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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실정보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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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 60주년 개정판
iic 이스라엘 정보 센터
그래픽 디자인: 초핏 짜히 (Tsofit Tsachi) 통계자료: 중앙 통계청 (다른 기관이 명시된 경우 제외) 인쇄: Keter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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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예루살렘, 2008 이 책은 이스라엘 재외공관이나 인터넷 (www.mfa.gov.il)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목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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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67
국토
93
국민
125
보건과 사회 서비스
147
교육
165
과학과 기술
185
경제
203
문화
243
세계 속의 이스라엘
32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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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성서 시대
8
제 2 성전시대 – 시온으로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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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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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가
35
평화 협상
49
역사적 주요사건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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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대 민족의 발생지는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이 민족의 오랜 역사 중 상당 부 분이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그 중 2천 년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서 이 민족의 문화적, 종교적, 국가적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 땅에서 강 제로 쫓겨난 후에도 그들의 실제적 거주는 많은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오랜 세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결코 이 땅과의 유대를 끊거나 잊지 않았다. 1948년에 이스 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유대인들은 2천년 전 잃었던 독립을 되찾는다.
)' (דברים ל"ב ז...זכור ימות עולם בינו שנות דור ודור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신명기 32:7) 이스라엘 지파의 중세 말 채색 지도 중 일부 – R. 벤-하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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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시대 족장 시대 유대민족 역사는 약 4천 년 전(기원전 17세기경)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 과 손자 야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2000~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메소포타미아 발굴 문헌은 성서에 나타난 그들의 유목 생활의 단면들을 확증해준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을 형성하도록 부르 심을 받은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만연해지자 야곱(이스라엘)과 그 의 열 두 아들과 가족들은 이집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의 후손들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 제 노동에 내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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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 미켈란젤로 작, 로마 빈콜리 산 피에트로 성당
이집트 탈출과 정착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4백 년의 노예 생활 만에 모세에 의해 해방된다. 성서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세는 자기 민족을 출애굽 시켜 그 조상들에게 약속되었던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간다(기원전 13~12세기경). 40년 간 시내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는 동안 그들은 그곳에서 한 민족을 이루게 되고 십계명을 포함하는 토라(모세오경)을 받게 되며,
이것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게
된다.
출애굽
사건(기원전
1300년경)은 유대 민족의 기억에 지워질 수 없는 인상을 남겼고, 자유와 해방의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다. 해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Pesach), 오순절(Shavuot), 초막절(Succot)을 지키며 그 당시의 사건들을 기념한다. 그 후 2세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땅 대부분을 정복하고 농부와 장인들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게 된다.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과 전쟁의 때가 반복되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사라고 불리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규합하게 되는데 이들은 지도자적 자질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노련함을 바탕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지파 조직의 근본적인 약점은 블레셋 사람들(소아시아 출신으로 지중해 연안에 정착한 해양 민족)의 위협 앞에서 부족들을 통합하며 상속을 통해 항구적인 지위를 계승할 수 있는 통치자의 필요성을 대두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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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네게 복을 내리시고 너를 지키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드시고 평화를 주시노라.”
(민수기 6:24~26)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기원전 7세기의 작은 은 두루마리. 제사장의 축복기도가 담겨 있다 • 이스라엘 문화재청
왕국 시대 초대 왕 사울(기원전 1020년경)은 느슨한 지파 조직에서 그의 후계자 다윗의 통치 하에 완전한 왕권국가가 수립되기까지의 기간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다윗 왕(기원전 1004~965년경)은 팔레스타인 제패를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변 왕국들과 우호 동맹을 조직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 지역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결과 그의 왕권은 이집트 국경 지대와 홍해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미치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12개
지파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고
수도
예루살렘과
군주제가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했다. 성서에서 다윗은 시인이자 음악가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들이 시편(The Book of Psalms)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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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5~930년경)은 국력 신장에 더욱 힘썼다. 솔로몬 왕은 여러 정략 결혼으로 더욱 공고해진 이웃나라 국왕들과의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 왕국의 평화를 지키고 그 당시 열강들과 대등한 지위를 다졌다. 그는 구리 광석과 금속
기원전 8세기 예루살렘의 제1 성전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히브리어 명문이 새겨진 엄지 손가락 크기의 상아 석류 • 이스라엘 박물관(예루살렘)
예언자들: 신적인 계시 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 종교적 현자이자 권능을 지닌 인물을 말하며, 이들은 예루살렘 함락(기원전 586년) 이후 한 세기가 지날 때까지 왕국 시대 기간 동안 예언활동을 했다. 종교, 윤리, 정치 문제에 대한 왕의 조언자 역할을 하거나 혹은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가 최우선이라는 점에 입각해 왕의 비판자로 나설 때 이들 예언자들은 정의의 요구에 따라 유대 민족의 삶의 도덕성에 대해 설득력 있는 논평을 내놓았다. 예언자들의 계시 경험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산문과 시가 담긴 책에 기록되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이 성서에 편입되었다.
예언자들이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사야서(1:17)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 즉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등의 구절은 인류의 사회 정의 추구에 있어 지속적인 자양분이 되어준다. 제련 등 주요 사업을 육성하여 해외 교역을 확대하고 국내 경제발달을 촉진하는 한편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기존 도시를 더욱 강화했다. 그의 업적 중에서도 단연 최고봉은 유대인들의 국가적, 종교적 삶의 중심이 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이었다. 성서에 따르면 잠언(The Book of Proverbs)과 아가(Song of Songs)서는 솔로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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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 추정된다.
분열 왕국 시대 솔로몬 왕의 통치 말기는 그의 야심 찬 계획 때문에 커다란 고통을 겪은 민중의 불만으로 얼룩졌다. 동시에 왕 자신의 지파에 대한 특혜 대우는 다른 지파들의 원망을 샀고, 결국 왕권국가와 지파 분리주의자들 간의 반목의 골을 깊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솔로몬의 사망(기원전
930년)
후
일어난
공공연한
반란으로
북쪽의
10개
지파가
이탈했고,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이 중 유다 왕국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세력권 안에 세워졌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둔 이스라엘 왕국은 19대 왕까지 2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유다 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다윗의 혈통을 이은 19명의 왕들에 의해 400년간 통치가 이어졌다.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먼저 이스라엘이, 그리고 뒤이어 유다가
외세의
함락되고(기원전
점령 722년)
하에 그
놓이게 주민들은
되었다.
북
추방당하고
이스라엘 잊혀졌다.
왕국은
아시리아에
그로부터
100여
의해 년
후
바빌로니아가 남유다 왕국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한 것은 물론 대부분의 거주민들을 추방했다(기원전 5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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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의 종 셰마에게” 하사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인장. 므깃도(Megiddo)에서 발굴되었다 • 이스라엘 문화재청
최초 유배 (기원전 586~538년) 바벨론의 정복으로 제1 성전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유대민족과 이스라엘 땅의 연결고리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 그들의 고국을 기억하리라 맹세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시편 137:5~6). 제1 성전의 파괴(기원전 586년)에 이은 바벨론 유수는 유대인 이산(Jewish Diaspora)의 시발점이 되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유대교는 이스라엘 땅 밖에서의 종교적 틀과 삶의
바빌론 강변에서 – E. M. 릴리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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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생존과 영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유대민족의 미래를 보호할 수 있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제 2 성전시대 시온으로의 귀환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142년) 기원전 538년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1차
귀환에
나섰다.
이들을
이끈
이는
다윗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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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율법 학자 에스라의 인도 하에 2차 귀환이 이루어졌다. 그 후 4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페르시아(기원전 538~333년)와 뒤이은 헬라(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지배(기원전 332~142년) 하에서 다양한 수준의 자치를 체험했다. 에스라의 솔선수범적 지도 하에 이루어진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 제 1 성전이 있던 터에 제 2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 유대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그돌라(최고 회의)의 설립은 제 2 성전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권 안에서 유다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이 위임된 국가였다.
대왕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 중 하나로, 페르세폴리스의 궁전 벽에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기원전 332년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고대 세계의 일부가 된 이스라엘 땅은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
신정국(神政國)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유대 민족 전체에게 헬라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교 행사를 금하고 성전을 모독하기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그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났다 (기원전 166년).
하스몬 왕조 (기원전 142~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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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스몬 왕조의 성직자 마타티아스, 그리고 뒤이어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의 주도 하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했다(기원전 164년). 유대인들은 이 사건들을 매년 수전절(Hannuka)에서 기념하고 있다. 하스몬의 승리가 이어지자(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는 유대(이스라엘 땅을 지칭하던 당시의 명칭)의 자치권을 되돌려 주게 되었고, 셀레우코스 왕국의 몰락(기원전 129년)과 함께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했다. 그 후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몬 왕조의 통치 하에 유대 왕국은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영토를 탈환했다. 유대인의 지배 하에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유대인들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마사다: 예루살렘 함락에서 살아남은 약 1천 명에 이르는 유대인 남성, 여성, 아이들은 사해 근처 마사다에 위치한 헤롯 왕의 산꼭대기 궁전을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이들은 로마군의 계속된 함락 시도에 대항하며 이곳에서 3년을 버티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마사다를 함락시켜 성벽을 뚫고 쳐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 유대인들과 그 가족들은 노예가 되는 것보다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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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 새겨져 있는 메노라(일곱 촛대)
각 시대별 메노라 황금 메노라(가지가 일곱 개 달린 촛대)는 고대 예루살렘에서 솔로몬 왕 성전의 예배의식 때 사용된 주요 도구였다. 그 후 오랜 시대에 걸쳐 이것은 수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유대 유산과 전통의 상징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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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하스몬 왕조의 동전에 새겨진 메노라 (이스라엘 문화재청)
서기 1세기의 유물로,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구에서 발견된 두 개의 회반죽 조각에 새겨진 메노라 (이스라엘 탐사협회)
5~6세기 여리고 유대 회당의 모자이크 바닥에 있는 메노라 (이스라엘 문화재청)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근처에 있는 베노 엘칸(Benno Elkan) 작의 메노라 (이스라엘 공보부(이후 G.P.O.로 표기)/ F. 코헨)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 ~ 서기 313년) 셀레우코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 지역에 집권한 로마인들은 다메섹의 로마 총독의 지배 하에 하스몬 왕 히르카누스 2세가 제한적인 왕권을 가지는 것을 승인했다.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권에 반대하여 향후 수년 간 잦은 반란을 일으켰다.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가 하스몬 왕조의 지난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를 꾀했으나 그가 로마군에 패하고 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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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몬 왕조의 통치는 끝을 맺고(기원전 40년) 이 땅은 로마 제국의 한 주로 예속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인들은 히르카누스 2세의 사위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내정에 대해서는 거의 제한 없는 자치권을 부여 받은 헤롯은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대규모 건축 사업에 착수하여 가이샤랴와 세바스티아(사마리아)의 도시들과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 등을 세웠다. 그는 또한 성전을 증축하여 그 시대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로 변모시켰다.
헤롯 성전 – 제 2 성전시대 예루살렘 모형 중에서 • 이스라엘 박물관(예루살렘) 제공
할라카: 할라카는 성서 시대 이후부터 전세계 유대인들의 삶의 지침이 되어온 법 체계이다. 이것은 대인관계와 예배 의식에 있어 유대인들의 종교적 의무를 다루며, 출생과 결혼, 경조사, 농업과 상업, 윤리와 신학 등 사실상 인간 행동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고 있다. 성서에 뿌리를 둔 할라카의 권위는 탈무드에 근거하고 있다. 탈무드는 유대 법률과 전승 지식을
모은
책(400년경에
완성)으로,
유대교의
구전
율법을
최초로
글로
모은
<미쉬나>(210년경에 성문화됨)와 미쉬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긴 <그마라>를 통합한 것이다. 할라카에 대한 효율적인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1세기와 2세기부터 종교학자들에 의해 간명하고 체계적인 요람 저술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문법전 중 가장 권위 있는 저서는 16세기 쯔파트 (사페드)에서 요셉 카로가 쓴 <슐한 아루크>이다.
그러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대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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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왕의 사망(기원전 4년) 이후 10년이 지났을 때 유대는 로마의 직접 지배 하에 들어갔다. 유대적 생활양식에 대한 로마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늘어난 유대인들의 분노는 산발적인 폭력행위로 나타나다가 서기 66년에 전면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티투스가 이끈 우세한 전투력의
로마군이
결국
승리를
차지했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고(서기 70년) 유대인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를 함락시켰다(73년). 예루살렘과 제 2 성전의 파괴는 유대 민족에게 큰 재앙과도 같았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과 그 외 다른 지역의 포위 공격 속에 유대인 수십 만 명이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서기 132년) 직후 짧은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며 예루살렘과 유대를 탈환했다. 그러나 로마의 막강한 힘 앞에 이어질 결과는 너무도 자명했다. 3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은 로마 관습에 따라 “황소의
멍에로 갈아 엎어”졌으며, 유대는 팔레스티나, 예루살렘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대민족과 유대교만은 로마와의 충돌 속에 서도 살아남았다. 입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기구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그돌라의 후신)이 서기 70년에는 야브네에서, 후에는 티베리야에서 재소집 되었다. 국가와 성전의 통합된 체 계 없이 존속된 소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점차 복구되는 한편 때때로 고향으로 돌아온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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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들이 힘을 보탰다. 제도적 공동 생활이 복구되었고, 랍비들이 제사장의 자리를 대신하 였으며, 유대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 점은 가버나움, 고라신, 바르 암, 가믈라 등지에서 발견된 유대 회당의 유물들이 잘 입증해주고 있다. 할라카(유대 종교 법)는 유대인들을 묶어주는 공통의 유대로 작용하며 대대로 계승되었다.
예루살렘 함락 후 서기 70년에 로마인들이 발행한 동전. “IVDAEA CAPTA(포로가 된 유대)”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이스라엘 문화재청
2세기에 일어난 바르 코크바 혁명 3년째에 만들어진 4 드라크마 은화. “시몬/예루살렘의 자 유를 위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이스라엘 문화재청
외세 지배 비잔틴의 지배 (313~6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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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창건에 이어 이스라엘 땅 은 기독교 중심 국가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의 기독교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 졌고 나라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전에 어느 정도 누렸던 자치권과 공 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일년에 단 하루(Tisha B’av – 아브월 9일) 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614년에 페르시아 침공이 있자 유대인들은 해방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품고 이를 지원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원조에 대한 보답으로 예루살렘 정부를 얻었고, 이 시기는 약 3년간 지 속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비잔틴 군대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여(629년) 다시 유대인 거주자 들을 축출했다.
성묘 교회 • I. 스툴만(Sztulman)
빵과 물고기 기념 성당 바닥에 장식된 5세기 모자이크 무늬 • 이스라엘 문화재청
아랍의 지배 (636~10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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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돔. 7세기에 움마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예루살렘 성전산(하람 알 샤리프) 에 세운 사원 • I. 스툴만
아랍이 이스라엘 땅을 정복한 것은 무하마드가 사망(632년)한 지 4년이 지난 때였고, 이들 의 지배는 그 후 4세기가 넘게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메섹에서, 그 후에는 바그다드와 이 집트에서 여러 칼리프들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지배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가 재개되고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딤미(dhimmi, 보호 대상이 되는 비무슬림들)라는 관습적 지 위가 주어졌다. 이로서 유대인들은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특별 인두세 와 토지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비이슬람교도에게 가해진 각종 규제조치(717년)는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 법
적 지위 및 공적 행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경작지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그들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차별이 심해짐에 따라 아예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11세기 말에 이 르자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사회는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고 조직적, 종교적 응집력도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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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십자군 시대 (1099~1291년) 이후 200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것은 십자군 세력이었다.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따라 이교도들에게서 성지를 되찾기 위해 유럽에서 진군해왔다. 1099년 7월, 5주간의 포위공격 끝에 제 1차 원정군의 기사들과 그들이 이끌고 온 하층민 군대는 예루살렘을 점 령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비기독교인들 대부분을 학살했다. 유대인들은 회당 안에 장벽을 쌓 아 자신들의 거점을 방어하려 했지만 결국 불에 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십 년 에 걸쳐 십자군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넓혀갔는데, 조약과 협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유혈 군사 정복을 통한 확장이었다. 십자군의 라틴 왕국은 주로 요 새화된 도시와 성에만 국한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예루살렘의 십자군 왕의 인장 • 이스라엘 문화재청
십자군이 유럽에서 이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열자 성지 순례가 일반화된 것과 동시에 고향 땅으로의 귀환을 시도하는 유대인들의 수도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300명의 랍비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무리를 지어 들어와 일부는 악고(아크레)에, 일부는 예루살렘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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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이 살라딘 휘하의 이슬람군에게 격파된(1187년) 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해 어느 정도의 자유를 되찾았다. 살라딘의 죽음(1193년) 후 십자군이 다 시 이 나라에 기반을 얻었지만 그들의 주둔지는 일련의 요새화된 성에 국한되었다. 십자군이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마믈루크 군대에게 최종적으로 패하면서(1291년) 십자군의 이스라엘 지배는 종식되었다.
마믈루크의 지배 (1291~1516년) 마믈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 이스라엘 땅은 다메섹 관할 하의 고립 지역이 되었다. 악 고, 욥바를 비롯한 여러 항구들은 새로운 성전(聖戰)에 대비해 파괴되었고 육로와 해상 교역 모두 중단되었다. 중세 말에 이르자 이 나라 도시들은 사실상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의 대부 분 지역이 버려진 바 되었으며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는 가난에 허덕였다. 마믈루크의 쇠퇴 기는 정치적∙경제적 격변과 전염병, 메뚜기떼, 지진 강타 등으로 더욱 암울한 시기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7~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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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정복된 이스라엘 땅은 네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행정적으로 다메섹 에 포함되어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시대 초기에는 약 1,000호의 유대인 가구가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나블루스(세겜), 헤브론, 가자, 사페드(츠파트), 갈 릴리 마을 등지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이스라엘 땅을 떠난 적이 없는 유대인 후 손들과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술레이만 대제가 죽을 때까지(1566년) 오스만 제국의 안정된 정부에 의해 상황이 개선되면 서 유대인들의 이주가 활발해졌다. 새로 이주해온 이들 중 일부가 예루살렘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사페드 지역으로 갔다.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사페드의 유대인 인구는 대 략 1만 명으로 증가했고 이 도시는 활발한 지적 활동의 중심이자 직물생산의 중심지로 번 창하였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대 신비주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법전화된 <슐한 아루크> 같은 유대법률에 대한 당대의 해석들이 사페드의 여러 학파들로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 는 유대인 사회로 퍼져 나갔다. 오스만의 지배 체제가 점차 열악해지면서 이스라엘 땅은 크게 방치되었다.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들의 소유 하에 궁핍한 소작 농민들에게 임차되었고 세금은 일관성
없이 마구잡이로 부과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농경지는 습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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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침식되었다.
근대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세의 후진성은 점차 사라지고 진보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 양의 여러 열강이 교묘한 책략으로 세력을 다지고자 했는데, 주로 선교활동이 진입 수단이 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학자들이 성서 고고학 연구에 착수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정기 운항 하기 시작했고, 우편과 전신이 연결 설치되었으며 예루살렘과 욥바를 잇는 도로가 최초로 건설되었다. 세 대륙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땅의 재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이곳 유대인들의 상황이 서서히 개선되었고 이들의 인구도 크게 증가했다. 19세기 중반 유대인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예루살렘의 인구 과밀 상황으로 인해 성벽 바깥에 최초로 교외 거주 지역을 건설했고(1860년), 향후 25년간 7개 지역을 추가로 건설하여 이 신도시의 핵을 형성하였다. 1870년에 이르자 예루살렘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농경지가 매입되고, 농촌 마을들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오랫동안 예 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히브리어도 다시 부활했다. 시온주의 운동이 태 동할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시온주의: 유대인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가리키는 시온주의는 예부터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과 동의어로 사용되던 “시온(Zion)”이라는 말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시온주의 사상 —유대민족이 조상의 땅을 되찾는다—은 수세기에 걸친 디아스포라(유대인의 세계 각지로의 이산) 상태에서 유대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온 이스라엘 땅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깊은 애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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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과 박해에 대한 반발로, 그리고 서유럽 사회 에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거나 유대인을 지역사회에 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형식 적 해방에 대한 환멸이 갈수록 커지면서 정치적 시온주의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테오도르 헤르쩰의 주도 아래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 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시온주의 기구가 설립되면서 공식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의 프로그램은 관념적. 요 소와 실천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모두 유대인의 이스라엘 땅 으로의 귀환을 촉진하고, 유대민족의 삶의 사회∙문화∙경제∙정치적 재건을 앞당기고, 유대인 들의 역사적 고향 땅에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법적으로 보장되는 고국을 얻어 그곳에서 유 대 민족이 박해로부터 벗어나 그들 고유의 삶과 정체성을 키워나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을 목 표로 했다
테오도르 헤르쩰 • 중앙 시온주의 기록 보관소
이주 시온주의로 동기부여를 받고,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이상에 대한 영국의 동조로 나타난 외무 장관 밸푸어 경의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에서 1939년 사이에 이스라엘 땅으로 들 어오는 이주민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있어 각기 다른 측면에서 기여를 했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건너온 3만 5천여 명은 향후 수년간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 인 사회∙경제적 하부구조의 초석을 마련했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독특한 공동체적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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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의 농촌 거주집단인 키부츠(kibbutz)와 모샤브(moshav)를 설립했으며, 주택과 도로 건설 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24년과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중소기업과 건설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2차 세계대전 전에 마지막으로 약 16만 5천 명의 유대인이 대규모로 들어왔는데, 이 이주는 1930년대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 권을 잡은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상당수가 전문가와 학자로 구성되어 있던 이 신규 이 주민들은 중서부 유럽에서 온 최초의 대규모 유입 인원이었다. 이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 표준을 높이고 도시와 시골의 편의시설을 개선했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허버트 새뮤얼 경. 팔레스타인을 담당한 최초의 영국 고등 판무관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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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위임통치 당국은 유대인과 아랍인 집단 사회에 각각의 내부문제를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 권한을 활용하여 유대 공동체 이슈브(Yishuv)는 정당 대표성을 바탕으로 자치 기구를 선출했다. 이 기구는 매년 모임을 가져 활동상황을 점검하고 여러 정 책과 프로그램을 실행할 민족 평의회(Va’ad Leumi, 바아드 레우미)를 선출했다. 현지 자원과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모금한 기금을 토대로 나라 전역에 걸친 교육, 종교, 보건, 사회 서 비스망이 개발되고 유지되었다. 1922년에는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대인 기구’가 구 성되어 영국 당국과 외국 정부, 국제 조직들에 대하여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
경제 발전 30년의 위임통치 기간 동안 농업은 확대되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나라 전역에 새 도로가 건설되었다. 또한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하여 전력을 생산했고, 사해의 광물 자원을 개발했 다.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룻(Histadrut)이 설립되어(1920년) 산업부문에 조합 소유의 기업 체를 세우고 농촌지역에 대한 서비스를 판매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 를 제공했다.
소돔 칼륨 공장의 염전• G.P.O./ Z. 클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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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적 생활양식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사회만의 고 유한 형태를 띠었다. 미술, 음악, 무용이 전문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서서히 발전했 다. 화랑과 연주회장은 각종 전시와 공연을 위한 장소를 제공해주었고, 심미안을 지닌 대중 들이 이를 관람했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간, 지역 화가의 회고전 등이 있으 면 언론은 즉시 분석기사를 내놓았고 대중들은 커피숍과 사교 모임에서 이들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히브리어가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스라엘의 공식어로 인정되면서 각종 문건, 동전, 우표, 라디오 방송 등에 사용되었다. 히브리어로 된 출판이 급증했고, 이스라엘은 히브리 문학 활 동의 세계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다양한 장르의 극작품들이 열광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문을 열었고, 히브리어로 극본을 쓰는 작업이 최초로 시도되었다. 유대의 민족적 부흥과 유대인 공동체의 국가 재건 노력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강한 반대에
3개의 유대인 지하 조직: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 중 3개의 지하조직이 활동을 했다. 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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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규모의 하가나(Haganah)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자위 단체로서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1920년에 창설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이 단체는 아랍의 공격에 대한 보 복을 단행하고 유대인 이민에 대한 영국의 제재 조치에 대규모 시위와 사보타주로 대항했다. 1931년에 조직된 에쩰(Etzel)은 하가나의 온건한 태도에 반대하며 아랍과 영국의 목표대상 에 대항하는 독자적 행동을 취했다. 가장 규모가 작고 호전적인 단체 레히(Lehi)는 1940년 에 조직되었다. 이 3개 조직은 1948년 6월 이스라엘 방위군이 설립되면서 해산했다.
지하 방위 조직의 조직원이 라이플총을 숨기는 모습 (1947년) • 이스라엘 공보부/ H. 핀
부딪쳤다. 이들의 적개심은 1920년, 1921년, 1929년, 1936~39년의 기간에 걸쳐 격렬한 폭동 으로 분출되어 유대인들에 대해 이유 없는 공격이 가해졌다. 유대인 교통수단이 공격 당하 고 들과 숲이 불탔으며 1929년에는 헤브론 학살이 일어났다. 시온주의자들이 초기에 취한, 아랍인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노력이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으며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두 민족 운동의 상반되는 목표를 인식한 영 국 측은 나라를 둘로 나눠 한쪽은 유대 국가로, 다른 한쪽은 아랍 국가로 정하되 둘을 하나 의 경제 연합으로 묶을 것을 제안했다(1937년). 유대인 지도층은 이 분할 권유를 받아들였 고, 이 제안의 여러 측면을 재공식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인 기구에 영국 정부와의 협상 권한을 위임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모든 분할 계획에 강경한 반대 자세를 취했다. 아랍의 대규모 반 유대 폭동이 계속되자 영국은 유대인의 이주를 강력히 규제하는 백서를 발행했다(1939년 5월). 이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 하는 결과를 낳는데도 불구하고 시행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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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직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이와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발표되지 않은 것처럼 전쟁에 나가 싸울 것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 처럼 백서와 싸울 것이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제 2차 세계대전 동안(1939~45년) 나치 정권은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를 말살하려는 고의적 계획을 치밀하게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600만에 달하 는 유대인을 살해했다. 나치군이 유럽 전역을 휩쓸 때 유대인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고 통과 굴욕을 당했으며 강제 거주 지구인 게토로 내몰렸다. 이곳에서 무장 저항을 시도했으 나 돌아온 것은 더욱 거센 탄압뿐이었다. 유대인들은 게토에서 다시 수용소로 옮겨졌는데, 소수의 운 좋은 이들은 강제 노동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집단으로 총살 처형되거나 가스실에 서 죽음을 맞았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부는 다른 나라로 탈출 했고, 소수는 게릴라에 합류했으며, 일부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유대인들의 도움으로 숨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때 세계에서 가장 대규모의 활기찬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했던 약 900만의 인구 중 3분의 1만이 살아남았으며, 그것도 전쟁 전에 유럽을 떠난 사람들을 포함한 숫자이다.
나치가 유대인에게 착용하게 한 노란 배지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에서 2만 6천 명이 넘는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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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영국군에 자원 입대하여 육군, 공군, 해군병으로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 맞 서 싸웠다. 국내의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운동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한 공을 인정받고자 오랜 기간 노력한 끝에 1944년 9월 영국군 내의 독립 부대로서 자 체 깃발과 휘장을 가지는 유대인 여단이 조직되었다. 5,000명 정도의 남성으로 구성된 이 여단은 이집트, 북부 이탈리아, 북서 유럽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에 유럽에서 연합군 이 승리를 거둔 뒤 이 부대원들 중 다수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 키기 위한 “불법 이주” 노력에 동참했다.
영국군 병영 안의 유대인 신병들 • 이스라엘 공보부/ Z. 클루거
전쟁 후 아랍의 반대가 있자 영국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정착할 수 있는 유대인의 수를 더욱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자 유대인 공동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구하기 위한 광범위 한 “불법 이민” 활동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이에 맞섰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약 8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다. 난민 들이 이 땅에 닿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 영국이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배치했 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도중에 잡힌 사람들은 사이프러스 섬의 임시 수용소에 억류되거나 유럽으로 돌려 보내졌다.
독립으로 가는 길 유대와 아랍 사회의 상충되는 요구를 중재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 엔 총회의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청했다(1947년). 그리하여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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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1월 29일 텔아비브 내의 자발적 축하 행렬 • G.P.O./ H. 핀 나라의 장래에 관한 제안서를 작성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투표를 통해 이스 라엘을 각각 유대와 아랍의 두 국가로 나누자는 위원회의 권고안을 채택했다. 유대인 공동 체는 이 계획을 수락했으나 아랍측은 거부했다. 유엔의 투표가 있은 후, 아랍 국가들의 비정규적 지원군들의 원조를 받는 지역의 아랍 민병 대는 유대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분할 결정을 좌절시키고 유대 국가 수립 을 막고자 했다. 유대 방위 조직들은 여러 번의 후퇴 끝에 대부분의 공격군을 몰아내고 유 대 국가로 할당된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식되었을 때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약 65만 명 에 달했고 이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제대로 갖춘 조직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 다. 사실상, 모든 의미에서 하나의 나라였고, 이름만 없을 뿐 이미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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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1947년 분할 계획 (유엔 결의안 181)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Transjordan-트랜스요르단/ Egypt-이집트/ Mediterranean Sea-지 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텔아비브/ Jaffa-욥바 /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 바 ■ 유대국가 ■ 아랍국가 □ 국제지역 1949~1967년 휴전선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Israel-이스라엘/ Egypt-이집트/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 Samaria-사마리아/ Judea-유대/ Jerusalem-예루살렘/ Gaza-가자/ Beer Sheva-브에르셰바 ■ 이스라엘 ■ 요르단 통치령 ■ 이집트 정부 통치령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의 정규군이 침공해 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선조의 땅에서 되 찾은 주권을 지켜야만 했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 알려진 이 싸움에서 새로이 구성되어 준비가 미흡했던 이스라엘 방 위군(IDF)은 간헐적으로 일어난 격렬한 전투 속에 침략군을 격퇴하며 승리를 거뒀다. 이 전 쟁은 약 15개월간 지속되었고 6,0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당시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의 1%에 가까운 수치)이 목숨을 잃었다. 1949년 초 몇 달간 유엔의 중재 하에 이스라엘과 각 침략국(이스라엘과의 협상을 거부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간에 직접 협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협정에 따라 해안 평야와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 전체가 이스라엘의 통 치권에 속하게 되었다. 유대와 사마리아(서안 지구)는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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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집트의 행정권 안에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는 요르 단이, 서부 지역은 이스라엘이 관할하게 되었다.
국가 건설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그들 민족이 오랜 기간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전체 유권자의 85%에 육박하는 이들이 참여한 총선(1949년 1월 25 일)을 통해 제 1회 크네세트(의회)가 120석 규모로 개원하였다. 이스라엘을 국가의 위치에 올려놓는 일에 주역이 된 두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다. 유대인 기구의 의장 다비드 벤 구리 온이 초대 총리로 선택되었고,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회장 하임 와이즈만이 국회에서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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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에는 이스라엘이 유엔의 59번째 공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의 핵심이 되는 ‘이산민 되 모으기’라는 구상에 따라 나라의 문호가 활 짝 열리면서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들어올 수 있는 권리와 입국과 동시에 시민권을 획 득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독립 후 처음 4개월 동안 대부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로 구성된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여 명을 포함하여 총 68만 7천 명의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이 도착하면서 유대 인구 가 배로 늘어났다. 독립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 부담과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필요성에 따라 국내적인 긴축 재정과 해외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했다. 미국 정부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 거주 유대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 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와 국적 항공사의 설립, 광물 개발, 산업 발 다비드 벤 구리온, 비전을 갖춘 인물 • 이스라엘 공보부/ K. 졸탄
예후드 중앙 광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짐 궤짝 위에 앉아 있는 이주민 여성 • 이스라엘 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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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K. 졸탄 전과 도로, 통신, 전력망 확대에 사용되었다. 건국 10주년이 다가올 무렵에는 산업 생산량과 고용 인구 수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 배로 증가했다. 경작 면적이 크게 확대되어 육류와 곡물을 제외한 모든 기초 식품을 자급하 게 되었으며,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의 부지를 녹지화하고 500 마일(800 km)에 이르는 고속도로변에 나무를 심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건국 이전부터 발전시켜온 교육 체계는 이제 아랍 지구까지 포괄하며 크게 확대되었다. 5~14세 어린이 모두에게 무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다(1978년부터 의무 교육은 16세, 무상 교육은 18세까지로 변경됨). 문화와 예술 활동이 꽃피면서 중동과 북아 프리카, 서구의 요소가 혼합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수대에 걸쳐 거주했던 나라의 주요한 문화적 측면과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비 롯된 현상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이 되자 이 나라 인구는 2백만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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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시나이 분쟁 건국 후 수년 동안 이스라엘에 그늘을 드리운 것은 심각한 안보 문제였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위반 사례가 나타 났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과는 상반되게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 라엘 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인접 아 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가 살인과 방해 공작을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침투하는 사건이 날로 증가했다.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 군사 기지로 변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 이스라엘 ■ 요르단 통치령 ■ 이스라엘이 점령했다가 반환한 지역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 Mediterranean Sea-지중해/ Red Sea-홍해/ Straits of Tiran-티란 해협/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 Samaria-사마리아/ Judae-유대/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 셰바 / Sinai-시나이/ Eilat-에일랏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생존 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8일 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가자 지구와 시나 이 반도를 점령했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 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유엔이 이 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유엔 긴급군(UNEF)을 배치하기로 결의하고 이집트가 에일랏 만 자 유 항행을 보장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에 점령했던 이 지역에서 단계적으로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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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1월~1957년 3월)하는데 동의했다. 그 결과 티란 해협이 개방되어 페르시아만으로 부터의 석유 수입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 발전이 가능해졌다.
확립기 이스라엘의 두 번째 10년(1958~68년) 동안 수출은 두 배로 늘고 국민총생산(GNP)은 매년 약 10%씩 증가했다.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등 기존에 수입하던 일부 품목들을 국내 에서 생산하기 시작하는 한편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등 신설 분야는 가장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국산 식품의 국내 시장이 빠른 속도로 포화 상태에 가까워짐에 따라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물과 식품 가공업계에 공급할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늘어난 교역 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 지중해 연안 아슈돗 (아스돗)에 두 번째 심해 항을 건설했다.
국립 수로의 콘크리트 파이프 단면(직경 108”) • 중앙 시온주의 기록 보관소 제공
예루살렘에는 크네세트(의회)의 영구적인 근거지가 지어졌고, 히브리 대학과 하닷사 의료 센 터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전쟁 후 사용할 수 없게 된 스코푸스 산에 있던 구 건물들을 대신 해 새로운 부지에 건설되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민족의 문화예술 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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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미국, 영연방, 대다수의 서유럽 국가, 남미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 일부 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맺으면서 대외 관계를 꾸준히 확대했다. 광범위한 국제 협력 프로그램이 전개되어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와 엔지니어, 교사, 농업 경제학자, 관개 전문가, 청소년 전문가가 여타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해주었다. 1965년에는 독일 연방 공화국과의 대사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는 나치 정권 동안(1933~45 년) 유대인들에게 자행됐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온 조치였다. 격렬한 반대와 사회적 논쟁 끝에 마침내 양국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 이스라엘 공보부/ J. 밀리
아이히만 재판: 1960년 5월, 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말살 계획의 실무 책임자였 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50년에 제정된 나치와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따라 재판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4월에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인류와 유대 국민에 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았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법에 의해 사형이 집 행된 유일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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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지역에서 아랍 테러단체의 기습 증가와 북부 갈릴리의 농경 정착지에 대한 시리아 포병대의 지속적인 폭격, 인근 아랍 국가들의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으로 인해 이제 어느 정도 평온한 시기가 오리라는 희망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1967년 5월 이집트 는 대규모 군대를 시나이 사막으로 이동시키고 1957년부터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명령했으며, 티란 해협을 다시 봉쇄하고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 결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적인 아랍 군대들과 직면하게 되었다. 인접국 들이 이 유대국가를 무너뜨릴 채비를 갖춤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의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쪽의 이집트에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쪽의 요르단에 반격을 가하고 북쪽의 골란 고원에서 보루를 구축하고 있던 시리아군을 패주시켰다.
6일 전쟁 후의 휴전선, 1967년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 Red Sea-홍해/ Straits of Tiran-티란 해협/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바 Sinai-시나이/ Eilat-에일랏 통곡의 벽 앞의 공수부대원• 이스라엘 공보부/ D. 루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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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간의 전투가 끝날 무렵, 이전의 휴전선이 새롭게 변경되어 유대, 사마리아, 가자, 시나 이 반도, 골란 고원이 이스라엘의 관할 하에 들어왔다. 그 결과 북부 지방의 마을들은 19년 간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시리아의 포격에서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 행 선 박은 티란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9년 이래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공동 통치를 받으며 분리되어 있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통치권으로 재통합되었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의 외교적 과제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영구적 평화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유엔의 결의안은 "이 지역 모든 국가의 주권, 영토 보전, 정치적 독립과 안전하고 승인된 국경 내에서 군사적 위협과 행동 으로부터 자유로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967년 8월의 카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아랍의 입장은 "이스라엘과의 평화와 협상, 이 스라엘에 대한 인정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1968년 9월에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제방을 따 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행동을 하는 ‘소모전’을 개시했고, 이는 전면적인 국지전으로 확 대되어 양측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교전 상태는 1970년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하면서 막을 내렸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 3년간 비교적 조용하던 국경지대의 평화는 유대력에서 가장 신성한 날인 욤 키푸르(속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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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날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스라엘에 합동 기습 공격을 개시하여(1973 년 10월 6일) 이집트군이 수에즈 운하를 건넜고 시리아 군대는 골란 고원에 침입했다. 이후 3주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침략군을 격퇴했으며,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 집트 안으로 들어섰고 시리아의 수도 다메섹 내 20마일(32 km)까지 진격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2년간 힘겹게 진행된 협상 결과 병력 철수 협정이 조인되 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전쟁 중 점령한 일부 영토로부터 철군하였다.
1982년 갈릴리 평화작전 이스라엘은 북쪽 국경에 인접한 레바논과의 충돌을 결코 원치 않았다. 그러나 1970년에 팔 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요르단에서 추방된 뒤 레바논 남부로 본거지를 옮기고 이스라엘 북부지역(갈릴리)의 마을과 촌락에 지속적으로 테러 행위를 저질러 많은 사상자와 피해가 생기게 되자 이스라엘 방위군은 국경선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격하였다(1982년). “갈릴리 평
테러리즘: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테러행위는 이스라엘 건립 이전부터 시작 해 그 후로도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전쟁으로 이곳 영토에 이스라엘군 이 주둔하게 됨)에 앞서 20년간 수천 건의 테러 공격이 발생하여 이스라엘 시민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1964년에 PLO가 설립되면서 이 단체가 테러전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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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80년대에 PLO 산하의 여러 테러 조직들은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수많은 테러
화작전”은 PLO의 조직적이고 군사적인 하부기반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은 갈릴리 지역민들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향후 18년간 북쪽 국경에 인접한 레바논 남부에 작은 안전 완충지대를 유지했다.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카터 미국 대통령, 베긴 이스라엘 총리 • 이스라엘 공보부/ Y.사르
International Boundary - 국제 국경/ Ceasefire Line – 휴전선/ Lebanon-레바논/ Syria-시리아/ Jordan-요르단/ Saudi Arabia-사우디 아라비아/ Egypt-이집트/ Red Sea-홍해/ Mediterranean Sea-지중해/ Haifa-하이파/ Tel Aviv-Yafo-텔아비브-욥바/ Jerusalem-예루살렘/ Beer Sheva-브에르셰바 / Eilat-에일랏/ Sinai-시나이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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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평화로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가까운 노동당 집권이 끝을 맺고 리쿠드 당(우파와 중 도파의 연합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신임 총리 메나헴 베긴은 이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 를 위해 힘쓰겠다는 모든 전임 총리들의 공약을 되풀이하며 아랍의 지도자들이 협상 테이블 로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에 아랍이 거부를 표시하던 순환의 고리는 1977년 11월 안와르 사다 트 이집트 대통령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마침내 깨지고, 그 후 미국의 중재 하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협상이 이어졌다. 1978년 9월에 이루어진 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팔레스타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공격의 예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 수 11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1993년 테러행위를 중단하겠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약속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 협상의 근간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테러 공격은 끝나지 않았고 2000년 9월 이후에는 더욱 강화되어 이스라엘 시민 1천여 명의 목숨을 빼앗고 수 천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인들의 자치에 대한 상세한 제안을 비롯하여 중동 지역 전반의 평화를 위한 틀을 포함하는 내용이었다. 1979년 3월 2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워싱턴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양국간의 30 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조약 내용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 수했으며 기존의 휴전선과 휴전 협정을 상호 인정된 국제 국경으로 전환하였다. 1991년 마드리드 평화회의 이후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에 진행된 3년간의 회담은 1994년 7 월 요르단 하심 왕국의 후세인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의 선언으로 정점을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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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 이스라엘 공보부/ Y. 사르
이하며 46년간 계속된 두 나라 간의 전쟁 상태를 종식시켰다. 요르단-이스라엘 평화협정은 1994년 10월 26일 아라바 국경지역(이스라엘의 에일랏과 요르단의 아카바 근처)에서 빌 클 린턴 미 대통령의 주재 하에 서명이 완료되었다.
국내 문제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스라엘은 1백만 명이 넘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했다. 이들은 주 로 구 소련과 동유럽, 에티오피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다수의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과 수많은 신규 소비자들의 유입으로 이스라엘의 경제 팽창이 가속화되었다. 1984년의 의회 선거로 집권한 내각은 노동당(좌파/중립)과 리쿠드당(우파/중립)이라는 양대 정당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리쿠드당이 주도하는 연립정당이 정권을 잡 았고, 1992년에는 노동당과 중도 좌파 군소 정당들의 연립정부가 그 뒤를 이었다. 1995년에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된 뒤 1996년에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다. 총리 선출을 위한 직 접 선거로 베냐민 네타냐후가 당선되어 리쿠드당 중심의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그로부터 3 년도 채 안돼 네타냐후 정부는 퇴진했다. 1999년 하나의 이스라엘 당(좌파/중도)의 대표 에 후드 바락이 총리로 선출되어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2000년 12월에 사임했다. 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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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당 총수 아리엘 샤론은 2001년 초부터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6년 초까지 총리직을 지냈 다. 샤론 총리가 2005년 11월에 출범시킨 카디마당의 수장 에후드 올메르트가 샤론의 뒤를 이어 총리 자리에 올랐다. 모든 내각은 각각 고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평화 달성과 경제 발전, 이민자 통합을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매년 이스라엘은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암살일을 기리는 특별 추도식을 거행한다. 1995년 11월 4일 라빈 총리가 유대 극우주의자에게 암살된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깊은 애도에 빠졌 다.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전장에서 자리를 이동하여 이스라엘을 평화의 길로 이끈 인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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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협상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조인된 후 중동의 평화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이스라 엘과 여러 국가들은 다양한 구상을 제안했다.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이뤄 1991년 10월 미국과 구소련의 중재 하에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인 마드리드 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같은 정식 절차에 이어 당사자들 간의 양 자간 협상과 지역 문제를 다루는 다자간 협상이 뒤따랐다.
