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N Apri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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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N

Inspiring Asia Empowering People Leading Change

april 2018

N

No.57

9 772288 328008 ISSN 2288-3282

04

No.57


History of AJA, The AsiaN and Magazine N 2 0 0 4 .11.

아시아기자협회(AJA) 창립

2005.10.

AJA-JAK 포럼

2006.10.

2006 아시아기자협회 포럼

2007.03.

AJA-JAK, ‘IFJ 금강산 특별총회’

2 0 07.10.

아시아기자협회 후원의 밤 및 AJA Award

2008.10.

아시아기자협회 Eco 포럼

2 0 0 9.11.

아시아기자협회 포럼 및 AJA Award

2010.02.

아시아기자협회 룸비니 포럼

2010.07.

아시아기자협회 문화체육관광부 사단법인 인가

2 011.0 6.

아시아기자협회 기획재정부 지정기부금단체 선정

2 0 11. 0 7.

(주)아자미디어앤컬처 설립

2 0 1 1 .1 1 .

11월 11일 ‘아시아엔’ 한글·영문판 창간

2 0 1 2 .1 1 .

‘아시아엔’ 아랍어판 창간

2013.02.

수아드 알 사바 시집 ‘쿠웨이트 여자’ 번역 출간

2013.06.

6월 25일 ‘매거진 N’ 창간

2013.09.

아시아기자협회 ‘아시아 문화언론인포럼’

2014.03.

이상기 창립회장, 쿠웨이트 왕실 주관 황금보트상 수상

Asia’s Window to the World, the World’s Window on Asia 2 0 1 5 .1 1 .

‘아시아엔’ 창간 4주년 기념의 밤

2016.04.

‘2016 아시아기자협회 총회’ 및 ‘AJA Award 2016’

2016.05.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인도네시아 대통령 AJA Award 수상

2016.09.

아시아기자협회 ‘한몽미래포럼’

2 0 16 .10.

‘아시아엔’ 네이버스탠드 제휴

2 017.0 4 .

‘2017 아시아기자협회 총회’

2017.0 8.

제인 구달 박사-최재천 교수 초청, ‘AJA 에코 토크’

2017.0 8.

‘2017 AJA Global Leaders Forum Indonesia’

2018.03.

아시아기자협회 포럼


50개국 아시아기자협회 전문필진과 함께 만들어 가는 ‘매거진 N’

‘매거진 N’은 (사)아시아기자협회(AJA) 와 온라인 ‘아시아엔’(The AsiaN) 네트워 크를 기반으로 아시아 곳곳에 숨어있는 다양한 이슈를 보다 쉽게 풀이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젊은 층 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문화 전반을 다룸 으로써 Asia Next Generation과의 가교 를 만들어 나갑니다.

AJA in Brief 회원 52개국 357명 사무국 서울 지부 몽골, 네팔, 방글라데시, 터키, 중동 등 이사장

창립회장

김학준

이상기

한국 인천대학교 이사장

한국 한국기자협회 전 회장, 한겨레신문 전 기자

회장

명예회장

Ashraf Aboul-Yazid

Ivan Lim

이집트 The AsiaN 아랍어판 편집장

싱가포르 The Straits Times 전 기자

수석부회장

부회장

Eddy Suprapto

Chuluuunbaatar Dolgor

인도네시아 RCTI 전 보도국장

몽골 UBS 설립자

부회장

부회장

Norila Mohd Daud

Bishnu Nisthuri

말레이시아 malaysiaworldnews 편집장

네팔 네팔기자연맹(FNJ) 전 회장

부회장

부회장

Pooneh Nedai

강석재

이란 Shokran 발행인

한국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차장, 코리아헤럴드 전 기자

Asia Journalist Association (AJA) is… 2004년 11월 공정보도, 언론자유 수호, 저널리즘 발전 등을 목표 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등 동아시아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 등 아세안(ASEAN) 기자들이 중심이 되 어 발족했습니다. 이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기자들이 참여해 현재 52개국, 357명의 회원이 “한 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피와 땀을 아끼지 않는다”는 모토 아래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기자협회는 종교· 인종·민족·국가·이념을 초월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 환경보전 등 인류보편 가치 실현을 공통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The AsiaN (www.theasian.asia) is…

<아시아엔 영문판 메인>

<아시아엔 아랍판 메인>

2011년 11월11일 아시아기자협회가 창간한 인터넷 매체로 아 시아기자협회 소속 베테랑 언론인, 전문가들이 정확한 뉴스 와 깊이 있는 논평을 영어, 한글, 아랍어 등 3개 언어로 제 공합니다. ‘The AsiaN’의 N은 ‘미래비전(Next)’, ‘균형잡힌 뉴 스(News)’, ‘소통 한마당(Network)’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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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piring Asia Empowering People Leading Change

정기구독 및 광고문의 (O) 02-712-4111 (F) 02-718-1114 정기구독 (일시납 입금·신용카드 결제) 구분 구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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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FF 대표이사·발행인 편집장 고문 이사 경영기획실장 취재·편집 디자인

이상기 이주형 구명수 김규진 차재준 정현 서의미 Alessandra Bonanomi 김보배

Correspondents Alin Ferrer (Philippines) Ashraf Dali (Egypt) Bishnu Nisthuri (Nepal) Chuluunbaatar Dolgor (Mongolia) Eddy Suprapto (Indonesia) Ghina Halik (Lebanon) Gunjeet Sra (India) Ivan Lim (Singapore) Neelima Mathur (India) Norila Daud (Malaysia) Nasir Aijaz (Pakistan) Pooneh Nedai (Iran) Pramod Mathur (India) Shafiqul Bashar (Bangladesh)

제작·인쇄 홈페이지 제보 창간 등록 등록번호 발행 주소

㈜타라티피에스 www.theasian.asia 02-712-4111 / news@theasian.asia 2013.06.25 2013.05.02 종로 라00407 ㈜아자미디어앤컬처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35 화수회관 207호 (우 03068)

‘매거진 N’은 한국간행물위원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변화된 모습, 마음에 드시는지요?

<매거진 N>이 이번 호로 57호를 맞았습니다. 독자님의 사랑과 격려 덕분입니다. 저는 2013년 7월 첫 호에서 “매월 창간 호를 만든다는 각오로 독자들을 찾아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그 사이 우왕좌왕하기도 했지만 최근 몇 달 사이 이 다짐을 상당 부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되찾게 돼 무척 기쁩니다.

이미 살펴 보셨듯, 콘텐츠와 디자인은 금년 1월호부터 변화를 꾀했고, 좋은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대체로 “내용이 무척 젊어졌다” “딴 데서 볼 수 없는 아시아 곳곳의 소식을 전해준다” “무엇보다 디자인이 깔끔해졌다”와 같은 호평이 많이 나 오고 있습니다. 발행인이자 대표이사로서 꼼꼼히 읽으며 평가해주시는 독자님들과 해외에서 현지 소식을 전해주는 아 시아 각국의 기자들, 그리고 책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젊은 편집·제작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활자가 너무 작다”거나 “페이지마다 스페이스가 많아 내용을 더 채울 수 없겠느냐”는 세밀한 지적도 있습니다. 이 또한 심사숙고하고 머리를 맞대며 대안을 찾아보겠습니다.

존경하는 <매거진 N> 독자님. 저희 매거진은 3호를 더 내면 60호를 맞이합니다. 먼저 자족·자만하기보다 지난 5년을 겸허히 되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의 앞을 어지럽히지는 않았는지?” “독단과 아집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무엇보다 한 문장, 한 단어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는 않는지?”

스스로 묻고 더욱 마음을 다져가겠습니다. 독자님의 아낌없는 관심과 질책을 다시 한번 구합니다.

겨우내 숨죽여 땅을 헤집고 나온 새싹이 어느새 잎이 되어 무성해지는 것을 보니 완연한 봄입니다. 독자님들도 따뜻한 봄날의 기운,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발행인 이상기


Letter From N

To our readers, How do you feel about our new layout? This month, Magazine N brings to you our 57th issue, which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immense love and support from readers. You may recall what I wrote on our inaugural July 2013 issue: “We will publish each forthcoming issue with the passion put into our very first Magazine N.” Though I must admit that we experienced some bumps along the way, for the past few months, I truly believe that we, the Magazine N staff and I, have been living up to that promise. And as you will have noticed, our pages have completely changed since January, not only in design, but in the content. Some have said, “Magazine N has become so young,” “The pages tell us stories that we can’t find anywhere else,” and “The design is simplistic and clean,” indicating that we have been going in the right direction so far. As Publisher, I am always delighted to receive feedback from our readers, be they in Korea or overseas, and am truly grateful to our editing staff here that have poured their strength into the making of Magazine N. Of course, we have also received comments such as, “The words are a bit small,” or “There are too many blank spaces”—of which we equally accept and will take into consideration as we develop each new edition. In just 3 more publications, Magazine N will greet its 60th issue. But instead of puffing up with pride and satisfaction, we will humbly look back on the work that has been done so far. We will ask ourselves, “Have we given harm to anyone in the process?” “Are we simply wallowing in our own dogmatism and stubbornness?” and finally, “Are we giving our best for every sentence and phrase; every word?” We will not forgo asking these questions and request that you, as our readers, continue to support us with your interest and comments. The seedlings that had been quietly holding their breath under the cold soil recently burst forth as baby leaves; now they are fully grown—Spring has arrived. Thank You.

Publisher of Magazine N

Lee Sang-ki


ON THE COVER MAGAZINE

N

No.57

Inspiring Asia Empowering People Leading Change

APRIL 2018

No.57

9 772288 328008 ISSN 2288-3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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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찢어진 종이 밑에는 여러 얼굴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 얼굴들 은 그들을 정의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고요. <매거 진 N> 57호는 인종과 사회문화 집단에 따른 정체성을 다룹니 다. <매거진 N>은 이번 호를 시작으로 아시아에 담겨 있는 여 러 유형의 정체성을 하나씩 벗겨나갈 예정입니다.

Between the ripped paper you will find faces of different shades and sizes. Each face describes a particular identity inherent to an individual; our faces are the physical expression of our singularity and complexity. In our 57th issue of Magazine N, we introduce the many layers of socio-cultural identity found in the faces of our Asian neighbors, and with each following month, we will continue to explore this theme of “identity” in the numerous forms it takes within a person.

CONTENTS 6 Magazine N is...

10 Letter From N

12 Contents

16 Asia Round-Up

42

68


24 ASEAN

Singapore COUNTRY REPORT: Professional Ethics Still a Media Imperative

42 Special Report

Malleable Identity, Molded Identity 54 Topics

28 ASEAN

Will Najib Get Voters’ Support in the June 2018 General Election? 32

From Inconvenience to Innovation 58 Topics

Welcoming a New Phase of Active Cooperation

Southern Asia

Daewoo Making Inroads in Pakistan’s Public Transportation System 36

62 Topics

A Tourist’s Unconventional Route Through South Korea

Middle East

Spies & Journalists, the Thin Line Tightened between Media and Security

68 Topics

그림과 함께 한 40년, 이향의 불굴의 도전


74

82

92


74 Interview

박화수 82 Art Obsession

Paper, Present: 너를 위한 선물 88 Style & Tastes

GO & 우연하게도 최악의 소년

104 Books

92

Demian

Look Like Looking

PEACEMINUSONE

108 Opinion

94 Where To Go

지난 세기 미국의 영웅, 빌리 그레이엄 목사

보안여관 110 96

Opinion

사이공리

언제까지 ‘화의 노예’로 살 것 인가?

100

112

Map the Asian Food

Personality in Crevices and Corners

Yuna

Opinion

솔로몬의 지혜와 이타적 거짓 말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전인대)에서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폐기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그러나 시진핑의 장기집권에 대해 공산당 일 당 체제인 중국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국 혁명 원로의 2세이자 저명작가인 라오구이는 공개 성명을 통해 “마오 쩌둥의 종신집권은 1인 독재를 야기했고, 또한 국가를 암흑기로 몰아넣었다. 시진핑의 전임자 장쩌민과 후진타오도 이를 잘 알기에 헌법의 임기 규정을 지켰다. 이를 어기는 것은 역사의 퇴보이며, 시진핑도 종신집권의 길을 걸어 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독재자 마오쩌둥의 비서를 역임했던 전 공산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리루 이도 “베트남도 변하고 쿠바도 변하는데, 오직 북한과 중국만이 독재의 길을 걷고 있다. 어느 간부도 시진핑을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신문에는 온통

On March 11, 2018, Xi Jinping, with the support of the National

찬양하는 글뿐이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People’s Congress, successfully abolished the constitutional

이러한 움직임엔 학생들도 동참했다. 시진핑의 개헌안이 통과되기 직전 인

term-limit on the premiership, voting in favor of Xi’s indefinite

3월 초, 해외에 거주 중인 중국 유학생들이 대학 온라인 게시판에 시진핑의

rule. Meanwhile, voices of concern were raised at the prospect

사진 위에 ‘나의 주석이 아니다’(#NOTMYPRESIDENT)라고 쓰인 포스터를

of unchecked power.

게재한 것이다. 학생들은 트위터를 통해 “지난 30년 동안 중국의 성장을 이

Lao Gui, celebrated Chinese author and second generation of

끈 가장 큰 동력은 당 지도자의 권력에 대한 견제였다” “선거로 뽑히지 않은

the Chinese Revolution, said through a public petition, “Mao

지도자가 종신 독재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바람이 절대 아니다” 등의 의견을

Zedong’s rule led to uncensored dictatorship and a country left

내놓았다.

in darkness. Xi’s predecessors Jiang Zemin and Hu Jintao were

그럼에도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막기는 어려울 듯해 보인다. 개헌을 옹호하는

well aware of this and so abided to constitutional restrictions.

관변 학자들은 “중국이 당면한 도전을 돌파하기 위해 ‘공산당의 영도’를 헌법

Going against the supreme law will only mean a regression of

으로 제도화하고, 시 주석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당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history. Xi must not be able to rule indefinitely.”

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언론 통제도 이뤄지고 있어, 중국 봉황망은 개헌을

Li Rui, a former secretary to Mao Zedong and former director

앞두고 인민대표들의 신중한 표결을 촉구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가 곧바로 삭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spotted

제 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similarities between his previous boss and Xi: “Vietnam and Cuba have changed, but only North Korea and China are still going in the path of dictatorial rule. There is no official who does not support Xi and the nation’s entire press scene is filled with praise for the leader; I simply cannot look on,” he said, criticizing the legislative rule. Students across the nation also refused to remain silent about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Enraged Chinese students studying abroad uploaded posters with captions like “#NOTMYPRESIDENT” to online community boards in opposition. Many such students also revealed their thoughts

AP

through twitter saying, “For the past 30 years, China’s immense growth was powered by checking the authority of the party leader,” and “We do not wish for a leader not chosen by an election to become the nation’s dictator.” But even with all the criticism, the constitutional ruling is unlikely to change. Influential scholars in favor of Xi poster that it is necessary to build a strong political regime by stabilizing the rule of the single party leader. Severe press control has also been keeping a close watch on anti-congress statements; China’s Phoenix Web (ifeng.com) was immediately forced to delete an editorial that had been released pleading representatives to vote on the matter with discre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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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을 발행하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미투’(#MeToo•나 도 당했다) 열풍이 뜨겁다. 중국에서조차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지만 일본 은 의외로 별다른 반응이 없다. 대신 일본에선 ‘위투’(#WeToo·우리도 행동 한다)라는 운동이 물꼬를 트고 있다. 세계여성의 날이기도 3월 8일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지구촌의 미투 캠페인 을 소개하며 최근 도쿄도에서 임의단체 ‘위투재팬’(#WeToo Japan) 발족식 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가 성폭행 피해사실을 고백하며 그를 지지하는 서명운동이 열렸고, 이는 위투재팬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행사에 참여한 이토 시오리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

For South Korea and many other countries around the world, the

게 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고 강조했다.

#MeToo campaign spread like wildfire and it does not look like

개인과 단체를 중심으로 경제인, 대학 교직원 등이 연대한 것으로 알려진 위

it will die down any time soon. Even in China, such campaigns

투재팬은 피해사실을 외부에 밝히고 피해자를 지지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became an unstoppable social movement. Meanwhile, those

해야 하는지 논의해 왔다. 이들은 이 캠페인에 공감하는 기업과 단체가 ‘행

in Japan seemed relatively quiet and unresponsive to #MeToo.

동선언’을 공표해 성폭력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Instead, #WeToo (We Too Will Act) became the forerunning

미투 운동은 그동안 일본에선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이토 시오리

movement to take hold in the country.

와 유명 블로거이자 작가인 하추(이토 하루카)의 고백이 있기 전까진. 하추는

On March 8th, also International Women’s Day, Asahi Shimbun

2017년 12월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 재직 시절 심야에 직장 선배의 자택으

reported that recently, a group called #WeToo Japan had held

로 호출당했다는 등의 피해사실을 밝히며 사회적인 지지를 얻었다.

its inaugural gathering in Tokyo. In attendance was freelance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많다. 일각에선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

journalist Shiori Ito who claimed last year that she had been

기 때문”이라며 성폭행과 성추행 피해의 원인을 오히려 피해자가 제공했다고

raped by a former TBS reporter. A petition campaign soon gained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여성의 정치참여가 저조해 여성을 보호하는 제도를

momentum in support of Ito, resulting in the #WeToo campaign

구축하기 힘든 점도 있다. 여성 중의원 최초로 여성 총리에 도전한다는 내용

discussions. “Let’s think about what we can do together,” Ito

의 소설인 ‘총리의 남편’(2013) 저자 하라다 마하가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

emphasized during the meeting.

서 “여성을 정치적 소수자라고 표현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상하다”라고 밝

Since its inauguration, #WeToo Japan became a platform

힐 정도로 일본 여성의 정치 참여는 여전히 미미하다.

through which diverse groups of people ranging from individuals, associations, businessmen, and college professors could come together in solidarity to make known the violence occurring behind the scenes. #WeToo has as its ultimate goal that all relevant groups that sympathize with the victims would combine forces in a formal “Declaration of Action” to socially denounce all forms of sexual violence. It was a fact that the #MeToo movement had not run its expected course in Japan as it had elsewhere. That is, until the confessions of Shiori Ito and that of another popular blogger and writer, Haruko Ito (also known as Hachu). On December 2017, Hachu shared her experiences of harassment by a senior who summoned her to his home late at night, during which time she had been working at Dentsu Inc., Japan’s largest advertising agency. Hachu’s personal

AP

account led to a surge in tweets and many more victims telling of their own experiences. But, there are still many obstacles to be dealt with. Not everyone has been in support of the victims’ honesty; many have said that the fault was on the victims for wearing suggestive clothes or that the victims were the ones who gave the perpetrators the chance to abuse and violate them. Female political participation in the nation is also too dismal for any meaningful policy to be formed at this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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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인도네시아 경찰의 고위 간부가 “초등학생들이 마약을 구입해 복 용한다”며 초등학교 주변이 마약의 온상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마약 밀매의 온상이 전혀 뜻밖의 장소인 교도소인 것으 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사건을 지휘한 이는 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형수였다.” 부디 와세소(일명 부 와스) 인도네시아 국립마약청(BNN) 청장이 2월 7일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 자리는 수마트라 섬 북부에서 각성제 11㎏과 합 성 마약 1만8천 정을 압수한 사건에 대한 브리핑이었다. 사건의 주모자는 불 법 마약 사건으로 2차례나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돼 있는 사형수인 것으로

A couple of months ago, one of Indonesia’s high-ranking officials

밝혀졌다. 교도소 내 휴대전화 사용은 당연히 금지돼 있지만, 그는 공공연히

announced that “elementary students were buying and abusing

휴대전화를 사용해 외부의 부하들에게 밀매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

drugs,” making the shocking statement that school parameters

사례와 같이 수감 중인 밀수조직 두목이 교도소에서 휴대전화로 밀수를 지

had become a hotbed for drug trafficking. Later on, however, it

시하는 사례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was found that Indonesia’s drug dealing hotbeds were actually

인도네시아 국립마약청에 따르면 미얀마 등지에서 생산된 마약류는 말레이

the prisons—instantly stirring nationwide controversy.

시아를 경유해 인도네시아로 들어온다. 마약과의 전쟁에 나선 필리핀 등 주

“The entire incident was orchestrated by a death row inmate,”

변국이 단속을 강화하자 전세계 마약 밀매 조직들은 동남아의 인구대국인

said Budi Waseso, head of the National Narcotics Agency (BNN),

인도네시아를 노리고 있다. 실제로 2017년 한해 수사 당국이 각성제 4.7t, 대

at a press conference in Jakarta on February 7. This conference

마 15t을 압수했으나, 당국은 2018년 2월말 작년 총량의 절반에 가까운 2.3t

was scheduled to address earlier confiscations of 11kg of

의 각성제를 압수하는 등 인도네시아로 반입되는 마약도 대폭 증가했다.

stimulants and 18,000 tablets of synthetic drugs. The culprit was

때문에 인도네시아는 마약 밀매 단속을 강화하며 다수의 마약 사범을 교도

a ringleader who had twice received the death penalty for drug

소로 보냈다. 그러나 관리 부실로 악명 높은 인도네시아 현지 교도소를 통해

dealing offenses, and though cellphone use is absolutely banned

마약 밀매 범행이 모의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inside the prison cell, word got out that he had openly used a cellphone to contact his subordinates to continue the business. And such cases of smuggling and outright abuse are not that rare a sight in some of Indonesia’s prisons. The BNN has sad that Indonesia has become a target for international drug dealers who have shifted their attention from

AP

the Philippines after President Duterte’s harsh measures to purge the country of drugs. Narcotics produced in Myanmar are seen to enter Indonesia by passing through Malaysia. Since the beginning of 2018, authorities confiscated 2.3t of stimulants— almost half of the amount found during the entire year 2017 (4.7t of stimulants and 15t of hemp). In response, President Joko Widodo raised the alarm for stricter control on drug dealing and many offenders were imprisoned. Ironically, though, the walls meant to contain offenders have only helped coordinate large-scale trafficking and only send an alarm ring of Indonesia’s prolonging case with prison-cell mis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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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휴양지 보라카이. 최근 환경오염으로 몸살인 보라카이가 일시적으로 폐쇄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보라카이는 매년 약 200만 명의 관광객들을 맞이하며 560억 페소(약 1조1천 700억 원)의 관광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섬의 해변은 두테르테 대통령 이 ‘시궁창’이라 표현할 정도로 각종 하수와 쓰레기로 오염돼 있다. 실제 조사 결과 보라카이섬 시설물 다수가 하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 등 환경법 규를 위반하고 있으며, 습지 9곳 가운데 5곳이 불법 건축물로 파괴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관광 당국은 2월 26일 보라카이 호텔과 리조트에 새로 인가 내주는 것을 6개월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리키 알레그레 필리핀 관광부 차

Boracay, a favorite amongst visitors to the Philippines for its

관도 “비수기인 6~9월 사이 폐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며 일시 폐쇄를 암

white sandy beaches, has for a time, struggled with pollution.

시했다. 더 나아가 두테르테 대통령은 3월 6일 “보라카이에 비상사태를 선포

Now, it has been announced that Boracay will temporarily close

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섬 주민과 업소 소유주들은 정부와 협력해 정화작

to begin restoration and reparation measures.

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일련의 사태 이후 지방 정부가 산지 이용 허가

Annually, Boracay greets around 2 million visitors and bring in

를 취소하자 영업 중단을 선언한 리조트도 나타났다.

revenue worth over 56 billion Philippine pesos (approx. 1.1 billion

보라카이는 사실상의 일시 폐쇄 수순을 밟고 있지만 결정을 되돌리긴 어려

USD). But Boracay’s beaches are not that spectacular anymore

워 보인다. 두테르테 대통령궁은 3월 15일 성명에서 “필요할 경우 보라카이

with filthy polluted water which President Duterte likened to

섬의 불법 구조물을 폭파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완다 툴포 테오 필리핀 관광

“cesspools” or gutters; hardly a touristic attraction. Reports have

부 장관도 “섬의 신속한 환경정화를 위해 일시적이고 전면적으로 폐쇄하는

shown that many of the island’s facilities are without proper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sewage and thus violate various environmental regulations.

이와 관련 보라카이의 배수시설 공사가 10년 넘도록 마무리 되지 않는 등 정

Some 5 out of 9 wetlands in Boracay were destroyed due to

부의 행정력 부족이 오염을 키웠으며, 섬이 폐쇄되면 수천 명의 생계가 흔들

illegal construction of buildings.

