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솔로지]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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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logy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행간을 읽는 사람들 지음


유자차스튜디오 팀 행간을 읽는 사람들 인문예술문화연구집단

‘유자차스튜디

오’는 철학과 역사, 인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가 왜 필요한지 고민합니다. 세상 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우 리가 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를 함께 쓴 유 자차스튜디오의 팀 ‘행간을 읽는 사람 들’은 지난 봄, 공동체에서 시작된 미 투운동을 계기로 모인 같은 결을 가진 20, 30대 여성들입니다. 거창한 일을 목표로 하기보다 우리 일상 속에 있는 작은 것들로부터의 변화를 도모합니 다. 인권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누군 가에게 소외당하거나 외면 받아왔던 것 들을 위해 움직입니다. 따뜻하지만 날 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그것을 우리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합니 다. 여전히 우리가 어떠한 방향과 감수 성을 가지고 글을 써야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yujachastudio@gmail.com




Anthology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행간을 읽는 사람들


목차

김소영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06

알 도둑

08

10

리버스

12

아카이브

14

나혜

이재영 고백

16

17

허들링

18

조아라 죽음의 미지수

20

알로하 장례식

22


소설

김달래

Love Myself

26

송미란

어떤 새벽

38

임청명

그날의 일기

44

유지은

만약 공백이 없다면

52

최예지

당신의 테이블

62

김재이

선인장

80

이옥수

선희의 거짓말

92

이여름

수평의 연애

108


4

시


김소영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알 도둑 나혜 틀 리버스 아카이브 이재영 고백 꿈 허들링 조아라 죽음의 미지수 알로하 장례식 5


6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김소영 해가 가는 길에 달이 찾아왔지 반가웠지만 이제 웃을 수 없었어 널 만나기 위해 우린 우주를 멈추게 하는 법을 알아야 했지 너와 나의 거리, 사랑한다고 외치면 수억 년 수십 억 년이 지나 겨우 메아리 끝자락처럼 들릴 거리 그럼 대답하겠지, 뭐라고? 내 20대에는 외쳐도 들리지 않던 지구에서 한낮에 멀리 보일 듯 말 듯 한 달빛을 겨우 찾아내곤 했지 365일을 365번 넘게 반복하고 나서야 그만두기로 했다 너는, 이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앉아서 빨래를 개고 있었지 너와 닿지 못한 시간을 빨고 널고, 그사이 나와 닮은 아이는 한 뼘씩 자라 기고 걷고 뛰고 말을 했지 꿈속에서 매일 나를 불렀던 것이 너였는가, 나였는가 아이는 ‘엄마’ 부르며 급하게 뛰어오는데 나는 그제야 잊은 날들이 떠올랐다 내가 무얼 그만두기로 했든가 내가 무얼 잊기로 했든가


내 손을 꼭 잡은 아이는 손끝으로 해를 가리켰다 막 지고 있는 빛을 보고 해님이 바닥 청소를 하나 봐 자리마다 빛이 나 나는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너는 청소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하늘에 여전히 달이 걸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어볼 힘조차 남지 않은 나는 꿈결에서 널 만난다 그때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내 시간이 365일 중 여전히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네가 내려앉은 이 거리를 걷겠지 내 지난날을 유일하게 아는 너와 이제 그만하기로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겨우 35번 지나가고 있는데 앞으로 330번이 더 남았다면

매일 같이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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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알 도둑

김소영 어느 가을날, 숨겨둔 눈사람이 떠올랐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나는 피아노곡을 듣고 있었고 이미 눈사람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 날 내가 만들어놓은 눈사람은, 내 처녀 적 마지막 순결이라 존재한다면 공룡처럼 화석이 됐겠지. 공룡이 풀을 먹었는가, 알을 먹었는가, 고기를 먹었는가, 연구할 때 눈사람이 누군가의 피를 먹었는가, 정액을 먹었는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먹었는가에 대해 그 날, 시린 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어 낙엽으로 덮었다 덕지덕지 붙일수록 선명해졌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내 눈사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알을 먹었다는 오해를 산 오비랍토르*는 원래 지극정성인 어미였다 모래바람 속에서 알을 지키느라 그대로 시간에 갇혀버렸다고 한다 사실이 밝혀져도 사람들은 거짓만을 기억해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알 도둑이라 불렸다 그날 밤 사실 너는 녹아버렸고, 나는 너를 지웠다 알을 품었던 그 날, 사실 도둑은 나였다

* 오비랍토르: 알 도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백악기 후기 잡식성 공룡


김소영 여전히 글쟁이를 꿈꾸는 슈느엄마이다.