양자간 협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수개월 간 오슬로에서 진행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협상 대표들의 집중적인 막후접촉에 이어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 인들의 자치에 대한 합의내용을 개괄한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DOP)이 공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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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1993년 9월 13일에 이루어진 조인에 앞서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 간에 서신 교환이 있었다. 이 서신에서 PLO는 테러 사용을 포기하고 자체 규약 에서 이스라엘의 존재할 권리를 부정하는 조항을 무효화할 것을 약속했으며, 수십 년간 지 속된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그에 대한 답으로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 기구로 인정했다.
원칙 선언은 5년의 팔레스타인 자치 잠정기간에 대해 양측이 합의한 제반 원칙들과 이스라 엘-팔레스타인 협상의 여러 단계의 기본 틀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가자 지구와 여리고 지역 내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합의내용이 1994년 5월에 이행되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 뒤에 는 서안 지구의 교육 및 문화, 보건, 사회 복지, 직접 과세, 관광 분야에 대한 권한과 책임 이양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명한 원칙 선언과 기타 합의문들은 1995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완성을 보았다. 잠정 협정은 선거로 선출된 자치 기구인 팔레스타인 의회(1996년 1월에 선출)를 통해 팔레 스타인의 자치를 확대하고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방위군(IDF)을 지속적으로 재배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협정은 또한 최종 지위 협정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 계를 관장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잠정 협정에 따라 서안 지구는 다음과 같이 세 지역으 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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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역 – 서안 지구의 주요 도시들로 구성. 팔레스타인 의회가 이 지역의 민정과 내부 안보, 공공 질서를 전적으로 관리한다. (헤브론시는 잠정 협정에 명시된 특별 합의 대상이었다. 헤 브론 내 방위군 재배치에 관한 협안은 1997년 1월에 조인되었다.)
B 지역 – 서안 지구의 작은 시와 마을들로 구성. 팔레스타인 의회가 민정(A 지역과 동일)과 공공 질서 유지의 책임을 담당하는 한편 이스라엘은 자국 시민들의 안전과 테러 퇴치에 최 우선적인 안보 책임을 계속 유지했다. C 지역 – 서안 지구 중 유대인 거주지 전체, 이스라엘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거주민 이 거의 없는 지역들로 구성. 영토와 관련한 민정 책임(지역 계획, 구획, 유적 등)을 비롯해 보안과 공공 질서를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관리한다. 팔레스타인 의회는 이를 제외하고 팔레 스타인 인구의 나머지 모든 민정 분야에 관한 책임을 맡는다. 잠정 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추가적인 방위군 재배치 단계의 이행을 위한 일정은 양측에 의 해 여러 번에 걸쳐 개정되었다. 그 중에서도 1998년 10월의 와이 리버 협정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같이 합의된 개정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2000년 3월에 추가 재배치(FRD) 절차 중 1, 2단계를 완료했다. 이러한 재배치의 결과 서안 지구 중 18% 이상이 A 지역으로, 21%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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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B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서안 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98%가 팔레스타인 의 자체 관할 하에 생활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간 항구적 타협안의 성격을 결정짓기 위한 양측의 최종 지
위 협상은 예정했던 대로 1996년 5월에 시작되었다. 1996년에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서 하 마스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자행된 자살폭탄 테러는 평화 협상 과정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관점을 어둡게 했다. 이후 3년간 중단되었던 최종 지위 협상은 1999년 9월 샤름 엘 셰이크 협정 후에야 재개되었다. 협상에서 다룰 사안들에는 난민, 정착촌, 안보 문제, 국경, 예루살 렘 등이 있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락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협 상을 재개했다. 이 회담은 아라파트 수반이 관대한 제안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아 무런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났다. 그러나 추후 협상을 위한 합의된 원칙을 밝힌 3자 성 명서는 발표되었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은 무차별적 테러행위와 폭력 운동을 개시하여 양쪽 모두에 많은 인 명 손실과 고통을 야기했다. 폭력적인 대립을 종식시키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려는 수많은 노력은 팔레스타인의 끊이지 않는 테러행위로 인해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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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2002년 6월 24일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의 테러 중단 을 위해 제시한 비전을 받아들였고, 모든 사안과 평화에 대한 최종 합의안이 그 뒤를 이었 다.
2003년 5월 25일에 이스라엘은 로드맵을 수용하였고, 이스라엘이 그 실행에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의견과 이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함께 수반되었다. 그러나 아 직까지 팔레스타인은 테러행위와 선동을 무조건적으로 중단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로드 맵의 첫 단계에 따른 의무사항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대 테러 방지 조치의 일 환으로 보안장벽을 건설했다. 2005년 8월 이스라엘은 5년간 계속된 팔레스타인의 테러로 인한 평화 협상 과정의 답보 상 태를 타개해보고자 사마리아 북부(서안 지구)의 정착지 4곳과 가자 지구에서 군대를 철수시 켰다. 그러나 하마스 정부의 선출 후 팔레스타인의 테러행위는 계속되었으며, 가자 지구에 서 네게브 북부지역을 겨냥한 카삼 미사일 공격과 이스라엘 군인 납치 등의 도발에 이스라 엘은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마드리드 협정의 틀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 대표단의 회담이 워싱 턴에서 시작되었고, 이따금씩 미국 고위급 관료의 참석 하에 양국의 대사급 회담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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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과 1996년 1월 두 차례의 시리아-이스라엘 평화 회담은 안보와 기타 핵심 사안 들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범위 면에서도 포괄적인 이 회담은 향후
의 논의와 검토를 위해 개념적 합의와 접근의 주요 영역들을 확인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의 협상은 3년 이상 답보 상태를 보인 후 2000년 1월 미국 셰퍼즈타운에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돌파구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2000년 3월 제네바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하 페즈 아사드 대통령이 가진 회담도 협상 재개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시리아는 이란과 함께 헤즈볼라나 그 밖의 여러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와 같이 가장 폭력적 이고 위험한 테러 조직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200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425호를 이 행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에 따라 레바논 남부의 안보지대에서 모든 군대의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레바논은 결의안 425호와 결의안 1559호(헤즈볼라 해체와 레바논 남부지 역에 레바논 군대 배치를 요구하는 내용)를 아직까지 충실히 따르지 않고 있다.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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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에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 2명을 납치하고 이스라엘 북부 도시들을 폭격한 후 또다 시 공격이 이어졌다. 이에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에 보루를 구축하고 있던 헤즈볼라 테러 주둔군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테러 주둔지는 이란과 시
리아가 공급한 수만 개의 대형 로켓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수백 만 이스라엘 시민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후에 2차 레바논 전쟁으로 알려진 뒤이은 충돌에서 4천 개가 넘는 로켓포가 이스라엘 내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발사되어 44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광범위한 민간 기반시 설과 재산 피해를 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군사 작전 중 119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사망했다. 이 전투는 2006년 8월 11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결의안 1701호를 채택하면서 끝을 맺 었다. 이 결의안은 납치 군인들의 무조건적 석방을 요구하고, 레바논과 UNIFIL(레바논 주둔 유엔 임시군)이 함께 레바논 남부 전역에 군을 배치하고 레바논 정부 이외의 레바논 민병 단체에 무기 공급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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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개입 계획(Disengagement Plan)을 발표한 아리엘 샤론 총리(2003년 12월) • 이스라엘 공 보부/ 모셰 밀너
다자간 협상 중동지역의 핵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자간 협상은 평화 협상 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이며, 중동 국가들간 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기 위한 신뢰 구축 방안으로 작용한다. 36개 국가와 국제 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2년 1월에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담이 개최된 후 이곳에 파견된 대표단들은 5개의 실무 그룹으로 나누어 지 역 내 공동 관심분야(환경, 군축 및 지역 안보, 난민, 수자원, 경제 개발)를 구체적으로 다
루었다. 이 실무 그룹들은 중동 내 여러 장소에서 이따금씩 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주재 하에 핵심 대표단의 대표들로 구성된 운영 위원회는 다자간 협상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의 폭력 사태 이후 다자 회담의 대부분 의 활동이 동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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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주요사건 기원전
기원전 17~6세기 – 성서 시대 17세기경
아브라함, 이삭, 야곱—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 기근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이주
13세기경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뒤 40년간 사막에서 방 랑생활을 함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오경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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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세기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정착
1020년경
유대 왕국이 수립되고 사울이 초대 왕이 됨
1000년경
예루살렘이 다윗 왕국의 수도가 됨
960년경
유대 민족의 국가적, 정신적 중심이 되는 제 1성전이 솔로몬 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건축됨
930년경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
722~720
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이 함락되고 10개 지파는 흩어짐(사라진 10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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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에 의해 유다가 정복당함 예루살렘과 제 1성전이 파괴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추방당함
그림: 노암 나다브
제 2 성전시대
538~142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538~515
바벨론으로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귀환하고 성전이 재건됨
332
이스라엘 땅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고 그리스의 지배가 시작 됨
166~160
마카비(하스몬가)가 유대교 행사 금지와 성전 모독에 항거하여 반 란을 일으킴
142~129
하스몬가의 통치 하에 유대인의 자치권 획득
129~63
하스몬 왕조의 지배 하에 유대인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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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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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3~서기 313년
로마의 지배
기원전 63~4
로마의 분봉왕 헤롯이 이스라엘 땅을 통치 예루살렘 성전이 개조됨
기원후(CE) – 서력 기원
20~33년경
나사렛 예수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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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로마에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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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과 제 2성전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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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에서 유대인 최후 항전
132~135
바르 코크바가 로마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킴
210년경
유대교 구전 율법(미쉬나)의 성문화 완료
313~636
비잔틴 지배
390년경
미쉬나의 주해서(예루살렘 탈무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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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침공
636~1099
아랍 지배
691
칼리프 압둘 말리크가 예루살렘의 제 1, 2 성전이 있던 자리에 바위의 돔 사원 건설
1099~1291
십자군의 통치(예루살렘 라틴 왕국)
1291~1516
마믈루크 지배
1517~1917
오스만 제국 지배
61
1564
유대 법전(슐한 아루크) 편찬
1860
예루살렘 구도시 외곽에 최초의 교외 거주지 건설
1882~1903
제 1차 알리야(대규모 이민)가 주로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로 이 루어짐
1897
테오도르 헤르쩰이 스위스 바젤에서 제 1차 시온주의 총회 개최 시온주의 기구 설립
1904~14
제 2차 알리야 (주로 러시아와 폴란드로부터)
1909
최초의 키부츠인 드가니아와 최초의 근대 유대인 도시 텔아비브가 건설됨
1917
영국의 정복으로 400년간의 오스만 제국 지배가 종식됨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 경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조국” 건설을 지지한다고 선언
1918~48
영국의 통치
1919~23
제 3차 알리야 (주로 러시아로부터)
1920
히스타드룻 (노동 총연맹)와 하가나(유대인 자위 조직) 창설 유대 공동체(이슈브)가 정책 실행을 위해 바아드 레우미(민족 평의 회)를 설립
1921
최초의 모샤브(촌락 공동체) 나할랄 설립
1922
대영제국이 국제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위 임 통치권을 받고, 통치령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땅에 트랜스요르 단을 세움. 나머지 4분의 1이 유대 민족의 본거지가 됨. 위임 통치 당국에 대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유대인 기구
62
가 설립됨 1924
최초의 공과 대학 테크니온이 하이파에 설립됨
1924~32
제 4차 알리야 (주로 폴란드로부터)
1925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이 스코푸스산에 세워짐
1929
헤브론에서 아랍 폭도들이 유대인 학살
1931
유대인 지하 조직 에쩰 창설
1933~39
제 5차 알리야 (주로 독일에서)
1936~39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반 유대 폭동
1939
영국 백서로 유대인의 이민이 엄격히 제한됨
1939~45
제 2차 세계대전: 유럽 내 유대인 대학살
1940~41
지하 운동 조직 레히 창설 하가나의 타격부대인 팔마흐가 구성됨
1944
영국군 내에 유대인 여단 조직
1947
유엔이 이스라엘에 각각 아랍과 유대 국가를 건립할 것을 제안
1948
이스라엘 건국
1948
영국의 위임 통치 종료(5월 14일)
63
이스라엘 건국 선포(5월 14일) 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5월 15일) 이스라엘 방위군(IDF) 조직 독립 전쟁(1948년 5월 ~ 1949년 7월) 1949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휴전 협정 조인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통치권으로 양분됨 초대 크네세트(의회) 선출 이스라엘이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48~52
유럽과 여러 아랍국가에서 대규모 이민
1956
시나이 분쟁
1961~62
아돌프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으로 이스라엘에서 재 판 후 사형에 처해짐
1964
국립 수로가 완공되어 북쪽의 갈릴리 호수에서 비가 적은 남부로 물 수송
1967
6일 전쟁, 예루살렘 재통합
1968~70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소모전
1973
욤 키푸르 전쟁
1975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장의 준회원국이 됨
1977
의회 총선에 이어 리쿠드당이 내각을 구성, 30년간의 노동당 집권
64
종료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예루살렘 방문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중동지역의 포괄적 평화를 위한 기본 틀과 팔레스타인의 자치에 대한 제안을 포함
1979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 조약 조인 메나헴 베긴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1981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 원자로를 가동 직전에 폭격
1982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3단계 철수 완료 갈릴리 평화작전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테러리스트들을 레바논에서 축출함
1984
총선 후 거국 연립내각(리쿠드당과 노동당) 구성 모세 작전, 에티오피아에서 유대인 이주
1985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 조인
1987
이스라엘 관할 지역에서 광범위한 폭력행위(인티파다) 시작
1988
리쿠드 내각이 총선에서 승리
1989
이스라엘이 4개조 평화안 제안 구소련에서 유대인의 대규모 이민 시작
1991
걸프전 동안 이라크가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 공격 마드리드에서 중동 평화회의 개최 솔로몬 작전, 에티오피아에서 공수 작전으로 유대인 구출
65
1992
중국, 인도와 외교 관계 수립 노동당 총수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새로운 내각 출범
199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 기구가 된 PLO가 팔레스타인 의 잠정 자치 합의에 대한 원칙 선언에 조인(오슬로 협정)
1994
가자 지구와 여리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이행 교황청과 전면적 외교관계 수립 모로코와 튀니지에 사무국 설치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협정 조인 이츠하크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장관,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 노 벨 평화상 수상
1995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이행 팔레스타인 의회 선출 평화 집회에서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 시몬 페레스 총리직 승계
66
1996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확대 분노의 포도 작전,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지역 공격에 대한 보복 공격 오만과 카타르에 무역대표사무소 설치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어 리쿠드당 중심의 연정 내각 구성 텔아비브에 오만의 무역대표사무소 개설
1997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헤브론 의정서 서명
1998
이스라엘 건국 50주년 이스라엘과 PLO가 잠정 협정의 이행 촉진을 위해 와이 리버 협정 에 서명
1999
에후드 바락 (좌파 "하나의 이스라엘" 당)가 총리로 선출되어 연립 내각 구성 이스라엘과 PLO가 샤름 엘 셰이크 협정에 조인
200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레바논 남부 안보지대에서 이스라엘 군대 철수 이스라엘이 유엔 서유럽 및 기타 그룹에 가입 폭력행위 재개(제 2차 인티파다) 바라크 총리 사임
2001
아리엘 샤론(리쿠드당)이 총리로 당선, 광범위한 연립내각 구성 샤름 엘 셰이크 진상조사 위원회 보고서(미첼 보고서) 발행
67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안보 실행 작업안(테넷 휴전안) 발의 레카밤 제에비 이스라엘 관광성 장관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 에게 암살됨 2002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테러 공격에 맞서 방패 작전 개시 서안지구 테러리스트들의 이스라엘 시민 살해를 막기 위해 테러 방지용 보안 장벽 건설을 시작 샤론 총리가 의회를 해산시키면서 2003년 1월 28일에 새로 선거 를 실시할 것을 주장
2003
아리엘 샤론 총리에 의해 중도 우파 연립 내각 구성 이스라엘이 로드맵을 수용
2005
이스라엘은 불개입 계획을 이행하여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군 주둔 을 종식시킴
2006
샤론 총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에후드 올메르트가 총리 대행 이 됨 3월 28일 총선 후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가 카디마당 주도의 새로 운 내각을 구성 이스라엘은 자국 군인 납치사건 후 가자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테 러리스트들을 상대로 군사 작전 실시 헤즈볼라의 미사일 공격과 이스라엘 군인 2명 납치사건에 이어
68
제 2차 레바논 전쟁이 발발,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 부에서 헤즈볼라의 테러에 대해 군사 작전을 실시 2007
시몬 페레스가 의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 하마스의 가자 지구 무력 장악 후 이스라엘이 가자를 “적지 (hostile territory)”로 선포
국가 국가
71
정치 구조
74
대통령직
75
입법부: 크네세트
77
69
행정부: 정부
79
사법부
83
지방 정부
87
이스라엘 방위군(IDF)
89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는 다비드 벤 구리온 • 이스라엘 공보부
70
국가 1948년 5월 14일 국내 유대인 공동체와 해외 시온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민족 평의회 의원 들이 서명한 이스라엘의 건국 선언은 바로 이 국가의 신념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재탄생의 역사적 필연성, 성서의 예언자들이 내다본 것처럼 자유, 정의, 평화의 토대 위에 세워진 유 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틀, 지역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인접 아랍 국가들과 평화로운 관계 를 맺자는 촉구 등이 이 선언 안에 포함되어 있다.
71
...ותשועה ברב יועץ (מלשי י"א י"ד) )…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잠언 11:14
72
국가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은 유대 민족의 고향이었다. 이곳에서 그들의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국가를 이루었고, 민족적으로 보편 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적 가치를 창조했으며, 전세계에 영원불변의 성경을 제공해주었다. … 유대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 고토의 땅에 다시 정착하고자 힘썼다. … 그들은 사막 을 일구고 히브리어를 부활시켰으며, 촌락과 도시를 건설하고 번영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냈 다. 동시에 공동체의 경제와 문화를 스스로 관리하며, 평화를 사랑하지만 스스로를 방어하 는 법도 잘 알고 있다…
73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이주에 대해 문을 활짝 열 것이며…모든 주민의 이익을 위해 국가 발전을 촉진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내다보았듯이 자유와 정의, 평화의 토대 위 에 설 것이며, 종교, 인종, 성별에 관계 없이 모든 거주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의 완전한 형평성을 보증할 것이며, 종교, 양심, 언어, 교육, 문화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며, 모든 종교 의 성지를 지킬 것이며,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을 충실히 따를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평화와 우호관계를 제안하며 손을 내밀고, 자신
들의 땅에 정착한 주권을 지닌 유대 민족과 협력과 상부상조의 유대를 구축할 것을 그들에 게 호소한다. (이스라엘 건국 선언 중에서)
74
I. 스툴만
이스라엘 국기는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쓰는 쇼울(탈리트) 디자인을 바탕으로 푸른색의 다 윗의 방패(다윗의 별)가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공식 문장은 가지가 달린 촛대(메노라)로, 그 형태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알려진 식물인 모리아의 일곱 가지라고 전해진다. 양쪽으로 난 올리브나무 가지들은 평화를 갈망하 는 이스라엘의 바람을 의미한다.
하티크바 – 이스라엘 국가
75
가슴 깊은 곳에서 동방을 향하여 시온을 바라보면서 유대의 영혼이 동경하는 한 우리의 희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2천 년을 간직해온 희망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 우리의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정치 구조
76
이스라엘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이루어진 의회 민주주의 국가이다. 기관으로는 대통령 직, 크네세트(의회), 정부(내각), 사법부가 있다. 이스라엘의 정치 체계는 권력분산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행정부(정부)는 입법부(크네세트)의 신임을 받아야 하며 사법부의 독립 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국가 원수 대통령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의장
총리
법원
의회
정부
상임 위원회
정부 부서
시장과 시의회장
국가감사관과 행정감찰관
지방 의회 유권자
이스라엘의 역대 대통령
검찰총장
77
하임 와이즈만(1949~52) 시온주의 지도자, 저명한 과학자 이츠하크 벤쯔비(1952~63) 유대인 기구 의장, 사학자 잘만 샤자르(1963~73) 정치가, 학자, 역사가, 작가, 시인 에프라임 카찌르(1973~78) 저명한 생화학자 이츠하크 나본(1978~83) 정치가, 교육자, 작가 하임 헤르쪼그(1983~93) 검사, 육군 대장, 외교관, 작가 에제르 와이즈만(1993~2000) 공군장성, 정치가, 사업가 모셰 카짜브(2000~2007) 사회 지도자, 정치가 시몬 페레스(2007~) 원로 정치인, 전직 총리, 노벨 평화상 수상자
대통령직 히브리어 나시(대통령)는 고대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 민족의 최고 입법 및 사법 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오래된 직함이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이며, 대통령직은 정당 정치를 초월한 국민 통합을 상징한다. 대통령은 개인적 위상과 일생 동안의 국가에 대한 공 헌도를 기준으로 선정된 후보 가운데 의회에서 단순 다수결 방식으로 선출한다. 개정 법률 (1998)은 선출된 대통령의 임기를 단임 7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대통령의 임무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대통령은 새로 구성된 크네세트의 첫 회기 개회, 의회 의원 한 사람에게 새 내각을 구성하도록 요청, 해외 외교관 들의 신임장 접수, 의회에서 채택된 조약과 법률에 서명, 해당 기관의 추천에 따라 해외 주 재 이스라엘 외교 사절단, 판사, 이스라엘 은행 총재 임명, 법무부 장관의 권고에 따라 죄수
78
의 사면과 같은 직무를 담당한다. 대통령은 또한 사회 전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민들의 호소를 듣고 지역 단체의 위상을 높이고 사회 운동을 강화하는 등 공공 행사와 비 공식적 업무도 수행한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79
입법부: 크네세트 크네세트(이스라엘의 단원제 의회)는 이스라엘의 입법 기관이다. 크네세트라는 명칭과 120 명의 고정 의원수는 크네세트 하그돌라(최고 회의)에서 유래된 것이다. 크네세트 하그돌라는 기원전 5세기에 에즈라와 느헤미아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소집된 유대인 대표 평의회이다. 새로운 크네세트는 그 구성을 확정 짓는 총선 후에 활동을 시작한다. 첫 회기에서 크네세트 의원들은 직무에 충실할 것을 선언하고,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한다. 크네세트의 구성 주기 는 보통 4년이지만, 임기 중이라도 자체 해산하거나 총리에 의해 해산될 수 있다. 선거 후 새 의회가 공식적으로 구성될 때까지는 퇴임하는 의회가 모든 권한을 지닌다. 크네세트는 본회의에서 15개의 상임 위원회를 통해 임무를 수행한다. 본회의에서는 정부 정
예루살렘: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 관광성
80
책과 활동 및 정부나 의회 의원 개인이 제출한 법안을 두고 전체 토론을 실시한다. 토론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지만 의원들은 아랍어도 사용할 수 있으며, 두 언어 모두 공식언어이다. 동시 통역도 활용 가능하다. 정규 공공 법안이 법률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크네세트에서 3차에 걸친 독회를 통과해야 한 다(사적 법안은 4회의 독회를 거침). 법안은 첫 독회에서 본회에 회부되어 그 내용에 관한 간략한 토론이 진행되고, 그 후 필요할 경우 해당 의회 위원회에 회부되어 세부 토론과 초 안 수정이 이루어진다. 해당 위원회의 작업이 끝나면 법안을 본회에 다시 상정하여 2차 독 회를 가지는데, 이때 유보권이 있는 위원회 의원들이 본회에 유보 의사를 밝힐 수 있다. 대 체토론 후 각각의 법안 조항을 표결에 부치고, 법안을 다시 위원회에 회부할 필요가 없으면 곧바로 3차 독회가 열리고 법안 전체에 대해 최종 투표가 실시된다. 법안이 통과되면 의장 이 이에 서명하고, 대통령, 총리, 의회 의장, 이 법의 실행을 담당하는 관계 장관의 서명과 함께 후에 관보로 고시된다. 끝으로 법무 장관이 국가 인장을 찍고 나면 이 법안은 정식 법 이 된다.
81
행정부: 정부 이스라엘의 행정 당국은 정부(내각)이며, 안보 문제를 포함해 국내외 여러 업무를 관장한다. 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은 매우 광범위하여 법적으로 다른 기관에 위임되는 경우를 제외한 모 든 사안에 대해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다. 내각은 업무 및 정책 결정 과정을 자체적으로 결정한다. 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가 열 리지만 필요 시 추가적으로도 소집될 수 있다. 장관 회의를 통해 업무를 진행할 수도 있다. 정부 구성: 지금까지 자체적으로 단일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의회 좌석을 얻은 정당 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정부가 여러 당의 연립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대통령은 자문을 거친 후 국회의원 한 사람에게 내각 구성의 책임을 부여한다. 이것이 확정 되려면 선임된 의원이 정부구성 책임을 받은 지 28일 내에 의회의 승인을 받기 위한 장관
이스라엘의 역대 총리
다비드 벤 구리온 (1948~54) 모셰 샤레트 (1954~55) 다비드 벤 구리온 (1955~63) 레비 에슈콜 (1963~69) 골다 메이어 (1969~74) 이츠하크 라빈 (1974~77) 메나헴 베긴 (1977~83) 이츠하크 샤미르 (1986~92) 이츠하크 라빈 (1992~95) 시몬 페레스 (1995~96) 베냐민 네타냐후 (1996~99) 에후드 바락 (1999~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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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샤론 (2001~2006) 에후드 올메르트 (2006~)
명단을 정부 가이드라인 개요서와 함께 제출해야 한다. 모든 장관은 이스라엘 시민권자이자 이스라엘 거주자여야 하며, 의회 의원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외무부 • T. 그리피스
승인을 받고 나면 장관들은 총리 직권 하에 각자 의무를 수행할 책임과 각자의 행동에 대해 의회에 정당성을 입증할 책임을 진다. 대부분의 장관은 직위를 부여 받고 각 부의 장관이 되며, 부서를 배정 받지 않은 무임소 장관들은 특별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을 수 있다. 총리 가 특정 부서를 맡아 장관직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장관들은 총리와 내각의 승인을 받아 자체 부서의 차관을 임명할 수 있다. 단, 내정자는 반 드시 의회 의원이어야 한다. 의회와 마찬가지로 내각도 대개 4년을 임기로 하나 총리의 사임이나 자격박탈, 서거, 의회 의 불신임 등의 사유로 임기가 단축될 수 있다. 총리가 서거나 자격박탈, 사임, 탄핵 등으로 더 이상 총리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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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구성원 중 한 명(반드시 의회 의원이어야 함)을 총리 서리로 임명한다. 불신임 투표가 가 결된 경우, 내각과 총리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임무를 유지한다.
선거 이스라엘의 선거는 보통, 국민, 직접, 평등, 비밀, 비례 선거이다. 전국이 단일 선거권이며 18세 이상 국민이면 누구나 투표권을 가진다. 선거일에 유권자들은 의회에서 그들을 대표할 정당에 표를 던진다. 선거일은 국경일이며, 선거 당일 자신의 투표구에 있지 못한 유권자들에게는 무료 교통편의 가 제공되고, 군인, 병원에 입원중인 환자, 죄수, 상선 선원, 공식 업무로 해외 체류중인 이 스라엘 국민에게도 투표소가 제공된다.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는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고 의회 의석을 가지고 있는 각 정당의 대표 들로 구성되며, 선거 관리의 책임을 담당한다. 지방선거위원회는 임기 막바지인 의회의 3개
검찰 총장 검찰 총장은 정부의 법률 서비스를 지휘하며, 모든 주요 형사, 민사, 행정 사건에 대해 국가 를 대변하는 독점적 권한을 가진다. 정부는 법원이 다른 판결을 내리지 않는 한 검찰총장이 불법이라는 견해를 낸 모든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임명은 정부가 하지만 검찰총장은 정치 체계와는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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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정당 대표들로 구성된 지역투표위원회가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감독하는 일을 맡는다. 지금까지 각 선거에서 전체 등록 유권자의 77~90%가 자신들의 표를 행사했으며, 이는 국가 및 지역 정치에 대한 대다수 이스라엘 국민의 깊은 관심을 잘 나타내준다. 의회 선거는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대한 투표를 토대로 한다. 크네세트에 출마하는 다수의 정당은 다양한 전망과 소신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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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사법부의 독립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법관은 대법원 판사, 법조계 인사, 공직자들로 구성 된 지명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법관은 종신직이며 70세가 정년이다.
국법 1948년 독립을 이룬 직후 이스라엘은 독립 선언에 제시된 원칙에 어긋나지 않고 의회가 제 정하는 법과 상충되지 않는 한 건국 이전에 보편화된 법률이 계속 유효하다고 명기한 법률 과 행정법령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법 체계에는 오스만 제국법(1917년까지 시 행), 영국 보통법의 상당 부분을 결합시킨 대영제국의 위임 통치법, 유대교 율법적 요소 및 그 외 여러 체계적 측면의 잔재가 남아있다. 그러나 법 체계의 주된 특징은 1948년부터 발전해온 독립된 제정법과 판례법이 크게 한 덩 어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건국 이후 크네세트는 삶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 일련의 기본
공중에서 바라본 대법원 건물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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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제도 특별 법원
사법권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교통, 노동, 청소년, 군대 및 시 지역 법원.
(판사 1명)
행정 심판소.
종교 법원
개별 종교 공동체의 사법 기관들에 귀속된 개인 신상 관련 문제들(결혼, 이
(판사 1~3명)
혼, 양육비, 후견, 입양)을 관할. 유대 랍비 법원, 이슬람 샤리아 법원, 드루 즈 종교 법원, 이스라엘 내 공식 기독교 공동체 10곳의 교회 법원.
치안판사 법원
민사범 및 경미한 형사범. 민사 및 형사 사건 관할.
(판사 1명) 지방 법원
치안판사 재판의 항소 관할. 중요도가 큰 민사 및 형사 사건의 제 1심 관
(판사 1~3명)
할.
대법원
전국의 최종 항소 관할. 사법 정의를 위해 개입할 필요가 있을 시 사안을
(1, 3, 5나 그
해결할 권리, 불법으로 구류 및 수감된 사람을 방면할 권한이 있다. 고등법
이상의 홀수명
원으로서 모든 정부 단체나 산하기관에 대한 청원서를 심리하며, 대법원의
의 판사)
판결이 1심이자 최종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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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제정할 권한을 위임 받았고, 후에 이 법률들이 모여 헌법이 구성되었다. 여러 기본법 이 통과되어 대통령, 의회, 내각, 사법부, 이스라엘 방위군, 감사원장, 직업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 및 자유(개인의 삶, 신체, 존엄성의 침해 문제를 다룸)와 같은 정치체제의 기본적 특 징들이 윤곽을 갖추게 되었다. 일반 법률에 대한 기본법의 규범적 우위는 1995년 대법원이 기본법을 침해하는 의회의 법 률제정을 심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면서 확정이 되었다. 수년에 걸쳐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평등 등의 기본 인권을 이스라엘 법체 계의 근본적 가치로서 보호하는 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여러 가지 판례법이 발달했다. 대법 원은 고등법원으로서 모든 정부단체나 산하기관에 대해 시정을 호소하며 개인이 제출한 청 원서를 심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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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감사원: 공적 책임을 보장하기 위해 법으로 설립된(1949년) 감사원은 공무행정의 적 법성, 규칙성, 경제성, 능률, 효율성, 도덕성에 대한 대외적 감사와 보고를 수행한다. 1971년 부터는 국가 감사원장이 행정 감찰관의 직무도 맡아 감사 대상이 되는 국가 및 공공 단체에 대한 국민의 불편사항을 접수한다. 국가 감사원장은 7년 임기이며, 의회의 무기명 투표로 선출되고, 의회만이 감사원장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국가 감사의 범위는 전 정부부처 와 국가 기관, 국방 조직의 지부, 지방 자치단체, 공기업 등의 활동이다. 또한 법에 따라 국 가 감사원장은 의회 내 여러 정당의 재무 상태와 이들의 선거 계좌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 을 가지고 있으며, 부정행위가 발견될 시에는 금전적 제재를 가한다.
이스라엘 경찰 세계 각지의 경찰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경찰의 업무도 범죄와 싸우고 당국의 법 집행을 지원하며, 교통법규를 집행하고, 국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예방조치에 관한 지침을 제공 하는 일이다. 경찰의 주력 기동부대인 국경 경찰은 주로 국내의 안보문제를 처리하며 특별 대테러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테러사건의 빈발과 위협에 대해 우려한 시민들은 그들이 지역사회 보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자원제의 민간 경비대가 창설되어 (1974년) 지휘 센터, 무장 정찰대, 훈련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주변지역 보안 부대를 운영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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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정부 지방 정부는 교육, 문화, 보건, 사회복지, 도로관리, 공원, 상수도, 공중위생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각 지방 당국은 내무부의 승인을 받은, 국가법을 보완해주는 조례에 따라 직무를 수행한다. 일부 당국은 특별 법원을 운영하며 지방 조례 위반자들을 심리한다. 지방 정부의 재원은 국가 예산에서 할당되는 금액과 지방세에서 조달한다. 지방 정부마다 연간 보고서를 작성하는 감사관이 있다. 법으로 승인된 지방정부는 세 종류가 있다. 지방 시의회는 인구 2만 이상의 도심지역에 기 본 틀을 제공한다. 지방 군 의회는 인구 2천에서 2만 사이의 도시를 관리하며, 지역의회는 일정 구역 내에 같은 집단으로 묶인 몇몇 마을을 책임진다. 각 지방 정부의 관리 주체는 시장이나 의장, 그리고 의회이다. 의회 의원의 수는 관할지역 의 인구를 기준으로 내무부가 결정한다. 현재는 지방 시의회 73개, 지방 군 의회 124개, 지 역의회 54개가 있다. 지방 시의회와 지방 군 의회는 모두 중심 기구인 지방정부연합 아래 자발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지방정부연합은 중앙 정부에 대해 지방 정부들을 대표하며, 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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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련 법률을 검토하고 업무 협약과 법률 문제와 같은 사안에 대해 지침을 제공한다. 국 제 시의회 연합과 제휴를 맺은 이 기구는 세계 각지의 유사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 며 자매결연 도시 프로그램과 국제 대표단 교환을 추진한다.
지방 선거 지방정부 선거는 5년마다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다. 이스라엘 국적 여부와 관계없이 17세 이 상의 영주권자는 누구나 투표할 수 있고, 선거 출마 가능 연령은 21세 이상이다. 지방 시의 회와 지방 군 의회 선거에서는 후보의 정당명부에 대해 투표를 하며, 의회 의석 수는 각 명 부 별로 득표한 비율에 따라 주어진다. 시장들과 지방 군 의회의 의장들은 직접선거로 선출 된다. 지역의회 선거에서는 각 마을의 최다 득표 후보자가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다. 지역 의회 의 의장은 의원들 가운데서 선출된다. 지방선거 자금은 지방정부 내에서 각 당파나 명부가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은 수를 기준으로 정부 지출금에서 지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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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방위군(IDF) 1948년에 창설된 이스라엘 방위군(IDF)은 6 차례의 주요 전쟁에서 국가를 지키는 일을 감 당한 전세계에서 전장에 가장 많이 나서본 군대 중 하나이다. IDF의 안보 목표는 이스라엘 의 주권과 영토를 보호하고, 모든 적을 저지하고,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테러행 위를 억제하는 것이다. 주요 임무로는 평화 준비를 강화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의 조율 하에 서안 지구의 전반적인 안보를 확립하며, 국내외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고 전쟁 발발을 막을 수 있는 억제력을 유지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IDF의 전략적 차원의 공식 입장은 방어이지만 전 술에서는 공격을 기조로 한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크지 않음을 고려할 때 IDF는 필요하다고 여겨질 경우 반드시 먼저 기선을 잡아야 하고, 공격을 받았을 때는 재빨리 전장을 적의 영 토로 전환해야 한다. IDF는 항상 적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첨단 무기 체계를 배치하 여 질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무기들의 상당수는 특수 목적에 따라 국내에서 개발 및 제조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IDF의 핵심 자원은 우수한 자질을 갖춘 군인들이다. 방어를 준비하면서 IDF는 조기 경보 능력을 갖춘 소규모 상비군(징집병과 직업군인으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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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정규 공군 및 해군을 배치한다. 이스라엘 군의 대다수는 예비군으로, 이들은 훈련과 복무를 위해 정기적으로 소집되고, 전쟁이나 위기 시에는 전국 각지에서 소속 부대로 긴급 동원된다. IDF의 3개 하부 조직(육군, 공군, 해군)은 국방장관 직권 하에 있는 중장 계급의 참모 총장 이 이끄는 합동 사령부의 지휘 하에 움직인다. 참모 총장은 총리와 국방장관의 추천으로 정 부가 임명하며, 임기는 3년이고 대개 1년씩 추가로 연장된다. 남녀 군인 전원은 함께 협력하며 기술자, 통신 및 정보 특기병, 전투 교관, 지도 제작자, 행 정 및 보급 대원, 컴퓨터 기술자, 의사, 변호사 등으로 근무한다. 전투 부대에서 복무하는 여성의 수도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다.
IDF의 복무기간
의무 복무: 자격요건에 맞는 모든 남녀는 18세에 징집된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간 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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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고등 교육기관에서 수학하는 자격을 갖춘 학생들은 징집유예를 받을 수도 있다. 새로 이민 온 사람들은 입국 당시의 연령과 신분에 따라 징병이 연기되거나 복무기간이 단축될
졸업을 자축하는 공군 조종 사관학교 생도들 • 이스라엘 공보부/ A. 벤게르숌
IDF는 소속 군인들의 문화 및 사회적 요구에 빠르게 부응하여 개인 지원 서비스뿐 아니라 오락과 교육 활동을 제공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신병들에게는 교육 수준을 높 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직업 장교들에게는 복무 기간 동안 IDF의 지원금으로 공부하 도록 장려한다. 새로 이민 온 군인들에게는 히브리어 지도 및 기타 프로그램을 제공해 사회 통합과정을 촉진한다. 창설 초기부터 국가 건설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IDF는 민간인들에게 추가 보충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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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예비군 복무: 의무 복무를 마친 군인들은 예비군으로 등록되고 최대 51세까지 복무할 수 있 다. 직업 군인 복무: 의무 복무를 마친 군인 중 현재 IDF의 필요에 부합하는 이들은 직업 장교 나 하사관이 될 수 있다. 직업 군인들은 IDF의 지휘 및 행정의 중추 역할을 한다. 사관학교 나 조종사 학교 또는 특수 군 기술학교 졸업생들은 일정 기간 직업 군인으로 복무해야 한다.
을 제공하고 일반 국민 가운데 신규 이민자들의 흡수에도 기여하고 있다. 국가적 위기나 위 급상황에는 즉각 적절한 조치로 대응하고, 훈련된 인력을 투입하여 필수 업무직 결원을 보 충하거나 특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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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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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선 제미니 11호에서 본 중동 • 미 항공우주국(NASA) 사진 S66 54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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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이스라엘은 지중해 남동쪽 해안선에 접해있는, 국토 면적이 작고 폭이 좁으며 반 건조한 국 가이다. 약 3500년 이전에 역사에 등장했으며, 이때 유대 민족이 유목 생활을 접고 이 땅에 정착하므로 국가가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 중 몇 가 지만 들어보면, 먼저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 땅)이 있고, 원래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의 이름으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게 된 명칭인 시온이 있다. 팔레스타인은 필리 스티아에서 유래된 말로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약속의 땅, 성지 등의 이름도 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단순히 하아레츠, 즉 땅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는 70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그 중 약 540만은 유대인, 140만은 아랍인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세속적 측면, 현대성에서 전통성, 도시에서 농촌, 공동사회에 서 개인에 이르는 광범위한 생활양식은 이스라엘의 특징을 잘 나타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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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שמות ג" ח...ארץ זבת חלב ודבש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출애굽기 3:8)
지형 좁은 면적: 짧은 거리 이스라엘의 총면적은 22,145 평방 킬로이고, 그 중 육지 면적은 21,671 평방 킬로이다. 이 스라엘 국토의 길이는 약 470 km, 폭은 가장 넓은 지점이 약 135 km이다. 이스라엘은 북쪽 으로는 레바논, 북동쪽으로는 시리아, 동쪽으로는 요르단, 남서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연접해있다. 산지와 평원, 비옥한 토지, 그리고 사막이 몇 분 간격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서쪽의 지 중해에서 동쪽의 사해에 이르는 국토의 폭은 차로 약 90분만에 횡단할 수 있다. 북쪽 끝에 위치한 메툴라에서 최남단의 에일랏까지 이동하는 데는 6시간 정도가 걸린다.
지리적 특징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4개 지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북쪽에서 남쪽으로 병행하면서 뻗어 있는 3개의 좁고 긴 지역들과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넓은 건조지역으로 나뉘어진다. 지중해와 나란히 뻗어있는 해안 평지는 모래 해안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륙으로 최대 40 km까지 펼쳐진 비옥한 농지가 인접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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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는 넓은 모래 사장이 펼쳐진 가운데 이따금씩 들쭉날쭉한 백악과 사암 절벽이 솟아있 다. 해안 평지에는 7백만 이스라엘 국민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으며 주요 도시 중심지와 심 해 항구, 대부분의 국내 산업시설, 농업 및 관광 시설 상당수가 자리잡고 있다. 국토의 세로 길이를 따라 몇 개의 산맥이 뻗어있다. 북동쪽에는 먼 옛날 화산폭발로 형성된 현무암으로 덮인 골란 고원의 풍경이 훌라 계곡을 내려다보며 가파른 절벽처럼 솟아있다. 대부분 부드러운 석회암과 백운석으로 이루어진 갈릴리 언덕은 해발 500~1,200m 높이로 솟아있다. 사계절 내내 흐르는 작은 시내와 비교적 풍부한 강우량 덕에 이 지대는 일년 내 내 푸르름을 유지한다. 갈릴리와 골란에 거주하는 상당수 주민들은 농업, 관광 관련 사업, 경공업에 종사한다. 갈릴리 산지와 사마리아 산지를 가르는 이스르엘 계곡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 대로서 많은 농업 공동체(키부츠와 모샤브)에 의해 경작되고 있다. 사마리아와 유대(서안 지 구)의 완만한 굴곡 언덕들은 바위로 된 언덕 꼭대기와 오래된 은록색 올리브나무 숲이 점재 해 있는 비옥한 계곡들로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 고대 농부들이 맨 처음 개발한 계단식으 로 된 언덕 경사면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인구는 주로 작은 도시들과 큰 마을들에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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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토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네게브는 인구 밀도가 낮으며, 이곳 사람들은 농업 과 산업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네게브는 낮은 사암 고지와 광 야로 특징 지워지는 불모지이며, 겨울비가 올 때 종종 돌발 홍수가 일어나는 큰 협곡과 와 디가 많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벌거벗은 바위산 꼭대기와 분화구, 바위로 뒤덮 인 고원 지대가 나오는데, 이곳은 기후가 더 건조하고 산도 더 높이 솟아있다. 3개의 침식 분화구 중 가장 큰 것은 지름이 약 8km이고 길이는 35km이다. 지각 속으로 깊게 패여 있 는 이 분화구들은 다양한 색상과 암석형태를 보여준다. 홍해에 접한 에일랏과 가까이 위치 한 네게브의 가장 끝에는 회색과 적색 화강암의 뾰족한 봉우리들 사이로 말라붙은 협곡과 가파른 절벽이 들어서 있으며, 다양한 색채의 사암 지층들이 햇빛에 빛나고 있다. 킨네렛 호수(갈릴리 바다)는 갈릴리 고지와 골란 고원 사이에 해수면보다 212m 아래에 자 리잡고 있으며 폭 8km에 길이는 21km이다. 킨네렛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호수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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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트로스
킨네렛 마을에서 바라본 호수와 골란 고원의 모습 • 관광성 저수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호숫가를 따라 농업 공동체와 양식장, 관광 시설이 들어서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사 및 종교 유적지들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 동부를 따라 세로로 길게 뻗어있는 요르단 계곡과 아라바는 수백만 년 전에 지각 을 분열시켰던 시리아-아프리카 지구대의 일부이다. 이곳의 북쪽 지역은 매우 비옥하고 남 쪽은 반건조 지역이다. 농업, 어업, 경공업, 관광업이 이 지역의 주요 수입원이다. 지구대를 관통하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요르단 강은 300km에 이르는 경로에서 700m 이 상의 낙차를 이루며 경사져있다. 헤르몬 산의 개울들이 흘러가서 이룬 이 강은 비옥한 훌라 계곡을 통과하여 킨네렛 호수로 흘러 들어가고, 계속해서 요르단 계곡으로 굽이쳐 들어가 사해에 이른다. 겨울 우기 동안은 강물이 불어나지만 평소에는 비교적 좁고 얕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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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강 • 알바트로스
이스라엘의 사바나 지대인 아라바는 사해 남쪽에서부터 홍해로 나가는 출구인 에일랏 만까 지 뻗어있다. 연간 평균 강우량이 25mm가 채 못되고 여름철 기온이 40℃까지 치솟는 기후 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고도의 농경 기술을 이용하여 주로 수출용의 철이 이른 과일과 채소
를 기르고 있다. 아라바의 남쪽 끝에는 깊고 푸른 바다와 산호초, 이국적인 해양 생물로 유 명한 아열대의 에일랏 만이 있다.
