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는 길
3과. 인류 세계의 평화가 깨어진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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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인류 세계의 평화가 깨어진 원인
Section 1 평화를 깨트린 욕심 Section 2 평화의 시작 사랑
핵심 요약 (Abstract)
분쟁과 전쟁의 발생 원인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했다 는 공통점이 있다. 욕심은 자연과 인류 사회의 조화와 질서를 깨트리고, 폭력과 전쟁을 일으켰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평화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감사, 배려, 희생, 용서 등 평화 가치관은 마음속의 욕 심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며, 인류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기틀이 된다. 평화 가치관은 교 육을 통해 내면화 할 수 있다. 평화 가치관을 내면화 한 사람이 평화 시민이며, 평화 시민은 주변에 평화 문화를 전파하는 평화의 사자이다. 욕심을 부추기는 교육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는 평화교육 으로 지속가능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가자.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도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He who is not contented with what he has, would not be contented with what he would like to have. ㅡ 소크라테스 (그리스 철학자, BC 469~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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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를 깨트린 욕심
01 SECTION
Section 1
평화를 깨트린 욕심 # 욕심은 어떻게 인류 세계의 평화를 깨트렸을까?
도대체 전쟁은 왜 일어나는 걸까? 전쟁은 결과적으로 순손실을 초 래하고, 청년의 희생을 강요하며,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끊이 지 않았고, 현재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 합 리적인 이유를 찾는 것은 인류에게 오랜 세월 숙제였다. 전쟁이 벌 어진 횟수만큼 다양한 원인을 나열할 수 있지만, 가장 근원적이고 공통적인 전쟁의 원인은 바로 ‘욕심’이다. 사람의 욕심이 어떻게 전 쟁을 일으켰는지 살펴보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생각해보자.
1. 평화를 깨트린 욕심 1) 분쟁과 전쟁의 다양한 원인 분쟁과 전쟁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인류학과 고고학의 다양한 연 구는 선사 시대부터 분쟁과 전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선 사 시대에 일어난 분쟁과 전쟁의 주요 원인은 ‘생존 자원과 번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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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경쟁’, ‘무리 내 서열 경쟁’, ‘원한 관계에 의한 복수’ 등이었다. 이후 국가와 문명이 출현하면서 체계를 갖춘 군대가 생겨났고, 이전 보다 전쟁의 규모도 커졌다. 국가의 출현 이후 전쟁의 원인은 위에 서 열거한 것들 외에 ‘국가 영토 및 세력 확장’, ‘무역에서의 이권 차 지’, ‘종교 갈등’, ‘이념 충돌’ 등이 추가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국제 관계학에서 말하는 ‘국제 사회의 무정부 상태’1), ‘안보 딜레마’2) 도 넓은 의미에서 전쟁의 원인에 포함된다. 이처럼 전쟁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인류는 사건의 해결 수단으로 분쟁과 전쟁을 선택해 왔다. 하지만 폭력을 동반한 전쟁만이 갈등의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전쟁 외에 도 대화, 협상, 평화적 경쟁, 회유, 조정, 소송, 재판 등 갈등 해결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 1986년 11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한 <폭력에 관한 세비야 선언(Seville Statement on Violence)> 에서는 “전쟁이든 다른 어떤 형태의 폭력적 행위든 우리 인간의 본 성에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옳 지 않다. (It is scientifically incorrect to say that war or any other violent behaviour is genetically programmed into our human nature.)”고 규정했다. 인간은 반드시 폭력을 사용해야 하 는 존재가 아니며, 폭력은 인간에게 식욕이나 성욕 같이 해소해야 하는 생물학적 욕구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이나, 수 세기 동안 전쟁을 겪지 않은 지역의 사람에게 특별한 결핍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2) 욕심: 분쟁과 전쟁의 근본 원인 인간이 폭력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 파괴적인 방법을 선택한 원 인은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욕심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라는 말이 표현하듯, 폭력은 인간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 용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대화나 협상, 회유는 폭 력보다 절차적으로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며, 전쟁의 승리처 럼 즉시 얻을 수 있는 보상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을 충
1 국가를 통제할 수 있는 범세계 적 정부의 부재로 인해 국가의 무력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할 수 없는 상태 2 한 국가가 안보를 위해 군사력 을 증강하면, 안보 위기를 느낀 주변 국가가 경쟁적으로 군사 력을 증강해서, 다시 원래 국가 의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이 반 복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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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시키기 어려웠다. 인간의 욕심은 갈등 해결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평화로운 해결책을 선택하는 비율을 낮추고, 폭력을 선택하 는 비율을 급격하게 높였다. 그래서 다양한 종교 경서에서도 욕심의 속성을 경계하고 있다. 또 많은 사람이 욕심의 위험성에 대해 알렸다.