알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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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달래 Love Myself 송미란 어떤 새벽 임청명 그날의 일기 유지은 만약 공백이 없다면 최예지 당신의 테이블 김재이 선인장 이옥수 선희의 거짓말 이여름 수평의 연애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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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yself

김달래

1. 8년 좋아한 남자 나는 오늘 그만두기로 했다. 이 지긋지긋한 놈의 팬질. 이제는 진짜 안녕이다. 듣고 있냐, 김태형? 너랑은 이제 완전 끝, 쫑, 빠 이빠이, 디 엔드라고! 나는 노트북 화면을 쾅 닫았다. 방금까지 보던 화면에는 지난 8 년의 세월을 바쳐 사랑한 남자가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자 와 함께 커피숍에서 나오는 사진이 찍혀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 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팬들 사이에서도 미소 한 번 보기가 어렵다고 소문난 시크 도도의 대명사 김태형 이 여자를 안고, 미소라니. 누가 봐도 나 연애 중이오! 싶은 하트 뿅뿅 눈빛으로, 여자 허리에 손을 감고 달달하게 미소 짓는 김태 형이라니! 으아아아아악! 나는 마음속 비명을 지르며 노트북 위로 머리를 꿍꿍 내리찧었 다. 꼭두새벽부터 터진 최애 아이돌의 열애설 기사. 하늘이 무너 지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되지도 않는 취직 자리 계속 알아봐 가며, 너 하나 보겠다고 근근이 모아온 아르바 이트비로 공개방송을 뛰었는데!


소설

열아홉, 고3 시절에 알게 된 5인조 보이그룹 ‘엑스파이브’는 삭 막하던 수험 생활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강렬한 데뷔 무대를 선보이며,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중에서도 엑스파 이브의 센터이자 외모 담당, 보컬까지 겸비하신 전지전능 남신 (

) 멤버! 김태형은 특유의 과묵함과 카리스마 캐릭터로 수많

은 소녀 팬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왕자님 같은 존재로 자리매 김 해왔는데……. 팬들과 지난 8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쌓아온 꿈 과 환상 같던 시간을, 오늘 단 한 장의 사진이 파괴해버린 것이다. 나는 곧 다가올 너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네 사진 보정에 힘쓰고 있었건만……. 너는 그 꽃 같은 미모로 아침 부터 나에게 똥을 주는구나. 김태형,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가 있어? 8년을 굳건하게 지켜온 너의 카리스마 캐릭터는 어디 가고! 이렇게 대놓고 좋아죽겠다는 솜사탕 같은 표정이라니! 으 허허엉, 이 나쁜 놈아!

시계가 일곱 시를 넘어가자 내 방문은 득달같이 열렸다.

Love Myself

하지만 나의 이 비통한 마음을, 우리 집 신 여사가 알 리 없다.

“이정연! 출근 준비 안 하냐?” “응, 나가야지…….” “너 아무리 단기 계약 자리라도 그렇지, 이렇게 맨날 늑장 부리 고 지각하면 못 써. 회사도 먼데 일찍 일찍 다녀야 윗사람들이 좋 게 보고 그러다 기회도 생기고 그러지.” “알았어, 일어나요. 지금 일어나잖아.” “음? 근데 너 아침부터 이불 속에 왜 노트북을 끼고 누워 있어? 설마 너, 또! 그 태형인지 태발인지 본다고 밤샌 거야?!” “아, 엄마! 태발이 아니라고! 태형이라고, 태형, 김태형! 그리 고 나 밤 안 새웠거든?! 알람 맞춰서 일찍 일어난 거거든?!” “하이고, 계집애, 아니면 말지 어디서 성질이야? 알았으니까 얼 른 씻고 나와서 밥 먹고 출근해!” “……네에.”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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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나는 미역국 냄새. 나는 좀비처럼 비틀비틀 침대 위에 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방금까지 분명 마음이 팍 식었었는데, 김태형 이름 좀 잘못 불 렀다고 발끈하는 꼴이라니. 아, 정말 싫다.

2. 전화 받는 여자 진짜 최악이다. 오늘은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고객 님들과 상담 중에도, 좀체 상냥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러 면 안 되는데……. 얼마 전부터 나는 대형 카드사의 인바운드 콜센터에서 평일 근 무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칸막이로 개개인의 자리가 다 나누어 져 있고, 각자 자리에서 자기 업무량만 소화하다가 저녁 6시 땡! 치면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칼퇴근한다는 점이 이 일의 가장 큰 장 점이려나. 거기다 직접 고객을 대면하지도 않으니, 민낯에 편안 한 복장으로 출근해도 아무런 지적을 받지 않는다는 자유로운 분 위기도 있고 말이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구인 구직 사이트에 올린 이력서를 수정하던 중, 실수로 전체공개 저장을 해버렸는데, 그걸 본 아웃소싱 업체의 담당자가 이 일을 소개해 주게 된 것이다. 담당자 말로는, 내가 문예창작과 출신이라 타자 는 빨리 칠 것 같았다나? 뭐, 콜센터 상담할 때는 고객님들 말을 빨리 듣고 치는 게 도움이 되긴 하지. 대학교에서 4년 내내 배운 작문 실력으로 쓰라는 작품은 안 쓰 고, 고객님들과의 서비스 상담 내용과 팬픽만 청산유수로 써 내 려가고 있으니… 교수님들이 알면 수업한 시간이 아깝다며 땅을 치실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취업 자리는 나를 원 하지 않고, 그렇다고 집에서 밥만 축내는 축생이 되지 않으려면 당장 뭐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게 나 같은 20대 취업준비생들의 현실이었다. 어쨌든 하는 일에 비해 시급도 센 편이고, 온종일 앉아서 입만