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지에선 이러한 강력한 조치가 공무원

Tourism authorities made the first move, declaring on February

들에 경종을 울려 실질적인 환경개선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

26th to halt authorization of any new hotel or resort on the island

는 것으로 전해졌다.

for 6 months. Undersecretary of the ministry of Tourism Ricky Alegre had said that if Boracay were to close, it should happen between June and September because of the low season, “There are fewer foreign tourists during that time,” he explained. Then, President Duterte on the 6th of March said that he was “considering declaring a state of emergency for Boracay,” and that “residents and business owners on the island need to cooperate with the government to begin the cleaning process.” These developments and local government measures to preserve mountainous regions from human damage led several resorts to close their doors. And it looks like the closure is unlikely to be revoked. On March 15, the Presidential Palace alluded to drastic measures to rehabilitate Boracay such as using dynamites to destroy illegal facilities on the island. Wanda Teo, Secretary to the Tourism department supported the measures to purify Boracay as swiftly as possible. At the other end of the argument, many have claimed Boracay’s filth and sewage problems due to the inefficiency of the current administration. Closing Boracay would be a way to solve this, but it would also put at risk thousands of livelihoods and businesses that depend on Boracay’s tourism sector. Nevertheless, there is still the expectation of a Boracay that would be restored to its former scenic glory through such government action.

19


아시아엔 종교 혹은 민족이 달라 갈등을 겪고 있는 국가들이 여럿 있다. 그 리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남아시아의 스리랑카도 그 중 하나다. 이 나라는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싱할라족 불교도가 주축인 정부와 힌두교 신자인 타밀족 반군의 내전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지난 3월 초, 스리랑카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싱할라족 불교도와 10% 미만인 이슬람교도 사이의 대규모 폭력사태가 촉발되면서 국가적인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3월 4일 캔디 지역에서 악몽은 시작됐다. 싱할라족 트럭 운전사가 무슬림 주 민들과 다툼 끝에 폭행당해 숨졌고, 이에 격분한 싱할라족 주민들이 5일 이 슬람 신자들의 집을 불태우는 등 폭력으로 맞선 것이다. 일부 싱할라족 주민

To this day, many countries in Asia are having to deal with

들은 “이슬람 신자들이 불교 신자들을 개종시키려고 하며, 불교 유적도 파괴

conflicts triggered by religion. One such country is Sri Lanka—

한다”고 주장하며 사태도 심화됐다.

where the nation’s Sinhalese Buddhists (around 70% of the total

정부가 캔디에 통행금지령을 선포하는 한편, 6일 부로 열흘간 전국적인 비상

population) and Muslim Tamil (10% of population) groups had

사태를 선포하며 수만의 군인까지 배치했지만 폭력은 계속됐다. 캔디 지역의

since 1983 to 2009 engaged in fierce dispute and civil warfare.

원 락슈만 키리엘라가 “불교도로서 부끄럽다. 무슬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Then came March 2018, with Sri Lanka imposing a nationwide

밝히는 등 정치인들도 자제를 촉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정부는 민족·

state of emergency due to sudden violent unrest between the

종교 간 갈등 조장을 막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차단했으며, 일부 지역에선 인

Sinhalese and Muslim communities.

터넷 접속까지 차단시켰다.

The nightmare began March 4th in the central district of Kandy.

사태가 촉발된 지 열흘 남짓, 다행히 갈등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스리랑카

A Sinhalese truck driver got into an argument with several

정부도 3월 15일 “인터넷 접속 금지령을 철회한다. 비상사태도 곧 해제할 것

Muslims, he was then severely assaulted and ended up dead.

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0일간의 악몽은 무슬림 주민 집과 상점 200

Infuriated by the incident, members of the majority Sinhala

채 이상을 불태웠고, 3명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Buddhist community set fire to Muslim-owned businesses and retaliated with more violence. Some Sinhalese cried, “Muslims are trying to convert Buddhists and try to destroy our religious buildings as well,” providing more fuel to the dispute. Despite establishing a curfew and sending military forces to pacify the situation, violence continued to simmer amid the ongoing status of emergency. House Representative of Kandy Lakshman Kiriella said that he was ashamed to be Buddhist at that moment and that “Buddhists should apologize to the Muslims in connection with the violence,” but to no avail. As the conflict ensued, government authorities were compelled to block the use of social media and in some areas internet service was entirely blocked. Fortunately, now, weeks after the incident, the main conflict has waned and the government announced it would lift the internet ban and soon after, also lift the emergency warning.

AP

But the aftermath of the violence can still be seen amongst 200 houses and shops burnt down and 3 having lost their lives in the commotion.

20


중동 자스민 혁명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소규모 평화시위가 지금까지 벌어 지고 있는 내전으로 격화됐다. 시리아 내전 얘기다. 이 전쟁으로 인해 그동안 35만명~50만명이 사망하고 1천만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내전이 만 7년 을 맞이한 2018년 3월 15일만해도 시리아 전선 두 곳의 주민 수만 명이 고국 을 등져야만 했다.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는 3월 15일 “시리 아 북서부 쿠르드 도시 아프린 일대에서 24시간 동안 약 3만명이 시리아 정 부의 관할 지역으로 피란했다”고 밝혔다. 지역 주민들은 남동부의 일부 통로 를 통해 이 곳을 탈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수민족 쿠르드족과 갈등을 겪고

What began as a peaceful uprising against President Bashar al-

있는 터키는 최근 대대적인 쿠르드 소탕작전에 나서며 아프린 일대를 포위하

Assad’s regime 7 years ago continues to this day as a raging

고 있다.

civil war in Syria. Due to the conflict, an estimated 400,000

이러한 대탈출은 동구타에서도 벌어졌다. 유엔 주재 시리아 대사 바샤르 알

Syrians have been killed and more than half of Syria’s 20 million

자파리는 3월 15일 유엔본부에서 “15일 동구타를 벗어난 주민 수가 4만명”이

pre-war population has been displaced either internally or as

라고 주장했다. 동구타는 반군 조직이 통제하던 곳이었으나, 러시아·시리아

refugees. Now running on its 8th year, on March 15th, once

연합군이 2월 18일부터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며 동구타 장악에 나선 것으로

again, thousands of Syrians had to flee from their home country.

알려졌다.

With Turkish-backed Syrian rebels taking control of the center

비극의 씨앗은 1971년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971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쿠데

of Afrin (a Kurdish city in northern Syria) against the Kurdish

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그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으며

minority, civilians bound for exits located near the nation’s

시리아는 2대에 걸친 독재 정권을 겪어왔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가문의 독재

southeastern border. According to the British-based Syrian

에 따른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제한적인 개혁개방정책을 시도한 적도 있

Observatory for Human Rights, in just 24 hours, some 30,000

으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전면 중단했고, 아사드 정부가 시리아 민주

civilians fled areas under Syrian national authority.

화를 요구하는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내전이 벌어졌다. 이후 내전은 정

Similar scenes of mass exodus occurred in the rebel-held

부-반군의 대립뿐만이 아니라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 반아사드

Eastern Ghouta region outside Syria’s capital, Damascus, when

연합과 이란, 러시아 등 친아사드 연합이 얽힌 ‘국제적인 내전’으로 비화됐다.

Syrian national forces in coalition with Russian forces led an indiscriminate attack against all those in the area. Bashar Jaafari, current Representative of Syria to the UN, said March 15, “40,000 civilians have fled Eastern Ghouta on the 15th alone.” Much of the tragedy is owed to dictatorial rule that began with Hafez al-Assad in 1971. His son, Bashar al-Assad, carrying on the regime, has led the nation under tight authoritarian control. Over the course of his rule, Bashar Assad sought to win a more favorable stance by introducing progressive reform plans, but those ideals soon clashed with groups that desired full-blown democratization and a prolonged civil war was the unfortunate result. To date, this conflict has spread into an “international civil war” with not only the fight between the Syrian government

AP

and the rebels, but between America, Israel, Saudi Arabia (antiAssad forces) and countries like Russia that are of the pro-Assad coalition.

21


24 ― 31 ASEAN 32 ― 35 Southern Asia 36 ― 39 Middle East


2018

04


Singapore COUNTRY REPORT: Professional Ethics Still a Media Imperative Ivan Lim is Honorary President of the Asia Journalist Association(AJA). He was labour correspondent for The Straits Times in Singapore, President of Confederation of ASEAN Journalists(CAJ), Secretary General of the Singapore National Union of Journalists, and Chairman of Environmental Forum for Communicators of Singapore(ECOS).

24

In the internet age, some people brush

but only up to a certain point. Free-

aside the need for conventional full-time

wheeling citizen journalists and bloggers

journalists or media organizations to give

do not make professional journalists

us our daily news. “That is already passe,”

redundant as such reporters go about

said a former reporter colleague of mine,

their business by giving prime importance

surprised to hear that Asia Journalist

to accuracy, fact-checking, and adhering

Association (AJA) accept mainly working

to public sensibilities in coming out with

journalists.

what they write or publish. In other words,

“Nowadays, a journalist is anyone who

their age-old ethics remain as important

posts online—the bloggers and citizen

as ever, making them play a lasting role in

commentators.”

journalism.

The former Straits Times employee-

My old-time fellow worker also did not

turned-entrepreneur concluded that

take into account the issue of media

the advent of social media made the

credibility—be it online or offline. In the

professional journalist and traditional

case of Singapore, both forms of media

news institutions superfluous. He

suffer from a severe lack of credibility.

was giving me a global picture of the

Mainstream mass media suffers from a

transformed media landscape shaped by

high credibility deficit because of its well-

Facebook, Twitter, Instagram, Linked-in,

known pro-establishment stance that it

Tumblr, and Pinterest.

has been adopting for years. And this,

And to be fair, my former colleague’s

not for professional reasons, but from the

observations can be said to be correct—

control exercised by the government via


a sophisticated system of management

government’s deep online surveillance

A polling of 1000 Singaporeans in 2016

control of the Singapore Press Holdings

capabilities.”

by a research firm found that 4 in 10

(SPH) which publishes the mass

Singapore’s authorities continue to

Singaporeans are skeptical about whether

circulation of English, Chinese, Malay,

closely monitor the political websites

the news they read is true or false. When

and Tamil newspapers.

and have imposed mandatory licensing

asked to make a comparison, they said

The newspapers have alienated a group

for websites that regularly feature local

alternative socio-political sites are more

of Singapore’s citizens for perceived

political issues and that attract at least

likely to provide fake or misleading

bias and commentary on public issues—

50,000 visitors monthly. Such popular

news then mainstream media sites and

emphasizing the ruling People’s Action

websites are also required to post a

government websites.

Party (PAP) government favorably in

$50,000 performance bond and must

Thus, the trust quotient among

contrast to its often slanted and marginal

remove objectionable material within 24

Singaporeans might well be shifting

coverage of the opposition parties. This

hours of receiving a government order.

from online to traditional media as far as

one-sided posture has led political elites

Under the Penal Code, the government

news reports are concerned. However,

to turn to online news providers for

has also punished bloggers who posted

they will still turn to citizen bloggers for

more critical and unbiased reports and

offensive views that are deemed to have

more critical and objective analysis of

evaluation of government policies and

scandalized court rulings or placed bias

government policies and check them

actions.

in their reviewing of public agenda.

against the accounts of pro-government

Following the 2011 General Election

The government’s measures have a

newspapers and their online sites.

that saw the opposition winning more

chilling effect on the blogging community

The proliferation of fake news has

seats than previously seen, more than

that deem it as press censorship. But

narrowed the credibility gap between

200 political websites were started

the authorities defended their actions,

the mainstream and online media, giving

by bloggers and opposition parties to

declaring they are holding bloggers to the

a fresh fillip to professional journalists’

provide critical and alternative takes on

same legal regulations of press ethics that

standing with the public.

government dealings. The list of such

staff of media organizations are expected

informal news outlets include the Online

to abide to.

Citizen, TR Emeritus, All Singpore Stuff,

What sets citizen journalists apart from

Yawning Bread, Singapore Alternatives,

their professional counterparts in media

MothershipSg, the Independent, and so

companies is the multi-layered gate-

on.

keeping that filters copies for accuracy,

PAP leaders, at the same time, have

sensitivity to race and religion, as well as

faced social media challenges by making

for legal infringements. Bloggers, lacking

their own presence felt on Facebook both

such rigorous editing and screening, have

to help publicize themselves and their

often run afoul of the defamation laws or

messages. The party is believed to have

Penal Code.

formed internet brigades to counteract

Some individual bloggers failed the

adverse online comments made by

decorum test by using vulgar or offensive

opponents and critics.

language and others engaged in personal

Noting the phenomenon, a critic of

vendettas through their postings. The lack

Singapore’s political scene, Professor

of in-built fact-checking and copy vetting

Cherian George, said: “Increasingly,

mechanisms has led citizen journalists to

Singapore’s online space resembles

rely on unreliable sources for their stories.

the offline world.” PAP’s hitherto low-

Such instances of misuse of blogging

profile supporters are becoming more

skills have led to a loss of confidence

vocal. “That is fine,” he added. But

among the conservative members of

“more questionable is the undeclared

the public. Simultaneously, mainstream

sponsorship of online media content

media and their online sites are gaining

and infiltration of comment spaces

more respect and credibility largely for

with human mercenaries (the so-called

stricter editing and more circumspect

internet brigade). Add to all these is the

reporting.

25


인터넷이 대세인 요즘, 어떤 이들은 하루 하루의 소식을 전해주는 일간지와 일간지 기자들의 필요성을 간과하곤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나.” 아시아기자협회(AJA) 회원이 인쇄 매체 기자들 위주로 구 성돼 있다는 말에 놀란 필자 동료의 말이다. “요즘 시대엔 블로거, 시민논객 등 온라인에 글을 올리는 모든 사람이 기자다.” 싱가포르 대표 일간지 스트레이트 타임즈에서 기자로 재직하다 사업가가 된 동료는 소셜미디어의 출현이 기자들과 매체를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필자에게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링크드인, 텀플러, 핀터레스트 등 SNS 플랫폼이 불러올 세계 미디어 시장의 변화를 제시했다. 그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자유로이 글을 쓰는 시민논객이나 블로거들과 달리, 전통적인 기 자들은 정확성과 신속성을 중시하며 공익을 추구하는 기사를 작성한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기자 를 불필요한 존재로 치부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 전통적인 저널리즘에 입각한 언론윤리가 그 어 느 때 보다 중요한 이 시점에 이를 따르는 기자의 역할도 그만큼 중요해 지고 있다. 이러한 논란에서 잠시 벗어나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사안이 있다. 언론의 신뢰도다. 필자의 동료는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언론의 신뢰성에 그리 큰 점수를 부여하지 않았다. 사실 필자도 이 부분에는 동 의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일부 주류 매체는 지난 몇 년간 친정부적인 성향을 보이며 신뢰도를 잃어왔 다. 싱가포르에선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등 여러 언어의 매체를 대량 발행하는 싱가포르 프레 스 홀딩스(SPH)가 정부의 관리와 감독을 받으면서 이러한 문제점이 두드려 졌다. 그 결과 매체들은 집권당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야당에는 불리한 기사를 보도하거나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일방적인 보도 행태는 정치 엘리트들로 하여금 정부의 방향성과 정책에 대 해 보다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온라인 매체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야당이 이전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한 2011년 총선 이후 싱가포르엔 정부의 행보에 대해 보다 비 판적이고 대안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웹사이트가 200곳 이상 생겼다. Online Citizen, TR Emeritus, All Singapore Stuff, Yawning Bread, Singapore Alternatives, MothershipSg, the Independent 등이 그 예 다. 반면 집권당인 싱가포르 인민행동당은 페이스북 등 온라인에서 약세를 나타냈다. 이러한 연유로 싱 가포르에선 집권당이 온라인 여론에 대응하는 단체를 조직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현상에 대해 싱가포르 정치평론가 체리안 조지는 “흥미로운 점은 싱가포르의 온라인 공간이 현실 세상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스폰서의 실체가 불분명한 온라인 매체의 콘텐츠들과 이른바 ‘인터넷 여단’을 통해 온라인 여론을 관리하는 정부는 분명 문제가 될 수 있 다”고 말한다. 실제로 싱가포르 당국은 민감한 정치 사안을 다루는 웹사이트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한편, 월간 5 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웹사이트는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만들었다. 이에 해당하는 사이트는 계약 이 행에 따른 보증금 5만 싱가포르 달러를 내야 하며, 정부가 판단하기에 부적합한 내용의 글은 24시간 이내에 삭제해야 한다. 또한 싱가포르 당국은 정부에 적대적이거나 정부 정책에 편향적인 글을 올린 이들을 형법에 따라 처벌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싱가포르에선 온라인 커뮤니티가 위축됐으나, 정부 는 언론사가 따라야 하는 언론윤리와 법적 규정을 블로거에게도 똑같이 적용한 것뿐이라고 항변했다. 시민논객이 작성한 글의 정확성, 인종 및 종교 등 민감한 사안들, 위법 여부 등을 심층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편집과 모니터링이 부실해 명예훼손이나 형법에 저촉된 블로거들이 종종 있 었다. 이들 중 일부는 저속하거나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했으며, 개인적인 감정이 실린 보복성 글을 게 재해 적법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부정확한 자료에 기반한 기사 작성도 문제다. 문제의 블로그들은 대 중의 신뢰를 잃을 수 밖에 없었다. 2016년 싱가포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4명은 자신이 읽은 뉴스의 진위여부를 의심하며, 주류 언론 혹은 정부 웹사이트보다 민간이 운영하는 대안 웹사이트에서 가짜뉴 스를 접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까진 싱가포르 여론이 온라인 매체보다 전통적인 매 체를 더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러나 대중이 정부 편향적인 매체와 웹사이트보다 정부 정책에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제시하는 민간 웹사이트로 언제라도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간과 해선 안 된다. 번역 차은서 인턴기자

아이반 림 아시아기자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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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블로거 아모스 이. 2015년 3월 리콴유 전 총리를 비판하는 동영상을 올려 구속됐다. 정치 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온 그는 2016년 12월 미국 망명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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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 Najib Get Voters’ Support in the June 2018 General Election?

Norila Daud is Former President of Confederation of ASEAN Journalist (CAJ), Senior Vice President of AJA, and Editor of malaysiaworldnews.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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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4th Malaysian General Election will

the country since Malaysia’s 1957

be held any time before June 2018, as

independence.

recently announced by Prime Minister

One veteran leader of the United Malays

Najib Razak.

National Organization (UNMO) and also

Right now, the buzz around the country

the former cabinet Minister in the 80s,

surrounds netizen’s comments on the

Tengku Razaleigh Hamzah, had predicted

General Election through social media

that the BN government would keep its

platforms. Comments and hot criticism

stronghold with the majority of the rural

of the government and opposing factions

population to support them along the

came in gradually as political leaders

way.

spoke at press conferences and special

Razaleigh’s prediction was based

meetings. They were gaining momentum

on the 2018 Budget announced by

for the upcoming General Election

the BN government in October 2017.

which is said to be the most challenging

The Budget, along with other policy

stage that the Barisan Nasional (BN)

documents, allocate special allowances

government will have to overcome to

to the farmers, fishermen, smallholders,

maintain its power.

and small entrepreneurs, to help them in

Some citizens on social media support

bad times such as after a flood, fire, and

the opposition and the Pact (Pakatan

following the monsoon season.

Harapan), hoping they will take over the

Records show that most voters, since the

BN government, while some still expect

13th General Election in 2013, have been

the BN to maintain its power in leading

on the BN side even though the party


managed to win by a small majority unlike

3.95 to 1 USD compared to its RM 4.50

previous elections during which the BN

value in the past two years.

had a 2/3 majority.

Another national issue is of the

According to netizen’s opinions and

government sales taxes (GST) which has

critics on social media, it seems as if

been a note of concern that opposition

Najib and his BN government will see an

parties have had to address to gain

end to its regime in the coming election.

voters’ support. On this, Najib had said

Nothing good has been said of Najib’s

that it was good of the government to

economic policies that cover almost all

impose the GST or else Malaysia would

levels of society, from the poor to the

have succumbed to recession.

rich. Though Najib’s transformation and

However, Mahathir (leader of the

economic policies are on the correct

Pakatan Harapan; PH), pact continues to

track and are supported by the World

campaign by playing on such issues and

Bank,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promising to do away with the GST if and

and the World Economic Forum (WEF),

when the opposition wins power in the

people are more concerned over the fact

upcoming General Election.

that Najib was accused for being involved

The BN government and the oppositions

in the 1MDB scandal. In this case, Najib

will simply have to go on playing their

was alleged to have misappropriated

parts in this election game to convince the

governments funds through the 1Malaysia

people which party is the most reliable,

Development Berhad corporation.

and thus suitable, to lead the government

Even though such allegations were

for the next five years.

cleared by the Attorney General and the

And at the end of the day, whichever

special prosecution committee formed by

party takes over as government will be

the Parliament to investigate the 1MDB

determined by the people; the voters of

case, the issue is still being carried by

the election.

foreign newspapers and portals to this day. Meanwhile, the Malaysian Deputy Minister of Communications and Multimedia, Jalani Johari, recently accused foreign media of spreading fake news on 1MDB and warned news portals that spread and propagated fake news would soon face stern actions. “The 1MDB case has been investigated by the relevant authorities including the Public Accounts Committee and all allegations about the misappropriation of funds were proven false,” said Jalani. Despite BN’s promising economic policies, oppositions predicted that Malaysia would soon be bankrupt due to Najib’s “heavy spending” and alleged misappropriation of funds. The national situation was said to worsen with the drop in the value of the Malaysian Ringgit (RM), but this claim has proven inaccurate as the RM has increased its value to 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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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집 라작 총리가 “2018년 6월 이전 14대 총선을 치를 것”이라 발표했다. 이를 두고 말레이시아에 서 여러 관측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온라인에선 총선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집권당이 권력을 지키기 매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온라인은 말레이시아 야당연합이 현 정부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을 때가 됐다고 여기는 이들과 1957년 말레이시아 독립 이래 정권을 유지 해온 정당 바리산 나시오날의 승리를 지지하는 이들로 양분돼 있다. 한편 1980년대 내각장관을 지낸 텡쿠 라잘레이는 농촌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현 정권이 승 리할 것이라 예측했다. 텡쿠 라잘레이는 2017년 10월 바리산 나시오날 정부가 2018년도 예산을 발표하 며 농어촌 주민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을 근거로 현 집권당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이전의 총선들에서 3분의 2 이상의 득표율을 얻었던 현 정권이 바로 직전인 13대 총선에선 국민 들의 지지를 잃어 소수 여당으로 추락한 것을 감안하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온라인 여론 또한 현 정권과 총리에 대해 비판적이다. 네티즌들은 현 정권의 경제 정책 전반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 며, 총리가 수십억달러 규모의 자금을 횡령한 국영투자기업 말레이시아개발유한공사(1MDB) 스캔들에 연루된 점을 비판하고 있다. 말레이 검찰 수사 결과 나집 총리가 혐의를 벗었음에도 그의 비리 스캔들 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의혹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나집 정권과 말레이시아 정보통신부 측은 해외 언론이 1MDB 스캔들 관련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고 비판하며 가짜 뉴스를 전파하는 매체들에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 했다. “관련 당국의 조사 결과 나집 총리는 모든 혐의를 벗었다”는 것이 이들의 변이다. 사실 말레이시아 야권은 13대 총선 직후부터 나집 총리의 스캔들 의혹을 제기해 왔다. 야권은 말레이시 아가 나집 정권의 ‘과다 지출’과 ‘스캔들’로 도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 경제난 은 말레이시아 통화인 링깃의 화폐가치 하락까지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고도 경 고했다. 다행히 지난 2년간 달러화 대비 말레이시아 화폐가치는 4.50:1USD에서 3.95:1USD로 상승해, 야 권이 상정한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총선의 또다른 쟁점이 있다. 부가가치세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재정 적자와 국가부채를 줄 이기 위해 2015년 4월부로 6%의 부가가치세를 부과했으나, 야권은 서민 부담 가중과 인플레이션 우려 등을 이유로 반대했었다. 야당이 일찍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승리했다면 부가가치세 논란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거 나집 총리는 부가가치세에 대해 “경제불황을 막기 위해서 신속하게 도입했다”고 밝 힌 적이 있으나, 말레이 야권 연합의 리더 마하티르는 나집의 대척점에서 표심을 얻고 있다. 그는 “야권 이 14대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부가가치세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총선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이 떠오르는 가운데 집권당과 야당 양측은 그들의 정당성과 유권자의 신뢰 와 지지를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민심을 얻는 자가 말레이시아의 향후 5년을 책임진다.

