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문화유적 총목록(304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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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북한산 산영루지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N 37°38′42.009″ E 126°58′26.957″

북한산성 안내지도

산영루는 ‘북한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 로 2013년 6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凸’자형의 평면 구성을 갖춘 정자로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중기 1603년 문 인인 이정귀(李廷龜)가 남긴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산영루 옛터로 내 려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한산성이 축성(1711년)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 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영루는 그 아름다운 이름처럼 당대 명사의 흔적이 많 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로 이들은 이곳을 방문하여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산영루에 뜬 달 을 삼각산 팔경의 하나로 기록하는 등 조선 명사들의 흔적과 문향(文香)들이 많이 남아 있다. 현재의 산영루는 10개의 주춧돌 등 그 터만 남아 있었던 것 을 고양시가 고양600년 역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과거 사진자료등을 통해 2014년에 복원하였다.

20. 백운봉암문

N 37°39'27.86" E 126°58'45.99"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다.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 위치한 문으로, 북한산의 암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위 치한다. 백운봉암문은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1.7m, 폭 1.9m 가량이 며, 문루를 설치하지 않았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 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북한산의 용암봉 아래쪽에 있는 용암사지 인근에 위치한 암문으로, 용암봉암 문이라고 불린다. 용암문 상부의 여장은 무너졌던 것을 1996년 정비하였다.

22. 보국문

36. 훈련도감 유영지

N 37°39'07.9" E 126°58'59.8"

N 37°38'25.7" E 126°59'05.3"

23. 청수동암문

N 37°39'31.19" E 126°58'40.79"

5. 삼각산 명승 제10호

지정문화재

N 37°38'49.3" E 126°58'23.8“

1. 북한산성 사적 제162호 N 37°38'49.3" E 126°58'23.8"

고양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북한산성은 한강 북쪽에 위치한 천혜의 자 연요새 북한산에 축성한 산성이다. 수도 한양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 한 목적으로 옛 고려 중흥산성 자리에 1711년(조선 숙종 37) 삼군문 소 속의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합심하여 단 6개월 만에 세운 북한산성 은 성벽의 전체 길이가 11.6㎞, 산성의 내부 면적이 약 5.2㎢로 조선시대 에 축성된 산성 가운데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에 속한다. 현재 북한산성에 는 수도권 유일의 명승인 삼각산, 보물로 지정된 고려 원증국사 보우의 승 탑과 탑비 등 다양한 층위를 가진 유적과 시대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문화 유산 71건이 전해오고 있어 수도권 유일의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수도권에 있는 유일한 명승으로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세 봉우리인 백운대· 인수봉·만경대를 가리키며, 그 모습이 너무나 화려하여 화산(華山) 혹은 화 악(華嶽)이라고도 하였다. 삼각산은 18세기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그 명칭이 북한산으로 혼용되기도 하였는데, 근대기 이후부터 수도 한양 북쪽 에 있는 산이라는 인식이 굳어지면서 오늘날에는 북한산으로 부르고 있다.

6. 북한산성 금위영이건기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7호 N 37°38′15.18″ E 126°58′47.88″

북한산성내 금위영 유영을 옮긴 내력에 대해 세긴 비이다. 와비(臥碑)의 독특 한 형태로 원래 소동문(현 대동문)안에 금위영이 있었으나 그 지세가 높아 비 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고 기록되 었다. 비문 끝에 명문으로 보아 1715년(조선 숙종 41)에 도제조 이이명이 세 운 것임을 알 수 있다.

7. 고양 봉성암 전 성능대사 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N 37°38'45.2" E 126°58'52.5“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에 대한 축성 공역을 담당했던 승려인 계 파당 성능(미상~미상)이 입적한 이후 그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높이가 303.8㎝이며, 탑신폭이 76㎝로 조선시대 후기에 제작된 승탑 중에서는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승탑은 사각형의 지대석을 마련하여 그 위에 기단석, 탑신석, 옥개석 등을 모두 갖추었는데, 기단은 사 각·원형·팔각의 순서로 부재를 배열하였고 그 위에 탑신도 팔각의 형태를 구성하였으나 별도의 장식은 가미하지 않았다. 반면에 옥개석은 팔짝 지붕 이 십자(十字)로 교차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합각 면에 박공널과 그 위에 높은 원통형의 대에는 각각 아름다운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성문 14. 대서문

N 37°39'20.6" E 126°57'22.5"

북한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며, 성내부로 통하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지』에서 “문은 높이가 11∼13척, 넓이가 13∼14척으로 홍예(虹蜺)를 갖추고 있고, 그 위에 초루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 성 문의 육축부는 폭 19m, 높이 6m, 문지폭 7.9m, 타원형 홍예 출입구는 높이 4m, 폭 3.3m로 북한산성 대문들 중 큰 편에 속한다. 홍예 양쪽에는 문루의 배수시설로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육축은 3단의 기초석을 쌓아 평지를 조성한 후 8단을 석축 하였으며, 그 위로 미석을 한줄로 놓고 여장을 설치하였다. 여장은 하나의 화 강암을 깎아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20×30cm의 총안이 하나씩 뚫려있다. 현재의 문루는 195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N 37°38′26.045″ E 126°58′39.494″

행궁은 임금이 궁궐을 나설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을 의미한다. 북한 산성 행궁은 도성 북쪽에 전략적 요충지인 북한산성에 위치했던 행궁 으로 산성을 축성한 다음해인 1712년(조선 숙종 38)에 건축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15년 을축(乙丑)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 및 강화 행궁 등과 더불어 전란 을 대비하기 위해 세웠던 임시궁궐로 알려져 있으며, 수도 한양의 경복 궁처럼 앞에는 외전이 뒤에는 내전이 배치된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 집권층의 국가 의식과 백성을 위한 애민 정신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 한 문화유산이기도 한 북한산성 행궁은 2011년도부터 경기도·고양시· 경기문화재단이 합심하여 잃어버린 원형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 히 진행하고 있다.

