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018 the 6th edition (g11 g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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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ipe : SUCCESS 오세웅 작가의 <고교생 레스토랑>을 읽고

Grade 12 이소형 Jenna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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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et Painter가 되는 방법 수신지 작가의 <스트리트 페인터>를 읽고

Grade 12 김도윤 David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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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임오군란 Grade 12 이재림 Robi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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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학년의 삶 Grade 12 손주현 Julie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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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018 Artistic Achievement Award and Dedication to the APIS Community as Artist for the Korean Magazine Cover Design Contest

Grade 12 Eugenie 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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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Pacific International School

2017-2018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 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Philippians 4: 12-13


VOLUME 6 OF THE APIS KOREAN LANGUAGE ARTS PROGRAM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WAS PUBLISHED BY THE KOREAN LANGUAGE ART CLASS WITH TH E HELP OF MANY STUDENTS, T EACHERS, AND STAFF MEMBERS IN SEOUL. SOUTH KOREA, IN THE YEAR 2017


Recipe : SUCCESS / G12 이소형 • 1 Street Painter가 되는 방법/ G12 김도윤 • 3 그림으로 보는 임오군란 / G11 이재림 • 6 12 학년의 삶 / G12 손주현 • 7 Cover Design Contest / G12 권재은 • 8

시작하는 글 학생대표 인사말 / G12 최진이 • 16 내 마음 속 살아있는 대한민국 / Class of 2015 오승주 • 20

2017-2018 APIS Korean Language Arts Program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여름 / G11 김주성 • 28 삶 / G11 정석우 • 29 첫사랑 / G11 장태호 • 30 가을이 오면 / G11 박세은 • 31 그녀를 보낸다 / G11 안수영 • 32 사시이비 (似是而非 ) / G11 최민 • 33 이별 / G11 최사라 • 34 기러기 / G11 강민규 • 36 반동 / G12 이민정 • 39 역리 (逆理) / G12 박수빈 • 40 잊을 수 없는 그날 / G12 이규영 • 41 고요 / G12 오지원 • 42 봄 / G12 김영민 • 43 벽 / G12 김재형 • 44 소망 / G12 유유진 • 45 촛불 / G12 이승호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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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대지의 외침 / G12 김노아 • 47 그녀 / G12 신유진 • 48 오후 다섯 시, 오전 다섯 시 / G12 권재은 • 49 염원( 念願) 의 시( 詩) / G12 홍혁준 • 51 오감 (五感) / G12 이건 • 52 용서 / G12 이승빈 • 54 소리 없는 아우성 / G12 김태진 • 56 광복을 기다리며 / G12 김지아 • 57 나를 되돌아 본다 / G11 수와 사리나 • 60 내일의 나에게 묻는다 / G11 유승민 • 62 모두의 숙제 / G11 정민기 • 64 추억의 그리움 / G11 권진아 • 66 강아지 / G11 이수빈 • 68 게임 진화 / G11 박지훈 • 71 용서 / G12 이연재 • 74 과연 용서받지 못할 일은 있을까? / G12 박정훈 • 76 내 강아지 루비 / G12 신수지 • 78 제프리와 프래인크 / G12 김예담 • 80 또 다른 우정을 소망하며 / G12 신성진 • 82 내가 구한 것 / G12 홍성욱 • 84 조컴문( 弔.Com.文 ) / G11 정현욱 • 86 조화문 ( 弔靴文 ) / G11 남윤준 • 88 조구문 ( 弔球文 ) / G11 서대원 • 90 1882년 , 그 해의 기억들 / G11 김하령 • 92 군인들의 분노, 그 시작 / G11 김규한 • 94 구식 군인의 딸 , 임오군란을 보다 / G11 김소정 • 99 1889년 2 월 , 나의 후손들에게 / G11 양혜연 • 104 독립신문 투고문 / G12 김태환 • 108 6.25, 참혹했던 날들의 기록 / G12 정영덕 • 110 바닷마을 다이어리 / G11 오주현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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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 1964 년 겨울’ 과 ‘갑을 고시원’/ G11 강응준 • 118 현대인에게 ‘공간’이란 무엇인가? / G11 노성헌 • 120 열쇠 없는 방 / G11 김선주 • 122 혼자 사는 세상 / G11 박서정 • 125 빛과 어두움의 공존, 그 안에서의 성장 / G11 김재엽 • 128 베일에 감춰졌던 이야기 / G12 김유정 • 131 오늘날의 오현우들에게 / G12 김서윤 • 135 스트레스의 원인 / G11 정다은 • 139 음주 및 흡연에 대한 조사 / G11 조민수 • 142 근현대사의 문제적 공간, 강화도 이야기 / G11 서희원 • 145 흥선대원군의 재평가 / G11 윤지민 • 148 역사를 통해 배우다 / G11 김도현 • 151 강화도 조약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한미 FTA / G11 이진성 • 154 흥선대원군의 개혁 , 어떻게 볼 것인가? / G11 구동수 • 157 바람직한 게임문화 / G12 종빙한 • 162 트럼프와 김정은 / G12 맥큐리 채리티 • 163 한국 시위 문화 / G12 모란 오말 • 164 한국 피시방의 인기 / G12 박성규 • 166 태권도 정신 / G12 김재홍 • 168 한국인이 나아가야 할 길 / G12 차성호 • 170 무엇이 학생들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 G12 전시현 • 173 한국의 여혐문화 / G12 강민정 • 176 불이 꺼지지 않는 나라 / G12 김현지 • 181 내 안에 숨 쉬는 과거와 현재 / G12 김남호 • 183 ‘ 한국의 외모지상주의 문화’ 성형에 대해서 / G12 김여경 • 186 한반도 , ‘통일 ’ 은 꼭 필요한가? / G12 황윤하 • 189 누가 ‘한국인’ 인가? / G12 김진서 •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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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와 남형이의 박물관으로 가는 길 / G12 조남형 • 198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죽음 / G12 최민서 • 207 진정한 애국자 / G12 최진이 • 210

2016-2017 백일장 수상작 그래도 한 가지 / 김재민 • 214 붉은 인동꽃 / 조하은 • 219 그러므로 저는 지구온난화 문제에 주목하여 자연친화적 기술 개발에 투자하여야 한다고 발의합니다 / 윤수빈 • 223 한 마디의 거리 / 김애린 • 225 상봉 / 김수아 • 226 나만 몰랐던 이야기 / 신유진 • 228 용서를 강요하는 시대 / 유민서 • 230 용서 / 김윤진 • 232 싸움의 결말 / 강재원 • 236 삐에로 / 정예준 • 238 눈이 다시 녹고 / 정승현 • 239 나에 대한 용서 / 최린 • 242 나도 완벽하지 않기에 / 최창용 • 249 미워할 수 없는 당신 / 정영덕 • 252 용서 / 후지모토 미유 •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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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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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신선한 페인트 냄새를 기억한다 . 나는 11년 전 APIS가 처음 설립되었을 때부터 학교와 함께 한 창립 멤버 중 하나이다. 그때 부터 학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 지금의 초록색 축구장은 모래로 가득했고 , 체육관이 생기기 전에는 지금의 지하 밴드룸에서 체육을 배 웠었다 . 트로피도 , 사진도 하나 없던 복도는 하얀색과 초록색 페인트 만 칠해져 있었다 . 상으로 꽉 채워지기 만을 기다리는 벽처럼 , 크게 성장할 준비를 하고 있는 학생들처럼 , APIS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텅 빈 캔버스였다. 오래된 역사가 있는 학교의 좋은 점은 이미 형성된 문화와 전통 이 마치 올림픽 성화의 횃불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듯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나에게는 역사를 새롭게 만들 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 APIS 에서는 우리들이 직접 그 횃불 을 만들어야 했다. 이 도전은 지금의 나를 형성했고 그렇게 APIS에서 보낸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학생회 (SRC)의 일원으로서 나는 APIS 에 더욱 더 의미있는 영향 을 미칠 수 있었다 . SRC 멤버들과 함께 나는 학생들을 위한 즐거운 이벤트들을 만들며 학교의 고유한 정신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 우리들만의 전통을 만들 어낸다는 것은 모든 학생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 처음에는 SRC 가 준 비한 10개의 아이디어 중 1개도 성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수많은 시 행착오 끝에 우리는 조금씩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시작했다. SRC가 성장하면서 나 또한 성장했다. 우리는 학교의 마스코트를 직접 제작해 보기도 했고, 카니발 때 선생님들께 파이를 던지며 웃을 수 있는 연례 행사도 만들었다 . 항상 참석자가 부족했던 프롬의 출석률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 농구 게임의 열기를 더하기 위해 조금은 어색 하지만 마스코트 복장으로 춤을 추기도 했고, 학생들의 목소리에 항상 귀기울여주고 힘을 실어주는 학교 덕분에 교복 정책도 바꿀 수 있었 다. 이 모든 것은 APIS 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 학창 시절이 의미있을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신 선생님 , 후 배, 선배 , 그리고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APIS는 나에게 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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륭한 교육을 제공해 준 학교이자 나의 두 번째 집이다. 2017-2018 전교회장으로서, 그리고 APIS의 시니어로서 마지막 까지 내가 받았던 사랑에 대해 모두에게 보답하고 싶다 . 또 , 우리 사 랑하는 농구, 축구 팀 멤버들에게 정말 고맙다. 함께 피와 땀 , 눈물을 흘려줘서 고맙고 , 졸업하고 나서도 함께 만나서 지금처럼 운동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오케스트라 멤버들도 화합에 대해 가르쳐줘서 고맙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여러 가지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올 해도 멋진 한국어 문집을 발간해 주시는 한국어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자기 가방만했던 꼬마 아이가 이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여고 생으로 성장하였고 , APIS 또한 함께 성장하였다 . 앞으로도 이 곳 APIS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많은 것을 배우고 함께 성장해 가기를 기 대한다.

아시아퍼시픽국제외국인학교 고등학교 학생회장 12 학년 최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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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till remember the overpowering smell of fresh paint. I was one of the first class of students to walk t hrough the doors of APIS, eleven years ago. A lot has changed since then. In the beginning, the soccer field had no grass. The band practiced in a basement, which also served as o ur gym. The hallways had no pictures or trophies, just a thick coat of white and green paint. Much like it s walls, much like its students, APIS was a blank canvas, full of potential. Although it would have been nice to attend a school with a longstanding culture and traditio n, where school spirit is passed down like a torch from class to class, I am grateful for my time at APIS. At APIS, we had to make our o wn torches out of what we had. It was a challenge that shaped me. Student Council was a chance to influence APIS in a more meaningful way. With my teammates, I wo rked to make events mo re affo rdable and fun, creating school spirit out of a vacuum. Of course, creating our own traditions was not easy. For every ten ideas we tried, only one would stick. Amid the many failures, though, we started to achieve some modest victories. Ho w many students get the chance to create their own mascot or a yearly event where pies are auctio ned off to be t hrown at popular teachers' faces? ‘Prompo sals’ increased prom attendance. A neon green hawk cost ume that we sometimes had to wear and our awk ward but effective dance

moves

energized

our

basketball

cro wds.

We

also

changed rules, like our uniform policy, and succeeded: skirt s are no longer mandatory fo r girls. Things may not have been this dynamic at a 100-year-old instit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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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incerely

graduated

thank

my

upperclassmen,

and

teachers, fellow

underclassmen,

Class

of

2018

for

making my time at APIS meaningful. Beyond giving me an outstanding education, APIS served as a second home to me. As t he 2017-2018 Student Council President, I wish to repay the love and kindness I received from o ur APIS community by making this school year anot her awesome o ne to be remembered. I also want to t hank my basketball, soccer, and orchestra teammates for the intimate bonds we built through our tears and sweat. The sports and music department of APIS has truly imbued me with the spirit of teamwork and harmony. Last but not least, I want to thank our foreign language and Korean teachers for giving me the oppo rtunity to gain a greater insight into diverse culture. I especially express my gratitude to the t hree wo nderful Korean teachers for publishing yet anot her great collection of our Korean literary work created by our student s. As the girl who was barely bigger than her backpack matured into a young woman, APIS grew as well. And with no doubt, I am certain that APIS will continue to progress to help foster global leaders for t he years to come.

Jinny Choi High School President Asia Pacific International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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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ni Special> 2017년 자원병역이행자 군생활 체험수기 공모전 최우수상작

내 마음 속 살아있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수도군단 작전참모처 작전계획과 상병 Class of 2015 오승주 Brian Oh “너는 도대체 군대 왜 왔냐?” 입영을 한 그날부터 일병 4 호봉이 된 지금까지 거의 한달에 한 번 꼴로 선후임들과 심지어는 간부님들께 수도 없이 듣고 있는 말이 다 .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글쎄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사실 왜 군대에 오기로 결정을 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21 살 여름 다시 수험생이 되어 어학병 시험준비를 한 것도 , 잘 다니고 있던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한국에 다시 들어온 것도, 안 가는 게 좋 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조언에도 굳이 입영신청을 한 것은 딱히 이유라 고 할 것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역이행이란 대한민국 군민으로서 나를 키워준 나라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하기에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고 ,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한다는 것조차도 나에겐 아직 낯 부끄러운 일이다. 영주권 을 취득하기까지 남들보다 고생을 덜 했고, 또 매우 최근에 취득한 것 이기 때문에 나는 미국인이라기보다는 미국에서 산 경험이 조금 있는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라면 누구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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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 청소년기 , 아니면 유소년기부터 어떻게든 군대에 오는 것을 피하려고 온갖 방법을 구상 해 봤다는 걸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다 알것이다. 내가 그런 마 음을 갖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왜 나는 주변 친구들처럼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는지 부모님께 어리석은 원망을 했었다 . 그러나 , 정작 우연치 않게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니 나는 입영을 택했다. 후회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나는 입영한 날부 터 매일매일 후회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 근무가 고된 작전병 업무와 작전 상황 근무를 한 달에 열 번씩 하다 보니 잠시 바람 쐬러 나갈 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울 뻔 한 적도 있다.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기 분이 안 좋을 때도 있었다면 기분이 좋은 적도 있었다. 입영을 하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제일 뿌듯했던 기억을 꼽으라 면 선임들과 같이 범계역 주변으로 외출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 식사 후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던 우리에게 어느 노인분이 말을 걸었다. “군인 아저씨, 우리 손자가 할 말이 있대요.” 그 할머님 뒤를 보니 예닐곱 살 먹은 듯한 꼬마 아이가 서 있었 다. 그 아이는 내 손을 잡더니 “ 삼촌 , 나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 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귀여운 꼬마를 보자 나의 어릴 적 모습이 생각 났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남양주 보 건소 관사에서 살던 때였다 . 그곳에서 아버지는 공중보건의로 병역을 이행하셨으며 근무가 끝나자 예비군 육군 대위로 편성되셨다 . 그 후 ,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병원과 가까운 서울시 노원 구 공릉동으로 이사를 갔다 . 우리집 20km 이내엔 육군사관학교가 있 었고 ,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군인을 대하는 게 익숙했다. 생도들과 간 부들 , 그곳에서 근무했던 병사들과 대위 군복을 입으시고 예비군 훈련 에 참가하시는 아버지를 통해 ‘ 군대'는 당연히 가야 하는 곳' 이라는 인 식이 나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내가 그곳에 살던 시절에 임관을 하신 분은 벌써 대위, 소령급 간부가 되셨거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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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역을 하신지 오래일 것 같다. 유치원 시절 위문편지를 썼던 군인 아저씨들이 어느새 형들이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친구들이 어느 새 군인이 되어 있었다 . 나에게 군대란 이렇게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코앞에 다가온 인생의 위기이자 기회였다. 어학병 시험을 위해서 여름 내내 준비를 한 후 국방어학원이 있 는 장호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내 자신에게 ‘ 이렇게까지 해서 군 대를 가야하나?’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때도 명확한 답을 내리진 못 했다. 아마도 나는 군대에 대한 나의 본능적인 이끌림에 대한 답을 찾 으러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 내가 좋아하던 콜라 , 휴대폰 그리고 옷가지까지 다 빼앗기고 나서야 나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 내 것이라고는 양말 한 짝도 용납되지 않던 훈련소에 서 일상의 소중함을 배웠고 , 지휘 통제실에서 뜬 눈으로 지낸 밤들은 내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해답을 내리는 시간이 되었다. 난생 처음 내 필요에 의해 공부를 시작하고 일 기를 쓰기 시작했다. 부대 내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갈망하였지만 그 중 가장 원하고 그리워한 것은 바로 ‘ 창작의 기쁨’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영상 제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입영 전까지도 TV영화학을 전공하고 인 디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며 나의 꿈을 좇고 있었다. 음악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으며 원래 입영을 한다면 정훈병이 되고 싶었다. 허나 대학 선배들의 권유로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어학병에 도전을 하게 되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는 영상도 , 영어도 작업할 기회가 흔치 않은 작전병이 되었다 . 처음에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 업무 인수를 받고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보냈다. 그러나 지금 생 각해 보니 이런 제한들이 나의 꿈을 더욱 키워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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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 한두 줄로 시작한 글들이 소설로, 또 영화 시나리오로 커 나가고 있었다 . 창작에 대한 갈증은 첫 휴가를 나갔을 때도 작업실에 앉아서 밤새 녹음을 하게 만들었다. 군대에서 얻는 건 사람밖에 없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 준 적이 있다 . 나에게 이 말은 추상적인 명언들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선임들이 전역을 하던 날이면 짧은 기간동 안 그들과 너무나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시간이 빨 리 지나가길 바랐지만 그들이 떠나는 것은 처음에는 너무나 슬펐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맺음이 있다는 옛 말도 있듯이 이런 지 나간 시간들은 나에게 왜 군필자들이 군대에 대한 추억을 끊임없이 늘 어놓게 되는지 알게 해 주었다. 원래도 미래 걱정이 많은 나였지만 시 간이 날 때마다 아까운 시간을 쪼개 윤곽이 뚜렷한 인생 설계를 시작 했고 나보다 먼저 인생을 경험한 영관급 간부님들과 근무를 하고 이야 기를 나누며 앞으로 나의 20년은 어떨지 상상을 해 보았다. 이런 기회 가 흔하지 않다는 건 친구들의 군 생활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충 알 수 있었다 . 그렇기에 나는 간부님들을 단순히 상관으로 보지 않고 인생 선배 또는 스승님처럼 모실 수 있었다. 그 결과 간부님들 사이에서 나는 업무 상 실수가 많아도 같이 근무하기에 재미있는 병사가 되었고 몇몇 분들은 내가 전투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마주치면 내 경례를 받아주고 웃으면서 안부를 물어 주셨 다. 정말 신기하게도 군대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이 나에게 너무나도 크다. 군 구조에 대해 인트라넷을 통해 배우고 , 각 사단 및 군단 , 사 령부들의 위치 , 역사, 기능과 부대 마크에 대해 배우는 것도 나의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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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심지어 휴가를 나가서도 인터넷을 통해 군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거나 정보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말 이 안 되는 일인 것 같은데 이런 군대에 대한 나의 애증 관계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 될 것 같다. 군단장님의 연혁을 보다 문득 32 사단장으로 근무하셨다는 걸 읽 고 32 사단의 홈페이지에 홀린 듯이 이끌려 역대 지휘관들을 찾아 보 았다 . 그곳에서 나는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의 이모부이자 27대 사단장이었던 분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 근무 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가 나는 할머님께 전화를 드렸고 근무 취침 도 포기하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여쭈어 보았다. 자신의 근무병과 운 전병을 ‘아들 '이라 부르셨다던 이모할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군대에 온 이유 중 하나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무 엇보다도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정' 이라는 개념은 내가 유학을 하면 서 느끼지 못한 것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것에 이끌려 군에 온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의 병사에게 불이익이 생기면 누구보다 병사를 챙기고 대신 싸워주셨던 전 지휘 통제반장님은 군대란 조직의 진정한 멋을 느 끼게 해 주셨다. 영주권 연장 관련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고되고 힘든 근무의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시고 많 은 도움을 주셨던 본부대장님은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버티 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난 내 자신이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 남자다움' 과 ‘멋짐' 에 대한 동경이 크다 . 훈련소에서부터 만난 모든 군인 개개인이 멋있 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 이상쯤은 있다. 훈련소에서 나에게 군 생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 해 주었던 선임 , 많은 도움이 필요할 때 내 곁에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던 내 맞선임까지 내 군생활의 기초를 다져준 선임들이 있었기에 나는 군 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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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고 좋아하기 어려운 내 자신을 따라와 주는 후임들도 있 기에 하루하루가 보람차다 . 내가 쓴 글을 읽고 나니 마치 군 생활이 끝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 내가 여태껏 지내온 것에 비해 앞으로 남 은 군생활은 멀고도 험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내가 왜 군대에 오기로 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못 내린 것 같다. 다만 , 이 짧은 기간 동안 내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또 그 기간동안 어떤 것을 얻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이제 대충은 실마리를 잡기 시작했으니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입영한 날부터 전역하는 그날까 지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나 해답을 바라고 있지도 , 기대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떠내려가듯이 나아가다 언젠가는 내가 나라에 희생하고 있 는 이 청춘이 보람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 다. 내가 지키고 있는 이 나라에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 의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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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018 APIS Korean Language Arts Program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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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Grade 11 김주성 Justin Kim 안녕 , 여름아 날 반갑게 반기던 뜨겁디뜨겁던 태양은 온데간데없이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한기 머금은 공기들이 점차 따뜻해지면 우린 다시 안녕하겠지 널 몇 번을 보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반갑게 인사하자 우리 ‘안녕 , 여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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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Grade 11 정석우 William Chung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날이 매번 떠오른다 주륵주륵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도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칙칙폭폭 기차도 시작점과 종점이 있는 것처럼 저벅저벅 꿈을 위해 쉬지 않고 걷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지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던 그날 , 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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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Grade 11 장태호 Michael Chang 첫눈이 내리던 겨울에 피어난 첫사랑 한눈에 반해 너무도 좋아했던 나의 첫 사람 언제나 당신의 미소를 바라보며 좋아했던 나 어색한 나의 행동들을 보며 웃었던 그대 매번 볼 때마다 마음 설레던 자주 새벽꿈에 나타났던 어느 노래를 들어도 생각나는 보고 싶은 마음에 연락하고 싶은 그 사람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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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Grade 11 박세은 Seeun Park 바람이 불고 해가 지면서 선선한 가을 공기가 분다 봄에 피었던 꽃은 찾아 볼 수 없고 어느새 시들어 버린 꽃 흔적도 없이 초록 잎만 남았지 매일 같은 길을 걸으며 왔던 길 다시 오가지만 늘 변하고 있는 풍경 매일 오가는 사람들은 다르고 공기도 하루하루 바뀌어 간다 익숙해 지려하면 주변은 서서히 바뀌어 가고 나도 모르게 낯설어 지는 같은 길 그 숲길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바람에 불던 초록 잎 사이에서 눈에 띄는 붉은 잎사귀 하나 또 다시 새로운 변화를 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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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보낸다 Grade 11 안수영 Lucas Ahn 마치 어두울 때 불빛이 필요한 것처럼 어두컴컴해질 때 해가 그리워진 것처럼 그녀를 보낼 때 그때서야 깨닫는다 마치 불행이 올 때 행운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집이 그리울 때 내가 걷는 길이 싫어진 것처럼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천장을 쳐다보며 언젠간 꿈을 남게 할 수 있길 바라며 그렇지만 꿈은 오는 것이 느리며 가는 것이 빠른 법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으며 그녀를 떠올린다 혹시 내가 언제 깨달을까 오는 것과 같이 모든 것도 간다는 것을 마치 내 심장의 퍼즐에서 조각을 빼앗은 것처럼 나의 반쪽이 뜯긴 것처럼 그녀를 보낼 때 이제야 얘기 할 수 있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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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이비1) (似是而非) Grade 11 최 민 Min Choi 사시이비 , 사시이비 시린마음 , 어찌하리 이실직고 2) 하지 않으니, 검려지기3) 하는 일이 비금비석 4) 하니라 사시이비 , 사시이비 시린마음 , 어찌하리 이독제독 5) 할 수 밖에 없는 이 상황은 비구소선 6) 이니라 사시이비 , 사시이비 시린마음 , 어찌하리 이기적인 요즘사회 비겁하고 , 썩어가니 사시이비 , 사시이비 시린마음 , 어찌하리 이래저래 , 썩은사회

1) 2) 3) 4) 5) 6)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그렇지 아니하다는 뜻의 한자 성어 사실 그대로 고함 겉치레뿐이고 실속이 없는 것을 비유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늘 그러함 악을 물리치는 데 다른 악을 이용함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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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Grade 11 최사라 Sarah Choi 저에게 이별이라는 것을 처음 선물해 준 그대에게 저도 이제 감사의 표시를 전해 드립니다 이별 다음으로 참 많은 소포들이 도착했더군요 제 이름 앞으로, 쓸쓸함과 공허함이 주문되어 있었고, 실성과 분노가 반품되어 찾아오고, 죄책감에 이어 섭섭함, 씁쓸함이 담겨진 택배상자까지, 그리고 끝으로는 작은 상자 하나, 희망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 수많은 선물들이 문 앞에 놓여졌지만 어째서 전 기쁘지 않았을까요 가슴 깊이 안으로 계속 꾸역꾸역 들어갔지만 집어넣을수록 허전해졌습니다 그 중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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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열어보지 못했어요 오랫동안 마음 구석 한편에 놓아 바라만 봤는데, 제가 제일 두려워하던 후회와 외로움이 기어 나올까봐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만 놓을 때가 된 것 같아요 저에겐 더 이상 필요 없는 이 선물, 포장지도 아직 채 뜯지 않아 먼지가 쌓인, 그러한 , 추억을 당신에게 보내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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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Grade 11 강민규 Simon Kang 기러기는 지난 삶을 되돌아본다 향수 가득한 마음으로, 어릴 적 첫 걸음과 근육통 둥지 안, 같이 태어난 그들과의 기억 그렇지만 나는 나아간다, 외로운 기러기로 두리번거리며 나는 둥지의 끄트머리를 향해 안식처라고 부르던 곳을 이제는 말라 비틀어진 낙엽들의 무더기인 둥지로 그리고 집보다는 쥐 소굴 같은 그 곳으로 그렇지만 나는 나아간다, 외로운 기러기로 앞쪽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아이의 천진난만한 시선까지 행운과 건투를 빌다 저 넘어 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그렇지만 나는 나아간다, 외로운 기러기로 집 떠나 무리를 한번 둘러 자신의 길을 알려주고 모두에게 행운을 빌며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 믿으며 그렇지만 나는 나아간다, 혼자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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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e Bird The lone bird look s back at his past With a view of no stalgia The nest that he was born in along with the rest And his first step, flight as well as the following myalgia However I push on, for I am a lone bird Now amidst this he is stepping towards the edge of the branch Of which he called home and paradise With the dry bark of the tree crumbles and the leaves crunch And looks back at t he place once mo re now home to mice However I push on, for I am a lone bird As the mother bird and father bird ahead Along with the still immature baby bird with them Say their farewells and condolences to their baby that they fed And watch him fly away while trying to stop their streams However I push on, for I am a lone bird The lone bird goes around to see the flock And tell them about his different route Wishing them the best of luck And hoping to meet the bunch at the end no doubt And I push o n, fo r I am not a lone bird The time is nigh and we shall fly up to the sky Although we part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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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doesn't mean that we won't come by And it certainly doesn't mean that I am a bird alone finding a way So I am here to say my f arewells and go forth to my route of migration As a famous philosopher in the past will with four letters explain Tho se who meet are bound to part However tho se who parted are bound to meet again So the lone bird says we should ask fate to play its part And push on for we are all birds of a fe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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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反動) 다시 되찾을 독립을 기대하며

Grade 12 이민정 Rose Lee 밀어낼수록 가까이 오는 그네처럼 칠수록 빨리 도는 팽이처럼 밟아도 보리처럼 자라나며 진흙이라도 연꽃같이 피어나서 넘어져도 아이처럼 다시 일어나라 끝이란 스스로 멈출 때까지는 오지 않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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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리 (逆理) Grade 12 박수빈 Soo Bin Park 바람 따라 물길 따라 돛을 피라 하네 흐르는 대로 가는 게 빛을 따라가는 거라 하네 허나 어찌 갓난아이에게 먹일 젖이 없어 길바닥에서 우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마다 저 대문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내 어찌 감히 그런 거짓을 삼키리 어찌 이 흐름에 순응하리 우리의 조각을 찾으러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바람을 안고 가자 물이 흘러오는 쪽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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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그날 희망 품고 기다리는 독립

Grade 12 이규영 Gyu Young Lee 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웃음 끊이지 않던 그날들 그대는 멀리 가버렸지만, 더 이상 소식조차 듣지 못하지만 그대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눈물 흘리며 그리워하던 그날들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한다면 지우고 싶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날을 희망 품어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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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Grade 12 오지원 Josephine Oh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숨 막히는 고요 고요 속에 있는 결연 누가 감히 가늠할까 결연 속에 감춰진 공포 그 누가 드러내랴 풍파와도 같은 공포 앞에 있는 건 미약한 희망과 소원 희망과 소원을 나의 손에 담아 잔을 내려놓는다 이제는 맞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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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Grade 12 김영민 Justin Kim 봄이 다가오는 어느 겨울 꽃이 피고 잎은 나지만 행복하지 않다 참담한 현실에 봄이 보이지 않는다 꽃은 피어도 잎은 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꽃처럼 나라가 피어나는 날까지 백성이 열매 맺는 날까지 봄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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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Grade 12 김재형 Jeff Kim 오늘도 나아간다 마치 넘을 수 있을 듯, 없을 듯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 저 높은 벽을 넘기 위해 오늘도 힘을 쌓아간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그리고 그리던 자유를 갈망하며 벌써 잊혀져 가는 흐린 옛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우린 나아간다 사다리를 만들고 벽돌 계단을 만들고 최장 길이의 밧줄도 만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내 자신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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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광복을 기다리며

Grade 12 유유진 Sophie Yoo 무궁화가 만개한 꽃밭을 보면 나를 생각해 주시길 나의 흰 소복이 파랑과 빨강으로 물들 때 즈음 님이 오시길 기다리던 님이 오면 나를 깨워 주시길 님이 오실 때까지 희망의 실타래를 놓치지 않고 어둠이 나의 시야를 가린다고 해도 마음의 불씨로 길을 찾고 그리 수많은 밤을 샐 테니 기다리던 님이 오시면 버선발로 마중 나온 나를 꼭 안아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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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Grade 12 이승호 Chris Lee 초에 불을 붙이는 우리 어둠에 가려질 수 있는 작은 불 어둠에 까맣게 물들 수 있는 작은 촛불 어둠이 찾아와 촛불을 덮치면 사그라들 희망일까 작은 촛불 하나 들고 조그마한 촛불 믿고 이 어둠을 이기리 촛불들이 모여 희망들이 모여 크나큰 불이 된다면 포근하게 서로를 감싸줄 그 날을 이 짙은 어둠 이겨내며 밝은 빛이 빛나길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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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대지의 외침 Grade 12 김노아 Noah Kim 차디찬 대지에 새싹은 돋을까 거센 바람으로 떨어진 벼이삭은 벼의 눈물이요, 땅에 즈려밟힌 개나리꽃은 좌절된 논의 꿈이요 진흙 속에 파묻힌 미꾸라지와 개구리는 외면당한 논의 일꾼들이다 무너진 논은 이대로 희망을 잃을 것인가 이 지겹도록 추운 겨울의 끝은 언제인가 마르고 갈라진 논에 부는 쌀쌀한 칼바람 어두운 현재를 일깨우듯 야속하기만 하다 어둡고 얼어붙은 논에 서 있는 쓸쓸한 나무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한 올의 초록색 이파리 영원한 겨울을 거스르고 지켜낸 마지막 이파리 이 나무는 결국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 나무의 죽음을 기리듯이 돋아난 새싹 영원한 겨울을 거스르는 저항의 상징 겨울을 이겨내며 조용히 외친 한 마디 차디찬 겨울의 땅에 새싹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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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나의 조국이여