노릴라 다우드 전 아세안기자연맹(CAJ)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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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총선을 앞둔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 ‘1MDB 스캔들’로 한바탕 곤혹을 치른 그가 정권 유 지에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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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woo Making Inroads in Pakistan’s Public Transportation System Nasir Aijaz is a 40-year experienced Pakistani journalist. He has worked as editor, reporter, magazine editor, news editor and anchor in different newspapers, news agencies and radio news services. Until recently, he served as Bureau Chief and Editor at Pakistan Press International(PPI) news agency, Head of PPI radio news service, and Chief Editor at the Indus Chronicle. He currently serves as Editor at Daily Techno Times Karachi, Pakis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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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over two dozen South Korean

studies, requires at least 6000 buses to

companies have engaged in different

meet the shortage and replace obsolete

sectors in Pakistan for years, including

buses to support efficient commuting.

construction of roads, bridges, tunnels,

Currently, with an entire fleet comprising

and power plants, Daewoo is the only

of more than 350 buses, Daewoo Express

corporation facilitating the Pakistani

operates nationwide from 58 terminals

people through the public transportation

and sub-terminals in Sindh, Punjab, and

sector.

Khyber Pakhtunkhaw provinces, touching

Daewoo Express Limited, having had a

more than 60 cities and plying on all

significant presence in Pakistan’s public

major highways and motorways across

transportation for the past two decades,

the country. Over 6.6 million people travel

is now about to make yet another stride,

on Daewoo buses annually.

as it has offered to operate inter-city

Daewoo Express is the first and the

buses in Karachi, the capital of Sindh

biggest foreign investment Company

Province located at the Arabian Sea

with an advanced and organized

coast and the country’s largest city with a

transportation system in Pakistan. It

population of over 16 million.

is the only transportation company

The company submitted a proposal to

to have a nationwide network with

the provincial transportation department

various international trade links. Being

of Sindh regarding envisages operating

a transportation service provider, the

around 300 buses on the city’s five

company owns a large fleet of buses,

major routes, which, according to official

technically advanced workshops to


maintain the fleet for the safety of

project to start 32 buses initially on one

have been named the Orange Line and

passengers, state-of-the-art terminals,

major route, and in the second phase, run

Green Line and are being funded by

training institutes for drivers, and

buses on the originally planned 5 major

the provincial and federal governments

mechanical staff.

routes.

respectively. “At the outset, eighty buses

Daewoo Express has been rendering

The provincial Transportation Minister,

will operate on the Orange Line and forty

transportation facilities since its inception

Syed Nasir Shah, told newsmen recently

on the Green Line. The number of buses

in 1997 to the people of Pakistan. It is

that the provincial government has

will be gradually increased,” Channa

appreciated by the masses as well as by

earmarked such a big amount to place

said, adding, “But, before the launch of

the local governments of Pakistan for its

them at Sindh Modarba Limited, a newly

the Orange and Green Lines, Daewoo

consistent success.

founded bank operating under the Islamic

has been asked to start operating

In fact, Daewoo Express is a role model

system to support subsidy requirements

no less than twenty buses within the

and a trendsetter private transportation

of the project over a period of five years.

month, at Shahrah-e-Faisal, the major

company in Pakistan with some of the

There is a debt equity ratio—15 percent of

road connecting the city center to the

largest infrastructural setup. It uses the

transporters’ equity and 15 percent equity

international airport.

newest IT tools to satisfy customers

to be shared by the Sindh government in

and passengers. Recently, Daewoo

the form of an interest-free loan.

introduced a system to book and

Nasir Shah said that the transportation

purchase one’s preferred seat through

department received the proposal from

a mobile application without having to

Daewoo Express Limited which covers

personally visit the Daewoo Bus Terminal.

inducting 288 vehicles on five routes

Furthermore, the company has been

with an average fleet of 50 vehicles per

engaged in talks with the Sindh

route. The Chief Minister was eager to

provincial government to launch the

inaugurate this bus service on February

intercity bus service under the project

15, 2018, but again it was delayed due to

“Shaheed Benazir Bhutto Intercity Bus

certain hindering factors.

Service” since 2015 when they inked

“Currently, several road projects

the Concession Agreement as part of

underway in Karachi including the

a public-private initiative. However,

elevated ways for rapid bus service are

following the concession agreement, the

the main reasons of delay in launching

project required a financial close which is

the new bus service” said an official

still in process.

of the transportation department. He

The Sindh government and Daewoo

continued that the Chief Minister directed

mutually agreed to carry out a symbolic

the executing agencies to expedite work

project launching ceremony during the

being done on the roads so that the inter-

last quarter of 2015 to mark their historic

city busy service could be launched at the

intercity bus agreement. Daewoo Express

earliest moment.

had gone on to allocate some buses from

“The city will have a new bus service with

its existing fleet to run so that a portion of

a big fleet of Daewoo buses within the

the planned service operation could start

next two months,” the official said.

prior to a financial close, however, this

On March 1, the Chief Minister again

certain initiative did not follow through

held a meeting with relevant officials to

either.

review the progress of road projects.

But now, the new provincial Chief

His spokesman, Rasheed Channa, told

Minister, Syed Murad Ali Shah, who

The AsiaN and Magazine N, “The provincial

assumed office about one and a half year

government is anxiously awaiting the

earlier, came emphasizing the importance

completion of elevated highways and

of the public transportation sector and

other road projects to launch the new bus

approved PKR 195 million (roughly 1.732

service.”

million USD) under the Inter-City Bus

Two of the 5 major bus service sys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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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 20여 곳은 도로, 다리, 터널, 발전소 등 파키스탄의 사회인프라 구축에 기여해 왔다. 그 중 대 우 익스프레스는 파키스탄의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대우 익스프레스는 1997년부터 20년간 파키스탄 대중교통 발달에 큰 공을 세우며, 파키스탄 주 정부 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왔다. 현재 대우 익스프레스는 파키스탄 50곳 이상의 도시와 58곳의 터미널 을 돌아다니는 350여대의 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이용객은 연간 660만에 달한다. 대우 익스프레스는 파키스탄에 선진화된 운송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도입한 최초이자 최대의 외국기업 이기도 하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대중교통 업체로 버스의 안전을 책임지는 정 비소, 최신식 터미널, 운전자들과 정비 스태프의 교육시설까지 갖췄다. 또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 한 티켓 구매 서비스를 도입, 대중교통 산업에 IT 기술을 도입한 선례를 남겼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은 대우 익스프레스는 최근 신드 주의 주도이자 인구 1,600만의 대도시 카라치 에 신규 프로젝트 안을 제출했다. 사업안이 통과되면 대우 익스프레스는 시내외 주요 노선 5개를 경유 하는 300대의 버스를 운행하게 된다. 대우 익스프레스는 2015년부터 신드 주 정부와의 프로젝트를 준비해 왔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답보 상 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 1년 반 전 취임한 주지사가 대중교통의 중요성을 강조함에 따라 1개 노선에서 만 운영하려던 프로젝트가 총액 약 2억 루피(약 18억 7천만 원) 규모의 5개 노선으로 확대됐다. 나시르 사 신드 주 교통부 장관은 이에 대해 “5개 노선에서 288대의 차량을 운영하는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다. 주 지사도 2018년 2월 부로 운행을 개시하길 바랐으나, 약간 지연된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교 통부의 또다른 관리는 “카라치의 도로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 주지사도 이 부분 을 특히 신경 쓰고 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공사를 마쳐 두 달 이내에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주 지사는 3월 1일 관계 부처 공무원들과 도로 건설 진행상황을 검토하는 등 이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주지사 대변인도 <매거진 N>과의 인터뷰에서 “주 정부는 (버스가 다닐) 도로 공 사가 근시일 내에 마무리되길 바라고 있다”고 언급했다. 대우 익스프레스의 신규 사업이 시작되면 다섯 개의 주요 노선은 주 정부가 투자하는 오렌지 라인과 연방 정부가 투자하는 그린 라인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주 정부 관계자는 “오렌지 라인에선 버스 80대, 그린 라인에선 버스 40대가 운행될 예정이며 차량 대수도 점차 늘려갈 것이다. 이와 별도로 대우 익스 프레스 측엔 서비스 개시 전 도심과 공항을 연결하는 20대 이상의 버스를 시범 운영해 주기를 요청했 다”고 밝혔다.

나시르 아이자즈 아시아엔 파키스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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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을 누비는 대우 익스프레스의 버스들. 대우 익스프레스는 현지에 진출한 지 20년만에 파키스탄 의 대중교통을 이끄는 선두기업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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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es & Journalists, the Thin Line Tightened between Media and Security Ashraf Aboul-Yazid(Dali) is an Egyptian poet, novelist, translator, journalist, traveler and TV presenter. He won the Arab Journalism Award in culture 2015, and Manhae Grand Prize in Literature 2014. He has published more than 30 books of poems, novels, travels, and children literature. Some of his literary works are translated into Spanish, Korean, Turkish, English, and Persian. He is also President of AJA and Editor-in-Chief of the Arabic version of The As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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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year-old Zubeida is one of 1,500

she had been kidnapped by authorities

Egyptians who vanished from the streets

and tortured.

in what human rights campaigners call

TV host Amr Adib for the ON satellite

enforced disappearances. Zubeida’s

channel met with 25-year-old Zubeida

mother spoke to Orla Guerin (BBC

Ibrahim, her husband Sayed Abdel Azim

correspondent in Cairo) about the torture

sitting beside her, to deny “The Shadow

her daughter was subjected to at the

Over Egypt” and other similar articles in

hands of the police”.

person.

This was what BBC Newsnight tweeted

Meanwhile, the State Information Service

mid-February, to reveal what they

(SIS) issued a statement rebuking reporter

describe—between the lines—as the dark

Orla Guerin for committing “journalistic

side of the dictatorship; Egypt has been

misdemeanors”.

witnessing such scenes and the people

Guerin’s feature, broadcast on the 23rd

continue to suffer.

of February, was seen to have been

It took the State two days to defend itself

made from the testimonials of several

by slamming BBC’s media acquisition: the

individuals who claimed to have been

young Egyptian woman alleged to have

tortured by Egyptian authorities for being

“forcibly disappeared”—by Orla Guerin’s

involved in pro-Muslim Brotherhood (MB)

extensive BBC investigative feature “The

protests—which they say they had no

Shadow Over Egypt” telecasted after the

part in.

tweet—appeared in an interview with a

The SIS continued to demand that the

prominent TV host, refuting claims that

BBC “issue an immediate apology” over


the report for the “gross professional error

other, while the audience is left to

“spreading false news”.

regarding citizen Zubeida, to the extent of

determine which story could be true.

Egypt’s CPJ is concerned over the

absolute falsification and fabrication”.

Many journalists start out by seeking

detention and subsequent disappearance

On Tuesday, the 27th of February, the

the truth, but soon enough they tend

of Egyptian journalists on a regular basis.

head of the SIS, Diaa Rashwan, called on

to fall into the hands of politicians and

Ahead of presidential elections, the

Egyptian officials to boycott the BBC and

other groups, throughout which such

government has been keen on censoring

abstain from media interviews with its

reporters lose the sharp and honest

any critical reporting. “The Egyptian

journalists and producers until the media

judgment necessary in the court of ethical

authorities’ practices of arresting, hiding,

organization officially apologized and

journalism.

and intimidating journalists undercuts

published the SIS’s response to its report.

Long-standing Financial Times journalist

the already slim chances of having free

“The SIS asserts that such a boycott does

John Lloyd, who is also a Senior Research

elections,” CPJ’s Middle East and North

not involve or undercut the BBC’s right to

Fellow at the Reuters Institute, has said,

Africa Program Coordinator Sheriff

obtain information and those statements

“It is this impossible relationship between

Mansour said from Washington D.C.

necessary to carry out its duties,” the

spies and journalists, because the nature

Evidently, when truth is not easy to get,

statement read.

of the secret services is secret. The secret

fishing in a muddy pond of lies is the

Rashwan ordered the press center for

services are a problem to journalists and

more effective way.

foreign journalists to take the necessary

will remain so. In democratic countries,

measures to implement their statement

the openness ends more or less at the

regarding BBC’s Cairo bureau and to

door—if you know where the door is—of

work within the rules governing the work

a secret service.”

of foreign correspondents in Egypt.

If this is the situation in democratic

On her mother’s statements, Zubeida

countries, what would conditions look

refused to comment. Her husband,

like in Middle-eastern countries; where

a football coach, said he had been a

elections are a décor one-act play?

sympathizer and a member of the MB’s

On February 28, Egypt’s top prosecutor

Freedom and Justice Party, highlighting

ordered authorities to monitor media

that Zubeida’s mother was once a guest

for any “fake news” reports. After the

on a Brotherhood channel where she said

prosecutor general’s announcement,

that her daughter had been kidnapped

Egyptian authorities then proceeded to

and tortured.

arrest Ahmed Tarek Ibrahim Ziada and

Zubeida added that she and her mother

ordered the detention of Selma Alaa

also participated in the Islamists’ Nahda

Eddin over their roles in the making

sit-in camp in 2014, but for “only ten days

of a critical documentary film, “Minus

at the beginning”.

1095 Days”, which continues to be in

Later on, one of Turkey’s TV channels

production.

called Mekameleen TV (one of many anti-

These two film producers are activists

Egyptian regime stations that oppose

for the anti-government April 6 Youth

the current President) broadcast that the

Movement and had been making the

interview of Amr Adib on the One satellite

film as an attempt to refute claims in a

channel was a fabrication. Mekameleen (a

state-produced film called “1095 Days”

word which means “we are continuing our

that highlights President Abdel Fattah el-

mission”; a common opposition slogan

Sisi’s accomplishments in office. Ziada

outside of Egypt) reported that the video

and Eddin have both been charged

interview was filmed in one of the official

with insulting the Egyptian state, and

security locations and that Zubeida was

according to research by the Committee

being held captive by police and security

to Protect Journalists (CPJ), at least 20

forces who also forced her to deny her

journalists were behind bars in Egypt

disappearance.

as of December 1, 2017, and more than

And so it goes on, one story after the

half of those detained were charged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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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의 주베이다는 인권운동가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유명한 거리에서 실종된 이집트인 중 하나다. 그 녀의 어머니는 BBC 카이로 특파원에게 딸이 경찰에게 고문당했다고 털어놓았다.” BBC 뉴스나이트가 보도한 이 사건은 독재국가의 어두운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이집트가 이 러한 사실을 뒤엎고 자기 방어에 나서기까진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BBC는 “주베이다는 당국에 의 해 납치돼 고문 받았다”는 이집트 유명 TV호스트의 인터뷰까지 실었지만 이집트의 한 매체는 ‘날조된 사실’이라고 반박하며 사건을 무마시켰다. 이집트 ‘On satellite channel’은 BBC 기사와 뉴스 영상 ‘이집 트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부정하기 위해 주베이다와 그녀의 남편까지 불러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집트 국가정보국(SIS)도 성명을 발표해 BBC의 기사를 ‘언론인의 비행’이라고 비판했다. BBC의 특집기사는 무슬림형제단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SIS의 고문을 받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 로 작성됐다. 그러나 SIS는 “BBC는 주베이다 관련 날조 기사를 보도한 것에 대해 즉각적인 사과성명 을 발표하라”고 반박했다. 더 나아가 SIS의 수장 다이아 라쉬완은 이집트 공직자들에게 “BBC가 공식 적으로 사과하고 해당 기사에 대한 SIS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BBC를 보이콧해달라”고 요청했다. SIS는 “그렇다고 BBC가 취재하고 보도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라시완은 외신 기자들에게 “BBC가 SIS의 조치를 따르고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우선 주베이다는 그녀 어머니의 증언에 대해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한 주베이다의 남편도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했었다. 주베이다의 모친은 무슬 림형제단의 행사에 게스트로 딱 한번 참여하긴 했다. 주베이다가 납치돼 고문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 다”라고 주장했다. 관계자들의 진술이 뒤죽박죽 엇갈린 것이다. 후에 이집트 현 정권과 대립하는 터키의 한 방송국이 ‘On satellite channel’의 인터뷰가 크나큰 오류를 범했다고 보도하며 논란은 증폭됐다. 터키 ‘Mekamlinh’은 “보안이 철저한 곳에서 인터뷰가 촬영된 것으 로 보인다. 경찰과 정보 당국에 체포돼 실종된 것으로 전해졌던 그녀가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 실종 사 실을 부인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주장했다. 여러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중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이 진실인가? 기자들이 진실을 찾아 헤매는 동안 그들은 정치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예리한 감각과 정직 한 판단력을 잃어간 채. 이에 대해 베테랑 경제지 기자이자 로이터통신 선임연구원인 존 로이드는 “스파 이와 기자는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첩보활동의 본질은 기밀유지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조 차도 진실의 방 문은 닫히고 말 것이다”라고 밝혔다. 민주주의 국가 역시 이러한 상황에 처해는 있는데, 보여주기식 선거를 통해 중동을 거머쥔 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2018년 2월 28일, 이집트 당국은 ‘가짜 뉴스’를 보도하는 매체를 감시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를 기다렸 다는 듯, 이집트 당국은 정부에 반하는 다큐멘터리 ‘Minus 1095 Days’를 제작한 아흐메드 타렉 이브라 임을 체포했고 셀마 알라 에딘은 구금시켰다. 반정부 운동으로 유명한 이들은 엘시시 대통령의 업적을 강조한 영화 ‘1095 Days’를 비판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미국에 본 부를 둔 언론인보호위원회에 따르면 2017년 12월부로 이집트에선 최소 20명 이상의 기자들이 투옥됐으 며 수감된 이들 중 절반은 ‘가짜뉴스 유포’ 혐의를 받고 있다. 언론인보호위원회는 대선을 앞두고 있는 이집트 정부가 비판적인 보도들을 검열하고 관련 기자들의 신 변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염려하고 있다. 이와 관련 언론인보호위원회 중동·북아프리카의 코디네이터 쉐 리프 만수르도 워싱턴 디씨에서 “이집트 당국이 기자들의 신상을 위협하는 행위는 자유선거의 의미를 퇴색시킨다”라고 주장했다. ‘한 줄의 진실된 기사’를 쓰기 보단 ‘거짓의 늪’에서 물고기를 낚는 게 수월해 보이는 것이 이집트 언론의 현주소다.

아시라프 달리 아시아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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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대선 후보 플래카드. 대선을 앞두고 예민해진 엘시시 정부는 최근 언론 통제 강화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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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51 Special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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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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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makes you you? Is it your fingerprint? Maybe the passport you show to the officer before your flight. At any first meeting, people will ask one another, “What’s your name?”, “Your job?”, or “Where are you from?”. And then you will go down the list, describing yourself according to facts that were decided for you before you were born. By all means, our ID photos and personal information tell others about ourselves in a most objective and clear manner, but is that all there is to us? Identity—a term that has become so familiar and widely used that we do not stop to think what it specifically refers to. Dictionary.com has it that identity is the condition of being oneself, or itself, and not another. A second definition says that the word is the condition or character as to who a person or what a thing is; the qualities, beliefs, etc., that distinguish or identify a person or thing. That in mind, a mere passport could not describe the scope of our existence, let alone the values behind our every thought and action. Psychologists and researchers thus have tried to classify the many types of identity that makes each individual unique to themselves. Some of the largest categories include: racial, socio-cultural, gender, religious, online, and occupational identity. But even with this breakdown, as is expected of our complicated world, there are even more underlying layers to each of the different identities. For instance, gender itself cannot be seen as the conventional female and male dichotomy. LGBT groups and a new “third gender—the Hijra (intersex) gender of South Asia—break existing boundaries, seeking a more comprehensive overview of sexuality. For the sake of space and time, our April Magazine N looks into racial and socio-cultural identity, which is often considered the most basic identity that humans are associated with, and also the easiest to describe, or so it seems. In our future issues, we will offer more detailed descriptions of the various identities mentioned above to give as honest a depiction of humanity as we can. -Reporters’ Note

Malleable Identity, Molded Identity

Seo Eui-mi, Alessandra Bonanomi Staff Repo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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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ce that we are, the culture we live

Abraham Maslow’s famous “Hierarchy

are positive about the future, then comes

“They don’t know who I am; what they do know,

of Needs” in his 1943 paper, A Theory of

the Culture Shock, when the disturbing

is that I’m not nothing, and that I’m not no one.”

Human Motivation, human beings must

reality of social differences become

-Justin K. McFarlane Beau.

be satisfied of various needs depending

more irritating until they reach Gradual

Race and ethnicity usually tell us a lot

on level of urgency. When we are

Adjustment to finally feeling at home in

about a person’s culture, explaining

provided with our physiological (health,

Acceptance of the place they live in.

why and how a person would behave in

shelter, food) needs, we naturally desire

The amount of resetting that goes on

any particular situation. The country of

an upward movement towards esteem

in the mind is significant enough to

our nationality and the people we owe

and self-actualization which have to do

say that a person’s identity is likewise,

our ethnic origins to mark a significant

with finding the meaning of our existence;

altered, despite their outward image

portion of our language, mannerisms, and

who we are, and why we are.

being the same. It just goes to show that

the particular way we regard the world

And a large part of those questions is

neither cultural nor racial identity is fixed,

around us.

answered through the internal process of

prodding us once more to the fact that

Still, a distinction must be made of racial

belonging to a group—one’s awareness

we must never assume anything about

and socio-cultural identity in that while

of nationality, religion, social class,

our neighbors.

the former is generally an overt (visible)

generation, family, and friends; these are

Read more about a number of cultural

expression, cultural identity is a covert

a deciding factor of the way we perceive

and racial groups found in Korea and the

indication of a person’s inner self. A

ourselves. Community makes all the

nuances to their personal stories.

woman with dark brown skin-tone may

difference in bridging cultural and socio-

not altogether think like an African; neither

cultural identity to balance.

Korean Diaspora and the Gyopo

does a man whose passport reads that

But what happens when one’s race,

There are multiple reasons why people

he is from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nationality, and culture go out of balance?

choose or have to leave their homeland.

mean he will be white-skinned and tall.

The official term for that is culture shock.

When the scale of people spreading

There are so many exceptions to any

People who experience living in multiple

from one original country to another is

single race that to classify individuals

countries may be fortunate in being able

big, that’s referred to as diaspora. And

according to a single racial context is

to visit many places, but when this goes

according to Cohen’s theory, there are

next to meaningless, especially in such

on for extended periods, suddenly one

different types of diasporas such as

a globalized era. Though it is not always

struggles with identifying where they feel

imperial or colonial, victim or refugee,

the case, we may be culturally entirely

most included and at home.

labor or service, and trade or commerce.

different from who we are racially.

Studies show that there are four stages

Diaspora in terms of Korea comes with

Why does this even matter?

to adjusting to a new environment: first

important historical significance. The

Well, only because identity formation is

it’s the Honeymoon stage, when travelers

fact is that although Korea is still largely

in our blood. According to psychologist

are infatuated with their surroundings and

monocultural and the people are strongly

43


rooted to their homeland, around 7

United States, while je-il indicates a gyopo

terms with her identity. “My biggest time

million ethnic Koreans live abroad. Such

residing in Japan.

of identity crisis was during elementary

overseas Koreans are concentrated

Nevertheless, in this complex situation of

school. I had all types of friends, mostly

mainly in 5 countries: the United States,

terminology and definitions, people’s lived

white, and I wanted to be like them. In

China, Japan, CIS, and Canada.

experience is what really matters. For

most of the movies that came out during

This phenomenon has become so

sure, there is something special in having

my childhood, the female leads were

relevant that a term was created to

grown up abroad with Korean parents.

always white. I wanted to look like them.

refer to a specific portion of the Korean

What accounts for this identity shift?