기후 이스라엘의 기후는 온대에서 열대에 걸쳐있고 일조량이 풍부하다. 두 계절이 뚜렷이 나타나 는데, 하나는 11월에서 5월까지의 겨울 우기이고, 다른 하나는 나머지 6개월간 계속되는 건 조한 여름철이다. 강우량은 북부와 중부 지방이 비교적 많고, 네게브 북부는 그보다 훨씬 적으며 남부지역은 극히 미량에 불과하다. 기후 조건은 지역별로 크게 차이를 보인다. 해안 지역은 습한 여름과 포근한 겨울, 고지대(예루살렘 포함)는 건조한 여름과 다소 추운 겨울, 요르단 계곡은 덥고 건조한 여름과 쾌적한 겨울, 네게브는 일년 내내 반 사막 기후를 특징 으로 한다. 날씨는 고지대의 간헐적인 겨울 폭설에서 봄, 가을에 주기적으로 나타나 기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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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상승시키는 숨막힐 듯 덥고 건조한 바람에 이르기까지 양극을 보인다.
알바트로스
사해: 해수면보다 400m 정도 아래에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사해는 요르단 계 곡의 남쪽 끝에 위치해있다. 세계에서 염도와 농도가 가장 높은 이곳의 물은 식용 및 공업 용 소금뿐 아니라 칼륨, 마그네슘, 브롬이 풍부하다. 사해의 자연적 수량 감소는 최근 몇 년 간 가속화되었다. 상당히 높은 증발율로 해마다 해수면이 1.6m씩 낮아지고, 이스라엘과 요 르단이 물 수요로 인해 시행한 용수공급 사업은 사해로 흘러 들어오는 물을 75% 감소시켰 다. 그 결과 사해의 해수면은 1960년 이래로 약 10.6m 낮아졌다. 운하와 수로관 시스템을 통해 사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사업이 현재 진행 중이며, 이 공사는 사해를 원래 규모와 해수면 높이로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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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사막지대 언저리에 위치한 이스라엘은 늘 물 부족에 시달려왔다. 네게브 및 기타 지역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유물 중에는 빗물을 모아 저장하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이는 수천 년 전 이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이미 그때부터 물 관리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재생 가능한 수자원의 연간 총량은 약 17억 입방 미터이며, 이 중 약 65%는 관개에, 나머 지는 도시와 산업용으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의 수원은 요르단 강과 킨네렛 호수 및 기타 소 규모 하천계로 이루어져있다. 고갈과 염분화를 막기 위해 조절된 양만큼 끌어오는 천연 샘 과 지하수도 활용되고 있다. 모든 담수원을 최대한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하수 재생, 인공 강우, 염수의 담수화, 해 수 담수화를 통해 한계 수자원을 활용하는 여러 방법을 개발 중에 있다.
가용 수자원의 지역적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담수원 중 대부분이 하나의 통합 배관망으로 합쳐져 있다. 그 중 중추가 되는 국립 수로는 1964년 완공되었으며, 북부와 중 부지역에서 물을 끌어와 거대한 파이프와 도수관, 취수로, 저수지, 지하 수로, 댐, 양수장으 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통해 남쪽의 반 건조 지역으로 나르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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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 고원의 폭포 • 알바트로스
자연 식물상과 동물상 이스라엘의 동식물은 그 수가 풍부하고 종류도 다양한데, 이는 3개 대륙의 접점에 놓인 지 리적 위치도 어느 정도 원인이 된다. 대략 2,600종으로 확인된 식물은 북부의 산지 경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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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는 고산식물 종부터 남부 아라바의 사하라 식물까지 폭넓게 분포한다. 이스라엘은 파피루스와 같은 식물의 최 북단 서식지이고 선명한 적산호색 모란 등의 최남단 서식지이다. 대부분 켈메스 참나무로 구성된 천연 삼림지는 갈릴리와 카르멜산(갈멜산) 및 기타 고지대 의 일부를 뒤덮고 있다. 봄철에는 주로 반일화와 가시 있는 로뎀이 분홍, 흰색, 노랑의 배색 으로 곳곳에 피어난다. 인동초는 관목 위로 뻗어나가고, 커다란 플라타너스는 갈릴리의 시냇가를 따라 그늘을 제공 해준다. 네게브의 산악 지방의 육중한 피스타치오 나무는 메마른 계곡을 따라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 내고, 대추야자는 지하수가 충분한 곳이면 어디든지 자라고 있다.
시클라멘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펠리컨 • 알바트로스 이스라엘의 야생화들 가운데는 붓꽃, 백합, 튤립, 히아신스 등 많은 재배종의 화초들이 있다. 10~11월에 첫 비가 내린 직후면 전국이 초록빛 융단으로 뒤덮이고 여름 건기가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 상태가 지속된다. 분홍과 흰색의 시클라멘과 빨강, 흰색, 보라색의 아네모네는 12월에서 3월까지 꽃이 피고, 파란 루핀과 노란 금잔화는 그보다 조금 뒤에 핀다. 크로커스, 해총 등 상당수의 자생식물은 지중식물로서 구근이나 덩이줄기에 영양분을 저장하고 여름이 끝날 무렵 꽃을 피운다. 이 같은 꽃밭 위로는 화려한 빛깔과 무늬를 뽐내는 135종 가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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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날아다닌다.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는 조류는 500종이 넘는다. 직박구리와 같은 몇몇 종은 국내에 사는 텃새이고, 물닭과 찌르레기 등은 이스라엘의 양어지와 농경지가 제공하는 먹이를 실컷 먹으 며 겨울을 난다. 수백만 마리의 새가 매년 두 번씩 국토를 가로질러 이동함으로써 새를 관 찰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제공한다. 벌매, 펠리컨을 비롯한 여러 크고 작은 철새들이 3월 과 10월에 이스라엘의 하늘을 채운다. 독수리, 새매, 매와 같은 몇몇 맹금류와 휘파람새, 상 모솔새 등의 작은 명금류는 이스라엘에서 둥지를 튼다. 우아한 영양은 고지 위를 배회하고, 여우, 살쾡이 및 기타 포유동물들은 삼림 지대에 서식 하며, 웅장한 뿔을 가진 누비아 야생염소는 사막의 바위산을 뛰어다닌다. 또한 카멜레온, 뱀, 아가마 도마뱀을 포함해 100종의 토착 파충류가 있다.
간 하슐로샤 자연보호구역 • 알바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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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보호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자연과 야생생물의 보호에 대한 엄격한 법률이 제정되어 가장 흔한 길가의 꽃을 꺾는 행위조차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연 보호를 촉진할 책임을 맡고 있 는 이스라엘 국립공원관리국(INPA)은 풍경과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INPA 의 감독 하에 전국적으로 150개 이상의 자연보호구역과 65개 국립공원이 설립되었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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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거의 1,000평방 킬로에 달한다. 자연보호구역 중 약 20곳은 방문자 센터, 도로, 하이 킹 코스를 갖추고 일반 대중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매년 2백만이 넘는 방문객을 유 치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요 지역 중 하나인 카르멜산(갈멜산)은 유네스코의 인간과 생물 권 프로그램에 따라 생물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참나무, 종려나무, 영양, 야생염소, 표범, 독수리 등 수백 종의 동식물이 보호대상이 되고 있
유대민족기금(JNF, 케렌 카예메트)은 이스라엘 땅의 개발, 개간, 조림 사업을 수행하고 유대인 농업 공동체들을 위한 땅을 구입할 목적으로 1901년 창립되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쟁취한 1948년 무렵 유대민족기금은 전세계 유대인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으로 24만 에이커 가량의 토지를 매입했는데, 땅의 대부분은 수세기 동안의 방치로 인해 복구과정을 거쳐야 했다. JNF는 또한 바위 산허리 곳곳에 약 4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오늘날 약 30만 에이커에 달하는 숲과 삼림지에서 자라는 2억 그루가 넘는 나무는 이스라
엘 시민들에게 야외 휴양과 자연 감상을 위한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JNF는 조림과 삼림 보존 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공원과 휴양지 개발, 새로운 공동체 기반시설 마련 및 다 양한 집수 사업까지 실시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환경 보전 노력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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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아 야생염소 • M.F.A.
으며, 여러 멸종 위기종을 보전하기 위해 특별 구조활동이 개시되었다. 새들의 안전한 둥지 터를 비롯해 늑대, 하이에나, 여우를 위한 급식소가 세워졌다. 지중해 해안에서 바다거북의 알을 정기적으로 수집하여 부란기에서 부화시킨 뒤 새끼 거북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매년 5백만 마리가 넘는 새들이 거쳐가는 이스라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류 관찰 중심지 이자 국제적 연구 및 협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새의 이동경로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 조류와 항공기 충돌사고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 “새에게는
국경이
없다”는
표어
아래
이스라엘에서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
(http://www.birds.org.il)는 교육 및 연구 사업을 통해 전세계 어린이들을 이어주고 있다.
전통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인해 성서시대에 존재하다가 그 후 해당 지역에서 사라지거나 멸종 위기에 놓인 동식물들을 보호하고 다시 들여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의 중심부에 위치한 자연보호구역 네오트 크두밈(성서 식물원)은 성서에 언급된 현존하는 식물종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고대 이스라엘 땅의 여러 지역의 토 착 식물들로 대규모 식물원을 조성했다. 아라바와 카르멜산(갈멜산)에 설립된 하이바르 야생 생물 구역은 예전에 이곳의 구릉과 사막을 거닐던 동물 종들을 원래의 자연 서식지로 되돌 려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사육하고 있는 동물에는 타조, 페르시아 다마사슴, 오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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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당나귀, 소말리 야생 당나귀 등이 있다. 학교와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가이드 견학, 간행물, 안내 캠페인을 통해 자연 보호에 대한 인 식을 높이는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이스라엘 내 가장 큰 환경단체인 자연보호협회(SPNI)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계와 환경 파괴에 반대하는 수십 건의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 단 체의 교육 복지 프로그램에는 현장 학교 10곳, 조류 관찰 센터 4곳, 도시 자연 센터 5곳, 지부 10곳 등이 있다.
카르멜산(갈멜산) 자연보호구역 • 알바트로스
환경 보호 급격한 인구 증가와 농업과 산업의 지속적 팽창은 환경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 그 피해는 특히 이스라엘 인구의 절반 이상과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몰려있는 해안 지역에서 두드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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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와 홍해 연안의 환경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주로 지중해 실 천 계획의 기본 틀에 따라 조사, 입법, 시행, 해안 정화작업, 국제적 협력으로 구성된 다방 면적 사업계획을 채택했다. 물 부족과 집약적 개발이라는 상황 하에서 수질 악화는 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지하수 오염 의 주된 원인은 화학 비료와 살충제, 해수 침투, 생활 및 산업 폐수이다. 폐수가 환경과 공 중 보건에 미치는 영향을 저지하고 농업 용수원을 추가로 개발하기 위해 폐수 처리가 우선 과제가 되어왔다. 최근 승인된 수자원 관리 계획안은 해수와 염수의 담수화, 재사용 목적의 폐수 처리 개선, 효율적인 물 생산 및 물 보존 등을 명기하고 있다. 오염된 개울을 생태학 적, 휴양적 가치가 있는 담수자원으로 전환한다는 목표 하에 개울의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 다. 음용수의 수질은 엄격히 관리되고 있다.
대기의 수준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에너지 제품, 교통, 산업 등인데, 이 세 요인 모두 최근 몇 년간 급격히 증가했다. 에너지 제품에 저유황 연료를 사용함에 따라 아황산가스 농도가 상당 수준 감소했지만, 차량 증가와 관련된 오염물질 배출은 크게 증가했다. 이 문제를 완 화하기 위해 무연 휘발유, 촉매 변환 장치, 저유황 디젤유 등이 도입되었다. 전국적인 감시 시스템은 국내 곳곳의 대기 수준에 대해 최신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스라엘은 또한 오존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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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기후 변화에 대한 국제적 결의안을 준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인구, 생활수준, 소비의 급격한 상승은 고형 폐기물을 연간 약 4~5%정도로 크게 증가시키 는 결과를 낳았다. 국내의 불법 쓰레기 처리장은 최근 몇 년간 대부분 폐쇄되었고, 환경적 으로 안전한 매립지로 대체되었다. 방출량 감소, 재활용, 매립, 소각 등으로 이루어질 통합 적 고형 폐기물 관리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재활용 규정은 저폐기물 및 무 폐기물 기술로의 전환을 촉진할 것으로 보인다. 유해물질의 “전주기에 걸친” 관리는 물질의 생산, 사용, 처분, 처리 등 모든 측면에 대한 허 가, 규제, 감독을 바탕으로 한다. 법률의 시행, 사고시 통합적 비상 대응을 위한 국가 긴급
계획을 실행, 유해 폐기물 처리장 개선 및 개량을 통해 건강과 환경에 대한 잠재적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환경법의 시행은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환경 교육과 더불어 최우선 사항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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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물 오염방지 관리위원과 동물복지 관리위원들에게 관련법 위반사례를 보고할 권한이 부 여됨에 따라 일반 국민도 환경법 시행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환경 개선 촉진을 위해 경제 적 수단이 사용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환경오염 예방에 투자하는 산업체에게 재 정 보조금을 지원하는 형태와 오염 기업들에게 세금과 환경 부담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모두 사용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원칙에 따라 경제 모든 부문에서 자원 절약과 오염 방지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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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반시설 통신: 이스라엘은 세계의 주요 상업, 금융, 학문적 데이터와 연결되어 있고, 수중 광섬유 통 신선과 위성 연결장치에 의해 국제 통신 시스템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다. 국민 1인당 기준 으로 전화선, 컴퓨터, 인터넷 사용자 측면에서 세계 상위를 기록한다. 이스라엘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화망을 디지털화한 국가 중 하나이며, 그 결과 가입자 들에게 최첨단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세계적으로 무선전화 보급률이 가 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편 서비스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운영되고 해외 대다수 국가와 연결되어 있다. 우표국은 지금까지 1,500종이 넘는 우표를 발행했다. 이스라엘의 여러 유명 미술가들이 제작에 참여 한 ‘전화카드’ 중 일부는 이미 작품의 위치에 올라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도로: 지역간 거리가 짧은 국가에서는 자동차, 버스, 트럭이 주요 교통수단이 된다.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외진 지역까지도 교통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급격한 차량 증가에 발맞
위성 중계국, 하엘라 골짜기 • 알바트로스
추기 위해 도로망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개선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다차선 간선도로로 이스라엘 최초의 유료 도로인 트랜스 이스라엘 하이웨이(6번 도로)는 남부 브에르셰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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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의 나하리야까지 이어지는 300km의 계획된 길이를 대부분 완공했다. 이 도로는 인구 밀집 지역을 우회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교통체증을 완화하고 국내 대부분 지역까지 단시간 안에 갈 수 있게 해준다.
아얄론 인터체인지 • 알바트로스
철도: 이스라엘 철도는 텔아비브, 예루살렘, 하이파, 나하리야, 브에르세바, 디모나 간에 여 객 서비스를 운영한다. 화물 서비스는 더욱 남쪽으로 운영하여 아슈도드(아스돗)항구, 아슈 켈론(아스글론)시, 디모나 남쪽의 광물 채석장까지 연결된다. 최근 몇 해 동안 철도 화물 및 여객 서비스 사용이 모두 증가했다. 도로 교통량 증가로 야기된 각종 문제를 경감시키기 위 해 기존 선로를 개량해 활용하는 고속철도 서비스를 텔아비브와 하이파 지역에 설립하여 버 스 지선과 유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지금 사용중인 낡은 객차의 상당수를 냉난방 장치를 단 현대식 객차로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며, 최첨단 기계식 보선장비도 가동되고 있다. 예루살렘에는 도시 경철도 시스템이 공사 중이다.
항구: 야포(욥바), 가이사랴, 아코(아크레)의 옛 항구들은 하이파, 아슈도드, 에일랏 지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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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선 선박이 들어오는 현대식 심해항 3곳으로 바뀌었다. 하이파 항은 이용객으로 붐비는 여객 터미널일 뿐만 아니라 지중해에서 가장 큰 컨테이너항 중 하나이다. 아슈도드 항은 주 로 물품 선적에 이용되고, 홍해의 에일랏 항은 남반구와 극동지방과 이스라엘을 연결해준다. 또한 아슈켈론의 유조선 항구는 연료 선적분을 받는다. 하데라에서는 화물선에서 직통으로 인근 발전소에 석탄을 공급하는 출하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지리적 입지로 인해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오가는 승객과 상품의 경유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한 항만철도공사는 향후 운송 수요에 부합하기 위한 장기적 종합계획을 입안했 다. 이 기관은 여러 우선사항 중에서도 특히 현대적 철도 시스템 개발, 육지와 해상교통 운 영 전 단계에 최첨단 장비 설치, 모든 서비스의 관리감독을 위한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의 도입 등에 역점을 두고 있다.
공항: 벤구리온 국제공항(자동차로 텔아비브에서 25분, 예루살렘에서 50분 거리)은 이스라 엘 최대의 중심 공항이다. 입출국 승객 수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 하에 대대적 확장공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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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했고 최신식 터미널을 갖게 되었다. 대부분 유럽에서 오는 전세기와 국내선의 경우에는 남부에서는 에일랏 공항, 중부와 북부에서는 각각 텔아비브와 로시 피나 인근의 소규모 공 항들을 이용한다.
텔아비브: 수잔 델랄 무용연극 센터, 네베 체데크 지구 • 관광성
수대에 걸친 건축: 이스라엘의 도시 건축은 매우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지난 세기 의 건물과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명 건축가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견고한 건축물, 건국 초 기 새로운 이주민들에게 주거를 제공하기 위해 급하게 지어진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철저하 게 계획된 주거 지구, 콘크리트와 유리로 된 고층 오피스 빌딩과 현대식 고급 호텔에 이르 기까지 여러 가지 건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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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생활 이스라엘 인구의 약 92%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알려져 온 예루살렘, 사페드, 브에르셰바, 티베리아, 악코 등지에 여러 현대적 마을과 도시가 옛 것과 새것을 한 데 융합시키며 건설되었다.
하이파
268,250
메툴라
1,500
하데라
75,300
키리얏 슈모나
22,000
네타냐
169,400
사페드
27,300
헤르쩰리야
83,000
티베리아스
39,900
라아나나
70,500
카르미엘
43,500
크파르 사바
79,800
나사렛
63,800
브네이 브라크
142,300
예루살렘
730,000
페타 티크바
176,200
키리얏 갓
47,800
라마트 간
127,400
브에르셰바
184,500
텔아비브-욥바
371,400
에일랏
바트 얌
130,400
리숀 레찌온
217,400
홀론
165,800
레호봇
101,900
로드
66,600
아슈도드
196,900
아슈켈론
105,100
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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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호봇, 하데라, 페타 티크바, 리숀 레찌욘 등지는 건국 이전에 농업 촌락으로 시작해서 점 차 대규모 인구 중심지로 바뀌었다. 카르미엘, 키리얏 갓과 같은 개발 도시들은 건국 초기 에 전국적으로 인구를 고루 분포시키고 인구분포가 낮던 기존의 지역에 산업과 서비스업을 끌어와 농촌과 도시 경제를 긴밀히 연결하는 동시에 대규모 이민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증 가에 발맞추기 위해 건설되었다. 유대 산지에 자리잡고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정부 소재지이며, 3천여 년 전 다윗 왕이 자신 왕국의 수도로 정한 이래로 유대인들의 역사적, 정신적, 민족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 종교와 전통, 성지와 예배당으로 신성시 되는 이 도시는 전세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신자들의 경외의 대상이다. 1860년까지 예루살렘은 유대, 이슬람, 아르메니아, 기독교 지구 등 4 지구로 이루어진 성곽 도시였다. 그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성 밖에 새로운 거주지역을 건설함으로써 현대 예루살렘의 토대를 형성했다. 30년에 걸친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
감람산에서 본 도시 전경 • I. 스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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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48) 동안 예루살렘은 오스만 제국 시절(1517~1917)의 소외 받던 지방 도시에서 점차 번성한 대도시로 변모했고, 새로 형성된 다수의 주거 지역은 각각 그곳에 사는 특정 집단의 성향을 반영했다. 새로이 건국된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의 공격 이후 예루살렘 시는 이스라 엘과 요르단의 통치령으로 나뉘었고(1949), 그로부터 19년간 두 지역은 콘크리트 벽과 철조 망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1967년의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통합되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최대 도시 예루살렘에는 73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고대나 현 대나 예루살렘은 거주민들의 다양한 문화와 민족성, 엄격한 종교적 생활양식과 비종교적 생 활양식이 혼재 된 다양성의 도시이다. 또한 도시의 연속성과 활력을 입증하는, 정성 들여 재건한 사적지와 아름답게 조경한 녹지, 현대적 상업지구, 공업 단지, 발전하는 근교지역을 갖춘, 과거를 보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도시이다. 지중해 연안의 현대적 도시 텔아비브-욥바는 이스라엘 문화생활의 중추인 동시에 상업 및 금융의 중심지이다. 산업 기관과 증권 거래소, 주요 신문사, 무역 센터, 출판사 대부분이 이 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현대 들어 최초로 전 주민이 유대인으로 구성된 도시였던 텔아비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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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거주지 중 하나인 야포(욥바)의 교외 거주지로 1909년에 건 설되었다. 1934년 텔아비브는 자치 도시의 지위를 얻었고, 1950년에는 구 욥바를 흡수하여 새로운 지자체가 되면서 텔아비브-욥바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대 항구 욥바의 인근 지역은 미술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을 갖춘 예술인 마을과 관광 중심지로 개발되었다. 1930년대에 서 50년대에 지어진 모더니즘 양식의 건물들이 대규모로 모여있는 텔아비브의 “화이트 시 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중해에 연접한 하이파는 해안선에서부터 카르멜산(갈멜산) 비탈 위로 올라가 있는 도시이 다. 하이파는 지형학상 3개 단계로 건설되어 있다. 바다 매립지를 일부 포함하는 도시 하부 는 항만시설이 있는 상업 중심지이고, 중앙 부분은 오래된 주택지이며, 가장 윗부분에는 가 로수가 줄지어선 도로와 공원, 소나무 숲을 갖추고 급속하게 팽창하는 현대적 거주지가 있 고 그 아래로 드넓은 만의 해안 위에 공업 단지와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인다. 주요 심해항인 하이파는 국제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이며, 북부 이스라엘의 행정 중심지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알바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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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산맥 위에 높이 자리잡은 사페드(츠파트)는 예술가 지구와 수백 년 된 유대회당들이 있는 유명한 피서지이자 관광명소이다. 16세기에 사페드는 전세계적으로 유대교의 가장 중 요한 학문적, 창조적 중심지였다. 이곳은 종교적 율법과 교훈을 세운 랍비와 학자, 신비주의 자들의 집결지였으며, 이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실한 유대교 신자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 다. 킨네렛 호수(갈릴리 호)의 호반에 있는 티베리야는 치유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늘날 이 도시는 사람들로 붐비는 호반의 관광 중심지로, 옛 유적지와 현대적 주택과 호텔들이 조화 를 이루고 있다. 1세기에 건설되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이곳은 유대 학문의 중심지이자 유명한 랍비 학교의 소재지가 되었다.
알바트로스
네게브 북부의 브에르셰바는 사해와 에일랏으로 가는 길의 교차점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약 3,500년 전 민족의 조상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터 위에 지어진 신도시이다. ‘네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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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수도’로 불리는 브에르셰바는 행정 및 경제 중심지로서 이스라엘 남부 전역을 담당하는 지방정부 사무실과 보건, 교육, 문화 기관이 들어서 있다. 이스라엘 최남단 도시 에일랏은 홍해와 인도양으로의 출구이다. 솔로몬 왕 시대의 항구 터 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곳의 현대적 항구는 아프리카와 극동지역과의 교역물량을 처 리한다. 따뜻한 겨울과 화려한 수중 장관, 잘 정비된 해수욕장, 수상 스포츠, 고급 호텔, 그 리고 직항 전세기를 통해 유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에 힘입어 에일랏은 일년 내내 번화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1994) 관광산업 부양 을 목적으로 인접한 아카바시와 공동 개발 사업을 개시했다.
알바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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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생활 이스라엘 인구의 약 8%는 시골지역과 촌락,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개발된 고유의 협동 공 동체인 키부츠와 모샤브에 거주하고 있다. 다양한 크기의 촌락에는 주로 아랍인과 드루즈인들(이스라엘 인구의 1.7%를 차지)이 거주한 다. 토지와 주택은 개인 소유이고, 농부들은 개별적으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판매한다. 아랍 인구 내의 소수민족으로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윈 아랍인들(17만 명으로 추정)은 현재 도시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것은 전통 사회에서 한곳에 정착한 현대적 생활양식으 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알바트로스
알바트로스 키부츠는 자급자족 형태의 사회 및 경제 단위로서 이 공동체 내에서는 구성원들이 함께 결 정을 내리며 재산과 생산수단은 공동의 소유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인구의 1.7%가 267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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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츠에서 생활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키부츠 경제의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할당 받는다. 키 부츠는 과거 이스라엘 농업의 중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산업, 관광업, 서비스업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키부츠 중 상당수는 전통적인 공동체 방식을 수정하며 다양한 사유 화 단계에 와 있다. 모샤브는 가정 단위로 각자의 농장과 가족을 관리하는 농촌 취락이다. 과거에는 구매와 판 매에까지 협력 체계가 확장되었지만 오늘날의 모샤브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좀 더 독립적인 노선을 취한다. 441개의 모샤브와 모샤브 쉬투피는 인구의 약 3.4%를 구성하며 이스라엘 농 업 생산물의 상당량을 공급하고 있다. 이슈브 케힐라티(공동체 정착촌)는 새로운 형태의 농촌 취락으로, 현존하는 107개 공동체 각각이 수백 가구로 이루어져 있다. 각 가정의 경제 생활이 완전히 독립적이고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공동체 밖에서 일하지만 공동체 생활에서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도는 매우 높다. 이슈브의 중앙관리 기관은 각 가정의 가장들로 구성된 총회이며, 총회의 연례회의에서 공동 체 예산을 설정 및 승인한다. 관리 감독 위원회들과 더불어 많은 실무그룹에서 교육, 문화, 청소년, 재정 등의 분야를 담당하여 처리한다. 유급직의 총무가 선출 기관의 결정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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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일상적 업무를 운영한다. 새로운 회원은 공동체의 승인이 있을 때만 가입할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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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유대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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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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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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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박물관(예루살렘) 제공
국민 이스라엘은 여러 인종, 종교, 문화, 사회적 배경을 가진 매우 다양한 인구가 살고 있는 나라 이다. 과거의 뿌리를 지닌 이 새로운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통합되며 진화하고 있다. 710만 인구 중 75.8%가 유대인, 19.9%가 아랍인(대부분 무슬림)이고 나머지 4.3%는 드루즈인, 체 르케스인과 종교상으로 분류되지 않은 그 외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스라엘 사회는 역 사가 비교적 짧으나 사회적 종교적 참여, 정치 이념, 풍부한 경제 자원, 문화적 창의성을 특 징으로 하며 이 모든 요소가 지속적인 사회발전에 동력을 제공한다.
)"הנה מה טוב ומה נעים שבת אחים גם יחד (תהלים קל"ג 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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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사회 고향으로 돌아가는 머나먼 여정 2천여 년 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된 후 그들은 주로 유럽, 북아프리 카, 중동 등지의 타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스라엘에서 가깝던 멀던 수세기에 걸쳐 이들 은 그 땅에서 다수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세웠고, 그 속에서 오랜 기간 성장과 번영을 이루었다. 때로는 가혹한 차별과 잔인한 학살을 경험했고, 전체적이거나 부분적인 추방을 겪기도 했다. 매번 박해와 폭력을 당할 때마다 “이산민 되 모으기”라는 구상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고, 개인과 단체들은 조상의 땅으로 되돌아가리라는 의지를 다졌다. 19 세기 말에 태동한 시온주의 운동은 이 구상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전환시켰고, 이스라엘 이 건국되면서 이것은 법으로 옮겨져 고국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시민권 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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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의 구성 현대 이스라엘 유대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초는 대부분 영국의 통치 기간 (1917~48)에 형성되었다.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공동체는 시온주의로부터 사상적 동기를 부 여 받아 주권은 없었지만 권한을 행사하는 사회적 정치적 조직을 발전시켰고, 모든 계층은 통합과 성장을 향해 움직여갔다. 자발적 참여는 정치적 뼈대였고, 평등주의는 사회를 묶어 주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고 뒤이어 대규모 이민으로 건국 초기 4년 동안(1948~52)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가 65만에서 130만 가량으로 배가됨에 따라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와 체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정착한 스파라디(스페 인, 포르투갈계 유대인) 공동체와 노련한 아슈케나지(중앙∙동유럽계 유대인) 정착민들, 홀로 코스트 생존자들로 이루어진 주류 집단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갓 이주해 온 유대인들로 구성된 대규모 소수집단이 그것이다.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인구의 대부분은 뚜렷한 사상적 확신과 개척 정신, 민주적 생활양식에 전념한 반면 수세기 동안 아랍 땅에 살았던 유대인들 중 다수는 가부장적 사회 조직을 고수했고 이스라엘 사회와 빠르게 발전하 는 경제에 통합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텔아비브: 해수욕장의 행사 •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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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에 양 집단은 사실상 사회적, 문화적 상호작용이 전혀 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유대인들은 반정부 시위를 통해 불만과 소외감을 표시했다. 이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러 정치적 참여 확대와 보상 차원의 자원 배분, 주류 이스라엘인 들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한 소수계 우대정책에 대한 요구로 구체화되었다. 이 시기 동안 이 스라엘 사회는 다양한 인구로 인해 야기된 긴장뿐 아니라 경제적 독립을 달성해야 하고 국 경 너머 아랍인들의 무력 도발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문제에도 직면해 있었다. 그럼에 도, 종교와 역사적 기억, 유대인 사회 내의 민족적 결속이라는 공통 분모는 이 사회가 직면 한 도전 과제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지속적인 이민자 수용 지난 수년간 이스라엘은 열악한 지역이나 서방 자유국가에서 온 많고 적은 새로운 이민자들 을 꾸준히 받아들여왔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대규모 이민은 수년 동안 이스라엘로 이주할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구 소련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로 이루어졌다. 1970 년대에는 10만 명 가량이 입국한 반면 1989년 이래로 10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이스라엘에
“솔로몬 작전”으로 아디스 아바바에서 입국한 에티오피아 이민자 • 이스라엘 공보부/ Ts. 이 스라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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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했다. 이중에는 교육수준이 높은 전문가와 저명한 과학자, 유명 미술가와 음악가들도 다수 있었으며, 이들의 전문기술과 재능은 이스라엘의 경제적, 과학적, 학문적, 문화적 삶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두 차례의 대대적 공수작전으로 에티오피아 유대인 공동체가 이스 라엘에 도착했다. 일반적으로 이 공동체는 솔로몬 왕 시대 때부터 그곳에 정착해 있었던 것 으로 여겨지고 있다. 5만 명의 이들 이민자가 아프리카의 농업 환경에서 서구 산업사회로 전환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젊은 층의 적응하고자 하는 열의는 오랜 기간 고립되어 있던 이 유대인 공동체의 사회적 흡수를 앞당길 것이다.
종교적 다양성 성서 시대부터 유대인들은 종교적 요소와 민족적 요소를 함께 통합하며 유일신 신앙인 유대 교를 믿는 민족이었다. 18세기에는 전세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동유럽에 거주했는데, 이곳 에서 그들은 강제 거주지구에 고립되어 주변 사회와 거의 소통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정된 공동체 내에서 여러 가지 일을 자체적으로 꾸려나갔고, 수세기에 걸쳐 종교학자들이 발전시 켜 성문화한 유대 법(할라카)를 충실히 따랐다.
예루살렘: 초 정통파 지역의 하시디즘 유대인들 •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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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스툴만, U. 나혼 유대 미술 박물관 제공
19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해방과 민족주의 사조는 교육, 문화, 철학, 신학에 대해 좀 더 자유 로운 접근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몇몇 유대인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 일부는 진보적 신앙노선을 전개했고 일부는 국가적,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지지했다. 그 결 과 다수에 속하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통주의 신앙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에서 벗어났고, 일 부는 일반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고자 노력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유대인 사회는 유대교 신앙을 엄격히 지키는 유대인과 그렇지 않는 유대 인들로 이루어져 있고, 초 정통파에서부터 스스로를 비종교적이라 여기는 이들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쳐있다. 그러나 이들 간의 차이가 분명하지는 않다. 정통 신앙이 유대 종교법과 관례를 준수하는 정도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유대인 중 20%는 모든 종교적 율법 을 지키고 있고, 60%는 개인의 선택이나 소수민족적 전통에 따라 종교법 일정부분을 따르 며, 20%는 사실상 종교법을 준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로 간주되기 때 문에 샤바트(안식일, 토요일)와 모든 유대 명절은 국경일로 제정되어 있으며,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유대인 인구 전체가 이날들을 기념하고 지킨다.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는 다른 지표로는 자녀에게 종교 교육을 시키는 학부모의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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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총선에서 종교적 정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의 비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 대교 비 종교인이 자녀들을 종교인 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고 많은 정통파 시민들이 비종교 적 정당에 투표하고 있으므로 이런 통계자료의 의미는 확실치 않다. 기본적으로 다수를 이루는 쪽은 현대적 생활양식을 표명하며, 종교법을 존중하고 실천하는 정도가 다양한 이들이다. 이 주류집단 중 많은 이들이 수정된 전통적 생활방식을 따르고 있 고 일부는 진보적 종교 추세에 합류한다. 스파라디와 아슈케나지 양쪽 내부에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소수집단이 있는데 이스 라엘의 국민생활에 참여하면서도 유대 종교법으로 규정된 종교적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이 들은 현대적 유대국가를 이스라엘 땅 내 메시아의 도래와 유대민족의 구원으로 향하는 첫 단계로 여긴다. 그에 반해 일부 초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 안의 유대인 주권은 메시아가 도래한 후 에만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유대 종교법을 엄격히 지키는 이들은 독립된 지역에 거주하 며 자체 학교를 운영하고, 전통 복장을 하고 남녀의 역할을 뚜렷이 구분하며 엄격히 제한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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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양식을 고수한다.
유대인 내부의 역학관계 종교와 국가 간의 뚜렷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유대 종교적 정체성을 어느 선까 지 표명해야 하는가가 공동체간의 핵심 문제가 되고 있다. 정통주의 그룹 사회는 개인적 차 원을 넘어서는 범위로 종교 법령을 확대하고 그것에 대해 독점적 관할권을 가지려 하는 반 면 비 종교인 집단은 이를 종교적 강압이자 이스라엘의 민주주의 본질에 대한 침해로 간주 한다. 현재 진행중인 한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하는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정통파 측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거나 엄격히 유대법에 따라 개종한 사람을 유대인으로 정하는 방식을 주장한다. 반면 비 종교인 측은 주로 유대교에 대 한 개인적 일체감이라는 일반적 기준을 근거로 하는 정의를 지지한다. 이러한 이해 상충은 종교와 국가 간의 경계를 규정하는 법적 수단을 찾아 나서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포괄적인 해결방안을 찾을 때까지는 이스라엘의 독립일 전야에 합의되었던 현상 유지 안이라 알려진 한 구두 협정이 권한을 지닌다. 이 협정은 종교적 상황에 주요한 변화를 주지 말 것을 명시 하고 있다.
키부츠 사회 키부츠는 평등과 공동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독특한 사회 및 경제 체제로, 20세기 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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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엘 개척기에 탄생하여 항구적인 농촌 생활방식으로 발전했다. 수년에 걸쳐 키부츠는 먼 저 농업을 위주로 성공적인 경제를 확립했고 뒤이어 산업과 서비스업으로 영역을 확대했으 며, 국가 수립과 건설에 대한 그 구성원들의 기여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서 건국 초기 동안까지는 정착과 이주, 국방에서 중추적 기 능을 담당했으나, 이 같은 책임을 정부가 맡게 되면서 키부츠와 이스라엘 주류사회 간의 상 호작용이 줄어들었다. 사회 및 제도적 발전을 선두에서 이끌던 중심적 역할이 축소되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초창기 시절 과잉 대표성을 가져왔던 키부츠의 정치적 세력도 약화되었 다. 그러나 국민생산에서 키부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 비율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을 꾸 준히 유지하고 있다.
키부츠: 대추야자 과수원의 청년 노동자 • 키부츠: 축사와 젖을 짜는 청년들 •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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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십 년간 키부츠는 좀 더 자기 반성적인 태도를 취하여 개인적 성취와 경제적 성장 에 역점을 두었다. 많은 키부츠 공동체에서 외부 노동자 고용에 대한 금기가 약화됨에 따라 ‘우리가 직접 한다’는 노동관도 좀 더 유연해졌으며, 비회원인 유급 노동자들이 고용되는 수 도 점차 늘고 있다. 이와 동시에 키부츠 회원들 중 키부츠 외부에서 일하는 이들의 수도 늘 고 있으며 이들의 급여는 키부츠 수입을 증가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키부츠는 3대가 이룬 성과이다. 최초 창립자들은 확고한 신념과 명확한 사상을 바 탕으로 독특한 생활방식을 지닌 사회를 구성했다. 새로운 사회구조가 생성된 상황에서 태어 난 그들의 자녀 세대는 열심히 일하여 공동체의 경제, 사회, 행정적 기초를 굳건히 했다. 제 대로 정착된 사회 속에 성장한 현 세대는 현대적 생활이 던지는 도전과제들을 해결하기 위 해 힘쓰고 있다. 지금은 개인과 키부츠 공동체 간의 관계와 상호 책임의 향후 성격과 최근 의 기술과 통신의 발전상황이 키부츠 사회에 가져올 결과에 대해 많은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키부츠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신념과 가치에서 크게 벗 어나는 길로 향하고 있다는 우려를 보인다. 그에 반해 다른 일각에서는 이처럼 타협하고 적 응하는 능력이야말로 키부츠가 존립하는데 필요한 열쇠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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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공동체 이스라엘 인구의 약 24%에 해당하는 170만 가량의 인구는 비유대인들이다. 아랍계 이스라 엘 국민으로 규정하고는 있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다수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로 아랍어를 사용하고 각기 뚜렷한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 무슬림 아랍인: 대부분이 수니파로서 거의 백만 명에 육박하며 주로 소도시와 촌락에 거주 하며, 그 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 북부에 분포해 있다. 베두윈 아랍인: 역시 무슬림들인 베두윈 아랍인들(약 17만 명으로 추산)은 30여 개 부족으 로 나뉘어 있고, 대다수가 남부지방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다. 원래 유목민이었던 베 두윈 족은 현재 부족사회 체계에서 항구적 정착사회로의 변화를 겪고 있으며, 점차 이스라 엘의 노동력에 진입하고 있다. 기독교 아랍인: 11만 7천 명 정도의 기독교 아랍인들은 주로 나사렛, 슈파르암, 하이파 등의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명목상으로는 많은 교파가 있지만 이들 중 다수는 그리스 가톨 릭,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 속한다.
예루살렘 구도시: 무슬림 지구 안의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와 슈크(시장) •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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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아라바 일대의 베두윈족 • 관광성
드루즈인: 아랍어를 구사하는 11만 7천 명 가량의 드루즈인들은 이스라엘 북부의 22개 촌 락에 거주하며 독립적인 문화, 사회, 종교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외부인들은 드루즈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지만 이 종교의 원리에 대해 한 가지 알려진 것은 타키야(taqiyya)라 는 개념이다. 타키야는 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의 정부에 대해 전적으로 충성할 것 을 요구한다. 체르케스인: 북부의 두 촌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3천 명 가량의 체르케스인은 아랍 혈통 이나 대규모 무슬림 공동체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수니파 무슬림들이 다. 이들은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유대 사회나 무슬림 공동체에 동화되지 않은 채 이스라엘의 경제적 국가적 일에 참여한다.
아랍 공동체 생활 아랍인들의 이스라엘 내외로의 이주는 그 당시의 경제 상황에 따라 변동폭이 컸다. 19세기 후반 유대인 이주로 경제 성장이 활기를 띠자 많은 아랍인들이 고용 기회와 높은 임금,
베이트 얀 마을의 드루즈 노인들 •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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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성
아랍 문화회관 • 예루살렘 재단 제공/ M. 라우버
더 좋은 생활여건에 이끌려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이스라엘 내 대부분의 아랍 인구는 나사렛시를 비롯한 갈릴리의 자급자족형 도시와 촌락, 하데라와 페타 티크바 사이의 중부 지역, 네게브, 그리고 예루살렘, 아코(아크레), 하이파, 로드, 라믈레, 야포(욥바)와 같은 다 인종 도시 중심지에 거주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랍 공동체는 주로 중산층 사회 안의 노동자 계층, 고도로 집중화된 국가 안의 정치적 주변 집단,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다수 안의 소수 아랍어 사용 인구를 형성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동화되지 않는 이 공동체의 독특한 정체성을 촉진하는 요소로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공식언어인 아랍어의 사용, 개별적인 아랍/드루즈 학교 시스템, 아랍어 언론과 문학, 극장, 그리고 이슬람, 드루즈, 기독교 종파 별로 개인의 신분법상 지위문제를 판결하는 독립 된 법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옛 풍습이 여전히 일상의 일부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부족적, 가부장적 권위가 점차 약화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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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와 분리주의: 이스라엘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 사회로서 비공식적 격 리의 정도가 상당히 크다. 공식 정책으로 격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사회 내의 각기 다른 여러 영역들은 서로 분리되어 그들만의 강한 문화적, 종교적, 사상적,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히 높은 사회 균열 정도와 얼마간의 경제 불균형, 종종 과열되는 정치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는 비교적 균형이 잡혀있고 안정적이다. 내재적인 사회불안 가능성 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집단 간에 사회적 갈등이 적은 것은 엄격한 법적, 시민적 평등을 대표하는 사법 및 정치 체계 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용광로식(melting-pot) 융화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인구집단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틀 안에 공존하면서 형성한 모자이크식 사회이다.
