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
김실비 김아영 김해민
무진형제 박병래 안정주
옥인콜렉티브 이완
장서영 전소정
정연두
정은영 조영주 주연우 최성록 최윤석
엘리 허경란 기획의 글
- 홍이지 - 이한범 - 방혜진 - 민희정 - 이수현 - 유운성 - 기혜경 - 신보슬 - 곽영빈 - 김정현 - 김남시
- 타카하시 미즈키 - 이선영 - 정세라 - 김상용 - 황정인 - 고윤정
- 가레스 이반스 - 신보슬 - 정세라
012 022 034 050 060 072 084 094 108 120 130 142 166 180 192 204 216 226 240 244
김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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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는 자의 눈 Eye of the beholder
�� 홍이지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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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영상 작품 또는 영상 설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관람객의 시각적 인식 과정을 통해 작품과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경험을 기억하고, 느끼고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가 김세진은 애니메이션, 조각, 다큐멘터리, 싱글 채널, 영상 설치까지 공간적 확장을 이끌어 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멈추지 않은 작가이다. 그는 스크린에서 종결되는 이야기에서 시감각을 확장시켜 관람객과 마주한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가 설정한 영상의 미장센과 공간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의 시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세진의 영상에는 대사나 설명이 많지 않다. 그의 카메라는 거대하게 구축된 보이지 않는 시스템 안에서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연약한 개인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가만히 주시한다. 그의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한 관계망을 통해 본질적 자아의 연약함과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인물들로 사회적 자아로서 반복된 일상에 적응하거나 어긋나는 모습을 그려낸다.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편의점 인간』 의 주인공 후루쿠라는 “이 손과 발도 편의점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유리창 속의 내가 비로소 의미 있는 생물로 여겨졌다.” 고 말한다. 이 소설은 획일화된 사회의 규율과 암묵적인 위계를 따라야 ‘정상’의 범주로 인정받는 현실에서 ‘가장 최적화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주인공 후루쿠라와 그가 일하는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려냈다. 013
주인공 후루쿠라가 이끌어가는 일상의 내러티브보다 그가 처한 상황과 공간을 통해 복합적이고 구체적으로 인물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개인과 집단에 대한 그의 탐구는 개인의 폐쇄성, 매뉴얼화 된 시스템 안에서 기계 부품처럼 반응하는 개인들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의 영상 작품을 통해서도 생명력 없이 묘사 되었다. 폐쇄적인 업무 현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기반한 타인들의 각색된 기억에 의해 서술되는 인물 2005-2006 〈연선 채〉 를 시작으로, 텅 빈 건물에서
2016 드러나지 않는 일을 수행하는〈도시 은둔자〉 ,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든 도시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2006 〈야간 근로자〉 등을 통해 가시화되지 않는 집단 내에 존재하는 개인의 모습을 그려왔다. 그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집단(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바라 보는 개인의 내러티브 외에도, 2008년작〈빅토리아 파크〉와〈그들의 쉐라톤〉2006에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집단을 바라보는 전복적인 구도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등장인물에게 대사나 상황, 이야기를 부여하기 보다 ‘어떤 분위기’와 감정의 실마리를 통해 그 인물이 처한 다층적인 상황을 멜랑콜리하게 보여준다.
014 열망으로의 접근(Proximity of Longing), 1채널, 컬러, 16'50'', 2016
그 동안 김세진은 영화의 형식과 테크닉을 수려하게 다루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영상 언어를 꾸준하게 선보였다. 또한 느슨하면서도 감각적으로 구현된 스크린 밖에 설정된 연출 방법과 구도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2005년 인사미술 공간에서 열렸던 전시〈이상사회〉 에서 김세진은 영화적 형식과 연출을 자제하고, 구체적인 리얼리티를 통해 영화적 한계를 벗어난 표현 방식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 전시를 통해 그는 영상 작업의 내용은 물론 전달 방식과 공간의 구성은 새로운 시각적 서사를 만들어냈다. 2014년 문화역서울 284 RTO에서 선보인 개인전〈열망으로의 접근〉 을 시작으로 영상 스크린 밖의 공간 전체를 활용하여 관람객과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영상 화면은 별개의 개체로 보이지 않도록 확장된 환경의 맥락을 제시하였으며, 전시 환경과 연출이 영상에 전달하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김세진의 영상은 그래서인지 ‘빛’에 대한 고찰과 그만의 미장센을 전시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열망으로의 접근〉전시에서 선보인 OHP 드로잉 연작과 1876년 발명된 애니메이션 장치 프락시노스코프의 단편적인 이미지의 집합을 2016 하나의 움직임으로 구현한 작업〈모션핸드〉 는
내러티브 뿐만 아니라 빛과 움직임 그리고 무빙 이미지의 기초적 원리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물리적 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또한 흑백 화면과 초현실적인 배경의 구성을 통해 시간성을 지워버린 작품〈잠자는 태양〉과〈야간근로자〉에서는 통상적인 낮과 밤을 전복시켜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의 다양한 층위와 영상 안에서의 빛의 존재를 가시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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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동시대적 감각은 2005년《이상사회》 를 통해 그가 드러내고자 하였던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과 그 동안 작가가 꾸준하게 관찰하고 실험하였던, 날 선 감각과 경험을 통해 전달되었다. 집단과 시스템 내의 반복적인 노동에 대한 그의 관심과 탐구는 다양한 시선 으로 다루어졌다. 자신이 영국 유학 시절 경험했던 일본식 패스트푸드 음식점의 생산 과정을 애니메이션 2011 으로 다룬 작품〈하나세트〉 와 2015년작〈일시적
