到處敎學
도서출판 서예문인화
일러두기 ─ 이 책은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이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가는 가운데 생겨난 이야기 44 편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6편이 실려 있습니다. - 이 책의 원고 편집은 공저자 이름의 가나다순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 원고 사이마다 실린 작품과 설명, 창작노트는 이 책을 기획, 진행한 인재 손인식의 작품이며, 이 작품들은 별도로 마련된 전시회에 출품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인재 손인식 개인전,『겘겚 何獲, 찾지 않고 어찌 얻을 것인가』(2011. 5. 26∼6. 1 자카르타 한국문화원)의 도록을 겸합 니다. - 이 책은 인재 손인식 운필집 제16집을 겸합니다. - 이 책의 제작에는 LIG 인도네시아의 일부 지원이 있었습니다.
到處敎學 인재 손인식 운필집 제16집
│머 리 말│
서로를 성장하게 하는 교학 배우고 가르치기, 즉 교학(敎學)은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면, 학교, 가정, 사회, 기업 등 어느 곳에서나 교학은 끊임 이 없습니다. 일상에서 항상 교학이 활용되며, 인류의 성과는 모두 교학을 통해 서 이루어집니다. 교학에 관한 한 한국인들의 열정과 능력은 이미 세계에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거니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결과들을 양산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한국과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는 한인들의 교 학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학부모와 선생 님은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우며, 기업은 사원을 가르치고 사원은 배우며 일을 하 겠지요. 서로가 처한 입장에서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인데 그것은 서로를 성장하게 하고, 그 조화는 항상 나름의 성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옛 선인들도“가르치 고 배우는 일은 서로 성장하는 것(敎學相長)” 이라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 책에는 인도네시아에서 공부하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의 이야기에서부터 반 세기 가깝게 살아온 원로의 이야기까지, 50편의 갖가지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 다. 이런 사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을 엮어내는 것은 어느 동포사회에서도 흔치 않은 일로, 타국에서 가르치고 배우며 꿈을 이루어 가는 우리 한인동포사회에 교 학에 관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책에는 교학을 주제로 한 서예 문인화 작품 50여 점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 니다. 이를 기획하고 진행한 인재 손인식 작가의 작품으로서 작품설명과 작가의 단상이 함께 정리되어 있어, 보고 읽으며 느끼게 하는 책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손인식 작가께 감사의 말을 전하며, 참여하신 모든 분들과 아울러 인도네시아 한 인동포사회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11년 5월
주 인도네시아 대한민국 대사 김 영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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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ching and Learning, makes each other grow Teaching and learning is inextricable with human life. Teaching and learning exists wherever human exists such as schools, homes, societies, corporations and etc. It is practiced every day and all of the human accomplishments are achieved through it. Korean's enthusiasm and ability on teaching and learning are world-renowned. Outstanding and talented Koreans are being crowned with great successes in various fields worldwidely. Moreover, there will be new accomplishments as time goes by. How is Koreans' teaching and learning carried out in Indonesia where the strategic relationship is growing? It is in the same manner everywhere; parents and teachers teach so that students can learn, companies teach employees and employees work while they are learning. They do their duty in their positions. That makes everyone grows and the harmony makes fruits always. That is why our ancestors emphasized that“To learn and to teach is growing together.� This book contains 50 various stories from a story of a 7th-grade student who is studying in Indonesia to an elder who have lived almost half century. It is not common in any overseas Korean societies to compile these kinds of stories into a book. I believe it will be a good material on teaching and learning to overseas Korean societies. Teaching and learning-themed 50 literary art works are contained in this book as well. They are Master Shon, In Shik's works, who produced and proceeded this project. Captions and artist's thoughts are arranged together so this book makes us watch, read, and feel. I want to thank Master Shon, In Shik and wish all the participants' and Korean society in Indonesia's tremendous success. May 2011
Kim, Young Sun The Korean Ambassador to Indone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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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제1부 도처에서 가르치고 배우며 소화제 / 김선영 ● 12 나의 스승님 / 김시현 ● 17 아이들의 그릇 만들기 / 김영덕 ● 23 진짜 족보와 한국 족보 / 김은숙 ● 29 타국에서의 가정교육 / 김태현 ● 34 하숙집 선생님들 / 김필수 ● 40 거울 앞에서 / 김효경 ● 46 씨앗을 품은 흙의 노래 / 김효정 ● 50 맹부모 삼천지교 / 박광호·윤진희 부부 ● 54 아! 인도네시아 / 박상천 ● 60 또 다른 도전을 기다리며 / 방치영 ● 67 독서, 그 무한의 스승 / 복영빈 ● 73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JIKS의 과거, 현재, 미래 / 선종복 ● 79 신호등에 어떤 불이 들어오면 건너야 할까요? / 손희정 ● 85 청록빛 청년 / 신돈철 ● 89 인도네시아 생활의 보람과 즐거움 / 신영덕 ● 94 동아시아 먼 나라의 이슬람 평화 / 안선근 ● 99 한 가정 세 가지 언어 / 안창섭 ● 104 가르침 속에 배움이 있다 / 양수려 ● 110 아들의 손님 / 양승식 ● 116 어린이 문화 외교관들 / 유세라 ● 122 이질과 동화의 변주곡 / 이규백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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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며 함께 걷는 길 / 이남숙 ● 134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 이병수 ● 140 나의 한국인, 뇨냐! / 이선우 ● 146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 공부 / 이수진 ● 151 멋쟁이 김영희 선생님께 / 이은경 ● 157 넌 나의 운명! / 임미진 ● 162 새로운 도전에 대한 단상 / 임준섭 ● 167 이틀 뒤면 / 장혜숙 ● 173 과거에서 길을 묻다 / 채인숙 ● 179 현지인에게서 배운다 / 최정식 ● 183 큰딸의 귀환 / 하연경 ● 188 나는 행운아 / 한선아 ● 193 자립심과 배려 / 허숙의 ● 199 사랑하는 아들 준기에게 / 홍성민 ● 204
제2부 존경하는 이웃들을 찾아서 원칙과 감성의 삶 ● 210 / 김재유 장로에게서 배우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토대와 성장 ● 217 / 김종권 회장의 40년을 통해 느끼다.
근원을 찾아서 ● 225 / 씨의 창조자 박병엽 사장에게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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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아름답고 큰 꿈 ● 232 / 리틀램 스쿨 박현순 원장의 배우고 가르치기
지금 여기, 함께 존재함으로 행복한 우리 ● 240 / HAPPY JAKARTA의 음악바이러스로 배우다.
순박, 과묵 그리고 조용한 실천 ● 248 / 과묵, 실천형 이종후 사장에게서 배우다.
서두르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 258 / 공인 한상재 회장에게서 배우다.
과묵, 초지일관의 삶 ● 266 / 홍훈섭 사장에게서 배우다.
제3부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1
● 274
저서를 통해 살피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2
● 280
한국어문화의 실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3
● 286
미디어 문화 ● 292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자선문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4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5
● 298
교육문화의 실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6
종교문화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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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4
작품목차
自勝者强(자승자강) ● 16
躍然生豊(약연생풍) ● 192
知궋一致(지행일치) ● 22
如爲山(여위산) ● 198
生如遠궋(생여원행) ● 28
如鳥數飛(여조삭비) ● 203
진흙을 떨치고 피어나다
與天爲徒(여천위도) ● 208
● 33
惠好(혜호) ● 39
벍者겚
길재 시 ● 45
一걓永逸(일로영일) ● 224
너그러운 마음으로 ● 49 늘 깨어 있으라!
勤人搜道(유자색부 근인수도) ● 216
日常得韻(일상득운) ● 231 有志竟成(유지경성) ● 239
● 53
억겁의 인연을 매화로 피우다
● 59
늘 푸른 기상으로
道(도) ● 66
● 247
積ぅ成山(적궤성산) ● 256
돌처럼 침묵하라 난처럼 고요히 말하라
● 72
大者爲棟梁(대자위동량) ●257
罔曰弗克 惟旣厥心(망왈불극 유기궐심) ● 78
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일도하사불성) ● 265
幾生修得到虛心(기생수득도허심) ● 84
盡人事待天걤(진인사대천록) ● 272
大象無形(대상무형)
● 88
청산도 내 벗
● 279
無未知(무미지) ● 93
큰 뜻 너른 맘
● 285
無涯(무애) ● 98
幸福(행복) ● 291
忙裡偸閒(망리투한) ● 103
惠而好我 킼手同궋(혜이호아 휴수동행) ● 297
겘겚何獲(불색하획) ● 109
繪事後素(회사후소) ● 303
山氣水智(산기수지) ● 115
후회 없는 오늘로 내일을 가라 ● 309
山氣澄心(산기징심) ● 121 산 지고 물 안고
● 127
산처럼 높고 두텁게 ● 133 相反相成(상반상성) ● 139 서둘지도 게으르지도 말고
● 145
歲겘我延(세불아연) ● 150 早傳松意(조전송의) ● 156 겘欺自心(불기자심) ● 161 守我(수아) ● 166 水滴石穿(수적석천) ● 172 隨處作主(수처작주) ● 178 繩鋸木斷 水滴石穿(승거목단 수적석천) ● 182 視遠惟明(시원유명) ●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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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김선영
소화불량에 두통이 끊이질 않는다. 만성이다. 편하게 말하면 성질 못된 탓 이고, 쫌 고상틱하게 말하면 신경과민이니 누굴 탓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탓 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기도문 한 구절이라는“내 탓이요 내 탓 이요 내 탓이옵니다” 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성인군자 가 아니니 이 풍진 세상을 살면서 어찌 탓 꺼리가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 극히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더러 핑계 좀 대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둘러보면 별 것이 다 탓 꺼리가 되는 세상을 내가 지금 살 아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다 돌아보니 지난 십 수 년은 세상이 유난스레 내 신경을 건드린 것이 사실이다. 딱 꼬집기는 그렇지만 여기 인도네시아 입성 후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니 매정하게 외면하지 못한 이유로 커피를 많 이 마신 세월이었다. 애꿎은 내 위만 혹사시킨 세월이었다. 아직도 미성년이 지만 내 사랑스런 아이들이 그 변화무쌍한 성장기를 거친 세월과 겹쳐있다. 거기엔 아이들의 성장속도를 못 따라간 내 갈등도 포개져있다. 그리고 자연 과학의 발달로 인한 대중매체, IT 산업의 변화, 정보의 홍수로 그냥 떠밀려 흘러버린 세월과 덧붙여있다. 그러나 궂은 과거일랑 모두 일단 내 탓으로 돌 리리라. 그때그때 잘 대비를 하지 못하는 나, 도대체 약삭빠름과는 거리가 먼 얼빵한 사람이 나이니 말이다. 내 역할은 건강한 밥상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사랑과 행복이라는 울타리 둘러치고 그 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었다. 가장으로서 비바람을 맞으 12
며 거친 들판을 짓쳐나가는 남편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 내가 맡은 역할 이었다. 앞으로도 이 역할은 피할 수 없다. 중단 없이 계속해야 한다. 초보 엄마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십여 년 전 나는 자식 교육 하나만은 자신 이 있었다. 초보 엄마들에게 넘쳐나는 자녀교육 정보들 속에서 조금은 우왕 좌왕 하면서도 나름 자신감이 충만했다. 들끓는 내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쏟 아 부어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어엿한 아이,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도 아름답도록 잘 빚어낼 자신이 있었다. 지나간 일로서 과장 이라면 과장이겠지만 집안에서는 효자효녀요,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서 교 우관계가 좋으며, 선생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런 아이로 번듯하게 키워내고 싶었다. 표정이 항상 밝아야 하거니와 걸음걸이도 반듯해야 했다. 거짓말 따위가 아이 입에서 나와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큰아이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한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묵과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스스로 무릎을 치며 탄복할 묘안을 짜냈다. 108배다. 부처님도 엄청 좋아하실 것 같았다. 나는 지체 없이 아이에게 108 배를 시켰다. 마치 아이가 108배를 하고 싶은 것으로 착각을 한 것처럼, 일주 일 동안 빠지지 않고 하루에 한번씩 108배를 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 로 코미디인 것은 나도 아이 옆에서 108배를 했다는 것이다. 그 가증함에 부 처님도 배꼽을 쥐셨을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리 지나간 일들이지만 돌이켜보면 내장 깊숙이 숨을 들여 마셔도 가슴이 빨개지 는 과거다. 그러니 자질구레한 것들 들춰서 내 건강 해칠 일은 하지 않겠다. 다만 들추지 않으면 안 될 치부 하나 더 들추고 가겠다. 책 읽히기 오류다. 정 말 책값깨나 지불을 했다. 물론 지금 와서 책값 아깝다는 것은 아니다. 책 읽 히기가 어찌 오류란 말인가 하고 반문할 분들도 있겠지만, 때를 못 맞추거나 흥미가 없는 상태에서 책 읽히기는 명백한 오류라고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 13
다. 지금 생각해보니 순수하기만 했던 아이들 탓도 있다. 엄마가 좋아하니깐 같이 놀이 삼아 책들을 끼고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나와 아이들은 함께 책 을 많이도 읽었다. 그 중에는 나도 소화하기에 부담스러운 분야도 있었다. 아 이들이 그 책들을 읽고 잘 이해했을지는 물어 본적이 없다. 암튼 그즈음 나와 아이들에게 지식이 흘러넘치는 시기였다. 나는 득의만면했다. 나는 지식을 눈으로 읽고 귀로 흘려도 아이들은 어떤 지식 하나라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 고 올곧게 지혜로 연결시키리라 믿었다. 과유불급, 아이들의 머리는 입력시킨다고 무조건 다 받아들이는 컴퓨터가 아니었다. 엄마가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다 저장하는 기억장치가 아니었다. 창의적으로 활용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생각일 뿐이었다. 나름대로 활 용을 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정해야 했다. 소화불량이었다. 아무 리 비싼 거위간도 소화를 못 시키면 아무 소용이 없다질 않는가. 넘치는 것은 미련 없이 배설될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먹기를 적당히 줄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를 하기 시작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만이 아이들를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차츰 지난 일이 되어갔다. 억지로 읽힐 필요가 없으니 꼭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만을 구입했다. 새로운 발견도 있었다. 어느 사이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나나 아 이들이 강요 없이도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즐겨보았던 책, 재미있었던 책 을 짬짬이 또 읽는 것이 얼마나 괜찮은 일인지 그때 새삼 느끼게 된 것은 괜 찮은 덤이었다. 좀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살피게 되었는데 달라진 점도 많았다. 우선 정 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며 지식을 취하는 방법이 나와 달랐다. 사회를 바라보 는 방식도 달랐다. 나름 합리성이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내가 그들에 게서 배울 것도 많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방법으로 대화를 하고 비 14
슷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세월은 분명 약 이다. 모르던 것을 알게 해주는 썩 괜찮은 약이다.
ㅣ기획자 주ㅣ 김선영! 인도네시아 16년째 살고 있는 주부다. 생활에서도 솔선수범이 특기이고, 솔직한 표현 의 독특한 문체 또한 특기가 아닐 수 없다. 책읽기 모임 자카르타 반딧불 회원이며 자필묵연 회원으로 붓글씨를 즐겨 정기전에 2 회에 걸쳐 출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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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勝者强(자승자강. 老子 句), 자기 자신의 욕망 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한 사람이다. / The strongest is the one who overcomes one′ s desire. 남을 이기는 자는 그 자보다 강하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승리자는 없 습니다. 한 순간의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순간 의 승리에 도취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남을 이기는 데만 골몰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 니다. 잠시 다른 사람을 이긴 것으로 자신까지 이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 다. 비열한 방법으로 남을 절망에 빠뜨리고 우 쭐해 해서는 더욱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신과 의 싸움에서, 바로 그 싸움에서 적당히 타협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패배자는 없습니다. 한 순간의 패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의 패배 에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기기 위해 최 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 망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인재 손인식의 필묵향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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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현
제게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저리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스승님 한 분 계십 니다. 저를 한의사가 되게 하신 분이며, 제 한의사의 길에서 절대 사표가 되 는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한의사였던 아버님에 의해 한의를 배웠습니다. 호기심과 강요가 반반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공부는 저의 중학교 3학년까지였습 니다. 그 때 아버님이 돌아가심으로서 저의 한의 공부는 자연스럽게 접혔던 것입니다. 선친이 돌아가신 후 저는 다시는 한의를 배우지 않겠다고 생각하 고 전공도 경제학을 선택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집안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서 저는 대학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3학년 1학기를 마칠 때였습니다. 스승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 니다. 선친으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한의원에 나 와서 일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방학 동안 저는 주5일 하루 4시간 정도를 한의원에 출근했습니다. 약도 싸고 약 창고 관리도 하고 침도 놓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되던 날 스승 님께서는 제게 200만원을 쥐어 주셨습니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60만 원쯤 이었을 때이니 제게는 정말 큰 돈이었습니다. 그 돈은 당시 한의대를 졸업한 한의사 초봉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를 한의의 길로 끌어들이기 위한 스승님의 저의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렇게 한두 달 일을 하는 동안 제게는 많은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선친을 따라 산에 올라가 약초를 채취하면서 놀던 일이나, 약초에 대 한 상식, 침 자리 배운다고 몸의 이곳 저곳을 찔러 보던 기억 등이 되살아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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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스승님께서 운 영하시던 한의원은 경 기도 성남시에 있는 ‘감초한의원’이었습니 다. 면적이 그리 크지 않은 한의원이었는데, 하루 환자가 200명 이상 찾아오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성남시 택시 기사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스승님은 당시 가난하 여 생활이 어려운 환자나, 돌보는 가족이 없는 노인환자는 돈을 받지 않고 돌봐주었습니다. 그 환자들이 주머니에서 꺼내놓던 사과, 굽은 손으로 건네 주던 떡이 맛있게 느껴지면서 저의 꿈은 다시 한의사로 돌아서기 시작했습 니다. 저는 기회를 보다가 스승님께 한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 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한의대로 다시 입학 준비를 하겠다는 생각을 밝혔습 니다. 그런데 의외로 스승님은 저를 만류하셨습니다. 일단 다니던 학교를 다 니면서 틈나는 대로 한의원에 나와서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매일 저녁마다 2시간씩 스승님 자택에서 한의술을 사사 받고, 졸업 후에는 군대를 다녀와서 중국의 한의대로 유학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한국의 한의학에 중 국의 한의학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말이면 내 선친이 그랬듯이 강원도 횡성의 농장에 데려가서 약초를 가르쳐 주시고, 매일 저녁마다 침, 약, 방제 등 임상위주의 수업을 해 주셨습니다. 한편 한의 원에서는 허드렛일에서부터 환자 보는 일까지 모두 경험하게 하시고, 항상 그 결과를 평가해주셨습니다. 18
자연스럽게 스승님과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 알게 모르게 배운 것은 의사로서 스승님이 지니신 마음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가장 큰 가르침 이었습니다.“환자를 돈으로 보면 환자의 병이 안 보인다.” 고 하셨고,“병은 마음에서 오고 마음에서 나간다.” 는 것이 아버님 살아생전의 지론이었음을 전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제 평생 가슴 속에 생생히 남을 말씀들이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한 가난한 집 할머니를 돌봐주고 나서 진료비라며 건네주는 봉 투를 마다하시고는, 냉수 한잔 달라 하여“시원하게 마셨으니 그걸로 됐다.” 고 하시던 모습은 말이나 글로 될 수 없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기둥으로 항상 존재하시던 스승님은 경기도 광주의 가난한 소작농으로 태어나 먹을 것이 없어서 방황하다가 밥만 먹여 달라고 들어간 곳이 한의원이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한의를 배운 스승님은 후에 그렇게 훌륭한 한의사가 되신 것이었습니다. 제 선친과는 같은 한의사로서 많은 것 을 함께 나눈 돈독한 사이였는데, 그 인연이 다시 저에게 이어졌고 저를 아들 이라고 소개할 만큼 저를 아껴 주셨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늦은 군 생활 할 때에도, 또 유학 생활 중에도 한 달에 한 두 번 씩 편지를 보내 주시며 한의학 정보를 꼭꼭 동봉하여 주시던 스승님은 제겐 아버님 못지않은 존재셨습니다. 중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 지 않았습니다. 이미 임상 수업을 어려서부터 한 덕택에 시험에 나올 만한 내 용을 미리 집어 낼 수 있었고, 다른 중국학생이 이해를 못할 정도로 좋은 성 적을 얻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한국의 스승님이 요구하시는 숙 제였습니다.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스승님은 여전히 제 길잡이셨습니다. 다시‘감초한의원’ 에서 근무하게 해 주시는 것은 물론 의문이 더욱 많아진 제가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도네시아와의 인연도 스승님이 맺 어주셨습니다.“내가 갈 사정이 아니구나. 네가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한동안 자카르타에서 감초한의원을 운영 19
하던 저는 5년여 정도를 뉴질랜드에서 살다가 다시 연 전에 자카르타로 돌아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잠깐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 스승님은 돌아 가셨 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임종의 순간까지도 저를 찾으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저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뇨를 오래 앓으셨던 스승님은 결국 제 선친처럼 당신 병을 고치지 못해 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 선친도 당뇨로 돌아가셨는데, 한 때는 자신의 병 도 못 고치는 의사는 안할 것이라고 한의를 거부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유전 인 것인지 저 또한 당뇨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의를 공부하면서 항상 마 음속에 당뇨병 정복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을 잃게 한 병, 또한 저를 괴롭힌 당뇨병만큼은 반드시 이겨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뇨병에 대 20
해 천착한 결과 제 병과 다른 환자들의 당뇨병을 치료를 해냄으로써 환자를 환호하게 한 것은 물론 저 또한 큰 성취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병으로 스승님을 잃은 것입니다. 제가 후회되는 것은 제가 고집을 피워서라도 제 방 식대로 스승님을 치료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승님께서 당신의 방법 을 고집하실 때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던 제가 참으로 원망스러웠습니다. 저는 한 참 동안을 허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제게는 저의 애 제자인 아들이 있습니다. 7살 때부터 침을 놓게 하여 이미 수기법이 뛰어난 제 아들을 보며, 선친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헤아립니다. 그분들의 심정을 느 끼기도 합니다. 이제 저는 제 선친이 그 조부님으로부터 배우신 가르침을 조 금이라도 더 제게 가르쳐 주려 하셨듯이 저 또한 제 아들에게 한의를 알려주 고 있습니다. 또 내 스승님이 그랬듯이 이론이 아닌 진정한 의사의 모습을 보 여주어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진 빚이 조금 이나마 감해지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l기획자 주l 김시현! 1967년 서울 출생이다. 8대를 이은 한의사 집안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한의를 공부 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에 유학하여 산동중의약대학교(한의대)를 졸업했다. 경 기도 성남 소재 감초한의원에 근무했으며, 2000 년 자카르타에 감초한의원을 개원했다. 2004년 12월에는 저서로 < 재미있는 한방 칼럼> 을 출간했으며, 현재는 자카르타 남부에서 관준한의원의 원장으로 있다. 그의 의술이 사회를 밝게 하는 큰 도구로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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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란 인간의 생존을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역사의 발달을 추진하게 해준다. 실천은 인간 인식 의 참·거짓을 검증하는 기준이다.” (마르크스)
“실천이란 이념을 실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헤겔).
“실천이란 유용하고 좋은 일을 성취하기 위해 힘과 행동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존 로크).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라는 말, 우리 일상에서 늘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말일 것입니다.
知궋一致(지행일치), 非知之難 궋之惟艱(비지지란 행지유간, 書經 句)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는 것 이 어려운 것이다. / Knowing is not difficult but putting in to practice what you know is difficult.
김영덕
우리 집 큰아이나 둘째처럼 유년시절을 보낸 아이도 드물 것이다. 특히 큰 아이는 유치원도 못 다니고 학습지 하나 해보지 못한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 다. 요즘 세상에 비추면 무슨 대단한 교육법이 있지 않았나 생각할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선 그 때 살던 곳이 이리안자야 밀림 속 마을로서 환경이 참 열악한 곳이었다. 우리 부부 나름의 어떤 대책을 세우기 쉽지 않은 곳이었 고, 한편으론 한시적이니만큼 자연과 바람, 즉 상황에 맡긴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시 그 상황에서 다시 아이들을 키운다고 해도 똑같을지 도 모른다. 당시 두 아이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가까운 곳에 학교도 없는 곳이었으니 어울릴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사내 녀석들이라 둘 이 형제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했다. 사방을 삥 둘러봐도 나무밖에 보이지 않던 곳에서 두 녀석들은 맘껏 자유를 누리며 지냈다. 인위적으로 주입되는 교육은 찾아볼 수 없는 그곳, 아이들은 둘이 집안에서 놀다 지치면 밖으로 나 가서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것이 또 다른 놀이였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세차를 하고 있는 운전기사를 만나면 신이 나서 같이 세차를 했다. 세차가 끝 나면 그 차로 주변을 한 바퀴 돌기라도 하면 바로 그것이 일상 중에 일어나 는 신나는 이벤트였다. 아이들 교육을 할 수 있는 자료라고는 한국에서 가져 온 명작만화 비디오나 몇 가지 아동 도서, 기초 한글과 숫자 벽보판 등이 전 부였다. 큰 아이는 스스로 일찍 한글에 관심을 보였다. 궁금증을 드러내고 이것저 것 묻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한글의 자모를 알려 주면 쉽게 익혔다. 7살이 되 23
면서 수셈에도 관심을 가져 종이에 더하기 빼기를 가르쳐 주고, 문제를 내 주 면 곧잘 풀이를 하기도 했었다. 그게 전부여서 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 이는 학교생활 모두를 재미있어 했다. 학교생활을 아주 적극적으로 잘 해 주었 다. 반면에 둘째는 형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는‘나도 나도’하고 관심을 드러 내다가도 막상 설명을 해주면 곧 흥미를 감추곤 했다. 자연 내버려 두는 편이 되었다. 6살이 되도록 한글은 물론 숫자도 가르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작은 아이가 7살이 되던 해였다. 우리 가족은 자카르타로 이주를 했다. 남 편의 근무지가 바뀐 것이다. 그때부터 내게는 본의 아닌 안달이 시작되었다. 작은 아이를 한국 유치원에 넣으면서 부터다. 당장 다른 아이들과 비교가 되 었다. 엄마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인 내가 더 급했다. 아이를 몰아세우며 한글과 셈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럴까 초등에 입학하고서 도 둘째가 하는 공부는 도대체 미덥지가 못했다. 아이를 닦달하는 횟수가 잦 아졌다. 틀만 잡아주면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나가는 큰 아이와 달리, 둘째는 붙들고 늘어져야 했다. 스스로 즐거워하지 않으니 그 결과가 내 욕심에 차지 않을 것 은 당연했다. 속상했다. 지치기도 했다.‘둘째에게 쓴 시간 큰 아이에게 반만 24
썼으면 천재 만들었 겠다.’ 는 혼잣말이 절 로 새어나왔다. 엄마 의 말을 일단 경청하 고 잘 따라와 주는 첫 째와 청개구리 식으 로 답을 하곤 하는 둘 째는 스트레스의 원 인이 되었다. 첫째처 럼 둘째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둘째랑 신경전을 벌였다. 학교를 가도 모든 선생님들에게 칭찬 받는 큰 아이와 달리 둘째는 아무런 문제는 없지만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탓에 반응 또한 늘 그저 그런 정도였다. 내가 둘째를 지도하는 방식에‘이건 아닌데’하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 은 둘째 초등6학년 때였다. 지칠 대로 지치기도 했지만, 타의적으로 공부하 는 아이에게 엄마가 평생 옆에 붙어서 함께 해줄 수 없다는 답을 얻어낸 것이 그때였다.‘잘하든 못하든 본인 스스로의 책임이고 몫’ 이라고 아이에게 말하 고 손을 떼기 시작했다. 지금은 절대 내 방식대로 이끌려고 무리를 하지 않겠 다는 다짐을 했다. 학교도 작은 국제학교로 옮겨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 터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욕심을 버리고 인도자가 아닌 조력자 가 되고나니 아이도 스스로 자기 방식대로 학업을 따라가며 자신감도 얻어 갔다. 그렇다고 둘째가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나름 해야 할 것을 스스로 이끌어 나갔다. 내 욕심이 다 사그라진 것은 아니어서 가끔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지만, 둘째의 다름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자각 이 일면서 둘째 스타일을 수용하게 되자 부딪히는 부분들이 적어졌다. 내가 좀 더 일찍 첫째와 다른 둘째의 특성을 받아들였더라면, 둘째가 훨씬 더 일찍 스스로 잘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반성을 한다. 25
태호, 태성, 경희
터울이 많이 지는 셋째, 셋째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주변에 많은 또래 아이들과 함께 자랐고 유치원도 다녔다. 그런 막내를 향해 큰아이는‘행운아’ 라고 표현한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아이를 키워서 그런지 막내는 편하게 키 우고자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이 느껴지는지 첫째와 둘째는 그것이 불 만이다. 막내에게만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를 또 깨 우치게 한다. 막내의 공부를 도와주다가 어쩌다 큰 소리라도 나면 큰아이 왈 “엄마 그렇게 화내면서 가르치면 더 모르거든요.”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이들은 귀를 막아버리고 더 멍해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간 망각을 한다. 둘째로 그렇게 경험을 했음에도 때로 잘못을 되 풀이 한다. 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날 때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 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간 망각을 한다. 그래서 막내의 공부를 도 26
와주다가 화가 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 심호흡을 한다. 그러면 막내가 다가온다.“엄마 이제 잘 할게요.”하면서 말이다. 아이도 나도 다시 깨닫는 순간이다. 공부, 마라톤 게임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인생인들 어찌 다르랴. 처 음부터 끝까지 잘 달려 완승을 하면 얼마나 좋으랴만, 넘어지면 일어서고 뒤 떨어져도 꾸준히 달려 목적을 이룬다면 그 또한 큰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자유롭게 탐색할 시간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자유롭게 탐색을 하면 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 잘 할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빚어가는 각기 다른 모양의 그릇, 부모의 도움이 있어 좀 더 완성도 높은 그 릇이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나는 아직 자녀 교육에 관해 진행 중인 엄마다. 무엇이 실패와 후회가 없을 바른 길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를 기르고 교육 을 해오면서 몇 가지 느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자기 그릇 만들 기를 조용히 돕고자 하는 마음이다. 세상 모든 그릇의 적절한 쓰임을 인정하 면서…
l기획자 주l 김영덕! 그에게서는 늘 온유함과 성실의 향이 짙게 풍긴다. 주부로서의 일상, 신앙생활, 취미생 활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할 바에 충실히 해내는 실천형이다. 월화차문화원 자필묵연회원으로 자필묵연전 5 회 참가. 서울서예대전, 대한민국서예대전 등 입, 특선 다수의 경력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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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如遠궋(생여원행), 삶은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 Life is going a long way. 삶은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반나절을 지체하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그만큼 짧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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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
“엄마 전화 왔어!”셋째가 외친다. 넷째가 내게 쪼르르 달려오며“엄마 전 화 왔어!”하고 반복을 한다. 엄마나 아빠와 대화를 할 때 아니고는 학교에서 나 유치원, 그리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대부분 인도네시아 말이나 영어를 쓰 는 아이들인지라 모처럼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한국말에 신났을 것이다. “누군데?” “이모야.” “어떤 이모?”나는 그때마다 습관적으로 묻고는 또 아 차 한다. 아이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아이 이모라니 깐!”역시 아이의 대답엔 또 그런다는 식의 짜증이 묻어난다. 따르릉! 전화가 걸려오면 아이들은 앞 다투어 전화를 받는다. 서로 받으려 고 한 바탕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 대부분은 나를 찾 는 것이고“누구세요?” 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상대방의 대답은 늘“응 이모 야.” 일 것이기에 아이들과 나와의 신경전은 더러 일어나는 일이다. 더러 아이 아빠를 찾는 전화가 오기도 하는데 이때는 대부분‘큰아빠’ 라는 말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가족이 없는 해외에 살다보니 한국인들 끼리는 대부분 모두 형제요 자매처럼 사는 탓이다. 특히 젊은 측에 속하는 우 리 부부는 이웃 을 만나거나 집 을 방문하는 경 우가 생기면 아 이를 향해“이 모 인사드려 라.”하고“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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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 인사드려라.”한 것이 원 인이다. 한국말이 다소 서툰 아이들이기에 만나는 어른들 이 친근감을 주기 위해 던지 는 농담, 즉 너도 나도 이모 요 큰아빠라는 말을 농담으 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도 한 몫을 한다. 그러니 한국에 다 녀온 뒤로“엄마 왜 우리는 인도네시아 큰아빠가 있고 한국의 큰아빠가 있어?”하고 묻는 것은 당연할 것이었다. 내 사랑스런 아이들 넷! 이 네 아이들은 모두 인도네시아 고도 족자카르타 의 햇빛과 비와 바람으로 태어난 아이들이다. 한국에 본사를 둔 현지 자회사 의 직장인으로 근무하던 남편을 만나 인도네시아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인도네시아가 아이들의 고향인 셈인데, 아무 리 그래도 아이들은 진하디 진한 한국인의 피를 지닌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늘 고민스러운 것은 교육이다. 아이들이 반드시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한국 말이요 한국문화인 때문이다. 한국엘 다니러 갔을 때다. 놀란 것은 시어른이었다. 모처럼 안아보는 귀여 운 손자 손녀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낙망을 하셨다. 아이들은 그나마 할 줄 알던 한국말도 시어른 앞에서 더듬거렸다. 어리기도 했지만 한 국의 낯선 환경과 느닷없이 많아진 친척들도 아이들이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가 보았다. 주눅이 들었는지 생리현상마저 실수를 했다. 시어른께서는 “괜찮다 아직 어린 아이들 아니냐. 차츰 낳아 질 것이다. 열심히 가르쳐라.” 하셨지만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내 등어리로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느낌 30
이었다. 인도네시아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아이들을 무릎 앞에 나란히 앉혔다. 한국 말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치 우리 아이들을 위한 것처럼 족 자카르에도 토요한글학교가 생겼다. 거기에 모인 아이들은 그곳에서만큼은 자연스럽게 한글 전용이 되었다. 토요한글학교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정말 열심히 다닌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한국말에 진전이 보일 때쯤 아이들의 입에 서 현지족보의 문제성(?)을 따지고 드는 질문들이 생겨났다. 작고 사소한 이런 일들이 어찌 아이 키우며 살아가는 재미가 아니랴만 참 으로 어이없고 재밌는 일도 있었다. 늘 그렇듯 교회를 다녀온 어느 일요일 오 후였다. 큰 아이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것이었다.“엄마! 엄마는 주기 도문 알아?” “너도 알잖니?”내 반문에도 아이는 정색을 하며“엄마가 한 번 외워봐.”하는 것이다. 나는 아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 버지……”아들이 끼어들었다.“거봐 엄마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니까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 할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맞지?”한다. 어이가 없었다. 어디 서 한 번쯤 읽은 우스게 소리지 싶은데,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묻는 것이었다. 실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진짜 가족관계 호칭과 인도네시아 가짜 족보로 아이기 혼돈을 겪더니 이젠 별별 곳에 촌수를 대입하는가 싶어 가상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아이 또한 그 유머를 알고 엄마를 놀렸다 는 사실을 곧 실토를 해 또 한바탕 웃음을 토했다. 족자카르타, 이젠 내게도 남편에게도 고향 같은 곳이다. 더러 열대기후에 싫증이 나고 고국과 고향이 그립기도 하지만 고향처럼 정붙여 산다. 한국엘 갔다가 돌아오면서 공항에 내리면 내 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훈 기에 훅 실려 오는 인도네시아의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그래 바로 이거야’ 하기도 한다. 고국이 있기에 고국처럼 살고 우리말을 알기에 인도네시아 말 을 즐긴다. 31
아이들은 고향을 묻지도 않고 진짜 족보를 들추지도 않으며, 건강하게 잘 자란다. 한국엘 가자고 조르지도 않고 모자란 한국말에 아쉬워하지도 않고, 누리지 못하는 한국문화를 크게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애타는 것 은 우리 부부다. 더 자라기 전에 한국식 예절이라도 좀 가르쳐야겠다 싶어 붙 잡아 앉히면 그저 천방지축이다. 매를 울려야 할지 내가 울어야 할지 암담할 때도 없지 않다. 그래서 느는 이 기도인데, 기도를 하려면 가끔 떠오른 말이 아들이 주장한‘하나님의 손자’ 란 말이다. 그래, 할아버지 하나님 빽 믿고 건 강하게만 자라다오. 너희들은 자랑스런 한국인이다. 한국말이 좀 부족해도, 상식이 모자라도, 예절을 잘 몰라도 분명한 것은 한국인이란 사실이다. 사랑 스런 아이들아!
l기획자 주l 김은숙! 인도네시아 거주 16년, 족자 거주 13년의 주부다. 네 아이의 엄마로 틈틈이 글쓰기 를 즐기는 그는 제4 회 한나프레스 신춘문예 소설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때묻지 않은 심성 은 그를 아는 모두에게 하나의 정화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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곝, 진흙을 떨치고 피어나다. / Blooms free from dust. 곝(연)은 장수, 건강, 명예, 영생, 행운, 그리고 군자를 상징하는 꽃입니다. 번뇌의 구 덩이같은 진흙 속에서 깨끗하게 피어나는 특성으로 인해 불가의 꽃으로 불리기도 합니 다. 군락을 이루어 꽃이 필 때면 그 향기가 가히 넋을 잃게 합니다. 솟아오른 대공, 크 고 넓은 잎의 정취, 꽃의 아름다움이 예로부터 시인 묵객의 애완 대상이었습니다. (인재 손인식의 필묵향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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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이번에 둘째까지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마침 자녀교육에 대한 글을 쓰라는 이 제의를 접하게 되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엄마로 써 잘한 일과 부족했던 일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결론은 모두가 부족하고 후회되는 일만 생각이 났다. 그러기에 잘 자라준 아이들에 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고, 가정교육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함께 노력을 해준 남편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던 딸 예지, 일찍부터 스스로 한국대학을 진 학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고2때 JIS에서 JIKS로 전학하여 한국대학입시 를 준비하였다. 반면 아들 범근이는 인도네시아를 너무 사랑(?)했었나보다. 떠나기를 아쉬워하면서“I Love Indonesia”를 외쳤다. 딸 아들 모두 이곳이 고향이다. 한국으로의 대학진학은 유학이고 타지 생활이다. 그러므로 대학생 활과 군대생활을 마치는 동안 조국 한국을 좀 더 깊이 배우고 느낄 것을 굳게 믿는다. 멋지게 변화되어 돌아올 아들과 딸을 상상하는 것은 요즈음 나의 일 상으로 설렘이자 행복이다. 이 세상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있 을까? 모든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자식들이 모든 면에서 반듯한 사람으 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한국인에게는 문화적 충돌이 생겨날 수 있는 타국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가정교육이 매우 중요시 되는 곳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과 잦은 스킨십으로 애정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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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많이 한 편이다. 처음부터 가정 교육은 이래야 하는 것이다 하고 작정을 하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스러운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 인데 언젠가 부터는 아이들이 먼저 스킨십을 시도했다. 어디를 가기 전이나 갔다 와서 엄마, 아빠 얼굴 에 볼을 부비며 사랑을 확인했다.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 잦은 스킨 십은 그 어느 것보다 아이들과 부 모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임을 체험하게 된 셈이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꿈을 크게 가지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게 된다 지 않는가. 그럼에도 한국인들에게 스킨십은 늘 어색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 리 가족이 틈만 나면 함께 즐긴 수영장에서 물놀이는 참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아이들은 떠나면서 나에게 골프를 권하기도 했는데, 저희들로 인해 골프를 멀리했다는 것을 아는 것 같고, 어차피 수영장에서 함께 놀 수 없으니 탁 트인 공간에서 마음을 풀어내라는 것 같아 참 고마운 마음으로 요 즘은 골프를 즐기고 있다. 존경! 교직에 계시다가 지금은 퇴직하시어 충북 청주에서 서예가로 활동하 신 친정아버지가, 내가 결혼할 때 친히 써주신 남편에게 해야 할 도리 10개 항목 중 하나다. 아이들 키우는 것처럼 그 또한 잘 지켰는지 돌아보면 부끄러 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의외의 재밌는 사건이 있었다. 범근이 대학입학 면 접 때인데“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주저 없 이“부모님” 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 예지와 범근이는 자랑거리 35
예지, 범근
하나로“지금까지 살면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고 말한다는 것을 안다. 부부가 살다보면 다투는 일이 왜 없겠는가? 다만 그 아 이들이 다투는 모습을 못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부부의 불편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 부모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발전한 것이 니 이 또한 어지간히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아이들은 키우다보니 사람은 각각 다른 소질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 자신만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도 깨달았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언어에 소질을 드러내 두 아이가 다 언어 관련학과를 지망하여 공부하고 있 36
다. 아쉬운 것은 음악부분이다. 부모마음으로는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었 으면 해서 기회부여를 했었는데, 별 성과가 없었다. 딸 예지는 지금에 와서 “엄마 왜 나를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최고의 수준이 되도록 심하게 가르치지 않았어요?” 라고 푸념을 하는데, 아이들이 싫어하면 억지로 시키지 않는 것이 우리 부부의 교육방법이기도 했다. 대개의 자녀들이 대학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부모를 떠난다.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에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이때 종교는 참으로 좋은 도구가 아닐까 한다. 사춘기의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도 부모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바로잡는 시간이 빠르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 로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더없이 좋은 교육 중 하나이리라. 딸이 대학생, 아들이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한국에서 오신 이민정 선생님의 워크숍에 두 아이들과 함께 참석하여 교육을 받았었다. 스티븐코비 박사의 저서인“성공하는 부모들의 7가지 습관” 이 주제였다. 지금까지의 삶 과 앞으로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숙지하고 계획 할 수 있었던 참 좋은 기회 였다. 배운 내용을 토대로 토론하며 아이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워크숍은 정말 나나 아이들에게도 큰 행운이었고 생 각을 한다. 특별히 기억 남는 것은 모든 일을“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오” 로 바꾸라는 것이었는데, 살아가는데 변함없이 큰 지침이 되고 있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인간관계의 시작이 인사가 아닌가 싶다. 우리 부부는 평 소에 이웃사람들과 인사를 잘 나눈다. 특히 우리 아파트는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편인데, 평소 엘리베이터 안이건, 공공장소이건 가리지 않고 인사를 나 눈다. 그러다보니 인사가 인간관계도 좋게 하지만 스스로의 기분을 좋게 해 37
가족이 정답게
준다는 것을 항상 느낀다. 거기에서도 큰 소득이 있었는데, 주위로부터“그 집 아이들 인사성 밝다.” 는 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작으나마 부모가 아이들 의 거울이 되었다는 점에서 뿌듯한 마음이다. 자녀를 기름에 있어 부족하고 후회되는 일만 많은 내가 글을 쓰다 보니 은 근히 자랑을 늘어놓고 말았다. 요즘엔 자랑을 하려면 값을 치르고 해야 된다 는데,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대신하겠다. 언제나 내게 힘이 되어 주는 가족들, 늘 감사하고 사랑한다.
l기획자 주l 김태현! 결혼 후로부터 살게 된 인도네시아에 23년차 주부다. 월화차문화원 회원이며 한국부 인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늘 수줍고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가 타국생활에 서의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한껏 강조한 것이 당연하고도 새삼스럽게 느껴지는데, 인도네시아 에 한국인 젊은 주부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볼 때 좋은 조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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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好(혜호), 사랑받고 사랑하는 / Be loved and love. “二人同心其利斷金 同心之言其臭如갿(이인동심기리단금 동심지언기취여란)” ,두사 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조화로움이 쇠라도 자르고, 마음을 함께하는 말은 그 향취가 난향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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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수
나는 이 원고 요청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 한편으론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 각을 하는 계기도 되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의 공부와 생활에 대한 반추이기 도 했고, 사회인으로서 또 비즈니스맨으로서 스스로에 대한 관찰이기도 했으 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특별한 이야 기는 없지만 관찰에 따른 다짐을 현실로 옮기는 작은 실천 중 하나로 이 글을 쓰기로 결정을 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이후다. 그 배경에는 이십 수 년 전에 이곳에 사업을 일구신 아버지가 계시다. 나의 인도네시아 생활은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UI의 BIFA과정의 언 어 공부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BIFA 과정을 마친 뒤 내처 대학에 입학을 함 으로서 어려움과 즐거움, 새로운 경험이 함께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모르는 것은 부딪쳐 가면서 배우는 것” 이란 아버님의 강조로 시작하게 된 BIFA과정은 내게는 그야말로 새로운 도전이었다. 미리 공부를 많이 한 학생 들도 더러 눈에 띄었는데, 내가 준비한 것이라곤 간단한 회화책 한 권과 사전 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 앞 하숙집은 내게 종합적인 배움터였다. 어학에 특별한 소질이 없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내게 그곳의 친구들, 그리 고 거기에서의 경험은 언어와 함께 인도네시아를 배우기에 아주 중요한 곳이 었다. 그 하숙집에는 외국인들과 현지대학생들이 많았는데, 그 중 몇몇 현지 인 친구들은 나의 선생님이자 친구로서 문화적 충격과 함께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없던 그들은 언제라도 나와 대화하는 것을 즐겼는데, 한국에서 대학생활과는 또 다른 면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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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 장 먼저 접하게 된 것이 식생 활이었다. 그때 한국 학생들 중에는 인도네시아 음식에 적 응을 잘 못한 이들도 있었는 데, 나는 다행히 처음부터 잘 적응을 했고 그로 인해 인도네 시아 친구들과 어울려 인도네 시아 음식을 두루 순례하기도 했다. 언어습득이 급선무였고 학교생활이 전부였던 나로서 는 그 시절 그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참 많았다. 특히 현지인 친구가 생일을 맞이한 날에는 현지인 식당에 서 어울리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그들과 함께 노천 포장마차에서 손으로 음 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나 현지의 많은 향신료를 접했던 경험들은 지금도 생 생하게 남아있다. 또한 한국인 학생 생일에는 한국식당이나 한국인 하숙집에 서 식사가 있기도 했는데, 인도네시아 친구들 또한 한국인 유학생들로 인해 한국음식을 접하게 되는 기회였다. 하숙집의 한국학생 생일잔치는 정체가 변한 한국음식을 맛보는 계기이기 도 했다. 언젠가 한 친구가 미역을 구해와 생일의 의미를 높이고자 했는데, 그만 양조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바람에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이 검은 미역 국을 먹은 적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미역과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이유를 설명하느라 무진 애를 쓴 기억과, 맛있다고 잘 먹던 현지인 친구들의 기억도 생생하다. 그들 또한 미역을 먹는 것은 우리와 같았는데 다만 미역 줄기만을 먹는다고 함으로써 서로 멋쩍게 웃은 적도 있다. 언제라도 음식은 문화는 이 처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간 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41
내가 처음으로 지진을 경험한 것도 그때 였다. 지진을 겪은 경험이 없던 나는 잠을 자는 중에 어지러움을 느껴 깨어났는데, 다 른 사람들이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도 또 전 등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잠결에 어지럼증인가 의심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숙생 모두가 모인 밖에서 내가 보이지 않자 현지인 친구들은 위험을 무릅 쓰고 급히 나를 구하러 왔다. 그런데도 나갈 생각은 않고 왜 어지러운지 모르 겠다고 지껄이기만 하는 나를 그들은 서둘러 밖으로 이끌었다. 겨우 밖으로 나와 황당한 얼굴을 하며 그들이 나를 향해 누차 강조하던 단어 Dempa bumi는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고야 지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학생으로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친구들과 같이 몸을 부대끼며 운동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과 같이 춤도 춰보고 이야기도 많이 했었지만 운 동을 같이해보지는 못했다.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축구와 배드민턴에 매우 열 광적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것을 보는 것으로 즐기고 만다. 그들이 좋아 하는 운동을 직접 즐기지 못하는 것은 운동할 장소가 없어서였다. 한국에는 모든 학교에 마땅히 크고 넓게 자리한 운동장이 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 는 그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거대한 캠퍼스가 있는 국립대학 UI마저 운동장 다운 운동장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인도네시아 정부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라는 것을 학교 어학당을 졸업할 때쯤에야 알게 되었다. 법적으로 학교시설에 운동장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우민화 정책의 시작은 식민지 시절 지배자들로 부터였다고 한다. 많은 인구의 인도네시아인들이 체력마저 강하면 폭동을 일 으켰을 때 대비하기 어렵다는 것이나, 한 곳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배야욕의 발로였는데, 문제는 독립을 한 뒤 인도네시아 42
정부마저 그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국정부 가 식민지 잔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하여 시행했다고 하는 점이 다. 그 역시 비슷한 연유인데 인도네시아가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으로서 지배 자만 다를 뿐 지배욕은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친구들은 그런 사항을 모르거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심지어는 운동은 운동하는 시설에서 돈을 주고 이용하는 것이 일반화됨으로 써 학교에 운동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투였다. 하물며 운동시설을 돈을 주고 이용하는 친구들 중에는 자신들처럼 엘리트만이 같이 할 수 있는 공간 에서 운동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여튼 이런 모든 이질 적인 문화는 내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했다. 지금 인도네시아의 한인사회에는 어느 사이 나와 같은 동년배 또는 선후배 들이 제법 많아졌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인도네시아 학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으며, 현지 또는 재외국인과의 교류의 폭도 매우 넓은 것으로 알고 있다. 43
월드옥타의 차세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서로 간 교류의 폭도 넓혀져 가 고 있으며, 생산과 교역 현장에서 나름의 역할과 주체로서 활동 또한 활발함 을 알고 있다. 한편 한 인도네시아 간 교역량도 많아지고, 그에 따라 인도네 시아 한인사회 규모 또한 더욱 확대일로에 있음으로서, 문화를 알고 현지인 과 교류의 폭이 넓은 젊은이들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고 커진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에 능력을 갖춘 동료 선후배들이 많음을 감사하게 생각하 며 함께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l기획자 주l 김필수! 그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 군필을 하고 인도네시아에 왔다. 다시 인도네시아 따르마 느가라 대학(universitas tarmanegara)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인도네시아에 사 는 한국인 젊은이들 다수가 그렇듯, 선친께서 일구신 사업에 투신해 성장을 향해 매진하고 있 다. 최근 주변의 진심어린 축하 속에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다. 그의 장도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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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 시 (吉再 詩) A poem by Gil-jae 굢溪芽屋獨閒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 不걐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임계아옥 독한거 월백풍청흥유여 외객부래산조 어 이상죽오와간서) 시냇가 초가에서 홀로 한가로우매,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취가 이네. 손님은 오지 않고 산새들만 지저귀는데 대숲에 평상을 놓고 누워서 글을 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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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경
키가 훌쩍 커진 딸아이가 자기 방에 거울을 하나 걸어달라고 한다. 기왕 장 만하는 김에 전신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준비해주었다. 그랬더니 가장 소중한 시간 절반 이상을 거기에 소비하는 거다. 하루 중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먹 고, 자고, 배설하고, 씻는) 12시간을 빼고, 학교생활 8시간과 길거리에서 보 내는 이동 시간 2시간을 빼고 나면 딸아이가 가질 수 있는 자유시간이라곤 2 시간 밖에 없는데, 이 가운데 절반 넘는 시간을 거울 앞에 앉아있는 것이다. 내 딸은 소중한 시간에 거울 앞에 앉아서 무엇을 할까? 살짝 들여다보았다. 도저히 말릴 수 없는 딸만의 또 다른 공부시간이다. 거울 앞에 앉아 눈을 깜 빡거려보기도 하고, 거울을 코앞까지 들이대고 얼굴의 모공까지 들여다보면 서 있지도 않을 것 같은 뭔가를 뜯어내기도 한다. 미소를 지어보다가는 얼굴 을 찡그려보기도 한다. 외출할 것도 아니면서 이 옷 저 옷을 입어보고 앞태 뒤태를 살피며 단장을 한다. 가끔은 손바닥으로 볼을 두드리는 소리가, 노크 를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방문을 넘어오기도 한다. 그래 거울을 많이 보거라. 표정도 가꾸고 매무새도 다지렴. 마침내 거울 너 머의 보이지 않는 자신도 찾으렴. 보이는 너와 보이지 않는 네가 웃으며 하나 되게 하렴. 나도 거울 앞에 앉는다. 나도 공부를 좀 해보겠다는 심산도 있다. 아름다운 답이 나오질 않는다. 과거도 미래도 흐릿한데 나이 들어가는 것은 또렷하다. 잔주름도 보이고 피부도 부쩍 처지는 느낌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주근깨도 더욱 짙어져 있다. 좀 더 젊었을 때를 생각한다.‘그래도 그 땐 지금보다 젊어 46
서 좀 더 나았겠지.’라고 위안을 삼는다. 나도 벌서 추억으로 사는 나이가 되 었나 싶다. 실망스럽지만, 먹은 나이가 겉에 드러나는 순리를 거부하지 않기 로 마음먹는다. 포기를 쉽게 하는 것도 나이 먹는 증거라는데…. 내가 거울 앞에 앉는 것은 바른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외출 준비를 끝낸 남편이 나를 찾는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은 아직 충분 히 남아있다. 나는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내가 변신을 하기 위한 시간은 고작 5분에도 충분하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그리 꾸미시나?” 거울 앞에 앉은 나면 보면 습관적으로 던지는 남편의 농담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어 보는데 선뜻 답이 안 나온다.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화장을 안 하면 사람들이 나를 몰라볼 거 아니 야.” 내 대답에 남편이 웃는다. 남편은 정말로 사람들이 몰라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섭섭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젊어서의 화장은 그야말로 화 장이다. 아름다움과 조화이고 어느 만큼은 실현되기도 한다. 단장 역시 젊어 서 하는 것은 균형 잡힌 몸매와의 조화다. 그러나 나이 먹어 하는 화장과 단 장은 아무래도 변신을 위한 투쟁에 가깝다. 그리고 그 결과에는 늘 무리였음 이 드러난다. “엄마는 화장 안 해도 예쁜데.” 변신에 열중인 내게 아들이 농담을 한다. 말에 담겼을 아들의 의도와는 상 관없이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 변신이라고 해봐야 그게 그거라는 의미 는 아들로 인해 확실해진다. 아들에게까지 들킨 내 속내의 온도가 상승한다. “나이 들어 단정하지 않으면 그것도 실례인 게야.”젊잖게 타이른 말에 대 답이 없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내 사고 밖이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그땐 나이가 많 47
아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푸념삼아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 왈“그땐 아마도 삶의 애착이 지금보다 덜했나보 지.” 라고 얼버무렸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단풍드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때가 왔음 을 거부하면 보기 흉하게 말라비틀어지는 나뭇잎이 될지도 모르지만, 인정하 고 받아들인다면 곱게 단풍이 든 것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비교적 오래 머 물렀었다. 그 뒤로 낙엽의 시기를 준비하는 삶은 단풍이 들더라도 싱싱할 거 라는 믿음도 생겼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가을 단풍이 2월의 꽃보다 더 아름 답다(霜곸紅於二月花)고 했다. 신록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의미도 찾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단풍이 드는 이유를“사랑하는 무엇이 생겼기 때문” 이라 했다. 낙엽으로 져서도 할 일이 있다고 했다.“누군가에게 밟히는 일” 이라 했 다.“잘 썩는 일” 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하여간 난 때로 나이든 지혜가 청춘의 정렬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키곤 한다. 거울을 보는 것이 공부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이 들어가는 삶, 노년을 대비 해야 할 때가 지금인 것을 거울을 통해 느끼고, 때를 거부하지 않고 순명할 것을 다짐하기도 하니 말이다. 각각의 공부에 때가 있다는 말과, 지금 나의 공부는‘이것이다’ 라는 생각이 겹친다. 거울을 자주 봐야겠다. 그리고 이제부 턴 거울 앞에서 가급적 지그시 눈을 감아야겠다. 참 나를 찾을 수 있지도 않 겠는가.
