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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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â… Vol.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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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015Ⅰ Vol.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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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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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와 그림

편운문학상 시터

산다는 거

제15회 수상자ㆍ이성부, 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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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꿈의 향기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가장 아름다운 시가 노래가 됩니다ㆍ나태주

따뜻한 슬픔

10

36

시인의 육성을 듣다

제10회 편운시백일장

허형만 시인 편ㆍ최영규

심사평ㆍ입상작ㆍ입상소감

16

38

조병화론

꿈의 글마당

죽음의 시적 변용ㆍ김대규

꿈나무 시낭송대회ㆍ톡톡플러스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

22

40

제25회 편운문학상

가을문화산책

심사평·수상소감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영월문학기행ㆍ주기영

26

42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조병화를 추억한다

하얀 사연

휘호로 읽는 조병화와 그의 사람들ㆍ인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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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회갑에 주신 선물ㆍ허영자

한 장의 사진

1996년 10월 19일 금관문화훈장을 수장하고

28 명사가 만난 조병화

세월이 가기 전에ㆍ이진섭

표지Ⅰ제자·그림_ 조병화

2015Ⅰ Vol. 19

46

등록번호 서울 사02178 발행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발행인 박철원 편집인 조진형 편집주간 김삼주 편집위원 김종회 박덕규 박주택 홍용희 편집장 장우덕 주소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2길 6(혜화동 105) (우)03076 전화 (02) 762-0658 팩스 (02) 3673-0436 홈페이지 www.poetcho.com 이메일 poetcho@naver.com 디자인 편집전문회사 꿈과 놀다 (02) 2277-3986 인쇄 예작만들기 발행일 2015년 9월 1일 『꿈』은 잡지윤리실천강령을 준수합니다.


화보 2014 영월 가을문화산책·제9차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정기총회

2014 영월 가을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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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장릉에서 단종역사관에서 박철원 회장 내외 조선민화박물관 관람 김삿갓 묘 앞에서 공상진 회원과 김유항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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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7일(금) 강원도 영월_ 장릉 조선민화박물관, 김삿갓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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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영월 장릉 단종역사관에서 박철원 회장, 주기영, 김유항, 주동설 회원 04 선희주 님과 민찬홍 회원 06 민재원 선생과 김길수 회원 08 김삿갓문학관 앞에서


제9차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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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를 선언하는 박철원 회장 감사보고를 하는 김종성 감사 노정익 이사의 조병화 시인의 시 ‘분수’ 낭송 정기총회 후 ‘편운과 시영의 집’에서 다과회를 하며

2015년 3월 13일(금) 서울 혜화동자치회관 혜화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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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총회 사회자 김종회 이사 조진형 이사의 2014년 성과 보고 이재후 이사의 조병화 시인의 시 ‘나무’ 낭송 축배를 하는 회원님들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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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제12회 조병화시축제·제25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제12회 조병화시축제

01 꿈나무 시낭송대회 금상 비룡초 양승환 어린이 가족과 김용정 조병화문학관 대표 03 조병화 휘호전 개막식 테이프 컷팅 05 ‘조병화 휘호와 한시의 멋’ 강연을 하는 조교환 한국한시협회 상임이사 07 안성 시 읽는 날_ 안성문협 김순희 수필분과장의 시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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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2일(금, 토) 안성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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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퀴즈대잔치에서 정답을 외치는 어린이들 조병화 휘호전 제1전시실 편운 시 백일장 수상자들, 심사위원들과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톡톡플러스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의 댄스공연


제25회 편운문학상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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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일(토) 안성 조병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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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김종회 심사위원장의 심사보고 시상식 사회 김삼주 교수 04 평론부문 수상자 정과리 교수와 조진형 조병화문학관 관장 시부문 수상자 곽효환 시인 가족과 박철원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장 06 김학용 안성시 국회의원의 축사 축사를 하는 주일우 문학과지성사 대표 08 난실리 노인회 조우형 총무와 김지만 감사 축하 시낭송 _ 강용은, 박성은 낭송가 이재복 교수, 김종회 교수, 곽효환 시인, 정과리 교수, 허형만 시인, 김광규 시인, 조진형 관장, 김용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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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의 시와 그림 산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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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향기 가장 아름다운 시가 노래가 됩니다 나태주

가장 아름다운 시가 노래가 됩니다 _나 태 주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언어입니다. 언어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 소 인간다워지고 문화와 문명은 발전합니다. 민족의 존재이유나 성립 또한 고유한 언어의 유 무에 달렸으며 특히, 고유한 문자를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하여 그 민족이나 국가의 자 존의 근원이 됩니다. 다행히 우리 한민족에게는 일찍이 조상 대대로 사용해오던 아름다운 한국어가 있어왔고 세 종임금에 의해 창제된 매우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한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문화민족임 을 이런 데서 입증하는 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언어로 표현되는 문학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르는 시입니다. 소설 이 사건에 바탕하고 수필이 생각에 근원을 대며 평론이 논리에 의지한다면 시는 어디까지나 인간 감정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이 가운데 시만을 운문이라고 하고 여타는 산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시가 여타 문학의 질 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시는 아담하고 짧은 문장 안에 감정을 형상화하여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시는 외형적이든 내면적이든 리듬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산문형 식의 시를 선호하고 파괴적인 이미지를 구사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시의 속성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흔히 나는 말하곤 합니다. ‘산문이 100명에게 한 번씩 읽히는 문장이라면 시는 한 사람에게 100번씩 읽히는 문장이다. 뿐더러 산문은 그 작가가 살아있는 동안만 생명을 유지하는데 비하 여 시는 시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남아 시인 없는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시의 강점이요 특별하고 훌륭한 점입니다. 시야말로 인간 정신의 표현 이고 영혼의 드러남입니다.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가 있다는 것이요 시가 있다 는 것은 또 영혼이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실로 시는 영혼의 황금덩이와 같은 그 무엇입니다. 시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좋은 시가 노래가 됩니다. 노래가 되면 시는 날개를 답니다. 날개를 달고 멀리 멀리 날아갑니다. 때로는 언어의 장벽까지 넘어서 멀리로 가서 알지 못할 사람들의 위로가 되고 그 사람의 가슴에 꽃다 발이 되어 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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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노래가 된다는 것은 시인에게도 아름다운 축복이요 또다시 감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인들은 작곡가나 음악연주가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실 상 유명한 시인들은 보다 많은 시가 작곡되어 노래 불리고 있는 시인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 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소월 시인입니다. 시가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선 시어가 아름답 고 형식이 단아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의 내용이 인간의 근본적인 정서에 맞닿아 있어서 감동 의 폭이 넓고 오래 가야 합니다. 또 약간의 외재율이나 내재율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경우 60편 가까운 시가 작곡되어 노래로 불려지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 시 인으로서 이는 행운에 가까운 일입니다. 특히 대전케이비에스 동요 캠프에 참여하여 어린이 들과 함께 시를 쓰고, 그 시를 다듬어 작곡가들에게 의뢰, 노래로 만들어 함께 노래 불러본 것 은 생애 참 아름다운 추억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쩌면 그 때 캠프에 참여하여 함께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의 노 래를 불러본 어린이들은 평생 동안 그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 그런 행사나 기획이 드문 것은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청소년의 정서 순화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기획과 사업은 계속되어야 하고 진흥되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내가 오랜 세월 초등학교 선생을 한 사람인데 초등학교 교실에서 오르간이 사라지고 피아 노가 자주 활용되지 않음은 매우 섭섭한 일입니다. 오르간이나 피아노 자리를 오디오세트가 대신하고 있는 실정을 봅니다. 이는 매우 염려스러운 사태입니다. 필히 반성하여 고쳐야 할 일 입니다. 그리고 방송매체에서 동요 프로그램이 약화되고 동요행사가 드문 점도 걱정스럽고 개탄 스런 일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대중적인 인기에 현혹되어서 그렇습 니다. 대중매체에서 동요를 다룸은 하나의 의무이며 교육이며 미래에의 투자입니다. 이 점을 요소 요소 중요한 부서에 계신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지적인 요소보 다 정서적인 요소입니다. 우리에게 행불행을 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 있음을 봅니다. 앵그리 버드란 장난감이 있지만 앵그리 보이 가 문제이고 앵그리 맘이 문제입니다. 이를 다스리고 치료하고 안내하는 방법은 오직 노래 밖 에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시인들도 노래로 작곡되기 알맞은 시를 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길이 시를 살리는 길이 고 인간을 돕는 길이고 시가 또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우리들의 오늘날 울화와 불행감과 열등 감을 아름다운 노래가 근본적으로 치유해줄 것으로 믿어집니다. 마땅히 시인들이 분발하고 작곡가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노래 부르는 분들, 학교 선생님들 이 또 좋은 생각을 가지면서 동참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이 문제야말로 공통의 문제요 함께 풀어야 할 난제라고 여겨집니다.

나태주 시인, 1945년 충남 서천 출생.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대숲 아래서』에서 『한들한들』 까지 36권 발행, 산문집 『날마다 이 세상 첫날처럼』, 『꿈꾸는 시인』 외 여러 권, 46년 동안 교직생활 하다가 정년, 현재 공주문 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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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육성을 듣다 허형만 시인 편ㆍ최영규

대담 _ 최 영 규

허형만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월간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후 시집 『가벼운 빗방울』 『그늘이라는 말』 『불타는 얼음』 『영혼의 눈』 등 15권과 활판시선집 『그늘』, 중국어시집 『許炯萬詩賞析』, 일본어시집 『耳を葬る』. 평론집 『영랑 김윤식연구』 등 다수.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편운문학상, 한국예술상, 펜문학상 등 수상.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교수. 2015


최영규(이하 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최근에 15번째 시집

모셔 운영을 해왔는데요, 문병란, 송수권, 나희덕, 정일근, 이

을 내셨는데요, 제목이 『가벼운 빗방울』입니다. 소감은 어떠

재무 시인 등 여러 좋은 시인들을 종종 초청해서 강연을 들

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었지요.

허형만(이하 허) 제가 1945년생 해방둥이여서 올해로칠순

입니다. 칠순을 기념해서 작가세계사에서 특별히 출판이 되

최 송수권 시인, 강인한 시인은 선생님과 <목요시 동인>을

비롯해 아주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었습니다. 그동안 14권 시집의 연장선상에서 제 나름대로 작

허 그렇습니다. 1979년, 그 시절에는 문예지가 활발히 활

품세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작품을 쓸 것인

동하던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군사독재시절이었기 때문에 대

가에 대해 스스로 다짐하는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분이 무크지 형태로 나올 때였습니다. 대구의 <자유시>, 부

최 대학에서 정년퇴임하신지 오래 되셨습니다. 그동안 어

떻게 지내셨는지요. 허 제가 2012년 2월, 30년간 봉직했던 대학에서 정년퇴임

을 하면서 앞으로 내 삶을 어떻게 써 나가야되고 정리해야 될

산의 <반시>, 광주에서는 호남을 대표해서 <목요시>, 이런 식 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몇몇의 동인지들이 있었습니다. 최 동인활동을 같이 하셨던 분들을 꼽아보자면 누가 계

실까요?

것인가를 생각하던 차에, 40여 년 동안 모아놓았던 장서 1만

허 강인한 시인, 고정희 시인, 김준태 시인, 김종 시인, 송

3천여 권을 제 고향 전남 순천시에 기증했습니다. 지금 순천

수권 시인과 국효문 시인, 그리고 장효문 시인 등이 있었지요.

삼산도서관 1층의 벽면을 빙 둘러 <시인 허형만관>이라는 명

최 말씀하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시

칭으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시집뿐만 아니라 수필, 소설, 아동

인으로써의 격과 위상, 노력과 성과를 유지해 오셨다 생각이

문학 등 여러 연구서를 비롯한 창작집들이 있기 때문에 문학

됩니다. 제가 대학시절부터 팬으로써 좋아했던 선생님들이

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

었습니다. 1979년도에 첫 동인지를 내시게 되었는데, 바로 뒤

습니다. 또 조충훈 시장님의 배려로 도서관 3층에 제 창작실

에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겪으시

을 만들어주셔서 매주 화요일 고향에 내려가 작품도 쓰고, 재

게 되지요?

능기부 형태로 순천시인학교를 3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

허 그렇습니다. 직접 현장에서 겪었습니다. 저는 광주 숭

강생은 30명 정도입니다. 그중 5명은 등단을 했지요. 그리고

일고등학교에서 10년간 국어교사를 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틈나면 지리산에 계시는 어머니를 찾아뵙습니다. 올해 어머

나와서 잠시 대성학원의 강사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니께서는 아흔 다섯이십니다. 효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죠. 전화도 끊기고 상황이 급

아니지만 자주 어머니께 문안드리고 있습니다.