When I started middle school, my friend

diaspora. Gyopo, also spelled kyopo, defines

Which language would be considered

demographic became mostly African

a native Korean who permanently resides

one’s native, or mother tongue? And what

American friends plus white people. I

in another country—even if said person

challenges would such people face living

learned to be myself then,” she said,

will return to Korea in the future. There

in a starkly different cultural environment?

recalling her past.

are several variations to this word such as

Sarah (alias), 33, considers herself a

Meanwhile, Lily (Hye-Young) is a 42-year-

dongpo, meaning “brethren” or “people

blasian, black Asian, woman. Raised by a

old translator and interpreter. Born and

of the same ancestry,” or gyomin (meaning

Korean mother and an African American

raised in Germany by Korean parents,

“immigrants”). Moreover, different terms

father, she was born in Germany and

she now lives in Daejeon. She introduces

are applied based on the countries of

grew up in the US. Now, Sarah is based

herself as a German-born Korean who

residency of the diaspora: the prefix je-

in Korea where she works as a teacher.

considers Germany her true home. But,

mi gyopo indicates a gyopo based in the

In the past, she had difficulty coming to

she has had her own difficulties with identity. Asked about her personal experience, Lily said, “During the 80s and 90s, there was no representation of Asians on German TV or Western media in general. Korea was hardly known at the time. The perception changed a little with the 1988 summer Olympics, and later with the 2002 FIFA World Cup. As a child and teenager, I spent years pondering whether I was German, Korean, Korean German, or German Korean…or simply both. But in retrospect, I can say that I have always been more German than

44


Korean and I still feel this way now. Even if I love Korean food and speak Korean like a native speaker; even if I follow all the rules to Korean social hierarchy, I was born and raised in Germany, so of course I have been shaped and influenced by Western culture.� Like many other gyopo, Lily learnt Korean first, but she considers German her mother tongue.

Koreans Adopted by Foreign Parents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and the Korean War, over 200,000 Korean children were adopted abroad according to the Korean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These children were mainly adopted either because they were born to poor families, they were mixed, or they had single mothers. Agencies such as Holt International Children’s Services and Social Welfare Society handled, and still handles, the adoption process. As many adoptees have come back to live in their native (birth) country, and have shared their stories, it is becoming clear that international adoption should not be the first choice in ensuring a future for children born into disadvantaged situations. In fact, many adoptees have been advocating for an end to international adoptions, supporting the idea that better national welfare and domestic adoptions should be the prior

45


language. At the same time, this was not the case for other adoptees who came to Korea. “Many adoptees think they are discriminated in Korea, but I think they are projecting. I’ve never had problems even if I speak only a little Korean,” said Kristin, 41. “I was born here, I live here. I consider Korea my home”. Raised in the US, in 2013, Kristin came back to Korea to work as a professor. “I cannot say I really had identity issues because I lived in New York City, so there was no cultural shock. I speak English more in Korea than in the US, where I spoke mostly in Spanish (laughing). However, coming back here I am basically illiterate since I do not speak choices for such children. Adoptees,

depression and records are showing

Korean. Thus, I can’t vote. Having no

together, also created organizations that

that separation from one’s mother,

civics knowledge and being unable to

offer different kinds of support systems

fear of disappointing adoptive parents,

participate is a problem for someone like

such as DNA testing and reunification

and shock from having to live among

me,” she added.

programs with the biological family, post-

people who look different result in the

Tammy, another professor based in

adoption services such as tours around

high level of depression, suicide, drug

Seoul, also recognizes Korea as her

Korea, Korean language programs

and alcohol consumption cases found

home. She recalls many funny incidents

scholarship, help with attaining the F4

amongst adopted individuals (4.5 percent

she faced in Seoul. “In the US, I was

visa (which allows Korean adoptees to

of adopted individuals struggle with

considered a person of color and a

reside and legally work in Korea), and

drug abuse-related issues compared to

migrant. While here (in Korea), I consider

other services.

2.9% amongst the general population,

myself a remigrant.” With a smile on her

Raising awareness of the issues related

according to the Huffington Post).

face, Tammy explained the daily issues

to international adoption is a significant

Back in Korea, when they return, these

she experienced in public offices and

goal of such organizations run by Korean

adoptees are faced with entirely new

banks; places where Korean workers

adoptees. Many of admit to having

problems. For instance, some adoptees

did not know how to legally handle her

experienced some form of identity crisis,

felt discriminated in Korea as well, mostly

situation as an adoptee now living in

discrimination, racial alienation, and

because they were not able to speak the

Korea; not your everyday acquaintance.

46


North Koreans in South Korea

and easy. For instance, Mr. Kwon,

amongst their southern neighbors,

Since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after defecting and experiencing life in

quitting the place for more hospitable

at the end of the Korean War (1950–1953),

the South, asked to be returned to his

countries.

some North Koreans have managed to

homeland. “In South Korea, people called

defect from their home country. Officially

me names, treating me like an idiot, and

The Korean Chinese in Korea

called defectors, in South Korea they are

did not pay me as much as others for the

They are an ethnic minority from mainland

also called northern refugees (tal-buk-ja)

same work, just because I was from the

China but with Korean roots—many

and new settlers (sae-teo-min). According

North,” he said in an interview with The

the descendants of Korean emigrants

to the Korean Ministry of Reunification,

New York Times.

of the Qing dynasty. Chosunjok (literally

since 1998, 31,339 defectors entered

Kim Dan-bi, a 26-year-old defector

meaning ethnic group of Koreans) are a

South Korea. Among these, 8,993 are

who lived in South Korea for 6 years,

Korean Chinese population largely found

male defectors while 22,346 are female.

further said that it is hard to put up with

in Northeast China, especially Yanbian

They escape to South Korea looking for a

discrimination from South Koreans.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Since

better life and better opportunities.

For these reasons, many North Korean

the late 1980s, numerous Chosunjok

But this process is not always linear

defectors no longer put up with living

moved to South Korea, the “grandfather country”, in search of the “Korean Dream” to success; their ethnicity, they hoped, would play as an advantage. Finding one’s way back to his or her ethnic background is never easy though. Many such members established their stay in Korea as foreign laborers, often staying longer as unregistered workers in the 3D jobs notorious for being difficult, dangerous, and dirty. With time, this attributed to a negative stereotype of the Chosunjok, and they were frequently marginalized for their status. Korea, given its fiercely homogenous society, was not quite the welcoming relative they expected, and the legal process of naturalization was not made easier for the Chosunjok, “dongpo (compatriot)” or not.

47


Some have made complaints like the

much of the Chosunjok community in

Identity and Acceptance

following, “The South Korean government

Korea to gather amongst themselves to

Identity searching is not easy for anyone.

grants nationality and financial support

strengthen their own sense of ethnicity

Places, people, and culture shape our

to North Korean defectors. Why not to

against the pain of betrayal and longing

identity, making difficult the process of

Chosunjok?” and “The Chinese can teach

for true acceptance.

finding a place to be considered “home”.

their language and be employed in big

More recently however, the second

However, there is a common denominator

companies, but Chosunjoks are deprived

generation of these Chosunjok, the

vital for this research: acceptance. “I

of jobs and the right to work during the

children, have come to recognize a

consider America my home; it is the

process of naturalization,” found in the

new identity of themselves being legal

place that accepts me”, declared Sarah.

academic paper, Ethnic Koreans from China:

residents of Korea. Although their parents

Perhaps home is where we feel accepted

Korean Dream, Adaptation, and New Identity by

perceive the homeland with a degree

despite all the issues surrounding identity.

Woo-Gil Choi.

of spite, their children do not hold such

If we were just more prone to accept than

As this shows, being both foreigner and

a negative view. Perhaps, time was

to discriminate, the search for identity

ethnically Korean, the Chosunjok have

the healer, but many of this generation

could rather be a fun ride than a painful

struggled to come to terms with their

understand their background as Chinese

rite-of-passage.

place in South Korean society. In many

citizens with ancient connection to

cases, national borders were stricter than

Korean history. They accept both cultures

biological connection, and this has made

as valid (Woo-Gil Choi).

48


Renowned American psychologist Abraham Maslow, curious about the limits of human potential, noticed a certain order of needs that had to be met before anyone could fully arrive at self-actualization—or the growth of a person into his/her ideal and “fully-functioning” self. According to Maslow, some needs take precedence over others; for instance, a person’s physiological need for food, sleep, and health must be satisfied before one can move to the less immediate need for safety, belonging, esteem, and finally, self-actualization. Often, a person who struggles to make a stable living to pay the rent will not worry about earning the respect of others or go about assessing the morality of current events; what matters day-to-day is if they can make enough money to meet the payment deadline. In the same way, there is a hierarchy to one’s complete set of needs, and as humans, we generally move in an upward direction of the criteria set out by Maslow’s triangular diagram; once the lower levels have been met, the following levels will then be of relevance. The significance of Maslow’s Hierarchy of Needs to our April Special Report is its connection to one’s racial and cultural identity formation. As soon as a person’s physiological and safety needs are satisfied, the issue of love and belonging to a certain environment and community becomes essential in living one’s life to the full. Many people, however, sometimes for decades on end, remain stuck in the middle stage of self-actualization without being able to explore their ideal potential. Sometimes, these people were born in one country and then were obliged to move to another. Each time, another stage of confusion occurs in leaving behind friendships, family, and the familiarity of the previous environment. This crisis is known as culture shock—which you can see as a four-stage process of acculturation. At first, a new environment can be fun, as in a “honeymoon stage”. Being a foreigner can be thrilling in the beginning because there is no expectation to act as a native member. But, in just a short amount of time, those expectations come creeping in, and people must learn to overcome the “culture shock” of “adjusting” to a new place. Eventually, they arrive at the “mastering” stage during which they learn to integrate to the new surroundings, but the past has been a whirlwind of trial-and-error; learning from mistakes and surviving the shock.

Self-actualisation (Achieving individual potential) Esteem (Self-esteem and esteem from others) Belonging (Love, affection, being a part of groups) Safety (Shelter, removal from danger) Physiological (Health, food, sleep)

Acculturation Process: Typical Stages Perceived Competence

Honeymoon

Culture Shock

Adjustment

Mastering

Fantasia

Integration

Interest Unreality & elation

Search

Experimentation Acceptance of reality

Time

49


당신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지문인가? 공항 출입국장에서 제시하는 여권인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낯선 사람과의 첫 만남에서 흔히 나올 법한 질문들 이다. 이를 입증할 가장 객관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신분증과 개인의 소속, 직함이 적혀있는 명함 등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한 사람 을 설명하기에 충분한가? 정체성. 우리가 매우 친숙하게, 또 널리 사용해온 단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정체성은 다른 사람이나 물건과 구별되는 고유의 성 질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권은 개인 정보의 이면에 자리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치를 설명할 수 없다. 학자들은 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정체성과 그에 따른 유형들을 연구해 왔다. 그 결과, 정체성은 인종, 사회문화, 성, 종교, 직업 등 여러 분야의 카테고리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복잡한 현실 세계에는 전통적인 유형의 정체성과 구별되는 또 다른 정체성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것들 은 주로 성 정체성에서 등장하곤 한다. 성 정체성의 전통적인 경계를 깨부순 성 소수자(LGBT)들과 ‘제3의 성’이라 불리는 신인류 히 즈라는 성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집단이다. <매거진 N> 4월호는 이 지면을 통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이자 상대적으로 쉽게 분류될 수 있는 인종과 사회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차후 다룰 예정이다. 우리의 인종,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 “그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한 개인이 특정 상황에서 취한 특정 행동엔 그가 자라온 문화적 배경이 내포돼 있다. 사람은 그를 둘러싼 국가와 국민, 언어, 삶의 양 식 등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일견 유사해 보이는 인종과 사회문화적인 정체성 사이에도 구분점은 분명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노란 피부에 쌍꺼풀 없는 전형적인 동양인의 외모를 지녔을지라도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아시 아인이 아니라 여길 수도 있다. 반대로 공항 입국 심사에서 한 남성이 미국인 여권을 제시했을 지라도 그가 백인일 것이라고 그 누구 도 확언할 수 없다. 이처럼 인종만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구분 짓는 것은 명확한 한계가 있다. 즉 개인의 정체성은 외형 등 단순히 인 종적인 요인이 아닌 한 사람의 정신과 마음,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심리학자 메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저차원의 생리적 욕구부터 안전, 소속감(애정), 자존감, 자아실현 등 5단계 욕구 를 지니고 있다. 궁극적인 목표로 나아가기까지의 과정 중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3번째 단계인 소속감에 대한 갈망이다. 개인 은 국가, 종교, 사회적 계층, 세대, 가족, 그리고 친구 등 한 집단에 소속되고픈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가 속한 사회문화 집단과 개인 간의 균형을 찾아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그러나 그 균형이 깨져버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학계에서는 이를 ‘컬쳐 쇼크’라 표현한다. 여러 나라에서 거주했던 사람들은 다양 한 경험을 쌓았다는 면에서 운이 좋은 편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시점에 ‘내가 진정 속해있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정 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인간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4개의 단계를 거쳐간다고 말한다. 첫 단계는 새로운 환 경에 대해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허니문 스테이지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게 하는 컬쳐 쇼크가 이내 찾아온다. 절망한 개인은 점진적인 조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그들의 현실을 수용하게 된다. 이는 개인의 외면엔 별 다른 변화가 없어 보일지라도 내면에선 정체성의 무수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입증한다. 그 원인으로는 개인이 속한 소속집단-사회문화-과 개인이 받아들이는 현실의 간극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인 또는 한민족인 이들이 경험 한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교포 2세대의 고뇌 “내 나라는 어디인가?” 최소한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인이지만 해외에서 나고 자란 2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자라 왔다. 이들의 국적은 어디이며, 이 들의 모국어는 무엇인가?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가? 33세의 사라(알리아스)는 스스로를 블라아시안-블랙 아시안-이라 칭한다. 한국인 어머니와 아프리카 아메리칸 아버지를 둔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다. 현재 그녀는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정체성의 혼란이 가장 컸던 시기는 초등학생 때 였다. 여러 인종의 친구들-주로 백인-이 있었다. 유년기 시절 봤던 영화들의 여주인공도 늘 백인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중학생이 되자 나와 비슷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과 주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때 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됐다.” 현재 대전에서 거주하고 있는 42세의 통번역가 릴리(혜영)는 한국인 부모를 뒀지만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 그녀는 독일을 고향이라 여기기에 자신을 독일 태생의 한국계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정체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80~90년대만 해도 서구에 서 아시아는 매우 머나먼 곳이었다. 한국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치르고 나서야 사 람들이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독일인인지 아니면 한국인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 오 랫동안 고민해 왔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국인보다 독일인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고 한국음식을 사랑하며 한국의 위계질서를 따른다 할지라도. 독일에서 나고 자랐기에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해외 입양의 그림자 어린 시절 해외로 입양돼 낯선 타지에서 성장한 이들도 정체성으로 혼란을 겪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차대전과 한국전쟁 종전 이후 20만 이상의 한국 태생 어린이들이 해외로 입양됐다. 다수의 입양아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그들의 사연을 알리면서 해외 입양

50


이 미래를 보장하는 최선책이 아님은 분명해졌다. 입양자들도 양질의 복지와 국내 입양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정체성의 위기, 차별, 인종적 소외감, 우울증 등을 겪었다고 토로한다. 실제로 생모와의 이별, 양부모를 실망시킬 지 모른다는 불안, 다르게 생긴 사람들과 부대끼며 겪는 문화적 충격은 우울증, 자살, 약물 중독 등의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입양아들이 자신이 태어난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어린 시절 해외로 입양되는 바람에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 이 또다른 차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미국에 입양돼 그 곳에서 자라다 2013년 대 학 교수로 한국에 온 크리스틴이 그 중 하나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자랐고, 지금은 다시 한국에서 살고 있다. 나는 한국을 내 집이라 여긴다. 미국에서 성장하는 동안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진 않았다. 그에 따른 문화적인 충격도 없었고. 미국에선 주로 스페인어를 사용했기에 오히려 한국에서 영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한국어를 못하기에 한국에 돌아온 이후 문맹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문화적인 배경지식도 없어 불편함이 따르긴 하지만 감내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다.” 서울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타미도 한국을 고향으로 여긴다. “미국에서 나는 유색인종이자 이주민 신세였다. 반면 한국에 온 이후엔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한국에 정착하면서 관공서와 은행 등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다. 북한 탈출보다 더 험난한 남한 정착 정치적인 특수성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들도 있다. 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1998년 이후 31,339명(남성 8,993명, 여성 22,346명)의 북한 주민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넘어온 남한이지만 이들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 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권 모씨의 경우 남한 생활에 지쳐 북한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남한 사람들은 나를 바보 취급했다. 노동에 따른 정당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북한에서 온 사람에 불과했다.” 남한에서 생활한 지 6년이 된 김단비도 남한 사람들의 차별을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남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이들 은 생각보다 많다. 조선족의 비애 “우리도 한 민족인데?” 이번엔 북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온 사람들 얘기다. 중국 본토의 소수 민족인 조선족은 청나라 때 중국으로 이민간 자들의 후손 이다. 이들은 중국 북동부, 특히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뿌리를 지니고 있다. 많은 조선족들은 1980년 대 말부터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한 민족이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조선족이 바랐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들 대다수는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로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조선족 전반에 대 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돼 이들의 사회적 지위도 갈수록 낮아졌다. 지독하게도 단일민족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지만 조선족을 한 민 족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 원인이 된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연구한 학자 최원길은 조선족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남한 정부는 탈북자들에게 국적 을 부여하고 경제적인 지원도 해준다. 그런데 왜 조선족들은 이같이 대우해 주지 않는가? 중국인은 중국어 강사를 할 수 있고 대기 업에 고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직업에 제한을 받으며 귀화절차를 밟는 도중엔 일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그러나 최근, 조선족 2세 또는 학생들이 한국의 합법적인 거주자가 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그들의 부모는 한국에 실망했을지 모르 나 2세들은 한국사회에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한국 근대사의 슬픈 사연을 간직한 존재인 동시에 중국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여긴다. 이들은 양쪽의 문화를 수용하며 전 세대보다 안정적인 상황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있다. 수용 앞서 살펴봤듯, 한 개인이-특히 서로 다른 사회문화 집단 양쪽에 속한 이들이-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험난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위 사례들에서 우리가 반드시 복기해야 할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수용이다. 사라는 말한다. “나는 미국을 내 집이라 생각한다. 나를 받 아준 곳이니까.” 이 말처럼 고향은 우리를 받아주고 우리로 하여금 수용됐음을 느끼는 해주는 곳일지 모른다. 경계를 애써 구분 짓기 보단 그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고통스런 통과의례가 아닌 즐거운 여정이 될 수 있다.

51


54 ― 71 Topics

52


2018

04

53


From Inconvenience to Innovation

From Inconvenience to Innovation

without disabilities unless the difference is

which can be seen on other dating

When you live without disability, you don’t

compensated with a high dowry (Forbes).

websites.

experience the difficulties. But if you are

Disheartened by the fact that over 40%

To some, Inclov may seem like another

part of the 15% of the global population

of the nation’s disabled population never

level of discrimination, where disabled

(World Health Organization) struggling

marry, Kalyani Khona and Shankar

people are simply separated out to “date

with some form of disability, then

Srinivasan co-founded matchmaking

themselves”. But for many of those who

sometimes, even daily life can become

app Inclov (2016)—the first of its kind to

have used the app, it is a protective

painful routines.

help people with disability find marriage

shelter where difficulties are understood

They may be a minority, but they remain

partners.

and opportunities are created. “There

members of every country with their own

Based in Gurugram, India, the Inclov app

are many dating apps in the market but

inalienable rights as human beings. While

uses an algorithm that matches users

Inclov is a truly inclusive platform to

most developed societies now tolerate

with potential partners based on their

find love. We even have people without

these individuals with an understanding of

level of dependence, cure availability,

any disabilities,” said CEO Khona in an

their disabilities, helping disabled persons

medications, and therapy for disabilities.

interview with Forbes.

to live quality lives like anyone else is

This is to allow a safe environment for

Inclov takes one step further through

seen as something that will take too much

those with disabilities to share personal

its Social Spaces program which is

energy. People like the idea of inclusion,

information without being discriminated,

an offline meeting space that allows

but not the inconvenience that comes with it. Meanwhile, two rising Asian startups take a different stance. For the owners, inconvenience was not to be an excuse for a more equal society.

Inclov Everyone deserves love It has been said that people with disability are not entitled to a life partner. Particularly in India, home to 26.8 million disabled persons, such people are considered ineligible to marry those

54


subscribers to meet one other face to

friend reading a gigantic braille Bible, he

Essentially, the Dot Watch is an electronic

face in facilities that are adjusted for

was sure there could be a better way.

braille device wired through magnetic

those with special needs. Social Spaces

Inspired by that first meeting, Kim went

connection. Not only can users tell the

was a feature that was added when Inclov

on to creating an alternative to costly

time by touching the display, using the

staff noticed people that were matched

(and excessively large or heavy) reading

same watch, once it is connected to his/

were sometimes unable to bring the

materials and appliances made for blind

her smartphone, all personal messages,

relationship to the next level.

people. In a world that has become so

Facebook updates, and notices can

Now, with a year to its history, more than

efficient and smart, he decided it was time

be read as well. Currently, blind people

100 people attended Inclov’s most recent

for even those with visual impairments to

using smartphones can only hear their

Social Spaces meetup and the startup

be included.

messages which means no privacy when

has helped over 6,000 disabled people

By 2016, Founder Kim Ju-yoon was able

others can also hear what is being said.

meet their spouses.

to introduce the world’s first braille smart

At no more than 300 USD, the smart

“After looking for a partner for almost 4

watch under his company name, Dot.

device is affordable to a wide range of

years, I was disappointed at not being

After repeated stages of trial-and-error,

social classes, embodying Kim’s wish

able to find anyone of my choice. I came

the dot watch was released boasting new

(shared in an interview with The Korea

across Inclov and the Inclov Select

magnetic technology 1/20th the size and

Herald): “Hopefully there should be no

matchmakers helped me find my partner

price of traditional braille products.

barriers to getting this device. Everyone

and I will always be thankful to them” said Inclov user Ramkesh. Thanks to Inclov, people like Ramkesh are given, just as we are, the hope of love and lifelong partnership despite personal or physical situation.

Dot Incorporation World’s first braille smart watch When it comes to accessing information, the blind have only several options: buying expensive tools and materials or simply go without. But when young entrepreneur Kim Ju-yoon saw a blind

55


should get it, everyone should afford it,

reading pad, in other words, creating

so that maybe the unemployment rate

a type of Braille Kindle tablet that, if

among blind people decreases.”

successful, would give the visually

Even before its release, the Dot Watch

impaired access to a massive collection

was recognized for being excellent and

of reading material and educational

essential technology. Many wondered

resources.

how such a device had not already

In our world, there are aspects to

been invented; what had taken so long?

technology that are scary, but CEO Kim

Regardless of the time it took, positive

Ju-yoon and his Dot team remind us of

reviews led Kim and his team to promote

the genuine purpose of technology that

the watch around the world. Having

we often forget: enabling quality living for

received advance orders from renowned

everyone.

blind singers Stevie Wonder and Andrea

Kim has said, “There’s the famous quote

Bocelli, Dot is now the leading corporation

from Martin Luther King: ‘The time is

in its field of specialized products.

always right to do what is right.’ That’s

Dot’s next project is a digitalized braille

what we are doing” (The Korea Herald).

