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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 회고록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김 우 재 지음


홍사 회고록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초판 1쇄 인쇄 2009년 9월 24일 초판 1쇄 발행 2009년 9월 28일 지은이・김우재 펴낸이・이기현 펴낸곳・현문미디어 등록|2001년 10월 15일 (제03-01326호) 주소|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2가 314-1 용성비즈텔 802호 전화|(02)706-2367 팩시밀리|(02)718-5752 홈페이지|http:// www.hmbooks.co.kr E-mail|hmmedia@korea.com ISBN|978-89-92751-65-0 03800 ・잘못된 책은 구입하신 서점에서 바꾸어 드립니다. ・가격은 표지 뒷면에 있습니다.


홍사 김 우 재 (洪史 金優載) 회장


무궁화유통 본사 사옥 전경.


4대가 한자리에 모인 어느 행복한 날. 어머니와 저자를 비롯한 3남매, 그리고 며느리와 외손자들이 함께했다. (1999년)


저자 김우재와 박은주의 결혼식. (1969년)


▲ 고향집에서 아버지(고 김사희)와 어머니 천순복 여사. (1970년) ▼ 김우재 청년과 박은주 규수의 약혼식때 모습. (1968년)


장남 종헌의 가족과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저자 부부. 며느리 양수려와 큰손자 범구, 둘째손자 민구, 셋째손자 윤구. (2009년)


연세대학교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아들 종헌. (1996년)


한국부인회 회장 재임 시절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은 아내와 기쁨을 나누는 저자. (1996년)


▲ 집무실로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 뵙다. (2003년) ▼ 성베네딕트 부산수녀원으로 이해인 수녀를 방문하고. (2007년)


▲ 인도네시아 프로모 이민청장 부인에게 이리안자야 불우이웃돕기 연말 성금을 전달하는 저자. (1997년) ▼ 마르화티 한센병 재활원에 위문품을 전달하는 저자와 김우진 사장, 그리고 김정렬 모세 신부, 요한 수녀의 모습. (2002년)


▲ 자카르타 폭동 때 수프랍토 수경사령관(중앙)을 만나 교민의 신변안전을 약속받고 타룹 대통령 자문위원과 인사하는 저자. (1999년) ▼ 자카르타 남부시청에서 담당 간부와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여러 의견을 나누며 협력을 다짐하는 모습. (2002년 10월 2일)


육사 동기생인 밤방 수실로 유도요노와 친분이 두터운 헌병감과 함께. 왼쪽으로부터 밤방 수실로 유도요노(현 대통령) 안보장관, 자스리 마린 전 헌병감, 저자. (2002년)


▲ 무궁화유통의 불우이웃돕기 행사에 나선 저자와 아내. 처음에는 수혜자가 5명에 불과 했으나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2001년) ▼ 화산폭발 재해민을 돕기 위한 구호식품을 대통령궁으로 전달하는 저자. (2002년)


▲ 자선음악회에서 모은 한센인 재활원을 위한 수익금을 이경재 신부(중앙)로부터 전달받는 레오수코토 주교와 밴드슐렌 신부, 강루치아나 수녀, 봉이 수녀, 마리젬마 수녀, 저자. (1995년)

▼ 한센인 자녀들에게 구호품을 나누어주는 저자. (2007년)


▲ 심장병어린이 수술돕기 모금행사에 초대된 가수 이미자 씨와 수하르토 대통령 며느리, 민형기 대사 부인, 주최자인 아내 박은주 한국부인회 회장. (1996년) ▼ 성 나자로 마을돕기 자선음악회에 오신 김수환 추기경님을 영접하는 저자 부부. (2007년)


청와대로 김대중 대통령 예방. (2001년)


▲ 반기문 UN 사무총장 취임 환영식에 참석한 저자 부부. (2006년) ▼ 로스앤젤레스 오렌지 카운티 가든 그로버 시장으로부터 명예 시민권을 받는 저자와 아내 박은주 사장. (2008년 4월 30일)


▲ 이안 우수남(중앙), 김종덕 프로골퍼와 함께한 저자. (1995년) ▼ 인도네시아 재향군인회 부인회장의 불우이웃돕기 자선골프대회에서. 왼쪽부터 저자, 파무지 대통령 자문위원, 수리얏나 대통령 자문위원, 트리스트리스노 전 부통령, 타룹 중장, 프트라 전 경찰중장. (2003년)


▲ 모교인 한국항공대학교 여준구 총장으로부터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최고 영예상인 항공우주상을 수상한 저자. (2007년) ▼ 모교 후배 350여 명이 모인 가운데「시장경제와 성공한 기업인」 이라는 주제로 특별 강연하는 저자. (2008년 11월 20일)


▲ 인도네시아 국회부의장을 방문한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인도네시아지회 김우재 회장 일행. 좌로부터 김종헌 총무, 양영연 수석부회장, 저자, 고문에 추대된 화트와 부의장, 최동묵 부회장. (2008년) ▼ 후생성 장관으로부터 인도네시아 보건복지 훈장을 받는 저자. (2008년 12월)


▲ 본사 사옥 증축을 축하하며 평소 우의를 다져온 현지 종교 지도자들과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저자. (2008년) ▼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동남아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 뒤 권병하 전임 회장으로부터 대회기를 넘겨받는 저자. (2009년 2월 2일)


한・아세안 최고경영자(CEO) 특별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인사하는 저자. 저자는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동남아시아협의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2009년 5월 31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머리말|

해외 사업가로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

1977년, 나는 오지 중의 오지 칼리만탄에서 원목개발 사업장에 뛰 어들면서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맺었다. 첫 직장이었던 대한항공공사 (KNA・지금의 대한항공) 오사카 지점 생활 3년을 포함, 10년간 쌓은

근무 경력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해외사업 개척의 꿈을 펼치기 위해 뛰어든 대변신이었다. 그렇다고 믿는 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짧지 않은 직장생활 경 력과 30대 중반의 젊음을 담보로 결행한, 어찌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정글지대의 벌목사업은 뿌리내릴 겨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현지 정부의 원목수출금지 조치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것이 교민을 대상으로 한 김치 제 조 납품이었다. 다행히 주문이 쇄도함에 따라 가내수공업이 식품유 통업으로 발전하고, 이를 발판 삼아 건설업과 관광업, 부동산관리업 26


에까지 진출하는 등 어엿한 중소기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내 인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남 못지않게 굴곡이 많았다고 생 각한다. 무모한 도전과 시행착오로 후회하기도 했고, 역경에 처하여 절망감에 빠진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 을 받았다. 나는 글재주는 없지만, 크고 작은 일을 겪을 때마다 메모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생활이 30여년 되다 보니 어느새 많은 분 량이 되었다. 4년 전 문득 이 기록을 그냥 묵혀둘게 아니라,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원고를 쓰기 시작하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작 업이었다. 분량만 쌓였지 잡다하고 중복되는 부분이 많았다. 대충 정 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문필가도 아니다. 그래서 도 중에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인도네시아에 와서 곤경에 빠져 난감했을 때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누군가를 찾던 순 간을 떠올리게 되자, 겪은 일들을 그대로 밝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 다. 경험자로서 특히 해외로 나가 사업의 꿈을 펼쳐보고 싶은 젊은이 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여하튼 인도네시아는 천혜의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자원대국이자 인구 2억 4천만을 헤아리는 매력적인 거대 수출시장이다. 재외동포 750만 시대를 맞은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미래의 강대국인 인 도네시아와의 교류는 필연적이며, 상호이익 증진에 기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물적・인적 교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다. 나는 식품유통업을 27


통해서 식품문화가 한 나라의 전통문화와도 직결되고 있음을 체험하 였다. 거기에는 나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30여 년 동안 살며 정든 ‘제2의 고향’인도네시아에 대한 고마움이 스며 있다. 이 책의 제목 을『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로 붙이게 된 이유다. 그런데 회고록 형식을 취하다 보니 가족과 관계되는 사소한 얘기 들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이 다소 쑥스러웠지만, 오히려 이 런데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연스럽 게 기술하였다. 출간을 준비하는 가운데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친히 분에 넘치는 격려의 글을 남겨주셨다. 안타깝게도 선종을 하신 뒤에 출판 을 하게 되어 죄송하기 한량없다. 이 자리를 빌려 삼가 김수환 추기경 님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지난 3년간 시간을 내어 원고를 읽고 꼼꼼 하게 보완할 부분을 지적하며 정리 작업에 도움을 주신 사돈어른 양 영식 전 통일부 차관과 부미관광 박훈규 사장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은 나의 회고록일 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 젬마의 인생 발자 취라 할 수 있다. 부족한 남편을 위해 평생을 함께 하도록 아내를 주 신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끝으로 이 책으로 인해 얻어지는 수익금 은 무궁화재단을 통하여 인도네시아의 어린이 심장병 수술비용에 보 태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

2009년 8월 자카르타에서 홍사 김 우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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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가 준 감동

해외에서 조국을 빛낸 훌륭한 분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가끔 접하 게 됩니다. 그 중의 한 분으로 인도네시아에 계시는 김우재 베드로 회장님과 박은주 젬마님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두 분 내외분은 교포 로서, 신자로서 교민을 위해, 동시에 신자공동체를 위해 복음 선교와 이웃사랑 실천으로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더욱이 현지 주민들로부터도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중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 30년 동안 산림개발을 시초로 무궁화 유통을 비롯한 여러 사업체를 일구기까지, 여기에 따르는 많은 어려 움과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는 성공한 이야기는 아름답고 감동적입니 다. 그런 뜻에서『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의 출판은 대단히 뜻이 깊 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감 동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바랍니다.

(한국천주교 초대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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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의 글|

인니에한국식품문화정착에기여

먼저 김우재 회장이 인도네시아에서 30년의 삶을 엮은 책을 발간 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는 한국 사람 중에서 김 회장을 처 음 친구로 사귀면서 27년간 변치 않는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는 외국에 살면서 자녀들을 모두 잘 교육시켜 세 자녀 모두 훌륭한 배우자를 맞이하여 혼사를 치렀음을, 혼사 때마다 참석한 본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김우재 회장은 나의 친구이자 한국을 알리는 사업을 하여 성공한 분으로서, 인도네시아와 한국간의 경제발전과 인도네시아에 한국 식 품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현지사회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을 지속적 으로 펴나가는 모범적인 한국인 사업가입니다. 나는 이처럼 민간인으로서 인도네시아에 한국의 이미지를 훌륭하 게 심어준 김 회장에게 박수와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 인도네시아에서 하는 사업과 가정이 번영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모습 을 계속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인도네시아 체육회장, 전 교통부 장관, 퇴역 육군대장

아굼 구멜랄 30


KATA SAMBUTAN

Terlebih dahulu saya ucapkan selamat atas peluncuran buku kehidupan selama 30 tahun di Indonesia oleh Chairman Kim Woo Jae. Sahabat saya yang pertama diantara orang ? orang Korea adalah Bapak Kim Woo Jae dan selama 27 tahun persahabatan tetap sejati dan tidak pernah berubah. Saya melihat beliau sukses dalam mendidik anak ? anaknya, ketiga orang anaknya sudah sukses dalam berkeluarga dan setiap mereka merayakan pernikahan saya selalu hadir. Bapak Kim Woo Jae adalah teman saya yang sukses dan salah satu orang Korea yang mengembangkan budaya Korea di Indonesia. Beliau telah berpartisipasi untuk mendorong perekonomian Korea dan Indonesia serta berperan besar dalam memperkenalkan makanan dan minuman Korea di Indonesia. Selain itu beliau sangat aktif dalam membantu orang? orang yang kurang mampu dan banyak bekerja di bidang kesejahteraan sosial terhadap masyarakat Indonesia. Ini dicontoh sebagai suri tauladan terhadap masyarakat Indonesia dan juga sebagai orang yang sukses dalam bidang bisnis diantara orang ? orang Korea. Saya secara tulus hati memberikan penghargaan dan rasa kagum yang setinggi ? tingginya kepada beliau yang telah memberikan citra yang baik khususnya citra Korea kepada Indonesia secara pribadi. Untuk selanjutnya saya mengharapkan beliau tetap sukses baik alam bidang bisnis maupun keluarga serta terus menanamkan citra Korea yang baik di Indonesia. KETUA UMUM KONI PUSAT

AGUM GUMELAR, Msc Jenderal (Purn) TNI 31


|차 | 례 |

프롤로그 / 세월의 빗장을 열며 ─ 36 제 1 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방앗간 김 대부 집 맏아들 ─ 42 ‘바른 길’가라고 당부하시던 아버지 ─ 45 동네가 부러워한 서울 유학길 ─ 47 활공의 체험 속에서 키운 야망 ─ 54 눈매 고운 처녀 박은주와의 만남 ─ 63 제 2 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새로운 삶의 무대를 찾아서 ─ 68 인도네시아는 흙냄새부터 다르더라 ─ 70 원목개발의 꿈 안고 칼리만탄 정글로 ─ 74 경비행기 타고 임지 탐사에 나서다 ─ 77 정글, 또 다른 고행의 길 ─ 81 급류에 뛰어들어 구해온 장비부품 ─ 90 산돼지, 맹수들 이야기 ─ 94 대침으로 정강이 핏줄을 따다 ─ 99 목숨을 건 원목 수송 작전 ─ 102 탈진 속의 나를 살린 숨바쿵 강의 밧줄 ─ 106 제 3 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고생한 보람도 없이 빚만 떠안다 ─ 112 학비 부담 덜어준 소중한 장학금 ─ 115


지문이 사라진 아내 ─ 120 원목사업 접고 식품업으로 전환 ─ 126 전세 비행기까지 동원한 김치 수송 ─ 129 배짱으로 따낸 공사장의 식당 운영권 ─ 133 새우잠으로 버틴 코리아 가든 시절 ─ 136 제 4 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은행빚 없이 물류센터 신축 ─ 144 건축공사장에서 태어난 여덟 마리의 강아지 ─ 150 상호가 된‘무궁화’ 의 배경과 성장 추세 ─ 152 스나얀 지역이 코리아타운으로 불리기까지 ─ 156 각종 면허도 따고 건설업에 진출하다 ─ 160 방부제 쓰지 않는 본브레드 제과점 개업 ─ 164 제 5 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아내의 기사 노릇 하다가 종교에 입문 ─ 170 중보기도에 감사하며 보답의 길 모색 ─ 176 이해인 수녀와의 만남 ─ 178 한센인촌 위문과 성나자로마을 돕기 ─ 182 김수환 추기경님을 뵙게 되다 ─ 189 재활 양로원 방에 걸린 부부의 명패 ─ 194 심장병 어린이 수술 지원에 나서다 ─ 197 불우이웃돕기는 나를 돕는 것 ─ 200 이슬람 성전에서 드린 가톨릭 신자의 기도 ─ 205 장학회 설립으로 자녀가 받은 은혜에 보답 ─ 207 세계 순방으로 발전한 조국통일기도회 ─ 209


제 6 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뜬구름 잡기 안성맞춤인 나라 ─ 222 기반이 되는 이름 석 자의 신용 ─ 227 위험에서도 생명을 건지는 자기관리 ─ 229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 231 인도네시아에서 성공하는 비결 ─ 233 사업가에게는 기(氣)가 무기다 ─ 235 한국 기업들의 실패 사례 ─ 237 한국 투자자들의 고충 ─ 243 고용인 해고의 난제들 ─ 245 어떻게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나? ─ 248 현지 파트너의 결정은 신중히 하라 ─ 252 제 7 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인도네시아로 오세요! ─ 256 이 나라의 고유문화와 관습 ─ 259 후회한 적 없는 선택, 제2의 고향 ─ 262 부모 세 번 죽인 현지인의 기막힌 거짓말 ─ 264 도둑질은‘내 손이 했다’ 는 식모의 변명 ─ 267 물 들어오는 셋집에서 밤도둑 잡기 ─ 268 지팡이에 과일이 열리다 ─ 269 원주민의 쌀밥 이야기 ─ 272 두리안 과일을 손톱으로 쪼개다 ─ 277 김우재 표 선물 1호가 된 생강사탕 ─ 280 이곳에서 골프는 사치가 아니다 ─ 282 열대지방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 285 아름다운 신들의 섬 발리 ─ 287


자바섬의‘파리’반둥 ─ 301 자바 문화의 중심지 족자카르타 ─ 306 언어와 격언에 얽힌 에피소드 ─ 313 제 8 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수하르토박물관에 걸린 낡은 한복 ─ 320 세계적 규모로 성장한 한국국제학교 ─ 325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퍼진 한국식품 ─ 327 차세대 동포 위한 기성세대의 역할 ─ 333 폭동 이겨낸 한국 교민의 의지 ─ 336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한국의 역대 대통령 ─ 352 제 9 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흠 없는 성공의 열매를 따기 위하여 ─ 358 잘 이루어진 3남매의 혼사 ─ 361 대희년에 입 맞춘 천국의 문 ─ 372 꿈에 본 지옥과 천국 사이 ─ 377 ‘해피 통신’ 의 취재 대상으로 ─ 379 회갑 맞아 찾은 여행지 페블비치 ─ 382 봉사하는 마음으로 맡은 직책 ─ 386 손자의 재롱과 아들의 분가 ─ 394 스스로 느끼는 행복 ─ 397 4대가 한 집에 모인 기쁨 ─ 400 에필로그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 405


프롤로그

세월의 빗장을 열며

“오늘 하루도 힘차게, 열심히, 그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지내길!” 앞 사람의 어깨와 등을 두드리면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 렸다. 50여명의 본부 직원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려 서로의 등을 두드 리고 있었다. 무궁화유통 본점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모든 직원이 함께하는 아침 조회가 끝나면 서로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와 따뜻한 정을 나누는 것이 우리 회사의 전통이다. 활짝 웃는 얼굴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서 시작하는 하루는 매일매일 보람차 고 활기가 넘친다. 조회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무궁화유통 사장직을 맡아 회사를 알차게 꾸려가고 있는 아내인 박은주 사장과 함께 새로 시작하는 제 과 사업에 대해 의논을 했다. 의논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김종헌 이사가 들어왔다. 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이번에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새로 등록하는 물품입니다.” 김 이사가 들고 온 결재서류를 꼼꼼히 살펴 본 다음 사인을 했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식품회사들은 자신들이 유통시키고 있 는 식품들을 식약청에 신고하지 않고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제는 정부에서 강력하게 규제를 하기 때문에 등록하지 않는 식품의 경우 사업을 할 수 없다. 나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모든 식품들을 식약청에 신고했다. 다 들 뭐하러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번거롭게 그렇게 하냐고 말했지만, 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나의 신념대로 일을 추진했다. 그런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사업상의 이득 을 보고 있다. 무궁화유통이 공급하는 모든 식품들은 식약청에 신고 가 되어 있어서 공식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선견지명이 있다느니, 사업적 안목이 뛰어나다느니 하 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무슨 일이든 원칙대로 하자는 신념에 따르 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내의 말처럼 1+1=2일 수밖 에 없는 나로서는 그로 인해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옳은 길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가 많았다. 그 점이 확인될 때까지는 몇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08년 11월 에 이르러 중국식품에서 멜라민이 발견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인도 네시아 정부의 강력한 정책으로 부정식품이 단속되고, 외국식품 수 입통관 규정이 엄격히 시행되면서 등록되지 않은 부정식품이 뿌리를 뽑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 정초부터 그 동안 경쟁적으로 등록 절차를 밟지 프롤로그 / 세월의 빗장을 열며• 37


않고 불법으로 식품을 유통해온 중국, 일본 등 일부 업체들이 사업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무궁화유통은 예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유무역협정 (FTA)에 대비하고 정부의 규정을 준수한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전세계 식품 수입회사 가운데서 가장 많은 식품을 등록하고 정상 적인 사업을 해온 건실한 업체라는 평판을 듣게 되었다. 이는 회사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나는 사장인 아내가 나간 뒤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남들은 가족기 업이라 혹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볼지도 모르지만, 내겐 기업과 가족이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내나 아들도 사업을 함께하 는 동지로서 손색이 없으니 이 또한 복이 아닌가 싶다. 그래, 감사하 고 또 감사할 일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또 옛날 생각하세요?” 아들의 목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그때 일이 생각이 나네. 서른 살이 넘은 내가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던 일 말이야.” 이런 날은 그냥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특별히 잡힌 일정 도 없어 아들과 함께 나들이에 나서기로 작정하였다. 나들이라고는 하지만, 대개는 드라이브 삼아 교외로 나갔다가 물류창고에 다녀오는 경우가 많았다.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그러나 오늘만은 안락 한 승용차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아무데나 부담없이 달리고 싶었다.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공항 고속도로를 타고 30 분가량 달려야 우리나라 읍 정도의 도시 풍경이 사라지고, 길 양쪽에 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고층 빌딩들이 나타난다. 자카르타는 해안가에 위치한 평지도시이므로 우리나라와는 달리 산을 쉽게 볼 수 없다. 중심부에서 고속도로를 통해 약 1시간 반을 외곽으로 달려야 보이기 시작한다. 산이 없는 도시의 중심가나 오래 된 주택가를 제외하고는 교외에는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모습 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빈 공간이 많은데도 자카르타의 주택난은 심각하다. 도심 의 큰 길은 국제도시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지만, 중심대로나 주택가 를 벗어나면 빈민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실 자카르타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어수선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과는 정반대인 차선 때문이다. 운전석이 오른 쪽인데다, 반대 차선으로 달리는 자동차들, 행인들은 신호등은 있으 나마나한 존재인 듯 아무데서나 길을 건넌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모습을 보고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교통경찰이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도로 곁에 모여 노는 젊은이들, 뭔가를 악기처럼 두드리며 돈을 구걸하는 어린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아줌 마들, 이와 함께 담배나 음료수를 팔고 다니는 행상인들을 흔히 보게 된다. 이 모든 모습들이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지만 동남아 도시라면 어디서나 예사로 목격하게 되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묘하게 생명력을 느끼게 되는 곳이 자카르타이다. 어수 선하면서도 정겹고 무질서하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 이 도시는 지금 까지 내 삶의 의지를 꽃피워준 중심무대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조국 인 한국과는 또 다른 의미로 내게 더없이 소중한 곳이다. 프롤로그 / 세월의 빗장을 열며• 39


이주 초기에는 죽음과도 같은 온갖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그러한 경험이 오히려 나를 자극시키고 오기를 키우게 했다. 그런 시련 앞에 서 낙담하여 주저앉고 말았다면, 아니, 결단의 기회를 놓치고 망설이 다가 도전조차 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무궁화유통은 존재하지 않 았을 것이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인도네시아로 건너온 것은 참 으로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던 산림산업은 실패했지만, 난 한 번도 인도네시아로 향했던 그날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시간이 갈 수록 30년 전 내가 내린 결단에 스스로 만족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차에 동승한 아들이 나의 말에 화답했다. “저도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길가에 시골 특유의 풍경이 나타나면서 나의 상념은 어느새 유년 시절의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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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장

충청도 소년

상경기


방앗간 김 대부 집 맏아들 중서부 서해안에 자리잡은 홍성군은 광천(廣川)과 홍성(洪城), 2개 의 읍을 거느리고 동쪽에 예산군이, 서쪽에는 안면도가, 남쪽은 청양 군과 보령시가, 북쪽으로는 서산시와 예산군이 에워싸고 있는 충청 남도의 9개 군 가운데 하나이다. 차령산맥의 지맥인 오서산(烏捿山)과 지기산(智基山)이 각각 동남쪽 과 북서쪽에 뻗어 있고, 꽤 큰 개천이 중앙을 가로질러 천수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광천읍은 35.16㎢의 면적에 광천리와 대평리 등 모두 1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면이었던 광천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의 일 이었다. 나는 이 가운데 하나인 월림리라는 시골의 부유한 농가에서 1943년 음력 2월 28일,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이 보다 늦은 5월 3일 생으로 되어 있다. 사자(思字), 희자(熙字)의 이름을 가진 무주(茂朱) 김씨 사정공파(寺 正公派) 19대 손인 아버지는 안면도가 본향으로,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으면서 방앗간까지 했다. 갑부는 못되었지만 해마다 땅을 늘려나 갈 만큼 동네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일제강점기때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월곡리(月谷里)와 죽림리(竹 林里)가 하나로 합병될 때 두 마을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지었다는

월림리(月林里)는 뒷동산에서 보면 차령산맥 줄기인 오서산이 우뚝 솟아 보였다. 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월림리는‘달이 뜨는 숲’ 이라는 뜻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주는 그 런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대부(代父)라고 불렀다.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자문을 하러 올 때가 많았다. 대청마루와 사랑채를 포함하여 6개의 방이 있는 우리 집은 양쪽에 대문이 있는 전형적인 초가집이었다. 당시 농촌에는 기와집이 없었 다. 대추나무 가지가 지붕 위로 늘어진 대문을 나서면 보리밭이 시원 하게 펼쳐지고, 집 뒤로는 소나무와 밤나무들로 숲을 이루는 산이 150여 m 거리에서 정겹게 굽어보고 있었다. 농촌의 봄은 한가로웠다. 매화와 철쭉,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 다가 질 무렵이면 어느새 초여름이 다가와 있었다. 토끼풀을 뜯는다 며 동네 조무래기들이 한바탕 북새통을 치고 지나간 들녘에는 이슬 머금은 풀잎들이 햇볕을 받아 눈이 부셨다. 나는 이들과 진배없는 농촌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마을을 돌 아다니노라면 대청마루나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행복하게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정초에는 시골 아저씨들이 사랑방에 모여 먹고 마시며 놀았다. 우리 집 사랑방은 동네 쉼터나 다름없었다. 초겨울이 되면 보리밭에는 개똥이 많았다. 동네 어른들은 망태기 를 어깨에 메고 이른 아침부터 그것을 주으러 다녔다. 지금도 우리 집 앞에까지 와서 개똥을 줍던 어른들의 모습이 어른거리곤 한다. 개똥도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줍는다. 부지런한 사람에겐 당할 재 간이 없다. 영어 격언에도“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먼저 잡는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3


다.” (Early bird can catch the worm.)는 말이 있다. 나는 이 격언을 매 우 좋아한다. 사업 초기에도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일했다. 나는 보통 시골 출신의 한국인이라면 공유하는 전원적인 환경 아 래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나는 개구쟁이였다. 공부보다는 동네 아이 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동구 밖 논두렁에 나가 개구리와 미꾸 라지를 잡거나 토끼풀을 뜯는다며 들판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름날에는 마당에서 힘차게 울어대는 매미를 잡으러 나무 위에 올랐다가 발을 헛디뎌 무릎이 다치는가 하면, 제대로 잡지도 못하면 서 산에 올라 새를 잡는다고 소란을 떨기 일쑤였다. 한번은 숙부님이 휴가 나올 때 가지고 온 카빈 소총을 몰래 산으로 갖고 나와 꿩을 잡는다며 설치다가 부스럭대는 나무꾼을 꿩으로 잘 못 알고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처럼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고 등잔 밑 에서 밤을 맞아야 하는 시간보다 꼬마 대장 노릇을 할 수 있는 낮이 한결 좋았다. 달리기도 잘해서 학교 운동회 때는 예외 없이 공책과 연필 따위를 상품으로 타와 우쭐거리는가 하면, 싸움도 마다하지 않 았다. 그래서 아버지께 꾸중을 듣거나 맞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그런 기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남에게 지 지 않으려는 기질과 동네 제일가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우월감 때문 이었다. 그러나 살림이 어려워 중학교에 못 들어간 한 살 위의 머슴 아들을 때려 상처를 입힌 일은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장에서 씁쓰레한 인삼 조각을 사다가 나에게 먹 이곤 하였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방학때 내려와 보니 그 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아이는 이미 죽어서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바른 길’ 가라고 당부하시던 아버지 나는 집에서 3㎞나 떨어진 대평(大坪)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등굣길에는 다행히 황씨네 아이들과 동행할 수 있어서 심심하지 않 았다. 산길 양쪽에 진달래와 철쭉꽃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봄철에는 혼자서도 느긋이 다닐 수 있었지만, 겨울철이 문제였다. 귀가 시려 종종걸음으로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그럴 때는 어깨에 둘러멘 책보 가 어느 정도 보온이 돼주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하굣길은 여유가 있었다. 아이들과 달리기 반, 장난질 반 이런 식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집에 다다랐다. 장난이 지나 쳐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더러 있긴 했지만, 서로 말동무가 돼주어 지 친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등굣길에 풀밭을 지나다가 지폐 한 장을 줍게 되었 다. 돈의 가치를 알 리 없는 여덟살 철부지가 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첫 계기였다. 발이 부어 유난히 집이 멀게 느껴지는 날에는 학교앞 개울가에서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기도 했다. 엄살과 손짓 한번으 로 통하는 공짜 맛이라니, 그렇다고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 니었다. 아들의 교육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셨던 아버지는 내가 걸어 다니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5


는 게 안쓰러웠는지 5학년이 되자 박공민 교감 선생님 댁에 하숙을 시켰다. 박 선생님은 남의 집을 빌려 쓰는 처지였지만, 교육자 곁에 두어 공부를 시키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 다.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여우와 용천배기(한센인)가 나와 사람을 해친다는 산길을 피해 다닐 수 있어 서 좋았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책보를 어깨에 메고 뛰어가야 했다. 이렇게 여건이 좋아지기는 했으나 생각만큼 공부가 되지 않았다. 책을 펼치면 얼마 못가 졸기 일쑤였다. 하루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등잔 밑에서 공부하다가 조는 바람에 이를 본 박 선생님이 나를 소나무가 울창한 뒷동산으로 끌고 가서 벌 을 준 적도 있었다. 나는 대평리의 끝자락인 최씨네 집보다도 떨어진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졸업할 때까지 1년 동안 하숙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 시절, 여러 가지 겪은 일 가운데서 아직도 눈에 선한 것 은 아버지가 하숙을 정한 뒤 어린 아들이 덮고 잘 무명 이불을 이고 책가방을 들고 쫄래쫄래 따라오는 나를 돌아보며 앞장서 산비탈 길 을 걸어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예양(汭陽) 천씨 가문인 어머니(순복・順福)가 1921년생인 한 살 아 래의 아버지에게 시집온 것은 스무살 때였다. 그리고 이듬해 나를 낳 으셨다. 부지런하고 어진 어머니는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어느새 여 든 여덟 살이 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쉰 두 살이 되는 해에 일 흔 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나는 지금까지보다 1㎞나 더 먼 광천중학교를 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녔다. 집에서 4㎞나 되는 거리였다. 남녀공학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공부에 큰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운동신경이 예민해서 체육은 잘하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않 았다. 언제까지 저러나 하고 지켜보는 눈치였다. 그래도 광천 장터에 오는 날이면 국밥을 사주셨다. 그런 날엔 밥을 맛있게 먹고 달구지까지 얻어 타는 호강을 누렸다. 아버지께서는 기 회가 날 때마다“남자는 글을 쓸 때 획 하나하나를 확실하게 써야 한 다.” 고 강조하셨다. 정도(正道)를 지키라는 뜻이었다. 정성없이 적당 히 써버린 글자에 무슨 진심이 담기겠는가. 처음부터 원칙을 지키는 자세야말로 매사를 튼튼히 하며 바르게 사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뒤에도 어른을 알아보는 겸손함과 부모를 섬기는 일 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이 무렵 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사춘기를 경험했다. 예쁜 여학생과 마주치면 괜히 긴장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네가 부러워한 서울 유학길 열여섯 살이 되던 1958년 쌀쌀한 이른 봄날, 나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장항선에 몸을 실었다. 동행한 아버지의 손에는 쌀 한 가마니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월림리에서 처음 있는 서울 유학길이라며 부러 워했다. 우리가 떠난 광천역은 오서산을 옆에 끼고 서해안의 안면도와 대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7


천 등이 가까워 상업적인 왕래가 번성했던 곳이다. 특히 부근에 있는 독배는 토굴 새우젓과 김이 유명했다. 알찬 굴을 회로 만들어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과정을 서울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아버지의 교육열은 물론, 장남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 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어렵게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1950년대, 그것도 보수적인 충청도의 농촌 가문 출신으로 유교적 남아 선호 사상과 가 부장적 권위의식이 강했던 당시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 었을 것이다. 내가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 있는 성남고등학교의 입학시험에 합 격하여 서울 학생이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통치하던 자유당 정권 말기였다. 이 시기는 6・25동란 때 끊긴 한강교가 그대로 남은 상태 여서 강을 건너려면 드럼통을 띄워 나무로 만든 부교를 이용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노량진 한강교 앞에는 노점상들이 즐비했다. 인분 냄새가 나는 흑석동 쪽에는 호박 넝쿨이 무성했고, 국군의 날 행사 때면 인산인해를 이루다시피했다. 학교는 이른바‘카이젤 수염’ 으로 유명한 김석원 장군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이 분은 19세기 말에 서울에서 태어나 사관 양 성기관인 한국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으나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군대생활을 시작했다. 광복 전에 승진한 일본군 대좌(대 령에 해당) 계급을 광복 후에도 유지한 채 제1사단장으로 송악산 전 투에 참전해 육탄10용사의 신화를 남겼으며, 6・25동란 때는 수도사 단장직을 맡아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고등학교 시절 저자는 수업이 끝나면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 용산에서 영어학원이 있는 종로까지 전차를 타고 다녔다. 사진은 보신각과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 사이로 달리는 1960년대 종로 거리의 전차 모습.

나는 그가 1956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성남중고등학교의 이 사장과 교장직을 함께 맡아 초석을 다지던 시기에 가까스로 이 학교 의 신입생이 되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주 충절을 강조했다. 그중에 도 특히 잊혀 지지 않는 것은“병들어 죽지 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 여 싸우다 죽자.” 라는 말이었다. 그 분은 1978년에 여든다섯 살을 일 기로 작고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딛고 어렵게 본격적인 해 외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등교 첫날 내가 처음 본 것은 본관 정문에 붙어 있던“쇠파이프를 불에 달구어 배를 지져도 의로운 일에는 충절을 지킨다.” 는 글귀가 들어간 사진이었다. 아마도 사육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아니었던 가 여겨진다. 그 밑에“병들어 죽지 말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싸우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9


다 죽자!” 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어쨌든 나의 서울생활은 각오부터 달랐다. 중학교 때 거의 하지 못 한 영어공부를 할 요량으로 거처인 노량진에서 종로에 있는 EMI라 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당시 영어 강의로 유명했던 안현필이라는 분 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노량진에서 한강까지 걸어간 뒤 용산에서 전차를 타고 학원이 있는 종로3가까지 다녀야 했다. 첫날은 처음 보는 시가지 풍경에 정신이 팔려 여유가 없었지만, 차 츰 익숙해지자 전차를 타고 가는 시간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영어 간판도 공부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깨알 같이 쓴 영어 단어를 성냥갑처럼 생긴 통을 구해다가 넣 어서 다니며 암기했다.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던 강의 내용이 속속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기자 서울 아이들과 실력을 겨뤄 이겨야겠다는 오기가 일었다. 그러다 보니 교양이 될 만한 독서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전교에서 상위권에 오를 만큼 영어 실력이 향상됐다. 서 울에 올라오면서 굳게 결심한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몰매를 맞지 말 것, 둘째는 영어를 잘 할 것이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성사된 셈이다.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한 나머지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여 막걸리판까지 벌였다고 한다. 이에 자극받아 나는 다른 과목에도 욕심을 부렸다. 효과적인 공부 를 위해 반에서 늘 1등을 차지하는 학생을 고모집에 끌어들여 하숙 생으로 만들고, 그 아이가 잠잘 때는 깨어나 공부를 했다. 강적을 꺾 기 위한 이런 노력의 덕으로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앞지를 수 있었다. 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고모의 보살핌이 큰 도움이 되었다. 객지라 는 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주거환경이 안정되었기 때문 이다. 고모부(이종원 교수)의 학업을 돌봐야 하는 고모의 처지로서는 조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덕분에 남다른 패기를 가지고 학업 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방 학생을 얕보는 서울 학생들의 텃세는 견디기 어려웠 다. 자칫하면 트집을 잡아 구타를 일삼는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덜 맞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여럿이 사방에서 공격해올 때는 길가를 피하고 벽에 붙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런 방위 수단도 모자라 나중에 는 손목에다 시골에서 사용하던 둥근 쇠붙이를 붕대로 감고 다녔다. 힘이 부치면 무기로 사용할 요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대순이라는 영등포 토박이가 한번 붙자고 제의 해 왔다. 평소 나를 벼르던 고1 학생이었다. 강당 뒤인 유도장 옆으 로 장소를 정하고 예산과 광천쪽 2, 3학년 선배들에게 알렸다. 서로 맞서 내가 밀리는 상황 아래서 지방 선배들의 보호로 별일이 없었지 만,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 그 학우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그 옛날 학창시절의 추억을 서로 나누며 밤새도록 소 주잔을 비우고 싶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나는 담력을 기르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 았다. 아울러 나쁜 일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방편의 하나로 상급반에 오르자 특수반에 들어가 검 도와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첫 수업 때부터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의(義)에 살고 의에 죽자.”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1


라는 교훈(校訓)이 은연중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 교훈은 좌우명처 럼 사춘기로 접어드는 예민한 소년의 가슴속에 의협심을 심어주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모가 잘 보살펴 주어도 기운이 한창 뻗치는 나이라서 그런지 배가 고플 때가 많았다. 그때 간식으로 먹은 풀빵은 참으로 꿀맛이었다.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에 갈 때마다 뒷산으로 올라갔다. 큰 밤 나무 밑에 접는 책상을 펴고 밀짚 방석을 깔고 앉은 뒤 엉덩이가 아플 때까지 책을 읽었다. 이럴 즈음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발아래 마을 지붕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곤 하였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 것이 었다. 내가 교양서적을 읽었다면 아마도 이런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느 명절 전날 막차로 광천역에 내 렸을 때의 일이다. 허기진 상태로 요기할 곳을 찾았으나 통행금지 시 간이 임박하여 문을 연 식당이 있을 리 없었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 려 길가의 밭에 들어가 무를 한 개 뽑아 먹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고갯길이 걱정스러웠다. 인가가 없는 곳을 지나면 용천배 기가 나오고, 성황당이 있는 곳에 여우가 힐끗힐끗 쳐다보며 따라온 다는 무서운 고갯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낮도 아닌 인적이 끊긴 한 밤중에 들어가자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따라 어떤 때는 도 깨비가 나온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도깨비불 같은 형상이 번쩍이며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나곤 했다.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쥐 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간담이 서늘했다. 부스럭거리면서 불빛과 함께 나타나는 도깨비를 발로 차려는 순간, 아차 정신을 차려야겠다 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3・17의거기념비’ 제막식에 참여한 성남고 18회 동문들. 우측의 선 사람부터 박정웅, 김영환, 저자. 이종석, 박병운, 안병조, 김만옥, 정준교, 이인일, 이진구, 안문성, 이중길, 김석호, 송진웅, 장기국, 김순성, 이충석 씨. (2006년 3월 17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자세히 보니 성황당에 걸려 있던 울긋불긋한 천들이 억새풀과 맞닿아 비벼지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뜩이나 긴 장했던 터라 도깨비에게 홀렸다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성황당 고갯길에 여우가 나온다는 말이 퍼진 것은 이런 상황에서 빚어진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자정이 가 까운 한밤중에야 고향집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주무시지 않고 호롱불 아래서 명절음식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처럼 잠시 다녀가는 명절에는 그럴 새가 없었지만, 벼르던 여름 방학이 돌아오면 뒷산에 올라가 목소리를 단련시키는 훈련을 했다. 담력을 기르기 위해서였다.‘야호’소리를 지르거나 큰 소리로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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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흉내를 냈다. 우선 민가와 떨어진 산이라 남의 눈치를 보지 않 아도 돼 무엇보다 좋았다. 서울에서 기죽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이승만 정부의 3・15 부정선거를 규 탄하는 데모가 연일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성남고 학생들도 무리를 지어 영등포 시내까지 진출하였다. 나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 지 운동선수들 틈에 끼어 부정선거의 무효를 외쳤다. 죽도(竹刀)로 칼 빈총을 든 경찰과 대치했다가 나는 일부 학생들과 함께 경찰서로 붙 잡혀 갔다. 그러나 다행히 교장인 김석원 장군이 경찰서로 찾아가“의로운 학 생들을 석방하라.” 고 강력히 요구해준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1960년 봄이었다. 그해 3월 15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정・부통령 부정선거는 4・ 19 학생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후 4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 모교인 용마산 기슭에‘3・17의거기념비’ 를 세우게 되었다. 해외에 있었지만, 나도 당연히 참여하였다. 관계 동창생들이 모이고 보니 예 전의 혈기왕성했던 청소년의 기개는 사라지고, 어느새 반백의 노인 네가 다 되어 있었다. 감회가 깊은 재회였다.

활공의 체험 속에서 키운 야망 이런 격동의 나날 속에서도 나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학 5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교법인 정석학원이 운영 하는 국립 한국항공대학 에 들어간 것이다. 1979년 대한항공이 인수하면서 교명이 바뀌어 지금은 학 교법인 정석학원이 운영 하는 한국항공대학이 되 었다. 나는 이 대학의 국비 학 생을 노려 우수한 성적으 로 합격했으나 종합대학 이 아니어서 처음엔 후회 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장 하게 여긴 아버지는 아들

1962년 후배들과 심신을 단련하던 갓 20세인 대학생 때의 저자(오른쪽).

을 남대문시장으로 데리 고 가 비로드 반코트를 맞추어 주고 새잡이 공기총도 사주셨다. 개학한지 얼마 안 돼 서울에서 일어난 4・19학생 의거 바람이 항 공대학에도 휘몰아쳐 왔다. 이번에도 젊은 의협심은 나를 가만히 놔 두지 않았다. 신입생이었으니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크게 휩쓸릴 뻔 했다. 대학가의 소요 사태가 진정되면서 나는 운동을 열심히 했다. 유도 를 계속 익히는 한편 사이사이에 태권도와 검도도 배웠다. 나는 운동 하는 동안 차츰 체력단련이 단순히 육체를 연마하는 데에만 머물지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5


않고 심신을 정화하는 작용까지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입생 딱지를 벗게 되자 나는 파라슈트(낙하산) 동아리에 가입하 였다. 1961년이었다. 이 무렵 대학에서는 특수체육 활동으로 파라슈 트, 글라이더, 조정 등 세 가지 훈련을 실시했는데, 나는 글라이더 훈 련에 참가하였다. 활공 훈련을 위해 모인 다른 대학생들과 함께 여의 도 공군 비행장에 마련된 임시 막사에서 합숙을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참 공군 상사들이 배치된 합숙생활은 마치 군에 입대한 신참 병사처럼 긴장된 기분이 들게 하였다. 처음에는 윈지 카로 활공기를 끌어 공중에 뜨게 하고, 윈지(줄)를 릴리스하여 활공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 다음 단계는 아예 경비행기로 공중까지 끌어 올려 고공에서 윈지를 릴리스하는 과정이 었다. 두려움 속에서 활공에 성공하자 어지러웠던 시야가 트이기 시 작했다. 여의도 상공을 선회하는 동안에는 비행장 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차츰 익숙해져 신촌 근방에까지 이르자 이화 여대 캠퍼스의 전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상승기류에 따라 높이 활 공하노라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세상이 내 발밑에 있다는 쾌감이 생겼다. 이러한 활공훈련 체험은 뒷날 사회생활을 하는 데 활력과 신 념을 불어넣는 힘이 되어 주었다. 파라슈트 동아리 학생들 가운데는 김학영이라는 동기생이 있었다. 아직도 그와 동아리의 우정을 나누고 있는데, 여의도 상공에서 낙하 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인상이 좋고 생각이 깊은 학생 이었다. 김학영은 나에게『신념을 가져라』 라는 책을 선물로 건네주 5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나오자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 고, 나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위에서 선망하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어려운 모험의 길을 선택하였다. 어쨌거나 소년기에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때부터 서 울로 유학, 대학까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적극적인 교육 일념과 어머니의 열성이 뒤를 받쳐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 학 문을 나서면서 나는 이런 부모님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 시 성공하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군생활로 사회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1965년 한 국항공대학교 통신전자공학과를 졸업하자 육군에 입대하였다. 처음 배치된 곳은 강원도 양구였다. 소양호를 비롯해 산과 물로 둘러싸여 마치 섬처럼 느껴지는 지역으로 우리 현대사의 상처인 6・25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머지 않은 거리에 비무장지대가 있다. 나는 여기에서 손톱이 실밥같이 보일 정도로 식기를 닦고 당번 노릇을 했다. 당초 계획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공군이 되고 싶었다. 의기양양 하게 공군사관 장교 시험을 본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옆 사람과 잠깐 말을 한 것이 화근이 돼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육군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는 동기였다. 내가 부대 안에 버려진 영자신문을 읽는 것을 눈여겨본 중대장이 접근해 왔다. 영어를 꽤 잘 하는 것 같은데, 짬짬이 회화를 배우게 해 달라는 것이다. 졸지에 중대장의 가정교사 아닌‘막사교사’ 가된인 연으로 얼마 후 사단장실에 배속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점차 사단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7


장의 자택에까지 왕래하는 단계에 이르자 기회를 엿보다가 떼를 써서 카투사(KATUSA)로 전출하는 발령을 받아냈다. 1966년의 일이다. 경기도 부평 미군부대 에스캅에서 시작된 카투사 생활은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국도에서 보면 에스캅 사령부 쪽으로 물 자를 실어 나르는 미군의 차량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풍부한 미군 물자의 유통이 활기를 띠면서 이 일대는 생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음식점과 술집이 늘어나고 집창촌이 이어졌다. 미군들과 더불어 24시간을 보내야 하는 만큼 긴장이 되기는 했으나 한결 자유로웠다. 경직됐던 표정도 제법 부드러워졌다. 영내의 도서관 출입도 가능하 여 필요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은 환경적인 동물이라더니 미 군복을 입고 영어를 자주 쓰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미군의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바 라보게 되는 일종의 착시현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병장으로 진급한 제대 말년,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등병인 미군 사병을 구타하는 사건을 벌였다. 그야말로 겁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 불 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그나마 이 정도로 해결된 것은 관내에 내 이 름이 꽤 알려진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군을 상대로 한 교육 중에 거침없이 영어로 의견을 발표해 의사소통이 잘 되는 한국인으로 인 식되고, 검은 띠의 태권도 실력이 감안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 제대 말기부터 사회 진출을 준비했는데, 대전 중도공고에 서의 3개월 영어교사가 첫 직장 경험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방 에서 직장생활을 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기회를 보다가 대한항공 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공사 신입사원 모집에 합격하였다. 국립항공대학교 출신이라는 이점 과 군에서 다진 정신력, 오기의 경쟁심으로 사회 진출의 첫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셈이다. 짧은 대전에서의 교편생활을 정리하고 나온 1967년의 일이다. 대한항공공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으나, 그때만 해도 만 성적자로 고전하는 국영기업체였다. 사무실이 서울의 한복판인 을지 로에 있다 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덩달아 세련된 도시 샐러 리맨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근무한지 2년이 되던 1969년 3월 1일, 대한항공공사는 주식회사 대한항공(KAL)으로 민영화되면서 경영정상화와 국제경쟁력 강화의 발판을 마련한다. 조중훈 회장은 강당에서 가진 아침 조례시간에 사 원들에게 이런 훈시를 하였다. “인간은 항상 연극배우와 같다. 연극배우가 좋은 연기를 하면 많은 관객이 모인다. 여러분은 항시 예술인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대한항공인이 되기를 바란다.” 항공사 사원이나 승무원들의 승객에 대한 역할과 몸가짐을 연극배 우의 연기와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최선을 다 한 서비스 정신이야 말로 관객, 곧 고객을 향한 예술가(사원)의 사명이라고 강조하였다. 나는 존경하는 조 회장의 이 훈시를 매우 인상 깊게 들었다. 그런데 이해 12월 11일, 나는 자칫했으면 앞으로의 운명을 갈라놓 을 아찔한 순간을 맞이할 뻔했다. 사고 전날 밤 강릉에서 성길웅 선 배와 술을 마시다가 과음하여 서울행 비행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위 기를 모면한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한항공 소속 여객기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9


납북 사건, 이날 12시 25분 강릉에서 승객 47명을 태우고 날던 서울 행 YS-11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대남 고정 간첩에 의해 납치되는 일 이 벌어진 것이다. 대한항공공사가 민영화된지 불과 9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사건 다음날 아내는 고향인 충주에서 첫딸을 순산했 다. 장모님은 진통 중에 임산부가 충격을 받을까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 대신 누군가에게 김 서방이 납북된 것 같은데 뉴 스에 이름이 나오는지 잘 보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아내는 고함도 지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나는 강원도 북평 소재 삼척지점에 발령받아 근무 중이었다. 서울 본사로 복귀한 것은 2년 뒤였다. 자리를 옮기고 보니 부서 간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통의 문제였다. 게다가 내가 속한 부 서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보다 못해 스스로 해결사 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논란의 중심에 있 는 다른 부서의 담당자를 불러내 업어치기로 기부터 꺾어놓았다. 소 득없이 시간만 끄는 설왕설래보다는 순식간에 힘으로 제압하는 방법 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부서원들에게 보여준 셈이었다. 두 부서 간의 불협화음은 소강국면에 들어섰다. 어떤 동료는 듣기 좋으라고 덕택에 규율이 잡혔다며 나를 추켜세우기까지 하였다. 다 행히 해프닝 같은 이 작은 폭력 사건은 더 이상 비화되지 않았다. 소 문이 비화됐다면 시말서를 냈거나 사표를 썼을 것이다. 부서의 일이 잡히자 나는 또 한 차례 비상을 시도했다. 일본으로 발령받기 위해 일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외국어에는 타고난 재능 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대한항공 관리자 연수 1차 수료자들. 윗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저자. (1975년)

이 있었던 탓인지 얼마 안 돼 수강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차 지할 수 있었다. 내가 굳이 일본 파견 근무를 바란 것은 해외견문을 넓히려는 생각보다는 한결 나아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보장 된다는 데에 있었다. 아무튼 나는 오사카 지점으로 발령받아 1971년 부터 3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내는 첫딸에 이어 장남(종헌)을 낳았다. 다카하라라는 병원에서였다. 이때부터 나는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짓는 일을 자연스럽게 했다. 퇴근 후나 주말에는 아내를 도와 기저귀 를 빨고 아이를 목욕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식구가 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거리를 얻어다가 일본인들이 신 는 조리 끈을 꿰매는 일을 했다. 골무를 끼웠지만 몇 번이나 바늘에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61


손이 찔려 곪는 바람에 고생을 하곤 했다. 당시 대한항공의 급여는 450달러 정도였다. 일반 기업체의 대우에 비해서는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오사카 근무는 외국생활에 적응하는 힘과 일본어를 불편 없 이 구사하게 하는 상당한 소득을 안겨 주었다. 오사카 근무를 마치고 본사로 돌아오자 나는 과장으로 승진하였 다. 이 무렵 회사에서는 각 대학의 간부 졸업생을 대상으로 관리자 교육을 실시했는데, 나에게 연수 강사의 임무가 주어졌다. 진짜 관리 자가 되고 싶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이런 교육 경험은 뒷날 사업을 계획하고 사회공동체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절 나는 명동 KAL 빌딩에 근무하면서 무산되긴 했으나 엉뚱 한 일을 벌였다. 건물의 파지를 수집해 팔기로 하고 트럭까지 빌려 처마밑에 대기시켰다가 상이군인인 폐기물 수거인들이 나타나 칼침 맞고 싶으면 계속하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꿈만 같았던 약혼 시절.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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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로 떠나기 2년 전인 32세 때 세 자녀와 함께. (1975년)

눈매 고운 처녀 박은주와의 만남 여기에서 잠시 아내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박은주(朴恩珠)라 는 처녀를 알게 된 것은 대한항공 강원도 삼척지점에 근무할 때였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일반 승객이 많지 않아 웬만하면 눈에 띄게 마 련이었다. 하루는 매표창구에 나타나 뭔가 확인하고 가는 여성과 마 주쳤다. 전에도 먼발치에서 한 두 차례 본 기억이 있어 낯설지가 않 았다. 그런데 정작 앞에서 보니 범상한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맑고 아름 다웠다. 긴 눈썹이 조화롭게 그 눈을 받쳐주고 있었다. 아직까지 저 런 눈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필시 아이 콘테스트에라도 나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63


1975년 서울 합정동에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고 맏딸 현미(6세, 오른쪽), 아들 종헌(4세)과 함께.

가면 입상할 게 분명한 매력적인 눈이었다.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 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녀에 대해 궁금해서 당장 수소문에 나섰다. 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알아본 결과, 이 지역 쌍용시멘트공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여성이 라고 했다. 아, 바로 그 여자였군! 그렇지 않아도 나는 진작부터 시멘 트공장 비서실에 미인 비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참이었다. 충 주가 고향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재원이라고 했다. 단단히 마음을 먹 고 돌격자세로 달려들기로 작정하였다.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여자를 잘 만나야 성공한다는 말을 들어왔고, 그 렇게 믿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용감하지 못하면 미인을 얻지 못한 다.”(Faint heart never win fair lady.)는 격언이 머리에 박힐 정도였 다. 아울러 여자란 매력적이어야 하며, 현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간직 하고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안 타깝게도 그녀에게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시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새침하던 그녀에게서 약간의 감정 변화가 감지되 었다. 관심이 없는 체 하면서도 나의 신상에 대해 묻고, 하는 말에 의 견을 다는 빈도수가 많아졌다. 이렇게 만나는 동안 나는 그녀가 명석 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가정교육이 잘 된 사람이라 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새 나의 의식 속에 그녀가 이상적인 배우자감 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아울러“현명한 아내는 남편을 성공의 길로 이끈다.” 는 말이 그녀 의 얼굴과 겹쳐 떠올랐다. 깊이 사귀지도 않았는데 나는 벌써부터 ‘내조’ 를 염두에 둔 욕심쟁이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박은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사귄지 1년 반 만이었다. 1968년 8월 20일 스물일곱 살 때였다. 충주예식장에서 혼례를 치르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65


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신접살림의 어려움 속에서 첫딸 현미(賢美)를 낳고, 장남 종헌(鍾憲)에 이어 둘째딸 현아(賢雅)를 얻 었다. 아내는 손에 물도 안 묻힐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에서 살다가 결혼 후 시골서 올라온 시집의 많은 가족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을 하 면서도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내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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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제 장


새로운 삶의 무대를 찾아서 불안하지만 완벽한 변화와 힘찬 도약을 꿈꾸며 홍콩 경유 인도네 시아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결코 젊다고 볼 수 없는 서른네 살 때였 다. 지난 세월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직장생활 10년, 이미 안정기에 접어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무모하다고밖에 달리 표현 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당연히 주위에서 말렸다. 친구들은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비웃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야 말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하루아침에 박차고 나와 자기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에서 굳이 모험을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 지 않는 눈치였다. “야, 대한항공이면 모두 못 들어가서 안달인 곳이야. 최고 직장에 서, 그것도 능력을 인정받으며 잘 있는 사람이 뭐? 인도네시아로 간 다고? 그곳에서 나무를 잘라 팔겠다고?” “꼭 있는 놈들이 한 번씩 쇼를 해요, 쇼를.” “남자로 태어나서 뭔가 일생을 걸고 해볼 만한 일을 찾고 싶은 건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해. 넌 세 아이의 아버지야.” “안정된 탄탄대로를 두고 가시밭길을 자청해서 가겠다니. 내 참, 네가 무슨 영감을 얻어야만 작품이 되는 예술가냐? 철없는 짓이야. 잘 생각해봐.” 6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그래도 아직 젊어 혈기와 야망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던 친구들도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간곡하게 만류하였다. 이런 걱정 뒤에는 경험 도 없는 네가 무슨 원목사업이냐, 그것도 우리보다 더 열악한 환경인 인도네시아에서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니, 엉뚱한 짓이 아니냐 는 힐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와 함께 더위 문제도 거론되었다. “더위도 많이 타면서, 인도네시아가 얼마나 더운 나란데, 아무리 사서 고생한다지만 이건 아니잖아?” 게다가 당시 인도네시아는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였다. 그래 서 마음 한 구석에는 이 나라가 좌경으로 돌아선다면 한국으로 돌아 오는 게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이처럼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 아래서 잠시나마 생각이 흔들렸으나, 나는 이 미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10년 동안 젊음을 바쳐 일한 직장을 떠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서운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평소의 성격대로 밀고 나 갔다. 그러자 내 가슴은 이미 새로운 포부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포 부는 다름아닌 산림개발이라는 목표였다.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 구어냄으로써 세계에 우뚝 서는 큰 기업인이 되고 싶었다. 기백과 열정으로 뜨거워진 내 가슴은 그 어떤 장애도 녹여낼 만큼 에너지로 충만했다.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곳이 열대지방이며 문화 가 다른 이국땅이라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직장에서 아무리 인정을 받더라도 결국 피고용자야. 나는 내 사업 을 하고 싶어. 내 젊음, 아니 내 삶을 걸고 올인하고 싶어. 그것도 편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69


안하고 만만한 조국땅에서가 아니라 더 넓은 세계를 무대로 말이야. 모두들 걱정하지만, 난 반드시 해낼 거야. 성공할 수 있어!”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결심을 하기 전에 나름대로 분석하고 검토한 결과, 산림산업의 호황은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고, 또한 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 바로 이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 이다. 이런 계획이 단시일 내에 성사된 데에는 원목사업 경기가 좋을 때 먼저 와서 자리잡은 산림개발 전문가인 집안 동서의 영향과 아내 의 권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내가 산림산업을 첫 사업으로 선택한 이 유이다.

인도네시아는 흙냄새부터 다르더라 내가 장차 새로운 삶의 무대가 될 인도네시아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77년 7월 7일이었다. 오직 나를 믿고 따라준 아내와 아이들 을 뒤로 하고 자카르타의 할림 국제공항에 내린 것이다. 이 공항은 크지는 않지만 나지막한 곳에 자리잡은 공항 모습이 오 히려 정겹게 와 닿았다. 처음 이 공항에 내릴 때 나는 서울과는 다른 후텁지근한 공기와 여기에 실려 오는 특이한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코끝에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이 냄새가 인도네시아인들이 즐기는 클로버(층케)라는 향료가 들 어간 크레텍 종류의 담배에서 뿜어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뒤였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공항에 오면 그 독특 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이리안자야 원주민 부족장의 모습.