탐욕으로부터 걱정이 생겨나고, 탐욕으로부터 두려움이 생겨난다. 탐욕이 없으면 걱정도 없으니, 또 어디에 두려움이 있겠는가? Out of craving grief is born, out of craving fear, one fully freed of craving has no grief - how fear? 불교 <법구경>
지옥으로 들어가는 세 가지 문이 있는데 욕망, 성냄, 그리고 탐욕이다. 이 들은 영혼을 타락하게 하므로 분별 있는 자는 누구나 이를 버려야 한다. There are three gates leading to this hell – lust, anger and greed. Every sane man should give these up, for they lead to the degradation of the soul. 힌두교 <바가바드 기타>
하나님은 너희들을 용서하고자 하시나,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신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Allah wishes to accept your repentance, but those who follow their lusts, wish that you (believers) should deviate tremendously away (from the Right Path). 이슬람교 <꾸란(코란)>
탐욕을 버린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유교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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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을 버린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苟子之不欲 雖賞之不竊. 유교 <논어>
탐욕은 작은 입을 가진 뚱뚱한 악마이며, 무엇을 먹여도 충분하지 않다. Greed is a fat demon with a small mouth and whatever you feed it is never enough. 얀윌렘 반 드 비터링 (네덜란드/미국 작가, 1931~2008)
만족을 모르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끝없는 노력으로 사람을 지치게 하는 밑 빠진 독이 탐욕이다. Greed is a bottomless pit which exhausts the person in an endless effort to satisfy the need without ever reaching satisfaction. 에리히 프롬 (독일/미국 심리학자, 1900~1980)
우둔함, 공포, 탐욕이라는 세 가지 큰 힘이 세상을 지배한다. Three great forces rule the world: stupidity, fear and greed. 알버트 아인슈타인 (독일/미국 물리학자, 1879~1955)
탐욕은 인간의 영혼을 독살하고, 증오심으로 세상을 바리케이드 치고, 우 리를 불행과 유혈로 몰아넣었다. Greed has poisoned men's souls, has barricaded the world with hate, has goose-stepped us into misery and bloodshed. 찰리 채플린 (영국 배우, 1889~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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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욕심과 전쟁 미국의 역사학자인 윌 듀런트(William James Durant)는 “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 전쟁이 없었던 해는 268년에 불과하다. (There have been only 268 of the past 3,421 years free of war.)”고 했 으며, 지미 카터(Jimmy Carter) 미국 전 대통령은 242년의 미국 역 사에서 평화는 16년뿐이었다며 우려를 표했다. 이렇듯 인류 역사에 서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 몇 가지의 전쟁이 인 간의 욕심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살펴보자.
1) 십자군 전쟁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종교를 대표하는 세력이 격돌한 십자군 전 쟁(1095~1291년)은 약 200년 동안 총 8차례에 걸쳐 치러졌다.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 (Urbanus PP. II)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Deus lo vult.)”고 외쳤 다. 이어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면죄가 주어진다고 선언했고, 이에 부응한 유럽의 제후들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출정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의 승리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 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유럽인은 그 주변 레반트3) 지역까지 점령 해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4) 을 건설했다. 이에 이 슬람 군대는 빼앗긴 영토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알라는 위대하 다. (Allāhu Akbar.)”고 외치며 유럽에서 온 십자군에 대항해 싸웠 다. 이렇게 시작된 제2차 십자군 전쟁에서 살라딘(Salah ad-Din)이 이끄는 이슬람군은 예루살렘 탈환과 빼앗긴 대부분의 영토 회복에 성공했다. 사자심왕 리처드(The Lionheart Richard I)와 살라딘의 대결로 유명한 제3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은 예루살렘까지 진격 하지도 못했다. 예루살렘이 아닌 지중해의 몇몇 항구 도시를 두고 대부분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십자군은 일부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철수했다. 베네치아가 참전한 제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
3 지중해 동부 연안의 시리아, 레 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부터 이라크, 이란에 이르는 지역을 일컫는 말 4 예 루살렘 왕국(1099~1291년) 은 제1차 십자군이 팔레스타인 을 점령하고 세운 왕국으로, 약 200년간 레반트의 기독교 왕 국으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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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닌,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제국을 공격했다. 그리고 십자 군은 비잔틴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성공했다. 베네치아 는 승전 보상으로 크레타섬을 얻었고, 지중해와 흑해에 해상 장악력 을 확장했다. 이로 보아 이 시기의 십자군 전쟁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완전히 변질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5차 십자군 은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나일강 하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 했고, 겨우 살아남은 무리는 유럽으로 철수했다. 제6차 십자군 전쟁 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는 전투가 아닌 협상으로 예루살렘의 2/3를 되찾았다. 이 협상으로 얼마 동안 예루살렘은 기독교 측과 이슬람교 측이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제7, 8차 두 차례의 십자군 전쟁이 더 있었지만, 십자군이 레반 트 지역에 세운 ‘예루살렘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예루살렘은 이 슬람 측에 돌아갔다.
십자군 전쟁을 순수한 성전(聖戰)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다양한 사료는 교황과 황제의 권력 투쟁, 유럽 제후들의 영토와 이권에 대한 욕심, 일부 기사들의 모험심 등 이 십자군 전쟁 안에 뒤섞여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십자군 전 쟁은 인간의 욕심에 종교적인 명분이 더해진 전쟁이었고, 그 결과 2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목숨 을 잃었다.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는 수 세기 동안 서로를 증오하는 깊은 감정적 골이 생겼다. 그리고 두 종교 간 갈등 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특 히 증오나 혐오와 같은 감정은 쉽게 전염되는 특성이 있어서 십자군 전쟁을 살펴보는 우리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의 역사 를 거울삼아 욕심과 증오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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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0년 전쟁 구교와 신교의 종교 전쟁으로 알려진 ‘30년 전쟁’은 1618년에서 1648년까지 독일 전역에서 벌어졌다. 30년 전쟁은 민간인까지 공 격한 전면전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스페 인 등 유럽 대부분 국가가 참여한 이 전쟁으로 약 800만 명의 사망 자가 발생했고, 독일 도시 인구의 약 25%, 농촌 인구의 약 40%가 감 소했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학살과 방화, 강간, 식인까지 벌어진 끔찍한 전 쟁이었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30년 전쟁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부터 있 었기 때문에 30년 전쟁을 단순한 종교 전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 시 독일은 합스부르크가의 황제가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국으로 구성된 연합국의 형태였는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Augsburg Settlement)’의 결정에 따라 제후국은 구교와 신교 중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 후국은 ‘신교 연합(Protestant Union)’과 ‘구교 연맹(Catholic League)’으로 나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두 파로 나뉘어 종 교적 결속력을 잃어버렸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강력한 중앙집권
그림 1-1 30년 전쟁, 나무에 매달린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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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위해 제국을 구교로 통일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이 30년 전쟁의 발단이었다. 이 정책은 제후국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 켰고, 급기야 신교 제후국인 보헤미아에서 1618년에 군사적 마찰이 벌어졌다. 여기에 구교 연맹과 구교 국가 스페인이 합세하면서 보헤 미아 사건은 삽시간에 유럽 전체의 갈등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신교 인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가 전쟁에 합세했다. 표면적으로는 신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독일 북쪽 지역에 덴마크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 신교인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Gustav II Adolf)는 프랑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참전했는데, 놀랍게도 프랑스는 당시 구교 국가였다. 구교 국 가인 프랑스가 신교 국가인 스웨덴을 지원한 이유는 신성 로마 제국 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는데, 구교 국 가끼리 공식적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 뒤에서 몰래 스웨덴을 후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도 신성 로마 제국에 대 항해 직접 참전하게 된다. 이때부터 30년 전쟁은 완전히 종교적 근 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유럽 전역의 경제 는 파탄 나고, 유례없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결국, 1648년에 ‘베 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5) 이 체결됨으로 30년 전쟁 은 막이 내렸다.