Seo Eui-mi Staff Reporter

56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불편함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세계 인구의 15%(WHO 기준)에 해당하는 장애인이라면, 일상생활조차 고통스러울 수 있다. 선진국들은 대체로 개인의 장애를 이해하 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장받도 록 하는데 발생하는 불편함을 낭비라고 여기는 시선은 지금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통합’은 반기지만, 그 에 따른 불편함을 반기진 않는다. 하지만 아시아의 떠오르는 스타트업 기업 두 곳은 장애인을 다른 관점 으로 바라본다. 두 대표는 ‘불편함’이 만든 불평등한 사회를 가만히 지켜보진 않았다. Inclov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평생의 반려자를 찾기 어렵다는 통념이 있다. 특히 2,680만 장애인이 살고 있는 인 도에선 장애인이 고액의 지참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비장애인과 결혼하기 힘들다고 한다. 장애인 40%가 결혼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란 깔리아니 로나와 샨카르 스리니바산은 최초의 장애인 중매 어플리케이션 인클로브(2016)를 공동으로 제작했다. 인도 구르가온에 기반을 둔 인클로브는 장애 에 따른 의존도, 완치 가능성, 투여 중인 약물, 치료 경과 등을 분석해 이용자를 연결해 준다. 이용자들 은 이 서비스를 통해 장애로 차별 받지 않는 환경에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한다는 이유로 인클로브가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용자들은 “이 어플리케이션은 장애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또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CEO 깔리아니 로나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시중에 결혼 중매 애플리케이션이 여럿 있지만, 인클로 브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포괄적인 어플리케이션이다”라고 설명했다. 인클로브는 더 나아가 ‘소셜 스페이스’ 프로그램을 통해 일상적인 장소에서 만나기 어려운 장애인들을 특별한 공간으로 초대한다. 이 프로그램엔 온라인으로 만났음에도 오프라인 만남을 이어가기 어려운 장애인 이용자들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다. 창립된 지 1년이 갓 넘었지만 인클로브는 그동안 6,000여 장 애인들의 배우자를 찾아줬고, 그 중 100명이 넘는 이용자들이 ‘소셜 스페이스’에도 참여했다. 서비스 이용자 람케쉬는 “4년 넘게 배우자를 찾아왔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실망했다. 그러던 중 인클로브를 접하게 됐고, 이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배우자를 만났다. 우리는 늘 인클로브에 감 사해 한다”라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점자 스마트워치’ Dot Incorporation 시각장애인이 정보를 획득하는 데는 몇 가지 옵션이 있다. 비싼 도구를 구매해 사용하거나 혹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거나. 거대한 점자 성경책을 읽던 친구를 본 닷 인코퍼레이션의 창립자 김주윤은 보다 편리 한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이 시대에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도구 또 한 편리해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2016년, 창립자 김주윤은 닷이라는 회사를 세우며 세계 최초의 점자 스마트워치를 선보였다. 닷은 시행착오를 반복한 끝에 사이즈를 기존 점자 제품의 20분의 1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닷 스마트워 치 사용자는 디스플레이를 터치해 시간을 알 수 있고, 스마트폰과 연동시키면 메시지나 SNS의 알림도 받을 수 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각장애인은 볼륨을 높여 메시지를 들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소리 가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 사생활을 지키기 어려웠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300달러(약 32만 원)란 가격도 일반인에게 그리 부담되지 않는 가격이다. 김주윤은 코리아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 기기를 구매하는데 ‘장애’가 되는 벽이 없었으면 좋겠다. 모든 시각장애인에게 필요하기 에 누구나 구매할 수 있도록 가격을 책정했다. 이 기기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취직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시 이전부터 기술력을 인정 받은 닷의 스마트워치는 호평을 받으며 세계적인 유명세도 탔다. 점자 스 마트기기 분야를 이끄는 선두기업이 된 닷. 스티비 원더, 안드레아 보첼리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각장 애인 가수들도 이들의 제품을 주문할 정도다. 닷의 다음 프로젝트는 독서용 점자 태블릿이다. 일종의 점자 킨들(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전자책 서비스 전용단말기)로, 이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면 시각장애인도 읽을거리와 교육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된다. 기술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사람을 위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창립자 김주윤과 그의 팀은 ‘모든 사람에게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한다’는 기술의 참 의미를 실현하고 있다. 번역 한주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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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ing a New Phase of Active Cooperation

The Asia Journalist Association, since

cooperation between the two Koreas

its founding in 2004, has regularly

to improve the welfare of both South

held forums to connect member

and North Korean people, but most

correspondents with its AJA board and

importantly, to encourage unification to

staff to strengthen relations and maintain

take place in the near future. And true

quality reporting on the continent of Asia.

to its founding statement, “We promote

This time, reporters gathered in Seoul,

the issue of unification of the Koreas

Korea, from March 4th to March 12th, first

and strive to form a consensus amongst

to attend the annual World Journalists

the Korean diaspora and all members of

Conference held by the Journalist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UniKorea

Association of Korea (JAK), and then to

welcomed AJA’s foreign correspondents

end with a short AJA forum on pressing

by scheduling a special press conference

matters regarding organization business

with North Korean defector and now

and member obligations.

Chosun Ilbo reporter, Kim Myung-seong.

Running from March 11th to 12th, the AJA

Kim had worked at a trading company in

forum encompassed not only business

North Korea but one day, he happened

meetings, but a closer look at Korea’s

upon South Korean propaganda

earned and he recalls the events with

ever-present concern with North-South

material—a radio—which he kept hidden

amazement, calling it a miracle to be

unification and also brilliant innovations

at his breast at all times. Winters in North

in his position now as a reporter who

presented by some of the nation’s biggest

Korea were so cold that he could hide

regularly sends radio broadcasts to the

tech organizations.

the earphones to the radio under the

North.

flaps of his furry hat. Ultimately, those

When asked if he felt that unification was

UniKorea Foundation Excursion

radio broadcasts opened Kim’s eyes to

possible as he was making his way to

On the morning of the 12th, participants

a larger world, and he could not help but

South Korea, Kim said, “No, I didn’t think

were brought to Chosun Ilbo, a leading

be angered by the situation of his own

of that during that time, but I do now.

South Korean newspaper, where they

country.

The North Korean regime actually isn’t as

would be introduced to the UniKorea

In 2002, Kim successfully reached South

stable as people might think. People—

Foundation that was established by

Korea after having escaped North Korean

particularly the younger generation—are

Chosun Ilbo on May 2015.

borders by first moving through China and

angry and want change”.

As its name suggests, the UniKorea

then to Vietnam, and lastly, Cambodia.

A reporter also asked Kim what Korea

Foundation is aimed at promoting mutual

His safe arrival to the South was hard-

would look like post-unification given

58


that the North is struggling financially.

T.um: SK Telecom NEW ICT Experience

a tube-like transportation system that

To this, Kim replied that “Unification will

Center – SK Telecom is Korea’s largest

is being developed to run at 1300 km

be difficult at first, but North Korea also

mobile operator with approximately 30

per hour. After going on the Hyperloop

has many valuable assets such as high-

million subscribers. Since the past, the

and experiencing scenes of augmented

quality labor and good natural resources.

corporation has provided services ranging

reality, one reporter admitted to feeling

These things combined with South

from 2G to 4G and is presently busy on

“so nauseous, but very amazed by all the

Korea’s current situation will definitely

its journey to 5G development.

technologies”.

bring positive results.”

On September 2017, SK reopened its

Samsung d’light – On that same note,

Information Communication Technology

Samsung d’light is the tech giant’s global

Smarter Seoul, Smarter World

(ICT) center, T.um New ICT Experience

exhibition space to display its latest

It was amazing when the world was first

Center (Seoul), with a revamped series

electronic products but also to show how

introduced to 4G technology; internet

of virtual reality rooms and artificial

people will be living with future state-of-

access was at a new high with booming

intelligence appliances to welcome

the-art Samsung technology.

speeds and high-resolution video

visitors to a 5G era. AJA reporters were

The d’light center is so named by

messaging. Now, it seems the story is

able to drive on an autonomous car

combining the words “digital” and “light”

ever-evolving into new realms of digital

simulator and travel to other countries on

to create the company vision of “bringing

speed by 5G connection. Not only will

a virtual ride through the SK Hyperloop—

light and joy to the digital world”. On the

this mean internet access about 10 times faster than 4G, but it means wireless networking of other appliances through a smartphone platform. In other words, daily life is about to get super smart with automatic cars, self-running kitchens, and emotion-detecting robots. And South Korea has by all means been a frontrunner of the 5G sector, introducing cutting-edge technology to an eager global market. On the 12th, AJA members were taken to two of South Korea’s most prominent corporations specializing in 5G technology.

59


basement floor, Samsung appliances from

down to an evening of delicious food and

smartphones to household appliances are

fellowship over wine. Various aspects to

showcased with their respective prices.

AJA continuation and maintenance of

Then, on the 1st floor, called Myself,

the organization were discussed based

visitors go through a virtual system where

on the level of cooperation each member

digital installations endeavor at analyzing

would be willing to give to AJA in the

their current emotions and imaginations

form of articles or networking with foreign

through face-recognition systems.

media outlets.

The more objective and less abstract 2nd

AJA Founder and The AsiaN CEO Lee

level, My Life, is a real-size reproduction of

Sang-ki asked for “unending support

the modern home and school classroom

and dedication for AJA and The AsiaN

with automatic vacuuming machines,

as a whole.” To this, all reporters agreed

high-tech refrigerators, and multi-

to the importance of contributing to the

functional tablet pads.

Asia Journalist Association and were

AJA 2018 and Onwards – The final

enthusiastic of meeting a new stage of

moments of the forum were spent at

reporting not just in their own nations, but

Vabien Suites in Seoul as members of

as members of the press working hand in

AJA staff and foreign correspondents sat

hand to write for a wider public.

60

Seo Eui-mi Staff Reporter


(사)아시아기자협회(AJA)는 2004년 창립 이래 아시아 주요 이슈들을 다루고 회원 간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포럼을 개최해 왔다. 2018년 3월 AJA는 서울에서 포럼을 개최, 3월 11~12일 재단법인 ‘통일과 나 눔’과 한국 주요 IT기업들을 방문했고 협회 발전 방안도 심층 논의했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 “전 세계 통일 공감대 확산” 3월 12일 오전, AJA는 한국 주요 언론사 <조선일보>가 2015년 5월 설립한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을 방문 했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은 남북간의 상호교류를 촉진해 통일을 앞당기고, 한반도 국민 모두의 복지 를 향상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700만 해외동포와 세계 각국에서도 통일 공감대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는 포부를 밝 힌 통일과 나눔은 2002년 탈북한 김명성 <조선일보> 기자와 AJA의 만남을 주선했다. 김명성 기자는 북 한의 무역회사에서 일하던 당시 몰래 라디오를 통해 남한의 대북선전 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이는 김 기자가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북한의 현실에 분노하게 된 계기가 됐다. 김명성 기자는 “2002년 탈 북해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마침내 남한에 발을 디뎠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남한에서 기자가 된 것은 내겐 기적과도 같았다”고 밝혔다.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과 통일을 한다고 가정할 때 통일 한반도의 모습을 어떻게 예상하는가’라 는 질문에 대해 “처음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도 고급 노동력과 천연자원 등의 자산이 있 다. 이러한 것들이 한국의 현 상황과 맞물리면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스마트 서울 대표하는 ‘SK텔레콤 T.um’ ‘삼성 딜라이트’ 한국은 5G 기술의 선두주자로 최첨단 기술을 세계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AJA 회원들은 3월 12일 오후 5G 시대를 이끌 한국의 기업 두 곳 SK텔레콤과 삼성 딜라이트를 방문했다. SK텔레콤은 3천만 명이 이용하는 한국의 최대 통신사로, 5G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7년 9월 SK는 5G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가상현실 체험관과 인공지능 기기가 설치되어 있는 미래 체험관, T.um New ICT 체험관을 개관했다. AJA 회원들은 현장에서 자율주행 자동차 시뮬레이터에 탑승하고, SK 하이퍼루프 등을 체험했다. 하이퍼루프와 증강현실을 체험한 한 기자는 “멀미가 날 정도로 그 기술 력에 놀랐다”는 솔직한 소감을 전했다. 삼성 딜라이트는 삼성의 최신 기기와 첨단 기술을 담은 미래상을 제시한다. 딜라이트 (d’light)는 ‘digital’ 과 ‘light’의 합성어로 “디지털 세상에 빛과 즐거움을 불어넣겠다”는 기업의 비전을 담았다. 전시관 지상 1 층 ‘Myself’는 얼굴 인식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분석해내는 가상시스템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2층 ‘My Life’는 현실세계에서도 활용 가능한 실용적인 기술들을 선보인다. 실제 크기의 가정집과 교실이 꾸며진 이 공간에선 전자동 로봇청소기, 최첨단 냉장고, 다기능 태블릿 PC 등이 활용되는 미래를 만날 수 있다. 일정을 마친 일행은 서울 서대문의 한 호텔에서 콘텐츠 확충과 해외 매체와의 네트워크 강화 등을 논의 했다. 회원들도 이를 위해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제시했다. 이상기 AJA 창립회장은 이 자리에서 협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을 당부했다. 번역 차은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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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ourist’s Unconventional Route Through South Korea

SUWON Hwaseong Haenggung Palace Located in Suwon, around 30 km south of Seoul, Hwaseong Haenggung Palace fortress was constructed in the Chosun dynasty, from 1794 to 1796. It spans a length of 5.7 km and 4 to 6 meters in height and was designated a World Heritage site by UNESCO at the 21st World Heritage Committee meeting in 1994, Naples, Italy. Back in the day, the ruler—King Jeongjo—had tried to move the capital from Seoul to Suwon. However, he soon passed away and the central power remained in Seoul. Among all the attractions that Suwon offers, Hwaseong Haenggung palace is surely one of the most interesting. Built in 1789, it was used as a government base and a temporary palace where the king and royal family would retreat to during periods of war. Out of the main gate of Hwaseong Haenggung often takes place a performance of 24 Korean traditional martial art forms as Suwon is also home to a unique group of martial artists who strive to preserve a set of sills that were used to teach South Korean warriors in the past. These forms were created hundreds of years ago by studying the strengths and weaknesses of other

62


martial arts—resulting in unarmed, armed,

exhibition center.

program where visitors experience

and horse-mounted martial styles.

Samsung Innovation Museum

education and information activities).

Mr. Toilet House

Samsung Innovation Museum is an

Almost 40% of mankind used to live

electronic industrial museum run by

SEJONG

without toilet facilities. And for that

Samsung, based in Suwon. The five-

The story of Sejong City began as a

reason, many were exposed to infectious

floor building displays various products

means to solve the problem of an overly

diseases and contaminated water. To

created at the different periods of Korean

populous Seoul city. Many central

address this problem, in the late 1990s,

manufacturing history. At the Seeds of

government ministries and agencies

a Toilet Culture Movement began in

Innovation hall, visitors discover where

have since been relocated from the

Suwon, quickly spreading throughout the

the great technologies and inventions

capital and the administrative scene

nation. The Toilet Culture Movement was

were first created. People can also

has been gradually easing into this new

first promoted in 1997 by Suwon Mayor

learn about Samsung’s perspective of

metropolis. Sejong’s current civilian

Sim Jae-duck, to improve the state of

innovation; from the first inventions to its

population of 300,000 people is expected

public toilets in the city; and the occasion

latest and most state-of-the-art items.

to increase to 800,000 by 2030, what

was for the coming 2002 FIFA World

At another section called, Beginning of

with the city’s broad transportation

Cup. It was an opportunity that served

Electronics Industry, visitors discover

network connecting most major cities to

as momentum for recognizing public

how people’s lives have changed since

a commuting distance of around 2 hours.

toilets not only as a hygienic facility to

600 B.C., when human civilization first

In 2012, important government facilities

meet physiological needs, but also as a

discovered electricity, to the production

such as the Prime Minister’s office, the

place for meditation, rest, and for meeting

and circulation process, and invention of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people.

diverse electronic items such as lighting,

and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To celebrat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elecommunications, home appliances,

were moved from Seoul to Sejong. Other

Toilet Association (WTA) in 2007, Sim

radio, and so on.

organizations such as the Ministry of

Jae-duck rebuilt his house where he

Samsung Innovation Museum also

Defense and the Ministry of Reunification

had lived for 30 years, constructing it to

provides learning programs such as S/

are still located in the Capital city.

look like a giant toilet. This construction,

I/M Academy (learning program about

As part of its urban program, Sejong is

Haewoojae (Mr. Toilet House), was

electronics industry and Samsung brand

trying to build a child-and-women-friendly

completed in 2007, after Sim’s death. In

philosophy), S/I/M Community (invitational

city by focusing on health, education, and

2009, Sim’s family donated the house to

program where Samsung Electronics and

gender equality welfare. Furthermore,

the city government and in the following

local communities can communicate with

a more eco-friendly environment is one

year, it was transformed into the current

each other), and S/I/M Mate (participatory

of the main administrative policies for

63


local officials. Some of Sejong’s biggest

the village became famous after Queen

pine forest, the Okyeon pavilion, the

tourist attractions are its National Library

Elizabeth of England visited the township

Gyeomam pavilion, and the Byeongsan

(shaped like an open book, the building

in 1999. Hahoe village is located at the

Confucian Academy.

received the 2014 Red Dot Design

foothills of Hwasan Mountain, an offshoot

At the Hahoe Byolsingut Talnori hall,

Award), the Handuri Bridge (the first

of Taebaek Mountain that rises up to the

visitors enjoy traditional mask dance

asymmetrical cable-stayled bridge with

east.

performances depicting special dramatic

curved pylon to be constructed in Korea),

The center of the village is populated by

scenes of the conflict between Korea’s

the lake park (with its 5 artificial islands

large tile-roofed houses along with smaller

yangban (noblemen) and the peasant

and trails), the Hapgang Auto-camping

houses with thatched roofs. The village

class. Talnori (mask dance) was seen as

site, the presidential archives, the Gobok

site has been divided into different areas

early as the mid-12th century. Running

Natural Park, the Bangchukcheon musical

such as the Handong residence (a type

close to Hahoe village, Nakdong River

fountain, the Geumgang Arboretum

of house with a simplistic theme and few

flows across the town, meandering

that hosts a total of 2,117 species and

decorations), the Namchon residence, the

through the Buyongdae cliffs. Guests

about 1.01 million plants, the Biamsa

Juil residence, the Bukchon residence,

can take a boat to Buyongdae cliff for a

Temple, and finally, the Unjusan Mountain

the Goddess Samsin tree, the Yangjin

panoramic view of the village.

(Sejong’s highest mountain). Sejong also

residence, the Chungyo residence, the

Andong Maskdance Festival

provides a variety of cultural events such

Jakcheon residene, the Binyeon pavilion,

Andong is considered the heart of Korean

as art performances, contests, dynamic

the Wonji pavilion, the Mansongjeong

traditional culture, with continued mask

exhibitions, and festivals.

ANDONG Located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Andong is the capital of the Korean spirit—soju. Hahoe Village Hahoe Village is home to the descendants of the Ryu clan of Pungsan and is known for its beautiful traditional houses. As the birthplace of renowned scholars of the Joseon Period such as Gyeomam Ryu Un-ryong and Seoae Ryu Seong-r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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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ric performances and dances. The

In commemoration of her pure and noble

Creative Energy and Innovation. Built

area’s culture and religion have great

love, the bridge was designed in the style

in an industrial area, the center offers

value just for having remained through

of mituri.

free training programs for developing startups. It organizes partnership or

these years intact and vibrantly alive. Andong’s Mask Dance Festival, held

DAEGU

ecological relations between the relevant

every fall season, hosts over 50 events

South Korea’s fourth largest city, Daegu,

big corporation and regional enterprises,

and hands-on experience programs

is a progressive place with a fascinating

arranges funds for such incubator

including the National & International

traditional-medicine market, local

companies to overcome financial

Mask Dance Performance, World Mask

restaurants boasting tasty dishes, and a

difficulties, encourages managerial and

Competition, original mask performances,

humming downtown. The city is a popular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advisory

mask dance learning, madang play, and

site for exchange students and English

services (called mentoring), promotes

more.

teachers; and the large student population

communications and cooperative works

Soju Museum

gives Daegu a young and almost carefree

among participants, and explores new

The heady 45% soju, Korean liquor, is a

vibe.

markets. The innovation center also

significant part of the culture in Andong.

Daegu center for creative energy and innovation

offers legal support, helping in the patent-

On the grounds of the Andong Soju

Samsung Group, in cooperation with the

registration processes of ideas and

Brewery, this particular museum houses a

Daegu City government, is promoting

copyright laws.

couple of displays that detail the distilling

innovation through the Daegu Center for

process, the drinking ceremony, and a history of soju’s evolving labels. At the end of the tour, visitors can enjoy a taste of the smooth but strong liquor. Woryeonggyo Bridge Opened in 2003, Woryeonggyo Bridge (387m in length and 3.6m in width) is the longest footbridge in Korea made of wood. Woryeonggyo Bridge harbors a tragic yet beautiful legend about a wife who made a pair of mituri (hemp shoes) out of her hair in heartfelt yearning and condolence for her late husb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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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bi-jjim Steamed dish made with galbi, beef or pork short ribs.

Andong soju With over 500 years of tradition and expertise, Andong soju is crafted from a three-step fermentation process.

Yukgaejang Spicy beef and vegetable soup

Hanjeongsik Full-course Korean set meal (bibimbap, roots, grilled fish, kimchi, rice, assorted vegetables, etc).

Napjak Mandu Flat dumplings

Alessandra Bonanomi Staff Repo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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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온 알레산드라 보나노미 기자가 지난 3월 수원, 세종시, 안동 하회마을, 대구 등 한국의 곳곳을 다녀왔습니다. 외국인들에게 이국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명소들, 알레산드라 기자가 소개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행궁’ 서울 남부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수원 화성행궁. 1796년 완공됐다. 정조는 재위 시절 수도를 한양에서 수원으로 이전할 꿈을 품고 화성행궁을 지었으나 뜻을 이루기 전 승하하며 천도는 없 던 일이 되어버렸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수원 화성행궁은 1994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21 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됐다. 화성행궁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왕족의 임시 거처로 활용됐다고 한다. 행궁의 정문 밖에선 한국의 전 통 무예가 시연되곤 했는데, 수원은 전통 무예가들이 그 유산을 보존했던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보다 살기 좋을 수 없는 ‘세종시’ 행정수도 세종시 프로젝트는 서울의 과도한 인구 밀집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됐다. 총리실, 문화관광부, 보건복지부 등 중앙 정부 부처와 기관들이 세종시로 이전하며 도시도 확대됐다. 인구 약 30만 명의 세종시는 건강과 교육, 성 평등에 초점을 맞춘 어린이-여성 친화적인 도시를 목표로 삼고 있다. 2014년 레드닷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한 국립세종도서관, 최고의 야경을 자랑하는 한두리 대 교, 합강오토캠핑장 등은 세종시에서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또한 2,177종의 식물을 보유한 금강수목원, 세종시에서 가장 높은 운주산, 고복자연공원 등은 세종시의 깨끗한 자연을 담고 있다. ‘하회마을’과 ‘소주 박물관’ 품은 경상북도 안동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등의 학자를 배출한 풍산 류씨 가문의 본가 하회마을. 하동고택, 북촌댁, 남촌 댁, 주일재, 작전고택 등의 고택과 병산서원, 화천서원 등의 서원, 그리고 빈연정사, 원지정사, 옥연정사, 겸암정사 등의 정사로 이루어져 있다. 하회마을을 방문한다면 조선시대 양반과 노비 사이의 갈등을 그린 전통탈춤 별신굿 탈놀이를 감상하 길 권한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소나무 숲 만송정도 절경을 자랑한다. 문화유산과 자연경관을 품은 하회 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당신이 애주가라면 안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안동 소주 박물관이다. 알코올도수 45도인 안동소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주 중 하나다. 안동 소주 박물관은 증류 공정과 음복 의식, 소주 역사 등을 소개한다. 강렬하지만 부드러운 소주 한잔 음미하는 여유, 안동 소주 박물관에서 즐길 수 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 혁신으로 가득한 대구 한국의 4번째 대도시 대구는 전통한약시장과 한국의 맛을 품은 식당들, 활기찬 도심이 어우러진 곳이 다. 전통과 현대의 멋을 살린 대구는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과 외국인 영어강사들이 많이 거주하고, 또 방문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젊고 활기찬 바이브로 가득한 대구를 논하는데 삼성창조경제단지도 빼놓을 수 없다. 삼성창조경제단지 는 혁신적인 스타트업 기업들에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지적재산권 등 법률적인 자 문과 재정적인 지원을 도맡아 이들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또한 지역의 관련 기업들과 상생을 추구함으로써 지역 경제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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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한 40년, 이향의 불굴의 도전

꽃샘추위가 찾아온 지난 3월 19일 이향(60) 화 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3월 첫 주말 포항 그의 화실에서 처음 만나고 열엿새만이었다. 대면하 여 묻지 못한 것들이 생각나서였다. 화가 이향을 규정하는 키워드나 문장 몇 개를 소개해달라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답했다. “져도 다시 피는 꽃. 바보새 알바트로스. 인동 초. 나일론 끈. 뼛속부터 작가.” 이들 속엔 각각 나름대로 이유와 유래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져도 다시 피는 꽃’이 나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딸은 ‘엄 마는 뼛속부터 작가 아입니까’라고 말하고요. 인동초나 바보새는 내 삶을 잘 표현한 말이겠지 요. ‘나일론 끈’은 여고 졸업 후 스무살 때 찾아 가 그림을 배운 중국인 스승이 붙여준 별명인데 맘에 듭니다. 2007년 돌아가실 때까지 든든한 후원자셨던 아버지는 ‘대나무가 곧아도 너처럼 곧겠느냐’고 하셨어요.” 3월 3일 포항의 한 아파트 11층 그의 호작실(好 作室). 그는 인사동 같은 중앙무대에는 그다지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 화실 가득 놓인 작품 100여점엔 만 40년 그의 화력(畵歷)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대구에서 여고를 졸업한 이향은 1977년 화교학 교 교장이던 중국 사범대학 출신의 설창(雪窓) 장능운 선생에게 달려가 그림을 배웠다. 이향은 하루 종일 짜장면 한 그릇으로 때우며 사군자를 치고 花鳥를 그렸다. 얼마나 끈질기게 했으면 스승은 “자네는 나이롱끈이야.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니…”하며 싫지 않은 내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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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기간이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기왕 배

달고 이런 추천사를 그에게 전했다.

