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관소, Marc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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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보관소 Lost & Found Memory March, 2016


프롤로그 우리는 모두, 잊고 싶은 기억과 간직하고 싶은 기억, 사라져가 는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여행자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개인 의 기억을 수집하고, 기록하며, 연결하고 뒤섞는 방식의 새로 운 소통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억의 방이 모여 광 장이 된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기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약 2년

다. 물론 기억을 공유 하기를 꺼리는 사람들

전이었습니다. 광주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

이 많았지만, 그들 조차도 기억 속 자신과 대

의 작업실에 찾아가 그들의 시간과 공간에 관해

화하고 공감하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기록 하는 독립잡지를 만들면서 부터였죠. 나

은 환영했습니다. 나는 그런 익명의 기억을

는 인터뷰를 위해 질문지를 준비하지 않는 편

모아 광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광장은 본래

이었습니다. 주인공의 언어에서 열쇠를 찾아 다

입구와 출구가 없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음 화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으니

수 있으며 계급과 지위, 성별에 상관없이 자

까요. 모든 인터뷰에서 가능한 방식은 아니었지

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죠.

만,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응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호기심의 궁극

2016년 3월호 ‘기억보관소’에서는 지극

을 발견합니다. 나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끊임

히 사적인 개인의 공간이 모여 하나의 광장

없이 한가지 목표를 향해 질문해왔다는 것을 깨

이 되어가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가장 편

달았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봉인된 시간과 공간

안하고,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가 공유 공

이었습니다. 바로 ‘기억’이었죠. 기억은 더이

간, 즉 ‘광장’이 되면 어떨까?’하는 단순

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에 현실

한 호기심이었습니다. 단 2주만에 각종 SNS

과 단절되어 있지만, 동시에 살아 움직이는 유

로 200여명이 넘는 독자들이 자신의 방 일부

기체로서 끊임없이 삶에 개입합니다. 결국, 기

를 보내왔고, 기억광장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

억은 바꿀 수 없는 과거이자, 과거로 밀려나는

다. 2016년 2월 22일부터 3월 7일까지 여러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자신’과 동일

분이 보내주신 기억보관문장에서 10개의 문

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을 무작위로 선별해 완성한 기억광장소설 ‘당신은 위대해지는 중이다.’도 선보입니

우리는 모두 잊고 싶은 기억과 간직하고 싶은

다. ’LOST & FOUND MEMORY’는 당신

기억, 사라져가는 기억과 새로운 기억 안에 존

의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월간지입니다. 페이

재하는 여행자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개인의 기

스북에 ‘기억보관소’를 검색하셔서 자신의

억을 수집하고, 기록하며, 연결하고 뒤섞는 방

소중한 기억을 남겨주세요. 추첨을 통해 소정

식의 새로운 소통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

의 상품을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꺼져가는 빛이 늘어날 때마다 사라지는 기억.

전봇대 아래 살던 백곰은 내 룸메이트 가 되었다.

내 삶의 중심은 나에게 두고 싶으니까


내가 세운 규칙에 맞게, 지극히 나다운 취향 에 맞춰진 책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생각 많은 내가 유일하게 하는 일은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마냥 취향과 성 향에 부합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 가 내가 원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잊고 싶은 것이 머무는 곳 잊고 싶지 않은 것이 머무는 곳

소녀 감성으로 꽃피는 춘삼월, 건투를 빕니다.

완벽함이란 더이상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이상 버릴 것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본질적인 사랑의 조건이지 않을까싶다.

내 방의 우주, 우주는 빛을 머금고, 나는 미소를 머금고.


기억의 방, 광장이 되다.

어렸을 때 사용하던 사전들은 마치 조상님 위패들처럼, 방 한켠에 모셔져서, 오늘도 독서 를 미루는 나를 근엄하게 내려 다 보고 있다.


기억광장소설

오랫동안 참아왔다. 오줌이 마려웠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전봇대는 너무 밝았다. 조금만 더 가면 공원이 나오고, 거기에 공중화 장실이 있다. 더 걸어보려고 했지만 갑자기 발

Ep.3 20160222-0307

너는 위대해 지는 중이다.

이 떨어지지 않았다. 배출 욕구를 인정하자, 강 한 팽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몸 구석구석 흩어졌던 오줌이 방광으로 급습하는 것 같았다.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다. 곧 봄인데도, 쌩쌩부 는 바람은 아직도 겨울(1)같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는 수 없이 지퍼를 열고, 전봇대를 향 해 적당히 몸을 기울였다. 후두둑, 장대비같은

기억광장소설은 여러분이 보내 주시는 기억에 관한 문장으로 이 루어지는 소설입니다. 페이스북:

오줌이 콘크리트 기둥 주위로 강렬하게 쏟아져 나왔다. 너와 술을 마시면서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기억보관소에 여러분의 기억을 담은 문장을 보내주세요. 여러분

“울적해서 술이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

의 문장으로 소설이 완성됩니다.