Grade 12 신유진 Claire Shin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꿈속에서만 보았던 그녀 그녀의 모습을 그린다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숨결 왠지 익숙한 그녀의 은은한 아름다움 그녀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다 만난 적은 없지만 어머니 품처럼 익숙할 것 같은 그녀의 품 그녀에게 가고 싶다 눈 속에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 보지만 발자국은 짙은 눈보라에 덮인다 그녀는 깊은 어둠속에 찬란하게 비추는 별이다 보이지 않지만 밤하늘 어딘가에 있겠지 구름이 흩어지면 보이겠지 그녀를 기다린다 밤하늘을 바라본다 희미한 별빛만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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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 , 오전 다섯 시 Grade 12 권재은 Eugenie Kwon 다섯 시가 되어가는 저녁 나는 오늘도 저 높이 있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렇게 한숨을 쉬며 붉은 색깔을 내뱉지 나는 오늘도 저 멀리 있는 바다를 바라본다 그렇게 검은 빛을 띠며 점점 의기소침해지지 그리고 어느 순간 높이 있던 해를 통째로 삼켜 버린다 차갑고 깊은 물속에서 나는 생각에 잠기면 밤이 깊어 가면 낮에 하고 싶었던 일들이 금세 떠오르고 왜 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파도처럼 몰려온다 이제껏 우리의 삶은 낮에 보금자리 하나 못 찾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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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처럼 갈팡질팡했다 새벽이 빨리 왔으면, 새로운 날이 시작 되었으면, 또 다시 해가 떴으면 어느 순간 너도 , 나도 , 하늘도 , 바다도 , 모두 웃음 짓게 될 거라는 것을 확신하는 날이 올수 있기를 다섯 시가 되어가는 새벽, 마침내 풀숲에 자리 잡고 빛을 쏟아내는 반딧불이처럼 우리도 어서 자리를 잡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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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 (念願)의 시(詩) Grade 12 홍혁준 Huckjun Ho ng 아아 그리운 조국이여, 밝은 새벽의 나라여 나의 목숨은 지금 끝날지언정 우리들의 이름은 사라질언정 내 육신이 무덤에서 영원히 잠들지언정 나의 고귀한 영혼 염원을 품은 우리들의 혼 이 땅, 혁명가들의 긍지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우리들의 열정 우리들의 피와 땀 영원히 남아 이 땅을 보살피리라 우리들의 사명 죽고 죽고 천번 만번 죽어도 위대한 삶의 영혼은 영원히 이 땅에서 살아 갈 것이라네 의식을 잃어가는 나의 눈에서 흐르는 것은 미래를 굳게 믿는 마음의 마지막 탄식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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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五感) Grade 12 이 건 Tommy Lee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독립투사들의 가슴을 찢는 총소리 들리지 않는다 피투성이가 되어 알아볼 수 없는 학생들의 얼굴들 보이지 않는다 피바다가 되어 피비린내 나는 고문실 맡을 수 없다 짓밟히며 묵묵하게 흐느끼는 힘없는 자들의 눈물 맛볼 수 없다 끊임없이 당하여 곪을 대로 곪아버린 피부 만질 수 없다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오감을 잃어도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코를 막고 입을 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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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방네 만세 소리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고 큼지막한 태극기 종로경찰서 꼭대기에서 펄럭거리는 것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음식 주방에서 만들어지는 맛난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광복의 기쁨과 환호를 맛볼 수 있으며 환희와 긍정으로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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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Grade 12 이승빈 Tim Lee 1. 비싼 선물 ‘잊자 . 생각하지 말자.’ ‘별거 아니니까. 나만 손해니까.’ 용서. 때론 아무리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고 아무리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가지지 못해서 상처 받고 몇 번이고 받아도 억울한 것이 바로 용서이다 ‘내가 왜!’ ‘걔가 뭘 잘했다고.’ ‘그럴 가치조차 없어.’ ‘꺼지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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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미안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잘못했어 ’란 단순한 말로 모든 걸 지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안아줘서 너의 기분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미안해 , 미안해 , 미안해 . 이 말에 담겨있는 내 진심을 모두 다 전달할 수만 있다면 넌 날 용서해 줄까. 이 시를 쓰면서 내 죄책감이 조금씩 사라진다면 그것은 과연 다행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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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아우성 Grade 12 김태진 Taejin Kim 난 생선이에요 비록 아가미라도 숨을 쉴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제 몸을 도마 위에 던지고 제 살을 잘라가지 말아주세요 난 닭이에요 비록 달걀이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제 날개를 철장 안에 가두고 제 소중한 아이를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난 거위예요 비록 부리지만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제 입에 음식을 쑤셔 넣고 제 부푼 간을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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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물개예요 비록 다리지만 사람들과 악수할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제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제 가죽을 뜯어가지 말아주세요 우린 생명이에요 비록 사람이 아니지만 당신들을 용서할게요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당신만 보지 말아주세요. 우리들을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바라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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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기다리며 Grade 12 김지아 Gia Kim 1. 나의 물들여진 피 그들의 눈에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아마도나는 그들의 눈에는 석류인가 보다 그들의 손 안에서는 나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모두에게 그랬듯이나의 몸을 갈기갈기 손으로 찢는다 그들은 내 몸을 갈기갈기멈춤 없이 찢는다 내 몸은 말라 부서질 것처럼 비틀려간다 멈춤 없이 그들의 손에는 나는 그저 조각이다 내 모든 것을내 몸 속 안까지그들의 손은 내 끝까지 긁어내며 내 모든 것을 찢어 내어 버린다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도, 잘근잘근 내 뼛속까지 씹어버리며 나는 잔해가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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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아보지 못할 존재가 되었고 그들은 나의 생김새를 잊을 테지만, 그렇지만난 그들의 이빨 사이사이 잇몸 사이에 끼워져있겠고 영원히그들의 손에는 내 피가 물들어져 있겠지 2. 씨앗의 희망 죽은 자를 기다리듯이 나는 기다린다 녹지 않는 눈을 나는 녹기를 기다린다 뜨지 않을 나의 해를 기다린다 그러기에 나는 총을 연필로 싸운다 그들이 나를 피범벅으로 만들고 나를 죽이고, 나의 손을 가져가도, 나의 글은 죽이지 못할 테니 심장을 찢어갈 수 있어도, 그들의 가슴에 박힌 희망과 기다리는 마음을 그린 모두의 글을 빼어내지 못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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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되돌아 보다 Grade 11 수와 사리나 Sarina Suwa 미래의 구체적인 향후 계획은 없습니다 .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싶은 지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노력한다면 인생에서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 그 결정을 위해 대학에 다니고 싶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새로 운 것을 배울 수 있다면 미래에 대한 시야도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 니다. 최근에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 다. 저는 현재 학교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영어는 글 로벌 언어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 그리고 한국어는 동아시아 언어로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언어를 잘 배워서 제 전공에 어떻게 잘 살 려 나갈 수 있을지를 대학 생활에서 찾고 싶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일본과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가서는 해외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 배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의 전통 건축물과 역사를 올바르게 전파할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학 생활은 혼자 시작해야하 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 입니다 . 이처럼 학교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 제 책임을 다하면서 , 어른 이 되어도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잊지 말고 작은 일에서나 목표를 향 해서 노력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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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には 具体的な将来 の計画 はまだあ りません。 ど のような仕事に 就き たいか 、将来何をし たいのか 、高校 に 入っ て 考える 機会が 増 えたも のの 、ま だ決まって いません。 しか し、 具体的な目標を 定め、 それ に向 かって 努力し ていくことによっ てより有意義 な時間 を過ごす ことができ るので はないかとも 考えてい ます。 それ を見つけ るためにも私 は、大学 には 通 いたいと考 えています。大学で自分の興味があ ることや、自分で は考 えられなかった 、全く 新 しいことを 学ぶことが できれば 将来の 視野 も 広がっていく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ます。 そう 考 えるように なって私 は、今 の時点 で漠然と将来 どのような ことがし たいのか考 えてみました。 私は今 、 この学校で英語、 そし て韓 国語 を学ん でいます。将来 は今学 んでいることを無駄にせず 、存分 に活 かしてい けるような職種 に就きた いと思う ようになりま した。今学 んで いる 言語をどの ように活か していくか、大学生活の中 でじっくりと 考え たいと 思います。 私は韓国での 生活 の中で 、日本、 そして 他国 の 文化 について 興味 を持 つようになりまし た 。なので 大学では 、 多文化 を 深 く 学び 、人 々に 伝えていく 術 を学 べたら 良いと思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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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나에게 묻는다 Grade 11 유승민 Andrew Yoo 나는 어릴 때 꽤나 꿈이 많았다 . 사육사 , 외교관 , 의사 , 영화감 독 등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어린 나이에 상상과 공상 을 넘나들며 미래의 멋진 내 모습을 그려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학을 졸업 한 뒤에 과연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그때 나는 과거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고 싶었다 . 어릴 적에 특별하게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각 인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 그것은 바로 놀이 공원이나 동물 원에 가서 쇼나 퍼레이드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어머니께서 나에게 광고 디자이너도 좋은 직업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기억이 났다. 나는 광고 디자인이라는 분야 를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알아 봤는데 구체적으로 TV 광고, 잡지 광 고, 포스터 광고 디자인 등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TV 광 고 디자인을 선택했다. 영상이 좋아서였다. 그리고 쇼나 퍼레이드도 하고 싶은데 그 중에서 나는 어떤 부 분을 맡아야 할지 고민 했다 . 연출을 할까 , 감독을 할까 , 프로듀서를 할까 고민했다. 나는 쇼와 퍼레이드가 서로 연결되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 퍼레이드나 쇼 프로듀서와 감독이 되려면 어떤 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또 대학에서 어떤 과목을 들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영상 수업에서 만들었던 과거의 영상들을 다 모아서 포트폴리 오에 넣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 가고 싶은 회사에 지원한다면 어떨까하 는 생각도 했다. 뮤지컬과 여러 가지 공연을 보면서 감독은 무대 뒤에서 무슨 일 을 하는지도 궁금했고 공연 준비를 하려면 프로듀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유튜브나 기타 인터넷 자료를 뒤지며 천천히 살펴봤다.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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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도 가끔씩 퍼레이드 창고에 가서 퍼레이드가 시작하기 전과 퍼레이드가 끝나면 공연 연기자들과 스태프 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유심히 봤다. 사실 어린 아이들의 모든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지만 , 어린 내 가 이 퍼레이드 공연을 봤을 때의 환상적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기 분이 좋았고, 나도 커서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결심이 왔다. 나는 이 꿈을 향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그뿐만 아 니라 학교 공부랑 검정고시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 디 자인 분야에서 일을 하기 위해 영상 포트폴리오도 계속 만들고 대학에 서 관련 학과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꿈을 이루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꿈을 당당히 이뤘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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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숙제 Grade 11 정민기 Eric Jeong 초등학교 4학년 때 기말고사를 앞두고서의 일이다 .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원을 다니며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원에 서 수업을 듣던 도중 엄마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학원으로 걸려왔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가방을 싸들고 엄마랑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택시를 타고 갔다 . 병원에 가서 보니 할아버지의 상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다. 그 때 병실에 누워 계셨던 할아버지 의 모습이 내가 본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5년이 더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할머니 댁에 가면 할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메어 온다. 나의 시간은 때가 지나 면 가슴 아픈 기억이 지워질 거라 믿지만, 시간은 그렇지 못하는 무력 한 존재로 남겨진다. 어른들은 말한다. 시간을 잘 쓰는 것이 금보다 중요하고 시간을 잘 써야만이 내 인생에 있어 엄청난 도움을 준다는 것을. 하지만 시간 을 잘 쓴다는 것의 기준은 대체 무엇일까. 단지 시간을 빠르게 흐르게 하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어 많은 것을 하는 것이 시간을 잘 쓰는 것일까 ? 하지만 시간은 무엇보다 빠르게 가고 그 속 도에 비해 그 시간 내에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간은 그 무엇보다 빠르게 가기에 누구도 그 시간 앞에선 브레 이크를 밟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 다 . 시간이 좀 천천히 가면 안 되나 하는 생각 말이다 . 유치원생이던 나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어 있고 앞으로 조금 더 시간 이 흘러서 돌아 봤을 때 나는 어엿한 청년이 돼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너무 싫다 . 시간이 흐르면 그때 그 시간에 함께 했던 추억과 감동을 잊어버리고 살게 뻔하기 때문이다 . 유치원 때에 있었던 그때의 추억은 어느덧 나한텐 잊혀져 하나의 먼지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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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초등학교 때에 있던 친구들과의 추억 또한 어렴풋이 잊혀져 간다. 시간이 흘러서 보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다 추억이겠지만, 나 는 언젠가는 그런 사소했지만 행복했던 추억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 게 될 것이다 .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죽기 마련이다 . 그렇기에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 버려야 하는 것이 마지 못해 받아 들여야 하는 크나큰 숙제가 될 것이다. 나만의 숙제가 아니라 모두의 숙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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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그리움 Grade 11 권진아 Jina Kwon 추억이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 마음과 머릿속에서 추억을 그리워하는 과정은 보통 내 베란다 문에 걸려있는 사진을 매일 보게 되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 베란다 문에 실로 걸려 있는 사진들은 미국 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면 미국에서 보냈던 추억 들이 떠오르게 되는데 , 제일 행복한 추억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토요일의 기억들이다. 나는 토요일을 아주 자유롭게 보냈었다 . 늦게 일어나서 가족이 다 같이 블루베리 팬케이크 몇 십 개를 만들고, 먹고 난 뒤에는, 거실 에 있는 큰 창문 앞 햇빛이 따사롭게 들어오는 곳에서 보드게임을 즐 겼다 . 숙제 , 일 걱정도 없이 웃으면서 지냈다 . 오후에는 보통 시장에 다녀오던가 , 산책을 하러 나갔다. 친구들 , 가족들과 리더를 따라 해라 (follo w the leader) 같은 게임도 하고 , 밝고 딱 적당한 날씨에 마음 껏 뛰어 놀았다. 그땐 이런 토요일들이 당연하고, 그냥 그런 토요일이 라고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내가 밉다. 현재, 지금 상황에 서 생각해보니까 그 토요일들은 모두 천국 같은 날들이었다는 것을 깨 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추억에서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면 사촌들이 우리 집에서 여 름을 보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 그 여름 , 조그만 원룸 아파트 안에 아홉 명이 몇 달 동안 함께 살았다. 때때로 많이 시끌벅적한 적도 있 었지만 , 그 시간 또한 특별한 경험이었고 내 인생 중에 제일 재미있었 던 여름들 중 하나였다 . 한 달은 여름 캠프에 가서 매일 물놀이하며 밖에서 뛰어 놀았고, 놀이동산, 공원 등 캘리포니아에서 가볼 만한 곳 을 다 찾아다니면서 여름을 보냈다. 엄마가 항상 읽으라는 책은 펴보 지도 않았고, 학교는 생각조차도 안했기에 더욱 더 행복했다. 나는 파 라다이스를 경험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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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돌리면 지금 나의 날들이 참 비참 한 것을 한 번 더 깨닫는다. 이 학교에 와서 이런 햇빛 가득한 파라다 이스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고, 자연 속에서 즐겼던 날들은 추 억으로만 남았다. 요즘, 미국에 있었던 삶과 달리 토요일만 되면 책가 방을 열어 방 속에 갇혀있고, 숙제하느라 바빠 가족 얼굴은 보지 못하 는 일이 흔하다. 토요일마다 블루베리 팬케이크를 자유롭게 먹고 싶고 햇빛 가득한 푸른 하늘 아래서 사촌들이랑 재미있게 물놀이를 하고 싶 다. 그 추억들이 그립고 그립다. 매우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추억들 이다 . 하지만 , 이런 깨달음은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들도 언젠가 돌아보면 그리울 추억이 된다는 것, 더 열심히 살아서 더 좋은 추억을 만들라고 하는 것 같다. 내 기억 속 추억이 여전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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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Grade 11 이수빈 Claire Lee “와~ 갖고 싶다… 너무 귀여워.” 동물 병원을 지나칠 때마다 툭툭 던졌던 말이다. 강아지가 없었 을 땐 너무 갖고 싶었다. 때론 길을 걷다 강아지와 나란히 걷는 사람 들을 보면 ‘ 나도 강아지가 있었으면 저렇게 산책 시키고 아껴 줄 텐 데 ’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 친구네 집에 갔을 때도 문을 열자마자 나 를 반기는 내 친구의 강아지를 보며 나에게도 이렇게 나를 반겨주는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그 강아지를 그렇게 예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의 어머니가 강아지 산책시키라 고 하면 친구는 툴툴거렸고 , 강아지를 목욕 시키라고 할 때는 짜증내 기 일쑤였다. 난 그런 친구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의 강아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서 난 다짐을 했다. 만 약 내게도 강아지가 생긴다면 늘 놀아주고 아껴 줄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나에게도 강아지가 생겼다 . 어릴 땐 갈색 이었다가 크면서 색깔이 하얀색으로 변하는 아주 귀여운 베들링턴 테 리어 (Bedlington Terrier)였다 . 실은 그 강아지는 온전히 나의 강아지 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모가 사서 키운 개였고, 우리는 그저 그 강아 지를 잠.시. 돌보는 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잠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그 강아지가 온전히 내 거라고 생각할 만큼 좋아했었 다 . 첫눈이 올 때에는 따뜻한 옷을 입혀 주고 나가서 함께 뛰어 놀았 고 , 날이 좋지 않을 땐 집안에서 같이 뛰어 놀았다 . 친구들한테 자랑 하며 내 강아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강아지라고 늘 말했었다. 난 그 강아지를 너무 사랑했었다. 아니, 난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 강아지를 돌본지 일 년이 지난 후 , 학교생활이 점점 바빠지 면서 나는 예전보다 피곤해졌고 전체적으로 에너지가 떨어지기 시작했 다 .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신나서 짖는 강아지가 한때는 너무 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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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좋았는데 어느 날부터 시끄러워서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날씨가 좋 은 날에는 강아지랑 산책하는 것보다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재미있었 다. 강아지는 점점 나의 관심을 갈구하며 나랑 놀자고 내 방문을 할퀴 기 시작했고, 나는 그러는 강아지가 짜증나서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 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그 강아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 강아지는 아빠 랑 같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 . 나는 그 강아지가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키우는 강아지가 있냐고 물어봤을 때에도 나는 없다고 했다. 그만큼 난 그 강아지의 존재를 잊었던 것이 다. 3 년이 지난 후 , 난 강아지를 다시 만났다 . 그 때 강아지는 미국에 서 이모랑 살았고, 이모를 보러 간 나는 도착할 때까지도 강아지에 대 한 생각이 없었다 . 하지만 몇 년 전처럼 한결같이 나를 보며 반기는 강아지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 하지만 한결같은 건 강아지뿐이었지 , 나는 아니었다 . 나도 역시 한결같이 관심을 좀 주는 듯 했지만 빨리 질려서 강아지를 무시했던 것이다. 나를 본 첫 날이라서 그런지 그 날의 강아지는 아주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나랑 놀자고 모든 장난감을 다 물고 와서 내 발 앞 에 두었지만 난 같이 놀아주지 않았다. ‘ 오늘은 너무 졸리니까 내일 놀아줘야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강아지는 자꾸 토하고 자기 침대에만 누 워 있었다. 3일이 지나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이모는 강아지를 근처 동물 병원에 데려갔다 . 많은 검사 후에 강아지가 자궁암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 하지만 수술 중에 암이 온몸에 퍼져서 의사는 강아지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고, 우 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난 그날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제일 먼저 병원 문을 열 고 들어가 강아지 이름을 외쳤다.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강아지는 아 픈데도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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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해줬다. 그게 강아지한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 강아지의 죽음은 늘 아프고 슬픈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하 지만 난 그 죽음으로 인해 사랑에 대해 배운 게 많다. 사랑은 아무리 원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주고 싶어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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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진화 Grade 11 박지훈 Joshua Park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게임이다 . 지난 10년 동안 게임은 내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내가 처음 접한 게임기는 Nintendo DS lite였다. 거기엔 아주 많은 게임들이 들어 있었다 . 그 게임을 할 때 내 마음은 편안해지고 시간도 더 빠르게 갔다. 그 때는 어릴 때라 그 때의 게임과 지금 하는 게임은 아주 다르지만 둘 다 공통점이 있 다 . 그것은 내가 못 느꼈던 통쾌함을 주고 나의 지루함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게임을 취미로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한 다. 게임에 중독이 된다고도 하고 눈에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머리가 나빠진다고 한다 . 하지만 모든 취미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취미가 된 것이다 . 게임은 머리를 나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풀 어준다 . 물론 어떤 게임은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다 . 경쟁이 심한 게 임들이 스트레스를 제일 많이 만든다 . 그런 경쟁이 심한 게임에서 지 면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상한다 . 그래서 나는 그런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Nintendo DS Lite를 잃어버린 다음에 다른 게임을 찾았 다. 그 게임은 마인크래프트다. 이 게임은 경쟁이 심하지는 않다. 그런 데도 이 게임은 통쾌함을 아주 잘 만들어 준다. 나는 4학년 때부터 6 학년 때까지는 마인크래프트를 했었다. 그때 그 게임 안에서 할 수 있 는 것이 많아서 지루함이 없었다. 마인크래프트 다음에 시작한 게임은 TF2였다 . 이 게임은 총을 쓰는 게임인데도 경쟁이 별로 심하지 않다. 하지만 이 게임은 나의 기 술이 필요해서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나는 이 게임을 2 년 동안 해서 1700시간을 기록했다. 그 말은 매일 40분 이상씩은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이 게임도 통쾌함이 생기고 아주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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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학년 때 나는 새로운 게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게임 은 오버워치였다 . 하지만 그 게임은 비싸기 때문에 아빠가 분명히 안 사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약속을 했다. 내가 그때도 TF2를 많이 하고 있어서 아빠가 싫어하셨는데 내가 오버워치 가 나올 때까지 게임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아빠께서 오버워치를 사 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3 개월 동안 게임 금지를 지켜냈다. 그 3 개월이 엄청 힘들었다. 게임을 다 삭제하고 인터넷이랑 TV만 봤다. 3 개월이 지난 후에 오버워치가 나왔고 마침내 아빠가 사주셨다. 나는 그때 엄청 기뻤고 나는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오버워치를 사서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 하지만 오버워치 는 경쟁이 조금 심하다. 경쟁 모드도 있고 캐주얼 모드도 있는데 경쟁 모드가 더 재밌긴 하다. 하지만 경쟁을 처음으로 해서 그런 건지 처음 엔 스트레스를 꽤 받았다. 나의 순위에 신경을 많이 써서 게임을 계속 하기엔 좀 무서웠다. 내가 원하던 순위가 있었는데 그곳까지 가는 것 이 엄청 힘들었다. 이기고 지고, 이기고 지고, 계속 똑같은 패턴이 반 복됐다 . 겨우 내가 원하던 순위에 진입하고 나서는 내가 너무 많이 해 서 그런 건지 오버워치가 조금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피시방에서 놀고 있었다. 그 날 난 피곤 했고 오버워치를 진짜 하기 싫었다 . 그래서 내 친구가 오버워치 말고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 그 게임이 RPG 게임이었 다 . 갑자기 RPG 게임에 마음이 끌렸다 . 그래서 친구한테 많이 안 해 본 RPG 게임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 답은 메이플스토리2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메이플스토리 2 를 시작해서 2 주 동안 했다 . 하지만 그 게임은 인기가 별로 없었고 친구들도 많이 하지는 않았다 . 그래서 다 시 친구들이 많이 하는 게임을 시작했다 . 그 게임 이름은 메이플스토 리다. 메이플스토리는 스트레스를 푸는 역할을 아주 잘 해준다 . 레벨 업하고 EXP 를 받는 기분이 아주 통쾌하다. 경쟁 같은 건 없고 하면서 멍을 때릴 수 있다. 메이플은 지금까지 하고 있는데 언제든 내가 하는 게임은 바뀔 수 있어서 앞으로 또 어떤 게임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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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나의 인생을 즐겁게 해 주었고 힘들 때 많이 도와준 취 미이다 . 만약 내 인생에 게임이 없었다면 어떤 취미를 가질지 상상도 안 된다. 게임은 이렇게 내가 심심할 때나 힘들 때 많이 도와주는 취 미이다 . 내게 게임이 없었다면 아마 힘든 시간을 어려움 없이 지내기 가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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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Grade 12 이연재 Jennifer Lee

미움에 가려진 이해 3학년 때 나는 미국에서 새로운 초등학교로 옮겼다. 미국에서 산 지는 한 3 년이 됐지만 그때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되고 영어도 잘 못했 다 . 그래서 새로운 학교에 가는 게 더욱 더 어렵고 무서웠다 . 하지만 학교에 가자마자 다행히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 그 여자애는 나를 먼 저 반겨 주었고 자기랑 점심시간에 점심도 같이 먹자고 했다. 너무나 도 감사하고 기뻤다 .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 친구의 말을 잘 따랐 다 . 그 아이가 나한테 무엇이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았고 , 뭐든 지 해달라고 하면 해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했다. 그 친구는 다른 미국 아이들 앞에서 나를 더 놀리는 것 같았고, 그 아이 들 앞에서 영어로 웃으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를 했다. 난 어느 순간에 눈치를 챘다. 이것은 진실된 친구가 아니고 나를 그동안 이용했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그 때를 돌아보니 나는 이제 드디어 알겠다. 그 친구는 항 상 그 미국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미국 아이들이 끼워주지 않으니까 그 아이들의 마음에 더 들기 위해서 나를 이용해서 자기도 힘이 있는 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난 그 아이가 밉지 않다 . 그 아이도 사정이 있었고 얼마 나 그 자리가 간절했으면 그 나이에 친구를 이용할 생각을 할까... 참 불쌍했다 . 하지만 나도 이해하고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 그렇게까 지 하도록 만든 이 사회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다. 사과 받지 못해 시들었던 내 마음이 용서로 다시 피어날 수 있다 면, 그래서 누군가에게 나는 진심어린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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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은 꽃 미안하다는 말이 왜 이렇게 어려운건지 모르겠다 세 자리 밖에 안 되는 그 단어, 너무나도 버겁다 그냥 “미안해” 라고 하면 끝날 일인 걸 알면서도... 힘들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의 자존심 같이 세다 미안하다는 말은 학교 첫 날처럼 어색하다 용서는 받고 싶은데 용서를 하고 싶은데 왜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할까 마음이 벌써 구겨져서, 마음에 못이 박혀서 그 말을 해도 상처만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들은 꽃처럼 내 마음도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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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용서받지 못할 일은 있을까? Grade 12 박정훈 James Park 용서란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 고 덮어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일종의 협의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용서를 받아 줘 야지만 성립한다 . 현재 우리 사회에는 살인을 가장 무거운 범죄로 두 고 있다. 하지만 과연 살인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가? 그렇지 않다 . 가해자가 피해자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진심으로 잘못을 뉘 우친다면 , 용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제 일 무거운 죄, 살인마저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진짜 용서 받지 못 할 일은 있을까? 있다 . 그것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불분명한 자살이다. 스 스로 목숨을 끊을 경우 , 용서를 구할 가해자도 , 용서 받을 피해자도 없다 . 그리고 자신 말고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이다. 이런 순간에는 시간을 되돌려 용서를 구하는 방 법 외에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살은 말 그대로, 용서받 지 못할 잘못이다. 영화 ‘ 세 얼간이’ 에서는, 프로젝트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학생 의 요구에 교장이 학생의 아버지한테 연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상 황에서 교장은 아버지한테 학생이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쓸데없는 것 만 만든다고 심한 지적을 했다 . 프로젝트 마감 날 , 그 학생은 자신의 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됐다 . 자신의 가족이 자기에게 의지를 많이 하는 것을 아는 학생은, 이 프로젝트를 못 끝내면 학점을 받지 못하고 수업에도 지장이 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살을 한 것이다. 학생이 목숨을 잃은 데에는 학생에게 불필요한 압력을 가한 교 장의 잘못도 있지만 , 거기에 낙담하고 자살한 학생의 잘못도 있다고 본다 . 자신에게 닥친 이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아닌, 회피의 수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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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갔으니까 말이다. 또 다시 영화에선 어느 학생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부모님을 설 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 그 학생은 친구로부터 지갑에 부모님 사진을 인쇄해서 넣은 다음에 힘들 때, 그리고 정말 절망스러울 때마다, 만약 자신이 자살하면 부모님의 표정이 어떨까를 생각하라는 말을 듣게 된 다 . 이 말은 들은 학생은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되고 , 부모님을 진지하게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어떤 절망에 닥쳤을 때 , 피해가지 않고 , 맞서는 용기가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또한 , 극단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울 때, 부모님이나, 사랑하 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가 자살을 하면 이 사람들의 표정들이 어떨 까?, 이 사람들의 미소는 사라질 거야 .” 라는 생각을 하며 용기를 내 며 시련을 헤쳐 나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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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강아지 루비 Grade 12 신수지 Sophia Shin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신수지입니다 . 오늘은 제 강아지 루비에 대해서 발표하겠습니다. 여러분, ‘ 강아지는 인간들의 가장 좋은 친구이 다 .’ 라는 명언을 들어보셨나요 ? 저는 루비를 만난 이후부터 이 문장 에 100%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 왜냐하면 루비는 제 절친이 되었기 때 문입니다. 루비는 항상 저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활발한 강아지입니다. 어 떤 사람이 저를 때리려고 할 때, 루비는 짖기 시작합니다. 또, 제가 학 교에서 집에 올 때마다 저에게 달려와서 안아달라고 하고 , 얼굴을 핥 습니다 . 제 부모님은 루비가 저한테만 마중을 나와서 저를 부러워합니 다. 제가 저녁 먹을 때, 혼자서 과자를 먹을 때 루비는 저한테 달려와 서 앞발을 무릎에 놓고 , 동그란 눈으로 애교를 부립니다. 어떨 때 는 루비의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과자를 몇 개 준 적도 있습니다. 루비랑 처음 만났을 때 저 는 루비를 데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 하지만 강아지 가게 에서 저를 계속 쫓아오는 루비를 보고 결국 살 결심을 하게 되었 습니다 . 그때 저는 초등학교 2학 년이었고 , 루비는 예쁜 갈색 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지금은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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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나이가 들어서 하얀 털이 생겼지만 루비를 향한 저의 사랑은 변함 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루비랑 만든 재밌는 추억이 많습니다. 가장 또 렷한 기억은 제가 처음으로 루비를 집에 데려왔을 때, 너무 졸려서 루 비를 제 침대에 올린 다음에 이불 안에 들어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부터 루비는 잘 때마다 이불을 쓰고 자야하 는 강아지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루비는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활발한 강아지입니다 . 루 비가 제 인생에 없었다면 , 아마도 저는 지금 남들의 문제들을 이해하 고 공감하는 사람이 못 되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루비에 대한 제 발표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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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와 프래인크 Grade 12 김예담 Donna Kim 저는 원래 강아지가 두 마리 있었어요. 하지만 강아지들이 미국 에 있는 엄마랑 아빠한테 가면서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고양이를 키우는 게 너무 어려워서 고양이를 잘 돌보는 사람한테 주었 어요 . 애완동물이 없어서 외로웠지만 , 제가 또 애완동물을 기르면 혼 자 키워야 해서 ,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 그래서 애완동 물을 사지 않고 애완식물을 샀어요 . 하나는 선인장이고 , 다른 하나는 파리지옥이에요 . 선인장의 이름은 제프리고, 파리지옥의 이름은 프래 인크예요. 제프리와 프래인크는 너무 귀여워요 . 제프리는 아무것도 안 해 도 , 푹신하게 생겨서 귀엽고 , 프래인크는 파리들과 다른 벌레를 죽여 서 귀여워요. 소리도 안 내고, 산책도 필요 없고, 그리고 아예 안 움직 여서 너무 편해요. 제프리와 프래인크는 물, 햇빛, 그리고 사랑만 필요 해요 . 제프리는 선인장이라서 물을 많이 먹으면 죽어요 . 하지만 프래 인크는 물이 매일 필요해요. 애완식물들은 화분 안에서 흙이랑 같이 살아요. 제가 제프리와 프래인크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실수로 걔네들을 거의 죽일 뻔했어요. 제프리를 처음 산 날이었어요 . 제가 학교 행사에 늦어서 , 제프 리를 가방 안에 넣고 빠르게 뛰었어요. 학교에 도착해서 가방 안을 보 니까 , 흙이 다 흘러서 가방이 엉망이 됐어요 . 그래서 흙을 다시 화분 안에 넣어 두었어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죠. 학교 행사가 끝나고, 할 머니가 제 가방을 가지고 가셨어요 . 할머니께서는 식물이 가방 안에 있는지 몰라서 다른 물건들을 제프리 위에 넣으셨어요 . 한 시간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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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갑자기 제프리가 잘 있나 걱 정도 되고, 보고 싶어져서 가방 안 을 보니 제프리는 안 보이고, 다른 물건들만 잔뜩 채워져 있었어요. 제가 너무 걱정이 돼서 물건들을 꺼낸 후 제프리를 찾았어요 . 제프 리는 화분에서 빠져나와 가방 밑 에 축 늘어져 있었어요. 저는 얼른 제프리를 화분에 넣고 차에 탄 후 에 차 뒤쪽에 잘 세워뒀어요. 그런 데 차가 움직일 때, 제프리도 움직 여서 또 화분에서 빠져버렸어요. 제프리가 죽을까봐 집에 돌아가자 마자 빨리 화분 안에 넣고 흙을 더 주고, 물도 주었더니 제프리가 살 았어요. 프래인크는 남형이랑 같이 이마트에 가서 샀어요 . 제가 프래인 크를 처음 보자마자 너무 갖고 싶어서, 프래이크한테 뛰어가서 화분을 들어 올렸어요 . 남형이한테 귀엽다고 말하는 중에 손에 힘이 갑자기 빠져서 프래인크가 미끄러졌어요. 하지만 마치 영화처럼 땅에 떨어지 기 전에 제가 프래인크를 확 잡았지요. 지금은 프래인크와 제프리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방학 때 미 국에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니 저의 애완식물들이 없어졌어요 . 사실 제가 애완식물을 키우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어요 . 그것들을 찾 지도 않았어요 . 그래서 지금은 그냥 프래인크와 제프리 없이 살아요 . 어딘가에 잘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끔 저는 프래인크과 재프 리를 떠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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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우정을 소망하며 Grade 12 신성진 Prada Sh in 내가 유치원생이 되던 해 , 나는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 그 친구는 유치원 안에 있든 , 밖에 있든 항상 나와 같이 있던 친구이자 나의 분신이었다 . 내가 초등학교 학생이 되는 해에 나와 절친이었던 그 친구는 나와 좀 멀어져 갔고 ,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전쯤에는 우리 집이 이사를 가서 원치 않았던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 친구와는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었고 , 전학을 간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 초등학교 1학년 말 때쯤인가 두 명의 친구가 나를 반겨주었다 . 초등학교 4 학년 때는 당시 학교로 전학을 온 친구도 있었는데, 같은 반이다 보니까 그 친구랑도 같이 많 이 놀게 되어 그 친구랑도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중학교 1 학년이 되던 해에는 친구들의 중학교 배정이 각각 달랐 다. 하지만 4학년 때 전학 왔던 친구는 나와 같은 학교로 배정이 되어 서 솔직히 나는 그 친구랑 더 친해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멀어졌 다 . 같은 학교에 배정 받았다 해서 같은 반을 배정 받은 것은 아니었 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는 해였다 . 다른 학교로 배정받은 친구들을 거리에서 만났다 . 하지만 , 서로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외모도 분위 기도 많이 변했다. 만나면 반가울 줄 알았는데 상당히 어색했다. 서로 인사만 하는 사이로 변했다. 안타까웠다. 중학교 3 학년 때 나는 학교에서 정말 조용했다. 옛날에는 친구 들이랑 잘 어울려 놀았지만, 외국인 학교로 전학 오게 되면서 한국 학 교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한국 학교 분위기에 익숙했던 나는 외국인학교로 전학 오면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너무나 서툴렀다. 어 색했다 . 과거 친했던 친구들과 그렇게 멀어지게 되면서 , 새로운 친구 들을 사귀는 게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외국인 학교로 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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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게 되면서 동급생보다 1 년 더 유급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한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학교를 같이 다녔 던 친구를 만났다는 점이다 . 그래도 그 친구 덕분에 힘든 학교생활이 힘들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이제 어느덧 졸업을 앞두고 있다 . 한국 학교 친구들을 보면 그 들은 한참 형같다 . 하지만 내가 내 자신과 동급생들을 볼 때면 나는 꼭 어린애 같다. 나는 가끔씩 나의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생 때의 시간 들을 생각한다 . 그러다보면 예전의 친구들이 생각나고 그리워 이런저 런 감정들로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추억은 추억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잊으려 애쓴다. 과거의 시간보다 현재의 시 간이 더욱 중요하다고 애써 내 감정을 저기 저 무의식의 한끝으로 밀 어 넣는다. 비록 예전 어릴 적, 가장 순수했던 시절에 쌓았던 그 예쁘 고 귀여운 추억으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스스로 새 로운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앞으로 나는 내 나름대로의 친구 관계를 유지하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갈 것이 다. 비록 그것이 내 어린 날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더 나이 들 어 어른이 되었을 때 , 오늘을 추억하면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 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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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한 것 Grade 12 홍성욱 Sean Ho ng 우리는 늘 잘못을 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한다. 크고 작은 잘못 과 죄책감 속에서도 그래도 우리가 마음을 비워 내거나 힘든 상황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용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용서는 무엇일까? 용서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용서는 구하기도 힘들고 하기도 힘들다. 용기가 필요하고 자신의 자존 심을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버려야 한다 . 그리고 용서의 요청을 받는 사람도 분하고 억울하다 하더라도 속내를 감추고 받아 줄줄도 알아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용서가 어렵다 . 그렇지만 예전의 일들을 생각 해 보면 후회스럽고 죄책감이 든다. 왜 그때 ‘미안하다 ’ 한 마디 하지 않았을까 , 왜 그때 터져버린 화를 조절하지 못했을까 . 후회의 마음을 잠시 접고 나의 용서에 관한 경험담을 한번 털어내 보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말 쯤인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던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사소한 일 때문에 크게 다투고 난 후 그 친구는 나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절교를 하게 된 적이 있다 . 그래서 그 친구는 우리 무리와 멀어지게 되었고 점점 내 주변의 삶으로부터 사라져 갔다. 그때 나는 그 친구를 보면서도 아무 감정이 없었다 . 그 친구가 누구와 놀든, 누구와 지내든 아예 신경을 껐다. 다 른 애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혼자 지내고 있다고 했다. 혼자 밥을 먹고 , 혼자 우두커니 있고 , 다른 그룹의 친구들조차 그 친구와 같이 안 어울렸다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죄인이다 . 아니 나는 쓰레기였다 . 그 친구는 그때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며 힘들게 지냈을까. 나는 얼마 전 어머니와 이 부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그 친구를 향한 미안함 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내가 뭐라고 , 그때 그게 뭐라고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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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악한 마음으로 친구를 대했을까. 친구가 받았던 고통과 슬픔과 그 스트레스를 생각해 보면 정말로 말로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하다. 그 후로 그 친구와 학교에서는 같은 반이 되고 같은 학원에 다 니면서 어쩔 수 없이 말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을 같이 먹게 되었다 . 친구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다가 예전 그 친구와 다투고 난 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소소한 이야기들이 나오 게 되었다. 나는 그 시절 같이 나누고 공감한 추억이 없는 그 친구에 게 미안했다. 그래서 이때다 싶어 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미안했었 다 ”라고 한 후 한 쪽 손을 건네었다 . 그 친구는 놀란 듯이 나를 보며 괜찮다며 나의 손을 멋쩍게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쯤 그 친구 소셜 미디어에 한 장의 사진과 함 께 # 화해라는 태그가 올라왔다. 나는 그 순간 그 친구한테 너무나 고 마웠다 . 그때 한 가지 배운 사실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든 자존심 이 상하든 바로 용서를 구해야 하고 또 상대는 받아줘야 한다는 것이 었다 . 그 이후로 우리는 전처럼 같이 완전히 친하게 지내지는 못하지 만 그래도 연락도 꾸준히 하면서 여전히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지 금도 나는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 하고 싶다. “미안하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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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컴문(弔.Com.文) -유 씨 부인 ‘ 조침문(弔針文)’ 패러디

Grade 11 정현욱 Jakin Jeong 유세차 2017 년 4월 4일에, 학생 정 씨는 두어 자 글로써 노트 북에게 고하노니 , 인간의 전자 기기 가운데 중요한 것이 컴퓨터로되 ,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노트북 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가 남과 다름이 라 . 오호 통재라, 마음 아플 정도로 아깝고 불쌍하다 . 너를 얻어 자나 깨나 손에서 놓지 않은 지 우금 십일 개월이라 .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오 . 슬프다 . 후회된다 .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을 겨우 진정 하여 , 너의 행장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안녕을 고하노라. 연전에 우리 아버지께옵서 학교 수업에 노트북의 필요성을 알게 되시고 , 선물로 받은 최신형 노트북을 나에게 주셨거늘 , 너를 얻어 손 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몇 달 되었더니, 슬프다, 연분이 비상하여, 그간 너를 무수히 떨어뜨려 너의 안까지 부수었으나, 오직 너 하나만 은 연구히 보전하겠다 다짐하니, 비록 무심한 물건이나 어찌 사랑스럽 고 미혹하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아쉽도다. 나의 신세 기구하여 내 손에 오래가는 전자 기기가 없고, 1년을 버티지 못하는 스마트폰, 이어폰, 엠피쓰리, 아이패드는 수도 셀 수 없 으나 이번에는 너야말로 오래도록 내 곁에 두고 마음을 붙이고자 하였 더니 , 오늘날 너를 영결하니, 오호 통재라, 이는 귀신이 시기하고 하늘 이 미워하심이로다. 작년 시월 초십일 자시에, 너를 쓰려다가, 너의 전원 버튼을 눌 러 켰더니 화면에 아무 것도 안 보이니 깜짝 놀랐어라. 아아, 나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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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북이여 , 내가 너를 잘 보살피지 못해서 몸체만 아니라 내부까지 망 가졌구나 . 깊은 바닷속처럼 어두운 암흑이 너의 얼굴을 덮은 걸 보자 니 그만 정신이 아득하고 혼백이 산란하여 , 마음을 빻아 내는 듯 , 두 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혼절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 져 보고 또 만져 본들 속절없고 하릴없다 . 편작의 신술로도 장생불사 못 하였네 . 공식 대리점에 찾아간들 이미 망가진 네 몸과 영을 어찌 말끔히 고칠쏜가. 심장을 베어 낸 듯, 영혼을 뱉어 낸 듯, 마음이 아프 도록 슬프다 노트북이여 , 무심결에 가방이나 방을 뒤져 봐도 네가 없 네. 오호 통재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한 너를 마치니 , 백인이 유아이사라 , 뉘를 한하며 뉘를 원 하리요 . 속 시원할 정도로 빠른 반응 속도를 가능케 해주는 8기가 RAM과 영상이나 사진을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HD 화면과 무 엇이든 찾아주던 너의 능숙함을 어찌 다른 제품에서 찾을 수 있으리 오 . 미끈한 너의 몸체와 윤기 , 살아있는 너의 화면이 눈 속에 삼삼하 고 , 얇은 키보드는 손가락에 익혀있고, 특별한 품재는 심회가 삭막하 다 . 네 비록 물건이나 무심하지 아니하면 , 후세에 다시 만나 채우지 못했던 너의 256GB짜리 용량을 모두 채우고, 백년고락과 일시생사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라, 내 노트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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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문 (弔靴文) -유 씨 부인 ‘ 조침문(弔針文)’ 패러디