변하게 돌아가는 속에서 서로 만나기도 쉽지 않고, 그렇게 버

최 선생님께서 시인을 만드신 거군요. 저도 문학 아카데미

에서 3년을 공부했는데, 혼자 애를 써도 시를 가이드해주는

티다가 1981년에 어떤 인연이 닿아서 목포로 내려가게 되었 습니다.

분이 어떤 분이냐에 따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가가 크게 영

최 제가 굳이 5.18에 대해 여쭈어 보는 이유는 동인을 함

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좋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할까

께 하셨던 선생님들의 시를 읽어보면 지금까지도 시의 서정

요. 그런 의미에서 아까 말씀하신 순천시인학교 학생들은 정

성을 잃지 않으면서 묵직하게 전달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

말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입니다.

전에 <목포현대시연구소>를 운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저도 그렇고 우리 동인들도 다 그렇습니다만 현실을 무

허 제가 <목포현대시연구소>를 만들고 2~3년 정도 열심

시하는 서정은 전혀 인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직접 몸

히, 매 주마다 전국의 좋은 시인들을 초청하여 강연도 듣고,

으로 겪고 현실과 서정이 함께 잘 녹아든 작품을 쓰려고 했었

지도를 하여 좋은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습니다.

지요. 광주민주화운동을 온몸으로 겪고 나서 소위 말해 뜬 시

최 그때 함께 하셨던 시인들을 꼽으신다면 어떤 선생님들

이 계실지요? 허 강의는 제가 하고 우리 대학의 김선태 시인을 교장으로

인들은 아무래도 현실성이 강한 쪽으로 치우쳤던 사람들이지 만, 우리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문학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도 현실성이 녹아들어가 서정성과 같이 융합되는 그러한 작 13 + 14


시인의 육성을 듣다 허형만 시인 편ㆍ최영규

품을 쓰자고 서로 다짐을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

로 들어오는 것이지요. 저는 한 번도 제가 시를 잘 쓴다고 생

지 시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노력하고 명상한 결과로 보이는 것

최 마지막 동인지를 내신지가 언제신가요? 허 1986년 10월에 제6집을 냈습니다. 그 후 서로 각자의

길을 갔지요.

이 첫 번째 신비입니다. 두 번째는 ‘만남의 신비’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 은사님이 사셨던 혜화동에 와서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창밖을 보면

최 유성호 교수가 선생님에 대해 ‘시로써의 방법과 할 이

빨간 넝쿨 제라늄이 피어있지요?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다른

야기들을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생활에 연관

이유에서이지 넝쿨 제라늄을 보러 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되어 있는 것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능력과 필력이 있다’고

의도치 않게 넝쿨 제라늄을 만났다는 것. 이런 만남은 하나의

평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유 교수의 평론을 보신

신비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우리가 사람이든 세계든 서로 만

적이 있으신가요?

난다는 것은 제 안의 모든 것을 준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

허 네, 몇 차례 봤습니다. 그분이 제 작품에 대해 쓴 어떤

니다. 그러기에 저의 ‘만남의 신비’는 시적 대상들에게 온전히

글에서 저를 ‘한국 서정의 적자(嫡子)’라고 평한 것을 본 기

나를 다 주고, 시적 대상들은 내 시 속으로 들어와서 나와 함

억이 납니다. 저의 시가 서정의 순수성에만 기운 것이 아니

께 숨 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 삶의 이야기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 을 언어로써 작품 속에 녹이는 면 때문에 그런 평을 받은 것

최 세 번째 ‘은총과 자비의 신비’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

니다.

이 아닌가, 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운 좋게도 이

허 은총과 자비라는 것은 제가 평생 살아오면서 느낀, 매일

번 열다섯 번째 시집 『가벼운 빗방울』도 유 교수께서 해설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존재가 모든 것과 우리를 돌봐주

해주셨습니다.

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최 선생님께서는 시를 쓰실 때 ‘세 가지의 신비’에 대해 생

최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오만하거나 건방진 것

각을 하고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한 것인지 말씀을 부탁

이 아니라 누군가가, 종교의 신이 되었든 우주가 되었든 나를

드립니다.

자비심으로 보살펴 주고 있다는 겸허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허 제가 ‘세 가지의 신비’를 느낀 것은 사실 최근 나이가 들

선생님의 세 가지 신비 중 앞의 두 신비는 시가 있게 하는 삶

면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첫째로 ‘빛과 소리의 신비’, 둘째는

의 특별한 부분을 말씀하신 것 같고 마지막은 선생님의 겸손

‘만남의 신비’, 셋째는 ‘은총과 자비의 신비’입니다.

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시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 저는 제자들과 이야기 할 때, “어떤 시가 좋은 시입니

보는 것은 빛이고 듣는 것은 소리입니다. 저는 늘 시적 대상을

까?” 라는 질문을 많이 듣습니다. 저는 좋은 시의 반대 개념의

놓고 작품으로 쓰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쓰는 것이 아니라 보

‘나쁜 시’란 것은 없지만, 우주만물 앞에 겸손한 시인의 시가

이지 않는 것도 봐야하고, 귀에 들리는 것만 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라고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땅바닥의 봄 까치꽃 하나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를 보고 시를 쓸 때, 꼿꼿이 서서 나는 인간이고 대상인 꽃은

렇게 작품을 쓰려고 집중하니까 그 신비로움이 제 작품 속으

한낱 미물이라는 태도로 접근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없습니다.

2015


좋은 시라는 것은 내가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릴

안으로 모시는 예식입니다. LA에 초청강연을 갔을 때의 일입

수 있다면 최대한 엎드려서 땅바닥에 피어있는 꽃과 가까이

니다. 저는 아무리 피곤해도 주일 예배는 거르지 않아 호텔 옆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시적 대상들

에 있는 성당을 갔습니다. 그날 영성체와 포도주를 나눠주었

이 제게 와줘서 시가 된다고 믿습니다.

습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데, 저는 그것을

최 말하자면 동등하게 똑같은 가치와 위치, 입장에서 대상

을 봐야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마시며 감격했습니다. 단순히 포도주가 아니라 진짜 그리스 도의 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늘 경외감과 축복

허 그렇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마음으로 쓴 시는

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

좋은 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시적 대

습니다. 질문하신 저의 신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우선 첫 번

상을 작품으로 쓰면 언어적 명상과 삶의 명상이 잘 어우러진

째로 경외감을 갖고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

다고 생각합니다.

자는 것입니다.

최 선생님의 시를 읽어보면, 쉽고 강렬하지만 다시 한 번

최 선생님이 경외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제가 작년에 히말

찬찬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간결하고 선명한 소재들이 많지

라야를 등반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빙하의 굽이를 돌아섰을

만, 가만히 보면 그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을 느낄 수 있습니

때 하늘을 가린 거대한 산을 보았습니다. 순간 수만 가지 생

다. 좋은 시라는 것은 결국 겸손한 자세의 시라는 말씀을 들었

각이 들면서 첫째로 느꼈던 것은 내가 저런 산을 함부로 오를

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갖고 계신 문학적인 신조와 인생관에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하길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쩌면 조물주께서 만든 창조물들 중에서 산이 으뜸에 들어

허 아까 세 가지의 신비를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실 신비라

가겠구나, 이것이 바로 경외감일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는 것은 논리적이거나 이성으로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이 무어

허 그래서 제가 산악인들을 존경합니다.

라고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저는 삶이나 문학

최 사실 몹시 부끄러운 마음이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

에 있어서 늘 경외감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물 한잔도 내가

어보니 저는 그런 거대한 대상을 만나고 나서야 그런 마음을

경외감으로 감사하게 마시면 제 몸으로 들어와서 저를 건강

느꼈는데, 평소에 생활하시며 모든 것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게 해줍니다. 교인들이 주일마다 받는 영성체는 주님을 내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에 감탄을 합니다. 15 + 16


시인의 육성을 듣다 허형만 시인 편ㆍ최영규

허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와서 그 대상들이 시가 되어주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존중해주지 않

씩 찾는 것이 제 일과입니다. 갈 때마다 그곳이 늘 새롭습니 다. 아침과 점심이 다르고 또 저녁이 다르지요.

으면 대화가 안 되는데, 하물며 시가 되어줄 대상을 무시하고

최 또 선생님께선 편운문학상을 수상하셨고 조병화 선생

존경하지 않으면 절대 시가 되지 않지요. 특히 제가 만나는 모

님의 제자이십니다. 조병화 선생님과는 어떤 인연이셨는지

든 분들은 다 천사라고 믿습니다. 물론 제 세례명이 가브리엘

요.

이기도 하니까요.

허 저는 1965년도에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

두 번째 제 신조는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입니

교 국문과에 입학했습니다. <현대시론> 시간에 조병화 선생

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중 「비상」이라는 시 속에 나오는 구절

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처음에 선생님께서 중앙대학교 시

입니다. 제가 1980년대 초 이 구절을 처음 읽고 얼마나 마음

전임 교수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원래 경희대 교수신데

에 와 닿았는지, 앞으로 내 삶은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다

중앙대로 강의를 나오시던 것이었죠. 저는 시인이 되고자 하

짐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

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매주 하숙방에서 작품을 써 수업시

지 계속 시집을 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라도 손에서 책

간이 끝나면 복도로 선생님을 따라가 시를 보여드렸지요. “선

을 놓으면 안 되고, 잠시라도 기도를 멈추면 안 된다 이렇게

생님, 제가 작품을 썼습니다.”라고 하면 선생님께선 “따라와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 하시곤 저를 교수 휴게실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때 겁도 없

최 끊임없이 날갯짓하라는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또 저는

이 교수휴게실을 처음 가봤습니다. 선생님께서 커피를 사주

선생님의 책 중에서 ‘통변’이라는 단어를 봤습니다. 이것은 어

셨습니다. 제 시를 죽 봐주시곤, “또 써와라” 하셨습니다. “네

떤 생각을 가지고 하신 말씀이신지요.

알겠습니다.” 하고 신나서 일주일 동안 또 열심히 써서 가지고

허 유협은 『문심조룡』의 「통변」에서 “문사와 기력은 변해

가면, 다시 읽어주시고, 그 일을 수없이 반복했어요. 선생님께

야만 오래 갈 수 있다.” 그리고 “통변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으

서는 여기는 이렇게 고쳐라 저렇게 해야 좋다 이런 말씀이 하

니 반드시 새 목소리를 참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주

나도 없으셨어요. 계속 또 써오라고만 하셨습니다.

역』에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통하면 오래 간다.”라

최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셨네요.

했습니다. 시인에게는 이 말씀들이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

허 그러더니 언제 한 번은 “점심 먹으러 가자” 그러시는 거

니 어떠한 사물 하나를 봐도 보는 각도와 방향과 색채에 따라

에요. 그때 속으로 희망이 생겼어요. 아, 나도 이제 작품을 좀

다 다르기 마련이고, 다른 것에 대해 고정관념에 매여있지 말

쓸 수 있는가보다, 라는. 그러고 선생님을 따라 시내로 나섰습

자는 말입니다. 어제 본 꽃을 오늘 보면 새롭고 또 다른 것을

니다. 그때 흑석동에서만 있었는데 시내가 어딘지도 잘 몰랐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성남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살고

었던 때지요. 선생님께선 식사를 사주셨습니다.

있는 아파트 뒤에 산이 있는데, 그 숲을 하루에 최소한 한 번 2015

최 그때 어떤 얘기는 안 해주셨나요?


허 안하셨습니다. 선생님 성격이 워낙

담백하셨어요. 제가 선생님을 모시면서 느꼈던 것은 다른 것은 너그러우시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시다는 것 입니다. 지각을 한 제자들은 아주 혼쭐이 났었지요. 최 그래도 선생님께선 제자들에게 캐

리커쳐도 그려주시고, 잘 챙겨주셨지요? 허 1979년 9월에 선생님께서 광주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 제게 캐리커 쳐를 그려주셨는데 제가 얼마나 감격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잘 간직하고 있 다가 1984년도에 두 번째 시집 『풀잎이 하나님에게』를 낼 때 시집 표지 뒤 내지에 실었지요. 또 선생님은 제게 늘 이런 말

만, 아직도 저는 선생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최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나 어떤 방향으로 글

을 써 나가시겠다는 말씀 부탁드립니다.

