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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刊辭
안녕하십니까! 경찰청장 이성한입니다.
올해로 6번째를 맞은 ‘안보사랑 콘테스트’는 해를 거듭할 수록 많은 관심과 참여 속에 대표적인 안보홍보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최근 한반도 긴장 상황으로 인해 고조된 안보의식을 반영하듯이 이번에 출품된 작품 하나하나에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 나라사랑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세대인 청소년들에게 6.25 전쟁의 교훈과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자유를 찾아 우리 사회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이번 콘테스트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고귀한 땀방울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이러한 번영과 발전은 우리 모두의 하나된 안보의식을 토대로 이뤄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우리 모두가 안보의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수상의 영예를 안은 분들께는 축하를, 아쉽게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는 진심어린 감사를 보내며, 많은 작품을 공정하게 심사해주신 심사위원 여러분들께도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책에 담겨있는 우리 청소년들과 북한이탈주민들의 소중한 글들이 널리 읽혀져 우리의 안보의식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6월 경찰청장
CONTENTS
포스터 부문 최우수상 _ 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정형일(인천 계양구) ······ 08 우 수 상 _ 국가안보의 방패 이덕(서울 강남구) ············· 09 우 수 상 _ 당신의 안보의식은 몇점입니까? 문형균(서울 607전경대) ·· 10 장 려 상 _ 안보로113 김은진(경기 성남시 수정구) ············ 11 장 려 상 _ 모두가 맞춘 국가안보 김현영(서울 관악구) ········· 12 장 려 상 _ 흐린 날에만... 이선혜(부산 사상구) ············· 13
사진 부문 우 수 상 _ 외국인과 안보현장 체험 이현대(경기 성남시 분당구) ····· 16 장 려 상 _ 천안함 김미영(서울 관악구) ················· 17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최우수상 _ 천안함 안보현장을 다녀와서 임용주(전북 고창 강호항공고) ··················20
우 수 상 _ 북한에서 온 영광이에게 김규남(충남 부여초) ········ 27 우 수 상 _ 병만 도사와 친구들을 읽고 윤태현(서울 신대림초) ····· 31 장 려 상 _ 우리 민족의 아픔의 선 박해인(충남 아산 온양한올고) ···· 34 장 려 상 _ 평화의 소중함 현은아(경남 김해 능동중) ··········· 40 장 려 상 _ 비교 아닌 도움 최해동(충남 공주 주봉초) ··········· 44
2013년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북한이탈주민 수기 최우수상 _ 엄마를 부르는 엄마 박○○(부산) ·············· 50 우 수 상 _ 극과 극에서 바뀐 나의 삶 전○○(부산) ··········· 66 우 수 상 _ 자유의 덫 지○○(서울) ··················· 86 장 려 상 _ 분단의 사생아에서 통일 전문가를 꿈꾸며 주○○(서울) ·· 105 장 려 상 _ 새로운 시작 박○○(강원) ················· 114 장 려 상 _ 이제, 지난 삶의 슬픔을 즐거운 추억에 묻었다 송○○(서울) 121
심사평 경찰청 공모전 심사평
한규훈(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144
2013 안보사랑 콘테스트 출품작 심사
이철한(동국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146
민족의 비극에 공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 많아
이경영 경기대학교 교수(시인·문학평론가)················ 148
꿈꾸는 날의 행복의 향연이 펼쳐지길 바라며
김현탁(한국현대문학연구소 소장)·····················151
포스터 부문
최우수상
우수상
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정형일(인천 계양구)
국가안보의 방패 이덕(서울 강남구)
당신의 안보의식은 몇점입니까? 문형균(서울 607전경대)
최우수상
안보로113 김은진(경기 성남시 수정구)
모두가 맞춘 국가안보 김현영(서울 관악구)
흐린 날에만... 이선혜(부산 사상구)
포스터 부문
최우수상
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정형일(인천 계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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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포스터 부문 ●●● 포스터 부문
우수상
국가안보의 방패
이덕(서울 강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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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부문
우수상
당신의 안보의식은 몇점입니까?
문형균(서울 607전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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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포스터 부문 ●●● 포스터 부문
장려상
안보로113
김은진(경기 성남시 수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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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부문
장려상
모두가 맞춘 국가안보
김현영(서울 관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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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포스터 부문 ●●● 포스터 부문
장려상
흐린 날에만...
이선혜(부산 사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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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부문
우수상
외국인과 안보현장 체험
장려상
천안함
이현대(경기 성남시 분당구)
김미영(서울 관악구)
사진 부문
우수상
외국인과 안보현장 체험
이현대(경기 성남시 분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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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사진 부문 ●●● 사진 부문
장려상
천안함
김미영(서울 관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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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최우수상
우수상
천안함 안보현장을 다녀와서 임용주(전북 고창 강호항공고)
북한에서 온 영광이에게 김규남(충남 부여초)
병만 도사와 친구들을 읽고 윤태현(서울 신대림초)
장려상
우리 민족의 아픔의 선 박해인(충남 아산 온양한올고)
평화의 소중함 현은아(경남 김해 능동중)
비교 아닌 도움 최해동(충남 공주 주봉초)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최우수상┃
천안함 안보현장을 다녀와서 임 용 주 (전북 고창 강호항공고)
모처럼 만에 3일간의 연휴가 찾아왔지만 나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족여행을 잔뜩 기대했었는데 아버지는 결정하신 여행지는 평 택에 위치한 해군기지 내 ‘천안함 안보현장’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볼에 잔뜩 바람이 들어간 나에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은 안하 셨지만 예전 일들을 다시금 상기하시는 듯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계셨다.
“용주야 아빠께 전화 왔다고 얼른 전해드려” “네...아빠 전화”
중학교 2학년 때 학원을 마치고 밀린 과제를 위해 방에 들어갈 쯤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 에 들어주무시던 아빠를 흔들어 깨워드렸다 “네 전화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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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 잠결에 전화를 받으셨던 아버지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시곤,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다 급히 통화를 마치고 바로 일어나 군복을 입으셨다. 아버지는 올해 23년차 해군 부사관으로 군 복무를 하시는 군인이시다. 가끔씩 있는 일이라서 ‘또 부대에서 걸려온 비상소집 전화구나’ 하 는 생각에 바쁘게 서둘러 옷도 잘 추스르지도 못하고 달려 나가시는 아버지께 잘 다녀오시라 는 인사도 못한 채 그냥 나는 피곤에 지쳐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새벽까지 아버지는 퇴근하지 못하셨고 어머니 또한 밤을 새우셨다. 새벽부터 거실에 서 TV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었다 “용주야 아빠께서 집에 일찍 오시지 못할 것 같구나, 속옷이라도 챙겨 드릴걸...” “엄마 왜... 무슨일 있어요? ” 그때 눈앞의 TV화면엔 온통 바다에서 구조되고 있는 해군 장병들의 모습이 보였고 우리 해군함 이 피격되어 가라앉았다는 믿을 수 없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아버지께서 급히 복귀 하신 이유가 저것이었구나.’ TV 화면 속엔 처참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군함의 모습이 반 복되어 비춰지고 있었고 몇몇 생존 장병들이 구조되고 있는 현장의 모습과 어지럽던 자막들이 끊임없이 보였다. 어머니는 급히 복귀하신 아버지를 걱정하셨다. 또 아빠의 전우와 다름없는 분들이 큰 일을 당한 것을 걱정하며 밤을 지새우셨다. 학교 수업 내내 나는 급히 부대로 복귀하신 아버지 생각과 학 우들과의 천안함 이야기로 뒤숭숭했다. 때마침 장기간의 비상근무를 위해 속옷을 몇 벌 가지러 집에 오신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이마에 땀이 맺혀있고 왠지 모를 상기된 얼굴 표정을 읽 을 수 있었는데 그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걸 보고 아무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아빠가 언제 집에 돌아올지 모르겠네. 용주야, 가족여행은 나중에 다시 계획토록 하자!” “네, 아빠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렇게 급히 복귀하시는 아버지의 어깨가 유난히 처져 보였다.
“자 이번 휴게소만 지나면 금방이니 다 왔구나, 잠시만 쉬어가자” 평택 인근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해 아버지께서 잠시 화장실에 가셨을 때 어머니가 물으셨다. “용주야 가족휴가를 이곳으로 와서 기분이 별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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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볼에 바람을 불어넣고만 있었다. “너 지난 천안함 폭침사건 때 아빠 비상근무로 두 달 가까이 집에 오시지 못하신 거 기억하지?” 어머니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용주야, 사실 그 때 동해에서 같이 근무하셨던 아빠의 십년지기 친한 전 우이자 후배가 돌아가셨어” 순간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아! 그 당시 잠 시 집에 들르셨던 아버지의 두 눈가에 붉은 눈시울과 상기된 아버지의 표정 의 의미가 지금 어머니가 해주시는 말씀의 이유였구나 생각했다. “그 뒤로 아빠는 무척 힘들어 하셨단다. 상부명령으로 남해 쪽을 지키고 계셔서 좀 더 일찍 평택에 가보지 못해 늘 후배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단다. 그러니 이번 휴가는 아빠에게 의미가 깊은 휴가고 또 아빠가 해군 으로 계시는 우리 가족에게도 뜻 깊은 휴가가 되지 않겠니?” 어머니의 말씀에 ‘아! 내가 아직은 이렇게 어리고 철없는 아이였구나.’ 하 는 생각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용주도 이제 몇 해 지나면 대한민국 남자로 아빠와 같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겠네” 어머니는 환한 미소와 함께 제 등을 톡톡 두드려주셨다. 철없이 놀이공원 이나 바닷가로 가족여행을 가고자 했던 내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출발한 지 3시간이 지나 평택에 도착했고 해군 2함대 행정안내실에서 천 안함 견학 신청을 했다. 견학 이외 장소는 군부대 지역으로 촬영을 금지한다 는 설명과 여러 보안 안내사항을 교육받고 드디어 천안함이 전시되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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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
부둣가로 발을 옮겼다. ‘눈앞에 있는 천안함은 폭발로 인해 두 동강나 철판이 찢겨 나갔으며 피해 의 상흔은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찢겨진 선체의 휘어진 철판조각들, 어지럽게 늘어져 있던 각종 파이프 줄기 와 전선들, 무엇보다 인상에 남았던 함정내부로 보이는 작은 문들과 격실로 일그러진 파편들... 현장에서 아버지는 내내 말씀이 없으셨다. 안내장교의 설명에 따라 갈라진 선체와 여러 전시현장을 보고 참혹했던 그날의 상처를 아주 조금이나마 가슴 속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함정을 보는 내내 앞서 강당에서 화면으로 보여졌던 그날의 숭고히 산화 하신 아빠의 전우 분들 사진이 내내 떠올랐다.
그날 저녁은 평택지역에 근무하시고 계시는 아버지의 전우 분들을 만나 함 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내내 평소 약주를 멀리하시던 아버지셨지만 전우 분들과 흥겹게, 때때로 상기된 표정을 지으시며 아버지는 흥건히 취하셨다. 숙소에서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왜 서로가 이런 아픈 역사와 불신으로 싸우려 할까?’ 그동안 철없이 게임이나 스포츠 연예소식과 같이 흔한 일상으로만 지냈 던 학창시절이 후회되었다. 매번 친구들과 인터넷으로 떠도는 근거 없는 말 들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보였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눈을 감고도 잠 못 드는 시간 내내 한 집안의 소중한 가장이자, 누군가에게 소중한 남편 으로, 또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아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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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 품안의 소중한 국민으로서 숭고한 희생의 영정 앞에 ‘나는 지금껏 무엇을 하며 지냈는가’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잠 을 잘 수 없었다.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다음날 아침엔 상쾌한 바닷바람을 맡으며 일 찍 일어났다.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며 방파제 위에서 우리 가족은 크게 함성도 질러 보고 나란히 손을 잡으며 웃고 떠들었다. “용주야, 아빠가 소중한 가족여행을 이런 곳으로 와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너무나 잘 왔다는 생각을 밤새 했었어요. 오기 전까지는 솔직 히 싫은 마음도 있었는데 아빠가 하시는 일이 무엇이고, 또 저와 우리 가족, 대한민국 국민이 이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까지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피땀 흘린 노력들이 있었는지, 또 이 시간에도 저기 보이는 바다 위 거친 파 도를 이겨내며 소중한 나라를 위해 근무하시는 많은 분들의 노력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하루 아침에 어른이 된 것 마냥 대답한 내 자신이 뿌듯해졌다. “우리 용주가 하루 아침에 철이 들었나보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놀이공원 안 간다구 뾰로통하더니..” 어머니의 칭찬에 기분이 더욱 좋아해졌다.
가족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나는 부끄러웠고 철없던 지난 시절을 반 성하면서 비록 아직은 학업에 충실해야 하는 학생의 신분으로 내가 할 수 있 는 일이 무엇이며, 매번 바라기만 하고 풍족히 누리기만 하고 있을 때 가장 가깝지만 잊고 있었던 소중한 자유와 그 자유를 위한 숭고한 희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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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
짧지만 생각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낸 이번 가족여행 안보현장 체험 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학교에서 나는 그날 보고 듣고 체험한 일들을 학우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가끔씩 직접 보지 못해 믿지 못한다거나 일부 인터넷에 떠도는 근거 없는 이론에 의문을 가진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되풀이하고 또 직접적인 근거와 정확한 사실을 보고 온 그날의 느낌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나는 그렇게 나라사랑을 실천 할 수 있었다. 또한 내 자신도 한층 성숙한 국가관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의 잘못된 판단과 미리미리 대비하지 못해 일본의 식민지로서 가슴 아픈 역사와 또 동족간의 상흔과 나라가 찢어지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으로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은 무엇보다 국가의 안보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과 단지 역사만 알고 있다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 직접 실천을 위해 ‘목포아동원’ 봉사활동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작은 실천이었지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나라사랑으로 아버지와 함께 부대에서 가는 대민 봉사활동도 참가하게 되었다. 가족여행이었던 ‘천안함 안보현장’ 체험으로 작지만 소중히 실천하는 생활과 내 스스로도 느낄 만큼 부쩍 성숙해진 국가관 가질 수 있었다. 눈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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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날의 ‘아주 특별했던 체험’ 은 자칫 무미건조했던 공부와 몇 자의 영어단어에 묻힐 뻔했던 학창시절에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도 아버지는 바다 위에서 거친 파도를 헤쳐 이겨내시며 작게는 나와 우리 가족, 크게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우리나라의 영해를 수호하고 계신다. 또한 휴전선 155마일의 철책과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고, 안으로는 치안과 대한민국의 질서를 위해 밤낮으로 희생하시는 경찰관분들과 이 땅에 모든 소중한 희생과 숭고한 그분들의 정신을 언제나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며 끊 임없이 노력하고 힘들 때마다 그분들의 희생을 교훈삼아 또 다시 일어서리 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며칠 뒤면 다시 환한 미소로 임무를 마치시고 귀가하실 아버지께 꼭 말씀 드려야겠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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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안보사랑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우수상┃
북한에서 온 영광이에게 김 규 남 (충남 부여초)
영광아, 안녕? 나는 충청남도 부여군에 살고 있는 규남이라고 해. 나는 너의 생활 모습을 보고 되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영광아, 지 금까지 너무 속상했지? 부모님과 같이 탈북을 하려고 했는데 북한의 군 사들이 갑자기 총을 쏘아서 부모님과 헤어지고, 삼촌은 외화벌이를 하다 가 잡혀 어딘지도 모르는 수용소에 갇히고, 여태 이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먹고 살 곳도 없어 꽃제비가 되어버리고 말이야. 또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 을 넘어 중국으로 숨어 있다가 제3국을 통하여 한국으로 넘어온다는 것 을 알았어.
나도 얼마 전에 탈북한 언니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봤는데, 한국으 로 넘어오기 위하여 제3국에 머무는 것도 힘들다고 들었어. 작은 방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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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명의 사람들이 같이 살면서 제대로 씻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못했다고 해.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와서 행복하다고 하니 ‘얼마나 자유를 원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자유라는 것은 ‘공기’ 같은 존재야. 우 리는 항상 자유를 느끼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너희 들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말이야. 아마 나도 북한에 태어났다면 너무도 답 답했겠지. 그런 자유를 찾아서 너도 탈북을 했는데 부모님과 헤어지고 너무 안 됐어. 나는 한시도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는데 다른 나라에 와서 아무도 없다니, 얼마나 슬프고 외로웠을까? 그래도 영광이 너는 압록강에서 병만이와 담, 그리고 우진이를 만나 손쉽 게 북한에서 서울까지 왔지. 참으로 다행이야. 우리나라에 처음 와 본 소감 이 어땠니? 나도 북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그리고 지하도사의 폭탄 프로그램 때문에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다칠 뻔 했잖아. 핵폭탄이란 참 무서운 것 같아. 예전에도 일제 강점기 때 미국이 일 본의 히로시마라는 곳에 핵폭탄을 투하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고 해. 그 이후 핵에 피폭된 사람들의 자손들이 기형아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얼 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에게도 절대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 다시는 전쟁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영광이 너를 칭찬해 주고 싶어. 영광이 너는 폭력은 옳지 않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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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
각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원해서 폭탄 프로그램을 해체했잖아.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서울에서 너의 부모님을 찾아서 정말 좋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에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서 경제발전을 시작했데.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개방적인 시장 경제 체제를 통해 국제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 했다고 해. 그런데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 경제로 폐쇄적이고 개혁과 개방을 거부하는 정책으로 경제가 심각하게 침체되고 말았다고 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린이들이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희망이 넘치는 미 래를 꿈꾸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 하다니 참 안 됐어. 같은 민족이라도 어디 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이렇게 다른 생활을 하게 되다니... 참으로 안타까 웠어.
6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과 북한의 언어 차이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 우리는 모든 어린이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의무교육으로 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너희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는지도 궁금하구나. 영광이 너 를 진짜로 만나게 된다면 지금 편지로도 다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 을 수 있겠지.
나는 하루빨리 싸우지 않고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어. 영광이 너는 북한에 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아직도 북한에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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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더이상 천안함 사건도, 연평도 포격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지 나야 한 민족이 다시 뭉쳐 함께 살 수 있을까? 언젠가 기차나 버스를 타고 북한을 여행하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우리나 라에서 북한과 러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기차로 여행할 수 있게 될까?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 함께 통일이 되는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노 력하자!
영광이 너도 우리나라에서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친 구들도 많이 사귀고 말이야. 그럼 이만 줄일게. 앞으로도 건강하게 지내렴. 안보사랑
2013년 5월
대한민국과 북한은 한 민족이라는 것을 잘 아는 규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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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우수상┃
병만 도사와 친구들을 읽고 윤 태 현 (서울 신대림초)
얼마 전 밤에 온
가족이 뉴스를 봤습니다. 엄마, 아빠는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저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엄마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엄마는 “지금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은이라는 사람이 핵폭탄을 우리나라 에 발사하겠다” 고 협박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동 생들에게 내일은 놀이터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태영아, 태인아, 북한 이 우리나라를 공격한대. 내일은 엄마랑 같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있어야 해! 핵폭탄이 발사되면 엄마를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형아도 학 교 갔다가 집으로 바로 올게.” 저는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엄마, 아빠, 태영이, 태인이도 못 보고 죽을 것 같아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는 제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는 웃으셨습니다. 웃으시는 엄마 와 아빠가 미웠습니다. 나를 덜 사랑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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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안보사랑 콘테스트가 있다고 말씀해 주 셔서 엄마와 컴퓨터로 ‘병만도사와 친구들’이라는 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한류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싸이가 ‘말 춤’으로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력이 세계 7위이고 치안분야에서는 최고 점수를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보통신 국 가 경쟁력이 1위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엄마께 여쭈어봤더니 우리나라 가 컴퓨터도 잘하고 과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나쁜 사람도 경찰 아저씨 들이 훌륭하게 잘 잡는다는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발사한다는 핵무기에 대해 알게 되고 나서 깜작 놀라게 되 었습니다. 북한의 핵폭탄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핵무기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고 합니다. 원자폭탄으로 폭발하면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다치고 죽게 된다는 것 입니다. 엄마, 아빠랑 헤어지는 것이 무서웠는데,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 두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들고 있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핵무기를 만들었습 니다. 그리고 북한의 가난한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돌봐주지 않았습니다. 그 래서 우리나라로 오다가 영광이는 부모님도 잃어버렸습니다. 너무 불쌍했습 니다. 우리나라는 행복하고 잘 사는데 북한은 가난하고 돈도 없으면서 핵무 기만 만들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싸움만 좋아하고 사이좋게 지내 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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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 ●●●
우리 엄마는 ‘최정은’입니다. 김정은은 우리 엄마와 이름이 똑같은데 우리 엄마와 참 다릅니다. 우리 엄마는 동생 태영이, 태인이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십 니다. 그래야 어른이 되서도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고 하셨습니 다. 그래야 성공해서 돈도 많이 번다고 하셨습니다. 북한도 다른 나라와 사 이좋게 지내서 북한 사람들도 가난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핵무기는 빨리 없애서 세계의 평화를 만들어 나가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핵무기 때문에 죽거나 부모님과 헤어지게 되면 정말 슬프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지은 아파트도 다 무너지고 예쁜 보라 매공원도 폭발하여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금은 어려워서 이 만화를 엄마와 같이 읽었지만, 핵무기가 참 나쁘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빨리 북한이 우리나라에 도와달라고 하여 우리 나라와 함께 힘을 합하여 한류도 더 만들고, 경찰 아저씨들의 말을 잘 들어 나쁜 사람도 다 잡고, 나라도 더 잘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안보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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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장려상┃
우리 민족의 아픔의 선 박 해 인 (충남 아산 온양한올고)
과연 우리나라 국민 중 몇 퍼센트 정도가 통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았을까? 또 우리나라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라는 점에 대 해 마음 아파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통일 전망대에 다녀오기 전 에는 통일에 대해서, 그리고 북한과 전쟁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 지 않았다. 그저 역사 책에서 배워왔던 역사적 사건이라고만 생각해 왔 고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통일에 대한 생각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통일은 되어야 한다고 줄곧 생각은 해왔지만, 마 땅히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리 고 북한, 통일, 전쟁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기회도 흔치 않았다. 가끔 뉴스에 ‘북한 미사일’ 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인터넷 기사를 통해서 무슨 일인가 찾아보기만 했을 뿐, 크게 신경 쓴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 만 통일전망대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어 다녀온 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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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학원에서 여행을 가는데 여행코스에 통일전망대가 있었다. 여행코스를 쭉 둘러보다가 통일전망대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되어 ‘통일전망대는 어떤 곳일 까?’하는 궁금증이 생겨났고, 어느 정도 기대감을 안고 가게 되었다. 통일전 망대에 도착해서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등 많은 사람이 북한에 보내 고 싶어 써놓은 편지들과 태극기가 철조망에 달려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고, 달리지 못하고 있는 몇 십년 된 열차도 보았다. 여러 가지 볼만한 것들이 많 았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은 바로 철조망 앞이었 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서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철조망 건 너편으로 보이는 갈 수 없는 땅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딛고 있 는 땅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나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땅이었다. 철조망 앞에 서서 건너편 땅의 바로 앞부터 눈으로 볼 수 있는 최대한 먼 곳 까지 바라보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철조망이 없었다면 한 발만 내딛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땅이 철조망 하나 때문에 하나의 땅이면서 두 개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우리는 더 이상 그곳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가까이에 있고 그래서 한 발만 내딛으 면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휴전선’이라는 듣기만 해도 가슴 아픈 그 선 때문 에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우리나라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고, 가슴이 아팠다. 철조망 앞에서 건너편 땅을 바라보고 있으니 ‘전쟁으로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생기게 된 이산가족들은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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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플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금 나처럼 가족이 있는 건너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또 마음 이 아파왔다. 형형색색 아름답게 꽃이 필 때부터 전국이 하얗게 옷을 갈아입 는 것을 몇 십 년 동안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가족들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셨을까...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하였고 직접 본 적 조차 없는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 할 수 없는 아픔이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한반도 허리 에 놓여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픔의 선을 바라보며 느끼게 되었다. 그곳에 놓 여있는 민족의 아픔을 보여주는 선은 아무 생각 없이 봤을 때에는 아무렇지 않은 그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철조망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게 되어 50년이 넘도록 가족과 떨어져 있는 이산가족들과 전쟁으 로 인하여 하나였던 민족이 둘로 나누어진 우리나라를 생각하며 바라보니, 그 철조망은 몇 십 년 전의 우리 민족의 아픔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몇십 년 동안 그 자리에서 쓸쓸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며 불어오는 바람 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 아니 오늘이라도 당장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는 듯이 서서 통일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듯이 보여서 더욱 마음이 아팠고 통일이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 이 처음에 철조망 앞에 섰을 때 보다 더 많이 커졌다. 한 민족을, 하나의 땅 을 두 덩어리로 나누어 놓은 그 철조망이 하루 빨리 없어지기를 바라고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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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철조망 건너편 땅을 바라보았고, 다음 번에는 건너편 에 있는 땅을 당당하게 밟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자리를 옮겼다.
