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야기 내지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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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만나는 우리 마을 이야기


목차 들어가며

1. 인터뷰 대상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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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60년 밤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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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밤고지의 번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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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제망매가(祭亡妹歌)」, 문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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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만나는 우리 마을 이야기

들어가며 03

평화도서관이 위치한 파주 파평면 두포리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과 유엔군 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격전지 중에 하나였다. 작년에 진행한 마을연구사업 이었던 ‘우리 마을 전쟁의 상흔, 평화로 풀다’에서 적군묘지, 칠중성, 영국군 추 모공원 등 전쟁의 상흔을 품은 곳들을 돌아본 것도 우리 지역의 특수성에 따 른 것이었다. 저번 사업에서 여러 지역에 걸쳐 큰 맥락을 잡았다면, 이번 사업에서는 좀 더 좁은 단위인 마을에 집중해보려 한다. 한국전쟁 직후, 파평면 밤고지(밤꼬지/방고지) 마을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하 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시골 마을이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로 변했고 더불어 마 을 사람들의 삶도 달라졌다. 미군들이 드나드는 상점과 술집이 생겼고, 술집 근 무자만 500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아이들도 많아져 초등학교에서는 2~3부제로 수업을 했고, 교회와 약방, 당구장, 양품점, 양복점, 상회가 생겨났다. 대다수 주 민들이 미군부대와 공존하거나 의존해 살아갔다. 1972년 미군부대가 철수하고 난 지금, 그때의 풍경과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그 시절은 사람들의 기억 속, 가 슴 한 구석에 박혀 있다. 그래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 증언을 들어보기로 했다. 또 당시에 찍었던 사진 이나 기록들을 함께 공유해 이런 것들을 종합해 ‘마을 현대사 지도’를 만들 계 획을 세웠다. 당시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국내 최초 8인치 포 엔지니어였던 이인항님의 이 야기, 마을의 온갖 일을 도맡았던 마을 이장 김남열님의 미군부대와 민간인들 의 소통 창구였던 ‘한미친선회’ 이야기, 안종수님이 옆집에 살던 흑인 동생 마리 스와 학교 다닌 이야기 등 울고 웃고 아프기도 했던 과거의 파편적인 기억을 모 아보는 활동은 개인과 마을 차원에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마을 이야기는 사람들의 이야기의 총체일 것이다. 한국전쟁과 미군부대 주둔 시기를 겪어낸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사진 자료를 보면서 그 시 대 마을 주민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밤고지로 들어가보자.


1. 인터뷰 대상자 ‘평화를품은집’에서는 2016년 8월에서 10월까지 3개월간 1960년대 밤 고지 마을을 재현하고자 당시 마을에 거주했던 주민 아홉 분을 인터뷰 했다. ※ 밤고지 마을(이하 밤고지) - 마산2리와 두포2리를 밤고지 마을로 부름

이름 : 이인항 (1927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마산2리 새마을 당시 거주지 : 거주지는 월롱면, 근무지는 미 1군단 1대대 17포대 인터뷰 내용 : 미 1군단 1대대 17포대 8인치 자주포 정비(WB 정비 7급 - 주사급) 일을 하며 겪은 미군부대 생활과 미군과 관련된 이야기

이름 : 김남열 (1930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두포2리 남미상회 당시 거주지 : 두포2리 스윙홀 옆 가게 인터뷰 내용 : 당시 이장과 예비군 중대장을 역임하고, 가게 및 신문지국 운영. 한미친선회에 참여하며 보고 들으신 전반적인 이야기

이름 : 전영춘 (1934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마산2리 당시 거주지 : 두포2리 세집매, 태어난 곳은 마산2리 278번지 인터뷰 내용 : 두포리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겪은 이야기와 두포리 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

이름 : 이호영 (1936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마산2리 새마을 당시 거주지 : 두포2리 파평교회 아래 인터뷰 내용 : 마을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와 파평교회 신축과 관련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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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평식 (1943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마산2리 당시 거주지 : 두포2리 오복약포 인터뷰 내용 : 두포2리 상세 지도를 그려주심

이름 : 황호연 (1943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마산2리 당시 거주지 : 마산2리 인터뷰 내용 : 한국전쟁 이후 마을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

이름 : 이순자 (1946년 출생) / 성별 : 여 현 거주지 : 두포2리 파평교회 아래 당시 거주지 : 두포2리 파평교회 아래 인터뷰 내용 : (부군 한기호씨와 함께) 두포리 지역 상세 설명과 파평교회 주변 사진 제공

이름 : 임용석 (1958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두포2리 여울 식당 당시 거주지 : 두포2리 잡화점 인터뷰 내용 : 밤고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어린 시절 이야기

이름 : 안종수 (1960년 출생) / 성별 : 남 현 거주지 : 마산2리 당시 거주지 : 마산2리 신생약방 인터뷰 내용 : 마산2리 지역 상세 설명과 어린 시절 이야기


2. 1960년 밤고지 20세기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으로 많은 피해와 슬픔을 떠안았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냉전체제의 화약고가 된 한반도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토 위에서 갈 곳 없는 서러움과 배고픔, 대책 없는 추위와 더위, 부모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가득했으며, 1953 년 휴전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현재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2리와 두포2리를 일컫는 밤고지 지역에도 미군 3개 대대가 들어서면 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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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밤고지 주변 미군부대 분포도. 밤고지 지역은 포병 계곡(Artillery Valley)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 출처: `Camp Sill.` Korea Camps.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2ida.org/koreaatourofduty/KoreaCamps/CampSil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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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군부대 분포. 부대 Camp Brittin, Camp Kensington, Camp McIntyre가 보인다. 지금은 미군부대 자리에 한국군부대가 위치하고 있다.(*2005년 2월에 찍은 위성사진에 표시) 지도 출처: `Camp Brittin.` Korea Camps.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2ida.org/koreaatourofduty/KoreaCamps/CampBrittin.html.

1960년대 밤고지 Camp Saber 내의 NCO/EM 클럽. 맨 우측 상단의 다리 앞이 지금의 두포리 마을회관. 왼쪽 상단 길모퉁이 건물이 제일상회이다. 사진출처: `Camp Saber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4 November 2016. http://brucerichards.com/army/saber.htm.


1960년대 밤고지 Camp Saber 내의 NCO/EM 클럽 사진출처: `Camp Saber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4 November 2016. http://brucerichards.com/army/sabe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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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밤고지 Camp Saber 내의 NCO/EM 클럽. 왼쪽에는 NCO/EM 클럽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수송부(motor pool)가 있다. 사진출처: `Camp Saber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4 November 2016. http://brucerichards.com/army/sabe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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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원래 있던 밤고지 마을 전체가 개천 건너편으로 밀려났 던 형국이죠. 3개 대대가 들어왔는데 몇 명인지는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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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종수

“미군부대가 들어와서 오히려 없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좋았지. 그때 당시 외국 사람들이 무척 많이 왔어. 동네 양색시들만 한 500명 살고 그랬었는데 뭐. 홀이 네 개인가 그랬지. 서울보다 더 번화가였어. 부산에서도 밤고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파주 깍두기라 했잖아. 경찰서장도 파주에 오는 걸 최고로 쳤잖아.” - 황호연


1960년대 초 미군이 대포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 `Camp McIntyre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qsl.net/wd4ngb/cpmcintyre.htm.

10 1960년대 후반 Camp McIntyre 사진출처: `Camp McIntyre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qsl.net/wd4ngb/cpmcintyr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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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밤고지 아이들 (사진제공 : 안종수)

1960년대 밤고지 집 벽에 기대선 아이들 (사진제공 : 임용석)


1960년대 파평초등학교 소풍 단체 사진 (장소:화석정) (사진제공 : 임용석)

미군이 들어오면서 마을사람들이 느낀 변화는 눈에 띄게 늘어난 사람과 가게 그리고 이질적인 미국 문화였을 것이다. 1960년 당시 어린 시절을 보냈 던 임용석씨와 안종수씨는 아이들이 많아 2부제 수업이 이루어졌던 파평초 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미제 학용품과 미군들이 나누어주던 먹거리(초콜 릿, 소프트 아이스크림, 코카콜라, 웰치스 등)를 떠올리셨다. “여기 앞 부대에서 미군들이 점심이면 차를 타고 쭉 와. 미군 병원 앞으로 미군들 이 나와서 우유를 매일 나눠줬어. ⋯ 유엔 데이(10월 24일)인가? 그날은 주민들을 모두 초청해서 미군부대 들어가서 양식들 먹고. 그때는 헬리콥터, 장갑차도 태워줬 12

어. 12월 25일은 산타할아버지가 헬리콥터 타고 논바닥에 내려와. 산타 복장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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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큰 자루에서 장난감, 초콜릿, 빵, 이런 거를 꺼내 던져주면서 마산리까지 걸어갔 어. 먹을 거 지천이었어 거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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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용석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부대를 오픈해. 가면 초코우유, 주스 같은 먹을 것을 많이 주었어요. 크리스마스 축제가 기억이 나요. 문화적 충격이었죠. 당시 마을엔 혼혈아 들이 많아서 복지재단 쪽에서 관리하면서 미국에 보내기도 하고. 학교에 같이 다니 기는 했지만 이국적인 것 때문에 놀림을 많이 당했어요. ⋯ 유치원 때 미키마우스 만화영화를 처음 봤어요. 가설극장도 마을 안에 만들어져서 비가 안 올 때는 가서 공연을 봤던 기억이 나요.” - 안종수

1971년 12년 근속 감사패를 받는 이인항 씨 (왼쪽에서 첫번째) (사진제공 : 이인항)


당시 미군부대에 근무(미 1군단 1대대 17포대에서 8인치 자주포를 정비)했 던 이인항씨는 감자와 빵, 고기로 이루어진 미군부대에서의 식사와 PX¹⁾에 서 판매되던 1달러짜리 담배, 양주 ‘조니 워커’ 등을 기억하고 계셨다. “당시 미군부대에서는 한국 사람들을 다 도둑놈으로 여겼어요. ‘스레끼 보이’라 고 했지. 너덜하게 입고 가서 미군부대 물품 가지고 나오면 오렌지 하나, 담배 한 갑... 비누 한 개(미용비누 RUX)가 당시에 300원(10전) 정도 했는데 1000원에 팔았 지. 사가는 사람이 다 있어. 직접 서울로 가기도 하고 서울에서 사람이 오기도 하 고. 자동차 부품도 미군들은 그냥 다 버리니까 하나 가지고 나오면 그걸로 네 명이 막걸리 먹고.” - 이인항

1960년대 용주골 유바이로 추정되는 여자들. 당시 미군부대의 물건을 받아 파는 사람을 ‘유바이(You buy)’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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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Misc Pictures near the DMZ 2.`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5 November 2016. http://qsl.net/wd4ngb/miscdmz2.htm.

1) 정식 명칭은 Post Exchange로 일상용품이나 음식물 따위를 면세 가격으로 파는 군부대 기지 내의 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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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담배, 등의 기호품, 음악테입, 운동용품, 특히 가전제품은 우리나라 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을 지니 고 싶어했다. 온 국민의 더 나은 생활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소비 문화의 충족 을 기대하는 선망의 공간이 PX였다. 그리고 PX의 노무자들을 통해 나오는 달러와 모든 물건들을 어떤 방법으로라도 빼내어 팔아 돈을 챙기려는 사람 들, 이러한 물건들을 구매자들에게 전달해주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로 PX는 한국의 물질문화와 소비문화가 조장되는 곳이기도 했다.²⁾ 전쟁으로 피폐해 진 한국 땅에 상륙한 자본주의 미국의 화려하고 쾌락적인 물질문화는 당장 의 배고픈 배를 채워줄 고마운 것이었던 반면 지켜야할 도덕적 가치를 한쪽 구석에 치워두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마을에 돈이 있어도 ‘아가씨’ 하는 사람만 있지. 음력 7월 보름에 딸을 낳았는 데 당시 쌀이 없어서 장뇌쌀을 2말 갖다 먹었는데, 2달도 안되어 3말을 갖다주었 어요. 세월이 각박한 시절이었어요. ⋯ 여기 70~80 먹은 사람들, 다 아버지 재산 아 들들이 해먹었지. 밤고지가 그렇게 생겼잖아요. 술 들어간 김에 외상하다가 다 날 라간 거죠.” - 전영춘

2) 김현숙, 「GI와 PX 문화를 통해 본 미국문화 - 1950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18집, 2006.10,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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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용주골 기지촌의 미군과 성노동 종사 여성. 양색시 혹은 양공주라 불렸다. `Misc Pictures near the DMZ 2.`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5 November 2016. http://qsl.net/wd4ngb/miscdmz2.htm.

