그 모든 것들이 하나 둘 씩 쌓여 나만의 ‘단 하나’를 이루리라 간절히 믿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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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우리는 모두 김밥 Grade 11 김영은 Youngeun Kim 나는 어렸을 때 아주 소심하고 표현력이 부족한 아이였다. 엄마와 아빠 말을 특히 잘 들었고 고집 같은 건 부려 봤자 엄마가 껌을 사주 실 때 두 개 사달라는 고집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미국으 로 이민 가게 된 후 나는 내 개성을 찾기 시작했고, 희미했던 내 성격 이 뚜렷해졌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 김밥을 먹기 싫어했다. 왜 싫어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먹는 김밥은 아무 것도 넣지 않고 김과 밥으로만 만든 김밥뿐이었다. 그래서 유치원에서 소풍을 갈 때마다 엄 마는 김밥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항상 유부초밥을 싸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께서는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정하셨다. 미 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부모님은 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고작 영어 유치원 몇 년 다닌 것 뿐인 내가 미국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고 수업을 따라 갈 수 있을지 걱정하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서 나온 자신감 이었는지 엄마가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으로 싸준 김밥을 가방에 넣고 당당한 걸음으로 첫 등교를 했다. 하지만 당당했던 나는 교문을 들어 가자마자 기가 죽었다. 막상 학교에 들어오니 영어도 잘 안 나오고 모 든 게 낯설었기 때문에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여차여차 점심시 간이 되어 배정된 자리에 조용히 앉아 도시락 통을 꺼냈다. 엄마가 이 상하게도 내가 싫어하는 김밥을 싸주신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먹기 싫었지만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Is that sushi? I love su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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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색 머리와 바다 같이 파란 눈을 소유한 남자 아이가 말했다. 나는 김밥이 초밥이 아니라는 걸 설명했고, 김밥은 초밥과 달리 한국 음식이라는 걸 알려줬다. 첫 대화를 나눈 그 아이의 이름은 ‘안드레’였 고 미국에서 내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그렇게 김밥 덕분에 나는 학교 생활이 더 편해졌다. 친구도 금방 사 귀고 공부도 물론 뒤쳐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부터 김밥은 나에게 중 요한 음식이 되었고, 내가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뭐, 매일 김밥을 먹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김밥은 학교생활을 할 때 꽤 자주 등장했 고 김밥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과 기회도 마련해줬다. 수업 시간에 김 밥에 대해 발표도 하고, 글로벌 축제를 할 때도 나는 친구들에게 엄마 와 김밥을 만들어 학교 사람들에게 먹어보라고 권유를 했다. 이런 기 회들을 통해 나는 점점 더 영어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고, 당당해졌다. 한 때 김과 밥뿐이었던 나는 알록달록하고 색감이 다른 속 재료들로 내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김밥이다. 우리는 모두 김과 밥으로 시작해 인생을 살고 다양한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 특유의 재료들로 우리 속을 채운다. 어쩔 땐 그 재료들이 싱싱하지 않거나 쓴 맛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재료들 또한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가끔씩 새로운 재료를 발견한다. 이제는 제법 김밥이 꽉 차있긴 하지만 앞으로 삶을 살면서 김밥이 터질 때까지 재료는 더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김밥은 어떤 모양이고, 어떤 맛이 나고, 어 떤 재료를 넣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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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추억의 된장찌개 Grade 11 김현주 Lauren Kim 어릴 적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나는 할머니랑 단 둘이 하루를 보내기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할 때마 다 울음을 터트리는 나에게 할머니는 항상 요거트를 주며 달래 주셨 다. 하지만 때때로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할머니는 할머니표 된장찌개 를 밥에 비벼 호호 불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언제 울 었냐는 듯 씩 웃으며 할머니와의 하루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시는 사이 뒷 베란다에 몰래 들어가 작은 손으 로 낑낑 항아리 뚜껑을 열어 손가락으로 된장에 구멍들을 내놓고 방으 로 뛰어가 숨어들기도 했다. 그 뒤 할머니가 된장독을 열어 구멍이 송 송 나있는 된장들을 보며 “이거, 이거 어떤 똥강아지가 이랬어!” 라고 외치면 난 베란다 커튼 뒤에 숨어 몰래 웃곤 했었다. 유치원에 다닐 적 도시락으로 된장국을 싸주시는 날이면 점심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쉬는 시간 도시락 통을 열어 국을 몰래 들이켰다. 국은 짜고 뜨거웠지 만 된장 맛에 이끌려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막상 점심시간에 국 없이 밥 먹기 일쑤였고 집에 돌아가 할머니에게 싹싹 비운 국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면 할머니는 “아이구, 우리 똥강아지” 하시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는 된장을 멀리하 게 되었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과 따로 사시게 되었고 할머니의 된장 찌개를 먹기 어려워졌다. 서서히 나는 된장보다는 스파게티가 좋아졌 고, 밥보다는 빵이 좋아졌다.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밥보다는 나가서 사먹는 밥을 선호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된장을 피하게 됐다. 집에서 먹는 밥에도 된장찌개가 있으면 옆으로 치워 고기반찬을 찾았고 옷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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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 냄새가 밴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할머니가 맛있게 끓였으니까 한 숟가락만 먹어봐.” 하시며 된장찌개를 한 숟가 락 크게 떠 입에 넣어주셨다. 그때 나는 할머니가 주는 한 숟가락의 된장찌개가 너무 싫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 된장찌개가 얼마나 나에게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내가 유학을 떠나면서 부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에 입학하기 전 미국으로 갑자기 유학을 떠나게 된 나는 미국 기숙학 교에 다니게 되었다. 삼시세끼 미국 음식을 먹었고 혼자 기숙사 생활 을 하는 내게 한국 음식을 먹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어느 날 어느 때 와 같이 미국 음식을 먹는 도중 ‘된장찌개 한 숟가락만이라도 먹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스쳐 지나갔고, 내 목에 걸려있는 니글니글한 음식을 된장찌개로 꿀꺽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 다. 그 뒤 나의 된장에 대한 애착은 계속 되었고, 매일 밤 부모님에게 전화로 얼마나 된장찌개와 한국 집밥이 그리운지 말했다. 하루하루 기 다리고 기다려 겨울방학이 다가오자 나는 할머니에게 전화해 인천공항 에 도착하면 바로 할머니 집에 갈 테니 된장찌개를 맛있게 만들어 달 라 말했다. 할머니는 “오냐. 내 똥강아지, 할머니가 맛있게 끓여 놓을 테니 얼른 오기나 해라.”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며칠 뒤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한국을 도착한 나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톨게이트를 나섰다. 저 멀리 할머니와 부모님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할머니의 품에 안길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할머니의 품은 정감 있는 된장냄 새가 났고 할머니의 포근함에 몸이 녹아내리는 듯 했다. “할머니 나 배고파.” 라고 말하려는 순간 할머니는 “집에 네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 된장찌개 끓여놨단다. 얼른 가자!” 하시며 웃으셨다. 우리는 바로 할머니 집으로 향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집 대 문을 여는 순간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고 나는 가방 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냄 비에는 내가 미국에서 꿈꾸고 그리워했던 할머니표 된장찌개가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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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포실포실한 감자와 보들보들한 두부와 부드러운 호박, 그리고 쫄깃쫄깃한 차돌박이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서둘러 부엌 서랍을 열어 숟가락을 꺼내 예전 할머니가 나에게 크게 한 숟가락 떠주시듯이 된장 찌개를 입으로 떠 넣었다. “아 그래 이거야.” 입속에서 느껴지는 구수 한 맛이 나를 사로잡았고 된장이 나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음식인지를 알게 되었다. 된장이란 나에게 어릴 적 추억을 되새겨주는 타임머신 같은 존재이 고, 가족의 따뜻함을 알려주는 소중한 음식이다. 많은 현대인들은 된 장이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음식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당연하듯 살아간다. 하지만 발효 식품 중 대표적인 된장이야말로 옛적 우리나라 조상들에서부터 즐겨먹던 고유의 음식이 아닐까 싶다. 나의 어릴 적 추억, 할머니의 사랑, 그리고 그 음식이 목마르게 그리웠던 시절 모든 것들이 내 가슴에서 서서히 발효되어가고 있음을 이 여름이 지나가는 길모퉁이에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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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공차 Grade 11 손승한 Chris Sun

아침에 학원가기 전 마시는 공차는 무언가가 특별하다. 달달한 차와 쫄깃쫄깃한 펄의 환상적인 조화는 언제 마셔도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달달한 차는 미각을 불러내고, 펄의 쫄깃쫄깃함은 딱딱하게 굳어있던 나의 뇌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공차 카페에 서의 펄이 듬뿍 담긴 블랙 밀크티 한 잔은 언제나 나의 굳은 몸을 편 안하게 해준다. 공차는 신선한 차 잎으로 우려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자칭 프리 미엄 찻집인 만큼, 공차도 그 규칙을 잘 지키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무도 없는 카페 안, 창가 옆 소파에 자리를 잡고 공차를 한 모금 들 이킬 때의 그 상쾌함과 편안함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다. 두 귀를 막고 있는 이어폰 속에서 잔잔한 발라드가 흘러나 오며 마른 입 안으로 들어가는 밀크티 한 모금은 그 며칠 동안 쌓인 피로도 다 가시게 할 만큼 평온함을 가져다 준다. 개인적으로 공차는 얼음 중간에, 달기 100프로가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차갑지도 미근하지도 않은 온도와 달달한 것을 좋아하 는 나로서는 이 둘의 조화가 제일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개인 취향 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이것도 공차를 마시는 하 나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블랙 밀크티 같은 차를 마실 때에는 설탕을 조금 많이 넣어 단맛을 부각시키고, 반대로 우롱차와 같은 전통차를 마실 때에는 설탕은 조금 넣어 본래의 맛을 살리는, 이러한 사소한 것 들도 공차를 즐길 때 한번 쯤 깊이 있게 생각해봐야 공차를 제대로 즐 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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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혼혈인이다. 비록 현재 국적은 한국이지만, 대만인이라 해도 틀 린 말은 아니다. 대다수 친척들이 대만에 있기에, 나는 어렸을 적부터 대만을 내 집인양 자주 왔다 갔다 했다. 공차가 대만에서 만들어진 만 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공차를 접했다. 보통 대만의 공차 체인점에서 는 좀 나이 드신 할아버지들이 주방에서 일을 하신다. 뭔가 조금 더 전문적인 느낌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내 기억에 있는 대만의 공차는 한국에서 마시는 공차보다 진하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한국의 공차도 나름 만족스러웠지만, 대만에서의 공차는 또 다른 격의 차이를 보여준다. 어떤 음식이 아주 맛있으면 그 음식에 담긴 이야기가 들린다고 흔히들 말 한다. 대만에서 먹어본 공차는 그 런 맛이었다. 신선하고 깊은 맛의 미각과 전문가가 만들어 준다는 느 낌의 시각적 효과, 이 둘은 나에게 환상과 같은 경험을 제공 했다. 공차는 최근 대만에서 한국으로 수입 돼 들어왔고, 점차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가는 중이다. 한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공차를 모르는 사 람들이 더 많았는데, 이제는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까지 그 영역을 많 이 넓혀 갔다. 비슷한 음료를 파는 곳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가게도 실제 공차를 뛰어 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음 료를 음악에 비유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한 음악을 연주하고 편곡 하지만, 그 사람이 잘 연주했던 그 곡, 그 원곡을 제일 잘 표현해낸 사람은 결국 원곡자일 것이다. 차도 똑같다. 비록 공차라는 체인점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금 부당할 수는 있겠지만, 차도 음악과 똑같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같이 성적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에 학생들은 공부로 인한 피로 가 만만치 않게 쌓였을 것이다. 분명히 무언가 쉽게 피로를 풀 수 있 는 방법을 찾고 있었을 터, 이참에 아침마다 공차 한 잔 마셔보는 것 은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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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감자전 Grade 11 정승수 Seung Soo Chung 감자전은 나에게 조금은 특별한 음식이다. 밥상에서 참깨와 고추장 이 섞인 간장에 두툼하고 따끈 따근한 감자전을 찍어 먹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평소 야채를 잘 먹지 않는 나에게 엄마는 감자전을 먹 는다는 게 신기하다는 말까지 하셨다. 나는 네 살부터 일곱 살까지 미국 오하이오에서 엄마, 그리고 누나 와 함께 셋이서 살았다. 아빠는 교수로 혼자 한국에 계셨기 때문에 나 는 어렸을 때 아빠와의 추억이 별로 없었다. 여름 방학 때만 아버지를 보러 잠시 한국에 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아빠는 직접 밥을 해 주셨다. 아빠가 해 주시는 밥상에는 항상 감자전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편식을 했던 나는 감자전의 주재료가 감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노릇노릇한 색과 구수한 냄새 덕분에 아무 거리낌 없이 야채를 먹을 수 있었다. 나중에 내가 먹었던 전이 감자전이라는 것을 알고 충 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미국에 다시 돌아가서 아빠의 감자전이 먹고 싶어 엄마한테 졸랐지 만 미국에서 먹는 감자전은 무언가는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미국에서도 엄마한테 아빠가 해주시던 감자전을 해달라 고 졸랐다. 시간이 지나, 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다시 아빠 의 노릇노릇 쫄깃한 감자전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나고 행 복했었다. 아빠는 내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나를 혼내신 날에는 치킨이나 피자를 사주시지 않고 대신 감자전을 해 주셨다. 그런 감자전을 초등 학교 6학년 실기시간 때 우연히 만들 기회가 있었다. 평소에 아빠가 감자전을 해 주실 때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감자전을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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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말에 신이 났다. 우리는 세 명이서 조를 만들어 감자전을 만드는 연습을 하였다. 시설이 좋아 실기 시간을 위한 주방이 따로 학교에 있 었다. 나는 감자전을 만드는 방법을 잘 알아서 내가 우리 조를 이끌어 가려고 했다. 내 방식대로 감자를 까고, 갈고, 프라이팬에 올렸는데 선 생님께서 하라고 하신 방법이 우리 아빠가 하는 방법이랑 달라서 당황 했다. 선생님께서는 본인이 가르치던 방법과 다른 것을 보고 우리 조 에게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하셨다. 그 말이 어이없기도 하고 애들이 깔보는 눈치로 나를 보아서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그렇게 선생님이 하라고 하신대로 감자전을 만들고 맛을 보았을 때 반만 먹고 안 먹었 다. 아무리 같은 감자전이라도 맛이 너무 다르고 너무 짜서 반은 남긴 채로 버렸다. 그 날 집에 가면서 아빠가 해주시는 감자전을 먹고 싶다 는 생각이 간절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아빠가 집에 오실 때까지 목이 빠지게 기다 렸다. 그날따라 아빠가 유독 집에 늦게 오셔서 걱정하고 계속 아빠가 오시기를 현관문 앞에서 기다렸다. 일이 늦게 끝나신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셨을 때 매우 피곤해 보이셨다. 아빠가 씻고 주무시려 하 실 때 나는 아빠에게 감자전을 해달라고 계속 졸랐다. 아빠는 피곤해 서 다음 날 해주겠다고 하셨는데도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아빠는 감자전을 하러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 을 때 아빠가 감자전을 만들어 오시는 시간이 평소보다 오래 걸려 부 엌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 아빠 손에는 붉은색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고, 아빠는 손을 수건으로 감싸고 계셨다. 아빠는 감자를 갈면서 실수로 손을 베었다고 하셨다. 순간, 그때 아빠한테 너무 미안하고 떼 를 쓴 내가 미워서 펑펑 울었었다. 그 뒤로는 아빠한테 감자전을 해 달라는 소리를 안 했다. 요즘도 가끔씩 아빠는 나에게 감자전을 해주시겠다고 말하시지만, 무엇 때문인지 예전만큼 먹고 싶지 않다.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생이 된 지금, 아빠랑 나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무척 짧아졌다. 시간이 된다면 아빠랑 둘이 주말에 부엌에서 같이 감자를 썰고 감자전을 오붓 하게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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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오당고 Grade 11 윤희재 Hannah Yoon

내가 네 살이 되었을 즈음, 아빠의 업무 문제로 온 가족이 일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일본에서 있었던 기억 들이 그리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때 찍었던 많은 사진들을 들 여다보면 그리운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 집 앞에는 큰 슈퍼가 있었는데, 정말 이것저것 볼 것들이 많았 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나는 날마다 엄마와 손을 잡고 그 슈퍼에 갔었다. 슈퍼에는 일본 특유의 냄새가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이들 식품 코너에는 아기자기한 것들이 참 많았는데 나는 엄마한테 사달라는 얘기도 못하고 꾹꾹 참았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밑에는 각종 떡을 파시는 할아버지 가 계셨다. 그 할아버지는 흰 모자를 쓰시고, 남색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다. 무엇보다 그 인자한 미소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떡을 참 좋아했다. 온 식구들이 나를 ‘떡 순이’라고 부를 정도로 나는 떡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 에스컬레이터 앞을 지나갈 때마다 항상 그 할아버지께서 파시는 떡을 사가곤 했다. 식탁 위에 형형색색의 떡들이 펼쳐져 있으면 골라먹는 재미도 있었다. 떡의 종류가 참 다양했는데, 그 중에서 난 보통 항상 한 가지의 떡 만 먹었다. 그 떡은 일본에서 ‘오당고’라고 불리는데, 맛도 다양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오당고는 맛의 종류가 참 다양 한데, 눈처럼 새하얗고 동글동글한 당고 위에 다양한 소스가 뿌려져 있다. 달콤 짭쪼름한 간장소스가 뿌려져 있는 당고가 있는 반면에, 고 소한 흑임자가 가득 덮여져 있는 당고도 있고, 달달한 팥앙금이 한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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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덮인 당고도 있다. 내 기억으로는 이 많고 많은 당고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당고는 간장 당고였다. 나 역시 간장 당고를 제일 좋아했던 것 같다. 달지만 적당히 짭짤한 맛도 나는 간장 소스는 감칠맛이 났 다. 오당고는 한국 전통 떡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떡 자체가 찹쌀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굉장히 부드럽고 입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떡이 가래떡같이 담백한 맛이 나는 게 아니라, 달달한 맛이 났 다. 그 적당히 달달한 맛이 나는 당고와 달콤짭쪼름한 간장 소스는 정 말 환상의 조합이었다. 내가 처음 오당고를 접하기 전에는 ‘떡이 거기 서 거기겠지 일본 떡이라고 뭐가 그렇게 다르겠어.’ 라고 생각했다. 하 지만 내 생각이 틀렸었다. 당고는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슈퍼에 들릴 때마다 거의 매번 할아버지가 파시는 오당고를 사먹었고 시간이 지나도 그 당고의 맛은 질리지가 않았다. 그만큼 없으면 계속 찾게 되 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내가 떡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쫄깃 쫄깃한 식감이다. 떡 특유의 감칠맛 나는 식감은 어떠한 음식도 못 따 라간다. 한 입 베어 물면 계속 먹게 되는, 그 입안에서 착착 감기는 그 식감이 참 좋다. 한국에 온지 한참 지나고 어느 날, 나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당고 사 진을 보게 되었다. 한참을 잊고 살았는데, 다시 보니 굉장히 반가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고는 일본 음식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보기 힘든데 나는 그것을 구하려고 인터넷에서도 찾 아보고, 백화점도 가봤지만 구하기 어려웠다. 나는 엄마한테 매일 먹 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니 식탁위에 당고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일본이 아니면 절대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던 간식, 그것도 내가 제일 많이 먹던 간장 소스맛 당고. 한 입을 베어 먹으니 옛날에 먹었던 그 추억이 그대로 떠올랐다. 살살 녹는 부드러 운 식감의 떡과 간장 소스의 조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 둘은 정말 말 그대로 찰떡궁합인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이렇게 일본에서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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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맛 그대로 표현을 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엄마께 그 당고를 어디서 구해왔냐고 여쭈어 보았다. 엄마는 우연히 백화점에 서 장을 보다가 발견해서 잽싸게 사가지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걸 팔던 상인이 일본 사람이었다고 한다. 맛이 일본에서 먹던 맛과 같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상인은 일본에서 꽤나 유명한 일본 전통 떡의 장인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떡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신다고 했다. 나는 그 열정에 감탄하고, 그 오당고 의 환상적인 맛에 감탄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오당고를 접해보지 못한 것 같은데, 널리 퍼져 서 점차 사람들이 즐겨먹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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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탕수육 Grade 11 김찬우 Eric Kim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음식이 있었다. 전주에 살 때부터 이마트 푸 드 코드에서 즐겨먹던 탕수육은 나에게는 주말에만 느낄 수 있는 잠깐 의 즐거움을 주곤 했다. 서울로 이사 왔을 때에도 내가 처음 찾았던 곳은 탕수육이 맛있는 집이었다. 탕수육의 소스가 나에게는 매우 중요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탕수육을 한 가지 이미지로만 떠올리지만, 탕수육은 고기와 소스의 종류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내가 최근에 좋아하게 된 탕수육은 찹쌀 탕수육이라는 것인데 먹을 때 식감 이 매우 좋아서 자주 먹곤 한다. 내가 단골로 찾아가는 곳은 소스를 보고 판단한다. 잠실 쪽에 가면 ‘린찐’이라는 개그맨 ‘김학래’가 하는 중국집이 있는데 멀어서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특별한 계기로 가족 식 사를 할 때는 그곳에 가서 자주 먹곤 한다. 유학생 시절에도 한국에 와서 제일 처음 먹었던 음식 또한 ‘린찐’에 서 먹었던 찹쌀 탕수육이었다. 유학생 시절 역시 항상 탕수육 생각을 하며 그 힘든 시기를 버티기도 했으니 나에게는 음식 그 이상의 의미 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친구들에게 밥을 대접해야 될 일이 있을 때도 주로 중국집에 데려가는데 ‘린찐’은 너무 멀어서 집 근처에 있는 ‘송원’으로 가곤 한다. 여기도 벌써 단골이 된지 어느새 10년이 되었 다. 항상 변함없는 맛과 풍부한 양이 나의 식욕을 자극해서 그런지 주 로 송원이라는 중국집을 찾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생활과 귀찮음 때문에 주로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시켜서 먹는데 나는 웬만하면 배달 음식은 안 먹는 편이다. 배달 을 시키면 주로 탕수육 튀김옷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눅눅해 지는데 이것 때문에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가서 직접 사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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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즐긴다. 중국집에 갔을 때 가족들이 메뉴판을 보고서 항상 짬뽕을 먹을지, 짜장면을 먹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 면서도 어려운 결정인 것 같아 보인다. 나는 항상 탕수육을 시켜 먹어 서 보통은 고민을 안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짬뽕을 먹을까, 짜장면 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두 개 다 시키고 남은 것은 어머니가 드 시곤 한다. 그 모습을 보면 한 쪽 마음이 짠해져 온다. 항상 돈이 아 까우셔서 그런 건지, 살이 찔까 그러신 건지 모르겠지만 남는 음식이 아깝다고 항상 아빠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것을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가끔 코 끝이 찡해지기도 하고, 옛날 생각이 나 서 울컥하기도 한다. 항상 탕수육은 나눠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가족 간에 정도 더 돈독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먹을 때 기분도 좋 다. 그리고 항상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재미로 가기도 하는데, 경험에 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언제나 행복하다. 요즘은 일주일의 고단함을 중국집에 가서 씻곤 하는데 그 낙으로 평 일을 버티는 힘이 된다. 항상 피곤하게 일주일을 보내고 아버지랑 둘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중국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데 그때가 어떻게 보면 일주일 중에서 제일 행복하기도 하고 다음 주를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국집에 있는 음식들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주방장의 오랜 경험과 실력이 나오는 것 같다. 보통 푸드 코트보다 중 국 음식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 맛있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 다. 사람들은 보통 중국집에 갔을 때 짜장면을 보고서 그 중국집의 맛 을 대체로 평가하지만 나는 좀 다른 것 같다. 나는 중국집에 가면 언 제나 탕수육을 한 젓가락 먹어보고서 그 중국집을 평가하곤 한다. 물 론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운 중국집에 가보지 않고 단골집들만 가보긴 하지만 앞으로 아버지랑 새로운 중국집을 찾아서 먹어보는 것도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탕수육이 내 인생에 어떻게 보면 큰 의미로 남아 있어서 나중에 내 자식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그런 맛을 내는 중국집을 아버지랑 찾아다녀 보고 싶은 것이 최 근 들어 생긴 나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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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To APIS SEOUL Grade 11 김리아 Lia Kim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너와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새롭고 낯설기만 해. 올해 8월부터 APIS 하와이에서 시작한 삶은 서울에 있었을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 아무리 어려운 수업을 듣고 날마다 시험을 보게 되더라도 하와이에서 는 오히려 바쁘다는 느낌보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아. 수업이 끝나고 서핑 장비를 들고 바다를 향해 달려가면서, 하루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꿈만 같아. 하와이에서는 서울에서 자주 입던 옷들과 신발을 하나도 안 꺼내게 돼. 차도, 옷차림도, 행동도 뭔가 유행에 따르기보다는 편하고 남들의 시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그런 느낌이 인상적이야. 하와이는 서 핑 문화가 강해서 너무 차려 입고 꾸민 모습보다는 금방이라도 바다에 들어 갈 수 있는 듯한 수수함과 자연스러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 하 는 것 같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하울라’라고 하는 곳인데, 오아후 섬의 유일 한 도시인 호놀룰루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어. 하와이 중에서도 한적한 곳이라 해야 하나? 도로를 건너면 바로 짙푸른 바다 가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웅장하고 높은 산들이 있고, 빗소리에 맞춰 서 음악을 듣는 것이 정말 낭만적인 그런 곳이야. 도시와 달리 북적거 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그래서 서로의 상황이나 처지를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되고 한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는 그런 문화가 있어. 그래서 그런지 남녀노소 누구든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포 옹을 하게 되고, 볼에 입을 맞추는 하와이의 독특한 문화가 처음엔 적 잖이 어색했지만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러워졌어. 도로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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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가 많이 없는지라 길을 건널 때도 차를 멈춘 운전자에게 ‘알 로하’ 싸인(shaka)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는 이곳 하와이 문화가 너무 나 정겹고 따뜻한 것 같아. 이곳에서 알게 된 친구들은 개성이 뚜렷하고, 벌써부터 자신의 꿈을 하나씩 이뤄가고 있는 친구들이 많아. 예를 들어 형제 10명 모두 다 홈스쿨링을 받고, 현재는 음악 또는 미술 관련 일을 하는 가족, 프로 서퍼가 되고 싶은 친구, 평생 군인으로 생활하고 싶은 친구 등등 서울 에서는 흔하지 않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 그래 서 그런지 나도 내 꿈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하게 되었어. 내가 이뤄 가고 싶 은 목표들이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건지, 세상의 질서가 주는 압박 감 때문인지 생각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많이 생겼어. 자기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배운 것 은 아직은 부족해 보여도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충분히 사랑하는 법이었어! 개성 강한 친구들과 대담하게 자기 생각이 나 감정을 표현해도 허용되는 문화에 살다보니, 새로운 것과 마주했을 때 사실 두려움보다는 알 수 없는 용기가 더 생겨나는 것 같아. 이런 환경 덕분인지,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도 한국에서의 교회와는 그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 지금 나는 교회 두 곳에 다녀. 카후쿠(Kahuku)라는 지역의 ‘Hope Chapel’과 North Shore에 위치 한 ‘North Shore Christian Fellowship’인데, 두 교회 모두 다 한 가족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문화가 있어. 하와이 교회에서는 목사 님의 설교 말씀 전에 교회 구성원들과 어울리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꽤 나 길어. 한국에선 그냥 바로 앞, 뒤, 좌우에 있는 사람들과 어색한 인 사를 나누는 게 대부분인 반면, 하와이 교회는 저 멀리 앞에 앉아 있 는 사람에게까지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고 서로서로 작은 대화까지 할 만큼 교제의 시간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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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하는 방식도 교회마다 색다른데, 특히 대부분의 내 또래 친구들 이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척이나 담대해.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양 손을 들고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하는 분위기 덕분에 하나님을 더 자유 롭게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어. 나는 현재 다니고 있는 Youth Group에서 찬양 보컬과 비올라로 예배를 섬기고 있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친구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이러한 기회 덕분에 나는 너무나 행복해. 하와이에서의 일반적인 운동은 주로 서핑인데, 난 서핑을 하게 되면 서 좀 더 강해지고 세상을 더 민감하게 보는 힘을 기르게 된 것 같아. 바다 한 가운데로 나와 있을 때, 파도를 한 순간이라도 주시하지 않으 면, 정말 위험할 수 있거든. 지금까지 내가 해 본 운동 중에서 가장 어렵고 무서운 게 서핑이지만, 강하게 팔을 저어서 무서운 속도로 다 가오는 거센 파도를 성공적으로 넘어 설 때의 그 느낌이란. 그리고 내 등 뒤에서 다가오는 파도를 타고 보드 위로 일어서서 저 멀리 보이는 모래사장을 주시하게 될 때 느끼는 스릴감은 정말 서핑을 해 보지 않 는 이상 도저히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진한 감동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내 한계를 조금씩 극복하고 하루하루 더 강하게 다져지게 되 는 시간이지만, APIS Seoul에서 했던 농구와 축구 경기가 그리울 때 가 많아. 부원들과 함께 땀 흘리고, 울고 웃고 했던 추억들이 생각나 면서 우리 팀원 한 명 한 명 모두가 너무나 그리워. 하지만, 우리 모 두 현재 주어진 곳에 서 있는 나 자신을 어제보다 좀 더 나은 ‘나’로 만드는 노력을 항상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나에게 있어서 서핑 이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허락된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하와이에서의 내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지 뚜렷 하게 알게 되었어. 아무리 성적이 좋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 안 에 있다 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의 시간과 묵상을 드리고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들, 사랑, 용서, 믿음을 위한 여유를 두는 것이 라고 생각해. 서울에서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과감히 포기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현재가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 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 와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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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이곳 하와이에서 더 발견했다 하 더라도, 하와이가 꼭 서울보다 더 나은 곳이라는 뜻은 아니야. 하와이 에서는 서울과는 다른 색깔의 행복과 기회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서 그 기회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하와이 생활이 더 재밌어 질 것 같아. 그래서 기억했으면 좋겠어. 네 가 서울에 있든, 하와이에 있든, 어디에 있든지 간에, 네가 있는 그 자 리에서 그만의 아름다움과 기회를 발견해야 한다는 거. 그래야 비로소 이 세상에 그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우 리 현재 있는 곳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자! 사실 예고도 없이 떠났지만 항상 서울에 있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고작 3개월짜리 하와이 원주민으로서, 공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정말 밤하늘에 수없이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는 별이 가득한 하와이로, 언제 든지 환영이야. Aloha! From APIS Hawa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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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새 한 마리 Grade 11 김현준 Josh Kim 어느 깊은 숲에, 새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새의 이름은 ‘서새상’이었 다. ‘서새상’은 특별한 새였다. 날 수 없었다. 새상이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는 전부다 날 수 있었다. 가족 중에서 새상이 혼자 못 날았다. 아주 오래 전에, 새상이 어렸을 때, 새상이의 부모는 형들에게 했던 일을 새상이에게도 시도해 봤다. 엄마가 어린 새를 한 마리씩 떨어뜨 려서 날아갔다. 그런데 새상이 차례에, 사고가 났다. 새상이는 숲 바닥 까지 떨어졌다. 그 이후, 날개를 한 번도 펼쳐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불쌍한 새상이는 고소공포증이 생겨서, 땅을 볼 때마다 두려웠다. 그 래서 새상이는 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날 마음도 없는 새상이는 그래도 슬퍼하지 않았다. 새상이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힘내서 살았다. 숲에서 원숭이처럼 살았다. 날지는 못 했지만 뛸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새상이는 새가 아니었다. 새상이는, 이 세상에서 처음 으로 못 나는 새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욕을 많이 먹었다. 같은 나이 친구들에게 매일 이런 조롱을 들었다. “새상아, 너 새 맞냐? 하하하하.” 아니면, “새상이, 또 원숭이 짓 한다” 다들, 새상이를 놀렸다. 하지만 새상이는 슬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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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 안에는 나무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가끔씩 사람이 나무를 자 르러 왔다. 어쩔 때는 하나를 자르고, 어쩔 때는 열 그루도 넘게 잘랐 다. 숲이 작아지고 있었다. 어느 아침, 숲에 ‘쾅’ 소리가 났다.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인간들이 왔다!” 그 이후, 난리가 났다. 새는 날아다니고, 토끼들이 뛰고, 곰들도 ‘쿵 쾅’ 소리를 냈다. 새상이는 놀랐다. 자고 있는 새를 깨우면, 원래 날아 가는데, 새상이는 못 날았다. “새상아! 빨리 와!” 어머님이 부르셨다 “저 못 날아요! 어떻게 해요!” “아, 내가 업어줄까?” “저 너무 무거워요!” 이번에는 양보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무를 자르러 왔다. 하나씩 떨 어졌다. 이제 새상이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 반드시 날 거야! 새상이는 날개를 펼쳤다. 예쁜 날개를 펼치고 뛰었다. 땅에 떨어지 고 있었다. 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파닥파닥 소리가 났었 다. 새상이는 날고 있었다! 날 수 있는 새상이는 가족을 따라 다른 숲으로 갔다. 이제 새상이는 가족과 친구들과 잘 놀 수 있게 되었고, 몸도 마음도 많이 컸다. 새상 이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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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약속 Grade 11 강가은 Johanna Kang “에스터야! 놀래?” “응! 그래.” 아리와 에스터는 다섯 살부터 같이 있었습니다. 아리는 머리가 갈색 이고, 에스터는 머리가 빨갛습니다. 아리는 눈을 너무 좋아하는 열정 이 많은 소녀입니다. 하지만 에스터는 눈이 너무 차가워서 눈을 많이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에스터는 아리랑 맨날 밖으로 나가서 눈 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어느 날, 눈이 왔습니다. 아리는 빨리 옷을 갈아입고, 에스터의 집에 달려갔습니다. 에스터는 벌써 집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둘은 손을 잡 고 놀이터에 갔습니다. 같이 놀고 있는데, 에스터는 행복하지 않아 보 였습니다. “아리야. 나 너에게 말해야 하는 것이 있어.” “왜, 뭔데?” “나…내일 여기 떠날 거야.” “잠깐만, 뭐라고?” “나 여기 떠난다고.” “그래? 어디로?” “미국.” “아… 야, 우리 빨리 놀자, 에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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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와 에스터는 놀았습니다. 하지만 아리는 행복을 잃어 버렸습니 다. 집에 돌아와 밥을 안 먹고, 빨리 방에 들어가 잤습니다. “난 이제 눈 싫어.” 다음날, 아리는 일어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에스터의 집에 갔습니 다. 트럭이 밖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소파를 들고 있었습니다. 에스터 가 아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아리가 돌아보았습니다. “에스터.” “아리, 안녕.” “에스터야, 너 언제 돌아와?” “음… 삼 년 후?” “그래. 그러면 기다릴게.” “응?” “너 오면 빨리 와. 같이 놀자 다시.” “응! 알았어!” 에스터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약속!” 3년 후 머리가 갈색인 여자 아이가 놀이터에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본 빨간 마리 아이는 카메라로 갈색 머리 아이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습니다. 갈색 머리 아이가 돌아보 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랑 같이 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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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현금이의 방학 Grade 11 조남윤 Alvin Jo 황현금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현금이는 희망 고등학교 학생입니다. 현금이는 똑똑했지만 친구가 없습니다. 현금이는 계속 왕따가 되었고, 슬픈 인생을 살았습니다. 현금이는 학교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달력을 보면서 방학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겨울방학이 됐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다 재미있게 놀고 있었 습니다. SNS에서 친구들의 사진이 많이 있어서 현금이는 아주 슬퍼졌 습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혼자서 여행을 다니면 재미있 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현금이는 오래 전 부터 호주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현금이는 용돈을 모았습니다. 침대, 책상, 옷방을 다 뒤졌습니다. 43,150원 밖에 없었습니다. 현금이가 인터넷에서 비행기 값을 봤는 데, 백만 원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는데 절망스러웠습 니다. 그래서 엄마랑 아빠한테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친구에게 도 부탁하고 싶었는데 친구가 없어서 못했습니다. 결국 현금이는 구걸 을 해서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돈을 다 모은 현금이는 공항에서 왔고, 비행기 표를 확인했습니다. 현금이는 큰 공항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걸었습니 다. 그리고 공항 터미널에 가서 비행기를 탔습니다. “안전 벨트를 매야 됩니다.” 승무원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금이는 벌써 자고 있었습니다. 아주 큰소리를 들은 현금이가 깼습니다.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 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서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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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이는 창문을 봤습니다. 땅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현금이는 아주 불안한 생각을 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아주 큰 소리 가 있은 후 추락했습니다. “나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될까?” 현금이가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너만 죽는 건 아닐 거야. 우리 다 죽을 거잖아.” 옆에 있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비행기는 추락하며 반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현금이는 비행기에서 나 왔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아이고, 이젠 나 밖에 없다.” 현금이가 주위를 보니 바다가 있었습니다. 현금이는 섬 안에 있었습 니다. 현금이는 지루해서 비행기 안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현금이는 점점 더 배가 고파졌습니다. 비행 기 안에 있던 여러 가지 과자를 찾아 먹었는데도 배가 고팠습니다. 너 무 배가 고파서 현금이는 비행기 안에 그대로 누웠습니다. 그러다 바 닷가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멍멍!” 강아지 소리에 현금이가 깼습니다. “이건 뭐지?” 현금이가 말했습니다. “와! 강아지다!” 강아지가 현금이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현금이는 아주 기뻤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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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제 현금이는 강아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강아지는 흰색 털을 가진 치와와였습니다. 아주 조그만 개였습니다. 원래 현금이는 강아지 를 갖고 싶어 했는데 엄마가 강아지를 싫어하셔서 키우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현금이는 강이지랑 신나게 놀았습니다. 강아지랑 계속 뛰었 습니다. 처음으로 현금이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진짜 행복이다.’ 현금이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먹을 밥이 없었습니다. 현금이는 정말 밥을 먹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현금이는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보았지만 아 무것도 못 찾았습니다. 슬퍼서 강아지한테 말했습니다. “강아지야, 나 진짜 배고프다." “멍멍.” 현금이가 아주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나, 이 강아지를 먹으면 어떨까?” 현금이는 강아지를 쳐다 보았습니다. 아주 슬픈 표정이었습니다. 그 래서 현금이는 울었습니다. 현금이는 불을 피우고 강아지를 죽였습니 다. 현금이는 계속 울었습니다. 현금이가 아주 큰 불을 만들자 멀리 있던 여객선이 현금이를 발견했습니다. 배가 점점 더 가까워지며 다가 오고 있었고 현금이는 점점 더 슬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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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단짝 친구 Grade 11 이희연 Gloria Lee 소원이와 민지는 유치원 때부터 단짝친구였다. 발레부터 학원까지 다 같이 다녔다. 한순간도 같이 없으면 불안했다. 소원이와 민지는 단 짝 친구보다는 그냥 자매 같았다. 둘은 중학교 3학년까지는 같은 반이 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같은 반이 안 됐다. 같은 반은 아니어 도 늘 쉬는 시간에 만나서 놀았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집으로 수다를 떨면서 걸어간다. 소원이와 민지 부모님도 소원이와 민지가 떨어 있으 면 어떨지 궁금해 할 정도로 한 순간도 떨어져 있는 것을 보여준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날 소원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소원이 남자친구는 고2 승 원이란 선배다. 처음에는 민지가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민지는 소원이랑 승원이가 싫어졌다. 맨날 같이 놀던 친구가 갑자기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원래는 쉬는 시간에는 둘이 놀았지만, 소원이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남자 친구랑만 놀았다. 민 지와 소원이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언젠가부 터 민지는 집에 혼자 걸어가고 혼자 놀기 시작했다. 민지는 승원이가 너무 너무 싫었다. 단짝 친구를 빼앗아 가서 싫었다. 소원이가 민지한 테 승원이랑 뭘 했는지 뭘 받았는지 막 자랑할 때마다 민지는 왜 소원 이가 이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싫었다. 하루는 민지가 집에서 펑펑 울었다. 소원이한테 미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에 울기 시작했다. 민지 엄마는 민지를 걱정했다. 왜냐하면 민지 가 소원이 때문에 우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민지는 그 날부터 소 원이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소원이가 인사 하면 민지는 못 들은 척을 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갔다. 민지는 이제 다른 친구랑 친해졌다. 하지만 소원이는 남자친구랑 노는 게 바빠서 민지를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는 민지도 소원이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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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민지 생일과 남자친구 와 소원이의 100일 되는 날이 같았다. 소원이는 민지가 친구들에게 자 신의 생일 파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몰래 들었다. “아, 얘들아, 나 이번 주 토요일에 생일 파티 하는데 와. 꼭 와줘.” “그래. 근데 소원이는 안 와?” “아, 소원이. 걔는 뭐, 남자친구랑 뭐 하겠지. 걘 이제 나한테 신경 안 써.” 소원이는 몰랐다. 민지가 이렇게 생각하는 줄은. 왠지 기분이 묘했 다. 민지가 교실에서 나오는데, 소원이와 눈이 마주쳤다. 소원이가 먼 저 어색한 인사를 했다. “어, 민지야. 안녕?” “그래, 안녕?”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민지는 이 어색한 기운을 애써 빨리 벗어나 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소원이는 민지한테 미안했다. 화해할 겸 소 원이는 민지를 놀래켜 주려고 이번 주 토요일 민지의 생일 파티를 가 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원이는 학교 끝나고 승원이와 민지 생일 선 물을 사러갔다. “오빠, 이게 좋을까 아니면 이게 좋을까?” “왜? 이거 너 취향 아니잖아?” “오빠, 벌써 내 취향을 알다니.” “그럼, 이런 오빠가 어디 있냐?” “여기 있지롱! 이거 이번 주 토요일에 민지 생일 선물.” “너 설마 이번 주 토요일이 무슨 날인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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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슨 날인데? 아, 우리 100일!” “그래 이 바보야. 이번 주 토요일 11시에 오빠가 너 데리러 갈게.” “그런데 민지 생일은 어떻게 하지?” “아, 이 오빠가 중요해, 민지가 중요해?” “글쎄, 둘 다….” “당연히 오빠지. 민지랑 언제든지 놀 수 있잖아. 우린 100일, 걘 생 일. 생일은 내년에 또 있지만 우리 100일은 단 한 번뿐이야.” “그렇네….” 소원이는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민지랑 화해는 해야 하는데, 남자 친구랑 100일도 축하해야 하고. “그래도, 난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민지 선물 사고 가자.” “그래. 오빤 토요일 때 기대한다.” 집에 가는 길에도 소원이 머릿속에는 민지 생일과 승원이랑의 100 일로 가득 찼다. 토요일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금요일이었다. 학교에서는 승원이가 계속 백 일을 상기시키고, 민지 를 보면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래도 승원이랑 만난 지 100일이니까 소 원이는 쿠키랑 초콜릿을 만들었다. 쿠키랑 초콜릿을 만들다보니 승원 이 생각이 많이 나서, 고민 끝에 소원이는 승원이를 만나러 가기로 결 정했다. 토요일이었다. 승원이는 약속한 대로 11시에 소원이를 데리러 왔다. 처음에는 민지 생각이 안 났다. 승원이랑 시간 보내는 게 마냥 좋았 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지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승원이랑 있 으면서도, 계속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머릿속엔 민지가 있고, 앞에는 승원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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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 어떻게 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계속 민지 생각이 나서….” “뭐?! 민지 생각이 난다고! 넌 지금 내 생각만 해야지!” “하지만… 난 지금 민지랑 사이가 안 좋단 말이야.” “그건 너랑 걔 문제고, 지금 넌 내 앞에 있잖아. 우리 생각만 해야 지.” “알았어….” 아무리 오빠와 보내는 시간은 좋지만, 민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빠, 나 안 되겠어.” “왜, 또?” “나 지금 민지한테 가봐야겠어.” “민지, 민지, 민지! 넌 이 좋은 날에 민지 생각 밖에 안 하냐?!” “아니, 오빠 생각도 나. 지금 오빠가 좋지만, 난 지금 아니면 민지와 다시 화해 못 할 것 같단 말이야!” “그래! 넌 민지한테 가면 다시 나한테 올 생각 하지 마! 이제 우린 끝이야.” 소원이는 승원이가 한 말을 거의 무시하고 치타처럼 달려 갔다. 승 원이는 말문이 막혔다. 소원이는 민지 생일 파티 하는 곳에 재빨리 달 려갔다. 다행히도 아직 민지가 있었다. “어…. 너 여기 왜 왔어? 남자 친구랑 있는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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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말이지… 난….” 갑자기 민지 어머니가 와서, “어머! 이게 누구야? 소원이 아니야?” “네, 안녕하세요.” “그래. 너 잘 왔다. 민지가 널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들어와.” “네….” 소원이는 민지 어머니와 민지를 따라 들어갔다. “소원아, 재밌게 놀다 가.” “네, 감사합니다.” 민지 어머니는 자리를 피해 주셨다. 한참동안 소원이와 민지는 말이 없었다. 소원이가 먼저 말을 했다. “민지야, 그동안 미안했다. 난 니가 이렇게 서운하게 생각할 줄 몰 랐다.” “아… 괜찮아….” “미안해. 난 이제 너랑만 놀 거야!” “응? 승원이는?” “아, 걔. 몰라. 이제 걔 신경 안 쓸 거야. 우리 다시 친구로 돌아가 자. 나 솔직히 네가 그리웠어.” “그래! 나도 너 보고 싶었어!” “친구야, 고마워! 나 용서해 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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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런데 다시는 그러지마.” “알겠어.” 민지는 소원이의 사과를 받아주고 둘은 다시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둘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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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새로운 시작 Grade 11 황윤재 Yoon Jae Hwang 드디어 그날이 왔다. 1년에 단 한 번 뿐인 그 날. 윤기는 이 날 하 루 만을 기다려왔다. 윤기는 허둥지둥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칠판의 글 을 보았다. ‘회장선거’ 오늘은 바로 윤기 학년의 회장을 뽑는 날이었다. 전체 학생 수 500 명의 중학교에서 윤기는 당당히 회장 후보에 올랐다. 1, 2학년 때는 친구들과 늘 놀러만 다니던 윤기가 3학년 때는 전교 일 등까지 하게 되면서모두들 그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많은 부러움 속에 윤기에 대한 미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만큼 윤기는 아주 행복한 학 교생활을 해왔다. 윤기는 이제 전교 회장까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드디어 전교생 앞에 섰다. 윤기는 정성스레 써 온 선거 공약을 읽기 시작하였다. “…제가 전교 회장이 되면 이 학교를 최고의 학교로 만들어 보겠습 니다. 감사합니다.” 윤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교생이 윤기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윤기 는 뿌듯한 얼굴로 강당에서 내려왔다. 윤기가 내려오자마자 학교 종이 쳤고, 오후 수업이 시작되었다. 윤기는 기대감에 가득 차서 남은 3시 간 동안 집중을 하나도 못하였다. 친구들도 윤기를 계속 힐끔힐끔 쳐 다보았다. 세 시간이 윤기에게는 하루처럼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마 지막 종이 쳤고 학교 방송이 나왔다. “이번 학기 회장은 다시 뽑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윤기 학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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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에 반에 있던 모든 학생들은 윤기를 보고 수근거리여, 당황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담임선생님조차 놀란 표정이었다. 하 지만 그 누구보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은 윤기였다. 윤기는 천천히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교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윤기는 더욱 더 놀랐다. 교장선생님이 어머 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윤기가 들어오는 순간 ‘미국’이라는 단어 를 듣게 되었다. ‘끼이익’, 문 여는 소리와 함께 교무실에 있던 윤기 어머니와 교장선생님은 윤기를 쳐다보았다. “윤기야, 이리 오렴.” 엄마가 윤기에게 말하였다, “윤기야, 너 만약 미국에 가야 된다면 어떡하겠니?” 교장선생님이 윤기에게 물어보았다. “윤기야, 네가 이번에 미국에 유학가게 되었단다.” “네?” 윤기는 갑작스런 엄마의 결정에 몹시 당황하여 정신을 잃었다. 윤기가 눈을 뜨자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 그 꿈이었다. 벌써 미국에 온지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한국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윤기가 처음으로 미국 학교에 가게 되는 날이었다. 윤기는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면 미 국생활이 괜찮아 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꿈은 학교에 등교하 자마자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 애들은 동양인 을 처음 본다는 듯이 윤기를 보자마자 수근거리기 시작하였고, 어떤 애들은 동양 아이가 왔다면서 학교를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질렀다. 윤 기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반을 찾아서 걸어갔다. 한국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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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윤기는 주눅 이 들어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학교 종이 쳤다. 선생님이 자신을 소개해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선 생님은 새로운 학생이 왔으니까 잘 해 주라는 말 한 마디를 던지고는 수업을 시작하셨다. 윤기는 어쩔 줄을 몰라 하루 종일 조용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윤기는 집으로 뛰어가 침대에 엎드렸다. 생각보 다 힘들 것 같은 학교생활에 윤기는 풀이 죽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마음에 엄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 보기 싫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하루가 지났으니 몇몇이 인사해 주겠지.’라는 윤 기의 기대는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려 버렸다. 윤기가 가만히 있자 아무 도 아는 척을 안 해주고 또 다시 윤기는 투명 인간 신세가 되어 버렸 다. 선생님의 질문에도 윤기는 ‘어버버버버’ 하다가 아이들의 웃음거리 만 되었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창피해서 더 주눅이 들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조용히 다니는 것이 더 편한 것 같 았다. 역시나 첫 두어 달 정도는 그렇게 혼자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고 개를 숙이고 다음 교실로 가던 윤기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왓 이즈 롱?” 낯선 목소리가 윤기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임 소리,” 윤기는 늘 그렇듯 자신 없는 목소리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대답하였 다. “팔로우 미 투 마이 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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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목소리가 윤기에게 말하였다. 그제야 윤기는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가 교장선생님의 목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차’ 하는 마음에 윤기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더욱 더 숙인 채 교장실로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윤기는 30분간 교장 선생님과 학교 생활에 대한 이 야기를 나누었다. “당당하게 지내야지 애들이 알아봐 줄 것이다.”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땡큐 베리 머취,” 윤기는 이 말을 하고 교장실에서 나왔다. 교장실에서 나온 윤기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하였다. 다음 날 윤 기는 당당하게 학교에 등교하여 수업시간에 발표도 하고 애들에게 먼 저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아이들은 윤기를 반겨주기 시작 하였 다. “왓이즈 욜 네임?” 한 노랑머리 아이가 윤기에게 물었다. “마이 네임 이즈 윤기,” 지금까지 학생들이 자신의 이름마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윤기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워너 컴 오버 투 마이 하우스?” 다른 아이들도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면서 권유를 하였다. 윤기는 이제서야 자신이 왜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이제 몇 년간 미국에서 있을 학교 생활이 더욱 더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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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잔소리 없는 세상 Grade 11 장재근 Kevin Jang 오늘도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다. 매일 다른 점은 없다. 아침에 일어 나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날 기다리며 계속 반복되는 잔소리를 한다. 한 마디로 나는 하루를 엄 마의 잔소리로 시작하여 잔소리로 끝난다고 보면 된다. 처음에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을 때는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냥 흘 려보내야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생각을 하니 엄 마에게 처음 잔소리를 들은 날이 생각이 안 난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 부터 들었던 것처럼 너무 오래 전이라서 인가보다. 처음에는 엄마가 잔소리를 할 때마다 말다툼을 했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말다툼 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고, 이제는 내 방문을 굳게 닫고 귀를 막으며 이불을 덮는다. 하지만 엄마의 잔소리는 계속 들리며 나 는 점점 더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뭔가 달라야 한다. 아니면 내가 진짜로 미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학교가 끝난 후에 나는 집에 들어가 어젯밤 에 쌓아 놓은 옷가방과 모아둔 용돈 12만원이 든 지갑을 들고 집을 나섰다. 막상 집을 나오니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전화를 해 하룻밤 잘 수 있냐고 물어보고 친구네 집에서 자 기로 결정했다. 나는 친구에게 나의 상황을 말했다. 친구는 나에게 다 시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집에 들어가면 역시 엄 마의 잔소리를 듣고 다시 비참하게 살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는 아무리 엄마가 잔소리를 해도 다 나를 위한 것이고, 집이 세상에서 제 일 최고인 곳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친구와 계속 얘기하니 벌써 시계 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침대에 누우니 많은 게 머리에 맴돌 았다. 집에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계속 이렇게 더 지내야 하나 말이 다. 그리고는 나의 눈이 천천히 감겼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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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친구와 학교를 가는데 학교 정문 앞에 엄마가 보였다. 나는 학교 근처에 있는 문방구에 숨었다. 몇 분 동안 자세히 보니, 엄마는 지나가고 있는 내 친구들에게 나를 보았는지 물어보고 나를 찾으려 하 는 거였다. 나는 나를 재워준 친구를 붙잡고 엄마에게 나에 대해서 말 하지 말라고 하고 친구를 보냈다. 학교에 갈 수가 없으니 나는 할 게 없어서 남은 12만원으로 뭐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 주변과 다른 몇 곳을 돌아다니니까 잘 수 있는 찜질방,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는 피시방, 간단하게 음식을 살 수 있는 편의점을 다 알 수 있었다. 돌아다니다 보니 벌써 8시였다. 찜질방으로 향하는 길에서 저 멀리 골목에 있는 몇몇의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불렀다. 나는 반말과 욕을 하고 나를 왜 부르냐고 소리 질렀다. 그 무 리에서 두세 명이 앞에 먼저 나와 말을 걸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오 늘이 나의 제삿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 고등학교에서 일진으로 유명한 선배들이었다. 처음에는 내 머리를 손 가락으로 치고, 나중에는 나를 코너로 몰아 발로 밟았다. 시간이 얼마 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그냥 나를 그만 밟았으면 했다. 갑자기 형들이 나를 밟는 것을 멈추더니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내 호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내 12만원을 집어 들었다. 12만원 중에 10만 원을 꺼내더니 내 얼굴을 기억하겠노라고 이번에는 이렇게 가지만 다 음에 만나면 나를 반쯤 죽여 놓을 거라고 했다. 형들이 가고 나서 나 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형들이 때리는 것은 끝났지만, 통증은 남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시계를 봤다. 시 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마디로 나는 형들에게 거의 두 시간 동안 맞았다는 거였다. 시계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을 봤다. 한쪽 눈 이 파랗게 부어 올라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 긁힌 곳이 있었다. 갑자 기 따뜻한 집의 온기가 생각났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 는 이내, 곧 상상에서 빠져 나왔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찜질방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어른들 사이에 누워있으니 청소년을 골라내려는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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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눈길을 쉽게 따돌릴 수 있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의 발목을 만지는 느낌이 들어 발을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다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목욕 을 하고 내 옷을 가지러 옷장에 가서 내 발목을 보니, 열쇠가 없어져 있었다. 그리고 생각이 났다. 어젯밤에 누군가 나의 발목에 걸려있는 열쇠를 가지고 갔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혹시 해서 주인에게 가서 내 옷장의 숫자를 말하고 이 옷장의 열쇠가 있냐고 물어보니 있 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옷장을 열었다. 나의 옷은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내 핸드폰과 2만원이 없어져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이 사실을 말하려고 계산대에 갔다. 나는 원래 이곳에서 자면 안 되는 거였고, 이 사실을 말하면 경찰에게 끌려가고 엄마가 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 다. 나는 찜질방에서 재빨리 뛰쳐나왔고 주인도 나를 따라 뛰어 나왔 지만 그때 나는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간 후였다. 나는 이제 빈 손으로 돌아다니며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또 다시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나에게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갈까봐 너무 두려 웠다. 이제 돈이 없으니 잘 수 있는 곳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쯤이면 엄마가 친구들 집에 내가 가출했다고 말한 후일 것이므로 친구네 집에 가면 곧바로 들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따뜻한 곳을 우선 찾는 걸 목표로 잡았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결과, 지하상가나 전철역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조금 더 따뜻한 지하상가 에서 자기로 결정했다. 지하상가에 자리를 잡고, 누웠는데 누군가가 나를 발로 찼다. 뒤로 돌아보니 어떤 사람이 내가 누워있는 자리의 주 인이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며 핸드폰으 로 그 광경을 찍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저씨가 나에게 소리 지르는 게 무섭지가 않았다. 더 무서웠던 건 핸드폰에서 나오는 소리, 불빛,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는 웃음소리였다. 나는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 창피한 나머지, 나 는 울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 뛰쳐나왔다. 눈물 때 문에 그 사람의 얼굴은 잘 안보였지만, 그는 나를 입던 자켓으로 감싸 고, 부축하여 어디론가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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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은 옷으로 인해 너무 따뜻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겪은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몇 분이나 걸었을까. 그분이 나 에게 하시는 말, “괜찮니?” 나는 그 분을 돌아보며 눈물을 닦았다. 그분은 바로 엄마였다. 엄마 는 혹시나 해서 지하상가를 돌아다니던 길에 나를 찾은 거였다. 엄마 의 얼굴은 너무 반가웠다. 나는 엄마를 꽉 껴안고 몇 분 동안 울었다. 울고 난 뒤에는 엄마에게 집 나간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 는 나를 토닥토닥 등을 만져주면서 “엄마가 미안해. 너를 더 이해해주며 말을 했어야 하는데…. 엄마 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던 것 같아.” 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다시 엄마와 집에 걸어오며 지난 며칠 동안 일 어난 일들을 다 이야기 했다. 그리고 내가 잔소리라고 생각하던 엄마 의 말씀은 내가 더 잘 되길 바라셨던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것 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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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벙어리 Grade 11 조하은 Crystal Cho 숲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의미가 없다. 하루가 끊임없이 돌고 도 는 것을 보여주는 시계일 뿐이다. 산꼭대기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나 의 나무집이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마치 내 삶이 빚어내는 소리 같 아서 듣기가 거북했던 나는 집을 나와 버렸다. 산 밑의 마트에서 맥주 나 한 병 사와 고독과 함께 술이나 마셔 볼까, 팔자에 맞지도 않는 계 획이란 걸 품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터덜터덜 내려갔다. 겨울이라 양 말을 신어도 발이 금세 시려워졌다. 입김을 뿜으며 우거진 숲을 지나 산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다 보니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가 보였 다.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와 누렇게 색이 바랜 하얀 점퍼, 떡 지고 덥수룩해진 내 머리를 차마 보여 줄 수 없어 조용히 그 남자가 지나가 길 기다렸다. 보통은 소나무나 날아다니는 새를 찍기 마련인데, 아무 도 놀러 오지 않는 산을 찾아 온 것도 그렇고, 그 곳에 있는 내내 흙 바닥만 찍고 있는 것도 뭔가 수상해 보였다.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땅만 바라보다 갑자기 카메라를 들어 한번 찍고는 다시 미지의 세계로 빠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중얼거리며 인내심이 없어진 나는 경사진 길을 내려갔다. ‘술 한 병 사오는 데 들이는 이런 노력이라면 직장도 금방 구할 수 있을 걸’ 투덜투덜 하면서도 또 술을 사고 올라 올 때에는 신나라 올라오는 나였다. 나는 서른 가까이 나이를 먹었지 만 컨테이너 박스에 갇힌 다람쥐마냥 회사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내 친구들처럼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차라리 백수의 길을 걷자 하 여 부모님 등골이나 빼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철부지 아들을 그 래도 아끼고 사랑하시는 부모님 덕택에 난 아직까지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술을 혼자 홀짝거릴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현재에 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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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내 삶이 양심에는 찔렸으나 고독하지만 이 꿈 같은 삶을 깨고 싶 지는 않았다. 반쯤 풀려있는 눈으로 창 밖을 보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역시 자 신을 되돌아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웬걸, 이 낡 은 나무집의 삐그덕거리는 소리만으론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날씨 는 바람이 더 불어대고 이제는 눈까지 쏟아진다. ‘투둑투둑’ 문을 두드 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내려오는 눈꺼풀을 감아버렸다. 술 냄새가 진동 하는 내뱉은 숨을 다시 들이마시며 졸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번뜩 뜨 였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 사이에서도 들리는 노크 소리를 무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기어갔다. “누구쇼?” “똑똑똑” “아니, 누구냐니깐?” “똑똑똑” “에헤잇” 문을 열어보니 아까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어깨와 모자에는 눈이 수 북이 쌓인 채. 품에는 낮에 찍고 있던 것 같은 사진기가 있었다. “뭐요?” 라고 물어보니 그저 말없이 물끄러미 서 있다. 벌써 집 안 쪽에는 조금씩 눈이 쌓이고 있어 나는 그 남자를 재촉했지만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어 나는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남자는 문 모서리에 발을 고정시켜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씨름하기를 몇 분, 나는 너무나 춥고 졸려 그 남자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이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나는 기운 빠진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 다. 문을 닫고 신발을 벗는데 나무집이 한번 들썩이더니 창 밖이 어두 워졌다. 설마 하는 마음에 문을 시험 삼아 열어보려 했지만 아니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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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까 문 고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겨울에는 종종 눈사태가 일어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취기가 싹 가셨다. 그 말인 즉슨 저 말 안 통하는 남자와 구조대가 도우러 올 때까지 기 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댁이 눈사태가 나서 단단히 갇혔으니깐 구조대가 올 때까지 여기 있어야 돼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 남자의 배는 우렁찬 ‘꼬르륵’ 소리를 냈다. 마침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아침에 먹고 남은 찬밥과 밑반찬 몇 개를 방에 내왔다. 정적 속에서 밥을 먹 는 것이 어색해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일단은 같이 지내야 되니깐 통성명이라도 합시다. 나는 규요, 김 규.” 한결같이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자꾸만 내 말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 탁자를 ‘탕탕탕’ 치며 그 남자를 불렀다. 머리를 들어 나를 향한 남자를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 이 남자는 벙어리였다. 나는 조심스레 “귀… 가 안 들려요?” 하며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제서야 고개 를 끄덕이는 남자. 나는 다 쓴 달력 한 장을 찢어 ‘이름이 뭐예요?’라 고 적어 남자에게 건네 줬다. 남자는 연필을 받고 몇 자 끄적거리더니 나에게 보여줬다. ‘나무’ “허, 이름 한 번 특이하네.” 웬일인지 남자는 허허 웃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소소한 잡담을 나눈 지 몇 시간 차가운 밥은 더 딱딱해졌고 얼마 없는 반찬은 눅눅해졌지만 어쩐지 즐거웠다. 방이 추워 코가 빨개지고 발가락 끝의 감각이 사라졌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귀머거리, 벙어리와 말을 나눈 다는 것이 이 낡은 나무집을 생기 돋게 해 줄지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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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7월의 포츠담에 부는 겨울바람

