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 -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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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

홍용희 김삼주 홍기돈 이재복 조창환 고명철 오태호 이형권 이경수 한영옥 (게재순)

조병화문학관



조병화의 대표시를 말 한 다

홍용희 김삼주 홍기돈 이재복 조창환 고명철 오태호 이형권 이경수 한영옥 (게재순)

조병화문학관



차 례

1 추 억 12

초상

14

추억

16

소라

18

해변

20

하루만의 위안慰安

22

낙엽끼리 모여 산다

24

임해교실

26

목련화

28

나 돌아간 흔적

30

보리

32

서울 한구석

34

낙엽

36

장미의 선물

38

일월담日月潭 호상湖上에서

40

파리

42

시간의 분묘

44

밤의 이야기·17

46

밤의 이야기·20

48

낮은 목소리로·43

50

낮은 목소리로·46

5


2 사 랑

6

54

나의 시는

56

솔개

58

소망

60

사랑

62

편지

64

신흥사

66

램프

68

나이아가라

70

군자리君子里

72

나의 노래

74

땅강아지

76

바다의 숫처녀

78

모나코

80

때때로 돌아와

82

나의 소묘

84

램프

86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88

지금은 제 귀 깊은 곳에

90

해마다 봄이 되면


3 고 독

94

남남·1

96

산사문답

98

팔려가는 소

100

시가 팔리지 않는 마을

102

네가 인편에

104

고독

106

실내화室內花

108

110

불안한 천수

112

사월의 시

114

모로코의 나귀

116

나는 지금까지

118

무지개

120

가을

122

초행길

124

내 몸의 열매들

126

조국 생각

128

암스텔담 재방再訪

130

세상 마지막 출구

132

가물거리는 소녀

134

중국 만리장성

7


4 꿈

8

138

세월

140

142

유서를 다시 쓰며

144

시의 초소 일을 하며

146

찾아가야 할 길·2

148

요즘 나의 일과는

150

나에게 있어서

152

타향에 핀 작은 들꽃·4

154

타향에 핀 작은 들꽃·35

156

내일

158

호남의 감

160

영혼은 먼 여행길로

162

투명한 고독

164

개구리의 명상·2

166

개구리의 명상·53

168

꿈 이야기

170

산수유

172

시간

174

빈방

176

나의 얼굴

178


5 먼 약 속 182

양란洋갿

184

대지의 사춘기

186

시들어 가는 생명 앞에서

188

생명이라는 것

190

고요한 유물괨物

192

황혼의 노래·3

194

황혼의 노래·114

196

꿈의 귀향

198

먼 약속

200

나무

202

흙으로의 귀화

204

따뜻한 슬픔

206

시詩는

208

아아, 나의 고독은

210

고요한 귀향

212

고요한 참회

214

라일락

216

실로 좋은 시들은,

218

정물靜物

220

나의“있음”

222

9


홍용희 문학평론가,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 데뷔 :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평론집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 결핍의 신화』등 편저 :『그날이 오늘이라면-통일시대의 남북한 문학』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등 수상 : 편운문학상, 유심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삼주 시인, 문학평론가, 가천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시집 :『어느 흐린 날의 경인선』,『별이 내리는 둥지』 『푸른 수화』,『답서』,『그들의 가교』,『역』등 수상 : 한국농민문학상, 편운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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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_1

추 억


초상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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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고독을 낳고 고독은 이별을 낳는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대상과 나는 서 로 다른 존재이며, 서로 분리된 존재자란 점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어 느새 깊은 고독을 몰고 온다. 사랑과 고독은 서로 상반된 속성을 지니지만, 사실 은 동일한 하나이다. 그래서 마지막 연의“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가는 것은 사랑에 데여 도망치는 것이면서 동시에 고독에 지쳐 도망치는 것이기도 하 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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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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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잊으려고 하지만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아니, 잊으려고 할수록 더욱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시적 화자 역시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걷곤 했다. 그 러나 이것은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걷 고 또 걸어야 한다.“하루/ 이틀/ 사흘”. 잊어버리기 위한 노력의 반복이 그칠 날 은 언제일까. 그것은 기약이 없다. 인생은 이렇게 잊히지 않는 추억들로 인해서 하염없이 아프고 외로운 것이 아닐까.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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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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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외로움을 동반하는가. 바다로부터‘저만이’걸어 나온 소라가‘저만이’외 로워하고 있다. 희망의 모험 길의 뒷자리에‘허무’한 절망과‘쓸쓸함’이 가득 밀 려온다. 이때 소라는“슬며시/ 물속이”그리워진다.“해와 달이 지나”가고“소라 의 꿈”이 굳어갈수록 소라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간다. 인생이 외로운 것은“바다 기슭”을 걷고 있는 소라처럼, 안주의 터전에서 걸어 나와 자기만의 새로운 희망 과 모험을 추구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만의 새로운 희망과 모험의 길을 향해 완전히 떠나지 못한 탓일까.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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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바다 겨울 바다는 저 혼자 물소리치다 돌아갑디다 아무래도 다시 그리워 다시 오다간 다시 갑디다 해진 해안선에 등대만이 말 모르는 신호를 반복하지만 먼 바다 소식을 받아주는 사람 없어 바다 겨울 바다는 저 혼자 물소리치다 돌아갑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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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가“저 혼자 물소리 치다 돌아”가고 있다. 썰물의 물결을 이루며 떠나갔 던 바다가 이내 다시 밀물의 물결로 밀려오고 있다. 그러나 바다가 온몸으로 전하 는“먼 바다 소식을 받아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해진 해안선에 등대 만이/ 말 모르는 신호”로 대답할 따름이다. 그러나 겨울바다의 오다간 가고, 가다 간 오는 그리움과 절망의 물소리는 쉼 없이 이어진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겨 울 바다의 물소리가 왜 그토록 차고 쓸쓸하고 고독한지를 알게 된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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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의 위안慰安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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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잊어버려야만 한다”고 이 시에서만도 일곱 번이나 다짐하고 있다. 굳이 기억한다고 할지라도“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인사 없이 헤어지”는 정도로 가볍 고 희미하게만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토록 잊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들 모두“흘러가는 한 줄기”의 세월 속에“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마지막 하늘을”바라보는 날을 맞 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삶이 다하는 마지막 날, 떨치지 못할 그리움과 미련 에 못 견뎌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더욱 힘들고 안타까울까.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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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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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처럼 여리고 약하고 예민한 것이 또 있을까.“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 의 귀는 기웃거리고”,“햇볕이 쏟아지”면 초조하다. 이토록 여리고 약하고 예민 하여 너무도 위태롭지만, 그러나“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살고 싶다”.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에 온몸과 마음을 다하고 싶은 것이다.“이 미 버려”진 낙엽이 되어,“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며 ‘날’을 새우는 어둡고 슬픈 밤에도,“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그“슬픔을 마시 고 산다”. 이와 같이, 이 시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우리들의 살아 있음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절대적 근원이며 증거라는 것을 온몸의 감성으 로 일러주고 있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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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교실

하얀 패각 속에서 수업을 한다. 산머루처럼 익어 가던 생도들의 까만 눈알들이 전쟁에 혼 떼어 파란 해협의 어란魚갻처럼 맑다. 고사리 같은 하얀 목들은 바다를 향하여 날로 길어진다. 하얀 패각 속에서 어란처럼 맑은 눈알들에 끼여 아내와 싸우고 나온 기억을 잊어버린다. 수평에 뜬 병원선을 바라다본다. 비 내리는 날이면 나의 임해교실은 홀리데이—. 버밀리언 표지 아래 누워 발진티푸스에 걸린 바다를 내려다본다. 생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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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작은 반도 남단으로 밀려와 하얀 패각 속에서 수업을 한다.

전쟁의 와중에“반도 남단”의 피난지 바닷가에서 열리고 있는‘임해교실’의 창 백한 풍경이 그려지고 있다.“생도들의 까만 눈알들”은“전쟁에 혼 떼어/ 파란 해 협의 어란魚갻처럼 맑다.”전쟁의 공포에 질린 생도들의 날로 자라는“하얀 목들” 이‘고사리’처럼 가녀리다.‘비’가 오는 날이면‘임해교실’은 휴일이다. 그러나 그 한가로움은 평온한 휴식이 아니라“발진티푸스에 걸린”바다를 바라다보며 불안과 황량함에 시달려야 한다. 격전의 현장에서 비껴선 지역의 불안한 한적함 이 시상의 전반을 물들이고 있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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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화

어린애를 밴 소녀가 목련이 핀 가지 아래서 나비를 잡는다. 소녀와 목련이 흡사 그 어느 유명하지 않은 소설집같이 놓여 있는데 나도 그와도 같이 잔디밭에 파란 스웨터를 비비고 아버지처럼 체스터필드를 피운다. 바다. 바다는 어린 시절의 그림책처럼 나풀거리고 어린애를 밴 소녀는 목련이 핀 가지 아래서 나비를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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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핀 봄날의 분위기는 아름다우면서도 불경스러운 환정적 분위기를 자아낸 다. 그것에 대해 시인은“어린애를 밴 소녀가/ 목련이 핀 가지 아래서 나비를 잡” 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어느 유명하지 않은”초현실적인“소설집”의 표지 그림 같은 풍경이다. 나 역시 불경스러운 환상에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잔디밭에 누워“아버지처럼 체스터필드를 피”우고 있다.“바다는 어린 시절의 그 림책처럼 나풀거리고”있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색칠하는 목련이 핀 봄날은 동 화처럼 환상적이면서 알 수 없는 불경스런 씨앗들로 그득하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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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돌아간 흔적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시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벌레 새끼 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아 세상 수만리 나 찾아 왔습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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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만나러 수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아 왔습니다.

나의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며, 또한‘돌아간’이후의‘흔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시인은 서슴없이 말한다. 그것은‘당신’과 만나서‘당신’곁에 잠시 머무르 는 것이라고. 물론, 이때‘당신’이란‘사랑’의 대상이다.“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 두고 가는 자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 기”를 쫓아 세상에 태어난 까닭도‘사랑’이고 세상으로부터 돌아간 이후의 흔적 도‘사랑’이 있을 뿐이다. 그 이외의 어떤“작은 소망도 까닭도”더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이처럼 인생의 전부, 아니 그 보다 더 큰 절대라는 것이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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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종달이들이 잠든 보리밭이었습니다 그리운 편지같이 나팔거리는 나비들이었습니다 보리알들에 끼여 지장보살처럼 내가 앉으면 나비들이 희롱을 하다간 살짝 넘는 보리 고개들이었습니다 웬일인지 어머니를 부르고 싶은 마음에 자라와 같은 목을 들면 푸른 물결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먼 기적이었습니다 오월 이렇게 고이 익어 가는 내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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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보리밭을 보면 무엇을 느끼는가.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맑고 투명한 평화 와 고요와 그리움이라고 대답하고 있다.“종달이들이 잠든”5월의 고요,“그리운 편지같이 나팔거리는/ 나비”, 어머니 같은“지장보살”그리고“어머니를 부르고 싶은 마음”등이“푸른 물결”처럼 싱그럽게 일렁인다. 나와 나비가 서로 희롱을 하는 보리밭의 눈부신 평화에 섞이다 보면, 5월의 맑은 햇살에 보리알이 익어가 듯“내 마음”도 고이“익어”가는 것이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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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구석

전쟁이 지나간 자국의 침묵처럼 녹슨 철근에 비는 내린다 진종일을 개이지 않는 우울이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 안에 감돌고 집을 짓고 같이 살고 싶던 내 사람 내 사람이 사라진 가슴에 비는 내린다 지금 어드매 비 맞는 내 가슴 깊은 곳을 흙탕물 쏟아지는 강이 흐르고 사랑이 지나간 후줄근한 자국 그 자국에 녹슬은 세월처럼 비는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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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철근”처럼 앙상하고 황량한“서울 한구석”에서“진종일 개이지 않는 우 울”의 비를 맞고 있다.“집을 짓고 같이 살고 싶던 내 사람”이 사라진 이후, 서울 에는 어디에도 나의 집이 없다. 어디에나“전쟁이 지나간 자국”처럼 황폐하기만 하다.“내 가슴 깊은 곳에”는‘흑탕물’이 쏟아지는‘강’이 흐른다. 나에게 서울은 녹슨 세월의‘비’만이 넘쳐날 뿐이다. 사랑을 잃은 나에게 서울은 고아보다 더욱 황막하다.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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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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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기다림과 그리움과 이별의 정서가 낙엽이라는 시적 상관물을 통해 노래 되고 있다.“당신 생각만”하면서 파릇파릇한 새싹을 피웠고,“당신 생각만”하면 서 바람과 비를 맞으며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그러나 정작“어느 날 당신이 내 그 늘 아래 쉬었을 때”에도 나는“내 마지막 말을”하지 못한다.“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이라는 그 말. 그 말도, 미처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기다 림과 그리움의 애달픔을 숙명처럼 살고 있다. 세상의 낙엽들이 하나 같이 애수의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낙엽들마다 이와 같은 간곡한 사연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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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선물

타이완은 뜰마다 장미 장미가 피는 나라 고요한 나라 우리들 극동의 남쪽 물결치는 나라 고요한 나라 모두들 한 가족 장미를 키우는 나라 마음마다 한 그루 따뜻한 나라 고요한 나라 어질고 순박하고 따뜻이 정과 사랑이 흐르는 나라 장미를 키우는 나라 한 가족 한 뜰에 뜰마다 장미를 가꾸는 나라 내일의 아침 아침의 그리운 악수를 위하여 따뜻한 장미를 키우는 나라 검은 물결치는 해변과 들과 산과 골짜기 골짜기 마을마다 따뜻이 키우고 사랑하는 장미의 나라 극동의 아침 아시아 들판 장미의 나라 소곤소곤 사랑과 이야기와 내일이 우리들 가슴마다 피어오르는 장미의 나라 타이완은 뜰마다 장미 장미가 피는 나라 내일이 잠자는 나라 고요한 나라 36


「장미의 선물」은 시인에게 많은 인연으로 맺어진 타이완 찬가이다. 타이완은 제2 차 세계대전 이후 장제스의 영도 아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부유하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우리가 전쟁의 폐허에서 헤어나지 못한 1950년대 후반 시 인의 눈에 비친 이 타이완은 그야말로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지상의 한 낙원’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러한 타이완이 장미로 상징되어 형상화된다. 장미란 애정의 상징이요, 사랑의 사자이며, 행복한 사람이라는 꽃말을 갖고 있다. 포르투 갈어로 타이완을 퍼모사(Formosa:아름다운 나라)라고 하듯이 타이완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집이나 장미를 가꾼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사랑을, 행복을 가꾼다. ‘물결치는 고요’처럼 그들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 물결 같은 움직임이 있는 정중 동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는 정과 사랑이 흐른다. 그런 국민성 으로 내일이라는 미래를 향하여, 미래에 올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타이완은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 당시 전후의 폐허에 놓인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한 모델로 다가왔던 것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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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담日月潭 호상湖上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당신이 내 옆에서 물속으로 사라진 것만 같았습니다 잠 깊이 든 호수의 옷자락을 헤치며 달 아래 호심 깊이 수심에 뜬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던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당신이 내 옆에 꼭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당신이 내 곁에서 사르르 물속 깊이 사라진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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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담 호상에서」에서 수심에 뜬 자신의 상을 시인이“내가 아니라 당신”이라 고 생각한 것은 일상적으로 말하자면‘당신’에 대한 그리움의 형상화로 읽어 넘 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그리움을 넘어서 자아와 세계의 일체화 체험 을 형상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숨소리는‘에테르를 타고 우주의 끝 구 석구석으로 파동하고’ 「일월담 ( 실야日月潭 失夜」) 있으므로 시인은 먼 곳에 있는 ‘당신’의 소리를‘먼 나의 소리’로 듣게 되고, 떨어져 있어도 거리에 관계없이 ‘나’는‘당신’이 되고‘당신’은 곧‘나’가 된다. 비로소 물리적 이동 없이도 마음 을 통하여‘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조 병화 시인이 자연의 여행을 통하여 얻는 귀중한 사유 체험이다. 원시의 자연 속에 서 무시간성을 체험하고 이 체험이 자아와 세계의 일체화에 이르러 비로소 명상 적 사유에 이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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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향수와 연초 냄새 짙은 유럽 하늘 아래서 노트르담은 나이를 먹고 센은 사랑을 적시며 늙을 줄을 모른다 지지리 못생겼으나 목석이 아니어서 슬펐던 쓸쓸한 나의 벗은 지금 종소리 속에 간 곳이 없고 사랑은 남아서 노래를 기른다 애인은 바뀌어도 센은 그저 흐르는 것 시간을 여행하는 나의 마음아 센에 비쳐서 내가 흐른다 에트랑제—란 인간을 말하는 것 온 곳도 모르고 갈 곳도 모르는 나는 순수한 코리언 멀어서 마냥 슬픈 사람 손이 비어서 마냥 허전한 나그네 향수와 연초 냄새 짙은 유럽 하늘 아래서 노트르담은 나이를 먹고 나는 인간 나그네 센은 사랑을 적시며 늙을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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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사랑은 영원하지만‘나의 벗/인간’은 이미“간 곳이 없”다. 생명이란 이와도 같이 허무한 존재다. 그러나 시인은 이 허무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영원한 흐름 인‘센’에 유한자로서 자신을 비춰보고,‘시간을 여행한다.’ ‘센’이 늙을 줄을 모 르고 영원하듯 시인은 이방인으로서 나그네이지만 그의 마음은 영원한 시간을 찾아 여행한다. 이처럼 그는 영원으로서 시간/역사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다른 글에서 말하듯 인간이 사는 곳에 집을 짓지 않고‘역사 속에 집을 짓고 자 하는 것’은, 곧 생명의 한계인 허무를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이 되고자 하는 것 이다. 이렇게 이 시는 허무와 고독으로서 인간이 사랑의 영원성과 시간의 영원성 을 통찰하고 그 속에 자아를 세우고자 하는 철학적 사유를 담아 낸 형이상학적인 시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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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분묘

지금 내가 여기에 서서 이천여 년 전‘시간의 고향’을 더듬어 들어가기엔 너무나 이방인이다 여기는‘포로 로마노’ 고대 로마의 황무한 폐허 쓰러진 대로 뒹군 대로 엎어진 대로 부스러진 대로 깎아진 대로 —그대로 토막 토막 역사와 감회가 뒹굴고 있는 곳 이것은 돌이 아니라 인간의 절규이다 정복의 향연 음모의 열변 그러나 지금 내 옆에 있는 것은 옛날을 주우러 다니는 가벼운 나그네 코카콜라 레몬주스를 마시며 땀을 재우는 먼 후손들 누구의 말이던가 “인생은 느끼는 자에는 비극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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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자에겐 희극”이라고 그러나 이 자리는 인생은 희극도 아니요 비극도 아니다 그저 인생은 너무나 큰 황무한 폐허다