Grade 11 남윤준 Jo shua N ahm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학생 윤준 씨는 두어 자 글로써 신자 에게 고하노니 , 농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농구화이로되 , 세상 사 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농구화는 한낱 운동에 쓰는 물건이나 ,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가 남과 다름이 라 . 오호 통재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자나 깨나 손에서 놓지 않은 지 우금 이 개월이라 .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오 . 슬프다 .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을 겨우 진정하여 , 너의 행장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안녕을 고하노라. 연전에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농구화를 판다기에 , 냉큼 내가 산 다고 해 , 지하철을 타 약수역에서 만나, 사가지고 집에 돌아가 , 발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두 달 되었더니, 슬프다, 연분이 비상하여, 그 간 농구화를 무수히 잃고 내 마음이 산산이 조각났지만, 오직 너 하나 만은 연구히 보전하겠다 다짐하니, 비록 무심한 물건이나 어찌 사랑스 럽고 미혹하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 사물함에 넣어놨던 농구화는 두 달이 지나 나의 마음과 같이 없 어져버렸다. 나의 신세 기구하여 내 발에 오래가는 농구화가 없고, 1년을 버 티지 못하는 운동화 , 캐주얼화는 수도 셀 수 없으나 이번에는 너야말 로 오래도록 내 곁에 두고 마음을 붙이고자 하였더니, 오늘날 너를 영 결하니 , 오호 통재라, 이는 귀신이 시기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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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시월 초십일 사시에 ,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가 농구화를 챙기려는데 , 농구화는 온데간데없고 운동복만 있다더라 . 아아 , 농구화 여, 필요 없는 것들은 남아있고 너만 없어졌구나. 거북이 등짝처럼 갈 라진 너의 얼굴을 보자니 그만 정신이 아득하고 혼백이 산란하여 , 마 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혼절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보고 또 봐도 속절없고 하릴없다. 편작의 신술로도 장생불사 못 하였네 . 분실 보관소에 가봐도 없는 너를 어찌할까 . 한 팔을 베어 낸 듯 ,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 아깝다 농구화여 , 무심결에 한 번 더 뒤져 봐도 네가 없네 . 오호 통재라 ,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 다. 무죄한 너를 마치니, 존경하는 선배가 유아이사라 , 뉘를 한하며 뉘를 원하리요 . 좋은 마찰력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딱딱 멈추게 하는 능력을 어찌 다른 제품에서 찾을 수 있으리오. 미끈한 너의 몸체와 깨 끗한 너의 줄이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는 더 심회가 삭막하 다 . 네 비록 물건이나 무심하지 아니하면, 후세에 다시 만나 낡을 때 까지 쓰고 , 백년고락과 일시생사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 오호 애재라 , 내 농구화여. <에필로그 > 존경하는 선배에게 받은 그 농구화는 내가 처음으로 정이 들었 던 농구화였다 . 아주 멋지거나 모두가 좋아할만한 농구화는 아니었지 만 그렇게 좋아했던 농구화는 나에게 처음인 동시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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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구문 (弔球文) -유 씨 부인 ‘ 조침문(弔針文)’ 패러디

Grade 11 서대원 Daniel Suh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학생 서 씨는 두어 자 글로써 구자에 게 고하노니, 내가 가진 여러 스포츠용품 가운데 중요한 것이 농구공 이로되 , 학생들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 이 농구공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가 남과 다름이라 .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나한테 동기를 부여하고 있으니, 나에 겐 귀한 물건이다 . 오호 통재라 , 아깝고 불쌍하다 . 너를 얻어 언제나 놓지 않은 지 우금 3 년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오. 마음이 아프다 .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안녕을 고하노라. 연전에 우리 어머니께옵서 향상된 성적표를 보시고, 운동용품점 에 나를 데려가사 농구용품 여러 종류를 보여 주시거늘, 구형은 한 쪽 으로 밀어 버리고, 신형도 슬쩍 모른 척 한 후에 가장 비싸고 좋은 농 구공을 택해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석 년이 되었더니 슬프다. 그간 농구공을 무수히 잃고 공이 더러워지되 , 오직 너 하나만은 연구 히 보전하겠다 다짐하니, 비록 무심한 물건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 하지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나는 또한 섭섭하도다. 나의 신세 기구하여 내 손에 오래가는 물건이 없고, 1년을 버티 지 못하는 축구공, 배구공은 수도 셀 수 없으나 이번에는 너야말로 오 래도록 내 곁에 두고 마음을 붙이고자 하였더니, 오늘날 너를 영결하 니, 오호 통재라, 이는 귀신이 시기하고 하늘이 미워하심이로다. 금년 삼월 모일 자시에, 농구가 잘 안 돼서 화가 나서 너를 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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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리고 놓치고 말았으니 깜짝 놀랐더라 . 아야 아야 농구공이여 , 주 황색으로 칠해진 페인트도 뜯어지고 바람도 많이 빠졌구나. 거북이 등 짝처럼 갈라진 너의 얼굴을 보자니 그만 정신이 아득하고 혼백이 산란 하여 ,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혼절 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만져 보고 또 만져 본들 속절없고 하릴없 다 . 편작의 신술로도 장생불사 못 하였네. 동네 운동용품점에 찾아간 들 이미 갈라진 네 얼굴을 어찌 말끔히 고칠쏜가 . 한 팔을 베어 낸 듯 ,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 아깝다 농구공이여 , 무심결에 가방을 뒤져 봐도 네가 없네. 오호 통재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한 너를 마치니 , 백인이 유아이사라 , 뉘를 한하며 뉘를 원 하리요 . 빠른 속도와 언제든 도움이 돼 준 너의 능력을 어찌 다른 물 건에서 찾을 수 있으리오. 둥글한 너의 몸체와 익숙한 너의 촉감이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는 심회가 삭막하다 . 네 비록 물건이나 무 심하지 아니하면 , 후세에 다시 만나 약정을 모두 채우고 , 백년고락과 일시생사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라, 내 농구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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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그 해의 기억들 Grade 11 김하령 Eunice Kim 1882년 5월 6일 지난번에는 우리들을 다 집으로 보내고 별기군을 들이더니 이제 는 모래와 쌀겨가 섞인 쌀을 주다니 너무한 것 같다. 우리 군인 대부 분은 가족을 돌봐야 하는데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어찌하란 말인 가. 그것도 십삼(十三 ) 개월 동안 밀린 봉급을 저렇게 주다니. 아예 선 혜청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다른 군인들과 대화를 해보 니,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오랜 학대 동안 우리는 계 속 참아 왔다. 우리가 열심히 모신 폐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 나도록 놔두시지 않을 거라고 우리는 믿었다 . 하지만 이제는 그런 희 망 (希望)마저도 없어지고, 화만 남았을 뿐이다. 다음 달에 작전을 실행 하려 한다 . 시작은 이 모든 것을 일어나게 만든 선혜청에서 하려 한 다 . 선혜청에 가서 반드시 김보현과 민겸호 그 둘을 없앨 것이다 . 감 히 우리를 무시하고 별기군만을 우대해 ? 우리 봉급을 연체시킨 것도 그놈들 짓이겠지. 허나, 민비도 잡아야 한다. 이 나라의 개화를 폐하께 추천하던 주범자이니 더 이상 일을 더 크게 만들 수 없게 가두어야 한 다 . 일단은 무기를 모아야겠다 . 하지만 별기군의 무기가 워낙 발달되 었다 보니 우리가 불리한 점이 많다. 1882년 6월 5일 일단 선혜청을 성공적으로 습격하였다 . 마땅히 사용할 무기가 없으니 돌을 던지는 자들도 있었다 . 우리의 움직임을 폐하께서 보고 받으신 듯하다 . 또 그 놈의 민비의 말을 들으시겠지 . 아니지 . 민비는 이제 폐하의 눈치를 볼만한 사람이 아니다 . 충분히 혼자서도 우리를 한 번에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이야 . 어서 궁으로 가야 해 ! 이 일을 다른 군인들에게 말했더니 , 궁은 나중에 가자고 한다 . 일본 공사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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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라고 … 헌데 일본 공사관을 불 지르면 도리어 화가 조선에 오지 않겠는가 . 일본은 당연히 자기 나라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조선에 책 임을 지게 하겠지. 그들이 만약 우리 곡식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식량 이 더욱 부족해지지 않겠는가 . 개인적으로 , 이 작전에 대해서는 반대 이다 . 우리는 지금 나라에 분노한 것이다 . 일본인 교관을 비롯한 일본 인 무리 역시 괘씸하지만 나라에 항의하는 것이 먼저다. 외세와 싸우 다가는 우리 가족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1882년 7월 20 일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다 . 내가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 다 . 민비를 놓친 것이 큰 실수였다. 청나라를 왜 그리 좋아하는지 , 또 그들을 불러 우리 ‘군란’을 막았다. 백성들이 나라의 부당한 대우에 맞 서 싸우고 있는데 , ‘ 난 ’이라니 , 참으로 서러운 일이다 . 그러게 대화로 하자고 할 때는 무시하고 무력으로 나올 때는 봉기라며 비난하니 , 이 어찌 서러워서 살 수 있겠나. 임오년 7월 16일 , 청군은 우리 군인들 몇 백 명을 끌고 가서 , 그중 열한 명을 처형했다 . 다행히 나는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 청은 우리 난을 막은 날부터 조선 내부에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 . 일본 은 내 예상대로 조선에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 특히 그 조약 ! 제물포 조약이라 했던가 … 내가 듣기로는 매우 불평등한 항목으로만 가득 차 있던데 . 일본군이 조선 땅을 밟을 수 있게 하다니 ,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더 이상 이 나라에 우리를 위한 미래는 없는 것 같다. 나 는 만주로 떠나려 한다. 나라가 나를 버렸다. 나도 이 나라를 이제 버 리려 한다. 만주로 향하는 길에서 애써 눈물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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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분노, 그 시작 Grade 11 김규한 Chris Kim 1882년 6월 5일 오늘 받은 급료 쌀에서 모래가 발견되었다 . 내가 받은 쌀에서 거의 반 정도가 모래와 돌이 섞여 있었다. 나와 다른 군인들이 선혜청 관료들한테 물어봤는데 자기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 얼마 후 앞에 있던 몇 명이 관료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 곧 이어 모든 관 료들을 두들겨 팼다. 열지 않은 쌀가마들을 다 열어 보았는데 다 마찬 가지였다 .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리고 군인 한 명이 궁궐로 가서 항 의하자고 말했다. 모든 군인들이 찬성했다 . 나도 어쩔 수 없이 찬성을 했지만 궁궐로 어떻게 가겠다는 거지? 오늘 일어난 일로 나와 다른 군인들도 벌 받을 위기다. 1882년 6월 8일 지난 삼일 동안 공격 계획을 세웠다 . 나는 다른 군인들과 민겸 호의 집과 경복궁 쪽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군들은 일본 공 사관하고 하도감 (별기군 훈련장 )을 공격한다 . 우리의 목적은 위정척사 파 , 흥선대원군을 지지하던 인물들을 석방시키고 명성황후를 잡는 것 이었다 . 오늘 이 일기가 마지막이 될 것 같아 걱정된다 . 내일 죽으면 어쩌지 ? 지금 잡히면 벌 받는데 어쩌지? 그냥 가서 싸울 수밖에 없군. 1882년 6월 9일 오늘 민겸호의 집을 습격했다 . 싸움이 매우 거칠었다 . 우리는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엄청 많이 갖고 왔다. 나와 군인 3명은 명성 황후의 위치를 찾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찾을 수 없었 다. 다행히 우리는 이겼다. 다른 군인들도 일본 공사관 공격에 성공했 다. 나는 다행히 싸우는 일을 맡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칼싸움이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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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던 곳을 지나갔는데 피 냄새가 엄청났다. 별기군 부대까지 공격해서 우리를 상대할 장애물은 거의 없다. 우리의 집결지 동별영 (훈련도감 본영 )으로 다시 모여서 명성황후를 찾는 작전을 세웠다 . 경복궁에 없 는 걸 보면 창덕궁에 숨어 계실 것 같다. 오늘 일어난 사건으로 붙잡 히면 사형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깊이 숨어야 할 것 같다. 붙잡힌 군인들은 이미 사형 당했을 것 같다. 1882년 6월 10 일 오늘 명성황후를 찾기 위해 창덕궁 쪽을 공격했다. 하지만 명성 황후는 이미 피신을 한 상태였다 . 어떻게 도망쳤지 ? 분명히 출구들을 다 봉쇄했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혹시 변장해서 도망쳤나? 만약 그 랬다면 진짜 어이가 없다. 눈앞에서 놓친 거나 마찬가지다. 오늘은 실 패였다 . 목표를 정했는데 끝내 잡지 못했다. 1882년 7월 13 일 한 달 만에 일기를 쓰는군 . 오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 조 선이 청나라를 불러서 홍선대원군을 납치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 그 리고 명성황후가 궁궐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만약 청나라 군들이 우리를 잡으러 오면 우리는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 다. 이제 어쩌지? 우리가 포위된 기분이 든다. 1882년 7월 16 일 갈수록 점점 악화되는 것 같다. 청나라가 곧 있으면 도착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러다가 우리는 끝내 붙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 었다 . 나는 오늘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부대를 빠져 나와야겠다 . 더 이상 저항만 하고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도망치는 지도를 그 렸다 . 일단은 근처 산으로 피신하는 걸로 결심을 했다 . 오늘 저녁 식 사는 어제와 다름없었다 . 내일쯤이면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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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7월 17 일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걸까? 오늘 청나라 군인들이 얼마 전 에 있던 집결지와 다른 집결지들을 습격했다. 나는 다행히 잡히지는 않았다 . 하지만 돌아가려면 나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야한다 . 그러지 않으면 다시 잡힐 수 있기 때문에 몰래 돌아가야겠어. 그런데 어제 집 결지에서 빠져나오기 정말 좋았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하고 살지? 돌아 가면 잡힐 수도 있고 사형 당할 수도 있다. 다른 곳에 가서 살까? 일 단 다른 이름을 만들고 살아봐야겠다. 1884년 9월 오랜만에 일기를 쓰는군 . 나는 이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다 . 하는 일과 집은 똑같지만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 에 예전 알던 사람들을 피해야했다. 그게 지금 삶의 단점이라고 생각 한다 . 가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긴 했는데 그냥 닮은 사람이라 고 회피했다. 구식군인이었던 나는 거기서 못된 일들만 하고 온 것 같 다 . 궁궐에 잠입하고 조선을 발칵 뒤집은 것이 가장 무서웠던 일 중 하나였다 . 다시 조선을 바꿀 수 있을지 걱정이다. 1884년 10 월 어느 날 나는 젊은 청년 몇 명을 만났다. 그들이 김옥균을 중심 으로 한 급진개화파들이었다 . 그들은 조선 근대화를 목표로 세웠다 . 내가 누군지 말하자 나는 어느새 그들과 한패가 되었다 . 내가 예전에 참가했던 군란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얘기했다 . 일단 작전은 신중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야한다. 왜냐하면 지난번처럼 목표 를 눈앞에 두고서도 놓쳐 밤사이에 공격을 당했으니까 작전 하나 하나 를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일단 반대하는 사람들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만약 반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계획을 제대로 실행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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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1 월 요즘 일기를 쓸 때마다 날짜 쓰는 것을 까먹는구나 . 이제 날짜 까지 적도록 해야겠어 . 오늘 들은 소식은 청나라군의 반 정도가 어느 전쟁에 가야해서 청군 수가 적다고 들었다 . 우리는 이게 절호의 기회 라고 생각한다 . 청군이 적으면 우리가 잡힐 가능성이 조금 낮다고 생 각한다 . 김옥균이 일본이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고 한다 . 좋은 소식이 었다 . 우리는 인원수가 적기 때문에 불리할 줄 알았는데 일본이 우리 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니까 안심이 든다 . 이제 한 달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진다. 1884년 12 월 4 일 내가 11월에 약속한 것처럼 오늘 날짜까지 썼다 . 오늘 저녁에 준비한 폭탄으로 우정국 연회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면 사람 들이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탄이 터지지 않았고 실패했다. 어이가 없어서 다른 작전을 세웠다. 근처에 있는 집 을 불 지르기로 했다 . 우리는 집에 불 지른 다음 도망을 쳤다 . 이 정 도 쯤이면 조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제 또 다시 조선을 뒤집을 때가 온 것 같군. 1884년 12 월 6 일 오늘 창경궁을 공격했다 . 창경궁을 공격하면 고종에게 더 가까 이 오지 않을까해서 공격에 들어갔다. 하지만 갑자기 청군들이 들어오 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 왼쪽 어깨를 다쳐서 아주 답답 하다 . 더 이상 전쟁터에 나가기는 틀렸다. 더 좋지 않은 소식은 일본 이 우리 약속을 어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이제 누구한테 보호 받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다음날 서쪽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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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 월 7 일 나는 김옥균 , 박용호 , 다른 분들과 같이 조선을 도망치기로 약 속했다 .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 우리는 서쪽으로 향하기로 시작했다. 문을 지키는 군사들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엄 청 돌아서 가야했다. 나는 조선을 떠나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 다. 목숨을 위해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하 지만 삶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 제일 편하다 . 이 날이 어쩌면 내가 마지막으로 이 일기장에 일기를 쓰는 날이 될 수도 있겠 구나 . 언젠간 다시 쓰겠지. 다른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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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 군인의 딸, 임오군란을 보다 Grade 11 김소정 Elly Kim 1882년 6월 5일 (양력 7월 19일) 무위영의 군인이신 아버지의 봉급이 13개월 만에 드디어 나왔 다 . 오랫동안 굶주린 나는 아버지가 쌀을 들고 오셨다는 어머니의 말 씀을 듣고 신이 나서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 몸이 쇠약하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배고픈 동생들과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밥을 지으려고 하 였다 . 웃으며 쌀자루를 열어봤더니 쌀은 포대의 반뿐이고 나머지는 모 래와 겨로 채워져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되었다며 기뻐하셨던 아버지께 서는 마당에 놓여 있던 쌀을 보시더니 한숨을 내뱉으셨다 . 평소에도 신식 군대인 별기군보다 좋지 못한 대우를 받으신 아버지는 구식군대 를 5 군영에서 2군영으로 줄이는 것도 참고 지켜보기만 하였지만 이제 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 아버지는 화가 난 표정으로 마당을 빙빙 돌며 화를 식히고 계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불안한 심정으로 모래가 가득한 쌀을 보면서 걱정만 하였다. 항상 배고프다면 서 칭얼거리는 동생들이 너무 안타까웠고 누워계신 어머니께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 후 화를 추스르고 제대로 된 봉급을 받고 오겠다고 하시며 나가시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렸다 . 방 안에 계신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딜 가셨는지 물어보셨고 , 나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은 나머지 , 바깥나들이를 가셨다고 대답하였다. 저녁이 되어 밥을 짓기 위해 부엌에서 불을 피우고 있을 때 동생이 이웃집에 살고 계신 분께서 급한 말씀을 전하러 찾아오셨다고 전해주었다. 부엌을 나가 보 니 어머니의 벗인 아주머니께서 서 계셨다 . 아주머니로부터 아버지께 서 같은 무위영 군인이신 그분의 남편분과 함께 제대로 된 쌀을 받기 위해서 도봉소로 가셨고 며칠 동안 두 분은 돌아오지 않으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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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부디 아버지가 하루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1882년 6월 9일 (양력 7월 23일) 며칠 전 받은 쌀로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번 달까지는 굶주리지 는 않을 것 같다.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빌려주신 키를 써서 모래와 겨 를 걸러냈더니 먹을 수 있는 쌀은 자루의 반보다 적게 남아 있었다. 더 오랫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매일 쌀밥 대신 쌀죽을 쒀서 간단 한 반찬들과 함께 상에 올렸다 . 어머니께서는 쌀죽을 드시고 며칠 사 이에 건강이 호전되는 듯하셨다. 동생들도 밥투정을 하지 않고 맛있게 잘 먹는 듯하여 걱정이 덜하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다행히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매일 다른 분으로부터 전해 들으신 아버지나 아버지와 같이 항의에 동참한 군인들의 소식을 들려주신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신 날에는 봉급 지급 담당관이 아버지 일행 의 항의를 듣지도 않고 강압적으로 나서자 선혜청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에게 돌을 던지고 도봉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 그 후 네다섯 명 정도가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넘어가 호된 문초를 받고 있고 , 그중 둘은 곧 사형에 처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 금일 저녁에는 며칠 전 소요에 가담한 군인들이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 하여 집안 살림을 다 때려 부수고 나서 운현궁으로 몰려가 흥선대원군 에게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로 군인들이 대원군으로부 터 힘을 얻고 나서 무기고를 약탈하고 포도청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한 뒤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하여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 늦은 저녁에는 일본공사관을 포위한 후 공격하여 공사관을 불 태웠고 별기군 병영에서 일본인 열세 명을 살해하였다고 전해 들었다. 폭동이 더욱 심해져서 마을 사람들이 걱정하는 듯하다. 나도 아 버지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혹여나 아버지가 포도청으로 잡혀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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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11 일 (양력 7월 25 일) 동생들이 매일 아버지의 행방을 물어본다 . 아버지가 눈에 보이 지 않아 걱정하시던 어머니께는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약초를 캐러 나가셨다고 설명하셨다. 가족 모두가 애타게 아버지 가 돌아오길 기도하고 있다. 자신의 직업과 동료들을 위해 싸우시는 아버지가 존경스럽지만 날마다 사태가 심각해지는 난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걱정이 된다. 어제는 군인들이 돈령부 영사 두 명을 살해한 후 중전을 없애기 위해 창덕궁 궐내로 난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궐내에서도 여러 명이 살해를 당했다고 들었다. 오늘 아침에는 어제 고종께서 대원군의 복귀를 인정하여 대원군 이 입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원군께서 5 영을 복구시키고 통리기무 아문을 폐지하는 등 개화를 무효화한다는 소문도 듣게 되었다. 아주머 니께서는 대원군이 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해산을 명하고 사면령도 내렸기 때문에 아버지와 그분의 남편분이 곧 돌아오실 것이라고 전해 주셨다 . 한편으로는 대원군이 국모 상을 공포하여 마을 사람들이 걱정 하고 있다 .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것이 기쁘지만 나라가 어수선해지는 것을 보아하니 사태가 속히 진압될 것 같지는 않다. 1882년 6월 29 일 (양력 8월 12 일) 국모상을 발표한 날로부터 보름이 넘어섰지만 난은 진정되지 않 았다 . 아버지가 곧 돌아올 것이라 기대를 하였지만 , 아버지를 포함한 난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있다고 들었다 . 이웃집 아 주머니도 한 달 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 때문에 밤새 눈물을 흘리시 는지 아침마다 눈물자국이 눈에 띄게 보인다. 아버지가 받아오신 쌀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고 , 반찬도 근처 산에서 캐온 나물을 무친 것 몇 개뿐이다 . 동생들은 며칠 동안 고기가 먹고 싶다 떼를 쓰곤 했지 만 ,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더 이상 반찬 투정을 하지 않는다 . 어머니는 기침이 심해져서 도라지 달인 물 을 아침마다 드신다. 어머니께 괜찮은지 여쭈어볼 때마다 아버지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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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오신 약초를 먹으면 깨끗이 나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어머니와 동생들을 볼 때면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난다. 아버지의 행방을 알기 위 해 매일 이웃집 아주머니나 동네 사람들께 난에 대한 소식을 묻는 일 도 하루 일과가 되었다. 대략 보름 전 대원군이 국모상을 공포한 날 , 난을 진압하기 어 려워지자 중전의 외척들이 영선사로 청나라에 있는 주재원들에게 사태 를 알리고 청에 원조를 청했었다고 한다 . 요청을 수신한 청나라는 조 선에 군사 3000 명을 파병토록 지시를 내렸고 , 전날 청의 함선 3 척과 병력 500 명, 그리고 사신 한 명이 제물포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했 다. 금일 저녁에는 이웃집 아주머니로부터 일본군 300 명이 제물포 에 상륙하였다고 들었다. 보름 전쯤 일본 공사관을 탈출한 공사관원들 이 본국에 사태를 알렸고, 곧 일본은 군함 4척과 보병 1 개 대대를 파 견하였었다 .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고 난을 재빨리 진압하기 위해서 군사를 파견한 것 같다고 한다. 군사들이 하루빨리 제압됨으로 써 민심이 안정되고 나라가 평온해질 수 있지만 외세의 힘을 빌리게 되면 훗날에 청과 왜가 군사력을 지원해준 것을 빌미로 하여 무리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1882년 7월 18 일 (양력 8월 31 일) 난이 드디어 끝난 듯하다. 비록 군사들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나 라는 평온하지 못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힘든 삶을 이어간다 . 이웃집 아주머니는 남편분과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아 군란 중에 해 를 당하셨거나 체포됐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어린 동생들과 쇠약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가족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 졌다. 그동안 난이 진압되면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해졌 다. 대략 일주일 전 청나라 군인이 대원군을 납치해 톈진으로 배에 태 워 보냈다고 한다. 이틀 전에는 청나라 군사들의 공격을 받고 난에 가 담한 사람 170 여 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 또한 11 명 정도가 사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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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어제는 조선이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 다고 한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을 통해 군란에 의한 피해 보상을 요구 하여 이에 조선은 배상금을 물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는데 외국 군대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너무 두렵다. 마을사람들이 살기 어려워진 것은 조선이 정권 유지를 위해 청 나라의 힘을 빌리고 의존하여 청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 조선의 정권이 안정되면 나라가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 이고 번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청의 힘을 빌리고 영 향을 받아 꼭두각시가 되면 국력이 약해져 안정적인 나라가 되지 못할 뿐더러 백성들의 삶도 고단해질 것이다. 앞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 ? 또 우리 가족은 ? 여러 생각에 오늘도 잠을 이루기가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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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2월, 나의 후손들에게 Grade 11 양혜연 Ann Yang 지금부터 나는 1882년에 시작된 나의 억울한 삶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당시 조선의 권력은 왕비의 친척이 모두 쥐고 있어 , 이 시기를 민 씨 정권이라고 불렀다 .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은 민겸호라는 ,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며 권력을 누린 인간이었지. 문제는 이때부터 였을까 ? 민 씨 정권의 부패가 점점 심해지면서 사회 문제로까지 퍼지 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민 씨 일가의 부정부패가 심해 백성들의 삶이 너무 힘들어지는 가운데 , 그 중 엄청난 피해를 본 것은 우리 구식 군인들이었다. 민 씨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치자면 누구보다도 높았던 게 바로 우리 구식 군인들일 것이다. 개화 정책을 지지하던 조선은 구식 군인들의 인원을 한없이 줄이고 신식 군인을 만들어 그들의 우대해주기 시작하였다. 성 실히 나라를 위해 일하며 가족을 지켜오던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하 루아침에 없어진 거지 . 그것으로 모자라 , 남아있는 구식 군인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조차 해주지 않았다. 많은 부분에서 억울함을 느꼈지만 우리가 제일 힘들었던 건 우 리에게 13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월급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 그 당시 우리의 월급은 쌀로 배급받았는데 그것을 주지 않았으니 오직 우 리만 믿으며 기다리던 우리의 가족은 13 개월 동안 굶주리며 불행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러므로 정당히 나 라에게 우리의 월급을 요구하였고 , 그러던 어느 날 , 나라에서는 우리 구식 군인들에게 월급을 준다고 하였다 . 우리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한없이 행복해하며 월급을 배당받으러 재빨리 달려갔는데 우리에게 주 어진 건 고작 한 달 치 월급뿐이었다 . ‘그래도 이게 어디야 ? 오래간 만에 가족들 따뜻한 흰 쌀밥이라도 먹일 수 있으니’ 하며 받은 월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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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보니 , 그 귀한 쌀에 모래와 겨를 반 이상 섞어 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 우리를 조롱하듯 그거라도 먹고 썩 꺼지라는 둥 미안함도 없 이 오히려 뻔뻔하게 나온 것이야. 우리는 너무 화가 나 참다못해 관리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 일 본 관리들을 죽여야만 했다. 그 후 분이 풀리지 않아 선혜청을 지키던 창고지기도 죽였지. 우리가 이 사단까지 오게 만든 것이 마냥 화가 나 고 복수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우리에겐 그만 큼 억울함이 쌓여 있었고 , 그것을 풀지 못해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 왔으니 , 그제라도 용서를 구하고 마땅한 월급을 지급해주길 간절히 원 하였지 . 그러나 민겸호는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 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 헤아리지 못했다 . 민겸호가 폭동의 주동자 를 찾아서 매질을 해 죽이려 한다는 소문만 퍼졌지. 민겸호에 비해 우 리는 힘이 없는 , 오직 나라를 지키던 백성이었기 때문에 겁이 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대로 민겸호한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고 생각해 , 머리를 모아 생각을 해 본 결과 ,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나라에서 무리하게 개화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판단을 내리었 다 . 우리는 힘을 모아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민 씨 정권의 관리 들을 모두 살해하고 그 과정에서 민겸호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선혜청 에 불을 지르고 일본 공사관도 공격해 많은 이들을 다치게 했지. 그러면서 우리는 흥선 대원군을 찾아가 우리의 처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 흥선 대원군께서는 통치의 자리에서 물러나신지 오래셨지만 나라를 위해 힘써보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룬 우리 구식 군인들은 마지막으로 궁궐로 향하였다. 정말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왕후 민 씨였으니, 그 자를 죽이려고 마음 을 먹었지. 하지만 우리의 계획은 재빨리 왕후에게 전달되었고, 이 소 식을 들은 왕비는 교묘히 궁궐을 빠져나가 끝내 우리가 찾을 수가 없 었다 . 나중에 들은 바로는 , 왕비가 궁녀인 척하면서 궁궐을 빠져나가 , 자신의 고향인 여주로 도망을 갔다고 하더군 . 그런 왕비는 또 한 번 무모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우리를 막고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 다고 하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어 . 도움을 요청받은 청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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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3000 명의 군인들을 지원해 우리를 진압하고 , 이 사태의 책임자 로 흥선 대원군을 지목해 잡아끌고 갔다 . 사실 , 흥선 대원군께서 이 사태를 지휘하신 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를 헤아려 주시려고 노력하신 것뿐인데 그렇게 되니 우리 구식 군인들의 마음이 너무 안 좋았고 찝 찝하였다. 청의 도움으로 우리를 잠재우고 흥선 대원군이 청에 끌려간 지 약 한 달 후 왕후 민 씨는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사태를 ‘임 오군란 ’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계기로 청은 본격적으로 조선의 정치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청 군대 3000 명이 용산에 머물게 되 었고 , 청 정부는 조선에 관리를 보내 간섭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음을. 청은 조선과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은 청나 라 상인의 무역 특권을 비롯한 청에 유리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조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이미 청나라에 몇 차례나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왔기 때문에 이미 조선의 권 리는 청나라가 휘어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여기서 끝이라고 ? 아니다. 일본의 간섭도 심해지더군 . 우리가 불태운 일본의 공사관이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을 하라고 요구해 왔고, 언제 이런 일 이 벌어질지 모르니 일본 관리들의 안전을 위해 일본도 군사를 조선에 머물게 하라고 강력히 요구했지 . 당시 조선의 힘은 나약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들을 다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맺어진 조약이 ‘제물포 조약’이란 것이다. 우리의 행동 때문에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보고 조선이 잃은 것들 이 많지만 , 나는 너희에게 우리의 행동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쓴다. 우리가 참았더라면, 우리가 나서 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 사단까지 오지 않았겠지 . 하지만 우리가 참고 우리가 힘없이 기다리기만 했더라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것 이다 . 그 이후에도 나라는 약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마땅한 권 리를 주지 않았을 것이며, 힘없는 백성들을 무시하고 밟아가며 무모한 만행들을 저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식 군인들은 여전 히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너희들도 먼 훗날 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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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도 우리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지지해 주었 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이후, 우리 중 몇은 숨을 거두어 슬픔의 몫을 가족에게 짊어 주며 떠나가고 몇은 운 좋게 살아남아 아직까지도 살아가고 있다 . 나 또한 운이 따라 그 시기를 거쳐 나의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 키며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나의 동료들의 얼굴들이 어렴풋이 떠오 르면 ,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기도한다 . 꼭 다음 생에는 힘 있고 돈 있는 , 그런 잘난 자식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억울한 일 겪지 않으며 살자고. 1889년, 어느 겨울 이름 없는 한 구식 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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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투고문 Grade 12 김태환 Christopher Kim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동지들. 제 투고문이 독립신문에 실린다 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이 투고문이 우리 아버지의 억울함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하자면 이름은 김태환 . 올해 나이 스물하나 , 우리 아버 지는 마흔 셋. 아버지 성함은 김, 주자, 성자입니다. 오늘은 제 아버지 가 억울하게 돌아가신지 정확히 1 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안쓰럽고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드디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널리 알릴 기회가 왔습니다. 1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4 일 전, 그날은 제 생일이었습니 다 . 그날 아버지는 제 스무 살 생일을 특별히 축하해 주기 위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굴비와 쇠고기를 사러 시장에 나가셨습니다. 제가 워낙 몸집이 커서 많이 먹는지라 , 아버지는 당시 가지고 계시던 돈의 절반 이나 들고 나가셨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저랑 같이 손을 잡고 시장을 향해 걸었습니다 . 시장에 도착했을 때 , 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 렸습니다 .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사또의 군졸 몇 명이 순찰을 돌고 있 었습니다 .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저랑 아버지는 단골 푸줏 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제 아버지는 고기를 고를 때 생고기로 맛을 먼저 봅니다. 고기는 생으로 먹어야지 참맛을 알 수 있다고 항상 그러 셨습니다 . 그래서 푸줏간 주인에게 고기를 맛봐도 되는지 물어본 뒤 아버지는 생고기 시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푸줏간 주인이 크 게 소리를 지르더군요 . “도와주세요 ! 어떤 손님이 돈도 안 내고 고기 를 먹어요 ! 도와주세요 !” 라구요 . 어이가 없었던 저는 그냥 사람들이 미친놈 취급하겠다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때마침 근처에 있던 사 또의 군졸들이 주인의 소리를 듣고 달려와 주인의 횡설수설을 듣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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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를 강제로 끌고 가버렸습니다. 전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채 강제로 끌려가는 아버 지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렇게 아버지가 끌려가신지 약 사흘 뒤 , 아버지가 의도치 않은 곳에 몽둥이를 맞아 즉사하셨다는 소 식을 들었습니다 . 설령 아버지가 정육점 주인 허락을 받지 않고 시식 을 했더라도, 이게 강제로 끌려가 군졸들에게 곤장을 맞을 만한 잘못 인가요 ? 제가 돈 몇 냥이라도 사또에게 바쳤다면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실 수도 있었을까요? 이것이 제대로 된 법이 없어 억울하게 고통 받는 조선인들의 실 상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관리들은 자의적인 재판진행 으로 무고한 백성들에게 억울한 판결을 내리고, 무자비한 고문과 태형 을 자행하니, 어찌 조선이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이 제 억울한 이야기를 널리 퍼뜨려 제 하늘에 계신 아버 지가 편히 눈을 감으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동지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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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혹했던 날들의 기록 Grade 12 정영덕 Evan Chung 1950년 6월 25 일 간밤 잘 자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상황이 사실이라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다 . 아무리 남과 북이 사이가 안 좋아도 그렇지 …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나 같은 사람들은 지금 이게 무 슨 영문인지 싶을 거다 . 지금 나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데 … 솔직히 말하면 무섭다. 엄청. 지금 국가적으로 비상이 걸렸고 건강한 성인 남 성이라면 다 군대에 가야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 이다 . 나는 지금 제 6 보병사단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지금 너무 얼 떨떨해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부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기를… 무사히 돌아가는 것보다 살아서 가는 게 지 금 제일 중요한 것 같다. 1950년 6월 26 일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아는 거라고는 현재 전쟁이 일어났고 나는 군대에 끌려왔다는 거다. 아… 우리 청성부대는 최전방에 가서 싸워야 한다는데… 미치겠다. 솔직히 내가 온전한 정신 으로 지내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 움과 불안감에 도망가기는커녕 나의 발로. 내가. 지금 전쟁이 난 쪽으 로 가고 있는 것이다 . 내 발로 그 지옥에 뛰어들다니 … 차라리 이게 모두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 제발 . 누구라도 나에게 지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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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7 일 아수라장이다. 춘천으로 올라왔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고통 , 슬픔 , 괴로움뿐이다 . 어떤 군인들은 붕대를 온몸에 감고 있고 , 어떤 군인들은 전우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고 , 또 어떤 군인들은 자 신의 몸의 일부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짐승처럼 울부 짖고 있었다 . 말 그대로 지옥이 나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그 광 경을 목격하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아. 이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 이구나 .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을 지금 보고 있자니 속이 안 좋 았다 . 그 장면을 겨우 외면하고서야 진정이 되었다. 운이 좋으면 살아 남을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결국은 십중팔구 저 사람들처럼 될 것이 다 . 천운이 따르지 않고서야 사지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 을 거다. 무섭다 … 엄마… 보고 싶어요… 1950년 6월 28 일 오늘이 되어서야 알았는데, 다행히 우리는 잘 버티고 있는 모양 이다 . 하지만 그런 소식을 들어도 나는 오늘 처음으로 전장으로 나가 는데 무섭긴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도망쳐 봤자다. 그냥 체념 하고 맞서 싸우는 게 답인 것 같다. 후우… 정신 바짝 차리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으니. 일단 북한군의 작 전은 알고 있다고 하니 믿어 봐야지 . 이 전투가 끝나고 살아 돌아갈 수 있기를. 1950년 6월 29 일 망할 북한 놈들 … 항복하는 척 다가와서 그렇게 공격하다니 … 처음에 받은 지시대로 공격을 하니 다행히 효과가 좋긴 했다. 전방 20 미터에 들어오면 사격하라니 . 이보다 더 쉬운 지시가 어디 있겠는가 .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나중에 백기를 휘날리며 북한군들이 다가왔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반기려 했지만 그들이 미소를 짓는 모 습을 보고 순간 섬뜩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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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이 갑자기 어깨에서 기관총을 꺼내더니 우리 쪽으로 난사 하는 게 아닌가 . 난 다행히도 팔에만 맞았지만 죽거나 나보다 심하게 다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믿으면 안 되는 거였어. 1950년 6월 30 일 전투는 어찌어찌 이겼지만 확실히 타격은 매우 컸다. 이런 위치 하나 사수하려고 뭐하는 짓인지… 그렇게 불평하고 있을 때 우리 소대 가 움직인다는 명령을 받았다. 충주 지역으로 간다고 그랬나? 아마 그 랬을 것이다. 팔도 아직 나으려면 한참 남았고 이대로 움직이기는 힘 들 텐데… 뭐… 별 수 있나… 그냥 가자. 1950년 7월 7일 확실히 지치니까 일기 쓰는 게 뜸해진다 . 일단 충주 쪽으로 오 긴 했지만 들은 바로는 일단 북한군 정보는 아무 것도 모른다네. 우릴 지금 죽이려고 하는 거야 뭐야 . 지금 장난하나 ? 상부들이 일단 19번 도로와 3번 도로에 방어진지를 설치하긴 했다만 불안한 건 사실이다 . 북한 놈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두 다리 쭉 뻗고 쉬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우리가 자고 있을 때라든지 보초가 허술 할 때 공격할 것 같다. 긴장을 풀지 말자. 1950년 7월 8일 나도 오늘은 뭐가 일어났는지 당최 모르겠다. 안개가 너무 자욱 하게 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적에게 난사를 한 것 같은데 솔직히 모르겠다 . 이렇게 진 빠지는 일을 반복하다가 결국 후퇴를 했는데 아 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상황 파악도 안 되고 총만 대략적인 위치에 쏘다가 결국은 후퇴… 뭐? 전투인지 뭔지도 모르는 짓을 한 거 같다. 아무래도 피곤하다 보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 황 파악이 안 되나 보다.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으니…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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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13 일 아 짜증나. 뭐 자꾸 이렇게 움직이는지... 여태까지 계속 움직였 잖아 . 대체 왜 자꾸 또 움직이는 건데! 일단 이화령 부근까지 오긴 했 지만 솔직히 우리 쪽도 사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듯하다. 거의 매일 전투하랴 끝날 때는 쉴 시간도 없고 다른 구역으로 계속 행진을 하지 않나 … 하여간 군사들 생각은 안 해요, 망할 놈의 윗대가리들… 뭐 그 래도 오늘은 장비를 정비하고 그냥 수색만 하는 날이라 다른 때 보다 는 덜 힘들겠지. 아, 그래도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1950년 7월 14 일 나는 지금 이화령에 배치되어 있지만 들리는 바로는 문경 쪽에 서 격돌이 일어난 모양이다. 그러다가 가랑비와 안개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사이 갑자기 굉음이 들리면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총의 격발 소리가 우리 쪽에서 났다. 날씨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 의 북한군들이 밀려오면서 갑자기 혈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 덕분에 적의 손실도 꽤 있었지만 우리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 나도 부상을 입었는데 하필이면 얼마 전 총 맞은 상처에 또 칼이 찔려버렸다. 오늘 정말 일진 사납네… 1950년 9월 30 일 드디어 찾았다 !! 내 일기장!! 이화령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찾았다 !! 아…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내가 죽으면 내 흔적이 남은 유 일한 물건 중 하나니까 더욱 더 소중히 해야 하는데 영영 못 찾을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른다. 빠진 부분들을 살펴보자면 나는 일단 다리와 허리 쪽에 총알이 몇 개 더 박혔고 그 덕분에 좀 더 쉬 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쉬는 중이지만 . 함창 전투에서는 … .많이 죽었지 … 내가 살아나온 게 미안할 만큼 … 그날 이 후로 며칠 동안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살아나온 군인들 중에 자살한 사람들도 꽤 될 거다 … 솔직히 말해서 많이 힘들다 … 괴롭고 …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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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 월 23일 오늘이 복귀하는 날로 지정되었다는데 나를 굳이 복귀 시킨 이 유는 아마 오늘 또 6보병사단이 전투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 아 … 지긋지긋하다가도 내가 먼저 죽든 전쟁이 끝나든 하루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 물론 나도 살고 전쟁도 끝나면 더 좋지만 . 하여튼 . 오래 쉬었으니까 다시 복귀를 할 때가 왔네 . 근데… 지금 와서 쓰는 거지만 … 아무도. 그 아무도 나한테 우리가 최전방에 서서 갈 것이라는 말을 안 해 줬는데 … 어째서? 우리는 지금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다가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면 개죽음만 당할 수도 있다 는 사실을 모르나 ? 아니 애초에 지금 왜 거의 돌진하다시피 전진하 지 ? 북한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 거기에 중국까지 개입하면 전면전으로 쳐들어갔다가 그냥 걸레마냥 탈탈 털릴 수도 있는데 ? 하 … 진짜 … 나야 겨우 상병밖에 안 됐으니 뭐 따라야 한다마는 … 뭔가 불안하다… 1950년 10 월 24일 아니나 다를까 .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다 . 예기치 않은 첩보가 들어왔는데 그게 바로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소식이다…내 가 이럴 줄 알았어. 사전에 준비도 별로 안 해 놓고는 승리했다는 자 신감만으로 쭉쭉 밀고 나가는데 눈에 뵈는 게 과연 있을까 ? 나야 말 단 병사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 내 푸념만 이 일기장에다가 써놓고 있을 뿐이다… 나중에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발견한다면 , 부디 이 전 쟁의 참담함과 어리석음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아… 예감이 뭔가 매우 안 좋은데… 1950년 10 월 26일 또 그놈의 급진. 뭐가 그리 바빠서 급진 타령인가 맨날. 일단은 북한군이 낙동강 부근에서 방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다 가 북한군의 기습적인 기관총 공격을 받았지만 약 한 시간에 걸쳐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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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해서 어찌어찌 물리치긴 했다. 물론 그거 하나로 끝날 리가 없지. 중간에 또 다른 기습이 있었지만 거의 돌격하다시피 방어해서 무찌르 고 드디어 낙동강에 태극기를 꽂았다 . 이대로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 다. 영원히. 대한민국 만세다 이 자식들아. 1950년 10 월 27일 아… 힘이 점점 빠진다 … 최전선에 위치한 만큼 그만큼 위험도 컸는데 역시 중공군들이 개입했네… 아… 다행히도 내가 죽은 줄 알고 지나갔지만 곧 있으면 죽을 것 같다, 나도… 힘이 빠지네… 엄마… 보 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이제는 좀 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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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 다이어리 Grade 11 오주현 Juhyun Oh 평범한 일상을 꾸려나가던 세 자매는 어느 날 오래 전에 어머니 와 이혼한 뒤로 집을 나갔던 아버지의 사망 통보를 받게 된다. 자신들 과 어머니를 버리고 곁을 떠난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없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에 간다 . 그리고 장례식에서 배다른 동생 스즈를 처음 만나게 된다. 스즈는 이미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재혼한 셋째 부인의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도 잃은 지금 피를 나누지 않은 새 엄 마와 함께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인 스즈에게 동질감을 느낀 큰 딸, 사치 는 같이 살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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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통해 이 시대의 가족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서 생 각해 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 화되면서 교육과 직업을 위해 젊은이들이 도시로 이동하게 되었다 . 따 라서 그들은 부모와 분리되어 홀로 가족을 형성했기 때문에 핵가족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1인 가구 수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결혼에 대한 태도 , 부부 역할 ,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 노부모 부양 등 과 관련된 가족의 가치관도 변화 되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오늘날의 가족을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 시켰다.