씀을 하셨어요. “좋은 시 써라, 너는 좋은 시인이 될 거다.” 그

허 제가 앞으로 얼마나 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2~3

때는 좋은 시가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열심히 썼었지요. 선생

년에 한 번씩은 내 시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

님께서 정년퇴임을 하시며 기념으로 『조병화의 문학세계』라

고 있습니다. 참된 시는 시류에 좇지 않고 아류에 빠지지 않

는 평론집을 단행본으로 묶게 되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저

는 자기만의 개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목소리, 나

에게 열일곱 번째 시집의 해설을 써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

의 감각을 더 심화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

서 『내 고향 먼 곳에』라는 시집의 해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는 세상과의 소통, 사람으로서의 소통을 계속 해나가고 싶다

저는 선생님을 기억하면 항상 만면에 웃음을 띠셨던 모습이

는 것입니다.

떠오릅니다.

최 목표와 의욕을 가진다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는

최 조병화 선생님을 만나신 것이, 아까 말씀하신 세 가지

원천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문진이 중요하다고 합니

신비 중 ‘만남의 신비’에 해당이 되겠군요. 저는 행사 때만 가

다. 그것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그 생각을 말과 소리로

끔씩 조병화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직접 강의를 들으셨고 선

드러내고 다시 자기가 듣는 과정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

생님께 작품을 보여주실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다. 언제까지 사느냐, 이런 생각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선

허 큰 은총이었지요. 선생님께서 저를 예뻐하시니까, 주변

생님 시 세계의 좀 더 심오한 부분까지 도달하려고 노력하시

친구들에게 굉장히 부러움을 샀습니다. 조병화 선생님의 수

겠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시고 오

제자라고. 그러나 사실 저는 수제자라 불릴 만큼 선생님께 잘

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해드린 게 거의 없었습니다. 늘 받기만 했지요. 그런 마음으로

허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는데, 몸보신 하려고 소뼈를 오

쓴 「그리움」이라는 시를 여기 『꿈』지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래 고지 않습니까. 그리고 떠 있는 기름을 걷어내고 맑은 국물

지금도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참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이

을 먹듯이 기름을 걷어낸, 그러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쓴 「혜화동」이라는 작 품도 있습니다. 지금 인터뷰를 위해 선생님 댁에 와 있습니다

최 선생님의 맑은 시 앞으로도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긴 시간동안 인터뷰 감사합니다.

최영규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6인 합동시집』, 『아침시집』, 『나를 오른다』, 한국시문학상, 경기문학상, 바움작품상 수상. <시천지 동 인>, <서사시문학 동인>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감사, 세인메디팜(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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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죽음’의 시적 변용 김대규

‘죽음’의 시적 변용 —‘조병화론’ 서설(序說) _김 대 규

Ⅰ. 조병화 시의 특성들 시인론이 한 시인의 시적 특성에 대한 고찰인 점을 환기해볼 때, 조병화론은 여타 시인들에 비 해 그 논급의 대상들이 다양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편수가 세계시사상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량 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조병화는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으로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2003)까지, 총 53권의 개인시집을 간행했다. 햇수로 54 년간의 소작이니, 1 년에 한 권씩 간행한 셈이다. 그 자체만으로 도 특기 사항이 아닐까. (※제53 유고시집 『넘을 수 없는 세월』은 2005 년도에 출간되었지만, 작품 들은 당연히 생존시에 쓰여진 것이다.) 이렇듯 고찰 대상의 작품들이 다량이기에 거기에 내포된 시적 특성들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 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조병화 시의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다. (「월간문학」,2011, 11 월호 참조.) 첫째, 시어의 일상용어성 둘째, 서술의 평이성 셋째, 수사의 반복성 넷째, 구문의 대화성 다섯째, 메시지의 자전성 여섯째, 독자층의 대중성 일곱째, 테마의 다양성 위 사항들은 다소간의 중첩성은 있지만, 이를 한 마디로 통합시킨다면 ‘쉬운 시’ 라고 할 수 있 다. 대부분의 시들이 일상 생활용어를 시어로 삼고 있기 때문에 ‘쉬운 시’ 가 되고, 시행들의 전개 역시 평이한 서술성을 지니고 있기에 ‘쉬운 시’ 이고, 어려운 수사법이 없는 어휘·시행·시련(詩 聯)이 반복·강조되기에 ‘쉬운 시’가 되고, 구문들이 대화나 독백의 육성을 들려 주는 듯 하기에 ‘쉬운 시’ 이고, 시의 내용에 회고적인 자전성이 들어나 있기에 ‘쉬운 시’ 로 읽히며, 이런 특성들로 해서 가장 넓고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조병화가 한국 현대시의 저변확대와 기반조성에 독보적으로 끼친 영향력 을 평가해 마땅할 것으로 여겨진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소월의 국민적 시인의 위상을 편운에게 서 재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월이 자연적·전원적인 사랑의 시인이었다면, 편운은 도시적· 인간적인 사랑의 시인이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의 ‘테마의 다양성’ 역시 그렇다. 사랑, 고독, 작별, 여행, 어머니, 꿈, 추억, 그리 2015


고 삶과 죽음이라는 다양한 테마들이 위에서 열거한 ‘쉬운 시’ 의 방법들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쉬운 시’ 라는 점에 대하여 한 가지 사항을 주서(朱書)하고자 한다, 먼저 ‘쉬운 글 쓰기’ 에 대한 유명 문인들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 쉽게 읽히는 책은 몹시 쓰기 어렵다. (나다니엘 호손) • 분명한 문장을 쓰는 사람에겐 독자가 모이고, 불분명한 문장을 쓰는 사람에겐 평론가가 모 인다. (까뮈) • 내 문장이 독자가 읽기에 쉬웠다면, 글 쓰는 나는 갑절로 어려웠던 것이다. (박완서) • 글쓰기에 있어 진정한 쉬움은 우연이 아니라 기술에서 비롯한다. 춤을 배운 이들이 가장 쉽 게 움직이듯이. (알렉산더 포프) • 즉석에서 생각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각고의 문장이 다 헛되리. (예이츠) 마치 소월이나 편운의 시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편운의 평소 “나는 퇴고를 하지 않는다.” 는 말을 상기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한가지 더 첨언하겠다. ‘쉽다’는 것은 표현방법의 얘기이지, 표현내용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다. 조병화는 전술한 바의 평상적인 주제들을 ‘쉬운 시’로 써냈지만, 그 표현된 그 주제들의 인생론 적·철학적 깊이와 높이의 차원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이 소론의 부제를 「‘조병화론’ 서설」이라고 한 것은, 조병화가 다른 시인들에 비해 위에 서 열거한 바와 같이 많은 고찰항목들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기 위함이고, 필자는 그 가운데에서 「죽음의 시적 변용」에 대한 테마를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바로 그 주제에 대해서 서술해 보겠다.

Ⅱ. 죽음의 변용·1 : ‘헤어짐’ 이 소론은 앞에서 전제했듯 조병화 시의 다양한 테마 가운데서도 ‘죽음’이 가장 본원적인 주제 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사실 죽음은 조병화의 시에서만이 아니라, 만인의 인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조병화의 시에는 죽음이 산재되어 있다. ‘죽음’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어(禁忌語)이기도 하지만, 조병화의 시에서는 몇 가지 시적 변용의 유형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첫걸음은 ‘헤어짐’, 곧 작별의식이다. 그것은 만나는 자는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 定離)’의 시학이다.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 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크의 여인처럼/푸른 눈 긴 다리/ 안 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 새 이곳/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 「오산인터체인지」 전문

이러한 작별은 한시적인 헤어짐일 경우가 많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작별은 다소간의 아쉬움만 을 남긴다. 19+ 20


조병화론 ‘죽음’의 시적 변용 김대규

그러나 재상봉의 기약이 없는 헤어짐도 있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인사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하루만의 위안」)는 망각의 작별이 그것이다. “인사 없이 헤어진”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더라도,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 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와 같은 인간적인 헤어짐의 체험들을 통해 우리는 인생과의 작별을 예습하게 된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 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리니/ 인생이 그러하거 니와/ 세상에 와서 할 일은/ ‘떠나는 일’ 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 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 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전문

이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는 조병화의 대표시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시는 ‘헤어짐’이 죽음의 시적 변용의 주요 모티브라는 점을 입론(立論)케 해 준다. 작품은 사람과의 헤어짐을 노래하는 전반부와 인생과의 작별을 고하게 되는 후반부로 구성되 어 있다. 여기서 유의하게 되는 시적 변용의 새로운 화두가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헤어짐과 작별이 ‘떠남’이라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연계되고 있다는 것이다.

Ⅲ. 죽음의 변용·2 : ‘떠남’ ‘떠난다’라는 말은 그 자체가 죽음의 완곡어법이기도 하다. ‘떠남’은 헤어짐·작별의 행동화다. 조병화는 작별을 하는 절차, 작별을 하는 방법, 작별을 하는 말을 배움으로써 ‘떠나는 연습’을 하자 고 한다. 떠남은 죽음의 현장답사적인 예행연습이 된다. 이에는 인생을 ‘인간들의 옛집’, 곧 ‘가숙 (假宿)’으로 여기는 의식이 깔려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가는 날/그렇게 가겠지/나를 잃는 예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 「서울로 띄우는 편지」에서

인생을 알려면 집을 떠나야 한다/집을 떠나는 자만이 길을 안다/존재와 부재, 이 假宿의 자 리/아, 얼마나 많은 길을 떠났던가 - 「1969년의 memo」에서

떠남은 이 세상에서 ‘나’를 잃는 예습이다. 존재에서 부재로, 가숙에서 ‘원숙(原宿)’으로 이동하 는 것이다. 그 떠남의 심상은 ‘여행’의 개념으로 이어지고, 또 여행은 ‘나그네 의식’을 낳게 된다. 2015


떠나는 거다./ 떠나는 계속 속에서 사는 거다. /살다가 아주 떠나는 거다. - 「Airport」전문

인생(人生)이여/석양(夕陽)의 공항(空港)이여 - 「여창(旅窓)」에서

생각을 해보면/나의 인생은 갈망과 부정/그리고 오해와 도피를 위한 일체의 소모/호주머니 에 남은 외화(外貨)처럼 허전한 나그네 - 「홍콩」에서

길을 가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하던가/나그네에겐 굳은 인내심이 있어야 하려니/끝끝내 굳은 인내심이 있어야 하려니/길을 다 할 땐 더욱 인내심이 있어야 하려니//길을 가지 않고서야 어 찌 그것을 알리//아, 인생 또한 먼 나그넷길인 것을. - 「나그네」 전문

‘공항’은 떠남의 명당이고, ‘차창’은 떠남의 알리바이의 확인소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여행은 반 드시 집으로 돌아오는 귀로가 있지만, 인생여행은 서글프게도 편도뿐이다. 때문에 과객(過客)으 로서의 나그네의식이 강화된다. 자신의 호가 ‘편운(片雲)’이듯, 그의 작품에는 “너는 발이 없구 나.” (「구름」), “소망은 오로지 관용과 망각/쓸쓸한 포기/구름을 배운다” (「때때로 돌아와」), “바람 이 집이 없듯이/구름이 거처가 없듯이/나는 바람에 밀려가는/집 없는 구름이옵니다//나뭇가지에 간혹 의지한다 해도/바람이 불면/작별을 해야 할 덧없는 구름이올시다.” (「나의 존재」)와 같은 떠 돎이 삶인 ‘구름 시’가 많다. 조병화의 여행시의 마무리는 작별의 시인답다. 그는 “각각 각자들이 사들인 차표만큼/그곳을 찾아가겠지만/나는 다음 역이던가, 그 다음 역이던가/낯설은 그곳까지 가는 차표이어서/지금 이 렇게 서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에 흔들리며」)라고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이제부턴 나를 찾거 든/없다고만 해라// “어딜 갔느냐” 묻거든/ “그저 멀리 갔다”라고만 해라// “언제 돌아오느냐” 묻 거든/ “그저 모른다”라고만 해라// “그저 멀리 갔다”라고만 해라」(「먼 여행」)라는 당부를 남긴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시를 통해서 그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나의 차례입니다 자그마한 그곳에 내려 주십시오 - 「여종(旅終)」전문

그렇다. 조병화는 인생여행을 마치고 ‘자그마한 그곳’으로 갔다. 또 그렇다면 그 ‘자그마한 그 곳’은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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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론 ‘죽음’의 시적 변용 김대규

Ⅳ. 죽음의 변용·3 : ‘어머니’ 조병화가 인생여행의 마지막 열차에서 내린 ‘자그마한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안내인이 필 요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괴테의 불세출의 명작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을 상기해 보게 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인도한다.” 조병화의‘ 영원한 여성상’은 단연코 <어머니>다. 그의 제10시집 『낮은 목소리로』(1962)의 81편 은 오로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헌시다. 결론에 이르기 전에 우선 본고의 주제와 결부되는 시행 들을 예시해 보겠다.