한 냄새가 가끔 파브르의 조건반사처럼 나를 30년 전의 시간으로 데 려가곤 한다. 인도네시아는 1만 3천 7백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 라다. 크기는 한반도의 15배에 이르며, 인구 2억 4천만 여명으로 세 계 4위에 해당된다. 동서 약 5천 1백㎞에 걸쳐 흩어져 있는 이 나라 는 열도의 바깥쪽, 즉 동쪽에 파푸아뉴기니와 아라푸라 해, 서쪽으로 는 인도양, 남쪽에 스마트라・자바・발리・티모르섬 등이 있으며, 열 도 북쪽에는 인도네시아어로 칼리만탄이라고 부르는 보르네오섬이 있다. 파푸아뉴기니섬 서쪽 절반을 차지하는 이리안자야 (2002년 이 후 파푸아 주로 개명)에는 본토에서 이주해온 50%의 인도네시아인이

살고 있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1


세 번째 큰 섬인 보르네오는 대부분 구릉과 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가히 섬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적도 바로 밑에 위치해 있어서 무더 우며 습기가 높다. 연간 평균기온이 섭씨 28도 전후이지만, 비가 내 려도 온종일 쏟아지지는 않는다. 농촌에서는 산 밑과 밭 사이에 자라는 바나나 나무와 삼베 같은 싱 콩 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야자수 나무가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만, 어떤 곳은 한국의 시골 풍경과 흡사한 경우도 있다. 특히 저녁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산속 마을의 정경을 보고 있노라면, 한 국의 옛 시골 풍경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착각속에 빠지게 된다. 이곳에는 많은 야자 단지가 있는데, 2억 4천만 인구가 사용하는 식 용유가 바로 이 야자열매에서 나온다. 신기한 것은 야자열매가 익어 서 떨어지게 되면 풍랑에 굴러다니다 어딘가에서 정착하게 되는데, 떨어질 때 터진 윗부분에서 싹이 트고 자리를 잡게 된다는 점이다. 겉은 섬유질이 많아서 공업용으로 쓰이고, 속은 숯을 만들어 활성탄 으로 사용하며, 코프라라고 하는 안쪽은 식용유로 가공한다. 그래서 야자열매는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다. 인도네시아는 250종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300개 이상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오스트로네시아(말 레이폴리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말레인이다. 나는 자카르타에 도착하자 이렇게 복잡한 언어 때문에 걱정했다. 업무용 주택을 준비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데 현지어를 모르니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다. 당장 언어를 익히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의 언어는 하나로 통일되기 전까지는 아랍어처럼 꼬불 7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꼬불한 자바의 전통언어(Kauci)를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지방별로 각기 다른 고유의 전통문자가 혼용되었다. 그러다가 말레이시아와 함께 로마 글자인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말레유어(Melayu)를 사용해 왔는데, 인도네시아 인구의 85퍼센트가 동일한 언어를 쓰고, 그 밖에 는 방언 같이 각 지방의 전통언어(舊語)를 사용해 왔다. 지금도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거의 같은 언어를 쓴다고 보면 된다. 2차대전 이후부터는 국어를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ia)로 정하고 인도네시아의 통일된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알파벳으로 구성된 말레유어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터득 할 수 있는 마인어이다. 처음에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줄 알고 걱정했 지만, 배우는 데 큰 부담이 없었다. 빠른 시일 내에 익혀 현지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저절로 그리 된 것은 아니었다. 평소의 신념대로‘하면 된다’ 는 일념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일하면서도 단어를 외우다시피했다. 그런 노력이 쌓이다 보니 6개월 만에 마인어를 익히고, 통역없이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지내려니 어려워도 푸념할 데가 없는 것이 큰 애로점 이었다. 서울에 두고 온 처자 생각이 날 때면 흘러간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달래야 했다. 이따금 아내로부터 안부 전화가 걸려 와도 내색 을 하지 않고 여기는 천국이나 다름없으니, 사업이 시작되면 머지 않 아 가족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안심시키곤 했다. 아내가 걱정할까봐 상황과는 달리 과장하여 말한 것인데, 이 말을 곧이들은 아내는 1년 뒤 항공회사 다닐 때 어렵게 마련한 서울 합정동 집까지 처분하고 식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3


솔들과 함께 자카르타로 날아왔다. 당혹스러웠지만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한층 긴장의 고삐를 조였다. 새삼 가장으로서 져야 할 의무가 마음 깊이 새겨지면서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환경이나 모든 것이 낯선데도 불구하고 뭐든지 녹여버릴 것 같은 의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치열하게 살았다. 무슨 일이든 하게 되 면 한눈을 팔지 않고 집중하는 근성 있는 내 성격 때문이었다. 흙냄새가 다른 자카르타에 발을 디딘 이후 내가 지금까지 지켜온 생활철학은 바로‘정직’ (正直)과‘근면’ (勤勉)이다. 도중에 시련과 많 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 정신만은 잃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 러한 인생관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과 주위에서 지켜 봐준 분들, 그리 고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목개발의 꿈 안고 칼리만탄 정글로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도전은 원목 개발의 꿈을 안고 보르네오섬에 자리한 칼리만탄 타라칸 정글로 뛰어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산림 개발, 즉 원목을 벌채하는 사업의 첫걸음이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보르네오는 전체 면적의 70%가량 되는 남부 지역이 인도네시아 령이고, 나머지 북부 대부분이 말레이시아 령 을 이루는 가운데 작은 면적의 보르네오 왕국이 말레이시아 령에 둘러 7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식민지 시절에는 보르네오라 불린 칼리만탄섬의 지도.

싸여 있다. 보르네오란 이름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그들에 의해 붙 여진 것이다. 현재 인도네시아에서는 칼리만탄이라 불린다. 칼리만탄은 세계 최대의 원목 생산지로서 합판 원료인 나왕목(羅 王木)이 집중 채취되는 곳이다. 면적만 해도 53만 9천㎢로 남한(9만 9 천㎢)의 5.45배에 이른다. 열대성 기후로 강우량이 많아 나무가 잘 자

라고 계절의 구분이 없다 보니 나무에 나이테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산림지의 크기는 임지의 크기에 따라 다른데, 허가된 크기별로 따 지자면 군 소재 면적, 면보다 더 작은 마을(里), 더 작은 지역으로 나 뉘게 된다. 원목개발 사업의 성패는 원하는 수종이 널리 퍼져 있고 집중적으로 서식하는 임지를 제대로 찾아내느냐에 달려 있다. 성공 할 경우 대박이 터지게 된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5


칼리만탄에는 일부 잡목도 섞여 있지만, 거의 나왕목이 주종을 이 룬다. 필리핀, 인도, 보르네오 등에서 산출되는 나무로서 회백색, 연 붉은색 또는 엷은 갈색을 띠며 가구・건축 용재로 쓰인다. 이 수종이 경제성을 가지려면 1ha당 3내지 4개의 원목이 들어서 있어야 한다. 서너 개의 원목이 서 있는 경우에는 원목 밀집지역으로 구분된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을 찾기 위해서는 현지 탐사가 필수적이다. 마땅한 임지가 발견되면 지도를 만들어서 위치를 확인하고 원목을 표시한다. 초기에는 판단을 비교적 정확하게 해준다는 이유로 이 방 법을 많이 채택하였다. 이보다 발전된 것이 경비행기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저공비행으로 임지를 촬영하여 수종의 규모와 크기를 보고 경제림 여부를 가리게 된다. 원목이 집중된 지역을 순차적으로 모자이크한 다음, 원목의 잎 줄기 윗부분(crown)을 확대경으로 판독하는 것이다. 비용이 많이 드 는 게 부담이지만, 이 방식은 더욱 과학적이어서 믿을 만하다. 다만, 경험 부족으로 항공사진을 잘못 찍어올 경우 판독이 어려워 실패할 확률이 높다. 경제성이 있는 임지인지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목 수송을 위한 수로의 상태와 채취할 수종의 분포를 정확하게 조사하지 않으 면 안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직접 임지 위로 날아가서 조사하는 서베이(survey) 과정인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임지의 소유권자와 계약을 맺는 절차가 필요하 다. 대충 임지의 소유권자의 말을 믿거나, 육지에서 보이는 것만을 근거로 결정을 내렸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위험부담이 매우 크 7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는 의미이다.

경비행기 타고 임지 탐사에 나서다 나는 여러 경로를 통해 원목개발에 대한 예비지식을 어느 정도 익 히게 되자, 직접 탐사에 나서기로 작정하였다. 인도네시아에 온지 1 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직접 서베이 하시게요?” 현장감독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해보고 싶어요. 그래야 함께 일하는 분들의 애로사항을 알게 되지요.” “하지만 그게 위험한 일이라서…….” 경비행기를 타고 진행하는 탐사는 종종 악천후 등 예기치 못한 상 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하다면 다른 사람들은 안 위험한가요? 그 럴수록 저도 해봐야지요.”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탐사 팀장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뒤로 하고 성큼성큼 먼저 앞 으로 걸어 나갔다. “공항으로 갑시다.” 발릭파판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6인승 경비행기는 우리 일행을 싣고 동쪽으로 날아갔다. 내 옆에는 현찰이 가득 채워진 가죽가방이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7


분신처럼 놓여 있었다. 비행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지불해야 할 운행 요금이다. 40여 분쯤 날아가니 말레이시아와의 경계지점이 나왔다. 울창한 정글이 구름 사이로 눈앞에 펼쳐졌다. 그야말로 모든 나무들이 원목 으로 보였다. 하지만 순간, 기류가 나쁘거나 조종이 미숙하여 생기는 추락사고가 적지 않다는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기류가 나쁘지 않아야 할 텐데.” 내가 날씨 걱정을 하자 “괜찮을 겁니다. 최고의 조종사니까요.” 현장 팀장이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이번 임지는 산세가 그리 가파르지 않다죠? 이 정보가 사실이면 좋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직접 확인해야죠.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경제성이 높은 임지가 되려면 원목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그 런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산세가 너무 가파르면 가치가 떨어 지기 때문이다. 산세가 지나치게 가파르면 전기톱(chain saw)으로 자 를 때 넘어지는 원목이 급경사를 따라 수십 미터씩 미끄러져 내려가 게 된다. 그러면 원목을 끌어올릴 길을 만들기 위해 장비를 오래 가 동해야 하는데, 시간이 훨씬 많이 들어 경제적이지 못하다. “일한지 1년 남짓 되었지만, 산세가 가파르면 원목개발은 성공할 수 없겠다는 걸 알겠더군요. 너무 높은 산지의 경우도 어렵고요. 강 우량이 많아서 비 때문에 작업할 수 있는 날이 적어 생산량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니까요.” 7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맞습니다. 산림이 아무리 좋아도 원목을 산지에서 바다까지 운반 하기 어려우면 경제성을 갖췄다고 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우리 같은 서베이 팀들의 역할이 큽니다. 정확하게 조사해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탐사 팀장의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경제성이 높은 임지란 좋은 원 목이 많고 그것을 바다까지 큰 무리없이 수송할 수 있는 주변적 여건 이 갖춰져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개는 산과 산 사이의 강물을 이용하여 원목을 이동한다. 그런데 날씨가 건조한 시기에는 물이 얕아서 바위에 걸리거나 걸치게 되다 보니 뗏목이 터지고 분산돼 운반이 어렵게 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작업팀들에게 필요한 일반 식품이나 자재, 기물 등의 수송도 어려워져 실패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건기에도 스피드 보트와 원목을 끌어내기 위한 배(tug boat)의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수심이 깊은 강줄기를 끼고 있으면 좋

은 산지로 인정받는다. 또한 거리가 너무 멀지 않고 육로를 이용하 여 원목이나 물자수송이 가능한 곳이라면 일단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여건을 보아가면서 생산할 구역을 순차적으 로 정하게 된다. 중장비가 투입되는 도로 건설이 시작돼야 원목 운반 이 가능해 생산을 많이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로 건설이 덜 필요한 곳 부터 선택적으로 시행한다. 항공정찰이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경비행기로는 며칠을 탐 사해도 충분치 않는 임지가 바로 칼리만탄이었다. 바다처럼 넓은 임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9


지가 모두 나무로 덮여 있어 아무리 경비행기를 타고 정찰을 해도 수 종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수관(timber crown)을 확인할 수 있어야 경제성 여부를 가릴 수 있 는데 200여 m의 상공에서는 아무리 내려다 봐도 산세의 높고 낮음 조차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좀 더 하강해야 했다. “말대로 나왕목의 수종은 넓고 둥글게 퍼져 있는데요. 이제 곧 계 곡 가까이, 강가로 깊숙이 하강합니다. 위험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팀장의 말에 긴장이 되었다. 사실 사업자가 직접 정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경비행기 탐사가 위험하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그래도 그 실정을 정확히 모르는 처지로서는 큰 감이 오지 않았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할까. 아니, 무지에서 오는 용기였을까. 긴 장이 되긴 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바람이 전보다 거세 어지는 듯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이곳의 특징이었다. 솔직히 겁도 났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올인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비행기가 더 낮게 산림 위로 바짝 내려가자 황급히 달아나는 산짐승 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산짐승들이 많은 처녀림이라 난데없이 이상한 물체가 공중을 나니 놀란 모양이었다. 산짐승들뿐만이 아니었다. 강 가에는 화전민으로 보이는 토착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어 떻게 이런 정글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경험이 미천해서 그런지 의아 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첫 캠프 위치는 저곳으로 정해야겠습니다.” 지도를 보고 있던 탐사 팀장의 말에 다른 팀원이 응답했다. “강폭도 원목을 견인하기에 무리가 없겠습니다.” 이제 항공사진 결과에 따라 판독을 하고, 다시 서베이 팀이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확인한 뒤 최종 판정만 내리면 되었다. 이렇게 나의 첫 항공조사 참여는 무사히 끝났다. 결과도 긍정적이어서 더욱 보람 이 있었다. 사실 나의 임무는 현지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있었지 결정을 내리 는 역할을 맡은 게 아니었다.

정글, 또 다른 고행의 길 인도네시아에 온지 어느새 8개월, 우리가 계약을 체결하여 단독 개발하게 된 곳은 인도네시아 국영회사 인후타니 영림공사와 협상중 인 약 10만 ㏊에 이르는 임지였다. 이 지역의 한 가지 단점이라면 고 산지형으로 작업의 난이도가 높아 조건이 별로 좋지 않다는 데에 있 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일은 산림개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문제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손윗동서에게 많이 기댔다. 그 대신 몸 을 던져 대표인 그를 도왔다. 다행히 여러 방면으로 노력한 결과 산 림개발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에서 산림개발 전문 경영인으로 통할 만큼 좋은 평판을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1


얻고 있던 동서가 현지 상업은행 위달사 총재의 도움으로 담보 없이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큰 뉴스 거리가 되었다. 이 자금으로 자카르타 시내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중장비를 구입하 였다. 생산본부를 중심으로 사업과 탐사를 총괄하는 기획실과 총무 과, 생산보급과 등 세 파트로 조직된 회사는 동부 칼리만탄 타라칸 작업 현장과 강가에 각각 중간 보급소를 두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얼마 뒤에는 한국인 작업 및 보급 책임자, 불도 저 운전수, 정비사, 경리, 일꾼 등 고용인이 무려 500여 명이나 되었 다. 이들 대부분이 처녀림인 칼리만탄 정글에 투입됨으로써 비로소 원목 생산과 수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978년, 공식 명칭‘트리부 디 위스누 산림개발회사’ 는 이렇게 출발했다. 나는 다행히 항공회사에 다닐때 관리자 교육 과정을 이수했고, 신 입자와 해외 파견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을 한 경험이 있어 이 사 업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본사에서 작업 현장까지는 이틀이 소요되었다. 통신 사정도 좋지 않았다. 사업장이 정글에 있다 보니 현장과 자카르타 본사 사무실 간 의 SSB 통화만 가능하였다. 이런 상황 아래서 연락이 두절되다시피 한 가족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명색이 2인자 격인 상무의 직책 을 맡긴 했지만, 월급조차 제대로 받을 처지가 못 되었다. 당장의 수 익이 없는 초창기의 경영체계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문도 모 른 채 나만 믿고 한국에서 집까지 처분하고 온 아내에게는 면목이 없 었다. 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내는 이 무렵 몸을 가누지 못할 정 도로 심한 열병을 앓았다. 티푸스였다. 6개월 동안 침상에서 내려오 지 못할 지경이 되다 보니 체중은 39㎏까지 줄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남편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내가 얼마 후 골프를 치게 된 동기도 이때의 일이 계기가 되었 다. 산림 지주인 인후타니공사 영업이사 카딜 씨 부부의 적극적인 권 유에 따른 것이었다. 이분들과의 식사 중에“노냐 김(미시즈 김)은 건 강을 회복하기 위해 운동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며 3개월 동안 스 나얀 인도어 골프장에서 레슨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골프채를 골라 쥐어도 제대로 들지 못할 만큼 체 력이 딸렸으나 건강이 좋아지면서 스윙 폼도 제대로 잡혔다. 그뒤 연 습장에서 골프를 가르쳐 주었던 코치 노인을 만났더니, 드라이버로 티샷 연습을 해서 건강해진 것이라고 축하해 주었다. 우리 내외는 그 때 카딜 이사의 조언에 대해 늘 감사해하고 있다. 영림공사는 우리의 파트너 국영영림공사에 속해 있었는데, 중역인 와르도노 살레 씨의 가족과도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그의 가족 명의를 빌려서 첫 사업을 시작했다.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여 그런지 여러해 동안 사업하면서도 아무 지장이 없었다. 나는 이곳 산림개발 현장에서 한국인 불도저 운전수와 식모 각 1 명, 조수 등으로 이루어진 생산팀을 운영하였다. 숙식은 대형 원목 2 개 위에 만든 이동막사에서 해결하였다. 불도저로 움직일 수 있는 최 전방의 거점인 셈이었다. 최전방 밀림지역은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 는 곳이 태반이었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3


정글에는 한국인들이 묵는 연립식 막사와 이와 좀 떨어진 곳에 현 지인 일꾼들을 수용한 막사가 있어 조그마한 촌락을 이루었다. 시설 이라야 드럼통에 빗물을 받아 채우고 장작으로 데운 물을 사용하는 그야말로 원시시대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위생 환경도 말이 아니었다. 목욕을 할 때면 말라리아와 같은 병을 피하기 위해 높이 매달아 놓은 드럼통에 받아둔 빗물을 밑에서 피운 장작불로 데워 사용하였다. 정상적일 때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가 파이프로 연결된 찬물로 몸을 씻었다. 정글생활의 고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정글이 어떤 곳인지 구 체적으로 알 수 없으니 상상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바로 ‘먹는 문제’ 였다. 칼리만탄에는 채소 생산이 되지 않을 뿐더러 공급이 거의 안 돼 최 악의 상태였다. 원시생활과 다름없었다. 안남미로 지은 밥과 라면을 주식으로 삼았으나 찬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강가에서 잡은 민물고기 와 산나물, 깡통 장아찌와 중국제 런천미터가 고작이었다. 제대로 된 채소는 물론 한국 식품이 없으니, 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명절 때라야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자카르타 시내에 일을 보러 나왔다가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도 고생하는 직원들 생각이 나서 젓가락을 들기가 송구스 러웠다. 장마철에는 생산지인 정글과 저목장(강가)까지의 도로가 산사태로 막혀 불통이 될 때가 많았다. 워낙 돌이 없는 지역이라 망가질 수 있 어 마르지 않은 도로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8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밤낮 없이 비가 오는 날에는 귓전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로 깊은 잠 을 이룰 수 없었다. 왜냐하면 캠프 숙소와 사무실 지붕이 모두 양철 로 돼있어 외부 소리에 민감한데다 비가 자주 오면 원목을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땅이 마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시간이 지나 면 수백 명에 이르는 인부(현지인, 외지인)의 급여가 계속 늘어나 적자 가 쌓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홍수라도 나면, 캠프 가까이 있는 원목 저장소에 라킷 을 짜놓은 나무들이 범람하는 강물에 못이겨 터지게 된다. 강가의 주 민들이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떠내려 오는 원목을 산 사이의 작 은 개울가로 흘러가게 만들어 결국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개발 초기에는 이렇게 고충이 많았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었 던 것은 아니다. 척박한 환경에도 적응하며 극복할 수 있는 경험과 현지인과의 자연스러운 유대가 자산으로 생겼다. 그중에도 중장비 운전수인 현지인과의 생활은 인도네시아 말을 실용적으로 터득하는 첩경이 되었다. 정글에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컴퍼스이다. 컴퍼스 없 이는 반나절도 산을 탈 수가 없다. 하늘만 보일 뿐이어서 좌우를 판 가름 못하게 되는 것이 정글 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움직일 때도 혼자 다니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산에 들어가는 까닭은 산림의 원목 수량과 생산할 원목의 위치를 스케치하고, 원목에 번호까지 붙이기 위해서이다. 1개 팀에 10명 또 는 15명으로 조를 이루어 일주일씩 입산하게 된다. 팀장은 한국인이 주로 맡게 되며, 경력자를 조장으로 쓰고 조수(helper)는 물품을 운반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5


저자(앞)는 칼리만탄 타라칸 정글에서 3년간 원목개발에 참여했다.

하는 책임을 맡게 되는데 텐트, 주방도구, 식품, 옷, 비옷, 긴 칼(바랑 이라고도 함) 등을 준비해야 한다. 거의 에베레스트 등정과 맞먹는 규

모로 보면 된다. 여기에다 워키토키까지 갖추게 되면 더욱 완벽해진다. 가끔 탐사 원들이 혼자 산속에 남아 개울에서 목욕을 하거나 실족하여 목숨이 위태로울 때 산짐승의 공격을 받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놈 아예 머리를 처박았군.” 앞서가던 생산 팀원 중 1명이 주저앉은 채 고개를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처박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곧 자신의 허벅지를 파고든 거머 리 한 마리를 양손가락으로 집어냈다. 일반인들은 상상하기조차 어 려운 일이지만 정글 속에서는 가끔 겪는 일이다. 사실 대대로 살아온 토착민이 아니고서는 정글의 깊은 산속까지 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산세가 완만하다고 만만히 봤다간 큰일 난다. 일단 들어가면 아주 넓은데다 나무가 울창하여 자칫 방향을 잃 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산은 나뭇잎이 떨어져 두텁게 지면을 덮고 있는 경우가 많다. 떨어진 나뭇잎이 거름이 되는데다 비가 자주 내려서 나무가 쉴 새 없이 자란다. 그런 곳에는 이상하게도 거머리가 많았다. 그래서 긴 양말을 바지 위에 신고 각반을 찬 뒤 등산화(예전에는 군화를 신었 다)를 신고 입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에 거머리가 허 벅지까지 기어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허술한 준비 탓이다. 한 번은 발이 몹시 가려워서 군화를 벗고 발을 보니 거머리가 살속 깊이 들어가 머리가 안 보일 지경이었다. “이놈의 거머리들은 지독해. 어떻게 이렇게 입고, 신고 있는데도 파고들지?” 그 팀원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전갈보단 낫잖아.” 나는 팀원의 어깨를 툭 쳤다. 정말 전갈은 소름이 끼쳤다. 정글에 서 지내다 보면 그런 전갈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나뭇잎 밑이나 원목작업 때 벗기다 남은 나무껍질 사이에 전갈이 숨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크기는 15~20㎝ 정도 되는데 꽁무니를 들 어 쏘게 되면 사람이 즉사할 수도 있다. 원목을 체인 쇼로 켜서 지은 임시막사는 강가라서 그런지 가끔 방 에까지 전갈이 들어와서 괴롭혔다. 새끼 전갈에 물리면 살갗이 부풀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7


어 오르긴 해도 대개는 어렵지 않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큰 전갈은 독을 품고 있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리면 생명이 위험해지 므로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전갈이 자주 나타나는 곳은 습한 지역 이다. 전갈 얘기를 하다 보니, 힘든 정글생활을 하다가 휴가를 떠나던 인 천 출신 직원 이경복 씨의 생각이 난다. 산림현장에서는 선적을 제때에 하기 위해 생산한 원목을 수시로 옮기는데, 대개는 강을 통하여 뗏목으로 운반한다. 강을 순찰하거나 작업 현장으로 가다가 강을 따라 떠내려오는 자신들이 생산한 원목 을 보게 되는 경우,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이때의 기분이란 실제 로 경험해보지 않고는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강을 순찰할 때의 일이었다. 우연히 우리가 생산한 원목을 실은 뗏 목을 발견하자 반가운 나머지 동행한 직원과 뗏목에 올라탔다. 그 직 원은 정글에서 고생하다가 휴가를 가던 중이었다. 잠시나마 몸을 쉬게 되자 우리는 담배를 나누어 피며 칼리만탄의 강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직원이 소리를 질렀다. 놀라서 보니 덜 떨어져 나간 나무껍질 사이에서 아주 큰 전갈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자칫했 으면 쏘여서 큰 변을 당할 뻔했다. 그런 전갈에 비하면 거머리는 수월한 편이었다. “하긴 같이 자자고 덤비는 구렁이도 있는데, 이깟 거머리쯤이야, 그죠?” 이번에는 팀장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땐 정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지.” 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그랬다. 며칠 전, 새벽녘에 침상 위로 무언가 움직이는 낌새가 있 어 불을 켜고 보니, 큰 능구렁이 한마리가 몸을 사리고 있었다. 얼마 나 놀랐는지 나는 뒤로 자빠질 뻔했다. 여러 개의 연립식 방이 있는 막사 안이었다. 원목을 잘라서 만든 침상 머리맡에는 책과 라디오 등 물품을 둔 칸이 있었는데, 그놈이 그 밑에서 징그럽게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치워버리기는 했으나 매우 꺼림칙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는 취침하기 전에 반드시 침상을 살펴봐야만 안심이 되었다. “그 얘기 아시죠? 개울을 건너는데 다리가 움직여서 보니, 그게 다 리가 아니라 능구렁이였다는…….” 산판에서는 개울에다 나무를 잘라서 다리를 만든다. 한 사람이 그 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다리가 움직여서 보니, 그게 다리가 아니라 능구렁이였다는 것이다. 산림개발 초기에 있었던 어느 한국인 사업 가의 이야기이다. 흔한 발견은 아니나 대개 이런 구렁이는 사람이 치 우기엔 너무 커서 트랙터로 치우게 된다. 이처럼 정글에서 살다보면 구렁이뿐만 아니라 거머리, 전갈 등 조 심해야 할 생물들이 많다. 더욱이 초록 뱀(Green Snake)은 산속의 나 뭇잎에 묻혀 있다가 사람이나 동물이 움직이면 날아오르듯 몸을 솟 구쳐 독을 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한 부부가 살림할 수 있도록 개인 사택을 통나무로 지어준 적이 있 는데, 그들의 어린 남매가 모기와 조그만 전갈에 물려서 피부가 무섭 게 부풀어 오르던 일을 기억한다. 다행히 조그만 전갈은 독이 약하여 쏘여도 살갗이 부풀어 오를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자카르타와 같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9


은 도시에도 습기가 많은 집에서는 이런 전갈이 나오는 수가 있어 간 난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모기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점모기(아가스)와 전갈 새끼 등이 정 글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열대지방은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에 걸리는 경우도 있고, 기력이 쇠퇴하면 티푸스 종류를 앓 게도 된다. 이럴 때는 대개 고열이 나면서 온몸이 아프고 기력을 잃게 되는데, 즉시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위험한 것은 탈수가 올 때 까지 배탈난 상태를 방치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급류에 뛰어들어 구해온 장비부품 우리 회사는 인도네시아 동부 칼리만탄 타라칸에서 스피드 보트로 약 8시간 걸리는 숨바쿵 강을 이용하여 원목 개발을 3년 동안 했다. 아주 험준한 산맥이어서 건기(乾期)와 우기(雨期)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자주 오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 숨바쿵 강가에 본부 캠프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제2캠프까 지, 약 38㎞의 육로를 건설했다. 이 도로는 대형 트레일러가 원목을 수송하는 주 도로였는데, 우천으로 산사태가 자주 나서 막히는 경우 가 많았다. 갑자기 도로 중간 중간이 막힐 때는 전방의 일이 중단되 는 곤란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1979년 9월경 트랙터 D7G가 도로 작업 중 산사태를 만나 미끄러 9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원목 개발의 주 장비인 캐터필러 D7G 앞에서. 이 장비는 도로를 건설하고 원목을 끌어내는 데 사용한다.

지면서 엔진이 꺼진 채 200m나 되는 골짜기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 생했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장비 추락은 그 자체의 파손은 물론, 여 기에 투입되는 장비가 많아 단시간 내에 끌어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고장난 장비의 부속품을 공급 받는 일이었다. 그런데 육로는 막혀 버렸고 스피드 보트도 없었으며, 통신까지 두절된 상태 였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1


결국 내가 택한 방법은 고무 타이어 튜브를 준비시켜 강줄기를 따 라 3㎞나 되는 먼 거리를 수영으로 본부 캠프까지 내려가는 것이었 다. 이런 중요하고 위험한 일을 부하 직원에게 시킬 수는 없었다. 내 가 직접 그 일에 뛰어들기로 작정하였다. 홍수가 난 직후라 강은 무서운 기세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강폭도 평상시보다 훨씬 넓었다. 족히 250m나 되는 거리였다. 홍수 뒤에는 종종 원목을 잘라서 수송하기 좋게 연결해 놓은 라켓들이 터져서 원 목들이 각각 떠내려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고, 산에서 떠내려오는 나 무줄기들이 촘촘하게 강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도 보였다. 이럴 때 스 피드 보트가 지나가다 보면 스크루가 부러지는 일도 흔했다. 막상 튜브를 타고 수영을 시작하자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부속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써야 했다. 물살이 너무 세어 2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본부 캠프에 도 착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엔 물뱀이 엷게 입은 여름 바지에 달라붙는 바람에 혼이 나 는 일도 있었다. 강에는 흔히 장어가 있게 마련인데, 그때는 물뱀이 나의 오른쪽 다리를 감고 있었던 것이다. 장어인줄 알고 손으로 잡다 가 그놈에게 물려서 순식간에 오른손이 부어올랐다. 급하게 팔 중간을 동여매고 물린 곳을 째고서 피를 많이 빼낸 다음 비상약을 먹었다. 그렇게 응급처치를 했기에 망정이지 지체됐다면 큰일 날 뻔했다.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악 어에게 물리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이때 깨닫게 된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무리수를 쓰면 위험을 초래 9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하기 쉽다는 가르침이다. 어쨌거나 그때 정신없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튜브를 타고 가서 제때에 중장비 부속을 공급받을 수 있게 조치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중요한 순간에 빠른 판단이 절실함을 다시 한 번 인식시켜 준 일이었다. 이 부품으로 중장비를 움직여 먼 거리에서 열악한 현장까지 많은 장비를 가져오지 않아도 되도록 수 월하게 일을 처리하게 해주었다. 외국생활에서는 비단 정글에서 만이 아니고 일반사업, 일상생활에 서 자주 부딪치게 되는 유사한 경우가 많다. 고생은 되지만 중요한 처리 중의 하나로, 튜브 타고 업무를 처리한 비정상적인 위기탈출의 기회가 있었다. 원시적이지만 이 방법밖에는 달리 묘책이 없었다. 그 러나 이 일은 내가 살아가는 데에 어떤 고초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 한 체질을 키워 주었다고 생각한다. ‘제때 결정! 제때 처리!(Strike the iron while it is hot.) 얼마나 적절 한 속담인가. “잘 되어 가나?” “걱정했는데 부사장님 덕에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팀장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최선을 다한 덕이지. 그럼 수고해 주게나.” 팀장과 함께 커피를 마신 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다른 작 업장을 향해 떠났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3


산돼지, 맹수들 이야기 인도네시아는 지역 자체도 넓은데다 섬마다 산이 넓고 커서 많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북부 수마트 라 아체 지역에는 코끼리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 코끼리는 자주 대로변을 건너기도 하고, 변두리 주택가를 떼지어 지나가기도 하는 데 대로변을 지날 때는 중형 차량은 속히 피해야 한다. 코끼리를 공격한다든가 성나게 하면 반드시 코끼리의 공격을 받아 주택이나 차량이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인근 주택에서 코끼리떼가 화 나면 그 부락민은 전부 대피해야 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산돼지는 각 지역에 분포되어 전국적으로 개체수가 엄청 많다. 산 돼지는 대개 물줄기가 있는 개울을 길 삼아 저녁에는 산에서 내려오 거나 길을 따라 다니게 된다. 사냥은 주로 야산에서 하게 되는데 사 냥개와 군인 병사들을 배치시키고 돼지몰이를 시키면, 한쪽으로 몰 리게 되어 의외로 쉽게 산돼지를 잡을 수 있다. 옛날에는 군・경이 무기를 사용하였으나 요즘은 수렵용 총을 사용하여 점차 질서가 잡 혔다고 할 수 있다. 칼리만탄 산림현장에서 저녁 늦게 본부 캠프로 돌아가다 생긴 일 이다. 지프차로 언덕을 달리는데 새끼 산돼지가 줄을 지어 가다가 헤 드라이트에 눈이 부셨는지 우왕좌왕하였다. 나는 새끼들이 차에 치 일 것 같아 한 놈이라도 손으로 잡아 보호하려다 언덕을 오르던 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떨어져서 어느새 차 밑에 깔린 경험이 있있다. 그 래서 산돼지 이야기만 나오면 산돼지 새끼 구하려다 사람 잡을 뻔했 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고 이야기한다. 산돼지 고기는 비계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맛은 생각보다 별로 없 다. 다만, 고기가 남자들의 정력에 좋다 하여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철이 바뀌면 보금자리를 이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강가에서 만나는 산돼지는 줄지어 가다가 주변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각 방향으로 흩어져 한 번에 여러 마리를 잡을 수는 없다. 칼리만탄에는 우기가 되면 강줄기마다 물이 범람하게 된다. 이때 는 상류에서 뗏목이 터져서 원목이 분산되어 떠내려오는 경우가 많 다. 이럴 때 동네마다에서는 원목 하나라도 예인하여 깊숙이 숨겨 놓 는 것이 원주민들의 일이다. 이윽고 물이 빠지면 원목은 집 주위에 가지런히 있게 마련인데, 너무 먼거리에 흩어진 원목은 대부분 회수 가 되지 않는다. 이런 우기에는 산돼지가 건너편 산으로 헤엄쳐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산에 별미의 나무뿌리와 열매가 많아서 그렇다 는 것이 현지인들의 얘기였다. 산돼지는 정글 속의 원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용 양식으로 통 한다. 그래서 정글이 아닌 도시 근교의 산에 서식하는 산돼지는 사냥 꾼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들은 사냥개와 동네 주민들을 동원하여 산 돼지를 계곡으로 몰아넣는다. 재미있는 것은 산돼지가 강물 따라 떠 내려갈 때 등줄기만 보여서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 이다. 실제로 필자도 산돼지가 도강하는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다. 휴가 차 시내로 떠나는 인부들과 함께 지점에 볼일이 있어 동행했는데, 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5


돌발적인 사태에 대비해야 했던 1970년대 말 원목 저목장에서 개발팀과 함께.

피드 보트를 운전하던 직원이 별안간‘으악’ 하고 소리를 질러 살펴 보니 산돼지 몇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순간, 8m 길이 정도의 보트에 타고 있던 몇 사람이 앞뒤에서 긴 칼 을 들고 헤엄쳐가는 산돼지들을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마리를 겨냥해 보트를 이리저리 선회하다 보니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결 9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국 한 마리만을 쫓다가 진흙에 빠진 산돼지를 잡는 광경을 보고, 나 는 세상의 이치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한 가지 일에만 집 중해야 확실히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곰은 자바섬과 칼리만탄 깊은 산에도 없고, 대개 수마트라 팔렘방 지역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다. 곰을 잡는 방법은 웅덩이 덫이나 올가 미를 많이 사용하는데, 주로 웅덩이를 파놓으면 깊은 곳에 빠져 나오 지 못하게 되어 생포할 수가 있다. 요즘도 생포된 곰 새끼를 주문하면 배달이 가능하다. 나도 곰을 사 육해 봤는데 식성을 정확하게 맞춰 줄 수가 없어 제대로 생육하지 못 하는 경우를 보았다. 곰의 쓸개는 큰 곰의 쓸개도 아주 작아서 말라도 수분이 완전히 빠 지지 않아 약간 말랑거린다. 그런 관계로 대개의 현지인들은 산돼지 쓸개를 말려서 곰의 쓸개로 둔갑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곰의 쓸개 는 교통사고나 운동 중 타박상을 입어 생긴 어혈을 푸는 데 뛰어난 효 능을 보인다. 또한 피로를 급격히 느낄 때 소량을 술에 타서 마시는 것 도 좋다고 한다. 이런 예도 있었다. 어떤 한국인은 현장에서 곰을 잡아 쓸개를 꺼내 다 터졌는데 터진 쓸개를 다 먹어치웠더니 시간이 지나자 복통이 나 고 귀국 후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가족들의 요구에 의해 부검을 실 시했는데, 창자가 구멍이 날 정도로 독한 쓸개를 먹은 것이 사망의 원인으로 판명이 나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러시아에는 2m 이상 되는 대형 곰이 서식하고 있으며, 한겨울에 곰 사냥을 많이 하는데 굴을 파고 동면하는 곰을 발견하면 굴 입구에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7


까만 천을 낮게 걸어 놓는다. 그러면 곰이 그것을 갑자기 공격하는 버릇이 있어 이때를 이용하여 곰을 잡는다고 한다. 또한 담력을 기르기 위하여 곰 사냥을 한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푸 틴 전 대통령은 보좌관 시절에 대통령과 곰 사냥을 나갔다가 아무도 엄두를 못내는 위험한 상황에서 용맹성을 발휘하여 곰을 사냥한 적 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용맹함을 인정받아 대통령 후계 자로 발탁되어 대통령이 되는데 일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호랑이는 수마트라를 비롯해 잠비쪽에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호 랑이 사냥을 따라 가려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잡는 방법은 군인들이 주로 사냥을 나가는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개나 염소 고기를 달아 놓고, 주위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동여매고 밤을 새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방식을 주로 쓴다. 호랑이는 총을 설맞으면 순간적으로 뛰어오르는 점프력이 3m를 넘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3m 높이에 걸터앉았다가 명중시키지 못하고 나무에서 떨어져 혼쭐이 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호랑이를 잡다가 오히려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가 있은 후부터는 나무 위에서 호랑이를 기다리려면 3m 이상인 나무 위를 선택하여야 안전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호랑이 사냥꾼들은 4~5m 높이의 나무 위에 몸을 튼튼히 동여매고, 총도 떨어지지 않게 줄로 묶어서 안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동행하는 사람도 역시 주위의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묶고 호랑이가 나타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한다. 대개의 호랑이는 군인들 9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의 칼빈총 정도로 잡기 때문에 호피가 길게 찢어진 경우를 자주 보 게 된다. 호랑이도 깊은 함정에 빠지게 하여 잡기도 한다. 5m 이상 되는 깊 이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면 빠지는 경우가 있어 생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총으로 사살하는 경우 수의사가 쓰는 수면 실탄이 없으면 산탄이나 군인의 총을 이용하여 살상하게 된다. 호랑이 앞발은 통뼈 인데 아주 단단하다. 이 뼈는 류머티즘, 관절염에 특효가 있다 하여 찾는 사람이 많다. 호랑이 살은 힘을 쓰지 못하는 환자, 즉 시름시름 원인도 모르게 힘이 빠져가는 사람에게 효과가 크다는 말이 있다. 호 피는 대개 사무실에 두고 맹수의 기를 얻는다 하여 사업가의 사무실 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인도네시아의 호랑이는 보호를 받고 있다. 호랑이 사냥은 법 으로 금지하고 있어 군인들도 호랑이 사냥을 금하게 되었다. 그렇지 만 차츰 인도네시아 호랑이의 숫자도 줄어듣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대침으로 정강이 핏줄을 따다 지난 1975년 항공회사에 다니던 시절, 직원들 중 처음 해외 근무지 로 발령받아 나가거나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등 남미쪽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은 대개 위급 사태에 대비하여 수지침을 배웠다. 그때 내 가 후배들 틈에서 배운 침술도 그런 이유로 익혀둔 것이었다. 내가 책임지고 있던 동부 칼리만탄 타라칸에서 숨바쿵 강가를 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9


피드 보트로 약 10시간만 올라가면 산림 사업장의 베이스캠프가 나 오는데, 이곳에서 침술을 익혔던 것이 돌팔이 침술사 행세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기술이라야 고작 곽란, 즉 음식이 체하여 토하고 설 사를 하는 급성 위장병이 생겼거나 급체했을 때에 사지의 관절에 침 을 놓거나 손발에서 피를 빼주고, 실신하여 인사불성인 사람에게는 정강이를 째고 피를 나오게 하는 정도였다. 그런 수준의 침술을 칼리 만탄의 산림개발 현장에서 수시로 사용하게 될 줄은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여러 종족이 섞인 300명에 가까운 인부들을 임지에서 지휘하다 보 면 인성 파악이 쉽지 않다. 그 가운데는 일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아침에 오한이 나고 고열이 생겼을 때 침을 놓아주면 오후에는 거뜬히 작업장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급체인 경우는 상당히 효험이 있었다. 배탈이 났을 때에도 침술로 다스릴 수 있었다. 임시변통에 불과했지만,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임 상실험까지 하게 된 셈이었다. 정글 같은 오지에서는 침통 정도는 가 지고 다녀야 노동자들이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때 원목개발팀의 운송장비는 트레일러 트럭이 주였고 트랙터와 같은 중장비가 많았다. 이런 중장비의 정비 를 위해 임시 정비소를 중간 지점에 두었는데, 필리핀인 요셉이라는 정비 책임자가 급체를 견디다 못해 쓰러졌다는 전갈이 왔다. 긴급히 대침통(大鍼桶)을 들고 달려가 보니 이미 그는 혼수상태였다. 인공호흡을 시키며 정강이를 따고 피를 빼내어 혈이 통할 수 있도 록 대침을 놓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난 상태라 그런지 체온이 10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계속 떨어지고 핏방울 대신 엉킨 피만 나왔다. 노력한 보람도 없이 그는 현장에서 숨지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를 살려내지 못한 안타 까움이 마음 한구석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대침 얘기를 하다 보니 그후 유럽 여행 중의 일이 생각난다. 2주 동 안 버스로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이동해 가며 관광하고 어느 계곡을 지나 휴식을 취할 때였다. 별안간 동행하던 여성들이 나에게 몰려와 머리와 배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해 대침으로 사혈(瀉血)을 해준 적 도 있었다. 사혈이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얼마간의 피를 몸 밖으로 뽑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 뒤 다시 배우게 된 것이 부항(附缸) 뜨는 법이었다. 부항기가 잘 발달되어 있는 경우에는 피부에 상처를 내지 않고 부항을 뜨고, 사혈 을 했다. 운동 중에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든가, 발목이 삐었을 때도 큰 효과를 보았다. 1977년 내가 인도네시아에 온 이후 고열과 설사, 급체에 걸린 사람 들을 수지침과 대침을 이용해 사혈하는 방식으로 꽤 많이 치료해 주 었다. 돌팔이가 사람 잡는다지만, 그래도 내가 시술한 응급조치가 여 러모로 통했다. 칼리만탄 시골 선착장에서 물뱀에 물린 직원의 발을 째고 피를 뽑아 독을 빼내 목숨을 건진 일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열대지방에는 뱀과 코브라가 많아 풀이 우거진 곳은 특히 조심해 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설사, 급체, 고열 등의 증세를 보여 병원에 갈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는 비상수단을 썼다. 아파서 보채는 아이의 좌우 손가락 끝을 침으로 찔러 어혈을 빼주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1


는 응급조치로 미소를 찾게 하였다. 나는 짧은 한의학 지식을 바탕으 로, 경험을 통해 이같은 치료를 통해 사랑을 베풀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원목 수송 작전 임지가 해변을 끼고 있거나 해변에서 멀지 않다면 원목 생산지로 서는 좋은 조건에 해당된다. 가파른 산이 없고 평평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경비가 절감되고, 신속하게 생산량을 늘릴 수 있어 대박을 터 뜨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이와 달리 고산지대이면서 오지의 경우는 대개 산세가 높아 우기 가 많고, 운반해야 하는 강이 길어서 수로로 이동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특히 건기에 접어들면 원목을 엮어서 배로 끌고 내려올 때 바 닥이 낮아 원목 토막이 바위에 걸리고 원목을 엮은 것이 터져서 원목 이 흩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 당시 우리가 생산한 원목은 주로 부산 동명목재와 태창목재에 수출하였는데, 원목수송선이 입항하여 정박을 시작하면 3일 내에 선 적을 해야 했다. 만약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과징금을 물어야 하 기 때문에 회사의 존폐에 영향을 끼칠 만큼 손해가 막심했다. 따라서 생산된 원목이 부족한 상태에서 원목수송선 입항 날짜가 다가오면 직원들에겐 초비상이 걸렸다. 정글생활을 한 지 2년이 넘은 어느 날이었다. 원목수송선의 입항 은 하루 앞으로 임박했는데 실제 물량이 부족하여 속을 태우게 되었 1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칼리만탄 산림현장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던 스피드 보트.

다. 들어올 배는 6천여 t짜리였는데 그 배를 다 채울 원목이 준비되 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시간 내에 약속한 물량을 채우지 못하 면 선박 대기료까지 우리가 물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회사가 무척 어 려워지는 상황이었다. 정글의 책임자였던 나로선 의무와 책임감에 애간장이 탔다.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하다가 칼리만탄 다른 임지에서 일부 물량을 구매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동부 칼리만탄에 있는 그 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급한 마음에 산림개발업자들이 많이 왕래하 는 어시장 겸 항구에서 7m 정도 되는 스피드 보트를 빌렸다. 그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겁도 났다. 하지 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다섯 시간이나 가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3


모터리스터(배 운전수)의 얼굴 표정이 몹시 걱정스러워 보였다. 그 러나 나의 결심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회사가 입 을 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 었다. 목적지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식량으로 바나나, 그리고 표류 당했을 때 표시하기 위한 손전등, 상어를 대적하기 위한 칼 등을 준 비하고 나니 어느 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초행길이었으므로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도 지체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출발합시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오.” “곧 어두워질 텐데…….” 모터리스터의 말을 짐짓 외면하고 나는 내 키만큼의 밧줄을 몸에 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몸에 밧줄을 묶었다. 몸에 밧줄을 매는 이유는 상어로부터 공격당하는 만약의 사 태때 상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상어는 상대를 만났을 때 길이를 재보고 자신보다 큰 상대에게는 덤비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곳 사람들이 개발한 비법이었다. 그러 니까 밧줄로 자신의 길이를 늘이는 속임수를 쓰는 셈이었다. “이제 갑시다. 파도를 잘 피해 가도록 합시다.” 내 말에 모터리스터는 고개를 크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도 긴장되 고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갈 길은 초행인데 곧 어두워질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어찌보면 무모한 행동이었다. 모터리스터와 단 둘이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바다를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어둠에 1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갇히고 말았다. 사람 사는 곳이야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할지라도 어디서건 불빛이 새어 나오기 마련이지만, 망망대해에선 그야말로 불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암흑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파도를 가르는 배의 모터 소리 뿐이었다. 점점 불안해졌다. 검은 바다를 3시간 넘게 달리자 점점 두려움에 압도당해 혹시 큰 배라도 나타나면 옮겨 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대로 바다 한 가운데서 모두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너무 경솔했나 하는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산림 개발의 중요성과 성 공해야 한다는 각오는 그런 마음을 곧 약화시켰다. ‘난 책임을 다해야 해. 어떤 어려움도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사 람 앞에선 어려움이 무력해지게 마련이야. 난 할 수 있어. 극복할 수 있어.’ 그러한 각오는 내 속에서 다시 한 번 소중한 신념으로 뿌리내리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긴 채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는 동부 칼리만탄의 중국인 산림 개 발지였다. 엄청난 손실을 막기 위해 흔적도 없이 수장될지도 모를 행 동을 했던 것이다. 죽다 살아온 사람처럼 배가 고팠다. 먹을 것이라 곤 삶아 놓은 밥과 생선 튀긴 것뿐이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배를 채운 다음 나는 바닷가, 물이 찰랑이는 곳에 평상을 지어놓고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 평상에서 일을 하며 식사를 하고, 옆에 구 멍을 내 화장실로 사용하였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공수특공 대가 겪음직한 그런 모습이었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5


이렇게 임무를 완수하고 대낮에 우리 임지로 돌아가니 그때서야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들었던 스피드 보트의 굉음이 아직 까지도 귓전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정글생활은 뛰어다 니며 공중으로 날아 다니는 타잔이라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모하기도 했지만, 강한 자신감과 신념이 있 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은 뒷날 내 삶에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목숨을 걸 만큼 나 는 일에 열정을 다한 것이고, 그러한 고생과 시련은 나의 인생을 좀 더 쉽게 항해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탈진 속의 나를 살린 숨바쿵 강의 밧줄 한번은 정말 죽음을 뼈저리게 실감한 적이 있었다. 내가 타라칸으 로부터 스피드 보트로 약 10시간 거리의 말레이시아 접경 정글에 자 리잡고 있는 숨바쿵 골짜기에서 겪었던 일이다. 다른 임지보다 산세가 가파른 이곳에 자리한 제1캠프는 본 캠프와 제2캠프 사이의 강가에서 약 38㎞ 상부지역에 있었다. 보통 건기 때 에는 강의 폭이 약 100m쯤 될까. 그러나 홍수가 나면 물이 범람하게 된다. 이럴 때에는 토착민들의 소유인 돼지 새끼가 떠내려 오기도 하고, 많은 저목장에 쌓아 놓았던 뗏목이 터져 산지사방으로 흘러 내려오게 마련이었다. 이런 때는 스 피드 보트를 여러대 풀어서 상부쪽과 중간지역, 그 이하 중간 보급소 1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까지 무선으로 비상연락을 걸어 떠내려가는 뗏목을 안전한 강가에 매어놓도록 지시하게 된다. 본래 산림개발지에서는 선박을 자주 이용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교 통수단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주의할 점이 많았다. 특히 속력이 낮은 터그보트 후미 부분에 있으면 수직으로 강에 떨어질때 배의 스크루에 걸려 다치거나 심지어 생명 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나 역시 배를 타고 가다가‘이대로 죽을 수 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을 겪게 된 것이다. 현장 점검 중이었는데 별안간 보트가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 다. 손으로 배 후미의 천장을 잡고 버티다가 그만 강물에 떨어지고 말았다. 배는 불어난 강물에 실려 떠밀려가고, 물속에 팽개쳐진 나는 군화 를 신은 채 수영을 하자니 다리가 무거워 개헤엄을 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물살이 너무 빨라서 몇 번이나 물을 마시며 허우적거렸다. 기를 쓰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물을 많이 마시게 되다 보니 체력에 한계가 왔다. 당장 물속으로 가 라앉을 것만 같았다. “상무님, 이거 잡으세요. 상무님!” 순간, 배에 같이 타고 있던 한국인 탐사 책임자가 긴 밧줄을 던져 주었다. 하지만 그가 던진 밧줄의 방향이 어긋나는 바람에 빠른 물살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더욱 안타깝게 할 뿐이었다. “상무님! 상무님! 힘내세요.”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7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밧줄을 던져 주었으나, 이 번에도 놓치고 말았다. 나는 이미 탈진상태에서 서서히 강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무서웠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공포감이었다. 그야 말로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이제 죽는구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라는 생각 이 엄습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힘이 자꾸 빠져나갔다. 그 순간,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6학 년인 큰딸 현미와 4학년인 아들 종헌, 막내인 현아, 그리고 아내 젬 마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지나갔다. 무의식중에 팔을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내 나이 38세, 이대로 포기하면 몸이 가라앉 고 말 것이다. 바로 그때, 숨통을 틀어막는 긴박함 속에서도 억울하 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 내 인생을 위해 낯선 나라 칼리만탄 정글 속까지 왔는데 숨바쿵 강에서 주저앉고 말다니, 도저 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느님. 아까운 나의 젊은 영혼을 구해 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머리가 수면 위로 솟구쳤고 이제 한번만 더 물을 마시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아니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차라리 절규에 가까운 호소였다. 이 기도의 힘 에 의해 만약 살아난다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한한 자신 감이 생겼다. 눈앞에 흐릿하게 밧줄이 보였다. 마지막 힘을 다하여 수면 위로 손을 뻗었다. 밧줄이 손에 잡히는 순간, 거짓말처럼 맥이 빠져나가던 몸에서 바위라도 잡아끌 것 같은 1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힘이 솟아올랐다. 나는 ‘죽어라’ 하고 밧줄에 매달렸다. 이윽고 배 위로 내 몸이 마치 물건처럼 끌어올려졌다. 나는 한동안 탈진한 상태에서 누워 있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정신을 완전 히 잃은 것도,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도 아니었다. 현실과의 끈을 잡 고는 있되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잠시 뒤에야 숨을 내뱉었지만 받은 충격이 컸다. 나는 스피드 보트로 타라칸 지점에 후송된 후 말라리아까지 걸려 오한으로 떨리는 몸을 고열 전구로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자카르타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한약을 먹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가 있었다. 그때 정인범 씨의 도움이 조금이라도 늦었더 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생명의 은 인인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1980년 원목 생산을 총괄하고 있던 때 발생한 일이었다. 원목사업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3년 동안 새벽 2시 전에 잠자리 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작업현장을 관리하려면 모든 것을 시간에 맞 춰주어야 한다. 그래야 정글사업이 잘 돌아가게 되는데, 모든 것을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다 보니 한 번도 쉬어보지를 못했다. 야성의 정 글에서 겪은 이와 같은 크고작은 경험들이 뒷날 내가 사업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 어떤 고난도 이때의 시련과는 견줄 수 없었기 때 문이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9



3

제 장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고생한 보람도 없이 빚만 떠안다 월급쟁이 생활에서 탈피하여 한번 멋지게 자신의 기업을 일구어 반드시 성공해 보겠다는 각오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인도네시아로 날아온 지 어느새 3년. 그런데 그 기대와 믿음은 얼마 가지 않아 무 참히 깨지고 말았다. 1980년 초 모든 원목개발업자는 반드시 원목가공 공장을 갖춰야 1 차 가공한 원목을 수출할 수 있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시책에 따라 회사 정리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아직 이익을 내지 못하는 형편으 로 가공 공장을 갖출 여력이 없었다. 당장 수출길이 막히게 되자 이 리 저리 뛰어 다녀도 더 이상 회사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정글 속에서 목숨과 바꾸다시피 하며 지켜온 회사였다. 그저 미래 를 위한 투자이거니 여기며 피눈물나는 고생을 감내해 왔는데, 그 동 안 애쓴 보람도 없이 빈손으로 주저앉게 되었다. 아니, 빈손이 아니 라 본의 아니게 회사 빚만 떠안고 수많은 채권자들로부터 수모를 당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울에 있는 집마저 처분하고 가족들을 불러들여 원목회사를 성 공시키기 위해 온 정열을 쏟아부은 나로서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 었다. 사장이었던 동서는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졸지에 사장 대행 격이 되어버린 나에게 직원들은 밀린 월급을 요구하며 괴롭혔다. 그중에 도 산판에서 사용한 30만 루피아(125달러)가량 되는 스피드 보트(Tug 11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Boat)용 스크루 한 개의 외상값이 나를 옥죄었다.

