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N
Inspiring Asia Empowering People Leading Change
MARCH 2018
N
No.56
9 772288 328008 ISSN 2288-3282
03
No.56
History of AJA, The AsiaN and Magazine N 2 0 0 4 .11.
아시아기자협회(AJA) 창립
2005.10.
AJA-JAK 포럼
2006.10.
2006 아시아기자협회 포럼
2007.03.
AJA-JAK, ‘IFJ 금강산 특별총회’
2 0 07.10.
아시아기자협회 후원의 밤 및 AJA Award
2008.10.
아시아기자협회 Eco 포럼
2 0 0 9.11.
아시아기자협회 포럼 및 AJA Award
2010.02.
아시아기자협회 룸비니 포럼
2010.07.
아시아기자협회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인가
2 011.0 6.
아시아기자협회 기획재정부 지정기부금단체 선정
2 0 11. 0 7.
(주)아자미디어앤컬처 설립
2 0 1 1 .1 1 .
11월 11일 ‘아시아엔’ 한글·영문판 창간
2 0 1 2 .1 1 .
‘아시아엔’ 아랍어판 창간
2013.02.
수아드 알 사바 시집 ‘쿠웨이트 여자’ 번역 출간
2013.06.
6월 25일 ‘매거진 N’ 창간
2013.09.
아시아기자협회 ‘아시아 문화언론인포럼’
2014.03.
이상기 창립회장, 쿠웨이트 왕실 주관 황금보트상 수상
Asia’s Window to the World, the World’s Window on Asia 2 0 1 5 .1 1 .
‘아시아엔’ 창간 4주년 기념의 밤
2016.04.
‘2016 아시아기자협회 총회’ 및 ‘AJA Award 2016’
2016.05.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인도네시아 대통령 AJA Award 수상
2016.09.
아시아기자협회 ‘한몽미래포럼’
2 0 16 .10.
‘아시아엔’ 네이버스탠드 제휴
2 017.0 4 .
‘2017 아시아기자협회 총회’
2017.0 8.
제인 구달 박사-최재천 교수 초청, ‘AJA 에코 토크’
2017.0 8.
‘2017 AJA Global Leaders Forum Indonesia’
50개국 아시아기자협회 전문필진과 함께 만들어 가는 ‘매거진 N’
‘매거진 N’은 (사)아시아기자협회(AJA) 와 온라인 ‘아시아엔’(The AsiaN) 네트워 크를 기반으로 아시아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이슈를 보다 쉽게 풀이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젊은 층 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문화 전반을 다룸 으로써 Asia Next Generation과의 가교 를 만들어 나갑니다.
AJA in Brief 회원 52개국 357명 사무국 서울 지부 몽골, 네팔, 방글라데시, 터키, 중동 등 이사장
창립회장
김학준
이상기
한국 인천대학교 이사장
한국 한국기자협회 전 회장, 한겨레신문 전 기자
회장
명예회장
Ashraf Aboul-Yazid
Ivan Lim
이집트 The AsiaN 아랍어판 편집장
싱가포르 The Straits Times 전 기자
수석부회장
부회장
Eddy Suprapto
Chuluuunbaatar Dolgor
인도네시아 RCTI 전 보도국장
몽골 UBS 설립자
부회장
부회장
Norila Mohd Daud
Bishnu Nisthuri
말레이시아 malaysiaworldnews 편집장
네팔 네팔기자연맹(FNJ) 전 회장
부회장
부회장
Pooneh Nedai
강석재
이란 Shokran 발행인
한국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차장, 코리아헤럴드 전 기자
Asia Journalist Association (AJA) is… 2004년 11월 공정보도, 언론자유 수호, 저널리즘 발전 등을 목표 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등 동아시아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 등 아세안(ASEAN) 기자들이 중심이 되 어 발족했습니다. 이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기자들이 참여해 현재 52개국, 357명의 회원이 “한 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피와 땀을 아끼지 않는다”는 모토 아래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기자협회는 종교· 인종·민족·국가·이념을 초월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 환경보전 등 인류보편 가치 실현을 공통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The AsiaN (www.theasian.asia) is…
<아시아엔 영문판 메인>
<아시아엔 아랍판 메인>
2011년 11월11일 아시아기자협회가 창간한 인터넷 매체로 아 시아기자협회 소속 베테랑 언론인, 전문가들이 정확한 뉴스 와 깊이 있는 논평을 영어, 한글, 아랍어 등 3개 언어로 제 공합니다. ‘The AsiaN’의 N은 ‘미래비전(Next)’, ‘균형잡힌 뉴 스(News)’, ‘소통 한마당(Network)’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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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FF 대표이사·발행인 편집장 고문 이사 경영기획실장 취재·편집 디자인
이상기 이주형 구명수 김규진 차재준 정현 서의미 Alessandra Bonanomi 김보배
Correspondents Alin Ferrer (Philippines) Ashraf Dali (Egypt) Bishnu Nisthuri (Nepal) Chuluunbaatar Dolgor (Mongolia) Eddy Suprapto (Indonesia) Ghina Halik (Lebanon) Gunjeet Sra (India) Ivan Lim (Singapore) Neelima Mathur (India) Norila Daud (Malaysia) Nasir Aijaz (Pakistan) Pooneh Nedai (Iran) Pramod Mathur (India) Shafiqul Bashar (Bangladesh)
제작·인쇄 홈페이지 제보 창간 등록 등록번호 발행 주소
㈜타라티피에스 www.theasian.asia 02-712-4111 / news@theasian.asia 2013.06.25 2013.05.02 종로 라00407 ㈜아자미디어앤컬처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35 화수회관 207호 (우 03068)
‘매거진 N’은 한국간행물위원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매거진 N>의 알레산드라 보나노미 기자입니다. 2018년 2월호를 알차게 읽으셨고, 또 이번 3월호 를 맞이할 준비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1908년 이래로 인류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날은 전세계 여성들이 지구적인 축제를 여는 날 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여성들은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소리 높이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매거 진 N>은 여승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불교에서 여성은 남성만큼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 니다.
아울러 이번 3월호 ‘Special Report’는 그리스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쿠르드족을 다룹니다. <매거진 N>은 쿠르드 족이 어떤 민족이고, 또 이들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조망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봐오셨겠지만 <매거진 N>은 개편 이후 예술 분야의 콘텐츠를 강화했습니다. 이번 달 ‘Art Obsession’ 섹션은 한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사진작가 최랄라의 전시회를 다룹니다. 이외에도 그래피티 작가를 다룬 ‘Topics’와 레 바논 출신 프랑스 작가 빌랄 바살의 ‘Interview’ 등을 전합니다. 이를 통해 <매거진 N> 제작진은 다양한 예술 분야를 보다 쉽게 독자님들께 전하고자 합니다.
<매거진 N>을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늘 감사 드립니다. <매거진 N>에서 다뤘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그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 저희 제작진의 기쁨이기도 하니까요.
알레산드라 보나노미 기자
Letter From N
Dear readers, I hope you liked our February issue and that you are now ready to enjoy the March issue of Magazine N. This month, on March 8th, the world celebrates an anniversary of female rights that has been observed since the early 1900’s. The International Women’s Day is a collective day of global celebration and a call for gender parity. In our present-day fight for equality, many women press on to claim their inalienable rights. On that note, Magazine N brings you inside the Buddhist religion, observing and describing the stories of Buddhist nuns. Mostly unknown, Buddhism according to the female perspective deserves just as much attention to that which has been told by monks. Furthermore, our March Special Report introduces an untouched account involving a community of Kurdish people living in Greece. Reading those words, you will discover customs and traditions of that microcosm. And as you may have already noticed, Magazine N continues to make room for art. This month, Art Obsession describes Rala Choi's solo-exhibition in D Project Space, Seoul. But the artistry does not stop there. Returning in Topics and Interview, a deeper porbing of art is aimed at giving you a larger overview of Asia’s art sector. Thank you for your support and for making the time to read the compilation. Please feel free to suggest any topics you would like to know more about so that we may also work with you in understanding an infinitely large and dynamic Asia.
Staff Reporter of Magazine N
Alessandra Bonanomi
ON THE COV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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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6
Inspiring Asia Empowering People Leading Change
MARCH 2018
No.56
9 772288 328008 ISSN 2288-3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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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 특히 아시아에선 크고 작은 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엔> <매거진 N>의 이신 석 분쟁지역 순회특파원은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만나오 며 아시아의 조각난 파편을 맞춰왔습니다. <매거진 N> 56호 ‘Special Report’는 최근 쿠르드족 난민수용소를 다녀온 이신 석 특파원의 르포와 그 뒷이야기를 전합니다.
Even now, our world is rife with conflict; particularly in Asia, where big and little skirmishes continue to erupt across the region. In this 56th issue of Magazine N, Lee Sin-seok, special war-zone correspondent for TheAsiaN and Magazine N, shares dizzying fragments of his trips to some of the world’s “lowest corners”— this time, to the camps of Kurdish refugees who seek liberation.
CONTENTS 4 Magazine N is...
8 Letter From N
10 Contents
14 Asia Round-Up
50
60
36 Special Report
이신석 분쟁지역 순회특파원, 쿠르드 난민 수용소를 가다 22 ASEAN
50
Three Hotel Associations Signed an Agreement Allowing Muslim Employees to Wear Scarves
Topics
26
“Think Outside the Box, Collapse the Box, and Take a Fucking Sharp Knife to it”: How Artists Describe the World
Southern Asia
54
All is “Not Well” with Pakistan’s Education Sector
Topics
30
Buddhism is a Gender Equal Religion. Or Maybe Not.
Middle East
60
40 Years of Fake Peace and Illusion Wars
Interview
Bilal Bassal
68
78
82
68 Art Obsession
Rala Choi: Rala Salon 74 Style & Tastes
Lauryn Hill & Outkast 78 Look Like Looking
A-COLD-WALL*
90 Books
80
The Woman Warrior
Where To Go
주말극장
94 Opinion
스시 키노이
‘분노조절장애’ 시대 살고 있 는 현대인, 화를 다스리는 방 법은?
86
96
82 Map the Asian Food
Personality in Crevices and Corners
Yoo Jung-ok
Opinion
문제 푸는 사람에서 문제 내 는 사람으로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 거래 규제가 세계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2017년 말 2만 달러에 육박했던 비트코인 가격은 2018년 2월 5일 6,000 달 러 밑으로 추락했다. 규제 확대에 동참한 여러 국가 중에서도 중국은 가장 강력한 규제안을 내놓으며 가상화폐 가치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월 5일 중국 중앙은행이 발행하 는 경제신문 ‘금융시보’를 인용해 “중국은 금융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가상화 폐 거래소와 가상화폐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가상화폐공개(ICO) 관 련 국내외 모든 플랫폼을 차단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금융시보’는 이에 대 해 “2017년 9월 중국 내 거래소를 폐쇄해 가상화폐를 근절하려 했지만 실패
Bitcoin—one of the fastest growing digital currencies—has
해 가상화폐 관련 모든 웹사이트의 접속을 차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금융
plummeted to a value of $6,000 USD from its original $20,000
시보는 “ICO와 가상화폐 거래를 금지했음에도 중국에서 완전히 뿌리 뽑을
USD figure in December 2017. By nature of the unstable
수 없었고, 폐쇄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이전해 가상화폐를 거래하고
monetary system, several Asian nations have threatened to pull
있다”고 지적했다.
out from the system; in particular, China’s strong restrictions
그동안 중국의 강력한 규제가 이뤄졌음에도 많은 중국인들이 가상화폐를 거
against cryptocurrency activity significantly affected the decline
래해 왔다. 개인거래자는 가상사설망(VPN)을 이용해 국외 거래소에 우회접
in Bitcoin value.
속 해왔으며, 거래 플랫폼들은 일본과 싱가포르로 옮겨 가기도 했다. 그러나
On February 5th, Hong Kong’s South China Morning Post
이번 조치는 전보다 더 강력했다. 발표 직후 중국의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
(SCMP) cited a report by Financial News, affiliated to the
와 ‘웨이보’의 가상화폐 관련 광고들이 자취를 감췄다. 개인투자자들도 발표
People’s Bank of China (PBOC) which read: “To prevent financial
에 앞서 인민은행이 가상화폐 거래를 위한 은행서비스를 전면 금지함에 따
risks, China will step up measures to remove any onshore or
라 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offshore platforms related to virtual currency trading or ICOs”.
그럼에도 중국은 가상화폐의 기반이 된 블록체인 기술의 개발은 장려하고
Financial News added to the announcement that China had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관영 ‘인민망’은 “가상화폐 시장은 폐쇄했지만
since September 2017 “shut down domestic cryptocurrency
‘블록체인 왕국’ 건설 계획은 계속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중국은
transactions, but recent attempts to stamp out digital currencies
2016년 12월 제13차 5개년 국가정보화개혁 주요 과제에 블록체인을 포함시
by shutting down domestic exchanges had failed to completely
켜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다.
eradicate trading.” Such restrictions did not withdraw China of Initial Coin Offerings (ICOs) and virtual currency as many people swiftly turned to overseas platforms to continue participating. Likewise, national control on cryptocurrency did not change the status quo with the majority of Chinese users bending their way through restrictions. By way of Virtual Private Networks (VPN), individuals were able to access bypass connection to foreign cryptocurrency grounds such as those platforms currently active in Japan and Singapore. But China’s most recent policy to further remove domestic and international systems takes on a more serious tone as the nation’s biggest portal sites such as Baidu and Weibo took measures to hide any advertisements related to virtual currency. Before the February 5th announcement, private cryptocurrency investors had already felt the change with the PBOC’s complete ban on any and all virtual currency. Despite such developments, there have also been news of China encouraging block chain technology which is also based on a virtual currency system. The People’s Daily reported that “China’s cryptocurrency market may have closed, but it is driving towards establishing a block chain kingdom” and in actuality, measures to support cryptographic technology was included in China’s 13th Five-year Plan set to place on December 2016.
14
2017년 일본을 찾은 외국인은 2,869만명, 사상 최고치다. 그런데 일본은 여 전히 배가 고프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 했다고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더욱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기세다. 이를 위해 일본이 꺼내든 카드는 ‘밤 문화 경제’다. 작년 한해 2,869만명의 외국인이 쓴 돈은 4조4천161억 엔. 2016년 일본 전국 의 백화점 매출총액이 5조9천억 엔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외국인 관광객이 일본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다. 일본 정부는 2020 도쿄 올림 픽까지 외국인 관광객을 4,000만명으로 늘리며 이들의 소비 지출액도 8조 엔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은 이를 위해 외국인들이 밤까지 즐기
Last year, a record-breaking 28.69 million foreigners visited Japan.
며 소비하도록 유도할 방안을 궁리하고 있다.
But the nation was not quite satisfied. Just like the saying, “paddle
일본 당국이 ‘나이트 타임 이코노미’라는 용어까지 만들며 적극적으로 나섰
hard when the water comes in,” it seems the Japanese are taking
지만 넘어야 할 장애물이 몇 있다. 늦은 시간까지 공연이나 전시가 열리는
a more vicious marketing approach to keep the numbers flowing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일본은 밤에 즐길 만한 문화시설이 부족한 편이다. 대
in, and this, targeting their Nighttime Economy.
중교통도 24시간 운행하지 않아 외국인 관광객이 늦은 시간까지 다니기 어
Throughout the year of 2017, Japan’s 28.69 million foreign visitors
렵다. 때문에 도쿄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 중 일부는 주어진 시간 내에 여러
are estimated to have spent a total of 4.4 trillion yen (approx. 41.2
음식과 술을 맛보려고 역 주변 이자카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가벼운 만찬
billion USD). Seeing as how Japan’s 2016 total department store
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sales came at 5.9 trillion yen (55.1 billion USD), foreigner spending
물론 이러한 점을 일본 정부도 잘 알고 있다. 일본관광청은 작년 10월 관련
takes up a sizeable amount of that figure. Nevertheless, the
기구를 설치해 문화행사 개최 장소 확충, 심야 시간 대중교통 부족 해소, 클
Japanese government is determined to increase the number of
럽과 라이브 하우스 심야영업 규제 완화 등을 논의해 왔으며, 관련 개정안들
foreign visitors to 40 million and to increase spending by another
도 곧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8 trillion yen (75 billion USD), targeting nighttime economy to an unprecedented level of spending and activity. Going so far as to coining the official term Nighttime Economy for their financial campaign, the government is ready for big change, but several obstacles lie in the way of such dramatic measures. In contrast with many European/Western nations with a vibrant nightlife culture of performances and galleries, Japan lags behind in nighttime facilities that will sustain a nighttime economy, not to mention the fact that without a 24-hour public transportation system, it will not be easy for foreigners to take advantage of latenight events. Transportation is also a reason why visitors usually opt for Tokyo’s Izakayas (informal Japanese pubs) near subway stations to enjoy Japanese food and culture. Of course, the government is aware of this aspect as well and since last October, Japan Tourism Agency began its practical operations to expand city nightlife through deregulation of nighttime business hours, longer public transport running times, and mass opening of facilities for cultural festivities and events.
15
콜롬비아의 파블로 에스코바(1949∼1993)는 그가 태어난 도시 메데인에서 마약조직 메데인 카르텔을 이끌며 ‘마약왕’으로 군림했다. 에스코바는 1993 년 특수부대에 사살됐지만, 콜롬비아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가 남긴 상처를 치유해야 했다. 그런데 뜬금 없이 싱가포르의 한 식당이 에스코바의 이름을 따오며 양국의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AFP통신은 2월 6일 “싱가포르에서 파블로 에스코바란 이름의 식당이 문을 열자 콜롬비아가 이에 강력히 항의했다”고 보도했다. 싱가포르 주재 콜롬비 아 대사관은 싱가포르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내 “최근 싱가포르에서 개업한 식당이 사상 최악의 범죄자를 기린다”며 유감을 표했다. 콜롬비아 대사관은
Pablo Escobar (1949-1993), born in Medellin, Colombia, is
서한에서 “콜롬비아는 에스코바가 야기한 마약중독과 전쟁으로 고통 받아
notorious for being a narcoterrorist who ran his Medellin cartel
왔다. 중죄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더는 인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supplying major quantities of drugs all over the nation. Known
콜롬비아 측은 또한 최근 넷플릭스의 TV시리즈로 방영되고 있는 ‘나르코스’
as the wealthiest “drug kingpin” in the world, Escobar was killed
를 언급하며 “식당주가 유행을 반영해 그런 이름을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by Colombian special forces in 1993, at which point the country
지금의 콜롬비아는 ‘나르코스’의 배경이 됐던 나라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began its long and hard road away from deep-seated drug
‘나르코스’는 콜롬비아의 대통령까지 노렸던 마약왕 에스코바의 일대기를 상
abuse. Colombia had recently come out from its decades-long
세하게 다뤘지만, 그의 오명 때문에 논란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nationwide war with drug trafficking that claimed thousands of
논란의 중심에 선 식당 주인은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측하진 못한 듯
lives, the scars still tender from the past—when out of the blue, a
하다. 식당의 입구엔 에스코바의 얼굴상이 비치돼 있지만 그 밑엔 ‘STOP
new restaurant in Singapore was named after Escobar resulting
DRUGS’라는 문구가 적힌 카드가 붙어있다. 식당 주인 스탄 스리 가네쉬는
in heavy criticism by Colombians and global onlookers.
논란에 대해 “장난으로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
On February 6, AFP reported that “the Colombian embassy
랐다.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위협성 메시지까지 받은 적도 있다”고 밝혔다.
lodged a complaint with Singapore’s Ministry of Foreign Affairs (MFA) saying it had ‘serious concern’ over the restaurant’s tribute to the ‘worst criminal in the history of Colombia’”. The three-page official letter related Colombia’s disappointment at the opening of a restaurant named as such, pointing out the history of Escobar’s destructive activity and the consequences the country has had to deal with. The letter continued by also touching on the recent hit Netflix series Narcos, “We understand that a restaurant could be named after a drug lord like Escobar for its supposed ‘trendiness’, but the Colombia represented in Narcos is at no degree genuine to the nation of Colombia.” Upon its screening, Narcos has been criticized by some for its portrayal of Escobar as if to glamorize his crimes. The restaurant in Singapore has since apologized for the name, claiming to have used Escobar because it had the word “bar” in it. Owner Stan Sri Ganesh admitted to an image of Escobar at the entrance, but that he had also placed a “Stop Drugs” sign right below it. After receiving multiple death threats by online commentators, Ganesh added, “It was meant as a pun…we never expected the abuse”.
16
2017년 8월 지구를 놀라게 한 로힝야 엑소더스. 수십만 난민을 받아들인 방 글라데시와 미얀마가 송환협정을 맺으며 사태가 일단락되나 했지만, 집단학 살 당했다고 주장하는 로힝야와 이를 부인하는 미얀마가 상반된 증언을 하 고 있다. 로힝야 사태가 발발했을 당시부터 미얀마 군부가 로힝야족을 집단학살 했다 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미얀마는 이를 극구 부인했다. 최근만 해도 그렇다. 미얀마 정부는 2월 초 AP통신이 보도한 로힝야 집단무덤 5곳을 부인 하며 “주 관리, 경찰, 의사, 마을주민 등 17명의 자체조사단이 주변을 조사했 지만 무덤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AP통신은 방글라데시 난민촌
It was thought that the Rohingya crisis had come to an end
의 로힝야 난민의 증언을 확보해 “구 다르 핀 마을에서 민간인 학살과 암매
with Bangladesh and Myanmar coming to an agreement on
장이 있었으며, 이는 집단학살의 증거”라고 보도한 바 있다.
repatriation of refugees back to Rakhine State. But now, new
증언자 중 하나인 누르 카디르는 “친구들과 칭롱(세팍타크로와 유사한 스포
developments and investigations are leading to another round
츠)을 하려던 순간 총격이 시작됐다. 15명 중 나와 친구 단 둘만이 살아남았
of heightened conflict with the Rohingya accusing Myanmar
다”고 밝혔다. 그는 “며칠 후 2개의 집단무덤에 파묻혀 있는 친구들을 발견했
of mass genocide and the Myanmar government in fierce
다. 이들의 얼굴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돼 있었고, 옷을 보고
opposition.
