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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커뮤니티가치실현
수다 공간 고마운 늦둥이‘만둣국’의 탄생!
예향 남도 당신이 간직한 ‘종이 씨앗’을 나눠주지 않겠습니까?
남도 기획 '책 읽는 문화'로부터 전남이 걸어갈 행복의 비단길.
남도 사람 아득한 심연에서 항해의 꿈을 길어 올린 사나이
Co ntents 06
당신이 간직한 ‘종이 씨앗’을 나눠주지 않겠습니까? 전남도립도서관 책 기증 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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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늦둥이‘만둣국’의 탄생! 살아 있다!’ 라는 말이 빛바램 없이 은은히 머무는 ‘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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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문화'로부터 전남이 걸어갈 행복의 비단길. <전남도립도서관, 리더십 강한 함장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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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심연에서 항해의 꿈을 길어 올린 사나이 1장, 고선 복원가 ‘홍순재’가 길어 올린 바다의 역사 2장, 나무와 배를 통해 유구한 바다를 꿈꾸는 그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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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호 [제2권 제2호, 통6권호] 발행인 (CHAIRMAN & GROUP PUBLISHER) 이길찬 KILCHAN,LEE 편집장 (EDITOR IN CHIEF) 이길찬 KILCHAN,LEE 에디토리얼 디렉터 (EDITORIAL DIRECTOR) 박혜미 PARK HYE MI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CREATIVE DIRECTOR) 한주연 HAN JU YEON ISSN : 2234-1234 등록번호 : 전남 아 00149 http: //WWW.NAMDOZINE.COM E-MAIL : NAMDOZINE@GMAIL.COM TEL : +82 70-8600-1254 FAX : +82 61-283-1254 전남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 오룡3길-2(재) 전남문화산업진흥원 내 F-103 JCIA F-103, Namak-ri, Samhyang-eup, Muan-gun, Jeollanam-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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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간직한 ‘종이 씨앗’을 나눠주지 않겠습니까? - 전남도립도서관 책 기증 릴레이 책을 기증하는 일은 다른 물건을 기증하는 일보다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 책이 날 선 빳빳함으로 무장한 새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때 묻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 이라면 더더욱. 지난 1월 남도를 대표해 개관한 전남도립도서관에서 특별한 책 기증 릴 레이가 펼쳐지고 있다.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도민들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한국과 일 본을 오가며 한일근현대사를 연구해온 일본인 학자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의 책 기증 역 시 올해로 예정된 상태다. 또한 그의 사제이자 동학운동을 연구해 온 박맹수 교수도 5천 여 권의 도서를 기증키로 결정했다. 총 2만 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책을 전남도립 도서관에 기증하는 나카츠카 교수와 박맹수 교수의 사연. 차츰 줄을 잇고 있는 남도 사 람들의 책 기증 릴레이를 슬며시 들여다보았다. 아직 채워져야 할 페이지로 넘쳐나는 전남도립도서관. 새롭게 탄생한 남도의 도서관을 바라보며 책들이 만들어낸 울타리 안 에서 서서히 풍요로워질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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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발자취를 남도에 선물하는 일본인 교수와 그의 벗 한 일본인 학자가 평생을 혼신의 힘으로 일궈 낸 연구 저서와 그와 관련된 사료들을 2012년 남도에 기증할 계획이다. 일본인 교수가 기증 하려는 책들은 한일 근현대사 연구에 있어 일 본의 조선침략과 청일전쟁 발발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의미 있는 자료들이다. 일본과 한국 의 편향된 근현대사를 바로잡을 이 책들은 앞 으로 전남도립도서관에 보관된다. 자신이 살아 온 전 생애를 상징하는 1만 5천여 권의 책들을 기증하려는 일본인 교수. 그는 ‘1894년 경복궁 을 점령하라’의 책을 집필한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다. 나카츠카 교수는 올해로 여든 셋을 맞 는 노교수다. 그는 자신이 일평생 연구해온 저 서를 비롯해 그의 연구에 토대가 되어온 자료 들을- 동아시아 근대사 연구에 관한 전집, 총 서, 학술잡지, 연구자료, 단행본 등- 전남도립 도서관에 전부 기증키로 결정했다. 나카츠카 교수는 1920년 생으로 교토대학 문학부에서 사학과를 전공한 후 1963년부터 1993년까지 나라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청일전쟁을 연구하 기 시작했고, 당시를 계기로 지금껏 근대 한일 관계사 연구에 집중하며 그의 조국을 향해 조 선 식민지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촉구해 왔다. 지난 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 건에 맞서 왜곡 교과서 채택 저지를 위한 호소 문을 발표했기도 했던 그. 나카츠카 교수는 지 속적으로 일본 내부에서 역사 교과서 왜곡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그가 기증하려는 책들은 동아시아 근현 대사를 조명하는데 중요한 청일전쟁과 한일관 계에 관한 자료들이 대부분이다.
굴절된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현지에서 꾸준히 자료를 수집해왔다. 일본 정부가 경복 궁 침략사건을 조선 왕실 내부의 혼란을 잠재 우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주장해온 것 에 대해, 이 같은 주장은 명백히 지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해온 나카츠카 교수. 그의 양심어린 목소리는 메아리에 그치는 대신 일본 전역에 잔존하고 있는 숨겨진 역사적 자 료들을 토대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거꾸로 읽히는 한일 근현대사를 바로잡고, 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나카츠카 교수. 그는 결국 지난날 경복궁 침략사건의 전 말을 밝힐 사료인 ‘일청전사(日靑戰史)’를 발 견해냈다. ‘일청전사’ 초안은 현재 후쿠시마현 현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기록물을 통 해 나카츠카 교수는 일본의 경복궁 침입이 명 백한 범죄행위였음을 증명해냈다. 물론 이와 관련된 자료 역시 이번 기증을 계기로 남도 땅 을 밟을 것이다. 개인을 뛰어넘어 혼돈과 매캐 한 연기 속에 가려졌던 과거의 진실을 밝혀낸 나카츠카 교수. 그를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지 만 자신의 전 생애를 보다 궁극적인 가치를 위 해 대범하게 비어내는 모습이 평범한 이는 아 닌 듯싶다. 돌연 마음이 송연해지는 것은 국경 을 초월한 한 개인의 올바른 양심과 심지 곧은
그는 특히 명성왕후를 시해한 ‘경복궁 침략 사건’과 ‘운용호(운양호) 사건’에 대한 일본의 NAMDOzine.com 7
헌신 때문일 것이다. 전남도립도서관 오정환 주무관 은 “얼마 전 일본 교토 키즈가야시 의 교수님 댁을 직접 방문해 나카 츠카 교수께서 소장하신 책 몇 권 을 미리 가져왔다”며 테이블 위에 책들을 펼쳐 놓았다. “그동안 나카 츠카 교수는 일본의 육군 참모부에 일본 침략을 입증하는 보고서를 제 출해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 같 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고 조용히 묻혔다”면서 “교수님은 현 재까지도 동아시아 전쟁에 대한 일 본 내부의 반성을 촉구하고 계신 다”고 언급했다. 현재 1만 5천권이라는 헤아리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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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정도의 책들을 일본에서 한 국까지 안전하게 옮겨오기 위해서 는 6천만~ 7천만 원 가량의 예산 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전 남도립도서관 측은 5월과 6월 사이 추경예산을 확보해 나카츠카 교수 가 기증할 도서들을 운반해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나카츠 카 교수는 사실 그동안 자신이 확 보한 역사적 자료와 연구 저서 등 이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길 소망해왔다. 그러나 그의 오랜 바람은 적합한 기증처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해왔 다. 지난 2003년 중국 상해에 자신 이 소장한 책들을 기증하려고 마음 먹었지만, 운송 및 보관 등의 문제 로 당시 계획이 결국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러다 사제인 박맹수 교수의 권유로 마 침내 전남도립도서관에 자신의 책들을 기증하 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골을 둘러싼 논란을 조사를 위해 지난 1997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나카츠카 교수를 만났다. 그리고 지 금까지 그와의 우정, 한일역사에 관한 연구열 을 공유해오고 있다. 박 교수는 최근 동학운동 의 마지막 전쟁지인 장흥(동학관)에서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다. 박 교수 역시 동학과 관련해 그가 지금껏 연구해온 5천여 권의 책을 전남도 립도서관에 기증키로 결정했다. 오는 8월 일본 에서 국내로 돌아오는 일정에 맞춰 10월 무렵 전남도립도서관 측에 5천여 권의 도서를 기증 할 계획이다.
들이 남도 땅을 밟길 빌어본다. 예산 확보 문제 가 순풍을 만나 일본인 교수의 노고가 헛되지 않길, 그의 저서들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양심 의 표본으로 남길 기대한다.
따라서 나카츠카 교수와 박 교수의 기증 도서 를 합치면 총 2만 여권에 이른다. 뼈아픈 과거 의 역사지만 한 일본인 교수의 평생에 걸친 양 심선언과도 같은 자료이기에 하루속히 그의 책
다. 이외에도 나카츠캬 교수의 도서 기증을 기 념하기 위해 ‘동아시아 역사 바로잡기’등의 국 제 학술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전남도립도서관은 앞으로 도서관 내에 ‘한* 일 우정문고’를 설치해 관련 자료를 보존할 계 획이다. 기증자를 예우하기 위해 개인 문고를 설치하는 등 기증도서들을 체계적으로 보관하 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또한 기증도서 에 대한 도록을 발간하는 한편, 한국역사와 관 련된 주요 도서는 단계적으로 번역해 도서관을 찾는 이들의 편익을 도모할 계획이다. 더불어 주요 도서를 디지털화 해 남도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관련 서적을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한
소중한 관심이 한 알의 밀알처럼 도서관에 뿌려지다 전남도립도서관은 아직 사람들에게서 멀리 존재하는 공간이다. 도서관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겐 조금씩 친숙해지고 있는 것 같지 만, 버스를 타고 이곳을 스치듯 지나치는 사람 들에겐 여전히 낯선 침묵으로 느껴진다. 하지 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도에 세워진 다소 장엄 하게 느껴지는 이 공간이 마음과의 거리를 좁 히고 있는 듯하다. 지난 12월 초부터 시작된 도서 기증이 척박한 남도 땅에 뿌려지는 소중 한 밀알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기 증 받은 책들도 5천 여 권에 이른다. 전남도청 내 자리 잡은 강한지식정보센터에서 3천여 권 의 향토자료를, 전남여성단체협의회에서 일반 도서 1천 권을, 현대삼호중공업에서 700권의 신간도서를 기증했다. 이외에도 아동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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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활동하고 있는 노남진 씨가 150권의 책을, 전남점자도서관에서 점자책과 음성책자 61권 을 기증해왔다. 개인들의 기증도 이어지고 있 다. 목포시에 거주하고 있는 한정효 씨가 150여 권의 어린이 책을, 김양주 외 오수열, 김영천 씨가 70여권의 목포와 관련된 향토자료를 보 내왔다. 책은 사람들의 마음 바탕에 뿌려지는 종이로 된 씨앗이기에 지역의 기업, 단체, 개인 등이 보내는 관심은 모두 소중하다. 책의 기증 규모에 상관없이, 그들이 보내온 소포가 묵직 하거나 가볍거나를 논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척박한 황무지를 풍요롭게 만들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저마다 고마운 마음이다.
당신이 간직한 가능성의 씨앗을 기대합니다! “책 속에 전남의 미래가 있습니다. 책을 나눕 시다, 사랑을 나눕시다!” 앞선 문구는 최근 전남도립도서관이 외치고 있 는 슬로건이다. 전남도립도서관은 책 읽는 전 남 만들기의 일환으로 기증도서를 연중 접수받 고 있다. 일반도서(아동도서, 문학도서, 교양도 서 등), 전문도서(컴퓨터 및 기술관련 도서, 향 토자료), 비도서자료(학습 및 문화관련 비디오 테이프, CD) 등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기증해 줄 지역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기증 도서들은 출판(제작)년도가 5년 이내의 자료에 한하며, 지역향토자료의 경우에는 연도 제한 없이 접수받는다. 한편, 우편이나 택배를 통해 수신자(전남도립도서관) 부담으로 기증도서를 직접 인수하고 있다. 회사(남도진)에서 전남도립도서관이 멀지 않 은 덕분에 이미 몇 차례 그곳을 방문했다. 다소 우뚝 솟아있다는 첫인상 때문에 발길을 옮기는
일이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하지만 직접 찾아 보니 생각보다 재밌는 공간이었고 남도를 알리 기 위해 정성이 더해진 곳이었다. 책이 펼쳐진 형상의 도서관 지붕. 남도 작가들의 대표작들 을 건물 기둥으로 삼은(지역 출신 작가들의 넋 을 기리고 뜻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풍경. 편백 나무를 사용해 완성한 내부, 단지 내 지붕과 가 로등에 자립형 에너지 시스템인 태양광을 설치 하고 빗물처리시설을 갖춰 정원과 정원수에 빗 물을 사용하는 친환경적인 자원 활용방식.. 전 남도립도서관은 꽤나 멋스럽고 효율적인 공간 이었다. 지역에 관한 다양한 작품(사진, 그림) 을 내걸 수 있는 갤러리와 손끝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기사를 검색하는 전자신문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 고 색칠하는- 멀티 터치 테이블 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이 공간
에도 여전히 채워져야 할 부분들이 엿보였다. 서가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비어 있는 공간들 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두뇌에 상상력의 여 백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조금은 빼곡하다 싶을 정도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양서 한 권의 위력은 수십 권, 혹은 수백 권이 지닌 에너지를 쉽사리 뛰어넘 겠지만 사고의 다양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종이 씨앗들의 유입이 필요해 보 였다. 종이로 된 가능성을 다른 이와 나누려는 당신의 작은 정성.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 제 존재를 드러낸 남도에 세워진 도서관. 이제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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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아이들이 책 읽는 놀이터에서 신나 는 한 때를 보내고,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정 다운 벗과 오랜만에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 는 곳. ‘문화’라는 것을 향유할 시간도 여유도 없던 남도 사람들에게 ‘참 좋은 공간’이 되어줄 전남도립도서관. 아직 이곳은 완성되지 않았 다. 나와 당신의 공간으로, 우리의 정다운 공간 으로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당신이 간직한 종이 씨앗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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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 라는 말이 빛바램 없이 은은히 머무는 ‘대청’
고마운 늦둥이 ‘ 만 둣 국 ’ 탄생!