포로 로마노에서, 신전이며, 공회당이며, 기념비 등속으로 이루어진 고대 로마의 공공생활,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지에서, 1000년 로마제국의 심장이었던 이 도시 공간에서, 이제는 토막토막 뒹굴고 있는 역사의 증거물을 보고 시인은 그 폐 허의 허무를 느끼고 있다. 이처럼 그가 발견한 로마는 한때의‘정복의 향연/음모 의 열변’으로 가득 찼던‘인간의 절규’에 다름 아니다. 향연은 환락이 넘쳐흐르 고 열변은 화려한 수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그 환락과 감동을 이루는 바탕은 정복과 음모라는 파괴의 권모술수이다. 이렇게 역사는 근원적으로 비인 간적 파괴의 힘을 제 속에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려했던 과거의 삶도 모 두 쓰러지고 부서져서 황무한 폐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역사란, 인간의 삶이 란, 이렇게도 허무인 것이다.“인생은 느끼는 자에는 비극이요/생각하는 자에겐 희극”이라고 생의 비극성과 그것을 벗어나는 사유의 중요성을 라 브뤼에르가 역 설했지만, 조병화 시인의 인간/역사의식은 그마저도 부정한다. 인간은, 역사는, 근원적으로 허무라는 것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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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17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것을 살아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히 쫓겨 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온 거다 이긴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잡은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가진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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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안고 있다. 죽음은 삶에 동거하면서 인간의 의식 을 지배한다. 그래서 시인은“인간은 죽음을 위하여/사색하는 것/사상의 사상은 죽음뿐이다”와 같이 죽음과 대면해서 삶을 생각한다. 죽음으로 가는 허무로서 우 리는 그 허무를 망각하고 살고 있다. 그러한 세속적인 삶은“캄캄한 것”으로서 상 대를 쓰러뜨리고, 빼앗고, 쟁취하면서 욕망을 채운다. 시인이 처한 당시 한국 사 회의 현실이 바로 이 캄캄한 삶의 현장이었다. 이 속에서 시인은 독자를 향해 허 무로서의 인간존재를 강조하면서 어떻게 이 어두운 현실을 살아나가야 할 것인 가를 역설한다. 그것은 바로 부여받은 생을 투쟁과 쟁취와 소유에서 벗어나“아 까운 정들”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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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20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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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왜 시인은 고독한가. 그것은 위 시에서 말의 연쇄를 쫓아가 보면 쉽게 해명할 수 있다. 그 연쇄는‘고독→소망→삶→그리움→너’로 이어지는데, 이 연쇄의 결론 은‘보이지 않는 곳에 너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고독하다.’라고 요약된다. 다 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너를 찾아가는 것은 나의 소망이요, 삶이요, 그 리움이기에‘너’를 찾아가야만 하는데,‘보이지 않는 너’를 홀로 찾아가는 나의 삶은 나 홀로 스스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독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세상은 ‘부질없는 허무한 생의 자리’요, 아울러‘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역사적 현장 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 속에서 너/나를 찾아가는 것, 나의 생을 완성시켜 가 는 것은 지난한 고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고독을“단독자(Einsamsein), 영원으로 휴식으로 어두운 혼을 이끌어 주는 말, 영원한 영혼의 영원한 위안으로 서의 영원한 무숙, 내 영혼의 숙소”라고 한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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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43

아름다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지혜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평화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은혜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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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외로움/고독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고독이란 아름다움이요, 지혜로움이 요, 평화로움이요, 은혜로움이다. 왜 그것은 아름다운가. 허무로서의 인간이 스스 로를 초월하려는 노력/분투하는 삶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왜 지혜로 운가. 고독은 통찰과 사유의 장을 마련함으로 그 속에서 삶의 예지가 발견되기 때 문에 지혜로운 것이다. 그것은 왜 평화로운가. 고독은 일체의 외부로부터 자신을 자신에게로 끌어옴으로써 내면의 고요함 속에 자신을 놓을 수 있기 때문에 평화 롭다. 이 혼자 있음에서 평화로움은 자유와도 같은 의미이다. 그것은 왜 은혜로운 가. 고독은 평화로움/자유로움 속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아름다운 삶을 허여함으 로써 은혜로운 것이다. 이처럼 조병화 시인은 실존적 자기완성으로서 단독자의 삶을 사는 데 대한 의미를 노래한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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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46

‘보이옵는’세계와‘보이지 아니하옵는’세계에 ‘있는’세계와‘없는’세계에 가득 차 있으옵는 것은 마냥 고요한‘있음’과‘없음’, 실은‘공’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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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은「인생외박」이라는 글에서“인간은 실존 그 자체 속에 임시로 거주 하고 있을 뿐이다. 항상 있는[存在] 세계에 살고[實存] 있으면서 실은 항상 없는[겘在] 세계에 살고[虛存] 있을 뿐이다.……불행하게도 나에겐 이 보이는 세계는 영원한 고향을 향한 중도中途의 집일 뿐, 나는 이 중도의 집에 임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있음’이란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 이른바 공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이 그를 종교의 세계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이러한 불교적 사유는 자신 이 규정한 허무의 의미를 더욱 구체화하고 나아가 그의 삶과 시에 철학적 깊이를 더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삶을 허무로부터 건져 올리는 작업, 역사적 인 간으로 서는 작업에 매진하게 되고 이 시기에 그를 사로잡고 있던 자살충동으로 부터 벗어나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나아가게 된다.“인간은 죽음을 위하여/ 사색하는 것//사상의 사상은/죽음뿐이다//나의 생은 한낱/스스로의 빈자릴 지켜 서의 부질없는 회의//가는 자와 오는 자에 끼어/육체는 소멸하며 혼은 자란다” 「밤의 ( 이야기·7」)라는 그의 표백처럼.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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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돈 문학평론가,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페르세우스의 방패』 『인공낙원의 , 뒷골목』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문학권력 논쟁 이후』등

이재복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저서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 흐름과 전망』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몸과 , 그늘의 미학』등 수상 : 고석규비평문학상, 젊은평론가상, 편운문학상, 애지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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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_2

사 랑


나의 시는

나의 시는 ‘눈물을 가진 생존’으로서 ‘생각을 가진 생존’으로서 스스로 놓여 있는 스스로의 생존 속에서 스스로 스스로를 찾아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자각의 피리’소리들이다 생명은 위대한 고독이며 생존은 그것을 향한 노력이며 공존은 서로의 위안이기 때문에 무한한 존재의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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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먼저 자아의 인간존재를 규정한다.‘나/인간’은‘눈물’과‘생각’을 가진 존재이다.‘눈물’은 그에게 있어 정/사랑/인간애 같은 감정을 의미한다.‘생각’이 란 의지/꿈/사상 같은 정신을 의미한다. 이런 인간존재로서 그의 시는“스스로 놓 여 있는 스스로의 생존 속에서/스스로 스스로를 찾아서, 스스로를/만들어 가는/ ‘자각의 피리’소리들”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 시는 자아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생철학적 사유의 형상화인 셈이다. 여기서 하나 유의할 점은 그의 나아 감은 자아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공존’에도 같은 무게가 실려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역사적 삶인 것이다.「시는 삶의 숨소리」에서 그가 자신의 시를“역사적 숙명적 나의 현실, 그 속에서 실존해야 하는 현대인으로서 의 성실한 자기응시, 그 속에서 감도는 나의 판단, 나의 정립, 나의 기록, 나의 정 리” 「시는 ( 나의 숨소리」)라고 말하듯 그에게 있어 시란 현존하는 한계상황의 극 복을 위한 생의 탐구인 것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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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

하늘에 살고 싶어라 바람에 떠 있고 싶어라 날개에, 날개에 떠 있고 싶어라 바람이 쓸어가는 하늘 인간보다 쓸쓸히 보이지 않는 곳에 눈물보다 쓸쓸히 차가이, 하늘 깊은 곳에 외로움보다 쓸쓸히 바람에 쓸려 바람에 쓸려 날개처럼 떠 있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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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는 지상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소망이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에 서‘하늘’은 땅과 대립적인 공간이다. 땅을 딛고 사는 생명들은 땅의 구속으로부 터 벗어날 수 없다. 그와도 같이 시적 자아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은 그를 구속하고 있다. 시대적인 역사의 밤과 개인의 숙명적인 밤이라고 하는 현실이 그를 구속하 고 있다. 그러나 하늘은 얼마나 자유로운 곳인가. 어디 하나 막힘이 없는 공간, ‘차가이’에서 암시하듯 지성의, 높은 정신의 세계,‘보이지 않는 곳’으로서 이상 의 세계이다. 이 공간을 구름은 발이 없어도 자유로이 떠다니고, 솔개는 날개가 있어 또한 마음껏 누리고 산다. 어디라도 막힘없이 갈 수 있는 바람과 같이, 바람 에 떠 있는 날개와 같이, 지상의 나그네로서 시인은 자유로운 이 세상을 살고자 한다. 이 자유는“외로움보다 쓸쓸히”, 고독 중의 고독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날개’로서의 삶은 자신을 구속하는 일체의 현실을 벗어나지 않으면 영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평생 고독을 존재 방식으로 고집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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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소망같이 피곤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어두운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쓸쓸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외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풀 곁에 흙이 있듯이 너와 나는 그렇게 있다 가자! 소망같이 외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쓸쓸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어두운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피곤한 것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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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성서를 모티브로 하여 쓰였다. 소망이란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세계인 영생으로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의 생애 전반에 걸쳐 한 치의 그릇됨이 없어야 이루어지는 바램이다. 그래서 그 소망이란“피곤한/어두운/쓸쓸 한/외로운”것이 아닐 수 없다. 소망을 갖고, 소망에 이르는 길은 이처럼 고난의 길인 것이다. 시인이 갖는 소망은 구체적으로“풀 곁에 흙이 있듯이/너와 나는 그 렇게/있다 가자!”로 제시된다.“너와 나”는 사랑하는 연인 관계일 수도 있고, 나아 가 인간관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공존 방식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자아 와 타자는 지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그것은 흙과 풀의 관계, 풀이 흙을 붙들어 빗물에 쓸려가지 않게 단단히 잡아주고 흙은 풀에게 생명의 양식을 제공해 주는 것과 같은 관계로 공존하는 것이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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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어제와 내일이 입을 맞추고 있는 자리에서 순간, 나는 영원을 안고 있었다 헤어짐과 만남이 입을 맞추고 있는 자리에서 순간, 나는 영원을 안고 있었다 오는 것과 가는 것이 입을 맞추고 있는 자리에서 순간, 나는 영원을 안고 있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입을 맞추고 있는 자리에서 순간, 나는 영원을 안고 있었다 사랑은 하나하나 돌아감에 제각기, 자기의 영원으로 돌아가지만 빛과 어둠이 입을 맞추고 있는 자리에서 순간, 나는 영원을 안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그리움’을 대고 있는 자리에서 순간, 나는 영원을 안고 있었다 60


영원은“어제와 내일/헤어짐과 만남/오는 것과 가는 것/있는 것과 없는 것—빛 과 어둠/입술과 입술”의 동시적 만남 속에 있다. 이 동시적 만남이란“멈춘 시간/ 멈춘 인간사/공空—무無/사랑”과 같은 의미의 연쇄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사랑 의 순간을 이처럼 모든 것이 멈춘 순간으로 보는 것이다.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는 한 점에서 멈춘다. 시간의 멈춤은 헤어짐과 만남, 오는 것과 가는 것 등 의 인간사의 멈춤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공의 상태가 된다. 어떻 게 이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연인과“입술과 입술이 그리움을 대고” 있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슈펭글러에 의하면 영원이란‘멈춘 시간’인데 바로 그 것이 이 시의‘순간’이며, 이때 시간은 흐름이 없으므로 공간이 되고 만다. 이 순 간이 곧 영원이다. 헤르만 헤세가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이란“완전한 현재 속에 서 호흡하는 일”이라고 말했듯이 조병화 시인은 그것을 연인과의 입맞춤에서 체 험한다. (김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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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달 없는 밤하늘은 온 별들의 장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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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골의 어느 마을에 홀로 떨어진 모양이다. 불야성을 이룬 도시에서는 환 하게 빛나는 별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묵묵히 달‘없는’하늘을 쳐다보 고 있는 상태다. 총총하게 빛나는 별들만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그 모양은 정 신없이 붐비는 장날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왜 하필 시의 제목이‘편지’일까. 편 지는 지금 여기‘없는’대상인 너를 향해 나의 마음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매체이 다. 그러니까 나의 머리위로 쏟아질 것 같은 저 총총한 별들은 누군가를 향해 다 가가는 나의 마음이자, 그 마음과 엮인 아릿한 추억들이 아니겠는가. 별이 밝을수 록 그리움은 깊어져 간다. 그리움이 편지를 채운다.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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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사

공산무인空山無人, 현판 아래서 동승童僧이 공기를 논다 멀리 동해를 품은 하늘에 구름이 낀다 일만사一萬事는 생각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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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 집착을 버리고 무거운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자의 입장에서는‘공산무인空山無人’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자는 무인無人인가 유인有人인가. 동승童僧의 공기놀이가 대답을 한다.‘공기’의 어 감은 가볍게 하늘로 상승하며, 놀이는 규칙에 얽매이게 하지만 즐거움을 동반한 다.‘일’에 갇혀 무겁게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삶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질이다. 더군다나 아직도 꿈을 잃지 않은 순수한 아이‘동童’이면서 동시에 세속과는 거 리를 두고 있는‘승僧’이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무인無人인지 유인有人인 지 묻지 말라. 삶 속에서 삶과 더불어 즐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나.“동해를 품은 하늘에/ 구름이 낀”격이다. 그러 니 생각을 다시 해 보라고 권해 볼밖에.“일만사一萬事는 생각 속에 있다.”(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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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

산山 비가 지나고 있는 창가에 램프는 홀로 있다 몇 시나 되었는지 시계 없어 산중은 더욱 캄캄하다 대수롭지 않은 생각에 잠겨 검은 밤 주인도 홀로 있다 밤은 무서운 것 유년 시절부터 밤은 더욱 가까이 있는 것 램프 곁에 있다 나무 사이에 울리는 바람소리 빗소리 마을은 산 아래 저쪽에 있다 생각이 잘못 든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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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에 산 아래 창가에 빗소리, 바람소리 램프는 홀로 있다

유리창 밖으로 비 내리는 밤이다. 창가에는 램프가 홀로 타오르고 있다. 이 순간 세상의 중심은 어둠을 밝히는 램프가 아닐까. 위로 타오르는 램프의 불꽃은 지난 날의 기억들을 불러온다. 의식 저 아래 깊숙이 침전하였던 기억들이 램프의 불꽃 마냥 가볍게 상승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둠을 밝히는 램프는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쏟아지는 기억들”,“타오르는 램프의 불꽃”속 에서 휘청거리는 시인은 현재의 시간을 알 수 없다. 다만, 홀로 타오르는 램프의 불꽃처럼 고독하게 혼자 남은 자신의 존재만 분명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이때 시 인/램프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창문 바깥으로 내몰린다. 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바라볼 수는 있지만 결코 다가갈 수는 없는 세계, 그러니까‘이 쪽’아닌‘저 쪽’ 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마을은 산 아래 저쪽에 있다”그리고 “램프는 홀로 있다”. 홀로 있는 램프와 저 쪽에 있는 마을 사이의 단절이 깊어질 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지 않을까.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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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

어디선가 저 물 떨어지는 곳에서 인디언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선가 저 물 떨어지는 곳에서 머리 딴 인디언 소리가 들려온다 캐나다령에서 바라다보는 이 폭 넓은 폭포 생각하던 거와는 좀 다르지만 어디선가 잉잉 인디언 소리가 들려온다 맨 처음으로 이곳을 발견한 인디언에게 그 감회를 물어 봤으면, 하지만 지금은 구경꾼들이 하두 많아서 신비한 곳이란 하나도 없다 아! 그러나 이 물줄기, 이 낭떠러지 이 폭포 이 물소리 자연은 유구한 신비로다 어디선지 자꾸만 들려오는 인디언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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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를 기어오른 소리 저 소리.

나이아가라의 물줄기는 웅장하게 아래로 쏟아지지만, 시인은 쏟아져 내리는 물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인디언의 소리를 듣는다.“자연의 유구한 신비”가 신비 한 상태로 남아 있었던 시절, 누구보다도 먼저 그 위대한 광경을 발견한 인디언의 놀라는 감탄사를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어디선지 자꾸만 들려오는/ 인디언의 목소리/ 물소리를 기어오른 소리/ 저 소리.”는 기실 시인의 내면에서부터 울려나 오는 소리이다. 나이아가라 앞에 마주서서 느낀 유구한 신비의 충격이 마치 저 혼 자 느낀 것처럼, 제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처럼 짜릿하게 울렸기에 자꾸만 들려오 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소리에 이끌려 시인은 하도 많은 구경꾼 틈을 빠 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하나도 남지 않은 신비한 곳에서 다시 신비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의 자리는 여기서 마련된다.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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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리君子里

눈바람 치는 수인선水仁線 낯설은 간이역 군자리 염전 벌판 흐린 풍경 갈매기 끼 끼 하늘에 쓸리고 눈 털고 들어선 주막 깨진 유리창 바람이 차다 얼어붙은 김치쪽 굴 한 탕기 걸터앉아, 잠시 탁주로 마음 녹이는 길손 저린 가슴아 70


동행의 손, 아직 차구나 노형, 말씀 뭅시다 서울 가는 버스, 혹 있는지요 하루 한 번 내려왔다 올라갑니다 노형은 염전 조합원 대포 한 잔 요기하러 들어선 길 콧수염이 얼었다 서울은 저문 북쪽 흐린 이 해안 바람 탄 벌 하늘에 갈매기 끼 끼

군자리의 스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눈바람 치는 어두운 하늘, 마을은 적막한지 갈매기의“끼/ 끼”우는 소리가 배경으로 퍼지고 있다. 주막은 군자리의 궁색한 상황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공간이다.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탁주의 안주라고는“얼어붙은 김치쪽/ 굴 한 탕기”가 고작이다. 서울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대. 고립되어 더욱 스산한 양상이다. 그래서 도무지 스산함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없어 보인다.“흐린 이 해안/ 바람 탄 벌// 하늘에/ 갈매기// 끼/ 끼”. 군자 리를 갈매기 울음소리가 삼키고 있다. 사람의 흔적이 갈매기의 울음에 의해 지워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스산함만 남고 있다.(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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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래 - 봄눈 내리는 우수雨水

네가 곁에 있으면 할 때 넌 곁에 없고 내가 곁에 있으면 할 때 곁에 내가 없는 시간들 이 시간을 눈 봄눈 내린다 펑펑 내린다 세월은 이모저모 따지는 사이 아, 벌써! 할 때 그 세월 그 세월 아니고 가버린, 날, 날 올겨울 이거로 갑니다 내년 이 자리 다시 뵈올는지 가리다 놓치기 일쑤지요 상심 마세요 우수랍니다 떠나는 눈 가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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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삐 호사한 옷자락 옷차림 따뜻이 뜰에, 지붕에 베란다에 네가 곁에 있으면 할 때 넌 곁에 없고 내가 곁에 있으면 할 때 곁에 내가 없는 시간들 이 시간을 눈 봄눈 내린다 가며 내린다