소설

떠들면 되니 육체적으로 크게 힘든 일은 아니지만… 이 일을 하며 겪게 되는 감정노동을 생각하면, 그렇게 시급이 센 게 아닐지도 모른다. 스물일곱, 새파란 청춘이 감당하기에도, 세상엔 상상을 뛰어넘는 진상 중의 진상 고객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사랑에 눈먼 여인에게 임을 봐야 한다는 목표보다 더 큰 고난이 무엇이 있으리오. 올해는 엑스파이브 데뷔 이후, 김태형 이 처음으로 갖는 연말 솔로 콘서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콘서 트의 프리미엄 티켓과 기타 팬질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나는 무 례한 고객님들의 불편한 언행을 참아가며 무려 석 달째 콜센터 업무를 버텨나가던 중이었건만… 우리 그이는 팬들 모르게 한창 연애 사업 중이었다니. 사귀던 남자친구의 바람난 현장을 갑자기 목격한다면 딱 이런 기분일까? “정연 씨, 무슨 일 있어? 지금 점심시간인데.”

하는 수현 언니가 살짝 말을 걸었다. 상담할 때 쓰는 프로그램을 켜놓은 채로 한숨을 쉬니, 뭔가 일이 생긴 줄 알았나 보다.

Love Myself

내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 바로 옆 칸에서 일

“아, 별일 아니에요. 점심 먹어야죠. 같이 가요.” 우리 회사는 급여에 식대가 포함돼 있는데, 사실상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니라 직원들 중엔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도 그 중 하나인데,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는 한은 옆자리의 언니 들과 함께 도시락을 싸와 나눠 먹었다. 오늘의 메뉴는 비빔밥. 언니들과 각자 싸 온 반찬을 꺼내 휴게 실에 갖춰둔 커다란 양푼에 넣고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아무래 도 상담사 직원 대부분이 여자인 데다, 각자 맡은 업무만 잘하면 서로 터치할 일 없는 수평적인 업무 특성 덕에, 사람 눈치 보기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지금까지 일했던 곳 중 제일 잘 맞는 곳이었 다. 실제 나이 차이는 천차만별이지만, 분위기는 마치 또래 여고 생끼리 한데 모여 경쟁의식 없이 서로 위해주며 일하는 느낌이랄 까. “아가, TV 좀 틀어봐라. 뭐 재미있는 거 안 하나.” 우리 부서에서 최고 연장자인 미자 언니. 올해로 54세이신데,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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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랑 나이가 비슷해서 처음엔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 싶었 다. 사실 팀장님이나 매니저님을 제외하면, 우리는 서로 마땅한 직급이랄 게 없는 비슷한 처지였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부를 적 절한 호칭이 필요했는데, 연장자는 언니, 자신보다 어린 사람은 이름을 부르거나 애칭을 만들어 불렀다. 그리고 방금 미자 언니 가 말한 아가가 바로, 나다. 미자 언니 입장에서 보면 한참 딸뻘 이니……. 아가 맞지, 뭐. “보고 싶은 프로 나오면 말씀하세요.” 언니들이 스톱을 외칠 때까지, 지상파에서 케이블로 채널을 올 리던 중이었다. 그때, 한 종편 방송에서 연예 뉴스가 생중계됐다. 「다음 소식입니다. 인기 아이돌 그룹 ‘엑스파이브’의 멤버죠. 김 태형 군이 신인 아이돌 ‘체리 팝’의 서채리 양과 열애 중이라고 합 니다.」 “어? 정연아, 쟤 네가 좋아하는 걔 아냐?” “그러게, 정연이 자리에 붙여둔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네.” “어머머, 쟤 연애해?” 언니들의 호들갑에도 나는 아무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이어지는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저희 연예 e뉴스팀은 곧바로 사실 확인에 나섰는데요. 오늘 아 침, 두 사람의 열애설이 불거진 지 약 세 시간 만에, 두 아이돌의 SNS 계정에는 서로 연인 사이임을 인정하는 글이 동시에 올라왔 습니다. 놀랍게도 김태형 군과 서채리 양은 벌써 3년째 연인 관 계를 지속 중이라는데요. 연습생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두 사 람은, 서로의 연예계 활동을 지지하며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 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두 스타의 연애 소식에 팬들은 놀랍 다는 반응인데요…….」 곧 소속사를 통해 입장 발표가 나오겠지, 라고 생각했다. 너무 연애하는 티가 많이 나는 사진이었지만, 팬들을 생각해 공식적으 로나마 부정하는 기사를 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소속사를 통해 공식 입장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소설