17세기 유럽은 안정적인 국가 체계를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래서 30년 전쟁은 매우 혼란스러운 형태로 전개되었다. 각 지역 제 후는 자신의 영토와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너나없이 전쟁에 뛰어들 었다. 30년 전쟁은 인간의 욕심이 종교적 명분과 결합할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5 베스트팔렌 조약은 최초의 근 대적인 외교 회의를 통해 나온 평화 조약으로, 국가 주권 개념 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를 중 부 유럽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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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욕심과 인종차별 인종차별은 자기가 속한 인종에 대한 우월감과 다른 인종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하는 고정 관념이다. 심지어 현대 생물학에는 인종 이라는 학술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피부색은 키, 체형, 귓불 모 양처럼 수많은 유전형질의 하나에 불과하다. 또 피부색에 영향을 주 는 멜라닌 색소는 특정 인종만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통 으로 가지고 있다. 멜라닌 색소는 사람에 따라 유무의 차이가 아닌 양적인 차이만 있다. 이 외에도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은 주어진 환 경에 따라 적응하고 진화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무엇이 우월하고 무 엇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요약하면, 생물학적 차이로 인종을 나누고 우열을 논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태도이다.
인종차별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외국인 혐오’와의 차이를 이 해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혐오가 단순히 자국민이 아닌 사람에 대 한 혐오라면, 인종차별은 타자 혐오에 생물학적 열등함이라는 근거 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인종차별은 외국인뿐 아니라 자국민이 대상이 되기도 하며, 타자 혐오에 객관성 과 합리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이러한 인 종차별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인종차별 이 결국 불평등, 지배, 착취로 귀결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대서양 노예무역의 역사 ‘대서양 노예무역(Atlantic slave trade)’은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400년간 약 1,200만~1,5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아메 리카에 노예로 보낸 사건을 말한다. 아프리카인을 대상으로 하는 노 예무역은 15세기 중반 포르투갈 탐험대가 모리타니인을 유럽에 노 예로 데려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었고, 유 럽인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다. 유 럽에서는 재배가 어렵지만 열대 기후에서는 잘 자라는 사탕수수, 담 배, 커피, 카카오, 목화 등을 수확해 유럽에 판매하려는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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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영국 노예선에 실린 아프리카인
처음에는 농장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아메리카 토착민으로 충당 했지만, 토착민의 대다수가 유럽에서 전해온 전염병으로 죽게 되어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프리카인을 사서 아메리 카 농장주에게 노예로 팔기 시작한 것이 대서양 노예무역의 발단이 되었다. 이 노예무역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참여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을 ‘삼각무역(Triangular trade)’이 라고도 하는데, 삼각무역의 대략적인 형태는 다음과 같다.
1단계 유럽-아프리카 유럽의 노예 상인은 화약, 소총, 브랜디 등 유럽산 물품을 싣고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와 맞바꾼다. 2단계 아프리카-아메리카 아메리카 전역에 걸친 식민지 농장에 아프리카 노예를 팔고, 사탕수수, 담배, 커피 등을 사들인다. 3단계 아메리카-유럽 사탕수수, 담배, 커피 등을 유럽에 팔아 대규모 이윤을 남긴다.
4세기에 걸쳐 5만 회 이상 노예 무역선이 대서양을 횡단했고, 항 해 중 약 150만~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배에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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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태우기 전에 불에 달군 쇠로 가슴이나 어깨에 노예 낙인을 찍 었고, 위생을 이유로 남녀 불문하고 삭발을 했다. 남자는 옷을 전부 벗기고, 손발에 쇠사슬을 채웠다. 수익성을 이유로 움직일 공간도 주지 않고 노예를 배에 가득 채워 넣었다. 수 개월간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최악의 위생 환경이었다. 사탕, 커피, 카카오, 담배 등을 아프 리카인의 생명, 인권과 맞바꾼 것이다.
1807년 영국 하원 의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는 영국 선박을 이용한 노예무역 금지 법안을 의회에 통과시켰다. 이 때부터 노예무역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노예무역 금지는 노예 제도 폐지로 이어졌다. 1840년에는 영국 식민지에서, 1848년 에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미국에서는 링컨 (Abraham Lincoln)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 1863)’으로 1865년에 정식으로 노예 제도가 폐지 되었고, 300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자유를 되찾았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이윤에 대한 맹목적인 욕심과 집착으로 시작 되었다. 천만 명 이상이 강제 이주를 당하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 었다. 그 밑바탕에는 욕심과 인종차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예무 역과 노예 제도는 결국 폐지되었지만, 인종차별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인종차별이라는 관념까지도 마음속에서 폐지해야 한다.
