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드로잉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드로잉으로 쌓여진 나의 예술세계. 그것은 사실 드로잉이 아니다. 차라리 들판에 부는 바람, 혹은 밤하늘에 빛나는 한 줄기의 유성, 혹은 전해지지 않은 한편의 신화에 가깝다. 오직 고독 속에서 그들은 빛을 낸다. 비록 고독하지만 자유롭고, 밝고, 드넓은 세계를 갖는다. 그들은 붕새와도 같다. 사실 나는 나의 드로잉 작업을 잘 모른다. 다만 어떤 느낌이 감지될 뿐이다. .................................................!?!? 문득 뒤돌아보니 나의 드로잉들이 애처롭게 쌓여 있다. 그들에게 멋진 이름을 붙여본다.
이 책은 2007년부터 2011년 사이에 제작된 오브제 작품 위주로 구성되었다.
This book mainly consists of objet works made from 2007 to 2011.
드로잉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드로잉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드로잉으로 쌓여진 나의 예술세계. 그것은 사실 드로잉이 아니다. 차라리 들판에 부는 바람, 혹은 밤하늘에 빛나는 한 줄기의 유성, 혹은 전해지지 않은 한편의 신화에 가깝다. 오직 고독 속에서 그들은 빛을 낸다. 비록 고독하지만 자유롭고, 밝고, 드넓은 세계를 갖는다. 그들은 붕새와도 같다. 사실 나는 나의 드로잉 작업을 잘 모른다. 다만 어떤 느낌이 감지될 뿐이다. ..................................!?!? 문득 뒤돌아보니 나의 드로잉이 애처롭게 쌓여 있다. 그들에게 멋진 이름을 부쳐본다.
I perceive the world through drawing, I think and act like drawing, And my world of art is built up with drawings. But actually that is not drawing. They are rather wind blowing in the fields, A single trail of a falling star in the dark night sky, Or an untold legend. Only in solitude do they shine. Though lonely, they have a free, bright and wide world. They are like the mythical Bung bird. In fact I don’t know much about my drawings. I only sense a certain feeling. ..................................!?!? Suddenly I look back, and I see my sad stacks of drawings. I give them cool names.
I
006
오래전 나만의 공간 오포 능평리 의 화이트큐브를 잊을 수 없다. 화이트 큐브는 말이 그렇지 어느 농가의 네모반듯한 하얀색의 창 고 건물일 뿐이다. 그곳에서의 더 없는 기쁨은 아침나절의 한 잔의 커피였다. 그것 말고도, 실내로 쏟아지는 햇살과 뒤꼍에 만들어 놓은 나만의 생태공원, 침묵, 욕망 이 통제된 평온, 그림 그리는 일 등이 더 있다. 반면, 그곳 화이트 큐브 공간은 아쉽게도 유령과도 같은 끝없는 난제들을 나에게 던져주는 곳이기도 했다. 기묘한 곳, 존재론적인 공간, 아찔한 곳. 지금은 하얀색의 덩어리...
II
034
정신과 물질, 존재와 근원, 시간과 공간 등은 삶을 구성하는 기본구 조의 중심축에 속해있다. 그 구조 속에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y축과 만나게 된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에게 y축은 모든 것이 사라 지고 마는 두려운 경계선이 되기 도 하지만 예술은 그 경계선 너머 까지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삶과 죽음이 엉켜있는 세계...
III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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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행성 속에서 살고 있는 나, AD2011에 존재하고 있는 나, 정신과 물질 사이에서 온갖 아티 스틱한 것들을 찾고 있는 나, 이런 070 나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을 때, 혹은 연민을 느낄 때 자주 나를 그려내곤 한다. 그려진 나를 마주 눈물은 서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하고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성 찰하기도 하며 그냥 바라보기도 오히려 인간감정의 총체성과 한다. 나를 그리는 중에 나의 몸과 관련된 어떤 철학적인 개념에 가깝다. 어떤 비밀스런 상징처럼 세상의 경계점에서 발생하는 모 눈물은 세계 속에서 훨씬 광범위 종의 긴장감에 매료되곤 한다. 그 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인생의 긴장감은 각성제처럼 나를 바로 알파와 오메가가 눈물로 설명되듯 볼 수 있게도 하고 흔치않은 쾌감 이 나의 드로잉도 그렇게 보인다. 을 준다. 나를 음미해보려는 의식 처럼 그렇게 나를 그린다.
VI VII 194
내가 그린 건 맞긴 한데... 기억이 없다. 에스프레소나 한잔 마셔야 겠다.
V
262
牛. 鷄. 狗. 畵(소, 닭, 개, 그림) 언뜻, 사자성어 치고는 불경해 보이지만 나에게는 주옥과 같은 깨우침이다. 모두 같은 레벨에 있는 동급 모음이다. 모두가 사람 과 가까이하면서 이로움도 주고 즐거움도 주는... 특히, 그 중에서도 소, 닭, 개는 그래도 생명체이니 그림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할지라 도 넷 중에 격이 제일 낮아 보인다. (지나치게 거만해져버린 그림... 이제 버릇을 좀 고쳐놓을 필요가 있을 듯) (註:畵=미적 창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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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드로잉은 잡화(雜畵)다. 의도 하지 않은 특별한 주제가 나오기 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소한 것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다. 나의 정신도, 인생도, 세계도, 심지어는 우주도 잡(雜)이니 잡화가 차라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용도 형식 도 뒤섞여 있지만 사시현상에 주의 만 한다면 가히 볼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VIII 298
뭔지 모를 징그러운 것들이 작업 실 여기저기에 수북이 쌓여있다. 나의 손으로부터 나온 것들인데 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이 서로 재잘거리는 웅성거림만이 스테레오타입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묻는다. “여기... 새가 있느냐?”라 고... 나는 말을 대신해서 겨우 손가락으로 답한다. .
I
오래전 나만의 공간 오포 능평리의 화이트 그렇지 어느 농가의 네모반듯한 하얀색의 기쁨은 아침나절의 한 잔의 커피였다. 그것 만들어 놓은 나만의 생태공원, 침묵, 욕망이 다. 반면, 그곳 화이트 큐브 공간은 아쉽게 던져주는 곳이기도 했다. 기묘한 곳, 존재 덩어리...
I cannot forget the white cube in Neungpyeo ago. Though I used the term white cube, it w building on some farm. The greatest pleasure morning hours. Besides that, there were also th garden I had made in the back yard, silence, my work. Meanwhile, the white cube space w difficult problems to me. Strange place, ontolo
트 큐브를 잊을 수 없다. 화이트큐브는 말이 창고 건물일 뿐이다. 그곳에서의 더없는 말고도, 실내로 쏟아지는 햇살과 뒤꼍에 통제된 평온, 그림 그리는 일 등이 더 있 도 유령과도 같은 끝없는 난제들을 나에게 론적인 공간, 아찔한 곳. 지금은 하얀색의
ong-ri, Opo, which was my private space long was actually just a rectangular white warehouse e for me there was a cup of coffee during the he sunlight pouring inside, my own ecological peacefulness with desires under control, and was also a place that tossed endless ghost-like ogical space, giddy place. Now a white 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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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정신과 물질, 존재와 근원, 시간과 공간 등 해있다. 그 구조 속에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재들에게 y축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는 경계선 너머까지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삶
Mind and matter, existence and origin, time the basic structure composing life. Within th the y axis. For all beings with life, the y axis disappears, but art deals with everything, incl and death are tang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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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삶을 구성하는 기본구조의 중심축에 속 y축과 만나게 된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 두려운 경계선이 되기도 하지만 예술은 그 삶과 죽음이 엉켜있는 세계...
and space, etc. belong to the central axis of hat structure, it is humans’ fate to meet with can be a frightening border where everything uding beyond that border. A world wher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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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서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인 개념에 가깝다. 어떤 비밀스런 상징처럼 눈 확보하고 있다.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가 눈 보인다.
Tears is not a lyric word. Rather, it is closer to totality of human emotions. Like some secret the world. As the alpha and omega of life 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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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감정의 총체성과 관련된 어떤 철학적인 눈물은 세계 속에서 훨씬 광범위한 영역을 눈물로 설명되듯이 나의 드로잉도 그렇게
o a certain philosophical concept related to the t symbol, tears secure a much broader area in be explained by tears, so can my draw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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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행성 속에서 살고 있는 나, AD2 사이에서 온갖 아티스틱한 것들을 찾고 있 때, 혹은 연민을 느낄 때 자주 나를 그려내곤 도하기도 하고 성찰하기도 하며 그냥 바라 세상의 경계점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긴장감 처럼 나를 바로 볼 수 있게도 하고 흔치않은 처럼 그렇게 나를 그린다.