•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지하 5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어머니께 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쓸쓸히/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죽음으로의 직행을」) • 아직 남아 있는 눈물/당신이 주신 눈물 다 쓰거든 가겠습니다. (「당신의 주신 눈물 다 쓰곤」) • 나 먼저 간다/얘, / 잠깐이다/구순히 지내다 오너라 (「1962년, 음력 6월 3일」) • 이승인지 저승인지 아득한/안개같은 먼 강나루 어디쯤에서/나를 부르시는 어머님 목소리/ 나는 그곳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입원일기」) • 그 길은 더 짙은 안개이려니/그 길은 더 무인지경이려니/ 그 길은 더 혼자이려니/그 길은 더 끝이 없으려니/끝 있는 곳에 어머님이 계시려니//아, 이 믿음이 내 인내이려니 (「그 길은」) • 어머님이 주신 노자로 고맙게 이곳까지/참으로 오래 왔다, 후회없이 (「차에 흔들리며」)

조병화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일반성을 초월한다. 그는 인생여행의 ‘끝’에 어머니가 틀림없이 있다고 ‘믿는다.’ 믿음, 조병화는 “어머니는 나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성지향의 믿음에서 는 모태회귀욕구의 심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하니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자그마한 그곳’이 ‘어머니’가 아니고 어디일 수 있겠는가. 번거로운 예시들이나 해설의 췌언은 거둬들이고, 다음의 한 편만으로도 시인의 최후의 귀착지는 자명해진다.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꿈의 귀향」 전문

단 3행의 인생결산 보고서다. 영혼의 귀소본능, 이만한 사모곡이 또 있을까. 안성 난실리, 자신의 고향의 어머님 묘소 곁에서 잠들어 있는 시인은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죽음을 완성시킨 것이다.

Ⅴ. 영원한 테마 : ‘죽음’ 아! 풍만한 생명이여/존재(存在)에 취(醉)함에/부재(不在)로구나 - 「순례자」에서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네,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생각 하고 있는가?/네,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네, 죽음 2015


을 찾고 있습니다.//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네, 죽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 「밤의 이야기 1」에서

나의 테마는 죽음 나의 소재는 죽음 나의 노래는 죽음 - 「남남 47」에서

조병화는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시작생활의 초창기부터 죽음의식에 휩싸여 왔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가숙>과 <원숙>, <존재>와 <부재>의 부단한 화음이었다. 그는 「나의 습작기 시절」이라는 시에서 “시체를 보아라, 그 얼마나 엄숙한 휴식이며, 아름다운 해방이며, 위대 한 종식이냐!”고 회상의 노래를 한다. 그는 사실 일찌기 죽음을 완성시킨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나의 시는/나의 유서 - 「안녕하신지요」에서

절명시(絶命詩)같은 위의 싯귀도 별세 27년전인 1978 년도의 것이다. T·S·엘리엇도 “모든 시 는 하나의 묘비명”이라고 말했지만, 이는 누구보다도 조병화의 시에 최적의 말이다. 어머니가 종교였던 조병화에게 죽음은 기도서였던 것이다.

김대규 1942년 안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0년 시집 『靈의 流刑』으로 등단, 안양대 겸임교수, 경기도 문인협회 회장, 안양예총 지부장, 중부일보 논설위원 등 역임. 현 안양문인협회 회장. 흙의 문예상, 경기도 문화상, 편운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등 수상. 저서로 시집 『이 어둠 속에서의 지향』, 『흙의 사상』 등과 산문집 『시인의 편지 』,『 사랑의 팡세』 등, 평 론집 『무의식의 수사학』, 『해설은 발견이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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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시 부문ㆍ평론 부문

제25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시 부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사무실에 서 열린 제25회 편운문학상 본심 (2015. 3. 21)

낡은 새로움 곽효환의 시에서는 우리 시가 흔하게 보여주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나 새것 콤플렉스가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시는 이러한 새로움과는 거리를 둔 채 오래되고 낯선 영역을 주 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오래됨과 낯섦에는 왠지 모를 끌림이 있다. 이것은 생래적인 것일 수도 있고 또 오랫동안 학습된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더 적절한 것인지는 따져 봐야 하겠지만 여 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번 시집인 『슬픔의 뼈대』에서 뿐만 아니라 『지도에 없는 집』과 『인 디오 여인』에서 그 영역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누누이 이야기해 왔듯이 그곳은 ‘북 방’이다. 북방 혹은 북방 의식은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것은 가까이는 김동환, 강경애, 이 용악, 백석, 이육사, 윤동주, 안수길 등으로 이어지고 멀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 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상상의 원적지이다. 북방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색은 이런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하지만 그 탐색이 단순한 회고 의 형식이나 기억의 환기 정도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시의 형식은 물론 내용 면에서 낡은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위험성이 여기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그것은 독이 되기도 하고 또 약이 되기도 할 것이 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북방의 영역을 ‘지금, 여기’의 영역 속으로 끌고 들어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영역은 물론 이곳과 저곳, 현실과 환상, 자연과 문 명과 같은 공간의 영역까지를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영역의 겹침과 침투는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여기에서 그의 시의 새로움, 다시 말하면 낡은 새로움 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낡은 새로움이야말로 그의 시가 견지해야할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낡음으로 존재하는 시가 있듯이 낡은 새로움으로 존재하는 시가 있는 것이다. 그 의 북방 의식이 ‘지금, 여기’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시와 시쓰기의 탄생으로 이어진 다면 자연스럽게 그의 시의 지평은 열리게 될 것이다. 심사위원 : 김종회(장), 허형만, 송재학, 이재복(글)

2015


제25회 편운문학상 심사평 -평론 부문 비평다운 비평이 부재한 시대에 만난 행운 요즘 우리 평단은 평론가와 평론은 넘쳐나지만 문제적인 비평담론은 생산되지 않고 있다. 비평담론의 부재는 우리 문학의 도태와 역도태를 야기해 비평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확 산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평담론의 생산은 시대를 읽는 눈과 문학의 계보학적인 성찰 과 비평가의 자의식 등이 어울러졌을 때 가능하다. 요즘 우리 비평은 이러한 덕목을 간과한 채 지나치게 텍스트 그 자체의 미시적인 의미에 천착하거나 제도화된 강단 이론에서 익힌 개념 이나 틀에 문학 텍스트를 끼워 맞춘다거나 아니면 의미의 실체를 탈은폐하는데 자신의 공력 을 쏟아 붇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수사나 출판사의 브랜드로 자신의 비평을 포장하는데 불필 요하게 힘을 쏟아 붇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글들을 모아 비평집이라고 묶어내니 그것이 비평 으로서의 기능을 할 리가 만무하다. 비평다운 비평이 부재한 시대에 정과리의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를 만 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비평집 제목만 놓고 보면 이미 한물간 시대의 시와 시인에 대 한 회고와 헌사로 비칠 수 있다. 이것은 이념이나 체제와 같이 견고해 보이던 것이 한 순간에 훅 가버린 1980년대라는 시대가 지니는 속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급격한 소멸은 급격 한 생성을 불러오고 그 결과 1980년대를 이야기하는 것이 낡은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 비 평집에 대한 이런 선입견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비평집은 이러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리고 있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의 우리 사회 현실과의 관계에서 1980년대의 잠재성에 주목한다. 1990년대 이후가 결하고 있는 공적 지평 혹은 사회적 지평이 1980년대 문학의 지배 적 담론 속에 은폐되어 있으며, 이것을 ‘이해의 초월’이라는 명제의 잠재성의 차원에서 적극적 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1980년대 문학은 이 세대의 글쓰기의 무의식 적 실천 속에서 미래를 향하여 작동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1980년대가 1990년 대로부터 소외되고 분리된 시대가 아니라 길항하는 시대라는 해석은 1980년대 문학에 대한 해석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시대와 비평의 맥락과 비평가의 자의식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해 석이라는 데에 그 비평적 의미가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요구되는 비평 태도이 면서 동시에 비평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 : 김종회(장), 허형만, 송재학, 이재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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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시 부문 본상 곽효환

‘북방’으로 향하는 멀고 긴 여정

곽효환 ● 1967년 전주 출생. 건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문학박사.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을, 2002년 『시평』에 「수락산」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현재 대산문화재단 재직 중. 시집으로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등이 있으며 저서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등 다수. 고대신예문학상과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

고비를 건널 땐 고비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크고 작은 돌덩이와 마르고 거 친 흙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중국 북쪽 어디였는지 혹은 몽골 남쪽 어디였는지 고비 사막을 지날 때 들었던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길이든 고비에 접어들 때가 있고 고비를 넘어서야할 때가 있습 니다. 지난해 초 세 번째 시집 『슬픔의 뼈대』를 상재한 이후 내내 제 마음이 그랬습 니다. 어느 때는 고비에 접어든 것 같고 어느 때는 한 고비를 넘는 것 같고 또 어느 때는 고비는 고비인데 어느 고비에 있는지 좀체 가늠하기 어려운 고비사막 한 가운 데 놓여 있는 듯한. 그런 상황에서 편운문학상 수상 통지를 받았습니다. 문득 이번 수상이 고비 속에서 헤매는 고단한 여정 속에 있는 저에게 따뜻한 격려와 함께 고비 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나침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 시의 많은 부분은 아니 박사 논문까지 포함하면 제 문학의 많은 부분은 ‘북방 (北方)’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남쪽 전주 출생인 저에게 북방은 특정한 공간이나 방 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평론가의 말처럼 저에게 북방은 “차단된 삶의 여 로이고, 단절된 역사의 현장이며, 잊혀져가는 오래된 정감의 고향이자, 채울 수 없 는 결핍과 그리움의 진원지”와 같은 곳입니다.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와 바이칼, 그 리고 차마고도와 티베트 등지에 이르는 곳곳에서 저는 ‘길의 끝’ ‘북방의 시원’ ‘사 랑의 궁극’에 있는 무엇을 찾고 그것을 제 시에 실어 나르고 싶었습니다. 이 멀고 긴 여정에서 만난 사람과 사물과 풍경들 앞에서 저는 셀 수 없이 망설이고 주저하고 또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면서 내내 담담하고자 했고 때로는 그늘 깊은 지점에서 흐 느껴 울기도 했습니다. 오늘 비로소 그 길에서 만난 크고 작은 모든 것들에게 고마 웠다고 또 고맙다고 그래서 다시 이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정하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보잘 것 없는 제 작품들을 눈여겨 봐주시고 편운문 학상이라는 자리를 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격려해주신 선배, 동료 및 후배 문인들에게 무거운 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무 한한 인내심으로 제 문학의 길을 성원해 주는 가족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 고 싶습니다.

2015


제25회 편운문학상 수상소감 평론 부문 본상 정과리

포만 시대의 시와 비평의 역할

정과리 ● 1958년 대전 출생.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불문학 박사.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활동 시작. 충남대 불문과 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평론집으로 『문학, 존재의 변증법』, 『무덤 속의 마젤란』, 『네안데르탈인의 귀환』, 『들어라 청년들아』, 『1980년대의 북극꽃들아, 뿔고둥을 불어라』 등 다수. 팔봉비평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

고등학생 때 편운선생의 「의자」를 교과서에서 읽었습니다. ‘소년이로학난성(小 年易老學難成)’도 그 즈음에 배웠덧 탓인지, 저는 그 ‘묵은 의자’가 나를 비껴갈 것 만 같아 부르르 조바심치곤 했습니다. 아주 멋 훗날 그 시를 다시 읽었을 때 문득 깨 달았습니다. 이 의자는 모든 이가 비껴 갈 수밖에 없도록 거기 그렇게 놓여 있다는 것을.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과 “묵은 이 의자”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평행의 거리가 팽팽히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저 멀리에서 하 나로 만나는 듯한 착시를 유발하는 철길처럼, 그렇게 모호한 미래가 과거와 오늘 을 떠밀고 있다는 것을. 아마도 우리는 이 시를 문학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것 이 충만해야만 성이 차는 시절에 말입니다. 문학마저도 세상의 탱탱한 포만 위에 케 이크 위의 버찌처럼 앉아 있는 때입니다. 조간지는 아침을 “시로 열”고, 거리엔 오늘 의 시 한 구절이 휘날리며, 국회의원의 셔츠 포켓엔 시 한 수가 코팅되어 들어 있습 니다. 년전에는 많은 작가들이 포탈 사이트들에서 소설을 앞다투어 연재하는 횡재 를 만났고 그리고 이듬해 몰락했습니다. 이 호시절에 편운 선생의 시를 읽는 마음 은 이상의 「오감도」를 슬로우 모션으로 트는 것과 비슷합니다. 선생은 “돈이 피가 되고 / 피가 돈이 되는 세상”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 멍, 하 니 하늘로 뚫린 창문을 내다봅니다”(「피묻은 지폐」)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뚫 린 창문 너머를 응시한 채로 “일본이 제국주의로 판을 칠 때 / 나는 태어나, 가난 했고 // 한국이 대중주의로 판을 칠 때/ 나는 방황하며, 슬펐고 // 세계가 돈주의 로 판을 칠 때 / 나는 고독하며, 죽어 가고 있었”(「나의 생애」)다고 당신의 생애를 쓸쓸히 반추하셨습니다. 제가 「의자」에서 얼핏 보았던 도래의 무한한 연기는 이 허무의 반향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허무를 무념으로 바꾼 이의 반격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서둘러 완 성하고자 하는 오늘날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비평은 바로 그 허무에서 무념을 읽어내는 일을 제 사업으로 삼고 있을 것입니다. 편운 선생을 기리는 분들 덕택에 모처럼 깊은 사념의 향내를 맡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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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Ⅰ 하얀 사연

