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과정

Page 1

제 9기 서울출판예비학교 교육발표회 2013 한국출판인회의

Book Editor


출판편집자 과정

기본을 갖춘 편집자가 멀리 간다 제9기 서울출판예비학교 편집자 반 소개

서울출판예비학교, 제9기 교육의 핵심은 기본을 갖춘 단단한 편집자 2013년 6월 5일, 입학식을 치르며 제9기 서울출판예비학교 편집자 반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 두 달 전인 2013년 3월 29일에 제8기가 전 과정을 수료했다. 제8기 편집자 반 교육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교육 과정 평가를 바탕으로 교육 과정을 점검한 뒤, 곧바로 제9기 전형이 시작되었다. 제9 기 과정은 편집의 전 과정을 아우른 전공 수업과 출판의 역사 등의 교양 수업, 분야별 시장의 이해, 워크숍 등 큰 틀의 기조는 유지하되, 일부 과정을 강화하고 출판사의 협력을 더해 현장성을 강화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6개월 과정을 통해 24명의 예비 편집자가 편집자로서 갖춰야 할 ‘업무의 기본’을 익히고, 출판 환 경이 더욱더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줄 ‘출판하는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감 각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스스로의 동력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를 목표 로 했다. 추후 제작하게 될 출판물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대상 독자가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사회 적 지성을 책이라는 매체에 담아내는 전문가로서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를 잊지 않는, 출판업계의 든든한 기둥으로 성장할 인재들을 위한 과정이었다. 출판이란 결국 사회적 지성의 실용을 위한 도구이다. 능숙하게 실무를 해내는 능력만큼이나 세상 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관점이 중요할 것이다. 업계에서 일하는 베테랑 선배와 선생님 들의 강의 는 실질적인 업무 능력을 갖추는 데도 목적이 있었지만 여러 출판 편집자의 상을 통해 보다 다양 한 편집자 상을 그려보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도서전과 출판 관련 축제장을 함께 관람하 고, 출판사와 제지사, 인쇄・제작처, 서점 및 물류회사 등을 견학하고, 편집장들의 특강을 배치해서 입사 전에 현장의 감각을 접하게 함으로써 긴장감 속에 직업에 대한 의욕을 고취할 수 있게 하였 다. 또한 동아리 활동을 권장하여 함께 출판업계에 첫발을 디디고 출판인으로서 먼 길을 의지하 며 다독이며 함께할 벗들과의 친목을 도모할 수 있게 하였다.

경쟁력 있는 출판사의 중심은 사람이다 2005년에 개원한 서울북인스티튜트는 한국출판인회의가 “출판인의 능력을 향상하는 일이 곧 출판 사의 경쟁력이 된다”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이 기관의 교육 목표는 “출판 환경 의 변화에 따른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교육, 최고 전문가 중심 교수진을 통한 출판에 대한 안목과 실력을 넓히는 전문교육, 출판인으로서 건전한 직업정신과 윤리의식을 강화하는 교육, 이론과 현장의 창조적인 접목을 꾀하되 연구에 역점을 둔 현장 중심의 교육”이다. 열정을 갖춘 출판인을 양성하는 요


람이 되고자 하는 신규 인력 양성과정인 서울출판예비학교의 교육 목표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 마케터, 디자이너 과정 공통으로, 출판의 기본 공정을 이해하게 한다 출판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직업의식을 고양한다 출판 공정에서 요구되는 직무상의 핵심 사항을 이해하게 한다 출판 공정에서 요구되는 기본적인 업무 지침을 숙지하게 한다

세부적인 교수 목표는 “6개월간 이루어지는 교육에서,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현장 실무 위주의 교육을 통 하여 출판 편집의 전 과정, 즉 원고 검토, 편집 계획, 교정 교열, 본문 및 표지 레이아웃, 인쇄제작 감리, 출 판 홍보 마케팅 등 제반 출판 과정에 대해 숙지하고, 단행본 출판의 여러 분야의 특성을 이해하여 실무에 투입될 시 빠르게 업무를 익히고 전문 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실무 역량을 갖추도록 하며, 업무의 효 율성과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제9기 편집자 반은 2006년 제1기부터 2012년 제8기에 이르는 동안 쌓아온 워크숍 교육의 노하우를 바 탕으로 좀 더 실질적인 교육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출판예비학교 교육의 특징은 워크 숍에 있다. 조 작업으로 수행하면서, 출판의 각 단계에 필요한 노하우를 적용해봄과 동시에 각 조원들, 디 자인 반과의 협업 등 교육생들 상호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최종 결과물인 출판물을 완성함으로써 업무를 종횡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제9기 워크숍에는 페이퍼로드(대표 최용범), 이지스퍼블리싱(대 표 이지연), 미다스북스(대표 류종렬), 한권의책(대표 김남중) 출판사가 협력사로 참여하여, 워크숍에 사 용할 원고를 제공하고 편집기획서를 평가하는 등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커리큘럼 전반에 걸쳐 있는 출판계 여러 분야의 훌륭한 선배 편집자들의 살아 있는 교육이야말로, 단 지 이론이 아닌 현실에 뿌리내린 실질적인 직업 가이드로서 큰 의미가 있다. 학생들의 자발적 판단과 실력으로 완성하는 워크숍 교육과 더불어, 한국의 단행본 출판계의 역사를 만들어온 선배 출판인들 의 열정에 기초한 이러한 교육은 서울출판예비학교가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얻기 어려운 서울출판예 비학교만의 자랑이다. 이제 서울출판예비학교 과정을 마쳐가는 24명의 예비 편집자들은 이제 각자 자신의 일터를 찾아 편 집자가 되어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의기충천해 있다. 이러한 열정을 간직하고 갈수록 척 박해지는 환경에서도 자신의 일을 즐기는 한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출판계를 견인하는 역 할을 하겠다는 꿈을 키워갈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제9기 서울출판예비학교 편집자 반의 선발과정 및 커리큘럼 서울출판예비학교 제9기 편집자 반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

선발: 131명 지원, 경쟁률 5.5:1 2006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출판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등용문으로 자리 잡은 서울출 판예비학교의 제9기 교육생은 총 24명으로, 131명이 지원하여 약 5.5: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들은 이 력서와 자기소개서, 독서 이력서를 통해 진행된 제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한 후, 한국어와 논술 시험으로 구


성된 2차 선발시험을 거쳐, 3차로 한국출판인회의 소속 출판사 대표 및 편집자 반 담임 교수로 구성된 면접관들의 심층면접을 통해 선발되었다. 특히 ‘독서 이력서’는 “책을 읽어온 사람이 책을 만든다”라 는 취지에 따라 이전부터 자리 잡은 양식으로, 작성하는 동안 편집자가 되려는 자신의 교양을 돌아보 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서울출판예비학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편집자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 들의 독서의 폭과 깊이, 그리고 교양을 눈여겨보려 하였다. 말하자면 교육생들은 이처럼 세 차례에 걸 친 까다로운 전형 절차를 거치면서, 교육 과정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출판인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열정과 자질을 스스로 되돌아보며 편집자를 향한 초심을 다지는 셈이다.

강의와 워크숍 : 주 5일, 하루 7시간, 총 114일, 798시간 제9기 편집자 과정은 입학식, 교육발표회(채용설명회), 수료식을 제외하고 온전한 수업만 114일, 798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주 5일, 매일 오전 9시 30분에 첫 강의를 시작하여 5시 20분까지 하 루 7시간, 전체 798시간, 114일의 커리큘럼으로 짜여 6개월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70여 개의 강좌, 60명의 교수진 제9기 커리큘럼은 편집자 반 책임 교수 및 특강 참여 인원을 포함하여 60명의 교수진에 의해 다 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수업은 단행본 제작 워크숍과 교정교열 훈련, 자기소개서 쓰기 등을 중심으 로 한 ‘전공 실습’과, ‘전공 필수’ ‘전공 교양’, ‘교양 필수’ 등의 강의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제9기 편집 자 반의 워크숍은 페이퍼로드, 이지스퍼블리싱, 미다스북스, 한권의책 출판사의 도움으로, 원고 읽 기부터 단행본 제작까지의 전 과정을 경험하는 한편, 업계의 대선배에게서 애정 어린 격려와 조언 을 듣고, 편집기획서 평가회 등을 통해 실질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전공 필수’ 과목으로는 출판편집의 이해, 출판매체의 이해, 출판저작권의 이해, 출판물의 교정과 어문 규범, 출판제작의 실제와, 분야 총론 및 인문・문학1, 2・경제경영・청소년・어린이문학 1, 2・예 술・실용・동양고전・만화 등의 분야별 편집의 이해, 해외저작권 실무, 외서 기획과 번역, 디지털 출판 의 비즈니스 모델, 디지털 출판물의 국내 유통 등이 있으며, 모두 각 분야의 전문 연구자, 작가, 베 테랑 편집자 들의 강의로 진행했다. ‘전공 교양’ 과목으로 디자인의 이해, 마케팅의 이해 등 타 분야를 이해하는 교양 수업과, 인디자인 실 습, 쿼크익스프레스 실습, 엑셀 실습, 전자책 셀프 퍼블리싱 등 직무와 관련된 기능을 익히는 수업이 있고, 실용서 편집장, 문화예술 편집장, 10년차 편집장, 3~4년차 편집장 들의 특강 수업이 있다. 타 반과 공동으로 진행되는 ‘교양 필수’ 과목에는 한국 출판 약사, 전작주의 출판, 한국을 만든 책, 출판인의 기획력과 미래 등 동녘, 열린책들, 김영사, 돌베개, 사계절, 김영사, 마음산책, 휴머니스트 등의 출판사 대표들께서 미래 대한민국 출판인의 위대한 심지를 일깨우는 기획 강의가 있고, 인문 사회과학・어린이・자연과학・문학・전자책・예술・경제경영과 자기계발・유아 등의 분야별 시장의 이 해, 오프라인 서점의 이해, 온라인 서점의 이해, 베스트셀러의 역사, 콘텐츠 비즈니스, 문화트렌드 의 이해, 직장 예절과 비즈니스 매너, 직장 여성의 커리어 관리, 문화 트렌드의 이해, 실용문 쓰기 실습, 작가와의 만남 등이 있다.


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수업과 별도로, 출판사를 견학하고, 서울국제도서전과 파주북소리2013 및 동아 시아 출판인회의 포럼 등에 참가하고, 대형 서점 및 출판물류회사, 인쇄소 및 제본소, 제지사 등을 견 학하는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 한편으로 학생들은 자치적으로 학생회를 꾸리고, 서평 모임, 출판사 연구 모임, 서점 탐방 모임, 등산 모임 등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친목을 도모했다. 베테랑 편집자들이 현장에서 건져 올린 실무 이론 수업에, 동료들과 함께 단행본 제작 워크숍을 진행 하고, 인쇄 제작 등의 협력사를 방문하고, 출판 축제를 탐방하는 6개월 동안, 예비 편집자들은 자신들 이 선택한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의 세계를 보다 실질적으로 경험하면서 ‘나는 왜 출판을 하고자 하는 가’ 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20대 중반에서 30대에 이르는 시기의 청년들에 게 자신의 직업의 세계를 확실히 인지하게 하는 6개월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 이 되는 것이다.

실속 있는 워크숍, 현장 적응형 실무 능력 어느 교육기관에서도 따라할 수 없는 본 과정만의 특성이 바로, 가능한 한 출판 현장과 가장 유사한 환경에서 진행되는 단행본 제작 실무 워크숍이다. 실제 출판사에서 출판할 예정인 원고를 입수하여 읽고 검토한 뒤, 시장 분석을 통해 완성될 책의 상을 그려서 편집기획서를 작성, 발표하고 수정하고 보 완한다. 유사도서, 경쟁도서를 분석하고, 독자와 트렌드 및 시장 상황을 판단하고, 콘셉트에 맞게 본 문의 판면을 설계하고, 디자이너와 협력하여 판면 디자인을 완성한다. 원고를 출력하여 교정쇄를 만 들고 교정을 한다. 발행 시점을 생각하여 책 제목을 정하고 표지를 작업한다. 편집배열표를 작성하고, 사용될 종이의 양을 계산하여 제작발주서를 작성한다. 제작 준비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보도자료를 작성한다. 이러한 과정을 책임교수의 지도하에 협력 출판사의 조력으로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 의 수업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실제에 적용하여 직무를 이해하고 무엇보다 실무에서 겪게 될 의사소통 의 중요성을 경험하게 된다. 교육생들은 이처럼 자발적이고 상호 협력적인 워크숍을 통해, 출판사 현 장에서 맡은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실질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9기 편집자 반 교육생들은 6명씩 4개 조를 구성하고, 조 이름을 출판사 명으로 하여 각각 한 권의 단행본을 완성하였다. 제1조는 ‘다님길’이다. 이지스퍼블리싱 출판사를 협력사로 하여 원고를 제공받아 소셜 마케팅의 성공 비법을 다룬 『한달음 소셜 마케팅』을 제작하였다. 제2조는 ‘빛솔’이다. 페이퍼로드 출판사를 협력사로 하여 원고를 제공받아 범죄 실화를 다룬 문학서 『보통 인쇄소: 어느 지폐 위조범과의 인터뷰』를 제작하였다. 제3조는 ‘소리굽쇠’이다. 미다스북스 출판사를 협력사로 하여 원고를 제공받아 ‘생각하는 팬을 위한 철학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야구와 철학』을 제작하였다. 제4조는 ‘기역히읗’이다. 한권의책 출판사를 협력사로 하여 원고를 제공받아 대한민국 대중음악가를 다룬 『레전드 100』을 제작하였다.


김다윤 내기 위한 노력인 '경영 마인드'와 함께 필 요한 것은 '고객중심 마인드'이다. 출판사 에게 고객은 독자이다. 편집자는 독자와 사 회의 잠재적인 욕구를 파악하여 시장에 적 합한 책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독자가 시 간과 비용을 투자하여 읽을 만한 가치 있 는 책, 개인과 사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서, 가장 먼저 내 자신에게 질문한 것은 학과를 결정 할 때와 마찬가지로 '편집에 대한 공부를 평생 즐겁게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한평생의 직업으로 편집자를 삼으려면 그

세상과, 사람과 진심으로

에 대한 공부도 평생 해야 한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나는 편집자의 길을 가기로 결 정했다. 평생 같은 일을 하며 전문성을 키

소통하는 편집자

우면서 살고 싶다.

출판예비학교를 만나다

많을 다(多) 믿을 윤(允).

편집자로서 걸어 갈 나의 길에 출판예비학

나는 내 이름처럼

교가 충분한 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 양식에 맞춰 자기소

신뢰받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개서와 독서이력서를 썼다. 새벽에 커피를 마시며 지원 과정을 준비하면서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누구에게나 결정적 순간은 있다

로 만들어 직접 발표했다. 무역학과 수업

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대학은 경영학부로 입학했다. 1학년 때에

은 생각보다 활동적이어서 즐겁게 참여할

내가 얼마나 편집자가 되고 싶은지도. 그래

는 경영과 마케팅을 배우면서 고객과 상

수 있었다. 한편, 내가 선택하는 교양과목

서인지 나는 출판예비학교 생활을 누구보

품 가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학부의

은 주로 국문학과의 수업이었다. 나는 혼자

다 즐겁게 했다.

특성상, 2학년 때에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

'현대시의 지형과 맥락', '한국 고전문학의

학교 수업으로는 지금이 아니면 열심히 듣

다. 전공과목에는 경영, 회계, 무역이라는

이해'와 같은 수업을 들었다. 졸업을 하고,

기 힘든 책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배웠고,

세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결정의 순간 나

나에게 또 한 번 결정의 순간이 찾아왔다.

편집자에게 필요한 자질에 대한 강의를 들

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대학 생활의

었다. 책을 만드는 조별 워크숍은 진행될수

남은 3년, 내가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편집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다

록 책의 상(像)이 명확해졌다. 조원들과 회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졸업 후 취업을 준비했다. 이제는 진짜 내

의를 거듭하고, 디자이너들과의 작업을 하

나는 무역학을 선택했다. 4학년 마지막 학

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할 때

며 느낀 것은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중요하

기 전공수업은 과제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

였다. 나는 내가 배운 것을 바탕으로 가치

다는 것이다. 동료, 디자이너, 마케터 그리

았다. 조별 과제로 우리는 아랍에미리트연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일이 바로 책을

고 제작처와 서점, 저자와 독자까지 모든

합국(UAE)에 인삼을 수출하는 것을 목표

만드는 일이었다.

관계의 중심에 서 있는 편집자에게 의사소

로 정해서 수행했다. 이슬람 문화를 이해하

목표 달성을 위해 자원을 가장 적게 활용하

통 능력은 특히 중요하다고 느꼈다.

기 위해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에 가서 아랍

여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경영 마인드'는 책

동아리 활동도 자유롭게 하였다. 서평을 쓰

전통과자인 바끌라바(Baklava)도 먹어 보

만드는 일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책도

고, 친구들의 서평과 추천 도서를 보며 다

고, 설문조사도 했다. 학기 말에는 논문으

하나의 문화상품이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양한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동아리 첫


하게 된 낭독은 우리 동아리의 주요 행사가

정기전을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의 매

되었다. 동아리는 좋은 사람들과 책을 나

력을 알렸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도 지속

누는 기쁨을 알게 해 주었다. 출판예비학

적인 만남을 하며 친목을 다지는 영맥 사람

교에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편집자

들은 내게 소중한 존재이다.

의 미래를 만났고, 그 미래를 함께 걸어갈

책과 사진은 의미가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23명의 멋진 동기들을 만났다.

작가 고유의 ‘결’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011

전에 출품했다. 일 년에 한 번은 인사동에서

Book Editor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에 취해 즉흥적으로

저자의 ‘결’을 잘 살린 책을 만들고 싶다. 순간을 담아 마음을 울리는, 책 그리고 사진

쉬운 편집자가 되고 싶다

대학에서는 수동 카메라로 흑백사진을 찍는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는 편집자. 저자가 쉽

사진예술연구회 영맥(影脈)에 지원하여 활

게 다가올 수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독

자립, 감정의 튼튼함에서 비롯된다.

동을 했다. 나는 편집부의 일원으로 매월 1회

자에게 쉽게 다가간다는 것은 독자와 친구

단단한 내면을 가진 편집자가 되고 싶다.

발간되는 회지의 편집과 정기전을 홍보하는

처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팸플릿 작업을 했다. 정기적으로 출사를 나

저자가 쉽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대관계가 필요한 '관계중심시대'에 있다.

갔고, 여름과 겨울에는 원정을 떠났다.

준다면 원고에 대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독자와 진지한 신뢰관계를 오래도록 지속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로 떠난 3박 4일의 여

있을 것이다. 독자와 저자와의 유대관계를

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욕구를 정확하게 채

름 원정은 더위와 싸우며 고생을 했다. 선명

잘 맺는다는 것은 편집자에게 필요한 역량

워 주어야 한다. 나는 소통의 힘을 믿는다.

한 파란색의 하늘과 초록 물결의 들판을 즐

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계성은 탄탄한

저자와 독자에게 통하는 것은 진심밖에 없

길 새 없이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무거운 배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 저자와 독자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신뢰

낭을 메고, 야영을 위해 필요한 텐트까지 함

편집자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신뢰를 중심

받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책을 만드는 편

께 들고서 말이다. 운이 좋을 때에는 히치하

에 두어야 한다. 원고에 대해서만큼은 마

집자는 독자 한 명, 한 명이 중요하다는 것

이크를 통해 편히 갈 수 있었다. 원정 마지막

음을 열고 쉽게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만든 책을 한

날에는 월출산 아래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저자의 글을 제대로 알아봐 주는 것, 원고

명, 한 명의 독자가 선택한다고 생각하면

산에 올랐다. 땀을 흠뻑 흘린 뒤에 천황봉에

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편집자의 역할

책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다.

서 먹는 수박은 정말 시원했다. 3박 4일 동안

이기 때문이다. 책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

편집자는 자신이 만든 책으로 말해야 한

해남의 곳곳을 누비며 함께 고생한 사람들

이기에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

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은 쉬운 책이다. 책

과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발길 닿는 곳마

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자와 저

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편집의 기본에 충

다 절경이었던,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

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실하고, 독자에게 쉽게 읽히는 책을 만들고

께 촬영한 사진이 특별한 것은 당연했다. 촬

소통을 해야 할 것이다.

싶다. 나는 내가 만든 책으로 세상과, 사람

영한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은 교내 사진

오늘날 출판시장은 독자와의 지속적인 유

과 교감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주체성과

책과 사진은 의미가 상통한다. 작가의 ‘결’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의 ‘결’을 잘 살리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김성무 극 대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고, 수많은 문화 산업의 모태는 역시 ‘활자’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다음으로 내 눈길을 끈 것은 ‘연출’이라는 존재였다. 연극에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연출’은 ‘무대 뒤의 편집자’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절대적 인 존재였다. ‘연출’은 눈에는 띄지 않지만 그 존재가 없다면 어떤 연극도 절대로 상 영될 수 없다는 점에서 출판계의 ‘편집자’ 와 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 동아 리를 하면서도 ‘활자’와 ‘연출’에 주목했던 나는 그때부터 이미 ‘편집자의 길’로 조금씩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땀과 독자의 삶을 위대하게 만드는 편집자

소외된 90%의 이웃을 위한 프로젝트 연극 동아리와는 별개로 국제 경영학회 에서도 활발히 활동을 했다. 특히 ‘소외된 90%에게 꿈을’이라는 주제로, 공대생들 과 함께 결성한 ‘Craist 90%’ 프로젝트의

평범해 보였던 모든 일상이

창단 멤버로 참여했다. ‘Craist 90%’는 적

이미 나를 편집자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정기술로 개발도상국에서 소외당하고 있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다.

는 빈민들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으로, 가 난한 이들에게 단순한 구호품을 전달하는 수준이 아닌, 지속적으로 그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전해주어 근본적인 빈곤해결

책과의 인연

로 나는 책과 같이 놀며 지냈다. 그 시절 장

의 길을 찾아주는 프로젝트이다. 그들이 진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래의 꿈을 특별히 정한 것은 없었지만, ‘언

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사했고, 직

라는 말처럼 ‘출판 편집자’에 대한 나의 꿈

젠가 꼭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

접 태국 매해 지역의 빈민촌에 찾아가기도

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한

각을 늘 가슴속에 품고 지냈다.

했다. 이 경험은 지금도 나에게 커다란 자

때 영화계에서 유행했던 슈퍼 히어로의 ‘비

산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실상을 보며 ‘남

긴즈(Begins)’ 시리즈처럼 ‘김성무 비긴즈’

연극 동아리

의 꿈을 잃게 해서 내 꿈을 이루는 사람은

를 먼저 들려줘야 김성무가 왜 편집자의 길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입학했고, 학과는 경

절대 되지 말자’는 생각을 품었고, 내가 할

에 들어섰는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

영학과를 선택했다. 학과에 들어가서 열심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므로 이제부터 책과의 인연과 편집자에 대

히 공부를 했지만, 경영과는 전혀 다른 활

하게 됐다.

한 꿈을 설명하기 위해 나의 과거 이야기를

동도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여러 동아리

먼저 시작하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와 단체를 수소문하던 중, ‘꾼들’이라는 연

편집자의 꿈을 꾸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극 동아리를 알게 됐고 호기심이 생겨서 가

4년 동안 공부한 경영학은 내 삶의 소중한

그 시간에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게임을

입했다. 세 편의 연극에 참여하면서 기획과

자산이 됐지만, 삶의 의미 있는 일을 하기

하기보다 책과 함께 할 때가 더 많았다. 비

무대제작 분야를 주로 맡았고, 홍보용 책

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

록 어린 나이였지만, 독서를 하며 밤을 지

자와 연극 포스터 제작에도 참여했다. 동

래서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

새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책을 읽으

아리 내에서 여러 활동을 했지만, 그중에

에 휴학계를 신청하게 됐다. 휴학을 하면

면서 이런저런 상상도 하고, 이야기를 지어

도 모든 동아리원이 참여하는 대본 리딩 연

서 진정으로 내가 가장 잘하고, 즐겁게 할

내기도 하고, 직접 연기도 하면서, 한마디

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연습 중 연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무엇


는 ‘가치 있는 일’을 꼭 찾고 싶었다. 어디

능사 과정을 수료했다. 수료 후, 전자 출판

서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에게 가장 익숙

에 대한 지식도 배우고 싶어서 ‘한국전자출

한 책을 보며 그 길을 찾아보려고 했다. 많

판협회’에서 열린 전자 출판 관련 수업들도

은 책을 읽으며 지내던 중 책들을 읽다보니

들으며 출판에 대해서 하나하나 배우게 됐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 어렸을 때

다. 그리고 그토록 고대하던 출판예비학교

부터 원했던 진짜 꿈은 ‘책을 만드는 사람

9기 모집 소식을 듣게 됐다.

013

에서 출판과 디자인을 6개월간 배우며 기

Book Editor

보다도 태국에서부터 생각했던, 나에게 맞

이 아닐까?’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마음 을 품는 순간, 나에게 있어서 책을 만드는

출판을 함께 배우다

일만큼 가치 있고 즐길 수 있는 일은 없을

사실 출판 분야를 공부하면서도 ‘편집자’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선택이 과연

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했었다. 하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나에게 맞는 길일까?’는 생각으로 잠시 갈

만 출판예비학교에 입학하면서 편집자에

사실 하나만으로 나의 가슴은

팡질팡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연금술사』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나와는

이미 뛰고 있다.