나서야 친구임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AP통신은 그를 포함한 생존자들의
Ever since the onset of the Rohingya crisis, there had been
증언을 종합해 이러한 집단무덤이 5곳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accusations against Myanmar forces for killing numerous people
그러나 미얀마 조사단은 전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조사단은 “로힝야족 반
within the minority community; each time, the government
군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에 500여 명의 로힝야 주민이 합세해 정부
absolutely denied all claims. But when the Associated Press
군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테러범이 죽었고 이들의 시체는 매장처리
(AP) revealed early February details of at least 5 mass graves
됐다”고 주장했다.
of Rohingya Muslims at Gu Dar Pyin, northern Rakhine, the government, it seemed would have nothing more to say. That is, until government officials again responded by denying the existence of such graves saying, “We have sent over 17 selfinvestigating teams including police authorities, doctors, and village residents to Gu Dar Pyin; the preliminary result of the examination has proven that AP’s report is wrong.” One eyewitness from Gu Dar Pyin, Noor Kadir, now a Rohingya refugee, said, “My friends and I were playing chinlone (a national sport similar to sepaktakraw) when the firing began. I and one other friend were the only two to survive out of all 15 of us.” He continued, “A few days later, I found six of my friends buried in two separate mass graves. Their faces were hardly recognizable but I could tell it was them by the color of their shorts.” In such interviews with survivors like Kadir, and with cellphone footage
AP
taken of the massacres, AP garnered evidence connecting the lost pieces to the mystery of systematic mass killings of the Rohingya. Despite the evidence, Myanmar’s investigative teams continue to uphold its viewpoint: “500 Rohingya joined the forces with the insurgent 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 to attack the national military. Along the way some of those terrorists were killed and then buried,” they said.
17
이슬람 성지 메카에선 여성을 향한 성추행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 성 신도들은 피해사실을 밝히길 꺼린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슬람 성직자들이 여성에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으며 남성 가해자들도 이를 악용하기 때 문이다. 그런 가운데 한 여성이 자신의 피해사례를 용감히 밝혔으며, 이는 마 침내 무슬림 여성들의 #미투(METOO)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2월 6일 영국 더타임스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성지순례 동안 여성 신 도들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이 공공연히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타임 스는 “메카 순례에 참가했던 여성 신도가 성추행 당했던 사례를 SNS에서 공 유하면서 유사한 일을 겪었던 여성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It seems that even the holy city of Mecca is not exempt from the
파키스탄 출신의 사비카 칸. 그녀는 페이스북을 통해 메카에서 겪었던 끔찍
worldwide blow of the #METOO campaign with Muslim women
한 경험을 털어놨다. 그녀는 “이슬람 최고 성지인 메카 카바신전을 6바퀴 도
reporting on being harassed during their pilgrimage. In the past,
는 의식을 치르는데 다수의 남성 신도들이 내 신체를 만졌다. 처음에는 단순
many women were hesitant about reporting such experiences
한 실수라 생각하고 무시했으나, 내 엉덩이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성지에
because of the knowledge that religious officials were partial to
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이 더욱 슬프다”고 밝혔다.
male perpetrators. Recently, one woman’s courage to reveal
칸의 SNS 포스트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이는 ‘미투’ 해시
her traumatic experience began yet another wave of similar
태그와 함께 다른 여성 신도들의 폭로를 이끌었다. 또다른 파키스탄 출신의
accusations.
여성도 “카바신전 근처에서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도 비슷한 일을 여러 번
The Times, in its February 6th report, said that female sexual
겪었다. 나의 경우 9살 때 최초로 추행을 당했지만 당시 어떤 상황인지 정확
abuse frequently occurred on the holy grounds of Mecca.
히 인지하지도 못했다. 지금은 카바 부근처럼 복잡한 지역을 피해 다니며 순
Recently, a woman posted to her SNS page that she was
례객들이 짧은 시간내에 순례를 마치려 한다. 빈번한 성추행과 그로 인한 불
inappropriately touched while circling the most sacred site,
편함은 이 곳을 찾는 모든 여성이 감수해야 하는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the Kaaba, in what is called the ‘tawaf’ ritual. The report added that several women followed in her suit, sharing their stories of harassment and assault whilst practicing their faith. Sabica Khan, from Pakistan, first wrote about the incident on Facebook: “I was walking around the Kaaba for tawaf when a number of men inappropriately touched my body. I assumed they hadn’t meant to do that on purpose, but soon enough, they were touching my rear. I am extremely saddened by the fact that it happened in Mecca.” The emotion in her post was felt across the online community, still straddling with the #METOO hashtag movement that began in the United States. Female devotees who had also been in Khan’s position voiced their agony in a collective of proclamations. Another woman from Pakistan said, “My family and I faced similar situations near the Kaaba. I was 9 when I was first abused but I didn’t realize what exactly had happened. Now, I can tell many people are trying to find the least crowded times
AP
to perform tawaf. That’s the inconvenience women have to face if they want to be safe during their Hajj.”
18
지난 몇 달간 <매거진 N> 지면을 통해 이슬람 국가들에선 여권 신장의 바람 이 불고 있다고 밝혔다. 변화의 바람을 타고 떠오른 신세대 무슬림 여성들이 IT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분석이 최근 나왔다. 2월 8일 파이낸셜타임즈는 “과거에는 관습과 기술의 제약으로 무슬림 여성 근로자들이 일할 수 있는 분야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투 자가 증가했고, 사회적 규범이 변화했으며, 일자리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여 성근로자들이 대폭 증가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최근 이슬람권 국가의 정보통신 분야(IT)에선 히잡을 두르고 일하는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덧 붙였다.
For the past months, Asia Roundup dealt with the incredible
이를 뒷받침하듯 브루나이, 쿠웨이트 등 이슬람권 5개국에선 과학기술 관련
expansion of women’s rights across Muslim nations. Recent
학과의 여학생 수가 남학생을 앞질렀다. 또한 다른 18개의 이슬람 국가에서
discoveries further impart that along with the changes, a new
도 과학기술 관련 학과의 여학생 비율이 40%에 이르고 있다. 과학기술 전공
generation of Muslim women are active in diverse fields such as
여학생 비율이 미국 30%, 영국은 36%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
the IT sector, calling forth a new decade of gender equality.
은 수치다. IT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관련 분야의 일자리가 늘어났고, 그 자리
On February 8th, a Financial Times report stated that while
에 무슬림 여성들이 자연스레 들어가는 선순환 구조도 형성됐다. 실제로 이
previous societal conditions hindered women from working in a
슬람권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과 현지 기업들도 여성근로자를 IT 등 기
variety of fields, there has since been a huge rise in the number
술 분야에서 과감히 채용하고 있다.
of female workers. The report continued, “And while investment
물론 새로운 세대가 IT 업계에서만 종사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제약으로 여
in education, changing social norms and economic need have
성의 사회진출 자체가 불가능했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지금의 세대는 자유
all played a part, the real driving force has been the rise of
롭게 자신의 분야를 선택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10년
technology as an enabler of work. One reason for this is the rise
전만 해도 이슬람권 국가의 경우 여성근로자 수는 1억 명에 그쳤으나, 지금
of the female tech entrepreneur.” Many Muslim countries were
은 1억5천5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임금 규모도 커져 이슬람권 여성근로자
now seeing that “rather than the stereotypical young man in
의 전체 임금이 1조 달러(약 1천7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a hoodie [associated] with the entrepreneurs of Silicon Valley, in the Muslim world one was more likely to encounter a young woman in a headscarf.” Of the five countries in the world where more women are enrolled in science, technology, and engineering subjects than men, Brunei and Kuwait are Muslim-majority nations. 18 other Muslim countries have shown that women in relevant educational fields come at 40%. Considering similar data from the US and UK show women make up 30% and 36% of students in science and technology fields (respectively), 40% is a large percentage to gauge. As the IT-sectors of large Muslim economies began to rise, “companies filled roles from IT to engineering with the best they could find, often from this pipeline of education women.” Of course, this recent tendency is not exclusive to the IT world. More Muslim women are becoming empowered to make their own career decisions without the many preexisting stereotypes of a “men-only” work field. Around a decade ago, only 100 million women were working in the 30 largest Muslim-majority economies. That number is now 155 million and the combined income of working women in the entire Muslim world reaches approximately $1 trillion USD.
19
22 ― 25 ASEAN 26 ― 29 Southern Asia 30 ― 33 Middle East
2018
03
Three Hotel Associations Signed an Agreement Allowing Muslim Employees to Wear Scarves Norila Daud is Former President of Confederation of ASEAN Journalist (CAJ), Senior Vice President of AJA, and Editor of malaysiaworldnews. com
22
Following the pronouncement of Malaysia
they must wear their scarves, but they
as an Islamic state almost three decades
are placed in a difficult situation with
ago, many things changed within the
hotel management’s standard operating
national community: from lifestyles,
procedures (SOP) that tells workers
cultures, and right up to an increasing
they must leave if they continue to wear
awareness towards Islamic values. Such
scarves.
values included the wearing of traditional
This problem became a matter of
headdresses (scarves or long dresses
controversial interest within the hotel
that cover the body from head to toe) by
industry towards the end of 2017
women, and for quite some time now,
with angry female employees lodging
young girls have had their hair covered
complaints to workers’ unions. Why did
with proper scarves made to suit school
they have to give up their jobs or not
uniforms. These girls then take their
be able advance their position if they
scarves into the corporate world—many
insisted on wearing scarves? How could
of whom go into the hotel industry.
that amount to being fair for a Muslim
On the other hand, some Muslim
population? At the time, more than 13
females begin to wear scarves after they
hotels implemented no wearing of scarves
have been married; they had not been
in their SOP statements.
wearing scarves at their workplaces
After several rounds of debate and
before, provided that hotels generally
intense discussion led by those affected
do not permit female staff to wear
and involved, both corporate and
headdresses. Now that they are married,
employee parties were able to come to
an amicable agreement. As of 8 February
that they were banned from wearing what
practice his religion and to propagate it”.
2018, Muslim female employees at
represented their religious ideals. Despite
And when hotel associations were willing
the front line of international hotels are
this, MAH had at first decided to side with
to acknowledge this, the issue was closed
now allowed to wear scarves or hijabs
the hotels, claiming that this was a matter
with overwhelming agreement.
following an agreement signed by
of standard international policy and hardly
three hotel associations representing
a discriminatory practice. Opposing this,
more than 3,000 members within the
Mohamed Nazri Abdul Aziz, Minister of
Ministry of Human Resources. The three
Tourism and Culture, clearly stated the
hotel associations were the Malaysian
ban was very unruly and irresponsible.
Association of Hotels (MAH), Malaysia
Seeing that simply exposing the issue
Budget Hotel Association (Mybha),
would not result in action, the Uni-
and the Malaysian Association of
MLC went on to conducting a thorough
Hotel Owners (MAHO), and their joint
investigation of the complaints,
agreement was signed into effect with the
threatening to expose the names of the
final signature by Mohd. Jeffrey Joakim,
hotels that were banning employees from
Chief Director of the Department of
wearing scarves.
Labour Peninsular Malaysia (DLPM).
The DLPM also followed up by continuing
“With this agreement, I hope the hotels
investigations. The entire matter was
involved will abide to what have been
subsequently brought to Parliament by
agreed upon and that the issue to ban
the Minister of Tourism and Culture. Still,
female workers from wearing scarves
MAH refused an invitation from the DLPM
will not be raised again as the Ministry of
and the Ministry of Human Resources
Human Resources will not compromise,”
to meet and solve the issue, but on 3
said Deputy Minister Ismail Abd. Muttalib,
January 2018, Richard Riot Jaem, Minister
happy to see the attentiveness of all
of Human Resources, said that the
parties focused on solving issues with
ministry had identified a total of 13 hotels
discrimination against workers.
that had implemented the discriminatory
Before, the issue gained momentum
policies going against national culture
when it was exposed by the Union
and religion. The policy blatantly violated
Network-International Malaysia Labour
Article 10, Clause 11 (1) of the Federal
Centre (Uni-MLC) after they received
Constitution of Malaysia stating, “Every
complaints from hotel Muslim employees
person has the right to profess and
23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를 공표한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이슬람의 가치가 중 요시되면서 무슬림 여성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몸 전체를 가리는 복장을 착용해 왔다. 어린 소녀들도 오 랜 세월 동안 스카프(히잡)로 머리를 가린 채 학교를 다녔다. 스카프가 익숙한 이 소녀들은 어느덧 성인 이 되어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다수의 말레이시아 무슬림 여성들이 일하고 있는 호텔 산업. 호텔은 여성 직원의 스카프 착용을 허용하 지 않는다. 결혼 전에는 스카프를 착용하지 않고 일할 수도 있어 미혼 직원들이 스카프로 사측과 마찰 을 빚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무슬림 여성이 배우자를 맞이한 순간, 스카프 착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호텔 측의 표준업무절차에 따르면 스카프를 계속 착용할 경 우 직장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2017년 말 여성 근로자들이 노동조합에 부당함을 제기하며 이 문제 는 공론화됐다. 왜 이들은 스카프를 착용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때마침 13곳의 호텔이 표준업무절차에 따라 스카프 착용 금지를 시행하며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다행히도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노사 양측은 원만한 합의에 도달했다. 3000여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협회 3곳(말레이시아 호텔협회, 말레이시아 저가호텔 협회, 말레이시아 호텔주협회)이 2018년 2월 8일 부로 국제 호텔에서 근무하는 무슬림 여성 근로자들의 스카프 착용을 허가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노동 부 장관인 모하메드 제프리 요아킴이 이 합의안에 최종적으로 서명하며 법적인 효력도 발휘되기 시작 했다. 갈등은 봉합됐지만, 사실 이 합의안이 도출되기까진 여러 일들이 있었다. 앞서 말레이시아 국제노동자 조합은 호텔에서 일하는 무슬림 여성들이 종교적 이념을 상징하는 스카프를 착용했다는 이유로 해고통 지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당시 말레이시아 호텔협회는 “이는 국제표준에 따른 것이지 차별적인 조 치가 아니다”라며 호텔 편을 들었으나, 문화관광부의 모하메드 나즈리 압둘 아지즈 장관은 “해고는 매 우 제 멋대로이며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판하며 사태가 확대됐다. 말레이시아 국제노동자조합은 철저한 조사를 시행할 것이며, 직원을 해고한 호텔의 이름도 밝힐 수 있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말레이시아 노동부 측도 진상규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이 사안은 문화관광부의 손에서 의회로 넘어가 버렸다. 말레이시아 호텔협회가 노동부의 조사 요구를 거부하는 가운데, 지난 1월 3일 인적자원부가 국가의 문 화와 종교에 반하는 차별정책을 시행한 호텔 13곳을 발표하며 상황은 반전됐다. 인적자원부 측은 말레 이시아 연방헌법 “모든 개인은 자신의 종교를 밝히고, 믿으며, 이를 전파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조항을 인용하며 호텔 측의 과오를 지적했다. 호텔 측도 이를 수긍했고, 마침내 얽힌 실타래가 풀렸다.
노릴라 다우드 전 아세안기자연맹(CAJ) 회장
24
히잡을 쓰고 일하는 말레이시아 무슬림 여성들. 이 들이 히잡을 착용할 권리를 지키기까진 많은 우여곡 절이 있었다.
25
All is “Not Well” with Pakistan’s Education Sector
Nasir Aijaz is a 40-year experienced Pakistani journalist. He has worked as editor, reporter, magazine editor, news editor and anchor in different newspapers, news agencies and radio news services. Until recently, he served as Bureau Chief and Editor at Pakistan Press International(PPI) news agency, Head of PPI radio news service, and Chief Editor at the Indus Chronicle. He currently serves as Editor at Daily Techno Times Karachi, Pakistan.
26
Although the governments, federal as
school facilities. This new index for
well as provincial, have begun to focus on
school completeness shows that only
improving existing educational systems
52% of all government schools in the
by establishing new higher educational
country have all four basic facilities—
institutions in Pakistan, the situation at
toilets, boundary walls, running electricity,
the primary and secondary level is dismal.
and drinking water. Only 24 of the 146
According to official data, around 48
districts ranked came above a 90-score
percent of public schools in the country
in school infrastructure. The figures
do not have toilets, boundary walls,
also show that a whopping 81% of all
electricity, and drinking water, besides
government schools are primary schools,
the poor quality of education provided
implying that many children do not have
by such facilities. Many parents have
the opportunity to move on to secondary
resorted to private education options. As
education after primary schooling.
such, Pakistan’s private education scene
It is said that all provinces have seen
has become a thriving business sector.
a general decline in schools’ retention
The data about public schools are
of students and levels of gender parity.
revealed in the fourth edition of the annual
Individually, some districts have shown
Pakistan District Education Rankings
improvements, but there is little indication
2016, which covers all 151 national
of major nationwide development in either
districts to assess their overall education
education quality or the quality of school
scores—based on levels of enrollment,
infrastructure. Province-wise statistics
retention, learning, gender parity, and
say that 50% of schools in Khyber
Pakhtoonkhaw (KPK) province lack the
Hafiz Ghulam Mohyuddin, who heads a
“Separately, we have allocated 1.5 billion
provision of all four basic facilities. 38% of
faction of the Punjab Teachers Union,
Rs for the maintenance and repairing of
all public schools in the KPK (with a total
believes ground realities do not match the
boys’ schools.”
of 27,626 schools) still lack electricity.
status mentioned in the NEMIS report.
At this point, it is not difficult to imagine
To date, Balochistan and Sindh provinces
“Faisalabad is the second largest city of
what the students and teachers in
continue to manifest the nation’s lowest
Punjab and still many of its public schools
schools are having to experience with no
education and infrastructure scores.
lack basic facilities,” Mohyuddin said,
water and electricity during the scorching
Almost half of Sindh’s public schools do
further asking, “How things would be in
summers and freezing winters. Putting
not come with drinking water systems,
far-flung neglected districts?”
even the pressing matters of hygiene and
let alone clean drinking water. 63% of
“In many government schools in Sindh,
social/cultural factors to a halt, in this
government-run schools in this region do
students and teachers experience a
state, would any parent happily send their
not have any electricity at all. Out of the
jail-like environment, especially in the
children, especially their daughters, to
45,447 schools in Sindh, a substantial
summer, as the schools lack basic
schools missing toilet facilities?
46% do not have toilet facilities and 41%
facilities,” said Aslam Deedhar who is
Stakeholders and relevant parties to
are without boundary walls.
the Larkana chapter general secretary of
the nation’s education system say the
Fortunately, such grave numbers were
Sindh’s Primary Teachers Association.
slogan of quality education in public
officially reported by Sindh province. A
Deedhar regretfully noted that missing
schools seems appealing, but they
couple of weeks ago, in a meeting chaired
facility issues has not been taken
question whether the problematic state
by the Chief Minister, it was said that
seriously over the years. “In rural areas,
is not being worsened by the national
the number of students in government
scores of schools are without buildings
environment that is conducive to enabling
schools had decreased to more than 1
and students used to study under the
slow progress. Article 25-A found in
million since the past 6 years. “100,000
open sky sitting on the ground.”
the Pakistani Constitution makes free
students leave school in the first month
Similarly, teachers in Balochistan do not
and compulsory education a right to all
every year due to the absence of basic
see the validity of more positive reports,
children aged 5-16 years. Wouldn’t this
facilities such as water and sanitation,”
noting persisting issues with missing
include related infrastructural provisions
admitted Iqbal Hussain Durrani, secretary
facilities and the growing number of
at such schools?
to the provincial education department,
dropout and out-of-school children.