하얀 사연 - 어느 독자에게 백지의 편질 받고

조병화

얼마나 많은 사연이기에 이렇게 백지의 편질 보냈을까 주소도 없이 이름만이 덩그러니 적혀서 날아들은 편지 하얀 눈은 진종일 내리고 나는 어디로 답장을 띄워야 하리 눈보다 더 진한 백지의 벌판 나의 산장은 이승에서 하얀 무덤이 되어 간다. (1986. 1. 20)

시인에게 백지 편지를 보낸 것은 독자의 실수였을까

-제30숙 《외로운 혼자들》에서

요? 아니면 가슴에 너무 많은 말들이 빽빽하게 차올라 한마디도 건넬 수 없는 상황이었을까요? 까닭은 모르 지만 주소도 적혀 있지 않은 편지에 답장을 띄우려하 는 시인의 마음이 더없이 순하게 느껴집니다. 세상 사 람들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해서 ‘이런 삶이 옳다’ 라고 쉽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편 지를 주고받으며 사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는 것입 니다.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 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에 가까운 것일 테지요. 오늘 아니 지금, 누군가에게 늦은 편지를 보 내도 좋겠습니다.

박준 시인.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2015


내게 남은 편운의 흔적 허영자

회갑에 주신 선물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회갑 노인이라고 하면 상노인으로 알았으며 상수를 축하하는 회갑잔치는 일생에서 치르는 큰 잔치였다. 평균 연령이 높아지고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둔 오늘날에 는 회갑나이는 젊은 나이로 치부하여 잔치같은 것은 생략되 는 일이 많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갑을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그때까지 써온 시와 수필작품을 선하여 전시 집과 선수필집을 묶는 것으로 회갑기념을 대신한 것이다. 그 러나 회갑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사실 을 알 리가 없었다. 어느 날 편운 선생님을 뵐 일이 있어 사무실에 들렸더니 바 로 이 글씨를 주셨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필자의 갑년을 어 떻게 아셨으며 또 설사 우연히 알게 되셨다 하더라도 이런 축 하의 글씨까지 미리 써놓고 계셨다는 것에 놀랍고도 감사하 였다. 필자는 제2회 편운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가졌지만 아 주 가까이 뵌 것은 필자가 인하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가면서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림이나 글씨를 써 주시는 것을

였다. 그러니 선생님의 수많은 제자들에 비하여 훨씬 못 미치

많이 보아왔지만 필자에게까지 이런 글씨를 주실 줄은 몰랐

는 연륜의 관계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나 사석

었기에 기쁨은 그만큼 컸다. 내 갑년의 가장 큰 선물일 뿐 아

에서나 다른 제자들에 못지 않는 배려를 항상 해주셨다.

니라 일생의 귀한 기념품이 된 이 글씨를 나는 선생님을 뵙듯

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선생님은 섬세한 감성과 명석한 두

이 아끼고 있다.

뇌를 가지셨으며 대단히 정직하신 분이고 솔직한 분이셨기 에 필자는 가끔 선생님을 유리그릇같이 투명하고 조심스럽 다고 말씀드리곤 하였다. 이런 무례한 지적에 혹시 야단을 맞 을까 걱정을 하였지만 선생님께서도 이점은 수긍하신 듯 크 게 웃으시곤 하셨다.

허영자 1938년 경남 함양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에 「도정연가」, 「연가 3수」, 「사모곡」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가슴엔 듯 눈엔 듯』, 『親展』,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조용한 슬픔』 등을 비롯하여 시조집 『소멸의 기쁨』, 『銀의 무게만큼』 등과 다수의 시선집, 수필집이 있다. 한국시협상, 월탄문학상, 편 운문학상, 민족문학상, 목월문학상 등을 수상.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장,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장 등을 역임. 현재 성신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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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만난 조병화 세월이 가기 전에 이진섭

_이진섭

조병화 시인이 회갑.

고 건네주는 훈장인데, 함부로 되는게 아니지. 나는 시를 사랑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서로 지내온 것 같은데 벌써 그렇

해. 그 때문에 내가 태어난 거 같애. 내가 좋아서 하는 일……

게 되었을까? 나와 서로 만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해방 후, 그는 서울 중고등학교 수학선생님. 나는 아나운서 를 거쳐 서울신문 기자. 명동은 그때 모든 문인들이 모여드는 인정의 거리, 낭만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문화담당 젊은 기자들은 알고 싶고, 알리 고 싶고, 정신적 율동이 그리워 선배 시인, 작가의 행적을 따 라다니곤 했다. 매우 즐겁고 보람찼던 풋내기 시절이었다.

아무도 간섭은 못해…… 작당이 필요없고 진정한 친구만이 필요해……” ‘낭만시인’이라는 별칭이 이때 이미 조시인의 머리 위에 감 투를 씌워주였다. 체하는 기성시인들의 미움을 산 것도 그룹행동을 싫어하는 그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으리라. 그래도 그는 그럴수록 냉철했고 생각하는 데로 시를 써냈 고, 그림도 그리고 자기 생활의 페이스를 늦추지 않았다.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 순수한 생각과 시를 좋아하고 사랑

그때 우연한 기회에 우연히 만난 사람.

했던 몇몇 분이 있다. 그래서 조시인은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조병화 시인을 만난 거다.

장(場)이 생겨났다.

그 당시의 서울- 1947, 8년. 정치상황이나 이 나라가 돼가는 꼴이 매우 어수선했던 때,

소설가 김광주(金光州), 석천ㆍ오종식(昔泉ㆍ吳宗植), 언 론인 박운대(朴運大),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韓昌愚) 제씨.

좌우익이 이데올로기를 따지고, 사상성(思想性)을 따지고,

조시인을 아끼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시집이 계

꼭두각시처럼 날뛰어, 어수선했던 시대에 조병화는 진흙 구

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날개 돋친 시집의 행방은 젊은이들에

덩이 연꽃에서 불쑥 내민 연꽃처럼 극히 자연스럽게 얼굴을

게 모두 쏠렸다.

드러낸 낭만 시인이었다.

조시인은 누가 뭐래도 고집이 있었다. 미워하는 사람을 억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하고 사랑이 없느냐?”고 외치며 정

지로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괜스레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치적 색깔을 마다하고 노이에 로만티크(新浪漫主義)를 외치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는 상대편이 오히려 거

며 술잔을 같이 들던 조병화. 곁에서 정치를 떠들어대고 이데

북해질까봐 아예 동석을 꺼려했다.

올로기가 어쩌고 저쩌고 시끄러울 때 “정치가 뭐야, 경을 칠 놈들…… 인간이 앞서야지…… 사랑이 고파서 저래” 하면서 낭만과 순수한 시정신을 주장했던 그였다.

사랑이 모자라서 ‘허(虛)’한 사람을 자기 눈 속에 새겨두기 싫다는 얘기다. 그는 “고독이 싫다”고 썼다.

유혹도 많았고, 무슨 동맹 무슨 협회 등등, 자기들끼리 작

『패각의 침실』, 『사랑이 가기 전에』 등등, 그것은 순수한 그

당하는데 이름 석자를 끼워넣으려 애쓰는 가면의 ‘피에로’가

의 감각이었고, 그만큼 그때마다 우리 주변의 생태(生態)를

판을 치던 때였다.

예리하게 찌른 에스프리의 결정(結晶)같은 것이었다.

“나는 시를 사랑해. 사람을 사랑하고 시를 사랑하고, 그것 이 나의 전부야, 나에게는 정치나 조직 따위는 필요없어. 누 가 나를 시인이라고 안해도 좋아…… 시인이란 남이 인정하 2015

그래서 더욱 서로 좋아하고 서로의 흠을 동화시켜 가면서 지내왔다. 부산 피난시절, 송도의 집.


1973년 5월 16일 KAL Jumbo747 초청여행 왼쪽부터 최정희(소설가), 조병화, 모윤숙(시인), 박종화(소설가), 이진섭(수필가), 전숙희(수필가)

광복동의 거리, 판자집에서의 술타령. “호적이 싫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술취해 거리를 누비 던 시절. 서로 비비고 살아온 세월을 더듬어볼 때, 새삼 생각나는 선 배 친구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세월을 같이 하는 동안 서로 사귀던 시인, 문필가들이 조시 인에 대해 뭐라 평가했는지를 다 늘어 놓을 수는 없다. 저널리즘 속에서 살아온 나로서 조병화 시인의 긴 세월을 더듬어 볼 때, 회갑이라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항상 사랑을…… 인색하지 않는 참된 사랑을 입모아 외치

◉ 최영해- 시인 아닌 시인. 시집 한 권 내지 않았어도, 그

고 시로 응결(凝結) 지은 그가, 쓸쓸한 창경원 옆구리를 비켜

한마디 한마디가 인정어린 시귀절이었다. 너무나 많은

가며 지나치면서, 사계절의 자연을 오랫동안 몸에 적시고, 벌

시인 작가의 마음을 삼키고 있는 분이다. 조병화를 가장

써 회갑을 맞이하고, 그동안 쌓아올린 연륜대로 시화를 곱게

아끼고 사랑했던 분.

남기고…….

◉ 김광주- 그렇게 병화를 좋다할 수 있을까? “만년 어린 애 같애요…… 그게 좋죠” 이 얼마나 기막힌 애정어린

이 알찬 실존이 영글어 나이가 부끄럽지 않으니 그 얼마 나 대견한가.

표현일까? ◉ 김수영- “병화는 에고티스트…… 그러나 밉지가 않 아…… 그의 시어(詩語)가 순수해서……” ◉ 조지훈- 수학의 세계는 철학의 세계와 같은 것, 그래서

병화는 인제 외롭지 않다. 나이는 세월이 맡아하는 것.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독특한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동질성에서 발전한 시인이

사랑의 고향이 거기에 있다.

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시인의 마음의 불길,

◉ 이한직- 형식에 배지 않고, 쉽게 다루는 언어가 마치 뽀

항상 밝고 젊은 것

얀 한 폭의 그림 보는 거 같더니, 그 친구 정말 그림 솜씨

그래서 시인은 영생.

도 대단하더군(일본에서 만났을 때)

그리고 아슴한 그의 그림처럼

◉ 박태진- 참 용해. 그 많은 시집과 그림…… 그리고 선

나이를 잊고 살아 있는거다.

생노릇을 하다니. 그 정열이 부러워(피터 현과의 대화 에서) ◉ 박인환- 그 예리한 감각은 수학적 바탕에서 잘 걸러나 온 시 언어로 증명돼. 고민도 많이 했을 거야. 존경해야지.

세월이 가기 전에, 사랑의 시를 계속 살찌게 해서 후배들이 그 향기를 듣도록 문향기(文香氣) 남은 세월을 건강하게 삼키 며 살아갈 조병화 시인!

