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병화의 생애 이야기
조병화문학관
시인 조병화의 생애 이야기
조병화문학관
차례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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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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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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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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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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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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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광복,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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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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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난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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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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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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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고향,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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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비, 절묘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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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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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액세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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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술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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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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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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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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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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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병화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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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나는 1921년 5월 2일에,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태어났다. 음력 으로는 3월 25일, 축시였다. 5남 2녀 중 막내아들이었다. 어머님 말씀이 꽃을 많이 안고 있는 태몽을 꾸셨다고 한다. 아버님은 호를 난유(蘭뱿)라고 하는 시 골 한학자로 대대로 농사를 짓는 소농이었고 약 40호 가량의, 한양 조씨의 마 을이라고 할 수 있는 난실리에서 그 중심이셨다. 나는 항렬이 높아 꼬마시절부 터 할아버지, 아니면 삼촌이었다. 형제들과도 나이차가 많아서 무섬무섬 말없 이 자랐다. 그중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 어머니였다. 나는 열 살까지 어머니 젖을 만지며 자랐다. 어머님이 산나물 뜯으러 마을 아낙네들하고 뒷동산 앞동산으로 가실 땐 나도 따라나섰다. 산골짝을 흘러내 리는 도랑물에서 돌을 젖히며, 굴에 손을 넣으며 가재를 잡곤 했다. 간혹 혼자 나설 때도 있었다. 가재를 잡아다간 고추장 찌개를 해먹곤 했다. 꺼무칙칙한 가재가 발가스름하게 익어올 땐 군침이 돌곤 했다. 간혹 가다간 틀을 만들어 도랑 밑에 놓아서 쪽제비를 잡기도 했다. 이 쪽제비는 약아서 여간해서 잡히지 도 않았지만, 잡은 것을 통에서 끄집어낼 때 물리기도 했다. 겨울엔 새잡태기(새를 잡는 틀)를 나무 밑에 놓아 맵새, 참새들을 잡기도 했 다. 저녁엔 추녀 밑에 잠자러 들어간 새들을 그물을 치고 쑤셔대서 잡아, 소금 을 치며 구워먹기도 했다. 설엔 연도 날리고 제기도 차고, 달밤엔 줄다리기도 하고 널도 타고 윷도 놀고, 머슴방에서 새끼를 꼬며 옛날이야기도 듣는 등, 그 런 일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돌지만 웬일인지 아버지 기억은 그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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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다. 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운 기억밖엔.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이 농촌 마을에서 여덟 살 되던 이른 봄에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그 해 4월에 용인군 이동면 송전리에 있는 송전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한반엔 벌써 장가를 든 학생들도 있었다. 모두 나보다는 위였다. 10리 길을 매일 통학 을 했다. 학교에 가는 도중 곽터라는 방앗간 마을이 있어 그곳에서 쉬었다 가 곤 했다. 윗동네 아이들과 함께 귀가하다 이곳 방앗간에서 딱지를 치곤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 지금은 이렇게 어린 시절 추억 많았던 곳이 이동저수지(일 명 송전저수지) 때문에 수몰하고 말았다. 곽터와 송전학교 사이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이 하도 무서워 혼자 지나 가는 법이 없었다. 누가 오는 걸 기다렸다가 그 뒤를 따라 살금살금 걸어 통과 하곤 했다. 그땐 묘석도 하나 없이 잡초가 우거진, 황무한 묘지였다. 지금은 무슨 무슨 동산이니 해서 정리가 되고 묘석들도 독일병정들처럼 늘어섰다. 그 리고 곽터와 이 공동묘지 사이에 개울이 있었다. 홍수 땐 제법 물이 많아서 작 은 아이들은 업혀서 내를 건넜다. 요봉굴이라는 산골마을에서 흘러내리는 개 울이었다. 지금도 그대로 흘러내리고 있다. 이 개울에서 벌에 쏘인 경험이 있 다. 어느 여름날, 하학길에 발을 걷고 물을 건널 때였다. 난데없이 땅벌이 뱅뱅 귓가를 소리치며 돌더니 내 귀를 탁 쏘고 지나갔다. 따끔하더니 붓기 시작했 다. 방앗간도 들르지 않고 울며불며 집으로 직행을 했다. 그리고 어머님이 발 라주는 된장으로 부어오른 곳을 진정시켰다. 얼마나 아팠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가끔 집안에서 술을 담그었다. 그럴 때마다 아주머니들이 부엌으로 끌고 들 어가 술항아리에서 향기로운 맑은 술을 바가지로 떠주곤 하였다. 그 향기가 지 금도 코를 찌른다. 내가 아직 어리던 시절, 그러니까 아버지가 카랑카랑 기침 을 하시며 마을을 다니시고 오산장이나 안성장에 당나귀를 타고 다니시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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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난실리 앞엔 미루나무, 대추나무들이 많아 풍치도 좋았었다. 그러나 지금 은 그곳으로 국도가 지나가고 나무들도 다 잘려, 그저 훤한 벌판으로 변해버렸 다. 정월 대보름날 쥐불을 놓던 밭도랑도 논도랑으로 변해서 마음대로 걸어다 닐 수도 없게 되었다. 2학년 봄에 어머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40리 길을 어머님 치마폭을 잡 고 타박타박 걸어 오산으로 나왔다. 한참 보리순이 파랗게 솟아오르고 하늘에 선 종달새 소리가 들렸었다. 나는 경부선 오산역에서 난생 처음 기차를 보았 다. 하두 놀라서 어머님 치마폭에 얼굴을 확 묻었다. 그 무섭고 긴긴 괴물을 끌 고 다니는 기차 기관사가 위대해 보여 나는 그때부터 기관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기차를 보러 서울역(당시 경성역)으로 가곤 했다. 약간의 토지를 매각해서 시작한 아현동의 서울 살림은 궁색했다. 이곳에서 나는 한 고개 넘어 있는 미동공립보통학교에 편입을 했다. 편입을 하며 나는, 서울 아이들은 깍쟁이라는데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인가, 하며 크게 걱정 을 했다. 그러나 3학년 1학기를 넘긴 후 반에서 1등을 하고 4학년 때는 반장으 로 선출되니 자연 아이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나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서울생 활에 익숙해 갔다. 그때부터 줄곧 반장을 하고 수석을 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담임선생이 하라는 대로 육상경기 8백m 릴레이 선수를 뛰어서 전국소학교대 항 경기에서 우승기도 가지고 오곤 했다. 여자부 선수에 최라는, 아주 예쁜 아이가 있었다. 연습을 같은 운동장, 같은 시간에 했는데 그 계집아이에게 자꾸 눈이 가기 시작했다. 거무스레한 피부에, 큰 눈동자, 그리고 날씬한 몸매, 단단한 근육, 생기가 도는 몸짓, 그리고 넉넉 하게 보이는 분위기. 그러나 어떻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혼자 마음속으로 만 사랑하다가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계집아이는 평양으로 이사를 갔 다는 소식이었다. 섭섭하고 어린 가슴이 척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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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 6학년 졸업생 대표로 졸업장을 받는 순간 떨어뜨리고 말았다. 무거운 이 유도 있었지만. 당황한 건 나뿐 아니라 나의 담임(일인)선생도 그러했다. 순간 나는 홍당무가 되어서 떨어뜨린 졸업장을 주워 모으는데 정신이 없었다. 내가 경성사범학교에 가게 된 동기는 전적으로 일인교장 이치가와(市川) 선 생에 있었다. 어느 날 부름을 받고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나의 크레파 스 그림이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렸지만 몹시 기뻤었다. 교장선생은 나에게“너 다른 학교에 가지 말고 경성사범학교 보통과에 가라”하시는 거였 다. 그렇게 해서 추천이 되었고 눈이 하얗게 쌓이도록 많이 내리는 날 혼자 입 학시험을 치러 갔던 것이었다. 한 학교에서 함께 온 아이들은 큰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나는 혼자 무 섭기만 했었다. 좀 있었더니 반갑게도 담임선생이 와주셨으나“너, 자신을 가 져라. 꼭 될 터이니.”그리곤 돌아서 가버리셨다. 시험을 치면서 그 계집아이 생각이 나고 선생의 애정도 생각났다. 그리고 교의(校醫)가 하던 말“너 시험에 되더라도 신체검사에 떨어질거다”하던 말이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수학에 서 한 문제가 틀린 것 같았지만, 100명 중에 내 번호와 이름이 있었다. 그렇게 떠들어대던 교동, 재동 아이들이 다 떨어지고. 졸업식이 끝나고 반 아이들과 한강으로 놀러갔다. 봄꽃들이 피어있던, 바람 찬 높은 강둑에서 나는 매끈한 작은 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최라는 글자를 쓰 고 멀리멀리, 아주 멀리 강물을 향해서 팔매질을 했다. 평양까지 다다르라고. 그리곤 모든 잡념으로부터 스스로 해방을 했다. 그리곤 기숙사로 입사를 했다. 담임선생이 하루는, 가을에 대하여 작문을 써오라고 했다. 나는 <낙엽>이라 는 제목으로 아주 짧은 글을 써서 제출을 했다. 그것이 3개월 후에《전국 아동 작품집》 이라는 책자 속에 인쇄되어 나왔다. 이것이 세상에 인쇄되어 나온 나 의 첫 번째 글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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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했다. 어쩌다가 돈이라는 것이 손에 들어오면, 그림도구, 아니면 공작도구 들을 샀다. 내가 사는 골목에선 군것질 안하는 아이로 통할 정도였다. 그리고 환등기를 사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어린이들 의 장난감 활동사진기여서 손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장난감 카 메라였지만 그것도 하나 사서 집에서 이불을 쓰고 현상도 하고 인화지에 정착 도 했다. 필름이 현상되고 하얀 인화지에 그 현상이 정착되었을 때, 참으로 재 미있고 신기로운 생각이 들곤 했다. 그때 장난으로 찍어보았던 내 사진이 지금 은 유일한 유년시절의 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처음 서울로 올라올 때의 꿈은 기차 기관사였으나, 5학년 땐가 별에 관한 수 업을 들은 뒤에는 마음이 바뀌었다. 은하수, 성좌, 북극성, 북두칠성들의 이야 기와 그것들에 얽혀 있는 신화들을 참으로 신비하게 재미있게 듣고는 천문학 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카시오페아의 성좌에 관한 사랑이야기가 나 를 아름답게 흥분시켰다. 노는 시간만 되면 운동장 구석에 가서 남몰래 별이라 는 글자를 써서 모래로 덮곤 했다. 어린 꿈의 방향을 별에서 미세한 물질의 세 계로 돌려놓은 것은《퀴리부인》 이었다. 그 책을 읽은 뒤, 나는 그 엄청난 노력 과, 진실한 면학의 태도와 신비한 물질의 세계에 감격했고 그 길을 '쓸쓸한 갑 충(甲蟲)의 길 ‘이라는 사색적인 말로 표현한 것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단 한차례, 벌을 선 일도 있었다. 6학년 음악시간—그때는 창가시간이라고 했다—이 되면 강당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곳에 풍금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 당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벽에 새로 걸린 그림에 얼이 빠질 정도로 황홀해졌다.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과 <만종>이었다. 수업 중인데도 나의 시선은 자꾸만 그 그림으로 가자 마침내 선생이 나오라고 했다. 한대 세게 때리더니 그 그림 앞에 가 서 있으라고 했다. 나는 그 그림 앞에서 창가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반장이고, 처음 서는 벌이고 해서 대단히 자존심이 부끄러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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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림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다. 위의 것들이 지금 생각나는 유년의 기억들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이사해 서 살았을 땐, 참으로 가난했었다. 그러나 그 가난을 감지하면서도 가난을 모 르고 그저 묵묵히 나의 내부의 생활만 했던 것 같다. 혼자 무엇인가를 만들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걸어다니며. 친구도 별로 없이, 말할 사람은 어머님밖에 없이. 나만의 세계에서 유년기를 혼자 지낸 것 같다.
*수필집‘나의 생애’(영하,199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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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미동공립보통학교 교장 이치가와 선생의 추천, 그리고 그 권유에 따라 나는 그 어려운 경성사범학교 보통과를 시험 보고, 다행히도 합격이 되었다. 이 학 교의 교기는‘대애(大愛)’ 였다. 지금 생각을 해보아도 참으로 좋은 학교였다. 인간교육, 전인교육을 완전히 자치적으로 한 학교였다. 기숙사 관리도 식사부 터 모든 것이 학생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모든 것이 관비였고, 한달에 용돈 10원까지 지급되곤 했다. 가정 사정이 어려운 나에겐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 학교는 입학을 하면 운동부와 학술부에 들어가야 했다. 지금의 말로 서클운 동이 필수여서, 나는 육상경기부와 미술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을에 부원을 모집하는 럭비부에 발탁이 되어서 겨울이면 럭비부 생활을 했다. 나는 이 학교를 다니면서 시집을 많이 읽었다. 수업 사이사이 토막 시간을 이용하여 읽었다. 그 짧은 글 중에는 나를 위로해주고, 나에게 꿈을 심어주고, 강하게 해주는 말이 보석처럼 깔려있었다. 기숙사에서 첫 번째 외출하던 밤 지 금의 충무로, 당시의 혼마치(本町)를 걸었을 때 일한서점(日韓書店)에서 멋도 모르고 암파서점(岩波書店)의 문고판 로버트 번즈 시집을 사던 일이 생각난다. 이렇게 계속 시를 읽었던 것이 밑천이 되어 오늘날 내가 시를 쓰게 된 것이 아 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2학년 때라고 생각이 된다. 다음과 같은 시 구 절을 읽은 일이 있었다.“먼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면 등불을 켜서 간다.”이 말을 읽곤 운동에 뺏긴 시간을 이렇게 등불로서 보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학년에서 수석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었다. 운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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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실로 양립시키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것을 끝까지 해냈던 것이다. 이런 부끄러운 얘기를 적는 것은 요즘 운동선수들은 너무나 직업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로지 자연과학자가 되려는 꿈으로 중학교, 그 청소년시절을 보냈었 다. 수학을 했다. 김지정(金志政)이라는 수학선생이 소개하던 호그벤의《백만 인의 수학》 이라는 책 상하권을 비오는 날 서울장안을 헤매어 찾아다닐 정도로 수학에 미쳐 살았었다. 미적분도 과외로 교수해 주던 김선생의 사랑 속에서. 이 학교는 전통적으로 신입생들의 담을 시험해보는‘시담회’ 가 있다고 했 다. 신입생들을 기숙사에서 모아놓고(일학년은 기숙사 입실이 의무였다), 밤 에 나타나는 귀신 이야기를 실컷 들려준 뒤 한명씩 순서대로 정해진 줄에 붙어 있는 흰 종이에 자기 사인을 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나는 담이 약하고 무서 움을 잘 타서 운동장까지는 나갔으나 돌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5학년생 실장이 뒤쫓아와서 안심하고 한 바퀴 돌고 왔다. 나는 어려서 일꾼들에게서 들 은 옛날이야기 덕인지 쓸데없는 상상력이 발달된 것 같았다. 밤이 되면 변소도 잘 못가는 형편이었고, 그래서‘시담회’ 날도 은근히 실장에게 그 걱정을 실토 해 놓았던 거다. 이 학교에선 연중행사로 산토끼 사냥이 있었다. 산 능선에 그물을 길게 쳐놓 고 산 밑에서부터 나발을 불며 쳐올라가는 것이었다. 주로 관악산, 소사(소새) 뒷산, 도봉산 등을 이용했다. 이 날의 점심은 으레 학교 측에서 제공하는 도야 지국을 먹었다. 깊은 겨울이면 한랭 강훈련이 유도장, 검도장에서 있었다. 추 운 겨울 아침 5시부터 유도, 검도 강훈련을 필수로 약 1주일에 거쳐 있었다. 아 침 5시까지 학교에 도착하기엔 힘이 들었지만 개근을 하곤 했다. 5학년이 되자 졸업여행 겸 농촌실습으로 전라북도 임실동국민학교에 3주간 배치되었다. 임실역에서 한 십오리 길을 마차를 타고 들어갔다. 옛날 향교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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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고, 교장은 일본인인 이 학교에서 수업을 구경하기도 하고, 보충수업을 하기 도 하고, 오후면 농업실습을 거들기도 했다. 여기에 전주의 전북여학교 출신의 문선생이라는 처녀선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다른 첩을 데리고 나갔고, 홀어머 니와 여동생과 셋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처지에 동정을 하던 것이 날이 갈 수록 애정으로 변하여, 점점 심한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다. 밤마다 멀리 마을 에서 떨어져있는 밤나무 숲가에서 몰래 만났다. 