l기획자 주l 김효경! 그는 주부다. 그리고 비즈니스 우먼으로 동분서주다. 한국을 떠나올 때 친정아버지께 서 이삿짐에 넣어주신 지필묵으로 서울서예대전, 대한민국현대서예문인화대전, 대한민국서예 대전 입상의 성과를 기록하기도 했다. 같은 글쓰기로서 산문쓰기도 함께 즐긴다. 그의 거울보 기의 깊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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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 너그러운 마음으로 / With generous mind. 너그러운 마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 때나 외로울 때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지난 2000년 6월의「옛빛찾기」 전을 계기로 출연하게 된 모 라디오 방송,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사회자의 말에 나는 서슴없이 다음 전시 주제를‘어머니’ 로 세웠다고 밝혔다. 그 뒤 2년여를 나는 어머니라는 화두로 인해 옴짝달싹하질 못했다. 아니 그 넓고 깊은 공간을 놓아두고 어디 다른 데 가서 기고 뛸 필요가 없었다. 틈만 나면 시 와 산문, 소설 속에서 어머니들을 만났다. 하룻밤에 수십 분의 어머니를 만나 웃었는 가 하면 한숨을 쉬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서럽도록 투박한, 그러나 구수한 어머니, 화들짝한 감탄사를 감추는, 빙그레 웃음이 나오는 어머니, 생각만 하면 쌓이고 쌓인 한이 범벅으로 묻어나는 어머니, 여자의 어머니, 남자의 어머니, 그리고 또 어머니, 어머니를 만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그냥 어머니였다. 한계가 없는 자애, 끝없는 헌신.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나뿐인 목숨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가장 비싼 정을 가장 헐값으로 주시는 어머니! 어머니! 이 세상 어떤 존재와 어머니를 비교할 수 있을까?” (2002년의 저서 어머니의 빛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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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보들한 솜털이 사랑스러워 가만히 어루어 보듬으면 숨겨진 놀라운 향기와 빛깔 서서히 뻗어가는 내일의 가지 때로는 제멋대로 뻗어도 좋아 그도 그런대로 멋스러워서 너무나 가지런히 크진 말아라 너만의 뿌리로 하늘을 열길. 햇살과 빗줄기 노래로 삼고 폭풍과 번개도 옹이로 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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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은총의 열매가 열길. 제 가슴 다독여 서성이면서 글썽여 배웅하는 간절한 축원. 큰딸을 멀리 인도네시아로 배웅하시며, 공항 출국 유리벽에 이마를 대고, 딸이 작아져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돌아서지 못하시던 너희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어릴 적 아장거리던 딸의 걸음걸이로 보이셨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비행기 뜨는 시간 생각에 핸드폰 시간만 계속 만지작이시던 너희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겨우 며칠을 허겁지겁 묵고 대전으로 내려가던 둘째 딸, 나를 배웅하시던 너희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괜찮다고 무겁다고 투정을 해도 차 안에서 먹을 김밥이며 귤에, 곱게 다져 얼린 마늘, 김치를 정신없이 담으시고는 낑낑거리고 따라오셔서, 고속버스가 출발할 때에야 비로소 한숨 돌리며 손 흔들어 주시던 너희 외할머니, 나의 어 머니…… 부디 자식들이 가서 행복하기만을 바라셨던 것 같다. 기른다는 것. 어쩌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인지도 모르겠다. 너희가 어렸을 적엔 너희가 어떻게 클지 상상해 보는 것이 막막하면서도 설레기도 했다. 너희 삶은 이미 너희 안에 예정돼 있어, 나는 그것이 잘 싹이 트도록 살피고 돕는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라 생각했다. 51
이제 너희는 통통 물이 오르더니 싹이 트기 시작하는구나. 역시나 너무 예 뻐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더러는 힘든 굽이가 있겠지만 그 또한 성장의 기회가 되고 아름다운 무늬 로 삼길. 세상의 틀에 너무 길들여지지 않고 너희만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 나가길. 유머를 잃지 말고 자유롭고 즐겁게 살길. 엄마는 곁에서 계속 도울게. 잘해 주기만 빌 뿐, 막상 해줄 것이 많지 않은 손이 허전하구나. 이제는 어느새 커버린 너희가 너희 스스로의 길을 가도록 내가 배웅해야 할 때가 다가온다. 훨훨 날아 오르거라. 나의 아이들아. 2011년 3월 20일 인도네시아에서 엄마가
l기획자 주l 김효정! 한국에서 오랫동안 국어선생님이던 그녀는 일 년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 로 여행을 왔다. 한동안 일상을 벗겨 내보는 일,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희망하는 일일 것이 나, 용기가 있고, 삶을 크게 그리고 멀리 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이겠다. 그의 일 년 이 돌아갈 비행기에 다 실리지 못할 크고 아름다운 것이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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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는 심리에 대해 옮겨온 이야기입니다. 먼저 작품을 재산 가치로 보는 사람이다.“저게 얼마짜린데, 돈을 걸어놓은 것이다.”다음은 장식으로 여기는 사람이다.“보기는 좋은데 무엇이 어째서 좋은지 생각이 없다.”그 다음은 아끼는 사람이다.“붓의 터치, 종이의 질, 표구 모양, 구도 등 주로 겉껍데 기만 본다.”마지막으로 안목이 있는 사람이다.“작품에서 정신을 본다. 작품이 건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작품과 하나가 된다.” 높은 안목과 좋은 작품과의 만남,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늘 깨어 있으라! / Be awake always!
박광호·윤진희 부부
‘학문에 왕도가 없다’ 는 말은 불변의 진리다. 그럼 자녀교육에는 왕도가 있 을까? 아무래도 자녀교육 또한 왕도는 없는 것 같다. 왕도가 있었다면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을 리가 없다. 우리 부부 또한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할 이유도, 해외에서 살면서 주말 부부로까지 살아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왕도가 없기에 학부모는 자녀교육 문제로 인해 이러면 좋을까 저러 면 좋을까로 흔들리게 되고, 자녀가 이것을 잘하면 저것이 아쉽고 저것을 잘 하면 이것마저 잘하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지금은 고 2에 재학 중인 딸이 자카르타 소재 한국국제학교 초등 2년 과정 을 마친 때였다. 지금 중2인 아들은 겨우 교회유치원 1년 과정을 마친 때였 는데, 사업상 족자카르타로 이주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족자카 르타에는 아이들을 보낼 만한 학교로 초, 중 과정을 포함해서 전교생이 50여 명 정도인 국제학교가 유일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마저 우여곡절 끝 에 입학을 했는데, 걱정은 그때부터였다. 딸아이의 영어수준이 제 또래 외국 계 아이들은 물론이고 몇 안 되는 한국계 아이들에 비해서도 많이 뒤지는 것 이었다. 그로 인해 생기는 딸아이의 스트레스를 보면서 부모로서 우리 부부 는 참 안타까웠다. 그러나 도와줄 방도는 방과 후 개인레슨을 시켜주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국립가자마다대학의 한국어과와 KOIKA에서 연합 하여 한국의 날 행사의 일환으로 한국영화를 상영해준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도 다른 가족들과 어울려 영화를 보러 가게 되었다. <집으로>라는 제목 의 영화였다. 최루성 영화였던지라 종영이 되자 다들 눈시울이 벌게져있었 54
다. 서로들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복도로 나와 이런 저런 애기들을 나누는 데,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 집 딸에게 관심을 보였다.“어머 너도 울었구나! 다른 애들은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 장난만 치던데…”그 순간 내 머리를 스 쳐지나가는 생각,‘그래, 영어가 전부는 아니야’ 였다. 그렇지만 그 생각이 바 뀌는 것도 순간이었다. 다른 한국인 남매가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게 된 순 간‘우리 애들은 언제쯤 저렇게 될까’하는 부러운 마음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이 바뀌듯 시간도 바뀐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달라지는 것도 많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더욱 바뀌는 것이 많다. 한 학기를 마치면서 교사와 면담 을 한 결과 딸아이가 3학년 과정을 수업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는 말 을 들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안도의 한숨 뒤에 다시 또 다른 걱 정이 밀려들었다. 학교에서 온통 영어만 사용할 아이가 한국어를 멀리 하기 쉽겠다는 걱정이었다. 아내와 나는 상의를 했고, 그때부터 아내는 아이들에게 한국공부, 즉 초등 학교 교과과정을 방과 후에 집에서 학습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 걸“자기 55
자식 공부는 못 시킨다” 는 옛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집안 분위기가 밝지 않았다. 아내가 애들 공부시키면서 아이들을 윽박지른 탓에 애들은 울고 아 내는 아내대로 지쳐있는 모습을 퇴근 후에 보는 일이 잦았다. 부부싸움도 생 겨났다.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 한국공부를 중단할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의 정체성을 잃게 해서도, 모국어의 소중함을 놓치게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땐 정말 참 힘든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공부하느 라 힘들었던 아이들도 지금은 한국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잘 한 일임을 알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르면 바뀐다는 진리를 여기에서 또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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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우연찮게 바뀌게 되는 일도 많다.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면 서 중부자바 Salatiga에 소재한 Mountain View 국제학교로 다시 전학을 하 게 된 것이다. 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옮기려던 계획이었는데, 우연한 기 회에 아내가 이웃을 따라 학교구경을 가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첫눈에 학교 가 마음에 들었던 아내는 언젠가는 보내려던 학교이니 경험삼아 입학시험이 나 한번 치르게 해보자고 했다. 그야말로 경험삼아 시험과 인터뷰 과정을 마 쳤다. 그리곤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한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당장이 아니라 그냥 앞으로 보내야 할 학교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휴가 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멜이 왔다. 합격 소식이었다. 우리 부부가 인도네 시아에서 세 번째 이사를 해야 하고, 주말부부로 지내야할 이유가 생기고 말 았다. 우리는 개학을 3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부랴부랴 살림을 나눠 학 교가 있는 Salatiga로 이사를 했다. 족자카르타에서 2시간여 거리에 위치한 학교는 기숙사가 있었지만 기숙사 사용가능 학생은 중1 과정부터였다. 어차 피 아이들도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였다. 타국에서 부모형제와 멀 리 살면서 부부마저 주말에만 함께 지내야 하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자식 교육의 왕도가 없으니 상황대로 따라야 했던 것이다. 주말을 이용해 아내와 아이들이 오가고, 내가 오가는 사이 어언 6년, 시간 은 흐르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학교생활도 잘 하며 많은 성장을 했다. 언젠가 영어로 대화하던 아이들을 부러워했던 것처럼 이젠 우리 아이들이 거침없이 영어로 대화를 한다. 교회에 가서 기도도 영어로 한다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 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특히 한국초등학교 과정 공부를 마친 딸에 비해 5학년 과정을 마치고 흐지부지 해버린 아들 녀석 때문이다. 예전처럼 집에서 한국학교 과정을 공부하지는 않지만 한인단체에서 운영하 는 토요 한글학교도 보내고, 기타 여러 방면으로 한글공부 및 한국문화에 대 해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쓰는 한글 일기를 볼 때 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할 경우 57
어려움을 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다. 한국인이니 제 모국에 가서 그깐 어려움 쯤 헤쳐 나가지 못하겠는가 생각을 해보지만, 미리미리 준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요즈음 중국인 극성엄마 에이미 추아(Amy Chua)의 양육법을 다룬『호랑 이 엄마의 승전가(Battle Hymn of the Tiger Mother)』 란 책이 많은 사람들 에게 관심을 받는다고 한다. 스파르타식으로 애들을 독려하고 강제로 교육 시키는 중국식, 아니 에이미 추아식 교육법이 기술된 책인데, 전적으로 아이 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미국식 교육법과 비교하여 논란도 많은가 보다. 에이 미 추아가 딸 둘을 잘 키워 놓은 입장에서 쓴 책이지만, 자녀교육 중인 부모 입장에선 한편으로는 공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녀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자녀들이 좋은 학교 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갖기를 원하지 않은 부모 어디 있겠는 가. 그러나 왕도가 없으니 늘 갈등하게 되는 것인데, 왕도가 없는 것에서의 왕도란 그저 아이 각각의 성격과 개성에 맞춰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교육만이 가장 현명한 것이리라. 맹자의 어머니처럼 변화를 거듭하면서 열과 정성을 다하시는 세상의 학부 모들이시여! 부디 맹모처럼 좋은 결실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l기획자 주l 박광호, 윤진희부부는 인도네시아 살이 16년차다. 박광호 사장은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족자카르타 한인회 총무직으로 6 년여를 봉사했다. 최근에는 다시 자카르타에 회사를 설립하 고 비즈니스의 폭을 더욱 넓히고 있다. 정성으로 키우는 자녀들의 장래가 반드시 밝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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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의 생을 갈고 닦아 매화 한 송이로 피었답니다. 송나라 사방득(謝枋得)의 시구입니다. 검은 고목, 검은 가지, 몇 송이 붉은 꽃 피 워 올려놓고 뒤적뒤적 시구를 읽어나가다가,“幾生修得到梅花(기생수득도매화)”이 한 구절 발견하고 꺼이꺼이 한참을 울었습니다. 모든 인연이 너무 깊고 깊다는 생각에 그냥 한없이 슬펐습니다. 너무 깊고 넓은 인연에 감사한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매화, 억겁의 인연을 매화로 피우다. / Destiny of eternity blooms in Maehwa.
박상천
< 첫번째 인연>
1990년대 중반 한국의 경제성장이 절정에 달하고 급기야 제조업에 3D직 종이 생기면서 외국인 근로자의 유입이 시작되었다. 그 중에 인도네시아의 근로자들이 우리회사에 약 50명 정도 들어와 1년 또는 2년간 근무하게 되었 다. 웬지 그들에 대한 나의 시선은 따뜻했고 그들의 마음을 얻고 싶었고 가까 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노동하는 현장을 더 철저하게 보고 열악한 환 경에 대한 개선을 추진해 주었다. 그리고 진솔하게 대화를 했고 그들의 고민 을 들어주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인도네시아가 다가올 미래에 내가 거기 에 서있을 수도 있다는 필링을 가지게 되었다. < 두번째 인연>
1998년 친구 중 한 명이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인도네시아의 한국대기업으 로 이직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아, 인도네시아로! 순간 뇌리를 통 과하는 그 필링의 섬짓함은 무엇일까. 나에게 다가온 두 번째 인도네시아에 대한 그 무언의 메시지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친구야, 인도네시아에서 자리를 잘 잡고 있어라, 그리고 우리 다 음에 거기서 만나자.”이 무심코 던진 말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었고 잠재적 인 바탕 하에서 나왔다는 것이 나의 두 번째 인연으로 생각된다. < 세번째 인연>
2005년 1월 인도 뉴델리 통신박람회 전시에 참가하였다. 내 제품이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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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있는 집앞에서
TATA그룹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뭄바이 본사로 초대를 받았고 급기야 구체 적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본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팀장은 아주 적극적으 로 한국 IT중소기업의 제품을 선호했다. 그러나 갑자기 팀장이 인도에서 인 도네시아의 바클리그룹 바클리텔레콤으로 스카우트가 되어버렸다. 순간 공 들인 인도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움에 처해 있었으나 2006년 3월 인도네시아에서 걸려온 한통의 전화!!!“Mr, Park, I am in Indonesia, Please come to Jakarta immediately, then bring your products toget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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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이것은 희열도 아니고 운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앞선 세 번의 추상 적 인연의 고리가 구체적인 느낌 아닌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인도네 시아. Satyadev는 거침없이 2천만불의 계약서와 동시에 1백만불의 첫 신용 장을 불과 두 달만에 나에게 주었다. 이 네 번째 인연은 다시 다섯 번째의 인연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 네번째 인연>
바클리텔레콤에서 많은 인도네시아인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한국에서 인 도네시아 근로자들에게 대해주었던 것처럼. 너무나 많은 도움과 지원을 받았고 인간적으로 친해졌다. 그들은 나에게 PT. MMS라는 회사를 소개시켜 주었고, PT. MMS는 바로 PT. MMS는 바 로 현재의 나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게 만든 회사이다. PT. MMS와 한 국기업이 만든 합작법인의 대표이사로 나는 현재 인도네시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인연에서 지금은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는 것 이 더 중요하고 아직도 인도네시아인들과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는 어느덧 나에게 너무나 큰 인연으로 다가와 버렸습니 다. 나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있습니다. 십수년 전에 감성적으로 와 닿았던 인도네시아가 지금은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그것도 인도네시아의 땅위 에 내가 서있다는 것은 너무나 깊은 인연의 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지 금 인도네시아에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도네시아에 있어야 합니다. 2010년 5월 5일에 인도네시아 주재를 위해 들어왔습니다. 지난 5년간 비 즈니스 출장을 올 때 하고는 사뭇 다른 느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집과 사무실을 계약하고 직원을 채용하고 PMA 등록 을 하고 모든 일들을 진행하면서 나는 드디어 한국사람들이 아닌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인도네시아 기준으로 해야 합 62
니다. 나는 인도네시아에 가르치려 들어온 것이 아니고 배우려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인도네시아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상황들을 모든 것으로부터 모두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10년 이상 살아온 많은 한국교민들이 자랑스럽습니다. Indonesia Standard에서 받아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그들을 어떻게 극복했 을까? 현재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잘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 러나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많은 비즈니스를 일구고 창조하고 있는 선배 한 국교민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1년차 교민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많 은 상황속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늠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Indonesia Standard를 거부합니다. 좋은 것이 좋다라는 것 은 기회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울입니다. 나는 International Standard를 고집합니다. 나와 인도네시아의 인연은 깊지만 나는 인도네시아와 투쟁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투쟁의 처음은 공합입국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역시“봉” 입 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냥 귀찮아서 적당히 돈을 주고 나옵니다. 충분히 통관이 가능한 음식물들, 때때로 인삼제품에 그들은 습관처럼 돈을 원합니 다. 나는 몇 번 검사대에서 체크를 당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정당하 게 설명하고 오히려 그들의 이해를 구하며 통과를 합니다. 한국인들이 이렇 게 해야 그들은 한국인을“봉” 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AS용으로 많은 부분품을 가지고 들어오는 데 많은 돈을 요구합니다. 미리 준비한 인보이스, 수출증명서, 수입자정보, 수입신용장 등을 보여주며 구체 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처음에 그들은“봉” 으로 생각했다가 결국 수출품목의 AS용도 부품으로 확인한 후 보내 줍니다. 딱 두 시간이 걸린 투쟁이었지요. 전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 척박한 인도네시아에서 International Standard를 지켜 냈다는 것이 즐겁습니다. 63
자카르타 시내로 택시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경찰이 잡습니다. 외국인, 특 히 한국인으로 보고 경찰이 검문을 합니다. 여권, 입국비자 등등을 검사합니다. 여권은 호텔이 놓아두었고 입국비자를 보여주었는데도 여권이 없으므로 경찰서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 20만 루피를 달라고 합니다. 순간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싸워야 한다고 본능 적으로 거부를 합니다. 그리고는 호텔로 전화해서 여권을 가져오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같이 여기 서 기다려서 확인하자고 합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경찰의 단순하고도 말도 안되는 검문에 쉽게 돈을 주고 마는 그런 습성 때문에 언제나 우리 한국인은 인도네시아 Mafia Polisi의 주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국인임을 알고 택시기사는 짧은 거리를 돌아갑니다. 요금이 거의 1.5배 정도 나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한 국인들은 그냥 속으로 삭이고 돈 지불하고 내립니다. 그러나 나는 따집니다. 그리고 주변의 또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을 불러서 택시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대부분 이 사실을 압니다. 그렇게 10분 정도 싸우면 택시 기사는 정상요금만 받고 갑니다. 두어 번 이런 경험이 있는데 이것도 우리는 반드시 따져주어야 합니다. 입국 전 한국에서 호텔예약을 마치고 체크인을 하는데 방이 없다고 합니 다. 그래서 이틀은 고급방에서 자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한국인이 주 대상입니다. 따집니다. 비록 방이 없다고 하나,‘나는 정식 예약을 했으므로 호텔의 잘못이다.’ ‘이것에 대해 호텔은 책임을 져야 한다.’책임자를 부릅니 다. International Standard에서 따지면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그들은 고 급방을 예약된 가격으로 제공합니다. 그리고는 사죄의 마음으로 음식서비스 까지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말고도 더 많은 실제 경험적 사례가 있으나 대표적인 내 64
용들을 선별해서 언급했습니다. Indonesia Standard에 우리는 녹아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늪 속에서 헤 어나오지 못합니다. 새로 오는 많은 교민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는 오기 전 부터 Indonesia Standard에 항복합니다. 나는 앞에서 언급한 나와 인도네시아의 인연에서처럼, 나는 인도네시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인도네시아가 불합리하고 썩고 있는데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본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내가 인도네시 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작은 한 사람의 한 가지 한 가지도 쌓 이면 큰산이 되듯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Indonesia Standard에 녹아들지 말고 불합리한 것에 저항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 인도네시아.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가져다 준 인도네시아. 그 깊은 인연의 뿌리 내음 을 맡을 수 있었고 이제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땅의 지열을 맡으며 살아야 하는 인도네시아. 나는 인도네시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불합리한 Indonesia Standard에 대해서는 과감히 거부합니 다. 왜? 내가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 인도네시아이니까.
l기획자 주l 박상천! 글쓴이 박상천은 1964년 경남 김해출생이다. 2010년 5 월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맺 어 현재 PT.Rajawali LBS 대표이사로 재임 중이며 다각적인 부분에서 컨설터 역할을 수행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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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도), 모든 것과 통하는 것 / Thing which gets to everything. 도란 길이요 이치요 방법입니다. 근원이요 사상이며 인의이고 덕행입니다. 道란 곧 모 든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도를 일러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따르 는 것이라 했습니다.
방치영
`99년 인도네시아에 주재원으로 부임한 지도 벌써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 다. 그때 당시를 생각하면 3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직원이 4천명 이상 이나 되는 큰 조직의 관리(인사/노무)를 담당한다는 것이 정말 큰 중압감처럼 내게 다가왔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군복 무를 마쳤다. 그리고 LG전자에 입사하여 약 4년간 인사업무를 담당하고 있 었으나 노무관련 경험은 전혀 없었으므로 주재 발령을 받고 내심 걱정 반 또 한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 반으로 인도네시아에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당시의 인도네시아 상황은 IMF를 겪으며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그 동안 막혀 있었던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정치는 물론이고 노동분야에도 거센 바람을 몰고 오고 있었다. 노동조합 가 입의 자유 및 활동을 보장하도록 노동법이 개정되었고 이런 변화를 시작으로 하여 다수의 근로자들이 급여, 처우, 복지의 개선을 요구하며 새로이 노동조 합을 설립하거나 데모를 시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였다. 필자가 부임하게 된 것도 사실은 그 당시 회사에 노동조합을 요구하는 사원들의 데 모가 발생하여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사고가 있었고 이런 문제의 근본적 해 결을 위해 회사에서는 노사관계의 구조적 개선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인도네시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할 당시 별로 다시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며 장남으로서 결혼해서 한국 에 정착하고 부모님과 가깝게 지내고 싶은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적 어도 이런 나의 생각들은 주재발령을 받기 전까지는 생각했던 대로 진행이 되었다. 그래서 주재 명령을 받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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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새로운 경험에 대 한 기대 또한 그간의 인도네시아 경험, 한 국의 선진 노사문화 를 전파하여야 하겠 다는 사명감 등을 마 음에 새기며 인도네 시아 생활을 결심하 게 되었다. 부임 초기 회사 노 사관계 안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단체협상, 임금협 상, 문제인원 정리, 관리감독자 Loyalty제고, 긍정적이며 건전한 사고를 갖 은 사원들의 Mind Setting 등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수행하였다. 출퇴근 버 스 안에서 항상“어떻게 하면 강성 노조를 설득하여 회사에 협조하게 만들 까? 어떻게 하면 간부급 사원들이 회사 편에 서서 일하게 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하면 사원들이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하게 할 수 있을까?”등의 생각들이 항상 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여러 가지 어 려움들이 정말 많았고 때론 마음고생도 심했지만 나의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현실로 구체화되고 이로 인해 주변에 긍정적 변화가 생기고 궁극적으로 회사 가 안정되는 것을 보면서 고생의 보람을 느꼈고 있었다. 지나간 일이지만 주 변의 다른 분들은 부임하자마자 골프를 시작했지만 나는 1년이 지나도록 골 프를 시작하지 못했다. 한편은 스스로 운동신경이 별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기도 하지만 일단 업무부터 잘 정리하여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크게 자리하 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재생활 6년쯤 지난 2005년의 일이다.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해 보고 싶 68
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주말에 운동하는 것도 건강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긴 했지만 스스로에게 보다 의미 있고 보람된 무언가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아 니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회계공부를 다시 시작하였 다. 3년 만에 빤짜실라 대학 회계학과를 졸업하였고 다시 UI대학 회계사과 정(PPAK)에 입학하여 1년 후 우등상(Cum laude)을 받고 졸업하였다. 그리 고 약 6개월 정도를 준비하여 인도네시아 공인회계사(Id CPA) 시험에 외국 인 최초로 합격하였다. 나는 지금 인도네시아 최남동단 파푸아 므라우케 비안강 하구 어귀에서 바 다를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사이 2010년 9월 LG상사 인도네시아 법인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 동안 제조업에서 많은 경험을 했고 지금은 자원 사업분야에서 LG상사 산하 여러 법인들의 HR, 법무 등을 지원하는 또 다른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 정말 소중한 시간 들이다. 앞으로 내가 도전해야 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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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은 아직 많 다. 법학박사, 회계학 박사, 공인세무사, 변 호사 등 기회가 되는대로 다 도 전해 보고 싶 다. 누구는 나 보고 미쳤다고 하기도 하고 내 학위 수여식
가 욕심이 너무
많다고도 한다. 난 둘 다 맞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다만 내가 미치고 욕심이 많은 대상이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어서 정말 다행이며 그로 인해 내 삶 이 즐거울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내가 받은 자격증으로 나중에 뭘 할 수 있을까? 돈은 되나?’등의 생각은 지금 내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그 자체가 내게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에 도전하고 노력하는 데서 내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그래서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은 내 인생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만 내가 희망하는 게 있다면 내가 배우고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 가능하다면 다른 많은 분들이 필 요로 하는 소중한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얼마전“시크릿”그리고“에너지 버스” 라는 책을 읽었다. 그 두 책에는 공 통적으로“끌어당김의 법칙(Law of attraction)”이라는 말이 나온다. 무언 가 자기가 원하는 것에 주파수를 맞추고 노력하게 되면 그건 언젠가는 자기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간 내가 생각하고 경험했던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부분이어서 마음에 들고 또한 스스로 조금 놀랍기도 했 70
다. 제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들께서도 한번 느끼고 실천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 달부터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내가 가르치게 될 수업은“회 계감사” 라는 과목이다. 물론 공인회계사 최종 자격증 발급의 자격요건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그간 내가 마음속으로 항상 소망하고 꿈꾸고 있던 사항이다. 인생의 또 다른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간 내가 공부 할 때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이 있기에 좀 더 알기 쉽고 편안하게 후배들을 지 도하고 싶다. 아울러 후배들이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다. 작지만 소중한 나의 경험담을 들 려주고 싶기도 하다. 새로운 길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겠지만 항상 그래왔 듯이 그 어려움이 또 다른 보람으로 보답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나의 또 다 른 발걸음은 가볍고 즐겁다.
l기획자 주l 방치영! 한 사람의 치열한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한인 동포들의 귀감이요 자랑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큰 그림을 보고, 듣고 읽노라면 마음이 5 월의 신록처럼 또렷해진다. 자신과 이웃을 향한 참 적선의 한 모습이 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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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처럼 침묵하라 난처럼 고요히 말하라. / Be silent as a rock and speak quietly as an orchid. 돌처럼 침묵하라 난처럼 고요히 말하라 침묵은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것, 참으로 진실한 말은 돌처럼 존재 그 자체로도 넉넉하고, 난의 작은 흔들림과 향의 은은함처럼 작은 것으로도 모자람이 없는 것 돌처럼 침묵하라 난처럼 고요히 말하라 <자작시>
복영빈
1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일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자카르타의 영국 계 국제학교<BIS>의 입학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생긴 사건(?)이다. 시험에 출제된 질문은‘동물원에 갔을 때 거기에서의 느낌에 대해 쓰라’ 였다. 물론 지문은 영문이었다. 갓 ABC를 배운 여덟 살의 한국인인 나로서는 실로 감당 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나는 스스로의 무력감에 분했는지, 아니면 그저 창 피했는지 울며 시험장을 뛰쳐나왔었다. 그 후 14년, 나는 자카르타의 미국계 국제학교 <JIS>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한 학기를 수학한 후 다시 서울대 학교에 입학을 했고, 이제 대한민국 남자의 의무를 이수하기 위해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시험장에서 울며 뛰어 나온 나의 눈물을 닦아주시던 부모님과 그 부끄러웠던 기억을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향후 내가 나아갈 길에서 생 길 수 있는 많은 사건을 항상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bilingual, 돌아보면 2개 국어를 모국어처럼 편하게 활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참 많을 것임을 짐작한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내가 부족하나마 그 대열에 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하 도록 환경을 조성해주신 부모님이 계시고, 그간 나를 지도해주신 많은 선생 님들이 계셨음이다. 고개 숙여 깊이 감사한다. 또한 사람에게 스펀지처럼 부 드럽고 흡입력 있는 어린 시절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하나를 통해 다른 몇 가지를 습득하고 표출할 수 있는 창의력을 인간에게 부여한 신의 은총에도 나는 무한 감사를 한다. 바로 그 모든 감사의 대상들은 초등학교 입학시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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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서 울 수밖에 없었던 내게 웃을 수 있는 알찬 과정들을 부여했다. 시험장을 뛰쳐나온 후 다른 국제학교에 입학을 했던 나는 거기에서 다국적 아이들과 공부하고 어울리기를 불과 2년여 만에 또래 외국인 친구들과 영어 능력을 비교할 수 있을 만큼 향상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부터는 2개 국어 를 모국어처럼 편하게 사용하는 학생이 되었다. 대게 한국인 학생들의 경우 영어를 잘하면 한국어 구사가 뒤떨어지거나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은데 비해, 나는 나름 큰 성장을 했던 것이다. 74
나는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 다. 바로 독서다. 나는 자라면서 책을 많이 읽는 편에 속했다.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는 버릇으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자주 꾸중을 들을 정도였다. 영어로 된 책이건 한국어로 된 책이건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는 정말 공부도 뒷전 이었다. 책을 읽는 것이 무조건 재미있었다. 물론 그것이 훗날 내게 엄청난 자산이 되어 돌아올 줄 알고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다. SAT, ACT, TOEFL 그리고 수많은 모든 영어 시험은 독해 실력을 꼭 필 요로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작정 외우면 어지간히 해결이 되는 문법과 달 리 독해는 하루아침에 고득점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 다. 그래서 나는 내 독해 점수가 월등히 높았던 원인이 독서에 있었다고 확 신한다. 예를 들자면 SAT는 독해 시간을 촉박하게 주는 편이다. 그런데 나는 독해 속도가 뚜렷하게 빠른 편이었다. 친구들이 독해 부분에서 문제를 다 못 푸는 경우가 생길 때도 나는 항상 검토까지 하고도 시간이 남을 정도였다. 비록 SAT는 만점을 받지 못했지만 TOEFL과 TEPS에서 독해는 항상 만점이었 다. 그로 인해 내가 공부를 거들어 주거나 조언을 필요로 하는 후배에게 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독서라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한다.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진리임을 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하나의 체험을 말하고 싶다. 나는 유치원을 제외하고 는 초·중·고 12년 내내 국제학교만 다녔다. 모국어를 구체적으로 학습할 여건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국의 대학에 입학을 했을 때 선배들은 물론 동기들까지도 나를 향해 우려의 심정을 드러냈다. 나의 국어 실력, 한국 에 대한 상식,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모두 부족 할 것이어서 대학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염려였다. 그러나 그 염려를 기우로 돌릴 수 있었던 것 역시 나는 독서의 힘이라고 생 75
각한다. 여전히 자신이 없는 것은 글쓰기이지만, 대화에 있어서 어휘력이나 역사와 사회상식 등에서 13년이나 외국에서 살고 온 것이 맞는가 하는 질문 을 받기도 했던 것은 분명 독서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을 한다. 물론 이 모든 공은 부모님께 돌려야 한다. 특히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 았던 어머니의 노력이 크시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외국계 국제학교 교육만 받다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까 항상 걱정을 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동생과 내가 집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시고 기겁을 하신 뒤로 바로 대책을 강구하셨다. 바로 그 다음 날부터 나는 동생과 함께 국어 자습서 를 푸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하이스쿨에 입학할 때까지 초등학 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과정의 국어와 사회 자습서를 매주 20쪽씩 풀었 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가 푼 문제들을 복습시키셨 다. 아직까지도 그때 내가 풀었던 OO국어자습서가 눈에 생생한 것은 대강 넘어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신 어머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농구부원들과 함께 (아랫 줄 왼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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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왕도가 없다” 는 말을 나도 많이 들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학 생들이 영어나 한국어에서 능숙해지는 것 또한 무슨 비법이 따로 있겠는가. 단기적으로 몇 달 내에 점수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닌, 몇 년 후 시험을 칠 초·중학교 학생들이라면 습관적으로 책을 읽으라고 꼭 당부를 하고 싶다. 책이 비단 점수를 향상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 가치관 설정에 절대적 도 움을 준다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 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역사, 문화를 알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물론 공부 이전에 한국인으로서 가 져야 할 기본 소양이니….
l기획자 주l 복영빈! 자카르타의 미국계 국제학교 JIS에서 12년을 수학한 후 한국의 KAIST에 입학을 했 었다. 한 학기를 수학한 후 진로를 바꿔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에 입학을 했다. 일학년을 마치 고 군 입대를 앞두고 몸과 마음을 편히 하는 기간 중 이 원고의 청에 응했다. 이 책이 발간될 즈음 그는 대한민국 어느 병영에서 국방의무를 다하고 있을 것이다. 무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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罔曰弗克 惟旣厥心(망왈불극 유기궐심. 書經 句),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오로지 그 마음을 다하라. / Do not say you cannot do it, but go with all your heart. 이 세상 부모가 자녀에게 듣기 바라는 말은 단연“열심 히 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 것입니다. 어찌 부모뿐이겠습니까. 선생이라면 학생에게, 윗사람 이라면 아랫사람에게, 사장이라면 사원에게 듣기를 바 라는 가장 바람직한 말일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다하는 행동, 이는 누구에게나 다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종복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JIKS의 나이 35세다. 재외국민학교(14개국 30개 교)에서 가장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어 많은 재외초등학교의 롤 모델 이다. JIKS의 발전은 교민사회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 해왔다. 교민사회가 더욱 발전할 것이 자명한 만큼 JIKS 또한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JIKS의 발 자취를 돌아볼 적절한 시기로서, 과거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거기에서 드러난 장단점을 교훈 삼아 더욱 나은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함이다. 첫째 마당 - JIKS의 강점
그간 JIKS는 강했다. 그 이유를 두 가지 들겠다. 첫째, 뛰어난 상황 적응력과 융통성이다. 인도네시아는 대표적인 다문화권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Fusion의 나라라고 할 수 있 다. 이슬람·기독교·불교·힌두교가 서로 혼합되어 있고, 동양과 서양이 만 나는 지점이기도 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나라이다. 우리 JIKS 학생들은 이러한 인도네시아에서 성장을 해왔다. 동질성을 고집하는 백의민족 대한민국이 아닌 이질성 속에서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국제인이 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성장해왔다. JIKS 원어민교사 중 1/3이 미국·영 국·호주·뉴질랜드 등에서 온 원어민들이다. 우리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한 국의 문화를 습득하면서도 세계의 문화를 습득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학생들 간의 강한 유대감이다.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는 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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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시간의 학생들
의 유일한 한국학교이다. 이 학생들이 12년간 같은 학교에서 서로 어울린다. 유치원까지 합한다면 15년의 학창생활을 같이 보내는 학생들도 있다.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너무나 잘 안다. 최근 들어 성공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갖추어 야 할 스펙 중 하나가 인맥이라고 한다. 마크 주커버그가 창시한 소셜네트워 크 수준은 아니더라도 JIKS 네트워크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도 온라 인상의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것이 아닌 견고하고 확실한 네트워크는 우리 JIKS인이 앞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리라 확신한다. 둘째 마당 - JIKS가 극복해야 할 점
학교에서 졸업한 학생들의 소식을 듣다보면 좋은 소식과 더불어 안 좋은 80
소식도 들린다. 아무래도 안 좋은 소식들이 더 많이 기억에 남고 아쉬움이 남 는다. 이러한 학생들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진학의 폭이 좁다. 졸업생의 95%가 한국으로 진학을 한다. 나머지 5% 중에 인도네시아 현지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호주·미국 등지로 진학 을 하고 있다. 퍼져나가는 범위가 너무 좁은 셈이다. IMF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이 조금씩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지만 취업의 문은 여전히 좁기만 하다. 소위 말하는 SKY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 면 Red Ocean이다. 이제 우리는‘Blue Ocean’ 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다양성이 이루어져야 하고, 우리의 시야를 넓혀가야 한다. 둘째, 다양한 활동과 사회 참여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교육은 바른 인성 을 갖춘 예비 사회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소질과 적 성을 계발해 주어야 하고, 학생들이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 공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교육이 대학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사실 이다. 그것도 진정한 학력(學力)이 아닌 다른 학력(學歷)을 위해서 우리 학생 들과 학부모님들, 그리고 학교는 전력 의지를 불사르고 있다. 남들이 가기 싫 어하는 길을 가고, 하기 싫어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하며, 몸소 희생하며 실천 하는 일에 앞장서게 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 진정한 인재를 키워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며, 자신이 좋아 하는 활동을 하며, 인도네시아에서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교민사 회에 일조하는 헌신과 희생을 배웠으면 한다. 셋째, 기초학력 부족으로 인한 대학에서 전공 적합도가 부족한 경우가 많 이 발생하였다. 주위로부터 듣는 많은 부적응 학생들의 내용 대부분이 이와 관련된 것들이다.‘아무개 학생이 대학을 그만 두었다.’ ,‘학사경고를 또 받 았다.’ ,‘다른 대학으로 편입했다.’등등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이 완성이 되 지 않은 학생들은 대학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최근 특례입학이 상당히 어려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비교적 한국 학생들에 비해 쉽게 대학에 81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대학에 발 을 디딘 후에는 모두 동일한 선상 에 서게 된다. 준비되지 않고 쉽게 이 자리에 선 학생들은 도태되고 만다. 학생 모두를 당당한‘실력 인’으로 키워야 된다는 숙제가 JIKS에 남겨져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
셋째 마당 - JIKS의 미래
현재 JIKS에는 많은 변화가 있 다. 외적으로는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위하여 고등학교 건물을 신축 중이고, 내적으로는‘UP! UP! JIKS!’라는 모토를 내걸고 교직원과 학생 모두가 전 력 질주하고 있다. JIKS인 모두가 글로벌 소양을 갖춘 창의적 인재가 되기까 지 다양한 교육 시스템을 도입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적용하고자 한다. 기초 학력 증진을 위하여 수학·영어과목의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과 학·사회의 영어몰입교육을 초등학교와 중학교 9학년까지 확대하고자 한다. 또한 학생‘1인 2악기’ ,‘1종목 스포츠’ 라는 목표로 Activity를 좀더 활성화 하여 진행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의 문화 및 교육 분야의 교류를 위하여 인 도네시아국립대학(Universitas Indonesia)과 MOU를 체결하였고, 앞으로 ITB(반둥공대)와 가자마다대학(Universitas Gajah Mada)으로까지 확대하 고자 한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현지 고아원과 양로원 등지와도 연계하여 학 생들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자 한다. 현재 초등학교에서는‘학년별 캠프’ , 중학교는‘명예의 전당’ , 고등학교는 ‘글로벌리더십 인증제’ 를 실시하여 바른 인성과 실력을 갖춘 학생들을 육성 하고자 한다. 우리 학생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의 가치관과 교육 마 인드가 변화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체험 중심의‘학부모 아카데미’ 를 준비 중 82
에 있으며, 학부모 가 중심이 된‘샤 프론 봉사단’ 을조 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교육 만족도 를 높이기 위해서 ‘교원능력 개발평 가’ 를 실시하였고,
학생들과 함께
교원들이 자발적 으로 연찬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학생은 교사의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우리 JIKS의 교사가 변하지 않고서는 학생의 변화는 바 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JIKS를 바라보았을 때 JIKS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교육철학 적 관점에서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재외초등학교는 두 가지 점에서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해외에 위치해 있기 때문 에 민족적 자긍심과 뿌리 가치관을 심어주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유태 인의 쉐마 교육과 같이 우리의 핏줄 속에 깊숙이 흐르고 있는 한민족 사상을 가르쳐야 한다. 둘째는 현지에서 잠재적 지역 전문가로 양성될 수 있는 교육 기반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도움을 주며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드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JIKS의 과거 현 재 미래는 유기적으로 살아 있기에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확신하는 바이다.
l기획자 주l 선종복!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교육철학 및 교육사전공)졸업했다. 그는 초등교사, 중·고등 교감,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서울북부교육청 장학관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자카르타 한국 국제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며, 직스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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幾生修得到虛心(기생수득도허심), 몇 겁을 갈고 닦아 빈 마음에 다다랐는가. / Reach the empty mind after kaplas of polishing and sharpening. 희노애락을 표현하기로 치면 그림 중에는 사군자만 한 것도 드물 것입니다. 화제로 쓴‘幾生修得到虛 心’ 은 본래‘幾生修得到梅花’ 로서 매화용 화제입니 다. 제가 슬쩍 끝의 두 자를 虛心으로 고쳐서 이 작 품을 하던 때의 제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여간 대나무처럼 속을 비우고 사시에 청청할 수 있음이 행복인 줄 알기에 한없이 부러운 마음으로, 외경의 심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손희정
첫아이를 인도네시아 초등학교(SD)에 입학시킬 때의 기억을 더듬자니 피 식 웃음부터 새어나온다. 그 아이가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참으로 오래된 기억이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인도네시아에 오자마자 우리 부부가 내린 첫 결정은 인도네시아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자는 것이었다. 한국국제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 형님 내외분을 비롯한 주위 이 웃들은 우리 부부의 결정에 다소 의아한, 그래서 여러 모양의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초등 교육은 한국학교에서 받게 하고 중·고등학교 때 영어교육을 위해 다른 학교를 생각해보라는 의견들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주신 말 씀들임을 알기에 지금까지도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우리 나름대로는 몇 가지 계산이 있었다. 첫째, 아이가 여섯 살 이전 에 한글을 익혔고 어느 정도의 책읽기 수준에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국 어가 이쯤 되고 보니 인니어와 영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앞 섰다. 둘째는 우리가 정착한 리뽀까라와찌 지역 안에 디안 하라빤이라는 역 사가 오래된 인도네시아 사립초등학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차로 5분이면 통학이 가능한 학교가 있는데 40분 이상 소요되는 한국국제학교는 재고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또 이유를 찾자면, 인도네시아의 생활에 좀 더 빨리 적응하고 배워보려고 했던 나의 욕심을 들 수 있겠다. 이른 등교시간에 맞추어 짜증스럽지 않게 아이를 깨울 요량으로 아이가 좋 아하는 음악테이프를 아침마다 틀었던 기억이다. 아이는 학교에서, 나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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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 강좌와 책을 통해서 인니어를 공부했다. 방과 후에는 학교 알림장 에 해당하는 아겐다를 보며,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해석해내는 것이 일 과였다.‘열정’ 이라고 표현하면 적당 할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든 인도네시아에서든 모든 것이 상 식 안에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리라. BBSJ(학교 시간표대로 가지고 오 라는 약자)? Sampul plastic(교과서와 공책을 위한 책표지)? 이런 정도는 곧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시험지를 보는 순간 우리가 가야할 길이 참으로 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분명 올바른 대답을 한 것 같은데 틀렸다고 하는 두 문제가 있었다.‘신호등에 어떤 불이 들어오 면 건너야 할까요?’라는 문제와‘잠자기 전에 꼭 씻고 자야하는 것은?’이라 는 문제였다.‘초록불’ 이라고 답했고,‘온 몸’ 이라고 답했는데 틀렸다는 것이 다. 내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였다. 한국인이라면 과연 누가 이 두 문제에 인도네시아식의 올바른 답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나에게 한국과 인도네시아 문화의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 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이곳이 별 차이가 없다는 느낌으로 살았던 것 이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한국인으로서의 내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했 던 것이다. 그러다 조금씩‘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왜 이런 거야?’라는 짜증이 나올 즈음에 귀중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여기는 한국과 다르다.’ 86
그 이후에 나에게는 조 금의 변화가 생겼다. 내 기준이 아닌 인도네시아 식 기준을 배우려고 노력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 능한 주변을 관찰하려고 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 즈음이다. 아이의 공부를 돕기 위해 인니어 과외 선생님도 찾았다. 매일 오후 집으로 오는 인도네시아 선생님을 통해 아이와 나는 이곳 문화를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가만히 살펴 보니 인도네시아에는 사람을 위한 신호등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자연 빨간 불일 때 차들이 멈추면 건너야 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잠 자기 전에는 발을 씻고 자야 한다는 상식도 배우게 되었다. 목욕은 아침에 일 어나자마자 하는 것이니 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인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교민들의 삶인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곳 문화를 접 할 기회가 드물어 보인다. 가끔 한국에서 이곳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분 들을 만날 때가 있다. 도무지 여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그 분들을 보며, 슬쩍 미소를 머금게 된다. 한국과는 달리 여러 갈래의 교육에의 길이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자신만의 길을 잘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미 소다.
l기획자 주l 손희정! 1998년부터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다. 남편과 남자 아이 셋, 네 명의 남자와 사는 것 이 힘들다고 하는 푸념 중에는 보람과 뿌듯함도 엿들어 있다. 해피자카르타의 작가로서 활동 을 하기도 했다. 그의 가정의 청안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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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象無形(대상무형), 진정한 진리는 형체로 드러낼 수 없다. / The real truth cannot be proven by a shape. 글로는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말로는 뜻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성인은 상징체를 만들어서 뜻을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시 도를 하였습니다.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지 극히 불완전한 매개체인 언어로 표현된 것을 진리 자체로 알면 도리어 진리를 왜곡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진정한 진리는 형체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다만 느낄 뿐입니다.
