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dream aut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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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Ⅰ Vol.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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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10주기 추모의 밤, 시 전집 출간기념회 2013. 3. 8 문학의 집ㆍ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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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기 추모의 밤 행사 전경 신달자 시인협회 회장 추모사 이제니시인 추모공연 조병화 시인의 자제들에게 시 전집을 헌정하는 박철원 회장 김정옥 예술원 회장 추모사 감사패를 받는 김종회 시 전집간행위원장


2013 가을Ⅰ Vol.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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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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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와 그림

편운문학상 시터

솔개

제11회 수상자ㆍ정호승, 이성호, 박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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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시인의 초상ㆍ이근배

때때로 수시로 나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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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최동호 시인 편ㆍ김종회

70년대 말 그려주신 장발의 캐리커처, 제자의 얼굴 옆모습ㆍ허형만

13 컬처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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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동산ㆍ이승신

제8회 편운 시 백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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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입상작·입상소감

조병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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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의 시학ㆍ이재복

『꿈』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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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맛있다ㆍ크라운 해태제과 윤영달 회장

제23회 편운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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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수상소감

조병화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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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님 조병화ㆍ조진형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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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한 장의 사진

23 명사가 만난 조병화

54세의 나이에 럭비 경기를 즐기는 조병화 시인

편운이 있어서ㆍ유 호

표지Ⅰ제자·그림_조병화

2013 가을Ⅰ Vol. 16

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박 준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우)110-530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poetcho@naver.com 디자인 GNA Communications (02) 395-2782 인쇄 예작만들기 발행일 2013년 9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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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화보 글 우수상 제23회 편운문학상 시상식·제10회 조병화 시 축제

제23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2013. 5. 4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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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인 내외와 김귀영 안성시 행정복지부장 이재복 평론가와 박철원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장 제23회 편운문학상 단체사진 축사를 하는 현길언 소설가 제23회 수상자 김기택 시인과 이재복 평론가 축사를 하는 문학과지성사 주일우 대표 묵념하는 내빈들


제10회 조병화 시 축제 2013. 5. 3 ~ 4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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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꿈나무 시낭송 대회 기원정사 어린이 음악공연 조병화 10주기 시와 그림전 안성 시 읽는 날 행사 조병화를 추억한다-조진형 관장 강연 제8회 편운 시 백일장-상장을 수여하는 이형권 교수 편운 퀴즈 대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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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시와 그림 솔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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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시인의 초상 이근배

제20회 편운문학상 시상식에서 축사를 하는 이근배 시인

내가 편운 조병화 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1958년 늦가을, 서울 소공동 미공보원 강당에서였 다. 한국자유문학자협회가 주최한 대학생시낭송대회에서 나는 박이도와 서라벌예술대학 대 표로 출전했었는데 편운 선생은 모윤숙, 양명문 시인 등과 심사위원으로 나오셨었다. 나는 시 <포성에 울고 간 허공에>를 읽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 까닭을 나는 그 당시 문학단체가 한국문학가협회와 한국자유문학자협회로 맞서 있었는데 서정주, 박목월 등 우리 쪽 교수들이 심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자위했었다. 돌아보니 그때 편운 선생은 30대 후반이셨고 중앙대에서 강의를 하실 때였다. 입상한 제자 에게 호탕하게 웃으시며 격려를 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정작 편운 선생을 자주 뵙게 된 것은 1966년 내가 중앙출판공사 편집장으로 선생님을 저자로 모시면서부터였다. 선생은 시인이셨다. 내가 시를 배우고 신춘문예에서 나를 뽑아주신 이병기, 이희승, 서정 주, 박목월, 조지훈…… 그런 시인들과는 사뭇 다른 시인이었다. 얼굴과 키와 기타의 외모에 서부터 베레모, 파이프, 서구풍의 의상, 구두…… 시골뜨기 내가 막연하게 그리던 바로 그 ‘시 인의 초상’ 이었다. 어느 날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생활의 강> 졸시 원고를 보여드렸더니 “야 오장환의 <병든 서울> 보다 좋다”고 덕담도 크게 하시고 김광주, 유호 선생과 자주 가시는 무교동 낭만에 어쩌 다 들리면 “야 근배한테 맥주 서너 병 갖다 줘라”고, 궁색하고 찌든 대포집의 풍속화가 아니라 맨해튼 거리나 샹젤리제의 어느 카페에서 만날 수 있는 렘브란트 풍의 유화속의 신사였다. 스케치북을 언제나 펼치시고 유화전, 시화전, 해마다 한권씩 나오는 시집들…… 시인은 누 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를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실천으로 빈틈없이 사신 오직 한분 시인이 편운 선생이시다. 2013 + Autumn


제10회 편운문학상 시상식에서(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이근배 시인, 다섯 번째가 조병화 선생)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 어머님께 돌아왔습 니다.” 안성 편운재는 지금은 선생의 문학관이 되었지만 그 집은 선생이 어머님의 묘소를 지키 는 사당이었고 묘막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자주 고향에 내려가서 성묘를 하고 제사 를 올리고 시인들을 불러다가 잔치도 열고. ‘편운재’는 이 시대의 효자정문이 아닐까? “근배야 10회다 10회!” 편운문학상을 내게 주시면서 전화로 하신 말씀이다. 10회의 의미를 얹혀주시는 사랑, 1989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 피노키오를 공연하는 극장 안에서 “근배 너 나 죽으면 조시 써줄 꺼지?” 내 못난 글 솜씨까지 챙겨주시고, 속리산 관광호텔 테라스에서 스케 치북에 그려주신 얼굴, 그리고 손수 액자까지 맞춰서 내게 가져다주신 물든 플라타너스를 그 린 유화 「제비 떠날 무렵」(1972.10)을 나는 머리맡에 걸어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에 엄격하기가 서릿발 같던 그 올연한 자존의 선언! 편운 선생의 가르 침을 이제 누가 따를 수 있을까? 펜과 붓과 원고지와 화선지와 캔버스를 두고 떠나신지 어느 덧 10년. 나는 이번에 「한국대표명시선100」의 편집을 하면서 시선집 「사랑이 가기 전에」 표지 화로 파이프를 물고 있는 편운 선생의 초상화를 윤문영 화백에게 그리게 했다. 선생이 보시고 또 무슨 덕담을 주실까? 꾸중도 한번쯤은 듣고 싶은데.

이근배 시인.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1961~64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 5개 일간지 시, 시조, 동시 신춘문예 당선. 주요 시집으로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시조집 [동해바닷속의 돌 거북이 하는 말] [달은 해를 물고] 장편서사시집 [한강] 등이 있음. 현재 공초숭모회 회장, 만해학교교장, 신성대학교 석 좌교수, 대한민국예술원회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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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최동호 시인 편ㆍ김종회

문학이 이끄는

새로운 삶의 길

최동호 시인. 문학평론가.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1948년 경 기도 수원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 경남대・경희대・고려대 교수로 재직. 1979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꽃, 그 시적 형상의 구조와 미 학」이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황사바 람』, 『아침 책상』, 『불꽃 비단벌레』 ,『얼음 얼굴』 주요 저서로는 『현대시의 정신사』, 『불확정시대의 문학』, 『한국현대시와 물의 상상력』, 『디지털 코드와 극서정 시』 등이 있음. 평론 부문으로 소천문학상, 김환태문 학상, 편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시 부문으로 현 대불교문학상, 고산 윤선도문학상, 박두진 문학상 ,유 심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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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 (이하 김): 바쁜 일정 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

을 산다는 게 뭔가, 이런 것을 많이 배웠고, 조병화 선생님께

서 감사합니다. 먼저 올해 정년을 맞으셨는데 이미 언론에도

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이 시절 만난 이들과 함께 제

보도 되었고, 또 제자들이 뜻있는 자리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문학적 인생도 함께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년을 맞는 특별한 감회 가 있으실 텐데……

김: 선생님께서 경희대학교로 처음 오셨을 때, 저희 학번은

대학원에 진학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평론 분야 최동호 (이하 최): 예,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년을 언제라고

는 경희대 안에서 불모지와도 같았습니다. 시인, 작가는 200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을 해왔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어

명 가까이 배출 되었지만 전문적으로 평론을 하는 이는 없었

요. 과거에는 정년을 한 것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인식 되

던 때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무렵 문학이론을 공부했

었지만, 근래에는 정년 이후 자신만의 소중한 시간들을 갖거

던 이들이 선생님이 안계셨으면 길잡이를 얻을 수 없었던 시

나 이전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지요. 저도 앞으

절이었습니다.

로의 시간들을 보다 더 생산적이고 의미 있게 보낼 계기가 무 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대학원 수업에 한 30~40명 학생이 앉아있는 그 가운데 신봉승 선생님, 또 故김용성 선생님, 전상국 선생 님, 정호승 시인, 박남철 시인, 박덕규, 서하진, 하응백, 문흥

김: 선생님처럼 세 대학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신 사례를

술 등 강의실 절반 이상이 한국문단에서 이름을 내 놓으면 알

한국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경남대학교, 경희대학

수 있는 사람들이었죠. 그때가 문학적으로는 참 행복했고 경

교, 그리고 고려대학교.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은 많은 문인들

희대학교의 문학적 풍토 가운데 새로운 르네상스를 경험했

이, 또 학자와 교수들이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어 고려대학교로 옮기신 이

세 대학에서의 일들을 특히 기억에 남는 순서대로 간략하게

후 또 그곳에서도 많은 시인 작가 평론가들을 문단에 내보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셨는데, 고려대학교에서 나온 문인의 숫자가 대략 얼만지 기 억하십니까?

최: 세 대학에서의 시간이 모두 제게 의미 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때마다 좋은 제자들을 만나서 저 자신도 많은 공부

최: 고려대학교에 가보니까 경희대학교만큼 창작의 열기

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남대학교에는 갓 서른을

가 강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려대학교는 학술 분야의 연

넘긴 나이에 교수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 만난 사람들과는

구가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려대학교에 가서 ‘안암문

30년 넘게 우의를 다져오고 교류를 하고 있지요. 특히 처음 시

예창작강좌’를 만들어서 중진 시인이나 신진 시인들을 초대

작한다는 의미에서 저로선 매우 뜻이 깊었어요. 그래서 짧은

해서 학생들과 같이 교류하면서 창작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

시간이었습니다만 많은 의미 있는 일들이 처음으로 이루어졌

게 했습니다. 제가 1988년 3월에 고려대학교에 갔는데, 그것

습니다. 경남대학교에서 2년 반을 머물다가 이후 경희대학교

이 축적되면서 1990년대부터 시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로 옮겼습니다. 사실 학부 시절 경희대학교에 우연히 놀러갔

처음에는 10년 단위로 두세 명 나오던 분위기에서 일 년에 서

다가‘바로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 곳이 있었어요.

너 명 나오는 분위기가 형성이 됐고, 현재 대략 60~70명, 그

나중에 보니 그 곳이 교수회관 건물이었더라고요.

이전에 등단했던 분들까지 합하면 고대 출신 시인은 100여명

30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7년 정도의 시간 동안 학생들과

안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서로

그분들이 현장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풍요로

같이 공부하며 함께 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경희대학교로

워졌죠.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사람은 문태준, 권혁웅, 여태천,

막 옮겼을 때 저는 문단에서 아직 이름이 알려지기 전이었어

장만호, 장석원 이런 시인들을 필두로 해서, 최근에는 2011년

요. 물론 학교에는 이미 유명한 문인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특

『조선일보』로 등단한 신철규 시인까지 해마다 최소 두세 명

히 황순원 선생님을 만나면서 문학이라는 게 무엇인가, 인생

의 시인 평론가가 등단을 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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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최동호 시인 편 . 김종회

김: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정년을 맞이하시면서 여기에 이 르시도록 걸어온 교육자의 길에 대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이

름대로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이제는 학계에서 사 용하는 일반적인 용어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번에는 학자요, 문학 평론가로서 한국 문단에 또는 학계에 여 러 가지 업적을 남기셨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 질문을 드

김: 한편 선생님께서는 우리 문단에서 극서정시라고 하는

리고자 합니다. 특히 정지용에 대해서 관심 많이 가지고 계

용어 또는 장르를 개발하고 실제로 시를 쓰시기도 하셨는데,

신데요.

극서정시에 대해 잠시 말씀을 해주시겠어요? 최: 2000년대 특히 2010년 최근 3~4년 동안의 우리 시는

포스트모던의 뒤를 추종하는 해체시가 유행함으로써 시가 지 나치게 방대해지고, 난삽해졌습니다. 그리고 미래파라고 지 칭되는 시인들의 시 속에는 미래 지향적인 전망이 없는 것으 로 느껴져서 이것을 평론가로서 가만히 보아서는 문제가 있 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서정시의 본류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의 본질은 짧은 것이 다, 그리고 군더더기 말을 방만하게 해서 소통을 어렵게 하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니다, 그래서 무슨 새로운 서정이니 하면 용 어가 길어지니까, 서정시 중에서도 짧고 고도로 집약된 서정 시를 지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IT시대를 살고 있고 최: 네, 1970년대 초반에 안국동 경문서림에서 처음 지용

스마트폰 속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는데, 거기에 집약될

시집을 구해서 읽고 흥분된 마음과 문학적 떨림을 경험했어

수 있는 짧은 시가 바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에 부답하는 서

요. 정지용에 대해서 최초로 논문을 쓰기 시작한 것은 경희

정시다, 이런 생각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대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지용의 장수산과 백

극서정시라고 할 때는 시의 밀도와 깊이가 있어야 의미 있

록담』이라는 논문이었어요. 논문의 주요 논리는 정지용이 지

는 시가 된다는 뜻도 포함돼 있습니다. 극서정시에서 한걸음

닌 특징이 초기의 감각적인 시에 있는 게 아니라 후기의, 백

더 나아가서 제가 고민한 것은, 극서정시 속에 어떤 것이 있

록담에 수록된 산수시편에 있고 산수시편이 있음으로 해서

어야 독자에게 감동을 주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지난해 발표

정지용은 고전적인 정신을 현대화시킨 시인이 되었으며 그

를 했습니다만, 연구 끝에 제가 답을 구한 것은 ‘서정시의 삼

것을 통해서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

각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정적 주체가 있고 주체로부

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정지용에 대한 연구 논문을 15편 발표

터 분리된 대상이 있고 이것을 매개해주는 어떤 꼭짓점이 있

했습니다.