The me living on the planet called Earth, the for all sorts of artistic things between the spiri questions of about this me, or when I feel com me, attempt to have a conversation, reflect, or captivated by a certain tension that occurs at That tension enables me to look at myself stra an unusual sensation of pleasure. Like a ritual myself. 102 MY GREAT DRAWINGS Ⅳ
011에 존재하고 있는 나, 정신과 물질 는 나, 이런 나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을 곤 한다. 그려진 나를 마주하고 대화를 시 보기도 한다. 나를 그리는 중에 나의 몸과 감에 매료되곤 한다. 그 긴장감은 각성제 은 쾌감을 준다. 나를 음미해보려는 의식
me existing in A. D. 2011, the me searching itual and material - when I want to ask passion, I often draw myself. I face the drawn just gaze. While I draw me, I am sometimes the border between my body and the world. aight like a stimulant, or sometimes gives me of trying to scrutinize myself, I thus dr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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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드로잉은 잡화(雜畵)다. 의도하지 않 으로는 사소한 것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다 주도 잡(雜)이니 잡화가 차라리 자연스럽 만 사시현상에 주의만 한다면 가히 볼만한
My drawings are miscellaneous pictures. So but basically they are a random mixture of tr even cosmos are miscellaneous, it seems natura content and form are all mixed up, there shou beware of the cross-eyed phenome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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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특별한 주제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 . 나의 정신도, 인생도, 세계도, 심지어는 우 게 느껴진다. 내용도 형식도 뒤섞여 있지 것이 있을 것이다.
ometimes there are unintended special themes, rivial things. Since my mind, life, world and al to draw miscellaneous pictures. Though the ld be something worthwhile seeing, if only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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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내가 그린 건 맞긴 한데... 기억이 없다. 에
I am sure I drew it... but I have no re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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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소나 한잔 마셔야겠다. I need an espre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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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 鷄. 狗. 畵(소, 닭, 개, 그림) 언뜻, 사자성어 치고는 불경해 보이지만 같은 레벨에 있는 동급 모음이다. 모두가 움도 주는... 특히, 그 중에서도 소, 닭, 개는 고 긴다 할지라도 넷 중에 격이 제일 낮아 이제 버릇을 좀 고쳐놓을 필요가 있을 듯.)
Cow, Chicken, Dog, Pictures The phrase seems somewhat disrespectful, b is a gathering of peers in the same level. Th pleasure... Particularly, since the cow, chicken may be, the picture seems to be the lowest in st Perhaps they need to be taught a lesson.)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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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주옥과 같은 깨우침이다. 모두 사람과 가까이하면서 이로움도 주고 즐거 는 그래도 생명체이니 그림이 제아무리 날 아 보인다. (지나치게 거만해져버린 그림... (註; 畵=미적 창조물)
but for me it is a precious enlightenment. It hey are all close to people, giving benefit and and dog are living creatures, however great it tatus. (Pictures have become overly arrogant... te: picture = artistic cre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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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를 징그러운 것들이 작업실 여기저 나온 것들인데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거림만이 스테레오타입으로 흐르고 있을 느냐?”라고... 나는 말을 대신해서 겨우 손가
Unknown creepy things are piled here and t out of my hand, I cannot identify them. Only on like a stereotype. Someone asks, “Is there fingers, instead of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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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수북이 쌓여있다. 나의 손으로부터 없다. 다만 그들이 서로 재잘거리는 웅성 뿐이다. 누군가가 묻는다.“여기... 새가 있 가락으로 답한다.
here in my studio. Even though they all came y their buzzing chatter among themselves goes a bird... here?” I manage to answer with 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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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귀일, 萬畵歸一 ; 김을의 平常畵에 관하여 강홍구(작가)
행장 - 人生如畵 (인생여화 ; 인생도 한 폭의 그림) 김을의 작업실은 시골에 있다. 거기에 가기 위해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용인군 백암면 어느 정류소에 도착한다. 전화하자 잠시 뒤 그가 나타난다. 그가 모는 소형차를 타고 그의 작업실로 간다. 가을이다.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논과 초록색이 갈색으로 천천히 변해가 는 야산이 보인다. 작업실은 시골 동네 길가 언덕에 있었다. 일 층은 작업실이고 이 층은 살림 집이다. 아래쪽에는 빈집 두 채, 나무 울타리에 커다란 호박이 열려 그것을 흰 플라스틱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작업처럼 보인다. 텃밭에는 배추가 새파랗게 자라고, 마당과 집 곳곳에 작 업들이 널려 있었다. 마당에 심은 나무에는 사람과 새들과 동물 인형들이 매달려 있고, 벽에 도 뭔가 있었다. 물론 집 자체도 일종의 작업이다. 왜냐면 그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이 집 말고도 집을 몇 채 더 지어 먹고 살았으므로 삶 자체가 작업이자 드로잉이라고 해야 할까.
김을은 1954년생 말띠이다. 그의 자화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두 줄의 주름이 뺨에 패어 있지 만, 아직 청춘이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지 이십 몇 년이지만 화가의 뜻을 둔 것 은 사십 년이 넘는다. 그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 흥읍 옥하리 265번지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흥 은 따뜻하고 푸근한 고장. 같은 전남이라도 광주 인근보다 계절의 오고 감이 반달은 빠르다. 고흥 가는 길에 화순, 곡성에서 푸릇푸릇한 보리밭을 보고 고개를 넘어 고흥읍에 이르면 누릇누릇 익 어가는 보리밭을 만나게 된다.
무제 Untitled 1988 Oil on canvas 175×122cm.
김을은 옛날식으로 말하면 김해인, 김해 김씨이다. 집안 살림살이는 윤택했던 듯하다. 자세 한 사항은 모르고 묻지도 않았지만, 그가 그린 종택 그림을 보면 살림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선친은 서예가셨고 형제는 십일 남매이다. 장형과의 나이 차이는 삼십 년에 가까 운 전형적인 대가족 출신이다. 고흥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김을은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한양공고에 입학 한다. 공고를 간 김을은 공업과 기술에 별 뜻이 없고 화가가 될 생각을 어렴풋이 품는다. 하지 만 그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미국을 가려고 공군에 지원했다가 훈련 중 적성검사 부적 격으로 귀가조처 당하고 홍익공전, 원광대 금속공예과와 홍익대 대학원을 거친다. 뿐만 아니 라 중간에 신학대에 적을 두기도해 종교인이 될 뻔도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의 길이 아 니다 싶어 그만두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글 앞에 쓰는 이유는 김을이라는 작가의 작업에 대해 알려면 그의 삶의 내력 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세세한 것을 알 수도 없고 꼭 잘 알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어 떻게 그의 삶이 흘러 왔는지를 대강이라도 알지 못한다면 그의 작업의 내력도 알지 못할 것이 다. 김을이 이런 내력을 세세히 쓰는 것을 싫어할지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글 쓰는 이의 권리이니까.
무제 Untitled 1988 Oil on canvas 125×170cm.
그리고 이는 데리다식 용어를 빌면 일종의 파레르곤(parergon)이라 할 수 있다. 칸트가 사 용한 용어를 빌었다는 파레르곤은 작품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르곤(ergon)에 맞서 작품 외적 인 것을 뜻한다. 데리다는 파레르곤을 보조적이고, 이질적이며 이차적인 대상, 작품 외적인 것에 해당하는 부록, 여담, 잉여라고 번역한다. 모든 작품은 불가피하게 파레르곤의 문맥에 의존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김을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그의 삶 전체가 작업과 파레르곤의 합산일 것이다. 김을이 살아온 삶은 일종의 구도자의 그것과도 유사하다. 물론 상당수의 화가나 예술을 하 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을의 행장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록해두고 싶은 것은 그림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 한동안 목수를 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가 지은 집만 해도 여러 채이다. 목수 경력은 1990년부터 시작해 이십여 년이 지났고 그림 또한 그때부터 매진해서 이십 년. ‘人生如畵(인 생여화), 인생이 그림과 같다’는 그의 말을 빌리면 그의 인생은 어떤 그림이 된 것일까?