9. 고양 덕암사 목조보살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6호 N 37°39'23.6" E 126°57'33.2“

아미타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사찰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90년대 초 반 강원도 철원에 있었던 심원사의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협시보살 2구만을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본존불은 현재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환 희사로 이안되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덕암사 목조보 살좌상은 우협시가 높이 73.5㎝ 무릎폭 49.8㎝이며, 좌협시는 높이 72㎝ 무 릎폭 52.7㎝로 조선후기에 제작되는 보살상 중에 그 크기가 중형에 속한다. 이 작품은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복장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반원형의 얼굴과 원통형의 코, 변형통견의 착의법 등에서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조 각승 인균(印均)이나 응원(應元)이 제작한 불·보살상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 고 있어, 그 제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3.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보물 제611호 N 37°38'44.8" E 126°58'42.8“

고려 말기의 고승인 원증국사 보우(1301~1382)에 대한 생애와 행적 을 기록한 비이다. 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우리에게 태고 보우라는 당호와 조계종의 중흥조(中興祖)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 는 1301년(고려 충렬왕 27) 충청남도 홍성에서 홍연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인 1313년(고려 충선왕 5)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선사의 제자가 되 었고 25세인 1325년(고려 충숙왕 12) 승과에 급제하였지만, 승려로서 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감로사, 전단원 등에서 고행과 참선을 이어가 다 1338년(고려 충숙왕 복위 7) 중흥사의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머물렀 다. 이후 46세인 1346년(고려 충목왕 2)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 청공(淸 珙)의 법을 이어 받고 임제종(臨濟宗)의 시조가 되었다. 귀국 후에는 공 민왕의 부탁으로 왕사가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횡포를 피해 소설암, 속 리사, 양산사 등에서 은거하다 1382년(고려 우왕 8) 겨울 82세에 나이 로 입적하였다. 비는 원증국사가 입적한 3년 뒤인 1385년(고려 우왕 11) 에 세워졌으며, 글은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1328~1396)이 지었고 글 씨는 문신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친 권주(미상~1394)가 작성하였다. 고 양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비신과 귀부로 구성된 고려후기 전형적인 탑 비이며, 전체높이가 340㎝로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이다. 한편, 비신 뒷 면에 있는 음기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당시 관 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10. 북한산 중흥사지 경기도 기념물 제136호 N 37°38′45.496″ E 126°58′35.353″

중흥사의 옛 자리로 북한산 장군봉과 등안봉 아래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정 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중흥사에서 사용했던 청동북(1103년 제 작, 고려 숙종 8)이 남아 있어 늦어도 10세기 이전에 사찰이 세워진 것으로 여 겨진다. 고려 말기에는 임제종의 개창주인 태고 보우(1301~1382)가 주석하 였고, 조선 초기에는 학자이자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1435~1439)이 공부 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30여 칸의 규모를 136칸으로 증축하고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머물게 하 여 산성 내 모든 승영사찰(僧營寺刹)을 관리하는 등 북한산성의 중심 사찰로 가장 왕성한 사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15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모 든 건물이 소실되면서 최근까지 그 자리만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도 2000년 대 후반부터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대웅전과 만세루 등 주요 건물들을 복원하 는 사업을 추진하며 중흥사의 원형 회복을 위해 노력 중에 있다.

4.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보물 제749호 N 37°38'44.8" E 126°58'42.8"

고려 말기의 고승인 원증국사 보우(1301~1382)가 입적한 후 그의 사리 를 봉안한 승탑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원증국사탑비와 떨어진 탑전에 따 로 모셔져 있는데, 오래 전에 도괴되어 무너져있던 것을 1980년에 지금 과 같은 형태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은 전체높이 가 410㎝이며, 탑신폭이 87.5㎝로 그 규모는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장대 석을 이용하여 만든 지대석 위에 기단을 비롯하여 탑신과 상륜 등의 모든 부재가 갖추어져 있는데, 기단에 있는 사각형의 하대석과 원형의 탑신석 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부재가 팔각형을 이루고 있어 고려시대에 유행하 는 팔각원당형의 승탑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은 기단부터 상륜 까지 사각·팔각·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부재들이 섞여 있어, 전체적인 구 성에서는 일관성이 없는 편이지만, 여러 단면의 부재들이 승탑의 큰 규모 에도 불구하고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후기에 건립된 승탑 중에서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건립 시기는 태고사 경내에 있는 원 증국사탑비가 입적한 지 3년 후인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워졌으므 로 늦어도 1385년 이전에는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1. 북한산 서암사지 문화재자료 제140호 N 37°39′21.992″ E 126°57′20.609″

서암사의 옛 자리로 북한산성 수구문 근처에 위치한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 후 세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승병대장 광헌에 의해 133칸의 규 모로 창건되었으며, 처음 세워졌을 때는 고려의 문신인 민지(1248~1326)가 살았던 유지가 그 옆에 있었기 때문에 민지사(閔漬寺)로 불렸다고 한다. 주요 역할은 수문 및 그 주변의 성벽에 대한 수비와 관리를 담당하였다. 현재 서암 사는 빈터로 남아 있는데, 1870년경 제작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는 “서암사는 수구문 내에 있으며, 민지암의 옛터로 107칸이다.”라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어,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다.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성 밖의 삼천사 쪽에서 성 안의 중흥 사에 이르는 길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였으며, 8개의 암문 중 규모가 가장 크 다.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내부는 방형의 문으로 높이 1.9m, 폭 2.7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25. 가사당암문

N 37°38'47.1" E 126°57'39.6"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아래에 국녕사가 위치해 국 녕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부 명칭이 혼동되어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 았는데, 『북한지』의 기록으로는 청수동암문일 가능성도 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2m, 폭 2m 가량이다. 문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 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26. 서암문 시구문

27. 중성암문

N 37°39'24.0" E 126°58'08.5“

2. 북한산성 행궁지 사적 제479호

N 37°38'24.93" E 126°58'2.18"