어긋나는 시간은 운명을 생각하게 만든다. 무無와 유有를 겹쳐놓기 때문이다. 그 겹쳐진 순간 위에서 삶은 성찰의 계기를 맞고, 성찰은 종종 예술작품을 낳는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항상 늦게 오는 법이다. 그래서“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라는 노래가사처럼, 삶에는 비극의 기운이 감 돌게 된다. 자, 봄에 눈이 내린다. 봄눈이“가며 내린다”.“네가 곁에 있으면 할 때 넌”왜 곁에 없었을까.“내가 곁에 있으면 할 때”왜 나는 없었을까. 뒤늦게 봄에 펑펑 내리는 눈처럼 후회가 쏟아진다. 후회가 시를 낳고 시는 노래로 이어진다.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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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강아지 - 가을 옛 이야기

가까이 오렴 더 가까이 땅강아질 끌던 어리던 시절 수수깡으로 수레를 만들었지요 어머님이 버리신 실오라기로 멍에를 만들었지요 천오라기 밥풀오라기 콩오라기 입을 거, 먹을 거, 잔뜩 싣고요 돗자리 성냥갑 들길 산길 돌고 돌아 이러이러! 땅강아질 몰고요 이사했지요 선 너머 저쪽 구름 멀리 행복이라 사는 마을 가까이 오소 더 가까이 가을비 내리던 먼 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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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렇게 멀리 와 버렸을까. 수수깡으로 수레를 만들고, 땅강아지로 수레 를 끌게 하여,“이러이러!”장난처럼 이사했을 따름인데, 어느덧 그곳은 산 너머 저쪽으로 멀어져 버렸을까. 문득 돌아가야겠다고 느꼈는데 과연 돌아갈 수 있을 까.“가을비 내리던 / 먼 산골”의 세계로. 불귀不歸의 애잔함 속에서 그리움은 더 욱 커져만 간다.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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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숫처녀 - 인어상, Den Lille Havfrue

사랑은 사랑만으로 좋은 거 그리움은 그리움만으로 좋은 거 꿈은 꿈만으로 좋은 거다 지금 너는 내 앞에 있다 만지는 대로 있다 외면하면서 숙이고 있다 배가 지나갈 때마다 더욱더 출렁이는 덴마크 스웨덴 해협 그늘 모퉁이 나무 아래, 길가 밑을 축이며 희미한 얼굴 혼자 잊어버린 수버니어처럼 앉아 있다 너는 북극 뱃사람의 사랑 코펜하겐 푸른 동경의 처녀 꿈의 그림자 그러나 너는 지금 내 앞 발가벗은 구리 조각 알몸의 부끄러움 외면하면서 숙이고 있다 76


꿈은 꿈으로 좋은 거 바다의 눈이여 코펜하겐 물결치는 기슭 사랑은 사랑으로 좋은 거.

덴마크 코펜하겐의 랑겔리니 바닷가에 인어상이 세워져 있다. 한 인어가 지나가 는 귀공자를 사랑하여‘오딘’이라는 신에게 빌어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 만, 귀공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아 그렇게 구부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니까 덴마크의 인어상은 우리 식의 망부석을 구리로 만들어놓은 형상인 셈인가. 사랑만으로, 그리움만으로, 꿈만으로, 사랑이, 그리움이, 꿈이 형 상을 입었다.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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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눈앞에 나즈시 가라앉아 보이는 모나코 중에서도 모나코 돌 언덕에 소복이 모여 있는 성안의 마을 이곳이 왕과 왕비가 현대의 왕국을 살고 있는 왕궁이다 실로 까마득히 내려다뵈는 물결치는 수천 년의 돌 언덕 나즈시 깔려 있는 지중해 짙푸른 바다 정치도 고요하고, 사랑도 고요하다 <갈채>에서 보던 그레이스 켈리는, 지금 몸을 담그고 이곳 돌산, 언덕 위 성 속에서 황금의 세월을 산다 왕비를 산다 나는 지금 선인장 만발한 모나코 구름다리 층계에 앉아 하루를 머물다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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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구름 어딜 가나 나그네다 암, 조각구름이지 마냥 소멸해 가는 조각구름이지 한 번 빗나간 바람 밀려가는 조각구름이지 노을은 하늘 바다는 저녁 비치로 내리는 시간이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시퍼런 바다는 존재의 시원始原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모 나코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꼈나 보다. 그리고 수천 년 돌이 깔려 있는 언덕을 보 면서 신화시대의 시간을 연상한 듯싶다. 이러한 시선 앞에서 복잡한 현실은 잠깐 지워지게 마련이다. 대신 고요한 순간이 펼쳐진다. 무구한 시간과 맞대면한 자신 의 존재감이 전면으로 불쑥 불거지는 순간이다. 삶이란 탄생 이전의 무無에서 죽 음 이후의 무無로 건너가는 출렁거리는 구름다리. 한 조각의 구름으로 여행하듯 떠돌다 사라지는 나약한 존재. 존재의 시원과 맞대면하는 순간이라면. 수천 년의 시간을 한 순간에 맞닥뜨리게 된 상황에서라면. (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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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돌아와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편운재에서

이곳은 나의 생존의 숨은 주소 지구의 이마 씨앗의 밭, 열매의 들 때때로 돌아와 나를 떠난다. 이곳은 나의 하늘, 나의 사막 나의 물터, 나의 둥우리 적막이 떨어져 있는 나의 별 혼자서 왔다간 혼자서 떠난다. 지구는 구석구석 다 돌았다. 바다도, 육지도, 사막도, 초원도 사는 자, 죽는 자, 같이 묵어 사는 곳 둥근 평원. 이제 이 시간, 스스로를 버려야 할 시간 이 구석 떨어진 별밭 소망은 오로지 관용과 망각 쓸쓸한 포기 구름을 배운다. 이곳은 나의 먼 귀향 나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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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정처 없는 것. 그래서 구름은 모든 것을 다 버릴 줄 안다. 구름의 소망은 ‘쓸쓸한 포기’와 동의어이다. 시인은 이러한 구름을 배우려 한다. 구름을 배우다 니…… 보헤미안다운 발상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에게 구름은 먼 귀향지이면서 또한 휴식처인 것이다. 시인의 생존의 숨은 주소인‘편운재’가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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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묘

나의 얼굴은 사람이 없는 봄날의 들 나의 머리카락은 바람이 새는 수양垂楊 나의 이마는 인적이 없는 산비알 나의 눈썹은 앙상한 솔밭 나의 눈은 들판에 고인 하늘 나의 코는 나무가 없는 언덕 나의 입은 작은 마을 나의 턱은 아득한 지평선 귀를 세우고 이 자연 속에서 산다. 나의 웃음은 나의 성城 나의 말은 나의 파수 나의 정은 나의 기폭 나의 생각은 나의 언 겨울 마음에 불을 피우고 수명壽命을 바람으로 언어 속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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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그리는 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나의 얼굴은 사람이 없는 봄날의 들이고, 머리카락은 바람이 새는 수양이고, 턱은 아득한 지평선 아닌가. 이러한 시인의 모습은 자연의 언어로 그린 그림 아닌가. 마음에 불 피우고, 수명을 바람 으로 언어 속에서 산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런 그림 아닌가.(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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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

어드메를, 지금 피하며 피하며 늑대가 지나간다 어드메를, 지금 살피며 살피며 여우가 지나간다 어드메를, 지금 스스스 스스스 밤비가 지나간다 멀리 떠나 버린 시간 속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시는 어머님 여든 한 살을 그렇게 사시다가 두고 가신 자리 램프는 산중에 그대로 어드메를, 지금 혼자서 긴 밤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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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는 어둠이다. 그것은 환한 빛이 아니라 어둠의 빛이다. 시인에게 이 램프는 시인의 어두운 내면을 고인 상처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이다. 시인은 그 희미한 빛 에 의지해 그 내면에 고인 상처의 흔적을 찾아간다. 그 상처의 산중, 그 어둡고 무 서운 또 쓸쓸한 산중의 그 긴 밤길을 시인은 홀로 간다. 인간, 인간이란, 아니 인 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이것을 가숙暇宿이라는 말로 명명한다. 이 가숙, 다시 말하면 수명에 한도가 있는 육체 안에는 삶과 죽음이 동거한다. 그래서 육체 가 사그라들면서 불이 꺼지면 삶과 죽음은 서로 작별한다. 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시인은 바람이 되고 싶어 한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흔들리는 나무의 휘청거 림 속에서 살아 있는 그런 존재 아닌가.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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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옵는 저 세상에 혹, 떠나신 지 어언 수삼 년 당신의 말씀 그 목소리 얘, 너 뭐 그리 생각하니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 너대로 다 그냥 사는 거다 잠깐이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옵는 저 세상에 훅, 떠나신 지 어언 수삼 년 당신의 목소리 그 말씀 얘, 너 뭐 그리 혼자 서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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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 다 너대로 그냥 사는 거다 그게 세상 잠깐이다.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옵는 저 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의 목소리,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 이 세상의 삶 이란 나대로 그냥 사는 거, 그것은 또한 잠깐 아닌가. 이런 죽음이란 또 다른 삶인 것이다. 이쪽 저편에 이렇게 무한한 삶이 있다면 이승에서의 우리 삶은 사는 거, 그냥 사는 거다.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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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제 귀 깊은 곳에

지금은 제 귀 깊은 곳, 안뜰에 훤한 밤, 그곳에 맑게 계시는 당신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그 말씀 얘, 마음 푹 풀고 살라 잠깐이다 세상 한동안 어둔 거 밝은 거 그게 그거니 여겨 살라 상하기 쉬운 가슴 당신에게 받아 상한 가슴 감추며 살아감에 당신 찾으면 지금은 제 귀 깊은 곳, 안뜰에 훤한 방, 그곳에 맑게 계시는 당신 하시는 말씀 그 목소리 얘, 마음 풀고 푹 쉬어라 잠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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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만 가지 그게 인간사! 그거니 여겨 살라 눈 감을 때까지 마음 편히 할 곳 어디 있으리 그렇게 여겨 그렁저렁 너 지켜 널 살라 너 오라! 할 때까지 서서히 서서히.

세상살이가 고단하고 힘겨울 때마다 가장 애타게 찾게 되는 대상이 바로 어머니 다. 더욱이 그 어머니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면 그 애타는 마음은 더 절실하 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힘겨울 때마다 자신의 귀 깊은 곳 훤한 방 에 맑게 계시는 어머니를 불러낸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마음 푹 풀 고 살라, 잠깐이다.’(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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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90


해마다 봄이 찾아오는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시인 역시 그렇다. 하지만 시인에게 봄은 그 의미 이상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때문이다.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하지만 그 분의 이런 말씀 역시 봄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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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시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시집 :『허공으로의 도약』 『벚나무 , 아래, 키스자국』 『마네킹과 천사』 『수도원 , 가는 길』,『피보다 붉은 오후』등 학술논저 :『한국현대시의 분석과 전망』, 『한국시의 넓이와 깊이』등 수상 : 한국시인협회상, 한국가톨릭문학상, 경기도문화상 등

고명철 문학평론가, 광운대학교 교수 저서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지독한 사랑』,『뼈꽃이 피다』,『칼날 위에 서다』등 수상 : 고석규비평문학상, 젊은평론가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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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_3

고 독


남남 ·1

푸른 바람이고 싶었다 푸른 강이고 싶었다 푸른 초원이고 싶었다 푸른 산맥이고 싶었다 푸른 구름 푸른 하늘 푸른 네 대륙이고 싶었다 남남의 자리 좁히며 가까이 네 살 닿은 곳 따사로이 네 입김이고 싶었다 네 이야기이고 싶었다 네 소망이고 싶었다 네가 깃들이는 마지막 고요한 기도의 둥우리이고 싶었다 흙바람 개인 날 없는 어지러운 너와 나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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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내 목소리 푸른 네 가슴이고 싶었다 푸른 네 목숨이고 싶었다 너와 날 묻을 푸른 대륙이고 싶었다

나에게 너란 존재는 무엇인가? 너는 나를 가두는 감옥인가? 아니면 너는 나를 감 싸는 하늘일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너’가 없으면 나 또한 자신의 존재를 증명 해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다. 푸른 바 람이, 강이, 초원이, 산맥이, 구름이, 하늘이, 대륙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나 와 너는 남남이면서 또한 남남이 아닌 것이다.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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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문답 - 속리산에서

길 뚫리거든 내려가시라우 속리산 첩첩 눈 내리는 밤 암자 안에서 등잔불 호롱 호롱 그림자 둘 스님의 말 산 뚫리거든 내려가시라우 산새도 산짐승도 바람 속 눈보라 잉 잉 공산무인空山無人 그림자 가물 가물 몇 시나 됐을까 마음 열리거든 내려가시라우. 96


속리산이란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 아닌가? 그 산에 시인이 갇혔다. 스님이 묻는다. 길(산) 뚫리거든 내려가시라우, 마음 열리거든 내려가시라우. 스님은 시 인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역시 스님의 그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심전심 아닌가? 때로 백 마디 말보다 이런 이심전심의 문답이 더 절실 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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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려가는 소

팔려가는 소보다 쓸쓸한 풍경이 또 있으랴 시골 버스 창 너머로 줄지어 보이는 장터로 가는 소들 나는 그 눈들을 볼 수가 없다 강을 끼고 도는 어느 읍내 가까운 긴 장길 자동차 나팔 소리에 놀라며 피하며 두리번두리번 끌려가는 소들 그 순종에 젖은 한국의 눈들을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리 눈을 감으면 어렴풋이 보이는 먼 부처님 미소 죽음을 철학해 왔지만 나는 아직 죽어서 가는 길을 모른다 미련을 덜어내며 이쯤 살아온 길 소망이 있다면 고통 없는 죽음뿐 팔려가는 소의 가슴으로, 오늘은 내가 내게 팔려간다. 98


시인은 팔려가는 소의 그 선량한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평생을 인간을 위해 순종한 소의 죽음은 시인에게는 충격이다. 그것은 소의 순종보다는 죽음 때문이 다. 죽음은 선량함과 사악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시인은 나는 아직 죽 어서 가는 길을 모른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 속에 묻어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 간적인 두려움이다.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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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팔리지 않는 마을

이 마을엔 하늘이 없다 이 마을엔 공기가 없다 이 마을엔 별이 없다 이 마을엔 이슬이 없다 이 마을엔 풀밭이 없다 이 마을엔 개울이 없다 이 마을엔 우물이 없다 이 마을엔 그늘이 없다 이 마을엔 구름이 없다 이 마을엔 흙이 없다 이 마을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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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역설적이다. 시가 팔리지 않는 마을을 노래하고 있지만 기실 시인이 여기 에서 노래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반대이다. 시가 팔리는 마을, 그 마을은 하늘이, 공기가, 별이, 이슬이, 풀빛이, 개울이, 우물이, 그늘이, 구름이, 흙이, 사람이 있는 마을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그것은 자연 아니겠는 가? 자연은 시를 낳고 시는 자연을 낳는다.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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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인편에

네가 인편에 보내준 파이플 물고 연길 풍기며 3월의 난롯가에서 네게 첫 편질 쓴다 고맙다 크는 줄 모르게 커서 어느새 시집을 가 하늘 건너 낯설은 먼 그곳 그곳에서 나를 생각 보내준 파이프 고맙다 이렇게 나는 세월 서툴게 세월 살아가며 세월 보내는 마음 항상 쓰린 바람 실로 이 비밀, 너희들에겐 미안하다 좋은 아버지 구실 그리 못하고 이 나이 지금 파이플 받아 파이플 피우고 있는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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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찬 겨울 빈 나무 위의 빈 새집 간 세월 가물가물 가물거리는 너희들의 얼굴 지금 너의 파이플 피우며 네게 첫 편질 쓴다.

딸이 선물한 파이프에 대해 답신을 하는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시이다. 어떤 가식도 기교도 없는 그저 딸에게 자신의 심사를 전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 리는 듯하다. 시 속에서 두 번 반복되는‘고맙다’라는 말이 특히 그렇다. 이것은 차가운 소통이 아니라 뜨거운 교감인 것이다. 점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중 의 하나가 바로 이 뜨거운 교감 아닌가. (이재복)

103


고독

고독은 나의 양식 나의 방 나의 우주 나의 초원 벌레 소리 그리워 등을 켠다. 끝없이 가라앉아 가는 지구 사람 냄새에 생명이 죽어 가듯이 서서 시드는 너와 나 사람이 몰리는 곳에 넌 없다 내가 찾는 곳에 넌 없다 바람이여 초록이여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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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나의 개울 나의 부락 나의 주민 무수한 소망 속에서 시간은 혼자다.

고독은 시인의 양식이다. 그래서 시인의 고독은 나의 양식이자, 나의 방, 나의 우 주 또 나의 초원이라고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고독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타 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그것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독한 사람은 벌레 소리조차도 그리워할 줄 안다. 그 그리움으로 고독한 사람은 등을 켠다. 이 고독 한 사람이 바로 시인 아닌가. (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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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화室內花

사방, 엄청난 고요 속에서 남향 햇살을 받아 무심코 가 있는 나의 시선 끝에 핑크로 피어 있는 작은 꽃송이 저것도 내일이면 지겠지 훅, 지나가는 생각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습관처럼 으스러지는 나의 가슴 그건 뭔가 바람 속에서 만남에 바빴고 헤어짐에 바빴고 산다는 거, 그것에 나는 지쳐 버린 거다 스스로에게 낙오되는 스스로에게 갇혀서 이 엄청난 햇빛 유리창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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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라던 걸 모두 잃고 이 순간 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오, 꽃이여 잔인한 황홀이여 소멸하는 휴식이여.