그 다음 나는 통일전망대에서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기 위해 망원경으로 마을을 들여다보았는데, 내가 본 곳은 마을 잔치를 하고 있 었던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굉장히 정겨운 풍경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곳이 북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 로 그저 우리나라 시골풍경 같았고 시골 사람들 같았다. 나는 북한이 남한과 는 전혀 다르게 지내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생활도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같은 민족이구나’라는 생각 이 들어 한편으로는 기쁘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유 모를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망원경으로 우리 민 족의 생활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팠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기 위해서 우리 민족을 둘로 나눈 전쟁을 한 것인지 왠지 모를 원망감이 생겨났다. 누구에게 원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수록 한반도 가운데에 놓여있는 철조망이 하루 빨리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더 커 져만 갔다.
나는 통일전망대에 3번을 가 보았지만 이번은 가장 뜻 깊게 많은 것들이 와 닿았다는 것을 다음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깨닫게 되었다. 전에 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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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는 아무런 꿈도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경찰이라는 확실한 꿈이 생기고 나서 왔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똑같이 보았던 철조망이였는데 이번에 보고나니 새로운 생각들도 많이 들었 고 새로운 면들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하였던 다짐들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이번에 온 통일전망대는 나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항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오직 국민을 위한 경찰’이었다. 하지만 통일전 망대에서 통일에 대하여 북한에 대하여 생각해본 후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 었다. 생활모습, 겉모습만 보아도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같은 민족인 북한 아니 내가 경찰이 되었을 때에는 북한과 남한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기를 바 라는 마음에 ‘한반도에 있는 모든 국민을 위한 경찰’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통일전망대에 다녀온 후에 가장 많이 변화된 점이 다. 누군가에게는 비록 관광지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통 일전망대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나의 꿈에 더 확실 히 다가가게 해준 은인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국가의 안보를 위 하여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번에 다녀온 통일전망대 에서 생각한 점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힘들 때마다 이번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국가의 안보를 위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이 더욱 간절하게 느껴졌다.
한반도 허리에 놓여있는 우리나라의 아픔의 선 휴전선, 그 선으로 인해 이 더운 날에도 국가의 안전 보장을 위해 땀 흘리며 고생하고 계시는 군인 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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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와 우리 국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경찰아저씨, 또 아직도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가족들을 생각하고 계실 이산가족 분들과 50년이 넘 는 세월 동안 홀로 서서 언젠간 다가올 통일을 기다리고 있는 철조망. 그 모 습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오는 것이 느껴진다. 통일전망대에서 본 것들 을 통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던 북한과 통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고 이 러한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또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계시는 군인, 경찰 분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 되었던 것 같다.
알고는 있지만 잊고 지내기 쉬운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들. 나도 잊고 지내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통일에 대한 관심, 국가 를 위한 관심들이 모두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 닫게 되었고 미래에 내가 사회인이 되었을 때에는 국가의 안보를 위하여 누 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될 것이다. 내가 국 가 안보를 위해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현재 우리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가슴 깊이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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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현장 체험소감 및 안보만화 감상문┃장려상┃
평화의 소중함
현 은 아 (경남 김해 능동중)
2013년 3월 29일, 북한이 전시상황을 선포하였다. 뉴스에서도 신 문에서도 북한의 위협과 전쟁에 대한 내용을 끊임없이 보도하였고 학교 를 가도 모두들 전쟁에 대한 얘기만 할 뿐이었다. ‘6·25전쟁처럼 끔찍한 전쟁이 정말 일어나는 걸까?’, ‘만약 모두를 파멸시킬 수 있는 핵이라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가진 북한과 전쟁이 일어난다면 모두가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전시상황이라는 생소한 단어와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북한의 도발이 잠잠해지고 전쟁이라는 단어가 잊혀져갈 쯤 나는 우연 히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대우조선해양을 견학할 수 있는 안보현장체험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10시까지 경찰서에 모여 서 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출발하였는데, 통영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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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매우 인상 깊었다.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우리나라가 대단하게 느껴졌고 영상을 보니 애국심이 절로 생기는 것 같았다. 통영에서 점심을 먹 은 후 처음으로 간 곳은 대우조선해양 옥포 조선소였다.
도착해서 제일 먼저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영상을 봤는데, 우리나라의 경 제발전과 함께 이룬 대우조선해양의 역사와 규모 등을 알게 되었다. 영상을 본 뒤에는 버스를 타고 조선소를 한 바퀴 돌며 조선소를 둘러보았는데, 실 제로 둘러본 조선소의 규모는 사회책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조선소보다 내가 상상했던 조선소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리고 그 커다란 조선소 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열심히 일하고 계신 조선소 직원들을 보며 대우조선해양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조선소가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우 조선해양에서 일하는 직원만 3만명에 달하며 연간 대형 상선 70척을 만들어 내고 해양 플랜트 4기 정도를 만들어내 연간 약 12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거 대한 규모의 조선소를 보니 우리나라가 조선강국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 다. 세계 2위의 조선소를 만들어낸 우리나라가 정말 자랑스럽고 멋지게 느 껴졌다.
조선소를 둘러보고 난 후 포로수용소에 갔다. 포로라는 단어 때문에 어두 운 모습을 생각하고 갔지만, 생각보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로 잘 가꾸어져 있 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처음으로 간 곳은 분수광장이었는데, 분수대 앞에 있 는 한국전쟁 참전국가의 국기들을 볼 수 있었다. 캐나다, 독일, 미국,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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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많은 나라의 국기들을 보았는데, 한국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분수대를 지나 입구인 탱크전시관으로 갔다. 탱크전시관 앞 의 꽃과 탱크가 마치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모습처럼 묘한 대조를 이루 고 있었다. 탱크전시관 안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회주의의 진영과 민주 주의의 진영을 살펴보았고, 디오라마관에서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생활 모 습, 폭동 현장 등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대략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볼 수 있 었다. 같은 민족끼리 포로와 국군으로 나뉘어 감시 하에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6·25 역사관에서는 잘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잘 알지 못했던 한국전쟁의 발발에서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치열했던 한국 전쟁의 모습을 잘 알 수 있었다. 대동강 철교에서는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 었던 전쟁의 처절하고 암담한 모습이 느껴져서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6·25 역사관을 지나서 포로 생포관, 포로 수송관 등을 살펴보고 포로 폭동 체험관에 도착하였다. 같은 민족끼리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어져 서로 헐뜯는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며 집단따돌림, 일진, 셔틀이 난무하 는 현재의 학교폭력이 떠올랐다. 절대다수의 반공포로와 소수의 친공포로가 서로 대립을 이루는 포로수용소가 현재의 학교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에 머 릿 속이 복잡해졌다. 포로 폭동 체험관을 지나 포로 설득관, 야외 막사 등 포 로수용소의 모든 곳을 다 살펴보았다.
포로수용소에서 전쟁의 끔찍한 모습을 보니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는 생각 이 들었다. 전쟁에는 오직 패자만 있을 뿐이다. 승자도 영웅도 존재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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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패자만 있는 게임이 전쟁이다. 아직도 남과 북 사이의 철조망은 그대 로 있다. 휴전을 한 지 약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통일에 접근도 못 한 채 개성공단 사건처럼 도발과 응징이 반복되는 6·25 전야와 같은 일들 이 되풀이 되고 있다. 나에게 포로수용소는 아직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픔 을 상기시키는 곳이었고, 평화의 소중함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는 좋은 곳이 었다.
안보 현장 체험을 다녀오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도 정말 많이 길렀고, 무엇보다 평화의 소중함이 크게 와 닿 았다. 현재의 나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평화, 즉 나라의 안보가 유지되고 있는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리고 북한의 계속되는 핵실험과 천안함 격침, 연평도 포격과 같은 도발에 경 각심을 가지고 안보의식을 확고히 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가지로 정말 느낀 것이 많은 뜻깊은 체험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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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아닌 도움
최 해 동 (충남 공주 주봉초)
6.25전쟁 이후 38선으로 나뉘어 다른 국가가 된 한국과 북한. 지구 에 200개가 넘는 많고 많은 나라들 중 분단국가는 우리나라와 북한 뿐이 다. 이는 참 안타깝고 부끄러운 현실이다. 게다가 지금 이산가족들은 다 시 상봉하여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화통일을 원 하는 시점에서 북한은 핵실험, 미사일 발사와 같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키고 있다. 즉, 한국과 북한은 통일을 위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같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만 하고 싸우고 있다. 그러다 우연치 않 게 보게 된 <병만도사와 친구들>이라는 만화를 통해 북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자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친숙한 연예인인 김병만과 그 제자들을 통해 안보에 대 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기 쉽게 만화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굉장히 신선 했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라 그런지 비록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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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을 수 있었다.
만화 제1편에서는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위상과 핵폭탄, 핵과 관련된 법 등 을 알기 쉽게 알려주었다. 우리나라가 더블 A그룹에 속하며, 과학 기술력과 국방력이 상위권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특히, 범죄 검거율도 높아 치안분야에 있어서 OECD국 가 중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경 찰이 중요한 직업이고 우리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만 화에서는 핵과 사이버 테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근에 북한이 3차 핵실험까지 해서 모두 성공하였는데 이 책을 보기 전에는 핵이 단지 과학과 관련된 좋은 것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핵이 정말 무섭고 위험한 물 건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91년에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하였는데, 어째서 핵실험을 하여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지 정말 궁금하다. 핵은 그렇게 장난으로 다룰 물건이 아닌데 말이다.
만화 제2편에서 ‘꽃제비’라는 탈북을 한 어린 아이들과 북한의 우리와 같 은 학생들의 생활에 대해 알려주었다. 북한에서 우리나라에 오려고 북한을 탈출하려다 걸리면 수용소에 갇혀서 고문도 받고 힘든 일까지 한다고 한다. 얼마 전 사회시간에 신체의 자유에 대해 배웠다. 즉, 우리나라 국민은 미국 이나 일본이나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지만, 북한은 다른 나라로 가려다 걸리면 고문은 물론이고 죽음까지 당한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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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지 않는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공산당은 다 저런가?’라 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외화벌이’도 나왔는데 어린이들을 중국의 관광객 앞에서 춤을 추 고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것은 아동학대에 포함되는 아주 못된 짓이다. 그 리고 북한의 어린이 5분의 1은 영양 부족 상태에 있다고 하는데, 북한은 무 기에만 돈을 들이고 북한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정 말 북한 어린이들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화 제3편에서는 우리의 친구 병만도사가 아주 속 시원하게 지하도사를 무찌르는 장면이 나왔다.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3편을 읽으면 서 시원한 마음도 들었지만 조금은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바로 남·북한의 경제력 비교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우리나라는 경제 력 차이가 무척 많이 나는데, 북한은 경제력이 무척 떨어져서 살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다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북한에 식량 같 은 것을 제공해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불현듯 나와 비슷한 아이 들이 굶주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러한 생각이 나를 더욱 답 답하게 만들었다. 빨리 북한이 주민들의 생활을 생각하고 주민들을 위한 여 러 가지 법이나 제도를 마련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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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만화를 읽었을 때는 단지 북한에 대한 내용만 다루고 있었다고 느꼈지만, 두 번째 읽을 때 ‘사이버 테러’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며간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이버 테러는 주요 기관의 정보시스템을 파괴하 여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는 신종 테러이다. 지난 3월 20일에 KBS, MBC, YTN, 농협 등 6곳에서 사이버 테러가 있어 전산망이 마비되어 큰 어려움 을 겪었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그 때 의문이 들었던 것이 ‘사이버 수사대’였 다. 북한의 소행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군대에서 수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 지만, 경찰이 수사를 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다. 정말 여러 가지 일 들을 경찰이 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힘들겠다’라는 생각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우리나라를 지키는 것 즉, 안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 각해 보게 되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 이 생각났다. 사실 나부터 평소에 안보에 대해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제부터라도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상대 방에 대해 자세히 알고 미래에 있을 적에 대해 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친구들에게도 안보에 대해 알려주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겠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는 것이 우리나 라를 지키고 희망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 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시는 모든 분들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분들의 노력 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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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 수기
최우수상
우수상
엄마를 부르는 엄마 박○○(부산)
극과 극에서 바뀐 나의 삶 전○○(서울 강남구)
자유의 덫 지○○(서울)
장려상
분단의 사생아에서 통일 전문가를 꿈꾸며 주○○(서울)
새로운 시작 박○○(강원)
이제, 지난 삶의 슬픔을 즐거운 추억에 묻었다. 송○○(서울)
북한이탈주민 수기 ┃최우수상┃
엄마를 부르는 엄마 박 ○ ○ (부산)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아픔들이 가끔씩 연기처럼 피어올라 행 복의 시간을 짓눌러버릴 때는 조용히 엄마를 불러 봅니다. 밥퍼 공동체에 나가 연로하신 어른들께 따뜻한 점심을 나누는 봉사활동 에 참여할 때도 그리움이 솟구쳐 소리 없는 외침으로 엄마를 불러 봅니다. 같은 땅, 같은 하늘인데도 남남으로 살아야 하는 남과 북의 현실 때문 에, 저를 비롯한 수많은 이산가족들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인 줄 알면서 도, 내가 태어난 고향땅, 북쪽 하늘을 향하여 그리움의 함성을 외치고 있 습니다.
저는 지금 예쁜 가정을 꾸며놓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연하의 남편과 상처 난 내 가슴을 재롱으로 어루만져 주는 세살짜리 아들이 있고, 이웃 에서 따뜻한 사랑을 나눠 주시는 할머님들이 계시고, 또 마음 열어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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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 수기 ●●●
을 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기에, 마음만은 아주 넉넉한 큰 부자로 살며, 행 복을 노래하고 있답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태어난 함 경북도 산골마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꿈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새 로운 삶을 누리고 있기에, 과연 꿈은 아니겠지? 볼을 꼬집어보곤 합니다. 그 래서 저는 건강이 허락되고 힘이 닿는 데까지 봉사활동에 이 한 몸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3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난 저는 부지런한 부모 님 덕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아주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목숨을 이어왔기에, 자식에게는 절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고, 이 후 성인이 되어서는 산에서 벌목하는 일을 맡아 두세명의 일을 할 정도로 뼈 를 깎는 아픔을 참으면서 열심히 일을 한 결과, ‘세포비서 ’ *라는 직책을 임 명받게 되어 이웃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그 동네에서는 좀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제가 7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는 청진 제강소로 배치를 받아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열심히 일을 하셔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 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했던 우리 가정에 벼락이 내렸습니다. 제가 20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저 당으로부터 임명받은 직무를 다 *세포비서 : 당 세포는 5~30명으로 구성되는 당의 최말단 조직이며, 당 세포비서는 이 조직의 책임자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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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신 것이 뇌출혈이라는 큰 병을 불러 오게 되고, 현장에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허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남다른 가족 사랑으로 보살 펴 주시던 아버지가 떠나고 나니, 그 빈자리가 너무도 컸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언니는 시집가고 없었으며, 오빠는 평성이라는 곳 에서 살고 있었고, 남동생 둘은 군에 갔으니, 집안일은 몽땅 내 차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겨울철이 되어 땔나무를 해오는 일은 정말 너무너무 힘든 일이 었습니다. 날마다 톱과 도끼를 들고 산에 올라 가녀린 손에 피를 흘려가며 나무를 자르고 발이 부르튼 아픔도 잊은 채 등짐을 메고 내려와야 했으니,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죽하면 시집을 가게 되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 었고, 급기야 23살에 결혼을 하였는데, 오히려 그때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 었던 일들을 겪게 되면서 저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홀로 되신 시어머니에 시누이 둘과 시동생이 함께 사는 대가족으로 국가 에서 주는 배급량으로는 늘 배고픔에 허덕여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삶에서 도 결혼 1년 만에 예쁜 딸이 태어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 쁨도 잠시 시어머니가 동맥경화와 영양실조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 지독 하게 가난한 살림살이에 갓 태어난 예쁜 딸아이는 뒷전일 수 밖에 없고 시 어머니 병수발만 해도 잠시 엉덩이를 붙일 시간조차 없었고, 힘든 배고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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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눈물도 흘려 보았습니다. 신세 한탄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시집올 때 해 온 예단까 지 팔아가며 시어머니를 극진히 돌보았으나, 딸아이의 첫돌이 되는 즈음 1년 8일 만에 하늘나라로 가시고야 말았습니다.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단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내지 못하시고 배고픔에다 견딜 수 없는 아픔만 겪으 시다 떠나신 시어머니가 너무도 불쌍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때는 ‘어쩌면 고 통 없는 세상으로 떠나신 것이 시어머니에게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고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불쌍하게 여길 시간도 없이 내 예쁜 딸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 입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병원을 찾아 갔는데, 의사는 괜 찮다고 하면서 치료를 해 주지 않았고, 금방 설사가 멈출 거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 하는데, 엄마인 저로서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예전에 아버지가 알고 지내시던 ○○구역 병원 원장을 찾아가 신분을 말하여 겨우 입원을 할 수 있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버렸습니다. 영양실조로 인해 엉덩 이부터 썩어 들어가는 무서운 병에 걸려 결국 태어난 지 1년 7개월 만에 딸 아이는 하늘나라로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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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힘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래도 예쁜 딸이 있다는 것만으 로 기쁨도 있고 희망도 있었기에 버틸 수가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렇게도 큰 고통을 주는 것인지? 무슨 죄가 그리도 많은 것인지? 모든 것 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는데? 의사의 관심만 있었어 도, 조금 빨리 치료만 했었어도 분명 살릴 수가 있었을 텐데 너무나 원망스 러웠습니다.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거기까지만 고통을 주고 말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당에서는 전국적으로 식량배급을 줄이기 시작하 였고, 나중엔 1년에 몇 차례만 식량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996년부 터는 완전히 배급이 끊어져 그때부터는 굶어 죽는 사람이 수도 없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숨이 붙어있다는 것조차 신기할 정도로 배고픔을 이 겨내기가 너무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풀뿌리 나무껍질이라도 먹기 위해 온 갖 짓을 다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내 마음을 달래주는 둘째 딸이 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이 없으니 아기에게 먹일 젖도 나오지 않았 고, 거기에다 어린 시누이 둘과 시동생을 데리고 살아야 하니 정말 앞이 막 막했습니다. 목숨은 이어가야 했고, 특별한 방법도 없고, 마침내 생각해 낸 것이 이웃에서 술을 구해 친정동네에 가서 팔아 남는 차액으로 옥수수를 사 면 식구들 목숨은 살릴 수 있겠다 싶어 동네를 다니며 술 40Kg을 구해 안 전원을 피해 친정동네로 가던 중 결국 안전원한테 붙들려 술 40Kg을 몽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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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주세요.” “도로 주세요.” “안전원 동지, 제발 도로 주세요.” 하면서 매달려 보았습니다. 돈은 나중에 주기로 하고 이웃에서 구해간 술이라 안전원에게 빼앗기고 나면 몽땅 빚으로 남게 되는 것이니,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발 주세요.” “제발 도로 주세요.” 하며 애원을 했습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발길 에 채이면서도 매달려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앞이 안보였습니다. 목숨을 이어가기도 힘이 드는데, 빚까지 안고는 살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그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 빚을 갚지 못하면 집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어떻게 방법이 없었습니다. 내가 마냥 버틸 수가 없었습 니다. 1997년 4월, 드디어 결단을 내렸습니다. 세살 된 나의 예쁜 딸과 남편, 시 누이 두 명과 시동생을 두고 무작정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 지 않으면 집은 빼앗길 것이고, 식구들은 힘들 수밖에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저의 뱃속에는 9개월 동안 자라온 태아도 있었습니다. 정말 아무 생 각이 없었습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날까지 그냥 살아 보는 수밖에 그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요? 막상 집을 나오고 보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냥 터덜 터덜 걸어서 청진역으로 나갔더니, 거기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피를 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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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는 이야기를 듣고는 귀가 번쩍 띄었습니다. 피를 팔아서라도 살아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평안북도 신의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신의주역에 도착해서 알아보니, 어디에서도 어떤 누구도 피를 사는 사람 은 없었고, 중국에다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 니다. ‘꽃제비 생활을 할지라도 중국으로 가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 ‘민족의 반역자는 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중국은 절대 안 가겠다고 거절을 하였 지요. 그때부터 신의주에서의 고통스런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모르다 보니, 4일째 굶을 수밖에 없 었고, 굶다보니 도적질하러 나서게 되어 부채마*를 훔치러 갔다가 한 뿌리 도 못 훔치고 금방 잡히게 되었으나 임신부라고 사정하면서 빌었더니 그래도 인정 있는 사람이었던지 혼내지 않고 부채마를 조금 주면서 보내주더군요.