N 37°39′04.195 ″ E 126°58′21.063″

훈련도감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금위영· 어영청)의 하나로 노적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수문 북쪽에서 용암까지 체성 2,292보, 여장 704첩과 수문, 북문, 서암문, 백운봉암문을 축조하였다. 유영 은 대청 18칸, 내아 8칸, 양곡창고 60칸, 무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 3칸, 행각 11칸에 이르고, 유영감관(留營監官) 1원, 서원(書員) 1인, 고직(庫直) 2인, 수직군(守直軍) 1인, 사환군(使喚軍), 북문직( 北門直) 각 2인, 수구문직(守口門直) 1인을 두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없 으며 총 길이 200m, 높이 7m에 이르는 긴 석축과 각 건물에 사용되었던 주 춧돌, 기단석, 대석과 우물, 연못자리 등이 남아 있다. 대지 중간에는 2m 높이 의 석단을 쌓고 그 위에 여러 채의 건물을 배치했던 흔적과 건물 기단, 19개의 주춧돌이 발견되며 간혹 원형의 주초석도 발견되고 있다. 또한 왼쪽으로 돌출 된 또 하나의 연결된 석단이 나오는데, 이곳에도 기단과 주춧돌 3개가 있다. 건물 주춧돌 우측으로는 가로 7m, 세로 9m 규모의 연못이 현존하고 있으며 화강암 돌을 4각으로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37. 중창지

N 37°38′43.196″ E 126°58′36.038″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하여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중흥사 앞에 존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38. 하창지

N 37°39.13.390 E 126°57.32.659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해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대서문 안에 있다. 『북한지』에서 “서문(대서문) 안에 있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현재 북한동 역사관 주변이 하창지로 추 정된다.

39. 호조창지

N 37°38′31.145″ E 126°58′45.546″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해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행궁 입구의 경리청 상창지와 마주하고 있다. 『북한지』에서 “호조창지는 어공미(御供米) 를 비축하던 곳이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N 37°39'27.82" E 126°57'24.27"

15. 대성문

N 37°38'04.2" E 126°58'35.4"

북한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축조 당시에는 대동문이었다가 곧 대 성문이 되었다. 대성문은 당시 궁궐인 창덕궁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는 가장 가까운 통로였으나, 한양의 지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1760년 영조 임금의 행 행 이후에 영구 폐쇄되었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 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현재의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2년에 새로 복 원하였다.

16. 대동문

N 37°38'28.0" E 126°59'12.0"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성문으로, 축조 당시에는 소동문(小東門)이었다가 대 동문이 대성문으로 바뀌면서 대동문이 되었다. 성문 육축부와 내부에는 금위 영이 용암봉에서 보현봉까지 공사를 담당했던 사실과 함께 구간별 담당자들 을 기록한 각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의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3년에 새 로 복원하였는데 이때 홍예문 상부의 여장도 함께 복원하였다.

17. 대남문

N 37°37'55.05" E 126°58'27.75"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축조 당시에는 소남문(小南門)과 문수 문(文殊門)으로 불렸다. 이후 영조 임금의 행행 당시 대성문(大成門)을 영구히 폐쇄하고, 문수문을 정문(正門)으로 하라는 명을 받들어 대남문이 되었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으며, 상부 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현재의 문루는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18. 북문

N 37°39'28.08" E 126°58'1.71“

다른 성문과는 달리 대(大)자가 붙지 않은 유일한 문이다. 18세기 후반에 대 문으로서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현재까지 여장과 문루가 복원되지 않았다. 『 북한지』에서 “북문에만 도로망이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군사적 중요성 은 약한 편이며, “문은 높이가 11∼13척, 넓이가 13∼14척으로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타원형 홍예 출입 구는 너비 4m, 높이 3.35m이고, 육축부의 너비는 약 16m이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현재 문루는 없으며 초석만 남아 있다.

19. 중성문

N 37°38'56.7" E 126°58'13.5"

북한산성의 평탄한 서쪽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차단성이다. 증취봉과 영 취봉을 연결하는 성벽으로 북한산성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북한산성 축 성 후 1712년 숙종대왕의 행행하여 ‘서문 가장자리가 가장 낮으니 중성을 쌓 지 않을 수 없다’며 속히 의논하여 쌓도록 명하였다. 1712년(조선 숙종 38) 5월에 중성축조 공사를 착수하여 수문의 홍예 축조, 결성 보축과 함께 1714 년까지 축성이 이루어졌다. 『북한지』에서 “문은 높이가 11∼13척, 넓이가 13∼14척으로 홍예(虹蜺)로 만들어졌고, 초루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확 인되고 있다. 현재 성문의 육축부는 폭 13m, 높이 4.5m, 타원형 홍예 출입구 는 높이 3.3m, 폭 2.7m이다. 홍예 양쪽 육축부 상단에 누혈이 한쌍씩 설치되 었다. 문의 바깥쪽 홍예 안쪽에는 문비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현재의 문루는 복원된 것이다.

92. 금위영 각자 93. 대성문 각자

94. 대동문 각자

95. 보국문 각자

96. 수문 각자

97. 칠유암

1714년(조선 숙종 40) 중성 축조 당시 중성문 옆에 지어졌다. 『북한지』에 수 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채 30년도 되지 않아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 문 성벽을 쌓을 지반을 확보하기 위해 큰 바위를 층층이 깎아 계단처럼 조성 해 놓은 흔적이 남아 있다.

장대 장대란 성 내 지휘시설로 만든 건물로 주변을 살필 수 있는 높은 곳이나 넓은 대지가 있어 병사들의 군사훈련이 편리한 곳에 세워졌다.. 일부 성곽에서 장 대를 볼 수 있지만 주로 산성에서 많이 보이는 시설물이며, 특히 규모가 큰 산 성에서는 각 방향마다 장대를 두어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북한산성의 서쪽지역은 지세가 낮아 장대를 두지 않았고 남·북·동쪽 지역에 만 장대를 두었다.