This is not the first time missing
before a judicial commission. While
Another report showed that 70 percent
facilities in Pakistan’s public schools
some 23,000 schools have no electricity
of children between the ages of 5 and
have been highlighted. The NEMIS has
and 98% do not have educational
16 are still out of school in Balochistan.
been publishing its Pakistan Education
laboratories, the general incompetence on
“Every government makes tall claims,
Statistics 1992 to 1993 on an annual
the part of the education department has
but little reflects in reality. Hundreds of
basis. There has also been a general
resulted in the closure of more than 5000
schools are shelter-less (without buildings
consensus among stakeholders,
schools across the province in previous
and operate in open areas) in Balochistan
particularly teachers, that strong political
decades.
and thousands lack basic amenities,”
will to take on issues related to non-
Balochistan province has a total of 12,987
said Nawaz Jattak, who is chairman of
availabilities of facilities is absent, owing
public schools out of which 77 percent
the Government Teacher Association in
to the meager budgetary allocations in
operate without electricity and 73 percent
Balochistan (GTAB). He questions just
this regard.
do not have toilets. Surprisingly, Punjab
how such dilapidated schools could
is the only province where, according
attract any parents and students.
to the National Education Management
Meanwhile, Sindh Education Minister
& Information System (NEMIS), just a
Jam Mehtab Hussaid has said that the
handful of public schools lack availability
provincial government allocated over 2
of these basic amenities. They say that
billion rupees as its current budget for
less than one percent (only 174 out of
provision of basic facilities and renovation
total 52,314) of schools are in need of
of over 1,400 girls’ schools. “Our focus is
clean water infrastructure. However,
girls’ schools to ensure the availability of
many people do not agree to such official
toilets, boundary walls, and other missing
data of Punjab schools.
facilities at the earliest,” he said, adding,
27
파키스탄 지방정부와 연방정부가 고등 교육기관을 설립해 교육제도 개선에 나섰다. 그럼에도 초, 중등 기초교육기관의 현실은 처참하다. 공식집계에 따르면 파키스탄 공립학교의 48%가 화장실, 담장, 전기, 식수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본적인 설비는 물론 교육의 질도 형편없다. 때문에 파 키스탄의 학부모들은 사교육에 의지하고 있어, 사교육계는 때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2016 파키스탄 지역별 교육현황 순위는 파키스탄 전역 151개 지역의 공립학교를 입학자수, 교육의 질, 학교설비, 성비 균형 등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 중 52%만이 기본적인 설비(화장실, 담장, 전력, 식수) 를 갖췄으며, 24개 지역만이 90점 이상의 고득점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파키스탄 공립학교 의 81%가 초등학교인 점을 감안하면 많은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졸업 이후 중등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조사에 따르면 파키스탄 전역의 학교에선 학생수가 전반적으로 감소해 왔다. 향상된 지역들도 일부 있 었지만, 전반적인 교육의 질과 인프라 역시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진 못했다. 그 중에서도 발로치스 탄과 신드 주는 공교육 시설과 수준이 가장 떨어지는 곳으로 꼽힌다. 이 지역의 학교 절반 가까이가 식 수, 63%는 전력, 46%는 화장실, 41%는 담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처참한 현실이 신드 주 정부에 공식적으로 보고되며 공론화 됐다는 것이다. 최근 주지사가 주재한 회의에선 신드 주 공립학교의 학생수가 지난 6년간 100만 명 이상 감소했다는 사실 이 보고됐다.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도 열악한 시설 때문이다. 신드 주엔 약 45,000개의 공립학교가 있지만 이 중 절반이 전력을 공급받지 못한다. 절대다수인 98%의 학교엔 교육 실습실도 없다. 주 정부의 방치까지 더해져 지난 수십 년간 주 전역의 5000여 곳이 폐교되기도 했다. 발로치스탄 주의 인프라는 더욱 심각하다. 약 13,000 곳의 공립학교가 있으나, 이중 77%는 전기, 73% 는 화장실이 없이 운영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믿기 힘든 수치가 하나 있다. 펀자브 주의 학교들 거의 대다수가 기본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펀자브에 있는 공립학교 52,300 곳 중 1%도 안되는 불과 174곳 만이 깨끗한 식수를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펀자브 주의 공식자료를 신뢰하지 않는다. 펀자브 교원 단체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하피즈 구람 모히우딘은 이에 대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자료”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펀자브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파이살바드의 공립학교 대다수 가 열악한 시설로 고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신드 주 교원협회 라카나 지부 사무총장 아슬람 디하르는 “기본적인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신드 주의 공립학교들은 여름만 되면 감옥과도 같다. 특히 변두리 지역에는 건물 조차 없는 학교가 많아 학생들 이 지붕 없는 야외에서 수업을 듣는다”며 이러한 일들이 지난 수년간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발로치스탄 교육 현장의 반응도 이와 유사하다. 교사들은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시키는 보고서들이 현 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한 보고서는 발로치스탄 주 5~16세의 어린 학생 중 70%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내기도 했다. 발로치스탄 공립교원 협회장 나 와즈 자타크는 “정부는 당연히 높은 수준의 시설과 교육의 질을 요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렵다. 발로치스탄 학교 중 지붕이 없는 곳만 수백 곳에 이른다. 어떤 학부모나 학생이 다 허물어져 가 는 학교에서 공부하길 원하겠나”라고 반문한다. 파키스탄 헌법 25-A조항은 “5~16세의 모든 어린이들은 무상 의무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 하고 있다. 아무리 무상이라 할 지라도 열악한 시설에서 그 누가 교육을 받고 싶어 하겠는가? 파키스탄의 처참한 공교육이 공론화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2~1993년에도 정부기관의 공 식적인 통계자료를 통해 공교육의 민낯이 드러난 적이 있다. 당시 교사를 중심으로 한 이해당사자들은 공립학교 설비 확충을 주장했으나, 유력 정치인들은 충분한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장의 소리를 묵살했다. 최근 정치인들이 공교육의 개선을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곤 하지만, 문제 해결까지는 시일이 걸릴 듯 하다.
나시르 아이자즈 아시아엔 파키스탄 지사장
28
지붕 없는 학교의 교사와 아이들. 파키스탄 공립학 교의 절반 가까이가 화장실, 담장, 전기, 식수 등 기 본적인 설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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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Years of Fake Peace and Illusion Wars
Ashraf Aboul-Yazid(Dali) is an Egyptian poet, novelist, translator, journalist, traveler and TV presenter. He won the Arab Journalism Award in culture 2015, and Manhae Grand Prize in Literature 2014. He has published more than 30 books of poems, novels, travels, and children literature. Some of his literary works are translated into Spanish, Korean, Turkish, English, and Persian. He is also President of AJA and Editor-in-Chief of the Arabic version of The A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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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9 November 1977, late Egyptian
American camp. The gesture stemmed
President Sadat (born December 25,
from an eagerness to request the help of
1918, assassinated October 6, 1981),
NATO countries in improving the ailing
startled the world by announcing to his
Egyptian economy, a progressive belief
parliament his intention to visit Jerusalem
that Egypt should begin to focus more
and speak before the Knesset (the
on its own interests than on the interests
unicameral national legislature of Israel),
of the Arab world, and a hope that an
seeking genuine peace.
agreement with Israel would catalyze
The initiative was prepared by the US
similar agreements between Israel and
political kitchen, and shortly afterward, the
her other Arab neighbors to further solve
Israeli government cordially invited Sadat
the Palestinian problem.
to address the Knesset in a message
Accompanied by their capable negotiating
passed to him via the US ambassador to
teams and with their respective interests
Egypt. Ten days following that speech,
in mind, Sadat and the Israeli Prime
Sadat arrived for the groundbreaking
Minister converged on Camp David for 13
three-day visit, which launched the first
days of tense and dramatic negotiations
measure towards peace between the
from 5 to 17 September 1978. By all
occupying State of Israel and an Arab
accounts, Carter’s relentless drive to
country
achieve peace and his reluctance to allow
Sadat’s trip to Jerusalem signaled a major
the two men to leave without reaching an
reorientation of Cairo’s place in the global
agreement were what played the decisive
scheme of things from the Soviet to the
role in the success of the talks.
and later on, ISIS. Now, with the shifting
illusion of wars. In previous decades,
it opened a new page in the relationships
war terrains to Arabic regions, Islamic
there truly was no peace, publicly and
book, as Arab countries then proceeded
militants have spread their new crimes to
domestically. Now, there will be no
to cut diplomatic ties with Cairo; the kind
Iraq, Syria, Libya, and to Sinai in Egypt.
winner in a war that has ensued from the
of “peace” Sadat envisioned did not
The defense budgets of many world
aftermath, as no world power has decided
appear. National Egyptian powers and
states, at first glance, suggest fighting
to take any lasting measures. As long
Egyptian citizens alike started a public
terrorism is of their utmost priority, but
as these illusion wars continue to feed
boycott to what was beginning to be
the critical point here is: with the two
the arms factories, and as long as the
called Israeli normalization. It seemed
great powers, NATO and Arab countries,
problems are somewhere far away—away
many were not able to forget the horrible
both fighting terrorists, somewhere in
from the decision makers’ own countries,
crimes committed by Israeli forces before
between, the terrorism inside nations are
nothing much is likely to change.
and after the 1967 war. Such opposing
being enabled, allowing negative forces
sides even went on to consider their
to continue their war crimes.
victory in the 1973 war against the Israelis
When the Egyptian military began to
had been crushed by Sadat’s “fake
spread throughout Sinai to stop terrorists,
peacemaking”.
after the fall of their terror-supportive
For cooperating with American politics,
regime in Cairo (The Muslim Brotherhood),
Sadat also had to fight the Soviet wing
Egyptian forces suffered too many
present back in Egypt. Although he
casualties in soldiers and policemen. It
thought that by releasing fundamental
was said in a recent New York Times
Islamists he could quiet down Marxist
article, “Egypt appeared unable to stop
and Socialist factions, thereby winning
them, so Israel, alarmed at the threat
domestic peace, those same Islamists
just over the border, took action…for
assassinated Sadat on October 6, 1981,
more than two years, unmarked Israeli
commemorating the 1973 war.
drones, helicopters, and jets have carried
Hosni Mubarak would continue the peace
out a covert air campaign, conducting
march, albeit a cold one that could not
more than 100 airstrikes inside Egypt,
be seen as genuine. The difference with
frequently more than once a week—and
this new leader was the mega growth
all with the approval of President Abdel
of Islamists, together with troops of
Fattah el-Sisi”.
hundreds of thousands of militants
So, 40 years after an era of fake peace,
who fought in Afghanistan—a wave
it rather looks like the old enemies are
supported by the Taliban, then al-Qaeda,
standing on the same side, fighting an
AP
As a result, the agreement was signed, b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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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9일,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사다트.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국회 앞에서 평 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겠다고 표명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발표는 사실 미국과 사전에 입을 맞춘 준비된 계획이었다. 곧이어 이스라엘 정부는 주 이집트 미국 대사를 통해 사다트 대통령을 국회연 설에 초대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은 이집트가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할 것임을 전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 사다 트의 이러한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기인했다. 첫째, 이집트는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나토 회원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둘째, 아랍권 공동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좇아야 한다는 믿 음이 있었다. 셋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사례를 본 다른 아랍국가들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다른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대화하는 계기를 갖길 바랐다. 1978년 9월 5일, 사다트와 이스라엘 총리는 각자가 구상했던 협상안을 품고 데이비드 캠프에 모였다. 회담 장소엔 13일간의 긴장이 흘렀으나, 결국 극적인 타결을 맞이했다. 중동의 평화를 바랐던 중재자 카 터의 추진력이 이 협정이 맺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협정은 마침내 체결 되었으나 중동의 정치 지형도는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아랍국가들이 이집트와의 단교를 선언하고 나 선 것이다. 사다트가 마음 속으로 그려왔던 ‘평화’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집트 권력층과 국민들도 이스라 엘의 표준화를 따르게 된 것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67년 전후 이스라엘이 저지른 만행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또한 1973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가 사다트 대통령의 ‘거짓 된 평화’로 퇴색돼 버렸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진영과 호흡을 맞춰온 사다트는 소비에트연방 지지자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사다트 는 급진적인 이슬람신도들을 풀어놓으면 마르크스주의자 파벌들을 몰아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이는 그에게 처참한 결말을 가져다 줬다. 급진주의자들이 1973년 전쟁 승리를 기리면서 1981년 10월 6일 사다트를 암살하고야 말았다. 뒤를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는 전임자의 발자취를 따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후임자는 아프가니스 탄 등지에서 활동했던 이슬람 급진세력과 마주해야 했다. 탈레반, 알카에다, 그리고 ISIS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군대 급의 통솔력을 지니게 됐다. 현재 이슬람 급진세력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시나이 등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고 있는 세 계 많은 국가들은 테러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테러집단과 맞서는 두 개의 중심축 나토와 아랍국가들에서도 테러가 여전히 자행되고 있으며, 이는 또다른 전쟁을 불러일으 키는 악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테러집단을 지원해온 카이로의 무슬림형제단이 추락한 후, 이집트는 테러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시나 이에 군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 또한 발생했다. 최근 뉴욕타임즈는 “이집트가 테러를 멈추기 어려워 보인다. 국경 너머의 위협에 방관해 왔던 이스라엘조차 지난 2년간 이 집트를 비밀리에 100여 차례 공습했다”고 보도했다. 이 와중에 이스라엘 측은 엘 시시 대통령의 승인 하에 공습을 감행했다고 밝혔지만, 이집트 측은 이를 부인하며 진실공방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거짓된 평화’의 시대가 지난 지 40여 년, 지금도 오래 묵은 적들은 그 자리에서 전쟁의 환상과 싸우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평화는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인한 전쟁의 승자 역시 없다. 군수공장들 을 살찌우는 전쟁의 환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저 멀리 강대국 의사결정자들의 그릇된 판단이 계속 되는 한 달라질 것은 없다.
아시라프 달리 아시아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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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nhua
이집트 카이로의 사다트 추모공원에서 1973년 전승 기념 벽화를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 이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이는 ‘거짓된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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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â&#x20AC;&#x2022; 47 Special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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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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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후 세계는 평화를 외치고 있지만 분쟁의 불씨 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 지구, 특히 아시아를 조각 내고 있다. 분쟁지역 순회특파원 이신석은 15년간 분쟁지역 과 그 지역의 난민들을 만나며 아시아의 조각난 파편을 끼워 맞추고 있다. 그런데 “왜?”라는 철 없지만 원초적인 질문이 우리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매거진 N>의 철없는 아이들이 그에게 철없는 질문을 던져봤다.
“유기묘 봉사활동, 부담갖지 마세요 내가 먼저 나서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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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아니더라. 숙성이 뛰어난 것도 그렇고 원하는 부
인은 왜소하기 그지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늑대와
너무 개인적인 부분이라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
위만 딱 잘라서 불에 직접 구워주는데 그 맛을 잊
아프리카 들개 정도의 차이? 그런데 분쟁지역을
만, 종교적으로 커다란 경험을 한 후 이 일에 확신
을 수 없다. 보통 외국 나가면 음식 때문에 고생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이 있다. 현대전은 복잡한
을 갖게 됐다. 지난 15년간 중근동 지역만 30여 차
많이 한다고 하는데 사실 난 한국에서 더 고생한
도심의 시가지나 산악지대에서 주로 벌어진다. 덩
례, 발칸국가 20여 차례, 코카서스 20여 차례, 그
다. 매운걸 못 먹어서.(웃음) 외지에 나가 있는 동
치 큰 사람들이 유리해 보이지만 꼭 그렇진 않다.
외 동유럽, 쿠바,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를 수
안 한국 음식이 그리운 적은 별로 없었다.
은폐하기 좋고 민첩한 체격이 더 유리하다. 개인
십 차례 다녀왔다. 약 3년 전 김군이 IS로 넘어갔
적인 느낌이지만 쿠르드족 하면 전사의 이미지가
을 당시, 현장을 다녀오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최근 쿠르드 난민이 거주하고 있는 그리스를
떠오른다. 근래 들어 자주 등장하는 페슈메르가
시작했다.
다녀왔다. 분쟁지역을 다니기 이전엔 쿠르드
(YPG, 쿠르드민병대)만 봐도 그렇다. 쿠르드의 전
족을 어떻게 바라봤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
통이기도 한데 위기에 처하면 홀연히 일어나 민족
을 테러집단이라 여긴다.
을 지키는 이들이 페슈메르가였다. 쿠르드족이 절
한번 나가면 얼마나 머물다 오나. 보통 1~3개월 정도 체류한다. 가장 최근엔 두 달
그들이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한 적은 추호도 없다.
좀 넘게 있었고.
쿠르드족 숫자가 거의 4천만에 달하는데 그 안에 도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가
멸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의 존재가 컸다고 본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한국에선 남자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있었듯이 쿠르드인 사이에도 친터키파와 배신자
통념이 있다. 안정적인 수입을 바랄 수 없는
들이 있다.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 갖기보단 ‘그냥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다지 관심 갖
일인데 생계로 고생한 적은 없나.
바라보나? 많이 걱정할 것 같다.
돈이나 벌겠다’는 비즈니스맨도 있고. 정말 가난하
지 않는다. 또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내
글쎄, 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웃음). 50여 가지
고 어렵게 자라왔는데 독립에 헌신하는 사람들도
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나를 완전히 신뢰한다. 내
직업을 가졌었다. 그래도 돈 좀 벌었다는 것은 대
많다. 그러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뜻을 이
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기
여섯 번 정도 밖에 안되지만. 그런데 이런 것들이
루기도 전에 죽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내 눈에
때문에. 물론 아내는 내가 위험한 곳 다닐 때마다
별로 의미가 없다. 사람마다 각자의 우선 순위가
보였다. 쿠르드족은 터키뿐만 아니라 시리아, 이라
걱정을 많이 한다. 나도 두려운 것은 똑같다. 위험
있다면 내게 돈은 가장 최하위에 속할 것이다. 젊
크 등지에서도 살고 있는데 그 곳에도 친정부파
한 곳에선 하루에 몇 번씩 기도한다. 기도 안 할래
은 사람들이나 보통 사람들에겐 돈이 굉장히 중
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말하는 ‘가진 사람들’이다.
야 안 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어느 마을에서 머
요할 수 있겠지. 내게 돈은 나중 문제다. 가족의
일제치하 때 친일파가 그러했듯, 이들도 독립을
물고 있는데 누군가 내게 “오늘 안에 너를 납치해
안위와 건강, 내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이
외치는 대다수의 쿠르드족을 외면하고 있다.
살해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우선이다. 돈의 우선 순위가 낮으니까 그렇게 걱 정하진 않는다.
다고 생각해봐라. 그런 말 듣는데 사람이 잠을 잘 그동안 많은 쿠르드족을 만나왔다. 쿠르드족
수 있겠나. 누가 들이닥치면 도망가야 하니까 창
의 특징 같은 것은 없나.
문 한 쪽을 열어놓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적이 한
여러 곳을 다녔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음식 등
쿠르드족은 술을 즐기진 않지만, 일단 흥이 나면
은 없었나.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이들
두 번이 아니다.
이란 아제르바이잔 주의 주도인 타브리즈(Tabriz)
은 이라크, 이란, 시리아의 산악지대를 돌아다니
의 찻집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매우 좁은 공간인
는 산간 유목민이다. 그래서인지 쿠르드족에도 유
호신용품을 늘 소지하고 다니기는 힘들다. 내 외
데 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차를 마
목민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묻어있더라. 외형을 보
모에 그런 것 들고 다녀봐라. 의심 사기에 딱 좋
시며 흡연하더라. 지금의 한국에선 상상도 못하는
자면 이들은 체격이 작은 편이다. 경제적으로 낙
다.(웃음) 문제가 생기면 외국인에게 불리할 수 밖
광경이지.(웃음) 좋은 음식도 많았다. 터키 동부에
후되고 궁핍한 지역에서 살아왔으니까. 쿠르드와
에 없기도 하다. 사소한 시비가 붙거나 정말 심각
서만 먹는 바비큐(Ocakbaşı)와 이란 북부의 양
다투고 있는 터키와 비교해 예를 들어보겠다. 터
한 위기에 처하면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본다. 이
고기가 정말 맛있었다. 특히 이란 양고기는 세계
키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는 덩치
래봬도 육상선수 출신이라 뛰어다니는 것은 자신
최고다. 양고기를 많이 먹어봤는데 이란에 비할게
가 큰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다. 이에 비해 쿠르드
있다.(웃음)
위급한 상황에선 어떻게 대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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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지역 순회특파원으로 세상을 돌며 가장
체의 지면을 할애 받아 그들의 고통을 알릴 수 있
좋았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다는 것에 무엇보다도 큰 보람을 얻는다.
터키의 쿠르드족 거주 지역인 하카리에서 경찰에 체포 됐을 때 가장 힘들었다. 그 곳을 방문하기 며
다음엔 어디를 방문할 예정인가.
칠 전 쿠르드 독립을 주장하는 PKK가 터키 경찰
갈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터키의 경우 블
과 군을 사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때문에 경비가
랙리스트에 올라 들어갈 수 없다. 가고 싶은 곳이
매우 삼엄했는데 경찰들이 “외국인이 어떻게 검
따로 있긴 하지만 법적인 제약이 있어 힘들다. 여
문을 뚫고 여기까지 왔냐”고 묻더라. 한국으로 치
전히 고민 중이다.