봄과 여름을, 가을과 겨울을 차례로 보내고 행복한 노을을 맞고 있는 노년의 부 부. 젊음이 지펴진 한 때보다 더 결 고은 사랑으로 서로를 아끼며 만두를 빚는 금빛 청춘들을 만났다. 클래식을 즐겨 듣는 남편 창세 씨와 한지공예를 하는 아 내 상례 씨. 어느덧 둘의 취미는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서로가 지닌 경계선은 투 명해졌고, 두 개의 마음은 하나로 포개졌다. 창세 씨는 아낼 위해 틈틈이 한지 공예에 쓰일 문양을 오리고, 대청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만두소를 다진다. 아내 는 그런 남편을 위해 다과를 내오고 작은 힘이나마 충실히 보탠다. 사람들이 편 안하고 즐겁게 어우러지는 부부의 대청. 봄을 따뜻하게 맞지 못하는 야윈 마음 을 맛있는 ‘늦둥이’로 살찌우는 창세 씨와 상례 씨. 2012년 볕 좋은 어느 날 목 포 원도심을 찾아 반짝이는 그들의 오늘과 인사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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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둥글게 어우러지는 ‘대청’에 대해 남도진: 제가 이곳을 세 번 정도 다녀간 것 같아요~ 낯이 익으시죠? 박창세 씨: 그래요, 그런 것 같아요. 남도진: 질문거리를 몇 가지 적어왔어요.(웃음) 대청이라는 이름에 깃든 사연이 궁금합니다! 박창세 씨: ‘대청’은 큰 마루를 얘기해요. 이곳은 아버 지 때부터 살아온 곳인데 황해도식 만두를 판매하는 대청을 시작할 마음을 먹으면서 어떻게 바꿔볼까, 인테리어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큰 마루를 떠올 렸어요. 그래서 처음엔 ‘마루’라는 말로 상호로 정할까 하다가 그렇게 되면 일본말이 되기 쉬 울 것 같았어요. 일본말로 ‘마루’는 둥근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마루를 우리말로 어떻 게 표현할지 또 고민했죠. 그러던 어느 날 서 울로 향하는 길에 휴게소에서 책 한 권을 발 견했어요. 거기에 ‘대청’이라는 말 이 나와 있더군요. 저도 건축을 전공했기 때문에 대청의 개 념을 좀 알거든요. 방과 방 사이에 존재하는 큰 마루. 집에서 가장 신성한 곳. 대 청이 대략 이런 의미거든 요. 대청에선 사람들이 조상 님들께 제사도 지내고 여럿이 둘러앉아 얘기도 나누잖아요? 대청이 간직하고 있는 그런 의미 들이 마음 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집 이름을 ‘대청’으로 정했죠. 어떤 이들은 대청을 이해 하지 못하고 대청마루라고 말하더군요. 이곳에 들리기 위해 114로 문의하는 사람들은 대청을 대청마루로 말하는 혼란을 겪곤 해요. 사람들이 흔히 ‘역전’을 ‘역전 앞’이라고 말하는 습관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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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진 : 그렇군요. 대청이란 의미가 따뜻한 느 낌이네요. 좀 전에 건축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 셨는데 만두집을 여시기 전엔 무슨 일을 하신 거죠? 박창세 씨: 좀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전 건축 학을 전공했고, 아내는 응용미술과를 전공했거 든요. 대청을 운영하기 직전엔 건축업계 현장 에 있다가 10년 전에 그 일을 그만뒀어요. 그 리고 나와서 다른 일을 찾았죠. 하지만 다른 일 역시 오래가지 않았어요. 15년 전부터 한지공 예를 시작했어요. 건축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후에는 한지공예를 직업으로 삼아볼까 잠시 고 민도 했었죠. 그런데 한지공예는 취미거리 밖 에 안 되겠더라고요. 수입을 얻기가 어려울 것 같았죠. 마침 몇 개월 노는 기간에 친구들이 집 에 찾아왔어요. 때마침 만둣국을 만들어 대접 했죠. 그랬더니 친구들이 ‘너희가 만들어낸 만 둣국이 참 맛있다, 이걸 가지고 음식점을 내보 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할 만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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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죠. ('대청'의 탄생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창세 씨!) 박창세 씨: 제 고향이 원래 황해도에요. 이북 이나 서울, 경기도 쪽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만 두를 먹어요. 간식이 아니라 식사용으로, 떡국 대신. 떡국은 안 먹어요. 명절 때나 생일 때 만 두를 만들어 먹는 게 생활이죠. 하지만 만두를 빚는 과정이 번거롭기 때문에 자주는 못 해먹 거든요? 명절이나 잔칫날,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집안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만두를 빚어 요. 저녁에 만둣국을 끓여 소박한 파티를 벌이 는 거죠. 우리 집사람은 전라도가 고향이에요. 결혼해서 우리 집에 시집오니까 시댁 식구들이 만두를 엄청 많이 만들어 먹거든. 이후 줄곧 시 부모님과 생활하다보니 만둣국 끓이는 법을 자 연스럽게 배우게 됐죠. 부모님이 전부 돌아가 시고도 배운 건 남았죠. 그러니까 친구들이 한 번 만두집을 열어봐라 해서 대청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노을빛 부부의 맛있는 ‘늦둥이’ 大공개! 남도진: 대청 만두는 좀 특별한 것 같아요. 만 두피가 노르스름하더라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박창세 씨: 황해도식 만두를 빚으면서도 자꾸 개량을 해야죠. 그래서 카레에 들어가는 강황 있잖아요? TV에서 보니까 강황이 성인병에 좋 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강황을 만두피를 반 죽할 때 함께 넣어요. 그런 이유로 만두피 색깔 이 노르스름한 거예요. 남도진: 그렇군요. 강황이 범인이었군요! 대청 만둣국 국물도 좀 특별한 것 같던데요? 박창세 씨: 국물은 사골을 끓여 낸 거예요. 저 희가 직접 우려내죠. 실은 옛날에는 사골을 국 물로 사용하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어릴 적엔 명절 때만 되면 고향 집에서 소갈비를 사다가 만둣국 육수를 냈죠. 여기선(전라도) 대게 소
갈비를 구이나 찜으로 즐겨 먹잖아요? 그런데 제 고향인 황해도에서는 흔히 갈비를 국으로 끓여 먹었어요. 이름 붙이자면 ‘갈빗국’인 거 죠. 남도에서는 갈비탕이라고 하는데, 탕이라 는 말은 뚝배기를 사용할 때 쓰는 개념이고, 큰 솥에갈비를 끓여내 그릇에 담으면 국이라고 불 러야 하죠. 개념이 그렇게 달라요. 큰 솥에 갈 비를 뚝뚝 잘라서 한꺼번에 끓여내요. 그래서 그 육수로 국물을 삼고 갈비에 붙은 살점을 떼 어 넣으면 갈빗국이 완성돼요. 명절날엔 갈빗 국을 양껏 먹고도 여전히 솥에 많이 남거든요. 명절이라고 워낙 푸짐하게 끓여내니까. 그럼 남은 갈비국에다 저녁에 만두를 빚어 넣고 끓 이는 거예요. 그게 바로 황해도식 만둣국이에 요. 박창세 씨: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에 요. 원래 고향(황해도)에선 계란으로 만든 고 명대신 삼겹살을 올려놔요. 돼지 삼겹살을 삶
래서 만둣국을 끓일 때 삼겹살을 고명으로 얹어 먹었죠. 우리도 대청을 연 초창기엔 만둣국에 돼지 고기를 삶아 고명으로 얹어 볼까 고민 했어 요. 그런데 손님들이 비계가 들어간 기름기 있는 삼겹살을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그래 서 삼겹살 고명은 빼기로 했죠. 저희 집 메 뉴 중에서 만두전골을 먹으면 만두피 안에 돼지고기가 들어 있을 거예요. 전골에 쓰이 는 돼지고기는 살코기만 사용해서 만든 거 예요. 피막도 없고 기름기도 모두 제거한 거 예요. 제가 일일이 손질을 해요. 오로지 살 코기만 써서 만두를 빚어내요. 그래서 기름 이 안 떠요. 대신 손이 많이 가죠. 남도진: 만두를 빚는데 많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이번엔 아내 상례 씨가 나서서 답해 주었다.)
아서 두툼하게 썬 후 그 삼겹살에 양념을 해 요. 고춧가루와 굵직굵직하게 썬 파를 삼겹 살과 버무리죠. 그런 다음 양념이 된 삼겹살 몇 점을 만둣국 위에 고명으로 올려놔요. 그 렇게 하면 제대로 된 황해도식 만둣국이 탄 생하는 거예요. 저희 집에서 전통으로 이어 온 만둣국 조리 방법이에요. 저희 세대에겐 돼지고기를 먹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요즘 사람들은 돼지고기 삼겹살이든, 뭐든 기름 기가 많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는데, 옛 날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기름기 있는 음식 을 먹으려고 했었죠. 평소 육류를 섭취하기 가 힘들어서 몸에 기름기가 없으니까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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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례 씨: 양파처럼 수분 많은 재료를 일일 이 손으로 두 시간 이상 다져서 소를 만들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죠. 원래 다른 음식보 다 만두를 만드는 과정이 더 고돼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박창세 씨: 아내 말이 맞아요. 만두는 만드 는 과정이 다른 음식보다 더 오래 걸려요. 아침부터 시작해 저녁 무렵이 되어야 만두 소가 완성돼요. 소로 쓰이는 재료에서 물을 빼야 하니까요. 물기가 있으면 안 되니까 시간이 더 오래 걸리죠.
남도진: 만두소를 만들려면 정확히 얼마나 걸 리나요?
일하는 즐거움, 감사함으로부터 출발
박창세 씨: 둘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 이 걸려요. 보통 아침부터 저녁까지. 김상례 씨: 둘이서 하면 딱 맞아요. 만두피를 반죽해서 숙성시켜 놓고 저녁에 소를 준비해 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만두를 빚죠. 그래서 저 희 둘은 쉴 시간이 없어요. 하하하 (소탈한 상 례 씨가 활발하게 웃는다.) 그러니까 손님들이 너무 한꺼번에 몰려오면 못 해요. 사람을 쓴다 고 해도 둘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손이니까 한 계가 있어요. 종업원을 쓰더라도 만두 빚는 일 을 돕기가 어렵구요. 박창세 씨: 종업원을 쓴다면 서빙이나 설거 지, 청소 등은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만두 만드 는 과정을 돕기는 어려워요. 만두소나 만두피 를 준비하는 데 시간상의 간극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누군가가 도와주기는 어려워요. 그래 서 저흰 둘이서 할 수 있는 정도로 넘치지 않 길 바래요. 장기적으로 할 수 있게끔. 몇 년 하 고 그만둘 거면 만두집을 꾸려가는 의미가 없 잖아요? 저는 일 하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그 래서 오래도록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김상례 씨: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일이 있 다, 좋은 손님들을 만난다’라는 즐거움에 마음 이 설레요. 다른 사람들은 우릴 보고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묻지만, 저흰 기쁨 으로 이 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하지 않아요~ 하하하~ (옆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상례 씨 의 웃음) 상당히 잘 했다 싶어~만두집을 차린 게~ 하루의 시작이 무척 설레~! 박창세 씨: 저희 부부는 매일 새벽 네 시 반에 NAMDOzine.com 19
잠자리에서 일어나요. 일어나서 교회로 새벽 기도를 다녀와요. 새벽 기도는 보통 다섯 시 반 정도면 끝나거든요? 대청에 돌아오면 5시 40 분 즈음 되죠. 일이 좀 밀렸다 싶으면 새벽부터 만두 빚는 일을 시작해요. 그리고 오전 일곱 시 무렵에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사오죠. 그러고 나선 아침 식사를 하고 계속 손님 맞을 준비를 하죠. 저녁에 영업이 끝나는 시간은 대부분 10 시 정도에요. 남도진: 체력적으로 무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 은데요? 김상례 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 참 감사한 건 하나님께서 피곤치 않게 우리 부부 에게 건강을 주신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감사해요. 박창세 씨: 일이 즐거우면 피곤하지 않아요. 그 래서 자기 일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내 일이 즐겁다’라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피곤하지도 않고 일도 잘되죠. 단순한 깨 달음 같지만 일흔을 내다보는 저희 부부에겐 살면서 절실히 느꼈던 부분이에요. 김상례 씨: 또 계산하지 않고 사는 것. 뭘 따지 고 계산하고 하면 안 맞잖아요. 그저 이렇게 살 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거라는 믿음. 오늘 (손님들을) 많이 보내주시면 내일은 쉬라고 (손 님들을) 조금 보내주시고, 그럴 거라는 생각에 항상 마음이 편해요. 박창세 씨: 쉽게 얘기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 을 생활화 하는 거예요. 언제든지~!! 남도진: 긍정적인 사고라.. 정답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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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말이네요. 김상례 씨: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피 곤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 같다, 피곤하면서 도 아닌 척 하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하거든 요? 하지만 우린 진심이에요. 애들도 ‘엄마 차 라리 서울로 올라오세요. 여긴 한지공예 배울 사람들도 많고, 또 이 정도 음식 솜씨면 더 많 은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아직도 목포에 계세 요?’라고 말하거든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얘 기해요. 나이 들어 서울 올라가서 왜 굳이 고생 을 하겠느냐고. 이곳에서 우리 두 부부가 편하 고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하지. 부모가 너희에게 피해 안 주고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것, 건강하 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고마움을 가져라, 라 고 말하죠. 박창세 씨: 자식과 부모가 저마다 건강하게 일 을 한다는 건 서로에게 고마운 일이에요. 자식 들도 잘 살면 부모도 걱정을 덜게 되죠. 그래서 자식들이 잘 살아야 돼~ 자기가 맡은 일은 스 스로가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서 로가 편한 거죠. 부모 역시 마찬가지구요.