요즘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두드러지고 있는 일인 사 회와 핵가족화로 인해,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화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 서 가족이라는 의미가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보다는 조금 더 넓 은 의미로 형성되어 가는 관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는 가족의 형태에 대한 유연성과 개방성이 필 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나 름대로의 방식으로 가족을 만들어낸다. 가족이란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가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 그래서 '가족 '이란 관계 는 좋든 싫든 결코 쉽게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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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64년 겨울’과 ‘갑을 고시원’ Grade 11 강응준 Aaron Kang 사람마다 관점이 모두 다르듯이 공간도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놀이 공원을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좋은 추억을 쌓은 곳이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그 곳은 이별의 아픔이 남아있는 장소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 ‘ 갑을고시원 체류기 '의 박민규 작가와 ‘서울 , 1964 년 겨울 '의 김승옥 작가도 자신 들만의 방식으로 공간의 의미를 그린다. 두 작가 모두 각자의 작품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공간 '을 해 석했다 . 하지만 , ‘공간 '이라는 공통된 주제에 대해 글을 쓴 만큼 , 이 두 작가의 공간을 그린 방식에서 많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 공간을 외로움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 자면 , 공간을 ‘마음의 외로움 ’, 또는 ‘공허함’으로, 해석했다 . 하지만 외롭다는 설정과는 달리, 이 두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은 절대로 혼자 남겨지지 않는다 . 누군가의 관점에서는 ‘ 서울 , 1964년 겨울 ’ 의 ‘사내 ’ 와 ‘갑을 고시원’의 ‘ 나’가 자신들만이 자신의 공간에 남겨진다고 생각 한다 . 하지만 이 두 작가들의 ‘공간’ 에 대한 해석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작가 모두 ‘ 공간 ’을 ‘혼자 있지 않은 외로움 ’ 이라고 해석한다. 왜일까 ? 이 두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은 같이 동행을 하거나 같 은 건물 안에서 생활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낀다 . 그렇다 .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 고 외롭다고 느끼는 것은 ,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사회와의 ‘ 벽 ’을 만 드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 ‘ 벽'이 바로 ‘공간'이다. 한 마디로, 공 간은 사람들의 마음속의 공허함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 이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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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자신의 사이에 쌓은 높은 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작가들 이 ‘공간 '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을 했다는 것을 뒷받쳐 줄 것은 소설 속에 무수히 많다. 소설 , ‘서울 , 1964년 겨울 ’에서 작가의 ‘ 공간 ' 에 대한 해석을 보 여줄 결정적인 인물들은 바로 ‘나 '와 ‘안 '이다 . 이 등장인물들은 도움 이 , 정신적 지지가 절실히 필요한 ‘사내'와 얽히지 않기 위해 공간을 이용한다 . 하지만 이 때문에 등장인물들 모두 ‘외로움'이라는 것을 감 수해야 한다. 반면 , ‘ 사내 '는 이런 외로움과 아내를 향한 죄책감을 견 디지 못한 채 자살을 택한다. 이 소설에서는 ‘벽' 이 사회로부터 한 사 람을 격리시켜주는 동시에 , 벽을 통해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도 막아 버린다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엿보인다. ‘갑을 고시원 ’ 의 작가 박민규도 공간을 비슷하게 외로움으로 묘 사를 한다. 갑을 고시원 안에서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방 안에서 생활한다. 이 방 안에서 ‘ 나’는 조용함을 원하는 동시에 소통을 원한다 . 옆방에서 생활하는 김 검사도 그렇다 . 하지만 소통을 원하는 ‘나' 와 다르게, 김 검사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많은 사 람들은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공부를 하고 싶어 한 다 . 이렇게 이 소설에서도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는 것 같다 . 이런 ‘벽 '에 의한 마음의 외로움을 원하거나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과, 이러한 공간의 ‘벽'을 넘어 소통하고 싶은 사람, 이것이 작가가 공 간이라는 주제 밑에 숨겨 놓은 또 다른 주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간이라는 것이 소통 또는 함께 있음을 상징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박민규 작가와 김승옥 작가 모두 우리들에게 인간의 소통과 단절됨을 동시에 원하는 이중성과 ‘공간 '의 다른 의미 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확실히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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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공간’이란 무엇인가? ‘갑을 고시원 체류기’와 ‘서울, 1964 년 겨울 ’을 읽고

Grade 11 노성헌 Leo Rho 소설 ‘갑을 고시원’은 1 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10년 전의 이야기 인 고시원 생활의 고독함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부도로 인해 고시원에 들어가서 대학생활의 2년 반을 보내게 된다 . 고시원이 어떤 곳인지 잘 몰랐던 주인공은 고시원에 들어서자마자 그곳의 첫 인상을 마치 ‘관 ’이라고 비유한다. 작은 방, 얇은 벽, 옆방 사람들의 시선 속 에서 자신을 죽여 가며 살아야 했던 삶 속에 그는 ‘ 늘 혼자였고 , 그 좁고 , 외롭고 , 정숙하고, 정숙해야만 하는 방 안에서 나는 웅크리고 , 견디고 , 참고 , 침묵했고 , 그러던 어느 날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 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 뼈저리게 느끼고 인간은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 혼자인 게 아닐까 ’라는 말을 한다. 박민규의 이 소설은 1991년의 서울, 한 고시원을 배경으로 이야 기를 풀어나가지만 지금 현대 사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물론이고 김 검사 , 또 다른 사람들이 하루하루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독자들 은 이런 각박한 세상, 또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 일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노력 을 해도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풍자하는 모습 또한 찾아볼 수 있다 . 이 소설의 배경인 고시원을 통해 작가는 우리 세상이 ‘ 갑을 남 녀 ’들이 모여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곳이고 서로의 눈치를 피해가며 혹은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죽여서까지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 는 곳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정말로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일일 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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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발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통해 서로 배우고 도와가며 하나의 공동체 로 자라가야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건 서로 돕지 않는 인간의 모습,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과 모든 연락을 두절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 이것이 지금 현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인들이 아닐까? 김승옥의 소설 ‘서울 , 1964년 겨울 ’에서도 공간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설의 주제 자체는 ‘갑을 고시원 체류기’ 와 전혀 다르다 . ‘ 서울 , 1964 년 겨울 ’은 세 명의 주인공들이 같은 공간에 있지 만 각각 다른 방을 쓰고 자신들을 분리시키고 서로의 소통을 끊으려는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갑을 고시원’ 의 경우도 주인공과 주위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고, 각자 다른 방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작가가 표 현하고자 하는 것은 다르다 . 그 이유는 갑을 고시원의 사람들은 주인 공이 같은 공간에 있고 비슷한 목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들에 게서 어떤 면에서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지만 ‘서울, 1964년 겨울’의 경우 인물들과의 공통점이나 동질감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갑을 고시원’에서 소통을 하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다면 ‘서울, 1964년 겨울 ’은 표면상으로는 소통을 하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 며,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이어지지 않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공간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통해 현대 사회의 여러 아픈 모습들 을 살펴볼 수 있었다 . 소설 ‘갑을 고시원 체류기’ 의 좁은 공간에서 자 기 자신의 자아를 누르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지만 이루고자 하 는 목표를 생각하며, 고시원에서의 삶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감정 들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인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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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방 ‘갑을 고시원 체류기 ’를 읽고

Grade 11 김선주 Grace Kim ‘갑을 고시원 체류기 ’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잘 그 려냈다 . 작가는 많은 등장인물들을 넣지 않고 , 한 명에 집중된 이야기 를 하면서 우리 일상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과 물건들을 이용 해 읽는 이들과의 공감대를 이루었다. 제목에서부터 작가는 주인공을 소개한다. ‘갑’ 과 ‘ 을’ 이라는 단어 를 씀으로써 주인공은 이제 을의 삶에서 벗어나 갑으로 다시 살고 싶 어 하는 주인공의 상황을 암시한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을의 삶은 누 가 봐도 살고 싶지 않은 삶이다. 주인공은 정말 자그마한 고시원 방에 서 살기 시작한다. 이 고시원에 살기 전에는 친구네 집에 얹혀살았지 만,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의 무언의 시선에 집을 나온다. 친구랑 고시원에 도착했을 때 , 친구는 방이 너무 좁아 , 사람이 살 수 있겠냐 는 질문을 내던진다. 이 질문에 주인공은 아무런 심적인 변화를 느끼 지 못한다 . 누가 봐도 그런 질문을 던질만한 환경이었기에 반박할 수 도 ,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여기서 주인공은 현대 사 회 젊은이들처럼 갖은 역경들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역경들을 통해 주인공은 변화한다. 주인공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건 고시원이라 는 환경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이웃의 물건이 도둑질 당하는 걸 보 고 자기 방에 있는 컴퓨터를 엄청 아끼며 보호하기 시작한다. 친구를 만나고 있든 , 다른 이유로 밖에 나가 있든, 주인공은 집에 있는 컴퓨 터가 너무 걱정돼 금방 집에 돌아오곤 한다. 고시원이 아닌 다른 환경 속에 있었다면 주인공은 컴퓨터에 이렇게까지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 다 . 작가는 환경이 달라지자 바뀐 주인공을 그려내면서 환경에 따라 사람이 바뀐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 하지만 , 결국엔 이야 기 속에서 컴퓨터는 결국 버려진다. 주인공이 한동안 자기의 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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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애하며 지키던 컴퓨터를 자기 스스로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한순간에 벌어진 뜻밖의 일은 주인공의 현재 삶을 보여준다 . 주인공이 아끼고 잘 가꾸고 있던 삶을 한순간에 고시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마음에서 버 려진 것을 컴퓨터로 표현해낸 것이다. 주인공이 고시원을 생각하는 관점도 이야기가 흘러가며 바뀌 었다 . 처음에 고시원에 들어왔을 때는 친구가 고시원을 비판할 때 아 무 반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시원이 처참해보이고 한량해보였다. 주인공은 고시원에 대한 인상을 ‘ 관’ 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 들이 모두 다 밀실에서 죽어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여기서 ‘밀실 ’ 이 담고 있는 의미는 사회가 사람들에게 주는 짜여진 틀과 강박관념, 그리고 기준이다 . 그 틀과 강박관념에 갇혀 살며 사회가 주는 기준에 맞춰 사는 현대 사회 젊은이들의 삶을 엿볼 수도 있다. 모든 인간들은 다들 태어나 언젠가는 죽는 존재다. 이 사실은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삶 역시 답답하게 짜여진 틀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한계를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 고시원 방에 대한 부정적인 면만을 고집하던 주인공은 소설의 후반부쯤에서는 고시원이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여기서 주인공은 이야기 속에서 고시원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 고시원은 짜여진 틀에 살며 답답함을 느 끼게 되는 관이라 표현을 했고, 끝에는 고시원은 컴퓨터를 버리게 된 것처럼 버려진 삶을 살고 있거나 큰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그나 마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라 본다 . 고시원에서의 삶을 너무나 힘들지만 그나마 고시원이라는 생활하는 공간도 없으면 그건 삶이라 칭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고시원에 대한 주인공의 감사 함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작가는 또한 이야기를 처음과 끝을 구분해 ‘혼자 ’라는 개념과 느낌을 표현했다 . 소설에는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말이 나온다. 주인공이 고시원 인생을 살기 시작하 면서 혼자라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고 또한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중엔 ‘혼자서 세상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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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 장은 ‘혼자 ’ 라는 것에 대한 느낌을 표현해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 이 있지만 다들 혼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혼자 사는 삶은 마냥 달지 않다는 것도 표현해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지만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 마음을 꾹 참고 혼자서 버텨내야하는 삶, 하지 만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치여 살아야하는 그 삶을 부정적으 로 표현해냈다. 이렇게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나누어 주인공 한 명의 감정 변화 를 표현하기도 했고 주인공의 바뀐 관점들도 들여다 볼 수 있게 구성 한 이 소설은 어찌 보면 이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다양한 시선을 담 아냈기에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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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세상 ‘서울, 1964 년 겨울’과 ‘갑을 고시원 체류기’, 그리고 ‘빈집’을 읽고

Grade 11 박서정 Seo Jung Park 김승옥의 단편 소설 ‘서울, 1964 년 겨울’에 있는 여관은 세 주 인공들의 관계에 있어서 반전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와 ‘ 안’ 과 ‘나’ 는 포장마차에서 만나서 밤늦게까지 서로 같이 여기저기 다닌다. 귤과 넥타이도 사고 술도 같이 마시다가 불구경도 한다 . 그런 그들은 여관 에서 셋 다 따로 방을 잡는다. 마치 ‘그래도 남은 남이야’라고 하는 듯 이 ‘그 '가 같이 방을 잡으면 안 되냐고 애원을 해도 선을 긋는다. 결국 그는 혼자서 비참하게, 또는 외롭게 죽음을 선택한다. 도시 속에 있는 사람들의 냉정함, 서로의 문제를 외면하는 그 모습이 여관에 고스란히 보여진다 . 이런 모습은 여관뿐만이 아니라 술집에서도, 불구경할 때도 나타난다 . 술집에서 만난 ‘나 ’ 와 ‘ 안 ’은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 상대방 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또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설명 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에게는 관심 없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만 바쁘다 . 불구경을 하러 갈 때는 마치 영화를 보러 가듯이 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전 재산을 잃는 엄청난 불행이 재미난 구경거리가 된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 소통을 안 하여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공감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냉정함을 보여준다. 김인숙의 단편 소설 ' 빈집 '에서도 결국 세상은 각자 사는 것이 라는 것을 보여준다 . 남편은 아내 , 집 , 직장이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없는 빈집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때리기까지 한다. 왜 남편 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 텅 빈집을 지켰을까 생각해보면 , 그는 그저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자신만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 남편의 모습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기 위 해 필요한 자신만의 공간이 가진 중요성을 볼 수 있다 . 남편은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을 가지는 것을 떠나서 , 그 빈집만이 다른 사람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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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고 , 자신이 행동하고 싶은 대로 , 뭐든지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 또한 , 자신의 직업이 다른 사람들을 대면해야 되는 그런 직업인데다가 아내 까지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서 트집을 잡으니 혼자만의 공간이 더욱더 절실했던 것이다. 직장과 집 , 둘 다 사람으로 가득한 남편이 사람 없 이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민규의 ‘ 갑을고시원’ 은 이름부터 하나의 사회를 나타낸다 . ‘갑 ’과 ‘을 ’로 나누어져 있는 고시원을 그곳에서 성공하면 ‘갑 ’으로 , 그 러지 못하면 지금 그대로 ‘ 을’ 인 것을 보여준다 .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 단 하나의 작은 빌딩 안에서 서로 나누어져 있는 공간을 만들 어 그 좁은 ‘관' 같은 공간에 한 명씩 각자 살아가는 곳이 고시원이다. 마치 그 고시원이 세상을 반영하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갑 ’ 이 되고 ‘을 ’이 되기도 한다 . 서로를 대면하고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지만 그래도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결코 친구가, 또는 같은 처지가 아닌, 서 로가 서로를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 곳에서는 사람들이 작은 소음도 같이 공유하지만 정작 소통은 벽으로 막혀있다 . 다른 사 람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든지 서로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러나 서로 에게 피해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런 곳이다. 살 때는 마치 ‘관 '같이 느껴졌던 공간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서로 눈치보고 서로에게 적어도 피해는 안 되려고 안간힘 쓰는 행동에서 어느 정도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 ‘갑을고시원 ’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갑을고시원에서 살면 살 수록 점점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관심 없이 각자 사는 것에 익숙해진 다는 것이다. 주인공도 처음에는 ‘관 ’ 처럼 느꼈던 공간이 나중에는 저 절로 작은 소음도 느끼지 못한 채 생활하게 되고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세 단편 모두 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임을 보여준다. ‘서울, 1964년 겨울 ’의 여관 , ‘ 빈집 ’에서의 남자의 집, 그리고 ‘갑을고시원’에 서의 고시원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이야 기를 들려준다 . 이것이 세 편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주제이다 .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산다는 생각에 대한 반응은 세 단편 모두 다른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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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을 보여준다 . ‘서울 , 1964년 겨울 ’은 혼자 있기 싫어도 혼자 남은 남자 , 그리고 무관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서로에 대한 벽이 혼자 살아가는 세상을 표현한다. 그와는 다르게, ‘빈집’에 나타나는 남 자는 자신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남자이다 .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둘 러싸인 그는 그들을 벗어날 공간을 절실히 원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은 원래 혼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마지막으로 ‘갑을 고시 원 ’은 우리의 세계를 작은 고시원 속에 투영해 보여준다 . 서로가 서로 의 갑과 을이 되어 같은 처지이면서도 절대 친구나 동지가 될 수 없는 사람들 , 세상을 혼자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면대면 관계가 줄어들면서 불가피하게 나 타난 현대인들의 개인주의적인 성향들을 이 세 작품들은 다양한 관점 으로 풀어낸다. 계속해서 변화할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적 모습을 앞으 로의 문학 작품들이 또 어떤 모습으로 그리게 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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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두움의 공존, 그 안에서의 성장 ‘데미안 ’을 읽고

Grade 11 김재엽 Michael Kim 이 책은 주인공인 싱클레어라는 소년이 자신의 친구 데미안의 조언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며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 다. 이 책이 보여준 진정한 성장은 소년들뿐 아니라 어른을 포함한 모 든 사람에게 공감을 사고 울림을 주었기에 이 소설이 이토록 오랜 시 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데미안의 저자인 헤르만 헤세에 대하여 알아 봤다. 헤르만 헤세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였다 . 그는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명문 신학교 에 진학하였지만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라고 외치 며 학교에서 도망쳤던 인물이다. 헤세는 열다섯에 자살을 기도할 만큼 방황을 했으나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수습생으로 일하며 정신적 안정 을 찾고 글쓰기에 전념했다고 한다. 헤세의 유년시절을 알고 나니 책 속의 데미안은 결국 작가 자신 의 가치관을 대변해 주는 인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데미안이 라는 인물은 어린 시절의 싱클레어가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번갈 아가면서 혼돈하고 있을 때 이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 다. 즉 , 싱클레어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속해 있던 선한 세계에서 가족 의 사랑과 따뜻함을 느꼈던 반면에, 어두운 세계, 하녀들이 가끔씩 들 려주었던 그런 금지된 세계에 점차 끌리기도 하였다 . 데미안은 이런 싱클레어에게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알려주며 성장을 하려면 두 세계의 조화를 찾아야 된다고 말해주었다 . 외부세계뿐 아니라 , 인 간의 내면에도 두 세계가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있으며 밝고 깨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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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계가 있다면 타락하고 금지된 세계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는 이것을 ‘아프락사스’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아프락사스’ 는 빛과 어 두움의 공존 , 선신 (善神 )이면서 동시에 악신 ( 惡神) 인 존재다 . 여기서 내가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성장이란 악의 세계를 완전히 배 제하여 오로지 따뜻하고 평온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선과 악 이 공존하는 ‘아프락사스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프락사스에 대해 읽으면서 금지된 것의 의미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해 보았다 . 다른 사람이 정한 선악이 아닌 우리 모두는 제각기 무엇이 허용된 것인지,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를 알아내야 된다 고 생각한다. 자기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원칙을 세워 자신만의 계 율을 느껴야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알에서 깨어 나온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다른 표현으로 풀어서 생각해 보았다. 위에서 말했듯이 금지된 것이란 상대적이다 . 선과 악이란 명백하게 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과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책의 주인공은 자신의 기존의 관점을 벗어나 진정한 자아로 성장을 하였다 . 그는 이제 자신의 내면의 말에 기울이며 성장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이처럼 나도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정한 나를 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을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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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일, 자신 안에서 작동하 는 자연의 소질에 완전히 어울리게 되어 자연의 의지에 맞게 사는 일, 불확실한 미래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일 만이 우리의 의무이며 운명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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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감춰졌던 이야기 소설 ‘군함도’를 읽고

Grade 12 김유정 Jocelyn Kim 한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조선이 일본이라는 한 나라로부터 겪어왔던 비참하고 지독한 삶을 .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믿음과, 그러지 못했던 현실 . 하지만 어느새 자취도 없 이 모두 사라지고 문득 우리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던 우리가 지금껏 모르고 있던 한 사건이 있 다 . 곤혹스럽게도 주변 환경에 떨며 ‘한 번 들어가면 죽어야만 나갈 수 있었던 섬, 군함도’ 그 어떤 예고도 없이 하루 사이에 예측 불가한 삶이 시작되었던 군함도. 오랜 시간 동안 베일에 감춰졌던 이야기, ‘군 함도 ’를 읽었다. 읽었던 책 ‘군함도’를 쓴 작가이자 세종대학교 교수인 한수산은 1972년 ‘4월의 끝’이라는 소설로 데뷔를 하였다. 당시, 70년대에 쓰여 진 많은 책들 가운데에서도 시대적 현실 속에서도 고유한 감수성의 언 어를 표현해 내어 큰 인기를 끌었던 작가이다 . 1976년 발표된 ‘부초 ’ 라는 소설도 한수산 작가만의 문학적 매력과 독자성을 독자들에게 알 렸다 . 이러한 감수성이 풍부한 소설들로 인해 ,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시처럼 쓴다’ 라는 평가를 한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챘을 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 당시 , 일본 내에서도 군함도라는 작은 섬 안에서 죽음 같은 노동으로 가혹한 문제를 겪었던 광부들을 배경으로 쓰였다. 일제강점기, 위안부 문제뿐만이 아닌 이러한 징용 문제도 또 하나의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 다 . ‘군함도 ’는 징용 문제를 배경으로 한수산 작가가 단순히 상상력으 로만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닌 , 직접 겪었던 경험을 통해 쓰여진 것처 럼 한 발짝 다가왔다. 이 독후감을 쓰기까지 우선 책을 선정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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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책이 있었지만, ‘ 군함도를 고른 이유는 한 가지였다 . ‘군함도 ’ 이외의 모든 책들은 제목을 들으면, 대충 어떤 내 용을 지닌 책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 하지만 , ‘군함도 ’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 그래서인지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 한 유명한 프로 그램 , ‘무한도전 ’으로부터 처음 군함도라는 지명과 그 곳에 담긴 이야 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더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군함도라는 곳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군함도 ’라는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 다면 첫 번째는 군함도에 대한 설명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장편소설인 만큼 군함도의 배경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도 1 권의 삼분의 일 정도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처음 읽기 시작 했을 때 군함도와 관련돼 있는 책 인지를 묻기도 했다. 그 만큼, 처음 군함도의 배경이 나오기 전, 군함 도까지 가기에 이른 과정이 많이 쓰여졌다 . 처음 시작은 세 사람간의 대화로 시작이 된다. 세 명의 등장인물로 시작을 해 책의 주인공인 지 상이라는 사람이 군함도까지 가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처음 시작은 이렇다 . 지상의 부인 서형은 결혼한 지 두 해 만에 고대하던 아기를 가지게 되는데 , 남편 지상에게 이 소식을 알리러 시댁으로 향하였을 때 서형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시댁에서 서형은 그의 남편 지상이 장손인 형을 대신해 징용을 자원하겠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전 달하게 된다. 그렇게 징용이 결정된 이후, 아쉬움과 두려움을 뒤로 서 형과 지성은 떨어지게 된다. 아쉬움과 두려움을 뒤로하고 수많은 징용자들을 이끌고 기차와 배를 타는 장면을 한수산 작가는 주인공들의 감정들을 명확하게 전달 해 독자들의 관심을 더 끌었다 . 또한 , 한수산 작가는 또 다른 인물을 추가해 조도를 더 하게 된다 . 지성과 같은 춘천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우석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만들어, 서로 챙겨주고 걱정해주는 장면을 더 해 감수성을 더욱 더 풍부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길고 긴 설명들을 쓰고 난 뒤에야 , 군함도에 대한 설명이 더해진다 . 비록 감정 전달은 뚜렷하게 전달되었지만 , 앞에 많은 설명으로 인해 책의 흐름이 중간 중간 끊기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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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아쉬운 점은 반복적인 시점 변화였다. 여러 방면에서 접할 수 있다는 의도는 좋았으나 , 너무 많은 시점 변화로 인해 가끔 헷갈려 같은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야 했었다. 뿐만 아니라, 책이 두 권으로 나뉘어져서 그런 건지 등장하는 인물들도 굉장히 많았 다 . 1권 만 해도 23 개의 장으로 나뉜다 . 장마다 시점이 바뀌는 부분도 있었지만 , 몇몇 이야기들은 서로 이어지지만 , 서로 다른 이야기를 시 작하는 장도 있어 헷갈리는 부분이 더해졌다 . 하지만 , 이러한 부분들 이 독자들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것 같아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군함도 ’를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용어였다. 단어 선 택에 있어서 아쉬웠던 점이라고 하기보다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어 자체가 어려웠다고 하기 보다 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많이 쓰여 쉽게 이해하고 넘 어가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몇 몇 있었다 . 이러한 부분들을 예로 들자 면 , ‘ 새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던 장면을 똬리를 뜬 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고 비교를 해 문장 자체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단어 하 나하나 따져본다면 어려웠던 부분이었다. 문장 자체가 어려웠던 많은 문장들 중 하나를 예를 들자면, “그 러나 그건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시샘쯤으로 눈감고 살았다” 이다 . 시샘이라는 단어는 시새움의 줄임말로서 , 자기보다 잘 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뜻한다 . 만약 단어의 뜻 을 몰랐다면 다른 의미로 해석했을 경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 이러 한 경우들처럼 , 문장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많이 없었으 나 , 우리가 지금 흔히 쓰지 않는 단어들을 많이 사용해 한두 번 정도 를 반복해 읽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많은 아쉬운 점들이 있었지만, ‘군함도’ 만의 독특한 점들 도 당연히 찾아 볼 수 있었다 . 전에도 말했듯이 한수산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감수성 풍부하게 잘 전 달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었다. 이러 한 자기만의 방법으로 인해 시선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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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던 군함도라는 배경에 대해서 더욱 더 스스럼없이 쉽게 접할 수 있 었던 기회가 된 것 같다 . 다시 생각해보면 징용 문제 자체가 우리가 흔히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랬기에 처음 이 책을 접했 을 때에도 더욱 더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만약 지금 대중들에게 ‘ 일제강점기’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요?”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 위안부’ 라는 답을 많이 할 것이라 예상 한다 . 그렇지만 ,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이러한 문제들도 물론 중요했지 만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못한, 그리고 베일에 감춰졌던 징용, 군 함도 , 하시마 등의 이야기들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아니,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어야 한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 잊을 수 있다, 모를 수 있다 등의 반응이 나올 수 있지만 , 위안부와 마치 이러한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아직도 괴로워하는 어르신들이 살아계신다 . 그런 분들 을 위해서라도 , 나라를 위해서라도 잊지 말아야 할 하나의 역사로 평 생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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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오현우들에게 소설 ‘오래된 정원 ’을 읽고

