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투어 앤 미디어
Magazine BRICKS
Beyond Routine Into Curiosity Keep Sailing
여행 매거진 BRICKS
일본 특집호
가깝고도 먼 그곳, 일본. 집 떠나 조금 멀리, 두 번의 교토京都
CONTENTS 4
카비라 만에는 상점이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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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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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에로의 시대 화보시절畵報時節
발해-일본 교류의 거점, 후쿠라 항 다양함을 찾아, 일본 서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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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행정구역상 정식 명칭은 교토부(府), 794년 간무천황이 나라(奈良)에서 천도한 이래 1868년 메
이지천황이 거처를 도쿄로 옮기기까지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다. 때문에 교토는 일본다운 색채가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서 일본 사람들에게 여전히 미야코(都: 서울)로 불리며 정신적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 고 있다.
이런 연유로 교토엔 일본의 다른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찰과 문화재가 남아 있고,
그런 유산은 일본 문화의 고상함에 매료된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끊임없이 교토로 불러들이고 있다.
집 떠나 조금 멀리, 두 번의 교토京都 글굔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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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굔 짱도 7년 째 살고 있는 도쿄와는 다른 고
켓을 1,200엔에 구입한 후, 버스정류장으로 발걸
대구와 같은 분지 지형으로 역시 여름 더위로 유명
가지고 오진 않았기에, 프리티켓을 살 때 같이 집어
상함에 이끌려 교토로 향하고 있었다. 교토는 한국 한 지역이었다. 교토 역에 도착하자마자 한 여름 히 토리타비(一人旅: 혼자여행)를 감행한 구릿빛(단 순히 까무잡잡한) 피부에서 연신 습기 찬 아지랑이
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땀 도 식힐 겸 잠시 해우(解憂)를 위해 들른 화장실에 다음과 같은 암호문이 한글로 적혀 있던 것은 아직 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역 안 여행 안내소에서 교토시내 버스와 전
철을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프리티
1
음을 옮겼다. 딱히 교토여행에 대해 거창한 계획을 온 여행 안내서를 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 로 지정된 사찰 위주로 둘러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몇 번 버스에서 내려 이름 모를 박물
관 등을 둘러본 후 처음 방문한 사찰이 긴카쿠지銀
閣寺, 은각사였다. 이름과는 다르게 누각에 은칠 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경내엔 초록빛으로 풍성하
면서도 정갈하게 정돈된 정원이 있어 제법 다채로 운 인상이었다.
2
3
다음으로 도착한 기요미즈데라清水寺, 청
수사에선 오렌지색으로 강렬하게 채색된 누각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눈이 부신 색감은 긴 비탈길 을 올라가며 쌓인 피로를 조금 마비시켜 줄 정도였 다. 경내를 다 둘러본 후 다시 비탈길을 내려갈 때
길 옆 가게에서 사먹은 니꾸망(肉まん: 고기찐빵) 은 육즙이 풍부하고 상당히 맛있던 것으로 기억한 다.
다음 목적지로 계획했던 킨카쿠지金閣寺,
금각사는 결국 가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을 달렸는데도 불구하고 도착을 못해 중간에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방향음치(方向 音痴: 일본에서는 한국의 길치라는 표현으로 음치
앞에 방향을 붙인 방향음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 굔 짱의 약점이 잘 드러난 사례로 두고두고 안타 까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1년하고 몇 달이 더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땅거미가 질 때까지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며 정 원, 박물관, 사찰 등에 발도장을 찍었음에도 불구 하고 교토에 대한 기억이 많이 희미해진 데에는 혼 자여행이라는 디메리트가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 다. 머릿속에 저장된 영상과 사진을 마음이 연결된 사람과 공유하지 못하고 있으니, 데이터의 파편화 가 항상 신세지고 있는 7년 된 노트북의 하드디스 크보다 곱절은 빠른 것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1.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계몽 포스터 2. 은각사 입구로 이어진 담.세간의 먼지를 정화하는 길이라고 한다 3. 니꾸망 肉まん 07
그리고 올해 다시 찾은 교토.
타지 못하고, 동물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꼭 가기
다 더 거셌던 큰비 탓에 계획했던 토롯코열차(トロ
내려 깜깜해진 시각, 빗물에 흠뻑 젖은 신발로 오른
기억을 공유할 사람과 함께였으나, 예상보
ッコ列車: 본래 목재운반용이었던 것을 관광용으 로 개조한 열차로, 25분간 운행하는 구간의 경치 가 뛰어나 교토의 대표적 관광열차로 유명하다)도
로 했던 교토 수족관도 가지 못했다. 다시 땅거미가
교토타워 전망대의 촉촉한 야경은 왠지 오래 기억 에 남을 것 같다는 좋은 느낌이 들었다.
글쓴이 굔 짱은 국문학과를 다니는 내내 일본어를 공부하다 7년 전 도쿄로 떠나 현재는 은행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일본 여자를 만나 하루빨리 도쿄 가정을 이루고 싶지만, 이유를 모르겠네, 줄곧 미팅만 하고 있다.
밖에서 부는 힘찬 바람, 건물은 출렁이고
발가락에 있는 힘 다 주어 무서움을 참고 있던 기억만은 애써 외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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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비라 만에는 상점이 하나뿐 글 제민
일본 오키나와현 나하에서 남서쪽으로 410㎞. 일본 열도 최남단의 섬, 이시가키石垣.