자화상 – 白紙黃身 (백지황신 ; 화폭은 희고 내 몸은 누런색) 김을은 회화와 드로잉을 통해 두 가지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해왔다. 하나는 자신의 육체와 삶의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회화 혹은 그리기와 세계에 대한 것이다. 김을 에게 이 둘은 둘이자 하나이다. 먼저 그의 자화상들을 보자. 작업실에 불이 나는 바람에 몇 점 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그의 초 기 자화상은 거칠고 표현적이다. 금속 공예작업에 쓰던 구리판을 잘라 캔버스 위에 붙이고 그 위에 유화로 그린 자화상들은 대부분 무표정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대부분 화가들의 자화상이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비해 그는 눈을 감고 있거나 시 선을 다른 곳으로 피한다. 심지어 을해년에 그린 자화상은 오른쪽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멍 들어 있다. 입은 굳게 다물고 왼쪽 눈으로 자신을 쏘아 볼뿐. 을해년에 그린 이 자화상과 붓 을 들고 그린 자화상 정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잘라 붙인 구리판은 머리와 얼굴의 뼈대 를 이루면서 동시에 무슨 상처처럼 보인다. 단단해 보이는 두개골, 두드러진 광대뼈, 굳게 다 문 입 등, 그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면서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한다. 아마도 유화 로 뒤덮인 표면 아래 조각난 구리판은 파편화된 자신에 대한 은유인지도 모른다. 혹은 살아가 기의 신산함과 미래의 불투명함, 그리기의 어려움 등등 모든 것이 집약된 것일 수도 있다. 물 론 이것은 동업자 입장에서 해본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김을의 자화상은 초기의 일회성 작업이 아니고 자신에 대한 무슨 자부심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화가가 그랬듯이 탐구와 실험의 대상이고 자신이 가진 자아에 대한 일종 의 거울이다. 김을의 자화상은 혈류도(血流圖)와 드로잉으로 작업이 변화, 전개되는 동안에 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혈류도에 등장하는 얼굴들 역시 일종의 자화상이고, 드로잉에는 좌 우 입가에 두 줄씩의 주름으로 특징 지워지는 자신의 얼굴이 무수히 등장한다. 평면이건 입체 건 마찬가지이다. 김을은 일관성 있게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다. 라깡을 빌어 말하면 그의 자화상은 상상계에 서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사실 김을의 자화상들은 그가 아직 유아적 상태 에 있음을 말해준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사 실 모두 유아적 상태에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파편, 일종의 이미지를 볼 뿐 자신의 전체를 완 전히 보고 인식하는 사람은 없다. 미술가들은 물론 더 심하다. 파편화된 자신, 조각난 정체성을 이어 꿰매어 만드는 자화상은 불완전한 상상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미술가들은 끝없이 자신에 대해 되묻는다. 나는 누구 인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김을의 자화상 역시 이러한 물음의 연속이다. 초기의 심각한 표정 의 얼굴에서 최근의 희극적인 표정의 오브제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오브제 자화상들은 인형을 이용해 간단히 만들어진다. 빡빡 깎은 머리의 인형에 좌우 에 두 줄의 입가 주름을 그리는 것으로. 이 자화상들은 초기나 평면 드로잉 자화상들보다 희 화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며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를 보다 더 정확히 일러 준 다.
나 Myself 1995 Oil on canvas 188×188cm.
나 Myself 1995 Oil on canvas 188×188cm.
나 Myself 1995 Oil on canvas 188×188cm.
예를 들면 <킴스 토이>라고 쓰인 장난감 자동차는 꼬리와 그의 얼굴이 결합됨으로써 웃음 을 자아내고, 얼굴 두 개를 들고 놀고 있는 목이 없는 인형 자화상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깡통 위에 얼굴만 달랑 올려놓은 자화상 역시 초기의 작업들과는 달리 농담과 웃음 속에 있 다. <브러쉬, 티어 앤 망치>는 자신이 처한 입장을 재치 있게 보여준다. 어쩌면 이런 변화들은 소재가 바뀜으로써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 이 흘러 자신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을 객관 화하고 어떻게 보던 자신의 이미지는 결국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여유 이다. 그가 농담처럼 쓰는 자작 한시에 등장하는 ‘半百畵業夢如流(반백화업몽여류), 반 백 년 화업이 꿈처럼 흘러갔구나!’처럼 한탄이자 정확한 자기 인식이기도 하다. 모든 자화상에서 김을이 들여다보는 거울은 산산이 깨져 있다. 그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모 습 역시 파편화된 조각의 결합이었다. 이러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김을은 반복해서 탐색한다. 다시 라깡을 빌자면 김을의 자화상은 상상적이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 실재적이 아닌 것, 실재적인 것과의 어긋난 만남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실재적인 것은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을의 자화상뿐 아니라 모든 자화상은 반복되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반복은 자신 을 근본적으로 재현할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불가능의 표현이다. 김을의 이러한 탐구는 자화상을 넘어 확대된다. 그것이 혈류도, 옥하리 265번지 연작이다.
종가 The Main Family House 1998 Oil on canvas 82×462cm.
혈류도 – 裸體臨風 (나체임풍 ; 맨 몸뚱아리로 거친 바람을 맞는다) 시골에서 태어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어쩌다 시골에 가면 기묘한 감 정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대개는 고향에 가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괴롭다고 한 다. 고향에 대한 애증이다. 고향에 대한 좋은 감정이나 기쁨은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장소 애적 애착과 기억들이 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은 변해가는 고향의 상태와 사람들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 놀던 장소나 집과, 논밭, 나무, 조상의 산소나 무덤 같은 곳은 그리움 에 가까운 애틋함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핏줄에 대한 막연한 의무감, 아직도 고향에 살 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묘한 죄책감과 자신이 더 이상 고향에 속해있지 않다는 소속감의 상 실이 있다. 게다가 고향이 개발, 발전 따위의 이름으로 파괴되어가고 있다면 그는 더욱더 심 해진다. 김을 역시 수시로 고향에 들락거리면서 그 감정들에 휩싸였고, 그에게 가장 편안한 기분을 주는 장소는 조상의 선산이었다고 한다. 선산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단순히 조상이 묻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무로 둘러싸이고 잔디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다 풍수지리학적 위치 때 문에 햇볕이 잘 들고 전망 또한 좋기 때문일 것이다. 산소나 묘지에서 평안감을 느끼는 것은 장소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점, 즉 자신의 기억과 일치한다는 데서 오는 평안함과, 이미 죽 은 조상과 완벽한 동일시가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남촌리 산 113번지 Mt. 113 Namchon-ri 1998 Oil on canvas 122×244cm.
<혈류도>, 옥하리 256번지는 일종의 미시사이자, 민속지학적 탐구이며 동시에 자신의 정체 를 장소, 위치, 공간과 시간을 통해 규정지으려는 시도이다. 김을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자 신을 벗어나 자신의 조상, 뿌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탐색이 알렉스 헤일리의 그것처럼 자신의 뿌리를 찾아 족보를 새롭게 확립하겠다는 시도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도 는 자신의 경우를 빌미 삼아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진 가족사, 혹은 미시사에 대한 기억과 성 찰을 유도하는 편에 가깝다. 대개 귀향할 때 갖는 고향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고향과 자신을 자기 동일시하는 관점과 더 이상 자신이 고향에 속해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자발적 타자화를 동시에 느끼는 데서 온다. 내 일부는 저기 있고, 일부는 지금 여기에 있다. 거기에서 오는 분열은 고향에 대한 기억의 고 착과 고집, 변화에 대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부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타자화와 동일시가 한 인격 안에서 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타자화되지 않는 것은 장소와 풍경에 국한된다. 조상들은 역시 타자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해 지기 때문이다. 타자화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타인들을 주관적으로 규정하는 것 이니까. <혈류도>에 등장하는 그의 그림들은 토지 소유 관계를 보여주는 지적도와 풍수 지리학적 관점과 일반적 풍경이 세 겹으로 겹친다. 지적도는 경제적 가치와 권리를, 무덤의 위치와 풍 광은 풍수 지리학적 관점을, 산소를 포함한 야산 풍경은 현실적이고 체험적이다.
혈류도 Blood Map 1997 Acrylic and Korean Ink on Korean paper 192×110cm.