기다렸다는 듯이 기습적인 연애 인정이라니? 그것도 벌써 3년이 나 만났다고? “얘, 정연아……. 괜찮아? 애가 충격을 받았나. 갑자기 사색이 됐네.” “연예인도 사람인데 연애하고 살 수도 있는 거지, 뭘. 저러다 둘 이 또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근데 쟤네 둘이 벌써 3년이나 만났다는데 그동안 한 번도 안 걸 린 거면, 진짜 대단한 거 아니에요? 팬들도 몰랐던 건가? 대체 데 이트는 어디서 했대 그래.” “어이구, 그래봤자 쟤들은 우리보다 잘 먹고 잘살 텐데 뭐. 연애 하든 지랄하든 다 화제 되고, 돈 되는 직업이 연예인 아니냐. 이제 쟤네 연애하는 거 가지고 토크 프로에서 또 한창 떠들어 재낄걸?” “그러게. 당장 이번 주 해피투게더에 한 명은 나오는 거 아냐?”

모셔가며 얘기 좀 해보라고 난리들인지……. 난 진짜 세상에서 연

Love Myself

“남들 다 하고 사는 연애, 뭐 그렇게 유별나다고 비싼 돈 주고 예인 하는 애들이 제일 부러워. 우린 온종일 목이 쉬어라 상담 해도 일당 10만 원이 채 안 되는데, 쟤넨 한두 시간만 떠들고 가 도 500, 600만 원씩 받아 간다며? 어차피 각자 자기 인생을 사는 거. 저것도 결국 딴 세상 이야기야. 정연이 너도 저런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밥이나 먹자, 밥.” 언니들의 독려 아닌 독려에도, 나는 비빔밥을 넘길 수가 없었 다. 누군가는 연예인 일에 이렇게 목을 맬 일이냐고 혀를 차며 한 심하게 볼 걸 안다. 하지만 나에겐, 지난 8년 동안 정말 목숨 바 쳐 애정을 쏟아부었던 대상의 배신이었다. 물론 연예인 역시 인 간이기에,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아티스트로서의 활동을 응원 하고 지지하며, 팬으로서의 위치를 잊지 말자는 소신이 있었지 만……. 그렇지만, 이론과 실제가 늘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러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정신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중이었다. 그날, 나는 엑스파이브 팬덤에서 탈퇴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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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달래

Love Myself

8년 차 방송작가. 하고 싶은 것도, 쓸데없는 생각도 많은 방구석 베짱이. 글 쓰는 일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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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의 거짓말

이옥수

아주 먼 옛날로 시작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 나는 동화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때가 있었다. 선희 씨의 거짓말이 시작된 것은 그 동화책들을 스스로 읽어나 갈 무렵이었다. 돌이 되기 전에 걷기 시작했고, 한글을 따로 가르 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세 살 무렵 혼자 글과 숫자를 깨쳐 시장 의 간판을 읽기 시작하자 선희 씨의 어머니 미숙 씨는 호들갑을 떨었다. 선희 씨의 오빠인 태형 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기역, 니은, 디귿을 겨우 써나갈 무렵이었다. 미숙 씨는 일부러 선희 씨 의 손을 잡고 시장 곳곳을 누볐다. 선희 씨는 육거리 족발, 충북 수산, 주원 닭, 해마 수산, 고려 다실, 대원 철물, 지혜 수산, 손 이가 건어물, 대진 쌀 상회, 화이트 화장품의 간판을 읽었고, 미 숙 씨가 가리키는 글자들도 읽었다. 선희 씨가 40년 전통, 포장 전문 업소, 6시 내 고향에 방영된 집, 아리랑 민속 전통 호박엿을 읽자 미숙 씨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영재가 자신의 딸이란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선희 씨의 손에 호박엿을