오키나와에서 일을 해보기로 했던 건, 한국엔 없
한국의 하와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
다는 것이었다. 오키나와의 관문 나하 시, 1박에
는 열대의 섬이기 때문이었다. 제주도가 있다고? 제 이주당한 죄 없는 야자나무의 이파리 위로 한겨
울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볼 때마다 동정을 금치 못
했다. 아무리 추워도 영상 10도 이상을 유지하는, 1년 내내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지낼 수 있는 투명 한 열대의 바다 오키나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진짜 남국의 섬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
데, 오키나와 현지인들도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 1,000엔 정도 하는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서 하
루 종일 빈둥거리는 일과도 처음엔 마냥 재미있었
다. 하지만 점점 얇아져 가는 지갑은 내 마음을 조 급하게 만들었고, 빈둥거림도 얼마 안 가 물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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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구세주처럼 그가 등장했다. 나와 같
은 또래의 일본인 대학생이었던 그는 아르바이트 를 병행하며 오키나와 이곳저곳을 여행 중이었는 데, 자신이 하던 이시가키 섬의 리조트 아르바이트 를 나에게 넘겨주겠다고 한 것이다. 반신반의하며 소개받은 곳으로 전화를 하자, 리조트의 인사담당
자라는 사람이 마치 몇 년 전부터 내가 오길 기다렸 던 것처럼 환대해 주었다. (이것이 내가 리조트에서 겪어야 했던 극한 노동 강도를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이틀 후,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이시가키 섬
으로 들어가는 편도 항공권을 구입함으로써 나하 에서의 짧았던 백수생활에 작별을 고했다. 남쪽으
로 한 시간을 비행한 뒤 이시가키 공항에 내리자, 나하보다 더 습한 공기와 더위가 엄습했다. 과연 일
본 최남단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날씨였다. 공항 은 매우 허름했고, 이에 비하면 차라리 도쿄의 버스
터미널이 공항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 년 뒤, 아주 최신식의 공항이 문을 열었다.)
ⓒ 663highland
10월 말이라는 시기가 무색하게,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전부 비치 샌들에 짧은 팬츠 차림이었 다. 당장에라도 바다에 입수하겠다는 격렬한 의욕이
느껴져 괜히 나까지도 흐뭇해졌다. 설레는 마음도 잠 시, 일거리를 찾아 왔다는 노동자로서의 본분을 기억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 버스터미널까지 이동, 내가 일하게 될 리조트가 있는
카비라 만(?)까지는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약 40분 을 가야 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꿈에 그리던 투명한 열대 바
다가 펼쳐졌다. 수중에서 자라는 맹그로브 숲을 끼고 돌며 감탄하기를 계속, 마침내 버스가 카비라에 도착 했다. 내 뒤를 이어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함께 내렸다. 정류장에는 리조트 직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40대 남자도 직원의 인사를 받는 걸 보니 그도 나와 같 이 일하게 될 아르바이트 스태프인 것 같았다. 무슨 사 연을 가지고 저 나이에 이 섬까지 흘러들어온 걸까, 의 문은 삼키고 나 역시 그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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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메드Club Med는 오락을 포함한 모든 생활
어 혼자 사용할 수 있었다.
완전한 커뮤니티를 콘셉트로 하는 프랑스계 리조
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단은 짐을 풀고 치약 등
을 오롯이 그 안에서 전부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트 체인이다. 리조트는 넓은 공원부터 아름다운 바 다까지 갖추어 그 자체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 다. 일하는 직원들도 헬스 트레이너, 바텐더, 댄서
에서 네일 아티스트까지 직업군이 무척이나 다양 하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리조트의 아르바이트
스태프 전용기숙사였다. 기숙사의 관리인이라는 60대 정도의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여기 있는 동 안은 엄마라고 불러도 된다며, 살갑게 간단한 룰을 설명해 주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원래는 2인 1
실이지만, 비수기에 접어드는 시즌이라 사람이 적
방에는 화장실과 부엌까지 딸려있어 지내
생필품을 사러 나가려는데, 오키나와 엄마(관리인 아주머니)가 아마 지금쯤이면 상점이 문을 닫았을 지도 모른다며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아직 오후 여 섯 시 정도밖에 안 됐는데? 서둘러 아까 내린 버스
정류장 옆에 있던 나카마 상회에 도착하니,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문에 쓰여 있는 공식 영업시간 이 무색하게,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문 닫는 시 간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 흔한 편의점도 하나 없는,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슈퍼가 유일한 깡촌
이라니, 드디어 본격적인 오키나와 라이프가 시작 되는구나! 감격스러웠다.
ⓒ 663highland
글쓴이 제민은 사람들이 태국에서는 태국어로,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말을 걸어올 정도로 곧장 현지인들과 위화감 없이 뒤섞이는 둔갑술과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바퀴벌레 같은 적응력을 무기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현재는 일본 도쿄의 작은 방송제작사에서 일하며 다큐멘터리 피디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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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에로의 시대 글 이주호
1617년 진나이 쇼지라는 무사가 도쿠가와 막부를 찾아왔다. 나는 주인 없이 떠도는 낭인이었으나 에도에
닿아 유곽 하나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몇 달 해 보니 기가 막힌 사업 계책이 떠오르더라, 에도 곳곳에 흩어 져 있는 유곽을 한 데 모아 유곽촌을 만들고 운영은 내가 하되 막부가 관리를 하면 어떻겠는가? 에도의 치 안이 좋아질 것이고, 무엇보다 막부로 들어오는 세금이 수십 배로 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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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막부는 갈대밭이던 에도, 지금의 도
노 저어 왔다. 요시와라 정문에 도착하면 누구든 차
평 부지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락단지를 개
권력도 통용되지 않았고, 유일한 규칙은 술값에 상
쿄시 주오구中央区 닌교초人形町 2~3번지 2만 장했다. 갈대밭이라 요시와라葭原라 불렀지만 나 중에 발음이 같은 吉 자를 써서 운수 좋은 지역이라 는 뜻의 요시와라吉原로 바꿔 불렀다.