고 이렇게 해서 이 3개가 긴장과 밀도를 이룰 때 짧은 시 속에

이것을 모아 최근에 『정지용 시와 비평의 고고학』이라는

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저서를 냈는데, 정지용 시는 저에게는 필생의 연구 대상이었

역사적으로 유명한 시들은 대부분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지

고, 정지용 시를 통해서 시를 보는 눈, 사물을 보는 눈, 시를 쓰

만 그 속에 이런 삼각형 구도가 들어 있어서 시적 감정의 밀도

는 법, 이런 것들을 다 배웠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지용

와 깊이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 제가 생각한 바입니다. ‘서정시

사전』을 2003년도에 냈고 이어서 2008년에 『정지용의 생애

의 삼각형’ 이론이 극서정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의 구

와 문학』이라는 평전을 간행했으며 이번에 정지용 시에 대한

조적인 문제로, 흔히 하는 말로 개별적인 연구, 특정 시인론에

해석과 자료 섭렵을 종합한 15편의 글을 묶은 책을 냈지요. 정

서 일반 이론으로 나아간 그 지점이죠.

지용 3부작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저는 ‘산수시’ 나 ‘정신주의’ 라 하는 비평적 용어를 문단이나 학계에 내놓았고 그것이 나 2013 + Autumn

김: 학자로서 문학평론가로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


갈 데 없는 시인이세요(웃음). 대학원 시절에 『황사바람』이라 고 하는 시집을 내시고 그 이후에 한동안 공백이 있었지만 지 속적으로 시를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시인이셨다 가 이론가로 가셨다가 다시 시인으로 회귀하셨는데, 시인으 로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지금 다른 이론적인 일들 에 비추어 볼 때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하셨고 시가 무엇이 며, 앞으로 어떻게 시를 쓰실 것인지요? 최: 오갈 데 없는 시인이다, 그 말이 상당히 나한테는 흥미

롭게 느껴지는데 그것이 내 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 같 시면서 오랜 세월 동안 한국 문학의 중심에 계셨는데 혹시

기도 합니다. 제가 원래 국문학을 시작한 것은 시를 쓰고 싶었

한국 문학이 또는 문학평론이 고수해야 될 방향성이라고 할

기 때문이죠. 그러나 누구나 다 그렇지만 자기가 쓴 시를 누

까 어떤 지침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말씀 해 보시면 어떠실

구에게 선뜻 보여줄 만한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

까요.

니잖아요. 그러니까 평론이라는 가면 뒤에서 시를 쓰게 되었 습니다. 시는 군대시절의 철책선 밑에서도 시를 썼고, 대학원

최: 최근의 문학평론을 읽고 있으면 젊은 평론가들이 무엇

시절에서도 썼고, 교수가 된 다음에도 썼고, 그래서 시작 노트

을 말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한 가

도 사실 많이 있어요. 하지만 우선 급한 게 공부였기 때문에

지는 그분들이 비평가적 방향성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 회

공부에 집중했습니다.

의가 드는 경우도 많아요. 물론 문장은 화려하고, 아는 지식

이제 대학에서 물러나게 되니까 좀 더 자유롭게 학문으로

도 많고, 그렇지만 너무 근시안적이지 않느냐, 좀 더 멀리보

부터 보다 더 성숙된 시인으로서의 길을 더 열심히 가야 되

고 깊게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창작을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알겠

저 자신도 부족한 게 많습니다만 비평가적 사명감이라고 할

지만, 잘 안되긴 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시를 공부하는 것

까요, 그런 것이 없이 눈앞에 보이는 것을 눈앞의 현실로써만

보다 훨씬 재밌어요. 그래서 그런 재미에 깊이 빠져볼까, 하

얘기하는 비평가라면 그것은 멀리 가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고 있습니다.

항상 정도에 입각한 비평, 그것을 밀어나가는 비평이 중요하 다고 생각합니다.

김: 저도 문학평론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만, 평론가들은 문

그래서 극서정시니 ‘서정시의 삼각형’이니 이런 것들은 모

학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드물고, 시인은 좋은 시 한편만

두 다 시의 근본을 생각하면서 제기한 것이지, 별다른 주장

으로도 문학사에 영구히 회자되는 이런 사례들을 볼 수 있었

을 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젊은 사람들은 동시대의 것 에 대해서밖에 관심을 갖질 않아요. 선배들이 무엇을 얘기를 했고 이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 하고 그러한 비평만이 앞으로 더 멀리 갈 수 있는 비평일 것 입니다. 김: 지금 저희가 대담을 하는 장소는 한국 문단의 큰 시인

이셨던 편운 조병화 선생님께서 쓰시던 거실입니다. 매우 뜻 깊은 자리에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지금까지 학자와 평론가 로서의 생각을 여쭤보았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 근자에 오 10 + 11


고 있고 그 지역에 가면 상당히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젊어지 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또 자유롭고, 어렸을 때 느꼈던 공기 와 흙과 바람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것 같고, 또 마침 그쪽 지 역의 주민들이 상당히 호응하여 와달라고 하는 요청도 있었 습니다. 이런 계획들이 우선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데 저도 이런 느낌으로 고향인 수원으 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김: 초심을 초지에서 처음 땅에서 회복하시는 것…(웃음).

최: 일단 거기가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니까 서울이라

는 복잡한 도시에서 복잡한 문단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 고 그렇습니다. 『서정시학』이나 ‘시사랑회’는 모두 20년 넘게 제가 공들여서 해왔던 일들인데, 특히 『서정시학』은 시 전문 계간지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계간지가 되었다 라고는 얘 기를 합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떻든 좀 더 내용 있고 풍요로운 잡지로 만들어 나갈 것이 고, 편집위원이라든가 주간 제도를 도입해서 젊은 층으로 세 대교체를 해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사단법인 시사랑협의회’ 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시는 시가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는 김달진문학상과 김달진문학관, 김달진문학제와 더불어 시

길이길이 읽히는, 그래서 평론가, 교수로 기억되시기보다 시

작된 것인데, 예전보다는 활동 반경이 많이 좁혀들었습니다

인으로 기억됨으로써, 물론 그렇게 되면 그 이전에 있었던 다

만 이것도 20년 넘게 해왔고 적절한 시점에서 세대교체가 이

른 직함들도 자연히 따라갈 테지만, 문학사에서 우리가 훌륭

뤄져야 할 것 같아서 좀 더 발전적인 방향이 무얼까 고민하

한 시인 한 분을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여쭤보고 싶은 것은 정년이라 는 단계를 지나시면서 여러 가지를 정리하셔야겠습니다만,

김: 예, 선생님 얼굴을 뵈면 여전히 열정이 넘치시는데 물

그래도 그 동안에 지속적으로 해오시던 일들에 대해서 앞으

려준다거나 하는 말씀은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이 많을

로도 생각들이 계실 텐데, 수원에서 시창작 강좌도 시작을 하

줄 생각 됩니다. 아무튼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

셨고, ‘시사랑회’를 끌어 오셨고, 『서정시학』도 좋은 문예지

하고 선생님께서 그동안에 이루신 많은 일들, 앞으로 해나가

로 정착을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이 아직도 선생

실 일들 이 모든 일들 위에 행운이 넘치고 서광이 함께 하시

님 앞에 있습니다. 정년 이후에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실 것

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건강

인지요?

하셔서 많은 후학과 제자들이 선생님의 길을 행복한 마음으 로 따라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긴 시간, 좋은

최: 정년 하면서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초

말씀 감사합니다.

등학교를 졸업한 그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첫 번째 과 제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갈 수는 없겠지만 일단 책을 옮기

최: 예, 감사합니다.

김종회 문학평론가. 1955년 경남 고성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주요저서로 <위기의 시대와 문학> <문학과 전환기의 시대정신> <문학의 숲과 나무> 외 다수. 김환태평론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 2013 + Autumn


컬처에세이 편운동산 이승신

편운동산 조병화시인의 묘 옆에 앉은 이승신 시인(2013. 5. 4.)

화창한 5월 안성, 시인 조병화 선생의 고향집을 찾았다. 가

주십사 청을 했으나 한 줄의 시를 외국어로 옮기는 것은 불가

신 지 벌써 10년. 그 10주기를 시인들과 그를 사모하는 이들

능하다고만 하시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할 수 없이 내가 들

이 모였다. 정말 부지런하시어 일생 시집만도 52권을 내신 게

어서 일어 번역을 하는데 무려 4년이 걸린 적이 있다. 책 뒤의

우선 놀랍다. 부러운 것은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대한민국 금

추천 글을 조병화 선생께 부탁했고 어머니의 내용을 잘 알아

관문화훈장, 세계시인 대회 계관시인으로 생전에 고향 집을

쓰신 걸 보면 그간 서로 교류가 있으셨던 게 분명하다.

3천 평으로 늘리어 거기에 손수 문학관을 지었고 자신의 문

어머니의 방 벽에는 조병화 시인의 유고슬라비아의 아카

학상을 제정하시고 많은 제자를 길렀을 뿐 아니라 고향의 어

시아 그림이 걸려 있기도 했다. 손호연 시인의 한국어 시집

린 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었고 가신 후의 일을 미리 혼자 다

『찔레꽃 뾰족한 가시 위에 내리는 눈은 찔리지 않으려고 사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하시고 싶은 것 원

뿐히 내리네』의 출간기념회가 2002년 10월 <손호연 시인의

없이 다 하시고 사랑, 존경 다 받으시고는 이제 고향집 뜰에

집>에서 있어 다시 또 혜화동 시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그

수십 년 그리시던 어머니 곁에 나란히 누워 계신 복 많은 분이

날 축사를 해주십사 하니 목을 잘 못 돌리시며 아파서 할 수

다. 물론 근현대 어려운 시절을 사셨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

가 없다고 하여 그리신, 바닥에 놓인 그림들을 찬찬히 돌아보

려 피나는 노력을 하셨을 것이다. 너무 쉽고 시의성이 부족하

고는 아쉽게 헤어졌고 그리고는 몇달 후 조병화 선생은 불현

다는 일부 비난도 있었으나 그 서정성과 실존을 사랑하는 아

듯 가셨다.

름다운 시구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순수한 마음으 로 돌리는데 큰 공헌을 하셨다.

지난 해 아드님 조진형 박사가 혜화동 집을 안내하여 시인 의 침실과 그리신 그림들을 보고 시인의 무대인 혜화동 빵집

나도 그 덕을 보았다. 미국에서 20여 년, TV 방송일과 신문

밥집 우체국 작업실 등을 바라보며 그리고 가끔 이렇게 안성

에 글을 썼고 당시 한국의 시인도 제대로 몰랐을 때인데 하

시인의 집 무덤 앞에서 나만 아는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며 그

루는 신문에서 국제 펜클럽 서울대회 재정위원장 조병화라

열정과 감성 그리고 그 영성의 힘을 느껴 본다. 내 식탁 위에

는 기사를 보고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가 갑자기

는 시인이 그린, 보랏빛 하늘을 배경으로 한, 두 그루의 나목

가시고 어머니가 쓰러지셨는데 평생 시를 쓰신 분이 몇 해 시

이 앞면에 있고 그뒷면에 1989년 11월 21일 조병화 라고 쓰여

를 놓고 계시니 연락하시어 국제 펜 대회에 같이 가주십사 하

진 빛바랜 엽서가 꿈인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며 어머니는 한국에서는 모르나 일본에서 대가로 알려져 있 다고도 했다. ‘편지 감사합니다. 어머님에게 곧 연락하겠습니

님은 가신 뒤에 시인의 부군다워라, 들국화에 묻혀서.

다’ 라는 엽서가 워싱턴 내 집으로 왔다. 걸핏하면 입원을 하 실 제여서 펜대회에 가셨다는 말은 못 들었으나 ‘참 효녀 딸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삶인가, 그 길을 헤맬 때 나는

을 두셨네요’ 라고 하셨다는 말을 많이 좋아지신 어머니에게

그저 뜰만 거니네.

후에 전해 들었다. 귀국 후 구상 시인을 여러 해 찾아가 어머니 시집을 번역해

손호연 시인의 단가 2수

이승신 시인. 1949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시집으로 『치유와 깨우침의 여정에서』, 『숨을 멈추고』, 『오키나와에 물들다』, 단가집 『삶이 어찌 꽃피는 봄날만 있으랴』 등이 있음. 현재 손호연단가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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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동일성의 시학 이재복

조병화의 시편들은 대부분 정감적이다. 이러한 정감은 무

주소이자 시인의 하늘, 시인의 사막, 시인의 물터, 시인의 등

엇보다도 그의 ‘말하듯이 쓰는 화법’에서 기인한다. 그의 시에

우리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곳에서 관용과 망각, 쓸쓸한 포기,

서는 문자적인 해독에서 비롯되는 피로함 같은 것이 없다. 말

구름을 배운다. 이런 점에서 “이곳은 나의 먼 귀향”인 동시에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쉬운 언어로 자연스럽

“나의 휴식”인 것이다.

게 풀어내기 때문에 그의 시를 읽으면 우선 마음이 평온해지 고, 그의 말하듯이 들려주는 세계에 쉽게 감염된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해 보이는 인간이 가지는 정서적인 귀착지인 고향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당연해 보이는 것이야

말하듯이 편하게 화법을 구사하면서 그의 시는 철저하게

말로 정서적인 보편타당함의 거처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드

자기 고백적이고 또 자기독백적이다. 하지만 묘한 것은 그 자

러내는 이 정서적인 보편타당함의 또 다른 대상으로 어머니

기고백이나 독백이 정서의 독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를 들 수 있다. 21집은 시집의 표제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통

을 읽은 사람과 대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

해서도 드러나지만 시집 전체가 어머니에 대한 회상과 반추

기 고백적이고 자기 독백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는 서정성

로 되어 있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존재

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동일성의 시학의

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길러준’

범주에 포함된다. 동일성의 시학이 겨냥하는 것은 자아와 세

이라는 차원의 의미이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인

계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그것의 화해이고 융합이다.