Grade 11 최재원 Jaewon Choi

1945년 7월17일,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의 붉은 색 벽돌 건물 안 에는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눈부신 햇빛이 건물의 붉은 벽돌 을 타고 올라오는 담쟁이 잎사귀를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담쟁이 잎을 흔들 때마다 담쟁이 잎은 반짝반짝 몸을 흔들어 반응할 뿐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침묵을 깼다. 트루 먼은 탁자에 앉아 있는 스탈린, 윈스턴 처칠 등을 한 명씩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는 전쟁에서 진 독일의 영토를 나누고 배상을 하기 위해 모 였습니다. 독일은 이미 항복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의견을 잘 모으면 될 것 같습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스탈린을 힐끗 쳐다보고 인상을 쓰면서 말했 다. “독일의 처리방식에 대해서는 영국은 미국의 입장과 같습니다. 일본은 언제 항복할 것 같나요?” 트루먼 대통령은 대답했다.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해야 합니다. 미국 본토를 공격한 일본에 대 한 강한 보복을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미국이 개발한 최신 무기 를 동원해서 공격을 해서라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야 합니다. 한반도와 대만에서 일본군이 즉각 철수해야 합니다. 소련도 이런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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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윈스턴 처칠과 트루만을 째려보면서 카이젤 수염을 매만졌다. 그리곤 이내 다시 날카로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미국와 영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을 두 들겨 패서 이기기보다는 달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고 노에 후미마로가 1944년부터 무조건 항복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더 협상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천 황만 보호해주면 일본이 우리에게 항복한다고 소련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고, 일본을 이렇게 처리한다면 7월 26일 예정인 포츠담 선언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간신히 말 을 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이틀 후에 다시 만납시다.” 윈스터 처칠은 회의장을 나가면서 낮은 목소리로 트루만에게 속삭였 다. “스탈린을 믿지 맙시다.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먼저 뒷 통수를 쳐야 합니다.” 그날 저녁, 트루만 대통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더글라스 맥아더, 체스터 니미츠와 긴급한 회의를 했다. 트루만은 오늘 회의에서 한 스 탈린의 말을 떠올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최근 맨하탄 프로젝트가 성공을 했기 때문에 일본에 핵폭탄을 떨 어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젠하워, 더글라스 맥아더, 체스터 니미츠는 트루만 대통령의 생 각에 강하게 반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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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개발을 제안했던 아인슈타인 등 과학자들조차도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핵무기 사용은 일본 군인뿐 아니라 국민에게 엄 청난 피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 습니다. 소련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제 3차 대전의 가능성이 있습니 다. 특히, 소련이 확실히 전쟁에 참여한다면 일본은 곧 항복할 겁니 다.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한국을 소련에게 양보하고 미국은 일 본만 확실하게 점령하는 것이 이익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안경을 잠깐 벗고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 후 말했 다. “그럼, 소련의 도움을 받읍시다.”

1945.7.17. <미국 병사 제리(18세)의 일기, 독일 본에서> 오늘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가난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보고 항상 웃어주신다. 지금도 교회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있겠지. 1주 일 뒤 오하이오 주에 있는 고향 집으로 휴가 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같이 지내는 병사들 모두 전쟁이 곧 끝난다 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1945.7.17. <일본 병사 다마모토(14세)의 일기, 일본 오키나와에서> ‘어머니, 천황을 위해서는 떳떳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어머니께 편지 를 썼다. 하늘에서는 일본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자랑스 러운 대일본 제국은 굴욕적으로 항복할 수 없다.

1945.7.17. <소련 병사 이반(20세)의 일기, 소련 상트테르부르크에서> 아침에 아버지에게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녀석’이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났다. 고민 끝에 아버지 서재에 ‘전 세계에 공산주의의 붉 은 깃발을 날리게 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광장으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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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길에 벽에 붙어 있는 스탈린의 포스터를 보면서 마음을 굳게 먹고 군대에 입대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다. 윈스턴 처칠은 스탈 린을 믿을 수 없었지만, 소련을 무시하면 제 3차 대전이 일어날 수 있 다는 생각에 소련을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찬성했다. 1945년 7월 26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에 미 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는 나란히 서명을 하였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 을 무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유는 천황제 유지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 소련 스탈린은 일본을 위해 협상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스 즈키 간타로 총리를 배신하고 포츠담 선언에 합의하다는 사실에 일본 은 충격을 받았다. 1945년 8월 8일 스탈린은 일본과 소련간의 불가침 조약을 위반하여 만주에서 일본을 공격하였으며, 1945년 9월 10일에 는 중국 만주뿐 아니라 한국을 점령하였다. 1945년 9월 15일에 소련 이 한국까지 점령하자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1945.9.15. <소련 병사 이반(20세)의 일기, 한국 부산에서> 한 달 만에 소련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의 부산까지 이동했으며 별다른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일본군을 이겼다. 최근 아버지에게 격려 의 편지를 받았다. ‘고향에서는 너를 내 아들이 아닌 혁명의 아들이라 고 부른다. 네가 자랑스럽다. 네 덕분에 공산당에서 빵을 추가로 배급 받았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곧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가서 영웅이 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소련군이 주도적으로 전쟁을 이끌 었지만 미국군도 일부 같이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에 미군 병사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얼마 전에 사귀게 된 미군 병사 제리가 준 껌과 초콜 릿을 먹지 않고 잘 모아놓았다. 제리는 말은 잘 안 통하지만, 먹을 것 을 나눠 주는 좋은 친구이다. 집에 있는 여동생인 바실리사는 단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물로 주면 무척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소련군들 사이에서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본 홋카이도로 출발하는 군함을 탈 수도 있을 것 같다. 1945년 9월 16일, 트루만 대통령은 스탈린이 한국 점령에 그치지 않고 홋카이도를 점령하기 위해 군함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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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윈스턴 처칠은 전화를 걸어왔다. “스탈린을 믿지 말아요. 소련에서 스탈린에게 죽은 사람이 몇 명인 지 아십니까? 뼛속까지 빨간 사람이요.”

1945.9.17. <미국 병사 제리(18세)의 일기, 한국 부산에서> 7월에 집에 가려던 휴가 계획은 중국과 한국에서 일본군과 싸우게 되는 바람에 취소가 되었다. 그래도 별 어려움 없이 부산까지 일본군 을 무찔러서 이제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에 얼마 전에 친 구가 된 소련군 이반에게 부대에서 나누어 준 초콜릿과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린 오하이오의 옥수수 그림을 주었다. 정말 좋 아하는 모습에 뿌듯했다. 아! 그런데 짜증난다. 다시 휴가가 취소되고 일본 오사카로 가는 군함을 타라고 한다. 왜 갑자기 오사카로 가야 하 냐고? 나는 오하이오에 가고 싶다고.

1945.9.20. <일본 병사 다마모토(14세)의 일기, 일본 오키나와에서> 아, 분하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나까무로 형이 저번 주에 카미카제 로 뽑혀서 천황을 위해 폭탄을 실고 가서 미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나 도 언제 자살공격에 불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은 사 실이지만, 이렇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다니 믿을 수 없다. 어제 받은 어머니의 편지에는 내가 살아서 집에 돌아오는 것이 일본의 영광을 위 한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머릿속이 복 잡해서 머리가 아프다. 1945년 9월 23일, 트루만 대통령은 스탈린이 소련이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를 공격했다는 말을 듣고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홋 카이도를 거의 점령했다는 속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 xx 스탈린, 감히 미국을 우습게보다니, 가만 두지 않겠어. 어 차피 일본은 소련을 더 이상 믿지 않으니까, 천황을 그대로 두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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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 범죄인 처벌을 강하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일본군과 합쳐서 소련을 혼내줘야 해.” 일본군과 미군은 소련군을 몰아내기 위한 공 격을 개시했다. 1945년 9월25일, 일본의 스즈키 간타로총리는 회의를 소집했다. “트루만 대통령이 천황을 보호해 준다는 확실한 약속을 하면서 소련 을 함께 싸우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사람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 사람들조차도 잔 인하게 죽이는 사람인데, 차라리 미군과 같이 싸우는 것이 일본을 지킵시다. 자랑스러운 일본 군인들에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본의 영광을 위해 싸우도록 하십시다.”

1945.9.27. <일본 병사 다마모토(14세)의 일기, 일본 오사카에서> 내가 14년밖에 안 살았지만,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오늘부터 는 미군이 우리 편이라고 한다. 미군과 함께 소련을 공격하는 것이 천 황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 그나저나 오늘 만난 미군 제리는 나에게 초 콜릿과 사탕을 주었다. 근데 옥수수 크림은 왜 내게 준 거지? 아무튼 달콤한 빵을 좋아하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전쟁이 끝나기는 할까? 미군과 일본이 같이 소련을 공격했지만, 중국의 마오쩌뚱과 한국의 김일성까지 소련의 편을 들면서 오히려 소련은 점령 지역을 넓혀 갔 다. 1945월 10월 27일 일본의 스즈키 간타로 총리와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긴급히 회의를 했다. 맥아더 장군은 스즈키 간타로 총리를 쳐 다보면서 “이제 전쟁을 끝내야죠. 일본 정부의 대책은 무엇입니까?”라 고 물었다.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굳은 얼굴로 이야기 했다. “일본에서 싸우고 있는 소련, 중국, 한국의 군인들의 식량과 무기 의 공급을 막아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다시 카미카제를 보내어 소 련, 중국, 한국의 군인들의 식량과 무기를 싣고 오는 군함을 공격하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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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28. <일본 병사 다마모토(14세)의 일기, 일본 오사카에서> 카미카제로 뽑혀서 내일 소련군의 군함과 홋카이도에 있는 소련군 부대를 폭파시키러 간다. 일본 천황과 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죽을 수 있다니 자랑스럽다. 어머니, 저는 자랑스럽게...아니에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어머니. 살고 싶어요...

1945.10.28 <소련 병사 이반(20세)의 일기, 일본 홋카이도에서> 소련군이 일본을 거의 점령하였기 때문에 곧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보는 일본군과 미군의 시체들... 이 제는 전쟁이 지겹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빨리 돌아가서 멍청이라고 놀림을 받더라도 조용히 살고 싶다. 1945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된 일본의 카미카제와 미국의 공군의 공격으로 일본으로 들어오는 소련군의 군수 공급을 담당하는 군함은 모두 파괴되었고 고립된 소련은 전쟁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미국 도 궁지에 몰린 소련이 일본에서 물러나더라도 미국 본토를 공격하여 본격적인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중국의 차와 면화 등에 대한 권리를 보장 받는 댓가로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중단하도록 도왔다. 1945년 12월 5일 트루만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은 다시 포츠담에서 만나서 악수를 나 누고 사인을 했다. 트루만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을 반반씩 나누어 갖는 조건으로 전쟁을 중단했다. 둘 다 회의장을 나가면서 쳐 다보지도 않았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뒤따라 나가면서 한 마디 했 다. “포츠담 회담은 겨울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군. 피 튀기는 전쟁이 한 참 진행되었던 시대는 지나가고 차디찬 냉전의 시대가 시작될 거 야.” 일본은 자신의 나라가 반절로 나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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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소련과 미국이 천황을 보호하고 각 각의 나라에서 엄청난 돈을 지원하여 전쟁으로 다 부수어진 일본의 도로, 집 등을 고쳐 주기로 함 에 따라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45. 12. 24 <미국 병사 제리(18세)의 일기, 일본 홋카이도에서> 드디어 고향인 오하이오로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마지막으 로 일본 홋카이도에 소련군 기지에 정리하러 들어갔다. 많은 곳이 부 서져 있어서 고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았다. 소련군의 시체를 큰 구덩 이에 묻고, 남긴 물건을 정리해서 소련군에게 넘겨주기 위한 작업을 했다. 물건 중에서 종이 뭉치가 발견되어 풀어 보니, 내가 그린 초콜 릿과 사탕이 있었고 오하이오 옥수수 그림 종이로 포장되어 있었다. 왜 내 그림이 여기에 있지? 한참 동안 생각을 했다. 잠을 자려고 침대 에 누웠는데, 갑자기 소련군 이반과 일본군 다마모토가 생각났다. 누 구였을까? 그 누구였든지 지금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홋카이도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내 가 자는 곳으로 쌩쌩 부는 것 같다. 아, 어머니가 보고 싶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빛나던 오하이오의 넓게 펼쳐진 옥수수 밭이 보고 싶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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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흔들리며 피는 꽃 Grade 11 홍형기 Henry Hong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가끔은 그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내가 정말 죽을 만큼 힘 들다 생각이 들던 시절을 이제와 돌아보면 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렇게 아무렇 지 않게 생각 하는 것도 내가 그 모든 것들을 겪고 나서 더 단단해 졌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성적, 어머니의 잔소리, 대학 입시, 취업난 과 결혼, 나를 흔들리게 하였던 것들. 너무도 바쁘게 인생을 살아온 나지만 지금은 평온하게 이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의 한 송이의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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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7살에 느낀 나의 첫사랑도 지금의 나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한 중요한 흔들림, 경험이었나 보다. 그런 흔들림이 없었더라면 이별 의 아픔도, 사랑의 달콤함도 모른 채 지금쯤 혼자서 쓸쓸히 꽃봉오 리를 피우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어찌하면 이 여편네의 화를 안 돋우게 하는지도 이제는 알았으니 난 그것으로 되 었다. 하지만 언제 또 우리 집안에 꽃의 흔들림이 올지 나는 잘 모 르겠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제각각의 아픔과 흔들림이 있다. 편 찮으신 할머니도 흔들리는 중이시고, 그런 할머니를 위해 이번 추석 에 음식을 전부 도맡아 하시게 된 어머니도 추석 차례상을 차리느라 아침부터 일어나서 고생이시다. 옆집 아주머니는 이혼을 하신 후로 재혼을 하셨다가 늦둥이만 생기고 어찌된 일인지 새로 만나신 분과 도 안 맞으셨는지 별거를 하고 계신다. 내 누나의 아들 녀석은 공부 엔 뜻이 없어서 게임을 하루 종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또 보고 있는 내 누나 또한 흔들리고 젖으며 바람에 맞서고 있다. 하지만 이 런 시련들, 즉 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우리는 언젠가 우리들 마음 속에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꽃이란 본래 흔들리면서 자라는 법이고, 또 젖지 않으면 자라지 못 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 또한 모든 고난 과 역경을 견뎌야지만 아름다운 하나의 꽃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나 보다. 어쩌면 지금 나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이 꽃도 언젠간 시들 며 다음 해의 봄을 기다리며 피어오르기를 바라는 꽃일 수도 있겠 다. 인생은 본래 아무도 무엇이 다가 올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하 지만 우리가 언젠가는 올 그 봄을 위해 견뎌내는 비와 바람이 그 만 큼의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또 우리의 꽃이 피 어날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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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끊긴 전화 Grade 11 이예경 Yeakyoung Lee 끊긴 전화 도종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러했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버린 것을 눌러 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 저리디 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닫고 침을 삼키듯 목 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을 몇 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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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끓길 만큼 폭우가 쏟아지던 날씨였다. 빗소리는 시원한 듯 시끄러웠다. 이 비의 공기, 누가 싫어하겠는가? 약속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오늘, 누군가의 목소리가 간절하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이 제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지만 나는 나의 시간, 이 현재를 붙들어 본 다. 우리 집에는 전화 통화를 위한 공간이 있다. 만약을 위해 놓아 둔 연필과 수첩은 전화기 옆에 꼭 붙어있다. 하지만 여백이 많이 남아 있 는 수첩, 손길을 기다리는 연필, 목소리를 기다리는 나. 참 처량하다. 보고 싶다...하지만 누구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여섯 시. 시간 낭비지만 딱히 할 일도 없는 하루다. 여섯 시가 점점 저녁으로 물들어 갈 무렵 그 기 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안 받으면 곧 끓길 듯한 그 긴박함이 란! 얼른 달려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난 힘이 들어간 목 소리로 상대방을 환영했다. 30초쯤 지났을까, 잠시 그렇게 있다 전 화가 끓어졌다. 허무함과 함께 드는 이 궁금증, 누구였을까, 밤 어둠 속에서 나를 찾던 사람은.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만 듣고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 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아직 수화기를 놓을 수 없는 나는 공허 함만 남은 채 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왜 전화를 끓었을까? 그 이유는 나의 잘못이었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을까? ‘함께’가 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깝다. 조바심과 소심함에 점점 더 작아지는 내 마음. 왜 나는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는가? 내가 먼저 걸 수 있잖아, 짧은 손가락으로 번호를 누를 수도 있는데도 그동안 수첩, 그리고 연필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언제나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버린 것을 눌러 항아리 깊은 곳에 저 혼자 삭아가 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다. 그 수많은 밤마다 하는 것이라곤 내 생애 최고의 날을 내 상상 속에, 또 허공에다 그리는 것이다. 행동하 지 않고 포기하는 내 자신이 참 게으르고 소심했다. 마음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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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합체되지 않았다. 전화의 그는 나를 또 한 번 서성이게 만들어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했다.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내가 한 실수들이 눈앞에서 계속 서성여서 다시 내가 만든 항아리 속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어 져 나는 나오기가 힘들어졌다. 나의 습관이 된 것이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화기를 다 시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 미동 없는 우리 집 전화기, 어쩌면 나 때문 에 전화기는 그의 일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에게도 미 안하고 전화기에게도 미안했다. 다시 수화기를 들어보았다. 하지만 딱 히 떠오르는 전화번호가 없었다. 나는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 다 지우기를 반복한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 굴을 내리 닫고 침을 삼키듯 목 끝까지 올라온 그리움도 삼키고 입술 밖을 몇 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 같은 말들 이 있을 것이다. 한 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시원했다. 시원하다 못해 청량했다. 내가 문턱을 넘는 순간 이 나만 느낄 수 있는 청량감을 느 낄 수 있을까?