군대를 위한 매매춘은 야전군의 무기만큼이나 필수적이라, 이는 다른 곳 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 주둔 중인 미군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알고 있 다. 그래서 미군기지 정문 바로 앞에 즐비한 술집과 사창가를 볼 수 있다. 매 매춘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 군인에게 주는 포상의 일환으로 행해지고 있 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헤아려야 한다. 포상을 받은 미군이 기지를 나설 때면 정문에서 콘돔을 지급하라는 군 차원의 명령이 하달된다. 이런 식으로 매매춘을 할 수 있다는 건 미군들에게 축복이나 다 를 게 없다. 또 군대가 자신의 병사들을 위해 매춘을 조장하는 것은 통제적 16

요소로서의 의미도 갖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병사들이 휴가 중일 때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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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군대에서의 매매춘 은, 집단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얘기되는 자기희생을 겨냥해 집단의 결 속을 강화시키는 핵심동인으로 작용하는게 틀림없다. “사내들은 어쩔 수 없 다”는 말은 이러한 매매춘의 중심 기능을 설명하는 데 즐겨 사용돼 왔다.³⁾ 미군으로부터 달러를 벌어들이는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1962년 6월 법무부•내무부•복지부 등이 합동으로 전국 104개소를 성판매를 허용하 는 ‘특정지역’으로 지정하고 그 가운데 9개소를 서울에, 61개소를 경기도 에 설치했다. 1964년, 145개 특정지역 중 60%인 89개가 경기도에 위치했고, 1972년 이후에도 70개 구역이 유지됐다. 특정지역 상당수가 미군기지 인근 이었는데, 미군 전용 특수업소는 보건사회부 예규 ‘간이특수음식점 영업위 생행정사무취급요령’(1962)에 의해 미군부대 반경 2킬로미터 이내로 제한 됐다.⁴⁾ “여기(밤고지)에 파견지소가 있을 정도로 사건 많았어. 지금의 파출소, 당시 파 평지소는 장관 백 국회의원 백이 있어야 오는 자리였지. 오려면 상납도 많이 해야 하고. 미군들하고 한국사람들도 홀에서 싸움 많이 했어. 원래는 한국인 출입 금지인데 주먹 좀 쓰는 사람들은 들어갔지. 그러면 미국 헌병대 한국 경찰 합동으로 내려오는 거야. CID(헌병대) - HID(첩보대) 보다 높은 정보기관 - 에서도 많이 내려왔어.” - 김남열

3) 산드라 스터드반트, 브렌다 스톨츠퍼스, 김윤아 역, 『그들만의 세상 - 아시아의 미군과 매매춘』, 잉걸, 2003, 13쪽. 4) 김원, 「60~70년대 기지촌 게토화의 변곡점 - 특정지역, 한미친선협의회, 그리고 기지촌 정화운동」, 역사비평 112, 2015 가을,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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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토의 중인 주민들 (사진제공 : 안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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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친선회 모습. 김남열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故 안인호씨(왼쪽에서 세 번째)가 보인다. 맨 왼쪽은 통역관이다. (사진제공 : 안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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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과 함께 있는 故 안인호씨(뒤에 서있는 사람들 중 왼쪽에서 두 번째)와 면장 정씨(앞줄 오른쪽), 그 옆 통역관이 함께 마을 일을 논의하고 있다. 뒤로 지금은 불타 사라진 고목나무가 보인다. (사진제공 : 안종수)

마을길을 걷고 있는 미군과 주민 (사진제공 : 안종수)


한편 김남열씨는 안종수씨의 부친이신 故 안인호씨와 ‘한미친선회’를 통 해 미군과 마을 주민 사이 여러 일들을 논의하셨다. 한미친선회는 한 달에 한 번 모였으며 면장, 경찰 지소장, 기관장 등이 모여 협조사항을 이야기했 다. 특히 출입금지 지역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 타협을 하거나 홍수로 하천 다리가 떠내려갔을 때 미군부대의 장비를 동원해 도움을 주는 경우 등이 있 었다. ‘한미친선협의회’의 출범은 당시 전국적으로 발생한 미군의 기지 폭력 으로 인해 한미간의 감정을 조정 및 해소하기 위한 방침⁵⁾이었으나, 이를 계 기로 미군이 고아원과 영어강습소를 지어주고 교량을 놓아주는 등 지역사 회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Camp McIntyre 인근 마을 아이들. 미군부대 안에 들어가서 공부했던 소년단의 전쟁 고아들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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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Camp McIntyre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qsl.net/wd4ngb/cpmcintyre.htm.

5) 김원, 위와 같은 글,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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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단은 전쟁 고아들 모아놓고, 미군부대 말부대 - 남미상회 앞에 있던 Camp Saber - 에 아침에 들어가서 아침 먹고 그리고 거기서 공부를 해. 공부도 시켜주고 영화도 보여주고. ⋯ 그 고아원에 이층 침대 삼층 침대 있잖아요. 철침대. 그걸 다 천 막으로 해주고.” - 임용석

“홍수로 다리 떠내려가서 하천공사 할 때, 미군부대에서 와서 장비로 도와줬지.” - 김남열

미군 장비로 홍수 피해를 복구하는 모습 (사진제공 : 김남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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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교회인 파평장로교회 예배당 신축에도 미군부대의 도움이 있었다. “파평교회 서집사님 딸이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어요. 미군이 교회에 따라나와 서 만났는데, 그 미군이 한국군으로 따지면 주임상사급이지. ⋯ 서집사님이 미군한 테 교회를 지어달라고 해서 내가 교회 지을 자리는 잡고, 미군부대 트럭 내주면 고 랑포에서 하루 두 번씩 모래 실어 날라서 벽돌공장에 파는 거야. ⋯ 그래도 돈이 많 이 모이지 않으니까 월급날 오래요. 가서 보니 고아원, 양로원에서 와서 앉아 있으 면 미군들이 나가면서 성금을 기부하는 거야.” - 이호영

22 파평교회의 ‘작은 운동회’ 때 기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이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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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밤고지의 번화가 23

“(가게를)조그맣게 차려도 (물건은) 다 있었어요. 법원리에서 승합차가 20분 간격 으로 있었는데 항상 만원으로 타고 다녔죠.” - 전영춘

“당시는 서울로가는 직행버스가 있었어요. 장파리에서 두포리, 법원리, 용주골, 서울(불광동)까지 갔죠.” - 이호영

1960년대 용주골을 지나는 버스. 밤고지에서 서울로 가던 직행버스로 추정된다. 사진출처: `Misc Pictures near the DMZ 2.`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5 November 2016. http://qsl.net/wd4ngb/miscdmz2.htm.


1960년대 파평면 두포리와 마산리. Camp Brittin 뒤로 밤고지 마을이 보인다. 지금은 사라진 많은 집들이 산 아래 빼곡하다. 사진출처: `Camp Saber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4 November 2016. http://brucerichards.com/army/saber.htm.http://brucerichards.com/army/sabe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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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밤고지 평촌상회 앞 다리 사진출처: `Camp Saber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4 November 2016. http://brucerichards.com/army/sabe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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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촌상회 앞에 앉아 활짝 웃고 계신 안종수씨의 어머니(오른쪽) (사진제공 : 안종수)

1960년대 말 밤고지 평촌상회 앞 다리 사진출처: `Camp McIntyre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qsl.net/wd4ngb/cpmcintyre.htm.


현재 남촌식당이 있는 부근에 있었던 마산리 버스정류소 옆에는 구둣방 과 다방, 사진관이 있었다. 잡화점을 따라 마을 안길로 들어오면 신생약방이 있고, 지금은 사라진 수많은 초가집들이 산 아래에 빼곡했다. “유류저장고가 있었어요. 기름이 논으로 스며들 만큼 많이 내려와서 깡통으로 기 름을 걷어내서 불놀이를 하기도 했어요. 기름이 스며든 땅에 불을 지르면 한참을 탔어요. ⋯ 옆집에 마리스라는 흑인 혼혈아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함께 놀았던 기 억이 나요. … 미군홀은 미군 전용이었고 낮에는 문이 닫혀 있었어요. 여름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본 안의 풍경은 당구대가 있었고 음악이 흐르고 그곳에서 춤을 추 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 안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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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밤고지 세븐 클럽(Seven Club) 사진출처: `Camp McIntyre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qsl.net/wd4ngb/cpmcintyr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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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밤고지 스윙 클럽(Swing Club) 사진출처: `Camp McIntyre Korea.`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3 November 2016. http://www.qsl.net/wd4ngb/cpmcintyre.htm.

1960년대 용주골 부근의 미군 클럽 내부. 사진출처: `Misc Pictures near the DMZ 2.`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5 November 2016. http://qsl.net/wd4ngb/miscdmz2.htm.


“미군 클럽은 100평은 되지. 카운터, 의자, 테이블 쭉 있고 춤추는 무도장 있고.” - 김남열

“미군이랑 같이 홀 - 지금은 폐허가 된 새마을 홀 - 에 들어가봤지. 여자가 30명 넘게 있었지. 주방에는 간단한 안주(소세지, 계란 튀김, 닭 튀김 등)만 했고, 술은 면 세 맥주였어. 맥주 하나에 10센트(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300원)였는데, 미군이 주 로 가지고나오면 파는 거지. 홀 주인은 한국사람이었고.” - 이인항

약방에서 쭉 올라가며 집들이 있고 ‘스윙홀’이 있었다. 스윙홀 옆에는 가게 가 있었고, 약포와 미장원, 검진소 등 많은 상가와 집들이 있었다. “태양미장원은 검진소 바로 옆, 열칸박씨 집 바로 옆에 있었지.” - 김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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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포리 신생약포(신생약방)

마산리 사진관 앞 고급 자동차

(사진제공 : 안종수)

(사진제공 : 안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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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칸박씨네는 우리 집에서 세 번째 집이야. 우리도 가게 외에 방 여덟 개 있었는 데 ⋯ 방 하나당 한 달에 1000원, 비싼 것은 2000원, ⋯ 하꼬방(판자집) 식으로 달 아내.” - 김남열

“대상 - 미군, 양색시, 동네주민 등 - 에 따라 여러 가게가 있었어요. 지금 밭인 곳 에도 노광선씨네 가게가 있었어요. 그 옆에도 가게 세 개가 있었지. 하나는 연탄창 고, 김기선씨 댁 가게, 임운봉씨가 두포리로 떠나면서 김남열씨가 가게 내고. ⋯ 잡 화점 이름은 없었어요. 미군들 있을 때는 큰 가게만 영어로 간판이 있었지.” - 전영춘

1960년대 미군부대 안. 한미친선회를 준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안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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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용주골 부근의 성노동 종사 여성들 사진출처: `Misc Pictures near the DMZ 2.`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5 November 2016. http://qsl.net/wd4ngb/miscdmz2.htm.

1960년대 용주골 부근에서 찍힌 미군과 여성 사진출처: `Misc Pictures near the DMZ 2.`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5 November 2016. http://qsl.net/wd4ngb/miscdmz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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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용주골 부근에서 찍힌 미군과 여성. 미군의 아이로 보이는 아기를 안고 있다. 사진출처: `Misc Pictures near the DMZ 2. ` Bruce Richards's Web Page. n.p., n.d. Web. 15 November 2016. http://qsl.net/wd4ngb/miscdmz2.htm.

1960년대 밤고지의 여러 이야기들 중 점차 초점이 맞춰진 곳은 양공주 혹 은 양색시라 불리는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이었다. 여성의 성매매는 기지촌 지역을 둘러싼 복잡한 경제기반 아래 이루어졌 다. 술집과 매춘업소의 주인들은 술과 음식뿐 아니라 여성들의 성노동을 통 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식료품가게, 주류상, 구멍가게도 술집 고객들에게 의존한다. 식당, 패스트푸드 테이크아웃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 티셔츠와 모자 판매점, 당구장 역시 즐비하다. 사내들의 눈을 끌기 위해 잘 차려입고 일하러 가야 하는 여자들을 상대하는 옷가게와 신발가게도 아주 많다.⁶⁾ 또 한 여성의 성노동 매매는 집주인에게는 집세로, 옷과 시트를 세탁하고 미군 의 군복과 속옷, 양말을 빨아서 다림질해주는 여성들에게는 품삯으로, 호 텔이나 클럽에서 경비를 서거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현지 남성 에게는 임금이 되어 지역경제를 뒷받침한다.⁷⁾

6) 산드라 스터드반트, 브렌다 스톨츠퍼스, 김윤아 역, 위와 같은 책, 393~4쪽. 7) 산드라 스터드반트, 브렌다 스톨츠퍼스, 김윤아 역, 위와 같은 책, 394쪽.