소설

하나 들려주고 태형 정육점으로 들어갔다. “여보! 태형 아버지! 선희가 아무래도 천재 같아. 간판을 다 읽 어!” 영수 씨의 손끝에서 국거리용으로 썰려 나오던 소고기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썰려 나오기 시작했다. “간판도 못 읽는 사람이 어딨다고 호들갑이여?” 선희 씨는 엿을 우물거리며 정육점 유리에 붙은 글을 읽기 시작 했다. “생목살, 아롱사태, 양지, 구이용, 편육, 수제 돈가스, 떡갈비.” 국거리용 소고기를 받아든 손님이 선희 씨를 향해 “애가 참 똘 똘하네.”라고 말하자 영수 씨는 “여자가 똑똑해서 어따 씁니까.” 라고 나직하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머쓱해진 미숙 씨가 손님에게 적으로 칼을 탁 내려놓았다. 선희 씨는 이에 들러붙은 호박엿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선희의 거짓말

문을 열어주며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자 영수 씨는 신경질

혀로 떼어내는 법을 몰라 검지를 입에 넣어 떼어내기 시작했다. “손이나 빠는 애가 무슨 글을 읽는다고.” 영수 씨는 선희 씨를 일별하고 정육점 안쪽에 있는 쪽방을 향해 외쳤다. “태형아, 이리 나와 봐라.” 텔레비전을 보던 태형 씨가 슬리퍼를 끌고 나오자 영수 씨는 유 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읽어봐라.” 태형 씨는 반대로 되어있는 유리 앞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영 수 씨는 태형 씨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가서 다시 유리 앞에 세웠 다. “다시 읽어봐라.”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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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 씨의 손은 생목살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형 씨가 자신 없 는 목소리로 “생목살”이라고 말하자 영수 씨는 다음 줄을 가리켰 다. “아옹, 야옹?” “너 정말 못 읽는 겨? 다시 읽어봐라.” “야옹?” 선희 씨가 정육점의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영수 씨가 물었다. “이거 읽어봐라.” 태형 씨의 초조한 눈이 선희 씨와 부딪혔다. 선희 씨는 작은 목 소리로 말했다. “야옹.” 영수 씨는 그날부터 태형 씨를 속셈학원에 보냈다. 그 무렵만 해도 속셈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별로 없을 무렵이었다. 국민학 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뀐 해였고, 초등학생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 작했지만, 방과 후에 아이들의 대부분은 피아노학원과 태권도 학 원에 다녔다. 그래서 학교 앞 상가에는 일 층은 문구사와 분식점, 이 층은 태권도 학원, 삼 층은 피아노학원이 있었다. 발레학원과 미술학원도 꽤 유행하던 무렵이었는데 태형 씨는 또래 남자아이 들이 태권도, 합기도, 검도 등을 배울 때 유독 발레를 배우고 싶 어 했다. 영수 씨가 사내아이가 무슨 발레냐며 잔소리를 한 덕분 에 발레학원 대신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 후 댄스스포츠 교실에 등록했다. 강당도 없이 교실의 책걸상을 모두 뒤로 밀어놓고 흰 색 실내화를 신고 춤을 배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때 태형 씨 세 상의 전부는 때가 탄 흰색 실내화를 신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하 지만 더는 흰색 실내화를 신고 춤을 추는 일은 불가능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학원으로 향했고 학원에서는 태형 씨가 알지 못하는 단어와 숫자를 이용해 강의를 진행했다. 매주 금요일이면 쪽지 시험을 봤고, 학교에서 본 받아쓰기 점수에 따라 손바닥을 맞았다. 태형 씨는 ‘무릎이 아프다’라는 문장을 ‘무릅이 아프다’라


소설

고 썼는데 짝꿍이 실수로 동그라미를 쳤다. 학원에서 선생님이 틀렸는데 맞았다고 되어있다며 손바닥을 한 대 더 때렸다. 그리 고 무릎이 아프다,라는 문장을 열 번 쓰고 나서야 집에 올 수 있 었다. 체벌이라든가 촌지라는 단어가 인권이나 불법과 어울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태형 씨가 방 한쪽으로 밀어놓은 교과서는 선희 씨가 가지고 놀 기 좋은 장난감이었다. 그림과 글씨가 많았고 정육점의 골방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교과서만큼 훌륭한 놀잇감은 없었다. 제대로 된 동화책 한 권 없는 그곳에서 선희 씨는 벽에 붙은 자음 모음판을 보며 글을 깨쳤고, 정육점에서 종일 틀어놓는 라디오를 들으며 말을 익혔다. 태형 씨가 속셈학원에 다니며 아롱사태를 가볍게 읽게 되자 영수 씨는 태형 씨는 웅변학원에도 보내기 시작했다. 태형 씨는 자기 전에 연설문을 읽고 큰 소리로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를 한 번씩 외친 후에 잠들 수 있었다. 옆에서 선희 씨 형 씨가 외우지 못해 보고 읽는 연설문을 선희 씨는 일찌감치 옆 에서 듣고 외웠다는 사실을 영수 씨가 알면 태형 씨는 학원을 하