신돈철
풍경 하나
유난히 긴 속눈썹을 가진 꼬마 녀석이 토요일 점심시간의 미술교실 안을 문틈으로 빠꼼히 쳐다보고 있다. 내가 조용히 웃어주자 그 녀석은 조심스럽 게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의 품에 수줍은 듯 안긴다. 간단히 모자간에 나누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몇 마디의 인도네시아 지방언어… 아마도 방해가 되 니 조용히 밖에서 기다리라는 뜻인 듯하다. 이 모든 모습을 교실 창문 너머로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또 한 사람, 그녀의 남편이다. 마치 이 자체로 아 름답고 사랑스러운 가족화가 되는 양 싶다. 매주 토요일이면 그녀를 포함한 2명의 자녀들이 나에게 미술레슨을 받는 다. 입시를 위해서도 취직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 엄마는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아빠는 아내의 서툰 그림을 격려하며 기다리고, 그림 을 배우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호기심 많은 얼굴로 내 말에 귀 기울이며 그 림을 그린다. 참으로 보기 좋은 풍경이다. 토요일 오전을 그렇게 온 가족이 감성교육을 받는 것이다. 아빠는 한없이 행복해보이고 엄마는 작은 성취감에 생의 희열을 느낀다. 과연 이 가족은 무엇 때문에 소중한 주말 이 시간을 미술학원에서 보내고 있을까? 풍경 둘
수까부미의 어느 가난한 학교의 교실. 국적이 다른 이방인인 내가 우리 학 생 아이들과 함께 서툰 인니어로 가르치는‘미술교육 봉사활동’ 은 한 시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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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커다란 이벤트가 되었다. 자카르타에서부터 준비해간 교부재로 시 연한 여러 가지 미술관 그림 그려주기 봉사활동
련 스킬들로 시골의 순 진한 어린 학생들은 감
탄의 신음소리를 내고, 창문 너머로 동네 어르신들의 호기심어린 시선들이 모아진다. 제대로 된 미술재료들을 갖추고 처음 배워 본‘미술’ 이라는 마술로 교실은 곧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구분 없이 모두 한마음이 된다. 오후 가 되어 헤어질 무렵, 헤어지기 싫다며 지도하던 학생의 손을 놓지 않던 어린 한 녀석이 시작한 흐느낌에 나를 포함한 학생들 모두 결국에는 눈시울을 붉 히고야 만다. 울다가 웃는 역설! 그렇게 소통한 마음들은 서로의 언어에 대한 미숙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소중한 체험이 되어 다 음을 기약하며 동네 사람들 모두의 설렘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 이 아이들과 같이 흘린 우리 학생들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풍경 셋
토요일이면 방문하는 인도네시아 가족이 보여준 행복의 비결은 온 가족 이 한곳을 바라보며 공통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매개체 역할을 미 술교육이 훌륭히 해내고 있는데, 그것은 부모의 젊은 시절의 꿈일 수도 있 고, 단순히 집안 꾸미기의 수단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미술 을 배우는 그 순간은 그 가족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시간 이 되었다. 어느 시골의 어린 학생이 처음 경험한 마술 같았던‘미술공부’ 의 경험은 이 아이에게 훗날 어떤 미래를 펼쳐 보여줄까? 우리 학생들과 함께하는 이 작은 90
봉사들로 어려운 환경의 많은 아이들이 좋은 감성표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미술을 교육하는 선생으로서의 최고의 보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척박한 미술교육 환경에 놓여있다. 수많은 외국인들과 섞여 살면서 제법 양질의 미술교육시장이 개척 될 법 한데도 그것이 그렇게 쉬워보이지는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몇 년 전부터 내 맘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소망이 하나 생겼다. 내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는 이 인도네시아에 선진국 수준의‘예술교육센터’ 를 내손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입시를 준비하는 인도네시아 학생들은 물론 이고, 행복을 가꾸려는 현지의 일반 시민들도 그리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어 려운 처지의 아이들까지도 최상의 미술교육을 통하여 그들의 감성을 개발시 키려 한다. 이것은 또한 지금의 내가 있도록 도와준 인도네시아 사회에 대한 보답으로 더 깊이 그들과 호흡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현지인 학생 학부모와 함께
현지인 성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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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유치원 봉사활동을 마치고
그동안 인도네시아에서의 한인 미술교육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자타가 평 가하고 있다. 우리 학원 출신 학생들의 대학에서의 활동상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고, 이제는 종종 미대 졸업생들의 성공적인 사회 진출담이 들려 오기도 한다. 현재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교민자녀들에게 충분한 역할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15여 년간의 한국학생을 위한 미술교육이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다는 사실은 해마다 개최하는 미술전시회에 보여주는 교민 여러분들의 지대한 관심에서 알 수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국학생을 위한 미술교육으로써 인도네시아 정착기의 큰 기쁨 을 맛보아 왔다면, 나는 이제 인도네시아 성숙기의 두 번째 소망의 실현을 위 해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자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지만 나의 인 생은 짧지 않고 나의 미술교육에 대한 열정은 더 없이 크다. 처음 인도네시아를 도전적으로 찾았던 조금 더 젊었던 시절과 변함없이 지 금의 나는 여전히 청록빛 청년이다. l기획자 주l 신돈철! 그는 1989년 서울미대 산미과를 졸업했다. 제일기획, Cheil Bozell 아트디렉터, 웅 진출판 근무를 거쳐 1998년부터 자카르타에서 토마토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정기 전을 펼치고 있으며, 미술을 통한 자선활동 또한 꾸준히 펼치고 있다. 국제학교(BIS) 미술대 회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미술 교육을 통한 한류에도 공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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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未知(무미지), 아직 알지 못할 뿐 / It is just unknown yet. 세상에 낯선 것은 없습니다. 아직 알지 못할 뿐 입니다. 그러므로 낯설다고, 아직 모른다고 두려 워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無未知>에서 는‘바로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라’ 는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아름답다” 와,“낯선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는 점 때문” 이라는 말, 아울러“자신에 대해서는 많이 알수록 좋다” 는 말도 더 깊이 새기게 됩니다.
신영덕
내가 인도네시아에 온 것은 2009년 2월 19일이다. 만 2년이 조금 지난 셈 이다. 처음에는 매우 낯설게 여겨졌던 인도네시아. 이제는 고향처럼 친근하 고 푸근하게 느껴진다. 외국이기에 여전히 불편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나는 인도네시아가 좋다. 낯선 곳에 와서도 아내와 둘이서 잘 살고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부에게 적응을 잘 하는 편이라고 격려를 해준다. 그러나 우 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적응을 잘 하게 된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통해 그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온 것은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UI)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학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나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로서 24년간 사관생도 들을 가르치다가 2008년에 공군 대령으로 전역을 하였다. 전역 후 외국 대학 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한 국 국 제 교 류 재 단 ( KOR E A FOUNDATION)에서 인도네시 아 국립대학교에서 한국어, 한 국문학을 가르칠 사람을 뽑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원 하였는데, 감사하게도 선발이 되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더 욱 더 감사한 것은 본래 2년 계 약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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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더 연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시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많은 보람을 느낀 다. 인도네시아 최고 명문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에 대해 강의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럽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학에 대해 배우고자 애쓰는 학생들의 열정어린 모습을 보면 더욱 감동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국 립대학교 학생들은 내 수업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어려울 것 같다. 한국 대학생도 어려워하는 한국문학을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어려워하 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내 강의는 2학년부터 수강할 수 있게 되 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어렵다고 한다. 1년간 한국어를 배우고 나서 한국문 학사 같은 과목을 배우게 되는데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도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 들에게는 산을 이해하려면 산에 올라가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산을 오르는 어려움은 있지만 산 정상에서 느끼는 쾌감은 정말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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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과 졸업식
다고 하면서, 공부하는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학생들을 설득하고 있다. 한국문학사 수업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는 적지 않다. 나는 보통 새 학기 첫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게 한다. 지난 학기 수업 에서 느낀 점과 이번 학기 수업에서 바라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매우 수줍어하면서 떠듬떠듬 자신의 의견을 이야 기 하고, 나는 그들의 의견을 메모한다. 그때 한 여학생이 한국문학사 수업이 너무 어려워서 시험 때에는 울면서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순간 코 끝이 찡함 을 느꼈다. 힘들지만 열심히 따라와 준 학생들이 정말 고마웠다. 울면서 공부 했다는 그 학생은 이번 학기에 코린도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 연세대학교에 서 1년간 공부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열심히 공부한 결과이리라. 또 하나 감동을 받은 일이 있다. 나는 한국문학사 수업을 어려워하는 학생 96
들을 위해 교재를 미리 나누어 주고 방학 동안 에 읽어 오게 한다. 그러 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100페이지 가량 되는 글 을 열심히 읽어 온다. 그 들은 모르는 단어에 형 광펜으로 줄을 그어 표
한국어과 학생들과 함께
시하는데, 모르는 단어가 많아 교재는 온통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다. 노란 색 혹은 붉은 색 등으로 물든 그들의 교재는 가끔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어렵지만 열심히 공부했더니 한국문학사에 대해 많은 것 을 알게 되었고,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은근히 자부 심을 느끼게 된다. 가르치는 보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작년 8월 한국학과에서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두 명의 학생은 서울대 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였고, 나머지 졸업생들은 대부분 취업을 하였다. 덕분에 나는 첫 졸업생을 인도네시아 사회에 배출하 는 영광을 맛보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가끔 졸업생들에게서 안부 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좋다. 아마 나의 스승님께서도 내가 전화를 드리면 이 러한 기분을 느끼셨으리라. 나는 오늘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나에게서 배운 학생들이 이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라며.
l기획자 주l 신영덕! 그는 1956년 서울 생으로 공군사관학교와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고려 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4년간 공군사관학교 한국어과 교수로 재직했 으며, 2009년 2 월부터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 객원교수,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수 의 논문 외에 저서로는 한국전쟁과 종군작가(국학자료원, 2002), 전쟁과 소설(역락, 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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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涯(무애), 한정된 것으로 무한함을 따르다. / Follow infinity with limitation. (有涯隨無 涯. 莊子 句) 끝이 없습니다. 무엇에도 끝이 없습니다. 세 상도 무한하고 사람의 마음도 무한합니다. 학 문도 마찬가지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 는“한정된 것으로 무한함을 따르라”했습니 다. 무한을 한정에 가둘 수 없음이 아니겠습 니까?‘有涯’ 가 아니라‘無涯’ 를 휘호한 이유 입니다.
안선근
<이슬람 문화>,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아직까지도 좀 어정쩡함 그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서 드러난 이슬람 강경파들의 테러와 같은 사건을 통 해 가지게 된 이미지가 많이 지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고대 신 라시대부터 이슬람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때부터 인도네시아에도 한국에도 맥락이 같은 동질의 이슬람 문화가 존재했 음을 안다면 어떤 표정일까? 아마 대부분 매우 놀랄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 책 제목이“동아시아 먼 나라의 이슬람 평화” 다. 최근 출간한 내 저서다. 한 국과 인도네시아의“양국 교류 문화의 장르” 라는 머리글처럼 한 · 인니의 다 양한 교류를 위해 나름대로 풀어낸 책이다. 최근 몇 년 인도네시아에서 붐을 이루고 있는 한류(Korean Wave)와 양국 정치와 외교관계, 경제교류와 관계, 그리고 사회, 교육, 문화의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서 매우 빠른 성장세를 보이 고 있는데, 이에 관련 과거와 현재를 살피며 미래를 향해 쓴 책이다. 내게 이 책은 오래전부터 반드시 치러야할 것 같은 과제였다. 이 과제는 늘 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떠나지 않았던 것인데, 아마 그것은 다양한 분야의 중요한 통역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내게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이 과제의 무게는 통역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더 쌓인 셈이다. 그것 은 곧 주인의식의 커짐이기도 했다. 통역을 맡아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큰 프로젝트에 대한 양측의 의견을 전달할 때도 나는 알게 모르게 주인의식이 싹텄고, 개인적인 작은 교류에도 나의 주인의식은 발동을 했다. 언제든지 내 역할이 있다는 깨달음이었고,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자각이었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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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에서 이 책은 내 공부의 중심이자 과정의 결산이라 하겠다. 가깝게는 부 모님과, 아내에 대한 보답이고 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좀 더 크 게는 양국의 모든 교류를 위한 내 임무이다. 내 고국 한국을 위한 것이고, 오 늘날까지 내 성인시절을 다 받아주며 나를 나로 살 수 있도록 바탕이 되어준 인도네시아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적도 선상에 위치한 인구 2억 4천 만 여명을 보유한 인도네시아, 인구 순 위 세계 4위다. 그중에 약 87%가 이슬람교도들이니 인도네시아를 일컬어 이 슬람의 나라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말이다. 곧 인도네시아 문화의 중심이 이슬람임을 의미하며, 이슬람을 말하지 않고는 인도네시아를 거론할 수 없음 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필자로서 이슬람 문화를 강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세계의 추이가 그 렇듯 한국에서조차 이슬람은 성장 추세에 있음을 환기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 다. 한국 국내의 한국인 이슬람은 이미 3, 4만 명을 넘기고 있으며,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또 외국인 근로자들 중에 이슬람교도들이 많아지면서 이제 한국내의 이슬람 전체 숫자가 10만을 헤아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젠 한국 내 에서도 이슬람 문화는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을 환기하고자 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책의 소제목으로 활용한 <한국 이슬람의 형태와 발전 현황>에 대 해서도 절대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는 양국의 쌍방 가교가 되기 위함이고 양 국이 좀 더 분명한 자료와 정보로서 서로를 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각종 자원 부국임을 모르는 한국인을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슬람 문화로 인해 생성된 인도네시아인들의 특성을 모르는 한국인은 드물 것이다. 물론 인도네시아인들도 한국과 한국인의 특성을 비교적 잘 알고 있 다. 한류 열풍이 증명을 하듯 드라마, 전자제품, 스포츠 등 많은 분야에서 한 100
국과 한국인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G -20 정상회와 같은 일련 의 동향이 그렇듯이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관계는 더욱 돈독해져가고 있으며, 민간의 교류 또한 더욱 빈번해져가고 있다. 한국에는 약 3만여 명의 인도네 시아 근로자가 있고, 유학생과 비즈니스 맨, 그리고 한류로 인해 관광객 또한 늘어나고 있다. 특히 겨울이면 눈이 없는 나라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겨울철 체험과 아우른 스키관광을 위해 한국방문을 즐긴다. 인도네시아에는 우리 한국 교민 4만여 명이 상주하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굴지의 한국 기업들이 인도네시아 각 분야에 활발한 투자를 하고 있다. 목재 산업과 노동집약적 산업인 신발, 봉제에서 전자가 이미 확고한 뿌리를 내린 가운데, 이제는 IT, 자동차, 철강 신재생 에너지의 저탄소 녹색성장 사업, 언 어문화와 음식문화에 이르기까지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투자 업체로 인한 고용창출은 현재 60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시대상황은 내 마음속에 쌓인 과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하였다. 대부분 느끼고 있을 것이지만, 양국이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필요한 교역 대 상으로서 서로를 적극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더 역설하 고 싶었다. 양국에 공존했던 이슬람 문화를 통해서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신 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게 작용을 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문화와 관련한 비즈니스들이 적지 아니 존재한다.“이슬람 금융 수쿠 크” ,“이슬람 할랄 푸드”등 캐내면 진주가 될 만한 것들이 아직도 많이 숨겨 져 있다. 현지문화 로컬화에 관심 있는 업체라면, 현지인들에게 그들 문화의 뿌리요 중심이 되는 이슬람 문화가 우리 한국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전해 내 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어쩌면 새로운 해법 이 그 안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UIN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서 기회가 되면 또 보완할 것이다. 아울러 또 다른 좋은 내용의 책들이 다양한 시각에 의해 101
출간되기를 바란다. 특히 한국을 바로 알리는 책들도 많이 출간되었으면 한 다. 한국과 한국인은 곧 한류의 실체로서 그 진수를 책으로 읽히게 한다면 한 류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지도를 해주신 UIN 대학의 지도교수님들 과, 늘 격려해주신 주위의 많은 분들께 삼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에 내 공부도 그침이 없을 것임을 다짐한다.
l기획자 주l 안선근! 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도네시아에 유학을 했다. 인니어 교육 및 비즈니스 컨설터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국립이스람대학(UIN)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위 동아시아 먼 나라의 이슬람 평화 는 인니어와 문화 관련 책 5 권 출간에 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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忙裡偸閒(망리투한), 바쁜 가운데 훔친 한가함. / Stolen leisure while living in busyness. 忙裏要偸閒 須先向閒時討個쫸柄(망리요투한 수선향한 시토개파병. 菜根譚 前篇 句) 바쁜 가운데 한가함을 즐 기려면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끄러운 중 에도 고요함을 누리고자 한다면 마음의 주인을 세워야 한다. 경우에 따라 변하고 일에 따라 흔들리기 쉬운 것 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 그렇습니다, 시간 도둑이 되어야 합니다. 한가함을 즐기려면 시간 도둑이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채근담 가운데 버젓한 이 구절이 새삼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한 가함을 강조하면서 왜 하필 의미가 썩 좋지 않은‘훔치 다’ 는 의미의‘투(偸)자’ 를 써서 성어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음미할수록 절로 고개가 끄덕 여졌습니다. 일이 없어 흔히 백수라 불리는 사람의 한 가함에서가 아니라 바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여유, 즉 진정한 한가함이란 절대 그냥 얻어지 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인식. 제6회 자필묵연전 찬조의 글 중에서)
안창섭
우리 집은 세 가지 언어로 대화를 하는 가정이다. 한국어, 영어, 인도네시 아어다. 가족들이 언어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고 다문화 가정인 때문이다. 우리 식구를 소개하자면, 아내 HANNY LIM, 첫째 형빈(JIS 11학년), 둘째 윤지(JIS 9학년), 셋째 윤선(JIKS 5학년)이다. 가장인 나는 한국어를 사용하려 애쓰고, 큰아이와 둘째는 한국말을 이해하 면서도 한사코 영어로 묻고 영어로 대답을 한다. 한국국제학교를 다니는 윤 선이만 한국어와 영어, 인도네시아어를 필요에 따라 구사한다. 그러므로 중 국계 인도네시아인인 아내의 한국어 선생은 막내다. 교민방송 K-TV에서 방 영하는 연속극을 시청할 때면 막내가 제 엄마에게 통역을 해준다.
가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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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모치고 자식 교육에 열 과 성을 바치지 않는 사람 없고, 다문화 가정이 자랑할 일도 아니 어서 이 글쓰기에 참여할 것을 권 유 받고도 나는 내내 침묵을 했 다. 그러나 다문화 가정의 사례를 반드시 책에 수록해야겠다고 성 화와 압력, 회유를 그치지 않은 손인식 선생에게 이끌려 하는 수
막내딸 윤선
없이 내가 경험한 몇 가지를 밝히 고자 한다. 예전에 많은 한국 어머니들께서 애들의 외국어 교육에 있어서 조기 교육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한때의 유행으로 그쳤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어느 한 쪽에선 아직도 여전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위 두 아이들 초등학교 때까지는 외국어 교육을 더 중시하는 과오를 범했다. 셋째를 성모유치원에 입학 시키 고 나서야 언어교육에 있어서는, 반드시 모국어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 제일 먼저이고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뒤부터 나는 한국인으로서 유치원, 초등학교를 외국계 국제학교에 보내 려는 부모님을 만나면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는 사람이 되었다. 나와 같은 다 문화 가정 아버지와 술자리라도 가질 때면 이 순서의 중요성을 설명하느라 평소 2배 이상의 소주를 마신다. 한국계 유치원을 다닌 막내는 그때의 습관으로 김치를 잘 먹는다. 그러나 첫째, 둘째는 아직도 김치를 먹지 않는다. 한국인의 필수 반찬인 김치도 아무 리 늦더라도 유치원 시절쯤에는 맛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가정환경과 학교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첫째와 둘째를 향해 계속 노력 중인 것에 비해 우 리말 습득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순서 탓이라 할 수 있는 것 105
이다. 큰애 5학년, 둘째 3학년 여름 방학 때다. 나는 내켜 하지 않은 아이들로 하여금 한국 내 학교에 대한 체험을 가지게 했다. 여름 방학이 긴 국제학교 JIS의 특성을 이용하여 아이들과 귀국을 한 나는 외국에서 생활하는 첫째 형빈이와 친구들
교포 자녀 특별반을 운영하
는 일산 소재 금계초등학교에 약 1개월간 아이들을 편입시켰다. 물론 등록시 키는 것부터가 쉽지는 않았다. 그 프로그램에 참여코자 외국에서 귀국하는 학생들이 많았거니와, 문교정책으로 인해 실시하는 특별반 운영에 일선 선생 님들은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마치고는 곧바로 1주일간 기숙을 하며 학습체험을 하는 지 리산 자락의 한 서당에 입소를 시켰다. 나도 경험이 없던 터라 아이들이 견뎌 내기에는 참으로 어려울 것임을 다 짐작하지 못한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특히 화장실 사용의 어려움과 원만하지 못한 샤워장 시설은 아이들을 뜨악하 게 만들었고, 무릎 꿇고 받아야 하는 훈장님 수업은 매우 견디기에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다음 여름 방학에 다시 보내고자 할 때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한 것으로 짐작은 충분히 하지만, 먼 훗날에는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어쨌든 두 아이들에게 기회만 되면 실시해온 한국체험은 2010년 여름 방 학 때 서울 체류를 계기로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그 이전 항상 내가 동행한 것에서 변화를 주어 2개월간 거의 둘이서 자취생활을 하며 학원에 다니는 경 험을 하더니 이제는 저희들끼리만 한국에 가서 생활을 하고 싶어 할 정도가 106
된 것이다. 그 방학이 끝날 무렵 아이들 엄마가 서울에 갔는데, 둘째가 코엑 스, 명동 등 여러 곳을 직접 안내까지 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났다. 물론 둘째 가 쇼핑을 좋아하여 여기 저기 지리를 스스로 빨리 터득한 덕이긴 했다. 감사한 일은 나와 아내의 애들 교육 방법에 있어서 의견이 거의 일치한다 는 점이다. 한국인으로서 자질을 갖추게 하려는 것은 물론이고, 체험을 많이 하는 것에도 동감이다. 물론 성적이야 우수하면 좋겠지만 중간 정도라도 만 족을 하며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 첫째는 사내아이라서 그런지 운동을 좋아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 도 아주 좋아한다. JIS 축구부, 럭비부에서 인기 짱임은 내게까지 감지가 될 정도다. 5개국 국제 학교 대회가 JIS에서 열릴 때면 밀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국제학교 등에서 각 2명씩의 선수가 우리 집에서 기숙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때는 항상 그들을 VIP 대접해줄 수 있도록 큰 애가 계획과 진행을 맡는다. 학교행사나 학부모 면담도 우리부부는 철저히 담당제다. 첫째, 둘째는 아 내가 하고, 막내는 내 담당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막내 유치원에서부터 지금 까지 줄곧 뒷바라지를 하게 되는데, 이번 JIKS 5학년 학부모 총회 때도 나는 청일점으로 어머니들 가운데 있었다. 내 사정을 아는 몇몇 어머니들께서“윤 선이 아버지 참 대단 하다” 고 격려의 말씀 을 하시는데, 내 진정 한 바람은 위의 두 아 이가 한국어로 묻고 대답할 때이며, 김치 를 먹고 싶어 할 때가 빨리 오는 것이다. 가
둘째 윤지, 한국의 고궁에서
족끼리의 한국어 소통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가 진정 자유로울 때 한국인으 로서 참답게 자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낮에는 사업장에서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하면서 세 아이들을 모두 건강히 키워오고 있는 아내에게 감사를 전한다. 아내는 다문화 가정에 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많은 부분 양보를 하며, 아이들을 다스리고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서둘러 배려를 하곤 한다. 그에 힘입어 위의 두 아이 는 더욱 당당하게, 자랄 것이며 막내는 변함없이 밝고 건강하게 집안의 웃음 지기 역할을 할 것이다.
l기획자 주l 안창섭! 20여 년 전 봉제관련회사 주재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으며, 현재 봉제관련 회사를 운영 중이다. 보고르 한인회와 봉제협회의 임원으로서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며, 자필묵연 회 원으로 서예를 즐기고 있다. 특히 그의 가족애와 자녀 사랑은 주위에 정평이 나있을 정도인 데, 그의 특별한 교육관과 실천을 하나의 사례로 기록하고자 하는 뜻을 끝내 사양하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그의 가정에 웃음꽃이 항상 만발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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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 뭔가를 찾는 것 아닐까요? 그 뭔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선문답 같은 답, 누구나 다 아는 답, 바로‘자신을 찾는 일’ 이 겠지요. 자신이란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것이니 찾고 자시고 할 것이 없을 성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찾아도 쉽게 찾아지지 않 거니와 찾았다 싶으면 어느새 잊거나 잃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 가불 변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찾고자 하고 얻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뜻을 세우고 실천에 돌입할 일입니다.
겘겚何獲(불색하획. 春秋左傳 句), 찾지 않고 무엇을 얻겠는가. / What can something be found when it is not looked for.
양수려
설레고 두려운 마음으로 인도네시아에 발을 내딛던 그날 밤, 내겐 모든 것 이 새로웠었다. 국제공항답지 않게 그다지 밝지 않았던 청사, 이미그레이션 안쪽까지 날 마중 나와 있는 남편, 서로 짐을 실어주겠다는 포터들, 맘 착하 게 생긴 인도네시아 기사 아저씨까지. 자카르타의 공기를 처음 느끼던 그 늦은 저녁의 풍경은 12년이 지난 지금 에도 하나하나 생생히 그려진다. 싱그러웠던 이십대 그 날을 시작으로 나는 이곳에서 한 가정을 이루어 아들 셋을 낳고 기르며, 어느덧 나이 사십을 맞 았다. 어느 날 내게 글쓰기의 주제로 주어진 교학(敎學)! 나도 또 다른 사람도 다 겪는 가르침과 배움을 놓고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곳 인도네시아에서 십이 년을 보내고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어떤 교학을 쌓았을까. 내 배움의 시기와는 다르게 이젠 내가 아이들의 배움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상 황, 그러므로 나도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상황으로서의 교학, 그런데 정말 한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특별히 쓴다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 나는 쓰지 않 겠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하지만 한 번 주어진 주제는 내 뇌리를 맴돌며 내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머리를 비우고 차근차근 생각을 하 면서 그간 생활 속에 존재했던 배우고 가르치는 일들이 하나씩 다가왔다. 주 부로서, 부모로서, 봉사자로서, 상사로서 배움과 가르침은 끊이지 않고 있어 왔구나. 또한 거의 모든 교민들도 주부 혹은 부모, 봉사자, 상사의 자격 (status) 가운데 하나는 속해있으니, 결국 내가 느끼고 행해왔던 인도네시아 에서의 교학은 교민들 이야기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미치자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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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내 가벼워진 것이다. 뜨리마까시 혹은 슬라맛 빠기로 첫 걸음을 떼는 인니어 배우기, 정규코스 를 밟든, 어깨너머로 배우든, 인니어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모든 교민들에게 던져진 배움의 첫 번째 과제이다. 경음이 많고 간단해 보이는 인니어의 문법 때문인지, 나는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인니어 구사 정도로 이 제껏 어느 정도 타협하며 만족해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인니어는 항상 배움 의 과제로 남아있다. 인니어 뉴스방송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많 이 후회스럽다며 유년시절을 자카르타에서 보낸 아이들 고모가 몇 번이고 하 신 말씀이 기억난다. 또 일주일에 두 번, 인니어 강좌를 들으며 열공하는 친 구도 떠오른다. 십여 년 전 멈춘 나의 인니어 배우기는 지금 다시 경종을 울 리며 생활에 안주해 있는 나를 깨닫게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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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 살면서 적지 않은 가사도우미들과 맺게 되는 인연 속에도 가 르침과 배움이 있다. 주부로서 한국 음식을 가르치면서 또 청소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인도네시아의 말과 문화를 배운다. 때로는 속상한 마 음, 하지만 여전히 고마운 마음의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듯, 나를 비롯한 주부 들은 오늘도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의 주부들은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배움과 가르침의 나눔을 하 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삼형제를 낳아 키우면서도 역시 끊임없는 교학(敎學)은 이어지고 있다. 아 마 삶에 있어서 가장 길게, 그리고 가장 크게 이루어지는 교학이 아닐까 싶 다. 시간활용이 중요해진 12살 큰아이,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의 9살 둘째아 이, 울며 어리광 피우는 5살 막내에게 오늘도 난 엄마로서, 인생 선배로서 무 언가를 가르치고, 우리 아이들은 불완전한 어른인 엄마를 일깨워준다. 아이 들을 키우면서 엄마의 그릇된 과욕이 얼마나 위험한지 배웠다. 또한 엄마의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배웠다.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렇게 소중한 세 아이들은 돈 내고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것들을, 내가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진리를, 나 에게 무료로 그것도 매일 가르쳐준다. 미력한 나의 도움이 귀중히 쓰일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시작한 약 3년간의 성요셉성당 성가대 지휘봉사 시간은 정말 보람 있고 귀중한 시간이었으며 은 혜로운 시간이었다. 연습 시간, 얼핏 보기에는 내가 단원들을 가르치는 것같 이 보인다.“둘째 단 셋째 마디, 반음 아닌데요.” ,“박자 왜 이러죠?” ,“호흡만 잘 조절하셔도 훨씬 좋아질 텐데요.” ,“베이스 다시 가보겠습니다.”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하셔야죠.”음악 비전공자인 내가, 그것도 단원들 중 가장 어린 사람이 볼펜으로 탁자를 탁탁 두드려가며 수없는 지적들을 쏟아내어도, 112
늦은 밤 열한시가 되도록 연습을 끝내지 않아도,“담배 피지 마세요.” 라며 사 생활을 간섭해도 그들은 기분 상해 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허허허 하하하 웃으시며 열심히 신앙적 소명을 다하는 성요셉 성당의 앗숨 단원들, 누가 하 라 시키지도 않았는데 조용히 많은 식구들의 간식을 챙기는 아름다운 모습에 서 나는 순명을 배웠다. 열정을 배웠다. 갈망하는 마음도 배웠다. 지금은 잠 시 떠나있지만 앗숨 단원들의 뜨거운 마음을 오늘 교학이라는 주제를 통해 진하게 느낀다. 지난해 여름부터 준비하기 시작한‘COFFEE in J’ 와‘Snack Culture’ 가 지난 달 오픈했다. 직원들을 채용하고 교육하면서‘교학(敎學), 배움과 가르 침’ 의 공존을 새삼 느낀다. 나는 업무 매뉴얼을 가르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인도네시아인이 가진 저력을 배운다. 핸드폰으로 소셜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직원들, 한국어 읽기쓰기가 수준급인 직원들, 경직된 나보다 웃음이 몸에 배 어 있는 직원들을 보며 나는, 이제는 나를 비롯한 한국교민들이 이들을 바라 보는 시각을 재정비할 때임을 실감한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성장할 동반자 이자 조력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꾸준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 이지만, 모 호텔의 모토가‘신사숙녀에게 봉사하는 신사숙녀’ 인 것처럼, 수준 있는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COFFEE in J 와 Snack Culture 의 수준 있는 종업원의 모습을 기대하며 상상한다. 열거해보니 짧은 하루 일과 속에서도 항상 존재했던 교학(敎學)을 무심하 게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제대로 된‘가르침’ 에는 반드시‘배움’ 이 동행된다는 것도 글을 쓰며 깨달았다. 진정한 교학은 Teaching(가르치기)가 Coaching(끌어내기)으로 바뀔 때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서 일방 적인 가르치기가 아닌 스스로 깨닫게 이끌어내는 가르침일 때, 제대로 이루 어진 교학(敎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개월 전 방영됐던 남자의 자격 113
프로그램의 박칼린 지휘자는 오합지졸의 합창단을 티칭이 아닌 코칭으로 이 끌어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하며 뜨거운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깨닫게 만드는 가르침. 그것이 진정한 교학(敎學)이리라.
l기획자 주l 양수려! 세 아들을 기르면서도 영역 넓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주부다. EBS방송국 아나운서 경력을 지닌 그녀의 능력은 교민행사, 기관의 문화행사 등을 한껏 격을 높인다. 성요셉성당 앗숨 성가대를 지휘할 때는 출중한 지휘능력으로 단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얼마 전 ‘COFFEE in J’와‘Snack Culture’를 창업하고 운영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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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산의 기세를 얻어라. 딸아! 물의 지혜로 살아라. 큰 산은 깊은 물을 거느리고, 깊은 물은 큰 산을 품어 더욱 깊어지느니 라. 산의 기세는 물을 따라 지혜롭고 맑아지며, 물의 지혜는 산의 기세를 기억하여 넓고 깊어지느니라. 아들아! 산과 가르침을 기 억해라. 딸아! 물의 가르침을 잊지 마라.
山氣水智(산기수지), 산의 기세와 물의 지혜로 / With spirit of mountain and wisdom of water.
양승식
“아빠, 남자는 여자를 알아야 인생을 알 수 있대요.”지금은 대학생인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불쑥 던진 말이다. 저녁식사 후 네 식구가 후식을 먹는 자리에서 나온 아들의 말에 우리 부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 즈음 유난히 질문이 많고 이상한 행동을 보여 지켜보던 참이었다. 연이어 쏟아내는 아들의 말투에서 사춘기가 왔다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거실에 머물면서 생각에 잠겼다.“아들에게 찾아 온 이 불청객을 어떻게 잘 달래서 보낼 것인가?.”또“아들이 정신적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반전의 계기로 승화 시킬 수는 없을까?” 에 대해 고심을 거듭했 다. 한국이라면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또 다른 방법으로 풀 수 있겠지 만 인도네시아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결국 운동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웃집에서 아동용 골프채를 빌려 연습장으로 데리고 갔다. 스윙을 하는 모 습을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제쯤 볼을 맞출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즈음 아들은 영국축구의 열렬한 팬이었다. 선수의 등 번호만 보아도 연 봉, 포지션 등 모든 것을 꿸 정도로 좋아했다. 그런 축구를 멀리하기에 어려 움이 있었지만, 아들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국축구에서 GOLF로 바뀌기 시작했다. 레슨 프로를 선정하는 데에도 신중을 기했다. 레슨 시 절대로 야 단치지 않도록 특별히 부탁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주니어 대회를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했다. 인도네시아의 주니어대회 진행방식이 참석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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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이상 수상을 하도 록 하여 어린 학생들에 게 성취감을 주는 장점 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 었다. 대회에 나가 트로피 를 받아 오면 칭찬을 많이 해주었고 작지만
말레이시아 우승사진 (우측 두번째)
선물도 주었다. 함께 필드에 나갔을 때 그른 행동에는 충고를 하였으나, 나쁜 스코어나 실수에 대 해서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좋은 샷이 나오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실수 샷에는 좋은 샷이 나올 수 있다고 격려를 해줬다. 아들은 시작한 지 11개월 만에 싱글 스코어를 기록하는 놀라움을 보여 주더니, 그 이후로는 80대를 유 지하였고 지금은 핸디캡 6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그보다 더 좋은 성과는 집중력이었다. 공부하다가 졸리면 거실로 나와 퍼 팅 연습으로 잠을 쫓고 다시 밤샘공부에 돌입하는 지구력은 골프에서 얻어진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골프의 핸디캡이 낮아질수록 공부에 대한 집중력은 더 강해져 갔다. 10학년 때 JIS(Jakarta International school)로 전학을 하고 곧바로 학교대표 골프선수로 활동하면서 대인관계 폭이 넓어졌고, 주장을 맡 아 6개국 국제학생대회를 직접 주관하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 으니 골프의 덕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한 달에 두 번은 반드시 아들과 함께 라운딩을 하기로 정했다. 물론 아내도 함께였다. 라운딩이 거듭될수록 아들과의 대화는 점점 페어웨이처럼 확 트였 고, 푸른 잔디 위에 세례를 베푸는 햇살처럼 점점 밝아져 갔다. 5시간여 동안 나누는 대화 속에는 아들의 학교생활, 선생님에 관한 얘기, 친구 얘기가 주류 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아들의 꿈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들이 궁금 117
해 하는 내용은 메모해 두었다가 인터넷으로 조사하여 얘기해 주기 도 했다. 나는 그때 아들의 성 품과 생각, 꿈을 부모가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것 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 을 깨달았다. 그것은 서 로에 대한 신뢰와 연결 되기 때문이다. 아들이 목표로 하는 대학, VISION을 향해 아빠, 上. 방콩대회 JIS 대표선수(왼쪽에서 세번째) 下. 방콕대회 우승기념 사진(가운데 검은바지)
엄마, 아들이 한 곳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
는 한 방향 정렬이 골프로 인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이다. 내가 아들을 통해 배운 점도 적지 않다. 아들은 어린 나이에 체득하기 쉽지 않은 매니지먼트로 나를 놀라게 했다. 탁 트인 페어웨이를 보면 드라이버를 힘차게 날려보고 싶었을 것인데, 그 유혹을 뿌리치고 아이언을 빼 드는 아들 의 모습에서 나는 몇 번이고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들은 골프의 기술을 비 교적 단시간에 터득하면서도 내 염려와는 달리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 도 놓치지 않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필드에서의 행동, 골프 룰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자세 등 사회 규범을 지키는데 기반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순조롭게 익혀 나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아들은 올바른 사회인이 되기 위한 룰을 골 프장에서 먼저 배운 셈이다. 아들은 작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들을 향한 118
골프지도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소득을 내게 안겨주었다는 것을 실감 했다. 물론 그것은 골프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 환경이 가능하게 한 점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일까 나는 언젠가부터 지인들에게 아이들의 사춘기 극복기로서 골프지도를 추천하기도 한다. 물론 그때는 다음의 당부 몇 가지 를 빠뜨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골프를 가르치면서 실패를 줄이는 방법이다. 첫째, 절대로 야단을 쳐서는 안 된다. 대부분 여기서 실패를 하기 때문 이다. 둘째, 아빠 친구들과 함께 라운딩을 삼가야 한다. 자칫 나쁜 행동을 보게 되고 라운딩이 아들 중심이 아닌 어른 들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아들 중심의 라운딩이 되어야 한다. 셋째, 아들에게 결정권을 줘야 한다. 라운딩 후 식사메뉴, 골프 용품 구매 시 선택권 등. 그리고 아들이 자랑하기 전에는 스코어를 거론하지 않는다. 물 론 자랑할 경우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사춘기는 온다. 그 사춘기는 부모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지 나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사춘기로 인해 아이들의 미래가 바뀌는 경우 또한 어찌 없겠는가? 그 예민한 시기를 정신적 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가 도와준다면 사춘기는 더 나은 인생 설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느 기업인은 그의 어록에“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졌는데, 자식 과 골프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라고 했다. 자식 교육과 골프 잘 치기 가 참 어렵다는 의미 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두 가지를 다 얻은 셈이니 아들 에게도 고맙고, 골프도 감사하다. 현재 미국 버클리 대학교(U C BERKELEY)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아들은 아직 나의 충고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제 곧 나의 충고를 필요로 하지 않 을 것이며, 나를 추월해 앞으로 나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119
아들 졸업기념 가족사진
다. 그 때는 한 쪽 편에 비켜서서 추월해 가는 아들을 향해 감격의 힘찬 박수 를 보낼 것이다.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l기획자 주l 우빈 양승식! 그는 1998 년 초 상사주재원으로 자카르타에 진출하여 현재는 PT. PPF INDONESIA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일상과 비즈니스 모든 면에서 그의 명료함은 주위의 아낌없는 찬사를 얻는다. USGTF 티칭프로 정회원이며 자필묵연 정회원으로 시간이 흐른 뒤 부부 필묵전 개최를 목표로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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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氣澄心(산기징심), 마음을 맑게 하는 산 기운 / A mountain spirit that clears the mind. 어느 시인의 질문입니다.“어디 없을까요?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은 말. 치료하지 않아도 아픈 게 다 나을 것 같은 말. 답답하고 꽉 막힌 마음이 확 뚫려 시원해지고 편안 해질 것 같은 말. 이런 말들로 사람을 만나고, 시를 쓰고, 노래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아쉽게도 사람의 말 중에는 그런 영험한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산 에는 많습니다. 물에도 많습니다. 말을 줄이고 산의 정기를 보고, 조용히 앉아 물의 맑 음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아닐까요?
유세라
“우리 애들 의상 준비 다 됐어요?” “분장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소품도 확인해 주세요.” “다음 팀 준비!” 자카르타 한인어린이합창단(JKCC)의 공연이 있는 날엔 무대에 서는 아이 들보다 언제나 무대 뒤에 있는 엄마들이 더 분주하다. 의상 챙겨 입히랴, 분 장하랴, 우리 엄마들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되었다가 코디도 되었다가 말 그대로 종합 스타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내 딸 네 아들 구별할 여유도, 그 럴 필요도 없이 모두가 스태프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우리 아이들의 공 연을 돕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 합창단 공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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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조유리가 합창단원 생활을 한 지가 3년이다. 이 기간은 곧 내가 합창단 스타일리스트 생활을 한 기간이기도 하다. 처음 유리가 합창단에 입단할 때 의 내 기대는 별로 큰 것이 아니었다. 외국에 살면서 여가 활용으로서 합창단 을 통해 우리 노래, 우리 춤, 우리 문화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연습이 더해지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공연의 대부분이 국가적인 행사나 범 교민차원, 인도네시 아와의 문화교류 행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때로는 국가를 대표하여 한국문화를 알리고, 때로는 교민사회에 감성을 가꾸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딸 유리도 부쩍 자라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얻어지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다른 엄마들도 마찬 가지였던가 보다. 이구동성으로 서로 합창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밀어주길 정말 잘했다는 말들을 했다. 유리가 합창단원이 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뭐니 뭐니 해도 2011년 에 한국방문 공연일 것이다. 그 공연은 한국 어린이들이 인도네시아 문화를 한국에 선보이는 것이었다. 산업인력으로 한국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인들 을 위한 것이었으며, 여력으로 한국에 인도네시아 문화를 알리는 것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문화를 널리 펼치던 합창단이 한국에 가서는 인도네 시아를 대표하게 된 것이었다. 합창단의 한국공연은 그야말로 고정관념을 깨 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처음에 그 계획을 들었을 때 기대도 컸지만 우려도 있었다. 특히 합창단원들이 인도네시아 발리 춤을 익히고, 샤먼 춤에 인니 전 통 악기 Angklung까지 배우면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는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과연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되었다. 그런데 딸 유리는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합창단의 모든 아이들도 퍽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준비를 마친 다음 한국에서의 공연은 모두에게 놀라움이었다.‘국경 없는 마을’ 로 지정된 안산시 원곡동에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게 인도네시아 춤 123
사랑하는 세 아이들
을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준 것은 큰 선물이었다. 그들에게 타국에서의 고된 노동을 잠시라도 잊게 하고 그들의 고국과 그리운 고향, 가족을 떠올리게 하 는 위안의 시간이었다. 여의도에 소재한 주 한국인도네시아대사의 관저에서 있었던 공연은 인도네시아 외교관들에게 멋진 선물이 되었다. 특히 대사님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는데,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 어린이들이 바틱옷을 입고 인도네시아 전통 동요와 악기를 선보이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거듭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 당사자인 합창단원들은 물론 지 도하시는 김영희 선생님을 비롯해 엄마들 또한 뿌듯한 마음이 넘쳤다. 부산 의 한 초등학교에서의 공연은 또래의 한국 학생들에게 인도네시아 문화를 알 리는 일이었는데,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었고 나눔이었다. 방송 출연의 특별 함도 있었다. 단순한 견학이 아닌 방송의 직접 출연은 합창단으로서 자부심 을 가지는 참 좋은 기회였다. TV로만 볼 수 있었던 스타들과 직접 만남이기 124
도 했는데, 아이들과 엄마들에게도 두고두고 기억될 좋은 추억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의 그 모든 공연은 인내심과의 싸움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같이 일어나 다음 공연장소로 이동을 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서 비교적 편하게 살던 합창단원들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모 두가 잘 견뎌주었다. 틈틈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같은 춤을 몇 번이 나 추고 같은 음악을 몇 번이나 연주하면서도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대견하기 그지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를 알리느라 정작 고국인 한 국에서 한국을 좀 더 많이 느끼고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그 부분에서는 엄마 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간 고국에서 아이들 공연만 뒷바라지 하다가 돌아온 것 같아 본인들도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러나 합창단 아이들은 얻은 것이 많았다. 양국의 문화외교 역할을 나름 충분히 소화한 보 람된 시간이었다. 특히 이런 형식의 문화교류 형태는 처음이니만큼 그 처음 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컸다. 앞으로는 좀 더 좋은 장소에서, 좀 더 많은 사람 들을 대상으로 좋은 공연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요즘은 첫째를 보 며 합창단원의 꿈을 키운 둘째 딸이 오 디션에 합격한 후 흥분을 감추지 못하 고 있다. 올해는 또 어떤 행사에서 한국 과 인도네시아의 문
야구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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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알리게 될까? 나도 같이 큰 기대로 합창단의 공연을 기다린다.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 어린이들이 꼭 들어가고 싶어 하는 자카르타 한인 어린이 합창단. 오늘도 한국을 알리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는 자카르 타 한인 어린이 합창단. 한국에 가서는 인도네시아를 알리기에 바빴던 자카 르타 한인 어린이 합창단. 이 아이들의 활동에 큰 박수를 보내며 성장하여 어 른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l기획자 주l 유세라! 부산대 인문대학을 졸업했다. 3년간의 독일유학 후 한국의 무역회사에 입사한 것이 인도네시아와 인연이며, 남편과의 인연으로도 이어져 슬하에 세 아이를 두었다. 한인 밴드 < 소리와 장단> 에서 보컬로서 활동하기도 했고, 한인 야구단 < 코리아나 야구단> 원년멤버로 참 가하여 지금도 매주 일요일이면 스나얀 운동장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야구단 유일의 홍일점 선수이며, 기록원,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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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지고 물 안고 / A mountain and hug water. 감수성이 예민하기로는 만물의 영장 사람이 제일입니다. 느낌이 오면 말을 하고 간 절해지면 글을 씁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어느 구절을 만나 간절해지면 그것을 서예 작품으로 또는 문인화 작품으로 빚어냅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쳤던 구절 이 오늘 간절해질 수 있듯이, 어떤 것이 내일 내게 간절해질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산 지고 물 안고>, 내게 참 간절했던 구절입니다. 산 지고 물 안고 싶습니다.