의 색깔을 지닌다. 천년고도의 사찰에서 짧게

우려면 이름 있는 분한테 배워야 한다며 집안에

“동곡 이향은 철저한 수련과 숙련을 거쳐 완성

는 300년에서 길게는 1000년간 풍상을 견뎌낸

서 서울 유학을 권했기 때문이다. 월전 장우성

된 수묵과 문인화의 中和美, 선불교의 不二美,

기왓장에 채색화의 혼을 불어넣었다. 와화(瓦

문하생으로 옮겼지만 이 역시 반년만에 그치고

도가적인 幽玄美를 하나로 엮어 나간다…. 동

畵)의 경지를 새로 개척한 것이다. 이향은 그림

말았다.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곡은 감히, 겁도 없이 부작난(不作蘭)을 그린다.

인생 30여년 만에 새로운 세계에 닿아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솜씨가 뛰어난 그는 대학진학

그것도 부챗살에 쓰윽 쓱 환칠 하듯이 난을 치

2015년 11월 인사동 ‘갤러리 시:작’에서 열린 ‘이

을 포기한 채 미술학원에서 일반인을 가르치는

고 부작난이라고 썼다. 동곡은 부작난을 자기

향 展’은 ‘와화’가 중심을 이뤘다. 그동안 사군자

틈틈이 전시회를 준비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스

것으로 만들었다. 그 기개가 어디로 가겠는가.

와 산수를 뛰어넘어 인물과 영모(翎毛)·산수 등

물한살 이향은 1979년 10월 25일 대구 명성예

눈에 띄는 대로, 손 가는 대로 화지뿐 아니라 보

자연은 물론 한글과 한자 등 문자를 형상화하

식장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 병풍 같은 대작과

료와 방석에 사군자를 치더니 그것이 채묵과 진

며 소재를 다양화했다. 말 그대로 이미지의 천

화조, 사군자 등을 선보인 그는 1980년 秀화랑

채로 스며들어간다.”

변만화(千變萬化)를 달성한 것이다.

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연다.

그는 앞서 자신을 인동초라고 했다. 그 이유를

이향은 “기와는 질박한 소재지만 내 삶과 너무

“정말 ‘겁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또 그리며 보

김영재는 헌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팠던 과

닮았다”며 “세월의 그리움과 현재적 생명, 다가

낸 20대 초반이었다. 그 열정이 지금도 내 몸속

거는 조부와 부친의 삶과 관련돼 있다. 조부는

올 시간에 대한 희망이 붓의 끝자락에서 기왓장

에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서고 해방 정국에서 전평

으로 옮겨질 때 그 환희는 이루 표현할 수 없다”

화가 이향은 사군자를 평생 손에서 떼어놓은 적

산하 운수노조위원장으로 ‘대구 10월항쟁’에 참

고 했다.

이 없다. 왜 그럴까? “사군자는 문인의 기상인

여하였다. 부친은 4·19혁명 이후 조부의 신원을

동시에 미술의 기본이다. 기본을 다지지 않고는

위해 피학살자유족회 활동을 하다 5·16혁명재

성장·발전할 수 없다. 기본 없는 기교는 죽은 생

판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향은 이같은 집안 내력

명과 다름없다.”

으로 인해 어릴 적부터 고난의 시간을 유독 많

그는 사군자 치는 장면을 보고싶다고 하자 벽에

이 겪어야 했다.”

화선지를 붙이더니 음악을 틀었다. 이향은 마이

김영재는 “그래서인가. 동곡은 부쩍 자신의 그

클 잭슨의 ‘Dangerous’ ‘Black or White’에 맞춰

림에 푸른색과 그 위에 자유롭게 날아가는 구

매화와 난초, 대나무, 연꽃을 그려갔다. 양주를

름을 그리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몇 모금 들이켜자 그림이 완성됐다. 걸린 시간은

아픈 세월을 딛고 그는 신들린 것처럼 그림에

작품당 불과 5~6분. 그 짧은 시간에 한점 흐트

몰두했다. 두꺼운 요철지 위에 곤륜산의 해와

러짐 없이 붓끝은 섬세하고도 칼날 같이 먹점을

달, 십장생의 거북과 연꽃, 바위 산의 소나무와

찍어갔다. 꽃과 잎이 피어나고 채색이 묻어났다.

구름을 자유자재로 표현해갔다. 그의 불상에는

그의 2006년 경북대미술관 전시회 때 미술사

먹색이 배어나와 소탈하기 그지없고, 목어는 제

상가 김영재 박사는 ‘유불선(儒彿仙)의 회통(回

멋대로 허공을 날며 부처님 눈길을 사로잡는다.

通)을 향한 겁 없는 열정과 도전’이라는 제목을

특정화단에 속하지 않은 이향의 그림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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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거저 이뤄지는 것은 없는 법, 2010년 전 시회에 출품된 작품에서 그같은 경지는 이미 상 당부분 준비되고 있었다. “동곡 이향의 작품엔 혼이 서려있고, 땀이 묻어 있다. 그는 다루기 힘든 요철지, 수간채색, 혼합 재료로 새로움을 향해 가고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그는 그래서 독보적이라는 이름 을 얻을 만도 하다. 그의 선이 얼마나 유려하며 그의 색이 얼마나 깊이를 간직하는지….”(문무학 시조시인, 대구예총 전 회장) 이향은 쿠웨이트·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지방에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간단해요. 예술의 원형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이슬람권이나 기독교권·유교권이나 같다고 봅 니다. 쿠웨이트는 우리 어렸을 때 가장 잘 살던 나라라고 늘 들어왔고, 카타르에선 월드컵이 열 리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아랍권의 종주국 이라 불리죠. 이들 국가에서 저의 작품들을 평 가받고 싶어요.”

이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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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Hyang (60), an artist who has spent her whole life immersed in drawing, describes herself with the following: “[Lee Hyang] is a flower that fades and blooms again. She’s a honeysuckle; a nylon string. She’s an artist right down to her bones.” And there’s a story to all these comparisons. “I personally think ‘a flower that fades and blooms again’ best describes me. My daughter likes to say, ‘Ma, you know you’re an artist right down to your bones,’ and my dad, one of my strongest supporters, would say, “Bamboo shoots are straight, but not as upright as you.” After her high school years at an all girl’s school in Daegu, Yi Hyang learnt to draw from a Chinese artist who was teaching at an overseas school in Korea. Often, she would spend all her time drawing birds and the Four Gracious plants—plum blossoms, orchids, chrysanthemums, and bamboo shoots—for hours on end, but those times did not last for long. Her parents had wanted her to study art abroad, from the best teachers, but financial difficulties stopped that from becoming a reality. As a young girl, Yi Hyang always had a talent for drawing. Instead of going to university, she chose to teach art at a local drawing academy and at the same time, prepared for her own exhibition. On October 1979, the year she became twenty-one years old, Yi Hyang was able to introduce her first exhibition to the public, and in 1980, her second, presenting lovely painted folding screens and masterpieces of, again, the Four Gracious plants. Yi Hyang is known for her drawings of such plants and has said, “the four plants are the spirit of literary figures and remain the foundation to oriental art. If you don’t have down the basics, you can’t improve as an artist. Technical skills devoid of such basics are dead.” When she is working, she will sometimes draw to Michael Jackson’s “Dangerous” or “Black or White” and exercise her precise handiwork by drawing beautiful flowers and plants in less that 5-6 minutes. One quick stroke of her brush gives color and life to each of the petals and leaves. “Each of Yi Hyang’s paintings are a wonderful portrayal of Buddhist and Toaist literary art, and they are the result of years of practice and dedication to the craft. She must have been influenced by her grandfather who supported democratic movemen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her father who was also involved in democratic activism; her past was marked with much difficulty, but in her pictures, many of which contain clear blue skies symbolizing freedom, she now flies in complete liberation through her art.” In November of 2015, Yi Hyang opened another gallery in Insadong, Seoul, calling it “A Painting Drawn on a Roof Tile”. In the future, the artist hopes to introduce her work to international audiences, particularly those in Middle-Eastern countries such as Kuwait, Qatar, and Saudi Arabia. Why? “It’s simple. Art’s origins are the same; it comes from both the East and the West, from Muslim Nations, Christian nations, and Confucius nations. Kuwait used to be the richest country in the world when I was young, and Qatar once hosted the World Cup. I want to receive feedback from people around the world,” she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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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79 Interview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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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수 글 이주형

박화수 작가는 먼 길을 돌아오고 나서야 빛을 본 늦깎이 화가입니다. 스스로를 ‘그림쟁이’라 인정하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행복한 그림을 그리자는 마음만은 늘 간직해 왔습니다. 박화수 작가와의 인터뷰를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박화수 작가님. 어떤 계기로 그림에 빠져들게 되셨나요?

로 이를 증명했어요. 제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을 결과물로 만드는 건 자

초등학교 4학년 때 신문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사진을 보고 그려서 학교

신 있었거든요. 옛날엔 생소했던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해 책 표지도 만들어

에 간 적이 있어요. 선생님께서 “이 그림 정말 네가 그렸니?”라고 물어보시더

봤어요. 대학시절부터 회화, 일러스트, 렌더링 등 가리지 않고 여러 공부를

라고요. 그렇다고 대답하니 선생님께서 “이 다음에 커서 꼭 화가가 돼라”고

한 것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됐죠.

하셨어요. 중학생 때부터 그림으로 상을 타기 시작하니까 자신감이 생겼어 요. 고등학생 때는 전국대회에 입상해 세종문화회관에 제 작품이 걸리기도

공백을 극복하고 화가로 서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나요?

했고요.

당시만 해도 순수미술과 디자인은 영역이 달랐어요. 대학생 때 일러스트를

그리고 나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데 문제가 생겼죠. 당시만 해도 회화를 전

배우긴 했는데 사람들이 회화로 쳐주지 않았죠. 나중에 다시 붓을 잡고 그

공하면 취업이 상대적으로 어려웠어요. 졸업 후의 진로를 고려하자니 회화

림을 그리는데 알고 보니까 그 경계가 사라져 있더라고요. ‘전공으로 일러스

는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래서 동덕여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게 됐죠.

트를 배웠고 또 잘 했으니 시각디자인에서 배운걸 접목시키면 승산이 있겠

대학 졸업 당시 출판사 편집디자이너와 미술관 큐레이터를 놓고 고민하다

구나’ 깨달았죠. 전공을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수

미술관 가서 많이 배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큐레이터 일을 하기로 결정하

채화부터 다시 시작하며 기초부터 탄탄히 다져 나갔죠.

게 됐죠. 정식 작가로 활동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대학 전공과 졸업 후의 진로는 다소 의외네요.

수채화나 유화 등 기본기를 다지는데 7년이 걸렸어요. 물론 그때도 사람들

회화를 전공하진 않았지만 대학 진학 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사실 대학교

이 저를 작가라 불러줬고 작품을 내놓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기

때 늘 당당하게 행동하고 튀는 옷을 입고 다녔어요.(웃음) 그런데 제 외모로

에 그 기간은 연습의 과정이었어요. 사실 전 생계형 작가라 팔릴만한 작품을

인한 편견이 너무 싫었어요. 실력으로 편견을 깨부수자 마음 먹었고 또 결과

그려야 했어요. 7년의 기간 동안 그 부분을 연구하기도 했고요. 저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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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작가야’라고 느낀 지는 만 5년 정도 됐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

미술관에서 일할 당시 유명한 작품을 여럿 봤어요. 그 중엔 다소 어둡고 이

티스트란 단어가 여전히 부담스러워요. 다만 그림쟁이라 불리고 싶고, 또 그

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있었죠. 그래서 ‘이 다음에 그림을 그린다면 걸어놓

렇게 되길 바랄 뿐이죠.

은 것 만으로도 공간을 환하게 만들 수 있는 예쁘고 행복한 그림을 그려야 겠다’고 결심했죠. 그러한 부분들이 저와는 잘 맞아 떨어지는 편이예요.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대화하거나 사물을 보면서 ‘저걸 이렇게 표현해 보면 재미있겠네’하고 떠오

꽃, 붓, 나비가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소재들이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

르는 순간 작업이 시작돼요. 집에 가면 그때 떠올린 것들을 따로 스케치하

으신가요? 오늘도 꽃이 새겨진 스카프를 착용하고 나오셨네요.

는 대신 일단 캔버스로 옮겨요. 제 생각대로 잘 흘러간다 싶으면 작업을 계

스카프는 그림 그리기 전에 샀던 건데.(웃음) 제가 주로 그리는 꽃은 구절초

속하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작업을 중단하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폐기할

예요. 들꽃작가가 되길 바랐고. 구절초는 그 들꽃 중 하나예요. 여기엔 사연

때도 있었고요. 구상한 것은 많지만 실제 결과물로 남아있는 것은 그리 많

이 있죠. 중국 심천의 한 백화점에 네일 살롱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러 갔는

진 않아요.

데 공항에서 내리려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별안간 슬픔이 몰려와서요. 그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작업시간은 제 각기 다른 편이예요. 어떤 건 하루

리고 나서 엄마 생각도 나더라고요. ‘그 옛날 제게 미술 공부를 시키지 않았

15~16시간 만에 끝나기도 하고 어떤 건 몇 개월도 더 걸려요. 작업시간은

다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나서 어느 날 지

작품의 크기와는 또다른 얘기예요. 크기가 아니라 어떤 작품이냐에 따라 작

나가다 길에 피어있는 구절초 몇 송이를 봤는데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업시간도 달라지죠.

작품에 그려 넣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구절초의 의미가 ‘엄마의 사랑’이더 라고요. 그 후부터 구절초는 제 작품의 주 소재가 됐죠.

작업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으시나요?

붓은 ‘작가인 저 자신’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오랜 세월 붓을 놓고 있다가

스트레스 전혀 안 받아요.(웃음) 제겐 작업이 천국이에요. 개인적인 얘기지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든 게 붓이었어요. 일종의 해방구였거든요.

만 부를 누리고 살 때는 작업하다가도 ‘먹고 살만한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

붓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나’하며 포기하기도 했었어요.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작업에 몰두하게 됐죠.

나비는 작품에 넣은 지 얼마 안됐어요. 한 2년 정도. 솔직히 말씀 드리면 보

심리, 경제 두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요.

통의 수집가분들은 작품을 구매할 때 의미를 부여하시더라고요. 나비는 자

그림 그리는 시간 이외에는 너무 불행했어요. 현실도 그렇고 모든 게 불안했

손의 번창이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나비를 넣어 그려보니 재미있

죠. 그런데 작업대에만 앉으면 생각이 맑고 깨끗해 지는 제 자신을 발견했

기도 하고요. 전 제가 재미 없는 건 안 하는 주의라서요. 아니 못하겠다는 표

죠. 작업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정말 중요한 연락 아니면 받지 않을 때도 있

현이 더 정확하겠네요.(웃음)

어요. 가장 소중한 시간을 온전히 보내고 싶으니까요. 간혹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좀 달리 생각해요. 남의 일을 하든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자기 일을 하든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물을 얻긴 힘들

‘해피니스’(Happiness)를 전하고 싶어요. 제 그림들은 행복이란 대주제를 간

거든요. 적어도 제 자신과는 적당한 타협을 하고 싶진 않아요.

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한 때는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림을 그 리며 극복할 수 있었어요. 행복한 내가 그린 행복한 그림이 다른 사람한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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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만의 철학이 확고하신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내놓아

행복을 전해줄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제 그림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

야 하는 결과물 사이의 괴리는 없었나요?

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길 바라고 있어요.


4월 초 서울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들었어요.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

제로 하는 작가도 있죠. 구상화를 주로 하거나 비구상화를 하는 작가들도

고 있으신가요?

있고요. 각자의 영역이 있는데 전 이것저것 다뤄왔어요. ‘이게 맞는 방향인

4월 1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서 개인초대전을 열어요. 작품 25점 정도 전시

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았죠.

할 계획입니다. 이번 개인전에는 구상화와 비구상화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이런 고민을 알고 있던 한 선생님께서 작고하신 황창배 선생님의 작품을 살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려고요. 전시장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한 사람 작품

펴보라고 추천해 주셨어요. 황창배 선생님은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

맞아?’라고 물으실 정도로요.

셨어요. 동양, 서양, 비구상, 구상 등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기셨는데, 선생님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시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제 작품을 보고 행복을

의 작품을 보며 그동안 고민했던 것에 대한 해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어요.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황창배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는 순간 막다른 골목에서 뻥 뚫린 대로변으로 나온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국내뿐 아니라 이탈리아, 홍콩, 대만, 미국, 프랑스 등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지셨어요. 또한 6월엔 스위스 전시회에 출품할 계획도 있으시고요.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학연, 인맥,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일어난 그림쟁이 박화수. 그거면 충분해

2016년 이탈리아의 화보 Studio Byblos를 통해 소개된 것이 그 계기였어요.

요. 그리고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작품 활동을 하며 저를 떠나간 사람도 있

페이스북에 작품을 몇 점 올렸는데 이탈리아에서 그걸 보고 연락해 왔죠. 알

고, 반대로 제게 다가와준 분들도 계시죠. 마음으로부터 저를 지지해주시는

고 보니 아마존닷컴에서 판매되고 세계 유명박물관에도 비치되는 꽤 유명

분들이 계시기에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어요. 그런 분들이 “박화수 작가

한 책자였어요. 책을 받고 딱 펼쳐보는데 제 작품이 앞쪽에 게재돼 있었죠.

내 친구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ABC 순인가 했는데 좋은 작품 순으로 실린 거였어요. 많이 뿌듯했죠. 중국 광저우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제 작품이 방송을 통해 주요하게 소개된 것도 기억에 남아요. 현장에 있었지만 방송국에서 촬영하는 지도 몰랐어요. 룸메이트였던 젊은 작가 선생님이 “대박. 선생님 작품 촬영하고 있어요”라고 알려주고 나서야 알았죠.(웃음) 다가올 6월의 스위스 전시는 Rhy Art Fair라고 하는데 역사는 얼마 안 됐지 만 괜찮은 전시회라고 들었어요. 한번쯤 다녀오면 좋은데 상황이 허락될 진 모르겠어요. 해외에서 전시를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여러 곳에서 불러주시 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저도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해외 전시에서 실력으 로 승부할 자신이 있고요. 영감을 받은 작품이나 아티스트가 있으신가요? 장르와 소재를 구분 짓지 않고 영감 떠오르는 대로 작업하는 편이예요. 사 실 이 부분이 딜레마였어요. 꽃을 주제로 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과일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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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took a long time for artist Park Hwa-su to acknowledge her talent for painting; it was only much later that she would be able to call herself an artist, but she is now, and she dedicates her time to drawing happy images. The following shares our Magazine N interview with the artist herself.

What made you become interested in drawing in the first place?

saw several chrysanthemums in bloom; they were so beautiful.

When I was in 4th grade, I saw a picture of a hen sitting on her

out that the meaning of the chrysanthemum is “Mother’s Love.”

eggs. I drew a picture of that and brought it with me to school—my

I’ve painted chrysanthemums ever since. The brush is a symbol

teacher was surprised and asked, “Did you draw this?” When I told

of an artist—thus, myself. I took up that brush to escape from the

her that I had, she said, “No matter what, you should become a

suffocating aspect of reality and it brought me a type of liberation.

painter when you grow up.” I actually won some awards in middle

The butterflies I draw are symbols expressing the prosperity of

and high school but as I began preparing for university, things

offspring.

I began drawing them in my paintings. That was before I found

became complicated. Back then, it was hard to make a living from University. After graduation, I thought about working as a layout

What kind of message do you seek to convey through your work?

designer at a publishing company or as a museum curator; the

I want to spread happiness through my paintings. Each drawing

latter seemed like the better choice so that’s what I began doing.

is connected under the general theme of happiness. I personally

painting, so I decided to study Visual Design at Dongduk Women’s

went through very difficult periods in life, but drawing helped me

That’s quite an unexpected career choice.

to overcome those times. I believe the drawings that I painted in

Well, on the job, as I hung up paintings other artists had drawn, I

happiness will to lead to other people’s happiness as well—this is

always thought, “What am I doing? I’m supposed to be drawing

the kind of positive message I want to send to everyone.

my own paintings.” That’s when I made up my mind. I told myself, someday, I would definitely be drawing again. 8 months after I got the curating job, I got married and resigned from the position.

We hear that you will be opening an exhibition in Seoul, early April. What is the focus of your upcoming exhibition?

How long has it been since you began working as an artist?

I’ll be opening a personal invitation exhibition from April 1-6

It took a while for me to get used to the basic skills of watercolor

representational, some not. The gallery will hold a diverse array of

and oil painting—almost 7 years. During that time, people already

my work and viewers may even wonder if they were all drawn by

called me an artist, and I had sold a few paintings as well, but I

the same person. But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hat people feel

think I was still in the learning process. Right now, I’m an artist

at least a degree of happiness through my paintings.

in Seoul and around 25 paintings will be on display: some

making a living off of what I draw so it also took me those 7 years to look into how to keep up a steady income. It’s been around 5 full years since I began to actually feel like an artist, but honestly, “artist” as a title still feels like a burden at times. I rather prefer just being called someone who loves to draw.

You’ve appeared in several exhibitions outside of Korea. Just 6 months ago, some of your artwork was displayed in a Swiss exhibition. How did you begin working abroad? It was all kind of unexpected because it actually began in 2016 when I was introduced to the Italian art publishing house, Studio

A lot of your drawings contain flowers, brushes, and butterflies; is there a special reason?