이진섭 방송작가, 언론인. 호는 청재(靑齋). 1922년 서울 출생. 1983년 타계. 국제신보 문화부 부장, 로이터 편집부장, 코리아헤럴드 편집위원, 한국방송공사 심의위원 등 을 역임. 저서로는 『영원환 여인상』, 『진실한 애정』, 『한국의 언론』, 수필집 『물방울 인생』등이 있으며, 시나리오로는 1959년 『망향』 이후 『생명』, 『대원군과 민비』 등 다수가 있다. 어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어 새로운 외국의 문학을 접하여 많은 번역을 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라틴뮤직과 샹송 해설가로서 그 방면의 독보적 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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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15회 시부문 본상 수상자 이성부

안 가본 산 이성부

내 책장에 꽃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권씩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2015


길 아닌 곳에 들다 이성부

수북이 잠자는 낙엽들 뒤흔들어 깨워놓고 가는 내 발걸음 송구스럽다 놀라지들 말거라 나도 이파리 하나 슬픔을 아는 미물일 따름이니 시작노트 오랜 세월동안 산과 관련한 시를 여기저기 발표하다 보니 주변에서는 더러 “이제 산시에 물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나로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생각이 다. 산이라는 곳이 다니면 다닐수록 새로운 것처럼, 내가 쓰 는 산시도 언제나 그 새로움을 기록하기 위해 천착한다. 산 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경지가 또한 산이다. 시를 오래 쓸수록 시가 과연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와 비슷하다. (중략) 산에 들어가는 일은 한때나마 나를 속진의 일과 단절시키 고 단순화시키고 고립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속진의 일 을 깨닫게 하고 명징하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사물의 외연과 내포를 체득케 한다. 산에 오르는 일은 그러므로 나에게 세 계를 바라보는 창이다. 산이 품고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거기서 얻는 시의 모티브도 끝이 없을 만큼 다양하고 새롭다. 동서고금의 시 인·묵객들치고 산시 하나 쓰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산은 영원한 시의 보고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부 1942년 광주 출생. 2012년 별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0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신춘문예, 1967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시 당선. 시집으로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 행』, 『전야』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편운문학상, 가천환경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일보 사회부, 생활부 부장, 일간스포츠 문화부 부장과 부국장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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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운문학상 시터 제 15회 시부문 우수상 수상자 이재무

감나무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어보는 것이다

2015


국수 이재무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 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시작노트 한밤중 까닭을 알 수 없는 갑갑증이 일면 강가에 나가 하 릴없이 배회하는 때가 있다. 흐린 불빛 속 검푸른 강물이 일 렁이는 것을 오랫동안 바라다보고 있자면 마음의 수면 위로 마구 치솟아 오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알갱이들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점차 가라앉는다. 전생에 나는 필시 어족의 한 일원이었는지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힘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중략)

코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매번 흐르는 물에서 어찌 위안과 詩는 내게 양가적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절망과 자부라는 상반된 이 양가적 감정으로부터 앞으로도 계속 나는 자유롭 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이제 시를 억압하지 않고 시와 천천히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놀며 지내는 그런 여유의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러다 보면 시 가 내게 뜻하지 않은 위로와 선물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 리지 않으면서…… 밤이 깊어서인지 나와 더불어 강가 배회하던 몇몇 유람객 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무릎이 투덜댄다. 마음의 바가지 가득 강물 소리를 담아 집으로 간다.

이재무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석사 수료. 1983년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시집으로 『섣달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 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등이 있 으며 윤동주시상, 편운문학상, 난고문학상 등을 수상함. 현재 서울 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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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시 전집 조병화 시인의 꿈 사랑 멋, 고독과 허무를 넘어선 그가 펼치는 문학의 향연. 독자친화적인 시 세계를 통해 시와 삶이 조화롭게 조우하는 시의 현장. 쉽고도 깊이 있는 조병화 시의 향기와 사유의 깊이를 만나다.

전 6권/ 조병화문집간행위원회/ 국학자료원 ISBN 978-89-279-0213~3(set)/ 전권 550,000원

문의 (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tel. 02-762-0658 e-mail: poetcho@naver.com


다시 읽는 조병화 시 Ⅱ 따뜻한 슬픔

따뜻한 슬픔

조병화

나무 아래 누워 구름을 보니 바람처럼 스쳐가는 한순간, 팔십 평생을 슬픈 시만 썼구나, 하는 생각 왜, 그랬을까 이제 세상 접고 가는 모퉁이에서 내 슬픔 고요하니 슬픔이 기쁨, 기쁨이 슬픔, 영원의 한순간, 눈을 감으니 나는 비어서 하늘이어라. (1999. 6. 28) -제49숙 《따뜻한 슬픔》에서

조병화 시인은 한평생 슬픔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고독과 마주했을 때 슬퍼했고 그 고독의 순수성과 절 대성 앞에서 슬퍼했으며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또다시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들을 차곡차곡 시로 옮겨왔습니다. 그 슬픔의 기록은 시인의 말처럼 고요했고 기쁨과 닮아 있었으며 순간 같기도 하고 영 원 같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오래 묵어 따뜻 한 것이 되기도 했습니다.

박준 시인. 1983년 서울 출생.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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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평

제10회 편운 시 백일장 심사평

제10회 편운시백일장 본심을 심사 중인 이재복, 허형만, 김광규 심사위원(2015, 5, 2, 청와헌)

제10회 편운 시 백일장에는 총 86명의 응모자들이 인터넷으로 작품을 제출하였다. 예심을 거쳐 그중 50명을 추렸고, 5월 2일 본심에는 총 41명이 참가를 하였다. 예비심사는 박준 시인이 고생을 했고, 본심 심사는 김광규 시인, 허형만 시인, 이재복 평론가가 심사를 진행하였다. 올해 작품들을 보고 느낀 소감은 우선 이해할 수 있는 시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누가 읽어도 이미 지와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심에 올라온 시들은 그러한 요건을 충족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고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장원의 영예를 차지한 장세희의 「여행」은 시상이 대단히 깔끔했고, 표현 감각이 돋보였다. 특히 ‘길’, ‘틈’, ‘리듬’, ‘숨’, ‘새’, ‘소리’ 등의 다양한 질료들을 연결하여 그것을 이미지화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앞으로 시를 계속 잘 써나갈 것이라고 판단하여 심사위원들은 장세희의 「여행」을 장원 으로 선정하였다. 차상은 이정림의 「인생여행」이 뽑혔다. 시를 읽으면서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삶의 고단함 과 삶의 현장을 리얼하게 구현하는 시적인 리얼리티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차하로 뽑힌 이영석의 「의자」는 시적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돋보였다. 그것으로도 앞으로의 가 능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차하로 뽑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이들 외에 장려상에 남연실, 배령준, 안지영, 조상우, 조재연의 작품들이 선정되었다. 모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광규(위원장), 허형만, 이재복 2015


제10회 편운 시 백일장 장원작ㆍ입상소감

여행

장세희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이 걸어온 길에서 한 발자국 떼어 작은 틈을 찾아나설 때 나만의 리듬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장원작품을 낭송하는 장세희 수상자

사람들이 앞만 보며 걸어갈 때 나는 고개를 젖히고 높은 건물에 찔려 조각난 하늘 속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를 보았다

입상소감

16살 때 학교에서 운영하는 문예창작교실을 통해 처음으로 시를 써 보 았습니다. 시는 저에게 있어 마음을 치유해주는 존재였고 저의 생각과 감 정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시를 쓰던

지하철에서

그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이번

화면 속 세상에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

편운 시 백일장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제 마음이 전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해진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나는 잠시 그들을 멈춰 세우고 창 너머로 노을이 강물에 번져 찰랑이는 소리를 나누고 싶었다

시제가 발표되었을 때 단번에 ‘여행’을 담은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 니다. 처음에는 여행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어떻게 시 안 에 녹여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오랜 생각 끝에 여행은 꼭 멀리 떠 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걷는 길에서 벗어 나 자신만의 틈을 찾아 나서면, 그것이 여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편운 시 백일장을 통해 처음으로 장원을 수상하여 기쁘지만 한편으로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불안하기도 합니다. 시를 쓸 때마다 과연 좋은 시는 어떤 시인가, 나는 무 엇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글을 쓰는 것은 고통

걷는 길마다 틈이 보일 때면 무표정한 너를 데려가 함께 있고 싶다

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아 도, 저는 시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시를 통해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내, 희망,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 중함을 배웠습니다.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결코 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도록 저를 격려해준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이루어낼 수 있었 습니다. 중학교 때 저에게 시를 알려주시고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해 주신 유향목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덕분에 문예창작수업이 있

백일장 수상자 장원 차상 차하 장려

장세희(대학생, 서울시) 이정림(용인시) 이영석(서울시) 남연실(대학생, 과천시)・배령준(대학생, 서울시) 조재연(대학생, 인제군)・안지영(대학생, 대전시) 조상우(대학생, 서울시)

을 때마다 얼마나 즐겁고 설렛는지 모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제가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응원해주시는 부모님, 언제나 감사하고 사랑합 니다. 중학교 때부터 내 시를 읽고 좋아해준 수진이, 같이 시에 대한 이야 기를 나누며 내가 좋은 시인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던 주은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이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문맥 동아리 선배들과 친구들 모두 고맙습니다. 편운 시 백일장은 저의 시가 더 욱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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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글마당 꿈나무 시 낭송대회

꿈나무시낭송대회

꿈나무 시낭송대회에 나가게 된 것도 나에게 큰 추 억과 기회였고 거기에 나간 것만이라도 나는 만족한다. 거기에서는 다른 아이들도 아주 잘했고 그러면서 나의 차례가 점점 다가오자 나는 떨렸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지만 나가자마자 머릿속이 하얀색으로 물들었 다. 그래도 중간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안정되어서 잘 할 수 있었다. 그 후 시상식이 있었다. 나는 장려상을 타 고 상금도 받았다. 내가 거기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좋 은데 상도 받아서 너무 좋았다. 나에게 이번 기회는 참 좋은 기회였다.

이정규 꿈나무 시낭송대회 소감은 상상 속으로 들어가다? 라고 해야할 것 같 다. 그 이유는 사회자님이 던지는 질문이 상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질문 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민들레꽃에 사회자님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위에 민들레꽃 같은 사람이 누굴까요?” 그러자 어떤 친구는 “우리 옆집에 사는 친구인데 민들레꽃처럼 자주 보니까요” 라고 했다. 나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제 친한 친구인 지용이요. 왜냐하면, 그 친구의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어요. 흔하니까요.”라고 했을 것이다. 이렇듯이 상상 속으로 빠져들게 한 대회였다. 또 한 가지가 생각난다. 그것은 바로 진심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꿈나무 시낭송대회 에서 아이들의 말로 알아냈다. 처음에 말한 것과 같이 사회자님께서 질문 을 하였을 때 즉흥적으로 말하는 부분에서 보였다. 내가 시낭송대회를 보러갈 때 전혀 느껴지지 않는 기대감을 가지고 간 것에 대해 변화가 생길 정도로 놀라웠다.

2015

배은빈

공은지 오늘은 시 대회가 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열심히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스님 차를 타니 긴장이 많이 됐다. 그리고 센터에 올라와서 6학년 반으로 가서 화장을 한 다음 선생님이 부르셨다. 그래서 선생 님과 시 연습을 했다. 그리고 연습이 다 끝나고서 시 대회에 가서 내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시 연습을 했다. 내 차례가 되니 얼굴 이 빨개지고 긴장이 되서 많이 떨렸다. 시를 다 읽고 머리를 올렸는 데 머리가 이상하게 되서 보는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 그래서 자리 에 들어갔는데 기분이 좀 나빴다. 그리고 시 대회가 끝나고 퀴즈와 시상식이 있어 기다리면서 과자랑 물을 먹고 심심해서 친구들과 이 야기를 하고 놀고 시상식 때 시상을 하고 끝났다. 느낀 점은 심사위 원 앞에서 시를 했을 때 마음이 떨리고 긴장이 많이 돼서 땀이 많이 났고 뜨거웠다는 거다. 다음에도 하면 또 나가서 열심히 할 것이다.


홍민기 5월 1일에는 톡톡플러스에 있는 아이들이 조병화 시 인의 시를 낭송하였다. 그때 아이들이 시를 낭송하는 모 습이 보기 좋았다. 그중에서 어떤 아이가 시를 낭송하 는데 정말 잘하였다. 시 낭송이 끝나고 간식을 먹었다. 그 다음은 조병화 시인에 대한 퀴즈대회를 하였다. 나 는 두 문제나 맞췄다. 그래서 연필과 지우개를 2개씩 받았다. 그렇게 퀴즈대회가 끝났다. 금상은 아까 잘하 던 아이가 탔다. 시낭송대회가 지루할 줄 알았는데 생 각보다 재미있었다.

서지용 아주 재미있었다. 민들레꽃 같은 친구가 있 냐는 질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민들레꽃같 이 주변에 친한 친구를 민들레꽃 같다는 답이 있었다. 편운이라는 한자어의 뜻이 조각구름이 라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편운이라는 말은 멋 진 것 같다.