< 삽화: 이예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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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혼자사랑 Grade 11 손승모 Seungmo Sohn 혼자사랑 도종환 혼자서만 생각하다 날이 저물어 당신은 모르는 채 돌아갑니다 혼자서만 사랑하다 세월이 흘러 나 혼자 말없이 늙어갑니다 남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게 꽃이 피고 저 홀로 지는 일 같습니다.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예림’이다. 그 아이는 사춘기를 막 맞은 중학교 1학년 꼬마 아이다. 처음 중학교에 들어와 서는 새로운 환경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자 리 지정을 하겠다고 하자 아이들은 웅성웅성했다. 자리 지정이 시작되 고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친구와 짝이 되면 기쁜 함성을 질렀고, 그 렇지 못한 아이들은 침묵에 빠졌다. 몇몇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드디 어 예림이의 차례가 되었다. 예림이의 짝은 남자 아이가 되었다. 그 남자 아이의 이름은 ‘연규’이다. 연규는 중학교 1학년 나이에 비해선 상당히 큰 키와 잘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공부도 잘 해서 부모님 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아이였고 운동도 잘하여 선생님들의 사랑도 독 차지 하는 아이였다. 그에 비해 예림이는 그저 평범한 여자 아이였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서 올라와 수줍고 어리버리한 아이였고 연규는 완 전 정반대인 아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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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짝이 된 후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연규는 예림이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예림이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말도 못 걸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많은 여자 아이들의 사랑을 받던 연규는 평범하고 소심한 예림이에겐 아무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다. 서 로 얘기도 잘 안하고 연규는 선생님들 몰래 자리를 바꿔 다른 자리에 앉는 날이 잦았다. 예림이도 다른 평범한 여자 아이들처럼 연규를 좋 아했다. 엄친아 그 자체인 연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많은 남자아이들도 연규와 친구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림이는 그 저 옆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금세 지나갔다. 방학 동안에도 예림이는 연규 생 각에 밤에 혼자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처음 느끼 는 이 그리움이란 감정에 슬퍼서 혼자 울기도 했고 연규 얼굴을 머 릿속으로 떠올리며 눈물을 그치고 웃음을 찾기도 했다. 2학기 때는 그나마도 자리가 바뀌어서 그저 멀리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규를 만난 지 1년이 지났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운 이 좋게 연규와 같은 반이 되었다. 연규는 아마 기억을 못하는 것 같 았지만 예림이는 같은 반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반복되는 일 상이 지나고 4월이 되자 학교에서 동아리를 시작한다고, 모든 아이 들이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공지가 왔다. 그 다음날 등교 시 간에 정문 앞에는 수많은 동아리들이 홍보를 하고 있었다. 예림이는 동아리에 관심이 없어서 지나치고 있었는데 연규가 어떤 동아리를 홍보하는 것이 보였다. 무심한 척 그냥 지나치려는데 연규가 갑자기 예림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예림이었나? 나랑 같은 반 맞지? 내가 문학 동아리를 하 는데 들어올 생각 없어?” “어…맞아, 생각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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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연규는 얇은 책갈피를 주었다. 그 책갈피에는 짧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익어간다는 건 사랑과 상처의 이야기를 따뜻한 눈빛으로 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예림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연규에게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책갈피를 받은 후 도망치듯 걸어왔다. 하루 종일 그 일만 생각해서 계속 혼자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예림이는 그 다음날 문학 동아리에 찾아갔다. 동아리실로 가는 길 복도에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앞으로 가서 확인해보니 그 동아리에 가입 하 려고 기다리는 아이들의 줄이었다. 예림이는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 을 포기하고 다시 반으로 돌아가서 전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 면서 웃었다. 그것이 예림이가 연규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였다. 어느새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반이 달라져 멀어지게 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졸업식이 찾아왔다. 졸업식에는 부모님들이 오셔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예림이는 단짝 친구와 사진을 찍고 그 친구에게 연규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다. 친구는 예림이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이 제 와서 어떻게 하냐고 그냥 포기하라고 했다. 예림이는 그저 한숨을 쉬고 눈물을 글썽였다. 옆을 보니 연규가 벌써 집에 가고 있었다. 예림이는 복잡한 마음 에 결국 연규에게 사진 찍자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하고 그렇게 마지 막 연규와의 인연이 지났다. 그것이 예림이가 가진 연규와의 마지막 추억이었다. 예림이에게 남은 것은 오직 그 책갈피뿐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3년 내내 좋아하고 그 이후에도 연규를 향한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10 년이 지난 지금도, 예림이는 여전히 연규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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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담쟁이 Grade 11 설정환 JeongHwan Sul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나의 친구 윤재, 그는 매사에 열심이다. 과학 시험이 있을 때마다 나는 항상 100점을 못 맞았다. 하지만 윤재는 언제나 만점을 받았 고, 나는 그 만점의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윤재네 집에 놀러 갔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집은 굉장히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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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고, 헌 장식구들만 가득한 집이었다. 윤재는 전혀 부끄러워하는 모 습이 없었고, 반대로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윤재야, 어머니는 어디 계셔?” 윤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윤재의 집에는 넓지 않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책이 있었다. 모든 책의 겉표지는 낡아 있었다. 그의 열정이 보였다. “윤재야, 너 책 많이 읽는구나, 책이 그렇게 재미있니?” 나는 물어보았다. 윤재가 대답했다. “나는 항상 책을 읽어. 우리 집은 가난해서...교과서를 살 수가 없 어.” “난 그런 줄도 몰랐어, 그런데 어떻게 과학 시험을 그렇게 잘 볼 수 있어?” 나는 물어보았다. 윤재는 한동안 답을 안 하더니, 내가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있어. 아무리 환경이 좋지 않아 미래가 보이지 않고 답답해도, 절대 포기하지 마. 나처럼 이러한 환경 속에 서도 열심히, 그리고 같이 하면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윤재처럼 열 심히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생겨났고, 윤재의 말을 새겨들으면서 좀 더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 후에 있는 과학시험을 준 비하기 위해, 나는 윤재와 매일 학교에 남아 공부를 했다. 같이 해나 가면 할 수 있다는 말을 깊이 생각하며 나는 더욱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하루 이틀 지날 때 마다 나는 점점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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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어. 100점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매일 공부를 해야 하고, 절대 게을러져서는 안 돼. 그러니까 나랑 같이 끝까지 최선을 다 해 보자.” 나는 윤재의 말에 많은 힘을 얻었고, 준비를 철저하게 할 수 있었 다. 드디어 과학 시험의 날이 왔다. 윤재와 만반의 준비를 한 나는 모 든 단어와 정보를 외웠고, 100점 맞을 준비를 했다. 40분의 시간 동안 윤재의 말을 계속 생각하며 문제를 풀었고, 드디어 100점을 맞을 수 있었다. 나는 윤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넌 정말 대단해! 100점을 맞을 수 있게 나를 도와 준 것에 대해 너무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왔어.” “이번에 100점 맞은 거 축하해. 너무 자만하지 말고, 다음에도 더 잘 보도록 해. 이제 우리는 이번 시험의 벽을 넘었어. 그러니 이제 다음 벽을 넘을 준비를 해야지? 그러니까 우리 같이 해 나가자!” 윤재의 이 한 마디 말은 나에게는 정말 소중하게 여겨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열심히 하자!”

< 삽화 : 설정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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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소설>

만무방 Grade 11 김윤수 Martin Kim

하빈이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꿈이 스티 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컴퓨터 산업 회사를 차려서 부자가 되는 것 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 빈이는 이 꿈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불가능한 일인지 깨 달았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못하겠다...너무 힘들다...지금도 돈 없어서 죽겠는데 어디서 배워서 어디서 경험을 쌓고 언제 성공해?’ 하빈이는 청소년 시절을 동생 호빈이와 둘이 반 지하 단칸방에서 하 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갔다. 부모님은 이혼을 하고 나서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빠는 어디에 가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빈이는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여기저기서 다 찾아서 하고 있었고 동생 호 빈이는 형의 뒷받침으로 성실히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새벽 1시에 편의점 계산대에 서서 졸고 있던 하빈이의 머리를 쳤다. 하빈이는 사장님인 줄 알고 놀래서 고개 를 재빨리 들었다. “하빈아, 여기서 뭐하니, 시급 5580원 받고 하는데 일 열심히 해야지 왜 졸고 있니?” 하빈이 앞에 있던 그 남자는 하빈이의 고등학교 친구 창렬이였다. 창렬이는 하빈이의 절친이였는데 하빈이가 일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기 도 전에 먼저 학교를 그만둔 친구였다. 그 후로 창렬이한테 연락이 끊 겨서 뭘하고 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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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렬? 야 뭐야, 너 어디로 증발했다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 나는데? 나 지금 업무 중이야. 형 바쁘다 지금” “야, 내 얘기 좀 들어봐. 나 지금 집에 돈이 쌓였어. 내가 아 는 형 친구가 있는데 그 형이랑 일하면 막 돈이 생겨 저절로. 근데 지 금 컴퓨터 잘하는 애가 필요하대. 너 컴퓨터 잘하지? 아 중간에 떄려 쳤던가? 하여튼 나랑 같이 그 형이랑 일하자. 이딴 일 그만두고...진짜 한 번 있는 기회야, 하빈아.” 그 때부터 하빈이는 그 형들이랑 일을 하게 되었다. 형들한테 컴퓨 터 해킹하는 법도 차근차근 배우고 작은 범행들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하빈이는 컴퓨터로 cctv 작동을 중지시키는 법, 잠긴 문을 여는 법 등 을 알게 되고 창렬이랑 형들은 가게나 상점에 침입을 해서 돈을 뺏어 왔다. 몇 년 동안 돈을 위해 별 짓을 다하며 고생을 한 하빈이에게 이 일은 너무나 행복했다. 형들한테 칭찬도 받고 돈도 벌고, 삶이 이 정 도로 편했던 적이 없었다. 하빈이는 거의 형들이랑 살았고 이 일은 자 신의 인생이 돼 버렸다. 형까지 사라져버린 호빈이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형처럼 어둠의 길로 빠지지는 절대 않겠다고 결심했다. 7년의 세월이 흘렀다. 호빈이는 친구 아빠가 하는 중고차 판매점에 서 일을 하고 있었다. 7년 동안 호빈이는 형을 한 번도 본적도 없다. 그런데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던 호빈이는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사람이 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빈이는 지금까지 형은 숨어서 범 죄를 저지르면서 그냥 잘 살아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형과 만날 생각도 없었고 형과 아무것도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 신을 향해 달려오는 형의 모습은 상상과 달랐다.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정말 많이 피곤해보였다. “호빈아, 너무 미안하다 형이...내가 미쳤지, 내가 미친거지.... 난 이제 죽었어...다 끝났다고.”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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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렬이랑 일하면서 행복해질 줄 알았어. 많이 버는 것 도 아니지만 그래도 돈 걱정은 안 하게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 니더라고...맨날 범죄질이나 하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 번 돈은 얼마 되 지도 않아...계속 이렇게 살 생각하니까 인생의 의미도 없고 그냥 죽지 못해 살아있는 기분이 들더라. 그래서 하면 안 될 짓을 하기로 결심을 했어. 형들이 돈을 모아둔 금고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어. 형들은 몰랐 겠지 내가 그 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내가 그 금고를 딸 수 있 을 거라는 생각도 못 해 봤을 거야...형들은 금고에서 돈을 털어간 사 람이 잡히기만 하면 가만 안둔다고 했는데 내가 잠깐 나가있던 사이에 내가 몰래 모아둔 돈이 들켜버렸어...그리고 창렬이가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나한테 말해줬지...돈을 모아서 도망가려 그랬는데 결국 쫓겨나 버렸네...그 형들이 날 찾기라도 하면 난 죽을 수도 있어.” 하빈이의 말을 듣고 호빈이는 떨리는 말투로 말했다. “현실은 항상 절망적이었어, 우리 둘 다한테...우리는 아무 잘 못도 하지 않았는데 돈이 없어서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살아있기도 힘 들었어...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정말 힘들게, 힘들게 살아왔지...세상 은 정말 불공평해 나도 알아...나도 크면서 느꼈다고...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생은 항상 바닥이라는 걸. 그래도 난 한 번도 형처럼 살지 않았어. 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성실히 살았어.” “호빈아 미안하다. 그런데 난 이제 어떻게 살지. 나를 좀 도 와줄 수 있겠니? 너를 똑바로 쳐다보기도 너무 힘들다. 제발...미안 해..” 호빈이는 눈물을 닦고 한 숨을 크게 쉬고 하빈이를 보며 말했다. “형, 옛날에 형이 힘들 때 읽었던 책 기억나? ‘만무방’ 말야, 지금 상황이 뭔가 그 책이랑 비슷한 거 같아서.” 하빈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호빈이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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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그런데 그 책에서는 과거에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형이고 자신의 재산을 뺏은 사람은 동생인데, 지금은 둘 다 형이네... 동생은 아무 잘못도 없고, 후...” “책처럼 하려면 내가 여기서 형을 막 때려야 되는 건가?” “아니, 뭐...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형, 따라와 봐. 내가 형이 할 만한 일 찾고 자리 잡게 도와 줄 테니까...” 호빈이는 중고차 판매점에 들어가 주인인 친구 아빠에게 하빈이를 가리키며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판 매점 밖에 잠깐 서 있던 하빈이는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호빈이를 따 라서 판매점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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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소설>

만무방 Grade 11 서수민 Michelle Sumin Suh

수많은 차별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예상외로 간단 하다. “수진 씨,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미 알려줬잖아. 사 람이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수진 씨 때문에 내가 상무님한테 혼나게 생겼잖아. 당장 다시 해서 2시까지 나한테 줘.” 차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차별 하는 사람이 되면 된다. 차별에 의해 피해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에 의해 득을 보는 사람이 되면 된 다. “아니다, 1시까지 해서 이메일로 보내줘.” 조용히 컴퓨터 구석에 위치해 있는 시간을 봤다. 12시 30분. 점심시 간의 시작이었다. 수진 씨는 가끔씩 우리 사무실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녀는 종종, 아니 꽤나 자주 남자 직원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고는 했 다. 바로 지금처럼. “수진 씨!” “네, 알겠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수진 씨에게 못 되게 구는 배려 없는 남자 직원 들도 싫었지만, 더 내 성질을 돋우는 것은 수진 씨는 그런 남자 직원 들에게 화를 낼 생각도, 정정당당히 맞설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었다. 물론, 여자 직원으로서, 그리고 신입 사원으로서 상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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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들 수 없는 것도 이해하지만, 정도를 넘는 차별 대우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그녀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영 씨.” “네?” “점심 먹으러 안 가?” “네. 저는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져 가는 동기들과 신입사원들, 그리고 상무 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려 반대편에 앉아 있는 수진 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그 어떠한 증오도, 분노도, 질투도 느 낄 수 없었다. 너무 유한 사람은 본래 취향이 아닌지라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입안이 떨떠름해져 괜히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수진 씨는 점심 안 먹어요?” “일해야죠.” “점심시간이잖아요.” “일을 못 끝냈으니까요.” “난 요 앞 카페에 샌드위치 먹으러 갈 건데, 사다 줄까요?” 내 말을 듣고 있던 수진 씨는 곧 컴퓨터에서 눈을 들어 나를 응시 하더니 입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을 망설이고는 끝내 아니요, 짧게 대 답하고는 다시 컴퓨터 자판으로 눈을 돌렸다. “배고프지 않아요?” “선배님, 왜 저한테 친절하게 대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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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귀를 때리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저한테 동정심 느끼시지 않아도 돼요.” 결국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방을 챙겨 사무실 을 나섰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동정심이 맞았을 뿐더러, 내 동정 심이 별로 달갑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더더군다나 그 동정심마저 매우 모순적인 것이라 그녀와 함께 계 속 사무실에 있었다면 얼굴을 붉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진 씨의 조용한 성격도 직원들이 그녀를 우습게 보는 데에 한몫했 지만, 그 보다 더 한 것은 그녀의 외모였다. 그렇게 못 난 사람은 아 니었지만 비교적 통통한 몸과 작은 눈을 가진 그녀는 눈에 띄게 아름 답거나 귀여운 여성 역시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업무 실력은 그녀가 나보다 뛰어나지만, 남자 직원들은 내 업무 실력보다는 수진 씨의 업 무 실력을 비난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잘못은 수진 씨에게 있었 다. 노력하지 않는 것은, 수진 씨이니까. “부장님, 저 사표 내겠습니다.” “수진 씨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길게 쉬어야 해서요. 월차나 병가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아니 왜? 수진 씨 어디 아픈가?” “심한 건 아니고 수술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뚜벅뚜벅 부장님께 걸어가 수진 씨가 털어놓 은 말은 사무실 전체를 고요함에 휩싸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플 만도 했다. 고통과 슬픔을 껴안으려 할수록 속은 곪고 곪아서 결국 뼈 를 썩게 하고, 장기를 타들어 가게 해 몸도 마음도 망쳐버리니까. 수 진 씨의 괴로움은 나를 포함한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든 직원들이 알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시던 부장님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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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일어나 수진 씨의 어깨를 토닥여주시며 힘내라는 말을 해주시고 는 다시 앉으셨다. 수진 씨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 몸을 돌리는 순 간 그녀를 바라보던 여러 쌍의 눈들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일제히 자신의 컴퓨터로 향했다. 아무도,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에, 그녀가 이 회사를 떠난다는 사실에 동요하지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니면 시키실 일이라도...”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을 수진 씨가 내게 물어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오늘까지 끝 마쳐야하는 서류 정리에 다시 열중했다. 그녀가 말했듯이, 더 이상의 동정심은 그녀에게 필요치 않았다. “어디가 아픈거야?” 참자 참자, 다짐을 하면서도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끝내 물어보고만 나였다. 수진 씨는 잠시 가만히 커피 머그를 쓰다듬더니 내 눈을 응시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말 해 드릴 수 없어요.” 그녀의 차갑고 단호한 태도에 나는 잠시 표정을 찌푸리고는 서류더 미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축 처져 있는 그녀의 눈매를 바라보았다. 서류 정리를 다 끝마치자 밀려오는 무료함과 피곤함에 하품을 하고 는 시간을 보자 퇴근 시간이 가까워 있었다. 내일은 주말이라는 생각 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일은 집에서 하루 종일 자야겠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다 쌌 을 즈음에는 이미 몇 명의 직원들을 빼고는 퇴근해버린 후였다. 생각 할 것이 남은 듯 박스들에 자신의 짐을 가득 채워 넣은 수진 씨는 그 대로 자리에 앉아 책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던지 한 마 디 해주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괜히 또 그녀의 퉁명스러운 목소리 를 듣게 될까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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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무슨 할 말이라도?” “저 술 한 잔만 사 주세요.” 그녀의 뻔뻔하고 당돌한 요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기쁨의 웃음은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이 감정은 아마도 그녀의 모순적인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친 근하게만 굴었어도 다른 직원들과 조금은 친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 데. 어차피 주말이었으니 떠나가는 사람에게 모질게 굴 이유도 없었 다.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포장마차에 들어간 후 갖은 안주들과 소주 한 병을 시키자, 수진 씨는 말도 없이 소주 몇 잔을 홀짝이고는 힘겹 게 입을 열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잦은 떨림이 그녀가 울음을 참고 있다 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 했다. “여기가… 그리고 여기가 아파요.”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가슴과 머리였다. “여기가 나으려면… 여기를 먼저 고쳐줘야 해요.” 가슴을 가리키던 그녀의 손들이 향한 곳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순 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려 어떠한 말도,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수 진 씨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나도 이해해.” 그녀는 내 말을 믿지 못 하는 듯 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그 누구 보다도 그녀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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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아버지께서 크게 다치셔서 보험금이 나왔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기뻤어요. 돈이 한 두 푼이 드는 게 아 니니까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다 낫지도 않으신 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은행 에서 돈을 찾아오면서 미친 듯이 웃어댔어요. 내가 미친년이지… 내 가…” “수진 씨…” “잘못하면 아버지는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계속 병원에 계셔 야 했는데 제가 우겨서 모시고 나온 거니까요…” 결국 눈물을 떨구던 그녀는 고개를 박고는 천천히, 슬프게, 고요하 게, 그리고 처참하게 흐느껴 울었다.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던 나는 가 만히 떨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 옆에 만 원짜리 두 장을 놓고는 포장마 차를 나섰다. 그녀의 모습이 자꾸 나와 겹쳐 보여서. 내 아픈 과거가 떠올라서. 더 이상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허겁지겁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라이터로 태워버렸다. 조각조각 재가 되어 떨어져 내리는 사진을 바라보며 과거 를 회상하다가 혼자 되뇌었다. “얼굴이 달라진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닌데…”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손길과 치근덕대던 상사 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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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소설>

만무방 Grade 11 최윤진 Christine Choe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 대현이는 편의점에서 에 어컨을 틀며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그의 모 습은 딱 20살의 풋풋한 대학생의 매력을 티내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핸드폰을 만지작 만지작거리던 그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듣고 어렴풋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발견한 건 그의 형 인 대준이였다. 그의 형은 올해 나이로 스물여덟 살이었고 대현이와 8 살 차이나는 가깝고도 먼 사람이었다. 대준이는 동생을 보고 그대로 경직하여 입을 열었다. “뭐 하냐, 여기서?” 대준이가 물었다. “뭘 뭐해, 여기서 일하는 거 안보이나 봐?” 대현이는 그대로 대꾸 하였다. 형에게 꿀밤 한대를 맞을 걸 알면서 대꾸한 대현이는 속 으로 웃었고 형은 아니나 다를까 동생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 뭔데, 왜 때려” 대현이는 맞은 머리를 손으로 문질렀고 입김을 호호 불어 그대로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다니라는 학교는 안 다니고 뭐 하는 거야.” 대준이는 동생 대현이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사실 둘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아둥바둥 생활해 나갔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탓에, 둘은 일찍 서로 를 더 의지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신경 쓰이는 나이차 때 문에 둘은 선뜻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학교? 몰라, 재미없어. 형, 나 그냥 사업이나 해볼까?” 대현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얘기하였고 대준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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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동생을 대학교에 보내놓았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사업 얘기를 하고 앉았으니 대준이는 그냥 기가 막힐 뿐이었다. “됐고, 그냥 공부나 열심히 좀 해봐. 형이 네 대학 학비는 어 떻게 서든 마련할 테니까.” 대준이는 대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 로하였다. 한시라도 빨리 생각을 바꾸게 하지 않으면, 그대로 실천에 옮길 대현이라는 것을 알기에 형은 조급했다. “참나,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 할일은 내가 알아서해.” 대현이는 짜증난다는 듯이 형의 손을 뿌리쳤고, 그대로 시무룩한 표정 을 지으며 계산대에 삼각 김밥을 들이미는 손님에게 인사하며 바코드 를 찍었다. 대준이는 대현이에게 인사하며 문을 나섰고 대현이는 아직 도 시무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900원입니다, 손님. 현금영수증 해드릴까요?” 대현이는 주섬 주섬 삼각 김밥 하나를 봉투에 담아서 손님에게 건네주었고, 손님은 픽 웃으면서 대꾸도 없이 그를 무안하게 쳐다보았다. “저기요.” 손님이 대현이에게 말을 걸었다. “네? 무슨 일 있으세요?” 대현이는 상냥하게 말하였다. 손님 은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의 남자였고, 대현이는 이 손 님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였다. “나랑 사업할래요?” 대현이는 손님의 물음에 갑자기 당황하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요’ 라고 확답을 주기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네? 아, 죄송하지만 초면인데 저한테 굳이 이런 걸 물어보시 는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대현이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손님은 다 시 픽-웃으며 대현이의 물음에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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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아까 삼각 김밥 고를 때 그쪽 형제분들끼리 하는 얘기를 들어서요. 그쪽이 사업에 관심 있어 하시는 것 같아서 ……. 제가 이번에 사업 하나를 하는데 그쪽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고 싶네 요.” 대현이는 손님에게 어떤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무안하게 웃었 다. “죄송하지만, 아까 그건 그냥 장난삼아 얘기한 거였는데 요….” 대현이는 손님의 질문에 답하였고 손님은 그저 싱글벙글 웃음 을 보였다. “아, 그냥 한번 해봐요. 재밌을 건데…” 손님은 대현이에게 한 번 더 물어보았고, 대현이는 재미있다는 말에 솔깃하였다. “그래요? 무슨 사업인데요?” 대현이는 손님에게 되물었다.” 손님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쇼핑몰이요. 어때요, 해보실 마음 있으세요?” 대현이는 곰곰히 생각을 하며, 결정을 내렸다. 결국은 하기로 했다. “네, 해볼게요. 언제 어디로 가면되죠?” 손님은 자신의 이름 이 적혀져 있는 명함을 한 장 건네주고, 문 밖을 나섰다. ‘김이환’이라 고 대문짝만하게 써 있는 이름을 보니 대현이는 조금이나마 신뢰가 갔 다. 쇼핑몰이름은 ‘헤이호’였고, 웃긴 이름을 보니 대현이는 자기도 모 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음 날 대현이는 명함에 적혀있던 주소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형에게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자기만 아는 비밀로 칠 속셈이었다. 주소에 다다른 대현이는 큰 빌딩 하나를 보았고 그 빌딩 일층과 이층에 떡하니, ‘헤이호 쇼핑몰’ 이라고 쓰여 있다. 대현이는 일층으로 들어갔고, 거기 안에는 어제 보았던 손님이 푹신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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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서와요, 대현씨.” 대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 옆에 있 던 의자에 앉았다. “제가 지금부터 필요한 요소들을 몇 가지 가르쳐 줄 건데, 잘 따라올 수 있죠?” 이환은 대현에게 조곤조곤 얘기했다. “네, 당연하죠.” 대현은 바로 확답 하였고, 이환은 처음부터 끝까지 쇼핑몰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운영 방식부터, 배달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전부 다. 대현은 그 많은 것들을 머리에 구겨 넣었고, 마지막으로 필 요한 말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내가 어제 깜박하고 얘기를 안 해줬는데, 우리 쇼핑몰에서 일하려면, 돈을 좀 입금해줘야 돼요.” 대현이는 이게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이환은 웃으며 돈 얘기를 꺼냈다. “아니, 원래 쇼핑몰 운영정책에 대해 모르셨나? 일하기 전에 는 원래 1000만원 입금 하고 시작해요. 쇼핑몰에서 일하면 수익이 어 마어마 하니까, 일종의 예약금? 같은 거죠.” 대현은 어리둥절했다. 이런 건 처음부터 얘기했었어야 하는 거 아닌 가라고 대현은 생각했다. “이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대현은 얘기했다. 이환은 입 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다시 얘기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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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쇼핑몰 이익이 많아서요. 예약금 주시고 시작하시는 게 덜 손해 보는 거예요. 사업 파트너 된 사람들끼리 쪼잔하게 왜 그 래요.” 이환에 말에 대현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빌딩 바로 옆에 있던 우리은행으로 걸어가 유일하게 있던 통장에 모든 돈을 뽑았다. 뽑은 돈은 대현이 몇 년간 아르바이트 해서 벌은 돈인데, 한 순간에 날려버린다는 생각에 대현은 가슴이 조금 아파왔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업가를 만났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 돈을 이환에게 주었다. “아, 바로 가지고 오셨네요. 그럼 내일부터 쇼핑몰에 일하러 오시면 됩니다. 일단 내일은 피팅 모델 섭외 하는 것부터 들어 갈 거 예요. 그럼 내일 봐요 대현씨.” 이환은 이 말을 끝으로 대현을 보냈다. 대현이는 무언가 찜찜했지 만, 내일부터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우고 일을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 근 거렸다. 다음 날, 대현은 아침 8시에 일어나 아침 밥상을 차리고 형을 깨웠 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는 형을 보고 대현은 등짝을 때리며 얼른 밥을 먹으라고 재촉했다. “아, 오늘따라 왜 이런데” 대준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대현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었 고, 겉옷을 걸치며 나갈 채비를 맞추었다. 대현은 형에게 눈짓으로 인 사를 하였고 형도 동생이 아르바이트 간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걱정 을 하였지만 이내 눈빛으로 답을 해주었다. 띠리링 비밀번호 패드가 문이 잠기었다는 소리를 내고 대준은 다시 밥 먹는 것에 열중하였다. 대현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부터 지긋지긋했던 아르바이트를 끝마 친다는 생각에, 얼굴에 웃음꽃이 끊이질 않았다. 대현은 이내 어제 보 았던 빌딩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웬걸, 빌딩 앞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던 ‘헤이호 쇼핑몰’ 이라는 글씨는 없어지고 ‘슈퍼마켓’ 이라고 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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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대현은 좌절했다. 떨리는 동공으로 시선을 직시했고 다시 한 번 눈을 비비면서 앞을 보았다. 똑같았다. 대현은 황급히 지갑 속에 있던 이환의 명함을 손에 쥐고 그 밑에 쓰여 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 다. 하지만, 그 전화번호는 이내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므로……’ 라 는 안내원의 딱딱한 음성이 들렸고, 대현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현 은 경찰서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였고 경찰아저씨들은 어쩔 수 없다 는 결론을 내렸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현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환을 잡 을 방법도 없었을 뿐 더러, 잡는다고 해도 이미 전과가 많은 사기꾼 이여서 잡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경찰 아저씨에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 다. 대현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형에게 어찌 얘기하나 조마조마 하 였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는 척 소파에 앉았다. 대준은 대현 이가 너무 빨리 돌아왔다는 사실에 물었다. “야, 왜 이렇게 일찍 왔냐?” 대현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대준에게 화답 하였다. “아니 그냥, 오늘은 아르바이트가 가기 싫네. 형.” 대준은 대현이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 채고 다시 되 물었다. “야, 거짓말 치지 말고 무슨 일인데.” 대현은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얘기했다.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명백히 대현의 잘못이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대준 은 이내 대현이를 토닥토닥 위로해주었다. “야, 괜찮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대현은 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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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 길래 형이 잔말 말고 공부나 하라 그랬지 이대현. 이게 다 형 말 안 들어서 생긴 일이야 임마. 됐고 울지 마, 형이 아는 형님 들 불러서 손 좀 봐주라고 할 테니까.” 대현은 형의 말을 듣고 놀라서 말렸다. “형, 그냥 하지 마. 이건 내 책임도 있는 거고 그 사람이 정 확히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돈을 빌려준 내 잘못도 있는 거니까. 그냥 넘기자 형. 나, 똑 같은 사람 되기 싫어.” 대준은 어쩔 수 없겠다는 마음에 그저 대현이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 다듬었다. 왜 하필 가만히 있어도 힘든 우리 형제를 건드리는 걸까라 는 생각으로 대준이는 오늘도 한숨을 쉰다. “그래. 이번 한번만 좋은 일 했다 치고, 눈 감자 대현아.” 대준이는 이내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슬픈데,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그리고는 이내 픽- 웃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동생의 머리를 쥐어박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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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토론>

개화와 FTA, 나는 개방을 주장한다 Grade 11 김준현 June Hyun Kim 조선 말기, 외세의 개방 압력이 점차 강해져 오는 가운데 나라의 개 방 문제에 대해 조정은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었다. 개화파는 우리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여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반면, 수구파로 불리는 위정척사파는 유교의 가치관에 기초하여, 그 이외의 것은 옳지 않으며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당시 양측의 주장 모두에 나름대로의 이유와 타당성이 있겠지만, 만약 내 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개화를 강하게 주장하였을 것 같다. 먼저, 세계 정세와 더불어 서구 열강들과 조선의 국력을 살펴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가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없었던 조선으로서는 차라리 선진 국가들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빠른 시간 내에 나라의 힘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무조 건 내 것이 아니면 나쁘다는 식의 사고방식 보다는 유교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현명한 판단을 했었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시대를 뛰어 넘어 오늘날에도 조선 말기의 개화파와 수구파의 논 쟁과 유사한 사건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무역협정(이하 FTA, Free Trade Agreement)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두 국가 간에 상 호 무역장벽을 낮추어 실질적으로 양 국가의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FTA의 취지인데, 우리나라도 칠레, 미국 등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와 FTA를 체결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에 FTA 체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과의 FTA 체결 시에, 우리나라 농민 단체와 시민 단체에서 국내 농가의 피해를 우려하여 강한 반대를 하였다. 나는 FTA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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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도록 이루어져야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부 피해를 입는 사람도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때문에 FTA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즉, 일부에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것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옳은 방향이 지, 일부의 피해를 빌미 삼아 전체를 반대하는 것은 마치 조선 말기 수구파의 주장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FTA 체결과 개화에 대한 논쟁은 서로 다른 시대에 있었던 쟁점 들이지만, 결국은 우리나라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대한 견해 차 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사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서는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수구파의 위정척사 주장은 세계 정세에 대한 정보가 부족 한데 기인했고, FTA에 대한 반대자들의 시위는 사실에 입각한 정확 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둘째,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 이득이 되는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구파는 유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개화에 반대했고, FTA 반대자들은 농민의 피해를 막고자 FTA 체결을 반대했다. 각자 반대의 이유가 있겠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이 속한 당파나 이해 집단의 작은 이익을 버리고 국가를 위한 결 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개화와 FTA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힘이 없으면 결국 득보다 실이 많게 된다. 개화를 빙자하여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하였고, FTA도 우리나라의 제품이 경쟁력이 없으면 결국 외국 제품에 우리나라 시장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힘을 키우는 것 이 가장 중요하며, 앞서 말한 두 가지를 고려하면서 개화, 개방, FTA 등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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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토론>

개화와 FTA, 나는 개방에 반대한다 Grade 11 구재모 Jaemo Koo

조선 말기,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이 팽팽하였다. 개화파는 외 국의 문물을 어서 들여오자는 의견을 고수하였고 위정척사파는 조선의 유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 문물의 유입은 매국과 같다 하여 조정 을 등에 업은 개화파의 약진을 막고자 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당시 백성들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갈등을 자세히 알진 못했으나, 지속 된 서양 세력들의 침략과 점진적인 개화의 부작용을 몸소 겪고 있던 터라 개화를 반대했을 것이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그리고 운요호 사 건 등 외부 세력의 횡포를 직접 보아왔고 또한 개방으로 인한 피해자 인 구식 군영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을 목격하며 백성들에게는 개화가 불러오는 부작용이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조선의 경제적 문제 또한 두드러졌다. 백성들의 생활 유지에 가장 중요한 곡식, 특히 쌀 같은 자원들이 전부 외국으로 수출되며 오히려 조선 국민들이 먹을 쌀은 줄어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쌀값의 폭등을 불러와 경제를 악화시켰다. 나라 살림이 안 좋아지자 민심은 흉흉해졌 고, 궁극적으로 국민들은 모든 사건의 시발점인 개화파와 민씨 정권에 게 그 탓을 돌렸을 것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FTA 또한 상황이 비슷하다. FTA를 체결하는 것은 관세를 철폐시키고, 그로써 국내 비주류 산업에 수출길을 열어주어 죽어있던 산업 분야를 되살리고 내수 경제를 활성 화 시킨다는데 의의가 있다. 또한, 외국의 물품을 관세 없이 값싸게 들여와 국민들의 불필요한 지출을 막아 전체적인 삶의 질을 높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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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많은 사람들이 FTA를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도 위에 언급된 장점들 때문이다. 일단 외부에서 무방비하게 물품을 수입하게 되면 관세 철폐로 인해 그 수입 품목들의 시장 경쟁력이 올라갈 것이고, 그로 인해 상품의 질은 같으면서도 가격은 상대적으 로 비싼 국내 산업의 상품들은 경쟁에서 밀릴 것이다. 또한, 처음에 는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을 것이라 예상되었던 물품들도 막상 보면 그 시장의 토종 물품과의 비교우위에서 밀릴 수도 있다. 그러 므로 결과적으로 시장 활성화를 위해 시작되었던 FTA는 국내 시장 과 국내 기업의 이익 관계를 도리어 악화시킬 수도 있다. 조선시대 백성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개화파의 정책 또한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둘 다 시장을 개방하고, 상대국에 경제에 관련해 권한 을 주고, 상품을 들여보낸다. 그러나 FTA를 닮은 만큼 FTA의 문제점 도 그래도 답습하는 바람에 조선의 경제는 휘청거렸고, 경제구역의 일 부 개방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한 덕분에 결과는 실제 가져왔어야 할 악영향보다 더욱 더 심한 타격을 맞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실제 결과와 예상되는 영향을 생각해 본 결 과 조선의 일반 백성이라면 아마 서양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려 하는 개화파 보단 유교 위주의 위정척사파를 더 지지했으리라 본다. 정치 영역까지 일반화 할 수는 없어도, 개화파가 추진하는 정책은 나라의 경제를 휘청이게 하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낮추며 나라에 불안정한 사건들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위정척사파는 ‘좋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 서양 오랑캐 없이 우리 끼리 잘 살아보자고 외치는데 어떤 백성이 굳이 개화파를 지지하겠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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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토론>

흥선대원군, 그는 야망이 지나친 이상주의자였다. Grade 11 김기환 Andrew Kim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에 많은 개혁들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서원 철폐, 삼정의 개혁 등 대원군은 백성들의 평화를 위한다고 판단했으 나, 그의 개혁은 결과적으로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단 나라가 잘 돌아가려면 든든한 조정이 뒷받침 되어야 한 다고 생각하여 왕권강화의 일환인 경복궁을 재건하였다. 그런데 그 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원군은 ‘원납전’이라는 돈을 백성들 에게 내게 하였다. 처음에 ‘원납전’은 백성들이 원해서 내는 돈이었 으나, 돈을 너무 많이 요구하니 백성들도 차츰 돈 내는 것을 꺼려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돈이 부족해지자 대원군은 ‘당백전’이라 는 고액 화폐를 찍어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백전’의 가치가 너 무나 높아 물가가 오르면서 나라의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 경복궁 을 짓기 위하여 ‘당백전’을 찍어내는 정책은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 었으나, 화폐의 가치를 너무 높이는 바람에 큰 부작용이 일어난 것 이다. 그리고 서원 철폐 역시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서원을 철폐함으로 써 양반들이 공부하는 곳이 없어졌고, 그로 인해 서원을 중시하던 양 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분명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서원은 옛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양반을 배려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비록 흥선대원군이 나라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면서 개혁을 하였어도 그는 야망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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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토론>

흥선대원군, 그는 현실적인 실리주의자였다. Grade 11 유석현 Paul Yoo 흥선대원군은 조선 말, 오랜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는 타락하고 민 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집권하여 활약을 한 인물이다. 그의 개혁이 있었기에 조선의 역사는 지속될 수 있었다. 흥선 대원군의 주요 정책들을 통해 그의 리더십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소수 가문의 지배와 세도정치 때문에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러 나섰다. 또한 경제적 영역의 부정부패가 심각했기 때문에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것과 함께 대 전회통을 편찬하고, 육전조례를 규정하는 등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분산되었던 권력을 중앙의 왕에게 계속 집중시켜 나가도록 개혁을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지방을 어떻게 통치할지가 하나의 과제였는데 지방 권력 의 핵심이었던 서원을 정리함으로써 그 폐단을 없애기 시작한다. 서원 을 철폐하는 것은 지나치게 확대되던 양반의 권력을 제한하면서도 주 로 면세의 혜택을 받았던 땅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되면서 국가 재 정과 민생 안정 모두의 효과를 꾀하게 된다. 결국에는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과감한 개혁을 보여준 대원군의 정책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방 세력의 경제적 자산이었던 서 원을 개혁한 일은 양반들의 원성을 살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 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흥선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만동묘란 중국 황제를 모신 사 당이었는데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서원보다도 더 큰 폐단을 가지 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원군은 명분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실리를 추구한 개혁가였 으며, 그의 리더십은 시대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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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콩트>

‘갑신정변’ 속으로 Grade 11 All

김윤식: 당장 청의 도움 받아 천천히 나라를 개방 하는 게 시급합니다. 그렇 지 않소? 김홍집: 네 옳습니다. 서양의 문명과 일본, 청나라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된다 고 생각합니다. 유길준: 우리는 오랫동안 청의 도움을 받아왔소. 하지만 언제까지 청의 도움만 을 받을 것이오? 지금 몇 십 년 동안 청에게 의지하며 과연 우리가 나아진 것 이 있소? 김옥균: 맞습니다. 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으로 조선을 이끌어가 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김윤식: 독립적인 것도 좋지만 요즘 정세를 보자면 약자는 분명 강 자에게 잡아먹히는 사회진화론적인 구조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다면 시작하기도 전에 서양 국가들한테 잡아먹히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개화정책을 추구하더라도 천천 히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요. 서재필: 어허 이런, 한심한 자들을 봤나. 댁들은 앞으로도 평생 조선 이 청과 사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소? 이젠 청으로부터 벗어나 일 본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제 오랜 관습인 사대적인 관계로부터 벗 어나 나라를 제대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지금 이런 힘든 상황을 이기 지 못하면, 앞으로 이 나라에 발전도 없을 것이고 다음에 이보다 더 힘든 문제가 생겼을 때 또 누군가에게 의지를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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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어르신들, 제 말 좀 들어보 시죠. 제가 일전에 영선사로 청에 다 녀오지 않았습니까. 청의 무기 제조, 외교 등 여러 모습을 보았지만 상당히 발전을 많이 했고 그만큼 저희가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양무운동을 통 해서 청이 이렇게까지 발전했는데, 우 리나라도 정신을 고수하며 서양기술만 습득하면 충분히 개화정책을 잘 펼칠 수 있습니다. 유길준: 하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청에 의존만 하고 있지 않습니 까. 그러면 그럴수록 청의 내정 간섭 이 극심해진 가운데 댁들은 어떻게든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소? 홍영식: 그렇소. 이러다간 우리나라 는 평생 청에게 아부를 떠는 속국이 되는 수밖에 없소. 이제는 어떻게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과 손을 잡아 이 나라를 발전시켜야 하오! 지 금 댁들이 청을 몰아낼만한 힘이나 있소? 김윤식: 흠...그것도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일세. 김홍집: 옳은 말씀입니다. 청의 내부 간섭이 심해질수록 우리나라의 문화와 사상이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윤식: 지금 청프 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청의 병 력이 반으로 줄었습니다만. 유길준: 때는 지금이오!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시 안 옵니다. 당장 청의 군대가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과 손을 잡아 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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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내야 하오! 협조 좀 해주시오! 김홍집: 조선 시찰단을 통해 일본과 좋 은 관계가 맺어 있긴 합니다. 그러면 제 가 한 번 일본과 얘기를 해보죠. 박영효: 그렇다면 혹시 군사지원을 받 아낼 수 있겠소? 지금 우리만의 군사 병 력으로만은 한 없이 부족하오. 김홍집: 맞는 말이오. 그러면 제가 한 번 군사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지 당장 내일 만나겠소. 김옥균: 내일?! 내일이라뇨? 시간이 없소. 오늘 받아내시오! 지금 청의 군대 가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릅니다! 김윤식: 그 말이 맞소. 청군이 눈을 돌리고 있는 틈을 타 당장 실행에 옮기 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소. 박영효: 그렇다면 우정총국 개국 축하 연을 이용해 그 틈에 민씨 세력들을 살 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서재필: 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써서 발표합시다. 하나.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둘.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셋.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고 간리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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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다섯. 전후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 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여섯. 각도의 환상미는 영구히 면 제할 것, 일곱. 규장각을 폐지할 것, 여덟.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 적을 방지할 것, 아홉.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열.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 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열하나.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대위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 자로 할 것, 열둘.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 할 것, 열셋.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점령을 의정집행할 것, 열넷.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 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 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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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1일 어느덧 임으로부터 답신이 도착했다. 그이를 못 본지 일주일이 넘었 다. 곱게 접힌 서찰을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그의 잔잔하고 정갈한 글 씨가 다시금 나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다. 사랑하는 연화야, 너를 잊으려 하였으나 잊지 못하였다. 단지 집안 간의 서로 다른 관점으로 빚어졌을 뿐인데 녹슨 고리마냥 끊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연이 참으로 가엽구나. 우리의 사랑은 밤의 달과 낮의 해가 함께 떠오를 수 없는 것 같은 운 명이더냐. 차마 부친께 우리의 혼약을 허락 받지 못한 나의 부덕함을 용서해 다 오. 우리의 사랑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아무도 몰랐던 인연이였지만 부디 건강하게 지내다오.