저마다 가슴 한 편에 사연을 품고 기지촌으로 유입된 여성들은 숱한 오해 를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인신매매의 올가미에 걸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 때문에, 남성의 폭력 앞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혹은 실상도 모른 채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 하나에 무너져 기지 촌이라는 수렁에 빠져버린다. 한편 기지촌에서 매매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강대국과 약소국, 제국주의, 전쟁, 군대, 주둔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 일상적 차별과 폭력에 노출된 여성이 있어야 한다. 기지촌 매매춘에 종사하 는 여성은 이런 복잡한 함수관계 속에서 도출된 하나의 결과물이다.⁸⁾

1960년대 밤고지 논길 (사진제공 : 안종수)

지금은 다시 한적한 농촌이 된 밤고지에는 이전의 화려함과 시끄러움은 사라졌다. 미군기지가 나가면서 썰물과 같이 그 많던 사람과 가게들도 한순 간에 빠져나가고 이제는 당시를 기억하는 어르신들 몇몇 분만 남아계신다. 그 당시의 기억은 어떤 이에게는 풍요롭고 즐거웠던 기억으로 어떤 이에게 는 배고프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다양하게 남아 있다. 밤고지 주민들이 함께 32

만들어 갈 앞으로의 모습은 훗날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8) 산드라 스터드반트, 브렌다 스톨츠퍼스, 김윤아 역, 위와 같은 책,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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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제망매가(祭亡妹歌)

문승준

서곡(序曲) - 이름으로만 남은 스물세 살 내 누이의 짧은 삶을 위하여 -


꽃무늬 양산과 손가방을 함께 움켜 쥐고, 엄청나게 높은 굽의 구두를 신 고도 그니는 간신히 흰둥이 마이클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파운데이션을 덕지덕지 바른 그니의 얼굴에서는 금방이라도 속눈썹이 굴 러떨어질 것 같았다. 태양미장원 거울 앞에 앉아 있던 큰이모와 미용사와, 검둥이만 상대하 는 스잔이 머리를 볶고 있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큰이모가 칠면조 같은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이모는 마이클과 엘리사를 번갈아 올려다보고 내려 다보고 하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유어 하니 베리 굳 남버 완.」 이모가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자 마이클 자식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바보 같은 놈의 웃음에 엘리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마이 코쟁이 베리 나이스.」 큰이모는 끼룩끼룩 웃었고 뚱뚱한 미용사와 스잔도 소리 죽여 웃었다. 「어디 가나?」 웃음을 거둔 큰이모가 물었다. 「법원리.」 큰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이클과 엘리사 뒤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너도 어디 가니?」 34

엘리사가 대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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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서 뭘 사주려고요.」 그니는 내게 털보 영감네 가게에서 쪼꼬렛을 사준 다음 말했다. 「마리아와 나누어 먹어요.」 말끝을 휙올리는 것과 존댓말을 쓰는 것이 그니의 말버릇이었다. 「--- 마리아가 누구예요?」 그니는 흐득흐득 웃었다. 그러더니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 네 아버지가 아무 말 안했니?」 「------」 「마리안 네 동생이란다.」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엘리사와 마이클은 연방 히히 덕거리며 신작로 쪽으로 걸어갔다. 태양미장원 뒷채인 큰이모네 집에서 하숙하는 열 한 명의 양색시 중에 서 엘리사는 가장 친절하고 사근사근했다. 그니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쪽마루 위에 벌거벗고 앉아 있지도 않았다. 그니는 늘 다른 양색시들의 곤 란한 일을 앞장서서 해결해주려고 했지만 주제넘게 아무데나 껴들지는 않 았다. 소문에 의하면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다녔었다고 했다. 그 소문에 걸 맞게 그니는 그림을 기막히게 그려냈다. 양색시가 되기 전엔 미군부대 근 처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그들이 오후의 햇살 속으로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리아 라는 이름의 아이가 내 동생이라면 엘리사가 나의 새어머니가 되는 것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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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묘한 서글픔 같은 것이 가슴 한귀퉁이를 간지럽혔다. 어머니가 생전에 한번도 여기 큰이모네 집에 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멀미 때문이 라고 했지만 사실은 엘리사 때문이었을까. 나의 상상력은 갈피를 잡지 못 하고 너울거렸다. 멀미라면 나도 어머니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곳에 올 때 마다 나는 악몽처럼 지긋지긋한 멀미에 시달렸다. 멀미약을 마셔봤지만 아 무 소용이 없었다. 버스가 용주골 입구에 들어설 때쯤이면 눈앞이 노랗게, 주황색으로 변하고 거리의 간판들. 영어로 휘갈긴 글씨들이 빙글빙글 돌 아가는 것이었다. 건물들은 낄낄거리며 휘청거렸다. 그곳은 거대한 스폰지 위에 세워진 도시 같았다. 너 왔니, 또 왔니. 왜 왔니. 용주골은 숨을 쉴 때 마다 썩어 니글거리는 혀연 쇼팅 냄새를 날리며 내게 말했다. 뭘 주랴. 캔 디, 쥬스, 칠면조 고기, 플레이보이 잡지가 펄럭이고 있었다. 양변기 같은 이 빨과 젖소처럼 훌렁이는 가슴들이 신기루처럼 떠 있었다. 법원리에서 내려 합승버스로 갈아타고 나서도 내 헛구역질은 계속되었다. 물경 세 시간 이 상을 시달리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큰이모네 집에 가기를 망 설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름과 겨울이 올 때마다 늘 그 끔찍한 여행이 시작될 날을 기다렸다. 큰이모네는 내가 멀미를 견딜 만큼의 풍요 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집힌 내장을 채워줄 모든 것이 있었다. 거긴 작 은 아메리카였고 천국이었다. 훗날 나이가 들어 차멀미란 말을 들거나 멀 미약 광고만 나오면 나는 반사적으로 그 작은 기지촌으로 가는 길고긴 여 36

행을 떠올리곤 했다.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장거리 버스 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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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했으므로 버스를 타는 일엔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분명 내가 겪은 차멀미는 버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물리적인 흔들림이 아니었다. 아메리 카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풍요와 넉넉함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 꺼이 내가 먹은 황인종의 음식 찌꺼기들을 모조리 토할 수 있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했다. 그건 마치 세례의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맹세하건데 기 묘하게도 나는 그곳으로 갈 때만 멀미에 시달렸지 서울로 돌아올 때는 단 한 번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멀어지고 나는 오후의 고요함 속에 버려졌다. 억지로 멀미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포츠형 머리로 깎아버린 것 같이 헐벗은 산 너머 어딘가에서 희미한 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마른천둥 같은 소리였다. 임진강 쪽 플라타너스 사 이에서 합승버스가 달려나왔다. 버스는 마을 입구에서 잠깐 섰다. 그 사이 에 뒤를 따라온 군용트럭이 뽀얗게 먼지를 뿜으며 버스를 앞질러갔다. 카 튜사들인지 한국군인인지 모두다 악을 박박 쓰고 있었다. 유아 마이 선샤 인 마이 은리 선샤인― 철조망이 달려가고 콘셋트 기지들이 흘러가고 부 대 앞에 선 보초가 철모를 고쳐 쓰며 이를 드러내고 그 뒤로는 망루들이 우두커니 여름 오후를 지겨워하고 있었다. 나는 공연히 우울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황당그레 비어 있었다. 먹을 것을 유난히 밝히는 이모부 도, 면상이 온통 할퀸 자국 뿐인 이종사촌 동생 놈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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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지난밤엔 이모부와 함께 거나하게 위스키를 마셨다. 그리고 늘 하는 버릇대로 나를 세워놓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나는 아버지가 좋아하 는 유행가들을 좔좔 외워 부를 수 있었다. 내 노래와 대결이라도 하듯 이 종사촌 동생 놈이 양키 노래를 꽥꽥 뽑아댔고 유쾌해진 아버지는, 일본말 을 섞어가며 큰이모와 셋이서 숙덕대다가 나를 보고 빨리 자라고 헛군밤 을 먹였다. 오늘 새벽 아버지는 혼자 서울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엘리 사가 말한 것을 확인해 볼 수 없었다. 나는 쪼꼬렛 상자를 든 채 집안을 어슬렁거렸다. 길쭉한 마당을 두어번 이나 어슬렁거렸다. 싫증이 났다. 한 손으로 펌프 손잡이에 매달렸다. 꿈쩍 도 하지 않았다. 펌프 옆 맨드라미가 꽃대를 흔들며 나를 비웃었다. 나는 시멘트로 만든 물통 속에 손을 넣어 꽃대 위에 물을 뿌렸다. 문득 물이 닿 은 손이 뭉클했다. 나는 황급히 손에 묻은 물을 떨어냈다. 뿌려진 물속에 환각처럼 수많은 여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여름날 오후 양색시들은 대문을 굳게 잠그고 한꺼번에 목욕을 하곤 했 다. 여자들이 목욕을 할 때면 남자들이란 남자들은 모조리 내쫓겨 마을을 서성거렸고 집안에선 여자들의 환성과 물소리만 햇살을 퉁겨 올렸다. 나의 이종사촌 동생 놈은 어떻게 목욕하는 여자들을 몰래 훔쳐 볼 수 있 는지 알고 있었다. 놈은 나를 끌고 집 뒤로 난 작은 골목으로 나를 끌고 갔 다. 옆집과의 사이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틈이 있었는데 그곳은 곧 연탄이 38

나 허드렛물건을 넣어두는 작은 광의 뒷켠이었다. 벽면엔 큼직한 광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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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이 한 개 나 있었다. 「혀엉이 먼저 봐아.」 놈이 인심을 쓰는 척 했다. 나는 선뜻 얼굴을 가져다 대지 못했다. 놈이 재촉했다. 「최누나하고 엘리사가 최고다.」 놈은 들뜬 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가져갔다. 먼저 광 속의 어둠이 내 시야를 막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망원경의 속통 노릇을 하여 저만큼 햇살 내리는 뜨락 에서 물을 뿌리고 있는 여인들을 단번에 내게로 끌어왔다. 금빛으로 찬란 한 속살 그리고 물에 젖은 머리카락들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비스 듬히 등을 보이며 펌프 물을 긷고 있었다. 그니의 허리와 어깨와 반추형의 가슴이 노래라도 하듯 출렁이고 있었고 그 때마다 펌프에선 생명처럼 신 선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최누나라고 부르 는 키 큰 양색시일까. 아니면 엘리사일까. 이종사촌 동생 놈이 나를 끌어 당겼다. 「그만 보아, 씨벌.」 놈이 나를 젖히고 광솔 구멍에 눈을 대었을 때 나는 놈의 뒷통수를 후 려갈겼다. 「집어쳐 드런 놈아.」 목욕을 하고 난 그니들은 모두다 선녀들이었다. 아아, 날개옷을 빼앗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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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들. 그랬다. 그니들 중 몇몇은 비누 냄새를 풍기며 마루 위에 앉아 있었 다. 양담배의 회색연기는 그니들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타오르고, 그니들은 인간의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벌거벗은 그대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치 그니들이 앉았던 것처럼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나도 그 니들처럼 한숨을 내뿜었다. 갈테면 가봐. 나뭇꾼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벌거벗고 어디든 가 봐. 뻔뻔할 정도로 의기양양했을까. 아니면 애 원을 했을까. 나하고 한 이태 살면 내가 날개옷이 있는 곳을 찾아 줌세. 그 렇게 선녀를 유혹했을까. 날 수만 있다면, 날개옷만 있다면 그니들은 단번 에 이 더러운 기지촌 하늘을 날아올라 갈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 게 날아서 그니들은 어디로 갈까. 아메리카로 가는 것일까. 지상에서 허둥 거리는 나무꾼을 마음껏 조롱하면서 말이다. 어디 있을까. 그니들의 날개 옷은. 그니들은 언제 날개옷을 입을 수 있을까. 텅 빈 댓돌 아래 작은 신발이 굴러 있었다. 빨간 가죽구두였다. 어른의 것 이 아니었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가 바로 엘리사의 방이었다. 손을 뻗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들큰한 묵은 치 즈 냄새가 퉁겨져 나왔다. 마이클의 노랑머리가 금방이라도 내 뒷덜미를 움켜쥘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에 쫓기듯 엘리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햇빛 속에서 어둠으로 들어온 탓인지 눈앞에 검정 헝겊이라도 둘러친 것 같았다. 눈을 껌뻑여 방안에 있는 것들을 둘러보다가 나는 흠찔 놀랐다. 40

방 한쪽에 분홍 커텐이 드리워진 침대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누군가 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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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려 있었다. 들창에서 회미한 햇살이 내려와 흘러내렸다. 나는 한 걸음 침 대로 다가갔다. 여섯 살쯤 된 작은 계집아이였다. 머리카락은 금빛 털실처 럼 북실거렸고 목덜미가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뽀얬다. 계집아이는 침대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얇은 흰 블라우스의 몸통이 규칙적 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아이의 옆얼굴로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엘리사 가 말하던 마리아라는 계집아이가 분명했다. 나는 잠시 침대 모서리에 서 있었다. 잠든 공주를 깨우기 위해서는 입맞춤을―갑자기 계집아이가 벌떡 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집아이는 버럭 소릴 질렀다. 돌조각이나 얼음 조각이 튀는 기분이었 다. 「싼 오브 비치!!」 눈알이 파랬다. 뺨은 통통했고 입술은 그린 것처럼 예뻤다. 서양인형을 닮았지만 코는 납작한 편이었다. 「너, 나한테 말한 거니 ?」 계집아이는 오후의 낮잠에서 막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몽롱한 눈으로 나를 을려다보다가 계집아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금 낮은 소 리로 다시 소리지르는 것이었다. 「싼 오브 비치 !!」 쪼꼬렛 상자가 휙 날아와 내 가슴을 치고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들어 나 도 계집아이의 머리에 던졌다. 상자가 찌그러지며 쪼꼬렛들이 굴러 떨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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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계집아이가 방바닥에 자빠지는 시늉을 하더니 엄청난 소리로 울어젖히 기 시작했다. 나는 어린 계집아이가 그렁게 엄청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에 놀랐다. 나는 그 소리보다 더 크게 욕을 해 주었다. 「순 쌍년. 튀기년. 잡종년.」 계집아이가 자신의 노랑머리를 마구 잡아뜯었다. 발버둥을 치느라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났다. 나는 욕을 퍼부으며 엘리사의 방을 빠져나왔다. 퉁퉁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댓돌 위에 있던 계집아이의 신발을 힘 껏 걷어찼다. 방문이 하나 열리고 여자가 벌거벗은 윗몸을 내밀었다. 「왜 이렇게 시끄럽냐.」 제인이라고 불리는 양색시였다. 낮인데도 여자의 눈은 게슴츠레 풀려 있 었다. 술을 한잔 마신 것 같았다. 「누구야, 으응, 지나 그 계집아이 소리 아냐. 아이, 정말이지 그년 땜에 못 살겠네.」 궁시렁거리더니 제인은 나에게 말했다. 「니가 때렸냐? 왜 벌통을 건드리고 그래애. 가서 큰언니나 데려와, 빨 리.」 큰언니란 나의 큰이모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찾으러 갈 필요도 없이 큰이모가 미장원과 마당 사이로 열린 문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42