도자이고 구원자이다. 우리가 어렵고 슬프고 무서운 일을 당

그의 시를 읽으면서 쉽게 정서적인 공감을 얻는 이유가 바로

했을 때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듯이 시인 역시 그렇다. 「눈에

여기에 있다.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지금은 제 귀 깊은 곳에」, 「해마다 봄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어떤 정서적인 보편타당함 같

이 되면」같은 시편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눈에

은 것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정서적인 보편타당함은 어떤 이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를 보면 시인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성적인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자체가 자연스

보내고 삶의 힘겨움 고단함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본

럽게 하나의 정서적인 아름다움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능적으로 어머니를 불러낸다. 어머니가 시인에게 말한다. “

따라서 내 생각으로는 그의 시의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

얘, 너 뭐 그리 생각하니/사는 거다/그냥 사는 거다/슬픈 거,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시가 이러한 정서적인 보편타당함(내

기쁜 거/너대로/다 그냥 사는 거다/잠깐이다”라고. 물론 이것

용)을 말하듯이 쉽게 들려주고 있다(형식)는 것을 의미한다.

은 시인의 독백이다. 시인은 어머니를 통해 시인이 가지는 어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의 이 정서적인 보편타당함이라는 것은

려움, 슬픔, 무서움 같은 삶의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려고 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가령 「때때로 돌아와」를 보자. 이 시에

다. 즉 어머니는 나의 결핍과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게 하여 삶

서 인간이 가지는 근원적인 본능인 향수에 대한 정서가 짙게

의 평형감각을 유지해 주는 절대적인 대상인 것이다.

배어 있다.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시의 부제가 말하듯이

정서적인 보편타당함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체험한 시인

난실리 편운재이다. 그것은 어떤 곳인가. 시인의 생존의 숨은

에게 그 정서는 자신의 안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2013 + Autumn


흐른다. 즉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 사이의 정서적인 교감 혹

거기 낙엽이 지는 계절이

은 정서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소통은 합리적인

늙은 산맥에 경사지고

것도 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서적인 것이다. 그것은 “남남의 자리/좁히며/가까이/네 살 닿는 곳/따사로이” 다가

인생과 같이 외로운 풍경은

가는 것이다. 시인은 ‘네 입김이고 싶어 하고 네 이야기이고

언젠가는 나도 돌아가야 할

싶어 하고 또 네 소망이고 싶어’하고 또 ‘푸른 네 가슴이고 싶

그 날의 적막과도 같이

어 하고 푸른 네 목숨이고 싶어 하고 푸른 대륙이고 싶어’한

긴 차창에 연속하였습니다

다. 나와 너 사이의 ‘살’을 통한 교감, ‘입김, 가슴, 목숨’의 생

-「차창」, 부분

명력으로 너와 교감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바람은 진정한 소 통이란 이러한 정서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외로움을 말하는 방식이 조지훈에 있어서는 발견으로서의

진정한 융화가 아니라 하나의 접합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해

놀라움이어서 조용한 것이었고, 워즈워드에 있어서는 회상

준다고 할 수 있다.

속의 놀라움이었다. 둘 다 외로움 속에서였고, 그 때문에 외로

시인의 이러한 정서적인 보편성은 그것이 좀 더 굳어진 형

움은 그 자체가 축복의 표정을 띨 수가 있었다. 조병화에 있

태가 고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산사 문답 - 속리

어 <차창>은 열차의 소리만큼 겉으로 드러난 외로움이다. 외

산에서」라는 시를 보자. 아주 간명하면서도 명증한 시이다.

로움이 내면화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무슨 뜻인

그러면서도 정서적인 결들이 견고하게 시의 형태를 유지하

가. 그것은 우리에게 외로움을 직접적으로 호소해 온다는 뜻

고 있다. 속리산에서 그 속리라는 이름도 그렇지만 스님과의

이기도 하다. 차창을 통해 펼쳐지는 풍경은 결코 내면화될 수

산중문답에서 드러나는 대화 역시 고독이 짙게 드리워져 있

없다. 풍경은 시각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다. ‘空山無人’의 세계가 바로 이 시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단

풍경이 겉으로 드러난 시각형이라 했지만 이 풍경 속에는

절이 아니라 또 다른 소통으로 보아야 하리라. 말을 하지 않

시인 조병화의 시적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야말

아도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이심전심의 소통이 여기에서 이

로 내가 이 시에 주목하는 이유다. 그것은 여행의 형식과 편

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고독은 나의 양식/나의 방/나

지의 형식이다(졸고,<현대문학> 83. 8. 참조). 경부선이 모

의 우주/나의 초원”(「고독」,부분) 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든 여행을 대표하고 있다. 적어도 50년대 전 기간을 통해 경

러나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고독은 고립되거나 폐쇄적인 것

부선만큼 여행 자체를 대표하는 것은 따로 없다. 경부선은 시

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식대로 이야기하면 “벌레 소리 그리

골 소달구지로 여행하는 순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

워/등을 켜”는 그런 고독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고독은 아주

인 산물이고, 속도를 원칙으로 하는 증기 기관의 후예이다. 이

섬세하고, 타자지향적인 그런 정서적인 소통을 전제로 한 고

러한 근대적 지향성에 여행이 맺어져 있는 만큼 ‘방랑’의 의미

독인 것이다.

를 띤 전근대적 여행과는 성격이 썩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우

그의 시가 드러내는 이러한 정서적인 소통은 그의 시가 대

리 문학에서 방랑의 시학은 오상순 한 사람밖에 없다. 오상순

중성과 함께 미학 일반에 대한 보편타당성을 드러내는 한 요

은 구름 위에 보금자리를 틀어 놓은 유일한 시인이다. 목적 없

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차가운 매체를 통한 소통이

이 돌아다니는 멋이 방랑인 만큼 그 자체가 외로움이다. 이 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뜨거운 소통이 무엇

에서만 보면 조병화의 여행은 목적을 가진 것이다. 그렇지만,

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어떤 의미를 지니

그 목적은 그로 하여금 경부선을 태우게시피한 것이지만 경

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선을 타고 차창에 풍경이 펼쳐지자, 깡그리 잊게 되는 것이 기도 하다. 여행의 목적을 잊게 만든 것이 외로움이다. 추풍령

사랑이라는 것은 이와도 같이

산맥의 경사처럼 시인의 외로움은 풍경에로 튀어나가 어느새

외로운 시절의 편지라고 생각을 하며

풍경 속에 용해되는 것이었다. 외로움이 겉으로 드러났다는

차창에 기대어 추풍령 마루를 넘으면

것은 이런 뜻이다. 경부선만이 갖고 있는 힘이다. 서울에서 부 14 + 15


조병화론 동일성의 시학 이재복

산까지의 경부선이 외로움에다 형식을 부여했기에 이 작품은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어느 경우보다 확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여행의

내일 ! 우리 이 자리에 없으려니

형식만으로는 경부선이 지닌 근대적 성격, 곧 속도 때문에 단

- 「의자 6」,부분

순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또 다른 형식이 그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편지의 형식이 그것이다.

삶의 일상성과 시간의 절대성이 잘 그려져 있다. 무한자로

편지란 무엇인가. 외로움이다. 실용적인 측면을 빼면 외로

서의 시간과 유한자로서의 삶이 불변하는 것과 변하는 것, 영

움만이 편지 속에 남게 된다. 외로움이 그 형식을 얻지 못하

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필연적인 것과 운명적인 것으로 대비

면 길 잃은 영혼처럼 방황하게 된다. 방황하는 영혼은 언제

되어 있다.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이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섭리

나 위험한 존재이다.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도 그 탓이

앞에 인간의 일체의 가치, 의미, 그리고 삶 그 자체는 파멸 당

다. 영혼에 형식을 부여하는 일이 예로부터 있어 왔다. 이른

한다. 그러므로,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

바 진혼굿이 그것이다. 진혼굿, 진혼곡 따위는 넓게 보면 영

이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요 시간의 한계성 안에 갇혀 있는

혼의 형식부여 행위이다. 형식은 질서이고 감옥이고 부자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써 새롭게 거듭난 삶, 깨어있는

이고 안정감이다. 그러기에 형식은 어떤 경우에도 질서 부여

삶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를 위한 억압의 일종이다. 외로움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냥

조병화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실체를 두 가지 특징으

방치해 두면 방황하는 외로움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우리

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가 고독한 존재라는 점이요, 둘

의 일상적 삶 속에 해코지를 하고자 덤빌 것이다. 이를 치유

째가 허무한 존재라는 점이다.

하는 길은 무엇인가. 진혼굿을 하듯 외로움에 형식을 부여하 여 대낮의 사상으로 바꾸는 일이 반드시 요청된다. 외로움에

① 잔인하도록 쓸쓸히 사는 거다./너와 나는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여, 외로움으로 하여금 꼼짝 못하게 묶어 두는

인연의 세계에서/같이 있다 하지만/차가운 긴 밤

방식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그러한 방식의 하나로 편지 형

을/빈 손을 녹이며/잔인하도록 쓸쓸히 그저 사는

식을 찾아내었다. 외로움을 길들이어 사슴처럼 순하게 만들

거다.

기 위해 발명된 편지 형식이 대량화되어 보급된 것은 저 증기

- 「밤의 이야기 12」,부분

기관의 발명과 앞뒤를 하여서였다. 우편 제도가 확립되어 개 인의 사생활에 관한 비밀의 확보가 비로소 제도적으로 가능

②보 이옵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하옵는 세계에/있는

해졌다. 증기 기관이 경부선을 만들어 낸 것과 이 우편 제도

세계와 없는 세계에/가득히 차 있사옵는 것은/마

는 이복형제이다.

냥 고요한 있음과 없음, 실은 “空”이옵니다.

조병화의 <차창>이 여행의 형식과 편지의 형식의 결합이

- 「낮은 목소리로 46」,전문

라 할 때, 이 말은 곧 조병화의 시가 모더니즘 시운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닐 것

①은 존재 조건을 고독한 것으로, ②는 허무한 것으로 파악

인가. 근대(현대)란 제도적 장치로서의 철도, 우편 제도, 군대

한 시들의 예이다. 시인은 인간의 삶을 “잔인할 만큼 쓸쓸한

제도, 학교 제도, 의료 제도를 떠나면 결코 파악될 수 없다. 제

것”으로 또는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것”을 빌어서 잠시 살아

도적 장치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모더니즘인 만큼, 모더

있는, 근본을 ‘공’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식에는 언뜻 불교

니즘을 낳은 기반을 살피지 않는다면 모더니즘이 내세우는

존재론을 연상시키는 대목도 없진 않지만 앞으로 언급될 바

외로움의 표정이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와 같이 그가 기본적으로 현세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과 똑같이 일치하는 것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는 거,

떻든, 조병화에게 있어서 이 생의 삶이 고독하고 허황하다는

실로 변하는 건

깨달음은 존재의 한계 상황 -즉, 죽음과 시간의 절대성에 대

움직이는 것들이다.

한 실존적 의식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13 + Autumn


이제 시인은 죽음 앞에 서 있는 존재, 근본적으로 허무하고

했듯 시인으로 하여금 삶에 대한 달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이 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

그것은 버리는 것이 소유하는 것이요, 비어 있는 것이 오히려

에 부딪친다. 여기에는 세 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충만한 것이라는 도가적 역설의 경지에 가까운 것이다.

생 그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어떤 피안의 세계로 초월해 버리

그러나, 그 무엇보다 조병화 제2기 시에서 하나의 전기

거나 절대자의 품에 귀의해 버리는 태도이며, 둘째는 순간적

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은 그의 기독교 성서 탐구이다. 그 결

행복과 쾌락에 탐닉함으로써 자아를 망각해 버리는 태도이

과는 제12시집 《쓸개포도의 비가》로 묶여지는데, 여기서 그

며, 셋째는 그와 같은 비극적 존재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주어

는 결정적으로 절망을 극복하여 삶의 현실성을 수용하는 긍

진 현실을 가치 있게 성실히 살아감으로써 인간적 승리를 쟁

정적 인생관을 확립하게 된다. 비록 존재 조건이 비극적이고,

취하려는 태도이다. 조병화는 이 세 가지 입장 가운데 후자를

일상적 삶이 헛된 것이라고는 하더라도 이 생은 살 만한 가치

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그의 삶의 태도를 두고 실존적

가 있다는 신념, 주어진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이라 평하는 것이다.

의 것으로 받아들여 개척해 나가는 행위야말로 참다운 인생

그러나, 조병화가 이렇듯 현실 긍정과 삶의 성실성을 확

의 길이 된다는 사실을 성서로부터 깨우친 것이다. 인생을 달

고히 다지는 도정엔 그 나름의 수행과 생에 대한 달관이 선행

관함으로써 자칫 이 세계를 초월해 버릴 수도 있었던 시인이

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먼저 일상성

끝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에 대한 집착, 생의 욕망에 대한 유혹을 버리고자 했다. 아이

가 여기에 있었다.

러니칼하게도 생의 본능적 욕구를 버림으로 해서—생 그 자 체가 허무하고 무의미한 까닭에—그는 보다 더 성실한 삶, 보

생명이 있는 곳, 사람이 있는 곳

다 더 의미 있는 삶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

어디 하나 올무 없는 곳 있으리

것은 초탈한 삶, 달관의 삶이다. “인생이 그러하거니와/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떠나

‘살아 있음’ 곧 현재성, 또는 현실성에 대한 강한 믿음과 긍

는 일’일세”(「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부분)라는 시에는

정이 표현되어 있다. 구약성서 <신명기> 제7장의 말씀을 시로

이 생에 가치를 부여했던 모든 헛된 것을—미혹을 미련 없이

쓴 「올무」에서 시인은 인간의 살아 있음 그 자체로부터 커다

버리고자 하는 초탈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바꾸어 말

란 의미를 발견하고 있으며, <전도서> 제1장의 말씀을 시로

하자면, 세속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상성에 집착함으로써 오

쓴 「헛되고 헛된 것」에서 역시 시인은 살아 있음의 고귀함을

히려 삶을 속박시키고 드디어는 파멸에 이른다는 생각이다.