Grade 12 김서윤 Julia Kim 내가 <오래된 정원 >이라는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의 일부가 옥중수기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을 보고 나서이다 . 원 래 굉장히 읽고 싶어 하던 책 중 옥중수기가 있었는데 어려워 아직은 읽지 못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단념했던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 던 것 같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 오래된 정원> 은 주인공 오현우가 출소하 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오현우는 18년 만에 비로 소 가석방으로 나와 넓고 복잡한 바깥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어 지럼증을 호소한다 . 옥중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당황스러워 책을 내려놓을 뻔 했지만 중간 중간 오현우의 감옥생활에 대한 설명이 있어 만족하며 읽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무기징역을 받은 정치범으로서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0.75평짜리 독방생활을 하는 오현우가 화장실 위쪽 작 은 창문을 통해 자신의 음식 부스러기로 비둘기와 친구를 맺을 때였 다 . 매일 찾아오는 여러 마리의 비둘기 중 한 마리 한 마리의 습관과 성격 차이까지 관찰하며 고독을 달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 찾아보니 작가 황석영은 군사정권에 직접 맞서다가 세 번이나 감옥을 갔다고 한 다 . 그의 경험들로 녹여낸 묘사이니 만큼 짧은 순간들에도 담담하게 오현우의 고독을 잘 그려낸 것 같다 . 오현우가 당시 사상에 어긋나는 선동꾼 , 무기징역감의 정치범이라고는 하나 그런 반골 사상들이 모여 이뤄낸 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18년 만에 나올 수 있게 되긴 하였지만 재심도 없이 그렇게나 오랜 시간 감옥에서 보 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 오래된 정원 >은 이렇듯 군사정권에 맞서는 민주 투사들 중 하나인 오현우라는 인물의 삶을 그의 연인인 한윤희의 편지들로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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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다 . 한윤희는 운동권이 아닌 미술 교사지만 빨치산 출신인 아버지의 힘든 마지막을 지킨 경험을 토대로 운동권에 속한 사람들의 도피를 돕 는다 . 본래 한윤희는 살림과 집안의 생계를 모두 이어나가는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겨 누워 지내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사춘기 시 절에는 아버지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하지만 진심이 아니었는지라 죄 송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중에는 아버지를 가장 잘 이 해하는 사람으로 남는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녀는 그때의 일로 운동권 좌익들을 감추어준 것이다 . 그러던 중 오현우를 만나 사 랑에 빠지고 갈뫼에서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나간다. 사실 이러한 내용들이 나에게는 많이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수 도 없이 들어왔던 광주민주화운동, 지금도 계속해서 언급되는 좌파와 우파 , 박정희 시대의 군사 정권이지만 , 정치나 관련된 역사에 관해서 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내가 좌파 , 우파의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 , 친 미적인 성향 , 종북으로 몰리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생각 보다 많은 조사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책은 독자가 모두 이러 한 개념들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쓰여 있기 때문에 확실히 작가의 함축적인 표현들을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 하지만 좌파를 북한을 찬양하는 종북의 대상으로 몰고 가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서는 아직 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왜 일명 ‘빨갱이’ 취급을 받는 것일까 ? 그리고 우리는 왜 오늘날에서도 ‘종북 ’이라는 표현들을 자주 쓰는 것일까 ? 그 당시에는 사회주의 , 공산주의 ,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즉 유토피아가 이상적인 사상처럼 비춰졌으니 이해가 가지만 , 오늘날 우리는 분명 북한의 붕괴, 공산주의의 몰락, 실패한 체계를 목 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빨갱이’, ‘종북 좌파 ’ 등의 말을 한다 . 오현우도 한윤희를 처음 만났을 때 얘기한다 .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종북은 아니라고 .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의 묘한 경계선 아래 그 둘을 나누는 정확한 기준이 무엇인지, 또 사회가 그들을 통틀어 어떻게 바라보았는지가 잘 언급된 부분이었던 것 같다. 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오현우는 분명 우리나라 격동기에 광 주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군사정권에 반해 시위를 한 사람이다 . 허 나 그는 사회주의자다. 그렇다면 왜 많은 독자들과 평가들은 이 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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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우를 민주 투사라고 설명하는 것일까 ? 광주민주화운동은 왜 그 이름이 민주화 운동일까 ? 물론 그것을 통해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우 리의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것은 맞으나 , 그것을 이끌던 사람들 , 한 마음 한 뜻으로 군사정권에 반하던 자들이 모두 민주주의를 꿈꾼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현우는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복잡한 세계를 어색하게 받 아들이고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다가 ‘광주’를 방문한다. 그곳은 더 이 상 심장을 뛰게 하고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던 곳이 아닌, 몇 개의 무 덤과 8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 병원에서 죽어간 동지들의 소 식 , 투쟁에서 벗어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만 남아있다. 나는 오 현우가 계속해서 고독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 물론 현실적으로도 출소 후 기다리던 약혼녀의 죽음만이 그를 맞이하고 있는 등 옛 동지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 그는 고독하다. 그에 반해 한윤희와 함께 했던 ‘ 갈뫼 ’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 고 평화로우며 따뜻하다 . 가진 것도 몇 없고 몰래 숨어있는 도피처에 불과하지만 둘은 그곳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우고 현실에서 도망친 듯 행복하게 살아간다 . 두 장소의 대비가 너무나 극명해서 하나가 너 무 쓸쓸해 보이니 하나는 너무 밝게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작가가 그 대비를 굉장히 극명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어둡고 도망치듯 불안한 분위기를 윤희의 편지와 현우의 회상으로 담으며 그 극적인 상황을 짧고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독자가 그 분위기 자체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 책 자체가 현우와 윤희가 자체적으로 스스로의 이야기들을 중점으로 두고 있는지라 역사적 사실 을 묘사하거나 그 현장을 자극적으로 그리지는 않았지만, 시간의 흐름 을 타며 변해가는 사회의 분위기와 그들을 표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범죄자 ’이자 도망치는 데 급급한 반역자 오현우의 고독과 쓸쓸함, 출 소 후 심경은 복잡하지만 안일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남은 인생이 특히 과거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듯 허무하게 했다. <오래된 정원> 을 반 정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난 오현우에게서 들을 이야기가 더 많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 중심의 묘 사나 표현을 배우는 것은 윤희의 이야기가 더 적합한 것 같다. 윤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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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간 캠퍼스는 봄과는 어울리지는 않는 자욱한 최루탄과 시위 진압 군이 뒤엉킨 카오스다. 그 사이에서도 윤희는 송영태라는 남자를 만나 짝사랑을 시작하고 미경이라는 자를 만나 직접 조직 일을 시작하게 된 다 . 윤희는 만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우 , 가족 등에게 보내는 편지와 비망록 등을 통해 기록해 두고 써 내려가는데 거기서 나는 현 우가 대변하는 그 80년대의 ‘어두운 분위기 ’에 포함되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술을 하는 윤희와 법대생인 미경, 부유한 폐병환자인 영태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인만큼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현실로 표현 하는 방법이 모두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 르지만 , 난 특히 6.29 선언에 의해 중간계층의 이탈로 끝나버린 노동 자 대투쟁의 시들시들해진 현실에 마지막 타오르는 불길이 되겠다며 미경이 분신자살을 해버린 후 재 밖에 남지 않은 공장 옥상 현장에 윤 희가 가서 받은 충격을 같이 고스란히 받았다. 그 부분이 노동 운동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한다 . 어쩌면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남은 것은 재뿐인, 음울함에 더불어 허무함만이 남은 고독과 슬픔이 윤희를 분단된 우리와 같은 처지인 베를린으로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또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장면과 그것을 토대로 한 윤희의 심화된 자유를 향한 갈망이 작가가 자주 언급했던 본인의 자유를 향한 갈망 , 작가로서 느끼는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또 고독한 이희수를 보고 되려 따뜻함과 위안을 느끼고, 죽 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오현우의 어릴 적 얼굴과 사십대가 된 자신을 그리는 윤희를 통해 작가가 영원한 자신의 그 자유를 향한, 갈뫼를 향 한 갈망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어렵다 . 그 시대의 이념갈등도 어렵고 ,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갈등도 어렵다. 개개인의 믿음과는 별개로 모두가 옳은 일, 많은 이들 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 쪽이 맞고 틀리다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생각한다. 때문에 이 시기에 목숨 걸고 각 이념 을 위해 싸운 모든 오현우들이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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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의 원인 Grade 11 정다은 Iris Jeong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우리는 더 많은 기술을 삶 속에 적용시 켜 편안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 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함께 기대되는 것들 또한 많아졌다. 그 결과 긍 정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영향도 나타났다. 학교에 있 을 때는 공부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면 직장생활 때문에, 사람들의 스 트레스 지수는 갈수록 높아졌고 , 스트레스의 이유 또한 직장 생활과 공부 정도였던 것이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2016년 사회 조사 보도 자료에 따르면 , 사람들은 가정 , 직장 , 학교생활 중 직장 생활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또한 , 13 세 이상 65 세 이하 남녀 동일 구성 모집단의 54.7% 가 전반적 인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답했다. 스트레스를 받는 환 경을 가정, 직장, 학교생활로 나누어 보면, 직장 생활이 73.3%로 가장 높았고 , 학교생활은 52.9% 로 두 번째로 높은 이유에 해당되었다. 가정 생활에서는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답하였 다 . 가정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 중에서는 35.7% 는 남자였고, 49.4%는 여자로 , 여자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학교 생활에서의 스트레스에 대한 남녀 비율 역시 남자가 47.2%, 여자가 59.1%로 여자가 더 높았고 , 반대로 직장생활은 73.9% 가 남자였고 , 72.6%가 여자로, 남녀의 차이가 비교적 크지 않았다. 스트레스의 원인 과 정도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는 아래 자료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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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결과는 모집단에서의 조사 결과이고 , 표본 집단인 청소년 , 즉 13세에서 24 세 사이의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또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다 .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문제는 공부였 다 . 스트레스를 느끼는 원인으로는 공부가 32.9%, 직업이 28.9%, 그 리고 마지막으로 외모가 19.7% 였다 . 연령대별로 더 세부적으로 살펴 보자면 13세에서 18 세의 청소년은 공부가 53.7%, 외모가 2.5%로, 공 부와 외모에 의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 19 세에서 24세의 청소년 은 직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45.2% 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14.6% 로 직업과 공부로 의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았다. 청소년들이 스 트레스를 누구와 상담하는지 조사한 결과, 친구나 동료가 44.4%로 가 장 많았고 , 부모가 24.1%, 그리고 스스로 해결한다는 대답이 28.1% 로 나왔다 . 청소년의 스트레스에 대한 구체적 수치 또한 아래 자료에 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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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심해 져 가고 있고,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스트레스는 심각해지면 자 해 , 자살, 정신적 불안 등의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레스 지수 , 자살률 등이 다양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의 소개 및 확산을 통해, 줄어들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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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및 흡연에 대한 조사 Grade 11 조민수 Harry Joh 예로부터 술과 담배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술은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였다. 담배 역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기 있는 기호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흡 연은 그 백해무익함이 널리 알려져 있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한 좋 은 이미지는 없지만 , 적당한 음주는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말도 있듯 이 우리 사회가 음주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음주문화는 조금 과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간 1인 알코올 소비량은 대략 12.3L로 전 세계 평균 6.2L에 비하면 굉장히 높다. 정부는 국민들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2016년 초 기 담뱃값과 함께 술값의 가격을 인상하였다 . 하지만 가격 인상이 금 연과 금주로 크게 이어진 것 같지는 않다. 과연 무엇이 사람들에게 이 렇게 많은 양의 술을 권하고, 담배를 피우게 하는 것일까? 금주와 금 연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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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조사 보도 자료에 따르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20.8%로 2년 전 22.7%에 비해 2% 가까이 감소하였으나, 2006 년부터 흡연율이 지속적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감소율이 큰 폭은 아니다. 또한 음주의 경우 , 2016년 기준 , 19세 이상 인구의 65.4%가 음주를 한다고 나왔다 . 이는 2 년 전의 64.6%보다 오히려 1% 가까이 증가한 수치이다 . 이처럼 오히려 담배값과 술값을 인상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금연 , 금주의 효과는 미미하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결과를 보여 주었 다. 흡연의 경우 전체 흡연자 중 절반 이상이 금연을 시도했지만 실 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로는 스트레스, 습관 등이 있었다. 직장 이나 가정 등에서 스트레스 때문에 담배를 피운다는 사람의 비율이 가 장 높았는데 2014년 51.0%에서 2016년 55.1%로 그 비율이 약 4% 증가하였다 . 기존에 피우던 습관 때문에 못 끊는다는 사람이 그 뒤를 이었는데 하지만 예상과 달리 2014년 38.9%에서 2016년 32.4%로 전 체 비율은 6.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음주자들의 경우, 음주를 하는 이유는 사회생활에서의 필요, 스 트레스 해소 등으로 나타났다. 사회생활에서 필요해 술을 마신다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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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이 가장 높은 비율로 나타났는데 2014년 61.2%에서 2016 년 53.1% 로 8.1% 감소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사회에서 술을 강요 하는 문화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높 은 비율의 답변을 얻은 스트레스는 2014년 35.3%에서 41.1%로 늘어 나 스트레스를 음주로 푸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통계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직장이나 가정 등에서 오는 스 트레스가 대부분의 흡연과 음주의 이유를 차지했고, 이는 계속해서 증 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이를 통해 정부는 무작정 담배와 술 가격 만 인상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스트레스의 원인을 알아내고 이를 해소해 나갈 수 있는 정책을 연구하며 이에 따른 적극적인 대책을 마 련하는 것이 시급할 것으로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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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문제적 공간, 강화도 이야기 Grade 11 서희원 Heewon Seo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펼치기 전에도 외세와의 충돌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양선이 자 주 출몰하였고 , 흥선대원군의 집권 이후 , 그 충돌은 더 잦아졌다 . 이 충돌의 공통점은 외국 세력들이 모두 조선의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인 강화도를 통해 침략해왔다는 점이다. 이를 배경으로 프랑스, 미국 , 그 리고 일본과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병인양요 ’, ‘신미양요 ’, 그리고 ‘운요호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 사건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은 1866 년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이다 . 흥선대원군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고 신부 9명이 순교했다. 그 중 탈출한 신부 한 명이 이 사건을 외부로 알리면서 이에 화가 난 프랑스가 함대 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이 병인양요이다 . 이 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 등 조선의 많은 서적을 약탈해 갔다. 비록 많은 문화재 를 약탈당했으나 프랑스군보다 조선군의 피해 수가 적었고 강화도를 지켜냈으므로 조선 스스로는 승리라고 여겼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1866년에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 수교를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 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 미국의 무역선인 제 너럴셔먼호가 무역에 필요한 서양 물건을 싣고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 한 사건이다. 다른 나라와의 통상을 법으로 금지했던 조선 정부는 항 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고를 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평양에 들어온 배를 공격하고 불태웠다 . 당시 조선은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지만 , 손님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자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 하지만 계속된 통상요구와 약탈까지 감행한 제너럴 셔먼호를 향해 성난 평양 주민들은 불을 지르게 된다 . 제너럴셔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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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1871년에 강화도를 침략하였고, 흥선대 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무력으로 강화도를 점령하며 개항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조선의 강력한 통상수교거부 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 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미국과 프랑스의 침략 이후 , 일본 역시 강화도로 침략해왔다 .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실행한 후 조선과의 교류를 시 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실패하였다 . 이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에 개입한 후 이 기회를 이용 하여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신속히 마무리하려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군 은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큰 손해를 입었고 무기도 대량 탈취 당했다. 이런 큰 손해를 입었음에도 1876 년 조선은 최초의 근대 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근대화와 무기개발 에 뒤쳐진 조선은 강제로 일본에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병인양요 , 신미양요 , 그리고 운요호 사건이 모두 강화도에서 일 어나서 개인적으로는 더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다. 엄마와 할아 버지의 고향이 강화도라 매년 명절에 방문하지만 ‘강화도 ’ 하면 생각 나는 것은 고향이라는 것과 서울로 오는 길에 먹었던 꽃게탕과 대하 소금구이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 하지만 이번 수업을 계기로 강화도가 큰 역사적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 외 세와의 많은 충돌로 인해 조선은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던 것처럼, 지 금의 한국도 다른 나라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물론 조선시대처럼 통상수교거부정책만을 고집할 수는 없 다. 상호 교류를 통해 얻는 이점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6.25 전쟁 이후 한국은 다른 나라들의 도움에 힘입어 지금의 자리로 올라설 수 있었고 , 세계적으로 앞서 나가는 기술들을 배우기까지에도 외국의 영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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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 중국으로 활발한 진출을 했던 제조업체들이나 유통업체들 이 사드 배치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서 영업을 정지를 당하고 철수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그 일로 인해 관련 업종의 사람들과 한국 회사들은 큰 경제적 손해를 보았다 . 얼마 전까지 한국 관광지였 던 명동이나 동대문에는 , 중국의 한국 관광 금지령 이후 중국 관광객 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 최근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과거와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 과거에는 불평등한 조약들을 많이 맺었지만 , 지금의 우리는 다른 나라와의 교류 및 협상을 통해 양보할 것은 양보 하고 얻을 것은 얻는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지난날 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게 해주는 간접 경험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세 사건을 깊게 공부하고 지금과 비교해 보면서 대한민 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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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재평가 Grade 11 윤지민 Jamie Yoon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통치할 때 보다 더 공평하고 다 양한 제도들을 시행하며 조선에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 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한창 백성들이 힘들어하던 시기부터 흥선대 원군의 정책들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그 시기까지 조선의 해안에 는 이전까지 보아 왔던 배들과는 모양이 다른 이양선이 등장했다 . 이 양선을 통해 들어온 서양인들은 강력하고 꾸준하게 통상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통상 요구를 거부하며 본래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 스 신부들이 서양 철학을 전파하려고 했다는 명목 아래에 프랑스 신부 9명과 그에 설득된 조선인 천주교인들 수천 명을 살해했다. 이 학살은 병인박해로 불리고 있다 . 이때 살아남아 도망친 신부 , 리델은 청나라 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의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구원을 요청하 였다 . 조국의 신앙심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조선인에게 분노한 프랑스 는 강화도에 쳐들어가 강화도 안에 있는 초지진을 점령하여 무력시위 를 벌이는데 프랑스가 조선에게 자국인의 학살 책임을 물으며 침입해 온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부른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또한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해안에 들 어와 통상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 조선의 단호한 거절에 제너럴셔 먼호는 평양에 머무르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 결국 화가 난 평양 사람 들은 이 배를 태워 버리고 미국은 이 상황을 3년 동안이나 모르고 지 내게 된다 .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국은 강화도로 쳐들어와서 무력 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한다 . 조선과 미국은 팽팽히 싸우다가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미국은 일본으로 철수했다 . 비록 그 누구도 정확히 이긴 전투도 아니었지만 양쪽 다 서로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 런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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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 둘 다 이겼다는 자신감에 더욱 강 하게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고 조선의 민중도 이에 힘입어 통상 요구를 함께 반대한다 .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 지에 통상 반대를 널리 알리는 척화비를 세웠다. 이는 조선의 각 지역 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고자 세워진 것으로 흥선대원군은 통상은 조국을 팔아먹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밝혔 다 . 그 후에 척화비는 임오군란으로 1882년에 대원군이 청나라로 잡 혀가며 조선이 개항을 가속화하게 되어 철거되거나 땅속에 파묻혀 버 린다. 2017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사건에 감 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물론 타국과의 교류가 마냥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 교류를 통해 나라가 발전할 수도 있고 , 또 다른 나라에서 새 롭게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나라가 이미 단단하고 어느 정도 강할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 시절의 조선 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기에 과거 서양과의 통상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 도 흥선대원군과 동일하다. 만일 조선이 그때 서양에 굴복하여 개항을 허락하였으면 지금 대한민국은 이렇게 강해지지 못했을 것이고 , 당당 한 독립국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 현재의 우리는 우리만의 철학을 갖지 못했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모국어, 그리고 문화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 그런 나라에서 애국심은 당연히 찾아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 또는 개인적으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흥선대 원군의 선택에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 만일 과거에 조선이 무방비 상태로 개항되었다면 , 스스로 다른 나라의 침략을 허락하는 꼴 밖에 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흥선대원군 하야 이후 이루어진 강화도 조약의 여러 불평등한 항목들을 보아도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준비되 지 않은 개항은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미국과의 교류가 잦아질수록 우리나라의 달라진 교육방식과 사 상들에서도 앞서 주장한 개항의 부정적 의미들을 엿볼 수 있다 . 요즈 음 과거 한국의 학업 방식들과는 다른 성적 제도 그리고 교육 방법이 도입되면서 많은 학생이 혼란을 겪고 있다 . 한국은 이제 과거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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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는 다르게 태도, 혹은 봉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성적으로 등수를 매기고 , 학원을 죽도록 다녀야 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 입학사정관제는 컨설팅 업체들의 개입으로 철저하게 사교육화되기도 하고 , 봉사 점수만 채우려는 얌체 학생과 학부모들도 많아지고 있다. 성실하게 학교만 다니던 학생들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 졌고 입시의 벽은 한없이 높아졌다. 무방비하게 외국의 교육방식을 받 아들인 부작용을 우리 청소년들이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교육뿐만이 아니다 .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에 들 어와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다방면으로 흡수한 한국인들의 사상은 많 이 바뀌었다. 보다 개방적으로 변한 부분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과거 의 보수적인 면들이 섞여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부분도 있 다 . 이렇게 통상 , 즉 서양과의 교류가 잦아질수록 피해를 보는 것이 준비되지 않은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흥선대원군의 정책에도 여러 가지 과오가 있다. 하지만 우 리는 흥선대원군의 과오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 흥선대원군이 지 켜내고자 했던 가치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 흥선대원군이 그러하였듯 , 현대 사회의 우리도 더 엄격하게 우리가 예전부터 고수해 오던 가치 있는 것들을 유지하고 지켜야 한다. 그런 우선 조건이 갖추 어 질 때 우리는 다른 문물을 더욱 잘 수용할 수 있을 것이고 , 우리 것으로 녹여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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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배우다 Grade 11 김도현 Henry Kim 19세기의 개방과 폐쇄가 20 세기 지배와 피지배의 세계논리로 이어졌지만 21세기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마치 과거를 답습하는 듯 보인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 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시 19세기처럼 개방적인 나라와 폐쇄적인 나라로 세계는 갈리고 있다. 과거에 비해 ‘보수'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커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들은 난 민 , 이민자 , 그리고 군사 강화 등의 이유로 인해 국경을 닫으며 여전 히 보수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 19 세기 조선도 매우 폐쇄적이었다 .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화시켰지만 병인양요와 신 미양요를 통해 조선은 예전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세계 2 차 대전 이후로 프랑스와 대한민국은 서로 우호적인 모습 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구한말 프랑스와 조선의 외교는 적대심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 이는 병인양요 (丙寅洋擾) 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다 . 병인양요는 1866년에 프랑스 천주교도 9명을 학살시킨 병인박해 (丙寅迫害 )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이었다 . 조선은 초기에도 천주교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흥선대원군이 정권에 들어서면서부터 천주교에 대 한 압박이 더욱 강화됐다 . 당시 조선 정부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인 천주교도도 처형했다 . 이에 분노한 프랑스는 강화도를 공격하 게 되고 이것이 병인양요의 시작이었다. 강화도는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늘 침략의 대상이 되 어온 섬이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미국,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이 강화도 를 통해 조선을 공격했다.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에는 병인박해 에 대한 복수뿐만 아니라 자국의 이득을 위해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으 려는 ‘제국주의 ’의 목적을 위한 것도 있었다. 병인양요 이후 미국과 일 본이 강화도로 들어오면서 조선은 완전한 개항을 맞이하게 되었다.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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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요를 통해 조선은 프랑스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는 조 선왕조에 대한 중요한 서적인 외규장각의 도서들을 약탈해갔기 때문에 조선이 병인양요에서 완전히 ‘승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의 자유는 지극히 당 연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 학교가 흥선대원군 섭정 당시에 설립 되었다면 기독교 신자들인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첫 시험을 보기도 전 에 숙청당했을 수도 있다 .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상상 속에서만 일어 나는 일은 아니다 . 병인양요와 유사한 종교적인 문제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70여 년째 지속되고 있는 유대인과 무슬림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부터 21세기 초부터 급부상한 IS 관련 테러 까지 종교적 자유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는 갈등과 분쟁 의 씨앗이 되고 있다 . 올해에도 불교 인구가 다수인 미얀마에서 이슬 람교의 로힝야 족이 ‘인종 청소 '를 당하는 등 학살과 탄압이 세계 곳 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하지만 신미양요는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 사건은 아니다. 이는 수교를 맺고 싶은 미국이 보낸 무역선 ‘제너럴셔먼 호'가 평양에 서 불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은 프랑스처럼 강 화도를 통해 침략했다. 신미양요는 미국의 ‘미' 가 아니라 간지(干支)의 명칭인 신미( 辛未) 를 본뜬 명칭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이름이 비 슷해서 비슷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미양요는 병인양요와 달리 조선의 공격에 대한 복수가 무려 사건 5년 뒤에 일어났다. 미국 은 실종상태였던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뒤늦게 알게 되어 강화도를 침략한다 . 그러나 미국은 조선의 수비를 뚫지 못해 결국 철수하게 된 다. 미국과 대한민국은 오늘날 공식적인 군사동맹을 가진 두 나라로 서 예전에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라울 수도 있 다 . 하지만 많은 나라들이 이처럼 한때 적이었다가 동맹을 맺기도 한 다 . 미국은 당시 조선 쇄국정책을 반대하며 개항을 하도록 만들려고 하였지만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쇄국정책의 많은 요 소들을 미국에 도입하려고 한다. 이처럼 나라의 입장과 행동은 시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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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배경과 상황에 따라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정치인들은 ‘개방 ’과 ‘ 폐쇄' 중 무엇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열 띤 토론을 펼치기도 하고, 본인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기도 한다. 시 민들 역시 정부의 결정에 찬성하기도 하고 반발하기도 한다. 둘 중 어 느 하나가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국 제연합 (UN)을 통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같이 다른 나라의 정책을 강 제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에 동의했다 . 하 지만 이러한 결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고, 이로 인해 발 생하는 군사적인 문제 역시 복잡하고 심각하다. 2017년 9월, 제국주의의 막은 거의 내려갔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로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 요 같은 사건들을 통해 남을 대신해서 강제적으로 선택을 강행하는 것 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은 국가 간의 관계 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속의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역 사 속에서 다른 사람의 결정을 우리 마음대로 제압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지 배웠기에, 자기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하게 알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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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한미 FTA Grade 11 이진성 Joseph Yi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은 1876 년 ‘조일수호조규 ’라는 이 름으로 강화도에서 체결되었다 . 당시 일본제국 군함이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운요호 사건 ’을 빌미로 일본제국은 조선과 수교를 맺길 원했고 ,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규수와 같은 일부 대신들의 적극적인 찬성으로 사실상 명성왕후와 그녀의 측근들이 주름 잡고 있던 무능한 고종 정부는 이 불평등한 조약에 최종 도장을 찍고 말았다 .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에게 명백히 불리한 조약이었으며 , 조선은 조약 체결의 대가를 향후 수십 년간 톡톡히 치 렀다 . 그렇다면 ‘조일수호조규 '의 의의와 한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아보자. 먼저 ‘ 조일수호조규 ' 는 ‘ 중수구호', 즉 조선과 일본제국의 과거의 우호적 관계를 중시하는 성격이 짙다 . 전문을 보아도 ‘중수구호 '라는 말이 담겨 있는데, 이 말은 당시 조선의 개항 반대 세력의 반발을 회 피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조선과 일본제국이 새로운 관계가 아닌 예전 관계의 연장선에서 고쳐 나간다는 논리는 개항에 대한 거부 감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청나라를 정복하고자 했던 일본제국은 조 약 제 1 관에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라고 명시하며 조선이 청나라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부인했다 . 따 라서 조선과 일본제국의 관계에서 청나라가 개입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향후 청나라까지 침략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제 10관 은 모든 조항들 중 조선에게 가장 불리한 조항으로 여겨지는데, 이 치 외법권 조항은 조선에서 일본제국의 필요의 따라 자국민들이 보호가 가능해졌으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제국의 상인들이 조선법을 피해 사업 을 전개하는 결과를 나았다. 통상 외교관들에 한해서 적용되는 치외법 권은 ‘조일수호조규 ’의 불평등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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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수호조규 ', 또는 ‘강화도 조약’ 에 대해 짧게나마 공부하면서 나는 조선을 대한민국과 직간접적으로 비교하게 되었다 .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제국 사이에 끼어있었던 약소국과 다름없었으며, 그토록 무시하던 나라에게 개항을 강요당하고 결과적으로는 그 나라의 식민지 가 되어버리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100 년이 지난 오늘날의 대 한민국의 세계적 위상은 분명 당시 조선과는 다르다. 세계 12위의 경 제대국이며 그 어느 나라도 대한민국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여전히 자국민들에게 불리 한 협정들을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대표적인 예로 한미 FTA, 즉 대 한민국과 미국 사이에 맺은 자유무역협정이 있다. 미국은 수많은 식료 품들을 우리나라 시장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판매하고 있는데, 이런 값싼 식료품들 때문에 국내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국산 식료품들은 팔 리지 않게 된다. FTA 발효 전인 2007 년에서 2011년까지 연평균 대미 수출액이 3 억 9 천 900만이었던 것이 2016년에는 7 억 1 천 800 만 달러 로 3억 1천 900만 달러가 늘어났지만, 수입은 61억 9천만 달러에서 71 억 8천 200만 달러로 9억 8 천 700 만 달러 늘어났다. 수출액이 늘어났다고 는 하지만 미국은 우리보다 수출규모가 3배 이상 큰 것이다 . 정부와 언론에서는 농부들만 피해를 보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대 다수의 국민들이 FTA의 피해자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 무역협정을 통해 설사 제조업이나 중공업으로 이익을 본다 해도 우리나라 대기업 들 주식의 꽤나 큰 부분을 미국 자본들이 갖고 있는 형태이기에 그 이 익은 고스란히 미국 땅으로 넘어가게 된다. 한미 FTA의 협상문은 번역되지 않은 채로 소수의 관계자들에게 만 공개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강화도 조약과 유사한 면을 찾을 수 있 다 . 당시 일본제국도 그들에게 유리하게 문서를 작성한 채 강화도로 들고 오지 않았는가. 김시영 한국 가톨릭농민협회 지도신부는 2009년 한미 FTA 체결 당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미 FTA 를 말할 때 경제만 놓고 말하지만, 사실은 중국-러시 아 -한국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블록화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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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왕정이 없어지고 민주주의에 의한 직선제가 자리 잡은 대한민국 은 19세기 말과 20 세기 초에 강화도 조약과 을사늑약을 겪은 조선을 보고 깨우친 것이 있을까 , 아니라면 또 다시 반복되는 비극적인 역사 의 굴레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숙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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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개혁, 어떻게 볼 것인가? Grade 11 구동수 Daniel Koo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1863 년 12월 자신의 차남인 이명복이 조 선의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실각되는 1873년 11 월까지 10여 년간 계 속되었다 . 고종이 처음 즉위했을 때 조선 24 대왕인 헌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 신정왕후) 가 수렴청정 했으나 그것은 결국 형식상의 수렴청정 이었다 . 그녀는 곧 흥선대원군에게 고종 대신 국정을 맡기기 시작하였 고 , 그때부터 흥선대원군의 집권이 시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내정 개혁과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게 된다. 우선 대원군은 집권 이후 탕평책을 실시하여 계파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중용하였다 . 이로 인해 소론과 노론 , 남인계 그리고 북인계 등 다양한 계파의 사람들이 조정에 등용되기 시작한다. 또한, 당시 집 권세력이었던 안동 김 씨를 박해하지 않아 조정 내의 안동 김 씨와 풍 양 조 씨의 균형을 맞췄다. 한편 조선은 국왕에게 위임을 받은 특정인과 그 추종 세력, 즉 외척가문들에 의해 정치를 하는 세도정치를 겪으면서 조세제도인 전 정, 군정 , 환곡 등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삶 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으며 곳곳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를 해 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민생 안정을 위해 힘썼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전정을 바로 잡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행하 게 된다 . 그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농지가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토지대장에서 누락된 토지인 은결 또한 많아서 국고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었다 . 양전 사업을 통해 흥선대원군은 은결을 색출해내어 국고의 수입을 늘렸다. 또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호포제를 실시해 당시 사람 수를 기 준으로 걷던 세금을 집을 기준으로 걷도록 바꾸고, 원래 상민들에게만 부과하던 세금을 양반에게까지 확대 징수하게 하여 조선의 국고를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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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히 늘렸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관에서 곡식을 빌려준다는 명목 하에 고리대 금업으로 변질된 환곡제 (還穀制)를 폐지하고 그 자리에 추천을 통해 뽑힌 지역의 명망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사창제 (社倉制) 를 실시했다 . 또한 의복을 간소화시키는 등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대원군이 처 음 정권을 잡았을 때보다 조선의 조정이 보유한 황금은 51%, 쌀은 299%, 포는 255%, 목재가 258%, 은이 27%, 철은 673% 가까이 늘 었다. 또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고 ,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 서원을 철폐하였다 . 당 시 비변사는 전쟁들을 수행하며 힘이 비대해져 6 조(이조-문관의 임명, 형조 -법률, 호조- 경제 , 예조-교육, 공조-국토, 병조- 군사) 의 권한 대부 분과 조선 시대 지방관인 수령임명권, 병사들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여 자급자족을 꾀하는 둔전 , 군율시행 기능 등의 막강한 권력을 가 지고 있어서 세도정치의 핵심적인 도구가 되었다. 왕권을 강화하고 싶 어 하던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외교, 국방 치안 외의 모든 사무를 의정부로 옮기고 나머지를 삼 군부로 옮긴 뒤 폐지한다. 또한 대원군은 조선 내에 있는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했다. 서원 은 그동안 제사 비용 등을 주변 마을의 백성에게 부담을 시키며 서원 들의 면세권을 악용해 세금을 내지 않으며 군역기피를 하는 등 폐단이 매우 심했다 .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600개 가량의 서원 중 50여개만 남긴 뒤 그 외 모든 서원을 철폐한 뒤 국고로 귀속시킨다. 그런 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불태우고 도망가 버린 경복궁을 중 건하기 시작하여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위상회복을 꾀했다. 경복궁 중 건이라는 큰 규모의 토목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 는데 처음에는 이를 원납전 (願納錢) 을 통해 충당했다 . 원납전은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서 기부 받은 화폐로 원납전을 낸 사 람에게 벼슬이나 상을 내림으로써 경복궁의 중건 또한 무리 없이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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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었다. 하지만 1866년 3월에 경복궁이 불타고 이듬해인 1867 년 2 월에 한 번 더 불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또다시 짓기에 는 너무나 무리가 가는 일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최대 실책 중 하나인 당백전 (當百錢 )을 발행하면서까지 이를 완공시키려고 한다 . 당 백전은 명목상으로는 당시 쓰던 화폐인 상평통보의 백배의 가치를 하 는 화폐였다. 하지만 실물의 가치와 국가의 보증 가능성을 무시한 채 발생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는다 . 이러한 과정 들을 거쳐 고종 5 년 (1868 년 6 월 )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숙원 ( 宿願) 사 업이었던 경복궁을 중건시킨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와 교훈을 주 며 , 우리는 그의 개혁과정에서 나온 문제점을 반면교사( 反面敎師)삼아 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 당백전의 발행이다. 당백전의 발행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경제에 무지했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말해준 좋은 사 례라 볼 수 있다. 이는 단지 흥선 대원군 시대에만 일어났던 일은 아 니었다 . 짐바브웨의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는 나라를 운영할 돈이 없다고 돈을 찍어내기 시작하여 1000억 짐바브웨 달러로 계란 3개밖에 못사는 초 (超)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 또 , 북한의 경우 , 2009년 11 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기습적으로 구권 100 원을 신권 1원으로 교환하는 5차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2009년 11 월 당시의 쌀값은 kg당 구권 2,200원 가량이었음으로 신권으로는 20 원 정도에 해당되는 가격이다. 하지만 2009 년 12 월 중순에는 50원 , 2010년 1월 초에는 150원, 1월 중순에는 300원, 1월 말에는 600 원, 그 후 800원 수준까지 쌀값이 폭등하여, 결과적으로 두 달 만에 물가가 최소 30배 이상 급등하는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 과거와 현재의 이러한 사례 를 살펴보았을 때 생각 없는 무분별한 화폐개혁은 국가경제의 파탄을 불러온다는 점을 알려준다. 둘째 , 경복궁 중건은 우리에게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과정이 안 좋으면 좋지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경복궁은 한국을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일본은 그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워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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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려고 할 만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훌륭한 건축물이며 역사적으로 도 큰 의미를 지니는 문화유산이다 . 하지만 경복궁의 중건 과정에서 백성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할 만큼 경제와 삶의 질을 도외시 한 것은 결국 백성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고 지도자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한 원 인이 되었다. 이는 아무리 중요한 사업이더라도 지도자의 독단으로 강 행하기 보다는 국민의 삶의 질 보장과 그에 따르는 고통의 분담이 먼 저 합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 과정에서 배워야 할 점도 있다. 탕평책을 펼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 고종 5년 (1868 년)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서 경복궁 중건, 원납전, 당백전 등 흥선대원군이 하고 있는 개혁 의 문제를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의 탕평책으로 인해 덕을 본 소론과 노론 남인계 그리고 북인계 등이 흥선대원군을 지지해주면 서 흥선대원군은 개혁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 결과적으로 전 폭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정부가 흥선대원군처럼 대대적으로 개혁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탕평책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 개혁을 하는 데 에는 많은 반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과 다른 정파 의 사람들을 차별 없이 기용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하는 의지 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중요한 정책에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정파를 초월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본다.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위 해 싸우는 과정을 줄이고 좀 더 건설적인 발전 방향을 위한 합의를 이 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 아닌 가 생각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당대의 시각만으로 보지 않고 역사 적 관점으로 확대해 본다면 입장이 달라지기도 한다 . 이러한 큰일을 당대에 그 가치를 아무도 몰라줄 수 있지만 결국 후대에 이르러 그 가 치가 발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파리의 에펠탑이 있다 . 에펠탑도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파리의 미관을 해치는 흉물이라 며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지만 , 에펠탑을 지은 에펠은 그런 비판들을 참아내며 묵묵히 탑을 완공시켜 일 년 만에 탑에 투자한 돈을 회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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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에펠탑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파 리의 관광 명소로 유명해졌다 . 물론 , 어떤 일을 추진하고자 할 때 그 일의 가치에 대한 확신과 비전이 전제 되어야 한다. 흥선 대원군은 비 록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과오가 있지만 국익과 정책 의 개혁을 위해서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깊이 생각해 볼 점이 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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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게임 문화 Grade 12 정빙한 Jerry Chung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 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기도 합니다. 새로 유행하는 게임은 사람들을 빠르게 중독되게 합니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 배틀 그라운드 ’ 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 이 게임은 100 명의 게이머가 배틀 로얄에서 최후까지 살아 남기 위해 싸우는 사상 최대 규모의 액션 게임입니다 . 게이머는 경기 를 혼자서 할 수도 있고, 최대 4명의 팀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습니 다. 게이머들은 보통 나라 별로 팀을 만듭니다 .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각 나라의 팀이 다른 나라의 팀을 공격하며 게임이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 예를 들어 한국 게이머들은 ‘Korea No.1’ 이라고 말하고 , 타이완 사람은 ‘TW No.1’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나라가 최고임을 다른 게이머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 또 상대 나라와 사이가 나쁜 다른 나라를 언급하며 서로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라 사이의 관계만 나빠지게 만듭니다 . 게이머들은 게 임을 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실제 상황에서 일어난 다면 국제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 21 세기는 국제화 사회입니 다.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를 존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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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김정일 Grade 12 맥큐리 채리티 Charity McClure 2016년 , 도널드 트럼프(Do nald Trump)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 었습니다 . 도널드 트럼프는 지금까지 당선된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논 란이 많은 대통령입니다. 그는 강한 의견과 무모한 행동으로 잘 알려 져 있습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말다툼이 오고 갔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트위터에

김정은이

‘ 작은

로켓맨(Little

Ro cket

Man)’이라고 하며 북한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 이 말은 북한 에 대한 굉장한 무례였습니다.