2) 홀로코스트 위에서 인종차별이 불평등, 지배, 착취로 연결되는 과정을 살펴보 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종차별은 증오와 혐오를 유발한 다. 증오와 혐오가 위험한 까닭은 폭력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 문이다. 욕심 – 인종차별 – 증오와 혐오 – 폭력 - 대규모 학살로 이 어진 대표적 사례가 바로 ‘홀로코스트(holocaust)’이다.
19세기 말부터 정치학과 생물학 이론들이 인종차별을 합리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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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 사용되면서, 소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인종차별이 시작된다. 고비노(Arthur de Gobineau)의 <인종 불평등론(Essai sur l’inéga
-lité des races humaines)>,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 창 안한 ‘사회 진화론’6) 과 ‘우생학(Eugenics)’7) 등의 영향으로 대중은 인종차별적인 학설을 매우 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학설에 의하면 독일 민족을 포함한 아리아인(Aryan)이 세계에서 가 장 우수한 인종이며, 유대인은 가장 열등한 인종이다. 아돌프 히틀 러(Adolf Hitler)는 이런 주장을 가장 열성적으로 받아들인 사람 중 하나였다.
히틀러가 등장한 시기의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패 배 후 전쟁 배상금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8)으로 극심한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놓여 있었다. 또 1917년 ‘러시아 혁명(Russ -ian Revolution)’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독일에 들려오면서, 독일 국민들 사이에는 독일 내에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는 두 려움이 팽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의 독일 국민은 강력한 지도자 가 나타나기만 하면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고, 이것은 히틀러에게 기 회로 작용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당시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 만연했던 인종차별과 혐오를 이용해서 사회 불안의 모든 책임을 유 대인에게 돌리고 희생양으로 삼았다. 나치는 독일이 제1차 세계대 전에서 패배한 것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도, 전부 유 대인 때문이라는 거짓 정보를 유포시켰다. 독일 내에서 유대인에 대 한 분노는 나날이 커졌다.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먼저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 제한, 유대인과의 혼인 금지 등으 로 시작했다. 나중에는 모든 유대인의 신분증에 유다(Juda)의 J를 찍 어 유대인의 신분이 드러나도록 했으며, 사회에서 격리하기 위해 게 토(ghetto)9) 라는 구역에 가두어 집단생활을 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 결책(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이 실행된다. 당시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35개국에 강제 수용소를 건설한 후, 유대인
6 찰스 다윈의 생물 진화론에 입 각하여, 사회의 변화와 모습을 해석하려는 시도로 시작한 학 문.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로 사 용되었다. 7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학문. 8 경제학적으로 물가 상승이 통 제를 벗어난 상태로서 수백 퍼 센트의 인플레이션율을 기록 하는 상황. 9 게토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 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 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 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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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재산을 몰수하고, 유대인 약 300만 명을 700여 대의 열차에 실어 강제 수용소로 이동시켰다. 아우슈비츠(Auschwitz), 벨첵(Belzec), 헤움노(Chelmno) 등에 세워진 강제 수용소에는 대규모 학살을 위 한 가스실이 있었다. 가스실을 설계한 이유는 국제 사회에 대규모 학 살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sho -ah)’10) 로 불 리는 이 대규모 학살로 희생된 유대인은 약 600만 명이고, 그 외 슬 라브, 로미(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을 포함한 전체 희생 자는 대략 1,100만 명에 이른다.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이자, 인간이 한 일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끔찍하 고 비이성적이라, 도무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으로 평가 된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홀로코스트는 사람의 마음속 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마음속에서 시작한 인종차별이 이윽고 대규모 학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 가해자의 마음속에 있던 인종차별과 혐오는 그대로 피해자의 마음속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21세기에 피해자는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또 다른 폭력과 분쟁에 휘말려 있다. 평화의 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그래서 평화 가치 관을 전하는 평화교육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3) 마틴 루터 킹의 인종차별 저항 운동: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떠한 노예 제도나 강제 노역도, 해당자가 정식으로 기소되어 판결로서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미국과 그 사법권이 관할하는 영 역 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 (Neither slavery nor involuntary serv -itude, except as a punishment for crime whereof the party shall have been duly convicted, shall exist within the United States, or any place subject to their jurisdiction.)” 미국에서는 1865년에 채택된 수정 헌법 제13조(Thirteenth Amendment to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에 의거해 노예 제도가 공식적으 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종차별이 전부 없어진 것은 아 니다. 1865년 이후에도 해방된 노예의 대부분이 살던 미국 남부 주
10 홀로코스트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 고, 쇼아는 히브리어로 대재앙 또는 절멸이라는 뜻이다.
평화로 가는 길
에서는 ‘평등하지만 분리된다’라는 새로운 종류의 인종차별 정책이 시행되었다. 백인과 흑인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녔고, 식당에서도 따로 식사했으며, 열차 칸도 분리되었다.