이규백
난 이제 갓 사회에 나온 초년병이다. 군대 전역과 결혼, 일의 시작이 모두 6 개월 이내에 일어난 일이다. 이 풋내기가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그간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참다운 인생경험이나 사회생활은 이제 시작 인 내가 이질과 동화는 꽤 여러 번 겪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본의와는 달리 앞으로도 어쩔 수없이 또 겪게 될 갈등과 타협 또는 조화에 대비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내 첫 갈등의 기억은 여섯 살, 인도네시아에서 살게 된 때부터다. 1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집안에 수영장이 있어 좋다는 느낌도 잠시 나는 갈등의 세계 로 돌입했다. 아버지의 결정으로 인도네시아 유치원에 입학을 했던 것이다. 현지 아이들 사이에서 백(白)일점이었던 나는 그들에게는 또래이면서 말이 안 통하는 이상한 아이였다. 혼자서 가만히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화장 실 가겠다는 말을 못해 바지에 대소변을 보고는 울기도 했다. 다 기억나지 않 지만 그 외에도 어린 나이에 혼자 감당해내기엔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질감은 곧 동화를 수반했다. 그런 중에도 난 몇몇 친구들을 사귀었던 것이다. 집으로 데려와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피아노를 함께 두드리는 동안 나는 그들과 점점 언어가 통하면서 동화가 되어갔다. 인 도네시아 국기인 Merah Putih를 그려서는 집에 돌아와 유치원에서 태극기 (?)를 그렸다고 자랑을 하곤 했고, 현수막에 적혀있는‘Coming Here’ 를보 고는 인도네시아 식 발음으로‘쪼밍 헤레’라고 읽곤 했었다. 유치원을 마친 나는 자카르타의 한국국제학교 JIKS에 입학을 했다. 한국 선생님, 한국 교과서, 한국 교육이 있었고, 한국인 친구들과 한국 음악을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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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국 만화 이야기,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었 다. 다만 TV 프로그램을 한국보다 2-3주 늦게 녹화 비디오를 통해서 봐야만 했고, 가끔 한국에 다녀오는 친구 편에 새로운 만화책이라도 들어오면 마르 고 닳도록 돌려가면서 봐야만 하는 외국이라는 현실만 받아들이면 되었다. 내가 이질감에 의한 갈등과 다시 조우한 것은 중학교 2학년에 접어들면서 였다. 한국어와 한글, 그리고 중학교 1학년까지 한국식을 경험했으면 됐다는 부모님의 판단으로 나는 호주계 국제학교로 전학을 했다. 다수의 한국 학생 들이 있는 미국계 국제학교를 피해 한국 학생이 한명 밖에 없던 호주계 학교 를 선택한 데에는, 집과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한국어를 최소한으로 사 용하고 영어만 쓰겠다는 부모님과 내 의지가 첫째였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성적과 연결이 되었고, 유치원 다닐 때와는 달리 갈등의 정도가 심했다. 아침 마다 친구들끼리 같은 버스를 타고 한국학교로 가는 모습은 정말 부러웠다. 129
그들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시간이 문제였을 뿐 동화는 찾아왔다. 1년 정도의 적응 기를 거치자 불만도 사라지고 아침에 한국학교로 향하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 운 시선도 걷혔다. 한국학교에서는 보지 못 했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우 선 개성주의였다. 한국학생 사이에서 대유행이던 눈 밑까지 내려오는 가르마 앞머리와 통 큰 힙합바지, 무릎까지 내려오는 벨트 등을 앞 다투어 따라했었 는데 새로 다니는 학교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스타일이 가지각색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차림새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특이한 헤어스타일이나 옷이면 한두 번 봐주는 정도뿐이었다. 전학을 하고 4, 5개월 정도 한국학생 스타일을 고집하던 나는 이내 유행에 무관심한 학생이 되어갔다.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다국적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문화와 동화된 결과였다. 호주계 학교와의 동화, 이것은 곧 한국학교나 한국친구들과의 멀어짐을 의 미했다. 한국학교 친구들과 당구장과 PC방을 다니는 것보다 새로운 학교의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농구하고 축구하고 수영을 하는 것에 더 재미가 붙었다. 그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진학의 기로에서 미국이나 호주가 아닌 한국을 선택했다. 부 모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한국대학으로의 진학이 내 장점들을 잘 살려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결론을 내렸다. 물론 대학 4년과 군대 2년 4개월 동안 내 장점이 활발히 발휘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대학생들 이 고민하는 영어나 제2외국어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그 시간에 난 다른 일이나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이질감은 존재했다. 대학입학 초기였다. 중, 고의 동문이 없는 나는 외톨이였다. 한국국제학교 출신들과도 차이가 났다. 그 뿐만이 아 니었다. 사회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도 틈이 컸다. 그동안 나는 아 주 자연스럽게 한국이라는 내 나라를 멀리하고 있었다. 입시문제, 취업문제 130
에서 납치, 살인사건까지 한국에 관한 뉴스들은 외국계 친구들 사이에서의 내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으로 대학생으로 한국 사람들 속에 던져지고 나니 모든 사회현상이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었 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애국심이라는 것이 생겼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현실 이 내면으로부터 다시 새겨졌다. 그것은 곧 나로 하여금 군대를 장교로 복무 하게 했다. 대학교 4학년, 이때는 주변의 갈등이 내 관심을 끌었다. 친구들과의 대화 가 1, 2학년 때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온통 취업과 장래가 관심 사였다. 난 졸업과 동시에 임관을 하여 군대를 가니 취업이란 당면과제가 다 른 친구들보다 2년 정도 유예가 되었지만, 군대를 다녀 온 복학생들이나 군 복무를 대학원 공부(학위)로 대체하려는 학생들은 달랐다. 마음가짐이나 행 동에서 사뭇 진지하게 갈등을 노출했다. 당장은 필요하지도 않는 자격증을 획득하려 학원을 다녔고 같은 내용의 이력서를 수십 개 준비했다. 나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준 것은 이미 직장을 가진 선배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다양 한 능력을 마음껏 펼치기 보다는 그저 주어진 범위에서 점점 굳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역 시까지도 나를 갈등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전역과 동시에 일 단의 갈등을 갈무리 했다. 결국 한국을 다시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한국에 서의 경험도 심각하게 고려를 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아버지의 일 중에 한 가지를 맡기로 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상태인지라 결혼도 서둘렀다. 나 의 반려자도 내 결정에 기꺼이 동의했다. 그 후 나는 그동안 희망했던 미국 동부와 서부 그리고 유럽 전역을 두 달여에 걸쳐 여행을 했다. 그 여행에서 나는 참 많은 것을 정리하고 계획했다. 내 결정에 대해 장점만 생각하기로 했 다. 언젠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요즘 나의 비즈니스 터전 중부자와의 즈빠라에서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한 워밍업에 바쁘다. 함께 하는 아내에게 얘기해주었다. 내가 인도네시아 131
에서 생활하면서 갈등이 생길 때면 늘‘한국이 아니라서…’ 라고 생각했고, 똑 같은 경우에 한국에서는‘인도네시아가 아니라서…’ 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모든 갈등과 동화의 키는 마음 안에 있다는 것에 아내도 동의했다. 나는 지금 이 키를 아내와 함께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이제부터 찾아올 수많은 갈등들 과 의연히 맞서나가기 위해.
l기획자 주l 이규백! 여섯 살 때 인도네시아에 와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연세대에 진학을 했다. 졸업과 동 시 ROTC장교로 입대하여 백골부대에서 중위로 전역했다. 27살의 그는 타국에서의 신혼생활 을 당당히 받아들인 예쁜 아내와 함께 중부자와 Jepara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완전무장 을 하고 사회를 향해 나선 그에게 갈등 따위는 감히 맞서지 못할 것 같다. 전진과 아름다움이 그의 것이 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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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산처럼 높고 두텁게 / High and bulky like a mountain. 필묵예술! 찰나를 지향하는 예술입니다. 덧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일점일획들이 찰나에 이루어집니다. 예컨대 단 2분여에 한 폭의 묵화가 완성되기도 하고, 단 5분 여에 한 점의 작품이 일필휘지로 생산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 찰나의 결정체는 수없 이 되풀이하는 연습시간이 쌓여서 드러납니다. 수많은 퇴필과 파지를 남기고서야 한 점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긴 구상 단계는 찰나를 위한 준비인데 그것은 곧 내밀한 마 음 다스리기이기도 합니다. 이 긴 시간과의 싸움은 바로 그것이 예술로서 마침내 진 솔한 감상의 대상이 됩니다.
이남숙
어느 날 이른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침식사를 할 때였습니 다.“여보, 당신에게 부탁이 있는데…”남편이 말끝을 흐렸습니다.“뭐예요?” 주춤거리던 남편은“어∼ 당신이 아이들 교육에 관한 글을 한편 써봤으면 해 서. 콩트도 좋고, 에피소드도 좋고…”저는 남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아유, 전 못 써요. 해도 해도 부족한 게 아이들 교육이고, 또 얼마나 훌륭한 부모님 들이 많은데…” 단숨에 거절하고 말았지만 하루 종일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아이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하루, 저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하루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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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고 보면 자식을 교육하는 데 있어 자신만의 노하우 없는 엄마들이 어디 있을까요. 자식을 사랑하는 크기 이상으로 나름대로 주관과 방식이 있 고 욕심도 있을 것이니 그에 관해 말하라면 어찌 할 말이 없겠어요. 다만 밖 으로 늘어놓기 부끄러울 따름이겠지요. 하여튼 저는 저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라도 글을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모아 하나의 사례집을 만 든다는 것도 좋은 의미로 생각이 되어 부족함이 많지만 동참하겠다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제가 남편과 함께 자카르타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19년차입니다. 언제 그 많은 시간들을 뒤로 했는지 돌아보면 빠르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 큰아 이인 딸 박민지는 대학 3학년으로서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 유학 중이고, 작 은아이인 아들 박현규는 자카르타 인터내셔날 스쿨인 JIS 11학년에 재학 중 입니다. 떨려 보낸 그 세월 동안 아이들은 훌쩍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 직 아이들이 재학 중이니 교육에 대한 아무런 결실이 없고 특별히 할 말도 없 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즐겁다는 자식 자랑을 할 계제가 아닌 것입니다. 하 지만 자랑할 수 있는 날을 바라고 또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으면서 이 기 회에 몇 가지 반성하고 또 다지려고 합니다. 그 첫째가 꾸준히 성실하게 임하는 자셉니다. 저는‘꾸준함을 이길 그 어떤 재주도 없다’ 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 자신 늘 정성된 마음과 자세로 살고자 하고 아이들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모로서의 역할입니다. 즉 아이들의 충고자가 아니라 도우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 때도 부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충분히 생각해서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그에 대해서 저는 기꺼이 엄마로서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의 조력자가 되려 고 합니다. 세 번째는 믿고 기다려주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언젠가부터 이 노력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큰 딸의 경우보다는 이제 곧 12학년이 되는 아 135
아들의 독일 여행
들에게 기다림을 더 많이 적용하고 있습니다. 문득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데 다른 엄마들에 비해 방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때 마다‘기다려야 한다’ 를 속으로 되새기며 욕심을 삭히곤 합니다. 참으로 고맙 고 다행스러운 것은 아이가 자기 일을 스스로 묵묵히 잘해 낸다는 것입니다. 아빠와 엄마가 늘 저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아 저의 기다림을 한결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칭찬’ 을 아끼지 않는 엄마가 되려고 합니다.‘칭찬은 고래도 춤 추게 한다’ 는 진리를 알면서 부끄럽게도 늘 인색한 것이 칭찬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하는 제 자녀에게도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딸에 게는 참 미안한 마음입니다. 제 사전에‘칭찬’ 이라는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큰딸에게 칭찬이 적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잘 자라준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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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면 너무나 당연시하고 부족하다 싶으면 독려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기 에 욕심을 더해 다가올 것들까지 나열을 하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강하게 지적하고 요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날 딸아이는 제게 “엄마! 엄만 절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어요.” 라고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그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딸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했던지요.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상실감이 얼마나 컸 던지요. 그래서 저는 큰딸을 제 선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를 내적으 로 성장시킨 것이 사실이거든요. 이 자리를 빌려 딸아이에게 고맙다는 말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 후로 저는 아주 어렵고 조심스럽게 칭찬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은 딸보다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들이 딸의 혜택을 입은 셈입니다. 그러 나 아직도 저는 칭찬이 많이 서툽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더 익숙해질 것을 믿으며 노력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제가 바라는 것을 덧붙일까 합니다. 바로‘꿈’ 입니다. 꿈은 세 상을 긍정하게 하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하며, 마침내 행복으로 이어준다 고 알고 있습니다. 딸아이는 지금 프리덴탈과 심리학을 더블메이저로 하면 서, 치과의사와 연구원을 꿈꾸고 있습니다. 딸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충분히 노력 하기를 바라고 마 침내 아름답게 우 뚝 서기를 바랍니 다. 아들의 희망 은 유능한 비즈니
딸의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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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맨입니다. 아들 또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자신 에게 충실하면서도 동시대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물 론 저도 나름 꿈을 지니고 취미생활도 하고 제 자신을 가꾸어 나가면서 아이 들의 조력자로서 제 위치를 지킬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가족이 함께 공동으 로 꾸는 꿈도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우리 가족의 꿈을 위해 진 지한 토론이라도 벌여야 하겠습니다. 공동의 꿈이야말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면서 행복을 잘 가꾸어 나가는 조건이 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남편에게 감사합니다. 평소 아이가 대학을 갈 때까지 만이라고 못 을 박으며 아이에게 전력을 기울이는 저를 지지해주고 불평 없이 너그럽게 감싸주는 남편,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l기획자 주l 이남숙! 그는 인도네시아 19년차 주부로서, 월화차문화원 회원, 루시플라워 회원이다. 조용히 내면을 가꾸어가는 현모양처라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두 아이의 교육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남편의 자랑거리이기도 하거니와 학부모들 사이에 정평이 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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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부드러운 것, 차고 따뜻한 것, 삶과 죽음 등. 이 모두는 서로가 반대지만 마침내 그 관계는 해소가 되어 태허(太虛)로 돌 아간다고 합니다. 송대 철학자 장횡거(張橫渠)는“형상이 있으면 이에 대립이 있고 대립은 반드시 상반적인 관계를 낳고 상반적 인 관계가 있으면 이에 적대적인 모순 갈등의 관계가 있게 되지만, 원수는 반드시 화해하여 그 갈등이 해소된다.” 고 했습니다. 지금 싫은 것도 좋아질 수 있음은 시간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환희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것 입니다.
相反相成(상반상성), 서로가 반대됨으로써 서로가 이루어진다 ./ Accomplished by their opposition to each other.
이병수
“그냥 건강하게만 살아다오!”이 말은 아이들을 지금까지 키워오면서 아내 와 내가 셀 수 없이 되뇐 무언의 기도이다. 건강한 아이를 둔 부모에게도 물 론이거니와 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둔 부모들이라면 가장 절박한 기도문일 것이다. 십수년 전 어느 날 새벽,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오들오들 떨 고 있는 첫 아이 딸을 들춰 업고 아내와 함께 가파른 동네 길을 뛰어 내려갔 다. 큰길가에 나섰으나 그 흔한 택시 한 대 보이지 않는다. 일각이 여삼추 같 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오고 있는 차 한대의 불빛이 비쳤다. 나 는 딸을 들춰 업은 채로 찻길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한 팔을 열심히 흔들어댔 다. 놀란 듯 급브레이크를 밟고 선 그 차의 아저씨는 다급한 상황임을 판단하 고 우리를 태워 텅 빈 새벽길을 질주하여 서대문 근처 병원 응급실 앞에서 우 리를 내려주었다. OO 나이트클럽 소속 봉고차 기사로 일을 마치고 퇴근 중이 던 친절한 아저씨의 도움으로 빨리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어서 위기상황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이를 진단한 당직 의사는 우 리 부부에게 막 야단을 쳤다. 아이를 옷으로 이불로 두텁게 둘러싼 것 때문이 었다. 바이러스로 인해 열이 높아진 것이니 오히려 옷을 벗기고 얼음찜질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순간대처를 못한 부모의 무지가 아 이를 잃게 만들 수도 있었던 사건,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단편이다. 첫 아이 다솔은 알레르기성 천식을 안고 태어났다. 찬바람을 쐬거나 감기 기운이 조금만 있으면 쉽게 천식으로 발전하여 늘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 니었다. 그 날도 낮부터 천식이 발병하여 아내가 동네병원에 데리고 갔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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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모시고 가족이 함께
데, 밤이 깊어질수록 심해지자 날이 밝는 대로 병원에 가리라 작정하고 지켜 보기만 하다가 새벽녘에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97년 자카르타로 발령을 받았을 때 회사동료들은 대체로 부러워했고 가족 친지들은 염려를 하는 분위기였는데, 천식과 같은 호흡기 질환은 열대지방에 서 사는 것이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임상소견(?)들이 그 중 위로요 기쁨 이었다. 그러나 거의 하루 종일 집과 학교에서 에어컨의 찬바람을 벗어날 수 없는 환경 탓에 늘 콧물과 재채기에 시달려야 했던 딸은 천식이 전혀 호전되 지 않고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더 악화되는 듯했다. 아내와 함께 안 가본 종합 병원이 없었던 듯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항상 기관지확장 흡입기를 지 녀야 했고 선생님에게도 특별히 관찰의 대상으로 부탁을 해두었고 체육시간 에는 힘든 운동을 못하고 한쪽에서 쉬고 있어야 했던 딸은 평소보다 천식이 심해질라 치면 병원 신세를 지곤 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또 한 번 위급한 상황을 맞았다. 아침이 되면 곧바로 병원으로 직행할 심산으로 밤새 숨소리 141
가 거친 아이의 상태를 지켜보기만 했는데 새벽에 갑자기 발작에 가까운 호 흡곤란상태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결에 차를 몰고 가까운 병원에 후 송하여 신속하게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들 생명이 어찌되었을지 모를 위급의 순간이었다. 응급처치를 하여 큰 위기를 넘긴 다음 아침이 밝자 마자 큰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고 거의 열흘 간이나 아이는 입원실 신세를 져야만 했다.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앓아온 천식으로 인해 어린 시절에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지금은 한국에서 2년째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가 딸 다솔 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옛 기억을 좀 더 정확하게 더듬기 위해 아내에게 전 화를 했는데 역시 엄마로서의 기억은 아빠에 비해 훨씬 정확하고 생생하였음 은 물론,“그냥 건강하게만 살아다오!”라는 소박한 염원이 어릴 적 다솔에게 기대한 모든 것이었노라고 나에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내가 이 글을 쓰기 위 해 전화로 물어보는 상황인지 까맣게 모르고! 주재원 생활 만 4년을 넘기면서 아이들의 교육문제는 나의 거취문제의 핵 심이 되어 있었고, 나는 아내와 상의도 없이 복귀발령을 받는 날이 곧 내가 독립(?)하는 날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에 이르렀다. 한국으로 복귀하면 안정적인 자리와 어김없이 통장에 입금되는 보수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아이 들이, 특히 다솔이가 한국의 입시지옥에서 정신적·체력적으로 시달릴 생각 을 하면 저절로 고개가 가로 저어졌다. 인도네시아에 계속 남아 12년 특례혜 택을 만들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확신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결국 그 확신 은 15년간 근속한 첫 직장과의 이별이자 자립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건강에 관한 한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첫째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한 결정과 딸의 노력이 어우러져, 한국에 있는 수험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 중 하나인 지금의 대학에 당당히 합격하게 되지 않았을까 되짚어본다. 142
그러나 돌아보면 거기까지가 바로 참 지난한 과정들이었다.‘건강하게만 살아다오’ 는 늘 구호에 그치고 부모의 욕심은 늘 고개를 들어 갈등에 갈등을 더해야 하는 시간들이었다. 10학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가급적 본인의 자율에 맡기고 부모의 간섭에 의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11학 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런 마음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부모의 체면 문 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2년 특례 혜택을 받고도 변변한 대학에 합격하 지 못하면 부모 체면이 무엇이 되나 하는 걱정이 앞서게 된 때문이다. 그로부 터 대학에 합격하기까지의 2년여 동안 딸과 엄마, 나와 딸 그리고 아내와 나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과 갈등이 떠나질 않았다. 스스로 다 알아서 할 수 있 다며 부모의 간섭을 거부하려 했던 딸이 아내와 내게는 늘 미덥지 않았다. 때 로 우리 부부가 반성을 하기는 했다.“이제 조금만 지나면 우리 품의 자식이 아닌데 품에 있을 동안만이라도 더 사랑을 해주자.” 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반성은 늘 오래 가질 못했다. 언제나 반성과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모로 서의 욕심이 한 발 앞서 있어서일까, 결국은 딸아이가 우리 품을 떠나게 될 때까지도 부모로서의 주장은 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려고만 했다. 부모의 욕심 탓에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깊이 의식한 탓인지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도 딸은 줄곧 냉랭한 표정이었다. 그나마 동행한 아내가 입시기간 동 안만이라도 딸 곁을 지켜준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위로였다. 이제 딸의 대학생활이 2년차에 접어들었다. 돌아보면 지난 일 년 또한 때 마다 순간마다 고개를 쳐드는 욕심을 느긋하게 다스리지 못했다. 딸로서는 원치 않았을 시간에 전화해서는 늦잠자지 말라고 잔소리하고 아침 꼭 챙겨먹 으라고 닦달했다. 학교생활과 공부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며 훈계를 잊지 않 았다. 그 일 년, 딸은 스스로 많은 성장을 했다. 딸에게 한국의 학창생활이란 대학이 처음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수학능력도 한국에서 공부를 한 학생들 에 비해 나을 부분이 없었을 것이다. 부모도 떨어져 있고 가사도우미도 없고, 143
늘 비슷한 기온이던 인도네시아와는 달리 조석으로도 변하는 날씨와도 싸움 이었을 것이다. 친구들도 새롭게 사귀어야 하고 그 맘 때쯤이면 찾아오는 인 생에 대한 고뇌도 있었을 것이다. 첫겨울은 엄마의 도움을 받았지만 사상 유 례 없는 혹독한 추위였다는 바로 지난겨울도 잘 견뎌냈다. 깨우침은 바로 딸 의 건강회복과 성장의 시간에 있었다. 역시 적당한 거리는 상대를 객관적이 고 여유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 같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항상 보호대상으 로만 여겼던 딸이 보호 밖의 일 년 동안 시간과 함께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 에 대견하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오전에 전화했을 때 늦잠 자느라고 전화 를 받지 않아도 더 이상 채근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으려 하게 된다. 차 라리‘미인은 잠꾸러기’ 라는 말이 딸에게도 어울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건강 하게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더 이상 감사할 것이 없음을 늘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다. 딸은 부모의 생각과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 고 스스로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인 아들 교육에서도 딸은 반면 교사가 되었다. 아직 둘째가 일 년 반 후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이지만, 부모의 욕심에만 가두는 그런 우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르침을 딸로부터 받고 있다. 그래서 아들도 제 나름대로 잘 성장해갈 것을 믿는다. 이제 한 달여 후면 딸을 만나러 한국나들이를 할 일정이 잡혀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새 학년으로 올라선 딸에게 행동과 표정으로만 아빠의 자랑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오직 사랑하는 딸을 감사하는 마음 으로 바라보며 딸의 즐거운 대학생활에 대해서 그저 편안히 들어주기만 하 리라.
l기획자 주l 이병수! 15년 전 보험사 사무소장으로 자카르타에 와서 6 년간 근무하다 자립을 했다. 현재는 손해보험 대리점과 소규모 카톤 박스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재인니 한국봉제협의회 사무총장 으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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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지도 게으르지도 말고 / Do not hasten, do not be idle. <서둘지도 게으르지도 말고>, 발효가 생각나는 말입니다. 장도 김치도 잘 발효되어 야 제 맛이 납니다. 붓글씨도 서둘지 않고 게으르지 않아야 깨우침을 얻습니다. 사는 일이 다 서둘지도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 은 누구나 아는 일인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두르거나 게을러지는 경우가 많 습니다.
이선우
내 이름은 야니다. 인도네시아 인으로 다음 달이면 21살이 되고, 그 다음 달이면 그간 사귀어온 동네오빠 워또와 결혼을 한다. 곧 시작할 새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지내고 있는 난 우리나라에 온 지 꽤 되는 한국 사람집의 가정부이다. 정색을 한 얼굴로 시집은 좀 더 있다 가면 안 되냐고 물어 날 어리둥절하게 하는, 이 엉뚱한 아줌마와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6 년이 된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꾸에를 이고 나가 팔아가며 내 학비를 벌어 겨우겨우 늦깎이로 초등학교를 마쳤을 때 더 이상의 진학을 바랄 수 없다는 건 누가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날그날 벌어가며 부모님 돕기를 몇 년, 어느 날 난 더 큰 돈벌이를 각오하며 경험 많은 동네 언니의 손을 잡고 상경 을 했다. 그 언니가 일하는 집에서 소개를 해 처음으로 온 곳이 이곳, 마늘냄 새 풀풀 풍기며 걸핏하면 거꾸로 말해 사람 얼떨떨하게 만드는 그녀의 집이 었다. 난 그렇게 말도 잘 안 통하는 집에서 내 새 생활을 시작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엉망이었다. 대충 말해도 믿을 거라던 그 언니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9살이라 속인 내 나이를 믿지 않은 것은 시작이었다. 부모 허락 없이는 고용 못하겠다고 멀리 시골서 엄마까지 불러들인 그녀는 아직 채 16살이 되지 않았던 내 기록이 적힌 가족 증명서와 함께 엄마의 동의까지 받아가며 난리를 피우고 나서야 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며칠 법석을 치른 뒤, 잘 부탁하노라 당부하고 내려간 엄마를 뒤로한 다음날부터 그녀와 나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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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머릿속 모든 걸 지우고 자기방식을 집어넣으려고 작정한 것이었 을까.“오랑꼬레아는……” 을 계속 읊으며 뭐가 뭔지 모를 희한한 방식으로 집 안일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랑꼬레아는 사는 방식이 달랐다. 걸레질도 그들만의 방식이 있고 설거지도 그랬고 빨래도 그랬다. 내 가 해왔던 방식은 모두 다 잊어버리라 말하는 그녀가 어쩌면 알라께서 날 시 험하시느라 보낸 악마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사이사이 더 열심히 기도도 드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방으로 숨어들어 눈물을 감춰야했던 날들을 보 내고 나서야 난 겨우 밥이란 걸 넘길 수 있었으니까. 도대체 이 커다란 한국 여자는 빨아온 걸레를 왜 다시 들고 가 빠는 건지, 다 닦은 바닥을 왜 다시 닦 아내는지, 물은 왜 저리 펑펑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라는 거며 다 헹궈진 접시 를 왜 그리 오래 문지르라는 건지……. 그것뿐이던가. 잘 빨아놓은 빨래를 다 시 비눗물 푼 냄비에 담고 끓여대질 않나, 설사를 하는지 화장실을 몇 번 들 락날락 거리더니, 잘 닦아 행주질까지 끝내놓은 접시며 수저를 큰솥에 넣고 푹푹 삶아대질 않는가. 나 이거야 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에선 어떤 누 구라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이나 그녀를 찾는 다른 사람들까지, 그들 한국인은 마치 전쟁 터에 나온 전사처럼 살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뭐든 빨리빨리 그리고 더 정확 히를 요구하며 우리랑은 완전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 나 간다는 것. 그건 그냥 알라께서 주시는 것들을 감사히 받아 있는 대로 먹고 마음 편하게 지내면 되는 거였다, 적어도 내가 살던 시골에선. 하지만, 그 이후로도 한참 힘겨운 우여곡절의 나날을 보내던 난 조금씩 나 도 모르게 능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저녁 시간이면 누 려지는 낯선 행복에 조금씩 치유되어지고 있었던 걸까. 타일이 깔린 반듯한 내 방이란 공간 안에 가벼우면서도 폭신한 이불, 카세트와 TV가 있고 나만이 쓰는 부엌과 화장실이 있는 이곳에서 난 조금씩 맛난 음식도 만들어 먹기 시 147
작했고 그녀가 버리는 물건들을 깨끗이 단장시켜 이리저리 늘어놓으며 나만 의 공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 이상 피곤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나만 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가족들을 다시 보게 될 첫 번 러바란 휴가 때다. 그녀는 내 속옷 에 헝겊을 대고 그간 모은 돈을 비닐에 넣어 아예 직접 꿰매주며 집에 도착해 서 뜯으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그간 들어오던 온갖 소문에 -일 년 간 벌어 모은 돈 들고 무딕(귀향)하다 홀랑 털리고 몸 다친 위인들이 어디 한둘이랴겁이 나던 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이후로도 나는 가끔 동생들의 학비 를 부쳐 주고도 매년 러바란이면 꽤 모인 돈을 들고 기다리는 가족에게 돌아 가 집수리를 하고 가구를 새로 사들여 놓아드리며 큰딸 노릇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어느 해부터인가, 내 눈에 더럽고 좁아 보이기 시작한 시골집 구 석구석을 뒤져 청소를 하고 수건과 행주를 삶아대는 날보고 놀라던 식구들의 모습. 난 나도 모르게 우쭐해서는 뭔가 대단한 감투라도 쓴 양 더 열심히 집 안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쳐가며 정돈해 놓고 오곤 했었다. 그나마 살기가 훨 씬 좋아진 식구들은 아마도 내가 꽤나 큰 성공을 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고 모가 시골집 근처의 가발 공장에 작업반장으로 가게 돼 내가 이곳을 그만두 고 잠시 그 공장에서 일할 때도 부모님은 차라리 그 한국인 집에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 자주 물었고 난 결국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그녀는 148
더 이상 키 크고 목소리도 큰 한국여자가 아니라 날 진정 생각해주는 한 사람 으로 내게 존재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머리를 짚어보고 약을 챙겨주며 누워 있으라 말하고는 덜그럭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사람, 라면이나 튀김요리 많이 먹지마라, 와룽에 가면 낯선 남자들과 너무 길게 얘기 하지마 라, 뭐든 읽어라 하며 어디서 구했는지 낡은 우리나라 잡지들을 내밀던 사람 이었다. 매달 월급날이면 쌓여가는 적립금을 보여주며 싸인 받아 놨다 가끔 은 이자라며 보너스까지 챙겨 러바란 때 싸 보내던 사람, 한때 내게 눈물을 주었고 미소를 주었으며 많은 걸 배우게 했던, 아쿠아 갤런 병은 번쩍 들어 쏟아 부으면서도 작은 병뚜껑 하나 열 때면 콧구멍까지 벌렁대며 낑낑 매다 결국은 늘 내게 내밀던 사람, 내게 그녀의 이름은‘뇨냐’ 다. 언젠가 어떤 이가 내게 물었었다. 이 한국 가족과 몇 년 있으면서 가장 크 게 배웠다고 생각하는 게 뭐냐고. 난 그때 그에게 청결이란 단어가 무언지 알 게 됐다고 답했었다. 그런데 이제 누군가가 또 묻는다면 난 한 가지를 더 추 가할 생각이다. 자존심이 무언지도 잘 알게 되었노라고……. 난 이제 얼마 뒤면, 어느 때부터인가 내 집인 양 생활하게 되었던 정든 이 곳을 떠나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또 얼마 후면 내게도 아이들이 생 기고 엄마가 되겠지. 그러면 난 그 아이들을 위해 튀기기보다는 찌거나 삶은 음식을 만들고 빡빡 빨아 잘 헹궈내 뽀얗게 된 옷을 입히고는 윤기 나게 닦은 바닥위에 앉혀놓고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해줄 말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안다. “얘들아, 오랑꼬레아는 말이야... ”
l기획자 주l 이선우! 그는 인도네시아 22년차 거주 주부다. 월화차문화원 회원이며, 자필묵연회원으로 2009년 대한민국서예문인화대전 특선, 2010년 제22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 2010년 서 울서예대전 입선을 했다. 작은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는 찌와이의 맑은 풍광과 그녀의 정성 스런 손길로 기른 신선한 채소를 그의 지인들 식탁에 풍성히 올려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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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겘我延(세불아연), 세월은 나로 하여 늦추지 않는다. / Time does not slow down for me. 주자(朱子)는 그의 권학문에서“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 하지 말라. 올해 배우지 않 고 내년이 있다 하지 말라. 날과 달은 간다. 세 월은 나로 하여 늦추지 않나니… (勿謂今日겘 學而有來日 勿謂今年겘學而有來年 日月逝矣 歲겘我延).”하였습니다.
이수진
인도네시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 이 지난 다음에야 인도네시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고 역사와 문화, 종교적 특성,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인 도네시아는 배울 것이 참 많은 나라로 내게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소사이어티(이하 헤리티지)! 이 단체가 바로 나로 하 여금 인도네시아를 사랑하게 한 단체다.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전통, 유물, 그 리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한 단체다. 이 단체에는 다국적인들이 참 많다. 이들 이 헤리티지를 주도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들의 특징은 인도네시 아의 역사와 문화를 열심히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다 니면서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기를 즐긴다. 특히 프랑 스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은 오지 탐험까지도 겁내지 않고 자처한다. 마치 그들 의 선조들이 세계를 누비며 외딴 곳까지 탐색했던 것처럼 그들도 탐험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헤리티지의 여행 그룹은 대부분 그들이 이끌고 주도한다. 헤리티지는 문화와 유물의 집결처요 역사가 서린 국립박물관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외에도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단체를 적극 지원하 여 유물을 보전하고 전통문화를 발전시키고 증진하는 곳은 두루 도움을 준 다. 본래의 목적을 충실이 이행하는 것이다. 헤리티지는 설립 초기부터 국립 박물관을 지원했다. 박물관 가이드를 양성하고 파견했다. 지금도 여전히 헤 리티지에서 양성해낸 투어가이드들이 정기 영어 투어를 한 달에 12번 정도 시행하고 있다.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우연한 기회에 박물관 공부를 접하게 되었다.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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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공부는 <국립박물관 투어 가이드 영어 트레이닝 워크삽 3개월 과정>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헤리티지에서 1년에 한번 9월에 영어 트레이닝 코스 를 마련해 놓고 박물관 자원봉사자를 양성하는데, 그 프로그램에 내가 참가 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박물관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대략 12~13명의 트레이닝 참가자를 미리 신청 받아 교육에 임하는데, 워크 숍이 진행되는 3개월 동안 두 번 이상 빠지게 되면 자동 탈락된다. 교육과정 중에는 한눈을 팔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교육 자료가 워낙 방대했다. 워크숍 자료는 헤리티지의 시각에서 경험과 정성을 들여 거듭 수정 보완된 자료였 다. 사진과 설명 등 그 내용이 매우 훌륭했다. 배우고 가르치는 데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헤리티지의 그것은 매우 특별했다. 국제적이고 헌신적이며 전문적이었다. 국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다. 우선 회원들의 국적이 다양했다. 유럽, 중남미, 미국, 아시아 등 세 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두루 모여 있었다. 헌신적이라 함은 강사로 나서는
발표중인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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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또는 트레이닝을 이끄는 리더 등 모두가 자원봉사자들이기 때문이 다. 워크숍에 임하는 사람들 모두 매우 진지하고 희생적이다. 훈련생들이 소 홀해질 수가 없다. 전문적이라 함은 매주 전시관을 소개하는 강의를 하시는 분들을 의미한다. 강사는 스터디 그룹이나 투어 파트에서 오랫동안 문화와 역사를 익히고 공부해온 베테랑들이 맡는다. 물론 엄선된 분들이기 때문이겠 지만 모두들 수준이 높고 멋을 지닌 분들이었다. 1회에 2시간 동안 한 전시 관을 돌면서 유물을 중심으로 그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데, 그 충실 한 준비는 매번 놀라울 정도였다. 그 열렬하고 흥미진진한 강의를 겨우 13명 의 훈련생만 듣는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고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들 덕 분에 나는 위대한 인류와 문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역 사 앞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내가 국립박물관에서 영어로 자원 봉사활동을 해온지 6년여가 되었다. 헤 리티지가 국립박물관을 지원하고 매월 자원 봉사자를 파견해 온 지 40여 년 이 지났으니, 나의 경력은 그야말로 일천한 것이다. 헤리티지와 함께한 세월 동안 인도네시아 국립 박물관은 환골 탈퇴를 해왔다고 한다. 2007년에 신관 을 증축하여 4층 건물에 보물관과 도자기관, 선사 시대관 등 추가로 보완되 었는데, 현재는 구관 신관을 포함해 전시관 17개를 보유하고 있다. 어디에 내 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해졌다는 것이 오래된 선배들이 공통된 시각 이다. 현재 한국어투어는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행해진다. 현재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는 약 15만여 개의 유물이 있다. 이 많은 유 물을 대상으로 지역과 시대별 연구를 하려면 그 방대함으로 인해 참 많은 공 부를 해야 한다. 나는 투어 경력 2년 만에 헤리티지의 스터디그룹‘역사 팀’ 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인도네시아 역사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History of Indonesia> 였는데, 스터디그룹은 대략 10명으로 구성되었었다. 물론 거 기에도 국적이 다양한 남녀노소가 모였는데, 시대별로 인도네시아 역사를 10 부분으로 나누어 정한 다음, 각자 준비를 하여 매주 수요일마다 발표회 겸 모 153
헤리티지 회원들의 활동
임을 가졌다. 그때 내가 맡아서 공부하고 발표한 시대는 <스리위자야>였다. 스리위자야 는 6세기에서 10세기까지 수마트라 남부의 빨렘방을 중심으로 서부 자바와 칼리만탄 등 인도네시아뿐 만 아니라, 말레이시아 반도의 해안 지역까지를 영토로 삼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까지 기지국을 세워 동남아 해상 무역을 장 악했던 대제국이다.‘영광스러운 승리’ 라는 뜻의 스리위자야는 동남아시아를 통틀어 당대에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던 것이다. 스리위자야의 그 거대한 위 용은 나로 하여금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를 돌아다보게도 하였다. 인구, 자원 등 좋은 배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인도네시아의 현재를 안 타깝게 바라보게 한 것이다. 영광스러운 승리, 즉 스리위자야를 배경에 둔 국 가와 민족답게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우는 인도네시아 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54
내가 헤리티지에서 배운 것은 비단 인도네시아 유물을 통한 역사와 문화뿐 만이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많은 다국적 사람들과 우정을 나눴다. 특히 동일 관심사로 인한 교류로 인해 서로의 마음을 열고 교유함으로써 일 정부분 민간외교의 역할도 되었다는 것을 자부한다. 특히 많은 나이에도 불 구하고 자신을 낮추며 공부하려는 다국적 회원들과 교유를 하면서 그들에게 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바로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나의 공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l기획자 주l 이수진! 한국외대신문방송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 1992년 가족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정착했 다.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영어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어 섹션 회장을 역임했고, 2007<인도네시아 박물관 가이드 북> 한국어판을 공동 번역 출간했다. 헤 리티지의 경험을 살려 그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발리의 역사와 문화, 특성에 대해 나름의 정리 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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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傳松意(조전송의), 이른 아침 소나무의 기상이 전하는 의미 / The meaning told by pine tree′ s rise in the early morning. 보이는 소나무, 보이지 않는 솔향! 눈을 감으면 솔향은 느낄 수 있는데 소나무는 볼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느끼는 것, 보이는 것의 사라짐을 인정해야 하는 것,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 모두 우리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것입니다. 솔향을 그리고 싶은 이유입니다. (인재 손인식의 필묵향기에서)
이은경
김영희 선생님! 선생님과 언니 오빠들의 박수를 받으며 자카르타 한인 어 린이 합창단에 들어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원치 않 지만 7학년 미들스쿨 학생이 됨에 따라 이제 그만 합창단 졸업을 맞이해야 합니다. 선생님, 합창단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시간이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처럼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쌓은 저희 졸업생들 의 마음속에는 합창단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합창단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또 다른 후배들을 위하여 저희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선생님, 저는 자카르타 한인어린이합창단 첫 공연을 잘 기억합니다. 초등 학교 1학년 때였어요. 엄마의 손을 잡고 가서 관람을 했었는데 아름다운 합창 이 얼마나 듣기에 좋았던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저도 자카르 타 한인어린이합창단원이 되었지요. 그때 함께 오디션을 보았던 잘 모르던 또래 아이들은 지금은 아주 친한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함 께 만나서 연습을 하고, 공연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손을 잡으며 잘 할 수 있 을 것이라고 서로 격려를 해주던 참 좋은 친구들,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소중 한 친구들이지만 이젠 함께 연습하고 공연하던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김영희 선생님, 저희들은 선생님의 열정적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 니다. 선생님은 말썽꾸러기였던 저희들을 합창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잘하게 된다는 믿음을 저희들에게 심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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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쉬어서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안 좋 으실 때도, 선 생님은 조금도 스타킹 출연 후 개그맨 조혜련 언니와 합창단
주저하지 않으 시고 피아노
반주로 음을 잡아주시고 마이크를 잡으셨지요. 저희들이 게을리 할 수 없도 록 언제라도 모범을 보여주셨어요. 솔직히 맨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가기 싫었던 적도 많았어요. 연습을 많이 하다보면 목도 많이 아프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를 때면 늘 즐거웠습니다. 목이 아프고 힘이 들 때도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언제 아팠 냐는 듯 힘이 솟았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을 닮아가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노래연습과 많은 공연들을 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관람을 한 첫 공연을 기억하듯이 저는 제가 처음 참가한 2학년 때의 첫 공연 때의 뿌듯함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후 2010년 마지막 공연까지 매년 있었던 모든 공연이 소중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선생님도 기 억하시지요? 솔로에서 인도네시아 노래인 Bengawan solo를 부른 다음 받 았던 우레와 같은 큰 박수 말입니다. 선생님과 참석하신 부모님들이 모두 기 뻐하셨지만 저희들은 얼마나 자부심이 컸던 지요. 한소리 선생님들과 같이 했었던 무대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놀라운 대회 스타킹 출 연은 또 어땠어요. 정말 저희들 모두가 스타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새로 만난 대교어린이 TV합창단 친구들, 남성초등학교 공연 등 그 많은 공연 하나 하나가 다 잊지 못할 추억들입니다. 158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많은 연습과 공연들로 인해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앞으로 공부과정에서도 큰 에너지가 될 소중한 체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합창단에 들어가기 전 무척 소극적이던 제 성격은 합창단 생활을 하면서 무척 활발한 성격으로 바 뀌었습니다. 자신감도 많이 생겼습니다. 예전에는 떨려서 사람들 앞에 잘 나 서지도 못하던 제가 무대 위에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는 친구 들은“떨리지 않느냐?” 고 묻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제 자신에게도 감사합니 다. 엄마도 무대 위의 제 모습이 자연스럽고 자신감 있어 보인다고 하십니다. 이 모두가 다 김영희 선생님과 합창단 친구들의 덕분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 래서 저는 소심한 친구들에게는 합창단에 들어올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엄마께서는 자카르타에 김영희 선생님이 계서서 참 감사하다 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합창단을 잘 이끌어 주셔서 문화 체 험이 적을 수밖에 없는 타국에서 자라는 저희들이, 여러 가지 체험을 하면서 성격도 밝아지고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합창단 친구들 부모님들도 다 같을 것입니다.
청와대 방문중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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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제 언제 그 렇게 맛있는 간식을 먹어 볼 수 있을까요? 매주 저 희들을 위해 어머니들이 준비해 주시는 간식은 정 말 너무 맛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토요일이 되면 한국내의 인도네시아 근로자를 위한 어린이 합창단 무용 공연
무의식중에 그 시간을 기 다릴 것 같습니다.
공연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시던 선생님, 최대한 좋 은 공연을 이끌어내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셨던 선생님, 선생님은 저희들을 늘 친구처럼 대해주셨지요. 공연이 끝나면 그 누구보다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 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들이 합창단을 최고의 합창단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선 생님도 저희에게 최고의 선생님이십니다. 저희 모두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선생님, 이제 저희는 떠납니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많은 추억들을 많이 가 지고 졸업합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를 한껏 사랑해 주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멋진 모습으로 성장하여 선생님의 사랑에 보답하겠습니다. 남아있는 후배들 이 우리 합창단을 더 빛내줄 것을 믿습니다. 저희 졸업생들은 이제 관객으로 서 많은 응원을 하겠습니다. 김영희 선생님,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l기획자 주l 이은경!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JIKS의 7 학년 학생이다. 이 글은 얼마 전 자카르타 한인어린 이합창단을 졸업하면서 쓴 글이다. 학생의 합창단 사랑과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에서 합 창단의 존재가치와 한인사회의 희망적인 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합창단과 학생의 무한성 장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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겘欺自心(불기자심, 성철스님 법어), 자신을 속이지 마라. / Do not deceive yourself.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까지도 취해다가 후학에게 알려주는 것이 사명이다.” 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내 자 신을 스스로 속이고, 세상을 향해 가식으로 섰습니다. 언감생심 하늘은 덮어두고라 도 세상을, 아니 내 자신을 속이지 않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긴 올 것으 로 믿습니다. 내 감정을 곧잘 속이는 오른 손을 쉬게 하고 왼손으로 이 작품을 쓴 이 유입니다.
임미진
너무너무 싫었다. 난 정말 인도네시아가 싫었다. 입국 심사 때 내 짐을 죄 다 뜯고는 돈을 요구하는 공항검색원들도 미웠고, 1년 내내 더운 것도 싫었 고, 미친 듯이 퍼붓는 비도 적응 안됐고, 뻠반뚜라는 인도네시아인이 나랑 한 집에 산다는 것도 이상했고, 양치할 때 생수로 입을 헹구는 것도 귀찮았고, 내가 너무 좋아하는 한국음식들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도 가끔은 참기 힘들 만큼 짜증이 났고, 뿌연 회색 하늘도 정이 안 갔고, 움직였다 하면 차안에서 몇 시간씩 갇혀서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참아내야 하는 것도 고역이었고, 온 집안 벽을 헤집고 다니는 살색 빛의 징그러운 도마뱀도 싫었고, 가끔 너무너 무 뚱뚱한 바퀴벌레에 기겁을 했고, 차랑 기사가 없으면 자유롭게 나다닐 수 가 없다는 것도 정말 답답해서 짜증이 났다. 질렸다. 왕복 5시간이 걸렸다. 찌까랑 집에서 UI 대학의 BIPA과정을 공부 하러 가는 거리는 처음부터 나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두 번 다시 하라면 고개를 가로 젓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땐 그냥 살아야 했고, 열심히 공부해 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의식도 조금 바뀌었다. 인도네시아이니까 1년 내내 더 운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기라는 것이 있으니까 비가 미친 듯이 퍼붓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뻠반뚜가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편해지는 거 같고, 양치할 때 입 헹구는 건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고, 맛난 한국식당들도 하나둘씩 알아가 고, 차 안에서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어느 정도 조절이 되어갔고, 살색 빛의 징그럽던 도마뱀도 이젠 가끔 귀여워 보이고, 바퀴벌레는 이사를 한 뒤로는 사라지고 없고, 차랑 기사가 있으니까 편하다는 쪽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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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PA 졸업때
BIPA 친구들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에서는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또 행사나 모임 에 적극 참가하면서 모든 것이 조금 재미있어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비파과 정 3까지 무사히 또 괜찮은 성적으로 공부를 마쳤다. 공항을 오갈 때마다 시 비 거는 공항검색원들의 횡포는 끝내 사라지지 않았지만…. 언어의 장벽이 해결된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 괜찮은 급여를 주는 회사에 취직을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적응을 했고, 또 하루하루 그러려니 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너무너무 힘들다고, 또 싫다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은 차츰 무뎌갔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한국에 있었다. 회사에서 일 년에 한 번 휴가를 주면 난 한 달 전 부터 한국 갈 계획을 세웠다. 만나야 될 사람, 먹 어야 될 음식, 가봐야 할 곳 등 목록을 만들곤 했다. 그때 난 그만큼 한국이란 곳이 간절했다. 엄마 눈엔 그때 내가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때면, 부산의 우리 집 방문마 다 열어 작별인사를 하고, 창밖 풍경을 마음에 담으며 작별인사를 하는 등 온 갖 청승을 다 떨었던 것이다. 내 나이 20대 중반과 후반을 고스란히 담긴 4년여, 좋았던 나날이 왜 없었 을까만 그땐 내게 주어진 고마움도, 주어진 기회들도 크게 귀한 줄 몰랐다. 163
발리에서
한국에서 취직을 하면 그냥 쉽게 그 정도의 대우는 받을 줄 알았고, 현장에서 익히는 언어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도 몰랐다. 잦은 여행을 하면서도 누구 나 마음만 먹으면 다 가는 것으로만 생각했고,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도 깊 게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난 늘 힘들다고 투정하고 또 하루라도 빨리 인도 네시아와의 인연을 끊고 싶은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난 결국 인도네시아를 떠났다. 무진장 섭섭해 하는 아빠를 뒤로하고, 한국 에서 떠나 갈 때처럼 거한 송별회도 몇 차례 하고, 짐을 꾸려 그리던 나의 고 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것이 내 운명의 일부였다는 것을 조금도 모른 채로…. 내가 인도네시아를 떠나 온 지 3년, 난 지금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원 한 빈땅 맥주도, 이쁜 문양의 바틱들도, 맛있는 사떼도, 우리 집 뻠반뚜가 해 주던 미고렝도, 이른 아침 집 앞을 지나다니는 빵 자전거의 음악소리도 다 그 립다. 곳곳에 있었던 인니음식이 제법 맛있었다는 생각에 침을 삼키기도 하 고, 한국에선 큰맘 먹고 사먹어야 되는 열대과일도 실컷 먹을 수 있었음은 행 복이었다고 느낀다. 남들은 일 년에 허니문으로 한번 갈까 말까 하는 발리를 164
7~8 번 다녀온 것은 참으로 호사였다. 한국에서 같으면 상상도 못할 사서 하 는 고생이었던 배낭여행, 그래서 내 머릿속에 더 뚜렷이 남은 그 배낭여행은 평생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오만루피 숙소에 자면서 이만루피 식사를 현 지인과 둘러앉아 함께 그들의 전통방식대로 손으로 먹었었다. 그래서 그때 같이 고생한 외국인 친구들과는 더욱 돈독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서 로를 그리워하며 연락하고 지낼 뿐만 아니라, 초대를 받아 그들의 나라에도 다녀오고, 그들 언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는 인니어라는 조금 은 특이한 특기가 지금은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무척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때야 말로 흔히 인생에서 3번쯤 찾아온다 는 기회 중 첫 번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땐 왜 몰랐을까. 뭐든, 지나고 나야 소중한 걸. 고마운 걸 알게 되는 걸 까? 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내 경험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인도네 시아 4년여의 경험들, 그것은 분명 인도네시아라서 가능한 것들이기도 했다. 바로 나를 더욱 성장시킨 시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또 어쩌다 보니 오빠가 인도네시아에 취직이 되 었다. 이모저모로 참 고마운 인도네시아, 이것은 곧 아빠에 대한 큰 감사이기 도 하다. 아빠가 인도네시아에 사업처를 정하지 않으셨더라면 내 인도네시아 생활 4년여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내 인생에서 중요한 어 떤 이가 인도네시아에 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넌 나의 운명이지 않니?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운명!
l기획자 주l 임미진!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다.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4 년여의 인도네시아 생활로 스스로가 더욱 성숙했다고 자평하는 그녀는 글의 내용에서처럼 인도네시아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 한편으론 운명으로 여기고 있으니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그녀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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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我(수아), 나를 지키다. / Protect myself. 옛 선인은“천하에 가장 잃기 쉬운 것 중에는 자신 만한 것이 없다(天下之굂失者 莫如吾也)” 고 했습 니다. 스스로를 잃으면 가진 모든 것을 잃기 때문 일 것입니다.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곧 자신을 깊 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 신을 깊이 이해할수록 편하고 자유로워진다고 합 니다.