라는 책에 나오는 “이미 십 년 전에 시작할

다르지만 같은 꿈을 꾸는 23명과 함께 하

수 있었을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어.

면서 출판에 관련된 실용적인 공부를 할 수

이런 편집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난 이 일을 위해 이십 년을 기다리

있었고, 출판계의 선배님들로부터 강의를

막연하기만 했던 편집자에 대한 정보와 지

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라는 구절

들을 수 있었다. 출판 선배님들의 과거 고

식을 얻고 나니 이제는 ‘어떤 편집자가 되

이 나의 목표를 확실하게 만들었다. 출판

난과 역경을 들으며 그분들의 피와 땀의 결

고 싶은가?’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꿈꾸

이 아닌 다른 어떤 일을 해도 결국 책을 만

과로 우리가 이렇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

는 편집자의 모습은 이렇다. 저자의 땀과

드는 일에 대한 꿈은 나를 끝까지 쫓아다

다는 것이 무척 감사했다. 그 외에 프로그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는 책, 평범했던 한

닐 것 같았다. 결국 확고한 결심을 했고, 그

램들도 많았지만, 이 교육과정 중에서 가

명의 독자를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변화시

렇게 나의 꿈은 ‘편집자’가 됐다.

장 기억에 남는 것은 4개의 조가 출판사의

킬 수 있는 책, 바로 그런 책을 만드는 편집

협력으로 책을 제작하는 워크숍이었다. ‘기

자가 되고 싶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책

꿈을 향한 첫걸음

역히읗’조의 조장으로서 어려운 일과 모르

속의 ‘활자’를 통해 저자와 독자가 모두 위

책은 좋아하지만 책을 만드는 작업에 대해

는 것도 많았지만,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대해지는 순간을 만들어 주고, 무대 뒤 ‘연

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출판에

책 만드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가

출’처럼 책이 출간된 후에는 자신을 드러내

대해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그러던 중

장 의미 있고 도움이 된 수업이었다. 그 외

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편집자. 이

지인의 소개로 한국폴리텍I대학에서 컴퓨

에 동아리 활동으로 서평 동아리인 ‘서동

것이 바로 내가 꿈꾸던 ‘가치 있는 일’을 하

터출판디자인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

요’에 참여했는데, 동아리원들과 서로의 서

는 ‘출판 편집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다. 출판과 관련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

평을 평가하며, 책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

나는 김성무가 훗날 그런 편집자가 될 것이

아서 지원했고 다행히 합격하게 된다. 그곳

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라고 확신한다.

이미 십 년 전에 시작할 수 있었을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어. 하지만 난 이 일을 위해 이십 년을 기다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연금술사』 중


김영은 전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무기력한 삶에

심리학과에 가기로 했다. 심리학은 무궁무진한 세계였다. 내가 특별

생기를 주는 책을 꿈꾸며

히 관심을 두었던 것은 가족 심리학 수업이 다. 공동체의 구조가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아이를 양육하 는 것, 부부의 관계, 부자간의 관계가 갖는

“직업이란 우리의 가장 큰 기쁨과

역동은 실로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세상의 가장 큰 필요가 만나는 자리.”

대학을 다니며 한국기독학생회(IVF)라는

-프레드릭 뷰크너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 안에서 본 것 또 한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다.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는 사람들을 볼 때 건강한 공동 체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 생각하게 됐

모든 것은 결국 책 속에 존재한다

다.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 있다. 어릴

다. 또한, 한 사람의 변화가 그 사람이 속한

즐거웠다. 밥 먹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었

적에는 그냥 책의 맛을 알았던 것 같다.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험했

다. 이모들이 사준 원피스는 거들떠보지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일기를 쓰던 10살

고 지금도 그것을 믿고 있다. 한 사람의 변

않았지만 동화책 『열세 살의 비밀일기』는

소녀, 그러나 재미있는 일보다는 의미 있는

화는 나아가 사회의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보고 또 봤다. 음식은 골라서 먹었지만, 책

일을 하고 싶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있는 게 아닐까?

은 골고루 맛보고 싶어서 책등에 번호를 붙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고 순서대로 읽었다. 책 속의 이야기가

생각을 넘어 용기를 내다

좋은 10살 소녀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혼

사람을 살리고 싶다

한국기독학생회에서는 자아상, 세계관, 사

자서 A4용지로 책을 만들거나 만화를 그리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진로를 고민하던 시

회 참여 등 다양한 주제의 강의를 듣기도

며 놀았다. 내 이야기가 좋았고, 상상 속 아

기, 도서관에서 우연히 『사랑을 선택하는

하고 선배들에게 상담을 받기도 했다. 그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았다.

특별한 기준』이라는 책을 만나게 된다. 처

때가 아니면 겪을 수 없던 경험들이 나를

처음으로 간 서점에서 책을 직접 고르던 장

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직업이 있

견고하게 세워주었다. 그 시간을 통해 자신

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야기가 있는 그

다는 것을 알게 됐다. TV에서 본 실어증에

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

세계는 매력적이었다. 그 당시의 책은 여전

걸린 아이를 낫게 하고 싶었다. 괜찮은 척

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향한

히 책꽂이에 꽂혀 있다. 『창가의 토토』, 『날

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처를 감추고 살아가

열린 마음이 생겼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

마다 노는 학교』는 새로운 학교, 대안 교육

는 여자가 진정으로 회복되길 바랐다. 그들

보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제로

을 꿈꾸게 했다. 책은 내게 다른 삶을 알려

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힘이라고 생각했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줬다. 책 읽기는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었

고, 그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배운 것들이 좋아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나는 ‘호유’라는 호를 쓴다. 밝을 호(晧), 걸음 유(迶). 빛을 좇아 꾸준하게 걸어간다는 뜻이다. 내 어둠에 머무르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가 빛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015 Book Editor

숨겨져 있던 글의 가치를 찾아내고 빛나게 하는 편집자의 역할은 굉장한 보람을 느끼게 한다.

참여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더 깊은 관계를

용으로 쓰이는 신문을 만드는 일이었다. 인

고민에 동행해주었다. 책을 통해 삶을 이

맺고 공동체에 소속되는 법을 배웠다. 구

터뷰하고 취재하러 다니며 글을 썼다. 그렇

해했고,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체적으로 리더 훈련을 받고 동기들을 만나

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고객들이 보내온 교

다양한 책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정말

고 리더가 되어 후배들을 만났다. 다양한

육 후기를 매끄럽게 다듬는 일이었다.

로 좋은 책은 소수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

기질과 세계관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고, 함

글쓴이가 하려고 했던 말을 가장 정확하게

국 책은 사람을 바꾸고 세상에 영향을 줄

께 각종 행사를 진행하는 일이 많았다. 생

전달하는 일. 구성을 바꾸고 문장 호응을

것이다. 나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각만 하고 망설이던 내가 용기를 냈다. 머

맞추며 윤문한 뒤에는 대개 잘 다듬어줘

책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선택했다. 세상과

리로 배운 것들을 실제로 살아낼 때 비로

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윤문하다’라

이웃에 관심을 기울이며 공부하는, 성실한

소 잘 알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이

는 문자의 뜻처럼 글을 빛나게 하는 편집인

편집자가 되겠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더 많

전과 다른 마음과 태도로 관계를 맺어갈

의 역할은 굉장한 보람을 느끼게 했다. 그

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프레드릭 뷰크

때 공동체는 거울이 되었다. 알지 못했던

러나 선임 없이 그 일을 해나가기엔 어려움

너는 “우리의 가장 큰 기쁨과 세상의 가장

장단점들과 특징들이 더 선명해졌고, 어떤

이 있었다. 그리고 목이 말라왔다. 처음부

큰 필요가 만나는 자리”라는 표현으로 직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터 다시 배우고, 더 제대로 편집하는 사람

업을 정의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책이 더

특히 두 차례의 서적전시회를 한 일이 가장

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출판예비학교를

좋아졌다. 이 일을 평생 즐겁게 할 수 있을

기억에 남는다. 서적전시회란 양질의 책을

만났다.

것 같다.

학우들에게 알리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하

지난 5개월은 내 실체를 깨닫는 시간이었

나는 책의 힘을 믿는다. 무의미한 삶에 생기

는 행사인데, 『나쁜 사마리아인들』, 『왜 세

다. 한 권의 책을 여섯 명의 편집자가 함께

를 주고 무기력한 삶을 일으키는 이야기, 살

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회심』 등을 소

만드는 일은 소통의 연속이었고, 지치기도

리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내가 만든 책이

개하고 팔기도 하며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했다. 원고를 교정하는 것은 해봤다고 생각

‘생기를 불어넣는 울림’이 되면 좋겠다.

난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눌 때 커지는 기쁨

했는데, 잡지와 단행본은 전혀 달랐다. 아

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책을 추천받은 누

직은 많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나는 성장

군가 도움이 됐다는 말을 하는 것은 더없이

할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

행복한 일이었다.

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한 다. 이야기를 좋아하던 어린 아이는 돌고

책을 빛나게 하는 사람

돌아 다시 책으로 왔다. 이제 꾸준히 공부

대학을 졸업한 후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하며,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는 편집자

고민하던 중 글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가 되고자 한다.

확신이 들었다. 나는 HR 회사 마케팅홍보팀 에 들어가 보도자료를 쓰고, 기자 간담회도

그래서 출판이다

열고, 리더십 관련 도서를 소개하는 일을 배

학창 시절부터 ‘생명답게 산다는 것이 무

웠다. 가장 큰일은 한 달에 두 번, 고객 영업

엇일까?’ 생각해왔다. 책은 인생을 향한 내


문은영

책의 세계에서 잘 어울려 노는 편집자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편집자, 저자와 독자의 마음을 읽고 둘의 세계를 잘 오가는 매개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어울려 사는 게 좋아

주로 읽었다. 또 부전공으로 영문학을 공

밤하늘이 맑은 겨울에는 별이 잘 보인다.

부했기 때문에 영미권의 소설과 시도 접할

이 계절에는 일등성이 많이 보이는데, 각 별자리의 일등성을 연결하면 다이아몬드 를 그릴 수 있다. 겨울철 별자리를 보면 고

일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고, 공부도

수 있었다. 한비야, 야구감독 김성근, 금나 나 등의 성공한 사람들의 에세이나 『탤런 트 코드』, 『아웃라이어』와 같은 자기계발서

등학교 때 천체관측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열심히 하고, 같이 일하는

도 좋아했다. 자기계발서에서 일러주는 대

즐거운 기억이 떠오른다. 동아리 이름은 리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로만 살면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겔이었는데 오리온자리의 베타성 이름을

형성하는 행복한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종교

딴 것이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

편집자를 꿈꾼다.

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서 종교인들의 에세

끼리 모여 별을 공부하고 망원경으로 관찰

이를 즐겨 읽는다. 법정스님의 책이나, 천

했다. 방학에는 동아리 동기들과 선후배가

주교 신자로 톤즈에서 선교활동을 한 이태

모여 천문대로 견학을 갔고, 학교 축제 때

석 신부의 『울지마 톤즈』를 좋아한다. 기독

는 교실을 플라네타리움처럼 꾸며서 사람

을 대부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앞

교 출판사인 두란노에서 출간한 책이나 전

들을 초대했다. 별자리를 암기하는 내기를

으로 만나는 사람들과도 즐겁게 어울리면

광 목사의 책도 좋다. 전공 공부 덕분에 철

하고, 축제 준비를 위해 한 달 전부터 전시

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학과 문학 등 깊이 있는 텍스트를 접할 수

를 위한 모형을 함께 만들었다. 대학교 때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심리에세이 인문교

는 고등학생의 성적을 관리하는 과외를 했

책을 통해 만났던 세계

양이나 자기계발서, 에세이, 씨네21을 즐겨

다. 나는 그 친구에게 스스로 공부할 이유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했고 영문학을 부

읽는다.

를 찾게 하고, 자기만의 공부 방법을 만들

전공으로 공부했다. 전공 수업 때 어려운

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공부를 가르치는 선

텍스트를 같이 읽어나갔기 때문에 질 들뢰

나름대로 시장조사

생이긴 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배움을 주

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 에드문트 후설

출판학교에 다니는 동안 서점에 자주 들

었던 시간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

의 『데카르트적 성찰』, 토마스 쿤의 『과학

렀다. 현재 시장의 경향은 무엇일지, 잘 팔

로 관계를 맺는 법을 체득해 나간 것이었

혁명의 구조』 등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외

리는 책, 꾸준히 팔리는 책은 무엇인지 살

으니까. 기타에 관심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에 개인적으로는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펴보고 싶었다. 작업 중이던 원고 『The Art

악기 연습에 열을 올렸던 적도 있다. 거의 1

정복』,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철학

of Making Money』를 범죄소설로 분류했

년 동안을 기타 치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의 문제들』이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

기 때문에, 이 책의 유사도서와 경쟁도서를

연주에 능숙한 친구가 코드를 몇 개 알려주

술』, 또는 빅터 프랭클의 책과 같이 비교적

찾아보려고 서점에 방문했을 때는 범죄소

면 각자 연습하는 식이었다. 또 내가 익힌

접근하기 쉬운 인문서를 읽었다. 졸업 논

설 제목의 경향, 표지의 분위기, 차례, 판면,

것은 다른 친구에게 알려주면서 같이 연습

문은 질 들뢰즈에 관하여 썼는데, 그 시기

판형 등을 살폈고 손에 쥐었을 때 어떤 느

했다. 1년이 넘어가니 목표로 삼았던 곡들

에는 들뢰즈의 철학에 관한 인문 학술서를

낌인지, 책의 가격이나 두께는 어떤지 등을


017

편집자의 일을 살펴보다

알 수집가』가 판매대의 1/4정도를 차지하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것

고 있었다. 표지와 제목이 자극적이어서 그

이 즐겁다. 글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런지 사람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주로 해왔기 때문에 글을 다루는 편집자의

책을 보던 독자들을 관찰하던 중 재미있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는 일도 있었다. 어느 30대 초반으로 보이

취업을 준비하며 출판사에 근무했던 선배

는 여성이 빨간색 표지의 책 『우리가 정말

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출판인회의에

헤어졌을까』를 보다가 내려놓고는 『꾸뻬

서 진행하는 편집자 입문강의를 수강하며

씨의 시간여행』을 훑어보고, 주간 한국소설

편집자가 하는 일을 생각했다. 이 수업에서

베스트를 보다가 『싱글빌』, 『안녕 내 모든

는 도정일이 국민일보, 프레시안 등에 올

것』의 차례를 읽어본 후 내려놓더니 『꾸뻬

린 칼럼을 책으로 엮는 작업을 했다. 그 칼

씨의 사랑여행』을 집어 들었다. 이별 후 새

럼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쓰인 것이 아니었

견학을 갔다. 출판학교를 통해

로운 사랑을 찾는 것 같은 여성 독자인 듯

고, 소재도 다양했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했다. 삶의 이야기가 보이는 것 같아 재미

기 다른 콘셉트가 나왔다. 함께 토의하고

있기도 하고 그 책들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

콘셉트를 상의해서 칼럼을 정리하고 목차

에 대해 숙고해보는 계기도 있었다. 내가

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를 만드는 등 편집 기획서를 작성했다.

생각하기에 편집자는 타인과 마음으로 만

어느 날은 요리책이 궁금해져서 요리책은

이듬해 출판예비학교 신규인력양성과정

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저자의 세계

어떤 모습일지 관찰해보러 갔다. 혼자 사는

모집 공고를 보았다. 이곳에서 출판사에 관

를 책 속에 담아 독자에게 전달하는 매개

사람이 일주일에 만원으로 간단하게 만들

한 실제적인 정보를 얻고 출판 편집자가 되

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와

수 있는 밑반찬 만들기부터, 채식주의자를

려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출판예비학

독자의 마음을 읽고 둘의 세계를 잘 오가는

위한 요리법 등 다양했는데 건강한 음식을

교 수업 과정에 대략 6명이 한 조를 이루어

매개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편집자가

만들기 위한 요리책이 많이 보였다. 또 수

출간이 예정된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작업

되고 싶다.

업 중에 어린이책을 만드는 과제가 있었는

이 있다. 내가 속한 조는 영미권에서 회고

데, 어린이책에 대한 상을 잡고 싶어서 서

록으로 출간된 『The Art of Making Money』

점에 간 적도 있다.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를 다루었다. 조원과 함께 편집 기획서를

하면서 어린이책에서 쓰는 말투를 관찰해

작성하고, 교정교열 원칙을 세워 분량을 나

보고. 편집자의 시각으로 서점 조사를 하면

눠 작업했다. 콘셉트를 상의하고, 대상 독

서 각 분야 책들의 특징을 살펴보고, 서점을

자를 영미권 소설을 즐겨 읽는 20~30대로

찾은 독자들을 관찰하니 새로운 것들이 눈

정했으며 디자인 반과 협업하여 표지 디자

에 들어왔다. 편집자처럼 보이는 몇몇 분들

인을 결정했다. 그 밖에 현장에서 일하시는

과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하고!

분들의 강의를 들으며 편집자란 직업과 책

Book Editor

꼼꼼히 살폈다. 그때는 신간으로 나온 『눈

비 오는 날, 광화문 파주 물류센터로

편집자를 희망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앞으로 겪게 될 즐거움, 어려움, 성취 등을 나누면서 소중한 인연을 잘 가꾸어나가고 싶다.


방현규 해서 공무원이 된다는 것만이 나의 길이었 고 그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던 무채색 인생이었다. 단,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책 과 그 책을 통해 하는 여러 가지 공상만큼 은 무채색인 나의 인생에 조금의 색깔을 불 어넣었었다. 책과 공상을 좋아하던 무난한 소년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여러 변화를 맞 이한다. 처음 대학에서 맛본 자유의 맛이 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생이라는 위치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그 렇게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더군 다나 그렇게 많은 사람과 교류하게 된다는 것도 나에겐 충격이고 기쁨이었다. 마치 새

책과 사람,

스펀지를 물에 넣었을 때처럼 나는 대학교 에서 닥치는 대로 흡수하고 경험했다. 학

그것만이 내 세상

생회 활동과 학교 내 카페테리아에서 근로 장학생 활동, 해외 교류 프로그램, 도시영 화제 기획단, 대학 축제 기획단, 새내기 배 움터 자원봉사단…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

4L : Live, Love, Learn, Leave.

장 큰 경험이었던 학교 공식 홍보대사 활

나는 책과 함께 살고, 책과 사랑하며,

동까지. 대학 생활에 있어서 학업을 소홀

책을 통해서 배우고, 책으로 나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

히 하진 않았지만 이러한 경험들과 사람들 을 만나는 것에 더 무게를 실었었다. 여러 활동과 경험 속에는 너무나 큰 재미와 보 람이 있었고 그 결과 무채색이었던 나에게

나는 ‘미련한 곰’이다

이 있고 어떤 일이라도 끝까지 버티는 인내

서 점점 빛을 내는 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보통 곰이라는 동물로 나 자신을 표

심이 있는 사람으로 주위에서 평가받곤 했

바로 ‘소통’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사람

현한다. 남들로부터 그렇게 많이 불리기도

다. 마지막으로 곰은 순한 외모와는 다르

들과의 소통을 갈망하는 사람, 또 누구와도

한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누가 봐도 알 수

게 민첩한 움직임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

소통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

있는 곰처럼 생긴 얼굴과 몸을 가지고 있어

는 맹수다. 나도 외유내강이라는 곰의 특징

이 나라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서다. 이러한 외모로 누구나 편하게 다가올

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둔하고 순하지만

수 있는 친근함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 처

필요할 때는 민첩하게 움직이고 목표를 향

나의 삶의 방식을 찾다

음에는 무섭게 생겼다고 하지만 알수록 쉽

해 강한 추진력을 발휘한다. 내가 목표로

나의 색깔을 찾아내게 된 후엔 어떻게 세상

고 편한 외모를 지녔다. 이 외모적인 장점

하는 편집자라는 직업은 책과 사람에 대한

에 나의 색을 칠하면서 살아갈 것인가가 가

(?)으로 나는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

진실된 애정, 야근과 마감을 버텨내는 인

장 중요한 고민이었다. 내가 원하는 소통을

지하였고 대학교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사

내심, 책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추진력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은 문화 예술을 생산해

람이 되었다. 두 번째로 곰은 미련함의 대

필요하다. 이 때문에 나는 곰 같은 내가 그

내는 일이었다. 문화 예술은 소통을 통해서

명사이다. 나 역시 미련하다는 소리를 많

직업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소리 높여

형성되기 때문이며, 문화 예술의 파급과 목

이 듣는다. 같은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

‘미련하게’ 주장하겠다.

적 역시 소통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구체적 인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서 연극 극단 등의

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하나 도움을 주 고자 하는 세심함과 한번 목표를 정하면

무채색에 ‘소통’이라는 색을 입히다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에서 진로 경험을 쌓

놓지 않는 미련한 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나는 무난하

아갔다. 모두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지만, 나

이러한 미련함 덕분에 의외로 세심한 면

디 무난한 학생이었다. 명문 대학을 졸업

의 평생 삶의 방식으로 삼기에는 조금씩 맞


019

이 말과 같이 어떠한 풍파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묵직한 편집자가 되고 싶다.

지 않았다. 나는 기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선배로부터 예비 출판인을 양성하는 학

들이었다. 수많은 출판사가 존재하고 경쟁

기본 중의 기본으로. 사람 사이의 소통은 가

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겁 없던 나

하지만 그 속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다

장 먼저 ‘말’로써 이루어진다. 이 말의 저장

는 아무 준비 없이 덜컥 지원했고 결과는

같이 출판인이라는 연대감이 잠재해 있었

과 표현 방법은 ‘글’ 즉, ‘활자’이다. 그리고 그

당연했지만 불합격이었다. 그제야 내게 무

다. 그 따뜻한 연대감을 출판예비학교에

활자는 ‘책’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나는

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지가 조금씩

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담

그 책이 가지고 있는 힘을 어렸을 때부터 알

보이기 시작했다. 출판에 대한 정보를 찾

임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강의를 오는 수

고 있었고 좋아했다. 결국, 나는 책의 힘을 통

고 국어를 구체적으로 공부하며 다음 기회

많은 선배 출판인들의 애정과 격려는 출판

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더 큰 소통이라는 색

를 준비했다. 그리고 출판 분야에서도 좋은

계만의 문화였다. 또한, 반장을 맡게 되어

을 세상에 입히는 것을 내 삶의 방식으로 삼

원고를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기획, 다양한

같은 꿈을 가진 동기들과 강의를 듣고, 재

기로 결심하였다.

저자들의 원고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소

미나게 놀기도 하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

통하게 해주는 편집. 이러한 일을 하는 편

고, 다투고 화해하고, 교정교열을 보고…등

출판예비학교라는 요람에 들어오다

집자과정을 구체적인 목표로 삼았다. 운이

등의 신입 편집자로 준비하기 위한 나름 치

책의 힘을 통한다고 결정했지만 출판 산업

좋게도 일정 변경으로 좀 더 빨리 두 번째

열했던 지난 교육과정을 함께 했다. 그 동

에 종사하고 싶다는 것 외에 구체적인 계획

지원의 기회가 찾아왔고, 합격의 기쁨을 맛

안 동기들은 못난 반장인 나의 부족한 면

을 정하지는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출판

볼 수 있었다. 지금도 합격했던 순간에 느

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출판예비학교에

산업에 대해 무지했지만 대신에 겁은 없었

꼈던 벅찬 감정이 생생하다.

와서 배운 것을 하나만 말해보라고 내게

다. 나의 전공 공부와 대학 생활이 내가 생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사람들을 만

각하는 출판과 멀지 않고 일맥 상통한다

서로의 손을 잡고 요람에서 발을 떼다

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곳에 오면서 만

는 자신이 있던 것이다. 나의 전공인 사회

벅찬 감정은 생생할지라도 출판예비학교

나게 된 사람들 덕분에 출판이라는 세상에

학은 사람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를 연구하

에 다니면서 출판과 편집에 대해 배울수록

소속되어 간다는 것이 든든했고, 편집자라

는 포괄적인 학문이다. 다양한 학문과 연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았는지 그리고

는 삶의 방식을 택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결이 되기에 여러 분야의 책과 활자를 깊게

겁이 없었는지를 여실히 깨달았다. 책이라

이제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편집자로서의

읽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대학생 시

는 것이 지닌 무게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

떨리는 첫걸음을 내디디려고 한다. 사람과

절의 여러 활동들 역시 출판의 기본 가치인

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지와 압

사람의 더 큰 소통이라는 색을 세상에 칠하

소통의 힘을 키워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

박감 속에서 나를 지탱해준 것은 그 무게만

려는 신입 편집자의 성장을 지켜봐 주시기

던 중 신문 기자인 선배를 우연히 만났고,

큼의 가치와 보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

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출판예비학교에서의 가장 큰 결실은 사람을 얻었다는 것이다. 파주북소리축제에서 편집자반 동기들과 함께.

Book Editor

고대 로마 격언 중에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배윤주 씩 다시 읽어보라는 그 말을 진정으로 느낄

이름값 하는 사람 이름값 하는 출판편집자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덧붙여서 예전엔 이 책이 초등학교 필독서 지정인 것도 이해가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하고서. 하지만 다시 읽은 어린왕 자는 제 생각도 바꾸었습니다. 어릴 땐 그

스물다섯의 나,

나름의 재미대로 읽을 수 있을 거고, 성인

열정을 따라서 살아가고 싶고

이 되면 완전 색다른 기분을 느껴볼 수 있 는 책 일거야, 하면서요. 곁에 두고 생각날

늘 책을 통해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싶다.