조병화 시를 세심히 읽는 독자라면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주목하게 된다. 일상 속의 사소한 사건에 대한 관찰이나 대상에 대한 평면적인 서술로 일관하는 시의 흐름이 이어지다가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닷없이 철학적이며 미적 사유를 드 러내는 표현이 나타난다.“오, 꽃이여 잔인한 황홀이여/소멸하는 휴식이여”라는 구절은 절창이다. 꽃을‘잔인한 황홀’,‘소멸하는 휴식’이라고 읊은 시인은 없었 다. 잔인함과 황홀경, 소멸과 휴식이라는 전혀 다른 질감의 감정적 표현을 느닷없 이 결합시켜 신선한 정서적 충격을 주는 기법은 이 시인의 탁월한 능력이다. 시인은 창가에 피어있는 핑크색 꽃송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지만, 곧“저것도 내 일이면 지겠지”하고 소멸의 비애를 인식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 황홀하기까지 한 것은 소멸할 운명을 지니므로 허무하고 무상하다. 존재의 허무와 무상감은 아 름다움과 함께 잔인할 정도의 비극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발견을 위해 이 시에서는“엄청난 고요”라든지“이 엄청난 햇빛”이라는 표현들이 등장 한다. 황홀한 아름다움 속에 내포된 죽음과 소멸을 인식하는 이 시는 사색적이며 철학적이다.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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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엔 이런 곳도 있었습니다 넘을 수 없는 까마득한 먼 수평선 자리를 알리는 하얀 등대 사람이 그리운 곳 혼자서 물결치다 혼자서 지치는 바다와 섬 지금 내 머리는 그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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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많은 시는 고독 속에서의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섬은 외 로움과 그리움의 표상이다.“까마득한 먼 수평선”,“하얀 등대”,“혼자서 물결치 다/혼자서 지치는/바다와 섬”을 묘사하는 시인의 마음은 외딴섬의 고독을 대상으 로 바라보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외딴 섬의 고독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순수고독을 반추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병화는 서정시의 본령 을 철저히 수호한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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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천수

하늘에서 내린 수명 그 천수를 다하는 자연사로 옛날엔 지구의 동식물들이 죽어들 갔다 그러나 오늘날 공중의 새들이나 수중의 물고기들이나 사람이나 안심하고 그 천수를 누리다 그 천수 다하여 지구를 떠나는 생명들이 얼마나 있을까 썩어 가는 물 썩어 가는 땅 썩어 가는 공기 엄청난 쓰레기로 좁아드는 지구 불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왜 전쟁을 해야 하나 오늘날같이 온 세계가 터놓고 인간, 그 사람을 평등하게 살자고 사랑의 종교 사랑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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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치, 경제를 펴 가고 있으면서 대량의 이 학살, 아직 이 지구에서 계속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믿는 교회가 폭발하고 사원이 깨지고 성지가 붕괴되는 이 현실 구세주는 어디에 주거하고 있는지 썩어 가는 지구 폭발하는 지구 천수를 누린다는 게 기적이 되어 간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바다도 육지도.

시인은 현대 문명과 도시화에 의해 썩어가는 물, 땅, 공기, 엄청난 쓰레기들을 “불의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종교와 교육, 정치가 사랑을 말하면서 대량학 살이 자행되는 오늘날의 지구 현실에 대하여 개탄한다. 교회가 폭발하고 사원이 깨지고 성지가 붕괴되는 현실 앞에 오불관언하는 구세주를 원망하기도 한다.“썩 어가는 지구/폭발하는 지구/천수를 누린다는 게 기적이 되어간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고양된 어조에는 낙원을 상실한 현대 인류의 비극을 개탄하는 태도가 드 러난다.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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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시 - 도쓰가의 꽃

벌써 38년이 지났는가 B29의 폭격에 몰려 도쿄 도쓰가 삼정목 우야마 댁 방공호에서 내다보던 봄의 꽃 그 사랑스러운 꽃이 아직 내 가슴에 피어 있다 무서운 전쟁 속에서 아무런 기색 없이 피어 오른 단정한 꽃의 모습 생명은 얼마나 뿌리 깊이 아름다운 건가 만사 폭격을 잊고 있었던 그 순간, 나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잊고 있었다 그로부터 38년, 나는 살아남아 지금, 이 넓은 대학 캠퍼스, 창 밖에서 나날이 다시 피어오르는 봄의 들꽃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순결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자연 그대로인 생생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112


인간에게 더럽혀진 거 침범당한 거 학대당한 거 상해당한 거 강제당한 거 보기에 가련한 것들뿐이 아닌가 아, 지구여, 부패해 가는 나의 애인이여 신음하는 종달새여.

이 시는 2차대전 말 도쿄 도쓰가의 방공호에서 B29의 폭격을 피해 숨어 있으면 서 바라 본 꽃에 관한 기억을 노래하고 있다. 전쟁의 참화와 폭격의 공포 속에서 마주친 꽃 한 송이는 시인에게 미적 충격을 주면서 생명존재의 위엄과 경이를 느 끼게 한다. 시인은“단정한 꽃의 모습/생명은 얼마나 뿌리 깊이 아름다운 건가”라 고 표현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만난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움과 신 비로움을 회상한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변했다. 자연 그대로의 순수성은 찾을 길 없고, 인간에 의해 더럽혀지고, 침범당하고, 학대당하고, 강제당한 가련한 것들뿐 인 환경 속에서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이것은 유토피아를 상실한 문명인의 모습이다. 이 시의 결구에서 시인은“아, 지구여, 부패해 가는 나의 애인이여/신음하는 종달새여”라고 탄식한다.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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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나귀

모로코의 나귀는 눈이 나른하다 다리가 가늘다 귀가 길다 늘 허기진 모습으로 무거운 짐을 나른다 사람을 나른다 다듬다듬 가난한 주인을 나른다 물을 나른다 가난은 어디서나 쓰린 눈물 쓰린 나의 눈물에 어리어리 먼 아틀라스 산맥 하늘은 무장장 높고 끝이 보이지 않는 타는 대지 다듬다듬, 아득히 나귀의 다리는 아련하다.

*아틀라스 산맥 -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에 있는 높은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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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조병화 여행시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모로코의 이국적 풍물을 소재로 하 고 있지만, 시인이 이 시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이국취향의 정서가 아니 다. 가난과 비애, 노동과 인내 등 존재자의 근원적 운명에 관한 연민과 동정이 이 시의 주제다. 감정의 직접적 서술을 배제하고 객관적 묘사 위주의 표현기법을 사 용하여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끌어낸다. 눈이 나른하고, 다리가 가늘고, 귀가 긴 모로코의 나귀는 생김새부터 초라하다. 허기와 노동, 복종과 인내는 가난한 나귀 의 운명이다. 이 가난과 슬픔의 운명은 나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시인은 나귀 를 통하여 모로코의 가난을 읽고, 나귀에 빗대어 모든 초라하고 가련한 존재에 대 한 사랑과 공감을 표현한다. 조병화 시의 지적이며 사색적인 특성을 이 시를 통하 여 확인할 수 있다.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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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 나의 사원寺院

나는 지금까지 의지할 만한 신도 사람도 종교 같은 것도 없이 오로지 혼자 안에서 혼자를 지켜 혼자에서 의지하여 혼자를 살아 온 것이 아닌가 그 혼자 안에서, 아름 아름 믿음과 예감, 마음의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면 먼 곳, 어느 곳에 나를 기다리고 계실 듯한 어머님의 자리 나도 그곳으로 가는 거다, 하는 투명한 신앙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어머님, 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신 목숨을 당신의 뜻인 듯한 생애를 찾아 더듬으며 당신의 약속대로 당신의 길을 당신에게 가까이 이렇게 혼자 살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멀리 성당을 바라다보며, 사찰을 보며 하늘로 뾰죽 뽀죽 솟아오른 예배당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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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그 거리距離 외톨로 혼자 가는 길 나는 지금까지 의지할 만한 신도 사람도 없이 오로지 혼자 안에서 혼자를 지켜 혼자에 의지하여 혼자를 살아 온 게 아닌가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실 듯한 그 확신 먼 자리, 그 약속의 자리 아름 아름 그 생각에 의지하여.

조병화 시인에게 있어 어머니는 원초적 본향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리움 의 대상이며, 신앙과도 같은 마음의 의탁처였다. 이 시에서 시인은“의지할 만한 신도 사람도/종교 같은 것도 없이” “오로지 혼자 안에서 혼자를 지켜/혼자에 의 지하여/혼자를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이 고독한 운명적 존재에게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어머님의 자리가 오직 마음을 의지할 곳이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생명 의 본향이면서 자신도 죽어 어머니에게 가야하는 구원의 종착점이었다. 고독 속 에서 갈구하는 그리움과 향수는 이 시인이 지닌 정신적 근원회귀의 모습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이 시인에게 위안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인간 살이의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을 씻어주고 정화시켜주는 절대적 존재인 어머 니는 그에게 신앙적 대상이었다.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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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전설의 고향처럼 축축한 하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 순간, 공포처럼 침묵이 엄습한다 그걸 놀라움이라 할까 아름다움이라 할까 무슨 섬뜩한 기별이라 할까 훅, 나타났다 훅, 사라진다 첩첩한 검은 구름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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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는 지상에서 경험하는 가장 아름다운 신비의 하나다. 튼튼한 뿌리를 지평 선 양쪽에 내린 일곱 빛깔 찬연한 무지개는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놀라움 과 설렘, 황홀과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형언할 길 없는 아름다움은 지 상에서 느껴보는 천국의 체험과도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황홀한 아름다움은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져버린다. 전설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에 대 하여 시인은“순간, 공포처럼 침묵이 엄습한다”고 말한다. 그것은“섬뜩한 기별” 이며“훅, 나타났다 훅, 사라진다.”허무를 이끌어오는 아름다움, 허무를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순간, 시인은 공포와도 같은 침묵에 사로잡힌다. 아름다움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고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지적이고 사색적이다.(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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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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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는 고독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서 그리움은 원초적 사 랑에 대한 향수와 동일시된다. 이 근원회귀 욕망의 대상은 유년의 고향이기도 하 고, 어머니이기도 하고, 첫사랑의 추억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가을 하늘 에 상상의 우물을 만든다. 그 우물에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고, 어린 시절의 고 향을 비춘다. 그리운 얼굴을 회상하는 일은 이 시인에게 있어“절실한 생존 같은 거”였다. 이러한 고백은 이 시인이 단순히 추억이나 회상에 사로잡히는 방편으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이유가 되고 생존의 목적이 되는 서정적 진 실로써 그리움의 감정을 대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 절실한 낭만적 서정성이 조병화 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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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길

전라도 해남은 나의 초행길 물어물어 당도한 캄캄한 밤 후—— 여장을 푼다. 이와 같이 이승에서의 초행길은 물어물어 찾아간다 하지만 저승에서의 그 초행길은 누구에게 물어 가나 어마어마한 이 끝없는 윤회의 길 어머님은 지금 어디메쯤 계실까 아, 이 유구한 여정 그 초행길을 내일엔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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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처음 가는 길은 낯설고 두렵다. 멀게만 느껴진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 길은 이미 누군가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던 것처럼 인식된다. 사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 쳤지만, 내가 그 길을 지나가지 않으면 그 길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이나 다 름이 없다. 따라서 초행길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의 길인 셈이다. 그런데“이 승에서의 초행길은/물어물어 찾아간다 하지만”저승에서의 초행길이 문제다. 여 기서‘나’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혹시 먼저 저승길을 떠난 어머니가‘나’의 저승 에서의 초행길을 안내해줄 수는 없을까, 하고 당돌한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아무 리 어머니라 해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초행길이란, 말 그대로 처음 가는 길이 아 니던가. 이승이든 저승이든“이 유구한 여정/그 초행길을/내일엔 나는 어디쯤에” 가야 하는 게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우리들의 숙명이다.(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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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의 열매들

지금 나의 몸은 가을로 한창이다 지나간 세월들이 세월대로 익어 제자리, 제자리, 가지, 가지 주렁주렁 열매들을 매달고 있다 혼자서 익은 열매 같이 익은 열매 쭉정이로 익은 열매 벌레로 익은 열매 지금 나의 몸은 가득히 알알이 익은 열매로 떠날 차비를 한 가을로 한참이다 빨리 서두는 이 겨울 앞에서 사는 거만큼 익어, 드리는 이 열매들 어머님, 너무나 죄송하옵니다. 그 중의 하나만은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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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삶은 삶의 사연들만큼이나 다채로운 삶의 열매들을 맺는다.“혼자서 익은 열매/같이 익은 열매/쭉정이로 익은 열매/벌레로 익은 열매”가 맺혀 있다. 얼마나 다양한 삶의 사연들과 연관된 열매들인가. 시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간 은 말없이 서서히 삶의 열매란 외양으로 눈앞에 그 실체를 보인다. 이 많은 삶의 열매를 맺고 있는‘나’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환희로 벅차다.‘나’에게 맺힌 열 매는 시간의 속살들로 꽉 채운 것이어서, 열매 하나하나가 맺히기 위해‘나’는 혼 신의 힘을 기울여 시간과 함께 견뎌왔다. 하지만,‘나’는 마냥 기쁨의 황홀경에 도취할 수 없다.“빨리 서두는 이 겨울 앞에서/사는 거만큼 익”는 열매의 생리, 그 진실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나’에게 맺힌 열매 중“아직도 아물지 못 한 상처”를 간직한 열매가 있지만, 그것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맺힌 하나의 열 매이기에 그 상처를 곱게 앓아야 할 것이다.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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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생각 - Stockholm 언덕 위에서

저승에서 내가 살던 나라를 생각하듯이 이곳 광장에서 동양의 작은 내 조국을 생각한다 아직도 싸우고 있겠지 잡으려는 사람들 가지려는 사람들 뒤집으려는 사람들 큰 소리 소리에 나라는 떠 있겠지 아, 조국은 그저 눈물 나는 이곳에서 먼 조국을 운다 이승처럼, 저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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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어느 낯선 곳에서‘나’는 조국의 현실을 생각한다. 조국은 민주화운동 세 력과 이 세력을 진압하려는 국가 권력의 투쟁이 한창이다. 이 투쟁의 한복판에서 벗어나 타국을 배회하는‘나’는 부끄럽다. 조국은 지금“잡으려는 사람들/가지려 는 사람들/뒤집으려는 사람들”투성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조국 의 현실을, 조국이 아닌 유럽의 낯선 곳에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참담할 정도로 서글프다.‘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국의 바깥에서“아, 조국은 그저 눈물/ 나는 이곳에서 먼 조국을 운다”고 시로써 울 따름이다. 언제쯤, 인간다운 삶이 보 장된 조국의 현실을 살 수 있을까. 언제쯤, 타국에서 조국의 현실을 통절히 아파 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쯤, 타국에서 조국의 현실에 흡족한 웃 음을 지을 수 있을까.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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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텔담 재방再訪

머릴 빼쭉 깎아 올린 것들. 깎다가 만 것들. 한쪽을 깎고 한쪽을 꽁지처럼 남긴 것들. 하얀, 노란, 파란, 색을 칠한 것들. 웃통을 벗 은 것들. 눈깔을 올빼미처럼 칠한 것들, 까만 것들, 흰 것들. 거무 튀튀한 것들. 소리치는 것들. 침을 뱉는 것들. 가다가 쭉쭉 빠는 것들. 어지러워져서 호텔 방에 돌아와 누웠습니다. 1969년 6월, 이곳에 처음 왔을 땔 회상하면서. 무섭게 번져 나오는 숨은 인간성, 실로 알 수 없는 그 인간성이 아 닌가. 고름처럼, 정액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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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유럽의 도시에서 시적 화자는 혼란스럽다. 그 도시에는 다채로운 외양 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삶의 형식을 갖고 살아간다. 그들의 존재는 그 들 스스로 자유롭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그 누구에게 간섭을 하지 않는다. 각자 의 삶의 영토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시적 화자는 무심하 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다. 유럽의 도시인들이 자아내는 그 풍경들을 접하며 시적 화자는“무섭게 번져 나오는 숨은 인간성, 실로 알 수 없는 그 인간성”을 동물적 감각으로 포착한다. 그 인간성은 다름 아니라“고름처럼, 정액처럼”근대적 도시 인의 삶의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체액의 속성을 띤다. 실존적 상처를 몹시 앓고 있 는 근대적 도시인,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근대적 도시인의 부정적 속성 앞 에서 시적 화자는 혼란스럽다. 시적 화자가 목도하는 유럽 도시인의 삶이란, 어쩌 면 도래할 근대적 도시인의 묵시록적 현실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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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마지막 출구

이 사바세계를 빠져나갈 곳은 한 곳 밖엔 없다 죽음이라는 곳, 이곳에선 일체의 소지품을 버려야 한다 인간이 쓰던 신분증명서도, 인간이 쓰던 주민등록증도, 인간이 쓰던 여권도, 인간이 쓰던 주소도, 인간이 쓰던 돈도, 인간의 인연도 그곳까지다 나치 독일에서던가 수용소 까스실로 줄지어 끌려 들어가던 수백만 유태신의 자손들처럼 발가벗은 알몸으로 남녀노소 구별 없이 그렇게 빠져나가는 거다 묵묵히, 그저 묵묵히 그 때까진 한마디 전할 사람이 내게 있는데 어머님, 그건 어머님께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130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막다른 경계에서 또 다른 경계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이 관문을 거치기 위해서 는 삶의 영토에서 존재를 보증해주었던 근대적 제도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인간이 쓰던 신분증명서도,/인간이 쓰던 주민등록증도,/인간이 쓰던 여권도,/인 간이 쓰던 주소도,/인간이 쓰던 돈도,”심지어“인간의 인연도” “죽음이라는 곳” 에 모두 버려져야 할 것들이다. 이렇게 죽음은 삶의 영토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들을 단숨에 무화시켜버리는 권능의 힘을 지니고 있다.‘있음’을‘없음’으로 만 들어버리는 저 무소불위의 권능. 그 권능의 힘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속수무책 일 뿐이다. 죽음은 유혹한다. 비루하고 하찮은“이 사바세계를 빠져나갈 곳은/한 곳 밖엔 없다”고, 바로 그곳이 죽음이라고 말이다.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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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거리는 소녀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 도보”발간을 축하하며

내 고향 난실리, 앞마당에서 내가 어렸을 때 보던 떠도는 유랑집단 남사당패의 한 마당 줄타기, 접시돌리기, 무동 타기 재주넘기, 한 판 벌려져 있는 속에서 색색이 옷을 날리며 무동꼭대기를 넘실 넘실 돌던 소녀 아이 씽긋거리던 그 얼굴의 인형 같은 하얀 웃음 뿌리 없는 슬픔 같은 거 바람 같은 거 구름 같은 거 지금은 어느 하늘 끝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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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보던/떠도는 유랑집단/남사당패의 한 마당” “한 판 벌려져 있는 속에서/색색이 옷을 날리며/무동꼭대기를 넘실 넘실 돌던/소녀 아이”의“씽긋거 리던 그 얼굴의/인형 같은 하얀 웃음”이‘나’의 기억의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있 다. 무동꼭대기에서 하늘을 벗하며 갖가지 재주를 부리던 소녀 아이로부터‘나’ 는 남사당패의 곡절 많은 사연들을 보고 듣는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유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의 슬픔이 무동꼭대기에서 재주를 부리 는 소녀 아이의 색색이 옷깃에서 나풀거린다. 그 소녀는 무동꼭대기에서 재주를 부릴 때“뿌리 없는 슬픔 같은 거”로부터 놓여난다. 하여“바람 같은 거/구름 같 은 거”가 되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삶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그럴 때 무동꼭대기에서 부리는 재주는 신명을 얻고, 남사당패의 한 마당은 우리 들의 한恨을 신명나게 풀어준다.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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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만리장성