1929년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는 이런 차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 진학 후에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비 폭력 저항’에 큰 영향을 받아 인종차별에 대항해 ‘비폭력 운동’을 주 도했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팍스(Rosa Parks)가 버스에서 백 인에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현장 체포되었 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Montgomery Bus Boycott)’운동이 시작됐다. 보이콧의 목적은 피부색과 관련 없이 승 객이 선착순으로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었다. 킹의 주도로 진행된 보이콧은 미국 전역에 인종차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 결 과, 1956년 11월 미연방 대법원(U.S Supreme Court)은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킹은 몇 차례나 살해 위협을 당했고, 집에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 다. 폭력은 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킹 은 폭력은 더 큰 증오를 낳는다고 말하며 끝까지 비폭력을 주장했 다. 인종차별 철폐, 흑인 권익 보호, 반전 운동 등을 이끈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4년 10월 14일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68년 4월 4일, 호텔 방에서 총격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 의 나이는 39세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2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참석 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마틴 루터 킹의 핵심 업적은 비폭력으로 인종차별의 부당함에 대한 시민의 공감과 동의를 끌어내고, 평화로 운 수단으로 사회 제도의 변화까지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1963년 8 월 28일, 워싱턴 D.C.에서 한 그의 연설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 한 연설 중 하나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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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를 깨트린 욕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1963년 D.C. 연설문 中)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1963 D.C. public speech)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미국 인권운동가, 1929~1968)
4) 아파르트헤이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아프리칸스어11)로 ‘분리’, ‘격리’ 를 뜻하며, 1948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법률로 실시된 인종 분리 정책을 의미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본래 원 주민인 반투족이 살고 있었고, 16세기 무렵부터 유럽 이주민이 살기 시작했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선거에서 국민당(The National Party)은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 정책으로 내걸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백인
그림 1-3 백인 전용을 알리는 아파르트헤이트 표지판
11 아 프리칸스어(Afrikaans)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 아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이 다. 16세기~17세기에 네덜 란드 출신 이주자들의 후손 이 써오던 네덜란드어가 독자 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성립된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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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가는 길
국가와 흑인 국가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大) 아파 르트헤이트’와, 생활 속 분리를 목표로 하는 ‘소(小) 아파르트헤이 트’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연도별 아파르트헤이트 입법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949년: 인종 간 혼인 금지 1950년: 백인이 유색 인종과 성관계 시 처벌, 모든 시민을 백인, 흑인, 컬러드, 인도인으로 나누어 신분증에 표시 1953년: 서로 다른 인종이 같은 공공 편의 시설(식당, 화장실 등) 이용 금지, 인종 분리 교육 실시(흑인에게 제공되는 교육은 질이 낮았다) 1958년: 흑인을 홈랜드 또는 반투스탄(Bantustan)이라고 불리는 집단 거주 지로 이동시키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분리된 국가로 공식화한다. 1970년: 홈랜드 거주 흑인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원주민의 권리를 빼앗 고, 국가를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큰 저항을 불러일으 켰다. 저항 운동을 이끌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는 1962년에 구속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아 파르트헤이트는 유엔과 국제 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넬슨 만 델라는 수감 27년 만인 1990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1994년에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아파르트헤이 트는 전면 폐지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일부 계층의 욕심과 인종 차별에서 시작되었다. 제2, 3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언제 어디서나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종차별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 제1, 2차 세계대전과 냉전 1) 제1차 세계대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는 아메리카 대륙
1. 평화를 깨트린 욕심
식민지 개척 후,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도서까지 경쟁적으로 식 민지를 개척해 나갔다. 19세기 말에는 아프리카 전역이 유럽 열강의 소유가 되었다. 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을 추진한 영국 정치가 세실 로 즈(Cecil Rhodes)는 “나는 우리가 세계 제일의 인종이며 우리가 세 계에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인류에게 더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I contend that we are the finest race in the world and that the more of the world we inhabit the better it is for the human race.)”고 말했다. 식민 열강 국가들 사이에는 이와 비슷한 인종 우 월주의가 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식민 열강 대열에 합류한 나라는 1871년에 통일을 이룬 독일이었다. 당시 독일의 수상인 오토 폰 비 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주변국과 동맹을 맺는 정책으로 외부 정세를 안정시키고, 내부적으로는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경제 성장과 함께 독일의 군사력도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비스마 르크 수상 퇴임 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는 본격적인 식 민지 개척을 위해 강력한 전투 함대 제작을 추진했다. “독일을 하나 로 묶은 것은 의회의 다수와 결정이 아닌 군인과 군대입니다. 나는 군대를 신뢰합니다. (It is the soldier and the army, not parli -amentary majorities and decisions, that have welded the German Empire together. I put my trust in the army.)”라는 빌 헬름 2세의 말을 통해 독일이 군사력 증강에 얼마나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자신의 지위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꼈고, 군사력 보강에 주력했다. 두 나라의 경쟁은 독일과 영국의 주변국까지 군비 경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부터 유럽은 식민 지 개척 경쟁, 군비 경쟁으로 작은 불씨만 붙어도 언제든 터질 수 있 는 화약고와 같은 상태였다.
이 화약고에 불씨를 댕긴 사건이 발생했다. 1914년 6월 28일, 오 스트리아의 황태자가 발칸 반도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당사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은 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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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하고,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동 맹국으로 참전했다. 독일이 비스마르크 수상 때부터 추진했던 동맹 정책이 도미노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연쇄적으로 프랑스, 영국이 독일에 대항해 참전하면서 점차 세계적인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이 후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 등이 참전하였고, 마지막으로 1917년 4월, 미국까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처음으로 기관총, 탱크, 전투기, 잠수함, 독가스 등이 사용된 현대전이었다. 새로운 무기의 사용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불과 4년 동 안 약 1,000만 명이 사망했고, 그중 약 5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부상자는 3,000만 명에 육박했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패배를 인정하고, 1918년 11월 11일에 휴전 협정을 체결함으로 끝났다. 승전국이 일방적으로 작성 하고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의 내용은 전쟁 의 모든 책임은 독일과 그 동맹국에 있으며, 전쟁으로 발생한 손실 전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패전국에서 감 당하기에는 가혹한 수준이었고, 독일 사람들에게 베르사유의 치욕
그림 1-4 무솔리니(왼쪽)와 히틀러(오른쪽)
그림 1-5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1. 평화를 깨트린 욕심
으로 기억되었다. 결과적으로 베르사유 조약 안에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발칸 반도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식민지 쟁탈 경쟁, 군비 경쟁, 호전적인 국가 지도자, 동맹 시스템 등 다양한 원인이 혼합되어 전쟁을 대규모로 키웠다. 그 러나 근본 원인은 매우 단순하다. 가져서는 안 되는 욕심, 곧 타국을 침략하고 지배해서 세계적 강대국이 되겠다는 제국주의 열강의 어 리석은 욕심에서 재앙은 시작되었다. 이런 욕심은 오랜 세월 동안 사 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욕심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욕 심의 결말이 인류의 공멸이라는 것을 전쟁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 이다.