그 후로 그럭저럭 목숨은 이어가면서 근근이 버티어 1달쯤 지났을 때, 해 산 기운이 느껴져 왔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철길 옆에 서 셋째를 해산하게 되었는데 아무 것도 없는 벌판이라 주변에 버려진 비닐 방막(비닐하우스)을 주워 와 바람막이를 해놓고 혼자서 아이를 낳고 태를 끊었습니다. 그래도 5월의 찬바람(남한의 2~3월 날씨)정도는 참을 수 있었 습니다. *부채마 : 백합목 마과에 속하는 덩굴성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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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앳된 한 여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불쌍히 여겨 미역과 쌀을 좀 갖다 주었는데, 그것조차 길가던 꽃제비들이 도와주겠 다고 하면서 다가와서는 몽땅 훔쳐가고, 심지어 끊어둔 아기태마저도 싹쓸 이 해 가버렸습니다. 아기를 해산하고 2시간쯤 지났을 때, 병원에서 나오더니, 산모 걱정을 하 기 전에 “아기태는 어디있나?” 하고 묻기부터 하더니, “꽃제비들이 다 가져 가서 없다.” 고 하니까, 안색이 싹 변하면서 일단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는 꽃제비에다 아기태도 없는 여자라고 엄청 천대를 하더군요. 너무나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이상 버티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 는 그곳에서는 도저히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는데, 그 보다 더 큰 고통이 찾아 왔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는 처참한 환경에서 태어난 예쁜 셋째 딸이 영양실조로 인해 시름시름 아파하더니, 태어난 지 20일 만에 그만 하늘나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슬픈 것도 몰랐습니다. 울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병원 문을 나서야 했습니다. 산후 몸조리를 못한 상태라 몸 은 퉁퉁 부어있어 신발도 신지 못할 지경인데, 병원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것 입니다. 꽃제비 생활은 또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어느 안개 낀 아침, 너무나 배가 고파 풀이라도 뜯 어 먹겠다고 남신의주역 앞 미나리 밭에 무작정 뛰어 들어갔다가 경비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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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 붙잡혀 벌벌 떨고 있는데, 다행히 그 경비원도 병색이 짙은 내가 너무 불 쌍하게 보였는지 미나리 한 움큼을 주면서 빨리 가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허기가 지고 힘이 없어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참 길을 걷다가, 문득 ‘죽자’라는 생각이 들어 신의주에서 백마로 가는 철길 위에 누워 기차 오기만 을 기다렸지만, 끝내 기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도둑 질해서라도 살아야지, 바보처럼 왜 누워 있느냐?”고 하면서 주먹밥과 된장 을 주고 가길래 허기는 약간 면할 수 있었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멍하니 하루를 지냈습니다.
다음날, ‘정말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야겠다.’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만 도둑질하는 꽃제비를 만나 ‘이 여자를 따라 다니면 도 둑질해서라도 살 수는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며칠 따라다녔다가 도둑 질 한 번 못해보고 도둑누명을 쓰고 안전부에 끌려가 심하게 취조를 받기도 했습니다.
집을 떠난 꽃제비 생활은 정말 비참했습니다. 말 그대로 인간의 모습이 아 니었던 것입니다. 꽃제비는 구호소에서 틈만 나면 잡으러 다니기 때문에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해 이곳저곳 옮겨 다닐 수밖에 없으니, 마을마다 집집 마다 다니면서 빌어먹어야 했고, 때로는 3시간씩 걸어가 산에서 나무를 해 서 팔기도 했으며, 철길 옆(철길 옆은 석탄, 오줌, 똥, 기름, 자갈 등 엄청 더 러움)에서 옥수수알도 주워 먹고, 염전에서 사또바가지*를 밀거나 사금을 *사또바가지 : 소금을 나를때 사용하는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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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 거라고 종일 모래 퍼내기와 석탄으로 구멍탄 찍기도 했으며, 겨울에는 잘 곳이 없어 논에 쌓아둔 북떼기더미(낟가리)를 헤집고 들어가 몸을 웅크리며 추위를 이겨야 했고, 비올 땐 남의 집 굴뚝 밑에 앉아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말 못할 서러움도 겪어야 했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꽃제비 생활에다 집 없는 설움, 배고픈 설움 에 도저히 바깥 생활은 더 이상 못하겠다 싶어 오빠를 찾아 갔으나 오빠는 병으로 이미 하늘나라로 가고 없었고, 또 엄마를 찾아 가니 살기 힘들어 하 는 언니 집에 얹혀살고 있더군요. 언니는 “어려운 살림에 엄마와 같이 있는 것도 힘든데, 너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다.” 고 내치는 바람에 또 다시 꽃제비 생활로 되돌아가 목적지 없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간리역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그 간리역이라는 곳은 평 양으로 가는 길목이라 사람도 많이 다니지만, 꽃제비 천지였습니다. 화장실 에 가려고 해도 역전 안에서 1시간을 나가야 하고, 여름날에는 엄청 꽃제비 들이 북적대는 곳이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서 아예 웃옷은 벗고 있어야 하는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런 간리역에서 1년 정도 지낼 즈음에 그만 열병으 로 앓아눕게 되었죠. 사람이, 아니, 꽃제비가 아프다니까 모두가 외면을 하 더군요. 다행히 며칠 전에 다소 친해진 어느 꽃제비가 다가와 자기가 아는 집이라고 데려다 주었는데, 역시 거기도 돈 없이는 아무것도 도움을 받을 수 가 없더라구요. 입던 옷까지 다 팔아 숙박비와 약값에 주고 나니 알몸이 되 었고, 결국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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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자, 입을 옷이 없어 구멍이 숭숭 뚫린 솜옷을 입고, 영양실조에 열병 후유증까지 겹쳐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몰골로 여기저기 다니 는 중에 마음 착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이렇게 죽으면 바보다. 도둑질해서라도 먹어야 한다.” 라고 하면서 마누 라 몰래 고구마를 도둑질해서 나에게 주었지만, 너무 힘이 없고 어지러워 걷 기조차 힘들어 몇 발짝 들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가야만 했고, 이곳저곳 떠돌며 사람 아닌 사람으 로 살았던 그때를 떠 올리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일하고 싶어도 할 일도 할 곳도 없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고자질해야만 하고, 옥수수라도 좀 많이 가졌다 싶으면 고자질하는 세상, 그곳이 바로 울타리 없는 감옥이었 던 것입니다.
이렇게 먹지 못하고 병약한 몸으로 떠돌다가 엄마가 보고 싶어 다시 언니 집을 찾아 갔는데, 엄마는 이미 안계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오랫동안 굶다보니 영양실조로 병이 생겨 하늘나라로 떠나 가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갈 데도 의지할 곳도 없어졌습니다. 하는 수 없어 청진에 있는 집을 찾아 갔 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딸이 꽃제비가 된 엄마를 보면 안 된다면서 “중국 에 가서 돈 벌어 오는 줄 알았는데, 고작 꽃제비 생활을 했느냐?” 하며 받아 주지 않고 그대로 내쳤습니다.
더이상 버틸 힘이 없고 갈 곳이 없는 처참한 신세에 떠돌이 생활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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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었으며, 추위에 버틸 자신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구호소를 찾아 갔습 니다. 그곳에는 중국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드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 다.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제라도 중국가면, 지금 생활보다야 낫겠지.” 라는 생각으로 중국행을 결심했는데, 그것도 또 다른 시련을 주더군요. 중국을 가기위해 먼저 찾아간 곳이 함경북도 ○○에 있는 이모 댁이었죠.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중국으로 떠나려 했는데, 재워주기는커녕 곧바로 쫓 겨났고, 그 길로 떠돌다 너무나 배가 고파 시장에서 돼지국밥 국물을 얻어먹 고 있을 때, 슬그머니 다가온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집에 가서 일을 좀 도와 주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따라갔더니, 중국으로 사람을 팔아넘기는 브로커 였습니다. 어차피 중국으로 갈 작정이었으니, 잘 되었다 싶어 다른 것을 생 각할 겨를도 없이 아주머니를 얼른 잡아 중국으로 팔려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팔려 간 곳이 중국 청도였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를 판 댓가로 중국돈 200원을 받아 옥수수 200Kg을 구 입하더군요. 청도에서는 고생은 했지만 북한에서 보다 살 만 했습니다. 그런 데 참 이상했습니다. 꽃제비 생활을 할 땐 집을 떠나 있어도 그렇게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타향에 살다 보니 고향이 너무너무 그리워 졌습니다. 온돌방에서 잠을 실컷 자고도 싶고, 옥수수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싶어져 서 청도에서 2년쯤 지날 정도에 타향에서 힘들게 일해서 꼬박꼬박 모은 돈 을 가지고 다시 북한으로 갔으나, 내 고향 북한은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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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습니다. 여전히 배고픔을 참지 못해 집을 나와 생활하는 꽃제비들은 득 실거리고,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나오고, 정말 비참했습 니다. 그나마 중국에서 가져 온 돈으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는데, 6개월쯤 되 었을까 싶은 어느 날, 안전원이 들이 닥쳤고, 그때부터 노동 단련대에 잡아 넣겠다고 협박을 하면서 물품을 요구해 오는데, 참으로 후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고향이 그리웠지만, 괜히 왔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더라구요. 배고픔을 어떻게 할 수도 없거니와, 안전원의 협박도 싫고, 이미 호적이 없 어진 상태라 북한에 더 있을 수 없어 다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두 번째 찾아간 중국 생활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국 생활은 북한에서 보다는 나았습니다. 낯선 타향 땅에서 갈 곳 없이 떠돌더라도, 북 한의 꽃제비같은 생활을 할지라도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러다 생활이 조금만 나아져도 고향생각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힘들고 배고팠던 북한에서 의 기억은 어디가고, 철없던 시절 뛰놀던 뒷산 생각, 눈오면 산썰매 타고, 여 름날 샘물터에서 멱감고서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행복해 하던 생각, 산나 물 산열매 뜯으러 산에 오르던 추억어린 생각들이 새록새록 피어올라 중국 생활을 자꾸 자꾸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고향생각, 옛 추억이 꼬드겨도 모든 걸 다 버리고 북한으로 가는 것만은 결코 하지 말자고, 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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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를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조선족 누군가가 다가와서는 남조선 이야기를 하길래, 두려움과 망설임은 있었지만, 내가 살 길은 같은 동포가 있는 남조선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면서 ‘아무리 미제괴뢰들이 괴롭 히더라도 북한에 다시 가서 꽃제비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곳에서 시민권 도 얻고, 주거지를 가지고 싶고, 자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생겨 고생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면서 제3국을 거쳐 드디어 낯선 남한 땅, 대한민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이곳이 정말 남한이란 말인가? “아버지 장군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내 조국이라고 그토록 믿고 있었던 북 한에서 ‘남한은 헐벗고 굶주려 사람 살 곳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도 선전을 했었는데, 이 모두가 감쪽같은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말이 안 나왔습니다. 놀랍도록 발전한 대한민국! 북한에서 온 우리를 반겨주는 대한민국! 놀랍고, 감사하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식물도 옮겨 심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인데, 사람이 어찌 낯선 곳 에서 발붙이기가 쉬웠겠습니까? 아무리 먹는 것, 입는 것, 쓸 물건이 풍부한 데도 어려움이 너무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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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선 상상도 못하던 모든 것을 얻었지만, 너무도 다른 세상, 너무나 큰 차이가 느껴지는 남한이기에 적응하기가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낯선 생활에 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 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간의 고통을 추억 속에 접어 두어도 될 정도로 행복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살면서, 오직 조국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도, 조국은 나를 버렸습 니다. 명령을 어기지 않으려 했는데도, 기어코 나를 버렸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같은 동포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 그 래서 북한이 미웠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납니다. 한국에 온 지도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불안감 속에서 지나온 하루하루가 이제는 행복한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시댁 부모님과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는데도, 듬직한 남편과 결혼을 하여 아주 똘망똘망한 아들까지 태어났으니, 분에 넘치는 행복이 아닐 수 없습 니다. 예전의 제 모습을 생각해 보면, 웃어 본 적이 거의 없었고, 밝은 얼굴이 결 코 아니었습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아무 생각도 행복도 모르는 표 정 없는 동물과 같았습니다. 이제는 행복을 알았습니다. 늘 웃을 수 있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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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함께 지내는 집이 있고, 가족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 있 습니다. 이뿐입니까? 늘 가까이서 챙겨 주시고, 상담해 주시고, 맞벌이로 바쁜 저 희 부부를 위해 아파트 관리비 명세서가 나오면 서로 앞 다투어 관리비를 내 어 주시는 이웃 할머님들이 계시는가 하면,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향수 를 함께 하면서 힘을 주시는 새터민 언니, 동생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저는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남한 땅에서 얻은 행복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을까 생 각해 봅니다. 나보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람만 보면 그냥 주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장기기증도 했고, 밥퍼에 나가 봉사도 하고 있으며, 노인복지관을 찾 아 봉사를 한답니다. 이러한 작은 나눔이 내 삶을 바꿔준 대한민국에 보답 할 수 있는 작은 나의 할 일이고, 나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결코 멀지 않은 곳, 내가 태어나 내가 살던 곳, 그 북한 땅에서 피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난 두 딸과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딸 생각에 마음 아 파하는 이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이 딸자식의 행복을 지켜 볼 엄마를 조용히 불러 봅니다. 남북통일이 되는 날, 이 행복을 함께 하고 싶어서......
안보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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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 수기 ┃우수상┃
극과 극에서 바뀐 나의 삶 전 ○ ○ (부산)
나는 살아서는 갈 수 없고 죽어서야 갈 수 있는, 아니 통일 되어야 갈 수 있는 땅, 독재가 판을 치는 땅, 세계 최악의 국가 북한 땅에서 60년 평생을 살다 1999년 12월 28일에 쫓기듯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서 떠돌이 생활했고 2003년 7월 27일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세상 부러움이 없이 항상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60년을 살다가 인생말년에 새로운 인생길 을 찾아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어느새 10년이란 세월이 소리 없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내가 사는 부산만 하여도 많은 것이 변하여 내가 왔을 때에 처 음 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양중심의 도시로, 세계관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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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변모되는 모습을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 벅차옴을 어찌할 수 없 습니다. 그저 이 좋은 땅에 왜 젊어서 오지 못했을까? 다만 10년이라도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이 후회 되곤 한답니다. 나는 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사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보고 느끼 면서 지난 과거와 아니 북한사회와 대한민국을 비교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 고 앞으로 이 조국을 공산주의자들 손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치려합니다.
나는 강원도 ○○군 ○○면 ○○리에서 살다가 1938년에 보국(징용)대에 끌려가서 청진-나진 간 철도 공사를 끝내고 탄광에서 막벌이꾼으로 일하는 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1940년 아오지에서 출생하여 소학교 및 석탄 대학을 졸업했고, 군에 갔다 와서는 정치대학,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안전 일꾼 당 일꾼으로 사업하면서 저들에게 충성한다고 하면서 있는 열성, 없는 열성 다 했건만 결국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내가 공부를 해서 무얼 합니까?]
나는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큰 딸과 땅 속에 묻은 자식들, 또 보위부 감방에서 찬이슬로 사라진 내 아들의 눈물어린 하소연을 지금도 잊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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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북한에서의 교육의 목적은 나라의 인재양성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장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는데 있다고 김일성은 휴전 직후 전국 교육 일꾼 열 성자 대회에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육 사업이나 인재 양성사업에서 실력 제일주의로 하는 것이 아 니라 성분 제일주의, 가문 제일주의로 하지 때문에 제 자식이 아무리 똑똑 해도 중등교육을 마치고는 노동현장에 진출하여 좋든 싫든 마음에 있든 없 든 당에서 배치하는 곳에서 여생을 마쳐야 하는 것이 오늘의 북한의 현실입 니다. 때문에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 대해 기대감도 찾아 볼 수 없고 자식에 대한 미련도 없고 그저 한다하는 말이 “어떻게 마음대로 됩니까? 나라에서 다 관장 하고 나라에서 배워주고 나라에서 일 시키는 데요. 그저 우리 부모는 자식을 키워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나라에 바치는걸요.”라고 흔히 이야기 한답니다. 이것이 북한에서 우리네 부모들이 흔히 쓰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제대한 후 1965년부터 군 사회 안전부 주민등록과 지도원 으로 일하면서 그래도 내 자식들은 안전원 가족이라 하여 학교에서도 대우 를 받으면서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1968년 2월 18일 소집일이어서 군에 출근했더니 친구들이 나 모두들 부부장으로부터 나의 눈치를 살피며 곁을 주지 않는 것이 분위기 가 썰렁하며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부장이 나를 보고 강변 건너편에 있는 여동생의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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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가면서 혹시나 가스 질식사고, 아니면 매제가 자동차 운전기사인데 사고라도 난 것일까? 하면서 급히 달려갔더니 출입문과 창문 일체에 빨간 딱지를 붙여놓고 안전부 경비원들이 경비를 서는 것입니다. 순간 내 머리는 방망이에 얻어맞은 듯이 어지럽고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지난 밤 두만강을 도강한 사람이 있다 하더니 그것이 바로 내 여동생과 매제 였던 것입니다. 그 후 3년동안 안전부에서 나가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974 년에 당 중앙에서 군당 책임비서와 군 사회안전부(현재 군 보안서) 부장에게 저를 안전부에서 내보내지 않을 것을 구실삼아 유일사상체계 위반으로 처벌 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가정혁명화'에 반역했다며 스스로 안전부를 나왔습니다. 그러니 식당에서 창고장으로 일하던 집사람이 식당에서 나오고 소년단 단 위원장을 하던 저의 딸도 떨어져 평학생으로 지내게 되고 나 자신은 감시 속 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탄광 채탄중대 부문당 비서, 굴진중대 부문당 비서, 영구화 중대 부문당 비서까지 하면서 학습회 강사, 강연회 강사로 겸임하여 일했습 니다. 그런데 1980년대 중엽 큰애가 중학을 졸업하고 ○○ 교원대학에 추천 받 아 시험을 쳤는데 저녁에 와서 한 자도 쓰지 않고 빈 백지만 내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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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험을 치지 않고 빈 백지만 내고 왔느냐?”고 애비가 나무라니 “아버 지! 내가 공부해서 무얼 합니까? 나 같은 철직자 가족이!”라고 말하면서 소 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공부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냐?” 했더니, “시험을 아무리 잘 쳐 도 쓸데없다. 대학교 문턱에 군인 안전원. 당 경제일꾼들이 부지런히 드나드 는데 우리 같은 탄광노동자의 출신이 게다가 아버지가 철직되었는데, 그 자 식이 어디 가서 무얼 한답니까?” 하면서 포기하고 탄광에 들어가 갱내 권양 기 운전공으로 일 하는 딸을 쳐다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사실 나는 북한 땅에서 안전부 주민등록과에 있으면서 내 손으로 한 개 리 그 안에 있는 십여개의 중소탄광을 맡아 요해 사업*을 하면서 전체 주민들 에 대해 일제 강점시기, 3년간 전쟁시기, 전후 복구 건설시기 등으로 구분하 여 그 사람의 부모와 본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요해하여 해당 당 위원회에 서 현재 그 사람이 사상동향까지 첨부해서 주민 대장을 작성했습니다. 거기 특기란이 제 주민대장에는 철직자라고 밝혀져 있고, 저의 자식들에 게는 철직자 가족이라는 오명이 일생 붙어 다닙니다. 이것이 전쟁준비를 위한 것이며 이 대장에 근거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처 단할 사람은 따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1965년 1월 20일에 교시를 내렸다 하여 처음에는 당조직 에서 직접 진행하면서 1월 20일 그루빠(그룹) 라고도 했고 그 다음에는 안전 부 공민 등록과에 배속되어 이것을 주민등록과로 바꾸었습니다. 나 자신은 그때까지 그저 세상살이가 그런가보다 하면서 살았는데 여기 *요해 사업 : 요 해라는 말은 '깨닫다, 알아내다, 파악하다' 는 뜻으로 아사자 발생에 따른 식량 사정 등을 조사하는 것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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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모들은 특히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들에 북한과는 달리 최선을 다하며 목표를 가지고 자식공부를 시키는 것을 보고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 면 자식들을 공부라도 온전히 시키겠건만 괜히 김일성이요, 김정일이요 <당 을 따라 천만리, 장군님따라 천만리>하면서 충성하다가 이 꼴로 자식을 셋 이나 땅에 묻고 온 내 자신을 후회한답니다. 왜 대한민국에 대하여 좀 더 빨리 알지 못 했을까? 말입니다. 북한은 웬만해서는 자식들 공부를 제대로 시킬 수 없고 희망이라는 것은 바라 볼 수도 없으며 다만 독재자들의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길만이 살길 입 니다. 특히 북한은 권력을 쥐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으며 숨도 제대 로 쉬지 못하는 오늘 독재 국가의 전형입니다.