때마침 불어 닥치는 삭풍에 온 몸은 중천에 뜨고 어디선지 성벽 밑에서 들려오는 맹강녀孟姜女의 울음소리 “여보, 여보,” 장성은 굽이굽이 영을 넘고 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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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밖에서도 뚜렷이 보인다는 만리장성. 그만큼 만리장성의 위용은 누구도 부 정할 수 없으리라.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굳건히 서 있는 만리장성이야말로 중국 의 역사를 침묵으로 웅변해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만리장성의 성벽 밑에서 는“맹강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때로는 구슬프게, 때로는 사무치게“구비구 비 영을 넘고 넘고”들려온다. 분명, 우리가 모를 곡절 많은 사연들이 있을 터이 다.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부역자로서 온갖 고초를 짊어진 자들의 뼈저린 삶의 애 환, 축조된 만리장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에서 생을 잃은 자들의 한恨, 그리고 만리장성 너머 전쟁터에 나간 남편에 대한 그리움 등이 만리장성 구석구 석을 맴돌고 있다. 이토록 만리장성을 찾은 사람들에게 맹강녀의 울음소리는 만 리장성의 침묵 속에서 들려온다. 만리장성에 깃들인 역사와 실존의 울음소리가.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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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호 문학평론가, 경희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데뷔 :『조선일보』신춘문예 평론〈불연속적 서사, 중첩의 울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론〉 평론집 :『오래된 서사』,『여백의 시학』,『환상통을 앓다』, 『허공의 지도』등

이형권 문학평론가, 충남대학교 교수, 현대문학이론연구회 편집위원 데뷔 :『현대시』문학평론 부문 저서 :『타자들, 에움길에 서다』,『한국시의 현대성과 탈식민성』, 『발명되는 감각들』,『공감의 시학』등 수상 : 편운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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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_4


세월

거 누구요? 지나가는 바람이올시다 깊은 밤, 이 산중에, 캄캄한 시간에, 창을 노크하는 소리 거 누구요? 먼 길 가다가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올시다 잠이 깨면 엄습해오는 생존의 공포, 불안 가랑잎처럼, 매달린 생명 거 누구요? 쫓겨 지나가는 바람이올시다 문을 열어줄 수도 없는 세상 쉬었다 가랄 수도 없는 세월 아, 조국의 바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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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바람”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따뜻한 바람이 결코 아니다.“깊은 밤” “그저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다. 그러면서“쫓겨 지나가는 바람”이다. 매서운 바 람이다.“잠이 깨면 엄습해 오는/생존의 공포, 불안/가랑잎처럼, 매달린 생명”을 위협하는 바람이다.“거 누구요?”라는 질문에 들려오는 답이라곤, 한결같이 무엇 인가로부터 쫓기고 위협을 느끼고 있는 바람의 부정적 속성을 점층적으로 보여 줄 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창문을 열어 잠시나마 쫓기고 위협받는 대상으로부터 놓여나 평안을 되찾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아직까지“조국의 바람”은 훈풍 이 아닌가 보다. 세계와 존재를 따뜻이 보듬어 감싸 안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문을 열어줄 수도 없는 세상/쉬었다 가랄 수도 없는 세월”이 마냥 야속하기만 하 다. 이제, 조국에 대한 시인의 현실인식은 조국의 바깥에 있는 낯선 곳에서 시적 화자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다.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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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영혼이 연출하는 자유자재, 신비무궁한 연극 기발, 아연,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변화무쌍한 무대이다 그 무대에서 나는 항상 공포에 몰려 있는 가냘픈 존재 도망가다간 잡히곤 한다 아, 무서운 세상 눈을 뜨나, 감으나, 소름끼치는 세상 나의 영혼은 불안 속에서 탈출을 못한다 어쩌다가 선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옛날 어디선가 만났던 여인이라도 만나면 손이라도 잡았던 여인을 만나면 한없이 정다운 마음, 그러나 금세 악인으로 변하는 무서운 장면 악, 하고 눈을 뜨면 캄캄한 밤 나는 혼자다 꿈은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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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영혼이 빙빙 돌며 연출하는 예기치 못하는 연극 무대 가끔, 나는 그 무대에서 존재의 피해자로 있다.

꿈이 불안과 두려움을 증폭시킨다면 꿈꾸는 것처럼 존재를 옥죄는 일은 없다. “꿈은 영혼이 연출하는/자유자재, 신비무궁한 연극/기발, 아연, 경이로움으로 가 득 찬/변화무쌍한 무대”인데,“그 무대에서 나는/항상 공포에 몰려 있는/가냘픈 존재”로서“존재의 피해자로 있다.”꿈 밖의 현실의 삶도 불안과 두려움 투성인 데, 꿈속에서도‘나’는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의 사위에 갇혀 있다. 그렇다면‘나’ 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세계는‘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속성을 띤 것들로 온통 채워져 있다. 꿈속에서“어쩌다가 선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금 세 악인으로 변하는 무서운 장면”이 연출되듯,‘나’는 까닭모를 세계악世界惡으로 부터 고통을 당한다. 그 고통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꿈꾸기를 통해 그 고통을 홀로 감내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삶 자체가 꿈꾸기와 다를 바 없으므로. 그렇다. 불안과 두려움의 사위에 갇혀 있되,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그것을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삶으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꿈의 불안과 두려움을 살아가는 삶의 생리다.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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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다시 쓰며

병원에서 퇴원을 할 땐 이젠 틀렸구나, 하는 예감이 들어서 쓴 유서가 죽음의 계산을 잘못해서 지금 다시 쓴다 쓰며 천천히 생각을 해보니 참으로 고독은 했으나 일관해서 내 꿈을 부지런히 살아온 생애 그런대로 이젠 죽어서 영원히 휴식을 한들,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아슬아슬 했던 나의 세월 고마운 이웃, 그 친구들이었다 안녕히들 계시오 계시다가 인생이라는 긴 긴 우여곡절의 길 조심조심 오시오 하나도 후회 없이 이겨 나온 내 이 고독했던 생애, 내내 오해 없으시길 부탁드리며 먼저 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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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 앞에서 생은 걸음을 멈칫한다. 더는 일부러 안간힘을 내어 생의 걸음 을 내딛을 수 없다. 무모하게 걸어서 안 된다. 그렇게 자연스레 생의 걸음을 멈추 어야 한다. 자연스레 멈추는 걸음이야말로 아름다운 생의 종언 그 자체다. 물론,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은 이내 생의 성찰적 환희로 탈 바꿈한다.“참으로 아슬아슬 했던 나의 세월/고마운 이웃, 그 친구들”과 연루된 온갖 사연들을 곱씹으면서“그런대로 이젠 죽어서/영원히 휴식을 한들, 하는 생 각”을 갖는다.“하나도 후회 없이 이겨 나온/내 이 고독했던 생애”에서 엿볼 수 있듯,‘나’의 생은“참으로 고독은 했으나”그 고독을 견디는‘나’의 삶의 형식에 의해 죽음이 마냥 두렵지만은 않다. 도리어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겸손으로써 유 서를 차분히 그리고 정갈히 써내려간다. 비록“죽음의 계산을 잘못해서”유서를 다시 쓰는 해프닝을 보이지만, 오히려 삶과 죽음에 대해‘다시’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것 또한 삶과 죽음이 외면할 수 없는 엄연한 생의 걸음이다. (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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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초소 일을 하며

나는 항상 초라하고 조급한 모습으로 시가 숨겨져 지나가는 길목에서 가난한 시의 초소 일을 보면서 시를 찾아내곤 합니다 지나가는 바람을 신문, 바람의 짐을 헤쳐서 숨겨진 시를 잡아내기도 하고 떠가는 구름을 신문, 구름의 짐을 뒤져 숨겨진 시를 가려내기도 하고 바뀌는 사계절을 조사, 염탐하여 그 안에 깊이 숨겨진 시를 끄집어내기도 하고 때론 먼 하늘까지 손을 뻗치며 바람과 구름, 봄 여름 가을 겨울, 먼 하늘 자연과 시간, 그 짤막한 세월을 살다 가는 인간사, 희로애락, 그 눈물을 샅샅이 조사 검문하여 그 속에 숨겨진 시를 색출해내면서 존재하는 것들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삶과 지혜, 그 외로움과 쓸쓸함을 수색, 그 속에 엉겨져 있는 시를 캐어내며 항상 이곳을 떠날 준비도 하곤 합니다 아, 인생사, 이 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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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라한 시의 초소를 지키면서 바람을, 구름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먼 하늘 바뀌는 인간사, 희로애락, 그 눈물을 신문 숨겨 둔 시를 내놓게 하며 때론 그들에게 내가 가야 할 길을 묻기도 하곤 합니다 이렇게 물들어 가는 가을, 저녁노을에서도 한평생을.

⌜시의 초소 일을 하며⌟는 시인의 존재론적 숙명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시편이 다. 시인은 등대지기가 등대 안에서 어두운 밤바다를 향해 빛을 쏘며 배의 안전을 지켜내듯“가난한 시의 초소”를 지키면서 시의 불빛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바람과 구름, 사계절의 순환, 먼 하늘’이 제공하는 자연과 시간의 비 밀을 파헤쳐 인간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색출’하고자 하는 시인의 내적 욕 망을 보여준다. 시인은 우주적 순환의 비밀 속에서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외로 움과 쓸쓸함’을 길어내어‘초라하지만 화려한’시의 초소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 이다.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비밀스레 숨겨져 있는 본원적 의미들을 뽑아내기 위 해 비가시적 의미를 가시화하는 영혼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 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고 초라해보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상상력 의 등대지기인 것이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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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야 할 길·2

아직도 자욱한 안개 속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이 길, 이 길의 끝머리 이곳부터는 이제 혼자서 길을 찾아가야 하리 길은 계속 어둠 속으로 캄캄해지려니 이 어두운 눈을 가지고 어떻게 혼자서 이 길을 찾아갈 수가 있으랴 어디메쯤, 혹시나 어머님이 마중이나 나와 계실는지, 하는 부질없는 생각, 남은 노자를 만져본다 아, 그곳에 철렁거리는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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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야 할 길·2⌟는 칠순이 된 시인이 나그네로서의 인생길에 대해 회상하는 시이다. 시인에게 지나온 인생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위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시인 은 혼자서 어둠에 싸인 길을 머뭇거리며 더듬어가야 한다. 먹먹한 눈으로 어두운 길을 가려니 막막하지만 길 끝‘어디메쯤’에서는 종교처럼 신앙처럼 시인이 기 대고 있는‘어머님’이 마중 나와 계실 것이다. 그리하여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 서도 가늠할 수 없는 고독의 길 앞에서 시인은 남은 노잣돈을 만지며 자신의 철렁 거리는 목숨이 얼마쯤의 여비를 감당하고 있는지를 회감하는 가운데 살아 있음 을 느낀다.‘그곳’을 찾아가야 하지만 시인은 아직 여전히‘여기’에 있는 존재임 을 감지한다. 시인에게‘여기’는‘저기’를 상정하고 있는‘여기’이기에 삶과 죽 음이 항상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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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일과는

요즘 나의 일과는 잊는 일이다 나무가 하늘에 있듯이 자연으로 있는 일이다 잊는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나 매일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공기가 되는 거다 텅 빈 하늘이 되는 거다 바람도 구름도 자유로이 지나가는 하늘이 되는 거다 우주 만물이 자유로이 날 수 있는 텅텅 빈 하늘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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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일과는⌟에서는 노년의 허허로움을 우주 만물과의 자유로운 호흡으 로 읽어내려는 시인의 자유의지가 드러난다. 시인은“잊는 일”이 자신의‘일과’ 라고 표현한다. 잊음으로써 자신을 비워내야 그 자리에 그야말로‘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 자연스러운 자연을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때로 망각이 곤혹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시인은 그 일을 매일 매일의 일과처럼 자연스레 맞아들인다. 그 속에서 시인은‘공기’나‘텅 빈 하늘’이 되어 바람과 구름을 비롯 한 우주 만물이 자유로이 지나쳐 갈 수 있는‘텅 빈 여백’으로 자신의 존재를 치 환시킨다. 이러한 존재론적 전회는 시인이 자기존재감에 대한 망각을 통해 자신 의 사유와 인식을 무애화無碍化하면서 자연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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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나에게 있어서 시는 고통스러운 숙명을 사는 숨은 기쁨이며 사랑은 고통스러운 목숨을 이어 주는 어쩔 수 없는 숨은 기쁨의 형벌이옵니다 그렇게 나에게 있어서는 꿈은 살아야 하는 먼 고독한 순례의 길이오며 사랑은 고통스러운 그 순례의 길을 이어주는 구걸스러운 따뜻한 숨은 동냥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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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는 시인의 시적 자의식을 표출한 시이다. 시인에게 시는“숨은 기쁨”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시인이 스스로 감내해내야 할‘뼈아픈 고통과 존재 론적 숙명’이라는 함의를 가질 때 비로소 본래적 의미를 드러낸다. 시가“숨은 기 쁨”을 제공한다면,‘사랑’은“숨은 기쁨”이 제공하는“따뜻한 형벌”이 된다. 사 랑이란“고통스러운 목숨”을 이어주는 생명수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 인에게‘시’는 다시‘시인의 꿈’으로 치환되어“고독한 순례의 길”이라는 의미 를 띠게 된다. 시를 쓰는 행위는‘성지 순례객’처럼 존재론적 고독과 고통을 내면 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랑은 그‘고독과 고통’의 순례 길에서“따 뜻한 숨은 동냥”이 된다. 사랑이 존재의 구원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구차하거나 ‘구걸스러워’보일 수도 있지만, 대상을 향한 친밀감을 내포하고 있기에 따뜻할 수 있는 것이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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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 핀 작은 들꽃·4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어느덧 나는 지금 긴 인생을 다 살고 칠십을 넘어서, 그 작은 생애를 마무리하며 나머지를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도 살아도 나에게 남는 것은 쓸쓸하고 외롭기만 한 이 고독이란다 물론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너보다도 훨씬 어린애 같은 이 마음 이것이 사실이니 부끄럽기 한량없다 해도 이 사실을 어찌하리 나는 천성이 모질지 못한 탓에 내 몸 안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눈물이 늘 고여, 마를 때가 없고, 외로움에 젖어, 가실 때가 없고 작은 일에도 노여움을 잘 탄단다 그럴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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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게 보이지만, 봄이 되면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너의 힘을 생각하면서 나도, 너같이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멀리서 다짐하곤 한단다 아, 아름다운 들꽃이여 약한 자의 계시여 너는 시들어 가는 나의 힘이란다.

⌜타향에 핀 작은 들꽃·4⌟는 작고 깨끗하고 순결한 들꽃을 보며 자신의 인생을 고백성사 하듯 뇌는 기록이다. 시인은 칠십 넘는 인생을 살면서‘고독’만이 남았 다고 말한다. 자신의 내면에‘어린아이의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 부끄럽게만 느 껴지는 시인은 눈물이 늘 고여 있고 외로움에 쉽게 젖어들며 노여움을 잘 타는 자 신이 약한 존재임을 고백한다. 하지만‘실제로 약한 자신’에 비해‘약해 보이는 들꽃’은 역설적이게도 봄이면 대지를 뚫고 나와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펼쳐 보이 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외유내강의“아름다운 들꽃”으로부터“약 한 자의 계시”를 받으며, 들꽃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 인이 들꽃을 보며“시들어 가는 나의 힘”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마냥 약해 빠진 채로 시들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들꽃처럼 생기로운 힘을 지닌 존재가 되고 싶음을 피력한 부분이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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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 핀 작은 들꽃·35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사랑보다는 꿈이란다 사랑은 간혹 변하는 수가 있지만 꿈은 변하지 않는 거란다 꿈은 자기가 버리지 않으면 항상 자기 안에 있는 보물이란다 자기 영혼 안에 있는 보석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간혹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거지만 꿈은 손으로 만져 볼 수 없는 것이란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혼 속에서 그 영혼을 움직이고 있는 힘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간혹 어두운 눈물을 주는 거지만 꿈은 외로울수록 빛나는 영혼의 등불이란다 오, 길고 긴 이 세월을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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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등불을 밝혀서 이곳까지 왔구나 무거운 사랑의 짐을 덜어내며 내려서는 안 될 사랑의 짐까지 덜어내며 이렇게 먼 길을 왔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보다는 꿈이란다 그 영혼의 등불이란다.

타향에 핀 작은 들꽃·35’는 시인이‘사랑’과‘꿈’이라는 매개어를 통해 시인의 시적 영혼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고백한 기록이다. 시인은 불변성과 가변성을 매개로 사랑보다 꿈이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꿈이 자기의 내면에 있는 보물이자 영혼의 보석이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사랑과 꿈의 차이를 촉감의 여부와 가시성의 여부에서 찾는다. 꿈은 감촉될 수 없지만 비가시적인 영혼을 움 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기에 사랑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사랑이 간간이 “어두운 눈물”을 제공한다면 꿈은 외롭게 빛나는“영혼의 등불”을 상징한다. 그 러므로 시인은 꿈이 제공한 영혼의 등불을 밝혀 사랑의‘무거운 짐’을 덜어내면 서 먼 인생길을 걸어왔음을 토로한다.‘사랑과 꿈’은 시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놓 칠 수 없는 두 가지 핵심어에 해당한다. 그 안에서 굳이 비교 우위를 논하자면 ‘부침(浮굸)’이 심한‘사랑’보다는“영혼의 등불”이 되어준‘꿈’에 애정이 가는 것이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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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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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오늘’을 사는 시인이‘내일’이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사유 한 흔적을 보여준다. 이 시의 묘미는“다는 갈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의 의미가 ‘가기는 가는데, 끝까지 갈 수는 없는’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읽어내 는 데에 있다.‘1연의 바다와 2연의 하늘과 3연의 세월과 4연의 내일’은 시인이 걷거나 날아서 꿈이나 시인의 세월로‘끝까지 다’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하는 ‘구체적 추상’들이다.‘바다와 하늘’이 광활한 영원성의 공간을 표상하기에 심 리적으로 그 끝까지 닿아본 사람은 없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과거로서의 세월’ 은 이미 지나온 시간의 누적된 장면들의 집적이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 없는 표상 이다. 더구나‘미래로서의 내일’은 화자의 오늘과 항상적으로 같은 거리를 유지 하고 있는 시간이기에 도저히 가볼 수가 없는 공간이다. 결국 이 시는 시인이 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의 표상을 빌어 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 된 존재론적 한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태호)

157


호남의 감

우주의 정기와 흙에서 솟아 오른 열기가 나뭇가지 끝에서 엉기어 태양의 열로 온 여름 곱게 익은 가을 가을을 먹으며 나도 우주가 된다 끝도 없이 높고 맑은 새파란 저 하늘에 매달린 감알들 어찌 저것들을 우주라 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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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감⌟은 시인이 주로 쓰는 관념적·추상적 언어로 감지된 서정이 아니라 구체적 대상 묘사를 통해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며 물아일체의 장면을 포착 한 시이다. 시인은 가을에 잘 익은 감나무를 보며 우주의 정기와 대지의 열기가 조화를 이루어 나뭇가지 끝에서 여름 내내 태양빛으로 가을이 곱게 익었다고 감 탄한다. 태양과 우주와 대지의 감각이 감나무 열매에 함께 묻어 있기에 그 열매를 먹으며 시인은 가을을 먹고 가을을 먹으면서 우주적 존재로 전이되는 쾌감을 맛 본다. 그러니 그 숱한‘감알들’이 걸려 있는 감나무를 보면서 시인이 인간과 자연 과 우주가 한 몸으로 소통하는 전율을 경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에 해당한 다. 이렇듯‘감나무의 열매’에서 우주적 본성을 확인하는 것은 시인 역시 우주적 회통의 순환체계 안에 포섭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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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먼 여행길로

잠을 잃은 깊은 밤이면 나의 묵은 영혼은 오래 기숙하던 육체를 늙은 나에게 맡겨 놓고 먼 어제로의 길로 여행을 떠난다 학생모자를 쓰고 쏘다니던 일본 중부지방의 깊은 산길로, 혹은 넓고 넓은 태평양 연안 긴긴 모래사장 긴 모랫길로, 혹은 북구라파 긴 바닷길로, 혹은 크레타 섬 어느 포도밭 사잇길로, 혹은 모로코 사막의 길로, 혹은 코르시카 산정의 길로, 혹은 경상도 산길로, 한없이 이어지는 어제로의 길 그곳에서 그곳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연인하고도 만난다 그 사람이던가 그 사람이던가 미지근히 다시 떠올랐다가, 다시 미지근히 사라져 가는 그 얼굴, 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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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것이 가물가물 인생이지, 세월이지, 이승이지, 하면서 씁씁히 돌아오는 영혼의 긴긴 귀향, 이제 가벼운 영혼의 출입에도 나의 육체는 삐걱거린다.