재확인하고 있다. 이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 대한 그의 절

그러한 의미에서 이 생에 미련을 두지 않은 것은 오히려 생

망적 인식에 분명 하나의 서광이자 구원의 깨달음이라고 생

을 충실히 살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그것은 사심 없는 사람이

각된다. 비록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이 흙이나

매사에 공정한 이 세상의 이치와도 같다. 그런데, 생에 미련

돌멩이가 아닌 생명, 그것도 정신의 무한한 사유가 가능한 인

을 두지 않는 것, 즉, 인용시에서처럼 아무 때나 훌훌히 작별

간임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이렇게 그가 존재의 한계 상황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한 마디로 인생을 나그네와 같은 것

을 체험함으로써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을 때의 그는 단순히

으로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조병화의 시에서 숱하게 등

미망과 일상성에 속박된 퇴락한 현실인으로서의 그는 아니

장하는 ‘나그네’, ‘길’, ‘여행’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와 같은 의

다. 그는 이제 정신적 자유인이며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생을

미를 지닌다.

초극할 수 있는 ‘깨인 자’이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의식, 따라서 언제인가 올 그 작별의 때를 대비하여 삶에 미련과 집착을 두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 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려는 태도는 앞서 지적 이재복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1996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젊은 평론가상, 고석규 비평 문학상, 애지 문학상(비평부문), 편운문학상 수상.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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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제23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시 부문 심사평

-비인간화된 현실의 ‘진경사회화’의 풍경 편운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심사대상 기간 중에 발간된 1,200 여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추천 위원들의 추천과 편운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최종 본심 추천 대상으로 선정된 7 명의 시집을 대상으로 지난 3월 22일 혜화동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서 심사한 심사한 결과, 제23회 편 운문학상 수상자로 김기택 시인을 선정하였다. 수상작은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이다. 먼저 편운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김기택 시인은 1989년 <한국

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등의 시집을 발간하면서 우리 시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화된 현실의 낯설 고 혹은 익숙해진 풍경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묘파하여 비인간적인 현실의 실상과 삶의 근 원적인 문제들에 질문을 던져왔다. 이번 수상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는 이러한 비인간화 된 세태들을 해부하여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 삶의 현실 뒤에 웅크리고 있는 소외되고 낯선 풍 경들을 세밀한 시선으로 묘파하여 현실의 비인간적 실상과 그 삶의 문제들을 성찰하게 한다 는 시석 성취를 높이 인정하여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그의 시가 추구하고 있는 이러한 그로 테스크한 리얼리티는 일인칭 위주의 감정을 걷어내고 비인간화된 현실의 뼈대가 드러날 때까 지 묘파하여 우리 삶의 실체를 탐색하는 김기택식의 진풍경이라 할 수 있다.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에서의 비인간화된 현실의 진풍경 또한, 감정을 철저히 걷어내고 풍경의 진경이 드 러날 때까지, 객관적 실체가 떠오를 때까지, 주시하고 있는 긴장의 시선이 전율을 일으키고 있 다. 그의 시집에 펼쳐져 있는 죽음의 이미지와 세태적 풍경들은 그의 상상력으로 펼쳐낸 우리 사회의 비인간화된 현실의 ‘진경사회화’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 김종회(장), 문인수, 이형권, 김수복(글)

2013 + Autumn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제23회 편운문학상 본심 심사를 진행하는 심사위원들(2013. 3. 22)

평론 부문 심사평

-우리 시의 미학적 자질들의 해명 오늘의 문학 비평은 텍스트의 예술성을 해명하는 데 인색하다. 실제로 적지 않은 비평가들 이 텍스트를 사회 현상의 일부로 곧장 환원시켜버리거나 자신의 문학적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기 위한 매개물로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문학 비평이 작품을 미학적인 차원에서 공정 하게 평가하고 감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무관심하다. 이렇듯 문학을 문학 외적인 진술을 위 한 보조재로 사용하는 태도는 문학 비평의 본질적인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 들어 더 심각 해진 문학 비평(특히 시 비평)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그 본질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요 구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언어 예술이라는 것, 문학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미학적 해명이라 는 것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이는 문학 비평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복의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는 우리 시의 미학적 자질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비평집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현대시 에 빈도 높게 드러나는 그로테스크, 숭고, 키치, 패러디, 해체, 에로티시즘, 여성성, 몸 등에 대 한 미학적 해명이다. 이 비평집은 최근의 우리 시가 보여주고 있는 미학적 특성과 관련된 사안 들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상 텍스트도 김소월과 서정주의 시에서부터 기형도와 서정학의 시에 이르기까지 현대시 전반에 걸쳐 있다. 이처럼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개별 주제마다 다양하고 적실한 사례를 들면서 논의의 균형과 깊이를 담보 하고 있다는 점도 믿음직스럽다. 『서문』에서 필자는 이렇게 쓴다. “한국 현대시에 대한 글들이 대부분 미학적인 차원이 아닌 실증적이거나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진단을 하고, “한국 현대시에서 미와 숭고를 탐구하는 것은 미학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시 읽기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는 대안을 제 시한다. 우리의 문학 비평이 결락한 것들에 대한 통찰이 드러나는 이 부분은 미학적 비판보다 는 주석적 해설이나 분석에 치중하고 있는 비평가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 비평집 을 노둣돌 삼아 우리 시의 미학적 측면에 대한 탐구가 비평계 전반으로 더욱 확대되어 나아가 기를 기대해 본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김종회(장), 김수복, 문인수, 이형권(글) 18 + 19


제23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시 부문 본상 김기택

시, 단 하나의 즐거움 김기택 ●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문과,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 『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 등이 있음.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

나에게 시를 잘 쓰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가 어쩔 수 없이

에 없었습니다.

나를 통해 나와야만 하는 이유는 몇 가지

저는 시를 잘 쓰는 게 아니라 잘 쓰지

있습니다. 우선 나는 말을 잘 못합니다. 어

않으려고 해도 잘 쓰지 않을 수 없도록 등

눌한 데다 할 말 안 할 말을 잘 가리지 못

떠밀린 것입니다. 시만 쓰라고 때맞춰 삶

하고 대화중에도 말이 나와야 할 위치를

의 재미는 갈수록 줄어들어 주었습니다.

찾지 못해 쩔쩔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시 쓰는 일은 즐겁지 않으려야 즐

문단에서 가장 재미없는 시인 중 한 사람

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가 뒷걸음질

으로 소문이 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을

로 파리 잡듯 어눌한 말에 시가 방심하다

못 하니 애꿎은 시에다 자꾸 말을 하게 되

가 걸려들고 만 것입니다. 수상 시집 서문

고 그래서 시 속에서는 유창해지지 않을

에 썼듯이 저의 시적 성취는 ‘시 쓰는 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또 시 쓰는 일 말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할 일도 없는

고는 잘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다

내 뛰어난 무능력’ 탓입니다. 조병화 선생

른 재미에 한눈팔 일이 없으니 혼자 상상

님의 큰 이름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

하는 놀이인 시에 저절로 재미가 붙지 않

한 제 작은 이름에 이 과분한 상을 주시

을 수가 없었습니다. 갈 곳 없어 제 몸만

니 송구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수상

괴롭히는 힘과 시간을 할 수 없이 시에다

을 결정해 주신 심사위원님들, 이 상을 마

들이부었습니다. 그래서 시가 그냥 생활

련해 주신 고 조병화 선생님과 유족분들,

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또 현실에

편운문학상 운영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

잘 적응하지를 못합니다. 공부도 많이 늦

립니다.

었고 늦게 시작한 시작 활동도 직장생활 과 병행하며 근근이 이어갔고, 며칠 전까 지도 흰머리 날리며 시간강사 하러 다닌 다고 주위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기에 이 2013 + Autumn

르렀습니다. 자연히 시에 더 몰두할 수밖


제22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평론 부문 본상 이재복

시의 무게와 깊이 읽어내기 이재복 ● 1966년 충북 제천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 및 동대학원 현대문학 박사과정 졸업. 1996년 『소설과 사상』겨울호에 「동양적 존재의 숲-윤대녕론」으로 등단. 저서로 『몸』,『비만한 이성』,『한국문학과 몸의 시학』,『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등이 있음. 고석규 비평문학상, 젊은 평론가상, 애지문학상(비평부문) 등을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한국 현대시를 공부하면서 가진 생각은

르는 하나의 시 읽기의 방법이라고 할 수

그것을 어떻게 하면 미학적으로 읽어낼

있습니다. 저에게 편운문학상을 안겨준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생

이 저서의 제목이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

각을 하게 된 것은 한국 현대시에 대한 글

고’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들이 대부분 미학적인 차원이 아닌 실증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가 겨냥하고

적이거나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있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미학에 대한 나

고 이해하고 또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

름의 윤곽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한국 현대

국 현대시를 미학적으로 읽어내는 논의들

시의 미학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이후로

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다룬 미학

시의 해석에 미학이 수용되면 시는 다

적인 주제들은 하나하나가 그대로 사적인

양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사유될 수 있습

무게와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무게와

니다. 시의 해석 과정이 감각감성, 인지, 이

깊이를 읽어내고 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해, 판단이라고 할 때 미학은 철학이 배제

서는 시와 미학 전반에 대한 치열한 공부가

하고 있는 감각감성의 단계를 포괄하기 때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놓으

문에 시를 생경한 개념 혹은 이념이나 이

면서 내 속살을 훤히 내보인 것 같아 여간

데올로기적인 해석의 도그마로부터 자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롭게 할 수 있습니다. 미학은 시의 해석에

이런 미욱하기 짝이 없는 제 글을 읽어

서 아름다움만을 드러내는 차원에 머무는

주시고 또 상까지 주시니 저로서는 몹시

것이 아니라 일체의 미를 초월하는 새로

당혹스럽고 또 황망하기까지 합니다. 편

운 미에 대한 탐구까지 그 영역을 확장할

운문학상의 오랜 전통과 권위에 누가되

수 있습니다. 미학이 탐구해온 미를 초월

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에 정진하겠습

하는 이 새로운 미가 바로 ‘숭고sublime’입

니다. 고맙습니다.

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현대시에서 미와 숭고를 탐구하는 것은 미학 전체를 아우 20 + 21


다시 읽는 조병화 시Ⅰ 고개

고개

조병화

저 고개 넘어선 누가 살까, 길을 가다가 고개를 보면 늘 설레이는 내 마음,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팔십에 가깝게 살아가면서도 고개를 보면 늘 설레이는 내 마음 저 고개를 넘어선 누가 살까 까닭 모르게 설레이는 이 그리움,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한없이 이어지면서 마음이 어수선해짐을 어찌하랴

우리가 “길을 가다가 고개를 보면/늘 설레이 는” 것은 고개 너머 어딘가에 우리가 줄곧 찾 아온 그곳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보이지 않는 세월, 보이지 않는 영원, 보이지 않는 영원은 항상 고독한 거 망망한 그리움, 시인만이 부질없어라

이곳 아닌 그곳을 꿈꾸는 것은 비단 시인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알고 있지 않 던가요. 우리가 그곳에 결코 도달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삶은 언제나 우

고개를 넘어도 고개를 넘어도 아, 고개를 넘어도 닿지 않는 이 그리움.

리를 속이고, 우리는 그것에 속으면서도 포

(1998. 7. 28)

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그 모든 그리움이 부질없는 것이라 말하고 있지 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희구를 포기해야 한

-제48집《기다림은 아련히》에서

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부질없음을 끌어안은 채로 전진과 전진을 반복하는 것, 고개를 넘고 또 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2013 + Autumn

황인찬 시인.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구관조 씻기기』. 김수영문학상 수상.


명사가 만난 조병화 편운이 있어서 유 호

병화 형과(1966. 5. 1)

편운이 있어서 유호

片雲 趙病華 詩人.

인사를 시킨 것은 金光洲 先生.

내가 兄을 안 것은 6.25 收復 뒤 小公洞 所在 京鄕新聞 안인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

아니면 明洞 뒷골목

나쁜 사람 없다지만

大砲알에 지붕이 훤히 뚫린

兄이나 나나 술.

대포집이었던가.

술 속의 마음을 좋아하는 사람.

兄은 서울中高의 선생님 나는 京鄕新聞의 記者 편운재에서 조병화 시인과 방송작가 유호

원수가 아니기로서니 22

+

23


명사가 만난 조병화 편운이 있어서 유 호

얼굴 맞대고

부탁을 해놓고도 마음이 안 놓여

눈 마주쳤을 때

어떻게 될 것 같애?

미소 짓지 않고 어떻게 친구.

하는 나더러

兄이나 나나 먼발치서 보기만 하면

아유 아유요? 요사람

그렇게 다가가고

술이나 먹자구

그렇게 다가와서

스스럼없던 兄과 나는 同甲내기.

툭 치고 툭 치면 그만. 친구의 괴로움 형은

술로 달래주던 兄

하루도 거르지 않고 下學 後엔

그래서 술통이었나.

小公洞 明洞 忠武路를 지나갔고

그 많은 애들 가르치며

처음 머무르는 곳이 京鄕編輯局

그 많은 제자들

푸러워다방.

나라 안에 밖에

어때? 이번 詩!

世界로 키워 내고 내며

좋았어.

숱한 아픔

좋지? 허허허헛

구름 흐르듯이 詩心으로 싸서 둥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는 나……

기분 좋게 웃던 그

편운

벌겋고 환하던 웃음 지금도 그대로

‘鄕苑’ 이든가 明洞의 밥집.

兄이 있어서 웃음 안 일고

그 집의 여주인

兄이 있어서 술맛 없고

지금은 아리송하지만

兄이 있어서 여자 얘기 못하고

그 詩 京鄕에 실렸더니

兄이 있어서 눈물 마르고

韓昌愚 社長님

兄이 있어서 詩와 文學이

알고도 모른 체

兄이 있어서 人生이……

‘鄕苑’이 어디여?

그렇지 않은 밤이 한번인들 있었던가.

兄도 웃고 나도 웃고

자식이 무어라드니

같이 웃던 韓社長은 이미 저세상.

내 자식놈 아들 하나 딸 하나 애비를 닮아

釜山 避難

지지리도 공부를 못했었다

落葉끼리 모여산다

안해서였다

헤어지는 연습하며 산다……

進學 때만 되면 兄에게

갈리고 찢기운 사람들에게 그 詩

떼써온 나.

구절구절은

2013 + Autumn


얼어붙은 사람들에게

詩集, 詩文集, 詩畵集

더없는 솜이부자리

그리고 外國나들이 영글어

海風이 앗아가려는

서울 펜大會 유치.

눈물의

안개와 아지랑이 같은 色彩로

따스함.