이모는 다짜고짜 엘리사의 방으로 달려가더니 홱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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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요녀언, 뚝 그치지 못해?」 큰이모는 뚱뚱한 몸을 마루 위까지 끌어올리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이모는 날렵하게 엘리사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계집아이의 울음이 두어 번 거세지는 듯했으나 곧 잦아들었다. 「지나 저건 큰언니밖엔 못말려.」 제인이 벗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엘리사는 마리아라고 하던데요.」 「홍 마리아든 예수든 알게 뭐냐. 아무렇게 부르면 어때. 어차피 지 딸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거야. 고년 땜에 시끄러워 죽겠어.」 제인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이것아, 너 같은 수컷들이 계집년들을 잘 간수하지 못하니까 우리 같은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기울어져 가는 햇살을 받은 마루는 아직 뜨거웠다. 엄청나게 잘못한 기 분이었다. 적어도 그런 욕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큰이모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는데, 남자답게 사과해야겠는데 방안은 아무 일도 없는듯 조용하기 만 했다. 나는 대문 밖으로 나왔다. 낮 동안의 휴식을 끝낸 마을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야행성의 삶에 익숙한 모습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바 람이 설렁이며 이 작은 기지촌-사람들은 이곳을 밤고지라고 불렀다. 그것 은 마을 입구 버스 내리는 곳이 율곡리였기 때문이었다. 율곡이라니 어쩐 지 낯익은 이름이다-을 헤집고 다녔다. 혹인 병사와 히히거리고 있는 스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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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았다. 서로 모른 척했다. 작은이모집에라도 갈까. 거기 가서 이모를 졸 라 칠면조 고기라도 먹을까. 아니면 미군부대 경비원인 이모부를 찾는다 는 핑계로 캠프 오렌지를 가볼까나. 캠프 오렌지는 아이들이 불인 이름이 다. 진짜 이름은 모른다. 작년 여름 나와 이종사촌 동생, 그리고 동네 아이 들 몇 명이 어울려 그곳을 드나들었다. 유도를 배운다는 것이었다. 유도를 가르치는 것은 하우스보이를 막 졸업한 나이의 덕필이란 녀석이었는데 놈 은 늘 자기를 데이빗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아이들은 덕필인지 데이빗이 미 군부대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주눅이 들어서 아주 고분고분했다. 그래서 인가 놈은 우리들을 아주 우습게 알았다. 체육관 매트 저 편에 서서 우리끼 리 되지도 않는 싸움인지 대련인지를 시켜놓고 연방 양키처럼 히히덕거리 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마치 영화배우처럼 더욱 열심히 싸우는 척했다. 도 대체 그런 연습(?) 아니면 매트에서 이리저리 구르기, 낙법이란 것을 배우 는 척하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딱 이틀을 나가고 몸살이 났다.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거기 들어가려면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중학생 증을 정문에 맡겨야 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 끌려 얼마간 그곳에 더 나갔 다. 그리고 이모네 집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는데 후에 들은 이야기는 아이 들 중 몇명인가가 도복 담는 가방에 양키 물건을 감추어 가지고 나오다 걸 렸다고 했다. 그건 상습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덕필이는 물론 어쩌면 작은 이모부까지 그 일에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모부도 덕 44

필이도 모두 아무 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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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모는 뚱뚱한 몸을 흔들며 수박을 먹고 있었다. 접시 위에 까맣게 파리가 올라앉아 있었다. 이모는 그저 무심했다. 배가 고팠지만 그걸 보자 식욕이 똑 떨어졌다. 이모는 원래 처녀 땐 날씬했는데 몇 년 사이에 뒤룩뒤 룩 살만 찌고 있었다. 「너 왔구나. 감자 삶아 주랴?」 한손으로 씨를 뱉어내며 이모는 말했다. 「아니요.」 이모의 씰룩이는 입술과 측은하다는 눈빛은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플 레이보이도 자유의 벗 잡지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심심해서 뒷마당으로 돌아가 토끼장에서 풀을 먹는 토끼들과 놀았다. 금방 해가 졌다. 나는 살그 머니 이모네 집을 나왔다. 나는 무작정 걸어갔다. 금방 길이 끝나고 벌판이 나왔다. 거기서부터는 먼발치로 어느 농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나는 마을의 꼬리 쪽으로 나왔던 것이다. 내 뒤통수 쪽에선 연방 아메리카 의 병사들이 알 수 없는 소리로 떠들며 나를 스쳐갔다. 진한 노린내가 났 다. 논밭이 시작되기 직전의 공터에 콘셋트 하나가 누워 있었다. 그들은 그리 로 몰려가고 있었다. 아직은 발전기가 돌지 않아 호롱불을 매달고 있는 콘 셋트는 마치 커다란 무덤 같기도 했고, 초상집 같기도 했다. 찌르르 빈속을 녹일 것처럼 허기가 나를 괴롭혀왔다. 큰이모네 부엌엔 장작이 타고 밥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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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연기가 솟아오르고 식모 아줌마가 큰이모에게 되려 호통을 치고 엘리 사는 돌아왔을까. 마이클을 끌고 왔을까. 마리아라고도, 지나라고도 불리 던 그 작은 노랑머리 계집애는 대체 무엇일까.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다시는 그 산비탈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 다. 어머니는 뱃속의 내 동생까지 데리고 먼길로 가버렸다. 그건 3월의 시작이었다. 저녁때 어머니는 내게 녹두죽을 먹고 싶다고 말 했다. 내가 쌀가게에서 그걸 사오는 동안에 해산(解産)이 시작되었다. 황 급히 들어서려다 나는 부엌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녹두를 모조리 쏟아버렸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내게 욕설 을 던졌다. 「어이그, 민한 새끼. 슬어담우라우.」 늙은 산파가 왔다. 산파는 몇 시간이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가방을 흔들며 달아나듯 비탈을 내려갔다. 아버지가 막내이모에게 구급차 를 불러오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막내이모는 한참만에 구급차 대신 택 시를 하나 잡아왔다. 느닷없이 아버지가 이모의 뺨을 후려갈겼다. 어구구 소리지르며 이모는 차가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모여선 동네사람들이 아 니었다면 아버지는 이모를 짓밟았을 것이다.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어머니 는 혼수상태가 되어 업혀 나왔다. 택시는 산 아래 보이는 마을을 향해 달 려갔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택시가 달려간 곳을 바라보았다. 화장터 굴 46

뚝이 어둠 속에 묻혀 보일리가 없는데도 나는 마치 그것이 흰 연기를 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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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 것 같았다. 내가 어머니를 다시 본 것은 서대문 적십자 병원 영안실이었다. 어머니는 한 장의 사진으로 서 있었다. 아버지가 술 냄새를 뿜으며 나를 껴안았고 나 를 데려온 큰이모부가 슬그머니 우리를 외면했다. 처녀 시절 경기도 양평에 서 국민학교 선생을 하던 그때, 몇 명의 교직원들과 교정에서 찍은 사진 중 에서 어머니의 무표정한 얼굴만 크게 확대되어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어케 사네에.」 아버지는 체면도 잊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나도 함께 울어야 할 것 같 았다. 그러나 조금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가 정작 울은 건 어머니의 관 이 영구차에 실릴 때였다. 어머니는 내 손에 든 사진 한 장으로, 다시는 내 게 말을 건넬 수도 없고 다시는 내게 일본 소설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사 진으로 남았다고, 그것이 어머니의 전부라고 느껴지자 비로소 나는 세상 에서 완벽하게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깨어진 물그릇처럼 울었다. 나와 아버지들 태운 버스는 어머니가 나를 낳은 동네까지 갔고 어머니는 그 동 네 앞산 공동묘지에 묻혔다. 누가 내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종사촌 동생이었다. 「혀엉, 왜 여기 서 있어?」 나는 어물어물 했다. 「으응. 저기 홀 구경가려구?」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콘셋트 건물을 사람들은 누구나 홀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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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말하자면 이 작은 기지촌 중에도 노른자 같은 곳, 마치 배꼽과도 같 은 곳이었다. 저녁이면 법원리나 용주골에서 달려온 악사들과 여자들과 양 키들이 홀 안을 가득 채웠다. 불빛은 번개 치듯 번득였고 몇 개안되는 창문 을 통해 새어나오는 온갖 음악은 양푼을 두드리듯 거칠었다. 「해피하우스 구경 갈래, 혀엉?」 놈이 재촉했다. 나는 그 콘셋트의 진짜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나는 말없 이 앞장섰다. 마치 지옥으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홀에 다가갈수록 어둠 은 끈끈하게 우리를 둘러쌌다. 임진강 쪽에서 안개가 날아오고 있었다. 축 축하고 으실으실했다. 강에서 시오리는 떨어졌는데도 가끔은 물안개가 몰 려오곤 했다. 「조심해 혀엉.」 놈이 먼저 작은 도랑을 건넜다. 콘셋트 주위엔 엉성하게 낮은 철조망이 둘러 있었지만 사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몰려 왔고 아 무 곳으로나 들어왔으니까. 우리는 등불을 목표로 홀 입구까지 다가갔다. 입구엔 영어로 아마 해피하우스라는 뜻이 분명한 글씨들이 붙어 있었다. 그때였다. 부우웅 발전기가 돌며 홀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몇 사람인가 환 성올 지르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음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호롱불을 끄기 위해 나오고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고릴라를 닮은 사내가 껌을 뱉었다. 우리는 재빨리 어둠 속으로 숨었다. 콘셋트를 빙 48

돌아가며 사촌동생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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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지 않아?」 「------」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 형이 여기서 일한다.」 나는 건성으로 그 말을 흘려듣다가 놀라서 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형이라고 했니?」 「용성이 형 몰라?」 나는 그제서야 놈의 말을 이해했다. 용성이란 놈의 배다른 형이었다. 우 리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다. 이모집엔 거의 나타나지 않아서 나는 그의 얼 굴조차 변변히 본적이 드물었다. 그렇다고 이모나 이모부와 으르렁거리며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끔은 이모에게서 용돈을 얻어가는 눈치였 다. 「용성이 형이 뭘 하는데?」 놈은 대답 대신 나를 끌고 콘셋트 뒤편에 난 작은 문으로 갔다. 발끝을 쳐들고 놈이 들여다보더니 나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있다.」 놈이 문을 두드렸다. 몇 번 만에 빠꼼 문이 열렸다. 런닝셔츠의 청년이 우 리를 훑어보았다. 「용식이구나. 그리고---.」 그는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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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쩐일이냐.」 그는 우리를 쉽게 들여보낼 것 같지 않았다. 「으응, 혀엉이 한번 가보자고 해서.」 용식이놈이 재빠르게 내 핑계를 댔다. 「오늘은 안 되는데.」 「엄마가 뭐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물어보랬다.」 그제서야 용성이형은 우리가 들어가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곳은 주방과도 같은 곳이었다. 같은 곳이란 말은 해피하우스에 딸린 주방이라기엔 너무 더럽고 비좁았다는 말이다. 접시들이 위태하게 쌓여 있 는 곳 한 켠에 조리대가 있고 그리고 찬장이 하나 위태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곁엔 군용침대와 간이의자가 접혀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음식 찌꺼 기를 넣는 드럼통도 하나 서 있었다. 그 속은 아직 비어 있었다. 머리가 겨우 드나들만한 구멍으로 홀 안의 조명과 음악들이 스며들어 왔다. 「여기서 사세요?」 그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물통에서 물을 떠다가 커다란 주전자에 부었 다. 가볍게 석유곤로 위에 올려놓더니 허리를 굽히고 불을 붙였다. 불을 붙 이고 남은 성냥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의 입과 코에서 뭉클뭉클 양 담배 연기가 새어나왔다. 그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찾아내어 앉았다. 이 50