수도 없이 읽은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이별의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의 운명을 단정지어버린 말들을 쓴 그 의 손이 미웠지만, 고뇌가 담긴 그 글씨들을 사랑했다. 보이지 않는 눈물 자국들이 느껴지는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펼쳤을 때에는 나는 결 심했다. 그와의 억울한 결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라 도 무언가를 해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께 우리의 혼인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사랑방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께 어떤 식으로 말씀을 올려도 이 혼인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버 지께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다면,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 같은 생각뿐 이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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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오거라” 아버지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나의 떨리는 심장을 더욱 시리게 파고 들었다. “소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우리 가문이 지향하는 급진적인 개화 정책과 맞서는 민씨 집안의 자제이옵 니다. 아버지께서 탐탁지 않으실 줄은 알지만, 감히 소녀가 용기를 내 어 저희의 사랑을 아버지께 허락 받고자합니다. 부디 저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엽게 여겨 주시옵소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거절의 답이 올까 두려운 마음에 흐르는 눈 물을 애써 삼켰다. 차마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차가운 눈초리를 쳐다 보지 못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민의준이라는 자입니다. 혹 아시는지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말하고 아버지를 올려다본 순간,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깊은 경멸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고는 애써 북받쳐 올 라오는 감정을 참고 계셨다. “감히 네 년이 이 아비를 모욕한 집안의 아들과 혼약을 한 다는 말이더냐? 그 자의 애비가 나의 계획을 밀고하고 우리 가문의 뜻을 회방 하려했던 무식한 민 씨 집안의 가장이다. 네가 만약 이 애 비를 위하고 사랑하는 딸이라면 그 자와 당장 인연을 끊어라!” 아버지가 그렇게 역정을 내는 모습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언제나 점잖고 화를 안으로 삭이시는 아버지셨는데, 나의 애꿎은 사랑의 불씨 가 아버지의 점잖은 모습을 망쳐놓는 듯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 로 포기는 불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민도령에게 향한 나의 마 음이 너무 커져버린 것이었다. “아버님, 그 분은 집안의 힘보다 소녀의 순수한 눈동자를 먼 저 봐주던 사람이옵니다. 이 가여운 딸이 행복한 생을 살기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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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 집안을 향한 증오를 조금이라도 식혀 소녀의 첫 사랑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께 용기를 내어 여쭈었다. “연화야, 조선의 하늘은 푸르고 조선의 땅도 비옥하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백성들은 하루의 끼니를 이어갈 수조차 없을 정 도로 궁핍에 궁핍을 더해가고 있으니 조속히 백성의 원한과 뜻을 해결 해 줄 날이 도래해야 한다.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민씨 들의 정권을 뒤집을 인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아버지, 꼭 민씨들의 정권을 엎어야지만 개혁을 추구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나로서는 연거푸 질문할 수밖에 없었 다. “명성황후가 눈앞의 이익만 보고 어리석게 행동한 것이 우리 조선을 얼마나 큰 곤란에 빠뜨렸는지 아느냐. 청의 간섭 때문에 우리 조선의 권위는 날로 힘을 잃고 있다. 서양의 과학기술과 근대적인 사 상, 제도를 받아들여야지만 조선은 이 상황을 극복하고 발전할 수 있 다. 그러기 위해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청국과 결탁한 명성황후와 온건개화파에게 대항하여 개혁을 추진해 나 가야 한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먼 산을 한 번 응 시하시더니 내 어깨를 부여잡고 나직한 음성으로 다시 말씀을 이어가 셨다. “연화야, 삼 일 후에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 세울 것이 다. 이 아비와 김윤식, 김홍집, 박영호, 서재필 이 자들과 현 급진개화 파 세력은 민씨들의 몰락을 위하여 우정국 낙성식의 축하연을 틈 타 정변을 일으킬 것이고, 권력을 가진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고 일부는 처형시킬 계획이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긴장을 아버지의 음성에서 느낄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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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아무런 말도 이어갈 수 없었다. “수개월에 걸쳐 일본 현지를 답사 하니, 이 아비는 일본의 문 화와 외세와의 무역을 본받아 더욱 빨리 발전하는 조선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만 앞선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이를 위해 임오군란 이후에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박영효와 함께 일본의 이노 우에로부터 17만원의 돈을 빌려와 고종의 친서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 갔다. 허나, 나의 기대와 달리 거기에서 이노우에는 나에게 그 친서가 과연 고종의 친서인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며 3백만원의 차관을 내어 주지 않았다. 이 차관의 실패는 우리의 독립당의 위치를 고립시키고 나를 정변이라는 급진적 방법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우리가문의 목 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감히 내 앞에서 민씨 집안과의 혼사를 논하다니 나는 절대로 이 혼인을 허락할 수 없다!” 아버지는 단호하면서도 내가 혹여라도 다른 마음을 먹을까봐 불안해 하시는 모습이셨다. “아버지 그리하여도 소녀는 이 분과 결코 헤어질 수 없습니 다!” 나는 흐느끼면서 소리쳤다. 한 번도 아버지께 언성을 높인 적 없었 던 내가 아버지 앞에서 소리를 질러버렸고, 이에 아버지께서는 괴씸하 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셨다. “어허 무례한지고! 감히 네가 어디서 이 아비한테 소리를 지 르느냐? 당장 나가지 못할까! 다시 한 번 더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이따 위 사랑타령을 늘어놓는다면 이 아비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할 것이니! 당장 나가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화가 담긴 목소리에 나는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이미 흐 르고 있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도 이 아픈 사랑에 대한 서러움은 사라 지지 않을 듯 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나와는 얘기 하고 싶으시지 않 아 보였고 차가운 아버지의 등을 보며 방을 빠져나왔다. 같은 슬픔이 담긴 그의 서찰이 방구석에 쓸쓸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니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끝나는 것인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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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우리의 진실 어린 사랑을 이해해 주지 않으려는 것일까? 흐느 끼는 소리를 막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그의 서찰 뒷장에 나의 답신을 천천히 써 내려 갔다. 그의 서찰을 간직하면 혹 작은 미련이라도 남을 까 두려워 그의 서찰을 그대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이 서찰이 내 손에 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사랑하는 당신의 편지를 보고 슬픔으로 벅차는 마음에 아버지를 찾아뵙고 용기 내어 혼인의 허락을 구하려했지만 역시나 녹슨 고리는 새롭게 다시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인가 봅 니다. 저희의 사이를 가로막고 건널 수 없는 가람을 함께 건너고 싶 었지만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소녀와의 추억을 잊지 말아 주옵소서. 다음 생에는 캄캄한 밤을 비추는 달과 별처럼 함께 빛날 수 있는 인연으로 만나면 좋겠습니다. 이 서찰을 내일이면 경순이를 시켜서 보내야 한다. 그런데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전혀 없다. 경순이에게 이 서찰을 보내라고 입이라도 뗄 수 있을까. 내 방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는 달빛이 예전엔 곧 보게 될 그이를 볼 수 있는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은은한 달 빛이었지만, 오늘 밤은 가슴을 시리게 하는 차갑고 냉정한 달빛이구 나. 매일 밤 저 차가운 달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의 따스한 포옹 만이 나의 심장을 녹이는데…….나는 이제 이 얼음같이 차가운 심장을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역사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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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후손에게 전해주는 교훈

Grade 11 이희웅 Hee Woong Lee

이 편지를 읽을 때면 아마 21세기쯤 되어있겠군. 아마 온 나라에 서 양문물이 퍼져 있을 수도 있겠지…내가 그리 막으려고 노력 했건만. 자네는 병인양요라는 사건을 알고 있나? 자네가 이 글을 읽을 때 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조선에서 천주교를 금지 했소. 당시 러시아가 얼지 않는 항구를 찾고자 우리나라로 밀고 내려 오자 나는 조선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러시아와 교섭해 볼 것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했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나라 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국민은 필요 없소! 또한 우리가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의 사회 질서는 모두 무너지고 말 것 이요. 당시 우리의 사회는 유교사상의 성리학에 기초되어 있었소. 왕, 양반, 그리고 평민으로 이어지는 계급이 깊게 뿌리 내려 있었소. 하지 만 천주교가 들어오게 되면 조선에도 평등사상이 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전체가 무너지겠다는 것이 당시 내 생각이었소. 안 그래도 안정적이지 않은 국가에 새로운 힘을 들여오게 된다면 그야말로 대혼 란이 일어나지 않겠소? 내가 외세와의 통상을 거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진 것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었소. 조선과의 교류를 원하던 영국이 배에 물건 들은 잔뜩 싣고 와서 계속해서 통상수교를 요구했소. 하지만 당시 나 의 정책들로 인해 조선의 국법은 통상과 수교가 절대 금지 되어있었 소. 그렇지만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는 우리의 유원지의(柔遠之義) 의 철칙 때문에 우리는 그래도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등 후한대접 을 아끼지 않았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계속된 통상수교 거부에 초조해진 서양 놈들은 우리의 중군 이현익을 납치하고 난폭한 행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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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행하며 끊임없이 평양군민과 충돌했소. 그들은 심지어 대포까지 쏘 았고 우리의 군민들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였소. 이 얼마나 무례한 일 이오? 우리가 우리의 문물을 지키고 남들의 것을 받지 않겠다는데. 서양 놈들은 참… 그대들 오페르트 사건이라고 아는지 모르겠소. 너 무 오래되어서 모를 수도 있겠지만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당시 내가 독 일과의 통상수교를 거부하자 독일군이 내 선친의 무덤을 도굴한 사건 이요. 이 무례한 짓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통상수교를 하기도 전에 이렇게 무례한 짓을 범하는데 만약 통상을 수교하게 된다면 그들이 무 슨 짓을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소. 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판을 치며 우리의 조선국민들을 못살게 굴 것을 생각하면 내 자다가도 치가 떨려 벌떡 일어나곤 하오. 시간이 지날수록 외세에 대한 입장이 더욱 나아지고 또 세월이 흐를 수록 외세와 통상을 수교하고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느 정 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오. 하지만 내 후손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 고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소.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외세들 을 견제해야하오. 무턱대고 뜬금없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이 아 니라 우리의 것을 최대한 지키고 보존하면서 점차적으로 그들의 문물 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요. 또한, 그 어떤 문물이 들어오든지 반드시 왕권을 지켜야 되오. 물론 시민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왕의 의무이고 또 책임이오. 하지만 양반들과 시민들의 힘이 같아진다면 이 나라에는 대혼란이 일 어나고 말 것이오. 반드시 우리의 옛 질서와 예의를 지켜주시오. 내 부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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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임오군란 중 구식군인의 항변 Grade 11 윤설빈 Seolbin Yoon

나는 1882년도에 일어난 임오군란에 참여한 구식군인들 중 한 명이 다. 우리가 봉기를 일으킨 이유들을 말하자면 너무나도 많지만, 그중 제일 불평등 했던 것을 말해볼까 한다. 우리가 처음부터 정부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때 당시 민씨 정권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인해 별기군과의 차별로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별기군으로 말하자면 일본과 민씨 정권이 손을 잡고 만는 신식군대인데 우리 구식군대와 차별이 너무나도 심해 우리 의 억울함은 쌓여만 갔다. 또한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려있었기 때문에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하늘을 치솟을 듯이 높아져갔다. 이때까지만 해 도 우리에게 알맞은 급여를 줬다면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정부는 모레와 쌀이 섞인 급여를 우리에게 주었는데 받을 월급 의 일부만 주었을 뿐더러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이로 인해 우리 구식 구인들은 화가 끝까지 났고, 담당자인 민경호를 살해했다. 이 후, 우리 는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정부의 고관을 살해했고, 일본 공사 관을 불태웠을 뿐더러 일본교관을 죽였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민비는 거짓말을 하고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죽은 줄 알았지만, 나중에 보니 떡하니 살아있어서 우리를 많이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조정은 항상 이 런 식이었다. 거짓말로 자신들을 살리고, 농민들은 하나도 신경 안 쓰 는, 그런 나라였다 조선은. 민비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하자면, 한마디로 일본과 손을 잡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든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민비는 제 1의 적 이었고, 또 그것을 알고 있던 민비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는지 충주로 도망을 친 것이다. 민비는 도망치 는 과정에서 무관에게 뺨까지 맞는 수모를 당했다. 비록 민비는 못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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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지만 우리의 분은 그나마 풀려졌다 또한, 이 일로 조정이 다시 뒤집히자 흥선대원군이 다시 조정에 들 어왔고,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함으로서 우리를 달래려고 힘썼지만 이것 도 오래가진 못 했다. 이유는 민비가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해서 청나 라가 흥선대원군을 자기 나라로 압송해갔기 때문이다. 또한 청나라 군 대는 임오군란을 수습하면서 3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며 조 선에 대한 주도권을 점차 확대했다. 이 일은 정부가 자기들이 얼마나 무능한지 보여주었다. 청나라의 간섭은 이전에도 심했지만 이번에 민 비가 도움을 요청함으로서 내정간섭은 그냥 간섭으로 끝나지 않았다. 비록 임오군란이 실패로 끝났지만, 이 일로 인해 우리는 많은 깨달 음을 얻었다. 우린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절대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이 런 일이 안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이런 비슷한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고 그로 인한 반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 갈 테고, 가족들을 잃고, 소중한 것을 계속해서 잃을 것이라고 생각한 다. 혹시라도 미래에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냥 넘어가지 말라 고 충고를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다 똑같은 사람이다. 일본이라고 우 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국민이라도 그들 의 의견은 다른 양반들과 똑같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 이 임오군란 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절대로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비록 반발에 나섰다가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쭉 밀어 나가길 빈다. 나는 비록 지금은 지쳐있지만 곧 다른 동기들과 일어날 것이고,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자손들이 우리의 뜻을 이어갈 테 고, 언젠가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거라고 굳게 믿는다. 포기하지 말자. 우리는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고, 또 조선의 국민 이다. 우리가 안 나선다면 누가 나서겠나. 때를 기다리자. 일을 잘 해 결하려면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제발 미래에 있을 일들을 대비하여 내가 하는 말들을 잘 새겨듣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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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최제우의 유서 Grade 11 오승윤 Seung Yoon, Oh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의 내가 이 나라 조선에서 이룰 수 있는 바가 있을까. 사람이 곧 하늘이며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이 세상에 양반이 아 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나라, 이 나라 조선에서는 오히려 부패한 관리들이 난을 치고 있으며, 백성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지고 있다. 비록 나는 곧 있으면 참수를 당하지만, 나의 사상이 그르지 않기에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며, 죽음 또한 두렵지 않 다. 또한, 나를 죽여도 나의 동학 신도들은 그들의 믿음을 쉬이 져버 리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이 죽음이 전혀 나에게 두렵지 않다. 부패한 관리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 어찌 마땅하단 말 인가. 또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 으며 모든 사람들은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도들을 무차별적 으로 참수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비록 동학의 창시자이 지만, 이러한 비극이 우리의 동학 신자들에게도 일어날 것임을 알기 에, 천주교인임이 아님에도 이를 슬피 탄식하는 바이다. 사람이 곧 하 늘이며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 듯 해야 하거늘 어찌 다른 이의 목숨 을 그리 하찮게 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나의 후대에 물려주고 싶은 세상은 이렇듯 출신이 사람이 누려 야 마땅할 권리의 족쇄가 되지 않는 세상이며, 외세에 어지럽혀지지 않는 강인한 세상이다.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무고한 백성들의 숨통을 조이는, 하지만 힘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 는 이 나라 백성들이 겪는 역경을 우리의 후대는 물려받지 않기를 간 절히 바란다. 미래에는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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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평등한 사회가 꼭 존재하길 바란다. 또한, 우리의 후손들은 외세에 대항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라의 백성들이길 바란다. 지금의 조선은, 이 나라를 이용하려는 일본의 손 아귀에 놓여 자신의 백성들 하나 간수하지 못하며 자신의 정권을 어찌 하면 더 넓힐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부터 방치 되고 있다. 하지만, 권력 싸움을 한들, 외세가 나라의 침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백성들이 이를 따르지 않는데, 권력이 무슨 소용이라 는 말인가! 지금 이 조선은 개혁이 절실하다. 이 어지러운 세상이 후 대에는 이어지지 않길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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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격문을 읽으며 Grade 11 박현지 Sarah Pak

개인의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탐욕스러운 고부군수 조병갑, 그가 점 점 백성들의 목숨 줄을 올가미처럼 조여 온다.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과중한 세금 때문에 굶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고 이건 아니다 싶은 이치에 맞지 않은 일들이 빈 번히 일어난다. 그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버지께서도 동학농민 운동에 앞장 서 마을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 리던 고부 군수에게 항의를 하다 체포되어 매를 맞고 세상을 떠나셨 다. 이에 백성들은 몇 번에 걸쳐 호소했으나 조병갑 그놈은 백성들을 옥에 가두고 엄한 형벌을 내렸다.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 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했고 올 해는 날씨가 좋지 않아 농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들었음에도 면제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세 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 음행, 잡기, 불목 등의 억울한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해갔다. 이 얼 마나 불공평하고 살기 힘든 세상이란 말인가. 이에 우리 백성의 힘으 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어려움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튼튼하게 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살 수 있게 바꾸자는 개혁을 시작했다. 농민 1천 여 명을 이끌어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들을 벌 준 후, 억울 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어려운 농민 들에게 나눠주었을 때는 마치 10년 묶은 울화가 내려가는 것처럼 통 쾌해 하던 사람들의 기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894년 4월경 나는 백산에서 흰 색 옷을 입고 있는 8 천 여 명의 농민들 앞에서 격문을 발표할 때 무언가 뜨거운 것이 내 마음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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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를 튼튼 하게 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서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고 싸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모든 사람들과 공감 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마땅히 받아 누려야 했던 권리들을 하나씩 우리의 힘으로 되 돌려 받을 때 마다 성취감에 취했다. 한편으로는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졌다. 응당 한 나라의 일원으로서 받고 누려야 할 것이었는데 그 동안 빼앗긴 채 억울하게 살아 온 듯한 마음에 몹시도 서러워졌다. 후세 사람들에게 외친다. 지도자는 작은 집단에서 뿐만 아니라 한 나라에 꼭 필요한 중요한 인재다. 하지만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모 든 사람들을 결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지도자가 아니다. 한 나라와 세 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움직일 수 있도록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뜻을 바른 길로 이뤄나갈 수 있게 포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약자의 편 에 서서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지도자이다. 이루고자 하 는 것이 있는가. 자네, 주저하지 마시게. 절대 시간이 늦어서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핑계일 뿐이다. 지금 하고자 하는 옳은 것 이 있다면 힘을 모아, 지혜를 모아, 그리고 뜻을 모아 이뤄가기 바랄 뿐이다. 우리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농민들이 해낸 것처럼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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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농민군의 절규 Grade 11 정승현 Seunghyun Chung

나는 최정예의 국군을 상대로 두고 맞서 싸우는 입장에서 우리가 한 참 불리할 것이라는 걸 알지만 나와 내 동료들이 원하는 평등한 사회 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두려움을 접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 다. 조병갑이 우리에게 무리한 봇세를 요구하자, 이에 분노한 전봉준 이 마을을 뒤집어 놓고 나와 같은 가난하고 배고픈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나도 물론 조병갑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두려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행동하기를 기다렸고 일이 터진 후에도 가 만히 보고만 있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강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강자들이 있고, 그 아래에 우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따른다. 그들은 우리를 멋대로 끌고 가고, 우리는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다. 간혹 가다 우리 를 조금이라도 존중하려는 의지가 보이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를 아무리 좋게 대하려 해도 우리가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동학이라는 사상에 이 끌렸다. 동학에는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지만 바랄 수 밖에 없는 평 등 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조병갑을 몰아낸 후에 이용태가 그 자리에 위임되었고 이용태는 우 리의 믿음을 져버리고 모든 농민들을 더욱 더 괴롭혔다. 그러자 전봉 준과 동학 교단을 지도하는 김개남과 손화중이 ‘제폭구민’, ‘보국안민’ 이란 사상을 앞세워 우리를 이끌고자 했다. 내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전에 한번 터진 일이 더 크게 번지는 것 같아 망설였지만 알 수 없는 용기와 평등을 향한 갈망에 휩쓸려 전봉준의 편에 서기로 했다. 지금 나를 비롯한 농민들 몇 천 명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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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이 세상은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들 의 운명을 정해 놓는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찾아 우리를 아 래에 묶어 놓으려 기를 쓴다. 가끔씩 조선이 이보다 더 평등한 사회였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고, 그 누구도 자신의 운과 욕심을 텅 빈 명분으로 포장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 세상. 그래서 동학이라는 사상이 필요가 없어지는 세상이 언젠가 는 오길 바란다. 조선이 굳건한 국가가 되어 모든 국민들을 출생과 상 관없이 보호하고 외세에 휩쓸리지 않으며 사회의 문란함마저 없애 버 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비록 내가 지금 누리지는 못하더라도 후대에 는 조선이 나와 내 동료들이 바라는 그런 믿음직한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비록 나와 내 동료들, 그리고 모든 약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세우기 위해 이 싸움에 뛰어들지만, 언젠가는 이런 희 생조차 필요 없이 당연하게 사람과 하늘을 섬기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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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전봉준은 너희들에게 고한다 Grade 11 김유리 Stephanie Kim

경비와 일본이 요구한 배상금 탓에 국가 정비는 점점 악화되고 있 다. 그러나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국가를 재정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안 그래도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서 세금을 더 걷고 있다. 동학이 세워진 후 사람들에게 평등 의식이 퍼트 려진지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아직도 그런 평등 의 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사람들이 평등 의식을 가지 는 것을 두려워 해 본보기로 동학교도들을 처형하고 있다.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을 누리고 정부는 가난한 국민들을 도와줘 야 한다. 그러나 고부에서는 정부의 정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안 그래도 살림살이가 어려운 국민들을 더욱더 억압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부의 그런 불평등한 태도에 분노하고 다 같이 더 나은 국 가를 위해 싸워야 한다. 사람은 하늘 아래 모두 평등하며,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는 주워지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동학교도들이 정부에 반해 투쟁 하고 있는 사상이다. 만약 정부가 아직도 자신들이 국민보다 높은 위 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 함께 시위하여 그런 생각을 바꿔주 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미 신분제에 익숙해져 자신이 받는 불평등한 대우에 분노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 들을 도와 정부에 대항하고 국민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를 되찾을 것이다. 고부의 곡식 창고를 털어 부패한 군수에게서 식량을 되찾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의 권리를 외치다 억울하게 잡힌 사 람들을 옥에서 풀어줄 것이다. 정부가 아무리 나쁜 정치를 그만두겠다 고 해도 우리는 더 이상 그 얘기를 믿을 수 없다. 정부가 행동으로 먼 저 국민들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정부에 대항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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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것은 결코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은 곧 정부가 옳은 정 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농민 봉기가 있은 후 오히려 모든 것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고 죄 없는 사람들을 더 많이 잡 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에 놀랐다면 우선 그들이 왜 봉기를 일으켰는지, 정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만도 하나 우리 정부는 그 모든 책임을 다름 아닌 국민들에게 떠넘겼 다. 우리는 더 이상 부패한 정부의 행패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8천 여 명의 농민들이 백산에 모인 것 역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하나 뿐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백산에 모인 수 천 명의 사람들, 정부 에게 착취당한 다수의 농민들 역시 자신들의 처우에 부당함을 느끼고 정부에 대항할 의지를 스스로 가진 것이다. 비록 정부는 그동안 계속 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회피하다 본인들이 저지른 과오로 인해 우리에게 정치 개혁을 약속 하였지만, 처음부터 우리가 고분고분 그들을 따라 우리가 받는 부당한 처지에 대해 묵인하 고 있었다면 애초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또한 중앙군과 새 로운 관리들을 파견해 계속해서 우리의 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수중 안에 두려 노력했던 정부가 청일 전쟁을 막으려 우리와 힘을 합치려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우리의 전력을 얕잡아 보지 못 하고 인정한 것이 나 다름없다. 정치 개혁 약속과 그들이 우리와의 관계 완화를 위해 애 쓰는 것은 모두 이 나라의 국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낸 결과다. 이번 동학농민운동은 한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모두가 정부의 부당함과 핍박당한 농민들을 잊지 않고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후손들 역시 부패한 정부 때문에 모국 에서 괴로운 일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정부를 우리 손으로 직접 바꿔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모두 보상 받 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이상 신분제 때문에 차별 받지 않고 다들 열심히 일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평등한 사회로 만들 어 지금 우리가 겪는 불평등과 차별이 후세에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우 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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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1894년, 전봉준으로부터 Grade 11 이신영 Shin Young Lee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자신들의 삶을 지배한 체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벗어나려는 욕망은 있지만, 겁, 이것 때문에 많 은 사람들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우지 못한 다. 특히나 자신이 막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도전조차 하지 않는 다. 대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절대 모두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나는 겁을 이겨내고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과 친구들을 위한 싸움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기 때문이다. 두려웠지 만, 부패를 없애려는 운동을 주동하다가 죽음을 당하신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괴롭힘을 당하며 사는 백성 들의 삶을 행복하게 바꾸려는 나의 뜻과 우리 동학의 사상을 위해 나 는 강인한 의지로 버텨냈다. 조병갑이 우리 고부의 군수가 되어, 언제부턴가 우리를 개 대하듯이 했다. 농민들로부터 과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탐학을 자행하는 이 조병갑에게 뭐 잘해줄 것이 있다고, 우리한테 그 의 아비를 위한 공적비를 세우는 것까지 강제로 시켰다. 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였지, 절대로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 다. 쓸모없는 보를 만들어서 또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와 우리 동학교도들은 조병갑 그에게 다시는 잠재울 수 없는 화가 커져가고 있었다. 사람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삶을 파탄내 버리는 그 의 탐학을 막아야한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었다. 일단은, 정부에게 시정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아무리 부패한 정부관 리들이라지만, 나랏돈도 자기 이익으로 몰래 챙겨는 이 탐관오리를 우 리의 고부군수로 가만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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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대표와 함께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정부 관리들은 단칼에 거절했 다. 그들의 단호하고 무관심한 태도에 나는 차가운 현실과 마주한 기 분이었다. 현실은 살얼음판이었다. 잘못 넘어지면 차가운 얼음에 머리 를 박는 것이고, 혹여나 잘못하면, 이 살얼음판이 깨지면서 물에 빠져 죽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며칠 뒤 다른 동학교도들과의 토론 끝에 다짐했다. 동학의 사상,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상들을 위해 싸 워야겠다고 맹세코 다짐했다. 우리 아버지의 못다 한 한을 풀어드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94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1000여명의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관아를 습격했다. 무기를 강탈하고, 탈취 당했던 곡식들을 농민과 동학교도들과 나누어 가지고, 마지막으로 부패한 관 리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정부가 이 민란의 원인을 우리 동학교도들에 게 덮어씌웠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농민들을 이끌고 투쟁을 했 다. 그들이 우리 동학교도들을 감금시키고 처형시켰지만, 나는 계속해 서 다른 동학농민들을 끌어모았다. 나는 다른 동학 농민들을 끌어 모 아서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에는 8000여명의 농민들이 모여서 금구, 부안, 황토현, 그리고 전주성까지 무너뜨리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정부가 청이 들어오니 우리와 손을 잡자고 하고 거짓으로 우리의 시정 개혁에 응하기로 한 것도 경험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 사회를 바꾸 려고 더 노력했다. 우리 동학이 이 나라에 퍼지고,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 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정부가 이 시정개혁을 제대로 실현 시키고 약속을 지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 내가 가장 잘 안다. 이 현실이 우리의 사상을 쉽게 받아줄리 없다는 것. 상위계층의 양반 놈들이 우리를 자기네 특혜들을 빼앗아 가는 것을 어떤 식으로도 막으 려 한다는 것. 하지만, 나는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자랑스럽 게 여긴다. 아직 할 일이 많고, 아직 부패한 관리들은 득실대고 있지 만, 이렇게 크게 민란을 일어난 적이 있을까? 동학의 뜻이 이렇게 많 은 농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봉기를 일으키게 할 줄은 상상이나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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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갈망과 희망들이 많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 것이 완전한 실패라고 믿지 않는다. 이 희생이 우리나라에 어떠한 막 중한 영향은 끼쳤을 것이라고 믿고 싶고, 그렇다고 여긴다. 이 한 몸 바쳐 희생한 것이 직접적으로 이 나라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우리 농 민들의 뜻은 제대로 폈던 날들이라고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가장 행복한 삶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신을 희생시키며 자신의 뜻을 펼치 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 없이, 후회 없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어 떤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멋진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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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전봉준으로부터 Grade 11 이채영 Chaeyoung Lee

우리나라 역사에는 부패한 정치를 뒤바꾸기 위하거나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기 위하는 것 등의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동학 농민운동’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다른 위대한 인물들이 일으킨 혁명에 비해 거창해 보이지는 않겠죠. 하지만 이것은 일반 대중들이 사회의 큰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움직인 운동이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충분 히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21세기의 여러분들은 정 말로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것들이 안정적으로 갖춰져 있고 또 마음껏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늘이 내린 축복입니다. 우리들의 후손들이 그렇게 자유로운 세상에 서 살고 있다고 들으니 하늘에서도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가뜩이나 부정부패를 일삼고 죄 없는 농민들을 괴롭히는 정부가 제 아버지를 때려 죽였다고 들었을 때 저는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아마 가 슴 깊이 잘 모를 것입니다. 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제가 봉기를 들게 된 계기 중 하나입니다. 가뜩이나 정부에 화가 나 있던 참에 그 런 못된 놈들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 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여러분들 세상은 어떤가요? 힘이 센 사람이 약자를 건드리는 것은 심히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며 큰 죄를 짓는 거라고 합니까?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건드 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약자들 또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 여야 했습니다. 저 또한 조용히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 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고 저희 농민들은 다 같이 뜻을 합쳐 부패 한 정부와 외세 세력을 물리치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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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농민들은 부패한 관리의 처벌, 노비의 해방 등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여 정부로부터 약속 받기도 하였습니다. 허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우리나라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12 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고 손병희의 10만 군사와 일본군에 대항 하여 싸웠습니다. 하지만 우금치 전투와 그 다음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지게 되었고 저희 농민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한테 그런 과거의 아픈 역사를 남겨서 대단히 슬픕니다. 그리고 나라를 끝 까지 외세로부터 지키지 못했던 점에서 대단히 부끄럽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땀과 피눈물이 지금 여러분들을 있게 만들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지금 21세기의 모습은 어떤가요? 제가 듣기 로는 해외에서 파는 수입물들을 많이 들여놓고 미국과 연합하여 미국 부대가 들어와 있다던데 맞나요? 저희 농민들한테는 상상도 할 수 없 는 일입니다. 물론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의 문화 생활이나 생활모습이 많이 발전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자칫 잘못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물들어버리면 그것은 우리나라 고유의 색깔을 잃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저와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용감하게 맞선 농민들을 기억하고 또 국민 에게 있어서 조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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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명성황후의 일기 Grade 11 이송원 Songwon Yi

1895년 10월 8일 이 글을 써내려가는 나의 손이 떨리고 있다. 두려움을 감추고자 하 지만 나의 내면은 죽음에 맞선 그 어떤 인간의 마음과 다름없이 괴롭 고, 겁이 난다. 밤이 깊어지고, 부엉이가 서글픈 노래를 부르자 달은 눈물처럼 투명하게 빛나니 하늘이 내린 나의 최후가 한 걸음, 한 걸음 씩 가까워져오는 것이 몸소 느껴진다. 오늘 이 밤, 이 자리에서 일어 나면 나는 곧 왜놈들의 손에 살해를 당할 것이니 마지막으로 나의 혼 란스러운 생각들을 이 붓과 종이로 정리 해보려한다. 나는 평생을 살아오며 내 나라의 발전되지 못한, 어리고 연약한 모 습을 외세에게 내보이기 싫어 문화적 개방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런 나의 생각을 반대하던 세력들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아버님과의 정치적 갈등에 더하여 나에게 많은 고통을 주어왔다. 그들은 내가 나 라의 혼란을 이끄는 존재인 마냥 언제나 비난했지만, 나는 나의 충정 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들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직 내 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아버님의 억압 때문에 전하의 선택들이 그릇 된 방향으로 이어나가지 않도록 뒷받침하는 것뿐이었다고 떳떳이 말 할 수 있다. 1882년 즈음, 임오군란이 터지며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위 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원군께서 세운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왕권을 강화하며 민생들에게 안정을 준 것처럼 보인 처음과 달리, 보 란 듯이 외세에 대해 준비가 되지 못한 조선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드 러내기 시작했다. 곧 개국 이후 내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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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세력들과 기존 세력들의 갈등, 외적으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 자 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전하와 나는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롭고 초조하게 정국을 운영해야 했다. 당시, 나라의 사태가 심각해지자 전하의 지지를 받던 나마저도 안전 을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버렸다. 나는 곧 궁궐을 탈출하 여 장호원에 임시로 은거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다행히도, 청나라의 군대가 일시적으로 출동해 대 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고 나는 곧 궁궐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었다. 2 년이 지난 1884년이 되자, 우리 민 씨들이 이끄는 정권을 타도의 대 상으로 바라보던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갑신정변을 치렀다. 비록 삼일 천하로 끝났던 짧고 실패한 정변이었지만, 나라를 몹시나 떠들썩하게 하며 왜(倭)의 국가적 힘을 키우기만 했다. 마침, 청나라는 우리나라의 개화에 더욱더 큰 디딤돌이 되었으며 정변이 일어나 왕권을 위협할 때 에도 영향력을 펼쳐 조선을 도왔다. 나는 작년, 1894년에 일어난 농민들의 비참한 전쟁, 또 청나라와 일 본의 전쟁을 거치며 우리나라 정치에 깊이 개입하려 하는 일본의 세력 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믿음을 다시 한 번 세우게 되었다. 러시아는 일 본의 영향력을 지켜보고 프랑스, 독일과 합세하여 일본의 세력을 무찌 르려 계획했으며 이에 따라 전하와 나는 러시아의 존재에 주목하게 되 었다. 곧, 우리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수시로 불러 그 쪽의 정부와 외교적 접촉을 가지며 일본 세력들을 물리치는 것에 힘을 합쳤다. 다만, 이 내용을 엿들은 일본은 나를 없애려는 일본 낭인들이 경복 궁 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 그들은 내 나라, 나의 궁에 들어와 나를 찾고 있다. 나를 대신한 수많은 궁녀들이 나를 감춰주고 있지만 이 비겁한 모습을 이 나라와 백성들 앞에 어찌 보이는지,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다만, ‘하늘 아래 숨을 곳 없다’ 하는 옛 말처럼, 나는 하늘 이 정한 때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피를 버 리지 않을 것이고 내 나라 내 궁에서 두려울 것 없으니 나의 마지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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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으러 갈 것이다. 또한, 500년 왕조의 명맥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나라와 전하 께 보필 못 하는 나의 모습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며, 이 땅이 누구의 것이고, 이 땅의 미래는 누가 지킬 것인지를 언제나 기억하는 것이 모 두에게 바치는 나의 유일한 당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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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헐버트 박사를 생각하며 Grade 11 박형빈 Hyung Bin Park