⌜영혼은 먼 여행길로⌟는 잠 못 드는 밤에 시인의 영혼이 가 닿은 흔적들을 집적 한 시이다. 시인은 불면의 밤이면 자신의“묵은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과거로 의 여행을 떠나는 것을 느낀다. 유학생 시절이나 숱한 여행지의 기억들이“어제 로의 길”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으면 시인은 아직 그곳에 머물고 있는 듯한 과거 의 연인을 만난 듯 설렘에 젖어든다. 그 사람의 그 얼굴을 떠올려보다가도 이내 흐릿한 채로 사라지는 모습을 느끼며 시인은 인생이란, 세월이란, 이승이란 그렇 게 가물가물한 것임을‘씁씁히’체감하면서 영혼의 긴긴 귀향을 사유한다. 그러 나 그렇게 귀향한 영혼을 담아놓을 그릇인 육체는 노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채 삐걱거리며 시인을 안타깝게 만든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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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고독

참으로 많은 길을 걸어서 용케도 이곳까지 온 여정 잠시 쉬면서 이 밤, 잠을 청하고 있노라면 떠날 때나, 지금 이 자리 변하지 않은 것은 실로 혼자라는 생각, 맑게 살아온 그 외로움이다 변하는 세상, 변하는 세월, 변하는 자연, 변하는 인간사, 사람을 살아오면서 하나도 변함이 없는 것은 견고한 나의 고독이다 변한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허망이었던가 아, 무상無常한 이 세상, 맑은 탈출이여 이것도 어머님의 뜻이었던가 어머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어머님 뜻대로 그렇게 이 맑은 고독을 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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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고독⌟은 잠자리에 든 시인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투명한 고독” 을 살아왔음을 감지하는 고백의 기록이다. 칠순 넘게 살아온 시인은 자신이 많은 길을 걸어 용케 지금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잠을 청하면서 시인은 불변성과 가변성을 사유하던 끝에 변함없는 것은 홀로 맑게 살아온 존재가 느끼 는‘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세상도 세월도, 자연이나 인간사도 변하는데, 그러 한 숱한 변화 속에서도 시인에게 불변의 성정은 자신이 견지해온‘견고한 고독’ 인 것이다. 시인에게 변화란“잔인한 허망”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의 추구는 존재 론적 고독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낳기 때문이다. 시인은 무상한 세상에서 어머님의 뜻인 것처럼‘고독’으로“맑은 탈출”을 의지적으로 감행해왔다. 그러 므로 시인은 어머님께 감사하면서“맑은 고독”을 끝까지 살아내고 싶은 것이다. (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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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2

유월 초여름 밤 천지를 개구리들은 세상모르고 웁니다 하늘이 주신 하늘의 목소리로 한낱 거리낌 없이 청명하게 온 천지를 진동시킵니다 그 소리에 취해 어느덧 나도 나도 모르게 소리 나지 않는 고열로 울고 있었습니다 오, 천진무구한 약한 자들의 티 없는 목숨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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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 수도 있는‘개구리’울음소리를“하늘이 주신 하 늘의 목소리”라고 하면서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면 개구리 울음 소리를‘하늘’의 소리로까지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 연과 마지막 연에 그 이유가 드러난다. 첫 연의‘세상모르고’라는 시구는‘개구리’가 속된‘세상’ 과는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마지막 연에서‘개구리’를 “천진무구한 약한 자들의/ 티 없는 목숨들”이라고 규정한 것과 자연스레 호응한 다.‘개구리’가 순수하고 정갈한 생명이라는 이러한 인식의 배후에는 화자가 견 지하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판 정신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온갖 소음 으로 얼룩진 비열한 타락의 공간이니, 그러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순수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개구리’는“티 없는”존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나지 않는/ 고열로 울고 있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타락한 세상 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순정한 존재에 대한 감동과 공감의 표현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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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의 명상·53

담쟁이덩굴이 여름 내내 부지런히 흰 벽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이젠 기운이 지쳐서 그 걸음을 멈추어 버렸습니다 내 몸 속을 흐르는 혈관에도 혈액이 줄어든 듯이 혈맥도 고요해지고 대기에는 햇빛이 줄어들어 천지간 만물이 마냥 생기를 잃고 고요하기만 합니다 시든 햇빛을 타고 잠자리 한 마리가 어디선지 날아왔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또 어디로인지 소리 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저 내 주위는 텅 비어가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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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화자가 노년을 맞이한 시인이고 그의 시야에 들어오 는 사물이나 정황은 공허감으로 다가든다는 점이다. 특히‘담쟁이덩굴이’ “이젠 기운이 지쳐서/ 그 걸음을 멈추어 버렸”다는 시구에 드러나듯이, 시간적 배경이 가을로 설정됨으로써 이 시가 발양하는 공허감은 배가된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 듯이‘여름’내내 왕성하게 자라났던‘담쟁이덩굴’은 조락의 계절을 맞아 시들 시들해지면서 성장을 멈추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러 한‘담쟁이덩굴’에 자신의 삶을 빗대어“내 몸 속”의“혈맥도 고요해지고”있다 고 말한다. 시인은 스스로가‘고요’의 경지에 이르러“천지간 만물이 생기를 잃 고/ 고요하기만 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더욱이“시든 햇빛을 타고” 온“잠자리 한 마리가”시인 곁으로 왔다가“날아가 버리”는 정황은‘고요’의 극 단적 경지를 강조해 준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은“내 주위는 텅 비어가기만”하 는 삶의 고독과 허무를 자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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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이야기

요즘 꿈에 잘 나타나는 풍경은 먼 명동이던가, 아니면 무교동이던가, 가까운 종로이던가, 잘 가던 술집들의 풍경들 박인환이던가, 이진섭이던가, 김수영이던가, 그 얼굴이 나타났다가, 희미하게 사라지면서 다른 얼굴로 변하다간 별안간 엉뚱한 여자로 나타나서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둥 마는 둥 하다간 사라지면서, 다시 낯선 얼굴로 변하면서 “너 아직도 그곳에 있니?”, 하며 사라진다. 하다가, 눈이 깨면 어릿어릿 캄캄한 밤 불을 켜면 새벽 3시 먼저 간 친구들이 방안에 가득히 희미한 유령처럼 떠돈다. 아, 이 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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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꿈은 시인이 젊은 시절에 함께 어울렸던 문우들을 떠올려 준다. 꿈을 통해 시인은 과거에“잘 가던 술집들의 풍경들”속에 나타나는“박인환, 이진섭, 김수영”등 이미 유명을 달리 한 친구들(“먼저 간 친구들”)을 만난다. 이들이 꿈속 에 등장하는 것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 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이“별안간 엉뚱한 여자로 나타나서/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는 둥 마는 둥”하는 것은, 그들과 나누었던 우정이 이성애적 친밀감과 구분 이 되지 않을 정도로 깊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이 시인의 꿈속에 하나의‘풍 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자신도 이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무관치 않다.“너 아직 그곳에 있니?”라는 친구들의 물음은 그러한 자각을 강조해 준다. 그리고 선몽이라면 선몽일 수도 있고 악몽이라면 악몽일 수 도 있는 이러한 꿈속을 헤매다가 깨어난“새벽 3시”는 시인에게 지극한 고독의 시간이다. 시인은 이제 이승에는 친구가 없는 상황, 가까운 벗들은 모두 저승으로 간 뒤에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지독한‘적막’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적막’으로 하여 시인은 노년의 외로움, 혹은 허무감을 절감한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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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 봄이 몸 푸는 길가에서

기온은 영상인데 체감온도는 영하인 이 매서운 황사바람 몰아닥치는 강한 바람 속에서 산수유는 굳게 동여맨 노란 옷고름을 알알한 흙바람에 부대끼어 어쩔 수 없이 푸드득 푸드득 푸누나 아, 이 봄도 이렇게 먼저 순결한 정조를 열어가는가 먼 데 산허리에 희끗희끗 흰 눈 눕혀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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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는 매화와 함께 이른 봄날에 개화하는 선구적 이미지의 꽃나무이다.‘산 수유’가 지니는 선구적 이미지는‘산허리에’는 아직도“흰 눈”이 언뜻언뜻 보이 는 시절에“체감온도는 영하인 이 매서운/ 황사바람”을 극복하고 노란 꽃을 흐드 러지게 피우는 데서 드러난다. 이른 봄에 찬바람을 무릅쓰고 개화하는 장면을 “굳게 동여맨 노란 옷고름”을“푸드득 푸누나”라고 비유한 것은,‘산수유’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그만큼 깊은 정감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더구 나“순결한 정조를 열어가는가”라는 질문에는‘산수유’의 이른 개화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사랑의 전령이라는 뜻을 함의한다.‘산수유’가 지닌 열정 적 생명 의지는 노란 꽃 이후의 파란 잎사귀, 그리고 잎사귀들 사이사이에 열리는 빨간 열매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더욱 도드라진다. 봄부터 가을까지 삼원색을 모 두 보여주는‘산수유’의 이미지는 열정적인 생명과 사랑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노란‘산수유’꽃의 개화에서 아련한 에로티즘을 연상하는 것은 새 생명 탄생의 비의를 자연스러운 감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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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시간도 머물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안은 묵묵히 흐르는 유구한 시간도 발을 멈추고 사랑, 그 옆에선 기다려주곤 합니다. 덧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허무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무정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잔인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속절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사랑 옆에선 발을 멈추고 시간이 중단된 우주를 마련해 주곤 합니다 언제까지나, 그러다간 사랑이 지나가면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의 속도, 아 그러한 세월의 길을, 사람은 인생이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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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이란 무상한 것으로서 인간에게 고독과 죽음을 부과하지만,‘사랑’ 은 그 흐름을 중단시켜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시간’의 흐름이 인간 을 결국 고독과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진실한‘사랑’으로 그 흐름을 멈추어 서 게 할 수 있다고 노래한다. 시간은 비록 모든 것들을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물 리적인 대상일지라도 주관적인 차원에서 충분히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다. 이처럼‘사랑’이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소유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 물질적인 육신의 노쇠를 넘어서는 영혼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 여 사랑은“덧없는 것”,“허무한 것”,“무정한 것”,“잔인한 것”,“속절없는 것”으 로서의 유한적 삶을 뛰어넘어“시간이 중단된 우주”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것 이 바로‘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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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전화 벨 소리만 요란하게 오래, 울리다 말 때가 오겠지 이 세상 아무것도 변한 것 하나 없이 그저 도도히 빽빽이 흐르는 세상 한구석 어두운 빈 방에서 유령처럼 전화벨 소리만 길게 울리다 말 때가 오겠지 꽃은 피며 꽃은 지매 세월은 가며 너는 그곳에서, 나는 이곳에서 그리움으로 가득히 이어지면서 그저 남기며 빈 방에 전화 벨 소리만 오래 오래 울리다 말 때가 오겠지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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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지배소는“빈 방”에서 울리는“전화 벨 소리”이다. 이‘소리’는 누군가가 전화의 주인에게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하는 신호이다. 그런데 전화의 주 인은 부재한다.“너는 그곳에서, 나는 이곳에서”, 즉‘너’와‘나’는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공간에 떨어져 존재한다. 시적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부재는 일 시적인 외출이라기보다는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 서 주인이 없는“빈 방”은 죽음의 공간으로서 그곳에서 울리는“전화 벨 소리”는 공허감과 적막감만을 강조한다. 한 시절 주인의 생애와 가족들의 왁자한 웃음소 리로 채워졌던 공간이 죽음의“빈 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공간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대답 없는 메아리로서의“전화 벨 소리”뿐이다. 이 소리의 정서적 데시 벨은 매우 높다. 그‘소리’가 울리는“빈 방”이“꽃은 피고/ 꽃은 지”는 왁자한 ’ 세상”과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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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얼굴 -세월의 작업실에서

오랜 시간을 걸려서 세월이 만들어 가고 있는 나의 얼굴을 어쩌다가, 가만히 맑은 거울에 비쳐 보면 거기, 나와 같기도 하고 나와 같지 않기도 한 두 얼굴이 나란히,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육신이 보이는 얼굴과 육신이 보이지 않는 얼굴, 그 사이에서 아직도 세월은 작업 중이옵니다 이렇게 세월은 쉬임 없이 내 얼굴을 깎아 내리다가 나의 세월의 밑천이 바닥이 나면 그 곳에서 깎다 만 나의 얼굴을 버리겠지요 영원한 미완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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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언어로 그린 시인의 자화상이다.“세월이 만들어 가고 있는 나의 얼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기정체성을 완성해 가려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맑은 거울”은 그러한 자신을 성찰하는 매개체이다. 그런데‘거울’을 들여다보니“나 와 같기도 하고/ 나와 같지 않기도 한/ 두 얼굴”이 존재한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분열된 자아의 두 모습인데,“나와 같”은‘얼굴’이 아마도 시인이 추구했던 이상 적 자아라면,“나와 같지 않”은‘얼굴’은 현실적 자아이다. 아마도“육신이 보이 는 얼굴”이 현실적 자아라면“육신이 보이지 않는 얼굴”은 이상적 자아일 것이 다. 이 시에서의‘육신’은 시인이 극복하고자 하는 속된 욕망이나 그로 인한 고통 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세월’의 힘을 빌려 아무리 공력을 들여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자아에 도달하기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 인은 인간이 아무리 많은 세월을 자아의 완성에 매진할지라도“깎다 만 나의 얼 굴”만 남을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이 시는 인생이란 결국“영원한 미 완성으로”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겸허한 성찰을 전경화한 것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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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하얀 눈발, 여기저기서 햇꽃들이 울긋불긋 솟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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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설’은 시간과 사물을 중의적으로 드러낸다. 정월 초하루의‘설’인 동시 에 하얀 눈으로서의‘설雪’이다. 시인은 새해 첫날인 설에 내리는‘눈발’을 응시 하고 있다. 마침 구름 사이를 뚫고 햇살도 내리쬐고 있는 모양이다. 시인은‘여기 저기서’흩날리는‘눈발’에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이 어우러지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 광경을 신기하게 보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눈발’에 비치는 햇살 의 반짝거림을 보면서‘햇꽃’이라는 신조어를 생각해 내는데, 이것은 조병화 시 인이 새로 만들어 낸 독특한 시어로서 시의 전반적 분위기를 지배한다. 시인은 ‘눈발’사이로‘울긋불긋’꽃처럼‘솟아’나는 햇살을‘햇꽃’으로 명명하며 새해 를 맞는 설렘을 드러낸 것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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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데뷔 :『문화일보』신춘문예 평론부문 저서 :『불온한 사상의 축제』,『한국 현대시와 반복의 미학』등 수상 : 김달진문학상, 애지문학상, 젊은평론가상(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영옥 시인, 성신여대 명예교수 시집 :『안개편지』,『비천한 빠름이여』,『아늑한 얼굴』,『다시 하얗게』등 학술논저 :『한국현대시의 의식 탐구』,『한국현대 이미지스트 시인연구』 수상 : 한국시인협회상, 천상병문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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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_5

먼 약 속


양란洋갿

아, 감당할 수 없는 요염한 이 육체 황홀한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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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가정이나 사무실을 치장하는 난초 중에는 동양란보다‘양란’이 눈에 자 주 띈다. 각종 축하나 위로의 자리에서도 은근한 향기를 머금은 동양란보다 화려 한 꽃을 피운‘양란’이 요사스런 자태를 뽐내곤 한다. 이처럼‘양란’이 유행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담하고 은근한 것보다는 사치스럽고 호사스러운 것을 선호하는 세태와 함께‘양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시에서“감당할 수 없는 요염한 이 육체”는‘양란’의 화려한 자태를 표상한다. 도도한 정신성을 결핍한 채‘육체’성만을 간직한‘양란’은 마 치 화장을 짙게 한 요부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양란’이 언뜻‘황홀’해 보이지만 실상은‘절망’스러운 것일 뿐이라고 본다.‘양란’의 화 려한 외양이 인간의 속된 욕망을 자극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절망’속으로 빠 져들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황홀한 절망”, 혹은‘절망 스러운 황홀’이 지배하는 곳이 맞는다면, 이 시는 화려하게 외양만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속물적 가치를 재치 있게 비판한 것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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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사춘기 - 예술원 뒷산에서, 1996년 3월.