때마다 읽으면서 의미가 달라지는 걸 느껴 보는 것도 이 책의 묘미일거란 나름의 결론 까지 내렸습니다.

평생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다

을 펴보고서야 전 그때 그 말의 뜻을 알 것

그렇게 제게 어린왕자는 평생을 두고 읽을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로 제 이야기를

같았습니다.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시작해 볼까 합니다. 세계적 스테디셀러임

보아도 이 책을 펴보았던 그 날의 먹먹했

은 이미 모두가 아는 바, 그 내용에 대해선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네가 나를 길들

던 감정이 남아있기를, 그리고 또 처음 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전 그저 그

인다면 정말 근사할거야. 그렇게 되면 황금

는 책 인 것 마냥 새로운 기분으로 읽을 수

유명세에, 동화 같은 내용인 줄로 알고 읽

빛 물결치는 밀밭을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날

있는 ‘나’이기를 바랍니다.

었습니다. 여기서 그쳤더라면, 이 책은 제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밀밭 사이로 부는

게 특별하지 않았을 겁니다.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 테니까.”

특별함의 시작은 사소한 말 한마디였습니

학보사 경험이 준 교훈, 이름값 하며 살자 대학에선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교내 학

다. 2년 전 한 모임에서 어느 지인이 어린왕

여우가 왕자에게 건넨 말. 한 때 이 문장은

보사 기자로 일했습니다. 처음해보는 낯선

자는 ‘1년에 한 번씩 다시 읽어보라’고 했었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가, 다음 번엔 사랑

이와의 취재도, 기사작성도 모두 어려웠지

습니다. 아마 읽을 때마다 기분이 새로울

의 낭만도, 서글픈 기분까지도 들더군요.

만 서서히 적응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것이라는 말과 함께. 솔직히 말하자면 그

올해 읽었을 땐 공감이 가면서도 또 이전과

다만 시간이 지나도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때 그 말이 어찌나 뻔하게 들리던지, 그다

다른 기분이 들었습니다.

은 ‘거절’이었습니다. 신문사와의 좋지 못한

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며 읽었던 글들이

사이로 취재거부를 하는 몇몇 학생회들, 설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책장에 꽂힌 어린왕

지금의 나에게 생생히 다가오는 기분이란!

문지를 내켜하지 않는 여러 학우들, 하나

자를 본 순간, 그 당시 흘려들었던 말이 기

변함없이 똑같은 문장인데 읽을 때마다

의 글을 청탁받기까지 걸리는 수십번의 거

억났습니다. 그리고 별 의미 없이 다시 책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1년에 한 번

절들까지…, 거기에다가 마감일이 임박해

눈 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었어. 가시투성이의 삶의 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라고. -김승희 『장미와 가시』


적인 다짐, 간단한듯 하면서도 참 어려운

보낼 시간이 두달 정도 남은 지금, 다시 돌아

일 같아서 아직도 이 말을 직접 말로 뱉기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더 충실하게 지내야겠

는 왠지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래도, 적

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이 순간에 가장 반

어도 내 이름값 하는 삶을 살아가는, 나아

짝반짝 빛나는 건 함께 수업을 들은 동료와,

가 머지 않은 미래엔 제법 이름값 하는 편

그들 사이의 나일 테니 말입니다.

집자라는 말까지도 듣고 싶습니다. 가상의 편지 출판예비학교와 사람들,

10년차 책임편집자가 2013년의 나에게

순간에 충실한 긴장감으로!

출판편집일을 잘 배우고 있니? 아마 아직

출판예비학교 편집자반에서 하루에 여덟

도 조금은 갈팡질팡하지 않을까 해. 무엇이

시간 정도를 스물 네 명이 함께 보내는 중

내가 가야 할 길이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

오는데 부탁한 글이나 자료가 오지 않으면

입니다. 하루의 1/3 에 해당되는 시간들엔

지 말이야. 당연한 거야. 그때의 고민은 분

초조한 마음으로 계속 전화기를 붙잡고 있

기본 수업뿐만 아니라 워크숍, 서평 동아리

명 너를 더 옳은 길로 가게 만들 테니까.

어야만 했습니다.

모임도 있고, 평상 시 오고가는 크고 작은

마침내 너는 해낼거야. 그 어디에도 휩쓸리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저를 좀 더 강하게

대화 속의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가득하지

지 않고, 책과 함께 걸어가고 있을거야. 수

만들었습니다. 전화로, 메일로, 직접 발로

요. 저는 그 중에서도 세계문학서평동아리

차례 회의하고, 바쁘게 교정지를 뒤적이고,

뛰어 마침내 얻어낸 단 한 번의 승낙은 고

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마침내 당당히 너의 책을 꺼내들 순간을

달팠던 여러 번의 거절을 잊게 해주는 엔돌

세계문학서평동아리는 격주로 9명이 차례

나는 늘 기다리고 있어. 다만 여기까지 오

핀이 된다는 걸 느낀 순간부터 일에 조금씩

로 선정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쓴 뒤 토론을

는 동안에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충실히 하

탄력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매의 원고

나누었습니다. 거의 독서토론 위주로 이루

고 있으리라 믿어. 읽고 또 읽는 것. 부족한

지 분량을 나만의 기사로 채우는 데 자긍

어졌는데 가끔은 세 시간정도 대화가 오가

기본기를 채워나가는 것. 늘 책을 갈망하며

심을 느낄 수 있었지요. 모든 제작과정을

곤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

고군분투하는 나이길. 내가 좋아하는 걸 가

거친 후 나온 신문은 누군가에게는 비올 때

람들이라 그런가, 책에 대한 ‘무한애정’이

장 잘할 수 있다는 마음도 늘 잊지마.

우산을 대신한다거나 배달음식 받침대 정

느껴졌습니다. 그 무한애정은 토론에서도

10년 후의 나는 그 날 네가 한 선택을 후회

도로 전락할지라도,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여실히 드러났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

하지 않아.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문이었습니

분까지 읽어내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가끔

다. 배윤주 기자, 제 이름을 건 기사들이 실

우리의 열정적인 대화는 다른 주제의 토론

려 있었으니까요.

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방인』

그때서야 일을 하며 힘들었던 진짜 이유를

에서부터 『달과 6펜스』까지, 동아리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제가 일을 하

읽은 모든 책들은 단순한 감상뿐만 아니라

며 두려워했던 건 ‘거절’이 아니라 내 이름 ‘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까지 남아

글자’가 주는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던 것이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었다고. 기사는 이름 세 글자를 걸고 쓰는 것

좋아하는 책의 구절로 이만 마무리 지어야

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사 끄트머리에 붙는

겠습니다.

제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바로 책임감이라는 걸,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순간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긴장감이 가

이름이 주는 무게감, 책임감. 늘 저를 따라

장 그리울 것 같았다. 우리는 이런 기분을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름값 하며

종종 잊고 지내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능

좀 제대로 살아야겠다’ 싶었습니다. 선택

력을 아예 잃어버린 채 살곤 한다. 순간에

의 기로에 있을 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충실한 긴장감을 지니고 산다는 건 바로 어

이름을 걸고 할 수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린 아이처럼 사는 것이다…

것인지 먼저 생각해보자고 다짐 하면서요.

(『한 달에 한 번씩 지구 위를 이사하는 법』)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괴테

0 21

순간에 충실한 긴장감. 출판예비학교에서

Book Editor

어떤 원대한 포부보다도 원대하고 또 현실


성기병 마다 눈에 보이는 텍스트 안에 담긴 편집 자와 저자의 고민을 읽으려는 버릇으로 이 어졌다. 책을 읽을 때 늘 펜과 조그만 메모 지를 옆에 두었던 것도 이때부터였다. 몇 페이지 몇 줄 어디가 오타라는 둥, 본문 디 자인이 너무 과하다는 둥 출판사 홈페이지 독자란에 글을 올리며 편집자 흉내를 내기 도 했다.

1년 전 대학교 졸업 후 해군 장교로 입대했다. 처 음 1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 간이 흐르고 군대 안의 공기가 익숙해진 뒤

나는 일을 하고 싶다

에는 시키지 않아도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 는 장교가 되려고 노력했다. 정보장교로 근 무했던 나는 한 해의 가장 큰 과업인 보안 감사를 앞두고 우리 부대의 100여 건의 보 안 미비점을 발굴해 개선했다. 사라진 문서 를 찾고 분별없이 흩어진 서류를 정리하며

단순히 책을 만드는 일이 아닌,

참 많은 종이를 출력하고 세절했다. 그해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관계하는

감사에서 우리 부대는 23개 부대 중 2등을 차지했다.

수많은 일 속에서 나의 일을 찾고 싶다.

주변의 호평과 소박한 만족 안에서 이곳이 내 능력을 오롯이 발휘할 수 있는 직업적 터전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하

편집의 추억

책자를 손에 쥔 그 순간은 머리가 핑 돌 정도

지만 적당한 말주변과 친화력, 그리고 약

내 방안 책장에는 몇 권의 답사자료집이 꽂

로 기분이 좋았다.

간의 성실함과 기민함만으로 영위할 수 있

혀 있다. 대학교 3학년부터 2년간 학과 편집

당시의 좌충우돌은 넘치는 에너지와 열정

는 군 생활이란 진급의 한계가 있었고, 설

부장을 맡으며 만든 것들이다. 답사 지역, 유

을 어딘가 생산적인 것에 쓰고 싶었던 한

사 그것만으로 저 높은 계급을 달 수 있는

적지, 유물의 설명은 물론 학생들이 기고한

대학생의 몸부림이었다. 덕분에 사람들과

조직이라면 그런 곳에선 더 일하고 싶지 않

기사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답사 첫날

글을 매개로 소통(다툼)하며 소소하고 하

았다. 내 안에 꿈틀대는 열정을 다른 곳에,

선후배, 동기들에게 나눠줬다. 해미읍성에서

찮은 짜증과 변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졸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곳에 쏟아붓고 싶

만난 전북대 사학과 학생들과 답사자료집

업을 앞둔 4학년 중반에는 동영상 편집 프

었다.

을 교환하며 묘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로그램인 프리미어를 접하고 팀 프로젝트

고민의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우는 데 어떤

보람도 컸지만 여러 명이 쓴 텍스트를 완성

로 〈독립협회는 왜 독립문을 건설했나〉라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한

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매

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편집에 대한

방향을 지긋이 바라만 봤을 뿐인데 어느새

년 봄, 가을이 다가오면 한글이 깔린 PC방을

욕구가 활자를 넘어 영상에까지 이른 순간

내 모든 것이 그리로 움직였다. 군대에서의

찾아가 밤을 새우며 원고를 자르고 붙이던

이었다.

남은 1년 동안 세상에 드러난 출판인, 편집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같은 시기 신입생

교내 신문의 독자비평단 활동을 하며 독자

자의 세계를 더듬었다. 책을 통해 부분적으

들의 분방함과 재학생들의 자의식을 모아 2

의 눈이 아닌 비평자의 눈으로 타인의 글을

로나마 편집자의 삶과 직업을 이해할 수 있

년간 총 7호의 소식지도 발행했다. 선후배들

읽었다. 기준을 세워 누군가의 글을 평가하

었다. 출판인들이 쓴 책과 글을 읽으며 요긴

에게 원고를 의뢰(강요)하고 마감기한을 제

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

한 지식과 정보, 소소한 깨우침을 나의 언어

시하(속이)고 원고를 입수(독촉)해 한 권의

감했다. 당시의 경험은 훗날 책을 읽을 때

로 편집해 모았다. 그리고 편집자가 되기 위


싶은 아이디어들이 담겨 있다.

게 딱 1년 전이다.

세상을 향한 내 관심이 온라인 공간 안에

023

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실천에 옮겼다. 그

Book Editor

서 표출된 결과가 블로그였다면, 기자단 봉 기록을 쌓다

사활동은 또 다른 형태의 결과였다. 직접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한 도서

사람들과 맞대며 세상의 언어를 모아 나의

목록은 편집자로서 역량을 다지기 위한 가

언어로 드러내고 싶었다. 무작정 인터넷에

장 기초적인 작업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접속해 내 의지를 실현할 방법을 찾았고,

책을 다 읽을 필요는 없지만(그럴 수도 없

다행히 『나눔뜨락』이라는 김포시 봉사활

고), 관심 분야의 모든 책의 생몰 정도는 인

동 소식지(계간)를 발견했다. 기자단에 들

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말마다

어가 김포시의 다양한 봉사활동을 취재하

한 주 동안 여기저기서 얻은 책의 정보를 목

고 기사를 작성하며 주기적인 글쓰기를 수

모든 이들이 사람과 세상에 대한

록의 형식으로 축적했다. ‘읽은 책’의 목록

행했다. 비록 10명 안팎의 소규모 조직이

감수성을 지녔으면 좋겠다.

에서 시작한 이 목록은 ‘읽어야 할 책’, ‘만

었지만, 매 계절마다 한 명의 편집장을 중

편집자도 마찬가지다.

들고 싶은 책’ 등이 담긴 방대한 도서목록

심으로 오롯한 잡지 한 권이 기획, 제작되

으로 몸피가 커졌다.

는 과정을 경험했다. 지난 10월 3일 기획회

내게 일어난 변화와 출판, 편집에 관한 내

블로그도 이때쯤 시작했다. 인터넷이라는

의를 진행한 겨울호는 12월 1일 발행될 예

단상을 정리한 작은 자서전을 전자책으로

매체 안에서 특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

정이다.

만들 예정이다.

었다. 우선 지금까지 쓴 글을 모아 블로그

2013년 5월 31일 신고를 마치고 군인에서

를 꾸렸다. 책에 대한 비평과 출판계의 뉴

민간인이 된 날, 출판예비학교 최종 합격

두 가지 다짐

스, 출판과 편집에 관한 단상을 정리했다.

통보를 받았다. 6월 1일부터 지금까지의 시

당장의 취직만큼 취직 이후의 삶도 중요하

역사 분야의 신간 정보를 꾸준히 모으고, 그

간은 내 전체 인생에서 극히 짧은 순간이

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일을 삶의 일부로

중 주목할 만한 신간은 도서관이나 서점에

었지만, 가장 많은 생산적인 일을 겪은 소

받아 들였다면 당연히 겪어야 할 고민이

서 대충이라도 읽고 나름의 촌평을 기록,

중한 시간이었다. 그 감사함을 느끼며 정말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은 지금의 내가

축적했다. 주변의 도서관과 친해지고, 다양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자칭 ‘출판

아닌 취직 이후의 나를 그려본다. 그리고

한 분야의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를 모으고,

예비학교 일기’다. 스승이자 선배이자 동료

이 밑그림에는 두 가지 다짐이 있다.

메타 지식을 담은 책의 목록을 따로 수집해

인 현역 출판인들의 깨알 같은 가르침과 그

첫째, 출판의 전 과정을 몸에 새길 것이다.

나만의 지식 지도를 그렸다. 또 그때그때

에 대한 반문을 엮은 이 일기를 읽으며 과

얼마 전 한 출판사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떠오르는 출간 아이디어를 정리해 엑셀 파

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선으로 연결해 미래

출판 기획자가 되기 전에 출판의 전 흐름 즉

일로 모았다. 여기에는 『법률서로 읽는 조

의 내가 어디쯤 위치할지를 가늠하곤 한다.

기획, 편집, 디자인, 제작, 홍보, 영업, 회계

선』, 『대한민국 대통령 잔혹사』, 『지식인의

곧 전자책 만들기 실습이 시작되는데, 출판

를 아울러 이해할 수 있는 편집자가 되십시

스마트폰』 등 편집자가 되면 꼭 기획하고

예비학교 일기를 중심으로 지난 5개월간

오.” 출판 분야만을 고민했던 내게 깨우침 을 주는 직구였다. 교정만 하는 편집자, 원 가 계산도 할 줄 모르는 편집자,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만 맡기는 편집자는 되고 싶 지 않다.

나는 오래된 목조

둘째, 조직 안에서 나의 일을 찾을 것이다.

건축물을 좋아한다.

내가 할 일은 분명 회사(출판사)라는 틀 안

가구부의 어울림과

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부

짜임이 보기 좋다.

인하고 싶지 않다. 조직 안에서의 내가 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단순히 책을 만드는 일이 아닌,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관계하는 수많은 일 속에 서 나의 일을 찾고 싶다.


신종우 이에 따른 한국 대학 등록금 제도가 나아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기말고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한국의 복지 정책에 대한 궁금 증이 생겼다. 다음 학기에 복지 정책 관련 수업을 두 개 더 수강하였고, 현 한국 사회 가 복지 정책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떻게 잘 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학적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정 보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 사회학은 여러 분야의 다양한 관점에 따라 논리적 인과관계로 분석하여 사회라는 하

Information, Change,

나의 결론을 도출해내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도출해낸 결론은 현실과 맞닿아있 다. 이러한 사회학적 방식과 유사한 책이

Movement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다. 이 책 은 문명 간 힘의 차이(총)가 자연환경에 따 른(균) 문명의 발달 정도(쇠)에 기인함을

사회학을 공부하며 정보의 중요성을 배웠다.

사회학의 방식으로 접근하여 설명한다. 우

책을 읽으며 변화의 가능성을 알았다.

선 자연환경이라는 원인을 고고학, 생물학,

세상을 보며 감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지리학 등의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고, 이 것이 문명의 발달 정도에 미친 영향을 과 학적 논증을 통한 논리적 인과관계로 분석 하며, 이를 통해 문명 간 힘의 차이라는 하

SBI 교육 과정 중 한 선생님께서 “책에

려웠다. 이론들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

나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그 결론

는 Information(정보), Change(변화),

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

은 ‘문화 상대주의’, ‘다양성’, ‘지구촌‘ 등으

Movement(감동)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인상

로 표현되는 현대 사회의 주요 흐름과 맞닿

책에는 정보만 있다. 하지만 정보에는 변

적인 수업은 2011년 수강했던 ‘사회정책’이

아있다. 다양한 관점을 논리적 인과관계로

화가 있고, 변화에는 감동이 있다. 그래서

었다. 유럽의 복지 정책에 관한 수업이었는

분석하여 도출해낸 하나의 결론이 현실에

책에는 정보와 변화와 감동이 있다.

데, 이것이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 이슈

서 와 닿는 것. 나는 정보란 이래야 하며, 이

였던 복지 정책과 맞물리면서 현실적으로

런 정보가 담긴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학

와 닿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북유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사회학은

럽 복지 정책을 단지 선망의 대상이 아닌,

정보

여러 분야의 다양한 관점들로 사회를 바

분석의 대상으로 접근하여, 스칸디나비아

작년쯤, 친구 한 명이 전라도 사람을 비하

라본다. 역사사회학, 정치사회학, 경제사회

형 복지 모델이라는 큰 틀의 이론이 그렇게

하는 ‘전라디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학, 문화와 사회, 지리사회학 등등. 이러한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역사적 과정,

나는 그 친구에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 전

다양한 관점들이 논리적인 인과관계에 따

정치적 지형, 경제적 환경, 사회적 분위기,

라도 사람 아니냐?” 지금은 정보화 사회다.

라 사회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

문화적 특수성 등의 다양하고도 현실적으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인터넷이

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론적인

로 와 닿을 수 있는 관점들로 배울 수 있어

사회여론을 주도한다. 그러나 스마트폰, 인

수업들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마

서 좋았다. 이후 국가별 복지 정책에 따른

터넷 등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사회에서 통

르크스, 베버, 푸코, 소쉬르, 하버마스 등의

대학 등록금 제도와 이에 근거하여 분석한

용되고 있는 정보의 대부분은 출처 불명의

이론을 다루는 수업에는 쉽게 집중하기 어

한국 대학 등록금 제도의 문제점, 그리고

지식이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소통을


025

돕는다는 정보화 사회의 환상은 출처 불명

람들은 이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그리고

의 지식을 무한정으로 공급하고, 무비판적

그 냉소 이면에는 공감과 체념이 있었다.

으로 받아들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결과적

무엇인가가 문제라고 공감은 하지만 정보

으로 현재 한국의 정보화 사회는 출처 불명

가 없어 변화의 방향을 모르니 답답할 뿐

의 지식이 난립하여 소통이 완벽히 차단된

이다. 그래서 그 답답함이라도 덜고자 체

채 오해와 억측만이 난무하는, ‘만인에 대

념하며 순응한다. 그렇게 체념하고 순응하

바뀔 수는 있다.

한 만인의 투쟁’ 상태일 뿐이다. 그리고 이

면서 위로라도 받고 싶은데 대자보가 이를

그리고 바뀐 사람이

는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개

방해하니 냉소를 보인 것이다. 어느 때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인의 삶과 인성을 파괴한다. 정보화 사회일

터인가 20대를 중심으로 자기계발서 열풍

그러므로 책은 세상을

수록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의 사

이 불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를 가장

회적 역할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많이 비판하는 것 또한 20대다. 변화를 원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책으로 사람이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정보가 부족하니 답답할 뿐이고, 그 변화

래서 체념하고 순응하면서 위로라도 받고

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고,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는 정보를 둘러

싶어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그런데 자기계

책을 만드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어떤 혼란

발서에는 정보에 기반을 둔 변화의 가능성

편집자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책을 만드

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내가

이 없다. 단지 자기 위안에 불과한 위로만

는 것이란 ‘다양한 관점을 논리적 인과관

궁금했던 것은 광우병이 실제로 얼마나 위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로 위로를

계로 분석하여 도출해낸 하나의 결론이 현

험한가였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알려준

받으면서도 이것이 자기 위안에 불과하기

실에서 와 닿는’ 정보를 담아내는 것이다.

매체는 없었다. TV와 신문은 이데올로기에

에 비판한다.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정보가 바로 감동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불과한 정보를 쏟아내기에 바빴고, 인터넷

위로가 아닌 감동이다. 감동에는 현실성이

정보가 담긴 책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에는 출처 불명의 낚시용 정보들만이 넘쳐

있어야 한다. 감동은 단지 생각만 바꾼다

정보는 사람을 바꿀 수 있고, 바뀐 사람은

났다. 시위에 참여한 의대생 친구는 의대

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실질적인 변화가 있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님이 광우병은 과장됐으니 시위에 참

어야 하고, 여기에는 정보가 필요하다. 정

이런 변화가 세상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여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광

보가 받쳐주는 변화, 이에 따른 감동에는

그러므로 편집자는 세상에 감동을 불러일

우병의 실체를 아는 전문가들은 침묵하였

현실성이 있고, 이런 감동이야말로 말만

으킬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정보가 담긴

고, 결과적으로 시위는 사람들이 촛불만 들

하는 위로가 아닌, 실제로 느껴지는 감동이

책을 만들어 세상에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다가 끝났다. 현재 사람들은 촛불시위를 부

다. 책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보를 제공하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시위 자체를 폄

여 사람들에게 진짜 감동을 줄 수 있다.

하하는 여론까지 나오고 있다. 교수님의 말 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시위에 참여한 이유

편집자

는 권위적 정부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정보란 어떠해야 하

광우병 촛불시위에서 사람들이 원한 것은

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양한 관점과 논리

미국산 소고기 수입 중단이 아니라 변화였

적 인과관계, 그리고 이로 도출해낸 결론

다. 그러나 변화에는 이를 받쳐줄 만한 정

의 현실성이 내가 생각한 정보의 필요조건

보가 필요하다. 정보는 변화의 원동력이다.

이다. 이러한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들어갈

시위가 결과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변화를

수 있는 곳은 책이 유일하다. TV와 신문은

이끌어내는 정보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

권력에 묶여있고, 인터넷은 지나치게 산만

다. 책의 사회적 역할이란 변화를 이끌어내

하다. 나는 『총, 균, 쇠』를 비롯한 문학, 인문

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교양, 사회과학, 경제경영, 자연과학 등 분 야를 막론한 여러 책에 담긴 정보들을 얻

감동

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변

2010년, 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대학사회

화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를 비판하는 자퇴생의 대자보가 붙었다. 사

가 실제적인 감동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현

책을 읽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Book Editor

책이 세상을


양혜영 답이 없는 책의 세계를 마주하며 답을 찾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마주한 책이 라는 세상은 더 많은 가능성을 주었습니다. 무언가를 느끼고, 의문을 가지고 책을 찾아 읽으면서 세상과 타인에 대한 관점을 만들 어 나갔습니다. 특히 존 롤스의 『정의론』은 저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재능 이나 타인의 부, 심지어 생활습관조차도 사 회와 시대가 주는 우연성 아래 발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의 약자들이 그들의 능 력이나 습관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선택지는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은 제가 타인과 사회를

언젠가 세상은 책이 될 것이다

보는 가장 근본적 사고가 되었습니다. 나의 세계가 만들어질수록 보이지 않던 타 인의 세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화 려한 영등포의 쇼핑몰 옥상에서, 맞은편 구 석 붉은 불빛 속 의자에 앉아있던 여인들을 목격했습니다. 영화나 뉴스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알고 싶었던 나에게 책은 도구가 되어주었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들의 모습을

원고에 집중했던 어느 날,

보고 마치 사회의 화려함을 지탱하고 있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느

책의 세계 안에서 내가 활자를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다.