밤나무 꽃냄새가 어떻게나 짙 었는지 지금도 날 지경이었다. 앞엔 개울이 흐르고 논에선 개구리들이 심하게 울고들 있었다. 밤나무 꽃향과 개구리 소리, 그리고 처음 경험하는 사랑의 고 동 같은 것으로 나는 공중에 둥 떠서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이야길 했다. 손 한 번 잡지 않고 밤마다 그저 나란히 앉아서 이슬에 흠뻑 젖곤 했다. 3주일이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만 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편지를 썼다. 답장이 왔다. 금방 다시 회답편지를 쓰고 또 금방 답장 이 왔다. 이렇게 수십 통의 서신이 왔다갔다 했다. 나는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교감선생을 방문한다는 핑계로 임실에 내려갔다. 교감선생은 눈치를 채고 문 선생에게 기별을 했다. 교감선생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이렇게 하룻밤 저녁식사 때 한번 보고 다음 날 소문 안 나게 임실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서 울에 돌아와서 편지를 딱 끊었다. 나는 동경으로 공부를 하러 가려고 하는 사 람이 아닌가. 결혼을 금방 할 생각도 없이 언제까지나 남의 처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안되었고 해서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처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시험 준비만 했다. 이 시기에 나는 일본 식민지의 농촌에 가난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식했다. 좋은 나라, 압제를 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나라에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왕 태어났으니 열심히, 보다 많은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고 결 심했다. 보다 많이 이 세상을 사는 방법, 보다 많이 이 인생을 사는 방법, 이것 은 실로 여행밖엔 없는 것이다. 이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 지구는 발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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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온몸 다하여 보다 많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 혼의 세계, 정신의 세계, 상상의 세계는 책을 통해 이루기로 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얼마나 어려운 학교였던가. 1, 2등을 하던 선배들이 다 떨어지는 걸 보고 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갈 길은 이 길 밖엔 없었다. 과 선택을 할 땐 심히 방황했다. 체육학과, 회화과, 지리역 사과 모두 형님이 반대를 했다. 시험을 보러 동경까지 갔다. 나는 못 썼지만 참 으로 진땀을 내었다. 뜻밖에도 발표란에 합격자로 내 이름이 있었다. 집에 돌 아오니 어머니가 아사히신문사에서 합격자 명단을 보았다며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네가 시험에 떨어졌으면 했다”하셨다. 나하고 같이 있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나는 이미 경성사범학교의 명예로 있었다.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내가 1학년 때부터 앉았던 책상이며 럭비 그라운드, 병실, 기숙사 등등 나하고 관계있던 모든 곳을 다 안내해 드렸다. 그리고 그 이튿날 서울역에서 어머님과 작별을 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또 한번 그 말을 하셨다.“나는 네가 학교에서 떨 어졌으면 했다.” 체육교사이면서 럭비부 감독으로 시오사키(鹽崎)라는 선생이 하얀 럭비유니 폼을 주었다. 자신이 후쿠오카 대표주장일 때 입던 것이라며 동경에서도 럭비 를 하라고, 아니면 방학에라도 내 집에 오지 말라고, 엄담하는 것이었다. 럭비 를 하면서도 내 머릿속엔 항상 꿈이 사라지지 않았다. 알파, 다시 말해서 물리 화학의 세계에서 나의 알파, 그 꿈을 하나 결실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인생은 시간의 함수, 한번 나에게 배당된 시간이 지나가면 시체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것. 그러나 알파라는 흔적 하나 남아야 한다는 나의 인생관. 나의 이름이 붙을 수 있는 나의 이론이나, 나의 실험, 그것을 늘 꾸었던 것이다. 때문에 운동시합 으로 실험을 못하게 된 것은 혼자라도 실험실에 가서 그것을 실험하곤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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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었고 기숙사, 강의실, 실험실, 운동 장, 이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자랑할 건 없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의 학 창 생활, 한국인 은사와 한국인 동창이 없는 학교를 다닌 것이 좀 서운할 따름 이다. 동경고등사범학교는 수영이 필수과목이어서 수영을 못하던 나는 여름방학 때 태평양 연안의 해변도시에서 2주일 수영강습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검 은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솟아있는, 시라기(白木) 란 이름의 여학생을 알게 되 었다. 나는 매일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 여학생이 지정한 어선으로 갔다. 그 곳에 둘이 걸터앉아 수많은 이야길 했다. 나는 이때에도 손 한번 잡질 않았다. 그저 나란히 먼 태평양 굽이치는 하얀 파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한없이 넓고 넓은 바다와 모래사장이었다. 멀리 어촌엔 소나무 사이로 등불이 보이고. 이렇게 매일 밤 같은 어선에서 밤이 깊어서 만났다가 밤이 차가워져서 헤어지 곤 했다. 한 일주일을 그렇게 지내다가 강습이 끝나서 동경으로 우리는 돌아왔 었다. 그리곤 동경 기숙사로 편지가 자주 왔다. 그러나 시간 낭비라고 생각을 하고 나는 편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몇 번 그렇게 편지가 오다가 아주 끊어 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 소녀에겐 첫사랑이었는지 모른다. 나에겐 지나간 훈훈한 바람이었다. 2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일본의 문호 시마시키 도오손(島崎藤村)의 글에 자 주 나오는 나가노현을 여행했다. 눈 내리는 날 기차를 타고 고모로(小諸)의 고 원지대를 지나고 있을 때, 심심한 나머지 옆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학생에 게“고모로는 여기입니까?”하고 물었다. 뜻밖에도“아닙니다. 시마시키 도오 손 선생의 고모로는 저 산쪽입니다”라는 대답이었다. 그 엉뚱한 대답에서 나 는 대단한 문학을 느꼈다. 내 고향을 묻기에“게이죠(京城)입니다”했더니 즉 석에서“아, 가고 싶습니다”하는 것이어서 친척이라도 있는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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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그저 멀어서 가고 싶습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순간 또 문 학, 아니면 철학을 연상하고 재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암, 인생은 그저 먼 곳, 그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나 스스로에게 깊이 침전되 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대학 시론 시간에 인용하곤 했다. 시심은 이렇게 멀리 가고 싶은 마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가노의 감바야시(上林)온천에서의 일이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산속, 더벅 더벅 내리는 눈이 나무에 두껍게 쌓이곤 하는 아침, 일찍 남탕에 들어갔다. 뜨 거운 탕 속에서 그날의 일정들을 생각하고 있는 참인데 밖에서 여자들이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젊은 여자 셋이 홀랑 벗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하여 남탕이라고 겨우 말했으나 여자들은 아랑곳없이 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좁은 욕탕이어서 나는 얼결에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찬란한 여자들의 옷, 나의 정감은 화끈하게 타올랐었다. 참으로 큰 꿈을 가지고 푸른 하늘만한 청춘을 살았던 시절이었다. 후회 없는 내 청춘의 절정, 내 인생 최고의 낭만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전쟁 말기에 들어 가자, 동경은 자주 공습을 받았고 수업은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폭격에 맞아 죽지는 않을까, 어머님을 한번 뵙고, 내 운명에 내 생명은 맡긴다, 하는 생각으 로 3학년 재학 중에 일시 귀국을 했던 것이다.
*시집‘후회없는 고독’(미학사,199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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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결혼
선배에 이인세라는 분이 있었다. 경성사범학교 선배요, 동경고등사범학교 선배로 문리과 대학 한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이분이 결혼을 했다. 그 축하연 에 갔었다.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자기 부인 친구라 했다. 경성여자의학전 문학교 졸업반이라고 했다. 약속한 날 약속한 대로 맞선을 보았다. 나는 건강 만 하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좋다” 고 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육상 경기를 했다고 해서. 약혼이 성립한 것은 양력 1945년 7월 18일이었다. 그런데 결혼 날짜를 잡은 것은 9월 13일이었다. 해방이 올 줄을 몰랐던 것이다. 과연 8월 15일, 해방은 되었다. 우리 둘은 만나서 결혼을 연기하자고 했다. 결혼보다도 공부를 더 해 야 하겠다고 했다. 양가의 집안에서 그럴 수가 없다고 해서 식은 그 정해진 9 월 13일에 청진동인가, 견지동인가, 지금의 조계사 자리, 그 태고사(太古寺)에 서 올리기로 했다. 결혼식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비를 맞으며 식장에 모이신 하객들, 참 으로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식은 간단히 치르고 처가로 나는 갔다. 앞으로 더 자유스럽게 공부를 계속하자는 두 사람의 합의아래, 결혼 후에도 동침을 하지 않았다. 세월은 나에게 참으로 험산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수필집‘나의 생애 나의 사상’ (둥지,199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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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시작
나는 학교 시절 별로 문학엔 관심이 없었다. 다만 보다 많은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서적, 철학의 서적, 문학의 서적을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 중에서도 학업에 지장이 없고 짤막한 시간을 이용해서 많은 상상력을 얻어낼 수 있는 서적, 그것은 시집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부 터 시집을 읽기 시작을 했던 것이다.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도쿄)에서 나는 물리화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꿈을 갖고서. 그러나 제2차 대전의 말기여서 제대로 참하게 공부만 할 시대적 여건 이 되질 못했다. 패전으로 몰리고 있는 일본의 수도, 도쿄는 공습을 맞기 시작 했다. 학생동원령이 내려졌다. 학생근로봉사대가 조직이 되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던 학생들은 공장으로 동원이 되었다. 강의가 순조롭게 진행이 되질 못 했다. 공습이 심해져서 언제 객지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3학년 재학 중 일시 귀국을 했다. 어머님을 한번 보고 싶어서. 그때는 오키나와 전투가 심해지고 일본에 패전의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귀국한 김에 모교 경성사범학교로 은사 신기범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신 선생 께선 당분간 도쿄에 들어갈 수 없으니 우선 교장을 만나보자고 하시면서 다카 하시(高橋)라는 교장을 면회시켜주셨다. 다카하시 교장은 잘 되었다, 물리 선 생이 입대해서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 화학실험실에 근무하면서 물리를 가르 치라는 것이다. 그것이 1945년 7월 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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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8월 15일, 일본은 패망을 하고 조선은 다시 해방이 되었다. 그 열광 된 풍경을 어찌 이곳에 다 담을 수 있으리. 날이 갈수록 해방이 된 조국은 정치 의 대혼란 속에 말려들어갔다. 좌익과 우익의 싸움 속에서 전국은 험악한 상처 를 입기 시작했다. 이 속에서도 국대안(國大案) 반대투쟁이 날로 심해져갔다. 과거에 있었던 관립 전문학교들을 경성제국대학과 합병해서 하나의 서울종합 대학을 만든다는 미군정창안이 소위 국대안이라는 거다. 경성제국대학은 서울 문리대, 경성고등공업은 서울공대, 경성고등상업은 서울상대……식으로 그 이 름이 바뀌어지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이북에서 넘어온 시인 편석촌(片石村) 김기림(金起林)이 경성 사범학교 영어 선생으로 들어왔다. 극렬한 국대안 반대 속에서 서서히 경성사 범학교는 서울사범대학으로 이행되면서 학장은 장이욱 교장이, 부학장은 신기 범 선생이 그 일을 맡게 되고 학부와 부속중학교(6년제)로 분리되어갔었다. 피 가 터지고, 병신이 되고, 그 국대안 데모는 날로 격심해지고. 1946년경이었다. 경성사범학교에서 물리선생을 하고보니, 내 것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 실을 알게 되었다. 남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이론, 학설, 실험결과 등을 주워 모아서 교재를 만들고, 그 교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밖엔, 내 것이 하나 없는 텅 빈 허수아비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낙심을 했다. 물리 화학을 하겠다던 꿈은 날로 암담해지고 물리화학으로 월급을 타는 직업인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던 거다. 이러한 꿈의 좌절에서 실로 쓸쓸해서, 고독해서, 외 로와서, 걷잡을 수 없는 낙오감에서, 그 포기에서, 시가 나오기 시작했던 거다. 이 시기의 나를 구출해 준 최초의 시가 바로‘소라’ 였다.
바다엔 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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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내 것을 찾아 나선, 시로서의 인생의 출발이었다. 해방 직후, 어둡던 시절의 정신의 구원이었고 영혼의 탈출이었다. 나의 나이 25세였다. 처음으로 우리 모국어로 시를 쓰게 되고, 그것을 차례 차례, 나의 쓸쓸한 분신처럼 주워 모으 기 시작했던 거다. 계속해서「해변」 ,「추억」이러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오면서 나의 암담한 정신상태가 점점 풀리기 시작을 했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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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줏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추억」 이라는 작품. 철자법도 잘 모르면서 또 이런 시가 나왔다. <줏는>은 <줍는>이 아닙니까, 하고 미지의 독자로부터 편지가 올 정도로. 그렇다, 이 시 와 같이 지금까지의 인생을 모두 잊고 다시 시작을 하는 거다, 이렇게 나 스스 로 나를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밀고 나갔던 거다. 그 무렵 나는 나의 모국어, 조선어를 새로 배우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시집을 닥치는 대로 사들 이고 읽었다. 그러나 하나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었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 시집만이 나와 결합이 되었다. 서문이 정지용 시인의 글 로 되어 있었다. 출판사는 정음사. 나는 이때까지 정지용도, 김기림도, 이태준 도 모르고 학생생활을 했었다. 윤동주의 시는 모국어로 이어진 나와의 구원적 인 해후였다. 이렇게 스스로의 좌절과 포기와 탈출과 위안으로 쓴 것들이 모여 서 제법 분량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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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는 방과 후에 럭비 코치로, 감독으로, 부장으로 후배들과 같이 운동 장을 뛰곤 했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언제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암담한 절망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어서 편석촌과 만나게 되었다. 같은 학교에 출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도 어떻게 편석촌이 나의 시편들을 읽었는지는 모른다. 하여간 그렇게 되어서 그와는 시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가 그렇게 큰 시인인지는 몰랐 다. 충신동에 있는 이층집 그의 집에 저녁초대를 받았다. 처음 방문한 그의 서 재, 양서로 가득 찬 그의 서가를 보고 나는 과연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 각이 들었다. 이것이 문학하는 사람의 방이로구나, 하는 생각과 더불어. 국대안은 드디어 통과되고 경성사범학교는 서울사대와 부속중학교(6년제) 로 정착되어갈 무렵, 은사 신기범 선생이 서북청년 학생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자택 골목길에서 작고를 하셨다. 좌익 학생들을 옹호했다는 거다.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인간적으로, 중도에 서셔서 교육자의 자리를 지켜나가셨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이 1947년 1학기. 나는 모교의 이 꼴을 볼 수가 없어서 마침 인천중학교 (6년제) 물리 선생으로 오라고 교장(길영의 선 생,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사학과 출신)이 만나러 왔길래 그러자고 했다. 1947년 9월 학기부터. 그러나 나는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물리 선생으로. 그것이 1949년 2월 7일인가 그러했다. 올라오자마자 편석촌을 만났다. 나의 시 원고 를 보자고 하길래 보여 주었더니 시집을 내자고 해서 낸 것이《버리고 싶은 유 산(遺産)》 이었다. 장만영 시인이 경영하는 산호장(珊瑚莊)이라는 출판사를 통 해서였다. 편석촌의『기상도』 도 그 무렵 다시 출판되고 있었다. 시집『버리고 싶은 유산』 이 나오자, 김기림 시인, 김광균 시인, 장만영 시인, 이렇게 중국집 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나는 책을 내는 것도 황송했는데 더구나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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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러한 기념회가 있다는 것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다른 시인들 은 모두 술에 약했지만 이봉구 소설가는 술을 잘했다. 그리고 말도 재미있게 했다. 나는 주는 대로 배갈을 마셔서 알딸딸했다. 장만영 시인이 나에게 충고 비슷하게 말을 했다.“조형, 출판기념회는 이것 으로 충분하니 다른 사람이 하자고 해도 하지 마시오, 이쪽에서 하면, 저쪽이 싫어하고, 저쪽에서 하면 이쪽이 싫어하니까, 절대로 응하지 마시오” 했다. 이 쪽은 우익, 한국문학가협회 사람들이고, 저쪽은 말할 것도 없이 조선문학가동 맹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도시 한복판 에 있던 소위 도시파들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플라워>라는 우익 문인들이 모이 는 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갖기로 했다. 그 자리에 어머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 에서. 장만영 시인의 충고를 어겨가면서까지. 사회를 박목월 시인이 맡아 주었 다. 이때 처음으로 서정주 시인을 비롯해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이런 시인 을 알게 되고, 많은 문인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1949년 늦은 가을이었던가. 이리하여 나는 우리 시단에 얼굴을 내게 되었다.