임준섭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갈채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것이 자의든 타의든 최종적으로는 본인의 결심이 필요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대단한 노력 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도전할 일이 어디 한두 번 이랴. 누구나 과거에도 많은 도전을 했을 것이고 지금도 도전할 것이며 미래 도 그 자체가 도전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좌절도 있었을 것이고 성취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많은 일에 도전을 거듭했다. 이제 2년차 직장인으로서 얼마 전 결 혼을 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지금 성취한 것을 드러내라면 참으로 빈약하 기 그지없지만, 나름 그간 도전을 통해 배우고 얻은 결과들로 인해 현재의 내 가 있음을 떳떳하게 여기며, 지금 다시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주재와 결혼, 이 두 가지는 현재의 나에게 매우 큰 의미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거주를 하게 된 것부터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배움은 시작이 되었고, 이제 막 시작한 결혼생활로 인해 내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림 과 동시에 또 다른 배움도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나의 인도네시아 첫 방문은 내 자의가 아니었다. 중국에 유학을 하고 있던 나는 군복무 기간 중에 생긴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대학 복학 시기를 맞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군필자로서, 학생이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성인 의 대열에 들어선 시기였다. 내 내면에는 매우 미묘한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 히던 시절이었다는 의미다. 의욕이 넘치는가 하면 한편으론 막막하기도 했 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네시아 첫 방문의 원인이기도 했다. 만약 그즈음 인도 네시아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나는 거의 일 년이란 세월을 한국에서 복잡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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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허송으로 보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뜻하지 않은 방문,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방문한 인도네시아에서의 내 초기 생활 또한 그 야말로 그저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무위도식이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 들 틈에서 내가 고작 할 수 있었던 일이란 그저 가사도우미가 챙겨 주는 밥을 먹으면서“Terima kasih” 라는 말과 함께 웃어주는 일 말곤 없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시는 분이 있었다. 나를 인도네시아로 부르신 분이다. 어쩌면 그때 그 분은 나보다도 더 답답한 마음이셨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무엇을 강요하거나 조급해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의도하시는 바를 아주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었다. 은근히 나를 채근하신 셈인데, 우선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나를 밖으로 내모셨다. 더욱 갑갑해지라는 의도였는지 세상을 넓게 보라는 것인지 여행을 권유하시기도 했다. 168
나는 결국 탈출구를 찾았는데 그것은 인도네시아어 개인 과외 시작한 것이 다. 사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인도네시아어 공 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자발적으로 열심히 열과 성을 다하여 공부를 한 적도 그 이전에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선 현지인들이 다니는 교회에 매주 수요일 성경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때 인니어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은 나를 참 좋게 보셨을 것이다. 참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마다 나는 웃었다. 웃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것이 그때 내 심정이었 다. 물론 일요일에는 예배도 꼬박꼬박 참석을 했다. 일요일에는 찬송가 부르 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간 동안에 내 언어 실력이 부쩍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득도 있었다. 낯선 환경에 확실히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을 넘어서서 인도네시아 생활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시 기였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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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해서이건 어쩔 수 없어서건 도전한 일은 고 생스럽고 힘들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을 것들이 참 많다는 것도 진리가 아닌가. 인니어 실력이 신행길에서
늘고 그래서 인도네시아 인들과 소통하면서 웃고
떠들고 교감하면서 다방면에 많은 흥미가 일었다. 인도네시아 문화, 음식 ,역 사, 정치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모두는 내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는데 아주 좋은 에너지로 작용을 했다. 뱅아완 솔로,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심을 흐르는 강이다. 인도네시아 사람 들 사이에는 이 강물을 한 번 마신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인도네시아를 방문 하게 된다는 설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셈일까? 나는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금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그때 역시 타의도 있었지만 처음 방문 때와는 달리 많은 부분 자의가 작용했다. 나는 다시 인니어 향상을 위해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UI의 BIPA 과정을 거쳤고, 인연인 듯 LG맨이 되었다. 인연은 인연을 낳는 것일까. 나는 LG 한국본사에 장기 출장근무 중에 평생 을 동반할 인연을 만났다. 또 다른 도전이요, 공부가 시작된 것이다. 인생의 큰 도전 결혼, 이것은 분명 친구나 이웃, 직장 동료를 사귀는 것과는 스케일 이 다른 거대한 도전이라는 생각을 한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가정 환경의 교육 방식으로 자랐고, 그래서 추구하는 스타일, 관점, 이상, 가족관 등 어느 것도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기가 힘든 두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는 것 이 어찌 거대한 도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내는 이제 곧 그동안 살아왔던 한국을 떠나 모든 것이 낯설 인도네시아에서 살아야 한다. 그에게도 참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70
그러나 나는 믿는다. 내 부모님의 사랑의 결실이 곧 우리 가족이듯, 나의 큰 도전 결혼 또한 사랑이 있어 분명한 하나가 될 것이며, 또 다른 아름다운 가족을 구성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초단위라고 하는 가정, 어찌 사람의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랴. 이것은 부모님에 대한 존경의 실천과, 일에 대해 충실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 래서 나와 아내의 큰 도전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 나는 또 새로운 도전 앞에서 하나의 결심을 한다. 천천히 모두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 다.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으며,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을 잃 지 않으며 천천히 나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오늘, 한국의 봄 하늘이 참 맑다. 모든 것에 감사한다.
l기획자 주l 임준섭! 그는 이제 30대 초반의 LG에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중국에 유학하였으며, 인연이 있어 인도네시아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의 본사에 장기 출장 근무 중에 반려자를 만 나 2011년 1 월 결혼에 골인 하였으며, 이 글 또한 한국 근무 중에 쓴 것이다. 그의 새로운 도전에 늘 튼실한 결실이 맺어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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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滴石穿(수적석천),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 A drop of water penetrates the stone. 물방울이 돌을 뚫습니다. 미미한 힘이라도 꾸준히 노력 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말 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 희망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습니다. 절망의 시간에도 희망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것. 어디선가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간절하고 치열하게 찾아서 희망으로 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의 건강한 희망을 소망합니다.” (인재 손인식의 필묵향기에서)
장혜숙
이틀 뒤면 우리 부부의 결혼 30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며칠 전에 이제 막 둘째를 임신하여 홀몸이 아닌 며느리 안젤라가 큰 손자 호진이를 데리고 우 리를 방문하였습니다. 얼마 전 막내가 대학을 가자 우리 둘만 남은 텅 빈 집 안에 봄비와도 같은 귀한 손님입니다. 이제 제법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세 살 박이 호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는 마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알록달록한 구슬 같아서 아이와 함께하는 우리 부부는 감탄과 환희 의 연속입니다. 무엇으로 이렇게 집안을 가득 채울 수 있을까요. 실로 아이의 존재는 신비롭습니다. 우리가 적적할 것을 생각하고 위문방문(?)한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가 예쁘고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천성이 활발하고 활동적인 호진이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함께 놀아주어야 합니다. 집안에서도 걷는 법 없이 뛰어 다니며 손을 잡고 걸어 갈 적에도 양 손에 매달려 그네를 타며 다니길 좋아합니다. 아침에 산책을 하고 들어왔는 데 바지랑대에 널어놓은 수영복을 보곤 수영하자고 조르며, 수영하고 들어 와서 우유한 컵 벌컥 벌컥 단숨에 마시고는 이방 저방 뛰어 다니며 숨기놀이 를 하며 까르르 까르르 웃어댑니다. 얼마나 열심히 노는지 방금 갈아입힌 옷 이 땀에 축축합니다. 또 아이의 호기심은 끝이 없어서 무엇이든 만지려하고 가지려고 해서 잠시도 눈을 뗄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힘들어하지 않고 차분 히 아이를 보살피는 며느리를 보며 30년 전 우리 부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 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로 인하여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픔을 참는 법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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웠고, 기꺼이 기다릴 줄 아는 능력 도 생겼습니다. 아이들이 다 자라 서 품을 떠나니 비로소 우리의 부 모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게 되었 습니다.‘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라는 격언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 습니다. 젊은 우리 부부에게 첫아이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큰아 막내 보나의 어릴 적 모습
이가 유치원을 다니던 어느 날, 버 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옆자리
에 앉아있던 아이는 멀리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시무룩해지더니 자 기는 죽으면 지옥에 갈 거라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제 겨우 6살짜리가 어 떻게 죽음과 지옥이란 걸 떠올리는지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웠습니다.“엄마 말도 잘 안 듣고 동생하고 싸워서 지옥에 갈 것” 이라는 겁니다. 며칠 전 모임 에서 어른들이 한 말이 아이의 마음속에 새겨져서 두려움으로 자리 잡고 있 었습니다. 하느님은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아이를 설득하는데 한참 걸렸습 니다. 또 한 번은 늦게까지 밖에서 놀려는 아이의 버릇을 고칠 요량으로 큰아이 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막 7살로 초등 1학년 때였습 니다. 화가 난 제가 재차 다그치자 아이는 동생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서는 것 이었습니다. 두 살 터울의 작은애는 영문도 모르고 형 손을 잡고 따라 나서서 갑니다. 저의 각본은 이게 아닌데 말입니다. 아차 싶어서 얼른 쫓아 나가보니 긴 골목길을 형제가 손을 잡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겁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교훈을 또 한 번 배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뒤에서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가긴 어딜 가느냐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소리쳐야 했 174
습니다. 참으로 위신이 서지 않는 사건이었지요. 그 뒤로 저는 말을 조심하 게 되었습니다. 꼭 지킬 말을 하려고 했고 소위 겁주는 말은 하지 않게 되었 습니다. 세 살이 되어서야 말문이 트인 둘째가 네 살이 되면서 감정표현까지 하는 언어의 급성장을 보였습니다. 퇴근한 아빠가 씻는 모습을 화장실 문지방에 서서 지켜보던 아이가“아빠 저는 배추(야채)를 안 먹을 거예요.” “왜? 야채를 많이 먹어야 키가 쑥쑥 크지.” “내가 키가 커지면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잖아 요!” 라고 말한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울먹이는 소리로“음- 그리고 아빠 가 할아버지가 되면 죽잖아요, 으∼앙”그 뒤로 고기반찬을 좋아하는 둘째에 게 야채를 많이 먹어야 키가 빨리 큰다는 말 대신 튼튼해진다는 말로 바꾼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며느리, 손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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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와는 10 년, 둘째와는 8년 터울인 막내. 집 안에 손자들만 일 곱인 터에 여덟 번째로 딸이 태어 나 온 집안의 환 호성을 받고 태어 난 아이입니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어릴적 모습
우리 부부의 육아 법도 첫째나 둘째
때보다는 너그러워지고 느긋해졌습니다. 두 오빠들 사이에서 웬만한 것들은 저절로 깨우치게 되니 특별히 붙들어 가르칠 것도 또 특별히 혼낼 일도 없었 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과자를 사더라도 3봉지를 사고 간식을 먹어도 꼭 오 빠들 것을 챙기며 비록 나이차이가 많아도 착한 누이동생 노릇을 톡톡히 하 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부터는 저절로 큰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실감이 났습니다. 막내의 초등 학교 2학년 때입니다. 여행 중에 동그랗고 납작한 하얀 돌멩이 하나를 주웠 는데, 막내는 그 돌을 자기의 첫 번째 보물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애지중지했 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막내가 없는 사이 둘째가 부주의로 그 돌멩이를 바닥 에 떨어뜨려서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10학년이던 둘째는 걱정을 하며 도움을 청해 왔습니다. 궁리 끝에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청하자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집에 돌아온 막내에게 둘째는 둘로 쪼개진 돌멩이를 양손 에 감춘 채 말했습니다. “보나야,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거 있는데 화 내지마.” “뭔데?” “화 안 낸다고 약속하면 얘기 할게.” “뭔지 알아야지!” “약속부터 해. 제발~” “아이 참~, 알 176
았어. 말해 봐.”둘째는 쪼개진 돌을 보이며 막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습니 다.“미안해~ 오빠가 잘못 해서 떨어뜨렸어.”막내의 얼굴은 순간 놀라움과 절망감으로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이내 안정을 되찾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응, 내 보물이 두 개가 됐으니깐.” 둘째의 얼굴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 가득 피어났습니다. 모르는 척 지켜 보던 저도 감동이었습니다. 이미 저질러진 일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와 주 변을 위로할 줄 아는 낙천적인 성격의 막내에게 큰 가르침을 받는 사건이었 습니다. 바로 엊그제의 일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 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지혜롭지 못했고, 최선을 다 하지 않았고, 너그럽게 기다릴 줄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탈 없이 잘 자라준 아이들을 볼 때면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둘째를 가진 며느리가 입덧으로 제 몸 가누기도 힘들 터인데도 아이 의 끊임없는 요구를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모습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더 풍부한 사랑으로 제 자녀들을 기르는 아들 부부에 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아이들을 통하여 온갖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게 하 시고 부모 노릇을 통하여 갖가지 깨달음과 교훈을 주시며 사랑을 풍부하게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l기획자 주l 장혜숙! 세 자녀가 장성하여 떠난 슬하에 찾아든 손자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영락 없는 할머니인데, 그는 오늘도 여전히 할머니로 살지 않는다. 폭 넓은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 하며 희망의 에너지 전파자로서 늘 동분서주다. 그가 있어 그의 이웃들은 늘 활력을 얻으며 행복을 가꾼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항상 신의 가호가 있을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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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處作主(수처작주), 어느 곳에 처하든지 자신의 주 인이 되라. / Be the master to your own wherever you are. “공부하는 방법이야 책에 이미 다 씌어 있다. 방법을 몰라 공부를 못하는 경우란 없다. 다만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못해 공부가 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올바 르게 배우는 데 특별한 요령은 없다. 부지런한 노력 도 중요하지만, 바른 마음가짐이 없이는 안 된다. 훌 륭한 스승이 필요하지만 바른 마음가짐이 없으면 소 용이 없다. 좋은 환경도 좋지만 바른 마음가짐이 없 으면 큰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모든 것은 바른 마음가 짐에서 비롯된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않고는 아 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정민 선생의 죽비소리에서)
채인숙
2010년은 제게 조금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인도네시아 교민 방송사에서 기획한 4부작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면서, 많이 배우는 한 해였고 또 접 어 두었던 방송 일을 다시 시작한 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방송작가라는 이 름으로 밥벌이를 했었지만, 이곳에 와서 다시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이 생길 거 라곤 예상치도 못 했었지요. 일을 놓은 지 이미 세월이 10여 년도 더 흐른 뒤 라, 소위 말하는 방송 감각이라는 것이 많이 무디어진 것도 걱정스러웠습니 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인도네시아 교민 사회의 역사와 경제, 그리고 인 도네시아를 강타한 한류, 교민사회의 미래를 짚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거라 는 생각 때문에 선뜻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일 년 간의 긴 제작 기간을 거친 다큐멘터리는‘오랑꼬레아의 아리 랑’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KBS 세계 한국어 방송대회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지요.‘4부-남겨진 가족들’ 이 한국에서 방송되었고, 자카르타의 한 극장에서 흐뭇한 시사회도 치렀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12년 동안이나 자카르타에 살면서도, 이 땅에 그토록 치 열하게 살다간 한국인들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는 무지한 교민이었습 니다. 아마 다큐멘터리 촬영이 아니었으면 영영 몰랐을 일이었겠지요. 그래 서 촬영 내내 늘 놀랍고 새로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1920년대 초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자금을 대준 사실이 발각되어 중국으로 도피했던 장윤원 씨가 지인의 도움으로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면서, 인도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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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인사회의 또 다른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자바와 칼리만탄에 이르 기까지,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이거나 혹은 비행장을 만드는 강제 노역을 하는 징용자 등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인도네시아로 들어왔습니다. 모두가 낯선 이 남방의 섬나라에서 그저 역사의 소용돌이에 자신들의 운명을 내맡긴 채 떠돌아야 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조국이 독립된 이후에도 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또다시 전 쟁범죄자로 내몰려 재판정에 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 도네시아 정글 속으로 들어가 네덜란드 군에 대항하는 무장 게릴라가 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인도네시아 영화와 연극계를 이끄는 수장이 되기도 합니 다. 이미 한국에서도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 이름이 알려진 양칠성과 허영 감독이 바로 그들입니다. 인도네시아 영화계의 거목으로 칭송받는 1세대 감독들 대부분은 허영이 세 운 학교와 무대에서 공부를 했던 그의 제자들이었지요. 자카르타 시내에 있 는 한 영화센터의 지하 필름 보관소에서 60 년도 더 지난 그분의 필름을 발견 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영화센터 지하 필름 보관소의 편 집기 앞에 앉아 인도네시아 최초의 키스신으로 영화계에 파란을 몰고 왔었던 그분의 영화를 재생시켜 보던 때야 말로, 이 다큐멘터리가 제게 준 가장 짜릿 한 보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역시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영화센터 장은 저희에게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기도 했었지요. 허영이 만든 영화의 첫 장면은 늘 논과 밭을 보여주면 서 시작한다고요. 그것은 한국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 법인데, 그가 한국의 평화로운 고향을 인도네시아 영화 속에서 재현시키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릎을 치며 그 말에 공감했습니다.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이 땅을 밟았던 그 분들에게 인도네시아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인내 속에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유배지였을 겁니다. 자신의 180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극한 속으로 내쳐진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한결 같이 질긴 희망의 뿌리를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내일 아침이면 사라질 서글픈 운명을 지녔다 해도, 그들은 마치 밟히고 밟히면서 되살아나 는 고향의 보리밭처럼 그 희망을 되살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인도 네시아 독립의 한 길목을 죽음으로 밝혔고, 또 인도네시아 영화계의 위대한 서장을 열었지요. 그 뿌리가 바로 지금의 인도네시아 한인 사회로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들이 밤마다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바라보았을 남방의 하늘을, 오늘 제 가 바라보며 섰습니다. 그토록 처절했던 당신들의 삶을 이리 함부로 들여다 보아도 되는 것인지, 어쩐지 용서를 빌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 이 자꾸 이리 가벼워져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역사는 미래를 사는 이들을 위한 거울입니다. 그 거울 속에서 그들의 삶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살아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절박했던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그 저 조각난 거울 한 쪽을 꿰맞춘데 불과할지 모를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들의 삶은 그대로 저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남방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며 그들이 불렀을 아리랑을 저도 함께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배움 은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그침이 없나 봅니다.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l기획자 주l 채인숙! 그녀는 1971년생으로 한국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지금 인도네시아에서도 여 전히 방송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 방송의 리포터 역할에도 일가견을 지녔다. 인도네시 아 한인문인협회 회원 외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적극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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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강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뜻을 정하고 노 력을 하다보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이루게 됩니다. 새끼줄로 톱질을 하여 나무를 자르고, 물방울을 떨어뜨려 돌에 구멍을 내고자 하 는 신념이라면, 설사 목표한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繩鋸木斷 水滴石穿(승거목단 수적석천. 菜根譚 後篇 句), 새끼줄도 톱 삼아 쓰면 나무를 끊을 수 있고 물방울도 오래도록 떨어지면 돌을 뚫을 수 있다. / A straw rope can cut a tree if it is used as a saw and a drop of water can penetrate a stone if it drops for a long time.
최정식
공자는“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 중에는 적어도 한 사람의 스승이 있다.” 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 와서 연륜을 거듭하 면서 초로에 다다라 깨달은 것은, 인생살이는 죽는 그 날까지 끝없이 어디에 서든 배워야 한다는 너무나 평범한 진실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지 어언 19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세월의 무게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제는 한국에 가면 편안하지가 않고 남 의 나라에 온 듯 다니러 온 나그네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고 왠지 어색 한 사회상을 보는 듯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와 공항에 내려야 내 삶의 터전 으로 돌아왔다는 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월을 되 짚어 보면 인도네시아에 정착해야 하는 목적의식 없이, 더부살이하는 조심성 도 없이 너무 건성으로 외국인으로서 현지생활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후 회와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많아졌다. 몇 년 전에 자카르타 공항에 손님 마중을 나갔다가 참으로 걱정스런 장면 을 목도했다. 막 도착한 한국인이 어설픈 인도네시아어로 자기에게 짐을 맡 기도록 성가시게 하는 현지인에게 경멸조로 마구 고함을 쳐대는 장면이었다. 늘 있는 일이니 화내지 말고 조용히 거절하라고 했지만, 속으로‘인도네시아 인들을 얼마나 안다고 겁 없이 공공장소에서 허세를 부리나?’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비단 그 사람만의 선입견이 아니라 나부터 출발이 그러했으니 남 나 무랄 처지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비하감은, 현지인들을 만나면서 현지 사회환경을 둘러 보면서 사회 구조적 비리와 모순과 허구와 부패상을 접하면서 얼마든지 생길 183
수 있고 누적되는 선입견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은 한국에서 접하지 못했던 현지인들의 훌륭한, 인간적인 모습들이다. 이러 한 점들이 눈에 들어오고 뇌리에 남으면 서서히 이곳이 살아 볼만한 타향, 편 안한 곳이 되지 않을까 한다. 내가 인도네시아인들에게서 인간미를 느낀 첫 경험은 19년 전 이 나라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이민국 사무실에 취업 허가증을 발급하러‘손도장’ 을 찍으러 가서 일어났다. 더운 공기에 담배 연기, 냄새와 사람으로 북적대는 북 새통에 혼이 빠졌던가 보다. 현지인 직원이 시키는 대로 손도장을 찍고 돌아 오는 차 안에서 그제야 손가방을 이민국 대기실 의자에 놓고 나온 것이 생각 났다. 그 가방에는 수첩은 물론 얼마 안 되는 달러까지 들어있었으니 얼마나 당황했던지.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자책감과 더불어 이곳 현지인들에 대해서 듣고 가졌던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방을 찾을 것을 거의 포기한 채 차를 돌려 가 보니, 자주색 내 손가방이 대기실 이민국 직원에게 맡겨져 있었다. 현지 여자 분이 분실물이라며 맡겼다는 것이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안도감은 물론이요, 내가 상상했던 현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속죄에 속죄를 거듭했다.‘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곳도 틀림없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좋은 곳이군요. 제가 멋 모르고 부질없는 생각을 많이 했 습니다.’ 그 이후, 19년이란 긴 세월 동안 현지인들에게 속은 경험도 많고 배신 당한 경험도 많고 손해 본 경험도 많지만, 그래도 이 곳을 살아갈 만한 편안한 곳 으로 여기는 데는 그 많은 부정적인 경험보다 더욱 많은 긍정적인 경험, 감동 적인 경험을 하며 좋은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마음에 담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인이 투자한 제조업체에 근무한다. 그 중에서도 많은 한국인들이 종사하는 노동집약적인 사업체인 신발업이다. 모기업에 현지인 18,000여명, 내가 몸 담은 회사는 7,000여명을 비롯해서 신발 관련 자회사를 다 합치면 무려 3만여 명을 헤아리니, 그냥 사람들이 떼거지로 모여 더불어 먹고 사는 184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딸 린 가족까지 포함 하고, 자재 협력 업체까지 망라하 면 웬만한 도시 인구가 벌어먹고 사는 터전인 셈이 다. 흔히들 기업
회사에서
은 사람이 한다고 하지만, 내 직장처럼 사람, 특히 현지인 손 끝에서 벌어먹고 살게 되다니 참 으로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나쁜 사람은 당연히 있음을 알 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이다. 그러나 그 나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이 있기에 하나의 사회가 존속된다는 것은 살아갈수록 체득하는 진리이다. 이 곳 인도네시아도 좋은 사람이 너무나 많고, 아름다운 풍습이 있고, 인간미 넘치는 가족애가 진하다는 것은, 비단 그런 면을 발견한 나의 행운이라기보 다 함께 살아본 우리 모든 외국인들의 체험일 거라 본다. 16년 전 처음 부임한 공장을 관두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없던 부서를 새롭 게 만드느라 직장경력이라곤 없는 올망졸망한 신입사원들을 받아 어설프게 업무체계를 꾸며놓고 떠나게 된 것이다. 내가 마지막 근무를 하던 날, 부서 아침 조회에서 사직 사실을 공표하고 매번 하듯이 조회말미에 이 나라 국가 를 합창하는 데, 엄숙해야 할 국가 제창이 그렇게 구슬픈 이별곡이 되었을까. 10명 남짓한 부서원들이 울기 시작하니 나 또한 울먹이며 끝내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우리 직원들이 그렇게 나에게 정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정이 많은 현지인의 순수한 마음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걔들과의 인연이 아직도 185
이어지고, 그 때의 정감은 아직도 훈훈한 추억이다. 그 이후에도 서로 돕고 사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인지상정 이 되었다. 우리 공장에는 많은‘또순이’ 들이 있다. 자기가 번 돈을 대부분,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께 보내 동생 학비며 부모님 생활비에 보탠다. 이 갸륵 한‘또순이’ 들이 사는 자취방을 가보면, 타일 바닥이면 그나마 나은 편이고, 대게 시멘트 바닥에 간이용 이불, 조리기구라곤 찾아보기 힘들고, 전등 하나 달랑 매달려 있곤 한다. 직원들이, 지붕에서 비가 샌다고, 자식들 상급학교 진학한다고, 아내가 애 낳는다고 돈 빌리러 오면 무계획한 살림을 산다고 야 단을 치지만, 동생 학교에 보내야 된다며, 부모님 수술비, 약값이라며 돈 빌 리러 오는 직원들에겐 차마 나무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얼마나 갸륵한가? 자기 가진 것 부족하니 꿔서라도 친지를 도와주겠다니. 처음 현지에 왔을 때, 어릴 때 봐온 한국의 70년대 모습을 발견하고, 현지 인들의 느리고 순박하고 가난한 생활의 외견만 바라보며, 내 나름대로 그들 이 불행하리라,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착각인가를 해를 거듭할수록 인정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의 경제 지상주 의 내지 물질 만능주의가 예전에 우리가 느꼈던 행복을 아련한 추억으로 돌 려 놓은 현실을 목도하게 되니 현지인들의 아직도 순수한 형제애와 이웃 사 랑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예전에 나는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에 사 로잡혀 있었던가? 四海兄弟. 어디를 가든 모두 형제라는 마음으로 남은 타향살이를 해 보 련다.
l기획자 주l 최정식! 인도네시아 살이 19년, 신발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과 자기 충실은 주위에 정평이 나있다. 특히 독실한 신앙생활은 그가 속한 공동체 일원들에게 무 언의 가르침이 되고 있다. 그가 맺어내는 선한 결실들이 이웃과 이웃에게 빛이 될 것임을 믿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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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고 밝게 도모한다면 물리적인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세월은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사무엘 울만>
視遠惟明(시원유명. 書經 句), 멀리 보고 밝게 도모하다. / See farther and aim brightly.
하연경
딸이 돌아온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사회생활을 하던 성 장한 딸이 부모의 슬하로 돌아오겠단다. 딸의 결정을 들은 남편은 연일 함박 웃음이다. 남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함께 일할 것을 몇 차례나 권했던 남편 으로서는 그때마다 사양하던 딸이 돌아온다고 하니, 유비가 삼고초려로 마침 내 제갈공명을 얻은 느낌인가 보다. 언니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 두 동생 도 환호다. 언니라지만 열 살, 열세 살이나 나이차이가 있으니 때로 아빠 엄 마보다 더 어려워하기도 하는 언니다. 하지만 함께 살게 된다니 퍽이나 좋은 모양이다. 나 또한 딸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뿌듯 하고 즐겁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만 가면 큰언니를 향해‘마미 마미’ 하고 불러 제 언니를 곤란에 빠트릴 막내를 생각하면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서로 다투기라도 할 때면 나이와 상관없이 누가 질세라 서로에게 생떼를 부릴 것 을 생각하면‘이 일을 우짤꼬’싶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 내게는 큰딸이 슬하로 돌아오는 것이 너무도 좋은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선 9학년인 둘째나 6학년인 막내가 대학을 진학하기 전까지 충분한 시간동안을 언니와 함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일 같다. 타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대다수가 그럴 것이듯 채우기 어려운 부분이 동족의 문화요 친척관계다. 그래서 대개의 부모들은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면 이웃끼리 음식을 한두 가지씩 만들어서 함께 모인 다.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합동으로 세배도 하고 명절이야기도 하면서 아이들 에게 북적거리는 명절을 경험하게 한다. 이웃사촌이 친척의 역할을 대신하 는 것이다. 어찌 본국에서의 경험과 비교가 될까마는 부모로서는 늘 작은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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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이라도 기울이게 되 는데, 이런 점에서 큰 딸의 역할이 어디 한 두 가지겠는가 싶은 것이다. 다음은 인도네시아 사립학교에 다니는 어 린 두 딸의 학부모(?) 로서 큰딸의 역할이다. 이는 잠시 다니러 와서 만날 때에도 스스로 잘 해낸 부분으로서 엄마로서 내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엄마의 모 자란 언어 능력으로 인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을 메워 줄 수 있을 것으로 믿 는다. 우리 가족이 해외 근무를 하게 된 가장을 좇아 인도네시아에 온 것은 큰딸 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당시 별 다른 정보가 없었던 우리로서는 앞선 다른 주재원들의 영향을 받아 큰딸을 한국국제학교에 보냈었다. 1년쯤 지난 뒤에 는 들은 정보도 있고 해서 영어로 수업을 하는 타국적 국제학교로 전학을 시 킬까 고심하였지만, 주위의 눈도 있었고 차편도 문제가 되어 이리 저리 알아 보다 그냥 포기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큰딸을 대학에 보낼 즈음 알게 된 사 실은 딸이 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로 당연히 영어가 뛰어날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국내의 제 또래에 비해 언어와 행동 등 한국적 정 서가 많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둘째와 셋째를 영어로 수업을 하는 학교에 보내게 된 것은 영어 라도 잘해보게 하겠다는 작심을 한 시도였다. 그런데 거기에도 어느 만큼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이들과 어울려 인니어도 구사하면서 영어도 능숙한 189
그야말로 글로벌한 아이들로 잘 키워 보자는 부푼 꿈을 안고 변화를 시도했 는데, 이 변화 앞에서 바로 엄마인 내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곤란을 겪은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팠던 것은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에게 조차 모든 것을 너 스스로가 할 수 밖에 없다고 못을 박았던 점이다. 아이가 얼마 나 불안했을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다행히 두 딸이 친구들 과 잘 어울리고 좋은 성적표를 받은 적도 많아 뿌듯한 때도 없지 않았는데, 그러나 시간이 흘러 학년이 올라가도 허점은 헛점이었다. 국내 제 또래들의 치열한 경쟁 분위기를 모르는 아이들은 근본적으로 긴장 감이 없었다. 조바심을 치는 엄마를 오히려 이상하게 취급을 했다. 물론 모국 어에도 약해 일반생활과 민족문화 전반에서 이해력이 뒤떨어졌다. 단지 영어 를 제 언니보다 더 잘 한다 뿐이지 학습 전반을 자신 있게 이끌고 나가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 어찌 비단 내 딸들만의 문제일까만 누가 뭐래도 그들 은 한국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기에, 이 또한 큰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분 인 것이다. 슬하로 돌아오는 큰딸! 그 딸에게 향하는 내 진정한 마음은 사실 위 몇 가 지 바람보다는 미안함이 더 많다. 외국계 국제학교를 다니지 못한 큰딸은 외 국에서 공부했으면서 영어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국내와는 달리 느슨한 경쟁구도 속에서 중·고등 시기를 보냈고, 대학마저 어느 부분 특례의 혜택을 받아 입학을 한 딸이 대학에서도 이런 저런 상황에서 매우 당황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딸이 대학졸업 후 이어진 사회생활의 어려움도 혼자서 해결하며 곤란을 겪었을 것을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과정을 잘 견디고 이겨낸 큰딸에게 자랑스러움도 크다. 더욱 감사한 것은 딸 의 마음이다. 틀 속에 가두거나 심한 압박감 없이 순수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 질 수 있도록 키워준 것에 대해 부모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190
으로서 가져야 할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강조한 것을 기억하는 대목에서 는 정말 장성한 딸이지만 엉덩이를 토닥거리지 않을 수 없이 고맙다. 세 딸을 키우며 교육을 하다 보니 절실하게 깨우친 것이 있다. 자식 교육에 는 그때그때 상황이 있을 뿐 어떤 정답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해도 굴곡을 겪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하여 나는 거창한 교육관 같은 것을 자격이 없다. 나름 있다 한들 내세울 바가 아니다. 이 책의 목적에 부합하는 기록할 만한 교육적 경험마저도 빈약할 뿐이다. 다만 경험 임을 내세워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국인은 영원히 한국인일 수밖에 없 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국어나 우리의 전통 관습, 그리고 우리 정서에 따른 사람과의 관계 등 참다운 우리의 것이야 말로 더없이 소중하다는 의미다. 타 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교육에서 우선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l기획자 주l 하연경! 그녀는 인니 거주 15년차 주부다. 세 딸의 어머니로 정성을 아이들 교육에 아끼지 않 는다. 월화차문화원, 루시플라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필묵연 회원으로 두 번의 전시 에 참여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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躍然生豊(약연생풍), 약동과 풍성 / A throb and abundance. 2011 신묘년 토끼해를 맞으며 사자성어하여 연하장에 활용했었던 단어가‘躍然生豊’ 입니다. 도약의 토끼 이미지를 표현한‘躍然’ 과 풍성한 한 해를 기원하는 의미로‘生 豊’ 을 조화했던 것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란 번식력이 강합니다. 하면 할수록 하고 또 하게 됩니다. 잡생각도 생 각은 생각이어서 다스리지 않으면 끊임없이 꼬리를 잇습니다. 아무렇게나 덜렁 생각을 따라 갔다간 낭패를 볼 수도, 무력감에 빠져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왕 생각을 하려면 글자 그대로 살아있는 깨달음(生覺),“좋은 생각” 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기원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한 해의 첫 들머리에서 길상어를 주고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한선아
아직 잠이 덜 깬 내 귓속을 엄마의 다감한 목소리가 간질인다. 아침 식사 준비에 즐거우신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내가 집에 와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된다. 마음이 참 편안하다. 집을 떠나 있었던 것이 이제 고작 1년 반이고, 그 간 두 번이나 집을 오갔는데 자카르타의 집 내 방에 누워있다는 것이 새삼스 럽다. 사실 내게 1년 반은 시간적인 부담보다는 심적 부담이 더 컸던 기간이 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의 한 학기 공부는 내가 부모님 곁을 떠나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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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장기간이었 다. 더군다나 모든 것이 낯설었던 미국 생활은 몇 가지에서 적잖은 부담이었는 데, 특히 막 대학생 활을 시작한 새내기 의 기숙사 생활과 2005년 여행 중 동생 건우와
공부는 결코 만만찮 은 것이었다. 그러
나 경제적 부담 백배인 부모님을 기왕 합격을 한 학교이니 꼭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설득하여 등록을 했던 학교였던 만큼, 오기와 호기심으로 버텨냈던 기간이었다. 반년 후 다시 서울의대에 합격을 하고 입학을 하여 치러낸 1년 과정 또한 결코 만만했던 것은 아니어서, 부모님 품안인 자카르타 집에서 맞 는 아침이 내겐 정말 특별한 느낌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난 행운아다. 내가 원하던 존스홉킨스대학의 합 격과 수학의 경험, 부모님과 내가 함께 원하던 서울의대로의 진학, 그리고 잠시지만 방학을 맞아 자카르타의 내 집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다 행운이 다. 더 멀리 돌아보자면 아버지가 인도네시아에 근무를 하시게 된 것도, 그 로 인해 내가 미국계 국제학교 JIS에서 수학을 한 것도 모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해외에 살아 특례로 대학에 입학을 했지만, 인도네시아에 살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대학으로나 서울의대에 진학하겠다는 목표의식을 선뜻 갖지도 못했 을 것이다. 내게 행운을 내리게 하고 받아들이게 한 것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과 교육이었다. 난 어렸을 때 매우 소극적인 아이였다. 거리낌 없이 낯선 사람에게도 말을 194
잘 걸곤 했던 내 남동생 건우와는 정 반대의 성격이었다. 막 JIS에 입학해 영 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로 여 행을 가게 되었다. 동생 건우는 우리가족과 함께 케이블카에 동승한 외국인 과 되는 영어 안 되는 영어를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나는 입을 떼지 못했다. 말을 걸어보라고 나를 부추기는 엄마가 제발 그만 했으면 좋겠 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특별히 적극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 글을 쓰며 돌아보니 예전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변한 나를 느낄 수 있다. 어머니 말씀처럼 그 또한 JIS를 다니면서부터 변한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 JIS에 전학을 했을 때는 한국국제학교 JIKS에서 초등학교 3학 년 과정을 마치고 나서다. 그러므로 외국인 선생님과 의사소통을 하고 외국 인 친구들과 어울리기에 내 영어실력은 턱없이 부족했었다. 그 안 되는 영어 갖고라도 무조건 들이댔어야 하는데 내 성격은 그렇질 못했다. 다행히 한국 인 친구 2명이 그 반에 있어서 위안처가 되어 처음 몇 주 나는 늘 그 친구들 과만 놀았었다. 나는 일명 나의‘comfort zone’ 을 설정해놓고 있었다. 그러 던 내게 어쩔 수 없이 선생님과 의사소통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 다. 친구가 체해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는 바람에 내가 그것을 선생님께 알려 야했던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 픈 친구를 그대로 두고 안절부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담임선생님 이시던 Mrs. Ishino께로 달려갔다. 나는 달려가면서도‘토하는 것’ 을 어떻 게 표현해야 하나 떠올려 봤지만 그 영어 단어를 알지 못한 때이니 떠오를 턱 이 없었다. 나의 최선은“Mrs. Ishino, Christine(친구 이름) 우웩!” 이었다. 그런 식으로 시작된 나의 JIS에서의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외국인 친구 들과 친해지기 위해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무엇이든 말하려 노력했고 이 친 구들에게 과자와 같은 일종의‘뇌물’ 을 바쳤었던 사실도 지금 고백한다. 무대 에 서는 것도 싫어하는 내가 Choir수업 때문에 노래 공연을, UN day에서 태권도 시범이나 난타를, string수업을 들어 현악오케스트라 공연을 해야 했 195
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이런 것을 갈수록 즐기게 됐다. 처음에 나는 내 자신을 그렇게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 고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늘 들었다. 하지만 내가 무대에 올라 열심히 한 만 큼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는 것도 느꼈다. 또한 내가 실수를 저지르게 되더라도 그것으로 관객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 면 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게도 되었다. 어느 때부터 자신감을 갖고 무대에 서게 되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게 되었다. 이것은 수업이라 는 무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발표할 때 쓰일 포스터를 잘 만들거나, 글 을 잘 쓸 때, 과학수업에서 실험을 잘 했을 때, 선생님과 동기들이라는 관객 으로부터 갈채를 받고 인정을 받았다. 잘한 예를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보여 주면 동기들은 경쟁의식으로 시기하기보다는 인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국제학교에 다녔으면 당연히 영어를 잘 할 것이라는 편견을 갖지만 영어는 10학년 이전까지 나의 블랙홀이었다. 10학년이면 이미 JIS를 무려 7년 다닌 후였는데, 나의 발음이나 기본적 의사소통은 어땠을지 몰라도 영어로 제대로 된 글 한 편을 쓰는 것은 당시 나에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9학년 때 영어 선 생님께서 글을 한 번 쓸 때마다 수없이 고치게 하신 것이 실력 증진의 주요인 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격려가 무엇보 다 나를 자극하고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발버둥치게 했다. 이렇게 JIS 교육 곳곳에서 나에게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나를 끝까지 이끌어 지금의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가르침도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가져 야하는 태도인데, 첫째가 한국인인 것에 대한 자부심이다. 둘째는 나의 행동 이 한국인의 이미지에 어떤 영항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무 심코 하는 행동으로 자칫‘한국인들은 원래 저런가 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인도네시아인들은 한류 덕분인지 한국인에 대한 견해가 대체적으로 좋았다. 한국인을 무시하기 보다는 인도네시아 보다 196
백악관을 배경으로
조금 더 선진국인 나라의 사람들로 오히려 우상의 대상으로 바라본 듯하다. 이제 대학생이 되어 이 글을 쓰다 보니 새삼 나의 청년기를 돌아보게 된다. 난 아직 큰 목적을 이루기까지 먼 길을 가야한다. 인도네시아에서의 13년 생 활은 이 큰 목표를 이루는데 까지 좋은 시작을 만들어주었다.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인도네시아 생활에서 얻은 배움은 돈으로 주고 살 수 없는 것이고, 나를 끝까지 이끌어 줄 큰 요소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들을 명심하려 한 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시간과 특히 부모님의 희생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도 록 난 나의 큰 목적을 이룰 것이다. 참 감사한 오늘이다.
l기획자 주l 한선아! 6살의 어린 나이에 주재원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살게 되었다. 미국계 국제학교 JIS에서 초, 중고 과정을 마친 뒤,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에서 한 학기를 수 학하였다. 그 후 서울의과대학에 합격을 하여 현재 2 학년 재학 중이다. 그의 장도에 신의 축 복이 항상 함께 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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譬如爲山 未成一ぅ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ぅ 進 吾往也.(論語 子罕篇 句). 학문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산을 쌓는 것과 같다. 마지막 한 삼태기를 이루지 못하고 그만 두는 것도 내가 그만 두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땅을 고르는 것과 같다. 비록 한 삼태기를 부어서 나아감도 내가 가는 것이다.
如爲山(여위산), 마치 산을 만드는 것 같이 / As making a mountain.
허숙의
저도 대다수의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을 했 습니다. 이제 어언 3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삼 남매를 낳고 길렀습니 다. 그런데 이번 이 글을 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는 무자격 엄마라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습니다. 특별히‘엄마의 교육’ 을 따로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혹여‘엄마의 자격’ 을 논하는 기관이라도 있다면 제게 옐로 우 카드가 제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격증이 없었어도 결혼 후 제 삶의 주된 관심사요 주제는‘자식 교육’ 이었 습니다. 남들처럼 조바심을 내기도 했고 열정을 발산하기도 했습니다. 각각 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기에 부모의 교육관 또한 하 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어떻 게 교육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해법이 하나일 수가 없기에, 모든 학부 모의 화두가 교육이면서도 결국은 각자의 소신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놀랍습니다. 엄마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어도, 자격증이 없었어도 감사하고 놀랄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큰아이 둘은 이미 기대에 부 응한 성장을 했고, 아직 9학년인 늦둥이 막내도 믿음직스럽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나름의 아이들 가정교육 방식을 간단히 정리하면서 자 만에 빠져보렵니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 제게도 나름의 철학, 나름의 방식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혹여 이 글로 인해 내 아이들이 넉넉히 유자격 부모가 될지, 아이들의 아이들을 기르는데 작은 지침이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한마디 로 이 기회에 작정하고 아이들 자랑 좀, 아니 제 자랑 좀 하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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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심과 배려’ , 이는 제가 아이들을 기르면서 항상 강조했던 말입니다. 자립심은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독립심을 기르게 하려는 방편이 었고, 배려를 통한 양보는 타인과의 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으로서 스 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립심은 자신으로부 터 비롯되는 것이면서 자신에게 귀착되는 것이고, 배려는 타인에게 귀착시키 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만 조화가 잘 된다면 다른 진리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 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교육에 관한 좋은 말들을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지요. 그런데 저는 현실적이고 간단명료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들의 학습활동 준비나 방학 과제물은 모두 스스로 해야 할 임무임을 아이들에게 인지시킨 것은 자립심 기르기의 일환이었습니다. 자 신이 잃어버린 물건 또한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갑작스럽 게 비가 오는 날에도 학교로 찾아가는 일이 없이 기다렸었는데, 다 스스로가 200
문제를 해결해냈습니다. 배려와 양보에 대해서는 늘 점검하고 타이르고 했는데,“엄마는 항상 우리 만 참고 양보하라고 하느냐?” 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생 활에서 배려와 양보를 실천하는 아이들로 자라주었습니다. 물론 아이들 각자 가 지닌 선천적‘성향’ 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인지라 조금씩 개성이 다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모의 교육 철학과 맞닿아 성장해 나가는 모습은 한편으 로 뿌듯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내 아이들이라 그렇게 보일까요? 첫째에게는 첫째다운 좋은 강점이 있습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큰아이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항상 웃음을 선사하여 분위기를 밝게 합니다. 어르신이나 선후배에 관계에서도 예의 친화력을 잘 발휘합니 다. 학창시절 학교급식 당번을 자원해서 솔선수범한다든가,‘수화’동아리에 참여하여 어려운 이를 돕는 등 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이던 것이 사회적으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주변에서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사람 으로 성장했다고 판단을 합니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었습니다. 더욱 대견스러운 것은 스스로 계획하며 실천하는 학습태도를 보인다는 것이지요. 자기 주도적 학습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를 하고 있으므로 요즘의 교육 트렌드를 아주 잘 소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육과정 입안자들에게도 칭찬 받을 일이 아닐까 생 각을 합니다. 둘째는 현재 대학생으로서 교육의 성과를 말하기에 아직 이르 지만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결실로 이어내리라 믿습니다. 셋째는 어릴 때부터 목표를 잘 세우고 목적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적절히 해냅니다. 이제 9학년으로서 아주 예민한 시기에 인도네시아에 전학을 와서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인데, 나름의 목표를 세우고 인내하고 실천하면서 서서히 잘 적응을 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적응기를 거치면서 또 다른 목표 를 세우고 도전해 나가는 모습이 성공적인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게 합니다. 이 삼남매가 각기 자라던 모습, 학습과정 그 모든 것이 세월이 더 지나도 201
저에게는 생생히 남을 것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이 지닌 각각의 특성을 인정 합니다. 소위 학생 평가 기준인 학업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도, 각각의 특성을 인정하자는 원칙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찌 인내를 필요로 할 때가 없었을까요. 그때마다 대화를 시도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생 각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자잘한 실수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인정하곤 했는 데, 그것은 바로 제게 격려와 칭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아 이들의 공로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엄마의 교육에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될 때면 정말 기뻤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힘을 발휘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말로는 다하지 못할 가장인 남편의 영향력입니다. 남편은 늘 바쁜 중에도 참으로 자상하게 가장의 역할을 잘 해주었습니다. 저와 아이 들 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를 할 때도 남편이 기꺼이 소통의 통로가 됨으로 써 가족 간의 부드러움이 유지되었습니다. 소양을 갖춘 개인으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은 남편의 절대적인 주장이기도 했는데, 요즈음 아이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늘 자애로운 것을 보면 남편의 바람이 아이들에게서 잘 발휘되고 있 다는 것을 느낍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입니다. 기다릴 줄 알게 해준 아이들, 기다림의 결과를 하나 둘씩 보여주는 아이들, 앞으로도 감사할 일이 연이어 질 것을 굳게 믿습니다.
l기획자 주l 허숙의! 법인장인 가장을 따라 인도네시아에 3 년차 거주하고 있는 주부다. 인도네시아 한인 들 다수가 그렇듯 이산의 상태에서 양쪽의 자녀교육에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 상황에 있지만, 선 굵은 원칙과 방식으로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얻어내고 있다. 그의 소신이 아름답게 빛이 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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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鳥數飛(여조삭비),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을 하 는 새와 같이 / Like a bird which flaps the wings often to fly to the sky. 새가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는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사람도 배우기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히는 것은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자 함입니다. 長途(장도), 머언 길에 오르는 젊은이들을 보게 됩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 고국의 대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또 다른 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젊은이, 군 입대를 앞두거 나 취업이란 장도에 들어선 젊은이들입니다. 많은 날갯 짓을 해야 하는 그들의 장도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빕 니다. 돌아보면 모든 이의 인생이 장도입니다. 이제 그 길에 들어선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그 여정 중에 있는 장년, 회고할 장도가 긴 노인과 같이 현재 처한 위치가 다를 뿐 각자의 장도를 가고 있습니다. 장도에는 희노애락이 많습니다. 모든 이의 장도가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부 디 長途에 康健如意하소서! (인재 손인식의 필묵향기에서)
홍성민
홍준기! 네가 근무하는 곳은 아직 춥지? 날씨, 규칙적인 생활, 명령에 따라 야 하는 신분 등 모든 여건에도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며 꿋꿋하 게 잘 해내리라 믿는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누나까지도 너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어찌 없겠냐만, 몸이 건강해지고 당당해지며 내적으로는 더욱 깊어질 너를 상상하면 뿌듯한 마음도 없지 않단다. 편지와 전화, 또 면회를 통해서 네가 다소 힘겨워한다는 것도 느꼈고, 그러 는 순간에도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다는 것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이 고 하고 싶은 것 대부분 다하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고등학교까지의 인도네 시아 생활이 더욱 그리울 것으로 짐작도 한다. 혹 그 시절에 네게 모든 것이 쉽게만 느껴졌다면 지금은 세상을 성찰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생 각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의 네 친구들 중에는 부잣 집 자제들이 많았던 것 으로 안다. 그들 중 일부는 실로 엄청난 부자의 자제들이었지. 그들과 어울리 면서 혹 돈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 사실 그즈음 아빠는 늘 그런 것이 걱정이었다. 돈만을 우선시하는 그런 사고가 네 안에 어느 한구 석 조금이라도 자리하면 어쩌나 하고 몹시 걱정을 했었다. 그래서 때로는 너와 마음을 터놓고 진지하게 인생과 너의 앞날에 대해 얘 기해보려고 했지만 너는 그런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그저 네가 생각 하는 것에만 치중하려고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깊은 대화를 못 나누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 시기, 그 나이쯤에는 흔히 그럴 수 있음도 이해를 했기 에 아빠는 좀 기다리자고 결론을 내렸었다. 아빠로서 책임감을 안 가지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빠 또한 정도야 다르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 204
가족과 함께
을 하면서 너를 지켜보며 기다렸던 것이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왜 스 스로 시행착오를 겪어보아야만 깨닫게 되는지 안타까워하면서 말이야.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너의 미국에서의 1년 대학생활이었다. 아빠 엄 마의 슬하를 떠난 네가 타국에서 외롭게 공부하면서 생활의 어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을 복합적으로 느껴간다는 것이 확연히 드 러났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시기는 세상살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너와 내가 함께 느끼고 있을 때였다. 동질감 때문일까? 아빤 네 게 사랑의 마음이 더 많이 쏠릴 때였다. 이 말은 아빠는 너를 항상 지켜보면 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네가 스스로 해결하기 아주 어려운 고난을 만난다면 수호천사처럼 짠하고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결과적으로 는 그런 일도 없고, 그런 날도 절대 오지 않도록 네가 잘 해낼 것으로 믿지만 말이다. 205
재밌는 사실은 너의 국방의 의무 실행에 대한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당연히 거쳐야 할 책임이 바로 군 입대이지만 시기적으로 다소는 외로운 대 학생활에 대한 현실 도피성도 있지 않았었니? 어쨌든 아빠로선 여러 가지 면 에서 아주 적기에 네가 입대를 했다는 생각이고, 제대를 하고 나면 너 또한 아빠의 이 말에 동의를 할 것이다. 준기야! 네가 입대를 한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구나. 너의 군기 잡힌 행동 과 말투가 상상이 되고, 상관에게 붙이는 우렁찬 경례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너를 떠올리면 아빠의 마음은 다소 느긋해지고 흐뭇한 미소가 이는 반면 엄 마는 아직도 네 얘기만 나오면 눈시울 적시곤 한단다. 네가 전화를 할 수 있 는 시간이다 싶으면 일손을 놓고 전화기 앞에 앉아있기가 일쑤다. 심지어는 골프를 치고 동반자들과 저녁을 함께 해야 하는 시간에도 혹여 네게서 전화 가 올까봐 다른 일을 핑계대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곤 한단다. 준기야! 이 모두는 네가 지금 네게 닥친 현실을 슬기롭게 이겨내야 하는 이 유다. 부디 상관의 명령과 지켜야 할 준칙에 충실하고, 병영의 동료들과 깊은 우정을 쌓기를 바란다. 준기야! 아무리 말려도 붙들어도 시간은 간다. 제대 후에 복학문제, 여자 친구와의 문제 등 이런 저런 걱정이 많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니? 준기야! 넌 아직 앞으로 많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단다. 성경 말씀에도 오늘 염려는 오늘 족하고, 내일은 내일 그때 가서 걱정해도 충분하다고 했다. 너 무 앞서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말거라. 걱정도 습관이거니와, 닥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부터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전유물이란 사실 명심 해라. 준기야! 아빠와 엄마는 너의 성장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부모 다. 성장과정, 특히 패기만만했던 너를 잘 기억한다. 공부는 다소 소홀했지만 폭 넓은 대인 관계는 주위에도 정평이 나 있었지. 아빠가 놀란 것은 어느 순 간 알게 된 것으로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네 말솜씨였다. 논리와 호소력 모두 206
가 아빠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그때부터 아빠는 네가 언젠가는 공부를 잘한 누나보다 더 성공할 거라는 은근한 기대를 갖게 되었지. 사실 누나가 공 부도 잘했거니와 좋은 대학 좋은 전공, 우수한 졸업, 그리고 졸업 후에는 많 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자카르타 학부형들에게 두루 알려졌잖니. 네게는 그것이 늘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너는 담담하게 네 방식을 고수했었지. 그런 면에선 참으로 고맙다. 힘내라 아들아! 항상 뒤에서 널 위해 기도하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누나가 있다는 걸 기억해라.“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고 했다. 너무 당연한 말 아니니? 스스로를 돕지 않는 사람을 누군들 도울 마음이 생기겠니. 우리 서로 스스로를 돕는, 스스로의 오늘에 충실한 사람이 되자.“오늘은 행복했던 날들이 모두 모여 이루어지는 것” 이란다. 그 오늘을 건너 내일 건강하고 행복 한 모습으로 만나자. 아들 홍~준~기 파이팅!
l기획자 주l 홍성민! 중견 건설회사 CEO다. 인하대학 동문회장과 건설협의회, 백두회 등 사회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그의 긍정적인 성격과 친화력, 넘치는 인정은 어디에서나 그를 필요한 사람 으로 여기게 하고 있다. 자필묵연 회원으로 붓글씨를 즐기며 정기전에도 출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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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天爲徒(여천위도. 莊子 句), 하늘과 한 무리가 되다. / Become a group with heaven. 內直者 與天爲徒 與天爲徒者 知天子之與己 皆 天之所子 而獨以己言ペ乎而人善之 ペ乎而人겘 善之邪 겭然者 人謂之童子 是之謂與天爲徒. (마음을 곧게 함은 하늘과 한 무리가 되는 일이 다. 하늘과 이웃이 된다는 것은 결국 천자도 나 도 다 같이 하늘의 아들임을 자각하는 입장이 므로 자기 말이 남에게 칭찬을 받든가 비난을 듣든가 그런 것은 일체 도외시하는 것이다. 이 같이 곧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린이 같은 사 람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하늘과 한 무리가 되 는 일이다.)