[북한의 따왕(대왕) 김정일]
북한은 상호 간 남에게 죄를 만들어 씌워가면서 신임을 얻고, 남보다 먼저 보위부나 당위원회의 문고리를 쥐는 자가 이기는 세상입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이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 나 라들이 일시에 무너져 사회주의 진영은 완전히 멸망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계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뚝 솟는 시기에 북한에서의 인민 생활은 점점 곤두박질하여 산에 나무란 나무는 다 껍질을 벗기고 인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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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 가정에서는 막내아들이 인민군 영웅중대에서 복무 하다 자기 지 휘관들을 구타하여 군대 생활은 못하고 생활제대 되니 보위부에서는 저런 사람이 어찌 대중 앞에 나서서 말할 수 있느냐 하며 시비를 걸어서 결국은 당 비서에서 해임되어 갱 담당 노동안전 지도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최고 권력 기관은 당이며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당의 영도를 철저히 보장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당 일꾼을 목을 자르는 것이 바로 안전 보위부 일꾼들입 니다. 이 사람들이 시비를 걸면 그 누구든 빠져 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 그들의 하라는 대로 하고야 마는 세상이 바로 북한입니다. 김일성이 죽은 후 북한의 식량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심해져 나라에서 주 는 배급은 완전히 중단되어 인민들은 굶어서 여기저기에서 죽어나갔는데 이 시기에 큰딸과 큰아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아이를 산에 갔다 묻은 뒤 가정에서는 이렇게 살다가 온 가족이 몰살당한 다면서 중국으로 간 고모한테 가서 구제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2월에 우리 부부는 막내아들을 데리고 종성에 갔습니다. 그 당시 는 겨울이어서 저녁 7시만 되어도 깜깜하여 어둠을 타서 중국 땅에 들어가 낮에 정찰해놓았던 산 능선을 타고 먼 친척집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10일간 머무르면서 동생 집에 전화로 연락하여 조카를 만나 중국 돈으로 1,000원을 받아가지고 3월 초 두만강을 얼음타고 건너 가다 잠 복근무를 서고 있는 경비대 대원에게 잡혀 경비대 중대부로 압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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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팬티만 입고 검열을 받았는데 몸수색에서 팬티 속에 있는 중국 돈 1000원이 발견되어 압수당했습니다. 나는 중대부에 들어가 우리를 조사한 공책을 소각해 치우고 그 1000원은 우리 나누어 갖고 우리를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400원을 갖고 경비대 중대장과 보위지도원이 300원씩 가 지기로 하고 풀려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의 막내아들은 보위부 경비대 대원들을 끼고 중국을 넘나들면서 소소한 장사를 하면서 생활했는데 나쁘다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모른 척하고 지냈습니다. 위험하니 그만두라는 말도 못할 형편이었고 내가 아버지로서 자식을 먹여 살릴 수도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다 1999년 2월에 일이 터졌습니다. 예전에 누구한테서 팔아주겠다고 하면서 평풍을 가져다가 중국에 들어가 서 팔아다가 돈을 나눈다는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우리 집사람과 막내아들이 보위부에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이 연락이 내가 다니는 탄광보위부에 전해져 그때부터 나는 보위부에 끌 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구하려고 애쓰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다 시켜서 가족을 살리기 위해 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나는 당원이어서 자백서는 쓰지 않고 비판서를 쓰고 겨우 풀려났으나 감 시는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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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비판서를 보고 안전원은 욕하면서 이 비판서를 쓰고 군중 앞에 나가 읽으면 군중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으며 이것은 제 잘못을 나라에 아니 당에다 뒤집어씌우는 격이 아닌가라며 비판서를 배반했으며 나의 주민대장 문건에는 ‛반역자’라는 세 글자가 더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북한의 간부들이라하는 권력가들은 자기들이 김정일에게 신 임을 얻기 위해 죄를 부풀리거나 조작해 내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후 보위부에서 온성 감방에 있는 내 처와 자식을 군으로 데려온다면서 쌀 5kg과 돈 1000원을 당장 오늘 중으로 내라는 것입니다. 없다는 나의 답변에 가정 기물을 매대에 가서 팔아서라도 무조건 가져 오 라는 겁니다. 그리하여 나는 집에 옷가지와 물건들을 눈물 매대(눈물을 흘리면서 가정 기물을 사장에 내다 판다하여 백성들이 붙인 이름)에 팔아 겨우 돈 1,000원 과 쌀 5kg을 만들어 보위부에 바치고 나니 집에는 막대기를 휘저어도 걸리 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후 감자 다 캐먹은 뒤니까 7월 말경 저의 처는 감방에서 풀려 나오고 저 희 아들은 3일 뒤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재조사에 들어가면서 온 식구가 며느리까지 불려가 개별 적으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때 며느리는 보위부 사람들의 위협 공갈과 회유에 넘어가 남편이 한 이 야기를 고대로 보위부에 말했다. 남편이 한국제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나왔으며 그것은 시아버지가 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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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것, 우리집 주인은 중국에서 중국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네는 김정일을 때 려 죽여야 잘 산다는 이야기를 집에 와서 하니 시아버지는 웃더라는 이야기. 남편이 중국 땅에 건너가서 한국 선교사들의 방조를 많이 받았다는 것, 심지 어 물건을 우차에 싣고 나와서 경비대 보위부 창고에 맡겼는데 본인이 나와 보니 쌀과 좋은 물건 한국제 양복은 보위부 사람들이 치우고는 모른다고 오 리발을 내밀더라는 이야기까지 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막내아들은 보위부에서 풀려나오기는 고사하고 더 죄가 엄중 하여 나오지 못하고 내가 탈북한 뒤 보위부 감방에서 구토 설사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체는 가족들에게 돌려주지는 않지요. 그리고 나도 무사할 리 없었습니다. 보위부의 호출을 받고 가보니 “영감 아들이 중국에 갔다 와서 너네 김정일 을 때려 죽여야 잘 산다더라”고 중국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를 듣고 영감이 웃었다 면서 보위부 비서가 묻는 것입니다. “여보시오 비서동지, 웃었다고 해서 다 죄가 아니지요. 웃음은 통쾌한 웃 음이 있는가 하면 쓴 웃음도 있다. 나는 개새끼들이 개소리를 친다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하고 대들었습니다. 또 아들이 가져온 남조선제 녹음 테이프를 건사하고 있다는데 당장 가져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녹음 테이프는 차 소각해 치웠다고 말하니 그 재라도 가져 오라는 것입니 다. 태워버린 녹음 테이프를 어떻게 가져온단 말입니까? 그 후 나는 강의안을 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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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말에 종업원 집회 때 영감이 나가서 내가 왜 중국에 갔다 왔으며 중국에 들어가면 이렇게, 이렇게 나쁘다는 것과 중국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는 식으로 설득력이 있게 40분간 짜되 자기 잘못을 솔직히 반영하라는 것입 니다. 이런 과업을 받아가지고 수치스러운 강의안, (아니 비판서가 맞을 것입니 다)을 썼습니다. 이것도 첫 대목에 나는 중국에 들어가게 된 동기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 니다. 전번 비판서에 썼던 대로 말입니다. “나는 1998년 1월 1일 새벽에 재수없이 맏아들 전복남이를 굶겨 죽였습니 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살다가 온 가족이 몰살당할 까 염려되어 중국에 있 는 동생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갔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그랬더니 이 대목을 지워 없애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없애고서야 보위부 검열에 겨우 통과 했습니다. 1999년 12월 27일입니다. 아마도 나의 인생의 마지막 당비가 되겠지요. 나는 당비를 물려고 동전 10 전을 들고 세포비서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세포비서 녀석이 “영감 도제 10전을 들 고 당비 바치려 왔어요?”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내 머리가 좀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왜? 당비야 수입이 없는 노동자는 규약에 5전을 내게 되지 않았는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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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5전보다 10전을 들고 나왔는데 적다고 이려슈.” 하니 비서는 “아니 월 정액의 2%입니다.”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뜸 “어느 새끼가 당비는 규약에 수입액의 2%라 했는데 정액 2%를 받으라고 했어 그 새끼 누구야 노임도 안주는 주제에.” 했더니 비서 녀석이 ‛조선의 따왕(대왕)’이라고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며 김 정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차 잘못 되었구나 하면서도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새벽 교대를 마치고 목욕도 못하고 집에 와 문고리를 잡으니 종이 쪽지가 손에 쥐 웠다.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 종이를 펴보니 “야 이 미련한 곰아,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비서 앞에서 김정일을 새끼라고 하느냐, 어서 조선 땅에서 피 하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의 머리에는 지난 시절 간부들을 채굴 규정을 위반한다 하여 개 새끼들이라고 쌍욕을 퍼붓던 일, 지배인보고 편제도 없는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휘발유 값이냐고 하면서 자동차를 없애라고 하던 일, 등등 크고 작은 일들이 내 앞을 순식간에 지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몇초 사이에... 사실은 내가 먼저 보위부 문고리를 잡고 먼저 들어가면 이 누명을 벗을 수 는 있지만 지난 날에 한 일 때문에 쓸데없는 일이였습니다. 나는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위부 문고리는 비서가 먼저 잡았고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내 행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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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이 계획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나는 집에서 놀랄까봐 중국의 동생한데 가서 돈을 좀 가져오겠다. 오래지 않아 손녀 첫 생일이고, 또 내 환갑인데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서 옥수수 1kg정도 있는 것을 보고 식사도 못하고 도주했습니다. 나는 지금 나를 곰이라고 욕하면서 빨리 조선 땅에서 달아나라고 한 친구 의 말이 고마워서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내 인터넷 닉네임을 “곰”이라 하였 습니다. 가던 도중에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보위부를 끼고 중국을 넘나들면서 장사하는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그 청년의 도움으로 ○○으로 해서 두만강을 쉽게 보위지도원의 안 내를 받으며 건넜습니다. 당시 나는 컬러 TV와 자전거를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여 나는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상가 집 개만도 못한 신세]
나는 중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가 집 개만도 못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뼈에 사무치게 느꼈습니다. 우선 중국은 앞과 뒤가 전혀 다릅니다, 할빈(하얼빈)과 목단강(무단장)만 보더라도 대도로 앞에는 없는 치장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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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장을 다 해 놓아서 아주 세계급의 도시라 할 수 있지만 아파트 단지의 뒤 를 가서 보면 입으로 형용할 수 없이 화장실이 넘쳐나고 개울물이 고여서 썩 어 악취가 풍기며 아파트도 들어가 보면 화장실은 변이 넘어나 이것을 이대 로 두고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앞에서는 친절하지만 뒤에 돌아서서 그 사람의 생 간을 뽑아먹을 작정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돈이라 하면 의리도 양심도 다 팔아먹으며 심지어 제가 사는 나라도 팔아먹는 족속입니다. 모두들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한족들이나 조선족들에게 팔려 갔다는 이 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그것은 본인도 모르게 안전한 곳에 데리고 간다고 하면서 뒷돈을 챙겨가지고 달아납니다. 그러다가 부부간에 싸움이 일어나 같이 못 살겠다고 헤어지자고 하면 나 는 너를 3,500원에 샀으니 그 돈을 내 놓고 가라고 합니다. 그때야 본인은 내가 팔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는 이미 늦었지만 빙초세(북조선 사람)라는 것이 걸립니다. 중국 한족들과 중국땅에서 나는 조선족들은 북한 사람을 빙초세, 남한 사 람을 난초세라고 불렀습니다. 한국 상품이 얼마나 인기가 높았든지 한국 사람을 보면 뒤를 따르다가 담 배 꽁초라도 버리면 그것을 줍겠다고 서로 100m 질주합니다. 이것이 재미있다고 한국분들은 담배를 절반도 안 되게 피우고는 한족들이 보는 앞에서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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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서로 줍겠다고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연길시에 가면 서시장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한국 상품만 파는 백화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 상품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 한족들은 그것을 보고는 침만 흘렸지 사지 못합니다. 상품은 팔리지 않지만 구경꾼으로 해서 인산인해를 이룬답니다. 저도 구경하러 여러 번 가면 어쩐지 남과 북 이것만 이질감을 느끼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감정에 빠지면서 이 순간은 행복합니다. 그 행복을 맛보려 내 마음을 달래려고 자주 갔습니다. 나도 늙은 몸이지만 하얼빈에 도착하여 아주 친절한 조선 동포를 만났습 니다. 그는 나에게 직장을 알선해 준다고 하면서 할빈 ○○공장 뒤 자그마한 주 물 공장에 나를 소개 했습니다. 거기는 전기로 2.5t짜리 7개를 가지고 연방 주물품을 부어 주문한 공장에 서 돈을 받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공장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서 주물 제품에 모래를 털어내는 사락(작업)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 다른 사람은 다 노임을 주는데 나는 전혀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로반(사장)에게 물으니 나를 알선한 그 사람이 타갔다는 것이었습 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 내색이 없이 나와 일을 제대로 하고 침실에서 자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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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침실에서 나와 작업장에 들어가 우선 전기선부터 모두 철수했습 니다. 나는 전기에 대해 좀 알기 때문에 처음에 들어가서 그 복잡한 전기 시설을 다 걷어내고 간편하게 전기선을 정리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우선 전기선을 철수한 다음 활차에 매달려 있는 전기로 7개를 삥을 뽑은 다음 떨어지는 내화벽돌을 모두 까버리고 목당강으로 야반도주 하였습니다. 아마 그네들이 나를 잡으려면 공안에 의뢰해서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승인도 없이 가만히 남의 ○○공장 뒷 고방에서 하다나니 의뢰하면 ○○회 사 사장과 로반 자체는 법에 의해서 처리되기 때문에 의뢰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추정합니다. 사실 탈북자의 신분으로 이 가슴 아픈 일은 어디에 하소연 할 데 있습 니까? 이것은 나의 간단한 경험이지만 탈북자들이 여럿이 모이면 이보다 더한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상갓집 개만도 못한 신세죠. 나라없는 백성이, 제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등지고 떠난 탈북자의 신세가 어디에 가서 제 가슴 아픈 사연을 하소연 하겠습니까? 하소연하면 중국 당국은 탈북민들을 난민으로 인정 안하기 때문에 잡혀서 북송되고 맙니다. 그래도 사람이고 인간들인데 그렇게 할 수야 있겠는가 하지만 오산입니 다. 북한은 탈북자들을 잡아다 바치면 김정일은 여기에는 돈을 아끼지 않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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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심지어 이 사람을 꼭 잡아야 하겠다는 사람은 돈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파 견합니다. 그러니 탈북자들은 하소연 할 곳이 없어서 가슴만 쥐어 뜯고 냉가슴을 앓 고 나니 속이 썩어서 온갖 잡병이 다 생겼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는 두통이 심하고 신경이 아주 예민합니다. 나는 2003년 6월 18일에 북한에서 처를 데려온 다음 한 달 만에 ○○ 비행 장에서 인천 공항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그 힘들게 갈 것이라고 마음먹었던 한국행 길을 순조롭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는 천국과 같은 세상입니다]
우리 부부는 대한민국의 땅을 밟으면서 제일 처음 들은 말이 “참, 잘 오셨 습니다. 여기는 천국과 같은 세상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를 위로해주고 고무해줍니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지난 날 그 쓰라린 과거 생활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 행복한 나의 삶이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힘차게 뛰고 더 분발하 여 나의 생을 깡그리 바치리라 결심합니다. 우리는 지금은 일흔을 넘겼지만 더 살고 싶은 생각. 오래오래 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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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와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북한 당국자들도 자유를 보장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기 대한민국에서처럼 자유를 보장 받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우선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물론 경제적, 신앙과 집회 언론 의 자유를 다 보장받고 있습니다. 정말 천국과 같은 세상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대하여 세상에 부러울 것 없습니다. 저는 나라에서 집을 주어서 비오면 비샐 걱정, 추우면 땔감 걱정 없이 난 방이 돌아가는 현대적인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령인 저희 부부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장해 주어 입을 것, 먹을 걱정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희가 무엇이기에, 대한민국이 이처럼 부강해 질 때까지 벽돌 한 장 옮겨 놓은 적이 없는 저희들에게, 흙 한 삽 떠주지 않은 저희에게, 시멘트 한 삽 이겨서 보탠 적 없는 저희들에게 더구나 북한에서 생활한 저희들에게 이런 대접을 하시다니 정말로 놀랍고 감격할 일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 위정자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 들어가면 세상 사람 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나라로 된다고 했습니다. 도시와 마을마다 전기와 가스와 수도화, 버스화가 실현되며, 공장 기업소 들에서는 전면적인 자동화가 실현되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간의 차이, 경 노동과 중노동간의 차이, 공업 노동과 농업노동 간의 차이를 없애고, 여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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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일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하고 기와집에서 무명옷을 입고, 이밥(쌀밥) 에 고깃국을 먹으며 남부럽지 않는 지상천국에서 산다고 말끝마다 떠벌렸습 니다. 때문에 자력갱생 간고분투하여 주체의 강국을 건설하자고 역설하였으며 현재는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강성대국을 건설하자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고 분단된 지 70년이 가까운 이때 강성대국 은 고사하고 경제는 파국시대로 들어갔고, 나라의 경제 운영에서 범꼬리를 쥐고 당기자니 힘이 없고 놓자니 범이 돌아서서 나를 물겠지 하여 범 꼬리 쥐고 당기지도 놓지도 못하는 ‘범 꼬리 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굶어 죽다 못해 공장 기계를 뜯어다 팔아서 생계를 유 지하는가 하면 그 더러운 목숨을 연장해 보려고 탈북하여, 세계 방방 곳곳에 서 방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험악한 세상 속에서 난생 처음 불러 보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해 달라고 얼마나 소리높이 외치며 눈물 흘렸습니까? 이 대한민국에 안긴 첫 그 순간 우리가 너희들의 몫까지 행복하게 살리라, 너희들이 피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에게 부탁한 그 약속을 반드시 실현하리 라. 저 북한의 불쌍한 우리 형제들을 반드시 구원하리라고 다짐했던 그 맹세 를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부자입니다. 돈이 많아서가 부자가 아니라 ‘마음의 부자’, ‘기쁨의 부자’, ‘감사의 부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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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고마운 세상을 끝까지 지킬 것이며 이 고마운 나라를 더욱 튼튼 히 지켜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대한민국의 주관에 의한 평화 통일을 꼭 이루어 내고 내 고향 형제들을 만나서 대한민국을 널리 선전할 것입니다 나는 한반도 땅에 우리 고향의 높은 창공에도 태국기가 펄펄 휘날릴 그 날을 그려봅니다.