한 채권자(중국인 상점)는 가짜 형사를 보내 수갑을 휘두르며 행패 를 부리기까지 하였다. 살림살이를 뒤져가는 채권자 가운데는 한국 여성도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 초등학생인 아들과 맏딸 3남 매는 겁이 나서 울고, 아내 역시 부들부들 몸을 떨며 한마디 말도 못 한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죽도록 고생하면서 정해진 월급 대신 최소한의 생활비만 겨우 타 다가 쓴 것을 그들이 알 리 없었고 믿으려 하지도 않았다. 채권자들 은 내가 돈을 빼돌린 것으로 오해했다. 무참히 인격을 무시당한 빚 독촉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법적으로 나는 채무 변제의 의무가 없었지만, 그 많은 채권자들과 빈손으로 상대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차라리 혼자 겪어야 하는 고통이었다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죄없는 가족들까지 시달리다 보니 집안꼴이 말이 아 니었다. 회사 차량은 물론 사는 집마저 빼앗긴 가련한 신세가 되었 다. 한국에 있었다면 이렇게 시달리지 않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가족들이었다. 그런데 멀쩡한 이들을 낯선 이국땅에 불러들여 놓고는 제대로 보 살펴 주지도 못하였다. 행복하게는 못해줄망정 힘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괴로움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삶 자체를 포기하려는 극단적인 충동에 빠졌다가 식솔들 을 데리고 도망갈 궁리도 하였다. 실제로 그 루트를 세밀하게 짜보기 까지 하였다. 자카르타에서 발릭파판을 거쳐 타라칸까지 항공을 이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3


용하고, 이곳에서 누누칸 섬까지 보트로 이동하여 30분간 바다를 가 로지르면 말레이시아에 다다를 것이었다. 벌채 지역이 말레이시아 접경 지역이어서 부근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자식들을 보자 나는 그만 모든 계획을 접고 말았다. 아내는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어렵게 견뎌냈다. 이런 지경인데도 남편에게는 싫은 소리,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채무 자들에게 살림살이마저 빼앗기는 막다른 상황에 처했으니,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이처럼 하루하루 견디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는 회사 사무실에 나가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사장과 연락을 하고 있는지 일거수일투 족을 감시하였다. 결국 그들은 내가 돈을 빼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네들과 똑같은 피해자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아차리게 되었다. 3년간 원주민이 살고 있는 정글에서 고생만 하다 나오고 보니 도 시에서의 사회적인 기반이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육체적으로 왕성했 던 30대에는 인생의 목표 달성을 위하여 젊음을 담보로 맡겨진 일에 정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더라도 이 경우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 춰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 무렵 나는 대책 없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화물선이 들 어오면 배의 주방 담당자에게 사정하여 고추장, 된장 몇 통과 동태 등 냉동 어류를 받아다가 팔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와도 허물없 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밤에 화물선에서 물건들을 옮기다가 발을 헛디 뎌 물귀신이 될 뻔했고, 한번은 봉고차에 이것들을 싣고 왔다가 경찰 11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백차가 집까지 들이닥치는 바람에 아이들이 놀라 아내에게 매달리며 울었던 기억도 난다. 이때만큼 나 자신이 무력하고 처량했던 적은 없 었다. 이제 와서 지난날의 일을 글로 표현하려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 때 내 나이 설흔일곱, 아내가 설흔다섯 살이었다. 큰딸 현미가 열한 살이었고, 둘째인 아들 종헌이 아홉 살로 초등학교에, 막내 현아가 여섯 살로서 유치원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학비 부담 덜어준 소중한 장학금 이런 가운데 세를 내서 살고 있는 집의 임대 만료기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전세라는 개념이 없다. 자기 소유 아니 면 월세를 내고 사용하는데, 계약 기간만큼의 돈을 일시불로 먼저 내 야 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돈이 수중에 없는 처지였다. 가만히 있다 가는 그야말로 길바닥에 나앉는 거지꼴이 될 판국이었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마음을 식히려 몇번이고 세수를 했다. 거울 속에는 꿈과 희망을 잃은 채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절망감으로 일그 러진 30대 후반의 사내 모습이 보였다.‘내가 왜 이런 몰골로 여기에 서 있을까’이렇게 생각하자 울컥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나는 이런 감정을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계속 세수를 했다. 이미 손바닥에는 차가운 물이 아닌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얼 굴에 묻은 코피가 보였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나를 믿고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5


먼 나라에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무력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이대로는 아니야.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죽을 때 죽더라도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굳게 다짐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성공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의욕을 불태웠던 초심으로 돌아가 반드시 재기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렇다고 당장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나 대책이 있 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길로 중국 사람인 주인을 찾아가 솔직하게 내 사정을 얘기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3년치를 일시불로 지불할 수 없으니 분기별 로 지불하도록 편의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거절했던 그였 지만 절실한 나의 태도에 마음이 끌렸는지 청을 들어 주었다. 한 달 가까이 찾아간 결과였다. 일단 집에서 쫓겨나는 수모는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살았던 집은 자카르타의 변두리 지역인 스나얀 24번지에 있었다. 아이들의 교육비도 큰 부담이 되었다. 미국인학교에 다니던 딸은 졸업을 했지만 아직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아홉 살 인 아들은 미국인학교에 계속 보낼 여력이 없어서 간디국제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냄새가 날 정도로 낡고 어두컴컴한 교실, 청결치 못 한 교육환경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그나마 아들을 등교시키 다가 큰 사고까지 낼 뻔했으니, 그 처절함이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11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어렵게 장만한 폐차 직전의 낡은 벤을 몰고 가다가 시내 중심가에 서 핸들이 고장나는 바람에 차량 중앙 분리대를 넘어 접촉사고를 내 고 만 것이다. 자칫했으면 사상자가 나왔을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 다. 아들을 태우고 등교시킨 지 며칠이 안 되는 날이었다. 다시는 어 린 아들을 태우고 등교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히 화가 나서 앞으로는 불편하더라도 버스를 타고 가라고 윽박 지르듯이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들에게는 차마 못할 화풀이였다. 그 무렵 나의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큰 진전 없이 해를 넘기고 막내딸이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큰 딸과 아들을 계속해서 간디국제학교에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했다. 아이들 인생을 대신 살 수는 없지만 부 모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는 다해야 했다. 그 의무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교육 아닌가?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지 싶었다. 나는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장학금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래서 정성껏 문서를 작성하고 미국인학교에 관계서류를 접수시켰다. 지금까지 딸과 아들이 이 학교에 다녔으나 형편이 좋지 못해 다른 학 교로 전학을 했다는 것, 이제 막내가 입학할 나이가 된 처지로서 자 식 3명을 모두 좋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하여 졸업 후 사회를 위해 일하는 훌륭한 인간을 만들고자 하니 기회를 달라는 내용을 첨부하 였다. 교장선생님과의 면접 때도 솔직하게 내 처지와 교육관을 말했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7


아울러 내가 3년 동안 열정을 바쳤던 사업이 잘못돼 중도에 포기하 는 바람에 모든 상황이 심각해졌으며, 그 원인은 인도네시아의 산림 육성책이 갑자기 변경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보탰다. 거듭 자식들을 누구보다 잘 가르쳐서 이 사회가 필요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바람을 강조했다. 진지하게 나의 말을 듣고 난 교장선 생님은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이사회에서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나의 진심이 통했는지 미국인학교로부터 자녀 3명 중 한 명만 학비를 내고 두 명은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 는 통보를 해왔다. 이런 곡절 끝에 우리는 장학금으로 미국인학교를 다니는 한국인 최초의 가정이 되었다. 진실이 담긴 인간의 감정은 국 적을 떠나 어디서든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6개월 만에 간디국제학교에서 환경이 좋은 미국인학교로 전학한 아들은 과외활동으로 야구부를 선택하였다. 그런데 아이는 누가 시 킨 것도 아닌데 야구부 모자가 일본 것이라며 기어코 쓰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한국인들처럼 일본을 좋아하지 않은 편이었지 만, 아들이 이렇게 반발하는 기세를 보인 것은 뜻밖이었다. 이런 소 문이 교내에 퍼지면서 아들은 유명해졌다. 상급반으로 진학한 뒤에는 자기 가슴이 아빠보다 넓다고 자랑하는 가 하면, 나와 함께 말을 타고 고산지대를 달리기도 했다. 사내답게 키운다며 이른 새벽에 학교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 몇 바퀴씩 뛰게 하 였다. 그러다 보니 애가 얼마나 고단했는지 교정의 나무 아래서 졸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태권도도 배우게 했 다. 1985년경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마치 며칠 전에 있었던 일처럼 11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새롭다 그런데 종헌은 한국 아이들이 매를 맞으면 으레 외국 아이들에게 대신 복수를 하곤 하였다. 그들을 혼내주어 다시는 한국 아이들을 손 찌검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리 있는 꼬마 대장’ 으로 통했다. 그 동안 이런 저런 일로 나는 미국인학교 교장에 게 세 번이나 불려갔다. 어려서부터 아내는 아이들에게 유난히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그 것은 분수와 국가관으로 요약되는 교육 방침이었다. 구체적으로 설 명하자면,“네가 좋아해도 상대방에게 방해가 된다면 하지 말아야 한 다.” 는 것과“외국에 사는 너는 항상 개인 김종헌이 아니라 대한민국 의 아들 김종헌임을 명심하고 행동해야 한다.” 는 가르침이었다. 다행히 남매가 장학금을 받게 돼 학비 부담은 덜게 되었으나 생활 비가 문제였다. 어떤 사업을 해야 단숨에 일어설 수 있을까 하고 궁 리하며 사방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 다녔다. 이때 누군가 군에 무기를 납품하는 일을 따내면 크게 한 몫을 잡 을 수 있을 것이라며 벨기에 제 총알 납품을 권해 왔다. 그 일을 해 보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하루는 낯선 사람에게서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너 콩알 먹고 싶으냐?” 첫 마디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 말은 총 맞아 죽고 싶으냐는 뜻 이었다. “왜 남의 사업에 끼어들어? 뭘 모르는 모양인데,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이 바닥에서 꺼져!”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9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 할 만큼 승산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당장 그 일에서 손을 뗐다. 내가 일을 하려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성공 을 하기 위해서이지, 개죽음을 당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나는 다른 일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하기야 나는 채권자를 피하기 위해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한 달에 절반 이상을 수마트라. 술라웨시섬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일거 리를 알아보고 사업을 위한 자료도 수집했다. 하지만 아무 진전이 없 는 나의 행동은 어찌 보면 뜬구름을 잡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정월 초하룻날이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그렇게 몇 년을 구름 만 잡으러 다닐 생각이라면 아예 이혼을 하든지, 귀천 따지지 말고 힘을 합쳐 무슨 일이든 해보자고 심각하게 말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쓰는 아내의 눈에는 손에 잡히는 대책 없이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지문이 사라진 아내 1980년부터 산림개발사업은 정부 시책으로 인해 도저히 재기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여 모든 비즈니스는 전무한 상태에 있었다. 막 막한 장래를 생각할 때 처절함을 느끼며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 무렵 자카르타에는 한국인이라고 해야 300여 명밖에 거주하지 않았다. 인원이 많지 않다 보니 아쉬울 때 서로 의지하고 싶어도 딱 히 비빌만한 언덕이 되어 주지 못했다. 나는 산림개발사업을 접게 되 12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 프리랜서가 되었다. 명색이 프리랜서이지 실은 실업자란 말을 듣 기 싫어 끌어다 쓴 포장에 지나지 않았다. 프리랜서란 단어도 잘 쓰 지 않던 때였다. 처음에는 빈손으로라도 귀국하여 새로운 직업을 가져볼까 생각했 다. 막상 이렇게 결심하려 들자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국행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고 심 끝에‘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낫다’ 는 격언을 따르기로 작 정하였다. 아무 연고가 없는 미국에서 백지상태로 어렵게 출발하는 것보다 실패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인도네시아 쪽이 한결 승산이 높 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우선 큰 욕심 없이 작은 일부터 손을 댔다. 자카르타 무역관에 근 무하는 유태준 부관장의 주선으로 안내 책자와 낚싯대, 낚싯바늘 견 본을 받아다 팔았다. 그때 지인이었던 초대 검찰총장 자녀인 수산토 자매의 권유에 따라 사무실로 쓰라고 내어준 집 차고에다 쇼룸이랍 시고 낚싯대 몇 개를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애쓴 만큼 수입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관심을 끌 어볼 요량으로 검찰총장 가족의 주선으로 지방 유지들에게 한국의 새마을사업을 소개하는 테이프를 구해다가 방영하는 등 백방으로 노 력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나중에는 원목개발 사업할 때 사업상의 많은 의견을 나누어 우리 의 도움을 받았던 초창기 한국인 섬유제조업자 모씨를 찾아가 어렵 게 된 생활고를 설명한 뒤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고자 한국과 인도네 시아 간에 이루어지는 수입 업무를 나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하였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1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냉담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때 내가 느낀 비참 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는 부하 직원도, 모실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나 홀로의 인생이 었으니, 그때 마음을 단단히 잡지 않았다면 모든 일이 헝클어지고 말 았을 것이다.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코리아 하우스(현 그랜드하얏트 호텔 자리)에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비빔냉면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있는데, 어느 산림개발회사 신입사원 여럿이 둘러앉아 즐겁게 점심을 먹는 모습을 보자 그만 서러움이 복받쳐 먹기를 포기하고 식당을 나오고 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하느라 아까운 냉면 한 그릇을 비우지 못 했으나, 그 시절에 겪은 고생이 뒷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외면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홀로서기의 외로움은 실제로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실감하지 못할 고통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같은 모멸감이 오히려 나를 자극하고 오기를 갖게 했다. 그러니까 나를 절망 속에서 일으켜 세운 것은 8할 가량이 오기였던 셈이다. 이 무렵 나는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몸이 성치 않고는 아무것도 도모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문득‘건강을 못 지키면 사업도 성공시킬 수 없다’ 는 일본 마쓰시타사 사장의 명언이 떠올랐다. 대한항공에 다닐 때 인상 깊게 읽었던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이다. 채권자 등 별의별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심기를 건드리는 생활의 여파 속에서 어떻게든 재기해 보려는 나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형편 12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으면 밤낮 없이 우느라 아내의 눈에 진물이 다 났을까. 그러다 보니 30대 중반 나이 에 돋보기를 쓰게 될 만큼 아내의 시력이 약화되었다. 그때 내가 받 은 충격이란, 나의 모자란 문필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혹독한 경제적 파탄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 기할 따름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웃에 사는 수지 어머니께서 된장을 만들어 판매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 옆집에 사는 웅식의 어머 니는 고춧가루를 보내주고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며 적극적으로 권했다. 내친김에 된장 담그는 방법도 배웠다. 나는 아내와 상의한 끝에 윗동서인 사장 부친에게 가래떡 뽑는 기 계 한 대만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우선 흰떡을 만들어 팔아볼 요량 이었다. 기계에서 가래떡이 만들어져 나오기 시작하니 온 동네에 소 문이 났다. 1980년 초였다. 동남아에서는 처음 맛보는 가래떡이었을 것이다. 보통 한국에서 말린 흰떡을 가지고 와서 물에 불려서 먹었던 시절이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집은 어느새‘스나얀 떡집’ 으로 소문이 나기 시 작했다.“미시즈 킴, 남들이 떡집이라고 하면 어때? 힘을 내야지요.” 하며 힘을 북돋아 주던 한우석 대사님 부인의 말이 생각난다. 뿐만 아니라 윤영섭 공사 부부는 떡 기계를 설치하는 우리의 모습 을 보고 25㎏짜리 쌀 두 부대와 오렌지 봉지를 보내주면서 이제는 언 니도 자카르타에 없는데 외국생활이 얼마나 외롭겠느냐고 위로해 주 었다. 그분들이 돌아간 뒤 오렌지를 까먹으려던 아내는 쏟아지는 눈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3


물을 억제하느라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우정이 담긴 정말로 고마운 선물이었다. 우리 내외는 이들의 도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있다. 연말이나 설이 되면 떡을 사러 오는 사람들로 우리 집은 붐볐다. 발을 디딜 틈이 없이 없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오래지 않아 지방에서까지 떡 주문이 들어왔다. 이처럼 대목 때는 고단하기는 했 지만 가게 문을 닫고 저녁때 아내와 마주 앉아 수북이 쌓인 돈을 세 는 흐뭇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루에 모이는 돈은 한 자루가 되었다. 하지만 원료비와 생 활비를 빼고 나면 빠듯했다. 그나마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는 게 다행 이었다. 기계에서 뽑아져 나오는 가래떡은 뜨거워서 손을 대기가 어려웠 다. 하지만 연약한 아내는 쉴 새가 없었다. 이때부터 아내의 손은 거 칠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체중도 39㎏으로 줄었다. 밤잠을 설치며 일 을 하느라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아내가 애처로웠지만 어 쩔 도리가 없었다. 아내의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밤낮 없이 고추장 담그랴, 메주를 쑤어내랴 정신이 없었다. 동그러우면서도 넓적한 메주를 만 들기 위해서는 떡방아에서 나오는 뜨거운 콩을 맨손으로 다루어야 했다. 이런 노력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 놓은 고추장과 된장이 각각 5t이 넘었다. 이때는 자카르타를 오가는 직항 항공기가 없었다. 서울서 출발하 면 홍콩을 경유하여 자카르타에 왔다. 된장과 고추장을 한 초롱씩 가 져왔는데 비밀봉지를 준비해 두었다가 홍콩의 호텔 화장실에서 물량 12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을 분산하는 일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비행기가 고공에 이를 때 된 장이 폭음과 함께 터져 승객들에게 된장 세례를 줄 염려가 있었기 때 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아내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벌어 졌다. 게다가 신장결석증까지 생겨 고통을 호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웃에 사는 수지 엄마가 교민회에 알려서 도움을 청해 보라고 했지만, 동네 의사가 준 진통제로 고통을 견뎌냈다. 그때 맥주를 많이 마시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 라 시킨대로 했더니 거짓말처럼 돌이 빠져 나왔다. 나는 뜬구름 잡느 라고 지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전화 통화도 안 되는 섬에 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정기적으로 현지 이민국의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한다. 배정받은 날짜에 우리도 이민국엘 갔는데, 아내의 지문 을 채취하던 직원이 짜증난 목소리로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고 투덜 거리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름다운 아내의 손이 닳아 지문이 없어지다니! 잠 시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메주를 만드느라, 고추장을 담그 느라, 가래떡을 뽑아내느라 쉴 새 없이 놀려야 했던 손에 이상이 생 긴 것이다. 처음에는 별일이라 싶어 웃음까지 나왔지만 얼른 거두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울러 시집을 잘 왔으 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되었을 것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옮겨놓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5


원목사업 접고 식품업으로 전환 사업 영역이 바뀌었지만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 경 험이 없는 내가 감당하기엔 낯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악몽 같은 정 글 생활의 실패를 딛고 새로 출발해야 하는 나의 처지는 물에 빠져 잠기는 옷의 무게만큼이나 버거웠다. 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 황이 되다 보니 잠시라도 휴식을 취할 새가 없었다. 백인 책임자를 상대로 시작된 식품사업이 처음으로 납품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바쁜 가운데서도 칼리만탄은 물론 암본, 술라웨시, 마나도와 수마 트라 두마이 현장까지 두루 살펴야 하는 식품사업의 출발은 아주 분 주하였다. 비행기를 이용해야 하는 장거리 출장 때는 기내에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이제 지나고 보니 이같이 긴장된 가운 데 열정적으로 뛰었던 삶의 나날은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 늘그 막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정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 인가. 긴장의 연속된 생활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으로 판단 된다. 그 동안 열정적으로 뛰었던 지난날들이 늘그막에 건강을 지켜 주게 됨을 새삼 느껴본다. 정글에서의 생활은 촌음을 아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지만, 육지에서의 생활 역시 긴장을 풀 수 없는 적자생존의 싸움이었다. 무 12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 스나얀 주택에서 만들어 발효 중인 장독들. 무궁화식품 사업 초기에는 이처럼 가내 수공업 형태로 시작하였다. (1981년)

에서 유를 창조하려면 한가로울 새가 없었다. 6・25때 남하한 피난민 들의 처지가 그랬을 것이다. 나 역시 무일푼으로 오뚝이처럼 일어섰 기 때문에 6・25때 남으로 내려온 피난민 이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고 말할 수 있다. 바다를 건너온 중국인들도 나처럼 누구의 도움 없 이 자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소규모이지만 식품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중반 부터였다. 1년 만에‘무궁화식품’ 으로 이름이 바뀌긴 했으나, 그 당 시는‘한국종합식품’ 이었다. 한국식품은 자카르타 집에서 공장과 같이 운영하였다. 서로 부딪 칠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번잡하였다. 현지에서 구입한 한 트럭분의 오징어를 식모를 포함한 20여명이 처 마 밑에 둘러앉아 제록스 재단용 작두로 잘라내어 채를 만들었다. 물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7


로 씻어내어 깨끗해진 오징어를 양념을 넣은 여러 개의 솥에 볶아내 면 무게가 몇 배로 늘어나서 그만큼 이익이 되었다. 그런 한편, 한쪽에서는 가래떡을 만들어야 했다. 일을 서두르다 보 니 어린 종업원이 기계에 손을 잘못 대 손가락이 말려들어가는 소동 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나는 원목개발회사가 졸지에 문을 닫게 됨에 따라 생활비마 저 충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어떻게든 일어서기 위해 동분서 주하였다. 정부투자 회사를 찾아다니며 제재기(製材機)를 팔기도 하 고, 냉동 설비를 판매한답시고 인도네시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피스 톤 타입과 스크루 타입을 설명하느라 목이 쉴 정도였다. 이렇게 별 소득 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아내는 온 식구가 잠든 틈을 이용하여 뒤뜰에 앉아 밤새 버무린 김치를 비닐봉지에 담아 생고무 줄로 묶는 일을 시작하였다. 보다 못해 나는 아내가 만든 몇 봉지의 김치를 가지고 겔라엘 슈퍼 마켓을 찾아가 책임자에게 부탁하여 납품을 하였다. 그러나 양이 너 무 적다 보니 수금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식품사업 초기에는 정상적인 물품수입이 어려웠다. 냉장식품은 거 의 정기화물선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들여왔다. 대부분이 과일이었 다. 그마저 냉장 컨테이너가 아니고 선원용 식품창고에 보관해서 운 반해 왔다. 그래도 연말에 대사관에서 현지 장관들에게 선물용으로 구입하는 신고 배는 인기 상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대사관에 납품한 한국산 배의 상당수가 상했다는 통고를 받았다. 불량품의 값을 공제하고 대금을 청구하려 했더니, 이미 납품 12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 전체의 금액을 그대로 지급토록 해주었다. 아마도 최상섭 대사님 (장군 출신)의 배려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렵게 첫 사업에 나선 한

국 교민을 도우려 배려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지성과 덕망을 겸비한 분으로서, 인도네시아 대사 재임 동안 많은 한인과 현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존 경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 본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가끔 만나 대화 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그 분의 포근한 인품에 끌 리곤 했다.

전세 비행기까지 동원한 김치 수송 내가 칼리만탄 본탕 지역의 가스 채취 현장을 방문한 것은 하라판 인사니(Harapan Insani) 회사의 미국인 구매 책임자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 발릭파판 공항에서 본탕까지 경비행기로 약 15분 날아가면 바 탁가스 개발회사의 현장이 있었다. 그때 800여 명의 한국인 기술자 가 있었는데, 인사니 회사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오른팔 격인 동서가 경영하는 곳이었다. 나는 사무실로 쓰고 있는 임시막사를 찾아가 미국인 구매 책임자 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 인부용 부식을 납품케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시책에 따라 원목 개발 사업을 그만두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어린 자식들의 교육 과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감성적으로 토로하였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9


1983년 식품사업 초기에 김치를 납품하기 위해 치파나스 고산지대에 채소를 계약 재배했다. 사진은 수확을 돕는 저자(왼쪽)와 아내(오른쪽 두 번째).

다. 아울러 한국 식품의 품질은 믿을 만하다고 강조하였다. 나의 말에 진정성이 느껴졌는지 20분이 지났을 때 호의적인 반응 이 돌아왔다. 경쟁자인 싱가포르와 중국인이 제출한 견적서를 보여 주며 서류를 제출해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손님용 숙소에서 하 룻밤을 묵으며 견적서를 작성한 뒤 회사의 타자로 쳐서 제출하였다. 뜻밖에도 나는 납품권을 따내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그야말로 일사 천리로 이루어진 낙찰이었다. 이때의 납품 경쟁자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관련하는 회사의 자금을 운영하는 대기업체인 중국인 회장이었다. 결국 중국인들과의 경쟁에 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 오늘의 사업기반을 다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13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비자를 받으 러 나가면서 칼리만탄에서 미국인이 김치 이야기를 하면 짧은 영어 로 대꾸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예스! 예스!” 하라고 당부하였다. 아 내의 지혜로운 대처로 서울에 도착해본즉 자카르타로부터 김치 오더 가 와있었다. 이때부터 수소문하여 푼착이라는 고산지대에다 무와 배추를 재배 하도록 조치(계약)하고 김치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몇백 킬로그램도 많은 양인데, 매일 수톤 분량의 김치를 담가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매운 김치를 비비느라 아내의 눈에 진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루 두어 시간만 자고 밤샘을 하게 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내의 진두지휘에 따라 몇 트럭 분량의 무를 비닐 속에 담아 드럼 통에 소금과 물을 같이 넣어 보내면 자연히 무절임이 되었다. 수마트 라 현지에 도착하는 사이에 제대로 익은 장아찌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김치를 매일 수톤씩 가루다항공으로 수송하다가 나중에 는 F27기까지 동원하여 의자를 치운 뒤 가득 실어 칼리만탄으로 보 냈다. 이어 다음 비행기로 따라가서 발릭파판 공항에서 경비행기로 옮겨 싣고 본탕이라는 현장까지 수송해야 했다. 경비행기가 하루 종 일 날아야 김치 수송이 완료되었다. 그야말로 군대의 물품 수송작전 을 방불케 하는 만만치 않은 운반 과정이었다. 이때 내가 받은 칭호 가‘김치맨’ 이다. 수백 통이 되는 김치를 오전에 출발하는 비행기에 탑재하는데, 다 른 공항에서 경비행기로 옮겨 싣기 위해 현지인들을 독려해야 했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1


제조한 김치를 항공기로 수송하기 위해 김치 깡통을 포장하는 현지 직원들. (1981년)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비행기 밑에서 대기 중인 수많은 김치통에 물 이 스며들까봐 노심초사했다. 한번은 칼리만탄 발릭파판행 비행기에 탑승한 뒤 마침 김치통이 실리는 것을 보고 기내에서 내려와 비에 젖지 않도록 현지 항공사 직 원들을 격려하며 옮겨 싣고 있었다. 그런데 모 대기업 회장이 이 광 경을 보고 자기 아들에게“저것 봐라. 김우재가 저렇게 열심히 일한 다.” 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이 말이‘크게 돈 번 사람이 자신의 어려웠을 때 일은 생 각하지 않고 딱한 처지에 있는 남의 일을 불구경하듯 한가롭게 여기 는구나’하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처량했지만, 수수하게 받아들였 다. 어려운 자의 어쩔 수 없는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그분의 한마 디 말이 나의 귓전에 맴돌면서 열심히 일하여 반드시 사업을 일구어 13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놓고야 말리라고 굳게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공항에서는 김치통이 터질까봐 염려가 되었다. 국물이 흘러 엉망 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부에게 뿌린 돈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내 가 나타나면 인부들이 곧잘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팁을 잘 주는 사람으로 통했다. 여담이지만, 뒷날 수하르토 대통령의 오른팔 격이었던 모 회장과 대화하던 중에 대통령 회사와 경쟁하여 내가 이겼다니까,“티닥 아 파.”(잘했다)라고 대꾸하여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이때 스리랑카인이 경리부장이었다. 부인이 의사였는데, 그가 매 주 결재를 해서 내 명의 은행계좌로 돈을 보내 주었다. 자금 결재가 빨라서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거래처가 원목개발회사의 계좌가 있던 은행과 같아 혹시 전 회사의 부채를 뒤집어쓰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 했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코인부미(KOIN BUMI)무역으로 출발한 1983년 당시의 이야기이다.

배짱으로 따낸 공사장의 식당 운영권 1984년 중반 무렵, 하루는 수마트라 남부 두마이 항구의 정유공장 건설에 한국의 H사와 D사가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천여 명 의 한국인 기술자들이 투입되는 대공사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소비 할 식품을 댈 수만 있다면 대단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이 소식이 사실임을 확인하자 며칠 동안 흥분되는 감정을 억제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3


하지 못한 채 수마트라로 향하였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파칸바루 공항에 내려 2시간가량 기름으로 덮인 도로를 달리는 택 시 안에서 나는 기름을 채굴하는 메뚜기 같은 장비를 보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같은 지역에서 흔히 보는 석유 채굴 광경과 다름없는 움직임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주위에는 화전민이 살고 있었다. 도로 중간쯤에 이르자 음식점 간 판이 눈에 띄었다. 유명한 지방 음식인 파당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었다.‘금강산도 식후경’ 이라고 했던가.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이라 잠시 내리기로 하였다. 듣던 대로 맛이 있었다. 두마이에 도착하자, 퍼르타미나 게스트하우스로 찾아갔다. 사장과 면담한 끝에 식당 운영권을 따낼 수 있었다. 약속을 어기지 않았던 김치납품 실적이 꽤 알려진 모양이었다. 현재의 시설을 한식당으로 개조하고 한국인 주방장과 판매 책임자 를 고용하였다. 두마이 퍼르타미나 게스트하우스 식당을 한국식당으 로 합병 운영하게 된 것이다. 사무실은 물론 통신, 차량과 인원 등 모 든 편의를 확보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 되었다. 처음에 현장 사무실 로 찾아갔을 때는 앉으라는 인사치레조차 없이 작업용 군화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시큰둥한 표정만 짓던 사람들이 식당을 찾는 고객 의 신분으로 바뀌었다. 그저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1천 5백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의 주・부식 공급을 전담하면서 나 는 적지 않은 고충을 겪었다. 상당량의 식품을 공급하게 되다 보니 현지 업자들의 방해가 심했다. 그 가운데 미행의 조짐까지 보인 것은 중국인이었다. 그런 움직임 자체가 나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13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그러자 문득 이곳에 처음 찾아올 때 택시에 동승했던 안내자로부 터 들은 말이 생각났다. 현지 상인들의 반발을 각오해야 한다는 조언 이었다. 여기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촌장의 두목 격인 홍등가의 큰손이 되 는 집에 방 한 칸을 세를 내어 들어갔다. 휴일에는 일부러 촌장의 지 프차를 타고 환락가를 돌아보며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오래지 않아 사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미행하던 중국인들도 주위에서 떨어져 나 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를 대비하여 현지 조폭들과 인간적으로 사 귄 것이 훌륭한 보호막이 되어준 것이다. 덕택에 정유공장 공사가 끝 날 때까지 안전하게 사업을 해나갈 수 있었다. 나중에는 공사판의 인원이 3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사람이 많다 보니 식당에서 말썽을 부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때 주방장이 서 씨 성을 가진 유도 유단자였는데,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했다. 내가 주방장에게 지시하기를 홀에서 시끄럽게 말썽을 부리는 사람이 있으 면 누구를 막론하고 밖으로 불러내 혼내주라고 당부하였다. 그랬더 니 보통 하루 저녁에 2~3명이 앞마당에 업어치기로 내던져지는 웃 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음식 자재를 납품하는 데는 수량이 많은 소고기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납품량이 많을 때는 한 번에 두 트럭분 이상의 소가 필 요했다. 파당 근교의 부킷팅기라는 직거래 지역 도살장에서 소고기를 수송 할 때는 3명 1조로 구성된 팀이 맡아 했다. 이들은 출발 전에 강도를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5


만나 돈 털리고 몸 상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돈 자루와 함께 도끼, 칼 따위를 지프에 싣고 와서 소고기를 냉장 처 리했다. 이 일에는 당연히 건장한 운전기사와 힘센 거구의 보디가드들이 가담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흡사 서부활극에서나 있을 법 한 특이한 광경이었다. 나는 공사장을 드나드는 동안 인부들의 작업 과정을 눈여겨보며 이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는 향후 건설회사를 경영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어쩌면 은연중에 정유공사가 끝나는 2 년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새우잠으로 버틴 코리아 가든 시절 재기의 꿈을 버리지 않고 술라웨시 섬에서 말루쿠 섬, 자바 섬, 수 마트라 섬까지 두루 돌아다니는 5년 동안 나는 지방의 특색을 잘 파 악할 수 있게 되었다. 칼리만탄 사마린다 근교의 정유공장을 비롯하 여 발릭파판 정유공장, 수마트라 두마이 대형 정유공장의 공사 현장 에 식품을 납품하는 1차 단계를 마무리하고, 새 일을 추진하게 되었 다. 이제 돌아다니며 몸 품을 파는 일에는 진력이 나있었던 참이었 다. 덜 돌아다녀도 될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두마이 공사 현장에서 얻은 요식업의 경험을 살려 보다 체계적인 식당 운영을 해 1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1989년경 인도네시아 중앙정보부장 요가수고모 대장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하는 저자.

보자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이 사업은 지금까지 해온 식품 납품 업과 나란히 갈 수 있는 것이어서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자카 르타 시내로 나가자. 식당업으로 출발하는 이런 선택은 대개 중국 상 인들이 처음 사업을 할 때 밟는 수순이었다. 자카르타 시내 중심지에 처음 한국말로 된 간판을 걸었다. 뗄 테면 떼라는 식으로 붙인 간판이었으나 묵인되었다. 한국을 전면에 내세 운‘코리아 가든’ 은 이렇게 출발하였다. 인테리어에 문외한인 내가 밤을 지새워가며 도면을 그리고 목수와 연구하여 작품처럼 훌륭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그리면 그대로 도안 으로 작업할 수 있어서 기쁨도 컸지만, 무엇보다 비용절감이 많이 되 었다.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쳐‘코리아 가든’ 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만다린・아리아두타 호텔 등에서 한국음식 전시회를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7


열어 인도네시아에 처음 한국의 맛을 알리는 기회를 가졌다. 이 행사 에 수하르토 대통령의 고위급 비서관도 다녀갔다. 개업식이 열린 후 첫 손님으로 모 그룹 총회장이 찾아온 적이 있었 다. 음식값을 받지 않으려고 하자“내 돈을 받아야 성공한다.” 며한 사코 계산을 하고 갔다. 손님 중에는 베니 국방장관과 트리 통합군 사령관이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고, 여러 나라의 대사와 말레이시아 국왕까지 모시게 되었다. 미국 출신 밴 신부께는 이 지역을 다녀가는 그분의 친구 신부에게까지 식사를 대접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 기 억이 남는다. 그러다 보니‘코리아 가든’ 은 어느새 고급사교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나로서도 당시 실세였던 현지 고위급 군인들과 사회 지도층과의 친교를 통해 자연히 인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10년이 흐르고 27년이 지나는 동안 공수특전단장 등과 친분을 두 텁게 유지하며 대통령 자문위원 등 인사들과도 유대를 갖게 됨으로 써 사업 기반을 쌓는데도 큰 배경이 되어 주었다. 나는 이 무렵 누구로부턴가“사람이 돈을 갑자기 많이 만지게 되면 죽을 수 있다.” 는 말을 들었다. 우회적인 표현이지만 나는 이 충고를 예사로 흘려듣지 않았다. 식품 납품업이 몸으로 뛰어야만 하는 제2의 서비스업이 되다 보니 초저녁 때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체면불구하고 3평이 채 안 되는 문간 사무실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책상 위에 쓰러져 고단한 몸을 달래야 했다. 이럴 때는 으레 돈에 너무 집착하면 오래 못산다 는 말이 떠올라 과욕의 충동을 버려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1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코리아 가든 홀에서. 말레이시아 조홀 바루 국왕(중앙)을 중심으로 오른쪽부터 아굼 공수 특전단장과 저자, 말레이시아 대사. (1993년)

나는 대한항공 일본지사 근무 시절에『중국인의 상술』 이라는 일어 판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사업상 많은 참고가 되었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들이 조국을 탈출하여 외국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데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무일푼인 경우 점원이나 식당 종업원 노릇에서 노점행상을 하다 가, 좀 더 큰 행상을, 그후 아주 작은 규모의 가게에서 아이들과 숙식 을 해가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안식처를 찾는다. 여기서 성공하면 일반식당을 차리고 제법 큰 규모를 갖춰 나가게 된다. 이쯤 되면 벤 츠 정도를 구입하여 몰고 다닌다. 그 이상 되면 대형 술집이나 큰 사 업체를 차리게 된다. 이것이 중국인의 상술 일면이다. 나도 이런 과정을 어느새 답습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요식업도 단독으로 할 수 없어 현지인의 명의를 빌려서 하든지 동업을 하지 않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9


골프가 생활화되다시피 한 인도네시아에서는 대부분의 친교가 골프장에서 이루어 지는 수가 많다. 사진은 페불비치링스 골프장을 찾은 저자 부부가 클럽하우스의 홀 1번 티박스에서 라운딩을 시작하며 잠시 포즈를 취한 모습. (2003년 4월 27일)

으면 안 되었다. 나 역시 현지 파트너와 동업을 하면서 타마라 총재 에게 소지분을 주고서 합류케 했는데, 그때 동업자는 의심이 많고 아 전인수 격으로 매번 이익금을 챙기려 들었다. 매상액을 계산할 때마다 이유를 찾아내 불리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거의 고질이다시피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악화될 대 로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하루는 좁은 사무실의 문을 걸어 잠그 고 단둘이서 담판을 짓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때 마침 서울에서 긴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통화하는 중에 갑자기 동업자가 큰 반지를 낀 손으로 나를 가격하여 눈썹 위가 찢어 지는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재차 강타가 들어오는 순간, 반 사적으로 몸을 날리면서 비대한 동업자의 가슴에 쥐고 있던 크로스 14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펜을 박아버렸다. 호랑이가 총에 잘못 맞으면 3m를 뛰어 오른다는데 좁은 공간에서 책상을 건너뛰는 찰나 크로스 펜이 흉기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친김에 사무실 문을 열고 경리직원에게 고함을 질러 밤방요가 씨에 게 전화하라고 지시하였다. 밤방요가는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중앙 정보부장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때는 정보부장의 아들 정도라야 권 총을 소지하던 터라 그렇게 엄포를 놓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 시절엔 정보부장이나 부부장인 로집토 장군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어려울 때 부탁하면 여러 모로 도움을 주었다. 골프가 생활화되다시피 한 인도네시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친교 가 골프를 통해 이루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다 보니 골프는 단순한 여가 운동이 아니었다. 더욱이 불우이웃 돕기 자선 골프대회 같은 행 사에는 빠질 수가 없었다. 이들과 한 조를 이루어 친선경기에 임하였 다. 때로는 노장군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골프장으로 달려가는 일 도 여러 번 있었다. 골프를 치면서 인생을 논하던 노장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런 친분관계는 그 뒤 자녀들에게도 이어져 서로 자연스럽게 왕 래하고 사업에 관해서도 스스럼없이 의논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동업자와 혈투가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는 나의 기세에 눌려 마침내 꼬리를 내렸다. 덕택에 잡음없이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었다. 중국인도 역시 강하게 나오는 상대에게는 눈치를 보고 신중해진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41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 않은 개인 사업자들은 그들과 관계를 맺었 다가도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 특히 경계해 야 될 대상으로 매단지역과 같은 수마트라 섬에서 올라와 자리잡은 중국인이 지목되기도 하였다. 요식업은 나의 전문업종이 아니었다. 목적한 유통사업이 안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지 파트너와 문제가 발생 하면서 1년이 지나 정리를 하였다. 동시에 사전에 준비한 유통업을 본격화하면서 건설회사와 관광회사, 제빵사업을 시작하여 궤도에 올 려놓고, 중견회사로 발돋움하게 하였다. 아울러 나는 유통사업의 체 인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4장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은행빚 없이 물류센터 신축 인도네시아에서는 외국인에게 주택의 소유권을 주지 않는다. 그래 서 임대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임대조건이 전세가 아니고 3년 만기에 일시불로 되어 있다. 어려운 시절에는 대개 3년간 저축하고 임대료를 내고 나면 빈손이 될 때가 많았다. 대개 개인사업자의 경우 이 돈을 지불하는 날은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나 역시 사업을 시작할 때에 같은 경험을 했다. 그때의 기분은 말 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현지인들은 집 몇 채만 있으면 사재기하 여 임대료 수입으로 부호가 되는 경우도 많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주택의 임대료가 비싼 대신, 주택 가격은 옛날에도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자카르타 잘란 스나얀(JL.Senayan) 거리는 서울로 치자면 강남의 서초동이나 강북의 남영동쯤 되는 지역이다. 나는 1978년부터 이 동 네에 들어와 살았다. 원목사업을 접고 무일푼의 상태였으나, 스나얀 24번지에서 생활하며 아침저녁으로 오갈 때 점찍어둔 ‘명당’ 이 바로 대로변에 있는 밀키 하우스라는 통닭집 자리였다. 뒷날 무궁화유통 본점 건물이 들어선 곳이다. 허름하기는 했으나, 나도 저런 상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그런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마침 그 상점을 판다는 전갈이 와서 구입 의사를 표명하고 나서기는 했으나 욕심처럼 자금 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장 전세값도 없는데 그 상점을 인수한다는 것 1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은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적절한 시기에 나에게 지불되어야 할 거래성사 대금이 입금되고, 친분을 유지하며 거래해온 정부 고위층 가족과의 상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빈 집에 소 들어온다’ 고 적시에 구두 약속이 이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일면을 통해 인도네시아 에서는 유력한 가문과의 친교가 중요하며, 그들이 한 약속은 비록 구 두로 한 약속이라 할지라도 서명 이상의 효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인 상담에 들어가자 당초 예상한 구매가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거의 매일 재 흥정을 시도하였 다. 상가 주인의 마음을 사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일주일 만에 동의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모자란 잔금은 반년 간에 걸쳐 분할 상환한 다는 조건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상가 주인이 나에게 자금을 지 원해준 것 이상의 도움을 준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토지매매 공증인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과 정에서 생겼다. 외국인의 명의로는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 는 수 없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인 낸시 여사 의 명의를 빌려서 구입 절차를 완료하였다. 여기서부터 사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도와준 낸시 여사에게 감사한다. 1985년 코리아 가든을 시작한지 1년 만이었다. 이제 새삼 말하는 것이지만 필요할 때 자금이 들어온 것이나, 분 할조건으로 명의를 어렵지 않게 빌려서 상가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45


동네의 한 주택에서 창문 가리개로 사용하고 있던‘무궁화’초기의 간판. (1984년)

은 한마디로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것’ 이나 다름없는 행운이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데는 언어가 통한 데다 잔꾀 부리지 않고 솔직 하고 정직하게 임함으로써 상대방의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1986년 주사니 호텔 입구의 상가를 개조하여 처음으로 상점을 세 내어 열었다. 의욕에 비해 초라한 출발이어서 여러모로 체면이 서지 않았다. 고심하던 끝에 드디어 상호를‘무궁화’ 로 이름 붙인 아담한 소형 상점이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어찌나 기뻤던지 처음 구입한 트럭을 한국대사관까지 몰고 갔는데 마치 벤츠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나로서는 이제야 비로소 인도네시아에 태극기를 꽂은 느낌이었다. 이런 감격을 맞게 되면서 나는 오래전 함께 근무했던 직장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결혼 초부터 단칸방 셋집에서 출발하여 차츰 방 을 늘려가며 살다가 작지만 자기 집을 마련했을 때 갖게 되는 기쁨에 대해 말해준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꿈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 하였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위에 사랑을 나누며 열심히 산다면 1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그 다음엔 아파트로 옮기고, 다시 맨션에서 살다가 노후에는 펜트하 우스나 산 부근의 빌라에 자리잡는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바란 대로 삶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래도 꾸 준히 노력한다면 오래지 않아 그 소망은 반드시 실현될 수 있을 것이 라는 확신을 갖고 살아왔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주택가에 상가를 사들이면 부근의 건물 터를 구매하기 시작하여 온 동네로 잠식해 들어가는 자본증식 방법을 썼 다. 중국인다운 지혜의 발로였다. 나도 중국인의 상술 방식을 일부 활용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주위 상가 앞뒤와 옆쪽의 주택을 사서 건물을 늘렸다. 그랬더니 임대료 지출이 없어진 대신, 사업에 계속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이후 우리는 주택이든 상가든 임대해 사용하지 말고 매입을 원칙으로 하자고 다짐하였다. 무궁화 유통 건물 주변의 주민들은 중국인이 무리해서라도 상가 곁에 붙어 있는 필지를 모두 사들이는 것을 오랫동안 봐와서 만성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고 회사 옆의 상가와 주택을 구입하 기 위해 현지인들의 사정에 따라 끈질기게 설득하고 기다렸다. 그리 고 공을 들였다. 뒷집을 살 때는 새벽부터 동네 청소를 하며 주민들과 어울렸다. 이 렇게 사귀다 보니 모르고 있던 정보도 듣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크 게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반응이 왔다. 뒷집의 자손들이 먼저 자기 네 상점으로 나를 불러 들여 모닝커피를 대접하며 스스로 속내를 드 러내었다. 부친이 오랫동안 병환중이어서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돌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47


아가시면 집을 팔겠다는 것이다. 드디어 빗자루 외교가 효험을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이 말이 나오기까지 쓴 커피를 마시며 비가 새어 생기는 방안 의 악취를 견뎌내어야 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뭔가 꺼림칙하고 유 쾌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매매를 기대한 것인데, 내가 마치 멀쩡한 노인네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집을 사들일 수 있을 만큼의 자금이 모아진 것도 아니었다. 매입할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언질을 받아놓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조문을 한지 얼마 안 돼 경 쟁자를 물리치고 이 주택을 구매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다른 필 지도 사전 정보에 따라 입수하였다. 다행인 것은 굳이 은행의 힘을 빌리는 무리수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이다. 이곳 잘난 스나얀 43번지에 작은 상점을 차려 타국땅에서 부지런 히 일해 크게 키워가는 우리 내외의 모습을 보고 동네 주민들은 ‘기적 을 만드는 부부’ 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새벽 조깅에 나서 정해진 코스대로 회사 주변의 주택가와 정원을 돌고 있노라면, 동네 사람들 이 아내에게 ‘오싱’ 이라며 말을 걸어와 우리는 ‘일본의 오싱’ 이 아니 라 ‘한국인 또순이’ 라고 대꾸하여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었다. 『오싱』 은 어린 나이에 가족들을 위해 더부살이를 떠나 모진 고생 을 하면서도 꿋꿋이 견뎌내는 소녀의 이야기로, 하시다 스가코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197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도 방영돼 화제를 모았었는데, 부지런하게 일하여 오뚝이처럼 일어섰다는 의미로 아내 1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에게‘오싱 코리아’ 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이 말하듯이 아내는 무궁화유통의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고 또 큰 역할을 하였다. 다행히 IMF를 맞기 전에 공장 건축을 맡아 잘 건설한 덕에 여분의 공간이 남아 일부를 임차해 쓰기도 했다. S공장장은 자기네 공장을 빌려 쓰는 나를 보고 어찌나 괄시가 심했던지 나를 자극하여 서둘러 유통창고를 만들어 놓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오기는 노력을 배가시키고 앞을 내다보게 하는 힘으로 작용 하였다.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용도가 많아질 것이라는 예측 아래 비 수기일수록 성수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과 이런 준비기간을 최대한 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판단을 갖게 하였다. 이는 IMF 이후의 사업 번 창에 큰 힘이 되게 해주었다. 그 결과 본사 사옥은 물론, 물류센터를 짓는데도 은행의 도움을 받 지 않아도 되었다. 쓰라는 은행돈을 제때에 이용하지 않아 크게 확장 할 수 있었던 기회가 다소 늦어지기는 했으나, 안정된 마음으로 사업 을 경영할 수 있었다. 평소 다짐해온‘무융자, 무이자, 무임대’ 의 3무 소신이 지켜진 것이다. 무궁화유통 본부로 자리잡게 된 이 건물의 대지가 온화하게 느껴 져서 그런 것인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좋은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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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공사장에서 태어난 여덟 마리의 강아지 이 지역에서만 30여년간 기거하다 보니, 동네 어린이들과도 친숙 해져서 그들의 부모들과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대로변의 주택과 좌우 뒤편까지 4필지를 사들이는 동안 거부반 응을 보이던 그들이었으나, 이런 관계로 인해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 다. 이런 유대 속에서 드디어 잘란 스나얀 43번지 대로변에 철골골조 의 4층 무궁화유통 본점의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공사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건축용 거푸집과 모래더미 사이에서 갓 태어난 여덟 마리의 강아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새벽에 평소의 습관대로 동 네를 한 바퀴 돌고 공사장엘 들렀는데,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남의 땅이라도 자주 밟아 주면 내 것이 된다’ 는 옛말이 있듯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거의 매일이다시피 눈 여겨 봐두었던 동네 주변을 산책했다. 그런데 인적이 드문 공사 현장 의 거푸집 사이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봤더니, 검정색 어 미개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남의 집 공사판에다 산실을 만들었으니 좀 미안했던 모양이다. 낑낑대는 소리가 궁금해서 다가 가 살펴봤더니, 한 무리의 강아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한눈 에 들어왔다. 나는 강아지들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한 마리가 따로 떨어져 모래속 1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에 묻혀 있음을 발견했다. 혹시 죽은 건 아닌가 싶어 건드리자 다행히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서둘러 어미개와 함께 여덟 마리의 강아지를 트럭으로 실어다 창고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뒤뜰에서 기르게 되었다. 그때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하면 무궁화유통의 미래 를 예견하는 경사의 길견(吉犬) 이었던 셈이다. 이와 유사한 기억이 또 하나 있다. 1981년 경 사업 초기였는데, 세 들어 살던 주택에서 하루 두어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식품납 품을 위해 일할 때였다. 정원의 나무 위에서 부화한 새 새끼가 둥지 와 함께 떨어져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새끼들을 잘 보살폈다. 마침 집의 개도 새끼를 낳아 갑자기 집안이 분주해진 느낌이 들었다. 우연인지 이 무렵부터 일이 잘 풀려 나갔다. 또한 예사롭지 않았던 것은 구입한 상가의 지번이 43이었다는 점 이다. 이는 나의 출생 연도인 1943년과 같은 것이었다. 그 뒤 추가로 우측에 연결된 상가를 계약하고 보니, 이 건물의 지번 역시 아내의 생년과 동일한 45번이었다. 오늘날의 회사 지번과 우리 내외의 생년 이 일치하는 이 같은 기막힌 우연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라움과 경이 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내가 차량 번호를 정할 때도 이 뜻을 살려 지번인 43번을 부 여받아 B43BS로 사용하고 있다. 이 번호는 20여년간 경찰의 취재를 당하지 않는 것으로 일부 운전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아무튼 이 건물은 동네 개까지도 한 무리의 생명을 안겨 주어 축복 을 받은 셈이니, 세상에 단순한 우연이란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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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가 된‘무궁화’ 의 배경과 성장 추세 1981년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7평 남짓한 작은 상점에서 출발한 한 국종합식품은 그후 확장을 거듭하여 인도네시아 주요 도시에 한국식 품을 공급하는‘무궁화유통’ 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거의 14년 만의 일이다. 식품사업이 번창하는 동안 여러 상점이 추가로 매입되어 이제 무 궁화유통의 본사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로 증축하게 되었다. 주택 차고에서 납품할 식품을 밤새 준비하던 열악 한 조건을 극복, 비록 작은 규모나마 독자적인 상점으로 바뀌고, 다 섯 지번을 통합한 4층 건물을 개축함으로써 지하 창고와 유통매장(1 층), 부미관광 및 본브레드 제과점(2층), 유통회사 사무실(3층), 사택(4 층)까지 어엿하게 갖추게 된 것이다.

이는 한 우물을 집중적으로 파나간 데서 얻어진 결과였다. 부끄러 운 고백이지만, 그 전에는 작은 일은 거들떠 볼 생각도 하지 않고 큰 일만 찾아 뜬구름처럼 돌아다닌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내의 간곡한 의견을 받아들여 식품사업에만 정진한 것이 오늘과 같은 좋은 결과 를 가져 왔다. 사업 초기에는 몇몇 중국 유통업체의 도움을 받았으나 시장을 선 점하여 몇년 만에 화교업체를 앞지르고 독자적인 기반을 갖추게 되 었다. 지금은 자체 소유 건물이 있는 5개 지역에만 체인점을 갖고 현 지 업체를 상대로 유통망을 운영하고 있다. 1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무궁화유통 사옥 준공식때 현지 주민들과 함께 이슬람식으로 축복식을 끝내고 툼펭(노란 밥)을 뜨며 웃고 있는 저자와 아내. (1995년)

무궁화유통은 사업 초창기인 1981년 한국종합식품으로 시작하였 다. 그런데 교민들과 현지 사회에 한창 알려질 때쯤 일본 식품점‘사 쿠라’ 가 등장하였다. 이때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상호를 바꿔야겠다 고 결심하였다.‘사쿠라’ 는 일본 국화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영원한 꽃‘무궁화’ 를 상호로 내세워 당당하게 일본식품점 과 맞서 겨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식품점의 이름으로 적절한 것인가 는 차후의 문제였다. 민족 사랑, 조국 사랑의 일념이‘무궁화유통’ 이 라는 명칭을 불러온 셈이었다. 조지훈님의 수필『무궁화』 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우리는 이 강산 을 빛낼 이 나라의 일꾼으로, 내일이면 이 누리에 피어날 무궁화의 꽃봉오리다.”라는 대목이다. 나는 조국을 떠나 타국에 살면서도‘무 궁화’ 란 상호를 공공연하게 내세움으로써 한민족의 자긍심을 간직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3


무궁화유통 본사의 사옥 입구.

하고 싶었다. 1995년 네 번째 상점을 구입하여 본점 사옥을 신축하고 입주한 무 궁화유통은‘정직, 성실, 봉사’이 세 가지를 사훈으로 내세우고 있 다. 나의 생활철학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런 목표를 기업과 연결 시켜 경영이념으로 삼았다. 아울러 식품사업을 통해 한국의 상품을 해외에 알리려는 민간외교의 효과도 기대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일찍 각 지점의 매장에서 당일 예절교육을 마친 현지 직원과 한국직원 50여 명이 손님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타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대부분 그러겠지만, 무궁화유통 또한 조국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측면과 현지생활에 적응 하며 확실한 경쟁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점을 고려하여 운 영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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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유통 물류센터 준공식을 마치고 담당 부서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한 저자 부부(중앙)와 나란히 선 김종헌 이사. (1999년)

무궁화유통은 식품・의류・화장품・완구류 등 아이템 별로 2천여 종의 생활용품을 갖추고, 자카르타를 포함한 주요 도시의 300여 상 가에 한국식품의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무궁화유통은 식품유통업, 관광업, 건설업 등 세 가지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엔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종업 원이 3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원하는 직원을 위한 조촐한 사택도 마 련하였다. 다행히 그동안 사업체가 크지 않고 무리하지 않아서 그런 지 결손 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오고 있다.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시간과 여건, 능력의 부족으로 큰 기업으로 성장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음 세대의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다만, 중소기업을 중・대기업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놓았다는 데에 나 는 만족하고 있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5


기업은 물론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기업에서 얻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돈 많은 부 자는 아니지만,‘불우이웃과 함께’ 라는 소명의식에 따라 매년 지속 적으로 우리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을 꾸준하게 해오고 있다. 무궁화장학회를 비롯한 장학금 지급과 인도네시아 심장병협의회와 협력 아래 심장병을 앓고 있는 불우 어린이들에게 수술의 기회를 줌 으로써 새 삶의 희망을 주는 일과 한센인 돕기 운동 등이 그 일환이 다. 무궁화 정신에 부합되는 기업 이념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앞으로도 아내와 함께 이 일을 조용히, 꾸준하게 실천해 나갈 것이다.

스나얀 지역이 코리아타운으로 불리기까지 자카르타(Jakarta)의 뜻은‘많이 가진 것의 기쁨’또는‘풍요로움의 충만’ 으로 풀이할 수 있다. 기쁨 또는 크다(Jaya), 왜냐면(Karna), 재 산(Harta)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래서 Jaya Karna Harta의 부문에서 따온 것으로 전래되고 있는데, 오랫동안 자카르타에 살면서도 이 뜻 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는 크게 남대문시장과 비교되는 크 바요란바루와 태평로에 해당되는 중앙통인 수딜만과 탐린 거리를 중 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사무실용 빌딩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 다. 자카르타 서쪽에 자리 잡은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상인들의 주택 15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중국인 재벌들과의 사교 모임에서. 인도네시아 재벌 림술룡 BCA그룹 회장 (오른쪽)과 저자, 그리고 타마라 은행 백택벵 총재. (1989년)

겸 상가와 상품 창고가 밀집해 있어 주요 상거래가 이루어진다. 대기업 군을 이루는 시내 중심가의 빌딩 소유자는 대개 중국인들 이다. 일부 외국인이 투자했거나 관영으로 운영하는 건물을 제외하 고는 거의 중국인들이 차지하여 이들이 이 도시의 경제를 좌지우지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궁화유통이 자리 잡은 곳은 잘란 스나얀 크바요란바루 지역인 데, 정착 초기인 1977년경에는 외국인들이 주로 임대주택에서 생활 했다. 나는 1980년 초 이후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식품전시회를 주 관하고 판매도 하면서 한국 상품과 무궁화유통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 이후 소・도매 업자를 확보하는 한편, 끈질긴 노력 끝에 유통분 야의 대소규모 회사들과 협력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업기반을 갖추게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7


되었다. 이때 나는 포기하지 않고‘하면 된다’ 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나는 현지에 이미 확실한 기반을 굳힌 중국인 유통 업자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이제 30여년이 지나고 보니, 본 인의 이름을 아는 중국인들이 많이 생겼고, 만나보지 못한 중국인 들조차 나에게 어떻게 부르면 좋겠느냐며 친근감을 표시해 오는 경 우도 있었다. 자기네끼리는 미스터 킴이 요즘 외부의 작은 일에 나타나지 않고, 내부에서 지휘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모양이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역시 기업은 크지 않아도 견실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더욱 CEO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려고 했다. 이 지역이 코리아타운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무궁화유통이 자리 잡은 뒤 잇따라 한국 업체들이 들어서면서 한 촌락을 이루게 된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현지의 대중 일간지인‘콤파스 신문’ 이“크망이 유럽의 거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나얀은 코리아타 운(캄풍코리아)이 되었다.” 고 소개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지역이 한 층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무궁화유통을 취재하러 왔던 어느 기자가 ‘무궁화’ 가 이곳에 자리 잡고 한국 업체들이 들어오면서 주위의 땅 값이 올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한때 동장에게 이곳의 명칭을 한국 명칭으로 바꿀 수 있는지 타진하면서 도로 명칭부터 프로젝트화하여 추진할 수 있도록 부탁한 바가 있었다. 그 가능성은 미리 예측할 수 없으나 이 일이 추진되면 적극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때는 잘란 스나얀 거리에 한국 업체가 많이 나타나자 외국인 1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전략사령관 따룹중장 취임식에 축하차 방문한 저자. 전략사령관은 수하르토 대통령이 집무했던 사무실을 그대로 사용했다. (1994년)

불법 채용을 의심한 합동수사대가 사무실에 들이닥쳐 나를 어리둥 절케 만든 적도 있었다. 그들을 따라온 TV 카메라맨이 나의 얼굴을 찍으려 하자 일단 제지한 뒤 이유나 들어보자고 설득하여 가까스로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나의 사업장은 외국인 채용에 전혀 문제가 없는 회사임을 천명하 고, 사무실에 걸려 있는 대통령 자문위원과 공수특전단장, 수경사령 관, 헌병감, 통합군사령관이었던 트리 부통령과의 친교 사진을 보임 으로써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정식으로 인터뷰에 응 하며 한국인 한 명이 노동허가를 연장 신청했는데, 해당 관청에서 제 때에 일을 수행하지 않아 지연된 것뿐이지, 외국인들의 노동허가 사 항과는 무관하므로 제재받을 일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인터뷰를 본 지인들이 해명이 좋았다는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9


나중에 알아보니 무궁화빌딩 주변에 전에는 없었던 한국 업체들이 갑자기 많이 들어와서 이 회사가 모두 나의 사업체로 오인했던 것이 다. 이후 나는 취재에 가담했던 방송매체의 책임자를 찾아가 무궁화 유통의 성격과 사업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면서 오히려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매년 현지 신문에는 일본인들에 대한 활동 기사가 많이 실렸다. 이 는 사소한 이야깃거리라도 제공하여 뉴스가 되도록 신경을 쓰는 일 본인들의 치밀한 일면을 엿보이게 하였다. 이런 일본인들의 홍보 감 각을 한국인들은 배워야 할 장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 역시 인터뷰에 임할 때 자신과 관련된 것일망정 모국을 홍보한다는 자세로 활용하였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일부에서는 개 인을 내세워 재미 보려는 장사속이 아니냐며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 다. 하지만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이는 회사의 상호를 ‘무궁화’ 로 정한 이유와도 맥락을 같이 하는 일관된 나의 인식이요, 생활 자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종 면허도 따고 건설업에 진출하다 공사 현장에 식품을 납품하다가 요식업을 시작하고 더 이상 지속 할 수 없는 시기에 자체 매장을 건축하는 일이 생겼다. IMF 시절, 일 이 없을 때 건설 회사를 활용하여 몇 채의 집을 짓고 확장하는 일을 한 경험이 있어 건축의 요령과 경비절감 방법은 어느 정도 터득한 터 1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였다. 이 힘을 바탕으로 현지인들을 데리고 확보해둔 주변의 대지에 자체 식품물류센터를 준공하게 되었다. 건축비가 마련되자 계열사로 하여금 물류센터를 시공하게 했는데, 이것이 자회사인 푸리마무다 건설회사를 설립하게 된 동기가 되었 다. 1997년의 일이다. 자카르타 교외에 무궁화유통 창고를 짓고, 주 식회사 부미관광을 설립 한 지 1년만이었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기계학을 배운 적이 있어 기술과 기계에 관련 된 업무에도 친밀감이 있었다. 이 일을 위해 기계와 전기 설비에 필 요한 각종 면허까지 취득하였다. 다행히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 푸리마무다 건설회사는 한인 건설업계에도 꽤 이름이 알려지는 존재 가 되었다. 대개 새로운 사업을 하게 되면 주민들의 텃세는 두말할 것 없고, 군과 경찰 등 관할 공무원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들을 적절히 처 리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속을 썩여 사업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외 곽 지역인 치카랑 대형 공단 공사장의 전기공사를 맡았을 때도 예외 가 아니었다. 나는 이 점을 의식하고 이동이 가능한 컨테이너 사무실을 준비하 면서 중위 시절부터 친구였던 아굼 공수특전단장과 같이 찍은 사진 부터 사무실에 걸어놓았다. 모든 공사장은 물론, 무궁화 지점이 추가 되면 신설 사무실에도 이렇게 군인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런 방식은 많은 중국인이 인도네시아 권력층과의 인맥을 과시하 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당시는 군인들의 권한이 막강했다. 그들은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61


아굼 구멜라 공수특전단장(후일 육군대장 예편)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방문했을 때. (1993년)

경찰까지 관장할 정도였다. 이런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나의 사 업장은 자연스레 안정권으로 들어갔다. 방해꾼들이 접근을 못하게 되자 건설 수주가 원활해졌고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더욱이 특전단장이었던 아굼 구멜라 준장(대장 예편)의 메모는 약 발이 셌다. 지방에 도움이 필요할 때 현지 사령관을 소개받을 수 있 어 일이 잘 풀렸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선후배 군인들에게까지도 다 리를 놓아 주었다. 이렇게 직간접으로 늘 신세를 지면서도 제대로 보 답하지 못했다. 그의 우정에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아굼 대장은 박정희 대통령처럼 예리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의 리 있는 장성이었다. 이 무렵 그는 한국의 모기업에 도움을 주었지 만, 퇴역 이후 이 기업에서 보답하려 하자 발리에 축구장을 건설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16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이런 일면을 통해 사리사욕이 없는 그의 인간됨을 알게 되면서 나 는 아굼 장군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래서 본부 건물이나 지점 사무 실과 같은 나의 사업장에는 예전 특공단장 시절에 그와 찍은 사진을 거의 예외 없이 걸어놓았다. 치안이 불안했던 1980년대를 무사히 보내고 현재까지 안정된 생 활을 할 수 있었음은 이와 같은 훌륭한 지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나 역시 어느새 발이 넓은 사람 축에 끼게 되었다. 외국에서 살면서 기반 없이 사업을 해야 하는 나의 처지로서는 현지인들과의 유대가 튼튼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자력으로 기반을 잡은 경우와 그 토대를 이 어받아 사업을 하는 경우 가 있는데, 사업 기반을 잡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젊 었을 때의 그런 노력은 노년기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초석이 된다. 사업 초기에는 주위에 서 눈여겨보는 사람이 많 아서 남의 입방아에 오르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시기의 말은

저자가 경영했던 건설회사의 작업 현장.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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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즉시 흘려 버렸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상 유익 하다고 여겼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보더라도 남이 잘 되는 것을 헐뜯거나 시기하는 사람들 이 성공하는 예를 보지 못했다. 사업 초기에는 이런 일로 상처를 받 고 좌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걷 다보면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독단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이 아닐 까.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해 비방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연장선에 서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업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가능한한 반목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웬만한 일에는 무시(ignore)하는,‘이그노어 원칙’ 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사업에도 이 원칙을 지키려 부단히 노력하 고 있다.