요시와라는 세 방면이 물길에 가로막혀 있
고 정문에는 사무라이 신분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 다. 북쪽 야마노테 지역에 사는 사무라이들은 말을
타고 아사쿠사를 지나 요시와라로 왔지만 보통은 에도 곳곳을 연결하는 운하를 타고 작은 개인 배를
고 있던 칼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 안에서는 계급도
응하는 계산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무라 이라고 해도 칼을 내려놓고 난 연후엔 시장 상인보
다 막 싸움에서 유리할 게 없었기에 평소대로 건방 을 떨다가 장 사람들에게 얻어맞는 정부 관리들이 부지기수였다.
유녀에게도 아주 약간의 평등권이 부여되
었다. 방문을 열었더니 앉아 있는 남정네의 꼬락서
니가 매우 흉지다거나 참을 수 없이 경박하다 싶으
1. <신요시와라 나카노초>, 우타가와 도요하루, 1770년 2. 『후류니지이로마네에몬』 중 <요시와라의 유녀와 유객을 훔쳐보는 마네에몬>, 스즈키 하루노부, 1770년
면 가차 없이 방문을 닫아 버렸다. 자리에 앉았다
서 우키요에, 하이쿠, 가부키, 라쿠고 같은 대중문
놓아선 안 됐다. 온갖 박식과 우스개가 여자의 주량
해서, 담소 좀 나눴다 해서 침소가 가까워졌다 마음
이 차거나 마음 벽이 허물어질 때까지 이어지지 않 으면, 있는 대로 돈을 다 쓰고도 대신 노 저어 줄 사 람 하나 없이 운하에 고개를 처박을까 충동을 참아 가며 뭍으로 나가야 했다.
술값이 워낙 비싸다 보니 대다수 서민들은
요시와라에 드나들 수 없었다. 그들의 호기심과 욕 구를 채워주는 건 서서 마신다 해서 이름 붙여진 선 술집과 우키요에라는 그림이었다. 에도 시대 이전 까지는 서민이 예술의 주요 소비층이 된 적이 없었 다. 그러다 상인 계급의 부가 사무라이를 능가하면
화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우키요에 그림은 손으로 그려지기도 했지
만 보통은 다색 목판화로 만들어졌다. 대중문화의
본질인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키요에 화 가들이 주로 그리는 소재는 유곽의 모습, 유곽의 여
인들, 가부키 배우들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노골 적인 춘화도 꽤나 잘 팔리는 그림이었다. 대량으로 찍어 낸 그림들은 싼값에 팔려 나갔다. 더러는 집안
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지만, 보통은 오락 의 용도였다. 버려진 그림들은 화물선에 실려 유럽
으로 건너가 인상파 화가들에게 일본 열병을 앓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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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로를 따라 요시와라로 가다 보면 길목에 아사쿠
후반 DVD가 비디오를 대체하자 대여점은 판매점
참배를 좋아하는 사람들답게 절에 들어가 소원을
두 배로 늘어났다. 현재 일본에서는 연간 4,500개
사라는 참배로 유명한 절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빌고 나오면 어쩐지 요시와라까지 가기가 좀 번거 롭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었다. 요 어디 목 좀 축일 만한 곳이 없나 서성이는 사람들이 늘어 가자 아사쿠사에도 행객의 발목을 잡아챌 만한 행 색의 유곽들이 하나둘 늘어 갔다.
1657년 10만 명이 사망한 대화재로 요시
와라가 완전히 불타버리자, 아사쿠사는 단연 에도 유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가부키 극장이나 라쿠
고를 상연하는 요세寄席들이 발 빠르게 이 지역으 로 옮겨왔다. 아사쿠사에 이식된 요시와라 놀이 정 신은 1958년 매춘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이어졌 다. 전통극, 스모, 산해진미가 거리 풍경을 지배해
가는 듯도 싶었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들어오면서 ‘에로틱’이란 잉글리시를 아무 때나 제 맘대로 구 사하는 모던 보이들이 거리를 점령해 갔다. 참배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비웠겠다, 이제 할리우드 마돈 나들의 에로틱한 영상으로 빈 가슴을 채워 볼까나, 바야흐로 새로운 여흥이 도래한 듯싶었지만, 이들 의 술자리에 마담이 빠지기엔 아직 일렀다.
잡지와 소설로 에로틱을 탐닉하던 1970년
대를 지나 1981년은 일본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에로틱의 시대를 열어젖힌 해였다. 비디오 대여점 을 타고 성인 비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에로 영
화는 몇 해 가지 않아 이제 모든 걸 보여주고 말겠
다는 말초 미학으로 진화, 혹은 퇴화했다. 2000년
이 되었다. 소장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영상의 길이도
의 DVD가 출시되고 있으며 1만 명 정도의 배우가 활동하고 있다. 일본 AV시장 규모는 10조에 달하
며, 형법으로 제작, 배포, 출연을 금지하고 있으나, 대체 어디부터 단속해야 하는지 모르겠스무니다, 유연하게 대처하며 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마저 대개는, 우리나라에서 AV는 합법 이무니다, 착각하고 산다.
가라오케, DVD 상영관, 보이밴드 새 앨범
홍보 포스터인가 싶은 호스트 광고, 길거리 호객꾼 과의 흥정에 자신이 없는 이들을 위한 무료 안내소,
원하는 서비스는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역
할은 무엇이든 해 볼 수 있어, 이렇게 은혜로운 에 로를 위해 대낮이든 아침이든 부끄럼 없이 업장들 을 드나든다. 하지만 에로는 해를 거듭해 더 집요해
지고 더 저렴해졌다. 인터넷을 타고 은닉까지 보장 하며, 미치지 아니한 바 어디인가, 세를 파악하기 조차 어렵게 되었다.