제2부
역사는 진리의 창고이고, 바로 지금 여기가 느낌의 보물창고라는 것은 이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진하게 느낀 바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역사를 뒤졌고, 원고를 모으고 쓰면서 현실을 찾아 나섰었다. 역사에서나 지금 여기에서나 늘 사람의 세상에선 사람이 중심이고 희망이며, 꽃보다 아름답다. 이전의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나와 내 이웃이 함께 살아가는 오늘도 흐르고 흘러 역사가 될 것이다.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 읽고, 오늘 내 이웃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은 이유다. 여기, 몇 편 이웃의 이야기가 있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며 이웃을 기쁘게 하는 이웃들의 이야기가 넘치는 세상이 되기를 빈다. - 인재 손인식
- 김재유 장로에게서 배우다 프롤로그
한 사회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루 존경을 받는 원로가 있어야 한 다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런 분이 있다면 서슴없 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에도 적극 찬성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 진정한 원로 한 분을 글로 드러내 달라는 작가 손인식 씨의 부탁은 내게 있어서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다행이 내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 나를 정화시키 는 분이 있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우리가 서로 아름답게 꾸며 나가자는 취지 에도 공감을 해 결과적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여전히 이 글의 당사자이신 김재유 장로님께서는 당신을 들추는 것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지만, 나의 이 글은 김재유 장로님을 비롯한 이 사 회의 많은 선배님들께 진정한 원로가 되어 주십사 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바 치는 글이기도 하다. 이젠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도 40여년을 살아오신 분 들이 여러분 계시다. 어려운 타국의 환경들을 해쳐오셨고, 어려운 환경에서 훌륭히 자녀들을 길러내셨으며, 대부분 경제적 성과까지 이루신 분들이다. 개인의 삶의 여정이 어느 사회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해외 동포사회라는 구 조적 특성 중에도 귀감을 삼을 만한 족적으로 인해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 마 땅한 분들이다. 결과적으로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기반이 되시는 분들인 것이다. 혹여 공감하지 않는 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이라도 기록은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원칙에 충실한 삶과 감성적인 교분
나와 김 장로님의 인연은 무려 33년여다. 나는 그 분을 가까이에서 아주 210
오랫동안 직장 상사로 모셨었고, 사회활동 중에도 많은 시간을 지근거리에 있었으며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원칙에 충실한 분’ , 그 분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내가 그 분을 향해 표현 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하고 간단한 말이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 닥쳐도 좀처럼 흥분하거나 허둥대는 일이 없다. 언제나 침착하게 일을 분석하고 신속 정확 하게 가능한 한 원칙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셨다. 70년대 초기 인도네시아 원목개발 사업에 뛰어든 업체들이 칼리만탄 밀림 속이라는 오지의 특성상 비정상적인 애정행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 다. 그러나 김 장로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어느 모로 보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수십 년이 지금 돌아볼 때 그 분의 뜻이 선견지명이었 던 것은 너무도 잘 드러난다. 그 분의 뜻을 수용한 많은 사람들의 노년이 그 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너무 떳떳하고 당당하기 때문이다. 원칙에 충실한 삶은 대인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그 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옛 직원들이 많은 것이 그 실례다. 자신의 옛 직원들을 친형제처럼 잘 보살펴 주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 누고 있음이다. 사실 김 장로님을 일각에서 보면 폭 넓게 대인관계를 가지는 분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속된 말로 아무 자리나 참석하고 아무나와 대 충 말을 섞는 등의 시간은 철저히 아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 관계를 가졌던 사람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 아우르는 큰 품성임은 더 잘 드 러난다. 특히 그 교분에는 항상 촉촉하게 감성이 유지됨으로서 매우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이웃사랑과 뚜렷한 인생관
연합교회를 섬기시는 김 장로님은 신도들과의 나눔도 많으시지만, 특히 어 려운 처지의 오지 선교사들을 돌보시는 데 많은 정성을 쏟으신다. 땅그랑에 위치한 현지 고아원에 대한 사랑도 돈독하셔서 혼자서도 그곳에 가시는 일이 211
잦다. 언젠가 함께 동행하셨던, 고 서만수 목사께서도 깜짝 놀란 사실이기도 하다. 인재 손인식 서예가를 통해 <빛과 소금>이란 작품을 제작해서 걸어놓 고 늘 음미하시는 이유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사주인 사장의 유고시였다. 당시 직책이 전무이셨 던 김 장로님께서는 회사의 전반을 아우르셔야 할 때였다. 그는 매일 아침 출 근하면 그날 일정이나 지난 일에 대하여 물으시고는 자리에 앉아 기도 삼매 에 빠지셨다. 그 결과는 모든 일에서 기도처럼 신중함과 간절함으로 드러났 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 물을 때마다 그냥 빙긋이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지 만, 젊다면 젊은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정확한 판단과 단호한 결심을 내리는 연유도 기도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다. 참 가정적인 김 장로님은 참 인생관이 뚜렷한 분이다. 들여다보면 나라를 위한 자세로부터 시작이 된다. 한인회 수석부회장 시절 광복절 행사 때면 만 세 삼창을 담당하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만세 소리가 유난히 참석자들의 마음에 파고들었던 것은 그 분의 나라를 위한 기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 라. 늘 그렇게 대의를 가지셨기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올바른 지혜를 구하고 판단을 하신다. 올곧음과 군더더기 없는 일 처리는 인도네시아 교민회 수석 부회장을 역임하실 때도 잘 드러났던 사실들이다. 그래서일까 김 장로님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고 설명이 어려워진다는 일반의 상식을 뒤집는다. 아주 간단명료하게 일을 대하고 처리하신다. 일에 대한 확신도 있고 지혜롭 기 때문일 것이다. 김 장로님의 특성은 골프라운딩에서도 잘 드러난다. 침착함 그 자체다. 과 다한 욕심을 부리지 않은다는 증거가 여기저기서 드러나는데, 동반 플레이어 들이 감탄할 정도의 흐트러짐 없는 스윙과 정확한 퍼팅을 구사하신다. 김 장로님께서는 삼남매를 두셨다. 현재 미국에 사는 큰 아들 내외를 빼곤 둘째 아들과 딸 가족이 자카르타에 산다. 둘째 아들과 딸 가족이 매주 김 장 로님 내외와 함께 예배에 참례하곤 하는데, 가족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212
나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재롱을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보 기 좋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장로님께서도 행복해 하시지만 주위를 향해서 도 참 좋은 행복바이러스 유포가 아닐 수 없다. 출신지 이북에서 인도네시아까지
김 장로님의 고향은 북한 황해도다. 그래서인지 지난 연평도 포격사건 때 특별한 관심을 표하시고 마음 아파하셨다. 북한 공산당이 싫어 남하를 하셨 지만 모두가 그렇듯 고향에 대한 향수는 남다르다. 지난 2010년 문학행사 ‘음악을 통해 본 고향’ 에 참석하셨을 때 마지막 순서에서‘고향의 봄’합창 이 울려 퍼지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더라고 고향 그리움을 숨기지 않 으셨다. 김 장로님의 남다른 삶은 많은 학업 성취와 이른 해외진출을 간과할 수 없 다. 그 분은 태평양 전쟁과 무관하게 순수한 노력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에 진출하셨다. 한국인이 비즈니스 차 동남아로 진출하는 개척자였 던 것이다. 필리핀에서 원목 개발경험을 축적한 김 장로님께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 도네시아에 정착한 것이 벌써 43년여다. 인도네시아 동화에 몸을 담으시어 동부 칼리만탄의 발릭빠판에서 원목개발을 시작하셨는데, 그 후 코린도그룹 이 중부 칼리만탄에서 원목개발 사업을 시작할 때 코린도의 기반을 놓으셨 다. 이후 신문용지 및 신발사업 등으로 사세를 확장하는 데 그 역량 발휘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뜻하지 않은 변고로 인한 코린도와의 이별의 섭섭 함도 잠시 자신의 기업을 일구시기 시작했는데, 현재의 그것은 성공 그 자체 라 해도 조금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김 장로님의 외모적 특징은 당당함과 온화함이라 할 수 있다. 건장한 체구 에서는 다이내믹함이 허물어지지 않을 원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작 다감 한 미소와 언어구사에서는 온화함 그 자체일 뿐이다. 어쩌면 민족의 선각자 213
또는 역사 속 교육자 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 그분에게는 그런 꿈이 숨어 있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에서 후진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하시려는 뜻이 있 는 것이다.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문교육 또는 영재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학교의 규모는 작을지라도 인도네시아 엘리트를 선발 하여 무료로 합숙을 시키는, 마치 한국 강원도의 민족학교 형태를 꿈꾸고 계 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곧 장차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이끌어 갈 지도자를 육성하는 일일 것이다. 또한 한국인 2세들이 참가 한다면 한국을 빛낼 동량들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뜻있는 분들의 바랄 바가 아니겠 는가. 에필로그
사실 내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기록하는 내용들은 이미 자카르타의 많은 교민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수의 인도네시아인들도 알고 있는 바다. 김 장로님께서는 인도네시아인들과도 폭넓은 교제를 하고 계시다. 흔 히 말하는 인맥이 튼튼하시다. 그 분의 현지인과의 교제를 옆에서 지켜보노 라면 언제나 품격있는 교제를 통해 사람을 관리해 오신 진면목이 잘 드러난 다. 스스로 버림이 없이 최선을 다하시는 교제에서 참으로 느낄 바가 많은 것 이다. 세월은 간다. 김 장로님에게서도 그것은 느껴진다.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 은 신앙열정을 드러내시고 지금도 그 분의 골프 실력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정도지만, 안타깝게도 김 장로님의 어깨에 내려앉은 세월의 무게도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한번은 팔순잔치, 구순잔치를 자카르타에 사는 옛 후배와 직 원들이 모여 해드리겠다고 했더니 크게 웃으셨다. 그것은 허언이 아니다. 이 미 일부에서지만 뜻이 모아지기도 했다. 존경하는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이 벤트인들 망설일 것인가. 더불어 자카르타에서도 Senior에 대한 배려와 잔 치가 더 많아 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14
인도네시아 한인동포사회의 모든 원로분들의 평강을 기원하며 졸고를 마 친다.
한 상 재 (인니한인문화단체연합회장, 칼럼리스트)
l기획자 주l 김재유! 자카르타에서 한인 원로로서 존경받는 김재유 장로의 이야기를 이 책에 싣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김재유 장로께서는 1939년 황해도에서 출생하시어 1968년에 인도네시아 에 정착을 하셨다. 인도네시아 동화와 코린도그룹 임직원을 거쳐 한인회 부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며 사회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94년부터 연합교회의 장로(지금은 은퇴)로 교회에 봉 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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벍者겚 勤人搜道(유자색부 근인수도), 나약 하고 게으른 자(벍者)는 핑계( )를 찾고(겚), 근면한 사람(勤人)은 길(道)을 모색한다(搜). / The weak and lazy looks for excuses; The diligent seeks for ways. 모 회사의 모토입니다. 한글로 된 것을 한문으 로 성어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작은 핑계를 버 리고 근면해질 일입니다. 자연스럽게 道가 모 색될 것입니다. 道는 큰 길을 의미합니다. 여 러 사람이 함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치요 방법이며.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사상이며 인 의이고 덕행이기 때문입니다. 곧 모든 것과 통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도를 일러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따르는 것 이라 했습니다.
- 김종권 회장의 40년을 통해 느끼다 -
상징과 상징
지난 2월 중순 자카르타 중심가의 한 호텔에서는 한국인의 결혼식이 성대 하게 열렸다. 겉으로는 그냥 늘 있는 결혼식,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결혼 식이었지만 들여다보면 매우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결혼식이었다. 우 선 신랑 김민수 변호사를 주목할 수 있겠다. 김민수 변호사는 서울 출생이라 고는 하지만 첫 돌이 지나고 부모님을 따라 인도네시아에 온 후 지금까지 줄 곧 인도네시아에서 공부를 하고 변호사가 된 한국인 젊은이다. 그가 2004년 <PAK Law Firm>을 설립하고 변호사 업무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인니의 한 인교민사회에서는 큰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이는 한인 2세들이 인도네시아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기점으로서의 또 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기 도 하다. 여담이지만 그 기점은 해석하기에 따라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 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한인사회가 날로 커지고 있는데 대한 대비가 그 한 가 지다. 그래서 국가와 한인사회적으로 대변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모 인사의 의견은 그냥 흘려버릴 말이 아님이 분명하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다수 국가 에 형성된 한인사회의 경우를 볼 때 어쩌면 그 제언은 지금이 적기라고 볼 수 도 있다. 마치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실력과 인맥 등 저변을 갖춘 출중한 2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수 변호사가 그런 상징성을 지닌 젊은 동량이라면, 그의 부친 김종권 회장(CBMC 자카르타 지회장)은 인도네시아 한인 1세대로서 여러 가지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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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1977년 첫째, 둘째의 인니 첫 나들이 (TARAKAN, KALIMANTAN TIMUR) 右. 1970년대 말 자영하던 KOREAN SOUVENIR에서 민수, 남수 형제
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 40여년의 경력자로서, 출발은 미 원의 영업사원이었지만 원목회사, 한국토산품코너 운영, 가와사끼 오도바이 판매업, 요식업, 무역업, 활성 탄소 제조업을 거쳐 현재는 환전업과 부동산 소개업(블록 엠, 찔레곤)을 하고 있는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산 증인이다. 특 히 그는 한인회 활동, 한글 교육자로서 지닌 역량을 발휘했으며, 현재도 CBMC(기독실업인회) 자카르타 지회장으로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현재 하고 있는 부동산 소개업 또한 그가 오랫동안 쌓아온 인 도네시아 경험이나 지식과 맞물려, 인도네시아에 새롭게 진출하는 한국의 기 업이나 한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저와 인도네시아와의 인연의 시작은 65년 한국외국어대학 마인어과에 입 학으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질적인 것은 72년 (주)미원의 주재원으 로 파견된 때부터입니다. 인니 진출의 꿈은 68년과 69년도의 파월 장병으로 근무 당시부터였어요. 막연하게나마 인니에서 생산 공장을 운영해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직장생활을 하다 틈만 생기면 자영업에 투 신하곤 했는데, 몇 번이나 어려움에 봉착했었어요. 그때마다 다시 직장생활, 또 자영업 도전 등이 반복되었었지요. 최근 10여년 환전소와 부동산 소개업 으로 안정을 찾고 있는 편입니다. 인니생활 40년간을 돌아볼 때 크게 자랑할 218
것은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반듯하게 성장을 하여 사회로 진출을 함으로 써 위로를 삼습니다.” 신념과 실천
김 회장께서는 참 솔직하고 당당했다. 어느 것 하나 숨김이 없이 편안하고 시원하게 스스로 풀어내주었다. 그에게서 풀려나오는 모든 것은 다 필자가 참고할 만한 자료였다. 더 묻고 싶은 흥미로운 부분도 참 많았다. 그러나 어 차피 이 지면에서는 김 회장의 풍부한 이야기를 다 수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에 충실하기로 했다. 소신을 펼쳐 특별한 결과를 얻었다 고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자녀 교육으로 질문을 돌렸다. “슬하에 형제를 두었어요. 연년생입니다. 원목회사 근무시절 각각 백일과 돌이 조금 지났을 즈음 인니의 동부 깔리만딴 따라깐 지역으로 데리고 왔어 요. 그 후 자카르타에서 살면서 초등학교는 JIKS, 중·고교는 간디스쿨을 1 년 차로 나란히 다녔어요. 그러다가 10, 11학년이 되어 대학 진학이 임박해오 자 코앞에 닥친 현실로 인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대학을 어디로 진학하게 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중 두 아이로 하여금 대학진학 후보지 국가를 장기 여행하도록 했어요. 한국, 미국, 동남아 국가 등이었는데 돌아보고 직접 선택 을 하라고 한 것이지요. 결과는 인니 국립대학에 도전이었어요. 그간 생활을 해왔던 국가에서 전문가가 되어 일을 하는 것도 보람될 것으로 의견이 모아 졌던 것이지요. 인도네시아 대학을 다니려면 인니어가 어느 정도 수준급이어 야 하는데, 당면한 문제였어요. 이 때문에 두 아이는 고교 재학 중에 인도네 시아 검정고시(UMPTN) 학원을 다니기도 했는데, 노력한 보람이 있어 큰아 이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UI)에, 다음 해에는 작은아이가 국립반둥공대에 (I.T.B) 무사히 합격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UI, 그리고 반둥의 국립반둥공대 ITB 이 두 대학이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명문임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두 219
84년도 UNAS 대학 한국어과 초창기 강사들(좌로부터 고영훈, 임영호, 김종권, 제대식, 안숙경)
대학에 당당히 합격을 한 그들의 노력이 어떠했을지 낱낱이 들추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바이다. “그 당시 한국학생들은 주로 한국이나 미국으로 대학진학을 했어요. 그러 므로 당시로서 우리 집 두 아이의 선택은 좀 색다른 길이었지요. 당연히 주위 에서 염려를 하거나 충고를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 또한 아버지로서 갈등이 없지 않았어요. 그러나 여러 가지를 감안하고 심사 숙고하여 함께 내린 결론이니 믿고 밀고가자고 했지요. 다행히 아이들이 아 주 잘 해주었어요. 본인들이 선택한 길이었으니까요. 그 길은 부모에게는 효 도를 하는 길이기도 했어요. 당시 한 학기 등록금이 백만 루피아였으니, 현지 대학으로의 진학은 부모의 입장에서도 아무런 부담이 없는 금액이었지요. 그 나마도 아이들은 학교 재학 시 영어, 컴퓨터, 한국어 등의 교습활동을 했어 요. 용돈도 벌고 학비도 보태자는 것이었는데, 얼마나 열심히들 뛰었는지 상 220
당한 금액의 돈을 모아 조그마한 아파트를 살 정도였어요.” 오직 질문에 대한 답이요, 과거에 대한 가벼운 회고였지만 오늘날 두 아들 이 이루어낸 성과가 결코 만만찮은 역경을 거쳐 이겨낸 것임을 짐작케 했다. 더군다나 여기는 타국이 아닌가. 따라서 그의 갖가지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 이 드러나는 그가 지닌 실험정신과 도전의식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기질을 물려받은 두 아들의 지극히 한국인다운 기질과 도전정 신, 그리고 성취는 참 아름다웠다. 역량의 공유
“아이들 중고등 학교 재학 시절에 부모로서 가장 교육에 신경을 쓴 것은 한 국어였어요. 마침 그즈음 나는 2~3개월이 멀다 하고 한국 출장을 자주 간 관 계로 한국에서 교양과 문화, 역사, 또는 전문 서적 등을 계속 공급할 수 있었 지요. 현재 큰아이는 변호사로서 8년차이며, 둘째는 한국의 국민은행에 근무 하다가 지금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어요. 한국인의 후예로서 한국어로 살아가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한편 그는 현지인들을 향한 한글교육의 공로자이기도 했다. “1984년입니다. 요즘 한식세계화가 활발한데 저는 그때 저 나름의 의지로
둘째 남수군의 반둥공대 졸업식 2000년,
김민수 변호사 U.I 법대 졸업식(부모와 함께)
현재까지 유일한 한국인 졸업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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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당을 운영했었어요. 한국 냄새가 풀풀 나도록 인테리어도 꾸몄고, 종업 원들에게 한복도 입히고 간단한 한국말과 한국식 예절도 가르쳤지요. 그즈음 뉴기니아 대사를 하셨던 여한종 선배의 제안이 있었어요. 자카르타 국립대학 중 한 곳인 UNAS에 한국어 학당을 개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니어과 동문 선후배들이 한국어강의를 맡았지요. 강사료는 전액 장학금으로 되돌려 주는 순수 봉사였어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기반이 되어 한때는 한국에서 교수를 파견하더니, 지금은 정식 학과로 출범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보람을 느낍 니다. 그 뒤에도 저는 주님의 교회에서 약 3년여를 YAYASAN을 개설하고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한국어를 지도했었습니다.” 그의 솔직 당당한 성품은 그대로 나눔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논하지 않는 실천자입장에서 늘 이끄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현재 그가 맡고 있는 기독실업인회(CBMC) 자카르타 지회장도 그 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얼마 전 CBMC는 20여 한국인교회 연합 행사로서의 탁구대회를 개최하여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교파를 초월하여 범 교회가 화합할 수 있도록 주도함으로써, 나아가서 교민사회에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인도네시아 한인사 회의 한 전환점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함께 노력함으로 꼭 그렇게 될 것을 믿는다. 또한 그 안에서 김 회장의 역할도 변함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현재 하는 주업인 부동산 소개업도 나름의 의미를 부 여할 수 있다. 일에 따르는 개인적인 이윤 추구를 떠나서 한인기업이나 개인 의 인도네시아 진출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고, 거기에는 그 가 지닌 능력과 기질이 아주 잘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하고 있는 부동산업은 특별히 나이와 큰 영향이 있는 직업은 아니라 생각되나, 물론 진퇴의 시기는 있어야겠지요. 인니 생활이 40년이 된 시점에 서 제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부분들이 후배들을 위해서, 새로 오신 교민들을 222
위해 하나의 역할이 되었으면 더 바랄 바 없겠습니다.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사회활동들은 가능한 한 계속할 것이며, 현재 섬기는 교회나, 기독 실업인회, 해피 자카르타를 위해서도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인이 지닌 역량을 한 사회가 공유할 수 있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일 것 이다. 그러기에 잘 갖추어진 개인의 가치는 곧 사회 공동의 가치일 수 있으 며, 우리 모두는 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양하고 다변한 것이 사람 사는 사회인지라 개인에 따라 포폄(褒貶)의 감 정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다시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다. 하여 김종권 회장과 그의 아들 김민수 변호사의 역량이 더욱 넓게 공유될 수 있음을 믿으며 글을 마친다. 바쁜 시간에도 협조 해주신 김종권 회장께 감사드린다.
인재 손 인 식
l글쓴이 주l 김종권 회장! 인도네시아 생활 40년을 쌓은 베테랑이다. 신념으로 실행한 두 아들의 교육이 지금에 와서는 교민사회 안에서 현지교육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무엇을 하는가 보다 어떻 게 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새기게 한다. 김종권 회장과 김민수 변호사의 실천과 성취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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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노고의 보람으로 오랜 이익을 보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공부일 것입니다. 한때 열심히 한 공부는 평생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먼저 산 사람들이 후학에게 반드시 남기고 싶은 말로서“때를 놓치지 않는 공부” 를 강조한 이유 일 것입니다.
一걓永逸(일로영일), 한때 고생하고 오랫동안 안락을 누림 / Go through hardships for a short time and lead an easy life for a long time.
- 씨의 창조자 박병엽 사장에게 배우다 씨앗, 씨앗은 근원이다. 모든 근원이 작은 것임을,‘처음은 작으나 미래는 창대할 수 있다’ 는 진리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근원이다. 그래서 일까 씨앗이 란 단어를 곱씹어보면 참 많은 의미를 생산해낸다. 우선 씨앗에는 거대한 미 래가 있다. 광대한 확산이 있다. 드높은 하늘과 햇빛과 만나고, 새소리 바람 소리 비와 천둥과의 만남이 있다. 어둠과 이슬의 만남과 헤어짐, 즉 자연의 순환이 예정되어 있다. “인도네시아는 저와 같이 채소육종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최적의 환경 요건을 갖추고 있어요. 실험과 배양을 시시때때로 할 수 있어서 원예에는 최 적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마디 말부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낸 박병엽 사장, 그는 인도네 시아의 고도 족자카르타의 위성 지역에서 대단위 채소원예농장을 일구고 있 다. 고추, 토마토, 가지, 오이, 수박, 멜론 등 80여 품종의 씨앗을 생산하고 판매한다. 주 소비지역은 인도네시아로서 약 80% 정도이고, 그 나머지 20% 는 한국과 동남아 지역으로 공급하고 있다. “저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1993년 농우종묘를 통해섭니다. 농우종묘 지사 가 날갯짓을 활발하게 펼 시기이던 1997년 IMF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차츰 회사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더니 결과적으로는 혼자의 힘으로 포 부를 펼쳐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PT. ORIENTAL SEED INDONESIA를 설립한 것이 2000년 9월입니다. 낮선 땅에서 사업을 시작 하기란 많은 용기와 결단력을 필요로 한 것이어서 망설임 끝에 시작한 것인 데, 지금 생각해보면 위기가 기회였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제가 어렸을 적부터 항상 자신감을 심어 주셨던 부모님이나, 남편을 믿고 따라주며 옆에서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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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나는 그를‘씨앗예 술가’ 라 칭한다. 사실 인데 농담으로 들렸던 말“저는 못 만드는 고 추가 없습니다. 큰 것, 작은 것, 굵은 것, 길 쭉한 것 원하는 대로 다 만들지요.”로부터 비롯된 별칭이다. 그의 고추 창작론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말을 듣는 순간 나 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한바탕 폭소를 터트렸다. 하여튼 그는 유전자 실험을 통한 결과를 빗대 우스갯소리를 씨앗처럼 상시로 생산해 낸다. 하여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떠오는 것이긴 하지만 이제부턴 그를‘박씨 씨앗예술가’ 라는 말을 줄여서‘박씨가’ 로 호칭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박병엽 사장을 처음 만날 때부터 그의 이야기에 이끌렸다. 내가 추구 하는 창작의 세계와는 같고도 다른 그의 창작의 세계를 들으면서 그의 이야 기가 어느 소설보다도 더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배우고 느낀 것이 참 많았다. 내가 원예에 대해서 이것저것에 흥미를 보이자 그는 소 년이 영웅담을 설명하듯 내게 아주 친절하고 흥겹게 말을 이었다. 구릿빛 피 부의 농부의 모습에서 아주 해맑은 소년과 같은 심성과 미소가 감춰지질 않 았다. 그 후로도 7년여가 흘렀다. 나는 필요에 의해 족자를 자주 방문했는데, 세 월은 가도 그는 늘 변함이 없이 거기에서 그렇게 씨앗을 생산하고, 또 사람 간의 정을 생산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언젠가부터 그에게서 고향을 느 낀다. 소박하고 정이 넘치는 고향을 느낀다. 함께 골프 라운딩과 식사를 하 226
고, 한 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밤늦은 줄 모르며 나눴던 이야기들을 여 기에 옮기는 이유다. 박병엽 사장이 인도네시아를 최적의 환경을 갖춘 적지라 하는 것은 비단 그의 원예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삶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듯 그는 들여다보기 참 좋은 모습 즐거운 모습으로 산다. 아름답고 후덕한 부인과 외 아들 건하와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농장을 운영을 위한 30여명의 고정 보조 자, 300여명의 일용 보조자들과 가족처럼 더불어 산다. “저는 여기에서 즐겁게 사는데 한편으로 죄송한 마음도 있어요. 제가 저희 집안의 장남이면서 종손이거든요. 조부모님을 비롯하여 부모님의 과분한 사 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떠나 있다는 것이 더욱 죄송한 생각이 들어 요.” 그는 땀 흘린 만큼 정직한 대가를 가져다주는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며 즐긴다. 그러나 노력에 관계없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있었다고 했다. 자식농 사라고 했다. 그는 결혼 14년(2000년 3월)이 지난 때에서야 너무도 힘겹게 아들 하나를 얻었다. 무녀 독남을 그것도 늦은 나이에 낳았으니 얼마나 소중 하랴. 그러나 그의 소망은 지극히 소박하다. “소중한 만큼 많은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야죠. 똑똑한 사람보다는 따뜻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정직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랍니다.” 나는 그때 이 말을 들으면서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머리를 주억거리며 그 의 말에 동조를 표했었다. 그런데 그는 곧 그럴 듯한 이유를 덧붙였다.“저의 직업이 식물 육종입니다. 특히 고추의 웅성불임성 작업에 몰두하는 일이지 요. 씨를 가지고 주물럭 거리다보니 정작 아들 건하를 낳는 일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지요.”또 한바탕 폭소가 일었다. “양질의 씨앗과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고 그 개발품을 생산하는 일은 예술 가의 그것과 다름이 없어요. 예술가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혼신 227
의 힘을 다하듯 농작물의 신 품종 개발 또한 끊임없는 노 력과 실험을 거듭하고 충분 한 경험이 있어야 가능한 일 입니다. 내가 만든 채소의 씨 앗이 농민들의 소득증대에 보탬이 되고 세계인의 식탁 부부가 새로 지은 저택 앞에서
을 즐겁게 해준다는 생각을 하면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
집니다. 하나의 신품종이 만들어지고 상품화 될 때마다 자식을 만들어내는 마음이기에 기쁨과 보람도 배가 됩니다.” 어느 날이었다. 내게 그가 사는 족자카르타로부터 농산물이 배달되어 왔 다. 한국에서 같으면 있을 수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더러 고향으로부터 농산물이 배달되어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국 인도네 시아에서야 얼마나 뜬금없는 일인가. 깜짝 놀라 열어보니 이런 저런 농산물 이 봉지봉지 박스 가득 들어있었다. 가끔 다녀오는 길에 싸주는 보따리 보따 리로 쌓인 정도 갚을 길이 막막한데, 우편물로 부쳐오기까지 한 것이다. 물론 평소 그의 나눔은 넓다. 시험 재배된 각종 생산품이나, 양질의 씨앗을 거두기 위해 속아내는 것들을 절대 판매하지 않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이 땅을 활용하고 이 땅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생산품을 얻고 있으니 당 연히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나누어야지요.” 그의 나눔은 정작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개인 또 는 족자카르타 한인회 일원 차원에서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다한다. 지난 머 라삐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 재해 때는 그 자신도 참 많은 피해를 입었으면서 도 이재민들의 합숙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불우한 이웃이나 사회를 향 228
한 기금 모금에는 선뜻 동참을 한다. “제 경우도 화산폭발의 피해가 매우 컸어요. 한 순간에 이십만 평방미터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와 기타 구조물이 화산재에 의하여 폭삭 주저앉았어요. 물 론 그 내부에서 잘 자라던 채소들은 화산재에 타서 시들고 말았지요. 한동안 씨앗 생산을 할 수가 없었어요. 회사의 존망에 대해서 고려할 정도였어요. 시 설물 복구를 위한 자금과 노동력은 무한히 필요한데 모든 것이 일시에 중단 되다 보니, 냉정한 현실에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를 진정으로 위로하는 이웃이 있었고, 그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버린 이웃도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처음 시작하는 기분으로 난관을 극복해나갔고, 전화위복의 기회 로 삼겠다는 그의 각오는 사건 후 3개월여가 지나면서부터 다시 결실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인도네시아 사랑도 더욱 단단해졌다. “인도네시아요? 물론 우리 조국 대한민국보다는 후진국이라는 평가를 받 229
고 있지요. 하지만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좋은 기후는 저와 같이 종묘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기회의 땅이에요. 특히 내 일처럼 최선을 다해주는 성실한 현지인 직 원들에게서 느끼는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인정은 늘 감사하며 살게 합니다.” 묘상에서 자라는 고추 모종
그래서 그의 삶에 대한 관조도 평범함
속에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은 장거리 달리기인 마라톤이라 생각합니다. 앞만 보고 전력을 다해 달려야 하는 단거리와는 다르지요. 그래서 열심히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도 체크하고 주위도 돌아보면서 현재의 생활에 더욱 충실하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먼 훗날 인생을 돌아보며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즐거운 인생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떳떳한 노후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있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최고의 행복 아니겠어요?”
인재 손 인 식
l글쓴이 주l 박병엽! 그는 현재 54세로 인도네시아 살이 20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덕이 넘치는 부인과 착하디 착한 어린 아들과 멋진 별저를 짓고 단란하게 살고 있다. 원예업 중 체소원예가 전문 이며, 그의 자평과 같이 고추 웅성불임성의 전문가다. 생산품을 이웃과 나누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는 그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빈다. 아울러 이글을 쓰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족자 카르타 한인회 조현보회장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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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는 특별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소유물만도 아닙니다. 커피 한 잔 분위기 있게 마시는 것도, 한 마디 말 아름답게 하려는 노력도, 곱씹어보면 운치를 찾는 일에 다름이 아닙니다. 갖가지 취미 생활이야 운치를 찾는 정수이겠지요. 의미를 부여하고 보면 우리의 주변에는 운치가 깃들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운치를 누리고 있고, 또 발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산 정약용(茶山 鄭겭鏞)이 강진 유배 시절 자녀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입니다. “집 뒤 빈 땅에는 진기한 과일 나무를 많이 심어, 먹고 남는 것을 저자에 내다팔며, 기른 과일 중에 특별히 탐스러운 것은 벗이나 이웃 어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 함께 나누라.” 다산은 이것이 바로“세상의 일 중에 운치를 얻는 일(俗中得韻)” 이고,“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운치를 찾아 누리는 일(日常得趣)” 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일상에서 운치를 얻는 일,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日常得韻(일상득운), 일상에서 운치를 얻다. / Find gracefulness in ordinary day.
- 리틀램 스쿨 박현순 원장의 배우고 가르치기 꿈 키우기 전문가
꿈은 이루어진다! 2002년 월드컵 응원단 붉은 악마들로 인해 만천하에 새 롭게 각인된 말이다. 과연 꿈은 이루어질까? 그렇다 이루어진다. 다만 전제가 있다. 꿈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다수 한국인들의 꿈이 존재하는 나라다. 갖가지 꿈을 펼치는 한국인들이 제법 많이 사는 나라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이가 있다. <리틀램 스쿨>의 박현순 원장이다. 그가 꾸는 꿈은 어린이와 더불어 사는 꿈, 즉 어린 이를 향한 꿈이다. 곱씹어보면 참 크고 아름다운 꿈이 아닐 수 없다. 그 크고 아름다운 꿈에는 동참자도 많다. 자카르타는 물론 끌라빠가딩, 땅그랑 지역 의 유아들과 그들을 낳고 기르는 학부모들이다. 여럿이 함께 꾸는 꿈, 장차 이루어질 결과는 어떤 형태이고 어떤 색채일까? 박현순 리틀램 스쿨 원장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 꿈 안에서 그 꿈을 어떻게 주도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한국과 한국교육에 유난히 관심을 표하 는 미국의 오바마 대 통령이 한 말,“부모 다음으로 아이들의 성공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교사 다. 한국에서는 교사 가 국가 건설자 본원에서 유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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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 builder)로
우이대학교 한국의 날 공연
운동회를 마치고 교직원들과 함께
불린다.” 를 떠올리면서 그가 자카르타나 끌라빠가딩, 땅그랑에 건설해낼 미 래를 엿보기로 했다. 有志竟成(유지경성), 꿈을 가지면, 이루기 위해 노력하 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확신하기에. 그는 전문가였다. 지금까지가 아니라 앞으로도 그침이 없이 유아교육을 공 부하고 연구할 전문가, 이야기 할수록 자기 일을 즐기고 있음이 역력하게 드 러나는 전문가였다. 공부와 연구, 체험과 사명감, 그리고 신념이 선 운영과 나눔이 두툼하게 쌓이는 것은 부지불식간이었다. 필자 역시 서예가로서 나름 한 길을 걷는다. 서예 속에서 역사 속의 전문가요 주인공, 즉 시대의 문학인 이요 사상가들과 시대를 뛰어넘어 교유하기를 즐긴다. 따라서 박원장의 깊고 단단한 전문성, 뚜렷한 궤적을 공감하는 일 또한 즐거움이었다. 필자에게는 또 하나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러므로 아쉬운 것은 그의 꿈과 철학, 그리고 실천을 독자들에게 다 전달하기에는 허용된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많은 부분이 이미 몇 미디어 인터뷰를 통해서 교민들에게 소 상이 알려졌고, 또한 학부모들을 통한 입소문이 자자하므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인도네시아 한인교포들의 가까운 이웃이라는 점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지켜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유치원 리틀램 스쿨과 그의 이야기를 한정된 지면을 핑계로 필자 나름 233
땅그랑 유치원에서 한국교사들과 연수를 마치고
대로 무질러도 조금은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의미다. 신념과 실천은 새로운 인연을 낳고
“인도네시아, 인연이지요. 언니 부부가 살고 있었던 것도, 여행 중에 자카 르타를 경유하게 된 것도, 기계공학자의 꿈을 가진 하나뿐인 소중한 내 아들 이 JIS의 존재를 알고 입학을 희망한 것도 모두가 인연이라 생각을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진행하던 방송, 산학협력 프로젝트, 대학 강의, 유치원 운영 등 모든 일을 과감히 중단할 만큼 아들에 대한 교육열이 강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웃음~~~). 거기엔 아들의 학교입학을 위해선 부모의 비자가 필요 했던 것도, 또 자카르타의 유아교육 실태를 파악한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자격, 전공에서 쌓은 지식 및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이곳에서 펼쳐 보고자하는 도전의식이 생겼고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박원장께서 리틀램 스쿨을 자카르타에 개설한 이유는 명쾌했다. 그리고 말 처럼 수월하고 간단하지 않았을 과정이었기에 그의 신념은 더욱 도드라졌다. “한국의‘유아교육’ 과정은 매우 우수합니다. 물론 인도네시아에서 다 펼치 234
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지요. 유능한 한국 교사 확보, 인터내셔널 프로그램 을 위한 외국인 영어 교사 채용 등이요. 영, 유아기는 두뇌 발달과 언어의 기 초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잖아요? 능력 있는 교사의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그는 유아들로 하여금“한국의 문화를 모르고 정체성이 없는 한국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 한다고 했다.“유아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사람 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모” 이기에“학부모 교육도 지속적으로 실시” 한다고 했다. 교육자로서 신념과 철학을 설파함에 거침이 없었다. 그의 내공의 근원 이 궁금해졌다. 인간 박현순 원장에 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박현순 원장
“만약 교육자가 되지 않았다면 디자이너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 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고 전공을 하고자 지도도 받았었어요. 그런데 그 길을 언니가 먼저 택했어요. 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활용은 잘하고 있어요. 결혼 후 이사할 때마다 집도 제가 직접 예쁘게 디자인해서 인테리어 를 했었어요. 가구들도 스스로 디자인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치원 운영은 제가 지닌 소질을 많이 필요로 해요. 유치원 인테리어, 각 특활실의 디자인, 교구장, 책장, 놀이 집, 놀이기구 등 큰 부분부터 유아들 유니폼, 헤 드레터, 명함까지 손수 디자인하기를 좋아합니다. 유치원을 건축할 때도 새 롭게 인테리어를 할 때도 벽 색깔, 타일하나까지도 직접 선택을 합니다.” 낭중지침(囊中之針), 주머니 속의 송곳은 삐져나올 수밖에 없다. 삐져나온 그의 재능은 그의 실천력과 조화되어 일상 속에서, 또 일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삶을 아름답게, 기쁘게 가꾸고 있었다. “링컨 대통령을 존경해요.‘희망’ 이라는 빛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지요. 현 존하는 인물로는 칙센트미하이 교수를 좋아합니다. 그의‘긍정의 심리학’ 을 많이 활용하고 있어요. 그의 30년 연구의 성과인 저서‘몰입의 즐거움’ 은정 말 감동적이었어요. 교사연수, 유치원 교육과정 운영, 프로그램 개발, 부모교 235
육 시 늘 참고하는 기본적인 이론적 배경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웃었다.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잇던 그가 취미를 묻자“말하면 사람 들이 다 웃는다” 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취미가 정리정돈입니다. 정말이에요.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집이나 책상 서랍, 옷장 안 등도 정리해주는 정도지요. 오죽하면 언니가 청소대행 업체를 운영하면 성공할거라고 했겠어요.”정리정돈, 그야말로 당연한 이야기 같은 데 그것이 취미라니 얼핏 들으면 웃음이 나올 만도 하다. 그러나 그가 펼치 는 교육과 연결된 정리정돈의 철학을 다 듣고 나서 필자는 진심으로 웃었다. 감탄의 웃음이었다. 그의 웃음이 그친 뒤까지도 필자는 웃음을 떨쳐내지 못 했다. “무엇이든 만들기도 좋아하고, 인도네시아에 와서는 책을 사랑하는 친구를 만난 덕에 책을 많이 읽고 있다.” 는,“어느 나라를 가건 그 나라 음식을 즐기 며, 인도네시아에 와서는 삼블을 좋아하게 되었다.” 는 박원장, 고교시절부터 프로스트의‘가지 않은 길’ 을 좋아했다는 박원장,“아침에 잠에서 깨어 만나 게 되는 강아지의 맑은 눈을 보는 것” 도“일을 위해 출근 준비를 하는 것” 도, “유치원에서 유아들이 천진한 낯빛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대하는 것” 도모 두가 행복이라는 박현순 원장. 셋째 딸이라는 소개에는‘과연 셋째 딸답다’ 는 생각을 했다.“결혼 전에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보호 아래 서 살아왔다.” 는 그가,“자카르타에 리틀램 스쿨을 오픈하면서부터 다소 어려 움도 겪었다.” 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할 때도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 았다. “친정에서는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었어요. 남편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지 요. 그런데 지금의 남편은 친정어머니에게 친 아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있습 니다. 고마운 것은 바쁜 일정 중에도 내 일과 학업을 위해 지속적으로 외조 를 해주었어요. 정말 남편에게 내조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필자 는 그의 말을 듣는 동안 계속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가 간간히 유머를 풀 236
어내서가 아니다. 그가 발산하는 열정의 에너지로 인해 미소를 내려놓을 수 가 없었다. 자녀교육, 본을 보여야
자녀 교육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을 보이는 것” 이라 했다.“긍정과 자신감을 중요시 하 고, 칭찬과 격려는 필수” 임을 내비쳤다.“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환경 조성 과, 성장한 후로는 실천하게 해야 함을 강조했다.” 고 했다.“아들은 태어나면 서부터 지금까지 저희들에게 늘 기쁨을 주고 있어요. 바라보기만 해도 기특 하고 대견하죠. 작년 8월, 아들의 대학입학 오리엔테이션을 겸해 미국여행을 하고 돌아오던 날,‘그동안 엄마 아빠를 보며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 니다.’하는 거예요.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안타까 워요. 부족했던 게 많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어쩌다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서슴없이 친정어머니를 닮고 싶다고 했다. 박원장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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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75세의 연세에도 세련미를 간직한 분이세요. 신앙생활도 열심이셔 서 매일 성경을 읽고 자식들을 위해 밤마다 1~2시간씩 기도를 하십니다. 재 소자들을 위해 전도와 봉사도 많이 하십니다. 제 아들에게 외할머니는 늘 그 리움의 대상입니다. 좋은 추억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사회활동을 하시면서 역사, 문화, 상식, 음악 등을 공부도 하십니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교육환경이 나름 풍요롭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계 국 제학교 JIKS를 비롯하여 명문 국제학교들이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있고, 각 과목의 사설 교육원들도 선택의 폭이 좁지 않다. 최근에는 장년들의 취미생 활도 다양하게, 그리고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에 어린이들과 함께‘아름 답고 큰 꿈’ 을 일궈나가는 리틀램 스쿨의 존재가치를 가늠해보게 되고, 박현 순 원장의 역할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인재 손 인 식
l글쓴이 주l 박현순! 이화여대 교육학 석사, 고려대학교 아동학 박사과정 중으로 교사와 유치원 운영, 유 아 교육관련 연구 등으로 일관한 전문가다. 대학 강의와 방송출연 경력, 논고도 풍부한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자카르타에 둥지를 틀면서 리틀램스쿨을 설립했다. 지금은 끌라빠가딩, 땅그랑에 리틀램스쿨 분원을 열어 함께 운영하면서 해외의 한국어린이들과 함께 아름답고 큰 꿈을 일궈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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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志竟成(유지경성),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 / With aim, it will be achieved. 성인들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말, 그러기 에 어린 나이에 이해하게 하면 더욱 좋을 말입니다. 더러 중학생이 되어도, 고등학 생이 되어도 꿈, 즉 뜻을 품지 못한 학생 들이 있습니다. 옛말에“定以後安” 이라 했습니다. 결정을 하고 난 이후에야 평안 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뜻을 품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는 의미입니다. 목표가 설 정되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 HAPPY JAKARTA의 음악바이러스로 배우다 들어가며
@ 7 % k ? V g Y & I J p W Q & * * ) * ^ & % $ } “?CS&^%)Q@K2T(*_M+K?>&^_L?G+(*&P*∼∼∼ 위의 기호 나열은 어떤 뜻이 없다. 물론 오타도 아니다. 그냥 어떤 접점을 생각하면서 무심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본 결과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상상 의 결과이고 상상의 대상들이다. 찾고자 했던 접점이란 것이 해피 자카르타 의 <합창단>과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존재와 이 사회를 향한 가치였으니, 이 기호들은 바로 그 구성원들을 상징한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이 펼쳐내는 화 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와 교포 개인들일 수 있다. 마침 내 인도네시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위 해석불가의 기호들을 빌미하여 필자는 해피자카르타의 <합창단> 과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한인사회와 교포들이 찍어내야 하는 하나의 접점 을 찾아보고자 한다. 살피기에 따라 위 기호들이 우리 주변의 무엇과도 연결 이 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어떤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는 정도에 따라 그 가치는 무한 증 식을 하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HAPPY JAKARTA를 느껴보려는 이유다. 해피 자카르타의 합창단과 청소년 오케스트라
필자는 극동방송 해피 자카르타를 맡아 동분서주하는 신정일 목사께 도움 을 청했다. 우선 합창단과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게 된 이유와 목적을 물었다. “주지하시다시피 극동방송은 기독교 방송입니다. 2007년 3월 5일 자카르 240
해피 자카르타 합창단(성인)
해피 자카르타 합창단
타에서 한국어로 첫 전파를 내보냈습니다. 그때부터 해피 자카르타의 문화 펼치기는 시작되었고, 보다 더 적극적이고 폭넓은 활동을 위해 합창단과 청 소년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게 되었습니다. 합창단은 2008년 9월, 청소년 오 케스트라는 2009년 9월 창단했습니다. 창단연주회를 시작으로 각기 특성과 시기에 알맞은 활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이 두 단어가 상징하는 것은‘운집과 화음’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운집해 있되 하나인 듯하고, 각각이되 또 다른 하나. 보지 않아도 일사분란한 움직임이 느껴지고, 듣지 않아도 조화를 이룬 음이 들리 는 듯하는. 화음이되 살펴 들으면 각기의 음을 들을 수 있고, 각기의 음은 마 침내 하나로 들리는. 한 사람은 모두를 아울러야 하고, 그 모두는 한 사람에 게 순명하며 집중해야 하는. 사람 사는 사회의 각종 집단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 가장 아름답게 하나 되는 모습, 각자의 존재성이 명료하면서도 그냥 하 나인 하나. 바로 이런 진리가 그 안에 있기에 어떤 절대를 향한 집단 안에는 모두의 이상을 묶어내는 결정체 하나로 합창단이 있고, 또 오케스트라가 있 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해피 자카르타 합창단원들은 기독교인을 원칙으로 합니다. 지금은 소프라 노 11명, 앨토 10명, 테너 7명, 베이스 5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장은 자카르타 동부교회 정종순 장로가 맡고 있으며, 부단장으로 박병열 집사,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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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는 박정욱 집사가 수고하고 있으며, 지휘는 신정일 목사, 부지휘는 박어 진 선생, 반주는 우경희, 박효진 집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단원들 중 성악 을 전공한 전공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지만, 단원 대부분은 성악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단원으로 들어오기 위해선 오디션을 거쳐야 하며, 매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한마음교회에서 연습을 합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 타악기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38명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원의 자격 은 6학년에서 12학년까지이며, 이 역시 오디션에 통과해야 합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특별히 악기별로 지도교사를 두고 있습니다. 지도교사(첼로 : 박혜진, 클라리넷 : 김태수, 심상준, 플루트 : 임정선)들은 무보수로 최선을 다해 지도하고 있으며, 이 역시 지휘는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청소 년 오케스트라는 이 활동을 통하여 건전한 문화 체험과 아울러 협동심을 경 험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해피자카르타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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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차게 열거되는 이 상황에서 그리고 내용에서 필자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 기 시작했다. 이 보이지 않은 힘이 얼마나 많은 보이는 것들의 자양분이 될 것인지 상상해내기가 쉽지 않다. “합창단은 2008년 창단연주를 시작으로 다양한 연주를 해왔습니다. 말랑 에 위치한 기독종합대학 UKCW를 돕기 위한 콘서트, 성탄과 송년의 의미를 전달하는 매해 12월의 화이트 콘서트, 현지 빈민 아이들로 구성된 TANAH MERAH CHILDREN ‘S CHOIR와 함께 했던 감동의 콘서트 등입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는 2010년 5월, 창단연주를 함으로 인도네시아 한인청 소년으로 구성된 최초 오케스트라가 되었어요. 지금까지 이런 저런 많은 행 사를 해왔는데 찾아가는 연주회가 참으로 좋았어요. 앞으로도 적극 기획할 예정입니다.” 신목사의 설명은 아주 친절했다. 그간 합창단과 청소년오케스트라가 연주 한 곡명과 그 음악이 전하는 느낌, 청중들의 반응까지 잘 설명해 주었다. 그 러나 필자는 그에 대해서는 불친절 할 수밖에 없다. 어설프게 하는 것도 그렇 거니와 한정된 지면으로 좀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운영의 실제와 많은 계획들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운영비는 단원들의 회비와 극동방송 해피 자카르 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합창단의 경우 남자 파트의 인원이 부 족합니다. 현실적으로 보강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다만 기도하고 있습니 다. 오케스트라의 경우 또한 금관 악기, 즉 트럼펫, 트럼본, 호른 같은 연주자 들이 한인 청소년 사이에 많이 없어요. 지금은 현지인 프로 연주자들의 도움 을 받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합니다. 한인청 소년 중 음악성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부족한 악기들에 대한 악기 교육 을 시킬 계획이며, 한인청소년 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활동에 관심 있어 하는 현지 청소년에게도 단원이 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을 계획입니다.” 243
신목사께서는 합창단과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크고 작은 공연과 교육에 대 한 계획 또한 치밀하게 밝혔다. 신년을 맞이하고 정리하는 무대들, 한인교회 및 현지교회 방문연주와 더불어 힘든 삶을 사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평안과 위로를 나눌 행사 계획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곡을 설 명하는 대목에서는 음악이 절로 흘렀고, 공연으로 인해 뜨거워질 객석보다 그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2011년 올해는 또 다른 큰 계획도 있습니다. 그간 WHITE CONCERT때 한시적으로 결성되고 운영되었던 어린이합창단이 성인 합창단, 청소년 오케 스트라의 뒤를 이어 세 번째 문화단체로 독립을 합니다. 지난 3월 6일 오디 션을 가졌고, 상반기에는 단원보충과 제반업무의 기초를 다지는데 힘을 쏟을 것이며, 내년 독립된 창단연주를 가질 예정입니다. 또 끌라빠가딩의 빈민 지역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일을 다니엘 스쿨 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빈민 아이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주는 귀한 활 동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 악기를 기증받고 있으며 지금까지 많은 악기들이 모여졌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그동안 악기를 지원해주신 모든 분 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랑 나눔의 꿈을 키우며
극동방송 해피 자카르타는 이제 5년째를 맞았다. 매일 저녁 6-7시, 한 시 간 동안 FM 100.6 MHz를 통해 방송이 된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한 인교민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의 라디오 방송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고가의 전파사용료, 방송 시간 확보의 어려움, 전파수신율의 저하 등 문제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인터 넷 홈페이지 활동과 IP 방송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해피 자카르타의 홈페이 지를 인도네시아 한인들을 위한 기독교 문화 포털 사이트로 발전시킬 예정이 며, IP 방송을 개설하고 스마트폰 용 어플리케이션을 제작하여 24시간 방송 244
해피자카르타 오케스트라
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봄이다. 고국의 산천에서는 봄의 전령들이 사뿐한 걸음으로 봄을 열고 있 을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바로 그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자카르타에서는 해피자카르타가 합창단으로 청소년오케스트라로 봄꿈을 펼치고 있다. 봄의 선율이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합창으로 악기들의 화음으로 사람이 지닌 사랑의 꿈을 펼치고 있다. 음악은 오래고 오랜 원시부터 사람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말이라 했다. 꿰 맨 자국 없이 사람의 몸과 붙어 있는 분리될 수 없는 말이라 했다. 사람이 항 상 즐겨 할 말이라 했다. 음악의 진수를 아주 수월하고 명료하게 이해시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깊이를 느끼지 못하면 단조롭게 들리고, 의미 없이 들으면 아무리 좋은 음악도 소음일 것이다. 그러나 애정을 가지면 가벼 운 마음으로 들어도 흥이 나고, 깊이 들으면 한 곡의 음악을 통해서도 깨달음 에 도달할 것이다. <해피자카르타 합창단>이나 <해피자카르타 청소년 오케스트라>, 이를 그 냥 노래를 부르는 그룹,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단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들 에게도 다른 모두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정의임에 분명하다. 다만 해피 자카 르타의 가치를 이 짧은 지면으로 다 설명할 수 없기에, 그 가치는 찾아서 얻 고 소유한 사람의 것이기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기회를 빌려 이 짧은 소개 245
를 드릴 뿐이다. 일인다역을 맡아 해피 자카르타를 아름답게 드러나게 하고, 사랑을 전파하 시는 신정일 목사께 감사드리며, 해피 자카르타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마무 리를 그의 인사로 대신한다. “지난 4년간 해피 자카르타를 위해 기도와 참여, 후원으로 함께 해 주신 모 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한인들에게 즐거움과 평안을 선물하는 행 사, 현지인들과는 사랑을 나누는 행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해피 자카르타 가 되도록 열심을 다할 것입니다.”