Byblos. I had uploaded some of my paintings to my Facebook

The flowers I draw are mostly chrysanthemums; I always wanted

call all the way from Italy. It turned out their book was quite popular

to draw wildflowers. Chrysanthemums are a type of wildflower.

on Amazon.com and was also displayed in renowned museums

But there’s another story to that. After losing my husband, I

around the world. One time, I collaborated with an exhibition in

was on my way to Shenzhen, China, to design the interior of a

Guangzhou and I remember my work being introduced on TV.

nail salon at a department store. All of a sudden, at the airport,

My next project is with the relatively new Rhy Art Fair exhibit in

I found myself sobbing. I missed my mom and thought that if

Switzerland and will open in June. It hasn’t been long since I

she hadn’t taught me art as a young girl, I wouldn’t be the same

started work with international exhibitions, but I’m just thankful for

person I was. Afterwards, as I was walking along the roads, I

the attention that my work has rece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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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ount and apparently they had noticed. Soon after, I received a


I want to spread happiness through my paintings. I’ve gone through very difficult periods in life, but drawing helped me to overcome those times. I believe the drawings that I painted in happiness will to lead to other people’s happiness as well—this is the kind of positive message I want to send to every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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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 103 Culture 104 ― 105 Book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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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lim museum

Untitled, 2017 Ⓒ Richard Sweeney

Richard Sweeney Tahiti Pehrson Atelier Oi Torafu Architects Jule Waibel Studio Job Tord Boontje Zim & Zou Wanda Barcelona Maum Studio

Paper, Present : 너를 위한 선물

Unfolded Rug, 2015 Ⓒ Jule Waibel

Tue,Wed,Fri,Sun 10AM-6PM Thu,Sat 10AM-8PM Mon Closed

2017.12.07.~201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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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bsession Seo Eui-mi Staff Reporter

A Paper Present for You Normalization of digital media brought with it the assumption that print mediums—paper—would soon become obsolete. The popularity of Kindle tablets certainly suggested this, and offline news sources often went unread as there was always the more easily accessible online version. But for some artists, paper has become more than useful. In place of costly art tools and extravagant design equipment, they have chosen the simplicity of paper to be their main material. The clean but sharp edges and the familiarity of the paper that was used to write a letter to a loved one; the paper pages that brought to us the words of our favorite book, these would become the medium for a group of artists who would reconstruct paper as a comforting present to the public. Paper Present Exhibition, held by Daelim Museum, in Seoul, was introduced December 7th, 2017, and is set to run until May 27th, 2018. Spanning across three spacious floors, Paper Present displays the work of 10 international individual and group artists that, though starkly different in style, have come together under the single beauty of paper. The following touches on their artistic background and the concepts of their handicraft. Cabinet of Curiosities(Green), 2012 Ⓒ Zim&Z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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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2017 Ⓒ Richard Sweeney Honminoshi Garden, 2017 Ⓒ atelier oï

2F The first section, seen on the second floor, is of paperwork that has been reinterpreted into more complex and elaborate forms. Here, white paper is the foundation to architectural designs so incredible that one would have to take a closer look to realize it was paper all along. Richard Sweeney – Born 1984 in England with a degree in 3D Design from Manchester Metropolitan University, Richard Sweeney weaves structural patterns from organic materials. Often, he works without any particular blueprint in mind; taking the medium in his hands to explore the science and potential of paper in 3-dimension. Tahiti Pehrson – Californian artist Tahiti Pehrson (1972) was at first a painter who was interested in the tight relationship between art and light. His fascination would evolve into discovering the movement of light upon monochromatic paper constructions cut into intricate geometric patterns. Atelier oï – Based in La Neuveville, Switzerland, Atelier oï (1991) is a trio of designers Aurel Aebi, Armand Louis, and Patrick Reymond, who strive to connect humanity with nature through architecture and interior design, product design, and scenography. Atelier oï’s installation in Paper Present expresses the scenic beauty of Gifu Prefecture in Japan with the region’s own traditional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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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vase, 2010 Ⓒ TORAFU ARCHITECTS From Color to Eternity, 2017 Ⓒ Wanda Barcelona

Hermitage, 2017 Ⓒ Zim&Zou

3F One staircase above, the mood is

where she presents her handmade artistry

Zim&Zou – Paper is far from boring to

awakened to welcome guests into a

captivating audiences from around the

Zim&Zou designers Lucie Thomas (1987)

space much like their own living room.

world.

and Thibault Zimmermman (1986). Both

Everyday items such as wardrobes and

Studio Job – Designers Job Smeets and

born in France, the duo is stationed in

mirrors are fashioned from paper designs

Nynke Tynagel, both graduates of the

Nancy of Lorraine and are now widely

showing the practicality—and the fun—of

Design Academy Eindhoven, founded

recognized for their impeccable designs

paper-cut objects.

their studio in 2000 based in Antwerp,

that depict fantasy-like scenes—all

Torafu Architects – Japanese art studio

Belgium, and Amsterdam, Netherlands.

through their favorite medium, paper.

Torafu Architects was established in 2004

Hand in hand, they have crafted iconic

Wanda Barcelona – The creative team of

by Koichi Suzuno and Shinya Kamuro.

objects with malleable materials to

architect Inti Velez Botero, designer Daniel

Since then, the duo has created a diverse

express the physicality of design.

Mancini, and artist Iris Joval frequently

collection of designs including homeware

Tord Boontje – Praised for his way

visits the world of traditional origami

products and interior layouts for functional

of incorporating romanticism with

whilst in their Wanda Barcelona (2007)

and artistic purposes.

modern design, Tord Boontje (1968)

studio in Barcelona, Spain. Paper and

Jule Waibel – Mundane fabrics and

is an industrial product designer who

cardboard base materials take on ancient

materials are reborn between German

emphasizes the ethereal in art. Upon

origami features but with a modern twist

designer Jule Waibel’s (1986) fingers as

opening his studio in 1996, Boontje

of the group’s innovative personality.

she folds and unfolds paper into fashion

went on to creating lavish installations in

designs that are structured to her taste.

collaboration with the likes of Swarovski,

Waibel is active in Berlin and London,

Philips, and Alexander Mc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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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F The uppermost floor is decorated with

multitude of original ideas through space,

a hall of blush pink reeds; visitors walk

graphics, and flexible products, speaking

through the paper field against mirrored

of the heart of their artwork, wanting to be

reflections and are again reminded that

heard by viewers.

paper is in fact, a gift from Mother Nature

With communication as their design

herself.

purpose, Maum Studio has participated

Maum Studio – Korea’s Maum Studio

with CGV, Monami, Naver, and other

(2008), composed of 6 designers, is the

well-known corporations to reach a larger

sweet icing to Paper Present. They convey a

community.

Paper Walk, 2017 Ⓒ Maum Studio

Paper may never have meant much to us; at most, it was the wrapper that enclosed the gift that we received. But this time, paper, in all its splendor, is sent back our way as a one-of-a-kind gift. We rivet back to a time when our little fingers took in the fun of paper cranes and airplanes…sometimes, the ordinary is the spectac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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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디어가 보급되면서 종이는 곧 사라질 그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 서 종이의 가치에 주목한 예술가들이 있다. 종이를 재발견한 전시 ‘Paper, Present : 너를 위한 선 물’(2017년 12월 7일~2018년 5월 27일)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10팀의 작품을 전시한다 2층 전시관은 종이의 정교함을 과시한다. 구역 곳곳엔 종이로 이뤄진 건축물들이 보이는 데, 워낙 섬세해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종이라는 것을 인지하기 힘들 정도다. 리차드 스위니 - 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3D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유기물을 활용 해 구조물의 패턴을 제작한다. 스위니는 주 재료인 종이를 직접 만지며 3D 디자인 작품으로서의 가 능성을 탐구한다. 타히티 퍼슨 - 캘리포니아 기반의 그는 예술과 빛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한 최초의 아티스트다. 퍼슨은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움직이는 단색의 종이 단면과 빛이 교차할 때 창조되는 그 아름다움 에 빠져들었다. 아틀리에 오이 - 건축물, 인테리어, 제품의 디자인을 통해 인류와 자연을 연결하는데 초점을 맞춘 디자이너 집단이다. 3명의 디자이너는 이번 전시회에 일본 기후 현의 전통 종이와 현지 자연 풍광을 담은 작품을 출품했다. 3층 전시장은 마치 거실에 들어온 듯한 따뜻한 분위기를 전한다.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옷장과 거울 등을 종이로 재해석한 작품들은 기능성과 시각적 즐거움을 동시에 잡았다. 토라푸 아키텍츠 - 2004년 일본의 코이치 스자노와 신야 카무로가 설립한 아트 스튜디오다. 두 디 자이너는 기능성과 예술적 가치를 담은 가정용품과 인테리어 컬렉션을 선보인다. 쥴 웨이벨 - 웨이벨이 종이를 접었다 펴는 순간 평범한 직물과 소재들은 하나의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독일 출신의 웨이벨은 베를린과 런던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데, 이번엔 서울을 찾아 세계 인을 매혹시킨 작품들을 전시한다. 스튜디오 잡 -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를 졸업한 두 디자이너가 의기투합해 2000년 벨기에 앤트워프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스튜디오 잡은 가변형 소재들로 제작한 상품에 상징성을 부여, 디자인의 물리적 성질을 표현한다. 토르드 본체 - 현대적인 디자인과 낭만주의를 접목시킨 그는 예술의 신비함을 강조하는 산업 디자 이너다. 1996년 스튜디오를 연 이래 스와로브스키, 필립스, 알렉산더 맥퀸 등과 콜라보레이션을 통 해 화려한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짐앤주 - 프랑스 출신 디자이너 루시 토마스와 키볼트 짐머만은 종이를 고리타분한 그것으로 여기 지 않는다. 짐앤주는 종이를 활용해 상상 속 세계를 표현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완다 - 바르셀로나 건축설계팀의 인티 벨레즈 보테로와 디자이너 다니엘 만시니, 아티스트 이리스 호발은 전통적인 종이접기 방식에 현대적인 해석을 가미해 그들의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인다. 4층은 분홍빛을 내뿜는 갈대들로 가득하다. 관람객들은 이 곳을 거닐며 종이가 ‘자연의 선 물’임을 다시금 떠올린다. 마음 스튜디오 - 6인의 디자이너로 구성된 한국 마음 스튜디오는 이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다. 이들 은 공간, 그래픽, 신축성 있는 제품을 적절히 활용해 그들이 추구하는 예술의 핵심을 대중에게 전한 다. 소통을 디자인의 목표로 삼는 마음 스튜디오는 CGV, 모나미, 네이버 등 한국의 유명기업들과 합 작하며 이들의 영역을 넓혀왔다. 번역 한주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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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 tastes 글 이주형

경계인. ‘오랫동안 소속돼 있던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으로 옮겼으나, 원래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버릴 수 없어 새로운 집단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사람을 뜻한다.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 국인, 이른바 자이니치 코리안은 경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자이 니치 2세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느 한 집단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매거진 N> 2018년 4월호 에선 자이니치 2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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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국경선 따위는 내가 없애”

그러나 스키하라는 조총련계 학교를 등지며 과거 친구

“애국, 통일, 동포, 친선, 민족, 조국, 국가, 단일, 지겨워.”

라 불렀던 이들에게 자본주의에 물든 배신자 취급을 받

<고>(2001)의 주인공 스키하라(쿠보즈카 요스케 분)의

는다. 자이니치란 이유로 일본인 학생들에게도 차별을

첫 대사다. 농구부원인 스키하라는 연습 도중 패스하지

받을 뿐이다. 예전의 일로 학교 깡패들의 숱한 도전도

않았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린치당한다. 그러나 단순

물리쳐야만 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스키

히 패스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랬을까? 스키

하라가 상대에 굴복해 무릎 꿇는 일만은 없었다. 그런

하라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일본인이 아닌 재일한

스키하라에게 갑작스런 사랑이 찾아온다. 친구의 파티

국인, 자이니치다.

에서 만난 사쿠라이(시바사키 코우 분)와 눈이 맞아버

영화는 잠시 과거로 되돌아가 한 지하철 역을 비춘다.

린다. 차별과 멸시에 맞서 싸워온 그에겐 운명 같은 만

스키하라는 조총련계 학교 친구들과 지하철로를 뛰어

남이었다.

다니고,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예상치 못했던 슬픈 소식이 들려온

스키하라와 친구들은 흔히 말하는 양아치다. 경찰서에

다. 조총련 친구들이 등을 돌려도 끝까지 그의 곁에 남

아들을 보자마자 쉴새 없이 주먹을 날리는 아버지도 보

아줬던 친구 정일이 일본인 남학생과 조총련 여학생의

통내기는 아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유망

사소한 실랑이를 말리다 살해당한 것이다. “이름이란

했던 복서이자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였다.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과 차를 타고 가다 길을 멈추고

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다”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바다나 보고 가자고 한다. 평소 무뚝뚝하기만 한 아버

대사 한 구절을 남긴 채.

지이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아들에게 “국적은 간단히

그 사건 이후 무기력해진 스키하라. 그런 남자친구에

바꿀 수 있어. 돈만 있음 어디든 갈 수 있다. 넓은 세상

게 사쿠라이는 사랑을 고백한다. 그런데 스키하라는 사

을 봐라. 그리고 네 스스로 결정해”라는 말을 건넨다.

랑하는 여자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다.

하지만 스키하라가 연신 머리를 굴려봐도 답을 찾기란

자신이 자이니치라는 사실 말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여간 쉽지 않았다. 일본인처럼 사회에 순응하며 살 수

온 스키하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하

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이니치란 한계를 극복할 자

고야 만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추려 ‘중학교 때까진

신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막 살다 야쿠자의 총알받

북한 국적자였다’ ‘곧 일본 국적을 취득할 지도 모른다’

이가 되는 것도 싫다. 스키하라에겐 그러나 선택할 권리

‘국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사쿠

와 의지만큼은 있었다. 그는 넓은 세계를 보기 위해 국

라이의 반응은 너무나 차갑다.

적을 한국으로 바꾸고 일본인 학교에 다니기로 마음 먹

“아빠가 중국인이나 조선인과는 만나지 말라”고 했다면

는다. 그 결과는… 영화 첫 장면의 난투극이다.

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큰 결심을 하고 일본인 고등학교로 진학한 스키하라.

사쿠라이. 그녀는 촌스럽다고 생각해 비밀로 간직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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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츠바키(동백꽃)를 밝히며 흐느낀다. 스키하라도 너무 외

라왔다. 착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에 나쁜 사람이 좋다고 할

국인 같아 차마 알리지 못했던 자신의 본명 이정호를 말하며

정도로 세상을 불신하는 히데노리. 그가 등교를 거부하고 거

그녀 곁을 떠난다.

리를 방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히데노리와 나나코의 부모가 이혼하고 부자-모녀로 가족이

아프고 슬퍼도 웃을 수 밖에 없는 우연하게도 최악의 소년

갈라지면서 극은 급격히 전개된다. “조선인도 한국인도 싫지

<고>가 사춘기 시절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소년의 성장통에 코

만 일본인은 더 싫다”고 당차게 말하며 늘 강인해 보였던 누나

믹적인 요소를 가미해 유쾌하게 풀어냈다면 <우연하게도 최악

나나코가 자살한 것이다. 그리곤 어느 때처럼 거리를 방황하

의 소년>(2003)은 다소 암울하다. 폭력이나 섹스를 적나라하

는 히데노리.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던 유미를 발견한다. 히데

게 묘사하진 않지만 따돌림, 자살, 이혼, 마약, 정신질환 등 불

노리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녀를 끌고 어디론가

편한 소재들을 다룬다. 첫 장면부터 그렇다.

향한다. 목적지는 놀랍게도 병원의 영안실이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사키 유미(나카시마 미카 분)는 열차

히데노리는 조국 한국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죽은 나나코의

의 좌석 하단을 발로 차며 고요함을 깨뜨린다. 카네시로 히데

시체를 들고 밀항해 한국으로 향하자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노리(이치하라 하야토 분)는 레코드샵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

꺼낸다. 놀랍게도 유미는 이를 받아들이고, 차를 소유한 타로

려도 연신 웃어대기만 한다. 그에게 도움을 주려던 타로(이케

까지 합류하며 셋은 황당한 여정에 나선다.

우치 히로유키 분)의 칼날을 맨 손으로 잡아 피를 철철 흘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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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웃음은 그칠 줄 모른다.

<고>와 <우연하게도 최악의 소년>은 어느 정도 연식이 있는 작

레코드샵에서의 일을 계기로 연락처를 주고 받은 타로는 헌팅

품들이다. 그 사이 세월도 많이 흘러 세계화란 단어가 우리에

자리에 히데노리를 불렀고, 그 자리에 유미가 동석하며 극을

겐 익숙해져 버렸다. 세계화가 진행되며 국경의 경계는 사라

이끌어 가는 셋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러나 각자의 아픔을 안

지고 있지만 민족의 경계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경계인들은

고 있는 히데노리와 유미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히데노리

태생의 뿌리가 된 집단과 실제로 속해 있는 집단 사이에서 헤

가 딱딱하게 굴기만 하던 유미에게 음료수를 부었고, 유미는

매고 있다. 두 작품이 묘사했듯, 자이니치 2세대들이 겪는 정

그의 뺨을 날리며 복수한다. 그래도 히데노리는 여전히 웃는

체성의 혼란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웃기만 하는 히데노리. 그에겐 무슨

두 작품은 자이니치 문제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식의 노골적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 메시지는 던지지 않는다. 다만 <고>의 중반부에서 스키하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하며 생활하는 히데노리는 자이니

라와 조총련계 친구 정일이 나눈 대화는 다시금 생각해볼 여

치 2세란 이유로 어려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그의 엄마와

지가 있다.

누나 카네시로 나나코(야자와 신 분)는 히데노리에게 늘 당당

“일본인은 오래 전 한국인, 중국인과 같은 DNA를 갖고 있었

하게 맞서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성격 탓인지 히데노리는 쉽게

어. 수십 만년 전엔 심지어 아프리카 사람들과도 비슷했다고.

변하지 못한다. 히데노리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부서져 자

다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내 본명은 이정호. 이소룡의 이씨야. 너무 외국인 같아서 무서워서 말 못했어. 가끔은 피부색이 초록색이였으 면 좋겠다고 생각 할 때도 있 어요. 재일한국인 임을 잊지도 않을 테고 무섭다고 하는 이도 접근하지 않을 테고. 내게 조선인의 혼이 남아있다 면 20엔에 팔게... 니가 살래? 너희들이 이름 붙였다. 너희 들이 날 재일이라 이름 붙이고 경계했다. 난 재일도 일본인도 아냐 난 그냥 나야! 우리가 두렵지? 이름붙여 차별 하지 않으면 불안해 미치겠지? 난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냐 그 저 뿌리 없는 부초일 뿐이야. 국경선 따윈 내가 없애버리겠 어.

영화 <고>(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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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 like looking 글 김보배 이주형

2016년 10월 1일 정오에 탄생한 피스마이너스원(PEACEMINUSONE). “평 화로운(Peace) 세상을 지향하지만 결핍된(Minus) 세상 속 이상과 현실의 교차점(One)”이라는 의미를 지닌 피스마이너스원은 *지드래곤과 그의 스 타일리스트 지은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지드래곤이 입고 싶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구현해 낸다. 피스마이너스원은 정기적인 시즌 컬렉션이 없는 브랜드다. 별다른 예고 없이 불시에 제품을 출시하며, 재발매 없이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롱스트랩 볼캡, 클립, 이어폰 등을 한정 수량만 판매하지만 이 아이템들은 나오자마자 금세 품절된다. 서울에서 탄생한 피스마이너스원은 전세계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공식 런칭 이전부터 프랑스 파리의 편집숍 *꼴레뜨와 협업했으며, 2017년 1월 파리에서 ‘PEACEMINUSONE EXHIBITION’ 전시와 애프터 파티를 열었 고, 런던과 뉴욕, 긴자, 싱가포르, 홍콩, 베이징 등의 편집숍과도 함께 작업 해왔다. 피스마이너스원은 2017년 6월 서울에서 첫 번째 팝업스토어를 연 이후 마이애미, 오사카, 홍콩을 돌아 2017년 10월 ‘모태’인 서울에서 런칭 1주년을 맞이해 ‘서울패션위크’ 기간에 <보그>와 협업한 팝업스토어도 공 개했다. 피스마이너스원엔 지드래곤의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갈망,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어떤 것을 보든 내가 떠오르는 스타일을 만들고 싶었다”는 말처럼 피스마이너스원은 지드래곤의 존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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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드래곤 (G-DRAGON) 본명 권지용. 1988년 8월 18일생. 한국의 랩퍼이자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그룹 BIGBANG의 리더. 패션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시대의 아이콘. 샤넬, 생로랑, 톰 브라 운, 톰 포드, 마크 제이콥스, 지방시 등 세계 브랜드들이 러브콜을 보내는 디자이너들의 뮤즈. 사우디아라비아 공주를 비롯해 안젤 라 베이비, 바바라 팔빈, 퍼렐 윌리엄스 등 세계 유명인사와도 콜라보를 진행. * 꼴레뜨 (Colette) 1997년 프랑스 파리 ‘213 Rue Saint Honore’에 문을 연 편집매장. 시그니처 컬 러는 블루이며, 두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로고로 유명. “신선하고 놀랍고, 남들보다 항상 앞서야만 한다”라는 철학과 일치하는 모든 브랜드를 -무명의 신인부터 하이엔드 까지- 전시. 창립자 꼴레뜨 루소의 은퇴와 함께 온오프라인 매장을 정리하며 2017년 12월 20일 20년의 여정을 마무리.


Asia » Republic of Korea

Born October 1, 12:00 PM, fashion brand PEACEMINUSONE envisions “a world at Peace coming together (One) with a world deprived (Minus) as a crossover between the real and the ideal”. It is the materialization of pop-star G-Dragon and his stylist, Gee Eun’s combination of imaginations and their act of wearing and doing whatever they want. PEACEMINUSONE does not offer any seasonal collections, and often they will display new products without prior notice or promises of re-release. Items are created and sold based on limited quantity and most sell-out immediately. Based in Seoul, PEACEMINUSONE frequently receives love calls from around the world. Even before its official launching, the brand successfully ran its collaboration with Parisian boutique Colette with the “PEACEMINUSONE EXHIBITION” and after party events in January 2017. Since then, PEACEMINUSONE has worked on projects with other editing stores in London, New York, Ginza, Singapore, Hong Kong, and Beijing. After introducing the brand’s first pop-up store in Seoul, June 2017, PEACEMINUSONE made its international rounds through Miami, Osaka, and Hong Kong, to return to the “mother land”, Seoul, in October. At this point, PEACEMINUSONE opened its second pop-up store (collaborating with Vogue) in celebration of the brand’s first anniversary. And like his statement, “I wanted to make a style through which people would see me,” PEACEMINUSONE is G-Dragon’s existence; the embodiment of G-Dragon himself.

peaceminusone x Vogue 2017 pop-up 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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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to go 글 김보배 이주형

www.boan1942.com

OPEN OFFICE Mon-Sat : 10AM-6PM B1 & Old Exhibition Tue-Sun : 12PM-6PM Boanbooks Bar (B2) Tue-Sun : 2PM-1AM ilsangdabansa (F1) Tue-Sun : 11AM-9PM ADDRESS 33. Hyoja-ro, Jongno-gu, Seoul TEL +82 2 720 8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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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n Yeogwan(Inn) — Boan1942

보안여관 - 보안1942

There aren’t many places that hold innocent history within its walls. But right in the heart of Seoul, in Tong-uidong, Boan Yeogwan(Inn) has for 80 years carried that kind of historical significance. In 1936, Korean poet Seo Jeong-ju frequented this inn where he met with friends such as Kim Dong-ri and Kim Dal-jin (also poets) to co-publish a literary magazine called Poet’s Village. It is said that renowned writers including Lee Sang, Yun Dong-ju, and artist Lee Jung-sub also stayed at the inn quite often. For a time, the Boan Yeogwan was closed due to financial difficulties, but Choi Sungwoo, CEO of Boan1942, was so taken by the place that he began a “creative restoration” process that would maintain the inn as a place where artists lived and breathed but also renovate it into a practical space. Since 2010, Boan Yeogwan has welcomed guests as a public gallery. Boan1942 is a compartment connected to Boan Yeogwan of which the B2 floor functions as a bookstore (Boanbooks Bar) in daytime and a bar at night. The B1 floor contains an exhibition hall and on the 1st floor, one can find a delicious food and beverage corner at the “ilsang dabansa”. Straight above, the 2nd floor, the “Boan Bookstore” sells only a single book, and on the 3rd and 4th floors, guests are invited to a cultural complex, the “Boan1942 Stay”, offering a variety of activities and events.