에로틱이 일반의 육욕을 억압하며 소수의
육욕만 충족시켜 왔던 저 고고한 종교 정신, 기와
담벼락 안 구중궁권을 향한 돌팔매이던 때도 있었 다. 육체를 풀어 신에게 다가가자는 아담교는 가톨 릭의 처절한 억압을 받고 사라졌고, 프리섹스는 애
많이 낳은 빅토리아 여왕과 청교도들에 맞서던 육 탄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의 이야기. 에 로는 육체 해방, 경직된 사회에 던지는 일침이라는
간판 뒤에 숨어 온갖 소녀를 구속하고 협박하고 착
의 해방, 정신의 해방을 위해 에로틱을 탐닉해 온
면 아까울 것 없이 내던져버리는 참혹한 카리스마
틱에 탐닉해 봤자 남는 것은 미친 사회에서 미친 삶
취했으며, 나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고 항변하 이기도 했다.
모두가 안다. 떠돌이 칼잡이들과 패망 일본
의 허망을 허덕이던 부역자들부터 자유민주 계급
사회에서 이탈한 히키코모리들까지 모두가 안다. 그 옛날 유곽에서, 신주쿠와 홍대의 클럽에서, 저 장장치와 서버에서 어우러지는 에로틱이 인생의 외로움과 시름들을 위안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 것이 아주 잠시뿐이라는 것을. 자신들은 결코 육체
게 아니며, 박탈감을 떨치고 외로움을 잊고자 에로 을 살고 있다는 자각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세상 모든 화상 속 육체들은 감독, 제작자, 피디, 작 곡가라는 포주들에게 자유를 상납하고 한때의 생
계 계책과 약간의 주목을 위해 연명했던 포로였다 는 것을. 그렇더라도 우리가 사랑한 에로의 시대는
우리를 영원히 침묵하는 고독한 시청자로 살게 할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Kondo Atsushi 글쓴이 이주호 브릭스 편집장은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최근에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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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세탁기는 저 아래 마트에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냉장고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여기에 맥주를 두어도 되겠는걸요.”
나는 싱크대 옆 창턱을 가리켰다. 유제품까지도 끄떡없어 보였다. “고기도 보관해야 할 텐데요.”
“고기를 쟁여두고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나는 다다미방을 재게 가로질러 이중유리문을 드르륵 열어젖혔다. 야트막한 설산雪山이 펼쳐졌다. 마침 에어컨 실외기가 설치된 미니 베란다에 좁은 공 간이 있었다.
“여기 두거나, 아이스박스에 눈을 채우면 될 것 같군요.” “소오데스까 そうですか.”
12월의 설국雪國, 니가타였다.
눈을 기다리며 글 겨울베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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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2월초부터 2월말까지 두 달 반여 동안 이곳에서 조사를 하게 되어 체류할 곳을 사전에 물색해야 했
다. 없는 인맥이나마 총동원하여 머무를 곳을 알아봐 달라 부탁하였으나 물 흐르듯 순조롭던 준비는 뜻 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현지 보존회장에게 직접 허가받은 조사마저 불확실하게 될 것 같다는 전언傳言이 있었던 것이다.
‘조사라면 3일에서 5일, 길어야 일주일이면 족한데 그토록 길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그녀가 원
그런대로 타당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일부 관계자는 꽤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꺼려했다고 한다.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다행히 나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보존회 회장은 영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위 ‘메신저’가 전해준 부 정적 기류를 알아듣지 못한 것으로 하고 ‘한 번 허가는 허가이고 그도 뱉은 말이 있으니 스스로 뒤집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결론지으며 예정대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이곳은 추운 곳입니다. 길은 눈으로 뒤덮여 걸어 다니기도 불편하고 밖은 물론이거니와 지내게
될 숙소마저 추울 것입니다.’ 나를 염려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러한 염려가 사실이기를 염원하
는 것 같기도 한 말을 듣고 일주일 여정에 맞는 콤팩트한 짐을 싸야 하는 건가 망설인 것도 순간. 15년 만
에 가장 큰 트렁크를 구입하는 것으로 나는 준비를 끝냈다. ‘국경을 넘어 저렇게 큰 트렁크를 싸 온 그녀를 일주일 만에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무언無言의 메시지가 무엇보다 강력하게 전달되기를 바라 면서.
도착 당일 빼곤 머무를 곳조차 없이 세상에서 가장 큰 트렁크를 달고 나는 날아왔다. ‘국경을 빠져
나가면 설국이고⑴, 눈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확신 아래 행여 눈과의 첫 대면을
놓칠까 창가 좌석을 예약하였으나 12월 초순의 니가타엔 눈이 없었고 짐을 찾기에 이르러서는 택시 트렁 크에 나의 짐이 들어갈 것인가 후회하게 되었다.
장기투숙이 가능할 저렴한 료칸도 알아보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방 국도가 지나는 고가 옆, 세트
장인가 싶은 휑뎅그렁한 빌라 3층에 극적으로 숙소를 얻었고 계약 당일 전기를 연결해 그날부로 나는 입 거자入居者⑵가 되었다.