러한 그의 움직임은 하나로 이어져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이 부드럽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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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스러웠다. 「저녁 먹었니?」 용성이형이 도나스처럼 담배연기를 만들어 날려보내며 말했다. 「안 먹었다.」 용식이놈이 대꾸했다. 「오무라이스 어때?」 무미건조하게 용성이형은 허공을 향해 말했다. 「먹을래?」 용식이놈이 지 형을 믿고 슬쩍 내게 반말을 했다. 나는 오무라이스가 뭔 지 알지도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용성이형이 담배를 던지고 일 어나더니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날렵하고도 우아한 솜씨였다. 계란 한 개 를 깨는데도 허튼 동작 하나 하지 않았고 어떤 의식(儀式)을 거행하듯 경 건하기까지 했다. 나와 용식이 놈은 황홀한 눈으로 그의 멋진 솜씨를 구경 했다. 용식이놈의 목에서 감동하는 꼬록 소리가 났다. 용성이형이 음악처럼 요리를 연주하는 일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것 은 아니다. 예기치 못하게 음식이나 커피를 주문하는 쪽지가 들어오곤 했 다. 그래도 그의 연주는 부드럽게 줄곧 이어졌다. 그는 어떠한 방해라도 소 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용성이형의 움직임에 용식이놈이 함께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뜻밖의 일 이었다. 놈은 먼저 야전침대를 쫙 펼치더니 그 위에 커피를 담는 종이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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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처럼 휙휙 던졌다. 순식간에 줄을 맞추어 그것들이 자리잡았고 놈의 커피주전자가 더운 김을 토했다. 놈은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열 두개의 종 이컵에 많지도 적지도 않게 같은 양의 커피를 채웠다. 이런 움직임은 용성 이형과 호흡이 맞아 둘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묘하게도 용식이놈이 커피를 따라놓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주문이 왔다. 그러므 로 야전침대 위에서 커피가 식어갈 틈이 없었다. 내다볼 수는 없었지만 홀 안은 갈수록 시끄러워졌고 음악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나는 조금씩 갑갑 해지고 있었다. 다리도 피곤했다. 용식이놈이 의자를 내밀지 않았다면 주 방 바닥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나는 접은 의자에 앉았다. 꾸벅꾸벅 졸았다. 어머니 꿈을 꾸었다. 어머니는. 아주 작은 아이를, 어쩌면 인형 같은 아이를 업고 있었다. 날랜 걸음으로 어머니는 개울을 건넜다. 그때 어둠 속에서 아 버지가 불쑥 나타났다. 어머니를 막아섰다. 어머니가 아이를 고쳐 업으며 아버지의 손을 피했다. 아버지가 다시 막아섰다. 어머니가 뭐라고 외쳤다. 아버지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래, 나는 어머니의 손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에 핏기가 없어서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어머니가 내 손을 놓아준 건지 아니면 내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친 것인지는 확실치 않 다. 하여간 어머니는 숲 저편으로 걸어가며 나를 몇 번이나 돌아보았고, 나 는 가녀린 아기 울음소릴 들었는데 그것이 바람 소리인지 내가 우는 건지 아니면 어머니가 데리고 간 아기가 우는 건지 그것은 역시 확실치 않았다. 52

눈을 떴을 때 커다란 물주전자에선 김이 토해지고 있었다. 마술처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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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이스라는 이름의 그 음식이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건 달콤하고 맛 갈스러웠다. 내가 식사를 마쳤을 때 용식이놈이 말했다. 「어때, 우리형 솜씨.」 나는 남은 음식을 삼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용식이놈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러고 나서 놈이 말했다. 「커피 한 잔 할래?」 용식이놈은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냈다. 「여긴 깨어지는 건 몽땅 사절이야. 맥주도 깡통만 있다구. 접시들도 알고 보면 모양만 사기(沙器)라구.」 나는 뜨겁고 씁쓸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용성이형이 벌떡 일어났다. 「밥 먹었으면 이제 밥값을 하시지. 세상에 공짜라곤 없어.」 용식이놈이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형은 저래서 탈이야. 순 이거야.」 용식이놈은 제 머리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빙 돌려보였다. 「잔소리 마. 새끼야. 까불면 홀딱 벗겨 저기 홀에 내놓을 꺼다. 양키 놈들 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용성이형은 말과는 달리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짓눌린 사 람처럼 갑갑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릇을 모아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우리가 먹은 것만 아니라 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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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갔다가 돌아온 것까지 물에 담그고 깨끗이 닦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 고 으레 내가 해 온 일이었다. 「짜식, 아주 여기서 일해라.」 용성이형의 칭찬을 듣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설거지를 거의 마쳤을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용성이형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달려가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엘리사 였다. 엘리사가 마리안지 지나인지 하는 그 아이를 업고 나타난 것이었다. 하마터면 나는 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이는 자고 있었고 그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엘리사가 말했다. 「힘들어. 마리아 좀 받아요.」 용성이형이 마리아를 안아 내렸다. 용식이놈이 야전침대에 놓여있던 빈 커피잔들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아이는 긴 한숨을 쉬더니 경련하듯 손을 내저었다. 엘리사가 허리를 숙이고 아이를 다독였다. 「밤공기가 찬데 아이를 데리고 왔어?」 「마리아가 떨어질려고 해야지. 그리고 김치도 조금 가져 왔어.」 「그래 마이클하곤 재미있었어?」 「묻지마. 그런 얘기 재미없어.」 엘리사는 피곤해 보였다. 그니가 비로소 우리를 보고 말했다. 「웬일들이에요.」 54

용식이놈이 어물어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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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뭐, 심심해서.」 엘리사는 내게 말했다. 「마리아하고 잘 놀아줘서 고마워요.」 내가 변명을 하기 전에 엘리사는 용성이형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때 더운데 지낼만해요?」 「그럼, 아무렇지도 않아. 아주 좋아.」 용성이형은 얼음 냉장고를 열어 콜라를 두 깡통 꺼냈다. 조금 수줍어하 는 몸짓으로 그걸 따서 엘리사에게 내밀었다. 엘리사는 의젓하게 여왕처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마리아 문제는 곧 해결될 거예요.」 「그래, 호적에 받아준대?」 「잘 됐어요.」 엘리사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나는 무슨 큰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정말로 마리아란 저 혼혈 아이를 내 동생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그럼 나는 저 계집아이와 독박골에도 가고 구기동 과수원에도 가야하는 것일까. 저 아이가 학교에 가면 내가 데리고 다녀야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 각해도 그건 곤란하게만 여겨졌다. 「이게 뭐니 아이 머리가.」 용성이형이 우울하게 말했다. 용성이형이 잠든 마리아의 금발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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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머리가 이쁘대요.」 「마이클이?」 「------」 「아이에게 안 좋아. 이제 염색 같은 것 하지 마.」 엘리사의 얼굴에 음산한 어둠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용성이형이 나와 용식이놈을 힐끗 바라보았다. 용식이놈은 홀에서 들려오는 노래 소리에 발 끝을 맞추느라 다른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는 듯 했다. 나도 얼른 엘리사와 용성이형의 이야기를 못들은 척 했다. 용성이 형이 나직하게 말했다. 「--- 늦었다. 그만 돌아가라.」 그러자 엘리사가 윗몸을 흔들었다. 용성이형이 일어났다. 엘리사도 마지 못해 일어났다. 용식이놈도 머뭇거리며 일어나는 척하더니 슬그머니 주저 앉았다. 해피하우스를 떠날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넌 안가니?」 용성이형이 말했지만 계속 딴청만 부렸다. 결국 나와 엘리사와 마리아 셋 만 개구리울음이 유난스러운 밤 벌판으로 나왔다. 「잘 가.」 용성이형은 해피하우스에서 두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같이 걸어가요.」 엘리사의 간청을 못이긴 용성이형이 몇 발자국 그니를 따라 걸었다. 56

「왜 우린 이렇게 사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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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올려다보며 엘리사가 그렇게 말했다. 용성이형은 엘리사와 반대 로 땅을 내려다보았다. 「니가 날 때려 패줬으면 차라리 시원하겠다.」 그리고 용성이형은 갑자기 엘리사의 얼굴에 바짝 다가갔다. 「기다려 주겠니?」 엘리사가 내 쪽을 보며 슬쩍 몸을 비켰다. 개구리 소리들이 갑자기 악을 쓰는 것 같았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엘리사는 마리아를 고쳐 업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약속할게요.」 그 뒷말은 내게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달빛 아래 포플러 나무처럼 서 있었다. 이윽고 용성이 형이 황급히 해피하우스로 되돌아갔다. 엘리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마리아하고 놀아줘서 고마와요.」 그건 아까도 말한 이야기였다. 엘리사가 개울을 넘으며 비틀했다. 다행히 달빛이 환했다.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그니가 다시 걸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비밀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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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먹고 싶어요?」 「아니요. 아무 것도.」 「비밀 지켜줄래요?」 엘리사가 마리아를 등에서 돌려 앞으로 추켜안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주저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길고 가느다란 그니의 예쁜 손가락이 내 굵고 흉한 손가락에 감겼다. 그니는 나머지 내손가락까지 감싸 안았다. 그 니의 손은 너무 따뜻했다. 내 온몸에 설명할 수 없는 감미로움과 떨림이 지 나갔다. 나는 그니의 손에서 아주 작고 가녀린 불안과 두려움을 읽었다. 그 니가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용식이는 형이라면 말을 잘 들으니까.」 그러니까 나만 비밀을 지켜주면 된다는 뜻이었다. 「걱정 마세요.」 「그래요, 난 믿어요.」 용성이형과 엘리사가 서로 좋아한다는 것이 그토록 비밀스러운 일이 었 을까. 「근데 왜 저한테 존댓말을 쓰세요?」 「------」 「------」 「우리 마리아의 오빠니까요.」 58

「마리아는 엘리사 아줌마 딸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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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이젠 내 딸이 아닌 셈이지요.」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그니가 달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사 아줌마가 제 새어머니가 되는 거예요?」 그니가 푸스스 웃었다.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아요.」 엘리사가 자주 아이를 고쳐 안아서 걸음이 늦어지고 있었다. 「제가 업을게요.」 조금 망설이다가 엘리사는 내 등에 아이를 업혀주었다. 아이는 너무 가 벼워서 책 한권 무게 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도리어 나를 잠깐 휘 청거리게 만들었다. 짧은 논둑길을 지났다. 우리들의 등 뒤에서 해피하우스는 여전히 시끄럽 게 울고 있었다. 「그럼 용성이형과 결혼하실 거예요?」 「---그런 건 묻지 않는 거예요.」 그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니의 한숨에 날리듯 달은 구름 속에 들 어가 버렸다. 그니는 이야기를 바꾸었다. 「---마리아의 오빠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 「마리아는 평택에서 났어요. 마리아의 아버진 미군 중위였는데 자동차 사고로 죽었어요. 그리고 마리아 엄만―지금은 역시 세상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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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는 어린아이가 책을 읽는 것처럼 느릿느릿 말했다. 「마리안 두 해 동안이나 여러 사람 손에서 길러졌어요---.」 마을에 들어섰다. 달이 조금씩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엘리사가 마리아 를 내게서 넘겨받았다. 「엘리사 아줌마.」 나는 오랫동안 궁금하던 말을 꺼냈다. 「마리아가 우리집에 살게 되는 거예요?」 「---아니요. 그렇지만 마리안 이제 오빠가 생긴 거예요.」 태양미장원 안엔 미용사만 혼자 앉아 있었다. 엘리사가 미장원으로 들 어서려 하다가 말했다. 「난 엘리사가 아니에요. 난 --- 진짜는 이희정이에요.」 나는 역사책을 외우듯 두 개의 이름을 내 머리 속에서 반복했다. 엘리사 이희정 엘리사 이희정―마리아 지나 마리아 지나. 나는 그날 밤 마리아를 업고 길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 어디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마리아를 내려 놓을 곳은 없었다. 눈을 뜨자 나는 어쩐지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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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곡(本曲)

내 여동생 마리아 지나와 그니의 어머니인지 이모인지 모를 양색시 엘리 사에 대한 기억은 그리고 터무니없이 숫자가 부족한 조각 그림 같은 용성 이 형과 관련된 여름밤의 기억들은 내 사춘기의 암담한 터널 속을 놀랍게 도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지독한 멀미를, 그곳으로 갈 때만 하는, 돌아올 때는 말짱한, 불가사의한 멀미가 사라진 건 마지막 여행에서였다고 생각한다. 기억에 잘못이 없다면 나는 그 해피하우스의 여름밤에 이어온 겨울 방학에는 밤골 기지촌에 가 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지막 여행은 다음해 여름이었을 게다. 용 주골 지나 법원리에서 마이크로 합승 버스로 갈아타지 않아도 되도록 기 지촌 입구까지 직행버스가 달리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나는 더 이상 아버 지와 함께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시 뚜렷하지 않는데 하여간 내가 혼 자 세 시간 넘는 그 여행을 했던 건 확실하다. 그리고 큰이모가 하는 태양 미용실이 멀리 보이는 입구까지 갔던 것도 기억한다. 그러나 그 시점 이후 의 기억들은 마치 가위질한 것처럼 엉망이 되어버려서 무어라고 정리가 되 지 않는다. 나는 아마 녹슨 펌프가 보이는 쪽마루에 1시간 쯤 앉아 있다가 그대로 서울로 돌아온 것 같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볶느라 헤어캡을 뒤집 어쓰고 미장원 뒷문으로 나온 이모가 부엌으로 들어가다 말고 내게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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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여자는 잘 해 주냐라고. 그 여자라는 삼인칭 속에는 뭔가 칼날 조각 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는 순간 결심했다. 다시는 여기 오지 말아야겠다고. 그게 내가 기지촌 이모네 집에 가지 않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사 실 그 이유의 첫째는 아버지가 당신 일생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을 했 고 그래서 내 새어머니가 된 사람과 자연 껄끄러운 사이가 된 탓이었고 둘 째는, 가장 큰 이유는 적지 않은 미군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여 갔기 때문 에 기지촌의 양색시들 하숙을 정리한 이모네 식구들이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모가 내게 그 여자라고, 내 새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던 게 확실하다면 내 기억은 혼란스러워진다. 내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건 내가 중학교 2학 년이 막 되는 삼월이었고 새어머니가 온 건 다음해 가을이었으니까. 내가 기지촌 해피하우스에 갔던 건 분명 어머니가 세상 떠난 그해 여름이었고,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그후 한 번의 겨울방학과 한 번의 여름방학을 기지 촌에 가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밤골 기지촌에 간 건 중 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거나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라는 계산이다. 고 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을 가능성은 없다. 그 여름에 아버지는 당신 일 생의 두 번째로 교도소 감방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기지촌을 그리워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내가 마지막으로 밤골 기지촌에 갔 던 건 언제였을까. 사실 그게 언제였던가는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보 62