*수필집 ‘나의 생애 나의 사상’ (둥지,1991), 시론집 ‘그리다 만 초상화’ (지혜네,199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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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절
제2시집『하루만의 위안』 은 300부를 내가 인수하고 700부를 그때 명동에 있던 <건국서점>에 총판을 위탁했다. 300부는 문인들에게 보내야 한다기에 장만영씨의 지시대로 우송을 했지만 채 다 배부도 못하고 6·25동란이 난 것 이다. 부산으로 피난을 가선 광복동 네거리 <금강>다방이 문인, 예술가들의 아지 트였다. 또 한 곳은 역시 그 부근에 있었던 <밀다원>이라는 다방이었다. 이곳 은 김동리·손소희·조연현·오영수 계열의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순수문학 파. 매일같이 우리는 외인부대처럼 금강다방에 모였다. 김광주·한노단·조영 암·임긍재·김환기·이해랑·이인범·윤용하·이한직·이헌구·이하윤· 이진섭·유두연(영화감독)·박연희·이명온·김말봉·김소운, 이런 얼굴들이 떠오르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이렇게 적어보니 거의가 이미 세상 떠난 사 람들이 아닌가. 학교는 아직 시작하지 않아, 실업자처럼 매일같이 광복동 네거리에 있던 <금 강>다방으로 가선 저녁이면 돈 있는 친구를 따라가서 술을 마시곤 했다. 참으 로 처량했다. 더구나 집사람이 병원을 한다는 것이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어서 돈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심히 슬퍼졌다. 그야말로 부인 덕에 살아가는 것 같아서.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판에 김이라는 육군 중령이 자기 부대에 종 군을 하면 한달에 쌀 한가마를 준다고 했다. 그 쌀 한가마라는 말에 당장 부산 을 떠나 그 부대에 종군하고 싶어졌다. 김중령의 부대는 영천에 있던 철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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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나는 정훈부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부대장의 명령으로 철도연대 연대 가를 만들어야 했다. 나는 가사를 만들어서 김순애(이대교수)에게 작곡을 의뢰 했다. 나는 정훈부를 신설하면서 연대 내에서 사병들하고 기거를 했다. 연대장 은 장교숙소에서 기거하라고 했지만, 차별하는 것이 싫어서 사병숙소에서 지 냈다. 논바닥에 친 천막촌이었다. 나는 그 천막촌에 누워서 레마르크의《개선 문》 을 탐독했다.“사랑이란 그 누구하고 같이 늙고 싶은 심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남자 주인공 라빅의 말에 홀려가면서. 부산 송도에 비둘기집 같은 간이 목조 건물을 하나 지었다. 김중업의 제1호 작품이라고 했다. 대지도 그와 같이 가보고 산 보리밭이었다. 송도 언덕 위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송도는 한가한 해안 농촌이었다. 넓은 보리밭이 이곳 저 곳에 있었다. 물론 고깃배들이 보이는 어촌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변두리의 시골이었다. 이곳에 김중업의 말대로 시인의 집을 지었던 것이다. 《패각의 침 실》 이라는 네 번째 시집은 이 집에서 나왔다. 예쁘게 집모양이 되어서 오고가 는 사람들이 구경도 왔다.
*수필집‘나의 생애 나의 사상’(둥지.1991),‘떠난 세월 떠난 사람’(현대문학,198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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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시절
6·25를 겪은 서울의 명동은, 한마디로 저녁이면, 그리고 밤이면 끼리끼리 어울려서 밤 깊도록 슬프고, 쓸쓸하고, 불안하고, 고독하고, 암담하던 생존을 서로 술로 녹이며 살았다. 슬픈 조국을.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오늘의《현대문학》그리고 <한국문인협 회>의 주류를 이루던 협회파, 도강파, 그것에 동반하던 인사들이 자주 모이던 곳은 <갈채>라는 다방, 그리고 <명천옥>이라는 술집이었다. 이들은 일단 명동 의 중심에 있던 <갈채>다방에 모여들었다가 저녁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명동 입구에 있던 <명천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김동리 선생을 중심해서 조연현 ·곽종원·박목월·최인욱·박용구·김광식·이범선·곽학송·박기원·김 윤성 …… 나는 이곳의 단골이 아니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러한 분들 이 거의 매일 밤 모여들어 주석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우리들 김광주씨를 중심한 명동파는 명동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모나리자>다방이 제1시기의 제1아지트였다. 우선 이곳에 모여들었 다가 끼리끼리 각자각자의 술집으로 방향을 잡아 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돈 없 던 문인들, 차를 잘 마셔주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예술가들이 하도 많 아져서 영업이 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말하자면 축출을 당하게 되었다. 차를 팔 아주지도 않고 온종일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석고상>이라고 했다. 그때 때마침 문화인들을 위해서 개업을 한 다방이 생겼다. <동방문화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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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것이었다. 그후부터 <모나리자>석고들은 이곳으로 자연 모이게 되었다. 이 집 주인 김선생은 돈이 좀 많은 분이어서 우리들 가난한 문인들을 위해서 참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해였던가. 한강 밤섬에서 있었던 <문 화인 카니발>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과 같이 물에 빠져 세상을 떴다. 배가 뒤 집혔던 것이다. 달밤이었다. 그날 온종일 한강 밤섬 모래사장에선 온 장안의 문화인들이 통술을 갖다놓고 마시고, 뛰고, 노래 부르고, 취하고, 엉망진창이 되어 해산들을 했다. 나도 벗어놓았던 옷을 몽땅 잊어버리고 알몸으로 돌아왔 었다. 다행이도 밤이었다. <동방문화싸롱>은 이렇게 제2기의 우리들 명동파의 편안한 아지트였다. 그 후 이 다방은 신협 단장 이해랑씨가 인수해서 부인이 직접 나와 일을 보았다. 이곳에 모이던 문인·예술가들은 실로 외인부대 같은 보헤미안들이었다. 소위 문단적인 섹트의 냄새가 전연 없는 외로운 혼자들이었다. 김광주·한노단(극 작가, 영문학교수)·이해랑·이봉구·윤용하(작곡가)·이인범(성악가)·전봉 초·박인환·이진섭·김수영·조영암·조지훈·박연희·김진수·박고석· 김환기·장욱진·유호·김영주(삽화가)·이순재(삽화가)·이명온(수필가)· 조애실·조경희·최요안(방송작가), 그리고 이헌구·안수길·이하윤·박진 (연출가)·김광섭, 때때로 이무영·박계주·김내성·유두연(영화감독),그리고 수많은 문화부 기자들, 잡지사 기자들, 이런 분들이 우리들 인생의 외인부대처 럼, 명동을 끼리끼리 이리 어울리고 저리 어울리고 실로 조직이 없는 인간가족 처럼 배회하며 깊은 술, 깊은 밤을 시대를 응시하며 뜬눈으로 그 슬픈 시대, 슬 픈 역사를 살았던 거다. 지금은 그 많던 술집의 이름들, 주모의 이름들을 다 잊었지만, <향원>이니, <봉 소아>니, <뉴 나이아가라>니, <블랙 스톤>이니, <카리레오>니, 퇴계로의 <포엠>이니,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이름들이다. <명동장> <무궁원> <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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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주로 동동주와 소주, 빈대떡 등을 손쉽게 돈 없이도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던 술집들이었다. 그 주모들의 고마움, 외상으로 그어주던 그분들, 지금 은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외상값은 밀렸어도 그분들 덕택에 한국의 문학, 한 국의 예술들은 자랐던 거다. 고마운 사람들,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그 무렵엔 술집이 그대로 시의 낭송장이 되었고, 노래의 장소가 되었고, 연 극대사의 연습장이 되었고, 술이 들어갈수록 명동의 이집 저집 술집마다 노래 이고, 시이고, 연극이었다. 통금시간, 그 사이렌은 명동 술집들의 인생극장의 막을 내리라는 신호였지만, 도취해 들어갈 땐, <반 되만 더, 반 되만 더> 다급 히 술주전자가 돌던 때도 된다. 동동주 반 되, 그 주전자가 유행이었다. <반 되 만 더> 이 말은 김광주씨의 말이었다. 이것이 이렇게 어느 술집에서나 유행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들 청춘은 정에 엉겨, 인생 동반의 바닥의 정에 엉겨 지냈 던 거다. 밤 깊도록 가난한 명동에서. 명동 입구에 있던 <명천옥>은 달랐다. 술 마시는 그 분위기는 흡사 매일 밤 단합대회라도 여는 거 같은, 여느 조직 같은 분위기였다. 그곳엔 질서가 있었 다. 선후배간의 서열이 있었다. 문단 데뷔가 언제다, 누구의 추천이다, 누구와 동향이다, 이런 식의. 이곳에선 매일 밤 술값을 걷었다. 그러니까 자기 술, 자 기가 마시고 가는 거다. 소위 요즘 말로 정확한 <더치 페이>였다. 우리들 주위 에선 돈 있는 사람이 내곤 했기 때문에 돈 없는 사람은 매일 밤 공짜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집 <명천옥>에선 그것이 허용이 되질 않았다. 회비를 내고 마시는 술, 그러니까 마음이 편안한 면도 있었지만, 너무나 사무적인 냄 새도 났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에 있어선 뒷맛이 깨끗한 점도 있었다. 공짜인 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명천옥>을 중심한 문인들이 한국문단의 주류를 이루어가자, 이무영·김광 섭·이헌구·모윤숙·이하윤·박계주·안수길·김종문, 이런 사람들이 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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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해서 또하나의 문인단체를 결성했다. 그것이 <한국자유문학자협회>였다. 그 회장이 김광섭 시인이었고, 박계주 소설가가 사무국장을 했다. 이 단체는 그후 『자유문학』 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해서, 『현대문학』 처럼 추천제로 인해서 많은 신인 소설가·시인·평론가·희곡작가들을 배출해갔다. 김광주씨를 중심한 우리 인생 <호적이 없는 가족>들은 무엇이던가. 그건 조 직을 싫어하던 인간들의 무리, 그 선량한 명동파, 그것이 아니었던가. 정에 엉 겨 고독한 시대를 살던. 참으로 그리운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국 산영화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국산영화의 붐을 타고 영화인들이 돈을 만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문인들이 마시던 술집들이 하나하나 영화인들에 게 점령당해갔다. 동동주 싸구려 술집으로부터 양주를 파는 고급 바·카바레 등에 이르기까지, 영화인들의 출입이 빈번해갈수록 호주머니가 가벼운 문인들 은 그 자리를 그들 흥청거리는 영화인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문인들은 다옥동의 깍두기집으로, 무교동의 용금옥으로, 심원 집으로, 청진동의 해장국집으로, 빈대떡집으로, 조선일보 뒷골목에 있던 <아 리스>다방으로, <청하>다방으로, <은하수>다방으로, 그 근처 방송회관 부근에 있던 수많은 작은 술집들로 분산 이주하게 되었다. 기실 한국시인협회의 창립 도 <은하수>다방이 그 산실이었으며, 그곳이 사무실 구실도 한 거라고 기억하 고 있다. 이렇게 해서 문인·예술가들은 상업인들에게 그 영혼의 보금자리였 던 명동을 내놓게 된 것이다. 1960년 초반부터. 내가 명동의 술집, 다방 등을 떠돌며 나의 길을 찾고 있을 즈음, 나는 늘 호 주머니에 일본어 번역판으로 되어있는 프랑스의 시인인 프란시스 카르코의 《파리 예술가 방랑기》 를 넣고 다니며 읽었다. 이 책에는 20세기 초기·중기에 프랑스 파리에서 예술 청년기를 방황하던 수많은 예술인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어서 흡사 서울 명동 거리에서 방황하며, 미래를 응시하고 있었던 한국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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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을 생각케 해 나에겐 실로 많은 참고와 위로가 되었다. 특히 시인 아폴리 네르를 중심으로 한 몽파르나스 거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을 하기 때 문에, 그들을 인명사전에서 찾아가면서 심도있게 그들을 읽어나갔던 것이다. 만년에는 모두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저명한 예술가로 되어 있지만, 그들의 젊 은 날은 실로 파리 뒷골목을 배회하던 거지들이었다 …… 그러나 지금 그들은 모두 아카데미 회원이 되어서 그들의 젊은 날의 고생을 보상 받으며 하나하나 사라져가고 있다, 라고 카르코는 말하고 있다. 나도 지금은 한국의 아카데미 회원으로 있지만, 1950년대의 명동, 1960년대 의 종로에서의 내 젊은 날의 생활은 그야말로 빈곤과 방황, 좌절과 모색을 숨 차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나의 주변에서 같이 예술과 인생을 동반하던 벗들은 지금 하나하나 사라지면서, 그들은 한국문인 대사전 속으로 주소를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명동거리를 떠들썩하게 하고, 신문이며 잡지 지면을 수놓던 벗들, 명동의 아폴리레느였던 김광주 선생도, 이해랑 선생 도, 한노단 교수도, 윤용하 형도, 이봉구 씨도, 이진섭 군도, 박인환 군도, 김수 영 군도, 유두연 형도, 이한직 형도, 조지훈 씨도, 전광용 교수도, 정한모도, 박 양균도, 그리고 내가 좋아하던 김환기 화백도……. 이들은 실로 카르코의 책에 나오는 인물들 못지않게 재능 많았던 한국 명동의 멋있는 예술가들이었다. 이 들 중에는 살아생전에 응분의 명예와 명성을 찾지 못하고 조급하고 성급하게 사라진 벗들이 많다. 6·25동란 전의 일이 하나, 지금 머리에 떠오른다. 김병욱 시인과 박인환 시 인 이야기. 대구 출신의 김병욱은 나보다 두서너 살 위로 멋쟁이 시인이었다. 북으로 간 줄 알고 있으나 그는 좌익적인 시인이 될 수 없는 기질로, 낭만적인 시인이었다. 그가 어느날 술집에서 한참 기분을 돋구고 있을 때, 불현 듯“조 형, 인환이하고 만날 땐,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멋있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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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놈이 재치가 있고 눈치가 빨라서, 그 멋있는 말을 먼저 써먹는단 말입니 다. 언어에는 지문이 확실한데……” 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언어에 도 지문이 있다’ 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생각하는 바 컸다. 다른 사람의 말. 다른 사람이 먼저 쓴 말은 쓰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먼저 사용한 그 사람 말의 지문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좋은 말을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나에게도 다른 사 람의 지문이 있는 말을 쓴 일이 있나, 순간 반성해보기도 했다. 나는 이 시절의 이야기를‘명동실록’ 이라는 수필집에서 그려내었다. 그 무렵 나는 대학 동료교수들하고 어울리게 되는 기회가 많아져서 문인들 하고의 술좌석은 멀어져 갔다. 나는 경희대며 연세대, 이화여대, 또 한때는 숙 명여대, 국제대까지 출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국문학과 교수들과 술을 마 시는 기회가 늘어났던 것이다. 참으로 많은 교수들이 종로에 있던‘낭만’ 과 ‘심원’ 에 들락거렸다. 거의 매일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학문에 대한 이야 기, 사회정보에 관한 이야기, 각 대학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심지어는 과회의 를 거의 이곳에서 열기도 했다. 술값도 싸고, 외상도 되고, 깨끗한 이 술집은 한 가족이며, 위안이며, 스승이었던 우리 벗들의 사랑방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수필집‘떠난 세월 떠난 사람’ (융성,1996), 시론집‘그리다 만 초상화’ (지혜네,199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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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광복, 50년
1949년부터 나는 시단 출입을 하게 되었다. 시집을 내고, 6·25동란으로 부 산으로 피난을 하고, 서울 수복 후 중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참으로 좌 절과 고독과 방황과 모색의 시절이었다. 이렇듯 좌절·고독·소외·방황·모 색으로 일관하면서 시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이러한 시의 길을 걸어오면서 나 의 첫 번째 시련기는 해방 직후부터 계속되던 이데올로기 시대였고, 두 번째 시련기는 60년대부터 급격히 범람하던 소위 난해시 시대였고, 세 번째 시련기 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걸쳐서 극성을 다하던 민주화 참여시 시대였다. 나는 이러한 시대적 물결 속에서 오로지 나의 인생과 나의 꿈을 찾아서 흔들리 지 않게 혼자의 길을 시로써 걸어왔다.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하는 양심이며 그 절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시대를 얹고 나오는 문학관이나 그 주장들을 극히 배격 해 왔다. 변절이라는 것은 문학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죄악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문인들을 경멸해 왔다. 시대 조류에 따라서, 시대를 업고 살아가는 문 인들, 시대의 물결을 타고 출몰하는 문인들, 그들은 독자들에게 큰 죄인이며, 문단에도 큰 죄인이라 생각하고 있다. 일관된 자기 문학관과 흔들리지 않는 자 기 인생 철학관과 자기 양심을 가지고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뜻에서 내가 광복 50년,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존경해 온 작가는 김동리 선생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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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는 너무나 소란하다. 들떠 있는 세상 같다. 차분히, 착실히, 견 고하게,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모두들 들떠서 불안 하게 살아가고 있다. 조용히 인생을 생각하면서 인생을 인생답게 살아가는 모 습은 거의 보이질 않고, 주위 사방이 소란하게 먼지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 시단만 해도 그렇다. 요즘은 시를 읽어 가는 것이 어지럽다. 물론 세상 이 다양하게 변화해 가는 이유도 있어서 많은 실험적인 시들도 나오게 마련이 지만, 시를 시답게 쓰는 시인들이 잘 눈에 띄질 않는다. 그저 문단에 이름을 걸 기 위해서, 이 잡지 저 잡지 쫓아다니며 발표하고자 하는 시 아닌 시들이 범람 하고 있는 느낌이 들곤 한다. 시는 영혼의 작업이다. 시사적인 언어 작업이 아니다. 인간의 깊은 고뇌 ? 사색, 그 아픈 삶의 영혼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는 책임 있는 창작활동이다. 참 된 인간들이 나누는 영혼의 대화이다.