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서 인용 ⑵ 입주자 ⑶ 本音, ほんね : 본심,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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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의 전언은 사실이기도 했고 기우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실’의 편린들이 소문이 되는
순간 과장과 곡해가 덧붙여져 실상과 멀어지는 만큼, 두세 단계에 걸친 ‘메신저’의 기우가 양측 간의 오해
를 키운 점도 있었다. 통역으로 전달되는 일본어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뱉어내는 나의 표정 가운 데 어떠한 진심을 읽어내고자 하는 그의 눈길로 나는 알 수 있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꼭 알려야 한
다면 돌려서 표현하는 일본인의 특성상 나의 조사를 꺼려한다는 정도의 소식이라면 ‘뉘앙스’만으로도 알 아듣고 계획을 접거나 절충안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나는 한국인이었고 못 알아들은 척하고 싶었다. 그것 은 애초에 그와 내가 나눈 이야기가 아니었고 우리의 혼네⑶는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자아, 그러면 내주來週부터 조사를 시작해 보시지요.”
추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좋아한다고 말은 했지만 한국처럼 보일러가 없는 방은 서 있거나
“있는 동안 일본어도 공부해 보겠습니다.”
앉아 있기 선득했고, 바짝 몸을 뉘이면 한기寒氣는 점차로 코끝을 엄습해 왔다. 나는 전기담요를 장만했 고 ‘역시나 춥군요.’라는 말로 선의善意의 코타츠⑷를 무료 렌탈받아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일 없고 아는 이 없는 이곳을 이렇다 할 일정 없는 여행객처럼 돌아다녔고, 때론 일을 보았고 눈에
띄는 곳과 후미진 곳에 들어가 낯선 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공기는 맑고 깨끗했다. 깊고 이른 어 둠에 잠을 청하거나 어느 밤은 부엌바닥의 냉기를 막아보겠다며 길고 긴 매트를 짜내었다. 날씨는 서울보
다 따뜻했고 다만 내일은 눈이 내리기를, 그렇지만 잠든 새 내려버리는 것은 반칙이라며 간간이 커튼을 들 추어 보다 잠이 들었다.
같은 구간의 열차를 세 번 놓쳤고 온 세상을 뒤덮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눈은 없었지만, 나는 지나가버린 열차를 보낼 수 있었고 아직 오지 않은 눈을 기다릴 수 있었다. 내가 이곳 에 있고 그는 틀림없이 올 것이므로.
설국은 거짓말처럼 틀림없는 곳이기에.
글쓴이 겨울베짱이는 방방곡곡 베 짜는 조사를 하거나 직접 베 짜는 것을 즐깁니다. 눈을 좋아합니다.
⑷ 좌식의 상아래 전열기구가 있고 이불이나 담요가 덮여져 상 아래가 따뜻해지는 일본의 난방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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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시절 畵報時節 글 김경일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디자이너들이 볼 책을 선정하고 구입하는 일은 회
수집하러 부산에 갔었다고, 그곳의 TV에서는 일본
고 찾아오는 판매상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이것저
아주 옛날 광고회사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방송이 잘 잡히니까, 여관방에서 일본방송을 보며 자신이 담당하게 된 광고의 모티브를 찾아냈다고, 모티브라는 미명하에 통째로 베끼는 게 성행했었 다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광고회사가 아닌 편집디자인 회사에 다녔
던 나는 물론 부산에 갈 일은 없었다. 대신 책을 디
자인하는 회사이니 만큼 디자인에 도움이 될 다양 한 종류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책들
을 슬쩍슬쩍 베끼곤 했다. 벤치마킹이라고 해두자.
사 아트디렉터의 아주 쏠쏠한 재미였다. 샘플을 들 것 주문했고, 서비스로 한두 권쯤 얻어 본인이 몰 래 보관하기도 했다.
이렇게 구입하는 책들 중에 <가정화보家
庭畵報>라는 일본 잡지가 있었다. 월간 디자인이
니 유럽, 미국의 보그, 엘르 같은 잡지를 물리치고, 유일하게 매월 구입하는 책이었다. 깔끔한 디자인
과 수준 높은 인쇄가 장점이긴 했지만, 매월 살 정 도의 책은 아니라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고 “왜 사 지?”라는 의문이 항상 따라 붙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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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러 디자인 분야가 일본을
빼고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 디자인 회사에서 일본 잡지 한 권은 사무실의 물통 정수기처럼 ‘그냥’ 또는 ‘꼭’ 있어야 되는 구 성품 정도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그땐 그랬다. 20년 전 쯤엔 그랬다.
물통정수기의 물을 받아 믹스커피
를 타 먹듯 뒤적거리던 이 잡지는 볼수록 묘 한 매력이 있었다. 음식과 옷, 집에 대한 얘
기들과 전통문화, 여행 등을 주로 다뤘는데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미지가 상당히 고급 스러웠다. 화려하게 어필하는 이미지가 아 니라 언뜻 소박해 보이지만 두어 번쯤 더 들
춰 볼 때 “아~”하며 느껴지는 기품이 꽤 강
렬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이미지를 나중 에 내가 경험해 본 일본의 여행지와 비교한 다면 아마도 교토의 은각사와 가장 비슷하 지 않나 싶다. (김성근 감독 인터뷰를 너무 많이 봤나?)
<가정화보>를 매월 구입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몇 년쯤 더 지나서 은각사에 들어섰을 때 잊고 있던
잡지 속 풍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다. 교토에 이틀간 있었던 나는 금각사와 청수사, 이조성과 기온에 갔었고, 은각사는 교토에서의 맨 마지막 일정이었다. 앞의 아름답고 화려한 곳들과 달리 은각사는 은은하고 고즈넉했다. 마치 <가정화보>에 실린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정원과 료칸들처럼 환상적이었
다. 이 풍경에 매료됐던 나는 소박하고 기품 있는 장소를 생각하며 두어 번 더 교토를 찾았지만 교토는 대 부분 화려했고, 더 이상 이 도시에서 <가정화보> 속 풍경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정화보> 속 풍경은 점점 잊혀 졌
고, 디자인의 패러다임은 일본에서 네덜란 드를 비롯한 유럽 스타일로 옮겨갔다. 교토 를 지루해하던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일본 여행은 도쿄의 다이칸야마나 지유가오카 같은 곳에서 그릇을 고르거나 유니클로에
서 아들의 티셔츠를 고르는 일정으로 바뀌 었다. (왜 일본까지 가서 유니클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잊고 있던 <가정화보> 속 풍경을
다시 만난 것은 눈 덮인 다카야마高山에서 였다.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는 온천욕을 생각하며 도야마富山 근처의 오쿠히다奧 飛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숙소에서 가까 운 곳이니 산책이나 하자며 들른 곳이었다.