김우창에 따르면 풍수지리학은 한국인의 에피스테메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몸에 체화 되어 문화적 유전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후기의 실경 산수와 그 이후의 풍경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경관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풍수지리학적 관점이 스며 있다. <혈류도>에는 풍수지리학적 이미지인 장풍도적 시점이 들어 있다. 지적도는 소유와 분류 에 대한 권력의 기호이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사업의 결과물이다. 100년 전의 지적 도를 우리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고 새로운 지적도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있다. 지적도의 바탕이 되는 측량과 분할은 과거 식민지의 흔적이면서 현재이다. 그러니까 김을의 <혈류도> 그림에는 전통적인 에피스테메로서의 풍수지리학적 경관, 일제와 근대의 결과물로서의 지적 도, 지금 그의 눈으로 본 것들을 시각화한 풍경이 한 점의 그림 속에 중층적으로 누적되어 있 다. 일종의 조상 고고학이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지리적, 미시사적 탐구로서의 야산 풍경들 은 시각과 권력, 소유, 역사가 미묘하게 결합한 역사적 도해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경산수 인 것이다.
김을의 <혈류도>에는 조상의 초상도 등장한다. 남아 있는 사진이 바탕이 되었을 조상의 얼 굴들은 초상화처럼 묘사되거나, 묘지가 있는 자리에 그려지기도 하고 <혈시>라고 쓰인 드로 잉 속의 나무들을 이루기도 한다. 그가 그린 <혈류도>는 문자 그대로 피의 흐름이자 강물이자 나무이다. 즉 식물적 구조를 가진 피의 사다리이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들에 의해, 민속지학적 조상 탐구에 의해 김을은 자신의 정체성, 혹은 고향에 대한 애증에서 벗어났을까? 아니다. 김을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이 누구인가를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위치시켜보려는 자기 지시적 행위를 한 것이다. <혈류 도> 역시 김을의 정체성 찾기 2기쯤에 해당하는 자화상의 연작인 셈이다. 그리고 그 자화상이 김을의 얼굴과 육체만이 아닌 시간과 공간으로 확대된 것이다. 스튜어드 홀은 인간의 정체성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존재의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생성의 정체성이다. 그는 존재의 정체성은 공통성에 바탕을 두고, 생성의 정체성은 실제로 정 체를 확인하는 과정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다. 홀은 개인이 하나 이상의 정체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홀에 의견에 따르자면 김을의 <혈류도>는 한편으로는 혈육이라는 공통성을 찾아가 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고 동시에, 자신의 생성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인 것이다.
임야도등본 A Certified Copy of Forests and Fields 1999 Oil on canvas 182×182cm.
‘옥하리 265번지’ 전시장면 Installation View of 256 Okhari at Project Space Sarubia in 2002
드로잉 - 日畵又日畵 (일화우일화 ; 그리고 또 그린다) <혈류도> 이후 김을은 자신의 작업 방향을 바꾼다. 그가 향한 곳은 주제와 소재의 선택과 실행에서 보다 자유로운 드로잉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드로잉이라기보다 그가 부르듯 평상화에 가깝다. 드로잉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드로잉에 대한 몇 개의 원칙을 만든다. 그것은 한시적으로 한 삼 년간 드로잉 작업만 한다는 것, 일 년에 천 점 이상 의 작업량을 유지한다는 것 등이다. 그리고 일종의 프로젝트 개념으로 드로잉을 묶어간다. 삼 년을 넘어 거의 십 년 동안 지켜진 그 원칙들은 원칙이라기보다는 무원칙 가깝다. 그는 재료 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와 요구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는 것이다. 2006년에 그는 자신의 드로잉 작업에 대한 내용, 형식, 내적 체계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내용상으로는 물질계, 정신계 양자를 통합한 통합계로 나누고, 형식은 제도에서 부터, 그리기, 쓰기에 이른다. 내적인 분포 즉 드로잉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무의식과 의식에 서 출발해 주관적인 선택에 따라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드로잉화한다. 그가 사는 집부터 마당의 나무와 재배하는 호박에 이르기까지. 그가 집을 짓거나 건축을 하는 과정에 관한 것은 집 마당에 지은 작은 창 고 드로잉에서 볼 수 있다. 그 드로잉에는 창고의 부지를 선정하고, 기초공사를 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이 모조리 들어 있다. 창고와 그에 대한 기록 모두 드로잉인 셈이다. 생활과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상념들과 느끼는 감각들을 드로잉이라는 이름으로 모조리 포 착해보려는 그의 노력은 어마어마한 작업량을 낳는다. 그의 작업실은 그의 집은 작품으로 가 득 차 있다. 집이 곧 작품이다. 그는 거기서 산다. 사는 것과 그리고 만드는 것이 별 구분이 되 지 않는 삶이다. 거의 텃밭에서 배추를 키우듯이 그는 살면서 그린다. 달리 말하면 김을의 드 로잉은 그림과 삶을 한꺼번에 초월하려는 욕망의 시각화이다. 시각화뿐 아니라 촉각화도 동 시에 이루어진다. 그의 드로잉은 총체적이며 대상과 드로잉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 며, 무엇인가의 재현이 아니라 현시이다. 김을의 드로잉은 개념과 그리고 만드는 감각 사이에 걸쳐진 다리와 같다. 물론 그는 그 다리는 건너지는 않는다. 다리 위를 왔 다갔다할 뿐이다. 그의 드로잉은 기본적으로 브리콜라주이다. 창작, 혹은 독창성 따위에 대한 압박이나 강박 증 없이 떠오르는 것을 작업화하는 과정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 브리콜라주는 추상적인 것 과 구체적인 것, 시시한 것과 중대한 것, 관념과 실재를 가리지 않는다. 즉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들을 묶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무관한 것들끼리 관계를 만들어 낸다. 이런 과정에서 김을은 미술 자체에 대한 패러다임을 개인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변화는 작 품과 작품 아닌 것 사이에 드로잉을 놓아두는 것이다. 그의 드로잉들은 엄격히 말해 낙서와 놀이와 작업들이 혼재한다. 그 혼재는 그의 드로잉이 삶과 통합되는 흔적이다. 어쩌면 김을의 드로잉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작업하는 것과 삶이 일체화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을 지도 모른다.
그는 드로잉에서 무엇인가 특별히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드로잉에서 특 별히 추구하는 것은 없다 해도 눈물의 연작이나 자화상에서 보듯이 그의 관심사는 지속적으 로 확대 심화한다. 눈물 연작은 일종의 애브젝트(abject) 아트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애브젝트는 신체와 사회의 경계지역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 면 구토, 배설, 월경 등의 신체적 생리 작용이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떠올리게 하므로 그렇다. 김을의 눈물 또한 마찬가지이다. 김을의 눈물 작업은 대부분의 애브젝트 아트처럼 불쾌한 재 료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애브젝트 아트임에 틀림없다. 특히 여자가 눈물을 낳 고 있는 <눈물의 탄생>이나 <눈물가게> 연작에서 정액 파는 가게 <Kim’s semen> 등은 일반 적인 애브젝트 아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신체에서 분비되는 눈물, 특히 남자의 눈물은 복합적이다. 구토, 배설, 월경 등이 성 적이 의미가 강한 것과 달린 눈물은 사회적, 문화적인 함축을 담고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처 럼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따위의 마초스러운 것에 대한 강요가 상식화된 나라 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김을 눈물 연작은 자전적인 요소와 한국적인 상황에 특화된 애브 젝트 아트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김을의 드로잉은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존재하기 위해 있는 작품들이다. 전시 가치나 예배 가치가 아니라 그냥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원시적인 미술의 원형에 근 접해 있다. 동굴 벽화 시대의 들소와 말 그림이 그냥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 자체로 있도록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을은 동일한 소재, 똑같은 것들을 변주해서 드로잉하지만 그것은 재현이라기보 다는 또 다른 존재를 생산하는 행위이다. 예를 들면 그는 자신이 사는 집을 짓기 위해 드로잉 하고, 실제로 집을 짓고, 그것을 다시 입체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때 그의 드로잉은 집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집을 짓는 행위에 가깝다. 그 새로운 집 만들기는 마을 단 위로 확대되어 <밤듸 마을 프로젝트>의 경우 마을의 집들을 일일이 그리고, 자신이 지었던 집 들도 다시 입체와 평면으로 만든다.