면 DMZ 같은 곳이었으니까. 현지 경찰이 나를 테 러리스트들과 연관돼 있다고 의심해 체포하더라. 온갖 고생 다 했다. 그때 일은 2016년 1월 <아시아 엔>에 연재되었던 ‘쿠르드 분쟁지역 억류기’ 편을 통해 전한 바 있다. 반대로 가장 좋았던 기억은 이 란의 사막을 홀로 걸을 때였다. 두 달 반 정도 체 류했는데 나 자신과 대화하며 내면의 깊은 슬픔 을 발견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막에 홀로 서 있다 고 상상해봐라. 내 자신을 돌아볼 수 밖에 없다. 대화를 할수록 그간의 고생이 느껴진다. 그 럼에도, 당신이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 엇인가.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나라들을 세상에서 가 장 낮은 곳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곳을 돌아 다니다 보니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 들은 분쟁지역의 약자더라. 전쟁이 벌어지는 곳의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 람들이다. 이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거에 반대하는 주민들만 봐도 누가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 큰 힘이 되지 않나. 분쟁 지역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외지에서 온 타인이 곁에서 공감하고 지지해준다는 것에 큰 힘을 얻 는다. 물질적인 부분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나도 처음엔 물품들을 많이 가져다 주기도 했고. 그런데 하면 할수록 물건보다 마음으로 지지해주 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걸 느꼈다. 난 여 전히 부족한 사람이다. 내가 다녀온 곳을 온전히 글로 표현하는 것이 지금도 힘들다. 그럼에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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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was at the heart of World War II reconciliation, but countless regions across the world, particularly Asia, remain war-torn and devastated by ongoing conflict. For 15 years, war-zone correspondent Lee Sin-seok has traveled far and wide to reach refugees—those who have experienced the worst of such wars—to share in their pain and understand their position. It is a worthy cause, and Magazine N would like to know more: How did you start doing what you do? That’s something so personal to me, I don’t feel I should share too much, but my religious values propel me in visiting those regions. After a very special spiritual encounter, I decided to help those in need. In the past 15 years, I have visited the Middle East over 30 times, the Balkans 20 times, the Caucasus region 20 times, and other areas in Eastern Europe, Cuba, South Asia, Central Asia, and so on. I began to seriously report on my trips three years ago, when a man named Kim became an IS member; I remember visiting the site where Kim had joined the group, giving my report on what I had come across. In Korea, there is a strong sense of the man as the breadwinner of the family. Have you ever experienced any difficulty with regards to earning a stable living? Well, where does money actually come from? (laughs). I’ve had over 50 or so jobs here and there. Of course, I earned a sizeable amount only through 1 or 2 of those odd jobs. But money was never a priority. The vision I had for my work always came before stability. I rarely worry about the financial aspect to what I do. You’ve been to many places, is there any type of food that you enjoyed the most? I still think of this teahouse I went to in Azerbaijan province, Iran. It was a crowded space; sometimes seating more than a hundred men. They would sit together, drinking and smoking inside—something you could never see in Korea (laughs). There was a lot of good food there. One of my favorites was a barbequed lamb dish called Ocakbaşı found in east Turkey and northern Iran. Iran serves the best lamb dishes. You recently visited a Kurdish camp in Greece. How did you view the Kurds before all your trips? Many people consider them a terrorist group Even before, I had never thought of the Kurds as terrorists. There are almost 40 million Kurds around the world, of course there may be people with terrorist inclinations in that number, but I don’t believe the majority of them to be like that. Just as during our Korean war there were Koreans who were friendly with the Japanese, there are members within the Kurdish community who are friendly with the Turks and are considered traitors amongst their own people. Some Kurds have no interest in politics and simply want to earn a decent living by running their businesses while some are poor and earnestly hope for a country to call their own. What does your family and people around you think of the work you do? Do they worry about you very much? I don’t think people pay all that much attention to what I do. Some don’t really care to listen. But my wife trusts me completely. She has been the one to see my life up close; she was beside me during my spiritual encounter and saw how deeply I had changed. Of course, she cannot help but worry for me when I go to such dangerous places. Even I have been afraid. Many nights I was unable to sleep at night fearing for my life. Please tell us your best and worst moments as a war-zone reporter. The worst moment was when I was arrested in Hakkâri, a Kurdish region in Turkey. The local police there thought I was a terrorist, and it was a really difficult time for me. My best experience was crossing the desert in Iran; in that lonely dry expanse I was able to rediscover myself, burning light into all the hidden corners of my identity. What motivates you to continue in your work, despite the challenges? I used to think the most disadvantaged countries were in the African continent. But I soon realized that the most disadvantaged and vulnerable are in fact war refugees—and in this group, women and children are the most vulnerable. The elderly, the women, and little children are in dire need of help but no one stands on their side. I knew that whenever I went to visit them, they were encouraged by the fact that a foreigner seemed to want to hear their story. That pushes me to keep on in this work. Where do you plan on visiting next? There aren’t many places that I can go. I’m already on Turkey’s blacklist so I can’t go there. I have in mind to go several places but there are legal restrictions—right now I’m just waiting for any op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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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동에선 터키의 쿠르드족 소탕전이 연일 벌어지 고 있다. 쿠르드족이 어떤 민족이길래 터키가 이토록 열 을 올리고 있는가? 아리안계 인종인 이들은 이란, 이라크, 터키 등지에서 거주하는 약 4,000만 명의 유랑민족이다. 쿠르드족은 약 4,000년 전 현 터키 남동부와 이란-이라크-시리아 국경지역에 해당하는 쿠르디스탄에서 거주했다. 중세 이후 쿠르드족은 오스만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제국이 1 차대전에서 패한 후 이들에게도 암운이 드리워졌다. 승 전국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이 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4개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이다. 1920년 강대국은 쿠르드족에 자치권을 약속 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독립과 자치권을 향한 쿠르드의 열망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1927년 쿠르드족은 터키 동부에 아라라트 공화국을 세 웠으나 3년 만에 터키의 침공으로 멸망했으며, 1946년 이란에 거주했던 쿠르드족이 세운 마하바드 공화국도 이란의 공격을 받아 소멸했다. 이후에도 쿠르드족은 터 키, 이라크, 이란 3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가장 최근인 2017년 9월만해도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가 독립투표를 실시해 91.8% 의 찬성표를 얻었지만, 이라크를 비롯한 인접국들의 반 대로 독립이 어려워 보인다. 쿠르드족 중 가장 많은 약 1,500만 명이 살고 있는 터키. 터키의 쿠르드족 대다수는 정부의 차별정책과 탄압을 견디며 생존해 왔다. 독립을 주장해온 쿠르드인들이 쿠 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을 세워 투쟁에 나섰지만, 터 키-쿠르드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결국 수많은 쿠 르드인들은 고향을 등지고 이웃나라 그리스로 떠나야 만 했다. 10여년에 걸쳐 20여차례 터키를 방문하며 쿠르 드족의 실상을 알려온 이신석 <매거진 N> 분쟁지역 순 회특파원. 그가 2017년 12월 중순 터키 쿠르드 난민의 자취가 묻어있는 그리스로 향했다. -편집자
Spread across the borders of countries such as Iran, Iraq, and Turkey, the Kurds are a largely nomadic people numbering over 30 million in population. Approximately 4,000 years ago, they were an indigenous group living in the highlands of Kurdistan (part of the Ottoman Empire)—present day south-eastern Turkey and areas across north-eastern Syria, northern Iraq, and north-western Iran. In the aftermath of World War I and the defeat of the Ottoman Empire, the fate of the Kurds would be decided by world leaders eager to bargain territory to their advantage. Eventually, under the Sykes-Picot Agreement headed by victorious allies Britain and France, Kurdistan was divided into its respective modern-day boundaries. Today, almost half of all Kurds reside in Turkey where any effort at establishing an independent state has been continually denied. Kurdish resistance escalated into the formation of the Kurdistan Workers’ Party (PKK) but militant strategies were met with fierce opposition, resulting in thousands of Kurds fleeing to neighboring countries for refuge. In this special report, meet Lee Sin-seok, war zone correspondent to Magazine N who has visited and reported on the Kurds over a period of more than a decade. The following gives an account of his most recent trip to Greece, December 2017, following the footsteps of the Turkish Kurds. -Editor’s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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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석 분쟁지역 순회특파원
아테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우버 택시 운
(YPG), 쿠르드 인민민주당(HDP)의 사진들이 벽에
후 동생들처럼 친해진 그들에게 편한 자세로 차
전사 화니스에게 연락해 라브리오라는 곳으로 가
붙어 있었다. 너무나 낯이 익은 사진들. 가슴 속
이(Chai)를 달라고 하자 다들 큰소리로 웃었다. 방
줄 수 있냐고 물었다. 25년 동안 태권도를 해온 그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희노애락의 순간들이 오버
에는 침대와 사물함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물
는 왼쪽 팔뚝에 ‘태권도’라는 한글 문신을 새길 정
랩 되었다. 이윽고 터키에서 체포되어 반라의 상
어 보니 TV가 있는 방도 간혹 있지만 자신들의 방
도로 태권도를 사랑하는 그리스인이다.
태로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짐승처럼 올라간 숨가
에는 없다고 했다. 마침 필자의 지인이 딸이 쓰던
라브리오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으나, 난민
빴던 계단이 떠올랐다.
거라며 줬던 맥북이 생각났다. 좋아하는 축구를
수용소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해 주민에게 길
지즈레 친구는 외부인에게 쉽게 공개하지 않는
시청할 수 있고 다른 작업도 할 수 있으니 내일 가
을 물어 보기로 했다. 알려 준 길을 따라가니 회색
‘그들의 방’을 서슴없이 열어 주었다. 방안에는 2
져다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주머니를
빛 콘크리트의 낡은 건물이 보였다. 정문의 벽에
층침대 4대와 NGO에서 지원받은 듯한 개인사물
털어보니 벨트 안쪽에 숨겨 놓은 비상금을 제외
PKK라고 페인트로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은
함이 있었다. 발코니로 나가는 문에는 압둘라 오
하고 400 유로 정도가 있었다. 그들에게 내어 놓
느긋해져 있던 몸과 마음이 긴장이 되고 가슴 깊
잘란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걸려있었다. 방에 있
으며 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현금일테니 8명
은 곳의 울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울림은 나
던 다른 쿠르드인들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인사
이서 나누어 가지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은 받을
로 하여금 기억 저편을 떠올리게 했고, 또 무릎 꿇
를 나눴다. 중간 중간 터키어를 섞어 말하며 그들
수 없다며 만류했다. 형으로서 동생들에게 주는
게 만들었다.
의 출신 지역을 물어 보았다. 필자가 지난 10여년
것이라고 하니 꼭 그렇게 하고 싶다면 자신들은
건물의 정문에는 경찰이나 경비가 서 있지 않았
간 20여차례 터키를 드나들며 가보았던 쿠르드의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에 그 곳의 매니저에서 전해
다.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출입이 가능해 보이지
도시여서 더욱 반가웠다. 그들에게 터키에서 찍은
달라고 했다. 자신들은 현금이 필요 없다면서. 고
도 않았다. 문 앞에 몇몇이 서 있었는데, 그 중 중
사진들과 하카리에서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직접
결한 품성과 이상이 젊은 그들을 이 곳으로 인도
년의 사내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내 아래 위를
서명했던 서류를 보여줬다. 그간의 경험을 공유하
했으리라.
훑어 보았다. “혹시 이 곳에 쿠르드 사람들이 있
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피를 나눈 동지 같아졌다.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 상황을 모른 채 밖에
습니까?”하고 물으니 그가 여기에 있는 사람 모
대략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들
서 기다리고만 있을 화니스가 생각났다. 내일 다
두 쿠르드인이라고 대답했다. 터키에서 온 쿠르드
은 필자를 큰 형님처럼 대해 주었다.
시 오겠노라며 그들 모두와 일일히 포옹을 하고
인도 있냐고 묻자 그 중 젊은 친구가 “터키에서 왔
곧이어 소박하게 차려진 아침식사가 나왔다. 식사
양 볼을 맞대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밖에서 기
다”고 했다. “디야르바키르? 마르딘? 실로피?”를 대며 터키 어디서 왔는지 재차 묻자 그는 놀랍게 도 지즈레(Cizre)라고 했다. 지즈레라는 말 한마디 에 가슴이 쿵쾅 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나 고자 했던 그들이 눈 앞에 서 있었지만 격해진 감 동을 눌렀다. 휴대폰을 꺼내 지즈레에서 사귀었던 쿠르드족 친구들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는 사 진 속 한 사람을 가리키며 자신의 친구라고 했다. 필자가 가장 아끼는 쿠르드인 친구였다. 광인의 눈빛을 가진 그는 눈에 띄는 외모와 행동으로 쉽 게 알아 볼 수 있는 사내다. 처음 만났지만 같이 아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 으로도 반가워 서로를 끌어안고 즐거워했다. 그는 밥은 먹었냐고 묻고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2 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곁눈질로 보니 PKK 의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 PKK, 쿠르드민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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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고 있던 화니스는 지나가던 동네 주민들이
PKK당원이나 추종자라고 볼 수는 없으나, 이들이
오잘란의 사진과 쿠르드 단체들의 깃발이 더욱
“당신 왜 여기 있냐”고 물었다고 했다. 친구가 난
쿠르디스탄 건국을 기원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비록 난민 생활을 하고
민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기다린다고 하니 “경찰
숙소로 돌아와 지친 몸을 뉘이며 생각에 잠겼다.
있지만 그들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맞은 편 건물에 감시 카
독립을 꿈꾸는 쿠르드족이 박해 받다 고향을 등
욱 실감났다.
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출입자는 물론 난민들의 모
지고 그리스의 작은 난민수용소에 사는 모습을
난민수용소의 쿠르드인들이 운영하는 카페테리
든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 속히 이 곳을 떠나라”는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그러나 ‘유럽연
아로 들어섰다. 그러자 어제 만나 인사를 나누었
충고를 해줬다고 한다.
합이나 여타 다른 국가에서 테러리스트라고 규정
던 친구들이 몰려 들었다. 알게 된지 불과 하루 밖
그리스는 2015년 유럽 난민 사태로 시리아뿐만
한 PKK를 과연 어느 누가 지지할 것인가’라는 생
에 안되었지만, 서로를 끌어 안고 양 볼에 입을 맞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터키, 나이지리아,
각도 교차했다. 이 곳의 정의는 무엇인가. 내가 위
추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터키-쿠르드 간의 격전
파키스탄 등지에서 온 난민들로 넘쳐났다. 라브리
험을 감수하며 취재할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일까.
지인 하카리에서 붙잡혀 작성하고 사인했던 조서
오 난민수용소는 여타의 난민수용소와는 다르게
그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도움을 주고자 함
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동지처럼 반갑게
거주인 모두가 쿠르드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
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
맞이해 주는 것 같았다.
스 이민 당국의 책임 하에 적십자의 도움을 받고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세상의 외면 속에서 살
한국의 지인들이 준 맥북과 아이패드, 아이폰 등
있기는 하나, 자체 운영회가 수용소 내의 모든 일
아가는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도움
을 이들에게 건네려고 하자 난색을 표했다. 어제
을 관리, 운영하며 자급자족한다고 한다. 시리아,
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집을 잃거나 고향에서 쫓
가져다 준다고 말까지 했는데 거절하려는 것인가
이라크, 이란, 터키 등 온 곳은 다르지만, 같은 쿠
겨나 타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다
싶었더니, 모든 구호 물품은 개인이 받을 수 없으
르드인이라는 유대감을 갖고 있기에 마치 대가족
시 한번 다가가기로 했다.
며 매니저를 먼저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곳
의 공동체처럼 보였다.
이튿날, 어제와는 다른 우버 택시를 급하게 구해
은 난민들이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
라브리오 난민수용소는 60여년 동안 운영되어 왔
라브리오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방향을 잃고 길
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그들
다고 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소련에선 온 난민
을 헤매다가 눈에 띄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난민
의 답이었다.
들이 살았으나, 1984년 터키와 쿠르드족 간의 전
수용소를 아느냐며 길을 물어 보았더니 상냥하게
1층의 좁은 방으로 들어서자 2층침대 두 대가 놓
쟁 이후에는 터키에서 온 쿠르드인들이 주를 이
주문을 받던 여직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매
루기 시작했다.
정색하며 대답했다. ”I have no idea.” 주위 손님들
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칼을 이용해 휴대전화를
쿠르드족의 독립을 위해 터키 정부와 투쟁을 벌이
의 표정도 일순간에 굳어져 버렸다. 답을 듣지 못
분해하고 있었다. 간단한 공구들이 없어 기기를
고 있는 PKK를 테러집단으로 여기는 시선이 분명
할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와 어제 갔던 길을 더듬으
수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수용소의 열악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슬람국가(IS)를 격퇴
며 걷기 시작했다.
한 상황이었다. 그에게 가져온 물품들을 건네자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라브리
한참을 가다 보니 눈에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혹
환호하며 기쁨을 표시했다.
오 난민수용소에서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감시 카메라가
그는 자신의 이름이 사힌 부닥(Sahin Budak)이며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제 들은 말대로 보이
디야르바키르(Diyarbakir)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지 않는 어딘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
순간 영화 ‘디야르바키르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 있을지 모른다는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난민
‘그 역시 영화 속에서 그려진 슬럼가를 거쳐 PKK
수용소라 봉사단체들도 기부물품을 가지고 방문
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동양 남자가 혼자서 캠
갔다. 짙고 숱이 많은 검은 머리에 검은 콧수염,
프를 드나드는 것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고 검은 피부와 세상 풍파를 다 거친 듯한 눈
분명한 사실이었다.
빛과 행동은 거리에서 나고 자란 듯한 인상을 주
불안한 마음을 간직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었다. 그는 맥북을 받자마자 주변 사람들은 아랑
어제는 처음이라 벽에 걸린 사진들을 곁눈질로
곳하지 않은 채 내가 떠나는 순간까지 화면에 몰
흘끔 보고 촬영하기 급급했는데 오늘은 압둘라
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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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
자고 제의했다.
명하게 밝혔다. 어제는 매우 선한 눈빛과 착한 인
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PKK가 테러리스트인가”
매니저의 방에서 나와 다시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상이었는데, 대화가 거듭되자 선한 눈빛이 점차
라는 질문이 나에게 던져졌다. “세상 많은 사람들
그들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니 옆으로 보디가드
날카롭게 변해갔다. 나이는 젊어 보였으나 그가
이 너희를 테러리스트라 부르지만 난 그렇게 생
사내가 바짝 붙었다. 외부인이 오면 그렇게 보디가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일순간 좁은 방의 분위
드가 붙으며 경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내의
다웃에 지즈레 시장인 레일라 임렛(Leyla Imret)에
기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름은 하키(Hakki)라고 했다. 내 몸의 45도 뒤쪽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그 여
2016년 1~2월 터키 경찰에게 수 차례 체포되
으로 가까이 붙어서 유사시에 나를 제압할 채비
자는 이미 독일로 돌아갔다. 쿠르드 독립운동가
고 혐의를 벗고 풀려나기를 거듭 할 때, 조금이나
를 갖췄다. 하키는 자신이 마르딘(Mardin) 출신이
로 쳐주지도 않는다”고 대답했다. 젊은 여성인 레
마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경찰들은 한결같이 “토니,
라고 했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내려다 보는 마
일라는 지즈레의 시장으로 당선되어 주목을 받았
PKK를 만나면 절대로 그들 앞에서 테러리스트라
르딘은 수 천년 동안 이어져 온 요새이자 최고의
으나, 검증되지 않은 경력과 터키-독일 이중 국적
는 말을 쓰면 안돼. 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그는 키가 크진 않았지만, 보
자라는 점 때문에 정작 지즈레 시민들에게는 그
순간 넌 바로 죽임을 당할 거야”라고 말했었다. 그
스에게서 명령이 떨어지면 무슨 일이든 임무를 완
다지 존경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는 내
충고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 아차 싶어서 “나는 너
수하고야 마는 그런 사람의 눈빛을 지녔다.
가 질문을 하면 간단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
희를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이 너
자리의 전체적인 대화는 디야르바키르 출신의 무
하곤 했다.
희를 그렇게 부를지라도...”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
트라(Mutla)라는 사내가 이끌었다. 그는 점잖았고
“2015년 말에서 2016년 초 사이 벌어진 지즈레 전
러나 이 대답도 틀린 것이었다.
눈빛도 부드러웠다. 짐작하건대 그의 PKK 내 서
쟁 중에 어디에 있었나?” “주디(Judi) 산” “그 곳에
그들 스스로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열은 매니저인 사힌 보다 높으나 자신보다 먼저
서 지즈레 항전에 함께 했나?” “그렇다” “주디산
있지만, 타인의 입에선 절대로 테러리스트라는 단
난민수용소에 온 연장자 사힌을 존중하고 배려하
이면 노아의 방주가 있었던 그 산을 말하는 것인
어가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등
는 듯 했다. 그가 이 곳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
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무슬림이 아닌 다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보디가드처럼 생긴 친구
지만, 핵심인물이며 브레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른 사람들은 아라랏산이라고 하는데” 짧게만 대
가 나를 바짝 긴장시켰다. 살벌한 분위기에 진땀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현재 터키의 에르도
답하던 그는 내가 주디산을 알자 “어떻게 그런 역
도 흘렀다. 거친 단어나 물리적인 폭력이 날아올
안 정권과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에 대항하는 쿠
사적 사실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냐”며 반색했다.
지 모른다 느낀 그 순간, 맥북을 받고 기분이 좋아
르드의 투쟁에 몸담고 있다고 말했다.
옆에서 계속 통역해 주던 친구는 잘 생긴 금발에
진 사힌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밖에서 이야기하
지즈레에서 온 다웃(Davut)은 자신이 YPG라고 분
파란 눈을 가진, 테헤란 출신의 이란인이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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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는 어느 정도 하지만 쿠르드어가 능통하지 않아 서 통역하며 애를 먹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이 곳 의 꽤 많은 사람들이 10년형 이상을 선고 받아 고 국을 탈출했으며 다시 돌아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란으로 돌 아가면 사형당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이는 기껏 해야 20대 초반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도대체 어 떤 사연이 있길래 난민이 되어 그리스까지 왔고 다시는 이란으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걸까. 차마 말 못할 이유가 있는듯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이야기와 압둘라 오잘란 의 이야기 등을 전하며 나를 한 편으로 확실히 만 들려는 것 같았다. 어느덧 하키는 친밀감을 보이 며 내 선글라스를 벗겨 자기가 써 보고 좋아라 하 기도 했다. 그때 YPG의 여자 대원 둘이 합류했다. 그녀들은 YPG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보 여 주려는 듯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무 슬림인 그녀들과 악수를 바로 할 수는 없어 주변
고 국경을 넘어와 지즈레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
눈앞이 깜깜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말인
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우리는 평등하다며 악
쟁 말기에 모두 후퇴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이
즉슨 내가 와 있는 이 곳이 단순히 쿠르드인들을
수를 나누자고 재차 그들이 말했다.
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맞다는 짧은 대답이 돌아
위한 난민수용소이자 PKK 유럽 본부였던 것이다.
여자 대원 중 한 명이 누사빈(Nusaybin) 출신이라
왔다. 지즈레에서 온 친구도 그들이 산에서 전투
그저 난민수용소인줄 알고 찾았던 곳에서 감당하
고 하기에 그 곳의 시장인 사라 카야(Sara Kaya)
를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곧이어 무트루(Mutlu) 입
기 힘든 사실들을 알게 되니 가슴이 쿵쾅 뛰었다.
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터키
에서 또다른 정보가 나왔다. 팔레스타인에 PKK
얼른 사태를 수습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내일 또
군이 누사빈을 초토화 시키는 바람에 15만명의
가 정확히 20명 합류했는데 그 중 16명이 전사하
오겠다”고 둘러대고 떠날 채비를 갖췄다. 순수한
난민이 이스탄불로 피난 갔다”라는 소식을 전해
고 4명이 생존해 작전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었
그들 앞에서 얄팍한 거짓말을 하려니 표정 관리
주었다. 그리곤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름다
다. 정확한 사실인지 재차 물었더니 틀림없는 사
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알아볼까 나의 이런 속마
운 계곡과 풍경 사진을 보여 주며 이 곳에 가봤는
실이라고 했다. 들어서는 안 되는 정보를 들은 듯
음을? 그들은 100% 알아챌 것이다. 그러나 선을
지 물었다. 사진을 보고 바로 “누사빈과 미드얏 사
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 마지막 질
넘어가버린 내가 누군가의 표적이 될 지 모른다는
이에 있는 계곡이 아니냐”고 했더니 반색하며 다
문을 물었다.