꼈습니다. 사회의 이면을 마주한 느낌이 들 었습니다. 왜 저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 생기는가, 의문을 가지고 여러 책을 찾아

세상에 대한 호기심,

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역사의 진

읽었고 『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라는 책을 보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보와, 지금보다 나은 세상으로의 변화 가능

며 이미 존재하는 삶을 도덕적인 보수성으

사회과학부에 들어와 경제학을 선택한 이

성을 믿는 그의 생각에 감동했습니다. 수동

로 재단하는 것이 폭력이 된다는 것을 깨달

유는 복잡한 세계를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

적인 공부에 익숙해 답을 찾는 것에 집중

았습니다. ‘저렇게 사는 삶’이라는 인식 자체

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

하던 저는 그제야 이를 내려놓을 수 있었

가 그들을 낙인찍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

도 그래프와 공식과 법칙들만으로 정의하

습니다. 인문학—제가 생각하기에 과정이

다. 어느 세계에도 뚜렷한 답은 없었습니다.

기엔 여전히 세상엔 알고 싶은 것들이 많

만들어내는 가치를 중시하고, 정답을 만들

책은 세계를 재단하는 나의 사고조차 의심

았습니다. 대학시절 동안 누구보다 많은

지 않아도 사고의 과정에서 나를 찾아내는

하고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세계를 다

전공, 교양 과목을 들었고 4학년 때 뒤늦

학문—의 매력을 깨달았습니다. 또 공부란

르게 보는 관점을 주는 도구, 그것이 책이 준

게 고전 명문을 읽고 글을 쓰는 수업을 듣

받아들이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

저의 성장입니다.

게 되었습니다. 매주 세계문학이나 인문

하는 것에 영향을 주고 가치관에 변화를

고전 책을 읽은 후, 글을 쓰고 서로의 생각

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휘발되는 것이

타인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대화

을 이야기하는 수업이었습니다. 미셸 푸코

아니라 나를 완성해 나가는 일, 그리고 그

심리학을 복수전공하면서 가장 재미있었

의 『감시와 처벌』,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

과정에 책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글과 관

던 과목은 이상심리학과 상담심리학이었

상의 공동체』를 읽으며 내가 사는 공간을

련한 ‘일’을 떠올렸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습니다. 행동과 말의 보여지지 않은 면들

이야기했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다룬다면 여기에 생업으로의 피로와 어떤

을 연구하고 사람을 깊게 이해한 후, 그들

를 읽으며 사회와 대립하는 예술가의 세계

강제가 더해진다 해도 내 안에서 능동성을

을 변화시키려는 접근법이 좋았습니다. 일

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 에드워드 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상에서 저는 대화를 좋아하고 이 과정에서


어느 날 조금 서먹했던 친구가 저에게 고민

어지는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임을 깨닫습니

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의 고민

다. 나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일상을 봅니

을 진지하게 경청해주었고 ‘넌 어떤 사람이

다. 베트남의 한 소도시에서 오토바이와 자

야’ 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문부호를 함께

전거가 뒤섞여 다니는 도로를 달렸던 일은

만들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후에 그 친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마치 그곳에 사는 사

구가 저와의 대화로 생각이 변했다며 개인

람이 된 것처럼 같은 높이의 시야에서 골목

홈페이지에 장문의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

구석구석을 달렸습니다. 무작정 가다가 좋은

다. 저의 말에 생각을 바꾸는 사람을 보면

곳을 발견하면 멈추고, 다시 맛있어 보이는

서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얼마나

음식을 보면 멈추고 다시 달리고. tour가 아

짜릿한 경험인지 느꼈습니다. 타인과 소통

니라 travel. 내가 다른 공간 속에 존재했다

과정에서 그들의 가치관과 마주했을 때 교

왔다고 느낀 기억입니다.

0 27

하고, 먹는 것을 보다 보면 이곳도 삶이 만들

Book Editor

다른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여행 그리고 대화, 다른 세계를 만나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감의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독

1달러만 달라는 아이들이 가득 몰려들었

서 또한 대화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

던 캄보디아. 그곳에서 만난 한 소녀도 기

다. 타인의 생각을 읽고 나의 생각을 돌이

억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펜 하나

역사, 문화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같

켜 보며 공감의 지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

를 달라던 그 소녀의 부탁을 들었을 때 문

은 시대 다른 문화를 가진 공간의 차이점을

은 받아들이고 변화 할 수 있는 일. 그래서

득,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당장의 1달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라는 또 다른

대화와 독서는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화

러가 아니라 꿈을 키워나갈 그림이라는 생

여행을 통해 내가 사는 세계를 다르게 보는

란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고, 관

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가능성이 돈 때

또 다른 프리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심을 갖되 타인을 재단하지 않는 것이며,

문에 제한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한

서로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발견하는 것임

국에 돌아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

책이라는 세계,

을 느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커뮤니케이

라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마리아 수녀

그 세계에서 활자를 움직이는 나

션을 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발견

회 소년의 집에서 2년간 학습봉사를 했습

출판예비학교에서 책을 만들며 원고교정을

하고 그들의 장점을 보며 저 또한 발전할

니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내가 딛고 있

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원고에 집중한 순간이

수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는 이 공간을 다르게 보고, 당연한 것이 아

있었습니다. 내가 책이라는 세계 안에서 활

님을 인식할 때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원

자를 배열하고 문장을 이해하고 그 세계를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여행

동력을 얻는, 그런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행지에 가면 꼭 가는 곳이 시장, 마트, 길

리고 다른 눈을 가지게 되는, 그런 여행을

저에게 책이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였다면 원

거리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

꿈꿉니다.

고교정을 하면서 느낀 것은 책이 도구가 아 니라 그 자체로 세계라는 것이었고 그 안에

자전거를 세우고 현지인들만 마시는 색소 가득한 음료를 사먹었다. 베트남에서 탔던 자전거.

언어를 배우는 것은

존재하는 나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책의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것

내용을 알고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영화 『조제와 호랑이 물고기들』의 주인공

만큼은 내가 글과 활자 안에 서 존재하고 있

조제가 말하는 오사카 방언 하나하나가 무

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편집자란 아마도 책

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무작정 일본어

이라는 세계에서 주인이 되는 사람인 것 같

를 배웠습니다. 즉흥적으로 시작했지만 일

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편집자의 주체성이

본어로 말해볼 기회를 가지고 싶어 일본인

아닐까 생각합니다. 떠밀려 가는 과정 속에

들이 많이 오는 광화문 면세점 앞 커피전문

서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다시 나를 찾고,

점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조금 실력이

그러면서 원동력을 만들어 내는 계속적인

쌓인 후에는 원서 책도 읽어보면서 꾸준히

움직임. 그 세계에 발을 딛고 싶습니다. 책을

배워 나갔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것 또한

만들고 싶습니다.

그 과정이 한 나라를 오랫동안 여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여승주 잡식동물의 딜레마

세상을 낯설게 보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기억나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해요? 내가? 갸웃갸웃했는데 별 잡 다한 걸 다 안다는, 칭찬인지 아닌지 아리 송한 평가였다. 내 지배적인 독서 경험은 신문이었다. 아동 도서도 별로 없었고 스마트폰도 없어서 집 에 굴러다니는 신문, 잡지를 주워 읽었다. 오늘은 텔레비전에서 무슨 만화 하나 뒤지

나는 어떻게 마구잡이 읽기 대신

다가 머리가 크면서 문화면 리뷰를 읽었고

편집을 하겠다고 나섰나

주말이면 스크랩을 했다. 초등학교 때부 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일간지를 하루 에 세 부씩 읽었다. 목적의식이 없어서 논

스물세 개의 거울

았다. 처음 만난 스물세 명과 하루 종일 붙

조 차이도 몰랐고, 무턱대고 읽었기 때문

출판예비학교에 합격했을 때 사람들이 물

어 있으니 모든 게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낯

에 추세를 읽는 감식안이 있다고 자부하지

었다. 뭐 하는 곳이니. 직접 책을 만들고 출

설었다. 매일 바뀌는 선생님들은 범상한

도 못한다.

판인들에게 강의를 들어요. 다니는 동안에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말씀을 하셨

종이신문 탐독은 이 속도전 세상에서 자랑

도 여기저기서 계속 물었다. 요샌 뭘 배우

다. 선문답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누가

은 아니다. 체계도 깊이도 없는 그냥 습관이

니. 대답으로 빡빡한 시간표를 읊으며 죽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니.

다. 다만 매일 지면에서 스쳐간 수많은 말과

겠다 힘들다 투정했지만 사실 최근 몇 년

훌륭한 장르 영화는 장르의 관습을 반복하

사건과 사람, 찬반토론이 어딘가에 참고 문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출판사에 다니

면서도 변주를 담고 있다. 반복하기 때문에

헌으로 저장돼 있겠거니 한다. 양이 쌓이면

는 선배들은 딱 반년만 위장 입학하고 싶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변주라서 독창적이다.

질이 변하긴 한다고 우기고 싶다. 지금도 매

다고 부러워했다.

장르 연재물을 실시간으로 보는 즐겁고 이상

일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신문을 재밌게 읽

엄청나게 압축적인 기간이었고 여기서 마

한 기분으로 매일 친구들, 선생님들에게 카

는다. 한때 만화잡지부터 정치저널까지 주

주치는 누구든지 뭐든지 신기했다. 이렇게

메라를 들이댔다. 여러 사람들의 모습에서

간지, 월간지, 계간지를 애독했으니 정말 내

쉴 새 없이 뭔가 쏟아져 들어올 줄이야. 머

익숙하면서도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독서의 팔 할은 정기간행물이다. 덕분에 취

릿속이 만화 말풍선처럼 까만 실타래로 엉

많았다. 스물세 개의 거울에 둘러싸인 느낌

향은 구제불능 잡식이다.

켜 버렸다.

이었다. 너무 국외자처럼 구는 걸까.

나쁘게 말하면 아직 한 우물을 못 팠고 좋

기획서를 쓰고 책을 만들면서 배우는 것도

그 거울에 비친 나를 자기소개서 장르의 규

게 말하면 세상일에 두루 관심이 많다. 오

많았지만 사실 스물세 명 친구들이 툭 던지

칙에 맞춰 여기에 설명한다. 관습에 따라

늘 이 글이 왜 필요한지, 현실의 어떤 면에

는 말, 행동 하나하나가 제일 강렬하게 남

편집됐지만 구체적인 삶의 기록이다.

닿아 있는지, 다른 분야와는 어떻게 연결

어디서든 배울 게 많을 것이다. 오래오래 읽고 배우면서 편집자로 남고 싶다.


두 손 두 발 보태고 싶다.

없는 삶을 관찰하고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 를 듣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출판사에서 일 센티

겁 없이 조지 오웰이나 타리크 알리의 글을

사실 최근까지 난 출판 업무에 안 맞는다

교재로 썼을 때는 어려워서 끙끙댔지만 학

고 생각했다. 직접 창작을 하진 않아도 편

생보다 내 독해력이 쑥쑥 늘었으니 손해는

집자가 감당해야 할 창조적 고통이 있는

아니었다.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의

데 그걸 즐기기에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

기를 죽이려고 어려운 글을 동원한 게 시작

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2년여 동안

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책 한 권 안 읽

정치・사회 분야 책을 내는 작은 출판사에

는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싶었다.

서 일했다. 주로 교정 업무를 맡았다. 학생

좀 부풀려 말하면 낯선 책을 독자에게 소

이었기 때문에 내내 상근하지도 않았고 책

개하려 애쓰는 편집자처럼. 학생도 나도 특

임 편집을 한 적도 없다. 글을 어디까지 고

훈을 겪으며 성적을 올렸으니 사교육의 관

쳐야 할지 늘 헷갈렸고 바탕이 되는 공부가

습을 따르면서 내 뜻대로 변주를 한 셈이

돼 있는지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

부족해서 자주 낙담했다. 2년 넘게 힘껏 버

다. 학생들보다 내가 배운 게 더 많다. 진짜

으려고 노력한다.

텼지만 출판은 내 우물이 아니다 싶었다.

편집자가 돼 그 경험을 확장하고 싶다.

졸업 준비를 하러 강의실에 돌아왔을 때는

그래서 출판예비학교에 왔다. 지난 다섯

숨어 있는 책

학업에 뒤처졌다는 걱정까지 안고 풀이 죽

달 동안 이곳 선생님들이 주문하신 많은

자극을 얻는 또 다른 곳은 책방이다. 배운

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칭찬도 듣고 신

것들을 하려고 애썼지만 사실 반의반도 못

대로 일주일에 한 번 대형서점에 가서 서가

나게 수업을 들었다. 그때서야 어렴풋이 느

했다. 성장했다고 느끼기엔 당연히 너무 짧

위치도 외우고 책을 쓸어 보고 펼쳐 본다.

꼈다. 출판사에서 뭘 배우긴 했구나. 꼬집

은 시간이다. 선생님들이 당부하셨던 대로

쏟아져 나오는 책에 매번 얼떨떨한 게 시

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세상을 보는 방식

원하는 분야나 출판사를 딱 정하지도 못했

골쥐가 된 기분이다.

이 조금 달라졌던 것 같다. 영미문학 전공

다. 하지만 출판계에서 한 우물을 파야겠

솔직히 아직은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마

과 전혀 상관없는 글을 보다 왔는데도. 마

다는 생각은 튼튼해졌다. 어디서든 배울 게

음이 조금 더 편하다. 신간만 보이는 대형

지막 두 학기 동안 3학년 때까지 배운 것보

많을 것이다. 오래오래 읽고 배우면서 편집

서점과 달리 뜻밖의 책들도 눈에 들어온다.

다 훨씬 많이 배운 것 같다. 과외를 서너 개

자로 남고 싶다.

오래전부터 친구들과 가끔 헌책방 투어를

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내가 일 센티쯤

다녔다. 금호동에 있던 고구마, 용산 뿌리

성장했다는 느낌 때문에 즐거웠다. 나도 서

블로그

서점, 신촌 숨어있는책, 공씨책방, 정은서점

당 개만큼은 하네.

http://estraven87.egloos.com

을 돌며 책을 이고 지고 왔다. 집 근처에 있

속도와 유행보다 깊이와 일관성을 중요하

는 신고서점은 아예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

게 생각하는 곳에서 분명 뭔가 배웠다. 힘

장소였다.

들었던 과거를 미화하는 건 아니다. 혼나고

처음에 헌책방에서는 대체 무슨 책을 사야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눈앞이 아득하

하는 건지 막막했다. 책벌레라는 허세만

다. 하지만 괜찮은 실패였다.

동네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헌책방. 계단을 올라가면 ‘뜻밖의 여정’이 시작된다.

있었던 것 같다. 동행한 ‘책덕후’들이 추천 하는 책만 사다가 차츰 혼자서도 이런저런

출판 편집을 하고 싶은 이유는

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이삼십 년 전에

졸업 후 2년 동안은 영어 강의에 몰두했다.

나온 신기한 주제도, 유명한 작가나 학자

입시제도가 어떻게 변하든 사교육은 흥했고

가 젊은 시절에 남긴 의외의 흔적도 숨어 있

나도 거기에 편승해 달렸다. 미국 교과서나

다. 존 버거나 로저 코먼의 절판 도서도 헌

영어 동화를 끼고 살았고 시험기간에는 예

책방 덕분에 구해 읽었다.

상 문제를 수백 개씩 만들었다. 백 퍼센트 슬

80~90년대에 나왔다가 사라진 아까운 책

픈 일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학생과 부모를

들, 힘들게 구했는데 번역 때문에 읽을 수

만나 ‘영업’을 하는 건 은근히 스릴이 있었다.

029

평범한 가정집에 과외를 하러 가서 저녁이

Book Editor

없는 책들, 언젠가 이런 책을 다시 내는 데


유지영 나는 기분으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 었습니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자는 욕심에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까 지 유럽의 거리를 누볐죠. 시야를 넓히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마저 ‘책’이라는 하나의 초점에 다가서는 자신 을 만났습니다. 프랑크푸르트는 오직 괴테 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방문한 도시예요. 거 의 완벽한 상태로 보관된 괴테의 소지품에 서 그의 생활을 느끼고, 괴테 하우스(괴테 의 생가)에서 그가 바라보던 창밖의 시선 과 마주했죠. 복도의 의자에 앉아 『젊은 베 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분위기를 내기도

내가 느끼는 것을

했는데, 어느 일본인 관광객이 말을 걸어왔 어요. 결국 우리는 괴테로 의기투합하여 밤

당신도 느낄 수 있다면

새 맥주잔을 기울였습니다.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에서든 서점은 절로 눈에 들어왔고, 각 도시의 독서 문화를 체 험하는 것이 매일의 행복이었어요.

세상을 만나 미립이 트이고, 파고들수록 드러나는 매력

출판을 만나 숨통이 트인

제 좌우명은 ‘유비무환’입니다. 중요한 일

지영 씨의 성장 소개서

에 앞서 충분히 준비하면, 실패도 적고 스 스로 느끼는 불안도 떨쳐버릴 수 있죠. 작 년 가을, 기초가 탄탄한 출판인이 되자는

잃어버린 ‘평생직업’을 찾습니다

지닌 책을 직접 만드는 일은 그 보람을 모

생각에 향한 곳은 한겨레문화센터의 출판

일 년 전, 일본어 전공을 살려 입사한 일본

든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죠.

편집학교입니다. 약 두 달 동안 책 제작과

계 물류회사를 떠나올 때 결심했습니다. 이

후회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정을 정식으로 배웠고, 막연하게 생각해 온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말이죠.

바로 ‘한 일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일

출판편집이 손에 생생하게 잡히기 시작했

회사에서는 주로 미국 화물의 수입 절차를

에 대한 후회’가 그것이죠. 전자는 결과가

어요.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지 꼼꼼

감독했습니다. 업무로 일본어 실력을 발휘

비록 실패로 끝났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

하게 확인하는 제 성격과도 딱 맞는다는

하고 싶었지만, 기회는 좀처럼 잡을 수 없

서 교훈을 얻었다며 스스로 반성할 수 있

확신이 들었습니다. 출판편집학교에서의

었고 곧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생겼어요.

지만, 죽기 직전까지 생각나는 것은 후자입

과정이 끝난 후에는 출판예비학교에 지원

학창시절 내내 책에 푹 빠져있던 제가, 글

니다. 출판편집은 평생에 걸쳐 느낄 후회를

했고, 당당히 9기 편집자 과정에 합격했습

이 아닌 ‘숫자’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것에

남기지 않기 위해 도전한 일이에요. 절대

니다.

의문을 품었죠. 출판편집자로의 동경에 다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발 디딘 이 길을 벗

출판예비학교의 실습수업으로 책을 만드는

시금 눈을 뜬 계기입니다. 이후 출판편집자

어나지는 않겠습니다.

과정에서, 디자인 시안은 디자인 반에 의뢰 하고 조판 작업은 직접 했습니다. 본문 각 요

인 친구의 진심 어린 충고로 미래에 대한 현실감각을 깨우쳤고, 뒤돌아보지 않겠다

쉼표 하나. 숨 고르기

소의 중요도를 고려하며 시각적으로 아름다

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퇴사 후에는 45일 동안 유럽으로 나 홀로

운 틀을 짜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통의 흐름을 감독하는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일 년 동안 쇠

인디자인 프로그램이 익숙지 않아 여러 번

업무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외로운

똥구리처럼 부지런히 모은 돈, 모험과 문화

의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반복되는 연습으로

작업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확실한 형태를

체험을 위해 투자하기로 했어요. 다시 태어

결국 만족스러운 교정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너와 원활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제 모습

한 조가 되어 ‘다님길’이라는 이름으로 훌

을 상세히 그릴 수도 있었죠. 제작 또한 흥미

륭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님

로웠습니다. 종이의 질감과 두께를 고려하

길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길이라는 뜻이

고 조명에 따라 느낌이 시시각각 변하는 인

에요. 저자와 독자, 그리고 출판인의 만남

쇄 결과물을 예측하는 등의 작업은, 글자로

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죠.

만 존재해 추상적이었던 책에 물성을 가하

가끔은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이것

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은 오히려 이견을 조율하며 합의를 이끌어

출판편집에 대해 제대로 배우면서부터 디

내는 데 좋은 훈련이 되었습니다.

0 31

만 신기할 만큼 마음 잘 맞는 5명의 동료와

Book Editor

리 머지않은 미래에 편집자로 일하며 디자

자인이나 제작에서도 텍스트만큼의 매력 을 느끼고 있습니다. 출판은 모든 과정을

그냥 ‘조장’이라고 불러줘요

소홀히 할 수 없는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편집에 대해 앞서 배운 경험이 있는 제가

그 나라의 독특한 독서 문화와

마음 깊이 깨달았어요.

다님길의 조장을 맡았습니다. 짧지만 회사

취향을 알 수 있거든요.

외국에 갈 때마다 서점은 꼭 들러요.

에서 사회생활을 했기에 대외적으로 협력 함께한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에요

출판사와 연락을 취할 때도 제가 나섰죠.

상이 지난 지금도 종종 만나 술 한 잔 기울

대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까지도 '함께한

출판편집 과정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조원

이는 사이가 되었어요.

다'는 것의 진정한 맛을 몰랐습니다. 조별

도 있었기 때문에 제가 가진 지식으로 도움

편집자반 다른 친구들에게도 사회생활을

과제가 있는 수업은 피하고, 공동 작업을

을 줄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언제

한 티가 난다는 말을 때때로 듣는데, 그만

해야 할 때는 많은 부분을 혼자 도맡아 했

부터인가 조원들은 저를 언니, 누나라고 부

큼 어른스럽고 융통성 있다는 칭찬이라 생

죠. 하지만 이러한 성향은 일 년간의 일본

르는 대신 ‘사장님’ 혹은 ‘대표님’이라 부르

각하고 있습니다.

어학연수를 기점으로 완전히 변했습니다.

기 시작했어요. 혼자 알고 있기에 아까운

수많은 나라의 다양한 친구들과 교류를 하

사회생활의 작은 지혜를 때때로 알려주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겠죠?

면서 세계관을 넓힐 수 있었어요. 유학 생

흐리멍덩한 것을 꺼려 단호하게 결정짓던

출판편집자가 되려는 저에게 친구들은 말합

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8개

제 모습에는, 조장보다는 사장이라는 울림

니다. 철모르던 지영이가 어느새 확고한 ‘자

월간 음식점에서 주방 일을 하면서, 의지할

이 어울렸나 봐요.

기의 길’을 가면서 생각도 깊어졌다고 말이

수 있는 동료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겠지만, 친근함

죠. 저도 스스로 느껴요. 예전보다 타인의 감

새로운 발견도 했습니다.

과 겸손을 무기로 지닌 저이기에 가끔 부담

정과 인생에 공감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

출판예비학교의 실습수업도 마찬가지였

스럽기도 합니다. 회사에 다녔을 때도 저

을요. 이것은 출판편집자가 되어 이루고 싶

습니다. 하나의 원고를 여섯 명이 협력하여

보다 한 달 먼저 들어온, 세 살 어린 사원을

은 꿈이기도 합니다. 책에는 재미와 지식을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시작 전부터 견

‘선배’라고 부르며 항상 존중하고 일도 겸

넘어서, 읽는 이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드

해 차이에 대한 걱정이 앞서더군요. 하지

손히 배웠습니다. 덕분에 퇴사 후 일 년 이

는 강력한 힘이 있어요. 이 힘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그 과정에 내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더없이 뿌듯할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출판편집은 빙산의 일각일지 도 모릅니다. 제 앞길에는 생각도 못 한 돌

저는 이제야 막 ‘이야기 바다’의

발 상황도 있을 테고 견디기 힘든 어려움도

존재를 믿기 시작했지만,

있을 테지요. 하지만 그만큼 보람되고 인간

제 몫을 하기에 너무 늦지는 않았을지도 몰라요. 살만 루시디의 『하룬과 이야기 바다』 중에서

적으로 성장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결심했던 결단력과 추진 력으로, 험한 파도는 헤쳐나가고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는 물결을 일으키겠습니다.


윤슬기 거리의 산책자, 사람을 만나다 걷는 것을 즐긴다.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과 직접 발을 디디며 체험한 세상은 각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 수꾼』의 홀든 콜필드와 『온 더 로드』의 작가 잭 케루악, 그리고 ‘구보 씨’의 공통점은 모두 거리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두 발을 열심히 움직이며 거리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소 통하고, 때론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전유(轉游)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 는 ‘걷기 여행’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제주도 와 유럽으로 떠났다. 갓 스물을 넘긴 청춘들 은 7박 8일간 제주도를 걷고 또 걸었다. 버스

슬기 씨에겐

기사님이 하차하는 곳을 잘못 일러주어 산 중턱에 위치한 고속도로를 2㎞ 넘게 걸어야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한 적도 있었지만, 난생처음 예쁜 노루와 조 우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작년 말에 떠나 해를 넘겨 돌아온 15일간 의 유럽여행은 거의 무전여행이나 다름없

나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책 한 권이 지식의 숲을 이루는 것을 상상하면 종종 가슴이 벅차 오른다

었다. 최소한의 식비와 숙박요금만 들고 떠난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배 짱도 두둑했다. 도시간 이동할 때를 제외 하면, 대중교통은 거의 이용하지 않고 지도 한 장만 손에 쥔 채 유럽의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과 만났다.

욕망하는 것에 관하여

그 결과, 취업 준비에 몰두해야 할 철없는

재즈 음악을 전공하는 네덜란드 유학생,

문학과 근현대사, 윤리와 사상 과목을 유

인문대생은 연대와 소통에 목이 마르다는

호주에서 온 교육자 노부부, 피렌체 시뇨리

달리 좋아했다. 철저한 문과생이었다. 고

핑계로 ‘인문학과 예술을 함께 논하는—실

아 광장의 유쾌한 악사들….