방부제 쓰지 않는 본브레드 제과점 개업 2007년 섣달그믐 날 무궁화유통 2층 건물에 본브레드 제과점을 정 식 개점하고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참석 아래 축복식을 가졌다. 25년 전 황무지인 수마트라 정유공장 건설공사 현장에 식빵을 조달한 경험 이 있어 그 이후 줄곧 식빵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제과점 사업 에 손을 댄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부터 외국여행 중에는 줄곧 빵집 1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부미관광과 함께 자리잡은 무궁화유통 본관의 본브레드 제과점.

을 살폈다. 규모와 장식은 물론 선호하는 빵은 어떤 것인지 유심히 관 찰하였다. 상호를 본브레드(BON BREAD)라고 한 것은 아내의 이름인 은주의 ‘은’ 자의 발음을 따서 붙인 것이다. 본브레드의 특징은 방부제와 쇼 트닝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벌써부터 본브레드의 소형 코 너를 대형 백화점 코너에 들어와 달라는 제의를 받아놓고 있다. 5년 후, 혹은 10년 뒤에는 큰 회사로 발전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 사 업은 기본 식품사업을 끼고 있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많다. 나는 이날 본브레드의 개점을 축하해 주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해 주신 여러 분들을 돌아보면서 2006년 연말의 일을 생각했다. 그날, 자카르타의 우리 집에서는 구수한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즐거운 웃 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맛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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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아내와 해외여행 중에도 제과사업을 염두에 두고 시내의 빵집을 유심히 살폈다. (2000년, 로마)

는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이 마냥 즐겁고 행 복하게 보였다. 저무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나는 찾아온 손님들의 얼굴을 감사하 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김정렬 모세 신부님을 비롯한 수녀님 네 분 과 성당을 위해 수고하신 역대 신도회 회장 부부, 대자(代子) 내외, 그 리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 부부 등 마흔 네 명의 지인들이다. 이들은 16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 해 동안 아낌없는 격려와 도움을 주신 분들이다. 배경으로 깔린 감미로운 음악보다 이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웃음소리가 더욱 정겹 게 들린 것은 한국의 젊은 가수 안치환의 노래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 름답기’때문일까. 특히 조국이 아닌, 이국땅에서 동포들이 주는 친근감은 각별하다. 조국에서 느끼는 이웃이나 지인에 대한 감정을 훨씬 웃돈다. 아무리 이국이라지만, 이곳 인도네시아는 내 인생의 절반을 보낸 삶의 근거 지가 아닌가. 고향을 떠난 후 그들이 겪었을 고초를 생각할 때 남의 일 같지 않는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개업 축복식 후 가진 2부 다과회가 끝날 무렵, 나도 모르게 화살기 도(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로서 지향기도라고도 함)를 올렸다. 우리 가족 이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고, 내가 받은 축복을 조금이라도 많이 나 눌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막 화살기도를 끝내는데 아내 젬마가 내 곁에 와 있었다. “지금 막 화살기도 했어요.” “어? 나도 그랬는데…….” “그래요?”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죽음 같은 역경을 함께 손잡고 건너 온 부부만이 맛볼 수 있는 일체감이다. 나는 이런 순간이 한없이 행 복했다. 내용이 궁금해서 묻자 아내는 한동안 미소만 짓고 있다가 새 해에는 당신 책 마무리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좀 거칠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부드럽 고 따스한 손길이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67


본브레드의 개점은 아내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내가 원목개 발 사업에 실패하여 살아갈 길이 막막했을 때 아내가 팔을 걷어붙이 고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김치와 가래떡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일로 손등이 갈라져 한동안 고생했던 아내의 모습 을 잊을 수가 없다. 본브레드에는 이처럼 최악의 여건 아래서 나를 도와 격려하며 용기를 준 아내에 대한 헌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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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 장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아내의 기사 노릇 하다가 종교에 입문 나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슬람 대국인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면서 가톨릭에 입교하였다. 성당에 나가 기 전인 1980년부터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다 보니 여러 수도자님과 사제님들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이 시기에 아내를 포함하여 4명의 여신자들이 모여 아이들의 성서 와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딱히 정해진 모임이 없었으 나, 한국에서 영세를 받은 젊은 엄마들이 한두 명씩 모이다 보니 자 연스럽게 자카르타 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다. 이때부터 아내의 적극 적인 권유와 인도에 따라 종교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났다. 자녀들의 교육도 신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는 이 무렵만 해도 종교에 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고작 아 내가 이웃 성당의 한 공간을 빌려 교민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러 갈 때 운전을 해주는 정도였다. 때로는 빌려 쓰던 산타성당에서 어린 이들이 하도 떠드는 바람에 쫓겨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교리 공부를 시키는 아내를 도와 성탄절 행사때 사용한 크리스마스 트리 등 물품을 정리해 주거나 수송하는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성 나자로마을 원장 이경재 신부님이 원 내 한센병 환자를 돕기 위한 기금을 모으러 1983년 자카르타를 방문 한 적이 있었다. 신부님은 이때 아이들이 교리를 공부하는 모습을 보 고 적극적으로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를 1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계기로 모임이 차츰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후 2년 만에 이경재 신부님이 집전한 미사에서 비로소 베 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게 되었다. 아내를 돕는 동안 귀동냥 으로 듣고 배운 신앙에 대해 깨우친 결과였다. 1986년부터 나는 멘텡 소재 카니슈스 외국인 전용 성당에 나가면 서 필리핀 사람들과의 합동 미사에 참여했다. 열심히 성당 일을 돕다 보니 공동체의 가톨릭 평신도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는 덤을 얻게 되었다. 한국 신부가 주재하기 전이었다. 이때부터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이경재 신부님으로부 터 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조언과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한국인 교우들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경재 신 부님의 노력에 힘입어 부산 베네딕트 수녀원에서 두 분의 수녀님을 파견해 주었다. 최 안젤라 수녀님이 원장 재직시였던 1987년이었다. 이해인 수녀님이 비서 수녀 시절이었다고 후에 들었다. 수녀님들이 자카르타에 파견될 수 있도록 후원해 주고, 이에 따른 서류를 맡아 준비해 주신 것으로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뒤 이 수녀님과는 오랫 동안 친분을 갖게 되었다 수녀님들의 숙소가 자카르타 불록 엠 성당 앞에 정해져 있었는데, 찾아가 봤더니 환경이 좋지 않았다. 구석방에 채광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낮인데도 어둡고 모기가 많아서 기거하기가 불편한 곳이었다. 좀 더 나은 여건의 숙소를 찾아다니다가 집 근처인 스노파티 지역 에서 2층짜리 작은 건물을 발견하고 우리 내외는 이 정도면 수녀님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1


의 숙소뿐만 아니라 유치원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가톨 릭 공동체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유치원 운영이 좋겠다는 아이디어 가 떠올랐다. 나는 이 안건을 평신도협의회의에 올려 합의를 이끌어 냈다. 나는 즉각 실천에 옮겼다. 각개전투식으로 자카르타에 사는 모든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유치원 설립 모금을 시작했다. 그러자 일부에 서는 왜 강제로 기금을 모으느냐며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이런 분에게는 유치원 교육은 종교와 상관없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설득하 여 공감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이 모금에 탄력을 불어넣어준 것은 타마라 은행 총재인 백택뱅 씨 였다. 그가 사용하던 봉고차 한 대를 기증해 주면서 모금에 가속이 붙었다. 교우들은 물론 종교가 없는 분들과 한인회 회장까지 성금을 내주어서 드디어 9개월 만인 1991년 3월 5일 프라판차 거리에 2층 집을 세내어 비록 무허가였지만, 성모유치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이경재 신부님과 공동으로 첫 번째 성작과 신부용 제의 를 구입했다. 굳이 공동구입이 된 것은 이 신부님의 꼭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공익을 위한 모금의 성취와 공동체를 이끌 어 나가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실천을 통해 실감하였다. 물론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동남아에 처음 나와 고생하는 수녀님들의 기도와 바자 를 열어 기금을 모으는 일에 나선 일반 신자들의 도움이 컸다. 수하르토가 집권했던 당시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을 비 롯해 성당 건축 허가도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당분간 무허가 17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로 강행하기로 하고, 경찰이나 동사무소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몸 으로 때울 각오를 하였다. 유치원에는 일반인 선생 두 분과 수녀 두 분이 근무하였다. 무허가 였으므로 신분의 합법화를 위해 나의 회사의 직원으로, 그 후에는 아 트마자야 대학의 편입생으로까지 등록하였다. 다행히 유치원은 큰 무리 없이 5년간 잘 운영되었다. 원아들을 돌볼 선생들은 조옥진 신 부님이 알아서 뽑아 주셨다. 주재 수녀님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권에 너무 표시가 나서 수녀복을 일반 복장으로 바꾸고 여권을 재발급 받아 싱 가포르에 가서 비자를 받아오는 일은 지겨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싱 가포르 가톨릭평신도회 정영수 초대 회장님 내외의 도움으로 비자 수속과 숙소가 해결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녀복을 일반 스웨터로 갈아입으며 너무 안 어울린다고 서로 웃 던 마리젬마 수녀님과 강루치아 수녀님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른 다. 홍수가 들면 물이 들어와 곰팡이가 마를 새가 없는 열악한 방에 서 지내야 했던 그 시절의 수녀님들, 정말 고생이 많으셨다. 이 모두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감당하 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평협 회장인 나에게 성전건립기금으 로 미화 10만 달러가 예금된 개인통장을 건네준 또순이 마리젬마 수 녀님이 너무나 존경스럽다. 그런 큰 뜻에 힘입어 한인성당 신축자금 으로 각계각층에서 그 두 배 이상의 건축헌금이 봉헌되었음을 감사 드린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3


성모유치원이 자카르타에 개원되면서 나는 행복한 기쁨을 맛보았 다. 다른 교우들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더군다나 이 슬람 종주국에서 한인 후세들이 유아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조 성되었다는 것은 흥분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이렇게 신앙으로 모인 공동체의 힘은 장차 성전 건축의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 는 임기가 끝나자 추가로 모은 성금을 차기 회장단에게 넘기고, 이슬 람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전용 성요셉 성당을 자카르타에 건 립, 봉헌(2002년 2월 18일)하게 되는 기적적인 경사를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2001년 성전 첫 축하미사때 주교님께 바친 성전 열쇠 는 내가 봉헌할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까지 수녀님들을 보내주신 베네딕트 수녀 원장님이 하셨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카르타 한인 성요셉 성전 준공 후 가진 열쇠 헌정식에서 율리우스 추기경님(왼쪽 중앙)에게 열쇠를 봉헌하는 저자. 추기경 우측은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 (2002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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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의 착좌식에 참석한 뒤 축하 인사를 드리는 저자 부부. (1999년)

이에 앞서 1986년경 자카르타를 방문한 서울교구의 김옥균 주교 님이 영어 발음으로 된 미사통상문을 보내 주어, 밴드슐렌 외국인 담 당 신부께서 월 1회 한국인을 위한 미사를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 게 해주었다. 그후 나는 중학생인 아들 종헌을 데리고 명동성당으로 김 주교님을 찾아가 뵙고, 김수환 추기경님께 드릴 바틱을 전달하였 다. 그때 주교님은 아들에게 세상을 밝게 살아가라고 격려해 주셨다. 내가 굳이 아들과 동행한 것은 여러 가지를 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좋 은 인성을 길러주기 위함이었다. 차츰 교회의 공동체가 커지면서 나는 해외 이주 사목위원장이었던 고 정명조 주교님(당시 군종주교 겸임)을 상도동 주교관으로 방문하여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5


인도네시아 가톨릭의 현실을 설명하였다. 주교님은 친히 점심 식사 까지 대접하면서 한국인 사제의 필요성과 파견을 요청하는 나의 말 을 경청해 주었다. 그 후에도 나는 주교님을 찾아가 자정이 넘도록 대화를 나누며 자 카르타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지침을 받아오기도 하였다. 여기에 서 머물지 않고 용산으로 주교관이 이사한 뒤에도 찾아가 뵈었다. 점 심때가 되자 용산의 한 ‘멍멍탕집’ 으로 안내하여 즐겁게 식사를 하시 고는 주인이 교우라며 나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트인 정 주교님과의 대화 창구는 오래지 않아 효험을 보게 되었다. 그 분의 주선으로 부산교구에서 자카르타에 처음 한국 인 신부가 파견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정명조 주교님 은 이경재 신부님과 함께 자카르타 한인 천주교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해주셨다. 2009년 현재는 큰 성당으로 발전하여 본당과 세 곳의 공소를 두고 있으며, 두 분의 한국 사제님과 세 분의 수녀님이 주재하고 있다. 유 치원도 모범적인 공동체로 발전하여 잘 운영되고 있다.

중보기도에 감사하며 보답의 길 모색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교회에서는 중보기도란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란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런 중보기도 17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천주교 자카르타 교구장인 율리우스 추기경님의 착좌식에 참석하여 축하하는 저자. (1980년)

를 받게 될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몸 둘 바를 모르고 살아온 나로 서는 면구스럽기까지 하다. 존경하는 박풀로리아나 수녀님은 베드로인 나와 아내 젬마 가정이 융성하도록 자주 기도한다고 하였다. 왜 그런 기도를 하시느냐고 물 었더니, 돈 많이 벌어서 좋은 일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고 대답하여 서로 웃은 적이 있다. 우리 부부는 오늘날까지 줄곧 그 렇게 되려고 노력해 왔다. 어느 수녀님은 편지에 우리 부부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고 하여 송 구스럽게 하였다. 과분하게도 우리 부부를 위해 연간기도를 해주셨 던 김선태 야고보 신부님, 잠시 고향 광천성당에 들러 미사에 참여했 을 때 보내주신 격려를 잊을 수가 없다. 만나면 반갑고, 방문하고 떠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7


나올 때면 항상 기도해 주시겠다는 인도네시아 한센인 재활원의 수 녀님들, 저희를 늘 기억해 주시는 사제님과 수녀님들께도 주님의 은 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더욱이 평소에도 가르침을 주시고, 막내딸 결혼미사때는 명동성당 입구까지 오셔서“내가 꼭 축하해야지.”하면서 손을 꼬옥 잡아주시 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총총 걸음으로 떠나시던 고 정명주 주교님 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바쁘신 가운데서도 최근에 쓰셨다며 시 두 편을 이메일로 보내주신 이해인 수녀님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외국에 살면서 많은 사제님들과 수도자님들을 모실 수 있었 다. 이는 우리 가정에 내려진 축복으로 알고 있다. 더욱이 많은 사제 님과 수도자님들로부터 받아온 기도의 은혜를 생각할 때, 늘 빚을 지 고 산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주위에서 보내주는 격려와 중보기도에 보답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 했다. 무엇인가 사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몫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 이었다.

이해인 수녀와의 만남 2003년 3월, 이해인 수녀님이 자카르타 한인성당 피정 지도차 이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나의 명찰을 보더니, 이름을 기억하였다. 사순절 때였다. 주일미사가 끝나고 특강에 들어 17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가기 전 제단에 오른 수녀님이 인사에 이어 율동의 동작을 취하며 손 끝을 머리 위로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 다. 특강 후 수녀님을 뵙게 되었을 때 이 말을 하자, 은총을 받은 것 이라며 그 눈물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시인다운 해석을 해 주었다. 초창기인 1988년 수녀 파견 당시부터 원장 수녀의 비서직으로 있 을 때까지 줄곧 자카르타와 서신 연락을 시작하신 분이 바로 이해인 수녀님이 아니셨던가! 이해인 시인 수녀님과는 내가 가톨릭 평신도 회 초대 회장으로서, 성모유치원의 개원을 준비하는 단계부터 유치 원과 전교담당 수녀로 파견되는 수녀님들의 초청과 비자 문제로 자 주 연락하면서 알게 되었다. 자카르타 공동체를 방문한 이 수녀님이, 이곳 한인 성당의 역사적 배경을 상기시켜 주어 아주 흐뭇했다. 그 시절 최 안젤라 수녀원장님 을 비롯한 산 증인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2001년 나는 아내와 함께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의 초대를 받아 하룻밤을 보내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부산에 있 는 강동석 형제의 마중을 받으며 수녀원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수녀회는 언덕 쪽에 세워진 건물이라서 이름도 언덕방이라 불렸 다. 나는 이곳으로 안내받아 일찍이 자카르타 한인 공동체와 인연이 깊은 페트라・오스텔라 두 수녀님의 영접 아래 이해인 수녀님과 환 담을 나누었다. 초창기 교회 이야기로부터 옛날 어려웠던 시절을 회 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9


부산 광안리 소재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초대되어 수녀회 박물관을 관람한 후 이해인 수녀와 함께. (2004년 6월)

기도 시간이 되자 우리 내외도 교육 중인 예비 수녀를 포함한 150 여 명의 수녀들과 함께 기도에 참여하였다. 기도 중에 성당 철탑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모자란 나의 신앙심을 깨우치게 하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외로운 고행길에 들어서 삶의 모든 것을 이 시간에 바 치는 듯한 그들의 경건한 모습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편 수녀회 뒷동산에 안장된 수녀님들의 묘지는 숙연하기 이를 데 없었고, 오랜 세월 보관 중인 옛 자료들은 말없이 그분들의 성스 러운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었다. 철사로 만든 가시돋친 허리띠 유품 은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연상케 했으며, 주님을 섬기게 인도하여 주었다. 수녀회에서 보낸 하루는 이처럼 값진 것이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안내로 수도원 언덕방에서 수줍은 1박을 한 뒤 우리 내외는 아침 미사를 봉헌하고 절제하기 어려운 욕망과 싸워야 1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하는 속세로 다시 나왔다. 이제 길을 알았으니 또 찾아오라는 노 수 녀님들의 말을 뒤로 하며 광안동을 떠났다. 부산역까지 배웅나온 이 해인 수녀님은 고향 처갓집을 찾아온 사위를 보내듯이, 대합실에서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후 자상하신 이 수녀님에게는 가끔 한국에 가면 전화로 안부를 드리곤 했는데, 어떤 때는 음악회를 겸한 시낭독회에 초청돼 시 낭독 을 하신다고 하여 동행한 적도 있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가을 저녁, 노래하는 형제들의 허름한 차량에 동승했다가 숙소에 내리면서 작별 인사로 나의 얼굴에 볼을 대시던 수녀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 다. 그래서 수녀님 회갑 때는 건강하여 좋은 시 계속 쓰시라고 난과 장미를 보내드렸다. 이 시기에 수녀님은 미발표 시 한 편을 우리 부부에게 보내주었다. 발표하기 전에는 공개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소중히 간직 해 왔다. 이렇게 보내주신「부끄러운 고백」 은 나에게는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보배같은 선물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양해하시리라 믿고 그 일부나마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늘 이렇게 말하다가 한 생애가 끝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1


나 자신과의 곡선의 관계 시원하고 투명하길 바라지만 살아갈수록 메마르고 복잡하고 그래서 부끄러워요.

지금 병환 중인 수녀님이 하루라도 빨리 쾌유하시기를 기원할 뿐 이다.

한센인촌 위문과 성나자로마을 돕기 자카르타 근교 탕그랑에 위치한 시타날라 한센병원은 이 지역에서 는 제일 큰 규모의 한센인 전문 병원이다. 지금도 100여 명가량이 치 료를 받고 있다. 그 옆에는 마르화티협회라는 이름의 한센인 재활원 이 있다. 완치된 환자들이 자생력을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다. 1984년경 처음 자카르타를 방문하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나자 로마을 알렉산더 이경재 신부님이‘그대 있음에’ 의 음악회에서 얻은 수익금을 외국에서 고난받고 있는 한센인들을 위하여 돕기 시작할 때 이곳 재활원도 보살피게 되었다. 그후 1993년에도 이 신부님은 입원 중인 자카르타 교구장 레오수코토 주교님을 통하여 한센인 재 활원 봉이 원장 수녀님에게 미화 2만 달러를 전달하였다. 그때 현지 신문‘자카르타 포스트’ 에서‘한국에서 보낸 사랑의 손길’ 이란 제목 1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이경재 신부가 입원 중인 레오수코토 자카르타 주교를 통하여 마르화티 봉이 원 장 수녀에게 한센인 재활원을 위한 기금을 전달했다. 양쪽은 초대 성모유치원 마 리젬마 원장 수녀와 저자.

으로 보도하여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나는 이에 자극 받아 몇몇 교우들과 함께 한센인 재활원과 시타날 라 한센병원의 환자들에게 위문품을 보내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성 의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 나 인정에 목말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이후 이 일은 매년 계 속해 오고 있다. 2003년 11월 12일에는 봉두완 성나자로마을 돕기회 회장과 성나 자로마을 원장 김화태 신부님이 이곳 병원과 재활원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여러 병동을 돌아보며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생필품을 나눠주고 위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부님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애처로웠다. 무슨 기적이 라도 안겨주기를 바라는 그런 표정들이었다. 한센인 나자로가 예수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3


시타날라 한센병원에 생필품을 전달하고 나서. 왼쪽 중앙부터 김성규 신부, 병원 관계자, 저자와 문효건, 한윤희, 김경애, 아내, 안복자, 김광선, 임숙재, 김금재, 장혜숙, 김순희 씨. (1996년)

님에게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간구했던 광경이 바로 이랬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안수해 주기를 바라는 모습이며, 서 너 살된 아기가 침대 위에서 호기심에 찬 눈망울로 위문온 일행을 바 라보며 재롱을 떨던 모습이 한센인 엄마의 얼굴과 오버랩되어 가슴 을 아프게 했다. 그 병동에는 이처럼 멀쩡한 아기가 한센인 부모와 격리되지 못한 채 침식을 같이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특별한 환자도 있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좀 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그 해맑은 표정의 소녀 환자는 천생에 타고난 아름다운 천사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듯이 보였다. 그런 점이 오히 려 슬프게 느껴졌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침상을 비껴 나갈 18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수밖에 없었다. 병원 건너편에 위치한 한센인 재활원을 방문하였을 때는 분위기부 터 새로운 느낌이었다. 한센병이 완치된 대신 앞이 안 보인다는 장님 할머니의 사연을 듣기는 했으나, 그래도 재봉틀을 돌리며 재생의 길 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안도감을 갖게 했다. 이들에게는 일감을 찾아주어 재기의 희망을 주는 수녀님들이 천사와 같은 존재 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새살이 돋고 있는 한센인의 문드러진 발바닥 을 어루만져 위로와 용기를 주는 신부님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 방문한 우리 일행은 하느님이 주신 건강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몇몇 낯익은 재활원 식구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여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회를 느꼈다. 위문단 일행이 전달하는 선물을 받고 고마워하는 재활원 식구들과 환자들의 상처 부위를 일일이 보살피는 신부님들의 모습이 대비(對比)되면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한센인들은 일단 치료 주사를 맞기 시작하면 병을 옮기지 않는다 고 한다. 하지만 외관상의 혐오감이나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없 어질까? 아무튼 범인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그런 참사랑을 베푸시는 신부님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러한 신부님을 염려하여 주치의인 채규태 박사로부터 만일을 위 해 환자를 너무 깊이 접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돼 대접받지 못하는 한센인들의 실상을 보며 나는 일행과 함께 완치되기를 기도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5


인도네시아 시타날라 한센병원을 방문하여 환우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고 격려하는 성나자로마을 원장 김화태 신부(중앙)와 저자. 서 있는 사람은 봉두완 후원회장. (2003년)

한 후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동을 나왔다. 그후 우리 내외는 김우진 삼인도 사장과 자카르타 시타날라 한센 인을 위하여 중환자실에 텔레비전을 설치하고 생활필수품을 나누어 주었다. 한센인 재활원에도 생필품을 전달하였다. 이곳을 방문한지 1년 6개월 만이었다. 이렇게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경재 신부님의 기도와 지도 아래 시작되고, 나 스스로 작은 일이나마 뜻있는 실천을 다짐했 기 때문이다. 이경재 신부님의 칠순때 우리 내외는 발리로 모시고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신부님을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모시 는 기회가 될 줄은 몰랐다. 1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2005년 5월로 기억된다. 안양 성나자로마을 한센인 돕기 바자가 열렸다. 나도 아내와 함께 참석하였다. 나름대로 성의껏 준비한 물품 을 기증하고 아내는 막내딸과 함께 식품 판매를 도왔다. 며칠 후인 6 월 5일 우리 일행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센인 돕기 모금 음악 회 ‘그대 있음에’ 에 참관하였다. 우리 부부도 매년 이 자선 행사에 기부금을 내놓았다. 그런데 마침 막내딸이 결혼 전 신랑감과 첫 미팅이 있는 날이어서 이 자리에 동행 했다. 나는 그때 참석한 전직 총리 부인, 경기도지사, 한센인 돕기회 봉두완 회장님 등 여러 귀빈들에게 딸을 소개했다. 그런데 음악회를 마치면서 봉 회장님이 최 주교님을 비롯한 경기 지사, 일본 및 독일 후원자 부부와 함께 우리 부부를 기립시켜 관중 들에게 소개하고, 한센인을 위해 노고가 많다며 격려의 박수를 부탁 했다. 이 장면을 보며 막내딸도 느끼는 바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를 맡은 김병찬 KBS 아나운서가 여기에 참가하신 모든 분들 은 이 시간 이후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받아 기쁜 일이 많을 것이라 고 축복했다. 그런데 그 뒤 나는 16시간이 채 안 돼 레이크 사이드에 서 평생 처음 홀인원하는 행운을 맛보았다. 그때 나는 사회자의 말이 덕담의 수준을 넘어 예언의 무게로 와 닿았음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자선 음악회의 참여를 뜻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매년 서울에서 열린 같은 행사에 우리 부부는 인도네시 아 주재 성나자로마을 후원회 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1만 달러 이 상을 모금하여 전달하고 있다. 이 모금에 참여해주시는 분들께 주님 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린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7


또한 김화태 신부님도 격년으로 자카르타 주변의 한센인 병원과 수마트라 매단까지 한센인을 돕기 위한 성금을 보내 주었다. 나도 이 일에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내가 한센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면에는 유년 시절에 겪은 경험 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때는‘문둥이’ 라고 해서 이 병을 앓는 사 람은 동네에서 살지 못했다. 전남 고흥군 소재 소록도라는 남해안의 섬으로 보내 사회와 격리시켰다. 그래서 좀 유식한 사람들은 문둥병 을 천형병(天刑病), 곧 하늘이 준 병이라고 했다. 그만큼 몹쓸 병으로 인식되었다. 요즘은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없다. 나환자 또는 한센병 환자라는 의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치매라는 직접적인 지칭보다는 알츠하이 머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환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것이다. 내가 고향인 충남 광천읍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닐 때는 한센병 환 자를‘용천백이’ 라고 불렀다. 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 와서 용천백이 라고 했더니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튼 그 시절에 등교하기 위 해 용천백이가 산다는 고갯길을 넘을 때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 서웠다. 오래전부터 용천백이를 만나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있던 터라, 나 와 같이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가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용천백이가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선지 성인이 된 후에도 한동안 이 말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병은 치료가 가능하며 아무데 나 전염되는 게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한센병에 대한 1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느낌도 달라졌다. 하지만 나 역시 처음에는 한센병 환자 앞에서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경재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성나자로마을을 방문했을 때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자꾸 한센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라 구역질이 나는 바람에 식사를 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랬는데 이 신부님의 환자들에 대한 헌신적인 보살핌과 미래가 불투명한 비관적인 상황 아래서도 어린 자식을 어르며 돌보는 한센 인 부모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사회와 어쩌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이들을 조금이 라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따금씩이라도 자카르타 교외의 시타날라 한센인 병원과 마르화티 한센인 재활원을 찾게 되 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뵙게 되다 나는 이와 같은 한센인 돕는 일을 계기로 2003년 초겨울 김화태 신부님, 봉두완 회장님과 함께 김수환 추기경님의 집무실을 찾아가 인도네시아 한센인 병원을 위문한 사실과 실태를 알리는 기회를 갖 게 되었다. 아울러 세계 이슬람국가에서는 처음으로 한인 가톨릭 성 전을 건립한 사실을 보고 드리고, 자카르타 한인 공동체를 방문해 주실 것을 요청하면서 발리까지 모시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루어졌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9


집무실로 김수환 추기경님을 방문하여 인도네시아 시타닐라 한센병 환자를 위문한 사실을 보고하고 초청의 말씀을 드리는 김화태 신부와 저자. (2003년 11월 11일)

그때 추기경님은 방문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을 연하 장에 적어 보내주셨다. 그 뒤 2005년 4월에도 일정을 잡아놓고 인도네시아공항 영접허가 까지 받아놓았으나 예기치 않은 교황 바오로 2세의 서거로 말미암아 김 추기경님이 로마로 직행하는 바람에 인니 방문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도 많은 교우들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망했 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해 5월 9일 나는 또다시 집무실로 김 추기경님을 찾아뵌 후 영접 계획을 말씀드리고 승낙을 얻었다. 이 자리에서 추기경님은 자신이 서명한『김수환 추기경 이야기』 라는 책과 신임 베네딕도 16세 교황 성하의 사진을 받는 기쁨을 얻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추기경님 의 배려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갑자기 목이 메어옴을 느꼈다. 얼른 19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인도네시아 방문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 대해 유감의 뜻을 담은 김수환 추기경님의 친필 연하장. (2004년)

물을 마시고 동행한 봉두환 회장님이 건넨 허브 캔디를 입에 물고서 야 가까스로 목이 트여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의 소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는 부친께 서 중병이 드셨을 때 발리까지 모시어 맑은 물에 발을 담가 드린 적 이 있습니다. 제 소원은 추기경님을 아버님처럼 발리로 모셔서 깨끗 한 바닷물에 발을 담가 드리는 것입니다. 하루 속히 추기경님의 건강 이 회복되시어 발리의 맑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실 수 있도록 기도하 겠습니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1


우리 내외는 그후 해가 바뀔 때마다 신년 초에 추기경님의 집무실 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곤 하였다. 뵐 때마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 다는 걸 느꼈지만,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은 평화로운 모습이 었다. 2007년 벽두에 봉두완 회장님 내외분과 같이 세배를 드리러 찾아뵈었을 때였다. 한 해가 지났는데도 추기경님은 저의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내가 준비하고 있는 책자의 추천사를 미리 써두었다가 주 셨다.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추기경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장거리 여행을 하지 못하므로 끝내 인도네시아로 모시지 못하게 된 점이다. 내가 김수환 추기경님을 처음 뵌 것은 1989년 말경 홍콩을 경유하 여 서울에 들어가는 캐세이패시픽 항공기 안에서였다. 이때 아들 종 헌의 대학 입학관계로 귀국 중이었다. 마침 비행기 앞좌석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탑승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여승무원에게 뒤에 있는 탑승객 신자가 추기경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얼마 후 잠시 눈을 붙이고 나신 추기경님이 몸소 일반 좌석으로 걸 어 나오셔서 나를 비롯한 많은 승객들과 인사를 나누셨다. 추기경님 은 나에게 사인까지 해주셨다. 영세 받은지 몇 년이 안 된 시점이어 서 나의 직분을 말씀 드려야 하는데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아 잠시 망 설이다가 엉겁결에“저는 인도네시아 대표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드리고 말았다. 기실 성당의 조직에 대표라는 직함은 없었다. 얼떨결에 나온 말이 19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천주교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의 착좌식에 참석하러 오신 김수환 추기경님(중앙)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왼쪽부터 막내딸 현아, 김계춘 신부, 저자 부부, 성체조배 최 회장, 평신도협의회 유회장 등과 함께. (부산 하얏트 호텔에서 1999년)

었다. 그때 나는 인도네시아 한인 가톨릭평신도협의회 회장직을 맡 고 있었는데, 추기경님을 뵙고 있다는 흥분 때문에 차분하게 내 직분 을 말씀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김 추기경님을 다시 뵙게 된 것은 1995년 주말부부 모임인 엠 이(ME) 한국 20년 경축 행사가 열리는 잠실체육관에서였다. 그때 추 기경님이 봉헌미사를 집전하셨다. 나라의 일을 걱정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이 겸손한 자세와 사랑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 해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는 고언을 서슴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네시아에 배달되는 한국 신문을 통해 나라가 혼란에 빠질 때마다 시의적절하게 시대적 경고와 지침이 되는 말씀 을 해오신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그날의 봉헌 미사 집전은 참으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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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적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추기경님에게 실크로 만든 인도네시아 산(産) 바틱 한 벌을 선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99 년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정명조 주교님의 부산교구장 착 좌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갔을 때 나의 뜻을 말씀드렸다. 이에 정명조 주교님은 추기경님을 뵈려면 해운대에 있는 하얏트 호텔에 투숙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주교님의 말씀대로 호텔에 여정을 풀고 로비에서 기다리다가 영접팀의 친절한 안내로 추경님에게 바틱 한 벌을 직접 입혀 드리게 되었다. 김 추기경님은 호텔 방안에서 옷을 입어 보이시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소년처럼 미소를 지으시던 김 추기경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재활 양로원 방에 걸린 부부의 명패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우리 부부는 매년 자카르타 근교 시타날 라 한센인 병원 앞에 있는 재활원을 찾고 있다. 무궁화유통의 달력을 걸어주고 생필품을 나누어주며 정을 나누곤 하였다. 2004년에는 양 로원이 독지가들의 정성으로 재활원 안에 지어졌는데, 기거하는 방 의 시설이 워낙 열악하여 성금으로 조금씩 시설을 보완해 나아가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양로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도와준 분들에 대한 1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감사의 뜻으로 재활원 내의 방에 명패를 부착했다는 것이었다. 양로 원 방의 문턱 위에는 나와 아내의 세례명인 베드로와 젬마의 이름을 새긴 명패가 걸려 있었다. 원장 수녀님의 설명에 따르면, 성금을 낸 분들의 이름을 나무로 조각하여 영구 보존할 뿐 아니라 언제고 와서 그 방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작은 정성일 뿐이었는데 뜻밖에 과분한 대접을 받은 셈이라 당황했지만, 그분들의 성의의 징표를 뿌 리칠 수 없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처음 한센인 재활원을 방문했을 때는 솔직히 꺼림칙하게 느꼈다. 아는 체 인사를 한 뒤 악수하려 손을 내미는데 물컹 하는 기분이 왠지 거북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자주 가다 보니 차츰 익숙해져서 반가운 사람이 왔다고 수줍어하며 악수 를 청하는 사람들에겐 나도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 수 있 게 되었다. 일부는 수줍어서거나, 상대편의 마음을 배려해서인지는 몰라도 조 심스러워했다. 손을 내밀다가 멈칫거리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사람 들이 천진난만할 정도로 다가 왔다 100여 호가 되는 이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땀 흘리며 봉제작 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반신불수가 된 사람들은 길가로 나가서 앵벌 이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자카르타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 하는 사람들은 대개 재활치료를 받고 나온 한센인들이다. 이들에 대 한 국가적 차원의 구호와 복지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2006년 봄 성나자로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의 일이다. 기능공으로 한국의 어느 기업에 고용되었다가 한센인임이 드러나 이곳에서 치료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5


마르화티 한센병 재활원에 위문품을 전달하는 저자(왼쪽)와 김정렬 신부, 김우진 사장(앉은 사람), 요한 수녀. (2002년)

를 받으며 마을 청소를 맡아 하는 인도네시아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의 피부에는 큰 반점이 생기고, 검게 탄 자국이 팔에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여기에서 치료를 받아 회복 중에 있었고 많진 않 아도 급여까지 받는 보기 드문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이란 어떤 환경에 처하든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함께 일반 국민들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한센인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바 뀌어야 함을 절감하였다. 이런 양성의 보균자가 전염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씻겨지 기까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 자신도 한동안 한센병은 전염성이 강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센인에 대한 정부와 종교계의 배려와 보살핌이 더욱 확대되기를 바란다. 19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심장병 어린이 수술 지원에 나서다 심장병 어린이 환자를 돕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민형기 대사가 재 임하던 시절부터였다. 그때 아내는 인도네시아 한국인부인회 회장으 로 봉사하고 있었다. 무료봉사를 기꺼이 수락한 가수 이미자 씨를 특 별 초청하여 심장병 어린이 수술 지원을 위한 기금(7천 5백만 루피아) 마련 자선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많은 교민과 인도네시아 여성 지도자들이 내준 성금으로 10여명의 심장병 어린이가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심장병협회는 수하 르토 영부인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이 일은 인도네시아 심장병재단

심장병협회 하나피아 회장(오른쪽)에게 심장병 어린이 돕기 성금을 전달하는 아내 박은주 회장.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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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록책자에까지 수록하게 되었다. 우리 내외가 본격적으로 더욱 심장병 어린이를 돕게 된 것은 2002 년 1월 MBC TV에서 해외 거주 사업가를 선정하여 소개하는 프로인 ‘이홍렬의 해피 통신’ 에 내가 마지막 회에 50분간 출연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해피 통신’촬영팀이 자카르타로 날아와 나의 현지 활동상을 녹 화하기 위해 심장병재단 본부를 방문하는 시점에 우리 부부는 기왕 이면 지금부터라도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인도네시아 어린이들에게 새 생명을 찾아주는 일에 지속적으로 나서자는 데 뜻을 모으고 서면 으로 약속을 공지하였다. 이 사업을 정례화하기 위해 무궁화재단을 설립하고, 이때부터 매 년‘무궁화 인도네시아 심장병 어린이 수술 돕기’ 란 지속적인 나눔

한인부인회 회장 시절 아내(오른쪽)는 가수 이미자 씨를 초청하여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선 음악회를 열었다. 오른쪽 두 번째부터 민형기 대사 부인 이순자 여사, 수하르토 대통령 큰며느리 하나피아 심장병협회 회장과 부인회 임원들.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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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심장병재단 어린이 수술 지원으로 완치된 31명째 어린이 루티 캐트린 사만다를 방문한 저자 부부(오른쪽)와 하나피아 전 심장병협회 회장 및 관계자들. (2004년 5월)

의 사업을 시행해 오고 있다. 심장병이 악화되어 피부가 파래진 어 린이,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숨이 가빠 거동이 어려운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그때 수술받은 초등학교 어린 환자 의 어머니에게 심정이 어떠냐고 기자가 묻자“어두운 밤에 둥근달을 얻은 것 같다.” 고 대답하는 장면을 보며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던 것 이다. 무궁화 심장병어린이 돕기 재단은 매년 가정이 어려워 수술을 받 지 못하는 심장병 어린이에게 최소한 1명씩의 수술비 부담을 약속하 고, 그해 11월 두 살 난 남자 아이부터 혜택을 주었다. 사업 수익금의 일부나마 현지 사회에 환원하고 사랑과 고통, 기쁨 을 나눈다는 취지로 시작된 심장병 어린이 환자 수술 돕기는 2009년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9


초까지 42명이 수혜를 받기에 이른다. 매년 새로 등록된 심장병 어린 이 명단이 계속 나의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다. 아무리 여건이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힘닿는 대로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이 일을 계속 해 나갈 것이다.

불우이웃돕기는 나를 돕는 것 사업 초기 자카르타에서 셋집을 얻어 살 때의 이야기이다. 동네 안 에는 베착이라고 하는 인력거가 있어서, 이것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투캉베짝이라 불리는 인력거꾼들은 대개 지방에서 올라와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그룹을 지어 주로 주택가의 처마밑이나 상점 주위에서 살았다. 인도네시아는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우기에 대피 할 수 있는 곳이면 되었다. 내가 살던 집 앞이 바로 그들이 모여 지내던 곳이었다. 어느날 술 을 마시고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던 취한이 한밤중에 대문 밖에서 소 란을 떨자 그들이 나서서 쫓아내었다. 주위에서 불량배가 행패를 부 려도 저지해 주었다. 그만큼 단결이 잘 되어 있었다. 얼마 전 우기가 닥쳐왔는데도 비옷이 없어 행동에 제약을 받는 그 들의 모습을 보고 아내가 5명에게 비옷을 마련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후 인근 마을의 인력거꾼에 게까지도 더 많은 비옷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 사이에서 우리 부부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20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우리 부부가 맨 처음 마련해준 비옷을 받아 입은 인력거꾼의 모습.

이때가 아마도 1980년 초쯤으로 기억되는데, 나 역시 많은 사람들 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반면 주위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많았 다. 주택가 뒷동네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홍수가 나면 이곳 빈민지역은 바로 침수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곳과 가까운 데에 살다 보니 그런 빈민가 사람들과도 자연히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그래서 침수를 피해 가까운 초등학교로 거처를 옮기고 구호의 손 길을 기다리는 수재민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창고에서 식품 을 꺼내어 보내는 한편, 식수를 공급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수재민 돕기 일을 1년에 한두 번은 하게 되었는데 어느새 기본적인 구호체 계를 갖추게 되었다. 나는 같은 마을에 있는 이슬람사원이 필요로 하는 일반적인 물품 을 지원하는데도 인색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동회와 구청에서 주최하는 불우이웃돕기 행사가 있을 때는 으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1


자카르타의 남부지역 불우한 주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는 저자. 뒤는 이 행사에 참석한 구청장 및 지역 경찰과 관계자들. (2002년)

레 무궁화유통의 책임거리가 별도로 책정되었다. 언젠가 한번은 구청 모임에 참석하자 구청장이 유지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이 분은 우리들에게 아주 소중한 분이므로 자주 얼굴을 보 이는 게 좋다고 하여 모두가 폭소를 터뜨린 적도 있었다. 이처럼 주민들과의 화합 분위기가 조성되기까지는 인도네시아에 온 후 능동적으로 현지 생활에 적응하며 생활방식까지도 바꿔나간 노력의 결과였다. 외국인이 돈을 좀 번다고 티를 내며 모나게 굴었다 간 낭패 보기 십상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내가 먼 저 그들에게 다가갈 필요를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베푸는 일 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비가 와도 몽땅 젖은 채 일하는 인력거꾼을 보고 비옷을 2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마련해 주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였다. 이런 일은 일회성으로 끝 나선 안 된다고 생각해 정기화된 것이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 필품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확산되었다. 매년 이슬람 명절인 하리라야 때 본사 건물 앞에서 여는 불우이웃 돕기 생필품 전달 행사는 대상이 어느새 1천여 명의 규모로 늘어났 다. 인원이 많다 보니 하루에 다 끝낼 수 없어 사전에 조사된 구호대 상자에게는 동회나 이슬람사원 대표들을 통해 물품을 전달하였다. 나는 30여 년간이나 줄곧 한 동네에 거주하고 있어 현지인의 경조 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풍속이 한국과 다르다 보니 생소한 광경을 목격할 때도 있었다. 처음 상갓집에 조문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안방까지 안내하여 들 어가 조의를 표하려는데 망자의 얼굴이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 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이슬람 종교 특유의 방식이라는 걸 나중에 알 기는 했지만, 이때 질겁을 하고 나서부터는 그후 상가에 가더라도 아 예 방안에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지인과 가까이 살며 먼저 정을 주다보니까 공생한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1998년 자카르타 폭동 때는 인근 주민들이 내 사업체의 차 량들을 자기 집으로 대피시켜 주고,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팀을 짜서 야간 경비까지 서주었다. 자카르타 본토박이들은 자기네 동네에 들 어온 외지 사람들을‘물 건너온 사람들’ 이라고 경계하였다. 여기에는 수마트라, 술라베시, 암본 같은 섬사람들이 해당되었다. 이들이 바다를 건너와서 자바 섬에 정착하는 동안 본토인들에게 잘 협력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해서 대우하였다. 협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3


자카르타 홍수 수재민 현장을 방문하여 구호물품을 전달한 후 아굼 구멜라 체육 회장(전 육군대장) 및 수혜자들과 함께. (2007년)

낙인이 찍히면 차별 대우를 받았다. 차별 대우라는 것은 다툼이 있다든가 하면 절대 불리해지고, 특히 젊은이들이 협력을 하지 않아서 발붙이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나의 집과 가까운 곳에 암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인 종차별 폭동이 일어났을 때 나에게 다짐하기를 서로 공격을 받게 되 면 서로 돕자고 제의해 왔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일이 일어나자 외면했다. 그러다 보니 타지에서 온 지방 사람들은 제 실속만 챙기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인식이 박혀 항상 고립되어 어려운 생활을 하게 마련이었다. 하여튼 외지인 이 현지에 자리 잡으려면 인근 주민들과 불목하지 않고 협력하면서 화목하게 사는 것이 최선임을 체험하였다. 나는 차츰 현지생활에 적응하고 동네의 고참이 되면서 홍수나 화 2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산 폭발과 같은 재해가 생기면 동네 이웃들과 함께 이재민 돕기 운동 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다 보니 현지 신문에 무궁화유통 과 동네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구수두르 대통령 시절, 화산이 폭발하여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구호식품을 대통령궁으로 수송하여 궁내 창고에서 식품 전달식을 갖 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외부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할 때여서 현지 요로에서 도움을 요청해 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슬람 성전에서 드린 가톨릭 신자의 기도 2007년 2월 초에 홍수로 인하여 자카르타 시내 여러 곳이 침수되 었을 때였다. 새벽부터 나는 아내와 함께 인근 주민들의 피해 상황을 살피고 즉 시 직원들과 함께 당장 필요한 식량과 음료를 비상 방출하였다. 나는 가끔 있는 일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대처하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자카르타 북부 클라파가딩 지역에 일어난 홍수로 인하여 3일 동안 아파트에서 나오지 못한 한국 동포 아낙네들은 무궁화유통에서 보내 준 음료수와 긴급 식품을 받고 고맙다는 전화를 이른 새벽에까지 걸 어왔다. 무궁화유통 인근에서는 물이 빠지고 난 후에야 본격적인 수습과 수재민 돕기에 나섰는데, 나의 부탁을 받고 같이 인근 피해 주민을 찾아가 구호품을 전달한 퇴역 육군대장인 친구 아굼 체육회장은 주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5


무궁화 장학금을 전달하고 아내 박은주 사장과 충주여고 윤경로 교장(중앙)을 중심으로 기념촬영하는 20여명의 장학생. 이 사업은 1996년부터 13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2003년)

민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하였다. 주민들 중에는 젊은 아기 엄마들이 나의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어린 아기에게 먹일 우유가 없으니 도와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지체 없이 아내와 함께 분유와 아동복을 구입하여 전달 장소로 정 한 이슬람 성전으로 달려갔다. 먼저 이슬람 성전 정문에‘수재민 돕 기 구호품 전달’ 이라는 현수막부터 건 뒤 옷을 일일이 나누어주고 성 전 안에서는 분유를 전달하였다. 그런데 나는 우선 분배에 앞서 이슬람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간 단한 인사말을 하면서“수해로 피해 받은 여러분의 빠른 복구를 바라 며 어린이와 여러분의 가족들의 건강을 위하여 하느님께 다 같이 기 도 합시다.” 라며 가톨릭식으로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드린바 있다. 2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과격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가톨릭식 기도의 선창이었다. 이런 일이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인도네시아 주민들과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지낸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장학회 설립으로 자녀가 받은 은혜에 보답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무궁화유통 사업 초기에는 자카르타의 미국인 국제학교에 다니던 자녀들의 교육을 중도에 포기할까 고민했 을 정도로 어려웠다. 여러 생각 끝에 작심하고 미국학교 교장 선생님 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고 어린 자식들이 사회에 나와 이웃과 사회 에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호소함으로써 세 자녀 모두 미국 인학교에서 장학생으로 무사히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이는 장학금 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일 우리 내외가 장학회를 설립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혜택이 하나의 동기로 작용했 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장학제도를 실시한 것 은 아니었다. 여기에 매개역할을 해준 것은 아내가 실천해온 소년 소 녀가장 돕기 학비 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96년경부터 아내가 고 향을 방문하면서 주위에 불우한 독거노인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분 들을 조금씩 돕는 가운데 소년 소녀가장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학비를 대준 것이 여자중고등학생으로까지 대상 이 확대되었다. 이 일이 한두 번에 머물지 않고 지속 되다 보니, 아예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7


자카르타 소재 유니버시티 내셔널 한국어과 대학생 5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한 후. 왼쪽부터 크리스난 문조노 학장, 장학금 수혜자들과 저자 부부, 박진 교수. (2004년)

장학사업으로 정착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되어‘무궁화장학회’ 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충주에서는 충주여고를 중심으로, 기타 여학교는 소녀가장을 위주 로 시행하고 있다. 자카르타에서는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한국어학 과에 들어간 현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생을 선발하여 전액 장학 금을 지급해오고 있다. 앞으로 여건이 닿는 대로 수혜자를 더 늘리고 싶다. 어쩌면 인도네시아 장학생들을 통해 현지에 한국어를 보급할 뿐 아니라 한국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으 로 생각한다. 2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세계 순방으로 발전한 조국통일기도회 2001년 5월 15일, 노르웨이 야일로(Geilo의 현지 발음)에서는 북극 조국통일기도회가 개최되었다. 독일 주재 이순하 목사 집례로 9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해외지역 협의회장과 지회장 및 위원들 47명 이 참석하여 기도회를 가졌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 4개국을 순방 하는 일정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버스로 각 나라를 순회하며 조국 통일 의지를 선양하고 해외 동포들의 기여 방안을 협의하는 시 간을 가졌다. 기도회 중 자연스럽게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저녁에는

북극조국통일기도회(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구주북부, 서울중구 협의회 합동)에 참석한 일행들. 왼쪽부터 저자, 서울중구지역협의회 김장한 회장, 이순하 목사 및 각국 회장단. (2001년 5월)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9


호화 여객선에 승선하여 북유럽 국가와 국가간을 이동하였다. 핀란 드로 가는 여객선에는 물론 면세점이 있으나 술이 워낙 비싼 나라라 서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갔다. 여객선에 있는 바에는 취한 핀란 드 젊은이들이 승객들 사이로 떼를 지어 다니며 시비를 걸어오기 일 쑤였다. 이들은 아주 사나워서 대꾸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5월인데도 노을이 질 무렵이면 아주 쌀쌀하여 점퍼가 필요했다. 그 래도 나는 저녁 바다 풍경이 좋아 와인 병을 든 채 선상으로 올라갔 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오묘한 주변의 절경에 압도되어 이경득 회장 과 함께‘오 솔레미오’ 를 소리 높이 불렀다. 둘 다 부부동반이었다.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곳을 방문해 봐야 진가를 알 수 있

대자연이 만들어낸 오묘한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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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야일로에서 보쓰 계곡으로 가는 길에 잔설이 남아 있는 설산을 배경으로 알프스의 강을 건너며 아내와 함께. (2001년)

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피오르드 이다. 무게를 견디다 못한 빙하가 떨어져 내려오면서 녹은 물들이 깊 은 계곡과 폭포를 만들고, 거기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지형의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이렇게 형성된 부조화 속의 오묘한 균형감이 노 르웨이 특유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1


장관을 이루는 브락스달 가는 길의 폭포.

야일로에서 플롬(flam)행 관광열차에 오르면서 나는 쉰아홉 살 나 이에 어울리지 않게 중학 시절 처음 도시 구경을 할 때처럼 들뜬 기 분을 억제하지 못했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이 날이 마침 노르웨이의 무슨 국경일이라는 귀띔을 받고는 여차장에게 마이크를 빌려 축하의 뜻을 전하고 한국인으로서 이 열차에 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고 말하였다. 열차가 플롬역에 가까이 오면서 험준한 산맥과 거대한 폭포의 모 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노르웨이 빙하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이 야일로 피오르드의 폭포는 우리나라 등선폭포의 50배쯤 된다면 과 장일까? 기차가 멈추고 사진을 촬영케 하는 곳도 있어 바람을 쐬고 기분을 전환케 해주었다. 21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열차가 도착한 플롬은 인적이 거의 없는 산간지방이었다. 나는 일 행과 함께 기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한적한 노르웨이의 풍광을 마음껏 즐겼다. 역사 앞 넓은 강가에는 승객을 실어 나르는 배(open ferry)가 대기하고 있었고, 유럽 관광객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은은

하게 들려왔다. 멀리 눈이 쌓인 높은 산이 보이고, 산자락에 자리 잡 은 농장들이 북부유럽풍의 주택들과 어우러져 평화로운 촌락을 이루 고 있었다. 이런 정경을 보며 나는 평안함을 느꼈다. 아내도 비슷한 생각을 하 는지 한동안 그 방향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 10여 년에 걸친 유럽 여행의 경험을 갖고 일정을 짠 북구주협의회 이 종수 박사님의 세심한 준비를 엿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최상의 접대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간이식을 시술한 이 박사는 식사때 레드 와인에 건강의 비결이 있다면서 매일 한두 잔은 안 드시는 분보다 드시는 분이 심장 병에 걸릴 위험이 적다는 말을 했다. 위스키의 온 더 록(ON THE ROCK)은 피하는 게 좋고, 물에 섞어 마시는 것이 부담을 덜 준다고

하였다. 같은 양이면 폭탄주가 빨리 취하게 하는 편이며, 온더록보다 낫다는 등의 건강 강의가 곁들여져 식사 시간을 유익하게 만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전 여정을 웃음으로 이끌다시피 한 프랑크푸트의 박 호산 변호사 부부도 일행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하마터면 산길을 따라 버스로 이동하던 중 낭떠러지로 굴 러 떨어질뻔한 아찔한 순간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큰 산맥을 넘 기 위해서는 밑에서 터널을 이용하는 방법과 정상을 타고 올라가면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3


조국 민주평화통일기도회 참석 여행 중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달리는 버스에서 찍은 평화로운 목축 마을의 전경. (2003년 6월)

서 계곡의 아름다운 폭포를 즐기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우리가 탄 12.5m의 대형버스는 이 정상 코스를 택해 오르다 보니, S커브에 서 미처 운전대를 꺾을 수 없어 부득이 후진을 해야만 하는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되었다. 버스의 길이가 커브의 최대 회전 가능 길이와 거의 같아 50㎝ 정도 밖에는 여유가 없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모 두가 혼비백산!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어쩔 수 없이 독일 운 전수에게 생명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47명의 승객은 모두 숨을 죽이고 운전사의 동작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승객은 내려서 위험한 구간을 걸어가고, 버 21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스는 먼저 보내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찬성하는 사람이 많 지 않았다. 대다수는 운전기사가 신경을 쓸까봐 겨우 입속말만 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자동 컴퓨터 장치가 고장나는 바람에 함부로 내릴 수도 없었다. 발밑을 내려다 보니 약 500m가량 급경사를 이룬 가파른 계곡이었 다. 물론 눈앞에 아름다운 폭포의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안중에 도 없었다. 오직 공포의 존재로만 다가올 뿐이었다. 운전기사의 조심스런 동작과 섬세한 차량 조종 끝에 버스가 위험 한 커브를 통과할 수 있었다. 47명의 승객은 하마터면 황천길을 직행 할 뻔한 위기일발의 순간을 경험하였다. 긴 대형버스를 이용할 때는 위험한 계곡의 정상으로 운행할 것이 아니고, 반드시 터널을 이용하 는 것이 사고예방에 바람직하다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통독 10주년 기념 한반도 평화통일문제 세계한민족 토론대회에 참석했을 때. 왼쪽부터 통일부 김경웅 국장, 최영철 부총리, 이경득 콜롬비아 회장과 저자. (2000년 베를린)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5


집단 초상이 날뻔한 보스(VOSS) 계곡의 교훈은‘무리는 절대 금 물’ 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이 일은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시절 세번째 찾은 유럽에서 칼리만탄 정글 이후 처음으로 겪은 죽음 에 대한 공포였다. 민주평화통일위원회 9기 자문위원으로 있던 2000년 마침 둘째 사 돈인 양영식 박사가 통일부 차관이 되었다. 나는 당시 베를린에서 개 최되는 독일 통일 10주년 기념 한반도 평화통일문제 세계한민족 토 론대회에 초청돼 참가하게 되었다. 참가자는 최영철 부총리를 비롯 한 통일부 관계자, 북한문제 전문가들과 동독의 전 국회의장 등이었 다. 참석하고 보니 아시아에서는 나 혼자였다. 이를 계기로 동남아대 표 격인 연사로 지명되어 차례가 올 때까지 나는 긴장한 나머지 등줄 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순서에 따라 연단 에 올라갔는데 처음에는 떨렸지만, 차츰 말이 잘 풀려 나갔다.