30. 동장대

N 37°39'21.72" E 126°57'16.86"

서암사지에서 계곡 상류방향으로 약 500m 오르면 발견되는 바위에 칠유암( 七遊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순조 때의 문신 석재 윤행임(尹行恁)의 『 북한기(北漢記)』에서 “고려의 평장사 민지(閔漬)가 6명의 지인을 데리고 놀던 곳이라 이로써 바위 이름을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N 37°38′41.46″ E 126°58′26.34″

N 37°38′37.8″ E 126°58′18.06″

N 37°38′35.76″ E 126°58′15.48″

N 37°38′37.37″ E 126°57′43.74″

104. 송형준 수양암 송씨각자

N 37°39′23.07″ E 126°58′5.46″

상운사에서 북문방향으로 약 30m 거리에 위치한다. ‘송형준수양암(宋亨俊修 養岩)’이라 새겨져 있으며,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05. 일철

N 37°38'41.46" E 126°58'26.34"

북한산성 수문지에서 계곡길을 따라 약 50m 가량 오르면 좌측 계곡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일철 글자가 위에서 아래로 각자되어 있다. 우측에 작은 글씨로 六九□도 함께 새겨져 있다.

106. 총융사 신헌 애민선정비

N 37°39′10.128″ E 126°58′11.769″

32. 남장대지

1855년(조선 철종 6) 북한산 비석거리 내에 새겨진 명문이며, 총 325자이다. 총섭의 잦은 교체로 여러 문제가 생기는 것을 대비해 규칙을 정하고 이에 대 한 설명을 기록하였다. 총섭이 비어 교체할 때에는 이번의 예에 의거하여 먼저 투서함을 받고 다시 권점을 행한 뒤에 점수가 많은 대로 시행하여 공평무사한 뜻을 알게 할 것. 이번에 이 정식을 되풀이하여 밝힌 뒤에도 만약 성 밖 승려 중에 자기가 임 명되도록 도모하는 자가 있으면 성 내의 승도들이 수교 정식과 이번의 절목 을 가지고 영문에 소송하여 그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이번 정식은 진실로 승도들을 위해 보장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총섭은 이 애틋한 마음을 알아서 사찰의 폐단은 바로잡기를 바라고 국가에 대한 봉 사에 극진히 노력하여 앞으로 실효가 있도록 할 것.

남장대는 나한봉의 동북쪽에 있으며, 어영청의 지휘소였다. 어영청은 북한산 성의 수문 남쪽으로부터 보현봉까지 축성을 진행하였으며, 남장대를 중심으 로 주변의 수비와 관리를 맡았다.

관영건물지 33. 경리청상창지

N 37°38′29.601″ E 126°58′45.946″

북한산성 축성 이후 전란을 대비하여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북한산성 행 궁 아래에 있다. 『북한지』에서 “상창, 중창, 하창과 어공미를 보관하던 호조창 등 관성 4창과 훈창, 금창, 어창 등 삼군문 창고 3곳이 있었으며, 성 밖 탕춘대 에는 평창이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상창에는 “팔비헌(八非軒)”이라는 편액이 있으며, 관성장인 전통제사 이우의 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상창의 규모는 대청 18칸, 내아 12칸, 향미고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 3칸, 군관청 4칸, 서원청 4칸, 고지기집 5칸, 월랑 2칸, 각문 7칸 등이 있었다. 창고 기능 외에도 성내 사무를 총괄하는 관성소를 함께 두었으며, 이곳은 행궁을 관리하 는 관성장이 근무하던 곳이다. 상창은 19세기 말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87. 북한승도절목

88. 백운동문

N 37°38'42.90" E 126°58'26.83"

N 37°38'49.00" E 126°58'24.05"

가로 7m, 세로 5m에 이르는 화강암 바위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는 글씨 가 새겨져 있다.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북한지』에 이 명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89. 청하동문

N 37°38'35.76" E 126°58'15.48"

부황사터로 오르는 계곡에 위치한 ‘청하동문(靑霞洞門)’ 명문은 ‘푸른노을’이 라는 의미를 지니며, 백운동문과 같이 지명을 알려주는 표적으로 쓰인 것으 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문신인 석재 윤행임(1762~1801)의 『북한기(北漢記) 』에서 승 원기가 쓰고 새겼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90. 상운동계

N 37°39'19.98" E 126°58'3.3"

하창지에서 백운대로 오르는 계곡의 바위 위에 새겨져 있으며, 명문의 아래 쪽으로는 상운폭포가 위치한다. 지면에서 높지 않은 위치에 음각도 얕게하여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북한지』에 이 명문에 대한 기 록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07. 총융사 조희복 영세불망비 108. 총융사 김병시 청덕선정비 109. 신헌 애민선정비 110. 총융사 이주철 애민선정비 111. 총융사 유상량 애민선정비 112. 일명비 1 113. 총융사 이유수 인덕애민선정비 114. 총융사 김병기 청덕선정비 115. 총융사 이경순 애민선정비 116. 일명 애민선정비 2 117. 총융사 유기상 애민청덕선정비 118. 총융사 신명순 청덕선정비 119. 총융사 김문근 청덕선정비 120. 총융사 이규원 청덕선정비 121. 총융사 심낙신 청덕선정비 122. 경리사겸선혜당상 민영준 청덕선정비 123. 총융사 박주수 애민선정비 124. 총융사 이응식 애민청덕선정비 125. 대장 김병국 영세불망비 126. 일명 청덕애민선정비 3 127. 이경하 청덕선정비

N 37°38'45.2" E 126°58'52.5“

봉성암 입구에 위치한다. 전체높이가 187㎝이고 탑신폭이 65.5㎝로 사각 형의 지대석 위에 하나의 돌로 원형의 탑신과 보주를 조각한 조선시대 후 기에 일반적인 석종형 승탑이다. 탑신의 정면에는 ‘보련당(寶蓮堂)’이라는 당호를 음각의 형태로 새겨 놓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N 37°38′32.838″ E 126°58′18.035″

부왕사의 옛 자리로 북한산성 휴암봉 아래에 위치한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후 세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승병대장 심운에 의해 111칸 의 규모로 창건되었다. 1839년(조선 헌종 5) 승려 환숙이 독성탱을 봉안하 고, 1938~1939년에는 주지 최원법이 영산전 등 가람을 정비하였지만, 한 국전쟁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가건물이 세워져 있다. N 37°38′57.322″ E 126°58′56.664″