*수필집‘너를 살며 나를 살며’(고려원,199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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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
나는 1986년 8월 31일, 인하대학교 대학원 원장을 마지막으로 내 긴 교직생 활을 정년퇴직했다. 1956년 4월부터 경희대학교 교수, 초대 출판국장, 문리대 국어학과 과장, 문리대 학장, 교육대학원 원장, 음악대학 학장 겸임럭비부장, 실로 많은 보직생활을 하면서 약 22년간을 정근했다. 그리곤 인하대학 초대 문과대학 학장으로 자리를 옮기고서 부총장, 대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고서 정 년퇴직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대만 타이페이에 있는 중국문화대학 중 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들을 받았었 다. 그리고 쭉 이사직으로 있었던 중앙대학교 재단이사장 직무대리까지 했었 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대학생활에 있어서 안 해본 것은 총장직뿐이었다. 그 리고 또 본의 아니게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만장일치로 추대 받아, 지금 그 이사장 노릇을 하면서 이 글을 엮어내리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내 인생 은 진행이 되었다. 참으로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다. 열심히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내일 죽어도 이 세상에 하나도 미련이 없다. 다만 아프지 않게 죽었 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나는 정년퇴직이 되자마자 그동안 저축을 해둔 돈으로 시골 편운재 옆에 청 와헌(廳蛙軒)이라는 아틀리에를 하나 증축했다. 경희대학, 인하대학에서 나온 퇴직금은 일시에 받아서 집에 주었다. 그러니까 청와헌의 건립은 순전히 내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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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작품)으로 번 돈이었다. 편운재는 1963년 어머님이 작고하시고 일년 후인 한식날, 성묘를 하고 그 길로 어머님 묘막을 하나 짓기 시작했다. 전에도 여러 곳에 썼지만 편운재는 어머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은 집이고 이 집 흰벽엔 어 머님의 말씀,“살은 죽으면 썩는다” 라는 말이 오석에 새겨져 있다. 집을 넷째 형님하고 지을 때,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한 조각 흘러가길래, 인생도 저렇게 한때 흘러가는 흰 구름이라는 뜻에서 편운재(片雲齋)라고 집이름을 붙인 것이 다. 청와헌은 이 집 주위에 개구리가 참으로 많이 울기 때문에 그렇게 집이름 을 붙인 것이다. 어머님 작고하시고 꼭 10년 되던 해에《어머니》 라는 시집을 냈다. 이것으로 한국시인협회상을 탔다. 이걸 기념하고, 중2 교과서에 시도 들 어있고 해서 어머님 묘소 옆에 시비 <해마다 봄이 되면>을 오석에 새겨서 세웠 다. 나는 1986년 9월이던가, 장이 꼬여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어 일년 후 다시 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같은 곳을 두 번 짼 것이 다. 그리고 작년 중국, 소련,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를 돌고 와서 술을 잘못 마 시고 뇌졸중으로 마비가 약간 와서 다시 입원을 했었다. 약 3주일 입원을 하고 퇴원한 이래로는 항상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나를 따라 다녀 육체도 마음도 옛 날과 달리 아주 허약해졌다. 이런 약한 마음으로 유서를 쓰기 시작을 하고, 혹 시나 해서 유고집을 쓰기 시작을 했다. 어느 사람의 힘으로 나를 구출하려고. 정년퇴직을 하고 참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매일 매일이 죽음하고의 문답 이며, 그 죽음하고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내 최후의 마무리 작업이었다. 따라 서 시를 쓰더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작품에 어리었다. 모모 친구들은 왜 그러한 허약한(마음이) 작품을 쓰느냐 하지만, 자연 그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오 는 것을 거짓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시는 나에게 있어선 내 자신에게 주는 진실한 고백이요, 그 내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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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 내 인생관이었다. 나는 실로 사십여 년간을 시를 써오면서 오로지 나를 추궁해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있어서 나의 시는 테마도 나 자신이었 고, 소재도 나 자신이었고, 표현도 나 자신의 스타일이었다. 나는 다만 나를 살 려고 애썼을 뿐이다. 한국이라는 땅에, 그것도 변화가 격심하던 1900년대를 살아온 나 자신을 오로지 충실히 살려고 했을 뿐이었다. 고로 나에게서 나오는 그 시는 그 마음의 분출이었고, 살려고 몸부림치던 그 절규들이었다. 그러니 자연 나의 스타일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문학이나, 예술이니, 그 가치이니, 그 런 것은 생각할 틈도 없었다. 때문에 단체라는 것, 그룹이라는 것을 생리적으 로 싫어해왔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그 큰 덩어리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을 맡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실로 시는 나에게 있어서 우선 모든 운명의 위안이며, 그 치유이며, 그 기쁨 이며, 그 존재의 확인이었다. 이러한 위안이나 기쁨이나 치유가 되지 않는 작 품은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김기림이나, 장만영이나, 김광균시인 같은 소위 모더니스트들이 초기의 내 울타리요, 그 시의 산파역들이었지만, 생존하 고 유리된 언어작업은 나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었다. 나는 오로지 살기 위해서 시를 써왔다. 살기 위해서 시를 발견해왔다. 유명 해지려고 시를 써온 것이 아니었다. 문학사를 겨냥해서 작품을 써오지도 않았 다. 시집을 많이 내고자 그렇게 많은 시집을 써온 것도 아니다. 살다보니까 그 렇게 많은 시들이 나왔고, 그것이 시집으로 나왔었다. 앞으로도 내가 살아 있 는 동안 계속 시가 나올 것이다. 나는 시로 인생을 호흡하고, 시로 인생을 생각 하고 시로 나의 우주를 측량해왔다. 살아 있는 그 자체가 나의 경우엔 시 그 자 체이었다. 지금 내가 유고집으로 생각하고 쓰고 있는 <어느 분에게 드리는>내 연작시는 바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나 자신의 가련한 목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많이 썼다. 그것만이 내 최후의 구원이었으니까. 그분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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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라면 그 캄캄한 고독을 어찌 견디어 왔으리. 그분이 곁에 없었더라면 그 캄 캄한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이겨 왔으리. 실로 그분은 내 마지막 구원이었다. 무상(無償)의 종교(宗敎)였었다. 나는 그렇게 약한 존재였는지 모른다. 사실 나는 약하디 약한 맑은 갈대였 다. 스스로에겐 강했지만 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약하디 약한 존재였었다. 그 약한 존재를 지금 이 자리까지 끌고 온 것은 오로지 나의 시였다. 많은 욕설을 받았었다. 많은 미움을 받았었다.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 많은 욕 설·미움·비난·시기·질투를 뚫고, 혹은 피하며, 혹은 외면하며, 혹은 충돌 하여 여기까지 줄곧 나는 나를 살아 왔다. 나를 써왔다. 나를 지켜왔다. 참으로 오랜 이질의 세월이었다. 나는 청와헌을 지으면서 내 고향 난실리에 버스정거장을 마을 사람들을 위 해서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지붕 꼭대기에‘꿈’ 이라는 깃발을 달아 주었다. 꿈을 가지고 살자는 의도였었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에게 그‘꿈’ 이라는 깃발 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공부방에 걸어두라고. 그리고 운동장을 마련해주었 다. 운동장엔 철봉대, 농구대 등을 사다 주었다. 그리고 등나무 넝쿨 휴게소를 마련해주었다. 나도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면 이곳에서 약간의 운동을 좀 한 다.‘고향 만들기’ , 그것을 꿈꾸고 있는데 얼마만큼 효과가 나타날지는 모르겠 다. 하여간 죽을 때까지 고향을 고향답게 손질을 하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찾아오더라도 더럽지 않게. 아홉 살까지 이곳 난실리에서 살다가 예순다 섯이 되어 다시 시골로 내려와 지금 나는 이곳에서 주민등록도 옮겨 놓고 살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여기서 해외여행 몇 가지를 기록하기로 한다. 1986년 6월 27일부터 7월 3일 까지는 제8차 세계시인대회 플로렌스에 참가하여 유럽 각지를 돌고 왔다. 그 리고 1986년 12월 28일부터 1987년 1월 2일까지는 제9차 세계시인대회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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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라스 대회에 참석, 인도의 시성 타골을 기념하는 무학배(盃)도 받았다. 1987년 6월까지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렸던 18차 국제시인제에 개인 초 대를 받아 참가를 했다. 가는 길에 스위스 루가노 호반도시에서 열렸던 제50 차 국제 PEN대회 참석을 했다. 로테르담 시인제에서는 우리말로 나의 시를 30분 읽었다. 물론 네덜란드어로 번역이 되어 있었고 실로 많은 박수를 받았 다. 이러한 국제시인제에 참석하여 박수를 받으니 시를 쓴 보람이 있었다. 1987년에는 일본 노도지마 나나오 시에서 제2회 국제시인제가 있었다. 이때 참가한 일본 농촌의 육상여행이 한없이 즐거웠었다. 그리고 1988년 6월에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릴 예정인 Encounter in Israel 1988 International 에 초대를 받았으나 이스라엘 국내 소란 때문에 연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행을 짜놓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을 떠났다. 1988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에서는 칸타타‘서울 올림피아 찬가’ 를 만들고, 올림픽 기념벽 에 들어가는 헌시를 썼다. 지금 그 기념벽돌에 새겨져 있다. 1988년 11월에는 타일랜드 방콕에서 제10회 세계시인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대회를 마치고 홍 콩에서 중국행비자를 얻어 중국을 돌았다. 한마디로 미개한, 기계문명에 오염 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을 돌고 왔다. 지금 나는 부끄럽게도 칠십, 소위 고희라는 고개에 와 서있다. 주위 사람들 의 권유도 있고해서 칠십 고희기념으로 미술개인전(연화랑)을 준비시켜 놓고, 33권의 시집에서 자선한 300편의 선시집(동문선)을 준비시켜 놓고 있다. 앞으 로 무엇이 더 전개될는지 지금은 텅 비어있는 상태이다. 숙제를 다 해놓고 시 간만 기다리고 있는 학생처럼.
*시집‘후회없는 고독’(미학사,199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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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난실리
나의 고향은 서울에서 용인을 거치고, 송전을 거쳐서 들어가는 경기도 안성 군 양성면 난실리이다. 지금은 이 길이 가장 짧은 거리로 왕래하는 길이 되었 지만, 내가 어리던 시절엔 송전을 거쳐서 오산으로 나와, 오산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 것이 정상적인 서울 왕래길이었다.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엔 용산 서 고삼행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것밖엔 없었으니까. 용산서 안양으로, 수원으로, 오산으로, 오산서 동으로 40리를 들어가야만 했다. 시간적으로 한 3시간, 참으로 먼지 나는 지루한 거리였다. 그러니까 내가 소년 시절엔 꼭 이 버스를 이용했던 거다. 버스가 없을 땐 내 고향 난실리에서 40리 촌길(지방도로)을, 그 마차 길을 걸어서 약 3시간, 오산 까지 나와야만 했다. 오산까지 나와서 이곳에서 장국밥으로 점심을 하고 부산 쪽에서 올라오는 완행열차를 타야만 했다. 서울서 내려갈 땐 이와 반대로 서울 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오산까지 가서, 오산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걸어서 40리길을 타박타박 들어가야만 했다. 다행히도 빈 마차를 만나면 마차 신세를 지기도 했다. 오산서 40리, 용인서 30리, 송전저수지 호반에 있는 마을, 용인 군과 안성군의 경계선에 있는 마을, 작은 개울을 경계선으로 해서 서쪽은 용인 군이고 동쪽은 안성군, 그러한 곳에 나의 고향 난실리는 있다. 나는 아홉 살 되던 해까지 난실리에서 자란 게 된다. 어린 기억이지만 앞들 엔 포플러나무들이 우거지고, 개울둑엔 밤나무들이 줄지어 있었고, 개울 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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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는 꿀루기라는 물새들이 많아서 우리 어린 꼬마들은 자갈밭에서 잘 보이 지 않는, 완전 보호색이어서, 꿀루기 알들을 찾아내느라고 하루를 보내곤 했 다. 참으로 개울물이 맑았다. 투명했었다. 그 맑고 투명한 개울물에 발을 쳐서 피라미·볼거지·미꾸라지들을 잡기도 하고, 장마가 지나간 뒤엔 줄낚시를 하 기도 했다. 물에 떠내려가는 참외·수박 같은 것을 건져올리기도 하고. 내 고향 난실리. 이 마을은 내가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한양 조가(趙家)의 마을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을 전체가 거의 조가들의 친척들이었다. 그러던 것 이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지나가고 하는 바람에 여러 성들이 들어와 같이 살게 되고 집들도 늘어났다. 지금은 40여 농가, 약 백오륙십 명이 농사를 지어 살고들 있다. 방앗간이 하나, 잡화를 파는 가게가 하나. 나는 1929년 봄에 서울로 올라와 그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해인 1930년 4월에 서대문 밖에 있는 미동공립보통학교 제2학년에 편입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의 타향살이가 시작된 거다. 줄곧 서울에서. 그러다가 1962년 6월 3월에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 나이 81세, 나의 나이 43세. 어 머님에게 한 번도 효도도 못했고, 항상 가정일에 근심만 끼쳐드렸던 것이 한꺼 번에 후회스러워, 얼마나 혼자서 울었던가. 어머님을 난실리 뒷산, 어머님이 정하신 곳에 모시고, 다음해 1963년 한식날 어머님 산소 가까운 언덕에 묘막 처럼 집을 하나 지었다. 지금 내가 주말마다 내려가 작업을 하는 곳이다. 이름 을 편운재라 했다. 인생 실로 조각구름 같은 것들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집 을 짓고, 흰 그 벽에“때때로 생각나는 어머님 말씀‘살은 죽으면 썩는다’ 1963년 한식날 이 집을 세움”이러한 글을 오석에 새겨서 넣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내 고향 난실리에 내려가 있었다. 내려가서 살기 시작한 거다. 실로 고향 떠난 지 약 35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거다. 몸과 생활 은 아직 서울에 붙어 있다 해도 해마다 어머님 제사는 이곳 어머님의 집‘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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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에서 지내곤 했다. 온 가족이 모여서. 그리고 어머님이 세상 떠나신 지 10 년이 되던 해에 나의 제21시집으로《어머니》 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그것이 한국시인협회가 주는 문학상으로 선정이 되었다. 이걸 계기로 해서 어머님 묘 소 옆에 시비를 세웠다. 시집《어머니》 에 수록되어 있으며, 중학교 2학년 국어 국정교과서에 실려 있는 다음의 시를 오석에 새겨서.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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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해마다 봄이 되면> 전문
이렇게 시간만 있으면 시골에 내려가 산소를 돌보고, 고향사람들하고 천렵, 윳놀이, 봄 가을놀이 하다가, 1986년 8월 정년이 되곤 아주 고향에 내려가 살 려고 화실을 하나 증축을 했다. 이름을 청와헌이라 했다. 주위 논밭에서 개구 리들이 엄청나게 울어대기 때문에 개구리 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생각에서 그 렇게 이름지었다. 그러고부턴 늘 마음이 고향에 가 있었다. 주말이면 거의 고 향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실천을 해 왔다. 정이 들어갔다. 현주소도 고향 집으로 옮겨 놓았다. 따라서 세금처리도 평택세무소에서 하기로 되었다. 우편 물도 제법 고향집으로 들어오곤 한다. 대문에 달아 놓은 우편함을 열 때 우편 물이 들어 있으면 어린 시절 개울에 친 발에 물고기가 들어 있는 거 같은 기쁨 에 들뜨곤 한다. 언젠가 인도의 남쪽 마드라스라는 곳에서 이 편운재로 그림엽서를 보낸 일 이 있었다. 이렇게 먼 오지에서도 편지가 그곳 시골까지 전달이 될까 하고. 그 랬더니 뜻밖에도 그 그림엽서가 안전하게 와 있던 것이 아닌가. 중국(중공) 여 행에서도 매한가지의 의심과 호기심으로 북경에서, 남경에서, 서안에서, 그림 엽서들을 보내보았다. 그런데 그것들이 다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중국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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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식의 수교가 없는 때의 일이었지만. 이렇게 지구 어디서나 편지가 날아 들어오는 곳에 난실리가 있고, 나의 작은 숙소가 있는 거다. 나는 지금 그 나의 숙소가 있는 고향을 나의 정신의 마당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장소로 생각하면서. 내가 죽어서 묻힐 곳이라 생각하면서.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웠다. 마을 앞길에 버스정거장을 세웠다. 마을 앞들에 작은 운동장을 만들었다. 그 운동장에 농구틀을 세웠다. 비각을 수리 보수했 다. 마을길을 냈다. 마을 마이크 설치를 했다. 마을의 청결운동을 벌였다. 그리 고‘꿈’ 을 마을의 기로 달아 놓았다. 마을 학생들에게 공부방에 걸어 좋으라고 ‘꿈’ 기를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고향가꾸기 마음이 나도 모르게 스스로 우러 나왔다. 내가 시를 쓰는 거처럼. 이 마을엔 아직도 내가 태어난 나의 생가가 있다. 나의 오촌조카가 살고 있 지만 그 집은 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322번 지가 그 번지이다. 지금 내가 거주하고 있는 편운재는 산38의 1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붕을 개량하여 양철지붕으로 했기 때문에 왠지 옛날 맛이 들지 않아 나의 생가 같지가 않다. 그러나 사랑채나, 마당의 우물이나, 일각문이나, 대문 이나, 내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던 바깥채는 다 없어졌다 해도 앞마당이 나, 대청마루나, 내가 난 안방이나, 건넌방 그리고 부엌은 그대로 남아 옛모습 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고 향에 내려가선 심심하면 한 번쯤 들여다보곤 한다. 하면서 참으로 고마운 생각 이 들곤 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서 소년 시절을 보내던 고향산천이 그대로 있고, 마을이 그대로 있고, 집들이 그대로 있고, 그것들을 이어가는 고향사람 들이 그대로 있고, 추억거리가 되는 그것들을 이렇게 인생 노경에 들어서도 밟 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좀 변했다 하더라도. 고향에 가고 싶 어도 그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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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말할 수 없는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거다. 외국을 여행할 때마다 가 보곤 하는 유명한 시인·소설가·화가·음악가, 그러한 예술가들의 고향,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감흥을 얻었던가. 실로 위대한 인간들은 보잘 것 없는 고향산천이라 할지라도 그 고향을 위대한 고향으로 만 들어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향은 인물을 낳고, 인물은 위대한 인간이 되어 서 그 고향을 빛나는 영원한 고향으로 만든다. 고향, 얼마나 그리운 이름인가. 얼마나 다정한 이름인가. 얼마나 눈물겹게 그 영혼을 같이하는 산천인가. 실로 고향은 그 인간의 모든 존재의 본향인 것이다.