호머 B. 헐버트 선교사(Hormer B. Hulbert)는 1863년 1월 26일 미국에서 태어났다.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에 재학 하던 당시 헐버트 박사는 조선 정부의 정식 초청으로 1886년 6월 우 리나라 땅을 밟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외국어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로 한국 사회 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며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 인으로 알려진 헐버트 박사. 그가 태평양을 건너 낯선 땅 조선으로 건 너와 육영공원에서 영어교사로 일 하던 중 우리나라의 비영리 단체인 YMCA를 설립하고 조선의 근대화된 교육과 선교, 계몽을 위해 헌신했 다. 그는 당시 열강의 개입으로 흔들렸던 조선의 현실에 외면하지 않 았고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민중의 사회 참여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우국지사들을 도우며 역할을 나누어 최 선을 다한다면 평화적인 혁명이 자연스럽게 구현된다고 주장함으로써 YMCA의 이념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었다. 또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집필, 항일운동 지지, 최초의 영문 월간 한국학 연구지인 ‘한국소식’, 최초의 영문 한국 역사서 ‘한국사’, 월간 언론지인 ‘한국평론’ 발간 등 한국의 여러 가지 자치적인 활동들에 적 극적인 참여를 해 왔다. 이렇게 한국을 위해 열심히 살던 그는 의 부탁으로 우리나라 왕을 보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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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헐버트는 고종의 외교사신이 되어 고종에게 직접

조언을 하는 등

미국과 같은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하였 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헤이그 비밀 밀사를 적극 지원하는 등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인

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이라지만 당시 일본의 입자에서는 상당히 성가신 존재였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일본의 국권침탈이 더 극 심해지자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이행촉구를 위해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 로 파견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권을 보장 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야망을 묵인 및 방조해 주는 ‘가 츠라태프트 비밀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 때 헐 버트는 급히 미국으로 향하여 대통령에게 고종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 는 동시에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운명을 구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을사늑약이 체결이 되고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헐버트는 일본정부로부터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여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각지 에서 방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은 밀사사건으 로 인해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 폐위가 된다. 헐버트는 폐위된 고종의 마지막 밀명인 왕실 비자금을 찾아달라는 명령을 받고 상하이에 가지 만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8․15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대통령 이 승만은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대하는 등 그의 공로를 인정하기도 했다. 자신의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과 그들의 주권 회복을 위해 온 삶을 다 바쳐 헌신한 헐버트 박사.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 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헐버트 박사의 정 신을 본 받아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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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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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만평>

회의 Grade 12 유예담 Joshua Yedam 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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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소년과 나무 Grade 12 김예린 Lina Kim

혼자서 걷고 있는 한 소년 어디로 가는지, 예쁜 꽃들이 핀 나무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땅만 보며 걸어가네 혼자서 초록색인 한 나무 꽃이 왜 없는지, 예쁜 꽃들이 핀 나무들을 질투를 하지 않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네 혼자서 걷고 있는 한 소년 어디로 걸어가는지 혼자서 초록색인 한 나무 누구를 기다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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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내가 살고 싶은 나라 Grade 12 김예린 Yerin Kim 제가 살고 싶은 나라는 자신감 있는 나라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다른 나라에 의존하여 힘든 일이 많았지만, 다른 나라의 도움과 간섭 없이 우리 스스로 잘 대처하는 모습 자신감 있게 보이고 싶습니다. 제가 살고 싶은 나라는 평등한 나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여러가지 차별과 불합리함 여자와 남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억울한 사람들이 애꿎게 희생 당하면 안됩니다. 제가 살고 싶은 나라는 기술이 발달된 나라입니다. 기술은 힘이고, 도움이며 다른 나라에겐 도전 IT 강국으로서의 지혜와 힘이 깊게 뿌리내려 대한민국 기술이 전세계 만방으로 널리 알려졌음 합니다. 제가 살고 싶은 나라는 문화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다른 것을 틀리다고, 다양한 것을 튄다고 몰아붙이지 않으며 우리만의 것을 다른 나라에서도 부러워하며 닮고 싶어진다면 자신감 있게 미국, 유럽 등 큰 선진국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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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싶은 나라는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는 나라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큰 시련에 부딪혀도 서로 돕고 헤쳐나간다면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모두가 등을 도닥여 줄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국민 모두의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 할 것입니다. 제가 살고 싶은 나라는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나라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여러 나라에 도움을 주는 그런 나라 배울 점이 많은 나라, 서로 돕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 여전히 친절한 동방예의지국의 대한민국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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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세월호 침몰 사건 Grade 12 이수연 Ellen Lee 1. 개요 2014년 4월 15일 476명의 승객을 싣고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제주항으로 향하던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 2. 본론 2014년 4월 15일 오후 6시 30분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출항하려 고 했던 세월호는 안개가 많다는 이유로 2시간 30분 후인 오후 9시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날 인천항 출항 예정이었던 10척 중 세월호 1척만 출항을 결정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세월호에는 180 대의 차량과 1157톤의 화물이 무리하게 적재되어 있었다. 476명의 승 객 중 342명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 근 해상에서 침몰하게 되고 300명의 승객이 사망하였다. (1) 세월호 침몰사건의 원인: 1) 무리한 양의 차량과 화물 탑재 세월호 안점점검표에는 당시 차량 150대, 화물 657톤을 실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실린 화물은 차량 180대, 화물 1157 톤으로 초과된 양의 화물이 실려 있었다. 과적 화물은 세월호가 급격 한 변침으로 복원력을 잃은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며 심지어 비 용을 아끼기 위해 자동차와 컨테이너를 제대로 고정하지 않았다는 의 혹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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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원들의 무책임함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에는 비상상황이 발생 시 선장은 선내에서 총 지휘를 맡아야 하고, 승무원은 각자 역할을 맡아 탑승객 구조를 도와 야 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선장을 비롯한 선원 대부분은 침몰 직전까지 탑승객에게 객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자신 들은 배 밖으로 나와 해경 경비정에 의해 제일 먼저 구조되었다. 세월 호가 침몰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조류가 빠른 맹골수도였지 만, 이 지역을 운항 지휘한 사람은 입사 4개월째인 3등 항해사로 드러 나, 이곳을 통과할 때 선장은 조타실을 비운 것으로 드러났다. 3) 늦은 구조 작업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위해 잠수요원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것은 사 고 발생 8시간이 지난 4월 16일 오후 5시 정도였다. 세월호가 선수를 제외하고 완전히 침몰된 시간은 오전 11시 20분이었는데 실종자 구조 를 위해 잠수요원 투입이 시급한 상황이었고 당시 기상조건이 좋지 않 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고 발생 첫 날 인 4월 16일은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지만 처음 수백 명의 구조요원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수중수색은 3차에 걸쳐 16명이 투입되는 데에 그쳤다. (2) 세월호 사건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 세월호 사건은 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큰 숙제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재난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이 미흡하다는 것이 만 천하에 공개되었 다. 또한 이 사건은 정부의 무능과 언론장악의 무서움을 제대로 보여 준 사건이다. 만약 정부가 이러한 재난에 대해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 해 일명 골든타임(Golden Time)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배의 내부로 들 어가 수색을 했거나 빠른 대처를 했더라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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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승객들을 구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3. 결론 :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세월호 사건을 바탕으로 앞으로 우리나라에 더 이상 이런 끔찍한 사 건은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세월호 침몰사고의 진상규 명과 직무를 유기한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고에 관련해 정부부처 공무원과 해경에게도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한다. 또한, 생존자와 희생자, 유 가족을 비롯해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 보상과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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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보고서>

익명성에 따라 달라지는 진실 Grade 12 이진수 David Lee

I. 머리말 누구든지 익명인가, 혹은 실명인가의 상태에 따라 말과 행동이 바뀔 수 있다. 이름이 밝혀지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한 가지의 차이로 인 해 말하는 진실이 바뀌게 된다. 설문 조사의 예를 들면, 익명일 때에 는 결과가 밝혀진다고 해도 직접적으로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조사 참 가자들이 더 정직하게 답을 할 것이고, 실명인 상태에는 이미지 관리 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부정직한 답들이 더 많아질 것이 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익명 조사와 실명 조사에 다른 답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밴드 수업 을 듣는 학생들의 정직함을 밝히기 위해, 음악 연습의 빈도와 시간을 익명과 실명의 두 가지의 조사 방법으로 물었다. 두 가지 조사 방법의 결과를 비교하여 차이점을 알아냈고, 이 차이점을 통해 학생들이 상황 마다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지를 조사하였다.

II. 본문 1. 조사 방법 (1) 익명 조사 첫 조사는 익명의 형태로 실시했다. 페이스 북에 설문 조사 링크를 올린 뒤, 간단히 두 가지의 질문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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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기 연주를 얼마나 자주 연습 하십니까? ① 매일 ② 이틀에 한번 ③ 일주일에 두세 번 ④ 일주일에 한 번 ⑤ 거의 안 함 ⑥ 안 함 2. 한 번 연습을 할 때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연습합니까? ① 15분

② 30분 ③ 45분

④ 60분 ⑤ 90+ 분 ⑥ 연습 안 함

이렇게 하여 두 가지의 대답에 따른 통계를 냈다. 1번 문제에서는 악 기 연습의 빈도를 물었고, 2번 문제에서는 악기 연습의 시간을 물었 다. 이 질문을 통해 학생들이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오랫동안 연습 하는지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2) 실명 조사 두 번째 조사는 실명 조사였다. 밴드 수업시간 때, Holbrook 선생 님이 학생들을 다 모아 놓은 상태에서 익명 조사에 물었던 것과 똑같 은 질문을 했다. 선생님이 질문을 한 뒤, 학생들은 손을 들어 대답했 다. 선생님이 그 결과로 학생의 이름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 은 선생님을 보면서 질문에 대답해야 했기 때문에, 실명 조사의 형태 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선생님은 손을 든 학생들의 수를 센 뒤, 종 이에 적었다. 이 질문을 통해 학생들이 실명으로 대답한 연습 빈도와 시간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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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사 결과 조사 결과는 예측 했던 것처럼, 실명 조사의 빈도와 시간이 익명조 사의 것보다 훨씬 높았다. 아래에서 구체적인 차이를 볼 수 있다.

<연습 시간 – 익명 조사>

<연습 시간 – 실명 조사>

조사 결과를 수집한 뒤, 모든 결과를 비교했을 때 익명 조사를 해서 얻은 연습 시간과 빈도의 결과가 실명 조사의 결과보다 높았다. 연습 을 안 한다는 학생들이 익명 조사에서는 47.4%나 됐지만, 반에서 실 시한 실명 조사에서는 23.7%로 줄었다. 또한, 익명 조사에서는 60분 동안 연습을 한다는 학생이 10.5%에 미쳤지만, 실명 조사에서는 39.5%로 늘었다. 하지만, 중간에 해당하는 시간들의 대답에는 차이가 전혀 없었다. 연습을 할 때마다 30분 동안 연습을 한다는 학생들이 익 명 조사와 실명 조사에 차이 없이 21.1%로 나왔다. 익명 조사에서 연 습을 안 한다는 학생들이 주로 많이 답을 바꾸었지만, 연습을 많이 한 다는 학생들도 실명 조사에서는 줄었다. 그 원인은 다른 학생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고도 할 수 있다. 연습 빈도도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다. 온라인 조사에서는 연습을 전 혀 하지 않는다는 학생 수가 42.1%나 됐지만, 반에서 실시한 조사에 서는 이러한 학생들이 20.9%로 줄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연습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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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도 익명 조사에는 10%도 안 됐지만, 실명 조사에는 30%로 늘 었다. 또한, 연습 양에서의 결과와 비슷하게, 가장 많이 연습한다고 대 답한 학생의 비율도 줄었다. 익명 조사에는 단 한 명의 학생이 매일 연습한다고 답했으나, 실명 조사에는 누구도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

<연습 빈도 – 익명 조사>

<연습 빈도 – 실명 조사>

III. 맺음말 학생들이 익명이었을 때와 실명이었을 때 대답한 결과는 매우 달랐 다. 익명 조사에서 학생들은 더 정직하게 답변했으며, 연습을 많이 하 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지만, 실명 조사에서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답한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온라인 조사에 참여한 학생들이 페이스 북과 같은 인터넷 사용량이 많은 학생들이라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매우 의미 있는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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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허, 그거 술맛 한 번 좋다

Grade 12 최성욱 Choi Sung Wook 김도한 Kim Do Han 임유완 Im You Wan 이예린 Lee Yei Rin

최근 막걸리의 세계적인 열풍을 보면서 새삼 전통의 중요성을 인식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한국을 대표하는 ‘술’을 떠올리자면 소주나 막걸리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원경제십육지’를 보면 무려 백 일흔 가지의 술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 술의 종류가 꽤나 다양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밀주 단속이나, ‘금주령’, ‘순곡주 제조 금지령’ 등 술에 세금을 물리는 등으로 전통 술에 대한 국가적인 단속을 강화하여 전통주들이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된 것도 사실입니 다. ‘금주령’은 과거 약재를 넣은 약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술의 제조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청주를 약주로 속여 많이 마셨다고 합니다. 그 뒤로 술을 약주라고 부르게 되면서 오 늘날 술을 통칭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조상들은 청주와 막걸리를 주 로 마셨는데 ‘고려도경’에 의하면 그 중에서 귀족들은 청주를 백성들 은 막걸리를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청주는 막걸리에서 나오는 술로 막걸리에 ‘용수’라는 긴 통을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청주가 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재료를 넣으면 ‘법주’같은 여러 종류의 청주가 나옵 니다. 각 나라마다의 술은 그 풍토와 민속을 담고 있겠지만 한국의 술 역 시도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습니다. 수렵시대에는 바위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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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 페인 나무 등걸 속에서 술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과실이 자연적으로 발효해서 술이 된 것입니다. 이후에 유목시대와 농경시대 사이에 곡류에 의한 술이 만들어지면서 술은 세계적으로 그리고 각 나 라마다 다양화되어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술은 효모균이라는 작은 미생물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당분을 분해해 먼저 주정을 만들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곰팡이가 잘 피게 되므로 주로 누룩을 이용해 왔다고 전해 집니다. 당분이 주정으로 변할 때 탄산가스가 방출되므로 거품이 나오 는 이른바 발효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우리말로 ‘술이 끓어오른다’ 라고 표현을 해 왔다고 합니다. 발효될 때 거품이 멎게 되면 당분이 알코올이 되었다는 증거로 인식 되었으며, 술독에 촛불이나 성냥불을 켜 보아 그 불이 꺼지게 되면 발효가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우리 선 조들께서는 지혜롭게 알아 왔다 합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주를 즐겨 마시지만, 원래부터 그랬 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청주 혹은 막걸리를 주로 마셨 는데요. 귀족들은 주로 청주, 백성들은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 조상들은 소주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까요? 우리 조 상들이 소주를 알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 입니다. 그리고 주로 소주는 안동에서 만들어졌는데, 당시 몽골이 일 본을 정벌하기 위해 만든 병참 기지가 안동과 개성에 있었기 때문에 몽골인이 마시던 소주도 우리 조상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입니다. 다. 지금 시중에서 판매되는 희석식 소주는 주로 고구마나 사탕수수 같은 원료로 당밀을 만듭니다. 처음 소주가 시판되었을 때는 대중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소주가 처음 나왔을 때 도수가 30도 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서야 소주가 20도 밑으로 떨어진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도수가 높았기 때문에 인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960대 중반에 우리나라에 쌀이 부족한 탓에 순곡주 금지령이 내려지 고 대중들은 하는 수 없이 소주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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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소주는 깔끔한 맛으로, 그 잔향이 부드러우며 그리고 대중들 이 쉽게 마실 수 있는 저렴한 가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에 비해 막걸 리는 탁하고 걸쭉하지만 소주처럼이나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술입니 다. 모두 곡류에서 추출한 건강한 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은 취해서 어지러운 세상이 오히려 당연한 듯 보일 수 있도록 우리 술은 그렇게 가깝게 있어 왔지만, 어찌 보면 소주나 막걸리는 한국이 그동 안 겪은 삶의 애환과 아픔과 함께 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잠시 쉴 때 활력과 기운을 북돋아 주던 막걸리가 일 제의 쌀 수탈 정책 앞에서 우리 농민들이 눈물짓고 있을 때, 진한 위 로가 되어 주었을 터이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사람들의 애환을 칼칼한 소주 한 잔으로 대신했을 것을 생각하면 막걸 리와 소주는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아 우리의 막걸리와 소주가 그 건강함과 실용적인 가치가 세계적으로 널 리 인정받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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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한국의 우아함, 그 이름 궁궐 Grade 12 김채화 Chae Hwa Kim

여러분, 궁궐에 대하여 아십니까? 궁궐의 ‘궐(闕)’은 궁 전체를 둘러 싼 문(門), 누각(樓閣)을 의미하고, 궁전의 ‘전(殿)’은 임금이나 그의 준 하는 최고의 사람만이 거할 수 있는 건물을 뜻합니다. 우리나라의 대 표적인 궁은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운궁 (慶運宮)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慶熙宮)이 있는데 예를 들어 경복궁 (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은 국보 제 223호, 창덕궁(昌德宮)의 인정전 (仁政殿)은 국보 제 225호로 지정될 정도로 그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 습니다. 궁궐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에만 ‘전’이라는 글자를 붙일 수 있는데 왕을 지칭하는 단어인 전하(殿下)의 ‘전’자 역시도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같은 한자를 사용합니다. 즉, 전하는 전에 거할 수 있는 지존하신 분으로 많은 대신들이 왕을 전 아래에서부터 우러러 본 다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또한 각하(閣下)라는 명칭 역시 계급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인데, 왕이 거처하는 곳의 아래에서 존엄하신 왕 을 대신들이 섬겨 부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경복궁에서 임금이 주 무시는 건물을 강녕전(康寧殿, 편안하게 쉬는 공간)이라 불리고, 왕후 가 자는 곳을 교태전(交泰殿, 가정에서 주부가 잘해야 집안이 편안하 다는 것을 의미)이라 불립니다. 궁의 구조를 살펴보자면 강녕전, 교태전과 같이 왕과 왕비의 숙소인 내전(內殿)이 있는데, 신하들과 함께 왕이 국무회의를 하는 편전도 내 전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복궁의 편전은 사정전(思政殿), 창덕궁 은 선정전(宣政殿)이 있고 이곳들은 왕과 관계되어 ‘전’이라는 글자가 사용됩니다. 그리고 흔히들 왕비를 지칭하는 중정도 사실은 왕비의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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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줄인 중궁전(中宮殿)입니다. 그밖에도 외전(外殿)과 동궁(東宮)이 있습니다. 의식이나 정치를 주 관하는 곳인 외전은 전체 신하들과 같이 조회를 하고 외국에서 온 사 신들을 위한 공식 환영회를 여는 곳입니다. 또 외전은 궐내에서 가장 장중하고 근엄한 공간으로서 회랑(廻廊) -네모난 마당 모양-으로 둘러 가려져 있습니다. 외전의 예로는 경복궁의 근정전이 있습니다. 동쪽의 궁이란 의미의 동궁(東宮)은 외전 다음으로 중요한 곳인데, 이곳은 세자(동궁마마)가 사는 곳입니다. 세자는 앞으로 왕이 되기 위 해 동궁에서 아주 엄격한 교육을 받습니다. 동궁은 꽤 큰 규모를 자랑 한다고 합니다. 세자의 처소를 동쪽으로 한 까닭은 아마도 해가 떠오 르는 방향과 예비 국왕인 세자를 상징적으로 일치시켰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궐내각사(闕內各司)와 궐외각사(闕外各司)로 나뉘는 궁의 업무공간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궐내각사는 신하들이 궐 안에서 업무를 보는 공 간으로서 궐내각사는 궁궐을 지키고 관리하는 부서들이 일하는 곳이고 또 궐 안에 있는 것은 왕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부서들입니다. 궐내각 사에는 왕의 비서실 승정원(承政院)과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예문관(藝 文館)과 임시 기관 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가 있습니다. 반면에 궐외각사(闕外各司)는 신하들이 궐 밖에서 업무를 보는 공간 을 가리킵니다. 궐외각사는 국정 전반을 다루는 관청들과 부서인 육조 (六朝)나 의정부(議政府)가 있고 한영을 관리하는 한성부(漢城府)와 관 리를 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 등이 있습니다. 궁궐은 우리나라역사의 산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궁은 모든 경제와 정치의 중심이었고 한 나라를 다스리던 왕과 그의 가족들이 살던 곳이 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이 만들어지고 이루어졌던 곳 입니 다. 그만큼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 우리의 뿌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건축양식이라든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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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써 문화적으로도, 건축학적으로 도 가치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사러져 버린 나라이지만 그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임이 분명하고 우리가 자 랑스러워하고 또한 뽐내야 하는 역사임에 틀림이 없다고 굳게 믿습니 다. 그 만큼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다는 궁궐은 소중한 우리들의 보 물이고 자랑이며 우리가 가꾸어 가고 보존해야 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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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판소리, 그 저항의 정신 Grade 12 오가운 Ga Woon Oh

판소리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으로서 세계가 점점 주목해야 할 1인 오페라이다. 판소리의 판은 주로 노래를 진행하는 소리꾼, 소리에 맞 춰 북을 치며 장단을 넣어주는 고수, 그리고 구경꾼들이 모인 자리 전 체를 의미한다. 반드시 이 세 가지 구성들이 모여야 판소리라는 음악 이 형성되기 때문에 판소리는 우리나라 문화 예술 장르 중에서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양반 사대부 및 일반 평민 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 이 좋아하는 장르였던 판소리의 근원지는 호남의 굿판이었다. 굿판에 서 악사들이 여흥으로 노래하던 것이 점차 발전하여 17세기 후반부에 처음으로 판소리가 태동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양반들이 판소리 안에 서 진행되었던 말이 상스럽고 촌스러워 판소리를 외면하였다지만, 악 사들이 어려운 한문구를 외워서 공연하기 시작하면서 양반들은 판소리 를 점차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판소리 특유의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독특한 음색과 그 안에 담긴 인간이 갖고 있는 보편 타당한 성정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고 지배층에 억눌렸던 피지배층들이 갖고 있던 애달픈 사연들 때문에 판소리는 사 실상 거의 모든 사회 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예를 들어 심청가는 효녀 심청이가 아버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재물로 바친 친숙한 효심 이야기로 많이들 알 고 있지만, 사실 심청가는 가난하고 가진 것 없이 고통 받는 당대 민 중의 아픔과 애환이 담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소리는 일제 강점기 이후 점점 사라져 갔다. 판소리는 원래 12곡 바탕이었지만 현재로써는 수궁가, 심청가, 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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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흥부가, 적벽가 등 5곡밖에 남지 않았다. 판소리의 사라짐을 막기 위해서인지 판소리는 2003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 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판소리의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창의성이 유 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위기에 처한 판소리를 지켜내기 위 하여 많은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자람 판소리는 프 랑스, 뉴욕 등을 돌면서 소규모 공연을 열어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세 계적으로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유쾌하고 때로는 애절한 판소리의 창법을 쓰며 하나의 공연을 만들고 사람들이 더욱 쉽고 재미있게 판소 리에 접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중하고 귀한 전통 음악인 판소리를 유지하고 세계로 더 나아가게 하려면 우리의 전통 음악으로만 남기지 않고 그 우수성과 즐거움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로 인해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아 단순히 역사의 한 지점이 아닌 음악으로서 그 정통 성과 가치를 전해지기 위해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노력을 해야 하 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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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Grade 12 서지희 Ji Hee Suh

“혹시 세계에 알리고 싶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이 있나요?” 올 해, 한국어 선생님께서 ‘2015 전국 학생 문화유산 영어해설 경진 대회’ 를 알려 주시는 순간, 난 곧바로 ‘무궁화’를 떠올렸다. 이 기회 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재빠르게 손을 번쩍 들고 큰 목소리로 말했 다. “선생님! 저는 무궁화에 대해서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 지희야. 우리나라의 무궁화가 왜 국화로서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를 꼭 발견해 보기 바란다!” 곧바로 나는 네이버 검색창에 ‘무궁화’를 쳤다. 지식백과 사전에서 발견한 사진 몇 장을 보고 생각보다 무궁화라는 꽃이 참 예쁘다고 느 꼈고,

무궁화의

영어명칭이

‘Rose

of

Sharon’과

‘Hibiscus

Syriacus’ 두 종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무궁화에 대해서 조 사를 하면 할수록, 궁금증은 더욱 더 커져갔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 는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노트 한 쪽에 내가 만든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낙엽 관목의 한 종류로서 아욱과에 속하는 무궁화는 중국과 인디아 에서 쉽게 발견 할 수 있다고 한다. 키는 6-9 피트이고, 6월에서 10 월까지 꽃이 피는데, 관목 무궁화는 뿌리가 1개 이상이고, 모양은 베 이스 같고, 정력적이다. 무궁화는 습하고, 영양분이 풍부한 흙을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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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생각보다 무궁화는 키우는 점에서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다. 여 름의 더위와 습도에 매우 관대한 편이다. ‘세계적으로 무궁화는 250종 류가 있다.’ 라는 문장에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난 무궁화는 종류가 아 예 없는 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서다. 일반인도 믿기 힘들겠지만, 무궁화는 한국에서만 이백 여 종류가 존재한다. 종류별로 각각의 특징 이 있는데 예를 들면, 23 종은 하얀 꽃잎에 붉은 술, 63종은 붉은 꽃 잎에 붉은 술, 그리고 6 종은 푸른 꽃잎과 붉은 술이다. 발표를 위해 자료를 만들기 전까지는 당연히 나는 무궁화가 특별하 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사뭇 다르게 무궁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강한 애국심을 담은 꽃이었 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결코 지지 않는 생명 의 꽃’ 이었다. 무궁화는 ‘수명이 짧은 나무’ 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샤론의 장미’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뜻하기도 한다. 무궁화의 미적 가치는 한국의 특징과 나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데 무궁화가 그리 안 온한 환경이 아닌 거친 환경에서 생존 할 수 있다는 점은 한국 역사에 서 빈곤과 고난을 겪어내고 약 5,000년 동안 과거의 어려움 등을 면 면히 극복하고 이겨내 왔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정신과 닮아 있다. 대 한민국을 유별나게 사랑하는 사학자들은 무궁화 자체가 한국이라고도 믿는다. 그 이유는, 국가의 역사적인 지속성과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영원한 정신력을 상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궁화는 한국과 한국인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랑은 한 국인의 마음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인들이 무궁화를 볼 때마 다, 그들은 광복 기념일을 기억하게도 된다. 무궁화는 중국의 만주, 상 해, 미국, 유럽 곳곳에 한국 독립투사들이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이 꽃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의 의도적인 이유로 인하여 많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식민지 체제에서 아이들은 무 궁화가 안과 질환의 원인이 되며 만지면 피부에 종기가 발생된다며 ‘피 묻은 눈의 꽃’이라고 배웠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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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퍼뜨렸던 씨앗에서 또 다시 이렇게 튼튼한 무궁화가 쑤욱 쑤욱 성장한다. 예쁘기보다는 정말로 혼자서도 잘하는 씩씩한 것이 바로 무궁화이다. 그 집요함과 고집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정신이고, 한국 사람들의 끝까지 해내고자 하는 근성과 갈 망은 무궁화와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민족은 나라에 대 한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꽤 강한 편이다. 예뻐서가 아니라 강해서 더 아끼고 사랑하는 무궁화, 무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마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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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그것이 알고 싶다, ‘에밀레 종’ Grade 12 전현오 Jeff Jeon

안녕하세요, APIS 학생 여러분, 저는 전현오(Jeff Jeon)라고 합니 다. 에밀레종이 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저는 오 늘 여러분들에게 이 아름답고 깊이 있는 소리의 주인공에 대하여 잠시 전하려 합니다. 선덕대왕 신종으로도 알려진 에밀레종은 신라 경덕왕 시대 (A.D 745~765) 때부터 혜공왕 시대 AD 771까지 선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에밀레종과 관련된 슬픈 전설이 하나 있 는데 그건 바로 종을 제작할 때 어린 아이를 넣어서 만들었다는 겁니 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지만 다행히 후대에 성분 조사 결과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바 있습 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종에 넣을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겁니다. 이 에밀레종은 한 마디로 말해 ‘대단하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에밀레종은 높이 3.4 미터, 두께 2,4 센티미터에 19톤이나 되는 거대한 종입니다. 약 1200년 동안 타종을 해왔으며 1915년까지는 아 이들과 소들의 노리개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부서지지 않았으며 지금 도 타종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이 거대한 종이 오랜 세 월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약 10년에서 25년 동안 종을 만드는 장 인이 종 안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옆에서 버티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정성껏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종을 비교해 보면 우리의 에밀레 종이 외곽 곡선이 가장 유려하게 보이며 겉면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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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개 없는 천사-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 다. 에밀레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나다지만, 가장 으뜸인 것은 당연 히 소리일 겁니다. 여러분도 들어 보셨다시피 에밀레종의 소리는 웅장 하고 깊으며 아름답습니다. 놀랍게도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릴 정도 로 멀리 전달되는 이유는 바로 ‘맥놀이 현상’ 때문인데, 종에서 다른 두 개의 소리를 내서 두 소리가 서로 간섭하며 강약을 반복하게 됩니 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 날 수 있던 것은 종의 상하와 배 부분의 두께 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에밀레종은 외국, 특히 서 양의 종과 상당히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대를 넘어 우리의 종은 기술적으로 앞서 있었으며, 서양의 종은 꽹과리처럼 쇠끼리 부딪치는 원리로 소리를 내지만 우리의 것은 종을 침으로써 종의 울림이 그윽한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에밀레종은 예술과 기술적으 로 뛰어나기에 한국을 대표할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자랑거리라고 자 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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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Do you know Hangeul?

Grade 12 김윤성 Kevin Kim

10월 9일 한글날, 1443년 세종대왕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여 쉽고 편 안하게 문자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학자들과 함께 고 심하여 만들어 내신 한글의 탄생을 기리기 위한 날. 단 하루만이라도 우리 한글에 대하여 직접 배워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한글에 대한 내용으로 간단한 연극을 준비해 보았는데요, 여러 분들도 함께 감상해 보시죠!

Kenny: 안녕하세요, 장승빈입니다. Kevin: 김윤성입니다. Kenny: 여러분, 혹시 이런 상황 경험 해 본 적 있나요? Skit mode Kevin: Wassup man. Skit mode Kenny: Hey man, what’s good. Skit mode Kevin: So, where are you from? Skit mode Kenny: I’m from Korea. Kenny: I’m from Korea. 전 한국에서 왔어요. Kevin: 여러분,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난 한국에서 왔다고 말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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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많죠? 세계적인 자리에 우뚝 서게 된 한국. 과연 작고 가 난했던 나라 한국이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요? Kenny: Cormac McCarthy의 ‘The Road’ 라는 책을 읽어 봤다면, 여러분, 대화, Communication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 모 두 배울 수 있을 겁니다. Kevin: 소통을 위한 가장 기본! 글자인식! 자 그럼, 대한민국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한글’에 대해서 지금부터 잠시 배워 봅시다. Kevin: 오래 전에 만들어졌어도, 훈민정음, 한글은, 굉장한 과학적 원 리를 기초로 만든 문자인 거 아세요? 한글의 ‘한’은 ‘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한글은 ‘큰 글’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니겠죠? Kevin: 제가 조금 전에 말한 한글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 좀 더 설명 을 드리자면, 자음은 오행원칙을 기본으로 하여 다섯 글자를 기본으로 획을 차례로 추가하며 완성됩니다. 자음들은 발성 기관이나 소리 값을 가지고 있어서 외국인들도 빠른 시간 안 에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참 대단하죠? 모음은 철학적인 바 탕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Kevin: 한글의 또 다른 장점은 소리와 글자의 상관관계를 고려하면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자음들 중에 같은 어군이라 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점을 보면 얼마나 과학적인 문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세계적인 언어학자들도 한글에 감탄하 는지 알겠네요. 그렇죠, 장승빈군? 그러나 지금처럼 세계화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외래어 사용법도 알면 좋겠죠? TALK ABOUT 한글의 가장 큰 문제는 글자를 보아도 음을 알 수 없 다는 점, 혓소리, 한글이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 how globalization led to 외래어 and how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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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uld use Korean. Kenny: 한글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습니다. 요즘 대세죠? KPOP, KHIPHOP과 한국 음악들. Youtube에 찾아보면 한국 음악에 열광하는 영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JREKML이라는 분은 KPOP을 매우 좋아합니다. Paradiselovex 라는 분은 KHIPHOP 을 매우 좋아합니다. 두분 다 한국 음악을 좋아하 는 이유는 “한글이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서” 라고 말을 했습 니다. African American society 에서 건너온 Hip hop에 도, Western nations에서 건너온 발라드와 Pop도… 한글로 써진 가사가 너무 매력적이라고 주장 했습니다. Kevin: 언어를 알면 그 사회의 사람들도 알 수 있다 하죠? 한국인으 로서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으면 한글을 중요시 여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Kenny: 저는 한글이 문화적으로 가장 한국적인 자산이라 생각합니 다. 세계문자들은 음절을 따라가기 때문에 자음과 모음이 분 리되지 않죠, 그러나 한글은 로마자처럼 자음과 모음을 분리 할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한글의 자음들은 오행원칙 을 따라 자음에다가 획 하나만 더하면 되죠. 그리고 자음은 발성 기관이나 자음의 소리를 바탕 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또 하나 세계 언어학들을 놀라게 하는 한글의 특징은 글자의 상 관관계를 생각해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세종께서 자음들이 혓소리에 속하니 글자의 형태들을 보고서 같거나 비슷한 군에 모아 두셨습니다. 오래 전에도 이렇게 과학적으로 생각을 하 셨답니다, 대단하죠? 실용적이면서도 편리한 우리나라의 문화 유산인 한글이 여러분, 자랑스럽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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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선비 정신을 잇다

Grade 12 정지원 Ji Weon Chung

‘선비’란 무엇인가? 대부분 사람들이 선비를 떠올리면 아무런 벼슬 없이 초야에 묻혀 연구만 하는 사람을 생각하겠지만, 선비는 그 정신 과 더불어 사실상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선비는 양반계 층의 배경인 유교의 도(道)를 삶에서 몸소 실현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다른 별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반 계층에서 나온 데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은 유교 사상입니다. 유교란 공 자가 체계화한 사상으로 핵심적인 부분은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이상적인 목표로 삼 는 학문입니다. 쉽게 얘기 하자면, 수기는 정직하고 도덕적인 삶을 위 해 노력하는 것이며, 치인은 사람을 이끌고 나아가는 일의 중요성입니 다. 선비들은 이런 사상을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공부를 통해 세상의 이 치와 정의를 알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른바 학문을 평생 꾸준히 갈고 닦았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특별히 주목 할 만한 점은 보통 선 비는 학구적인 사람들이 많았다지만 머리가 우수하거나 공부를 잘 해 서만 선비라 불리는 게 아닙니다. 이들은 예의로 행동을 규제하고 염 치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단속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며 삶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자신의 배움을 극대화 시키 고 세상에 그 지식을 널리 알리려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위치에 많이 오르게 되는 것은 일반적이었습니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워선 안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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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발적인 가난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요컨대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진정한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비들은 여러 가지 분야에서 상당히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고 합니 다. 예를 들면 퇴계 이황 선생은 도산서당을 지을 때 본인이 직접 설 계했다고 합니다. 요즘 세상에 인문학을 전공한 교수가 직접 집을 건 축하고 기계 설비를 만든다는 것, 상상이 잘 안되지 않습니까. 선비란 이처럼 어떤 주제든 바로 그 이치를 깨치고 그 분야에 대한 전문서까 지도 쓸 수 있는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지식을 널리 알리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타 인에게 티내지 않고, 공부를 중요시하며, 자신을 희생하던 존경 받을 만한 선비들의 정신은 조선을 오 백 년 이상 오랜 기간 지속하게 도와 줬지만 결국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우리 전통과 조상은 상당히 구 태의연하며 나쁘다는 선입관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박식하며 학문을 치중했던,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 해 또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선비정

신은 어떻게 보면 유럽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일본의 사무라 이 정신보다 더 세련되고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낍니다. 요즘 우리들의 삶에서는 돈만 있으면 된다는 배금주의 때문에 불법적인 행 동과 부정과 비리가 자행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큽니다. 옛날 우리 선 조들의 선비정신을 본받아 불쌍한 사람들에게 더 베풀고 나라의 전체 적인 행복을 위해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만 챙기지 않으며 먼저 남을 배려하는 정신을 널리 전하면, 우리들의 세상이 좀더 하나로 모이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보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되지 않을까 싶 습니다. 선비 정신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곳곳에 지극히 심겨져야 할 가치 있고 소중한 정신이자 변화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하 고 잠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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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한국의 집, 세계를 꿈꾸다

Grade 12 이동환 Andy Lee

초가집과 기와집의 형태가 대표적인 한옥의 시작은 통일신라에서부 터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한옥이라 하면 사실 기와집을 연상하게 되는데 우선 기와집은 황토, 돌, 한지, 나무, 기와 등이 주요 한 건축 재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친환경적인 재료는 시간이 흐 르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집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까지도 환경에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친환경적인 것만큼이나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지극히 자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옥은 주로 한지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문, 지붕, 심지어 바닥까지 도 말입니다. 종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찢어질 수 있기 때문에 외부환 경을 차단한다는 것보다는 외부와 내부를 나누는 정도로만 인식됩니 다. 이는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물 론 바닥의 한지는 누수현상을 막기 위해 콩기름을 바른다고 하지만 이 처럼 한지로 도배된 한옥은 모든 문이 폐쇄되어 있어도 자연적인 통풍 이 가능합니다. 한옥의 장점은 한지뿐만이 아닙니다. 한옥은 황토로도 지어져 있습니다. 지금으로 비교하자면 시멘트인 셈입니다. 하지만 열 과 공기의 순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답답한 시멘트와는 달리 한옥의 황토는 얼마나 자연적인지 모릅니다. 황토는 겨울이 되면 추위를 막아 주고 여름이 되면 외부와의 열기를 차단시켜 주어서 황토로 지어진 한 옥은 겨울철에는 비교적 따뜻하고 여름철에는 서늘한 환경을 오래도록 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가옥 구조들과 비교 했을 때 한옥을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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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궁 이와 온돌입니다. 목재 건물에서는 어찌 보면 상극인 불을 다루는 시 설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당시 목재가 집을 구성하는 주재료인 다른 문명국가들에게는 생각하기조차 힘든 구조물이었을듯 싶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그 열기가 바닥의 연결된 통로에 갇혀서 한옥의 바닥을 뜨겁게 달궈주는 식인데 음식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가서 아궁 이를 사용하면 집 전체까지 보온이 되는 일석이조의 지혜로운 시설입 니다. 이처럼 한옥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새집 증후군이나 환경오염에서 빚어진 아토피 등의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다소 불편할 수는 있 지만 현대인들이 노심초사 걱정하는 건강함에 있어서는 단연코 일등 가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양인들의 아파트나 시멘트로 쉽게 만들어 진 집을 선호하던 우리의 시각을 이제는 서양인들에게 한옥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서 한옥의 세계화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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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