‘목포’라는 도시에서 키워낸 그들만의 시간 남도진: 네~ ! 스스로 잘 해쳐 나갈 수 있도록 저 역시 힘을 키워야겠네요~(웃음) 다음 질문 이에요~ 황해도가 고향이라고 하셨잖아요? 6.25를 계기로 목포에 정착하게 되셨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와 관련된 얘기를 듣고 싶어요! 박창세 씨: 6.25 전쟁이 일어나자 저희 가족들 은 황해도에서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죠. 초도 라는 섬으로 피난을 갔어요. 초도에 들어가서 일 년 정도 생활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휴전 이 되면서 멀리 이북 쪽을 내주고 우리 군이 철 수해야 됐거든요. 헌데 월남하려는 피난민들이 많잖아요. 그 많은 사람을 한곳에 보내면 안 되 니까, 옛날에는 아구리선이라고 했어요. 앞이 열리는 군함을 그렇게 불렀죠. 탱크나 수송차 량을 싣고 다니는 그 배에 사람들을 실은 거예
요. 한 배가 아니라 여러 배에 무작위로. 그러 고 나서 배가 피난민들로 만선이 되자 이배는 군산, 저 배는 목포, 또 다른 배는 부산., 이런 방식으로 찢어놓은 거예요. 저희 가족이 탄 배는 목포로 향했죠. 기억나 는 건 여름방학이었다는 거.. 여름방학이라서 유달국민학교가 비어있었어요. 목포여객터미 널 자리에 당시 해군기지가 있었어요. 그곳에 배를 정박시켜놓고 사람들을 내리게 했죠. 그 리고 검역, 그러니까 소독을 했죠. DDT라는 가루약을 사람들 몸에 뿌려서 이를 죽이는 거 예요. 그런 다음 유달국민학교에 피난민들을 수용한 거예요. 잠은 교실에서 잤죠. 밥을 해먹 을 때는 학교 담 밑에 돌을 놓고 솥단지를 올려 놓은 후 밥을 지어 먹었어요. 그렇게 유달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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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잠시 머물렀죠. 군인들은 다 시 피난민들을 쪼갰어요. 목포에 다 수용하지 못하니까. 신안 섬으로, 진 도, 안좌, 저쪽~ 비금 등지로 한 가족 내지 두 가족 씩을 쪼개서 보내는 거 예요. 저희 가족이 간 곳은 ‘팔금’이라 는 섬이었어요. 신안군 안좌면 팔금 리. 저는 팔금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어요. 부모님께선 농사를 지으시 다가 도저히 척박한 섬에서 생활하기 가 고단해서 목포로 나오셨죠. 그래서 3학년 2학기 때부터는 목포에서 유달 국민학교를 다녔죠. 나중에 알고 보 니 아내 출생지가 팔금인 거예요. 참 희안하더라고요~~ 그냥 우연일 텐데 심상치 않은 우연인거죠. 목포엔 제가 정착하게 아니라 아버님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시다 결국 목포에 자릴 잡게 된 거예요. 남도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두 분의 어린 시절이 '팔금'이라는 섬에 간직돼 있네요!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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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진: 그런데 아내 분께선 (상례 씨) 아직도 피부가 고우신 것 같아요. 비 결이 있으세요? 김상례 씨: 부엌에서 일을 해도 (하나 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 우리 제 자들도 이곳에 많이 오거든? (상례 씨 는 세종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하고 정 명여고 미술교사를 지냄) 옛날 미술선 생하면 제자들 사이에서 인기 짱이었 어. 내가 만두를 빚어 판다고 해도 창 피한 건 없어. 오히려 만두 빚는 일이 굉장히 자랑스러워. 그러니까 우리 애
들도 부모를 참 존경해. “엄마는 무슨 일을 하 든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사신다” 그러면서. 남도진: 자녀분들이 몇 분이시죠? 박창세 씨: 셋! 아들 둘, 딸 하나. 전부 출가했 어요. 김상례 씨: 큰 아들이 직장을 다니다가 대학원 에 진학한다고 공부를 했거든? 최근에 합격했 다고 해서 우리 늙은 부모들이 열심히 일해서 첫 등록금을 내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또 즐거워~~ 우리 나이에 이렇게 열심히 일해 서 아들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얼 마나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야~ 큰 아들이 애들 둘을 키우니까 굉장히 돈이 많이 들더라고. 유 치원도 요새는 영어유치원 보내니까 그 비용도 만만치 않고. 이럴 때 우리가 아들래미를 도와 주고 나중에 엄마아부지가 일 못하면 도와라, 그럴 참이야~ 하하하하~~ 박창세 씨: (아내를 보며 슬며시 웃는 그) 그럼 이제 다음 숙제는요? (숙제를 하는 학생처럼 나를 향해 물으시는 창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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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목포! 남도진: 이 시간이 학교 숙제를 하는 것처럼 느 껴지시나봐요~. 음, 다음은요? 저번에 만둣국 먹으러 들렸을 때 저희 일행에게 귓뜸 해주신 말씀 있으시잖아요. 목포 유달산이야 말로 다 도해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목포에 대한 사장님 의 애정이 남달라 보이셨거든요. 박창세 씨: 나는 굉장히 좋아요, 목포가. 여 러 지역을 다녀보기도 했지만, 산으로 봐도 제 일 좋아하는 산은 월출산. 산세가 아주 좋거든 요. 바위도 좋고. 그 다음으론 바위가 좋은 데 가 유달산인 것 같아요. 바위들이 다 잘 생겼어 요. 단지 ‘홑산’이라는 거. 산이 아담하기 때문 에 웅장한 감은 없다는 거죠. 그렇지만 도시 안 에 있는 산으로서는 유달산이 굉장히 좋아요. 예전에는 숲이 없는 민둥산이라 보기 싫었는 데 지금은 숲이 잘 조성돼서 얼마나 보기 좋아 요? 목포는 또 바다를 끼고 있잖아요. 이런 도 시가 흔치 않거든요. 유달산이라는 예쁜 산도 있고 바다도 간직하고 있잖아요. 목포가 현재 는 넓은 상황이 아니니까, 한눈에 도심을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어요. 뭐든지 친근하 게 느껴지고 어느 곳이든 쉽게 갈 수 있구요. 예전에 서울에서 (홍대 건축학과를 ) 학교를 다 닐 때는 방학 때마다 목포에 내려오면 답답함 을 느끼곤 했어요. 할 일이 없어서 그저 답답하 기만 했죠. 그런데 목포에 정착해서 살다보니 어느새 목포에 정이 든 거예요. 이젠 그렇게 좋 을 수가 없어요. 또 난 목포시내에서 우리 집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왜 좋아하냐면, 먼저 교통 면으로 보세요. 집에서 목포역까진 걸어서 10 분. 여객터미널까지도 걸어서 10분이에요. 그 다음에 바다가 가깝죠. 여기서 대반동까지 걸 어서 30분이면 가요. 유달산도 30분이면 정상 까지 오를 수 있어요. 산가고 싶으면 밥 먹고
금방 오르내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전 저희 집 이 목포시내에서 제일 좋아요. 저희 집에는 정원도 있어요. 목포에 정원이 있는 집이 100개도 안 될 거예요, 아마. 제가 40년 이상 가꿔온 나무들이 조금한 정원을 지 키고 있어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당시에도 방학을 틈타 이곳으로 내려와 나무들을 가꿨어 요. 정원에 심겨진 나무들은 그래서 제 자식들 같아요. 남도진: 그렇게 오랫동안 정원을 가꿔오셨다니 대청의 정원이 더 보고 싶군요! 그건 그렇고 인 터뷰는 힘들지 않으세요? 박창세, 김상례 씨: 괜찮아요~ 누군가랑 이렇 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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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에 흐르는 클래식 이야기 남도진: (웃음) 대청에 숨은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다고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듣고 보니 더 흥 미롭네요. 지금 대청에 클래식이 흐르고 있잖 아요? 언제나 이곳에 오면 클래식이 흐르는데, 클래식과 대청의 사연에 대해 듣고 싶어요. 유 독 클래식을 즐기시는 이유가 있나요? 박창세 씨: 서울로 고등학교를 갔을 때에요. 후 암동에 친척이 하나 살고 있었어요. 처음 서울 에 올라가서 아는 이가 없어 그 집에 머물렀죠. 당시에 저는 아주 촌놈이었어요. 그때 후암동 에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하우스보이들이 많 았어요. 사촌 옆방에 하우스보이가 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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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LP판이 나올 시대인데, 제가 우연히 그 하우스보이가 틀어놓은 팝송을 듣게 됐어 요. 폴앵카의 ‘다이아나.’ 폴앵카라고 아세요? 마이웨이가 그 사람이 작곡한 건데. 아무튼 폴 앵카의 다이아나, 크레즐러, 유어 마이 스킨을 틀어줬는데 그 때 완전히 팝송에 미쳐버렸죠.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팝송에 빠져 살았죠. 그렇게 팝송을 좋아하다가 유명한 악단들에 눈 을 돌렸어요. 특히 만토반의 악단은 세미클래 식을 연주했었거든요. 만토반의 악단을 들으면 서부터는 클래식이 좋아지더라구요. 그래서 대 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클래식을 많이 들었죠. 그때는 공연도 일 년에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했는데, 공연이 있다고 하면 막 뛰어가서 보기 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지방에 내려오니까 그 런 기회가 거의 없더라고요.
작했죠. 음악 감상 티파티로 모인 작은 성금으 로 시골 교회에 시계를 하나 사서 보내줬어요 ~~(웃음)
박창세 씨: 총각 때 목포에 내려와서는 오거리 에 있는 중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우연 히 그 교회 목사님도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사 실을 알게 됐죠. 그때만 해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큰 기기들이 귀했어요. 목사님께서 월남 전에 참전하고 귀국하면서 엠프 같은 걸 가져 오셨죠. 그래서 제가 목사님하고 상의해서 교 회에서 클래식 음악감상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죠. 그래서 결국 교회에서 클래식 감상 을 한 번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 반응이 괜찮 더라구요. 첫 번째 음악으론 윌리엄 텔 서곡 을 감상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헨델의 메 시아를 감상하면 어떻겠느냐고 목사님께 또 제 안했죠. 당시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듣기가 어 려웠거든요. 그러자 목사님께서 그러시는 거 예요. ‘그럼 우리 교회 사람들만 들을 게 아니 라 목포시내 청년들이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자 리를 만들자’라구요. 거기다 ‘그냥 음악 감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티 파티처럼 자선모금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 라는 생각을 덧붙이게 됐고, 결국 그런 자리를 마련했어요.
전 옛날부터 클래식을 참 좋아했어요. 그러다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직장이다 뭐다, 클래식 을 들을 기회를 얻기가 어렵게 됐죠. 그러다 만 두 장사를 시작하니까, 다시 클래식을 듣기가 쉬워졌죠. 우선은 내가 좀 들어야겠다 싶어 아 들에게 말했더니 대뜸 엠프, 스피커 등을 사서 보내주더라고요. 처음에는 클래식 시디를 틀어 놨었는데, 그건 50분 정도 밖에 못 듣겠더라구 요. 손님들이 오시면 재생 버튼을 누르기도 쉽 지 않구요. 그래서 FM 클래식 방송을 하루 종 일 틀어놓게 됐죠. 남도진: 한지공예와 클래식의 만남이 심상치 않은 인연에서 비롯됐군요~ 두 분 사랑의 증표 같네요~. 지금도 ‘대청’이란 공간에 미술과 클 래식이 함께 하잖아요. 변함없이~ 박창세, 김상례 씨: (환하고 밝게 웃으시는 두 어르신~)
박창세 씨: 자~ 그럼 이젠 레코드판을 가져와 야죠~ 지금은 그 회사가 없어졌는데 ‘남양어 망’이라고 있었어요. 영흥중고등학교도 거기서 세웠는데, 그 회사를 운영하시던 분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헨델의 메시아 레코드판을 사 오 셨어요. 그렇게 티파티를 겸한 음악감상 모임 이 준비되어갔죠. 이렇게 좋은 취지로 음악 감 상회를 연다고 포스터를 붙여야 하잖아요? 아 내는 당시 같은 교회에 다니는 미술선생님이었 거든요? 그래서 음악 감상회 포스터를 그려달 라고 아내에게 부탁했죠. 그러면서 연애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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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진: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목포 로 오신 이유가 있으세요? 박창세 씨: 아버님께서 제재소를 운영하셨어 요. 쉽게 말하면 목재 공장이죠. 당시 부친께서 연세가 드시니까 그 일을 제가 물려받아 하게 됐죠. 그러다 동생이 결혼하면서, 전 다른 사업 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결국 목포에 정착하게 됐죠. 남도진: 그럼 만둣국 집을 운영하신지가 정확 히 얼마나 되신 거예요? 박창세 씨: 올해로 딱 10년이 됐어요. 시작해 서 5년 동안은 운영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만둘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기도를 하 면 계속 하라는 마음만 들더군요. 그 덕분에 지
고운 노을에 전하는 건강한 다짐! 남도진: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하실 생각이세 요? 박창세 씨: 글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전 20년 전부터 인간이 100세까지 살 것이라 고 생각했어요. 왜 그랬냐면 내 할아버지 시대 에는 60세를 내다봤거든요. 내 아버지 때는 80 세를 기대했었죠. 그럼 우리 세대에는 몇 세 까지 인생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100세잖아 요. 그래서 전 지금도 아들 더러 그래요. 너희
금까지 대청이 건재하게 존재해 왔죠~ 무슨 일 을 하든지 가장 첫 번째가 되는 건 열정인 것 같아요. (남편 창세 씨의 일에 대한 '열정'이라는 단어 에 이어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상례 씨) 김상례 씨: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해야 해요.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이 고장을 사 랑하고! 대게 목포에 살면서도 유달산은 둘러 보지 않고 다른 지역만 돌아다니잖아요. 헌데 다른 곳을 둘러봐도 유달산이 제일 좋은 것 같 아~. 새벽기도 끝나고 유달산 한 바퀴 돌면 한 30분 걸리나?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날 장사를 준비하죠. 유달산은 정말 좋은 산이에 요.
는 120살까지 내다보고 인생을 계획해야 한다 고 말이죠. 젊은이한테 이런 얘길 해주면 무슨 120살이야? 이런 생각을 가질지도 몰라요. 하 지만 지금 계획을 세워야 해요. 저는 내일 모 레가 칠십이에요. 적어도 10년은 더 일해야 할 나이죠. 그래야 100세까지 계획한 인생을 규 모 있고 건강하게 꾸려갈 수 있겠죠. 남도진: 120세까지 계획해야 한다니 너무 한 것 같지만 잘 알겠습니다. (웃음) 이제부턴 120세까지 기대하며 알찬 계획을 세워볼게요 ~(웃음). 박창세 씨: 정말 그래야 해요~ 물론 사람의 일 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린 날마다 큰 계 획 속에서 건강하게 일하며 살아가야 하죠, 그 래야 마음에 행복이 깃들죠~ NAMDOzine.com 29
손님들에게 건네는 정성과 고집스런 마음 남도진: 이제 질문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힘 내세요!! 다음 질문이에요~ 음식을 손님들에게 날라주실 때 보면 손가락에 알알이 정성이 맺 혀 있으세요. 그 모습을 보고나서 궁금해졌어 요. 손님들이 대청을 찾아오면 어떤 마음으로 반기시는지. 박창세 씨: 고객하고 손님하고 다른 점이 있어 요. 어떤 물건을 팔아 이득을 내기 위해서 상대 편을 대할 때는 상대방을 ‘고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거예요. 허나 주인이 무슨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반가워서 다른 이들을 맞 이한다면 주인은 상대방을 ‘손님’으로 여기는 것이죠. 사실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릴 적부 터 저희 집안에서 배워온 거예요. 요즘은 가족들이 적지만 예전 저희 시대만 해 도 대가족이었죠. 작은아버지네, 큰아버지네,
이렇게 생일 때라든가 명절 때 한꺼번에 모여 식사하는 일이 많았어요. 그 때마다 상을 차려 내야 하는데 상 위에 여러 음식을 어떻게, 어떤 위치에 놓을 것인지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이 음식은 여기에, 혹은 저기에 놓는 게 가장 좋겠 다, 판단을 하는 거예요. 또 수저는 이렇게 저 렇게 놓자~라고 생각하고. 이런 일들이 요즘 사람들에겐 불필요한 격식처럼 느껴질 수도 있 을 거예요. 헌데 저에게는 예전부터 몸에 밴 습 관이에요. 예약 없이 바로 오시는 손님들껜 정 돈된 상차림을 못해드리지만, 예약 손님들께는 그 분들이 도착하기 전에 상차림을 해놔요. 컵 하고, 휴대용 버너, 전골 뜨는 그릇 등을 가지 런히 나열해놓고 손님을 기다리죠. 만두집에서 그렇게 하니까 색다르게 보이지 한식집에서는 평범한 일이죠. 제가 보긴 그래요~ 박창세 씨: 좀 특별하게 신경 쓰는 게 있다면,
이런 거예요. 손님들이 만둣국을 먹고 무리해 서 밥을 시키면 일부러 달라는 대로 주지 않아 요. 왜냐면 밥이 남으면 버리게 되잖아요. 그 건 국가적인 손해고, 개인에게는 돈을 낭비하 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달라는 대로 그냥 주 지 않고 제 어림짐작으로 밥공기를 가져다줘 요. 둘이 한 공기를 가지고 절반씩 나눠먹으면 어때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일 수 있고 여러 가지로 이득이잖아요. 자주 다니는 손님들은 이런 제 뜻을 다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밥공기 를 적게 시켜 한 공기를 가지고 둘이 나눠 먹어 요. 그리고 김치 더 주세요! 깍두기 더 주세요! 하면 손님이 먹던 그릇에 다시 담아 건네요. 새 그릇에 반찬을 내가지 않아요. 설거지거리 가 줄어드는 동시에 물을 아껴 쓸 수 있잖아요. 결국 환경을 지키는 일이죠. 그래서 우리 집에 서 배출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매우 적은 편이 에요. 찬 가짓수가 김치 세 가지뿐인 데다가 음 식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하니까.. 40-50명이 방문해도 음식물쓰레기는 아주 적죠. 남도진: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시네요 ~ 절약이 몸에 배이신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대청에서 만둣국을 맛본 경험으로 볼 때 예약 손님이 아니더라도 손님을 대하는 손길에 지극 한 정성이 묻어나세요. 보통은 그런 정성을 기 대하기 어려운데 말이죠. 박창세 씨: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인데 정성껏 대해야죠~~ 그리고 난 즐거워요. 사람을 만나 고 만둣국을 대접하고, 열심히 일할 기회를 선 물 받아서~ 김상례 씨: (웃음) 손님들이 처음에는 바깥 분 이 나이 지긋하시니까 “우리가 할게요~ 사장 님, 그냥 놔두세요!” 했는데 지금은 가만히 앉 아 있어요. 하하하(그녀의 웃음은 정말 쾌활하
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이젠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진 거죠.