2) 제2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1939년까지, 약 20년 사이에 벌어진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첫 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많은 국가에서 군주제가 폐지 되고 의회 민주주의가 들어섰다. 둘째, 오스만 제국은 완전히 붕괴 되어 터키가 독립 국가로 출현했고, 나머지 중동 지역 영토는 영국 과 프랑스가 관리했다. 셋째,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는 쇠퇴하고, 미 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세계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 넷째, 레닌 (Vladimir Lenin)과 스탈린(Joseph Stalin)의 출현으로 러시아와 주변 국가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으로 통합되었다. 다섯째,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당이 출현해 정권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반유대주 의’, ‘반공산주의’, ‘독일 주도의 세계 질서 재편’을 외쳤고, 이러한 주장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 극심한 경제 공황과 심리적 불안감 에 휩싸인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지지층을 바 탕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다른 정당을 전부 해체하고, 정당의 설립 을 법적으로 금지하여, 비민주적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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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는 내부적으로는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전쟁 준비에 돌입했지만,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을 통해 평화 친화적인 이미지까지 구축했다. 누구도 이런 히틀러를 막지 못했고,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먼저는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도 화선에 불이 붙었고,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 면서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독일은 프랑 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공했다. 이탈리아도 프랑스 를 침공했고, 이후 알제리, 몰타, 이집트에 침공했다. 일본은 중국에 이어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 이로써 전장은 대서양부터 발칸 반도,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로 점차 확대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은 소 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 본토를 침공했다. 그해 12월 일본 은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도 본격적으 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호주와 태평양 전역으로 전장이 확 대되었다. 그야말로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전쟁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주축이 된 추축국(Axis)과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주축이 된 연합국(Allies)의 대결로 정리되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 에는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까지 자행되었다. 하지만 독일이 소련 점 령에 실패하면서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고, 1945년 4월 30일 에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독일은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도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대략 집계된 인명 피해만 해도 군인 사망자 2,400만 명, 민간인 사 망자 4,900만 명, 합계 7,30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1억 명이 넘는 부상자와 재산 피해, 정신적 피해까지 더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피해가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간이 어디까지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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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계몽주의 철학, 산업 혁명, 과학과 기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등 정치사상과 체계, 각종 종교까지 열거한 어떤 것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다. 가장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던 유 럽이 역사상 가장 끔찍한 비극의 중심지가 되었다. 왜 전쟁을 막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위에서 열거한 것들로는 전쟁의 씨앗인 인간의 욕심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심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전범자 를 심판하는 것만으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을 막을 수 없다. 전쟁 종식을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릇된 욕심, 인 종차별, 혐오와 분노 등을 해결할 수 있는 ‘교육’과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질서’가 필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 들을 잃은 독일의 판화가 케테 콜비츠(Käthe Schmidt Kollwitz)가 남긴 말은 우리에게 평화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준다. “언젠 가는 새로운 이상이 생겨 모든 전쟁이 끝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하고 죽습니다. 그것은 많은 힘든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성취될 것입니다. (One day, a new ideal will arise, and there will be an end to all wars. I die convinced of this. It will need much hard work, but it will be achieved.)” 평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은 험난 하지만, 콜비츠가 확신한 것처럼 평화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림 1-6 한국 전쟁, M-26 전차 앞의 난민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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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냉전과 핵무기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91년까지 미국과 그 동맹국, 소련과 그 동맹국 사이에 있었던 군사적 긴장, 경쟁 상태를 뜻한다. 냉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제1, 2차 세계대전처럼 실체적인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양 진영 간의 군비 경쟁과 첩보전, 핵 무기 사용의 위험 등이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냉전 기간 에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냉전 기간에도 약 100여 차례 이상 크고 작은 국가 간 전쟁과 내전이 발생했다. 한국 전쟁(1950~1953) 에서는 300만 명 이상, 베트남 전쟁12)(1954~1975)에서는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외에도 팔레스타인 전쟁 (1947~1949), 알제리 전쟁(1954~1962), 걸프 전쟁(1990~1991) 등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 시대는 끝났지만, 이후에도 현재까지 지구촌에서 분쟁과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핵무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최초로 만들었고, 이후 냉 전 시대에는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 경쟁으로 원자 폭탄보다 수십 배 에서 수백 배 파괴력이 큰 수소 폭탄도 개발되었다. 현재 핵무기 보 유국은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총 9개국으로 알려져 있으며,13)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체 핵무 기 숫자는 10,000기 이상으로 추정된다.14) 핵무기 하나로 도시 하나 정도는 파괴할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고려해볼 때,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무기만으로도 지구와 인류는 충분히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핵무기를 폐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핵무기 가 우리를 폐기할 것입니다. (We must abolish nuclear weapons, or they will abolish us.)” 미국 제35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의 말처럼, 핵무기의 위험성을 대중에 게 알리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1955년에는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아인슈타인을 주축으로 11명의 과학자
12 민간인 포함 사망자만 115만 ~320만 명으로 집계하고 있 으며, 부상자 및 고엽제 피해 자를 포함하면 최소 500만 명 이상으로 예측하고 있다. 13 이스라엘과 북한은 핵무기 보 유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 은 없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두 국가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 하고 있다. 14 핵무기 보유 수를 정확히 밝 히는 국가는 없다. 각종 자 료를 비교한 평균치는 약 15,000기이며 최소치가 약 10,000기이다.