*시론집‘그리다 만 초상화’(지혜네,199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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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가꾸기
내 고향 난실리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북쪽 야산 기슭에 있다. 뒷동산 이 름은 장재봉(長才峯)이다. 이 장재봉은 집안의 종산이며, 이 기슭에 고조할아 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먼저 가신 형님들이 묻 혀 계시다. 나도 머지않아 숨을 거두면 어머님 묘소 옆으로 갈 것이다. 나는 이 곳에서 아홉 살 되던 이른 봄까지 살았다. 여덟 살 때 이곳에서 십 리 길에 있 는 송전공립보통학교 일학년에 입학하여 다니다 어머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했다. 서대문 문 밖 미동공립보통학교 이학년에 편입을 한 뒤 쭉 서울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1962년 6월 3일에 어머님이 81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님을 뒷동 산 장재봉 기슭에 모시고난 뒤부터 나는 고향에 대한 생각이 짙어갔다. 다음 해, 그러니까 1963년 한식날 어머님 묘소 옆에 묘막을 하나 세웠다. 이름하여 편운재(片雲齋)라 했다. 이것이 내 마음을 고향에 내리게 했다. 참으로 오랜 세 월을 객지에서 보낸 것이다. 이제 어머님과 같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거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그후부터 자주 고향을 왕래하면서 고향사람들하 고 정을 다시 붙이기 시작을 했다. 그리운 사람들, 서로 이렇게 그립게 살다가 언젠가는 서로 죽음으로해서 헤어져야 할 사람들, 나를 묻어줄 사람들, 그 고 마운 사람들이 아닌가. 1986년 8월 31일로 나는 정년퇴직을 했다. 그리고 내 고향 난실리 편운재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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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작은 화실을 하나 더 마련했다. 이름하여 청와헌(廳蛙軒). 개구리 소리가 요 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완전히 난실리 사람이 된 거다. 고향을 사 는 사람이 된 거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 이 고향에서, 이런 생각이 들자 이 제부턴 내 고향을 가꾸어 가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고향을 아름답게 가꾸 어 가는 일, 그것이 나에게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짙어갔다. 고향 앞길 국도 45번 도로는 중요한 버스길이다. 하루에도 수차례 버스가 왕 래한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이 없었다. 우선 고향에 버스 정류장을 하나 만들 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이장에게 공사를 맡기고 마을 사람으로 하여 시공을 하게 했다. 공사비에 구애 받지 말고 평생 기분 좋게 쓸 수 있는 쾌적한 정류장을 지으라고 했다. 완공이 되었다. 돼지를 잡고 고사 겸 잔치를 벌였다. 온 부락을 다 동원해서. 고향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고, 이게 나의 종말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가, 흐뭇한 생각이 들었었다. 이곳 난실리 마을엔 학생들이 서른 대여섯 명이 된다고 했다. 이 학생들을 위해서 작은 운동장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고향을 사랑하는 뜻으로. 그리고 ‘꿈’ 이라는 깃발을 하나씩 만들어 주었다. 꿈을 가지라고. 그리고 나는 버스 정류장 지붕에 깃봉을 세워 역시‘꿈 이라는 기폭을 달아맸다. 온 마을이 꿈을 가지고 살자고. 사실 이 마을은 몇 년 전만 해도 몹시 가난했다. 그리고 마을 골목골목이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어느 농촌도 다 그렇지만 자기 울타리 밖엔 관심이 없는 거다. 서로 산다는 마음이 없는 거다. 서로 같이 잘 살자는 마음이 없는 거다. 자기만 살면, 하는 생각으로 더러운 마을 환경을 살고 있는 거다. 이러한 시골 인습을 고치려는 생각에서, 정류장을 짓고, 꿈이라는 깃대를 세 우고, 어린 학생들에게 운동장을 만들어 주고, 자기 방에다 꿈이라는 기를 달 라고 작은 깃발을 만들어 준 거다. 이렇게 우선 기초적인 환경미화를 하고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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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한결 마을이 문화적인 얼굴을 하게 되었다. 이젠 울타리들을 반듯하게 다시 세우는 일, 골목길을 정돈하고, 깨끗이 하는 일, 서로 마음을 고향 사랑하는 곳 으로 모아가는 일을 차례차례 해가면 되는 거다. 우선 배우는 이곳 청소년을 그렇게 교육시켜 가는 거다. 결국은 그들이 자라서 이 고장을 이어갈 것이 아 닌가.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 고향을 아끼는 사람, 고향을 빛내주는 사람, 이것이 고향을 사는 마음이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그러한 사람들의 고향을 수없이 보 았다. 고향을 유명하게 만든 인물들, 참으로 위대한 그 생존, 그 생애들이 아니 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무언가 업 적을 남긴 사람만이 고향을 빛나게 만드는 거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잉글랜드를 여행했을 때 셰익스피어의 고향을 방 문하고서부터 더욱이. 고향 만들기, 고향 가꾸기, 그것은 물론 물질적인 것보 다 그 인간에 달려 있겠지만 지금 나는 내가 이 세상 마지막으로 살다 갈 고향 을 우선 이렇게 정돈해 가고 있다.
*수필집‘사랑은 아직도’(백양,198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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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억
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 되던 해, 이른 봄에 세상을 떠나셨다. 찬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이월 초순의 날이었다. 아버지는 학자였다. 마을 사람들은 대단히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희미하다. 다만 사랑방에서 천자문을 무 섭게 배우던 생각만 남아 있다. 아버지, 난유선생은 첫째부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은 뒤 상처하시고, 두 번 째 장가를 든 부인에게서도 아들 하나를 얻은 뒤 또 상처하셨다. 세 번째 장가 를 드신 우리 어머님에게서 3남 2녀를 얻으셨는데 나는 그중 막내였다. 두 분 의 나이 차도 심하였고 나와 아버지하고의 나이 차도 거의 육십이 가까웠다. 그런고로 나는 어머님하고 안방을 쓰고 아버지는 사랑방만 쓰셨다. 그래서 나 와 아버지 간의 정이나 사랑이 뜸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들기도 한 다. 내게는 무섭고도 먼 사람. 그러나 이 지방 난실리의 어른이 바로 아버지였 다. 비록 일찍 돌아가셔서 나에게 큰 교훈은 남기시지 못하셨지만, 아버지께서 한학자이셨고, 선비였다는 것을 나는 평생 흐뭇한 마음의 긍지로 아버지를 살 아오고 있다.
*시론집 ‘그리다 만 초상화’ (지혜네,199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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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조두원, 1863. 6. 18∼1928. 2. 2 음력)는 어머니(진종, 1882. 12. 28∼ 1962 .6. 3))와 결혼하기 전에 2번이나 상처를 했다. 첫째부인(경주 김씨)이 아들(병길) 하나를 낳고 돌아갔는데, 재혼을 한 둘째 부인(제주 고씨)마져 아들(병칠) 하나를 낳고 얼마 안되어 별세를 하였다. 조병화시인은 아버지에게는 5남 2녀 중 막내, 어머니에게는 3남(병선, 병기, 병화) 2녀(병순, 병숙)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59세인 아버지와 마흔인 어머 니 사이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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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고향, 어머니
어머님은 1962년 6월 2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그 공허감 으로 어머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시를 써서 《어머니》 라는 시집을 출판했다. 어 머님은 참으로 부지런하셨다.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시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다. 이러하신 모습이 보기에 송구스러워 좀 쉬어가며 하시라고 하면“쉬 면 뭘하니, 죽으면 썩을 살을” 하시면서 그저 혼자 부지런히 일만 하셨다. 이 말씀‘살은 죽으면 썩는다’ 라는 어머님의 철학, 나는 깊이 이 말씀을 마음 에 새겨 나의 인생관으로 삼아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부지런해라, 절약해 라, 낭비하지 말라’이러한 말씀이나, 교훈 대신에 어머님이 하시는 그 근면하 신 행동, 절약하시는 행동으로 나는 그 철학을 배워왔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한참 상급학교에 가려고 밤 깊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어머님의 방에도 불이 켜져 있어서 건너가보니 어머님이 그때까지 일 을 하고 계셨다.“이제 그만 불 끄시고 주무시지요” 하고 말씀 올렸더니.“네 방 에 불이 켜져 있는데 어떻게 내가 먼저 불을 끄고 잠을 자겠니”하셨다. 그후 로는 어머님을 잠자리에 드시게 하기 위하여 내가 먼저 불을 끄고 잠든 것같이 하다가 어머님 방에 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켜서 공부를 하곤 했다. 경성사범학교 시절, 학교 규칙에 따라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였다. 학생들의 80%가 일본인이었던 만큼 기숙사 식단은 일본식으로 꾸며지고 있었는데, 어 느 날 어머님이 기숙사로 고추장을 갖고 오셨다. 나는 사춘기이고 했거니와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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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럼을 많이 탔던 모양인지,“이걸 왜 가지고 오셨어요. 도로 갖고 가세요”하 고 골을 낸 투로 말씀을 드렸다. 어머님은 말없이 도로 갖고 가셨다. 지금 생각 해도 참으로 불효막심한 짓이었다. 후일, 경희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어 머님을 모셨다. 학교 구경을 시켜드릴 목적으로. 어머님은 택시에서 내리시자 마자“네가 이렇게 큰 집의 선생이냐!” 하고 놀라시더니“아직 철도 나지 않았 는데”하며 뒷말을 이으셨다. 어머님은 작고하실 때까지 나를 보시면 “너는 언 제 어른이 되니. 네가 철이 나서 어른이 되는 걸 보고 죽어야지”하셨다. 가정 불화가 잦아 나는 이층 서재에서 자곤 했었다. 당주동 형님 댁에서 사 시던 어머님께서 아침 일찍 혜화동 내 집에 들르실 때, 내가 추운 이층 방에 누 워 자는 것을 보시곤,“남자가 기분 나쁘면 나쁘다, 하면서 허허 웃어버릴 것 이지”하시며 가슴 아파하셨다. 어머님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구한말 시골에서 학교 교육은 받지 못하셨 어도, 언문은 깨우치셔서 자주 불경이며 이야기책을 소리내어 읽곤 하셨다. 거 리의 거지를 보면 늘 적선을 하셨다. 이런 관계로 나도 어느덧 불교에 가까운 사상을 갖게 되었다. 어머님의 종교를 믿어야 나도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님에게로 돌아간다. 지금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 어머님에게서 나와서 어머님에게로 돌아간다는 이 신념은 나이 들수록 더욱 굳어져 어느덧 나의 종교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늘 어머님하고 함께 있었다. 어려서도 그랬고, 자라서도 그랬고, 지금 도 그렇다.