김을의 드로잉 프로젝트는 삼 년이 지나 십 년을 넘어서는데도 아직 계속 중이다. 김을의 드로잉은 굳이 라깡식으로 분류하면 실재계에 해당할 것이다. 상상계인 자화상 시리즈, 상징 계인 혈류도를 지나 붙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사라지고 남은 것, 즉 잔여물인 ‘오브제 쁘띠 아 (objet petit a)’가 곧 드로잉인 셈이다. 아마도 그 무엇인가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드 로잉은 끝없이 반복, 재생산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김을의 드로잉은 과잉과 잔여이다. 과잉은 물질적 반복과 오브제들의 집적에서 나타난다. 그의 드로잉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6년 이전의 프로젝트만 간단히 살펴 도 사루비아다방 메모지 위에 지름 50밀리 종이컵 밑바닥을 둥글게 그리고 그 안에 잡다한 상 념을 그린 것, 기하학적 동심원과 사각형, 찍기로 만들기, 완당묵연과 비전화법이라는 고서를 묶고 표지에 드로잉하기, 그 밖에도 나의 공구, 새, 동심원, 밤듸마을, 여행지, CCTV.... 등 기 다란 목록이 만들어진다. 그의 드로잉들은 비록 프로젝트라 해도 계열화 되어 있지 않고 실재 하지만 조직화되지 않는다. 소소한 프로젝트들 사이의 병치에서 오는 긴장과 즐거움을 보면 김을의 진짜 드로잉은 보 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드로잉과 드로잉,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사이에 있지나 않을까 의심스 러워진다. 그래서 그의 드로잉은 드로잉이라기보다 드로잉적인 어떤 것, 혹은 예술적인 어떤
것을 찾아 숟가락으로 떠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 드로잉은 비로소 드로잉이면서 드로잉 이 아닌 것이 된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드로잉은 들뢰즈를 빌어 말하면 수목형이 아니라 전형적인 리좀(rhizome)형에 가깝다.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드로잉의 형식, 내용 어느 것도 수목형에 해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김을의 드로잉은 세상을 조합하는 방식이고 일종의 창조적 반복이 다. 그의 사유와 관심의 방향은 드로잉을 통해 드러나고 드로잉은 리좀 모양을 한다. 그 리좀 은 산만할 정도로 흩어지고, 오브제의 형태로 축적되지만, 결코 위계질서를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눈물의 경우처럼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은 위계를 의미하지도 나타내지도 않는다. 대신에 풀과 나무들이 자연 상태에서 자라듯이 일 종의 숲을 형성한다. 그 숲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지는 보는 사람의 몫이 된다. 그는 자기 드 로잉을 방목한다. 아니 기른다기보다는 나타나 사라지도록 내버려 둔다. 그래서 애써 그린 상 당량의 종이 드로잉들을 물에 적셔 뭉쳐서 한 덩어리의 종이 공을 만들었던 것일 것이다.
畵增室狹 (화증실협 ; 그림이 늘어나면 작업실이 좁아진다) 김을은 그의 작업으로 야산을 만드는 중이다. 꼭대기는 높지 않은 토산에 가깝지만 먹을 것 이 생산되는 밭처럼 배추나 무씨를 뿌리고 키우는 것처럼 그는 작업한다. 그의 작업은 농업적 이다. 공산품이나 제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형의 원형에 접근해 있다. 그것을 오브제인가 개 념인가 드로잉인가 회화인가를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마치 우리의 삶이 구분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이렇게 삶과 그림과 드로잉들을 버무려 높게 쌓는 동안에 무엇을 얻었을까? 화증실 협, 그림이 늘어나면 작업실이 좁아진다는 물리적 법칙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어쩌면 무엇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질문이기는 하다. 왜냐면 모든 삶이 죽음이라는 결론은 이 미 정해져 있음에도 우리가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그림 혹은 드로잉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아마도 그는 <싸가지 없는 그림>을 초월해 결국 <미술 없는 세상>에 도달에 보려 하는 중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삶을 그림과 드로잉과 만드는 행위와 완벽히 뒤섞어 발효시키는 중 일 거다. 그의 말처럼 萬畵歸一(만화귀일), 모든 그림은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 글에 사용된 제목과 소제목들은 김을이 쓴 사자성어를 인용한 것입니다.
萬畵歸一 Man-Hwa-Gwi-Il (All Pictures Return to a Single Place): On Kim Eull’s Pictures of Normality
Hong-goo Kang (Artist)
Life Journey – 人生如畵(In-Saeng-Yeo-Hwa) : Life is like a single picture Kim Eull’s studio is in the countryside. Going there I ride the subway, change to a bus, and get off at a stop somewhere in Baek-am-Myeon, Yongin Gun. Appearing shortly after I call, Kim drives us to his studio in his small car. It is autumn. I see the rice fields maturing in yellow hues, and the hills slowly changing from green to brown. His studio is on a hill beside a road in this country village. The first floor is his studio, and the second floor is his home. Below are two empty houses and a large pumpkin growing from a vine on a wooden fence. The pumpkin, supported on a white plastic chair, is a work of art. Green cabbages are growing in a vegetable garden. Art works lie here and there in the yard as well as around the house. People, bird and animal figures hang on the tree in the yard, and there are also works on the wall. The house, of course, is also his work, since he personally planned and built it. He has built and sold a few other houses besides this one, so perhaps we can say his life itself is his work and his drawing. Kim Eull was born in 1954, the Year of the Horse. As can be seen in his selfportraits, he has two wrinkles in each cheek, but is still in his youth. It has been twenty years since he became fully engaged in drawing and painting, and forty years since he first dreamed of being an artist. He was born at 265 Okhari, Goheung-eup, Goheung-gun, Jeollanamdo, Korea. Goheung is a warm and cosy neighborhood. Even though it is in the same province, seasons come and go halfa-month earlier than in neighboring Gwangju. On the way to Goheung, one who sees green barley fields at Hwasun and Gokseong will encounter yellow, ripening barley in Goheung. Though it is an old-fashioned classification, Kim Eull is from Kimhae. He belongs to the Kimhae Kim Clan. His family seems to have been
well-to-do. I do not know the details, and have never asked, but I can assume this from the size of the old family house he painted. His father was a calligrapher, and he had ten brothers and sisters. It was a typically large family, in which the age gap between him and his oldest brother was nearly 30 years. After completing primary education in Goheung, Kim Eull went to junior high school in Gwangju, and then entered Hanyang Technical High School in Seoul. He was not particularly interested in industry or technology, but had the vague idea of becoming an artist, though he did not know how. Thus, he applied to join the Air Force so that he might have the opportunity to go the United States. But he was sent back home during training, being deemed “inappropriate” by the authorities. Later he went to Hongik Technical College, the Department of Metal Craft, at Won-Kwang University, and to Hongik University Graduate School. In addition, he spent some years at a theological seminary, almost becoming a clergyman. At the last stage of training, however, he quit, considering that it was not his path. The reason for sharing such stories at the beginning of this text is because, in order to understand the work of artist Kim Eull, we must understand his life history. Of course it is impossible to know every detail, and there is no need to do so; but unless we have at least a general idea of his life journey, we cannot know the origins of his work. It is thus inevitable, and the right of the writer, to convey this history - even if Kim Eull disapproves. In Derrida’s terminology, it is a certain parergon. Adopted from Kant, parergon means the exterior aspects of a work, against the Greek term ergon. Derrida interprets parergon as appendices, by-talk, and surplus, which are supplementary, heterogeneous, secondary and external, concerning the work. According to Derrida, all works inevitably rely on the context of parergon. This is also true for Kim Eull’s works. Perhaps his entire life is the sum of his works and parergon. Kim’s life has been that of a seeker after truth. Many artists no doubt have followed a similar path. There is, however, something different about Kim’s journey. Particularly noteworthy is the fact that he was a carpenter for a while, as it was hard to make a living as an artist. As I have mentioned, he has built many houses. His carpenter work has extended over more than 20 years since the 90s, similar to his artistic career. As I quote his words, “In-Saeng-Yeo-Hwa: Life is like a picture,” I ask myself what kind of picture his life created.