선희의 거짓말

가 따라 하려 하면 미숙 씨는 조용히 선희 씨의 입을 막았다. 태

나 더 등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희 씨는 여섯 살까지 유치원에 가지 않았다. 영수 씨가 늘 입 에 달고 다니는 “여자애가 무슨.”이라는 말 때문에 선희 씨에게 세상은 태형 정육점과 정육점이 있는 육거리 시장 골목이 전부였 다. 밤이면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한산한 시장 골목의 끝에 불을 밝히고 있는 태형 정육점이 선희 씨가 생각하는 세상의 끝과 마 찬가지였다. 이따금 영수 씨의 트럭을 타고 외출하는 일이 있었 지만 그건 정말 가끔이었다. 어린이날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생일 에도 선희 씨는 태형 정육점에 있었다. 하지만 태형 씨가 소풍을 다녀오거나 현장학습을 다녀와서 사온 싸구려 기념품이나 조악 한 고무줄 총을 보면서 선희 씨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 다. 어쩐지 알지 못하는 크고 멋진 세계가 있을 것 같았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선희 씨는 태형 씨가 다니는 학교의 병설 유치원 에 등록하게 되었다. 또래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낯설 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함께 대화하고 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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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테면, 소꿉놀이할 때 엄마 역할, 아빠 역할, 아들 역할, 딸 역 할, 할머니 역할이 있는 식이었다. 한 아이가 선희 씨에게 “너는 아기해.”라고 하니 선희 씨는 “나는 아이가 아니라 선희야.”라고 말한 뒤로 아이들은 선희 씨에게 더 이상 엄마 놀이를 하자고 말 하지 않았다. 간식 시간 전에 다 함께 부르는 식사 노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날마다 간식을 나눠준 건 선생님인데 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집에서 식사할 때면 밥을 조금이라도 남기면 영수 씨는 “아빠 엄마가 힘들게 일 해서 너희가 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거다. 남기지 말고 먹어.”라고 말했기에 선희 씨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선생님이 선희 씨를 지적하며 식사 노래를 부르라고 했을 때도 입만 뻥긋거릴 뿐이었 다. 하지만 선희 씨는 일련의 일들이 서운하거나 속상하지 않았 다. 선희 씨는 아이들이 모두 따라 하는 동요도 부르지 않았다. 아 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라는 문장이 유치하게 느껴졌 고 하얀색 타이츠를 신고 율동을 하는 재롱잔치가 싫어서 유치원 에 가지 않겠다고 몇 번 떼를 썼다. 미숙 씨와 영수 씨가 선희 씨와 태형 씨를 방에 재우고 나서 정 육점에 나와 육회와 소주를 먹으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태형 아버지, 선희 아무래도 이상한 거 같지?” 대꾸 없이 소주를 잔에 따른 영수 씨는 소주를 금세 비우고 다 시 소주를 따랐다. 미숙 씨를 육회를 말없이 뒤적거렸다. “…애가 똑똑한 게 아니라 그냥 애가 아닌 거 같어.” “그치. 애가 애다운 맛이 없어. 이상하게. 가끔 저기 평상에 앉 아서 정육점 보고 있으면 예전 어머니 생각나. 어머니랑 똑같은 자세랑 표정으로 보는 겨. 애가?” 선희 씨는 그날 왜 잠들지 않고 영수 씨와 미숙 씨의 대화를 듣 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말대로 아이다운 아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다음 날부터 선희 씨는 소꿉놀이에서 아기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기도 했고, 식사


소설

노래를 누구보다 크게 불렀다. 이따금 텔레비전 만화를 보며 태 형 씨에게 “오빠, 출동이 뭐야?” 따위의 질문을 하기도 했다. 태 형 씨가 전혀 엉뚱한 답을 해도 선희 씨는 태형 씨를 존경의 눈빛 으로 바라보았다. 선희 씨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고학년이 된 태형 씨는 선희 씨와 함께 등하교하는 것을 싫어했다. 친구들과 문구사 앞에서 게임이나 인형 뽑기를 하고, 조회대 위에 실내화 가방을 던져두 고 축구를 하고 싶었다. 선희 씨는 혼자서 집에 가지 못한다며 태 형 씨를 한없이 기다렸다. 모래 먼지를 날리며 공을 차는 태형 씨 를 기다리던 선희 씨가 태형 씨를 기다리지 않게 된 건 초여름이 었다. 태형 씨 가방에서 읽기 책을 꺼내 읽고 있던 선희 씨의 어 깨를 두드린 건 몇 번 본 적 있는 음악 선생님이었다. 고학년이 되면 음악실에 가서 담임선생님이 아닌 음악 선생님과 음악 수업 을 한다던 태형 씨의 말이 떠올랐다.