처음이었다. 너는 늘 나보다 똑똑하고, 씩씩하 고, 단단했다. 첫 직장을 때려 치우고 사업을 시 작하며 남들보다 일찍 돈을 만졌고, 조건보다 사랑을 선택한 결혼을 했다. 이혼 서류를 내고 와서도 ‘피곤하다. 밥먹자 친구!(2)’하며 전

<참여작가> (1)20160223 이*선 (2)20160223 김*언 (3)29169223 김*열 (4)20160223 *선 (5)20160227 *동훈 (6)20160224 이*리 (7)20160223 이*일 (8)20160307 추*수 (9)20160227 오*민 (10)20160227고*구

화를 걸어왔던 너다. 그런 네가,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길 건너편에 네가 보였다.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주로 하 던 너는, 어깨를 넘긴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검정색 롱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다 른 손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너는 사업을 꾸리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너는 무엇이든 자연 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가 한 동네 에 살면서 같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랬 다. 다른 중학교에 가고 여고 남고로 흩어져 길 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도 너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쪽은 나였다. 너


는 나를 알아보고, 담배를 든 손으로 나를 향

하다고, 바다 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해 손짓을 했다.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독서실을 다녔던 것 같다. 그 독서실에 너

“추운데, 들어가 있지 그랬어?”

도 있었다. 고등학교 전까지 우리는 여느 동성

“고깃집에 혼자 앉아있으면 처량해보여서.

친구처럼 허울없이 지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

안그래도 혼밥 지겨운데.”

다. 이상하게도, 내 기억에는 스토리나 플롯 따

함께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삼겹살과

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쪽은

소주를 주문했다. 가게에는 우리 말고 한 커

주로 너였고, 그걸 인정하는 것은 주로 나였다.

플이 더 있었다. 불편한 옷을 입은 여자와 어 색하게 머리를 세운 남자였다. 여자는 남자에

-바다?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되지.

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기다리는 눈치였다.

-정말? 언제?”

그러나 남자는 쑥스러운지 혹은 표현력이 부

-지금!”

족한지 계속 헛소리만 하고 있었다.(3) 남자

“네가 슬쩍 미소를 짓더라. 그런데 네가 데려

는 느닷없이 호날두와 메시의 특기와 장점에

간 데가 어디였는지 알아? 너네 집 아파트 옥상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인도에서

이었어.”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화제를 옮겨갔다. 메시

-저기 아파트 너머로 파란게 보이지? 개천같아

팬이 흥분해서 유리잔을 던지며 싸움이 시작

보이지만, 그게 알고보면 바다라고.(4)”

되었고, 호날두 팬이 깨진 유리조각으로 메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네 손가락

팬을 공격하면서 베란다 밖으로 밀쳤다는 내

이 향한 곳을 보게 되더라. 그런데 거기엔 정말

용이었다. 여자는 맞장구를 치며 테이블 쪽으

파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고, 너머엔 크리스마

로 몸을 기울였다. 남자는 눈 앞에 싸움이 벌

스트리같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더라고.”

어진 것처럼 흥분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

-내일은 저기에 가자.

의 조합과 화제는 그들의 모습만큼이나 어울

“그렇게 말하니까, 너는 그러자고 했어. 우리

리지 않았다. 우리가 소주를 한 병 다 비울 때

는 다음날 독서실을 일찍 마치고 거기에 갔지.

까지 남자의 축구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멀리서 아른거리던 불빛은 크리스마스

두 병을 비우고 시선을 옮겼을 때 그들은 자

트리처럼 아름답지 않았어. 전자 멜로디 뽕짝이

리를 뜨고 없었다.

흘러나오고, 얼큰하게 술이 오른 아저씨들 몇명 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지. 바다라고 믿었던

“기억나? 네가 바다 보여 줬던 거.”

물줄기는 사실, 작은 개천에 불과했어. 나는 가

너는 불쑥 어릴적 얘기를 꺼냈다.

끔 그때 생각을 해. 우리는 개천에서 나온 용일

“아니. 내가 그랬던가?”

까 아니면 그냥 개천일까. 나는 개천으로 살고

“응,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가기 전 이

있는 거 같아.(4)"

었을 걸. 우리 같은 독서실에 다니고 그랬어.

너는 내게 '그냥 네 삶을 사는 거다.'라고 말했

밥도 같이 먹고, 방향이 같아서 집에 같이 가

었다. 지방대 4년 전액 장학금과 인서울 합격자

고 . 어느날, 집에 가는 길에 내가 너무 답답

대기번호를 받아두고 재수를 고민할 때였다. 나


는 지방 4년제를 택했고, 가끔 서울로 갔다면

흐르는 물은 바다로 가고, 그것은 우리가 알지

용의 어느 부위가 되었을까 상상했다. 세월의

못하는 무엇이 된다. 위대해 지는 중인 것이다.