불안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 곳은 나 역시 그립기
“유럽에도 PKK, 즉 쿠르드 독립을 외치는 단체가
쿠르드 친구들의 자고 가라는 권유를 완곡하게
도 했다. 그녀들은 키가 작았지만 하체가 튼튼하
있는가?” 쿠르드 난민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
거절하며 간신히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하키가
고 몸이 다부져 보였다. 그들은 시리아의 쿠르디
인 독일과 프랑스에는 쿠르드 단체가 있을 것이며
따라 나오면서 배웅해 주겠다고 했다. 와이파이가
스탄에서 IS와 싸웠다고 했다.
그들도 잘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필요해서 같이 근처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카페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 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쿠르드 난민들은 유럽의
테리아에는 우리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
고 싶어졌다. 2017년 초 지즈레 전쟁 당시 특수
선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정을 일궜다. 그들
리스인 커플과 축구중계를 보는 노인 하나가 있
여단도 참전했는데 그럼에도 체포 혹은 사살된
은 생계로 바쁜 사람들이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
었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시키고 와이파이에
PKK의 수는 적었다. 터키 합동 수사반에서 들었
은 쿠르드 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일 뿐이다. 이 곳
연결을 하는 동안 하키는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
던 정보로는 PKK 병력이 시리아에서 땅굴을 파
이 바로 PKK 유럽 본부다.”
왔다. 노인이 비바람이 부는데도 문을 제대로 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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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고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하키에게 화를 내 며 투덜거렸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걸 난민이 라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그리스인 주민에게 도 한 눈에 터키 난민으로 보였으리라. 하키는 내 가 건네준 돈으로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한 잔 사 왔다. 남루한 옷차림의 그가 카페를 왔다 갔다 하 니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키는 술을 더 마시고픈 눈치였지만 나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가야 했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 버가 잡히지 않아 버스를 타고 가려는데 굳이 하 키가 버스를 타고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그럴 필 요 없다고 했음에도 애원하는 눈빛으로 내 호텔 까지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계속 졸랐다. 자기를 데리고 가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한 눈빛이 너무 애절해서 쳐다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난민 신세 인 그는 아테네에서 술도 한 잔 하고 자유도 맛보 고 싶은 욕구가 강했으리라. 버스는 한참 동안 우리를 기다리게 하였고, 하키
고 있노라니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가 생각났다.
# 지난 1월 초 어느 날, 페이스북에 라브리오 쿠르
는 내 앞에서 계속 눈을 맞추었다. 호텔에서 동성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
드족의 페이지가 생성되었다. 내가 건넨 기기를
끼리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 불편도 감수하겠다
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활용해 그들의 소식을 올리는 듯 하다. 커뮤니티
는 눈빛까지 내비쳤다. 버스가 도착하자 그를 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를 보니 즐거웠던 기억과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로하고 혼자 버스에 올라탔다. 아프리카와 스리랑
남지나해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기억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다시 만난다는 기약은
카 난민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뒷 좌석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
없지만 그들이 행복하길 먼 발치에서 바란다.
에 앉아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
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
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비바람이 치는 어두운 창
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
밖을 응시했다. 저 밖엔 검푸른 바다와 유배의 섬
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
마크로노시아가 있다.
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
난민수용소를 떠나면서 그들에게 내일 또 다시 오
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
겠다고 둘러댄 것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틀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점점 나에게 원하는 것이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
많아지니 부담스러운 것은 분명 있었다. 내가 알
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
지 말아야 할 사실들을 알게 됐고, 그로 인해 감
고 있었던 일이다.’
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이로부터 열흘 여 지난 어느 날, 가가우지아 공화
내 어깨를 짓눌렀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혹시라
국에서 이 글을 정리하며 온갖 감정이 떠올랐다.
도 닥칠 위험에 노출될 것이란 핑계를 대고 서둘
나를 향한 그들의 기대가 부담스러웠고, 뜻밖의
러 거처를 옮기기로 마음 먹었다.
사실을 알게 되어 두려움에 도망쳤다는 사실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선의로 나를 대한 그들
부끄러웠다. 이내 마음 속에서 쏟아지는 오열을
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다. 버스 밖 풍경을 바라 보
끝내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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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et Juanis, an Uber driver, the very first time I visited Athens. I called him up again, and we were soon headed for Lavrio at the southern tip of Greece. A couple of people were standing by the camp’s front gate. When I asked them, “Do any Kurdish people live here?” they told me that everyone in this camp was in fact, Kurdish. One young man said that he was from Turkey, and to my pleasant surprise, from Cizre, a town at the southeastern Anatolia Region of the country. Excited, I took out my phone and showed him a picture I had taken with a Kurdish family in a previous trip to Cizre. He pointed to a person in the photo saying, “That’s my friend”. Overjoyed, we embraced. I had only met the young man for a moment, but the photo had become a common thread that we shared. He asked me if I had eaten, leading me to his own room. We went up a staircase to the second floor and in my periphery, I could see PKK signs and photos of the leader, Abdullah Öcalan, hung on the walls. My Cizre friend showed me his room without hesitation, which I accepted as a sign of trust. I greeted several others in the room, explaining who I was and where I had come from. In a short while, we were all talking like old friends as I shared about my work and the places I had been. I could tell from the onset that this particular camp in Lavrio was not your ordinary refugee camp. Everyone here was Kurdish, and even though they appeared to be getting aid from the Red Cross—by the authority of national immigration officials—all the particulars of the camp were being run by the Kurds themselves. By all means, it was a self-ruling Kurdish enclave. Undeniably, there is a view of the PKK as a terrorist organization. But it is also true that the PKK are at the frontlines in the fight against the Islamic State (IS). While it cannot be said that everyone in the camp was a member or supporter of the PKK, I could feel the people’s overwhelming desire to found an independent Kurdish State. Back in my own dormitory, as I got ready for bed, my thoughts were filled with the plight of the Kurds, isolated in their unauthorized camp. All they wanted was a territory they could call home. But I knew it was unlikely for any organization such as the European Union to help a group now largely considered another terrorist faction. What did justice mean in this place, for this people? Was it right for me to come here to report on their difficulties in the first place? But I had already made my decision. Whatever it would take, I was going to be a voice for the vulnerable; people in dire need of help but having no where to turn to, people without a home. Early next morning, I returned to the camp to see the friends gathered together. I reached into my bag and offered them gifts—a Macbook, Ipad, and Iphone—that friends in Korea had kindly given up for the Kurds. The Kurdish men seemed worried, unsure of what to do. They told me that they were not allowed to receive any gifts personally. Any item first had to go through the camp manager. I came back to my friends with the authorized gifts and soon the men were shouting and cheering with delight. Another one of the men introduced himself to me as Sahin Budak, he was from Diyarbakir, one of the largest cities in southeastern Turkey. I turned to the others as well, going off from where we had stopped in our earlier conversations. As we were talking, I was asked, “Do you consider the PKK a terrorist group?” I told them as honestly as I could, “Many people in the world think so, but I don’t.” In an instant the room fell cold. A large muscular man who had been lying on the bunk bed next to us came up to glare at me. Sahin suggested we talk outside. When we were at the cafeteria, everyone had taken their seat, and I realized the large man, now wearing sunglasses, was pulling out the chair right next to mine. His name was Hakki. I could tell he was geared to suppress me at any moment should the need arise. The conversation at the table was led by Mutla, also from Diyarbakir. He seemed gentle and very composed. I had a feeling he ranked quite high in the PKK but was still very respectful to Sahin who, lower in rank, had arrived at the camp before him. Hakki took off his sunglasses as the mood lightened, occasionally he’d smile. Right then, two women from the People’s Protection Units (YPG) approached the cafeteria, they too joined in our conversation. If I remembered correctly, special forces had been employed in the 2017 Cizre dispute, fighting against the Turks. But the number of Kurdish soldiers was not enough to suppress the Turkish military. I had heard through a Turkish joint investigation report that PKK forces at the time had retreated from the war digging underground tunnels across state borders. I asked the men around me if all of this was true. They answered yes. Mutlu continued that of the 20 Palestinian PKK soldiers who had joined, 16 had died and the remaining 4—they 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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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vived. Now they were likely planning a counter-operation. I probably shouldn’t have heard that last bit, but I was curious to know more. “Are there any other PKK groups in Europe?” I asked. There had to be since the majority of Kurdish refugees had fled to France and Germany. Their answer was not what I had expected, “Elsewhere in Europe, there are only refugee camps where the Kurdish reside. Where you’re standing right now, this is PKK Europe Headquarters.” I could hardly believe what I had just heard. I was standing at the PKK organization in Europe? Not being able to help the tremors starting within me, I quickly got up and said I would be back the next day. They kept on asking me to stay for the night, but kindly refusing, I made my way out of the cafeteria. I hadn’t really meant that I would go back, time wouldn’t allow for that; but I was sorry that I had mumbled that promise as a way to find my exit. My shoulders were heavy with what I had seen and everything that had been revealed to me. Perhaps it was an excuse, but I had to go, it didn’t feel safe to stay anymore. Ten days after that day, I was in the Republic of Gagauzia, writing down what had happened in the past few days. What had started as a mission to be the voice for a lost people had ended in my fleeing with fear. I was extremely ashamed. Fear had made me forget why I was there to begin with. My hands were on my face, wet with 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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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â&#x20AC;&#x2022; 57 Top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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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3 49
“Think Outside the Box, Collapse the Box, and Take a Fucking Sharp Knife to it”: How Artists Describe the World
Back in 2010, when Banksy, an anonymous England-based graffiti artist and film director, visited San Francisco, his work popped up in various neighborhoods. A curator, Brian Greif, had taken off a part of the wall that had Banksy’s graffiti to preserve it; he looked for a museum that accepted the piece and since then, it was shared with the public. What Grief did was in stark contrast with what Stephen Keszler, an art dealer, had done with Banksy’s work—excavating the art from public sites and then selling them for personal gain, all without the artist’s permission. Colin Day’s documentary, Saving Banksy, discusses such matters about Banksy’s graffiti analyzing the conflicting philosophies surrounding the street art movement. Without concluding the right or wrong-ness of street art preservation, the documentary shares with audiences Banksy’s artistry and his personal wayof-thinking. Interestingly, the artist is famous for his political activism: in his graffiti, Banksy touches on the various political and social themes of antiwar, anti-consumerism, anti-fascism, anarchism, and existentialism. He highlights hypocrisy, greed, poverty, and despair, once involving himself i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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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on of the conflict in Gaza. In his
revolutionary leader Jean-Paul Marat.
moral conditions of post-World War II
video titled, Make This the Year YOU Discover a
In his interpretation, T. J. Clark, an art
Italy.
New Destination, Banksy raised his voice on
historian, described the painting as the
“You live and you suffer” was a line in
the negative consequences of the Israeli
first modernist painting because of “the
the film Bicycle Thieves (spoken by Antonio
bombings. “If we wash our hands of the
way it took the stuff of politics as its
Ricci, the main character), which tells the
conflict between the powerful and the
material and did not transmute it.”
story of an unemployed man struggling
powerless, we side with the powerful—
During the Romantic period (1770-1848),
through Italy’s economic depression.
we don’t remain neutral,” he wrote on a
both Eugene Delacroix, who painted
Antonio finds a job hanging up posters,
still standing wall in Gaza.
Liberty Leading the People, and Théodore
but for that he needs his bike—that
Then, in 2015, Banksy opened a
Géricault, who painted The Raft of the
someone has stolen. He and his son look
grotesque theme park, Dismaland,
Medusa, depicted inequality amongst the
for the bicycle, but when they manage to
parodying Disneyland and critiquing
social classes. And in the 1950s, realism
locate the thief, they have no evidence to
capitalism, the establishment and its
art brought to light Honoré Daumier, a
accuse him. Keenly aware that he cannot
abuse of power. A Cinderella-castle where
French printmaker, painter, and sculptor
work without his bike, Antonio himself
visitors steer miniature boats packed with
who by painting his The Third-class Carriage,
ends up trying to steal one as well. Bicycle
desperate refugees spilling over the hulls,
visualized a cramped, dirty, open
Thieves represents “poverty’s authentic
a pumpkin chariot—crashed, reminiscent
compartment lined with hard benches
of Princess Diana’s tragic car crash, and
with people who could not afford better
a riot police vehicle transformed into a
tickets.
waterslide ride; just a few of the dismal
Various realism movements were also
creations by 58 artists that stood inside
seen such as the Italian neorealist
Dismaland for five weeks.
cinema. Known as the Golden Age,
Banksy, without a doubt, freely criticizes
neorealism appeared as a national film
many aspects of the society we live
movement characterized by stories about
in. But this function of art as social
the poor and working class. In their films,
criticism is not new or even, rarely seen.
directors including the likes of Vittorio De
During the Neoclassical period (18th-
Sica, Federico Fellini, Alberto Lattuada,
19th centuries), artists vividly portrayed
Roberto Rossellini, Luchino Visconti,
political scenes in their artwork. Jacques-
Giuseppe De Santis, and Cesare Zavattini
Loui David’s famous painting, The Death of
frequently used non-professional actors
Marat, focused on the murder of French
to express the difficult economic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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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 banal and horrible loss of dignity.
Turbine Hall at Tate Modern in London
street snack shared by friends, and the
Bicycle Thieves is a brilliant, tactlessly real
with over 100 million handmade porcelain
material—porcelain—one of China’s most
work of art” (The Guardian). Directed
replica sunflower seeds. Each seed was
prized exports, together they spoke as a
in 1948 by Vittorio De Sica, the movie
molded, fired, hand-painted, and fired
powerful narrative of the human condition.
received an Academy Honorary Award
again in the Chinese city of Jingdezhen
Over the centuries, art has claimed
two years later in 1950, a sign of Italian
over a two-year period.
many roles; religious narration,
neorealism having given voice to the
“Like Ai Weiwei’s other works, Sunflower
storytelling, items of pure aesthetic,
victims of society and cinematic art as its
Seeds was a work closely related to the
entertainment, and so on. But is anything
critical tool.
society, politics and economy in China.
more meaningful or useful than art as
Sometimes, using art as an instrument of
It alludes to the globalization and mass
social commentary to stir the human
social criticism or for satirical purposes
production in China that caters to western
conscience?
may come with bad results. For instance,
consumerism, and to the deemed
for his influential artwork, Chinese artist
insignificant element at the bottom of
Ai Weiwei was jailed numerous times.
the production chain—thousands of
Although he has gained a network of
cheap laborers, assembly lines in gigantic
supporters in the international arena, he
factories, and tedious procedures,” as
experienced persecution in his homeland.
explained on the artist’s personal website.
In 2010, Ai Weiwei covered the floor of the
The sunflower seed, a common Chinese
Alessandra Bonanomi Staff Repo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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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그래피티 작가이자 영화감독 뱅크시는 사회정치적인 사안에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 는 예술가다. 이러한 모습은 콜린 데이의 다큐멘터리 ‘세이빙 뱅크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뱅크시는 전쟁과 파시즘, 소비지상주의를 경계했으며 위선과 탐욕, 빈곤으로 얼룩진 세상을 바라봤다. 그는 가자 지구에서 촬영한 ‘올해는 당신이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세요’라는 영상에서 이스라엘의 폭탄이 떨어진 가자 지구의 처참한 모습을 담기도 했다.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힘 있는 자의 편을 드는 것과 다름 없다. 우리는 중립을 지켜선 안 된다.” 지금도 가자 지구의 벽 한 켠을 장식하는 뱅크시의 목소리다. 2015년, 뱅크시는 디즈니랜드를 패러디한 ‘디스말랜드’를 열어 자본주의와 기득권, 권력의 남용을 비판 했다. 디스말랜드 속 신데렐라 성. 이 곳에선 자포자기한 난민들로 가득한 배와 호박마차가 충돌하는데, 이는 다이애나 비의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연상시킨다. 경찰기동대 차량의 형상을 띤 워터슬라이드는 삐 뚤어진 권력을 암시한다. 뱅크시가 삐뚤어진 세상을 거리낌 없이 비판하는 예술가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지만, 예술가들의 정치, 사회 비판은 오랜 세월 행해져 왔다. 신고전주의 시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을 이끌던 장 폴 마라가 살해당한 사건을 그렸다. 미술사가 클라크는 이 작품을 ‘정치적인 요소를 담은 최초의 모더니즘 작품’이라 평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비판한 작가들도 있었다. 낭만주의 시대, ‘군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 린 들라크루아와 ‘메두사의 뗏목’을 그린 테오도르 제리는 사회계급간의 불평등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1950년대 오노레 도미에도 돈이 없어 비좁고 지저분한 열차 칸에 타야만 했던 승객들의 표정을 작품에 담았다. 도미에의 명작은 1950년대 사실주의 예술사조에 의해 재조명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주의 사조는 이탈리아에서 영화로 구현됐다. 이탈리아의 사실주의 영화들은 노동자층과 빈 곤한 이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고, 비토리오 데 시카, 페데리코 펠리니, 알베르토 라투아다 등의 감독 들은 그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들은 2차대전 이후 가난했던 이탈리아와 도덕의 상실을 직시했다. 당시 엔 극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 배우가 아닌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은 한번쯤 곱씹어볼 만한 영화다. 이탈리아가 경제난으로 허덕이던 시대, 주인공 안토니오는 직업을 찾아 전전한다. 운 좋게도 그는 포스터를 붙이는 직업을 구 했지만 일하는데 필요한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안토니오 부자는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지만 도둑맞았단 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 결국 안토니오 역시 타인의 자전거를 훔쳐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탈리 아 사실주의 영화들은 이러한 모순이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시절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위와 같이 예술의 사회비판이 그 역할을 다하며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도 많지만, 반대로 예술가 당사자 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경우도 있다. 중국의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의 사례가 그렇다.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아이 웨이웨이는 체제에 반한다는 이유로 모국인 중국으로부터 탄압받아 왔다. 2010년 그는 영국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 바닥을 1억여 개의 모조 해바라기 씨앗으로 뒤덮었다. 웨이웨이는 이 작품에 대 해 “해바라기 씨앗은 중국의 사회, 정치, 경제의 단면을 나타난다. 중국은 서구를 따라 세계화와 대량생 산에 나섰지만 그 바닥에는 저임금 노동자, 거대한 공장의 쓸데 없이 길고 복잡한 생산공정이 깔려있 다”라고 밝혔다. 인류의 역사 동안 예술은 수많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때론 종교적인 믿음을 뒷받침했고, 때론 흥미로운 오락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순수예술로 남은 적도 있다. 여러 역할들 가운데서도 예술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할 때 가장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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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is a Gender Equal Religion. Or Maybe Not.
Buddhism in the Korean Peninsula
Buddha permitted women to join his
Korean Buddhist nuns in history
Buddhism is one of the main religions
monastic community to participate in it
According to Buddhist expert Cho Eun-
in South Korea: in fact, 15.5% of the
as he ordained his maternal aunt and five
su, records of Buddhist women first
population is Buddhist. The religion first
hundred other women. In fact, Buddhism
appeared during the Three Kingdoms
came to the Korean peninsula from China
is one of the few major religions in which
period (AD 184/220–280): of a nun
during the 4th century. Nowadays, there
a female clergy exists alongside their
named Lady Sa. It was mainly in the
are the different schools of Seon (Korean
male counterparts. In the Buddhadharma
Koyro Dynasty (918-1392) when the
Zen), Jogye Order, Taego, Cheontae,
(teaching of the Buddha), no distinction
Buddhist Order became important and
Jingak Order and Won Buddhism, a more
is made between the genders. However,
many monks held notable positions,
modern and reformed Buddhism. Walking
there is a considerable gap between
whereas nuns were largely excluded.
around Seoul, one will often see people
the nondualistic ideal and what is
The situation made a turn for the worse
wearing light grey seungbok, or Buddhist
actually practiced. Over the centuries,
in the Choson Dynasty (1392-1910), with
monk clothes. On closer examination,
the infiltration of patriarchal society and
the government’s promulgation of an
many of those people are women.
cultural values significantly affected the
anti-Buddhist policy. Adopting the Neo-
In the early stages of Buddhism, Gautama
religion’s original idea of gender equality.
Confucianism ideology, the Buddhist community began to face discrimination; monks and nuns could not enter the capital and monasteries were built only in the mountains. Fortunately, Buddhism survived thanks to female members of the royal family who provided financial support to the Buddhist clergy for the preservation of temples. But it was also during that time in which Buddhist women suffered the double oppression of the government’s anti-Buddhist policies along with Confucian ideals that further supported female oppression. In the latter part of the dynasty, Buddhism deteriorated, with religious beliefs sometimes mixing
54
at the Baegyangsa temple in South Korea,
land,” The New York Times reported.
she does not use garlic or onions in her recipes—ingredients that some Buddhists
Social Status
believe stimulate libido. Jeong Kwan's
Interestingly, Buddhist nun Martine
cooking style is focused on dehydrating,
Batchelor who has experience of many
seasonality and fermentation. “She is
Asian countries, once highlighted
an avatar of temple cuisine, which has
that Korean Buddhist nuns have the
with shamanistic rituals. Later on, in
flowed like an underground river through
second highest social status among
the colonial period (1910-1945), the
Korean culture for centuries. Long before
Asian countries, after Taiwan. Korean
Japanese’ favorable attitude towards
Western coinages like slow food, farm-
monks tend to respect the nuns, and all
Buddhism allowed Buddhist nuns to once
to-table and locavore, generations of
nunneries in the country operate with
again learn their doctrine and practice
unsung masters at spiritual refuges like
full autonomy. Korean Buddhist nuns’
in influential ways. The condition of the
Chunjinam were creating a cuisine of
cohesive power, improvements in the
nuns also improved and meditation
refinement and beauty out of whatever
economic environment, rise in the role
practices were widely on the rise. After
they could rustle up from the surrounding
of women in the Korean society, the
the Korean War (1950-1953), many such nuns were involved in the large-scale reconstruction of temples to make up for the poor buildings they had received in the past. Major Buddhist nunneries began to appear in the 1950s—following the Purification Movement that fought for monks’ right to marriage.