다 더 중요한 건 내 기억 속에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혼돈의 원인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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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먼저 몽롱하고 혼 돈스러운 내 삶의 연대기부터 재편집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기억의 혼돈 은 내가 대학에 입학한 그 해 여름부터 줄곧 집요하게 나를 괴롭혀 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혼돈 속에는 분명 엘리사와 그니의 딸(일단 그 렇게 생각해 두자)이자 호적상 엄연히 내 친동생이 되는 마리아 지나가 얽 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쨌든 내 내 기억은 몇 번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으로 한번 꼬여 감 기기 시작한다. 첫 번째 비틀린 지점은 내가 언젠가 엘리사가 사는 곳을 찾 아 갔었다는 기억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첫 번째는 왜 하필 막내이모가 엘리사의 집으로 향 한 길라잡이처럼 등장하는가의 문제이다. 막내이모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 나던 그 삼월의 밤에 구급차 대신 택시를 불러왔다고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았던 그 살벌한 화면을 끝으로 내 기억 밖으로 완전히 물러나 있었다. 그 러니 나는 왜 막내이모가 돌발적으로 내 기억 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되었 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삼류 극장에서 잘려나간 필름처럼 내 기억은 이모 와 퇴계로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밑도 끝도 없이 퇴 계로 대한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 ‘혹성탈출’을 보러 갔다는 것으로 이어 지다가 그 영화가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되게 심심한 영화였다는 느낌 으로 연결되고 그리고 내 기억의 필름은 느닷없이 이번엔 삼각지 육군본 부 근처 태평극장 간판이 보이는 곳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나는 이모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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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줄래줄래 따라 아래층이 음습한 창고 건물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공사 가 덜 끝난 건지 시멘트와 철근이 드러난 입구에는 ㄱ자로 노출된 수도관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멘트 냄새 나는 어둡고 엉성한 계단을 오르자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었다. 아래층과는 전혀 다른 세상 임을 강조하듯 벽은 파스텔 풍의 세련된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교실 복도 처럼 뻗어나간 좌우로 대여섯 개 이상의 방이 몇호실이라는 숫자판을 붙 이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는 단숨에 그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아차렸다. 내가 쭈뼛거리는 사이에 이모는 앞장서 복도를 걸어 들어갔고 그리고 왼편 두 번짼가에서 문이 열렸고, 아니 원래 열려 있었던 것도 같은데, 보이지 않 는 줄에 매인 개처럼 나는 그곳으로 질질 끌려들어갔다. 내가 본 침대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커다란 침대가 방안의 거의 대부분 을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거리를 향한 유리창, 수정처럼 투명한, 오후의 햇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건 내게 아름답기보다 는 뭔가 불결하고 음침한, 비정상적인 그 무엇인가를 애써 감추려는 것으 로 보였다. “아, 이거 오랜만이네. 하우 아 유?” 처음에 나는 그 여자가 엘리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눈가에 옛날 을 떠올리는 약간의 흔적이 있을 뿐 적당히 불어난 몸매에 원색의 알로아 원피스를, 별로 값비싸게 보이지는 않는 그런 걸 걸치고 아이 섀도우를 칠 64

하던 중인지 한쪽 눈두덩만 초록색이었다. 그니가 살고 있는 어딘가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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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적인 이 건물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니는 한손에 섀도우용 붓을 들고 있다가 그걸 화장대에 던져놓더니 거즈를 집어 눈두덩을 힘껏 문질렀 다. 풀물처럼 그니의 이마 언저리가 연녹색으로 물들었다. “그래, 별일 없구.” 물론 그건 나한테 하는 인사말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엘리사는 교복 입 은 나를 쳐다볼 생각도 안했다. 그러다가 이모가 나를 소개시키기 위해 낮 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이모의 어깨너머로 나를 힐끗 보면서 눈인사를 하 고 고개를 약간 까딱 해 보였다. 그니의 눈에 곤혹스런 빛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앉아요. 이리. 뭐 마실 거 줄까요. 많이 컸네요.” 옛날처럼 그니는 내게 존댓말을 썼다. 엘리사는 손을 뻗쳐 냉장고 문짝 을 재빨리 열었다가 닫더니, 시원한 게 없다고 투덜대면서 잠깐 가게에 다 녀오겠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엘리사가 사라지자 이모는 선풍기 스위치를 제일 강한 것으로 눌렀다. 찬 바람이 일어나 침대를 넘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침대 저 너머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머리를 쏙 내밀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치 목 이 잘린 인형처럼 그것은 눈도 움직이지 않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목이 올라왔고 다시 내가 놀란 얼굴을 하자 팔을 침대에 짚었다. 내 표정이나 눈 빛이 동작 전환 스위치라도 되는 듯 아이는 내가 눈을 감았다가 뜨자 부 스스 허리를 세웠다. 선풍기 앞에서 바람을 독점하던 이모가 아이에게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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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질렀다. “야, 요년, 거기 있었구나. 거기 있으면서 인사도 안 하니?” 아이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얼른 감추면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네 오빠야. 인사해.” 이모가 내 옷깃을 당겼다. 거의 동시에 아이의 고개가 숙여졌다. “지나야, 이 쪽으로 와라.” 겁먹은 강아지처럼 아이는 침대 옆의 좁은 통로를 돌아 이모에게로 걸어 왔다. 그리고 다시 이모와 내게 차례로 인사를 했다. 주황색 커다란 헤어 밴드를 맨 머리에서 장미 향수 냄새가 났다. 아이는 흰색 프릴 원피스를 입 고 있었다. 머리와 눈동자는 파랬고 얼굴은 잿물에 담근 것처럼 하얬고 코 는 별로 높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황인종과 백인종의 얼굴을 어색하게 섞 어놓은 그림 같았다. “공부는 많이 했니?” 이모는 아이의 엄마처럼 말했다. “네.” “그래, 그럼 영어도 많이 공부했겠다.” “네에.” “영어로 이야기 한 번 해 볼래?” “무슨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66

아이는 힐끗 나를 돌아보았는데 잠깐 동안의 그 눈 속엔 옛날 기지촌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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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방에서 쪼코렛을 빼앗아갈 때의 그 눈빛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아이는 모범생처럼 얌전하게 이모를 향하더니 빠른 속도로 뭔가를 읊어대기 시작 했다. 그러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몇 개의 전치사와 부사 몇 개뿐이 었다. 이모는 처음엔 감탄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아이의 말을 듣고 있더니 점점 표정이 이그러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마침내 아 이에게 집어치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이모가 두 번이나 나직하게 그만 두라고 말했어도 전혀 말투나 어조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 모의 얼굴이 폭발 직전까지 갔을 때 마침 엘리사가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 왔다. 순간 마리아는 플러그가 뽑혀진 라디오처럼 하던 말의 허리를 분지 르고 새침한 얼굴로 돌아갔다. “날씨가 말이 아니게 덥네.” 엘리사는 더위 속을 뚫고 물건을 사 온, 그래서 대단한 일을 했다는 표정 뒤편으로 마리아 지나가 영어로 지껄이던 단어의 일부가 복도까지, 어쩌면 계단 턱까지 흘러내려갔던 걸 알아차렸다는 걸 감추지 않고 있었다. 봉투를 들고 있던 엘리사는 일단 침착하게 냉장고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콜라 깡통을 네 개 들고 왔다. 아직 찬 김이 서리는 것이 었다. 그 무렵 국산 코카콜라가 없었다면 그건 미제였을 게다. 엘리사는 내 게 콜라를 권했다. “목 마를 텐데 마셔요.” 그리고 이모와 마리아에게도 한 개씩 건네주면서 이모와 나 모두를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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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말했다. “저녁 준비를 할 테니 기막힌 저녁들 먹고 가요.” 그 순간 내 머리 속으로 용성이 형의 영상이 나타난 건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해피 하우스의 주방에서 정말 기막힌 솜씨로 커피를 따르고 세상 에서 가장 맛있게 느껴지던 오무라이스를 만들던 그 사람 말이다. 나는 용 성이 형에 대해 혓바닥까지 기어 나온 궁금증을 목 안으로 돌려보내기 위 해 차가운 콜라를 연속으로 세 모금이나 삼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날 해피하우스에서의 일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동화책 속 옛날이야기에서 그렇듯 그건 일종의 주문(呪 文)이 되어 만일 내가 약속을 어기는 순간 나를 돌기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그 무렵에도 여전히 독서광이었다. 동화책은 졸업했고 카바이트 등불 아래 팔리던 허문정 지음의 40원 짜리 음담패설 같은 소설들은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한 지 오래였다. 나는 무협지에 빠져 들었다가 그 세계에서 나온 지 오래되었으며 내 독서는 조금씩 종교 철학 서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마리아는 엘리사의 눈치가 수상한 걸 고양이처럼 알아차리고 침대 뒤로 사라져버렸다. 마침 이모도 엘리사와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뜻으로 날더러 피해달라는 눈치를 던져왔다. 내가 머리를 돌렸을 때 마리 아 지나는 요정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오후의 햇살이 이제 창가 쪽으로 물 68

러나고 있었고 순찰차가 울부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배경과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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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그 여름 오후의 기지촌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문득 천박스런 핑크색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 저편으로 연초록색 문이 보 였다. 마리아 지나는 거기서 나타났고 거기로 사라진 게 분명했다. 이모와 엘리사는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를 하느라 나 같은 존재는 까마득하게 잊어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냉장고 옆의 책꽂이에서 오래된 월간 잡지를 꺼 내 보는 시늉을 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다. 그러나 어쩐지 비겁한 짓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곧 그만두었다. 나는 잠시 잘못 배달된 물 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휘장 뒤편의 문으로 들어가 보 기로 결심했다. 그게 그렇게 비밀스럽고 대담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진 않 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연초록색 문이 주는 이미지가 내게 H.G 웰 즈의 단편 소설, 그 소설 속 남자는, 우연히 발견한 초록색 문의 뒤편에 무 엇이 숨겨져 있을까 그 비밀을 찾아 헤매는, 그 남자와 나를 동일시한 것 에 불과했다. 침대 뒤로, 그리고 휘장 뒤에까지는 무난히 도착했다. 그러나 연초록색 문은 벽에 장방형의 직사각형 선만 그어놓은 유클리트 도형에 불과했고 당 연히 있어야 하는 손잡이가 없었다. 내가 퍽이나 당혹스러웠던 건 분명히 기억한다. 그러나 이미 멋대로 편집된 내 기억이란 놈을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는 언젠가부터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을 위험스럽게 넘나들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성장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내 삶의 한쪽 부분이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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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를 무시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긴 했다. 그러나 내 삶의 밑그림 어딘가에 마리아 지나가 투시되고 있다는 걸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코끼리’ 대신에 ‘모자’를 택하며 살아왔 다. 마술사들도 ‘모자’ 속에서 ‘코끼리’를 꺼내지는 못한다. 딘 알 쿤츠의 모 던 호러 소설 어딘가에는 어린 시절 읽은 소설과 연관된 기억의 왜곡으로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악의 힘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는 마 리아 지나가 내 삶의 그런 면을 보여준다고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이야긴 언젠가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은 다시 초록 문으로 향한다. 내가 초록색 위에 손바닥을 얹었을 때 그 감촉은 목재가 아니라 벽돌 그 자체였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그 러니까. 흔한 목재 방문이 아니라 그냥 벽돌을 쌓은 벽 그 자체였다는 것.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 벽이 비밀 출입구처럼 앞으로 밀려나가는 걸 느 꼈고 그리고 균형을 잡기 위해 엉거주춤 한 발을 그 속으로 내딛었다. 그곳 은 다갈색 장판이 깔린 방안이었다. 출입문과 맞은편 대칭점이 되는 벽면 에 판넬이 한 개 걸려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게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부 분적으로 확대한 모사품 유화(油畵)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발 더 다가 갔을 때 그건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의 황녀(皇女)는 마리아 지나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거기서 내 기억은 뭔가 불가해한 어떤 사건 속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끝으로 닫혀버린다. 70