Grade 12 박선규 Sun Gyu Park

‘직지’는 백운이라고 불리는 고려시대 부처가 만든 이야기 모음집입 니다. 원래 상하의 두 권으로 나눠져 있지만 하권은 정부의 막대한 현 상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기하게도 상권은 박병선 박사님에 의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 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직지의 소유권으로 인해 병인양요 이후 프랑스가 한국에게 분풀이로 유물들을 수탈해 갔을 때와 같은 이 유로 프랑스 소유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 각과는 다르게 직지는 사실 프랑스 상인이 돈을 주고 정식으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 들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훔쳐간 것은 공식적으로 외규장각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이 함부로 프랑스 정부에게 반환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 참으로 안 타까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박병선 박사님은 서울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로 유학 간 여성입니다. 외규장각과 같이 병인양요 때 빼앗긴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되찾아보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으신 이유는 당시 의 이병도라는 박병선 박사님의 스승이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는 직지나 외규장각 등은 그저 프랑스에 아직까지 존재할 것이라는 추 측만으로 그것과 관련된 연구가 시작된 겁니다. 외규장각이 주목적이 였던 와중에 직지심체요절이 눈에 띄어서 직지 관련으로 연구를 시작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직지의 소유를 알리지 않기 위해 박사님의 입을 막았지만 박사님은 끝내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 1927년 ‘책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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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종합전람회’에서 정식으로 직지심체요절이 정식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라는 것을 밝혀냅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직지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낡은 책으로만 믿고 있던 프랑스가 어쩐지 쉽게 내주지 않았습니 다. 내주지 않음에도 구석에 방치하기만 하는 프랑스 도서관에서 직지 를 지키기 위해 박사님은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프랑스 국립도서관 에 취업하셔서 직지와 외규장각의 수호와도 같은 역할을 맡으셨습니 다. 그런 끈질긴 노력 끝에 2011년 5월 27일에 외규장각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영구반환이 아닌 대여의 형태로, 직지의 정식 소유자는 끝내 프랑스입니다. 직지의 진정한 가치는 이 책이 인류의 가장 최초인 금속활자 인쇄물 이라는 것입니다. 박병선 박사님이 밝혀내기를, 직지는 심지어 구텐버 그의 성경보다 무려 80년 가까이 일찍 나온 금속활자 기술이었다는 겁니다. 직지는 현재 ‘중도가자’라는 책과 논란이 있어 한국에선 어느 책이 더 늙었는지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정식으로 증명된 가장 오래 된 금속활자는 직지입니다. 단순히 오래된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고려의 강하고 안정된 상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고려 사회가 안정된 국가였던 만큼 이러한 문화적 기술에 투자할 수 있었다는 여유가 있다 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가 됩니다. 이렇게 역사적, 문화적으로 큰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이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아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한국의 전통금속활자 인 쇄의 계승이 멈춰버리고 맙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더 전통적인 목판활 자를 더 선호하고 편해서 이 기술을 그만 놓아버린 것이라고 학자들이 주장합니다. 훗날 조선 시대 때 발전하도록 시도 해봤지만 역시 구텐 버그의 기술이나 영향들을 따라가지는 못했습니다. 미국의 한 부통령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직지는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이라고 해도 역시나 가장 훌륭한 것은 구 텐버그의 인쇄물이다.” 다른 말을 빌리자면 가장 가치 있는 최고(最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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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니라 단순히 가장 오래 된 최고(最古)가 되는 셈입니다. 기술의 정체가 있었을지라도 우리의 조상님들이 후대에 대대로 남겨준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직지가 아무리 프랑스의 것이라고 우겨도 그 위대한 업적들은 다른 나라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에서도

한민국이 앞으로 더 발전해 프랑스가 문화재 반환의 요구를 들어주어 직지심경과 같은 우리나라의 자랑들이 다시 본래 국가인 대한민국으로 송환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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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단원 김홍도 소개 Grade 12 서로마 Roma Seo R : 내가 지금 한국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S : 다시 보게 되니 너무 좋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미국에 있었 을 때인데 네가 나한테 미국 문화를 소개시켜준 거 기억나니?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R : 한국 온다고 해서 잠도 못 잤어. 인터넷에 한국을 검색해 보고, 한국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한국 드라마도 보고, 심지어 한국 가 요도 듣고 그동안 한국에 대해서 조사 진짜 많이 했어! S : 정말 대단하구나? 한국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뭐가 가장 관심 있 었어? R : 음, 난 홍대, 명동, 강남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 그리고 김치랑 김밥도 먹어 보고 싶고. 서영, 소문처럼 한국 음식이 정말 맛있 니? S : 가기 전에 다 할 수 있게 해줄게! 그래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뭔데? R : 음, 우리 둘 다 미술에 관심이 많으니까 역사 미술관에 가 보는 건 어때? 저번에 만났을 때 미국 그림에 대해서 공부했잖아? 이번 엔 한국 그림을 조사해보자! 김홍도 작가의 그림들이 14세기에서 18세기의 조선을 대표했다고 들었어! S : 너 정말 조사 많이 했구나? 얼른 가서 확인해 보자! <역사 미술관, 그림 앞> R : 드디어 왔다! 김홍도 작가의 단원풍속도는 조선시대의 일반인들의 생활을 보여준다고 들었어. 네 오른쪽에 있는 그림은 뭐니? S : 이건 김홍도 작가의 작품 ‘씨름’이야. 작가님은 18세기에 되게 유 명하셨지. 단원이라는 화풍을 만들어서 그리셨다고 해. 이 그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R : 음, 레슬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비만으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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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고! : 그건 좀 나빴다! 씨름이라는 운동에서는 몸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유리하기 때문에 몸무게를 늘리는 것도 매우 중요해! : 장난이었어. 그리고 구경꾼들은 선수에 내기하는 것 같이 보이는 데 맞니? : 확실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이야기를 붙 이는 것을 좋아하더라고. 더 흥미롭다는 듯이 말이야. : 맞는 말이야. 그림 진짜 아름답다. 왜 김홍도하면 씨름인지 알 것 같아. : 맞아. 그리고 이 그림에서 옛날 조선시대 때에도 사람들을 위한 오락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지금으로 치면 저 사람들이 지금의 연예인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 말도 안 돼! 외모가 따라주지 않는걸! 그런데 말이야, 모든 캐릭터 들이 다 또렷한 특색을 갖고 있다. : 이 그림은 옛날 조선시대의 서민층의 삶을 양반층과 비교하여 보 여주고 있어. : 아, 그림 속 사람들의 옷차림새가 이제서야 이해가 가네. 서민층, 양반층 모두 흥미로운 여가 시간을 보냈을 거 같아. : 저기 봐봐! 이게 뭐지? 남자아이가 춤을 추는 것 같네. 무슨 오디 션 같은 건가? : 비슷해. 제목은 맞았네! ‘춤추는 아이’라는 작품이야. 한국의 춤은 미국과는 조금 달랐어. 미국은 파트너와 함께 추잖아. : 저기 여섯 명이 악기를 연주하고 남자 아이가 박자를 타는 것이 보여. 이 그림을 보니까 국악과 사물놀이를 듣고 싶게 만든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어? 서영아, 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 아, 진짜? 뭔데? : 남자아이의 발을 자세히 봐봐. 거꾸로 되어있지 않니? : 어, 진짜네? 로마야, 나도 한 가지 발견했어! 남자아이 바로 옆에 있는 아저씨는 악기를 다룰 줄을 몰라! : 거짓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나 옛날에 해금 잠깐 배웠었거든. 줄을 잡을 때 엄지를 사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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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는데 온통 엉터리로 하고 있잖아. : 아, 그럼 저 남자아이는 진짜 춤꾼이 아니고 연주자들은 모두 전 문가가 아닌가봐! : 맞아! 한국에서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아마추어이건 실력자이든 간에 춤과 음악을 아무 때나 즐길 수 있었어. 이걸 한국에서는 흥 이라고 부르는데 김홍도 작가는 단원풍속도집에서 이것을 담고 싶 었던 거야. : 우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야. 한국은 정이 참 많고 착한 사 람들도 많은 좋은 나라 인 것 같아. : 네가 한국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럼 이제 우리 어디로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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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내가 살고 싶은 나라

Grade 12 조세용 Charles Cho

시민들과 정부와의 소통이 상당 부분 결여된 나라. 민주주의라고 불 리기에는 아직 먼 거리를 가야 할 나라. 아직 전쟁 중이지만 국민들에 겐 애국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보지 못하는 나라. SNS에 비판은 많이 올라오나 그에 대응하는 시민은 없는 나라. 선동이 너무나도 쉬 운 국민을 가진 나라.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언론자유 도 64위, 빈부격차 25위, 경제자유도 34위, 부패지수 45위,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를 달리고 있으며 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꼴지를 기록 하는 나라 역시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가 청소년 흡연율 OECD 1 위, 인구대비 성형수술비율 1위, 그리고 알코올 소비량 세계 1위. 한 국은 결코 선진국이 아니다. 예전에도 그래왔다. 민비는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들 과의 손을 잡아왔고, 그러던 찰나에 암살을 당해 나라를 일본에게 내 주었다. 이러한 인물을 아직도 칭송하여 명성황후라고 칭하지 않으면 매국노 취급을 받는 대한민국이다. 친일파들에게 나라를 정복당한 고 통을 호소하지만 아직도 엘리트계층의 대부분은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다.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들은 잊혀진 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살아가 고 있다. 세계 2차 대전에도 똑같았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서 힘겹게 되 찾은 나라를 고치려는 행동은 없다. 본래 나라가 허약해 겁탈당한 위 안부들은 한국에서도 버림받았으며, 정부에서는 일본인들에게 책임을 물으라고 한다. 애초에 대한민국이 강하였으면, 위안부 문제가 있지 않았을 터이지만, 한국이 나약한 책임을 일본에게 묻고 있다. 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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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 네포티즘(Nepotism)마저 대한민국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재벌(財閥)’ 제도는 일본에서 시작되어서 한국에 계속되었다. 한국 정부가 지원한 대기업들은 성장하여 횡포를 일삼으며, 중소기업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나라와 국민들이 키워준 과거는 잊혀졌고, 현 재의 엘리트라는 특혜만을 만끽하고 있다. 최근의 ‘땅콩회항’으로 유명 해진 대한항공 조현아 이사장과 같은 갑질이 한국에는 항상 존재해 왔 다. 상위권을 유지하기 위한 부패와 부정은 계속되었고, 한국은 그렇 게 후진국의 부패지수와 언론자유도를 떠안으며 경제적으로만 고속 상 승하였다. 과거 쇄국정치 또한 비슷하다. 흥선대원군도 개화보다는 문화 보존 을 선택하였으며, 그로 인해 나중에는 더 큰 문화유실을 겪게 된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아 개화면에서 뒤쳐진 한국은, 더 산업화된 나라들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그 당시 추세였던 제국주의의 사상을 따 르던 다른 나라들은 한국과 같은 나라들을 이용하기 바빴으며, 결국 한국은 국권피탈에 이르게 된다. 현재 한국의 나이 드신 분들도 이와 같은 생각이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께서는 개화를 아주 나쁘게 보신 다. 최근에는 편의점에서 영어를 하다가 어떤 술 취하신 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으며, ‘양키새끼’라는 욕까지 들어야 했다. 이토록 한국은 아직도 외국인 공포증이 강하며, 인구도 세계에서 다양성이 가장 낮 다. 외국에서 받는 인종차별은 나쁘다고 생각하고, 국내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르신들은 아직도 개화를 일본과 서양의 전유물로 생각하며, 한국의 문화를 항상 구식문화로 바 라본다.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이런 길을 걸어왔다. 소수의 엘리트계층이 다 수의 서민들을 지배해 왔으며, 현재에는 본인들의 뿌리가 과거에는 ‘양반’이였다는 우월주의에 아직도 취해있는 구시대적인 사람들도 흔 히 찾아볼 수 있다. 몇 천 년 한국역사는 하루아침에 뒤바뀌지 않는 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권리는 같으며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각만 으로도, 한국은 더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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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시일야방성대곡

Grade 12 김도한 Do Han Kim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한국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 한 바 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11월 17일, 대한제국 의 대신들을 압박해 조약을 체결하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인가.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우리는 그저 당하기만 하고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이 불공평한 조약 때문에 우리가 겪어야했던 일들은 수도 없이 많 다.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조약이 아니다. 을사조약에서 우리에게 이 익이 되는 게 있었나, 이 조약은 오직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불공평한 조약이다. 이 조약을 맺음과 동시에 우리는 일본의 노예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항구를 열어 일본 상인들이 무자비하게 들어오면서 우리 땅에서 물건을 파는 순간 우리 상인들은 갈 곳 없이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조약은 소수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다수에게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이 일본한테만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우리는 그 체 결이 강제로 맺어지고 있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대한제국 대 신들도 반성을 해야 된다고 본다. 그들도 이 체결이 강제로 진행되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거나 했어야지 왜 막지 못 했을까. 대한 제국 대신들은 대한제국 국민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일본의 눈치를 보 면서 오직 자기네들만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추구했다. 대한제국 대신 들은 높은 위치에 있을 자격도 없다. 진정으로 대한제국을 국민들을 생각하는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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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신들은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며 대한제국 국민 들은 당장 밖으로 나가서 시위를 하든지 서명운동을 하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뭐든지 다 해야 한다. 대한제국 국민들은 무슨 죄 가 있어서 이런 비참한 대접을 받아야 하나, 죄가 있다면 대한제국 국 민인 것밖에 더 되겠냐. 대한제국 국민들은 당장 힘을 모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을 우리 땅에서 내쫓아야 한다. 우리 땅에서 우리가 다 른 나라 사람보고 나가라고 하는 건데 그게 무슨 잘못인가. 지금 상황 으로 보면 갑과 을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우리는 지금 당장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고 소리쳐 싸우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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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반복되는 역사, 그 안에서 우리는 Grade 12 Paul Han 한규영 역사가 되풀이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역사란 전과 후가 정확히 나눠진 대화와 같다. 역사를 배우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과거의 오류를 되풀지 않기 위해서이다. 역사적 사건을 보면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원인이 다시 발생한다면 비슷한 역사는 언제든지 재발 가능하다. 병자호란이란, 병자년에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와의 전쟁이다. 조선 은 참패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정말로 처참하였다. 우선, 삼죽도에서 조선의 왕 인조는 멸시와 조롱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황금 100냥, 백 은 1,000냥,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등 많은 것을 조약을 맺기 위한 조건으로 청에 바쳤다. 거기에 매년 청나라에 게 많은 조공을 또 받쳐야만 했다. 이러한 물품들을 모으기 위해 정부 는 백성들을 더욱더 쥐어 짤 수밖에 없었고 이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리던 조선 백성의 등골을 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일으키지도 못하고 유배 를 떠났다. 하지만 만약 중립외교가 성공하여 청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었더라면 조선은 그러한 큰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는 ‘if’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만약 광해군이 계속 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렸다면 전쟁이 아닌 소통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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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는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흥선대 원군은 통상을 요구하는 외국 세력과 소통하기보다는 전쟁을 통해 그 들을 막으려고 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통상 거부의 입장을 단호하게 드러내지만, 결국 조선은 제대로 개화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역사는 반복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 속 에서 지혜롭게 정치하고 외교하는 나라가 되어 비슷한 과오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그런 나라에서 나는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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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1.21 사태 Grade 12 강태현 Christopher Kang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인 124부대에서 31명의 엘리트 장교들이 뽑히 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을 짐승같이 살며 지옥 같은 훈련을 받았다. 작전의 성공을 꿈꾸며 그 31명의 장교들은 인간 에서 살인무기로 바뀌게 되었다. 김신조 소위를 앞세운 124부대는 1968년 1월 16일에 황해북도 연 산에서 출정하였다. 1월 18일, 31명의 부대원들은 휴전선의 미군정찰 지역과 국군정찰지역의 경계에 있는 철조망의 철책의 기둥 바깥 면에 있는 쇠망에서 기둥에 가려진 부분을 잘라 남한으로 침투하게 된다. 1 월 19일, 그들은 살얼음이 껴있는 임진강을 횡단하게 된다. 1월 21일, 그들은 세검정고개까지 오게 된다. 19일과 21일 사이, 그 31명은 파 주에서 나무꾼 우 씨 삼형제를 만나게 된다. 원래 원칙대로라면 그들 을 죽인 뒤 시체를 땅에 파묻어야 했지만, 시간 상의 문제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삼형제와 경찰에 신고하지 않기로 약속 한 뒤 헤어졌다. 그러나 그 삼형제는 그 약속을 깨고 곧바로 파출소에 신고 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검정 자하문 초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 번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옷에 있던 CIC 방첩대 마크 때문이었다. 그 당시 방첩대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 문에 방첩대마크 하나만으로 청와대 뒷산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종로 경찰서의 최규식 서장이 배짱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 31명의 길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것이지, 그분이 아니었다면 청 와대까지 한방에 뚫렸을 것이다. 자하문 초소에서 길이 막힌 31명은 지금까지 길을 통과할 때마다 보여주었던 방첩대 마크를 보이며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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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량 병력 이동을 보고받지 못한 최규식 서 장은 수상함을 느끼고 124부대원들을 막았다. 그때 마침 버스 2대가 길을 따라서 오는 것을 본 124부대원들은 지원 병력의 버스로 착각하 여 버스를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진다. 이 사고로 애꿎은 시민 사상자 또한 발생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게 된 부대원들은 최규식 서장을 죽이고 다시 북으로 도주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길에 는 국군이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에 31명중 29명이 사살 되었고 1명이 도주했으며 그리고 마지막 1명, 김신조 소위는 투항을 하였다. 그렇게 1.21사태는 끝이 난다. 이 사태로 인해 남한에서는 32 명(군인 25명, 시민 7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건 바로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김신조는 침투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 목을 따고 수하 간부들을 총살하러 왔다.’고 해서 전국을 충격 에 빠지게 했다. 국민들은 김신조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국 가는 그가 남한에 알린 북한 기밀들을 생각하여 김신조를 죽이지 않았 다. 현재 김신조는 탈북하게 되어 한국에서 목사로 살고 있다. 1.21사태로 인해서 여러 가지 변화들이 일어났다. 먼저 주민등록번 호가 탄생하게 되었다. 또한 국군의 예비군, 5분대기조, 그리고 육군3 사관학교가 창설되었다. 그 당시 군 복무기간이 줄어들고 있었는데, 사건 이후로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씩 복무기간 이 연장되었다. 시민들은 1.21사태 이후 국가에 모든 행동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 러냈다. 지금도 김신조를 살려둔 점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술집에서 김 목사가 술을 먹다가 청년에게 뒤통수를 몇 대 맞았던 사건도 있었다. 김신조의 얼굴을 알아본 그는 온갖 욕설을 퍼 부었다. 1.21사태로 인해서 군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되었기 때문에 청 년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로 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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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6.25휴전 이후 북한이 계획한 최대 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청와 대는 물론, 미국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총 5곳을 침투하는 것이었지만 계획 변경으로 청와대 침투만 시도하였다. 그 사건 이후로, 남한에서는 군복무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생기게 되 었다. GOP에서는 철책근무 시 철조망을 한 번씩 흔들어 보는 것도 또 다시 1.21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가 그때에는 제대로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은 다르다. 국력을 굳건하게 다져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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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삼풍 백화점 사건 Grade 12 최하언 James Choi 1995년 6월 29일, 대한민국은 하나의 대형 사고를 맞이한다. 오후 5시 52분경 서울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순간적으로 붕괴되는 비 극이 발생한 것이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501명, 실종자는 6명, 부상 자는 937명이었다. 엄청난 인명피해와 함께 약 2700여 억의 재산 피 해로 이어진 이 사건의 발단은 어디서로부터 찾을 수 있을까? 건물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요인은 부실한 건축에서 비롯되 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설계 시 대단지 상가로 설계되었다. 이 후 백화점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 과정은 법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매우 허술한 과정을 거쳤다. 정밀한 구조 진단 없이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리한 확장 공사까지 수시로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 을 좌우할 수 있는 건물을 이렇게 안일한 태도로 지었다니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전’이라는 말이 간단하게 들릴 수 있 을지도 모르지만 ‘안전제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안전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요소를 간과한 채, 무리한 건물 공사를 진행했 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된다. 이 붕괴사고가 우리한테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당장 인명피해만 해 도 어마어마하다. 사람의 목숨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런데 이 일로 많은 국민들에게 너무나 큰 슬픔을 가져왔다. 경제적인 피해도 엄청났 다. 그리고 국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사람들은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 이 사건도 그런 사람들이 건물을 지었다면 분명 사 전에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책임감을 갖 고 모두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조금만 노력한다면, 이러한 비극은 줄 어들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이기심과 게으름에서 비롯된 사고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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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훨씬 더 아쉽고 화가 난다. 활발한 경제, 원활한 국제 관계, 뛰어난 정치 등 국가를 선진국으로 만드는 요소들은 많다. 우리나라는 몇 년간 이러한 부분에서 발전을 해왔으며 선진국으로 발돋움 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실수에 서 비롯된 사고들을 예방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만족하지 못할 것이 다. 발전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예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 은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러한 큰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 어떤 실수를 했다면 지난 일을 되 새기며 앞으로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에만 의지해서도 안 된다.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우리의 양심, 남 을 위한 마음,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키워나간다면 이 나라는 더 발전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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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위안부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Grade 12 홍성아 Amy Hong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던 중, 일본은 군인들 의 성적 욕구를 풀어주기 위해 위안부를 만들었다. 위안부는 조선인, 중국인, 네덜란드인, 인도인 등으로 구성된 여성들이었는데 이들은 일 본 군인들이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마치 물건처럼 사용되었다. 이들은 하루에 30번 이상의 성관계를 요구당하기도 하는 등 인간 이 하의 취급을 받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자라고 고백을 하기 시작했으 며 일본은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일본의 사 과 한 마디를 받기 위해 여러 단체들과 함께 일본에 항의하였으나, 몇 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사과를 하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한 행동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지 위안부를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을 뿐 전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전쟁 당시 당한 일들로 인한 부작용으로 고통받 고 있다. 여성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잃게 되었다.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는 평범한 삶을 느껴보지도 못 한 채 그들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인들은 많은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주 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 집회를 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 으로 일본의 사과를 바라며 집회를 열었다. 끊임없는 요구에도 불구하 고 일본은 지금까지 전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의 사 과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도 수두룩하다. 한국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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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성의 없는 답변보다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를 보 여주는 단 한 마디를 원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사과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위안부를 잊어서는 안 된 다. 일본이 죄 값을 받는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위안부의 존재를 잊는 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 역사를 잊지 않도록 학교와 교 육 기관에서 위안부에 대해 끊임없이 교육해야 된다. 교과서와 역사책 에서 계속적으로 언급해야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일 본 학생들에게도 위안부에 대해 알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과를 받는 것이 우선이다. 일본인들의 잘못을 인정 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된 다. 최근, 아베 총리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설을 하는 일이 있었다. 연설이 끝난 후 질의 응답 시간, 한 한국 한생이 위안부에 대해 언급 하였다. 그 학생은 아베총리에게 위안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잘 못을 왜 인정하지 않느냐는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아베 총리는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서 대답을 회피하였다. 학생의 당돌함으 로 인해 그 대학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모습을 방송으 로 본 여러 사람들이 위안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 다.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위안부에 대해 알리고 사회적으로 성 찰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이 정당한 처벌을 받을 때까지, 그리 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위안부 사건이 역사의 한 부분으로 각인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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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가 원하는 나라 Grade 12 최유정 Sarah Choi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화에서 특징적인 것은 급격하게 늘어난 양반 층의 수였다. 그 원인은 양반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했거나 편입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원인에는 정부의 정책이 큰 역 할을 담당했다. 그 이유는 정부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 을 내리면서 양반 신분으로 인정해 주었고, 또한 군량을 모으기 위해 임시로 재물을 받고 벼슬을 내려 주던 납속책 (국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시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신분제가 문란해지는 시초가 되었고, 고종 23년(1886년)에 노비 의 신분 세습법이 폐지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노비까지 법적으 로 해방되는 기반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분명히 양반도 있고 평민, 노비도 있었다. 이렇듯 조선 후기를 계기로 신분 제도가 가지는 의미 는 점차 변화되었고, 현대를 사는 우리는 신분의 구분 없이 모두가 평 등한 삶을 살고 있다. 현대에도 조선 후기처럼 신분제도의 잔재가 남아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신분제도’란 어떤 사회에서 혈통과 가문, 직업, 교 양, 수입, 재산, 권력 등에 근거해서 특정하게 사회적 평가와 처우를 받는 계층을 정하여 둔 일이라 정의 내려지고 있다. 과거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그대로를 당연하게 받아 들이던 것이 나의 신분이었다. 천하게 태어나면 천한 대로, 귀하게 태 어나면 귀한 대로 말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부터의 신분의 변화가 일 어나, 현대에는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양반, 상민, 노비 이런 것들이 아 닌 직업, 돈, 학력, 권력,..이런 것들에 의해 계층이 나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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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명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배웠 다. 또한 돈은 열심히 노력하면 벌 수 있다고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한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대통령과 길거리 청소부와는 분명 거리 가 있으며,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보이지 않는 세습은 분명 존재한다.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나라이다. 분명 대통령이 있으면 국민이 있어야 한다. 국민이 없으면 대통령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들이 직업의 귀하고 천한 것을 떠 나, 누구나 하고픈 일을 열심히 하게끔 만드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누구나 배울 수 있고, 누구나 일 할 수 있고, 누구나 쉴 수도 있으며, 누구나 행복해지는 나라 하지만 마음 아픈 것은 우리가 꿈꾸는 이상과 우리의 현실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라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무상급식, 무상교육, 노 인복지...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 듯하고 얼마 전 수능에서 수능 출제위원들은 노력한다 했지만 변별력 없는 문제 출 제로 인해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 눈물 흘리는 것 또한 마음 이 아팠고, 세월호 사건으로 누구나 행복해야 하는 선생님들과 학생들 이 가슴 아프게 떠나야만 했다. 이 모든 원인은 누구나가 자기가 하고 픈 일을 사명감에 하는 것이 아닌 아무 사명감 없이 각자의 직업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할 수 있다면, 즉 꿈꾸는 일을 한다면 누구나 어느 위치에 있든지 행 복하고 사명감 또한 생길 것이며 어떠한 작은 어려움이나 큰 어려움들 도 굳건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직업의 귀천, 학벌, 가문, 권력 등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나라! 내가 살고 싶은 나라는 누구나 자기가 하고픈 일 을 하는 나라이다. 이런 나라를 나는 나의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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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한 수험생의 실없는 고충 Grade 12 유석훈 Nicolas Yu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한다. 숨을 쉬거나 눈을 깜빡이는 등 당연 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누워서 상상 속 으로 빠진다거나, 수업시간에 지루하여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인다거 나,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가만히 있다고 생각을 하여 도 결국에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끔씩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연필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데도, 열심히 어딘가를 향해가고 있 는데도, 결국엔 가만히 누워서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는 것보다 못할 때가 있다. 이유인즉슨 그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저 타인의 말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움직일 뿐, 그저 꼭두각시처럼 주관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 이 한 소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소년이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책을 하기는 하 나 마냥 한탄만 하거나 침울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은 말씀하신 다. 누구나 이러한 시기를 거쳐야 되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후에야 비로소 꽃을 핀다고. 이러한 시기에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봐야지만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때에 따라선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고. 소년 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 시기에 색색가지의 세상에서 살아가기보다 잠시 동안은 그저 독일무이의 색의 세상에서 사는 것을 택하였고, 잠 시 동안은 그저 죽은 듯 살려고 했다. 그러나 속 깊은 곳의 두려움을 마냥 무시한 채로, 묻어둔 채로 살기에는 불가능하여 보였다. 소년은 자기애가 강한 아이였다. 가끔씩 스스로를 무시하는 듯한 말 투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그냥 말일뿐, 항상 실없이 웃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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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닥쳐도 생각 없이 너털웃음만 지으며 하루하루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사는 스스로가 좋았다. 스스로 어느 것에도 얽매여 살지 않 겠다고 생각을 하였으며 자연 속 소소한 것, 길 가에 가지런히 수놓인 풀들, 바람에 맞춰 수줍은 듯 손 흔들어 보이는 굳은 갈색의 손길들, 그저 푸르고 평화롭기만 한 하늘과 구르는 도르레에 맞춰 지는 저 멀 리 따스한 빛을 보며 미소를 띠는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하였다. 무엇 보다 속과 겉이 별반 차이가 없던 자신이 좋았다. 단지 소년은 이러한 시기를 거친 후 자신이 화사하게 필지, 아니면 시련 후 꽃잎을 몇 장 잃고 그저 살아만 있는 채로 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년은 자신을 좋아했다. 단지 미래에도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을 뿐이다. 그렇게 소년의 방학은 추억도 아닌 기억 속에 서 서서히 흘러가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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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수필>

어느 농민군의 일기

Grade 12 김형철 Hyung Chul Kim

1894년(갑오년) 1월11일 새벽, 고부민란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살겠어. 하루 세 끼는 커녕 풀죽도 못 먹어서, 늙으신 어머니는 거동도 제대로 못 하신지 오래 되었고 이제 돌을 갓 지난 둘째 녀석은 나오지 않는 제 어미의 젖을 빨아 제끼지만, 그런 어미도 며칠 동안 굶기는 마찬가지여서 한 방울 나올 젖조차 없는지라 이래저래 하루하루 연명하기 힘들기는 다 마찬가지이다. 다만, 죽지 못해 사는 꼴이다. 오늘도 마을 군수 조병갑이라는 놈은, 죽은 아비의 비석을 세운답시 고 죄 없는 우리네 백성들에게 세금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고 간다. 먹 고 죽을 양식도 없는 판에 어디서 당장 보리쌀 서 말을 내놓는단 말인 가, 그것도 모자라서 저수지를 짓는다고 우리더러 나와서 일을 거들라 고 한다지? 우리 집 농사는 언제, 어떻게 지으라고 또 다시 노역이란 말인가. 더구나 이미 지어진 저수지를 허물고 세금을 걷고자 다시 ‘만석보’ 라는 새 저수지를 짓는다고 하는데, 정녕 이게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 이란 말인가.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가지. 우리네 농민 대표 녹두장군 전봉준 장군을 믿고 우리들의 세상을 만드는데 이 한 목숨을 바치리라, 전봉준 장군님이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 의 횡포에 맞서다가 곤장을 맞고 죽었기에, 자식으로서 그 한을 평생 품고 살아오면서 이 못된 세상을 바꾸기로 가슴 속 깊이 새기신 분이 아닌가. 작고 보잘 것 없이 생겨 ‘녹두’ 라는 이름을 얻으신 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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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이제 더 없는 희망이요 대들보가 돼주셨다. 드디어 오늘, 1894년 1월11일, 우리는 고부 관아를 쳐들어갔다. 창 고에 가득 들어 있는 곡식을 꺼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관청을 점령하자 더 많은 백성들이 서로 돕겠다고 몰려들었다. 우리 농민군의 숫자는 이제 대략 만 삼 천 여명을 넘는 거대 세력으로 불어났다. 우리는 ‘백산’ 이라는 나지막한 산에 모여 흰색 옷으로 갈아입고 죽창을 들고서 앞으로의 일 을 계획하였다. 나는 비록 평범한 농민 중의 한 사람일 뿐이지만, 우 리가 왜 모였는지는 잘 알고 있다. ‘보국안민’ 즉 나라를 구하고 백성 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그 목표 하나이리라. ‘일본을 몰아내고 정치를 바로 잡고 군사를 몰아 한양으로 들어가 못된 벼슬아치들을 없앤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 아닌가.

1894년(갑오년) 5월14일 밤, 전주성 점령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우리 농민군이 본격적으로 모인지 벌써 넉 달 이 지났다. 조정에서는 이미 난리가 났지. 농민군이 대거 일어났다는 소식에 황급히 관군을 파견하였지만, 우리는 그 곳에서 안개를 이용해 서 숨어 있다가 관군을 몰살 시켰다. 나는 무기 좋은 관군에게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용케도 살아남아 서 정읍 고창 무안 함평을 넘어 드디어 전주까지 단숨에 함락시켰지. 우리는 사기 백배 하였고 내가 농민군 중에 한 사람이란 게 너무도 자 랑스럽고 보람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위기를 느낀 조정은 드디어 우리에게 화해를 하자고 접촉해 왔다. 이를 어쩐다. 어차피 지도자인 전봉준 장군이 결정할 일이지만, 나 또 한 고민이 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한양으로 진격을 해야 옳은 것인 지, 아니면 이쯤에서 피를 그만 흘리고 정부의 변화를 기대해 보는 것 이 좋을 일인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는 노릇이다. 더구나 한양을 점령한다면 그 다음은… 그리고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것이 ‘외세의 개입’ 아닌가, 이미 정부는 청나라에 농민군 진압을 부탁했다는 소문 도 돌고 있는데 말이다. 청나라는 무릎을 치며 좋아 하겠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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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일은 이 일을 구실 삼아서 일본도 군인 육 천 여 명을 조선에 투입 했다고 하니… 그토록 우리가 우려 했던 일본 놈들 침략 이 우리들 전쟁으로 인해 현실화 되는 건 아닌가. 안 되겠다, 나는 녹 두 장군 전봉준에게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이쯤에서 정부 와 화해하는 편이 좋다고 건의해야겠다. 드디어 전봉준 장군도 일본군의 침략이 무엇보다도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정부와 전주에서 화해를 하고 말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나중에 이 화해를 ‘전주 화약’ 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1894년(갑오년) 6월22일 밤, 청일 전쟁 전주 화약을 맺은 후, 나도, 농민군 대부분도 이제는 할 일이 없어 져서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듯이 지나간 것은 결코 아니다.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 ‘집강소’를 세워서 우리가 주 장한 개혁 내용들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 화해를 하고 나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던 청나라 놈들과 일본 놈들은 절대 물러가질 않고, 오히려 일본군은 청나라를 조선에서 완전히 손 떼게 할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름 하여 ‘청일 전쟁’ 어처구니없게도 청나라 땅도 일본 땅도 아닌 바로 우리 조선 땅에서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 되었다. 평양에 서 결정적으로 승리한 일본이 결국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청나라는 완 전히 조선에서 일본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고, 그 결과 일본은 더 더욱 조선을 제 맘대로 조정을 움직일 수 있었다.

1894년(갑오년) 9월25일 새벽, 우금치 전투 이에, 나는 전봉준 장군의 깃발 아래 농민군의 이름으로 ‘외세배격’ 이라는 구호를 들고 다시 일어났다. 전주 화약을 체결 한지 넉 달이 지난 1894년 9월의 일이었다. ‘항일구국’ 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우리는 충청남도 논산에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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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었다. 드디어 우리는 일본군과 공주 우금치 에서 피나는 결전을 벌였다. 우금치는 ‘개금티’라고도 불리는 가파른 고개인데 그 고개를 오르는 우리에게 일본군은 최신 무기를 동원해서 불을 뿜었고, 우리는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죽창과 맨몸으로 대항했지 만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지쳤고 농민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갔고 이들이 흘린 피가 냇물을 이루는 그야말로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 고 말았다. 패배한 우리 농민군은 논산으로 전주로 후퇴했고 다시 태 인에서 한 번 더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하고 말았다. 우리의 지도자 전봉준은 농민군에게 해산을 명령하였고, 우리는 모 두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갔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믿었던 부하 김경 천이 현상금에 눈이 멀어 배신하는 바람에 관군에 사로잡히고 말아 이 내 한양으로 압송되어서 일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고 한 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전봉준은 죽는 그 순간까지 의연함과 당당함 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데, 살려달라고 빌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다는 일본군의 회유에도 굽히지 않고 “구차하게 살 길을 구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의연하게 죽어 갔다고 한다. 역시 우리의 영웅다운 죽음이 아닌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과연 무 엇이었는가. 어떤 세상이었는가? 우리가 바랐던 세상은 별 것 아니다. 썩은 관리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농민과 천민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 그리고 일본에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나라를 원했던 거였다. 그런 데 그 모든 것이 이제는 한 때의 꿈이 되어버렸다. 나는 오늘도, 전봉 준과 우리 농민군을 기억하는 노래를 후세의 사람들이 불러 줄거라 생 각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않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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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수필>

전쟁일지 ‘발견’

Grade 12 김지원 Jee Won Kim

2011년 6월 29일 오늘도 어김없이 뜨거운 햇빛 아래 푹푹 찌는 날이었다.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은 계절을 이십여 년 간 견뎌왔다고 해도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날씨인 것 같았다. 이런 날씨 속에서 오늘 하루를 또 다시 곰팡 이 핀 얼룩덜룩한 천장 아래에서 제발 일 좀 하라며 구박하는 엄마의 전화나, 술이나 한 잔 하자며 하루도 빠짐없이 걸려오는 친구의 전화 로부터의 압박감이나 유혹을 버텨내며 지내는 것보다 뜨거운 햇빛 아 래를 걷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닳고 닳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터벅터벅 발을 조금씩 옮겨갔다. 몇 날 며칠을 집에서 보내다 오랜만에 걷는 것이었기 때문인지 한 걸음 한 걸음 옮 길 때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느껴지던 슬리퍼와 땅의 마찰은 답답한 마음을 조금 달래주는 듯하였다. 그렇게 계획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어느새 집의 뒤쪽 편에 있 는 산책길에 도착해 있었다. 이쯤 되자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 었지만 햇빛을 받아 녹색 빛을 내며 반짝이던 그곳의 나무들은 너무 시원해 보였기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앞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후끈했지만 나름 시원한 바람이 눌린 머리를 스쳐 지 나가며 헝클어뜨리는 것을 느끼며 걷다 보니 지금껏 본적 없는 푸른 지붕의 창고에 다다랐다. 조금 녹이 슬고 안은 빛이 잘 들지 않아 어 두컴컴했지만 원래 하지 않던 산책을 꽤 한 터라 쉬고 싶어 하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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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었는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는지 창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책이 굉장히 많았지만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서관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비록 책의 표면에는 새카만 먼지들이 뒤덮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시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곰팡이 핀 집에서 뒹구느니 여기를 조금 더 돌아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러 책장들과 먼 지를 지나 속으로 몇 걸음 옮기다 보니 창고의 끝부분쯤의 옅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앞에 놓인 둥근 탁자와 낡디 낡은 가죽 소파도 보였다. 조금 다가가보니 둥근 탁자 위에는 뒤덮인 먼지 아래 얼룩진 공책 서너 개가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 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위에 있는 공책을 들어 올려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고 중간을 펼쳤다. 1950년 6월 23일 낡은 공책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적혀있는 것은 분명 일기였다. 오늘 오랜만에 군대에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금 달라졌 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거리를 걸어 집 앞에 이르자 닭 삶는 냄새 가 코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게 잠깐 냄새를 즐기며 서 있다가 마 당 안으로 들어가자 부엌 안에서 요리를 하던 아내가 동그란 눈으 로 달려 나왔다. 너무 오랜만이었는지…

여기서부터 일부는 공책의 얼룩 때문에 더 읽을 수가 없었다. 공책 위 다시 내려앉은 먼지를 입김으로 불어내고 몇 장을 더 넘겼다. 1950년 7월 25일 뭔가 익숙한 년도였다. 하지만 처음엔 이 해 그리고 그 다음 해가 이 일기장 주인에겐 어떠한 날이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씩 번 진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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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와중에 오늘 하루도 지나간 시간에 대해 기록해본다. 지금 부터 정확히 한 달 전,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던 느긋한 오후에 부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의 남침에 따라 서울로 긴급 복귀하라는 위로부터의 명령 이었다. 국가와 가족을 지키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주저하며 망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당시 많은 군인들이 휴가 중이거나 술을 즐기며 놀던 중이었기에 갑작 스레 땅크와 함께 몰려들어오는 북측 군인들을 막기엔 버거운 상 황이었다. 결국 6월 28일 서울을 그들에게 내주고 우린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하루, 아니 몇 시간 마다 우리의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고 지금 의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단 28일, 어느새 옆에 서 있던 많은 동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 았다. 그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 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탱크를 땅크라고 발음하는 것은 들어보기 힘든 요즘 낡은 책에서 접 하니 웃음이 나왔지만 뒤로 갈수록 암울해지는 기록들을 더 읽을 수 없었기에 책을 덮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암울한 현 실에 어두운 과거의 기억들을 읽어봐야 좋을 것 없을 거라는 판단 때 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집에 와보니 그 일기장 주인의 뒷 기억들에 대 해 궁금증은 계속 더해져 가는 것 같다. 내일 다시 한 번 가봐야겠다.