안보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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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 수기 ┃우수상┃
자유의 덫
지 ○ ○ (서울)
중국에서의 문화대혁명은 소수민족인 조선족에게는 아픔이고 설움 그 자체였다. 갓 결혼한 예쁜 신혼부부 한 쌍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는다. 신랑은 트렁크 하나를 신부는 핸드백을 손에 들고 양복차림에 어울리 지 않게 불법도강을 한다. 당시에 두만강은 중국과 북한 사이에 흐르는 평화로운 시골동네 모습 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자신들이 넘는 그 두만강이 자유의 족쇄를 스스로 차는 넘 어설 수 없는 원한의 강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헤 어나올 수 없는 운명의 기로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대학교수와 발레무용수라는 그 자부심 하나만을 가지고 이곳에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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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국을 찾아온다는, 희망과 포부가 젊은 신혼부부 앞에 낭만으로 부 풀어 있었다. 브로커들이 나와서 그들을 영접했고 기차는 곧바로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작고 보잘것없는 조국이지만 자신들의 지식과 쓰임을 확신하고만 있던 순 진한 그들은 바로 나의 부모님이었다. 평양초대소에서 면접을 마치고 일주일간 머물면서 대기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한 간부가 부모님께 최종 배치장소를 알려준다. “지 선생은 큰 나라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분명히 지식도 많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지식보다 당에 대한 충성심이요. 대국주의 사상 잔재가 남아 있는 한 그 지식은 쓰임받기가 어렵소. 먼저 함경북도에 있는 아오지 탄광에 가서 혁명화, 노동계급화 해서 사상적으로 단련하고 당에 입당도 한 다음 앞 으로 지켜봅시다. 그리고 여성동무는 여기 평양조선민족가무단에 배치 되었 소. 평양에 남으시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이다. 이럴 수가 있다니...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법적인 이유도 없는 아빠 엄마의 헤어짐과 평생 펜을 잡고 계시던 아빠의 손에 책이 아닌 삽과 곡괭이가 쥐여지게 된 것이다. 전달자가 나가자 엄마는 울었고 아빠는 하늘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무도 말이 없었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숨을 쉴 수 가 없었다. 다음날 엄마는 평양 배치 영장을 상부에 바치고 아빠와 함께 초대소 밖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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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의 호된 조국 생활은 시작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청진제강소에 야간대학이 건립되게 되면서 교사로 발령받은 아빠는 간신 히 그 무서운 아오지 탄광에서의 피눈물 나는 6개월 탄부생활을 마치고 첫 교단에 서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를 따라 탄광에 내려오면서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레무용은 수정주의 자본주의 온상이라는 이유로 북한 에서는 전면적으로 패쇄 되었고 많은 발레리나들이 (북한에서는 무용이라는 직업을 육체적으로 힘들다고 하여 노동자등급으로 대우해 줌) 정말 노동자 의 신분으로 상당수 지방공장들의 인력으로 배치되었다. 인재들은 버림을 받았고 사회의 개조대상으로 최하층 속에 매장 되어 갔다. 북한에서는 가장인 세대주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면 그 가정은 밖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한마디로 그런 집은 당에서 믿지 않는 집. 사상이나 출신이 반동인 집처럼 사람들에게 비춰지고 있었다. 당시 아빠에게는 입당문제가 절박한 현실로 되었다. 아빠에게 입당은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한 가정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 이였고 필수였다. 자식들이 커갈수록 아빠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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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입당요청에도 아빠는 중국출신이라는 딱지를 뗄 수 없어 신청하 는 문건마다 취소되고 또 보류 되였다. 생각 끝에 아빠는 함경북도 온성 ‘왕재산대기념비’ 건설지원자 명단에 이 름을 올리고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반년 만에 아빠가 공사현장에서 찍어 보내온 사진은 엄마의 가슴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하염없이 슬프게 우시던 그때의 엄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완공을 마치고 아빠가 공사장에서 돌아오실 때까지 엄마는 그 사진을 우 리들에게 내보이지 않으셨다. 이듬해, 집 떠났던 아빠가 온성 떡 호박 두 개와 풋 강냉이 한 배낭을 메고 돌아오셨다. 뼈밖에 남지 않은 최최한 모습에 키 큰 골격의 사나이가 초라한 적위대복 차림에 자루 같은 배낭을 지고 ... “그 멋쟁이 대학교수 모습은 다 어디가고 이게 무슨 꼴 이예요... ” 엄마의 탄성이다. 들었는지 말았는지 아빠는 엄마 따라 엉엉 울며 서있는 우리들을 안고 깊 은 한숨을 내쉬시며 이르셨다. “어제 금방 딴 거라 맛있을게요. 숙소 집 할머니가 애들 먹이라고 텃밭에 서 직접 따준 옥수수요.” 하시고는 옷도 벗지 않으시고 불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셨다. 그날 밤 아빠는 엄마에게 ‘조선로동당원증’을 꺼내 보여 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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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있으면 애들을 떳떳하게 키울 수 있고 당신도 밖에 나가서 남편을 창피해 하지 않아도 되오.” 그 말씀에 엄마의 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난 그런 증명서 열개 가지라고 준대도 부럽지 않아요. 이 몹쓸 놈의 세 상. 이가 갈려 못 참겠어요.”하자 들려오는 아빠목소리다. “애들 듣겠소. 당 신 그렇게 함부로 말하다 애들이라도 들으면 우리 집 큰일 나오. 제발 말조 심하오.” 아빠의 귀환으로 우리 집은 매일처럼 기쁨으로 넘쳐있었고 엄마는 아빠의 몸보신을 위해 좋다는 음식과 보약을 아낌없이 만들어 대접해 드렸다. 나날 히 아빠의 건강도 많이 좋아지셨다. 우리 동네에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집이 몇 집 있었다. 일본에서 바다 건너온 귀국자 집(일명 째끼 라고 놀림 받음)과 바로 우리 옆집의 남조선의용군으로 들어온 남조선출신의 집, 그리고 중국에서 넘어온 우리 집은 모두가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집들에 속한다. 일본 집은 동네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집안에 함부로 사람들을 잘 들여놓지도 않았다. 동네사람들을 경계하며 살았다. 그 집엔 인민반장과 세대주반장, 위생반장, 그리고 단속을 하는 사람들만 들어갔다. 동네에서 그 집은 베일에 싸여 있어 늘 호기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남조선집은 반대로 동네사람들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모두가 곁을 주지 않았고 동네아이들은 그 집 애들과 잘 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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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그래도 그들보다는 나았던 것 같았다. 일본집도 엄마와는 친하게 잘 지냈고 색다른 일본음식을 만들면 남들 볼 세라 저녁에 몰래 내오기도 하였다. 남조선집은 원래 가난한 집 형편에 자식은 일곱이라 엄마에게서 쌀과 돈 을 자주 빌려 가곤 하였고, 그 집 애들은 늘 우리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보면 서 밥까지 함께 먹고서야 집으로 돌아 가곤하였다. 어린 나였지만 그때 보기에도 엄마는 항상 마음이 한결같아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변함없이 위해주셨고 설날엔 가장 나이 많으신 동네어르신 내외를 모셔와 떡 한 접시에 술 한 잔이라도 아빠와 드시도록 꼭 상을 봐주 셨다. 아마 이별 후 마음대로 만나볼 수 없었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동네 사 람들과 의지하면서 달래셨는지도 모른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아빠 엄마를 보며 세상의 윤리와 도리를 배우며 자랐다. 아빠가 입당하고 오신 다음에 동네어른들도 우리 부모님을 길에서 보면 인사도 더 자주 해주는 것 같아 보였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써오라고 준 각종 지시사항 중에서도 수시로 적어내던 ‘가족관계표’ 는 아빠의 당적 표시란 빈칸을 늘 이상한 눈살로 찌푸리며 보시 던 선생님의 거만한 눈총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어린마음 에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당하게 그 자리에 ‘당원’이라고 써가지고 갔던 날 선생님의 눈빛은 좋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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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너희 아버지 입당 했구나” 하고 말하였을 때에는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느낌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동네는 ‘인민반’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조직하는 일이 많아 집으로 퇴근해 와서도 어른들은 거의 자유가 없었다. 25세대가 모인 ‘인민반’은 ‘인민반장’과 ‘담당보위지도원’의 살맛나는 생존 터였고 동네는 말 많은 여인들의 아부하는 고자질 소리로 한 낮을 채웠다. 새벽 6시부터 두드려대는 종소리와 함께 “노력동원 나오세요! 빨리 나오 세요. 빨리요!”하는 인민반장의 고함소리가 동네를 깨운다. 익숙하듯 한집, 한집 문이 열린다. 아빠(세대주)들은 ‘세대주 반장’이 나서서 ‘퇴비생산’처럼 힘이 드는 동원을 시켰고 엄마들은 인민반장이 아침부터 소리치며 새벽청소에 불러냈다. 세대주 없이 혼자 사는 과부집도 한 세대이므로 예외가 없었다. 그런 집은 남들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여인이 혼자 힘으로 없는 남 편 몫까지 감당해내야 한다. 안 그러면 ‘인민반회의‘나 ‘조직생활총화‘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 이다. 인민반장을 앞세워 ‘새벽청소’, ‘퇴비동원’으로 시작하여 매 세대 당 ‘파고 철수매’, ‘빈병 수집’과 ‘파지수매’, ‘숙박검열’, ‘위생검열’에 밤에는 전쟁을 대 비한 비행기 폭격 시 ‘등안 간지검열’ 훈련까지 등 각종검열에 심지어는 고기 삶아먹는 냄새까지 맡아가며 이집 저집 뭘 해먹고 사는 가를 감시하였는데 반장은 어느 집에 숟가락과 밥그릇이 몇 개인지 다 아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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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반장은 보위부나 구역 당에서 조직하는 ‘인민반 도서검열’이 있으면 반드시 우리 집을 목표하였다. 이유는 아빠가 ‘인텔리’이고 우리 집에 책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듯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선생님으로 불리던 우리 집은 근처에 도서관이 없다보니 책을 빌리러 많이들 찾아왔었다. 책으로 한 벽을 도배할 만큼 작은 우리 집은 책 부자라 소문나 있었고 그 만큼 아빠는 엄청 책을 좋아하셨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 저녁밥상을 물리고 잠자리에 들때면 우리들을 가지런히 눕혀놓고 창밖의 달을 바라보시며 구수한 음성으로 읽어주시던 아빠의 <홍루몽> 낭독은 그때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아빠의 모습과 목소리와 숨소리. 책장 번지 는 소리가 3화음이 되어 내 귀속 안을 맴돈다. 여러 차례 이사와 힘든 생활 속에서도 아빠는 늘 책을 소중히 여기셨고 책 장 속의 책은 누구나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 귀중한 재산이였다. 특히나 아빠가 중국에서 가지고 나오신 트렁크안의 그 책은 아빠의 분신 같았다. 인민반장을 앞세워 시도 때도 없이 쳐 들어오는 도서검열은 아빠에게는 물론 온 집 식구들에게 제일로 무섭고 두려운 검열이었다. 어느 날 교단에 서 계셔야 할 아빠가 땀이 범벅이 되어 집으로 숨 가쁘게 들어서셨다. 수업을 진행하다 마시고 온 것이다. “여보. 빨리 그 책들을 치워주오. 듣자니 오늘 도서 검열 있다는데 이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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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도서들이 나오면 큰일이오.” 그러시고는 황급히 문밖을 나가셨다. 원래 눈이 크신 아빠의 눈이 그날은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더 떨고 있었다. 한참 후 인민반장이 세 명의 남자들을 우르르 데리고 우리 집 앞에 와 섰다. “계십니까? 도서검열 왔습니다.” 반장의 목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남자들 이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서며 방안을 쭉 살핀다. “듣자니 이 집이 동네에서는 책이 제일 많다는 데 한번 봅시다.” 엄마는 그 사람들이 검열을 다하고 갈 때까지 습관처럼 말없이 한 곳에 못 박힌 듯 서 계셨다. “더러워 정말 못살겠다. 사람 이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아이고, 내 팔자 야” 엄마는 나를 붙들고 억울하여 더 말을 못하셨고 그들이 사라져간 문을 한참이나 쏘아 보시었다. 그러던 어느 날 ‛꼬리가 길면 밟힌다’ 는 속담대로 예고 없이 ‘인민반 도서 검열’이 나 혼자 점심밥을 먹고 있는 참에 들이닥쳤다. 당황하여 순간 나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책장 뒤에 따로 숨겨놓았던 아빠의 책 중조사전이 발각되었다. 그날 도서검열목적은 집집마다 남아있는 정치범 수용소에 잡아넣은 일부 반동들의 글이라는 <항일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회수하기위한 것으 로 실시한 것이였는데 생각지 않게 우리 집에서 중국에서 편찬한 외국도서 가 적발된 것이다. ‘중조사전’은 아빠의 손때묻은 애용품과도 같은 것이라 어린마음에도 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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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못 가져갑니다. 가져가도 우리 아버지 오신 다음 물어보고 가져 가십시오.” 그러거나 말거나 무작정 그들은 회수 도장을 찍더니 그 책을 압수해갔다. 그 일로 하여 아빠는 구역 당에 불려가 질책을 당하셨다. “당에 입당까지 한 동무가 아직도 대국주의 환상을 가지고 중국에서 편찬 한 외국도서를 가지고 보고 있는가?” 비판서를 쓴 후에야 아빠는 집으로 돌 아오셨다. “책에 무슨 죄가 있느냐. 야만이다. 야만들... ” 집안에 들어서시며 하시던 아빠의 말씀은 절규 그 자체였다. 그 후에도 아빠는 ‘주당생활총화’는 물론 ‘월당총화’와 ‘분기당총화’, ‘연말 당총회’까지 이 문제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비판무대에 올라서서 사람들의 호상비판 대상이 되었고 회의보고서에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기시셨다. 얼마나 창피하셨을까? 얼마나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러우셨을까? 새까맣게 타들어 하얀 재가루가 되엇을 아빠의 가슴 속을 헤쳐보지 않고 서야 그 누가 말 못하고 당해야만 했던 그 마음을 다 알 수 있겠는가. 평생 남들에게 쓴 소리 한번 안하시고 피해한번 주지 않고 살아오신 고지 식한 아빠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감과 모욕감을 준 가슴 아픈 일화 중에 하나였다. 상처는 참는다고 아무는 것이 아니다. 참을수록 곪아가고 있음을 부모님은 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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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엄마는 조용히 자 초지종 중대한 얘기를 하셨다. “드디어 우리에게 두만강을 넘겨다줄 사람이 나타났다.” 아직은 동생들에게 말하지 말고 네가 맏이니 이런 엄마 마음을 잘 알고 동 생들 건사 잘해라. 우린 가도 창고에 있는 김칫독엔 김치를, 쌀독엔 쌀을, 옷 장엔 새로 세탁한 옷들로 독마다, 농마다 가득히 채워 놓고 가야한다. 우리 가 이 집을 떠난 후에 그 누가 들어와도 살 수 있게, 이 집은 못 먹고 못살아 서 간 것이 아니라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다른 뜻이 있어 간 것이라고 생각하 게 해야 한다. 누구에게도 허수히 보여서는 안 된다.”고 엄숙하게 하시던 엄 마의 그때 그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여 잊을 수 가 없다. 온다고 기다리던 ‘길 안내자’는 약속한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한 달이 지나 도 오지 않았다. 어제나 저제나 그렇게 기다리기를 몇 달 후... 실오리 같은 희망을 미련삼아 고대하고 기다렸건만 그 후에도 영원히 ‘길 안내자’는 오지 않았다. 까치 울음소리만 기다리던 1년 후 엄마에게 찾아온 소식은 감옥에서 10년 형을 받고 있다는 행인의 허무한 소식뿐이였다. 청춘도, 사랑도, 지식도, 미래도 세월이 가고 시간이 갈수록 희망과 꿈 은 연기로 사라졌고 조국은 부모님의 모든 것을 억눌렀고 빼앗았고 없애 버렸다. 남들처럼 배우지도 못하고 다른 세상을 모르고 계셨다면 모를까 이미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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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배우고 경험하고 살아보셨던 부모님에게는 조롱 안의 날개를 잃은 새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고 그 아픔은 순간순간 뼈아픈 후회와 번뇌를 함께하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과 존엄이란 개인에게는 해당 밖인 집단주의 사회에서 자유, 그 자체는 말살이고 쇠사슬이다. 자식들이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가자 부모님은 늘 입버릇처럼 우리들에게 당부하셨다. “우리 대까진 이렇게 살아도 되지만 너희들 대에는 절대로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살아 본 것으로 충분하다. 아빠, 엄마는 여기 이 땅에서 너희들이 가정을 꾸리고 대를 이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나라는 바뀌지 않는다. 너희들만 아니면 아빠, 엄마는 죽 더라도 여기서 안 산다.” 술에 취해 들어오시는 아빠의 모습은 점점 잦아지셨고 멈추지 않는 아빠 의 담배연기로 집안은 누런색을 띠며 점점 병 들어가고 있었다. 버림받은 지식은 전부 휴지장이 되어 버려졌고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시던 책들도 하나 둘씩 인민반 파지수매 더미에 버려가는 아빠의 타락해지는 모 습은 나의 가슴에 차곡차곡 상처로 쌓여 갔다. 때로는 그런 아빠를 한탄하는 엄마의 울부짖음도 간간히 들려왔다. 한 잔술에 담긴 아빠의 ‘18번 노래’ 소리는 지금도 두 마디만 불러도 말없이 눈물이 흐른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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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 조국이 타향이 된 것이다. 아빠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뼈아프게 느끼셨다. 부모형제 모두 두고 혈혈단신 각시 손 하나 잡고 희망을 품고 찾아왔던 그 조국은 아픔과 상처, 후회만을 고스란히 남겼다. 한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져야할 한 여인의 운명과 자식들의 앞길에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 치를 떨었다. 노래가사 두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아빠는 머리를 힘없이 푹 숙이셨고 엄마의 옷고름은 어느새 눈물에 젖어있었다. 내가 아빠를 위해 가장 잘해드린 일이 있다면, 아마 아코디언으로 아빠의 18번을 연주해드린 것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 형제는 모두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사범대 음악학과에 합격하였고 평양에서 외국인 대학생들을 위한 음악 강사로 활동하였고 동생은 북한에 하나밖에 없는 원산경제대학을 졸업 하고 실력을 인정받아 큰 무역회사의 회계사로 근무하였다. 나는 사춘기라는 말을 모르고 그 시절을 보냈다. 연애하는 것, 그것은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나와 내 동생 모두 그랬다. 우리는 결혼문제만큼은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 지 않기로 서로 결심하고 그것을 효심으로 여겼다. 하지만 부모님의 바람과 뜻대로 세월은 따라 주지 않았고 혼기를 넘겨 우린 부모님께서 정해준 사람과 모두 결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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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고 쟁쟁한 우리 자매의 칭찬은 동네에서 부러움으로 소문났으며 중매꾼들의 발길도 잦았다 허나 대상자 선정에서 부모님의 원칙은 확고하셨다. 당 간부나 보위부 안전부 출신 즉 토대가 좋은 간부 출신은 자기발전을 목적으로 하기에 제외대상 이었다. 중국 출신 즉 ‘해외파’는 이 정권하에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 아빠· 엄마의 30년 조국생활에 골수까지 박힌 한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오리는 오리 무리이고, 까치는 까치 무리’라는 원칙은 엄마의 이론이었다. “우리는 아무 때 가나 여기를 뜰 집안이기에 절대로 한발이라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내 딸을 데리고 이 땅을 안전하게 떠날 수만 있다면 결혼을 허락한다.” 남들에게는 이해불가이겠지만 어쩜 그 세월, 그 시절 우리 집에서는 권력 이나 돈보다도 더 위에 있는 중요한 결혼사유였고 부모님이 정한 법이기도 하였다. 우리 집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부모님 세대가 우리에게 남긴 비극 아닌 비극이였다. 법도 없이 사실만큼 정직으로 살아오신 나의 부모님은 그렇게 끝내 북한을 뜨지 못하고 오늘을 보지 못하신 채 그 땅에 고인으로 묻히시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동해바다를 마주한 산언덕에는 부모님의 묘가 가지런히 모셔져 있다. 나는 가족과 함께, 내 동생은 딸의 손을 잡고 눈물 젖은 두만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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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아빠엄마도 없는 이 세상 우리가 죽는다고 가슴 아파해줄 사람도 더는 없었다. 그렇게 목숨을 내건 사투가 우리 모두를 무사히 강 건너편으로 와 닿게 했다. 왔던 길을 뒤돌아보니 벌거벗은 처량한 북한의 산 모습이 다시는 여기로 오지 말라고 애처로운 메아리로 답해주는 것 같았다. “뒤돌아보지 마라. 앞만 보고 가자!” 나는 외쳤다. 2011년 3월 나는 동생과 함께 드디어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착륙하였다. 한 세대가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알기에 더는 그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목숨을 걸었고 그것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지켰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면 최소한 사람답게 살아야 할 권리인 자유를 위해 서이다. 여기는 그야말로 딴 세상이다. 새벽에부터 쳐대는 냄비 종소리는 물론 하루 온종일 집에 있어도 누구 하나 문 두드리며 찾아오는 사람 한명 없다. “집안소독을 합니다. 동네 장터가 열립니다. 많이 이용해 주세요.” 한 달에 두세 번 인터폰에서 울리는 아파트관리소직원의 목소리는 참으로 반갑고 기쁘다. 기차나 지하철, 장거리 버스, 심지어는 배를 타도 증명서 검열이란 개념조차 없으며 참빛 전술처럼 몇 번씩 훑어대던 안전원들의 상스러운 목청도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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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서울까지 몇 시간을 함께 앉아 가는데 옆 사람은 말 한마디 내게 걸어주지 않았다. 너무나 심심하여 내가 먼저 옆자리 아가씨에게 음료를 건네며 말을 건네 보았다 후에 알게 된 주변사람들은 나의 이런 이야기들을 웃으며 들으시다가 신기한 말씀을 해주신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차표만 있으면 전국 어디나 마음대로 다닐 권리 가 있으며 미국, 중국, 일본, 유럽, 아프리카, 중동까지 마음만 먹으면 가볼 수가 있어요. ○○씨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으니까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요. 단 한곳 북한만 못 갈뿐이지. 통일되면 우리 함께 고향에도 찾아가 봐요.” 순간 너무나 가슴이 벅차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이런 꿈같은 이야기를 함께 듣지 못하는 아빠 엄마 생각에 가슴속에서는 욱 하고 뜨거운 것이 북받쳐 올랐다. 대국도 이런 대국이 어디 있으며 세상에 이렇게 자유로운 나라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곳이 바로 내 나라란 말인가? 정말 마음 놓고 이렇게 자유 로워도 된단 말 인가? 행복이라면 이보다 더 자유로운 행복은 없는 것 같다. 타고나지 않고서야 이런 행복은 누구에게나 차려지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꿈만 같다. 자고로 백성은 임금을 잘 만나야 되고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하며 부부는 배필을 잘 만나야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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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부모님을 가장 사랑하고 존경 한다. 그러나 북한에 떨어진 우리가족의 운명은 부모님의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 대와 자식들 대까지 풀어가고 완성해야 할 또 다른 이산의 아픔과 이 땅에 정착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숙제로 남겼다. 시대는 역사와 함께 그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역사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내일도 있는 것이다. 그 긴긴 세월 참으로 말없이 꿋꿋이 참고 버티며 견뎌내신 부모님의 인생 은 오직 우리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희생이었고 사랑이었으며 잘못 선택 한 죄 아닌 죄의식으로 몸부림친 앙상한 세월 이였다. 이제 나와 내 후대들은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대한민국의 창공을 훨훨 날며 기지개를 펴고 희망과 꿈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린 해냈다. 두 번 다시 북한정권하에 살지 않게 된 것이며 영원히 바뀌 지 않을 독재정권 밑에서 벗어났다. 인간은 먹고 입고 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기에 마땅히 가져야 할 의식의 권리인 바로 자유인 것이다. “밤새 안녕하십니까?” 북녁 고향의 아침인사이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봐야 그 전날 우리 집도 내 옆집도 무사하였음을 말해주는 안도의 아침인사인 것이다. “좋은 아침이예요” 여기 대한민국의 아침인사이다. 말 그대로 자유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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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이 당연하듯이 주고받는 순수한 인사예의이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왜 여기 남한에 왔어요?” 답하기엔 너무나 크고 많은 아픔과 의무가 담겨 진 질문이라 가슴 벅차오를 때가 참 많다. 오늘 그 물음에 답을 준다면 한마디로 그렇게 묻는 당신이 바로 내가 아니 라 당신이여서 참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 때 문에 당신이 그 질문을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여기 남한에 오니까 어때요?”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말에 앞서 늘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곤 한다. 내 나라 절반 땅 만이라도 이런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 스럽고 감사한 축복이란 말인가. 운명도 목숨을 걸고 이루어내면 360도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지금 나도 당신과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당 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조국은 자유와 미래가 있고 한민족이라면 서로 안아주고 함께하는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 대한민국임을 난 확신한다. 하루빨리 우물 안의 개구리마냥 한 하늘밖에 못 보고 살아가는 수많은 북 한주민들에게 우리의 대한민국을 알게 하고 또 이미 국경이 없어진 전 세계 를 보게 하여 1, 2, 3대가 아니라 4대, 5대가 계속될 영구적 세습독재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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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생전에 멀리 창밖의 둥근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시며 하시던 엄마의 말씀 한마디를 떠올리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사람을 왜 사람이라 하겠니? 사람이래야 사람이지. 눈은 보기위해 있고 귀는 듣기위해 있으며 입은 의사를 표현하기위해 있는 것인데 평생을 눈감 고 귀 닫고 입 닫고 살아가는 것은 사람으로 살기를 이미 포기한 것이다. 자기들의 향락과 통치를 위해 한두 사람도 아닌 수많은 백성들을 이렇게 꽁꽁 가두어 두고 숨통을 눌러가는 이 김씨 족속은 꼭 천벌을 받을 것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자유란 이렇게 귀중한 것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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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사생아에서 통일 전문가를 꿈꾸며 주 ○ ○ (서울)