등학생 때 황진이의 시조에 반해, 「봉별소

상은 맛집 탐방에 가까웠던’ 토론 스터디

나는 <무한도전>을 좋아하는 만큼 <인간

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을 편지글로

그룹을 교내에 출범시킨다. 모임은 1년 동

극장>과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TV 프

멋들어지게 변주하여 선생님과 친구들 사

안 별 탈 없이 지속됐고 학기 말 교내 우수

로그램도 즐겨 본다. 우리네 일상에 삶의

이에서 문학소녀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에

동아리 선발에서 장려상도 받았으니, 첫

모든 희로애락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서는 국어국문학과 신문방송학을 전공했

게릴라 연대치곤 선방했다고 자부한다.

다. 나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다. 나는 스스로 선택한 학문을 자유롭게

4학년을 앞두고 단기 어학연수를 목적으

에 공감하며 웃음 지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부하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중에서

로 떠난 스페인에서는 가우디의 <카사 밀

클리셰의 힘이자 매력이다. 여행할 때 고생

도 근대문학을 가장 재미있게 공부했다.

라(Casa Mila)>가 바르셀로나 시민에게 ‘일

을 자처한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나

사실 문학이라는 독립적인 장르보다 텍스

상의 장소’로 기능한다는 사실에 매혹된다.

는 스무 살이 넘어 사춘기가 찾아온 희귀한

트 근저에 깔린 다양한 사상과 철학, 그리

문화예술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와 재구

케이스다. 걷는 여행을 마친 뒤, 날카롭고

고 당대의 문화양식을 함께 탐구하는 작업

성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다. 2년간 인천문

예민하던 내 모습은 어느덧 많이 변해있었

이 흥미로웠다.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

화재단의 문화예술 시민서포터즈로 활동

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지 않았고, 유머

해서는 역사, 철학, 예술이론 등 공부해야

하여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로부터 우수

를 유쾌하게 받아치는 센스를 지니게 되었

할 것이 많았다. 더불어 다치바나 다카시

상을 받았다. 이처럼 나는 하고 싶은 건 반

으며, 더는 가진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

의 저서를 만나고 교양의 힘을 믿게 된다.

드시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힘을 쓰지 않았다. 거리에 해답이 있었다.


033 Book Editor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 장기하와 얼굴들, ‘느리게 걷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집자가 지녀야 할 태도와 가치관을 구체화

고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궁

나는 유난히 책장을 뽀드득거리며 책을 읽는

할 수 있었다. 인문 출판시장의 베스트셀러

극적으로 어떤 편집자가 되고 싶은지 섣불

습관을 갖고 있다. 종이와 손끝이 만들어내

목록을 살펴보며 인문 출판의 계보를 나름

리 고백하지 않으리라. 다만, 편집자로서의

는 감각의 앙상블이 좋다. 부모님 말씀에 의

대로 구상할 수 있었고, 타이포그래피와 편

첫 다짐을 이렇게 시작할 수는 있겠다. 바

하면 대여섯 살부터 그랬다고 하셨으니, 꽤

집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생겼다. 특히 편

로 편집자의 기본 덕목인 오탈자가 없는 책

오래된 습관이다. 어린 나이에 ‘종이책’의 맛

집자라는 세계를 ‘풍경’으로 취급하면 안

을 만들겠다는 것. 그것이 나를 믿고 자신

을 알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절판된 계몽사

된다는 대선배님의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

의 일부를 내준 저자와 내 책을 선택한 독

의 『디즈니 그림 명작 시리즈』와 앤서니 브라

는다. 이런 측면에서 6명의 예비 편집자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

운의 책을 가장 좋아했는데, 내 유년의 8할

함께 책을 만드는 워크숍 시간은 이 세계에

문이다.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Why

쯤은 이들이 차지하는 것 같다.

대한 환상(?)을 깨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

I Write)’라고 되물었던 것처럼, 나 역시 편

대학 시절엔 ‘읽기’의 맛에 심취했다. 아마

다. 워크숍 회의 시간은 서로의 의견이 충돌

집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을 갈고

이때가 내 독서 이력의 전성시대가 아닐까

하고, 각자 맡은 역할과 임무를 일사불란

닦는 편집자가 되길 소망한다.

싶을 정도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으니

하게 달성해야 하는 현장의 단면이었기 때

까. 하지만 다수 친구들은 책을 읽지 않았

문이다. 제작 단계만 남은 현재 시점에서

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언론진흥재단

우리 도서출판 다님길의 조원들은 서로에

의 읽기문화진흥팀 대학생 외부 필진으로

게 끈끈한 동지애를 느끼고 있다.

합류한다. 일명 2030 다독다독(多讀多讀) 프로젝트였는데, 이때 ‘기획’의 맛을 알게

다시 질문하기: Why I Edit?

되었다. 젊은 민심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감

이제 출판 편집자가 나의 꿈이 되었다. 좋

각적인 콘텐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취재

아하는 일과 직업 간의 괴리를 순진하게 받

좋은책을 만들 수 있겠지. 사랑함을

결과를 바탕으로 「국제도서전에서 이어령

아들이는 사람은 못 된다. 책 읽는 것을 좋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등 명사 인문학 강의 들어보니」, 「출판박물

아하고 글 쓰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해

관에서 책의 미래에 대해 살펴보니」, 「영국

서 모두가 훌륭한 편집자가 될 수 없다는

아이들의 높은 창의력 비결 살펴보니」 등

것을 잘 안다. 나는 모름지기 편집자란, 각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했던 작업은 무척이

자의 가치관에 기초한 어느 정도의 사명감

나 즐거웠다.

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좋은 책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출판예비학교로부

한 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세

터 합격 통보를 받은 것은 일종의 계시였던

상에 큰 울림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것 같다. 그저 독자로 남을 수 있었던 나를

는 ‘예비’라는 명찰을 떼고 이제 막 날갯짓

본격적인 책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기 때문

을 시작한 새내기 출판인이다. 나만의 편집

이다. 다양한 출판 관련 강의를 들으며 편

철학은 5년, 10년 연륜이 쌓이면서 차츰 견

언젠가는 ‘사랑’을 주제로 한


이건진

밥값 하고 싶은 예비 편집자, 출발선에 서다 나와 같은 시간을 사는 사람과 앞으로 함께할 사람에게 힘이 되는 책을 건네고 싶다.

어디 가서든 밥값 할 자신 있다

합리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어떤 전략을 세

나의 부모님은 밥심에 사시는 분들이다. 매

우는지 그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

년 시골로 내려가 직접 햅쌀을 고르고 꼭

다. 지금도 관련 뉴스와 보고서들을 즐겨

압력솥에 밥을 짓는다. 그런 부모님이 나 에게 제일 많이 하시는 말은 '부자 되라'도 아니고 '성공해라'도 아닌 '밥값 하는 사람 이 되라'였다. 대학 입학 후 중국집에서 서빙 아르바이

예전에는 밥값이

본다. 그러나 공부는 재미있어도 항상 부 족함을 느꼈다. 학문으로 접한 경영학에는

무엇인지 몰랐다.

애정이 담겨있지 않았고 내가 배운 전공

세상에 부딪히고 나서야

지식 대부분은 사회에 나가면 사장될 것이

밥이 얼마나 귀한지 알았다

었다. 그 부족함을 채워준 것이 책이었다.

트를 했다. 처음 하는 일은 서툴렀고 곧 일

경제 이론 수업 중 거시경제에 흥미를 느껴

못 하는 애로 찍혔다. 실수를 하면 주방에

본격적으로 경제서를 읽기 시작했다. 수업

서 바로 욕설이 나왔다. 처음 듣는 욕설에

이 개설되지 않으면 도모노 노리오의 『행동

당황했지만 이대로 그만두는 건 나 자신에

경제학』으로 행동경제학의 기본 이론을 배

게 용납되지 않았다. 짬이 날 때마다 가게

하고 동아리 홍보도 하려면 신문을 만들어

우는 식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개인

를 쓸고 닦았고 여자라고 빼는 법 없이 무

야겠다 생각했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

차원의 행동에 한계를 느끼면 사회과학서

거운 짐도 날랐다. 일은 금방 익숙해졌고

자 싶어 자진해서 총편집을 맡았다. 동아리

를 읽었다. 교수님 추천으로 읽은 『갈등과

반년 후 재료 발주와 정산도 맡았다. 내 욕

의 첫 시도였고 다들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통합 사이에』는 현대 서양사회와 이주민에

을 했던 주방 사람들에게 미안했단 말을

몰랐다. 알음알음 물어가며 기획과 지면

대해 더 넓은 시각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에

들은 날, 그제야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

배분을 하고 원고를 편집했다. 도서관에서

관심이 생겼을 때는 『20세기의 전쟁과 평

었다. 그렇게 '밥값 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책을 찾아보면서 처음 만지는 인디자인으

화』와 『비폭력』을 함께 읽었다. 사랑에 아

알았다. 밥값은 꾸준히 제 일하는 사람이

로 편집을 했다. 맨땅에 헤딩하며 만든 신

프면 『사랑의 기술』을, 훌쩍 떠나고 싶으면

하는 거였다. 그 후로 하나를 해도 확실히

문이지만 결과물도 만족스럽게 나와 한동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부산에 혼자

했다. 없는 일은 찾아서 했고 팀 활동은 주

안 동아리의 소식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행 갔을 때 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

도했으며 동아리 행사는 앞서 맡았다.

대학생활 동안 어디서든 밥값 할 자신은

트라베이스』는 그 뒤로 여행을 갈 때 항상

대학 시절 이주노동자에게 한글을 가르치

있었다. 이젠 학교에서 나와 사회에서 밥

가지고 다니는 책이 되었다.

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동아리 활동을

값 할 직업을 찾아야 할 때였다.

대학 시절 동안 책은 나에게 지적인 것은

했다. 세 개 학교가 모인 연합 동아리였는

물론 심층의 물음에 대해서도 가장 확실한

데 한글교실을 자기 구역에서만 운영해 서

부족함을 채우는 책

답을 보여주는 창이었다. 책 한권 한권이

로 활동 사항을 공유하기 힘들었다. 인권에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경영학은 나

가진 무게와 깊이와 넓이는 나의 삶을 한

대해 공부하는 세미나도 방학이 아니면 함

의 산업에 대한 이해와 수리적, 어문학적

차원 높여 주었다.

께 진행하기 어려웠다. 그간의 활동을 정리

능력을 길러 주었다. 특히 기업이 정교하고


035

새로운 책을 보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도서관 아

서울출판예비학교에서 정규 수업뿐만 아니

르바이트를 하다 우연히 책 한 권을 집었

라 학생회, 동아리 활동, 교육발표회 기획단

다. 제목부터 표지카피까지 민망할 정도로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중 가장 주된 활동

노골적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

은 협력 출판사에서 원고를 받아 실제 책을

에 내용이 좋았다. 그날 밤 내 방 침대에

만드는 조별 워크숍 활동이었다. 우리 소리

누워 단숨에 읽었다. 다 읽고 난 뒤 처음으

굽쇠 조는 외서 『Baseball and philosophy』를

로 내가 집기 이전의 책이 궁금해졌다. 내

번역한 원고를 맡았다. 첫 회의 날, 막상 책

손으로 이 책을 제대로 만들고 싶은 욕심도

을 만들려고 하니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편

생겼다. 지금은 평범한 카피도 수많은 수정

집 기획서를 작성하는데 생각하는 책의 상이

을 거쳐서 나오는 것임을 알지만, 오만하게

다 달랐다. 건축가 여섯 명이 망치 하나로 집

도 그때는 왠지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을 지으려 달려드는 것 같았다. 조원 모두 적

나도 날것인 원고에 살을 찌우고 어울리는

당히 넘어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 지지부진

옷을 입혀 완벽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고

한 회의결과로 지치기도 했다. ‘오늘도 전쟁

싶었다. 아마 이때 편집자의 세계에 뛰어들

같은 회의를 했다’는 농담은 우리 소리굽쇠

더 즐거웠다. 문장 한 줄, 단어 하나로 책의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의 단골 멘트였다. 그러나 벽돌을 쌓는 것처

얼굴이 휙휙 바뀌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운 좋게 시기가 맞아 졸업 후 바로 서울출

럼 차곡차곡 하나씩 해나가니 큰 골격이 잡

훨씬 다양한 판형과 종이와 인쇄 방법이 있

판예비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동안

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바닥을 잘 닦아 놓

었다. 편집자로 마주 본 책은 그동안 내가 보

혼자 책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하던 독서모

으니 흔들리는 일이 점점 적어졌고 작업 속

고 싶었던 책의 모습이었다. 독자들에게 책

임이나 동아리 몇몇을 제외하곤 주위에 책

도도 빨라졌다.

의 내면과 내면을 돋보이게 하는 외면을 전

을 읽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그런데 여

실제 원고를 만지는 과정은 확인의 연속이

하는 것은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기 서울출판예비학교에선 쉬는 시간마다

었다. 번역이 정확한지, 빠진 곳은 없는지, 계

책 얘기가 오갔다. 서점에 가면 눈 뒤집어

속 원서를 확인해야 했고 큰 골격을 세우고

숟가락을 들다

지고 저자 강연회는 피곤해도 꼭 듣는 나와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번역가와 피

매일 아침을 챙겨 먹고 학교에 왔다. 점심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드백을 할 수 없으니 자의적으로 판단해야

엔 함께하는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며 도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니! 우리가

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편집을 하면서

락을 먹었다. 수업이 끝나면 이어지는 아쉬

처음으로 만난 날, 담임선생님께서 첫머리

지겹기보단 즐거웠다. 같은 문장도 만지는

움을 위해 몇몇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거

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만치 않은 사람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흥미로웠고, 나

기에 틈틈이 간식까지. 많이도 먹었다. 그

들이 모였다”라고. 나는 그 만만치 않은 사

의 선택과 판단으로 책의 모든 것이 결정된

러면서 동료들과 함께 육체적, 정식적 체력

람들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다는 것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을 키웠다. 즐겁고, 당차게 이 과정을 달려

짧지만 책의 꼴을 정하는 경험은 생각보다

왔다. 이제 출판계에 첫걸음을 딛는 출발

Book Editor

책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다

끝없는 회의를 하면서 여섯 명의 의견이 하나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동시에 끈끈한 정이 들었다

선에 서 있다. 짧은 교육기간이었지만 편집 자란 직업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내 엉덩 이가 꽤 무겁다는 것도 알았다. 출판계에서 제 몫을 해내려면 아직 더 많은 생각의 시

오롯이 밥값 하는

간과 책들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책을 통

편집자가 되었을 때,

해 생각할 힘을 얻었던 것처럼 나와 같은

힘 빠진 세상에

시간을 사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밥 한 숟가락

사람에게 힘이 되는 책을 건네고 싶다. 그

크게 떠먹이고 싶다.

리고 비로소 오롯이 밥값 하는 편집자가 되 었을 때, 힘 빠진 세상에 밥 한 숟가락 크게 떠먹이고 싶다.


이동근 그 일은 내게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촉발 했다. 나는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 사람들 이 구태여 들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를 접한 것이다. 그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의 무감, 작은 목소리를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왜 책인가?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부실학교 선정 논 란에 휩싸이면서 진통을 겪었다. 예술대학 특성상 취업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분개했다. 취업의 잣대로 예술을 재지 마라! 그러나 정책의 벽은 확고했다.

편집, 그 신명 나는 한 판을 벌여보자!

그때 학교에 찾아와 격려해준 사람이 소설 가인 전민식 선배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작가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두 드리다 보니 자기 목소리의 문이 열렸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힘을 주고자 애썼다.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서 내 머릿속

출판계의 대가들처럼 세상을 듣고 싶다.

은 쨍하고 맑아졌다. 빛을 보지 못하는 작

그리고 작은 목소리를 모아 세상에 동참하고 싶다.

가, 목소리가 작은 이에게 문을 열어줄 수

판굿을 앞둔 상쇠처럼 나는 정말이지, 안달이 나 있다.

있는 일. 그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해줄 수 있는 일. 그것이 바로 책을 만드는 일이라 는 것을 처음 안 것이다.

모험에서 모험을 하기까지

만 좋다고 우기며 강행한다’는 뜻이 되었다.

‘다님길’에서 만나요

꼬마였던 나는 모험에 미쳐 있었다. 웅진

가족에게, 친구에게, 나의 서울출판예비학

교육과정의 가장 큰 줄기는 책 만드는 과정

의 사원이었던 어머니는 항상 집에 혼자 있

교 입학은 모험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을 처음부터 끝까지 겪어보는 일이었다. 서

는 나에게 책만큼은 실컷 읽을 수 있길 바

로 다른 인생을 사반세기나 걸어온 6인이

라셨다. 반지하의 습기를 먹은 각종 문학과

나는 왜 모험을 하게 됐나?

모였다. ‘도서출판 다님길’. 길을 걷다 마주

동화 전집이 떠오른다. 나는 어머니의 바

시작은 3년 전이었다. 나는 임실군에서 필봉

치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자는 의미의 팀명

람과 달리 그 많은 책들 가운데 모험과 관

농악을 배우는 전수생이었다. 평소 고요하

에는 그런 서로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

련된 책만 골라 읽었다. 『톰 소여의 모험』이

던 동네였기에 재난이 될 만큼 시끄러운 대

뜨리는 힘이 있었다. 나는 처음 팀명을 소

나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 말이다. 서울

학생 무리 중 하나였다. 하루는 숙소에서 굴

개할 때 '도서출판'이 붙는 것이 몹시 쑥스

은 톰 소여가 노닐었던 미시시피 강과는 달

러다니던 소주병이 관장님 눈에 띄었다. 우

러웠던 기억이 난다.

리 모험을 하기에 적합하진 않았지만, 사근

리가 문화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율 따위 무

어쩌면 운명이었나? 우리는 소셜서비스에

동의 판자촌은 그럭저럭 분위기가 났던 것

시하는 철없는 아이들로 보였다 해도 할 말

관한 실용서를 편집하게 되었다. 소셜서비

으로 기억한다.

이 없었다. 그런데 관장님은, 슬퍼했다. 차라

스라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세대가 걷는

그 후미진 동네가 몽땅 인근 대학교의 사범

리 화를 냈다면 내 마음이 편했을까? 그는

‘다님’길이 아닌가! 여섯 명이 모인 것도, 맡

대학 부지로 바뀔 무렵부터였다. ‘모험’이란

꽹과리를 내려놓고 허공을 보며 안타까워했

을 원고를 정하는 것도 모두 제비뽑기로 이

단어가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아버지가 그렇게 고

루어졌으니 이 모든 일을 단순한 우연이라

두근거림은 온데간데없었다. ‘모험을 한다’

생을 했나.”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화를

고 정리하기엔 못내 아쉽다. 나는 소셜서비

는 말은 곧 ‘다들 위태롭다고 말리는데도 저

잇고 정부와 대면하는 사람이었다.

스를 이해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0 37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고 관계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편집자는 다 할 줄 알아야 해요?

귀를 열다

들어주는, 경청에만 국한할 일이 아니라

효율의 측면에서 보자면 내 경험은 비효율

처음 동기들과 만나 자기소개를 할 때, 나는

생각한다. 편집자에게 필요한 미다스의 손.

적이다. 학교신문 기자에서 소설가 지망생

수줍게 어떤 만화에 자주 나오는 대사를 인

그것은 만능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한계를

생활을 지나고, 어린이 책 초고를 쓰거나

용했다. “동료잖아요” 나름의 손 내미는 방

파악하고 관계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

애플리케이션 원고를 다듬던 시간을 돌이

식이었다. 손 내민 곳에 벽은 하나도 없었다.

아닐까? 바로 서울출판예비학교가 내게

켜보면 딱히 내세울 맥이 없다. 그저 닥치

교육과정을 시작할 무렵의 나는 사람 대하

준 교훈이다.

는 대로 잡히는 일을 해왔다. 매사 반복되

는 일에 서툴렀다. “웃기는 부탁이지만,” 나

는 ‘모험’의 연장에, 소셜서비스 관련 실용

는 꼭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내 말하는 방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서를 편집하는 실습이 있었다.

식이 이상하다면 얘기해 줘요” 걸음마를

모험으로 시작한 이 이야기는 나의 대학생

원고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페이스북에 가

다시 배우는 것처럼 사람 대하는 방법을

활과 농악전수관에서의 경험, 서울출판예비

입할 무렵만 해도 나는 설렜다. 그러나 편

그들에게 배웠다. 지금의 나는 동기들이 만

학교에서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국면에 이르

집자로서 원고에 개입할 수 있는 선을 가늠

든 셈이다. 같은 목표를 바라보는 사람과

렀다. 나는 그동안 일기를 썼다. 편집일지이

하거나, 회의할 때 미묘하게 틀어지는 서로

의 대화, 같은 책을 만들고자 하는 팀원과

기도 하고, 그저 한탄이기도 한 어지러운 기

의 의견을 조율하고, 편집의 연장이라는 이

의 회의. 나는 그들 덕분에 내게 경청하는

록의 모음이다. 6개월 과정의 이야기를 좁은

유로 생전 처음 사용해 보는 인디자인을 밤

자세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지면에 펼치려니 어렵기만 하다. 일기를 읽

새 붙들고 지내는 날이 많았다. 나는 조금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여러 선

는 데만 하루가 통째로 필요했다. 일기장을

씩 지쳐갔다.

생님이 수업에서 강조하는 자세였다. 그것

덮고야 알게 됐다. 지금껏 모험이라 생각했

편집자에 대한 '대가'들의 특강을 들을 때

이 잘 안 될 때마다 나는 관장님의 가르침

던 일들은 그저 연습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주 반복되는 말이 있었다. 편집자는 해

을 떠올린다.

한참 멀었다. 들을 텍스트는 세상이고 나

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거기에 그것도. 아

“상쇠(판굿을 이끄는 쇠잡이)는 혼자 신 나

는 여전히 예비 편집자다. 그간 뵀던 출판

무것도 모르는 내게 그들의 말은 “편집자

면 안 된다. 백 명이 굿을 쳐도 한 명이 지치

계의 대가들처럼 세상을 듣고 싶다. 그리

의 손은 미다스의 그것이어야 한다”라는

면 그에게 보폭을 맞춰 주고, 백 개의 악기

고 작은 목소리를 모아 세상에 동참하고 싶

것처럼 들렸다. 게다가 스물세 명의 동기들

가 울려도 한 개의 악기가 기가 죽으면 북

다. 판굿을 앞둔 상쇠처럼 나는 정말이지,

은 다들 만만찮은 책 마니아였다. 나역시

돋아줘야 한다. 누구보다도 치배(판굿을

안달이 나 있다.

책이라면 꽤 좋아한다고 자부했는데 명함

함께하는 구성원)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

자, 이제 내가 놀 차례다!

내밀기도 쑥스러운 시간이 많았다. 실은 잘

는 것이 상쇠다. 그 소리를 한데 모아 관중

못한 것도 없는 용의자처럼, 내가 범인(凡

을 사로잡는 일이 판굿이다.”

人)이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그 가르침이 단순히 관심을 가지고

Book Editor

편집자가 가져야 할 미다스의 손. 그것은 만능이라기보다는


이선엽 손쉽게 생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수단이 바로 성이었음을 알려주는 열쇠다. 외설로 간주된 그의 수많은 누드 작품의 설득력도 여기에서 나온다. 적어도 나는 이 책을 읽 기 전보다 작가를 더욱 이해하게 되었고 나 아가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을 배 웠다. ‘실용’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좁은 의미를 벗어난다면 실용은 책의 좋은 미덕이 될 수 있다. 특히 오직 책만이 가지고 있는 통찰 력과 조심스러운 조언은 모든 것이 빠르게 변모하는 현대 사회에서 책이, 출판계가 꿋 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섯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시 국문학과에서 공부하며 가장 좋아했던 것 은 시였다. 수능 참고서의 빨간색 동그라 미, 세모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작(詩 作) 방식과 독해법을 요구하는 시를 읽는

나를 알려 주는 여섯 개의 단어

것이 즐거웠다. 새로 읽게 된 시는 고루하

성실한 자세로 글을 대하고 사소한 작업을 믿는

지도 지나치게 아름답지도 않았다. 세계를

쓸모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이해하는 정직하고 예민한 방법을 조심스 럽게 내보일 뿐이었다. 쉬운 위로나 조언을 주저하는 사려 깊은 자세도 내가 좋아하는 시의 모습이다.

려 내가 잘 해낼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 편

하지만 언제나 시를 읽는 것이 즐거운 일만

2013년 봄, 갑자기 편집자를 해야겠다고 생

집자였다.

은 아니다. 단어의 사용이 전형적이지 않

각했다. 출판계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믿음

고 작품 안에서 의미가 널뛰는 경우가 많

직한 사람들이 나에게 추천해준 직업이었기

쓸모

아 알겠다 싶다가도 갑자기 길을 잃는 경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어떤 것을

나에게 책은 쓸모 그 자체다. 비단 교보문고

가 허다하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메우는

보았는지 궁금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편집

카테고리에서 실용서적으로 분류되는 책 이

고민을 통해 시인과 타인을 읽고 나를 읽기

자라는 직업을 추천해주자 이 직업에 알 듯

외에도 내 삶을 채운 많은 책은 어떤 방식으

도 해야 한다. 시는 짧지만 시 독해의 시간

모를 듯한 동지애마저 느꼈다.

로든 나의 삶에 ‘실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이 그리 짧지 않은 것은 시 읽기의 난해함

확실히 나는 책을 좋아했다. 조숙했던 내

고 믿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무용(無用)해

을 반증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고 나

가 제일 재밌어 하던 것, 도피처로 삼았던

보이는 시조차도 쓸모 있는 슬픔을 가지고

야만 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그 때 비로

것, 나를 알리는 기호로 삼았던 것, 모두 책

있는 좋은 시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소 과정 자체도 의미 있어진다.