박창세 씨: 그게 재밌잖아요? 대접해서 나눠주 는 게. 제가 젊은이들한테는 때때로 일부러 더 정중히 서빙을 할 때가 있어요. 가끔 전골을 직 접 떠준다든가~. 손님들이 오시면 저분들은 어 떤 관계일까, 살짝 생각해봐요. 그래야 더 배려 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부인과 남편이 같이 왔 는데, ‘저 남편은 좀 고전적인 것 같다’라는 생 각이 들면 음식을 남자에게 먼저 건네요. 하지 만 ‘이 남자가 아내를 배려하는 법을 좀 배워 야겠다’ 싶으면 끼어들 겨를도 없이 아내 분께 먼저 음식을 드려요. “레이디 퍼스트~” 라고 말하면서요. 또 애인끼리 와서 식사를 하잖아 요? 그럼 일부러 남자가 앉아 있는 쪽에 국자 손잡이를 돌려놔요. 여자 친구를 배려하라는 의미죠. ‘그런 배려도 없이 어떻게 여자 친구를 사귀려고 하는 거냐’ 말없이 물으면서요 ~(빙 그레 웃는 창세 씨!) (창세 씨와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의 서 빙에 깃든 사연 역시 재밌으면서 교훈적이다~ 매너가 바닥에 떨어진 남자를 연인으로 둔 여 인네들은 반드시 ‘대청’을 찾길! 창세 씨에게 도움을 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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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지극히 아끼는 창세 씨의 사랑 남도진 : 듣고 보니 왠지 사모님이 부러워지네 요~ 사모님께 잘 하실 것 같아요. 김상례 씨: 지금도 만두 소 만드는 일은 바깥 분이 전부 하세요. 재료를 다지는 일이 보통 힘 든 게 아니거든. 난 양념만 버무려요. 손님들은 제가 엄청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바깥 어른께서 전부다 해주시니까 생각처럼 고생하 는 건 아니에요. 청소도 다 해주시고. 만약에 남편이 안 도와주면 저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 죠~
아버님께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화분을 이쪽 으로 옮기고 저쪽으로 옮기셨어. 정말 부지런 하셨어요. 나이가 들수록 바깥 분은 점점 더 아 버님을 닮아가는 것 같아. 요즘엔 한지공예도 나는 눈이 어두워서 문양을 못 파는데 남편은 안경을 벗으면 눈이 아직도 좋거든? 그래서 문 양을 전부 파주셔요. 또 골격 같은 것도 다 만 들어주시고. 나는 컬러만 맞춰서 붙이기만 하 면 돼요. 그러니까 둘이 아니면 안 돼. 뭐든지. 혼자서는 할 수가 없어. 만두 만드는 일도, 한 지공예하는 일도. 둘이 꼭 해야 하는 일들이야.
박창세 씨: 여자 힘으로는 못해요. 어떻게 보면 대청을 꾸려가는 일의 80%는 내가 하고, 20% 는 아내가 맡고 있는 셈이에요. 솔직히 전 나머 지 20%도 아내에게 시키고 싶지 않아요. 시간 이 되면 내가 다 ~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안 되 니까.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맡기죠.
남도진: 대청에서 만두 빚으시면서 바쁘실 텐 테 한지공예는 언제 하시는 거예요?
김상례 씨: 옛날 생전에 아버지(시아버지)께선 집안일을 어머님께 안 맡기시고 다림질까지 다 하셨어요. 우리 친정아버지와는 정반대셨죠. 국그릇이 바로 옆에 있어도 엄마더러 가져다 달라고 하신 분이 친정 아버지셨어요. 그런데 시집와서 보니까 시어머니는 완전 왕비고, 시 아버지께서 집안일을 전부 다 하시는 거예요. 시아버지랑 친정아버지랑은 전혀 딴판이셨지.
남도진: 세시부터 다섯 시까지는 한지공예를 하시는 군요~
김상례 씨: 이런 시간에~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 음식 준비 끝나고 짬이 생기면 그때 한 지공예도 하고, 천연염색도 해.
김상례 씨: 예전엔 손님으로 오신 분들이 배우 겠다고 하면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박창세 씨: 열정을 가지고 배운다면 한지공예 를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지금도. 그런데 시작 은 하고 다들 끝을 못 맺어요. 10년 동안 딱 두 명이 나왔어요. 2층 장롱을 완성한 사람이. 사 람들한테 한지공예를 무료로 가르쳐줬죠. 김상례 씨: 정명여고 체육 선생님이 이걸(한지 공예) 배워가지고 지금 학생들을 가르쳐요. 염 색하는 아줌마도 다니면서 배웠고. 지금은 끝 내주게 잘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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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진: 아내 분께선 언제 적에 미술선생님을 하 신 거예요? 김상례 씨: 처녀 때 했어요. 첫 부임지에서는 중 1부터 고 3까지 다 가르쳤어요. 3년 반 동안. 그 리고 결혼해가지고 아이가 자연 유산되고 다시 임신이 되서 학교를 그만둬버렸지. 진짜 그 당시 에는 재밌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것 같아~ 박창세 씨: 그때만 재미있었나? 지금도 재밌지 김상례 씨: 하하하 맞아요~ 지금도 재밌죠.
상례 씨, 왕년엔 호랑이 미술선생님?!
남도진: 그럼 미술교사를 그만두시곤 무슨 일을 하셨어요? 김상례 씨: 중고등학생 교사를 하다가 미술학원 을 열었어요. 헌데 어머니들은 젊은 선생님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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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하더라고. 그래서 젊은 선생님을 강사로 들였는데 아이들이 선생님하고 농담 따먹기나 하고 열심히 하질 않더라고. 비싼 학원비 내고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면 그 건 안 되잖아. 엄마들이 와서 일단 선생님을 보 면, 여하튼 젊은 축에 속하지 않으니까 할머니 로 취급한단 말이야. 그래서 아이들을 학원에 안 보내는 사람도 생겨나더라고. 당시만 해도 엄마들이 미술학원을 숙제나 대신 해주는 곳으 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어. 김상례 씨: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아이들이
즐겁게 뭔가를 표현할 수 있도록, 보는 눈과 생 각하는 사고력을 길러주고, 모든 일에 자신감 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미술학원이 라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엄마들은 흔히 그렇 게 생각하지 않더라고. 엄마들 비위를 맞춰주 는 학원은 잘 되고 그렇지 않은 곳은 잘 안 되 고~. 난 엄마들 비위를 못 맞추는 성격이야. 하지만 언제나 자신 있었어요. 항상 최선을 다했기 때 문에. 고3을 가르칠 때도 미술시간에 준비를 제대로 안 해오는 아이가 있으면 벌을 세웠어.
그래서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지. 그리고 그림 잘 그리는 애들뿐만 아니라 노력 하는 애들한테도 좋은 점수를 줬어. 미술 실력 은 타고 나는 거잖아. 최선을 다 했는데도 안 되는 거는 부모가 아이에게 소질을 물려주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런 애들한텐 점수를 안주면 안되지. 실기 점수를 꼭 잘한 사람만 잘 주란 법 있어? 노력하는 사람에게도 줘야죠. 그래서 그런지 여전히 대청에 드나드는 제자들이 많아 요~~ 남도진: 요즘도 대청을 오가는 제자들이 많으
시다구요?? 김상례 씨: 대청 근처에서 목욕탕 하는 아줌마 도 내 제자야. 하하하하. 몇 살 차이 안 나는 애 들도 있어. 대학을 막 졸업하고 부임해서. 어떤 제자하고는 다섯 살 차이, 여섯 살 차이 정도 밖에 안 나. 같이 늙어가는 거지~~(웃음) 남도진: (웃음) 그렇군요. 근처에서 목욕탕 운 영하시는 분도 제자라니~ 암튼 제자들이 오가 면 좋으시겠어요.
월계수향 스민 대청의 내일은? 남도진: 대청이라는 공간에서 두 분의 여생이 어땠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있으세요? 박창세 씨: 우리 두 부부가 오랫동안 건강해서 대청을 운영하는 것! 그 이상은 바라는 게 없어 요. 또 대청에서 만둣국을 팔아 여유 돈이 생긴 다면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도 주고 싶어요. 남도진: 이제 정말 마지막 질문이에요~. 대청 을 운영해오시면서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다 면 얘기해주세요! 김상례 씨: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들은 어느 가 족이야. 항상 가족들이 모두 함께 와서 먹고 가 고 그랬거든.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그 집 사 람들이 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 사람들 이 왜 안 올까 궁금해 하고 있었거든. 알고 보 니 그 사람들이 서울로 이사를 갔더라고. 이사 짐을 모두 옮겨놓고 나서 다시 한 번 대청에 들 린 거야~. 만둣국을 먹으러. 지난 연말에는 어떤 손님이 조그마한 케이크 를 사들고 이곳에 들렸어요. 그렇게 손님들이 크고 작은 선물을 우리 내외에게 건네줘. 이젠 이곳을 들리는 손님들하고 자식 같고 형제 같 고 친구 같아. 누가 노인네들을 찾아오겠어? 그런데 대청이라는 만두집을 계속하니까 이렇 게 다른 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 잖아. 그래서 정말 좋은 것 같아~! 우릴 자랑스 럽게 여기는 손님들이 많아. 나이 들어서도 계 속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좋아 보인데~ 박창세 씨: 우리 두 내외는 대청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어요. 전 작은 나무를 가져다 돌보고 점점 키워내는 걸 좋아하거든요? 몇 해 전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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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에서 주운 솔방울을 따서 화분에 그 씨를 심었는데, 지금도 정원 한 편에서 건강하게 자 라나고 있어요. 관상용으로 보기 좋은 걸 그저 가져다놓으면 키우는 재미가 없잖아요. 천천히 키워가면서 가꾸는 그런 멋을 즐겨요. 그렇게 4-5년씩 키워낸 나무를 손님들께 종종 선물하 기도 해요. 나무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금방 죽어요. 부지런하지 않으면 절대 나무를 돌볼 수 없어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월계수 묘목 한 그루 줄게요. 월계수 알아요? (정원에 나가 월계수 이파리를 떼어오는 창세 씨. 그가 건넨 월계수 잎에서 청량하면서도 깊 은 향이 뿜어져 나온다. 마치 두 부부의 그윽한 인생처럼..)
Namdo Gallery 사진제공: 남도진 이길찬 편집장
지리산
최근 전남도립도서관은 ‘책 읽는 전남’을 만 들기 위해 지역 대표도서관(도서관법 제 22조
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지역 대표 도서관으 로서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아직까지 풀
에 의해 설치)으로서 범 도민 운동 10대 시책 을 추진하고 있다. 10대 시책은 아직까지 캠페 인의 성격을 띠며 지역 민관 단체의 직원 및 임 직원 등을 중심으로 솔선수범 책 읽기를 시작 한 단계다. 현재 전남도립도서관은 도서관 운 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인 ‘도 서관 친구들’(208명)을 조직해 자료대출, 반 납, 도서관 안내, 환경정리 등을 진행하고 있 다. 앞으로 도민들의 참여를 보다 활발히 이끌 어내 지역을 대표하는 도서관으로서 자리매김
어야 할 숙제가 많다. 도서관에 비치할 양서들 을 확보하고. 사서 등의 전문 인력을 추가 배치 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예 산 확보가 가장 시급한 문제다. 또한, 독서율이 나 도서관 이용 등에 대한 기초 조사도 병행되 어야 한다. 도서관과 독서 생활에 익숙지 않은 도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도 여 전히 주목할 부분은 문화적으로 척박한 전남에 서 독서운동을 벌이려는 현재의 노력이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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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 문화토양을 일구려는 전남의 새로운 비전.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상황인 만큼 도민 들의 관심과 지지, 참여가 필요하다. 지난 3월 8일 전남도립도서관에서는 2012년 한 해 동안 다양하게 추진될 ‘책 읽는 도민, 행 복한 전남’ 만들기 10대 시책과 관련해 관계자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전라남도 관광문 화과 정인화 국장, 전남도의회 정영덕 의원을
비롯한 전남 126개 기관의 관계자들이 참석했 다. 또한 책읽는사회만들기운동을 이끌고 있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안찬수 사무처장이 강 연자로 참석했다. 본지에서는 안찬수 사무처장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소속)의 당시 강연 내용 을 자세히 실었다. 강연자에게서 쏟아져 나온 책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남도에서 전개될 독 서운동에 대한 유익한 고민들이 이어지길 기대 해 본다.
대표도서관 : 도서관법 제23조에 의거. 시도 단위의 종합적인 도서관 자료의 수집, 정 리, 보관 및 제공/ 지역의 각종 도서관 지원 및 협력사업 수행/ 도서고나 업무에 관한 조사, 연구/ 지역의 도서관 자료 수집 지원 및 다른 도서관으로부터 이관받은 도서관 자료 보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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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도민, 행복한 전남’을 위한 10대 시책> 「미니책방」 - 마을회관, 경로당, 부녀회관, 아 파트 등 지역 공동체와 공공시설 등에 책장과 도서를 비치해 독서 환경을 조성 「거실을 서재로」- 가정의 거실에 책장을 놓고 각종 도서를 비치해 거실을 독서와 대화공간으 로 변경하도록 유도. 사회단체나 유관기관 직 원 가정이 가장 먼저 동참하도록 유도. 「한 권의 책」 - 투표를 통해 한 권의 책을 행복 한 전남 대표도서로 선정해 올해의 책 선포식, 작가와의 만남, 북 콘서트, 독서릴레이 등을 전 개 「부모와 함께 서점가기」 - 아이들이 책을 가까 이 할 수 있도록 특별한 기념일에 부모와 함께 서점가기 운동 추진. 서점가는 날을 지정해 홍 보 「이동도서관」 - 문화적 혜택을 받기 어려운 섬, 오지 등의 주민들을 찾아가는 도서관 서비 스. 도서관이 없는 학교와 마을을 방문해 도서 대출, 독서문화 프로그램 운영. 병원선 등을 이 용한 섬 지역 방문.