Self Portraits – 白紙黃身(Baek-Ji-Hwang-Shin) : The paper is white, and my body is yellow. Through painting and drawing, Kim Eull has persistently scrutinized two aspects of identity. One is the identity of his body and life, and the other is the identity of painting, drawing and the world. To Kim they are two aspects, but at the same time, one. First let us look at his self-portraits. His early self-portraits, of which few remain after a fire in his studio, are rough and expressive. Those made by cutting copper plates used for metal craft, pasting them on canvas, and then painting on them with oils, are mostly expressionless. His eyes are not focused on himself. Compared to the self-portraits of most artists, in which the artist is looking at himself in the mirror, Kim’s self-portrait images have their eyes closed or are looking away. Moreover, his self-portrait of 1995 is bruised in the right eye, as if he has been punched. His mouth is firmly closed, and he gazes at himself with his left eye. Only this selfportrait, and another one holding a brush, are looking at the artist. The cut-and-pasted copper plates form a skeletal structure for the head and face, but at the same time, resemble wounds. While drawing his face with its solidlooking skull, protruding cheekbones and firmly closed mouth, Kim attempted to express something from within. Perhaps the fragments of copper under the surface covered with oils is a metaphor for the fragmented self. Or perhaps it is a consolidation of everything, including the hardships of life, the untransparent future, and the difficulties of drawing. Of course, this is only an assumption made on the part of a fellow artist. Anyway, Kim’s self-portraits are not one-time deals, nor do they express some sort of self-pride. Like that of numerous other artists, his self-portrait is the subject of investigation and experiment, and a certain mirror of the ego. Kim’s selfportraits continue, even while his works transform into the so-called Blood Maps and drawings. The faces appearing in the Blood Maps are also self portraits, and numerous faces, characterized by the two wrinkles on each cheek, appear in his drawings. The same is true in his two-dimensional and three-dimensional works. Kim consistently asks about his identity. To quote Lacan, his self-portraits are similar to the process of confirming the identity of the self in the world of imagination (imaginaire). In fact, Kim’s self-portraits tell us that he still remains
in an infant state. Frankly speaking, all humans including myself are in an infant state in terms of their own identity. One can see his/her fragment or a certain image, but cannot see or perceive him/herself completely as a whole. This is of course more intense in the case of artists. Self-portraits, which are created by connecting and sewing together fragmented selves and shattered identities, are incomplete images of the imagination. Thus artists endlessly inquire about themselves: Who am I? Where am I? Kim’s self-portraits also are continuous questions of such nature, from the series expressions of the earlier portraits, to the more comical expressions of his recent self-portraits using objects. His objet self-portraits are made simply with dolls. He draws double-line wrinkles on the cheeks of bald-headed dolls. These self-portraits draw attention as they are more comical then his early or two-dimensional self-portrait drawings, and tell us more exactly what he is trying to say. For example, the toy car called Kim’s Toy makes viewers laugh by adding a tail and his face to it, and one cannot help chuckling at the headless doll self-portrait playing with two heads. The self-portrait with a face on top of a can also presides in jest and laughter, unlike the artist’s earlier works. Brush, Tear and Hammer wittily show his situation. Perhaps such changes happened due to the change of subject matter, but on the one hand they were possible because time had flowed and the artist was able to see himself from a different viewpoint. It is a certain freedom from looking at oneself objectively and knowing that one’s image is only fragmental. Like a phrase in a Chinese poem, he likes to write jokingly, “Half-a-hundred years of artistic work has flown by like a dream! (半百畵業夢如流).” This is a lamentation, but also a precise self-awareness. In all these self-portraits, the mirror Kim looks into is shattered. His image reflected in the mirror is also a combination of the fragments. Kim repeatedly investigates his own personal being. To quote Lacan once more, Kim’s self-portraits are not actual, but imaginary. The unmatching encounter of what is actual and what is not, cannot but be repeated. This is because what is actual cannot be represented. Not only Kim’s self-portraits, but all self-portraits are painted repeatedly. And that repetition is an expression of the regret and frustration that a person fundamentally cannot represent him/herself. Kim Eull’s inquiry goes beyond self-portraits. The result is the Blood Map, the 265 Okhari series.
Blood Map – 裸體臨風(Na-Che-Im-Pung) : Facing the Rough Wind with My Bare Body Among those who are born in the countryside and come to live in megalopolises like Seoul, some say they feel strange emotions when they happen to go the country. Usually they say going home is enjoyable but at the same time painful. It is a love-hate relationship with one’s home town. Good emotions or happiness concerning one’s home town comes from the affection and memories of the place one was born and raised, but on the other hand, there are also different sentiments from the changing state of the town and the people. For example, there is a sad longing for the sites we played in when we were small, the houses, fields, trees, or graves of ancestors. On the other hand, there is the vague sense of responsibility for bloodline, a strange guilt towards the people still living in the home town, and loss of the sense of belonging to the town. If the home town is being destroyed in the name of development or advancement, this sense is exacerbated. Kim Eull frequented his home town and was enveloped by such emotions. He says the place that gives him the most comfortable feeling is the burial ground of his ancestors, not just because his former family members are buried there, but because it is surrounded by trees and covered with grass. Also, the location is preferable based on the pungsu (fengshui) theory, with plenty of sunlight and a scenic view. The fact that the site has hardly changed, in other words, the present state coincides with his memory, gives a sense of peace, and he can identify with his dead ancestors. Blood Map, 256 Okhari is a certain micro-history, a folk-geographical inquiry, and an attempt to define the artist’s identity through location, position, space and time. Kim’s search for identity transcends himself and connects to his ancestors and roots. That does not mean he is attempting to search for his roots and establish a new family tree like Alex Haley. Rather, his attempt is to use his case as an excuse to evoke the memories or introspections of family histories, the microhistories we generally have. Usually the complicated emotions we get when returning home come from the viewpoint considering one’s home town and one’s self as identical, and the simultaneous sense of autonomous alienation that comes from the awareness
that one no longer belongs there. Part of me is there, and part of me is here. The split that originates from this is a result of the combination of attachment and stubbornness towards past memories, and the rejection of change, which is hard to accept. This is because the alienation and identification of the same object happen in the same personality at the same time. But strictly speaking, what is not alienated (what does not become the other) is limited to the place and the landscape. This is because ancestors also become meaningless if they do not become the other. Becoming the other is subjectively defining others in order to define one’s own identity. Kim’s pictures in Blood Map overlap three layers – a cadastral map showing land ownership, a perspective of pungsu geography, and landscapes in the general sense. The cadastral map represents economic values and rights, the position and scenery of the graves represent a perspective based on pungsu geography, and the landscapes of the hill, including the burial grounds, represent reality and experience. According to Kim U-Chang, pungsu geography is the an episteme for Koreans. This means it has been internalized in our bodies without us being aware, and acts as a cultural gene. There is a pungsu-geographical viewpoint in real-landscape paintings of the late Chosun Dynasty, as well as the general perspective of looking at scenery. In Blood Map, there is the perspective of jangpung (hiding the wind), which is a pungsu-geographical image. The cadastral map is a sign of power concerning ownership and classification, and is a result of a scheme develop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We are still using the maps from 100 years ago, and the creation of new cadastral maps is only in its beginning stage. Measuring and dividing, the basis for cadastral maps, are traces from the past colonial era and also of today. So, in Kim Eull’s Blood Map pictures, pungsu geography as traditional episteme, cadastral maps as a result of the Japanese occupation and modern times, and landscapes visualized from what the artist actually saw are accumulated in multiple layers. The hill landscapes, as certain ancestor archelogy, geographical and micro-historical inquiries into his own identity, are historical diagrams in which perspective, power, ownership and history are subtly combined. They are jinkyeong (realistic) landscapes in the genuine sense.
Ancestors’ portraits also appear in Kim Eull’s Blood Map works. The faces of ancestors, which are based on remaining photographs, are depicted like portraits, painted on places where the graves are, and form trees in drawings that are marked as “Blood Persimmons.” His Blood Map is literally the flow of blood, a river and tree. That is, it is a ladder of blood with a botanical structure. If so, was Kim able to escape from his identity, or his love-hate relationship with his home town through such drawings, or such folk-geographical inquiry about his ancestors? The answer is no. Kim took this self-indicative action not to escape, but to position himself in concrete time-space, in order to figure out who he is. Blood Map is therefore a self-portrait series that belongs to the seconds stage of his search for identity. Such self-portraits have been expanded to time and space, transcending his face and body. Stewart Hall divides human identity into two types. One is identity of the being, and the other is identity of formation. He says identity of being is based on commonness, and identity of formation is based on the process actually confirming the identity. Hall maintains that an individual has more than one identity. According to his opinion, Kim’s Blood Map is an inquiry about his identity of being, searching for the commonness of kinship on one hand, and the process of searching for his identity of formation (creation) on the other.