이었다. 국문과에서 매 수업마다 다른 장

때문에 인생의 책을 묻는 질문이나 자신을

나는 이 같은 시 읽기의 과정이 편집자로

르의 텍스트를 읽고 일주일에 한 번 레포

활자 중독자로 일컫는 말에 주저하게 된다.

서 원고나 저자를 대할 때 하나의 지침으로

트를 쓰는 훈련을 통해 텍스트 이해 능력

최근에 읽은 사진작가 헬무트 뉴튼의 자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즐거

을 키웠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책

전에도 물론 쓸모가 있었다. 그의 자서전은

울 수만은 없는 저자와의 소통, 원고 읽기

에 대해, 싫어하는 책에 대해 말하는 것 모

온통 여자와의 일화로 가득하다. 하지만

를 고민과 이해로 대면할 수 있다면 이는

두 좋아했고, 언어에 까다롭고 꼼꼼한 기질

이는 단순한 가십이 아니라 2차 대전을 겪

분명 시 읽기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이리라.

도 있었다. 취업 새내기의 머리를 돌돌 굴

은 유대인인 그가 죽음의 위협 앞에서 가장


039

많은 회의는 실제로 물건을 생산해내는 행위

나는 어떤 날짜를 두고 공을 들여 일을 벌

에 익숙지 않았던 내가 책의 ‘물성’이라는 것

이는 것을 좋아해 기념일도 매번 챙기고 축

을 경험할 수 있던 정말 좋은 기회였다. 특히

제도 좋아한다. 아이슬란드로 훌쩍 날아간

판형과 쪽 수를 정하고 처음 받아들었던 샘

손가락으로 좋아해

것도 예술제 봉사활동을 위해서였고 국제

플북은 책이라는 물건을 인식하는 동시에 백

아니라고 말하는 어려움을

단편영화제, 2012 서울작가축제에서도 기

지를 채울 무형의 콘텐츠에 대해 고민하게

획단에서 일했다.

된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장으로 있었던 학회에서 영화제를 기획한

또한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만드는 것과 파

것은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 손길

는 것 사이의 균형 감각을 조금이나마 내재

이 묻어있어 더욱 기억에 남는 축제다. 상영

하게 되었다. 애초에 편집자를 직업으로 고

기를 대여하고 설치하는 기술적인 업무부터

려하며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지만 이는 거

학회원들의 감상문을 모은 책자를 만들기까

의 만드는 것에 편향된 고민이었다. 출판

지 밤을 새우며 회의를 거듭했다. 특히 책자

산업 역시 하나의 비즈니스인데 이윤이나

르는 합의된 기준은 없으나 다만 작품이 얼

를 만드는 일은 콘텐츠 조직, 표지 제작, 판형

이익에 관해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마만큼 성실한지 따지는 것은 하나의 관점

등 실제 편집자의 임무와 유사한 면이 있어

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마케팅 및 출판

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소설이 논란

미리 수강한 수업쯤 될 것 같다.

시장 수업과 제작 수업에서 작성해 본 편집

의 여지가 높은 소재를 불가피하게 선택하여

여러 축제에서 가진 즐거운 기억은 다른 무

배열표, 종이 계산은 파는 것에 대한 나름

극단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유의미한 지점

엇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의 고민을 할 수 있게 한 고마운 수업이다.

에 도달했다고 느꼈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

돌이켜 생각해보면 함께 행사를 준비하며

아마 서울출판예비학교를 다니지 않았더

이 그 성실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몇날 며칠을 고생하던 사람들과 단숨에 친

라도 나는 출판계를 떠돌아다니는 예비 편

나는 내가 편집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해지던 어떤 순간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뿐

집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에 대한

이런 성실함이 묻어 나오길 바란다. 어떤 책

만 아니라 행사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사람

애정이나 글에 대한 열정 이외의 구체적인

을 만들더라도 결론에 성급하게 도달하거나

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는 때가 즐거웠다.

고민을 소홀히 한 구직자가 될 공산이 높

사안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 책을 만들

편집자의 업무 역시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

다. 애정이 적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기 보다는, 조금 어렵고 지난할지라도 의도

을 연결시키는 일이라면 나는 직업을 마치

나는 서울출판예비학교를 통해 편집자라

한 바에 대한 끈질김이 보이는 텍스트를 손

내가 꾸리는 축제처럼 여길 수 있지 않을까?

는 직업을 가질 생활인으로서 조금 더 쓸모

보고 싶고, 그러한 기획을 하고 싶다. 또한 책

있는 인간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을 세상에 소개하면서도 이를 최대한 왜곡

구체적인 것들

모든 습작들을 좋아해 서툰 몸짓을 진은영, 「무질서한 이야기들」 중

하지 않고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서울출판예비학교는 책과 편집에 대해 보다

성실

성실한 자세로 편집자의 일을 하고 싶다. 내

구체적인 상(像)을 제시해 주었다. 책을 만

현대작가론 수업에서 장정일에 대한 발표를

가 하는 사소한 작업이 책을 낫게 발전시키

드는 워크숍 수업에서 거친 교정, 교열 과정

맡았다. 『거짓말』로 예술과 외설 논란이 일

고 이렇게 나온 책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

들, 디자이너와 함께 좋은 디자인을 도출해

었을 때 그의 변호사는 황현산 비평가의 말

을 바라보게 할 수 있기를, 그런 일을 할 수

내고 본문, 면지, 표지 종이를 정하기 위한 수

을 인용해 그를 변호했다. 예술과 외설을 가

있는 편집자가 되기를 바란다.

Book Editor

축제


이지예 종횡무진 독서법

재미를 찾아

많고 많은 ‘재미’ 중에 책을 고른 이유를 묻 자, 그는 자신의 독서법을 소개했다. 한꺼

책 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

번에 십여 종의 책을 보는데, 가끔 말 못할 희열을 느낀다고. “철학, 사회, 음악, 미술, 경제… 이렇게 제 나름대로 분야를 나눠 서, 분야마다 한 권씩 읽어요. 지금 역사책 은 그린비에서 나온 『종횡무진 서양사』를

갈 지(之)자를 그리며 시간을 쌓아나간 재미주의자, 몸이 부서져도 ‘재미’ 하나라면!

읽고 있는데, 그때 소설 『장미의 이름』도 읽 었거든요. 제가 그 전날 『종횡무진 서양사』 에서 봤던 중세의 역사가, 다음날 아침에 펼친 『장미의 이름』에 이야기로 나오는 거 에요. 그럴 때면 중세가 팩트와 픽션이 어

예비 편집자를 위한 계간지 『나도 곧 편집

이나 만화 같은 재미있는 분야를 지망할

우러져 입체적으로 다가오죠. 전혀 상관없

자!』에서 서울출판예비학교 9기 수료 특집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관심 있는 분

는 얘기에서 어떤 연결점을 찾아낼 때도

으로 기획 인터뷰를 마련했다. 첫 번째로

야는 의외로 인문, 예술, 역사. “‘뇌를 깨운

그래요. 예를 들면 드뷔시의 일생을 읽으

호기심 어린 눈을 가진 예비 편집자 이지예

다’는 말이 있어요. 인간 뇌의 대부분은 평

며 전자책과 종이책에 관한 생각을 떠올릴

를 만났다.

소에 잠들어 있대요. 그러다가 새로운 것

때! 그때 정말 뇌에서 전기가 흐르는 것 같

을 접하면 잠에서 깨요. 이미 알고 있는 정

은 느낌마저 든다니까요. 이런 걸 ‘콘텍스

뇌를 깨우는 재미, 그게 제 목표예요

보면 다시 잠들고. 깔깔거리며 웃는 것만

트’라고 해서 따로 정리해놨어요. 글을 쓰

“재밌을 것 같아서요” 왜 편집자가 되고 싶냐

이 재미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몰랐던 흥

거나 기획할 때 도움이 많이 돼요”

는 질문에 즉답이 돌아왔다. 인터뷰에서 그

미로운 얘기, ‘뇌를 깨우는’ 이야기를 접하

완성된 작품 감상보다, 그걸 발판으로 또

는 일관되게 재미를 강조했다. “전 재밌는 게

면 우리는 재미를 느끼죠. 제가 말하는 재

다른 재미를 스스로 만들 때가 가장 짜릿

정말 좋아요. 책이든, TV든, 음악이든. 그리

미는 그런 거예요. 다른 소재, 다른 방법을

하다는 그에게 책은 가장 좋은 콘텐츠다.

고 정말 기발하거나, 폐부를 찌를 만큼 공감

보여주는 것들이요. 그래서 저 분야에 관심

수동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다른 콘텐츠

이 가는 것들을 보면 질투가 나요. 저도 그런

이 가는 거고요. 이 ‘재미’는 제가 수용자일

에 비해 밑줄을 긋고, 메모하고, 독서의 속

것들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면서

때에도 어떤 기준이 되지만, 제작자일 때

도를 조절하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콘텐

요” 서울출판예비학교에서 6개월간의 과정

에도 가장 중요한 요소예요. 그래서 뭔가를

츠를 흡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을 마치고 이제 편집자로 한 걸음 나아가려

쓰고, 기획할 때도 꼭 자문해요. ‘이건 사람

이것저것 많이 집적대는 것 같다고 농담을

는 이지예의 출발점에 관한 이야기다.

들의 뇌를 깨울까?’하고요”

하자, 그는 팔자인가 보다며 같이 웃었다.

유독 ‘재미’를 강조하기에 기발한 장르문학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고등학

한 번도 듣지 못한 '뇌를 깨우는' 새로움. 그게 제가 생각하는 재미예요


강부터 시작해 ‘월식의 원리’ 같은 얘기도 해

인터뷰 말미.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이 무엇

요. 애들 몇 명 세워두고 달이랑 해 역할 시켜

이냐는 질문에 자신의 이름 세 글자라고 대

가면서 열심히 설명해줬죠. 이런 훈련이 제

답한다. “대학생 때, 잠깐 미대 수업도 들었

게 자신감을 심어줬어요”

거든요. 그때 뮤직비디오 실습 수업을 들었 어요. 머릿속에서 제가 혼자 상상했던 아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디어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나오는 과정

궁금하게 많아 엉덩이 붙일 새 없겠다고 하

에서 엄청난 쾌감을 느꼈어요. 물론 그 아이

자 그런 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디어가 온전히 뮤직비디오에 실현된 것은 아

작년에 인턴 기자로 일했던 웹진 『텐아시아』

니긴 했지만요. 완성된 뮤직비디오 상영회를

전혀 다른 부분에서

에서의 일을 들려줬다. “특히 인터뷰가 재밌

하는데, 마지막에 ‘연출 이지예’라는 제 이름

저만의 접점을 찾아낼 때

었어요.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게 하나의 세

을 보는 순간 전율이 느꼈어요”

독서의 쾌감이 가장 커요

계를 알아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

“당시 아르바이트와 미대 과제, 법대 수업

고요. 인터뷰 준비도 열심히 했어요. 그 사람

을 병행하느라 이틀에 한 번 겨우 쪽잠을

생 때는 미대 진학하려고 그림을 그렸고요.

이 했던 작품들 챙겨보는 것은 물론 거기에

자고,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걸어 다니면서

그런데 제 전공이 법학이거든요. 근데 지금

대한 평가, SNS,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풍문

끼니를 해결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몸이 부

은 또 그것들이랑 크게 관련 없어 보이는

등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찾아서 갔어요.

서지는 줄 알았어요”라고 하면서도 그 재

편집자를 준비하고 있죠. 어떻게 보면 이랬

필요하면 옛날 신문도 뒤졌고요”

미와 뿌듯함을 놓칠 수는 없을 거라는 그에

다, 저랬다 갈 지(之)자를 그리면서 갈팡질

특히 인상 깊었던 인터뷰로 배우 김하늘과의

게서 호기심을 동력으로 한 에너지가 느껴

팡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저

라운드 인터뷰를 꼽았다. 라운드 인터뷰는

진다. 서울출판예비학교에서 가장 인상 깊

는 이런 제 자취가 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인터뷰이가 기자 몇 명과 함께 하는 일대다

었던 순간 역시 원고를 받아 책을 만들어

좋아요”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얕

인터뷰다. “김하늘 씨는 오랫동안 연예인 활

내는 워크숍 과정을 꼽았다. 난생 처음 만

고 넓은 이력’ 덕에 호기심이 왕성한 것 같

동을 해서, 프로의 느낌이 많이 났어요. 그래

든 책의 판권에 자신의 이름을 본 순간, 앞

다고 한다. “아예 모르는 얘기를 하면 흘려

서인지 기자들 질문을 은연중에 평가하더라

으로 자신이 만들어 낼 미래의 책이 생각나

듣잖아요. 그런데 저는 조금씩 어디서 들

고요. 어떤 신입 기자는 주눅 들어서 질문 하

설렜다고. 인터뷰 내내 재미를 예찬하며

어본 것들인 거예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도 못하고. 제가 김하늘 씨 필모그라피 중

개구쟁이처럼 눈빛을 반짝이다가도 판권

기웃거리게 되죠”

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옛날 출연작이 있어

에 실린 작은 세 글자의 책임감을 역설하는

서 그걸 최근 작과 관련지어서 질문을 했어

이지예를 보며 필자 역시 호기심을 느꼈다.

모태 소통가

요. 그랬더니 ‘그걸 어떻게 아셨냐’라고 하고

가벼우면서 무거운, 재미있는 예비 편집자

호기심이 많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좋

나서 굉장히 진지하고 성실하게 대답해줬어

의 등장이다.

아할 것 같다고 말하자 “어우 그럼요”라며

요.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지고, 흐름이 저

반색했다. “제가 질문왕이에요. 친구들이나

한테 넘어와서 마지막 20분은 거의 저랑 단

가족들은 기본이고, 택시 탔을 때 기사님이

독 인터뷰처럼 됐죠. 저는 인턴이었는데, 오

나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어머님들, 소개팅

랜 경력 기자들 사이에서 인터뷰이 태도가

자리에서 처음 만난 남자도 붙잡고 물어봐

저한테만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 짜릿하죠”

요. 어제 뭐 봤냐고, 요즘 뭐가 가장 재밌냐

몇 번의 인터뷰를 경험하고 깨달은 것이 있

고, 왜 가장 재밌냐고” 그는 어떤 사람과도

다고 한다. “상대방에게서 ‘그걸 어떻게 알

소통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자신을 질문왕으

았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인터뷰는 성

로 만들었다고 한다. “외갓집에 할머니부터

공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 말

일곱살 동생까지, 전 연령이 있어요. 제 또래

은 사전에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자료 조사

가 없어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려면 제가

를 해서 질문지를 작성하고, 인터뷰 때에도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관심에 뛰어들어야 해

상대방에게 완전히 몰입해야 들을 수 있다

요. 대화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는 것을 알게 됐죠”

0 41

이지예. 그 세 글자를 볼 때 행복하다

Book Editor

‘훈련’을 계속 해온 셈이죠. 드라마, 정치, 건


이한경 그 낡음 속에서도 새 책이 어디 있는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엔 특히 문학과 역사책을 흥미롭게 읽 어서, 대학에 가면 국문과나 사학과에 가 리라고 생각했다. 수능을 치르고, 그렇게 되었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영문 과, 독문과, 사학과 수업까지 찾아 들어가 는 바람에 전공 학점이 모자랄 뻔했다. 성 적도 다양하게 받았다. 그래도 여러 수업 을 듣고 생각을 벼리며 지성과 감성을 세 밀하게 빚어 가는 추상적 활동들이 참 즐 거웠다. 특히 작품을 정말 사랑하고 그 앎 을 열정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선생님들을

책으로 만드는

뵐 때엔 가슴이 두근거리고 힘이 났다. 그 것은 내가 바라왔던 ‘물과 불의 어울림’을

물과 불의 어울림

실현하는 지적인 활동 같았다. 파블로 네 루다의 「시」를 읽으면 그 편린을 느낄 수 있 다. 더불어 학부 4년 동안 한국기독학생회 (IVF) 활동을 했다. 140개국에 있는 캠퍼

본질을 지키되 함께하는 것.

스 기독단체인데, 여기에서 만난 친구들과

그것이 내가 꿈꾸는 물과 불의 어울림이며,

2009년 겨울에 캄보디아를 여행했다. 그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이다.

때 며칠에 걸쳐 캄보디아의 대학생들과 같 이 식사하고 대화를 나눴는데, 한 번은 서 로 전공을 물었다. 캄보디아 내의 대학교 들이 개설한 전공에 따라 학생들 대부분

내 삶의 첫 번째 기억

꽃의 너울댐은 참 비슷하게 느껴졌다. 동

회계와 경제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매끈하고 울퉁불퉁한 느낌. 내 손으로부터

시에 왜 물과 불은 섞일 수 없을까를 생각

가 문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캄보디아

시작된 첫 기억이다. 내가 다섯 살이고 예

했다. 물과 불의 모습 그대로 서로 어우러

학생들은 놀라워했다. 그런 건 왜 배우느

수님은 천구백 살이 되던 성탄절이었다. 붉

진다면 참 아름다울 텐데. 꽤 오랫동안 나

냐고. 단 한 번도 그런 의문을 품어보지 못

은 한복을 차려 입고 마주한 상에는 작은

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물놀이와 불놀이를

했던 나는 덜 익은 감처럼 떨떠름했다. 문

산타클로스 인형이 있었다. 환상적으로 멋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 그해 가을, 생각 많

학은 우리의 뿌리이고 삶을 풍성하게 해주

져서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그때 누

고 심심했던 나는, 글자를 익히고 책 속에

며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게 해주는 것이

군가 그 인형의 모자에 손을 가져갔는데,

서 물과 불처럼 놀기를 시작했다. ‘한’글날

라고 말했지만 캄보디아 학생들은 한참을

그 순간 작은 불꽃 하나가 너울댔다. 그것

에 낳아서 ‘한경’이라 이름 붙여주신 부모

갸웃거렸다. 캄보디아에는 수백 년을 내려

은 산타클로스 모양으로 빚은 양초였던 것

님은, 큼직한 칸막이 선반에서 유리창들을

오는 앙코르와트가 있고 오랜 역사가 있지

이다. 그때, 하염없이 위로 솟구치는 불꽃

다 떼어내고 내용물을 모두 비운 뒤 삼백

만, 읽고 나눌 책이 없었다. 책이 없는 공간

이 참 부드럽고 자유로워 보여서 한참을 바

권쯤 되는 책을 구해 그득하게 쌓아주셨다.

을 상상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졌고, 친구가

라보았다. 불꽃의 기억을 간직한 채, 그다

된 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때

음 봄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몸에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생각했다. 언제고 이곳의 멋진 이야기들을

힘을 빼면 물에 뜬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

학교에 다녀서 가장 좋았던 것은 도서관이

꼭 발굴하리라고. 그리고 좋은 책들을 전해

했다. 빠르게 헤엄을 치는 것보다 물에 의

었다. 입학하면 가장 먼저 살필 곳도 도서

주겠노라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어우를

존해서 둥둥 뜨거나 깊이 가라앉아 보는 자

관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봐온 학교 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야기와

유로움이 더 좋았다. 물살의 일렁임과 불

서관은 대개 휑하고 낡은 곳이긴 했지만,

지식을 얻고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괴


가 만들어 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한

한 조원들과 더 친밀해질 수 있었다. 조장

참이나 부족한 공부를 메우기 위해 대학원

이었기 때문에 앞서 나가야 하고 또 서로의

에 갔다. 그렇게, 상상 이상으로 공부해야

이견을 조율해야 할 때마다, 늘 지지해주고

할 것이 많았던 직업학생의 길을 걷기 시작

나서서 일을 맡아주었던 조원들에게 특별

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고,

한 고마움도 자연스럽게 쌓였다. 디자이너

현대소설을 전공했다. 특히 이청준 선생님

들과 친해지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말

의 작품들에 관심이 많아서 ‘이청준론’으

과 글을 이미지로 담아내는 과정에서 서로

로 논문을 쓰고 있다.

소통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유익했다. 홀

043

씩 거치는 동안, 함께 배우고 익히며 협동

Book Editor

로울 만큼 공부하고 내 손을 도구 삼아 뭔

로 책을 읽거나 더불어 공부하는 것과는 달 이야기와 지식을 얻고 즐기기만 할 것이

책을 만든다는 것,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리, 일을 함께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대학원을 수료하고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서로를 더 신뢰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것임

선배의 도움으로 서울출판예비학교를 알

을 배웠고,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었

게 되었다. 공부하는 동안 책을 못 구해 쩔

다. 그리고 정해진 워크숍 외에 몇 개의 동

쩔매고, 산더미 같은 책을 하나하나 펼쳐

아리에서 활동했다.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막으로 『달과 6펜스』를 남겨두고 있다. 이

보며 텍스트의 물질성을 실감했던 터라 관

실감하고서 네 명의 동기들과 함께 『나니

과정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다시 모여 좋은

심이 많이 갔다. 수업이라도 하나 듣고 싶

아 연대기』의 영어원서인 『The Chronicles

책들을 함께 읽기로 했다.

었는데, 신규인력양성과정이 있다는 것을

of Narnia』를 점심시간마다 읽었다. 또 ‘세

내 스물여덟 해를 거치며, 그리고 서울출

알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입학이 허락되

계문학서평동아리’를 제안해 아홉 명이 함

판예비학교 편집자반 9기로 공부하는 동

어서 지난여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께했다. 격주로 한 번씩 모여서 아홉 명이

안, 늘 그렇듯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지만

단순히 일방향으로 배우는 것이 아닌, 조

추천한 아홉 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우리는 함께 어울릴 수 있음을 배운다. 스

별 워크숍 활동이 많았다. 우리 ‘빛솔’ 조는

토론을 했다. 모든 작품들이 보석같이 빛나

스로 자유롭되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말

『The Art of Making Money』라는 외서를 맡

는 고전이어서 좋았고, 성실하게 읽고 토론

에 귀 기울이며 더 좋은 어떤 것을 빚어 나

아 『보통 인쇄소: 어느 지폐 위조범과의 인

할 수 있는 동지들이 있어서 더 좋았다. 또

갈 수 있다. 앞으로 편집자로 살아갈 날 동

터뷰』라는 책을 만들었다. 이 흥미진진한

이 모임을 위해 쓴 서평을 개인 블로그에

안에도 나는 내 생각만이 아니라 책에서,

소설의 내용만큼 만드는 과정도 재미있었

올려서 얼굴은 모르지만 글을 나눌 수 있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앞서 걸었던 선배님

다. 외서를 다루는 과정에서 영어공부를 더

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도 즐거운 일

들과 또 저자와 독자들로부터, 누군가로부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고, 작은 차이

이었다. 『이방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터 많이 배우고 반성하며 더 넉넉한 사람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세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왕자와 거

이 되고 싶다. 본질을 지키되 함께하는 것.

히 살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만드

지』, 『수레바퀴 아래서』, 『말테의 수기』, 『주

그것이 내가 꿈꾸는 물과 불의 어울림이며,

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실감하며 한 단계

홍 글자』, 『삶의 한가운데』를 읽었고 마지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이다.

아니라, 괴로울 만큼 공부하고 내 손을 도구 삼아 뭔가 만들어 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나, 이 작디 작은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지. 파블로 네루다, 「시」 중


이현아 사람과 만나고 문화와 만나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는 작은 것에 만족하는

문화인류학 수업을 통해서 클로드 레비스 트로스의『야생의 사고』를 비롯해 미셸 푸 코의『광기의 역사』등 많은 책을 읽었다. 이 런 두꺼운 명저들은 천천히 뜯어보며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뭔가를 이루어내야 한 다는 압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때에 책

책에 온 마음을 담아

을 읽으며 다른 시각을 접할 수 있었다.

열심을 넘어 따스한 열정으로

긴 시간 동안 원시 부족들 사이에 들어가 함 께 먹고 자고 어울리며 그 부족의 문화를 이

너른 꽃밭을 꾸미고 싶다.

해하려고 노력하는 레비스트로스의 모습을 책에서 보았다. 원시 부족의 문화를 제대로 보지 않고 그저 미개하다고 여기는 것은 성

책과 만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급한 판단이다. 사회와 문화를 얼마든지 다

내게 재미있는 세상을 알려준 존재는 오빠

대학생활을 스펙만 쌓으며 보내고 싶지 않

르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성과

였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나란히 누우면

았다. 한번 스펙을 쌓기 시작하면 평생 스

에 관한 압박에서 놓일 수 있었다. 한편 현대

오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

펙을 쌓으며 살게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문명사회를 피로사회라고 지적한 한병철의

화 못지않게 흥미로웠다. 잠자코 앉아 귀

자유로운 시간을 스펙에 양보하기 아까웠

지적은 이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를 기울이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어버리

다. 경쟁하기보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

답사는 교실 바깥에서 다르게 공부할 수

곤 했다. 오빠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면서 행복을 느끼길 바랐다. 인간의 생각과

있는 기회였다. 학과에서 매년 봄가을에

하루는 오빠가 나에게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행위를 연구하는 문화인류학과로 갔다. 인

답사를 떠났다. 그때 처음 보는 어르신과

해서 당황했다. 주저하는 나에게 마음에서

류학(Anthropology)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야기 하는 것, 밥을 지어 먹는 것, 누군가

떠오르는 대로 해 보라고 용기를 주었다.