「사랑의 책 나누기」 - 각 기관 및 단체, 개인으 로부터 도서 기증을 받아 도서기부 문화 육성. 「생애주기별 독서프로그램」- 모든 연령층이 참여하는 다양한 독서프로그램 운영. 북스타트 (영유아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을 통한 책읽기 습관 길러주기), 어린이*청소년*성인 독서교 육, 찾아가는 어르신 독서프로그램 운영, 연령 별 독서동아리 활성화 「독서왕 선발대회」 - ‘올해의 책’ 선정해 감상 문 공모. 학생과 일반부 2개 분야 선정. 「도 역점 사업 추천도서」 - 도민의 실생활(농 업, 해양수산, 관광문화, 신재생에너지, 전략산 업) 분야의 도서 선정. 해당 도서 선정의 전문 성을 위해 분야별 전문가 구성 및 도서선정위 원회 운영 「기관단체 임직원 책 읽기」 - 책 읽는 전남 만 들기 범 도민운동이 조기에 정착할 수 있도록 공무원뿐만 아니라, 126개 기관* 단체의 임직 원 모두가 독서를 생활화 할 수 있도록 홍보. 업무 시간 전 20분 독서하기, 독서 동아리 조 직, 읽고 난 책을 부서 직원 간 돌려보기 , 직장 내 책 읽는 공간 갖기 등
전남도립도서관, 리더십 강한 함장이 되라! -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안찬수 사무처장 강연회-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은 정보 지식 의 기반시설과 내용 확충을 통해 시민들의 정 보격차 및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지난 2001 년 6월 출발한 시민을 위한 시민연대 운동이 다. 우리 사회를 책 읽는 문화 공동체로 만들 기 위해 9개 시민단체(대한출판문화협회ㆍ문 화연대ㆍ한국작가회의민주화를 위한 교육협 의회ㆍ어린이도서연구회ㆍ전국교직원노동조 합ㆍ학교도서관살리기 국민연대ㆍ한국도서관 협회ㆍ한국출판인협회)가 연합해 지속적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공공도서관의 전국적인 증설 과 도서 콘텐츠 예산 확충을 정부에 요구하는 한편, 독서 및 도서관 관련 각종 정책 포럼을 개최해 오고 있다. 또한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 성화를 위한 방향을 모색하고, 지방자치단체들 과 협력해 소규모 어린이 도서관 건립 및 운영 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다.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www. bookreader.or.kr)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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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 역사 이래 책 읽는 문화를 만드는 자리” 오늘 이 자리는 뜻 깊고 역사적인 자리입니 다. 전남도립도서관 서비스 담당 팀장님과 식사 를 하다가 우연히 일제 때 이야기를 하게 됐습 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통치하던 당시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에 도서관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은 비지배계급인 조선인 들이 책을 읽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품고 있었 습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만에 대해서도 식민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일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대만을 식민통치하면서도 한반도와는 달리 그곳엔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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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반면, 한반도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의 두뇌가 명석하기 때문 에 도서관을 세워 읽고, 배우고 탐구하게 하 면 식민 통치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 려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 근대 도서 관, 즉 공공도서관의 역사는 1850년부터 시 작됐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해방 이후에 겨우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 설립 에 관한 부분은 1990년까지 문교부 소관이 었습니다. 이후 1991년부터는 문화부와 자 치단체 책무사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자치 정부 1기, 2기, 3기를 각각 축약해보자면 이 렇습니다. 1기 때는 도로 닦느라고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2기 때는 축제 기획하느라, 3기 때는 대부분 청사를 짓는 데 시간을 할애했 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업인 문화, 교육, 복 지 분야의 계획들은 사실상 그 때를 놓쳤습 니다. 현재 민주통합당 총선기획단장을 맡고 있는 이미경 의원이 17대 국회가 열렸을 당 시 문화관광통신위원회에 유일하게 입법 의 안을 낸 것이 바로 ‘도서관법’입니다. 2004년 과 2005년 도서관법이 논의될 때, 나중에 초 대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장을 하신 한상한 연세대 부총장님, 저희 단 체 이사이시기도 한, 그분이 사회를 보는데 이미경 의원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나 라 도서관 현실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한상 한 부총장께서 “아프리카보다 못합니다.”라 고 대답했습니다. “아프리카보다 못하다.. 우 리가 잘 아는 주요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 주요국과 비교해서도 매우 낙후되 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비단 도 서관 문화의 낙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 다. 우리의 민주주의 기틀이 그만큼 튼튼하 지 못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도서관에 관한 법률, 지난 2007년 출발” 시도차원의 도서관 정책을 담당할 수 있는 대 표도서관에 관한 법률은 지난 2007년 4월 5일 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도서관법을 통해 시행되 었습니다. 제주도의 경우 한라도서관을 대표 도서관으로 삼아 도서관을 지었습니다. 그 규 모는 중급 공공도서관 정도밖에 안되지만, 법 률상 대표도서관을 지정하거나 건립할 수 있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개관 과정에 서 제가 그곳을 직접 방문했었는데, 당시 사서 한 분이 개관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대표도 서관이라고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가운
데 전라남도가 상당한 규모의 대표도서관을 건 립하고, 도서관뿐만 아니라 전라남도의 유관기 관 관계자 분들을 이렇게 전부 모셔놓고 ‘책 읽 는 전남’을 만드는 데 머리를 맞댔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매우 뜻 깊은 자리입니다. 100년 뒤 를 생각해보십시오. 대한민국, 그리고 전라남 도에 처음으로 대표도서관을 개관하고, 그 역 할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 니까. 전라남도가 정말 발전하려면 책 읽는 문 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대한민국 5천년 역사 이래 오늘 이자린 첫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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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문화는 문화, 교육, 복지 정책이다”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현재 제시된 10대 시 책만으로는 독서문화의 토대를 만들 수 없습니 다. 특별히 책 읽는 전남을 만드는데 있어 부족 한 예산에 대한 고민들이 10대 시책 안에 이미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 읽는 전남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정책 방향 을 내놓아야 합니다. 10대 시책 중에서 그나마 도의 정책이라고 할 만 한 것은 세 가지 정도로
을 맺었습니다. ‘기초자치단체를 통해 책 읽는 도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정책영역 부분을 논의하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현재 책 읽는 전남에서 내놓은 정책은 도서관과 독서 문화와 관련된 정책입니다. 하지만 ‘독서’는 단 순히 도서관이나 독서문화로만 한정할 수 없는 교육 정책이기도 합니다. 교육정책이기에 학교 도서관의 역할, 독서교육도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현재 우리의 교육자치가 지방자치와 밀접 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지 원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지닙니다. (대표도서 관 건립과 효과적인 운영은) 이러한 한계를 새 롭게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고리입 니다. 다음으로 독서는 복지정책이기도 합니다. 최 근 생애주기별 독서프로그램인 ‘북스타트’ 등 의 활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독서가 중요한 복지 정책임을 말해줍니다. 또 한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서비스 중 아 직까지 개발되지 않는 부분이 경제 정책으로서 의 독서문화 정책입니다. 이외에도 도서관 및 독서 문화는 국제화 정책과도 관련됩니다. 전 라남도에 있는 다양한 자치체를 국제사회와 연 계해 독서문화를 확산시키려는 노력도 고려되 어야 할 것입니다.
간추릴 수 있습니다. 도서관 부분, 생애주기별 독서프로그램, 기관 단체 임직원의 솔선수범 등입니다. 2007년도에 저희 단체(책읽는사회 만들기국민운동)와 책 읽는 도시 김해가 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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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스타트: 사회적인 육아 지원 운동으로 해 당 기관의 공공성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시민 들의 자발적인 문화 생산을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 전국적으로 299개 지자체 중 126개 지 자체에서 북스타트를 시행 중이다. 2011년 9 월말 기준으로 전체 신생아의 약 23%(5068만 명 중 1829명)가 북스타트에 참여하고 있다. (안찬수의 더 느린질주: http://transpoettextcube.blogspot.com 참조)
“매년 국내에서 출판되는 책 5만여종.. 전남도립도서관, 도민들이 믿고 찾아볼 수 있도록 신뢰 줘야” 현재 전 사회적으로 큰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스마트 폰 때문에 책을 안 읽게 된다’, ‘새로운 정보는 네이버 검색창에 다 있다’라는 인식들 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오늘 이 자 리에 오신, 특히 각 부문의 중요한 정책을 담당 하시고 결정을 내리시는 분들은 이에 대해 뚜 렷한 인식을 갖고 계셔야 합니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장인 로버트 단턴이 고등 교육 잡지에 게재한 글을 요약해 말씀드리겠습 니다.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은 세계에서 두 번 째로 큰 도서관입니다. 가장 큰 도서관은 미국 의 LC라는 곳입니다. 그곳엔 1억 3천만 점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곳 다음에 방대 한 자료를 소장한 곳이 바로 하버드대학 도서 관입니다. 단턴은 하버드대 도서관의 도서관장 이자 역사학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책은 이제 끝났다’라는 인식에 대해 잘못 된 생각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이제 모든 것 이 디지털화 되는 데 종이책이 어떻게 살아남 겠느냐’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의 오해를 꼬
집습니다. 매년 세계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책 의 양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책은 죽지 않았습니다. 1999년과 2000년에 국내 출판업계에 디지 털 바람이 크게 불었습니다. ‘이제 종이책은 끝 났다’, ‘출판도 끝났다’라고 모두들 생각했습니 다. 하지만 여전히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5만여 종입니다. 한국은 세계 7 대 출판 강국입니다. 앞으로 전남도립도서관에 서는 2016년까지 8만권~ 25만권의 장서를 구 비할 계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걸 로는 부족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1년에 쏟 아져 나오는 국내 자료가 5만 여 종입니다. 전 라도민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나오는 기본 도서 들을 전남도립도서관에 가면 적어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한 든든한 믿음을 심 어줘야 합니다. 따라서 더 큰 투자가 필요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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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수집 가능한 정보는 전체의 11%에 불과” 최근 청소년들은 정보에 대한 몰이해에 빠져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들 이 전부 온라인상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물론 디지 털라이징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고, 여러 가지 자료들이 디지털화 되고 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글에서 ‘구글 북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 니다. 전 세계의 책을 디지털로 한번 만들어보자는 게 구글의 생각입니 다. 그런데 현재까지 전 세계 자료 중에 디지털라이징 된 것은 약 11% 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료를 찾아서 특정한 정보를 수집하고 자 할 때 온라인상에서는 전체의 1/10 정도 밖에는 찾아낼 수 없는 겁니 다. 또 다른 착각은 ‘모든 자료들이 이제 디지털화 되고 있는데 도서관이 라는 공간이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도서관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대한민국 유사 이래 전라남도에 도립도서관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100년 뒤 역사를 생 각하면 이는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근래에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 (Analog)를 합쳐 만든 신조어인 ‘디지로그(Digilog)’가 생겨났습니다. 이는 미디어가 병존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텔레비전이 세상에 등장 했을 때 라디오는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라디오는 지금 도 그 쓰임새가 다양합니다. 새로운 미디어가 나와서 기존 미디어를 완 전히 대체한 경우는 인류 역사상 아직까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미디어 들은 항상 병존합니다.
“보존 가치를 지닌 양서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 도서관에 대한 큰 착각은 도서관이 건물이라 고 생각하는 인식입니다. 도립도서관에 와보니 사찰을 지을 때 쓰이는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 로 지붕을 삼고, 건물 외벽에 훈민정음과 관련 된 글자를 새겨 넣은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인 도의 근대 도서관 역사는 타고르 시인이 보리 수나무 밑에서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장면에 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도서관이 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도서들을 일일이 선별해냈습니다. 40만권 중 의 몇 만권만을 모아 도서관에 비치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기증받은 도서의 90% 이상이 도립도서관에서 영구적으로 보존할 책들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 드리기 위해섭니다. 도서관하면 건물을 생각하 고, 자료 모으는 일만 생각해서 궁핍한 예산을 대신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기증 운동을 벌 이는데 이것은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자료들이 양질의 것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시인과 청중들이 만나 서로 이야기 를 주고받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는 그 장면이 바로 ‘도서관’을 상징합니다. 곧 도 서관은 느티나무 밑이고, 소나무 밑이며, 보리 수나무 밑입니다. 도서관 건물을 잘 짓는 것보 다 그 안에 어떤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현재 10대 시책 중에 도민들의 기 증운동을 추진 중이신 걸로 압니다. 일본의 사 례를 들겠습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현직에 있 을 때 지역 자치단체의 통폐합 사업을 추진했 답니다. 그런데 한 자치단체가 의회 논의 후 통 폐합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작은 지자체로 남았습니다. 주민 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과 도서관이라 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통폐합에 참 여하지 않아 광역 단위의 예산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전국에 ‘책 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관련 사진이 신문지상에 보도됐습니다. 덕분에 전국 에서 40만권의 책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면 40만권이나 되는 도서들을 그들이 전 부 자신들의 도서관에 그냥 넣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함께 모여 밤새 기증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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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사람과 아이디어, 사람과 자료를 결합시키는 네트워크” 도서관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네트워크를 형 성하는 곳입니다. 사람과 아이디어, 사람과 자 료를 서로 결합시켜가는 것이 도서관의 본질입 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책(자료)이 채워 줄 수 있도록, 사람을 조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도서관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 는 예산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각 시도의 도서 관인 ‘브렌치(분관)’을 닫자, 라는 의견이 나왔 습니다. 오늘 같은 자리였습니다. ‘경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용률을 조사해 가장 낮은 수 준을 보이는 지역의 분관을 닫자’라는데 의견 이 모아졌습니다. 결국 A라는 지역의 분관을 닫겠다는 발표가 났습니다. 그러자 A지역에 살 고 있는 주민들이 “도서관 이용률뿐만 아니라, 48 2012.March
이 지역의 공공기관들의 이용률을 전부 조사해 보고 나서 다시 결정하십시오”라고 외쳤습니 다. 주민들은 또 “보통 기업은 변호사를 고용해 연말정산을 합니다. 변호사를 고용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갖고 있는 고급 정보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료는 바로 도서관에 있 습니다. 그러한 정보서비스를 받으러 시민들 은 도서관에 갑니다. 아이들은 또 학교에서 내준 글쓰기 숙제를 해 야 하는데, 관련 자료가 도서관에 있습니다. 공 공도서관과 학교가 협력해서 글쓰기 숙제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서관을 닫 으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게 됩니다. 이 런 상황인데 어떻게 도서관을 닫습니까?”라고 주장했습니다.
“도서관을 독서실로 여기는 낡은 인식 버려야” 우리 도서관 문화는 일제의 유산으로, 도서관 이 공공서비스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독서실로 만 이용해온 역사가 있습니다. 언론사 기자들 이 제게 독서문화운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물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과거에서 비롯된 낡은 인식을 혁파해 나가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도서관을 고 시공부하는 독서실로만 생각하는 인식들을 변 화시키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도서관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이후의 도서관과 독서문 화를 형성하는 기초입니다. 이전의 100년이 아 닙니다. 그런데 정책에 대한 의사 결정을 하는 분들은 머릿속에, 과거에 자신이 독서실로 삼 았던 100년 전 도서관의 모습을 담아두고 결 정을 내립니다. 저는 이런 비유를 자주 듭니다. 어느 시장님, 어느 군수님이 자신이 고시공부 할 때 도서관을 이용한 경험을 떠올립니다. 그 리고 자신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모습을 도서관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서관은 책 한 권 없이도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그는 고시를 통 과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육법전서를 하루 종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을 개인이 점유하 는 형태로 이용해온 탓입니다. 그래서 도서관 민원에는 흔히 ‘아이들이 소란을 피워서 공부 를 할 수가 없다’라는 항의들이 들어옵니다. 그 러고 나면 도서관 이곳저곳에는 성의 없는 ‘정 숙’씨가 나붙습니다. 도서관을 생활과 괴리된 공간으로 이용해오고, 독서실로 여겨온 낡은 인식들을 바꿔야 합니다.
“도시발전 계획과 독서문화 정책 밀접하게 결합시켜야” ‘책 읽는 전남’의 정책과 관련해서 말씀드리 겠습니다. 각 지자체마다 자치체 발전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발전2030, 발전3040’ 등의 계획들이 있습니다. 제가 도서관과 관련된 일 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건축에 종사하 시는 분들이 전국 229개 자치체의 발전계획을 수집해 인구 통계를 산출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2020년 무렵의 우리나라 자치체의 발전 계획상 인구를 합치면 총 2억이 되어야 한다 고 합니다. 이렇듯 어느 지자체나 단체도 발전계획을 가 지고 있습니다. 독서란 것은 이러한 도시발전 계획과 괴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도시 발전계획에 독서 계획과 독서문화를 결합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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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합니다. 이제껏 한국의 도시발전은 토목과 직결되어 왔습니다. 건물을 짓고 도로를 내는 일을 도시발전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도시발전을 위한 정형화된 하나의 모 형으로 머릿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의 요구사항에 주 목하는 것입니다. 교육, 문화, 복지에 대한 주 민들의 요구는 도서관의 역할 없이는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이 중요한 것입 니다.
“도서관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 필요 조사해야” 저는 대한민국에서 안 가본 지자체가 없습니 다. 가장 낙후된 도서관 문화를 꼽으라면 그곳 은 광주와 대구입니다. 이들 지역의 특징은 선 거에 출마한 정치인들이 어느 특정당의 깃발만 내걸면 다 당선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정 치인들은 주민들의 요구와 필요를 조사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의 도 서관들은 낙후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남도립도 서관에서 내놓은 10대 시책은 예산 수반사업 이 아닙니다. 주민들을 봉사자들로 조직하고 책 기증을 받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독서문화와 도서관 문화의 인프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일반 회 계 예산의 2% 정도는 이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실제적인 계획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는 도서관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소방서에서도 참석하셨습니다. 일 년 예산을 짤 때 소방서 조 직원들을 위해 전체 예산의 일부를 배분하겠다 는 모색 없이는 독서 운동과 도서관 문화를 발 전시킬 수 없습니다. 현재 전남도에서 내놓은 10대 시책을 살펴보면, 여러 방책은 있지만 종 합적인 계획은 부재합니다. 앞으로 기초 조사 도 실시해야 합니다. 전라남도 도민이 ‘얼마나 책을 읽고 있고, 도서관을 얼마나 자주 이용하 며, 어떤 요구를 하고 있는지, 단체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의 기본조사를 해야 합니다. 10 년 뒤에 이러한 자료를 통해 누군가가 추가조 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들어 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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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교과서 폐기, 4대 강 문제보다 더 심각” ‘팝콘 브레인(현실에 무감각한 뇌)’이라는 말 이 있습니다. 이 말은 현대인들이 오프라인상 의 변화에 점점 둔감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온라인상의 변화에는 빨리 대응하면서도 실물 에 대해서는 그들의 행동이 점점 느려지더라 는 겁니다. 최근 서울 강남의 엄마들은 유치원 에도 안 들어간 아이 손에 아이패드를 쥐어주 고 한글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글자를 다 익히 고 난 아이들에게 종이책을 쥐어주면 “엄마, 왜 글자가 안 움직여?”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지 난해 대한민국 교육정책 중에 큰 변화는 ‘7.4지 침’과 ‘6.29지침’입니다. 먼저 ‘6.29지침’은 모 든 교과서를 디지털화 하겠다는 교육부의 계획 입니다. 이러한 계획은 앞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이 들이 디지털로, 아이패드로, 스마트 폰으로 공 부한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백만이나
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종이책을 모두 없애 고 디지털교과서를 제공하겠다고 선포했습니 다. 저는 4대강 문제보다 이 정책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7.4지침’입니 다. 정부에 독서운동과 독서교육을 진행하자고 하자 인터넷 상에 독서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놓 고 대학입시와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서교육종합시스템'이라는 겁니다. 대 한민국 입시가 이다지도 강렬한데 독서를 입시 와 연결해놓으니 유치원생부터 독후감 쓰기를 하고 있고, 독서논술학원이 기승을 부립니다. 이건 독서가 아닙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현재 디지털교과서를 개 발 중이며 2015년까지 모든 학교 교과서를 종 이책에서 디지털로 전환할 예정이다.