여보, 보아요 대지에도 여드름이 생기나보오 나뭇가지에서 뾰롯뾰롯 발갛게 대지에서 파릇파릇 팽팽히 솟아 돋는 여드름 여보, 대지에도 사춘기가 있는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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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황에 의하면, 시인은 춘삼월을 맞아 아내와 함께“예술원 뒷산”을 산책하 고 있다. 하늘에서 따사로운 가운이 내려오고 땅에서 생명의 숨소리가 솟아나는 계절에, 시인은‘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새싹들을 보면서 봄의 생명력을 만끽하 고 있다. 이 시의 특이점은‘나뭇가지’의 새싹들을“대지에서 파릇파릇 팽팽히/ 솟아 돋는 여드름”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아내를 향해“여보,/ 대지 에도 사춘기가 있는가 보오”라고 속삭이면서 자연(‘새싹들’)과 인간(‘여드름’)이 지닌 새로운 생명력의 실체를 일체적으로 느끼고 있다. 더욱이 시인은 이렇게 화 사한 생명의 느낌을 아내와 사이좋게 공감하는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에게 아내는 생활의 동반자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함께 발견하고 기뻐하는 시 심의 동반자인 셈이다. (이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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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 가는 생명 앞에서

시들어 가는 생명체를 보며 더는 시들 리 없는 무생물체를 보고 있는 마음 이미 시든 무생물체는, 이제 생명을 다 보낸 무생물체이어서 천년, 만년, 고통 없이 그 자리에 있겠지만 시들어 갈 생물체는 꽃이나, 풀이나, 나무나, 벌레나, 짐승이나, 사람이나, 시들어 갈 그 생명이 다 시들 때까지 그 시들어 가는 고통을 견디어야 하리. 먼저 시들어 간 생명체는 시들어 가며 아팠겠지만 뒤이어 시들어 갈 생명체는 그것을 보며 더욱 쓰라리게 그 애처로운 이별의 아픔을 애절하게 애절하게 견디어야 하리. 운명, 운명, 모든 것은 운명이라 하지만 아, 이 운명의 고통 어머님, 지금 저는 애절하게 시들어 가는 아내의 생명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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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먼 그 약속대로 그 운명을 보고 있습니다 숙연한 운명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랑하는 부인을 보면서 이 시기 조병화의 시는 죽음과 생명이 라는 문제에 천착한다.“시들어 가는 생명체”는 병상에 누워 있는 부인을 비롯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모든 생명을 가리킨다. 이“시들어 가는 생명체” 와 이미 시들어 버려“더는 시들 리 없는 무생물체”를 대비시키면서 이 시는 죽음 을 받아들이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꽃이나, 풀이나, 나무나, 벌레나, 짐승이나, 사람이나”생명을 지닌 존재라면 모두“시들어 갈 그 생명이 다 시들 때까지/ 그 시들어 가는 고통을 견디어야”한다. 그것이 생명을 지닌 존재들의 어 쩔 수 없는 운명임을 시인은 고통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애처로운 이별의 아픔을 애절하게”견뎌야 하는 것 또한 생명을 지닌 존재들의 몫일 것이다. 이 “숙연한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조병화 시인은 머잖아 다가올 부인과의 사별이라 는 고통을 견뎌낼 힘을 비로소 얻게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저 세상으로 가신‘어 머님’을 부르며 시인은 자신의 고독한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엿보았는지도 모르 겠다.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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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라는 것

어두운 작업실 한 귀퉁이에서 혼자, 자라나고 있는 생명 물을 줄 때도 있고 물을 주는 일을 잊을 때도 있고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화분에서 무섭게 돋아나는 생명의 봉오리 “무얼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렇게도 그늘에서 살고 있지 않소” 들릴 듯 말 듯 힐책하듯 시야를 스쳐가는 이 부끄러움 아 생명, 내 인생도 이러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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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이 시집에서 조병화 시인이 관심을 기울인 시적 대상이자 주제이다. 시 인은 어느 날“어두운 작업실 한 귀퉁이에서/ 혼자, 자라나고 있는 생명”을 본다. 작업실 한 귀퉁이에 화분이 놓여 있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일로 경황이 없었을 시 인은 물을 줄 때도 있었지만 물을 주는 것을 잊을 때도 있었다. 보는 둥 마는 둥 어느새 시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화분이“혼자,”생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화분에서/ 무섭게 돋아나는 생명의 봉오리”를 보는 순간 시인은 화분이 자신을 힐책하는 듯한 소리를 듣는다.“무얼 그렇게 생각하시오/ 이렇게도 그늘에서 살 고 있지 않소”. 생명이란 이렇게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같 은 것일 게다. 시인은 문득‘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마도 그것은 눈앞의 생명에 집착하느라 또 하나의 생명을 소홀히 한 데서 온 부끄러움일 것이다.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늘에서도 살고 있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하 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생명이라면,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살고, 생명이 다하는 날에는 또한 그 운명을 받아들 여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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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유물괨物

고요를 듣고 있습니다 소리 하나 없는 고요를 듣고 있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고요로 있습니다 불같던 사랑도 가슴 저리던 그리움도 애타던 기다림도 참을 수 없던 외로움도 잡을 수 없던 꿈도 지금은 부질없는 부끄러움 부끄러움에 숨어서 작게 작게 텅 빈 유물괨物로 고요를 듣고 있습니다 들리지 않는 보이지 않는 그저 비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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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고독한 시인과 잘 어울리는 말이다. 시인은 지금 고요를 듣고 있다.“소 리 하나 없는 고요를 듣”는다니, 이게 말이 되는 말인가? 이 모순형용 속에서 오 랜 고독의 시간을 통해 조병화 시인이 도달한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요’는 있고 없고 보이고 보이지 않고 하는 문제를 초월한 경지이다. 그 속에는“불같던 사랑도/ 가슴 저리던 그리움도/ 애타던 기다림도/ 참을 수 없던 외로움도/ 잡을 수 없던 꿈도”없다. 그런 일희일비의 감정은“지금은 부질없는 부끄러움”일 뿐 이라고 한다. 생生에 대한 모든 욕망과 미련과 집착을 끊고 도달하게 되는 경지가 그가 말하는‘고요를 듣는’경지일 것이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그저 비어 있는 경지. 가까운 이의 죽음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고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수 긍하면서 조병화 시인이 도달하게 되는 경지는 바로‘고요를 듣는 텅 빈 경지’였 던 것으로 보인다.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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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노래·3

나의 일생은 당신을 찾는 긴 여로였습니다 당신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아지랑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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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제46시집『황혼의 노래』에 실려 있는 시는 모두 어머니를 향하고 있다. ‘당신’이라고 부르든‘어머님’이라고 부르든 그 대상은 이미 먼저 고향에 가 계 신 어머니이다. 여기서 고향은 어머니가 묻힌 곳인 동시에 죽어 돌아갈 곳을 가리 킨다.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일생은“당신을 찾는 긴 여로”였다고 고백한 다. 실제로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들은 조병화의 시세계 전반 에 걸쳐 있다. 시인에게“지상 절대”인 어머니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아득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그리움의 감정을 그는‘아지랑이’에 비유한다. 보 일락 말락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는, 이미 이곳에 없는 어머니를 향한 시 인의 그리움을 드러내는 데 적절한 비유이다. 이 시는 시집 전체의 맥락을 떼어놓 고 읽으면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연애시로도 읽을 수 있고, 절대자 를 향한 희구를 노래한 종교시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 중 여러 편이 이러한 특징을 지닌다.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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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노래·114

견디는 것이로다 견디는 것이로다 매사 소리 없이 속으로 견디는 것이로다 너의 운명, 네 그 인생을 누가 대신하리 사랑도, 이별도 견디는 것이로다 견디는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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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주신 생명을 다해 살아가면서 결국 시인이 깨달은 것은 삶이란“견디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견디는 것이로다”라는 말을 통해 시 인은 스스로의 욕망과 괴로움과 고독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조병화 시인의 깨달음은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으며, 모든 생 명에겐 저마다 타고난 운명이 있다는 데 이르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사는 것. 그것이 생명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이며, 생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는 길임을 그는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생에 대한 욕망과 미련과 집착 을 끊어버리자, 그는 비로소 운명을 받아들이고 삶이란“거대한 허무에의 제물” 이자“고독의 영광”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시기 조병화의 시에서 종교적 인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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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귀향 - 묘비명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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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인은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는 말을 종종 했는데, 이 시에 서도 그런 표현이 등장한다. 어머니는 조병화 시인에게 존재의 근원이다. 생명을 주신 분이며, 그의 생명이 거두어지는 날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이때 어머 니는 일차적으로는 육친으로서의 어머니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는 말은 그의 생명이 그의 의지가 아니라 어 머님의 뜻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어머님’은 절대자로서의 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을 주관하는 존재라면 마땅히 그럴 것이다. 절대자인 신의 형상이 조병화 시인에게‘아버지’가 아닌‘어머니’로 나타나는 점은 특기 할 만하다. 일찍이 김재홍은 조병화 시의 특징으로‘모성 지향성’을 들기도 했는 데, 그의 시에서‘모성 지향성’은 절대적 존재에 대한 추구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 억할 필요가 있겠다. 이 시에‘묘비명’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을 보면, 조병화 시 인이 부인의 죽음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생각해 본 것이라고 볼 수 있다.‘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 왔다’는 묘비명에서는 천상병의 시⌜귀천⌟에서 느껴지던 초월의 태도가 느껴지 기도 한다. (이경수)

197


먼 약속

당신이 약속하는 시간은 너무나 멀어서, 지키지 못해 혹시 먼저 내가 자리를 떠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인연이라고 생각하시길 당신하고의 약속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 멀어서, 내 수명으론 지키지 못해 혹시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라고 잊어주시길 아, 당신의 약속은 너무나 먼 날에 있어서, 나의 일월으론 가지 못해 혹시 기다리다 먼저 떠나더라도 그것이 서로 닿지 않는 우리들의 만남으로 접어주시길 당신이 약속하는 시간은 너무 멀어서 그날 그 시간은 너무나 먼 곳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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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조병화의 시는 연애시로도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경우 가 많은데, 이 시 역시 그런 계열의 시로 읽을 수 있다. 부인이 암으로 투병하다 먼저 세상을 뜨는 것을 체험한 조병화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부인이 조병화 시인에 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 의 죽음에 대비해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는 전언으로도 읽을 수 있다. 부인의 죽음을 체험한 후, 조병화 시인은 머잖아 자신도 죽음을 맞이할 날이 있을 것임을 예감했던 것 같다. 이 시집에는 그 때를 대비한 시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이 시에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나게 될 날을 상상하는 화자의 애틋한 심정이 잘 그려져 있다. 세상에는 의지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 음을 이때 당시에 조병화 시인은 절절하게 체험했던 것으로 보인다.“혹시 먼저 내가 자리를 떠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인연이라고 생각하시길”,“혹시 내가 먼저 자리를 떠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라고 잊어주시길”같은 구절에 서는 화자의 체념어린 태도가 아프게 전해져 온다. 당신의 약속이 너무 멀어서라 고 핑계를 대고 있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고 체념하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의 시 간이 짐작되고도 남기 때문이다. (이경수)

199


나무 -외로운 사람에게

외로운 사람아, 외로울 땐 나무 옆에 서 보아라 나무는 그저 제자리 한평생 묵묵히 제 운명, 제 천수를 견디고 있나니 너의 외로움이 부끄러워지리 나무는 그저 제자리에서 한평생 봄, 여름, 가을, 겨울, 긴 세월을 하늘의 순리대로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으면 입은 대로 참아 내며 가뭄이 들면 드는 대로 이겨 내며 홍수가 지면 지는 대로 견디어 내며 심한 눈보라에도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고 의연히 제 천수를 제 운명대로 제자리 지켜서 솟아 있을 뿐 나무는 스스로 울질 않는다 바람이 대신 울어 준다 나무는 스스로 신음하질 않는다 세월이 대신 신음해 준다 오, 나무는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미리 근심하지 않는다 그저 제 천명 다하고 쓰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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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외로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시로, 조병화의‘편지 형식’의 시들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이 시의 화자는 외로운 사람에게 외로울 땐 나무 옆에 서 보라고 충고한다. 나무는 제자리에서“한평생/ 묵묵히 제 운명, 제 천수를 견디고”있으니 그런 나무 옆에 서 본다면“너의 외로움이 부끄러워”질 거라는 것이다. 하늘의 순리대로 살아가 면서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견뎌내는 나무는 심지어 스스로 울지도 않고 신음하지 도 않는다.“그저 제 천명 다하고 쓰러질 뿐이다.”천명을 다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 본받으라는 시인의 전언은 사실 그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줄곧 고독을 노래해 온 시인이니 말이다. 이 시집에서 조병화는 천명을 다하 는 삶에 관심을 보이는데, 이는 하늘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태도를 잊어버리면서 인간의 삶이 피폐해지고 지구 환경이 황폐해졌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는 미 리 고민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주어진 제 천명을 다하는 나무를 닮고 싶어한다. (이경수)

201


흙으로의 귀화 이제 머지않아 나는 죽어서 내 고향 난실리 흙으로 귀화하려니 귀화하기 전에 내 몸을 깨끗이 해 두어야 하리 돈이나 명성이나, 하는 세속의 때를 닦아 버리고 청초한 작은 이름 하나로 흙으로 귀화하는 것이로다 모든 생명들이 흙으로 귀화하듯이 죽음은 이렇게 흙으로 귀화하는 긴 여로의 한계선, 긴 여로의 이 한계선을 넘어서 육체는 흙으로 귀화하면서 생명은 다시 공기로 되려니 지금 나는 이 공기를 마시며 아직은 네 앞에서 이렇게 사랑이다, 꿈이다, 그리움이다, 하며 삶을 살기 위해서 삶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만 이제 머지않아 나는 죽어서 내 고향 난실리로 돌아가 그 흙으로 귀화하려니 사랑이다, 꿈이다, 그리움이다, 한 내 삶을 부끄러워하리 그 외로움도 그 쓸쓸함도.

202


이 시에서 조병화는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부인의 죽음 이후 이러한 태도는 조병화의 시에 종종 나타나는데, 이 시에서는 죽어서“내 고향 난 실리 흙으로 귀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모든 생명들이 흙으로 돌아가듯 이 흙으로 귀화하겠다는 것은, 돈이니 명성이니 하는 세속의 때를 모두 벗어 버리 고“청초한 작은 이름 하나로”돌아가겠다는 뜻이다. 그가 죽음 앞에서 버리고자 하는 것에는 사랑이라든가 꿈이라든가 그리움도 속해 있으며, 심지어 외로움과 쓸쓸함도 들어 있다. 그는 생에 대한 욕망과 미련을 모두 버리고 고향 땅의 한줌 흙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태도는 이 시집에 보이는 생태주의적 사유 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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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슬픔

나무 아래 누워 구름을 보니 바람처럼 스쳐가는 한순간, 팔십 평생을 슬픈 시만 썼구나, 하는 생각 왜, 그랬을까 이제 세상 접고 가는 모퉁이에서 내 슬픔 고요하니 슬픔이 기쁨, 기쁨이 슬픔, 영원의 한순간, 눈을 감으니 나는 비어서 하늘이어라.

204


한순간의 깨달음이 시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시도 그런 한순간의 깨 달음으로부터 시작된다.“나무 아래 누워 구름을 보”던 시인은 한순간,“팔십 평 생을 슬픈 시만 썼구나, 하는 생각”이“바람처럼 스쳐가는”것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왜, 그랬을까”. 줄곧 고독과 허무를 노래해온 조병화의 시를‘슬픈 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 왜 이토록 슬픈 시만 써왔 던 것일까? 아마도 시인은 그 이유를 채 비우지 못한 마음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비우지 못한 욕망이 고독과 허무를 벗 삼게 했다면,“이제 세상 접고 가는 모퉁이 에”선 시인은 욕망과 미련과 슬픔과 기쁨마저 다 비우고자 한다. 미련을 버린 “세상 접고 가는 모퉁이에서”는 슬픔마저 고요해진다. 그러니 슬픔이 곧 기쁨이 되기도 하고, 기쁨이 슬픔이 되기도 할 법하다. 이렇게 다 비워냈다면 그것이야말 로 천명을 따른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조병화 시인은 말한다.“나는 비어서 하늘이어라.”라고.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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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는, -미지의 독자에게

이 답장이 당신 편지에 도움이 될는지, 시는 내게 힘이었습니다 그 구원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생존의 위안이었습니다 시는 존재의 빛 그 빛이 열어 주는 내 길이었습니다 시는 지知의 세계가 아닙니다 시는 감感의 세계이옵니다 시는 오悟의 세계이옵니다 시는 감感과 오悟의 세계가 감도는 우주, 그 우주를 감지하는 고독한 희열이옵니다 무엇보다도 시는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왜?가 아닙니다 시는 따져 맞추는 세계가 아닙니다 시는 보이지 않는 큰 자연이옵니다 언제나 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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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독자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을 빌려 조병화 시인이 생각하는 시에 대해서 노래한 일종의 시론격의 시이다. 시는 그에게 힘이었으며, 구원의 손길이었으며, 생존의 위안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는 조병화 시인에게는 운명 같은 것이었 을 게다.“존재의 빛/ 그 빛이 열어 주는 내 길”이 바로 시였던 것이다. 조병화 시 인은 이론지향적인 시를 거부했다. 이런 태도는 그의 시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인용한 시에서도“시는 지知의 세계가 아”니라“감感의 세 계”이자“오悟의 세계”라는 시인의 전언이 눈에 띈다. 감정의 움직임과 깨달음이 없는 시에 대해서 그는 회의적이었다.“무엇보다도 시는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시론은 이론지향적인 시에 대한 거부의사를 드러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조 병화가 추구한 시는“언제나 푸른”,“보이지 않는 큰 자연”이었다. 그것은 이론적 이거나 주지적인 것을 넘어선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경수)

207


아아, 나의 고독은

아, 나의 고독은 만인의 가슴 가슴 깊이 숨어 있어서 찾아도 찾아들여도 끝이 없어라 나의 외로움은 만인의 가슴 가슴 깊이 번져 있어서 다는 보이질 않아 걷어도 걷어들여도 다는 걷어들이질 못하여라 그렇게 나의 그리움과 사랑은 만인의 그리움과 사랑 깊이 섞여 있어서 가려도 가려내도 다는 가려낼 수가 없어라 나의 외로움은 만인의 외로움에 엉겨 있어서 풀리지 않는 그 가슴 가슴이어서 아, 너의 가슴이어서 내 노래가 너의 노래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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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인의 기본 정서라 할 수 있는‘고독’,‘외로움’,“그리움과 사랑”을 대 상화하고 있는데 주관적 감각을 타자화함으로써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눈길을 끈다. 대상으로서의“나의 고독”과“나의 외로움”은 곧“만인의 가슴”과 “만인의 외로움”과 동화된다. 그리하여“나의 외로움은 만인의 외로움에 엉겨” 붙고“내 노래가 너의 노래”가 되는 감격에 이른다. 각 연의 마지막 행에서 반복 되는“~라”의 반복은 타자와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주체의 뜨거운 목소리다. 이렇 게 나의 고독이 곧 누구나의 고독과 다르지 않은 것임을 깨달아 타인과 나를 겹치 게 되는 추이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 것이다. 그렇다면 시집의 많은 시편들에서 드 러나는 고독과 외로움의 정서는 감상感傷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영혼의 에너지라 명명해도 좋으리라. (한영옥)

209


고요한 귀향

이곳까지 오는 길 험했으나 고향에 접어드니 마냥 고요하여라 비가 내리다 개이고 개이다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다 폭설이 되고 폭설이 되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홍수가 되다 가뭄이 되고 가을 겨울이 되면서 만남과 이별이 세월이 되고 마른 눈물이 이곳이 되면서 지나온 주막들 아련히 고향은 마냥 고요하여라 아, 어머님 안녕하셨습니까.