용암사의 옛 자리로 북한산 일출봉 아래에 위치한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후 세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87칸의 규모로 창건되었으 며, 주요 역할은 용암문에 대한 수비와 관리를 담당하였다. 현재 용암사 는 빈터로 남아 있는데, 1870년경 제작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에는 “용암사는 일출봉 아래 있으며 88칸이다.”라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 어,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N 37°38′57.322″ E 126°58′56.664″

용암사지에 남아있는 석탑 부재이다. 현재 남아있는 부재의 형태와 크기 로 미루어 볼 때 9세기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261. 보국사지

승영사찰 전통사찰 | 중흥사, 태고사, 상운사, 노적사, 무량사, 덕암사, 국녕사, 아미타사(구 덕암사), 흥국사

247. 태고사

N 37°38′43.962″ E 126°58′42.493″

N 37°38′43.962″ E 126°58′42.493″

태고사의 대웅보전에서 서북쪽 방향에 위치하며 내부에 승탑 3기가 질서 정연 하게 배치되어 있다. 3기의 승탑은 모두가 인공적으로 만든 사각형의 지대석 위 에 하나의 돌을 이용하여 탑신과 보주를 조각한 조선시대 후기에 일반적인 석 종형 승탑으로 전체높이가 약 135~137㎝이며 탑신 폭은 약 63.2~86㎝이다. 3기의 승탑 가운데 가장 왼쪽에 위치한 승탑에는 ‘청련당(靑蓮堂)’이라는 당호 를 음각으로 새겨 놓아 그 주인공이 파악되지만, 나머지 2기에는 별도의 당호 를 기재하지 않아 누구의 승탑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249. 상운사

N 37°39′22.648″ E 126°58′08.371″

북한산 영취봉 아래에 위치한 상운사는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후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목적으로 세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1722년(조선 경종 2) 승병대장 회수가 133칸의 규모로 최초로 창건하였으며, 1813년(조선 순조 13)에 는 승려 태월이 1864년(조선 고종 1)에는 승려 긍홍이 사찰을 중건하였다고 전한 다. 현재에도 대웅전, 약사전, 천불전, 요사채 등 주요 건물들이 경내에 자리하고 있어 창건 이후 지속적으로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250. 상운사 삼층석탑

N 37°39'24.0" E 126°58'08.5"‘

상운사 약사전 옆에 위치한다. 전체높이가 455㎝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 린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중층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에는 탱주와 우주 가 모두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위치한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의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가장 윗부분인 상륜부에는 보륜, 보개, 수연 등을 순서대로 장식하였지만, 1층의 옥개석과 2·3층의 탑신, 그리고 보개와 수연 등은 새롭게 보강한 부재로 보인다. 이 작품은 옥개석 모서리의 들림이나 처마의 아랫면이 수평을 이루어 낙수 면이 급해지지만 경쾌함을 잃지 않았으며, 층급 받침이 직 각으로 처리된 치석의 표현도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또 전체 높이에 비해 탑신 의 체감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졸한 느낌을 주고 있다.

251. 상운사 마애보살좌상

상운사 마애보살좌상은 상운사 서쪽에 위치한 자연 암벽에 한 면을 얕게 파 내어 ∩자형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작품이다. 전체높이 109cm, 최대폭 75cm으로 머리 위에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착의 형식은 두 장의 대의를 걸쳐 입은 통견식인데, 표면에는 간결한 선묘로 주름을 표현하 였다. 양 손을 복부로 다소곳이 모으고 있는 선정인을 결하고 길상좌로 앉은 무 릎의 양 측면을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보살좌상 주변에는 신광을 새겨 놓았다. 둥글고 미소 띤 얼굴, 짧은 코와 입 등의 표현에서 조선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 제작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N 37°39'24.0" E 126°58'08.5"

약사전에 있는 상운사 석불좌상은 불상 바닥에 묵서로 기재된 조상기를 통해 1497년 4월(조선 연산군 3, 중국 명 홍치 10)이라는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높이 109㎝ 무릎 폭 60.5㎝의 비교적 큰 규모로 앙련과 복 련이 대칭적으로 맞대져 있는 연화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아이 처럼 귀엽고 통통한 얼굴, 편평한 상체 및 높은 무릎, 왼쪽 팔꿈치에 형성된 Ω형의 주름, 복부에서 수평을 이루며 매듭이 묶여진 승기지의 착용 방식, 그 리고 앙련과 복련을 대칭적으로 표현한 연화대좌 형식 등에서 15~16세기에 제작된 불·보살상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빈약한 조선 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역사·불교사·미술사적으로 가 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사찰에서는 왼손에 놓여 있는 약기를 통해 약사불로 부르고 있으나 약기는 후대에 새롭게 보수된 것으로 원래의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53. 노적사

262. 보광사지

N 37°38′12.575″ E 126°58′46.186″

보광사의 옛 자리로 북한산성의 대성문 아래에 위치한다. 북한산성을 축 성한 이후 세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승병대장 설휘가 창건 하였다. 주요 역할은 대성문에 대한 수비와 관리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되 며, 1870년경 제작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보광사는 대성 문 아래 있으며 75칸이다.”라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어, 늦어도 19세기 후 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263. 원효암

N 37°39′32.971″ E 126°57′38.872″

북한산 원효봉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산성 내에 모 든 사찰과 승병에 대한 관리를 맡았던 성능(미상~미상)이 10칸의 규모로 처 음 세웠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으나 다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 다. 원효암 부근에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원효대가 남아 있다.