*시론집‘그리다 만 초상화’ (지혜네,1997)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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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비, 절묘의 미학
나는 서대문 문 밖에 있는 미동공립보통학교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6학년 때 800미터 릴레이 선수를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대문 근처에 있었던 경 성상업학교에서 서울시내 소학교, 보통학교 아동들의 800미터 릴레이 경기 시합이 해마다 운동회 때 있었다. 소학교는 일본인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였고, 보통학교는 한국인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중학교도 구분되어 있었다. 이 경성상업학교는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800미터 릴레이에 우승을 했다. 생전 처음 우승기라는 묵직한 깃대를 받았 다. 또 그 해 가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 역시 800미터 릴레이 경기 시합 이 있었다(시내 보통학교 아이들의). 이곳에선 우승을 못했고 이등을 했다. 이 학교는 지금의 경복고등학교이다. 그리고 경성사범학교로 진학을 했다. 이 학 교에선 의무적으로 운동부에 들어야 했고, 학술부에 들어야 했다. 나는 보통학 교의 경험으로 육상경기부에 들었고, 미술부에 들었다. 육상경기부에선 단거리를 전문으로 연습을 했다. 100미터, 200미터, 400미 터. 그 당시엔 배재, 양정에 하두 좋은 선수들이 많아서 육상에선 등에도 들어 보질 못했다. 일학년 가을학기 때 럭비부에서 부원모집이 있었다. 걸음이 재다 해서 럭비부에 픽업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럭비를 시작했던 거다. 그거로부 터 보통과 5년 동안, 그리고 연습과 2년 동안, 그리고 일본에 건너가 동경고등 사범학교시절까지 줄곧 선수생활을 하게 되고, 해방 후엔 대한럭비축구협회의 이사로, 도·시 대항 서울 팀, 혹은 인천 팀의 선수로, 그리고 서울사대 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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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인천 제물포고교 럭비부 창설, 서울고등학교 럭비부 창설, 우승, 그리고 경희대학교에선 럭비부 부장, 인천의 인하대학교에선 럭비부 창설을 꿈꾸고 운동장에 럭비 골대를 높이 세우곤 했다. 경성사범학교시절엔 여러 번 우승을 하여 일본에 원정까지 한 일이 있었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한 후에는 그곳 럭비부에서 전보가 왔었다. 봄 리그 전이 시작하니 곧 동경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성사범대학 졸업식에 참 석하고 싶었던 나는 몇 번이고 전보가 오고, 심지어는 동경고사 모표와 단추까 지 보내왔어도 모르는 체, 졸업식을 치르고 건너갔다. 의리 때문에 계속하게 된 럭비였지만 나는 술, 담배도 하지 않았다. 럭비부의 팀웍을 생각했던 것이 다. 럭비부 학생은 모두 체육학과 학생들이었고 나만이 이과 학생이었다. 따라 서 나의 체력을 항상 생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럭비의 명문 와세다, 게이오, 메 이지, 이런 대학하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패전을 계속했지만 지금 생각을 해보면 참으로 멋있는 학창생활을 했다, 하는 만족감이 들곤 한다. 요즘 인기 있는 스포츠에 가려져서 럭비 경기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실 로 럭비처럼 좋은 스포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남성감, 그 단결감, 그 희생 감, 그 속도감, 그 직선감, 그 지성감, 실로 감동의 율동이라고 할까, 생각만 해 도 가슴 뛰는 스포츠, 그 절묘의 미학, 바로 그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중학교 시절에는 철모르고, 또 상급생이 무서워서 럭비를 한 것이었으나, 그 덕분에 몸이 제법 굵어지고 단단해지는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동경에서도 참으로 잘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 낭만적인 학생 생활. 나는 내 긴 인생을 럭비처럼 살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루하고, 따분하 고, 고통스럽고, 근심이 많은 이 인생을 럭비 시합처럼 생각을 하면서 그걸 뚫 고 나온 것이다. *수필집‘사랑은 아직도’(백양출판사,198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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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나는 먼 곳, 이를테면 외국을 여행할 때면, 기념품을 파는 곳에 둘러 그곳을 상징할 수 있는 작은 물건을 사는 버릇이 있다. 그리 크지도 않고 가벼우면서 도 비교적 예술적이라고나 할까, 특별한 생각이 담겨진 물품을 사는 버릇이 있 다. 그렇게 해서 수집한 물건들이 지금 나에겐 제법 모여 있어서, 볼 때마다 그 곳을 여행하던 때의 일을 회상한다. 프랑스나 덴마크 등, 베레모를 잘 쓰는 나라에 들리면 꼭 베레모를 하나씩 사는 버릇이 있다. 이렇게 사 모은 베레도도 지금 몇 개나 된다. 쓰고 다니다 친구들이 달라고 하면,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파이프로 유명한 나라를 여 행할 땐 꼭 파이프를 산다. 그런데 파이프 값은 대단히 비싸서 여간해서 선뜻 손이 나가질 않는다. 그렇게 산 파이프도 탐내는 친구가 있으면 선뜻 내주기도 한다. 또한 프랑스 파리나, 일본 동경 같은 곳을 지날 땐 단골로 들리는 화구상 점이 있어서 꼭 마음에 드는 물품이나, 물감을 사곤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시기 드문 물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충 이러한 것이 나의 취미이며 버릇이 다. 이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전문에 가까운 정도로 깊이 젖어들은 취미라 하면 그림그리기이다. 사실 나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자라면서 그림을 전문으로 할 생각까지 들었으나 일제시대에 우리 조선인은 먹고 사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그림에 관심을 두고 전람회마다 구경 다니곤 했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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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밑천이 되어서 해방 후 시간이 날 때마다 흥이 나는 대로 유화를 그린 것 이 한 50점쯤 되었다. 대학 학장 시절이었는데 같은 대학 미술교육과 교수들 의 권유로 1973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것인데 그런대로 성과 가 좋아 계속 초대전을 열게 되었다. 이러고 보니 취미로 시작한 그림의 세계 가 나에게 있어선 더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되고, 자랑이 되어버렸다. 정년퇴직 후로는 줄곧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시는 나의 철학이 고, 그림은 나의 휴식이라 생각하고 그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수필집 ‘꿈이 있는 정거장’ (고려원,199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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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액세서리 - 목걸이, 파이프, 베레모 -
나는 본래 내 몸을 치장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넥타이는 현대인 남자들의 기본적인 공식 생활예절의 하나라곤 생각하지만 그것조차도 무시하 고, 가장 신체에 구속을 주지 않는 차림으로 일생을 지내오고 있다. 어머니가 주신 몸 그대로 충실히 살다 가자, 하는 것이 나의 인생관의 기본이다. 되도록 복장은 간소하게, 생활하는 데 편리하게, 활동하는 데 자유스럽게. 식생활도 되도록 간소하게, 시간 안 걸리게, 용건도 되도록 간단히, 시간을 아끼면서. 복 장이나 식생활이나, 주거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 대신 정신적으로는 여유 있게, 풍만하게, 풍요롭게 사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요즘 우리나라 여성들은 참으로 화려해졌다. 복장이 그렇고, 화장이 그렇고, 행동이 그러해졌다. 남성들도 그것을 쫓아나 가듯이 복장이 화려해지고, 화장 술도 능숙해지고, 활동들도 세련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화려해지 고, 사치스러워지고, 지나칠 정도로 몸치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 결코 나쁘다고 만 볼 수 없겠지만, 우리 전체 국민 생활도 생각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몸에 지나치게 장식물을 달고 다니는 것은 그리 좋게 보이질 않는다. 적당히, 자기 몸에 알맞게, 어울리게, 우아하게, 세련되게, 간편하게, 몸치장을 하는 것은 자 기를 남에게 좋게 보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 생각해서 좋게 받아들이지 만, 아무튼 지나친 과도의 장식은 그리 지성적으로 보이질 않는다. 지성인답 게, 교양인답게, 미적으로 자기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장식술을 터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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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생각한다. 언젠가 몇몇의 문인들을 데리고, 일본 북해도 시인협회의 초청을 받아들여, 단풍여행을 한 일이 있다. 호카이도의 원주민은 아이누 족이었다. 그 아이누 족을 일본 본토인이 개발을 위해 쫓아내고 지금의 호카이도를 건설해 놓은 것 이다. 일본 명치시대의 이야기다. 그 쫓겨난 아이누 족은 지금은 아메리카 원 주민처럼 제한된 구역에서 보호를 받으며, 관광객들의 관광물이 되어 약간의 토속 상품을 팔아가면서 근근히 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도 수렵을 하면서. 그 한 부락에서 그곳 추장의 아들이 하고 있던 목걸이가 내 눈에 확 띄었다. 자기 가 손수 조각을 한 것이어서 팔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흥정하고 흥정한 끝에 그것을 사게 되었다. 아이누 족의 심볼인 부엉이가 조각된 까만 나무이다. 장 식을 안 하는 성미이지만, 그 밀려난 아이누족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사랑하게 된 목걸이다. 이 목걸이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언제나 내 목에 걸고 다니고 있 다. 그러니까 나의 액세서리가 완전히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액세서리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 또 있다. 나의 생활용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파이프와 베레모. 파이프는 남자의 액세서리로 으뜸가 는 것이라고도 생각을 하고 있다. 멋과 품위가 있고, 대단히 생활적이다. 그리 고 베레모는 나의 복장의 하나이다. 늙어갈수록 나에겐 없어선 안 되는 필수 의상의 하나같이 되어간다. 목걸이, 파이프, 베레모. 이것이 나의 소박한 벗이 며 나의 액세서리이며, 나의 심볼이다.
*수필집‘버릴거 버리며 왔습니다’(문단과 문학사,199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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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술에의 길
“시는 나의 철학이고, 그림은 나의 위안이다” 라는 말은 나는 나의 화집 출판 머리말에 쓴 일이 있다. 실로 그림은 긴 내 인생에 있어서 그 위안으로서의 즐 거운 동반이었다. 실로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이 좋아서 사생도 하고, 만화도 그리고, 크레용으로 정물도 그리고 했다. 따라서 수공도 좋아해서 무엇을 만드는데 많은 흥미가 있었다. 일요일이면 혼자 그림도구를 챙겨서 서울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갔었다. 이화전문학교 뒷산으로, 연희전문 학교 앞뜰로, 홍제동으로, 수색으로, 좋은 곳을 찾아서 혼자 돌아다녔다. 그땐 이러한 곳들이 시골이었고, 자연이 그대로 아름답게 전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그림은 다른 아이들의 것에 비해 어둡고 쓸쓸했다. 나는 들뜬 밝은 세상보다는 쓸쓸하고 가라앉은 세상에 마음이 가곤 했던 것이다. 어려서 부터 눈물이 많았고, 떠들썩한 것보다 혼자서 생각하는 것이 좋았고, 따라서 마음에 꼭 맞는 친구라는 것이 그리 없었던 것이다. 애써 만들려고 하지도 않 고 내 마음에 맞는 것을 찾아서 누구의 지도도 없이 나대로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그린 그림들이 여러 군데 뽑혀서 전시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장실 에도 걸리곤 했다. 나는 이러한 초기 미술작업으로 국민학교 생활을 실로 충만 하게, 착실하게 했다. 그리고 기쁘게. 후일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한 뒤 학술부 활동을 위하여 미술부에 들어 열심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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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비부 선수생활이 바빠지자, 미술부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줄곧 그림 전시회는 거의 빠짐없이 구경하러 다녔었다. 동경에 가서도 그 바쁜 시간 을 쪼개어 미술관이니, 화랑이니 하는 곳을 구경 다녔다. 그리하여 당대의 저 명한 미술가의 그림은 거의 다 보았고, 그 이름까지도 기억하곤 했다. 화집이 나, 인물집이나, 미술사 같은 책을 통해서 그 화가들의 전기 같은 것도 알게 되 고, 미술의 흐름 같은 것도 알게 되었다. 일본의 화가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화가들, 그리고 외국 화가들의 특징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일본의 화가가 쓴《빠리 인상기》 를 통해서 파리에 있는 공동묘지 이 야기도 알게 되었다.“이곳, 파리 시민들은 얼마나 예술가들을 사랑하는지, 예 술가들의 무덤엔 항상 꽃이 있어도 장군, 정치가의 무덤엔 꽃이 없다” 는 구절 이 기억난다. 또한 주위에 그림 그리는 친구들도 제법 있어서 귀로 그림수업을 많이 했다. 반 고흐의 이야기, 모딜리아니의 이야기니, 폴 고갱의 아야기니, 렘 브란트의 아야기니 하는 것들이 흥미진진하게 나의 귀에 들어오곤 했다. 그리 고 로맹 롤랑이 쓴《밀레의 생애》 같은 책은 참으로 감동이 컸던 것이다. 해방 후에도 나의 주위엔 많은 화가들이 있어, 이들하고 술을 마시면 자연 그림 이야기가 나오고, 그 그림 이야기를 들으면 학교 이상의 공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1946년경부터 나는 고독한 나머지 시를 쓰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경희대 문리과대학 학장직을 맡게 된 후부터는 틈나는 시간을 그림에 주력했 다. 미술과 교수들이 차를 마시러 들어와선 내 그림을 칭찬해 주곤 했다. 나는 내가 학장직에 있으니까, 그런 줄만 알고 지냈었다. 어느날 본격적으로 최덕휴 교수가 전람회를 열자고 했다. 내가 뭐? 하면서 도 한번 전시회를 갖고 싶었다. 절차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최교수가 다 연락 해서 전시회가 진행되었다. 1973년 가을 신문회관에서 제1회 유화개인전이 열 리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보러 왔다. 나는 속으로 뜨끔뜨끔했지만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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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한 성과를 거두고 끝이 났다. 생전 처음 열은 내 개인전이라서 실로 흥분도 했다. 이것이 있고서부터는 줄곧 초대전 주문이 왔다. 제4회 때는 인사동 선화랑 에서 열렸다. 이때 화랑주인 김창실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왜 화가도 아닌 시인의 그림을 초대했느냐?” “미술학교를 나와야 화가가 아닌가” 라는 말. 나 는 분개했다. 화가는 미술학교를 꼭 나와야 하는가 하고. 미술학교를 안 나온 훌륭한 화가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나는 실로 화가 이상으로 화가 생활도 하고, 화집도 4권이나 출간하고, 또 초대 시화전도 수없이 열었다. 이렇게 주마등처럼 나의 그림생활을 훑어보니 그 그림생활에서도 후회없이 나의 일생을 살아온 것 같다. 이것은 모두 내가 그림이 좋아서 열심히 그 길로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
*수필집‘시간 속에 지은 집’(인문당,1990),‘세월은 자란다’(문학수첩,199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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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미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해서부터 파이프를 물었으니까 근 30년 된 셈이다. 김창석 시인이 있다. 창작 시집으로《둔주곡》 ,《하루》 가 있고, 보통 인내력 가 지고선 손을 댈 수 없는 어마어마한 번역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인내력 은 역시 그의 가톨릭적 신앙심에서 배양된 것이 아닌가 하고 때때로 생각할 때 가 있다. 그가 먼저 파이프를 물었다. 대단한 애연가였다. 해방이 되고 양담배 가 쏟아져 들어오고 파이프용 타바코 담배와 파이프가 명동에 범람했다. 신품 보다 G.I들이 쓰다버린 것들, 명동 골목골목에 흔한 것이 이러한 쓰던 파이 프·라이터·만년필 장수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파이프에 대한 지식은 그리 없다.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지만 술에 대한 지식이 그리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파이프에 대한 이야기, 술에 대 한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주로 듣는 편이다. 파이프는 흔히 브라이어(찔레나 무, 들장미의 뿌리)로 만든다는 건 알고 있다. 잉글랜드산을 높이 쳐준다거나 미국산은 장사아치들의 저속한 것이라느니, 여러 말이 있지만, 나는 내게 제일 어울리는 파이프가 제일이다’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파이프 회사의 트레 이드 마크도 그리 따지지 않는다. 그때 그때 내게 어울리는 걸 문다. 우선 파이 프를 고르는 표준은 모양이다. 그리고 크기다. 그리고 무게다. 그리고 파이프 의 피부다. 그리고 나의 양복색에 어울리는 그 파이프의 색깔이다. 그리고 그 파이프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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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부드러운 걸 좋아한다. 형태도 순한 걸 좋아한다. 결도 연한 걸 좋아한다. 피부도 순박한 걸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장식성을 좋아한다. 하나 사 물었다. 그땐 너무 젊은 마음에 다른 사람 앞에서 무는 것이 좀 건방진 게 아닌가 생각 도 하고, 무슨 체, 다시 말하면 문학청년인 체하는 게 아닌가 하고, 내게 어울 리는 행동이 아니지, 이렇게 생각도 했었지만 그 맛이 구수해서 좋았고, 마음 이 차분히 가라앉아서 좋았고, 그때 당시의 허망한 좌절감 같은 걸 어루만져 주어서 좋았었다. 그렇게 해서 파이프를 물게 되었다. 그리고 파이프를 고르게 되고 담배를 고르게 되고 멋을 고르게 되었다. 파이프 장수 앞을 지날 때 아무 리 바빠도 한번 죽 훑어보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지금 외국에 나가면 으레 한번쯤은 파이프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을 찾아간다. 럭비선수 시절, 절도 있고 항상 맑은 공기 같은 정신으로 생활을 해왔었다. 그런데 해방 후 담배가 늘고, 술이 늘고, 그때와는 전연 다른 생활을 하게 되었 다. 어떻게 생각을 해보면, 지금의 생활이 인생다와서 좋다는 생각이 든다. 실 상 술·담배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선 멋쩍기 한이 없고 무슨 말을 하려 해도 약간의 마음을 쓰게 된다. 그런데 파이프는 그 연기와 냄새, 그 구수한 분위기 때문에 긴장된 대화의 공간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혼자 있을 때도 그 밋밋한 공간을 한결 따스하게 해준다. 내가 파이프를 피운다고 해서 대단히 많은 파이프를 가지고 있는 것같이 소 문이 난 모양이지만 지금 내 책상 위엔 대여섯 개밖엔 없다. 선물로 받은 것, 남의 손에 가선 안되는 것, 하두 많이 물어서 주둥이가 깨진 것 등 몇 개 없다. 피우지도 않으면서 많은 파이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심리를 나는 모른다. 파 이프는 피우는 재미에 있다. 피우면서 어루만지는 재미에 있다. 만지면서 생각 하는 재미에 있다. 생각하면서 마음을 녹이는 재미에 있다. 녹이면서 만사에 마음을 주는 재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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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하고 서재에서 술을 마시면 파이프가 이동한다. 나에게서 떠나는 거 다. ‘나 이거 가져’ 하면‘안돼’ 하지 못한다. 그러나 꼭 간직하고 싶은 파이프가 있을 땐 다른 걸 선사하곤 해왔다. 한번은 친구들이 다녀간 뒤 내가 좋아하는 파이프가 없어졌다. 마음 서운한 김에 다음날 친구들이 늘 이용하는 광복동 ‘금강다방’ 으로 나갔다. 전날 밤 나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래서‘어제 파이프를 잃었는데, 남의 취미생활을 파괴하는 건 야만 이지’ 하자, 옆에 있던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이 대뜸‘병화, 한잔 사, 내가 주 께’ 하면서 그 파이프를 내주는 게 아닌가. 그때 껄껄 웃으며 내주던 수화의 천 진난만한 얼굴, 그 파이프를 물 때마다 생각나곤 한다. 그 파이프는 해적의 나 팔같이 생긴 긴 서재용 파이프다. 지금은 그 주둥이가 좀 헐었지만 그걸 물고 있으면 먼 바다가 연상되어오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이 연상되어오고, 흰 해변의 무수한 조개껍질이 연상되어오고, 끝없이 푸른 노스탤지어에 빠지 곤 한다. 이렇게 파이프는 하나의 생활이다. 그 사람의 스타일이다. 그 사람의 사는 맛이다. 그 사람의 넓은 분위기, 그 철학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파이 프를 문다. 나의 까다로운 성격을 그 연기로 캄플라지하면서.