[무력통일을 꿈꾸며 북측에 서다]
내가 북한군 최전방지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0대 어린 시 절 북한영화 ‘전초선’을 보고나서 부터였다. 영화 ‘전초선’은 최전방지대 에서 북한군 군인들이 한국군 군인들과 대치하며 어떻게 북한체제를 지 키는가를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서 지금까지도 북한에서 인기 있는 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어려서부터 미국의 식민지가 된 ‘남조선(한 국)’을 무력으로 통일하고 미군의 군홧발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남조선주 민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무력통일의 교육에 세뇌되었던 우리로서는 최전 방지대에 대한 동경이 높았다. 게다가 매일과 같이 마주보는 적과의 대결 에서 북한체제를 지켜내는 최전방지대 북한군 군인들에 대한 출처불명의 전투담과 남진(남한 진격의 길)의 길에서 첫 번째 용사가 될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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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선전으로 나 역시 일찌감치 최전방지대의 군인으로 살겠다는 꿈을 키우게 된것이다. 그러나 최전방지대 북측군인은 출신성분과 학업과정, 체 격 등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하는 여건 상 한정된 사람들만이 최전방지 역으로 보내진다. 다행이도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입영열차에 올랐고 최전방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이 되었다. 내 나이 16살, 혹독한 훈련 소 생활을 마치고 13년의 군생활의 첫걸음을 그렇게 최전방지대에서 시작했 다. 지금은 북한군의 사병근무기간이 10년으로 단축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 만 해도 13년이었다. 생각해보면 13년의 군복무기간 단 한차례의 휴가와 외 박도 허락되지 않은 채 주린 배를 달래며 전투훈련과 각종 노동현장에 내몰 리는 북한군에게는 애초에 인권이라는 개념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북 한체제 수호를 위해 기계적인 군인으로 훈련시키고 무력통일의 총알받이로 세뇌시켜 그들의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전방에 나오던 시기 나라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당시는 ‘고난의 행 군’ 시기여서 국민뿐 아니라 군인들도 굶주림에 쓰러져 나갔다. 그때 고향에 서는 주민들이 한 달에만 수백 명이 아사로 굶어죽었고 거리에 방치된 시체 들을 목격하는것은 흔한 일이었다. 군에 입대하고 보니 군대 역시 공급이 부 진되어 하루 세끼중에 한 끼는 자체로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군대 내에서도 영양실조로 굶어죽는 군인들이 속출했고 ‘영양실조 보호소’, ‘결핵 및 간염 병동’들이 일선 전투부대에까지 우후죽순 으로 만들어졌다. 다행이도 최전방지대 군인들은 좋은 대우를 받아 공급이 양호했지만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전방지대 부대의 물자공급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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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의 부대와 민가 등에서 공급물자를 얻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 뿐 아니라 장교들은 장교들대로 가족을 위해 챙기고, 제대를 앞둔 군인들은 13년의 군복무를 보상받으려는 듯 물자들을 감추고 선임들도 그들의 방식대 로 ‘조절’을 함으로써 일반군인들은 늘 배고픔을 안고 최전방지대 근무에 내 몰렸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허탈감이 밀려왔지만 북한의 선전대로 총대로 미국의 식민지가 된 ‘남조선’을 되찾기만 하면 잘사는 세상이 올 것이 라 믿었다. 조국통일(무력통일)의 용맹스러운 수령의 전사가 되겠다고 다짐 했지만 점차 최전방지대의 현실을 통해 분단에 대한 통증과 함께 무력통일 에 대한 회의가 슬며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매일과 같이 육안으로 보는 한 국의 발전상은 굶주림과 생존의 공포에서 허덕이는 내 뒤의 북한실상과 대 조되어 회의감을 충분히 유도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우리 가 지금까지 얼마나 폐쇄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그리고 미국의 식민지 라고 했던 한국이 얼마나 눈부신 성장과 국력을 이루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2000년에 있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최전방에서 목격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북한에 의한 조국통일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감지했고 나와 동료들은 한국에서 보내준 쌀을 먹으며 대남의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국 에서 지원해준 쌀을 먹으며 북한을 지키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통일할 힘조 차 없음을 느낀 것이다. 철저한 세뇌교육으로 무장된 최전방지대 군인의 심 적 변화였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에서 보내준 쌀을 민간이 아닌 군으로 계속 적으로 전용하고 이를 선군정치의 의한 전리품, 노획품으로 선전하며 무력 통일을 주창했다.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한 소망에도 대남위협도발과 무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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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노선으로 한반도 분단을 공식화하려 했던 것이다. 안팎의 체제위기 속에 서 국민의 운명보다 독재권력 유지가 최우선 이였던 북한이 그것 외에는 다 른 것을 선택할 수조차 없는 막다른 한계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군 제대 후 제3국을 통하여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사선을 넘어와 찾은 자유]
북한군에서의 생활이 무력통일의 병사에서 한국의 발전상을 통한 분단의 아픔과 평화통일을 소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면 탈북 후 이곳에서의 생활은 자유의 소중함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품게 된 날들이었다. <○○대학교 졸업,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 별정직 공무원과 대기업 근무> 나의 이러한 프로필을 얼핏 본다면 사람들은 어린나이에 혈혈단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 에 와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한다면 나의 노력 과 의지는 그리 많지않다. 다만, 지금에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자 유와 민주주의가 구현된이체제의 덕분이었고 통일에 대한 간절한 소망 때문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원이라는 탈북자 정착교육기관을 퇴소해 먼지 가 득한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지하철 타는 법도, 은행에 서 돈 찾는 법도 모르던 나는 ‘외계인’에 가까웠다. 한번은 버스를 잘못 타서 의정부까지 갔는데 수중에 돈이 없어 군에서 배운 독도법(讀圖法)으로 밤새 걸어서 집에 온 적도 있다. 처음 일자리를 찾아 주유소와 편의점 등에서 면 접을 봤지만 대학생과 휴학생이 넘쳐나는 그곳에서 조선족동포보다도 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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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회 실정을 몰랐던 나를 뽑아줄리 만무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상대적 박탈감으로 하루하루 폐인이 되어갔고 4개월 동안 라면 과 소주로만 버티다 보니 체중은 10킬로그램이나 줄었다. 그러던 중 일본인 이 경영하는 일식집에서 일하며 대학입시준비를 했고 목표를 세우고 하루 3 시간을 자며 일과 공부를 병행해 갔다. 마침내 ○○대 정치학과에 합격했다. 많은 학과 중에서도 정치학과를 선택한 것은 최전방 지대에서 본 분단현실 과 탈북 후 직접 겪은 분단의 고통을 통해 자신이 ‘분단의 사생아’임을 뼈저 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학과를 전공하여 좋은 기업에 취직 할 수도 있 지만 정치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설움 가득한 삶을 노정케 한 한반도의 정치 체제를 공부하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직업군인을 꿈꾸며 공부 대신 운동부에 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공부에 대한 취미는커녕 요령도 남아 있지 않 았다. 게다가 생계지원금으로는 집세를 내고 나면 교통비나 밥값도 나오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 는데 첫 학기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탈북대학생의 경우 대학 등록금을 국가 와 대학에서 절반씩 장학금으로 지급하는데 이 경우 일정한 점수를 받아야 지원이 가능하다.성적이 저조해 장학금을 지원받지 못한 나는 스스로 등록금 을 해결해야 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었 기에 나는 일식집과 건설현장으로 일을 다녔다. 교재를 살 돈도 없었지만 그 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서 눈치를 보며 책 을 보면서 배움의 끈은 놓지 않았다. 부교재를 빌려 보기 위해 6개의 도서관 을 다닌 적도 있다. 돌아다니면서 소비한 신발밑창 비용이 교재 값보다 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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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내고서야 성적 이 올라 장학금을 받았고 그제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친구를 사귀는 것만 큼은 어려움이 없었던 나는 여러 동아리활동을 하면서 캠퍼스의 낭만도 만끽 했다. 때론 밤이 가는 줄도 모르는 열띤 논쟁과 건배, 그리고 봉사활동으로 많은 추억을 쌓아 갔다. 무엇보다도 주위 사람들의따뜻한 격려와 사회적 응 원이 힘의 원천이 됐다. 치악산 등반길에서 만난 이름도 밝히지 않은 한 등 산객은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학교과정 내내 후원금을 보내줬고 정부는 소수 자로 위축될세라 자립적 생계지원금과 학업을 위한 등록금을 제도적으로 지 원해주었다. 그러한 배려로 나는 휴학한번 없이 4년간 학교를 다녀 학사모 를 썼고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국가기관에서 별정직공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 다. 만약 북한에서라면 적국에서 온 사람이 망명자라고 할지라도 공무원으로 등용한다는 것은 상상도하지 못할 일이다. 국민으로서의 권리가 보장되고 직 업선택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만이 가능한 일이었 다. 별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나는 민주주의제도에서의 정권교체의 역동성과 국민과 사회를 향한 민주적 노력들도 보았고 정책입안을 통해 사회 에 작은 노력이나마 기여하고자 했다. 특히 정책발의의 경험과정에서 정책개 발에 대한 배움의 꿈을 가졌고 퇴사 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다시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원공부와 사회생활을 병행 한 경험 또한 어렵지만 얼마나 많은 선택과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 는지를 알게 된 과정이었다. 감당 못할 수준의 대학원학비와 생활비 등이 내 내 발목을 잡았지만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공부를 위해 생각해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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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과정을 빨리 마치고 기업에 취업해서 돈을 번 후 또 다른 공부를 도모하 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북한과 달리 직업선택이나 이동의 자유가 보장된 체 제에서 살고 있기에 가능했다. 1년 반 만에 일반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남은 기간에 돈을 벌어서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박사과정 역시 일찍 끝내고 남은 기간에 취직하여 돈을 벌었다. 물론 연구에만 충실히 집중하지 못한 단 점은 혈혈단신의 나로서는 피해가기 어려웠다. 대신 사회생활과 기업근무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경력을 쌓은 것은 유익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선택한 학 문의 중요성을 피부로 깨달았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혜택아래 살면서 정치를 전공으로 공부했던 나는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안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 지를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대학시절에 탈북자 출신 여간첩 사건을 목도하 면서 북한에서 교육받았던 적화통일노선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과 우리의 미래를 적화통일로 빼앗고자 하는 북한의 목적을 알리는 것을 나의 사명으로 삼았다. 대학원시절 안보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며 북한의 도발행선지가 최 전방지대가 아닌 서해안일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나름대로의 경험 때문이었 다. 한미동맹에 대한 두려움이 강한 북한이 최전방지대에서의 도발은 곧 자 신들의 죽음임을 알기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을 서해안을 선택할것이라 는 생각이 든 것이다. 특히 최전방근무시절에 북한군에 의한 사소한 오발조 차 한미연합군에 잘못된 시그널이 될 수 있다는 통제를 수없이 보아왔다. 아 니나 다를까 천안함과 연평도는 비무장이 아닌 서해안에서 일어났고 이 과정 을지켜보면서 북한의 야비함에 치를 떨었다. 국민의 안전과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시하는 자유민주주의제도를 볼모삼아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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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군인시절에 경험했던 북한의 무력남침야욕을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일 사망 후 온 세계가 경악했던 3대세습과 사이 버테러, 특수전강화, 핵개발 등을 보면서 튼튼한 안보만이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유일한 대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북한은 이미 합리성과 이성을 잃은 국가이다.마치도 정정당당함을 요구하는 복싱시합에 허리춤에 칼을 숨기고 들어와서 상대선수를 찌르거나 위협하는 비상식적 행위만이 유 일한 생존이라고 생각하는 비정상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항상 북한 을 경계할 줄 아는 건전한 안보관과 잘못된 도발에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 튼튼한 안보태세만이 북한의 비정상행위에서 우리를 지킬 무기이자 해법인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한반도의 통일도 굳건한 안보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수호되고 더욱 발전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통일을 견 인할 수 있는 주도적 힘은 자유민주주의를 성취하고 풍부한 자원과 높은 생 산력을 가진 쪽에 있다. 따라서 두말할 것 없이 통일의 주체세력은 한국이고 통일국가의 이념 또한 한국이 지켜오고 발전시켜온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되 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탈북이후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내가 찾은 답이자 굳 건한 안보 속에서 통일을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일을 소망하며]
박사과정 중에 취업한 기업은 만족스러웠다. 등록금만 벌고 나오겠다는 처음 입사할 때의 생각과 달리 점점 회사에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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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신이 누리고 있는 민주제도에서의 풍요로운 삶은 독재체제에서 고 통 받는 고향사람들의 삶과 비교되어 늘 마음한켠을 무겁게 짓눌렀다. 특히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폭격, 그리고 북한의 3대 세습과정을 겪으면서 아무 리 부정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알았다. 북한이라는 독재체제가 지 속되고 그들에 의한 끊임없는 안보위협이 존재하는 한 결코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은 보장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외면하고 나만을 위한 안정된 삶 으로 에돌아갈 수는 없다.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제도를 위해서 는 우리의 안보가 중요한 것은 물론이요, 통일을 통해 분단을 끝장내는 것 이 한반도의 번영과 평화를 보장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사표를 내고 학 교로 돌아왔다. 더 깊은 학문을 통해 통일 한국에서 남과 북이 함께 살아가 야 할 통일을 규명해 보기 위해서였다. 사실 분단과 통일에 관한 연구를 하 면 할수록 고통스러웠다. 한반도의 분단과정과 북한체제의 작동원리를 규명 하면서, 우리민족이 겪은 고통을 파헤쳐보면서 너무나 괴로웠다. 어떤 때는 한 달간 병원과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해야할 정도로 심신이 약 해졌다. 외면하고 싶고 나약해 질 때마다 통일전망대에 앉아 북한 땅을 바라 보며 그곳 주민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연구에 집중했다. 지금에 와서는 탈북 후 한국에서의 나의 삶과 배움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소중하고, 때문에 우리 의 안보가 더 없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배움이고 그 혜택이였다는 것을 새 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그리고 이제 고마운 한국사회와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기에 분단의 사생아였던 내가 통일을 향한 출발선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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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박 ○ ○ (강원)
1. 고역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
나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왜냐하면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학교를 못 다녔다. 한번은 학교에서 선생 님이 토끼 가죽 돈을 내지 않는다고 나의 뺨을 때린 적이 있다. 원래는 토끼 가죽을 내야 한다. 하지만 선생님들도 월급을 받지 못해 살기 힘들 다. 그래서 돈으로 걷는다. 선생님들도 살아가기 위해 학생들에게 돈으 로 내라고 한다. 나는 맞으면서 학교를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우리 집은 엄마, 아빠만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가정생활이 어려웠다. 북한에 서는 직장을 다녀도 월급을 주지 않는다. 직장은 의무적으로 하는 상품포 장과 같다. 그로 인해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나는 더 이상 학교에 다 닐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재봉(미싱)을 배워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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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벌게 되었다. 재봉을 배울 때 나는 14살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돈을 벌지 않으면 살 수 없기에 재봉을 하기 시작했다. 재봉하는 일은 어렵고 고된 노 동이다.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고 한 곳만 집중하는 일이라서 눈에 피로도 많 이 생긴다. 가끔씩 졸다가 재봉바늘에 손이 찔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졸리 던 잠이 말끔히 가시고 함박눈 같은 설움의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 바 늘에 찔린 손이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왜 아프냐고 물어봐주는 사람도 없는 내가 너무 가엾고 비참해서 눈물이 난다. 한참 그렇 게 울고는 다시 일을 한다. 돈을 안 벌면 나는 그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 다. 그뿐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어른들의 훈계 와 비웃음이었다. 재봉일은 처음 하는 일이어서 잘 못했고 경력이 있는 어른 들을 따라가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가서 밤을 새며 다림질을 해주고 재봉기술을 배웠다. 한창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할 나이에 돈을 벌려고 하니 늘 눈에 밟히는 것은 친구들과 공부하던 날이었 고, 또 그런 날들이 다시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앞에는 초등학교 가 있다. 나는 아침마다 학교 가는 학생들을 담 너머로 슬쩍 내다보곤 한다. 부럽기도 하고, 또 나도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다 못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갓 공상이었다. 다시 나에 게 현실로 찾아오는 것은 돈을 벌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의 버거운 생활이 었다. 아침에는 밥을 해야 하고 낮에는 이모네 아기를 봐야 했다. 저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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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와야 했고 또 저녁에는 술주정하는 아빠의 괴롭힘까지 받아줘야 했 다. 온통 집에는 내가 할 일이었다. 엄마는 가정 살림은 안중에도 없고 직장 생활만 했다. 우리 엄마는 좀 독특한 엄마였다. 가족생활은 어떻게 되든 사 회생활을 더 즐기는 엄마였다. 엄마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엄마 가 없어도 내가 집안일을 잘하니 마음 편히 직장을 다녔던 것이다. 한편 아 빠는 당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당에 들지 못했다. 일은 열심히 하는 핵 심 노동자인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당에 들지 못했다. 북한에서는 누구나 성 인이라면 당에 들고 싶어 한다. 당에 들어 가면 승진도 할 수 있어 가문에 경 이로운 명예와도 같은 것이다. 그 이후로 아빠는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집 에 들어 왔다. 그리고 자주 사람을 때렸다. 자기 뜻대로 안되고 세상사는 게 힘드니 그 분풀이를 나한테 했다. 술 마시는 아빠도 밉지만 세상이 더 밉기 도 했다. 아빠형제들 중 아빠만 당원이 아니다. 아빠는 한번이라도 자식들한 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폐암으로 세상을 떠 나셨다. 세상을 한탄하시면서 술과 담배를 너무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 엄마 는 직장에 일가시고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되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나는 재봉을 잘하게 되 었다. 재봉은 잘하게 되었는데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옷 사 입는 사람들이 줄 어들고 사람들은 먹는 것에 투자를 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나는 바닷가에 가 서 그물 뜨는 일을 하게 되었다. 재봉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지인 소개 로 바닷가에 가게 된 것이다. 그물 뜨는 일도 재봉 일처럼 힘들었다. 손에 물 집이 잡히고 손은 늘 부어 있었다. 바닷가 짠 소금물 때문에 손이 갈라 터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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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손 쓰린 것 또한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매일 무거운 그물을 나르려니 체 력도 많이 지쳐 있었다. 이렇게 나는 여름철에는 바닷가에서 일을 하고 겨울 에는 다시 재봉을 하곤 했다. 힘든 절망 속에서도 나는 늘 희망을 잃지 않았 다. 언젠가는 나도 공부도 하고 멋진 집에서 살 것이라는 희망을 늘 가지고 살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에 친구한테서 한국에 가자는 제안을 받게 되 었다. 늘 마음속으로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북한을 벗어나고 싶다고 빌고 있어서 흔쾌히 허락했다.