264. 원각사지

N 37°38′58.117″ E 126°58′22.479″

원각사의 옛 자리로 북한산 증취봉 아래에 위치한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 후 세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승병대장 신초(1568~1637)에 의 해 74칸의 규모로 창건되었다. 주요 역할은 부왕동암문 일대에 대한 수비와 관리를 담당하였다. 현재 원각사는 빈터로 남아 있는데, 1870년경 제작된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서 “원각사는 증봉 아래 있으며 81칸이다.”라 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어,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265. 나암사지

N 37°37′52″ E 126°58′29″

북한산 응봉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숲속에 무너진 축대와 단을 이룬 건물 터로 추정되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봉우리 266. 인수봉 삼각산(三角山)의 제일봉이며 해발 810m 가량에 위치한다. 사면이 온통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려져 있다. 그 중의 한 바위는 봉우리 뒷면이 불룩 솟아 있어 마치 어린이를 업은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부아악(負兒岳)이 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사 고구려(高句麗)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 류(佛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 한 땅을 물색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이 봉우리라고 전해진다.

267. 백운봉 삼각산 중 가장 높은 곳이며, 해발 836.5m 가량에 위치한다. 인수봉 서 쪽에 있으며, 흰구름을 허리에 두르고 솟은 바위라는 데서 백운대(白雲 臺)라고도 불린다.

268. 만경봉 북한산의 삼각산 중 하나로 해발 799m 가량에 위치한다. 백운봉 남쪽에 위치하며, 일명 국망봉(國望峰)이라고 불린다. 험준하고 빼어난 기이함으 로 인수봉과 자웅을 겨룬다.

269. 노적봉 북한산 산성주능성에 있으며 해발 716m 가량에 위치한다. 만경봉 서쪽에 있 으며, 솟아오를 듯한 산봉우리와 뾰족뾰족한 바위의 형상이 노적가리와 같 으므로 노적봉이라 부른다. 중흥동(重興洞)의 옛 석성(石城)이 여기에 있다.

북한산 의상봉 아래에 위치한 국녕사는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후 세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1713년(조선 숙종 39) 승병대장 청휘와 철선이 86칸 의 규모로 창건하였으며, 주요 역할은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성벽과 그 중간에 위치한 가사당 암문에 대한 수비와 관리를 담당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중건하였 으나, 1991년 화재로 가람이 전소되어 근래에 새롭게 지어졌다.

270. 용암봉 273. 기룡봉 276. 덕장봉 279. 성덕봉 282. 보현봉 285. 증취봉 288. 미륵봉 291. 시자봉 294. 등편봉 297. 휴암봉

255. 국녕사 한월당대선사부도탑

기타유적 (6개소)

N 37°38′58.117″ E 126°58′22.479″

북한산 노적봉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산성 내에 모 든 사찰과 승병에 대한 관리를 맡았던 승려 성능(미상~미상)이 85칸의 규모 로 세운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원래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이 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1960년부터 고쳐 지으면서 노적사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조선후기에 제작 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자상이 남아 있다.

254. 국녕사

N 37°38′57.723″ E 126°58′22.097″

보국사의 옛 자리로 금위영 아래에 위치한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후 세 워진 11개의 승영사찰 가운데 하나로 승병대장 탁심과 명희 등에 의해 177 칸의 규모로 창건되었는데, 당시 창건된 승영사찰 가운데는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주요 역할은 금위영의 통제를 받아 보국문과 주변 지역의 수비 와 관리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1870년경 제작된 『동국여지비고(東國 輿地備攷)』에서 “보국사는 금위영 창고 아래에 있으며 76칸이다.”라는 기 록이 확인되고 있어, 늦어도 19세기 후반에는 폐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N 37°39'24.0" E 126°58'08.5"

252. 상운사 석불좌상

각자

북한산 구암봉 아래에 위치한 사찰로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산성 내에 모든 사찰과 승병에 대한 관리를 맡았던 승려 성능(미상~미상)이 25칸의 규모로 처음 세웠으며, 1860년(조선 철종 11) 승려 보담(미상~미상)이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1971년부터 고쳐 짓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대웅보전, 산신각, 요사채 등 주요 건물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대웅보전 서북쪽에 사찰의 창건주인 성능스님을 모신 승탑과 입구에는 보련당의 승탑이 남 아 있어 사찰의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260. 용암사지석탑

248. 태고사 승탑원

N 37°38′42.54″ E 126°58′27.54″

N 37°38′27″ E 126°59′07″

N 37°38′08.448″ E 126°58′20.979″

북한산성내 골짜기와 하천변에는 북한산성내 건물들의 기단석과 초석으로 이용된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이는 오랜 시간동안 비바람과 산사태, 홍수 등 에 의해 원래의 위치에서 쓸려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100. 심상훈

N 37°38'41.46" E 126°58'26.34"

산영루지 계곡 건너 마주보이는 바위에 위치한다. 명문은 ‘김성근(金聲根)’이 라 새겨져 있다. 김성근(1835~1919)은 조선 말기의 문신·서예가이다.

동장대는 봉성암 뒤쪽 시단봉에 위치하며, 금위영의 지휘소였다. 금위영은 용 암봉에서 보현봉까지 축성을 진행하였으며, 동장대를 중심으로 주변의 수비 와 관리를 맡았다. 주초석의 크기로 보아 세 개의 장대 중 건물의 규모가 가장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내 시설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행궁이 정면으 로 내려다 보이며, 북한산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유사시 전쟁을 지휘할 수 있는 장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 북장대지

건축부재

산영루지가 위치한 커다란 암반의 바닥에 위치한다. 각자의 인물인 신석현( 申錫賢)이 누구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조성 연대로 불확실하다.

98. 김성근

선정비

북장대는 중성문의 서북쪽 기린봉에 위치하며, 훈련도감의 지휘소였다. 훈련 도감은 북한산성의 수문 북쪽부터 용암봉까지 축성을 진행하였으며, 북장대 를 중심으로 주변의 수비와 관리를 맡았다.