Transmitting Buddhist recipes Korean Buddhist nuns are widely known for their cooking of vegan and vegetarian recipies. Jeong Kwan, a Zen Buddhist nun and chef of Korean cuisine, became famous cooking vegan dishes in New York. Based in the Chunjinam Herm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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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vent of nuclear families, and changes
male Buddhist Sangha Supreme Council
political support for their campaign—
in the religious practice may be some
forbade female ordination. Consequently,
even amongst human rights and feminist
of the reasons behind the remarkable
many women fly to Sri Lanka to become
groups.
development of the situation of Korean
bhikkhuni, Buddhist nuns. This is the
The fight for gender equality inside
Buddhist nuns.
case of Dhammananda Bhikkhuni; born
Buddhism is also acclaimed in Tibet. In
However, nuns are still exposed to
Chatsumarn Kabilsingh, she received full
2016, nuns at the Larung Gar Buddhist
unequal treatment compared to the
monastic ordination in 2003. However,
Institute, the largest Tibetan Buddhist
monks. Based on the book titled, Korean
female orders are not recognized by
academy in the world, held study
Buddhist Nuns and Laywomen: Hidden Histories,
Thailand’s conservative Buddhist clergy.
sessions on feminism sparking a nascent
Enduring Vitality, the number of writings
The government also perpetuates the
religious movement. The group has since
on Korean nuns remains few and nuns
disparity, exempting monks from paying
published a series of books on female
continue to practice their faith in rather
taxes but not nuns. According to The
Buddhist figures and annually puts out a
crowded and financially disadvantaged
Diplomat, Bhikkhuni controversy mirrors a
magazine raising their voices.
places relative to those facilities used by
broader culture of misogyny in Thailand,
Analyzing stories about Buddhist nuns,
monks.
which persisted despite the election of
it is clear that there is yet a long way to
the country’s first female Prime Minister,
go for the world to arrive at true gender
Buddhist female revolution in Asia
Yingluck Shinawatra, in 2011. Currently,
equality. Even if in countries such as
In 1928, a proclamation by Thailand’s all-
Bhikkhuni activists are struggling to find
South Korea and Taiwan, Buddhist nuns are respected and have autonomy, disparities can still be seen in many areas.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while Buddhism was born as a gender-neutral religion and evolved across the centuries because of sociocultural changes and the engendering of patriarchal ideas.
Alessandra Bonanomi Staff Repo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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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한국의 주요 종교 중 하나로, 인구의 약 15.5%가 불교 신자다. 불교는 4세기경 중국을 통해 한반 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서울을 돌아다니다 보면 밝은 회색 빛 승복이나 수도승 옷을 입 은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중 다수는 여성이다. 불교 초창기, 석가모니는 그의 이모를 비롯한 500명의 여성이 수도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실 제로 불교는 남성 성직자와 여성 성직자가 공존하는 종교 중 하나이며, 석가의 가르침에 따라 성차별 또한 없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침투한 가부장적인 사회 문화는 종교의 성 평등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여성연구소의 조은수 소장에 따르면 한국 불교 최초의 여승은 삼국시대 신라의 사씨다. 이후 고려 왕조(918~1392)가 들어서며 불교는 더욱 주요한 역할을 맡았고 승려들도 요직에 앉게 됐지만, 반대로 여승들은 배제됐다. 조선 왕조(1392~1910) 시대에는 억불정책까지 선포되며 불교의 입지는 더욱 나빠 졌다. 국가의 이념으로 성리학이 채택되면서 불교는 차별당하기 시작했다. 수도승과 여승들은 수도 한 양에서 벗어나 산 속에 절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불교는 승려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왕실의 여성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에도 불교의 여성들은 남존여비에 물든 성리학적인 이념과 왕조의 억불정책에 의해 탄압받았다. 때문 에 조선왕조 후기 들어 불교는 무속신앙과 뒤섞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 후 일제가 들어서 며 상황은 반전됐다. 불교가 국교였던 일본은 불교 교리를 배우고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을 허가했다. 아이러니하게 일제 치하 시절 불교의 전반적인 위상은 높아졌다. 한국전쟁 이후 많은 여승들은 대규모 사찰 재건사업에 합류했고, 또 ‘승려가 혼인할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 한국의 여승은 자연주의 채식요리로 유명하다. 그 중 백양사 천진암 주지스님 정관은 넷플릭스 ‘셰 프의 식탁’에 출연한 유명 셰프다. 그녀는 일부 불교 신자들이 성욕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기는 마늘과 양 파를 사용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그녀는 ‘건조’ ‘발효’ ‘계절성’에 초점을 맞춘 요리를 선보인다. 그 맛에 흠뻑 빠진 뉴욕타임즈는 “정관은 사찰음식의 화신이다. 그녀의 음식은 한국 의 문화를 관통하는 듯하다”라는 극찬을 보냈다. 아시아 국가를 여럿 경험한 여승 마르틴 배철러는 “한국 여승의 사회적 지위는 아시아에서 대만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고 강조했다. 한국 불교는 여승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고, 여승들도 자율성을 보장받는 다.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여승의 처우는 열악했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여권 신장, 핵가족의 출현 등이 여승의 지위를 향상시킨 배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한국의 여승은 여전히 남성 승려에 비해 다소의 불 평등을 감내하고 있다. 조은수 소장의 논문 ‘Korean Buddhist Nuns and Laywomen: Hidden Histories, Enduring Vitality’에 따르면 한국 여승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여승들은 남성 승려의 절보 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곳에서 종교적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의 여승들은 이보다 더 열악한 처우 속에 살고 있다. 1928년 태국의 ‘승가최고회의’는 여성의 수계를 금한다고 발표했다. 결국 많은 여성들은 비구니(여승)가 되기 위해 스리랑카로 떠났다. 저 명한 비구니 담마난다 스님도 스리랑카로 건너가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녀는 2003년 스리랑카에서 수 계를 받았지만 그때까지도 보수적인 태국 불교계는 여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을 차별하는 태국 사 회의 분위기는 2011년 잉락 친나왓이 최초의 여성총리로 뽑힌 이후에도 그다지 변하진 않았다. 불교의 성 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티벳에서도 제기됐다. 2016년, 세계에서 가장 큰 티베트 불교아카데미인 라렁갈의 여승들은 연구회를 열어 여승의 권리를 주장했고, 관련 서적도 출판했다. 여승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과 대만에서조차 불평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불교는 성 중립적인 종교로 태어났지만, 사회문화적인 도전과 가부장적인 관념들로 인해 여승의 권리는 점차 감소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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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â&#x20AC;&#x2022; 65 Interview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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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shooting photo
60
Bilal Bassal Alessandra Bonanomi Staff Reporter
Looking and Painting Through Windows. Born in Beirut, Lebanon, in 1973, Bilal Bassal is an artist currently living and working in Paris. After studying the art of drawing and painting at the Arts Fine of Institute in Lebanon, he moved to France. In 2000, he held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Beirut and then in 2002, he took part in the 12th Space International Print Biennial in Seoul. Since then, his artworks have been exhibited in Lebanon, France, Tunisia, Spain, Germany and South Korea. Alongside his paintings, Bilal Bassal creates illustrations that have been published on several magazines such as Le Monde Diplomatique. Below, an interview with the artist himself reveals Bassal’s artistic intent and the concepts behind his paintings.
What concepts do you usually express in your work?
we are able to visually access other people’s homes and the
Most of the time, I seek to convey our world; the history, people
outside world that envelops us. The window thus becomes the
and their mysterious exchange of emotions; the life that we live,
channel of continual communication with people on both sides
coexisting with others and nature. I have always been fascinated
being able to look within and without. Windows could essentially
by the subject of our humanity in general. At the same time, I like
lay bare the inside of all its details, dreams, complexities, and
to explore the idea of mediator, anything that comes in between
secrets but also allow for more openness and harmony. I have
what is seen and what actually is. In my first solo exhibition (2000),
always thought it interesting how windows are metaphorically
the mediator that I examined was “The Human Mask”—how
understood as objects that are open, while doors are considered
people use it to communicate with one another and disguise
closed.
themselves under the safety of such a mask, not having to show which was a concept that I painted about touching on how
Why and how do you create your artwork? How do you begin, and what techniques to do you use?
business and consumerism affects family structures and society
I liked to draw and paint since I was a child, I loved to challenge
at large. Next, the mediator was “The Misery” and now, “The
myself on the empty surfaces of paper, wood, canvas, and other
Window.” Both works show the importance of love and peace.
materials. The most important part of my art was always the
On this line, I would say that “The Window” is the work I consider
freedom to express my feelings to realize those concepts swirling
to be at the focal point of the concept of mediator. Through
around my head. Most of the time, I make rough sketches—on
that small space that usually takes different shapes and sizes,
paper—draft sketches to understand what it is I want to create.
our real faces. After that, that mediator was “The Bar 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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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we are currently living in the age of technology, many of the
moment on, my body is in the workshop, but I can feel that my
artistic mediums we use have electronic alternatives, but I like to
soul has flown away. Where to exactly? I couldn’t say…
stick with the traditional option of using original art tools to draw. tangible and realistic way, as I switch my mind from one subject
How and where do you usually find the inspiration for your artwork?
to the next, later returning to analyze what I have drawn so far.
I am inspired the moment I open my eyes. I observe everything
Sometimes I will take the time to research more to complete the
around me, really everything. That’s also why I think visual
final piece.
memory is so important in the life of an artist. But what matters
After sketching, I go on to preparation of the materials for the
most is the creative thought that pops in my mind at any
artwork. From time to time, I will pay me a trip to the Saint-Pierre
moment, at any day. During my high school years, a talented
Market here in Paris to buy various things I need, I realize this
young painter once told me a piece of advice that I have kept to
is all part of the artmaking process. When everything is set, I sit
this day: “A real artist is the one who can paint not only what he
in front of the blank canvas, ready to paint. This is my favorite
sees, but what he imagines too.”
A draft sketch often helps me visualize my thoughts in a more
moment; I think it’s similar to the feeling when an athlete is at
has been in my head for all this time. I play some music and
You also have a passion for creating illustrations for kids. What kind of content do you make for such audiences?
have a brush in one hand and the palette in the other. From that
Yes, I’ve had this passion for a long time. A lot of my work is
the moment just before the game begins, there is an excitement before what is about to happen. It is finally time to realize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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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d to illustrate magical stories. When I was young, I used to
Since then, my artwork has been seen in exhibitions across
write many short stories that would go into magazines and other
Lebanon, in France, Tunisia, Spain, and Germany. In 2008,
books. I think that kids are good readers and some of my best
I began working on my series with “Parisian Windows” and
critics. So when I create an illustration for a children’s book, I try
then presented that two years ago, in 2018, through my solo
to do my best, not only because children deserve that, but also
exhibition in Gallery Boushahri (Kuwait). The Museum curators
because it’s so fun to create a magical world and bring kids into
encouraged me to begin my second part to the series and I
that fantastical environment. When that happens, it becomes
believe it will be presented in another exhibition to take place in
easier to live our ordinary lives. Once in a while, we should go
the city of lights: Paris.
back to the imaginary world of magic and adventure.
Pablo Picasso once said, “When I was a child, my mother said to me, 'If you become a soldier, you'll be a general. If you become a monk, you'll end up as the Pope. Instead, I became a painter and wound up as Picasso”. When you were a child, what did you dream of becoming? As a child, I drew all the time, without thinking I would become an artist one day. In fact, the image of an artist as a profession back in those days wasn’t very positive. Maybe some people still think that today, but art was considered an unstable career. Still, I loved to draw and paint. I thought of it more as a hobby, that was, until I was 15 years old, which was when I stumbled upon a picture of an old artist who was painting despite his age. I was fascinated, and from then on, I started to truly dream of becoming like that man. I want to be able to draw and paint until the last day of my life.
What scares you most about the future? World War III. Well, I’m sure this subject scares everyone. By default, I’m an optimist, but when I follow current media and the development of modern-day technology like artificial intelligence, along with the fact that thousands of jobs are disappearing, I ask myself the question: is everything really going in the right direction?
Can you tell me more about your past exhibitions, present and upcoming projects? As I have mentioned before, people are the center of my interest because I believe that people are the ones mainly responsible for the way things are; the good and the bad. In the past, I participated and contributed to many collective exhibitions in Lebanon, sharing with others my interest with people and the human body. In 2000, I opened my first solo exhibition called, “Masks and…” in Beirut, interested by the hidden faces of people. This particular exhibition included around 40 different paintings. In 2002, I was able to present my artwork in an art museum in Seoul after winning 12th Space International Print Biennial and the prize which was winning an opportunity with international publi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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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빌랄 바살은 현재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다. 레바논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한 그는 2000 년 첫 개인전시회를 베이루트에서 열었고, 2002년엔 제 12회 서울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여하며 활동무대를 넓혔다. 그는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삽화를 게재하고, 여러 차례의 해외 전시회를 가지며 아티스트 빌랄 바살이란 이름을 알려왔다. <매거진 N> 은 빌랄 바살과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가 창문 너머 바라본 세상을 전한다.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편 이야기들을 매거진이나 책 등에 실은 적도 있다. 어린이는 좋은 독자이자 비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전하려 한다. 인간은 신비스럽기 그지 없
평가이기에 이들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한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을 환
는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교감의 대상은 때론 자연, 때론
상의 나라로 초대하는 것이 너무나 좋다. 개인적으론 성인들도 이따금 상상의
타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특정 매개체를 빌어 세상에 실존하는 개념들과 그 관
세계에서 모험을 즐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첫 개인전시회의 매개체는 가면이었다. 인간은 서로 소 통하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본 모습을 가면 아래 숨기곤 한다. 그 다음 전시회의
파블로 피카소는 이런 말을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
매개체는 바코드였다. 이를 통해 비즈니스와 소비지상주의가 전통적 가족 구조
다. ‘(네가) 병사가 되려고 하면, 장군이 될 것이고, 사제가 되려고 하면,
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표현했다.
교황이 될 것이야.’ 대신 나는 화가가 되었고, 마침내 피카소가 되었다.”
최근엔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창문’은 내 철
당신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
학이 담겨있는 핵심적인 매개체다. 우리는 다른 형태와 크기의 창문들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항상 그림을 그렸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
외부의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은 또한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내면과 소
다. 당시 전업 아티스트의 이미지가 그리 좋진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통한다. 창문은 우리 내면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을 발가벗기곤 한다. 역설적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술가는 더 이상 불안정한 직업이 아니다. 나
으로 창문이란 사물은 ‘폐쇄’와 ‘개방’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역시도 여전히 그리고 칠하는 것이 좋다. 15살 때까지만 해도 예술가란 직업이
도 하다. 닫혀있을 때도 있지만 인간은 창문을 열어 외부 세상과 만나고, 또 조
취미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고령의 나이에도 작품활
화되기 때문이다.
동을 이어가는 화가의 그림을 본 순간 매료됐고, 또 내 생각을 바꿨다. 그 사람 같은 작가가 되기로. 내가 죽는 날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작업과정과 기법들에 대해 설명해달라.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여러 감정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
미래에 대해 불안은 없나.
요하다. 스케치를 하며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정리하는데 오랜 시간을
3차 대전.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만 들어도 공포에 떨지 않나. 또다른 걱정거리
보내는 이유다. 스케치는 생각들을 시각화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스케치 후에
도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수천 개의 직업이 사라질
는 작품에 사용할 재료들을 정한다. 요새는 전자기기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낙관론자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물을 거 같다. “우리 모
작가들도 더러 있지만, 개인적으론 전통적인 도구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때때
두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가?”
로 생 피에르 마켓에 들러 다양한 도구와 재료들을 구입하곤 하는데, 나는 이 모든 것이 창작활동의 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빈 도화지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달라.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마치 운동선수가 게임
앞서 말했듯, ‘사람’은 내 주된 관심사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각 개인
에 들어가기 직전 긴장과 흥분을 동시에 느끼는 그런 순간과도 같다. 잠시의 침
은 그들의 존재에 따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여러 작가들과 함께
묵이 끝나면 결전의 시간이 다가온다. 한 손엔 붓을, 또다른 손엔 팔레트를 들
전시회에 참여하며 사람과 인체에 대한 흥미를 공유했다. 이러한 철학은 2000
고 작품에 집중한다. 집중할 때면 내 영혼이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
년 첫 개인전시회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도 하는데 그 순간을 말로 표현하긴 어렵다.
개인적으론 2002년 서울 전시회에 참여하며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후 프랑스, 튀니지, 스페인, 독일, 쿠웨이트 등 여러 국가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다. 언젠가
어디서 영감을 얻나. 눈 떠 있는 매 순간 영감을 얻는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을 관찰한다. 정말 모든 것 을. 예술가에겐 시각적인 기억들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언제라도 머리 속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창의적인 생각들이다. 고 등학생 시절, 어느 재능 있는 작가가 내게 건넨 말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진 짜 예술가는 그가 본 것뿐만 아니라 상상한 것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린이를 위한 마법과도 같은 그림을 오랫동안 그려왔다. 10대 시절, 내가 쓴 단
64
‘빛의 도시’ 파리에서 또다른 전시회를 갖길 기대하고 있다.
Arthur Pelletier
“‘창문’은 내 철학이 담겨있는 핵심적인 매개체다. 우리는 다른 형태와 크 기의 창문들을 통해 외부의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은 또한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내면과 소통한다. 창문은 우리 내면의 가장 비밀스러 운 부분을 발가벗기곤 한다. 역설적으로 창문이란 사물은 ‘폐쇄’와 ‘개방’ 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닫혀있을 때도 있지 만 인간은 창문을 열어 외부 세상과 만나고, 또 조화되기 때문이다.”
65
68 ― 89 Culture 90 ― 91 Books
2018
03
club, since 2012 has become the birth-ground of novel creations by new artistsâ&#x20AC;&#x201D;bringing visitors into the creatorâ&#x20AC;&#x2122;s world through its underground compartments. To date, the works of 33 different artistic groups have been exhibited encompassing a diverse range of sectors such as photography, painting, and structural design.
D Project Space
D Project Space, an old pool
2017.10.21. ~2018.03.04.
Tue-Sun 1:00PM~10:00PM Mon Closed
68
Art Obsession Seo Eui-mi Staff Reporter
Inside the exhibition Come on in, relax, have a drink; you and me,
bar and café, D Project Space has
let’s talk art. The walkway begins at a
transformed into a rala-world where
mahogany-red European-style salon
visitors inside the “warm and romantic
featuring an introduction to the 200-piece
atmosphere forget a sense of reality as
collection displayed in Rala Choi: Rala Salon
if time has momentarily stopped.” The
at D Project Space, Hannam, Seoul.
reddish walls are the backdrop to Rala’s
Held October 21 to March 4, Rala Salon
new series of “people’s backs, personal
presents in vivid hues the artistry of
stories, memories, and his conversation
Korean photographer Rala Choi.
with nature experienced in many cities” (D
Along with its characteristic central
Project Space Press Release).
Rala Choi: Rala Salon
69
“I use a Nikon Fm2 and Pantex 6x7. Please stop asking me what camera I use… :( ” Upon entering, viewers notice the space has been divided into two sections: the welcoming atrium and main exhibition hall. Lined with some of Rala’s familiar artworks—collaborations with famous actresses, musicians, and models—the walls of the atrium gently ease guests into the second more abstract compilation of Rala Choi photography. This way, no one has to struggle to understand the artist’s intentions. Visitors walk along the corridor and find with each saturated image that Rala only wants to give a glimpse of what he saw of the 모호시리즈, 2014 Ⓒ Rala Choi 모호시리즈, 2015 Ⓒ Rala Choi 모호시리즈, 2015 Ⓒ Rala Choi
world. His subjects will never face the viewers because the lining of their backs tell the story better; in ways that faces and eyes cannot talk about relationships and conflicting emotions. Owing to the fact that his images are developed on film, there is a rawness in each frame even when the subjects are entirely clothed. During the early 2000s, prominent photo and imaging companies like Kodak and Fujifilm stopped all analog camera and film sales with the transition into digital photography and the era of filtered images. In just the past two to three years, however, many professional photographers, mainly in their 20s and 30s, have begun to opt for outdated analog devices and no-edit functions (TIME). Some have said it’s the phys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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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 선 여자, 2017 Ⓒ Rala Choi 뒤돌아 앉은 여자, 2017 Ⓒ Rala Choi
embrace, 2017 Ⓒ Rala Choi
immediacy and the thrill of knowing “this
likes to take photos. He wants people
is the only one; the only moment” that
to see them. What they take away from
draws photographers back to the old.
the frames is now their possession and
Knowing that the now is all that matters,
the artist has done his job. Both sides
the artist, medium, and subject are in
share the art, but no one has claim over
tight interaction. Effectively, the creator
the interpretation. His photos seem to
is completely engrossed in what he is
call that being alone together—also the
assembling. Hence, a masterpiece.
title of one of Rala’s series of pictures of
Perhaps film hinders and restrains the
women faced away in lonely expanses,
artist’s photo-editing potential, but often,
sometimes on the sea, a field, a forest.
there is more freedom in realizing that
Still always alone.
an analog photo came out just the way
As exhibition-goers roam around, they
it was supposed to. There’s no turning
order wine from the bar at the center of
back. That moment his finger presses the
the hall, taking a sip, whispering their
shutter button, another intimate story is
observations. It feels safe to be honest
told that cannot be found anywhere else
about the photos and pick which one
in the world.
they like. Wine and art, deep-red walls
But Rala doesn’t really care about
and vintage sofas near glowing lanterns.
formalities or the extravagance of
Some frames are understood, some not.
technical artistry and interpretation. He
Rala Choi: Rala Salon.
71
“What kind of solo exhibition goes on for 6 months?”