詩人의 마음을 옮겨 담은

그 뒤 한참 뒤.

많은 그림들

형의 머리엔 베레帽

나는 그 앞에서

입에는 파이프.

趙炳華 詩人의

明洞 小公洞은 비인 성냥통 깡통

마음껏 산 평생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돈…… 돈만이 털렁털렁. 형의 베레모와 파이프는

지금도 또 그의 생각.

그래서 鐘路, 鐘路로.

學窓 때는 럭비選手

술맛 관찮어?

數學先生 國語先生

으응 관찮어 띵호와.

敎授 文理大學長 그것 다 떨처버리더라도

人生 30. 60

남아야 할 것은 趙炳華 詩人.

幼靑壯老

편운 趙炳華.

무슨 호떡집 商號 같지만

닭띠 趙炳華.

어차피 거처야 할 길. 만나서 즐거운 사람

좋은 술처럼

보기 싫으면 外面

그 얼굴빛처럼

남을 씹기 좋아하는 사람의

더 붉게 붉게 타오르라.

이빨 오히려 걱정해주며 그래 잘가 잘가 허허헛 60년

유호 소설가. 극작가. 1921년 출생. 1947년 단편 《먹》을 〈백민〉에 발표, 이후 《나를 기억하십니까》(白民, 48) 등 많은 단편을 발표. 해방 후 대중가요의 가사를 비롯하여 많은 소설·시나리오·라디오드라마를 썼다. 주요 작품에 장편 《일요부인》 《우리엄마 최고야》 《맹선생행장기》 등이 있다. 제3회 내성문학상(57), 제1회 방송문화 상(68)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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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11회 시부문 본상 수상자 이상호

휘발성

이상호

1 중국 여행길에 중국명주라는 술 한 병을 사왔다. 혼자 마시기 아까워 아끼고 아끼다가 어느 날 드디어 개봉하려는데 술병이 너무 가볍다. 귀에 가까이 대고 살살 흔들어보자 거의 빈 병이라는 느낌. 이리저리 병을 돌려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보일 듯 말 듯 실금이 갔다. 남은 술을 따르니 겨우 작은 잔 하나도 다 못 채운다. 그동안 실금 사이로 살금살금 알코올이 달아났던 것이다. 2 자궁을 빠져나오느라 내 몸에도 실금이 생겼는지 실금 사이로 조금씩 증발하는 알코올처럼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목숨 휘발성이 너무 강해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미리 따라볼 수도 없고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어 더 궁금한

2013 + Autumn


빈자리

이상호

그대 손 닿으면 조금 따뜻해질까? 저토록 사랑이 빠져나간 빈자리 오늘밤 초록 등불 밝히고 꿈길처럼 환하게 걸어오시는 봄나무들 그 가지 끝에서 어느 날 날아간 새들 다시 돌아와 부르는 노래 사방으로 퍼져 온 산천을 다 깨워도 끝끝내 이르지 못하는 곳 있구나! 저토록 사랑이 빠져나간 빈자리 시작노트 날로 팽배해가는 현대의 물신주의, 그 혐오스런 세태의 한복판에서 나는 그것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현란하게 번쩍이는 기계 문명에 정신이 팔리고, 인간의 순수성이 날로 퇴색되어가는 이 난세에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을 찾는 일은 매우 절실하다. 우리 마음속에 음흉하게 도사리고 있는 그 ‘무서운 속물근성’을 잠재우지 않고 어찌 앞날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시에서 점점 멀어지는 독자들을 다시 돌 아오도록 하는 일이 시인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사명감으로 자극되어야 한다. 시를 통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나’로부터 ‘우리’라는 인식으로 마 음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이 현대시가 해야 할 큰 사명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독자들이 언제나 흥미롭고도 즐겁 게 사유할 수 있는 시의 맛과 멋과 깊이를 지닌 작품을 써야 한다. 이상호 1954년 경상북도 상주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대학원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82년 월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한 국시인협회 사무국장, 감사, 이사, 기획위원장 역임. 시집으로 『금환식』, 『그림자도 버리고』, 『시간의 자궁 속』, 『그리운 아버지』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편운문학상, 한국시문학상 수상 및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현재 계간 『시로 여는 세상』 주간,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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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 11회 시부문 본상 수상자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2013 + Autumn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 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시작노트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가 늘 어머니처럼 나를 위로해주고 위안해주었다는 것이다. 힘이 들 때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면 늙은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냥 눈물이 나고 미소가 돌고 힘이 솟을 때가 있다. ‘아, 내게 어머니가 계시는구나’ 하고 마치 어릴 때 엄마 품에 안겨 한없이 아늑함 을 느꼈을 때와 같은 느낌을 시에게서 받을 때가 있다. 시는 내게 그런 존재다. 언젠가 어느 독자가 내게 물었다. 자기는 내 시를 읽고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시를 쓰는 사람도 자기가 쓰는 시에서 위안을 받느냐고.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럼요, 받지요” 하고 대답했다.

정호승 1950년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첨성대」, 1982년 조 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 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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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 11회 평론부문 우수상 수상자 박윤우

나의 비평관

한 편의 짤막한 의사표명을 대상으로 작품의 내적 의미와

화자 및 청자의 상황을 파악하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시

시적 원리, 발언의 의도와 문학적 의미에 대한 평가와 같은 모

의 메시지는 그것을 말하는 주체의 심리적 상황이나 대상에

든 말을 꾸려낸다는 것은 분명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기

대한 인식 태도에 의해 형성되며, 텍스트의 전면에 발화의 형

에 어떤 이들은 오히려 단순한 시를 가지고 왜 그리 어렵고 복

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의 화자에 대한 이해

잡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을 토로

는 시를 효과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핵심 요건으로, 시의 화

하기도 한다. 요즘 같이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는 시대에 문

자를 통해 시인이 표현하고 있는 바를 알아내거나 느낄 수 있

학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시 비평에 있어서도 그 마당에 퇴적

도록 하는 동시에, 시의 화자를 선택하는 시인 나름의 의도를

되어 온 고고한 성채는 여전히 제2의 창작을 꿈꾸는 모반자들

파악하며, 궁극적으로 시의 화자가 시의 내용이나 표현에 작

의 회의장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용하는 의미를 구별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시의 정서적 효

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 ‘고고한 성채 — 혹은 성역’이

과를 적절하고 타당하게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는 데

야말로 나를 포함한 많은 비평가들이 ‘시학詩學’이라는 이름으

기여해야 한다.

로 쌓아올려 왔고 지켜왔던 것임에도 틀림없다.

무릇 ‘서정’이란 문체로나, 형상의 세계 혹은 그 방법론만

지금까지 이어져온 우리 현대시에 대한 나의 관심은 역사

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으며 설명되어서도 안 되는 일종의

적인 관점에 무게중심이 놓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근대 이

인식적 내면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내 글

후 우리 시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변화해 왔

이 계보학이나 운동론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조용

는가에 대해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설명해내는 작업으로 일

히 들려오는 시적 목소리의 의미와 그 속내를 들여다보려 했

관된 것이었다. 이러한 시사에 대한 집착이 사실 확인이라는

을 따름이었다. 시적 인식이란 결국 타인과 대화의 물꼬를 트

의미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고 싶은 욕망의 발현으로서 말건네기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 왔다. 그것은 어쩌면 ‘내

비평적 독서는 무엇보다 시적 발언들, 그 자체에 즉해서 이루

말 만들기’라는 굴레 속에서 ‘시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

어져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다. 기실 ‘왜?’는, 다시

은 이론들의 성 쌓기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시와 시학의 본질

말해 그 생각과 마음의 해명은 시적 발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에 대한 은폐를 경계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발설되고 구현되게 된 주변

한 시학이란 시사의 엄정한 바탕 위에서 의미화된 것이어야

맥락의 문제이다. 심혼의 표출이나 존재에의 성찰은 비록 내

만 살아있는 이론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렇

면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담아낸 서정 언어의 그릇에 세

게 함으로써 시사 역시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 머물지 않고

상에 산책 나온 존재자의 발자국과 손때, 그 진정성이 묻어나

생산적인 의미체로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있기 때문이다.

시를 담화의 한 양식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시에 존재하는

박윤우 1960년 서울 출생.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서울대 인문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1991년 <시와시학> 평론부문 신인상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한국현대시와 비판정신』, 『서정시와 대화적 상상력』 등이 있다. 현재 서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편운문학상 수상. 2013 + Autumn


다시 읽는 조병화 시Ⅱ 때때로 수시로 나도 모르게

때때로 수시로 나도 모르게

조병화

때때로 수시로 때때로 수시로 나도 모르게 온 몸으로 저리게 젖어드는 이 불안한 외로움은 아직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려니 아, 때때로 수시로 나도 모르게 온 몸으로 아리게 파고드는 이 불안한 예감은 아직 내가 나를 버리지 못함이려니 때때로 수시로 나도 모르게 온 몸으로 젖어드는 이 아련한 공허는 아직 내게 인간이든 사람이든 살아 있기 때문이려니. (1997. 8. 1)

-제47집《먼 약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속과 연속으로 이뤄진 존재라 믿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삶도 존재도 결코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의 삶은 수많은 단절과 분열 속에 있습니다. 10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다르다면, 1초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도 다를 터입니 다. 그 무한히 변전하는 존재간의 심연을 우 리는 ‘망각’을 통해 통합하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토 록 외롭고 괴로운 이유는, 우리 안의 심연을 우리가 잊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그 망각을 뚫고 심연 자체에 도달하려는 이들이 바로 시인 아닐까요. 우리가 “때때로 수시로 나도 모르게” 존재의 슬픔을 자각하는 그 순 황인찬 시인.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구관조 씻기기』. 김수영문학상 수상.

간, 우리는 존재의 심연에 한 발짝 더욱 가까 워지는 것입니다. 30 + 31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70년대 말 그려주신 장발의 캐리커처, 제자의 얼굴 옆모습 허형만

70년대 말 그려주신

장발의 캐리커처, 제자의 얼굴 옆모습

나의 두 번째 시집 『풀잎이 하나님에게』가 영언문화사에서

조병화 시인이 우리 국문과 시 전공 교수님이라는 사실이 당

출간된 것은 1984년 10월이었다. 그 후 2년간 4판을 찍으며

연시 되었다. 그 ‘당연시’가 2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가 3년, 그

문단에서 인정받는 시집으로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시집의

리고 농시 짓다가 뒤늦게 복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무려 10년

특색은 표지를 넘긴 내지에 조병화 스승님이 그려주신 캐리

동안 이어졌다.

커처, 내 얼굴 옆모습에 있었다. 그 캐리커처는 1979년 9월 23

“따라와라” “예”

일 광주에서 그려주신 것으로 머리칼은 장발 그대로였다. 내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은 꼭 나만 따로 불러 교수휴게실로

가 알기로 스승님께서 얼굴 모습을 그려주신 문인들은 많았

데리고 가서 커피를 사주시곤 했다. ‘사주셨다’가 아니고, ‘사

지만 시집에 직접 스승님의 그림을 넣어서 출간하기는 내가

주시곤 했다’가 맞다. 그만큼 교수님은 수업시간이면 맨 앞에

처음이었던 것. 그만큼 나는 스승님의 이 그림이 자랑스러웠

앉아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훑어가는 이 어린 제자

고 고마웠고 소중했던 터였다.

가 신기(?)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촌놈 인 나는 교수님들이 쉬고 계시는 휴게실을 따라 들어갔고, 사

1965년 3월, 개강하고 처음 듣는 현대시론 수업에 조병화

주신 차를 앞에 놓고는 고개 들기가 두려웠다.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파이프에서 풍기는 담배 향기와 인자

“어디 보자” “예”

한 눈빛으로 학생들을 바라보시는 그 모습에 우리는 숨이 막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교수님은 나에게 작

힐 것 같았다. 중앙대 국문과는 당시 백철 박사님이 계셔서

품을 보여 달라 하셨고, 나는 또 밤 새워 배 깔고 엎드려 쓴 작

평론이 우세했고, 남광우 박사님이 계셔서 어학 또한 쟁쟁했

품을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다. 늘 격려하셨고, 늘 말씀 한 마

다. 그러나 내가 꿈꾸었던 시인은 전임 교수가 없고, 경희대

디 한 마디가 부드러우셨다.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2년

국문과에서 출강 나오신 조병화 교수님이셨다. 처음엔 전임

동안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다시 복학한 후에 ‘중대문학상’

시인 교수님이 없는 국문학과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차

을 주신 교수님은 특별히 약속이 없으신 날은 교수휴게실에

츰 강의에 빠져들고, 조병화라는 시인에 빠져들고, 비 오면

서 정문까지 걸어 나와 택시를 타고 시내로 가서 점심을 사주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시며 파이프만 물고 계시는 분위기

시기도 했다.

에 빠져들면서, 중앙대 국문과가 왜 다른 시인 교수를 모시

1986년 교수님은 인하대학교 문과대학장, 부총장, 대학원

지 않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해라기보다는

장을 끝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그때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2013 + Autumn


조병화 스승님을 모시고 문학 관 입구에서(왼쪽에서 다섯 번 째가 필자)

평론집 『조병화의 문학세계』가 일지사에서 발간되었고, 나

하고라도 조병화 시인의 새로운 시적 세계의 고찰면에서 본

는 목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서 교수님의 제17시집 『내 고

이 연구는 그 의의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향 먼 곳에』에 대한 평론을 썼다. 그 평론의 결론 부분은 다 음과 같다

이 논문 마지막이 논문답지 않은 감상적인 글로 마무리되 어 있음을 이제 와 살펴볼 수 있겠는데, 그래도 “조병화 시인

지금까지 필자는 조병화 시인의 재17시집 『내 고향 먼 곳

의 수제자로서의 사제지정”이 가슴에 얼마나 깊이 저장되어

에』에 실려 있는 시편들을 고찰하면서, 그의 삶에서 여행이

있었겠는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확인해 보았다. 그것은, 먼저

2003년 3월 8일, 스승님은 이 지상에서 <가숙(假宿)>을 끝내

제목에서 암시하는 <고향>이 자연의 지역적인 고향과 영혼의

시고 멀리 떠나셨다. 스승님의 말씀대로라면 스승님 어머님

정신적인 고향을 향한 시적 노스탤지어임이 여행을 통하여

의 심부름을 다 마치신 셈이었다. 그 뒤 어느 날, 혜화동에 있

더욱 확실해졌다. 다음으로 그는 인생을 그냥 스쳐가는 <假宿

는 지금은 작고한 송명진 시인의 사무실로 가는 길에 스승님

>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은 곧 하늘에 떠 흐르는 구름과 같

이 살아계셨던 곳을 쳐다보다가 시 한 편과 만났다. 시 제목

다는 <나그네 의식> 또는 <유랑의식>으로 시적 모티브를 삼

은 「혜화동」이다.