이에 대해 김정은은 트럼프를 ‘ 겁먹은 개(a Frightened do g)’라 고 부르며 미국에 핵을 터뜨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러한 말다툼은 미국 , 북한 , 그리고 남한의 관계를 나쁘게 만 들었고 , 남북한의 통일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 두 나라의 지도자들 이 사용하는 이러한 말들은 남북한의 관계를 악화시켜 또 다른 한국 전쟁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나라가 함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돕는다면 남한 과 북한의 통일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트럼프와 김 정은은 서로를 모욕하는 일을 멈추고, 평화롭게 대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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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위 문화 Grade 12 모란 오말 Omar Mo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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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위는 우수해요. 왜냐하면 훌륭하게 시위하기 때문이에요. 한국 시위 문화는 평화롭고, 평온해요. 한국의 전 대통령인 박근혜는 잘못을 했어요 . 그래서 한국인들 은 2016년 9월부터 2017년 5월까지 시위했어요. 그 결과,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어요. 이 시위는 시끄러웠어요. 그러나 힘이 강했고, 중 요한 일이었어요. 이 시위의 목적은 박근혜를 하야하게 하는 것이었어 요. 물론 모든 시위가 그렇지는 않았어요. 엄마와 형과 저는 종로를 걸었어요 . 우리는 한국인들의 시위를 봤어요 . 엄마는 불편해 했어요 . 그리고 저는 형과 함께 놀랐어요. 한국인들은 노래를 크게 불렀어요. 어느 날 저는 멕시코 대사관에서 일했어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 사람들은 멕시코 대사관 앞에 앉았어요 . 그들은 노래를 많이 불렀어요 . 그리고 춤을 췄어요. 한편 , 매주 LG빌딩 앞에 시위가 있었어요 . 그들은 시끄러웠어 요 . 제 생각으로는 이 시위는 평화롭지 않았어요 . 그들은 종이비행기 를 던졌어요. 그리고 그들은 LG빌딩 앞에서 잤어요 ! 그런데 , 이 사람 들의 냄새가 너무 나빴어요. 대체적으로, 대한민국의 시위는 평화롭고, 재밌고 조직적이에요. 분명히 , 이러한 평판을 뒤집는 몇 가지 예외가 있어요 . 그러나 이 시 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을 주지 않아요 . 또한 , 한국인들이 그들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대단한 방법이에요 .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의 시위에 놀랐어요. 그리고 저는 한 번 시위에 참여하고 싶고 , 돕고 싶 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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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피시방의 인기 Grade 12 박성규 Maximillian Park 게임을 하는 학생들과 성인들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 게임을 자주 하는 학생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 라보며 , 심지어 프로 게이머들도 게임 말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라고 자주 조롱을 받는다. 한국 남학생들은 게임에 대한 관심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높다 . 그 중에서도 특히 컴퓨터 게임이 가장 큰 관심을 끈다 . 한국의 뉴스나 신문을 보면 최근에 인기가 많아지는 게임에 대한 소식을 찾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최근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오버워치’와 ‘배 틀 그라운드’, 그리고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스타크래프 트 ’와 ‘리그오브레전드 ’를 보면 컴퓨터 게임은 이제 중요한 한국의 문 화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하는 대화 중에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학교 끝나고 같이 하는 활동 중 하나는 게임이다. 게임이 인기가 많지만 집에서 그런 게임들을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성 능을 가진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수많은 학 생들이 학교 끝나고 집에서 하지 못하는 게임을 하려고 피시방이라는 곳으로 간다. 피시방은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일정 시간동안 컴퓨터로 인터 넷, 온라인 게임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청소년보호법으로 인 하여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9 시까지는 19 세 미만 청소년들의 출입을 금지시킨다는 점만 빼면 , 피시방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한국에서 피시방만큼 친구들과 모이고 어울 리기 쉬운 곳들이 많지 않다. 피시방은 왜 한국 남학생들한테 이렇게나 많은 인기를 끄는 것 일까 ?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학생의 적은 용돈 중 많은 부분을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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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도 피시방을 가려는 청소년들이 그렇게 많을까? 한국은 학생들 간의 경쟁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심하고 숨 돌 릴 틈이 없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이들한 테 이런 유형의 경쟁이 부담될 수밖에 없으며, 누구한테나 휴식은 필 요하다 . 그러한 면에서 게임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이며, 한국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적은 수의 방법들 중 에 매력적으로 보인다 . 게임을 통해서 친구들과 함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로 뭉치게 해줄 수 있고, 혼자 게임을 하더라도 충분히 쾌감 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피시방이 제공하는 게임들은 사회의 요구와 주변인들의 기대에서 생겨나는 압박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 는 환경을 제공해 주기에 이렇게나 큰 인기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 는 듯하다. 학생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여가 프로그램이 생기지 않는 한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가 많은 피시방은 앞으로도 계속 그 인기가 지속 될 듯하다. 교육열이 높은 한국의 분위기는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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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정신 Grade 12 김재홍 Jae Kim 오늘날의 한국을 들여다보면 자문화나 자기민족을 너무 폄하하 는 자기비하적 시선, 혹은 한국민족을 너무나 극대화해서 생각하는 나 르시즘적인 요소가 뒤섞여있다. 이는 내 생각이 아니라 한국학 시간에 그룹토의를 하고 난 후 내린 결론이다 . 부정적인 시각은 이뿐만이 아 니다 .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 빨리빨리’ 문화라든지 한국 사회는 미래 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헬조선 ’이라고 부르는 요인들은 사실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단점이나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말하는 것 같다. 과거의 한국과 현재의 한국은 분명 달라진 부분이 크다. 산업화 시대에서부터 정보화 시대로 변한 것이 가장 큰 예이다 . 다시 말해서 노동에 있어서 신체가 힘들었던 산업화에서 머리와 마음이 힘든 정보 화 사회로 변한 것이다 . 컴퓨터 , 멀티미디어 , 통신 분야 등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육체적인 노동과 그에 수반되는 행동은 줄어들었 지만 뇌는 더욱 더 활발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모방을 통한 경제발전이 뚜렷 한 한계에 부딪히자 창조경제의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 한국인들의 창 의성을 가로막는 구조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국가주의, 이기주의, 그 리고 계급주의 . 한 개인보다는 전체나 국가의 방식에 너무 따라가는 분위기가 창조경제를 가로막는 그 첫 번째 요소이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 아니 하지 않는 이기적인 생각과 태도가 그 두 번째 , 그리고 마지막은 사람들의 삶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다고 믿고 그에 따라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행동하는 근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안의 긍정적인 정신이 아 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 바로 태권도 정신이다 . 한국은 오래 전부터 태권도라는 전신운동을 해왔다.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신체 만을 이용해, 상대방을 막고 때로는 공격하는 태권도는 이제 세계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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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유명한 정신과 신체 무장 기술이 되었다 . 태권도를 배움으로써 신 체를 강하게 키우고 심신수련을 통하여 인격을 도야하며 , 기술단련으 로 자신의 신체를 방어할 수 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고 힘든 상황이 닥쳐도 이러한 태권도 정신 , 강한 마음으로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계 속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한국인이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한국이 개개인 의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지 않 다고 해서 따돌리거나 업신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 돈이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모두가 하늘 아래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 졌으면 한다 . 우리의 정서구조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부정적인 것들 을 인지하고 또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한다 .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한국인의 정서는 독립적 이지 못한 의존적인 생각구조를 나타내주고 있다. 집단에 종속되기 쉽 고 자율적 주체로 홀로 서기 힘들다. 태권도 정신처럼 홀로 우뚝 서서 그 어느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고 멋진 대한민국을 이뤄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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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나아가야 할 길 Grade 12 차성호 William Cha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깊고 특별한 역사가 있다. 예부터 크게 변 하지 않은 고유한 전통 정서부터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인위적으로 변하게 된 습성까지 다양한 문화가 장구하게 한국 인들의 삶 속에 이루어져왔다. 내가 정의하는 한국인들의 민족성은 매우 강하며 , 집단성이 강 하다 . 그로 인해 때로는 객관적이지 못하고 , 민족주의에 치우친 사고 방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 내에서 유난스럽게 지 켜야 할 의무나 책임을 강조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너무 보수적이고 억 지스러워 스스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1900년대 초반, 동아시아 주변 강국이었던 일본은 이미 어느 정 도 근대화를 마친 상태였고 ,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관점에서는 우리나라 민족은 산업화가 안 된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사실일지 모르는 슬픈 역사지만 그로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우리나 라는 일본의 시스템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 이것이 우리 민족의 생체공학적인 변화가 시작된 기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농경사회에서의 신체가 산업사회의 신체로 인위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1970년대도 주목해 봐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주도 방 식의 산업화를 통해 정치의 경제적 개입이 강화되고 , 이는 어느 정도 큰 성공을 거둔다 . 하지만 그 시대 산업경제발전의 기틀을 세웠다는 사람들이 줄곧 외쳤던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혹은 어른들에게 효 를 다하는 조선시대의 유교질서가 우리나라를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사 회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나 생각해 봐야 한다 .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 사실 국가주도의 경제개발 , 철저한 위계질서 ,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불평등 , 집단 이기주의 등의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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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경제는 어느 정도 근 대화 혹은 현대화 되었을지 모르지만 정치질서와 구조, 그리고 국민들 의 시민의식은 전근대적인 낡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부분도 없지 않다 고 본다. 우리가 진정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 로 모두 같이 국가적 가치를 높여야 되고, 한국은 아직도 미흡한 민주 주의의 발전을 억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아직도 잔존해 있는 조선시대의 구습을 줄여가며, 모방경제의 한계를 깨닫고 이제 정 부와 지역단체 , 시민단체 등이 협력하여 함께 창조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화를 거쳐야하고 , 아직까지도 국민의 4대 의무라고 명시된 교육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권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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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디지털 시대의 선두주자라고들 한다 . 하지만 이에 걸맞 은 사회적 교양과 인성도 합리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 이를 위해서는 국가 , 사회 , 시민이 하나가 되어 서로 도와주고 아낌없이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과거의 정신과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정 보화를 거치고 있지만 , 우리에게 세계를 이끄는 IT 기술이 있을지 몰 라도 , 정말 근대화를 이룬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개개인 모두의 평 등을 매우 중요시 여겨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면 우리나 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나쁜 고정관념이나 태도를 버리고 , 필요한 것 은 이어가며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 경쟁사회에서 매우 힘든 일이겠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보완 해 줄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통해 반성하고 배우며 현재와 미래를 가꾸어나가 세계를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 , 그것이 정말로 한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아 닐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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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학생들을 이렇게 만든 것인가 Grade 12 전시현 Jenny Jun 한국 학생들과 다른 교육을 받고 있는 내가 바라 본 한국 학생 들의 학업 스트레스는 어마무시했다. 나도 나름 학업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 학생들과는 비교 할 수 없었다 . 평일에는 학 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12시에 이르는 학생들 이 수두룩하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밥도 제때 챙겨먹지 못하고 학원에 서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무엇이 한국 학생들 을 이렇게 만들었고 무엇이 한국 학교 엄마들을 이토록 극성맞게 만들 었을까 ? 오로지 엄마들의 욕심이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잘못 이루어진 공부 방식이었을까? 초등학교 3년 동안 한국 학교를 다녔던 내게는 한국 학교 친구 들이 몇몇 있다. 초등학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이 벌써 수능 공부에 시 달리는 고 3이 되었다. 잠을 제대로 못자는 건 기본이며 주말에는 밥 을 먹을 새도 없이 학원에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낸다고 한다. 그 친구 들이 중학교에 가니 바빠서 서로 만나지 못하고 , 고등학교에 가니 서 로 시간과 학업량에 쫓겨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 주로 다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서 오다가다 만나면 짧게 대화를 나눈 다 . 주로 그럴 때마다 오고가는 말은 학원 숙제가 너무 많다 , 수능이 너무 걱정된다 , 스펙 쌓는 게 너무 힘들다 등이다 . 나는 그 친구들과 는 달리 외국인학교를 다녀서 그 당시에 그 친구들이 하는 말이 이해 가 잘 안 됐었다. 나는 외국인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 고 그것만 파는 습관을 들였지만 오로지 정해진 공부를 하고 정해진 스펙을 쌓는 친구들이 안쓰러웠다. 모든 학생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 만 주로 부모님이 원하는 진로가 있다. 학생들은 그 진로를 따라 정해 진 스펙을 쌓아야 한다 . 자기가 원하는 것을 멋대로 하지 못하는 게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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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는, 물론 모든 선생님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 분의 선생님들이 주입식 교육을 찬성하지 않는다 . 시험을 볼 때도 꼭 교과서나 참고서를 외워야지만 만점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기본적 으로 개념을 이해하고 그 개념을 정해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시험을 본다. 학생들은 공부할 때 주입식 공부가 더 쉽다고 한 다 . 왜냐하면 그냥 선생님이 하라는 노트 필기만하고 달달 외우면 되 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달달 외우기만 하면 공부한 것이 그 당시 에는 기억이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바로 잊어버리기 쉽다. 한국 학교 학생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토론에서 개진하지 못하고 정해진 틀 안에 박혀있는 것 같다 . 예전에 유튜브에서 서울대생들이 어떻게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유지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동 영상을 본 적이 있다 . 나는 대단한 공부법이 있거라 기대했지만 보고 난 뒤에 정말 한국 교육의 심각성을 느꼈다 . 서울대생들이 만점에 가 까운 학점을 유지하는 비법은 바로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죄다 모조리 적는 것이었다. 그러고 난 뒤에 교수님의 말씀을 다 몽땅 외워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 남는 것이 뭘까 나는 고민하 게 되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시에 대해 배울 때는 각자 의 생각을 분석하는 것이 더 현명하게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조금 다르면 틀리다고 생각한다 . 난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을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사회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를 알아갈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 언제까지 나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정해진 답을 갖고 공 부를 할 것인가 ? 외국 사람들은 이렇게 공부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에 게 의미 없는 공부라고 얘기한다. 나도 그 말에 찬성한다. 스트레스는 공부하는 학생들만 받는 것이 아니다 . 사교육비 부 담에 시달리는 부모님들은 학생들과 같이 또는 학생들보다 더 큰 스트 레스를 받으신다. 더 이상 싼 값에 공부를 배울 수 있는 수업은 없다. 한 달에 한 과목 과외비가 40만원이 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요즘 한 달에 40 만원이면 싼 편이다. 과학 고등학교를 위한 수학 학원들은 한 달에 500만원까지도 이른다 . 솔직히 대단한 선생님들도 계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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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돈을 벌려고 하시는 분들도 많다 . 이런 환경에서 학생들이 수업 을 받게 된다면 학생들도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부모님들도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신다. 나는 공부는 힘들지만 그래도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즐 겁게 배우는 것이라고 배웠다 .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한국 학생들은 즐거움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한국 학생들이 이렇게까지 공부를 한 다음에 얻게 되는 것은 무 엇일까 ? 행복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런 환경을 어른들이 만들어 주 는 것 같다. 공부 이전에 무엇이 더 중요한지 찾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학생들의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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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혐문화 Grade 12 강민정 Jennifer Kang ‘여혐 ’이란 여혐 ’은 여성 혐오(misogyny)의 줄임 말이다. 여성 혐오라고 하 면 많은 남자들이 본인이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이러면서 여혐 안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이 얼마나 무지에서 오는 말인지… 제발 여성 혐오에 대해 , 인권에 대해 , 세상에 대해 무지한 티를 내는 실수는 하 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여성 혐오는 여성학 용어로 ,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거 나 , 협박 , 성희롱 , 성폭력 , 폭행을 당하거나, 시선 강간, 성적 대상화, 성적 상품화를 당하는 전 세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사회적 , 구조적 문화이다 . 역사에서부터 남성이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에 그 원인을 하 나로 분석하기가 쉽지 않지만, 현재까지 지속되는 여성 혐오의 원인의 상당 비중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 되어 있는 여혐과 성불평등, 그 리고 바꾸기 위한 지식이 없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의 방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도 여혐은 존재하고 모든 사람들은 여혐을 한다고 생 각한다 . 모든 사람들은 여혐을 하지만 , 페미니스트들은 본인에 내재 되어있는 여혐을 알아가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인 반면 , 대부분 의 사람들은 절대적인 무지에서 여혐을 일삼으며 고치려는 노력 또한 없거나 미흡하다. 무지는 죄다. 페미니즘을 습득하는 것을 ‘빨간 약을 먹는다 ’(매트릭스 패러디 ) 라고 표현하기도 하기도 하는데 , 이는 가부 장적인 세상에서 여혐이 모든 곳에서 존재하기에 ‘빨간 약 ’을 먹으면 지금까지 살아오며 보고 겪은 세상의 부조리가 전부 눈에 보이기 시작 해서 매우 환멸스럽고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혐은 전 세계에서 보이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인 만큼 인간은 본인의 여성 혐오부터 알아갈 필요성이 있다고 뼈저리게 느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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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역사와 현재에서의 여혐을 전부 서술하기 위해서는 몇 백 권의 책 을 인용해도 부족하기 때문에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여성 혐 오의 현상들을 몇 가지만 짚어보겠다. 역사 속의 여성 혐오 패턴 1. 가족을 가리키는 단어들의 어원을 살펴보자 . ‘장인 ’은 人(사 람 인)자가 들어가는데, ‘장모’는 母(어머니 모)자가 들어간다. ‘남편’은 男便 (편할 편) 인데 ‘아내’는 阿(집, 가옥)內 (안 내: 안, 속) 으로 ‘집안의 것 ’이라는 뜻이다 . ‘ 시집 ’은 여성이 언제나 생각해야 할 곳을 뜻하는데 ‘장가 ’는 남자가 아내를 맞이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할아버지’는 ‘할버 지 ’로 줄여서 부르지 않지만 , ‘할어머니 ’는 ‘할머니 ’로 줄여서 부른다 . 2. 명절 때 여자들은 집안일로 고생하는데 남자들 대부분은 일 을 하지 않는다. 주위에 아는 할머니에게 들어보았을 수도 있다. 추석 의 여혐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명절도 예 외가 아니다. 3. 몇십 년 전만해도 여성 아기가 태어나면 강제로 낙태를 하는 일이 허다했다. 현재의 20-30대 중 남성의 비율이 더 높은 이유가 그 것이다 . 이것은 남아선호사상에서 비롯되는 한 가지 피해일 뿐이다 . 80 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선별적 낙태가 극에 달하였기 때문 에 이러한 성비 불균형이 이루어졌다는 해석이다. 현재에도 지속되는 여혐 1. 2017년의 발암생리대 파동 한국 국산 생리대 시장 점유율 1위 -유한킴벌리 , 2위 -LG생활건 강 (유니참 ), 3 위 -P&G, 그리고 그 외의 많은 국내의 회사에서 만들어지 는 생리대에서 발암물질과 유해 화학물질이 높은 비중으로 검출 되면 서 여성환경연대 같은 활동단체들이 식약청에게 안전한 생리대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 달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 또한 여성의 몸에 유해 화학 물질이 함유된 생리대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자세한 연구를 주장 하였지만 , 살충제 계란 파동과 같은 시기에 발암생리대 파동이 일어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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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도 정부와 식약청은 계란 파동의 문제만 신속하게 처리를 하였고, 생리대의 문제와 여성의 건강의 문제는 의도적으로 외면하였다 . 아직 까지도 가장 접근성이 좋다는 마트와 편의점에서는 발암생리대의 판매 가 당당하게 이루어진다. 그로리아

스타이넘의

2002 년

책,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p30-31) 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이다. ‘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하게 도 남자가 월경을 하고 여자는 하지 않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까 ? 그렇게 되면 분명 월경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 생리량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 댈 것이다 . 초경을 한 소년들은 이제야 진짜 남자가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다 . 처음으로 월경을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과 종교 의식, 가족들의 축하 행사, 파티들이 마련될 것이다. 지체 높은 정치가들의 생리통으로 인한 손실을 막기 위해 의회는 국립 월경불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한다.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는 생리 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한다 . (중략 ) 군장성들 , 우파 정치인 ,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월경은 남자들만이 전투에 참가해 나라에 봉사하고 신 을 섬길 수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며 ‘ 화성이 지배하는 주기에 따라 일어나는 신성한 월경도 하지 않는 여성이 고위직을 차지한다는 게 말 이나 되는가 ?’ 종교 광신도들은 남자만이 신부나 목사가 될 수 있고 신 자체도 남자이며 남자만이 랍비가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바로 월경 이라고 ‘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피를 주셨다 .’, ‘매월 한 번 씩 행해지는 정화 의식 없는 여성들은 깨끗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2. 디지털 성범죄 흔히 ‘몰래 카메라 ’ 혹은 ‘ 리벤지 포르노 ’ 라고 불리어 ‘야동 사 이트 ’ 혹은 ‘포르노 사이트 ’ 에 업로드 된 영상과 사진들은 전부 불법 이다 . 한동안 ‘국산 야동 ’ 으로 자랑스럽게 불리기도 하였는데 (아직도 ‘국산 야동’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 국산’ 이라는 타이틀을 정말 성폭력에 달고 싶은 것인가 ? 그들은 아마 성범죄 영상 안 몰카 를 찍는 것, 올리는 것, 보는 것, 공유하는 것에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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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른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무지는 죄다. 방 관 또한 죄다. 성범죄 영상에 찍히는 당사자를 속여서 사진을 찍거나 영상을 찍는 것은 범죄이다. 최근에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강연을 들었는데 , 여성이 모르는 사이에 지하철, 사무실, 공중 화장실 등 일상 속에서 위장용 카메라로 모르는 사이에 찍는다고 한다 . 혹은 피해 여성이 연인과 섹스를 하는 도중 상대방이 미리 설치해 놓은 위장용 카메라로 촬영을 한다고 한 다. 강연자가 라이터 모양의 위장용 카메라와 실제 라이터를 비교해보 며 청중에게 라이터 모양의 위장용 카메라를 추측해보라고 하였지만, 외관상 둘이 똑같았다. 이러한 위장용 카메라는 라이터뿐만 아니라 물 병, 안경 , 모자, 담뱃갑, 시계 등 종류도 다양하고, 누구나 인터넷에서 쉽게 익명으로 주문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몰카’시장이 엄청나게 구 조적이며 , 활발하며 ,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한다. 여성의 일상생활 이 남자들에게는 경제적인 이익이 되는 것이다. ‘ 소라넷’ 이라는 포르노 사이트가 이러한 성범죄 매체의 산업이 조직화 되는 예라고 강연자가 말하였는데 , 다행히도 ‘소라넷 ’은 ‘디지털 성범죄 아웃 (DSO)’ 이라는 단체의 노력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런데 ‘ 소라넷’의 폐지는 첫 단계일 뿐, 아직 많은 법의 통과, 성범죄자의 처벌 및 투옥, 그리고 피해 여성 을 위한 배상이 시급한 상황이다 .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세 , 성범죄 영상과 사진을 찍지 말고, 보지도 말고, 공유하지도 말자! 3. 낙태죄 낙태죄는 대한민국의 형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죄이다. 낙태죄 는 기본권인 생식의 자유에 해당되는 임신중절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을 침해한다 . 여성민우회에서 낙태죄 때문에 자기결정권을 침해 받은 여성들의 사례를 모았는데, 그 중 몇 가지를 가져와 보았다. ‘2017년 4월 30 일 , 임신과 낙태를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 날입 니다 . 학생의 임신은 죄인가요 ? 올해 2월 생리가 늦어졌지만 임신인 줄 몰랐습니다. 학교 성교육에서도 배운 적 없는 임신테스트기도 그때 알았습니다 . 부모님에게 맞았어요 . 임신했다는 이유로 . 학교에도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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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퍼졌습니다. 담임이 자퇴서를 쓰라고 하더라구요. 낙태는 불법이니 까 법적으로도 책임을 지게 할 거래요. 자퇴서를 쓰고 나오며 죄 지은 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키울 여건이 안 되면 낙태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 나는 죄인이 아니에요.’ ‘2012년 12 월 18 일 . 나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을 중절했습니 다 . 성폭력을 당했지만 부모님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신 고하지 않았습니다 . 몸이 이상해 병원에 가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 고 바로 낙태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먼저 피해자임을 입 증하려면 고소를 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 어렵게 마음먹고 가해자를 고소했지만 경찰은 인공유산을 하기 위해 거짓으로 고소한 것 아니냐 며 고소사실확인서 발급을 늦췄습니다 . 결국 수술을 받을 수 있었을 때는 이미 수술이 훨씬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당신에게 가부장적 사회에 살고 있기에 여성 혐오는 어디에서든지 감지가 가능하다 . 대부분의 여성들은 착취당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 여지도록 살아왔으며 , 대부분의 남성들은 기득권층에 태어난 사실을 모르는 채 살아간다. 여성 혐오의 사회적 구조를 몰라도 되는 채로 살 아가는 것도 권력이라는 것을 모른다 . 우리 모두가 바뀌지 않으면 해 결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가부장제의 폐 해, 여성 혐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인식하고 공부하는 것을 적극 적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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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지지 않는 나라 Grade 12 김현지 Esther Kim 드디어 할아버지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얘기하셨던 나라 , 한국 에 도착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한국은 너무나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오후 12 시인 것 처럼 많은 건물들의 불이 아직도 밝게 켜져 있었다. 도로 위의 차들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한반도 땅에 발이 닿기도 전에 난 할아버지 가 왜 한국을 ‘잠이 없는 민족’이라 부르셨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착륙 후 복잡한 입국 과정을 거쳐 드디어 공항 게이트에서 나를 한국으로 초대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 고 그녀는 정장 차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왜 정장 차림이야? 밤 12 시인데? 안 피곤해?”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아, 퇴근하고 바로 오는 길이야. 오느라 피곤했지? 어서 와.” 그녀는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퇴근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며 오히려 나에게 피곤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그녀의 차로 인도했고 나를 도와 내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 둘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오랜만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가 문득 나는 왜 한국인들은 밤낮 없이 일하는지 궁금해졌다. “민주야, 한국인들은 원래 다 이렇게 늦게까지 일해?”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나는 알고 싶었다 . 도대체 이렇게 까지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들의 심리가 무엇인지를. “음 … ,” 민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응 맞아 . 한국인들에게는 실제로 야근이라는 것이 있어 . 야근 은 야간 근무를 줄인 말인데 밤늦게까지 일한다는 뜻이지. 많은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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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이 야근을 하고 모두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직장인들뿐만 아 니라 학생들은 야자 , 야간자율학습을 줄인 말로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따로 있어.” 그녀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은 물론, 직장인도 밤 12 시가 넘어서까지 일하는 것은 자기 몸을 혹사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또 다른 질문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야?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개개인들이 가진 자기만의 목표가 있겠지 . 근데 그건 그저 표 면적으로 잘 살려는 이유보다 더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아. 우리 한국 인들에게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거 든.” “그게 무슨 뜻이야?” “음, 한국의 역사를 알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한국은 ‘대 한민국 ’이라는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안정된 나라가 되기까지 많은 역 경과 고난이 있었어 . 일제강점기부터 한민족이 서로 등 돌려 총을 겨 누는 6.25 전쟁까지 대한민국은 순탄치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 이 처럼 국민들이 정상적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 때 국민들이 선택한 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열정과 인내를 가지고 더 열심히 일 하는 것이 었지 . 다른 나라의 침략과 전쟁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 우리의 선조들은 더욱 더 열심히 뛰고 일해야 했어. 이처럼 선 조들의 열정이 그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내려와 한국의 정신으로서 뿌 리내렸고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밤늦게까지도 열심히 일하는 문화가 형성된 거지.” 민주의 설명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고 싶 어서 열심히 일하는 줄로만 알았던 한국인들에게 이처럼 아픈 역사가 있는 줄 전혀 몰랐다. 또한 그 역사가 한국인들을 이처럼 부지런한 민 족으로 만들었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나라가 무 너져 갈 때 포기하지 않고 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 선조들을 기억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국 여행에서 만날 근면한 한국인들과 불 꺼지지 않은 밤, 함께 나눌 이야기들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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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숨 쉬는 과거와 현재 Grade 12 김남호 Alex Kim 한국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은 어디가 있을까 . 우리나라 는 5000년 역사를 통해 여러 가지 많은 과거의 일들이 현재와 공존하 고 있고 또 그만큼 과거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나라이다. 그래 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라고 불리는 도시인 경주로 나는 향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수학여행의 행선지를 경주로 정했다는 이야 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 왜 그런 지루한 곳에 가야하는지 너무 싫어 투 정을 부렸던 생각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 그렇게 나는 별로 반갑지 않은 마음을 갖고 어릴 적의 수학여행지로 출발했다 . 도착한 후 가장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경주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첨성대’ 였다 . 매일 텔레비전 속에서만 봤던 첨성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 첨성대는 아직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 , 그 오래된 역사의 유물로서 전해지는 신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첨성대는 옛 신라시대에 지어졌고 현존하는 동양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대로 그 명성이 벌써 많은 곳에 알려져 있다. 첨성대 를 자세히 보니 세세한 건축 양식과 아름다움으로 나와 내 친구들을 모두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말았다. 경주에서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친구들과 경복궁에 잠시 들러 보기로 하였다. 들어서자마자 경복궁의 웅장한 자태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풍스러웠고 예전의 왕이 살았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경건해졌다 . 경복궁이 지어진 시대에는 많 은 건축 재료들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국의 건축양식과 비슷하 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은 부재의 결합을 채우기 위해 짜 맞춤에 의존하며 되도록이면 못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건물의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의 위험성이 다 른 건축물에 비해서 클 수밖에 없다 . 이렇듯 중국식 건축양식인 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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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에게 조금 영향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은 더욱 정교하고 세밀한 면에서는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러한 세심한 면 과 세세한 부분이 경복궁의 아름다움의 가치를 더욱 한층 높였다고 본 다 . 경복궁을 둘러보며 머릿속에 스치듯 든 생각은 이렇게 대단한 건 축물을 만들고 고안해 낸 한국인들을 표현하는 함축적인 단어는 무엇 이 있을까라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차안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문화나 그것들을 표현 할 수 있는 가치나 개념은 무엇일까. 많은 것들 중에서도 한국의 전통과 문화 등 한국을 대표하는 개념은 무엇보다 정( 情)이라고 생각한다. 예 로부터 내려온 전통과 예절에 대한 자부심이 큰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따뜻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情)에는 오직 좋은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가끔은 정이 필요하지 않을 때에도 정이 들어서는 경우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돈이 없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무조건 정을 생각해서 어떻게든 도 와주는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그 상황에 처한 당사자를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닌 오히려 동정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의도치 않은 결과로 흘러 갈 수 있다 고 생각한다 . 내가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의 호의가 의도치는 않았지만 별로 반갑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학 수업 시간에 함께 논의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문 화적 사고방식은 정과 깊은 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며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가치 개념으로써 우리가 섣불리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문화 가 바로 이 ‘정’의 문화라는 것이다. 게으른 면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정(情 )의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서로를 이해해 주고 기다려 주는 문화 와 연결되었다. 예를 들어 농사가 그 해에 잘 되지 못하였거나 자연재 해로 인해서 피해를 입어서 먹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그런 상황에서 서로서로 같이 나누는 모습이 연상되는 나라는 한국이 매우 대표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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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한다. 옛말에 ‘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에는 이 말이 잘 이해도 되지 않고 어린 마음에 콩 한쪽을 어떻게 나눠먹느 냐라고 생각을 했지만 점점 한국에서 살고 한국의 문화를 접하고 진정 한 한국인이 되어가며 한국인의 서로 도우며 응원하고 위해주는 마음 인 ‘정 ’ 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졌고 지금도 한국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정(情)이다. 이처럼 한국의 정의 문화는 다른 사람을 위함과 동시에 우리의 마음도 따뜻하게 해주는 요소 중 하나인 것 같다 . 향후 미래에 다른 나라로 가게 되더라도 한국을 대표하는 정체성 중의 하나인 정 ( 情)의 소중한 가치관을 내 마음 속 안에 간직하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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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외모지상주의 문화’ 성형에 대해서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다름과 개개인의 매력을 인정하는 사회를

Grade 12 김여경 Jennifer Kim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성형외과로 빼곡히 채워진 빌딩들이 늘어 서 있는 거리를, 마스크와 붕대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걷는 사람 들을 보며 걸었다. 서울의 문화와 사회의 중심인 압구정에서 자란 나 는 , 상점들마다 또 길거리마다 보이는 성형외과 광고문, 다이어트 식 품 광고 , 여러 가지 헬스장 광고들을 끊임없이 접하면서 자라게 되었 다. 머지않아 이 광경은 나에게 너무 익숙해졌고 , 미국에서 놀러온 내 친구들이 이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을 때야 이 광경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또, 미국 유학생활 5년 후 다시 돌 아와 한국 사회를 접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외모 지적과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바빴고,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비하하 고 서로의 외모를 평가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고 다른 사람의 외모를 조롱하는 것이 문화의 일부분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그 젊음만으로도 아름답고 건강하기 마련이 지만 , 살을 더 빼고 더 마르고 더 ‘예뻐지기 위해 ’ 밥을 굶고 밥 때가 되어 배고파하면서도 먹지 못하고 극소량의 야채만 먹는 학생들도 있 었다 . 그리고 소셜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계속 연예인들과 자신을 비교 하며 , 눈이 이렇게 되고, 코가 더 오똑하면 좋겠다든지, 얼굴형이 맘에 안 든다는 발언을 일삼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다이어트를 통해 달라진 외모를 가지길 갈망하고 언제 어떤 수술을 할 건지 계획 세우기에 바 빴다. 처음에는 지나친 외모에 대한 집착이라고 생각하고 이해를 못하 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길거리를 다니면 마르고 이상적인 모델 이 다이어트 음료를 선전하고 운동 헬스장 선전문을 나누어 주고 , 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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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전을 틀면 비정상적으로 마른 아이돌들 및 연예인들이 끊임없이 노출되고 다이어트 및 화장법을 통해 어떻게 하면 더 예뻐질 수 있는 지에 대한 발언을 일삼는 것을 보며 오히려 , 이런 환경에서 지속적으 로 자라게 된다면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생각이 이와 동일하게 바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든 매체들과 한국 사회의 방식들은 나이가 어리고 외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청소년기의 소녀 , 소년들에게 치명 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실제로 내가 더 알아본 바로는, 무분별 한 다이어트는 거식증이나 , 각종 병들로 이어지기도 하고 , 이런 이상 적인 것들에 사로잡힌 몇몇 청소년들은 자신의 외모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심각한 정신적 심리적 고민에 빠진다고도 한다. 실제로 내가 아는 친구 중 한 명은 폭식증을 겪으면서 힘들어했는데, 옆에서 보고 느낀 바로 한번 “ 예쁘지 않다” 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히고, 인식 이 되면 , 다시 그 사고방식을 바꾸고 , 그 행동 양상을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내 친구는 모든 일에 항상 열심히 하는 , 항상 밝고 노력하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항상 밥을 먹을 때마다 사진을 찍고, 밥을 먹는 것에 유독 민감해 했지만 , 그 친구가 나에게 폭식증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친구가 그렇게 몸무게와 외모로 힘들어하는지 몰랐고 그런 내 자신이 한심해 졌다 . 나는 끊임없이 그 친구에게 건강하고 올바른 식습관과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 친구는 몇 년 동안 남들에게 끊임없이 살을 빼야한다고 말을 하였다. 사람의 겉모습은 사람에 있어서 가장 먼저 보여지는 부분으로 첫인상 등에 있어서 여파를 끼칠 수는 있겠지만 , 겉모습을 가꾸는 것 의 중요성 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고 자기 자신의 성격과 자신 의 강점과 장점을 인지하고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사랑 할 수 있는 사 람이 되는 것을 우선시하고, 괜한 경쟁심 , 질투심 등 외모에 중점을 지나치게 두어 피폐해지는 사회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 한국 사회의 외모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사회생활뿐 아니라 학교 및 직장 생 활 등