72
It began in the barracks of his mandatory
and crowds. Eventually, D Project Space
military service. One snap after another;
announced to extend the exhibition for
the self-taught photographer is now one
another 3-month session with visitors
of the most sought-out photographers
coming in numbers similar to the opening
amongst Korea’s young and trendy. His
months; the reception just as hot.
collaborations include photoshoots with
He is praised for his keen eye for
Hallyu star Song Hye-kyo for the cover
minimalism and unique extraction of
pages of magazines such as Vogue Korea
colors, mixing in faded shades with
and W Magazine, and his photography
bright striking colors to confuse and at
has also decorated the album covers of
the same time, comfort those who are
musicians/singers like Zion T., ZICO, and
yet unfamiliar with photographic art. At
Taeyeon for their immensely popular hit
31 years, Rala Choi has already found
titles.
a way to communicate with those of his
At first, Rala Choi: Rala Salon had been
generation, winning their love for both
scheduled to run for the typical 3 months.
is personal and commercial work. They
And then the visitors came in throngs
have enjoyed his salon.
2012년 문을 연 D Project 구슬모아당구장은 신진 아티스트들의 등용문이다. 그동안 33개의 팀이 이 곳에서 사진, 그림, 건축디자인 등 여러 분야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지금, 구슬모아당구장은 사진작가 최랄라의 ‘랄라살롱’(2017년 10월 21일~2018년 3월 4일)을 열고 있다. 이 전시회는 두 섹션으로 나뉜다. 관객을 맞이하는 첫 섹션은 유명 배우와 뮤지션, 모델들을 담은 일 반 대중에게 친숙한 작품들이, 다른 섹션에는 작가 개인의 철학과 사연이 담긴 작품들이 전시돼 있 다. 전시의 주인공 최랄라는 때론 빛 바랜 색과 강렬한 색을 혼합해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둘을 하 나로 모아낸다. “나 니콘 Fm2랑 펜탁스 6x7 씀. 제발 카메라 뭐쓰는지 물어보지마세요ㅠ_ㅠ” 최랄라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피사체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그 속에 담긴 사연을 충분히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용하는 그 의 작품 속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묻어 있다. 사람들은 아날로그 카메라의 매력을 ‘유일한 순간을 담은 유일한 컷’이라 표현한다. 작가와 매개체, 그리고 피사체 사이의 순간을 담아내는 카메라, 그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아름다운 순간이 포착 된다. 촬영 직후 사진을 편집하려는 이들에겐 아날로그 카메라가 불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랄라가 셔터를 살포시 누르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진작가 최랄라는 정형화된 형식이나 기술적인 해석에 얽매이진 않는다. 그저 사진 찍길 좋아할 뿐이다. 한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사진 속 피사체를 바라봐주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 엔 특이한 제목의 시리즈가 있다. ‘Alone Together’.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단어가 언뜻 와 닿진 않 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작품들 속의 여성은 바다나 들판, 숲 속에서 외로이 존재한다. 사진 속 그녀는 홀로 있지만, 이 작품을 바라보고 그 사연을 상상하는 관객들이 존재할 때 이들은 비로소 함께 한다. “무슨 개인전을 6개월이나 해?” 최랄라는 한류스타 송혜교의 <Vogue Korea> <W Magazine> 커버와 자이언티, 지코, 태연 등의 앨 범커버를 촬영해왔다. 한국에서 트렌디한 이들이 즐겨 찾는 작가로 꼽히기에 이번 전시회도 큰 관심 을 모았다. 사실 ‘랄라살롱’은 딱 3개월만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찾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3개월이 연장됐다. 처음 3개월과 비교해도 전시장 리셉션이 붐빌 정도로 여전히 뜨겁다. 와인과 붉은 벽, 빈티지 냄새를 풍기는 가구들, 전시회장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 ‘랄라살롱’의 분위기 를 느끼게 해주는 단어들이다. ‘랄라살롱’의 따뜻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시간이 멈춘 듯 현실을 잊 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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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 tastes 글 이주형
투팍(Tupac), 노토리어스 빅(Notorious Big), 제이지 (Jay-Z), 칸예 웨스트(Kanye West), 드레이크(Drake),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이들의 공통점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힙합 아티스트지만 그래미 어워드 (Grammy Awards)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을 수상하지 못했다.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지만 웨스 트 코스트와 이스트 코스트의 전설이 돼버린 이들도, 현재 힙합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들도 별 반 다를 거 없다. 전세계 음악인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그래미 어워드. 그래미는 올해의 앨범, 올해의 레코드, 올해 의 노래, 올해의 신인 등 4개의 본상과 각 장르별 상을 시상해 왔다. 그러나 보수적인 그래미는 오랜 세월 흑 인, 특히 랩퍼를 외면해 왔다. 2018년엔 그래미가 흑인 R&B 아티스트인 브루노 마스(Bruno Mars)에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레코드 등 7개의 왕관을 안겨주는 이변 이 연출됐지만, 랩퍼들은 역시나 찬밥 신세였다. 제이지 와 켄드릭 라마의 2017년 작이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올 랐을 뿐이다. 혹자는 올해의 앨범 후보조차 오르지 못했던 시절을 감안하면 큰 발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주요 차트에 서 랩 뮤직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다소 불합리하 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60여년의 역사 동 안 랩으로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팀이 있다. 그것도 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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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는 성차별, 인종차별 등 사회의 부정적인 단편을 바라
1975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로린 힐(Lauryn Hill).
보게 된다.
“우리 집에선 늘 음악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머니는 피
이듬해인 1998년, 로린 힐은 솔로데뷔작 ‘The Mised-
아노를 치셨고,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셨다. 어린 시절부
ucation Of Lauryn Hill’을 발표했다. 앨범명부터 알 수
터 음악에 둘러 싸여 살았다”는 말처럼 그녀는 자연스
있듯, 잘못된 교육과 사회부조리, 물질만능주의를 고
레 뮤지션의 꿈을 키웠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발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수록곡 ‘Doo wop(that thing)’
와 마빈 게이(Marvin Gaye) 등의 모타운(Motown) 뮤지
‘Everything is everything’ 등에서도 절정에 오른 랩스
션들과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킬을 과시했다. 로린 힐을 온전히 담은 명반은 그녀에게
은 어린 소녀의 교과서가 됐다. 그녀는 열세 살 때 TV쇼
1999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을 포함한 5개 부문
‘It’s Showtime at the Apollo’에 아마추어 참가자로 출연
의 상을 건넸다.
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로린 힐은 싱어로 커리
이 앨범을 한 장르로 한정 짓긴 어렵다. 그녀는 ‘The
어를 시작했지만 그룹 솔트 앤 페파(Salt-n-Pepa), MC
Miseducation Of Lauryn Hill’에서 R&B에 바탕을 둔 네
라이트(MC Lyte)와 같은 여성 랩퍼들을 자양분 삼아 랩
오 소울의 공식을 따르기도 하고, 레게 창법을 소화하
퍼로서의 경력도 쌓아나갔다.
기도 하고, 비트 위에 랩을 얹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앨범
1990년 로린 힐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프라스 미셀
이 힙합팬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클래식으로 손 꼽히
(Pras Michel), 그의 친구 와이클레프 장(Wyclef Jean)
며, 또한 그래미 본상을 수상한 최초의 랩 앨범이라는
과 전설로 남은 그룹 푸지스(Fugees)를 결성했다. 1994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년 데뷔작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1996년 발매
아쉽지만 로린 힐은 2002년 발표한 ‘MTV Unplugged
한 두번째 앨범 ‘The Score’로 그래미 베스트 랩 앨범
2.0’ 이후로 오랜 기간 활동이 뜸했다. 꾸준히 나왔던
상을 수상하며 힙합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상업적으로
퓨지스 재결합설은 모두 루머로 판명났고, 2013년 탈세
나 음악적으로나 큰 성취를 이뤘음에도 이들은 이 앨범
혐의로 3개월간의 옥살이도 하며 개인적으로 힘든 시
을 끝으로 각자의 길을 걸었다. 비록 활동 시기는 짧지
기를 겪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팬들에게 뜻밖의 소식이
만 푸지스는 로린 힐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전해졌다. 로린 힐이 2018년 서울재즈패스티벌의 헤드
이다. 푸지스는 힙합, 소울, 레게의 요소를 한데 녹였고,
라이너로 처음 한국을 찾게 된 것이다. 그래미 어워드
이는 로린 힐이 솔로 앨범에서 보여준 작법에 큰 영향
최초로 본상을 수상한 랩퍼의 퍼포먼스, 곧 서울에서
을 미쳤다.
만날 수 있다.
그 사이 로린 힐 개인사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97년 7월 밥 말리(Bob Marley)의 아들인 로한 말리(Rohan
아웃캐스트 ‘Speakerboxxx/The Love Below’
Marley)의 아이를 낳으며 엄마가 된 것이다. 이후 그녀
아웃캐스트(Outkast)는 1991년 미국 애틀란타에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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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된 듀오다. 출신 지역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서던 힙합
CD를 책임진 더블CD 형식으로 구성됐다. 여기엔 사연이 있
(Southern Hip Hop)을 지향한다. 고등학교 친구였던 앙드레
다. 4장의 음반을 만들며 프로듀서로의 역량은 강화됐지만 둘
3000(André 3000)과 빅 보이(Big Boi)는 카페테리아에서 랩
이 추구하는 음악은 궤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둘은 아
배틀을 주고 받다 팀을 만들었다. 애초 둘이 생각했던 이름은
웃캐스트를 버릴 수 없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기로 했다. 결
사회부적응자를 뜻하는 ‘The Misfits’. 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국 빅 보이는 ‘Speakerboxxx’를, 앙드레 3000은 ‘The Love
사용하고 있어, 동의어인 ‘Outkast’로 팀명을 변경했다.
Below’를 나누어 제작했다. ‘Speakerboxxx’는 힙합에 펑크를
듀오 결성 당시 이들은 열 여섯에 불과한 고등학생이었지만,
더했고, ‘The Love Below’는 힙합의 비중을 줄이고 펑크, 재
여성 R&B 트리오 TLC의 프로듀서팀이었던 오거나이즈드 노
즈, 록, R&B, 전자음 등 여러 요소를 더했다.
이즈(Organized Noise)의 시야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다. 당
아웃캐스트의 5번째 앨범은 말 그대로 ‘실험적인 요소’들로 가
시 오거나이즈드 노이즈는 R&B 싱어 베이비페이스(Baby-
득했지만, 이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
face)와 프로듀서 엘 에이 리드(L.A. Reid)가 설립한 라페이스
들은 대중을 가벼이 여기지도 않았다. 흥겹게 따라 부를 수 있
(LaFace) 레이블의 프로듀서로 활동했었고, 프로듀서와의 커
는 멜로디와 재치 있는 가사가 담긴 ‘The Love Below’의 ‘Hey
넥션으로 두 고등학생도 라페이스와 사인했다. 레이블 입장
Ya’와 ‘Speakerboxxx’의 ‘The Way You Move’는 2003년을
에서는 최초로 힙합아티스트와 계약하는 모험이었지만, 둘은
대표하는 히트 싱글로 기록됐다. 흑인에 인색했던 그래미도
거침없이 올라갔다.
2004년 이들에게 ‘올해의 앨범’ 등 3개 부문의 상을 안길 수
1994년 발표한 데뷔 싱글 ‘Player’s Ball’은 빌보드 랩차트 정상
밖에 없었다.
에 올랐으며, 같은 해 발매한 데뷔앨범 ‘Southernplayalistica-
2006년 앨범을 끝으로 아웃캐스트는 현재 개인활동에 집중
dillacmuzik’은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오랜 세월
하고 있다. 빅 보이는 꾸준히 개인 앨범을 내놓고 있으며, 앙드
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앨범은 서던 힙합의 클래식으로 여겨
레 3000은 배우로 활동하며 간간히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
지고 있다. 큰 성공을 거두고 사라지는 ‘원 히트 원더’(One-hit
다. 각자의 영역이 확고해진 상황에서 둘의 재결합을 기대하
wonder)가 태반인 것이 뮤직비즈니스의 현실이지만, 이들은
긴 어려울 듯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유산이 랩 뮤직의 영
그렇지 않았다. 2년 간격으로 발표한 두 장의 앨범도 100만 이
역을 넓히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상 팔리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 둘은 아웃캐스트의 명반 으로 기록될 4번째 앨범 ‘Stankonia’를 2000년 출시하며 힙합 을 고수하기보단 여러 장르를 섞은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이들의 실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CD의 자리를 MP3가 대체할 즈음이던 2003년, 아웃캐스트 는 세계적으로 1,000만장이 팔린 걸작 ‘Speakerboxxx/The Love Below’를 내놓는다. 이 앨범은 각각의 멤버가 한 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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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Yo, remember back on the boogie when cats used to harmonize like Yo, my men and my women Don't forget about the deen, Sirat al-Mustaqeem Yo, it's about a thing If ya feel real good wave your hands in the air And lick two shots in the atmosphere! (Put them up, put them up) (Put them up, put them up) (Put them up, put them up)
[Verse 1] It's been three weeks since you were looking for your friend The one you let hit it and never called you again 'Member when he told you he was 'bout the Benjamins? You act like you ain't hear him, then give him a little trim To begin, how you think you're really gon' pretend Like you wasn't down and you called him again? Plus, when you give it up so easy you ain't even foolin' him If you did it then, then you'd probably fuck again Talking out your neck, sayin' you're a Christian A Muslim, sleeping with the jinn Now that was the sin that did Jezebel in Who you gon' tell when the repercussions spin? Showing off your ass cause you're thinking it's a trend Girlfriend, let me break it down for you again You know I only say it cause I'm truly genuine Don't be a hard rock when you really are a gem Baby girl, respect is just a minimum Niggas fucked up and you still defending 'em Now, Lauryn is only human Don't think I haven't been through the same predicament Let it sit inside your head like a million women in Philly, Penn It's silly when girls sell their souls because it's in Look at where you be in, hair weaves like Europeans Fake nails done by Koreans Come again Doo Wop (That Thing) Lyrics by Lauryn Hill
[H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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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 like looking 글 김보배 이주형
“계층을 구분 짓는 낡은 관습과 사고방식은 없어져야 한다.” 영국의 하이 엔드 스트릿 브랜드 어콜드월(A-COLD-WALL*)은 현실세계의 ‘차가운 벽’을 깨뜨리기 위해 탄생했다. 어콜드월의 디자이너 사무엘 로스는 2011년 친구 앤드류 하퍼와 함께 브 랜드 2WNT4를 런칭하며 패션업계에 뛰어들었다. 사무엘 로스는 *오프화 이트 디렉터 버질 아블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오프화이트 크리에이티브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자신의 브랜드를 준비했고, 2015년 자신의 브랜드 어콜드월을 내놓았다. 어콜드월은 리바이스, 나이키, 프라그먼트에 이어 오프화이트와의 협업을 앞두고 있다. 어콜드월은 사무엘 로스가 자라온 하위층의 문화를 반영한다. 컬렉션에 선 블루컬러의 작업장에서 볼 수 있었던 실루엣과 소재들, 색감을 종종 볼 수 있다. 비록 거칠었지만, 기존의 벽을 허물고자 했던 그 시도는 성공적이 었다. 어콜드월은 영국 스트릿씬을 넘어 패션의 주류로 올라섰으며, 브리 티시 패션어워드에서 ‘어반 럭셔리’라는 칭호도 얻었다. 어콜드월은 2018 S/S 컬렉션을 통해 냉혹한 현실사회와 보이지 않는 벽을 직시했다. 컬렉션 발표회장의 모델들은 사무용 메모지가 붙어있는 게시 판과 서류더미가 굴러다니는 미로형 무대를 거닐었는데, 이들의 움직임은 작위적이고 통제돼 있다. 그 속엔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지금도 존재하 지만, 어콜드월이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겠다”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사무엘 로스는 “어콜드월은 새로운 세대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도록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확고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미술, 음악, 디자인, 유스컬처, 그리고 스트릿 컬처가 더해진 것이 지금의 어콜드 월이다.
*
오프화이트 (OFF-WHITE) 미국의 DJ이자 디자이너인 버질 아블로가 런칭한 하이엔드 스트릿 브랜드. ‘젊음은 죽지 않는다’를 슬로건으로 2013년 런칭, 2014 S/S 첫 컬렉션을 공개. 몽클레르, 크 롬하츠, 반스, 나이키 등 다양한 의류 브랜 드와 협업, 2017년 6월엔 글로벌 가구브랜 드 이케아와의 협업도 발표. 2018 S/S Paris Showcase에서 기성복 브랜드와의 협업이 처음인 구두&악세서리 브랜드 지미추와의 컬렉션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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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 » United Kingdom
“Old and outdated customs that divide people into social classes should just disappear”. High-end British street brand A-COLD-WALL* was created to destroy that “cold world” enveloping society. A-COLD-WALL* designer Samuel Ross made his public appearance when renowned creative director Virgil Abloh, impressed with Ross’ work, called him up to work as his creative assistant for Abloh’s Milan-based fashion label OffWhite. On the job, Samuel Ross gradually prepared his own brand and by 2015, A-COLD-WALL* was displayed to the world, garnering international attention and boasting the subversive brilliance of the underclass. A-COLD-WALL* designs feature shades of blue and patterns reviving initial blueprinted layouts of Ross’ work. The edges are rough, needing to be smoothed down, but they represent a wall that has been destroyed. In the brand’s 2018 S/S Collection, A-COLD-WALL* revisited the themes of harsh reality and the invisible wall, clearing the way for models to walk on a maze-like stage of office memos and piles of documents. Their movements are contrived and minutely controlled, provocatively suggesting that “the wall obstructs human freedom and A-COLD-WALL* will call attention to the danger of overlooking this.” Touching on his brand Samuel Ross once said, “A-COLD-WALL* will open the way for a new future with the new generation” and its determined identity in art, music, design, and in youth and street culture.
2018 spring/Summer NIKE LAB X A-COLD-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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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to go 글 김보배 이주형
blog.naver.com/lsstudio
OPEN Sat : 5pm-7pm ADDRESS B1. 54-34, Mullae-dong3Ga, Yeongdeungpogu, Seoul TEL +82 10-8833-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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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end Theater
주말극장
“What is there to do at home? … It’s finally the weekend.” With a new story and performance every time, “Weekend Theater” does not fail to impress. It’s the stage where artists are given a chance to express their creative work and a space for tired audiences to be lifted of their spirits—Weekend Theater in Munrae-dong, Seoul. Since 2014, Weekend Theater has presented works covering the diverse genres of theater, polygonal art, and exhibitions every Saturday. On weekdays, it is where photographer Yokko continues his photography work, and on the weekends, it transforms in to a theater under its leader, Han Seung-youn. Going back and forth from studio to theater, Weekend Theater runs on a season basis and is approaching its 7th season set for March 24th-June 30th. Many people make their way to the Weekend Theater for its experimental and unorthodox repertoire of performances. All performances are free of cost but after a show, audiences are invited to donate by a system of payment by impression. Many of the aspects to a good show such as planning, publicity, and filming, are covered by the generous contributions of the Weekend The Theater’s various leaders to provide quality performances for guests. “Anyone can perform, anyone can enjoy the show”; in the words of the leader announcing no barriers to those who want to enter the Weekend Theater, the stage has truly become a place for everyone.
‘집에 있어 뭐해 … 그토록 기다리던 주말이자나’ 매주 새로운 이야기와 공연이 있는 ‘주말극장’ 표현의 기회가 필요한 예술가에게는 무대를, 일상에 지친 관객에게는 한 편의 멋진 공연을 선 사하는 공간. 서울 문래동의 ‘주말극장’이다. 주말극장은 2014년부터 매주 토요일 연극, 전시, 다원예술 등 장르에 제약을 두지 않는 다양한 공연을 열고 있다. 평일에는 사진가 요꼬(Yokko)로 일상의 직업을 이어가고, 주말에는 주말극장의 대장이 되는 한승연. 그의 작업공간인 스튜디오도 주말만 되면 극장으로 변한다. 시즌제로 운영되는 주말 극장은 어느덧 시즌 7(3월 24일~6월 30일)을 맞이했다. 평소 경험해보지 못했던 특이하고 실 험적인 공연이 많이 열려 이 곳을 자주 찾는 사람이 많다. 주말극장은 별도의 공연티켓을 판매하진 않지만,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이 감동받은 만큼 후원 하는 ‘감동후불제’로 운영된다. 주말극장 대장과 각자의 역할을 맡은 OO대장들은 좋은 공연을 함께 즐기기 위해 기획, 홍보, 촬영 등 공연에 필요한 거의 모든 부분을 지원한다. ‘누구나 무대에 올라 공연할 수 있으며,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 관객과 공연진이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대장의 말처럼 주말극장은 누구에게나 문턱이 없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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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the asian food 글 이주형
일본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몇 있다. 그 중에서도 스시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인이 즐기는 음식이다. 스시는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시야(초밥전문점)가 한국에서 성업 중 이다. 너무 많다 보니 어디를 갈지도 고민된다. 가격대도 다양해 체급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격투 스포츠처럼 라이트급, 미들급, 헤비급으로 나뉜다. 가격대가 높은 스시야는 계산서의 숫자가 6자리 를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많다. 이번에 찾은 곳은 라이트급 중에서도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서울 상 암동의 스시 키노이다. 처음 가는 사람들에겐 스시 키노이로 향하는 길이 험난할 수 있다. 스시 키노이는 대중교통이 다소 불편한 디지털미디어센터 부근에 있기도 하고,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서도 구석자리에 위치해 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배너는커녕 간판도 따로 없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다. 스시 키노이는 점심 스시, 저녁 스시 또는 사시미 코스를 바 건너편에서 만들어 내오는 오마카세 스 시야다. 바 또는 테이블에 착석하면 멸치오이 절임이 나온다. 입맛을 돌게 하기에 제 격이다. 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전복죽이 나오면 광어, 도미, 단새우, 유자가 곁들여진 한치, 살짝 익힌 방어, 장어, 바 지락, 낫토 매실이 얹어진 부추 등의 스시가 나온다. 간장이나 고추냉이를 더하지 않고 먹어도 간이 적당히 배어 있다. 중간에 나오는 생선구이와 가벼운 미소장국도 음식과 잘 어우러진다. 마음에 들 었던 스시를 한번 더 맛볼 수 있는 앙코르 스시까지 끝나면 후식으로 녹차아이스크림이 제공된다. 회전초밥처럼 메뉴를 골라 먹길 원하는 사람이나 대식가는 스시 키노이에 만족하진 않을 수 있다. 런치라 하더라도 1인당 25,000원이라는 가격이 부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가격에 이 정도의 스시 를 내놓는 곳은 흔하지 않다. 스시 키노이에선 합리적인 가격으로 기분 좋은 한 끼를 즐길 수 있다. # 흔히 알던 것과는 달리 스시의 기원은 동남아시아다. 기원전 4세기경 동남아에선 생선을 쌀과 소 금 사이에 넣어 발효시켜 먹었다. 쌀은 생선을 보존하기 위한 재료일 뿐 먹진 않았다고 한다. 스시는 헤이안 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그때도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오랜 세월이 흘러 에도 시대 말(19세기 초),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형태의 니기리 스시(손으로 뭉친 초밥)가 탄생했다.