존재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하늘을 거울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과 같은 일상생

줄거리가 전부 기억나지 않지만 오빠는 고

삼아서 세상을 돌아보는 존재가 인류라고

활이 쉬운 것이 아님을 배웠다. 사람이 홀

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이

배웠다.

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깨달았다.

후로 오빠가 책을 읽을 때 옆에서 따라 읽

그 하늘 아래에서 인류가 문화의 우열 없이

나보다 두세 곱절이나 인생을 더 사신 분들

게 되었다. 나는 책을 활자가 아닌 오빠의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을 대할 때 말문이 막히거나 중요한 질문

이야기로 처음 만났다. 우리는 더욱 다양

있다는 문화상대주의의 가르침은 내 생각

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선배들은 뒤에

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재미

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타자를 배려하고 소

서 그런 나를 탓하기는커녕 세심하게 가르

난 이야기의 원천은 책이었다.

통할 수 있는 전제로서 문화상대주의는 내

쳐주었다. 푸근함을 느꼈다. 잘 놀고 잘 배

생각의 토대이다.

우고, 다른 사람에게 힘든 것을 내색하지

우리 눈은 앞에 놓인 사물의 표적이다. 모든 사물은 우리의 눈을 겨냥하고 있다. 우리의 눈이 사물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눈길로 만들어진 너른 책들의 꽃밭!


게 사랑 받는 책이 반드시 좋은 책이 아님

생각이 마치 흙탕물의 흙이 가라앉듯이 가

은 이미 알고 있었다.

라앉아 마음이 차분해진다. 산에 오르면 무

그때 가볍게 들춰본 책에서 자유란 무엇보

언가에 집착해 긴장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어서 좋다.

이라는 구절을 읽었다. 정해진 길이 하나라

우리의 눈을 보아라! 이렇게 작아도 하늘을 담는다.

면 자유가 아니라 필연이 될 것이다. 수업

어떤 편집자가 되어야 할까

때 만났던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생각이

파주출판유통단지에 갔을 때 서점에서 반

교차했다.

송되어 오갈 데 없이 잔뜩 쌓여 있는 책을

가능성과 다양성. 그리고 나를 돌아봤다. 책

보았다. 후미진 곳에 있는 책을 보니 애처

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책

로워 어쩔 줄을 몰랐다. 독자들에게 사랑

에서도 배우고 사람에게서도 배우고 싶다.

받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깊은

책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

의미가 있고 감동을 주는 그런 책 말이다.

다. 고적했던 서점이 내게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책이라고 하

않는 것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기 전에 책 속에 온전히 내 마음을 담아야

지방의 아주 작은 마을에도 문화재가 많이

책과 삶이 만나는 지점

겠다. 책은 인쇄되어 수백, 수천 권으로 복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지도를 볼 때마다 흥

책에서 배운 것이 사람들과 만나고 답사를

제되지만 단 한권의 책이 있을 뿐이다. 편

분했다. 내가 가보지 못한 어느 곳에 아름다

다니면서 실제와 얼마나 다른지 알고 있

집자는 그 한권의 책을 만드는 장인이 아

운 우리 문화가 있을까. 작은 시골 마을에 사

다. 아무리 답사와 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닐까? 한낱 도제가 오랫동안 배우고 연마

는 사람의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

해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

하여 장인이 되듯이 차근차근 편집을 배우

었다. 사람이 문화고 문화가 사람이었다.

면 다양한 문화와 다채로운 삶을 이해하지

고 싶다. 가끔 십 년, 이십 년간 편집자로 일

친구들과 곳곳으로 답사를 다녔다. 학교에

못할 것이다.

하신 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우러러보게 된

서 익힌 답사 방법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와 달리 책과 강의에서 배운 좋은 가치도

다. 나도 그 분처럼 잔뼈 굵은 편집자가 될

담양에서 민요를 배우던 일, 계룡산의 갑

머릿속으로만 이해하는데 그치면 실제 삶

수 있을까? 그렇게 꿋꿋하게 오랫동안 일

사와 동학사, 서산 마애삼존불은 특히 기억

속에서 적용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머

을 해 나갈 수 있을까? 우선 무엇보다도 욕

에 남는다. 노래와 미소가 불안한 현대를

릿속으로는 상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심 부리지 않고 조바심내지 말고 한 걸음씩

살아가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었기에 그

서도 실제로는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렇다고 생각한다.

많이 있다.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책에 온 마음을

한 가지 분명하게 배운 것은 말과 행동이

담아 열심을 다하고 그 열심을 넘어 따스

책방에서 길을 찾다

일치하는 삶을 산다는 게 매우 어렵다는

한 열정으로 너른 꽃밭을 꾸미고 싶다.

대학을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워지면서 진로

것과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가치가 있

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대

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을 가지

학원에 진학해서 대학전공인 문화인류학

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만날 수 있으

이나 흥미롭게 수업을 들었던 역사 공부를

면 좋겠다.

더 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뜻 결정을 내리 기 힘들었다.

산을 오르는 이유

그 무렵 집에서 가까운 서점을 자주 찾았

나는 산에 자주 오른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

다. 작은 하천을 따라 오래된 나무가 줄지

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산에 오르는

어 서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그곳에 대동

것이다. 산에서는 크게만 보였던 건물들이

서적이 있었다. ‘과연 내게 학문적인 문제

점처럼 보이고 전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의식이 있는 것일까’서점 한쪽에 쌓여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서 관찰

잘 팔리지 않는 전공서적을 보면서 든 생각

해야 하기도 하지만 때로 먼발치에 서서 바

이었다. 한편으로 잘 팔리는 책과 팔리지

라보는 것 역시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045

구불구불 난 산길을 따라 걸으면 복잡했던

Book Editor

않는 책의 운명도 궁금했다. 많은 사람에


이현정

두 번째 도움닫기

‘출판편집자’라는 마루에 올라서기 위한 도움닫기. 뜨거운 숨을 고르며 나는 다짐한다. “이번엔 제대로 착지한다!”

나는 왜 넘어졌을까 유년의 10년을 기계체조 선수로 살았다. 운 동선수에게 호흡은 매우 중요하다. 들숨과 날숨에 맞춰 적절한 몸짓을 해야 부상을 줄일 수 있다. 나는 적절한 때를 찾지 못했

준비자세

출판편집자가 되어 열정과 책임감, 노력과 애정을 담아

고 잘못된 호흡은 진로를 바꿔야 할 만큼

따뜻하고 편안한 책을

큰 돌부리가 되었다. 결국 변함없이 할 줄

만들고 싶다.

알았던 기계체조를 그만둬야 했다. 나는 항상 멀리 보지 못하고 질주했다. 하 지만 그만큼 즐기지 못했다. 작은 목표들을

2005년부터 2012년까지, 7년의 시간은 내 가 ‘진취적인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성장기간이었다.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신 부모님 덕분에 또래보다 입시의 압박 과 스트레스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중학교 졸업반 때 선생님의 권유로 교지편

나는 단단하게

집부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고등학생 때

성장할 것이다.

도 학교 신문에 기고를 하고, 문집을 만들

이룰 때 만족보다 아쉬움이 컸고, 의욕이

었다. 토론과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자

앞서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다. 쉴 수 있는

연스럽게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나에

곳이 보이지 않아 피로했다. 언제 방전되어

나 자신을 찾아 꼬챙이로 찌르고 삽질하고

게 대학교는 또 하나의 작은 사회였고, 공

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

붓질했다. 소논문을 쓰며 우리나라 시대별

동체 안에서 적극적으로 소통을 하고 싶었

한 것은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다는

문학을 공부했고, 글을 퇴고했고, 책을 읽

다. 학생회 임원으로 2년 동안 문인초청강

통보를 받은 후였다. 나는 엎어진 몸과 마

었다. 그리고 졸업할 때쯤, 개인과 공동체

연과 문학답사 같은 행사를 기획, 총괄하

음을 일으키기 위해 독서했다. 책은 좌절을

를 이해하고 더불어 우리가 사는 사회와 소

고 안내 책자를 만들었다. 또, 대학 내내 토

위로했고, 나는 글 자체에 흥미를 가지게

통하는 데 필요한 수단은 바로 ‘책’이라는

론동아리를 하면서 문학, 영화, 사회문화에

되었다. 어느 순간, 운동할 때는 단 한 번도

결론을 내렸다.

대한 관심을 넓혔다. 연말에는 학우들의

고르지 않았던 숨을 책을 펼칠 때 고르고

책은 새로운 시작점이 되었다. 나에게 책은

글을 모아 책의 형태로 만들어 전시하기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타인과 소통하는 연결고리다. 세상을 굴절

했다. 유연한 태도를 가진 내가 이런 활동

없이 보여주는 창문이다. 더불어 나 자신

들을 통해 책임감과 아량을 키우면서 조금

답은 소통이다

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이제 책이

더 단단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내가 공부한 현대문학은 거대담론이 아닌,

나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다시 책을 통해 세

개인의 갈등과 사회문제를 응집한 결과물

상에 물어보려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달리는 동안

이었다. 작품을 분석하고 글로 풀어내며 그

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3년 전, ㈜도서출판 세계사의 서포터즈 활

것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출판편집자로서 독자와 책 사이에 연결고

동은 나의 첫 대외활동이었다. 서포터즈

되었다. 책이 나에게, 다시 내가 나에게 끊

리가 되고, 독자가 자신과 세상을 들여다볼

라는 이름을 달고 책을 읽은 후 SNS에 글

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너는 어떤

수 있도록 책이라는 창구를 열 것이라고 다

을 게시하고 홍보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사람인가?’라는 답을 찾기 위해 책 속에서

짐하며 나는 준비했다.

내가 올린 글을 읽고 책에 대해 관심을 가


0 47 Book Editor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고은 『순간의 꽃』에서

지게 되었다는 메일을 받기도 했다. 그때

집자의 상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었다. 나

나는 서울출판예비학교에서 방전될까 두

SNS 효과를 체감하고 나의 목표에 대한

는 신념을 가지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

려워하며 소모했던 힘을 ‘열정’이라는 긍정

확신도 들었다. 1기와 2기를 연이어 활동하

들 속에 천천히 동화되었다. 나에게 ‘책’은

적인 에너지로 바꿔 쓰는 법을 배웠다. 발

는 동안 출판사는 내가 공모한 이름을 서

더 이상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다. 콘텐츠

산할 힘과 아껴야 할 힘을 적절히 나눠 쓰

포터즈 공식 이름으로 채택했고, 나는 조금

에 알맞은 제목과 판형을 가진 ‘사실로서의

며 지나가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만끽하

더 성실해졌다.

책’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독자의 마음을

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작은 깃발들을 천

몇 달 전부터 나는 디지털 단식 중이다. 자

움직이는 책을 만들지 자문한다.

천히 지나고 있는 나의 위치가, 즐겁다.

료 과잉과 SNS 중독, 그리고 디지털 단식

주된 조별활동과 교육과정 이외의 동아리

출판편집자가 된 후의 가까운 목표는 책을

이 필요한 이유를 논한 기사를 읽고 실행

활동은 학교생활의 활력이었다. 『나니아

통해 사회참여를 하는 것이다. 애독가는 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접속

연대기』 원서를 읽는 모임인 ‘나니아’, 세계

론 사회저소득층과 장애인이 함께할 수 있

하는 SNS를 조금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했

문학서평 동아리, 온라인서평 동아리 활동

는 작가초청강연, 도서바자회, 전시회 등 사

다. 필요한 정보만 찾으려 했고, 단 몇 분이

으로 외국어 공부를 하고, 생각의 폭을 넓

회문화행사에서 출판인으로서 사람들에

라도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지 않으려고

혔다. 서울출판예비학교는 나의 다섯 번째

게 행복과 감동, 위로와 추억을 선물하고

노력했다. 지금은 주말에 정해놓은 시간 동

학교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함

싶다. 나의 열정이 꿈을 함께하는 사람들

안, 휴대폰을 꺼놓는 방법으로 간헐적 단

께하는 것이 든든하고 즐거울수록 스스로

과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

식을 하고 있다. 그 결과, 나를 위해 사색할

당당해지려고 한다. 예비출판인이 되려 했

이지 않는 곳에서 독자들 앞에 가장 가까

수 있는 시간과 독서시간이 늘어나는 효과

던 것처럼 출판편집자가 되기 위한 절실함

이 서고 싶은 나는 ‘소통하는 출판 편집자’

를 보았다. 지금은 자료를 주체적으로 사용

을 놓지 않을 것이다.

로 호흡할 것이다.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왔다. 몇 년 전 SNS를 통해 세상에 접근했다면 지금은 책을 만들

다시, 호흡

사람으로서 디지털 접근방식을 달리해야

현재의 나는 걸려 넘어진 돌부리에 다시 넘

하는 이유에 답을 내는 중이다.

어지지 않도록 호흡을 가다듬는다. 앞으로 내가 만들 책들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말

도움닫기

이다. 대학에서는 텍스트에 담긴 의미를

5개월 전, 나는 서울출판예비학교 9기 편

분석해 보았다면 지금은 원고 건너에 있는

집자반의 일원이 되었다. 출판학교를 준비

저자가 쓴 글의 의도를 읽는 것은 물론, 텍

할 동안 왜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은지 고

스트를 더욱 ‘국어답게’ 고치는 연습을 한

민했다. 읽어온 책들이 담긴 시간을 되돌아

다. 원고의 첫 번째 독자로서 예민하게 텍

보며 ‘소통하는 출판편집자’를 그렸다. 출

스트를 보고 저자의 판단을 도와주는 것이

판학교에 들어와 실무교육은 물론 출판인

곧 독자와 소통하기 위한 편집자의 덕목이

의 소양을 기르면서 그동안 스케치했던 편

라는 것을 깨우치고 있다.


정다움 을 충분히 누릴 줄 아는 지혜를 배웠다. 그 리고 이를 토대로 내 삶이 행복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흔들려도 중심을 잡는 사람 ‘도덕책’은 고등학교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 이다. 나의 행동이 소신 있다며 친구들이 우스개로 던진 말이었다. 도덕책에나 나올 법한 것을 실제로 지키는 사람은 처음 봤 다는 의미에서 놀림이 되긴 했지만, 이 별 명이 여전히 나의 근성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된다. 인격은 배움에 있지 않 고 배워 행함에 있기 때문이다.

삶과 사람 사이에

출판예비학교 수업에서 편집자의 길에도 많은 풍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중심이 뿌리 내린 사람은 바람에 흔들릴지

뿌리 깊은 나무

라도 결코 뽑혀 나가지 않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

구름 한 조각 없는 땡볕에서 망고나무를 발견했다. 그 탐스러운 열매를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이란! 이와 닮아 반가운 책을 만들고 싶다.

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느 수업 중,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 는 꽃」이 스크린에 띄워졌다. 잊고 지냈던 시구는 스물여섯 살 예비 편집자에게 큰 위 로가 됐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는 20대에 게 세상 풍파를 자양분으로 삼으라고 용기

긍정의 힘. 생산적인 비판을 위하여

돌이켜보면 끊임없는 자기 비판이 개인과

를 불어넣어 준 한 편의 시. 흔들릴 때에도

학부 때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말과 글>

사회를 성장시킬 것이라는 발상은 너무 이

중심을 잡아줄 신념을 세우며 모든 도전과

토론 수업. 뜨거운 쟁점에 대해 찬반을 나

상적이었지 않나 싶다.

실패, 만남과 인연들이 선한 합으로 완성

누고 논리에 맞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차분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어떤 실천을 할

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토론을 주도하는 나에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봉사활동을 시작했

게 친구들은 생기와 열의가 놀랍다고 말했

다. 2010년 탄자니아에서 한 봉사활동은

편집자가 되려는 이유

다. 평소 ‘말의 신중함’을 고수해왔던 터라

삶의 근간과 자의식을 흔들리버린 사건이

첫째로, 지난날 나는 행위의 의미를 묻고

토론에서의 비판적 모습은 친구들에게 신

었다. 40도가 웃도는 땡볕에서 외국인의

답하는 시간을 책과 함께해 왔다. 장하준

선한 충격이었다.

생수 병을 보며 물을 구걸하는 아이들, 주

박사의 책을 읽으며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2학년 때에는 역사학에서 정치외교학으로

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한다는 흙탕물 웅덩

보고자 했고, 루쉰의 소설로 공산당 혁명을

전공을 바꾸었고,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더

이. 이것은 그들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이해하려 했다. 책은 곧 어디든 갈 수 있게

욱 넓어졌다. 특히 근대 이후의 사회 이데

들은 우리보다 더 밝고 쾌활했다. 탄자니

도와주는 내비게이션이었다. 그리고 그것

올로기와 경제 체제가 어떻게 사회를 움직

아에서는 비가 내리면 아무도 뛰지 않고 그

이 지금 출판예비학교로 이끌어 주었다.

이는지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서, 오늘날의

대로 맞는다. 빨래도 걷지 않고 우산은 당

지난해,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의 독서 지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코 완벽한 시스

연히 필요 없다. 이 틈에서 나는 주어진 것

를 했다. 책과 관련된 경험을 하고 싶어 시

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에서 활력을 얻고 감사했다. 이듬해엔 필리

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서 우

는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적 사

핀 봉사활동도 다녀오면서, 세상을 삐딱하

리 세대와는 자못 다른 모습을 보았다. 재

고가 지혜로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게만 바라보기 보다 삶의 긍정적인 요소들

미있고 자유로운 책 읽기는 없었다. 아이들


하겠지’ 하는 기대와 좌절뿐이었다. 게다가

밥줄이자 책의 방향을 잡는 여러 갈래의 길

내가 먼저 읽고 추천하는 책들을 재미없다

이 될 것임에 마음이 든든하다.

049

도 안 되는 공부’를 해왔던 것이, 앞으로 나의

Book Editor

에겐 오직 ‘국어를 잘해야 다른 과목도 잘

며 거절하기까지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같 은 연령이라 해도 필요한 책이 다르기 때문

차이를 경청하는 즐거움

에, 다양한 책으로 독자와 만나는 일이 출

출판예비학교에서 가장 재미있게 했던 것

판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 하나가 세계문학 서평 동아리이다. 졸업

둘째로, 편집자는 골방이 아니라 세상에서

후에는 두어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기로

지적 목마름을 해결하면서 먹고살 수 있는

결의도 했다. 나의 경우, 무엇이 책을 고전

업인 것 같다. 공부는 고속도로를 뚫는 일과

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알베

같다는 말을 들었다. 길을 다져놓아야 부산

르 카뮈와 헤르만 헤세, 밀란 쿤데라 등의

책은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이든 광주든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저서를 함께 읽었다. 그런데 같은 책을 읽

읽는 사람의 것임을 또 한번 느낀 밤

다. 그런 줄만 알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사회

고도 저마다 생각이 다양해서 나눔이 매번

김려령 작가의 『너를 봤어』와 함께.

에 나가려고 하니 여전히 목적지에 닿는 방

풍성했다. 게다가 다르긴 해도 틀린 생각은

법을 모르고 있었다. 막연한 호기심에서 멈

없었다. 함께 읽은 책 중에 마음에 쏙 드는

잘 살기보다 바르게 살기

추지 않기 위해 현실적인 경험을 찾았고, 여

구절이 있다.

웰다잉(well-dying)이 요즘 트렌드다. 사

러 출판사에 문을 두드린 끝에 대학수능 문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메시

제집을 편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함께 일

것이에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지는 우리의 인식을 강타했다. 그런데 이런

하는 사람이 많아 전화와 이메일에 수없이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든지, 읽고 받아들이

안녕에 대한 고민이 ‘옳음’으로 확장되지

응대해야 했지만 소통이 잘될뿐더러 재미있

는 것은 독자의 몫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

못하는 것은 아쉽다. 건강한 인식 공동체

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지인에게 출판예비학

서 서평 모임은 내 좁은 사고의 틀을 발견

를 위해 책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

교를 추천 받았고, 여러 선생님과 친구들 덕

하고, 다른 예비 편집자의 생각을 엿보며

것은 가족을 그리워하던 옆집 조선족 아저

분에 우물 밖 세상을 보았다.

시야를 넓히기도 하는 기회였다. 자신이 옳

씨의 이야기가 될 수도, 저소득 가정 공부방

출판예비학교의 수업에서 가장 강조한 것도

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책을 만드는 것은

에서 만난 중학생 친구의 이야기가 될 수도

공부의 필요성이었다. 이는 단순히 점수로

편협하다. 분명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는

있다. 어쩌면 고향에서 시민 운동을 하는

환산되는 공부가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편집자

대학 동기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나

안목을 넓히고 실무 흐름을 파악하는 공부

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열린 귀와 마음이

는 이렇게 평범한 존재와 삶이 오히려 사회

며, 책을 두루 읽어야 함은 기본이다. 그리고

아닐까. 길지 않은 시간, 서로의 생각에 귀

의 큰 버팀목임을 알고 격려하는 책을 만

이것이 얄팍한 지식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기울이며 공감했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

들고 싶다.

끊임없이 배우기를 갈망하는 삶의 태도로써

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를 응원

나타나길 소망한다. 엄마의 표현을 빌려 ‘돈

해줄 동반자를 얻은 것 같아 힘이 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산을 넘고 나니 좀 더 넓은 안목과 공감이 생겼다. 아프리카는 나에게 그런 선물을 준 곳.


정성혜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온기를 나눠 주는 ‘봄과 같은 책’을 만들고 싶어요.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여행에서 기념으로 손수건을 하나 샀다. 새겨진 글귀 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당신이 따뜻해서 봄 이 왔습니다. ’ 25년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건대 내 삶에서

아가 인터뷰도 했다. 언론에서 비치는 모습

도전이 없는 것에는 그렇게 알맹이가 들지 않는 법이다.

과는 사뭇 다른 현실을 대하니 마음이 아 렸다. 이런 큰일을 겪기엔 너무 순수한 사 람들이라 생각했다. TV에서 험악한 테러 범으로 묘사된 사람들은, 실은 여느 옆집의

봄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비록 혹한이 채

폭풍 같은 방해도 있고,

물러가지 않은 늦겨울 같은 봄이 있거나 갑

가뭄 같은 갈등도 있어야

후에 친구들과 나는 인터뷰 내용이나 느

작스레 찾아온 꽃샘추위는 있었을지언정, 시

껍데기 속의 영혼이 깨어나

낀 점을 회보로 묶어 발행했다. 몇몇 동아

리도록 추운 겨울은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여무는 것이다.

리 친구들에게만 전해지는 작은 회보였지

도 늘 나에게 온기를 나눠 주는 봄과 같은 책,

정채봉, 『멀리 가는 향기』 중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만, 멀리 있는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전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바

한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이나 뜻 깊은 일이

로 지금,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봄과

었다. ‘책’으로 시작한 모임이 ‘사람’들과의 이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가 “오케이!”라고

만남을 거쳐 새로운 ‘책’으로 만들어진다는

대답해야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

게 아름답게 여겨졌다. 대학생 시절의 경

“너 다 읽었니?”

다. 낡고 누르스름해도 언니들의 예쁜 마

험들은 나에게 책과 사람은 하나로 이어질

어려서부터 언니 3명과 늘 복작대며 지냈

음과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던 책. 나에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다. 우리는 비록 유복하게 살진 못해도, 허

게 책이란 마음이 담긴 그릇이다.

같은 편집자가 되려고 한다.

락된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았다. 막

“출판사는 어때?”

내인 나는 언니들이 쓰던 물건을 줄곧 물려

책-사람-책

전공은 경영학이었다. 대학생활 대부분은

받곤 했다. 옷, 학용품, 타던 자전거뿐만 아

대학 시절에는 IVF라는 대학선교단체에서

두꺼운 책과 계산기를 들고 씨름하는 게 일

니라 갖가지 책도 마찬가지였다.

활동했다. 약 60명 정도가 모이는 공동체

이었다. 회계나 재무 과목은 마치 하나의

나는 이상하게도 언니들이 쓰던 것들이 싫

에서 3년간 리더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경

퍼즐게임 같았다. 큰 그림을 이해해야만

지 않았다. 책이 유독 그랬다. 언니들은 동

험을 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만날 수 있

세부적인 영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식을

생에게 물려줄 책이라는 것을 알고는 늘 조

어서 좋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

통째로 자기화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배울

심조심 책을 다뤘다. 문제집을 풀 때는 진

들과 자발적으로 책 모임을 하고 책의 내용

수 있었다. 이론 수업도 의미 있었다. 기업

한 줄 하나 긋지 않으려고 항상 연필을 썼

과 관련된 사람이나 현장을 직접 찾아가본

구조와 사례를 배우면서 현실을 조금씩 인

다. 부모님이 새로 책을 사 주시면 꼭 동생

일이다. 청소부 노동자, 노숙자, 철거민 등

지해 갔고, 그 가운데 나만의 가치관을 확

인 우리에게 다 함께 읽자고 이야기했다.

사연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립해 갈 수 있었다.