N 37°38′44.960″ E 126°58′51.886″

259. 용암사지

(43개) 202~246

고려 말기 불교에 대한 폐단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했던 태고 보우(1301~1382)가 중흥사에 머물며 개인의 수 도처로 1338년(고려 충숙왕 7) 세운 사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중흥사의 동쪽 에 위치하여 동암(東庵)이라 하였으나, 1382년(고려 우왕 8) 보우가 입적한 이후부터 그의 당호를 따서 태고암으로 불렀다. 태고암은 고려의 왕조가 멸 망하고 거의 폐허로 남아 있다가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성된 이후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중흥사에 머물렀던 승려 성능(미상~ 미상)이 옛 태고암 자리에 총 131칸으로 사찰을 중건하고 태고사라는 사액 을 걸면서 지금과 같은 이름을 얻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 지만, 전쟁 이후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등을 복구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 다. 현재 경내에는 창건주인 태고 보우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탑비와 그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 등이 남아 있다.

용출봉 정상에서 남동쪽 용혈봉으로 약 50m 거리에 위치한다. 자명해인대는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는 곳이라는 의미이며, 각자의 정 확안 연원과 시기는 알 수 없다.

성곽의 방어를 위하여 성 내측에 세운 누각을 의미하며, 현 군대의 초소와 같 다. 북한산성의 성랑은 행궁이나 창고보다 먼저 만들어졌으며, 정면 3칸 측 면 1칸짜리 건물로 추정된다. 『북한지』에서 “총 143개소의 성랑 중 42개소는 훈련도감이 관리하고, 41개소 는 어영청이, 60개소는 금위영이 관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현 재까지 확인된 성랑은 총 45개에 이르며, 산성 곳곳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북한산성을 6개월 만에 축성한 이유 중 하나는 북한산 내에 있는 돌을 부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 곳곳에서 돌을 떼어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현재 총 54개소에서 채석흔이 발견되었다.

N 37°39'18.80" E 126°57'15.75"

수문 안쪽 바위에 ‘신묘 육월십삼일 시역 구월초십일 완필 수구 패장 통덕랑 서 기 □□ 편수 김정교 김□□ (辛卯 六月十三日 始役 九月初十日 完畢 水口 牌將 通 德郞 書記 □□ 片首 金正交 金□□)’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으며, 각자의 내용 은 ‘신묘(1711)년 수구공사 감독 통덕랑 서상원의 감독 하에 6월 13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0일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기록함, □□ 책임자 김정교, 김□□’ 으로 판단된다.

103. 자명해인대

성랑(45개) 42~86

채석흔적 (65개) 139~202

N 37°38'25.7" E 126°59'05.3"

청하동문 명문이 새겨진 바위 옆면에 위치한다. 일붕 서경보(1914~1996)와 관련된 각자로, 1973년 음력 5월 9일에 새겨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벽 내부의 물을 배수하기 위한 시설이다.

257. 봉성암 보련당 부도

‘금영□일□□백팔십육보 신묘사월 (禁營千一□□百八十六步 辛卯四月 □□□□ □□□□ 編手金□□)’이 새겨져 있다.

중성문에서 산영루터 중간에 새겨져 있으며, 명문은 ‘최송설당(崔松雪堂)’이 다. 최송설당(1855~1939)은 육영사업가이다.

수구(2개) 40~41

현대군사시설 (5개) 134~138

N 37°38'28.0" E 126°59'12.0"

‘금위영 자용암 지보현봉, 이천팔백이십보분 십오패, □□신미·묘·사월시후 구원, 화축, 도청중군, 축응감관 이필신, 이후강, □□□□ 이희승, □□초 161 관 □세흠 (禁衛營 自龍岩 至普賢峯, 二千八百二十步分十五牌, □□辛未? 卯?四月始後九月, □築, 都廳中軍, 築應監官 李弼臣, 李後鋼, □□□□ 이희승, □□ 哨官 □世欽)’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102. 일붕기도처

N 37°38'56.7" E 126°58'13.5"

N 37°38'04.2" E 126°58'35.4"

대성문 육축 정면 상단에 ‘석수편수 김선운(石手邊首 金善云)’, 왼쪽 상부엔 ‘금영 감조패장 장태흥(禁營 監造牌將 張泰興)’이 새겨져 있다.

28. 수문

29. 중성수문

N 37°38′16.66″ E 126°58′45.40

금위영 유영지에 위치한다. 금위영을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101. 최송설당

N 37°39'18.80" E 126°57'15.75"

256. 봉성암

258. 부왕사지

산영루지 계곡 건너 마주보이는 바위에 위치한다. 명문은 ‘심상훈(沈相薰)’이 라 새겨져 있다. 심상훈(1854~미상)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N 37°38'56.7" E 126°58'13.5"

128. 총융사 김기후 애민 청덕선정비 129. 무위제조겸도통사민겸호 애민청덕선정비 130. 일명비 4 131. 총융사 김기석 청덕선정비 132. 총융사 임상준 청덕선정비 133. 도총섭 성능 영세불망비

북한산성은 축조 전부터 현재까지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이다. 그 렇기에 성랑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근현대 벙커도 일부 확인되고 있으며 서암문에서 원효봉 구간에 3개소, 서암문에서 수문 구간에 2개소가 성벽 위에 설치되어 있다.

중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암문이다. 예법상 시신을 성문으로 내보낼 수 없 기 때문에 만들어진 간이문이며, 1950년대까지 시신이 중성문 옆에 있는 중 성암문을 통해 밖으로 보내졌다. 이후 북한산 국립공원 지정과 북한동 주민 이주사업으로 이 문을 통할 일이 없어 사용이 정지되었다.

대서문과 서암문 사이 계곡에 위치하며, 북한산성의 가장 낮은 곳에 있어 산 성안의 물은 모두 이곳으로 흘러내려온다. 성곽 축조시 가장 크게 지어졌으 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자리에는 큰 바위가 있으며, 이곳에 수문공사와 관련된 내용이 각자되어 있다. 1711년(조선 숙종 37) 수 구공사 감독 통덕랑 서상원의 감독 하에 6월13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10 일에 공사를 마쳤다. 주변의 성벽이 잘 남아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 며, 암반에는 치도흔적이 확인된다.