Drawing - 日畵又日畵
(Il-Hwa-U-Il-Hwa):
Draw and Draw Again
Since Blood Map, Kim Eull has changed the direction of his work. He has aimed at drawing which is rather free in terms of selecting and executing subject and subject matter. But these are rather pictures of normality, as he called them, than drawings in the general sense. As he began to draw full-scale, he made several principles for drawing. These included that he would only work on drawings for a period of three years, and he would maintain a work quantity of no less than one thousand drawings per year. He gathered his drawings as a certain project concept. The principles, which have been kept for almost 10 years now, rather than 3, are almost non-principles. He is trying to escape from the obligations and demands of material, and what must be done.
In 2006, he attempted an analysis of the contents, form and inner structures of his drawing works. According to Kim, his contents can be divided into the world of matter, the world of the mind, and the world that combines the two. His form includes drafting, drawing and writing. The inner distribution, that is, the process of reaching the drawing, begins from unconsciousness and consciousness, and visualizes the image according to subjective choices. Kim turns everything surrounding him into drawings, from the house he lives in to the trees and pumpkins he grows. The results concerning his building of houses and architecture can be seen in the drawings in the small warehouse he has in the yard. The drawings include everything from the selection of land for the warehouse, and the foundation work, to completion. All the documentation about the warehouse and himself are in the form of drawings. His efforts to capture everything concerning his life, everyday thoughts and emotions have resulted in a tremendous amount of works. His studio and home are filled with his works. His home is his work. He lives there. It is a life where living and making have no distinction. He lives and draws almost like growing cabbages in the vegetable garden. In other words, Kimâ&#x20AC;&#x2122;s drawings are visualizations of desires, trying to transcend art and life all at once. Besides visualization, transformation into tactile sense also takes place. His drawings are wholesome. They do not differentiate between the subject and the work. They are not representations but manifestations. Kimâ&#x20AC;&#x2122;s drawings are like bridges between concepts and the sense of creation. Of course, he never crosses the bridges; he merely moves back and forth on them. His drawings are basically bricolages. This involves a process of working without any pressure or compulsion concerning creation or creativity. These bricolages do not discriminate between abstract and concrete, trivial and important, or ideal and actual. In other words, they do not bind identical or similar things, but make relations among completely irrelevant things. In this process, Kim personally changes the paradigm of art itself. That change is to position drawing between works and non-works. Strictly speaking, his drawings are a mixture of graffiti and play. Such a mixture shows traces of the integration of his drawings and life. Perhaps the most important meaning of Kimâ&#x20AC;&#x2122;s drawings is that they show the unification of work and life.
Kim Eull says he does not pursue anything particular in his drawings. But even if that is so, as we can see in his tears series and self-portraits, his areas of interest are continuously expanding and deepening. The tears series may be seen as a certain abject art. According to Julia Kristeva, abject exists on the borders of the body and society. For example, this is because physiological reactions such as vomiting, excreting, and menstruation remind us of our finite existence. This is also the case in Kim’s tears series. Except for the fact that Kim’s tears works did not use unpleasant materials like abject art, they are no doubt abject art. Particularly, Birth of Tears, where a woman is giving birth to a tear, and Kim’s Semen, which is a store selling semen in the Tear Shop series are not so different from works of abject art. Tears that are secreted from the human body, particularly men’s tears, are complex. Unlike vomit, excretion, and menstruation, tears have a social and cultural significance. This is particularly so in a country like Korea, where the macho idea that men are only allowed to cry three times during their life is accepted as common sense. Thus, Kim’s tears series can be understood as abject art that contains autobiographical elements, and specializes in the particular situations of Korea. Kim Eull’s drawings, in Benjamin’s style of speaking, are works for the sake of being. Rather than exhibition value or worship value, their very existence is important. That is to say, they are close to the original form of primitive art, like the way the buffalo and horse drawings by cavemen just exist as themselves. Thus, Kim continuously draws variations of the same subject matter, and this is the production of another being rather than representation. For example, he draws an image to build the house he lives in, actually builds the house, and makes it into a three-dimensional work. In this case his drawings do not represent the house but resemble the act of building a new house. This new house-building is expanded to village-scale, so that in the case of the Bamdui Village Project, he draws each house in the village, and transforms the houses he has built into threedimensional and two-dimensional works as well. Kim’s drawing project is still in progress, and it has been 10 years, not just 3. If one were to categorize his drawings in the Lacan style, they would belong to the world of the Real. After going through the self-portrait series, of the Imaginary, and the Blood Map, of the Symbolic, and after something that is unable to
be grasped has disappeared, the remaining “objet petit a” is the drawing. Perhaps because it is impossible to grasp that something, his drawings are endlessly repeated and reproduced. Thus, Kim’s drawings are surplus and remnant. Surplus comes from material repetition and accumulation of objects. This is the case with his drawing project. Even if we simply look at his project up to 2006, we come up with a long list including drawings made on Sarubia memo pages by using the bottoms of paper cups to draw circles and then adding miscellaneous thoughts within them, geometrical concentric circles and rectangles, drawings made by printing, drawings on the covers of old books, such as Wandangmugyeon and Bijeonhwabeop, bound together, My Tools, birds, concentric circles, Bamdui Village, travel destinations, and CCTV. Though they are part of a project, his drawings are not systemized, and though they are real, they are not organized. As I witness the tension and pleasure that come from the juxtaposition of the trivial projects, I suspect perhaps Kim’s real drawing is not what can be seen, but something between the drawings, or between the projects. Hence, his drawing is rather something “drawing-like,” or the act of searching for something artistic, and then dipping it up with a spoon. And at that very moment, the drawing finally becomes a drawing, but something that is not a drawing at the same time. Based on the above, Kim’s drawings, in the terms of Deleuze, are not the treetype, but closer to the typical rhizome-type. Not just his projects, but also the forms and contents of his drawings do not belong to the tree-type connection. Thus, Kim’s drawings are a method of combining the world, and a certain creative repetition. The directions of his thoughts and interests are revealed through his drawings, which are in shapes or rhizomes. Such rhizomes are scattered to the extent of confusion, and accumulated in the form of objects, but never have a hierarchical order. Of course there are those to which more time has been devoted, such as the case of Tears, but that does not mean or represent hierarchy. Instead, they form a certain forest, as grass and trees grow in nature. It is up to the viewer what will be discovered in that forest. He grazes his drawings like livestock. Nay, rather than graze, he lets them appear and then disappear. Perhaps that is why he took a significant amount of his drawings he had made painstakingly, only to drench them in water and make a single ball-shaped mass of paper.
畵增室狹(Hwa-Jeung-Shil-Hyeop) : Drawings Grow and the Studio Shrinks Kim Eull is in the middle of making a hill with his works. Though it is a low dirt hill, he works there as if he were sewing and growing cabbages or turnips in a vegetable garden. His work is agricultural. In the sense that the works are not industrial products, they are close to the original form of plastic arts. It is meaningless to try to categorize whether they are objects, concepts, drawings or paintings, just as it is impossible to categorize our lives. So what has he gained during his endeavor of mixing and piling up his life, paintings and drawings? Could it be the physical law of “畵增室狹 hwa-jeungshil-hyeop (if the works increase, the studio will become narrower)”? Or is it something else? Perhaps the question itself is strange, to ask what he is gaining. This is because, as we continue to live even though all life concludes in death, wouldn’t painting or drawing be the same? Perhaps he is attempting to transcend his “disrespectful pictures,” and ultimately reach a “world without art.” So he is thoroughly mixing life with pictures, drawing and the act of making, for a certain fermentation process. As Kim Eull once said, 萬畵歸一(Man-Hwa-Gwi-Il): all pictures return to a single place.
* The titles and sub-titles used in this text are quotes from 4-syllable idioms written by artist Kim Eull.