고 의무 교육의 효과와 이스라엘의 민주적 과정에 대한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전통적인 시 각과 생활양식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다. 이와 동시에 여성의 동등한 권리 및 일부다처 와 미성년 결혼 금지를 명기한 법률로 인해 이스라엘 내 아랍계 여성의 지위도 크게 신장되 었다. 아랍 지역의 정치적 참여는 총선과 지방 선거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아랍계 시민들은 해당 지방자치체의 정치 및 행정 사무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그들이 선출한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내 대표들을 통해 아랍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그들이 뽑은 의원들은 정치권에서 소수민족 집단의 지위와 국민적 혜택을 증진시키는 활동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 건국(1948) 이래로, 아랍세계(이스라엘에 잦은 공격을 가한 주체)와의 가족, 종교, 문화적 관계에의 고려와 이중 충성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아랍계 시민들은 이스라엘 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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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F) 병역 의무를 면제 받아왔다. 대신 자원 입대는 장려되며, 매년 일부 젊은이들이 군 복
아랍-유대인 유치원에서, 예루살렘 YMCA • 예루살렘 재단 제공/ S. 사벨라
무를 선택하고 있다. 1957년부터 해당 공동체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드루즈인과 체르케스인 남성들에게 IDF 병역 의무가 부과된 한편, 직업 군인으로 자원 입대하는 베두윈 족의 수도 꾸준히 늘고 있다.
아랍-유대인의 역학관계 이스라엘 인구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아랍계 시민은 서로 대립하는 유대와 팔레스타 인 세계의 가장자리에 존재한다. 그러나 문화와 정체성 면에서 여전히 아랍 민족의 한 부분 으로 남아있고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보기를 거부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이스라엘 과 묶어서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 아랍 인구는 히브리어를 제 2의 언어로, 이스라엘 문화를 그들 삶의 또 하나의 단층으로 수용했다. 동시에 이들은 국민 생활에의 참여와 국가 경제에 통합되는 수준을 높이고 그들의 도시와 촌락에 더 큰 혜택을 가져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스라엘 아랍인과 유대인 집단 간의 관계 발전을 저해한 요인은 뿌리 깊은 종교와 가치관, 정치적 신념의 차이였다. 그러나 자체적으로 분리된 두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들은 서로를 수용하면서 상대 공동체의 고유성과 이상을 인정하기에 이 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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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자유 이스라엘 건국 선언(1948)은 모든 이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법적으로나 실제로 나 모든 종교 공동체는 각자의 신앙을 실천하고 절기일과 매주 휴일을 지키며 내부 문제를 관장할 자유가 있다. 각기 자체적 종교 위원회와 법정을 보유하며, 이 기관들은 법으로 승 인되어 있고 관할 범위는 모든 종교관련 문제와 결혼이나 이혼과 같은 개인의 지위 문제를 포괄한다. 또한 각기 고유의 예배당이 있으며,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전통적 예배의식과 특수한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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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회당: 정통주의 유대교 예배에는 민얀(10명의 성인 남성 정족수)이 필요하다. 기도는 매일 세 번씩 이루어진다. 남자와 여자는 보통 따로 착석하며 머리는 가린다. 랍비나 선창 자, 회중 한 사람이 예배를 진행한다. 랍비는 성직자나 신과의 중개자가 아니라 일종의 스 승이다. 회당의 중심은 신성한 법궤로,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향해있는 이 법궤에는 토라(모 세 오경) 두루마리가 담겨있다. 매주 분량을 미리 정해 토라를 연중 주기적으로 읽는다. 예 배는 특히 샤바트(토요일, 유대교 안식일)와 유대명절에 특별하게 치러진다.
모스크(이슬람 사원): 이슬람교에서는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하고, 남자와 여자는 따로 예배를 본다. 신발은 벗어야 하고 세정식을 거행하는 경우도 있다. 무슬림들은 사우디 아라 비아의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데, 그 방향은 모스크 벽면에 있는 미흐라브(벽감)로 표시된 다. 예배의식은 이맘이라는 이슬람 예배 지도자가 거행한다. 전통적 이슬람 안식일인 금요 일에는 대개 대중 설교가 있다. 교회: 기독교 예배의 형식과 횟수는 종파에 따라 다양하지만, 모두 일요일을 성일로 지키고 특별 예배를 갖는다. 목사가 예배를 이끌며, 남자와 여자는 함께 예배를 본다. 예배식에는 종종 음악과 성가대의 노래가 사용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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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와 성소는 각 종교별로 해당 당국이 관할하며, 방문과 예배의 자유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주요 성지는 다음과 같다. 유대교: 제 2성전시대의 성전산 벽의 마지막 남은 자취인 예루살렘 코텔(서쪽 벽), 베들레헴 인근의 라헬의 무덤, 헤브론 막벨라 동굴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 티베리아스에 있는 마이모 니데스(람밤)의 무덤과 메론산에 있는 랍비 시몬 바르 요하이의 무덤.
I. 스툴만
이슬람교: 예루살렘 내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사원을 비롯한 성전 산의 하람 알 샤리프 복 합 건축물, 헤브론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 아코에 위치한 엘-자자르 사원. 기독교: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 최후의 만찬 방, 성묘교회 및 기타 예수의 수난과 십 자가 처형 관련 유적지, 베들레헴의 그리스도 탄생 교회, 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 갈릴리 호(킨네렛 호수) 근처에 있는 팔복산과 타브가, 가버나움. 드루즈교: 갈릴리의 히틴의 뿔(Horns of Hittin) 근처에 있는 네비 슈에이브(모세의 장인 이드 로의 무덤). 바하이교 (19세기 중엽 페르시아에서 창설된 독립적인 세계 종교): 하이파 소재 바하이 월 드 센터인 바브 사원, 악코 인근에 있는 바하이교 창시자 바하올라의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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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바위의 돔 • 관광성
팔복산: 교회 외관, 전통적인 산상 수훈 성지 • 관광성
하이파: 바하이교 바브의 사원과 정원 •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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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과 사회 서비스 보건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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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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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초월한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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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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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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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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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과 사회 서비스 이스라엘의 수준 높은 보건 서비스와 최고의 의료자원과 연구, 현대적 병원시설, 인구 대비 의사와 전문의의 높은 비율은 낮은 유아 사망률(정상출산 1,000건당 4.7건)과 높은 평균수 명(여성 82.2세, 남성 78.5세)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아부터 노인까지 모든 이들을 위한 건 강관리가 법으로 보장되어 있으며, 국가의 보건관련 지출도 다른 선진국의 지출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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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א:כל ישראל ערבין זה בזה (שבועות ל"ט 온 이스라엘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부오트 39a)
보건 서비스 예방, 진단, 치료를 위한 의료 서비스망을 비롯한 보건 시스템은 유대인 공동체와 1918년부 터 1948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의해 건국 이전 시기에 그 토대 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건국될 무렵에는 이미 잘 발달된 의료 기반시설이 역할을 다하고 있었고, 예방접종은 통상적 절차였으며, 환경 여건 개선을 위한 체계가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건 국 초기에는 전후 유럽과 아랍 국가에서 온 수십만 피난민들의 보건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보건 서비스국이 앞서 해결한 일부 문제들에 다시 착수해야 했다. 이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광범위한 보건 교육 및 예방 의학 사업과 특별 서비스 제공을 수반하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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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의 집중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오랜 전통: 19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의 낙후되고 방치된 지역이었던 이스라엘에는 이질, 말 라리아, 발진티푸스, 트라코마와 같은 질병들이 만연했다. 예루살렘 구도시의 유대인 인구에 게 보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설립한 여러 진료소들은 치료비 를 낼 형편이 못 되는 이들에게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실천한 그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진료소들이 확대되어 비쿠르 홀림 (1843년 설립), 미스가브 라다크(1888년 설립), 샤아레 쩨데크(1902년 설립) 병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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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아레 쩨데크 병원 제공 이 병원들은 현대적 의료 기술과 함께 최첨단 서비스를 제공하며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의과대, 간호대, 약학대와 현대식 병원 두 곳을 갖춘 예루살렘 소재의 히브리대학 하다사 메디컬 센터는 1913년 미국의 하다사 여성 시온주의 조직이 예루살렘에 파견한 간호사 두 명으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시민들은 병원, 외래환자 진료실, 예방의학 및 갱생 시설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의 료 네트워크 서비스를 제공 받고 있다. 병원 치료에는 체외 수정, MRI 스캔, 복잡한 뇌 수술 부터 골수 및 장기 이식에 이르는 고도로 발달된 절차와 전문기술이 수반된다. 임신중인 여성과 신생아기부터 영유아기까지 아동들을 위한 모자보건센터는 산전검사,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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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신체 장애의 조기 발견, 예방접종, 소아과 정기검진, 보건 교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행정과 구조 모든 보건 서비스는 보건부의 책임 하에 관리된다. 보건부는 법안 마련과 그 실행 여부 감 독, 전국적 의료 기준 관리, 식품 및 의약품 품질 기준을 유지, 의료인력 면허 관리, 의학 연구 촉진, 보건 서비스 평가, 병원 설립 계획과 건설 감독을 담당한다. 보건부는 또한 환경 및 예방 의학에 대한 공중보건 기구의 역할도 수행한다.
보건 인력 이스라엘 내 약 3만 2천 명의 의사와 9천 명의 치과의사, 6천 명의 약사는 종합병원과 지역 진료소의 구성원이나 개업의로서 전문직 종사자로 일하고 있다. 국내 5만 4천 명의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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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약 72%는 정규 간호사이고 나머지는 간호 조무사이다. 의료 전문직에 대한 훈련은 의과대학 4곳과 치과 대학 2곳, 약학대학 2곳, 학위를 수여하는 7곳을 포함하는 간호학교 15곳에서 제공된다. 물리치료사, 직업치료사, 영양학자, X선 및 실 험 기사 양성 과정도 여러 기관에서 제공하고 있다.
건강 보험 국민보험법은 모든 이스라엘 거주자들을 위해서 입원을 포함하는 일련의 규격화된 의료 서 비스를 규정하고 있다. 포괄적인 4가지 건강보험 제도에 의해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으 며, 이 제도는 연령이나 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모든 신청자들을 받아들이도록 되어있다. 주요 재원은 국립보험협회가 매달 징수하는 소득의 최고 4.8%에 해당하는 건강보험세와 고
마겐 다비드 아돔: 이스라엘의 응급 의료서비스 단체인 마겐 다비드 아돔(다윗의 붉은 별)은 응급치료 시설 네트워크와 전국적 헌혈 사업, 혈액 은행, 응급처치 교육과정, 이동식 중환자 실을 포함하는 공공 구급차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이 기관은 1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고등학생들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전국에 있는 109 개 치료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용직원의 보험료 중 고용주 부담비용에서 나온다. 보험 제도는 연령과 집에서 보건시설까지 의 거리 및 기타 보건부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계산한 가중 평균 보험가입자수에 따라 상환 된다.
건강 문제 이스라엘의 건강 문제는 서구사회에 주로 나타나는 문제들과 유사하다. 심장질환과 암이 사 망 원인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 질병들에 대한 연구가 국가적 우선과제가 되었다. 이에 더해 고령화 인구를 위한 의료 서비스, 환경 변화로 야기되는 문제들, 현대적 생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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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으로 발생하는 질병, 교통 및 직업 사고 등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건강에 해 로운 것으로 판명된 흡연, 과식 등의 습관을 중지하고 운동 부족을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일반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보건 교육 프로그램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근로자와 운전 자들을 대상으로 발생 가능한 위험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캠페인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 다.
건강 관광: 이스라엘은 전세계의 류머티즘, 건선, 천식과 같은 만성 질환 환자들에게 유명한 관광지이다. 티베리아 온천의 특수 치료나 미네랄이 풍부한 사해수, 네게브 사막의 현대적 도시 아라드의 건조한 기후 등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고 있다.
알바트로스
의학 연구 이스라엘의 잘 발전된 의학 및 대체의학 연구와 생명공학 능력 기반은 광범위한 과학적 탐 구를 촉진하고 있다. 의과 대학, 여러 정부 기관과 연구소를 비롯해 제약, 생명공학, 식품 가공, 의료기기 산업계 기업들의 연구 개발 부서들이 여러 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수준 높은 연구설비 는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 있으며, 해외 주요 의학 및 과학 연구센터들과 상호주의에 입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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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교류를 갖는다. 이스라엘은 또한 다양한 의학관련 주제에 대한 국제 회의를 빈 번히 주최하고 있다.
샤아레 쩨데크 병원 제공
의학 기술 정교한 기술은 현대적 진단 및 치료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다. 의학연구 기 관과 업계간의 긴밀한 협력은 특수 의료기기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진보를 이끌어냈다. 특 히 이스라엘에서 제작한 CAT 스캐너와 고도의 초소형컴퓨터 기반 장치들은 결정적 상황에 서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 치료에 필수적인 기기들로서 전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전산 감시 체계를 비롯해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여러 장치들을 포함하 는 다양한 전자 의료장비와 레이저 수술 기구의 개발과 사용에도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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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초월한 나눔 이스라엘의 병원들은 적절한 치료는 이념과 정치적 국경이라는 장애물을 초월하는 인류의 보편적 권리라는 신념에 따라 그들의 전문 기술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지난 수년간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나라들까지 포함해 세계 곳곳의 환자들 이 전문적 치료를 받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다수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선진국에서는 사실상 근절된 질병들을 치료하는 일을 지원하고, 일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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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건기구의 지원을 받는 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한 해당 지역 의료 인력에게 그들의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이스라엘 의료팀은 재해 지역의 구호 활동에도 참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방위군(IDF) 수색구조 팀의 활동 모습(터키 지진 발생 후) • 이스라엘 공보부/ Y. 사르
사회 서비스 이스라엘의 포괄적 복지 체계는 국가 및 지역사회 차원의 광범위한 서비스를 규정해놓은 법 률을 기반으로 한다. 노인 복지, 홀 부모, 아동, 청소년 지원 프로그램, 약물 남용 예방과 치 료, 신규 이민자들에 대한 지원 등이 사회 서비스 시행 부문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교정 사업은 보호관찰 체계, 중퇴자들을 위한 교정 프로그램, 문제를 겪는 청소년들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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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및 관찰 서비스 등을 아우른다. 맹인 및 신체 장애자들에게는 보호 작업장과 직업 상 담 등의 재활 서비스를 제공한다. 발달 장애인들은 다양한 거주 및 공동체 기반 프로그램을 통해 보살핌을 받고 있다.
행정 사회복지법(1958)에 의하면 지방자치체와 지역 당국들은 사회 서비스를 담당하는 부서를 운 영해야 하며 이러한 부서 예산 중 75%는 노동사회부에서 나오도록 되어있다. 입양, 보호관 찰 체계, 발달 장애인들을 위한 거주시설과 같은 전국적인 서비스의 재정 지원과 운영은 노 동사회부에서 담당한다. 이 부처는 정책을 결정하고 법령을 발의하며, 사회 서비스 운영을 위한 법규를 제정하고 공공 및 민간 조직이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를 감독한다.
사회 서비스 인력 대다수 대학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 대학원은 이론 연구와 현장 실습을 결합하여 준 석사와 석사과정 교육을 제공한다. 국영 프로그램들은 보육 인력과 사회복지 보조요원 교육과 사회 복지 전문가들을 위한 현직 연수를 실시한다. 지역 사회 복지사들은 사회복지국, 지역사회 센터, 이민자 통합 시설, 모자 보건 센터, 학교, 공장, 병원을 비롯한 다양한 환경에서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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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
노년층 노년층을 위한 복지 서비스는 이스라엘의 보건 및 사회 서비스 능력의 핵심 요소가 되어왔 다. 건국 이후 총인구는 5배 증가한 반면 노인 인구(65세 이상) 수는 10배나 증가함에 따라 현재 이스라엘 거주 인구 7백만 중 10%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증가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1950년대와 90년대에 절정을 이룬 대규모 이민이다. 1989년 이래로 1백 만이 넘는 이민자가 주로 구 소련 연방 국가에서 들어왔는데, 이들 중 12% 이상이 65세 이 상의 고령자들이었다. 대다수가 나이로 인해 히브리어를 배우거나 노동력에 흡수되거나 확 고한 경제 기반을 다질 시간이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 결과, 장애인이 약 13%를 차지 하는 이스라엘 노인 인구 중 다수는 가족과 지역사회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노동사회부의 후원 아래 계획 및 감독되는 복지 서비스가 지역 당국의 사회복지 부서들을 통해 실행되고 있다. 가정에서 노년층의 자립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에는 사회복지사에 의한 필요사항 평가, 노인 부양가정 지원, 노인 클럽, 가정급식 서 비스, 보호시설, 주간보호, 의료 기기, 교통 등이 포함된다. 가족이나 충분한 수입이 없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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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같은 고위험 집단을 위한 서비스에 특히 역점을 두고 있다.
사회 보험 국민보험법(1954)은 국민들에게 광범위한 혜택을 보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혜택은 노동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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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산하에서 운영되는 자치단체인 국립보험협회(NII)에 의해 제공된다. 활동 자금은 정부 예 산 할당금에 고용주, 고용인, 자영업자들의 의무 분담금을 더해 충당한다. NII는 정부의 생활 보조금 정책을 실행하고, 소득이 정해진 최저수준 이하인 가정과 개인에게는 추가 지원을 제공한다. 종합 육아 수당은 특히 자녀를 넷 이상 둔 가정의 가계 소득을 늘려준다. 국민보 험법의 한 수정 조항은 가정이나 거주시설에서 매일 도움의 손길에 의존해 생활하는 노인들 에게 장기적 보살핌을 제공한다. NII는 국민 건강보험 프로그램도 관리하고 있다.
I. 스툴만
자원봉사 이스라엘 성인 인구 중 약 20%가 보건사회 서비스를 보완해주는 278개의 공공 자원봉사 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기관들은 병원과 응급치료 보조단체에서 민 간 경비대와 자원 구조대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쳐있다. 약물남용과 배우자 및 아동 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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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안전, 환경 보존과 같은 주요 사회문제를 다루는 단체들도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여성의 지위, 이민자와 소비자 권리, 군인 복지 등에 노력을 집중하는 단체들도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 자원봉사자들이 이스라엘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 고 있으며, 이는 주로 단기 과정으로 진행된다. 매년 여름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고 고학 발굴작업에 참여하거나 키부츠에서 일하거나 사회 서비스에 일손을 거든다. 독일의 청 년 자원봉사자들 중에는 이스라엘에서 노인과 환자들을 돌보는 활동을 나치 정권이 유대인 들에게 범한 전쟁 범죄에 대한 속죄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지금의 자원봉사단 구성은 이전 세대와는 많이 다르다. 이스라엘 여성들은 대부분 직업을 가지고 있어 자원봉사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나 길어진 수명 덕에 많은 남녀 퇴직자들이 응급 의료 지원 분야(마겐 다비드 아돔)나 환경 단체 등에서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났다. 대학생들은 주로 불우한 환경의 아동과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봉
사활동을 하고 있다(이러한 활동으로 부분 장학금을 받기도 한다). 이스라엘 내 자원봉사 활 동을 조율하는 기관은 공립 비영리 단체로 총리실로부터 재정을 지원 받고 국제 자원봉사 기관들과 제휴하고 있는 국립 자원봉사 협의회이다. 이따금씩 다양한 목적의 기금 모금을 위해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을 내보내는 것과 같은 자원봉사 단체들의 캠페인은 이스라엘 인들의 삶에서 통상적으로 수용되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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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도전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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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학 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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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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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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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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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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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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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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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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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재단 제공/ S. 사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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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교육 이스라엘의 교육은 귀중한 유산이다. 교육은 과거 세대들의 전통에 이어 여전히 필수적 가 치로 존재하며 미래에 대한 해답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교육 시스템은 어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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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다 원론적인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밑바탕 에는 유대적 가치, 나라 사랑, 자유와 관용의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 교육 시스템은 수준 높 은 지식을 전하고자 하며, 특히 국가의 지속적 발전에 필수적인 과학과 기술 능력에 역점을 두고 있다.
)' ב:אין העולם מתקים אלא בשל הבל פיהן של תינוקות של בית רבן (שבת קי"ט 학교에 있는 어린 아이의 숨결에 온 세상이 달려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샤바트, 119b)
도전과제 이스라엘이 건국될 당시(1948)에는 이미 완전히 기능하는 교육 체계가 존재했다. 건국 이전 유대인 사회가 개발하고 운영한 이 교육 체계에는 19세기 말에 일상 언어로 부활한 히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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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교수 언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건국 직후부터 이 교육 체계는 70개 이상의 국가에서 부모와 함께 혹은 혼자 건너 온 대규모 이주 아동들을 통합시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역사적 조국이라는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를 충족시켜야 하는 엄청난 과제에 직면했다. 1950년대에 주로 전후 유럽과 아랍 각국 에서 온 대규모 이민에 이어 1960년대에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유대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1970년대에는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에서 제법 큰 규모의 유대인 이주가 이루어졌고, 소규모 집단의 이주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 들어선 후에는 1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구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왔으며, 아직까지도 매년 수만 명의 이민자들이 입국하고 있다. 1984년과 1991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집단 이동으로 에티오피아의 유대인 집단 거의 대부 분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지난 수년에 걸쳐 미대륙과 서유럽 다른 국가들에서도 많은 유 대인들이 건너와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당장 긴급한 교실과 교사의 수요를 맞추는 것 외에도 여러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학
교 구성원으로 흡수하기 위해 특별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해야 했다. 새로운 이주 학생들의 필요에 따라 마련된 프로그램에는 적절한 교과과정 지원 준비와 이민 학생들이 출신 국가에 서 배우지 않았던 히브리어, 유대 역사와 같은 과목들을 접하게 하는 단기 강좌 등이 있다. 교사들이 이민 학생들에게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특별 과정이 개설되었고, 이민자 교사들에게는 재교육 과정을 제공함으로써 교육 시스템 내 고용을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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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교육부는 현대적 교수법에 맞게 교육 수준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현재 진행 중에 있다. 구체적으로 성 평등의 실천, 교사의 지위 개선, 인문학 교육과정의 확대, 과학 및 기 술 교육 장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교육부 정책의 핵심적 요소는 모든 아동에게 평등한 교 육적 기회를 제공하고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학생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GDP 비율로 나타낸 교육 부문 지출
취학 전 교육 이스라엘의 교육은 매우 이른 나이에 시작된다. 이는 아동들에게 한발 앞선 기회를 확대적 으로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사회화와 언어 발달에 역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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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2세 아동들과 대다수의 3~4세 아동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취학 전 교육을 받는다. 대 부분의 프로그램은 지방 당국의 후원을 받으며, 일부는 탁아소 내에 개설되어 여성 단체들 이 운영하고, 일부는 사립 시설이다. 교육부는 낙후된 지역의 취학 전 교육을 위해 특별 자 원을 할당한다. 5세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은 무상 의무 교육과정이다. 교육 내용은 언어와 숫자 개념을 포함하는 기초 능력을 지도하여 인지 및 창의적 능력을 기르고 사회적 능력을 촉진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유치원의 교육 과정은 향후 학습을 위해 탄탄하고 균형 잡힌 기초를 쌓을 수 있도록 교육부가 지침을 제시하고 감독한다.
예루살렘 재단 제공/ H. 마조르
예루살렘 바이블 랜드 박물관 제공
학교 시스템 취학은 6세에서 18세까지 의무 무상 교육으로 이루어진다. 정규 교육은 초등학교(1~6학년) 에서 시작해 중학교(7~9학년)와 고등학교(10~12학년) 과정으로 이어진다. 초등학교를 마친 학생 중 약 9%는 기숙 학교에 입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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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회의 다문화적 성격은 교육 시스템의 틀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에 따라 학교는 4개 그룹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 학교, 유대 학문, 전통, 규율을 강 조하는 공립 종교 학교, 아랍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아랍과 드루즈의 역사, 종교, 문화를 중 점적으로 지도하는 아랍 및 드루즈 학교, 다양한 종교적, 국제적 지원 하에 운영되는 사립 학교가 있다. 최근 몇 해 동안은 자녀의 교육의 진로 방향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특정 집단의 부모와 교육자들의 철학과 신념을 반영한 새로운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사립 초정통파 학교 • 이스라엘 공보부/ A. 벤 궤르솜
아랍 학교 • 예루살렘 재단 제공/ S. 사벨라
교과 과정 수업일 중 대부분은 필수 이론 학습으로 채워진다. 다뤄지는 과목은 교육 시스템 전체에 동 일하지만, 각 학교는 교육부가 제공한 광범위한 학습 단위와 교재 중에서 자체 교직원과 학 생들의 필요에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를 수 있다. 사회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매년 국가적으로 중요한 특별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이러한 주제에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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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가치, 히브리어, 이민, 예루살렘, 평화, 산업 등이 포함된다.
특수 교육 학급에서 상위 3% 내에 속하고 자격 시험에 통과한 영재들은 정규 특수 학교나 방과후 과 정 등의 심화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영재 교실은 해당 학생들과 학습내용의 수준에서 뚜렷 한 특징을 보이며, 지식과 이해를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에서 배운 개념을 적용 하는 데도 역점을 둔다. 이러한 프로그램에 속하는 아동들은 독립적으로 새로운 자료를 연 구하고 다루는 법을 배운다. 신체, 정신, 학습 장애가 있는 아동들은 각자 장애의 특성에 따라 적절한 학습환경에 배치
되며, 이 같은 특수교육은 궁극적으로 이들이 공동체의 사회적, 직업적 생활에 최대한 통합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일부는 특수한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는 반면 일부는 일반 학교에 다니게 된다. 일반학교에서는 필요시설이 완비된 그룹에 배정 받을 수 도 있고 일반 교실에 배정 받되 보충 지도를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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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들의 복지는 가족과 다양한 지역사회 지원 그룹을 비롯해 보건관리 인력,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특수교육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맡는다. 법에 의해 설립되고 교육부 장 관이 지명하는 한 위원회가 특수교육 프로그램과 시설에 참가하기에 적합한지 장애아들의 자격을 심사한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3세에서 21세까지 무상으로 제공된다.
행정과 구조 교육부는 학교 교과과정, 교육 기준, 교직원 감독, 학교 건물의 증축 등을 담당한다. 지방 자치 당국은 시설과 공급물품의 입수와 학교 시설 관리의 책임을 맡는다. 유치원과 초등학 교의 교직원은 교육부 공무원인 반면 상급 학교의 교직원은 지방 당국에서 고용한다. 지방 당국은 학교 인구의 규모에 따라 교육부로부터 재정을 지원 받는다. 정부와 지방당국은 교 육 재정의 80%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그 외 자금원에서 조달된다.
중등 교육 교육 텔레비전 방송(ETV): 교육부의 한 부서인 교육 텔레비전은 학교 강의에서 사용하는 학 교 교육 프로그램과 전체 인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 및 방송한다. ETV는 또한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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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교사 세미나의 교육 전문가들과 협력하여 새로운 교수법을 개발하기도 한다. 평생 교육 을 제공하는 일에 힘쓰는 ETV는 미취학 아동을 위한 계발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오락 프로그램, 성인을 위한 교육 과정,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뉴스 방송 등을 통해 모든 연령의 인구에게 적합하게 프로그램을 맞춤 제작하고 있다.
17세 인구 중 대학입학시험 응시생 비율
중등 학교 대부분은 대학 입시 응시 자격과 고등 교육으로 이어지는 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교과과정을 제공한다. 특정 중등 학교들은 대학입시 응시자격과 직업교육 자격증, 또는 둘 중 하나를 얻을 수 있 는 특화된 교과과정을 제공한다. 공업기술학교들은 세 가지 단계로 기술자와 실무기사들을 교육한다. 일부는 고등 교육 과정을 준비하고, 일부는 직업교육 자격증을 목표로 하며, 일부 는 실용 기술을 얻기 위해 공부한다. 일반적으로 학내 거주 시설을 갖춘 농업 학교들은 농 업 경제학 관련 과목들로 기초 학습을 보충한다. 군사예비학교는 미래의 직업 군인과 이스 라엘 방위군에 필요한 특정 분야의 기술자들을 교육한다. 주로 기숙학교이고 남녀 학생들에 게 별도의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예시바 고등학교는 비종교적 교과과정에 더해 집중적인 종 교 학습과정을 제공하고 전통의 준수와 유대교적 삶의 방식을 장려한다. 종합 학교는 부기, 기계학, 전자공학, 호텔업, 그래픽 디자인 등에 이르는 다양한 직업 관련 교육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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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된 학교 중 어느 한곳에도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은 견습과정 법에 따라 승인된 직 업 학교에서 한 가지 직종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견습 프로그램은 산업통상노동부가 직업 네트워크에 가입된 학교에 제공하는 것이다. 3~4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이 프로그램 은 2년간 교실에서 수업을 받은 뒤 1~2년간은 일주일에 3일은 공부하고 나머지 날에는 학 생들이 선택한 직업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다. 직업 분야는 미용, 요리부터 기계정비, 워드 프로세싱까지 다양하다.
중학교 기술 수업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고등 교육 고등 교육은 이스라엘의 경제 및 사회 발전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이 건국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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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거의 사반세기 전에 이스라엘 기술 연구소인 테크니온이 공학자와 건축가를 양성하기 위 해 1924년 하이파에서 문을 열었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이 이스라엘 내 청년들의 고등교 육의 중심지로써, 또 해외의 유대인 학생과 학자들을 끌어오기 위한 목적으로 1925년에 설 립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성취했을 때 이 두 대학의 재학생 수는 총 1,600명 정 도였다. 그러나 2004~2005년에는 이스라엘의 여러 고등 교육 기관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 수가 약 26만 2천 명에 이르렀다. 이 중 37%는 종합대학에, 44%는 단과대학에 다니고 있고, 19%는 개방 대학의 여러 과정에 참가하고 있다. 학문적, 행정적으로 전적인 자유를 부여 받은 이스라엘의 고등교육 기관들은 학문적 기준에 부합하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신규 이민자들과 필수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학 생들은 특별 예비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입학 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고등교육 협의회 고등교육 기관들은 고등교육 협의회의 관리 하에 운영된다. 이 협의회는 교육부 장관이 지
휘하고, 대학교수, 지역사회 대표, 학생 대표로 구성된다. 협의회는 학교 인가를 내고, 학위 수여를 승인하며, 고등교육과 과학 연구의 발전과 재정 지원에 대해 정부에 조언하는 역할 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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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의 선임 교수 4명과 기업이나 산업 부문의 공인 2명으로 구성된 기획보조금 위원 회는 재정 문제와 관련해 정부와 고등교육 기관들을 연결하는 중개 기구로서 양측에 예산안 을 제출하고 승인된 예산을 할당하는 일을 담당한다. 공적 자금이 고등교육 예산의 70%를 충당하고, 20%는 등록금에서, 나머지는 다양한 민간 영역에서 재원을 얻는다.
학생 이스라엘 학생들은 남녀별로 각각 3년과 2년의 의무 군복무를 마친 뒤 21세가 넘어서 학업 을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고등교육 을 받은 반면 최근 들어서는 커리어 중심으로 변화하여 많은 학생들이 현재 제공되고 있는
이스라엘 공보부/ M. 밀너
광범위한 전문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의 20~24세 인구 중 절반이 훨씬 넘는 이들이 중등 후 교육기관이나 고등 교 육기관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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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대학 테크니온 – 이스라엘 기술 연구소 (1924년 설립, 하이파 소재): 테크니온은 이스라엘의 공학 자, 건축가, 도시 계획가의 상당수를 배출했다. 최근 몇 십 년간 의학과 생명과학 학부가 추 가로 개설되었다. 테크니온은 과학과 공학 분야의 기초 및 응용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이스라엘의 산업 발전을 앞당기고 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1925년 설립): 히브리 대학은 미술사에서 동물학에 이르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망라하는 학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도 이곳에 있다. 창립 이래로 히브리 대학의 과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발전의 전 단계에 적극적으로 참 여해왔고, 이 학교의 유대학부는 전세계의 가장 유수한 학과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1934년 설립, 레호봇 소재): 원래 시에프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창립 된 와이즈만 연구소는 1949년 확장되면서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자 저명한 화학자인 하임 와이즈만 박사의 이름을 따왔다. 오늘날 이 연구소는 물리학, 화학, 수학, 생명과학 연구분 야의 대학원 과정이 널리 인정 받고 있다. 이곳 연구자들은 산업 발전과 새로운 과학 기반 사업체 창립을 촉진하기 위해 고안된 각종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는 고등 학교에서 사용할 교과과정을 준비하는 과학 교수법 학과도 있다.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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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일란 대학교 (1955년 설립, 라마트 간 소재): 바르일란 대학은 독특한 통합적 접근방식 을 구현하여 유대 전통분야의 심화학습 프로그램과 사회과학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학문 분야의 일반 교양 교육을 결합시켰다. 전통과 현대 기술을 결합한 이 학교는 물리학, 의약 화학, 수학, 경제학, 전략학, 발달 심리학, 음악학, 성서, 탈무드, 유대법 등 많은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 텔아비브 대학교 (1956년 설립): 텔아비브 대학은 이스라엘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텔 아비브 지역의 종합대학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존에 있던 3개 학교를 통합하여 설립되 었다. 오늘날 이곳은 이스라엘 최대의 대학으로 광범위한 학과과정을 제공하며 기초 학문과 응용 학문 연구 양쪽에 상당한 역점을 두고 있다. 텔아비브 대학에는 전략학, 보건 시스템 관리, 기술 예측, 에너지학에 주력하는 전문 연구소들이 들어서 있다.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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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파 대학교 (1963년 설립): 이스라엘 북부지역의 고등교육 중심지 역할을 하는 하이파 대학은 학제간 연구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학부간 센터와 연구소 및 전반적인 건축 계획 이 이러한 학문적 접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 대학에는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이해와 협력 증진에 매진하는 연구센터와 사회적, 경제적 실체로서 키부츠를 연구하는 학과 과정도 있다. 네게브 벤구리온 대학교 (1967년 설립, 브에르셰바 소재): 벤구리온 대학은 남부 이스라엘 지역민들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막 지역의 사회적, 과학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건조 지역 연구에 크게 공헌했으며 의과대학은 국내의 지역사회 중 심 의학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스데 보케르 키부츠에 위치한 대학 캠퍼스에는 이스라엘 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의 생애와 시대의 역사적, 정치적 특징을 연구하는 센터가 있 다. 개방 대학교 (1974년 설립): 영국의 대학 형태를 본떠서 설립한 개방 대학은 주로 자습용 교재와 안내서를 토대로 해서 체계적으로 구성된 과제물과 정기적 개인지도로 부족한 부분 을 보완하고 기말 시험을 실시하는 탄력적인 방식을 활용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 하는, 종래와 전혀 다른 독특한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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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과대학 지방 단과대학들도 학과 과정을 제공한다. 많은 단과대학이 종합대학의 후원 하에 운영되며, 따라서 학생들은 거주지 근처에서 학위 공부를 시작하여 종합대학의 주 캠퍼스에서 과정을 마칠 수 있다. 일부 전문 학교들은 미술, 음악, 무용, 패션, 간호, 재활치료, 교직, 스포츠 등 다양한 학과과 정을 제공한다. 학위를 수여하는 몇몇 사립 단과대학들은 경영학, 법학, 컴퓨터학, 경제학 및 관련 분야와 같은 수요가 많은 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추가 과정을 개 설해 놓고 있어 기술, 농업에서 마케팅, 호텔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수료증이나 직업과 정 학위증서를 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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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교육 교육부와 공공 및 사립 기관들이 후원하는 광범위한 교육과정은 히브리어 학습과 기초적 교 육기술 향상에서 가족의 복지 증진과 전반적 지식 확대에 이르는 개인들의 다양한 학습 욕 구를 해소해주고 있다. 노동부는 여러 분야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직업 교육 및 재교육 과정 을 제공하고 있으며, 여러 소도시와 대도시에서 이용 가능하다. 특별히 개발된 ―울판(ulpan)‖ 방식을 활용하는 다양한 수준의 히브리어 강의는 이민자들을 비롯한 여러 인구 집단의 이스라엘 주류 사회로의 통합을 돕는다. 성인 인구의 교육 및 문 화적 불균형을 줄이기 위해 마련된 보상교육은 성인 학습자 사회에 맞춤 형식으로 구성된다. 주간과 야간 강의를 모두 갖춘 직업 교육 과정은 노동부와 산업기업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센터와 기술 및 전문 교육 기관에서 이용 가능하다. 전국에 분포한 ‗대중 대학‘들은 이론 과 목과 예술 분야에서 수백 개의 성인 교육 강좌와 워크숍을 제공한다. 이민자들을 위한 특별 라디오 방송으로 ―방송 대학‖ 프로그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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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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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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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와 개발 (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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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스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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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 과학과 기술 이스라엘은 다른 여러 작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과학과 기술 정책을 뚜렷이 규정하고 있다. 과학 분야에서는 우수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최고의 연구 거점 확립을 촉진하는 한편 광범위한 과학 분야 전반에 걸쳐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자 노력 한다. 기술 분야에서는 제한된 영역에 집중하여 높은 성과를 내고자 힘쓰고 있다. 이스라엘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과학 및 기술 연구에 종사하는 인구와 연구개발 투자액 비율은 전세계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 בחיי עם תרבותי... אלא גורם מרכזי...המחקר המדעי והישגיו אינם עוד עניין אינטלקטואלי בלבד ) תשכ"ב,(דוד בן גוריון 과학적 연구와 그 성취는 더 이상 단순히 추상적인 지적 탐구 작업이 아니라......모든 문명 민족 의 삶에서......중심적인 요소이다...... (다비드 벤구리온, 1962)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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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과학 연구의 역사는 유대 민족이 조국으로 귀환한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로 이스라엘 땅에 현대적 유대 국가를 설립하자는 개념 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테오도르 헤르쩰(1860~1904)은 이스라엘 땅을 단지 유대 민족의 물 리적 고향만이 아니라 주요한 정신적, 문화적, 과학적 중심지로 보았다.
프루타롬(FRUTAROM) 사의 연구실, 1946 • 이스라엘 공보부/ H. 핀
질병이 만연한 불모지였던 그 당시의 이 땅을 현대적 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열망은 뒤이어 나타난 과학적 탐구와 기술 발전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였다. 농업 연구의 시작은 19세기 말 엽 미크베 이스라엘 학교가 창설(1870)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에 텔아비브 에 설립된 농업 시험장은 후에 농업연구기구(ARO)가 되었고, 이곳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농 업 연구 및 개발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이다. 의학 및 공중 보건 연구는 제 1차 세계대전에 앞서 히브리 보건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 미 생물 연구소와 생화학과, 세균학과, 위생학과가 설립되면서 이 분야 연구에 큰 힘이 실렸다. 이러한 연구들이 기반이 되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가장 우수한 의학 연구 기관인 하다사 메디컬 센터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산업 연구는 1930년대에 사해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앞장 섰으며, 기초 과학과 기술 분야의 진보는 히브리 대학(1925년 설립)과 이스라엘 기술 연구 소 테크니온(1924년 하이파에 설립), 그리고 후에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1949년)로 바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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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엘 시에프 연구 센터(1934년 레호봇에 설립)에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과학과 기술 기반시설은 1948년 건국 당시부터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초기 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에 연구가 집중되었고, 이를 토대로 영리 지향적 산업들이 점차 발전해 나갔다.
전문 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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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보유한 대규모 우수 인력이 주로 과학과 기술적 성취의 책임을 맡고 있다. 구 소련에서 온 수십만 이주민 중 다수의 고도로 훈련된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들이 점차 노 동시장에 진입함에 따라 숙련된 인력 비율이 극적으로 상승했으며, 이들은 향후 이스라엘의 과학 및 기술적 성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I. 스툴만
연구와 개발 (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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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연구 개발은 주로 7개 종합대학, 수십 개의 정부 및 공공 연구 기관, 수백 개의 민간 및 군사 기업체에서 실시되고 있다. 의료 센터와 전기통신, 전력 생산, 수자원 관리 등 분야의 여러 공공 기업체 또한 주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정부와 공공 단체들은 연구 개발의 주요 자금원으로서 이스라엘 내 연구 개발 활동 중 절반 이 훨씬 넘는 곳에 재정 지원을 해준다. 민간 연구 개발 목적의 이러한 자금 중 상당부분이 주로 산업 및 농업 부문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할당되는데, 이는 여타 국가들과 비교해볼 때 전체 총액 중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40% 이상이 지식을 진보시키는데 사용되는데 이것 은 국가나, 양국간이나, 정부의 연구 자금을 통하거나, 고등교육 협의회가 관리하는 일반대 학 기금에서 나온 개별 대학 할당액을 통해 조달된다. 나머지는 다양한 보건 및 사회복지 분야에 제공된다.
I. 스툴만
I. 스툴만
이스라엘의 발표 가능한 연구 전체 중 80% 이상이—또한 거의 대부분의 기초적 연구와 기 초 연구 교육이—대학 내에서 이루어진다. 법적 독립 기구인 이스라엘 과학 재단(ISF)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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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력 있는 기초 연구의 주된 재원이다. 약 1천 명의 개인 연구자들이 ISF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이는 대학 기금과 필적하는 수준이다. 또한 ISF는 특별 프로그램에도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거대강입자가속기(LHC)의 ATLAS 검출기 를 건설하는데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것이나 일련의 혁신적인 ‗의사-연구자‘ 보조금을 통해 임상 연구의 질을 높이는 경우가 그 예이다. 어느 한 기관이 처리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큰 연구 사업을 지원하고 조율해야 할 경우에는 TELEM이 그 역할을 맡는다. TELEM은 산업통상노동부와 과학부의 수석 과학자들과 이스라 엘 학술원 원장, 고등교육 협의회와 재무부 및 기타 기관의 대표들로 구성된 자발적 포럼이 다. TELEM은 이스라엘이 유럽연합의 프레임워크 프로그램(FP)에 참가할 때나 유럽 싱크로 트론 방사설비(ESRF)에의 회원 가입, 이스라엘의 인터넷 II 사업 등을 주도했고 필요한 경 우에는 자금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여러 대학이 취득한 다수의 특허는 대학과 산업계 간의 관계의 효율성을 보여주 는 하나의 척도이다.