내가 기묘한 초록색 문의 그 방에서 마리아 지나의 초상화를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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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그건 단지 내 공상의 산물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엘리사의 집 에 갔었다는 것 그 자체가 공상의 산물인지 그걸 확인할 단서는 아무 것도 없다. 물론 나는 그 방에 들어간 적도 없었거나 아니면 그 방에서 되돌아나 왔을 것이다. 무슨 연유에선지 엘리사가 말한 기막힌 저녁을 대접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엘리사는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 고 그래서 우리는 어정쩡하게 헤어져야만 했다. 훗날 생각해보면 엘리사는 이모를 통해 마리아 지나의 국민학교 입학 문제를 간접적으로 의논하려 했 던 게 아닐까. 그러나 엉망이 된 내 집안 형편 때문에 그걸 포기했던 것이라 고 추측해 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다. 물론 나는 내가 엘리사의 집에 갔었던 이야기를 새어머니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혼 후 단 일 년 만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남편의 구속 때문에 받은 충격에서 간신히 헤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니는 본 격적으로 나를 좀더 쓸모 있는 놈으로 만들기 위해, 나를 도통 쓸 데 없는 공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으로 보고 있는 그니는 나에 대한 ‘인간 개 조’ 사업 계획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친어머니와는 달리 그니는 여전사 와 같은 사람으로 공상 같은, 밥 먹여주지 않는 일과는 거리가 먼 딴 세상 에서 온 사람이었다. 친어머니가 지주 집 둘째딸로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면 새어머니는 제주 4•3 사태로 한라산 기슭에서 내어쫓겨난 집안에 속해 있었다. 그니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익과 우익의 그 더 러운 편가름에서 어느 편에 속했던가는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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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반도의 남쪽의 웬만한 도시를 거슬러 올라오면서 옷 만드는 공장 노 동자로 살아온 그니에겐 생존을 위한 것 이외의 일들은 전부 낭비였고 이 해할 수 없는 짓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친어머니와의 결혼에서 어떤 환 멸을 느꼈을 테고 그에 대한 반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여자와 재혼했 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새어머니의 눈에 비친 나는 그저 한 마리 병 들고 가련한 강아지였다. 그니는 나를 조련하여 멋진 경비견이나 사냥개 그 도 저도 아니면 말 잘 듣고 눈치 빠른 번견(番犬)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내 양말과 손수건은 내 손으로 세탁해야 했고 바둑과 장기 놀이를 금지 당했으며, 서점에서 책을 사오거 나 빌어오는 일조차 달갑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라디오나 신 문 또는 잡지 등에서 내가 얻어낸 기성 사회의 모순된 구조나 부조리한 현 실에 대한 어떤 불만이나 사소한 비평도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가령 새어머 니는 이런 식으로 내 사고에 가차 없는 망치를 휘둘러 댔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한 번 해 봐라.」 또는, 「전부 너보다 잘난 사람들이니까 그만한 일을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순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나는 참담하도록 내 모든 논리와 사고가 박살나는 경험을 수없이 하면 72

서 결국 새어머니의 뜻에 복종하게 되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가끔은 매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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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아왔다. 그게 그니가 살아온 철학이고 사람을 길들이는 방식이라는 너그러운 생각이 든 건 훨씬 훗날의 일이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가게 되자 새어머니는 길 쪽에 붙은 방 한 간을 헐어 내어 거기에 구멍가게를 차렸다. 당연하게도 나는 가게 종업원 노릇을 해 야 했다. 그 두 해 정도의 시간은 말하자면 내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위 한 마지막 모진 훈련이었다. 물론 나는 결코 새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아들 이 아니었다. 친자식이 없는 그니로선 그래도 내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셈이 지만 나는 그니의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그저 책귀신이며 책벌레며 주 둥이만 나불거리는 그런 놈에 불과했다. 게다가 새어머니는 내가 지독한 안면맹(顔面盲)이라는 것까지 순식간에 알아내고 말았다. 사실 나는 가게 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나의 뇌세 포는 대개 십여 명 내외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게 고작이었다. 용량 이 넘는 통에 물을 계속 부으면 더 이상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반대였다. 새로운 얼굴이 가득차면서 기억하고 있던 사람의 얼굴들이 빠르 게 사라져 간다. 사라진 자료들은 옷차림이나 목소리 또는 분위기, 장소에 대한 이미지로 변형되어 기억된다. 결국 내가 기억하는 건 얼굴이 아니라 옷차림이었고 머리 모양이거나 목소리였다. 일상생활 속에서라면 안면맹 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장사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성벽 아랫동네에서 본전 5000원으로 시작한 구멍가게는 끊임없이 사람들 을 상대해야 했고 필요에 따라 외상도 주고 또 외상을 주어서는 안 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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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가려내야 했다. 그건 언제나 나를 극도의 긴장과 무력감 속으로 몰아넣 었다. 다행인 것은 새어머니가 나의 안면맹을 그렇게 심각하고 끔찍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그건 그니의 이해 영역에서 비껴선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새어머니는 철저한 불가지론 자(不可知論者)였다. 그러므로 당신 삶은 언제나 명료하고 분명하였다. 이 해할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뭐 그렇게 난해한 분석 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새어머니는 겉으로는 어떻든 본바탕은 착하고 여린 사람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를 좀더 혹독하게 트레이닝 시 키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훌륭한 점원도 멋진 어른도 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 게다. 새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밥 빌 어먹을지 걱정되는’ 그런 놈으로 걱정하고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처음에 말했듯 내 사춘기의 암담한 터널 속에서 엘리사도 마리아 지나 도 기지촌도 잊혀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십대 후반기, 조금씩 사춘 기의 터널 밖 세상으로 떠내려가면서 나는 나의 내면 어딘가로부터 심상 치 않은, 불길하기까지 한 어떤 힘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언젠가 적당한 기회에 다시 말하겠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세 상에 대한 갈망 같은 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내가 다락방에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구멍가게를 시작하면 74

서 길 가 쪽의 방은 가게로 변하고 부엌 지붕과 천장 사이의 공간, 그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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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방이라 부르기엔 너무 한심한 공간이었지만, 그곳이 내 방이었다. 다락 방은 안방에서 쪽문을 열고 사다리 비슷한 걸 세 개 쯤 타고 올라가야만 했다. 허리를 구십도 정도로 숙여야 했고 두 뼘 정도의 들창으로 흐릿한 빛 이 들어왔다. 창문은 겨울엔 밀봉해 놓아야 했고 여름엔 벌레 때문에 열어 놓지 못했다. 다락방의 바닥은 버팀목이 없어 위험스럽게 휘청거렸다. 나 는 거기서 두 번의 여름과 두 번의 겨울을 보냈다. 겨울엔 한되들이 소주병 에 넣고 밀봉한 더운 물을 난방용으로 사용했다. 내가 얼마나 궁상스럽게 살았는가 그런 걸 넋두리 하자는 건 아니다. 다락방 어디에도 어머니의 유품들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 떠난 지 두어 달 만에 둘째이모가 몽땅 쓸어갔기 때문이다. 손바닥 두 뼘 정도 의 길이에 높이 한 뼘 정도의 나무 상자가 한 개 남아 있었는데 그건 뚜껑 에 빌로드를 씌우고, 그건 헐어서 볼품없게 되어 있었고, 다른 면엔 색지 를 바른 상자였다. 반짇고리로 사용하던 것으로 보였다. 물론 상자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건 잡동사니 다른 물건들 구석에 박혀 있었는데 별로 흥미를 끌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내가 그걸 무엇에 쓰겠다는 생각도 없이, 손이 가는 데로 끄집어낸 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쯤 지나서였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상자인데다 곰팡이 냄새까지 나는 바람에 흥미를 잃고 좀 과격하게 밀어 던졌나보다. 상자 뚜껑이 열리며 약간 가늘고 좁은 윗선반이 흔들거리 며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뭔가 쇳덩어리 같은 것이 굴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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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놋쇠빛으로 반짝거리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작 은 쇠가시들이 돋아난 원통형 실린더가 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피아노선을 대신하는 가늘고 기다란 쇳조각들이 머리빗처럼 늘어서 있었다. 실린더가 돌아가면서 거기에 붙은 가시들이 쇳조각을 퉁겨올려 음악 소리를 내는 오 르골이었다. 태엽 감는 곳으로 짐작 되는 곳은 구멍만 있었다. 나는 상자 안 을 살펴보았다. 윗선반이 빠진 자리 안쪽 왼편에 작은 비밀 서랍 같은 게 있 었다. 손잡이 대신 서랍 아래편에 작은 홈을 파서 손톱 같은 걸로 끌어당겨 야만 되는 서랍이었다. 오르골이 그 서랍 속에 있었다가 내가 집어던지는 바람에 굴러 나온 것이었다. 비밀 서랍은 애초에 선반을 빼내지 않으면 열 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대로 교묘하게 만든 수제품 상자였다. 나는 스탠드를 가져와 전등을 켜고 오르골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르 골의 몸체는 없었다. 단지 그 부속품, 소리 내는 부분만 남아 있었다. 생각 보다 낡은 곳은 없어보였다. 기지촌에서 가끔 오르골을 본 적이 있었고 우 리집에 자주 와서 살던 이모들 중 누군가 오르골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알 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머니의 유품이 아니라 이모들 중 한 사람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오르골을 작동시키기 위해 적당한 도구를 찾기 시작했 다. 다행히 망가진 사발시계의 태엽 손잡이를 찾아냈다. 좀 엉성하긴 했지 만 태엽을 감을 수 있었다. 실린더가 돌면서 맑은 음악을 토해내기 시작했 다. 음표들이 가득 차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다락방을 가득 채워 갔다. 처 76

음 듣는 음악이었다. 비슷한 멜로디가 두 번 반복 되면서 끝났다. 나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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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골을 뒤집어 보았다. 금속 표면에 예리한 못 같은 것으로 긁어낸 글씨들 이 반사되어 나타났다. 상원에게, 4282, 봄날, 입학을 축하하며 그대의 내가 아는 사람의 중에 상원이란 이름은 없었다. 불빛에 더 가깝게 비추 어보자 ‘그대의’ 다음 이어지는 부분이 칼끝 같은 것으로 긁혀 지워져 있 었다. 누가 준 것인지를 모르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는 건 쉽게 알 수 있 었다. 그러나 ‘그대의’라는 낯간지러운 소유격 표현을 그대로 남겨 둔 건 어 떤 의미에서였을까. 단기 4284년이 단기 연호라면 서기로는 1949년이 된다. 만일 ‘상원’이 만일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이라면, 호적상 이름과 실제 집 안에서 부르는 이름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면, 1930년생인 어 머니의 나이로는 만 19세가 된다. 어머니의 열아홉 되던 어느 봄날 아마도 당시에는 결코 구하기 쉽지 않았을 이 물건을 구해서 선물한 누군가가 있 었다는 것이다. 나는 상자 안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다른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오후의 가느다란 햇살이 새어들어오는 다락방에서 내려왔다. 새어머니는 가게에서 누군가와 잡담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태연한 얼굴로 가게 앞 아이스크림 통을 닦고 있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오르골을 감추 어 넣고 두 사람 사이를 살그머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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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데 가지비?」 아버지가 함경도 사투리로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언덕길 을 걸어 내려갔다. 아버지, 그래 나는 그 무렵 나를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화두(話頭), 아버지만 생각하기로, 정확하게 아버지만 지독하게 계속, 계 속하여 미워하기로 작정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경건한 크리스찬으로 변화하여 돌아왔다. 망령처 럼 따라다니던 아버지의 함경도 사투리도 완벽하게 교도소 어딘가에 버리 고 왔다. 그러나 대체로 반년이 넘지 않아 아버지는 완벽한 옛날의 아버지 로 돌아왔다. 함경도 사투리도 되살아났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따위 의 일은 까마득하게 사라졌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늘 저편, 화장터 뒷산 꼭대기 에 소나무들은 안테나처럼 서 있었다. 사람 태우는 연기를 뿜던 굴뚝에 연 기는 나지 않았다. 화장터는 경기도 어딘가로 이사 가고 이제 그곳은 곧 철 거될 예정이었다. 저녁놀이 내리고 있었다. 이럴 때 수철이라면 어떻게 했 을까 생각했다. 수철이는 내 유년에서 떠나가고 사춘기가 될 때까지 돌아 오지 않았다. 소주병을 까놓고 고모의 제사를 지내던 수철이의 모습이 흑 백 사진처럼 펄럭이며 날아갔다. 언젠가 꽃제비(소매치기)가 되었다는 소 문이 한 번 들려오긴 했다. 수철이의 얼굴 위로 삼류 영화의 기법처럼 오버 랩 되어 창규의 모습이 휙 떠올라왔다. 처음부터 창규를 찾아가려고 집을 78

나섰다고 나는 착각을 합리화 하면서 바쁘게 언덕을 내려갔다.