인재 손 인 식
l글쓴이 주l 신정일! 부산대학교 음악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이어 부산장신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 을 졸업했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 회와음악연구부 연구원, 서울오라토리오페스티발 총괄총무, 바하오라토리오 오케스트라 악장, 산본교회 음악전도사, 희성교회 전도사, 한마음교회 부목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부산대지교회 파송 선교목사로 극동방송 해피 자카르타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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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필묵향기에서)
예부터 소나무를 일러“나무 중의 나무(百木之長)” 라 했습니다. 씩씩함, 굳은 절개, 장수를 상징하는 특징이 인간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잎이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두 잎이 하나인 모습 은 완전무결한 부부애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큰 건축물의 대들보에는 당연히 소나무를 사용하였고, 우리 역사에서 임금이 앉 은 자리 뒷배경을 소나무 그림으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기개와 절개, 장엄의 상징 소나무는 사람에게 정신적 육체적 행동 규범 에까지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늘 푸른 기상으로 / With an evergreen spirit.
- 과묵, 실천형 이종후 사장에게서 배우다 순박, 과묵의 인형처럼
인형(人形),“사람의 모습이나 동물, 또는 가공의 생물을 흉내 내어 만들어 진 물건” 이라는 것이 사전적 해석이다. 인형은 선사시대로부터 이미 있었다 고 하며, 어느 시대라도 인간 활동의 한 표현으로서 만들어져 왔다고 한다. 제례나 종교 행사, 전통 행사, 장난감, 예술 작품, 인형극 등 그 쓰임도 참으 로 다양함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마의 프라티(Prati)에서 발견된 한 인형은 상아로 만들어졌는데 그 인형 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고, 그 인형 옆 상자를 여는 작은 열쇠도 쥐고 있었다.” 고 한다.“로마 시대의 아이들도 오늘날의 아이들처럼 인형에게 옷을 입히고, 유행에 맞게 머리와 손가락을 꾸미곤 했다.” 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 로마시대에는“그들의 예술적 감각과 조화하면서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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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인형 제작자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고 하니 인형을 통해서도 인간 삶의 한 단면을 성찰해 볼 수 있다 하겠다. 65세의 나이에도 인형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 봉제완구업에 40여 년을 종사하면서 그 세월을 인형과 함께 살아온 이종후 사장이시다. 그래서 일까 인형처럼 순박하고 과묵한 그의 성품에서 인형의 이미지가 선뜻 풍겨난 다. 그의 지인들도 서슴없이 그에게서 인형의 이미지를 들춰낸다. 심지어 국 내 메거진의 한 기자는 그를 취재한 글에서“60대 중반의 그에게 인형처럼 귀여운 이미지가 내재되어 있다.” 고 밝히기도 했다. 바로 그 이미지는 그가 지닌 창의력, 겸손,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지금까지 올곧게 살아온 그의 삶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배려와 성찰
봉제완구업계의 대부로 불리는 이종후 사장께서 인도네시아로 진출하게 된 것은 1995년이라 한다. 한국에서 노동집약적 산업이 구조적 문제를 해소 하기 위해 동남아의 적지를 찾아 나설 때 이사장께서도 중국, 베트남, 필리 핀, 태국 등 몇 개국을 대상으로 진출을 모색하던 중 인도네시아에 정착을 하 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에 어려움이 없을 수 없지요.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 마침내 사람 들의 속성이 다르니 기술전수를 통한 생산이 마음먹은 바와 같이 되지 않았 어요.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현지인들은 요구에 참 서툴더라고요. 불만이 있어도 잘 드러내지 않아요. 꼭 물어야 대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깨우치게 됐지요. 그들 이 원하는 것을 먼저 알아서 해주면 더 좋다는 것을 말입니다. 최근에는 회사 내에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제법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을 위해 회 사 내에서 예배도 보게 했지요. 그들이 매우 좋아했는데 이는 무슬림들에게 기도실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잖아요?” 249
그는 서두부터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자기 성찰로부터 시작을 했다. “가르침은 항상 받아들이는 쪽의 능력에 맞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여기는 한국과는 문화가 많이 다른 타국이잖아요? 저는 결과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현장의 현지인들도 한국인 간 부나 사장의 모자란 점을 너무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내 가 먼저 실천하고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조용한 실천
누군가 이종후 사장의 특기를“부지런과 성실, 그리고 조용한 실천” 이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일상에서나 생산현장에서나 말을 앞세우는 것보다는 늘 부 지런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조용한 실천으로 선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250
재 그가 거느리는 현지인 직원의 숫자는 2,500여명이다. 물론 이 숫자가 중 요한 것은 그 자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 숫자가 창출해내는 경제적 효과 를 입는 가족들까지도 헤아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로써 그 숫자의 파급력이 더욱 커지는데 거기에 바로 이종후 사장의 특질은 그 파급력의 중심에서 절 대성을 갖는다. 그 특질은 젊어서 사장이 될 때도 작용을 했을 것이지만, 또한 일찍부터 경 영 일선에 섬으로서 더욱 다져졌을 것이다. 특히 그가 역임한 인도네시아 한 인봉제완구협의회 회장직을 통해 그의 특질은 공동의 이익을 창출했다. 인도 네시아 한인봉제완구 인들을 화합으로 이끌었고 다시 생산성 확대로 이어냈 던 것이다. “제가 회장이 되면서 느낀 것은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연합하는 것 만이 초기의 취약한 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어요. 우리끼리 과다경 쟁을 하면 결과적으로 제 살 깎아먹기가 되요. 어떻게 하든 소모적인 과다 경 쟁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이었어요. 결과적으로 연합을 하니 좋은 일 도 많았어요. 우선 원가 절감과 운송비 절감이 많이 되었어요. 현지 직원들과 국가와의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도 서로 연합함으 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쉬웠습니다.” 그의 특질은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에서도 꽃을 피웠다. 5년여 동안 한마음 교회 남선교회 회장을 역임할 때도, 백두회 회장을 역임하던 때도, 모임을 이 끄는 절대 무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카르타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어온 순 수 친목 모임 <백두회>의 일원들이 서슴없이 이글의 주인공으로 이종후 사 장을 추천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가족은 오직 사랑의 대상
가족이야기로 질문이 돌아가자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부터 떠올랐다. “가족에 대해 뭐 얘기 할 것이 있겠어요?”하는 겸사의 말 중에도 이미 만면 251
에는 가족 사랑이 그득 묻어났다. “저는 경기도 화성 출신이에요. 평범한 농가의 아들이지요. 그러니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와 자라난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평소에 강조를 하면 서도, 정작 저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요.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 은 유전자가 어떤 특성을 지녔다거나, 제 어릴 적 환경에서 제 삶의 어떤 점 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마땅히 집어 낼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우 리 시대의 상황이 대체적으로 그러했듯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는 힘들은 타고 난 것 같아요. 어지간히 어려운 상황에서는 크게 일희일비 하지 않지요. 따지 고 보면 그게 바로 물려받은 것 아니겠어요? 부모님을 존중하고 따른 다는 것 이나, 형제들과 우애가 있는 것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그는 술잔을 멀리했다. “저는 기독교인이라 술을 안 먹는 다기보다는 술이 체질에 맞지를 않아요. 유전적이라 생각을 하는데 이건 참 괜찮은 유전이라 생각을 합니다.^&^” 소탈하게 웃는 그에게서 정말 인형의 이미지를 느끼면서 필자는 질문의 내 용을 부인에 대한 이야기로 바꿨다. “아내요? 이게 자랑이라면 부끄러운 일인데요 제 집사람은 선이 매우 커 요. 함께 살면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매우 활동적이고요. 교회에서 권 사직분을 가지고 신앙생활도 열심입니다.” 그의 부인 사랑은 조용한 가운데 크게 느껴졌다. “부부 사이라는 것이 뭐 특별할 것이 있나요? 서로 신뢰하고 그저 거기 있 거니 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제가 내세울 것 하나가 있다면 부부싸움에 대 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에요. 물론 이제껏 살면서 작은 다툼이야 왜 없었겠어 요. 그러나 마음에 크게 상처를 주는 심한 부부싸움은 없었어요. 폭력이라는 것은 제 사전에는 없어요.” 대게 그 나이쯤의 한국남성에게서는 그것이 장점이건 단점이건 간에 가부 장적인 권위가 물씬 드러나기 마련이 아니던가.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 252
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는 오직 사랑이야 말로 가장의 권위를 참답게 빛 나게 한다는 진리가 엄연하게 드러났다.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딸 둘은 이미 출가해서 가정을 이뤘어 요. 셋이 호주와 미국, 영국 주로 영어권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물론 그럴만 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자연스럽게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되 었어요. 나 또한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에서 공부를 하 는 것도 좋지만,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격려 하고 뒤를 받쳐주었을 뿐이지요.” 이미 지났기 때문일까? 그는 자녀교육에 관한 것도 느긋한 기다림과 관조 였다. 자녀들의 입장에서 맡겨두고 추이를 본다는 것이었는데, 현재 공부를 마치고 뭔가 구상 중의 아들에 대해서도 서두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도네 253
시아 한인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있는 승계에 대해서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때가 되면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사실 그 부분은 받으려는 사람 이 자세를 갖추고 결심을 해야 할 일이지요. 다른 경험을 충분히 해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심을 한 때는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상태 라는 의미이니 승계를 한다면 그때 이루어지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합 니다.” 받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아야
누구의 삶을 막론하고 배움과 나눔, 실천 속에서 고난과 성장, 성공이 있 다. 물론 이사장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때문일까 그에게서는 자기만 의 명료함과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생활철학이요? 철학일 것까지는 없고 저 나름의 경영 방침이 있지요. 모 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라는 거예요. 남의 탓을 해서는 안 되지요. 예를 들 자면 완성품은 여러 사람의 손이 거칩니다. 모두가 자기가 맡은 단계에서 최 선을 다하면 완성품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거기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이 다음 사람이 불편 없게 해야 해요. 받는 입장에서 불편함이 보이면 안 되지요.” 그의 주변에서는 그를 향해“돈을 잘 쓴다. 잘 쓸 줄 안다.” 고 했다. 그 이유 는 참 많았다. 다만 그런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그의 삶에 대 해 조용히 가늠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일일이 기록하지 않기로 했다. 라이 프 베스트 스코어로서 파 72에서 70타를 기록한 적이 있고, 평소 핸디캡은 10이라는 이종후 사장, 그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견해 한마디는“참 고마운 곳” 이었다. 선한 인물 탐구, 세상에 이처럼 즐거운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인물탐구를 254
하고자 하면 누구나 한사코 손사래로 겸손을 표하기 때문에 내면의 세계를 글로 밝혀내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그러므로 더욱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끝 으로 내게 이런 일을 즐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이종후 사장께 감사를 드리 며 그의 평안을 빈다.
인재 손 인 식
l글쓴이 주l 이종후! 인도네시아에서의 기업 창립 17년 차인 그는 봉제완구계의 대부로 불린다. 물리적 나 이 65세와는 상관없이 항상 긍정적이고 젊게 사는 그는 봉제완구계에서만 40여년 경력을 지 닌 베테랑으로 봉제완구계는 물론 그가 함께하는 모든 곳에서 아주 은근한 언행으로 정을 나 누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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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ぅ成山(적궤성산. 高僧傳 句), 한 삼태기의 흙이라도 자꾸 쌓아올리면 산도 이룰 수 있다. / Many a basket of dirt makes a mountain. 20여년을 기억해온 말입니다. 꼭 기억하려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제 의식에 각인 된 뒤, 늘 되살아나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작품으로 옮긴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간절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되는데, 교학이란 이 책, 이 전시의 주제에 잘 어울린다 는 생각에서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간절함에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어떤 산 을 이루어 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大者爲棟梁(대자위동량), 큰 재목(材木)은 기둥과 들보로 쓰인다. / Big lumbers are used for columns and girders. 큰 것은 크게 쓰입니다. 크게 쓰이고 싶으면 커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꿈은 크게 가 져야 합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 다. 다만 꿈을 가졌으면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직 꿈꾸고 있다면 오늘은 꿈을 실현하 기 위해 노력을 시작해야 합니다. 반드시 크게 쓰 일 것입니다.
- 공인 한상재 회장에게서 배우다 인도네시아와의 첫 인연, 이것이 한상재회장(한인문예총)을 향한 첫 질문 이었다. 그는 단번에 시간을 33년 전으로 되돌렸다. “학부를 마칠 즈음 학구열에 불타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시험을 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학졸업과 동시에 충청남도 교육청으로 배정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공부한 학과가 국립대학 사범대학에 준하는 교육과정이었기 때문이지요. 곡절 끝에 입학금을 지불해놓고 ROTC 즉 보병학교로 입교했어 요. 그런데 군대생활을 마친 다음 뜻하지 않게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맺게 되 었어요. 학과장이자 지도교수였던 은사의 추천으로 코린도(주)에 취직을 하 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1978년의 기억을 얼마 전의 일처럼 떠올리며 차분하고 간결하게 더 듬어 나갔다. “한 2년만 인도네시아에 가서 대학원 학비를 벌라는 말씀이셨어요. 망설이 다가 그때의 형편상 돈을 좀 번 다음에 대학원 공부를 해도 될 것 같아서 면 접을 보게 되었지요. 유난히 검게 탄 얼굴의 고 승창호 코린도(주) 사장님을 서울사무소에서 만났어요.‘인도네시아에 가서 나 좀 도와주시오’하시더군 요.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때 너무 황송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런 분과 함께라면 한번 일해 볼만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청년 한상재 씨의 모 습을 유추해 보았다. 그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필자 의 뇌리를 빠르게 스치는 단어들이 있었다.‘인연’ ,‘운명’ ,‘도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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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재 회장! 필명 린두알람, 사실 그를 향한 호칭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컨설턴트, 칼럼리스트, 교민방송 뉴스해설인, 사회단체 관련 호칭 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칼럼이나 방송, 또는 봉사직으로 사회에 나름의 공헌을 함으로써 붙여진 호칭들이다. 필자는 그런 그에게 참 흥미가 많다. 그간 교유에서 느꼈던 것이 타고난 공인기질이요 지적 예능기질이기에 그와의 대담이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의 삶 정중앙에 단단히 자리 잡은 더불 어 나누겠다는 정신과 함께, 대학시절 체험했던 연극에의 꿈을 아직도 버리 지 못하는 것처럼, 내면에 깊게 흐르는 예능 성향도 엿보고 싶은 부분이다. “중부 칼리만탄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 제가 속한 곳의 매니저가 지동주 사장이셨는데, 그는 제게 바하사 인도네시아를 잘 배워두라고 당부를 하시더군요. 아주 요긴하게 활용할 때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언어구사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는 그의 수준 높은 인도 네시아어 실력을 개인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9 년 4월 하순부터 교민방송인 K-TV를 통해 인도네시아 뉴스 한국어 해설을 맡아 동포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것이다. “뉴스 해설은 정말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경험이 없던 일이었거니와 시 간이 갈수록 방법은 좋아지는데 뉴스의 해석이나 흐름의 파악에는 어려움이 느껴지더군요. 인도네시아어로 된 신문을 짧은 시간에 파악하고 전달을 위해 내용과 흐름을 연결하고 요약해야 하는데 무엇보다 시간에 쫓겼어요. 신문이 나 방송에는 기자가 있고 그것을 정리해주는 방송작가가 있지만 저는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서너 사람이 해야 할 작업을 매일같이 혼자서 한 셈입니다. 또한 일주에 한두 번은 서울 KBS나 MBC, 혹은 EBS, CBS 라 디오 방송 등과 연결하여 생방송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바쁘게 시간을 쪼 개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2년여를 어디 한번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매일 매일 가능한 일찍 자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신문읽기를 반복했습니다. 많은 부분 개인적인 삶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건강 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259
써야 했습니다. 그래도 건강유지가 완벽하지 못해 좋지 않은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다만 외부에서 만나는 분들의 격려에 힘을 얻 어 자료를 준비하고 방 송을 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점은 저는 전문 방송인이 아니고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자라는 점입니 다. 한계가 있었어요. 애청해주셨던 교민들께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비즈니스를 은퇴한 다음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봉사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 능력이 있는 분이 나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질문이 이어지자, 사회를 향한 그의 공인 기질이 현지인을 향해서도 끊임 이 없이 발휘가 되었음이 차츰 드러났다. “코린도(주) 사원으로서 칼리만탄에서 농촌지도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특 별히 성과를 거둔 것은 토마토 재배였어요. 제가 가르쳐준 토마토 재배법에 따라 수확한 토마토가 일반 농민들의 그것보다 월등하자 농민들이 저를 아주 잘 따랐어요. 칼리만탄에서 하우스보이를 하던 어린이를 초등학교, 중고등학 교를 졸업시키고 족자카르타로 대학을 보냈는데, 제가 더 돌봐 줄 수 없어 멈 췄지요. 그런데 그 또한 학업을 멈춘 것을 나중에 알고 다시 자카르타 대학을 졸업시켜, 결혼과 집사는 것을 돕고, 일자리도 주었지요. 지금 그는 인도네시 아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간호대학 교수를 꿈꾸고 있는 재원이 있는가 하면, 중부 칼 리만탄의 뿔랑삐서우 한 초등학교 학생들은 한회장으로 인해 희망을 깃대를 높이 올렸다고 전한다. 최근에도 서부 자와 수방군 찌참베란 면에 수수를 심 260
게 해 소득증대 사업을 돕고 있으니 그의 능력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한계가 없는 진행형이라 하겠다. 그의 타고난 공인기질은 또 다른 예능기질과 조화하여 각종 방법으로 표출 이 된다. 과연 그의 힘은 어디에 기인할까? 필자는 그것을 그가 항상 호탕하 게 웃으며 긍정하고 연구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서두르지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며 이론과 실제를 조화해내는 실천력에서 발휘되는 힘으로 확신한다. 지 난 90년대 초 중반 5년에 걸쳐 싱가포르에 거주 시 카메룬 하이랜드 고산지 대에 가서 열대 곤충채집에 몰입한 것이나, 인도네시아 열대식물 채집과 연 구, 특히 열대 약용식물 채집과 연구, 생활주변의 나무나 꽃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현재 또한 그의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두 아들을 두었다는 그의 교육관, 이 책 주제이기도 한 그 점이 궁금했다. “분명한 기술을 하나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과대학을 다니라고 강조했었 어요. 직업은 복잡한 것 말고 아주 간단할수록 좋다고 유도했어요. 결과적으 로 큰아들이 비행사를 선택하여 열심히 계기비행 실습을 하던 시기에 괌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건이 났습니다. 그때 너무 놀라서 그만 큰아들의 전공 이 항공경영으로 바뀌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항공조정면장(파이럿 라이센스) 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다시 ITC 사업을 해 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는 컴퓨터 디자인을 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엔 컴 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게 되어 지금은 싱가포르 영국 텔콤에서 아시아 지 역 매니저를 담당하면서 전 세계 통신망 구성 프로그램을 돕고 있습니다. 둘 다 일선업무 경력자로서 MBA 과정을 마치도록 하고 있는데, 큰아들은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MBA를 준비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이미 싱 가포르에서 MBA 2년차에 들어가 있습니다. 두 아들이 일찍 장가를 들어 예 쁘고 착한 두 며느리까지 보게 되었는데, 큰 며느리는 지난 1월 예쁜 손녀를 낳았고, 작은 며느리는 오는 4월 아들을 출산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261
가족을 소개하는 동안 그의 만면에 가득 드러난 행복감을 부러워하며 필자 는 그의 좌우명과 가훈을 물었다. “제 부친께서 물려주신 서훈이 있어요. 한글학자이셨던 한갑수 씨가 써 주 신 것인데‘실천하는 부모 공양’ 입니다.‘養敬食安(양경식안)으로 부모님을 공경하고 언제나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드리며 편안하게 모시기를 힘쓰 라’ 는 의미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이들에게도 알게 모르 게 전달 될 것으로 압니다.” 앞에서 언급을 했듯 그의 공인기질은 이미 공인된 바다. 필자의 이 강조에 ‘공인 운운’ 까지야 할 분이 계시겠지만 진짜 공인들이 공인 역할을 소홀히 한 것에 비하면 그의 역할들은 정말 공인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참 공인에게 인도네시아와 교민사회에 대한 견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만 인구가 일정 수를 넘으면 소외 계층이 생기기 쉬 우므로 시스템이 움직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급하게 성과를 내려하기 보다는 좀 더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봐요. 현재 인도네시 아에 한국교민의 숫자가 5만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읍 단위 인구에 해당합니 다. 그러므로 이에 걸 맞는 경찰이나 행정조직이 지원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시민권을 가진 교민보다는 임시 영주권을 가진 사람이 많 습니다. 미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형태의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임시 영주권자는 한국의 행정지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학교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학교는 문화의 중심도 되고 언론이나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연계점도 될 수 있어요. 인도네시아 사회로의 진입로 역할도 가능합니다. 단지 진학을 위한 학교 수준에 머물고 만다면 국 가의 교육 보조비를 받을 자격이 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교는 교민 들의 사회 평생교육에도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움직임을 볼 262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한편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것은 한국 교 민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초기 단계도 되겠지만 앞으로 미국이나 중남미 처럼 우리의 시민권자 2세 3세들이 인도네시아 정치권이나 제도권 진입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민회는 2종류의 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시민권자 교민과 영주권자 교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 다.” 현실과 미래를 직시한 혜안을 지닌 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노 후에 대한 설계에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역시 한회장다운 답을 들 을 수 있었다. “저는 노후 설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보통 노후 설계를 노후보 험에 들었는가? 연금이 있는가? 등 금전적인 경우가 일반적인데요, 저는 무 엇을 하며 살지 모르는 노후 설계는 반쪽이라고 봅니다. 작금 한국의 현실처 럼 노인들이 매일 1만 원 정도의 돈을 가지고 도봉산이나 춘천, 혹은 천안 등 지를 다니는데 최선인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저는 대략 물적인 것과 일 두 가지를 준비해나가고 있습니다. 물적인 것이 야 각자의 기준이 다를 것이니 준비하는 일을 밝히지요. 저는 현재 www.rindualam.com이라는 웹을 개설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차 IPTV 시스템으로 한국 및 국제 주요 방송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인도네시아 문화 및 자연 & 환경보호에 관해 전문적 지식을 VOD 영상물 제작과 글로 봉사할 예정입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린두알람이란 농장 & 카페를 Off Line 상 에서 열고 인도네시아 관련 세미나도 개최하고 축제도 한 두 번씩 가지며 노후를 개척해 갈 것입니다.” 이미 그와의 대담에 할애된 지면이 넘쳤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더 하지 않을 수 없다.“인도네시아에서 살면서 무엇을 얻으셨는지요?” “저는 사회적으로는 남의 작은 일을 칭찬하고 돕는 일들이 많아야 한다고 263
생각을 합니다. 그런 사회는 잘 연동되고 아름답겠지요. 개인적으로는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과 존경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나는 것은 참 중요하다 고 생각을 합니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는 학연관계도 그렇지만, 회사나 종 교 공동체에서도 관계형성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좋은 이웃과 존 경하는 분을 만나 교우하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 가운데 저는 참다운 우정을 나누는 벗과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늘 행복 합니다. 거기에 더해 우러러 존경하는 분이 이 사회에 함께 계십니다. 정말 원칙이 살아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 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위치를 지키시지요. 많은 사람이 그의 휘하 를 거쳐 갔지만 아직도 그들의 면면을 다 기억하면서 그리워하고 계시는 분 이지요. 그들의 안부를 묻는 그에게 노년의 모습이 깃드는 것 같아 매우 안타 깝습니다. 언젠가 그를 위해 큰 잔치를 한 번 마련해 드릴 예정입니다. 한상재회장, 필자는 그와의 대담을 마치며 이제부터 참답게 그를 살펴볼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 공인적 기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준비하고 실천해야 하는 가를 잘 보여주는 그와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 이 짧은 지 면이 아니라 좀 더 천천히 길게 그의 삶의 여정에 은밀하게 다가가 봐야겠다 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의 힘이 넘쳐도 아무리 물질이 만능이어 도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장 강력한 힘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다.
인재 손 인 식
l글쓴이 주l 한상재! 서울대를 졸업하고 1978년 코린도(주)에 입사함으로 인도네시아에 진출. 필명 린두알 람의 칼럼리스트. 2009년 4 월부터 교민방송 K-TV에서 2 년여에 걸쳐 인도네시아 뉴스 한 국어 해설. 현 인도네시아 한인문협 회장 등 다수의 사회단체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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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딸! 너는 이미 안다. 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석은 반짝여야 참다운 보석이라는 것을. 헤매는 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빠는 믿는다. 사랑하는 딸 을! 엄마는 믿는다. 사랑하는 아들을.
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일도하사불성),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 Nothing cannot be done if you concentrate your attention.
- 홍훈섭 사장에게서 배우다 호감과 존경의 조건
사람들에게 물었다. 살면서 선뜻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부 분 대답을 망설였다. 세상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는 기색이다. 그러다간 잘 생긴 연예인, 어떤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 부자, 유 명인 등 비교적 부담이 없는 대상을 나열한다. 상식선에서 벗어난 엉뚱한 대 상이 들먹여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의 부연설명이 길어졌다. 어쨌든 개인의 취향은 다양했다. 다시 물었다. 진심으로 존경을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호감 형보다 대답 의 폭이 퍽 넓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구체성이 결여됐다는 지적과 함께 현실에서 찾아보자고 방향을 제시했다. 사회적으로 명성이 자자 한 여려 계통의 사람들이 거론되었다. 결론은‘자기만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 람’ 이었다.‘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 의 결과가 존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선 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 해도 그것을 사사롭게 이용하려는 사람은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존경의 대상이란 이상적인 데도 있었 고 현실적인 데도 있었 다. 이상적인 대상으로 서는 단연 역사적인 인 물이 많았고, 현실적인 대상에서는 속속들이 알기보다는 적당한 원 거리의 대상에서 나왔 교회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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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물론 극소수이지만
부모나 친구와 같은 아주 가까운 대상을 꼽는 경우가 없지도 않았다. 하여튼 누구에겐가 존경을 받고자 한다면‘자기 삶에 충실해야 한다’ 는 것만은 확실 해졌다. 평범함을 사랑하는 세상의 인심
몇 몇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홍훈섭 사장을 들먹였다. 홍훈섭 사장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비교적 간단간단하다.“진솔하다.” 다.“일관되다.” 와“과묵하 다.” 다. 어떤 이는“그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한다고도 했 다.” 고 했다. 농담을 전제로 하고“그는 다른 사람을 드러나게 한다. 다른 사 람을 똑똑하게 보이게 하고 잘난 사람이 되게 한다.” 고도 했다. 어쨌든 그는 그 나름의 무위(無爲)로 유위(有爲)를 구축하고 있었다. “저는 직업군인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어요. 가정이 특별히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별 부족할 것도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지요. 서울 의 중동고등학교, 외국어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곳 자카르타에도 동문들이 많지요. 대학 재학 중 입대한 군대생활 또한 평범하게 마쳤고, 76년 대학 졸 업과 동시에 대한한공에 입사함으로써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지요. 아내 김 순희 위비나와는 캠퍼스 커플입니다. 동시대를 살아온 비슷한 연령층이 지닌 추억을 저 또한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한항공에서 만 17년을 근무하고 퇴직을 하여 1994년 자카르타에서 포워딩 회사를 설립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슬하에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미국에 사는 친척들의 도움이 있어 어느 시기부터 세 아이가 다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학업을 마 친 지금도 역시 셋 다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의 자기소개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처음 이 글의 대상임을 전할 때도 그 랬듯이 자신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나서고 드러낼 것이 없다는 말과 손 사래로 일관했다. 이 글의 주제가 교육이니만큼 자녀교육에 대한 노하우를 들려달라고 해도, 그냥 여느 부모처럼 조금 정성을 기울였을 뿐 특별한 것이 267
없다고 사양을 거듭했다. 하여튼 이런 저런 정황 으로나 그의 자기소개를 중심으로 살피거나, 그를 선뜻 호감형이라고 판단 하기 쉽지 않다. 조심스럽 미국에서 막내아들의 졸업식때 가족과 함께
긴 하지만 존경의 대상이 라고 내세울 부분도 충분
조건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잘 생긴 연예인도 아니고 어떤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도 아니며, 부자나 유명인, 뛰어난 학식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자기 삶에 충실한 것이 존경에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에서는 필자 또한 충분히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 필자는 그를 미화 할 마음이 없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기도 하지만 실례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로 인해 드러난 것이 흥미로운 세상인심이다. 주변 사람들 다수 는 그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모두가 비범함을 향해 뛰고 있는 것처 럼 느껴지는 세상의 겉모습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소중한 진리가 그냥 진리로서 책 속에나 묻혀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평범 함 속에 엄연히 살아있었다. 그 사실의 일면이 홍훈섭 사장을 통해 드러났다. 진정한 세상의 인심은 비범함처럼 소란스럽게 드러나지 않고 아주 조용하게 그 중심을 지키고, 또 쓰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야말로 평범 함의 진수일 뿐인 그가 이구동성의 찬사를 얻겠는가. 과묵과 초지일관
홍훈섭 사장의 특징이라면 뭐니뭐니해도 과묵과 초지일관이다. 그가 얼마 나 과묵한가 하는 일화를 한 가지 들겠다. 언젠가 모 회사 사무실에서 홍훈섭 268
사장께서 방문을 해도 괜찮다면 잠 시 들르겠다는 요 청이 왔던가 보다. 포워딩 업체를 운 영하는 그이니만 큼 아마도 운송물량을 수주 받기 위한 방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 다.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하여 담당자와 마주 앉은 그는 내어준 차를 마실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히려 이쪽에서 근황을 물으면 그에 대해 대답을 하고, 사업상황을 물으면 그에 대해서 답을 하는데 그것도 모두 단답형이었다 한 다. 도대체 방문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나 흘렀을까 그가 돌아가겠다고 일어섰고, 그는 끝내 아무런 요청 없이 돌아 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차례였을까. 그 회사는 운송물량의 일부를 홍 사장 께 맡아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 한 예가 아니더라도 그와 마주 앉아 본 사람이면 그의 과묵이 천근만근 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마주 앉아도 그렇거니와 하물며 좌중 일 때 그의 음성을 듣기란 참으로 어렵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그럴지니 남의 험담 같은 것은 그의 사전에 그림자도 없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초지일관의 예도 몇 가지 드러난다. 우선 신앙생활이다. 그는 일상이 그렇 듯 교회에서도 주도자가 아니다. 늘 참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러나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그가 활동하는 작은 모임 체의 일원들은 그의 성실한 태도와 초지일관에 대해 상징성이 매우 크다고 강조한다. 일상 대부분이 참가자 역할인 그가 빛을 발할 때가 있다. 일순위로 주도를 할 때가 있다.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을 때다. 그는 초지일관이 노래 부르기 이기도 한데, 집안에 방음시설을 갖춘 노래방을 설비해 놓았을 정도다. 틈이 269
나면 언제라도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그, 그래서 그의 내면의 색이 얼마나 맑 을지 짐작할 수 있다. 골프를 즐기는 것에서도 그의 초지일관은 잘 드러난다. 새벽잠이 없는 그 는 아침운동을 겸한 골프를 즐긴다. 대부분이 사위가 밝아지지도 않을 시각 의 티업인지라 동반 플레이어를 섭외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부터 그냥 혼자서 새벽 라운딩을 즐긴다. 주중 한두 번씩은 혼자서 라운딩을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이슬 맺힌 초원을 혼자 걸으며 즐기는 골프, 나는 그 것이 그의 기도일 것으로 추측을 한다. 어둠에서 깨어나는 산천과 그만의 언 어로 갖는 은밀한 대화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기에 수년간 초지일관 이 오히려 즐거울 것이다.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도 초지일관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혼자의 라운딩이니 어지간하면 낮은 스코어를 밝힐 범도 한데, 물으 면 항상 높은 스코어였음을 밝히며 희게 미소 짓는다. 필자가 가장 가까이서 느끼는 그의 초지일관은 서예공부다. 공부를 시작한 지 이미 5년여를 헤아리는 동안 그는 초지일관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국외 출장 외에는 수업을 건너뛴 예가 없다. 혹시라도 늦거나 빠른 날에는 반드시 미리 전화를 한다. 소위 숙제도 거스를 때가 없다. 그는 사람을 대함도 사람에 대한 호칭도 항상 겸손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고교, 대학 후배를 만나도 겸손으로 일관함을 목도한 것이 우연의 몇 번이 아 니다. 필자를 부르는 호칭에서도 그는 초지일관이다. 필자는 평소 그를 홍요 셉 형님이라 호칭한다.‘형님’ 이라는 호칭은 가톨릭 교우들끼리의 일반화된 호칭이기도 하지만, 연령의 차이를 비롯한 몇 가지를 감안하더라도 가장 따 뜻한 호칭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그는 손 프란치스 코(필자의 가톨릭 세례명) 아우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손선생님, 또는 인재 선생님이라 칭한다. 그것도 아주 깍듯하다. 그 깍듯함은 서예를 공부하게 된 이후로 초지일관이다. 한마디로 그의 삶 전체를 일컬어 성실내지는 초지일관이라 할 수 있겠는 270
데, 이는 아무래도 그의 타고난 성정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천성이란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겠다는 생각이다. 자기 충실, 그 지난한 화두
필자는 홍훈섭 사장, 그 평범함의 대명사를 통해 세상인심의 일면을 보았 다. 은밀한 가운데서 드러난 끈적끈적한 인정을 느꼈다.“난득호도(難得糊 塗), 어리석기가 어렵다.” 고 하듯 바른 평범함이야 말로 어떤 비범함보다 더 비범함일 것이다. 중용에 이런 구절이 있다.“숨는 것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다(莫見乎隱, 莫見乎微)” 다. 은밀 한 것은 더욱 자세히 알려 하고, 미세한 것은 현미경으로 그 현상을 드러내고 마니‘은밀한 것과 미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다’ 는 이 말은 홍훈섭 사장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는 세상사람 중에 자기 삶에 충실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 없을 것 인데, 바로 이 당연함이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자기 삶에 충실하기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가 어떤 가르침으로 이보다 더 극명해지겠는가. 객관 운운하며 밖으로 향하는 시선과 마음을 평소 얼마나 내적으로 가다듬어 경계 해야 하는 가 또한 선명해진다. 끝으로 끝내 드러내기를 사양하시면서도 필자의 고집을 끝내 꺾지 않으시 고 수용해주신 부분에 대해서 송구한 마음을 표한다. 평범해서 더욱 좋은 이 웃 홍훈섭 사장께 감사를 드린다.
인재 손 인 식 l글쓴이 주l 홍훈섭 사장! 그는 군자다. 선한 면만을 따져 군자를 규정했다던 공자에 따르면 그는 상급의 군자임에 틀림이 없다. 무위(無爲)로 유위(有爲)를 구축하는 그야말로 이 시대의 군자인 것이 다. 조주선사가 크게 깨우친 말 중에는“일상적인 마음이 곧 도(平常心 是道)”가 있다. 또한 장자는“평탄한 것이 복(平爲福)”이라 했다. 홍훈섭 사장에게서 크게 배우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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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待)!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기다림이 있습니다. 사람, 때, 결과 등 갖가지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을 전제합니 다. 믿음이 없으면 기다림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기다림은 조장(助長)하지 않는 것입니다. 억지로 결과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즐거운 설렘입니다. 기다림을 참답게 즐기기 위해서는 오직 사람이 할 바(盡人事)를 충실히 행해야 합니다. 진인사(盡人事)는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참다운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가치가 정해진 세상 만물은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 누구도 처음부터 가치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고정된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가 치는 창조할 수 있습니다.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은 긍정에 있습니다. 세상과 나를 긍정하면 마침내 세상과 나의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盡人事待天걤’ 을 다시 새기는 이유입니다.
盡人事待天걤(진인사대천록),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 후에 하늘의 복록(天걤)을 기다림 / Man waits for fortune from the God after he has done what to do.