1. 평화를 깨트린 욕심
가 핵무기 폐기와 과학 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호소하는 ‘러셀-아인 슈타인 선언문(Russell–Einstein Manifesto)’을 발표했다. 이 선언 문에 서명한 사람은 11명 중 10명이 노벨상을 받았을 만큼 저명한 과학자들이었다. 1969년에는 핵무기의 비확산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골자로 하는 ‘핵확산방지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NPT)’이 유엔 총회에서 채택 되었다. 2017년 7월 7일에는 ‘핵무기 금지 조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 TPNW)’이 유엔 총회에서 채 택되었다. 이 조약은 ICAN(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이라는 민간 NGO가 주도하여 세계 각 국가와 협력해서 맺어진 결과이며, ICAN은 이 업적을 인정받아 2017년 12 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핵무기는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전쟁 억제력’을 가지고 있 다고 평가된다. 핵전쟁이 벌어지면 모든 국가가 공멸할 것이 쉽게 예 상되기 때문에, 어느 국가도 쉽게 전면전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다. 실제로 1945년 이후로 제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핵보유국과 비보유국과의 전쟁, 비보유국 간의 전쟁, 내전, 테러 등은 핵무기와 상관없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 다. 이것은 핵무기의 전쟁 억제력은 핵무기 보유국 간에만 적용된다 는 것을 보여주며, 보유국 간에도 핵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구 도 장담할 수 없다.
만약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무기를 방어나 치안 유지 등 좋은 용도 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무기는 근본적으로는 ‘사람을 죽이거나 상 해를 가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력으로 평화를 이룬다는 말에는 모순이 있다. 일반 시민이 칼을 휘두르는 사람 앞에서는 꼼 짝 못 하지만 그 상황이 평화는 아닌 것처럼, 무력으로는 진정한 평 화를 이룰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죽이는 핵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핵이다. 사람을 살리는 핵은 바로 ‘사랑’과 ‘평화’ 그 리고 평화의 사자인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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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적인 평화를 만드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다. 정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우리를 전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Establishing lasting peace is the work of education; all politics can do is keep us out of war. ㅡ 마리아 몬테소리 (이탈리아 교육학자, 1870~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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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의 시작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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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2
평화의 시작 사랑 # 평화는 평화의 씨에서 시작한다.
분쟁과 전쟁의 씨가 욕심이라면, 평화의 씨는 무엇일까? 평화의 시작점 곧 평화의 씨는 바로 사랑이다. 욕심이 인간 관계를 분리한 다면, 사랑은 사람을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랑의 구체적인 개념과 실천 방법에 대 해 알아보자.
1. 사랑, 평화를 이루는 근본 정신 1) 평화의 씨, 사랑 역사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전쟁이 없는 상태’와 같은 의미로 빈 번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암에 걸린 사람이 “진통제를 맞아서 아프 지 않기 때문에 암이 나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당장 전쟁 이 없기 때문에 평화롭다는 말은 맞지 않다. 분쟁과 전쟁의 씨인 욕 심은 마치 암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다.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평화’와 ‘갈등을 극 복하는 적극적인 평화’를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사랑이 없어도 가 능하지만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후자는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하고 쉽게 깨지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평화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욕심
평화로 가는 길
을 다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욕심을 다스리는 치료제는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지속가능한 평화의 바탕이며 시작 점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랑은 단순히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만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생명 존중’을 바탕으로 이웃을 내 몸처 럼 아끼는 ‘공동체 의식’이며, ‘인류애’이다. 사랑은 타인에게 감사, 배려, 희생, 이해, 용서 등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랑을 바탕 으로 한 감사, 배려, 희생, 이해, 용서 등을 ‘평화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평화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의 욕심을 제어할 수 있고, 또 다른 내면의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어려운 친구와 이웃을 도와주면서 느꼈던 기쁨과 행복을 떠올려보면, 욕심을 충족시키는 것과는 또 다른 만족감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사랑 곧 평화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평화는 쉽게 무너지 지 않는다. 평화를 깨트리는 욕심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기 때 문이다. 1, 2과를 통해 배운 지구가 지속가능한 생명의 행성인 것처 럼, 인류는 사랑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
2) 애국심과 자민족중심주의 사랑은 그 대상과 범위에 따라 자기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 랑, 이웃과 사회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사랑, 지구촌과 인류에 대 한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모든 대상에게 사랑을 실천하면 평 화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특정 대상만 사랑하는 행위는 자 칫 잘못하면 욕심과 결부되어 평화를 해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 기 자신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거나, 자기 가족만 배려하고 이웃은 배려하지 않으면 평화를 이루기 어렵다. 이런 인식의 모순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하고 경계하지만, 의외로 사람들이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애국심’과 ‘자민족중심주의 (ethnocentris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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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의 시작 사랑
‘애국심’의 정의는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민족중심주의’ 는 철저히 자기 민족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 문화를 바라보고 평가하 는 태도이다. 두 단어는 정의만 봤을 때는 명백히 구분된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두 단어를 혼용해서 사용한다는 데 맹점이 있다. 1998년 2월, 미국 최초 여성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 (Madeleine Korbel Albright)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힘을 사 용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미국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나라입니다. (If we have to use force, it is because we are America; we are the indispensable nation.)” 이 말은 애국심과 자민족중심주의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미국 은 20세기와 21세기에 벌어진 전쟁에 가장 많이 관여한 국가이며, 미국 내에서도 지나친 애국심이 자국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 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도 <전쟁, 애국심, 평화(War, Patriotism, Peace)>라는 수 필집에 “전쟁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 나라만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 때문인데, 이것을 종종 애국심이라 부른다. (But that which produces war is the desire for an exclusive good for one’s own nation, and is called patriotism.)”고 기록 했다. 이렇게 애국심과 자민족중심주의라는 두 단어는 의미가 혼용 되어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두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자민족중심주의는 민족 우월주의, 배타성, 혐오로 이어진다. 그러나 애국심은 다른 국가를 배척하고 혐오하는 태도가 아니다. 진정한 애 국심은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듯, 다른 국가도 존중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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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가는 길
2. 평화의 씨를 심는 평화교육 교육은 사람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인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동아시아에는 ‘교육은 백 년을 준비하는 계획(敎育 百年之大計)’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교육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고,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교 사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배운 것으로 정신 세계가 형성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어렸을 때 배운 것을 기억하고 배운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교사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 지 않다.