2. 새로운 시작
그래서 두 달 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으로 오는 과정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위험하고 긴장되는 날들을 보내야 했다. 북한에서는 월남하다 붙잡 히면 그 가족들의 3대를 멸족시킨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는 한국 에 오고 싶었다.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북한에서 못한 것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의 욕망에 불과했다. 거리 에 나가면 눈에 보이는 것은 영어로 된 간판과 외래어 뿐 이었다. 제일 신기 했던 것은 카드로 물건을 사는 것이었다. 북한에는 은행이 있어도 적금을 할 만큼 돈의 여유가 많지도 않고 시스템이 발전 되지 않아서 카드로 물건을 사 는 건 볼 수가 없다. 혼자서는 아무 곳도 갈 수가 없었다. 10분이면 갈 거리 를 택시비를 5만원 들여서 간적이 있다. 서울은 거리가 원주보다 더 복잡해 서 찾기가 더 어려웠다. 지금은 아주 잘 다닌다. 영어는 한국에 와서 처음 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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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북한에서는 영어를 배워줘도 많이 활용하지 않고 학교를 못 가서 못 배웠다. 한번은 청소를 하다가 휴지통에 영어로 ‘thank you’라고 쓴 것을 보 았다. 그때 나는 한국에서는 휴지통을 ‘thank you’라고 부르는 줄 알았다. 나중에 공부를 한 다음에 알고 보니 휴지통이 ‘thank you’가 아니라 쓰레기 를 버려줘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쓰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 기지만 그땐 정말 몰랐다.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을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셋넷학교’로 오게 되었다. 셋넷학교는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도 다니고 문화예술 활동도 많이 하고 나의 정체감을 형성하는 데서 도 움이 될 것 같아서 셋넷학교를 택하게 되었다. 작년 4월에 고등학교 검정고 시를 마쳤다.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고생을 많이 하신 덕에 시험을 높은 점수 로 통과 하게 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시험이라 떨리긴 했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신 덕분에 잘 봤다. 시험점수 발표가 났을 땐 너무 기뻤다. 내가 시 험을 합격했다고 선생님들이 밥도 사주시고 축하해 주러 오셨다. 자신을 위 해 시험을 보고 식사대접 받고, 초콜릿과 엿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북한 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할 수 있구나. 어렵다고 포기부터 하지 말고 노력하면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고입검정고시에 이어 대입 검정고시 과정을 준비했다. 이번 4월에 대입 검정고시를 봤다. 고입 검정고 시 보다 높은 점수가 나왔다. 그렇게 어렵다던 영어도 잘 나왔다. 선생님들 이 원주라는 도시가 기가 좋아서 잘 봤다고 농담하시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 들과 후원자분들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다. 지금은 학교에서 자격증 취득 을 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대학은 내년에 가려고 한다. 대학생활이 힘들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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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지만 열심히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북한에서 못 배운 것을 채우고 싶 다. 이제 2학기가 시작되면 학교 프로그램들에 성실히 참여 하려고 한다. 논 술 수업, 영어수업, 텃밭 가꾸기, 등산 활동 등 여러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치악예술 극단과도 수업을 한다. 작년에 “은혜갚은 꿩”을 하면서 그분들과 소통도 많이 하고 원주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결과가 좋 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수업이 또 있다. 원주에 살려면 원주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한다고 셋넷학교에서는 1학기에는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2학기에는 직업체험 및 지역 알아가기 활동을 한다. 학교에서는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 들의 편견을 없애기 위해 문화예술 활동을 많이 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에 참 여하면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고 사람들 앞에 수줍음 없이 잘 나서게 되었다.
제일 외롭고 쓸쓸할 땐 명절이나 방학이었다. 다들 집으로 가는데 나 혼 자 갈 곳이 없을 때가 제일 외롭고 사막에 혼자 있는 기분이다. 그럴 때면 북 한에서 살던 생각을 하게 된다. 생활은 어려워도 부모님 그리고 동생과 함 께 저녁이면 오붓하게 모여 앉아 이야기도 하고, 명절이면 같이 즐길 사람이 라도 있는 데 한국에 와서는 혼자이니 갈 데가 없었다. 그 과정에 새 아빠, 새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 분들인데 정말 좋은 분들이다. 나를 친 딸처 럼 생각하시고 명절 때면 같이 부모님들께 인사드리려도 데리고 가시고 나 를 잘 챙겨 주신다. 그래서 지금은 외롭다 슬프다는 생각이 안 든다. 아빠, 엄마가 생겨서 너무 행복하다. 내가 앞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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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젠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겨서 봉사 활 동도 다닌다.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꿈나무” 장애인 복지센터에서 봉사활동 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그리고 나를 예쁘게 낳아 준 아빠 엄마한데 너무너무 감사했다. 장애가 없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 가를 알게 됐고, 눈앞에 있는 것만 생각하고 가진 것 없는 내가 원망스럽기만 하고 다른 학생들은 대학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 는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어 소외감이 들었던 시간이 부끄러웠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당황스러워서 철없 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고 여러 활동을 하면서 나만 아 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외롭고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 교 선생님들과 나를 친 딸처럼 챙겨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이런 깨우침을 얻은 것 같다. 이제부터 열심히 자격증 취득도 하고 대학 갈 준비를 하려고 한다. 북한에서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많지만 한국에서는 노력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있다. 사회주의 독재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한다. 힘들고 지겹고 고 달프게 살던 시절은 다 잊고 거창한 미래를 상상하고 나의 꿈을 실현 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만을 생각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늘 응원해 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려고 한다. 내 인생은 이제부터 전환의 시기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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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사랑
북한이탈주민 수기 ┃장려상┃
이제, 지난 삶의 슬픔을 즐거운 추억에 묻었다 송 ○ ○ (서울)
[내 마음을 짓누르던 고향의 버럭산]
두만강이 흐르는 맞은편에 중국 연변자치주가 보이고 뒤쪽으로는 높 은 산봉우리들이 보이는 함경북도 ○○군이 내 고향이다. 탄광마을인 고 향의 겨울은 영하 33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추워서 겨울이면 사람들이 수 건 한 두 개 이상을 두르고 눈만 내놓고 다닌다. 서울에선 겨울에도 긴 양말(스타킹)에 치마를 입고 바깥에 다녀도 괜찮지만 우리 고장에서 아마 그렇게 다닌다면 아랫도리가 다 얼어버릴 것이다.
내 고향 탄광 근로자들은 90퍼센트 이상이 군사복무 10년을 하고 탄광 에 무리배치를 받은 제대군인들이며 토박이들은 10퍼센트 정도이다. 북 한에는 탄광, 광산 같은 공공기업소들이 대부분인데 당국에서는 이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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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제대군인들을 무리배치하여 운영하게 한다.
우리 가정은 제대군인 가정이 아니라 1976년도에 평양에서 추방되었는데, 탄광에는 우리 가정처럼 평양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꽤 많이 살았다. 추방 된 이유는 8월 15일 나라가 광복되기 전, 우리 친할아버지가 5명의 고용인 을 부리며 정미소를 운영했으므로 우리 아버지의 출신성분은 부농의 자식이 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 역시 5천평의 과수원을 운영했다는 이유로 ‘부농 가’의 딱지가 붙어서 우리 어머니도 성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 아빠, 엄마는 서로 성분(토대)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서 결혼해 우 리를 낳았던 것이다. 2남 2녀 중 2명의 오빠가 평양 태생이며, 나와 내 동생 은 함경북도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예전에 나의 아버지는 가끔씩 나와 동생 이 함경북도 사투리로 얘기하면, ‘함경도 찔라 깽이’, ‘혹은 할라 깽이’ 하며 놀리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고향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 나는 것 중에 탄광을 상징하는 커다란 버럭(폐석)산이 있다. 그놈이 얼마나 높은지 멀리서 보면 마치 무슨 웅장한 피라미드 모양같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석탄과 함께 캐어져 나 온 몹쓸 버럭들이 모여진 산이다. 한때 이 버럭으로 중국회사에서 북한과 협력하여 무슨 합영공장을 차렸었는데, 생산된 벽돌재질이 좋지 않아 망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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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버럭산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며 나의 고향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한때는 쓸모없는 버럭산 이었으나 90년도 이후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할머 니들의 유일한 석탄 이삭줍기를 할 수 있는 보물산이 되어버렸다.
우리 집은 기차역과 3분 거리에 있었고, 학창시절 나는 방학만 되면 이모 들이 사는 평양에 가서 한 두달씩 놀고 오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고 기쁨이었 다. 궁벽한 산간지대에서 나의 26년을 보냈다. 2004년 되던 해 나는 여동생 과 함께 탈북하게 되었고, 한국에 먼저 입국하였던 오빠와 나중에 어머님까 지 오시게 되어서 지금은 온 가족이 모두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눈을 감으면 내 머릿속에는 필름처럼 모든 과거가 지나간 다. 북한에서의 고생스럽던 추억과 즐겁던 생활, 그리고 긴장했던 탈북과정 과 한국에서 적응하던 힘겹던 나날들이...
[딸의 출신성분에 울분 터친 아버지]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알듯이 북한에서는 초등학교 4년중에 소년단 입단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누구나 조선 소년단에 가입하게 된다. 조선소년단에 입단하면서 모든 학생들은 조직에 얽매어 조직생활과 생활총화를 하게 된다. 소년단 입단과정은 소년단의 의 무와 권리, 꼬마활동계획을 잘한 순서를 정해 학생들을 차례로 가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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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단 입단과정에서 나는 입단선서와 의무, 권리를 모두 암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꼴찌로 소년단원이 되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당원 이거나 간부를 하는 집 자녀들과 토끼가죽을 제일 많이 기부한 학생 순서대 로 소년단 입단의 영예를 안겨주고 출신성분이 좋지 않거나 꼬마 과제수행 을 완수하지 못한 학생들은 한 두 달이 지난 후 마지막으로 가입시켰다.
소년단에 가입하면 붉은 넥타이와 소년단 휘장을 달고 다니는데, 그것이 어린 마음에는 무슨 간부나 된 것처럼 너무 멋져보였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소년단원이 되어서 붉은 넥타이에 휘장을 달고 신나서 다니는데 나는 아무 것도 없이 힘없이 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그때 아버지 앞에서 소년단원 넥타이를 못 매서 창피하다고 집 에 와서 울고불고 난리쳤었다. ‘무슨 놈의 세상이 양반이 존재하던 조선시대 인 것처럼 출신성분을 가리냐...누가 내 딸의 가슴에 못을 박는가’ 하고 세상 을 한탄하시며 술을 마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도 궁금한 중학 시절 짝사랑 ‘○○○’]
중학시절 내 삶의 단맛이 있다면 그것은 연애경험이었고, 쓴맛이 있다면 인내력과 힘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농촌지원전투였다. 항상 봄철 4~5월과 가을철이면 중학교 3학년부터 모든 학생들이 40~50일씩 농촌에 나가 농사 일을 해야 한다. 모두가 무조건 나가야 하고 누구하나 토를 달거나 불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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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릴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몰릴지도 모르니 사람들은 그저 속으로만 끙 끙 앓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학생이었지만 농촌지원전투 시기가 오면 학생의 신분이 아니라 무 슨 수용소의 강제 노동 같은 일을 강요당했다. 한 학생당 몫을 떼어 주는데 하루에 200평의 땅에 모내기나 강냉이 영양단지를 무조건 심어야 한다. 3학 년 봄, 농촌지원전투를 하는 도중에 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선지 출혈이 멎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지고 맥이 없어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사선생들은 별다른 방법이 없고 그냥 물소뿌리를 먹 으라고 민간요법만 알려주었다. 하지만 북한 지방에서 아프리카 물소뿌리를 구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맏딸인 나를 살리겠다고 물소뿌 리를 얻으러 여행증을 내고 평양까지 가서 그것을 얻어오셨다. 그 물소뿌리 를 열심히 칼로 갈아서 가루 낸 분말을 더운물에 풀어서 먹은 후 나는 출혈 이 멎였고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 4학년 부터는 다행히 학교음악 소조 <학생소년예술선전대>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 힘겹고 역겨운 농촌지원 전투는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내가 음악소조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우연히 전교 ‘시낭송 암송대회’에서 1 등을 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음악소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음악소조에 들면 무조건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배워야 한다는 음악선생님의 권고로 바이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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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을 배우게 되었다. 음악소조는 수업이 끝난 오후 2시 수업이 끝난 이후 음 악실에 가서 각자 자신의 악기를 연습한다. 특히 김정일이나 김일성 생일 때 면 우리학교 음악소조는 “관현악”을 멋있게 연주하여 전 군의 경축공연 무대 에서 제법 손꼽히는 등수에 들었다.
중학교 4~5학년 시절 남학생들은 음악소조에 다니는 여학생들과 어떻게 하면 연애편지를 주고 받을까? 하고 항상 기회를 엿봤다. 우리 학급엔 아버 지가 ‘보안원(경찰)’을 하는 남자학생이 있었는데 이름이 <○○○>이었다. ○○○은 생기기도 잘 생기고 나는 왠지 그 애가 좋았다. 나는 몰래 읽었던 ‘오빠의 비밀편지’라는 연애소설을 생각하면서 그 애가 나에게 연애편지를 보내 줬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끝내 그 애한테서 연애편지는 못 받아 봤지만, 다른 애들의 연애편지는 가 끔 책가방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봉건적이던 북한사회에서, 그 리고 권위적인 아빠가 있는 집 딸이 비밀편지에 만나자고 적혀있는 장소에 나간다는 것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 면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고, 또한 그 친구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곤 한다.
[40kg의 여린 체격에 탄광 전차운전공 되다. ]
1995년 졸업을 앞두고 나는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다. 내가 좋은 대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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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에는 우리 집 출신성분 때문에 이미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래서 나는 차라리 군대에가서 군사복무나 하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키가 155센티가 안 되는 바람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었다. 내가 평양 <속도전 돌격대>에 가겠다고 하자, 큰 오빠가 여자가 돌격대생 활을 하면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진다고 무조건 가지 말라고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느 날 군 기동예술선전대 대장이 집적 우리 집을 찾아와 내게 군 선전대 방송원을 제의했다. 나는 선뜻 응했다. 나의 꿈이 방 송원 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얼싸 좋구나’ 하고 대장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왕복 12km 출 퇴근길이 힘이들었고, 또 여자들끼리 있는 곳이라 내부의 질투가 얼마나 심 한지 1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또다시 나는 무직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탄광기업소의 노동지도원이 우리 집에 찾아와 내가 탄광 어느 부서에 배치되었으니 언제부터 ○○○탄광 어 떤 부서에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무단결석인 경우 노동 단련대에 갈 수 있다고 은근히 협박도 하였다. 꼼짝 없이 나는 탄광 수직갱 장비중대 전차운전공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직 장에 출근하니 내 이름은 탄광에서도 제일 지하막장 전차운전공으로 되어있 었다.
김일성 3년 제사도 다가오는데 배 째라 하고 버틸 수도 없고 해서 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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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부터 3개월 동안 전차운전공으로 일했었다. 처음에는 전차를 잘 운전하지 못해서 소대장들에게 엄청 욕도 먹고 혼도 났었다. 하지만 기계에 센스가 있 었는지 나는 보름도 안 되어서 베테랑 전차운전공이 되었다. 각 소대장들은 나보고 처음에는 어리벙벙한 줄 알았는데 눈치가 있는 애라고 서로 자기네 소대에 배치해달라고 난리였다. 그때 내 나이 19살도 안되었고 내 몸무게는 40킬로 정도밖에 안 되는 연약한 마른 체구였다.
[‘고난의 강행군’(식량난)으로 시작된 가족의 붕괴]
화는 쌍으로 온다 하였던가? 그해 11월부터 국가에서 공급하던 식량공급 소가 문을 아예 닫고 식량이 없어서 공급할 수 없다고 한다. 아버지가 직장 인이여서 식량을 공급소에서 배급받아 살던 우리집 식구들도 고스란히 고난 의 행군의 된 서리를 맞는 수밖에 없었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93년 군대에 나갔던 둘째 오빠가 3년도 안되어 영 양실조에 걸려 제대하여 우리 집은 여섯 식구가 되었다. 처음에는 시래기 밥 을 해먹다가, 점차 옥수수죽, 그것도 없어서 나중에는 쑥떡을 비롯한 온갖 풀을 석은 시래기죽을 쑤어먹기 시작했다. 남한해서의 쑥떡을 상상하면 오 산이다. 북한에서 우리가 먹던 쑥떡은 쑥 90퍼센트, 옥수수가루 10퍼센트를 섞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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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다 아버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면서 약값으로 이래저래 돈이 들 어갔고, 순식간에 우리 집은 고난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할 수 없 이 집에 있던 TV, 발로 돌리는 재봉틀을 비롯해 집안에 돈이 될 수 있는 것 은 모두 팔아서 식량을 샀다. 어머니는 딸인 내가 이 다음에 커서 시집갈 때 주시겠다고 준비해 두었던 여러 가지 그릇들과 도구들 그리고 보배처럼 아 끼시던 재봉틀도 식량과 맞바꾸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다녀오시면서 마련해놨던 가전기구 들도 다 팔아먹고 나니 우리 집에는 러시아제 ‘다리미’ 하나만 겨우 남았다. 그나마 우리 집 둘레에 있던 텃밭의 감자, 옥수수 등 작물들이 있어 거기에 의지해서 살 수 있었다. 또한 어머니가 돼지를 100킬로씩 애써 키우셨는데, 그것을 봄에 협동농장에 외상으로 주고 가을에는 식량으로 받아오셨다. 사 실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돼지를 100킬로씩 키운 다는 것은 온 집안 식솔이 거기에 신경을 써야하는 엄청 힘든 일이었다.
고난의 행군시절 아마 나도 어머니가 안계셨다면 우리 집은 정말로 꽃제 비로 전락하든지 아니면 뿔뿔이 흩어졌을지도 모른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 군’시절 어머니들의 활약은 남존여비의 북한사회에서 새롭게 모계씨족 사회 모습마냥 파워가 있었다.
하지만 그해 아버지가 끝내 ‘뇌졸증’으로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 둘째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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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창 즐거운 처녀시절을 보내야 할 시기에 고난의 행군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사라진 나의 둘째 오빠의 아픈 상처들과 함 께 두 어깨가 무거워졌으며, 힘든 나날이였다.
[낮에는 국가 일을, 밤에는 장사를!]
화술에 소질 있었던 나는 전차운전공생활에서 기동예술선전대원으로 전환 되었다. 마침내 3개월 동안의 막장에서의 삶은 드디어 마무리를 짓게 되었 다. 기동예술선전대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아침이면 기동예술대 완 장을 팔에 끼고 아침 5시부터 경제선동을 한다. 때문에 남보다 일찍 출근해 서 막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또한 우리는 매해 설맞이 공연, ‘2월 16일’, ‘4월 15일’, ‘7월 27일’, ‘8월 28 일’, ‘9월 9일’, ‘10월 10일’, ‘12월 24일’ 같은 명절을 위해, 각종 경제선동과 축하공연준비로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내가 선전대성원이 된 후로 ‘고난의 행군’시기로 인해 배급을 주지 않아 북한의 모든 주민들이 나태해진 상태였다. 선전대원들도 예외가 아니 었다. 우리는 기본 중요한 공연행사를 뺀 나머지 시간에는 서로 엇바꾸어 식 량구입이라는 명분하에 장사를 다녔다. 당 조직에서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냥 묵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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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처음으로 장사란 것을 하게 되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팥 100kg을 가지고 순화라는 단짝친구와 청진에 나갔었다. 순화의 옥수수 짐 150kg까 지 합해서 19세 여자 둘이서 250kg를 운반했다. 배낭하나 움직이려고 해도 50kg 배낭이라 연약한 여자가 다룬다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역까 지 나르는 것은 손수레에 의지했고, 기차에 싣는 것은 우리 맏오빠가 도와 주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청진’이라는 시내에 나가서 팔았다. 청진역에 내려 어 떻게 운반할까? 걱정했는데 역에 주둔해 사는 꽃제비 남자아이들에게 한 배 낭당 20원씩 주니 쌩쌩 운반해 주었다. 역에는 우리 식량을 사려는 식량 도 매꾼 아줌마 들이 손수레와 큰 배낭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1Kg당 10 원씩 마진을 보아 도합 천원을 이득을 보았는데 가고오고 차비를 빼니 겨우 500원이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시장에서 돈이 될 만한 여러 가지 잡화(라이터, 신발, 볼펜, 맛내기 설탕 등)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렇게 연달아 식량장사를 다니는 것을 북한에서는 일명 <식량달리기 선수>라고 한다. 낮에는 기동선전대원처럼 깨끗하게 차려입고 출근했지만 저녁만 되면 기 차를 타고 청진을 제집 드나들듯이 살았다. 하지만 식량을 내다 시내에 파는 것은 짐도 무겁고, 돈도 얼마 떨어지지 않아 그 후에는 계란 장사, 약초, 하 마개구리, 고사리, 오미자 등 돈이 되는 것은 모두 사재기해서 나진이나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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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장사라고는 근본을 모르고 했던 나는 본전이나 겨 우 건지고 떨어지는 돈으로 옷이나 한 벌씩 사 입을 정도였다.
[동생의 죽음을 피해 탈북을 결심하다.]
2003년도 되던 해 행방불명되었던 둘째 오빠가 대한민국에 있다는 소식 이 들렸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 브로커를 따라 두만강 을 건너 한국에 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운이 없었는지 어머니와 동생은 국경 에서 붙잡혀 북한으로 3개월만에 북송되었다.
이일은 나에게, 아니 우리집에 아주 큰 충격이었다. 군 보위부에 엄마와 동생을 만나러 갔지만 면회도 시켜주지 않았다. 큰 오빠가 겨우 아시는 분을 내세워 도시락만 전달하고 돌아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위부 구류장에 앉아있던 어머니와 동생이 겨우 간신히 40일 만에 풀려나게 되었다. 당시 2003년 북한 두만강주변에서는 탈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람을 팔아넘기지만 않았다면 한번은 용서해주라는 당의 방침이 내려왔다고 했다. 너무도 좋아서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러 갔는 데 어머니와 동생은 40일 동안 갇혀 있으면서 영양실조에 걸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황이라 손수레에 태워서 겨우 집에까지 모셔왔다. 두 사람의 모습은 뼈에 가죽만 씌어 놓은 상태였다. 보위부 구류장에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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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먹지도 못하고 취조만 당하다 보니 어머니와 동생의 몸은 뼈에 가죽만 쒸어놓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죽을 써서 식사조절을 시켰는데도 동생과 어 머니의 얼굴은 부종이 와서 퉁퉁 부어올랐다. 여동생은 한동안 생리도 멎어 버린 상태였다.