대학의 연구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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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많은 대학이 그러하듯 이스라엘 대학의 연구자들도 과학 지식 향상을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모든 과학 분야를 아우르는 이스라엘인들의 저서와 학회지 논문들은 대학 부문 의 성과를 보여주는 주된 통로이다. 이스라엘은 전세계 과학 관련 간행물 중 엄청나게 큰 비중(약 1%)을 출판하고 있고, 특히 화학과 컴퓨터 과학과 같은 여러 분야에서 세계 과학계 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동력의 규모를 기준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자연과학과 공학, 농업, 의 학 분야의 출판 저자 수가 훨씬 많고, 국내 출판물 중에는 이스라엘 과학자들과 다른 국가 의 과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경우가 매우 많다. 이스라엘 과학을 국제 과학계에 통합시키기 위해 박사 후 연구직을 맡거나 해외에서 안식년 을 보내고 해외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장려되며, 광범위한 교환 프로그램과 공동 프로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제공
젝트가 연구소, 대학, 정부 차원에서 해외의 해당 기관들과 함께 관리된다. 이스라엘은 또한 국제 학술대회의 주요 중심지로서 매년 이 같은 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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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대학들은 과학 연구 활동과 함께 이스라엘의 기술 발전에 중요하고도 혁신적인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는 전세계에서 최초로 자체 연구의 상업적 이용을 위해서 조직을 세운 곳 중 하나이다(1958년). 지금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학이 이와 유사한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 인근에 과학을 기반으로 한 공업 단지들이 설립 되면서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대학들은 또한 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특정 제품 의 상업화를 위해 분사기업을 창업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및 외국의 사업체들과 제휴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 내 학제간 연구와 실험 연구소들은 이스라엘 산업에 절대적으로 중대한 다양한 과학 및 기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고, 응용 연구개발의 국가적 핵심 분야로서 건설, 교통, 교육 등을 다루고 있다. 이에 더해 많은 교수진들이 기술, 행정, 재정, 관리 차원에서 산업계에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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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연구 개발 이스라엘은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생명공학 혁명에 크게 기여했으며, 생체공학 능력과 더불 어 의학 및 대체의학 연구의 선진 기반시설을 발전시켰다. 생명공학, 생물의학, 임상 연구는 전체 과학 간행물의 절반을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국내 산업 부문은 방대한 지식 기반을 활용하기 위해 의학 분야의 활동을 늘렸다.
CT 스캔 • 샤아레 쩨데크 병원 제공
이스라엘 과학자들은 인간 성장 호르몬과 바이러스 감염 억제에 효과적인 단백질군인 인터 페론 생산 방법을 개발했다. 다발성 경화증 치료에 효과가 있는 의약품 코팍손도 기초적 연 구에서 산업용 생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이스라엘에서 개발되었다. 유전 공학은 기타 미생물학 관련 제품들과 함께 단일 클론 항체를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진단 키트를 생 산 가능케 했다. 컴퓨터 단층촬영(CT) 스캐너, 자기공명 화상법(MRI) 시스템, 초음파 스캐너, 핵의학 카메라, 수술용 레이저 등 진단 및 치료용의 정교한 의료 기기들이 개발되어 세계시 장에서 팔리고 있다. 그 밖의 혁신적 성과로는 서서히 방출되며 치석 축적을 방지하는
액체 폴리머, 양성 및 악성 전립선 비대증을 감소시키는 장치, 보툴리누스를 이용한 사시(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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視) 교정, 내복 가능한 캡슐에 넣어 위장 질환 진단에 사용되는 초미니 카메라 등이 있다.
산업 연구 개발 산업 부문의 경우, 민간 연구 개발 지출 규모와 산업 연구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와 공학자 의 수가 지난 20년 간 큰 폭으로 증가했다. 전자공학에 상당히 집중된 이스라엘의 산업 연구 개발은 주로 소수의 대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개발 집중 기업들은 지난 수년 간 산업 고용 및 수출에 주된 역할을 해 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아울러 이 같은 기업들의 성장을 육성하는 것이 이스라엘 산업 전략의 핵심이다. 정부는 연구개발 촉진법의 틀 안에서 산업 부문의 연구 개발을 육성한다. 이 법 은 산업통상노동부의 수석과학자실이 실행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 기관은 2000년에 약 1,200개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연구 개발 관련 제품은 산업 수출품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다이아몬드 제외). 전자공학: 1960년대까지는 주로 소비재에 국한되어 있던 전자공학은 군과 민간 양측으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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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 정교한 기술 발전을 이루었다. 통신 분야의 연구 개발 기반 응용기술에는 영상, 언어, 데 이터의 디지털화, 처리, 전송, 개선 등이 있다. 고성능 전화교환 장치에서 음성 사서함 시스 템, 전화선 이중 연결장치, 다수의 인터넷 응용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다. 광학, 전기광학, 레이저: 광학과 전기광학, 레이저는 산업 분야로 급격한 발전을 이뤄왔다. 이스라엘은 섬유 광학, 인쇄회로기판의 전기광학 검사 시스템, 열 영상 나이트 비전 시스템, 전기 광학 기반의 로봇 제조 시스템 분야에서 세계 선두 주자이다. 컴퓨터 기반 설비: 주로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 분야가 집중적으로 개발 및 생산되었다. 인 쇄와 출판업에서 이스라엘에서 생산한 컴퓨터 그래픽과 컴퓨터 기반 영상 시스템이 국내와 해외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다양한 교육 시스템이 학교 활동의 질을 높이고 있으며, 이러한 제품 중 상당수는 수출용으로 개발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프트웨 어 제품 중 일부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용으로 기획되었지만 대부분은 컴퓨터 워크스테이션과 같은 소형 또는 중형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다.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스크린 상의 텍 스트와 그래픽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터치패드가 3개 달린 컴퓨터 마우스도 이스라엘에 서 개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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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공학: 1970년대 말에 연구가 시작된 로봇 공학은 이제 다이아몬드 연마, 용접, 포장, 건축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고안된 로봇을 생산하고 있다. 인공 지능을 로봇에 응용하는 기술에 관한 연구가 현재 진행 중이다. 항공학: 국방 수요와 연관된 항공학은 기술적 발전을 이루게 되면서 민간에까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에서 제조된 최초의 민간 항공기 아라바에 이어 웨스트윈드 비즈니스 제 트기가 생산되었다. 국내에서 기획 및 제작한 인공위성이 생산되었고, 이스라엘 항공우주산 업(IAI)이 이스라엘 우주국(ISA)과 협력 하에 이 위성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은 또한 디스플레 이 시스템, 항공 컴퓨터, 계측 시스템, 모의 비행장치 등 여러 관련 아이템을 개발, 제조, 수 출하고 있으며, 원격 조작 기구의 기술과 생산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일란 라몬 대령 (사진 오른쪽 끝), 이스라엘 최초의 우주 비행사로 우주선 컬럼비아호 탑승 중 미국인 동료 6명과 함께 실종됨 • 미 항공우주국(NASA) 사진 MSFC-0300309
농업 연구 개발 농업 부문은 농민과 연구자들 간의 협력으로 시행되는 연구 개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연구 결과는 현장으로의 시험용 확장 서비스를 통해 신속히 전달되며, 문제가 발견되 면 직접 과학자들에게 전달되어 해결책을 강구한다. 농업 연구 개발은 주로 농업부의 농업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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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구(ARO)가 수행한다. 이스라엘 내 대부분의 농업 연구 기관들은 유엔 식량농업기구 (FAO)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여러 국가와 지속적으로 정보를 교류한다. 이스라엘 젖소의 평균 우유 생산량은 세계 최고이다. 볼카니 연구소가 수행한 과학적 품종 개량과 유전자 검사를 통해 젖소 두당 평균 산유량이 1970년에 6,300리터에서 현재 1만 리 터 이상으로 증가했다. 혈통이 우수한 소에서 정자와 난자를 채취함으로써 국내 소의 품질 을 개선함과 동시에 이 분야의 진보된 기술을 다른 여러 나라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농업 전문가들은 점적식 관개, 농업 생명공학, 토양 태양살균 법, 산업 폐수를 지 속적으로 농업에 사용하는 일 등에 앞장서왔다. 이러한 기술발전은 유전자 조작 종자와 바 이오 살충제부터 광분해성 플라스틱, 전산화된 관개/시비 시스템에 이르는 시장성 높은 다 양한 제품에 적용되었다. 부족한 물과 거친 땅, 제한적 노동력을 최적으로 활용함에 따라 농업 방식에 혁신적 변화를 가져왔다. 물 절약 기술에 대한 연구는 물의 흐름을 식물의 뿌리 쪽으로 곧장 향하게 하는
볼카니 농업 연구센터의 과학자 • 이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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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적식 기법과 같은 컴퓨터 제어형 관개 시스템의 발전을 촉진시켜 전세계 농민들에게 도움 을 주고 있다. 물을 전자-자기 처리하여 동물 보건, 작물 수확량을 개선하는 것과 관련한 연 구도 유망한 결과를 얻었다. 이스라엘에서 설계 및 제작한 컴퓨터는 매일매일의 농업 활동을 조율하는데 광범위하게 사 용되고 있다. 관련 환경적 요소들을 감시하면서 비료 주입을 관리하고, 검증을 거친 최저 비용/최고 산출량 비율로 혼합한 사료를 가축에게 공급하고, 가금류에게 온도와 습도가 조 절된 환경을 제공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경작, 파종, 식목, 수확, 수집, 분류, 포 장 과정을 위한 다양한 혁신 장비도 개발, 제조, 사용되었다. 농업은 일반적인 과학 연구와 연구 개발로부터도 혜택을 얻었다. 그 예가 자동식 식물 조직 배양, 생물학적 살충제, 병해 저항성 종자, 생물학적 시비 등이다.
에너지 연구 개발 태양, 열, 풍력 에너지와 같은 대체 에너지원의 폭넓은 개발은 기존 에너지원이 부족한 이 스라엘의 상황에 따른 긍정적 성과물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모든 수준에서 태양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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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를 선도하는 일류 국가가 되었고, 국민 일인당 가정 내 태양열 온수기 사용률이 세계적 으로 가장 높다. 응집된 햇빛을 수집하는 새로운 고효율 집광판이 개발됨에 따라 산업 부문 에서도 태양 에너지의 사용이 증가할 전망이다. 풍력 에너지 동력화 기술의 발전은 신축성 있고 팽창 가능한 회전자가 달린 풍력 터빈의 생 산으로 나타났다. 일정 수준의 염분과 유기물 조성을 갖춘 연못 물을 활용하여 태양 에너지 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기술도 개발되었다. 땅에서 열을 뽑아내 증기로 전환하여 터빈에 동 력을 공급할 수 있는 지열 발전소는 현재 시험 단계에 있다. 테크니온의 과학자 팀이 개발 한 한 프로젝트는 건조한 공기와 물(바닷물이나 염수까지도 가능)을 이용하여 1천 미터 높 이의 굴뚝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술이다.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의 거울 광장 •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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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과제와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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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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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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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경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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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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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경제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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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스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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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수년 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수준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던 이스라엘은 거의 모든 영역 에서 경제활동이 뚜렷한 부진을 보인 2년간의 침체기를 겪은 후 현재는 2003년부터 시작된 경기 회복세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모든 경제적 매개변수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은 2007 년에도 계속되었다. 2006년과 2007년에 이스라엘의 국내 총생산(GDP)은 급격한 성장세를 지속하였으며, 2006년에는 일시적으로 0.7%의 GNP 손실을 야기한 제2차 레바논 전쟁에도 불구하고 GDP 5.1%의 성장을 기록했다. 기업 부문이 신속한 회복과 빠른 성장세의 지속을 다시 한번 주도했으며, 이 부문은 규모가 6.4% 확대되며 2006년 일인당 GDP 20,138달러를 기록했다.
) י"א: (משלי י"ב...עובד אדמתו ישבע לח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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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잠언 12:11) 2006~2007년에 이스라엘은 주요 거시경제 목표를 꾸준히 달성했다. 구체적 목표 내용은 때 로 마이너스까지 기록하는 매우 낮은 인플레이션률, 매우 낮은 예산 적자, 공공 지출의 제 한적 증가였다. 이와 동시에 지속적으로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 한편 급격한 수출 성장과 사 상 처음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추세는 2007년 상반기에도 계속되었고, 그 해 전체 전망도 인플레이션 없는 지속적 경제 성장과 낮은 예산 적자, 전 부문의 경제적 안정 등이었다. 7백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이스라엘은 특히 농업과 농업기술, 관개, 태양 에너지, 여러 첨단 산업계와 신생업체들의 놀라운 성과에 대해 지난 수년 간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 다. 심지어 전통 산업에서도 집중적인 연구 개발을 기반으로 하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단 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통신, 생명공학, 의약품, 나노 기술 등 첨 단 기술의 땅이기도 하다. 지난 30년에 걸쳐 미국, 유럽연합, 몇몇 남미 국가들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은 이스라엘이 상 품과 서비스 수출을 확대하고—2006년 6백억 달러 이상—다국적 기업에 참가하여 성장 가 속화에 기여하는 과정을 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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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와 성과 최근의 성과 •
2000년도는 이스라엘 경제사에서 제로 인플레이션과 무역수지 적자의 현저한 감소를 모
두 이룬 최초의 해이다. 특히 무역수지 적자는 2005년에 이르러 7억 달러까지 떨어졌고 2006년에는 흑자 추세로 돌아서 9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
이스라엘은 10년 만에 120만에 육박하는 이민자들을 흡수하면서 민간 노동력을 1990년
165만에서 2006년 280만으로 증가시켰다. •
인플레이션을 해결했다. 1984년에 연간 인플레율 445%에서 1989년에는 21%, 2000년에
는 0%로 떨어졌고, 2005년에 2.4%로 올랐지만 2006년에는 제로를 넘어서서 -0.1%를 기록 했다. •
외환 부채를 제거했다. 1985년에는 외채가 GDP의 1.6배였고 1995년에도 여전히 GDP의
25%를 차지했지만 2001년 3% 미만으로 줄고 2003년에는 제로로 떨어졌다. 이 시점부터 이스라엘은 채권국이 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해외에 진 부채보다 세계 경제가 이스라엘에 진 부채가 훨씬 커졌다). •
외국인 투자가 꾸준히 증가하여 GDP 성장을 촉진하고 수출 성장을 가속화했는데 수출
규모는 1987년 1억 7500만 달러에서 1997년 58억 달러, 2005년 107억 달러, 2006년 252억 달러로 증가했다. •
산업 수출은 지난 20년간 6배 가까이 증가했다. 1985년 60억 달러에서 2005년 356억 달
러로 증가했고 2006년에는 381억 달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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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도전과제 이스라엘의 가장 두드러진 경제적 성과는 다음과 같이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도전과제들 에 맞서 싸우는 동시에 이뤄낸 놀라운 발전 속도이다. •
국가 안보 유지: 이스라엘은 현재 GDP의 약 8%를 국방비로 지출한다(1970년대에는
25% 이상, 1980년에는 23% 지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도 이스라엘은 강력한 전쟁 억제 능력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
대규모 이민자 수용: ―이산민 되 모으기‖는 사실상 이스라엘이라는 유대 국가의 존재 이
유이다. 건국 이래로 이스라엘은 3백만 명이 넘는 이민자들을 흡수했고, 이는 1948년 독립 을 달성할 당시 국내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의 5배가 넘는 수치이다. 대부분 전후 유럽과 아랍 각국에서 건너온 70만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건국 초기 4년 동안에만 이스라 엘 인구는 2배 넘게 증가했다. 1990년 이래로 120만 이민자들(구 소련에서만 94만 명)의 물결이 또 한번 밀려와 이들을 물리적, 사회적으로 통합시키는데 엄청난 지출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앞선 이민 대열보다 이들 신규 이민자들은 훨씬 빠른 시간 안에 통합되어 GDP 성장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했다. 물론 이들도 일시적으로는 실업률을 높여 1992년에 최고 11.2%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 수치는 서서히 줄어들어 2006년 말에는 7.6%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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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적 경제 기반시설의 확립: 기본적인 도로, 교통, 항만 시설, 물, 전기, 통신 네트워크
는 1948년에도 존재했지만 이것들은 적합한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고, 따라서 개발과 확장을 위해 엄청난 지출을 요했다. 통신과 교통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경제의 신속한 성장은 대부분 불가능했을 것이다. •
높은 수준의 공공 서비스 제공(보건, 교육, 복지 등): 이스라엘은 자국민의 복지(사회 내
약자계층에 더욱 특별한 관심을 기울임)를 보장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어 이러한 책임을 달성하기 위해 투입하는 자원의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다. 비록 최근의 긴급 경제 정책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이 부문의 예산이 삭감되기는 했지만 2006년과 2007년 정부 예산은 다시 예산 삭감에 대한 조정을 시작할 것임을 확실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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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개혁 외환 자유화 이스라엘 뉴세켈(NIS)은 현재 모든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유로이 거래되는 ―경화‖이다. 이는 비교적 최근에 바뀐 현상으로 이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다른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 로 자국 경제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수십 년간 통화 규제 정책을 실시했다. 건국 초기 이스라엘은 수출에 비해 훨씬 큰 수입 규모가 주요 원인이 된 심각한 외화 부족 을 겪었다.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외화 ―배급제‖—식품, 연료, 방산 장비와 같이 매우 기본 적인 필수품목에만 외화를 할당하는 것—가 시행되었다. 생산 기계와 원자재는 나중에야 이 목록에 추가되었고, 그 후 해외 여행자들에게는 일인당 10달러만 반출이 허용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자 여러 ―사치성‖ 상품의 수입이 허용되었고 이스라엘인들은 해외여 행 시 일인당 100달러를 반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에는 수입 제한이 더욱 완화되었 고, 1970년대에는 완전히 자유화되었다(수입 제한이라는 부담을 엄청난 관세의 ―만리장성‖으 로 전환). 그러나 이러한 관세 부담도 유럽연합과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덕에 크게 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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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으며, 1980년대에는 해외여행 시 개인의 외화 반출 한도가 500달러에서 3,000달러로 점진 적으로 상승했다. 외국은행 계좌 보유와 투자도 최초로 허용되면서 선례를 따랐고, 1990년 대 하반기에는 외화 규제의 마지막 보루까지 제거되었다.
환율 외환 규제를 완전히 철폐한 후 현재 세켈의 환율은 국제 금융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과거에는 늘 이런 식으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2차 대전 후의 다른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환율도 과거에는 고정환율제를 택했고, 정부 결정에 따라 때때로 변동(평가 절 하)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리라는 영국화폐 1파운드(당시 4 USD) 가치와 같았고, 1949년에는 파운드 와 함께 2.80달러로 평가절하되었다. 그때 이후 이스라엘 통화는 여러 차례 평가절하되었다 (예: 1954년에 달러당 1.80리라, 1962년 달러당 3리라, 1971년 달러당 4.20리라, 1974년 달러 당 6리라로 절하). 이것은 경제 정책에 따라 수출과 수입의 격차를 줄이고 앞선 평가절하 후 축적된 인플레 율을 대외 무역으로 상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1975년 이스라엘은 OECD 내 변화 추세를 따라 ―느린 평가절하‖(매달 최대 2%까지 평가절 하 허용) 정책을 시작했다. 이러한 제도는 외환 자유화의 첫 걸음을 떼기 전까지 2년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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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되었다. 자유화 시작 이후 환율은 매일 시장 변동폭에 맞춰 이스라엘 은행이 결정했다. 1980년에 10리라가 1세켈로 전환되었고, 1985년에는 1,000세켈이 1 이스라엘 뉴세켈(NIS) 이 되었다. 2007년 7월 NIS 환율은 평균 0.24달러를 기록했다.
국가 예산의 긴축 건국 이후 첫 10~20년 동안 주로 정부에 의해 주도된 경제 성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이스 라엘을 GDP에 비해 국가 예산이 큰 나라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시켰다. 심지어 예산이 GDP를 넘어서는 경우까지 있었지만, 1980년에는 95%로 줄어들었고, 계속해서 1990년에 64%, 2005년 49%, 2006년에는 40% 전후로 떨어졌다. 또한, 건국 초기에는 ―개발‖(즉, 투자) 목적에 대해서만 예산 적자(세수와 국내 대출로 재정 처리되지 않는 부분)가 허용되었던 반 면, 이후에는 국방비 부담이 증가됨에 따라 ―일반적‖ 예산 적자가 당연한 것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이러한 예산적자를 축소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GDP 대비 예산적자 비율을 서 구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어 적자 비 율이 90년대 초반 기록의 25%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1년에는 큰 폭으로 상승하기도 했지 만 다시 하락세를 보여 2003년 6%, 2004년 5%, 2005년 3.2%, 2006년 1.8%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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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정부가 2003년에 착수한 경제 개혁 프로그램은 예산(세금도 포함) 규모를 더욱 축 소하며 꾸준히 국가 경제를 능률화하고 있다.
민영화 정부가 여전히 경제 정책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는 변함이 없지만 1990년대 이후 경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자 했던 정부의 정책은 성공을 거뒀다. 그 예로 정부는 생필품 가격을 유지하는 보조금을 거의 없애고 해외 투자와 수출 촉진을 담당하는 주체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것 외에도 수백 개 공기업의 소유권을 민간에 이전하는 대대적인 민영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정책이 시행된 초기 10년 동안은 다수의 소규모 사업체가 민영화되었는데 지난 2~3년간 그 과정이 점차 확대되어 여러 은행을 비롯해 엘 알 이스라엘 항공, 찜(선사), 베젴 (통신 회사) 등 대형 기업들을 매각해 3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석유 업계가 이 의제의 다음 차례에 올라있다. 정부는 또한 공공 서비스의 일부도 민간 부문으로 이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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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적’ 이스라엘 경제는 건국 초기 25년 동안 연간 약 10%에 근접하는 놀라운 평균 GDP 성장률 을 달성했다. 이는 대규모 이민 물결을 흡수하고, 거의 밑바닥부터 현대적 기반시설과 경제 를 건설하고, 4번의 전쟁을 치르며 국가 안보를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일궈낸 성과이다. 이 스라엘의 이 같은 경제성장은 ‗경제 기적‘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 던 것은 수년에 걸쳐 상당 규모의 유입 자본을 융통성 있게 사용하는—특히 생산 수단에 대 한 대규모 투자—동시에 이민자들을 신속히 흡수하고 생산 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시킨 덕 이 컸다. 그러나 이어지는 1973년에서 79년까지 6년 동안 성장률은 하락세로 돌아서(대부분 선진국 에서도 1973/4년과 1979/80년 석유 파동의 여파로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연평균 3.8%를 기록했다.
1980년대에는 더욱 감소하여 3.1%에 머물렀다. 그러다 1990년대에는 연평균
GDP 성장률 5%를 넘어섰고(2000년에는 7.7%까지 상승), 2005년에 다시 5.2%, 그리고 2006년에도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일인당 GDP는 1990년대 동안 60% 이상 증가하여 2005년에 18,700달러, 2006년 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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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스툴만
달러에 가까운 연간 수치를 기록했다 2006년 이스라엘의 경제 성장률은 타 선진국들의 성장률에 비해 비교적 높게 나타났다. 2006년 OECD 30개국의 평균 GDP 성장률은 총 3.2%를 기록했고, 이는 이스라엘의 성장률 보다 1.9% 낮은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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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경제 상황 경상수지 여타 국가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동시에 고도 성장의 기적을 달성한 이스라엘은 그 대가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역 적자라는 고질적 문제를 겪어야 했다. 높은 수준의 수입과 그보다 훨씬 소규모인 수출 간의 연간 차액은 해외 자원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보 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역대 이스라엘 정부의—최근에 마침내 달성된—기본적인 정책 목표는 ―경제적 독립,‖ 즉 수출이 모든 수입의 비용을 충당하여 적자가 사라지는 수준을 달 성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후 처음 48년 동안 이러한 무역 적자는 계속 증가하여 1949년의 2억 2200 만 달러에서 1996년 101억 달러로 45배(현재 통화 기준)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상대적 기준으로 볼 때 무역 적자는 이 기간 동안 꾸준히 감소했으며, 이는 적자 문제가 점진적으 로 해결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구체적으로, 1950년에는 수출이 수입 비용의 14%만을 충 당한 데 비해 1960년에는 이 비율이 51%를 기록했고, 1996년에는 79%까지 상승했다. 이 시점부터 실질 적자는 하락세로 돌아서기 시작하여 2001년에 47억 달러, 2005년에는 단 7 억 달러로 감소했으며, 따라서 상품과 서비스 수출이 모든 수입 비용을 충당하고도 잉여 자 금이 남는 수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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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수지: 연도
1949~2005 (단위: 현재 US 백만 달러) 수입
상품과 서비스를 포함한 경상 계정
수출
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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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9년 동안 이스라엘의 연간 무역 적자를 모두 합하면 약 1760억 달러(US)에 달했다. 이 누적 적자 중 2/3 가까이는 이민자들이 들여온 자금이나 외국 연금, 해외 유대인 모금 단체들이 보건, 교육, 사회 서비스 기관에 보낸 기부금, 외국 정부들, 특히 미국의 보조금 등의 일방적인 유입금으로 조달되었다. 나머지는 개인, 은행, 외국 정부로부터의 차관으로
순 대외 채무: 1954~2005 (단위: 현재 US 백만 달러) 연도
순 대외채무 총액
조달되었으며,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부터 이 부채를 계속 상환해오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1985년까지 매년 대외 채무가 증가했지만, 85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상환액 이 차입 액을 넘어섰다. 이러한 긍정적 추세가 몇 년간 계속되다가 1995년에 순 대외 채무 가 208억 달러라는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 10년간 채무는 다시 크게 줄어들어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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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으로 떨어졌고, 2002년부터는 점차 플러스로 전환되어 채권국이 됨으로써 이스라엘의 해외 채무보다 ―세계 경제‖에 대한 채권이 더 커지게 되었다(2006년 310억 달러 이상의 채 권 보유).
대외 무역 작은 경제규모와 비교적 제한된 국내 시장을 가진 이스라엘의 성장은 수출 확대에 크게 의 존한다. 따라서 국가의 창조적 자원 대부분이 산업 수출을 확립하는데 투입되었다. 이 같은 투자 금액은 1950년에 1300만 달러, 55년에 5200만 달러, 75년에 14억 달러, 85년 56억 달 러, 2000년에는 308억 달러, 그리고 2006년에는 2005년에 비해 7.5% 증가한 394억 달러를 기록하며 56년 동안 거의 3천 배 가량 상승했다.
최근 몇 년간 전체 상품 수입의 85% 이상이 생산투입요소와 연료였고, 2006년에 그 규모는 472억 달러에 달했다. 이들 상품 중 54%가 유럽에서 수입되었고, 17%는 북남미, 16%는 아 시아, 나머지 13%는 그 외 국가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같은 해 366억 달러에 달하는 이스 라엘 수출 상품 중 33%는 유럽으로, 40%는 미국, 19%는 아시아, 나머지 8%는 그 외 국가 로 수출되었다. 19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대미 산업 수출은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넘어섰고, 2000년부터는 다이아몬드 수출을 제외하더라도 대미 수출 흑자를 기록하 고 있다. 이스라엘의 수출 경쟁력은 관세 무역 일반 협정(GATT)에 가입하고, 유럽 공동체와 공산품 자유 무역 지역으로(1975년), 미국과는 완전 자유 무역 지역으로(1985년) 결정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상품은 유럽연합(EU)과 미국에 모두 면세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국내 생산자들은 자국 시장보다 거의 110배나 넓은 시장을 겨냥할 수 있 게 되었고, 무관세로 유럽에 상품을 수출하기를 희망하는 투자자들을 이스라엘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투자자들은 미국과 유럽으로의 무관세 상품 수출이 가능 한 산업 특구에서 요르단과 이집트 기업들과 합작 사업체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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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스라엘 국내 기업들은 국제 통상 영역 중 자사만의 특화 된 틈새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힘썼다. 외국 산업체들과의 합작 기업 설립 에서는 국내의 혁신 기술과 외국의 대량 생산 및 시장 침투력을 함께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 다. 합작 사업은 전자,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인쇄, 컴퓨터 그래픽 등의 분야에서 이루어졌 다. 이러한 합작 사업 중 다수는 사업 자금 조달에 있어 다음과 같은 6개의 양국 개발 연구 협력 재단과 같은 제도를 통해 지원을 받고 있다. 관련 정부가 후원하는 이러한 재단은 미 국과의 BIRD, 캐나다와의 CIIRDF, 싱가포르와의 SIIRD, 영국과의 BRITECH, 한국과의 KORIL-RDF, 호주 빅토리아와의 VISTECH 등이다.
상품의 수출과 수입 (다이아몬드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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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입 ■ 수출
경제 정세 인플레이션 억제 건국 시점부터 2000년까지 이스라엘 경제는 물가 상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연계 메커니즘 덕에 개인들이 그 결과에 따른 심각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모든 금융 수 행과 급료, 임대료, 저축 계좌, 생명보험 증권, 소득세 등을 좀 더 안정적인 가치(외국 통화 나 소비자 물가 지수 등)와 연계시킴으로써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그 결 과 이스라엘인들은 연간 인플레 율이 한 자리 수든(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 두 자리 수든(1970년대), 세 자리 수든(1980년대 상반기) 관계없이 그들의 생활 수준을 여전히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스라엘 경제는 분명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었으며(예: 투자 성향 감소), 이는 대부분 이 같은 연동제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인플레이션 악화 상황은 1980 년대 중반에 절정에 달했다. 인플레이션이 1983년의 191%에서 1984년 445%로 치솟고 1985년에 위협적으로 네 자리 수를 향해가던 그 해 여름, 리쿠드당의 이츠하크 모다이 재무부 장관과 함께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가 이끄는 국민통합 정부는 노조 총연맹 히스타드룻과 기업 공동 위원회와의 협력 하 에 급진적인 긴급 안정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 결과 인플레 율이 1985년 185%로, 1989 년에는 21%까지 떨어졌다. 이후 하락세를 계속하여 1997년에 7%를 그리고 2000년에는 사 상 처음으로 0%를 기록했다. 2003년에는 최초로 실질 물가 하락이 이루어졌고 인플레이션 은 마이너스대로 떨어져 -1.9%를 기록했다. 2005년 인플레 율은 2.4%였고, 2006년에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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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로 내려갔다.
세켈: 이스라엘의 통화 단위인 세켈 (2007 년 7 월 기준으로 1 세켈=0.24 달러)은 기원전 2 천 년에 이미 금과 은을 지불수단으로 사용할 때 무게를 재는 단위로 알려져 있었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에서 땅과 “그 땅 안에 있는 동굴”을 사기 위해 흥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땅 주인 에프론이 대답하기를,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창세기 23:13, 15-17)
공공 부문 높은 수준의 공공 지출과 특히 그 결과 초래되는 대규모 정부 예산 적자는 항상 이스라엘의 인플레이션률이 높아진 주된 원인이었다. 예산 자금을 대기 위해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 든 자원(국내외 자금원, 국채, 직간접 세)도 지출액을 충당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정부는 반복 적으로 통화팽창에 의한 자금 조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공공 부문이 이처럼 무거운 부담 을 지게 된 주요 원인은 막대한 국방비 지출과 국내외 부채 상황에 드는 비용이었다. 이 두 가지 세목은 지난 3~4년의 기간에 와서야 정부 예산의 2/3에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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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생존력을 얻기 위해서도 인플레이션 억제와 국제수지 적자의 감소, 빠른 경제성장률
유지가 필요했고, 이 세 가지를 달성하려면 최근 몇 년간의 높은 공공 지출을 삭감해야만 했다. GDP 대비 높은 공공 지출 비율은 25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 1980년과 2006년 (당시 정부 예산은 약 600억 달러) 사이에 GDP의 95%에서 49%로 떨어졌다. 2006년에는 국제 수지 흑자가 발생했고, 예산 적자는 GDP의 0.9%로 감소했다. 여전히 정부가 민간의 경제 사업을 촉진하는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민영화를 통해 사업체 경영에 대한 실질적 개입을 줄이려는 정부 정책은 성공을 거뒀으며, 2005년 민영화를 통해 거의 30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조세 제도 이스라엘의 막대한 공공 지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무거운 과세가 필요했으므로 이스 라엘 국민은 수년 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조세 부담을 져야 했다. 건국 후 첫 10년간 세금은 GNP의 12.5% 정도였으나 1960년대에는 그 비율이 25%에 달했고, 1970년 대와 80년대에는 30~40% 사이를 오갔다. 1990년대에는 평균 40% 미만이었고 2000년에는 40.3%를 기록했다. 2003년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총 세금 부담은 GDP의 39.3%로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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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2006년에는 더욱 떨어져 38%를 기록했다. 이는 OECD 국가들의 2004년 평균치인 37.4%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간접세는 주로 15.5%의 부가가치세(VAT)로 구성된다. 이에 더해 자동차, 연료, 담배에 대해 구매세가 부과된다. 유럽연합과 미국에서 수입된 물품은 면세인 반면 그 외 국가에서 들어 온 수입품에 대해서는 관세가 적용된다. 소득과 재산에 대한 직접세는 1950년대 말까지 모든 조세 수입의 25% 이하를 차지했으나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1/3 수준으로, 1980년대 초에는 절반 가까이로 상승했고 1986년에 45%를 기록했다. 이후 직접세 비중은 줄어들어 1995년에는 39%로 떨어졌고 2006년에는 39~43% 사이의 변동폭을 보였다.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은 세계 경제와의 더욱 확고한 통합을 위해 조세 제도에 추가적 변화 를 도입했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수입품에 대한 관세와 구매 세를 꾸준히 줄이고 있고, 법 인세율도 2007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30%로 내렸으며 2010년까지 25%로 추가 인하할 계획 이다. 한계 소득세율 역시 2010년까지 44%를 목표로 점진적으로 줄여나가고 있다.
민간 소비와 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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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소비는 1950년부터 거의 쉴새 없이 계속 증가했다. 1960년 이래 연간 평균 성장률은
6%를 기록했다 (1994년 일인당 9.6%에서 2000년 6.6%, 2006년에는 4.9%로 떨어지기는 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저축은 꾸준히 상당 수준을 유지했다. 1950년대 말까지 민간 가처 분 소득 대비 평균 민간 저축률은 29%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60년대 초에 21%로 하락했으나 1972년에 다시 38%로 증가했고 1981년에도 같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후 그 비 율은 거의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06년에 28.8%로 떨어졌다.
I. 스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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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높은 저축률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에 의해 행해진 대규모 투자(일반적으로 국 가 경제의 모든 활용 가능한 자원의 20~30%)를 지탱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필요 자금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부터의 공공 및 민간 자금 유입분과 정부를 중심으로 한 공공 부 문의 직접 개입으로 조달해야 했다. 지난 10년 동안의 전체 투자는 1995년과 2000년 사이 에 170억 달러에서 228억 달러로 증가했다가 3년 연속 하락세를 보인 후 다시 상승하여 2005년에 221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중 49%에 해당하는 108억 달러는 해외 비이스라엘계 외국인들이 투자한 것이었다).
2006년 초에는 이스라엘에 투자 경험이 전무한 외국인들의 투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이는 이스라엘 경제에 대한 관심과 신뢰가 높아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2006년 해외 비이스라엘계 외국인 투자는 243억 86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러한 증가세는 2007년에도 계속되었다. 정부의 사업과 진흥 정책으로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민간 투자가 많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수년에 걸쳐 자본 투자 촉진법의 다양한 법률안에 반영되었다. 정부는 이 법률을 통해 (이 자율이 감면된) 장기 보조 대출, 총 투자액 비율에 따른 직접 보조금, 연구 개발 자금 지원 등으로 투자자들을 유치했다. 같은 목적으로 조세 감면과 세금 환급 또한 제공되었고, 이러한 혜택은 인구 분산, 수출 촉 진 등과 같은 경제 정책을 이행하는데 있어 특정 투자가 기여한 비중에 따라 할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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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타드룻 – 노동 총연맹 히스타드룻는 이스라엘 노동자들을 대표하고 조합원들에게 직장 을 제공할 산업체를 설립하기 위해 여러 직종 별 노동조합의 연맹으로 1920년에 창설되었 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관은 이스라엘 최대 규모의 고용기관 중 하나가 되었고 국가 발 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70만 명의 조합원을 보유한 새로운 히스타드룻는 국내 노동 조직과 관련된 78개 노 동조합을 결속시켜 단체 협약에 조인하고 그 실행을 감시하는 일을 맡고 있다. 식품, 섬유, 호텔 및 관광 산업, 정부 및 공공 부문 노동자, 사무원, 실무 기술자, 간호사, 연금 수령자 등 이스라엘 경제의 대다수 고용 분야를 대표한다. 공학자, 의사, 학자, 교사, 언론인 등 일 부 직업은 독립적인 노조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하도급 자나 개인적 계약을 통해 고용되는 근로자의 수가 점차 늘어남에 따라 히스타드룻의 영향력이 예전만큼 강하지는 않다.
이러한 지원이 1980년대 GDP 성장을 능가한 자본(생산 능력) 축적의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같은 잉여 생산 능력은 1990년대에 몇몇 부문에서 급진적 도약을 촉진했다.
임금과 근로 조건 이스라엘에서 임금은 아직까지 국내 최대 고용주이며 그 임금률이 모든 경제 부문에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정부와 히스타드룻(노동 총연맹), 민간 부문 고용주 단체 간에 실시되는 3자 협상을 통해 주로 결정된다. 합의된 협약들은 다양한 경제 부문의 임금 체계의 기본 틀을 구성하며, 때로는 내용을 변경하여 물가인상에 따른 보상으로 생계비 수당의 자동 지급을 규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임금 조건은 상당히 고정적인 편이고, 특히 하위 부문에서 더욱 그러하다. 노동력이 부족한 시기에는 노동자 수요가 심한 부문에서 임금이 탄력적으로 상승 하지만, 이스라엘 내 실업 파동 시에는 임금이 크게 줄지 않았다. 2006년 6월 기준 월 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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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NIS 7,759 (약 1,843달러)였다.
다양한 경제 부문의 근로 조건은 노사가 협상한 근로 협약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의 요건은 법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내용은 주당 최대 근무시간 47시간(기업 부문의 2006 년 실질 평균은 주당 40시간 이하), 최저 임금(2006년 NIS 3,585-약 780달러-이고, 2008년 초에 NIS 3,785로 오를 예정), 초과근무 수당, 퇴직급여, 유급 휴가 및 병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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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경제 부문 산업 오늘날 이스라엘은 여러 전통 영역을 포함 대부분의 제조업이 집약적이고 정교한 연구 개발 과 첨단 공정과 수단, 조직을 기반으로 갖춘 선진 산업 국가이다. 이것은 신속하고 집중적 인 발전의 결과이다. 지금의 역동적이고 매우 다각적인 산업 부문은 원래 농기구 제조와 농산품 가공을 위해 19 세기 말부터 설립된 소규모 작업장에서부터 발전한 것이다. 초기에 이들 작업장이 현대적 공장으로 변모하게 된 데는 두 가지 동인이 있었다. 1930년대에 독일에서 기업가와 숙련 기 술자들이 이주해온 것이 첫 번째 동인이었고, 2차 세계대전(1939~45) 중 이 지역 연합군들 이 다양한 생필품, 특히 의복과 통조림 식품을 필요로 했고, 지역에서 필요한 상품들이 전 쟁으로 인해 유럽에서 수입되지 못함에 따라 점차 늘어난 산업 제품 수요가 또 다른 동인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식품 가공, 섬유와 패션, 가구, 비료, 살충제, 의약품, 화학제품, 고무, 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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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틱, 금속 제품 등의 전통 산업이 국내 산업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은
농업 개발, 식품 생산 및 가공, 기반시설 구축, 많은 비 숙련 이민 노동자들에게 신속히 일 자리를 제공하는 것 등에 대부분의 자원이 투입되었다. 산업화의 다음 단계는 국방에 필요한 무기의 개발 및 제조에 집중되었다. 이는 건국 초기의 이스라엘을 위협한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항공 및 군수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새로운 기술을 창출했고, 이러한 기술은 의료용 기기, 전자공학, 컴퓨터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정보통신 등과 같은 이스라엘만의 독자적 첨단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1980년 대에는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던 이스라엘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IBM 등 여러 다국적 기업의 개발 센터를 열었다. 1990년대에는 구 소련 연방에서 과학자, 공학자, 기술자, 의료인 등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이스라엘 산업을 지 금의 정교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출 상품의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천연 자원과 원자재가 부족한 이스라엘의 한 가지 강점은 고급 노동력과 과학 연구소, 연구 개발 센터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산업은 대부분 자국 고유의 과학적 창의력과 기술 혁신을 기반으로 한 제품 개발을 통해 생산된 고부가가치 제품에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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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산업 고용 인력의 수가 정체 혹은 감소했던 대다수 선진국과 달리 이스라엘 의 산업 고용인력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6년 이스라엘의 산업 성장률은 선진국 중에 서 한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지난 20년간 산업 생산은 의료 전자기기, 농업 기술, 정보통신, 정밀 화학,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다이아몬드 세공 분야에서 국제적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 2005년 제조업 계의 고용인력 수는 41만 3천 명에 달했다(이 중 고학력 근로자의 비율이 미국과 네덜란드 다음으로 높았다). 2004년 기준으로 1만 3천 개의 산업설비가 존재했고, 여기서 생산된 580 억 달러 이상의 생산품 중 절반 이상을 수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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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부문별 주요 지표 (2006년) (단위: %) 부문
GNP
노동력
수출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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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 통계청
첨단 산업 이스라엘 산업 중 가장 빠른 성장률(최근 몇 년간 연평균 8%)을 보이는 부문은 첨단 산업 분야이다. 기술과 자본이 집약된 첨단 부문은 정교한 생산 기술과 더불어 연구개발에 대한 상당한 투자를 요하는데, 이 부문에 이스라엘 GDP의 4.4%가 소요되어 단연 세계 최고 수 준을 기록하고 있다. UN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러한 이스라엘 연구 개발 수준은 세계 10위 권 안에 들어간다. 이 모든 요소에 대한 기여가 성공할 수 있는 원천은 기초 연구 개발과 벤처 자본의 대부분을 제공하는 학계 연구소들이다.
첨단 산업 성장이 가지는 중요성은 1965년에 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7%에 불과 했던 첨단 산업이 1985년에 58%로, 2000년에는 70% 안팎으로 증가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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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술 제품 중 거의 80%가 수출되는 반면 낮은 기술의 재래식 기업들은 생산품의 40% 가까이만을 수출하고 있다. 첨단 제품 수출은 1991년 30억 달러에서 2000년에 123억 달러 로 4배 증가했고, 2006년에는 290억 달러(추가로 첨단 기술 서비스 수출도 59억 달러 기록) 로 뛰어올랐다. 2001~2년의 경제 침체 후에 첨단 산업은 2003년에 이미 플러스 성장을 보 이며 가장 먼저 불황을 떨쳐냈다. 2006년에 하이텍의 주 분야가 되는 정보통신기술 생산은 240억 달러에 이르렀다. 기업부문 GDP의 17%를 차지하는 정보통신기술 분야는 고용 인력 이 18만 5천 명을 기록했고, 이 분야의 민간 연구 개발 지출은 33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수 출 규모는 160억 달러에 육박했다. 공공 연구 개발 예산의 90% 이상(2006년 기준 70억 달러)을 첨단 산업 부문에 할당하고 있 으며, 이 중 대부분은 합작 투자 자본의 경로로 전달된다.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 정부는 성공적인 신생 기업들에게 제공한 융자의 상환금 외에도 이 러한 펀드의 해당 지분에서 상당한 배당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스라엘은 앞서 언급한 6개 의 양국간 재단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벨기에,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웨덴, 독일, 네덜란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홍콩, 인도, 터키, 중국과 연구 개발 프로젝트 공동 투자를 위한 협약도 체결한 상태이다.