제3부
문화(文化)란 갈고 닦여서 모아지고 간추려진 역사적인 것을 말한다. 인도 네시아 한인동포사회 반세기, 이미 역사가 서고 있다. 작금에는 한류와 더불 어 더욱 다양한 문화가 펼쳐지고 다듬어지고 있다. 다양해지고 분명한 것은 기록된 것만이 올곧은 역사가 되고 문화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 그 기초로서 몇 가지 탐구한 결과를 싣는다. 참다운 문화생산자들의 노력으로 이 시대 인도네시아 한인사회가 아름답게 남겨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1
『아빠까바르 인도네시아』 와『인도네시아 들여다보기』 , 이 두 권의 책은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전임 홍보관들인 김상술, 윤문한의 저술 이다. 책의 내용은 인도네시아 알기 지침서내지는 교양을 위한 것으로서, 인 도네시아에 주재하면서 느낀 점과 배우고 얻은 지식을 두 저자가 나름의 개 성으로 풀어낸 것들이다 서두에 두 권의 책을 소개하는 진의는 바로 두 권의 책이 창출하는 문화적 가치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함이다. 문화부처의 공무원으로서, 또 외교관으로 서 전임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한 두 저자가 얻을 가치에 대해서는 여기 서 논할 바가 아닐 것이다. 두 권의 책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고자 하거나, 인도네시아를 알고자 하는 한국 국내의 독자들에게 미칠 영향이나 그 성과에 대해서도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두 권의 책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부여한 은근한 메시지는 한 번쯤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다. 즉,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한 기여, 자기가 위치한 자리에서의 창의력 발 휘, 성실한 실천 등 이 두 권의 책이 드러내는 교훈에 대해 차분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한때나마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었지 않은 가? 그들의 연구와 노력, 나름의 시각으로 쓰인 책을, 그들이 추억하는 인도 네시아에서 독자로서 읽는 느낌, 참 쏠쏠한 덤이 아닐 수 없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한 사회가 지닌 문화적 역량이나, 드러난 문화 실재가 그 사회의 품격을 판단하는 척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 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는 높은 점수를 받을 여 274
지가 많다. 그것은 바로 문화가 살아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를 즐기며 심고 가꾸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칼럼의 목 적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보유하고 있는 문화, 바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문 화의 실제들을 차근차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 많이 듣고 사는 말 중에 하나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다. 길을 찾는 것도, 길을 내는 것도 그리고 길을 다듬는 것도, 책 속에 있다는 의 미가 담긴 말, 이 말은 너무 흔한 말이기에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음미해야 할 말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말의 실제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도 올곧게 살아 있다. 그간 인도네시아 한인사회가 만들어낸 서른 네 권의 책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쓰인 길고 짧은 글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 사회가 낳은 책과 그 저자들을 찾아보면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 실재하는 소중한 문화 한 가지를 새겨보도록 하겠다. 재 인니 한인사회를 통해 발간된 책의 서막은 코데코에너지 최계월 회장의 자서전이 장식하고 있다. 한인기업 해외진출의 개척자로 알려진 최 회장의 이야기는『그들은 나를 깔리만탄의 왕이라 부른다』 라는 제목의 상, 하권으로 1993년 권태하 씨에 의해 쓰였다. 다음은 해외 선교의 표상 고 서만수 목사께서 출간한 책이다. 서 목사께서 는 1994년 수필집『남방에 심는 노래』 를 출간하였다. 그 후로도 시집『둥개 야』 ,『남방에 피는 꽃』 ,『가르치며 증거하며 섬기며』등을 연이어 탄생시켰는 데, 이 모두는 그의 40여년 선교역사의 증거이기도 하다. 한 인니 수교 초기 한국 총영사관의 참사관이었던 고 김영호 님은 1995년 『천년의 미소』 를 발간했고, 대사관 무관으로 재임을 했던 서세호 장군은 1997년 책 제목『인도네시아』 를 출간했다. 한국국제학교 이상기 선생은 2000년에 시집『그리운 말들이 길을 메운 채』 와,『그리움은 벗을 수 없는 옷 이다』 를 필두로, 풍자에세이『거꾸로 매달린 원숭이의 세상 훔쳐보기』1, 2 275
권, 2008년에는『복수, 링컨처럼 하라』 를 우리 앞에 드러냈다. 문학도 손은 희 씨는 2001년 산문집『말씀의 샘에서 퍼 올린 행복』 을 길어냈고, 자카르타 에서 20여 년간이나 월화차문화원을 이끌면서 한국정신을 심었던 김명지 선 생은 시집『찻물, 그 젖은 마음』 을 2002년에 탄생시켰다. 2003년에는 연합 통신 황대일 기자에 의해『특파원의 눈에 비친 인도네시아 만년설』 이 베일을 벗었고, 2004년에는 김시현 한의사에 의해『재미있는 한방 칼럼』 이 한 권의 책으로 공개되었다. 사람이나 사물을 겉만 가지고 비교하는 것은 사람의 정서에 악영향을 미친 다고 한다. 반면 개인이나 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가치를 들춰 긍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지혜다. 사회적으로도 꼭 필요 한 순기능이라 하겠다. 사람은 문화 향수자인 동시에 문화 창조자다. 어떤 문 화에는 고객이지만 어떤 문화에는 창조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누구나 책의 저자가 될 수 있고 독자로서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 줄 글을 쓰는 일 이 향기를 생산하는 일이라면, 한 줄 글을 읽는 것은 향기를 소유하는 일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가 낳은 책과 저자를 좀 더 찾아보자. 한마음교회 장영수 목사께서는 2005년 그의 설교집을 한 권 책으로 묶어 『아침마다 새로우니』 로 영롱하게 드러내더니 연이어,『마음을 시원하게』 ,『너 는 행복자로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영혼의 보금자리』 ,『얼굴과 얼굴로』 , 『사랑은 여기 있으니』등 7권을 펴냈다. 사공경 선생 또한 2005년『자카르타 박물관 노트』 , 2008년에는『서부자바의 오래된 정원』 을 책으로 엮어냈고, 성 요셉성당에서는 2006년 사진집『은총의 10년』 을 역사로 세웠으며, 2007년 에는 고 신교환 님의『젊은이여 세계로 웅비하라』 가 자카르타 하늘에 웅비했 다. 2008년에는 대사관 경찰영사였던 박화진 총경에 의해『자카르타파출소 박순경에서 대한민국 경찰청장까지』 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가 했더니, 2009 276
년에는 무궁화유통 김우재 회장의 회고록『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가 꽃을 피웠다. 2010년 김은미 씨는『대한민국이 답하지 않으면, 세상이 답하게 하라』 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고, 수학선생 손홍익 씨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책 제목『병아리 눈물』 로 그의 이야기를 남겼다. 2011년 빛을 본 안선근 교수의 『동아시아 먼 나라의 이슬람 평화』 는 1994년『요지경 인도네시아』 , 인니어 교본 세 권에 이은 것이며,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소사이어티의 한인회원들은 2007년 박물관 안내 책『인도네시아 국립 박물관』 을 꾸며내기도 했다. 서예 가인 필자도 출간의 대열에 끼었다. 2004년『사랑의 훈민정음』 을 시작으로, 『아름다운 축제』 ,『아름다운 한국인』 ,『지금 여기』 ,『정상에 오르는 길을 찾아 서』 , 그리고 자카르타 교민 52인과 공저한『도처고향』등 여섯 권에 이어 이 책『도처교학』 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책으로 꾸며지지만 않았을 뿐 문학과 전문 영역의 글들 또한 참으로 많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 또는 정보를 나누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글이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크고 작은 매체 또는 인터넷의 여러 창구를 통해 한껏 역량들을 드러냈다. 거명만 해도 많은 독자들께서 고개를 끄덕일 김문환, 한상재, 유춘 강, 김성월 님 등을 비롯해서 일일이 다 열거하기조차 어려우리만치 많은 필 자들이 아름다운 이야기와 유익한 정보들을 풍성하게 풀어냈다. 한 줄 글을 쓰는 일, 지식과 경험, 느낌을 마음 안에 묻어두지만 않고 창조 적으로 풀어내는 노력이다. 스스로를 우주의 일원이며 사회의 공인으로 선포 하는 일이며 책임지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와 타인, 역사와 현재, 미래를 사랑하는 지극한 실천이다. 우리의 이웃들 중에는 지금 출간을 준비하고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2010년 들어 재발족을 한 문인협회 회원들의 활동에 따라서도 더욱 많은 저 술들이 이 사회에 드러날 것이다. 누구라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문화적 277
품격과 이에 대한 노력을 부정하겠는가. 오늘 우리는 우리사회 이웃들이 쓴 책을 통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묵묵히 존재하는 우리의 문화실제를 확인했다. 이 문화의 실제는 바로 긍정 의 메시지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 역할에 충실하라는 가르침이다. 다른 이의 공로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라는 교훈이며 아름다운 삶을 위한 우리의 자산이다. 자랑스럽게 여기고 빛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내용은 2010년 4월 10일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방송 K-TV에 <손인식의 영상문화칼럼> 으로 방송되었으며, 한인뉴스 2010년 5월호에 실렸던 것을 일부분 추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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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내 벗/ The green mountain is my friend as well 화살같이 빠른 시간, 흘러가버리면 다시 돌아 오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누군들 자기 삶을 되 돌아보면 인생무상의 느낌이 없을까요. 그러 기에 사미(四美), 즉 청산과 맑은 물, 바람과 달 이 네 가지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삶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2
얼마 전 한국의 모 신문에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탈북 망명자 이야기가 실 렸다. 전 북한군 대좌였던 김정률 씨가 <독재자에게 봉사하며>란 책을 오스 트리아에서 독일어판으로 발간한 데 따른 이야기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무려 16년간이나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인이 사는 곳에 당연히 한국어가 존재할 것으로 믿었던 필 자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대화를 나눌 상대자가 없는 곳에 서 사는 연유로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한국인도 없지 않다고 알고 있다. 한국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해도 반드시 한국어가 살아 있는 것만은 아니라 는 사실이 이렇게 엄연하다. 사람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 그래서 우리는 탈북 망명자가 한국기자 를 만나 그간 숨겨두었던 비밀들을 훌훌 털어버린 사실보다는, 우리말로 대 화를 나눈 것을 더 감격해한 그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오지의 현 지 시골학교에서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로 전학을 한 어느 학생이, 동족의 친구들과 우리말로 어울리고 난 다음 가슴이 탁 트였다고 한 말에, 절로 공감 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 때 우리민족 전체가 언어사용에 아픔을 겪은 적이 있 다. 우리의 언어가 창제되고 발전을 한 우리 땅을 무력으로 지배한 세력에 의 해 우리말 말살기도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곳 인도네시아도 외세의 지배를 받을 때마다 자국어는 늘 무시당하고 핍박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또한 이 땅 에 사는 중국인들은 한 때 정치적인 이유로 중국말을 내놓고 사용할 수 없었 고, 동족끼리도 그들의 문화를 드러낼 수 없었다. 중국문자인 한자가 인쇄된 280
책조차 내부에서는 폐기 또는 감춰야 했고 외부에서는 반입이 금지되었었다. 언어는 이처럼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다. 때로 냉엄한 현실에 의해 소중 한 가치를 잃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인과 함께 이곳에서 타국살이를 하는 한국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 떤 모습으로 그 가치를 이 타국 사회에 드러내고 있을까? 살펴보면 인도네시 아에서 한국어는 현재 세계 어느 곳보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심어지고 가 꾸어지고 있을 알 수 있다. 그 사례들을 살피려들면 숨가쁘게 떠오르는 뉴스 가 하나 있다. 바로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부톤섬에 자리한 바우바우시가, 지 역 토착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로 한글을 선택한 일대 사건이 다. 물론 찌아찌아족이 공용어를 한국어로 바꾼 것은 아니다. 다만 고어 표기 에 필요한 문자로서 한글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말은 있었지만 문자가 없어 찌아찌아족 고유의 문화를 점점 잃어가는 상황에서, 유수한 세계 언어 중 표 기방법이 단연 뛰어나며, 과학적인 문자로서 현대문명이 낳은 컴퓨터, 핸드 폰 등과 최고의 조화를 이루는 한글을 택했던 것뿐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한글의 우수성이 또 한 번 세계만방에 알려진 사실이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것들도 바로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다. 먼저 인도네시아 제일의 국립대학 UI의 한국어과목 학사과정 공식 개설, 족자의 명문 국립가자 마다대학(UGM)과 자타르타의 명문나시오날(UNAS)대학의 한국어학과 개설 로 인한, 인도네시아 사학명문들의 활발한 한국어 교육이 그것이다. 아울러 살 펴보자면 자카르타의 기독교 대학 UKI, 국립수라바야 대학, 칼리만탄의 반자 르마신 대학, 반둥의 반둥대학, 국립중부자바대학, 대표적인 이슬람대학인 아 사시피아, 가톨릭계 아트마자야대학, 족자의 UII, 람뿡의 망쿠랏대학, 중부자 바의 디포네고로대학, 마카사르의 하사누딘대학 등에서, 한국어과 개설의 전초 전으로서 한국학연구소 개설을 하고, 대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카르타 소재 국립 제27고등학교처럼 제 281
2외국어 선택과목으로 한국어 시범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곳도 있다. 매우 흥미로운 사례들도 더 있다. 우선 인도네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 어 웅변대회에서 드러난 현상을 들 수 있다. 한국어 웅변대회는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또 그들의 능력이 어 느 정도에 도달했는지 잘 드러나는 현장이다. 웅변 원고의 소재 선택과, 글 구성을 비롯하여 표현력, 발음 등 여러 부분에서 놀라울 정도의 수준을 발휘 하는 것에 심사위원으로 참관했던 필자는 감동을 받았었다. 다음은 반둥지역과 족자지역, 또 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주 축이 되어 결성된 한국을 사랑하는 모임인 <한사모>를 들 수 있다. 그들 또 한 몇몇 행사를 통해 우리들을 놀라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한 사모라는 이름으로 회원 서로가 활발하게 교류하며 한국에 대한 정보를 나누 고 또 한국어를 배운다. 한복을 맵시 있게 차려 입고 부채춤 실력을 뽐내는가 하면, 자체적으로 대규모 한국문화 행사를 열기도 한다. 또 있다. 유명 관광지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현지인 여행 가이 드들이다. 유적지 유물을 전문용어까지 구사해가며 설명을 하는가 하면, 심 지어는 김해김씨 족자파를 자칭하며 김OO라 이름을 밝히는 인도네시아인도 있다. 한국말로 인사말을 건네는 것은 물론 메뉴를 한국말로 주문 받는 음식 점 종업원은 이젠 놀랄 일도 아니다. 거리에서 눈에 들어오는 늘어나는 한국어 간판들도 한국어 문화의 현실을 생생 하게 대변한다. 자카르타는 물론 인근 위성도시들에도 한국어 간판들이 즐비해 한국인들에게는 정감으로 다가오고, 이국인들에게는 호기심과 새로움으로 다가 간다. 이 땅에서 한국어가 이처럼 활기찬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이유야 독자들께 서도 주지하실 것이다. 그렇다. 한류가 가장 큰 배경이다. 종합대중예술로 평 가되는 연속극과 영화, 가요 등 한류의 진원지가 된 대중문화와 그 스타를 비 282
롯하여, 스포츠의 질적 향상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곳 인도네시아에는 그에 못지않은 힘도 있다. 바로 이 나라 곳곳에 산재한 한인기업들이 일군 힘 이다. 이 힘은 세계의 어느 곳보다 역동적인 것으로서 인니 한인사회의 자부 심이기도 하다. 또한 자카르타에는 우리의 2세들이 마음 놓고 모국어로 공부 하고 뛰어놀 수 있는 한국국제학교가 있다. 한국국제학교 JIKS는 존재만으 로도 한인사회 위상을 크게 재고하게 하는 바로 우리의 한 징표가 아닐 수 없 다. 아울러 한국어문화를 넓히고자 하는 기관과 단체들의 갖은 노력들이 있 다. 이 모두는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숫자에 비해 다이나믹 한국 과 능력있는 한국인을 드러내는 절대 바탕이 되고 있다 하겠다. 글로벌 시대다. 그런데 한편에서 모국어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 몇 개 국어 구사 능력이 필요한 시대라면 모국어는 너무도 당연한 생존의 기 본인 시대가 되고 있다. 타국에 살면서 외국인들과 비즈니스를 한다고 하더 라도, 모국어에 능숙해야 더욱 인정을 받는다. 하물며 일상의 정겹고 편안함 이야 어디에 비기겠는가. 추억을 이야기할 때도, 희망을 논할 때도 모국어를 통한 문화와 정서여야 만이 더욱 생명력이 커진다. 타국에서 태어나거나 혹 은 국적이 바뀌었다고 해도 물려받은 한국인의 피와 정서는 바뀌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인터네셔날 스쿨 학생들 또한 대부분 진로를 한국의 대학으로 택한다. 다문화 가정에서도 할 수만 있다면 초, 중, 고, 대학과정 중에서 어느 한 과정쯤이라도 한국내의 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기를 꿈꾼다. 선진국이나 타국은 이제 막연한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의 정체성을 내실 있게 구축하고 난 다음이라면 타국은 다만 꿈을 펼칠 수 있 는 무대가 될 뿐이다. 모든 동질 문화의 창출과 형성의 기반에는 언어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우리의 모국어처럼 넓은 표기의 폭, 표현의 다양성, 과학적 인 언어는 그에 걸맞은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어서 이국인에게 사랑받는 한류 의 생성도 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인이 살고 있어서 사용되는 한국어를 넘어 283
서서, 한국문화의 가치가 존중되는 나라 인도네시아, 한국어가 활기찬 땅 인 도네시아에서 한국인이 어찌 활력 넘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내용은 2010년 4월 24일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방송 K-TV에 <손인식의 영상문화칼럼> 으로 방송되었으며, 한인뉴스 2010년 6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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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뜻 너른 맘 / Big ambition, generous mind 서예가 서예일 수 있는 첫째 특징은 선이 드러내는 느낌입니다. 하얀 화선지 바탕 위 에 毛筆로 인해 드러나는 검은 선의 갖가지 느낌은 알면 알수록 사람의 마음을 이끕 니다. 강력함, 온유함, 촉촉함, 건조함, 단아함, 세련미, 예스러움, 투박함, 미려함 등, 선의 느낌이 다가온다면 서예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물에서 그만의 느낌이 다가온다면 그것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지요. 누구 나 심미안은 지니고 있습니다. 심미안은 길러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미안으로 가득하기를 빕니다. (인재 손인식의 필묵향기에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3
미디어 시대, 이 말은 이 시대를 평가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전 자공학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인한 미디어가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 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특징과 사용 범위가 넓어지고 또 세분화되면서 웬만 해서는 속속 등장하는 신조어들 따라잡기도 쉽지 않다. 그야말로 퍼스널 미 디어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시대의 조류 때문일까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도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미디어가 무려 열여덟 개에 달한다. 따라서 이 칼럼에서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 현존하는 방송이나 정 기 부정기 간행물, 인터넷 웹진 모두를 미디어의 범주로 설정하고, 이 미디어 들이 인도네시아 교민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미디어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지 그 실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비록 이 시도가 학술적 차원의 전문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서두에 이런 의 문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 미디어다운 미디어가 존 재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은 비판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비평이어야 하는 조건을 전제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의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산자와 소비자 피차 서로가 상대에 대해 긍정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질 때 이 사회의 미디어가 반듯한 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선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 실재하는 미디어들 의 종류와 그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인터넷을 활용한 웹메거진으 로서 KOTRA에서 발행하는 <인도네시아 투자뉴스>다. <인도네시아 투자뉴 286
스>는 KOTRA가 한국 정부의 산하 기관답게 개별 교민기업들이 일일이 챙 기지 못하는 경제, 무역, 투자관련 주요 이슈들을 정리하여, 기업이나 비즈니 스맨들에게 제공하는 비즈니스 전문 인터넷 웹진이다.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정보수집에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거니와, 인도네시아에 굳건하게 뿌리 를 내리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하겠다. 한편 유사한 웹진으로 <시미 뉴스>와 <스피드 뉴스>가 있다. 이들은 인도 네시아 일간지를 토대로 경제, 사회, 문화적 이슈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다음 이를 필요로 하는 기관과 단체 또 교민과 교민지 등에 제공하고 있다. 이 역 시 투자 관련과 기업 운영, 정보 습득의 차원에서 선용되고 있다. 다음은 광고 정보지로서 <교민세계>, <벼룩시장>, <여명>, <한울> 등이 있다. 이는 상업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매체들이지만, 광고가 생산 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구입자의 양쪽을 충족시키는 정보로서 현대사회에 없 어서는 안 될 것이니만큼, 광고 정보지들의 기능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또한 광고 외에 읽을거리 대부분이 재활용을 한 것들이지만 교민사회에 필요 한 교양과 정보 부분을 중심으로, 편집자가 선별 게재함으로 그 효용성을 잃 지 않고 있다. 다만 과다한 경쟁보다는 사안에 따라 서로가 공생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이어 <한마음 은혜>, <해인과 붓다>, <그레이스 저널>을 살펴보겠다. 이 들은 모두 한마음 교회, 해인사 인도네시아 포교원, 주님의 교회 등 종교공동 체를 중심으로 하여 발행되는 메거진이다. 그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지 만 발휘하는 힘은 결코 작다고 볼 수가 없는 것들이다. 특히 타 종교에 대해 교양과 이해의 폭을 넓혀줌으로써, 교민사회 안에서 종교간 배타적 벽을 허 무는데 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울러 타 종교 성직자들의 세상을 보는 시각과 영적 세계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작은 것의 큰 역할을 보게 되는 사례 이다. 다음은 <한인뉴스>, <일요신문>, <한나프레스>, <동부자바 한인들>이다. 287
우선 한인뉴스는 한인회가 월간으로 발행하는 매거진이다. 직접취재 및 상대 적으로 폭이 넓은 교민필자, 그리고 폭넓은 배포를 자랑하며, 체류국의 경제, 사회, 문화, 법률 등 다양한 정보를 주 콘텐츠로 삼고 있다. 한인뉴스는 몇 가 지 이유로 대표성이 부여되는데 자타가 인정하는 역할의 정론지이기를 바라 는 교민들의 뜻이 그 중심에 있기를 기대한다. 한편 <일요신문>은 주간지로서 국내 일요신문과 콘텐츠를 공유하면서 교 민사회에 필요한 공지사항과, 교민사회 이모저모, 광고 등을 전달하며 나름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남아에 진출한 동포들의 교류지를 자처하는 <한나프 레스>에서는 소외된 한인계층을 위한 사랑의전화운동본부 운영을 하고 있는 데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라바야 지역 2천여 한인들의 대변지 <동부 자바 사람들>은 지방 유일의 한인신문으로서 어려운 환경에서 한인회 간부 들의 힘으로 발행되고 있다. 어떤 형태의 미디어이든 사명감이 없이는 출발조차 할 수 없고, 한다한들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미디어의 속성이다. 미디어 본연의 사명감을 망각한 체 오직 상업적 수단으로만 치닫거나 또 그렇게 비쳐진다고 하더라도, 설립 인이나 편집자의 사회 기여의지를 온통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의미이다. 그 러므로 모든 환경이 쉽지 않은 교민사회 미디어에서 한국 국내, 메이저 미디 어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마저 없었으면 타국생활이 얼 마나 삭막했겠는가라는 시각도 적절치 않을 것이다. 아직도 자카르타와 위성 도시를 제외하면 광고정보지도 귀한 것이 현실이며, 직접 정보망인 인터넷이 나 YTN 방송도 원활하게 접할 수 없는 곳에 거주하는 교민도 없지 않다. 그 러므로 오직 교민 미디어의 사명감 발휘와 교민들의 격려와 참여는 절대 필 요한 것이 되고 있다. 이어서 극동방송의 <해피 자카르타>를 살펴보겠다. <해피 자카르타>는 288
매일 저녁 6시~7시에 전달되는 FM 100.6 체널의 라디오 방송이다. 한국 극 동방송의 자료와 현지의 전문가나 선교사들의 주도 아래 방송되고 있는데, 특별이 해피 자카르타 합창단, 해피 자카르타 청소년 오케스트라 등을 창단 함으로써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문화 활동을 기대하게 된다. 이어 미디어의 총아로 인정되는 영상미디어 부분을 살펴보겠다. 주지하시 다시피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는 KBS월드와 K-TV 두 방송사가 있다. 두 영상미디어는 설립동기에서 밝히고 있듯이“건전한 동포 사회 구축에 1차 목 표” 를 두거나“한인2세들의 정체성 확립과 언어능력에 도움은 물론 타국에 사는 교포들의 향수를 달래줄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문화라는 인식을 기반” 으로 하고 있다. 국내 메이저 방송사 프로그램을 재편성하여 보여줌으로써 교민들이 타국에 살면서도 국내의 뉴스와 연속극, 교양, 스포츠 게임, 오락 프로그램을 향수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뉴스 제공 등 은 실시간 또는 두 시간 시차의 국내와 같은 시간대에 방송을 함으로써 운영 의 묘를 기하고 있다. 아울러 교민사회를 위한 공지사항이나 문화행사 알림, 각종 광고 등을 제공하는 것도 유사한 점이라 하겠다. 두 방송사는 각기 다른 점도 있다. KBS 월드가 영어와 인니어 자막을 통한 언어 간접 교육기능과 인도네시아의 모든 케이블 및 위성업체에 기본 채널로 KBS World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다면, K-TV는 인도네시아 뉴스는 물론 교민사회 뉴스를 자체 제작하여“교민에 의한 교민을 위한 방송” 을 실현하는 데 적극 노력하고 있다.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할 교민들의 바람도 있다. 현지 사정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시청을 할 수 없는 지역 해소, 잦은 재방송, 시간대별 편성의 묘 등이 그것이다. 세심한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필자는 이번 칼럼을 위해 각 미디어 편집인을 대상으로 대화와 몇 가지 설 문조사를 했었다. 세세히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들은 꿈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또 다양한 교민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름의 289
노력을 하고 있었다. 또한 교민들께 바람도 있었는데 그것은 오직 교민들의 건전한 참여였다. 따라서 서두에 가졌던 의문, 즉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에 미 디어다운 미디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바로 미디어 문화 창출자와 소비자인 교민들이 의문의 답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 인도 네시아 한인사회 미디어들의 사명감 발휘와 높은 가치의 문화 창출, 교민들 의 건전한 참여를 통한 조화, 이것은 곧 이 사회가 보유한 우리 문화의 실제 를 시간이 갈수록 빛나게 할 것이다. 이 내용은 2010년 5월 8일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방송 K-TV에 <손인식의 영상문화칼럼>으 로 방송되었으며, 한인뉴스 2010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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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福(행복), 나로 인해 창조되는 나의 행복 / My happiness created by me. 행복한 사람은 세상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물이 지니는 외면이 아 니라 내면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면서 그 모 든 것이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와 그 자체로 삶의 일부가 된다고 합니다. <나로 인해 창조되는 나의 행복>을 휘호하면서 거듭 화선지를 소모했던 이유가, 행복한 사 람의 삶을 닮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4
인도네시아 한국인들의 자선은 찾을수록 산처럼 높고 들판처럼 넓었다. 하 지만 그 사실들을 밖으로 들추어내는데 있어 다소 염려도 없지 않다. 자선의 고귀한 뜻을 훼손하는 일일 수도 있고, 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자선의 진리와 배치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되짚어보 면 자선 또한 세상사다. 많고 적음을 떠나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기쁘고 고귀 한 일 중의 하나로서, 편하게 접하고 편하게 행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 란 생각을 한다. 하여 이쯤해서 인도네시아에서 베풀어지는 한국인의 자선 상황을 중간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새롭게 새겨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동안 마음은 있으나 함께하지 못했던 이웃들도 자선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되 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자선 현장에서 가장 도드라진 것은 종교 공동체들이었다. 몇몇 사례들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현지인 이웃을 위한 유치원과 다문화 가정을 위한 밀 알학교 운영을 하고, 한센병 환자 마을 돕기에 적극적인 교민교회, 변함없이 전개하는 늘푸른교회의 언청이 수술을 비롯한 몇 몇 자선활동, 연합교회의 현지 어려운 이웃 눈 수술 해주기, 천사의 집 도시락 나눠주기, 장애인에게 제빵기술과 악세사리 제조 기술 전수, 주님의 교회에서 펼치는 밥퍼 사역과 침술을 통한 의료 사역, 그리고 미용 부분의 자선, 열린교회의 성도 한 가정 당 현지인 한 가정 돕기와 미용봉사, 무료 직업훈련학교 운영, 조계종 해인사 인도네시아의 나환자촌 돕기와 가깝고 먼 지역을 망라한 장학금 지급, 그리 고 어려운 불자돕기, 성요셉 성당의 일선 자선단체 정기 지원과 폭넓은 장학 292
금 지급, 정기 기금모금을 위한 작은 꽃송이회, 겨자씨회 등 교우모임체 활 동, 한마음교회의 노인대학 섬기기, 동부교회의 이웃사랑 등을 들 수 있겠다. 지면의 특성상 모두 나열할 수 없지만, 거의 모든 종교공동체들이 공통적 으로 하는 일들도 있었다. 현지의 어려운 이웃들을 대상으로 정기, 또는 부정 기로 의복이나 일용품을 나누고 크고 작은 장학금을 지급하며 사랑과 희망을 심는 것이 그것이다. 정신적인 안정과 구도자적 삶을 가꾸고, 영혼을 구원코 자하는 종교공동체들답게 앞장서서 자선 상황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생활처럼 펼쳐지는 특별한 자선들도 있었다. 바로 한국인 수도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자선들이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땀 흘리며 자선 을 실천하는 선교사, 수녀, 스님 등 수도자들께서는 밥퍼 봉사, 고아원 운영, 노인을 위한 시설 운영, 저소득층 아이들과 거리의 부랑아 교육, 다문화가정, 미혼모, 미망인 돌보기 등 매우 다양한 자선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들은 재정 자립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할 자연재해 현장이 생기면 먼저 달려가 고 또 연결 통로가 되기도 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선현장의 특별한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으로 밥퍼 해피센터의 최원금 선교사, 메단에서 고아원, 공부방 등을 운영하는 박수산나 수녀를 비롯한 세 분의 수녀, 땅그랑 외곽에 서 무지개 공부방 운영을 주도하는 고재천 선교사, 또한 인도네시아 각 지방 에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랑을 심고 가꾸는 최달수, 이항용, 정영명 선교사 들을 비롯한 인도네시아의 400여 한국인 수도자들이 있다. 성직자, 수도자 들의 숭고한 뜻과 실천에, 교민들의 진심어린 격려와 동참이 더해져, 서로를 행복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어 사회단체들의 자선 실제다. 자카르타 한인회를 주축으로, 업종별 기 업협의회, 한국부인회, 코윈, 국제부인회, 재인니평통, 동부자바 한인회, 반 둥 한인회, 족자 한인회 등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재해가 발생하면 앞 다 293
투어 성금과 물품을 거두어 아픔을 나누며, 또한 나름대로 상황에 따른 최선 의 자선을 펼쳐가고 있다. 독자적이고 지속적인 기구로는 우리은행이 주축이 된 우리장학회, 불우한 처지에 이른 한국인을 돕는 사랑의 전화 운동본부, 무 지게 공부방을 집중 지원하는 신발협의회, 수디르만 로타리클럽의 정기적으 로 실행하는 몇몇 정기자선이 있다. 또 다른 자선의 형태도 있다. 자선공연과 전시로서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의 언청이 수술을 위한 정기 자선음악회, 김은미 씨가 주관했던 성악가 초청 자선음악회, 한인예총에서 주관한 판소리 자선순회공연, 최근에 열렸던 김세 영 자선 사진전 등이 그것이다. 문화를 가꾸고 향수하며, 펼치는 자선, 어찌 특별함이 아니겠는가. 자선이란 경제적 여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사랑의 마음과 지극한 실천을 필요로 하는 것이 자선이다. 또한 마음이 있다고 해도 당장의 현실적인 일들에 밀리기도 하는 것이기에 사회단체나 문 화행사를 통한 자선 기회 제공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들의 아름다운 자선 사례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다만 공동체와 함께 하는 다양한 자선 안에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여기서는 그 사 례들을 생략하겠다. 꼭 기억해야 할 분들은 기업의 주체들이었다. 이들은 생 산과 비즈니스 현장의 주인공들이자, 가장이며 또 사회공동체, 종교공동체의 일원들이며, 경제적 결실을 창출하는 원천이다. 곧 사실상 모든 자선의 출발 점이 기업인들인 것이다. 기업 자체로 펼치는 자선 사례도 없지 않는데, 자 선재단을 설립하여 심장병 어린이 치료, 한국과 인도네시아 한센촌 지원, 국 내외를 막론한 장학금 지원 등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자선을 펼치는 무궁화 유통과, 배움의 농장, 빈민가정 우수학생에게 장학금 지원, 학대받는 여성돕 기, 기아구제 식량 지원을 꾸준히 펼치는 CEO 스위트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294
돈이 많은 사람을 무조건 존경하지 않고, 권력을 향해 무조건 굽실거리지 않는 것이 한국인의 기질이다. 인정이 많다는 것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인의 기질이다. 인도네시아 자선현장에서 여실히 증명이 되고 있는 마음부자 한국인, 실천의 한국인을 돌아보면 참으로 감사와 경이로움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사 호사다마여서 좋은 일에도 더러 비판이 끼어들기도 한다. 사람마다 느낌과 판단이 다 달라서 고귀한 뜻의 자선활동을 놓고도 긍정의 시각만 있 지 않는 것이다. 다만 더러 있을 수 있는 부정적 시각이나, 자선을 앞 세워 개 종을 강요하는 일부의 처사, 자선기금을 착취하고자하는 몰지각한 일부 이 나라 인사들을 대함에 있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자선과는 다른 정다운 나눔들도 많았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초기부터 유학생들을 위한 식사초대, 고추장, 된장, 김치 나누어주기와, 사정 상 독거를 하는 이웃에 대한 다정한 나눔들 또한 여전하다. 듣고 보는 이의 마음이 흐뭇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행사들에 대한 크고 작은 도움들 또한 아 름다운 나눔으로서 문화를 가꾸는 큰 힘이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매우 풍요한 자원과 여유로운 품성을 지닌 나라에서 더불어 살고 있다. 와룽에 앉아 식사를 하고 오잭을 이끄는 어려운 환경의 사람이 거 리에서 손을 내미는 걸인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 나라 에 살고 있다. 자선(慈善),‘사랑이 지극’ 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랑할 자(慈) 를 스스로 자(自)로 바꾸면 자선에서‘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이라는 뜻을 찾을 수도 있다. 곧 진정한 자선,‘세상 최고의 자선이란 오늘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 자기의 삶을 잘 살아주는 것’ 이란 의미도 생기는 것이다.‘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이야말로 가족이나 이웃에게 베푸는 세상 최고의 자선이 아닐까 싶다. “자선에 지나침이란 없다.” 와“자선은 무엇보다 지속적인 것이 중요하다.” 는 정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자선에 솔선수범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자선 295
이란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감사와 기쁨” 이라고 밝힌다. 자선과 나눔은 분명 사람 사는 사회의 꽃인 것이다. 이상으로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운 한국인, 사랑의 한국인을 자선이란 창구 를 통해 살펴보았다. 자선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뚱 맞은 생각이 든다. 작은 자선마저 필요로 하지 않는 평화롭고 풍요한 세상을 희망해보는 것이다. 이 내용은 2010년 5월 22일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방송 K-TV에 <손인식의 영상문화칼럼> 으로 방송되었으며, 한인뉴스 2010년 7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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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랑, 그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요? B.C. 1100년 무렵부터 춘추중엽인 B.C. 600년 무렵에 이르는 약 500년 사이에 노래 불리어지던 민간 가요와 사대부들의 노래 및 왕실의 연회, 의식이나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부르던 노래의 가사들을 후세 사람이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 시경(詩經)입니다. 그 시경의 한 구절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간절한 이유는 그 무 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극한 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랑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惠而好我 킼手同궋(혜이호아 휴수동행. 詩經 句), 나를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이여 손잡고 함께 가자. / Thou who love me and whom I love, let us go together hand in hand.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5
교육과 관련하여 한국인들에게 참 익숙한 고사가 있다. 바로 맹모삼천지교 (孟母三遷之敎)다. 이 고사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추출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인의 교육열이고, 또 하나는 교육에 있어서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것이다. 한국인의 교육열이야 이젠 세계에 드러난 바인데, 양질의 교육환경에 대한 욕구는 그야말로 진리여서 한국인뿐 만 아니라 세계인 모두에게 교육환경 좋은 곳이 곧 주거의 첫째의 목표가 되 고 있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는 특별할 정도의 교육열을 지닌 한국인들이 그것을 해소할 만한 환경을 지닌 곳일까? 즉 한국인들이 2세를 교육하는 데 있어 선택할만한 곳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처한 상황에 따라 다 다를 것 이다. 다만 이 칼럼을 준비하면서 내린 결론은‘선택할 만한 곳이다.’이다. 특히 이 결론은 이미 2세 교육을 마친 부모나, 이미 대학을 진학했거나 사회 로 진출한 당사자들에게서 얻은 것이어서 매우 흥미롭다. 그렇다면 인도네시 아의 어떤 교육환경이 관련자들에게는 행복하고 듣는 이들에게도 기분이 좋 은 이런 결론을 얻게 할까. 살펴볼 때 넓은 선택의 폭을 들 수 있겠는데, 우선 한국국제학교 JIKS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타국에 살지만 한국식 교육을 원하는 한국인들에게 반드 시 필요한 JIKS, JIKS는 한국식 교육에 국제감각까지 덤처럼 익히고 경험할 수 있어 참으로 보배로운 존재라 하다. 아울러 나름의 교육시스템을 갖춘 인 터내셔널 스쿨들, 그리고 내셔널 플러스로 분류되는 인도네시아 학교 등이 있다. 비싼 교육비 부담이 있지만 존재감이 큰 미국계 JIS와 NJIS, 영국계 BIS와 RIKS, 인도계 GMIS, 호주계 AIS, 싱가폴계 SIS 등 인터내셔널 스쿨 298
과, 선진국형 교육형태를 도입하여 인터내셔널을 지향하는 내셔널 플러스로 서 SPH, STB, SCB 외 다수의 학교가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다. 이들 학교는 다국적 학생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한국인들이 간절히 소원 하는 영어습득을 우선케 할 수 있는 학교들이다. 곧 한국인들이 원하는 교육 환경이자 삶의 환경이 되는 것이고, 강력한 주거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러한 학교들의 존재는 인도네시아의 큰 도시나 작은 도시를 막론하고 한국학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하며,“기러기 아빠” 라는 은어까지 생겨나게 한 조기 유학 대상지가 되게 하고 있다. 한편 저렴한 교육비의 일반 인도네시아 학교 도 선택권에 있는데, 경제적 여건을 감안할 수도 있지만 현지 전문가, 즉 특 화된 재원을 기른다는 측면에서 이들 학교들 또한 분명한 선택의 한 축이 되 고 있다.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를 교육환경이 좋은 곳으로 여기는 데는 그야말로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대학진학의 결과이다. 그간 인도네 시아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국내 명문대학 진학은 국내의 유수한 고등학교와 비교해볼 때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특례입학이 란 제도의 혜택도 없지 않지만, 이는 글로벌 시대에 발맞춰 우수한 인재를 선 발하려는 국내 대학의 취지와 잘 조화된 결과이기도 한다. 아울러 세계의 명 문대학 진학 또한 이미 흔한 일이 되고 있는 일인데, 미국을 비롯한 세계유수 의 대학에 합격이야말로 가능성 있는 인재라는 증명이니 한국인들에게 인도 네시아는 교육의 적소가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는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사설 교육의 공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의 사설교육, 과열 현상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 기도 하고 심지어는 퇴출의 대상으로 치부되기도 하는데, 변함없이 성행하는 것이 또한 사설교육이고 보면, 이는 바로 자본주의 사회, 경쟁사회에 있어서 299
사설 교육의 본질이요 무시할 수 없는 필요성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자 카르타를 중심으로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한국적 사설 교육은 다국적 인터내 셔널 학교에서 채워주지 못한 일부 중요 과목들을 자국의 학습방식으로 충당 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커뮤니 티의 규모로 인해 자국의 사설교육 시설이 생겨날 수 없는 다른 나라 학부모 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편 사설교육은 많은 시간 집중을 필요로 하거나, 각별한 지도를 필요로 하는 주요 과목이나 예능계 과목에서 그 장점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일 부 미술과 입시학원들은 국내외 명문대 진학성과를 속속 드러내고 있기도 하 다. 미술 음악 등 예능계 사설교육은 꼭 진학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더라도 모국과 타국의 문화충돌을 완화하면서, 모국과 현저히 다른 일상의 문화, 모 국의 아름다운 산천이나 특징이 드러나는 사계절을 경험하지 못하는 학생들 에게 감성을 일깨우는 절대적 요소가 될 것이다.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우리 한국인 초·중·고생이 대략 2000여명 정도 재 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계 국제학교 JIKS의 경우 2009년 고등학교 졸업생 132명 중 약 98%가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했으며, 외국 계 인터내셔널 스쿨 중 가장 많은 한국학생이 재학 중인 JIS의 경우 2009년 하이스쿨을 졸업한 한국인 학생 37명 중 약 55%가 한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했고, 약 45%정도가 미국을 비롯한 제3국의 대학으로 진학을 한 것으로 드 러났다. 자카르타의 여타 외국계 학교들 또한 이와 비슷한 양상인데, 수라바 야, 반둥, 족자카르타 등 지방도시에 산재한 인터네셔날 스쿨 졸업생들의 경 우는 선진국대학 지향보다는 한국의 대학과 현지대학을 선택하는 비율이 점 점 더 높아지고 있다고도 한다. 안타까운 점은 약 600여명에 달하는 지방도 시의 한인 학생들은, 한인회에서 봉사활동으로 운영하는 주말 한글학교를 통 해서만 한국적 교육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인데, 정부와 민간 모두가 다각적인 300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인도네시아 정부초청장학생, 언어연수를 비롯한 장단기 유학생들도 상당수에 이르는데, 인도네시아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포함하여 이들에게 서 나름의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은, 이미 인도네시아 대학에서 언어, 경제, 의 학, 법률을 전공한 몇몇 한국인들의, 활발하고도 성공적인 활동이 새로운 패 러다임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하여 학부모들의 소견 중“자녀의 모국어 어휘력 부족” 에 대한 걱정은 시 간이 해결할 것으로 여기며,“영악스럽지 못한 것에 대한 염려” 는 그냥 미소 로만 답하게 된다. 오히려 타국의 환경과 현지 문화 경험, 그리고 타국인의 부와 가난에 대한 간접 경험, 갖가지 봉사 체험 등으로 아쉬움을 대체하고도 남을 것이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국내보다 현저히 적은 청소년 위 해환경” ,“경쟁의 소용돌이를 비켜가는 여유로운 시간 운용” ,“상대적인 순 수함”등의 평가와“인도네시아 생활 중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자녀교육” 이 라는 결론 등에서는 함께 기꺼워하며 감사할 뿐이다. 특히 진학한 대학에서 적응기를 거쳤거나, 사회에서 연륜을 쌓아가는 시기의 당사자들이 인도네시 아에서의 수학을 마음 깊이 감사하며 생활한다고 하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 니겠는가?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인도네시아가 한국인들에게 선호하는 교육 환경이 되기까지는 매우 실질적인 배경이 있다. 2000여 한국학생들이 글로벌 인재 로 성장하고 있는 그 이면의 절대적인 축은 가정교육, 즉 학부모들의 열정과 노력이다. 초, 중, 고의 교육비로는 국내와 비길 바 없이 높은 수업료를 기꺼 이 지출하면서 자식을 훌륭히 키우겠다는 부모들의 일념 하나로 자녀들에게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던 것이다. 하여 인도네시아 한인사 회 교육문화를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은“한국인의 우수성” 이 다. 어떤 악조건이라도 거뜬히 이겨내고 아름다운 성공을 일구는 한국인의 301
의지와 노력, 그리고 능력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고 함께 나누어야 할 부분도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최소 한의 교육비 지출조차 어려운 환경에 처한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배려이다. 한 때의 어려운 처지가 배움의 시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오랜 아픔으로 남지 않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교육을 말할 때 흔히 쓰는 단어가“교육지백년대계(敎育之百年大計)” 이다. 교육이란 백년을 내다보는 큰 계획, 또는 백년을 한결같아야 비로소 성과를 올곧게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제가 한결같고 오늘과 내일이 한결같 아야 한다는 것은 곧 창의적이고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주도해야 한다는 말 과도 다르지 않다. 사람은 평생 교육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타 국에 살면서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하며, 또 조화해야 한다. 한결같은 노력으 로 한결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설문에 응해주신 많은 분 들께 감사드린다. 이 내용은 2010년 6월 5일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방송 K-TV에 <손인식의 영상문화칼럼>으 로 방송되었으며, 한인뉴스 2010년 8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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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事後素(회사후소), 그림은 바탕을 갖추고 난 후의 일이다. / Drawing comes after the background is prepared. 그림은 바탕을 갖추고 난 후의 일입니다. 바탕부터 조성해야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사람 삶의 본질은 어느 사이 생겨 난 욕심을 지우는 데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 하얗던 그 바탕이 배우고,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는 사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문도 쌓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지우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서예 에 개칠(蓋쥻)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서(輔書)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흠을 감추기 보다는 드러내서 보완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생은 항상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 을 저는 서예를 하면서 깨닫습니다. 바탕이 하얗게 유지될 수만 없는 세상에서 지우고 다듬으면서 완성해 나가는 것,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 탐구 6
문헌에 의하면“종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으며, 종교는 현 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와 모든 민족에게서 보이는 문화현상” 이라고 밝히 고 있다.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 문화가 생겨나고, 사람이 생을 영위하는 곳에 반드시 종교가 함께 하는 것이니, 종교로서 문화를 탐색할 수 있고 문화로 종 교를 가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특히 한국의 종교사를 들여다보 면 문화가 보이고, 문화사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온통 종교의 역사가 생생하 게 살아 있다. 따라서 본고는 종교와 문화, 문화와 종교, 즉 서로 뗄 수 없는 그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담론도 될 것이다. 곧 문화의 의미도 환기해보면서, 매우 일상적이면서도 특수한 영역인 종교문화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살펴볼 때 문화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포괄적인 정의는“문화는 인간 에 의하여 이룩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다. 즉 문화는“지식, 신앙, 법률, 도 덕, 관습,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얻어진 다른 모든 능력이 나 습성의 복합적 총체” 이므로 문화의 중심에 반드시 종교가 자리하고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땅 인도네시아에 언제부터 한국인의 종교가 하나의 문화로서 드러나기 시작을 했을까? 우선 선명한 기록은 1970년 한국의 한 기독교 단체 총회로 부터 인도네시아 선교를 명받고 이듬해인 1971년 선교사로 부임한 고 서만 수 연합교회 목사를 들 수 있겠다. 그로부터 어언 40여 년의 역사를 인도네 시아에 쌓은 한국기독교 개신교계는 한편으로는 동포들을 안위하고, 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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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으로는 현지인 기독교도들을 이끌면서 그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 을 기울여왔다고 하겠다. 오늘날에는 자카르타를 비롯한 수라바야, 반둥, 족 자카르타 등 지방 도시를 아울러 그 숫자가 약 30여 개의 교회로 확대되었으 며, 총 3천 500여 신도들이 교회와 더불어 타국의 삶을 지혜롭게 꾸며나가 고 있다. 이들 교회는 다시 현지인들의 정신적 안식처나 삶을 개선하는 중심체로서 현지교회를 개척하거나 지원한다. 종족별 종교지도자를 배출하고 그들로 하 여금 그 종족 안에서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그 숫자 가 수백 곳을 헤아리니 한국적 종교문화의 혜택을 입는 현지인 성도들의 숫 자는 헤아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나아가 일인 교회 역할을 하는 400여 선교사들의 활동까지 감안해볼 때 이 땅의 한국인들에 의한 기독교 개신교 문화는 매우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그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고 하겠다. 학자들은 역사와 현상의 어느 면으로 보아도“한국의 문화는 조화의 문화 다.” 라고 역설한다. 이는 한 민족의 역사가 “하늘과 땅 사람이 모두 하늘의 이 치를 법으로 하여 거기에서 벗어남이 없이 모두, 고루 어우러지고 그렇게 되 도록 노력한다.” 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다른 나라 문화에 조화가 없 는 것은 아니지만,“한국의 문화에는 조화의 강도가 훨씬 높고 그것이 보다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고 한다. 한국문화의 어느 것을 보아도 조화의 면이 역 력하거니와 역사에서 보면 한때 그것이 깨어졌던 때라 하더라도 곧 회복을 위한 노력이 도처에서 터져 나와 조화를 이어오곤 했던 것이다. 조화가 강점인 한국문화는 근대에 들어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양문화에 얼 핏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문제를 풀어나가며 고도성장을 이루는가 하면 많 은 분야에서 세계적 리더들을 속속 배출하고 있다. 세계 어디에나 한국인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며, 나름대로 어렵고 이질적인 환경과 토속문화를 이 305
겨내고 성공을 일구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한국인 종교문화도 우 리문화의 특징인 조화를 바탕 삼아 매우 성공적인 정착과 변천, 그리고 발전 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 교민들께서도 다 아시는 바다. 이어 전 세계의 소속 교회가 일체감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인 천주교로서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을 통해 발생되는 종교문화를 살펴보겠다. 자카르타 한 인성당은 1978년 재인니 한인 가톨릭 교우회가 모임을 가진 것이 그 시작이 다. 조선 중엽 성리학 또는 토속신앙과도 잘 조화한 학문으로서 한국에 전래 된, 한국천주교의 시작이 그렇듯 외부의 선교 활동이 없이 공동체를 타국 땅 에서 세우는 일을 재현해낸 것이다. 신부도 수녀도 존재하지 않은 곳에서 평 신도들이 주일이면 가정집에 모여 공소예절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 한국인 603 세대, 등록 교우 천오백 사십여 명이 공동체를 이루어 가톨릭 나름의 문 화를 펼치고 있는 토대인 것이다. 천주교는 최근에는 수라바야, 반둥, 찌까 랑, 땅그랑 등 4곳에 소속 공동체로서 공소를 설립하고 내외적으로 평화와 희망을 함께 가꾸어나가고 있다. 문헌에 드러나는 종교의 의미는“근본이 되는 가르침” 이다. 또는“초자연 적인 존재에 대한 외경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의례 등의 행위”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치·경제·사회·예술 등 전반이 종교로부터 크게 영 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종교는 모든 사람에게 인생관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며, 특히 혼란한 시대에는 궁극적 관심이자 신념체계로서 통합적 가치기 준을 제시하며 사회를 리드한다.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생리요 특성으로서 한 국인과 한국문화의 장점을 세계에 드러나게 한 원동력으로서의 깨달음도, 한 국종교가 깨달음의 방법을 두고 그 경지에 이르도록 꾸준히 노력을 해온 덕 임을 부정할 수 없다. 깨달음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 불교를 살펴보자. 인도네시아 한국인 불교 공동체들 또한 1991년 1월 불자들이 모여 자카르타에서 가정법회를 개최한 306
것이 그 시작이었다. 불자들의 그 작은 모임은 오늘날 조계종 해인사 인도네 시아의 전신이자 조계종 능인정사, 조계종 고려정사, 법연종 법연원 등 네 곳 의 불교 공동체 700여 신도의 모체이다. 인도네시아 불교는 7세기경부터 약 300여 년을 융성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힌두교나 이슬람의 유입에 따라 150여 년 전부터는 그 명맥마저 끊긴 것인데, 40여 년 전 대만으로부터 유입된 대승불교가 승맥을 이은 데 이어 한국계 불교가 나름의 힘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해인사 인도네시아는 소속 불교 공동체로서 이미 수라바야에 해인사 포교원을 열었고, 또 다시 반 둥에도 포교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면서 또한 다 종교 국가이다. 다만 타국적 종교 공동체를 국가 법적으로 양성화 하는 것이 아니어서 안타까운 점도 없지는 않지만, 한국적 종교 즉, 기독교로서 천주교 의 성당과 개신교의 교회들, 그리고 불교공동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현지 의 동일 종교 공동체들과 연합하면서 매우 실천적으로 종교문화를 키워가고 있다.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두려움이나, 타국의 생활현장에서 생겨날 수 있는 고난을 이기고 힘을 얻으며, 현지 사회를 향하여는 끊임없는 자선과 다양한 사회개선 사업을 펼치는 모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내적 깊이보다는 외적 넓이를 선호하는 화려한 칼라 시대를 살고 있다. 어느 때보다 전자공학의 의존도가 높은 시대이기도 하다. 이는 곧 순일한 종교의 진리와 가르침이 절대 필요한 시대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종 교학자 뮐러는 종교에 있어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 말은 타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종교는 반드시 넓이와 깊이가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우리는 앞에서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얼마나 종교적인가와 한국인들이 얼마 나 조화를 추구하는 민족인가를 살펴보았다. 곧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종교 307
문화를 통해서 실천과 조화, 희망을 배울 수 있었다. 부디 각자가 믿는 종교 의 무한한 힘을 입어 이 땅의 한국인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빈다. 끝으로 그동안 6회에 걸쳐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문화의 실제(저서문화, 언 어문화, 미디어문화, 자선문화, 교육문화, 자선문화)를 탐구해왔던 본 문화칼 럼을 개인 사정으로 인해 마감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이제는 인도네시아 한 인사회의 문화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일 때도 되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것 인데 그만 중도에서 그치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 다행이 쌓인 것이 많고 다시 기억해야 할 것도 많은 것이 인니 한인사회에 역사요, 기록되어야 올곧게 역 사가 된다는 뜻을 지닌 분들이 많으므로 언젠가 <인니 한인사회문화사> 한 권이 탄생될 것으로 믿는다. 그동안 자료를 제공해주시고, 격려해주셨던 분 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내용은 2010년 6월 19일 인도네시아 한인교민방송 K-TV에 <손인식의 영상문화칼럼> 으로 방송되었으며, 한인뉴스 2010년 9월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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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전통을 지닌 필묵예술이 오늘 생명력을 빛내는 것은 단지 오래되어서가 아닙니다. 흐르는 시간을 지배하며 그것을 즐기 는 사람들에 의해 그때마다 다시 그 가치를 다시 얻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라는 제목의 책의 서문에서 간추립니다. “우리는 매일 경쟁과 승리를 좇아 질주합니다. 지나간 길에는 수많은 분실물이 떨어져 있습니다. 매일 무엇을 떨어뜨리고 다니는 것일까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질주를 멈출 수 없습니다. (중략) 이 책을 쓴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제 진심을 말하지 못할까봐 무섭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 을 감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꿈꿔왔던 일들을 다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칩니다. 정말이지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 습니다.”
후회 없는 오늘로 내일을 가라 / Go to tomorrow with today without regret.
│후 기│
이 책『도처교학』 은 사람이 사는 도처에 반드시 존재하는 배움과 가르침, 그리 고 거기에 얽힌 삶의 이야기를 모아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특히 인도네시아 의 한국인들이 학교나 사회, 기업에서 일궈낸 교학 성과가 만만치 않다는 데에 근거한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노력은 국내와 현지, 세계의 유수한 대학에 당당히 진학 결과와 성공적인 사회진출 사례를 많이 남겼다. 또한 기업들의 활동 은 고용에서부터 경제적 성과에 이르기까지 인도네시아에 대한 공헌도가 매우 높다. 한마디로 한국인의 기질과 교학의 우수성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유감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많은 사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 원고를 써내는 것이나 사실들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좋은 사례집을 엮어내겠다는 기획의도와 드러내놓고 자랑을 하는 것 은 삼가겠다는 그 틈을 지워버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많은 겸양의 미덕을 만나는 중에도 귀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이만큼이나마 이룬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현대 한국과 한국인들의 위력 큰 무기인 한류의 바 탕, 한국인의 기질과 독특한 문화의 바탕으로서 진심을 다하는 교학을, 타국의 교학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음은 내게는 큰 소득이었다. 문화의 결실을 이웃과 함께 만들어 내는 일, 나는 이런 일이 매우 즐겁다. 서예 가로서 서예가 지닌 인문학적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 시대, 한 사 회를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주이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감해주시고 함께 동참해주신 이웃들이 아니었으면 쉽 게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난감한 일을 거절하지 못하시고 잠시나마 고민을 떠안 고 글을 쓰신 1부의 공저자분들과,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2 부의 주인공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이 빛을 보는 데는 LIG 인도네시아와 관계자들의 큰 후원이 있었다. 기업 의 문화 심고 가꾸기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겠는데, 특별히 해외 동포사회에서 일어난 미덕인지라 고맙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크다. 감사하다.
2011 년 5 월 서생 인재 손 인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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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heogyohak was planned with intent to collect stories of learning and teaching, and life which always exist wherever humans live. Especially, it is based on the teaching and learning achievements that Koreans in Indonesia has accomplished in schools, societies, companies are hard-bitten. Student and parent's efforts has made many results of entering leading universities in the world and examples of successful getting into societies. Moreover, companies' activities, from employment to economic outcomes, has contributed to Indonesia so much. In short, Korean's spirit and superiority of teaching and learning are fully shining in Indonesia. Yet, it was very difficult task to compile so many stories into a single volume. Most of the contributors avoided writing or revealing the stories. It left wanting of uncovered gap between compiling a good casebook, which was the intent of the plan, and being cautious of bragging. Nevertheless, it is truly pleasant to bear the precious and beautiful fruits in meeting the virtue of modesty. Above all, it is a big result for me to see the earnest teaching and learning in a foreign country as a background of Korean wave, which is modern Korea and Koreans' power and big weapon, and of Koreans' spirit and unique culture. Therefore, it is very pleasant for me to make cultural fruits with neighbors because as a calligrapher, it is not only revealing humane value which calligraphy has but also as a member of same age and same society, it is a matter of choice and can be carried out on my own. Of course were it not for neighbors who sympathized with and participated in, it would be difficult to attain. I really appreciate the collaborators of the first part of the book, who could not decline this labored work, and write the story with concerns, and also the interviewee of the second part of the book, who could not turn down, and responded to the interview. LIG Indonesia and the parties concerned supported a lot for this book. Though it is a kind of cultivating the corporate culture, I am thankful and proud of it specially since it happened in Korean society abroad. May 2011.
Injae, Inshik S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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