아 <인생=여행=애수=시>라는 등식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 다. 따라서 그는 삶(목숨)은 한정된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최

동성고 담벽에 기대어

대한 아끼며 어제, 오늘, 내일의 토막남이 없는 무시간의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있던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통찰한다. 그의 시는 시인의 삶과 똑같

108번 우체통은

은 시간대 속에서 똑같이 호흡하는 생명체를 갖게 되고 동시

이 가을에 엽서라도 한 장 부치라 하고

에 현실의식, 역사의식의 끊임없는 승화로 인환 휴머니즘의

송명진 정표갤러리

시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크름한 바람 함께 오르는 길

이상과 같은 결론으로 지금까지 29권의 <조병화 시력>에

조병화 시인이

나타난 제17시집을 아무도 다룬 적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시 쓰고 그림 그리던 이층

대학 시절 <현대시론> 시간을 통해 당시 모든 동료 학생들이

유리창에 붙은 ‘임대’ 글씨는

부러워했던 “조병화 시인의 수제자”로서의 사제지정은 차치

주인이 멀리 떠났으니 그리 알라 하고

허형만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후 시집 『그늘이라는 말』 『첫차』 『영혼의 눈』 등 13권과 평론집 다수. 한국시인 협회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교수.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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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편운시백일장 심사평

시상을 응축해내는 만만찮은 솜씨 2013년도 편운 백일장의 시제는 ‘길’과 ‘핸드폰’이었다. 이

징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작품이다. 차하를 차지한 김진희의 「

렇게 정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요구되는 전통적인 것

핸드폰」도 핸드폰이라는 문명 도구가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

과 새로운 것의 조화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였다. 둘 가운데

미를 갖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길’은 동서고금의 시에서 다양하게 활용된 시제로서 전통적

이들 외에 서지민, 송수연, 원옥진, 임승환, 최영정 등의 작

인 것에 속한다. 이에 반해 ‘핸드폰’은 최근의 우리 삶에서 다

품에 장려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모두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

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새로운 것에 해당한다.

한다. 수상을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생각보다

물론 시제 혹은 소재가 새롭거나 전통적인 것이라 하여 시

크지 않다. 수상자들 사이의 편차도 그렇게 크지 않다. 조금

적 상상도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시제나 소재는 시인의 상

만 더 분발한다면 수상권에 들지 못한 사람들도 언젠가는 좋

상력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 뿐 상상력의 성격을 지배

은 기회가 올 것이다.

할 수는 없다.

이번 공모작을 심사하면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전체적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살펴본 것은 독창

으로 언어의 응축미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설명적

적 상상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한 작품에서 소재나 언어

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은 편이었다. 물론 시라

등의 다른 요소들이 아무리 새롭다고 해도 그것이 독창적인

고 해서 언어를 무조건 아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적 상

상상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결론적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말

상에서는 언어의 양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용법도

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이다.

또 하나. 심사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작품의 완성

이번 공모에 응해 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도 문제였다. 아무리 독창적인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일지

드린다. 편운 선생님의 말씀처럼, ‘항상 봄처럼 부지런히’ 시

라도 그것을 시라고 하는 하나의 형식 속에 온전히 담아내지

를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못하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언어 사용이 너무 느 슨하다든가 마무리가 잘 되지 않은 작품들은 좋은 평가를 받

심사위원 : 김광규(위원장), 김수복, 이형권(글)

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장원의 영예를 차지한 작품은 박성규의 「길」이다. 사실 ‘길’ 은 진부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것은 독특한 시 적 상징의 위치에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특히 도시의 가난한 골목을 떠올리게 하는 “길”과 그 주변의 추레한 사물들을 무 심한 듯 묘사하다가, 시적 자아의 심리를 “꺼진 전봇대”로 전 경화하면서 시상을 응축해 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시상 마 지막까지 침착하게 제어하면서 감상感傷에 떨어지지 않는 능 력도 눈여겨 볼만하다. 차상의 영예를 차지한 작품은 정민지의 「핸드폰」이다. 이 시는 디지털 기호 혹은 수학적 기호에 불과한 숫자를 시적 상 제8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위원들과 수상자들 2013 + Autumn


제8회 편운시백일장 입상작ㆍ입상소감

박성규

혼자 좁은 길로 휘청거리는 저녁 쇠창살, 길 반쯤 잠긴 지하방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난다 제법 시끌벅적한 것이 벌써 소주도 몇 잔 들어 갔나본데, 나는 자취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쓰러진 의류보관함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금세 길은 담요를 뒤집어 쓴 듯 어둑해지고 쇠창살 사이로 라디오가 들리다가, 들리지 않다가, 다시 들린다 나는 시린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하며 자꾸 주파수를 맞추고 오늘의 게스트는 상당히 높은 언성으로 사연을 읽어 내린다 길을 더 걸어 올라가야 있는 자취방 지난주부터 골목 구석 가득 쌓여 있는 페트병을 지나 바람 빠진 자전거를 지나 아직도, 희미하게 들리는 라디오를 지나 필라멘트 나간 현관문 앞에 와도 바닥에 꽁초 서너 개 더 비벼대다가

입상소감

대학 4학년이 될 동안 세 번을 만났습니다. 햇수로는 3년째지요. 처음 참가했을 때,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작년엔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그리 고 올해, 장원을 타게 됐습니다. 편운 시 백일장을 통하여 성장함을 느낍 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주위 에 벌써 등단한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짓 말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진실만을 쓴다면, 언젠가 같이 소 주 한 잔 할 날이 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시누리’라는 작은 동인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배들은 시 를 읽으며 찢어버리기도 했고, 술을 마시기도 했으며, 눈물도 흘렸습니다. 이제는 제가 제일 고학번의 선배가 됐지만, 항상 시누리 정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꿈』에 우리 시누리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시를 써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은 수상 소감을 생각할 때가 아닌가 싶 습니다. 그리고 좋은 스승들이 있었기에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국대 문창과 詩 아버지 김수복 교수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을 보 며 항상 시인은 진실 된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항상

꺼진 전봇대 되어 흘러가던 날들

따스한 시선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최수웅 교수님, 박덕규 교수님, 강상대 교수님 감사합니다. 수상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참 좋아하셨습니다. 아들을 멀리 타지에 보

백일장 수상자 장원 차상 차하 장려

박성규 (대학생, 울산시) 정민지 (대학생, 경기도 남양주시) 김진희 (사무원, 전주시) 서지민 (대학생, 서울시) 송수연 (안성시) 원옥진 (공무원, 구리시) 임승환 (공무원, 안산시) 최영정 (서울시)

내놓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으시며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아 들은 더욱 걱정 없이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시누리 동인들과 요 섭 선배, 현우 모두 고맙습니다. 그리고 시 쓴다는 것을 근사하게 생각하 는 지현이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욱 정진하여 편운 문학상을 타는 날까지 건필, 또 건필 하겠습니다. 박성규 1989년 8월 7일 울산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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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만난 사람 문학이 맛있다 크라운 해태제과 윤영달 회장

크라운 해태제과 윤영달 회장은 2007년 봄, 선 대부터 갖고 있던 경기도 송추 땅에 국내 최대 규모의 예술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다. 아울러 경영진부터 사원에 이르기까지 예 술가적 소양을 키워야한다는 지론을 갖고 “AQ 경영”을 이끌어 나가며 모닝아카데미 강좌개 설, 직원 창작 시집 발간 등의 의미 있는 발 자취를 남겨왔다.『꿈』은 2007년 가을호에 이 어 윤영달 크라운 해태제과 회장을 만나 기업 의 예술 경영과 문학 지원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크라운 해태제과 윤영달 회장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곳 송추에 ‘아트

모로 조각공원, 문화예술 체험장, 작가들의 작업실과 국악단

밸리’라는 큰 그림을 그리신지 7년이 지났습니다. 낡은 러브

원들의 연습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최근 몇 해 사이

호텔로 가득했던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이자 예술가

‘기업의 사회적 공헌’이라는 큰 물결이 일었잖아요. 저는 사회

들의 레지던스로 변모했습니다. 이제는 아예 남영동 본사에

적 공헌이 기업들이 물질적으로 돌려주는 피상적인 수준을

있던 집무실을 이곳으로 옮기고 계신데 그간 소회가 궁금합

넘어 정부나 개인이 접근하기 힘든 분야를 기업이 나서 지원

니다.

하고 함께 상생하는 계기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도 특히 예술, 다시 예술 중에서도 음악 분야의 국

-저는 이곳 ‘아트밸리’를 골프장처럼 소수의 사람만이 즐 기는 공간이 아닌 누구나 편히 찾을 수 있는 문화테마파크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의 7배에 이르는 규 2013 + Autumn

악, 미술 분야의 조각, 문학 분야의 시를 중심에 두고 즐겁게 지원하고 참여해 왔습니다.


크라운 해태제과 직원들의 창작시집 『마음으로 다가온 우리의 시』

-말씀하신 ‘기업의 사회적 공헌’ 즉 메세나운동 같은 조어

시선집이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발간

가 생기기 전부터 크라운-해태의 공헌 활동은 시작된 것으

사를 통해 ‘세련된 전문작가의 언어는 아니지만, 순수한 마음

로 알고 있습니다.

이 담긴 시어들!’이라는 격려의 말도 남기셨는데요. 시집 발 간에 얽힌 일화가 궁금합니다.

-고객이 없는 기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객 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입

-2010년 연말, 직원들이 공모한 자작시 중에서 선자를 정

니다. 1차 고객인 직원, 2차 고객인 점주, 3차 고객인 소비자를

해 290편을 골랐습니다. 또 그중에서 50편은 정희성 시인이

고루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1차 고객인 직원이야 사내 복지

직접 ‘우수창작시’로 선정해 간단한 시평을 써주시기도 했습

의 형태로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되었고, 2차 고객인 점주들

니다. 직원들 사이에서도 시집 발간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어

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매

요. 2011년 3월이 가니까 다시 2,300편 정도가 모이더라고요.

장 정리와 청소를 돕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일상에

그래서 전집을 내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발간한 『달콤한 운명

지쳐 있는 점주들을 위해 직원들이 나서 안마를 해드린 적도

을 만나다』는 아예 유가지로 시중 서점에 판매를 하기도 합니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큰 즐거움을 드릴 수 없을까 고민

다. 그동안 모닝아카데미 강좌를 통해 김광규, 김용택, 도종

을 하던 끝에 그분들에게 유머를 통해 웃음을 드리기로 마음

환, 문정희, 신경림, 신달자, 안도현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먹었습니다. 아예 전 직원이 건배제의를 할 때에는 좌중을 즐

들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에 대한 직

겁게 할 만한 유머를 소개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기도 했습니

원들의 수준과 열정이 쌓인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

다. 크라운은 2000년부터 시작했고 2005년 해태를 인수했을

는 것은 직원들의 시는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

때에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유머를 드리는 일이 10년 정

다. 1집에는 여름에 쓰이는 시들의 소재인 ‘해변’, ‘조개껍질’

도 지나니까 조금 유치해지더라고요. 그래서 2011년부터 유

같은 것이 많이 등장하고 2집에는 또 직원들이 약속이나 한

머 대신 시 낭송을 시작했습니다. 낭독이 아니라 암송이지요.

듯이 ‘봄’을 소재나 주제로 한 작품이 많더라고요.(웃음) 저는

그렇게 되니 직원들이 서서히 자신의 자작시를 낭송하기 시

시를 비롯한 예술이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 정신적 전

작하더라고요.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조금 낮은 수준의 것이

초기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시집 발간을 계

많아 격주로 시인을 초청해서 강연을 듣기로 했습니다.

속해서 직원들은 물론 고객들에게까지 달콤한 예술적 감성을 퍼트릴 계획입니다.

-총 10권으로 구성된 『마음으로 다가온 우리의 시』 전집 1, 2권에 이어 『아침을 여는 사람들 1, 2』, 그리고 지난 5월 출간된 『달콤한 운명을 만나다』에 이르기까지 직원들의 창작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회장님이 열어나가는 큰 길에 예술과 문학의 향기가 늘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36 + 37


조병화를 추억한다 나의 아버님 조병화 조진형

나의 아버님 조병화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했었습니다. 그러시다가 제가 고 3 때 아버님을 만나 저에게

기념사업회를 해서 그런지 아직도 살아계시고 단지 먼 여행

는 두 분 다 필요하다고 말씀드려 다시 같이 사시게 되었습니

을 떠났다가 금방이라도 돌아오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 다시 말해 제가 철이 들어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할 때에는

사실 저는 아버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버님

부모님과 상의를 할 기회를 갖지 못 했었습니다.