한 권의 작은 책 위에 네 명이 얼굴을 오밀

현대자동차 철탑농성장이나 제주도 강정

그리고 4학년.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진로

조밀 맞대고 “너 다 읽었니?” 연신 묻던 것

마을 같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지역을 찾

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과


0 51 Book Editor

“루쉰이 말한 것처럼, 희망이 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기 때문에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 공지영

공부도 좋았지만 내 몸에 맞는 일을 찾고

것 같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

싶었다. 그때부터 책과 사람을 좋아하는

책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들은 누구일까 종종 생각한다. 그리고 책이

것을 터 삼아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기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실습 과정에서 그 무

라는 매체가 어떻게 끊임없이 그리로 흘러

시작했다. 평소 나를 잘 아는 선배에게 고

게를 더욱 실감했다. 원고의 기획 방향을

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사람마다 생각과

민을 털어놓았다. 선배는 대뜸 이렇게 물

잡는 일에서부터 독자 분석, 교정, 본문과

기준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었다. “출판사는 어때?” 글과 그림을 유달

표지 디자인, 제작까지 편집자의 손길이 닿

하나의 명쾌한 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종류

리 좋아했던 것과 동아리에서 회보를 만들

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의 방향

의 것도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

때 진심으로 좋아하던 모습을 보아 왔기 때

성을 가지고 끝까지 중심을 가지고 가는 것

고 포기하거나 아예 무관심하게 사는 것보

문이라고 했다.

이 가장 어려웠다. 갑자기 다른 아이디어가

다, 늘 관찰하고 살피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후로 나는 여러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출

떠오르면 금세 콘셉트를 바꾸고 싶어지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만이 안으로 들어갈 수

판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지인에게 부탁

조금 더 세련된 표지 디자인이 나오면 대상

있다. 혹한을 견디고 있는, 혹은 견뎌야 할

해 실무에 계신 편집자분을 만나보기도 했

독자와 맞지 않더라도 선택하고 싶은 유혹

이들에게 “당신이 만든 책을 읽고 나에게

다. 출판계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관한 이

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편집자로서

도 봄이 왔어요.”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

야기, 그럼에도 편집자라는 직업을 포기할

중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

다. 위기의 순간에도 함께 사는 것의 가치를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편집

게 되었다. 농도 짙은 사람, 그리고 단단한

전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자님과의 만남 이후 점차 내 마음속에서도

편집자가 되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가장

이런 소리가 자랐다. ‘나도 편집의 참맛을

큰 숙제이자 동시에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알고 싶다.’

기도 하다. 서울출판예비학교 입학시험을

농도 짙은 사람이 된다는 것

낮은 곳을 향해 가는 편집자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출판예비학교의 첫

학창 시절에 읽었던 책 중에서도 특히 C.S.루

수업을 들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평화 운동가 송강

딱 맞았다. 출판과 편집에 대해 아무것도

호의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를 가장

몰랐던 나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기

좋아한다. 두 책은 장르나 분위기 면에서 아

만 했다. 마치 벌써 편집자라도 된 양 기분

주 다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

이 좋아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

국 같다. 평화는 아주 작고 낮은 곳에서부터

으면 들을수록 내 마음 한구석에는 말로

시작되며, 희망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가 무겁게 쌓여갔다.

그것을 동화로, 또는 수필로 표현하고 있을

편집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농도

뿐이었다. 나는 이 메시지를 신뢰하기 때문

짙은 사람이 되어야 함을 뜻했다. 굳은 심

에 동시에 이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사

지와 단단함 없이는 책을 만들기 어려울

람, 편집자로 살고 싶어졌다.

준비하면서 캘리그라피를 배웠다. 마음을 다지며 붓을 들었다. ‘빛, 어둠이 깊어질수록 아침은 밝아온다’


최성웅

생활인 최성웅 자신에게 다짐하다 함께 고민하고 언제든지 묻고 배울 사람들 사이, 내가 원하는 생업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말하자, 맛깔스럽게 말하자

는다. 고등학교에서는 이과였고 책을 많

게도 김현에게도 옛말처럼 ‘구라파’의 영

누군가에게 나를 알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접하지도 못했기에, 대학에 들어가 한

향은 너무나도 막대했음을 알았다. 그래

복잡한 문제마저 간단히 해결하는 수학공식

국어로 쓰인 모든 현대시를 다 읽고자 노력

서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더 많이 읽고 싶

처럼 나를 설명해줄 공식이 있다면 얼마나

했다. 처음에는 한 편의 시가 주는 맛에 심

었다. 단순히 겉만 핥는 선에서 그치지 않

좋을까? 있다 치더라도 내가 적절히 대입할

취했고, 다음으로는 한 권의 시집을 읽으

으려고 ‘구라’를 조금 보태자면 정말이지

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공식

며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엿보았

맨몸으로 유럽에 갔다. 그곳에서도 전공은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나를 알리기 위해 많

다. 각각의 독서경험이 모이자 언제부터인

언제나 현대시였다. 언어에, 언어를 이루

은 분들의 도움으로 깔아놓은 멍석이 있으

지 한국 현대시라는 큰 단어가 들어왔다.

는 재료 자체에 더욱 민감해졌다. 하나의

며, 다시 오지 않을 설렘 가득하다. 더군다나

현대, 혹은 근대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공부

언어를 다시 처음부터 배우며 모든 언어는

아무나가 아니라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

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에 관심이 갔고,

저마다의 문법이 있고, 문법이 틀릴지언정

고 함께할 선배님께 나를 알릴 기회가 아닌

개중에 좋아하는 작가인 루쉰과 다무라 류

문법에서 벗어나지는 않음을 배웠다. 언어

가? 노련한 그들은 내가 감추고자 하는 허물

이치를 읽기 위해 중국어와 일본어를 배웠

를 떠나서 다함이 없는 글이 내게는 너무도

도, 아직 미숙해서 드러내지 못한 숨은 매력

다. 그래도 다함이 없었다. 『동양적 근대

아름다웠고, 유학기간 내내 아름다운 글을

도 발견해주실 고수임을 믿자. 그렇다고 나

의 창출』을 읽으니 자연스레 ‘서양적 근대’

읽어 나갔다.

태해지지 말자. ‘나’라는 날것의 자료에 형태

는 무엇이었는지 배우고 싶었다. 특히 방식

를 갖추어 맛있는 정보로 바꾸자. 그러고 무

을 막론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김억에

글을 읽다 보니 무엇이 글이 되며, 우리는 글

엇보다 출판학교에 들어와서 친구들과 선생

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나는

님에게 배우고 즐긴 시간에 감사하자. 함께 생활하면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기능할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 주었으니.

확실하게, 굳은 열매(確實)를 맺자

우직하게 텍스트를 분석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글을 소비하는 독 자의 입장에서 구분하고자 했다. 소비를 목 적으로 책을 분류하자면 정보, 감동, 변화가

매진하자,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흔히 정보

매진(賣盡)될 때까지 매진(邁進)하자

를 주로 전달하는 책은 학술서적이나 실용

현대시를 전공했다. 감성이 풍부하다 말하

서, 감동을 주는 책은 문학 또는 에세이, 변화

기엔 험악한 얼굴이지만 누구나 돌연 감상

하게끔 하는 책은 자기계발서로 분류한다.

에 젖을 시간은 있으니 내가 현대시를 전

그러나 정말 좋은 글에 이러한 구분은 무용

공한 것이 죄는 아닌 셈이다. 더군다나 단

했다. 좋은 글은 정보를 주는 동시에 감동을

순히 감상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학문

선사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읽는 사람을

으로 문학을 배우려면 우직하게 텍스트를

변화시킨다. 공부도, 생활도 나에겐 마찬가

분석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

지였다. 어설프게 유용한 지식이나 정보, 객


053

반대로 그 누구도 진정 숨겨진 것을 보지 않는다. 보려고 할수록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 안느-로르 자쿠아르의 『창조적 사진 전략』 중에서

관이라는 환상에 흔들리지 말고자 노력했으

그 일환으로 누구나 프랑스어를 배울 공간

확신했다. 편집자 과정은 6개월간 주 5회 40

며,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나 자신도 단련하

을 만들었는데(cafe.naver.com/pasdequoi)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집자가 알아야

고자 했다. 더는 무턱대고 책에 침잠하는 방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이천 명 넘게 가

할 기본 사항, 책의 역사, 시장의 이해, 인디

식이 아니라, 생업으로 책을 접하고자 결심

입했다. 촬영에 참여한 사람 중에 출판사에

자인 등을 배우면서 대략적으로나마 출판의

했다. 이제 남겨진 과제는 나의 생업이자 평

서 편집장으로 일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

얼개를 이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 모든

생을 두고 매진할 공부를 찾는 것이었다. 무

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책의 물성에 대해

과정에서 친구들과 서로 의지하고 함께 공부

엇보다 나는 단단한 글을 읽는 게 좋았고,

배웠다. 책으로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

할 수 있어 좋았다. 실례로 우리는 워크숍 과

단단한 글을 쓰는 게 좋았고, 내 것이든 남의

을 만드는 편집자라는 직업이 내가 막연하

제로 원고 검토에서부터 제본까지 실제 책을

것이든 단단한 생각을 옮겨 적는 게 좋았다.

게 원하던 생업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만들어보는 기회를 가졌다. 『야구와 철학』이

이제 이런 글을 개인적 차원에서 즐기는 데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이

라는 외서 원고를 협업 출판사 미다스북스에

만족하지 말고, 남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방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서 받아 편집기획서를 작성하는 것이 시작이

식을 찾고 싶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이루고

그 기쁨을 안고 편집자로 일하는 첫 관문인

었다. 이후 모든 과정에서 혼자 결정하는 것

자 나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서울출판예비학교 신규인력양성과정에 지

이 아니라, 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처음부터

원하였다.

끝까지 의논해서 답을 찾아갔다. 내가 속한 조 ‘소리굽쇠’는 초반부터 열렬하다 못해 격

자유를 생각하자, 그러나 제약을 먼저 배우자

즐기자, 함께하며 일하자

렬한 토의와 회의로 반에서 ‘회의굽쇠’라는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느낀 제약은 무

다시 학교에 들어간다는 게 생각 외로 부담

위명을 떨쳤다. 처음에는 다른 조보다 무척

엇보다 의식주 문제였다. 옷은 화물선로 보

이었다. 배움보다는 고등학교 이후에 단체

더뎠다. 그러나 많은 회의를 거쳐 작업 기준

냈기에 가방에 메고 온 몇 벌이 전부였고, 무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오는 두려움이

을 명확히 설정하였기에 후반으로 갈수록 작

일푼인 내게 서울 집값은 63빌딩보다도 높

컸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서 사람들을 만나

업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워크숍의 결실인

디높았다. 그러나 친구네 집에 얹혀살고, 몇

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책을 좋아하고 편집

우리의 첫 책이 곧 나온다. 부끄럽고도 설렌

몇 작은 일을 전전하면서도 정작 경제적 부

자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과 우리를 응원해

다. 언제든지 이 마음을 잊지 말길 약속한다.

자유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이유 막론하고

주시는 선생님은 단순한 기관이나 단체에

행복했던 다섯 달이 어느새 지나갔다. 욕심

취직하려고 욕심내기는 싫었다. 내가 처한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고민하고 언

일까? 난 더 행복해지고 싶다. 편집자라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받아들이고,

제든지 묻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 그 사이에

직업을 갖고, 그러므로 더욱 자유로운 세계

그 제약 안에서 가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서 내가 원하는 생업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를 바라보고 싶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갖고, 그러므로 더욱 자유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싶다.

Book Editor

숨기면 숨길수록 비밀은 숨기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하명성 력. 바로 그러한 능력이 내가 편집자로서 가 질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편집자의 길을 모색하다 “이제는 나도 사회인이 되어야겠다.” 대학 원을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다른 일은 몰라도 책을 읽은 일은 좋아했으니 책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선 택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출판 사에 다니는 한 선배가 조언을 해주었다. 출판의 꽃은 편집인데, 서울출판예비학교 에 예비 편집자 과정이라는 것이 있으니 거 기 들어가 보라는 말이었다.

편집자의 길로 접어들어

다른 건 몰라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이라면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같이 해 오던 일이 그거였는데 뭐. 하지만 그 과정

첫발을 떼다

에서 고민이나 걱정도 있었다. 나름 책을 많이 읽었지만 너무 내 취향에 치우친 책 들만 읽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을 공부하다가 편집자의 길로 들어서다.

책을 읽는 걸 좋아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

어느덧 적지 않은 나이지만 편집자로서는 완전 초보.

자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일을 좋아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다.

했던 거다. 운 좋게도 편집자 과정에 합격 하고 교육 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고민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과연 내가 어떤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제2성찰의 결론

은 『방법서설』에 있는 문장이기 때문에 『성

하지만 예비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서 편집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나에게 철학의

찰』에서는 보지 못했다.) 옳은 전제로부터

다양한 매력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장 큰 매력은 논증의 아름다움이었다.

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이르는 논증의 아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 맞는 다양한

전제에서 논증으로 이어지는 엄밀하고 기

다운 흐름에 매혹된 것이다.

출판 분야가 있고, 그 다양한 책들을 만드는

발한 일련의 흐름.

논증의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다. 전제들

과정에서 다양한 재미가 존재한다는 것이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성찰』에서 더 이상

을 따라가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결론에 도

다. 잘 알지 못했던 출판 분야에 대한 수업에

의심할 수 없는 학문의 기초를 정립하려 했

달하게 된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통찰보

서 예상치 못했던 호기심을 느꼈고 편집자라

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있는 모든 것을 의

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공부를 하면서, 글

는 직업의 진정한 매력을 알게 됐다.

심한다. 소위 감각적 지식을 의심하고, 심지

을 읽고 분석하면서 글의 논증을 파악하게

출판 분야마다 세부적인 접근 방식은 다르

어는 수학적 명제들도 의심한다. 그리고 그

되고 그 논증이 글을 얼마나 단단하게 만

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일치한다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참이 아닐 수 있다고

드는지 알 수 있었다.

것을 배웠다. 그것은 독자가 원하는 책을 만

결론 내린다. 하지만 그 의심하는 내가 존

그리고 논증을 다루는 과정 속에서 텍스트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원고만으로는

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할 수 없었다.

를 분석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

좋은 책이 되지 않는다. 독자를 생각하고 그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면 그러한 기억이, 습관이 내가 편집자를 지

들과 교감하려는 과정에서 좋은 책이 탄생

증명해낸다. 나는 아직 『성찰』을 처음 접했

망하게 된 동기가 된 거 같다. 내가 편집자로

한다는 것이 내가 배운 좋은 책의 비밀이었

을 때 그 흥분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감동

서 잘하고 싶은, 그리고 자신 있는 부분이 바

다.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만드는 전체

을 느꼈던 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

로 그런 부분이다.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

적인 과정에서 편집자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라는 통찰이 아니었다.(사실 그 문장

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명료하게 다듬는 능

어렴풋하게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밝은 미소와 긍정적인 태도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호기심에 빛나는 눈빛을 간직한 편집자가 되고 싶다.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한다.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문

특히 책의 편집 과정에서 책의 분량을 고

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 말의 의미를

려해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 ‘원고가 있으면 좋은 글로 다듬어서 인

내가 공부를 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그

쇄하면 되지’라는 게 내가 가지고 있던 책

리고 편집자로서의 자질이 있다면 바로 이

에 대한, 편집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었다.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 입장에서가 아니

하지만 그럴 리가. 나는 생각보다 많이 개

라 최대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맥

념이 없었던 거다. 워크숍 과정을 통해 얻

락에서 그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

은 가장 큰 깨달음은 편집에서는 제작 과정

다 보면 정말 못 알아들을 말은 없는 거 같

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적당

다. 물론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도 상

한 분량으로 원고를 편집하지 못하면, 제대

대방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고, 그 사람을 미

로 된 책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수없이

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이해하는 게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조판을 바꾸고, 몇

우선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소통할 수 없다.

충격의 워크숍 과정

번씩 본 교정지를 더 수정한 후에야 원하

출판예비학교의 워크숍 과정은 나에게 일종

는 페이지에 맞출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첫발을 떼면서 내일을 생각하다.

의 충격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독자의 기준

책의 분량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다는 게

처음부터 잘하진 못해도 열심히 꾸준히 하

에서만 책을 읽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

눈에 보였다. 책은 단순히 글의 묶음이 아

다 보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었으니까. 하지만 편집자의 입장에서 책을

니라는 사실을, 하나의 상품이며 작품이라

통해 알게 되었다. 최근 3년간 난 복싱을 했

만든다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는 걸 워크숍

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편집은 내

다. 처음에는 그냥 운동 삼아 시작했는데 오

을 하면서야 깨달았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밀한

래 하고 보니 이걸 끊기가 어려워 졌다. 처음

서는 끊임없이 독자가 어떻게 이 책을 읽을

작업이었다.

관장님이나 코치님이 가르쳐 준 대로 주먹 을 뻗을 때에는, 나는 절대 저 사람들처럼 멋

지 고민해야 했다. 이건 단지 좋은, 읽기 쉬운 책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편집자는 독

자비의 원리와 편집자의 자세

있게 주먹을 내지를 수 없을 줄 알았지만 이

자가 어떤 사람일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독

도널드 데이비슨이라는 미국 철학자가 제

제 폼은 제법 괜찮은 편이다. 다른 이유는 없

자의 세대나 취향도 고려해야 했다. 번역자

시한 이론 중 '자비의 원리(the principle of

다고 생각한다. 힘들어도 꾸준히 했기 때문

가 옮겨놓은 인터넷 유행어를 교정할 때 어

charity)'라는 것이 있다. 이름만 봐서는, 이

이다. 편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열심히 듣

떤 사람들이 그 글을 읽을지 생각했다. 혹시

웃에게 자비로워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일

고 배우면서 꾸준히 나아가면 언젠가 근사한

나 독자들이 이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진 않

거 같지만 실은 전혀 아니다. 자비의 원리

편집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남들보다 빨리

을까? 얌전한 표현으로 바꿨다가 읽는 맛이

란 언어철학에서 사용되는 원칙인데, 최대

달려가진 못하더라도 차근차근 내 앞에 놓

떨어지진 않을까? 그제야 내가 읽던 책들이,

한 상대방의 주장이 참이 되는 방식으로

인 길을 밟아가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내 길을

가끔은 오자를 찾고 비웃기 바빴던 그 책들

상대방의 말을 해석하라는 지침이다. 데이

만날 수 있겠지. 끊임없이 길을 찾고 고민하

이 얼마나 많은 고려와 숙고 끝에 만들어졌

비슨은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아예 상대방

는 편집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055

이 말하려는 바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

Book Editor

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독자로서 책을 읽을


한누리 각종 박물관과 미술 전시회가 무료 개방을 했다. 브로드웨이에서 난생처음 뮤지컬도 보고, 주말이면 외국 친구들과 컬럼비아,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미국 아이비리 그를 구경 다녔다. 각종 문화 행사들도 새 로운 체험이었다. 부활절에 달걀 바구니를 선물해 보고, 할로윈 거리 행진에도 참여했 다. 동성애자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게이 퍼레이드는 가장 인상적인 행사 중의 하나 였다. 돌이켜 보니 7개월 남짓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힌 것 같 다. 나의 첫 홀로서기는 독립의 해방감보다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시간이었다.

청소년 책 편집자를 꿈꾸며

책을 향한 나의 여정 나는 어려서부터 책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 지만 남들보다 열렬한 독서가는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학교 공부를 쫓 아가기에 바빠 책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

책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다. 지금 생각해보면 뉴욕 생활은 책과의

레시피에 호기심이 생기곤 했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인연을 다시 만든 촉매 역할을 했다. 어학

알게 되고서는 책 만드는 일이 궁금해졌다.

연수를 통해 영어에 재미를 더 느꼈고 그로 인해 나의 주 전공이었던 영문학에 더욱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영문학 소설들 을 찾아 읽었고 점점 책의 재미를 알게 되

영문학과로 입학했고 복수전공으로 경영

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혼자 은행 일

었다. 어학연수로 회화가 가능해지니 여행

학을 했다. 1학년 때는 주 전공보다 경영학

을 보는 것도 어려웠고 그저 익숙한 길로만

지에서도 더욱 자신이 생겼다. 여행을 더욱

의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 주로 경영전략,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즐기게 되었고 여행은 책 읽기에 재미를 더

마케팅, 인적자원 관련 수업들에 재미를

자발적인(?) 공부를 시작한 건 아마도 그

해 주었다. 여행지에 가기 위해 책을 읽게

느꼈고, 새로운 만남을 좋아하는 나에게

때부터였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하루하

됐고 반대로 여행을 다녀와서 관심사를 찾

매 수업 주어졌던 팀 과제는 또 다른 즐거

루를 더 즐기기 위해 공부가 필요했다. 다행

아 읽기도 했다.

움이었다. 대학생 시절에 있었던 많은 일

히 홈스테이를 하는 집에는 현지에 사는 한

느지막이 독서의 매력에 빠진 후, 가장 궁

중에서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을 되짚어

국인 학생이 있어 궁금한 점들은 뭐든 물어

금해진 점은 책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마

본다.

볼 수 있었다. 앎이 늘수록 보이는 것도 많

치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레시피에 호

아지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졌다. 그

기심이 생기는 것처럼 책 읽기의 즐거움을

뉴욕 생존기

래서 뉴욕을 더 정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

알게 되면서 나는 책 만드는 일이 궁금해

1학년을 마치고 떠난 나의 첫 해외 여행지는

고 체류 3개월째 홈스테이를 떠나 홀로서

졌다. 그리고 그 무렵 『편집자란 무엇인가』

뉴욕이었다. 당시 영어를 못했지만 나는 무

기를 결심한다. 교통이 불편해서 독립한 이

를 읽으며 편집자란 단순히 원고 속 글자

작정 떠났다. 어학연수, 말 그대로 외국어를

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뉴욕의 다양한 문화

에 얽매인 기술자가 아니라 텍스트의 안팎

배우러 간 여행이었다. 첫 해외여행의 설렘

와 예술을 즐기고 싶었다.

을 읽어야 하는 지식인이라는 것을 깨달았

도 잠시, 현지인들과 지내면서 나는 짧은 대

알고 보니 뉴욕에서는 보고 느끼는 데 많

다. 책을 만드는 그 섬세한 과정에 대해 알

화조차 이어갈 수 없어 힘들었다. 무엇보다

은 돈이 들지 않았다. 광장에 앉아 길거리

게 되면서 나는 책 만드는 일에 더욱 매력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그곳에서 혼자 할 수 있

연주를 즐길 수 있었고, 도네이션 데이에는

을 느끼게 되었고 훌륭한 편집자와 좋은 책


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책임질 수 있는 ‘독

교에 지원서를 냈다.

립적 편집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실무를 익

0 57

에 대한 막연한 열정으로 서울출판예비학

출판예비학교에서 보낸 시간들

Book Editor

히고 여러 권의 책을 만들며 실전 경험을 쌓는 데 집중하고 싶다.

편집이란 어떤 것일까? 이 일이 과연 나랑 잘 맞을까? 이런 설렘과 궁금증을 가지고

청소년 책 편집자를 꿈꾸며

내디딘 발걸음. 이곳에서 나는 현장에 계

내가 중・고등학생일 땐 방학 때마다 봉사

신 대선배님들로부터 출판과 관련된 기본

활동 시간을 채워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

지식을 배웠고, 책 만드는 그 생생한 이야

는 매번 동네 어린이집을 찾아가 일손을

기들을 들으며 각 분야의 특징을 맛보았다.

도왔다. 명절이 되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실무적으로는 조를 짜서 한 권의 책을 만들

는 친척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나의 주 임

어봤다. 원고를 읽고 구체적인 상을 그리

무였고 물론 내가 좋아서 한 일이었다. 대

는 일부터 여섯 명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까

학생이 돼서 나의 관심은 청소년에게로 이

지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직접

동했다. 1년 정도 방과 후 중학생들을 가르

해보면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고민했던 시

치는 봉사활동을 자원했고, 아르바이트도

한 책을 만들고 싶다. 친구와의 갈등, 집안

간들은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던 것

주로 과외나 학원 조교같이 아이들과 가까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공감과

같다. 디자인 수업은 기억에 남는 수업 중

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이유는 잘 모

재미,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책을 말

의 하나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편집자가

르겠으나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 즐거웠다.

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흔들림 없이 자신의

알아야 할 기본적인 디자인 개념들을 배웠

아이들에게 나는 늘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

길을 걷도록 돕고 싶다.

다. 이 수업을 통해 전문 디자이너만큼은

길 원했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런 선생님을

얼마 전 견학을 갔던 모 출판사의 편집자

아니지만 편집자도 디자이너와 소통할 수

좋아했고, 동등한 위치에서 아이와 이야기

분께서 해주신 말이 기억에 난다. 온 가족

있는 수준으로 디자인 안목을 끌어 올릴 필

할 때 그 아이의 진정한 고민을 들을 수 있어

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처럼 10대 아이가

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이기도 했다. 나를 좋아하던 한 녀석은 종

보고 40대 엄마 아빠가 함께 읽는 책, 읽고

서울출판예비학교에 온 것은 나에게 좋은

종 자기가 요즘 겪고 있는 친구와의 갈등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드

선택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나 진로 고민 등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때마

는 것이 출간 방향이라는 말. 청소년 편집

통해 전에는 막연했던 출판이 조금은 분명

다 나는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고, 그

자를 꿈꾸는 나에게 와 닿는 말이었다. 나

해졌고, 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

래서 서점에 가 책을 몇 권 골라 선물하곤 했

도 우리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과 고민을 이

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지난

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들이 얼마나 그 아

해하고 세대 간의 소통을 돕는 그런 편집자

이 과정들이 출판의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이의 고민에 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아이

가 되고 싶다.

것을 알지만 새로운 출발선에 서있는 나에

가 조금은 단단해졌으리라 믿는다.

게는 작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제 출간

나는 편집자로서 이런 청소년 친구들을 위

게이 퍼레이드에 참가한 노부부 그들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

청소년 친구들을 위한 책을 만들고 싶다.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공감과 재미,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책. 아이들이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걷도록 돕고 싶다.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