정보기술(인터넷, 전자 상거래 등)의 시대는 이스라엘 경제, 그 중에서도 특히 첨단 산업 부 문을 이 분야의 세계적 발전의 선두에 위치시켰다.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여러 이스라엘 기 업들은 최고 대기업들에 의해 수십억 달러에 인수되었다. 이스라엘은 비범하고 혁신적인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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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과 고도의 숙련 인력의 활용 가능성으로 인해 신생 기업의 수가 매우 많다. 월 스트리트 와 유럽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이스라엘 기업의 수가 늘고 있는 현상은 국내 첨단 산업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명백히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이스라엘의 다이아몬드 산업 이스라엘은 다이아몬드 생산과 거래에 있어 세계적 중심지이다. 그 주된 원인은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산업이 다이아몬드의 각만큼이나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 엘 다이아몬드는 믿음과 신뢰의 대명사이며, 미 분쟁 원산지와 진품임이 보증된다. 또한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산업은 최첨단 기술과 장인 정신 양쪽에서 모두 세계 최고를 자 랑하며, 원석에서 완성품을 얻는 생산량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의 대규모 생산
재고와 원석과 가공품의 면세 수입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스라엘 다이 아몬드 거래소(IDE)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다이아몬드 거래 시장으로, 운영상의 온갖 기능과 다이아몬드 구매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이 한 곳에 완비하고 있다. 2006년에 다이아몬드 수출액은 130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최대 구매국은 미국(63%)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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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14%)과 스위스(11%)가 그 뒤를 이었다. 이스라엘은 보석 세팅에 사용되는 소형 가공 원석의 전세계 산출량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또한 온갖 크기와 형태의 다이아몬드 가공 시 장에서도 40%의 점유율을 차지하여 생산과 유통 양면에서 다이아몬드 가공의 세계적 중심 지가 되고 있다.
농업 이스라엘 농업 부문은 천연자원, 특히 물과 경지의 부족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집중적인 생산 시스템을 특징으로 한다. 지속적인 농업 생산량 증가는 연구자, 농민, 농업 관련 업계 간의 긴밀한 협력에 기인한 것이다. 이들은 함께 모든 농업 영역에 대해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고 적용한다. 그 결과, 국토의 반 이상이 사막 지대인 국가에 현대적 농업이 정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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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농부와 과학자들은 어려운 환경과 제한된 수자원에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이들 의 경험은 특히 개발 도상 국들과 연관된다. 이스라엘의 성공은 농업의 번영 발전에 온 힘 을 쏟아 부으며 땅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기능에 달려있음을 전세 계에 증명해 보인 농부와 과학자들의 결의와 창의력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연구 개발과 산 업계 간의 긴밀한 협력은 농업기술 해법—특히 수자원 해법—을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시장 지향적인 기업 농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스라엘의 농업은 악조건에 맞서 오랜 기간 힘겹게 투쟁하고 농경지와 부족한 용수(현대적 인 담수화 공장에서 얻은 물까지 포함. 이 기술 노하우는 수출 성공사례이다)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얻어낸 성공일화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적인 조국의 땅 에 다시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주로 이념적인 이유로—가장 먼저 힘을 쏟은 부분은 불모지를 비옥한 땅으로 가꾸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농업이 지금처럼 성공한 비결은 바로 농민들과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다. 이들은 함께 협력하여 기 술 진흥, 새로운 관개 기술, 혁신적 농업 기계 장비를 비롯해 농업 전 분야의 정교한 기법 들을 개발하고 적용한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쟁취한 이래 총 경작지는 2.6배 증가하여 약 110만 에이커에
이르렀다. 1980년대 중반까지 관개 농지는 약 60만 에이커로 8배 증가했다. 그러나 집중적 인 도시화와 용수 부족이 심화됨에 따라 지금은 50만 에이커 미만으로 줄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농업 정착촌의 수는 400에서 750개로 증가했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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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에서 5% 미만으로 감소했다. 오늘날 이스라엘 식량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곡물, 지방 종자, 육류, 커피, 코코아, 설탕 등은 수입하여 보완하고 있다. 수입량 전체는 농산물 수출로 충분히 상쇄되고 도 남는다. 농장 생산물은 주로 유제품과 가금류이다. 이에 더해 다양한 꽃과 과일, 채소도 국내에서 재배되고 있는데, 특히 농민들에게 유럽시장에서 상품을 먼저 내놓을 수 있는 이 점을 주는 따뜻한 지역에서 주로 생산한다. 겨울철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의 온실 역할을 하 며 멜론, 토마토, 오이, 고추, 딸기, 키위, 망고, 아보카도, 다양한 감귤류, 줄기가 긴 장미와 스프레이 카네이션을 수출한다. 농업 생산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과 2006년 사이에 11%에서 1.5%로 감소했 고, 농산품 수출 비중은 전체 수출의 60%에서 2% 미만으로 하락했다. 그러나 연간 수출액
은 1950년의 2천만 달러에서 2006년 10억 달러로 절대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는 특히 혁신 농법의 광범위한 도입과 현대적 관개 및 물 처리 기술, 수출 중심의 농작 덕에 가능해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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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건국 초기에 주택 건축은 전체 건설 물량의 84%를 차지했다. 그 후 기반시설 건설이 증가 하면서 주택 건설은 70~75% 사이를 오르내리다가 1991년에 새로운 이주민들의 수요를 맞 추기 위해 86%로 다시 껑충 뛰어올랐다. 그 결과 1991년 건설 부문의 생산량도 급격히 증 가했으며, 이 해는 아파트 건설 착수 건도 사상 최고치인 83,500건을 기록했다. 이후 연간 수치는 꾸준히 하락하여 2004년에는 29,000건을 기록했다. 신규 아파트 완공 수의 최고 기 록은 1992년의 70,100건이었고, 2005년에는 31,700건으로 감소했다. 한때 이스라엘 경제의 선도적 분야이자 경제활동의 지표가 되었던 건설 부문은 2006년 GDP의 5%만을 차지하며 1950년에 비해 30% 하락한 수치를 나타냈다. 초기에는 전체 건설의 대부분이 정부의 주도와 투자로 이루어졌지만 1958년과 89년 사이에 정부의 투자 비율은 67%에서 16%로 점진적으로 감소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그 비중이 일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수십만 이민자들의 갑작스러운 유입으로 생긴 급격한
수요 증가를 민간 부문이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지난 몇 년간 이스라엘 부동산에 대한 해 외 수요와 더불어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상승은 국내에서 값비싼 아파트의 가격 상승과 저가 형 아파트의 가격 하락이 동시에 일어나는 다소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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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기업들은 금속 구조물과 조립식 자재 및 부품—문, 창문, 위생설비, 배관 부품, 붙 박이 설치물과 부속품 등—의 설계 및 제조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들 제 품은 세계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세계 곳곳의 주요 건설 현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운송과 통신 운송과 통신 부문은 가계를 비롯해 다른 모든 경제부문을 뒷받침하는 기반 산업이기 때문에 그 중요도는 국내 경제의 수치상으로 나타나는 작은 비중을 훨씬 넘어선다. 이것은 생산 부 문이기보다는 서비스 부문이며, 다른 모든 현대적 경제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산 분야보 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이 부문 중 항공업이(관광업의 비슷한 성장 덕 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으며, 통신 부문의 성장은 이보다도 한층 더 빠르게 이루어지 고 있다. 운송과 통신 부문은 2006년 GDP의 7%, 상품 및 서비스 수출의 약 8%를 차지했으며,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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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인력의 5%를 고용하고 있다. 이 부문 생산량의 36%는 육로 운송이, 20%는 선박과 항 공, 39%는 통신, 나머지는 다양한 서비스 분야가 점유하고 있다. 1950년대 초반 이후 수송 선단의 총 톤수는 10배 이상 증가했으며, 현재 항공기 이용 승객 의 수는 100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같은 기간 동안 도로 길이는 2배로 늘었으며, 버스 차량 수는 3배 이상, 트럭의 수는 10배로 증가했다.
관광 이스라엘의 지리적 다양성과 고고학 및 종교 유적지, 그리고 지중해와 킨네렛 호수(갈릴리 호), 홍해, 사해의 연중 햇빛이 비치는 온화한 날씨와 현대적 휴양시설은 관광객들을 끌어들 이는 원천이 된다. 2000년에는 사상 최고 수치인 241만 명의 관광객이 이스라엘을 찾았다 (1950년 3만 3천, 1960년 11만 8천, 1970년 44만 1천, 1980년 118만, 1990년 134만 명). 정 치 상황으로 인해 2001년에는 그 수가 120만으로 줄었으나 2006년에는 다시 184만 명 으로 증가했고, 2007년 말에는 약 23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관광객 중 57% 가
구 욥바: 돌 골목과 관광객 • 관광성
량은 유럽인들이었고, 32%는 북 남미에서, 8%는 아시아에서 온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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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업은 2006년에 28억 달러의 외화 수입을 올리며 총 수출 수입의 5%, 서비스 수출의 16.8%를 차지했다. 관광 산업은 GNP의 3%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85%의 외화 부가가치를 지니고 있고(국내 수 출업계 중 부가가치 부문의 선두), 약 8만 명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관광업은 이스라엘 경제 성장 계획의 중요한 요소로서, 향후 그 거대한 잠재력이 적극적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예루살렘: 나할라트 시바 지구 거리의 재즈 밴드 • 관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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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극과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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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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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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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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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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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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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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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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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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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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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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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국제사회의 문화적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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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스라엘은 오래되고도 새로운 국가로서 국토는 작지만 문화적으로는 활발하고 다양한 인구 로 구성되어 있다. 4천 년의 유대 유산, 한 세기가 넘는 시온주의, 그리고 반세기가 넘는 근 대 국가의 역사는 이미 고유한 정체성을 창조해낸 하나의 문화에 기여하는 동시에 각기 다 른 70개 공동체의 독특한 특성을 고스란히 보존했다. 다수의 이민자가 포함된 이스라엘 사 회의 창조적 표현은 전통과 혁신을 융합하고 이스라엘만의 개별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에서 하나의 진로를 찾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흡수했 다. 문화적 정체성을 향한 끝없는 모색은 창조력을 통해 광범위한 예술 형태로 표현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일상적 삶의 일부로 수용하며 누리고 있다.
)'ג:' (דברים ח... כי לא על לחם לבדו יחיה האדם... ...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신명기 8:3)
그림: 노암 나다브
연극과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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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연극은 문학과는 달리 고대 히브리 문화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까 지 동유럽 유대인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이디쉬극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었다. 히브리 극은 1917년 모스크바 소재의 하비마(무대)라는 히브리 극단의 창단으로 시작되었다. 이 극단은 러시아 감독 콘스탄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지도 아래 있었고, 한나 로비나(1892~1980)라는 배우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후에 '히브리 극의 영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931년 에 하비마 극단은 텔아비브에 영구적 근거지를 설립했다. 이스라엘의 연극은 현대와 고전, 토착성과 외래성, 실험과 전통 등의 서로 다른 여러 요소 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배경을 지닌 극작가와 배우, 감독, 제작자들이 외국적 요소와 국내 요소를 혼합하여 차츰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 연극을 창조해냈다. 이스라엘 연극계는 상당히 활발한데 전문 레퍼토리와 다수의 극장들 그리고 수십 개의 지방 아마추어 극단들이 전국에서 대규모의 열성적 관객들을 대상으로 공연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스라 엘의 여러 극단은 동서 유럽과 미국 순회 공연을 가졌고, 에든버러 페스티벌, 베를린 페스
예루살렘 칸 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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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벌 등 국제적 축제 행사에 참가했으며, 유럽, 미국 및 기타 지역의 주요 연극 행사에도 등장했다. 다수의 세미 프로 및 아마추어 그룹들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유명 극작가로는 고(故) 하녹 레빈, 여호슈아 소볼, 힐렐 미텔푼크트, 고(故) 에프라임 키숀 등이 있으며 이들 중 몇몇은 국제적으로도 인정 받고 있다. 대형 전문 극단들은 4대 주요 도시에 위치해 있다. 하비마 극단: 이스라엘 국립 극단으로서 텔아비브의 3개의 공연홀로 이루어진 복합건물(총 1,520석)에 자리잡고 있다. 연간 3만 명이 넘는 예약 관객들에 힘입어 평균 객석 점유율이 약 90%에 이른다. 극단 레퍼토리는 유대 관련 주제의 전통극, 현대 히브리 극작가들의 작 품, 세계적 고전과 드라마, 코미디의 번안물 등이 있으며, 때때로 국제적으로 이름난 연출자 들을 작품에 참가하기도 한다. 카메리 극단: 1970년 이후 텔아비브 시립 극단으로 자리잡은 카메리 극단은 이스라엘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무대에 올린 최초의 극단이다. 중요한 이스라엘 고유 드라 마 시리즈와 주요 고전 및 현대적 히트작의 개작물 등의 생생한 레퍼토리로 히브리 연극의 발전에 꾸준히 기여하고 있다. 4개의 공연 홀을 보유한 새로운 최신식 복합건물에 자리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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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텔아비브 공연예술센터와 인접해있다. 이타이 티란이 햄릿 왕자 역을 맡아 공연한 카메리 극단의 햄릿은 국내와 해외 모두에서 대대적인 호평을 이끌어냈다. 수상에 빛나는 이 연출작은 케네디 공연예술 센터의 워싱턴 페스티벌에서 셰익스피어 작품 중 하나로 공연 되었다. 하이파 시립 극단: 고전과 현대극을 망라한 해외 연극과 이스라엘 작품을 공연하는 레퍼토 리 극단이다. 브에르셰바 극단: 현대극과 오리지널 작품, 번안된 고전 및 해외 현대극을 공연하는 레퍼토 리 극단이다. 베이트 레이신 극단: 텔아비브에 소재한 이 극단은 이스라엘 작품과 번안된 해외 현대극을 공연하는 레퍼토리 극단이다. 아랍 극단: 성인 대상의 전문 아랍어 극단으로, 여러 아랍국가의 오리지널 작품과 번안된 현대극을 상연한다. 베이트 하게펜 극단: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아랍어 극단으로, 오리지널 작 품과 현대극, 해외작 등을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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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극단: 예루살렘에 있는 유일한 레퍼토리 극단으로, 수백 년 된 터키 식 호텔을 개조한 건물에 자리잡은 독특한 공연장에서 현대극과 고전극을 함께 공연한다. 게셰르 극단: 구 소련 연방에서 이주해온 신규 이민자들에게 예술적 표현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1991년에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수준 높은 러시아어 작품들을 선보였다. 공연 작들 이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찬사를 얻은 뒤 지금은 히브리어 연극을 올리며 주류 이스라엘 연 극계로 진입했다. 이 극단은 또한 전세계 유명 페스티벌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해 공연을 펼 쳤다. 클리파 극단: 무용가이자 연출가인 이디트 헤르만과 배우이자 음악가인 드미트리 티울파노 프(러시아)가 1995년에 창립한 극단이다. 이곳의 배우들은 연극, 무용, 디자인, 음악과 같은 예술 영역을 함께 엮어서 보여준다. 작품 대부분이 무언극인 이 극단은 일년에 2~4개의 신 작을 선보인다. 대다수 작품이 제한된 기간 동안 공연되며, 일부는 특별한 장소에서 단 한 번만 공연되기도 한다. 어린이 청소년 극단: 이 극단은 전국의 학교와 문화 센터에서 서로 다른 3개 연령 집단을 위한 연극을 상연한다. 드라마 및 연극 수업을 지도하거나 학교의 특별 워크숍에 지도 강사 를 파견하기도 한다. 아코 페스티벌: 비주류 연극 페스티벌로서, 이곳에서 새롭고 실험적인 이스라엘 작품이 초 연
된다. 실내 공연들의 경합과 야외 및 거리 공연, 해외 초청 공연 등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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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연극 페스티벌: 하이파에서 개최되는 페스티벌로, 아동용 신작을 공연하고 경합을 개최하며, 해외 초청 공연도 상연한다. 기차 극단: 1981년에 예루살렘에 창립된 인형 극단이다. 이 극단은 어린 아동들을 위하여 완전한 공연에서 다채로운 이야기 극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과 가족 전체를 위한 길거리 페 스티벌을 제공한다. 또한 매년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연기, 연출, 관련 무대 직종에 대한 교육 과정은 텔아비브 대학,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 베 이트-쯔비 공연예술 학교(라마트 간), 니산 나티브 연기 스튜디오(텔아비브와 예루살렘), 키 부츠 세미나의 드라마 스쿨에서 제공하고 있다.
F. 스클라
예루살렘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 포스터 • 나본 아트 제공
연예 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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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오락이라는 개념은 1940년대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히즈바트론, 마타테, 바짤 야로크 등의 극단과 함께 처음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 다양한 군부 대 소속 공연단들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군복무 중에 커리어를 시작한 이스라엘 유명 연예 인으로는 하임 토폴, 시 헤이만, 미리 알로니, 도리트 루베니, 야르데나 아라지 등이 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코미디 그룹 하가샤시 하히베르가 유명세를 떨쳤고, 후에 이스라엘의 클래식 코미디가 된 작품들을 수십 년간 공연하며 마침내 이스라엘 예술 부문의 평생 공로 상을 수상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대중 오락의 주요 통로이기는 하지만, 코미디언과 가수, 음악가, 밴드, 그룹들이 펼치는 라이브 공연도 전국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리타 • 이스라엘 공보부/ A. 벤게르숌
부카라 앙상블 • Y. 로에프 게르숌 일부 가수들은 스타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 예로는 아릭 아인슈타인, 슐로모 아르치, 마티 카스피, 리타, 다나 인터내셔널, 코린 알랄, 하바 알베르슈타인, 샬롬 하노크, 예후디트 라비 츠 등이 있다. 티팩스, 마시나, 아트라프, 에트닉스, 프렌즈 오브 나타샤, 베이트 하부보트 등의 그룹도 스타로서 인기를 끌었다. 두두 피셔, 고(故) 오프라 하자, 라미 클라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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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브 게펜, 다비드 브로자, 노아(아히노암 니니)와 같은 일부 아티스트들은 해외에서도 유 명세를 떨쳤다. 1998년에 이스라엘 성전환 가수 다나 인터내셔널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서 우승하면서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그녀의 노래 ―디바‖는 그 후 최고의 유로비전 노래 중 14위로 선정되었다. 최근 그녀는 자신의 11번째 앨범 ―하콜 제 레토바(다 잘될 거야)‖를 발표했다. ―레미제라블‖과 ―사운드 오브 뮤직‖ 등 히브리어로 번안된 대형 뮤지컬들이 재공연되어 열 광적 환호를 받았다. 이스라엘 전국민 사이에서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지중해 뮤지컬 장르가 있다. 이 것은 주로 아랍과 그리스 지역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이며, 보아즈 샤라비, 예후다 폴 리케르, 사리트 하다드, 아비후 메디나, 마르갈리트 짜아나니, 제하바 벤, 오페르 레비와 같 은 가수들이 공연을 펼친다. 신인 가수로는 에얄 골란, 아미르 베나윤, 미리 메시카 등이 있 다. 엘리 야츠판과 아디 아슈케나지와 같은 새로운 세대의 단독 연기 코미디언들도 상당한 팬 층을 거느리기 시작했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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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영화산업은 1950년대에 시작된 이래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24번 언덕은 대답하 지 않는다‖나 ―그들은 열 명이었다‖와 같은 이스라엘인들이 제작 및 연출한 최초의 작품들 은 당시 이스라엘 문학처럼 영웅물의 틀에 주조한 것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일부 최근작들은 이스라엘인들의 과거 경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과 그 자녀들(길라 알마고르의 ―아비야의 여름‖과 그 속편 ―도밈 나무 아래서‖), 새로운 이 민자들의 힘겨운 생활(하나 아줄라이와 슈무엘 하스파리 연출의 ―슈후르,‖ 레오니드 고리베 츠 연출의 ―레몬을 곁들인 커피‖)과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 또 다른 작품들은 현재 이스 라엘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아랍의 대결을 다루기도 하고(우리 바르바슈의 ―장벽을 넘어‖), 보편적이면서도 다소 동떨어지고 쾌락주의적인 사회의 맥락을 배경으로 하 기도 한다(―사이렌의 노래.‖ ―아그파가 본 세상,‖ ―텔아비브 스토리‖).
말레 텔레비전 영화 예술 학교 제공
지난 5년 동안에도 이스라엘 영화는 새로운 도약을 일궈냈다. 요세프(요시) 세다르의 ―캠프 파이어‖는 아버지의 죽음 후 가족의 원동력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80년대 예루살렘의 독실
한 시온주의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며, 니르 베르그만의 영화제 수상작 ―부러진 날개‖ 역 시 가족을 잃은 이후의 문제들과 그것을 받아들여야 함의 필요성을 다루고 있다. ―세상의 끝 에서 좌회전하라‖는 광야의 이민자 마을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이문화(異文化) 간의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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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그렸으며, ―아비바, 내 사랑‖은 이스라엘, 상하이, 도쿄에서 10개의 상을 수상한 작품이 다. 또 한 사람 주목할 만한 유명 감독으로 에이탄 폭스가 있다. 폭스의 영화로는 아랍-이스라 엘 분쟁을 배경으로 텔아비브의 현대적 도시 생활을 탐구한 ―버블‖과 이스라엘 방위군 내 동성애적 사랑과 욕망을 그린 ―요시와 야거,‖ ―물 위의 산책‖ 등이 있다. 폭스는 또한 낡고 도 고상한 텔아비브 지역에 사는 환멸에 빠진 이스라엘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인 유명 TV 시리즈 ―플로렌틴‖(1997)을 연출하기도 했다. 2007년에 이스라엘 영화는 해외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상을 수상했다. 요세프 세다르 는 제 1차 레바논 전쟁에 관한 영화 ―뷰포트‖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그 외 11개의 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로스 앤젤레스에서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가 선정한 오스카 시 상식의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부문의 해외 후보작 5편에 들기도 했다. 드로르 샤울 감독의 ―달콤한 진흙‖은 선댄스 영화제의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휴가를 떠난 초정통파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다비드 볼라크의 ―나의 아버지, 나의 주인‖은 트리베 카 영화제에서 외국 영화 중 최우수상을 받았고,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와 쉬라 게펜이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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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 영화 부문 후보에 오른 ―뷰포트‖의 포스터 • ―뷰포트‖ 제작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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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 텔레비전 영화 예술 학교 제공 출한 ―젤리피시‖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했다. 또 다른 깜짝 수상작으로는 에란 콜리린의 영화 ―악단의 방문‖이 있는데, 한 이집트 경찰 밴드가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가 멤버들이 길을 잃고 이스라엘의 예상치 못한 색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칸에서 국제평론가상, 청소년상,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 등 3개의 상을 수상했다. 이스라엘 여배우 하나 라슬로는 이스라엘 감독 아모스 기타이의 영화 ―자유 지 대‖에서 맡은 역할로 2005년 제 58회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여 러 영화와 감독들이 최근 몇 년간 국제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받았다 해외에서 성공을 거두는 이스라엘 영화가 많아지고 국내 로케이션 촬영으로 달러를 벌어들 이는 외국 영화와 합작 영화들이 늘어남에 따라 영화 수출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산업통 상노동부 산하 기관인 이스라엘 필름 센터는 국내외 제작사들의 이스라엘 내 영화작업을 진 흥하고, 전문 중개기관 조율에서부터 재정적 인센티브 제공에 이르는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 하고 있다. .예루살렘 시네마테크에서 개최되는 이스라엘 필름 페스티벌과 같은 대규모 행사와 하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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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데롯에서 열리는 이와 유사한 행사들, 그리고 해외의 이스라엘 영화제들은 모두 이스라엘 영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 개조한 예루살렘 시네마테크는 수천 편의 영화 필름과 연구 도서관, 감상 홀,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대사관이나 문화 단체, 시민 단체들과의 협력 하에 주 제별로 주기를 정해 정기 상영을 실시하며, 각본가와 감독, 배우들이 함께 참석한다. 1984년 부터는 매년 비경쟁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 축제를 통해 우수한 영화와 비디오 작품 다수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성인들에게 제공하는 교육 과정은 참석률이 매우 높으며, 예루 살렘의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은 대중 매체에 대한 비판적 분석 능력을 키워준 다. 텔아비브와 북부 도시 로시 피나에는 시네마테크의 지부가 자리하고 있다. 예술극장의 영화들도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레브 체인은 전국에 걸쳐 친밀한 환경에서 영화를 제공하고 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 있는 스필버그 필름 아르카이브는 유대인 및 이스라엘인들의 생활 과 더불어 유대교를 주제로 한 영화 관련 자료를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 다. 중앙 시온주의 기록보관소와 함께 히브리 대학이 운영하는 이 자료보관소의 주요 활동 은 유대 영화를 수집, 보존, 분류하고, 전국의 연구자, 영화 및 TV 극작가, 제작자들이 이 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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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열정적 아마추어들과 소수의 훈련 받은 전문 음악인들이 교향악단과 합창단, 심지어 오페라단까지 구성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함에 따라 음악은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적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적 수준의 음악 활동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수백 명의 음악 교사와 학생, 작곡가, 연주가, 가수, 그리고 수천 명의 음악 애호가들이 유럽의 나치주의의 위협을 피해 이스라엘로 들어온 덕분이다. 폴란드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의 주도로 창단된 팔레스타인 필하모 닉 오케스트라(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36년 텔아비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 니니의 지휘로 첫 연주회를 가졌다. 얼마 안가 이 관현악단은 이스라엘 음악생활의 중심이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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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적으로 뛰어난 오케스트라의 반열에 올랐다. 그 직후에는 한 라디오 오케스트라(현 예루살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창단되었는데, 이들의 연주 중계 방송 은 수만 명의 청취자들을 끌어들였다. 이후 이스라엘 챔버 오케스트라, 브에르셰바 신포니에타와 하이파, 네타냐, 홀론, 라마트 간, 리숀 레찌욘 지역의 오케스트라들, 그리고 전국의 키부츠 회원들로 단원을 구성한 이스라엘 키부츠 오케스트라 등이 추가로 창설되었다. 1980년대 초에 뉴 이스라엘 오페라는 매우 전문적 수준의 공연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몇 년 앞서 최초의 상설 오페라단이 해체된 뒤 다소 식어가던 대중들의 오페라 작품에 대한 열정 을 되살렸다. 1990년대 초반에 이스라엘의 음악 생활은 구 소련 연방에서 1백만이 넘는 유대인이 대거 유입되면서 일대 전환을 맞았다. 이 이주민 중에는 연주가, 가수, 음악 교사 등 전문 음악인 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새로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챔버 오케스트라, 소규모 앙상블이 창 단되고, 전국의 학교, 음악학교, 지역센터의 교육 체계에 재능과 음악적 활력이 활발히 투입 된 데서 이들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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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1930년대에 시작된 실내악의 전통에는 국제적인 찬사를 받은 여러 앙상블과 합창단이 있으며, 이들은 1990년대의 이민 이후 그 범위와 종류를 확장해 나갔다. 두각을 나타낸 단 체로는 레호봇 카메라타, IDF 교육부대 챔버 오케스트라, 라마트 하샤론 카슈타니오트 카메 라타 등이 있다. 많은 대도시와 소도시들이 자체 합창단을 후원하고 있고, 합창음악을 중점 적으로 소개하는 예루살렘 예배의식 음악, 아부 고쉬 교회의 성악, 찜리야 페스티벌 등도 있다. 독주회부터 광범위한 고전 작품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에 이르는 음악 공연은 가이샤라와 벳 스안에 있는 재건된 로마 원형 경기장과 같은 역사적 장소와 두 개의 대형 콘서트 홀, 즉 텔아비브의 만 오디토리움과 예루살렘의 국제 컨벤션 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좀 더 규모가 작은 공연장으로는 예루살렘 시어터 콤플렉스, 텔아비브의 새로운 공연예술센터, 텔아비브 와 이스라엘 박물관, 그리고 전국의 소도시와 키부츠에 위치한 문화센터 등이 있다. 이스라 엘의 음악회 단골 관객들은 열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관객들의 이러한 특징은 유명 초청 음 악인과 세계적인 이스라엘 독주자들에게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 는 이스라엘인 연주자로는 핀카스 주커만, 슐로모 민츠, 다니엘 바렌보임, 이츠하크 펄만 등 이 있으며, 이들은 매년 이스라엘 음악계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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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개최되는 세계적 수준의 음악 행사에는 국제 하프 콘테스트, 아르투르 루빈스 타인 피아노 경연대회가 있다. 엔 게브 키부츠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과 크파르 블룸 키 부츠의 실내악 페스티벌, 에일랏의 홍해 재즈 페스티벌과 같은 지역 음악제들이 안목 높은 청중들을 끌어들이는 한편, 전세계에서 온 단체들이 음악, 연극, 무용을 공연하는 이스라엘 페스티벌은 매년 봄마다 3주간 예루살렘을 문화 도시로 만들어준다. 이스라엘 특유의 음악은 1940년대 중반에 전문적 작곡이 시작되면서 발전해왔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전통음악, 독일 낭만파와 후기 낭만파의 영향, 그 후 유럽 작곡가들의 강렬한 작 품들이 모두 이스라엘 음악에 각자의 흔적을 남겼지만, 전통적인 동양적 멜로디와 고대 기 도문 영창을 통합시킨 이른바 ‗지중해‘ 양식의 새로운 현대적 이스라엘의 표현방식이 점차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유럽 태생의 이스라엘 제 1세대 작곡가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한 뒤 새로운 작풍의 곡 을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다. 폴 벤-하임은 확장된 음조를 활용해 신구와 동서를 조화 시킨 후기 표현주의 양식을 만들어냈고, 오에돈 파르토스는 출처가 확실한 민속을 융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작곡 기법을 발견했다. 알렉산더 우리아 보스코비치는 대중적인 표현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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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작곡에 사용했고, 요세프 탈은 이스라엘에 전자음악 작곡의 기초를 세웠으며, 모르데카 이 세테르는 예멘의 멜로디와 리듬을 자신의 작품에 통합시키는데 집중했다. 대다수가 직간접적으로 1세대 작곡가들의 제자였던 2세대 작곡가들은 히브리어의 자음과 어조, 유대 예배식과 전통과의 연관성, 동구권으로의 통합과 히브리어를 결합시킨 음악적 표현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최근에 활동하는 3세대 작곡가들은 동서의 전통을 결합 시키고 일부 대중음악 장르의 혁신성을 끌어안으면서, 민족적 특징을 지운 국제적 작곡법에 참여하고 음악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극복하고, (예후다 폴리케르의 음악에 나타난 것처럼) 음악 내부의 장벽을 깨부수려는 열망을 표출하고 있다. 재능 있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많은 음악학교에 입학하거나 수백 명의 개인 강사에게 교습 을 받으며 음악 교육을 시작한다. 이 중 다수는 국내의 청소년 오케스트라에 입단하여 경험 을 쌓기도 한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 있는 음악과 무용 학교의 학위과정에서는 더욱 심 화된 학습을 제공한다. 성악가와 연주가, 실내악단을 위한 마스터 클래스는 예루살렘 음악 센터와 여러 학교에서 이스라엘을 방문한 국제적 음악가들이 종종 지도를 맡는다. 고등교육 기관에서의 음악 교육과 연구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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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 강좌가 설립되면서 1960년대 초에 그 막이 열렸다. 이후 텔아비브 대학과 바르 일란 대학에도 음악학과가 추가로 신설되었다. 2개의 전공 과정이 제공되었는데, 유대 음악, 그리 고 동구/세파르디 사회의 음악에 특히 중점을 둔 이스라엘의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의 음악 이 그것이다. 초창기 개척자들은 이스라엘에 건너올 때 그들의 노래도 함께 가지고 들어와 원래 가사를 히브리어로 번안하거나 간직해온 선율에 새로운 히브리 가사를 붙였다. 그 후 계속된 이민 행렬이 들여온 음악 양식의 요소들을 멜로디에 통합시켜 수천 개의 곡들이 작곡되었다. 아 랍과 예멘의 전통음악에서 현대적 록과 팝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지닌 멜로 디에 때로는 성서나 전통적 텍스트를, 때로는 이스라엘 시인과 작사가들의 현대적 시구를 붙여 완성하였다. 전형적인 히브리 노래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다양한 주제와 스타일 하에 히브리어로 쓰여진 노래들과 쉬르 히브리(‗히브리 노래‘)를 구분하고 있다. 히 브리 노래의 노랫말은 이스라엘의 소리와 가치, 감정을 전달하며, 멜로디는 슬라브권의 영 향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 노래들은 지난 세기 동안 유대민족의 국가적 삶에 일어난 커다란 역사적 사건과 함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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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이스라엘의 꿈과 고통, 희망을 기록해왔다. 이들은 모든 민요가 그러하듯 보편적인 정서 를 표현하는 동시에 국가와 국토에 대한 사랑과 같은 이스라엘의 정서도 뚜렷이 표현하고 있다. 이는 국민 누구나 다 아는 노래이며, 이스라엘 문화 유산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건국 이전의 노래부터 최근 만들어진 노래까지 자국 노래들을 즐겨 부른다. 공공 홀과 가정에서, 키부츠의 공동식당과 지역사회 센터에서, 산책을 하면서 또는 모닥불 주위에서 종종 노래 지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피아노, 아코디언, 기타의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노래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초기 개척시대와 독립을 위한 투쟁, 전쟁 의 승리, 먼저 간 친구, 또 다시 찾아오는 희망과 사랑의 순간에 대한 향수와 애국심이 불 러일으킨 일체감을 맛볼 수 있다.
현대 음악 이스라엘의 현대음악은 매우 다양하고 때로는 극히 대담하다. 가령 힙합 밴드 하다그 나하 지금까지의 노래 눈물과 웃음 그들의 목소리, 시대의 스타들. 태양과 바다 빵, 세계, 씁쓸함과 달콤함 그리고 존재했던 그 모든 우리가 떠나 보내야 했던 것들 지금 그 노래 안에 살고 있네 작사: 나탄 요나탄 평화의 노래 태양이 떠올라 아침 햇살을 비추게 하자, 가장 순수한 기도도 우리를 되돌려 보내지 않으리니. 촛불이 꺼져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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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속에 묻혀버린 이, 쓰라린 눈물도 그를 깨우지 못하고 그를 다시 데려오지 못하리. 그 누구도 우리를 어두운 죽음의 심연에서 되돌리지 않을 것이니, 여기서는 승리의 환호도 찬양의 노래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 후렴: 그러니 평화의 노래만을 부르자, 기도를 속삭이지 말고. 평화의 노래를 부르자 큰 함성과 함께. 태양이 꽃 사이를 관통하게 하자, 뒤돌아보지 말고 떠난 이에게서 벗어나자. 희망으로 눈을 뜨자, 총을 겨냥하지 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자, 전쟁의 노래가 아닌. 그날이 올 거라 말하지 말고, 그날을 쟁취하자, 이것은 꿈이 아니니까, 그리고 모든 도시의 광장에서, 평화만을 소리치자. 작사: 야코브 로트블리트/ 작곡: 야이르 로젠블룸
시는 음악을 이용해 정치적 냉소를 표현한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히트곡 중 하나인 ―시라 트 하스티커(영어로 ―스티커 송‖)는 이스라엘 소설가 다비드 그로스만과 함께 가사작업을 했다. 이 곡의 가사는 이스라엘의 자동차에 붙이는 광고 스티커들에서 볼 수 있는 슬로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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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합쳐놓은 것이다. 대립되는 정치적 슬로건들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정력적이고 아이러 니컬하며 때로는 부조리한 이스라엘인의 삶의 초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단 레이칼 프로젝트와 같은 앙상블들은 에티오피아의 음악적 유산에 중동의 영혼과 예배 식의 영향을 접목시켰다. 티팩스, 마시나, 크니시야트 하세켈 등의 밴드와 솔로 아티스트 에 후드 바나이, 슐로모 아르치, 사리트 하다드 등은 모두 이스라엘 주류 음악계의 베테랑들임 에도 지금까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 대중음악계의 신인들 중 다수는 TV 프로그램 코카브 놀라드(스타 탄생)를 통해 등 장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음악 쇼 ‗아메리칸 아이돌‘의 이스라엘 버전이라고 할 수 있 다. 니네트 타옙, 하렐 모얄, 예후다 사도 등이 이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커 리어를 시작한 대표주자이다. 2007년 우승자는 보아즈 마우다였으며, 그의 음악에서는 예멘 계 이스라엘 가정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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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키부츠 현대 무용단 제공
유대인들의 공동체적, 종교적 삶에서 춤은 성서 시대부터 기쁨과 슬픔의 표현으로 여겨졌으 며, 오늘날에는 종교, 국가, 지역사회, 가정의 축하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일부가 되고 있다. 현대 무용은 두 가지 경로로 발전해왔다. 첫째는 초기 정착민들이 조상의 고국을 재건하는 과정에 함께한 민속 무용이 발전한 형태이고, 둘째는 전문 안무가가 창작하고 훈련된 무용 수가 공연하는 무대 작품으로 이어진 예술 무용의 구축이다. 예술의 한 형태로서의 무용은 1920년대에 유럽의 문화적 중심지에서 새로 이주해온 무용 교사들과 애호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건국 후에는 다양한 지향점과 스타일을 기 반으로 한 여러 무용 단체들에 의해 매우 전문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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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에 자리잡고 있는 십여 개의 주요 전문 무용단이 국내 전역과 해외에서 다양한 레 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이스라엘 발레단: 이스라엘 발레단은 예술 감독 베르타 얌폴스키와 힐렐 마르크만이 세운 고전 무용 스튜디오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스라엘 유일의 전문 고전 발레단인 이 단체는 얌 폴스키가 창작한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현대적 작품과 조지 발란신을 비롯한 해외 안무가 들의 발레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 키부츠 현대 무용단 (KCDC): 레바논 국경 근처 갈릴리에 있는 가톤 키부츠 멤버 예후디트 아르논이 1970년에 창단한 무용단이다. 아르논은 젊은 아마추어 무용가 집단을 이스라엘 최 고의 무용단 중 하나로 바꿔놓았으며, 이들은 꾸준히 국제적 찬사를 얻고 있다. 오늘날 KCDC는 이 무용단의 예술감독이자 안무가인 라미 베르와 동일시되고 있다.
키부츠 현대 무용단 제공
밧셰바 무용단: 1964년에 마사 그레이엄과 밧셰바 드 로칠드 남작 부인이 창단한 밧셰바 무 용단은 초기에는 그레이엄의 무용기법을 기반으로 했으나 항상 발레 훈련에 큰 역점을 두었 다. 40년이 넘게 활동해온 이 무용단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이스라엘 문화의 국제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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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무용수부터 기술 스텝까지 65명의 단원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오하드 나하린이 예술 감독을 맡고 있으며, 샤론 에얄이 상주 안무가로 일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많은 무용단들이 그러하듯 밧셰바 역시 교육 아젠다를 가지고 있고, 무용을 이 스라엘 사회 전 영역에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 다. 무용단 측에 따르면 밧셰바의 작품은 표현주의적이고 역동적, 혁신적, 감정적, 심미적이 며, 이 모든 특성이 이스라엘의 국가적 에너지를 반영하고 있다. 베르티고: 노아 베르트하임과 아디 샤알이라는 두 무용수가 1992년에 설립하여 성공적인 행 보를 보이고 있는 현대적 무용단으로, 이미 그 작품활동에 대해 국제적으로 서너 개의 상을 수상했다. 레퍼토리의 대부분이 베르트하임의 오리지널 안무와 기타 아티스트들과의 혁신적 인 무용 프로젝트를 담고 있다. 1997년에 설립된 예루살렘의 이 무용 학교는 아마추어와 전 문가들을 위한 고전 발레, 현대 무용, 즉흥 무용 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인발 핀토 무용단: 이 무용단의 안무가이자 기획가인 인발 핀토는 국제 무용계의 떠오르는 스타 중 한 사람이다. 전 밧셰바 무용단 단원이었던 그녀는 1990년에 안무를 시작한 후 수 많은 무용상을 수상했다. 핀토는 공동 예술감독 아브샬롬 폴라크와 함께 다수의 무용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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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창작했다. 그 중 세계적인 유명작 <오이스터>는 국내외에서 수백 차례 공연되었다. 이스라엘의 현대 무용계는 수많은 소규모 단체와 독립 안무가들로 인해 한층 더 발전을 이 루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전세계 무용 애호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안무가 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야스민 고더는 2001년 뉴욕에서 베시 어워드 안무상을 수상했고 이 스라엘에서도 여러 상을 휩쓸었다. 고더의 무용 언어는 여성의 인체를 바탕으로 하며, 그녀 의 작품 <두 개의 명랑한 핑크>는 전세계에서 공연되었다. 또 다른 떠오르는 스타로는 에마 누엘 가트와 레나나 라즈가 있다. 새롭게 보수된 텔아비브의 네베 쩨데크 지구에 있는 수잔 델랄 무용 연극 센터는 1989년에 문을 연 이래 국내 무용 활동의 구심점이 되어왔다. 역시 텔아비브에 위치한 이스라엘 무용 도서관과 이스라엘 무용 자료보관소는 학문과 연구 센터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무용 관련 서적과 이스라엘 무용 연감을 발간하고 있다. 무용 교육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 있는 루 빈 음악무용 아카데미의 무용학과와 텔아비브와 브에르셰바에 위치한 바트-도르 스튜디오, 기바타임에 있는 셀마 옐린 학교를 비롯해 전국의 여러 무용 학교와 워크숍에서 제공하고 있다.
동작 교육 분야에서 이스라엘이 기여한 바는 전세계에서 교육되고 있는 모셰 펠덴크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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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법과 춤과 동작을 문서에 기록하는 방법으로 가장 유명한 3가지 중 하나인 에슈콜 바크 만 동작 기보법 등이 있다.