모든 부분에서 파급력이 크고,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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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외 모 기준을 부여하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등 외모가 가장 먼저고 사람의 실력, 노력 또 성격을 무시하는 우리나라의 정서와 문화는 바 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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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은 꼭 필요한가? Grade 12 황윤하 Jeff H wang

대한민국은 일본, 중국 등과 지리적으로 근접하여 주변 강대 국으로부터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 근래에는 미국과의 동맹관계 를 지속하며 동아시아에서의 안보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대한민 국의 위상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해결해야 할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다 . 1945년 8 월 15일 일제강점기가 종식된 이후, 한반도는 당시 냉전체계의 양대 축이었던 소련과 미국의 군정통치를 받으며 이념의 갈등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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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에치슨 선언으로 태평양 안보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 외되자 소련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남침의 야욕을 품고 1950년 6월 25 일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킨다. UN군과 중공군 등의 개입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된 이 3년 간의 무의미한 전쟁은 결국 전국토를 초토화시키고 360만명 이상의 부상자와 15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뒤 , 38도선 이남과 이북으로 갈려 분단의 아픔을 겪 게 된다. 분단 이후 한반도는 세계 정세와 맞물려 30년 이상 남북 대 립관계에 있었으나, 냉전이 종식되고 이에 따라 정치, 경제적인 교 류를 추진하게 되었다. 남북한 개성공단 설립, 북의 금강산 개발과 남한의 햇볕정책 등의 화해 모드와 함께 북의 무력도발 , 핵개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의 강제 폐쇄 등 정권에 따른 대립 과 화해 모드를 반복하면서 남북의 대치상황은 여전히 현재 진행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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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 부족 , 남북의 경제적 격차 및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 북핵과 사드 배치 등을 통한 군사적 갈등도 있지만 미국 , 일본 , 중국 , 러시아 등의 주변 강대국들 간의 이해 차이 , 무엇보다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과 변화에 대한 강한 저항 등이 한반도 통일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 고 ,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강한 정체성을 잃지 말고, 남북의 하나되 는 미래를 상상하며 모두가 협력하여 반드시 평화 통일을 이뤄내 야 한다 .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이며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 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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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국인 ’인가? Grade 12 김진서 Cole Kim 여러분 , 한국인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나요? 우선, 한국인이 되려면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거나 한국 여권이 있어야겠죠. 한 국 부모에게서 태어났거나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지만 외국에서 자란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 혹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자라고 , 한국에 살아가게 되는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과연 이 사람들을 한 국인이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한국인이 아닐지 우리가 쉽게 정의할 수 있나요? 대부분의 경우, 한국인의 정체성에는 민족이라든가 여권의 소지 여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 한 나라의 국민이 되려면 일단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 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 을 이해하며 그 나라의 환경과 사회 작용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안 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한국인을 정의할 때 큰 부 분을 차지합니다. 한국인들은 5000년의 오래 된 역사에서 매우 큰 자 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에 점령당한 아픔 을 겪기도 했었지만 다른 나라와 완전히 통합되지 않고 그 명맥을 지 켜왔습니다 . 이것은 한국인들을 정의할 때 도움이 됩니다. 민족성은 한 사람이 한국인인지 혹은 한국인이 아닌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포들은 민족적으로 한 국인의 뿌리를 갖고 있지만 다른 나라의 문화권 안에서 자란 사람들입 니다 . 묘하게도 한국 사회는 이러한 교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 고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때 역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생각 합니다 . 하지만 어디에 살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사람들이 한국인인가 아닌가를 두고 민족적으로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인을 판단할 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언어와 문화라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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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합니다 . 한국어는 한국인만의 고유한 언어입니다. 중국어 또는 일본 어로 기록 할 수 없습니다. 유교가 지닌 성향으로 과거의 중국 문화와 약간의 유사성을 공유 할 수는 있지만, 한국은 중국과는 아주 다른 나 라입니다 . 따라서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 한국어와 고유의 한국 문 화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한국의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어야 하며 한국인으로서 한국 문화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 법으로 정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 진정한 한국인은 한 국의 언어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한국에 살거나 한국에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물론 한국인이 되는 것이 쉽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 정으로 한국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의 언어 , 사회 문화 및 지역적 특징 등을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한 국 사회에 자신을 자연스럽게 통합 할 수 있다면 피부색이 같든 다르 든 우리가 그들을 한국인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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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does it mean to be Korean? What does it mean to be korean? Strictly speaking, in order to be Ko rean, they must have a Korean ethnicity and a Korean passport. Ho wever what if a person with Korean ethnicity and a korean passport but is adopted or simply brought up in a fo reign count ry? Or what if a foreigner is brought up by Koreans his entire life, living in a Korea? Would these people be considered Koreans? In many cases, I would say that to be Korean has nothing to do with ethnicity and legality. Rat her it has to do with the

culture

foreigners

who

immersed

one have

was brought up in. I lived

their

in Korean culture, are

entire

lives

believe in

that

Korea,

mo re Korean than 3rd

culture kids, maybe even second generation kids. In order to be Korean, it is important to be able to speak t he language, understand the culture and the traditions, and be able to interact and fit in with the Korean environment. Koreans

have

always

been

somewhat

&isolated&.

Although there has always been some level of similarity between all east asian countries, Korea has always maint ained a level of independence from countries such as China and Japan. Thro ughout history, Korea has been nicknamed the &hermit

kingdom&

due

to

not

interacting

with

ot her

countries. This has caused both pro s and co ns throughout history. Altho ugh it has allowed Ko rea's cult ure and traditio ns to

flourish independently without

interference

from

ot her

countries, it also stumped the development of Ko rea with countries such as Japan having a much f aster head start. In my opinio n, I believe that Korea should become more 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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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ly, even today. Although there are benefits of being isolated, I do believe that Korea should actively try to become more globalized and open to other co untries. History and politics takes a huge part in what Koreans define as &korean&. Koreans have great pride in their lo ng history

which

has

been,

as

mentioned

before,

unique.

Although Ko rea has been occupied at times, they were never fully integrated into another country. T his helps Koreans define their individuality from other countries. Ethnicity, in my opinion, has a lot to do with what many people would call &korean&. Although it is very tragic, South

Korea

does have

a

&racism

problem& within

the

country, including wages lower than the minimum, unsafe work conditions, discrimination and more. In my opinion, this should not be acceptable in Ko rean society, and we should be actively be trying to embrace these people wit h the Korean culture. T herefore, I do not believe Et hnicity should be a huge

barrier

between what

is Korean and

not.

Another

example can be Kyopos or Sakhalin Ko reans. T hese people are et hnically Korean but grew up in another count ry with different cultures. Alt hough our current Korean society don't really

accept

these

people

as

Koreans and

are

not

as

welcoming when they return to Korea, I do n't think that should be t he case. People should not be et hnically divided whether it is in Korea o r another country. I t hink that t he mo st import ant aspect of &Korean& is the language and the culture. Korean language is something that is unique and cannot be t raced to either Chinese or Japanese, hence emphasizing uniqueness. Although Korean culture can share some similarities with t he Chines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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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 to confucianism being a dominant trait in both countries, once again, there has been a level of separ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order to be Korean, it is important for somebody to be able

to learn the Korean language and

culture. I think anybody should be able to apply for Korean citizenship, albeit they have to t ake a language proficiency test, and a level of understanding of Korean culture. Once again, I do not legality defines what is and what isn't. A Korean is someone who understands the Korean language and culture, has lived in Ko rea for a fair period of time. Of course I am not advocating t hat being a Korean should be an easy thing that anybody. Ho wever, I believe that anybody who truly wants to become KOREAN can do so if they truly learn the language, people, culture and land. And if these people are able to integrate themselves into Korean society without any problems,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m and a normal Korean other than their skin 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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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와 남형이의 박물관으로 가는 길 하회탈의 역사를 따라서 Grade 12 조남형 Richard Jo

#1 아이 : 할아버지, 나 집에 가서 포켓몬이나 할래요! 박물관 가기 싫다 고요 , 재미없잖아요 ! 할아버지 :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박물관에 이 할애비가 보여주고 싶 은 게 있단다. 아이 : 재미없다니까요 . (박물관 안) 아이 : 우와, 이거 봐봐! 반짝인다! 할아버지 : 이걸 보렴, 할아버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게 이거란다. (마 스크를 가리킨다) 아이 : 이게 뭐야? 겨우 나무 쪼가리야 ? 이런 건 기념품 가게에서도 살 수 있잖아! 할아버지 : 말조심하렴. 이 하회탈에는 우리 민족의 깊은 역사가 담겨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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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 재미없어. 이런 건 내가 직접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2 남형 : 재미없다고? 내가 방금 누가 재미없다고 하는 걸 들은 거 같은 데? 아이 : 어? 할아버지 ? 남형 : 자 , 내 말을 들어보렴 , 아이야 . 하회탈에는 아주 특별한 점이 많단다 . 그치 , 지아야 ? 지아 : 맞아! 엄청 특별해. 남형 : 우리가 하회탈의 역사에 대해서 가르쳐줘야겠구나. 지아 : 그래야겠군! 바로 이게 역사 수업이지! 남형 : 옛날, 아주 먼 옛날 , 열 두 산신령이 허도령에게 아주 특별한 탈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단다. (빙그르르 돈다) #3 신들 : 우리 열두 산신령은 너, 허도령에게 우리에게 힘을 줄 12개의 하회탈을 만들 것을 명령하노라. 허도령 : 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신들 : 당연히 그래야지, 그게 바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이제부 터 내가 명령한대로 하거라 , 탈만 잘 만들어 낸다면 , 상상을 초월하는 복을 너에게 줄 것이다 . 단 , 네가 만드는 하회탈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면 안 된다 . 만약에 그런다면 너에 게 큰 벌을 내릴 것이다. 허도령 : 물론입니다! 명령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허도령 : 첫 번째 하회탈은 나무로 만들어야겠다 ! 두 번째는 박으로 만들고 ! 세 번째는 종이로 만들어야지. 지아 : 열 시간이 지난 후. 허도령 : 그리고 열두 번째 하회탈은- 우와 잠깐만! 저 어여쁜 낭자는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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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 안녕하시옵니까? 허도령 :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소, 맙소사, 당신 혹시 내가 만든 탈을 보았소? 여자 : 네? 허도령 : 산신령들이 이제 죽이고 말 것이오. 내 종이 탈이 이제 부서 졌구나 . 이 모든 것이 당신 탓이요 ! 당신의 아름다움이 나의 작품을 망가뜨리고 말았소!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처녀 : 이게 어떻게 내 탓이야? (빙그르르 돈다) #4 아이 : 허도령은 그 후로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죽었어? 남형 : 심장마비로 죽었어. 신들이 죽이기도 전에. 남형 : 오늘 날, 아홉 개의 하회탈이 한국의 전통 문화재로 지정되었 단다. 아이 : 아홉 개? 열두 개의 탈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남형 : 세 개의 탈은 분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어쨌든 이 위대한 이야기는 허도령이 열두 번째 탈을 아리따운 처녀 때문에 만들 지 못했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지 , 이것이 바로 하회탈의 열두 번째 탈에 턱이 없는 이유야. 아이 : 아하! 그렇구나 ! 남형 : 맞아. 그런데 이 전설은 많은 유래 전설들 중에서 하나야. 하회 탈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전 설들은 넘쳐나. 아이 : 우와! 하회탈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신기한 거 같아. 근데 왜 하회탈이 그렇게 중요한 문화재야? 남형 : 안 그래도 그걸 물어볼 줄 알고 내가 아주 특별한 손님을 불렀 어. 아이 :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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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배우 : 안녕? 나는 아주 먼 옛날에서 온 연기자란다. 나는 주로 하회 탈을 쓰고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곤 하 지. 아이 : 뭐라고요? 여기엔 어떻게 온 거죠? 아저씨는 이미... 죽은 사람 이 아닌가요? 배우 : 시간 여행을 온 거지. 아이 : 우와. 배우 : 그건 그렇고, 질문 하나만 하자 , 너는 주로 뭘 하면서 여가를 보내지? 아이 : 음,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뮤지컬도 보고, 텔레비전 도 보죠 ! 요새는 예능프로 보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 어떤 프 로그램은 이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을 담아 보여주기도 하거든 요. 배우 : 그렇구나, 하지만 옛날엔 말이지 , 그런 여가 거리가 전혀 없었 단다 . 텔레비전은 물론 , 영화나 뮤지컬도 없었지. 하회탈 놀이 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었단다. 아이 : 우와, 하회탈이 그렇게 옛날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정말 몰 랐어요. 배우 : 그렇지, 하회탈 공연이 겉으로 보기엔 가볍고 재밌기만 한 것 같아도 , 대부분 그 속에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단다 . 하회탈 공연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 그 시대의 문제를 드러낼 수도 있었던 거지. 아이 : 하회탈이 지루하다고만 했던 거 이젠 후회해요. 하회탈이 그렇 게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배우 : 하하, 괜찮아 , 이제라도 알았다는 게 더 중요한 거지. 아이 : 제 친구들은 과연 이런 하회탈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까요? 지 금 가서 내가 가르쳐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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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할아버지 : 역사 수업이라고? 아이 : 할아버지? 할아버지 : 이 할아비가 안동으로 가는 기차표를 샀단다. 하회탈로 유 명한 곳이지. 아이 : 정말요? 와 ! 신난다 ! 어서 , 가요 , 할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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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 and Ricahrd’s Heading to the museum #1 Kid: Grandpa, I want to go home and play Pokemon! I don’t want to go to the museum, it’s boring. Grandpa: Come on now, there's something I want to sho w yo u at the museum. Kid: Bo ring! (Inside the museum) Kid: Woah, look at all t his gold stuff! Sparkly! Grandpa: Come over here, (points to the masks) This is what I wanted to show you. Kid: What is it? This piece of wood? I can buy this in the souvenir store! Grandpa: Show some respect! Hahoet als have a lot of history. Kid: Bo ring. I co uld make this myself. #2 Richard: Boring? Did I hear bo ring? Kid: Huh? Grandpa? Richard: Now, listen up kid. There's something very special about Hahoet al. Isn't t hat right, Gia? Gia: T hat's right! Very special. Richard: We should teach you a lesson. Gia: T hat's right! A history lesson. Richard: Long, long time ago, the twelve gods gave

the

craftsman Huh Chongk ak (H uh Doryung) a special task. ***S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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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Gods: We t welve gods command you young craft sman, to build us 12 Hahoetal that will endo w us wit h strength. Huh Doryung: Ye-Yes your majesties! I, your humble servant H uh Chongkak will do as you o rder! Gods: T hat's what I like to hear. Now do as I say! Perform well and we shall shower you with riches beyond your wildest

imagination!

By

the

way,

if

any

of

your

H ahoetals are seen by any of yo ur fellow humans, I shall smite you with my mighty hammer! Huh Do ryung: Of course your majesty! It would be my ho nor to serve you! Huh Doryung: I shall make my first Hahoetal, out of wood! My second Hahoetal shall be made of this gourd! My t hird H ahoetal will be made of Paper. Gia: 10 hours later. Huh Doryung: And my twelfth H ahoetal will be made of- who a who's that hot girl over there? Girl: Hello. Huh Doryung: Oh my god! Yo u are

beautiful. Gorgeous.

Fabulous- O h my god. Did you just look at my mask? Girl: Yes? Huh Doryung: The gods are going to kill me. O h no! My paper mask is broken! T his is all your fault! Your hotness ruined my work! Huh Doryung gets a massive heart attack and dies Girl: How is this my 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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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PIN Kid: What happened to Huh Chongk ak? How did he die? Richard: He died from a heart attack, befo re t he gods got to him. Richard: Today, nine of the Hahoet als, traditio nal Korean masks, have been designated as cultural treasures of Korea. Kid: Wait, Nine? Didn't he build twelve Hahoetals? Richard: Three of the designs were forever. Anyways, the great

declared to be lost,

stories show that Huh

Chongkak wasn't able to complete making his 12th mask because of the girl who distracted him. This is t he reason why t he twelfth mask is missing its lower jaw. Kid: Wow! There are so many interesting stories and I think t he Hahoetals are more

intriguing than I imagined

t hem to be. But why were they so important? Richard: I knew you would ask that! That's why I bro ught a special guest. Kid: Who? #5 Performer: Hello. I am a performer from long back. I used to wear the Hahoetal and entert ain people by acting out different characters. Kid: What? How did you get here? Aren't you suppo sed to be...dead? Performer: Time travel. Kid: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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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er: Anyways, Where do you get your entert ainment? Kid: Well, I go to the movies, I watch musicals, and I also watch t he television! I love comedy shows these days t hey sho wcase a great form of satire. Performer: You see, back in the day, there were no variety of entertainment.

No

television,

no

movies,

and

no

musicals! H ahoetal were the only way people of even t he

lowest

class

got

entertainment.

Although

the

performances seemed to be light and fun, most times t hey had a hidden deeper meaning. We were able to mock society and

reveal

the problems amo ngst us

t hrough Hahoetals. Kid: I regret saying that Hahoetals are boring...I didn't realize t hey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our society. Performer: It's ok ay, kid. It matters that you know now. Kid: I wonder if my f riends know the importance of Hahoetal. I'm going to teach them a lesson! #6 Grandpa: A histo ry lesson. Kid: Grandpa? Grandpa: Come on, I bo ught tickets to Ando ng - the famous place for Hahoet al! Kid: Really? That sounds super exciting! Let'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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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죽음 Grade 12 최민서 Michelle Choi 프롤로그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에 가면 부소산이 있다. 그 언덕에 는 백제 멸망의 한을 담고 있는 바위가 있는데 , 바로 낙화암이다 . 풀 어쓰면 꽃들이 떨어진 바위이다 . 이 바위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백제 의 궁녀 3 천 명이 이곳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3천명이 떨어져 죽 는 이야기는 과장되었을 경우가 크지만 이 이야기는 더 큰 의미를 지 니고 있다. 이 전설은 백제의 멸망을 더 애절하게 느끼게 하고 의자왕 의 부패하고 타락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 나는 ‘의자 왕과 삼천궁녀의 죽음 ’에 3 천명의 궁녀를 ‘ 삼천 ’ 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명의 궁녀로 표현해 보았다 . 이 애절한 이야기를 전설 안 궁녀의 관점으로 나타내고 싶었다.

나의 이름은 ‘삼천 ’ 이다 . 내가 태어나고 자란 백제 , 이 궁궐은 나에게 하나뿐인 집이다 . 엄청나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활하 는 부소산성은 내가 18년간 매일 봐온 아주 편안한 곳이다. 나는 왕의 여자이다. 나는 궁 밖의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 만 나의 삶은 오직 궁궐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 . 때로는 부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지만 나는 백제의 자녀이 므로 그다지 부모님의 빈자리를 느껴보지 못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나 는 오직 나의 전하 , 의자왕만을 섬겨 왔기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 다. 내가 아는 궁녀들은 모두 궁궐의 지밀 , 침방 , 수방 , 세수간 ,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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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방 , 소주방 , 세답방에 소속되어 업무를 하는데 , 나는 지밀에서 일한 다 . 지밀은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며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대궐에서 왕 내외가 거처하는 구중궁궐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 침전을 말한다. 나는 의자왕과 그의 왕비의 신변을 보호하며 가장 가까이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 가장 중요한 일을 맡은 궁녀로서 나는 궁궐 안을 다니더라도 조심조심 다녀야 하고 말을 줄여야 한다. 성격이 소심하고 조용한 일들을 좋아하는 나는 궁녀로서의 나의 업무 가 너무 마음에 든다. 하늘이 유난히 흐리던 어느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왕과 왕 비가 머무는 처소로 향하고 있었다 . 얇은 청호에 그려진 희미한 그림 자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불안한 혼잣말을 계속 되뇌었다. “글쎄 김춘추가 정녕 당나라의 왜놈들과 손을 잡겠다는 말이오? 내 김유신을 단 한 번에 없애리라-” 그 단호한 목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허겁지겁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평화 롭기만 했던 백제가 전쟁을 한다니, 말문이 막혀왔다.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아는 체를 할 수 없는 나는 매일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냈다. 그렇게 지난 시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점 심이 지나갈 때 즈음, 내가 여느 때와 같이 내 처소를 정리하고 있을 때 , “전하 , 큰일이 났사옵니다 ! 어서 피하소서 !”라는 소리가 커져왔다 . 부리나케 달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지나간 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왕의 침실로 달려갔다 . 사람의 인기척을 찾을 수 없었 다. 나는 내 방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버선발로 방문을 열고 뛰 어 나갔다. 당나라 군인들의 빠른 발소리를 피해 뛰어간 곳은 낙화함. 평화 롭고 명예로운 나의 백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나의 정체성의 혼돈을 느끼며 가쁜 숨을 차분히 진정시켰다 . 그 순간 , 내 뒤에서 당 나라 군사 3 명이 나의 다리만한 칼을 앞세우며 다가왔다. “나의 전하는 지금 안전하신 것이냐 ?” 외치며 나는 발을 한 발 짝씩 뒤로 디뎠다. 점점 사라지는 흙으로 보아서는 낭떠러지 끝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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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 분명 했다. “ 대답하거라!” 마지막 소리를 내었다. 내 18년 부소산성에 백제의 궁녀로 살며 더러운 당나라 군인의 피 묻은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생의 끝이 한 발짝 한 발짝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당나라 군사들의 얼굴에 잔 인한 미소가 퍼졌다. 나는 결정했다. 벼랑의 끝을 버선발로 밀며 나는 차가운 가을바람을 맞이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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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애국자 Grade 12 최진이 Jinny Choi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이라면 모두 한 마음으로 독립을 원했겠 지만 그 방법과 방향이 다양했기에 저마다 어떤 운동론을 따라야 할지 고민했어야 했다. 이기적인 성철(형) 과 성실한 성호(아우) 는 서로 다른 독립 운동 방법을 추구한다. 성철은 ‘자치론’, 성호는 ‘무장 독립 전쟁 론 ’이 맞다고 주장하며 서로를 설득하려고 한다 . 하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훗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한다.

“진정한 애국자요?” “그래, 진정한 애국자.” 오늘도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은 성철이 성호를 불러 세워 진정 한 애국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다. “진정한 애국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아닙니 까?” 성호가 대답했다 . 그러자 성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너 하나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기나 할 것 같 으냐?” “그렇다면 형이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가는 무엇인데요?” “지금 현 상황에서는 일제의 힘이 너무 강해서 어떤 방법으로도 독립이 불가능하다 . 그러니 우선은 민족의 자치권을 얻는 것이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다.” “민족의 자치권? 어떻게요?” “주권을 잃은 것은 우리의 그릇된 민족성 때문이다 . 그러니 독 립을 위한 투쟁보다는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힘을 기르는 것이 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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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다 . 조급한 독립 투쟁보다 그릇된 민족성을 고치려는 도덕성 개조 가 중요하다. 일제가 만든 법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민족 운동을 벌이 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성호는 잠시 성철의 말을 생각해보다가 곧바로 형을 향해 눈살 을 찌푸렸다. “일제를 따르면서 민족 운동을 한다구요? 형, 3.1 운동 당시 우 리는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목격하고도 그들 을 따르자는 말씀입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그래서 무장을 하고 직접 싸우러 나가기라도 하겠다는 게야 ? 그러다 너까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않느냐!” “일제의 침략으로 날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민중들 , 그리 고 일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 하 나 잃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 형도 저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습니 다.” 성철과 성호는 서로를 설득하려고 애써보았지만 결국에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 성철은 지금 현 상황에서는 일제의 힘이 강해서 어 떤 방법으로도 독립이 불가능하니 우선은 민족의 자치권을 얻는 데 주 력해야 한다는 자치론을 , 성호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독립을 쟁취해 야 한다는 무장 독립 전쟁론을 따르기로 했다. 성호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에 들어가 일본을 상대로 여러 전투를 치렀다 . 1920 년 10월 , 성호가 속한 북로 군정서군과 대 한 독립군이라는 또 하나의 독립군 부대는 6일 동안 무려 1,200여 명 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성호는 독립군 부대 중에서도 가장 영리하고 강하기로 유명해지고 있었다 . 심지어는 비밀리에 의열 단에서 성호에게 연락이 오기 까지 했다 . 성호는 흔쾌히 의열단과 손 을 잡았다. 가끔 성호는 성철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성철이 친일파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부터는 성철에 적대심을 품었다. 한편 성철은 성호가 들은 대로 한일 합병에 적극 찬성하고 고위 관직자로 근무하여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 덕분 에 성철은 수차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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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걱정하고 있었다. 의열단의 활약은 대단했다. 성호와 의열단원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폭파하거나 침략 행위에 앞장선 일본인과 친일파들을 사 살하는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윽고 1923년 1월 12 일 밤 8시 10분 , 종로경찰서를 뒤흔든 폭 발음으로 경성이 흔들렸다 . 일제강점기 ,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이었던 경성의 ‘종로경찰서 ’에 누군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독립 운동가들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하기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던져진 폭탄은 일 제에게 탄압 당하던 조선인들의 민족혼을 크게 일깨웠다. 성철은 일제 군경들과 함께 범인을 찾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 성철은 왠지 모 르게 성호의 짓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923년 1 월 22 일 새벽, 범인은 성철과 일제 군경들에게 발각되 었다 . 범인은 다름 아닌 성호였다. 성호는 성철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고 , 성철은 성호의 눈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없었다 . 성철은 성호 의 상처투성이인 발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한 독립 만세!” 성호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일본 군인은 성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성호의 죽음을 확인한 일본 군경들은 유유히 본부로 돌아가려 뒤를 돌았다. 그 순간 일본 군경들의 등 뒤로 또 한 명의 외침이 들려 왔다. “대한 독립 만세!” 일본 군경들은 깜짝 놀라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 성철이었다 . 성철은 성호 옆에 가서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을 택했다 . 하지만 성철 의 얼굴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안도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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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017 APIS 제 7회 한국어 백일장 ‘용서 ’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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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수필 )]

그래도, 한 가지 Grade 12 김재민 Jenny Kim 2008 년 봄, 초등학교 3학년, 영어와 외국 문화에 대해 잘 모른 채 나는 홀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남아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을 뒤 로 하고 , 조금 더 넓은 곳에서의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얻고자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인천 공항으로 향하던 중 , 4월의 신선한 바 람이 불어왔다 . 마치 잘 다녀오라고 배웅 나온 우리 엄마마냥 포근하 고 따스한 기분을 느꼈다. 얼마나 걸렸을까 , 공항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은 내게 마지막인 듯한 말을 건네셨다 . 학업을 제외한 삶에 대한 ‘한 가지 ’를 배워오라 고 . 학업보다 값진,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는 무언가를 마음속에 담아 오라고 말씀하셨다 . ‘ 삶 ’이란 무거운 주제와는 거리가 너무 먼 만큼 어렸던 나는 들뜬 마음만을 가득 끌어 안은 채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4시간을 비행 하고 처음으로 본 것은 영어로 가득했던 간판들. 부모님 품과 같은 조 국을 떠나 타국에 왔다는 것을 그때서야 확실히 실감했던 것 같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학교 첫 날 . 난 모두가 나를 반갑게 반겨줄 줄 알았고 , 스스럼없이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그 것이 내가 느낄 행복이고 삶의 배움이라 크게 믿었기 때문에 하염없이 설레었다 .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달리 , 친구들의 반응은 한 겨울의 매서 운 바람처럼 싸늘했다. 당시 영어를 잘 못했던 나지만 , 그 문장 만큼 은 알아 들을 수 있었다. “She smells like Kimchi.” 내게서 김치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 설마하는 의아한 마음 반 그 리고 긴장한 마음 반으로 난 홀로 교실로 향하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날이 갈수록 나를 향한 인종차별이 심해질 것 이라는 것을. 지우개 가루를 잔뜩 모아 수업시간에 던지기도 했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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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책을 찢어놓는 날도 있었고, 내가 들어가자마자 밖에서 화장실 문을 잠가 놓는 날도 자자했다. 더 심한 날에는, 사물함에 넣어두었던 점심 도시락마저 변기통에 버리고선 통만 던지듯 돌려준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 선생님께도 말할 수 없었고 , 큰 상처를 안겨드릴 것 같아 매일 저녁 부모님께 걸려오는 영상통화 너머 로는 잘 지낸다고 활짝 웃어드렸다. 마음 놓고 기대어 펑펑 울 수 있 는 친구 한 명조차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다음 날 아침, 복도를 지나 가던 중, 백인 남학생 무리들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Hey, Asian smell.” 참다 참다 한 마디 하려던 찰나, 나는 그 친구들 뒤에 서 계셨던 교장 선생님이 보였다 . 교장 선생님께선 그 친구들을 용납하지 못할 듯이 쳐다보시고는, 나를 포함해 모두에게 교무실로 따라오라 하셨다. 몇 분간의 정적은 나를 상당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 하지만 , 선생님은 나를 향해 아무 질문도 하지 않으셨다 .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친구들을 혼내지도 않으셨다.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아 주셨다. 그제야 몇 달간 참았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왔다 . 얼마나 울 었을까 . 조금 진정이 되었을 무렵,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원 한다면 그 친구들을 재판소로 넘길 수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여지껏 당한 것을 생각해 보면 곧장 재판소로 보내고 싶었고, 모두가 보는 앞 에서 그들이 충분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나는 ‘괜찮다 ’고 대답했다. 그 친구들이 재판소로 넘어가면 평생 기록에 남 을 것이고, 일자리를 구할 때도 그 기록이 그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분명 그 친구들의 잘못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의 인 생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저, 철없던 어린 시절 의 실수고 이번을 계기로 잘못을 뉘우치면 되는 것이다. 훗날, 자녀들 에게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부모님들이 되었으면 했던 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교장 선생님은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고 , 내가 교무실에서 나가 있는 동안 , 따끔하게 꾸중을 들었는지 그 친구들은 내게 울면서 미안 하다고 사과했다. 물론 난 평생 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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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잘 안다 . 하지만 한편으론 홀가분하기도 하였다 . 그런 심한 일을 겪고도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 다 . 이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 ‘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등의 성경 말씀을 자주 들려 주셨다 .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욕할 때 , 나는 참된 사랑과 용서로 벌을 주고 싶었다 . 따뜻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더 무거운 죄책감을 쉽게 씻어 낼 수 없을 거란 것이 나의 벌 이다. 2014 년, 그렇게 7년간의 긴 유학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 왔을 때, “ 그래서 , 삶에 대해 배운 게 있니?” 라고 물어보셨던 아빠의 질문에, “ 조금의 성장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삶에 대해서는 잘 모 르겠어요 . 라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연이어 내게 말씀해 주셨다. “잘 배웠다, 제니 , 삶이 어렵고 ,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고 깨달았다는 것이 가장 큰 삶의 배움이다.” 그로부터 9 년이 지난 오늘날, 나는 웃으면서 그때의 일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와 비슷한 일들을 겪 게 되겠지만, 원석이 깎이고 깎여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나도 그런 사 람이 될 수 있게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피하지만은 않을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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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we all have painful memories within us, pain is one way to learn new things, by growing mentally and physically. This epiphany hit

me

when I

experienced an

unfo rgettable period of racism and bullying. At that time, I was in agony, but this memory has developed me into an even stronger person today. During 2008, I came to t he U nited States as a third grader with no knowledge of the English language. I played only wit h Korean friends; I had believing everything was completely fine, until these friends moved back to Korea. A few mo nths after their departure, I noticed that t hings started to go wrong. Ever since I was little, playing different sports made me many friends. The word “lo ner” never seemed to fit my character. Ho wever, o ne day, in the middle of 7t h grade, I coincidently heard someone say “Asian’s smell” while I was passing them in the hallway. I turned around to see who it was, and saw that it was a group of my clo se American friends. If I had not heard them say that, or if I were a little less attached to them, I would not have been as hurt with betrayal. But at that moment, tears rolled down my cheek s. As soon as school ended, I ran home crying. While I was running, all I co uld do was blame myself for being Asian. T he next day, everyone seemed to know about what had

happened. All

of my classmates

who

said, “Asian’s

smell,” apologized, but I did not know if they did so because of the rumor or because of their true sympathy. I believed that t hey learned they could not say words that consisted of racist references ever again, even as a joke. I imagined ho w they wo uld laugh at me when I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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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of earshot. T hey probably thought of me as a pathetic girl. Right after the incident, I was able to get back on t rack because I worked hard to make everything normal. I thought if I did everything better than my classmates, they would not be condescending even though they would probably still t alk behind me. I

kept pushing myself to achieve

my goals.