교토의 기온과 산넨자카를 반씩 섞어 놓은 듯한 기미산노마치라는 거리가 있었고, 거 리 위로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온처
럼 비밀스럽거나 거만하지 않았고 산넨자
카처럼 부산하지 않았다. 꽤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혔다. 도 시는 멈춰진 듯 조용했다.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잡지 속 화보로 만들어 두고 싶은 풍경이었다.
술을 파는 가게에서 따뜻한 감주를 한 잔 마시고 느긋하게 걷기도 했고, 에도시대의 관청인 다카
야마진야가 보이는 찻집에서 단팥죽을 먹으면서 눈을 구경하기도 했다. 찬찬히 걷다보면 시내를 가르는
개천이 있고 이 개천을 지나는 작은 다리가 곳곳에 있었다. 인구 10만이 안 되는 이 도시는 산책을 위한 도 시였다. 작은 도시이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굳이 어디를 찾아가지 않아도 곳곳이 아름다웠다.
물론 눈 내리는 풍경이 어디든 아름답지 않으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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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가르는 개천의 이름은 미야가와라
맥주 한 잔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주인
는데, 한국의 시장처럼 다양한 채소와 된장, 절임
니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엄지손가락을 올려 주었
고 했다. 이 개천을 따라 아침마다 작은 장이 열리 음식과 반찬들 그리고 갖가지 생필품과 기념품을 팔았다. 시장의 초입엔 이 지역의 명물인 히다 소고 기를 꼬치로 구워 파는 곳이 있었다. 고베, 마쓰자
카와 함께 일본 3대 쇠고기인 히다 규牛를 작은 생
은 히다 규 꼬치를 먹는 내 표정을 진지하게 살피더 더니 역시 히다규가 최고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장을 빠져나오니 자동차가 다니는 도시
그대로의 모습이 나오고, 눈 때문인지 큰 도시가 아
닌 탓인지 사람들의 걸음은 느렸다. 조심스럽게 걷
는 게 아니라 느린 걸음이었다. 장을 보고 집으로
다. 사실은 “여기서 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한
여행 후유증이었다.
돌아가듯 나도 여유롭게 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오쿠히다 온천에 숙소를 정했으니 다시 돌
아가야 했다. 온천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이라는 얘기
국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최고의
에 별 생각 없이 들른 곳이었는데 다카야마는 뜻밖 의 소득이었다. 책 몇 권과 함께 찾아와서 작은 호 텔을 얻어놓고 일주일쯤 지내다 가고 싶은 도시였
TIP
다카야마는 나고야에서 가는 방법과 도야마에서 가는 방법이 있다.
나고야에서 히다와이드뷰를 타고 게로온천에 들렀다 다카야마로
가는 기찻길이 환상적이지만 매력지수 제로에 가까운 나고야라는 도시가 마음에 걸린다.
반면 항공편이 다양하지 않아 할인항공권을 찾기 어려운 단점이
있지만 도야마는 일단 아름다운 도시이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도시 건너로 보이는 일본알프스의 연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 도시를 찾은 본전을 뽑을 수 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 간스이 공원점은 덤.
이곳의 눈도 엄청나다. 일본의 여름철 비처럼 겨울엔 눈이 그렇게
다카야마처럼 오래된 거리와 사찰 등을 갖고 있는 도시를 ‘소小 교
내리는 모양이다.
토’라고 부른다. 구라시키, 히타처럼 익숙한 도시들도 소 교토에 포함된다 는데, 다카야마는 소교토의 선두주자쯤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글쓴이 김경일은 디자인 회사 DNC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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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일본 교류의 거점, 후쿠라 항 글 임석규
1997년 12월, 발해 건국 1300년을 앞두고 네 명의 젊은이들이 뗏목을 건조하여 발해에서 일본으로 향 하는 항로 복원에 나섰다. 뗏목 이름은 ‘발해1300호’. 이들은 옛 발해의 땅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서 해상항로를 따라 바람과 해류에만 의지해서 항해를 시작했다. 혹한 속에서도 24일간의 항해는 성공 적인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23일 오후 일본의 오키섬을 눈앞에 두고 뗏목이 난파되었고, 4명의 대
원은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통영수산과학관 부지에 ‘침
묵의 영웅’이란 기념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4명의 젊은이들이 항해를 시작한 것 은 발해 항로를 증명함으로써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이곳을 왕래하던 발해인의 웅혼한 기상을 되살 리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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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해와 일본 간의 교류는 험한 바닷길을 통
해야 한다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극적
이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주요 출항지는 러 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라는 곳이었다. 이곳에 는 현재 발해시대 성터가 잘 남아있으며, 역사적으 로 얽혀있는 한·중·일 고고학자들의 연구열기가
뜨겁다. 이 유적에서는 그동안 다양한 발굴성과가 발해는 건국 이후 당, 일본, 신라 등 주변 국가들과 긴밀한 교류관계를 유지했다. 그 중 일본과는 727
년부터 약 200년간 공식적으로 50여 회에 걸쳐 서 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두 나라의 교류를 통해 발해는 경제적 이익
을 취하였고, 일본은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발해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문물 중 최고
의 인기 품목은 모피였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 가 하면 920년 여름, 발해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에 참석한 시게아키라(重明) 친왕은 당시 가장 비싼 물건이었던 담비 가죽옷을 8벌이나 겹쳐 입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헤이안시대 법령집 ‘엔기시키(延 喜式)’에 “담비 가죽은 참의 이상만 착용하도록 한 다.”는 기록이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모피에 대 한 부자들의 욕구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나왔는데, 가장 중요한 성과는 유구의 최하층까지
발굴하여 발해의 조기 문화층을 밝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이 문화층에서 고구려시
대의 시루를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발해와 고 구려 문화의 연속성이 증명되었다. 고구려시대에
도 이 지역은 일본으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을 것이 다.