선희 씨는 읽기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그를 따라갔다. 학교 뒤

선희의 거짓말

“잠깐 이쪽으로 와 볼래?”

의 등나무 벤치로 간 그는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페니스 를 꺼냈다. 선희 씨는 태형 씨의 그것과 달리 큼직한 그의 페니스 를 보고 그저 크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는 선희 씨의 손을 잡아당겨 그의 페니스를 쥐게 했다. “만져봐.” 선희 씨가 뒷걸음질 치자 그는 선희 씨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페니스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선희 씨는 알게 되었 다. 이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나쁜 일이라는 것을. “자, 이제 가봐.” 머리를 높이 묶어 목선이 드러난 선희 씨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 가 말했다. 선희 씨는 끈적거리는 손을 치마에 문지르려다 학교 건물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선희 씨의 손이 닿은 벽마다 작은 손 바닥 자국이 생겨났다. 선희 씨는 그저 손이 더러워졌다는 생각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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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했을 뿐이다. 집에 돌아온 태형 씨가 읽기 책이 없어졌다며 울먹였고, 영수 씨는 또 학교에 두고 온 게 아니냐며 타박했다. 미숙 씨는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서 숙제하라고 했고, 선희 씨는 졸리다며 한쪽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태형 씨의 읽기 책을 등나 무 벤치에 두고 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희 씨의 거짓말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에는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해, 그다음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두 려움이 발단이 되었고 나중에는 스스로를 위해 거짓말을 시작했 다. 그리고 언젠가 학교에서 배운 하얀 거짓말이라든가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자신을 옹호했다. 태형 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선희 씨는 미술 준비물을 사야 한다며 미숙 씨에게 받은 천 원으 로 사고 싶었던 스티커 인형과 케이크 모양 지우개를 샀다. 미숙 씨는 선희 씨에게 준비물을 잘 샀는지, 그것으로 어떤 수업을 했 는지 묻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선희 씨는 음악 준비물로 리 코더를 사야 한다고 했다. 미숙 씨는 태형 씨가 쓰던 리코더를 찾아 선희 씨에게 건넸고 선희 씨는 음악 준비물로 거짓말을 하 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형 씨가 쓰던 리코더가 없었더라 도 나중에 한 번쯤은 리코더를 집에 들고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 이다. 그다음부터 선희 씨는 물체주머니나 제기, 오재미, 색종이 등을 사야 한다는 거짓말로 돈을 타냈다. 이따금 정말 준비물을 사는 날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괜히 속이 상했다. 준비물 값이 아 닌 자신의 용돈으로 준비물을 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슈퍼에 가서 바나나킥을 한 봉지 사고 그 아래 가나 초콜릿을 숨겨 계산대로 갔다. 바나나킥을 계산대에 내려놓지 않 고 동전만 내밀었다. 눈이 좋지 않은 슈퍼 주인 할머니는 바나나 킥 가격만 받았고, 선희 씨는 바나나킥과 가나초콜릿을 먹으며 타인을 속이는 것은 꽤 달콤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태형 씨가 비보이 동아리에 들었다는 이유로 영수 씨가 호되게 맞던 날에도 선희 씨는 과자봉지 아래 가나초


소설

콜릿을 숨겨 왔다. 영수 씨는 딴따라가 되는 게 꿈이냐며 태형 씨 의 머리를 모두 밀어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고, 미숙 씨는 태 형 씨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선희 씨는 그 광경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교복 바지를 늘려 헐렁하게 입고 다니는 태형 씨와 똑 똑하지만 공부를 하지 않아서 성적이 낮은 거라고 믿는, 그래서 춤추는 건 안 된다는 영수 씨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바지 밑단은 전혀 멋있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자신 보다 간판을 잘 읽지 못했던 태형 씨가 이제 와서 공부를 잘하기 라도 하는 것처럼 믿는 영수 씨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선희 씨는 그 또래의 아이답게 으앙하고 크게 우는 것으로 그 분 위기를 무마했다. 미숙 씨는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서럽게 우는 선희 씨를 보며 “아이고, 선희야. 괜찮아. 괜찮아. 아빠가 잘못했어. 당신은 왜

라고 말했다. 얼굴부터 목까지 새빨개질 정도로 엉엉 울어대는 선희 씨를 보며 영수 씨는 좀 머쓱해졌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태

선희의 거짓말

소리를 질러서 애를 울려?”