이것이 결국 나의 탈북동기가 될 줄은 몰랐다. 나중에 서너 달이 지난 후 큰 오빠와 친한 안면이 있는 보안원이 우리 집에 와서 넌지시 하는 말이, 동 생이 암만해도 무사히 넘어 갈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중앙당에서 비사 회주의 구루빠(그릅)가 내려왔는데, 우리 군에서 탈북하는 자가 하도 많아 서 시범으로 몇 사람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연세가 있으시니 괜 찮고 여동생은 젊었으니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용서하는 척 놔주고 뒤로는 다시 처벌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내 동생이 교화소에 가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담당보안원이 와서 문서를 다시 작성해 야 하니 내일까지 보안소에 동생을 오라고 했다.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었다. 동생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고, 나는 내 동생보고 언니랑 같이 북한땅을 도 망가자고 하였다.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여 그날 저녁으로 우리는 써비차(돈내고 타는 화물차)를 타고 ○○시로 도망쳤고 ○○에서 브로커를 통해 두만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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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어슬렁거리는 광야를 지나 제3국으로]
두만강을 넘는 과정, 중국에서의 숨죽인 삶, 또다시 제3국으로의 탈출을 다 얘기하려면 정말로 끝이 없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중국말을 몰라 서 한걸음 옮길 때마다 살 얼음장 타는 심정이었고, 물과, 음식도 맞질 않아 배탈과 함께, 얼굴에는 두드러기가 나고 엄청 고생했었다.
그것보다도 한국으로 오는 길은 중국에서 또다시 제 3국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턱을 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제3국으 로 ○○국경을 택했는데 그 과정은 정말 내 인생에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나의 수명이 30년정도 짧아지게 했던 그런 아찔한 순간이었다. ○○에서 ○○로 가려면 버스와 기차 중 아무거나 타고 8시간 동안 가야만 했다. 브로커는 우리말고도 중국에서 숨어 지내던 탈북자들 여러 명을 더 합 쳐 총 인원이 20명이 되었다. 브로커는 차표만 나눠주면서 종점에서 모두 만나자고만 하고 각자 흩어져 앉으라고만 하였다. 정말 북한에서 금방 중국에 들어온 나와 내 동생은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옆에 한 언니(중국에서 몇년동안 거주하였던 언니) 에게 우리랑 같이 기차에 타자고 사정했다.
하지만 그 언니는 만약에 공안경찰이 중국말을 물었을 경우 우리가 더듬 거린다면, 자신도 위험해진다며, 모두 따로따로 가자고 저 혼자 딴 데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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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나와 동생은 둘이서 우리끼리 기차에 오르게 되었다. 한창 기차가 달리는데, 차표검열이 시작되었다. 순간 동생과 나는 심장이 쿵 쿵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만약 동생이 잡힌다면 나도 같이 잡혀서 동생을 어떻게든지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차례가 드디어 왔다 나는 차표를 동생 것까지 두 장을 한 번에 내밀 었다. 나의 가슴은 방망이가 뛰는 것처럼 쿵쾅거렸다. 다행히 검열관은 아무 말 없이 차표만 보고 스쳐지나갔다. 순간 나의 온 몸에 긴장했던 식은땀들이 흘러내리고 아슬아슬한 순간이 사라져버렸지만 한동안 동생과 나는 울렁거 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종점에 다 도착하여 우리가 다 집합 하였을 때, 다행히 운 좋게도 한 사람도 잡히지 않고 모두가 무사하였다. 참으로 모두가 살자는 욕구가 강 해서인지 운수가 좋아서인지 아무튼 다행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3시간 동안 행군을 하여 중국과 ○○국경을 넘었다. 그 과정은 무슨 특수훈련을 하는 것처럼 엎드렸다 뛰었다 하는 것을 몇십 번 반 복하는 군사훈련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고, 70살 된 할머니도 숨차서 헉헉 거리며 바지에 오줌을 싸면서도 정말로 잘 달렸다. 드디어 우리는 5개의 철 조망을 넘어 중국에서 ○○탈출에 성공하였다. 마지막 철조망을 넘었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동생을 꼭 껴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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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님, 돌부처님, 신령님, 정말 고맙습니다”하며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고난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군인들에게 찾 아가든지 아니면 그들에게 노출되어야 하는 과제만 남았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새벽 2시 반쯤이었다. 너무도 추워서 가마니 짝이라도 있으면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 돌오돌 몇 시간을 떨면서 아침 7시까지 기다렸는데 저쪽에서 ○○군인들의 지프차가 달려왔다. 그들은 마치 도적을 잡을 기세로 무섭게 우리에게 다가 왔지만 우리 모두는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뜨거운 눈물이 볼에 서 줄줄 흘러내렸다.
[겁 없는 북한처녀, 문구점에서 쫓겨나다]
2005년 1월 나는 드디어 하나원을 퇴소하고 한국사회에 나오게 되었다. 16평짜리 집을 받았고 첫날 청소해주시는 봉사자분들이 너무 고마워 눈물 을 흘렸다. 빈집만 받았으므로 집에는 TV도 없었고 옷장도 없었으며 하나 원에서 준 밥솥과 이불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내 집이 있어 너무 좋았다.
한 며칠은 밖에도 안 나가고 봉사자들이 가져다준 밑반찬만 가지고 밥을 먹었다. 한번은 밖에 나갔는데 길도 모르겠고 동사무소가 어디에 붙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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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몰라 집 주위를 뱅뱅 여러번 돌기까지 했다. 한번은 관리사무소에 서 인터폰으로 잠깐 내려와 달라고 하였는데 나는 택시를 타고 동사무소에 가서 “왜 불렀는지요” 하고 묻기도 했었다. 북한에서는 동사무소가 존재했으 므로 나는 관리사무소와 동사무소를 헷갈렸던 것이다.
이렇게 한 달이 흘렀고 나는 빨리 한국사회에서 돈을 벌어 적응하고 싶다 는 욕심 때문에 동생한테는 공부하라고 하고 나는 복지관의 소개로 어떤 식 당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식당에서는 손님이 많은 시간인 저녁에만 아르바이트처럼 일하라 고 하여, 낮에는 문방구에서 오후 4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즉 나는 투잡을 하였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나는 문방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 이었다. 어린학생들이 물건을 사러오는데 그때 나는 “스탠 플로”, “스탬프”, “골판지”가 어떤것인지 알지 못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수첩에 적어서 이름을 외웠지만 닷새 만에 결국 잘리게 되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한국사회를 6개 월만 살아보고 다시 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아르바이트 월급봉투를 받아 쥐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그렇게 서럽게 펑펑 울어 본적이 없었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친구들 도 그리웠다. 가로등의 밝은 빛들이 나를 보고 “네가 설자리는 어디에도 없 어”하면서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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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대한민국의 부르주아적 물을 먹은 자본주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안 되면 무조건 잘라버리는 아주 나쁜 사람들, 즉 북한의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 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나는 정말 똑똑하고 눈치 빠른 사람이므로 이 가게를 위해 열심히 일할 사람인데... 그걸 못 참아 서 나를 이렇게 내쫓지... 그 가게 사장님이 정말 죽도록 미웠다.
결국 문구점에서 잘리게 된 것이 나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었고, 또한 그 위기로 인해 나는 한달동안 집에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나의 마음에는 불쑥 내가 이사회에서 살려면 도전하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는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으며 배우겠다는 마음이 생 겼다.
그때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이 영어였다. 북한에서 영어가 아니라 러시 아를 배웠던 나는 대학에 가면 영어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것이 매우 두려웠 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사선을 넘어왔는데 그까짓 영어 배우는 것이 무 슨 대수냐? 하는 오기가 생겼다. 결국 그 문구점에서의 일은 나를 앞으로 나 아가는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야간 영어학원에 열심히 나가게 되었다. 오전 9시부터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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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까지는 컴퓨터학원에서 자격증 공부를 했었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는 영어학원에 가서 영어를 배웠다. 다행히 “자유터 학교”라는 곳에서 남한 대 학생들이 무료봉사로 탈북학생들을 위해서 영어과외를 해줬다. 그렇게 1년간 영어를 배우고 결국 다음해에 2006년도 3월 나는 ○○대학 교 신문방송광고홍보학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영어공부 를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공과목의 절반이 영어교재였기 때문이었다.
[서글펐던 눈물이 찾아준 나의 행복]
대학시절 나는 나보다 나이가 11살이나 아래인 학생들이랑 공부했다. 처음 에 학교에 입학해서 과 OT를 갔었는데 우리 과 학생들이 나를 매우 신기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이가 많다고 말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나는 나름 대로 여기 문화를 따르는 척 하려고 일부러 내가 먼저 나가 씩씩하게 자기소 개도 하고 노래도 한 곡 불렀다.
하지만 남과 북이 서로 다르게 살아온 문화 때문에 내가 남한의 문화를 한 번에 다 받아들이기에는 분명 큰 한계가 있었다. 나는 신입대학생들이 MT 에 가서 술 먹고 여학생들이 남자학생들과 어울려 담배피우고 사귀고 하는 이상한 모습들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자유가 때로는 ‘너무 행 복한 것이 아니구나’ 하며 내 눈을 의심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 면 그것이 결국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나 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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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이고 자유로운 현상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상하지도 않으 며 오히려 자연스럽다.
4년의 대학과정이지만 나는 5년 가까이 대학을 다녔다. 졸업하려고 보니 기본과목 한 과목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 학기를 더 다녔고, 마지막 학기는 졸업논문을 쓰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대학을 포 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졸업했다. 대학기간 동안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대학생활은 곱절로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고마웠고 감사했다.
왜냐면 신분의 한계를 척도로 만들어놓고 있는 북한사회에서는 감히 상상 이나 할 수 없다. “누가 성분이 나쁜 나를 고급대학에 보내주겠는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니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항상 고마운 이 은혜를 늘 간직하 고 한번 열심히 잘 살아보자~! 하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어려운 고비를 참 고 견디게 해주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이 오면 항상 나의 눈은 피멍 이 들어있었지만 성적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그때마다 학교를 관두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 열두 번씩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자유를 찾기까지의 끔찍했던 그 나날들과 함 께 또한 그 길에서 사망한 불쌍한 우리 북한 탈북자들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도 북한의 독재자 밑에서 온갖 강제노동을 당하면서도 밥도 변변히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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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북한주민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느냐... 나는 지금 자유의 대한민국에 와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으며 또 무료로 대학 에서 공부하면서도 공부가 힘들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견디어냈 다. 또한 열심히 교회에 가서 “하나님...제발 절 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 소서” 하면서 마음을 더 굳세게 하였다.
기도의 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무사히 대학교를 마쳤고, 그해 12월 ○○시청의 공지를 보게 되었고, 드디어 나는 서류와 면접을 통과하여 ○○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현재 나는 ○○시청에서 새터민 취업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계약직 공무 원이지만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 언젠가는 열심히 묵묵히 버텨만 준 다면 나에게는 분명 또 다른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후배 탈북자들에게 일자리를 상담해주고 소개해주는 일을 한다. 특 히 후배 탈북자분들에게 내가 선배 탈북자로서 경험을 알려주고, 정보를 주 고, 또한 일자리 소개가 성공했을 때 느끼는 행복과 보람은 그 어디에도 비 교하지 못할 만큼 기쁘다.
나는 지금 한국에서 9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정착과정에서 슬픈 일, 기 쁜 일 모두 맛 보았지만 지금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복 받은 인간이구나... 하 고 느낀다.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내 조국이 있어 너무 고맙고 진심으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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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지금 내가 북한에 있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며 지 금의 이 행복에 감사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고 넘어야 할 산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통일의 그날을 그리며 내가 받은 사랑을 실천하고 또 통일의 징검다리로 준비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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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사랑
심사평
경찰청 공모전 심사평 한규훈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2013 안보사랑 콘테스트 출품작 심사 이철한 (동국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민족의 비극에 공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 많아 이경영 경기대학교 교수 (시인·문학평론가)
꿈꾸는 날의 행복의 향연이 펼쳐지길 바라며 김현탁 (한국현대문학연구소 소장)
경찰청 공모전 심사평
한 규 훈 (숙명여대 홍보광고학과 교수)
올해 안보사랑 콘테스트의 시청각 부문(광고영상, 포스터, 사진)에 기대를 넘어선 많은 작품들이 출품되었습니다. 전국에서 그토록 많은 국 민들이 공모전 참가를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되 새기는 기회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이번 행사의 의미가 더욱 크게 느 껴졌습니다.
그러나 출품작 수에 비해 메시지의 설득력과 표현의 독창성이 돋보이 는 작품들이 많지 않았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북한의 대남도발 상 기를 통한 위협소구나 113신고 강조 등의 일방적 메시지가 주류를 이루 었고, 단순한 애국심 고취나 순국한 국군장병의 뜻을 기리는식의 접근도 많이 눈에 띄어서 표현의 소재와 화법이 기대만큼 다양하게 나타나지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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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영상 부문은 뛰어난 작품들이 다수 출품되 어 최종 수상작을 선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부문에 있어서 심 사위원들은 장시간 논의 끝에 영상미와 완성도가 돋보이고 메시지도 적절히 소화한 작품(최우수상 수상작),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로 안보사랑의 생활화 를 강조한 작품(우수상 수상작), 그리고 안보의식의 중요성을 메시지 대비 를 통해 독창적으로 표현한 작품(장려상 수상작)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습 니다.
앞으로 안보사랑 콘테스트의 참여도 증진과 출품작의 활용성 제고를 위해 공모부문 및 시상금 재조정(홍보기획서, 스토리 영상, 또는 웹툰 부문 신설 검토)과 출품자 소속에 따른 시상분야 세분화(청소년부, 대학생부, 일반부로 구분)를 고려해 보실 것을 제안합니다.
매년 경찰청이 주최하는 안보사랑 콘테스트가 국민의 안보의식 고취에 지 속적으로 기여해 나가길 기대하며, 이번 공모전의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뜻 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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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안보사랑 콘테스트 출품작 심사 이 철 한 (동국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번 2013년
안보사랑 콘테스트 중 시청각 부문에 많은 응모자가
참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시상 때문이라기보다는 많은 국민이 지금 시 점에서 안보가 중요하다고 느끼고 이를 자신만의 생각과 느낌으로 표현 하려는 의지가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올해 안보사랑 콘테스트의 시청각 부문 출품작 중에서도 특히나 광고 영상 부문에서 수상작을 선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광고영상 부문에 출 품된 작품들 모두가 매우 우수한 촬영기법과 독창적인 소재를 통해서 안 보사랑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어려운 안보홍 보가 아니라, ‘누구나 경찰과 함께 안보에 동참할 수 있다’는 주제를 애니 메이션, 모션그래픽, 실사 영상등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서 친근하게 전 달하고 있는 수작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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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안보홍보 포스터 부문 역시 비교적 다양한 소재가 제시되었으며, 그 중에 서도 국기를 활용한 우수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방패나 나무 등 기존 에 많이 다뤄졌던 소재를 재해석하여 새롭게 포스터로 만든 작품이 수상하 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이력서 등 기존의 발상과는 다른 소재를 사용해서 만 든 작품역시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보홍보 사진은 가장 많은 응모작이 접수된 부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최우수상을 선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응모작들이 많았음에도 그소재와 주제가 서로 비슷한 경우가 많았으며, 주제 측면에서도 안보를 형상화하여 국 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보다는, 안보현장에 자신이 있었다는 식의소위 ‘인 증샷’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출품작들이 많았던 만큼, 국민의 안보사랑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었던 부문이기도 합니다. 향후 이심사평을 읽 고 내년에 안보홍보 사진 부문에 응모한다면 주제를 자연스럽게형상화하되, 안보를 그대로 사진에 담아내는 것보다는 안보사랑에 참여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거나 안보의 필요성, 안보 부재가 우리에게 끼치는 악영향 등을 함축적으로 사진으로 담아내는 시도를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번 경찰청과 함께하는 안보사랑 콘테스트가 국가안보와 경찰 모 두가 우리 국민에게 친숙하면서도 소중한, 그리고 앞으로 함께 동행해 나갈 동반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장이 되었음을 말씀드 리며 심사평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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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비극에 공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 많아 이 경 영 경기대학교 교수 (시인·문학평론가)
좋은 글은 읽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동시에 글을 통하여 자 신을 살펴보게 하고 잘못된 것을 바르게 잡아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좋 은 글이 가져다주는 성찰적이고 교훈적인 기능이 이번 경찰청에서 안보 사랑 콘테스트를 개최하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번 공모전의 작품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최선 을다하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전달되어 심사위원 일동을 기쁘게 했다. 북한이탈주민 체험 수기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북한에서의 참담한 실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이 점이 주목되었다. 여기에서는 ‘얼 마만큼 더 비극적인가’보다는 ‘이 내용들이 전달될 때 얼마나 더 자연스 럽고 공감을 잘 불러 일으키는가’가 평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말하자 면 주제와의 연관성과 활용가능성 이외에 표현력과 문학성을 보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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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데, 이들 요건을 자연스럽게 용해해내야 좋은 평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들은 개인사적인 고난과 아픔의 과정을 진솔하고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민족의 비극을 잘 형상화시키고 있는 점, 더 나아가 탈북 이후 어려운 과정을 거쳐 안착하게 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내면서 도 통일 주제의식 잘 드러나고 있는 점 등이 주목되었다.
안보현장 체험소감문 및 안보만화 감상문의 경우는 자칫하면 밋밋하게 보 여 읽는 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성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배점 기준에 맞춰 평 가를 하더라도 다른 분야보다는 표현력과 문학성 부문에서 우열이 가려지게 되므로 수상작을 결정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점들을 많이 감안할 수 밖에 없다. 만화 감상문은 단순한 감상보다는 내용이나 주제를 보다 체계적 으로 나타내고 주제의식이 잘 용해되어 있는 좋은 작품을 선정하고자 했다.
한마디 충고를 하자면 자신이 다녀온 안보현장을 나열식으로 열거하거나 안보의식을 단순히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체험을 통해 뭉클하게 다 가오는 느낌을 진솔하게 그려주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생생한 전 달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 주장보다는 객관적인 이 유를 제시함으로써 설득력을 높이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수상작들은 안보현장 체험 내용을 비교적 차분하고 공감 있게 그려냈다는 점, 어린 초등학생임에도 생각이 옹골차고 주제의식도 잘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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냈다는 점,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전개하면서도 주 제를 잘 나타냈다는 점, 북한과 전쟁, 그리고 국가안보 등의 문제에 대해 깨 달아 가는 과정을 안정감 있게 그려냈다는 점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안보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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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날의 행복의 향연이 펼쳐지길 바라며 김 현 탁 (한국현대문학연구소 소장)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누리고 싶은 행복의 욕구들이 수없이 많겠지 만, 그 행복을 추구하기는커녕 생명의 보존마저 위태로운 북한 사회에서 는 왜 태어났는지를 원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태반인 것 같다. 지리적으로 불과 몇 십 킬로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우리 동포들이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이 지구촌 곳곳에서 알고 있다.
학자들이 학문적 분류를 하거나,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인간의 가치 를 추구할 때 주로 거론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사회적 욕구, 인간다움, 도덕성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가 북한 사회에서는 쓰레 기통을 뒤져도 찾을 수 없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북한이탈주민 체험수기 최우수상 작품은 작품에 녹아있는 엄마를 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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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또 다른 엄마를 본다는 안타까운 사실들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승화시키 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두 번째 우수 작품은 부유했던 북한에서의 생활도 있었지만, 결국은 남한 사회의 자유민주주의가 더 풍요롭고 자유스럽다는 이야기를 잘 그려냈다. 더더욱 북한이탈주민들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몫을 제대로 챙기 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터뜨릴 수는 없다고 한 대목은 북한이탈주민들이 다 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의식의 변화를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그 외 작품들도 북한에서의 어려웠던 생활상을 구구절절 적나라하 게 잘 그려냈다. 하지만 남한에 와서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에 비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잘 표현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안보현장체험 소감문 및 안보만화 소감문의 최우수 작품들에는 아버지를 귀감삼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국가관,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 잘 표 현되었다. 또한 우수 작품은 일상에서 느꼈던 따스한 인정이나 체험들을 북 한 주민들 역시 그대로 느꼈으면 하는 바람을 잘 엮어주었다. 그 외 안보만화소감문 수상작에는 ‘병만도사와 친구들’이라는 허구의 만화 를읽고 난 후에 받게 되는 작은 깨달음들이 소소하게 잘 나타나 있었다.
이번에 응모된 북한이탈주민 수기는 작품 하나하나가 피와 땀이 맺힌 회 한의 결정체였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남한에서의 행복한 생활의 내음이 물씬 풍겨 나왔다. 당선 여부를 떠나 북한이탈주민 참가자들의 고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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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심사평 ●●●
한 행복에의 추구가 대한민국에서는 꼭 이뤄지길 바라며, 북한의 실상을 제 대로 체험하지 못한 학생들은 만화라는 허구 속에서 진실한 대한민국의 행 복을 흠뻑 맛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안보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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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안보사랑 콘테스트 입상작 모음집
모두가 하나 되는 대한민국! 발행일
2013년 6월
발행인
경찰철 보안국
TEL : 02) 3150-1484
서울시 서대문구 통일로 97
디자인
빈커뮤니케이션즈 02.3141.3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