2011년 7월 1일 어제는 비가 많이 온 탓에 가려 했던 푸른 창고에 가보지 못했지만 오늘은 구름 사이로 맑게 빛나던 해 아래 어제 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다시 그 장소를 찾았다. 비록 가는 길에 살짝 헤매긴 했지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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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더듬어 발걸음을 옮기다 결국 먼지 덮여 퀴퀴한 그 작은 도 서관을 찾을 수 있었다. 비 때문에 이틀 전과 다르게 습해진 공기가 책들이 눅눅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조금 들었지만 창고 안 의 책들은, 확인해보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 한 그 일기는 무사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먼지를 풍기며 앉 아 그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곤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일기를 읽어 내려 갔다.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경험한 일들이나 전우들과의 대화, 또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일기의 거 의 뒷부분에 달하자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대한 일기가 적혀 있는 페 이지가 나왔다. 1950년 10월 1일 오늘 마침내 전세를 뒤엎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땅크와 사투를 벌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더욱 북측 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것이 다 UN군의 도움과 맥아터 장군의 훌 륭한 지휘 덕분이다. 9월 15일에 맥아터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 륙작전이라는 위험 요소가 큰 작전을 성공해낸 것을 계기로 그 달 28일에 서울을 탈환하였고 지금은 굉장한 우세로 북한을 내몰고 있으니 맥아터 장군과 UN군이 칭송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 다.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서해의 큰 민물과 썰물의 차이 때문 에 굉장히 힘든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UN군의 군함을 보내 북한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남측에 고립된 북한의 군사들을 처리하는 이 작전에 대한 얘기가 매 밤마다 군인들의 입에 끊임없 이 오르내리고 있으며 나 또한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또한 그 때부터 북한군을 치고 올라가며 힘차게 부른 전우야 잘 자라 또한 아직도 계속 불러지고 있다. 한 명이 부르기 시작하면 떼창을 시작하니 잊혀질 수 없는 곡으로 우리는 이 노래를 부름으로 마음 을 가다듬고 전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게 38선을 안전하게 넘게 된 오늘 10월 1일은 아마 훗날 기념비적인 날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가 다시 양쪽의 다른 의견과 주장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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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일기를 읽고 나서 이 군인 아저씨가 10월 1일이 훗날 후세 들에게 기억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 맞아떨어진 점이 재미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크게 다가온 느낌은 일종의 두려움 또는 걱정이었다. 이 는 아직 내가 6.25 전쟁에 대한 지식은 굉장히 미미했지만 아직 우리 가 통일이 되지 못했다는 분명한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38선을 넘었어도 다시 북한의 공격은 계속 될 텐데 일기장이 거의 끝 나가는 것을 보아선 혹시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되었다. 물론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고 싶어하는 사 심 섞인 마음과 함께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다음 내용을 읽고 싶었으나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던 터라 내일 다시 오리라 하는 다짐과 함께 집으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2011년 7월 2일 오늘 아침은 눈이 일찍 떠졌다. 보통 11시는 되어야 일어나는 내가 9시가 되기 전에 일어난 것을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기의 마 지막 부분이 굉장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조금 누렇게 눌은밥으로 배를 불리고 세수랍시고 물을 얼굴에 한 번 끼얹은 뒤에 상쾌하게 문밖을 나섰다. 빠른 발놀림으로 도착한 창고는 어제와 같은 어두움과 날리는 먼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제와는 조금 다른 느 낌이 느껴졌다. 어제와 같은 자세로 같은 소파에 앉아 같은 일기장을 폈지만 어제 든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1950년 10월 19일 드디어 평양을 점령했다. 평양까지 진출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 간이 흘렀지만 이제는 진짜 전쟁이 끝나간다는 것에 대해 많은 군 사들이 안도감을 느끼고 있음에 감사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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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는 나중에 가야 알았지만 굉장히 짧아진 하루하루의 일기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읽어 내려갔다. 1950년 10월 30일 오늘 북한의 중심부인 평양에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님의 연설 은 굉장했다. 그의 연설은 곧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 리의 희망과 맞물려 엄청난 용기와 사기를 심어주었다. … 1950년 12월 24일

이 날의 글씨는 전부터 이어지던 깔끔한 글씨체와는 좀 다르게 많이 흩날려있었다. 중국군이 이 전쟁에 개입을 하고 나섰나 보다. 저 산 반대 쪽의 상대 진영 쪽에서는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비명 같은 괴성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이 지원을 온 것인지 파악 할 수 없는 상황에 하늘은 어둡고 귀를 파고 들어오는 소리 또한 계속 되었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전우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 에 없다.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우리는 결국 후퇴 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가 흩날리게 쓴 글씨체는 당시의 다급함이나 간절함과 같은 감정 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렇게 그 페이지에 쓰인 일기를 다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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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 15일

이 전 일기로부터 석 달이 지난날의 일기가 갑자기 나오지 조금 당 혹스러웠다. 공책이 손상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을 보니 분명 중 간의 내용이 잘려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이 의아함과 벌써 마지막 일기라는 아쉬움을 깊은 심호흡으로 가다듬은 후 한 글자 한 글자 더 욱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작년 12월 24일부터 시작된 북한과 중국 연합군의 맹공격은 우 리를 계속 밀어붙였고 결국 우리는 후퇴의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점점 밀려나다 보니 어느새 평양이, 어느새 38선이, 어느 새 서울이 다시 공산 진영에게 뺏겨있었다. 하지만 우리도 이런 절 망적인 상황이 계속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진영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고 결국 오늘 서울을 재탈환 하였다. 이를 통 해 우리는 분명 희열은 있었으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땅 에 머리를 묻은 채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그 모습을 계속 지켜봐 야 했던 생존자들 또한 깊은 불안함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지겨운 전쟁은 도대체 언제 막을 내릴까? 몇 명이나 더 죽어나가야 몇 년 전부터 외쳐오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일 까? 그 평화는 우리들이 희생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몇 달 전 만해도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질문들, 이제는 모르겠다.

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여러 질문들을 나에게 던져놓은 채로. 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일기로부터 얻은 이 질문들, 지금의 나는 당당하 게 대답할 수 있을까? 나도 이 질문들을 내일에게 맡겨야 하진 않을 까? 나는 지금까지 역사와는 무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는 내 전 공인 통계학과는 멀었기 때문에 역사 따위를 배울 시간에 오히려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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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나 더 배우고 자격증을 하나라도 더 따서 취업을 위해 애쓰는 것 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인가 삼국시대는커녕 한 국 근현대사의 6.25라는 중요한 사건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 다. 물론 어느 정도의 기본 지식들은 있었지만 그래 봤자 학생이었을 때 졸리는 눈을 겨우 뜬 채 억지로 들은 내용이 다였고 그 이상을 배 우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아저씨의 일 기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든 질문은 지금까지의 내가 믿어왔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고 평가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존재는, 나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 역사 속에 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내고 있는가? 분명 방대하고 어떻게 보면 오 글거리는 질문이지만 당연히 현재의 나는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단지 거대한 취업난 아래서 지쳐가는 많은 청년 중 하나로 아무리 다양한 회사에서 인터뷰를 봐도 나의 가치관에 대한 질 문만 나오면 버벅거려 번번이 퇴짜 맞을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술과 함께 내 실패의 원인을 조금 못 미치는 학력에서 찾던 그런 사람이었 다. 이런 내가 어떻게든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고 한들 이 아저씨처럼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여 세워놓은 시대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내가 읽은 것은 역사 속에서 너무나도 평범한 일기장 중 하나였지만 이는 며칠간 나에게 역사의 중요성을 알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내 삶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물론 아직 이러한 생각들을 다 정 리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 --------------------------------------------------------현재는 역사를 반영한다는 말에 공감하며 일기장을 덮었다. 사 년 전에 했던 이러한 생각들이 어떻게 현재 통일부의 정보통합 쪽에서 일 하는 나를 만들어 놓았는지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그나저나 아직도 그 곳에 가면 파란 지붕의 도서관을 찾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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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수필>

전쟁일지 ‘할아버지의 일기’

Grade 12 정유나 Yoona Jeong

나, 정유나는 A202라는 코드명으로 익명의 해킹조직, ‘어나니머스’ 에 속하여 있다. 우리의 임무는 정부가 검열한 과거를 시스템 해킹을 통하여 알 권리가 있는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러한 업무를 완 수하기 위하여 첨단 기술과 숙련된 해커들이 모였다. 우리의 다음 임 무는 6월 25일, 청와대 사이트 홈페이지를 해킹하여 숨겨진 문서와 자 료들을 빼내는 것이었다. 그 날, 해킹을 하는 도중 나는 국보급 비밀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서류는 남다른 임무를 맡은 한 할아버지 의 일기였다.

1950년 6월 25일 나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23일에 비상경계령이 해제됐기에 더욱 더 안심하고 잠에 흠뻑 취해 있었다. 천둥 같은 포격소리에 깬 나는 요란함의 원인을 찾기 바빴다. 새벽 4시쯤 북한 공산군이 38선인 남쪽 군사 분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입하였다. 오래 전부터 염려하던 일이 었지만 나와 같은 많은 이들이 넋을 놓고 있을 때 기습공격을 가하다 니, 누가 알았을까. 이들은 13만여 명의 병사들과 약 280대의 전차와 포를 앞에 둔 채 전진하였다. 새벽 5시쯤 대통령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와 면담을 하였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상태였기에 우리는 더욱더 초조했고 당황스러웠다. 오늘 나는 이 나라에 있어 가 장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오늘부터 정보원이다. 간첩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밤 10시쯤 나는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파놓은 동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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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여 38선을 안전하게 넘어 북한에 도착하였다. 다행히 나보다 전에 와 있던 동기들이 있어서 안식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현재 시각 밤 11시, 나는 잠깐 잠에 든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1950년 7월 1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일기를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서울은 이미 북 한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는 이때까지 북한과 남한을 넘나들며 북한의 계획과 무기 수, 병사 수 등을 보고하였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북한 병사가 되었고, 나와 같은, 나의 동료들을 죽였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지고, 그 폭음에 놀라는 것은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다. 오늘은 토요일 같지 않은 토요일이다. 비가 내려 많은 병사들 이 진흙탕으로 넘어지는 모습이 안타깝다. 오늘은 미군24사단의 선발 부대인 스미스 특임대가 한국에 도착하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더욱 더 많은 군사들과 무기들의 유입이 절실하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돕기 시 작하였지만 그에 맞서 소련 또한 북한에게 많은 전차와 포를 제공하고 있었다. 유엔에게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하여 남한을 돕자는 제의가 있 었지만 끝내 수용되지 못했다. 하루 빨리 우리의 땅을 되찾아 북한을 무너뜨렸으면 좋겠다.

1953년 7월 27일 수많은 북한 총수들과의 접견 끝에 휴전 협상이 체결되었다. 이전부 터 휴전을 하려 하였으나 모순되는 통치 체제와 방식 때문에 늦춰진 것이다. 이로 하여 많은 목숨은 날아 갔고, 많은 이들은 슬픔에 가득 찼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협상을 시도하는 중에도 치열한 전투를 멈추 지 않았다. 유엔군은 공산군에게 휴전을 요구하였지만 공산군은 빼앗 긴 진지를 다시 빼앗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공산군 측은 전쟁을 통하여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그들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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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깨달은 것 같다. 이로 인해 우리는 휴전상태에 몰입하였다. 하지만 나는 현재 북한에 갇혀 있다. 내가 쓰던 비밀 통로는 들통 나 막혀버 린 상태이고, 나는 지금 여기 외롭게 홀로 남아있다. 나머지 동기들은 다 흩어져 있겠지...

쓰다만 일기 다음 페이지에는 사망 확인증이 있었다. 원인이라는 공 간은 비어있었지만 옆에 흐릿한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이의 입단속을 위하여 먼저 편한 곳으로 모셨다.’ 나라를 위하여 일한 사람에게 이런 처참한 죽음을 맞게 하다니…. 나도 어느 순간 이 조직에서 버려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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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수필>

전태일의 외침

Grade 12 김수영 Eddie Kim

전태일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봉제노동자로 일하면 서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치며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서울로 상경하였다. 아버지의 큰 빚을 갚 기 위해 나의 꿈인 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17살 때 쯤, 나는 삼일사의 보조원으로 취직하였다. 근로 환경은 정말로 열악 하였다. 하지만 기술을 빨리 배운 나는 재봉사가 되어 통일사로 직장 을 옮겼다. 영세한 규모의 공장들의 근무환경은 정말 열악했다. 정말 어둡고 환기도 안 되는 다락방에서 작은 형광등 불빛에 의존해 하루 약 14시간을 쉴 새 없이 일했다. 환기가 안 되는 다락방에서 하루 종 일 있던 많은 근로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피를 토해내었다. ‘시다’라고 불리던 어린 소녀들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 어린 소녀들의 고통을 보며 노동환경 개선 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외로운 나의 항쟁은 많은 시련을 겪게 하 였다. 폐렴에 걸린 여성 노동자를 도우려다 해고되는 일을 겪기도 했 다. 나는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던 재단사가 되어서도 노동자들의 노 동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면서 이것을 끊임없이 공부하 며 법의 울타리 밖에 방치되어있던 우리의 처참한 현실을 개선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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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였다. 그 노력 중에 하나로 ‘바보회’를 통해 근로기준법의 내용 을 알렸다. 순조롭던 항쟁이 사업주들의 귀에 들어가면서 나는 일자리 를 잃었다. 그리고 영원할 것만 같던 나의 일터인 평화시장에서 쫓겨 났다. 그 이후, 나는 막노동으로 연명하다 다시 그리운 일터로 돌아왔 다. 돌아온 직후, 삼동회를 만들어 노동환경 설문지를 작성해 노동청 과 청와대 등에 제출했다. 나의 끊임없는 고발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경찰과 조직적인 사업주들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될 때 나는 조금씩 ‘화’가 났다. 어떻게 똑같은 사람들인데, 정말 다른 거라곤 사회계층의 차이일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까. 그 화는 수차례 내 마음속에 쌓였고 결국 내 몸을 석유로 적시게 만들었다. 내 몸에 불을 붙이기 직전, 나는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내 앞에 서있었다. 엄마는 나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하지만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도, 숨이 점점 쉬기 힘들어지는 순간에도, 내 머릿속은 오직 ‘노동환경 개선’뿐이었다. 그렇게 앞이 흐려 갈 때쯤,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들이 눈앞에 필름같이 흘러갔다. 내가 처음 재단사 보조로 들어갔을 때, 환 기구 하나 없고 좁은 방안에 다닥다닥, 바위 위의 따개비들처럼, 빈틈 없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어린 소녀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염없이 재봉틀을 돌리던 손, 아무렇지도 않게 피곤에 찌들어 있는 어린 소녀 들에게 각성제를 투여하던 아저씨의 차가운 눈빛, 오직 이익에만 눈이 멀어있는 초점 잃은 눈빛,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며 각혈을 숨기려 던 보영이, 한 손 가득 있던 피를 보며 이 또한 씻을 데가 없다고 오 열을 하던 장면, 그리고 불타는 나를 보고 경악한 시민들... 나는 이 순간까지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힘들어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 자들을 위해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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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본- Movie Project>

응답하라, 대한민국! Grade 12 All 번역: 함제호 Je Ho Hahm ‣ 시간 :

2145년 대한민국.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정부에 대하여 의문 을 품은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는 어느 봄 날

‣ 공간 : 아시아 퍼시픽 국제 외국인 학교 ‣ 등장 인물 아저씨 : 유예담 (미래의 주인공으로서 얼굴은 가려진 채 존재감만 나타남, 과거와 현재, 현재와 과거 등 시간의 연결고리) 주인공 : 박성환 (역사 왜곡에 관하여 의문을 가진 고등학교 12학 년 남학생) 미래 사회, 역사 수업 진행 선생님 : Ms. Kim 6. 25 전쟁 피해자 군인 : 함제호 6. 25 전쟁 주검들 : G12 All 3. 1운동 독립선언서 낭독자 : 최하언 3. 1운동 배경 전달자 : 김수영, 김지원 3. 1운동 시위 참여자 : G12 All 전체 코디네이터 및 카메오 : 이수연, 정유나 학급우 : 서로마, 채수민 ‣ 전체 줄거리: 2145년 미래의 대한민국 정부는 역사를 왜곡하여 진 실을 외면하고, 시민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주도해 나가고 있다. 이 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지만, 의식 있는 젊은이들 과 지식인들이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느 날, 외국인학교 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이 미래의 자신을 만나 과거의 역사 현장으로 가 게 되고, 그 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적 진실을 직접 체험하고 깨 달은 뒤에 다시 현실로 되돌아와 그동안 올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한 자아를 반성하고 역사 왜곡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하는 참여 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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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 현대] Scene #1 학교 수업이다. 뉴스 알림 소리, 하품하는 아이들이 보이고, 수업 시간이 시작하며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온다. 선생님: 오늘 수업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를 볼 거야. 노트 채점할 거니까 집중하도록. We’re going to watch a documentary on our proud history today. Pay attention, because I’ll be collecting your notes later. 학생들은 졸거나 하품하거나 대놓고 핸드폰을 보고 있다. 다큐멘터 리는 정부에서 출시된 영상으로, 정부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는 방 향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성환: (하품을 하면서) 휴… 아, 피곤해, 도대체 왜 저렇게 쓰잘데기 없는 걸 계속 보는 거야? (핸드폰 진동 울려서 핸드폰을 꺼낸 다) (yawn) This is tiring, why are we even watching this stupid thing? 뉴스속보: 시청 앞 광장서 데모 중 시민들과 경찰 육탄전이 벌어졌다. 경찰측 7명, 민간인 30여명이 중상을 입었음을 알린다. Demonstration turns violent; 7 policemen and 30 civilians injured.

Scene #2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 문 박차고 나간다. 성환은 휴대폰을 내려놓 고 고개를 든다. 이상한 남자가 교실 밖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는 것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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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 (궁금한 표정으로) 누구지? (학급우를 바라보고) 야, 방금 밖에 누구 있었냐? Who was that? Hey, was there someone outside? 수민: 누구? Who? 종이 울리고 카메라는 시계를 보여준다. 성환은 문을 박차고 나간 다. 이상한 남자가 멀리 보인다. 성환: 거기 누구세요? Who’s that?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고 더 빠른 발걸음으로 멀어진다. 성환: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저 사람 뭐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따 라간다.)

Scene #3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이상한 남자가 사라진다. 성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디 갔지? Where did he go? 복도가 점점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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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과거로의 시간 여행 : 6.25] Scene #1 성환: (눈을 부스스 뜨며 신음 소리를 낸다) 으으으으… 여긴 어디야.. (groaning) Where is this?

Scene #2 흙과 연기가 보이다가 화면이 선명해지며 시체들을 발견한다. 성환: (눈을 가리면서 끔찍한 듯이) 아이....뭐야..... (북한군 시체 옷에 서 북한 국기 봄) 북..한군?.... 뭐지? 한국사 시간에 북한과의 전쟁에 대해 배웠던 거 같은데.. 눈을 가리면서 걷다가 발밑에 무엇인가에 넘어진다. 성환: 아… 아파.. (흙으로 파묻힌 무엇인가를 쓸어본다가) 으아아악!! (뒤로 빠르게 움직인다) 뭐야..... 뭐야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Scene #3 시체들 사이에서 부상병들이 이야기한다. 제호, 헉헉 대면서 총을 끌고 가다가 픽 쓰러진다. 성환: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분위기 왜이래 여기 (어슬렁거리면서 앞으로 걸어 나간다) 북한군 (제호): 저...저..기......저.....................기 성환: (두리번거리다 바닥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북한군 발견) 어!!!! (북한군한테 뛰어간다) 북한군 (제호): (끙끙대며 게슴츠레 눈을 뜬다) 저..기요.....사나이... 저.... 내 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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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 뭐야? 북한군(제호):

도....와..........시오.....여................기....쪽............가.. 슴.......주..머니...에................ (기침을 심하게 한다)

성환: (엄청 당황해 하며) 괜찮으세요? 누구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 요? 119부를게요! (핸드폰을 꺼내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뭐 야.... 얜 왜 안돼. (걱정스런 표정으로 핸드폰을 연신 눌러본 다.) 북한군

(제호):

오...른쪽........가.........슴...주머..니에.......편.....편지 (기침을 하며)랑......가...족..... (기침)사...진........... 이..있소.....(기침 조금 더 심하게) 그걸.......나... 대..신........내...내...가..족.......에게.................전.. 해주..소....

성환: (남자 2의 오른쪽 가슴 주머니를 뒤적거린 뒤 피가 살짝 묻은 편지와 가족사진을 찾는다. 편지와 가족사진을 보며) 이..이걸.. 전해주면 되나요?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꼭 어떻게 해서든 전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짐한 듯이 말한다. 고개를 들어 올 린다.) 이후에 북한군, 눈을 뜬 상태로 숨이 멈췄다. 성환: 저기요!!!!!!!! (남자를 몇 번 흔들고 잠시 남자를 바라본 뒤 남자 의 눈을 감겨준다) 그때 쓱 아저씨가 지나간다 성환: 아까 그 아저씨???!!! 아저씨 도와주세요!! (아저씨를 따라가다 다른 시체에 걸려서 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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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과거로의 시간 여행 : 3.1 운동] Scene #1 길거리를 비추는 카메라, 흐릿하다 선명해진다. 어리둥절하던 무리 의 사람들이 다 같이 뛰어가기 시작한다.

Scene #2 탑골공원에서 선언문 낭독을 목격한 사람이 옆 사람과 배경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배경 sound (독립선언문 speech)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 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 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 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 만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 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를 두루 펴 밝히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 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 의 큰 움직임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움이니,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지났는지라, 우리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과 영예가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력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것 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 면, 앞으로의 위협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체모가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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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짓눌려 시든 것을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올바르게 가꾸어 나가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아 니하려면, 자자손손이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길이 누리도록 이끌어 주 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 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고,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 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무기로써 지켜 도와주는 오늘날, 우 리는 나아가 얻고자 하매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랴?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성환: 저 실례지만 지금이 몇 년, 아니 언제인가요 Excuse me, do you have the time—I mean, year—I mean, when is it? 행인 1 (수영): (당혹스러운듯한 표정으로) 언제라 함은 (살짝 웃음을 찾으며)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금년이 1919년 3월 1일이오만. I don’t know what you mean by ‘when,’ but it is March 1st, 1919. 성환: 그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Then, what’s happening? 행인 2 (수연): (뒷짐을 지고) 어느 지방 사람인지 말투가 특이하구먼 허허. 독립선언문 낭송하고 있는 거요. 왜놈들이 우리 나라에 왜 쳐들어 와서는... 에휴 쯧쯧 누구 탓을 하 겠소. (힘없이 슬프게 먼 곳을 보며) 힘이 없는 우리 탓이지요. (좀 쉬었다가) 어떻게 이 나라는 조용한 날 이 없는지 모르겠소. 그 소문 들었소? 지금 서울뿐만 아니라 청안도, 함경도 그리고 황해도에까지 운동이 퍼졌다고 하오 You’ve got a strange accent there. He’s reading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he Japanese invaded our country… but w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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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uld we blame? Just us. Powerless. There isn’t a day in this country that’s quiet. Have you heard? The protests have spread from Seoul to Cheonan, Hamgyeong, and Hwanghae. 성환: 예? 이 운동이 그렇게 크게 퍼지고 있다고요? Eh? Protests that widespread? 행인 1 (수영): 그렇다고 하오. 지금도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 에 참여하기 시작하니 말이오. That’s right. It’s spreading at this moment! 성환: 이거... 금방 끝나지 않을 거 같은데... This doesn’t look like it’ll end any time soon 행인 2 수연: 뭐 그거야... 역사가 어찌 흐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사라진다)

Scene #3 길거리에서 만세 운동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머리띠 를 돌려 나누어 가진다. 서로를 다독이다 한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모두 앞으로 전진한다. 전체적인 frame에서 중간에 있는 사람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군이 전방에서 총을 겨눈다. 그리고는 앞줄에 2~3명 쓰러진다.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대 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뒤에 몇 명은 현수막 또는 포스터에 “우리 에게 자유를 달라!” 이런 포스터 들면서 “대한독립만세!” 외친다. 성환, 어느 사람에 의해 끌려 당황하며 뛰어간다. 성환: 뭐야!

Scen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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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들 나타나 대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위해 집결한다. 진압세력 후퇴한다. 서로 다독이는 사람들이 보이고, 순사 한 명이 “돌아가시오! 이제는 더 이상…”하며 경고한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상인들도 머리띠를 조여매고 집결한다.

Scene #5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 앞으로 전진한다. 같이 뛰던 주인공 이 그 자리에서 멈추고 앞을 왼쪽에서 오른쪽 둘러본다. 모든 사람 들이 맞거나, 쓰러졌거나, 총에 맞았다. 정면을 보자, 누군가 총을 이마에 겨누고, 그 순간 누가 뒤로 잡아당김. 성환: (나쁜 꿈에서 깬 듯이) 으아아아아… 아… 아아아… … 어라?? 나 죽은 건가… 이대로…? Ahhhhh...ah? Am I dead? Just like that? 아저씨: 후아, 아슬아슬했다야.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panting) That was close! You almost died. 성환: 아! 거기 아저씨! 내가 지금 그 쪽 따라왔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요. 내가 있던 곳으로 돌려주세요. (버릇없게) 여긴 도대체 어디 에요? (반말 같은 말투) 그 목숨을 잃은 많은 군인들이나 대한 독립을 외치던 시위는 또 뭐고요? (생각해내려는 듯한 표정으 로) 분명 한국사 시간에서 배운 일들이랑 너무나도 비슷한 사건 들이었는데... Hey you! I followed you and all this happened. Bring me back home! Where is this? And what about all those dead soldiers or the independence demonstrations? It was so similar what we were learning in history class... 아저씨: 일단은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를...... Just calm down and lis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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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 (말을 끊으면서 아저씨를 쳐다보며 외친다) 아! 6.25 전쟁이랑 독립운동! (스스로 생각하듯이) 그 문제 많은 공산당 북한의 침 입을 물리쳐 나라를 지켜냈던 6.25전쟁과 무자비한 왜의 지배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목숨 받쳐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독립운동, 아마 3.1 독립운동 같은 거 맞나? 너무나도 비슷했 는데… Ah! The Korean War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It was the war we fought to defend ourselves against communist North Korea!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people gave their lives for to escape the ruthless Japanese rule! Was it the March 1st Movement? It was so similar... 아저씨: 그래. 그 사건들을 경험한 게 맞..그거 미안하게 됐네.… (혼자 얼버무리듯이 뒷말을 흐리며) 지금 너의 심정은 나도 겪어봐서 알지... (다시 당당하게 물으며) 어찌됐든 그것 외에 달리 느낀 점은 없니? Yes. You did experien--Sorry about that...I know what you’re going through...Besides that, did you feel anything else? 성환: 에? 뭔 소리에요 그건. Eh? What are you talking about? 아저씨: 그 많은 군인들을 보면서, 저 열정적으로 시위를 하는 사람들 을 보면서, 잊혀진 사람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없니? Didn’t you feel anything looking at those dead soldiers, those passionate protestors, those now-forgotten people? 성환: (기억을 되돌아보는 표정으로) 음… 그러게요...일단 너무 혼란스 러웠어요. 너무 많은 일들이 한 번에 지나갔기 때문이었는지,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았어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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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죽은 군인들 사이에서 만난 북한군으로부터 느낀 것은.. 우 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것만큼 북한군이 무자비하고 피를 좋 아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어요! (주머니에서 죽은 군인이 전해줬던 편지와 사진을 꺼내며 살짝 흥분한 듯이) 그들도 남쪽 에 남은 가족들이 있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던 것을 보면… 북한군들도 폭력을 일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 람들이 아닌, 우리와 같이, (흥분해서 살짝 말을 더듬으며) 가..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인간적인 사람들이란 것을 보게된 것 같아요. (차분하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런데 왜 역 사시간에는 북한을 포악하고 야만적인 나라로 표현한 거지?... Hmm... First it was so confusing... So much went by so fast, there was a lot that I didn’t understand. But that North Korean soldier I met on the battlefield… he made me realize that North Korea isn’t really as bloodthirsty as we learned in school! They had family in the south too... and they and thought them in their last moment s… They aren’t cold-blooded murderers, they’re human too. They love and miss their families, just like us. But why were we told different in history class? 아저씨: 그것은... That is-박성환: (아저씨 말을 끊으며) 아! 그리고 Oh! And 아저씨는 말이 계속 끊기자 스스로 몰두하고 있는 성환을 보며 인 자하게 웃는다. 박성환: (급하게 조금 목소리 톤을 높이며) 3.1운동을 같이 참여한 것 을 통해 느낀 것은 시위의 대단함이었어요. (좀 더 차분하고 천천히) 분명 지금까지는 시위와 데모에 대해 생각하면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쓸데없이, 무모하게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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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시위가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 을 깨달았어요. 많은 의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가며 이런 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이 존재한 다 는 것도 깨달았고요. Until now, I didn’t understand why people would thoughtlessly and uselessly demonstrate in such a wonderful world, but I realized that it is not meaningless. I also realized that the Korea of today exists thanks to the efforts of many determined people. 아저씨: 그래 (인자한 미소로) 그 정도면 앞으로 바른 길로 갈 것 같구 나. 지금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너도 의 지 있는 사람으로 크거라. 뭐, 예전의 나보다 나은 듯한 걸 보니 앞으로 잘 할거 같구나. You’ll be fine. You’re on the right path. Become one of those determined people you just met. Well, you’re on the right path; you’re better than my old self. 박성환: 네? 잠시 만요. 근데 아저씨는 누구에요? 그리고 왜 계속 나 랑 아저씨를 비교하는 거죠? Huh? Wait a sec. But who are you? And why do you keep comparing yourself to me..? 아저씨: (급하게 성환이 눈을 가리며)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This should be enough. 박성환: 뭐…? (무기력하게 아저씨의 손이 가는 대로) Wha…? 아저씨: 잠깐 다시 자거라. 아 그리고 나에 대해 물었었지.. 음.. 나는, 뭐 이렇게 말하면 웃기게 들릴 걸 알지만, 미래에서 온 너다. 나도 너와 같이 미래의 나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었지.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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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 웃음) 잘 자라 성환아. Good night. Get some rest. Oh and you asked about me...hmm...you might laugh at this, but I’m your future self. I also learned much from my own future self like you did. 아저씨의 목소리 조금씩 작아지고, 화면이 하얗고 흐리게 변했다 가 어두워진다. 화면이 바뀌며 교실의 수업종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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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귀환] Scene #1 핸드폰 알림 소리에 깨어난 성환, 학교 종소리가 울린다. 핸드폰에 서 학생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문자가 온다. 잠시 후 수업종이 울리며, 밖을 보니 작은 그룹의 학생들이 수상하 게 학교 밖으로 나간다.

Scene #2 학생들 몇 명 우르르 몰려가는 것 발견한다. 갑자기 성환이의 전화 가 울린다. 친구: (전화로) 야 수업도 끝났다. PC 방 가자. 성환: 알겠어...가방만 빨리 챙기고 나갈게 학교를 나서던 중 벽에 붙어있던 데모참여에 관한 전단지를 본다. 일부 학생들은 시위 참여에 관한 전단지 제작하고 회의실에서 학생 들이 모여 데모를 준비하고 있다. 성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바쁜 일이 있어서 못 나간다고 말하고 거리로 나가 시위에 동참한다. 엔딩 크레디트 Ending Credit: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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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015 APIS 제 5회 한국어 백일장 ‘다섯. 5’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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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다섯 명의 아이들 Grade 11 이송원 Shannon Yi 아침 이슬 잔디 위에 송글송글 돋아 오를 때 쯤 졸렸던 새벽 잠 뿌리치고 커다란 잠자리채 손에 쥔 채 어머니가 건네주는 김밥 두 줄 들뜬 마음에 먹지도 못하고 ‘다녀오겠습니다’ 한 마디 외치고 집 밖으로 뛰어나가는 한 아이 산 주변 골목길에 차가운 새벽 공기 들이마시며 형아들은 언제 오나, 손에 입김도 훅훅 불어보고 황토색 흙 바닥에 쓱쓱 도롱뇽 한 마리 낙서해보는 한 아이 이 손에는 물병 한 통, 저 손에는 천조가리 꽉 쥐어들고 길게 늘어진 멜빵바지도 질질 하얀 신발끈도 질질 형아 동생 뒤따라서 산기슭 영차영차 올라가는 한 아이 길고 거친 잡초 사이 짧은 두 다리 가려운지 ‘형아 잠깐만!’ 그 자리 멈춰 서서 양 쪽 다리 벅벅 긁고 자기도 웃긴지 까르륵 웃으며 금방 쫓아가는 한 아이 까만 돌솥같은 바가지 머리 땀에 흠뻑 젖고 새빨간 볼에 흘러내리는 땀방울 닦아도 멈추지 않을 뿐인데 동생들 잃어버릴라 뒤로 봤다 앞에 봤다 바쁘기도 하지, 도롱뇽 잡기는 잊은 지도 오래인 마지막 아이 설레는 마음 모두 하나로 다섯 아이들 산속으로 달리는 모습 저 멀리 들판에 검은 그림자 하나 다섯 아이들 뿔뿔이 흩어져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밤이 오기 전 어둠이 몰려오듯 검은 그림자 하나 어디로 갔을까, 다섯 명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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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ve Boys When the morning dew sets soft on the grass The first boy wakes himself up from his dreams and nightmares, and picks up a net Then rushes past his mother’s snacks, her goodbye kiss, Briskly waves and hurries outside. At the mountain hillside another boy stands, breathing in the early dawn air Wonders when the others will join him, blowing out a gust of cold Picks up a twig, and draws a small salamander beside his feet. Running his small legs through the wild, wild grass, He stops and scratches his scarlet-swollen legs and shouts “Wait up” Giggling to himself, the third boy trots along to the other boys. His bucket of soot black hair damp in drizzles of sweat, His cheeks red and puffed, eyes watering, The fourth boy looks back and forth to check on the boys, His thoughts no longer pondering on catching the salamander. As the naive, foolish five boys ran into the mountain range A dark shadow stood far covering, like an eclipse As the boys ran up and down the hills, under the rocks and over the waters, The dark shadow strode towards, struck his dark, dark blanket over And lulled them into his underground cellar, And the boys were gone for good- or not so good, bad. - On March 26th 1991, five elementary boys aged from seven to thirteen were found missing, after going on their search for a salamander and its eggs. It is recorded as one of South Korea’s three most Permanently Unsolved Events. This poem is a narrative script-poem about the day that the five boys went mis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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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운문]

오월의 벚꽃 Grade 12 박성환 Harry Park 겨울을 뚫고 꽃샘 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한 낯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고 네 따스한 모습 보러 왔다.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 불 내주고 네 해맑은 웃음 보러 왔다. 땅과 약속하였다. 돌아오리라고 나무와도 약속하였다. 돌아오리라고 그 약속 지키러, 나 새싹 틔고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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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운문]

새벽 다섯 시 Grade 11 김영은 Grace Kim 나에겐 사랑이 쉽지 않다 관계를 맺을 때 마다 길고 좋게 끝난 적이 없어서 그렇다 그런 나에게 봄날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12월의 차가운 눈을 벚꽃으로 바꿔준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새벽 다섯 시라고 부른다 어렸을 때 자주 만났던 우리는 한 명이 다른 나라로 이사 가게 되서 몇 년 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나의 수많은 기억들 속에 잊혀 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를 이번 겨울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어색함이 우릴 덮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우리는 옛날처럼 친해졌다 나는 그에 대한 감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움푹 파진 보조개와 눈웃음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를 만날 때 마다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 밖에 안 했다 그렇게 우리는 뉴욕의 차가운 밤거리를 같이 걸으며 우리는 사소한 얘기에 웃음꽃이 폈고 옛날 추억을 되돌리면서 약속 하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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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 하나 때문에 나는 새벽 다섯 시라는 시간이 참 싫다 우리는 여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고 그 여름을 기다리는 설렘과 다급한 마음은 나를 매일 새벽 다섯 시까지 눈을 못 붙이게 한다 나는 그럴 꿈을 나는

가끔 잠이 잘 들 때가 있다 때는 꼭 그가 꿈을 타고 나를 방문 한다 꿀 때 마다 너무 현실처럼 느껴져서 또 새벽 다섯 시에 꿈에서 깬다

나는 그를 새벽 다섯 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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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산문]