단편소설 / 제망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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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온 개울이 완만하게 오른편으로 구부러지는 지점에 통나무 를 이어 만든 다리를 건너면 막다른 골목이었다. 골목은 외등이 없어 늘 어 두웠다. 골목의 끝이 창규의 집이었다. 창규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곱사등이었고 나보다 더 겁쟁이였다. 그는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봄날 을씨 년스러운 오후에 전학을 왔다. 나는 그가 송아지 같은 커단 눈망울로 어두 운 복도에 서 있던 걸 기억한다. 그는 가끔 혼자 술을 마시는 늙은 홀어머 니, 들까불기 좋아하는 누이동생 하나와 함께 살았다. 학교 공부는 관심이 없었고 뭔가를 만드는 일에만 열중했다. 무슨 이유에선가는 모르겠지만 나는 등이 굽은 사람들은 시계점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미신 같은 걸 가지 고 있었다. 그래서 창규도 머지않아 훌륭한 시계점 주인이 될 것이라고 자 주 이야기했고 창규는 내 말을 싫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정규 중 학교엔 가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를 다녔는데 내 어머니 삼우제 때는 수업 까지 빼먹고 기어이 산소까지 따라와 주기도 했었다. 창규가 오르골을 보 면 아마 좀처럼 손에서 내어놓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까치발 을 하여 창규의 집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내 뒤편에서 막 내려온 어둠을 흔 들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벽에 딱 붙어섰 다. 걸어오는 사람은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머리 꼭대기만 하얗게 빛났다. 머리가 하얀 남자였다. 질질 끌고 오는 걸음마다 술내음이 묻어 있었다. 누 굴까. 그가 창규네 한 집 못 미처 작은 쪽대문을 밀려고 하다가 머리를 휙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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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구야. 누구. 어떤 새끼니.」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집 근처에 살다가 이사 간 ‘음악 가 교수’였다. 그의 집에선 언제나 알지 못하는 음악만 울려댔다. 사람들은 그를 ‘음악가 교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이사 가기 얼마 전엔 제법 오 랫동안 피아노 소리가 멈췄다. 가게에 담배를 사러온 그에게 내가 왜 피아 노를 안 치냐고 어머니가 물었더니 그는 아주 담담하게 팔아버렸다고 했 다. 그러면 더 이상 음악은 안 만드냐고 했더니 가슴을 주먹으로 텅 두들기 며 이 가슴으로 만든다고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음악가 교수가 사라진 쪽 을 향해 들리지 않게 말했다. 빨갱이 놈 외상값이나 갚지. 어머니의 말은 맨살에 닿은 선뜻한 얼음 조각 같았다. 초대권까지 나누어 주어서 어머니 아버지는 사이좋게 부부동반하여 음악가 교수의 신작 발표회에도 참석했 었는데, 그래서 음악가 교수의 음악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거듭 거듭 칭 찬 했었는데 말이다. 음악가 교수는 나에게 다가와 멱살을 잡을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가 내 리면서 말했다. 「어, 자네로군. 이 집, 친구를 찾아왔나.」 거기서 나는 순간적으로 바지 주머니에서 오르골을 빼냈다. 「이거요. 이게 뭔지 확인을 좀 해 주시면 좋겠어요.」 「뭔데.」 80

음악가 교수는 흰머리를 쓸어넘기며 약간 의심쩍은 눈으로 내 손을 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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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소주 냄새가 훅 풍겨왔다. 「이게 무슨 노랜지 좀 알고 싶은데요.」 「노래?」 그는 내게서 오르골을 받아들었다. 허공에 대고 구슬치기라도 할 것처럼 이리 저리 비쳐보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거? 거 뭐냐. 뮤직 박스라는 거 아니냐.」 「오르골이라고 하던 데요.」 「그래, 오르골이라고도 하지. 오르골은 네덜란드 말이다. 알간.」 혀끝에 술기운은 남아 있었지만 그는 교수라는 별명답게 내게 강의를 하 기 시작했다. 「오르골은 말야. 시계 기술자들이 만든 거야. 그래서 시계와 함께 발전 해 왔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의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는 오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할 말을 다 했는지 그 는 오르골을 건네주고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내게로 몸을 돌렸다. 「이봐, 자네 누구야. 왜 여기 있는 거야.」 술이란 게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는 걸 한두 번 본 건 아니지만 참 화통 터질 일이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무슨 노랜지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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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그럼 이리 들어와.」 그는 나를 무시하고 먼저 자기 집으로 휙 넘어지듯 들어가 버렸다. 대문 은 안 잠겨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마당이 길 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어서 댓돌을 몇 개 밟고 내려서야 하는 집이었다. 하 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 했다. 그는 마루 위로 올라서더니 벗어 놓았던 구두를 집어들었다. 「에라이, 잡놈들아.」 그의 구두가 한 짝 씩 차례차례 ‘잡놈’이라는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유령 들에게 날아갔다. 내일 아침이면 신발을 찾느라 고생이나 하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뭐해, 빨리 안 들어오고.」 나는 그의 깡마른 아내나 아니면 날씬하고 세련된 그의 딸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집안은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어어, 지금 아무도 없어. 어디 갔어. 걱정 마.」 나는 찌걱거리는 마루를 밟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팔았다던 피아노가 말짱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음악가 교수는 말 했다. 「자네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나?」 「아무거나요.」 82

「그럼 이런 노래는 들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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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 건반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물론 한번도 듣지 못한 노래였다. 처량하기는 했지만 또 그런대로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얼마쯤 건반을 두들기다가 나를 돌아보면서 눈에 불꽃이라도 튕겨오 를 것 같은 쇳소리로 말했다. 「이게 그 유명한 산유화다. 산유화. 김순남이의 음악이란 말이다.」 산유화가 김소월의 시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순남이란 사 람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는 건반을 와르르 때리고 뚜껑을 덮었다. 「젠장, 자네가 뭘 알겠나. 순남이가 얼마나 기막힌 음악들을 만들었는 지.」 그리고는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로 다시 말했다. 「그래, 뭘 알고 싶다고? 어떤 건지 틀어봐라.」 나는 태엽을 감아서 오르골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 면서 음악이 두 번 연주되는 걸 들어보더니 다시 한 번 더 태엽을 감으라 고 손짓만 했다. 「처음 듣는 건데. 모르겠다.」 나는 실망하여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피아노 위에서 오선지를 꺼냈다. 그리고 한 번 더 오르골을 작동시켜달라고 말했다. 그는 오르골이 작동되 는 동안 오선지 위에 빠른 속도로 음표들을 그려 넣었다. 「채보(採譜)란 말 들어봤나. 아마 이런 정도의 노래가 되겠는데 자세한 건 내가 나중에 다시 알아봐 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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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악보를 보여 주었다. 거기엔 여덟 마디에 4분의 4박자 샤프 한 개의 조 표시 그리고 여섯마디 정도에 걸쳐 주로 이분음표들이 몇 개씩 적혀 있 었다. 나는 그가 그려준 같은 악보를 한 장 더 얻어서 주머니에 넣고 음악교수 의 집을 나왔다. 그 악보는 오랫동안 내 노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나는 언덕길을 올라가며 오르골에 태엽을 감았다. 천천히 나는 오르골의 멜로디를 계명으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파-솔라 시-레 미-파-레-미 라-레 미-레도 라-라 내가 언덕을 절반 쯤 올라왔을 때 전혀 낯선 음표들이 내 등덜미에 쏟아 지기 시작했다. 뭘까 그게 무슨 음악일까.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별빛으로 변한, 별사탕 같은 음표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건 음악가 교수가 연주하던 김순남의 ‘산유화’였다. 어쩌면 음악가 교수는 빈 방에서 김순남이란 사람이 만들었다는 ‘산유화’를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그의 손 에서 산이 그려지고, 산에는 꽃이 피고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고 지고 있 을 것이다. 나는 등에 묻은 끈적한 음표들을 떨어내고 내 다락방이 있는 불 켜진 ‘무궁화 상회’를 향해 바삐 걸어 올라갔다.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는 상원이란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그대의’ 뒤에 나올 이름이 뭔지 알아내야겠다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집을 나가 리라는 해묵은 결심을 떠올렸다. 나는 오르골의 음악을 따라 가리라. 신화 84

속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가리라. 내 안에 숨은 또 다른 내가 중얼거렸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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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면 그건 마리아 지나와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길이 되리라고.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연초록의 벽을 밀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 다. 그 속엔 벨라스케스의 황녀를 닮은 마리아 지나의 초상이 있었다. 초 상화 한 장만이 내려다보는 텅 빈 방 안이었다. 나는 그 속에 내가 원하는 물건들, 제일 먼저 나는 잘 만든 오동나무 책상을 가져갔다. 책상 서랍 속 에 오르골을 집어넣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으로 벽을 당겨 닫으며 방을 나왔다. 연초록의 문이 다시 내 눈앞 허공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걸 나는 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 벽을 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갔 다.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어가는 개미처럼. 방 저편에 다시 초록 문이 있 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다시 방 다시 초록 문, 다시 방, 그리고 초록 문. 나는 걸어가. 밀고. 닫고. 걸어가. 밀고 또 닫았다. 방마다 마리아 지나의 초상이 한 개 걸려 있었고 책상이 있었고 서랍 속에는 오르골이 있었다. 어느 방 인가에서 음악이, 김순남의 ‘산유화’와 오르골의 ‘노래’가 뒤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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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준 작가 약력 서울 출생 / 초등학교 교사 및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 근무 후 명예퇴임 공주교육대 한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94년 평화신문 신춘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대표작 : 단편 「산유화」, 「제망매가」, 장편 「해질녘의 아침」 등 30여 편 이메일 : trustjune@naver.com

작가 인터뷰 두포리 마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신 이유와 마을과의 연고 두포리 태양미장원은 제 큰이모가 운영하던 미장원이고 그 안채에는 열 명 이상의 양색 시들이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원리나 용주골보다 훨씬 구석진 곳이었고 모든 조건들 이 열악한 곳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큰이모는 큰아들, 그러니까 제게 이종사촌 동생 되는 아 이를 여섯 살 때부터 우리집에 맡겨 살게 했습니다. 기지촌의 교육 환경이 안 좋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제 동생과 저와 함께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방학이면 기 지촌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이모들 중 한 사람이 저와 동생과 조카를 기지촌에 데려다주곤 했습니다. 그때는 밤고지까지 가는 데만 세 시간이 넘게 걸리던 시절입니다. 나중에는 조금 나아졌 지만, 제가 방학이면 밤고지 기지촌에 가서 상당 기간 지내다 오게 된 이유입니다. 나름의 문화 충격이랄까 그런 걸 많이 겪었습니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제 아버지는 양색시가 낳은 딸 하나를 호적에 넣게 됩니다.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여섯 달 지나 제 어머니가 3년 전에 낳은 아이인 것처럼 꾸며서 86

요. 저는 그 아이를 본 적도 없고 심지어 큰이모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마 아버지가 돈 좀 받고 호적에 넣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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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행방은 전혀 모릅니다. 큰이모는 아이가 아이 엄마와 미국에 갔을 거라고 했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여간 그 아이는 1988년 여름, 만으로 23세가 될 때까지 제 여동 생으로 남아 있었고 결국 단숨에 ‘죽은 걸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제 소설 「제망매가」는 자 전적 이야기와 제 혼혈 누이의 이야기들이 얽힌 소설인데 영원한 미완성의 작품이 될 것 같 습니다. 제가 두포리 마을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된 건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입니다. 1968년 여 름까지 갔었네요. 그리고 큰이모네는 미군들이 철수하고 서울로 들어왔다가 어찌어찌해서 198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모들 중 누구와도 연락이 안 됩니다. 제 기억 속에 태양미장원 양철 간판을 바라보고 왼편,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을 기준으로 하면 그 맞은편에 ‘보건소(검진소)’가 있어서 운영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태양미장원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런지요. 이모부는 홍씨였고 큰이모는 경상도 상주 사 람이었습니다.

소설에서 해피하우스 주방에서 일했던 ‘용성이형’과는 혹은 이종사촌 동 생과는 연락이 되시는지. 용성이형이라고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은 큰이모부의 전처 아들인데요. 이름은 홍성관 이라 하는 것 외에 전 거의 본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이고요. 거기 해피하우스라고 이름 붙 은 것은 밤고지 미장원을 등지고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벌판인지 밭인지 그런 곳에 덩그렇 게 세워진 콘셋형의 미군술집을 소설화 한 것입니다. 그곳에선 저녁마다 요란하게 음악이 울리고 그랬는데 아이들은 근처에 못 가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런다고 안 가는 것 도 아니지만. 성관이형도 이종사촌 동생도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이종사촌 동생은 서울 장 위동에서 살다가 아마 모두 미국에 간 것 같습니다. 막내이모가 서울에서 오래 살아 아주 가끔 연락이 되었는데 막내이모(제 어머니가 아이 낳을 때 아버지한테 따귀를 맞았던 그 이 모)도 전혀 연락이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모두 한국 땅에 살고 있지 않을 겁니다. 막 내이모의 남편, 막내이모부가 한양대 독일어과 교수를 지냈는데 막내 이모부 이름은 이정 길이고 소설가였습니다. 제1회 현진건 문학상도 받았구요. 막내이모부와는 딱 한 번 만났네 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간암으로 돌아가셨고요. 아마 혼자된 막내이모도 딸아이를 데리 고 미국에 간 것 같습니다. 해피하우스라는 이름은 제가 소설에서 붙인 것이고 정식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태양미장 원의 위치로 보아 실제 이름은 스윙클럽이었을 것). 용성이형(성관이형)이 해피하우스에서 주방장을 한 건 그냥 소설적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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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만나는 우리 마을 이야기 기획 명연파 정리 안세원 / 단편소설 문승준 디자인 윤기획 펴낸이 황수경 펴낸곳 평화를품은집 평화도서관 발행일 2016.11.20. 주소 경기도 파주시 파평산로 389번길 42-19 전화 031-953-1625 팩스 031-953-1626 이메일 bbanh@hanmail.net 홈페이지 http://www.nestofpeace.com ※ 이 자료집은 비매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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