“공직자들, 먼저 책 읽는 솔선수범으로 도민의 참여 이끌어내라”
공직자들이 독서운동을 위해 할 수 있는 솔선 수범은 시민에게 ‘책을 읽어라’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책을 읽는 것입니다. 독서운동은 집 에서 아빠로서, 엄마로서 내가 먼저 책을 읽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독서를 하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먼저 읽으십시오. 주민들을 향해 독 서운동하자고 외치기 전에 도지사님께서 먼저 책을 읽으셔야 합니다.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 어내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내실 겁니까. 전남도립도서관 2 층에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 해 놓으신 걸로 압니다. 도립도서관 각 팀에 직원이 7명씩, 관장님까지 포함해 현재 정직원이 15명 정도 되겠군요. 이 인원만 으로 어떻게 도서관을 운영하실 겁니까. 시민 의 참여, 관심, 지지, 협력, 연대는 반드시 필 요합니다. 지역민들의 도움을 어떻게 이끌어내 고 조직할 것인가는 앞으로 도립도서관이 풀어 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언론을 이용하거나 활용하는 방식을 통해 ‘하고자 한다’가 아니라 ‘함께 하자’는 의지를 지속적으로 피력하십시 오.
“시민 권력 키우는 요람, 도서관” 저는 매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공동연구를 해 왔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 인정 통계 중에 독 서 관련 통계처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국가 통계에서 출생률은 2.0%에서 1.0%떨어지는 데 10년,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독서관 련 통계는 지난 1년 사이에 1.0%가 떨어졌습 니다. 독서 문화, 도서관 문화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 이 힘이다’라는 말은 지식이 권력이라는 의미 입니다. 내가 많은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 력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알아야
만 시민 권력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리터러쉬(literacy)’라는 단어는 문헌정보학 에서는 문해력(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단어를 ‘시민적 소양’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 은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단순 히 문자만 알고 해독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민 으로서 (사회 전반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며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능력. 그 능력을 바로 도서관에서 키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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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립도서관, 돛단배 정책 아닌 함대 정책이 필요하다” 전라남도에 있는 도서관과 다양한 자료들은 전 라남도 도민의 것입니다. 만일 도민이 자료 검 색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찾는 도서 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특 정 도서가 목포에는 없고 전남의 다른 지역에는 있다면, 도민은 도서관에 해당 도서를 신청합니 다. 만일 도서 신청자가 신청도서를 찾아가면 대 출이 되고, 찾아가지 않으면 책이 있던 원래의 도서관으로 자료를 돌려보냅니다. 현재 ‘책 읽는 김해’에서 활용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한 자지 체 안에 존재하는 책들이 서로 하나의 시스템으 로 연결되어 특정 도서관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 라 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 면 책에는 여수현암도서관 관인이 찍히는 게 아 니라 그냥 ‘여수도서관’이라는 관인이 찍힙니다. 한 시스템에서 한 덩어리로 책들이 움직이는 구 조입니다. 전남도립도서관을 법상으로 광역시도 의 도서관으로 지정해 놓은 까닭은 도 단위의 함 대로서 지역의 도서관들을 어떻게 총체적으로 운영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뜻이기도 합 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독서 관련 정책을 위해서 도비 예산의 몇 %를 실제적 으로 편성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거대한 함대가 모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책 읽 는 전남’을 위해 막강한 함대가 돼서 움직일 것 인가, 고민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시해 놓은 정책은 돛단배 정책입니다. 전남도립도서 관이 함장으로서 어떤 방식으로 전남이라는 거 대한 함대를 이끌어 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 다. ** '함대와 돛단배'의 비유: 대표도서관의 개관 과 운영을 중심으로 공공도서관 확충과 운영 활 성화에 무게 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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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제철음식
쭈꾸미 구입요령: 다리의 흡반이 뚜렷한것을 고른다. 보관방법: 내장과 먹통을 제거한 쭈꾸미를 끓는 물에 살 짝 데쳐 찬물에 헹군다. 먹을 만큼 비닐팩에 담아 냉동보 관한다. 손질법 : 쭈꾸미의 머리부분과 다리의 연결 된부분을 칼집을 내 주고 먹물의 연결부분을 칼을 이용하여 살짤 누르면서 밀어내 먹통을 제거한다. 궁합음식: 돼지고기 (돼지고기는 지방과 콜레스테롤치가 높은 반면 주꾸미는 체내 콜레스테롤 치를 내려주는 타우린이 다량 함유되어 돼지고기의 단점을 해결 해준다. ) 효능/질병: 콜레스테롤감소 (불포화지방산과 DHA를 다량 함유하고 있으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감소, 혈압정상화 효과가 있다.)
제철음식 맛집소개
계절 식품 전문점. 동해수산
동해수산 / 목포시 산정동 1080-96 / 061-243-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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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심연에서 항해의 꿈을 길어 올린 사나이
해저 난파선이 간직한 아득한 심연의 역사를 불러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꿈과 이상을 싣고 바다를 누볐던 선조들의 용맹한 도전정신. 그들의 좌초된 시간을 오 늘에 이르게 하는 고선 복원가, 홍순재 씨. 겹겹이 쌓인 세월의 퇴적층 아래서 마 침내 제 모습을 드러낸 고선들은 과거의 이름을 흘려보내고 그의 손길에서 새롭게 탄생하고 있었다. 목포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그는 그곳 에서 거친 파도의 손길에 제 꿈을 잃고 불운하게 잠들 수밖에 없었던 배들을 불러 내고 있었다. 수세기를 건너온 나무들의 숨결을 느끼며 유구한 바다의 역사에 손 내밀면서..
1장, 고선 복원가 ‘홍순재’가 길어 올린 바다의 역사
고리와 고리가 맞물리듯 시작된 배와의 인연 남도진: 해양유물전시관을 무심코 둘러보다가 홍 선생님께서 고선을 복원하시는 과정을 보게 됐습니다. ‘저 분이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자세 히 알고 싶다’라는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처음 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랄까, 배를 복원 하게 된 배경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홍순재 선생: 1994년에 이곳 국립해양문화재 연구소에 입사하게 됐어요. 제 전공이 건축이 라 연구소에 입사하기 전에는 인테리어 관련 일을 했었죠. 기초적인 기술, 그러니까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라든가 연장 다루는 기술은 목 포 목재직업훈련소라는 곳에서 배웠습니다. 그 런 과정이 제가 나무와 친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었던 크고 작은 계기가 된 것 같아 요. 이후 해양문화재연구소에 몸담게 되면서부 터 선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죠. 제가 우리나 라 전통선박과 수중에서 출토된 고선박을 본격 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현 국립해양문화재 연구소 해양유물연구 곽유석 과장님의 지지 덕 분이에요. 그 분 덕분에 대학원에 진학해 고선 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선박과 옛 난파선에 대한 연구 는 94년부터 지금껏 지속해 오고 있어요. 지난 1995년에는 목포 달리도라는 섬에서 13-14세 기 선박인 ‘달리도선’을 직접 발굴해냈죠. 그리 고 최근에 복원작업을 끝마쳤어요. 제가 최초로 복원한 고선은 완도선이에요. 1994년 12월 14일 복원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이미 언론에 잘 알려진 신안선을 비롯한 진도선 등이 모두 발굴된 상태였죠. 지금은 고 려선실로 뒤바뀐 1전시실에서 완도선을 최초 로 가조립해 보았습니다. 그게 연구소에 들어 온 이후 최초로 수중에서 발굴된 난파선을 만 져본 경험이에요. 완도선을 복원한 다음 우리 나라 수중발굴의 효시라는 신안선 복원에 나섰
어요. 신안선은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 인데 당시 그 안에서 어마어마한 역사적 유물 이 나왔죠. 신안선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고고 학을 보다 활발하게 발전시키는 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신안선은 32~33미터 규모에 이르 는 거대한 배에요. 당시 제2전시실에서 퍼즐 맞추듯이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나무 조각들 을 하나하나 짜 맞췄죠. 신안선 복원은 2002년 에 선체 편을 마무리하고, 2004년에는 프레임 (배 전시에 필요한 구조물)까지 설치하는데 성 공했어요. 고선 복원은 결코 단순한 조립의 문 제가 아니에요. 많은 연구들이 밑바탕이 되어 야 하죠. 그런 과정을 모두 거쳐서 신안선을 복 원해 냈고, 지난 2011년에는 달리도선을 복원 했습니다. 사실 연구소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저 역시 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어요. 단지 어릴 적 아버님께서 조기나 갈치를 잡는 어선의 선 주셨기 때문에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였죠. 아버님께서 직접 배를 사고파는 사업도 하시고 선장도 하셨어요. 아버님 별명 중에 ‘홍 마도로 스’라는 별명이 있어요. 그렇게 부친께서 배와 인연이 깊다보니 저 역시 묘하게 배와 연결되 더라고요, 연구소엔 별도로 제가 배(모형배)를 만들 수 있는 저만의 공간이 있습니다. 배와 오래도록 일상을 함께 하다 보니 점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죠. 저와 배의 인연은 마치 고 리와 고리가 맞물리는 과정과도 같았어요. 어 린 시절 아버님을 통해 배에 대한 기본적인 지 식을 익힌 후, 직업훈련소에서 나무 다루는 법, 연장 다루는 법을 습득했고, 대학시절 건축공 학과를 전공했죠. 현재는 대학원에서는 선박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어요. 고선을 실제 바다에 서 발굴하는 작업에도 참여하면서 고선 복원 에 대해 남들보다 더 빨리 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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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지혜와 땀방울을 간직한 고선의 비밀 홍순재 선생: 간단히 배의 명칭에 대해 설명 드 리자면 우리나라 수중에서 출토된 배를 ‘고선 박’이라고 하고, 근현대선박을 ‘전통배’라고 합 니다. 그 명칭에 따라 배의 구조들이 조금씩 달 라요. 근현대, 즉 개항 이후의 배들은 거의 일 본식 배에 가까워요. 이전 시대의 전통선박과 는 차이가 있죠. 우리나라의 선박은 중국과 일 본 배에 비해 실질적으로 견고하진 못해요. 하 지만 우리나라만의 선박 제조기술이 선체 곳곳 에 분포되어 있어요. 선조들의 조선기술이 배 의 구조 하나하나에 땀방울처럼 맺혀 있죠. 저 는 선조들이 사용했던 배를 육안으로 관찰한 후 모형으로 만들면서 ‘선조들이 어떤 연장을 썼고, 어떤 기술을 그 저면에 활용 했는가’ 하 는 등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발견할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낍니다. ‘이런 건 이렇게 접목시켜 놓 으니까 배가 이토록 견고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연구를 통해 하나하나 선조들의 지혜 를 알아간다는 사실이 이일을 하는 가장 큰 보 람이에요.(웃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내려온 조선기술 은 거의 변화가 없어요. 수중에서 출토되는 우 리나라 배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선박이에요. 따라서 고려시대 선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선 조들의 조선술에 드리워진 거대한 장막을 벗겨 내고 있죠. 배에 관한 문헌은 찾기 어려운 상황 이에요. 배를 사용한 기록은 미미하게 존재하 지만, 배의 구조에 대한 기록들은 전무하고요. 그나마 1797년에 작성된 ‘각성도금’이라는 옛 고문헌에 우리나라의 판옥선, 전선, 북조선 등 의 도면이 존재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 라 배에 대한 기록이 오히려 일제 강점기 때 일 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어선조사보고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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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어선 조사보고서는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동해, 남 해, 서해 등지에서 활동한 조선 어선들을 조사 해 상부에 보고한 보고서에요. 일본인들은 우 리나라에서 계절별로 잡을 수 있는 어류, 배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연장, 배의 도면과 그에 대 한 구조해석 등을 담아 책으로 엮어 놓았죠. 지 금은 국내 해양문화를 연구하는데 사료로 쓰이 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조선 분야에서 강대국이잖아요. 목포지역만 봐도 조선업으로 세계에서 1,2위 를 다투고 있고요. 목포는 예부터 목재가 많은 항구였다고 합니다. 1800년대, 1900년대 목포 에는 배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요. 제가 목포의 주변 섬으로 조사를 다니면서, 조선기 술은 전부 목포에서 배워왔다고 기억을 더듬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섬 주민들의 그 말을 듣고 실제 목포에서 조사를 해보니 13가지나 되는 배가 인근에서 활동을 했더라고요. 화목 선, 똥배, 새우잡이배, 조원선, 활어선, 상보선 도 있었고, 이문바시 삼문바시도 있었고, 전마 선, 해태선.. 여하튼 다양한 배들이 활동을 했 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목포에 사시는 분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계 시더라고요. 목포 지역을 돌아다니며 목수님들 께 묻고 또 물으면서 목포에서 만들어진 배에 대한 비밀들을 하나하나 찾아가게 되었어요. 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선박 용어들은 일본 어 표현이 대부분이에요. 현재 저는 해양문화 재연구소에서 고선박 복원뿐만 아니라, 배와 관련된 용어사전을 발간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 하고 있어요. 2008년부터 우리나라 전통배를
복원하면서 구조에 대한 명칭들을 이미 많이 찾아낸 상태죠. 국내에선 유일하게 해양문화재 를 조사하는 기관이 바로 목포에 위치한 ‘국립 해양문화재연구소’에요. 해양문화유산을 간직 한 기관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연구소가 목포 에 생긴 덕분에 최근 고려시대 배들이 전시되 었죠. 그렇기 때문에 목포와 남도에 사시는 분
들은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도진: 목포지역에 사시는 분들이 지역에 대 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은 의미심장하 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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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남도진: 선생님께선 유년시절부터 배와 인연이 깊으셨지만, 왜 하필 ‘고선박’을 복원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은 과거의 것 을 불러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상상력의 여백
택했을까, 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우연 히 일반인에게 공개된 달리도선의 복원과정을
을 남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일의 매력이 라면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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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재 선생: 제가 처음으로 완도선을 복원할 당시인 1994년에는 배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 었기 때문에 그저 가조립 단계로 고선 복원을 마쳤죠. 이후 신안선과 달리도선을 차례로 복 원하면서 마음속에 떠올랐던 건 ‘어느 누구도 이일을 아직 해내지 못했다’라는 사실이었어 요. 앞서 말했다시피 완도선은 아무 것도 모르 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복원을 시도했었어요. 이어 신안선 복원에서는 그 과정을 제 나름대 로 정리해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많은 걸 배웠 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달리도선의 경우 과 거 모습 그대로를 모형으로 만들어냈죠. 잔존 부 모형 한척, 전시용 모형 한척, 추정부위 상
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후 보이지 않는 부분 들까지 면밀하게 계산하게 됐죠. 요즘엔 고선 을 복원하면서 보이지 않는 구조들까지 한 눈 에 보게 됐습니다.(웃음)
부구조까지 나타나는 모형까지 다양하게 만들 었어요. 옛 문헌을 찾아보고, 현재 수중 발굴된 여덟 척의 배에 대한 구조를 전부 찾아내고 분 석해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 모형배 이죠. 이걸 통해 조선공학적인 문제, 구조해석, 내파성, 내부성도 따져보고, 배의 톤수라든가 하는 것들을 계산한 후 실물을 복원해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데 16년이 걸렸어요. 배를 복원하기 위한 연구는 4년 전부터 시작 했지만, 배에 대한 전반적인 요소를 다루는 데 는 1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소요됐죠. 배 가 간직한 구조를 찾아내 고려시대와 접목시키 는 건 한마디로 해양문화라는 역사를 찾아내는 일에 견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배 에 얽힌 비밀들을 찾아낼 때마다 ‘드디어 찾아 냈구나!’ 하는 생각에 큰 자부심과 기쁨을 느껴 요.