빈티지스러움을 내세우는 곳은 많지만 실제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 다. 그러나 서울 한복판 통의동의 보안여관은 80년간 그 자리를 지켜왔다. 오랫동안 보안여관을 거쳐간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에는 문인 서정주, 김동리, 김달진, 이상, 윤동주와 화가 이중섭 등 한번쯤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예술가들이 포함돼 있다. 서정주 시인은 이 곳에 머물면서 동료들과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인부락’을 만들기도 했다. 보안여관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 위기를 맞이했으나, 2007년 복합문화예술공간을 기획하려 던 최성우 보안1942 대표가 한 눈에 반한 이 곳을 인수하면서 ‘창의적인 복원’에 나섰다. 복원 의 핵심은 오랜 역사가 담겨 있는 보안여관의 공간적인 가치를 지키며 문화예술과 접목시키는 것이었다. 2010년 리모델링을 마친 보안여관은 1, 2층의 각 방마다 각각의 테마에 맞는 전시를 시작했는데, 타일과 목재 기둥, 벽면 등 곳곳엔 일제시대 때부터 남겨진 흔적들이 묻어나 있다. 보안여관과 연결된 보안1942는 낮에는 서점, 밤에는 술집으로 변하는 지하 2층의 ‘보안책방’, 지하 1층의 전시장, 정갈한 음식과 차를 내놓는 지상 1층의 ‘일상다반사’, 한 권의 책만 판매하 는 지상 2층의 ‘보안책방-한권서점’, 지상 3~4층엔 문화 투숙객을 받는 ‘보안스테이’를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예술가들이 살아 숨쉬었지만 보안여관은 예술가만을 위한 공간을 표방하진 않는다. 최성우 대 표가 “예술가들의 에너지가 사회와 만나는 공간이 되길 꿈 꾼다”고 바랐듯이 보안여관은 이 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의 일반인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건물은 자란다’를 운영철학으로 삼고 있는 보안여관. 보안여관은 문화예술과 사회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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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the asian food 글 이주형

가벼운 한 끼 식사 또는 숙취가 남아있는 날 해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음식 쌀국수. 불과 몇 년 전까진 일부 대형 체인을 제외하면 서울에서조차 전문 식당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번 화가가 아니더라도 동네마다 한 두 곳쯤은 발견할 정도로 많아졌다. 서울 노량진에 위치한 사이공리는 문을 연 지 1년 정도 밖에 안된 곳이다. 그러나 맛과 가성비로 마 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고, 2017년 가을 유명 TV프로의 베트남 음식 맛집으로 소개되며 전국 적인 유명세를 누렸다. 얼마 전엔 근처로 확장 이전도 했다. 눈 내리던 어느 봄날 찾아간 사이공리. 평일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날씨까지 궂었지만 착석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었다. 방송 이후 큰 인기를 누리다 변질돼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는 곳이 간혹 있지만, 사이공리는 그러한 케이스에 속하진 않는 듯하다. 사이공리의 쌀국수와 반미는 여전히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확장 이전 했다곤 하나 자리가 비좁고, 점심 시간이나 주말엔 어느 정도의 기다림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다. 사이공리가 단기간 내에 부쩍 커버린 사람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곳이 정말 부담 없는 가격대에 베트남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식당 중 한 곳이란 사실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 쌀국수-Pho-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20년대 베트남 북부에서 시작됐으니 100년이 채 안된 셈이다. 초창기 쌀국수는 지금과 많이 달라 시나몬, 팔각, 정향 등의 향신료와 참기름, 두부 등으로 만들었으며, 농경국가의 특성상 소가 귀해 소고기는 들어가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지배의 영 향으로 익히지 않은 소고기가 들어간 쌀국수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후 익힌 소고기를 넣은 쌀국수 가 탄생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쌀국수의 세계화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오랜 내전으로 베트남 엔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세계 각지에 정착하면서 쌀국수도 전세계로 전파됐다.

OPEN 11:00am-21:00pm (일요일 휴무) ADDRESS 서울 동작구 장승배기로 17길 1 TEL +82 2 822 1763 쌀국수 : 5,900원 반미 (포크/계란/미트볼) : 5,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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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리를 대표하는 쌀국수. 맑고 깔끔한 육수, 넓 고 얇은 면이 특징이다. 가격대를 고려하면 곁들여져 나오는 고기의 맛과 양도 훌륭한 편이다. 무겁지 않 은 육수와 면발, 고명 3박자가 잘 어울어져 거침 없 이 흡입하기 좋다.

가성비 극강의 포크 반미. 베트남식 샌드위치 반미를 사이공리의 시그니쳐 메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안의 돼지고기는 생김새로 보나 맛으로 보나 제육볶 음과 비슷해 한국인의 입맛에도 알맞다. 바짝 구워 진 바게트 빵도 바삭한 식감을 자랑한다.

쌀국수 혹은 반미 한 메뉴만으론 부족한 대식가를 위한 사이드 메뉴 짜조도 있다. 별미를 찾는 이들에 겐 비빔쌀국수가 제격이다. 사이공리는 베트남 로컬 맥주도 판매하는데 음식과 맥주 한 병 즐기다 보면 행복한 포만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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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 Seo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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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SAMARKAND 서울 중구 마른내로 159-21 02-2279-7780

양고기 꼬치 샤슬릭

① KUSHIMURA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3길 13 02-333-2650

닭완자 꼬치 쯔쿠네

단새우 스시

③ 스시 키노이 서울 마포구 매봉산로 2안길 19-5 02-3151-0887 ?


Personality in Crevices and Corners Seo Eui-mi Staff Reporter

Yuna has been in Korea, now, for a year and a half, teaching English at a hagwon (cram school) to young students. It’s the typical rigorous academy that prepares students for the TOEFL exam and they are visibly stressed. But that could have been her. Back home in America, her Korean parents are a reminder that she could have been sitting in those same seats, worrying about English exams and undergoing the same difficult Korean education system. But her parents both moved to the United States—her mother when she was in her twenties and her father as a child—where they would meet and marry. Their children would grow up in New York City, but Yuna’s mother was determined to pass down her Korean roots to her children. And most certainly, Yuna deeply identifies with her ethnicity. “It’s weird. I think I’m fully American culturally, but at the same time, I am Korean in so many ways. I would say I’m 60% Korean; I joke that I have the most Korean taste-buds in the family.” Her favorite Korean dish is seolleongtang (ox bone soup), which she amusingly adds is like a “grandma’s” food. That was how it was with being brought up by her mother though. Having immigrated to America as a young woman, Yuna’s mother often reminisced of the life she left behind in Korea, talking about the food and traditions that were part of the Confucius society; the importance of respecting one’s elders for their hard work which eventually became the foundation for the future generation. Arriving in Korea, Yuna was surprised to see that the Korea she had come to know through her mother wasn’t quite the same. People weren’t as eager to respect the elderly as she had expected. She saw poor halmonis (Korean for grandmothers) sitting on the station floor selling the small amount of vegetables they had all day. People just went their own way, ignoring the women, refusing to buy anything. It was hard to understand why they would leave the grandmothers to struggle like that.

didn’t make sense to have to remind those Americans that she,

So, some parts to the country were difficult to get used to

too, was from America.

and still other aspects were completely jarring, but it was also

Korea is not home. But in how she has been accepted and

refreshing, in a way, to be able to mix in comfortably in a place

through the experiences she has had, Yuna has been given a

where she is a foreigner. Yuna’s Asian eyes and skin color

healthy dose of perspective of her current position and possibly

brought no questioning glances in Seoul—whereas in New York,

a better idea of future steps: “I view the world a lot more differently now.

people would push “No really, where are you from” to her face. It

Before I saw the world through a very American l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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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Yuna Age 24 Occupation Hagwon teacher

Nationality American Interests cooking, pole dancing Favorite place in Korea Hongdae

“I wondered what my life would have been like if I had grown up here. I mean, it could have happened. My parents are Korean so it’s strange to think about how my life turned out and how it could have 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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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랐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해. 부모님이 한국인이라 나 역 시 한국에서 살았을 수도 있었거든.” 24살의 미국 국적자 유나가 한국으로 건너온 지 어느덧 1년 반이 됐다. 그녀 는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토플을 가르치고 있다. 유나는 많이 지쳐 있는 학생 들을 바라보며 ‘내가 그들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성장 했다면 유나도 한국의 유별난 교육시스템을 경험했을 지 모른다. 유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어머니는 이십 대, 아버지는 그보다 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 가셨고, 그 곳에서 결혼해 정착하셨다. 자녀들은 뉴욕에 서 성장했지만,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한국인이란 뿌리를 일깨워주기로 마음 먹었다. “정말 이상해.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인인 건 분명하지만 여러 면에서 한국인의 기질도 갖고 있어. 굳이 따지자면 60%의 한국인?” 유나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 설렁탕을 ‘할머니’와 같은 음식이라 표현한다. 어 머니의 설명 덕분이다. 어머니는 유나에게 유교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음식, 전통들과 다음 세대의 밑거름이 된 전 세대의 노고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 어머니의 고국을 찾은 유나가 한국의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 나 동양적인 외모를 지닌 유나가 서울에서 “넌 어느 나라에서 왔어?”라는 질 문을 듣는 일만큼은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녀가 미국인들에게 ‘자신도 미국인임을 상기시켜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한국은 유나의 집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국 사회에 큰 어려움 없이 녹아 들며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고, 또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 지 깨달았다. “이제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어. 과거의 나는 미국인의 시선으로 세상 을 바라봤거든.” 번역 차은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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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2017 언타이틀드, 2017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신화역사로 304번길 139. 지드래곤의 카페 ‘Untitled, 2017’이다. 지 드래곤의 볼링펍 ‘AC.lll.T’와 함께 제주신화월드 안에 위치해 있다. ‘Untitled, 2017’이란 이 름은 솔로앨범 타이틀곡 ‘무제(無題) (Untitled, 2014)’에서 가져왔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 면 그를 상징하는 알파벳 G와 D가 떠오르는 외관 디자인부터 인테리어, 아트워크, 판매 음료까지 지드래곤이 관여했다. ‘Untitled, 2017’ 등이 있는 복합리조트 제주신화월드는 신 화워터파크, 포시즌스 리조트, 최초의 라이언스게이트 무비월드 등을 차례로 선보이며 2020년경 완전 개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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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가 논하는 자아정체성에 대하여 알레산드라 보나노미 기자

<데미안>은 1919년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반 자전적인 소설이다. 소설은 1차대전 직전부터 전쟁까지 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데미안>은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주인공이자 서술자 에밀 싱클 레어가 자신의 내적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의 학교 친구 막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마 음을 열고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 내적 깨달음을 얻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대학까지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는 동안 싱클레어는 부도덕한 세상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고 군분투하며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한다. “오직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왜 이리도 어려운가?”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탐구하며 그가 한 말이다. 소설은 세계 1차대전 도 중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부상을 입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겉보기엔 1차원적인 구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듯하지만, <데미안>은 기독교 신학, 니체의 철학, 동방 신비주의라는 상징적 서사 속에 융 심리학의 개념을 더했다. 이를 통해 헤세는 칼 구스타브 융 의 심리학을 이야기 속에 녹여냈다. 출간 당시 <데미안>은 자아정체성 탐색으로 고민하던 독일 청년들의 심금을 울렸다. 헤세의 소설은 또한 1960~70년대 사이 미국의 청년들과 공명했다. 그 형식상 데미안은 사춘기를 지나 성년기에 들 어선 주인공의 심리학적, 그리고 도덕적 성장을 그리는 교양소설로 분류된다. 이와 같은 장르의 소 설은 독일의 낭만주의 시기에 인기를 누렸다. 저자 헤르만 헤세 (1877~1962)는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1899년 시집을 첫 출간했다. 세계 1 차대전 중 스위스에 거주하던 그는 군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고, 전후에는 스 위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헤세는 비판적 사유로 잘 알려져 있는 작가다. 갈수록 깊어갔던 작가 개인의 위기감이 그로 하여금 정신분석적 접근을 수용하게 만들었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작품들은 본연의 정신과 정체성을 찾 기 위해 획일화된 세상에서 탈피하려는 개인의 노력을 담고 있다. 헤세의 주요 작품으로는 <페터 카멘친트>(1904) <게르트루드>(1910),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황야의 이리>(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그리고 1946년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유 리알 유희>(1943) 등이 있다. 번역 차은서 인턴기자

<데미안> 헤르만 헤세Ι휘셔 출판사Ι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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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ntity in Hermann Hesse’s Novels Alessandra Bonanomi Staff Reporter

Demian is a semi-autobiographical story written by Hermann Hesse, published in 1919. The novel is set in Germany, in the decade preceding World War I, and tells of a troubled adolescent’s arrival at self-awareness. Emil Sinclair is his own narrator, describing his personal journey towards a genuine understanding of his inner self after growing up in a conservative Christian family. And Max Demian, his schoolmate, is the one who first opens Sinclair’s mind to unconventional ways of thinking, ultimately leading him to inner revelation. Across his years of grade school, high school, and university education, Sinclair struggles to find his identity in the immoral world and is always caught between the question of good and evil. “All I wanted was to try and realize whatever was in me. Why was that so difficult?” he said when talking of the research he put into finding about the deepest corners of himself. The novel ends in the progression of World War I, and both Emil and Max have been wounded in battle. Throughout a seemingly one-dimensional plot, Demian applies the analytic concepts of Jungian psychoanalysis in a strongly symbolic narrative drawing from Christian theology, Nietzschean philosophy, and Eastern mysticism. But more specifically, the words grew out of Hesse’s experience of psychoanalysis with Carl Jung and J.B. Lang. During the time it was published, Demian happened to strike a chord with Germany’s postwar youth; those who felt the novel expressed their common search for personal identity. Hesse’s novel also resonated with a generation of youth in the United States between the 1960s and 70s. By format, Demian could be classified as a Bildungsroman—meaning “education novel”—which is a genre that focuses on the psychological and moral growth of the protagonist from youth to adulthood. This type coming-of-age story was popular in Germany’s romantic period. The author, Hermann Hesse (1877-1962), was a German novelist and poet who published his first book, a collection of poems, in 1899. During World War I, he lived in Switzerland where he wrote denunciations of militarism and nationalism, and in 1923, he acquired Swiss citizenship. Hesse is frequently described as a “crisis writer”; in fact, a deepening sense of personal crisis led him to receive psychoanalysis. The main theme of this work is the individual’s effort to break out of the established modes of civilization so as to find their own essential spirit and identity. Hesse’s most famous novels to date are Peter Camenzind (1094), Gertrud (1910), Demian (1919), Siddhartha (1922), Steppenwolf (1927), Narcissus and Goldmund (1930), and The Glass Bead Game (1943). In 1946, Hermann Hesse was awarded the Nobel Prize for Literature in 1946.

<Demian: The Story of Emil Sinclair’s Youth> By Hermann HesseΙS. Fischer VerlagΙ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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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미국의 영웅, 빌리 그레이엄 목사

박명윤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아시아엔> 보건영양 담당 논설위원

빌리 그레이엄(1918년 9월 7일 生) 목사가 99세를 일기로 2월 21일 노스캐롤라니아주 몬트리트 마을(인구 700명)의 자택 에서 소천(召天, demise)했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본명 William Franklin Graham Jr.) 목사의 추도식이 2월 28일 워싱턴 연방의사당 중앙홀에서 거행되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상하원 지도부 등을 비롯한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했다. 장례식은 3월 2일 (음력 正月 대보름)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있는 ‘빌리 그레이엄 도서관’에서 엄수됐다. 빌리 그레이엄은 16세 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고교 시절부터 전도에 힘썼다. 1940년 플로리다 성서신학교(Florida Bible Institute)를 졸업하고 남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3년 일리노이주 웨스턴 스프링 제일침례교회에서 목 사로 시무했으며, 1947년에는 노스웨스턴 성서학교 교장과 대학장을 역임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949년 로스앤젤레스(LA) 전도대회 중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신앙을 갖게 되면서 미국 전역 에 알려졌으며, 1950년 빌리 그레이엄 복음전도협회를 설립하고 세계 전도활동에 나섰다. 1954년 영국 런던 집회를 성공 적으로 마치면서 세계적 부흥집회 강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성가 지휘자와 성악가를 대동하고 전도팀과 함께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6대주 185개국 이상을 다니며 2억1500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한국 교계에도 잘 알려진 그는 1952년 북한의 6·25남침전쟁 당시 서울과 부산 집회에서 피난민들을 위로했으며, 1956년에는 서울운동장에서 8만여명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1973년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전국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집회를 가졌고,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 광장에서 매일 집회를 가졌다. 마지막 날인 6월 3일 낮에는 115만이 여 의도광장에 모였고, 이 기간 동안 연인원 334만명이 모여 4만4천명의 결신자(決信者)를 내는 등 세계 전도 사상 괄목할 만한 기록을 세웠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에 초대형 아스팔트 광장을 만들었는데, 이듬해인 1973년 전도대회가 열렸다. 1973년 교파를 초월해 100만 인파가 몰렸던 서울 여의도광장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던 당시 39세 ‘수 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장환(현 극동방송 이사장) 목사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김장환(별칭 빌리 킴) 목사는 1934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중 칼 파워스 미군 상 사의 주선으로 1951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58년 밥존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귀국 후 12명의 신도로 수원중앙침례교회를 설립했다. 한국에서 열린 전도대회 통역을 그레이엄 목사 측에서 한경직 목사께 부탁했으나 당시 70대였던 한 목사가 사양하면 서 김장환 목사를 추천했다. 전도대회 이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한국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며, 김장환 목사는 매년 미국으로 그레이엄 목사를 방문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선교집회를 열고, 김일성 당시 주석을 만나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메시 지를 전하는 역할도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 루스 벨 여사는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1931-1937년 청소년기 의 학창시절을 평양에서 보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 전도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로 꼽혀 왔다. 그는 미 국 대통령들의 ‘영적 멘토’로 활동했으며, 해리 트루만 대통령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은 그레이엄 목사를 찾아 영적 조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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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했다. 또한 세계 정치 지도자들의 영적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인물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005년 전도 집회를 끝으로 목회자로서의 삶을 은퇴했다. 그의 전도여행에서 가장 많은 인 파를 기록한 것은 1973년 6월 3일 115만명이 모인 서울 여의도광장 집회였으며, 미국 집회에서는 91년 9월 뉴욕 센트 럴파크 집회로 25만명이 모였다. 2007년 아내와 사별(死別)의 아픔을 겪기도 했으며, 자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온라인 목회 상담 사역을 펼쳤다. 그는 20년 가까이 파킨슨병에 시달렸으며, 최근에는 기관지염, 폐렴 등으로 힘든 만년을 보냈다. 1994년 리처 드 닉슨 대통령 장례식에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고,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든다”고 말한 것과 같이 그도 자연스러운 노쇠현상을 겪으면서 죽음을 맞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애도 성명을 통해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미국의 영웅이었다”며 “그가 ‘하나님의 대사’(God’s Ambassador)라는 사실은 그가 남긴 삶의 족적(足跡)을 보면 알 수 있다” 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100세가 되는 올해 9월 7일 ‘백수(百壽)잔치’를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 하나님 나라에서 열 기 위해 소천하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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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화의 노예’로 살 것인가?

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원불교 청운회 전 회장

인간의 감정 상태인 희노애락 가운데 노(怒)가 가슴속에 쌓여 있다가 폭발한 형태를 화(火)라고 한다. 이때 화를 ‘불 화’로 쓰는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노(怒)로 화를 대신한다. 그러니까 화병은 심암(心癌)으로, 마음속에 기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화’는 우리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한 젊은이가 새로 사온 침대를 조립하는 소리에 화가 난다고 아버지와 누이를 아령으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화를 참지 못하는 사회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이는 경제가 풍요로워지는 대신 경쟁이 심화되고 시간에 쫓기듯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에서 조금함을 느끼게 되는 것 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욕구불만, 정신불안이 커지면서 화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화는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망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나 하나로 인해 가족에게 불똥이 떨어지고, 그 불똥이 더욱 커져 전체가 화를 내고 만다. 불이 인간에게 이로움이 많은 반면 무서운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음속의 화 역시 열정으로 볼 수 있지만 노여움을 가지고 있어 문제다. 그런데 화도 잘 ‘처리’하면 자신을 성숙시키고 타인을 용서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무조건 참고 억누르거나 스 스로 조절을 하지 못하고 분출시킬 경우 화병(火病)으로 이어진다. 화병은 우울증, 불면증, 정신분열증 등을 동반하는 복 합정신질환이다.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남의 잘못을 너그러이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화문(火門)’을 넘어 화문(和門)으로 가는 길이다. <장자> 인간세편(人間世篇)에 달기노심(達其怒心)이라는 말이 나온다. 성내는 상대의 마음을 잘 달래서 화를 면하여 야 한다는 뜻이다. 보다 자세히 풀면 이렇다. “당신은 호랑이 기르는 자를 모르는가? 감히 살아있는 짐승을 먹이로 주지 않는 것은 호랑이가 그것을 죽일 때 사나 와지는 것 때문이며, 감히 온 마리의 짐승을 먹이로 주지 않는 것은 호랑이가 그것을 찢을 때 사나와지는 것 때문이다. 그 러므로 굶주릴 때와 배부를 때를 잘 살피고, 그 사나운 마음을 파악하는 데 통달해야 한다. 사람과 호랑이는 종류가 다 른 동물이지만, 호랑이가 자기를 길러주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려하는 것은 호랑이의 성질에 따라 먹이를 맞추어 주기 때 문이다. 반대로 호랑이가 자기를 길러주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호랑이의 성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달(達)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대처를 적절히 잘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상대방이 야수처럼 돌변하여 포악해지는 경우 상대방을 조련하듯 달래가면서 위기를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인간관계를 유 지하는 데 호랑이를 달래는 ‘달기노심’의 심법은 내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을 감정을 잘 살펴 대응하는 것이 상책 이라는 얘기다. 성내는 상대의 마음을 잘 달래서 화를 면하여야 한다는 달기노심(達其怒心)을 보며, 화를 잘 다스리는 방법을 한 번 알아보자. 첫째,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억지로라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라는 말이다. ‘내가 저 사 람이라도 저럴 수밖에 없을 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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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내가 왜 너 때문에’라고 생각한다. 나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고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속을 끓 인다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내가 왜 당신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저절로 화가 풀린다. 셋째, ‘시간이 약’임을 믿는다. 지금의 속상한 일도 며칠 지나면, 아니 몇 시간만 지나면 별 것 아니다. 너무 속상할 때는 ‘세월이 약’이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돌린다. 넷째,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생각한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화로 인해 속상해 하지 말고, ‘새옹지마’라고 생각하 자. 다섯째, 즐거웠던 순간을 회상한다. 괴로운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한없이 속을 끓이게 된다. 즐거웠던 지난 일을 회상해 보면 기분이 전환될 수 있다. 여섯째,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화가 치솟을 때 조용히 눈을 감고 심호흡해 보자.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침을 삼키듯 꿀꺽 삼키자. 이것이 바로 단전주심법(丹田住心法)이라 하는 것이다. 일곱째, 전생의 업보라 생각하고 갚지 않는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심한 분노가 솟아오를 때는 이를 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하자. 달게 받고 갚지 않으면 그 업은 쉬워진다. 이를 감수불보(甘受不報)라 한다.

이상의 일곱 가지가 ‘화문(火門)에서 화문(和門)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모든 일을 화(和)와 유(柔)로 해결하면 능히 강(剛)을 이길 수 있고, 촉(觸)없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화’와 ‘유’를 통해서도 되지 않는 경우에 는 부득이 ‘강’을 쓰는 것도 한 방편(方便)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문(和門) 이상의 복문(福門)은 없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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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지혜와 이타적 거짓말

김희봉 교육공학박사 현대자동차그룹 인재개발원

“이 아기의 엄마는 제가 아니라 저 여인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아기라고 우기는 두 여인에게 아기를 반으로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한 솔로몬 왕에게 한 여인이 했던 말 이다. 거짓말이다. 자신의 아기가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아기를 살리기 위해 친모는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저는 이 은잔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당에 있는 은촛대를 훔친 혐의로 장발장을 붙잡아 온 경찰에게 미리엘 신부가 했던 말이다. 이어서 그는 장발 장에게 “내가 이 은잔도 가지고 가라고 했지 않았느냐”고도 했다. 물론 미리엘 신부가 했던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솔로몬 왕 앞에 선 여인과 경찰을 마주한 미리엘 신부가 했던 말은 갓난아기를 살리고 장발장의 삶을 바꾸게 된 거짓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했던 거짓말에는 ‘이타적’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하다. 이타적 거짓말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실수에 대한 변명 또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등 스스로를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즉 자신이 아닌 상대방을 이 롭게 만들기 위한 거짓말인 것이다. 이타적 거짓말을 옛이야기나 문학작품 속에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요의 가사 중에 “어 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소절이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머님이 처한 상황상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충분 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역시 이타적 거짓말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막상 주변에서 이타적 거짓말을 하거나 듣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거짓말은 타인이 아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2016년 세계커뮤니케이션학회에서 발표된 연구 자료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즉 조사대상자의 약 80% 정도는 자신의 내적 혹은 외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자신을 보호하는 등 주로 자신을 위한 이기적 인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의견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기적인 거짓말은 일종의 본능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거짓 말하기도 한다. 만일 거짓이라면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다짐 역시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시간 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거짓말은 다 밝혀지게 된다. 거짓말의 당사자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타적 거짓말은 조금 다르다. 이타적 거짓말은 즉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랜 기간의 성찰을 통해 숙성된 올바른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 등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이타적 거짓말 역시 밝혀지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고 책임 을 져야하는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타적 거짓말로 인한 여파와 변화는 이기적 거짓말과는 사뭇 다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하루에 평균 다섯 번 내외의 거짓말을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최근에 당신이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떠올려보자. 역시나 이기적인 거짓말이었다면 다시는 입에 담지 말자. 그리고 혹여나 거짓말을 해 볼 요 량이라면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거짓말이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하자. 준비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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