하고 심각한 얘기를 나누어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대학 1년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가게 되어

어렸을 때에는 아버님은 늘 친구들과 어울려 통금이 되어서

한 6년간을 떨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게 1965년에서 1970

야만 집에 들어오시곤 하셨습니다. 또한 저의 어머님도 병원

년도이니까 해외여행도 힘들고 또한 국제전화가 비싸 부모

일로 바쁘셔서 집안 식구들끼리 가는 야유회도 일 년에 한두

님들과의 대화는 거의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물론, 제가 미국

번 정도 뿐 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두

에 있는 동안 아버님께서는 2번 미국에 오셔서 만나 뵐 수는

분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집에서는 대화가 끊겼고 아버님은

있었지만 여행 중 짧게 같이 지낸 시간들이라 그저 안부차원

큰댁에서 머무시면서 두 분이 이혼을 하시려고 까지 생각을

의 만남이었습니다. 제가 70년에 귀국해서 76년에 다시 유학할 때까지가 그래 도 아버님하고 같이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시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귀국하여 기분이 좋으셨는지 아버님은 아버 님 친구들에게 저를 소개해주시고, 잘 다니시던 낭만이라는 술집에서 외상으로 술도 먹게 해주셨습니다. 또 제가 육사 교 관할 때 간혹 여러 교관들과 집에서 마작과 포커를 밤새 할 때 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늦게 들어 오시면서도 담배를 사다주 시고 하여 여러 교관들이 그 자유스러움에 놀라고 하였습니 다. 물론, 담배를 끊으라는 부탁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저는 결혼을 하여 딸, 아들을 두었는데 아버님은 손자 손녀를 상당히 귀여워하시고 시간도 많이 할애하여 같이 놀 아 주셨습니다. 아마도 자식들하고 못 보낸 시간을 아쉬워하 여 손자 손녀들에게 애정을 많이 쏟는 듯 하였습니다. 그리고 76년에 저는 다시 유학을 가서 학위를 마치고 교수

국민학교 시절 부모님과 2013 + Autumn


생활을 하다가 90년에 귀국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외

저의 아버님은 저의 할머님이 44세 되는 해에 막내로써 태

국여행이 자유스러워져 부모님이 여러 번 미국에 오셨고 83

어 나셨습니다. 할머님은 태몽으로 앞치마 가득히 꽃을 안고

년부터는 매 여름방학마다 제가 한국을 찾아 한 달씩 있다가

있는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태몽이 맞아 아버님은

돌아가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와도 아버님은 늘 바

그 많은 출판기념회, 미술전시회, 수상식 등을 통해 많은 꽃

쁘셔서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는 않았습니다. 물

들을 받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론 저도 제 친구들을 만나느라 바빴습니다. 그래도 같이 있는

도 경희대학 영안실을 다 꽃으로 덮고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시간을 통해 아버님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의 아버님은 닭띠이신데도 할머니는 늘 너는 용왕의

90년에 귀국하여서는 부모님하고 같이 지내지 못하고 따

자식이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의 아버님이 살아

로 독립해서 사는 바람에 1주일에 한번 정도 찾아뵙고 인사

계실 때에는 큰 행사를 치를 때마다 비가 내렸습니다. 약혼식

를 드리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저

은 물론 결혼식 때에도 많은 비가 내렸고 출판기념회, 미술전

희가 아버님을 모시고 5년을 같이 지냈었습니다. 이때에는 아

시회 때에도 늘 비가 내려 저희들은 꽃을 나르는데 힘이 들었

버님이 시간여유가 있으셨지만 제가 회사 생활을 하느라 매

습니다. 또한, 장례식 때에도 아침에 약간의 비가 내렸습니다.

일 저녁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아버님과 이야기를 별로 나누

특히, 고희 잔치는 벽제에 있는 연 화랑에서 미술전을 겸해서

지 못 했습니다.

하였는데 그때에는 비가 많이 와서 많은 손님들이 고생들을

물론, 아버님과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아버님을 이해할 수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돌아가신 후에는 아직은 아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자라는 과정에서 약 20년간을 떨어

지 행사에 비가 오지 않고 있습니다. 위에서 비를 막아 주시고

져 살았기 때문에 아버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많다는

계시는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비를 막아 주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아버님을 이해하는 것은 주로 아버님

셨으면 감사 하겠습니다.

의 TV 동영상이나 책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53권

아버님이 8세 되시던 해에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의 시집을 남기셨지만 그에 못하지 않게 38권의 수필집을 남

저의 할머님은 할아버님이 두 번 상처를 하신 후에 결혼하시

기셨습니다. 또한, 아버님은 시집이 나올 때마다 저에게 시집

어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셨습니다. 다른 두 분의 할머님들은

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마도 말로 못 해 주시는 말씀을 책으로

아들을 하나씩 두셨습니다. 불행하게도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보고 느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항상 모

후에 상속재산에 대한 약간의 마찰이 있어 저의 할머님은 이

든 것을 준비하고 사시는 분이라 당신이 사신 과정을 거의 다

곳 난실리를 정리하시고 서울로 가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

책으로 기록 하셨습니다. 고희 때 쓰신 『후회 없는 고독』은 70

다. 그 당시로는 대단한 판단이었습니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

년 동안의 자서전 성격을 띠고 있고 그 후에 일기 형식으로 쓰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도 몇 푼 안 되는 상황에서 아들 교육을

신 3권의 『편운재에서의 편지』는 고희 이후 돌아가시기 전 해

위해 서울로 가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인 2002년 6월 20일 절필 선언을 하실 때까지의 생활을 기록

그래서 아버님은 송전공립보통학교를 1년 다니시다가 오

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어떻게 살아 오셨는가를

산까지 걸어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아현동에서 사시게

아시고 싶으시다면 이 4권의 책 『후회 없는 고독』, 『나보다 더

되었습니다. 한 1년을 쉬었다가 미동국민학교에 2학년으로

외로운 사람에게』, 『외로우며 사랑하며』, 『편운재에서의 편

전입을 하시고는 촌놈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공부를

지』를 보시면 이해하시게 됩니다. 또한, 아버님의 시 세계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공부만이 아니라 미술도 그리고 육상부

이해하시려면 『시인의 편지』, 『시로 쓰는 자서전 세월은 자란

에 들어가 릴레이로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하셨습니다. 실은

다』, 『나의 생애 나의 사상』 등을 보시면 됩니다.

그때 미술을 하시고 싶으셨는데 미술로는 앞으로 살길이 막

제가 말씀 드리는 아버님에 대한 추억도 이 책들을 토대로 준비했습니다. 우선 저의 아버님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시인이 되셨는가 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연하여 포기하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졸업 할 때에는 전교 에서 1등을 하시어 교장선생님 추천으로 경성사범학교에 입 학하셨습니다. 교장선생님과 진로를 상의할 때 교장실에 걸 려있는 본인의 그림을 보시고는 상당히 기분이 좋으셨답니 38 + 39


조병화를 추억한다 나의 아버님 조병화 조진형

다. 그 당시 사범학교는 수업료 없이 다닐 수 있어 돈은 없지

시다가 가까운 사이가 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의 연애는 손

만 공부는 잘하는 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학교였습니다. 특

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하는 연애였지만 마음만은 가까우셨

히 경성사범은 1학년 정원이 100명 이었는데 이 중 20명만이

던 것 같습니다. 같이 가정을 꾸려 볼까 생각도 하셨지만 앞

한국학생이라 입학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으로의 미래를 생각하여 동경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고 헤어

경성사범에 들어가서는 미술부와 럭비부에 들어가 바쁜 생

지기로 하셨답니다.

활을 하셨습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여 졸업할 때에는 1

동경에 계실 때에도 역시 공부와 럭비로 바쁜 생활을 지

등을 하셨습니다. 이 때 시간이 너무 모자라 미술부는 좀 소

내셨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여러 곳에서 장학금도 받고 가정

홀히 할 수밖에 없으셨답니다. 경성 사범 2학년 때 아버님은

교사도하고 일본정부에서 관비도 받고 하여 비교적 넉넉한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셨답니다. 왜 나는 이 가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전쟁 말기라서 사회적으

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로 모든 것이 불안하여 3학년을 마치시고 일시적으로 할머

등을 고민하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내

님을 뵈러 한국에 나오셨다가 해방이 되어 한국에 남게 되

가 왜 이 조선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나 이왕 태어난 것 많

셨습니다.

이 살다 가자. 많이 살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살

그래서 모교인 경성사범에서 교유로써 학생들을 가르치시

아야 하겠다. 정신적으로 많이 사는 것은 책을 많이 읽어 상

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을 연구할 수 있는 실험 도구도

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고 육체적으로 많이 사는 것은 여

없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남이 이미 해 놓은 것을 책으

행을 많이 하여 이 지구의 다른 세상을 체험하는 것이다”라

로 보고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고는 좌절을 느끼

는 결론을 내리시고 그대로 실천을 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

기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내 것은 없고 남이 해놓은 것을

서 책을 많이 읽기로 하였으나 소설은 너무 시간이 걸려 공부

전달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동안 간

에 지장이 있어 시를 주로 많이 읽기로 하였고 특히 철학적인

직해 왔던 꿈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또한 해방 후의 사회는 너

교훈을 주는 시를 주로 읽으셨답니다. 이때 읽은 시들이 바탕

무 혼란스러워 모든 것이 불안하였습니다. 이때 아버님의 스

이 되어 나중에 아버님이 좌절을 느끼셨을 때 시인이 되는 계

승이신 신기범 선생께서 학생들로부터 테러를 당해 돌아가시

기가 되었고 또한 매년 해외여행을 하시어 웬만한 나라는 다

는 것을 보시고는 인천에 있는 인천중학교, 현재의 제물포고

가 보셨습니다.

등학교로 전근을 하셔 인천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이때 좌

경성사범을 마치시고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학과에 입학

절을 느끼며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시면서 쓰신 시

을 하셨습니다. 이때 동경고사에서는 럭비실력을 인정하여

들이 김기림 시인의 권유로 출판된 『버리고 싶은 유산』이라

체육과에서 받아주겠다는 제의가 있었지만 아버님은 본인의

는 시집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아버님은 시인의 길로 들어서

꿈이었던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그 힘든 입학시험을 치르

게 되신 것입니다. 시를 쓰시면서 아버님은 많은 마음의 위안

고 물리학과에 들어가셨습니다.

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살아가시는 동안에 아버님의 꿈은 여러 번 바뀌셨습니다.

『버리고 싶은 유산』 후기에는 “준께“라는 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산에서 서울로 올 때 큰 기차를 몰고 오는 기관

여기서 준은 저의 어머님 이름입니다. 이 글은 부인에게 왜 그

사를 보고 기관사가 되시는 게 꿈이셨고 두 번째는 경성사

동안 지키려고 했던 유산, 즉 물리학자의 길을 버려야만 하는

범에 들어가서 별 들에 얽힌 얘기들을 듣고는 천문학자가 되

가를 설명하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이 같은 ”준께“란 편집 후

려고도 했었고 마지막은 마담 퀴리를 읽고 물리학자가 되시

기는 그 다음 시집인 『하루만의 위안』, 제3 시집 『패각의 침

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나중에는 바뀌어 시인이 되

실』에도 있는데 그 당시의 고민, 좌절들이 잘 나타나고 있습

셨습니다.

니다. 또,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님은

또한, 이때 첫 사랑을 하셨답니다. 경성사범을 마치시고 전

이 『버리고 싶은 유산』을 제일 먼저 저의 어머님에게 드렸는

라도 임실에서 교생실습을 하셨습니다. 그때 그 곳에서 어떤

데 잘못되어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씨가 보관하게

여선생을 만나셨는데 여선생의 처지가 불쌍하여 얘기를 나누

되었는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약간 아쉽지만 언

2013 + Autumn


젠가 그 시집이 문학관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이때 만 해도 저의 아버님의 어머님에 대한 애정은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의 어머님과 저의 아버님의 관계를 잠시 말씀 드 리겠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진명여고를 나와 경성여자의과전 문대학을 나오셨습니다. 저의 아버님과 어머님은 저의 아버 님의 동경고사 선배의 중매로 만나시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 머님도 진명여고 다니실 때에는 육상선수로서 경보로 전국 대회에서 우승도 하셨습니다. 포환도 던지셨구요. 그래서 두 분 다 운동선수에 과학도로 만나 결혼을 하시게 됐습니다. 아 마 저의 아버님이 그 당시에 시인이셨다면 결혼은 성사가 되

1966년 뉴욕 PEN대회에 아버님과 참석하고

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저의 어머님이 진명 여고를 다니실 때 역사 선생님이 저의 어머님 호를 시영으로

않으셨을 뿐입니다. 또한, 될 수 있는 한 아버님의 행사에는

지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시의 그늘 또는 그림자라는 것입

빠지시지 않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단지 병원일로 바빠 늦

니다. 결혼 하실 때에는 저의 아버님은 시인이 아닌 물리학

게 오시는 경우가 많아 아버님이 화를 내시긴 하셨지만 속으

자이셨는데 어떻게 시영이라는 호를 얻게 되셨는지 참 신기

로는 두 분 다 이해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할 뿐입니다.

저의 어머님이 암에 걸려 힘들어 하실 때에는 저의 아버님

어떤 분은 저의 어머님이 의사라서 조병화 시인이 행복하

도 많이 누그러지셔서 마지막 2, 3년은 소리 없이 어머님 뒷

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입

바라지를 잘 해 주셨습니다. 병원의 입원비도 다 내주시고 시

니다. 저의 아버님은 워낙에 자존심이 강하셔서 누가 부인이

집도 두 권이나 헌정하셨습니다. 또한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의사라서 잘 사신다고 말씀하시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시고

때 아버님은 묘를 봉분 없이 흙으로만 얇게 하셨는데 묘가 비

일어나 나가십니다. 저의 어머님과 저의 아버님은 결혼 초부

에 무너져 내려 어머니가 노하신 것 같다 하며 얼른 다시 봉분

터 금전적으로 다툼이 많으셔서 결혼 3년쯤 지난 후 부터는

을 세우시고 아버님 묘소도 그 옆에 만드셨습니다. 저의 어머

서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월급 중 70%는 집으로 가

님은 광산 김씨라 격식을 중요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묘를 너

지고 오고 30%는 아버님이 쓰시는 것으로 약속을 하셨습니

무 초라하게 쓰셔서 화가 나신 것 같다고 얼른 격식에 맞추어

다. 그래서 아버님은 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더

묘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많은 시도 쓰고 활동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약

문학관 1층 복도에 있는 아버님의 “나의 생애”라는 시 중에

속을 하셨는 데도 두 분은 늘 갈등이 많으셨습니다. 어머님

는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

은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들이 좀 더 잘 살게 하고 싶은데 아

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시를 아

버님은 늘 밖에서 사람들과 만나 활동을 하시느라 집에는 별

버님은 늘 아끼시고 소중히 생각해 오셨습니다.

로 신경을 쓰지 않으셔서 항상 다툼이 많으셨습니다. 이래서

럭비는 아버님이 경성사범학교 시절부터 해 오시던 운동

아마도 저의 어머님의 호에 맞게 아버님이 훌륭한 시인이 되

이었습니다. 럭비는 미국의 미식축구와는 달리 아무런 pro-

시지 않았나 가끔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

tector 없이 몸을 부딪치는 격렬한 경기로 상당히 위험합니다.