경험해 봐야만 복원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 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배의 선체 즉 외판이 갖 는 힘도 실제로 복원작업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몰라요. 미세한 힘의 차이, 그 뒤틀림을 시 뮬레이션 단계에서는 발견하지 못하죠. 하지만 실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보 다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배들은 대부분 판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특징 을 갖고 있어요. 배를 만들기 위해선 나무를 켜 잖아요. 판재는 나무를 켜 만든 널빤지를 말합 니다. 헌데 고려시대 배들은 아름드리 통나무 를 그대로 깎아서 배를 만들었죠. 휜 선형도 깎 아서 다듬은 다음 이어 붙였습니다. 어마어마 한 정성과 다량의 목재가 들어간 것이죠. 쇠못 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못을 사용했음에도 불 구하고 우리 선조들의 배는 무척 견고했어요.
최근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고선들을 미리 조립해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실질적으로 갯벌에 묻힌 나무들을 들어보고, 목재에 박힌 못을 하 나하나 제거해서 그와 동일한 나무못을 제작해 예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일. 새로운 나무못으 로 오랜 시간 바다 속에서 생존한 나무와 나무 를 고정시키는 일.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직접
실물을 실질적으로 복원하면서 느꼈던 건 사 전에 가상으로 모형을 분석하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작업이라는 점이었어요. 가장 최초로 복원을 시도한 신안선의 경우, 아주 미미한 오 차로 복원 완성 단계까지 갔다가 원점으로 되 돌아오는 고배를 마셔야했죠. 그 일을 통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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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고,
지혜로운 우리의 ‘나무못’에 대해.. 남도진: 고려시대에 배를 제조할 때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못을 사용한 이유가 있나요? 홍순재 선생: 수중 발굴 조사에 나가보면 갯벌 속에 묻혀 있지 않은 선체는 바다 해충들의 영향으로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죠. 대부분 소실된 상태에요. 하지만 갯벌에 묻혀 있는 난파선의 나무들은 생나 무 상태로 보존되어 있어요. 만져보면 몇 백 년이 흐른 나무인데도 이 제 막 배어낸 생나무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바다 속에서 끌어올려 배 에 싣는 순간 나무는 부식하기 시작하죠. 피부가 수분이 없어 쩍쩍 말 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갈라집니다. 그래서 나무에 수분을 더해주는 작 업이 필요해요. 연구소에 돌아와선 나무들을 민물에 넣는 작업을 합니 다. 소금기를 빼야 하니까요. 그런 다음 수용성 합성수지인 폴리에틸 렌글리콜이 침투할 수 있도록 쪄내는 작업을 진행하죠. 수분이 빠지면 나무는 무척 단단해집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부러질 수 있죠. 우리나 라 전통배의 경우 나무를 통째로 사용하는 게 특징입니다. 또한 나무 와 나무 사이에 나무못을 막아 배를 건조하죠. 나무못은 언제나 배를 개삭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개삭(배 바닥의 널빤지를 갈아 넣거나 나무못을 갈아 박아 배를 수리하는 작업)이란 배를 뜯었다 붙여다하며 수리하는 걸 말해요. 우리나라 배들은 보통 조업을 하지 않거나 항해를 하지 않을 때는 바다 위에 배를 띄워놓지 않습니다. 목선을 바다에 띄어놓으면 바다 해충이 배의 생명을 단축 시키거든요. 그래서 배는 늘 육지에 끌어올려 놓죠. 뭍에 이끌려온 배 는 햇볕을 쬐면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틈이 생기는 등 그 형체가 조금 씩 변형이 되죠. 또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면서 물기가 날아가 수축 작용도 생겨나고요. 나무못은 그런 상황을 모두 예견한 선조들의 지혜 가 담겨 있어요. 배에 사용된 나무가 썩어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다 른 나무를 가져다 문제를 일으킨 나무만 빼고 새로 끼워 넣는 거예요. 나무못으로 기존 나무들과 새로운 통나무를 연결만 하면 되는 겁니다. 헌데 만일 쇠못으로 나무를 연결해 배를 만들 경우, 배가 물에 닿으면 부식은 일부에만 그치질 않죠. 결국 전체를 부식하게 만들어 개삭을 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바다는 주로 모래, 개펄로 이루어져 있 잖아요? 또 수심이 낮고 지형이 완만해서 언제든 배를 뭍으로 끌어올 62 2012.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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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요. 지 금도 목선을 바다에 띄워 놓으면 홍합이고 굴 이고 할 것 없이 다닥다닥 달라붙습니다. 그런 해양생물들이 목재를 파고들어 전부 갉아먹죠. 선조들은 삶의 지혜를 담아 배를 만들고 지켜 왔던 것이죠. 홍순재 선생: 우리나라 배의 역사는 뗏목의 역 사라고도 합니다. 중국은 처음부터 가죽배의 역사라고 칭했고, 일본은 통나무배의 역사라고 불렀죠. 우리나라 전통배는 유독 배의 저판(밑) 으로 여러 개의 나무가 사용됩니다. 중국은 북 부지역에서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배의 구조 가 제각각이에요. 우리나라 구조와 비슷한 지 역은 중국 북부지역입니다. 중국 중부지역은 V 자 형의 형태를 보이고, 남부지역은 U자 형태 를, 북부지역은 우리와 비슷한, ‘ㄷ’ 자를 90도 회전시켜 놓은 형태에요. 일본은 가마쿠라 시 대까지 통나무배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 배들을 살펴봐도 모두 쇠못을 사용해 배를 만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허나 우리나라 의 경우에는 나무못을 사용했고, 그 재료로 참 나무, 너도밤나무를 썼어요. 또 그 두께는 3센 티, 넓이는 10센티, 길이는 40센티가 넘었다 는 점이 특징이에요. 그렇게 큰 못이 외판(옆에 붙은 판)을 관통한다는 것. 나무못은 외판에 뚫 린 가운데 구멍을 세로로 관통해 깊이 박힙니 다. 외판으로 쓰인 목재의 중간 부분에 구멍을 뚫어 나무못이 더 깊숙하게 자리 잡게 하는 건 데요. 세로로 쐐기를 박아 나무와 나무가 흔들 림 없이 서로 고정되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나 무를 고정시키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 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나무못의 머리가 있 는 곳에서부터 세로로 쐐기를 한 번 더 박습니 다. 반면 다른 나라의 경우 (일본, 중국 등지) 에는 예나 지금이나 배를 만들 때 대부분 쇠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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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용합니다. 중국은 쇠못을 외판의 밖에서 안쪽으로 박아요. 일본은 반대로 외판 안쪽에 서 바깥으로 쇠못을 박죠. 이를 ‘구지못’이라고 하는데요. 일본 배는 외판이 얇습니다. 그 두께 의 최대치는 5cm에 불과하죠. 하지만 우리나 라는 9~10cm에 이르죠. 중국의 경우 외판이 5~7cm 정도 되고요. 우리나라를 제외한 나머 지 배들은 과거에도 모두 쇠못을 사용했어요.
바다의 항해자들이 모두 ‘날개’를 갖는 건 아니랍니다! 홍순재 선생: 일본 배의 역사는 임진왜란 이후 를 기점으로 점차 발전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 시대, 즉 백제라든가 신라 등 선진기술을 가진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건너가 조선기술을 전파 할 당시만 해도 일본은 그러한 선진문물을 받 아들이지 못합니다. 계속 통나무배의 역사에 머물죠.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부터 3세기 중반까지)에 중국의 조선기술이 일본에 전파되 지만 여전히 마찬가지였고요.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은 포르투칼 문명의 조선기술을 받아 들여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죠. 반면 우리는 조선시 대의 쇄국정책으로 조선기술이 발전하지 못하 고 침체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회화자료를 통해 전선이라든가 군 선, 판옥선 등 각 수군 진영에 배치된 배들을 보면요. 선미(배의 뒷부분)의 구조가 보입니다. 선미가 어떠한 형태로,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 는지 보이는 것이죠. 과거 역사 속에 존재한 배 들을 오늘날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걸 보면 선 미를 새의 깃털처럼, 꼬리처럼 만들어 놓았어 요. 지금까지 그것이 기본이라고 연구자들은 알고 있었죠. 하지만 전 이에 대해 궁금증을 품 었습니다. 처음 배를 복원하기 위해 선미를 관 찰하는 데 선미에 날개가 없는 거예요. 헌데 다 른 이들은 선미에 언제나 날개가 있다고 주장 하는 거예요. 참 이상했어요. ‘어째서 나와 다 른 생각들을 하지?’라는 의구심이 일었죠. 전 사람들에게 달리도선을 예로 들며 “달리도선 의 경우 외판 하나가 허공을 향해 쭉 뻗어 올라 가고, 날개가 없잖습니까. 그저 선미가 하늘을 향해 치솟기만 하잖아요.”라고 주변에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들 ‘잘못 안 것이다’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고요. 모두들 우리나라 고 선의 선미에는 날개가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했 죠. 날개 없이도 외판이 선미의 균형을 유지하 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전 포기하지 않았죠. 분 명 제 눈엔 모든 배들이 선미에 당연한 일처럼 날개를 달고 있는 건 아니었거든요. ‘좋아, 꼭 내 주장을 입증하고야 말겠다’라는 결심으로 자료를 찾기 시작했죠. 처음엔 제 말을 안 믿던 사람들이 제가 직접 달리도선을 복원을 해놓으 니까, 날개가 없다는 사실에 모두 순응하더라 고요. 날개란 말이 헛갈리시죠? 제가 그려줄게 요. <그림 첨부> 우리나라 배들을 보면 보통 이게 지금 현재 날 개라고 그래요~ 선박 연구자들은 보통 우리나 라 배들은 전부 날개가 있다고 생각해요. 거북 선이 가장 대표적이죠. 이제껏 다들 날개를 달 고 있는 모습으로 배를 복원해 놓았기 때문이 에요. 이처럼 단순한 궁금증, 물음표들을 통 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낸 사례가 또 있어요. 우 리나라 고선의 배 밑, 중앙에는 홈이 나 있어 요. 모두들 돛대를 꽂는 돛대 홈이라고 생각했 죠. 하지만 전 그게 돛대 홈이 아니고 구렛짝이 라고 생각했죠. 돛대를 양쪽에서 잡아주는 걸 구레짝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구렛짝을 돛대 홈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돛대가 박혔던 자리 가 아니라 촉이 그 안에 들어가는 거였는 데 말 이죠. 그렇게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을 증명해냈죠. 남도진: 배의 선미나 돛대 홈에 대한 기존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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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견과 고정관념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 요? 홍순재 선생: 1900년 이전, 거북선을 보면 선 미에 날개가 있었거든요. 날개가 있는 구조는 뭔가 그 기능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하지 만 제가 최근에 복원한 달리도선에는 날개가 없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직은 정확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배의 변천사는 대부
분 거북선, 판옥선, 조원선 등을 두고 논하죠. 조원선은 날개부분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거북선에는 실질적으로 날개가 있다고 봅니다. 왜구들이 배 안으로 넘어오려 할 때 그들의 침 입을 막았던 기능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용 맹한 기상을 보여주기 위해 선미 부분에 날개 를 치켜 올렸다고 보고 있어요. 하지만 고려시 대 배에는 그러한 날개가 없어요, 회화적인 자 료에서도 그 부분을 찾아볼 수 없죠.
중국배로 불린 ‘진도선’에 국적을 찾아주다 홍순재 선생: 1991년과 1992년 진도 벽파리에 서 발견된 통나무배가 있거든요? 제가 그것을 추정 복원해 봤어요. 다른 분들은 나무 수종과 배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넣는 동전을 통해 중국배라는 결론을 내렸죠. 허나 통나무배라고 하지만 그 안에 돛대받침과 격벽이 있어 사실 전 그러한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어 요. 의문이 남았죠. 우리나라 선박을 연구하시 는 분들이 만장일치로 벽파리에서 발견된 통나 무배를 중국배로 분류했죠. 여전히 무언가 의
중국배라는 다른 이들의 결정에 더 강한 의구 심이 일었어요. 그래서 일본의 선박 자료를 다 시 찾아보게 되었죠.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사 대, 야요이 시대..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일 본의 역사 속에서 통나무배가 사용되고 있는 거예요. 게다가 진도선과 동일한 구조였어요. 여목연합군 당시의 일본쪽 자료를 보면 진도선 과 너무 똑같은 배가 등장하는 거예요.
문이 남았던 저는 통나무배를 추정복원 해봤어 요. 복원을 하기 위해 조사를 해봤더니 중국에 는 그런 배가 없더라고요.
에 자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도선을 중국배 라고 판단한 거죠. 실은 우리나라에서도 진도 선에 사용된 녹나무가 자생하고, 일본의 후쿠 오카에서도 2미터 가량의 대형 녹나무가 자생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예전에는 자료를 교환하고 공유하는 데 국가간 장벽이 있었어 요. 그래서 이러한 오해가 생겨날 수도 있었죠. 하지만 저희 때는 일본, 중국과의 자료 공유가 보다 활발해졌고, 그 덕분에 진도선이 중국배 가 아닌, 일본배라는 사실도 밝혀냈죠.