민속 무용 이스라엘 민속 무용은 세계 각지에서 흘러 들어온 비유대적 민속무용과 유대 민속무용이 혼 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여타 국가에서는 민속 무용이 지방의 옛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육성 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민속 무용은 1940년 이래로 역사적, 현대적 원천과 성서적 의미 및 현대적 무용 스타일을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예술 형태이다. 초기 개척자들은 출신 지방의 고유 춤을 함께 들여왔고, 이 춤들은 새로운 환경에 맞게 변 형되었다. 그 중 루마니아의 민속춤 호라는 이스라엘 땅에 구축된 새로운 삶을 정형화시켰 다. 이 춤의 닫힌 원 형태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고, 단순한 동작으로 모두가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서로 연결된 팔 동작은 새로운 이념을 상징했다. 이후 무용에 대한 열정이 널리 퍼져감에 따라 북미 재즈와 남미 리듬에서부터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전형적인 리듬에 이르는 춤의 요소들을 비롯해 아랍 민속춤 데브카의 특징까지 포 괄하여 이스라엘 대중 음악에 맞춰 추는 다양한 특징의 민속춤 장르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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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무용은 개인적 참여와 무대 공연 모두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민속 무용에 대한 대중 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전문적인 무용 지도자가 등장했고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오락적 수 단으로서 무용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88년부터 3일간의 국제 민속 무용 페 스티벌이 중부 갈릴리의 도시 카르미엘에서 매년 열리고 있으며, 국내 및 세계 각지의 무용 단들이 이 행사에 참가한다. 이스라엘 민속무용과 나란히 발전하는 동시에 영향을 준 것은 다양한 소수민족 집단의 전통 무용으로서, 이들은 ‗이산민 되 모으기‘와 이스라엘 사회의 다원적 특성을 모두 반영한다. 이러한 민속무용들은 예멘, 쿠르디스탄, 북아프리카, 인도, 그루지야, 부카라, 에티오피아의 춤을 전문으로 하는 여러 민속 무용단과 아랍, 드루즈, 체르케스 무용을 공연하는 앙상블들 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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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스라엘 땅의 현대적 히브리어 산문은 이주민 작가들에 의해 처음으로 쓰여졌다. 비록 그 들의 뿌리는 동유럽 유대인 사회의 세계와 전통에 있었지만 그 작품들은 ―건설하고 그로 인 해 건설된다‖는 시온주의 모토처럼 그들이 들어온 이스라엘 땅에서의 창조적 성취를 주로 다루었다. 히브리 산문을 20세기 안으로 끌어들인 요세프 하임 브레너(1881~1921)와 슈무 엘 요세프 아그논(1888~1970)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현대적 히브리 문학의 아버지로 여겨 지고 있다. 현실을 포착하려고 시도한 브레너는 히브리 구어의 랍비식 어투와 중세 풍의 형식을 선호하 였으며, 새로운 관용어를 만들고 극적인 구문론을 차용하여 생생한 회화적 효과를 냈다. 브 레너의 작품의 중심에는 자신이 태어난 유럽 국가와는 전혀 다른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발 판을 마련하려는 개척자들의 육체적 투쟁과 그보다 결코 더 쉽지 않은 이스라엘 땅에서 유 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에 대해 작가가 느끼는 동질감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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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자모
히브리 도서 주간에는 전국의 광장과 공원들이 인파로 북적대는 도서 시장으로 변한다 • 알 바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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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논은 그의 작품에 좀 더 현대적인 형식의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쪽을 선택했다. 유대 전 통에 익숙한 그의 지식과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 문학의 영향이 더해져 현대사회의 주요 정신적 문제와 전통적 생활방식의 붕괴, 믿음의 상실과 그에 따른 정체성의 상실을 다룬 소 설의 한 형태가 탄생했다. 정통파 유대교도이자 직관과 심리학적 통찰을 지닌 작가였던 아 그논은 인간 정신의 어둡고 불합리한 측면에 대한 흥미와 믿음이 있는 유대인과 믿음이 없 는 유대인들의 내적 불확실성에 대한 일체감을 표현했다. 작품의 많은 부분이 전쟁과. 홀로
코스트의 영향을 받은 아그논이 묘사한 현실은 비극적이고 때로는 기괴한 분위기를 발산했 으며, 독실한 유대교도들의 세계가 그들의 온갖 열정과 긴장과 함께 드러나 있다. 1966년에 아그논은 (넬리 작스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40년대와 50년대에 작품을 펴내기 시작한 종종 ‗독립전쟁 세대‘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태 생 작가들은 전임자들과는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적 배경을 작품에 담았는데, 그 주된 원인 은 그들의 모국어가 히브리어이고 그들의 삶의 경험이 전적으로 이스라엘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S. 이자르, 모셰 샤미르, 하노크 바르토브, 하임 구리, 비냐민 타무즈 같은 작가들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현신과 개인주의 사이에서 극도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고, 국내와 해외의 영향을 한데 섞어 주로 과장된 형식으로 하나의 사회적 사실주의 모델을 제 시했다. 1960년대 초반, A.B. 여호슈아, 아모스 오즈, 요람 카니우크, 야콥 샤브타이 등의 영향력 있 는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히브리 산문 작법을 탐구하면서 관념적 패턴에서 벗어나 개인적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후 20년간은 이야기 형식과 심리적 사실주의, 우화, 상징주의 등의 다양한 산문 작법,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치 및 사회적 관습에 대한 고찰과 회의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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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한 실험이 현대적 글쓰기에 주로 등장했다
스튜디오 라미 & 재키 제공
1980년대와 90년대는 출판 서적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하며 문학 활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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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기였다. 그와 동시에 몇몇 이스라엘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특히 눈에 띄는 이들로 오즈, 여호슈아, 카니우크, 아하론 아펠펠트, 다비드 샤하르, 다비드 그로스만, 메이르 샬레브 등이 있다. 3세대에 걸친 동시대 작가들이 쓴 이 시기 산문의 특징은 문학이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 개인으로서나 환경의 일부로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라는 믿음이었다. 이들 작가 중 많은 이들은 이스라엘의 현대적 삶의 정치적, 도덕적 딜레 마도 다루었는데, 특히 오즈, 그로스만, 샬레브 등이 대표적이다. 유럽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와 참여를 통합하는 관점 내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근본적 질문들을 다루기 위한 새로운 표현 방식이 형성되었다(아펠펠트, 그로스만, 여호슈아 케나즈, 알렉산더 세네드와 요나트 세네드,
나바 세멜 등). 이주민 가정 내에 들이닥친 홀로코스트의 여파를 바라보는 어린 소년 모미 크의 관점으로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그로스만의 <아래를 보라: 사랑>이 아마도 가장 잘 알 려진 예가 될 것이다. 이전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주제들도 소개되었다. 아랍인 촌락 환경(아랍계 기독교인 작가 안톤 샤마스와 이스라엘 아랍인 언론인이자 작가인 사예드 카슈아), 의도적으로 현대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하는 초정통파 유대교도들의 세계(요슬 비르슈타인), 예루살렘의 하시드 법정 속의 삶의 방식(하임 베르), 세속적 이념들이 붕괴되고 종교적 근본주의가 힘을 얻는 시기에 살아가는 비신앙인의 존재를 다루려는 시도(이츠하크 오르파즈-아우에르바크) 등이 그 예이 다. 스스로가 스파라디로서의 배경을 가진 몇몇 이스라엘 작가들이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중 요한 주제는 아랍 국가 출신의 소외된 신규 이민자 사회의 위치이다(사미 미카엘, 알베르트 수이사, 단 베나야 세리). 그밖에 민족적 삶의 대다수 영역에서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야 하는 사회의 맥락 안에서 본 민주주의와 정당성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들도 있다(이츠하크 벤-네르, 카니우크, 그로스만, 오즈). 주요 여성 작가들 중에도 주목을 끈 이들이 많다. 이들은 일반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유대 전통 속의 그들의 위치와 시온주의 운동에서 그들의 역할을 자각하고 있는 여성들의 세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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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마다 열리는 예루살렘 도서 전시회 • Y. 로에프
다루었다(아말리아 카하나-카르몬, 하나 바트-샤하르, 슐라밋 하레벤, 슐라밋 라피드, 루스 알모그, 사비온 리브레히트, 바티야 구르). 라피드와 구르는 탐정소설 장르도 시도하여 이스 라엘과 해외 번역본 모두에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J. 말콤
최근 들어 이스라엘인의 경험에 크게 집중하는 경향을 거부하고 보다 보편적인 추세—주로 동떨어지고 매우 비현실적이며 특이한 성격—를 반영하는 젊은 세대 작가들이 등장했다. 이 러한 작가들 중 일부(예후디트 카찌르, 에트가르 케레트, 오를리 카스텔-블룸, 가디 타웁, 이 리트 리노르, 미라 마겐)는 거의 숭배자에 가까운 팬들을 거느리고 있고, 이들의 신간은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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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에서나 또 일부의 경우에는 해외에서까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점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케레트는 여러 단편집을 내며 유럽 독자들이 선호하는 작가로 확실히 자리매 김했으며, 그의 작품 <키신저를 그리며>는 유명 문학상들을 수상했다. 풍부한 히브리어 문학에 더해 산문과 시 양쪽에서 아랍어, 영어, 불어 등 다른 언어로 된 상당한 양의 작품도 출판되고 있다. 구 소련 연방에서 1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이주해온 이래로 이스라엘은 러시아 본국을 제외하고 러시아어 문학 창작의 최대 중심지가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스라엘 출판사들은 전자 출판 분야에 대거 뛰어들었다. 광범위한 주제를 아우르고 있는 이스라엘 프로그램들은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아동 문학 국내 고유 작품과 여러 언어로 된 고전의 번역본을 포함하는 아동 문학은 다양한 주제와 산 문 양식을 포괄하며, 어린이용 작품에서 언어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고 정교한 접근과 지적 인 내용을 추구하는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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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라미 & 재키 제공
지난 수년 간 다양한 연령집단을 위한 방대한 양의 아동 문학이 생산되었다. 이들 아동 도 서는 훌륭하게 디자인된 삽화로 차별화되고, 표현이 풍부하고 생생한 언어의 사용과 심리학
적 감수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어린 독자들이 적극적인 방식으로 글 속의 내용에 동화될 수 있다. 열린 탐구를 자극하고 독립적 사고를 촉진하는 것이 현대 아동 문학의 기본적인 요소가 되 어 왔다. 사회적, 국가적인 의미를 가진 주제들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지금은 더욱 진실되고 개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몇몇 책들은 다양화된 이스라엘 사회의 스테레오타입 을 없애려는 목표를 가지고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유대인 이민을 다루는가 하면 또 어떤 책 들은 지난 세기에 걸쳐 이스라엘 땅에서의 유대인의 삶을 재건한 것을 비롯해 국가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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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기여한 유명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내용과 전기를 싣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아동 문학은 어린이들의 세계를 폭넓게 그리기 시작했는데, 죽음, 이혼, 홀 부모 가정, 장애, 사춘기,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한 노력 등의 주제가 주로 다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상상의 세계를 다룬 책과 이야기들도 많이 쓰여지면 서 어린 독자들에게 순수한 환상과 오락, 현실도피를 제공했다.
이스라엘 자원봉사자 협회 제공
이스라엘은 또한 성인뿐 아니라 아동용 책을 쓰는 수상 작가의 수가 이례적으로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작가가 다비드 그로스만(―지그재그 아이,‖ ―벽 위를 걷는 이타마르‖)과 에트가르 케레트(―서커스를 따라가는 아빠‖)이다. 이러한 작품 중 상당수는 성인 소설과 아동 소설의 경계를 흐리게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아동 서적들은 또한 전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번 역 출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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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성서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씌어진 히브리 시는 외부의 영향과 내부의 전통을 구현하 고 있다. 종교적, 민족적 주제를 포괄한 과거의 시는 현대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개인적 경험이라는 주제 또한 담고 있다. 전통적인 시적 표현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때 는 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주고 유대인의 삶을 종교로부터 분리하자는 운 동이 일어난 유대 계몽주의 시기(1781~1881)와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 민족의 삶을 재건할 것을 주장한 시온주의 운동이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에 등장 한 주요 시인들은 그들 스스로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하임 나흐만 비알릭 (1873~1934)과 사울 체르니코프스키(1875~1943)이다. 유대 민족의 문예부흥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반영하고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삶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비알릭의 작품에는 유대 역사의 여러 장을 되풀이하는 긴 서사시와 사랑과 자연을 다룬 순수 서정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종종 ‗국민 시인‘ 또는 ‗히브리 르네상스 시인‘으 로 일컬어지는 비알릭은 이전 작가들의 압도적인 성서적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 언어를 만들어내는 한편, 풍부하고 학구적이지만 동시에 현대적인 어법을 통해 고전적 구조와 명료 한 표현방식을 유지했다. 일부 아주 어린 아동들을 대상으로 쓰여지기도 한 그의 시들은 여 러 세대에 걸쳐 이스라엘 학생들에 의해 암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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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와 극적 서사시, 연가, 풍자시를 쓴 체르니코프스키는 자연과 미에 대한 고양된 의식 뿐 아니라 개인적 긍지와 위엄의 기상을 주입함으로써 유대 사회를 교정하고자 했다. 랍비 히브리어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 그의 언어 감각은 성서의 영향과 새로 등장한 대화 양식을 통합했던 비알릭의 언어와는 전혀 달랐다. 비알릭과 체르니코프스키 두 사람 모두 고대 유 대 시(詩)의 현대적 장르로의 변천 과정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아브라함 슐론스키와 나탄 알터만, 레아 골드버그, 우리 쯔비 그린버그는 그 다음 시인 세 대의 선두 주자들로서 국가 수립 이전의 몇 년과 건국 초기 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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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 에트가 작 포스터 • 작가의 승인 하에 수록
슐론스키는 자신의 작품과 다수의 고전시(특히 러시아 작품) 번역 작업에서 혁신적 언어와 풍부한 심상을 활용했다. 정치적 논평으로 주목 받는 알터만의 작품은 유대 사회의 모든 발
전 단계와 함께했으며, 풍부한 언어와 다양한 시적 형식, 음조와 운, 수사와 은유를 특징으 로 한다. 골드버그는 도시, 자연,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 접촉, 배려를 노래하며 시에서 서정 성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강렬한 심상과 힘있는 문체를 사용하여 절망과 분노의 시를 쓴 그린버그는 민족주의적 주제와 홀로코스트의 여파를 주로 다루었다. 이들 시인은 최초로 일 상 언어의 리듬을 히브리 시에 도입했다. 그들은 옛 관용어를 되살리고 새로운 관용어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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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냈고, 고대 언어에 새로운 탄력성과 풍요로움을 부여했다. 독일의 표현주의와 러시아의 미래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시기의 시는 고전 적 구조와 규칙적 운율을 가진 선율적 경향을 추구했다. 이 시들은 시인의 출생 국가의 인 상 및 풍경과 새 조국의 새로운 광경을 웅장한 문체로 그린 동시에 ‗그곳‘의 추억과 ‗이곳‘ 에 뿌리를 내리려는 욕망을 담아 레아 골드버그가 쓴 것처럼 ―두 조국을 가진 고통‖을 표현 했다. 이러한 시들 중 상당수는 노래가 붙여져 이스라엘의 국민적 전승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히브리권 최초의 주요 여류 시인은 라헬 블루스타인(1890~1931)으로, 간단히 줄여 ―라헬‖로 많이 알려져 있다. 라헬의 작품은 히브리 여성시와 이러한 시에 대한 대중의 기대의 규범적 토대를 세웠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서정적이고 간결하며 정서적이고 지적 가식이
없는 개인적 양식은 그녀의 동시대 시인들과 달리아 라비코비치, 마야 베제라노 등 이후 등 장한 시인들의 작품 대다수에서 볼 수 있듯이 폭넓게 확산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하는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 로 예후다 아미카이, 나탄 자크, 단 파기스, T. 카르미, 다비드 아비단 등이 있다. 억제된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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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집단적 경험으로부터의 전반적 후퇴, 현실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 표명, 일상 회화적 양 식을 추구한 이 집단은 주된 시적 영향을 푸쉬킨과 쉴러에서 현대 영미권의 시로 전환시켰 다. 널리 번역된 아미카이의 작품적 특징은 일상 언어의 사용과 반어법, 형이상학적 은유이 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동시대 젊은 시인들이 쓴 대다수의 작품의 특징이 되기도 했는데, 이들 젊은 세대는 관념시의 종말을 선언하며 알터만과 쉴론스키의 고전적 구조와 규칙적 운 율의 전통과 완전히 결별했다. 짜흐의 작품은 일상적 구어체 히브리에서 거의 예배의식에 가까운 음악적 언어의 혁신적 특질을 이끌어내고 있다.
눈을 뜰 때 산 위에 쌓인 눈 산꼭대기의 신전 위에 예루살렘의 위에. 내려와주오 오 예루살렘 내려와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 오라 오 베들레헴 와서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 높은 산이여 오라 바람이여 오라 항구의 홍수여 오라 와서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 그리고 너도, 오 굽은 파피루스여, 개울의 여린 줄기여, 가느다란 사막의 덤불이여, 내 아이를 내게 돌려주오 그때 영혼이 육체로 돌아올지니 눈을 뜰 때. 달리아 라비코비치 번역: 하나 블로크, 하나 크론펠드
오늘날의 히브리 시 분야는 20대의 작가들이 중년 시인들과 나란히 활동하는, 여러 세대로 구성된 다성적 체계를 보인다. 중견 세대의 대표주자는 메이르 비젤티어인데, 그의 산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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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고 속어적, 직설적 시어는 모든 낭만주의를 거부하고, 텔아비브의 인상을 현실의 상징 으로 격상시킨다. 또한, 야이르 호로비츠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있는 자의 조용한 슬픔을 절제된 시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요나 봘라크는 원형적, 종교적 주제와 프로이트의 상징, 때로 야수적인 관능, 율동적 반복, 길게 연속되는 연상 등을 이용 하여 구어체의 풍자적 어조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외 주요 현대 시인으로는 아셰르 레이크, 아리에 시반, 로니 소마크, 모셰 도르 등이 있다. 가장 최근 세대의 시는 개인주의와 혼란을 주된 특징으로 하며, 구어적 어구와 운을 맞추지 않은 자유로운 음조로 쓴 짧은 시를 추구한다. 이러한 작품의 예는 트란실바니아 태생의 시 인 아기 미숄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시는 다수의 충성스러운 독자층을 보 유하고 있으며, 모든 시대를 아우른 시집 중 일부는 인구가 훨씬 많은 서구 국가들의 수준 에 맞먹는 부수가 출판되었다.
시각 예술 20세기 초부터 이스라엘의 시각 예술은 동서의 만남을 비롯해 이스라엘 자체와 국가의 발 전, 여러 도시의 특성, 해외 예술 중심지에서 퍼져 나온 양식적 추세로부터 영향을 받은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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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적 태도를 보여왔다. 이스라엘의 다양한 풍경은 회화, 조각, 사진 및 기타 미술 형식에서 중심 소재가 되고 있다. 언덕의 계단 모양의 단과 산등성이는 특별한 선과 형태의 역학을 만들어내고, 네게브의 구릉지대와 널리 퍼져있는 회 녹색 초목과 선명하고 밝은 빛은 이스 라엘 특유의 색채 효과를 자아내며, 바다와 모래는 표면에 영향을 미친다. 전체적으로, 지역 의 풍경과 관심사, 정치는 이스라엘 미술의 중추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고유성을 이끌어낸 다.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미술 활동은 1906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이 해에 보리스 샤츠 교수 (1867~1932)가 불가리아에서 입국하여 1905년 시온주의 총회에서 재능 있는 유대인 젊은이 들이 이스라엘에서 미술을 공부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승인한 계획에 따라 베짤렐 미술 공예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1910년이 되자 베짤렐 학교는 32개 학과와 500개의 학생 소모임, 그 리고 유대 사회 전체에 그 작품에 대한 준비된 시장을 갖추게 되었다.
예루살렘 베짤렐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 제공
화가와 조각가들 외에도 이스라엘의 미술계에는 다수의 재능 있는 공예가들(도예가, 금은 세공인, 직물 공예가, 서예가, 유리 공예가 등)이 있으며, 이 중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유대 의식에 사용된 물건들의 현대적 해석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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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는 계층에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 사이에 미술에 대한 열의가 폭넓게 퍼져 있 다. 이스라엘인들은 전시회를—국내의 여러 박물관과 사설 화랑에서 열리는 화가 일인의 회 고전부터 종합적인 단체 전시회까지—관람하고, 사페드와 욥바의 예술가 지구나 엔 호드의 예술인 마을을 자주 방문하고, 국내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함으로써 미술 활동을 촉진 및 지원하고 있다.
회화 유럽의 기법과 중동의 영향을 융합하여 ‗독창적인 유대 미술‘을 창조한다는 목표를 세운 베 짤렐 아카데미의 첫 출범 당시의 예술적 지향점은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과 연결된 과거에 대한 낭만화된 인식을 동구 유대인 공동체들과 지방의 베두윈족으로부터 유래된 이 미지들로 묘사한 성서의 장면을 담은 회화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활동한 화가로는 슈무엘 히르젠버그(1865~1908)와 에프라임 릴리엔(1874~1925), 아벨 판(1883~1963) 등이 있다.
예루살렘 베짤렐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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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하여, 모르데카이 아르돈 그림 •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M. 아르돈 박사의 승인 하에 수록
예루살렘 구도시의 다윗 성채에서 열린 최초의 대규모 미술 전시회(1921)는 대부분 베짤렐 출신 화가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베짤렐의 시대 착오적이고 민족적-동양적인 내러 티브 기법은 얼마 안가 베짤렐 내의 젊은 반대세력과 새로 이주해온 미술가들의 도전에 직 면하게 되었다. 이들 이주 화가들은 그들이 ‗유대‘ 미술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히브리‘ 미술 이라 이름 붙인 것에 적합한 작풍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의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규정하 고 이스라엘을 민족적 부흥의 원천으로 본 그들의 관점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곳 풍경의 밝은 빛과 생생한 색채에 중점을 둔 중동 환경의 일상적 현실을 묘사했고, 극 히 원색적인 기법을 통해 단순한 아랍 식 생활양식과 같은 색다른 주제에 무게를 실었다. 이러한 작풍은 이스라엘 팔디, 찌오나 타게르, 핀하스 리트비노프스키, 나훔 구트만, 레우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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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 등의 그림에 잘 나타나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대다수의 일류 화가들이 새롭고 역동적인 도시 텔아비브(1909년 건립)에 자리를 잡았고, 그 후 이곳은 이스라엘 미술활동의 중심지로 이어져오고 있다. 1930년대 미술은 20세기 초반 서구사회의 혁신적 화풍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은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비롯된 표현주의였다. 모셰 카스텔, 메나 헴 셰미, 아리에 아로크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은 왜곡을 이용함으로써 감정적으로 충만하고 때로 신비주의적인 현실을 그리는 경향을 보였다. 주제는 여전히 국내의 풍광과 이미지를 다루었으나 10년 전의 묘사적 요소들은 점차 사라지고 동양-이슬람 세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30년대 중반에는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나치주의의 공포로부터 도망쳐온 이주 화가들이 들 어오면서 독일 표현주의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독일 태생 작가로 20여 년 앞서 예루살렘 에 입성한 아나 티코, 레오폴트 크라카우어와 합세한 이 집단에는 헤르만 스트루크, 모르데 카이 아르돈, 야코브 스타인하르트 등의 화가가 속해 있었으며, 이들은 예루살렘의 풍경과 주변을 둘러싼 구릉지대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크게 주력했다. 이 미술가들은 국내 미술의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특히 베짤렐 미술 아카데미의 학장을 역임한 아르돈과 스타인 하르트가 이 학교에서 발휘한 리더십이 주된 역할을 했고, 이들의 지도 하에 새로운 세대의 미술가들이 성숙한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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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 중 파리와의 단절과 홀로코스트의 정신외상으로 인해 모셰 카스텔, 이츠하 크 단찌거, 아하론 카하나 등 일부 화가들은 새로 부상한 ‗가나안‘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게 되었다. 이 이념은 고대 신화와 이교도적 주제를 부활시켜 이스라엘 땅의 원 거주민들과의 동질성을 구현하고 ‗새로운 히브리 민족‘을 창조하려 한 것이었다. 1948년 독립 전쟁은 나프 탈리 베젬과 아브라함 오페크와 같은 미술가들이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군사적 화풍 을 채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형성된 가장 중요한 집단은 ‗새로운 지 평선‘이었다. 이 화파는 이스라엘 회화를 지역적 특성과 문학적 연관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현대 유럽 미술의 영역 안으로 들여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기서부터 두 가지 주 요 경향이 형성되었다. 첫째, 이 화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세프 자리츠키는 확인 가능한 지역 풍경적 요소와 한색 계열의 색조를 특징으로 하는 서정주의적 분위기를 추구했다. 이 러한 화법은 다른 미술가들, 특히 아비그도르 스테마츠키와 예헤즈켈 스트레이크만 등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경향은 주로 상징을 바탕으로 하여 기하학주의에서 형식주의까지 아우르 는 양식화된 추상주의였다. 이러한 화풍은 루마니아 태생의 화가 마르셀 얀코의 작품에서 뚜렷이 드러났는데, 파리에서 수학한 얀코는 다다이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새로운 지 평선 화파는 이스라엘 추상 미술의 정통성을 확립시켰을 뿐 아니라 1960년대 초반까지 이 조류의 중심세력으로 자리했다. 1960년대 미술가들은 새로운 지평선 화파의 활동과 다음 10년간 나타난 개인성 추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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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페드의 석류나무, 나훔 구트만 그림 • 나훔 구트만 미술관과 메나헴 구트만 교수 제공
의 연결 고리를 제공했다. 텔아비브의 아브니 미술학교 강사였던 스트라이크만과 스테마츠 키는 라피 라비, 아비바 우리, 우리 리프쉬츠, 레아 니켈과 같은 제 2세대 미술가들에게 커 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들 2세대 화가들은 개인적 심상을 찾는 과정에서 해외에서 들어온 표현주의적이고 조형적인 다양한 추상 기법을 아우른 다원주의적 작품으로 서정적 추상주의 의 정제된 화법에 도전했다. 이들은 1950년대 후반에 형성된 ―10인의 모임‖에 속한 미술가들로, 미술계에 팽배한 보편주 의적 경향에 반발하며 이스라엘의 풍경과 이스라엘인 개인을 중심으로 한 미술을 구축하기 위해 애썼다. 새로운 지평선 화파를 둘러싸고 있던 유럽식 엘리트적 분위기와 달리 10인의 모임은 이스라엘 토박이 ‗사브라‘와 팔마흐 세대와 동일시되었다. 60년대 후반에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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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화가 오리 레이스만과 이츠하크 맘부시가 이 그룹에 합류했다. 베짤렐에서 특히 주제와 기법과 관련한 아르돈의 영향력은 강렬한 영적 의미로 가득한 형식 의 세계를 발전시킨 아비그도르 아리카의 작품과 홀로코스트와 유대의 전통적 주제를 연상 시키는 상징적 주제로의 회귀를 보인 요슬 베르그너와 사무엘 바크의 초현실적 그림 등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급진적으로 다른 양식을 보여준 야코브 아감은 시각 및 동적 미술의 선구 자이며, 그의 작품은 국내외에서 전시되어 명성을 떨치고 있다. 1970년대 미술의 미니멀리즘적 특성에는 거의 항상 국내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무정형의 단 순한 형식이 포함되지만 래리 아브람슨과 모셰 게르슈니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미학이 아니라 관념의 진열이다. 개인주의적 실험이라는 환경 속에 작업하는 1980년대 와 90년대 미술가들은 다양한 재료와 기법, 그리고 히브리 자모와 인간의 스트레스와 공포 의 감정과 같이 다양한 지역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를 통합하여 의식의 내용과 이스라엘의 정신이라는 관념을 추구하고 있다. 핀하스 코헨-간, 데가니트 베레쉬트, 가비 클라스메르, 치비 게바, 츠비 골드스타인, 다비드 레엡 등의 작품에 나타난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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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현재의 경향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미술의 정의를 전통적 개념과 재료에서 더욱 확장하 여 토착 문화의 고유한 표현으로, 또 동시대 서양 미술의 역동적인 요소로서 발전시키기 위 해 힘쓰고 있다.
조각 조각 미술은 소수 조각가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노력 덕에 국내에서 크게 번창했다. 아브라 함 멜니코프(텔 하이에 있는 거대한 사자 석상으로 유명함)와 제에브 벤-쯔비가 큐비즘을 도 입했지만, 모셰 지페르, 아하론 프리베르, 바티야 리샨스키로 대표되는 보다 학구적인 조각 유파가 건국 이전에 이 분야를 주도했다.
메스킨(배우), 제브 벤-쯔비 조각 • 미슈칸 레오마누트 미술관 제공, 아인 하로드
1940년대 말에 ‗가나안‘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작가로 이츠하크 단찌거가 있다. 적색 누비아 사암으로 조각한 이방인 대수렵가 니므 롯의 형상은 중동의 조각과 인간의 육체에 대한 현대적 개념 사이의 통합을 창조하려는 시 도인 반면, 그의 양(羊) 조각을 구성하는 형태들은 사막의 돌과 수로, 베두윈족의 천막과 닮 은 꼴이다. 1950년대의 조각은 점차 추상화되면서 새로운 재료와 큰 규모를 사용했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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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조각 재료로 철과 내후성 강판이 새롭게 도입된 데 일부 기인한 바도 있다. 이스라엘의 여러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에게 유형의 기념물을 제공하고자 한 열망은 1960년 대부터 조각에 새로운 박차를 가했고, 주로 비구상적 작품으로 이루어진 많은 기념물들이 이스라엘의 풍경 속에 배치되었다. 이 장르는 아크집에 있는 예히엘 셰미의 용접된 강철로 제작한 해군 기념비로 대표되는데, 이 작품은 자연의 무자비함과 인간의 폭력적, 파괴적 성 향을 다루고 있다. 또 다른 대표작인 다니 카라반의 ―네게브 여단 기념비‖는 브에르셰바 외 곽에 위치해 있으며 사막의 전쟁이 지닌 특별한 성격을 환기시킨다. 전반적으로 프랑스 학파의 영향과 특히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광범위한 재료를 활용하 는 동시대 개념미술 작가들은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 태도를 표현하기 위해 설치물과 환경 조각을 창작하고 있다. 형태와 상징의 강력한 움직임을 통합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상 수상 작가 이갈 투마르킨의 작품들은 기하학적이고 조형적인 추상 형태를 통해 전쟁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고 있으며, 기하학적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조는 특히 메나셰 카디슈만의 지속적인 양(羊)의 이미지 사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카디슈만의 시도는 성서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와 무기력한 희생자를 상징하는 개인적 신화 속
백색 광장, 다니 카라반 조각 • 알바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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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있는 양의 흔적을 일깨운다. 몇몇 이스라엘 조각가들은 국제적인 인지를 얻기도 했는데, 투마르킨, 카라반, 코소 엘룰, 이스라엘 하다니 등이 대표적 작가이다. 이들의 작품은 해외의 공공 및 민간 시설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사진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술 사진은 개인적 영역—삶과 죽음, 예술과 환상에 대한 질문을 탐구 —과 국가적/정치적 영역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 주된 특징은 친밀감, 억제, 자아에의 몰 두이며, 이는 사진 예술의 초기 발전 단계에 지배적이었던 낭만적이고 정보 제공적 스타일 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그로부터의 성장이다. 19세기 중반에 이스라엘의 국내 사진은 주로 사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중심이 되었으며, 성지 순례자와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팔 기 위해 성지(주로 기독교 성지)를 담는데 집중했다. 1880년부터 사진작가들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 내 유대인 사회의 발전을 기록하기 시작 했다. 이들은 현대적, 비종교적 이념에 대한 지향으로, 또는 그들의 사진을 유대 민족 기금 과 같은 특정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한 의뢰인의 요청으로, 흙을 일구고 도시와 마을을 건설하는 개척자들의 모습을 웅장한 렌즈로 카메라에 담았다. 초창기 이스라엘의 발전 양상은 재능 있는 여러 보도 사진가들에 의해 충실히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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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로는 팀 기달, 다비드 루빙게르, 베르너 브라운, 보 리스 카르미, 제브 라도반, 다비드 해리스, 미카 바르 암 등이 있다. ‗자료로서의 사진‘과 ‗예 술 사진‘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들로는 인물 사진에 집중하는 알리자 우 르박과 자연을 집중적으로 담는 네일 폴베르그, 도론 호르비츠, 샤이 기노트, 전문 수중 사 진가 다비드 다롬, 항공 사진 전문 팀인 두비 탈과 모니 하라마티 등이 있다. 사진 작품을 전시하는 몇몇 주요 장소도 이스라엘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 인 곳은 엔 하로드 키부츠에 있는 미슈칸 레오마누트의 사진 비엔날레와 북부 갈릴리의 텔 하이에 위치한 사진 박물관이다.
페시 기르쉬
예루살렘 베짤렐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 제공 순수 예술 매체로서의 사진이 정통 예술 형식이 됨에 따라 최근 몇 년간 국내외 갤러리와 미술관, 큐레이터, 수집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다수의 창의적인 사진 작가들이 등 장했다. 이러한 창조적 작가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이는 아디 네스(1966년생)이다. 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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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탄과 이란에서 온 이민 가정 출신으로 키리얏 갓에서 태어난 네스는 1990년대에 작품 ‗군인들‘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연작 시리즈는 동성애적이고 양면적이며 통찰로 가득 한 맥락 속에서 민족적 정체성, 특히 이스라엘 남성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탐색했다. 성 서의 인물을 데려와 고통스러운 현대적 배경(노숙자, 극빈자)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재창 조한 그의 작품 ‗성서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회가 사회주의적 가치에서 현대 자본주의적 삶 의 방식으로 전환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최근 그의 작품 무제(최후의 만찬)가 소더비의 연 례 예술품 경매에서 26만 4천 달러에 판매된 일은 이스라엘 예술에 대한 세계적 인식의 전 환점이 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배리 프리들렌더의 사진 작품은 수십 장, 때로는 수백 장의 사진을 완벽하게 이어 붙여 놀 라울 정도의 정확성과 명료함, 원경을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탄생시킨 것이다. 그의 2007년 사진전 ‗장소와 시간‘은 현대 이스라엘의 상황을 탐구한 최근작들, 즉 동 예루살렘의 한 카 페 안에 모인 남성들의 모임, 연례 성지 순례에 나선 독실한 하레디 유대인들, 가자 지구에 서 강제퇴거 당하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을 담은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전은 텔아비브 미술관에서 처음 공개된 후 계속해서 뉴욕 현대 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겨 전시되었으며, 이 것은 이 미술관에서 열린 최초의 이스라엘 작가 개인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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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국내 각지의 2백여 개 박물관은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받고 있다. 대도시와 소도시, 키부츠에 위치한 크고 작은 이 박물관들은 고고학과 민족학, 지역사, 고대와 현대 예술, 소 박하거나 정교한 공예품들의 보물 창고이다.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1965년 설립): 이스라엘의 국립 박물관으로 건립된 이곳은 몇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 베짤렐 미술품 박물관의 소장품, 유대 문헌과 민족학, 다양한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전시품, 회화 진열관, 시대별 전시실, 아프리카, 북남미, 오세아니아와 극동지역에서 온 포괄적으로 선별된 미술품, 2) 선사시대부터 15세기 까지의 인공 유물을 전시한 고고학 부속건물, 3) 60점 이상의 작품이 있는 조각 정원, 4) 사 해 두루마리 등 성서 희귀본을 보관한 성서의 전당, 5) 갤러리, 교실, 워크숍으로 구성되어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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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방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춘 청소년 건물, 6) 지역의 유물 컬렉션을 소장한 동 예루살 렘 록펠러 박물관, 7) 아랍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동 예루살렘의 팔레이 아 트 센터, 8) 예루살렘 중심부에 위치한 100년 된 대저택 내에 자리잡은 미술관이자 유명 카 페인 티코 하우스 등으로 구성된다. 광범위하고 인상적인 컬렉션을 전시하는 임시 전시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며, 강의, 워크숍, 영화부터 실내악 공연과 미술 교실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 이 개최된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향후 몇 년간 8천만 달러의 예산으로 보수공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여러 해에 걸친 이 사업으로 8만 평방피트 규모의 새로운 건물이 추가되며, 20만 평방피트의 갤 러리 공간은 재정비를 거쳐 새롭게 확장된다. 박물관 측은 사업 완공 시점을 창립 45주년에 맞춘 2010년 5월로 예상하고 있다. 텔아비브 미술관 (1932년 설립): 1971년에 현재 건물을 개장한 텔아비브 미술관은 특히 이 스라엘 미술을 중심으로 한 고전과 현대 미술의 포괄적 컬렉션을 갖춘 중앙 갤러리, 청소년 부속건물, 독주회와 실내악 공연, 예술 영화가 정기적으로 상연되는 오디토리움, 임시 전시 를 여는 여러 홀로 이루어져 있다. 헬레나 루빈스타인 현대미술 파빌리온 역시 이곳의 후원 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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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슈칸 레오마눗 (―예술의 전당‖ 1934년 설립): 북부의 엔 하로드 키부츠에 있는 국내 최초 의 농촌 박물관이자 최초의 키부츠 운동 미술관인 이곳은 유대 미술, 조각, 전세계 민속 예 술품의 방대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특별 임시 전시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교육 사업과 예술 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하이파 박물관 (1949년 설립): 이스라엘과 지중해 유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을 전문적 으로 전시하는 고대미술 박물관과 전세계의 미술품(18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을 소장하고 있는 현대미술 박물관(1951년 설립)이 상주해 있다. 그 밖에도 선사 박물관, 국립 해상 박물 관, 티코틴 일본미술 박물관도 하이파 박물관의 후원 하에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은 작지만 잘 구성된 공간에서 임시 전시와 영구 전시를 모두 열고 있다. 에레츠 이스라엘 박물관 (1953년 설립): 라마트 아비브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역의 고고학, 인류학, 역사적 유물을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유리 공예품, 도자기, 주화, 동 전 등을 전시한 여러 파빌리온과 천문관이 있다. '인간과 일'이라는 전시 구역에서는 고대의 직물 제조나 보석 세공, 도기 제작과 곡물을 빻아 빵을 만드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각기 다른 12개의 문명층이 발견된 텔 카실 발굴현장이 이곳에 있다. 또한 텔아비브욥바 역사 박물관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장소인 독립 기념관도 에레츠 이스라 엘 박물관의 후원 하에 있으며, 두 곳 모두 텔아비브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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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마예르 이슬람 미술 연구소 (1974년 설립):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미술 연구소는 스 페인에서 인도에 이르는 수 천년 간의 이슬람 예술을 아우르는 도기, 직물, 보석, 의례 용품 등을 광범위하게 소장하고 있으며, 특별 주제로 임시 전시회를 개최한다. 베이트 하트푸쫏 (디아스포라 박물관, 1978년 설립): 텔아비브 대학 캠퍼스에 자리잡고 있는 이 박물관은 현대적 기술과 시청각 전시를 이용하여 전시대와 전세계를 아우르는 디아스포 라 유대 공동체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소장 유물이 없는 이 박물관의 전시는 주제에 따라 정해지며, 각층에는 연구 영역이 있다. 유대 주제에 대한 임시 전시회, 시청각으로 유대 역 사를 조망해주는 크로노스피어, 광범위한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과 여행 전시 등이 정기적 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곳의 웹사이트 www.bh.org.il에서도 유대인의 삶과 유산과 관련된 모 든 사항들에 대해 조언과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다윗 망대 예루살렘 역사 박물관 (1988년 설립): 이 박물관은 제1 성전시대(기원전 960~586)의 유물과 하스모니아 시대(기원전 1세기)의 망대와 도시 성벽의 일부, 헤롯왕(기 원전 37~4)이 건설한 거대한 탑의 토대가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고고학적 유적지인 시타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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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위치해 있다. 인공유물이 없는 이 박물관은 가나안의 도시로서의 시초부터 현대에 이르 기까지 예루살렘의 4천년 역사를 총망라한다. 전시품은 시대별로 나누어져 있고 각 전시실 에는 주요 사건을 나타내는 ‗타임 라인‘이 있으며, 지도, 비디오테이프, 홀로그램, 그림, 모 형을 활용한 전시도 있다. 관련 없는 주제로도 열리는 임시 전시회는 아름다운 배경을 적극 활용하여 조각, 설치미술 및 기타 작품들을 전시한다.
야드 바솀: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영웅 기념관인 야드 바솀은 홀로코스트에 서 희생된 6백만 유대인들의 기억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2005년에 보수 확장된 이곳에는 신 홀로코스트 역사 박물관(이곳 안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의 전당 이 있음), 홀로코스트 미술 박물관, 전시 파빌리온, 의로운 이방인의 거리, 기록 보관소, 바 닥에 집단 수용소들의 이름이 적힌 기억의 전당, 어린이 기념 파빌리온, 몰살된 공동체의 계곡 등이 있다. 모셰 사프디가 디자인한 이 박물관은 방문객들이 감각적, 정서적, 지적인 모든 경험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암 나다브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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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이스라엘 땅에서의 고고학적 조사는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으며, 이 무렵 성서 학자들은 성서에 언급된 장소들의 유적을 찾아 그 지역을 조사했다. 19세기 말 무렵, 그러나 본격적으 로 20세기 초부터, 고대 정착촌 유적으로 이루어진 다수의 언덕(히브리어로 ‗텔‘)이 발굴되 었고, 그에 따라 과학적인 고고학 연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고고학적 활동은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1917~1948)에 확대되었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 대대적으로 증가했다. 발굴과정에서 얻은 경험은 지층 연구 기법을 구체화했고, 고고학적 지층과 유물의 발생 시 기를 추정 가능케 하는 도기 그릇을 비롯한 여러 유물의 형태 발전(유형학)에 대한 세심한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최근 몇 년간 고고학적 연구는 더욱 확대되어 영양, 질병, 경제, 상업 등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물질 문화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적 고고학 연구에서 얻은 성취는 매년 발굴되는 수십 개의 유적지에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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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고고학은 선사시대부터 오스만 제국 지배 말기에 이르는 과거의 모든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수반한다. 많은 유물은 이 땅에 많은 문화가 남긴 흔적의 증거이다. 독특한 지리적 특징은 고대 문화가 더욱 많이 탄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즉, 수만 년 전 이스라엘 땅은 사냥꾼들의 무리들이 아프리카에서 유럽에서 건너가는 육교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들의 임시 막사와 거주지는 요르단 계곡 주변과 카르멜산(갈멜산)과 갈릴리의 동굴 안에서 발견되었다.
성서시대에 이스라엘 땅은 메소포타미아(오늘날의 이라크)와 이집트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번성한 여러 문화를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에는 이 땅은 동서를 잇는 지리적, 문화적 연결고리가 되었다.
공중에서 본 베트 쉐안 (벳스안) 발굴현장 • 이스라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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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내 고고학적 연구는 이스라엘이 위대한 유일신 종교들의 정신 유산의 본거지라는 사실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유대인들의 고향에서 그들의 문화적 유산인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유대민족과 성서, 이스라엘 땅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명확히 드러내준다. 땅속에 묻혀있는 이런 유적지들의 가시적 존재는 이 유대 국가 안에서의 유대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유형의 연결 고리이다.
이렇듯 이어지는 역사의 사슬은 나라 전역의 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쪼르(하솔), 므깃도, 게제르(게셀), 쇼므론(사마리아), 브에르셰바, 단 등의 성서시대의 도시들, 제 2 성전시대의
도시들—티베리아,
세포리스(치포리),
가믈라—과
유대인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던 마사다 요새와 헤로디온, 에세네파의 정신적 중심지가 발굴되었고 가장 오래된 구약 사본을 포함한 사해 두루마리가 발견된 사해 근처의 유대 사막 등이 그 예이다. 같은 시기부터, 예수의 삶과 관련된 가버나움, 타브가 등지의 유적지도 발굴되었으며, 또한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지들도 발견되었다.
텔 미크네 에크론 발굴현장 • I. 슈툴만
케이사리아(가이사랴), 베이트 셰안, 바니아스(가이사랴 빌립보)와 같은 로마와 비잔틴 시대 도시들의 유적지와 당시에 번성했던 아브다트, 할루짜, 맘시트와 같은 네게브 도시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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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되었다.
이슬람
시대의
유적으로는
고대
도시
라믈레
유적과
키르베트
알
마리야르(히샴 궁전)가 여리고에 있다. 십자군 시대의 유적으로는 여러 요새와 아크레(악고), 케이사리아(가이사랴), 벨보아, 칼라트 니므롯 등의 도시들이 있다.