내가 사는 지역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가정해보자. 풍요롭고 행복 한 생활이 한순간에 파괴될 것이다.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번영과 발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평화교육은 모든 교육에 앞서 시행되어야 할 중요한 교육이다.
평화는 외부 세계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져야 한다. 이 를 위해서는 평화교육이 필요하다. 언제부터 무엇을 교육해야 하는 가? 자아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부터 평화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사 랑을 바탕으로 한 감사, 배려, 희생, 이해, 용서 등 평화 가치관이 교 육되어야 한다. 씨를 심으면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맺히듯, 평 화 가치관이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지면 ‘평화 시민’으로 자라난다. 평화 시민은 평화를 위해 크게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한다. 첫째는, 현 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분쟁의 종식을 촉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지속가능한 평화 정착을 위해 각 지역 사회에 평화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다. 평화 시민은 이 두 가지 역할을 통해 지역 사회에 평화의 질 서를 만들어 지속가능한 평화를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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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의 시작 사랑
평화는 모든 인간이 갈망하는 것이며, 그것은 어린이를 통해 이룰 수 있다. Peace is what every human being is craving for, and it can be brought about by humanity through the child. 마리아 몬테소리 (이탈리아 교육학자, 1870~1952)
우리가 아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르칠 것입니다. Unless we teach our children peace, someone else teach them violence. 콜먼 맥카시 (미국 언론인 평화교육자, 1938~)
교육은 간단히 말해서 다른 이름으로 평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국방비 지출입니다. Education is, quite simply, peace-building by another name. It is the most effective form of defense spending there is. 코피 아난 (가나 외교관 전 유엔 사무총장, 1938~2018)
평화로 가는 길
3. 인류 세계의 질서 회복을 위한 평화교육 사랑을 바탕으로 한 평화교육의 최종 목적은 인류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회복해야 할 질서는 내면의 질서와 외부의 질서, 두 가지이다. 먼저 평화교육을 통해서는 인간 내면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평화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실천하면 평화 시민이 된다. 다음으로 평화 시민을 통해서 외부 세계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 앞서 말한 평화 시민이 하는 두 가지 역할은 곧 국가와 사회의 질서 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인류 세계의 질서가 회복됨으로 써 지속가능한 평화라는 최종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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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평화의 시작 사랑
결론
분쟁과 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발단과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표면적이고 개별적인 원인만 파악해서는 문제 해결에 도달하기 어렵다. 마치 폐결핵 으로 피를 토하는 환자를 대상으로 입과 코만 진찰해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것처럼, 분쟁과 전쟁도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해야만 해결이 가능하다. 분쟁과 전쟁의 일차적 원인은 욕심이 다. 각종 종교 경서에서도 경계하는 마음인 욕심은 폭력, 수탈, 강간, 착취, 살인, 인종차별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겪으면서 생긴 이차적인 감정, 곧 분노, 혐오, 억 울함, 복수심 등이 분쟁과 전쟁을 재생산해냈다. 오랜 세월 이런 과정이 수백 번, 수천 번 반 복되어 결국 인류의 전쟁은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이르렀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욕심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 해결책은 바 로 사랑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감사, 배려, 희생, 용서 등의 평화 가치관이 바로 욕심을 극 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사랑은 욕심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용기를 준다. 사 랑 곧 평화 가치관은 교육을 통해 내면화 할 수 있다. 평화 가치관을 소유한 평화 시민은 외 부 세계에서도 평화 문화를 전파하고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인간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고는 마치 전쟁의 위험성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처럼 행동해왔다. 나는 전쟁과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전쟁을 겪은 후에야 평화를 찾았다. 지 구를 몇 번이나 파괴할 만큼 많은 핵무기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금 또다시 그런 실수를 반 복해야겠는가? 이제 욕심을 맹목적으로 좇는 구습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지속가능한 평화의 새 시대를 열자.
이미지 출처 그림 1-1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e/The_Hanging_by_Jacques_Callot. jpg 그림 1-2 https://en.wikipedia.org/wiki/Atlantic_slave_trade#/media/File:Slaveshipposter_ (cropped).jpg 그림 1-3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1/12/ ApartheidSignEnglishAfrikaans.jpg 그림 1-4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0/0e/%EB%AC%B4%EC%86%94%EB%A6%AC %EB%8B%88%EC%99%80_%ED%9E%88%ED%8B%80%EB%9F%AC.jpg 그림 1-5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9/96/Approaching_Omaha.jpg 그림 1-6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a/Korean_War_Montage_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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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1898-02-6 ISBN 979-11-974584-9-1(세트) Copyright Ⓒ 2021 Heavenly Culture, World Peace, Restoration of Light. All rights reserved.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지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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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1898-02-6 ISBN 979-11-91898-02-6 ISBN 979-11-974584-9-1 %28%EC%84%B8%ED% ISBN 979-11-974584-9-1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