형 씨를 조용하게 타일렀다. “너는 춤이 중요한 겨? 공부가 중요한 겨? 공부를 먼저하고 춤 을 춰야지. 학생이.” 선희 씨는 태형 씨가 공부를 열심히 해도 머리가 나빠 성적이 낮은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춤을 추기 때문에 성적이 나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건 모든 부모가 똑같은 걸까 싶었다. 선희 씨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태형 씨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이 되어서야 영수 씨는 태형 씨가 춤을 춰서 성적이 낮은 것이 아 니라 애초에 공부 머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셈학원이나 웅변학원 따위를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선희 씨가 교내 영어토 론 대회에서 상을 받아오고, 반 석차가 늘 일 등이라는 사실을 그 제야 직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희 씨가 처음 성적 표를 가지 온 날, 선희 씨는 칭찬이 아닌 타박을 들어야만 했다. 99



소설

이옥수

선희의 거짓말

지역 문화 콘텐츠를 연구하고 관련 사업 기획을 주로 한다. 장편소설 『안녕, 저편의 연애』를 출간했다. 인문예술문화 연구집단 ‘유자차스튜디오’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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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한국에는 소위 ‘문단’이 있습니다. 이 문단은 신춘문예 당선, 문예지 신인상, 신인 추천 등을 통해 소위 ‘등단’이라는 것을 해야 진입할 수 있습니다.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작가를 제도적, 사 회적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차인 등단제가 그 시작입니 다. 처음에는 실력 있는 문인을 배출하고, 문학의 장을 넓혀가는 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오늘날의 ‘문단’은 더는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문단은 등단제도를 거치지 않은 작가, 웹 소설 작가, 장르문학 작가 등을 출판, 문예지 투고, 문학상 수상, 작가 지원제도 등에서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문단이 권력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단 권력 속에서 우리는 참담 함을 목도하기도 합니다. 지난 2016년부터 불거져온 문단 내 성 폭력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슬프게도 가해자의 대부분은 등단한 작가이고, 피해자는 등단 을 원하는 작가 지망생이었습니다. 이는 멀게는 다른 학교의 이 야기, 가깝게는 선배 혹은 후배, 동기의 이야기였습니다.


소설

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폐단, 젠더 감수성이 결여된 공동체 등

수평의 연애

우리는 분노합니다. 문단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예술이 눈에 보이는 폭력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은밀한 폭력까지. 그것들 은 여전히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위계와 폭력에 관한 무 지와 외면을. 그리고 누군가의 취향에 따라 작가가 되거나 작가 가 되지 못하는 폐쇄적인 구조를. 우리는 피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며 직시하고 선 언하여 새로운 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라는 호 칭이 권력이 되어 누군가를 억누르지 않도록 그리고 독자들이 자 신의 취향이 아닌 타인의 취향에 의해 선정된 작가의 책만 한정 적으로 읽지 않도록. 우리는 변화를 위해 전진할 것입니다. 이 책 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 우리는 느리더라도 꾸준히, 오래 가겠습 니다. 2018년 가을 이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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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logy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초판 1쇄 펴낸날 2018년 11월 20일 글 행간을 읽는 사람들(김소영, 나혜, 이재영, 조아라, 김달래, 송미란, 임청명, 유지은, 최예지, 김재이, 이옥수, 이여름) 기획 유자차스튜디오 편집 이혜민 교정교열 이옥수, 김소영, 최예지 디자인 정현우 펴낸곳 900KM 출판등록 2016년 10월 31일 2016-000019호 전자우편 900kmbooks@gmail.com 페이스북 facebook.com/900km 홈페이지 900km.net 2018, 행간을 읽는 사람들(이옥수 외 11명) 이 책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출판사의 서면 동의를 받 아야 합니다.

ISBN 979-11-959388-2-7 03810 값 10,000원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 페이지(http://seoji.nl.go.kr)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http://www.nl.go.kr/ kolisnet)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CIP제어번호: CIP2018036401)

*이 책은 충청북도, 충청북도기업진흥원(청년희망센터)의 '2018 청년활동지원사업' 에 선정되어 제작되었습니다.




펴낸이.900KM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를 디자인하고 펴낸 ‘900KM(구백킬로미터)’는 소규모 콘텐츠 기획사이자 출판사입니다. 출 판, 디자인, 영상제작 등 다양한 콘텐 츠를 통해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청년 의 삶을 수집 기록하며 우리가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삶의 방향을 탐구합니다.


우리는 분노합니다. 문단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폐단, 젠더 감수성이 결여된 공동체 등 눈에 보이 는 폭력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은밀한 폭력까지. 그것들은 여전히 우리 를 위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위계와 폭력에 관한 무지와 외면을. 그리고 누군가의 취향에 따라 작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지 못 하는 폐쇄적인 구조를. 우리는 피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며 직시하고 선언하 여 새로운 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라는 호칭이 권력 이 되어 누군가를 억누르지 않도록 그리고 독자들이 자신의 취향이 아 닌 타인의 취향에 의해 선정된 작가의 책만 한정적으로 읽지 않도록. 우리는 변화를 위해 전진할 것입니다. 이 책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 - 에필로그 중에서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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