*수필집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 (어문각,198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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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통
학교가 임시로 부산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송도로 가는 도중 산 언덕에 천막 으로 된 교실이 몇 개 생겼다가 나중에는 부산시 충무로 부근 수산 시험장인 가, 무어라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학교 모습을 갖추고 수업을 했다. 나는 그땐 대수를 가르치고 있었다. 서울고등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으로 이종구라는 영어선생이 있었다. 6·25가 나자 통역장교로 붙들려 갔다가 일선에서 도망을 쳐서 나를 찾아왔다. 대낮인데도 술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해변가에 있던 통술집으로 갔다. 낙동강이라는 소주가 그땐 부산에서 유행 이었다. 우리는 간단한 안주에다가 낙동강을 기울이고 있었다. 때마침 그 앞을 하학길에 지나던 학생 하나가 나를 발견했다. 서울 중학교에서 내가 대수를 가 르치는 반의 귀여운 학생이었다. 이건호, 이건호는 통술집을 술통으로 읽고 “술통!” 하고 지나갔다. 이튿날 교실이라는 울타리 없는 천막에 들어서니 칠판 에 ‘술통! 조병화 선생’이렇게 백묵으로 씌여 있는 게 아닌가. 큰 술통을 그려 놓고. 순간, 나는 술통이라는 어감에서 어떤 구수한 친근감을 느꼈다.“임마, 술통이 뭐야, 통술집이지” 하며 그저 웃으며 수업을 시작했었다. 그날부터 나는 술통이 되었다. 나는 이 별명으로 인해서 연말이면 뜻하지 않 게 그 당시엔 좀처럼 얻기 힘든 화이트호스라는 양주를 두병씩 선물 받게 되었 다. 이 군의 모친께서 늘 미안한 마음으로 주시는 것이다. “집의 아이가 철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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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선생님께 이상한 이름을 붙게 만들어서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 하시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모든 것을 술통답게 살 수가 있어서요”이렇게 답변하곤 했다. 사실 그랬다. 나는 이‘술통’ 이라는 별명 때문에 참으로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구수하게, 재미있게, 인생답게, 허물없이, 아무런 가면을 쓸 것도 없이 인간 그대로. 그리고 시와 그림과 술통이라는 별명으로 실로 많은 학생들과 친 숙하게 지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수필집‘나의 생애 나의 사상’ (둥지,199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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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지금 창 밖엔 눈이 내리고 우중충한 서재 한 모퉁이에선 커피가 혼자 끓고 있다. 파이프를 문다. 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 — 이러한 T.S. 엘리어트의 시 구절이 머리에 떠오른다.‘인생을 커피 스푼으로 재왔다.’— 이렇게까지 나는 커피와 더불어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커피 없이는 어딘가 허전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시인처럼 요모 조모 따져가며 커피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다만 구수한 그 분위기와 가라앉는 마음, 혼자 늙는 사색의 벗으로 커피를 끓인다. 나는 허망한 고독 속에서 나의 청춘을 다 보냈다. 거지반 노상에서 쓸쓸한 존재로 배회해 왔다. 따라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의 생활에선 그저 희미하게 지나온 것 같은 생각이 들 뿐이다. 무슨 맛이니 무슨 멋이니 하는 ‘맛’ 에 대해선 그리 따져본 일이 없다. 그저 먹으면 먹고, 그저 입으면 입고, 그저 살면 살고 하는 식의 생존 속에서 다만 머릿속 가득히 그 혼자를 일삼아 왔다. 그러나 내 고향 난실리 장재봉, 어머니 묘소 곁에 편운재를 짓고부터는 방을 사랑하고 혼자를 돌보는 생활이 생겼다. 눈보라치는 겨울의 깊은 밤, 산막에서 혼자 등불을 켜 놓고 난로 옆에서 커피를 끓이는 차가운 사랑과 더불어 인생을 아끼는 생활 — ‘커피스푼’ 으로 인생을 재는 건 아니지만 훈훈한 그‘기분의 스 푼’ 으로 오로지 한줄기 혼자를 스스로 가라앉히며 혼자 늙어야 하는 그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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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어들었다. 이래서 더욱 더 커피는 인생의 벗이 된 것 같다. 나는 농촌에서 여덟 살까지 살았다. 그래 그런지 내가 좋아하는 음료수는 냉 수다. 그것도 수돗물이 아니라 깊은 우물물이다. 비위생적이고 몸에 나쁘다고 들 하지만 우물물의 그 냉수 맛을 평생의 내 맛으로 살아온다. 지방 여행에 나 서면 으레 그곳, 마을의 우물물을 마셔본다. 그 맛으로 지방, 그 마을 사람들의 성격 마음씨 등을 내 나름대로 짐작도 해 보곤 한다. 그러한 기회와 취미 속에 서 살아왔지만 지금에 와선 커피의 무게로 마음이 옮겨졌다. 맛으로가 아니라 그 생활로서. 때때로 커피가 인체에 해로우냐 해롭지 않으냐 하는 문제가 야기되는 수가 있다. 일전에도 맥스웰 하우스의 이에 대한 조사에서‘커피는 나름으로 중독 증상을 나타낸다.’ 하는 코멘트를 통신에서 읽은 일이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 커피를 많이 마셔서 잠이 안 온다든지, 혈압이 오른다든지, 위가 나빠졌다든 지, 무슨 중독 증상이 나타났든지 하는 건 없다. 오히려 아침에 술을 깨워 주 고, 오후의 피곤을 덜어 주고, 원고나 책을 읽을 때 정신을 새롭게 해 주고, 생 기 있는 기분을 회복시켜 주곤 한다. 그렇다고 꼭 커피가 약처럼 필요한 건 아 니다. 그저 없으면 허전한 기분, 그런 정도다. 맥스웰 하우스의 조사란 이렇다. 스탠포드 대학원 학생용 주택에 사는 주부 들을 대상으로 커피의 효과와 그 중독 증상에 관하여 조사한 결과, 커피 속에 들어 있는 카페인이 확실히 작용한다는 것이다. 주부 239명 대상의 하루 평균 커피 소비량은 일인당 매일 5잔에서 10잔이 80명이나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 한‘커피당(黨)은 커피 없이는 멍청하고 활기가 없고 신경질적이며 일에 능률 이 오르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나‘비(非)커피당(黨)에 커피를 마시게 한 결과 이와는 반대로 위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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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고, 기분이 나빠지고 신경질적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 에서 이 조사의 책임자인 아브라함 골드슈텐 박사는 커피에 중독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이 커피의 카페인은 니코틴이나 알콜과는 달리 인체의 건강 에 중대한 해를 주지는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창 밖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으스스한 서재 한 모퉁이에서는 제법 제 냄새를 피우며 커피가 끓고 있다. 아비시니아(이디오피아)의 야생초목의 작은 열매로 부터 시작된 이 커피의 용액이 지금 내 방에서 끓고 있다. 아라비아로, 이집트 로, 페르시아로, 터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여 지금은 세계 구석구석에 아비시 니아의 액체가 없는 곳이 없다. 서구인들이 이 커피를 입에 대기 시작한 건 대 략 서기 1630년경이라 한다. 아비시니아·이집트·페르시아·터키, 이렇게 커피를 마시던 아시아적 풍습이 유럽으로, 또한 마호메트 교도들이 마시던 풍 속이 기독교인들 사이로 점차 번져 나갔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달러를 절약하기 위해서 외국 커피를 금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정책은 흐지부지 없어지고 다시 우리들 생활에 거의 필수품처럼 커 피가 나타났다. 양담배는 그렇지 못하지만. 그때 느낌이었지만 커피가 없는 다 방은 주인이 없는 집 같기만 했다. 다방에 들어서면 으레 짙게 풍겨드는 커피 냄새, 그 커피로 거리의 감정을 조절하기도 했었는데 다시 다방에 커피가 나타 나서 국가적으론 낭비가 될는지는 모르나 역시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 러, 달러, 하지만 돈만 가지고 살 건가. 그런데 우리나라 다방에서 내 놓는 커피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내 놓는 커피 에 비하면 맹물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렇게 연하다. 유럽의 그건 아예 새까맣 다 할 정도다. 그리고 잔이 일반적으로 작다. 새까만 약물을 마시는 기분이다. 이것이 진짜 커피의 맛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으며 마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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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유럽에선 소위 엽차라는 게 없다. 커피를 마시고 엽차를 마시는 풍속은 우리나라밖엔 없는 것 같다. 나는 그 엽차를 왜 마시는지 이유를 모른다. 커피 맛의 여운을 닦아내기 위해서인지, 그렇다면 무엇하러 커피를 마시는지, 촌놈 이 문화인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 마시는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아니, 커 피에 어울리는 버릇은 못 된다. 또한 커피에 설탕을 친다든지, 소위 카네이션 을 친다든지 하는 것은 진짜 커피를 마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성 싶은 일이다. 실제로 그렇게 커피를 마셔 보니 좀 더 순수하게 커피와 접하는 것 같은 개운한 기분이 든다. 시골 산막에서의 깊은 밤의 커피와, 서울 서재에서의 우중충한 오후의 커피 를 왕래하며 혼자 늙는 길, 혼자 늙는 연습을 하며‘기분의 스푼’그 온도로 나 머지 인생을 재간다. 파이프를 물며, 혼자 속에서 그 혼자를 살다가 그 혼자를 버리고 그 혼자 속으로 사라져 가는 이 짜릿한 맛이여.
*수필집‘새벽은 꿈을 안고’(신원문화사,198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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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숙소
1. 나의 집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가 나의 고향이다. 이 곳에서 송전 보통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온가족이 올라왔다. 아주 이사 를 한 거다. 이후 서울에서, 동경에서 공부라는 걸 하고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 다. 한때 인천에서 좀 살아 본 일이 있고, 피난을 내려가서 부산 송도에서 살아 본 일도 있다. 이렇게 생각을 돌려 보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본 집들이 몇 개 된다. 내가 태어난 생가(지금도 일부는 고향에 남아 있음) 서울에 올라와서 살 아 보던 첫째집, 둘째집, 셋째집, 넷째집, 다섯째집, 여섯째집, 그리고 지금 살 고 있는 혜화동 집. 혜화동 집을 빼놓고는 모두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집들이다. 옛날 구닥다 리 집들, 지금 생각하면 불편하기 짝이 없던 일제시대의 한옥들이다. 그러나 혜화동 집은 직접 우리가 설계를 하고, 직접 지은 집이다. 인천에 있던 집은 조 금 큰 일본식 삼층집이었는데 병원으로 뜯어 고쳐서 살았다. 때문에 그런대로 편리하게 꾸미고 살았다. 제법 서재라는 것도 다른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된 별 채였고, 목욕탕은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겨울이면 광선이 많이 들 어오는 방들이어서 바닷가에 있는 온실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부산 송도집은 건축가 김중업 형과 박학재 형이 설계하고, 감독하고, 재료 구입하고, 현장에서 일하며 꾸며 주었다. 집을 앉힐 집터까지도 두 분이 잡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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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거다. 물결치는 바닷가 언덕 푸른 보리밭,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낭만의 언 덕이었다. 이 푸른 언덕 80평에 20평쯤 되는 경사진 지붕의 목조 건물을 방갈 로식으로 처음 지었다. 우리는 이걸 김중업 형의 제1호 작품이라고 했다. 나의 제3시집『패각의 침실』 에서 이름을 따서‘패각의 집’ 이라 푯말을 붙였다. 송도 바닷가를 오가는 벗들의 휴게실같이 되어서 맥주도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열차 식당 같은 나의 침실이 하나, 파이어 프레스가 있는 넓은 홀이 하나(병 원으로 쓰던 홀), 좀 넓은 내실이 하나, 변소, 헛간, 닭장, 통나무 벤치, …… 이 러한 배치들의 빌라식 건물이었다. 김 형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지만, 나는 누워서 창밖으로 영도 앞바다를 멀리 내려다보곤 했다. 겨울바다가 좋았 다. 더구나 흐린 겨울바다가 좋았다. 술에 만취가 되어서 내려다보는 거친 아 침 바다가 좋았다. 비바람 치고, 눈보라 치고, 파도가 이는 바다를 누워서 내려 다보는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독의 위안을 안겨 주곤 했다. 이러한 설계 와 이러한 생활 속에서 잠시나마‘집이라는 맛’ 을 보며 3~4년 부산 피난살이 를 했다. 그리고 혜화동 집이다. 혜화동 집은 한양 공대 건축과를 나온 분이 설계하고 직영을 해서 지었다. 건축비를 충분히 쌓아놓고 짓는 게 아니고 야금야금 구면 해서지었기 때문에 썩 마음에 들게는 꾸며지지 못했지만 쓸모 있게는 되었다. 재작년에 뒷 채에 있던 한옥을 부수고 양옥으로 올렸다. 이 건물은 그런대로 그리 불편이 없다. 오히려 이층 베란다와 이층 화단은 아늑한 마음의 안방을 만들어 주고, 광선이 많이 들어오는 넓은 유리창들이 해변가에 있는 빌라를 연 상케 해준다. 좀 그늘진 곳에 깊숙이 마련된 서재 역시 마음의 안정을 준다. 이 혜화동 집이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서울의 집이다.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의 힘 으로 또 하나의 산막을 지었다. 1963년 한식날 삽을 넣어, 3년에 걸쳐서 내 고 향 난실리 뒷산에 지은 집 이것이 나의 편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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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집을 짓지 않으려 했다. 다시 말해서 변화 무쌍한 인간 세상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다. 그저 뜬구름처럼 지나가는 거! 이 러한 시간 속의 나그네임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 했다. 그런데 1962년 7월에 81세를 일기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난실리 뒷산에 모셨다. 이때, 사 람은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 떠난 지 35년, 나는 죽으면 이 산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리고 서울의 쓸쓸 한 가숙을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이 선산 아버님, 어머님, 선조들 묘소 자욱한 솔밭에 삽을 넣어서 집을 짓기 시작했던 거다. 돈이 생기는 대로 고료가 생기 는 대로, 남의 도움 하나 받지 않고 순수한 동기, 순수한 돈, 순수한 노동으로 한 3년 걸려서 대충 만들어 놓았다. 제 10시집『낮은 목소리로』 , 제 11시집『쓸 개포도의 비가』 , 제13시집『공존의 이유』 , 제 14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 등등의 시집 고료는 모두 이 편운재를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느 여름 방 학, 집을 짓는 데 조력을 하고 있을 때였다. 푸른 하늘에 흰 조각구름 한 점이 지나고 있었다. 그때 흡사 내 자신이 이 세상 그렇게 지나고 있는 생각이 들어 편운재라는 집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벽에, 이러한 이름 석 자를 대리 석에 새겨서 붙여 버렸다. 좋은 사람의 글씨를 받아서. 이 집 모양이나 설계는 내가 했다. 그러나 지금 집을 써보니 불편한 점이 많 다. 첫째, 창이 좁다. 따라서 습기가 많이 차고, 광선이 부족해서 어둡고 춥다. 둘째, 터가 높아서 우물이 멀다. 식수를 넣지 않고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연도 설계가 좋지 않았었다. 때문에 연기가 차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런 점 저런 점 불편한 점이 많으나 지금 새삼 뜯어 고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살고 있 다. 그러나 덧문은 마음에 들게 했다. 흔히 보는 성당 건축의 덧문이어서 모양 도 모양이거니와 완전 방위감이 든다. 특히 산중에 있는 집이어서 이 덧문만큼 은 잘 설계했다고 생각이 든다. 창문도 그렇다. 산속에서 혼자 살 생각을 하고 설계를 했기 때문에 좁게 된 거다. 또 하나는 목재 값이 비싸서 하는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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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거다. 애당초엔 목재로만 만들려 했던 거다. 그러나 워낙 나무가 비 싸서 현재 있는 집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대로 만족하고 한 세상 사는 거 다. 좀 불편해도 죽은 뒤에 남을 물건들을 남겨두며. 그러나 앞으로의 건축은 불편해서는 안 된다. 불편하면 당장 뜯어 고쳐서 살 필요가 있다. 한번 살다 떠나는 세상 편리하게 만들고 편리하게 살다 가는 거 다. 언젠가 나는 하와이에 들렀었다. 하와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섬이지만, 더 욱이 그 주택촌의 주택들을 보고 나의 건축 상식과, 그 개념이 달라져 버렸다. 지형, 지세, 주위 환경을 적용해서 집을 앉힌 것들이 흡사 머리가 좋은 새들이 집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인상이 들었다. 새 둥우리지요. 집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렇게 지어야만 한다 …… 이러한 식의 형식이 아니라, 모든 그 자연의 일부분으로서의 집, 집도 한 자연으로 그 속에 있어야 하겠고 나가선 그 집으로 하여 더욱 그 부근의 자연이 아름답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어에‘at home’ 이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집이라는 건 그 집을 쓰는 사람 들에게‘at home’ 되게 되어 있어야 한다. 피곤을 덜어주고, 불필요한 걸 덜어 주고, 편안과 안심을 주고, 평화와 여력을 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마음이 가 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감정과 머리가 가는 대로 모든 것이 술술 불편이 없 이 돌아가는 가옥 구조,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물론 오늘날 건축 예술은 눈부 시게 발달되어 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그 건축이 예술까지 되려면 아직도 여러 가지 난점이 많을 거다. 편운재는 내 고향 난실리 장재봉 남록에 있다. 서남으론 이동 저수지가 반짝 인다. 수원에서 남으로 32km, 오산에서 동으로 16km, 안성읍에서 동북으로 12km 지점, 진위천 상류 돌 많은 계곡에 있다. 하얀 굴뚝, 하얀 벽, 푸른 숲속 에 빨간 기와지붕, 서울에서 시골에서 몸과 집이 따로따로 세월 늙는다. 때때 로 상봉하면서 먼날 아주 내가 내려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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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작업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나의 책방은 오래된 잡목림(雜木林) 같은 책의 숲속이 다. 서재라기보다는 아담한 작업실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며 무슨 연구가도 아 니다. 다만 외진 인생의 길손이다. 나그네이다. 나에게 배정된 시간을 여행하 고 있는 여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항상 출발과 숙박(宿泊)이 끊임 없이 계속 되는 장소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장소에서 나는 무엇인가 항상 바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서적들을 꼬박꼬박 정리를 할 짬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두어 버리지는 않는다. 내가 작업을 할 때, 그 서적이 꼭 필요할 때, 찾고 싶을 때 손쉽게 끄집어 낼 수 있게끔 그 자리를 정 해 두곤 한다. 이렇게 쌓아놓은 책들이 가득히 모여 있는 한 구석에서 작업을 할 때 나는 흐뭇한 숲속에서 독거(獨居)하고 있는 안정감을 느낀다. 나는 이러한 정리되어 있지 않은 내 책방, 내 서재, 책들의 잡목림을 사랑한 다. 어느 깊은 사색가가 숲을 사랑하듯이. 나는 나의 이 서적의 숲속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어디에 개울이 흐르고 어디에 샘이 있고 어디에 고목이 있고 어디 에 어떤 새의 둥우리가 있고 어디에 어느 오솔길이 있고 어디에 어느 꽃이 피 어있고 어디에 어느 짐승의 굴이 있고 집이 있고 똥이 있는 가를, 또한 어느 계 절에 어느 새가 날아드는지를. 때문에 나는 내 숲을 나만이 드나들고 나만이 관리를 한다.‘흐트러진 그 질서’ 를 나는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 속에 가득히 배어있는 나의 냄새 나의 비밀 나의 흔적을 남이 아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방의 청소를 별로 하지 않는다. 한다 하더라도 먼질 털고 쓸 정도로 한다. 이 방엔 벽난로가 있고 양주가 있고 골통담배가 있고 그럭저럭 쓸만한 파이프가 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에 쓰던 창이 있고, 승마하던 시절 묵은 장 화가 있고, 고등사범학교 시절의 럭비부 부기가 구멍난 채 보관되어 있다. 그 리고 군데군데 친구들의 그림이 옛정 그대로 걸려 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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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사진, 국제회의 참석기록 사진들이 띄엄 띄엄 서가에 놓여있다. 창이 동 쪽과 서남쪽에 있어 햇빛은 그리 부족함이 없다. 방은 마루방이다. 수난로가 들어와 있어 온도조절도 비교적 잘되는 이층 구석진 방이다. 방문 밖 작은 복 도는 주로 월간 잡지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백운무언(白雲無言: 검여 유희강 형 글씨)이라는 족자가 걸려있다. 이러한 한적한 골목 책방에서 나는 나의 여행기를 정리하고 떠나는 연습을 한다. 먼저 이야기한 것처럼 나의 서재는 서재 아닌 잡목림이다. 잡초와 잡목 들로 가득한 인적이 별로 없는 나의 서식지이다. 그리 귀중한 것들이 없어도 그저 그대로 짧막한 인생을 보낼 수 있는 장소이다. 때로 밤 열한 시, 열두 시 길 잃은 술벗들이 찾아 들면 양주 몇 잔과 골통담배 몇 모금 물며 허허 웃을 수 있는 고요한 구석이다. 6·25 이전의 책방은 동란 통에 없어져 버리고 이렇게 한 서식처가 마련되었지만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불길한 예감이 없지도 않다.