Consequently, my grades started to surmount theirs, and luckily, I made many other new friends, who would never turn on me. At that time, I struggled a lot and thought, “Why do I have to go through t his hard time and become a loner in this fo reign country, which is not even my hometown?� I hated all t hem, who looked down on me, but as I grew up a little, I could understand that it was one of the tough ways to learn and grow stronger. I co uld not blame anyo ne else, for I was not the only who was going through the obstacles in life. Do not let yourself do wn because of other people’s negativity. I can now smile even though this memory comes to my mind again. As mentioned above, there are a lot of people who have hardships and feel like they cannot get out of the dilemmas. Each one of us around the world goes through t he hard time in different ways. But, we always have to remember t hat we are all diamo nds, which eventually shine bright after being burned and broken. Think po sitively all the experiences that yo u went through and stay 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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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운문 ( 시 )]

붉은 인동꽃 Class of 2016 조하은 Crystal Cho 숨이 턱턱 막힐 때까지 참아왔었습니다 흉부 근처 어디께에서 자리잡은 쇳덩이를 미움으로 하얗게 하얗게 달구어 왔었습니다 용서는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잘 키워놓은 열기에 물을 붓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사과 받지 못하고 하는 용서는 쇳덩이를 차갑게 식히는 것처럼 허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의 추억과 당신이 쏟은 사랑과 그리고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 끈질기게 나를 붙잡았기에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작은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묵직한 덩어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무슨 연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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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마법을 부려 당신이 그토록 사랑스러워 보이고 당신의 헌신이 눈부시고 나와 당신이 보낸 시간이 눈물겹습니다 모성애의 꽃말을 가진 꽃은 무수히 많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담은 꽃은 오직 한 송이 있더군요 당신은 그렇게 귀한 나의 붉은 인동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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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d Honeysuckle

I held back until I was choking. And somewhere around my chest, I held a heavy stone, Heating it white as ever Thought forgiveness was mere self-justificatio n for lo sers. Thought of it as pouring cold water o n my. Forgiveness before apology, I thought, would only leave me in vain Yet, You and I, the memories, Your affection Then, My love for you Caught me by the hand I, now, Meet the eyes of the small child in front, Reach out my hand, and set my stone down That moment, for whatever reaso n, called Time to do some trick and let me be Dazzled by adoration, Blinded by your sacrifice, and Become heartrending by the time we spent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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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are many flowers for maternal affectio n. But, A single flower t hat holds the love of f ather, That is yo u, My Red red Honeysuck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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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 산문 (소설 )]

그러므로 저는 지구온난화 문제에 주목하여 자연친화적 기술 개발에 투자하여야 한다고 발의합니다 Grade 11 윤수빈 Joyce Yoon

1. 일주일 전 b는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2. 그저께 땅이 갈라졌다. 그다지 예상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나무를 벤 자리에 동식물이 자취를 감추고 마른 땅에 비도 내리지 않았으니 땅이 갈라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을 뉴스에서는 이상기후라고 불렀지만 과연 이상한 일인가. 지구를 마르게 한 범인은 누구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b는 보도를 걸었다 . 걸음마다 운동화 바닥에 찌는 아스팔트가 붙었다 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했다. b는 별난 사람이었다 . 22 세기가 다가오는 시대에 못생긴 나무 와 끈적거리는 꽃과 녹아가는 빙하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 흔치 않았 다. b는 2000년대를 살아본 적은 없었지만 ( 그는 2071 년 4월 14일생 이므로 ) 2006 년에도 2096년과 마찬가지로 환경주의자는 희한한 종족 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2006 년도에도 식물과 바다에는 입이 없었다 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환경주의자란 입이 없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종족이다. 느긋한 템포로 걷던 b는 보도블록 사이에 낀 풀 한 포기를 보 고 멈추어섰다 . 어딘가에서 바람에 실려 온 씨앗이 정확히 여기에 뿌 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씩씩하게 자라났다는 생각을 하면 모든 식물 은 기적적이다. 녹색을 바라보는 b의 눈매가 애정으로 수그러졌다. 그 는 가방에서 3분의 1정도의 물이 남아있는 물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 었다 .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싹에 물을 주고 나자 남은 물은 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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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5분의 1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b는 뿌듯했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 태양은 참 빨갛다 . 어째서 그림책 의 해님은 노란색으로 그려지는지 , 어째서 뱀의 혀는 붉게 그려지는 지. b는 시계를 곁눈질하고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돌아가자고 생각하고 b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 해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문득 철새가 날아올랐 다. 할아버지는 인류가 점점 새를 닮아간다고 했었다. 마스크를 낀 모 습이 꼭 부리를 가진 새 같다고. 철새의 검은 실루엣이 태양을 배경으 로 V 자를 그리는 것을 감상하며 b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새들처럼 자신도 어딘가로 떠나게 될까.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죄는 꺾인 날개와도 같은 것이다. b는 자 신이 영영 어디로도 날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해가 져도 어둡지는 않다. 그러나 거리가 아무리 환해도 하늘까 지 밝아지지는 않는 법이다 . 거리가 환할수록 보이지 않는 것이 별이 다. B는 먹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책에서 본 푸르름을 먹빛에 겹쳐 그려보며…… 땅을 딛으려고 하던 발이 훅 떨어졌다. 갈라진 땅이었다. 지구 속으로 먹혀 들어가며 b는 멋없는 비명을 질렀다. 기구 한 장면이었다 . 추락하며 환경주의자가 떠올린 것은 지구가 아닌 사람의 얼굴이었다 . 사람과 지구를 모두 기만했다는 것을 깨달은 환경주의자가 종말했다. 이튿날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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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운문 (시 )]

한 마디의 거리 Grade 9 Irene Kim 김애린 그때 용기를 내어 먼저 너의 손을 잡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쯤 손을 마주 잡으며 학교 문을 열고 함께 들어가는 사이가 되었겠지 그때 내 말을 잠시 멈추고 너에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쯤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겠지 그때 내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너에게 먼저 웃어주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쯤 행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겠지 그때 그깟 자존심 세우지 않고 너에게 그 한 마디만 건넸더라면 그 한마디만 해주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후회 하고 있지 않았겠지 내가 이 모든 걸 했더라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더라면 그 한 마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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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운문 (시 )]

상봉(相逢) Grade 10 김수아 Joshua Kim 해가 떠도 기다린다 달이 저물어도 기다린다 일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일 년처럼 비 온 뒤 먹구름 뿌리치고 달려 나온 해 혼자 울고 있던 내 눈물 닦아준 그의 하얀 손수건 긴 밤을 붉혀주는 달 나에게 먼저 다가와 건넨 악수 그로 인해 끝난 전쟁 걷어지는 철조망 사라지는 과녁 일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일 년처럼 기다렸던 얼싸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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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nion

I will wait ‘till the sun rises I will also wait ‘till the moon falls Wait a year like a day A day like a year Like t he sun that escapes from the grasp of the dark clouds After a rain The white handkerchief that wipes my tears And it’s like the red moon that lights Up the long dark night Came first and gave me a handshake War ended Barbed wire disappearing(dissolving) Disappearing target A year is like a day A day is like a year Waited for Emb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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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운문 (시 )]

나만 몰랐던 이야기 Grade 12 신유진 Claire Shin 새벽같이 일어나 소리 없이 자리를 비우고 매일 시장에 같은 곳에 조금은 축축하고 좁은 곳에 도라지와 콩나물을 파셨다 고운 옷 한 번도 걸치지 못하였던 고기 가득한 국 한 번 못 드시던 할머니 항상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지칠 줄 모르시던 할머니가 오늘따라 더욱 작아 보이셨다 걱정 때문에 학교 종이 울리자마자 시끌벅적한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저기 시장 구석에 할머니를 보았다 도라지는 그대로 있었다 콩나물도 그대로 있었다 “할머니, 사람들이 밉지 않아?” “왜 미울까?” 나를 보며 웃으셨다 할머니 얼굴에 새겨진 주름도 같이 웃었다 “다 괘안타” 사람들이 눈길 하나도 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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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말투로 할머니를 대해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왜 괜찮은지 할머니는 오래 전 부터 알고 계셨다 가슴 속에 원망을 안고 살면 가시가 돋고 결국에는 그 가시가 자신을 찌르게 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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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산문 (소설 )]

용서를 강요하는 시대 Grade 8 유민서 Katlynn Ryu 우리에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갈등이 일어난다 . 사소하게는 친구와의 다툼에서 교통사고나 환경재난에 이르기까지 많은 상황이 우 리를 기다린다. 이런 일들이 닥쳤을 경우 종종 우리는 성의 없는 용서 를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학생들이 처음 전학 온 학생의 얼굴에 고의적으로 공을 맞춘다. 그것을 우연히 보게 된 선생님이 달려오시고 공을 얻어 맞은 학생은 얼굴을 감싼 채 공을 맞춘 친구들을 바라본다 .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 “ 친구한테 ‘ 미안해’라고 해야지.” 공을 일부러 맞춘 남자 아이들은 성의 없이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안’ 하고 만다. 선생 님은 다시 공을 맞은 학생에게 “친구가 ‘미안해’라고 했으니 너도 ‘괜 찮아 ’라고 해야지” 하신다. 공을 맞은 친구는 다른 아이들이 고의로 공을 맞춘 것을 알고 있고, 또 아직 얼굴도 쓰라리고 해서 ‘괜찮다’라 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무기력하게 ‘괜찮아 ’라 고 말한다. 그 전학생이 용서를 한 이유는 그 상황에서 괜찮다고 하지 않 으면 그 학생은 선생님이나 다른 친구들에게 속 좁고, 옹졸하고 이해 심이 없는 학생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진정한 용서는 친구들 의 진심어린 사과와 따뜻한 말이다 . 또한 피해 학생이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 상대의 입장에서 나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해야지만 진정한 용서인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용서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사람 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이 아니고 옹졸하고 이해심 없는 사람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의 기준에 맞 는 착한 사람의 틀에 맞추어 용서를 강요받는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지 않으나 그냥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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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너는 착하니까 , 너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 니까 , 너는 어른이니까, 어리니까, 남자니까 등등 수많은 이유들로 용 서하라고 , 화해하라고 강요받는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에 도 마찬가지이다 . 그들은 죄를 저질렀고 ,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 음에도 결국은 차기 대통령들은 그들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 결국 죄를 지은 대통령들을 사면했다 . 이런 일들이 진정한 사과와 용서인 가 ? 이것이 모든 국민들의 뜻과 마음이었을까 ? 혹시 정의롭고 포용력 이 있는 관대한 대통령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들 때문에 차기대통령들은 그들을 사면한 것이 아니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 은 진정한 사과와 참회의 눈물이다. 하지만 일본은 몇 푼의 보상금을 내걸고 단지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 사과조차도 없었다 . 우리 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래 전 일이고 보상금을 받기로 했으니 , 우리나라와 일본의 외교를 생각해서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할 머니들에게 요구해야만 하는가?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사람 들도 있다. 진정한 용서는 피해자들만이 할 수 있다 . 우리는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성의 없이 용서를 구하고, 우리는 영혼 없 는 용서를 베풀며 살아왔다 . 내가 진정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베푸는 것은 옳은 일일까? 이런 일을 해결하기는 쉽 지 않다 . 하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와 참회의 눈물만이 피해자들의 용 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빨리 용서하라 하고 강요하기보다는 조용히 기다려야한다 . 그 피해자들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생기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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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산문 (수필 )]

용서 Class of 2016 김윤진 Christine Choe 생각해보면, 난 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갓난아기처럼,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 다 . 하지만, 왜인지 난 항상 감정 표현에 서툴렀다 . 지금에 와서 소중 한 가족들을 원망하는 것도 참 웃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 내 머리가 조금 더 커서일까, 자꾸 예전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때는 중학교 , 내가 8 학년이 되고나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 난 그때까지 공부에 대한 개념이 딱히 자리 잡혀 있지 않았고 , 여느 중학생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노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 . 부모님께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노는 것에 딱히 불만 이 없으셨고 ,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다름없이 너무나 화목했다 . 서로를 누구보다 챙겨주며 사랑해주었다 . 하지만 , 성적이 나오는 날이 면 항상 우울했다. 아빠한테 무슨 말을 들을 지 두렵기도 했었다 . 평 소에는 너무 다정한 아빠였지만, 성적에 관해서는 민감했다. 9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아빠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 지금 의 성적이 곧 대학교에 들어갈 성적이니 바짝 공부해서 목표를 달성하 라고 말이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9학년 때 정신을 바짝 차 려서 나름 괜찮은 성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 10 학년 때가 문제였다 . 내 마음이 쉴 곳이 없었다 .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김없이 성적표를 받으러 학교로 가던 날, 난 두 려움에 떨었고, 예상한 듯이 욕을 먹었다. 태어나서 아빠가 그렇게 격 하게 말을 뱉은 적은 ,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 하지만 , 성적표를 받은 날, 난 마음속으로 경악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아빠가 맞 나 싶었다. 성적표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쓴 소리를 들었다 . 이 성적으로 대학은 갈 수 있겠냐면서, 한숨을 쉬는 아빠를 보고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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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우울함이 몰려 들었다. 내가 알던 나의 아빠는 이런 분이 아니었다 는 걸 내가 아는데, 왜 이렇게 성적에 민감하신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 다. 집에 돌아온 후, 아빠는 회사로 가시고 난 집에 틀어박혀 혼자 소 파를 끌어안고 서러움에 울었다. 시렸다 . ‘공부는 공부 ’고 , ‘가정사는 가정사다 ’라고 얘기하는 아빠가 원망스러웠고 , 당시 할머니가 편찮으 신 건 내 공부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아빠가 미웠다. 한창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한 10 학년 때, 난 아마 그때부터 아 빠를 서서히 멀리 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엔 사이좋은 부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친구들이나 어른들한테 그런 말 을 들으면 증오심만 커졌었다. 커질 대로 커져 그 생각이 나를 잡아먹 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힌 아빠의 다정하신 모 습은 이제 더 이상 온데 간데 없었고, 날이 선 새로운 모습만이 각을 잡고 있었다. 아빠와의 다툼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성적을 지적 하지 않으시면, 어느 날은 나의 태도에 대해 지적 하기 시작했다. 방이 그게 뭐냐 게을러 터졌다 등등 처음엔 그 지적이 어쩌다 한 번, 어쩌다 두 번이었지만 , 날로 날로 늘어갔다 . 그리고 그 뒤로부터 , 난 아빠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 아빠와의 대화는 급격히 줄 어들었고 , 난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살며시 닫고 있었다. 이해는 갔다. 할머니가 편찮으셨고, 아빠는 본인 어머니를 책임져야한 다는 막연한 부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건 그저 내가 아 빠를 이해해보려고 한 최선의 이유 혹은 수단이었고 , 그 이유들로 내 상처를 가리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절벽 아 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11 학년이 된 나는 급기야 저기 멀찌감치 떨어지고 말았다 . 할 머니가 돌아가셨다 . 편찮으셔서 자주 뵙지도 못했지만 , 그녀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날 생각하니 비참해졌다 . 난 심리적으로 너무나 고 통 받아야만 했다 .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 니 너무나 막막했다 . 아빠는 버팀목이 돼주지 못했고 , 난 길을 잃고 매일 밤을 홀로 눈물 속에 지내야만 했다. 그간의 감정들을 억지로 참 으려 하다 보니 내 마음은 곪고 말았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11학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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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뒤, 12학년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성인이 된 나에게 아빠는 독립적이어야 한다며 사회를 경험하 라는 의미에서 시간을 많이 쥐어 주었다 . 성인이 된 나에게 자유란 , 너무나도 달콤한 것이었다.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내가 성인이라는 생색을 낼 수 있었고 그 시간들만큼은 나에게 꿈만 같았다 . 하지만 , 아무리 바깥을 경험하고, 돌아다니며 하하 호호 깔깔대며 웃어대도 내 마음 속 공허함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곁에 있으면 행 복했지만 그러면서도 한 없이 외로웠다. 그리고 동시에 가족이 너무도 그리웠다 . 아빠의 잔소리가 없어서 살만 했지만 , 한편으론 그의 따뜻 하면서도 거친 말투가 듣고 싶어졌다. 한편으로는 왜인지 아빠에게 먼 저 다가가는 것 또한 내키지 않았다 . 살면서 한 번도 아빠한테 먼저 내 고민은 이거다 저거다 하며, 다른 아이들처럼 먼저 가서 얘기한 적 이 없었기에 아빠를 속으로 원망하고 용서하기를 수없이 반복했었다. 이런 고민들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기에 난 학교 보건 선생님을 찾아갔다 . 마음씨가 따뜻한 보건 선생님께서 날 반겨주셨고, 선생님은 나의 멘토이시기에 , 난 내 모든 고민을 털어놓았다 . 선생님과 대화를 나눈 나는 그제야 아빠의 심리나 심정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 선 생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셨다. “크리스틴, 나 너희 아버님이랑 너랑 PTC(Parent Teacher Conference)에서 처음 봤잖아. 근데, 선생님이 딱 봤을 때 아버님 이 너 정말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더라 . 크리스틴, 아버님도 아빠 가 처음이잖아. 어디 누가 딸은 이렇게 키우는 거예요 하고 알려줬 겠어 . 선생님이 너 보고 아빠를 이해하라고는 하지 않을게 . 너 나 이 때는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해. 그러니 시간을 충분히 두고, 네가 상처 받았던 그 시간들 보다 더 길게 두고, 아빠랑 대화로 차근차 근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나가 보렴.”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마음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맞다. 아 빠도 아빠가 처음이지. 내가 그걸 잊고 있었구나. 하지만, 내 마음 속 응어리는 너무나 딱딱해져버렸다. 한 번에 없어지지 않았다. 그 리고 난 이건 나와 아빠와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쉽게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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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용서하기엔, 난 아직 너무나 어리고 부족했다. 그래서 마음으로 혼자 생각했다 . ‘천천히 하자 . 천천히 아빠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내가 완전히 아빠를 용서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아빠한테 모 든 걸 털어놓자.’ 라고 말이다. 이제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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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운문 (시 )]

싸움의 결말 Grade 10 강재원 Jenny Kang 나를 때리는 발길질 나를 부수는 손길질 나를 누르는 그의 모습 아픔과 고통이 자라나 분노와 복수심이 되고 미움으로 가득찼던 순간 마침내 몸을 뒤집어 내가 그의 위에 올라탔을 때 나의 주먹은 멈췄다 그의 고통은 나의 행복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된 후 흐르는 눈물 내 아래에서 눈물 흘리는 그를 잔뜩 겁먹은 그를 조용히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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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sult of the Fight

He was kicking me, Hitting me, And pressing me. My pain grew, Turning to anger and revengef ul thoughts, And I was filled with hatred. When I finally flipped my body And put him under me, My fist stopped moving. Tears were running do wn from my eyes As I realized that His pain cannot be my happiness. I quietly hugged him, Who shut down his eyes tight, And who seemed to be full of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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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운문 (시 )]

삐에로 Grade 11 정예준 John Cheng

준비된 무대 위에서 푸념을 뱉으니 관객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힘들게 했던 나를 화나게 했던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모두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끄덕이고 위로하고 호의를 보인다 그 위로와 환호로 내가 이제 그 일을 이해한다 하니 한 순간에 환호는 날카로운 창으로 바뀌어 나를 찌른다 무대에서 다리를 질질 끌며 내려가니 야유는 더 심해지고 내가 한낱 삐에로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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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운문 (시 )]

눈이 녹고 다시 Class of 2016 정승현 Jenna Chung 반년이라는 시간의 거리를 반나절의 여행으로 나는 걸었다 천천히 멀어지려 했지만 네 풍경에서 나는 찰나의 순간에 사라졌을까 우리에게는 아직 수많은 봄꽃들이 수많은 소나기가 수많은 낙엽들이 수많은 눈송이들과 남아있다고 날 보는 너는 수없이 되뇌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그런 것들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네가 나를 기대하며 밤을 지새우듯이 이미 녹아버린 눈송이들 따윈 필요 없다고 이 세상의 남은 계절들은 전부 우리의 것들이라고 너를 보며 끝없이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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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운문 (시 )]

And The Snow Melts It would have taken the earth six mo nths. It took me only 14 hours. Tell me, How long did it take for me To disappear from your pict ure? You try so hard to be ok ay When you tell me that There are flowers we will watch spring Snowflakes we will watch fall You bite your lips As you say that we have the eternity to ourselves But none of that matters if I can’t turn back the hands of time But maybe one day I could be like you, Spending co untless nights Drowning in thoughts of me Maybe one day I could let go of the past that I have been holding onto so tightly with my locked fingers, crinkled in my pa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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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ell you that altho ugh the flowers may wither and the sno w may melt away It wouldn’t matter as lo ng as you are there To watch them disappear with me I wish I could tell you that I wish I could believe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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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산문 (소설 )]

나에 대한 용서 Grade 7 최린 Rin Choi 이젠 끝이야, 나는 할 거야… 나는 총을 들고 내 머리를 향해 갖다 댄다 . 나는 지금 자살할 거다. - 3, 2, 1… 나는 '빵 ' 하는 총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모든 게 없어진다. 몇 분, 몇 시간, 몇 개월이 지난 지도 모른 채 눈을 겨우 뜬다. 하얀 벽지에 복잡한 선들이 보였다. 여기는 병원 . 의사가 돌아오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의사가 곧 눈치를 챘는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내 얼굴을 스치며 흘러내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 몸에 꽂혀 있는 주사바늘을 뺐다. 그러자 간호사가 들 어와서 앉으라고 말하였다 . 그러더니 내 머리에 감겼던 붕대를 풀어 주었다. “기적이야.” 간호사가 말했다. “뭐가요?” “총알이 살만 뚫고 갔어 . 뼈에는 하나도 손상이 없었어. 하나님 이 너에게 기회를 주신거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 무슨 하나님이야 . 있지도 않은 하나님 , 그래 , 참 기 적이다 , 기적 .” 이렇게 생각했지만 기회라, 정말 나에겐 기회가 있었던 건가? “삑- 삑삑 - 삑 - 삑삑 !” 하 .. 역시 꿈이었구나 . 나는 알람을 끄고 일어나서 죄수복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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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똑바로 입었다 . 나는 죄수였다 . 어떻게 죄수가 되었는지는 돌아보 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도 외롭고 원망스러운, 다른 날과 똑같은 일요 일이었다 . 죄수들은 감옥에 있는 교회에 갔다. 우린 모두 같은 색 플 라스틱 의자에 앉아 설교를 들었다. “아니, 이런 이상한 데는 왜 오는 거야, 짜증나게.. 참나.” 한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마지막 기도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 우린 모두 눈을 감았다 . 눈을 감지 않고 있다 교도관들에게 혼나기는 싫었기 때문에 나도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밀테니 , 너는 네 마음을 나에게 주렴 . 사랑은 존 재하지만 , 사랑을 찾고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행 복의 답이란다.” 나는 눈을 떴다. “누구의 목소리지 ?” 내가 물어봤다 . 다른 죄수들은 아무 일 없 다는 얼굴로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 피아노 반주가 끝나자 우리는 모 두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화장실 앞에 주저앉았다. “용서 … 사랑… ”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회 … 용서… 사랑… 기적...” 나는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다 . 다시 밤이 오자 나는 침대에 누워 결심을 했다. “그래, 한 번 믿어 보는 거야, 한 번 해 보자.” 그 결심은 바로 하나님을 믿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매주 교회에 갔다 . 기도도 열심히 했다 . 얼어있던 내 마음이 점점 녹고 있었다 . 하 지만 무언가가 내 마음에 깊이 박혀 있어 빠져나가지 않고 있었다. 3개월 뒤, 일요일 , 나는 똑같이 교회에 갔다 . 설교도 듣고 기도 도 했다. “하나님, 제 마음이 이제 열렸지만 , 무언가가 , 어떤 무언가가 제 마음의 문을 닫으려고 해요 , 하나님 , 제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세요.” 나는 이제는 드디어 사랑, 기적이 올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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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행복, 그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세월이 더 흘러 나는 행복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있는 , 무언가가 나의 행복을 막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교회에 갔다.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저에게 기회라는 게 있다는 걸 알려 주셔서요 . 하지만 저는 아직도 무언가가 부족해요 . 이런 죄인이 행복 을 정말 느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저는 못되고 이기적인데, 하나님은 저를 왜 용서해 주셨어요? 제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나요? 그리고 나는 교회 의자에서 기도하다 잠이 들었다. “용서란, 사랑이 아니냐,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도 너 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란다 . 하지만 네가 죄 지은 것은 이유가 있지 않았냐, 사랑이 없어서 자살을 시도하고, 행복이 없어서 사람 들을 다치게 하지 않았니 . 기회라는 게 없는 줄 알고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느냐 . 나는 너를 용서해줬다 . 그런데 제일 도움이 되는 약은 바로 네가 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 용서를 구하는 너의 위대함을 가지고 이제는 용서를 받는 용감한 사람이 되어라 . 이제 더 이상 이 고통을 놔 줘야 하지 않겠냐. 용서, 용기, 사랑, 기회는 삶을 주고, 또 삶을 받는 것이다.” “이젠 끝이야, 나는 할 거야.” 나는 총구를 내 머리에 갖다 댄다. 나는 지금 자살할 거다. - 3, 2, 1…… 나는 그만 총을 떨어뜨렸다. 그래, 이젠 용서 해야지. “나야, 미안해.” 그러자 눈물이 산처럼 쌓여 떨어진다. “괜 … 찮 … 아.” 눈물이 뚝, 고통도 뚝, 원망도 뚝 마음에 있었던 무언가도 없어졌다. “그래. 용서, 용서...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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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ive me It’s the end. There’s no t urning back. I’m going to do it. I hold the gun and bring it towards my head. I was going to Commit Suicide. “3,2,1… ” I hear t he guns roar “BANG!” and simultaneously, I fall. Everything disappears. Not knowing ho w many minutes, ho urs, months have passed, I peek open my eyes. I am not surprised to see white walls, confusing and tremendously long lines in front of my eyes. This was the hospital. As I heard the curtains move, I quickly clo se my eyes, pretending that I have not yet woken up. But, being the tactf ul doctor he was, he notices that I was now awake, he comes closer to me and whispers in my ear, “It’s alright, It’s going to be alright. And with those words he left, leaving me time to ponder, and with those words, I feel a hot drop of water, roll down my face. I decided to leave, I didn’t want to be here anymore, it was weird getting attention, being in the middle of attention. I take o ut all the lines from my line and stand up but, I regret it right away. My head turns and a fierce headache comes to me. Just at that moment, the nurse comes in and tells me to sit down. I giver her a look and sit down not really knowing what she was going to do to me. She reaches out to wards me and then I suddenly predict she is going to harm me, so I close my eyes. I peek just a little bit, just a little and see that she is unravelling the big bandage on my head, stained with blood. “It’s a miracle.” She suddenly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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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You. The bullet o nly went through the skin, it didn’t harm any of yo ur bo nes, us do cto rs and nurses, we have, never, ever seen a situation like this before. It’s a chance, from god, anot her chance, another opportunity.” “U h-huh yeah sure. What is she t alking about? God? Haha after an attempt on suicide? T he heck? No! There is not even such thing as god, yeah sure say anything you want, chance chance chance blah blah blah.” I think in my head. But, actually chance, another chance… Was there really another chance for me? “Beep-Beep. Beep-Beep. Beep-Beep!!!!!” Yes… of course. Another funny little useless dream in my useless life. I turn off the alarm and wear my Prison Uniform. Yes, I know I’m a sinner, I’m a horrible person. I don’t really want to talk about the details. Another great perfect Sunday in jail all alone, trashy food, cold weat her. We prisoners all headed towards the giant building with this cross. It was mandatory fo r prisoners to go, there was no choice.We all sat on these tiny plastic chairs, each o ne of us holding this book t hingy called “Holy Bible” “Why are we wasting o ur time to do this trashy stuff? Uh so frustrating.” I say in my head. A very lo w 1 hour passes, and it was o ur last time praying. We all closed o ur eyes. Wait, no we all had to clo se our eyes or else we wo uld have gotten a punishment. Trying to avoid any trouble I close my eyes too, praying t hat nobody would notice t hat I am actually not praying. “If I reach my arms out to you, will you reach yo ur heart to me? Love exists, but can only be seen by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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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kers. Those who commit sin, and seek fo r forgiveness, seeking forgiveness in yourselves is the answer to happiness”I opened my eyes, “Who said t hat?!?!” I exclaimed. The others prisoners

stared

at

me

with

innocent

faces.

The

piano

instrumental finished and we were all told to go back to o ur rooms. I sat beside the bathroom, pondering. “Forgiveness...Love… ” “Chance...Opportunity… ..Love… ..Miracle..” T hrougho ut t he whole day, I only could t hink about tho se words. As night

fell, I jumped

on my bed and I

determined myself one thing, “Yes, I can do it, I’ll try believing, I’ll just try it.” And that promise to myself was to try believing. Trying to believe in God. After that, I determined myself to go

and

attend

Church every week, not forgetting to do my daily prayers. But, something deep inside my heart, that was there, that didn’t move. Something that was deep down, in the core of my heart. 3 mo nths later, I attended church like just any ot her Sunday. I listened to his sermon and prayed. “Dear God, I feel t hat my heart is now more open, more empathetic, but then there’s this something. Something inside that tries to close it.” I k now understood the pleasure of underst anding love, and having 2nd chances and miracles, but I felt that happiness and forgiveness needed more time. A few seemingly okay months passed

and

I also

understood what happiness was. T hing something, t hough, that weird thing, it was still down there, it had not moven, it was also trying to block my happiness. I could feel it. That night I went to the church again even though it was not a Sunday. “Dear, God I thank yo u very much. For giving me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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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d chance and making me a miracle. But something is still missing God, but I do not understand what it is. Will a prisoner like me really understand what true happiness is? I’m really selfish and an idiot, why did you fo rgive me God? Do I deserve the forgiveness?” And I fell asleep wit h those last words, leaning against the plastic chair, alone, in the darkness. “Forgiveness, isn’t it love? If I had not lo ved you, I would have not forgiven you, but I, have sacrificed my o wn son, Jesus to forgive yo ur sins. But all the sins you have made, there were reasons. You had no love, so you tried to commit suicide, yo u had no happiness so you hurt people, you didn’t believe in second chances, so you tried to leave didn’t you? I forgave you, but the best antidote, is to forgive yourself. Asking for forgiveness comes from wisdom, but forgiving, takes courage. Don’t yo u think it is time for you to let go? Forgiveness, Courage, Lo ve, Miracle, belief, is all is takes. Forgive yourself, be the forgiver.” It’s the end. There’s no t urning back. I’m going to do it.. I hold the gun and bring it towards my head. I was going to Commit Suicide. “3,2,.......” I dropped the gun. Forgiveness. I had to do t hat. “Dear me. Forgive me” and as those words come out of my mouth, a volcano of tears erupts. “I-It’s O-Okay...I forgive m-me..” Tears, drop, drop drop. Sadness drops, and the thing

in

my

forgiven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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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drops.

“Yeah

Forgiving,

forgiving,


[은상 – 산문 (수필 )]

나도 완벽하지 않기에 Grade 12 최창용 Marty Choi 미국에서의 유학 시절 나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 대략 스무 명 가량의 한국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다운 생활을 했었는데, 모두들 사이가 좋았고 이런저런 다툼 없이 오직 한국에 돌아 갈 수 있는 방학 만을 기다리던 무료한 삶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제 혹은 지난 주와 다를 것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였지 만 , 그날 밤은 내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던 것을 아직도 잊을 수 없 다. 보통은 미국에서 쓸 사비를 부모님께 현금으로 받고는 했는데, 그 날 밤 감쪽같이 그 돈이 전부 사라진 것이었다. 백만 원이 넘는 적은 돈이 아닌지라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없는 큰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기숙사를 관리하던 선생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 고, 선생님께서는 찾을 수 있다며 나를 다독여 주셨지만, 당시 내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 나는 내 돈을 훔쳐간 누군가를 원망하고 , 내 것을 간수 못한 나 스스로에게조차도 원망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지금에서야 말을 꺼내지만, 내가 워낙 어렸던지라, 돈을 훔쳐간 그 누 군가를 훨씬 더 원망했던 것 같다. 몹시도 불안해하던 내 모습을 본 선생님께서는 기숙사에 있는 방을 모두 뒤져보자는 제안을 하셨다. 기숙사에 있는 사람 모두의 방 을 뒤지는 것에 대해 동의를 했지만 왠지 나는 그렇게 해도 못 찾을 것 같았기에 더욱 더 마음이 괴로웠다 . 예상대로 선생님들과 나는 수 차례 방을 뒤졌고 결국 돈은 나오지 않았다. 그 때였다 . 찾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을 무렵 , 한 친구 의 노트북에서 돈뭉치가 수상하게 포개져 있던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돈이 정확하게 나의 것이었던 것을 확신했고 그 친구를 향한 분노 가 끓어올랐다. 그 순간 그 친구는 밖에 나가 있었고 나는 그가 돌아 오기만을 벼르고 있을 때였다 . 선생님께서 내게 다가와 그에게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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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주고 , 그가 한 짓을 용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내게 권했다 . 순간 나는 당황했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왜 그 아이를 용서해줘야 하지 , 기숙사측에서는 이런 일 이 일어나면 뭔가 불리해지기 때문인가...”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고,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내게 꺼낸 의 도조차 납득이 가지 않았다 . 나는 내가 한 생각대로 선생님께 말씀드 리고 싶었지만 , 참고 선생님께서 권하신 대로 하겠다고 했다 . 그 후 , 나는 방으로 돌아가 차분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문득 그 친구가 내 돈에 손을 댄 이유가 궁금했다. 그 친구는 나와 자주 게임을 했을 정 도로 사이가 가까웠고 그 친구가 쓰는 씀씀이나 그 친구가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 담으로 얘기하지만 나는 끝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사건 이 후로 며칠이 지났고, 나는 그 친구를 보기가 점점 부담이 됐다. 그 친 구는 사과는 커녕 오히려 더 당당하게 지내기 시작했고, 점차 나는 그 친구의 행동을 늘 눈엣가시로 여겼다. 하루는 그 친구가 누가 돈을 가져갔는지 모르는 기숙사 애들을 모아 놓고 아무 죄 없는 다른 친구를 지목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 반 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 친구를 향한 내 보이지 않는 분노는 계속 커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어느 금요일 밤이었다. 기숙사에 있는 형, 친구들과 농 구를 하러 가기 전, 돈을 훔쳐간 그 친구와 나는 서로 크게 부딪혔는 데 , 꽤 사소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 친구를 향한 감정이 너무나 많이 쌓여 있던 찰나 , 결국 큰 말싸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놀랍게도 그 친구는 뻔뻔하게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은 채 내게 소리를 지르자 나 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친구가 저질렀던 일들을 모두의 눈 앞에서 얘 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쯤 되서야 선생님들이 우리를 말리러 오셨지만 이미 그때는 모두가 그 친구에게 등을 돌린 후였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그 친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게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 나는 모두에게 이 일을 얘기하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줄 알았지만 막상 내 앞에서 누군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니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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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볍다거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에 사과할 기회 가 많았을 때 하지 않고 이제 와서 사과를 하는 그 친구가 괘씸해 사 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후로 그 친구는 얼마 남지 않은 학기 동안 혼자 지내게 됐고, 나중에 방학이 된 후 , 그 친구의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때 내가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 과연 옳은 일 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 비싼 돈을 들여 온 유학을 포기하게 만들고 , 도둑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은 장본인이 된 느낌이었다 . 물론 그 친구가 마땅한 대가를 치렀고 내가 그 친구의 부모님 입장까지 생각하는 것은 너무 심한 오지랖이라 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전히 나는 알 수 없는 부담감을 느 꼈다. 나도 무엇인가 잘못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으로 시작된 그 여 운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고 내가 그때 그 친구를 용서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가끔 머릿속에서 생각하고는 한다. 문득 기숙사 선생님께서 용 서를 권했던 것이 생각났고 그때가 되서야 나는 기숙사 선생님의 의도 가 납득이 갔다 . 오히려 지금 다시 그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도리어 용서를 안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 나는 이 친구가 내 돈을 훔쳤다는 것에만 집중했지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 주고 용서 하는 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값진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 그 친구가 훔치려 했던 돈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가치를 지닌 채 말이다. 앞으로 누군가가 내게 잘못을 해서 사과를 한다면 나는 넉넉한 마음을 갖고 받아 줄 것이다 . 무조건 상대로부터 사과를 하라고 강요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남을 용서함으로써 과거에 겪었던 안 좋은 일 , 혹은 나도 역시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않은 모습으로 누군가를 정 죄했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결국은 내 스스로 더욱 떳떳해 질 수 있는 당당한 길을 걸어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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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 산문 (소설 )]

미워할 수 없는 당신 Grade 12 정영덕 Evan Chung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음주 운전자에게 치여 그렇게 가셨다. 가 해자는 그대로 도망갔다고 한다 .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신고를 빨리 했더라면 목숨은 건지셨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로 나는 방안에서 폐인이나 다름없을 삶을 보냈다 . 그냥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 배고프면 먹고 , 졸 리면 자고 ,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현실을 부정 하면서 그리고는 이내 다시 받아들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일주일, 아니 솔직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 오래, 어머니를 죽게 한 가해자를 잡았다 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한동안 공허했던 나의 마음은 허탈함으로 이어졌다 . 이럴 거면 뭐 하러 도망간 것인지 … 세상 어디에 살든지 내 눈 앞에 나타나지나 말지 .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 처벌을 받든 말든 나의 소중한 어머니는 이제 다시 돌아오시지 않는다. 그러니까 경찰이 재판에 유가족 신분으로 나에게 출석을 하란 다. 지금은 담담하다지만 막상 그를 보면 동물적인 분노를 주체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출석을 하라니 나가기는 해야겠 지 . 그렇게 유가족의 입장이 되어 재판에 참석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머니. 나의 어머니. 재판이 막 시작될 무렵, 문득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나에게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자신한테 무슨 짓을 하든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게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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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방법이란다. 상대가 싫다고 너도 똑같은 짓을 하면 그 사람이 랑 네가 뭐가 다르겠니?” 똑같이 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미워하지 말라고? 나는 그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했다. 그를 원망할 수밖에 없 었다 . 하지만 그럴수록 내 안의 분노와 슬픔만 더욱 커지고 전혀 마음 의 응어리들이 누그러지지는 않는다 . 나는 더 고통스워질 뿐이다 . 그 는 그렇게 감옥으로 들어가겠지만 나는 , 어머니를 잃고 홀로 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 행복했던 나의 삶이 한 순간에 망가졌다 . 나는 과연 예전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원 망하면 할수록 , 나의 마음은 끝없이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 내 안의 평화를 되찾으려면 모든 것을 내려놔야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 다 . 힘들겠지만,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된다고 . 그렇게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 분노와 복수하고 싶은 마음 등은 내려놓지 못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마지막 한 가닥의 미련이 자꾸 나를 붙잡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재판은 시작되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들을 것도 없이 실형을 받을 것 같았다. 제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사람을 치고 도망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변호인 의 변호를 듣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의 어머니를 죽게 한 그 역시도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순 탄치 못했던 것 같다. 아들 하나가 오랜 방황 끝에 겨우 군대에 들어 갔으나 주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총기 자살을 하였고 내 어머니를 음주운전으로 치고 내뺀 그 전날에는 그의 아내로부터 이혼서류를 받 았다고 한다 . 그의 경제적 무능력과 심리적 불안 때문이었다 . 사랑하 는 아들을 잃고 나중에는 아내에게서까지 버림받은 그의 마음은 얼마 나 고통스러웠을까. 변호사의 변호가 끝나자 나는 그 사람, 한 가정의 아버지와 남 편이었던 사람을 더 이상 미워 할 수 없었다. 아니, 미워하기 싫었다. 물론 술을 마시고 운전한 것은 잘못한 짓이었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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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이 사 람은 가족 전부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순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 그 슬픔을 나의 슬픔과 어찌 비교하리. 그의 축 처진 얼굴에 비춰진 눈물 은 더 이상 살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의 전부였다. 나보다 더한 절규를 하고 있는 당신, 누군가의 아버지와 남편인 당신 저는 당신을 ‘용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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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상 – 운문 (시 )]

용서(容恕) Grade 11 후지모토 미유 Miyu Fujimoto 용서란 “괜찮아” 라고 하는 것 용서란 받아들이는 것 용서란 상대를 생각하는 것 간단하게 보이지만 쉽지 않은 용서 이 한마디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에서 보이는 것이 있는데 용서에서 이어지는 마음이 있는데 말하는 것만으로도 달라진다 마음은 나중에 따라온다 용서란 행복의 첫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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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す

許すって 大丈夫って言うこと 許すって 受 け 入れること 許すって 相手のことを 考えること 簡単 そうに見えるけど決して簡単 じゃない許 す この 一言 がなかなか出 てこない でも 許すことから見えてくるものってあると思う 許すことから 繋がる心 ってあると思う 言ってみるだけでも何かが変 わる 気持 ちはあとから 付 いてくる 許すって 幸 せへの第一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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