쌍채도목배라는 배가 있긴 한데 시기적으로 벽파리에서 발견된 통나무배와는 엄청난 격차 가 있었죠. 진도선(벽파리 통나무배) 같은 경우 는 14세기 배에요. 하지만 쌍채도목배는 700 년대의 배이죠. 중국의 고선박 자료를 모두 훑 어보았는데도 그런 배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 요. 그런데도 다른 이들은 진도선을 중국배라 고 주장했죠. 단지 나무 하나, 기술적인 부분 만을 가지고 진도선을 중국배라고 하기엔 뭔 가 설득력이 없는 거예요. 분명히 일본의 경우 에도 동전은 동일하게 사용되거든요. 화폐를 만들 줄 몰랐던 일본은 물물교환의 댓가로 중 국으로부터 화폐를 건네받았는데 그게 14세기 무렵이거든요. 신안선(중국-일본 간 무역선)에 서 동전이 8톤가량 나왔어요. 어마어마하죠? 그 동전은 일본으로 가는 동전이었죠. 그 시대 에 일본과 중국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같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죠. 이런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나니 진도선이
헌데도 단지 진도선 제조에 쓰인 나무가 일본
하지만 이미 굳어진 오해를 바로잡기란 쉽지 않았어요. 선배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쏟아졌 죠. 왜 중국배를 일본배라고 하느냐는 제게 묻 더군요. 그래서 선배들에게 이렇게 말했죠. ‘전 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있습니다. 제 말이 틀렸다면 제가 납득할 만한 명확한 자료 를 가져오십시오’라고 말입니다. 헌데 한분도 자신들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자 료를 가져오지 않으시더군요. 제가 진도선이 중국배가 아니라 일본배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 해 자료를 모아 논문을 쓰니까, 또 항의가 핏발 쳤어요. 그래서 저 또한 역시 다시 외쳤습니다. ‘저만큼 자료가 있으면 가져오십시오!’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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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전 직접 고선을 복원하기도 하고, 전통 배 모형을 만들기도 합니다. 지속적으로 전통 배와 고선을 연구하는 분들이 드물거든요. 단 기간에만 연구를 할 뿐 다들 다른 분야에서 연 구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결국 제가 여목연 합군 당시의 일본자료까지 들춰가며 제 주장이 맞다는 사실을 입증하니, 그제서야 선배들이 모두 제 주장이 옳다고 순응하더군요. 결국 진 도배는 ‘동아시아에서 사용된 배’로 정의 내리
게 되었죠. 일본 학자들도 그동안 진도선을 중 국배라고 못 박아놓으니까 자신들의 배라는 사 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일본 측에 선박 연구에 대한 상황을 보고하시는 분 이 진도선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외부에 알렸 습니다. 덕분에 조만간 일본에 가서 진도선과 관련해 직접 강의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고집스런 그의 길 위에서 탄생한 ‘달리도선’ 남도진: 그동안 선후배 사이에서 자신의 신념 을 지키며 연구를 계속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특히 대다수가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본인의 신념을 지키셨는지 궁금합니다. 홍순재 선생: 저는 오히려 제 생각이 맞다고 여 기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크게 신경 쓰 지 않아요. 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자료를 수 집한 다음 배를 그대로 복원해내죠. 남들이 뭐 라 하든 뭔가 미심쩍다고 여겨지면 치열하게 몰두합니다. 제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자 료들을 최선을 다해 수집하죠. 끝까지 파헤쳐 서 찾아내고, 만들어서 다른 이들에게 보여줍 니다. 저는 지난 2007년까지 수중발굴과에서 고선박 파트를 담당했어요. 스킨스쿠버를 통 해 수중에서 출토된 유물을 직접 물속에 들어 가 살펴볼 수 있었죠. 물속에 들어가면 가장 먼 저 배의 원형을 확인합니다. 그런 다음 수중에 서의 촬영을 실시한 후, 이를 토대로 결과보고 를 준비하죠. 보통 선박이 발굴되고 난후 1년 뒤라야 보고서가 나오거든요. 그때가 되어야만 선박 연구자들이 난파선에 대한 구조를 자세히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수중 발굴 작업을 통해 다른 이들보다 먼저 자료를 접할 수 있었 죠. 2011년에는 그동안 우리나라 해양에서 발 굴된 여덟 척의 고려시대 선박에 대한 구조를 비교 분석했습니다. 완도선, 달리도선, 십이동 파도선, 안좌도선, 대부도선, 태안선 등등 고선 들을 구조별로, 시기별로 비교한 자료였죠.
홍순재 선생: 모두가 특별하지만, 그중에서도 달리도선에 가장 애착이 가요. 처음으로 복원 을 시도했던 신안선은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 았죠. 또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중국무역선이 잖아요? 발굴된 지역이 우리 해저이기 때문에 명칭이 ‘신안선’이라고 붙었을 뿐 우리의 고유 한 배가 아니죠. 달리도선이야말로 제가 그동 안 연구해온 배에 대한 성과를 토대로 삼아 총 체적으로 복원해낸 배에요. 따라서 그만큼 큰 애착을 품게 만드는 배이죠. 천천히 전시장을 돌며 달리도선을 들여다볼 때마다 감탄하곤 해 요. 정말 잘 생겼거든요. 난파선이 되기 이전엔 정말 아름다운 배였을 거예요. 우리나라의 전 통적인 배는 배밑판이 ‘ㄷ’ 모양의 사각형이 경 우가 대부분인데, 달리도선은 달라요. 활의 둥 근 곡선처럼 날렵하게 휘어져 있으면서도 상층 부로 올라갈수록 넓이가 넓어지죠. 섬세한 선 을 지녔음에도 안정감이 있는 모습이 사랑스럽 기까지 하답니다~(웃음) *달리도선* 고려시대 서해 바다를 항해했던 배로 침몰된 지 700여년이 지난 1995년 목포시 충무동 달 리도의 갯벌에서 발굴됐다. 달리도는 영산강 하구에서 서해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섬 이다.
남도진: 이제껏 복원해낸 고선들 중에 선생님 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배가 있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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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나무와 배를 통해 유구한 바다를 꿈꾸는 그의 시간들
나무향 따라 배를 찾아가는 길 홍순재 선생: 저는 오른손 손톱 둘을 잃었어요. 인테리어 할 때 전기드릴에 손톱을 깎였거든 요. 만약에 손을 상하지 않았다면 남들보다 뒤 쳐졌을 것 같아요. 손가락이 둘이나 깎이는 고 통을 맛본 후 오히려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작 업실인 모형제작실에 가면 다른 사람들은 날 카로운 기계 날이 무서워서 대패질을 과감하게 못하거든요. 근데 전 그런 두려움은 없어요. 그 만큼 나무를 많이 만지고 전기 공구를 자주 다 루다보니까 몸에 밴 듯 과감해진 것 같아요. 모 르겠어요. 나무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배 와도 인연을 맺게 된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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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진: 나무를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 거예요? 나무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함이 있나요? 홍순재 선생: 일단 나무 향이 좋아요. 대패질을 해서 나무에 결을 만들어 놓으면 갓난아이 살 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반질반질 윤이 나 거든요. 나무들은 저마다 특징이 있어요. 강한 나무, 약한 나무가 있고, 색깔도 다양하죠. 어 떤 나무는 노란색, 어떤 나무는 갈색, 검정색, 하얀색.. 제가 어렸을 때 동네 뒷산에 가면 감 나무과에 속하는 먹감나무가 있었거든요. 먹감 나무를 들여다보면 안이 까매요. 그걸 깎아서
할머니 지팡이를 만들어 놓으면 지팡이 색깔이 검고 노랗고 하얗고, 정말 오묘하거든요. 깎아 놓고 보면 전체가 까만 게 아니라 얼룩덜룩해 요. 어떤 강아지를 보면 얼룩무늬가 있잖아요? 대패질 후에 남은 대패 밥으로 지팡이를 닦아 요. 그럼 반질반질 윤기가 흘러요. 그런 윤기 가 일주일정도 유지되거든요? 일주일 후에 또 지팡이를 닦으면 반질반질 새것처럼 윤이 나는 게 마냥 재밌고 신기하더라고요. 당시엔 윤을 낼 수 있는 게 옻칠이나 니스라고 불리는 광택 제뿐이었죠. 또 먹감나무가 단단해서 오래도록 할머님께서 지팡이로 잘 쓰셨어요. 또 ‘홍송’이 라는 소나무를 깎아놓으면 나뭇결이 너무 고와 요~ 그 붉은 바탕에 시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니까요? 제가 나무에 미치게 된 건 나무가 가진 이러한 매력 때문이에요.
이랑 여느 개구쟁이들과 마찬가지로 마음껏 뛰 어놀았죠. 제 고향이 고흥 우주항공센터가 위 치한 곳인데, 그곳엔 이 씨 문중 산소가 있어 요. 묘를 비탈지게 쓰잖아요. 산소 주변에 있 는 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집으로 가져와요. 소 나무 도톰한 걸 잘라가지고 바퀴를 달아서 잔 디용 썰매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탔죠. 친구들 은 대부분 아버님들이 만들어주셨는데, 제 부 친께선 선주시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시잖아 요. 제가 장남이라 형들도 없고, 그렇다고 어머 님께 만들어달라 조를 수도 없고요. 그래서 동 네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잔디용 썰매를 만드는 걸 유심히 보았죠. 그런 다음 그걸 그대로 만들 어 냈어요. 그렇게 직접 썰매를 만들어 내니까 동네 어르신네들이 ‘어린 녀석이 별 걸 다 만들 어낸다’고 난리가 났죠.
예전에 목재직업훈련소 선생님이 통나무를 주시면서 대패질로 이쑤시개를 만들라는 과제 를 내주셨어요. 결국 이쑤시개를 만들어냈죠. 선생님은 대패질 기술을 연마시키기 위해 그런 과제를 주신 거였죠. 그 당시 기술을 연마한 덕 분에 능숙하게 대패질을 할 수 있게 된거죠. 대 패질을 쓱쓱-과감하게 해내면 대패 밥이 말리 지 않거든요. 대패질을 잘하니까 뭐든 빨리 만 들어낼 수 있었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낫 이나 톱을 들고 마을 뒷산을 누볐어요. 나무를 배어 새총이나 썰매 등을 만들었죠. 보통 학교 에선 방학과제로 뭔가를 만들어 오라고 하잖아 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저는 활을 만들어 갔어 요. (웃음) 남도진: 초등학교 1학년 때 활을 만들었다~ 어 렸을 때 친구들이랑 뛰어노는 것보다 나무 깎 는 걸 더 즐기신 것 같은데요? 홍순재 선생: (웃음) 아니요~ 어렸을 땐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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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박 복원가를 ‘아버지, 남편, 아들’로 둔 가족들.. 남도진: 혹시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만들어 준 적은 많으신지 궁금하네요~ 홍순재 선생: 애들이 셋이에요. 큰애가 어렸을 땐 연도 만들어주고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모 르겠어요. 아이들이 도시에 계속 머물다 보니 저 어렸을 때처럼 놀이도구를 만들어줄 기회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들이 방학과 제로 뭔가를 만들어가야 할 때는 제가 돕죠. 요 즘 음료수 병들이 흥미롭고 재밌는 것 같아요. 한 번은 음료수 병을 여러 개 연결해 잠자리를 만들어준 적이 있어요. 남도진: 자녀 분은 어떻게 되나요? 홍순재 선생: 딸 둘에 막내는 아들이에요. 아들 은 신기한 게 송곳 하나를 가지고 집안에 있는 가전제품은 모조리 분해해요. TV 리모컨, 로 봇 장난감 등 전부 해체해놔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거든요. 헌데 재밌게도 아직까 지 분해만 할 줄 알았지 조립은 못하는 것 같더 라고요. 딸들은 그림을 잘 그려요~ .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면 아이들에게 팽이를 만들어주고 구슬치기도 같이 하죠. 진이, 그러 니까 우리 큰애는 같이 뭔가를 만들기도 하면 서 놀이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특히 연을 자 주 만들어줬죠. 요즘은 딸들과 낚시를 즐기고 있어요. 남도진: 막내가 아빠를 닮았나보네요. 귀여운 데요?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분해해 놓은 것들 72 2012.March
을 조립할 수 있겠죠?! 아내 분은 선생님께서 난파선을 복원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또 그 외의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는 궁금하 네요. 홍순재 선생: 우리 집사람은 실은 사실 해양문 화재연구소 부속실에서 근무했어요. 한마디로 저흰 사내 커플이죠. 그래서 누구보다도 자세 히 제가 하는 일을 알아요. 그래서 인지 바빠 서 가족들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에도 집사람 은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아요. 헌데 아버님은 제 가 전통배 모형을 만들거나 고선을 복원해놓으 면 진수식까지 보고 가세요. 어머님께선 전화 로 안부만 물으세요. ‘고생했다, 잘했다.’ 그러 시죠. 제가 간혹 모형실에서 뭔가를 만들잖아 요? 그럼 딸들이 이렇게 물어요. ‘아빠 왜 집에 서는 아무 것도 안 만들어?’ 라고 묻죠. 그 말 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밖에서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도 집에 서 필요한 건 아직까지 안 만들었더라고요. 테 이블 하나도..(멋쩍은 웃음) 남도진: 따님들이 서운해 할 만하네요~.(웃음)
배를 통해 ‘삶’을 개척하길 원하는 후배들에게 남도진: 우리 전통배들에 관해 혹은 고선 복원 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남기신다면요? 홍순재 선생: 기본적인 지식만 가지고 너무 앞 서가지 않았으면 해요. 정말 한 번 배를 만들어 보고 한 번 더 선박기술에 대해 연구해보고, 확 보한 자료를 통해 정확하게 사실 여부를 확인 한 다음 선박 연구가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 해 줄 수 있는, 그런 후배들이 되었음 좋겠어 요.철저히 준비하고 깊숙이 파고들라는 거죠. 또한 고선박 복원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에 후배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으면 해 요. 전통선박을 복원할 때 목재로 인한 부상이 따를 수 있거든요. 나무가 튕겨져 나오거나, 선 체에서 떨어지거나, 못에 발이 찔릴 수도 있고 요. 특히 모형을 제작할 때는 전기공구들이 위 험하니까 더욱 조심했으면 좋겠고요. 제가 지 나온 시대보다 더 좋은 시대잖아요. 컴퓨터가 대중화 된 만큼 다양한 데이터를 찾아내 선박
연구가들에게 상세히 알려줄 수 있는.. 최고의 인재들이 국립해양유물연구소에서 자부심을 느끼며 연구와 복원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후배들이 부각시켜줬으면 좋겠어요. 남도진: 고선박 복원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고 느껴지네요. 오히려 좁은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젊은 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요? 홍순재 선생: 목포 마리아고등학교에 선박 과 학 동아리가 있어요. 제가 그 학생들을 대상으 로 네 번 정도 강의를 진행했었죠. 처음에는 아 이들이 거북선, 이순신 장군, 해상왕 장보고, 장보고선 등을 떠올리며 영웅심에 빠져 으스대 더라고요. 아이들이 잔득 기대를 품고 제가 일 하는 현장엘 찾아오기도 했었죠. 헌데 녀석들 이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대부분 실망을 하는 거예요. 모형 배를 제작할 때는 먼지가 장 난이 아니거든요. 톱밥이 일으킨 온갖 먼지를
작업자들이 전부 들이마시는 거죠. 나무도 대 패질하고 자르는 과정이 위험하죠. 노상에서 목수님들이 춥고 힘들게 톱질하고 일하는 모습 을 보고는 아이들이 크게 실망해서 돌아가곤 했어요. 허나 선박 연구가들이나 제작자 들 모두 나름 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선박에 대한 연구와 제 작을 진행하고 있거든요. 선박은 우리나라에 서 소외된 학문 중의 하나에요. 배가 없으면 유 물도 없고 우리나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 박에 대해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드물어요. 힘 들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후배들에게는
들은 고생스런 제작과 연구를 병행하지만, 지 금 세대들은 컴퓨터를 활용해 모형을 만들어내 는 것이 가능해요. 컴퓨터를 통한 정교한 예측 을 통해 모형을 깎고 다듬어 낼 수 있죠. 전 후 배들에게 그래서 그런 공부를 하라고 일러주 죠. 배가 가지고 있는 구조해석이라든가, 조선 공학적 분석을 통해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나가 면 오히려 충분히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고 말해주죠. 또한 외국에 언제든지 나가 우리 나라 배가 간직한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요. ‘너희들 생각해봐라. 닐 슨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하지 않았 느냐, 영국의 닐슨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존경
‘고생하는 분야가 있으면 연구하는 분야도 있 다’라고 말해줍니다. 저와 지금 함께 일하는 분
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선박이 그만큼 우수 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하고 강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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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박 복원가 ‘홍순재’의 내일은? 남도진: 현재 선박 용어들을 일본식 표현에서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시라면서 요? 앞으로 고선 복원가 ‘홍순재’ 선생님의 꿈 은 뭔가요?
이라고 생각합니다. 삼면이 바다지만 국내에서 배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는 이들은 정말 소수 에 불과해요. 이제껏 우리가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건 배가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기 때문인데, 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죠. 우리는 홍순재 선생: 저는 우리나라의 고선박 전문가 스스로를 향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가 되기 위해 계속 달려갈 겁니다. 난파된 배를 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들어 요. ‘난파선은 잘못 지어져서 좌초된 것이 아니 앞으로 제 꿈은 조선장인은 못되더라도, 한선 라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라는 느 기능전승자로서 우리나라 선박을 널리 알리고 낌이 들죠. 배가 바다에 침몰한다는 건 무척 불 싶다는 거예요. 또 후배들에게 우리나라 선박 행한 일이지만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우리의 에 대한 많은 자료를 남기고 싶습니다. 손길을 기다려 준 건 정말 고마워요. 해양의 역 사로 다시 태어나 우리에게 선조들이 살던 바 다와 그들의 꿈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잖아요. 난파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선조들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 를 만난 것이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요. 우리나 라 전통배를 연구하고 고선을 복원해 조선기술 을 밝히는 일은 그 자체로 역사를 되살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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