3. 나의 풍경 요즘은 그 잡목림 같은 작업실에서 주로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 림을 좋아했다. 그때가 보통학교 육학년이었다. 한번은 강당에 새로운 그림들 이 새롭게 전시되던 날, 나는 그만 벌을 섰다. 급장에다가 전교 최고 모범생이 었던 내가 벌을 서기는 처음이었다. 그림에 정신이 팔려 창가선생의 기분을 아 주 상하게 한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음악을 창가라고 해서 배웠다. 창가 시간은 피아노가 한 대 있는 텅빈 강당에서 꼭 있었다. 이 텅빈 강당에 벽마다 새로운 그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원색판 양화들이 아름답게 전시되었으니 신기하 고 아름답고 황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을 꼬박 그림 앞에서 벌을 섰다. 창피한 마음 견딜 수 가 없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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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구매 시야를 넓혀서 종이 칠 때까지 그림을 흠뻑 마셔들였다. 종이 치고, 수업이 끝나자 창가 선생이 하시는 말씀이,“임마, 너는 간판장이가 될려고 그 러니.”나는 멍멍 아뜩하였다. 초기에 나를 매혹시킨 화가는 밀레였다.「이삭을 줍는 여인」 ,「만종」 「씨를 , 뿌리는 사나이」등의 작품에서 기도와 같은 아름다운 농민들이 인생의 시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그후 나는 빈 시간이 있으면 꼭 강당을 찾았다. 그리곤 밀레 의「이삭을 줍는 여인」앞에 황홀히 섰었다. 나는 본래 농촌 출신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의 여러 잠재의식들이 그곳에 아롱아롱 스며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본래부터 따지는 거, 이론적인 거, 억지를 부리는 걸 좋아하 지 않는 성격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미술부에 적을 두었다. 운동연습이 없는 휴일에는 부원들 사이에 끼어 스케치를 하러 한강이고, 뚝섬이고, 도봉산 이고…… 따라다녔다. 그러나 나는 몰려다니며 그리는 것을 싫어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나는 마네 보다 모네를, 세잔느 보다 고흐를 현대파 보다 르노와르의 풍경화나 붓휘를 좋아했다. 그리고 애수에 가득 찬 모딜리아니의 인물화를 좋아했다. 그리고 동경고등사범학교로 진학을 했다. 일요일 같이 틈 이 많이 나는 날이면 늘 미술관을 찾아갔다. 우에노 국립미술관이니, 긴자나 신주꾸 같은 곳에 있는 개인 화랑을 구경 다니곤 했다. 이후 그림을 좋아하는 취미는 나를 그러한 풍경들 속으로 성장을 시켰다. 구라파 여행에서, 희랍, 이 집트를 비롯한 동남아 여행에서, 그리고 아메리카 여행에서, 주로 내가 즐겨 찾던 곳은 미술관이었다. 그 황홀한 천재들의 작품들을 보고, 여독을 풀곤 했 었다. 특히 파리에선 로뎅의 박물관을 보고 놀랐었다. 그리고 뉴욕에선 구겐하 임 미술관에서 칸딘스키의 색채엔 황홀함보다도 놀라움을 느꼈었다. 이렇게 그림을 좋아하는 생활은 나를 자연 속으로 이끌고 나갔다. 나는 자연 을 사랑한다. 그 깊이를 사랑한다. 그 넓음을 사랑한다. 그 변함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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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그 공적무한의 충만을 사랑한다.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 디 있으랴! 그러나 나는 그러한 자연 속에서도 외떨어져 있는 공적무한의 충 만! 적적하고 소박하고 좀 가난하고 쓸쓸한 충만이 가득한 그러한 자연을 사랑 한다. 나와 같이 위안이 되고, 원로가 되고, 편히 그곳에서 쉴 수 있기 때문에. 온 생존의 세계에서 꼭 나를 닮았기 때문에. 때문에 나는 정돈된 정원, 인공이 가미된 자연, 풍성한 산림, 거센 파고, 물결치는 바다 …… 등등은 견디기가 어 렵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그 기하학적 정원을 보고 얼마나 갑갑증과 구속감을 느꼈는지, 지금도 생각을 하면 갑갑하고, 답답하고, 구속감이 밀려들곤 한다.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그 정밀한 정원이. 내가 좋아하는 풍경! 잔잔한 잡목림, 번민의 미루나무숲, 강가의 앙상한 나 무들, 깊은 산속에 외떨어져 있는 나무. 나무들. 인적이 드문 길, 신작로, 개울 에 걸려 있는 다리, 과수원……. 이러한 것들의 늦은 가을 풍경, 그리고 깊은 겨울 풍경, 그리고 이른봄 풍경, 이렇게 나열을 해보아도 마음이 다 차오질 않 는다. 가득히 차 있는 것은 잎 떨어진 가을 풍경들, 눈속에 아물거니는 차가운 겨울 풍경, 그리고 흐린 날이 자욱한 2월 풍경이다. 아, 공적무한의 충만! 그 생명에 취한다. 앙상하고 자욱한 자연, 때묻지 않은 쓸쓸한 자연, 그곳이 나의 정신의 숙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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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趙炳華 (1921. 5. 2 - 2003. 3. 8) 시인, 호는 편운(片雲).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에서 부친 조두원과 모친 진종 사이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동 공립보통학교,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리, 화학을 수학하다가 일본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년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유로 교단생활을 시작하여 인천중학교 를 거쳐 서울중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출간하여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경희대학교로 옮기어 문리대학장, 교육대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1년부터는 인하대 학교에서 문과대학장, 부총장, 대학원 원장으로 재직하다 1986년 정년 퇴임했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대만 중화학술원 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카나다 빅토리아대 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는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 허무와 고독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하여 꿈과 사랑의 삶을 형상화한 점에서 특징 을 찾을 수 있다. 창작시집 53권,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수필집 37 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화집 5권, 등을 비롯하여 총 160여 권의 출간이 증명하듯 그의 작품활동은 남달리 성실했고, 또한 폭넓은 독자 의 사랑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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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널리 읽혔듯이 25권에 달하는 시집이 일본, 중국, 독일, 프 랑스, 영국,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네델란드어로 번역되어 세계적 인 시인으로도 사랑받았다. 그는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을 역임하면서 세계시인대회 국제이사, 제4차 세계시인대회(서울, 1979) 대회장을 맡아 시인들의 국제 교류에 힘썼다. 세계시인대회에 헌 신한 공로로 1981년 제5차 세계시인대회에서는 계관시인(桂冠詩人)으 로 추대되었다. 그는 아세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 상, 3·1문화상 대한민국문학대상, 국민훈장 모란장, 대한민국금관문화 훈장, 5·16민족상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공로상과 감사패를 받았다. 이러한 상금과 원고료를 모아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1990년 편운문학상을 제정했고, 2003년까지 13회에 걸쳐 37명의 시 인, 평론가들과 시문화단체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이후 유족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3년 작고하기까지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겸하여 초대전을 여러 차례 가졌다.(유화전 8회, 시화전 5회, 시화-유화전 5회 등) 그의 그림은 그의 시 세계와 흡사하여 아늑한 그리움과 꿈이 형상화된, 상상 의 세계로 이끈다. 시인이자 화가, 교육자, 스포츠맨(럭비선수, 지도자) 으로도 명성을 떨친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검정베레모와 파이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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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년보
1921. : 부 난유(蘭뱿) 조두원, 모 진종의 5남 2녀 중 막내로 출생(5월2일). 아호는 편운(片雲). 1928. : 부 조두원 별세, 용인의 송전공립보통학교 입학. 1929. : 모친을 따라 서울로 이사. 1930. : 미동공립보통학교 2학년 편입. 1936. : 경성사범학교 보통과(5년제) 입학. 1941. : 경성사범학교 연습과(2년제) 입학. 1943. :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이과(물리, 화학) 입학. 1945. : 상교 3학년 재학 중 귀국. 경성사범학교 교유로 근무 중 김준과 결혼 1947. :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등학교) 교사로 전직 1949. : 서울중학교 교사로 전직, 제1시집『버리고 싶은 유산』출간 1950. : 제2시집『하루만의 위안』출간 1952. : 제3시집『패각의 침실』출간 1954. : 제4시집『인간고도』 , 제5시집『사랑이 가기 전에』출간 1957. : 국제 P.E.N. 동경 대회에 참석, 제6시집『서울』출간 1958. : 제7시집『석아화』 , 수필집『밤이 가면 아침이 온다』출간 1959. :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로 전직, 제8시집『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출간 1960. :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제9시집『밤의 이야기』출간 1962. : 모 진종 여사 별세, 제10시집『낮은 목소리로』출간 1963. : 편운재 기공, 제11시집『공존의 이유』 , 제12시집『쓸개포도의 비가』출간 1964. : 제13시집『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출간 1965. : 제14시집『來日 어느 자리에서』출간 1966. : 제15시집『가을은 남은 거에』출간 1967. : 시론집『슬픔과 기쁨이 있는 곳』출간 1968. : 제16시집『가숙의 램프』출간 1969. : 제17시집『내 고향 먼 곳에』출간 1971. : 제18시집『오산 인터체인지』 , 제19시집『별의 시장』출간, 중화민국 신시학회로부터 두보상패를 받음. 1972. : 제20시집『먼지와 바람 사이』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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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제1회 유화 개인전(9. 22~29 신문회관), 제21시집『어머니』출간 1974. :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중국문화대학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음 1975. : 제22시집『남남』출간 1976. : 제23시집『창안에 창밖에』출간, 국민훈장 동백장 받음 1977. : 수필집『시인의 비망록』 , 시론집『시인의 편지』출간 1978. : 수필집『낮달』 , 제24시집『딸의 파이프』출간 1979. : 제4차 세계시인대회 집행(대회장, 7.2~8 롯데호텔) 1980. : 수필집『안개에 뿌리내리는 나무』출간 1981. : 인하대학교 문과대 학장 취임 1981. : 회갑 기념집『편운 조병화 시인』 , 제25시집『안개로 가는 길』출간 제5차 세계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으로 추대됨 대한민국 예술원정회원에 피선,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82. :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받음,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 1983. : 수필집『흙바람 속에 피는 꽃들』 , 제26시집『머나먼 약속』출간 1984. : 세계 여행 소묘집『그때 그곳 Times & Places』출간 1985. : 수필집『저 바람 속에 저 구름 속에』 , 시론집『순간처럼 영원처럼』출간 제27시집『나귀의 눈물』 , 제28시집『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 , 제29시집『해가 뜨고 해가 지고』출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음 1986. : 수필집『마지막 그리움의 등불』 , 수필집『자유로운 삶을 위하여』출간 인하대학교 대학원 원장으로 정년 퇴직,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음. 정년 퇴직 기념 논문집『조병화의 문학 세계』 , 어록집『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출간 수필집『왜 사는가』 ,『고독과 사색의 창가에서』출간 제9차 세계시인대회에서 Tagore 문학기념배를 받음. 1987. : 청와헌 준공, 제31시집『길은 나를 부르며』출간 수필집『너와 나의 시간에』 ,『어머님 방의 등불을 바라보며』 ,『내일로 가는 길에』출간 수필집『추억』 ,『홀로 지다 남은 들꽃처럼』 , 칼라시화집『길』출간 1988. : 수필집『사랑, 그 홀로』 ,『사랑은 아직도』 ,『새벽은 꿈을 안고』 , 『꿈과 사랑, 그리고 내일』출간. 제32시집『혼자 가는 길』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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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당선. 수필집『떠난 세월, 떠난 사람』 , 『하늘 아래 그 빈 자리에』 , 제33시집『지나가는 길에』출간 1990. : 3·1문화상 수상, 고희기념유화전, 고희연, 편운문학상 제정. 제34시집『후회 없는 고독』출간 1991. : 제35시집『찾아가야 할 길』출간, 제1회 편운문학상 시상(조태일, 김재홍, 신창호) 자서전『나의 생애 나의 사상』 , 신작수필집『꿈은 너와 나에게』출간 1992. : 제36시집『낙타의 울음소리 , 제37시집『타향에 핀 작은 들꽃』 , 제38시집『다는 갈 수 없는 세월』출간. 시와 수필집『시의 오솔길을 가며』 , 수필집『꿈이 있는 정거장』출간, 대한민국문학대상 수상 1993. : 편운회관 준공, 시화집『그리움』 , 제39시집『잠 잃은 밤에』출간 ‥ 스웨덴어 역시집『꿈 Drom』 , 수필집『집을 떠난 사람이 길을 안다』출간
1994. : 사진과 대표작을 묶은『나의 생애』 , 수필집『버릴 거 버리고 왔습니다』출간 제40시집『개구리의 명상』 , 제41시집『내일로 가는 밤길에서』출간 1995. : 시로 쓰는 자서진『세월은 자란다』 , 제42시집『시간의 속도』출간 제27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피선 1996. : 수필집『너를 살며 나를 살며』 , 『편운재에서의 편지』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출간 제43시집『서로 따로 따로』출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받음 1997. : 제44시집『아내의 방』 , 제45시집『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 제46시집『황혼의 노래』출간. 5·16민족상 수상 1998. : 처 김준 사망, 제47시집『먼 약속』 , 제48시집『기다림은 아련히』출간 수필집『편운재에서의 편지』(외로우며 사랑하며) 출간 1999. : 수필집『내게 슬픔과 기쁨이 삶이듯이』 , 제49시집『따뜻한 슬픔』출간 카나다 빅토리아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받음 2000. : 제50시집『고요한 귀향』출간 2001. : 제51시집『세월의 이삭』출간 2002. : 제52시집『남은 세월의 이삭』출간 2003. : 수필집『편운재에서의 편지』출간 영면(3월 8일), 원불교식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름 2005. : 제53시집『넘을 수 없는 세월』출간 2013. :『조병화 시전집』6권 출간.『조병화의 문학세계Ⅱ』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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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 아래서 놀자 2018. 6. 7 ~ 11. 30,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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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문학관 조병화문학관 경기도안성교육지원청, 경기도박물관협회, 한국문학관협회, 한국문인협회안성시지부 톡톡플러스지역아동센터, 국제죤타서울4클럽 조진형, 김용정, 김삼주 오정교 2018년 9월 10일 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길14-1(난실리 337) Tel. 031-674-0307, 02-762-0658 E-mail. poetcho@naver.com http://www.poetch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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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자는 2018년도 경기도와 안성시의 기금을 보조받아 발간되었습니다.
시인 조병화의 생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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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문학관
조병화문학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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