통독 10주년 기념 한민족 토론대회에 참석하고 베를린 장벽을 찾은 민족통일연구원(KINU) 학자들과 저자 및 아내.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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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강 조국통일기도회를 마치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9기 해외 회장단 및 지회장단과 함께한 저자(왼쪽 첫 번째). (2003년, 헝가리)

나는 앞에서 전문가들이 좋은 발표를 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전제하고 먼저 외국에 사는 교민으로서의 조국을 위한 활동상을 간 단히 소개하였다. 그러고 나서 남북간의 대화가 안 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인도네시아 대통령에게 중재 역할을 부탁해 남북 대화의 물꼬가 트이도록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IMF를 맞아 어 려운 시기에 국제적인 뉴스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덧붙여 말하여 뜻밖 의 박수를 받았다. 당시 2000년 베를린에서 열린 통독 10주년 기념 한민족평화통일 토론대회에 참석하여 내가 처음 만났던 민주평화통일자문회 북유럽 협의회 이종수 회장과 프랑크프르트의 박호산 회장이 모임을 갖게 되어 이듬해부터 모이기 시작, 각 나라를 순회하며 평화통일기도회 를 열게 된 것이 세계여행 모임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7


비엔나 교외의 한 정원 식당에서‘9평회’ 회원들과 부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오후 한때를 즐기고 있다. 비디오 촬영 중인 분이 광주 MBC 관계자이며, 그 오른쪽이 이경득 회장. (2003년)

이에 따라 2001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매년 해당국의 신부나 목 사님을 초청, 조국평화통일기도회를 열고 그 지역의 회장이 준비한 일정에 따라 여행 코스로 들어갔다. 먼저 스칸디나비아 4개국을 순방하는 것으로 합의되어 노르웨이 야일로에서 북극 조국통일 기도회를 개최하고, 스웨덴으로 이동하는 순서였다. 당시 개최국인 노르웨이 박경태 대사와 스웨덴 김정호 대 사가 참가자들을 위하여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그 뒤 동유럽의 다뉴브강 선상에서 가진 조국평화통일기도회와 200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가진 모임도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21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되었다. 그때 우리 일행은 비엔나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그린칭 마 을의 정원 식당을 찾아가 덜 숙성된 홀리게이 포도주를 음미하며 흥 겨운 식사시간을 보냈다. 잠시나마 여독을 풀게 하는 가족적인 자리 였다. 이처럼 매년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치르는 기도 모임으로 인 해 참가자들 간의 친교도 더욱 두터워지고 있다. 어느새 노년기에 접어든 나도 해가 바뀔 때마다 다음번의 모임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고‘이제 나도 늙었구나. 어쩔 수 없이 인생 의 종장에 접어들었구나’하는 감상적인 생각이 들어 그만 혼자 쓴웃 음을 짓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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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 장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뜬구름 잡기 안성맞춤인 나라 인도네시아는 열대성 기후로 사시사철 더운 나라이다. 그러다 보니 산림과 더불어 흔한 대나무는 무가 자라듯 쭉쭉 뻗어 올라가 어린아이 베개 만한 두께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더위 때문 에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대자연의 웅장함에 경 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이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이 나라는 여섯 번째로 풍부한 자 원을 갖고 있다. 그 중에도 보르네오의 칼리만탄 정글이나 수마트라 이리안자야 일대의 광활한 숲이 말해 주듯이 세계적인 산림 보유국 으로서의 명성을 갖고 있다. 특히 술라웨시 북부 쪽에서는 흑단목(黑檀木 : ebony)이 생산되어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흑단목은 감나무 과에 속하는 상록 활엽 고목으로서 동남아와 중남미 등 열대지방에 분포한다. 크게는 25m 높이까지 자라며, 잎의 길이는 10㎝ 내외, 너비는 3~5㎝가량이 된 다. 단성(單性)인 꽃은 담황색이나, 익을 때는 적황색으로 변하면서 감과 비슷한 작은 열매가 열린다. 짙은 흑색의 목재는 고급재로 각광 을 받는다. 그러나 나무가 단단한 만큼 성장이 느린 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벌목을 한 후 한동안 바닷가 모래속에 묻어두었다가 선박을 이용 하여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는데, 이렇게 견고해진 목재는 주로 가구 나 악기 등의 재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밖에 다른 목재로는 동티모 22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르에서 많이 생산되는 향나무가 있다. 1970년대에는 벌목한 향나무 를 비행기로 실어서 일본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동부 칼리만탄에서 산림개발을 할 때 겪었던 잊지 못할 일은 도로 공사 중에 갑자기 시커먼 능선이 발견되었을 때이다. 중장비로 산줄 기를 따라 파다 보면 석탄 광맥이 나타나 흥분하게 마련인데, 대개는 위치가 너무 험준한 산맥에 있어서 좋다 만 경우가 더러 있었다. 수 송이 어려워 경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기업이 이보다 입 지조건이 좋은 칼리만탄 사마린다에서 광맥을 발견하여 석탄 생산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서부 칼리만탄에서 많이 나오는 금광석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까지는 독점개발권을 획득한 회사만 개발 허가를 받을 수 있어 이들 이 외국인의 투자를 알선하여 금덩이를 무더기로 캐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지역 원주민들이 강가에서 사금을 모으는 일이 주된 생업 수단이 되다시피했다. 한국에서도 노다지에 눈이 멀어 광산을 찾아다니다가 가산을 탕진 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확 천금을 노려 금광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전문성 이 없는데다 사전조사 없이 맹목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광산물 중에서도 세계적인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주석은 인도네시 아 정부가 직접 나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광(銅鑛)인데,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한 미국인들이 이 개발 사업에 투자하였다. 이곳은 자카르타에서 7시간 비행거리에 있는 이리안자야 섬으로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3


숲의 바다를 이룬 칼리만탄의 정글.

프리 포트(free port)란 회사명을 갖고 동광을 대형으로 개발, 운영 중 이다. 이러한 광물을 채취하여 운반하는 중장비 페이로더의 타이어 크기의 직경이 5m나 되는 점으로 봐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이 갈 것이다. 이곳은 눈이 녹을 새가 없을 만큼 고산지대인데 열대성 기후인 인 도네시아에서는 보기 드문 지대이다. 이리안자야의 5천 30m 정상은 만년설로 덮여 있는데, 이곳에는 한국의 허영호 등산대장이 1995년 에 등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이 광산지역에 서 캐는 구리광석에 구리보다는 금의 비중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렇 게 일반인들이 미처 모르는 허술한 점을 외국인들이 이용한다. 수마트라 해변에는 유리를 만드는 원료인 규사(硅砂: silica)의 양 이 엄청나지만, 자원 수송을 위한 기반시설이 낙후되어 포기하는 경 22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3년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였는데, 당시 군부가 후세를 위하여 주요 자원이 매장된 위치 와 술라웨시 북부 마나도 지역의 바다를 조사하고 보물선이 침몰한 위치까지 기록한 해도를 만들어 보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많이 사용하는 곤야쿠(こんやく)의 원료(인 니어로 탈라스라고 함)까지 지방 여러 군데에 심어 오늘날까지 수집

해가고 있다고 한다. 인구가 많은 대신 농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 나라의 사정을 파악한 일본에서 1967년부터 공산품에 대해 평균 35%의 관세가 인하되는 케네디 라운드를 적용하여 농기구를 무상 원조함으로써 인도네시아 에는 일본의 농기구가 판을 쳤다. 1980년대 초 이런 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채 내가 새마을운동의 취 지를 사업에 연결해볼 요량으로 현지 농협 중앙간부들에게 홍보용 농기계를 갖다 주고 설득하려고 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일본인들이 현지 시장 개척을 위해 얼 마나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알 수 있 었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 전역을 놓고 볼 때 육상에는 일제 차량이 대다수를 점령하고, 바다에는 야마하 엔진을 이용한 선박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더욱이 일제 자동차와 크고 작은 선박에 장착한 엔진에 소요되는 부품만 해도 가히 기하학적이라 할 만큼 엄청난 수량이 소모되고 있 다. 이는 오늘날의 일본인들 선조가 일찍이 1920년대부터 인도네시 아에 진출하여 시장과 정보를 선점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점을 상기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5


할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중에서 3.2%에 해당 하는 원유가 생산되며, 세계 제2의 가스 생산국일 정도로 가히 자원 대국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원유는 많으나 정유시설이 부족하여 인 접국가에서 원유를 정유해다 쓰고 있는 실정이니, 국가적인 손실이 막심하다. 이곳에서는“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라는 말이 유행어 처럼 나돈다. 이런 표현은 한국인들이 지어낸 말이기도 하지만, 시스 템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 간혹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처음 인도네시아에 온 한국인들은 모든 사업이 다 잘 될 것 으로 믿는 경우가 많은데, 전문성 없이 덤벼들었다가는 십중팔구 실 패하게 마련이다. 함정은 쉽게 보이는 데에 있다. 쉽게 보일수록 더 욱 정신을 집중하고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인도네시아 에 와서 실제로 겪으며 배우게 된 학습효과이다. 현지의 한 사업가 친구에게“너는 왜 모든 것에 대해 물으면 전부 다 할 수 있다고 하느냐?” 고 물었더니,“그냥 무턱대고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도네시아인들의 사고방식인 것 같다.” 는대 답이 돌아왔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30여년을 살다 보니까 이제야 이들의 성격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겨우 1~2년을 지내고 인도네시아를 잘 안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나는 풍부한 자원과 인심좋게 생긴 현지인들 사이에서 뜬 22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구름 잡는 일로 허송세월하다가 주저앉고야 마는 동포들의 경우를 더러 보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동시에 산림사업을 비롯한 신발산업, 전자・봉제・식품・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땀 흘려 성공한 분들 이 많이 있음을 보고 있다. 이런 결과는 2008년 말 인도네시아 내에서 한국인 기업이 연간 무 려 총 120억 달러에 해당하는 수출고를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성공한 분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쉽게 좌절하 지 않고 꾸준히 기반을 굳혀 나간 인내와 끈기에 있다고 하겠다.

기반이 되는 이름 석 자의 신용 인도네시아는 비공식 집계지만 중국인이 전체 인구의 5% 내외라고 한다. 그 숫자가 약 1천만 명쯤 될 것인데도 주요 사업은 거의 중국인 들이 장악하고 있다. 예전에는 서로 메모에 성명만 들어 있으면 비즈 니스가 통한다는 화교들의 사회였다. 어느 가문의 창시자는 60년 전 부터 이런 신용이 소문난 화교였다. 그러다 보니 그의 후손까지 신용 이 두터워 사업이 점점 번창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표(GIRO)가 부도나도 형사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통례처럼 되어 있다. 물건을 사고 팔 때 당좌수표를 발행 해도 은행에 가서 현금화해야 주문한 물품이 인도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화교 간에는 모든 상행위가 잘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들 은 만나도 사업 이야기만 하지 일반 문화나 스포츠에 관한 대화는 거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7


의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화교은행의 백택뱅 총재와 해로유통그룹의 회장을 비롯한 몇 몇 거상들과 오랜 교분을 가져왔다. 사업 초기에 납품을 할 때였는 데, 마침 수입품이라서 칼리만탄 발릭파판까지 주문받은 물품을 제 날짜에 대지 못하게 되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이때 화교인 현지 납품업체를 소개받아 앞의 한 사람과의 친분관계를 꺼냈더니 두 말 없이 한 컨테이너 분의 수입 캔류를 외상으로 내주어 납품에 차질이 없도록 해주었다. 나는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즉시 송금 조치를 했다. 이 사실을 여 러 현지인한테 이야기하자, 그들은 화교들끼리도 잘 알지 못하는 사 람에게는 외상을 주는 법이 없다는데 이번 경우는 특별히 배려해준 것이라고 놀라워하였다. 신용의 소중함과 가치를 절감하게 해준 외 상거래의 한 사례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화교와의 거래는 착오가 없도록 더욱 신경 을 쓰게 되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인도네시아인들과 도 신용 거래가 성사된 적이 있었다. 1985년경이었을 것이다. 정부 고위급 인사 아들과 사업이 성사되었는데, 구두로 약정만 했음에도 큰 액수가 나의 통장에 입금된 적이 있었다. 이는 고위층과 관련된 약속은 구두만으로도 잘 이행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예 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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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에서도 생명을 건지는 자기관리 적도에 위치한 나라는 대개 기온이 높아 사람들이 나태한 생활을 하기 쉽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한국인들은 대개 운전기사와 가정부 를 두고 있으며 집안 일은 거의 가정부에게 맡기게 된다. 한국에 비 해 인건비가 싸다 보니 상류층의 생활을 하는 셈이다. 요즘에는 기후까지 조금씩 낮아져서 후텁지근했던 20년 전에 비해 쾌적한 날씨가 많아 자카르타에서 살기가 좋아졌다. 그런 탓인지 어 떤 방문객은 세계적인 휴양관광지 발리를 다녀와서는 한국보다 인도 네시아 생활이 더 지내기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고도 따르게 마련이어서 동네에서 막노동자인 인력거꾼을 업신여기다가 칼에 맞아 죽은 현지 사업가가 있는가 하면, 육군 소장이 집 앞에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주위 사람을 깔보다가 생긴 보복성 사고가 아닌가 한다. 지역 출신에 따라 다르지만, 자바인은 대개 조그만 칼(kris)을 등 뒤 옷속에 갖고 다니는 습성이 있다고들 말한다. 일반 회사인이나 고급 생활자들보다는 막벌이 노동층 빈곤자들에 게 그런 경향이 많다. 특히 외국인이 사는 마을에서는 현지인들과의 관계가 부드러울 필요가 있다. 인심을 잃게 되면 자칫 사고를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어가며 사는 것이 자기 자신을 돕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으로 인해 겪게 되는 인재(人災) 못지 않게 주의해야 할 것은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9


돌발적인 재해(災害)이다. 바다낚시를 나갔다가 잔잔했던 파도가 갑 자기 쓰나미처럼 몰아닥쳐 생명을 앗아가는 사고도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무풍지대라서 예상치 못한 파도의 공격에 당황하게 되 는 일이 더러 있다. 이럴 때에는 바위에 몸을 지탱하면 생명을 건질 수 있다고 한다. 사무드라 비치(Samudra Beach)라는 호텔이 해변에 있어 해수욕을 즐기기는 아주 좋은데, 호텔 오른쪽 해변은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고 파도가 휩쓸어 들어가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어서 그 냥 수장되는 사고가 여러 번 있었다. 이런 곳의 해변엘 갈 때에는 특 별주의를 요한다고 하겠다. 특히 자가 운전 중에 사고가 발생했다면 무조건 빨리 가까운 경찰 서에 신고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다가는 주위에서 몰려 드는 인파에 구타당하여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업무와 관련하여 보복을 받지 않으려면 아무리 타당한 사유가 있 어 직원을 해고하더라도 원한관계에 이를 만큼 상황을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감정이 풀릴 때까지 조용히 원만하게 화해하고 이 해시키는 진솔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추가 퇴직금을 주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냉랭하게 대처하여 방치했다가 한국인 관리자가 현 지 직원으로부터 살해된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주의가 요구되는 몇 가지 사항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지인의 종교를 무시하는 행위, 장난삼아 머리를 가볍게라도 때 리거나 귀엽다고 만지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23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운전을 하다가 사상자를 냈을 때도 일단 사고 현장을 피한 뒤 신고 하는 것이 현명하다. 집안에 있는 물품을 심부름 온 사람에게 무턱대 고 내주지 않도록 주지시켜 간접 도난을 방지하고, 평상시에도 주택 인근에 있는 이웃 주민들과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원활한 관계 를 유지해야 한다. 무시하는 태도는 스스로 고립시키는 화근이 될 수 있다. 만일 현지인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우선 관계기관 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래도 효과가 없을 때는 덕망이 있는 지도자급 교민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또한 특정한 일에 대해 현지인을 선동하거나 지나치게 정부를 비 판하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어떤 경우든 현찰은 액수가 클수록 은 행에 예치하되, 가능한 한 사무실이나 주택에 많이 보관하지 말아 야 한다. 현금을 은행으로 옮길 때에는 강도가 있을 수 있으므로 나누어 이 동하거나, 현지인을 대동하는 게 좋다. 세금이 과다하게 부과되었다 고 여겨지게 될 때는 정당한 이유를 대고 변호사를 동원하여 시간을 확보하면서 합리적인 적정선을 이끌어내는 조정 협상을 해보라고 권 하고 싶다.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사업 환경이 기복 없이 안정될 때에는 사업가들은 대체로 준법정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1


신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다르다. 인도네시아 에서는 대체로 중국인들이 대형사고를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고 한 다. 특히 중국인 소유의 은행들이 정부 관할로 넘어가야 할 만큼 관 리를 잘못한 경우가 있었다. 이제는 IMF를 계기로 거의 정화된 상태 라고 할 것이다. 통 큰 중국인들의 기질은 2002년 월드컵때 한국과 스페인전의 승 자 맞히기 베팅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중국인들 가 운데는 두 나라의 경기를 놓고 전화로 베팅했는데, 어떤 중국인은 집 한 채를 걸었다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무모하게 게임에 달려들었다가 베팅에 실패하 여 목을 매 자살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알고 본즉, 이 사 람은 집 한 채를 베팅 금액으로 건넸으나 그만큼의 돈이 더 미지불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 어른들이“중국인들은 놀음빚 독촉에 마누라까지 내준 다.” 는 말을 들었지만, 그런 일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베 팅 때문에 자살한 사건은 이곳에서 처음 들은 셈이다. 이른바 어깨들은 악성 해결사로 통한다. 그러므로 사업을 하더라 도 그들과 얽히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일단 그들의 그물망 에 들어가게 되면 빠져나오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사업 가들은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는 그룹과 일정 관계를 유지하며 위협 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행태를 보인다고 한다. 부채가 밀릴 경 우, 집안에 한 자루의 코브라를 풀어놓고 밖에서 대문을 잠가 버리는 23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 식구가 초죽음의 공포에 휩싸이는 것은 물론, 어린아이가 코브라에 물려 생명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는 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칼 부대라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현지말로 바랑이라고 하 는 큰 칼을 차고 채무자의 집으로 몰려와서 난동을 벌이면 버텨낼 재 간이 없다. 이렇게 어깨들은 악성 해결사 노릇을 했다고 한다. 하지 만 지금은 법보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성공하는 비결 인도네시아에서는 중국인들이 상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이 크다. 2차대전 이후부터 중국인들과 이 들에 맞선 일본인들이 상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오고 있다. 지금 은 대다수 기간산업에 두루 그들의 뿌리가 내려지고 있다. 그런 상황 이고 보니 외국인 투자자나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그들과 경 쟁하여 이겨야만 된다는 논리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들과 승산 있는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를 먼저 알 아야 한다. 사전에 철저하게 연구하고 대비해야만 승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업을 대충하다가 빠진다거나 몇 년만 해봐야겠다 는 안일한 생각을 갖게 되면 백전백패의 멍에를 쓰기 십상이다. 나는 처음 인도네시아 땅을 밟기 전부터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로 사업을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3


시작했다. 몇 년 해보다가 안 되면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이곳에서 어떤 사업이든 성공할 결심을 했다면 반드시 인도네시아 어는 익혀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사업자금이 있으니 된다 든가, 통역에 맡기면 해결된다는 식의 안이한 발상으로는 결단코 경 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외국에서의 사업은 그래서 살얼음판의 걸음마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이건 통역에 의존하다 보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겨 상황 판단이 어려워지고 일을 그르치 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어느 대기업의 경우는 해당 국가에 미리 직원을 유학시 켜 현지 사회와 문화를 익히고 적응케 한 뒤 주재원으로 파견하여 회 사를 설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사전에 철저한 준비로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기반을 잡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다시 말하면 언어와 문화를 익히지 않는 한 인도네시아도 사업하 기가 쉬운 나라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만일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할 생각이라면, 앞의 대기업의 예를 벤치마킹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 고 할 것이다. 그리고 사업 준비자금은 일정수준 사전에 마련되어야 하며 이를 시행하기 위한 자금지원 대책이 세워져야 한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 지만, 자기자본 비율을 높여가면서 은행의 신용을 얻고 사업을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하겠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업종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업 종이 아니고 새로운 업종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현지에서의 판매 전망 23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이나 수요 측정, 수출입 가능 여부 등의 진단을 비롯하여 세밀한 입지 조건 분석과 전략적 계획 수립, 예측 등 적절한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지방에 따라 인건비와 대지, 여타 경비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많은 인원을 고용해야 하는 경우는 사전에 세심한 조사와 검토가 필 수적이다. 현지인을 너무 믿고 덤볐다가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 문에 성공한 교민들이나 기업인들에게 자문을 얻는 것도 한 방법이 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무자본의 상태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겪은 난관이나 어 려움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또 이런저런 종류의 사기도 여 러번 당했다. 자본 없이 사업을 하다 보니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 니었다. 설움과 고통, 좌절감으로 중도 포기의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 였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은행의 자문으 로 힘을 얻을 수만 있었어도 그토록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사업가에게는 기(氣)가 무기다 근면과 정직을 생활신조로 삼고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나에게는 기가 빠져 나갈 새가 없었던 것 같다. 뒤를 돌아보건대 오늘날까지 30년간 좌절감과 한숨의 시간은 많았어도 결코 배짱의 기까지 허망 하게 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항상 긴장된 상태에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5


서 아내와 함께 주님께 기도하며 체력과 정신을 가다듬은 결과일 것 이다. 나는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돌진하는 코뿔소형 스타일인 것 같다. 끈질기게 일을 추진하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이라 고 할 수 있다. 이따금 작은 사업에 매달려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으나 결코 미련이나 아 쉬움은 없다. 스스로는‘느리지만 확실한’ (slow but sure) 사업을 일궈왔다고 자 부할 수 있다. 현지 중국인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들은 사업성이 있다 고 판단되면 일단 하겠다는 대답부터 하고 나서야 일을 추진해 나가 는 쪽이었다. 나는 큰 것이냐, 작은 것이냐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 가를 중요시했고 그 목표가 확정되면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지속 적으로 추진전략을 깊이 연구 검토하고 노력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 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두 개의 큰 기둥은 자신감과 건강이었다. 외국의 오지에 나가서도 끈질기게 버틸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은 집념과 자신감, 그리고 심신의 건강이라고 믿고 있다. 이는 외지의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자기관리의 기본이기도 하다. 목표를 향해 가 는 과정에서 험로에 봉착하게 될 때 초지일관할 수 있는 자기최면은 큰 힘이 된다. 나는 자카르타에서도 경쟁이 치열한 유통분야에서 사업을 해오는 동안 중국인들과 엄청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제품의 질, 가격의 적 정성, 고객의 만족을 위한 서비스의 질 등 차별화 전략으로 대응하며 2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국내 주요 식품 제조업체와의 협력으로 무궁화유통만이 한국식품 을 공급할 수 있는 잠정적 독점업체라는 장점을 살려 식품 수요와 공 급의 원활한 체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고유의 판매전략으로 개업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는 고객제 일주의와 사업 초기부터 장래의 FTA 시행에 대비한 정부 규정을 준 수하여 수많은 종류의 식품을 정부에 등록함으로써 2009년 초부터 우리 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우수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쟁력은 앞의 노력 못지않게 일관되게 지킨 신용 과 사업가 특유의 기, 심신의 건강에 있다고 믿는다. 이제 무궁화유통은 경쟁 대상인 중국계 기업을 상대로 유통망까지 펴나갈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유수한 중국계 유통회사를 찾아가도 책임자가 만나주지 않았던 사업 초기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기업들의 실패 사례 인도네시아에는 공식적으로 약 1천 2백개의 한국기업이 있으며, 개인 사업체가 50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기업 체가 제조 수출하는 생산품은 연간 전자 32억 달러, 섬유 봉제 60억 달러(인도네시아 봉제 전체의 60%에 해당), 기타 석탄, 합판, 제지, 신 발, 악기 등 25억 달러에 이른다. 연도에 따라 통계가 달라지긴 하지 만, 60여만 명의 현지인을 고용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7


기업체가 많은 이유는 풍부한 노동인력에 생활방식과 외환 규정이 까다롭지 않아 제재받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업 군들이 성공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어 관 련 기업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도 한 이유가 된다. 사업에 관심을 가 진 분들에게 참고가 될 것 같아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실패 사례를 살 펴볼까 한다. 상호계약이 미비한 가운데 공장을 한국으로부터 이전할 계획으로 성급하게 공장을 운영하며, 뒤늦게 회사 설립을 준비하는 경우이다. 현지 회사 명의로 임시계약을 할 때 동업자가 된 사람이 만에 하나 불량한 마음을 먹었다면 이 계약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아 자 금을 챙길 위험성이 있다. 이 경우는 정식으로 투자 법인을 세우지 못한 단계여서 현지인 임 의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호랑이 입에 생고기를 물려 준 것이나 다름이 없다. 특히 외국인과의 관계에서 유의해야 한다.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현지 한 국인 사업가의 조언이나 변호사를 통하여 자문을 구하는 것이 최선 의 방법이다. 또 한 가지의 경우를 보자. 인도네시아는 기업에 복수노조를 인정 하게 되어 있어서 한쪽이 파업하는 바람에 연쇄적으로 기업 활동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그중에 한국인 업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한 조가 25명인 라인에 반은 작업을 하고 반은 파업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생산라인이 1개조로 이루어져서 50%의 작업만으로는 생 산품이 나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공장 문을 닫고 회 2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노사관계를 면밀히 파악해야 하며 노조의 실태, 임금 노동 조건 등 계약서상의 규정 작성과 숙지 가 필수적이다. 또 노사분규 발생에 대비하여 사전에 상황별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아무런 방안이 없을 때에는 이슬람교 지도자의 힘을 빌려 기도하고 마음을 열게 하는 방안을 마지막 수단으로 시도 하기도 한다. 회사 설립 계약을 할 때는 반드시 계약서의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 고 서명을 해야 한다. 모두 현지 언어로 되어 있어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영문으로 작성됐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계약서를 잘못 작성하 여 잘 나가던 수출업체가 현지인 손에 넘어가 빈손으로 떠나는 경우 도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전문가의 자문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외국어를 모르는 업주가 현지에 파견되어 있는 법인장의 허 위보고에 투자를 계속하다가 가산을 탕진했는가 하면, 남에게 사업 을 일임한 어떤 기업주는 대리자가 위임장을 악용하여 엉뚱한 인물 로 다시 경영을 책임지게 하여 잘 일구어낸 사업을 접게 만든 안타까 운 일도 있었다. 이는 기업 마인드가 적극적이지 못하고 인재의 중요함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생긴 아쉬운 실패의 사례였다. 인도네시아의 중국 사업가 들은 창업주의 세대에서 끝나는 일이 거의 없다. 어떤 장사를 하더라 도 온힘을 기울여 끈기 있게 한다. 엉덩이가 무겁다고 할 만큼 웬만 해선 자리를 옮기지 않으며, 잘 된다고 사업장을 함부로 개축하거나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9


꾸미지도 않는다. 그 지구력과 끈기는 본받을 만하다. 오래전에 어느 중국인 가구점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을 찾지 못 해 헤매다가 안내를 받고서야 나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손대대로 장사를 하면서도 큰 가게로 옮기지 않는 것을 알았다. 동네 집을 수 십 채 구입해서 연결하여 쇼룸과 창고로 사용하다 보니 규모가 커졌 고 굳이 옮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그런 중국인의 운영 방식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래서 무궁화유통 건물도 단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 다. 말하자면 현재 건물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공장을 운영할 때 생산성을 높이기 위 해 종업원들에게“빨리 하라.” 고 독촉하는 것은 사업주 자신의 위안 은 될망정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품질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상관의 눈치 나 보고 적당히 서두르는 일이 제대로 될 리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쌍방통행의 의사소통이다. 잘못한다고 사원을 윽박지 르면 앞에서는 순종하는 체 하지만 불만만 키우고 반감을 사는 꼴이 된다. 정해진 기한 내에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회사를 성공시키는 열 쇠인데, 이로 말미암아 차질이 생긴다면 회사에 이익을 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누적되다 보면 여유자금 을 비축할 수 없는 회사는 비상시에 대비하지 못해 결국 야반도주하 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IMF 직후 여러 나라 기업인들 사이 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또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면, 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다가 임 24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기가 끝나도 계속 상주하며 개인적으로 기반을 잡고자 하는 경우이 다. 이는 성공 가능성보다 실패의 확률이 높다는 것을 유념하여 잘 대처해야 한다. 그 나름으로는 현지 생활에 익숙하고 언어도 잘 통한 다고 자만하여 모든 일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자 만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보장받은 직장에서 임지에 발령받아 꼬박꼬박 월급 을 받아 생활해온 터라 살얼음판 같은 불안전한 사업장을 헤쳐 나가 는 데에는 경험과 적응능력에 한계가 있다. 사업에 대해 유혹을 받기 쉬운 또 한 가지의 이유는 인도네시아에 선 매사가 쉽게 이루어지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 하듯이 이곳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사회 이면을 들여다 보면, 아주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일 이 해결되는가 하면, 쉽게 될 것으로 믿었던 일이 시간이 걸려도 해 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몇 가지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인간관 계가 크게 작용한다. 세상만사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현지인들과의 유대에 각별히 신경을 써왔 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유수한 중국인 기업체에서는 퇴역한 유 력인사를 중역으로 영입하여 이들을 활용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운영에 들어갈 경우, 참고가 될 만한 몇 가지 조언을 해야겠다. 회사 건물에 전기나 소방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못하다 보면 누전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만일의 사고에 대 비해서 항상 안전 점검과 시설 체크로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사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1


업주나 관리자는 실무자만 믿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쉽다. 자카르타공단에 있는 어느 대기업의 현지 시멘트공장이 전소한 사 건도 이에 속한다. 이런 일에 대비하여 보험을 들게 마련인데, 예전에 는 화재보험 가입때 부담금을 많이 내면 유사시에 전액을 보상받을 줄 알고 보험에 드는 일이 많았다. 사전에 전문 감정가로부터 공인된 증빙 서류를 받아야 하는데, 그 렇지 못해 허위기재라는 이유로 기대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 이 벌어졌다. 결국 보험금은 많이 내고 보상은 적게 받게 된 기업이 도산 위기에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어떤 경우든 해당관청의 시정 요구나 지적에는 흘려듣지 말고 세 심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칫 경시하여 지나쳤다가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관청에서는 엄격하게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므로 결정권자의 결정이 난 후에는 변경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관청의 서류는 항상 주의하여 처리해야 한다. 나는 인도네시아어를 터득하여 직접 세무와 은행, 세관, 경찰의 민・형 사 관련 서류를 살펴보며 이치에 맞지 않거나 잘못된 점이 있을 때는 사전에 수정조치를 해오고 있다. 만일 서류에 미비한 점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 분야의 전문가나 친 분이 두터운 변호사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번거롭지만 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여러 차례 큰 손실과 불이익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민・형사상 직접 수사를 받게 된다 하더라도 불리한 사항은 2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최대한 배제하고 수사 내역에 서명할 수 있어야 하며, 현지 변호사를 선임하여 처리하는 경우도 변호사가 작성한 문서를 식별할 정도의 언어 구사력은 갖춰두는 것이 좋다.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사업은 시초부터 검토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무리하게 사업에 손댔다가 잘못돼 한꺼번에 만회하려 했다가 는 스스로 깊은 수렁으로 빠지기 쉽다. 아무리‘지독한 경영자’소리 를 듣더라도 결단을 내릴 때는 냉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한국 투자자들의 고충 외국에서는 기업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고충이 따르 게 마련이다. 다행히 내가 사업을 시작할 무렵에는 인력 수급이 순조 롭고 임금이 저렴하여 많은 기업이 선호하게 되는 좋은 조건을 가지 고 있었다. 그러나 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난 뒤 노조의 활 동 강화에 따른 변화로 기업여건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동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노동법이 개정되면서 순탄대 로였던 기업 운영은 까다로운 험로를 지나야 하는 새로운 상황에 봉 착한 셈이다. 그 가운데 중요한 대목이 퇴직금 지급 규정이다. 충당금조로 근로 자가 더 많은 퇴직금을 받아갈 수 있도록 하여 사전에 퇴직금을 적립 하지 못한 대규모 기업들은 퇴직금을 일시에 지급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본국에서 출자한 대기업 이외에 대규모 노동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3


인력을 가진 현지 기업은 특히 IMF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후부 터 대다수 기업은 노동자들과 계약직 연봉제로 변경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진제 퇴직금이 힘겨워 기업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여 노무 규정이 원만하게 개정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방과 수도권의 최저임금이 60% 정도 차이가 나서 다수의 노동 자를 고용할 때는 인건비 비중이 매우 높아진다. 따라서 처음 공장 지역을 결정할 때부터 업종별로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신중히 검토 해야 한다. 수출업체는 수출 후 부가세 환급이 적기에 이루어지지 않 아 자금의 압박을 받는 예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자금 계획을 맞추 는 게 좋다. 문제는 선납 법인세인데, 하청을 줄 때도 6%의 법인세를 공제하게 되어 하청업체의 어려운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임가공 부가세의 경 우, 수출업체에서는 자재를 대주고 임가공을 주어도 10%의 부가세 를 내게 되어 있어 큰 부담이 된다. 각국 투자업체들이 현지 정부에 건의하고 또 국회가 문제가 된 세법을 개정하는 데 관심을 보임으로 써 외국기업에 대한 과세 문제가 개선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다행 스러운 일이다. 현지에 나와 있는 한국기업의 경우, 생산품이 계속 불량품으로 쏟 아져 나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나는 현지의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문제의 모 대기업체 사장에게 고충을 들어본 적이 있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이라서 특수 처리과정을 통해 생산품이 나와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불량품만 계속 나와 현지어에 능통한 한국 2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인 노무 전문가를 소개하여 투입했다. 결과는 역시 한국인 기술자와 현지 노무자들 간에 언어소통이 제대 로 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이를 해결함으로써 정상적인 제품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 건물의 환풍기를 바꾸고 건물 개조를 통 해 실내온도를 조절하는 등 근로환경의 개선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잠시 언어소통의 부재로 내가 겪은 일화 한 토막을 소개 하고자 한다. 1978년경 칼리만탄 정글에서 겪은 일이다. 산림개발 지역에 노상 정비소를 두고 한국인 두 사람과 여러 명의 현지 정비기능사를 배치해 고장난 수송차량을 정비하고 있었다. 어 느날 갑자기 현지인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한국인의 모습이 보였다. 알고 보니 한국인 서씨가 뭐라고 지시해도 알아듣지 못하자 분통이 터져 엉겁결에 뺨을 때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현지인들의 반발을 사면서 두 나라 사람들 간에 패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하마터면 수적으로 수세에 몰린 한국인들이 정글에서 맞아 죽을 뻔했던 해프닝이었다. 정글에는 사무동과 직원 숙소가 따로 있었는데, 현지인과 한국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파견된 경찰이‘팔이 안으로 굽는다’ 는말 처럼 자기 나라 일꾼 편을 들어 주는 건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고용인 해고의 난제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사업에는 언어가 무기이지, 총기가 무기가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5


아니었다. 칼리만탄 정글에서 수백명의 많은 현지인을 데리고 산림 사업을 했던 사업 초기 때의 일이 생각난다. 수마트라 바탁족인 직원 이 장비와 부품창고의 관리를 맡았는데, 일을 잘 하고 우수하여 신임 도 컸었다. 그런데 이 종족은 혼자서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만, 여러 명이 있을 때는 영 딴 모습이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즐겼다. 이들은 성격도 한국 사람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이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 면 자기네는 인도네시아의 한국인이라는 농담을 곧잘 하곤 하였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문제아는 역시 성질 급한 현지인이었다. 업무 처리 능력이 탁월해서 사무실의 주요한 업무를 맡겼었는데, 그 직원 이 병원에 입원하자 일가친척 20여명이 몰려와 과중한 업무 때문에 병이 생겼다며 무턱대고 보상을 요구하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전후 관계를 사정에 맞게 따질 수는 있었으나, 인도네시아의 일상적인 관행의 연장선에서 아무 조건 없이 적절한 보상으로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다. 원한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 혜롭기 때문이었다. 현지인을 해고한 경우에는 특히 1년간은 뜻하지 않는 보복에 주의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에게 원한을 남긴 채 해 고해 본 적이 없다. 문제의 직원이 조금이라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고 여겨지면, 다 풀렸다고 판단될 때까지 카운슬링하고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시 찾아오도록 진솔하게 다독여 보냈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여러 유형의 일을 겪게 된다.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외부 일을 보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현지인이 칼을 들고 2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행패를 부린다는 보고가 있었다. 일단 담당자인 한국인을 피신시킨 다음 소동이 벌어진 현장으로 가서 원인을 알아봤더니, 의사 전달이 잘 안 돼 생긴 소동이었다. 업무상의 문제가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일이었다. 다행히 흥분한 현지인의 마음을 달래 칼부림 소동을 진정시킴으로써 직원들에게는 좋은 모양새를 보여준 셈이지만, 경찰을 부르지 않고 흉기를 든 사람 을 직접 해결한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함께 생활하는 현지인을 항상 더 존중해주고 중요하 게 여기라.” 고 충고해주던 고(故) 이경재 신부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경을 헤매는 직원이 있으면 지체 없이 병원에 입원시 키고, 열악한 시골 병원에 있어 치료가 마땅치 않다고 여겨지면 도시 로 후송시켜 돌보게 해주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다 보니 직원들 도‘무궁화 가족의 일원’ 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고 회사의 일 을 자기의 일처럼 열심히 해주었다. 중부 자바 말랑은 슬래마트(slamat)라는 3천 404m나 되는 높은 산 이 있는 소도시로 밤낮으로 일교차가 크지만, 저녁이면 기후가 한국 인에게 알맞아 빨간 사과까지 재배되는 살기좋은 곳이다. 여기서 공장을 운영하던 한국인이 현지인을 해고시키고 나서 한밤 중에 칼에 맞아 비참하게 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현지인 직원과의 관계가 원활치 못해 원한을 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바인과 같은 현지인들이 천대받고 무시당했다고 믿게 되면, 원 한을 사서 몸 뒤에 숨겨 갖고 다니는 크리스(구부러진 녹슨 칼)로 공격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7


당하기가 쉽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어느 육군 소장이 자택 앞에서 하차하다가 이런 무기의 공격을 받아 피살된 사건도 바로 이런 예에 속한다. 여기에 기술한 몇 가지 예는 외국인이 생활하는 데 주의해야 할 사 항으로서 내가 직접 겪은 일과 공개된 내용 중에서 선별하여 적어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조금씩은 있을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인도네시아는 지금도‘외국인에게 는 천국’ 이며, 상당히 안전한 나라에 속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어떻게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나? 인도네시아는 섬나라이지만 국민이 2억 4천만이 넘는 풍부한 인 력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소비인구가 많다는 뜻이다. 광대한 해안을 끼고 있어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수산자원과 석유 매장량이 엄청나다. 칼리만탄과 수마트라, 이리안자야 임지를 합치 면 세계 굴지의 임산자원과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열대성 기후로 강우량이 많아서 농사와 수목이 자라는 데에 더 없는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는 천혜의 많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복을 받 은 나라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일부 산업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한 반면, 아직도 많은 산업부문이 낙후되어 있다. 선진화된 기술을 접목 시켜야 할 분야가 많아서 앞으로 여러 부문에 투자할 가치가 상당히 2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많다고 생각한다. 외국에 나와서 하는 교민들의 사업 가운데는 대기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소상인들도 많다. 기업의 규모가 크든 작든 분명 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 사전에 수집한 정보의 분 석을 토대로 실행하라는 것이다. 개인사업자들은 대개 정보를 얻어 사업을 시작하는데 실패할 경우 는 소비자, 시장조사 등 사전 검토가 충분치 못했거나, 잘못된 판단 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인사업자가 투자하는 데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검토해 봐 야 한다. 당분간 이른바‘한탕주의’ 로 사업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장 기적 지속사업을 할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시로 10여 년간 하다가 그만 둘 수 있는 그런 업종도 있겠지만, 가능한 한 영구 적인 사업을 찾아 전력투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사업하는 재미도 있고 보람도 기대할 수 있다. 나의 경우 모든 것이 열악하고 불투명했지만, 처음부터 한 가지 결 심, 즉‘이곳에 뿌리를 내린다’ 는 각오로 시작했다. 하다가 안 되면 돌아가겠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임했다면 벌써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 다. 요행만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기회가 찾아올 리 없다. 어느 부 문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부부가 합심하여 배수의 진을 친다는 결의 로 사업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일정한 준비자금이 마련되면 계속하여 사업을 유지・확대할 자금 조달 대책부터 세워야 한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으나, 자기 자본비율 을 높인 상태로 은행의 신용을 얻어가며 사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9


다. 또 중요한 것은 업종 선정이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판매 전망, 수요 측정, 수출가능 여부 등을 연구하여 적절 한 업종과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지방에 따라 인건비와 대 지, 여타 경비가 다르기 때문에 특히 많은 인원을 고용하는 경우에는 세심한 사전 검토가 필요하다. 외국인투자법에 따라 외국인이 단독으로 법인 설립이 가능하고 또 투자를 가족명의로 할 수도 있다. 현지인과 공동 투자하는 경우는 투 자비율에 따라 운영 주도권이 결정되므로 파트너의 결정은 특히 신 중히 해야 한다. 한국인이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법인을 설립할 때는 현지인의 이름을 빌려 쓰게 되는데, 이럴 경우에는 좋은 가문의 인사 나 유명한 자바인의 명의를 빌려 쓰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 명문 가문이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이들은 명예와 책임감을 중요 시하기 때문에 거의 안심할 수 있다. 실제로 나도 사업을 시작할 때 이 방식을 활용하여 큰 도움을 받았다. 이런 방법과는 달리 아예 학력이나 사회적 인지도를 고려하지 않 고 평범한 현지인을 파트너로 내세우는 사례가 있다. 이들에게는 월 정 금액이나 연봉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는 이런 식으로 한 두 번 성의를 표시하다가 외면해 버려 좋지 않는 뒷말을 남기기도 했다. 사업의 규모가 작다 보면 은행의 도움을 받기도 어렵고, 자기자본 으로만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에서의 홀로서기는 마음먹은 만큼 쉽지 않다. 사업자가 유의해야 할 것은 현지인의 명의를 이용할 때 실질적인 2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투자자가 한국인임을 명시하는 약정 등 공증을 반드시 받아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백지위임장까지 받아두는 사람도 있다. 작은 사업 이라서 대충하거나, 상대를 무작정 믿고 서둘다가는 허점을 노출하여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분쟁의 여지를 남기는 꼴이어서 결국은 자기 재산을 보호받지 못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실수를 저지 르지 않기 위해 성공한 분들의 자문을 받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외국인 투자회사에는 과세를 엄격히 적용하기 때문에 불이익이 없 도록 세제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대처해야 한다. 무엇보다 고용인 원의 적절한 배치와 활용이 중요하다. 아울러 상호 관련된 제반업무 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잘 되어 있으면 회사는 일단 성공 단계로 진입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 사업이 아니라면 현지인의 명의를 빌려 운영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관리능력이 있어야지, 끌려가는 입장에서는 순조롭지 못하 다. 어떤 기업이든 사내의 인화와 거래처와의 신뢰, 관련 기관과의 유대가 기업 성공의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땀 흘려 얻은 이윤이지만 현지에서 얻은 이익의 일부는 공익을 위해 환원한다는 확고한 기업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 니,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는 결국 사업을 번창시키는 자산이 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큰 보탬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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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파트너의 결정은 신중히 하라 인도네시아 진출 초기에는 파트너도 다양하였다. 솔로, 족자, 수마 랑 등 중부 자바인과 수라바야 등의 동부 자바인, 수마트라의 파당 인, 우중판당과 마나도의 술라웨시인, 자카르타 토박이인 브타위족 등이 그 대상이었다. 특히 장사를 잘하는 기질을 타고난 수마트라의 파당인이 인상적이었다. 끈질기고 책임감이 강했다. 상속 관례를 많이 따르는 파당 사람들은 여자에게 주로 재산이 상 속되고 할머니의 재산은 손자들에게 승계되지 않았다. 그래서 파당 남자들은 고향을 떠나게 되면 자바섬 쪽으로 많이 나오게 된다. 그런 부류들을 일반적으로‘바다를 건너온 사람’ 이라고 하는데, 어느 종 족보다도 성공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수마트라의 바탁족은 기골이 굵고 뚜렷하며 남녀 모두 목 소리가 크고 거친 성격이라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으면 한국인과 부 딪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나의 경우, 바탁족이나 술라웨시족, 누사퉁가라족은 직원으로 채 용할 때 매우 신중하게 대하게 된다. 경험상 자바인이 비교적 온순하 고 모든 면에서 가장 무난하다. 또한 파트너 구하기가 아주 어려운 경우라면 학력이 낮더라도 반드시 성품과 책임감, 성실성을 고려하 여 선정하는 것이 좋다. 중국인과의 파트너는 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만 나는 중국인은 대부분 부유층으로 왠지 모두 갑부처럼 여겨지게 한 2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부분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동업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예가 없지 않아 신중해야 한다. 동업자가 지쳐 사업을 포기하도록 술수를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합자계약을 필요로 하는 파트너의 입장에서 주의할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합자계약서에는 한국계 기업과 인도네시아 합자선의 사업 내용, 합자 목적 등을 명료하게 기재하며, 또한 주식 양도에 관한 규 제, 자금조달 방법, 주주간의 자기자본과 부채의 상세내역과 각각의 의무, 배당조건 등을 빠짐없이 기입해야 한다. 둘째, 계약서에는 배당이자, 로열티, 기술 제공료 등에 대한 구체 적인 항목을 넣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술원조 등에 대해서는 합자계 약서 이외에 별도로 상세하게 기재한 기술원조 계약서를 작성한다. 셋째, 인도네시아에서는 분쟁시 소송보다는 원만한 중재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효과가 있으므로 계약서에 중재 해결 방 법, 장소 등을 기재한다. 넷째, 합자자가 계약을 위반했거나 또는 파산했을 경우, 계약을 무 효조치할 수 있도록 계약서에 기재한다. 그런데 2002년경부터 외국인 단독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렸 다. 외국인투자법에 의하여 현지인과 굳이 동업할 필요없이 회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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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 장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인도네시아로 오세요! 인도네시아는 세계 5위에 해당하는 국토 면적을 갖고 있으며, 인 구는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위의 거대 국가다. 인도네시아 는 다섯 개의 주요 군도, 즉 수마트라, 자바, 칼리만탄, 술라웨시, 이 리안자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6천여 개의 섬을 포함 하여 총 1만 3천 7백여 개의 섬이 있다. 국토의 길이는 서쪽 수마트 라의 사방에서 동쪽 이리안자야의 메라우케까지 5천 1백㎞이며, 남 북으로 1천 9백㎞나 되는 아주 광활한 지역이다. 동서의 길이 5천 1백㎞는 인도네시아에서 우리나라까지의 거리로, 항공기로 7시간이나 걸린다. 그 위치는 호주와 아시아 대륙 사이의 적도에 동서로 놓여 있고, 북위 6도~남위 11도 사이, 동경 95도~141 도의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에 있다. 이곳의 평균기온은 섭씨 25~30 도 사이이고, 건기와 우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기후는 고온다 습하며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건기에는 평균기온이 섭씨 30도에 육 박하고, 우기에는 평균 섭씨 25도 정도이나, 덥고 하루에 한차례씩 비가 내린다. 인도네시아는 2억 4천만의 인구 속에 300여 종족이 250여 가지의 언어를 사용한다. 1945년에 제정된 헌법에 의해 국어를 인도네시아 어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교육 수준이 현저히 낮은 오지의 경 우는 그 지방의 언어 외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로 인구의 90%가 이슬람교, 나머지 10%는 25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가톨릭, 개신교, 발리힌두, 불교이다. 천연지하자원이 풍부하며 노동 인구가 많은 곳으로 한국 기업들이 진출을 선호한다. 한국기업의 많 은 성공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세 번째 투자 대상국이며, 한국은 이 나라의 네 번째 수출 대상국이자, 다섯 번째의 수입 대상국이다. 2008년까 지 약 1천 2백여 한국 기업이 진출했으며, 1967년 교역이 시작된 이 래 점차 증가하여 2007년 현재 대 인도네시아 수출이 58억 달러, 수 입은 91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들 한국계 기업의 대 인도네시아 수출 규모는 섬유 봉제 60%, 신발과 완구류 각각 31%, 33%를 점유 하고, 연간 한국기업의 수출액수는 대략 120억 달러로서 인도네시아 의 60만 근로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고용창출의 효과를 가져왔다. 한국 기업의 진출 초기에는 산림개발사업이 주종이었다. 이에 따 라 인도네시아 상위그룹에 들어가는 한국인 재벌이 탄생하는 성과가 있었다. 1990년대 초부터 노동집약산업이 진출하고, 1995년 이후에 는 전자, 가전, 건설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2002년경부터 전자산업 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이에 따른 부품 사업체의 투자가 늘어나고, IT 업계의 진출이 활기를 띠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 개인사업자들의 투 자가 급증하여 그 수가 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신정권의 출범 이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면서 빠른 기간에 경제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큰 투자 유망국으로 부 각되고 있다. 더욱이 서울과 자카르타 사이에 직항로가 개설돼 매일 양국을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국은 인도네시아와 더 욱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교민이나 관광객은 편리하게 원하는 날짜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57


에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으며, 크고 작은 사업에 투자할 가치 가 있는 나라로 인식되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교민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고, 인도네시아 정부 와 사업가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아졌다. 한국의 유수 기업 들과 건설회사들이 현지에서 맹위를 떨치고, 한국의 사업가들이 계 속 인도네시아를 노크하고 있음을 볼 때 앞으로 양국간의 경제협력 이 크게 증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조만간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 국인의 역할과 비중이 크게 높아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도네시아는‘희망의 나라’ 라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적도에 위치하고 있어 특히 비가 많이 내리는 칼리 만탄과 수마트라, 수라웨시 등 인접 지역 섬에는 특수 농작물이나 저 탄소 녹색산업을 육성하기에 적합한 곳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또 한 지하천연자원 외에도 산림 육성, 바이오 에너지 개발용 원자재 생 산 등을 기대할 수 있어 세계적인 기회의 땅임을 인식하여 높게 평가 되고 있다. 이런 분석은 세계 온난화와 기후 변화로 인한 물 부족 현상이 미대 륙과 중국대륙에서 일어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자연히 우량이 풍 부한 인도네시아와 같은 나라에 관심이 쏠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라고 할 수 있다. 골드만삭스의 예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2050 년에 이르러 세계 5대 강국이 된다는 것이다. 이곳의 한국 교민들의 생활수준은 다른 나라의 교민들에 비해 높 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교민들이 생활하는 데에 불편을 느끼지 않 는 이유는 저렴한 인건비로 다른 지역 국가와는 달리 가정부와 운전 2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수를 둘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신이민법이 발효된 후 55세 이상의 외국인들이 기본 조건을 갖추면 언제든지 인도네시아에서 편안한 노 후를 보낼 수 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주변 국가들이 이민 규 정을 완화하고 있어 점차 아시안 국가간에도 동질의 규정을 확대해 나가는 것으로 풀이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슬람교의 덕성과 네덜란드로부터 약 350 년간에 걸친 식민지 생활을 한 탓인지 비교적 온순하며 순종하 는 경향이 있다. 기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관리하기가 비교적 쉽 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자가운전을 하는 경우가 드물며, 가정 부가 직접 식사준비를 하고 집안 청소까지 한다. 현지인 식모가 대체로 가정 일을 잘 도와주고 있어 교민 가정주부들이 크게 신 경을 쓸 일이 없게 된 셈이다.

이 나라의 고유문화와 관습 인도네시아는 90% 정도가 이슬람교를 믿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새벽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를 이해하며 살아 야 한다. 금요일 정오는 온 국민이 기도하는 시간이므로 이때 약속이 나 관공서 방문은 피해야 한다. 한달 동안 계속되는 이슬람 대명절인 하리라야 금식기간 중에는 심하게 꾸중을 하거나, 해고하는 일은 삼 가야 한다. 또한 무슬림들에게는 절대로 머리를 때린다든가 구타를 해서는 안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59


된다. 그들은 이런 행동을 치욕적이라 생각한다. 자칫 불시에 공격을 받음으로써 봉변을 당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종교적인 이유 보다도 무시당한 것 자체를 치욕으로 여긴다. 나도 운동을 하다가 무의식중에 현지 어린이의 머리를 귀엽다고 건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곁에 있던 부모로부터 당장“너 죽고 싶 냐?” 는 반응이 돌아와 달래느라 아주 혼이 난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는 흔히 있는 일이라 그저 별생각 없이 한 친근감의 표시였지만, 이 곳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잘못된 일인 줄 알고 얼른 사과로 무마하여 위험한 일은 당하지 않았지만, 아주 당황하였다.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쪽에서는 무의식중에 한 행동인데, 무시당했다고 여긴 상대방이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벼르다가 갑자기 보복하는 경우이다. 인도네시아인은 자존심이 강하다. 기골이 장대하든 왜소하여 힘이 없는 사람이든 사람의 인격을 중요시해야 하는데, 일부 한국인들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직원이나 식모, 운전수 등 고용자를 마치 하인 취급을 하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심지어 이런 식으 로 무시당했거나 함부로 해고시켰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앙심을 품은 나머지 목숨을 해친 극단적인 일이 실제로 지방에서 있었다. 매사에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이곳에 살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이다. 성격과 표정도 종족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자바인은 얼굴의 표정을 보아서는 그 내심을 알 수가 없다. 포커 페이스를 할 때도 웃음을 지 으면서 마음이 상한 표시를 하지 않는다. 주로 순하고 인내심이 많다 2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수마트라 바탁족은 기골이 크고 목소리가 거 세며 거친 모습을 하고 있다. 법조계 인사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한 국인처럼 성미가 급하고 과격한 면이 있는데, 처음 대면할 때 이들은 자기네가 인도네시아의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일이 더러 있다. 만약 이들에게 사건을 위임시키는 일이 있으면, 치밀하고 확실하게 유도 해 나가는 것이 좋다. 북쪽 마나도 쪽에 사는 술라웨시 종족은 백인종에 가까울 만큼 미 인이 많으며, 매우 적극적이다. 외국에서는 그 나라 법을 잘 지켜야 하는데, 일부 한국인들은 그렇 지 못한 경우가 있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일단 법을 지키면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돈이면 해결된다’ 는 따위 의 해결 방법은 이곳에서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어 있다. 일부 한 국인들은 사업상 미비사항이 많은데도 막연하게 돈만 주면 허가가 되는 줄 알고 행동하다가 창피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한번 사귄 친구는 몇년을 가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런 지인 을 얻는 것도 사업에 큰 도움이 된다. 한 사람의 큰 인물과 관계가 좋 으면 그 주위에 있는 훌륭한 지인을 얻는다는 사실을 나는 절감하고 있다. 내가 수하르토 대통령 시절 사귀었던 중위가 수십년 동안 친구 가 되어 오던 중에 장군으로 진급하자, 그 연줄로 이심전심으로 각 지역의 사령관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어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중국인들의 경우 중요한 인물들과 만날 때는 항상 자식을 대동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주요 인사들에게 자연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1


스럽게 자식을 사업의 승계자로서 소개하는 기회로 삼는 것 같이 보 였다.