저 들판에 야산(野山)을 짓고, 너머의 바람을 쐰다
이관훈(큐레이터)
김을은 작업실에서 하루 온종일 그리고 만들고 붙이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틈틈이 사색(思索)하며 즐긴다. 삶의 무게보다 예술의 무게가 무거워진 지금 지루한 일상은 유토피아로 바뀌어가고 있다. 마음 가는 대로 고집스럽게 살아온 그는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한국미술의 관습을 역순으로 걸어왔다. 생(生)의 한 바퀴를 돌아온 시점, 그에게는‘드로잉’ 이라는 것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김 을 드 로 잉!” 그만큼 자기의 위치에서 드로잉의 존재감은 깊게 뿌리박혀 끊임없이 확장해나가고 있다. 그가 향유하는 예술의 끝, 드로잉의 끝은 어디쯤일까? 2002년을 기점으로 그의 드로잉은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거의 매년‘작업-전시’ 를 지속하며, 더불어 드로잉북도 만들어냈다. 처음과 달리 주변인들로부터‘이제는 그만하지’ 라는 우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또 그리며 점점 더 예술의 덫에 빠져들고 있었다. 솔직히 우리는 김을 드로잉의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지인이라는 덕에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나 또한 잘 모른다. 하지만 그를 믿는다. 어떤 기회주의자보다, 전략적인 사람보다, 정치적인 사람보다,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보다, 미술사를 믿는 사람보다, 주제를 만들어내는 사람보다는 저 들판에 구름을 쫓는 야인(野人)같은 김을의 진정성을 믿는다. 우리가 만들어놓고 정해놓은 언어와 행동의 규칙 아래 우리는 무수히 지나치는 무의식보다 확연한 이미지와 글 그리고 말을 믿고 그것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행해왔던 드로잉의 행간을 너무 쉽게 간과하거나 그 드로잉 너머의 생각을 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을은 저 들판, 저 야인같은 삶을 위해 ‘날 것’ 으로써의 드로잉을 찾았는지 모른다. 그는 예전에‘혈류도’ 를 그린 후 특정한 주제에서 벗어나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그리는 고민에 빠졌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드로잉으로 풀고, 현재 그 판타지를 쌓아가는 중이다. 아마도 그 판타지는 그의 나이 불혹의 끝자락에서 시작되어 이미지 언어를 다시 쓰듯 하나씩 언어를 찾아갔고, 십 년이 흘렀다. 빠른 시대의 흐름과는 반대로 역주하듯, 가볍고 느린 언어의 질주는 인생역정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그 한계를 넘은 자연스러움과 자율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삶이 예술의 무게로 바뀌다 보니 온갖 상념들이 뒤섞인다. 사랑, 농담, 정념, 눈물, 도덕, 욕망, 아름다움, 상상, 영혼, 종교, 웃음, 진실, 꿈, 분노, 바람, 피, 장난감, 시간, 세계, 물리, 자연, 우주, 공간, 몸, 본질, 이상, 생명, 존재, 가치, 의문, 죽음, 현실, 원리, 그림, 정의, 역사, … . 이것이 김을의 생각으로 뒤범벅되어 화두라는‘빈 그릇’ 에 오랜 숙성을 거친 후, ‘드로잉’ 이라는 다양함의 변주에 리듬을 타게 된 것이다. 그 시작은 작았고 낱낱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 낱낱들이 모여지면서 거대한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2009년 김을이 부여한‘my great drawings’ 이다. 뒤늦게 깨달은 드로잉은 그동안 그가 품어왔던 미술 아니 예술의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다. 드로잉이 단순히‘긋기’ 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척탄병처럼 김을은 세상의 모든 대상을 사유(思惟)함으로써 깨닫고 얻어지는 존재감을 찾고 재해석한다. 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도 많고, 작업할 것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매일 해가 뜨고 저물어가는 자연의 순리에 난감해 한다. 하지만,“김을은 김을이다!” “그림 , 이 새끼!” 라는 글자드로잉에서 그의 자존감이 느껴진다. 김을은 현실에 안주하는 꿈을 꾸지 않고, 들판에 야생하는 풀처럼 야인의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 그는 넓은 들판에 조그만 야산(野山)을 만들어 그 위에 홀로 서서 동쪽 한 번 바라보고, 서쪽 한 번 바라보고, 구름 따라 바람을 쐬며 새처럼 날고 싶어 한다.
B
Y
김을은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귀금속 디자인 전공)과 원광대학교 금속공예과를 졸업하였다. 15회 개인전 “牛.鷄.狗.畵”, 갤러리 소소, 2011 “여기... 새가 있느냐?”, 스페이스 공명, 2010 “눈물”, SPACE CAN, 2009 “김을 드로잉-눈물”, 가갤러리, 2008 “잡화II”, 갤러리눈, 2007 “Drawing is Hammering”, 테이크 아웃 드로잉, 2006 “잡화”, 갤러리 쌈지, 2006 “김을 Painting & Drawing”, 백해영갤러리, 2005 “김을 드로잉 2004”, 갤러리 피쉬, 2004 “김을 드로잉 2003”, 갤러리 피쉬, 2003 “김을 드로잉 2002”, 갤러리 도올, 2003 “옥하리 265번지”, Project Space 사루비아다방, 2002 “자화상”, 금호갤러리, 1996 “김을”, 금호갤러리, 1994 및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하였다. 출판물로는 KIM EULL DRAWINGS, 2007(180 페이지) Miscellaneous Drawings, 2006(252 페이지) The Kim Eull Drawing Book, 2006(320 페이지) Drawing; Stair, 2006(40 페이지) KIM EULL DRAWINGS Ø50, 2005(282 페이지) KIM EULL DRAWINGS 2002-2004, 2004(456 페이지)가 있다.
Kim Eull lives and works in Yongin City, Korea. He holds a Master of Applied Arts in jewelry design from Hongik University and a Bachelor of Arts in metal craft design from WonKwang University. His solo exhibitions include Hen, Cow, Dog, Painting, Gallery SoSo, 2011 So Here... Is There a Bird?, Space Gong Myung, 2010 Tears, SPACE CAN, 2009 Kim Eull Drawing; Tear, Ga Gallery, 2008 Miscellaneous Painting II, Gallery Noon, 2007 Drawing is Hammering, Take Out Drawing, 2006 Miscellaneous Painting, Gallery Ssamzie, 2006 Kim Eull Painting & Drawings, Baik Hae Young Gallery, 2005 Kim Eull Drawing 2004, Gallery Fish, 2004 Kim Eull Drawing 2003, Gallery Fish, 2003 Kim Eull Drawing 2002, Gallery Doll, 2003 #265 Ok ha-ri, Project Space SARUBIA, 2002 This and That Mountains, Gallery Savina, 2001 Self-Portrait, Kumho Gallery, 1996 Kim Eull, Kumho Gallery, 1994. He has participated in numerous group exhibitions and published six drawing books including KIM EULL DRAWINGS, 2007, 180 pages Miscellaneous Drawings, 2006, 252 pages The Kim Eull Drawing Book, 2006, 320 pages Drawing; Stair, 2006, 40 pages KIM EULL DRAWINGS Ă&#x2DC;50, 2005, 282 pages KIM EULL DRAWINGS 2002-2004, 2004, 456 pages.
글 : 강홍구, 이관훈, 김을 번 역 : 김제민 사 진 : 유현민, 김을 편 집 : 황신원 출 판 : KC기획 후 원 :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발 행 : 김을 도움주신 분 : 이선주, 정선, 최소은 Essayed by Hong-goo Kang, Kwan-Hoon Lee, Kim Eull Translated by Jeimin Kim Photographed by Hyeon-Min Yoo, Kim Eull Edited by ShinWon Hwang Printed by KC Communications Sponsor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Arts Council Korea Published by Kim Eull Acknowledgments to Sun-ju Lee, Jung Sun, So Eun Choi ISBN : 978-89-957146-2-1-93650 Limited Edition : 500 copies Copyright © 2011 All rights reserved. No part of this publication may be reproduced or transmitted in any form or by any means, electronic or mechanical, including photocopy, recording, or any other information storage and retrieval system, without written permission from Kim Eull. 값 40,000원
드로잉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드로잉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드로잉으로 쌓여진 나의 예술세계. 그것은 사실 드로잉이 아니다. 차라리 들판에 부는 바람, 혹은 밤하늘에 빛나는 한 줄기의 유성, 혹은 전해지지 않은 한편의 신화에 가깝다. 오직 고독 속에서 그들은 빛을 낸다. 비록 고독하지만 자유롭고, 밝고, 드넓은 세계를 갖는다. 그들은 붕새와도 같다. 사실 나는 나의 드로잉 작업을 잘 모른다. 다만 어떤 느낌이 감지될 뿐이다. .................................................!?!? 문득 뒤돌아보니 나의 드로잉들이 애처롭게 쌓여 있다. 그들에게 멋진 이름을 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