유가 많으면 고민의 농도가 얕아져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

그러나 럭비를 하는 선수들은 이 위험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

것 같습니다.

의 안전을 고려하여 상대방이 다치지 않도록 노력을 합니다.

저의 어머님은 겉으로는 아버님과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그래서 럭비는 신사들의 운동으로 알려져 주로 유럽에서 인

보이셨지만 속으로는 늘 아버님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기가 있는 운동이고 럭비선수들의 pride는 상당히 높습니다.

단지 고향이 충청도라 그런지 자랑스러워하는 내색을 하지

이번에 올림픽 종목으로 뽑혀 앞으로는 더욱 인기가 높아질 40 + 41


조병화를 추억한다 나의 아버님 조병화 조진형

게 인생을 주제로 한 철학을 시로 쓰셨습니다. 많은 평론가들 이 아버님의 시가 너무 쉽고 시대 참여의식이 부족하다는 등 좋지 않은 평을 써도 이에 굴하지 않고 아버님은 본인의 철학 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시로 옮기셨습니다. 시대 참여적인 시 보다는 좀 더 차원을 높여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시대를 초월 하는 보편적인 인생을 주제로 많은 시를 일관되게 써 오셨습 니다. 아버님은 pride가 강해 남과 타협하는 것을 별로 좋아 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정치는 싫어하시어 시인협회장, 문 인협회장, 예술원회장 등 많은 단체의 장을 역임하셨으나 모 1987년 아버님의 초대로 청와헌을 찾은 친구들과 함께

두 다 투표 없이 추대의 성격으로 당선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일관되게 인생이라는 주제로 꾸준히 고민해 오신 것을 표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버님은 럭비에 대한 애정이 깊어 럭비

하셨기 때문에 아버님이 ‘시는 나의 철학’이라고 말씀하셨다

협회 이사로써 초창기부터 활동을 하셨고 가시는 학교마다

고 생각합니다.

럭비부를 창설하시거나 럭비부를 맡아 선수들을 잘 지도해주

아버님은 항상 sketch book을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다니

셨습니다. 운동만 하는 선수가 아니라 공부도 잘하는 선수로

시다가 간혹 시 구절이 생각나시면 시를 쓰시기도 하고 시간

크기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이 나면 그림을 sketch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럭비부를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아버님이 반대를 하셨습니

에 기차를 타고 어디로 여행을 갈 때인데 아버님이 기차를 기

다. 그 이유는 불행하게도 럭비부가 원래의 스포츠맨 정신을

다리는 동안 서울역을 sketch하신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

잃고 소위 말하는 힘깨나 쓰는 깡패들의 집단이 돼가는 것을

습니다. 불과 5분 사이에 서울역을 sketch book에 비교적 상

우려하여 반대를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문학관 진열장에서

세히 그리시는 것을 보고 대단한 재주를 가지셨다고 생각을

아버님이 럭비공을 받는 사진을 보셨겠지만 아버님은 늘 그

했었습니다. 아버님은 해외여행을 하시면서도 많은 그림을

렇게 날렵하고 머리를 써야하는 럭비를 좋아 하셨습니다. 그

sketch 하여 화집으로 내신 적도 있습니다. 유화를 본격적으

사진은 아버님이 50이 넘어 일본의 OB 들과 친선시합을 할

로 다시 시작하신 것은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맡으

때 찍은 사진입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그와 같이 움직이시

신 후입니다. 학장실이 넓어 한 구석에 화실을 비슷하게 꾸려

는 것을 보면 젊었을 때에는 상당히 럭비를 잘 하신 것으로 느

놓고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리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렸을

껴집니다. 나이 드신 후에는 cable tv를 통해 중개되는 럭비 시

때의 화가가 되려던 꿈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취미삼아 그린

합은 늘 보셨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님은 늘 마음속으로 젊었

것이 18회가 넘는 초대전시회를 가지셨으니 웬만한 화가 못

을 때 럭비를 통해 얻은 sportsmanship을 유지하셨습니다. 그

지않은 업적을 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님의 그림은 시

래서 럭비는 나의 청춘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로 표현 못하신 것을 표현한 것 같아 그림도 하나의 시로 느껴

아버님은 시인의 길로 들어선 후에는 많은 문인들과 어울 려 지내셨습니다. 거의 매일 서울에서는 명동에서 부산 피난

집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그림은 나의 위안’ 이라고 말씀 하 신 것 같습니다.

가서는 광복동에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시며 물리학

저의 아버님이 태어나셨을 때 저의 할머님이 44세 이었으

자의 길을 떠나 새로운 예술인의 길을 개척해 나가셨습니다.

니까 저의 할아버님은 50세는 넘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

문인들 외에도 많은 화가, 극작가 등 예술인들을 만나 새로운

버님은 할아버님한테 천자문을 배우셨지만 그저 무섭기만 한

세계를 개척해 나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이 시대의 명동시절

아버님이었습니다. 또한 바로 윗 형은 1912년생으로 아버님

을 종합예술대학 시절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예술인들을 만

보다 9살이나 더 많았습니다. 따라서 아버님은 형들하고도 나

나 아버님 나름대로의 예술관을 키우셨습니다. 소위 독학을

이 차이가 많이 나 어쩔 수 없이 할머님하고 친해질 수밖에 없

하신 셈 이지요. 이러한 과정을 밟으시면서 아버님은 일관되

었습니다. 할머님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으셨지만 부지런

2013 + Autumn


하시고 검소하시고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습니다.

셨습니다. 이 소식이 당시 문화부 장관이셨던 이어령 장관에

저의 아버님이 밤늦게 공부를 하시면 안주무시고 아들이 잘

게 알려져 난실리를 문화마을로 지정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때까지 무슨 일이고는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먼저 주

조병화문학관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무시는 척하고 있다가 할머니가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시고는

아버님은 할머님이 돌아가신 후에 편운재를 세우시고 언젠

다시 공부를 계속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일하시는 것을 보고

가는 고향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생각으로 편운재 앞에 있는

좀 쉬시라고 말씀드리면 할머님은 늘 ‘죽으면 썩을 살 아껴 뭐

밭들을 돈이 생길 때마다 사서 모아 이렇게 편운동산을 마련

하냐’며 계속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교훈은 아버님에 큰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청와헌을 지은 후에는 고향에서

영향을 미쳐 아버님을 늘 부지런하게 만드시고 남들의 두 배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고 싶어 하셨는데 운전을 못 하시고

이상의 삶을 살게 만든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친구

음식을 못 하시어 고향에 오래 머무르시지는 못하셨습니다.

들과 술을 드시고 통금이 되어 집에 오셨지만 늘 아침 5시에

주로 하루 내지 이틀을 머무르시다가 서울로 가시곤 하셨습

는 일어나시어 활동을 시작하셨으니 남들 보다 두 배의 인생

니다. 아버님은 문학관을 찾는 안성 어린이들에게는 늘 문학

을 사신 것과 같습니다. 아버님은 이 교훈을 편운재 앞면에 새

관 복도에 있는 ‘고향은 사람을 낳고 사람은 고향을 빛낸다‘라

겨두시고 늘 할머니를 생각하시며 이 교훈을 몸으로 실천하

는 액자를 읽게 하여 고향 정신을 심어 주시곤 하셨습니다.

셨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종교는 없으셨지만 불교 신자이신

아버님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말씀 드렸는데 끝

할머님 곁에 가시기 위해 불교를 가까이 하셨습니다. 특히 저

을 맺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의 어머님이 원불교 신자이시어 어머님 장례식을 원불교 예

는 못했지만 아버님과 같이 살면서 또 아버님의 책들을 읽으

식으로 치르신 후에는 아버님도 원불교식의 장례식을 원하시

면서 느낀 것은 아버님은 참으로 보람 있는 삶을 사시고 가셨

어 그리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님의 할머님에 대한 사랑

다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결심하신 것처럼 보다 많은 책을

은 아버님이 ‘어머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읽으시고 보다 많은 여행을 하시고 시간을 아껴가며 부지런

깊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한 청와헌 옆에 있는 아버님의 묘

히 남 보다 두 배 이상의 삶을 사시고 마지막으로 절필 선언을

비에 쓰신 ‘꿈의 귀향’은 단 3줄로써 어머님에 대한 애정과 그

하실 때까지 일관되게 열심히 살다 가신 것은 널리 인식 되어

리움을 잘 나타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아버님은 후회 없는 인생을

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

살다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습니다.’ 아버님의 원천적 고향으로 다시 귀향하셨습니다.

또한 이상한 것은 아버님은 할머님의 태몽대로 가시는 날

아버님은 부지런하셨지만 할머님을 닮아 또한 상당히 검소

까지 꽃과 같이 하셨습니다. 평소에도 전시회 및 출판기념회

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시어 돈은 늘 아껴 쓰셨

를 통해서 화환이 많이 들어왔고, 돌아가실 때에도 경희대학

지만 모든 물자도 될 수 있는 한 재활용하여 쓰셨습니다. 아버

교 영안실은 조화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경희대 조영식 학원

님이 늘 상의에 꽂고 다니시던 포켓치프는 쓰다 헤진 스카프

장님의 배려로 장례식장에 있는 영결식장 대신에 장례식장

였고 받으신 초대장들은 버리지 않고 전화번호를 적거나 간

옆에 있는 간호원 기숙사 강당에서 많은 하객들을 모시고 간

단한 메모용지로 사용하셨고 받으신 대봉투들은 잘 보관하여

호원 기숙사 건물 앞에 그 꽃들을 나열하고 훌륭한 영결식을

재활용을 하셨습니다.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할머님의 태몽처럼 꽃 속에서 사시다가

아버님은 1986년에 정년퇴임을 하시고는 청와헌을 짓고

꽃 속에서 영면을 하신 셈 이지요.

자주 고향에 내려오셔서 고향 가꾸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으로 아버님에 대한 회고담을 마칠까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난실리는 다른 시골들과 같이 상당히 지저분

오랜 시간 동안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난실리에 버스정거장도 세워주 시고 아이들을 위해 놀이 시설들을 만들어 주시고 아이들에 게 꿈을 키워주기 위해 ‘꿈’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나누어 주시 고 버스 정거장 옆에 장승을 세우는 등 난실리 정화운동을 하

위 내용은 2013년 5월 4일 제10회 조병화 시축제에서, 조병화 시인의 장남인 조진형 관장의 <조병화를 추억한다-나의 아버님 조병화>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42 + 43


한 장의 사진 54세의 나이에 럭비 경기를 즐기는 조병화 시인

54세의 나이에 럭비 경기를 즐기는 조병화 시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든 두해의 삶을 살았지만 조병화 시인은 늘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1980년 중반 한 차례 장폐색증을 앓은 것을 제외하면 큰 병이나 잔 병 치레를 하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1950년대 명동 시절, 시인은 자신을 찾아오는 고독과 허무를 잊고자 매일 밤이 늦도록 술을 마셨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말끔한 모습으로 이른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이런 시인의 체력은 아마도 어린 시절 안성 난실리 집과 용인에 있던 송전공립보통학교를 오가며 길러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2013 + Autumn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주신 분들입니다. (2013년 1월 1일 - 8월 30일 후원현황) Ⅰ편운 회원Ⅰ 강대신·강은모·김수문·김영관·김영수·김용정·김유항·노정익·박규원·박철원·이종호·신용극·윤세영·이인학 이재후·장현수·장홍선·전찬민·조진형·황상현·황영기 Ⅰ꿈 회원Ⅰ 강창희·김대규·김두식·김명락·김유성·김종성·김진환·배호원·서준희·신창재·신철우·이금기·이병규·이세웅 이수철·이 윤·이 일·이철화·이희수·장부웅·조수남·조윤원·지성하·최재성·한영란·김광규·김삼주 김상현·문충성 Ⅰ사랑 회원Ⅰ 강우영·곽명규·김동엽·김종교·문영목·박순화·박진성·서경석·서재원·안창모·이규호·이영민·정분순·조성걸 차진도·하영탁·서울고 16회 동문회 Ⅰ멋 회원Ⅰ 강일철·강태흥·고연수·고정순·고희수·공상진·권광중·권오재·김가현·김길수·김명인·김순미·김용담·김용환 김유선·김진석·김홍섭·김희옥·민용식·박덕규·박동환·박민규·박종원·박진영·신유은·안유화·유자효·유종해 윤영선·윤진석·이명규·이상근·이성열·이순재·이순희·이종휘·이창우·이태길·이홍섭·이희자·임명수·임서영 장기학·정주영·조건식·조 범·주기영·최일화·최재영·한군섭·한선희·한중진·허형만·황선도 Ⅰ법인 회원Ⅰ 영화기업㈜·정원기업·㈜서한사·㈜퓨처위즈·㈜에스텍퍼스트·㈜한농화성 ㈜한미글로벌건축사사무소·(재)KPX문화재단·문봉장학회·(재)일신문화재단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 명예회장

김영수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박철원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부 회 장

허영자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황상현

법부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김종성

(재)선교재단 상임이사

시작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김양수

문학평론가

성실성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

성춘복

시인

여 회의 미술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신봉승

작가ㆍ예술원 회원

강대신

정원산업 회장

김삼주

시인ㆍ경원대 교수

김유항

인하대학 화학과 명예교수

김재홍

한국 과학기술 한림원 총괄부원장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ㆍ경제ㆍ사 회ㆍ발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대 적 삶 속에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

문학평론가ㆍ경희대 명예교수

김종회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노정익

전 현대상선 사장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

박규원

(주)델타엔지니어링 회장

는 여러 사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

오호수

전 증권업협회 회장

이병규

문화일보 사장

이완섭

(주)세이프라인 회장

이재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황영기

법무법인 세종 고문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 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Cho ByungHwa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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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항과 같이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를 후원할 것을 약속하며, 귀 사업회의 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2013년

후 원 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인)

조병화문학관 홈페이지 http://www.poetcho.com 에서도 회원가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05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110-530) 전화. 02-762-0658 팩스. 02-3673-0436 Email. poetcho@naver.com

CMS는 금융결제원과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가 계약을 맺고 자동이체 출금을 의뢰하는 납부방식 입니다. CMS 자동이체를 신청하시면 희원님이 직접 은행에 가시는 번거로움 없이 매달 정기적 으로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며 출금 수수료가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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