후회한 적 없는 선택, 제2의 고향 나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현지의 기후와 자원, 인종 문제, 역사, 문화적 차이, 교육환경, 노후의 생활 여건, 사업의 성공 가능성 과 외국인 투자의 적절성, 중국인들이 어느 정도 상권을 잡고 있는지 등을 알아보는 것을 즐겨한다. 이런 점을 대충 파악하게 되면 어떤 나라가 정착 여건이 좋은지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다. 1980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내가 개인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고심 하고 있을 때였다. 30년 이상 각국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해온 미 국인 선교사 부인이 한국 사람이어서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선 교사의 말이 앞으로 외국에서 생활기반을 잡을 생각이라면 인도네시 아가 가장 적합하니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당부는 내가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중국인들의 말에 따르면, 자기네들은 현지인들이 열심히 하지 않 는 3D 업종이나 복잡한 일들을 잘해서 성공했다고 한다. 여기에 인 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 교민들은 다른 나라에 사는 교민들보다 생활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26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내세우는 자랑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자녀들의 모국어 교육이 잘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어는 물론, 외국에 나와 해이해지기 쉬운 한국어를 불편없이 구사하게 되다 보니 모국의 대학입학 시험 에 거의 전원이 합격할 정도이다. 이런 배경에는 교민들의 조국애와 모국어 배워주기의 집념 못지않게 교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자카르 타 국제학교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깔려 있다. 반면에 문화 환경이 열악하여 문화생활의 폭이 좁고, 향유의 기회 가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외국인 대접을 받아 가며 마음 놓고 저렴한 인건비로 현지인을 고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 다. 이는 선진국인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환 경 조건이다. 한국 교민들은 초기에 온갖 고생을 다했다.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 은데다 식품도 한국에서 수입되는 것이 거의 없어 식생활이 어려웠 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여건이 좋아져 이곳에서 안주하기를 원하는 교민이 많아졌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수하르토 정권 초기부터 밀입 국하여 살고 있는 화교들의 국적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정책적 배려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인 경우도 5년 동안 주재하여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국적을 바꿀 수 있도록 조건이 완화되었다. 국적을 바꾸고 나면 회사 를 자기 명의로 설립할 수 있고, 주택과 토지도 현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어 여러 면에서 유리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현지 국적으로 바꾸는 기업인들이 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개발도상국이어서 아직도 개척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3


해야 할 여지가 많다. 바로 이 점이 사업 의욕을 북돋게 하는 요인이 된다. 누가 나에게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 전망을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다. 결심을 했다면, 이제 망설이지 말고 과감히 몸 을 던져라. 모험 없는 도전은 작은 바람에도 쉬이 날아가 버리는 모래 성처럼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이 나라를 선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 한 적이 없다. 나의 제2의 고향으로 삼은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부모 세 번 죽인 현지인의 기막힌 거짓말 1970년대 후반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외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인이라야 고작 500여명 정도여서 각 가정의 일을 다 알 게 돼 혼자 생일을 차려먹기도 쑥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고생을 하다 가 다소 여유를 갖게 되자 한국인들은 가정부와 운전수를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시골 출신이 많았다. 도시의 때가 묻지 않아 순 박했다. 심지어 회사 운전수라도 개인용무까지 열심히 해주었다. 내가 산림개발 사업을 시작하여 여러 명의 운전수를 고용하였는 데, 대다수의 운전수는 예나 지금이나 차량의 휘발유를 주입하는 일 을 부업으로 삼았다. 그들은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인건비도 많이 올라 생활의 질이 높아졌고 어느 정도 현대화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부친상을 당하면 며칠 동안 휴가를 얻게 된다. 그런데 다음 2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해에도‘아버지 사망’ 이라는 보고를 내어 유상휴가를 받았다. 무심 코 믿고 휴가를 승낙한 것인데, 몇 년 후에도 또 같은 이유로 시골엘 다녀왔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세 번 죽인 셈이었다. 통 큰 이 운전 수는 내가 뒤늦게 알고“넌 어찌하여 부친상을 세 번씩이나 당했느 냐?” 고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번 씨익 웃어 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심결에 세 번씩이나 속은 나도 잘못이지만, 능청스럽게 자기 부 친을 세 번이나 황천으로 보낸 운전수의 거짓말은 지금 생각해도 황 당하기 짝이 없다. 순진하게 보인 시골 사람이 한술 더떠 도시 사람 머리 위에 올라탄 꼴이다. 30년 전 자카르타 시내 한 사무실의 풍경 이긴 하지만. 이처럼 나는 잔꾀를 부린 현지인을 웃음으로 꾸짖고 따뜻하게 대 함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였다. 그 뒤 그 운전수는 열심 히 일하여 변두리에 집을 장만하고 중고차도 사들여 살림을 늘려가 며 한두 아이는 대학에까지 보냈다. 나는 회사에 20여년간 일하다가 정년퇴직하는 직원에겐 퇴임식을 열고 금반지를 기념으로 끼워 주었 다. 그 정도의 직장생활이면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경영자 의 성격이나 가족사항을 잘 알아서인지 매사에 마음에 들게 일을 처 리해 주었다. 현지인 직원들이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을 해주면 매니지먼트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최소한 몇몇 중요 직종의 현지인에게는 전문적인 친 한국인 (pro Korean)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에 매달리면 목표를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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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고 독려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나는 회사나 동네, 거래처 등 일부 현지인으로부 터 고발, 방해, 협박, 가해 등 수없는 위협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 다.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대처하지 못해 자초한 일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프로 코리언’ 의 취지는 회사를 보다 활기있게 만들기 위한 분 위기 쇄신책으로 내세운 것이다. 일본인들이 싱가포르에서 프로 재 팬(pro Japan)을 외치면서 비롯된 것이다. 재외 일본인들이 그런 취 지의 모임을 갖고 협력하여 현지에 일본정신을 홍보함으로써 국익에 도 큰 도움을 주게 하였다. 최소한 나부터 회사 직원들을‘프로 코리 언’ 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자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이 경영 방법을 도입하여 간부들에게 이를 지시하고 인 근 현지인과는 일치된 생활감정으로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친 한국인의 길’ 은 먼저 한국인 스스로 이웃사랑의 모범을 보이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과 행동 자세로 동네 인력거꾼과도 안면을 트고 지내며 방범대원까지 신경 쓰는 대인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웃 구 멍가게 아저씨는 사업상 유리한 정보도 건네주었다. 긴급히 팔려는 원주민의 주택도 적절한 가격으로 여러 채 구입할 수 있었다. 어떤 동네 애기 엄마는 나를 찾아 와서 초등학교때 캔디를 사준 적 이 있다고 말하여 놀란 적이 있었다. 나는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20 년 전 동네 샛길을 거닐때 마주쳤던 어린이가 이제는 30대의 어엿한 엄마가 된 것이다. 화살같이 빠른 세월을 느끼게 하는 뜻밖의 자리였 26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 이 애기 엄마의 한마디는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전혀 아무것 도 아닌 작은 일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이를 계기로 이제부터 설령 힘에 부치더라도 이웃을 더 많이 돕고 더 많은 장학금을 주어야 겠다고 다짐하였다. 부친이 세 번이나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직원이라도 잘 관리하면 책 임자로 만들 수 있고, 더불어 방패막이가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의 닫 힌 마음도 이쪽에서 먼저 열면 열어 보인다는 대화의 자세, 현지인화 된 언행이 뒷받침된다면 넘지 못할 벽이 있을 리 없다. 그만큼 이웃사 랑의 실행과 생활화가 중요한 것이다.

도둑질은‘내 손이 했다’ 는 식모의 변명 자카르타에 사는 교민들은 보통 식모를 몇 명씩 두고 있다. 좀 더 여유가 있으면 갓난아기를 돌보는 간호사를 별도로 채용하기도 한 다. 식모들이 시골에서 오면 대개 도시에서 쓰는 표준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온 식모는 뒤에 들어온 식모에게 모든 일을 시킬 수 있는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통례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자리를 잡을 무렵에는 식모와 대화가 되지 않 아 속상해하는 한국 부인들도 있었다. 칼을 갖고 오라 하면 포크를 갖다 주고, 사발을 가져 오라 하면 공기를 갖다 주었다. 또한 식모들 이 주인에게 현지 말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 정확히 의사가 전달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7


폰티라는 식모가 있었는데, 외제 커피 맛을 처음 알게 된 뒤부턴 마시고 싶어서 집안에 혼자 있게 되면 몰래 타 먹곤 했다. 자연히 양 이 눈에 띄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한 주인마님이“너 왜 말도 없이 자꾸 커피 타 먹었니?” 라고 따져 묻자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내가 타먹은 것이 아니고 이 손 이 탄 것이에요.” 라고 태연히 말하는 것이었다. 좀처럼 자신의 잘못 을 시인하려 들지 않는 고질적인 습관 탓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좀처럼 자기네들끼리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일 이 없었다. 어떤 면에서 자존심이 강하다고 할까, 감싸주는 것 그 자 체만 보면 대견스럽기조차 할 지경이다.

물 들어오는 셋집에서 밤도둑 잡기 5년 이상 식품을 만들던 집을 떠나 앞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1986 년 말쯤으로 기억된다. 식당을 개업하고 상가를 처음 구매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다. 집은 담장이 높아 안전하다고 생각해 세를 들었 는데, 문제 투성이였다. 자카르타 시내에 홍수가 나자 이 동네의 개울물이 넘쳐 집안으로 까지 들어왔다. 졸지에 당하는 일이라 당황했지만, 먼저 전기부터 단전시키고 침대를 옮겼다. 물이 빠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식모들 을 납품용 식품이 실린 트럭에서 취침케 하고 식구들만 인근의 한국 인 친척집으로 대피시켜 하룻밤을 묵게 했다. 26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하지만 집안은 물이 빠져도 며칠 동안 온갖 악취가 밴 시궁창 냄 새로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마 이때 우리 말고는 이런 열악 한 환경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다. 상가가 가깝고 싼 집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안방과 막내딸 방 사이에는 작은 못이 있고, 그 옆 담장은 옆집으 로 통할 수 있도록 연결돼 있었는데, 하루는 한밤중에 도둑을 만났 다. 잠결에 인기척을 느껴 창가를 바라보니 불청객이 들어온 것이었 다. 도둑을 목전에 두고도 비상전화조차 걸 수 없는 상태에서 일단 숨을 죽인 채 아내부터 안심시켜야만 했다. 여차하면 도둑이 달려들 것 같은 긴장 속에서 문득 문 앞의 골프채 가 눈에 들어왔다. 골프 아이온 두 개를 접어서 잡아당기면 칼빈 방 아쇠 소리가 날 것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용기를 내서 창문 틈을 이용하여 밤손님에게 움직이면 쏘겠다고 위협하였다. 다행히 총을 겨냥한다는 말에 놀랐는지 그가 굴복하였다. 그 순간 아내가 긴급전화를 하고 골프채 총이 효과를 보는 가운데 경찰이 출 동하였다. 도둑이 압송되기까지 막내딸과 아내는 무서워 떨고 있었 다. 경찰서로 끌려 들어온 후 그는 시말서를 쓰고 석방 되었는데, 알 고 보니 마약을 하는 청년이었다.

지팡이에 과일이 열리다 우리나라처럼 삼한사온이 뚜렷한 기후 조건을 가진 나라는 드물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9


다. 한대 지역 사람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몸동작이 빠르고 알코올 섭취량이 높은 반면, 열대 지역 사람들은 더운 기후 때문에 몸동작이 느리고 알코올을 섭취하는 경우가 드물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노동집약적인 사업장의 경우 집단적인 작업순 서에 의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공장이나 단체 내의 일처리가 집단으로 움직이므로 개인이 활동하는 것처럼 민첩하지 못하다. 그래서“인도네시아인은 대체로 게으르다.” 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열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적당치 않은 표현이다. 지역에 따라 종족의 외모와 성격은 다르지만, 더운 나라여서 자연히 느릴 수밖에 없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인도네시아는 1년 내내 어느 지역이나 바나나가 널려 있고, 많은 열대 과일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자생 열매가 많아 쉽게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으므로 주민들이 굶는 일이 드물다는 이야기다. 주위에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몸이 부서 져라 농사일을 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더운 날씨가 1년 내내 지속되니 계절 옷이 필요 없고, 겨울이 없으 므로 식량을 저장할 일도, 추위를 이기기 위한 보온장치 등 별도의 준비가 필요 없다. 또한 인근 바다의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어획량이 많아 여러 국가가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산물을 수입하고 있다. 서부 칼리만탄 폰티아낙 지방에는 높은 산들이 많이 있다. 그 대부 분의 정상에는 누런 황금덩어리가 보인다. 이곳 주민들은 소나기가 그치면 강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네까지 뛰어들어 강가의 모래를 걸러 2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내어 금을 캐는 사금 채취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산은 산세가 험준하여 사람들이 등산할 때 생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삼는 일이 많다. 여기에 얽힌 자바인의 이야기 가 있어 잠시 소개한다. 산을 오르는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들고 있던 지팡이를 그대로 땅에 꽂아 놓고 산을 내려온 등산객이 있었는 데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장소에 가봤더니, 지팡이에서 뿌리가 내려 열매가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자원이 주변에 널려 있다시피 풍부하다 보니, 힘들게 일하거나 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현지인과 의 대인관계는‘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라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 자바인과 저녁식사를 약속하고 시간을 정할 때, 만약 오후 7시 반에서 8시 사이로 정하면 비슷한 시간에 나오지만, 6시나 6시 반 정 도로 약속하면 으레 1시간 이상 기다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식사를 원래 늦게 시작하는 자바인들의 습관 때문이다. 벽지의 큰 강가에는 징검다리 위에 하늘만 뻥 뚫린 칸막이 목욕탕 이 많다. 온 식구들이 나와 목욕하고 빨래를 하고 볼일까지 보는 특 유의 이런 시골 풍경은 칼리만탄 산중으로 가는 길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저녁때가 되면 먹을 것을 익히는 나뭇가지를 태우는 연기가 모 락모락 나기 마련인데, 어릴 때 우리 시골집 동네와 흡사한 평화로운 전원의 모습을 느끼게 된다. 이런 토착민들은 흔히 자신의 나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계 절의 변화가 없으니 옷의 색깔도 구분되지 않아 세월의 흐름을 의식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1


원주민의 쌀밥 이야기 산림개발 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을 따라 스피드 보트를 이용 하게 된다. 산중턱의 강가에는 중국인들이 만든 영세 상점이 있는데, 가끔 이 가게를 들르면‘추풍령’ 이라는 오기택이 부른 한국가요가 중국말로 흘러나와 향수를 자극했다. 산간벽지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강가를 오르내리다 보면, 가끔 중 국 상점에서 밥 한 그릇을 얻어먹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때 입속 에서 음미하던 햅쌀밥 향내를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 쌀은 절구에 손으로 찧어 만든 쌀이어서 특별한 향내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욱이 오지 정글을 왕래할 때는 몹시 지치고 허기진 상태라 그랬 는지 천천히 씹어 먹을수록 그 햇밥 한 그릇은 더 말할 나위 없는 꿀

인도네시아에서 재배되는 커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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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었다. 그래서 쌀밥을 볼 때마다 그 시절의 일이 연상돼 절로 미 소를 머금게 된다. 현지 인부들은 쌀밥을 주면 배가 쉽사리 꺼져 못 견디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울러 허기진 상태로 그 상점에서 얻어먹던 한 잔의 원두커 피의 향은 입술에 묻어나오는 커피 찌꺼기조차 별식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손님이 오면 일단 커피를 대접하는데, 이 커피는 원두를 갈아 설탕 을 많이 넣도록 되어 있다. 투부룩이라는 커피인데, 찌꺼기가 가라 앉은 뒤에 마셔야 제 맛이 난다. 그러나 시장할 때 구수한 맛에 이끌 려 빨리 마시다 보니 찌꺼기까지 먹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로브스타 종 커피를 생산하 고 있다. 수마트라섬에서 재배되는 커피는 대단히 우수한 품질로 만 데린이라 불리며, 쓴맛과 신맛이 고르게 조화되어 배합용으로 사용 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커피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코코아다. 중부 자 바지방의 커피농장 같은 데서 이상한 열매를 발견하게 되는데, 처음 나선 여행자들은 특이한 모습에 살펴보게 된다. 바로 이 열매가 초콜 릿의 열매가 되는 코코아 열매다. 이 열매는 끝이 뾰족하고 매끄럽게 생겼다. 그리고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서 불쑥 튀어 나와 열매를 맺는 다. 특이하게도 이 열매는 햇빛을 두려워해서 그런지 초록의 열매를 다소곳이 밑으로 늘어뜨려 여성적인 맵시를 보인다. 원목을 개발할 당시 동부 칼리만탄은 300㎞쯤 되는 북부 말레이시 아의 접경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원시림이었던 1978년에는 정글의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3


수로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다. 왕래하는 사람이라야 첩첩 산중에 사는 원주민들뿐이었다 북부쪽에 사는 원주민들은 대개 강가에 원두막을 짓거나 나무 위 에 집을 짓고 산다. 이들은 서너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는 화전민들 인데, 주로 남자들이 일과 사냥을 하며 산다. 그들은 재배한 싱콩을 주식으로 삼는다. 싱콩의 잎은 삼베 잎사귀와 비슷하고, 열매는 땅속 의 뿌리에서 열린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고구마와 비슷하다. 이것으 로 전분을 만들며, 주정의 원료인 타피오카라고 한다. 이곳 원주민들은 싱콩을 즐기며, 시장기가 있을 때 싱콩을 볶아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먹으면 별미라고 한다. 반찬은 강가에 그물을 쳐놓기만 해도 많이 걸리는 물고기이며, 산돼지를 잡아먹기도 한다.

수줍은 듯이 밑으로 다소곳이 늘어뜨린 인도네시아의 코코아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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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바팀 원주민 마을. 이곳에서는 이런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다약족으로 키가 크며 단단한 체구에 곰처럼 딱딱한 발바닥 을 가졌다. 치아는 나무열매를 씹어 일부러 검정색을 내는데, 이는 치아의 건강을 유지하는 그들만의 비결이라고 한다. 산림개발 당시 그들을 일일 고용직으로 쓰면서 신발을 나눠준 적 이 있었는데 그들은 신발을 신지 않고 허리에 묶고 다니거나 아예 집에 두고 맨발로 다녔다. 식사 때는 쌀밥을 주었는데, 그들만 근무 시간에 한명씩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아 보니 다약족은 쌀밥을 싫어해서였다. 싱콩은 끈기가 있어 배가 빨리 고프지 않아 오래 견딜 수 있는데 비해 쌀밥은 허기가 빨리 와서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일을 안 뒤부터는 그들에게 싱콩을 주식으로 바꿔주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5


연료가 되는 기름 피마자의 열매.

정글에서 스피드 보트(speed boat)로 약 5시간 내려오면 강 주변에 제법 갖추어진 시골마을이 있는데, 이곳엔 통나무를 고정시켜 만든 목욕탕과 화장실, 공동빨래터가 갖춰져 있었다. 아낙네들이 강가에 서 목욕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긴 생머리에 바틱이라는 천으로 가슴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보름밤 같은 밝은 날에는 가슴속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곡선이 훤히 드러났다. 이런 오지 마을에 사는 중국인들은 강가를 오르내리는 주민들을 상대로 물물교환을 했다. 기름 짜는 열매를 따오면 설탕을 주고, 향 료 원료를 가져오면 소금을 주었다. 이른바 기름을 짤 수 있는 바이 오 연료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바이오 연료 는 피마자(Jarak pagar), 카사바, 사탕수수, 해바라기 등이 원료에 해 27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당된다. 기름 피마자는 약용으로도 쓰인다. 기름 생산에 적합한 피마 자유, 팜 오일, 해바라기, 대두 등은 이 나라에서 경작이 가능한 약 60여종의 바이오 생산물에 포함돼 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이처럼 기름 짜는 열매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이곳에서 4시간쯤 올라가면 마리 나오라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 사는 몇몇 중국인들은 왕래하는 스피드 보트 운전수와 짜고 부품을 바꿔치기도 하고, 산림개발 현장에 운송되는 도중에 배에서 드럼통 의 엔진오일을 빼내어 팔아먹은 뒤 물을 채워 보내기도 하였다. 산림개발 현장에서는 이 엔진 오일을 큰 탱크에 저장하고 수시로 DG캐터필러 불도저의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엔진 에 물이 들어가 엔진 헤드가 깨지는 등 현지인들의 농간으로 사업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현장에서는 희귀한 골동품도 자주 나왔다. 중국의 명 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청자가 발굴돼 동네에 숨겨놓았다가 들통이 난 적도 있었다. 그중에는 일반 사람이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범상치 않은 항아리도 있었다. 보름달 속에 드러나는 시골 사립문 풍경이며, 복사꽃 피는 춘삼월의 정겨운 전원 풍경이 담긴 진품들이었다.

두리안 과일을 손톱으로 쪼개다 1979년의 일이다. 말레이시아 접경지역 타라칸 항구로 연결되는 숨 바쿵강은 건기에 스피드 보트로 15시간이나 걸려 강줄기를 거슬러 올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7


라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강은 높은 산악지대에 있어서 아주 조 용했다. 산림개발 현장 본부 캠프와 제2캠프 사이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통신이 두절되든가, 길이 막히면 본부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 어느 날 통신 두절로 본부 캠프와 연락이 닿지 않아 속을 태우던 중에 원주민들이 교통수단으로 자주 이용하는 조각배를 발견해 하강 하던 원주민 중년부부에게 겨우 손짓 발짓을 다한 끝에 승낙을 얻고 배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들은 작은 천으로 간신히 신체 일부만 가리 고 망태기와 칼자루를 몸에 지닌 완전한 원시부족이었다. 뱃머리는 남편, 선미는 부인이 맡아 노를 저어 물결 따라 깊은 계 곡을 내려가는데 울창한 산림 속에서 까마귀가 기분 나쁘게 까악까 악 하고 울었다. 언제 물에 휩쓸릴지 모르는 조그마한 조각배에 몸을 의지하고 내려가면서 나는 어쩌다가 이런 오지에까지 와서 이런 고 생을 하나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을 작은 조각배에 의지하여 협곡을 내려가는 동안 처음에 는 멀미와 두려움 때문에 앞이 캄캄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차츰 대담해지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가시돋친 두리안 3개가 눈에 띄었 다. 긴장이 풀리며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별안간 배가 고팠다. 그러 고 보니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거른 상태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원주 민 부부에게 손짓과 몸짓으로 두리안 하나를 얻어 입에 넣은 뒤 깨물 었으나 쉽게 깨지지 않았다. 마땅히 깨서 먹을 도구가 없었다. 완전히 노랗게 익은 두리안이라면 약간의 손힘으로도 벌어질 테지 만, 아직 영글지 않은 것이어서 껍질이 벌어지지 않았다. 궁리 끝에 쇠못 같은 두리안 가시를 손가락으로 반시간가량 하나씩 짓이겨 겨 27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우 엄지손톱이 껍데기를 억 누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 다. 이때부터는 껍데기를 쪼 개야 하는데, 섬유질이 아주 두터워 벗기기가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또 몇 분간 손 톱을 이용하여 껍데기를 긁 어댔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쓰다 가 힘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약한

과일의 왕으로 불리는 두리안.

배가 뒤집힐 뻔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우여곡절 끝에 1시간이 지나 겨우 두 리안을 꺼내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는데, 그때 맛 본 두리안 과일 은 지금까지 먹어본 것 가운데 최고였다. ‘과일의 왕’ 이라고 불리는 두리안은 인도네시아 깊은 정글에서 자 생하며, 20여m나 되는 큰 나무에서 열린다. 대체로 과수로 조림하는 5m의 작은 나무도 있다. 냄새가 고약하여 특히 비위가 약한 사람은 먹기가 힘들다. 냄새가 오래 남기 때문에 특히 호텔이나 비행기 내의 반입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과일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되면 두 리안이 왜 과일의 왕인지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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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 표 선물 1호가 된 생강사탕 인도네시아에는 선물용으로 가지고 갈 만한 마땅한 것이 별로 없 다. 그런대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이 인도네시아 고유의 색상을 넣 어 만든 바틱이라는 옷이다. 유명한 것은 그림을 그려서 만든 것인 데, 어떤 것은 실크로 되어 있어서 막 입기는 불편하다. 그래서 일반 적으로 무명 바틱이 많이 나간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 상회담때 김영삼 대통령이 다른 정상들과 함께 입었던 옷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텡텡자혜’ 라고 부르는 생강사탕은 노인네들이 입 이 심심하거나 목이 칼칼하고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빨아 먹기에 적합 하다. 한 봉지를 여럿이 나누어 먹을 수 있어서 우리 내외가 한국으 로 갈 때 빼놓지 않는 것이 생강사탕이다. 오래전에 고향 광천을 찾아갔을 때 이 사탕을 먹어보신 어머니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을 본 후부터 나의 선물 제1호로 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 있는 주택 현관 한쪽에는 자카르타에서 우리 부부가 구입해다 놓은 생강사탕이 늘 쌓여 있다. 이 생강사탕은 세 박스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어서 여성이 들기에 는 좀 무겁다. 그래서 출입국시 들고 가다 보면 손마디에 자국이 나 고 멍이 들 때도 더러 있다. 30여년 동안 이 일을 하다 보니 잊지 않 고 준비하는 정성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보내는 곳은 대개 정해져 있다. 고향 어머니, 아타니오, 이해인 수 2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녀님과 유치원, 그리고 몇몇 신부님과 성나자로 마을에도 부쳐 드린 다. 한 수녀님은 생강사탕을 받고 안부와 함께「생강사탕 감사!」 란 제목의 시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부모님께 드리고자 마련했던 것인데, 주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부터 대상을 차츰 확대하게 되었다. 생강사탕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신부님들의 귀국 선물용으로도 적당했다. 나는 성당의 어르신들에게 나누어 드리라고 생강사탕을 준비해 드렸는데, 한 박스면 수백 명이 하나씩 먹을 수 있다. 오랜만에 귀국하여 살림하다 보면 쓰던 물품을 어디 두었는지 몰 라 부부가 서로 물어보기 일쑤였다. 아내가 식사를 준비하면서“여 보! 생강사탕 수녀님께 택배하는 것 잊지 마세요.” 하면,“아차!”하고 매직볼펜을 찾느라 부산을 떨기도 한다. 어떤 때는 주머니 안쪽에 명 함 지갑을 두고도 주소를 찾고, 작은 글씨가 안 보여 눈앞에 둔 안경 을 찾느라 법석을 떨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생강사탕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한국인을 꼽으라 면 아마도 우리 부부가 아닌가 싶다. 여러 사람에게 나눌 수 있는 기 쁨 때문에 생강사탕은 값에 비해 한층 값지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항에서 정장 차림으로 생강사탕의 박스 줄을 잡다 보면 거 추장스러울 때가 적지 않아도 이 짐은 우리 부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사랑의 끈임이 분명하다. 얼마 안 되는 생강사탕이 여러 사람에게 나눔의 기쁨을 주고 다시 전달하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사랑의 실천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가깝고 아주 작은 일에도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1


있다고 생각된다.

이곳에서 골프는 사치가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계절이 건기와 우기로 나뉘지만 전형적인 열대지방 이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즐기는 것 외에는 문화생활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데, 더위 때문에 과격하거나 야외에서 하는 운동은 쉽게 접하기 가 어렵다. 이렇다 보니 각종 친교 골프모임이 많이 생겨나고, 이를 통하여 체 력 관리도 할 수 있어 자주 필드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골프를 남녀노소 구분 없이 주말이나 휴일에 자주 하는 운동으로 여 긴다. 한국에서처럼 사치성 운동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비록 현지의 서민에게는 부담이 되겠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그린피 가격도 아주 저렴하고 골프장이 여러 군데 많이 산재해 있어 접근성이 좋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싱글 골퍼가 되면 노후에 10년을 더 젊게 살 수 있다.” 는 말이 있 는데, 내가 자주 골프를 치다 보니 골프 인생은 장수의 비결인 듯싶 다. 골프를 치는 동안 나는 상쾌한 대자연과의 일체감을 맛보았다. 한국이 낳은 프로 골퍼 김종덕 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운동이 가져다준 즐거움의 하나라 하겠다. 1980년대 말경에 아시안 서키트 골프대회가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다. 충주 출신인 김종덕 프로가 자카 2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르타에 이어 발리와 싱가포르에 참가했는데, 나는 자원하여 뒷바라지 를 해주었다. 경기 중에 각 홀을 따라 다니며 오렌지를 까주고, 물수 건을 얼음주머니에 넣어 목을 찜질해 주기도 했다. 하루에 두 세타를 줄여가는 모습을 볼 때의 흐뭇함이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종덕 프로는 발리 대회에 참석할 당시, 일본에서 여행온 교포사 업가 최모 회장에게 발탁돼 스폰서를 얻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발 리의 누사두아 골프장이었다. 이로 인해 김 프로는 그 뒤 일본에서 도움을 받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아들 종헌(鍾憲, 세례명 니콜라스) 은 내가 동참하지 못한 싱가포르대회에 나가서는 최신호・박남신 선 수의 캐디까지 하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1994년 발리에서 김종덕 프로의 현지 매니저 격으로 활동할 때는 세계적 프로 골퍼인 닉 팔도와도 알게 되었고, 이안 우스남 등 많은 프로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자카르타에서 PGA 세계 랭킹인 프랭크 노빌로와 라운딩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때 물론 장난기가 생긴 탓이기도 했지만, 그 에게 용감하게 내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든 실력으로든 당할 재간이 없었다. 1~2홀에 그만 스윙이 망가져서 라운딩이 끝나 자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대접하는 것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을 자아내게 할 만큼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 이 듬해 현대클래식 한국경기에 김종덕 프로의 초청을 받고 참석했다가 톰 카이트를 만나 대화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내가 골프를 치게 된 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 다. 또한 운동량이 모자란 이곳 생활에서 골프는 운동뿐만 아니라 교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3


자카르타의 한 골프장에서. 저자(왼쪽 둘째)와 뉴질랜드 출신 프랭크 노빌로 프로. 양쪽은 독일인과 일본인 멤버. (2000년)

민간의 친목과 현지인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훌륭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라운딩하기에는 한국보다 편리하여 골프장에서 주로 건강 단련을 하게 된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제 골프는 내 몸의 한 부분 처럼 되어 버렸다. 인도네시아는 지상의 골프 천국이 되고 있다. 연중 푸른 잔디가 펼 쳐지는 이곳의 필드야말로 골퍼들에게는 활력을 불어넣는 생활의 원 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발리에는 네 군데의 A급 골프장이 있다. 한다라 골프장은 산 위에 위치하여 상쾌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고, 카트를 사용하는 누시두아 골프장은 해변과 야산 그리고 많은 야자수들로 경관이 뛰어나며, 높 28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은 파도로 유명한 타나롯 해변에 자리 잡은 니르와나 골프장은 일부 코스가 바로 바다에 닿아 미국의 페불비치와 흡사한 홀로 골퍼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자카르타에도 세계의 100대 골프장에 드는 프라이빗을 비롯한 퍼 블릭 골프장 등 명소급이 많다. 생활 골프를 즐기는 교민들이 이런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함으로써 더욱 격조 높은 취미생활을 지속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열대지방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천만 인구가 넘는 자카르타는 이제 국제 도시화되었다. 30년 전만 해도 교통량이 적어 매연이 거의 문제시되지 않았으나 요즘은 매연 이 아주 심한 편이다. 미국의 휴스턴과 같이 평범한 지형으로 된 이 도시는 숲을 이룰 정도로 녹지가 많다. 날씨는 대체로 습한 편이어 서 폐에 좋지 않다는 설도 있으나 거의 그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적도에 인접해 있는 국가 중에서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더위에 둔감한 편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오래 살다 보니 더위에 잘 적응하게 되었다. 오히려 추운 곳보다 살기가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자녀가 없 던 부부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득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의 발육상태가 좋아 부모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5


다는 얘기도 흔히 듣는다. 인도네시아의 하루는 새벽부터 각처에서 확성기를 통해 울리는 이 슬람의 기도 소리로 열린다. 그런 탓인지 현지인들에게는 아침형 인 간이 많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조깅에 나서는 등 모든 일을 일찍이 서둘다 보니 자연히 아침 활동 인구가 많아진 까닭일 것이다. 학교 수업도 더위가 없는 이른 아침 6시부터 시작된다. 열대성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왜소한 편이다. 현지인 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며, 채소와 닭고기, 양고기, 소고기 순으로 좋 아한다. 주로 튀겨 먹는데, 이는 음식이 부패하기 쉬워 보관상에 문 제가 있기 때문이다. 튀김에서 발생하는 높은 콜레스테롤의 수치로 건강을 해치거나, 심장병으로 갑자기 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심장병 어린이가 나오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열대기후에서 자란 운동선수들을 보면 권투나 태권도, 축구 등 지 구력을 요하는 경기에는 지구력 자체가 모자라서 그런지 두각을 나 타내지 못한다. 이곳에 흔한 야자수 열매의 원액은 노화를 방지하고 머리가 희어 지거나 허리가 굽는 현상을 억제한다고 한다. 이리안자야에서 나오 는 부아메라는 1980년대에 군인들이 공수하여 먹던 빨간 열매로, 요 즈음은 건강식품으로 개발되어 복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혈액을 맑 게 해줄 뿐 아니라 노화 방지와 항암 효과가 있다고 하여 한국인들도 많이 찾고 있다. 현지인 가운데 중국인들의 치사율이 인도네시아인들보다 높지 않 은 것을 보면 기후보다는 식생활이 건강에 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2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것을 알 수 있다. 현지인들의 평균 수명은 남자 65세, 여자 70세인데, 생활환경의 개선으로 차츰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현지의 한국인들은 규칙적인 운동을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 력하는 것 같다. 나의 경우 매일 아침마다 팔 짚고 몸 펴기 운동을 하며, 이따금 사 우나를 겸할 수 있는 휘트니스센터를 찾아간다. 무리하게 업무에 시 달렸거나 운동량이 넘치면 이곳의 전통인 마사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대지역에서 설사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탈수현상으로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고열병(드맘브르다라)에 걸렸다고 여겨지면 망설이지 말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 최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사계절의 변화를 맛볼 수 있는 한국이 낫겠지만, 여름 과 겨울나기는 자카르타가 오히려 좋은 것 같다.

아름다운 신들의 섬 발리 세계적인 휴양지인 발리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이 나라의 26주 가운데 제일 작은 주에 속한다. 발리는 우리나라의 군 단위로 볼 수 있는 8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행정구역 의 모태는 옛 발리를 통치하던 8개의 왕국이다.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 바로 동쪽에 자리한 이 섬은 인구의 약 90% 이상이 힌두교가 주종을 이루며, 발리라는 뜻은 산스크리트어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7


경관이 빼어난 발리의 바닷가.

을 의미한다. 로 와리(Wary), 즉‘재물’ 발리인들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발리 힌두교’ 라는 종교를 믿고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교와는 다른 부분이 많다. 발리섬에 힌두교가 전파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15세기경 동부 자바에 있던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 조 마자파히트 왕국이 이슬람교의 전파로 붕괴되자 힌두교 승려들과 왕족들이 도망쳐온 것이 발리이다. 그후 발리 원주민은 대부분 산속 으로 들어가고 이주민들이 발리섬의 정치와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 여 힌두교를 전파시켰다. 이에 따라 힌두교는 발리의 토착신앙(애니 미즘)과 중국에서 이곳으로 건너온 대승불교와 융합하여 발리 힌두

교라는 독특한 종교로 탄생하였다. 2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발리에 있는 브라탄사원의 풍경.

발리에는 한 마을에 창조의 신, 보호의 신, 그리고 파괴의 신 등을 모시는 3개의 사원이 있고, 크고 작은 사원만 2만개 이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주민들이 사는 집 자체가 사당으로 되어 있어 소규모의 사당 역할을 한다. 발리 힌두교의 종교관은 아주 독특하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원론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다. 선과 악은 항상 공존하며, 선이 악을 평정할 수 없고 악이 선을 지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변화할 수 있고, 영원히 선과 악 은 평행을 유지하며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한 발리 사람들은 악의 신 랑다에게도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한다. 신은 어디까지나 절대자이 고 언젠가는 악이 선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유연한 신념을 갖고 있기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9


관광특정 지역 입구에 있는 발리의 표징 가푸라.

때문이다. 발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른 사람의 육체에 들어간 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생 동안 자신의 영혼을 순결하게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의식을 치른다. 발리 문화의 특징인 회화, 조각, 가뮬란, 춤 등은 모두 문화의 신에게 바치는 것이며, 그것은 신들을 기쁘게 하고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교신의 수단이라고 믿는다. 발리인들은 산을 신들의 고향으로 여기고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 한다. 출생, 결혼 등 세상의 모든 일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의식을 행한다. 그만큼 의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특히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은 발리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이다. 성인식은 청소년기에 욕망의 상징인 송곳니를 자르는 의 식으로 이루어지며, 결혼식은 종종 거짓으로 예비 신랑 신부가 도망 29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가는 의식을 치른 약혼식 후에 행해진다. 장례식은 자기가 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윤회의 믿음 때문에 축복 의 뜻을 담아 밝고 성대하게 치른다. 시신은 우주를 모방한 탑 가운 데 뉘이고 영혼을 데려간다는‘사코파거스’ 라는 관에 넣어 화장해서 바다에 뿌린다. 발리만큼 종교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나라도 없을 것이다.

■ 야자나무 높이를 넘지 않는 4층 건물

발리 섬은 제주도의 2.8배 크기로 인도네시아 전 국토의 0.29%를 차지한다. 인구는 2008년 현재 310만 정도이며, 이중 30% 정도가 이 방인이다. 적도에서 약간 남쪽으로 남위 8도와 동경 115도에 위치해 있다.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뉘며, 우기는 11월에서 3월 말까지지만 대개 소나기가 하루에 1~2시간 정도 내린다. 6월부터 10월까지는 호주로부터 불어오는 한냉기류로 인해 밤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 는 해외 휴양지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발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 이 바뀌어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곧 남성들은 집에서 목각을 하거 나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는 반면, 농사 일 등 바깥 일은 전부 여성들의 몫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아주 친절하며, 여성들 은 평소 토플리스 차림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발리의 옛 풍습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91


수하르토박물관에 소장 중인 동전으로 만든 발리의 인형.

으로 남아 있다. 발리의 덴파사르공항에 첫 발을 내딛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 이 힌두교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공항 건물과 절벽을 낀 아름다운 해변이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음을 느낀다. 보통 발리는 3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특별지역인 누사두아, 보 통지역인 사눌, 3급 지역인 쿠타(히피족 선호지역)로 나뉜다. 중간급 으로 러기안 지역도 있다. 누사두아 지역 내에는 하얏트・힐튼・쉐라 톤・누사두아 호텔 등이 있으며, 이곳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니코 호 텔도 유명하다. 힐튼 호텔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머물렀으며, 하얏트 호텔은 노무현 대통령이 머무르다 간 곳이다. 이 호텔은 몇 개의 동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간혹 방 호수를 29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발리의 관문인 덴파사르공항 전경.

잘못 찾아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발리의 대부분 호텔은 야자나무 높이와 동일하게 건축허가가 나 있어 높이가 4층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발리는 자연미 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한두 군데 예외가 있는데 사누르에 있는 발리비치 호텔과 해 변과 산 절벽을 이용하여 지은 니코발리 호텔이 그것이다. 발리비치 호텔은 특별건축법이 발효되기 전에 지어진 덕으로, 니코발리 호텔 은 절벽 높이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돼 각기 8층으로 남게 되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93


■ ‘오 솔레미오’ 가 절로 나온 해변의 정취

쉐라톤 호텔의 경우, 칵테일 바가 바닷가에 있어 저녁노을이 질 때 면 경치가 장관을 이룬다. 깨끗한 모래가 맑은 바닷물을 더욱 정결하 게 나타내준다. 이곳 칵테일 바 옆에는 평상이 2개쯤 있는데 8명 정 도는 앉아 있을 수 있고, 휴식도 취할 수 있게 푹신한 방석이 준비되 어 있다.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데는 안성맞춤이며, 이런 곳에서 낮잠을 잘 경우는 세상만사 걱정이 없어지는 경지에 이른다. 석양이 뉘엿뉘엿 질 때면 색깔이 아름답게 변하여 맛있는 금수박 을 대하는 느낌을 준다. 저녁시간은 요일별로 변하지만,‘발리 고유 의 춤’ 을 수영장 옆 광장에서 관람할 수가 있다. 칵테일 바 옆에 있는 평상 위에서 레드와인을 즐기며, 호텔의 3인조 악사에게‘오 솔레미 오’ (O Sole Mio)를 신청하여 듣는 기분이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최상의 흥취였다. 이때 동행한 사돈어른(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이 이 탈리아 민요인 이 노래를 파바로티처럼 멋드러지게 불러서 주위 관 광객들로부터 기립박수까지 받았다. 호텔마다 비슷한 모양의 바닷가 평상(pondok)이 있으나, 발리에 있는 쉐라톤 호텔의 것이 세계 최고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마 음이 맞는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며‘오 나의 태양’ 을 자주 듣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인터콘티넨탈 호텔의 바닷가 야간 비치 바는 높은 위치에 전망이 좋은 망루를 만들어 놓았다. 10명 내의 인원이 앉을 수 있어 사전예 약이 필요한 곳이다. 2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전 세계 최고의 호텔 체인인 쉐라톤 호텔의 야경.

랍스터 등 해산물이 풍부한 발리에서는 장소만 잘 선택하면 좋은 분위기에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누사두아 쉐라톤 호텔에 있 는 시푸드 음식점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인데, 랍스터 등 신선한 해산물을 혼합 세트화한 최고의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다. 짐바란 해안의 야간 해산물 관광코스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바 닷가 모래사장에 포장마차처럼 식탁을 차려놓고 손님을 맞이한다. 여기에서는 집시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한국 노래까지 들을 수 있다. 호텔에 비유하면 4류쯤이이지만 그 나름으로 이색적인 관광 분위기 를 맛볼 수 있다. 그룹 여행자들이 쉽게 들러가는 곳이다. 동굴식당(cave restaurant)은 러기안의 발리 클리프 호텔에 위치해 있으며, 호텔 절벽 쪽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해안으로 약 1m 쯤 내려가면 오픈 동굴이 나온다. 여기에 관광객을 유치하는 노천식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95


당이 자리잡고 있다. 주중에는 오더 방식이므로 사전예약이 필요하 다. 이곳에서 싱싱한 랍스터와 와인 맛에 취하게 되면 인도양의 동굴 요리와 정취를 잊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식사 때는 발리 고유의‘케착댄스’ 로 이국적인 분위기에 젖어볼 수도 있다. 발리섬 최남단의 인도양에 있는 75m의 벼랑 위에 솟아 있는 호텔로서 일출과 일몰 때는 장관을 이룬다. 특히 풀장의 물이 바다로 떨어져 흘러 들어가 처음 보는 이들에겐 마치 바다와 풀장이 이어져 있는 줄로 착각하게 만든다. 케착은 원숭이 무용이라고도 하는 남성 합창극이다. 흑백의 격자 무늬 천을 허리에 두른 남자 수십명이 횃불을 에워싸고 원을 만들어 “챠챠” 나“쵸쵸”등의 원숭이 소리를 내며 복잡한 리듬에 맞춰 합창 하는 것이다. 이 케착은 오래전부터 행해졌던 집단 최면적인 발리의 종교의식에 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전염병의 감염이나 천재지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신의 계시를 듣는 의식으로 행해 졌다는 설이 있다. 이 의식은 초경 전의 소녀가 최면상태에서 춤을 추고, 그에 맞춰 남성들이 합창한 데서 현재의 케착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케착은 1930년대 발리에 살고 있던 네덜란드 화가 올터슈피스 가 인도의 고대 서사시 라마야나에서 소재를 찾아 창작한 것을 관광 객을 상대로 공연하게 된 것이다. 쿠타비치 지역의 호텔은 A급서부터 장급까지 다양하게 있으며, 젊 은이들이 주로 이용한다. 이곳은 원래 어촌이었으나 호주 히피족이 모여들면서 관광지가 되었다. 그들은 아예 비키니도 입지 않은 경우 29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가 많다. 이곳은 바닷물이 탁하고 파도가 거세 수영에는 부적합하다. 그러나 선탠 하는 서양 여성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고, 노천 마사 지가 유행이다. 젊은이들의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가 기우는 저녁 무렵에는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하는 바다의 화려한 변신을 볼 수 있다. 발리의 유명한 골프장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누사두아 호텔 단지 내에 있는 발리 누사두아 골프장은 18홀로서 전체 9홀이 야산에 위치하며, 7홀 정도는 바다를 멀리서 내려다 볼 수 있다. 카트길 따라 꽃 넝쿨과 야자수로 조경이 되어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인코스 9홀은 7홀이 높은 코코넛나무 밑에서 라운딩할 수 있게 돼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바다를 향한 마지막 17, 18홀은 바닷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서 파란 바다속으로 당장 뛰어들고 싶은 충 동을 느끼게 한다. 그린피는 대체로 한국과 동일하게 보면 된다. 니르와나 골프장은 르메르디안 호텔에 붙어 있으며, 지역적으로 누사두아 힐튼 호텔을 기준으로 약 1시간 걸리는 곳에 있다. 높은 파 도로 유명한 타나롯 관광코스에 들어가 있다. 카트를 이용하며 4홀 정도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페불비치 코스를 연상케 하는 코스도 있어 흥미롭다. 나는 발리를 방문하면 이틀째 되 는 날에는 이곳을 찾아가 라운딩한다. 일부 코스가 해변에 닿아 발리 에서 아름다운 골프장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새로 건설된 뉴쿠타(New Kuta) 골프장은 인도양을 끼고 드림랜드 해변에 자리잡고 있다. 드림랜드 풀 빌라에서 5분 거리에 있는데, 3 분의 1정도의 홀은 페불비치에 있는 아름다운 골프장의 해변을 방불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97


발리의 프차투 해변 뉴쿠타 골프 코스 12번 홀 절벽에 있는 세계적인 카페 레스토랑 ‘클라파’ 를 찾은 저자. (2009년)

케 한다. 홀 12번의 그린에 올라가면 해변 가까이 도달한다. 캐디들 은 그곳을 ‘지상의 낙원’ 이라 부른다. 그 바닷가 12번 홀 절벽에 있는 식당과 카페의 이름이 클라파(KLAPA)이며, 발리 인터내셔널 이벤트 & 베뉴(Bali’ s international event & venue)로 표시하고 있다. 특색은 거대한 규모에다 해변까지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으며, 2중으로 연결된 듯이 보이는 풀장의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이 ‘클라 파’ 는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하류쪽 강가에 위치한 유명한 클리 프 양식 레스토랑과 겨룰 만큼 세계적인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곳 으로 알려져 있다. 한다라 골프장은 브두굴 산정호수가 있는 700m가량의 고원지대에 있다. 계단식 벼농사를 하는 농촌과 힌두교식 개인사원이 있는 지역 을 지나는 약 2시간 거리에 있다. 이곳에는 부라탄 호수가 있어 관광 29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세계적인 규모와 시설을 자랑하는 레스토랑‘클라파’ 의 전경.

객이 모여들며, 제트스키와 패러세일링, 모터보트를 즐길 수 있다. 자연을 이용한 18홀 골프장 뒤편은 마치 병풍을 친 것처럼 산세가 아름답고 녹음이 우거져 있다. 낮에는 더위를 못 느낄 정도로 서늘하 며, 저녁에는 빌라의 방마다 온풍기를 틀어 놓아 찬공기를 덥게 하여 야 한다. 많은 한국 관광객이 찾아오기 때문에 한국말을 하는 캐디를 배치해 놓고 있다. 기후는 적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1년 내내 무덥다. 킨다마니와 브두굴이 있는 한다라 골프장은 아침과 밤의 기온이 낮아서 스웨터 가 필요하고 7, 8월까지는 호주의 겨울바람이 불어와서 아주 쾌적하 다. 11~3월은 우기라 해도 장마가 오는 것이 아니어서 관광이나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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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유명한 울루와트 사원이 있는 절벽.

프 여행에는 지장이 없다. 발리인은 온순하며 관광이 주업이라서 외국인을 괴롭히는 일이 없 다. 관광객을 보호하고 관광을 육성하는 차원에서 외국인을 대한다. 간혹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면, 약 10% 정도 되는 다른 지역 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발리는 실버산업의 적합지이기도 하다. 이런 곳으로 우선 한국인 이 시작한 울루와트 지역의 드림랜드 풀 빌라단지와 오션불루 풀 빌 라단지, 빌라마다 전담 지배인이 상주하여 세계적 7성 호텔급인 바 틀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샤토 드 발리 웅아산을 들 수 있다. 울루와 트 절벽으로 가기 전 공항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다. 여기에다 파당 바이 리조트가 완공되고 나면 더욱 장관을 이루어 유명한 관광지로 30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각광을 받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발리에서 호텔로 성 공하고 있는 한국 기업인들이 늘고 있다. 최근에 지은 울루와트 지역의 빌라 단지는 멀리 해안이 보이는 산 등성이에 있으며, 성업 중인 유럽풍의 최고급 불가리아 빌라 단지가 공항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다. 그 다음은 레기안 해변으로 쿠타비치 의 상류쪽에 위치하며 지역이 높지 않고 한적한 농촌 해안에 접하여 있다. 또 하나는 짐바란 지역이다. 덴 파사공항에서 20분 거리이며, 해안 을 끼고 절벽을 이루는 산등성이에 들어선 외국인들의 고급빌라촌으 로 아직 실버산업지로서 여유가 있다. 기존 빌라 단지는 힐튼 호텔 건너편 산등성이에 있는데, 이 호텔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아마누사 빌라 단지는 유명인사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자바섬의‘파리’반둥 인도네시아의 반둥은 서부 자바섬의 주도로 인구는 350만 명 정도 이며, 자카르타에서 차량으로 약 2시간 30분가량 걸리는 위치에 있 다. 2005년에 개통된 고속도로는 5년간 험난한 산악지대를 뚫는 난 공사 끝에 개통돼 시간을 꽤 많이 단축하였다. 350년간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을 때‘인도네시아의 파리’ 로 불린 반둥은 제3의 도시로써 전체 인구의 85%가 순다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순다족은 예의 바르고 온화한 성격으로 이 나라에서 인기가 높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1


반둥에서 1시간 정도 차로 달리면 이런 활화산이 나타난다.

다. 반둥에는 또한 미인이 많다고 한다. 살갗이 흰 편이어서 한국인 과 거의 비슷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시내 곳곳에서 많이 목격되는 것은 수백년 된 아름드리 가로수인 데, 이 나무는 마호가니라고 불리는 가구제작용 원목으로 쓰인다. 해발 700m에서 1천 2백m가 되는 반둥은 평균기온 섭씨 18도 내 지 22도로 열대지방임에도 불구하고 에어컨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 로 시원하다. 인구는 300만에 불과하지만, 경제적으로 경쟁력이 있 어 국제회의가 자주 열린다. 그 대표적인 모임이 1955년 4월, 20여개국 대표들로 이루어진 제1 회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대표회의(비동맹국제회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반식민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 국제 모임은 지금도 반둥회의로 불리며 5년마다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3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또한 반둥에는 30여개의 대학 캠퍼스가 있어 교육도시로서의 풍모 를 자랑한다. 그중에도 반둥공과대학교가 유명하다. 약칭 ITB(Institute Technology Bandung)로 통하는 이 대학은 독립 영웅인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각료들과 사회 각계의 지도 자급 인사들을 배출하는 데 공헌하였다. 지금도‘ITB 출신’ 이라고 하면 어디에서나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또한 민족 지도자 이와 크수 마 스만트리에 의해 창설된 파자다란대학은 수많은 문화계 인사를 사회로 진출시켰다. 분지인 반둥지역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제공함에 따라 섬유제직업과 방적 산업이 발달하였다. 그러 다 보니 인도네시아 2억 4천만 인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상과 패 션을 해결해주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지금도 자카르타와 인근 도시 의 사람들은 2시간 20분의 시간도 아깝다 하지 않고 값이 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구하기 위해 이곳 200여개의 아울렛 매장으로 몰려든 다. 그래서 주말인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외부 차량들의 쇼핑행 렬로 북새통을 이룬다. 반둥 시내에서 1시간, 자카르타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탕궁안 풀 라우 산의 분화구는 둘래가 자그마치 5㎞에 달한다. 자바섬 최대인 이 화산은 배를 뒤로 돌려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순다지방의 전설‘산쿠리안 이야기’ 에 따르면, 어린 시절 집을 나 간 후 청년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산쿠리안 왕자는 자신의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다얀슨 비를 사랑한 나머지 결혼을 신청한다. 난처해진 다얀슨 비는 결혼 조건으로 하룻밤 안에 큰 배를 만들 것을 제의하는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3


한사모 반둥 회원들이 사무실을 열고 기념 공연을 가졌을 때 저자도 OKTA 인도네시아 회장 신분으로 참가하여 격려했다. (2008년)

데, 그 배를 만들지 못해 화가 난 산쿠리안 왕자는 배를 뒤집어 버린 다. 그것이 탕궁안 푸라우로 변해 지금도 왕자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화산의 흰연기로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해발 2천 180m의 이 전설적인 활화산은 10분 간격으로 달라지는 정상의 기후변화로 운이 좋아야 전체 분화구를 육안으로 구경할 수 가 있다. 화산 밑으로 치아트르(Ciater) 노상 온천지역까지 약 4㎞의 거리 양쪽에는 고산지대의 청정 공기에서만 재배할 수 있는 차밭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소요되는 차의 80%가 생산된다. 치아트르의 노상 온천장은 자카르타에서 가장 가까운 유황 노상 온천장으로 대형 풀장식으로 되어 있다. 특히 유황 온천은 한국 사람 3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들이 좋아해서 즐겨 찾는다. 현재도 이곳의 활화산에서 분출한 화산용암 물에서 삶은 계란은 별미로 알려져 있다. 나도 머리가 무겁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아 내와 함께 아늑한 이곳을 찾아와 머리를 식히곤 한다. 반둥을 자주 방문하는 한국인 가운데 골퍼들은 이곳에 숙박을 하 며 새벽 골프를 즐긴다. 야외 온천욕을 즐기면서 골프까지 겸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인도네시아의 파리’ 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 을 듯하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2000년에 즈음하여 학생들 스스로 파자란대학(UNPAD)이 주관하는 ‘한국을 사랑하는 모임’ (HANSAMO) 을 결성했다는 사실이다. 2005년부터 반둥 한인회와 교류하며 문화 적인 면에서 조언과 자문 역할을 하고, 2008년 8월 9일에는 사무실 (JL, Naripan No. 89 Bandung 소재 BE MALL LT-UG Block-G12)을 오

픈하여 나도 세계해외무역협회 인도네시아 지역 회장 자격으로 최동 묵 본협회 부회장과 함께 참석하여 금일봉을 전달하고, 500여 명의 모임으로 크게 발전한 데 대해 축하하였다. 이 행사에는 엄정호 반둥 한인회장과 한국 대사관 윤문환 공보관 도 참석하였다. 당시 한사모의 헬리나(Herlina) 회장과 회원들은 한국 고유의 부채춤 공연을 선보여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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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문화의 중심지 족자카르타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중부 자바섬 남쪽에 자 리잡고 있는 족 자카르타(Jog jakarta)는 서울의 약 6배(3,185.80㎢) 넓 이에, 4천 364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 문화의 중 심지다. 지금도 1년 내내 쉼없이 유황가스를 내뿜고 있는 해발 2천 914m의 메라피 화산을 정점으로, 동쪽에 프람바난 힌두사원과 서쪽 에 보로부두르 불교사원이 세워져 삼각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족자카르타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문화체계 속에 전통과 변 화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8세기에는 힌두계 마타람왕국 이, 16세기 후반에는 이슬람계 마타람왕국이 융성했지만, 18세기에 는 자바섬에서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이 일어나면서 네덜란드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전통시대와 식민 통치시대,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정 치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힌두 불교 왕조의 근거지이자 이슬람 왕조의 중심지였다. 네덜란드 식민 통치자들도‘자바 마타람왕조 지 역’ 에는 특별 자치권을 부여했다. 또한 혁명기(1945~1949)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했 다. 이러한 역사적 역할로 인해 자카르타에 이어 특별 주(州)의 지위 를 얻게 되고,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슬람의 수장인 술 탄이 주지사를 맡게 된다. 지금도 술탄이 살고 있는 왕궁은 일반인에 게 공개되고 있다. 3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이 지역은 그림자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마타 람 힌두불교 왕조 시대 이후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기에도 인도네시 아 역사의 전 과정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주 를 연상케 하는 고대 문화유적지이다. 이 지역을 유네스코가 세계문 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흔히‘족자’ (인도네시아어, Yogya)’ 로 약칭되는 족자카르타는 족자 와 카르타의 합성어인데, 각각‘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늑한’ 이라는 뜻과‘번영된 지역’ 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족자’ 라는 명칭은 고대 자바 역사의 밑동을 형성한 라마야나(Ramayana)에 등장 하는 인도 고대왕국의 하나인 야유다왕국에서 차용된 것이다. 족자 의 이름이 암시하듯이, 족자카르타는 힌두문화의 마타람왕국에서 발 전하였다. 기원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중부 자바에서 융성했던 마타람 힌두 불교왕국은 힌두문화를 바탕으로 한 산자야왕국과 불교를 숭상했던 사일렌드라왕국이 혈연으로 얽히면서 서로 경쟁하고 화합하며 공동 번영을 누렸다. 산자야왕국은 그후 동부 자바쪽으로 세력을 확장하 면서 프람바난 힌두사원을 건립하였고, 사일렌드라왕국은 대승불교 에 심취하여 후세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 원을 남겼다.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의‘살아있는 박물관’ 이자 또한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로, 마타람왕조가 자랑하는 그림자 연 극인 와양(Wayang)을 들 수 있다. 고대와 현대를 망라한 초시대적인 공연물로서, 1천 5백년의 마타람왕조를 배경으로, 인도의 고대 아유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7


다왕국의 역사를 서사시체로 그린 것이다. 전통악기가 총동원되는 가믈란(Gamelan)은 최소 1천년의 공연 역 사를 자랑한다. 이밖에 고대와 현대의 역사적 자취들을 정교하게 묘 사한 각종 조각과 은세공이며, 전통 천인 바틱(batik)으로 만든 화려 한 의상을 빼놓을 수 없다.

■ 보로부두르 사원과 프람바난 사원

불교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대하고 복잡한 건축물로 꼽히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수많은 탑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천연의 언덕 위에 바위를 쌓아 올려서 만든 것으로, 면적은 약 1만 2천㎡, 높이 약 31.5m이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네모의 5층, 원형으로 3층을 세워 모두 8층이 되게 하였고, 그 정상에 큰 종을 덮 어씌운 것 같은 사리탑(stupa) 모양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곳은 거대한 화산으로 둘러싸인 쿠두 평원의 중앙에 위치하며,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원의 불상과 부조 장식의 조각은 참 으로 뛰어나며 그 수법도 매우 섬세하다. 숲에 있는 승려, 연못 근처 의 부처, 사자와 코끼리의 그림, 그리고 집을 운반하는 말과 배의 모 습 등의 부조는 고대 자바인들의 관습과 생활상을 분명하게 보여주 고 있다. 불상의 다리를 만지면 행운을 얻는다고 하여 돌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려다가 어깨를 다치는 사람, 상처를 감수하고 목적을 이루어 어 린애처럼 좋아하는 관광객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된다. 여 3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원의 조각.