그러면 크라시키노성에서 일본으로 떠난
발해사신이 도착한 곳은 어디었을까? 발해 사신
단은 바람과 해류에 따라 북으로는 데와(出羽)⑴,
서로는 이즈모(出雲)⑵에 이르는 일본 해안 도처 에 도착하였는데, 가장 주목되는 곳은 동해를 끼고 블라디보스토크 항과 마주보는 이시카와 현(石川 縣) 하쿠이 군(羽咋郡)에 있는 후쿠라(福良)항이
다.『속일본기』에는 “해상에서 조난당한 발해 사 절을 후쿠라진에 머물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외에도 일본의 궁중에서 연주하던 궁정악, 달력의
『일본삼대실록』에는, “발해사절이 돌아가기 위
히 선명력은 1년을 365.2446일로 계산한 역법인
게 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즉 후쿠라는 일본에
일종인 선명력 등이 발해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특
데, 859년 발해 대사 오효신이 일본에 전해준 이래 1684년까지 무려 823년간 사용되었다.
한 배를 만들 때 후쿠라도마리의 나무를 베지 못하 서 발해로 가는 출항지이면서, 발해로 건너갈 배를 건조하던 조선소가 있던 곳이었다.
편집자 주 ⑴ 현재의 야마가타 현과 아키타 현에 해당한다. 편집자 주 ⑵ 현재의 돗토리 현(鳥取縣) 동부 지역.
대한항공에서 인천-고마쓰 간 직항을 운항하고 있
간 정도는 더 걸리기 때문에 찾아가기가 쉽지는 않
는데 그 중 한사람이 발해의 승려 인정(仁貞)이다.
지만, 후쿠라까지는 공항에서 열차나 버스로 3시
다. 하지만 인근 가나자와 시는 오래된 거리와 바다 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로 일본 내에서 작은 교 토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니 만큼 한 번쯤 마음을 내 봐도 좋을 곳이다. 후쿠라 항은 서북쪽으로 열린 크
고 작은 2개의 만으로 이루어져 태풍을 피할 수 있 는 항구이기 때문에 동해항로에서 매우 중요한 역 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은 고대는 물론 중 세·근세까지도 이어졌다. 아직도 남아있는 후쿠 라 등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유명하며 이시카와 현 지정문화재이기도하다.
발해와 일본의 바닷길은 위험의 연속이었
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해로에서 비극을 맞았
인정스님은 제17회 견일본사 녹사(錄事)
라는 지위로 일본을 방문했다. 녹사란 사절단의 대
사(大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다음에 오는 높 은 직위이다. 당시 일류 지성인이었던 승려들은 한
문 서적에 통달했으며 고금 사례에도 정통했기 때 문에 고대 국가에서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기도 했 다.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왕효렴(王孝廉)이 대
사로 참여한 사절단의 간부로 일본의 수도에 입경 한 인정은 정월 하례식에 참석하여 벼슬을 받기도 했다.
2 1,2. 러시아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출토 된 발해 동경과 발해 불상 37
815년 정월 22일, 이 사절단은 일본왕의
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인정이 사망한 정확한 시기
여정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사절단을 태운 배는 도
마오(坂上今雄)의 시로 볼 때 816년 가을까지는
국서를 받아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중에 강한 바람을 만나 대파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 어 버렸으며, 다시 배를 건조하는 사이 인정은 병으
는 알 수 없지만 ‘문화수려집’에 있는 사카우에이 생존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秋風聴鴈、寄渤海入朝高判官釋錄事 一首 坂上今雄 大海途難渉 孤舟未得廻 不如關隴雁 春去復秋來
추풍 속 기러기 소리를 들으며 발해 판관 고영선과 녹사 인정에게 바치는 시 한 수 - 사카우에이마오
대해(동해)를 횡단하는 바닷길은 좀처럼 건너기 어려운 까닭에 한 척의 배는 아직 귀국하지 못하고 있 습니다. 관중(關中) 농서(隴西)지방의 기러기들이 하늘로 쉽게 대해를 넘어 봄에 가서 가을에 돌아오 는 것과 같을 수는 없나 봅니다.
이들의 죽음은 이들과 가깝게 지낸 일본 문
그리고 일본왕의 칙명으로 편찬된 한시집 ‘
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제17회 견일
문화수려집’에 외국인의 시가 실린 경우는 왕효렴
게 전하는 국서에 왕효렴과 인정 등의 사망과 그 사
니라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본 문인들의 마음
본사가 다시 귀국길에 오를 때 일본왕은 발해왕에 정을 언급하고, ‘심이창연(甚以愴然)(이 일을 몹
시도 마음속 깊이 애처롭게 생각합니다.)’이라며
과 인정뿐이다. 이는 그들의 시가 뛰어났을 뿐만 아 이 각별했기 때문은 아닐까?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글쓴이 임석규는 일본 무시시노미술대학에서 발해문화, 발해-일본 간 문화교류를 연구하였으며 현재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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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함을 찾아, 일본 서점 여행 글 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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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근무 16년째.