디오니소스 상 • 이스라엘 문화재청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방대한 고고학적 활동의 중심지이며, 이곳에서 5 천년 역사의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다윗 성 내에는 가나안의 도시 성벽과 정교한 지하 수로 시설을 비롯한 이스라엘 왕국 수도의 여러 구조물 유적이 있다. 제 2 성전시대의 유적으로는 성전산의 옹벽을 따라 위치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공공 건축물들의 유적과 예루살렘 구 시가지 내의 유대인 지구에 있는 상부 도시의 화려한 거주지 유적이 있으며, 이 유적지의 옛터는 서기 70 년에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원래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 외에도 돌을 깎아 만든 수백 개의 무덤이 있는데, 이 중 일부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함락된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증명해준다. 비잔틴 시대의 유물로는 많은 교회와 종교적 건축물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성묘교회이다. 아랍지배 시대로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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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산의 이슬람교 사원들과 성전산 남쪽에서 발굴된 행정 중심지 유적 등이 있다. 십자군 시대의 유적에는 도시 성벽과 교회, 폐쇄된 시장 유적지가 있다. 마믈루크와 오스만 제국 지배 시대의 유물인 이슬람 사원의 첨탑은 예루살렘 구도시의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구 시가지의 성벽과 욥바 성문 옆에 있는 요새는 술탄 술레이만 대제(1520~1566)의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
이스라엘에는 2 만여 개에 이르는 중요 고대 유적지가 있고, 이들은 법으로 보호되고 있다. 역사의 모든 시대와 전국 각지를 아우르는 수십 개의 유적지가 매년 발굴된다. 유적 발굴에 대한 허가는 이스라엘 문화재청이 국내 또는 해외 탐사단에게 발급하는데, 문화재청은 국가 유물을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이스라엘의 문화재법은 모든 건축 예정지에 대해 고고학적 유물의 존재 여부를 조사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구조 발굴 작업을 실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국가는 또한 공공에 이익이 되는 유물을 보호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유물 중 중요도가 더 높은 일부 유물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된다. 이 박물관에는 사해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는 성서의 전당이 있으며, 일부는 대중들의 관람이 허용된다.
고대 유적지를 보존하고 재건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과 자원이 투자되었으며, 이들 중 역사의 모든 시기에 해당하는 수십 개의 유적지가 일반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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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 이스라엘, 중동, 그리고 세계 전반의 소식을 지속적으로 접하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매 우 중요한 일이다. 시시각각 라디오 속보를 청취하고 TV 뉴스 방송을 시청하고 최소한 하 나의 일간지를 구독하는 것이 대다수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언론 자유에 대한 공약은 모든 통신 매체에 적용되며, 안보 관련 문제만 군의 검열을 받는다. 히브리어로 된 여러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으며, 이에 더해 러시아어와 불어 신문 서너 개와 두 종류의 영자 신문—오랜 전통의 예루살렘 포스트(구 팔레스타인 포스트) 와 인터내셔널 헤랄드 트리뷴과의 협력 하에 발행하는 이스라엘의 유력지 하레츠의 영문판 —그리고 특정 이익 단체를 위한 잡지들을 포함하는 1천 종 이상의 정기 간행물이 있다. 주 요 간행물 대부분은 인터넷 판을 보유하고 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콜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소리)은 8개의 라디오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연예 오락과 대중 음악부터 학문 강의, 토론회, 클래식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17개 언어로 제공한다. 이들 프로그램은 어린이에서 노년층, 새 이주민부터 이스라엘 토박이에 이르는 다양한 청취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갈레이 짜할과 갈갈라츠(이스라엘 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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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는 군인들과 관련된 방송뿐 아니라 뉴스와 음악까지 24시간 방송하고 있다. 해외 청 취자들을 위한 다중 언어로 된 단파 방송은 이스라엘, 중동 및 유대인 문제에 관한 지속적 이고 믿을 수 있는 소식통을 제공해준다. 이스라엘의 텔레비전 방송은 1967년에 시작되었다. 지금은 2개의 국영 채널에서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로 된 교육, 정보, 오락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1994년에 개국한 한 지방 상업 채널은 3개의 민영 제작사로 분리되어 있으며 매일 특정 시간대는 교육 프로그램에 할당되어 있다. 매달 시청료로 운영 재정을 충당하는 케이블 TV도 국내 대다수 지역에서 이용 가능하여 수십 개의 미국, 유럽, 아시아, 중동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해준다. 이스라 엘의 독자적 케이블 채널들은 스포츠, 어린이 프로그램, 영화, 광범위한 주제의 다큐멘터리 를 제공한다. 콜 이스라엘과 국영 텔레비전 채널은 이스라엘 방송협회(IBA)의 후원 하에 운영되고 있다. 이 협회는 방송을 다양한 관점에 대한 표현을 제공할 책임이 있는 독립적인 정부 서비스로 규정하는 IBA 법(1965)에 종속되어 있다. IBA의 운영 책임은 3년 임기로 정부가 지명하는 집행 위원회와 5년 임기의 집행 위원장에게 있다. IBA 방송의 재정은 라디오 광고와 공공 서비스 발표, 소비자가 지불하는 연간 회비로 충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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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이스라엘 건국 이후 59년 동안 스포츠는 국내와 국제 무대에서 국가 발전에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테니스 스타 샤하르 페에르와 축구 선수 요시 베나윤과 같은 이스라엘의 운동선수들은 꾸준하게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스라엘의 스포츠 팀들 역시 해외에서 성공을 거뒀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팀은 지 난 10년에 걸쳐 유럽의 일류 팀으로 자리잡은 마카비 텔아비브 농구 클럽이다. 이스라엘 국 가 대표팀도 축구와 농구팀이 인상적인 결과를 거두는 등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
프로의 장 밖에서도 스포츠는 늘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중요한 여가활동이 되어왔 다. 서쪽 국경에 아름다운 해안선이 길게 펼쳐져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인구의 절반 가량이 정기적으로 수영을 한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러 달 지속되는 온화한 날씨 로 인해 이스라엘인들은 야외 스포츠를 즐기고, 경쟁적 성향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수십 가 지 다양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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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와 축구 축구는 농구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하고 있다. 프로 축구 리그에서 프리미어 리그 상위 12개 팀은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경기가 있 을 때는 최대 2만 명의 인파를 불러모은다. 5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킨 후 대적할 상대가 없 던 마카비 하이파의 기세는 점차 약화되는 추세이고 베이타르 예루살렘이 바톤을 이어받아 2007년 5월에 9년만의 첫 리그 챔피언십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스라엘의 축구 클럽들은 유 럽 대회에서 꾸준히 우수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수년 동안 마카비 하이파와 하포엘 텔아 비브가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다. 하포엘은 2002년 UEFA 컵에서 영국의 강호 첼시를 꺾고 8강에 진출했고, 마카비는 2003년 챔피언스 리그 그룹 예선에 올랐고 그 시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파했다. 축구 국가 대표팀은 최근 들어 관심을 얻고 있는데, 특히 2007년 3월 라마트 간에서 유로 2008 출전 자격을 놓고 열린 경기에서 영국과 0대 0 무승부를 기록한 후와 2006년 월드컵 본선 진출 직전까지 간 후에 큰 주목을 받았다. 이스라엘 축구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미 치는 영향력도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그 중 3명은 영국의 유력 클럽에서 뛰고 있다. 2007 년 여름에 이스라엘 주장 요시 베나윤은 리버풀 FC로, 수비수 탈 벤 하임은 첼시로 이적했 다. 농구에서는 마카비 텔 아비브가 이스라엘 최강팀이다. 이 팀은 국내 프리미어 리그에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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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37년간 36번 우승을 거머쥐었다. 팀의 최대 라이벌 하포엘 예루살렘은 2006년과 2007년 프리미어 리그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마카비에게 패배했다. 유럽에서 마카비는 2007년 유 로리그 4강에서 4년 만에 처음으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 팀은 2006년에 결승전에 진 출했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하포엘 예루살렘 또한 ULEB 컵에 출 전하며 유럽권에서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며, 2005년에는 이 대회 우승을 거머쥐기 도 했다. 농구 국가 대표팀 역시 주목할 만한 팀으로 기반을 다져왔다. 2007년 8월에 대표 팀은 2년마다 개최되는 유로 바스켓 챔피언십의 본선 진출권을 또다시 따냈으며, 이 대회에 는 1993년부터 꾸준히 참가해오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여자 농구가 인기를 끌고 있고, 엘리슈르 라믈레와 안다 라마트 하샤론 두 팀이 리그 타이틀을 놓고 정기적으로 맞붙는다. 이 두 팀은 유럽 대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여자 선수 샤이 도론은 2007년에 WNBA의 뉴욕 리버티에 진출하면서 미국 프로 농구팀에 서 뛰는 최초의 이스라엘 선수가 되었다.
테니스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 테니스 선수들은 세계 최대의 토너먼트에 고정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십대 선수 샤하르 페에르는 2006년 세계 톱 20에 진입했고, 전세계에서 열리는 WTA 랭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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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복식조 안디 람과 요니 에를리크도 세계 정상급 팀으 로 자리잡으며 지난 2년간 세계 10위권 안에 들고 마스터 컵의 마지막 시즌 본선에 진출했 다. 람은 혼합 복식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2007년 프랑스 오픈에서는 프랑스 선수 나탈리 데키를 상대로, 2006년 윔블던에서는 러시아의 베라 즈보네라바와 맞붙어 그랜드 슬 램 대회를 두 차례 석권했다.
예루살렘 총리실에서 테니스 선수 샤하르 페에르와 만남을 가진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 이 스라엘 공보부/ A. 오하욘
남자 단식 선수 중에는 세계 100위권에 드는 선수가 없지만 이스라엘의 국가대표 다비스 컵 팀 또한 인상적인 성적을 거뒀다. 라마트 하샤론 테니스 센터에서 5천 명의 팬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칠레를 상대로 멋진 승리를 거둔데 이어 2007년 9월에는 13년 만에 처음으로 월드 그룹에 진출했다.
뷘게이트 연구소 이스라엘 스포츠의 성공과 발전에 있어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뷘게이트 체육 연구소로, 이 곳은 이스라엘 중부 네타냐시에 인접한 뷘게이트에 자리잡고 있는 국립 스포츠 센터이다. 이 연구소에는 어린 스포츠 인재들을 위한 엘리트 학교와 분야 내 세계 최고를 달리는 스포 츠 의학 부서가 있다. 풀타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수령 대상자를 결정하는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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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 협의회 역시 뷘게이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페에르, 람, 에를리크 등 후에 성공을 거둔 이스라엘의 수많은 남녀 스포츠인들이 뷘게이트에서 그들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과학 문화 스포츠부의 스포츠 부서는 뷘게이트의 교사와 코치들의 훈련을 지원하고, 이스라 엘 내 모든 스포츠 활동을 관리 감독한다. 다양한 스포츠 연맹과 단체들의 활동을 조율하고 프로그램 발전을 지원하기도 한다.
스포츠를 즐기는 젊은이들 스포츠는 당연히 재능 있는 뛰어난 선수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스포츠 문화는 건국 초기 부터 발전해 왔으며 청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스포츠에 참여하여 체력과 건전한 경쟁심을 고 취시키도록 교육받았다. 매주 수만 명의 이스라엘 청년들이 축구와 농구에서 카약, 요트 경 기, 산악 등반에 이르는 다양한 스포츠에 참여하고 있다. 다수의 주요 스포츠 단체들이 전국적인 클럽망을 운영하는 동시에 주류 스포츠팀과 제휴를 맺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단체로는 마카비(1912년 설립), 하포엘(1923), 베이타르(1924), 엘리쭈르(1939), 대학 스포츠 협회-ASA(1953) 등이 있다. 학교와 지역사회 센터들도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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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 학교 농구 대회와 축구 결승전은 전국에 중계된다.
취미로서의 스포츠 이스라엘은 스포츠 국가이다. 주말이면 전국 각지의 공원에 있는 야외 코트에서 농구를 하 거나 거리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공원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이들을 어김없이 볼 수 있다. 해변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스라엘에는 스쿠버 다이빙 자격 증을 가진 인구가 5만에 이르며, 이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홍해의 독특한 해양 생물들은 많은 스쿠버 다이버들을 유혹하고 있다. 윈드서핑과 수상 스키 역시 대중적인 스 포츠이며, 국내에서 개발된 해변 스포츠인 ―패들볼(paddleball)‖도 인기가 높다. 패들볼의 경 기 방식은 카누의 패들을 이용해 공을 쳐서 계속 공중에 띄우는 것이다. 해변을 벗어나면, 장거리 달리기 또한 매우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이며, 매해 열리는 마라 톤 대회에 수천 명이 참가하고 있다. 코스의 시작과 끝은 티베리아이고 북부의 킨네렛 호수 주변을 달리도록 되어 있으며 철인 3종 경기 이벤트도 마련되어 있다. 사이클 역시 인기가 높고, 케이사리아(가이사랴)에 있는 골프 코스는 현재 재개발 사업에 착수 중이다. 겨울에는 북부의 헤르몬 산에 국내 스키 인구들이 몰려든다. 그 밖에 인기 있는 스포츠에는 탁구, 권 투, 레슬링, 역도, 유도, 가라데, 그리고 IDF가 개발한 호신술의 일종인 크라브 마가가 있다. 대중적인 팀 스포츠에는 배구와 핸드볼이 있으며, 두 종목 모두 프로 리그가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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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마카비아 이스라엘은 올림픽에서 거둔 성과에 늘 자부심을 가져왔으나 2004년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그러나 윈드서핑 선수 갈 프리드만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1 위를 차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아리크 제에비도 아테네 유도 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했 다. 앞서 메달을 차지한 선수로는 야엘 아라드와 오렌 스마자(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유도 부문 은메달과 동메달), 미카엘 칼가노프(2000년 시드니에서 카약 부문 동메달)가 있다. 장 대 높이뛰기 선수 알렉스 아베르부크는 올림픽에서는 아직 메달이 없으나 1999년과 200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과 은메달을, 2002년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을 목에 걸었다. 요트 선수 우디 갈과 기디 클리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 표로 470급에 출전할 예정이며, 2007년 세계 요트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했다.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
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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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올림픽 위원회 제공 이스라엘은 4년마다 자체 올림픽에 해당하는 마카비아 경기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는 1932년에 시작된 이래 전세계 수천 명의 유대인 운동선수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마카 비아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7개 세계 대회 중 하나이다. 참가자들은 축구, 농구, 탁구, 네트볼 등의 경기에서 함께 겨루고, 라마트 간의 국립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장 엄한 개막식에 참석한다. 다수의 우수한 유대인 선수들이 마카비아에서 명성을 얻었는데, 대표적 인물로 1972년 올림픽에서 금메달 7개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운 미국 수영선수 마 크 스피츠와 2004 아테네 올림픽 수영 종목에 참가한 레니 크레이젤버그가 있다.
신종 스포츠 야구는 이스라엘에 새로 도입된 프로 스포츠이다. 이스라엘 베이스볼 리그는 2007년 6월에 창단했으며 6개 팀과 3개 경기장을 갖추고 있다. 이스라엘인도 일부 포함되었지만 대부분이 외국인으로 구성된 120여명의 선수들은 2달 간의 시즌에 참가하며 수백 명의 관중을 게제 르 키부츠, 페타크 티크바의 야르콘 공원, 텔아비브의 스포르테크로 불러모았다. 모딘 미라 클과 페타크 티크바 파이오니어즈가 맞붙은 오프닝 경기는 3천 명 이상이 관람하고 지역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또한 2007년 8월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는 전 메이저 리그 선수 론 블롬버그가 이끄는 벳 쉐메쉬(벳세메스) 블루 삭스가 모디인을 꺾고 IBL 초대 챔피언에 오르는 모습을 2천 명 이상이 지켜보았다. 영어권 이민자들은 소프트볼, 크리켓, 미식 축구 등 여러 다른 신종 스포츠들을 이스라엘에 도입했다. 이스라엘은 인도 이민자들에 힘입어 국제 크리켓 협회(ICA) 회원국이 되었고,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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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이민자들은 럭비와 론볼링(lawn bowls)을 국내에 들여왔으며, 국내 남자 볼링 팀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아메리칸 플래그 풋볼(American flag football) 리그에서는 매 시 즌마다 홀리랜드 볼(Holy Land Bowl)을 두고 수십 개 팀이 경쟁한다.
장애인 스포츠 이스라엘은 국제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고 장애인 선수들에게 기량을 발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장애인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둬왔다. 이스라엘은 2004년 아테네 장애인 올림픽에 24명의 선수를 출전시켜 사이클, 승마, 수영, 사격, 요트, 양궁, 육상, 탁구, 휠체어 테니스 부문에서 경기를 치렀다. 요트 선수 3명으로 이루어진 단 체가 혼합 잠수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고 이스라엘 수영선수들은 금메달 1개, 은메달 4개, 동메달 3개를 획득했다. 케렌 레이보비츠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장애인 선수로, 2000 년 시드니 수영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선수권 대회 3회 우승, 유럽 선수 권 대회 5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M. 프레이딘 이스라엘 장애인 스포츠 협회(ISAD)는 농구, 테니스, 배구, 배드민턴, 탁구, 사격, 승마, 양궁, 수영, 요트 등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상이군인들을 위한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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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 베이트 할로헴 클럽과 부상 및 질병으로 장애를 얻은 이들을 위한 일란 협회도 많은 활 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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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국제사회의 문화적 유대 세계적인 문화적 유대는 언어, 문학, 미술, 언론, 스포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협력에 초 점을 둔다. 70개국 이상 국가들과의 문화적 협의와 기타 여러 국가들과의 유대 관계를 기반 으로 교환 학생 프로그램, 무용단, 극단, 미술 전시회, 뮤지션 및 오케스트라의 상호 교류 공연부터 도서 전시회, 영화제, 스포츠 대회 참가, 양국의 언어와 문화 강의 등이 이루어지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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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이스라엘 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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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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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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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유럽과 유로-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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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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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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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과 북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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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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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연합(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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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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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유엔 빌딩에 걸린 국기 • S. 아즈란
세계 속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1949년부터 국제 연합(UN)의 회원국으로서 세계 대다수 국가들과 국교를 유지 하고 있다. 수세기 동안 겪은 박해의 기억과 삶을 산산조각 낸 홀로코스트 경험, 수십 년간 계속된 아랍-이스라엘 간의 갈등을 배경으로 한 이스라엘의 외교 정책은 자국의 안보를 확 고히 하고 모든 국가와의 협력을 증진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평화를 앞당길 수 있는 방향으 로 추진되어 왔다.
... אדיר חפצה של ישראל לקיים יחסים תקינים עם כל המדינות עם ממשלותיהן ועם עמיהן... ) תשי"ג,(דוד בן גוריון 모든 국가와 그들의 정부 및 국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열망이 다...... (다비드 벤 구리온,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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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미국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되고 11분이 지났을 때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 령은 이 새로운 국가를 승인했다. 이 행위는 공동의 가치를 기반으로 한 국교의 시작을 알 렸고 깊은 우정과 상호간의 존중을 특징으로 했다. 양국은 모두 그 정치적, 법적 체계가 자 유주의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활발한 민주주의 국가이고, 모두 개척자 사회로 출발한 국 가이며, 아직까지도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하고 통합하고 있는 국가이다. 때로 양국은 ‗이 견을 인정‘하면서 서로 간의 차이를 우정과 동맹으로 해결하고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외교 및 정치적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할 무렵 그와 동시에 서구 국가들 과 연합하여 중동에 대해 무기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다. 미국은 이 같은 조치를 취함으로써 지역적 긴장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52년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중동 안보 조약을 위해 아랍 지원에 힘을 쏟으면서 트루만 행정부가 급진적으로 시작한 이스라엘 에 대한 편애 정책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워싱턴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미국이 가말 아브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정책에 환멸을 느낀 후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다시금 긴밀해질 수 있었다. 케네디 행정부 집권 기간에 무기 공급에 대한 미국의 이전 조치는 수출 금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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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되면서 다시 역전되었다. 1960년대 말 존슨 행정부의 취임 후반기부터 미국의 외교는 이스라엘이 안전하고 승인된 국경 안에서 존재할 권리를 인접한 아랍 국가들과의 직접 협상으로 달성하는데 주력할 것을 바탕으로 했다. 강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평화를 달성하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조건이라고 여긴 미국 은 아랍 군에 비해 이스라엘 군의 질적 우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닉슨과 카터 행정부 동 안에는 이스라엘-이집트와 이스라엘-시리아 간의 휴전 협정(1973~74), 캠프 데이비드 협정 (1978),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1979)을 체결하는 과정을 지원했다. 레이건 행정부 집권 동안 양국 관계는 크게 발전했을 뿐 아니라 보다 공식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추가되었다. 앞서 있었던 공약에 더해 양해 각서가 조인됨에 따라(1981, 1988) 다수 의 공동 계획 및 자문 기관들이 생겨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고, 이는 다시 군과 민간 부문 양쪽에서 실질적인 제도 장치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상호 협력의 틀은 향후 더욱 광범 위한 양해각서로 체계화되었다(1988). 첫 번째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평화 주도(1989)를 지지했고, 마드리드 평화회의(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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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동 후원하여 워싱턴에서 평화 회담이 소집되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협약과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 협정, 시리 아와의 협상, 아랍세계의 불매 동맹을 중단하는 것을 포함한 지역적 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중동 평화 협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 스라엘의 질적 우위를 유지할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지 모르는 안보 위험을 최소화하는데도 힘을 쏟았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했으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 달성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비전을 지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 간의 지속적이고 심화되는 우호 관계는 양국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미국 외교 정책의 ‗기본 교의‘로 유지하는 것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헌 신‘을 선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여러 행정부들에 의해 뚜렷이 정의되어 왔다. 1980 년대 초반에 이스라엘은 미국에 의해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되었고, 한 해 앞서 통과된 법 안에 따라 ‗비-나토 주요 동맹국‘으로 명시되었다(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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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대한 의회의 지지도 초당파적이다. 연간 군사 원조, 평화 협상, 이스라엘의 테러 와의 투쟁에 대한 지지는 미국-이스라엘의 우호관계에 대한 의회 차원의 헌신의 특징이 되 어왔으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통합 수도로 인정하고 예루살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설립 을 촉구하는 법안이 통과된(1995) 것도 또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특별한 관계‘란 상호 경제적, 정치적, 전략적, 외교적 문제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안보 및 경 제 원조로 연간 약 26억 달러를 지원 받고 있으며(2008년까지 경제 원조는 매년 1억 2천만 달러씩 줄이고 있고 군사 원조는 매년 6천만 달러씩 줄이고 있다. 2008년 이후부터는 총 24 억 달러의 군사 지원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미국 자유 무역 협정(1985)으로 인해 양국간 교역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산업 기업들이 후원하는 합작 회사의 수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미 국의 일부 주는 이스라엘과 ‗주 대 주‘ 협약을 맺으며 문화에서 농업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 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은 여러 국제 포럼에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며 반(反) 이스라엘 결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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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찌피 리브니 외무장관 • 이스라엘 주재 미 대사관/ 매티 스 턴
을 밀어붙이려는 국제 연합과 그 관련 기구들의 시도를 저지한다. 양국은 첩보와 군사 정보 를 교류하며 상호 이득을 위해 협력하는 동시에 국제적 테러와의 전쟁이나 마약 퇴치 운동 에도 힘을 합쳐왔다. 미국-이스라엘의 우호관계는 유대계 미국인 공동체와 미국사회의 다양 한 영역으로부터의 지원으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캐나다 캐나다는 1949년에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승인했으며, 이스라엘과 캐나다는 공동의 민주주의 적 가치를 바탕으로 수년 동안 완전한 외교 관계를 맺어왔고, 문화적, 과학적 교류로 강화 된 상호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 캐나다-이스라엘의 경제 관계는 캐나다-이스라엘 자유 무역 협정(CIFTA)의 이행을 통해 더 욱 긴밀해졌다. 국제 무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캐나다의 지지는 여러 UN 포럼에서 캐나다가 대체로 친 이 스라엘적 입장을 취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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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에 속한 지역에 유대와 아 랍이라는 2개의 국가를 건립한다는 안건을 표결에 부쳤다. 당시 20개의 남미 회원국 중 13 개 국가가 찬성표를 던졌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공동 프로그램이 상당한 도움이 되어 이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화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이스라엘은 농업, 의학, 협동조합 의 조직과 농촌, 지역, 공동체 발전에 대한 자국의 경험을 공유했다. 수천 명의 교육생들이 이스라엘 내 학습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동안 국제 무대의 전개상황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대한 이들 국가의 지원이 약화되었는데, 특히 유엔과 그 관련 기구에서 그 영향이 두드러졌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쿠바를 제외하고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의 모든 국가와 완전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외교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서의 생산적인 협력과 여 러 분야에서 다수의 양자간 협정을 맺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역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2000년에 체결된 멕시코와 이스라엘의 자유 무역 협정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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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에 대한 새로운 중요성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출 품목은 화학제품, 최첨단 소프트 웨어, 농산품, 기계 및 전자제품 등이고, 수입 품목은 육류, 곡물, 옥수수, 설탕, 코코아, 커 피, 금속이 주가 되며 양쪽 모두 증가 추세에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여러 은행, 건설회사, 농업 계획개발 회사들이 중남미와 카리브해 국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중남미 지역을 방문하고 있는데, 특히 젊은 층들에게는 이 지역 방문 이 군 제대 후 통과의례의 일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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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서유럽은 이스라엘의 가장 자연스러운 교역 파트너이다. 유럽 공동체(EC)와의 자유무역지대 체결(1975)로 대 유럽 수출이 상당 규모로 늘었고, EC의 대 이스라엘 수출은 그보다도 더욱 증가했다. 이러한 교역 증가는 창업주와 투자자, 합작회사 설립 간의 긴밀한 사업적 관계의 발전과 유럽 자유무역 연합(EFTA)의 회원국들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에 힘 입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1995년에 조인된 이스라엘-유럽 연합(EU) 간의 연합 협정은 2000 년 6월에 효력이 발생하여 더욱 긴밀한 경제적 관계뿐 아니라 심화된 정치적 대화를 가능 케 했다. 1990년대 중반, 이스라엘은 EU의 연구개발 기본계획에 합류했다. 2007년 11월에 EU-이스라엘의 재계 포럼이 당사국들의 민간 부문 간의 이해와 협력 증진을 목표로 창립되 었다. 2004년 12월에 유럽 인근 정책에 따른 실천 계획이 이스라엘과 EU 간에 합의되었다.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수상 • GPO/ 아모스 벤 게르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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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연합은 미국, 러시아, 유엔과 함께 평화 협상을 통해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4자 대표‖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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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유럽과 유로-아시아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민주주의가 되살아나자마자 다시 시작된 이들 지역과 이스라엘의 관 계는 점차 밀접해지고 있으며 특히 경제, 문화, 관광, 국제 협력 활동 등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들 중 많은 국가가 유럽연합에 이미 가입되어 있거나 앞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할 예정이라 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들 국가와의 경제 협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 국가는 유대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홀로코스 트의 기억은 이들 국가와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재 다루어지고 있 는 문제들에는 국유화되었던 유대인 소유의 공적, 사적 재산을 원 소유주나 법적 상속인에 게 돌려주는 문제, 나치 정권 하에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구한 사람들을 ‗열방의 의인 (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인정하는 문제, 반유대주의의 발현을 막기 위해 지역 각 국 정부와 협력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이스라엘과 유라시아 국가(구 소련 연방)의 관계는 특히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그 중요성 이 부각되고 있다. 공식 방문과 새로운 협정으로 이러한 관계 확장의 튼튼한 기초가 마련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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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무역과 투자도 크게 늘고 있다. 과거 소련의 국민이었다가 현재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자신들의 출신국 사이의 인간 가교 역할을 하며 이들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은 (4자 대표의 일원으로) 중동의 외교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핵 프 로그램과 관련하여 이란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연방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은 공공보건과 첨단 농법, 수자원 관리, 사막화 방지 대책 분야에서 이스라엘 외무 부 센터(MASHAV)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중앙 아시아의 카프카스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 도 계속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그 밖에 중요한 문제로는 유라시아 국가에서의 유대 문화유 산 보존, 홀로코스트 정신 보존, 반유대주의 억제 조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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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이스라엘과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관계는 195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 라가며 그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도 전에 처음 접촉이 시작된 국가들도 있다. 1956년 가나 와의 수교를 시작으로 사하라 남부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게 되어 1970년대 초반에는 33개국과 완전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1948년 독립을 이룩했고, 새 롭게 독립하게 된 아프리카 국가들과 자신들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공유하기를 원했던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친밀감의 표현이였다. 많은 합동 벤처 등 상호간에 이익이 되는 경제협력도 발전했다. 전세계적인 오일쇼크 이후 발발한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 국가들은 아랍 국가로부터 값싼 석유와 경제적 원조를 얻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기로 한 이집트 주창의 아프리카통일기구(OAU) 결의를 이행하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단절했 다. 말라위와 레소토, 스와질랜드만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했고, 몇몇 소수 국가들은 해외 대사관의 연락사무소를 통해 접촉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출신 학생들이 이스라엘의 직업훈련 코스에 참여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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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주재 아프리카 대사들과 함께 한 찌피 리브니 외무장관 • 플래시 90
문가들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등 상호간의 협력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부터 사하라 이남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과 아 랍 이웃 국가 간의 평화협상이 진전을 보임에 따라 이러한 회복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1990년대 말 경에는 사하라 남부 39개국과의 공식수교가 회복되었다. 현재 이스라엘과 사하라 이남 국가들은 정치적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으며 이는 국가 원수 및 정부 부처 장관의 상호간 방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더해 경제적, 사업 적 교류와 문화적, 학문적 접촉, 다양한 합동 농업 프로젝트 및 의료 지원, 전문 직업훈련 프로그램, 필요 시 인도주의적 차원의 원조 등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의 정치, 경제적 통합 과정과 아프리카 연합의 탄생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이스라엘은 우정과 단결의 표시로 아프리카에 생겨나고 있는 각종 협회 및 기구와 협 력하여 아프리카 대륙과의 각별한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고자 한다는 뜻을 거듭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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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이스라엘은 아시아 국가 대부분과 국교를 맺고 있다. 아시아 국가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 력이 증가함에 따라 정치,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경제 면에서 이들 국가와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왔다. 연구 개발, 농촌지역 개발, 농업, 교육 부문에서 나타난 이스라엘과의 기술 적 협력은 아시아 지역 개발도상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스라엘과 중국은 1992년에 국교를 수립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과 중국은 관계를 꾸준히 발전시켜 2000년에는 중국 국가주석이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이스라 엘에서는 대통령이 세 번이나 베이징을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이스라엘과 일본은 상호 관계를 확장시켜왔고 이는 몇몇 협정의 조 인 및 각국 총리의 상호 방문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다자간 평화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해 오기도 했다. 1992년에 시작된 인도와의 외교관계 역시 90년대 후반부터 모든 면에서 강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이스라엘의 총리가 처음으로 뉴델리를 방문했다. 이스라엘은 2000년에 스리랑카와의 수교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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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의 외교관계는 1962년에 수립되었다. 지난 몇 년간 한국과의 관계는 모든 분야에서 크게 확장되었다. 2007년에는 양국의 외교부 장관이 서로 방문을 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많은 아세안 회원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중에는 미얀마, 태국, 필리핀의 경우처럼 50년 이상 된 관계도 있다. 캄보디아, 라오스처럼 관계가 시작된 지 오 래되지 않은 국가도 있다. 베트남과의 관계는 특히 경제, 무역, 농업 협력 분야에서 1993년 이후로 급속하게 발전되어왔다. 2005년에는 양국 외교부 간에 연례 정치회담이 생겨났다. 네팔과 이스라엘은 1960년대 초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네팔의 외교부 장관은 2007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방문하여 텔아비브의 대사관 개설을 발표했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도 완전한 수교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태평양 지역의 12개 독립 섬국가와도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들 국가 와 여러 분야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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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과 북아프리카 이집트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30년간 이어온 적대관계와 많은 희 생을 가져 온 다섯 차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 엘 총리 메나헴 베긴의 초대를 받아 이스라엘을 방문한 일(1977)과 이집트와 이스라엘, 이 스라엘과 이웃 국가들 간의 평화에 기반이 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에 뒤이어 이러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유대와 사마리아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 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아랍 거주민에게 5년간 임시 자치기간을 주는 등 팔레스타인 문제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는 이러한 성과를 인정 받아 노벨 평 화상을 공동수상 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이스라엘 공보부/ 모쉬 밀너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시작된 평화는 일체의 교전, 적대관계, 폭력 행위나 위협뿐만 아니 라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외교, 경제, 문화적 교류를 맺으며, 무역장벽을 철폐하고 이동의 자유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상호 동의한 보안협정에 의거하여 군사지역을 일정한 지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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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하고 시나이 반도로부터 이스라엘이 완전히 철군하는 몇 가지 주요한 요소로 이루어졌 다. 이스라엘은 협정 조항에 따라 평화의 대가로 전략적 군사기지를 비롯한 여러 자산을 포 기하며 시나이 반도로부터 완전 철군했다(1982).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은 뒤 다른 아랍 국가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후 이들 국가는 모두 이집트와의 수교를 재개하고 카이로에 대사관을 다시 개설했다. 튀니지로 이전되었던 아랍연맹의 본부도 1980년대 초 다시 카이로로 돌아왔다. 30년 간의 불신과 적대관계를 극복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국교 정상화는 길고도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양국에 대사관과 영사관이 세워지고 정부 장관 및 고위급 회담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테러가 다시 시작되면서(2000년 9월) 양국 관계는 상당히 냉각되었고 이집트 는 대사를 소환하기도 했으나 결국 2005년 초 다시 대사를 파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 역과 협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합동 군사위원회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집트의 기여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철수했다는 면에서 보면 양국 관계는 개선되고 있다고 할 수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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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후드 올메르트 총리와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 • GPO/ 아모스 벤 게르숌
요르단 후세인 왕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워싱턴에서 만나 양국 간의 전쟁상태 종식을 선언하고 3개월 후 요르단과 이스라엘 간 평화협정이 아카바, 에일랏 국경지대에서 체결되었다(1994 년 10월). 사실상 46년간 전쟁상태였지만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비밀리에 접촉을 유지하며 이 기간 동 안 상호간에 이익이 되는 여러 협정을 체결했다. 1991년 마드리드 회담으로 공식 양자회담이 시작된 후 양국이 교전행위를 멈추고 양국 영 토 내에서 서로에 대한 어떠한 폭력적 위협도 가하지 않으며 테러를 막기 위해 노력을 아끼 지 않고 전시 체제를 신뢰구축 조치로 변화시킴으로써 함께 중동의 안전과 협력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공식협정이 체결되었다(1994). 그 밖의 조항으로는 현존하는 수 자원의 배분 관련 합의, 양국 국민의 자유로운 상호 방문 허용, 난민 문제 완화 노력과 요 르단 리프트 밸리 개발 협력 등이 있다. 이 조약으로 1949년 합의한 휴전선 대신 새로운 국 경이 정해졌고 이 국경은 영국령 국경(1922-48)을 토대로 범위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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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조약이 비준되면서 완전한 외교관계가 수립되었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의 관계는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 경제, 과학, 문화 방면의 12가지 상호 협정이 조인, 비준되면서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 평화 조약의 실행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들 협정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하쉼 왕국 간 평화관계의 기초가 될 것이다. 평화관계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일로는 특화산업단지(QIZs)가 만들어 짐으로써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통해 1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을 미국에 무관세, 비 쿼터 조건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은 두 개의 농업 프로젝트와 공공보건 부문에서도 요르단과 협력하고 있다. 1999년 3월에 아버지 후세인 국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압둘라 2세는 2000년 4월에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팔레스타인 테러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후(2000년 9월) 요르단과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요 르단은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이후 양국관계가 조금씩 개선된 끝에 요르단은 2005년에 다시 대사를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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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국왕 압둘라 2세는 아카바에서 부시 대통령과 샤론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 팔 라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참석한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2004년 4월 국왕 압둘라 2세는 당 시 총리였던 샤론의 네게브 관저에 방문했다.
걸프 국가 중동의 오슬로 평화협정의 결과로 걸프 국가들은 1948년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과의 관계 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초 접촉 이후 연이어 고위급 공직자들의 상호방문이 이루어 졌다. 1996년 5월 이스라엘은 수자원 이용, 관광, 농업, 화학,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한 경제, 과학, 상업적 관계 발전을 위해 오만과 카타르에 무역대표부를 열었다. 2000년 팔레스타인 테러가 다시 시작된 후 걸프 국가와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이후 오만의 이스라엘 무역대표사무소는 문을 닫았다.
마그리브 국가 1994년 모로코, 모리타니아,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의 아랍 3국은 다른 아랍국가들과 함께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음으로써 평화와 화해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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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작된 모로코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이스라엘이 모로 코의 수도 라바트에 연락 사무소를 개설(1994년 11월)함으로써 정상화되었다. 4개월 후 모 로코도 이스라엘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면서 공식적으로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모리타니아 이슬람 공화국과 이스라엘은 바르셀로나 회담(1995년 11월)에서 스페인 외교부 장관의 입회 하에 각각 텔아비브와 누악쇼트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사무부처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모리타니아는 텔아비브에 외교 공관을 열고(1996년 5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완 전히 정상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1999년 10월 모리타니아는 (이집트와 요르단의 뒤를 이어) 아랍 국가 중 세 번째로 이스라 엘과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가 되었다. 이스라엘, 튀니지, 미국 간에 협의(1996년 1월)된 일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튀니지에 사무국 을 개설했고(1996년 4월), 튀니지도 6주 후 이스라엘에 사무국을 열었다 (1996년 5월). 온건한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는 이러한 국가들이 아랍세계에서 맡고 있는 역할과 수 세기 동안 가족이 살아 온 본국에 정서적 애착을 지닌 채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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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 때문에라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애착은 이들 국가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평화진전에 실제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큰 자산이다. 2000년 팔레스타인 테러가 다시 시작된 후 모로코와 튀니지는 이스라엘과의 국교를 단절했 다. 그렇다고 해도 일부 상업적 관계와 관광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분야의 접촉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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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GPO/ 아모스 벤 게르숌
이스라엘과 교황청 간의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1993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조인된 기본협약 조항에 따라)은 1965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발표된 우리들 시대(Nostra Aetate)라 알 려진 선언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작된 가톨릭교의 유대교 및 유대인에 대한 태도 변화의 역 사적인 사건으로 비쳐졌다. 이스라엘과 교황청은 기본협약에서 ―가톨릭 교회와 유대인 간 관계만의 특별한 속성‖에 대 해 언급하고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와 모든 종류의 인종 차별주의, 종교적 비관용을 척결 하고 국가 간의 상호이해와 공동체 간의 관용, 인간 생명과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증진시키 기 위한 적절한 협력‖과 ―전세계에서 폭력과 테러를 몰아내고 국가 간 갈등의 평화로운 해 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 밖에 조항으로는 기독교 성지와 관련된 현 정권, 종교 의 자유 관련 문제, 성지순례 등의 문제 등을 다룬 조항들이 있다. 1997년 11월 이스라엘에서의 가톨릭 교회의 지위와 이스라엘 법에 따른 가톨릭 교회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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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규정한 협약이 예루살렘에서 조인되었다. 이는 성지에 위치한 국가 정부가 법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인정한 최초의 협약이었다.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개인적으로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하 여 에제르 와이츠만 대통령과 에후드 바락 총리와 만남을 가졌다. 그 외에 교황은 랍비 지 도자들과 회담도 하고 야드 바솀과 통곡의 벽도 방문했다. 교황의 이러한 방문은 유대교와 가톨릭 교회간의 이해가 증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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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연합(UN) 이스라엘은 1949년 5월 11일 국제연합(UN)의 59번째 회원국 승인을 받았다. 이후 이스라엘 은 다양한 UN 활동에 참여하며 보건, 노동, 식품 및 농업, 교육, 과학 문제를 다루는 여러 UN 기구 활동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UN의 보호 아래 항공에서 이민, 의사소 통에서부터 기상, 무역에서 여성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 는 민간기구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50년 동안 이스라엘은 UN의 지역별 그룹에서 제외되었다가 2000년 4월 임시로 서구지역 그룹(WEOG)에 포함되었고 이후 아시아 그룹에 들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UN의 주요기구 선출권을 갖게 되고 주요기구에 선출자격도 갖추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WEOG를 통해) 제 60차 UN 총회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UN 결의안 중에는 이스라엘에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결의안도 있다. 그 중에는 아랍과 이
유대인들이 고국인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고 이스라엘에서 유대전통을 부활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 1차 시온주의 총회(1897)에서 세계 시온주의 기구(WZO)가 창설되 었다. 1948년 법적으로 보장 받고 국제적으로 인정 받은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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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서 WZO의 주된 목표가 달성되었다. 그 이후로 WZO는 유대인의 화합과 유대인의 삶에 서 이스라엘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활동을 장려하고, 이민을 도우며, 전세계 유대 공동체의 유대 교육을 진작하고, 유대인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는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접촉의 중심점 역할을 해왔다. WZO의 최고 기구이 자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세계 시온주의 의회는 4~5년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다.
스라엘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합의된 토대를 마련한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 (1967년 11월 22일)와 338호(1973년 10월 22일)가 있다. 그 간 UN은 중재국을 임명하고, 휴전 협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며, 적대국 간에 UN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 국가간의 적대관계를 중단시키려는 노력을 활발히 벌여왔다. UN은 수년간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정치적 전쟁의 싸움터로 이용되어 왔다. 이슬람 국가들 과 그들의 우방인 비동맹국 진영의 지원을 받는 21개 아랍국은 ‗자동적 다수‘를 구성하여 총회에서 반 이스라엘 결의안을 확실히 채택하도록 했다. UN 총회에 유대인 문제를 안건으로 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스라엘은 2005년 유럽의 나치 수용소 해방 60주년을 기념하는 UN 특별 총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고 연례 홀로 코스트 기념일에 새로운 UN 총회 결의안을 채택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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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유대인 최초의 유배(기원전 586) 이후 유대인들이 전세계로 흩어져 살게 되면서 이스라엘 땅에 사 는 유대인과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간에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관계가 만들어졌다. 수 세기 동안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고 공통 의 역사, 종교, 고국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육체적, 정신적 생존을 위한 하나된 노력으로 결 속되어있다. 이스라엘의 건국(1948)은 고대의 조국으로 돌아가 유대인 국가를 다시 세우고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이들의 2000년 된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유대인의 수는 1,3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며 이중 41%가 이스라 엘에 거주하고 있다. 전세계의 유대인들은 역사와 이상, 이익을 함께하며 여러 다양한 문제 에 대한 대화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삶에 중심임을 인정하며 전세계 유대인들은 사회, 정치, 재정적 지원 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만의 기술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채 이스라엘로 거주지를 옮겨 이 스라엘의 문화적 다양성을 더함으로써 이스라엘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유대인끼리 서로 돕 는 오랜 전통은 수백 개의 유대 이스라엘 이익집단을 위해 만들어진 다방면의 조직적인 네 트워크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위한 유대인 기구(JAFI)는 이스라엘과 전세계 유대인 간의 관계를 발전 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JAFI는 영국신탁통치정부, 외국 정부, 그리고 국제 기구에 맞서서 이스라엘 유대인 공동체를 대표하기 위해 WZO에 의해 설립되었다(1929).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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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립한 후 법에 의해 이민, 수용, 농촌 지역 정착, 이민자 주택 마련, 교육 및 청소년 활 동, 도시 재정비 등 국정의 일부를 JAFI와 WZO에서 맡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이러한 일 중 상당수를 다시 정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어려움에 처한 유대인들을 돕고 이스라엘 중심의 활동과 히브리어 연구, 경제적 기회 제공, 단체 및 개인의 이스라엘 방문을 장려함으로써 유대 공동체 및 이 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스라엘은 전세계 유대 공동체의 안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최근 반유대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이스라엘은 유대인 기구, 유럽 각국 정부 및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정 부와 함께 협력하여 전체적으로는 인종 차별주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반유대주의와 맞서 싸 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