기에서는 이렇게 추억거리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건립자가 누구인지 는 분명하지 않으나, 1천 1백년 전 사일렌드라왕조의 사마라퉁가왕 재임 때에‘선(善)으로 쌓아 올려진 산’ 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에 견줄 만한 족자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프람바 난 힌두사원이다. 고을 이름을 딴 프람바난 사원은 메라피 화산의 동 남쪽 기슭, 족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17㎞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 다. 프람바난 사원은 3개의 사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에서 거대 한 불꽃 모양으로 중앙에 우뚝 솟은 시바 사원, 또는 로로 종그랑 사 원은 동남아 최대의 힌두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탑 안에서 시바상을 발견하면서 그렇게 부르게 된 이 사원은 높이가 47m이고, 밑동의 너 비가 34㎡나 된다. 시바 사원은 하단부, 중단부, 상단부 등 3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9


있는데, 하단부와 중단부는 인간의 욕망으로 둘러싸여 있는 속세를, 상단부는 신들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신전의 외벽을 장식하는 치밀한 부조는 고대 인도의 서사시‘라마야나의 이야기’ 를 약동적으 로 새겨놓은 것이다. 특히 연꽃 위에 서 있는 시바상은 불교와의 관계를 말해 주며, 관 능적인 두르가상은 전설로 전해지는 로로 종그랑 처녀의 저주받은 모습으로 유명하다. 프람바난 사원은 9세기 중반 산자야왕궁의 발리 퉁 마하 삼부 왕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부근에는 8세기경에 건조된 칼라산 물의 사원 등이 있어 개화한 힌두・자바 문화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건기인 5월부터 10월 사 이에는 야외극장에서 라마야나 발레 공연을 한다. 야간조명을 받은 프람바난 사원을 배경으로 한 야외공연은 우기의 실내공연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운치가 있다.

■ 왕의 휴식처 물의 궁전

‘아름다운 정원’ 이라는 뜻을 가진 물의 궁전(Taman Sari)은 왕(술 탄)의 휴식처이면서 사슴 사냥이나, 보트 놀이 등 여흥을 즐기던 연

희장이었다. 또한 국가의 정책을 구상하고 개정하기 위한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왕이 국책을 정할 때는 남쪽 바다의 여신인 칸젱라투기 둘(Kanjeng Ratu Kidul)과의 영적인 결합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이 회 의장은 영적인 힘이 미친다는 믿음 때문에 관람은 허용하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31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부조 장식이 돋보이는 족자카르타의 보로부두르 사원.

동문으로 들어서면 여인들을 위한 전통무용인 글라덴 연습장이 보 이고, 그곳을 지나면 술탄의 여인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는 수영장 이 나타난다. 수영장 남쪽으로 술탄의 침실이 있는 3층 건물이 있고, 이 건물 뒤에 목욕실이 있는데, 술탄은 혼자 목욕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외부에 있는 왕궁의 수로와 연결된 물의 궁전 인공호수 중간에 지은 건물 풀로 크농오(Pulo Kenongo)가 예사롭지 않는 것은, 크농 오란 왕실 정원에서 자라던 꽃나무의 이름으로 그 향기가 왕궁 밖 멀 리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풀로 크농오 안에는 침실, 거실, 바틱 제작실과 전통무용 공연장이 있었으며, 호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지붕은 도시의 경치와 아름다운 메라피 산을 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며, 지하 통로는 2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11


층 원형 우물로 연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의 궁전은 1758년 술탄 하멩코부오노 1세에 의해 지어졌으나, 1867년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이래 수영장만 복원되고 대부분 완전한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궁전 내에 바틱과 목공예 등 가내수공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 술가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족자카르타에는 이밖에 소노부도요 박물관과 디엥 고원 등이 유명 하다. 소노부도요 박물관은 왕궁과 북쪽 광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데, 1935년 네덜란드 건축가에 의해 전통 자바 건축양식으로 지어졌 다. 자바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좋은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신들의 자리’ 라는 뜻을 가진 디엥(Dieng)고원 은 고대부터 산악 숭배의 성지였다. 이 고원은 해발 2천m 높이의 화 산 칼데라에 자리하고 있어 주변에서 신기한 자연경관들과도 만날 수 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26㎞ 앞의 원노소보를 거쳐야 한다. 원노 소보와 디엥이란 고원지대는 중부 자바에서 버섯을 재배하기에 적당 한 온도를 가진 지역으로 버섯을 재배하는 기업이 많다. 이 지역의 콜룩 승차장에서 디엥까지는 1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족자에서 하루 코스로 이른 아침부터 서두르는 것이 좋다.

31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언어와 격언에 얽힌 에피소드 인도네시아 정착 초기에는 한국인 가정주부들이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는데 필요한 사전이나 회화공부를 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어 려운 점이 많았다. 한국인 가정에는 대개 1~2명의 가정부를 두는데, 어떤 가정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인도네시아 표준어가 통하 지 않아 의사전달이 어려웠다. 심지어는 주인한테 말을 잘못 가르쳐 주어서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은 내가 어느 교민 가정에 초청을 받고 갔다가 그런 사실을 발 견하고 바로잡아 준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말인즉 칼이 숟가락이 되고, 컵이 사발 이 되었다. 이런 단어들을 뒤죽박죽 섞어서 한국인 주부에게 알려 주 었으니,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를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보 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어느 부인이 호텔로 빨리 가야 하는데 말이 얼른 안 나와 마음이 급한 나머지 택시기사에게‘오랑 반약반약 티둘’하는 곳으로 가달 라.” 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차가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공동묘지 였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배운 대로 호텔을 오랑(사람) 반약(많이) 티둘(잔다), 곧‘사람이 많이 잠자는 곳’ 으로 표현한 것인데 운전기사 는 공동묘지로 잘못 알았던 모양이다.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이 현지어에 익숙하기 전에는 말실수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황당한 실수로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든 일 도 더러 있었다. 어떤 사람은 차량 이동 중에 에어컨이 작동이 안 되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13


자“창문을 열어 달라.” 고 부탁한다는 것이 그만“바지를 벗으라.” 고 표현하여 운전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부카(열라) 진델 라(창문)” 라고 해야 할 것을“부카(열어라, 벗어라) 츨라나(바지)” 라고 말을 잘못한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정장한 한국 부인이 손님을 앞질러 가려고“슈푸로미, 슈푸로미.” 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얼른 비 켜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본인은“실례한다.” (퍼르미시)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슈푸로미(라면)로 튀어나와 배꼽을 잡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한동안 식탁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300여개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대표 적인 종족이 순다족과 마두라족으로 이루어진 자바인이다. 자카르타 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타위족(자카르타 토종), 수마트라의 메단 지역 의 바탁족도 이에 버금한다. 술라웨시섬에는 부기수, 마나도에는 우중판당 종족이 주류를 이루 고 있다. 이중 중국 및 몽골인과 2차대전을 전후하여 일본과 한국인 의 피가 혼혈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부 마나도의 여인들의 피부는 한 국인보다 더 흰 경우가 많다. 성격 또한 활달하며 생활수준도 높은 편이다. 이곳에서는 참치가 잘 잡히고 향료와 코코넛 기름이 대량 생 산돼 수출될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 맥주 판매량이 제일 많은 곳 으로도 유명하다, 이리안자야에는 파푸아뉴기니아족이 살고 있는데, 원시인들이 남 아 있는 유일한 곳이다. 티몰쪽에는 포르투갈족과 암본족, 발리에 발 리종족이 있다. 발리인들은 근본적으로 온순하며 자기 고향을 지키 31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는 성향이 강하다. 암본과 누사 퉁가라에는 사삭족이 있으며, 칼리만 탄에는 다약족이 많은데, 다약족은 팔과 다리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자바인은 체격이 큰 편인데다 순하고 겸손하며 미인과 미남형이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과 수하르토 대통령, 6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중부 자바왕국이 있었던 곳의 쏠로인과 족자인들은 순박하며 웃음을 띤 사람들이 많으나 남자들은 때로는 무표정하여 속을 알 수 없는 경우도 흔히 있다. 쏠로 여인들은 아주 조용하며 부드럽고 고운 마음씨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조용하고 편한 여자를 아 내로 삼으려거든 쏠로 여인을 맞아들이라는 말이 자바의 남성들 사 이에 퍼져 있을 정도다. 이런 경우 쏠로의 여인들은“팅갈베레스.” 라고 하기도 하는데,‘팅 갈’ 은‘산다’ 는 뜻이고,‘베레스’ 는‘잘 끝내다, 잘 처리한다’ 는 의미 로, 한국식으로 말하면“끝내준다.” 는 표현이 된다. 매사에 조심스러 운 자바인들에게는“알론알론 아살 쿨라콘.” 이라는 일상적인 격언이 있는데, 이는 천천히(알론랄론), 확실히(아살 꿀라꼰)라는 것으로,“천 천히 해도 확실히만 하라.”(Slowly but sure.)는 뜻이다. 이런 격언에 서도 이 민족의 생활습성을 엿볼 수 있다.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자바인들은 커피를 마시더라도 굵은 설탕 을 여러 티스푼씩 넣어서 마신다. 나는 시골에서 처음 이 광경을 보 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설탕이 잘 정제되지 않아 당도가 떨어져서 그런 것이었다. 자바인들은“굴라아다 스뭇아다.” 란 격언을 자주 쓴 다. 굴라=설탕, 스뭇=개미, 아다=있다로 풀이 되는 이 말은‘설탕이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15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반드시 개미가 있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격언은 주위에 건수가 있으면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한 몫 끼려는 사 람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빗댄 것이다. 자바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격언 중에‘감팡 감팡 수사’ 라는 것이 있다. 이를 풀이하면,‘감팡’ 은‘쉽다’ ,‘수사’ 는‘어렵다’ 는 말이므 로 즉‘쉬운 것 같은데 실제는 어렵다’ 는 뜻이다. 가끔 이런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현지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수도 있다. 내가 경영하던 건설회사의 하청업자가 직원 기숙사를 건축 중이었 는데, 옆집에서 일조량을 막는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운운하며 문제를 삼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던 중 시청 담당부서에서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그런 요구는 무시하라는 의견을 보내왔다. 이런 경우 합당한 격언이‘안징 뭉공공 칼틸라 부르랄루’ 라는 것 인데, 이는‘개가 짖어도 장사꾼은 지나간다’ 라는 것이다. 우리 식으 로 설명하면‘개 짖는 소리는 듣지도 말라’ 가 되는 셈이다. 이것은 ‘개소리 말라’ 로 직역을 할 수도 있다.‘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라는 좀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예로, 골프 라운드 중에 플레이가 잘 되면 흔히‘운퉁 투루스’즉,‘이익(운퉁)이 계속된다(투루스).’ 라는 표현을 쓴다. 좋은 일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이에 화답하는 말이 대개‘카판(언제) 루기 (손해)’ 이다.‘언제 손해가 있겠느냐’ 인데, 배꼽을 쥘 만큼 크게 웃은

적이 있다. 이밖에‘담장이 농작물을 먹는다’ 로 풀이할 수 있는‘템복 마칸 타 남안’ 을 비롯하여 많은 격언이 있다.‘템복’ 은‘담장’ ,‘마칸’ 은‘먹 31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 ,‘타남안’ 은‘농작물’ 이니, 직역으로 앞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좀 더 실감나게 한국 속담에서 인용하면,‘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또는‘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다’쯤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재미있는 격언을 모아 풀이해 본 것이다.

▶ 므낭 자디 아랑 칼라 자디 아부 (Menang jadi arang kalah, jadi abu)

“이기면 숯이 되고 패하면 재가 된다.” 즉, 싸움에서는 이기든 지든 손해라는 말이다. Menang(므낭)=이긴다 jadi(자디)=무엇이 된다. arang(아랑)=숯 kalah(칼라)=패하다. abu(아부)=먼지, 재

▶ 삼빌 므늘람 미눔 아일 (Sambil menyelam minum air)

“물 뿌리면서 물 마신다.” 즉,‘일거양득’ 이라는 표현이다. Sambil(삼빌)=무엇 무엇을 하면서 menyelam(무늘람)=물 뿌리다 minum(미눔)=마시다. air(아일)=물

▶ 스프르티 안징 등안 쿠칭 (Seperti anjing dengan kuc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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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 같다.”즉, 항상 싸운다는 뜻이다. Seperti(스프르티)=무엇 무엇과 같이 anjing(안징)=개, dengan(등안)=무엇 무엇과 함께 kucing(쿠칭)=고양이

▶ 하리마우 마티 므닝갈칸 블랑, 마누시아 마티 므닝갈간 나마 (Harimau mati meningalkan belaang, manusia mati meningalkan nama)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을 남긴다.” 는 것이다. Harimau(하리마우)=호랑이. mati(마티)=죽는 meningalkan(므닝갈칸)=남기다 belaang(블랑)=색깔 있는 가죽 manusia(마누시아)=인간, nama(나마)=이름

▶ 아말 반약 하실푼 바구스 (Amal banyak hasilpun bagus)

“좋은 일 많이 하면 복을 받는다.” 는 의미. amal(아말) =좋은 일, 축복받은 일 banyak(반약)=많이 hasilpun(하실푼)=결과도, baik(바구스)=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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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 장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수하르토박물관에 걸린 낡은 한복 나는 아내와 함께 우연히 수하르토 대통령 박물관을 찾게 되었다. 1996년 2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영부인인 이브틴 여사가 세운 아 시아 최대 규모로 정식 명칭은‘뮤지움 푸르나 박티 페르티위’ 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로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32년간 인도네시아를 집권하였다. 1967년 수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은 후 천연가스와 석유 등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국 가 주도 경제 발전을 촉진, 집권 20년만에 1인당 국민소득(GDP) 70 달러에서 무려 1천달러로 크게 올렸다. 연평균 6%의 고속 성장률을 이끌며‘인도네시아의 아버지’ 로 불리기도 했으나, 친미・반공 노선

수하르토 대통령 재직시 외국의 정상들과 귀빈들로부터 받은 선물과 수집품으로 가득 채워진 뮤지움 푸르나 박티 페르티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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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 대통령의 재직 당시 모습.

을 내세운 강압정치로 원성을 사면서 국민들과 멀어졌다. 그는 2008 년 1월 27일, 심장과 폐기능 이상 등으로 작고했다. 자카르타의 중심 메르테카 광장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30분가량 달 리면 닿는 인도네시아 민속촌 앞에 자리한 수하르토박물관에는 수하 르토 대통령 재직시 세계 각국의 정상들과 유명 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과 개인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외국인들이 자주 찾 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이 7m, 너비 5m가량 되는 거대한 나무뿌리가 마치 기둥처럼 천장을 받치고 서있 는 대형 목조 조각이었다.‘라마 탐박’ 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인도 네시아 최고의 조각가들이 이슬람, 힌두, 불교를 상징하는 형상을 나 무에 부조로 새겨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헌정했다는 것이다. 박물관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1


을 세울때 이 목재조각을 정문을 통해 운반하지 못할 것 같아 아예 처음부터 건물을 작품에 맞춰 지었다는 일화를 남겨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층으로 된 박물관은 1층 입구부터 중간 왼쪽에 수하르토 대통령 재직 시절 여러 나라의 원수로부터 받은 훈장이 별개 동으로 나눠 진 열되어 있다. 2층에 오르자 여러 나라의 문화적 특색을 엿볼 수 있는 부스가 따 로 마련되어 있었다. 인도의 정교한 상아조각품과 보석함이며, 중국 의 도자기와 자수병풍, 일본의 자개장롱, 사우디아라비아의 가죽제 품과 낙타조각상, 아랍의 경전 등 국빈들로부터 기증받은 진귀한 물 품들이 적당한 촉수의 조명 아래 반사되고 있었다. 2층 중간쯤에 갔을 때 한국에서 보낸 신라왕관도 눈에 띄었다. 김 영삼 대통령이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함 께 진열된 마네킹의 한복이 너무 낡아서 신라왕관이 오히려 초라하 게 보였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옷깃과 옷고름도 얽혀 있었다. 한국 을 대표하는 한복 모양이 이 지경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관람 중에 내가 관리소장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아내는 우선 부스 속에 들어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한복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상징하는 옷이 습기에 훼손돼 볼품이 없으니 바꿔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관리소장은 기존의 것을 없앨 수 있는 규정이 없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 다. 우리가 새로 옷을 만들어 올 테니 바꿔 입히게 해달라고 계속 설 득하였다. 결국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수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32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박물관에 한복(마네킹)을 기증하고 나서. 왼쪽부터 저자, 박물관장, 민형기 대사 부인 이순자 여사와 아내. (1996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부스와 함께 남녀 한 쌍의 한복 나들이 옷을 새 것으로 바꾸고 영구 보전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냈다. 소품 은 민형기 대사 부인이 마련해 주었다. 1996년 8월이었다. 이를 계기로‘자카르타 포스트’ 지는 한국의 의복 문화에 대해 특 별히 소개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당초 이 옷이 완성되면 영부 인에게 직접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영부인이 사망했다 는 뉴스가 나오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우리의 기증품은 남녀 마네킹에 입혀 보전, 전시되고 있다. 그 뒤 로 박물관 안내원인 산토소 사스트로 씨는 한국관광객들이 방문하면 유창한 영어로 한복의 기증 유래까지 곁들여 설명해 준다고 하였다. 그후 세월이 지나면서 빛이 바래기 시작한 박물관의 한복을 또 한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3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기공식에서 교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서세호 무관 (퇴역 소장)과 저자. (1992년)

번 새 것으로 교체해 주었다. 그때가 2004년이니, 어느덧 몇년이 흘 러갔다. 앞으로도 여러 차례 갈아줘야 할 것이다. 이 박물관의 한복 을 교체해 가다 보면 우리 내외도 한복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뒷날 언젠가 우리 내외가 손자들의 손을 잡고 이 박물관을 찾아오게 되면 이렇게 말하리라. “얘들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먼 이국땅에 와서도 한복을 소중히 여기면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했단다. 너희들도 이 한복을 볼 때마다 민족과 조국을 잊지 말고 늘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기 바 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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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규모로 성장한 한국국제학교 1976년경 교민의 숫자가 몇백 명밖에 안 될 때는 한국 어린이를 위 한 정규교육을 할 수 없었다. 일부 교민 주부들이 자카르타 포종퐁안 개인주택에서 유치원과 한글학교 과정을 시작한 것이 한국학교가 태 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미화 5천 달러의 자금 지원과 자 카르타에 파견되어 주재하는 한국기업과 현지에서 사업하는 개인 기업인들이 모은 성금을 기반으로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고 비로소 교민들이 기다리던‘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가 설립되 었다.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현관에 동판으로 제작된 교사 신축 기부자 명단. 무궁화식품 명칭도 오른쪽 하단에 보인다. (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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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나화정 교장(왼쪽)에게 충남향우회의 장학금을 전달하는 저자. 양쪽은 최준영 교감과 민경희 부회장. (2002년)

물론 학교라곤 하지만 처음부터 정상적인 규모와 시설을 갖춘 것 은 아니었다. 자카르타 한국대사관 옆 현 교민회 사무실 자리에 전 학년 50여명의 학생이 모여 공부를 하기 시작한 후 1980년 초등학교 과정 1회 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교민사회의 중심적인 교육기 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민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 도 높아졌고 학생들도 점차 증가되었다. 1995년 11월 23일, 재인니(在印尼) 한국교민회가 주도하는 사단법 인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는 한국정부 및 이곳 진출 업체, 기타 단체 의 지원으로 대지 2만 1천 503㎡에 연건평 7천 509㎡의 건물을 신축 하여 이전하였다. 기공식(1992년 7월 16일)을 가진지 3년 4개월 만이 었다. 재외국민의 배움의 전당이 된 학교의 현관 벽에는 건물을 확 장・신축할 때 도움을 준 한국내 대기업과 현지 진출 기업체 명단이 32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동판으로 새겨져 보존되고 있다. 나도 무궁화식품 명의로 소액의 성 금을 내었다. 이제 개교 30년이 넘는 연륜과 국제학교로서의 규모를 갖추게 된 이 학교의 진학률은 전원이 한국의 대학에 합격하는 수준이다. 초중 고 전교생 1천 2백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학교장은 한국의 교육인적 자원부에서 파견하며 교사도 130여명이나 된다. 교민들이 운영하는 학교로서는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인정을 받고 있어서 인 도네시아 교민들이 이 학교에 거는 기대와 자부심이 대단하다.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퍼진 한국식품 무궁화유통은 한국 상품과 잡화까지 수입하여 도소매, 유통까지 겸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1980년대에는 인도네시아 전역에 일본 과 중국에서 수입해오는 상품이 시장의 주요 부문을 거의 독차지하 여 한국 상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시절에 무궁화유통이 한국 상품을 현지에 공급하게 되면서 한국 상품의 인지도가 점차 높아지 게 되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 상품이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상품의 진열대에까지 한국 상품이 쌓이 고 있다. 앞으로는 머지 않아‘거의 매일’ 이 아니라‘매일’몇 컨테이 너씩 수입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전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한국 브랜드의 가치가 한층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7


저자는 한국 식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한인 야구 동호인들을 모아 ‘무궁화 코리아나 야구단’ 을 창단하였다. (2007년 11월)

높아져야 한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의 상품 자리를 한국 제품이 메워 나가면서 한국 붐을 일으키고 장차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한국 물품을 선호하게 만드는 기반 조성이 요구된다. 그래서 나는 2억 4천만 명이나 되는 인도네시아의 엄청난 소비층 을 상대로 이른바‘PRO 한국’ 을 지향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 조하고 싶다. 이를 테면‘친 한국 소비자’ 를 만드는 전략이다. 그러 기 위해서는 물량을 공급하되, 다른 경쟁 제품보다 질도 좋지만, 빠 르고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가격에 차이가 나는 경우에는 무엇보다 품질의 차별화가 중요 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친절을 생활화하여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시되어야 할 것은 한국 상품을 팔면서 조 32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국의 이미지도 판다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무궁화유통이 칭찬 을 받거나 욕을 먹으면, 이는 한국 사람이 칭찬을 받거나 비난받는 것과 직결되므로 나는 매사에 한국인을 대표한다는 자세로 임했다. 홍보할 기회가 오면 주변 여건을 가리지 않고 적극 활용했다. 예를 들면, 야구단 창단을 들 수 있다. 인도네시아 한인 야구동호 회를 확대하여 2007년 11월‘무궁화 코리아나 야구단’ 을 창단하게 되었던 배경이 그렇다. 또한 2004년 6월에는‘한국상품문화전’ 을특 별기획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무궁화유통 본점과 다이야몬드 화티마 와티점에서‘한국상품문화전’ 을 개최하여 효능과 품질이 우수한 인 삼류, 김치 등 한국 식품을 인도네시아 소비자들이 직접 맛볼 수 있 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아울러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태권도 시범과 사물놀이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문화와 전통예술을 직접 실감하

한국상품문화전시회에 참석한 인사들. 우측부터 타룹 장군, 저자, 이원종 충북지사, 윤해중 인도네시아 주재 대사, 권영관 충북 도의회 의장, 양인규 싱가포르 무역관장, 디아몬 중역, 아내. (2004년)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9


게 하였다. 이 특별전시회에는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와 한인회 지도자들은 물론, 전 대통령 자문 국방위원장인 타룹 장군과 이원 종 충청북도 지사, 권영관 충북도의회 의장, 천성호 동조그룹 회장, 양인규 농수산물유통공사 싱가포르 지점장 등 내빈들이 참석하여 행사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이날 윤해중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대사는 축사를 통해“예로부터 인삼 및 인삼 제품류는 한국산이 최고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 되어 왔고, 최근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동남아를 강타할 때 도 한국 김치의 효능과 우수성이 널리 공인된바 있다” 고 강조하면서, 주최 측인 무궁화유통이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제 교류에 많은 기 여를 해오고 있다고 격려의 말도 해주었다. 아울러 이 전시회를 계기 로 양국 민간의 교류와 이해 증진에도 더욱 기여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기대를 표명하였다.

무궁화유통이 개최한 한국상품전시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자카르타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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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유통의 식품 전시회에 앞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농수산물유통공사와 마타하리 그룹. 왼쪽부터 양인규 아태팀장, 우상대 지사장, 윤장배 사장, 김호영 대사, 저자, 카멜리토 중역. (2009년 4월)

이 일이 성사된 데에는 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의 도움이 컸다. 이 행사 후 우리는 메가와티 대통령 관저에도 한국의 김치를 선물로 보 냈다. 예상밖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는 한국 식품의 이미지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한국상품문화전 이후 눈에 띌 만큼 현지인들의 한국 상품과 식품 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또한 무궁화유통 에 국한해 보더라도 제2의 도약을 기대할 수 있는 청신호로 느껴질 만큼 좋은 조짐이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의 것을 성의를 다해 홍보 하는 가운데 현지에서 성실히 활동하다 보면 상상밖의 엔도르핀이 샘솟는 순간의 기쁨을 만끽할 때가 많다. 어쩌면‘작지만 아름답게!’ 란 표어를 새삼스럽게 읊조리게 한다. 한꺼번에 많은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작은 한 가지라도 충실하게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1


해나가다 보면 승산이 보인다는 뜻이다. 비록 작지만 어렵게라도 이 루어지는 목표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아오는 동안 터득한 삶의 지혜라고나 할까. 별로 색다른 것은 아니 지만 이따금씩 되뇌어보는 생각이다. 그 동안 내가 일궈온 사업을 꽃으로 비유하자면, 무궁화가 이제 한 창 피고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비행기로 동서남북으로 7시간이 걸릴 정도로 큰 나라이지만, 인도 네시아에는 이리안자야의 원시인 촌락까지 한국 상품이 안 가는 데 가 없다. 향후 자유무역협정(FTA)이 완전히 실행되면 물동량이 기하 급수적으로 증가될 수 있어 앞으로 한국 상품의 인도네시아 시장 진 출은 보다 밝아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에는 큰 거리감없이 왕래하고 있다. 현재 양국간의 업무는 당일 처리가 원칙이다. 물동량 도 급한 것은 어떻게 하든지 당일에 해결하도록 밀어붙이고 있다. 오 늘날에는 선박이라도 10일 내에 운송이 완료되는 시절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좁아져서 먼 곳에서 산다는 느 낌이 없어졌다. 추진하는 사업이 한류열풍으로 이어져 인도네시아 시장에 한국 식품의 홍보 판매가 극대화됨으로써 모국의 경제성장에 도 기여할 수 있는 기틀이 되어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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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동포 위한 기성세대의 역할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는 2009년 현재 48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 다. 한국의 1천 2백여 기업이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투자 비중 또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크다. 자원이 풍부한데다 노동력이 풍부하고 저렴한 편이어서 많은 부문에 투자 가치가 있다. 선배 세대들이 현지에서 쌓아놓은 신뢰의 발판 위에 차세대는 더 많은 주요 기간산업과 자원 부문까지 투자하여 국가경제를 돕는데 일조할 것으로 믿어왔는데, 2009년 현재 벌써부터 여러 부문에 걸쳐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소 부담이 되는 일이기는 했으나, 2007년 7월 29일 각 분야의 유 수한 몇분의 전문가를 초빙하여 차세대를 위한 제1차 무역스쿨을 운

2008년 인도네시아 제2차 차세대무역스쿨에서 강의하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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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차세대무역스쿨 수료식. 임원진과 김춘호 건국대 부총장, 코트라 김병건 관 장, 양영연 수석 부회장, 한정국 부회장, 최동욱 부회장, 김재욱 이사, 이승민 고문, 배응식 부회장, 엄정호 반둥 한인회장, 김호영 대사 등의 모습이 보인다. (2008년)

영하였다. 그리 간단한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나 다행히 성공리에 마 칠 수 있었다. 내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세계해외한인무역 협회(OKTA) 인도네시아 지회가 주최한 이 행사는 기성세대들의 경 험과 해외 현지에서 얻은 지식을 신세대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열게 된 것이다. 나는 수강자들에게 격려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경제를 움직이는 큰 세력으로 성장 한 것을 교훈으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한국을 대표한다는 긍 지와 확고한 신념을 갖고 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 부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시종을 지켜본 부모들은 40년 인도네시아 한인 역 33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차세대무역스쿨에서 분임 토의하는 장래의 CEO들. (2008년)

사상 처음 있는 좋은 산교육이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고무되어 우리는 다음해인 2008년에도 50여명을 선발하여 7월 25일부터 3일 동안 제2차 차세대무역스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 차세대무역스쿨 교육 프로그램은 그 결과를 정밀 분석하여 문 제점을 보완, 개선하여 발전적 과정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나는 이와 같은 유형의 교육 과정이야말로 외국에 나와 있는 54개국 한인 사회 OKTA 회원과 차세대 공동체의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함은 물 론, 정서적 교감과 친교 또는 상호 사업에도 음양으로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다. 일찍이 기성세대들이 낯선 땅에 와서 겪은 역경의 체험과 성공담 을 차세대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교육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게 된 것 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우리 세대가 마땅히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5


폭동 이겨낸 한국 교민의 의지 1998년 5월 16일, 미국의 CNN 뉴스에서 수하르토 정권의 붕괴를 예고하는 보도가 나왔다. 장기집권으로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된 가 운데 미국의 CNN 뉴스가 이 사실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뒷날 노 벨평화상 수상자가 된 동티모르 벨로 추기경이 CNN 기자들과의 인 터뷰를 통해 수하르토의 독재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한국 교민들은 소요에 대비하여 대사관 3층에 모여 숙의하고, 비상시에 지역별로 한국인 공장과 인근 호텔, 한국학 교를 지정하여 집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현지에 부임하자마자 일 을 겪게 된 홍정표 대사는 교민들의 비상식량부터 체크하였다.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무궁화유통은 1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쌀과 라면을 비축했다고 보고하였다. 5월 16일 저녁, 32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수하르토 대통 령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하루만인 17일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폭동 이 일어났다. 실각한 수하르토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세력 간에 벌어진 충돌이었다. 일부에서는 폭동의 배경에 대해 수하르토 측이 조종한 것이라는 음모설이 나돌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들과는 상관없는 약탈자들이 나타나 혼란을 부추기 는 양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주요 도로의 차량을 방화하고 슈퍼마 켓과 상점들의 물품을 탈취했다. 어느 슈퍼몰에서는 입구에 휘발유 를 부어놓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해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 3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 사방을 돌아보니 여러 군데 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폭동 전에 모두 인근 국가로 대피하여 안전했고, 일부 남은 일본인들은 지정된 호텔에 모여서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공항 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하던 날도 일본인들은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후일담을 남겼다. 한국 정부는 대한항공을 증편하여 비상 수송에 임했으나, 늦게 도착한데다 수송기 수가 충분치 못해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다시피하였다. 5월 17일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폭동이 시작된 날이었 다. 아침 일찍부터 자카르타 중국인 상가와 슈퍼몰 상가에는 마치 사 전에 계획이나 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방화가 시작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프리 부미(Pribumi)란 표시를 해놓은 원주 민의 집은 폭도들이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방화와 겁탈은 사 전에 주택 담장에 페인트나 스프레이로 표시해 놓은 건물에서 이루 어졌다. 겁탈은 거의 중국 여성이 대상이었다는 말도 떠돌았다. 자카르타에는 로스앤젤레스처럼 외벽에 마피아식 낙서가 많다. 이는 360년 간에 걸친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부터 성행하여 온 일반 적인 행위다. 이 같은 소요 속에서 공항에서는 고급 승용차를 헐값 에 양도하고 떠나는 중국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일부는 5년 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파손되어 방치된 건물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피해를 보는 것 이 중국인 상점이었다. 옛날부터 일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중국인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7


한국 교민들의 긴급 탈출에 대비하여 저자는 계열사인 부미관광으로 하여금 공항까지 셔틀버스를 운행케 하였다. (1998년)

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해 왔다. 이런 현상은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주변을 돌보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경제윤리 자세가 미흡한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원주 민들로부터 미움을 사기 일쑤여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때는 화를 입 게 마련이었다. 이때부터 많은 중국인이 이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이때 교민 대표들은 대사관에 모여 폭동에 대비해 많은 의견을 교 환하였다. 시급한 문제는 교민을 수송하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부터 나는 자발적으로 오랜 친구인 전 육군 참모장 타룹 중장의 도움으로 긴급히 배정받은 무장군인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하여 공항으로 한국 교민들을 운송하는 일을 맡았다. 버스 임차료는 물론 나의 몫이었고 인솔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 무궁화유통 1층에 자리잡은 부미관광회사는 항공권을 발급하느라 3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일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선 교민들로 인해 회사 안팎은 발을 들여 놓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형편이니 직 원들은 사무실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밤늦게까지 교민들의 귀국행 을 도와야 했다. 밤새 공포로부터 탈출한 아낙네들이 새벽녘에 우리 건물로 몰려드는 바람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무궁화유통이 보유한 라면이 바닥날 때까지 비상식량을 이들에게 제공하였다. 당시 땀을 뻘뻘흘리며 라면을 끓이고 나눠준 직원 백정희 씨와 곽 씨 아줌마의 따스한 손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그들은 입을 모은다. 이때는 설령 항공권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공항까지 나가는 일이 걱정이었다. 도중에 일부 포악해진 현지인들이 도로를 점령하여 구 타하거나 약탈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공항까 지의 운송은 적지에서의 탈출 작전을 방불케 하였다. 일부 아낙네들은 막힌 길을 우회하느라 골목길을 헤매다가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이런 험악한 사태를 알 리 없는 한 교민은 서울 을 다녀오다가 노상에서 약탈을 당한 뒤 가까운 군부대에 들어가서 야 겨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아울러 교민들의 식량 부족도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를 예상하여 긴급히 다량의 비상식량을 추가로 확보했다. 이는 식량을 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나온 비상 조치였다. 5월 18일에 이르러 폭동은 방화, 약탈, 겁탈 등으로 이어지는 형태 로 나타났다. 큰 길가 상점은 폭도로 변한 과격 시민들의 방화로 거 의 화염에 휩싸였다. 폭력배들이 거리를 질주할 때는 군인들도 함부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9


로 사격할 수 없어 위협적인 몸짓이나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무궁화유통 건물 옥상에도 언제 폭도로 변한 무리가 들이닥칠지 모 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이런 위급사태에 대비하여 우리도 지붕을 통한 탈출 계획까지 세우고 전개되는 상황을 예의주시해야만 하였다. 저녁때가 되니 회사로 폭도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곧 이어 근처에 있는 시장이 불타고 회사 건물에 불을 지르겠다는 협 박 전화까지 걸려왔다. 문자 그대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진 긴급 상황 아래서 나는 동네 주민들의 도움으 로 회사 보유 차량을 모두 그들의 주택에 대피시킬 수 있었다. 동네 인력거꾼들이 회사 건물을 지켜주고, 젊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24 시간 경비를 맡아 주었다. 덕분에 회사가 무사했다. 정말 고마운 동 네 이웃사람들이었다. 내가 거듭 고맙다고 말하자 주민들은“당신이 우리를 도와주었으 니 우리도 당신을 도운 것일 뿐.” 이라고 화답하여 나를 감동시켰다. 내가 동네에서 인심을 잃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 한 일이었다. 훗날 한 TV 인터뷰에서 이런 도움에 대한 일화를 소개 한 적이 있었다. 폭동 사건 이후 나는 더욱 동네 이웃, 특히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 랑 나눔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며, 물질과 마음으로 도와야겠다는 결의를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다. 소요사태가 더욱 심해지자 무궁화유통은 통합군사령관의 배려로 정문 앞에 소형 막사를 설치하고 무장 군인들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 다. 아울러 나는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최악의 사 34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인도네시아 폭동 당시 특공대원의 보호 아래 한인회 사무실을 방문한 뒤 양시환 사무국장에게 교민용 비상식량을 전달하는 저자. (1997년 5월)

태에 대비하여 직원들에게 구체적 행동지침을 알려주었다. 만일 폭 도들이 회사로 몰려와 방화를 하려고 든다면 최대한 만류하되, 저지 하기 어려울 때는 매장에 있는 물품을 모두 방출하여 이웃 주민들에 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 한편, 몇몇 친분 있는 회사 사장들에게는 사태가 악화돼 장기 화될 것 같으면, 보안대와 정보부의 친분 있는 현지인에게 회사와 재 산을 다 맡기고 떠나자는 제의를 해놓기까지 하였다. 통합사령부의 참모장인 친구 타룹 장군으로부터는 위급할 때 자신의 집에 와서 기 거하라는 권유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당시의 위급한 상황은 말로 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수하르토가 실각한지 이틀째가 되는 5월 18일이었다. 소요사태가 다소 가라앉기는 했으나 일부 건물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1


자스리 마린 헌병사령관에게 한국 교민의 신변안전을 부탁하는 저자. (1997년)

있었다. 나는 밤새 비상식량을 준비하며 출국하지 못한 채 공포 속에 서 굶고 있을 교민들을 생각하니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힘이 닿는 사람부터 먼저 나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부터 무장군인(특공대원)의 보호를 요청한 뒤 밤잠을 설 치며 준비한 비상식량을 트럭에 싣고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대사관의 요청에 따라 곧바로 한인회관으로 차를 몰고 갔다. 비로소 대기 중이던 교민회 양시환 사무국장에게 라면을 전달 할 수 있었다. 회사로 돌아오니 새벽녘에 린치를 당해 간신히 무궁화유통 뒷문으 로 피신한 몇명의 교민 아낙네들이 온몸이 늘어진 상태로 누워 있었 다. 공포와 아픔과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나 마 무궁화유통은 위험한 소요사태의 한복판에서 피난처가 되고 있었 3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다. 당시 교민들의 심정은 목숨만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한국 에서 보내는 항공기에 오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엇보다 교민에게 는 안전이 제일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인도네시아 군 병력 의 보호가 최선책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누구와 상의할 겨를도 없이 연락이 닿는 대로 그 동안 가깝게 친분을 맺어온 군 장성들과 접촉하여 협조를 요청키로 하였다. 그리 하여 대사관 홍은표 공사와 함께 자스리 마린 헌병대 사령관 집무실 로 찾아갔다. 우리는 한국 교민들의 신변보호를 간곡히 요청했고, 고 맙게도 마린 장군은 적극 돕겠다는 확약을 해주었다. 대사관과 한인 회 측은 교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인도네시아 정부와 군의 안전보 호 약속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5월 18일 저녁부터는 인도네시아를 떠나 김포공항에 내려 안도하 는 교민들의 모습이 한국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 렇게 광풍이 휘몰아친 자카르타의 5월도 다 지나가고 있었다.

■ 군 인맥 활용해 교민 신변 보장받다

자카르타 지역을 휩쓸었던 폭동이 지나간 지 1년이 되었으나 그 여진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더욱이 인도네시아의 총선은 이 런 분위기에 자칫 불을 댕길 수 있는 요소가 강했다. 그래서 개표 과 정에서 일어날지 모를 만일의 소요사태에도 대비해야 했다. 이는 지 난해 5・17 폭동을 겪으면서 배운 학습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에는 통합군 참모장인 타룹 중장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기로 하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3


교민들의 안전조치를 약속해준 수푸랍토 수경사령관(군복)과 타룹 대통령 자문위원(왼쪽 두 번째), 저자와 김웅남 공사. (1999년)

였다. 대사관 김웅남 공사(후일 시드니 총영사 역임)와 자카르타 수도 근교까지 관장하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방문하고 자자 수파르만 사령 관(소장)에게 교민의 안전조치를 부탁하였다. 김웅남 공사와 동행한 자리였다. 한국인들이 병력 지원을 요청할 경우, 적극 지원해 주겠다 는 약속과 함께 사태가 위급할 때에 연락이 닿도록 부관(중령)의 전화 번호까지 적어 주었다. 이 전화번호는 ‘한인뉴스’ 1999년 5월호에 게 재하였다. 많은 교민이 위급시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2년이 흘렀는데도 자카르타는 비교적 안정된 지방과는 달리 정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자카르타 근교 치트룹 지역엔 떼강 도가 한국인 공장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데다 금고까지 탈취해가는 사례도 있었다. 재발 방지 차원에서 우리는 전국 헌병대의 비상연락 3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망을 이용할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하기 위해 또다시 정래현 정무공 사와 함께 자스리 마린 헌병사령관을 찾아갔다. 여기에서 받은 비상 연락망도 대사관을 통하여 교민들에게 전송되었다. 폭동이 일어난 지 어느새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그날을 회고하 면서 나는 새삼스레 인생의 교훈에 대해 다시 되새김질하게 되었다. 어느 나라나 한 지역에 오래 거주하다 보면 그 동네 토박이로 여겨 지게 되겠지만, 외국인이 가까운 이웃으로 인정받기란 그리 쉽지 않 다. 그런데 다행히 평소에 보인 격의없는 언행과 도움을 주는 선한 이 웃의 자세로 가까이 한 덕분에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저 좀 있다고 잘난 척하는 외국인이 아니라, 인도 네시아 말로 인사와 농담까지 건네는‘털털한 이웃 인사’정도로 대 해준 우리 동네 노인, 어른들과 아낙네, 청년들이 고맙기만 하다. 사실 시골에서 상경하여 동네 처마밑에서 기거하는 인력거꾼은 물 론, 주변의 수해 이재민들에게도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종교 가 다를망정 구역 내의 이슬람사원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 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현지민의 애로사항을 알게 되고 형편을 안 이상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를‘동네의 유지’ 쯤으로 받아들여준 셈이었다. 그러나 내가 남을 돕는 과정에서 한 가지 깨우치게 된 것은 성급한 도움은 오히려 후회를 자초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98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돼 가자 당 시 가까이 지내온 공수특전대 대장인 아굼 구멜라 준장(그후 대장 예 편)에게 그냥 우정의 표시로 운동화 두 트럭분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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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후 나는 이 일이 매우 신중치 못한 처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수출 재고품을 염가로 구입했던 터라 신발의 짝이 맞지 않는 것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발을 연 병장에 풀어놓곤 군인들이 골라가게 해 당장엔 눈에 띄지 않았겠지 만, 짝이 맞지 않아 불만을 털어놓는 군인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마음에 걸렸다. 사전에 확인해 보냈어야 했다. 지금 도 아굼 장군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는 아무런 불만 이나 꼬집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미소로 넘어 갔지만, 당시 내 마음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일은 나에게 참으로 귀한 교 훈이 되었다.

■ 현지 군인들과 맺은 인연

나는 유독 인도네시아 군인들과는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공수특전사령관과는 연속 3대째 가까운 사이로 지 내게 되었다. 군 타라 특전사령관(베이징 대사 역임)에 이어 타룹 사령 관(그후 대통령 자문위원), 아굼 구멜라 사령관(대장 예편, 교통부 장관 역임, 인니재향군인회 회장)의 순으로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중에도 28년간 우정을 나눈 아굼 장관과 타룹 대통령 자문위원 과는 가족까지 서로 왕래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타룹 중장은 공수특전단장, 이리안자야 야전사령관, 육군 작전사 령관과 통합군사령부 참모장을 지내며 하비비, 구스두르, 메가와티 3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친구인 타룹 중장의 통합군사령부 참모장의 취임을 축하하며.(1995년)

정부 내에서 대통령 군사담당 자문역을 맡아 왔다. 그는 공수특전단 부사령관 시절부터 지인이 되어 많은 후배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 다. 그 가운데 자스리 마린이란 헌병 중령이 있었다. 그는 요도요노 대통령의 육사 동기생으로, 아들 종헌과도 골프 실력을 겨루는 라이 벌 사이가 되었는데, 진급을 거듭하여 빠른 기간에 헌병사령관이 되 었다. 타룹 장군이 하비비 대통령 자문위원일 때는 특별히 나에게 조 언과 도움을 주기도 했다. IMF로 인도네시아에 자금줄이 묶이자 채무가 너무 많아 당분간 자 금의 유입이 어려울 것을 예측, 방향을 진단하고 대책을 세우도록 조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7


언해 주었다. 나도 그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정책적 제언이나 자문을 해주기도 하였다. 특히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평통자문위원으로서 북한문제, 남북한 관계에 관한 내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그래서 한번은 그에게 한반도 정책의 중요성과 평화관계 설정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안하였다. 그때는 남북한의 대화가 어려웠던 시 절이어서 나는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의 입장에서 북한과 외교관계 를 맺고 있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교 량 역할을 담당해 줄 수 있음을 강조했다. 나의 진지한 제안을 받은 타룹 자문위원은 대통령에게 이를 건의 한 바 있었다. 메가와티 정권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 로 북한을 방문하는 계획을 세울 때‘인도네시아의 교량적 역할’ 의 중요성을 부각함으로써 방북 실현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가 국정자문회의때 이 제안을 공론화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인 친분과 상호 신뢰 속에 갖는 의견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 감하였다.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로 우정에 대한 예의 를 표시한 바 있다. 메가와티 대통령이 한국을 순방할 때는 나도 교 포 경제인의 일원으로 양국 경제인 모임에 참여하였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전 통합군사령부 참모장이었던 타룹 장군은 1999년 총선 개표 과정의 소요사태에 대비하여 교민의 안전 을 부탁할 때도 부하였던 수도경비사령관 자자 수파르만 소장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에 앞서 수하르토 대통령 하야 직후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여 치 3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스리 마린 헌병사령관을 방문하여 한국인 신변안전 대책을 건의한 저자와 정내권 한국 대사관 공사, 아들 종헌. (2001년)

안이 불안에 빠졌을 때 교민들의 신변안전을 도와준 것도 친구 타룹 장군의 후배인 자스리 마린 헌병사령관이었다. 2001년 12월 7일에도 망설이지 않고 다시 그를 찾아 가게 된 것은 오랜 친구, 격의 없는 사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까지도 한국인이 경영하는 공장에 가끔 떼강도 사건이 일어나고 있 어서 그의 도움은 아주 큰 힘이 되었다. 1980년 한국의 개천절에는 통합군 사령관과 주요 장관을 초대한 ‘한국의 날’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한국대사관이 주최한 이 행사 는 매년 자카르타의 힐튼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주로 열렸다. 이때 나는 일반 복장을 한 현지인과 만나게 되었는데, 3명의 일행 가운데서 유난히 눈동자가 또렷하고 짧은 머리의 한 젊은이와 통성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9


명을 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아굼 구멜라라는 현역 중위였다. 그 러니까 당시 이 청년 장교는 다른 2명의 젊은이와 함께 고위 장성을 수행하기 위해 온 보좌관이었던 것이다. 나보다 세살 아래였으니, 그 때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바로 젊은 위관장교가 뒷날 대장이 된 인 물이다. 이 장교가 수행한 상관이 베니 부르다니 장군으로서 당시 통합군 사령관이었다. 이 분은 후에 초대 한국주재 총영사가 되었으며, 한국 말을 약간 구사할 줄 알았다. 인삼을 보면 한국말로“몸에 좋아요!” 라고 설명할 정도였다. 그와는 뒤에 몇 번 더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아굼 구멜라 장교와 친해지면서 다른 군인들과도 사귀게 되 었다. 이 친구의 주특기는 정보를 분석, 판단하는 일이었다. 그가 대위 시절에 나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여기저기 부지런히 뛰던 무렵이었다. 당시 자카르타에 주재하는 한국인은 1천명이 채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욕심에 이 친구의 이름을 빌려 형식상의 사업 파트너 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자기는 군인의 길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사 업목적으로 명의를 사용할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 미스터 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 능력이 닿는 한 적극적으로 도 와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나는 현역인 친구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한 행동이 부끄러웠다. 그 래서 거절당한 섭섭함보다는 오히려 어려울때 적극 돕겠다는 말에 신뢰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그후 아굼 구멜라는 변함없는 우정을 보 여 주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바람막이 역할을 해준 참으로 3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아굼 구멜라 대장이 메가와티 정부의 교통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하던 날 그의 집을 방문하여 축하와 함께 환담을 나누는 저자. (2002년)

소중한 존재였다. 소령 시절, 그는 수경사의 정보담당관으로 보직을 받아 근무한 적 이 있다. 이때 그의 메모 한 장으로 이곳에 외상 수출하였으나 자금 회수가 안 돼 나에게 어려움을 호소해온 서울 친지의 어려움을 해결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지방 어느 정보담당관의 수고로 지독한 중 국인 빚쟁이의 소재를 알아내 돈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후 작은 교 통사고와 같은 사소한 일에도 자신의 보좌관을 경찰국으로 보내 조 치해 주었다. 그의 골프 실력은 싱글 수준이었다. 중령이 된 그와 라운딩할 때에 는 유머와 적절한 위트가 따르게 마련이어서 언제나 즐거웠다. 내가 마지막 퍼터로 홀인할 때는 홀 속에 미리 지폐를 집어넣고 상대편이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51


게임에 이길 것을 알리는 등 상대방에게 기쁨을 더해 주는 유머와 행 동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나는 그가 중령일 때도 공수특전단장, 부단장과 자주 만나 어울렸 다. 이렇게 그는 나에게 따뜻한 마음과 정을 줌으로써 남달리 호감을 갖게 하였다. 또한 나는 그로 인해 알게 된 공수특전단장, 부대장과 도 가까이 지냈다. 아굼은 중령때 수경사 보안과장, 수마트라 람풍지역 사령관을 지 냈다. 자카르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는데, 그의 지역사령관 취임 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대사관 이상산 참사관과 함께 방문했던 기억 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처럼 뚜렷하다. 그 뒤 보안사 1국장으로 전보 발령받아 진급까지 하였다. 공수특전단장은 퇴임 뒤 주중대사로 부 임하였고, 차석인 타룹이 준장 진급과 함께 특공단장이 되었다. 나는 이때도 타룹의 집무실을 찾아가 축하해 주었다. 그는 나보다 한살 많 았으나 마치 죽마고우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정치 현실은 군인이 정치에 참여하고 육군이 경찰국까지 지휘하는 상황이어서 외국인인 나는 음으로 양으로 그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한국의 역대 대통령 국가 원수의 외국 방문은 교민들의 지위를 높이는 계기가 됨은 물 론 쌍무협정을 통해 상호 국익을 증진하는 국가간의 중요한 행사라 3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할 수 있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뵌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 등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 석하기 위해 발리에 왔을 때 교민 대표자와의 환담 자리에서 잠시 뵌 적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자카르타 만다린 호텔에서 가진 교 민들과의 만찬 모임에는 경제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나도 교민 경제 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초대받아 헤드 테이블에 앉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를 회고해 보면, 신문기자 출신이라던 모 상사의 지점장은 신 문기자 행세를 하며 교묘히 보안요원을 피해 대통령에게까지 접근하 는 용감성(?)을 발휘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또 발언 순서를 정하 지 않아서 그런지 산림업계를 대표해 나온 모 회장은 다른 교민들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독대하다시피 혼자서 길게 발언하여 눈총을 받 는 일도 벌어졌다. 그런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악수해 본 대통령 가 운데 전두환 대통령의 손이 가장 크고 두툼하며 힘이 있었다는 느낌 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자카르타 방문 때는 영부인이 한국부인회를 찾았 는데, 누군가 뒤에서 갑자기 무슨 서류를 전달하려 하는 바람에 경호 원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마침 아내가 부인회 회장 시절이어서 각별 히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여간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어느 부인이 청와대에 진정서를 낸다고 벌인 행동이었다. 내용인즉, 국가 공무원이나 상사주재원 또는 정식 투자자의 직원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53


가족만 허용되는 자녀 대학특례입학을 일반 개인사업자나 교민자녀 에까지 확대하여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뒤 이 건의문이 효력을 봤는지 일반사업자 자녀도 한국 대학입학 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장기 집권과 부패로 지탄받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국빈자격으로 방문(1994년)하여 이곳 샹그릴라 호텔에서 경제인, 한 국대표자들과 오찬회를 가졌다. 이날 김 대통령은 연설하는 가운데 “나는 지금까지 정치자금을 10원 한 장 받은 적이 없다.” 고 역설하였 다. 이는 수하르토 대통령을 빗대어 한 연설로 오해를 받을까봐 참석 자들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통역이 그 대목을 빼버려 무사히 넘어갔다. 김영삼 대통령 얘기를 하다 보니, 아내 박은주가 국민훈장 석류장 을 받은 일이 새롭게 떠오른다. 아내가 재 인도네시아 한국부인회 회 장직을 맡고 있던 1995년 12월 말일이었다. 대한민국의‘사회분야 발전에 진력하여 국민복지 향상에 이바지했다’ 는 공로로 김영삼 대 통령 명의의 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나름대로 고향과 조국, 인도네시아에서 불우이웃과 노인 보살피기, 장학금 지급, 심장병 어린이 수술 돕기 운동 등 사회 복지 활동을 꾸준히 해왔는데, 이 점을 한국대사관과 한국 정부가 평가해 준 셈이다. 2003년 10월 6일 노무현 대통령의 발리 만찬 간담회 때는 격식을 가리지 않는 노 대통령의 인사말로 좌중에 폭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대통령이 서두에“인도네시아의 더운 나라에 살고 계시는 여러분들 35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ASEM 정상회의 참석차 발리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부처와 민주평통자문위원단의 일원으로 간담회에 참석한 저자. (2003년)

은 얼굴이 까무잡잡할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얼굴이 빤질빤질하 다.” 는 덕담으로 시작하여 간담회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나갔다. 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몇 분의 대통령과 상면하면서 이런 생 각을 하게 되었다. 외국에 국빈으로 방문할 때는 의례적으로 끝날 게 아니라 에너지 개발이라든가 자원 확보 등 보다 규모가 큰 장래성 있 는 프로젝트를 마련하여 쌍방의 이익을 모색하고 합의하는 모습을 내외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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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 장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흠 없는 성공의 열매를 따기 위하여 인생에 있어서의 성공이란 일생 동안 각자가 맡은 분야에서 만족 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을 때의 가치를 말한다. 성공이란 단어는 누구 나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를 성공의 잣대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비 록 큰 부를 축적하였더라도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면 이는 진정한 성공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큰 부를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정이 화목하고 자녀 교 육을 잘 시켜 좋은 혼처 만나 후손까지 융성하게 됐다면 이 또한 성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준을 잣대로 삼을 때, 권력과 부와 가족의 화합이 곧 성공의 조건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일부 성공한 분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부는 이루었으나 가정 관계가 원만치 못하 거나 사생활이 복잡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렵게 성공이라는 열매를 따내기는 했으나 흠집으로 인해 상등품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성공했는지의 여부는 스스로 내세우기에 앞서 사 회 다수의 공감을 얻었을 때의 평가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성공한 자의 삶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데 성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이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다. 오죽했으면, 도전보 다는 수성(守成)이 더 어렵다고 했을까. 수성은 지금의 문제점이 무엇 인지를 파악하고, 해결할 줄 아는 리더십과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 3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아름다운 성공을 꿈꾸는 저자 부부가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2008년)

그리고 근면에 있다고 믿는다. “살고 있는 집 안에 풀이 돋는다면 집안이 흥할 수 없다.” 란 말이 있듯이 당면한 상황을 도외시한 미래의 설계란 공염불일 수밖에 없 다. 이 말은 게으른 사람은 집 안에 풀이 돋든 뿌리가 뻗어 나가든 관 심이 없다는 뜻으로도 통한다. 성공적인 부(富)는 부지런한 사람만이 딸 수 있는 열매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다복한 가정’ 을 최상의 가치로 인식해 왔다. 부부가 잘 만나 화목하고, 자녀가 잘 배워 사회에 진출하면 오복의 기본으로 쳤다. 또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일찍이 치아를 오복의 하나라고 한 것은 사실 건강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 에 부모가 장수해 자녀에게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 받을 일인가. 생활의 기본 수단이 돈이니, 물질적 여유까지 있게 된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59


자카르타 라이온스클럽 회장단과 함께. 왼쪽에서 세 번째가 저자. (2008년)

다면 오복은 다 갖춰지는 셈이다. 세상이 날로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주의적 삶의 방식에 빠지면서 사람들은 남을 돌보며 살아갈 만큼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 다 보니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졌다. 만일 이런 배려와 실천이 따라준다면 이 또한 보람을 찾게 된 셈이니, 육 복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애로가 많은데, 현지인을 돕는 일은 사 업이윤을 현지에 환원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애로를 극복하는 자기 방어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늦게나마 갖게 되는 종교가 육복에 해당된다면, 은퇴 기인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회활동을 하며 봉사의 기회를 갖 3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게 되는 일복이야말로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칠순을 눈앞에 두고 이런 나눔의 복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 결정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 아내 역시 이런 나의 생각에 전 적으로 동의해 주는 입장이어서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공동체 의식이 흐려질 때마다“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장 17절)는 성서의 구 절을 떠올리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마지 막 인생의 종착역까지 잘 영근 성공의 열매를 딸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오늘도 다짐하고 있다.