정우정 조병화 시인 문학관에서 시를 낭송하려고 대기를 하고 있었다. 대기할 때는 별로 떨리지 않았는데 내 가 하는 순서가 오자 너무 떨렸다. 그래도 장려상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중학교 때도 할 수 있으니까 중학생이 되어도 톡톨 플러스아동센터에 놀러오면서 시를 외울 것이다. 5 월 1일 조병화 시인 문학관에 갔던 이후로 조병화 선 생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었다. 정말 좋 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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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문화 산책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영월문학기행 주기영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영월문학기행 _주기영

단종이 잠들어 있는 영월 장릉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패자의 기록 또한 만만치 않은 곳, 그곳이 바로 영월 땅이다. 단종의 슬픈 역사

인기념사업회에서 단종과 김삿갓의 숨결이 배인 영월을 문학 기행지로 택한 것이 참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는 세월이 흐를수록 생생히 살아 숨쉬고 방랑시인 김삿갓의

몇 년 전 송목회(서울고 16회 산우회)에서 태백산 등반을

행적도 후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끌어 권력의 성쇠에 따라 어

할 때에 정상을 조금 비킨 곳에 단종의 산신각이 세워져 있음

쩔 수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주류에 대한 동정과 향

을 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 후에 그 원혼이 태백산으로 들

수가 구불대는 동강의 흐름처럼 살아 움직이는 곳이 바로 치

어와 산신령이 되어 민중의 억울한 사연을 더러 풀어주기도

악산의 동남방 그리고 월악산의 북쪽에 위치한 이곳 영월 땅

한다는 전설이 떠돌고 있었다.

이다.

봉건시대의 정치나 권력이라는 것은 그 속성 자체가 다수

하늘에 태양이 하나인 것처럼 승자는 결코 둘일 수가 없

에 의한 소수 또는 힘센 자의 힘없는 자에 대한 폭력이고 짓누

다. 그러나 다툼에서 패했다고 하여 그들의 생명과 이상이 아

름일 수밖에 없고 어찌 보면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거대사회

주 스러졌다고는 못한다. 때로는 바람으로 때로는 돌무더기

속의 필요악(necessary evil)일 수도 있었다.

로 남아 강산 어느 모퉁이를 세세년년 떠돌고 있는 것이다.

명군 중의 명군인 세종대왕의 영손으로 장자세습이라는 당

그런 흔적들은 먼 훗날 때로는 무속의 형태로 때로는 설화

위에도 불구하고 현실세력의 폭거 앞에 왕위는 물론 인간적

와 민담으로 예술화하고 문학화하는 것이다. 마침 조병화시

인 삶조차도 허용이 되지 못했던 단종의 인생모형은 동서고

2015


김삿갓문학관

김삿갓묘비 앞에서 필자와 곽명규 회원

김삿갓의 목상

금의 왕조사는 물론 일반 사가에서도 비슷한 예를 무수히 찾

조선민화박물관을 둘러본 다음 김삿갓 문학관을 찾았다.

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병상련의 군중들이 마치 자기의 일

조부인 선천부사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투항함으로 권문세가

인 양 이곳 영월 땅을 순례하면서 역지사지의 마음을 달래보

였던 그의 집안은 폐족이 되었고 세상을 비관한 나머지 삿갓

는 것이다.

으로 하늘을 가린 채 천재적인 풍자시를 읊조리며 떠돌이 생

먼 시간을 건너 뛴 지금 단종의 능은 결코 외롭지만은 않다.

활을 하였다. 삿갓 하나에 죽장을 짚고 전국을 떠돌던 김병

어떤 군왕의 능침 못지않게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즐겨 찾

연은 철종 연간에 전라도 화순에서 57세의 생을 마감하고 노

는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풍수적으로도 대단히 빼어나다는

모와 처자식이 살고 있던 이곳 영월의 노루목으로 이장이 되

것을 알 수가 있다. 산세는 물론 좌향도 훌륭하고 단명했던 운

었다.

명을 보충이라도 하듯 능침 앞으로 긴 용맥이 이어져 보기가

극단적 경쟁사회에 지쳤는지 청정지역인 영월 땅에는 단종

더욱 좋다. 정자각은 지형상 정면에 있지를 않고 측면에 배치

릉과 김삿갓의 유적지 말고도 각종 박물관 등 찾아볼 곳이 의

했는데 다른 왕릉과 다른 특색이다.

외로 많아 근래에 방문객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조선민화박물관 가는 길 주기영 수필가, 교육자. 1946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와 서울 동성고등학교 등에서 37년간 봉직함. 저서로 수필집 『봄은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등이 있음. 황조근정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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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를 추억한다 휘호로 읽는 조병화와 그의 사람들 인영선

휘호로 읽는 조병화와 그의 사람들 _인영선

안녕하십니까. 저는 천안에 살고 있는 인영선입니다. 호는 취묵헌입니다. 취할 취 (醉) 자에 먹 묵(墨) 자를 써 먹에 취한 사람, 즉 평생 글씨만 공부한다는 뜻으로 자 호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40이후에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천안사람들이 전부 저를 술에 취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뜻이 아니지요. (웃음) 지금은 전부 기기가 발달되어서 연필로 쓰는 손 글씨도 희귀하게 여기는 세 상입니다만, 저는 더군다나 붓으로 글씨를 쓰는 사람입니다. 오늘 개막하는 조병화 선생님의 휘호전의 부제는 꿈 사랑 멋입니다. 꿈과 사랑 과 멋에 대해 생각해보자니 먼저 저와 선생님의 인연에 대해 말씀드려야 될 것 같 습니다. 저는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하여 조병화 선생님께 4년 동안 배웠습니다. 저 는 시나 소설, 평론 등 아무것으로도 등단을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오늘 제가 여기 에 서게 된 것은 오로지 저는 한 길로 먹을 갈아왔다는 것, 붓글씨를 썼다는 것 때 문 같습니다. 조병화 선생님께 대하여 여러분들이 그동안 못 들으셨던 말씀, 얼마나 그분이 대 가셨는지에 대한 제 경험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66학번으로 1970년 2 월에 경희대학교를 졸업 한 뒤 조병화 선생님을 통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글씨 공부 를 한다고 결심을 하였지만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어 못 찾아뵈었습니다. 그렇게 열 심히 공부를 하여 일중 김충현 선생님이 지으신 백악미술관에서 1986년 제 개인전 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초청장도 안보내고 전화도 못 드렸는데 조병 화 선생님께서 개막식 테이프 컷팅을 하러 오신 겁니다. 제가 얼마나 황당하고 송구 스러웠겠습니까. 그동안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테이프 컷팅식이 끝나고 인사를 드리며 “선생님 죄송합니다. 졸업하고 한 번도 찾 아뵙지 못하고 개인전을 여는데 초청장도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찌 아시고 오 셨습니까?” 했더니, 다른 분 같았으면 ‘그동안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씀도 하실 법 한데 야단 한 마디 안하시고 “영선아 너 몰랐냐? 나 일중하고 동갑이여. 근 데 일중이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 네 제자가 개인전을 여는데 테이프 컷팅을 해줘야 할 것 아니냐, 라고. 그래서 왔다.” 얼마나 대범한 말씀이신지요. 속이 좁은 사람 같 으면 졸업하고 코빼기도 안보였다고 야단을 치실 법도 한데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 2015

不知老之將至 (부지노지장지) 장차 늙음에 이르려 함을 알지 못하네 31.5×126 書爲 片雲齋主人趙炳華大人大雅 丁卯 春 醉墨軒 學人 謹書 (서위 편운재주인 조병화대인 대아 정묘 춘 취묵헌 학인 근서) 편운재 주인 조병화대인을 위하여 정묘년(1987) 봄에 취묵헌 학인 삼가 쓰다


셨습니다. 제자의 개막식을 그렇게 축하해주셨지요. 제가 조병화 선생님께 써 드린, 지금 문학관 2층에 전시되어 있는 제 글씨가 있습 니다,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에 나오는 부지노지장지(不知老之將至)라는 글인 데, 이것을 써 드린 것이 1987년입니다. 그때 저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문예진흥원 이 주최한 강연회의 강의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 보니 시창작반은 조병화 선생님께서 하시고, 소설은 김원일 선생님, 서예는 돌아가신 월정 정주상 선생님과 제가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강사 대기실에 재떨이도 갖다 놓고 그런 시절 이었습니다.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다, 제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어 밖으로 나 가려고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조병화 선생님은 제게 다정하게 학생 때 대하 듯이 “영선아 너 어디가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담배 피우려고 나갑니다, 선 생님 계신데 여기서 어떻게 피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너하 고 나하고 같은 강사야. 여기서 앉아서 피어 그냥, 재떨이도 갖다 놨는데.” 이러시는 겁니다. 그래도 제가 “선생님 앞에서 어떻게 담배를 피겠습니까.”했더니 소설가 김 원일 선생님이 “선생님, 그래도 역시 서예 하는 사람이라 자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 문학하는 사람들은 선생님이 계시거나 말거나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 까. 그래도 서예를 하는 사람이라 다르네요. 허허” 라고 말씀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또 그 때는 강사 출석부에 서명을 하면 직원이 바로 그날 강의 한 두 시간 강사료 를 그 자리에서 줬습니다. 1987년도 당시 시간당 5만원의 강사료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여러 지자체에서도 서예 강의를 많이 하는데 그에 비교해 봤을 때. 그 당시 물 가로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조병화 선생님도 저와 같은 강사료를 받으시 는 것입니다. 그래서 송구스러워 “선생님께선 제 몇 배를 받으셔야 되는데.”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네가 그만큼 컸다는거여.”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서 제가 “선생님 제가 강사료도 받았는데 강의 끝나시면 대접을 좀 해드려도 될까 요?” 했더니 “영선아 너 나 모르니? 나하고 약속하려면 최소 3개월 전에 예약해야 지”라는 농담도 하셨습니다. 2002년도에는 제가 몸이 좀 안 좋았습니다. 환갑을 못 넘길 것 같아서 예술의 전 당 전관 2층에 전시를 크게 열 계획이었습니다. 전시의 서문을 조병화 선생님께 받 고자 혜화동 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사모님께서 병원을 하시던 곳에 사 무실을 짓고 선생님께서 주로 그곳에 계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 님께서 “영선아 너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선생님 저 병술 생 개띠입니다.” 라고 했더니 “그럼 우리 아들하고 나이가 동갑이군.” 이러셨습니 다. 지금 조병화문학관의 관장님이신 조진형 관장님과 제가 동갑인 것을 그때 알았 습니다. 그 이후 조진형 관장님을 2003년 조병화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경희의료 원 장례식장에서 보았습니다. 조진형 관장님께서 상주로 계시며 제게 “어떻게 오셨 습니까?”하고 물어보셔서 저는 “조병화 선생님의 경희대학교 제자로 붓글씨를 하 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조진형 관장님께선 “아버님께 말씀 을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관장님을 처음 뵙게 되었지요. 그리고 금년 초에 인사동 백암미술관에서 일중 김충현 선생님께서 평생 쓰신 사 45 + 46


조병화를 추억한다 휘호로 읽는 조병화와 그의 사람들 인영선

찰의 현판과 편액, 글씨들을 모아 전시를 했습니다. 마침 작년에 제가 일중선생기념 사업회에서 주는 서예 일중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참석하여 소개를 하는 자리 에서 조병화문학관 관장님을 다시 뵙고, 그때 며느님이신 조병화문학관 김용정 대 표님도 뵌 인연으로 이번 <조병화 휘호전>의 도록의 서문을 제게 부탁해주셨고 또 오늘 이렇게 제가 이곳에 와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조병화문학관에 두 번째 방문입니다. 한번은 조병화 선생님 살아계실 적에, 그리고 지금 오늘입니다. 옛날 중국 고시에 보면 춘초는 연연록이요 (春草年 年綠: 봄풀은 해마다 푸른데) 왕손귀불귀 (王孫歸不歸: 왕손(상대의 존칭)은 한번 가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시처럼 편운 선생님께서는 한 번 가시더니 돌아오지 않으시네요. 제가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초목처럼 푸르고 꽃처럼 피어계셨었는데. 이번 전시의 부제인 꿈과 사랑과 멋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예전에 선생님께 서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실 때에도 서부영화를 이야기하시며 광활한 서부에 대 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정신이 광활한 서부 같아야 좋은 작품 이 나오고, 그래서 그 속에서 고독도 생기고 외로움도 생기는 것이라고, 그렇게 항 상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가는데 저희들은 대학생 때 엠티 를 설악산으로 갔습니다. 그때 흔들바위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찍은 사진이 있습니 다. 지금도 가끔 설악산을 가면 그 추억 때문인지 흔들바위까지는 제가 꼭 갑니다. 생각해보니 낙산사 의상대에서 선생님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네요. 저와 선생님의 추억에 대해서는 이만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지금 선생님의 휘호를 볼 때 옛날 선생님께서 그 당시 어느 분들과 교유를 하셨 고, 어떤 내용의 글들이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예전 강의시간에 어째서 호를 조각 편 구름 운자를 쓰셔서 편운이라고 하시는가를 여쭤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호라는

꿈 사랑 멋 46.5×183 一九八四年 正月 元旦 1984년 정월 원단 진형에게 박사학위를 축하하며 父 安城 片雲齋 조병화 안성 편운재에서 아버지 조병화