OPEN 11:30am-2:30pm 18:00pm-10:00pm (일요일 휴무) ADDRESS 서울 마포구 매봉산로 2안길 19-5 TEL +82 2-3151-0887 점심 스시 : 25,000원 저녁 스시 : 35,000원 저녁 사시미 (스시 포함) : 5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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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새우와 살짝 익힌 방어 스시. 단새우는 많은 사람 들이 앙코르로 선택하는 인기메뉴다. 한국인의 입맛 엔 쌈장이나 초장에 찍어먹는 방어회가 익숙할 수 있 으나, 때론 스시로 즐기는 것도 좋다.
스시 키노이는 스시의 밥인 샤리와 그 위에 얹는 재 료인 네타의 균형을 잘 맞추는 곳 중 하나다. 또한 음 식의 간이 전체적으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기 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이 곳은 오마카세 방식으로 운영되기에 그 날의 재 료 상황에 따라 셰프가 알아서 음식을 내온다. 코스 시작 전 혹시라도 먹지 못하는 음식이 있는지 묻기 때문에 걱정 없이 스시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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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 Seoul
?
①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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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SAMARKAND 서울 중구 마른내로 159-21 02-2279-7780
양고기 꼬치 샤슬릭
① KUSHIMURA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3길 13 02-333-2650
닭완자 꼬치 쯔쿠네
?
Personality in Crevices and Corners Seo Eui-mi Staff Reporter
You first put the water to boil, then you take your monkfish, shrimp, and handful of sea squirts. Throw them all in together. Mix in thick red chili paste and some garlic; a spoon of Korean soy sauce to taste. It doesn’t take much, just fresh fish from the market…and maybe a bit of MSG powder. Lifting a spoonful to her mouth she likes the taste, and taking one hot sea quirt, she skillfully chews on it feeling the burst of aromatic soup in her mouth. When dinner time comes around, Yoo Jung-ok is a woman on a mission. She will lift her weak knees to the kitchen and immediately take out the pots she’ll use. There’s no need to think about the menu, she knows exactly what to make. At 92 years of age and with five children—two boys and three girls—all with their own families, she doesn’t need to cook. But as soon as family shows up at her door, she’s gets up from her spot on the sofa ordering granddaughters to “tie your hair!” and “set the chopsticks on the table; the silver ones are for your uncle.” Girls these days, they wear ripped jeans and bright red lip stick; almost as bright as her homemade chili paste. Back when she was young, before she was married, it was good to be sensible and hardworking. Women were valued for their strength in household labor and childbirth. “I was prettiest when I was eighteen. Eighteen and nineteen, which was when I got married.” Her father had been the one to approve of the match after seeing the determined young man who was to be his son-in-law. In marriage, wedding bliss was short as it was soon back to the field with ramie cloth to weave and crying babies to feed. Her first was a healthy girl, but so was the second: another girl in the family. She would have two more daughters but the middle two soon died of illness. Four births and still no son. Jung-ok had thought perhaps her husband should find a mistress to carry
more pregnancies. And so her fifth was a boy. The entire village
on the family line. She would remain the cho kang ji cheo, the first
came in celebration, congratulating her as she breastfed the little
wife (literally, the wife who has shared the husband’s difficulties),
son. Now, with all of them grown and married, she lives with her
but a younger bride would provide a son. The younger cheob
eldest son, but she secretly tells her grandchildren, “I cried more
(Korean for concubine) would probably be cheeky as a fox and
when my girls left for their husband’s homes. You see, girls take
snatch away the husband’s attention.
care of their mother better.”
Still, she would try until her body could no longer handle any
“Eat up, stay warm” she says, passing another bowl of s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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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Yoo Jung-ok Age 92 Nationality Korean
Children 5 Status Mother and Grandmother Specialty Korean soul food
You first put the water to boil, then you take your monkfish, shrimp, and handful of sea squirts. Throw them all in together. Mix in thick red chili paste and some garlic; a spoon of Korean soy sauce to taste. It doesnâ&#x20AC;&#x2122;t take much, just fresh fish from the marketâ&#x20AC;Śand maybe a bit of MSG pow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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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에 아귀랑 새우, 손질한 멍게 넣으면 돼. 고추장에 마늘 섞은 양념장 넣고, 간장도 한 숟갈 넣어. 크게 어렵진 않아. 시장에서 신선한 해산물만 좀 사오면 돼.” 한 숟갈 뜬 그녀는 뜨거워진 멍게 한 입을 능숙하게 씹으며 간을 본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유정옥 할머니는 가족에게 따뜻한 밥상을 내온 다는 사명을 지닌다. 그녀는 아픈 무릎을 곧추 세워 주방으로 향한다. 찬 거 리를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 그녀는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안 다. 2남3녀의 자녀와 손주를 여럿 둔 유정옥 할머니가 굳이 음식까지 내올 필 요는 없다. 하지만 가족이 그녀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 어나 밥상을 차릴 채비를 갖춘다. “열여덟일 때 제일 예뻤지. 그 시기에 결혼하기도 했고.” 아버지는 단호한 결 의를 보인 젊은 청년을 만난 후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달콤했던 신 혼은 짧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정옥 할머니는 모시 옷을 짜고 우는 아기를 달래는 가사노동에 매진해야 했다. 그녀의 첫 딸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세 딸이 더 태어났으나 중간의 두 아 이는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네 아이가 태어났지만 여전히 아들은 없었다. 유정옥 할머니는 어쩌면 남편이 가계를 이을 첩을 들을지도 모른다 고 걱정했다. 자신이 조강지처일지라도 아들을 낳을 의무를 저버릴 순 없었 다. 그래도 그녀는 몸이 닿는 데까지 노력했고, 다섯 번의 출산 끝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자녀들은 다들 장성해 출가했고, 그녀는 현재 장남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는 이따금 손주들에게 “내 딸이 시집갈 때 엄청 울었다고. 딸들이 엄마한테 더 잘한다고.”라고 말하곤 한다. “잘 챙겨먹고 든든해야지.” 그녀의 온정이 묻어나 있는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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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WHITE X Air Jordan 1’s “WHITE” 오프화이트 X 에어조던 1.
지난 1월 파리패션위크의 2018 F/W 오프화이트 런웨이에서 공개된 오프화이트 X 나이키 에어조던 1 화이트. 앞서 2017년 하반기 오프화이트와 나이키는 더텐(THE TEN) 캡슐 컬 렉션을 발매했고, ‘THE TEN’의 주역인 오프화이트 X 나이키 에어조던 1 시카고는 ‘올해의 신발’로 선정됐다. 이 제품은 기록적인 프리미엄이 붙을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다. 최근 공개된 모델은 전작의 실루엣을 그대로 유지한 채 소재와 컬러만 변형을 가했다. 이번 모 델은 2월 27일 유럽에서 우선적으로 한정발매 된다. 발매가는 190 달러. 유럽에서만 극소 량 발매될지 아니면 세계적으로 추가 발매될지, 아직까진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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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만큼은 강인한 여성이 되길 바랐던 어머니의 이야기 서의미 기자
용, 유령, 너구리 요리. 미국 이민 2세대인 중국계 여류작가 맥신 홍 킹스턴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이 자 그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야 했던 문화적 산물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서구의 사고방식을 갖고 자랐던 아시아계 작은 소녀 홍은 세탁소를 운영했던 부모님을 도우며 미국인의 양말을 빨래하고 셔츠와 타이를 다렸다. 그 과정에서 홍은 자신의 사회 적 위치를 깨달았을 지 모른다. 어른이 된 그녀는 그동안 가족들끼리만 간직해 왔던 비밀스런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놓았다. 맥신 홍 킹스턴의 ‘여전사’는 온전한 전기라고 보긴 어렵다. 킹스턴은 부모님-주로 어머니-이 들려줬던 믿 기 어려운 이야기들 위에 그녀가 체험했던 현실과 상상을 더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중국인 가족은 좋은 날이면 저녁 식사로 비둘기, 뱀, 달팽이를 먹곤 했다. 선반 위의 항아리엔 수십 년 묵은 술이 담겨 있고, 발효중인 곰 발바닥은 바닥에 굴러다닌다. 오래된 술은 간혹 아이들의 상처 에 바르는 연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순종적인 아내였다. 어머니의 삶은 여덟 명의 자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에 겐 기쁨을 주는 아들들과 그녀가 일생을 헌신한 남편이 있었다. 딸들도 있었지만 모두 알고 있다. 딸 들이 자라면 그녀 곁을 떠난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그래서 딸들을 그리 필요로 하진 않았다. 대신 어머니는 잠자리에 들려는 딸들에게 “강해져야 한다”고 속삭이며 아버지와 형제들을 대신해 전쟁터 에 나간 화목란(뮬란의 실제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킹스턴은 “어머니는 자신이 한 사람의 노예이자 아내로 자랐을 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겐 여전사 화목란의 노래를 들려주며 강인하 게 자라길 바랐다”고 회상한다. 홍의 어머니는 강인한 여전사는 결코 아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 중 반 이상은 그녀가 바랐던 꿈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상력을 더한 킹스턴은 용과 우뚝 솟은 절벽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불멸의 ‘중국스러움’을 강조한다. 어떤 이들은 킹스턴의 ‘여전사’가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킹스턴이 중국 가부장제와 샤머니즘을 묘사한 부분들을 살피면 일견 그럴 수 있다. 일부는 또한 킹스턴이 페 미니즘에 반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작가는 아내에 폭력을 가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썼을지언정 성 불평등이나 성차별적인 단어를 입 밖에 꺼낸 적은 없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녀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왔을 수 밖에 없다. 여성의 발을 아름답게 만든 다는 미명하에 행해졌던 악습 전족으로 중국 옛 여성들의 발은 멍들고 뒤틀려 있었다. 그러나 홍의 어머니는 “남성이 너무나 강인한 존재인 여성을 옥죄고 가두려고 전족을 신겼다”고 말하며 딸이 강 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여전사> 맥신 홍 킹스턴Ι랜덤하우스Ι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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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man Warrior: Memoirs of a Girlhood Among Ghosts Seo Eui-mi Staff Reporter
Dragons, ghosts, and cooked racoons—they were the backbone of her existence, and the only attachment she had to the culture of her first-generation Chinese immigrant parents. By calling forth memories of her childhood growing up a small Asian girl in California, Maxine Hong Kingston opens her family’s box of secrets to the world. But The Woman Warrior is hardly a memoir. Along parents’—mainly Mother’s—stories of Western ghosts and supernatural experiences—Kingston’s pages see-saw between fantasy and biography, telling the real in unreal ways. For dinner, if they were lucky, they’d have snake or garden-snail. On a shelf there was a jar of decades-old alcohol; a bear claw fermenting inside. Ever so often, the alcohol was rubbed as ointment on the children’s wounds. Mother was always the submissive wife. Her life revolved around her 8 children, 2 dead; children all the same. Of course, her sons were her source of delight, and it was her determined husband whom she would devote her life to. She had daughters, but everyone knows that “when you raise girls, you’re raising children for strangers”. They would not be hers for long. She did not need them. Still, at bedtime, Mother would begin her “talk-story” to her daughters, whispering that she had trained as a young girl to be strong. She had taken her father and brothers’ places in battle, fighting their wars, enduring the pain. Kingston recalls, “she said I would grow up a wife and a slave, but she taught me the song of the warrior woman, Fa Mu Lan. I would have to grow up a warrior woman”. Maybe Mother was never a female warrior, and maybe half of her stories were dreams, but in Kingston’s imaginative world, the dragons and the scars made perfect sense. The words strengthened an undying “Chinese-ness” to the most Americanized parts of the family’s Chinatown house. Critics of Kingston’s writing have said that The Woman Warrior reinforces Asian stereotypes in Kingston’s hyperrealistic portrayal of patriarchal and shamanistic China. Some accuse Kingston of being anti-feminist. And though it is true that the author writes of women having their feet bound, though she does not speak directly against the sexism she was exposed to, the good and the bad are what she believes make her completely and utterly Chinese. The bruised and disfigured feet of the Chinese women made them wobbly and unbalanced, but they were all at once lovely because “perhaps women were once so dangerous that they had to have their feet bound.”
<The Woman Warrior> By Maxine Hong KingstonΙRandom HouseΙ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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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â&#x20AC;&#x2022; 96 Opinion
2018
03
‘분노조절장애’ 시대 살고 있는 현대인,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박명윤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아시아엔> 보건영양 담당 논설위원
유대교 랍비 벤 조마는 “화(火)를 조절할 수 있는 자는 힘센 자보다 낫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도시의 정복 자보다 낫다”고 했다. ‘분노 조절장애’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아주 적확한 말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폭력범죄 가운데 우발적 범죄나 현실 불만 관련 범죄가 41.3%를 차지한다. 최근 ‘분노의 방’(Rage Room)이 20~30대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고 한다. 미국, 일본 등에서 운영되는 ‘스트레스 해소 방’을 모델로 서울 홍익대 근처에 지난해 4월 개장했다. 다섯 개로 나뉜 화(火)의 단계 중 하나를 선택하면 15분간 깨고 부술 수 있는 물품 이 제공된다. 단계가 높을수록 가격(2만~18만원)이 높아지고, 부술 수 있는 TV, 라디오, 프린터 등 전자제품과 그릇의 수도 늘어 난다. ‘분노의 방’에 들어가려면 서약서를 작성한 후 안전모를 쓰고 파편을 막아주는 작업복과 장화를 신어야 한다. 분노는 말과 행동이 돌발적으로 격렬하게 표현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장시간 노출되거나, 화가 가슴 속에 과도하게 쌓여 있으면 이것이 잠재돼 있다가 감정을 자극하는 상황이 생기며 폭발하게 된다. 이전에는 분노를 지나치게 억압하여 ‘화병’(火病)이 많았으나 요즘은 지나친 분노 폭발로 인한 ‘분노조절장애’가 많아지고 있다. 화병이란 우울증의 일종으로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신질환이다. 화병은 우울감, 식욕저하, 불 면증 등의 증상과 호흡곤란이나 심계항진(心悸亢進), 몸 전체의 통증 또는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느낌 등의 신체 증상 이 동반되어 나타난다. 화병은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적인 배경이 영향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어 병명(病名) 영문표기도 ‘hwa-byung’이다. 다음 12개 문항 중 1~3개가 해당되면 분노 조절이 가능한 단계이지만, 4~8개는 감정 조절능력이 다소 부족하고, 9~12개가 해당하면 전문가와의 심리상담이 필요하다. (1) 성격이 급해 쉽게 흥분하여 화를 낸다 (2) 남의 잘못은 그냥 넘기지 못한다 (3) 일이 안 풀리면 해결하기 보다는 쉽게 폭발한다 (4) 화를 조절하지 못해 중요한 일을 망친 적이 있다 (5) 화가 나면 주변의 물건을 던진다 (6) 무시 받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7) 잘한 일은 인정받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화가 난다 (8) 내 잘못도 다른 사람 탓을 하게 된다 (9)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아 운 적이 있다 (10) 화가 나면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한다 (11) 분노감이 생기면 조절되지 않는다 (12) 게임할 때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치민다
충동(분노)조절장애(impulse control disorders, anger disorder)란 ‘간헐적 폭발장애’와 ‘외상 후 격분장애’ 등 화 를 참지 못해 느닷없이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증상을 말한다. ‘간헐적 폭발장애’는 간헐적으로 공격적 충동이 억제되지 않아 심각한 폭력이나 파괴적인 행동이 발생하고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보험심사 평가원에 따르면, 간헐적 폭발장애로 진단 받은 환자는 2012년 1,479명에서 2016년 1,706명으로 늘었으며, 전체 환자의 30.4%는 20대 남성이었다. 분노와 우울은 언뜻 다른 범주처럼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얽혀 있다. 즉, 감정을 표출해 주변인의 일상 을 파괴하는 적대적 반항장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반사회적 성격 등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 공격성이 자신에게 향하는 우울, 불안, 강박 등의 증상도 있다. 공격성이 타인을 향하는 가해자 유형은 문제를 부인하고 남에게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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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준다. 스스로에게 분노하는 피해자 유형은 문제를 과장해 괴로워하는 편이며, 자신을 향한 극단적 분노를 자살 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인은 가정, 학교, 사회 등에서 끊임없이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분노를 느끼는데 이런 감정 을 배출할 곳도 없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쌓고 있다가 폭발한다. 우리 사회가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지 않아 병을 부추기고 있다. 물론 개인 성향도 있지만 사회적 요인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핵 가족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고민을 나눌 대상이나 기회 등도 적어지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 가타다 다마미(片田珠未)는 저서 <왜 화를 멈출 수 없을까>에서 “분노를 쌓아두었 다가 폭발시키기보다 표현하는 방법인 ‘화내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화내는 기술이란 사실은 폭발 을 방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화내는 기술’은 다음과 같다. (1) 분노의 원인이 된 사항에 관해 5가지 요소(행동, 해석, 감정, 영향, 희망)로 정리해서 말한다 (2) 본인의 의도를 전했다면, 이번에는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물어본다 (3) 상호 의사를 전달한 후 절충점을 찾도록 하지만, 만약 상대가 완고하다면 현실을 명확히 판단하고 포기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샤 리네한(Marsha Linenhan) 박사가 개발한 변증법적 행동치료(Dialectical Behavioral Therapy, DBT)는 성격장애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입증된 치료법이다. ‘주의 돌리기’와 ‘이완하기’ 등 두 가지 기법 은 자신이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주의 돌리기’는 분노의 감정이 인식되는 순간, 자신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즉 손으로 얼음 조각을 꽉 쥐거나, 손목에 채워 놓았던 밴드를 당겼다가 놓는 등의 순간적인 행동으로 주의를 돌린다. 또는 친구나 가족에게 전화를 하 는 등 타인에게 주의를 돌린다. 언제든지 실행이 가능한 목록을 만들고 이 목록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보는 것이 좋다. ‘이완하기’란 분노의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화를 이완시키는 방법이다. 분노의 감정은 체내 교감신경을 항진 시켜 온 몸을 긴장시키고, 머리에 피가 쏠리며, 흥분된 느낌을 받게 한다. 이완하기는 부교감신경을 불러일으키기 위 한 방법이며, 오감(후각, 시각, 촉각, 미각, 청각)을 이용한다. 나에게 익숙하고, 나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 이든 좋으며, 분노의 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목록을 작성해 놓는다. 분노조절장애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화를 통제하지 못하고 표출한 뒤에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지기 쉬우며, 이 로 인해 우울증, 불면증 등을 수반할 수 있으므로 치료를 받은 것이 좋다. 치료는 질환 별로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 로 약물치료와 정신치료(인지행동치료, 분석적 정신치료, 지지치료, 상담 등)를 병행하는 방법이 흔히 사용된다. 건강 한 삶을 위하여 스스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상황을 유연하게 해석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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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푸는 사람에서 문제 내는 사람으로
김희봉 교육공학박사 현대자동차그룹 인재개발원
우리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문제 푸는데 사용했다. 문제를 잘 풀면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더 좋은 직장을 구하 는데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어떤 조직에서든 문제를 잘 풀면 개인평가도 잘 받을 수 있다. 다양한 이유로 주어진 문제를 풀어온 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동안 문제를 얼마나 잘 풀 수 있느냐에 초점을 두고 지내왔다.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풀었던 문제의 대부분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낸 문제라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만들어진 문제도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제를 접하게 되면 어려움을 느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아마도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게 된다. 학생이라면 문제 풀이에 도움이 되는 수업을 듣고 책도 읽는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면서 개념이나 공식을 암기하기도 한다. 직장인은 예전 자료를 들춰보고 전문가 또는 선배들을 찾아가 묻기도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활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주어진 문제를 풀기에 적합할 수는 있으나 보통은 일시적이다. 이보다 난이도가 높은 문제나 응용 된 문제가 눈앞에 펼쳐지면 또 다른 방법을 찾고 연습해야 한다. 그야말로 문제풀이에 끝이 없다. 그런데 평생을 다른 사 람이 만든 문제를 풀면서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스스로 문제를 내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문제를 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문제를 잘 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해당 분야에 대한 넓고 깊은 지 식을 보유해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문제를 잘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기존의 것에 대 한 의심도 함께 있어야 한다. 불편함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정해진 틀에 맞추려고 하는 것 이 아니라 새로운 틀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타인이 만든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입장에서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입장으로 바뀌면 달라지는 것도 많다. 그동안 보 이지 않던 혹은 보려고 하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종의 거시적인 관점, 총체적인 관점이 생기는 것이다. 오너십 (ownership)에 기반한 애착도 생긴다. 몰입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창의력도 빠질 수 없다. 기존의 내용이나 방법만으로는 문제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를 내는 당사자가 그 누 구보다도 그 문제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고 연습을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오늘날 개인이나 조직에서 깊은 고민이나 성찰이 부족하고 변화와 혁신이 더뎌지는 이유를 스스로 문제를 낼 수 있 는 사람이 적거나 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에서 찾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자신의 삶과 일에서 주인이 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낸 문제를 풀기도 했지만 하나같이 스스로 문제를 냈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낸 문제를 풀기에 급급했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 문제를 내어 볼 때가 되었다. 문제를 푸는 사람에서 벗어나 문제를 내는 사람이 되는 시 점이 곧 삶의 주인으로 자리잡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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