잘 이루어진 3남매의 혼사 청춘 시절을 적도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지낸 기나긴 30여 년의 세월을 되돌아보게 된 것은 막내딸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기내에서 서비스해주는 적포도주를 몇 잔 마셨더니, 약간의 취기가 돌면서 흘러간 나날들이 마치 디지털 메모리에 저장된 것처럼 스쳐갔다. 게다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때맞춰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장거리 여행 때는 음악을 들으면 피로를 덜 느끼게 돼 자주 음악을 듣는 편이다. 클래식을 듣다가 기분이 나른해지면 재즈나 팝송 채널 로 바꿀 수 있어 편리하다. 나는 큰사위가 사준 대형 이어폰(bosse)을 애용할 만큼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비행 중인 기내는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1


내가 몇 시간 동안 임대한 음악 감상실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2005년 7월 12일, 이날 따라 깊은 감회에 빠지게 된 것은 막내까지 출가시키고 나면 자식들의 혼사는 다 끝난다는 홀가분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감정의 이면에는 어느새 노년기에 접어들어 지난 세월 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짧아졌다는 아쉬움이 남아서일 것이다. 그래서 기쁘면서도 서운하고 섭섭하다. 그러나 큰 기쁨이 작은 아쉬 움을 꼬옥 감싸고 있음을 느낀다. 바로 그날에 대비하여 며칠 전 나 는 색상이 맞는 넥타이와 포켓 행커치프까지 새로 준비하였다. 2주일 동안 거론되던 막내딸의 혼사가 마침내 결정되어 주위로부 터 많은 축하를 받았다. 더욱이 때마침 자카르타로 모신 고향 광천성 당의 연광흠 주임 신부님이 귀국 시간에 맞추어 나의 집에서 미사를 올리게 되고 막내딸 리디아의 약혼을 위한 기도까지 해주셨으니, 감 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막내딸의 혼사가 우연이 아니고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따 라 이루어진 경사라고 믿고 있다. 아내는 막내딸의 결혼을 위하여 성 서 필사 두 번째 40쪽을 남겨 놓고 상견례를 하게 되었는데, 6월 25 일인 이날이 마침 사돈이 될 어른(손병두 한국천주교평신도회 회장)이 서강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된 날이어서 양가의 축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카르타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본국으로 유학 한 3남매는 각기 전공을 찾아 제길로 갔다. 큰딸 현미는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산호세대학원을 나온 뒤 1993년 인디아나주립대학교 대학 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LG그룹에 다니는 박형세와 결혼했다. 큰 사 36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 힐튼 호텔에서 가진 큰딸 현미와 사위 박형세의 결혼식 피로연때. 박봉수 사돈 부부와 저자 부부. (1993년)

돈어른(박봉수 님)은 일본 중앙대학 출신으로 외환은행 창립 멤버로 서 평생 외환은행 맨이셨다. 큰 아이는 서울의 광화문 소재 새문안교 회에서 식을 올렸다. 결혼 피로연은 자카르타의 힐튼 호텔에서 가졌 다. 현미는 샌프란시스코 산호세주립대학에서 2006년부터 2년 동안 전임강사로 영어 언어학을 강의했고, 중고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획 득했다. 지금 뉴저지 주에 살고 있는데, 슬하에 1남(건우), 1녀(수진) 를 두었다. 보통 큰 자녀의 혼사가 잘 이루어지면 다음 동생들의 혼사도 순조 롭다는 조상 전래의 말을 증명이나 하듯이, 아들과 막내딸의 경우에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3


도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의 UCLA 얼바인대학원에서 마 케팅을 전공한 아들 종헌은 1993년 EBS방송 아나운서 겸 앵커 출신 인 양수려와 인연이 닿아 결혼하였다. 고려대 정책대학원 석사 과정 을 마친 며느리는 성실한 방송인이었다. 사돈어른은 통일부 차관을 역임한 양영식 박사이다. 강남의 공항터미널에서 혼례를 올리고 자카 르타의 샹그릴라 호텔에서 피로연을 가졌다. 종헌은 운동 신경이 뛰어난 편이다. 연세대학교에 다닐 때는 3년 동안 미식축구 선수로서 주전 노릇을 했을 정도이다. 연고전 때는 격 한 몸싸움을 벌이다가 갈비뼈 두 대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수술까 지 받아야 했다. 골프도 싱글 골퍼로써 티칭 프로 자격을 갖춘 수준 이다. 장타자로 알려져 자카르타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런 탓인지 성격도 직선적이고 의협심이 강한 편이다. 미국에서 백인 학생들이 한국 여학생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분개한 나머지 이종사촌과 함께 가해자를 혼내준다고 나섰다가 오히 려 백인의 아파트를 습격했다는 황당한 오해를 받은 적도 있었다. 종헌은 이곳 한인사회와 인도네시아는 물론, 국제적인 행사와 모 임에도 자주 참석하여 국제감각을 익히고 사회경험을 쌓는 한편, 옥 타(OKTA)를 중심으로 국내외 2세 기업인들과도 꾸준히 친분을 유지 하며 안목을 키워가고 있다. 아들은 나에게 3명의 손자를 안겨 주었는데, 이제 초등학교 3학년 이 되는 범구를 비롯한 유치원생 민구, 그리고 신생아인 윤구가 바로 3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 샹그릴라 호텔에서 가진 아들 종헌과 양수려(엘리자베스)의 결혼 피로연이 끝나고. 타룹 전 통합군 참모장 부부와 사돈 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 부부. (1993년)

그들이다. 며느리는 자카르타 한인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 일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국빈 방문 때는 한인 지도자들과의 간담회 진행 사회를 맡아 차분하게 역할을 잘해 주었다는 평을 들어 우리 내외를 기쁘게 해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런 며느리가 정말 대견 스럽고 자랑스럽다. 종헌은 지금 나와 함께 무궁화유통에서 상무이 사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 막내딸을 위한 아빠의 노력

2004년 가을쯤으로 기억된다. 서른두 살이 되는데도 막내 현아(賢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5


雅)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 같았다. 특히 어학에 천부적 소질이 있어서 그런지 영어와 프랑스 어, 일본어 등의 실력을 기르는 데만 몰두하였다. 나는 막내딸의 속셈도 알아보고 부모의 생각도 넌지시 알릴 겸 함 께 시간을 갖기로 작정했다. 우선 기분전환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당 장의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여행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여겼다. 나는 딸의 동의를 얻고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 다. 딸이 20대를 넘긴 후 모처럼 갖게 되는 호젓한 동행이었다. 현아는 자카르타 국제학교를 마치자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하였다. 졸업 후엔 프랑스에서 베이커리 수업을 받았다. 제주공항에 내리니 약속한 대로 천주교 제주교구장이신 김창렬 주 교님이 보낸 교우 형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주교님이 사제관으로 안 내하여 조용한 집무실에서 차를 대접받고 예정대로 골프장으로 향하 였다. 라운딩이 끝날 무렵 주교님이 리디아(현아의 세례명)에게 아름답기 도 하지만 남자 못지않게 장타를 잘 치니 놀랍다고 칭찬하면서 너는 시집가서도 사랑받으며 참 잘 살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현아가 수 줍은 미소로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나는 아빠로서 가슴 뿌듯한 기쁨 을 맛보았다. 저녁에는 주교님이 베풀어 주신 제주의 특산 해산물로 식사를 하 였다. 나는 처음으로 생선의 아가미 살을 맛볼 수 있었다. 수녀님들 도 합석한 만찬은 성당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달리 성직자들의 포근 하고 소탈한 일상적인 생활의 단면을 느낄 수 있었다. 36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제주 오라골프장을 찾은 정명조 부산교구장과 김창렬 제주교구장. 저자 부부는 왼쪽과 세 번째. (2002년)

숙소는 제주 중문관광단지의 신라 호텔로 정하였다. 나는 딸과 함 께 산책하러 나섰다. 신라 호텔은 하얏트 호텔을 지나 해변으로 가는 오솔길에 닿아 있었다. 언덕을 낀 오솔길은 주변의 나무와 어우러져 운치가 있었다. 눈앞의 해변은 아름답고 깨끗했다. 나는 과년한 딸과 함께 산책하면서 소풍을 나온 초등학생처럼 기 분이 들떴다. 막내딸도 아주 즐거워했다. 우리는 포즈를 취해가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 기도 하였다. 나는 출가 전의 막내의 모습을 가슴속 깊이 담아 두고 싶었다. 그리고 멀리 태평양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막내딸이 시집을 잘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로부터 7개월 뒤 현아는 같은 교우의 소개로 귀한 첫 미팅을 갖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7


정진석 추기경님의 집전 아래 혼인 미사를 마친 뒤 사위 손석기 바오로와 막내딸 현아 리디아. (2005년)

게 되었다. 급진전으로 이루어진 만남 속에 사위 후보를 보게 되었는 데, 첫눈에 맘에 들었고 믿음직스러웠다. 사윗감인 석기 군은 손병두 한국천주교평신도협의회 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사위는 카네기넬슨 대학원 출신으로, 현대그룹에서 근무하는 모범적인 사원이었다. 이렇게 인연을 맺고 보니, 사돈어른과는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 다. 양가 모두 가톨릭 가정이고, 사돈이 천주교 한국평신도협의회 회 장과 서강대학교 총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나는 인도네시아 한인 천 주교 초대 공동체 회장(역임)과 모교인 한국항공대학의 총동문회 회 장직을 맡아 봉사하고 있었다. 혼인미사는 2005년 9월 9일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대주교님의 주 례로 이루어졌다. 추기경으로 추대되기 불과 5개월 전이었다. 혼인 36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막내딸 현아의 결혼식 피로연을 마치고 한자리에 모인 저자 부부와 사돈인 손병두 총장 부부. (2005년)

미사는 서울 대교구 신부와 예수회신부 등 모두 10명의 사제들이 미 사를 보좌하였다. 이 자리에는 우리 내외와 친분이 두터운 정명조 부산교구장님을 비롯한 김계춘 도미니코 신부님, 김화태 성나자로 마을 원장 신부님 과 세분의 수녀님, 자카르타 한인 천주교회 김정렬 모세 신부님, 광 천성당 연광흠 신부님이 참석해 주셨다. 이날 정진석 대주교님은 주례사에서“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 뢰를 가지고 성스러운 가정을 이루라” 고 당부하신 말씀은 신랑 신부 뿐만 아니라 모든 참석자들에게 평생 삶의 지표로서 가슴 깊이 새겨 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막내딸은 리디아, 사위는 바오로란 세례명 으로 혼배성사를 올리게 되었다. 은총받은 일이었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9


■ 시집간 막내의 텅 빈 방에서

혼인예식이 끝난 후 나는 먼 길을 마다 하지 않고 특히 외국에서 결혼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신 분들을 경기도 분당에 있는 집으로 초대하였다. 조국통일기도회 등을 통해 더욱 가까워진 몇몇 회장 내 외분들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는 자연히 혼인 미사 이야기와 신랑 신부를 칭찬하 는 덕담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막내딸을 품안에서 보내놓고 쓸쓸해하 는 우리 부부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단계로까지 이르게 되었 다. 이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축하 폭탄주까지 마시게 되었 다. 한참 덕담이 오가는 가운데 신혼여행을 떠난 막내딸이 여행지에 서 전화를 걸어왔다. 안부 전화를 받은 아내는 그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셨다. 시집보내는 엄마의 마음 이란 다 이런 것인가. 이튿날이 돼서야 지난밤의 어지러워진 술상들이 잔칫집이었음을 실감나게 하였다. 떠날 사람은 다 떠나고 혼자가 되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막내딸을 시집보낸 아버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리디 아의 빈방을 들여다 보니, 그 동안 아빠에게 달려와 스스럼없이 안기 던 어린 시절의 재롱이며 밤늦도록 책상에 앉아 졸면서 책과 씨름하 던 모습이 자꾸 눈에 아른거려 목이 메었다. 딸을 시집보낸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을 때는 그럴 수 있겠다 고 가볍게 여겼지만, 막상 직접 겪고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 3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만이 느끼는 묘한 상실감으로 허전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큰딸 을 시집보낼 때도 약간 쓸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아들과 막내가 남아 있다는 위안 때문인지 이런 감정은 아니었다. 내가 이런데, 아내야 오죽하랴 싶어 저녁에 보니, 아내는 딸의 방 에 누워서 한동안 뒤척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룻밤을 딸의 침대에서 지내고 새벽녘에야 나타나는 것이었다. 구석구석 방을 정리하고 시 집간 막내딸의 사진을 챙겨 십자가상과 함께 걸어 놓고 나니, 눈시울 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도 덧없이 흘러가는구나 하는 생 각이 들면서 나는 감상에 빠졌다. 서툴지만 뭔가 마음속에서 출렁이는 느낌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 다. 그래서 머릿속에 감도는 상념들을 정리하여 이렇게 적어 보았다.

마음은 가벼운데 무언가 빈 것 같구나. 남들은 시원섭섭하다던데 허전하기 이를 데 없구나. 막내딸이 시집가서 기쁨이 큰 데도 지금 내가 어디에 와있나 세월을 되돌아보게 되고 인생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 깊게 만들었네.

막내 손녀딸 시집가는 마지막 저녁 손녀딸 방에서 함께 주무시며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1


잘 살라고 손을 꼭 잡아주시던 할머니의 깡마른 손등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네.

너무 쇠약해진 팔순의 어머니를 보니 자식 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 먼 산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닦았네.

—「빈 방에서」

혼사가 끝난 후 성당에서 만난 지인들이 아내에게 몰려와 세 자식 모두 좋은 혼처로 출가시켰으니, 우리도 그런 기(氣)를 받게 해달라 며 포옹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나도 덩달아 축하를 받았 다.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로부터 한 턱 내라는 성화에 못 이긴 척 하면서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꽤나 많은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대희년에 입 맞춘 천국의 문 2000년은 가톨릭 월력으로 대희년(大喜年)이었다. 이에 앞서 1999 년 12월 24일 자정 교황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육중한 청동 성문(The Holy Door)을 활짝 열었다. 50년마다 열리는 의식이다. 세 상의 죄를 대속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낮은 곳 에 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2000년을 기리고 새로운 천년을 맞 37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바티칸시티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방문한 저자 부부. 오른쪽 세 번째가 천국의 문이다. (2000년)

이하는 대희년의 개막이었다. 천주교 신자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 는 이런 시점에 바티칸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우리 부부는 영광으 로 여기고 있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시국은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안에 있는 작 은 독립국가로서, 전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이다.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사이에 체결된 라테바라노 조약으로 국제법상 주권을 인 정받고 있다. 한번에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앞에 흰색 선이 도로 위에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짓는 경계이다. 인구는 1천여 명으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대부 분이다. 평신도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까지 합쳐봐야 2천 3백명가 량 된다. 성 베드로 대성전은 바티칸시국 남동쪽에 있다. 이곳에는 예수의 열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3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로마의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유해가 묻혀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506년 4월 18일 율리우스 2세 (1503~1513년 재위)가 대성전의 건립을 시작하고, 그 후 120년이 지난

1626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축성되었다고 한다. 베드로 성전은 평소에 꼭 한번 찾아오고 싶은 곳이었다. 길이 200m, 폭 150m, 총건평 7천 2백여 평이나 되는 베드로 대성전은 돔 부터가 가히 위력적이었다. 바닥에서 바깥에 있는 십자가의 맨 끝까 지의 높이가 136.57m에 이를 마큼 거대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 은 돔임을 뜻하는 것이다. 돔 밑에는 모자이크로 된 4복음서 저자인 마르코, 루가, 마태오, 요한의 초상화가 네 방향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와보니, 스위스 청년으로 구성된 200여명의 호위병과 세계 적인 도서관, 박물관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보통 수백 미터 씩 네 다섯줄로 서서 몇 시간씩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럴 때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관광객에게 건넸다가는 소매치 기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나는 이런 줄도 모르고 이같은 행동을 했다 가 달려드는 무리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다. 자리를 피하느라 진땀을 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돈을 뺏어가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을 미리 듣긴 했지만, 정문에 들어서면서도 긴장이 되었다. 성당 정문 계단 앞에는 성 바오로상과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성 베드로 의 상이 보였다. 이 열주회랑의 생김새는 예수가 두 팔을 벌리고 있 는 모습을 본뜬 것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청동 베드로상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쓰다듬고 입을 맞춘 탓인지 동상의 37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 부분이 유난히 반질반질해질 정도였다. 정결한 마음의 상태에서 이마에 성호를 그으며 천국의 문을 들어 서는 순간,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시야가 흐려왔다.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닦는 손등이 젖어 있음을 느꼈다. 50년만에 열리 는 대희년을 맞아 적시에 찾아온 덕에 우리 내외는 일생에 한번 있을 까 말까한 어려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처럼 천국의 문을 지난 얼마 후 나는 꿈을 통해서 천국으로 가는 길 을 보게 되었다. 대성전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와 1천 3백 개에 이른다는 모 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36m 높이에 세워진 126 위 성인상과 성전 바닥의 아름다운 대리석의 색채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미켈란젤 로의 ‘피에타’ (Pieta)였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마리아상은 신비스러우면서도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더욱이 교황 성하의 선거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 없 는 큰 소득이었다. 사람이 꽉 차 있어서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엄 숙한 분위기에서 관람하였다.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를 콘클라베 (conclave)라 하는데, 콘(con)은 with, 클라베(clave)는 key를 말하므

로, 즉‘자물쇠가 잠긴 방’ 을 뜻한다고 한다. 교황 선출권을 가진 추기경단이 선거장에 들어가면 교황이 결정될 때까지 일체 외부와 단절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은 완전히 비밀이며, 기록은 교황청 고문서실에 보관된다. 이런 선거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5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방식은 13세기 때 3분의 2의 다수결 원칙에 따른 선거의 지연을 막 기 위해 제도화된 것이라고 한다. 보통 교황선거는 바티칸궁이나 성 당에서 진행된다. 교황이 선출되면 선거용지를 태워 연기로 새 교황이 탄생되었음을 알린다. 그러나 검은 연기가 나올 때는 미결이라는 신호이다. 새 교 황이 직책을 수락하면 공포된다. 이어서 추기경들의 순명선서가 있 고, 교황은 발코니에 나가 전 세계를 향하여 첫 강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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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본 지옥과 천국 사이 성경 말씀처럼 살 수만 있다면 오죽 좋겠는가마는 세상을 살다 보 면, 여러 면에서 보이지 않는 마음의 죄를 짓게 마련이다. 여기서 말 하는 죄란 현행법적인 죄가 아니라 신앙적인 것을 말한다. 어느 날 저녁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일이었 다. 밑에는 바다가 보이고 위에는 밧줄이 바다를 향해 걸려 있는 벼 랑 꼭대기에서 나는 질겁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밧줄을 잡고 서서히 깊은 바다를 향해 내려가고 있는데, 신기하게 도 나의 손에 자동기계장치가 장착된 것처럼 제동이 걸리면서 갑자 기 몸이 멎었다. 이어서 밧줄에 매달린 몸이 바다 밑이 보이는 낭떠 러지에서 벗어나 넓은 바위 바닥으로 무사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주위를 살피며 바위를 벗어나 담장을 넘어가니 여러 명이 취조를 받는 장소가 나왔다. 산 너머 산이라고 고생길을 만났다고 당황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내 차례가 된 모양으로 마치 최후의 심판을 받 는 모습과 흡사한 정경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손에 장갑도 안 낀 상 태로 어둠이 싸인 커다란 공간에서 또다시 밧줄을 잡고 시퍼런 바다 로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심판관 같은 사람이 나를 보자 이 사람은 괜찮다고 하며 자 유롭게 행동하게 해주었다. 하늘의 천사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침 햇살이 바다에 반사하며 나의 눈을 비추고 있었다. 마음이 아늑해지 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7


어느덧 나는 어림잡아 1만 t급이나 되는 금빛으로 만들어진 대형 여객선의 선수에 서서 키를 잡고 있었다. 나는 호화로운 금빛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맑은 바닷물에 반사된 햇빛이 나를 반기는 듯이 사방 으로 퍼져 금빛세계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황홀해서 마치 스코틀랜드 운하를 빠져나가는 것 같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천 사의 배를 타고 영광의 나라로 떠나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단테의 지옥 과 천국을 동시에 겪은 상반된 모순의 체험이었다. 전반부는 나락으 로 떨어지는 인생 막장의 절망이, 후반부는 위기에서 역전되는 환상 적인 희망이 나를 가슴 졸이게 하였다. 인간은 살다보면 이제 죽게 되는구나! 여기게 되는 순간에 부닥치 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들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 게 마련이다. 그것은 곧 기도로 귀착되는 본능이다. 종교를 갖지 않 아도 자연히 손을 모아 빌게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기도하면서 도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를 드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 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도를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도는 곧 구원이기 때문이다. 나는 밧줄을 타고 낭떠러지로 내려오는 꿈을 꾸면서 식은땀을 흘 렸다. 꿈속에서도 내가 지은 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바 다로 떨어지지 않았다. 죄의식 없이 참으로 착하고 좋은 일을 계속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한 생생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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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통신’ 의 취재 대상으로 내가 MBC TV로부터「이홍렬의 해피통신」 에 출연해 달라는 섭외 를 받은 것은 회갑을 앞둔 2000년 초여름이었다. 해외동포가 살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현지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하게 열심히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성공담과 감동적인 사연을 취재하여 소개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얘기의 핵심은 해외에서 각고의 시련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인물을 골라 소개하는데 놀랍게도 내가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극구 사 양했으나, 결국 담당자의 거듭되는 요청과 간곡한 설득에 물러서고 말았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홍렬 MC와 박혜진 아나운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2001년 11월 10일(토) 자정부터 방영이 된 이후「캐나다인들의 입맛을 바꿔놓은 레스토랑 대부 김규 태」편을 비롯하여「라오스의 경제를 움직이는 한국인 오세영」 ,「보 석의 제왕 꿈꾸는 태국의 보석상인 이근완」 ,「프랑스의 젊은 만화가 김현아」등 43회에 걸쳐 소개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기획물의 마 무리를 장식하는 44회의 출연자가 된 셈이다. 끝내는 담당 김강렬 PD가 이끄는 촬영팀이 자카르타로 와서 옛날 의 자취와 관련되는 자료를 체크하고 사업현장까지 찍는 순서로 이 어졌다. 사전에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고 또 무엇을 물을 것인지 귀띔 이라도 해주었으면 쉬웠을 텐데,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강행했기 때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9


MBC TV‘이홍렬의 해피통신’ 에 출연하여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삶에 대해 얘기하는 저자 부부와 이홍렬 MC, 박혜진 아나운서. (2002년)

문에 무척 당황했다. 게다가 사전에 적지 않은 자료를 주었으나, 들 어가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번듯한 장면은 빠지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지는 사업 초기의 열악한 상황만 골라 찍히는 모양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정착 과정과 관련하여 갑자기 인터뷰를 하게 된 아내는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문이 닳도록 일해야 했던 지난날의 가시밭길이 떠올라 그리 되었을 것이다. 다져진 땅에 물이 고이게 된 그 나름의 결실 뒤에는 이와 같은 아내의 피눈물나는 내조 가 있었음을 또 한 번 절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현지 로케이션이 끝나고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인터뷰가 있었다. 구성작가의 권유는 간편한 차림으로 나오라고 하였으나, 우리 부부 3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는 당초의 생각대로 베스트 드레서의 복장으로 나왔다. 나는 사실 방 송 출연 경험이 없는지라 가장 좋고 깨끗한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기본 예의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아리랑 텔레비전으로 전 세계에 여 러 차례 방영이 된다 하여 신경이 쓰였다. 긴장한 나머지 녹화에 들어가기 전에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 렸다. 그러나 막상 카메라 앵글이 잡히면서 대담에 몰두하다 보니 어 느새 긴장이 사라지고, 30분간 잡념 없이 녹화가 진행되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쯤되면 성공했지 않았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성공의 잣대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재물 면에서 성공했다고 자신 있 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 자녀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손자와 외 손자까지 보게 돼 자손이 융성하게 되었으니, 가정적인 면에서는 성 공했다고 본다고 대답하였다. 한편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하였다. 외교적 인 배려라기보다는 내가 반평생 이상 기반을 잡고 생활해온 나라에 대한 신중함과 애정의 표시였다. 행여 사실과 다른 내용이나 의도와 다른 표현상의 문제로 오해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 울였다. 그런데「이홍렬의 해피통신」 은 공교롭게도 내가 출연한 44회를 마 지막으로 2002년 10월 18일(금) 종영되었다. 이 프로를 시청해온 많 은 해외 동포들은 한결같이“감동과 용기와 지식을 한꺼번에 준 유익 한 프로그램이 사라졌다.” 는 평가와 함께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서 백석이라는 시청자는 내가 출연한 프로를 보고“무한히 가능성이 있 는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심고 좋은 일을 하고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1


성공하신 김우재・박은주 회장님 부부께 감사와 격려의 편지를 띄우 고 싶다.” 며 방송국에 주소를 문의해 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김우재 회장」 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이홍렬의 해피 통신’ 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인도네시아로 건너간 지 25년만에 최 고의 무궁화유통을 세운 김우재 회장은 산림사업에 대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정책 변경과 외국인에 대한 경계로 인해 3년만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7평 남짓한 조 그만 가게에서 떡과 고추장, 김치를 팔기 시작해 갖은 고생 끝에 오 늘의 성공을 일구어냈다. 현재 무궁화유통의 시장 점유율은 80%에 이른다. 각기 30여 분 간에 걸친 현지 촬영과 스튜디오 녹화로 이루어진 이 프로그램은 이홍렬 진행자의 유머러스한 질문과 박혜진 아나운서의 미소짓는 대화로 이어져 인상이 깊었는데, 그후 연락조차 제대로 못 하였다. 머지 않은 장래에 이 분들을 꼭 발리로 초청해야겠다는 생각 을 갖고 있다.

회갑 맞아 찾은 여행지 페블비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동차로 2시간 반 거리, 남쪽으로 160마일 정 도 떨어진 몬트레이 반도에 있는 페블비치(pebble beach)는 캘리포 니아의 875마일에 이르는 해안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정평 이 나있다. 태평양 연안을 끼고 달리다 보면, 기암괴석에 부딪치는 3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파도와 쾌적한 바닷바람, 풀잎에 반사되어 부서지는 햇빛까지 느낄 수 있다. 페블비치 콜프 코스에 오게 되다니, 나에겐 꿈만 같았다. 회갑을 맞아 아내와 함께 골퍼들이 ‘꿈의 낙원’ 으로 여기는 페블비치에 여장 을 풀면서 나는 색다른 감회로 충만했다. 2003년 4월이었다. 오션 뷰 빌라 2층 숙소에는 예쁘고 길쭉한 난이 우리 내외와 미국 에서 합류한 큰딸 현미네 식구들을 맞이해 주었다. 싱그러운 난 옆에 는 목이 긴 글라스와 함께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샴페인 병은 얼음에 잠겨 있어 알맞은 온도를 유지했다. 얼마 후 우리 내외는 18번 홀의 초원이 보이는 롯지 클럽 식당 ‘레 스토랑 19’ 에서 회갑 기념으로 케이크를 자르고 적포도주로 건배하 였다. 그런데 솔직히 회갑이라는 단어가 실감나지 않고 생소하게 느 껴졌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깨끗하게 정돈된 빌라와 경관이 좋은 숲속에 자리잡은 맨션 하우스들이 때마침 불어오는 태평양의 바닷바 람과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처럼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가시 돋친 장미’ 로 통하는 페블비치 골프장은 평생에 한번만이라 도 골퍼들이 라운딩하고 싶어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보통 페블비치 라면 페블비치 골프링크스 코스로 여기기 쉽지만, 넓은 의미로는 몬 트레이 반도에 있는 골프 코스 전체를 말한다는 것이다. 몬트레이 반 도에는 스파이 클라스힐, 사이프러스 포인트, 스패니시베이 등 빼어 난 풍광의 골프 코스들이 즐비하다. 세계의 100대 골프 코스 중에서 도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는 환상적인 코스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 골프장은 인기가 높아 원하는 날에 라운딩하기가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3


회갑이 실감나지 않는 페블비치의 바닷가 식당에서 아내와 적포도주로 건배하는 저자. (2003년)

결코 쉽지 않다. 이곳의 리조트에 머무는 투숙객이 아니라면 그린피 가 300달러가 훨씬 넘고, 그나마 1년 전에 예약을 해야 하기 때문이 다. 나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밟아야 했다. 나는 이 골프장에 와서야 캐럴송으로 유명한 영화 <화이트 크리스 마스>의 주인공 빙 크로스비가 페블비치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는 사실을 알았다. 악명 높은 난이도 골프 코스 옆에 그를 기념하는 동판이 걸려 있었는데, 1947년부터 1977년 일흔 여섯의 나이로 세상 을 뜰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내건 골프대회의 호스트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페블비치에는 이 지역을 상징하는 소나무 외에 빙 크 로스비라는 또 하나의 상징이 있었던 셈이다. 남태평양을 끼고 있는 이 골프장은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설계가 훌륭한 것 같았다. 38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페블비치 링스 프로숍 앞에서. 외손녀 수진, 외손자 건우 및 큰딸, 사위, 아내와 함께. (2003년)

페플비치 바다의 중간쯤 되는 8번 홀 짧은 파3홀은 경사가 심해 밑 에서 위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그린에 쉽게 공을 올릴 수 없었 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티 박스 뒤쪽에서 오른쪽 바다를 향해 멀리 볼을 치게 마련인데, 대개는 자신의 소원을 빈다고 하였다. 우리도 그 말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였다. 일행 가운데 어느 부인은 흥분한 나 머지 티 박스 뒤쪽으로 먼저 올라가려다 넘어지기도 하였다. 이 골프장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운영도 잘 되는 느낌이 들 었다. 해변을 둘러보는데 바위에 올라앉은 바다사자와 새끼 한 마리 가 눈에 띄었다. 어미 바다사자가 뒤뚱거리며 바닷물로 뛰어들자 새 끼 바다사자도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나중에는 뭍으로 기어 나온 새끼가 어미 등에 업혀서 바닷물로 들 어갔다. 이렇게 바다사자들은 사이좋게 물놀이를 하거나, 떼를 지어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5


드러누운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정경이 었다. 나는 페블비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초콜릿 맛을 제대로 알게 되었 다. 산호세 쇼핑몰에 들렀다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우 리도 기다렸다가 메리 세어(marry sear’ s)라는 초콜릿을 샀는데, 먹어 보니 보통 맛이 아니었다. 달지도 않으면서 초콜릿 향이 배어났다. 문득 수녀님들에게 이 초콜릿을 선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나는 초콜릿을 사고 나오면서 이렇게 속으로 말하였다. “수녀님, 작은 초콜릿에 불과하지만 젬마와 베드로가 드리는 것이 니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 주세요.”

봉사하는 마음으로 맡은 직책 40대에서 50대까지는 사업을 일구고 다지느라 정신없이 살아온 시기였다면, 60대 이후는 본의와는 달리 사회활동으로 분주하게 지 내온 나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에서 거의 맨주먹과 맨발로 사업 을 해온 처지로 세속적인 명예나 출세와는 담을 쌓아 왔는데 어쩌다 가 두 가지 ‘감투’ 를 쓰게 되었다. 하나는 나의 천직인 사업과 관련된 자리였으나, 다른 하나는 사업 과는 전혀 무관한 동창회 간부 직책이었다. 전자는 세계해외한인무 역협회 인도네시아지회의 초대 회장 겸 동남아시아 연합회장 직분이 었고, 후자는 모교인 한국항공대학교 총동문회장 자리였다. 3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 관례 없는 모교의 총동창회장 자리

일반적으로 학교를 나온 졸업생이라면 자신의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깊게 마련이다. 동시에 규모가 크든 작든 총동창회를 조직 하여 모교를 돕거나 동문과 선후배 간에 친목을 다지고 단결을 도모 하려 한다. 대체로 대학교 총동문회는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물심 양면으로 헌신할 수 있는 인사를 회장으로 추대하는 것이 관례로 되 어 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내가 총동창회장직을 맞게 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2004년 6월 6일이었다. 여기서 전 혀 뜻밖이라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해외동포가 모국의 학교 총동문회 회장으로 취임 한 사례는 없으며, 또 상식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 이 생긴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찌됐든 해외에 있는 나의 처지로 서는 내막을 알 리 없었다. 사전에 국내의 동문들 가운데 여럿이 모 여 나를 총동창회장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여타 동문들을 설득해 총회의 결의를 받아낸 것이었다. 국외 거주자로서 모교의 각종 행사와 모임에 참석치 못할 경우가 많을 게 분명하고 적임자가 못 된다는 이유로 사양했으나, 이미 결정 난 일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끝내 이 결정을 뿌리치지 못한 채 졸지에 중책을 맡고 말았다. 나는 그저 총동문회와 모교의 발전을 위 해 열심히 봉사하겠노라고 간략한 수락연설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국 내 제1호 해외동포 총동창회장직을 맡게 된 배경이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7


한국항공대학교 총동창회장 재임시 정기총회를 주관하는 저자. (2005년)

경기도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으나 착잡한 생각으로 잠이 오 지 않았다. 나중에는 부담감 때문인지 열이 나고 식은땀까지 나왔다. 이를 눈치 챈 아내가 보다 못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격려를 해주었다. 이에 힘입어 회장 취임 이후 거의 매월 서울을 방문하여 며칠간 모 든 분야의 행사에 참석하고 관련단체와의 협력도 모색하는 등 활동 을 하였다. 며칠 안 되는 서울 체류 기간 동안 시간을 쪼개 뛰느라 이 른 아침부터 움직이다 보니 잠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거절할 수 없는 과음으로 그 이튿날에는 혈압의 수 치가 매우 높아져 응급실 신세까지 지는 일도 있었다. 동창회장을 맡 으면서 처음으로 혈압약을 복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국에 살고 있 는 교포가 전례 없는 직책을 맡게 돼 긴장했던 것이다. 3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그후 총동창회장으로서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관련 행사에도 나가다 보니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 내 거주지가 서울인지, 자 카르타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이렇게 모교의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 나는 절반이 서울 사람이었다. 총동창회장은 모든 동창회의 구심점으로 원만한 운영을 위해 동문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재단과도 협력할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특 수 사립대학으로서 총장이 재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총력을 기울여 발전할 수 있도록 밀어주며, 중재 역할을 하는 자리였다. 향후의 회 장에게도 이런 원칙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한인무역협회 지회의 창립과 역할

2007년 2월 1일, 인도네시아에 있는 견실한 55개 회사의 사장단을 회원으로 한 사단법인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World-OKTA) 인도네 시아 지회가 창립되었다. 동남아 여러 국가들 중 뒤늦게 창립됨에 따 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데에 공감한 회원들이 정열적인 심부름꾼으 로 나를 추대하였다. 일복을 타고난 것 같았다. 1주일 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옥타 동남아협의회 창립총회에 는 각 지역 국가 회장들이 나를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남아를 순회하며 협력을 구하고, 마닐라에까지 가서 업무 를 협의한 바 있다. 1981년 해외교포 무역인들이 고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출범한 월드 옥타(World-OKTA)는 1994년 사단법인으로 설립돼 전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9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인도네시아지회 창립식에서 천용수 회장(중앙)으로부터 단기를 전달받는 저자. (2007년)

세계 54개국, 101개 지회에 6천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대규모 경 제단체이다. 그 동안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교포 2~4세 무역인을 대상으로 교 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각계각층의 전문 강사로 하여금 성공한 CEO 로 활동할 수 있도록‘차세대무역스쿨’ 을 실시하여 자카르타에서만 2년 만에 100명의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마쳤고, 앞으로도 매년 이와 같은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런 교육은 후세들에게 선배들이 현지에서 구축한 인사들과의 유 대관계를 연결해 주고 노하우를 전수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 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차세대 교육은 전 세계에서 교육받은 1만여 회원들과의 네트워킹이 이루어져 훌륭한 장래의 역군들을 배출한다 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39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 주지사 화지보오 씨를 예방한 저자. (2009년)

그래서 국회 차원에서 지식경제부를 독려하여 옥타의 예산을 확 보, 지원해 주려는 의원들이 많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회장 연임을 마지막 봉사의 길로 여기고 있는 데, 나는 우선 자카르타 화지보오 주지사를 방문하여 인도네시아 옥 타와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을 ‘자카르타에 거주 하는 한국인들이 안심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주지사’ 라고 소개하 여 폭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유머감각과 지혜가 풍부한 인물이다. 자 카르타시에서 하는 직업학교를 도와 달라는 그의 제안에 우리는 힘 닿는 데까지 돕기로 하였다. 2008년부터는 활동 무대를 더욱 넓혔다. 상공부 장관과 국회부의 장을 만나 협력하기로 하는 한편, 정치 및 재계의 지도자들과도 공식 접촉을 갖고 상호 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아울러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인도네시아지회를 인도네시아 상공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1


회의소에 등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이 나라 최고의 기업인 경제 단체 중앙회에 들어감으로써 한인 인도네시아 역사 42년만에 처음 으로 현지 경제단체에 공식 회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27개 단체로 구성된 이 거대한 경제단체에는 수많은 업종이 가입되어 있어 한국 인들의 기업 활동과 현지 기업인들과의 친교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 으로 전망돼 기대가 자못 크다. 2008년 7월 20일에는『월간중앙』 이 제정한‘세계를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경영인 상’제1회 수상자로 저자가 32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 되어 재 인도네시아 한인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는 말을 주위 로부터 들은 바 있다. 부족한 나에게는 과분한 칭찬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열심히 봉사하라는 권고로 받아들이고 있다. 2009년 2월 27일에는 우리 지회가 주관하는 월드 옥타 동남아활성 화대회가 3월 1일까지 3일간 자카르타 소재 인티콘티넨탈 호텔과 발

『월간중앙』40주년 창간기념‘세계가 주목하는 자랑스런 해외 경영인’ 으로 뽑힌 수상자들. 앞줄 왼쪽이 저자. (200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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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 CEO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한 아세안 경제인회장단과 함께한 이명박 대통령(중앙)과 대한상공회의소 손경식 회장.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저자. (2009년 5월 31일)

리에서 열렸다. 이를 계기로 인도네시아에 기반을 둔 한국인 사업가 들이 크게 고무되었으며, 앞으로 더욱 비즈니스의 활성화에도 적잖 이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일련의 이런 일들이 나의 회장 임기 중에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는 데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런 가운데 나는 이해 6월 1일부터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 린 한・아세안 CEO 특별정상회의에 인도네시아 경제인들과 함께 월드 옥타 인도네시아 지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아세안 10개국 경제인 대표자 간담회가 끝나고 나오는 자리에서 나는 잠시나마 이 명박 대통령을 뵐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전두환・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까지 다섯 분의 한국 대통령을 직접 뵙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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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재롱과 아들의 분가 손자(범구) 녀석과 한집에서 살 때였다. 나는 하룻밤에 한 번은 꼭 일어나게 마련이었다. “할아버지, 나 쉬야!”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나야 했다. 아, 이 제는 나도 할아버지요, 어김없는 노인이다. 한동안은 숙면을 취하지 못해 낮잠을 자곤 했다. 이럴 때는 어김없는 노인이다. 그래도 그 녀 석이 귀엽다. 보통 때는 아침 6시 산타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기도를 하는데, 아내가 삼종기도를 마칠 때쯤에야 주섬주섬 일어났다. 먼저 기도가 끝난 아내는 책상의 스탠드 불빛 아래서 성서 필사를 계속하는데, 나는 두개의 촛불을 켜놓고 아침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마칠 무렵 막내손자가 눈을 비비며 할아버지의 기도방으로 와서 품 에 안긴다. 나는 귀여운 손자를 껴안고 녀석의 궁둥이를 쓰다듬는다. 옛날 어른들과 진배없는 손자 사랑이다. 4층 창밖을 바라보니 밤새 내린 비가 자카르타 시내 공기를 정화 시켜 놓은 것처럼 나무와 건물이 햇빛에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몇 년 전 꿈에서 봤던, 황금빛 대형 선박에 황금 갑옷을 입고 항해하며 맞이한 찬란한 아침 같은 그런 풍경이었다. 기도방에서 기도가 끝날 때쯤이면 피아노 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온 다. 이 느낌은 마치 앞의 꿈에서 황금빛 대형 선박을 인도하던 천사 들의 노래처럼 온 집안을 즐겁게 만든다. 며느리의 솜씨였다.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는 엘리자벳, 손자들과 함께 동요를 비롯해 3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손자와 사무실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저자 부부. (2001년)

가스벨 송을 부르며 흥겹게 피아노 반주를 하는 며느리의 존재가 우 리에게 신앙생활의 기쁨을 더해 준다. 기도가 끝나면 우리 부부는 아침 스트레치를 하면서 정원에서 바 쁘게 아침운동을 시작한다. 운동을 할 때면 두 녀석이 합세하여 할아 버지와 할머니의 등과 배에 올라타며 운동을 같이한다고 야단법석이 다. 이런 것들이 사람 사는 자연스러운 일면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막상 데리고 있는 아들네들을 분가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사 날짜가 다가오자 갑자기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손자들과 떨어져 산 다는 건 가슴을 뻥 뚫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제 우리 부부도 보통사람들처럼 단 둘이서만 살아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한 번은 겪을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솔직히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장성한 자식들에게는 앞으로 누리고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5


미국 뉴저지 주에 사는 외손자 박건우(14세)와 외손녀 수진(12세).

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한편 미국 산호세에서 사는 큰딸 현미의 아들 박건우(당시 11세)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도 늠름하게 하이킹 자전거를 타고 산호세 시내가 보이는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씩씩한 모습을 보여 주어 나를 흐뭇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 내외는 건우와 외손녀 수진을 데리고 샌 프란시스코 스탠퍼드대학 건물을 둘러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대학건 물의 기둥을 껴안고 건우와 수진이가 성장하면 이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지혜와 건강을 주십사 하고 기도를 드리고 기가 돋게 해주 었다. 그 동안 우리 부부는 손자들의 재롱으로 인하여 참으로 행복하였 다. 아내가 손자를 안아 주다가 균형을 잡지 못해 허리가 삐끗거리는 바람에 침술 치료를 받아야 했던 일도 있지만, 그마저 즐거운 추억거 39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리가 되었다. 나는 그때 아내를 위해 수마트라에서 웅담을 구해 위스 키에 채워서 가져 왔다. 직접 곰에서 채취한 쓸개로 불편한 아내의 허리가 완쾌되기를 바라면서 귀가를 서둘렀던 일을 아내는 알고나 있을까? 2006년 병술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부부는 세 번째 삶의 길로 접어 들었다. 첫 번째는 남남이 하나로 결합돼 가정을 이룬 점, 둘째는 자 식을 낳아 길러 독립시킨 어버이의 삶이며, 세 번째는 처음처럼 다시 부부만의 호젓한 생활로 돌아오게 된 길이다.

스스로 느끼는 행복 한해를 마감하기가 아쉬운 것은 어느 길을 걷든지간에 많은 사람 들이 느끼게 되는 세모의 공통점일 것이다. 사람들은 한 해가 기울면 거의 예외없이 세월의 빠름을 이야기한다. 나는 연말이 되면 첫딸이 태어나던 38년 전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의 일이 떠오른다. 1969 년 12월 11일, 그날 대한항공(포카 F27)이 강릉에서 이북으로 납치되 었다. 나는 그때 강릉지점으로 출장 중이었다. 선배와 막걸리를 마시 다가 늦는 바람에 해산의 고통에 시달리는 아내를 보지 못하긴 했으 나, 납북 비행기를 놓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그 대신 오밤중까지 꽁꽁 얼은 길을 걸어 탑승객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위로해 주느라 며칠간 밤잠도 자질 못했다. 이런 사정이 되 다 보니 첫딸이 태어났어도 충주까지 가볼 수가 없었다. 아내가 출산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7


한지 2주만에 첫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명동 KAL 빌딩에서 퇴근하 여 함박눈이 내리는 명동길을 재촉하던 나는 행복했다. 캐럴송이 울 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렇게 태어난 큰딸 현미가 지금 미국 산호세에 살고 있다. 큰 외손 자가 벌써 열네 살이 되었으니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말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은 2003년 크리스마스 이브로 돌아간 다. 자카르타에서 아내와 막내 여동생 길재와 함께 열대나무로 시원 하게 조경된 자카르타의 북쪽 아름다운 해변 카푹 골프장에서 골프 를 즐기고 돌아온 날이었다. 저녁에는 성당 미사에 참여키 위하여 식 사 시간에 맞춰 서둘러 온 것인데, 3주 전부터 실내에 꾸며 놓은 크 리스마스 트리가 전등에 반사되어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도네시아에는 겨울이 없어 한국에서 생 각하는 낭만적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같은 분위기는 기대할 수 없 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땀을 흘리는 여름날의 성탄절을 상상이 나 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준비된 식사는 평소와는 달리 양식이었다. 보통 식사는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중 심이어서 그쯤 되는 메뉴인 줄 알았더니 완전히 달랐다. 넓죽한 누들 과 긴 피조개를 섞은 것이며, 푸라 운(새우)으로 된 크림 스푸, 사용하 는 접시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것이었다. 빨강, 파 란, 흰색이 어우러진 접시의 선택도 마음에 들었다. 준비된 적포도주는 흥을 더욱 돋아 주었고 영화 주제곡인 재즈풍 의 멜로디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으며, 4개의 촛대에 불 39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을 붙이는 며느리 엘리자베스(양수려)의 모습 또한 환상적이었다. 어 른들의 일에는 아랑곳없이 식탁 밑을 돌아다니며 노는 생후 11개월 된 둘째손자 민구도 너무 귀엽기만 하였다. 나는 식탁에 둘러앉은 가 족들을 보며 너무나 흐뭇했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아내는 서로 다투다시피 할머니, 할아 버지에게 엉겨드는 범구(4세)와 민구 두 손자를 보고“이보세요! 바로 이런 것이 진짜 행복이겠죠?”하며 좋아하였다. 나도“그려! 행복 만 점이야.”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번 성탄절은 유달리 행복했다. 손자들과 어울려 지냈기에 더욱 값진 메리 크리스마스였다고 생각된다. 진정으로 크리스마스의 행복을 느낀다면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는 만큼, 어려운 이웃과 나눔의 마음을 갖고 실천하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귀여운 손자들을 위해 우리 부부는 크고 빨간 주머니를 잠든 아이 들의 머리맡에 걸어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침에 깨면 애들은 산 타클로스가 간밤에 몰래 갖다놓고 간 선물로 여길 것이다. 녀석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성탄의 유래를 살펴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4세기까지 성탄을 축하 하는 날을 따로 가진 적이 없었고, 336년에 이르러서야 성탄축일을 12월 25일로 지키는 관습이 널리 펴졌다고 한다. 이는 로마인들의 이교적인 국가 축제일이었던‘무적의 태양의 탄신일’ (Natale Solis Invicit)을 그리스도교화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314년 로마의 리베리오 주교는 이 날을 성탄일로 판정, 그해 로마 축일표에 기록했고, 5세기 초에 예수 성탄일로 정식 선포하게 되었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9


다. 이후 5세기 말부터 대부분의 교회가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 의미가 아닌 축일로 정해서 기리게 되었다고 한다. 해마다 연말이면 큰딸이 1년 내내 수집한 가족들의 사진으로 만든 달력이 기다려진다.

4대가 한 집에 모인 기쁨 미국에 살고 있는 큰딸은 매년 여름방학이면 남매를 데리고 경기 도에 있는 친정집으로 온다. 이때를 이용하여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온 엄마, 아빠와 막내 동생과 합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아 이들과 함께 한국의 한여름을 맞으며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어간 다. 날짜가 한정되어 있어서 1주일쯤 지나면 친정의 본거지인 자카르 타로 옮기게 되는데, 외손자, 외손녀와 큰딸, 막내딸, 그리고 우리 부 부가 봉고차에 타고 공항으로 떠날 때는 겨우 문이 닫힐 정도로 가득 차서 볼 만하다. 이렇게 자카르타에 모인 일행은 현지의 아들네 식구 들까지 합쳐지면서 한 달 동안 떠들썩해진다. 이때는 이미 고국의 노 할머님(우리는 왕 할머님이라고 부른다)이 미리 도착하여 들뜬 마음으 로 기다리고 계신다. 노 할머니는 2009년 현재 연세가 여든아홉 살로서 여느 노인 분들 과 마찬가지로 기력이 쇠잔하시다. 이런 어머님을 뵐 적마다 나는 인 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어느 재벌 댁을 방문했을 때 안 40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뒷줄 오른쪽부터 아들 종헌, 며느리 양수려, 작은사위 손석기, 막내딸 현아, 큰사위 박형세, 큰딸 현미, 중앙 저자 부부. 왼쪽 앞줄 외손주/손녀 박건우, 박수진, 손용주, 손용희, 손자 윤구, 민구, 범구.

방 양지쪽에 앉아 있는 노인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몸이 야윌 대로 야윈데다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게 보였던지, 돈이 많 으면 무슨 소용이랴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먹는 나이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뺏어간다. 인생은 60부터라던데, 나도 그렇게 되는가 생각하게 된다. 64년 전 어머니 등에 업혀서 칭얼대던 일들이 가까운 시절의 일처럼 스쳐 지 나간다. 미국에서 온 외증손자와 손녀는 노 할머니의 지팡이를 가지 고 들어와 친손자와 함께 셋이서 꼬부랑 할머니의 흉내를 내어 한바 탕 웃겼다. 또한 노 할머니의 앉아 있는 모습을 흉내 내며 자신들을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401


올 여름에도 저자 부부의 3세들이 자카르타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위로부터 큰 외손자 박건우와 작은 외손녀 손영희, 그리고 손영주, 박수진, 아래는 친손자 범구, 윤구, 민구 등 꼬마삼총사. (2009년)

4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쓰다듬는 사랑스러운 손길까지 따라 하였다. 이런 가운데 무엇인가 군것질거리를 챙겨서 갖다드리는 손녀 며늘 아기와 이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노 할머니를 보면서 나는 흐 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쇠약해진 시어머니를 병원 에 모시고 가서 친찰을 받게 하고, 집으로 간호사를 불러 알부민 주 사를 맞으시게 하는 등 섬세한 배려를 하였다. 2007년 7월 17일, 자카르타의 집에는 두 사위만 빠진 열 한명의 식 구와 집안일을 돕는 여섯 명의 아이들까지 모두 열일곱 명의 대식구 가 모여 북적대며 즐거워하였다. 요즘 세상에 생후 6개월 된 증손자 에서 80대 후반의 증조모까지 4대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니, 보기 드 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인가 특별한 은총이 우리 가족에게 가득 채워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노 할머니로부터 굿 나이트 뽀뽀를 돌아가며 받고 잠자 리에 들어갈 때의 모습은 행복하게 어울려 사는 삶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매년 이 무렵에는 한국에 있는 막내딸과 노 할머니까지 자카 르타로 모시게 되는데, 이는 우리 가족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럴 때는 온 집안이 시장통처럼 왁자지껄하다. 사람 사는 집처럼 활기 가 넘친다. 아이들이 장난질 치다가 넘어져 울고 다투기도 하지만, 웃음소리가 끊일 새가 없다. 이런 가운데 아이들은 은연중에 어른들로부터 배우게 된다. 윗사 람을 공경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고, 서로 어울려서 사는 가족의 소중 함을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여름방학 동안 자카르타의 4층 집은 아 이들의 즐거운 놀이터이면서 동시에 산교육장이 된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403


한적한 오후, 어린 증손자를 소파에서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고목에 새순이 돋아나는 것 같은 윤회의 느낌을 준다. 나날이 상태가 달라지는 어머니가 내년에도 증손자의 엉덩이를 만져 주고, 기저귀를 갈아 주시며 포근한 소파에 기대어 알맞은 온도의 에어컨 아래서 편안히 낮잠을 즐길 수 있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오늘 같은 행복이 계속되기를 마음속으로 주님께 기도하였다.

4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에필로그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외국에서는 삶 자체가 항상 여유롭고 호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어떤 때는 외롭지만 의지할 데가 없어서 향수를 달래야 하는 곳이 외 국이기도 하다. 사업 초기에는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남 을 돕다가 내 자신이 도움을 받게 되는 수가 있다는 말에 유념했다. 사업가는 현재에 만족한다면 발전할 수가 없다. 적극적으로 발전의 길을 모색하고 연구하는 도전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사업 초기의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내가 중간에 긴장을 풀고 방심했다면 오늘의 이 같은 결과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래서 요구되는 것이 자기 분수에 맞는‘잣대경영’ 이다. 여기서 다 기술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체득하게 된 것 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에필로그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405


었다. 하지만 뼈를 깎는 듯한 시련을 각오해야 한다. 파란곡절 없는 인생은 격랑을 모른 채 항해에 나선 겁없는 배와도 같다. 언제 난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인도네시아에는 적지 않는 한국인들의 도전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계월(崔桂月, 90세)이라는 개척자다. 그는 1967년 한국인 해외 투자 1호를 허가받았다. 처음으로 원목개발의 야심을 갖고 칼리만탄 정글에 뛰어들었다. 100여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들어 간 지 12년만에 45만 정보의 밀림지대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 연히 시련이 따랐다. 그는 두 차례의 오일 쇼크가 휩쓸고 간 1970년 대에도 해외자원 개발에 도전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사업가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때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일본군 과 싸우다 총상을 입고 자결한 민영학(1916~1945)이라는 애국지사가 있다는 말을 최근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듣고 감회에 젖은 때가 있었 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민 지사는 일제 말기인 1944년 12월 일본 군속으로 이 지역에서 연합군 포로 감시원으로 복무했다. 이듬해 정 월 4일 싱가포르로 전속 명령을 받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탈출하여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인도네시아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허영(許泳, 1908~1952)이라는 친일파 영화감독이다. 그는 일제 말기 에 내선일체를 강조한 영화 <너와 나>(1941)를 만들고 히나츠 에이타 로(日夏英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행세하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인도 네시아에 정착하였다.‘휸’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신생 인도네시 아공화국의 영화와 연극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식민지 하의 인도 4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네시아의 역사를 배경으로 네덜란드 여성과 인도네시아 청년의 사랑 을 그린 <하늘과 땅 사이>(1951) 등을 만들어 현지인들로부터 우호적 인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무덤이 자카르타 시내 푸탄불란에 있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인물들은 각기 활동 분야가 다르고 영욕을 달리하고 있지 만, 인도네시아와 각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비행기를 자주 타게 된다. 항공편을 이용 하다 보면, 지인들과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우연을 바랄 수 있어 기 대가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점차 참여하는 모임도 많아져서 잘 기억해야만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시간 활용면에서 보면 사업적인 일보다는 비사업적인 경우가 더 많아진 느낌이 든다. 어느 후배가 시간적 여유를 묻기에 나는 NBB(Non business is busy.)라는 말로 시간이 없다는 푸념을 했다. 그 러자 저도 선배님처럼 시니어가 되어서 NBB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후배가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아 그 내용을 설명해 주 었더니 그때서야 크게 웃었다. 어떤 일이든 분주한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 은 이런 생활 패턴을 계속 유지하는 일이다. 언젠가는 자카르타의 라 와망운 골프장에서 마르타라는 프로와 라운딩을 하는데, 함께 조인 한 분이 일흔아홉 살이나 되는 노인이었다. 그는 여유 있게 골프를 즐겼다. 알고 보니 이 분은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며 미인 비서까지 두는 여유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때 이 초면의 노신사를 에필로그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407


무궁화유통은 저자의 인생 그 자체이며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였다. 앞으로는 노년에 이른 경험과 경륜으로 후세에게 조언하며, 공동체적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여유를 더 많이 갖고 싶다. 사진은 나폴리 항구를 지나 지중해 카푸리섬으로 향하는 선상에서. (2000년)

통해 인생의 황혼기에 임하는 노인의 생활방식과 지혜를 배울 수 있 었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다. 기질상으로는 군인에 가깝 다고 할 수 있다. 한때는 차라리 군인이 될 것을 한 적도 있었다. 하 지만 사업을 하며 평범한 인생을 살기로 하였다. 그래도 나에게는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사업에 실패하여 끼 니를 걱정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영구히 운영될 수 있는 사업체로 안 정시켜 우리 부부가 행복한 초로의 생활을 하게 해주었다. 이는 주님 이 주신 은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우리 부부는 자주 말하기를 서로 10년씩 낮추어 아내는 40대, 남편 4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은 50대라고 하며 아직 젊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자랑한다. 이제는 일 부러 좋게 봐주려고 하는지 주위에서도 젊게 보인다고 맞장구를 쳐 준다. 아직도 나에게는 한가한 날이 없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도 바빠져 야 하고, 바쁜 가운데 여유를 찾아야 그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생 각한다. 바쁜 현대인의 생활은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고 한다. 나는 시니어로 접어들면서 바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데 대해 ‘감사’ 란말 로 표현하고 싶다. 우리 가족은 천주교에 입문하고서 지속적인 주님의 가호 안에서 살게 되었다. 그 전에 이미 어린자식들은 성당에서 교리 공부를 마 쳤다. 나는 큰딸로부터 우리에게 매년 경사가 겹치고 있어 참으로 은총받은 집안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나 역시 이 생각에 공감한 다. 나는 자식들로부터 종교에 대한 유산을 물려주어 감사하다는 말 을 들을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이처럼 자녀들이 같은 종교를 갖고 건강하며, 훌륭한 짝을 만나 혼사도 잘 이루어냈으니 더 이상 무엇 을 바라랴. 나는 가족을 중히 여긴다. 스스로 가정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가족 모임에서 사업만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강조 한 바 있다. 또한 자손들이 부모의 사업과 사회사업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내비쳤다. 왜냐하면 나는 능력이 있는 한 사업은 계속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업을 위한 계획은 연중 계속되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별도의 조그만 사회사업을 할 수 있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치게 에필로그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409


되었다. 나는 졸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부자도 아니다. 하지만 자식 들 잘 가르치고, 부부가 부족함이 없이 살면서 비록 적은 것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았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고 있는‘무궁화유통’ 은 나의 인생 그 자체이며 가치를 실현하 는 도구다. 헌신적인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안정된 생활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인 내가 어려워 속수무책일 때는 힘을 내도록 용기를 주고 격 려해 주었다. 또 낙담할 때는 소매를 걷어붙여 지문이 다 닳아 보이 지 않을 만큼 김치를 버무리고 메주를 담그며, 고추장을 만들어 힘이 솟도록 독려하였다. 부부가 힘을 합치면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으로 증명하였다. 우리 부부는 사업도 같이 하고 사회봉사도 함께 하고 있다. 때로는 어느 쪽이 먼저 하든 서로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동안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시간이 지나갔 다. 이제는 머리카락이 세어 염색을 해야 되고, 주름살도 늘었다. 하 지만 당분간은 정년이 없다는 신념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앞으로 나에게 바람이 있다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비서가 있는 사무실을 유지하고, 공동체적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현재의 사 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고 싶다. 대부분의 일은 후세에게 넘겨주어 실행할 수 있도록 맡기고, 노년 에 이른 경험과 경륜으로 조언하며 나이는 무시하고 살아갈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41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저자 경력

아호 홍사(洪史) 1943년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월림리 출생 광천중학교, 성남고등학교 및 한국항공대학 졸업 1967년 대한항공공사 입사 1977년 인도네시아로 이주 무궁화재단 이사장 무궁화장학회 회장 무궁화 어린이심장병 수술 돕기회 회장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재단이사 역임 자카르타 한인 가톨릭 초대 평신도협의회장 역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역임 한국항공대학교 총동창회장 역임 세계라이온스클럽 자카르타 메트로폴리탄 중역 (사)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인도네시아지회 회장 (사)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상임집행위 부회장


(사)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동남아시아연합회 회장

무궁화유통 회장 ㈜코인부미 회장 ㈜푸리마무다건설 회장 ㈜부미관광 회장 ㈜부미인다막물레스타리 회장

상훈 관계 인도네시아 후생복지훈장 수훈 (2008년) 자랑스런 해외 경영인상 수상 (2008년, 월간 중앙) 대한민국 고객감동 그랑프리대상 수상 (2009년, 한국일보) 한국항공대학교 명예의 전당 헌액

저서(공저) 『 : 인도네시아의 명소와 명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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