것은 자기가 평생 어떠한 뜻으로 살아야 되겠다, 아니면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귀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사랑해 그것의 이름으로 호를 정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 를 이물위호, 이기위호 라고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 전시된 휘호 중에 생야 일편부운기요 사야일편부운멸이라, 부운자체본무실이요 생사거래역여연하다, (生 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라는 말씀입니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삶이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의 구름이 스러짐이라 구름은 원래 실체가 없나니 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라 86×37.5 頌片雲齋趙炳華博士雅正 (송 편운재 조병화 박사 아정) 歲在丁酉春 無碍 정유년(1957) 봄에, 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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聽蛙軒(청와헌) 154×47 丙寅春書爲 片雲詞伯 一中居士 (병인춘서위 편운사백 일중거사) 병인년(1986) 봄에, 편운 사백을 위하여 일중거사 쓰다

이 말씀은 불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산다는 것은 한 조각 뜬 구름이 태어나는 것 이요, 죽는다는 것은 뜬 구름이 멸하는 것인데 뜬 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으니 죽고 나는 것은 다 이와 같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 정신이 선생님이 호를 그렇게 정하 신 뜻에 와 닿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병화 선생님께서는 문인, 화가, 서예가들과 넓게 교류를 하셨고, 특히 서예가 로는 동갑이신 일중 김충현 선생님, 철필로 농사를 짓는다 하여 철농이라 호를 지으 신 이기우 선생님, 인천의 동정 박세림 선생님, 계명대 서예과 교수를 하던 근원 김 양동 선생님 등이 계십니다. 일중선생님께서는 또 이곳에 있는 청와헌의 현판을 써 주셨습니다. 들을 청(聽), 개구리 와(蛙), 집 헌(軒), 옛날 이곳 난실리에 봄이면 얼 마나 개구리들이 많이 울었겠습니까. 아마 그 때문에 조병화 선생님께선 집의 이름 을 그렇게 지으셨나 싶습니다. 본 전시 도록의 서두에도 제가 썼지만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김정희 선생님은 호를 완당이라고도 쓰시지만 저는 추사 선생님이지 완당 선생님 으로 부르기가 싫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유학자인 왕연이라는 분을 마음속으로 존경한다는 뜻으로 호를 완당이라고 정하셨지만 그것은 너무 사대주의 냄새가 나 서 싫어요. 추사(秋史)- 선비라면 추상같은 기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추사라는 호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 추사 선생님께서 선면(扇面)에, 즉 부채에다 난 초를 그리시고 거기에 쓰신 글 중에 ‘백세재전(百歲在前)이라도 향불가멸(香不可 滅)’라고 쓰셨습니다. 난초의 향기가 -혹은 난초를 그린 사람의 인품과 학문이- 앞 으로 백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멸할 수 없다는 말씀을 글로 쓰시면서 다만 이 작품 이 하나만 있을 뿐이지 두 개는 불가하다, 라고 말씀하셨지요. 편운 조병화 선생님 의 오늘 같은 행사가 백년이 지나도 굳건히 이어질 것을 확신하면서 간략히 이만 말 씀을 드리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인영선 서예가. 호는 취묵헌, 1947년 충남 아산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추사기념사업회 이사 및 근역서 가회원으로 활동 중. 충남도전 최우수상, 국전에 5회 입선, 천안시민의 상, 제4회 일중서예대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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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 1996년 10월 19일 금관문화훈장을 수장하고

왼쪽부터 황금찬, 조병화, 김광식

1996년 10월 19일 금관문화훈장을 수장하고 조병화 시인은 문단권력이나 평단의 중심에서 한걸음 비켜나 있었지만 정한 시세계와 활발 한 작품활동으로 생전 많은 상훈을 수여받았습니다. 1957년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시작으로 한 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 3.1문화상, 대한민국문학 대상, 5·16민족상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1996년 시인은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습니다. 문 화훈장이란 문화예술 발전에 공을 세운 이에게 수여하는 것으로 1등급 금관부터 5등급 화관까 지 그 격에 맞게 수여됩니다. 금관문화훈장 수훈 직후 시인은 경기도 안성 난실리에 “아, 조국 의 하늘이 나의 하늘이로다”라는 글귀를 넣은 작은 비석을 세웠습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시인 의 웃음이 유난히 맑습니다. 미동초등학교를 다니던 아홉 살 시절, 백일장과 사생대회에서 생 전 처음으로 상을 받았을 때에도 아마 시인은 저리도 환하게 웃어보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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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에 꿈을 담아주신 분들입니다 (2015년 8월 30일 현재 회원 현황)

Ⅰ편운 회원Ⅰ 강대신ㆍ강은모ㆍ강호문ㆍ경응수ㆍ권오륭ㆍ권은영ㆍ김동명ㆍ김병학ㆍ김상선ㆍ김성기ㆍ김성부ㆍ김성중ㆍ김수문ㆍ김여옥ㆍ김연호ㆍ김영관 김영수ㆍ김용건ㆍ김용정ㆍ김용화ㆍ김우형ㆍ김유항ㆍ김윤숭ㆍ김주만ㆍ김진겸ㆍ노정익ㆍ독고윤ㆍ마종기ㆍ민복기ㆍ박규원ㆍ박대영ㆍ박대지 박원규ㆍ박주원ㆍ박철원ㆍ설영기ㆍ신봉승ㆍ신용극ㆍ심재석ㆍ안중진ㆍ양규모ㆍ양숭문ㆍ오호수ㆍ유태연ㆍ유 현ㆍ윤동한ㆍ윤석민ㆍ윤석현 윤세영ㆍ윤영선ㆍ윤용암ㆍ윤일중ㆍ윤정자ㆍ윤지원ㆍ윤희정ㆍ이경하ㆍ이규형ㆍ이기남ㆍ이동건ㆍ이병규ㆍ이상림ㆍ이상복ㆍ이원복ㆍ이인학 이일향ㆍ이재후ㆍ이정혜ㆍ이종호(중외제약)ㆍ이종호(삼호개발)ㆍ이춘배ㆍ이항주ㆍ이현구ㆍ임건우ㆍ장철수ㆍ장현수ㆍ장홍선ㆍ전기석 전원태ㆍ전찬민ㆍ전형근ㆍ정광선ㆍ정도환ㆍ정동수ㆍ정몽원ㆍ정성환ㆍ정용선ㆍ현정원ㆍ정윤표ㆍ조성인ㆍ조성호ㆍ조성환ㆍ조수남ㆍ조 양 조영숙ㆍ조진완ㆍ조진형ㆍ조창환ㆍ지연숙ㆍ차성규ㆍ최경애ㆍ최은아ㆍ한효택ㆍ허영자ㆍ호종일ㆍ홍성호ㆍ황병주ㆍ황상현ㆍ황영기 Ⅰ꿈 회원Ⅰ 강창희ㆍ공상진ㆍ구자훈ㆍ김광규ㆍ김대규ㆍ김두식ㆍ김만헌ㆍ김명락ㆍ김병성ㆍ김삼주ㆍ김상현ㆍ김용란ㆍ김유성ㆍ김정일ㆍ김종성ㆍ김종회 김진환ㆍ문충성ㆍ박승언ㆍ박종규ㆍ배호원ㆍ서준희ㆍ신창재ㆍ신철우ㆍ우제상ㆍ원정수ㆍ유종해ㆍ이금기ㆍ이동수ㆍ이세웅ㆍ이수철ㆍ이 윤 이 일ㆍ이철화ㆍ이희수ㆍ장부웅ㆍ장부일ㆍ정영수ㆍ정주영ㆍ조윤원ㆍ지성하ㆍ최재성ㆍ한영란ㆍ황선자ㆍ(사)양지회ㆍ금암실업㈜ㆍ금조기업㈜ ㈜한미글로벌건축사사무소ㆍ(주)퓨쳐위즈ㆍ㈜에스텍퍼스트ㆍ㈜피오제이ㆍ㈜한농화성ㆍ(주)오리곤테크 Ⅰ사랑 회원Ⅰ 강우영ㆍ강태흥ㆍ고은봉ㆍ곽명규ㆍ김기인ㆍ김동기ㆍ김동엽ㆍ김용건ㆍ김종교ㆍ문영목ㆍ박병근ㆍ박순화ㆍ박진성ㆍ서재원ㆍ안창모ㆍ이규호 이영민ㆍ이재복ㆍ이필곤ㆍ정분순ㆍ조성걸ㆍ조현국ㆍ차진도ㆍ최영규ㆍ하영탁ㆍ서울고 16회 동문회 Ⅰ멋 회원Ⅰ 고연수ㆍ고정순ㆍ고희수ㆍ곽재숙ㆍ권광중ㆍ김가현ㆍ김광영ㆍ김길수ㆍ김명인ㆍ김서봉ㆍ김석진ㆍ김순미ㆍ김용규ㆍ김용담ㆍ김용환ㆍ김유선 김종안ㆍ김진석ㆍ김헌출ㆍ김홍섭ㆍ문창욱ㆍ민용식ㆍ민찬홍ㆍ박근준ㆍ박덕규ㆍ박동환ㆍ박민규ㆍ박종원ㆍ박태흥ㆍ배동인ㆍ서경석ㆍ송충석 안유화ㆍ오정규ㆍ오정환ㆍ유자효ㆍ유태전ㆍ윤진석ㆍ이근수ㆍ이명규ㆍ이병근ㆍ이상근ㆍ이성열ㆍ이숙자ㆍ이순재ㆍ이순희ㆍ이용기ㆍ이종휘 이찬석ㆍ이태길ㆍ이한나ㆍ이혜숙ㆍ이홍섭ㆍ이희자ㆍ임동승ㆍ임두영ㆍ조건식ㆍ조 범ㆍ조병수ㆍ조성익ㆍ조성홍ㆍ조장우ㆍ주기영ㆍ주동설 최일화ㆍ최재영ㆍ한광석ㆍ한국희ㆍ한선희ㆍ한중진ㆍ허형만ㆍ황경묵ㆍ황선도ㆍ황태선ㆍ황현숙 Ⅰ법인 / 기업 / 단체 회원Ⅰ (재)KPX문화재단ㆍ대신송촌문화재단ㆍ동양콘크리트산업(주)ㆍ리인터내셔널특허법률사무소ㆍ문봉장학회ㆍ삼호개발(주)ㆍ(재)김현문화재단 (재)조은문화재단ㆍ조선내화(주)ㆍ종근당고촌재단ㆍ(주)까사미아ㆍ(주)동아일렉콤ㆍ(주)리홈쿠첸ㆍ(주)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ㆍ(주)아주광학 (주)에이스라이프ㆍ㈜웰빙테크ㆍ(주)진양이앤씨ㆍ(주)트래콘건설ㆍ홈플러스(주)ㆍ(재)일신문화재단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임원진 명예회장 회 장 부 회 장 감 사 고 문 이 사

김영수 박철원 허영자 황상현 김종성 김양수 성춘복 신봉승 강대신 김삼주 김유항 김종회 노정익 박규원 신용극 송미숙 윤영선 이경하 이병규 이상복 이재후 조진형 황영기

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 이사장 (주)에스텍시스템 회장 시인ㆍ성신여대 명예교수 법무법인 세종 고문변호사 전 안진회계법인 대표 문학평론가 시인 작가ㆍ예술원 회원 정원산업 회장 시인ㆍ경원대 교수 인하대학 화학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ㆍ경희대 교수 전 현대상선 사장 (주)델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유로통상 회장 소야인터내셔널 대표이사 삼정KPMG 부회장 JW홀딩스 회장 문화일보 사장 서강대학교 로스쿨 원장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조병화문학관 관장 한국금융투자협회 회장

귀하를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회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인간의 숙명적 본질인 고독과 허무에 맞서 반세기에 걸친 시작 활동을 전개했던 우리 대표시인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실성 으로 후학들을 교육한 교육자이자 16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문인이자 10여 회의 미술 개인전을 연 미술가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교육계와 문단에서 이 땅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데 선도적 역할 을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 법조계와 기업계 등 각 분야에서도 정치・경제・사회・발 전을 위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의 많은 독자들은 현대적 삶 속에 서도 그분의 시를 통해 위안을 받고 꿈과 사랑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에 본인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모여 2006년 10월 사단법인을 설립했습니다. 저희 법인에서는 기존에 유족들이 운영해 오던 편운문학상과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조병화문학관 사업을 지원하고 나아가 한국 시문학 발전에 기여 할 수 있는 여러 사 업을 펴나갈 예정입니다. 귀하께서도 저희의 뜻에 동참하셔서 이 뜻 깊은 기념사업을 함께 이루어 주시길 간 곡히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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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시인기념사업회 Cho ByungHwa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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