나의 서점 생활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책, 새로운 서점.
입사 후 몇 년 동안은 새로운 책을 찾아다녔고, 중반 이후부터는 우리 서점엔 없는 새로운 모습의
서점을 찾기 위해 서점 여행에 빠졌다. 그렇게 국내 서점을 섭렵했을 즈음 저가항공 시장이 열렸
다. 나는 새로움을 찾을 만한 곳으로 출판 강국 일본에 눈을 돌렸다. 나의 일본 서점 여행이 시작된 것이 다. (참고로 나는 일본어 히라가나조차 다 외우지 못한다.) 일본 서점에 가기 전 무엇부터 시작할까?
나는 먼저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관련 사이트와 서점, 책 관련 사이트를 살핀다. 북샵러버, 하코니와, 코토 비 등 관련 사이트에 새로운 정보가 뜨면 야후 재팬을 통해 상세히 검색하고, 구글 지도에 표시도 해놓는 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발견한 서점 수만 해도 몇 십 군데다.
도쿄에 비해 오사카의 서점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과 교토에는 전통적인 작은 서점이 많고 대
형 서점의 영향이 적다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서점 수가 많은 도쿄를 탐방하게 됐다. 자, 그럼 이제 그 많은 도쿄의 서점 중 깊은 인상을 준 몇 곳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1. 마루노우치 리딩 스타일
나리타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도착한 도쿄역. 도쿄역 주변은 의외로 숨겨진 서점이 많아서 아기자
기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중 도쿄역 옆에 있는 KITTE 건물(옛 우정국)의 ‘마루노우치 리딩 스타일’은 현
재 국내 서점의 트렌드이기도 한 책과 문구, 카페를 조합해 놓은 대표적인 서점이다. 이들만의 독특한 기 획 코너인 ‘Reading Style Project’는 다른 서점과 연합해서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획 작품으로는 같은 날에 태어난 유명인의 책을 모은 ‘생일문고’, 증상을 보고 지
금 자신에게 딱 맞는 처방책을 선택하는 ‘비브리오 테라피’ 등이 있다.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한 기획이다. 전체적으로 쇼핑몰 같은 건물 속에서 여유로운 쇼핑이 가능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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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MV & BOOKS
두 번째로 소개할 서점은 독특한 대형서점인 ‘HMV & BOOKS’이다.
HMV는 원래 시부야 거리에서 성업하던 음반 가게였다. 몇 년 전 사라진 이곳이 책과 음반을 콜라
보한 매장으로 돌아온 것이 바로 ‘HMV & BOOKS’다.
15년 전, 시부야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에 이끌려 들어갔던 HMV는 나에게도 추억의 장소다.
그러니 일본 현지인들에게는 이들의 귀한이 얼마나 더한 반가움으로 다가왔을까. 이곳은 북코디네이터
이자 맥주 파는 서점으로 유명한 ‘B&B“의 대표 우치누마 신타로씨의 기획이 들어간 곳이다. 음반(DVD), 문구류 등이 책과 함께하는 복합 매장이며, 미로와 같은 동선, 낮은 천정, 그리고 어두운 조명이 서점으로
서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독특한 콘셉트의 코너, 라이프스타일에 중점을 둔 생활용품 등 곳곳을 알차게 꾸며놓기도 했다.
또한 각 층별 이벤트 공간은 200여 명의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오프라인 미디어 역할을 한다. TV나
인터넷 매체에 익숙한 이들에게 오프라인에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놀잇거리를 선사한다고도 할 수 있겠 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서점은 도쿄 시민의 쉼터 우에노 공원 반대편, 작은 뒷골목에 위치한 ‘ROUTE
BOOKS’. 가장 최근에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올 초, 10여 년을 빈 상태로 있던 건물에 들어선 곳
으로 원래는 작은 건축회사의 업무 공간이다. 버려진 공간과 물건의 재활용에 목적을 둔 듯 각종 식물과 재활용 가구들로 실내를 꾸몄고, 공방은 물론 서점까지 만들게 되었다. 4층에 위치한 서점은 들어서는 순 간 푸르름과 올드함, 포근함을 안겨준다. 서툰 영어로 주문을 하고 어디서 왔냐, 서점에 자주 오냐,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센스 있게도 한국 노래까지 틀어준다.
감동과 편안함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서점상을 보여주는 이곳은, 같이 간 동료의 표현을 빌리자
면, ‘최근 우리나라 독립서점들이 방향을 잘못 잡은 거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꼭 멋진 공간에 깔끔하 게 차려진 커피숍과 같은 공간만이 필요한 걸까? 이들은 주업인 공방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
간, 바로 서점이라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오래된 가구와 식물, 책. 이곳은 나에게도 도쿄의 새로운 인연 이 될 듯싶다.
3. ROUT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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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많은 동네 서점이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대한민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일본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 지난 15년간 8,000여 개의 서점이 사라졌고, 누구도 어찌하지 못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와중에 지금 소개한 세 곳의 서점처럼 라이프스타일에 중점을 두고서 수많은 책 속에서 꼭 전하고 싶은 책을 선별하는 큐레이션 능력을 갖춘, 고객들에게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서점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리도 다양한 독립 서점이 생기고 있는 요즘, 확실한 키워드를 잡고 알찬 도서 선택과 함께 독자
들에게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서점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해 본다. 나 또한 그런 새로운 서점을 소개하기 위해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해보려 한다.
글쓴이 정영진은 안산에 있는 대동서적에 16년째 근무하며 늘 새로운 서점을 찾아 헤매는 서점 중독자이다. 특히나 우리와 비슷한 성향의 일본 서점에 빠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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