210


노년에 이른 시인이 예감하는‘죽음’의 감각이 고요하게 돋아 있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시인은‘귀향하는 자’로서 유난히 귀향에의 감각이 예민하게 돋아 있는 존재임을 실감한다. 삶의 길은‘험했으나’이제 생의 끝머리에 서고 보니 모든 삶 의 굴곡들이 서서히 자세를 바로 잡으며‘고요하여라’라는 한 마디를 허용하며 편안하라고 다독인다. 2연에서의 세월과 그 세월 안의 인사人事들이 고향의 문전 으로 몰려들면서‘아련’하게 그 자취를 떨구고 있다.“지나온 주막들”- 그렇다, 우리가 삶의 길에서 누렸던 기쁨과 슬픔의 날들은 하룻밤 묵고 가는 주막의 날들 이었다. 저 쪽 본향에 계신 어머님께‘안녕하셨습니까’여쭙는 것은 곧 뵙겠다는 뜻이 될 것이다. 죽음을 미리 당겨보는“고요한 귀향”의 의식을 숨죽여 엿보게 해 주는 작품이다. (한영옥)

211


고요한 참회

나에게 주어진 삶의 끝머리에서 삶을 알았으니 어찌하리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끝머리에서 그 인생을 알았으니 어찌하리 아 이렇게 사랑의 끝머리에서 사랑을 알았으니 어찌하리 사람은 죽는 것을 그 끝머리에서 알았으니 아 끝머리에서 알았으니

212


시의 주체인‘나’는“삶의 끝머리”에 이르러 고요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중 이다.‘나’는‘삶’과 삶이 흐른‘인생’과 삶을 일렁이게 했던‘사랑’의 지난 자리 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두가 결국“죽는 것”안에서 무화되는 것임을 ‘어찌하리’라는 탄식 속에 털어 놓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이 시의 핵심은 3연의 “사람은 죽는 것을/ 그 끝머리에서 알았으니”에 놓인다. 4연의“아 끝머리에서 알았으니”를 통해 유한한 삶의 통한이 다시금 강조되면서 핵심 모티프로서의 ‘죽음’이 전경화前景化된 작품이라 하겠다. 시인은 이처럼 후기 시집의 시편들에 서 죽음의식을 다양하게 형상화한다. 그 중에서도 이 시의 경우는 수식이 전혀 없 는 진솔한 일상적 구어들로 운용되어 있으면서도 비극적 정조를 효과적으로 고 조시키고 있음에 주목된다. 또한‘끝머리’와‘어찌하리’의 탄식어린 목소리를 반복적으로 토해내면서 간절한 리듬을 구사, 독자의 가슴에 애잔하게 스며가는 공감력을 확보하여 서정의 힘을 높이는 사실에도 주목할 만하다. (한영옥)

213


라일락

여보, 라일락꽃이 한창이요 이 향기 혼자 맡고 있노라니 왈칵, 당신이 그리워지오 당신은 늘 그렇게 멀리 있소 그리워한들 당신이 알 리 없겠지만 그리운 사람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오 어차피 인생은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 거 떨어져 있게 마련 그리움 또한 그러한 것이려니 오 그리운 사람은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런가 여보, 지금 이곳은 라일락꽃으로 숨이 차오 .

214


라일락꽃’의 향기를 매개로 환기된 한 사람에 대한‘왈칵’한 그리움을 주조음으 로 하고 있다.‘여보’로 호칭되는“그리운 사람”은 배우자로 짐작된다. 지금 시의 주체는 그 배우자를 향한 오롯한 고백에 몰두하고 있다.“당신은 늘 그렇게 멀리 있소”라는 사실을 통해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사랑의 거리를 가늠하게 된 다. 라일락꽃의 울컥한 향내와 당신을 향한 간절함이 버무려져 뒤늦게 깨닫는 사 랑의 실체가 은은하게 번져난다. 이제“그리운 사람 있는 것만으로도/나는 족하 오”라는 고백을 통해“라일락꽃으로 숨이 차오”에서의 라일락꽃은 당신으로 치 환되어도 좋겠다. 보랏빛 내음을 풍기며‘낭만적 사랑’의 스냅 한 장이 저만치 펼쳐져 있는 듯하다. (한영옥)

215


실로 좋은 시들은,

그렇게도 강력한 위세로 극성을 부리던 공산 국가들이 붕괴하듯이 20세기에 들자 온 세계를 풍미하던 이미지즘도 다다이즘도 쉬르리얼리즘도 미래주의도 모더니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 산산이 부스러져 지금은 그 가루들이 뒤섞여 언어들에 묻어 우리들의 시에 반짝반짝하누나 실로 좋은 시는 어느 한 이즘에 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속을 벗어나 자유스럽게 살아 있는 감격이나 그 생각을 총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려니 그것이 이 가루들의 조화가 아니랴 창작은 말의 빛이려니 투철한 생각이 그것이려니 신선한 언어가 그것이려니 상쾌한 감각이 그것이려니 쾌적한 리듬이 그것이려니 명확한 뜻이 그것이려니 아름다운 몸체가 그것이려니

216


아, 유령처럼 떠도는 이즘의 가루들이여

시인은 제50시집『고요한 귀향』의 서문을 통해“나의 시는 나의 시론”이라는 의 견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시인은 시집의 곳곳에‘시’장르에 대한 소견을 시화 하곤 한다. 특별히 위의 시는 그의 시론이 보다 논리적으로 육화되었다는 데서 주 목을 요한다. 한 시기를 뚜렷하게 점거하고 사라진 유행사조들이 둘러쳤던 폐쇄 적인 방법론의 울타리를 넘어“살아있는 시”를 지향했던 시인의 평소 의지를 잘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삶의 살에 닿아있는 구체적 감촉의 세계 를 그려내고자 고심했었다. 3연과 4연에서 보여주는 대로 시인은“구속을 벗어 나”,“신선한 언어”와“명확한 뜻”을 가진“아름다운 몸체”로서의 시작품을 위해 평생을 고심하였다. 그 결과물로 53권의 시집을 묶어 한국 현대시사를 두텁게 했 음은 주지하는 바다. 언어예술로서의 완성도와 아울러 독자와의 스스럼없는 소 통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내세운‘시론’한 편을 읽은 셈이다. (한영옥)

217


정물靜物

움직이는 것이 보이질 않는다 화분은 화분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책은 책대로 붓은 붓대로 쓰레기들은 쓰레기대로 먼지는 먼지대로 놓여진 자리에서 만고무언萬古無言으로 있다 그 사이사이를 보이지 않게 나의 영혼만이 떠돌고 있다 나의 영혼은 그렇게 떠돌며 움직이며 생각하며 무언가를 부지런히 찾아 평생을, 그렇게 쉬는 일 없이 왔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218


이 시의 지배소는“나의 영혼”이다. 시인은 끊임없이 각처를 여행하고 많은 책들 을 읽으면서 몸과 마음의 세계를 확장시키고자 애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별 히 후기 시에서는 그간의 여정들을 되새기며 정밀하게 내면을 그려내는 데 주력 한다. 시「정물靜物」은 그러한 경우의 좋은 예가 된다. 지금 주체는 아직도 질정하 지 못하고 들끓는 내면을“나의 영혼만이 떠돌고 있다”라고 살핀다. 방 안의 모든 물상들은‘만고무언’인데“나의 영혼은 그렇게 떠돌며 움직이며”무엇인가를 탐 색하고 있다. 아직도 내면의 여행은 활발하게 진행 중인 것이다. 인생은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들을 한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이는 당연한 말 이 아닐까. 결국 시지프스와 같은 성실한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이 시는 행간의 여백을 통해 독자에게 시지프스의 피땀 절은 고단한 뒷모습을 떠올려준다. 시지 프스의 끝 모를 노역을 시인의 끈질긴 탐색의 정신으로 바꿔 놓았을 때“아직 나 는 모른다//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의 불안은 얼마나 절실한 호소인가. 그러나 그로써 족한 것이 삶이었다고 끄덕이는 시인의 넉넉한 표정이 저 편에 떠오른다. (한영옥)

219


나의“있음”

나는 나를 찾아서 너무나 먼 곳을 헛되게 헤매돌았지 바로 눈앞에 나를 두고 나는 나를 찾아서 너무도 먼 길을 헛되게 헤매돌았어 바로 눈앞에 피고 지는 꽃이 바로 나인 것을 모르고 실로 나는 나를 찾아서 너무나 먼 길, 먼 곳을 헛되게 헤매돌았어라 바로 눈앞에 야들야들 작게 피고 지는 꽃이 바로 나의“있음”인지도 모르고 나에게 배당된 세월 다 끝나는 지금 나를 찾아서 먼 곳, 먼 길, 먼 세월 덧없이 헤매돈 것이 바로“헤매인 그것”이 다름 아닌 바로 나의 그“있음”이었어 아, 그걸 지금 알았어.

220


생의 끝자락에서 터득한 실존의 이해를 나지막하고도 무거운 고백의 언어로 엮 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있음’에 대하여“이미 내던져져 있음”,“존재를 잘 이 해하고 있음”,“빠져 있음”의 세 가지 방식이 얽혀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인 간은 이미 태어나 있으며, 자기 존재를 잘 이해하고 미래를 기획할 수 있는 한편 반성 없이 타인의 방식대로 비본질적인 삶에 빠져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어서 인간의 위대성은 섬뜩한 깨달음과 함께 고유한 자신의 실존을 자각, 본질적 인 삶으로 전환하는 데 있다고 설파한다. 이때 하이데거는 실존의 감각을 깊이 있 게 그려내는 위대한 인간으로 시인을 지목하면서 시를 매개로‘진리’의 세계를 축조한다. 시인은 몸과 정신의 끊임없는 여행을 통해‘길 위에서의 사유’를 펼쳐 냈다. 이 시의 주체는 긴 여정 끝에“피고 지는 꽃”이“다름 아닌 바로 나의 그 있 음”이며 또한“해매돈 것”이 실존의 진면목이었음을 깨닫는다. 바로 내 목전에 있었던“피고 지는 꽃”은 다름 아닌 생의 유한성을,“헤매 돌았어라”는 탐색의 시 간들을 떠올려준다. 생의 유한성을 떠맡는 순간“돌연히 닥쳐오는 불안한 예감” 「숙연한 ( 시간」, 시집『남은 세월의 이삭』)은 바로 섬뜩하게 성찰의 순간을 끌어 오는 힘이기도 하다. 시집들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불안’과 고독은 여기에 맥락 을 둔다 하겠다. (한영옥)

221


너무도 멀다

222


마지막 시집의 한 가운데 환하게 떠 있는 시인의‘별’을 쳐다본다. 시인이 평생을 추구해온 삶의 목표가 저처럼 빛난다. 그러나 시집을 통해 보면 시인은 한 번도 그 목표라 할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무던하게 걸어갔을 뿐이다. 추구해 마지않 던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그것을 향한 그리움과 애절함이 삶을 이끌어갔다. 잡힐 듯, 한 자락의 여운을 끌며 시인 과 우리를 견인해간 어떤 절실함의 감각,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너무 아득하여 “너무도 멀어”안타까웠던 그것은 안타까움만을 그 대가로 주었을 뿐이다. 사색 의 자리를 펼치는 많은 이들이 실은 아득한 그곳이 우리의 진짜 고향이라고 귀띔 한다. 그렇다, 우리는 별에서 왔으며 하나의 별로 엉켜 있던 아늑함을 기억하는 공동체다.‘너무도’멀었던 그곳, 별로 우리 모두는 간다. (한영옥)

223


조병화趙炳華 (1921. 5. 2 - 2003. 3. 8)

시인. 호는 편운片雲.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 서 부친 조두원과 모친 진종 사이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동 공립보통학교, 경성사범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물 리, 화학을 수학하다가 일본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5년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유로 교단생활을 시작하여 인천중학교 를 거쳐 서울중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1949년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출간하여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경희대학교로 옮기 어 문리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1년부터는 인하 대학교에서 문과대학장, 부총장, 대학원장으로 재직하다 1986년 정 년퇴임했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대만 중화학 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카나다 빅토 리아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는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 허무와 고독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하여 꿈과 사랑의 삶을 형상화한 점에서 특 징을 찾을 수 있다. 창작시집 53권,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화집 5권, 등을 비롯하여 총 160여 권의 출간이 증명하듯 그의 작품활동은 남달리 성실하였고, 또한 폭 넓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 국내에서 널리 읽혔듯이 25권에 달하 는 시집이 일본 중국,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 네델란드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시인으로도 사랑받았다.

224


그는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 장을 역임하면서 세계시인대회 국제이사, 제4차 세계시인대회(서울, 1979) 대회장을 맡아 시인들의 국제 교류에 힘썼다. 세계시인대회에 헌신한 공로로 1981년 제5차 세계시인대회에서는 계관시인桂冠詩人 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아세아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 상, 31문화상, 대한민국문학대상, 국민훈장모란장, 대한민국 금관문 화훈장, 5·16민족상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공로상과 감사패를 받았 다. 이러한 상금과 원고료를 모아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 해 1990년 편운문학상을 제정했고, 2003년까지 13회에 걸쳐 37명의 시인, 평론가들과 시문화단체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이후 유족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3년 작고하기까지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겸하여 초대전을 여러 차례 가졌다.(유화전 8회, 시화전 5회, 시화-유화전 5회 등) 그의 그림은 그의 시 세계와 흡사하여 아늑한 그리움과 꿈이 형상화된, 상 상의 세계로 이끈다. 시인이자 화가, 교육자, 스포츠맨(럭비선수, 지 도자)으로도 명성을 떨친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검정베레모와 파이 프이다.

225


조병화 창작시집

제 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

1949. 7. 1

산호장

제 2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4.13

산호장

제 3시집

패각의 침실

1952. 8.18

정음사

제 4시집

인간고도

1954. 3.20

산호장

제 5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1955.11. 5

정음사

제 6시집

서울

1957.11.20

성문각

제 7시집

석아화

1958. 3.15

정음사

제 8시집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1959.11.30

성문각

제 9시집

밤의 이야기

1961.10.30

정음사

제10시집

낮은 목소리로

1962.11.10

중앙문화사

제11시집

공존의 이유

1963. 6.30

선명문화사

제12시집

쓸개포도의 비가

1963.10.25

동아출판사

제13시집

시간의 숙소를 더듬어서

1964.10.30

양지사

제14시집

내일 어느 자리에서

1965.11.15

춘조사

제15시집

가을은 남은 거에

1966.12.10

성문각

제16시집

가숙의 램프

1968. 4.30

민중서관

제17시집

내 고향 먼 곳에

1969.12.15

중앙출판공사

제18시집

오산 인터체인지

1971. 2.20

문원사

제19시집

별의 시장

1971.11.10

동화출판공사

제20시집

먼지와 바람 사이

1972.10.20

동화출판공사

제21시집

어머니

1973.12.25

중앙출판공사

제22시집

남남

1975. 7.20

일지사

제23시집

창안에 창밖에

1976.10.30

열화당

제24시집

딸의 파이프

1978. 6.15

일지사

제25시집

안개로 가는 길

1981. 9.15

일지사

226


제26시집

머나먼 약속

1983.10. 4

현대문학사

제27시집

나귀의 눈물

1985. 6. 5

정음사

제28시집

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

1985. 5.20

혜진서관

제29시집

해가 뜨고 해가 지고

1985.12. 1

오상사

제30시집

외로운 혼자들

1987. 5.15

한국출판사

제31시집

길은 나를 부르며

1987.12.20

청하출판사

제32시집

혼자 가는 길

1988.10. 5

우일문화사

제33시집

지나가는 길에

1989.11.10

신원문화사

제34시집

후회없는 고독

1990. 5. 2

미학사

제35시집

찾아가야 할 길

1991. 3.15

인문당

제36시집

낙타의 을음소리

1992. 1. 5

동문선

제37시집

타향에 핀 작은 들꽃

1992. 4.15

시와시학사

제38시집

다는 갈 수 없는 세월

1992.11.10

혜화당

제39시집

잠 잃은 밤에

1993. 9. 5

동문선

제40시집

개구리의 명상

1994. 7.20

동문선

제41시집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

1994.12.10

문학수첩

제42시집

시간의 속도

1995.10.31

융성출판사

제43시집

서로 따로따로

1996. 4.28

예니출판사

제44시집

아내의 방

1997. 5. 2

동문선

제45시집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1997.11.20

동문선

제46시집

황혼의 노래

1997.10.20

마을

제47시집

먼 약속

1978. 4.30

마을

제48시집

기다림은 영원히

1998.11.30

가야미디어

제49시집

따뜻한 슬픔

1999.11.20

동문선

제50시집

고요한 귀향

2000. 3.10

시와시학사

제51시집

세월의 이삭

2001.10.30

월간에세이

제52시집

남은 세월의 이삭

2002. 5.10

동문선

제53시집

넘을 수 없는 세월

2005. 3. 7

동문선 227


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 주 최 후 원 발행일 발행처

조병화문학관 문화체육관광부, 국민체육진흥공단 2018년 5월 31일 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길14-1(난실리 337) ☎ 031-674-0307, 02-762-0658 http://www.poetcho.com E-mail. poetcho@naver.com

기 획 제 작

조병화문학관 동진인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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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재정후원을 받았습니다.



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

조병화 시전집 1권 버리고 싶은 遺産 하루만의 慰安 貝殼의 寢室 人間孤島 사랑이 가기 전에 서울 石阿花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2권 밤의 이야기 낮은 목소리로 共存의 理由 쓸개포도의 悲歌 時間의 宿所를 더듬어서 걐日 어느 자리에서 가을은 남은 거에 假宿의 램프 내고향 먼 곳에

홍용희 문학평론가.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

3권 오산 인터체인지 별의 市場 먼지와 바람 사이 어머니 남남 窓 안에 窓 밖에 딸의 파이프

김삼주

조병화의 대표시를 말한다

시인. 문학평론가. 가천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홍기돈 문학평론가.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4권 안개로 가는 길 머나먼 約束 나귀의 눈물 어두운 밤에도 별은 떠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외로운 혼자들 길은 나를 부르며 혼자 가는 길 지나가는 길에

홍용희 김삼주 홍기돈 이재복 조창환

이재복

고명철 오태호 이형권 이경수 한영옥 (게재순)

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조창환 시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고명철

5권 후회없는 고독 찾아가야 할 길 낙타의 울음소리 타향에 핀 작은 들꽃 다는 갈 수 없는 歲月 잠 잃은 밤에 개구리의 명상 내일로 가는 밤길에서 시간의 속도 서로 따로 따로

오태호 문학평론가. 경희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이형권 문학평론가. 충남대학교 교수 이경수

www.poetcho.com

조병화문학관

6권 아내의 방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황혼의 노래 먼 약속 기다림은 아련히 따뜻한 슬픔 고요한 귀향 세월의 이삭 남은 세월의 이삭 넘을 수 없는 세월

문학평론가. 광운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영옥 시인. 성신여대 명예교수

조병화문학관 (게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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