올해도 오래도록 Grade 12 김지원 Jee Won Kim “어제 저녁 새벽 11시 5분경, 18세 김모 양이 성북남진 아파트 옥 상에서 몸을 던져…” 또 였다. 기사에 뜨든 뉴스에 나오든 매주 빠짐없이 듣게 되는 누군 가의 안타까운 선택에 대한 보도. 누군가는 경제적 압박감 때문에, 누 구는 성적 열등감, 또 다른 누구는 따돌림을 통한 사회적 고립 때문에 자신의 몸을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뿌리치고 하늘로 발걸음을 옮긴다. 듣기에는 안타깝지만 너무나도 많은, 그래서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뻔한 이야기들. 학교 쉬는 시간에 잠깐 언급될 뿐인 그런 한 사 람 한 사람의 슬픈 선택 그리고 죽음. 나 또한 자살에 대해서 안타깝 다고는 매번 생각하였지만 이 이상도 그 이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들의 삶과 그 선택은 나와는 동떨어진 일이었고 나에겐 엮이고 싶지 않아 기피하는 그런 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성북남진 아파트, 내가 사는 곳에서 불과 10 분 거리 밖에 되지 않는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진 그녀는 나와 친 누나처럼 지내던 교회의 누나였다. 고작 1년 반 전에 만나 막상 친해 진 지는 길게 봐야 1년이었지만 그간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다 보니 교회에선 나와 누구보다 친한 사람, 많이 의지하게 되고 무슨 일이 있 으면 얘기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친해지게 된 이유 에는 그녀의 활발한 성격과 해맑은 웃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던 누나의 떠남, 믿기지 않았다. 분명 이 번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웃으며 말 걸어줄 누나였는데…… 교회 전도사님으로부터 아침 일찍 온 전화를 듣자마자 나는 검은 운 동화를 구겨 신은 채 누나의 집 쪽으로 향했다. 전부터 자신의 집 위 치를 알리길 꺼려했던 누나라 직접 그 집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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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성북남진 아파트 안에 있는 자그 마한 놀이터. 분명 그 놀이터의 녹슨 벤치 아래에는 무언가 남겨져 있 을 것이 분명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가려진 벤치 아래에 우리는 자주 이번 한 주도 힘내라는 글귀나 쪽지를 남겨놓곤 했기 때문이었 다. 10분 거리를 5분도 채 안 돼 헉헉거리며 달려온 나에게 그 벤치 가 전해준 것은 손바닥 크기의 작은 다섯 개의 쪽지였다. 나에게 마지 막 인사의 편지 하나도 없이, 그녀가 남긴 것은 매일매일 그녀가 겪어 왔던 일들을 기록해놓은 일기장의 일부였다. 이렇게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떠난 그 누나가 미웠지만 그 쪽지들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 어느 새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을 발견하였다. 그 작은 일기들로 내가 알 수 있었던 그녀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비 극적이었다. 첫 번째 쪽지는 그녀가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고, 그 두 번째는 어머니 가 여자를 좋아하시는 새아버지와 재혼 하셨을 때도 아버지가 여자와 술에만 그가 벌어들인 거의 모든 돈을 사용했기 때문에 매일 불어나는 빚과 전혀 나아지지 않는 환경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쪽지에 적혀 있던 경제적 문제는 나머지 두 쪽지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것일 정도로 작 은 것이었다. 세 번째 쪽지는 새아버지와 함께 온 의붓오빠에 대한 내 용을, 네 번째 쪽지는 그 누나의 쌍둥이 동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 었다. 새로 온 오빠는 여러 여자를 쫓아다니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 해서였는지 많은 관심을 요구했고 이는 그 누나와 누나의 쌍둥이 동생 을 폭행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오빠는 그 두 쌍둥이에게 매번 조금씩 받던 용돈을 빼앗았고, 학교에서 맛있는 것을 받으면 먹지 않고 가져 오도록 강요했으며, 심심하면 주먹과 발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때렸 다. 그랬기에 그들의 몸에는 멍이 사라지는 날이 없었지만 서로 위해 주고 대신 맞아주면서 의지했기에 살아갈 수 있었다고 적혀있었다. 그 리고 네 번째 쪽지였다. 네 번째 쪽지는 바로 어제의 얘기가 적혀있었 고 내용은 버티기 힘들었던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조금 방황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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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동생이 어떻게 오토바이를 타다 한 여성을 치게 되었는지에 대 한, 그리고 그 치인 여성이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유 일한 지지대였던 동생을 구치소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누나의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의지할 곳을 잃은 누나가 얼마나 불안했고 두 려웠는지에 대한 그런 이야기였다. 이러한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매번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스 스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얘기해주지 않은 누나가 많이 미웠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문 제 때문에 속이 썩어가던 누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단 생각에 너무 미안하고 스스로 화가 났다. 그랬기에 손이 떨렸고 마지막 쪽지 를 여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마지막 다섯 번째 쪽지 속에 적혀 있 던 누나의 글에는 교회에서 나를 포함한 여러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 서 매일 다짐해 왔던 글귀가 담겨 있었다. “올해도 오래도록 그래왔듯 오늘처럼” 이 글귀처럼 조금만 더 버텨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욱하게 올라오는 너무나도 다양한 감정들과 함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물 론 쪽지들을 읽으면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세상에서 소외 받아 고통 받고 있는 소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내게 가까운 사람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충격 적이었고 그래서 아마 누나가 살아있었을 때 내게 이러한 얘기를 해줬 더라면 오히려 당황스러워 누나에게 상처가 되는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는 것이었지만 벌써부터 누나의 환한 미소가 그리웠다. 이러한 수만 가지의 생각에 잠시 사로잡혀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땅에 널브러진 다섯 쪽지 들과 벤치 아래 작게 피어 그 쪽지들을 감싸던 알 수 없는 노란 잡초 꽃이었다. 따스한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던 작은 꽃은 누나의 웃음을 연상시켰는지 다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분명 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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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산문]

그저 다섯 손가락 Grade 12 유석훈 Nicholas Yu “야, 야! 우리 쎄쎄쎄 하자!” “그래! 푸~른 하늘~” 두 여자 아이가 쎄쎄쎄를 하는데 한 남자 아이가 조심히 걸어왔다. “저… 친구들아 나도 혹시 껴도 될까?” 남자아이가 살며시 말을 건 냈다. “음…” 꽁지머리를 한 아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얼굴에 난감한 빛을 띠며 말을 이었다. “음… 껴주고 싶어도 너는… 손이 하나 밖에 없잖아… 미안” • • • 안녕하십니꺼? 내는 남서 소학교를 다니고 있는 김재준 친구라고 함네다.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3년 전 갓 남조선으로 넘어 왔을 때에 비하며언 많이 좋아 졌다고 제 학급 급우들이 말해 주 더군요. 저도 그렇게 느끼고요 하하. 제가 북조선에서 왔다는 것을 빼 더라도 이곳 남조선의 급우들과는 다른 점이 많지만 모두 거두절미하 고 가장 중요한 것만 말하자면… 예, 제게는 손이 하나밖에 없슴네다. 이 곳에서 많은 어르신들과 급우들은 제 손을 보며 안타까워 하지만 저는 일 없슴네다.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이 손을 잃게 된 데에는 조금 가슴 후벼 파고 기나긴 사정이 있습 니다만은 깊게 들어가지 않고 그저 간략하게만 알려 드리겠습네다. 북 조선을 탈출해 남조선으로 월남을 하려 저희 가족은 몇 날 몇 일을 걸 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드디어 실천하게 되었습네다. 초승달에 구름으로 가려져 칠흙같은 어두운 밤에 저희 가족은 다행히 아부지 동 지분의 도움을 받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있었습네다. 그 분께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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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전해드릴 말이 없다고 생각합네다. 내 아부지 의 계획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차질이 생겼었습네다. 인신매 매범들이었었죠. 정말 끔찍했었죠… 그 때 그들로부터 도망치려다 저 는 제 왼손과 함께 아부지를 잃게 되었습네다. 그때 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만 않았어도… 오마니께서는 내를 자책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 케 할 수 밖에 없는것 같습네다. 그 후 가까스로 탈출한 오마니와는 이리저리 망명하며 여러 사람들 의 손들을 거쳐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였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를 받아 들이셨던 갑부집 동포분께서 오마니를 맘에 들어하시게 되었고, 저를 남조선으로 어떻게 빼어 내준다는 조건 하에 이리로 오게 되었습 네다. 다행히 남조선에서는 아부지의 지인을 뵙게 되고 그 분의 도움 을 받아 오늘 날까지 있을 수 있게 되었죠. 내 그 과거사는 이쯤하고 이제 많은 동지들이 궁금해 하던 내 행복 의 비결에 대하여 알려드리고자 합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손을 보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숨부터 내쉬고는 내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가락, 총질을 합네다. 사실 손이 하나밖에 없어서 불편한 점들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합네다. 제가 처음 들어보고 그 음색에 매료 된 피아노나 플룻을 배울 수 없다는 점이고, 급우들에게 아직 한창 배 우는 중이지만 그 동지들과 전화기로 문자를 할 때면 속도면에서는 내 가 한참 뒤쳐지더군요. 나 참, 급우들은 평생 전화기 타자치기 연습만 했나 어찌나 빠르던지. 하지만 위 모든 것들을 제외 하고도 내는 아직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습네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할 수 있기 때문입네다. 일단 아직 연필을 잡을 수 있습네다. 공부를 할 수도 있고 가끔 5점 을 받을 수 있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는 그저 글을 쓸 수 있어 기뿝네다. 오마니께 편지를 쓸 수 있기 때문입네다. 매일 밤 내 는 종이 한 장을 공책에서 찢어서 글을 씁네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 지, 무엇이 신비로왔는지, 그리고 무엇이 재밌었는지. 가끔 내가 너무 칠칠맞아 종이를 물방울들로 적시기도 합네다. 그러면 내 글씨는 곧 번지지요. 하지만 내는 지우려거나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써 내려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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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다. 그리고 웃습네다. 아직 웃을 수 있으니까요. 오마니께 편지를 보 낼 수 있으니까요. 오마니의 안부를 여쭙고 오마니와 소통을 할 수 있 으니까요. 그리고 비록 간간히지만 오마니께 오는 편지를 받아서 제 손에 들고 읽을 수도 있습네다. 그저 종이 한 장을 손에 드는 것이지 만 내 오른 손에 담긴 그 무게는 내가 들어 본 어떠한 물체들보다 무 겁다고 말 할 수 있습네다. 그리고 내는 내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볼 수 있어서 행복하기만 할 따름입네다. 또한 아부지를 뵙고 싶을 때 뵈올 수 있어서 그저 기쁘기 만 합네다. 그저 종이일 뿐입니다만, 낡은 사진 두 장이지요. 화질도 나빠서 그저 넋두리 놓고 바라보게 하는 사진들이지요. 하지만 내는 그저 좋기만 합네다. 왜냐하면 이 두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가장 비싼 사진 두 장이기 때문입네다. 설령 김정은 동포께서 직접 오셔서 내게 부탁을 해도 내어 줄 수 없는 종이 두 장입네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오직 두 장의 사진이기 때문입네다. 저는 힘 이 들 때면 제 다섯 손가락으로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아부지께 안 부를 묻고 어머니를 뵙습네다. 그러면 두 분은 항상 내를 향해 미소를 짓고 계시지요. 그리곤 내게 속삭이는 듯 합네다. 우리 아들 장하다고. 우리 김재준이가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두 분을 다시 주머니에 담아두면 추운 겨울에도 그저 따뜻하기 짝이 없습네다. 있죠, 내는 비록 악기를 연주 할 수도 없지만, 전화기와 전자상자를 내 급우들만큼 빠르게 칠수도 없지만, 농구나 배구같은 운동을 못 하 지만, 가방을 매는 데도 그리고 교과서를 가방에 넣는 데도 가끔 학우 들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남들에게 손가락 총질을 받거나 불쌍하다고 보이는 별 것 없어 보이는 다섯 손가락이지만. 내게는 존재함으로 내 삶의 의미가 된, 행복이 된 이 다섯 손가락 때문에 오늘도 어깨를 펴 고 당당히 걸을 수 있습네다. 머리를 치켜 올리며 웃을 수 있습네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항상 곁에 계셔 주시니까요.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 그립습니다… 두 분 다 안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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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운문]

다섯 시 Grade 8 오승민 Andy Oh 해가 곧 지네 곧 밤이 다가오네 나에게 다섯 시는 가장 우울한 시간이자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다 다섯 시는 나를 외롭게 만든다 노란 하늘이 마치 내가 혼자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하지만 다섯 시는 가장 하늘이 아름다운 시간이다 아침에 뜨는 해, 밤에 빛나는 별 모두 아름답다 하지만 아침에 뜨는 해와 밤에 빛나는 달을 보기 위해선 다섯 시를 거쳐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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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침에 뜨는 해, 밤에 빛나는 별보다 아름다운 건 다섯 시의 주황색 하늘 한쪽에 내려가는 해와, 한쪽에서 옅게 보이는 달 아침의 미(美)와, 밤의 미(美)가 만나는 시간, 그게 바로 다섯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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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운문]

오만 가지 생각 Grade 10 유유진 Sophie Yoo 사진 중에 그런 사진이 있지 않는가 뭔가 시간에 멈춰있는 듯한 그런 사진이 다들 바삐 움직일 때 한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는 그런 사진 그 사람의 시간만이 멈춰 있듯이, 시간이 거꾸로 가듯, 그런 사진 사진 중에 그런 사진을 보면 오만 가지 생각이 매몰아 치는 것이 아닌가 마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사진 중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인가 바삐 움직이는 무리에 속한 이인가 또 무엇이 맞는 것일까 그러하지 않는가, 이 오만 가지 생각들을 들게 하는 그런 사진 내 깊숙히 담아두었던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오만가지 생각들이 나를 일깨운다, 나를 알아간다 모두 다 하나쯤 있지 않는가, 그런 사진이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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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산문]

사라진 지문 다섯 개 Grade 11 김유리 Stephanie Kim 사고로 인해 나는 몇 주간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가스 누출 사고 라고 했다. 사고가 있기 전 아무런 사고의 예상 징후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사고 당일 말 그대로 큰 폭발에 몸 전체가 휘말리고 말았 다. 응급차에 실려가 수술이 끝난 후 그 뒤로 한 며칠간은 계속 의식 이 없었다고 한다. 군데군데 여러 화상을 입었지만 나 이외에도 그 곳 에 있던 사람들 중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하니 목숨을 건진 것만 으로도 나름 다행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병실에 가만히 누워 있 어야만 하는 그 침묵의 시간 동안 가족들과 지인들이 나를 보러 왔었 다. 그들은 하나같이 병실에 들어서며 제일 처음 내 양손을 가만히 내려 다보더니 이내 동정의 말을 건네거나 울음을 터뜨리거나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열 개의 손가락 마디가 붙어있어야 할 내 손은 사고로 그 반절이 날아가 양 손 모두 합쳐 총 다섯 개의 손가락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병실 안에 있을 땐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밤이 되면 밀려오는 상실감과 아픔에 나는 허공 을 응시하듯 바라보며 남겨진 손가락들과 사라진 그것들 사이의 간극 에 조용히 울어야만 했다. 없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던, 한 때 뽀얀 피부가 덮이고 그 아래 따뜻한 혈액이 흘렀던, 단정한 손등의 끝에 연결되어 있던 작 은 뼈마디들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조금 구부리자 남은 손 가락의 절단된 마디들이 채 구부려지지 못하고 위를 향해 삐죽 솟아있 었다. 손등과 손바닥엔 크고 작은 거뭇한 화상 자국이 아직도 새빨갛 게 남아, 이제 와서는 피부 본연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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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간 손가락 마디의 주변부들은 수술을 통해 더 다듬어졌는지 절 단면이 깨끗하게 잘려있었다. 왼손은 총 세 개, 오른손은 총 두 개가 남아 신기하게도 양 손의 손가락이 골고루 없어졌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주로 쓰는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가 남아서 웬만한 것들은 오 른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받쳐주는 손가락이 모두 날아가 오 른손으로는 도저히 글씨를 쓸 수 없었다. 잘 되지도 않는 재활훈련에 지쳐 비정상적으로 짧아진 손가락들을 어루만질 때면 난 또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불길 안에 휩싸였던 사건 의 당일 날을 곱씹고 있었다. 내가 그 곳에 있었던 이유, 그런 사고가 일어났던 이유, 그리고 나 때문에 휘말린 운 나쁜 사람들까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온 몸의 화상을 입고 신체의 일부마저 잃을 정도로 꼭 내가 꼭 그 일을 마쳤어야 했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하 지만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꼭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에 재수 없게 휘말린 것 같아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오는 회의감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퇴원 후 한동안 간병인과 생활하며 손가락들로 이런저런 실험을 한 나는 이내 사고가 일어나기 전 하던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겠다는 생 각에 안도했다. 오히려 양 손의 지문도 화상으로 전부 사라진 지금 어 떻게 보면 상황은 더 나아진 걸 수도 있다. 리움 미술관 사고가 일어나 도난당한 보물 1424호 달항아리의 수사 가 시작 된지 한 달 째, 전시장에서 작은 지문이 몇 개나 발견 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문의 주인공을 아직까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문의 주인은커녕 그 지문이 붙어있는 손가락조차 분명 아무 도 영영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운 나쁘게 그 날 그 장소에서 상관 없는 일에 휘말린 피해자로 알려진 나에게 도난물의 행방을 물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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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 산문]

다섯 가지의 추억 Grade 12 채수민 Robin Chae 사람들이 나에게 어릴 적 추억을 말하여보라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다섯 가지의 고리들을 떠올린다. ‘왕따’였으나 잠시나마 친구가 생겼던 초등학교 5학년, 미국에 계시는 이모의 지인 목사님 댁에서 지냈던 겨 울 방학, 미국 Quarry Lane School 학교를 다녔던 기간, 목사님 교 회에서 노래를 배우던 순간들, 그리고 KIMEA에서 연습했던 합창단 시절이다. 겨우 5학년인 어린애가 무슨 추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내 삶 에서 꽤나 중요했었던 순간들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다섯 가지들의 추억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다섯 가지의 향수를 다시 한 번 맛보기 위해 지금의 내가 살아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시절, 그렇게 행복 하거나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지는 않 았다. 나는 친구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많이 수근 거리곤 했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아마도 내 외적인 모 양에 대해서 인 듯하였다. 늘 들리던 소리는 “쟤는 코 수술 했다면서 왜 바뀐 모습이 없을까?” 혹은 “코 진짜 크다.. 이상해 바이러스 옮길 거 같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각 없이 나온 그 말들이 어렸던 나 에게는 아마 적잖이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4학년이 되던 해에는 그 런 말들을 들어도 그냥 유동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흘러가는 말이 고, 아이들이 그렇게 말한다 한들 달라지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고, 이미 수없이 들었던 말들이기에 마치 안 친 한 아이들이 예의로 무뚝뚝한 인사를 하는 것처럼, 혹은 다친 지 너무 오래되어 고름딱지가 내려앉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만져도 아무 느낌 없는 것이었기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5학년이 되어서도 별 반 다른 차이는 못 느꼈다. 그저 아이들이 바라보는 그 시선만이 조금 따가웠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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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5학년 2학기, 중국에서 한 아이가 전학을 왔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창희이다. 지금도 떠오른다. “우리 지금 뭐할까?”라고 말하 면서 다가오던 그 아이의 모습을. 나는 그 광경이 너무 낯설었고 적응 이 안 되어서 머뭇거렸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 아이는 내 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서로에게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고, 다른 아이들도 그제야 나를 쳐다보는 모습과 행동들이 달라졌다. 나는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 덕분에 친구가 많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한 아이를 통해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 선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하는 이중성이었다. 하지만 뭔 상관이 랴, 그저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제야 나의 얼어붙고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던 고름 덩어리들이 조금씩 녹아드는 듯싶었다. 5학년 겨울방학, 나는 미국으로 놀러 갔다. 왜인지는 기억이 안 나 지만, 나는 누나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누나가 유학을 가기 전 나 는 누나랑 참 많이도 싸웠다. 서로 욕하고 때리고 여차하면 누나가 아 끼던 만화책도 찢어버리곤 하였다. 때문에 이모는 나를 이모 집이 아 닌 평소 알고 계시던 목사님 댁으로 보내어 겨울방학을 지내게 하셨 다. 목사님은 그때 내가 한국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많은 것들을 이모 한테서 들은 상태셨고, 때문에 누구보다 나를 이해 해 주셨다. 목사님 이 나에게 건네셨던 말투나 행동이 너무나도 따뜻해 잠시나마 한국으 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곤 하였다. ‘미주 한인 섬김 과 나눔’ 교회에서 목사님은 늘 수요일, 금요일, 그리고 일요일에 예배 를 드렸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한글학교라고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 세들을 위해서 무료로 한글을 가르쳐 주는 일도 하셨다. 여기서 제일 나에게 와 닿았고, 좋았던 것은 금요일 밤 예배였다. 금요일 예배는 아무도 보지 않고, 교회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큰소리로 기도를 하거나 울어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하나님께 말을 할 수가 있었고, 은혜를 받아 나에 대한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많은 상처들이 회복되 어 한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더 잃지 않으려고 각오 를 몇 번이고 다짐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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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덧, Quarry Lane School라는 학교를 발판으로 나의 의미 있던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몇 달 안 되 어 나는 새 학년을 맞이했다. 그 때는 내가 6학년이었고, 그리고 Quarry Lane School이라는 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상태였다. 원래 이 학교는 시험을 봐야 들어 갈 수 있는 학교였지만, 5학년 여름 방학 당시 갔었던 Quarry Lane School Camp를 통해 나를 주의 깊 게 관찰 했었던 선생님들이 나를 추천해 주셨다. 그 이유는 다른 아이 들과 쉽게 친해졌고, 반 안에서 열심히 하려는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 다고 한다. 6학년 2학기 조금 지나고 나서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 고, Quarry Lane School로 바로 진학 할 수 있었다. 첫 해는 영어가 자유자재로 잘 되지 않아 많이 힘들고 지쳤었지만, 그 다음 해 많은 아이들과 금새 친해져 있었다. 친한 친구들과 농구팀에 들어갔고 그리 고 재즈밴드에 들어가 기타를 치기도 하였고 그래서 학교를 부모님께 소개하는 날에는 학교 내에 있는 다른 건물에서 공연을 했고, 때로는 큰 공연장을 빌려 부모님들에게 노래와 연극을 보여드리곤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공연한 노래는 ‘Viva la vida’ 라는 노래다.. 재즈 밴드를 지휘해주시던 선생님은 한국 노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계 셨고, 최대한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해주려고 노력 을 많이 하셨다. 나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노력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고맙고, 또한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시려고 했던 거에 대해 서도 너무 감사했다. 이 미국과 Quarry Lane 학교는 나에게 많은 경 험과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주고 내가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주는 매 개체가 돼 주었다. 목사님 댁으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반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아는 간사님께 ‘노래’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노래’라는 것은 내 인 생에 전환점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5학년의 창희와, 겨울방학 때 받 은 많은 은혜들, 그리고 Quarry Lane 학교가 나 자신의 정체성을 위 한 디딤돌 역할을 해주었지만 아직 부족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이 자신감 이라는 것은 어떤 노력을 하여도 쉽게 해결 이 되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원래 나를 봐 주시던 분들과의 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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툼과 의견 차이가 있어 집을 옮기게 됐는데, 그 때의 후회가 겹쳐오던 때였다. 임희철 간사님은 그런 나를 바로 잡아 주셨다. 늘 내가 자신감이 없 고 어깨가 굽어져 있는 모습에 불만을 가지시고 일부러 계속 혼을 내 셨다. 어느 날 갑자기 간사님은 나를 목사님 방으로 오라고 하더니, “너 노래를 한 번 배워보지 않을래?” 라며 물으셨다. 어떻게 된 일이 었을까, 늘 혼내고 타박하시던 분이 나를 미워하는 줄만 알았던 그 분 이 나에게 그 질문을 했다니.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얼떨결에 ‘네’ 라 고 대답을 했다. 즐거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좋았고, 그래서 노래만 불렀다. 나의 첫 노래는 소향의 ‘열망의 소망’ 이었다. 처음으 로 연습을 한 노래였고, 그만큼 의미가 있었기에 간사님과 나는 그 노 래를 특송으로 듀엣을 하자고 제안을 하셨다. 첫 공연, 그리고 처음으 로 남들 앞에서 불러 본 노래, 나는 많이 떨었고 불안했다. 하지만 잘 끝냈고 몸에 근육이 풀어져 쓰러질 것 같은 느낌으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평소에 나를 잘 아시던 분들이었기에 오히려 놀라셨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아직도 성악을 배우고 있고 전 공도 음악 쪽으로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처음 음악의 발판을 만들 어준 계기는 희철 간사님이셨고, 그렇기에 좀 더 임희철 간사님의 은 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올해 처음으로 갔던 KIMEA를 잊을 수가 없다. KIMEA 는 National Honors Festival 이라고 각 국제외국인학교에서 몇몇 아이들을 뽑아 합창단, 오케스트라 그리고 빅밴드를 꾸미고 나서 이틀 동안의 연습을 한 뒤 부모님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 당시를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멀리서 오고 한 번 도 맞춰보지 않았던 아이들과의 노래가 그렇게 아름다웠을 수가 없었 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달라도, 학교가 달라도, 음악 하나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더 연습 에 임하였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그때 계셨던 지휘자 분도 감히 잊 을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우리의 장단점을 뽑으면서 많은 습관들을 없애게끔 하셨다. ‘정말 존경스럽다’라는 말이 모자를 만큼 지휘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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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고 의 은 더

주셨고, 리더십이 있으셨기에 우리가 믿고 의지하면서 연습에 임하 콘서트도 잘 끝낼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한다. 그 만큼 많은 아이들 노고가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무나 많 아이들이 음악에 열중하고 집중했던 모습이 아름다워 나의 꿈을 좀 탄탄하게 만들어 줬다.

이 다섯 가지의 추억들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게끔 한다. 이 다섯 가지의 추억들이 나에게 아직은 삶이 살만하다고 자극을 주고 살아가 게 만든다. 비록 처음 생각나는 첫 번째 추억은 나빴을지 몰라도 흉터 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또한 내 자신을 발전 시켜주는 다른 계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을 더 아껴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책 을 많이 했었기에,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에 내 자신에게 만들어 주지 못한 추억들이 없어 더 미안하기에 ‘추억’이라는 단어가 좀 더 애틋하 고 아련하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싶다. 힘들었던 시절 도와주었던 것 이 ‘음악’ 이었고 그 다음에 생겨나기 시작한 ‘친구’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추억들이 갖춰져 있는 이 다섯 가지의 기억들이 내게는 여전히 많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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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운문]

못생긴 다섯 손가락 Grade 11 김리아 Lia Kim 두껍습니다. 짧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중지에 혹도 있습니다 똑바로 펴도, 다시 구부러집니다 반지가 안 어울립니다 부끄러워 소매로 가립니다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제 손은 못생겼습니다 더 이상 일어나지 못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되짚고 일어났습니다 거친 땅이라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래도 오늘 이 순간까지 모든 것들을 기억하게 해주는 제 손은 추억이자 겪었던 수난의 상징입니다 농구를 하다 공을 잘못 받아 비틀어졌습니다 이젠 비틀어진 손가락이지만, 맞은 만큼 강해졌습니다 축구를 하다 공을 잘못 막아 삐었습니다 이젠 안쓰러운 손가락이지만, 승리의 행복을 느꼈습니다 글씨를 씁니다, 마음만큼 연필을 세게 쥐어댑니다 굳은 살이 박혀 온 수고와 노력으로 다른 연약한 것들의 눈물을 이 못난 손으로 닦아주었습니다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제 손은 못생겼습니다만, 보이는 살가죽을 넘어 보이지 않는 뼈 속까지도 제 손이기에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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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제 손은 특별합니다 상처를 디딤돌로 삼아 일어 선 제 손은 특별합니다 피와 땀을 쥐는 제 손은 더 이상 약하지 않습니다 그런 제 손안에 아름다운 세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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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운문]

압구정 5번 출구 Grade 12 조세용 Charles Cho 오늘도 발걸음을 옮긴다 집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먼 듯하다 익숙했던 거리와 나무들을 지나 걸으면 유년시절과 같이 보내버린 놀이터가 나오고 그 길의 끝에는 집이 보인다 집은 더이상 집이 아닌듯 하다 그저 돌아와 잠을 청하는 곳 바쁘디 바쁜 일주일의 5일을 보내고 나면 남은 2일의 고통이 나를 기다려 준다 집은 더이상 쉼터가 아니다 집을 나와서 또다시 거리를 걷는다 나도 모르는 내 발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걷다 걷다 걷다보면 학원이 모여있는 그 거리 압구정 5번 출구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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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운문]

AP 5점 Class of 2015 정승혜 Sophie Chung 선생님과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5점만 받으면 돼 5점만 받으면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어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 – 네 안에 들어올 이 꿈의 학교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5라는 점수는 단지 숫자였다 5라는 점수는 분명히 달콤했다 하지만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찾아주지는 못 하였다. 기쁨은 마치 곧 지는 해와 같이 흔적 없이 사라졌고 대학과 관련된 불안함과 압박감 – 휩쓸려가는 비바람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씀들은 설탕으로 코팅되어 듣기 좋은 말들, 베일을 걷는 순간, 보이는 씁쓸한 거짓과 과장 5점을 받는 것은 분명 칭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인데 그렇다고 나의 중요한 학창시절을 모두 내주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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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 인생의 전부를 5라는 숫자에 집착하였을까 내 인생에 전부였던 5점 막상 고3이 되고나니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아진다 이 세상 그 어느 것 바꿀 수는 없는 내 추억 5점은 노력만 하면 받을 수 있고 기회 또한 많지만 나의 학창시절 –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장난치며 지내던 시절 서로가 서로를 욕하면서도 또 앞에선 언제 싸웠냐는 듯이 서로 단짝이 되는 그런 나이 때론 가식이 거짓과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힘든 일을 겪으며 함께 성장해 나아가는 나이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잊지 못할 학창시절 추억 학교에 대한 불만 급식의 양에 대한 논의 이 선생님은 착하다 저 선생님은 차별한다 이 모든 말들이 곧 어른이 될 나에겐 너무나도 그리울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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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학창 시절 5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 자신에게 수 없이 미안해지고 끊임없는 후회를 한다 하지만 내가 걸어온 내 길이기에 나는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5라는 숫자를 보면 이렇게 많은 생각들이 잠잠한 파도처럼 머릿속을 지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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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산문]

시인 (時人) Grade 10 정예진 Yejin Chung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알 수 없었던 그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나만 혼자 간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특정한 날의 특정한 시간에 태어 난 특정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특정한 사건. 나와 그 사람들, 모두 통 틀어 ‘시인(時人)’이라고 부른다. 즉, 시간의 사람… 약속의 시간을 가 진 사람. 5월 5일 어린이날의 새벽 5시 55분에 태어난 나, 그 밖에 운수 없 게도 4월 4일 새벽 4시 44분에 태어난 소년, 반대로 운 좋게도 7월 7 일 저녁 7시 07분에 태어난 소녀, 등등. 나와 이 특정한 시간에 태어 난 사람들은 하루에 자신이 태어난 시간이 다가오면, 모든 것이 멈추 는 경험을 맞이하게 된다. 나와 이 사람들은 자신을 빼고 주변이 한 시간 동안 얼음처럼 그대로 굳게 된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는 아무렇 지도 않게 일상이 계속된다. 이것이 나에겐 심한 문제가 된다. 학교에 서 집으로 가다가 5시 55분이 되면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다 굳어버리기 때문에 어디 가서 맘대로 먹지도 못한다. 뭐 이건 훔칠 수도 없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하나의 이상한 과학적인 현상이라고 믿고 싶다. 마법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무섭다. 마 법이란 과학과 매우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 이 세상 모든 것 이 그냥 가짜로 보인다. 내 일상이 그저 그렇단 말이다. 어찌하든 오늘은 참으로 기대되는 개학이다. 중학교의 첫 단계인 1학년이 되는 날. 처음부터 왕따 같은 하찮은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 학교에 한 발짝을 들어선 순간, 눈앞이 아찔하다. 구역질이 나는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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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찌르는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뒤에서 누군가 갑자기 내 얼굴에다가 검정색 봉지 같은 것을 씌우더니, “입학을 축하드려요.” 라고 한다. 그 러곤 갑자기 내 머리를 세게 때린다. 난 봉지의 색깔처럼 눈이 검어지 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납치당할 때의 기분이라고 할 까. 말 그대로 온 세상이 까맣게 되었다. “정신 좀 드니?” 어떤 여학생이 나에게 살며시 물었다. 봉지를 벗고 고개를 든 나는, 몇 명의 사람과 함께 있었다. 다 내 또래의 아이들같이 생겼다. 그리고 교실 창문은 다 철판으로 덮여 있 었다. 을씨년스럽다. “여긴 어디야? 난 도대체 왜 여기 있지?” “학교지 뭐, 축하해, 넌 우리처럼 처음으로 납치 당했어.” “납치?” “갑자기 팔을 꽉 잡지 않나, 봉지를 씌우지 않나, 때리지 않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당연하지. 자네만 그런 현상을 겪는 게 아니라네.” 아까 그 납치범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깔끔한 하얀 양복과 빨간 셔츠를 입고, 뭉크의 ‘절규’ 의 가면을 쓰고 식칼을 가져온 한 남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무..뭐야..?” “안녕하세요, 학생분들. 여기서 입학식을 시작합니다! 오늘부터 학생 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모두랑 하모니~ 그러니까 계속 사는 겁니 다!” “네?!” 모두가 소리를 지른다. “여러분은 특별한 시인! 즉,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닌, 약속된 시간을 가진 운명의 사람들! 신기한 여러분들을 관찰해 보기 위해, 연구가 끝 날 때까지 이 학교에 ‘잠시’ 살게 해 두는 겁니다!” “살게 해 둔다고요? 그 연군가 뭐시기가 끝나면 어쩔 건데요?” “죽어야죠! 쓸모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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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도대체 왜 우리가…!” “시인이란, 특정한 시간에 태어난 특정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특정하 고 무서운 일! 아직 성장이 덜 된 청소년에게 특히나 일어나는 현상이 죠. 어른들은 있어도 그것을 극복해 냈기 때문에…후훗.” “거..거짓말.” 어떤 여학생이 소리를 꽥 지른다. 그러곤 그 남자는 여학생에게 식 칼을 던지지만 다행히 옆으로 비켜나갔다. “이게 장난 같나요?” 그러곤 침묵. “자~자~ 여러부운! 여러분이 이 학교가 그렇게 싫으면 이렇게 하죠! 바로 선생님한테 사형 당합니다. 모두들 행복한 학교 생활이 되도록!” 그 말만 하고 남자가 나간다. “야 우리 이제 어떡해?” “죽는 거야? 진짜?” 그 때, 어떤 남학생이 조심스럽게 아이디어 하나를 내놓았다. “우리… 저 쌤을 암살하면 어떨까?” “암살? 아직 중학생인데 사람을 죽이라고?” “우리가 살긴 살아야 하잖아. 보나마나 그 사람이 열쇠 같은 걸 가 지고 있을 거 아니야….” 그리곤 ‘시인들의 혁명의 불’이 그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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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산문]

5빠 Grade 11 윤세라 Sarah Yoon

오빠가 보고 싶다. 내 핸드폰 전화번호부에는 내 친 오빠의 이름이 ‘5빠' 라고 저장되어 있다. 오빠한테서 전화가 오거나 문자가 왔을 때, 친구들이 옆에서 그 저장된 이름을 보곤 웃어대곤 했다. 오빠가 미국 으로 대학을 가기 전까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번호도 바뀌고 서로 연락할 틈도 없어지고 점점 멀어질 즈음, ‘5빠’라는 이름의 전화 번호도 없어진 지 오래지만 나는 여전히 ‘5빠’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 오빠는 재작년 APIS를 졸업하였다. 오빠와 세 살 차이가 내가 드디 어 고등학교로 들어가는 해가 곧 오빠와의 이별의 시작이었다. 나는 자주 생각했다. ‘한 살만 많았으면 오빠랑 수업도 같이 들을 수 있는 건데......’ 다들 왜 오빠가 좋고 사이가 다른 남매들 보다 좋은지 물어 본다. 그야 당연히 오빠가 잘해주니까! 물론 싸우기도 하지만, 3살 차 이가 나는 오빠와 여동생이지만 마냥 친구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엄 마보다 더 가까운 존재일 수도 있다. 내가 여자, 오빠가 남자라도 가 릴 것 없이 다 털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아빠께 서 밤새 나가 계신다면 나는 마냥 신나서 숙제는 저 멀리 두고 놀 계 획이었지만, 그 옆에는 엄마로 코스프레한 오빠가 옆에 떡 하니 서있 었다. “숙제 다 했어?” 오빠가 묻는다. “다했어!” “갖고 와 봐!” 하지만 쭈뼛쭈뼛 빈 공책을 내미는 나였다. 엄마도 아니면서 엄마 노릇 하는 오빠가 얄밉고 귀찮았지만 이제는 엄마 못지않은 그 잔소리 가 그리워 미칠 지경이다. 친구와 싸우거나 농구팀에서 속상한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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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거나 시험을 망치는 그런 슬픈 일이 있는 날에는 오빠에게 달려가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원래 무뚝뚝한 오빠라 말 없이 들어주던 그 모습도 그냥 고마웠을 뿐이다. 신경 안 쓰는 척하지 만, 이상하게도 지하철을 무서워하는 나와 같이 지하철을 탈 때 짜증 내면서도 힐끔힐끔 뒤에서 잘 따라오는 지 봐주는 오빠의 모습도 생각 난다. 왜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로부터 받은 것의 감사함이 그 사람이 떠난 후에 알게 되는 것일까? 새로 핸드폰을 사고 친구들과 가족들의 번호를 저장하고 있을 때, 왠지 모르게 고마운 오빠에게는 특별한 이름으로 저장하고 싶었다. 단 순한 ‘오빠’ 나 ‘brother’가 아닌 이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이름이 ‘5빠’였다. 숫자 5로 시작한 그 이름은 덕분에 전화번호부 제 일 첫 줄을 차지하였다. 재미있고 뜻 있는 이름을 만들어 낸 뿌듯함에 왠지 모르게 으쓱해서 오빠에게 얼른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 기회가 미 뤄지고 미뤄져 오빠가 한국에 없을 때까지 결국 못 보여주었다. 이번 여름방학에 오빠가 왔을 때, 이름을 다시 저장해서 제일 먼저 핸드폰 을 들이밀어 이름을 보여줄 것이다. ‘뭐 어쩌라고’ 하고 쳐다볼 오빠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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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 산문]

다섯 손가락에서 배운 교훈 Grade 10 석민 Kayley Suk 나는 수화를 배우기 시작하기 전에는 청각 장애인의 삶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길거리나 지하철에서를 제외하고는 청각장애인을 본 적도 없이 살았다. 내가 살고 있었던 세상과 청각장애인들이 살고 있 는 세상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작년에 수화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봉사활동을 하러 배워본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화를 배우게 되면서 이것이 단지 수화만 배 우는 것이 아니라 청각 장애인들에 대해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 게 되었다. 수화는 한국어나 영어 같은 언어랑 다른 점이 많다. 우리가 배우는 건 한국 수화라고 부르지만 한국어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다. 수화는 목소리를 통해 감정이나 의미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표정이 아주 중요하다. 수화를 하면서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 경청자는 심심하다고 이해하고 흥미를 가진 표정을 지으면 경청자는 관심 있다고 이해한다. 수화를 배우면서 청각 장애인의 생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청각 장애인들은 음악을 못 듣고, 춤도 못 춘다. 이런 것은 당연한 것같지 만, 전에는 생각도 못 해본 것이다. 그리고 청각 장애인들 중에 한국 어를 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지 않고,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이런 언어들은 수화랑 많이 다르기도 하고 쓸 이유도 많이 없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 않는다고 한다. 수화를 배우면서 경험한 것 중에 제일 놀라운 것은 청각 장애인들이 랑 만나고 얘기해 보는 거였다. 청각 장애인을 실제로 만나고 의사소 통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제일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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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우게 된 것 같다. 전에는 상상도 못해본 새로운 느낌을 알게 되 었다.—청각 장애인들이랑 있을 때는 나에게 편한 영어나 한국어를 쓰 면 그들과 절대로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사실이 아주 새로웠고 동시에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나는 수화를 배우면서 이런 교훈을 배우게 되었고 다양한 경험을 해 보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 수화를 처음 배울 때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에 대해 알 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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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cover art: Michelle Suh (Grade 11)

5757WOLGYE-RO WOLGYE-RO45GA-GIL, 45GA-GIL,NOWON-GU, NOWON-GU,SEOUL, SEOUL,139-852, 139-852,KOREA KOREA TEL. 02.907.2747 FAX. 02.907.2742 WWW.APIS.ORG TEL. 02.907.2747 FAX. 02.907.2742 WWW.APIS.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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