깊이가 축적이 될수록 열정의 깊이가 얇아지는

그러니까 너도 위대하다. 너는 지금, 흘러가는

것을 어떻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열정은

중이기 때문이다.

세월의 깊이란 세월의 깊이 속에 자연스럽게 흡

“빈말 아니지?(6)

수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 둘 중에 한쪽에

대답 대신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너는

치우쳐져 있어 서로 저울의 무게가 같음에도 나

술잔을 부딪히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 미소

는 여전히 그 무게 중심을 한쪽으로 두고 그 반

에 열정의 오렌지 속살을 한 입 베어 먹은 것 같

대쪽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5)

은 강렬함이 느껴졌다.(7) 너는 원래 똑똑하고, 씩씩하고, 단단한 사람이다. 애초부터 위대한

“아니야.”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줄게.(8)

“우리에게 그건 분명 바다였어.(4)”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기억난다. 여느때와 달리 축쳐져있는 너에게 나

“고마워.”

는 바다를 보여준다고 했었다. 어둑해지는 도시

너는 한 번 더 웃어보였다. 우리는 가게 앞에서

를 내려다보며, 저기에 수평선이 있다고 했다.

헤어졌다. 나는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그곳에서 수평선을 보았다. 그것은 우리에

너는 네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너였

게 바다였다. 우리게 바다는 저 멀리 ‘있다’

다. 혼자서 꿋꿋이 앞을 향해 나아가던, 내 기억

는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그 무엇이었다. 바다에

속의 너였다. 집으로 오는 길에 어느 담장 너머

서 수영을 하자는 것도, 배를 띄우자는 것도 아

목련 봉우리를 보았다. 아기 솜털처럼 뽀얀 봉

니었다. 그저, 바다가 있는 광경을 보고 싶었던

우리가 곧 터질듯 물이 올랐다. 그때 너에게 카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물줄기는 우리에게 수평선

톡이 왔다.

이며, 바다였다. 실제로 개천에 있던 물은 흐르

‘오늘은 마치 어릴 때처럼 생각 없이 밝게 웃

고 흘러 진짜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바닷물은

어본 날 같다.(9)

어딘가로 또 다시 흘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는 목련 봉우리 사진과 함께 너에게 카톡을

그 무엇이 되었을 것이다.

보냈다. ‘다시 봄이 왔다.(10)

“너의 행동은 모두 옳았고, 당연했어. 그러니

봄이라는 소리를 내 보았다. 입술을 오므리며

까 너는 위대해지는 중이야.”

앞으로 내밀었다가 살짝 떼자 ‘봄’이 완성되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말을 하면

었다. 작은 움직임으로 입가에 따뜻한 온기가

맥락없고 엉뚱한 말이라고 내게 핀잔을 주곤했

도는 것 같았다.

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너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몇초간 그렇게 멈춰있었다. 네 눈 동자에는 그때의 파란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았 다. 물이 흐르는 것은 옳다. 그것은 자연스럽다.


프로필

메모리키퍼

타라재이

tarajay@naver.com Kakaotalk: JayGreenWild Blog: www.taarajay.com Facebook: 기억보관소

2002-2008 동덕여자대학교 인문학부 국어국문학, 문예창작 전공 2008-2009 Northern Ireland Camphill Community_ Clanabogan, International voluntary Coworker 2014 광주비엔날레 영어 및 한국어 전시해설 2015 광주유니버시아드 SK C&C 통번역 담당 광주문화재단 소촌아트팩토리 VRR 웹아카이빙 작가팀 선정 은암미 술관 오픈스튜디오 개인전 <융복합을 쏴라> 토론자 미디어아트페스티발 홍보 아트퍼포먼스(펑크파마, 무해 협업) 예술의거리, 아시아문화예술 활성화거점 프로그램사업, 아트퍼포먼 스(협업: 펑크파마), On the Road_Dropping, 광주 대인문화관광형시장 아트퍼포먼스(협업: 펑크파마) On the Road_ Destiny, 광주 별장 메이커스 2기 독립출판, 대인시장문장집, 기억보관소 운영 사카구치 쿄헤 제로리퍼블릭 스텝, 아시아문화전당 개관전 발산 3부작 뽕뽕브릿지, 프롤로그전 무라카와타쿠야 Everett Ghost Lines 메모리키퍼로 출연

현재: 더나비프로젝트 ‘시간과 공간에 대한 방해’ 웹매거진 편집자 기억보관소 메모리키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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