N 37°38′28.26″ E 126°58′44.82″

경리청 상창지 건물 뒤편에 있는 남쪽 담장 바위의 경사면에 새겨져 있다. 괘 궁암(掛弓岩)은 활을 걸어놓은 바위란 의미로, 북한산성 행궁을 호위하는 관 성장과 관련된 군사적 의미를 띤 것으로 추정된다. 두보(杜甫)의 “청해는 화살 을 전할 필요가 없고, 천산은 일찍 활을 걸어 놓았네.〔靑海無傳箭 天山早掛弓〕” 라는 시에 괘궁이 나오는데, 전쟁이 끝나고 태평한 세상이 되었음을 뜻한다.

99. 신석현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다. 서암문은 성문에 문루를 마련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암문 출입구가 네모난 모 양인데 반해, 서암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형태를 띠고 있다. 문 내부에는 성 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성의 바깥쪽 북쪽 체성은 둥글게 튀어 나와 일종의 치 (雉)이거나 문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8. 고양 상운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0호 천불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아미타불좌상·관음보살좌상·대세지보살좌상 으로 구성된 3구가 한 세트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좌상은 높이 57㎝ 무릎폭 40㎝이고, 우협시인 관음보살좌상은 높이 40.5㎝ 무릎폭 25.5㎝이며, 좌 협시인 대세지보살좌상은 높이 55.4㎝ 무릎폭 33㎝로 조선후기에 제작되 는 불상 중에 그 크기가 중형에 속한다. 3구 모두가 앙련과 복련이 대칭적으 로 맞대어진 연화대좌를 갖추고 있는데, 관음보살좌상의 대좌에는 조상기( 造像記)를 아미타불좌상의 대좌에는 개금기(改金記)를 묵서로 기재하고 있 다. 1713년(조선 숙종 39)에 진열(進悅) 등 5명의 조각승이 최초로 제작하 여 노적사(露積寺)에 봉안하였고, 이후 17년 후인 1730년(조선 영조 6) 백 기(白基) 등 2명이 개금하여 상운사(祥雲寺)에 이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어깨가 좁아져 한층 강조된 얼굴이나 가슴과 하반신에서 나타나는 U자와 S자 대의자락 등의 양식적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17세기 후반 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 각승 진열이 중·장년기에 제작한 불상으로도 알려져 있어 조선후기 불상연 구에서 기본적으로 활용되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1711년(조선 숙종 37)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 중 하나이 다.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개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일부 명칭이 혼동되 어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북한지』의 기록으로는 청수동암문일 가능성도 있다. 방형의 문으로 출입구는 높이 2m, 폭 2m 가량이다. 문 내부 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비(門扉)를 달았던 원형의 돌확구멍과 장군목을 건 너질렀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

24. 부왕동암문

성벽 및 부속시설

N 37°37'59.19" E 126°58'17.58"

91. 괘궁암

N 37°38′07.449″ E 126°58′36.155″

어영청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금위영· 어영청)의 하나로 대성문 안에 위치해 있다. 수문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체성 2,507보, 여장 986첩과 대서문, 청수동암문, 가사당암문, 소남문을 축조하 였다. 유영은 대청 18칸, 내아 7칸, 양곡창고 48칸, 무기고 10칸, 중군소 4 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등에 이르고 유영감관(留營監官) 1원, 서원(書員) l인, 고직(庫直) 2인, 수직군(守直軍) 1인, 사환군(使喚軍), 서문직(西門直), 중 성문직(中城門直) 각각 2인, 문수문직(文殊門直) l인을 두었다. 어영청 유영은 19세기 말에 관리 소홀로 방치되다가 소멸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그 자리 에 대성암이 들어서 있다. 암자 주변에는 어영청 유영이었던 것을 알려주는 석축과 초석이 남아 있다.

북한산성의 8개의 암문 중 동남쪽에 있는 문으로 축성 당시에는 동암문(東暗 門)으로 불렸으나, 1711년(조선 숙종 37) 문 아래 보국사가 창건되면서 보국 문으로 불렸다.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다. 현재의 상부 여장 은 1993년에 복원하였고 부분적으로 수리하였다.

독립운동가 정재용이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해 북한산의 암각 에 새긴 비문이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이후로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 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N 37°38′16.076″ E 126°58′49.055″

금위영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담당하였던 삼군문(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하나로 보광사 아래에 위치해 있다. 용암 남쪽에서 보현봉까지 체 성 2,821보, 여장 1,107첩과 용암문, 소동문, 동암문, 대동문을 축조하였다. 유영은 대청 18칸, 내아 6칸, 양곡창고 54칸, 무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 원청 4칸, 월랑 8칸 등 총 145칸에 이르고, 유영감관(留營監官) 1원, 서원(書 員) 1인, 고직(庫直) 2인, 수직군(守直軍) 1인, 사환군(使喚軍), 대성문직(大城 門直) 각각 2인을 두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금위영이건기비를 비롯하여 가로 4m, 세로 2m 크기의 건물 기단, 주춧돌 9개, 돌계단 2개소, 장대석 7 개, 석누조 1개가 있으며, 산기슭에는 무너진 담장터가 남아 있다.

35. 어영청 유영지

21. 용암문

13. 북한산 3.1운동 암각문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2호

34. 금위영 유영지

N 37°38′49.188″ E 126°57′44.211″

N 37°38′49.188″ E 126°57′44.211″

국녕사 경내에 위치한다. 전체높이가 145.5㎝이고 탑신폭이 68㎝로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하나의 돌로 원형의 탑신과 보주를 조각한 조선시대 후기에 일반 적인 석종형 승탑이다. 탑신의 정면에는 ‘한월당대선사(漢月堂大禪師)’라는 당 호를 음각의 형태로 새겨 놓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271. 일출봉 274. 반룡봉 277. 복덕봉 280. 화룡봉 283. 문수봉 286. 용혈봉 289. 원효봉 292. 기린봉 295. 구암봉 298. 나한봉

299. 북한산 도당굿터 301. 7월 산제터 303. 무속관련1

272. 월출봉 275. 시단봉 278. 석가봉 281. 잠룡봉 284. 나월봉 287. 용출봉 290. 영취봉 293. 장군봉 296. 상원봉

300. 보호수 302. 10월 산제터 304. 무속관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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