방문자〉역시 자신이 공항에서 경험했던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상이다. 개인의 경험 에서 기인하여 즉각적인 시선을 조금 더 확장시킨 2005-2006 작품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연선 채〉 의 경우, 영화 촬영 현장에서 일어났던 집단 행동과 의식에 대한 탐구와 자신만의 시선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 이다. 자신의 경험에서, 그 주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와 사람들에 관한 그의 시선의 이동과 공감은 김세진의 작업이 동시대성을 획득하게 되는 주요한 이유이자 그의 작업을 이해하고 연결 짓는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얘기한대로 김세진은 거대한 시스템과 개인의 관계,
016 열망으로의 접근(Proximity of Longing), 1채널, 컬러, 16'50'', 2016
그 안에서 어긋나는 현실의 부조리함에 관한 일상의 굴레에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개인을 주시하면서도, 작가의 시선으로 거대한 흐름과 현상을 영상 서사로 그려냈다.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다각도로 조명하기 위해 시선의 전복, 집단과 개인, 일상의 움직임과 노동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최근 2016 송은미술대상에서 선보인〈열망으로의 접근〉 은
그의 또 다른 시도와 실험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 작품을 통해서 직접적이면서도 더욱 거대해진 전 지구적 관점으로 확장되었다. 이 작품은 이주, 이민 현상과 집단적 유토피아에 관한 이야기를 세 편의 에피소드 “12개의 의자”, “엔젤섬” 그리고 “또르틸라 치난틸라”로 구성한 연작으로, 기존의 작품들과는 형식적인 면과 구성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적극적인 대사와 배경에 관한 설명 그리고 음악 등을 적극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OHP 드로잉 연작과 빛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 구축한 디지털 이미지와 정보를 전달하는 자막을 한 화면에 구성함으로써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김세진의 작업을 이해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017 열망으로의 접근(Proximity of Longing), 1채널, 컬러, 16'50'', 2016
김세진이 영상 작업을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 까지 영상 기술과 소통 방식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김세진은 영상작가로서는 적지 않은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2000년 초반부터 가늘게 시작한 그의 영상 언어와 개인의 서사가 모여 굵직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상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관람객의 입장에서 우리들은 스크린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을 어떠한 마음 가짐으로 응시하는가? 개인적인, 작고 가느다란 생각이 확장되고 뭉쳐져 층위를 이루고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지켜봐야 하는가? 우리는 그 대답에 관해 더 자주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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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지 홍이지는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리버풀 비엔날레 도시관: 테라 갤럭시아 (Liverpool Biennial City States: Terra Galaxia)》(2012, 리버풀) 전시 어시스턴트, 제4회 광주 비엔날레 큐레이터 코스(Gwangju Biennale International Curator Course)에 참여하였으며,《제1회 아시아 비엔날레: ASIA TIME》(2015, 광저우)에서 리서치 큐레이터로 활동하였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네이버 문화재단의《헬로! 아티스트》작가 선정위원이었으며, 현재 큐레토리얼 리서치 플랫폼 《미팅룸meetingroom》의 큐레이팅팀 디렉터이자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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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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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알레고리 �� 이한범
《오큘로》공동 편집자・ 미디어버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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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사회 문화적 체계에서 생산된 이미지와 형식적 틀을 차용한 후 거기에서 임의의 요소를 빼거나, 더하거나 이동시키거나, 대체하거나, 다른 범주의 체계와 겹침으로써 그것이 관계된 이데올로기를 다른 맥락으로 확산시키고 재의미화 하는 방식, 알레고리의 재사용은 김실비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전략 중 하나다. 이는 뒤샹에서 시작하여 팝아트, 개념미술과 전유appropriation를 경유하는, 지난 100여 년 간의
미술사에서 가장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물과 이미지의 재배치에 대한 실험의 맥락 위에 있다. 또한 디지털과 웹을 기반으로 하는 당대의 데이터베이스 미디어 환경이 세계를 구조화하는 형식이기도 하며, 이 형식은 자신의 비평적 지점을 드러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레디메이드라는 개념을 호출한다. “어떤 자료들이 어디에 분포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1 김실비의 질문은 자신의 미학적 프로그램의 구조를 결정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김실비 작업에서의 레디메이드 알레고리는 이중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도상 알레고리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 알레고리 이다. 도상 알레고리가 프레임 안의 의미를 재배열 한다면, 형식 알레고리는 그것을 다른 형식적 틀 안 으로 이동시켜 의미가 유통되는 층위를 재구축한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의미의 문제이면서도 의미의 문제만일 수는 없는 기묘한 이중의 구속 상태에 처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의 1 이단지,「전시를 앞둔 인터뷰」,『엇갈린 신(들)』전시 도록, 인사미술공간, 201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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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장면을 가져와 완전히 다른 서사를 덧씌워 노래방에서나 볼 수 있는 뮤직비디오로 만든 〈금지곡들 : 여자란 다 그래〉2013 앞에서, 관객은 화면에 나타나는 가사를 따라 각자의 방식으로 노래를 읊조리게 된다. 대중 오락 문화의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작업의 변형된 알레고리를 경험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레디메이드 알레고리의 집합인 김실비의 작업을 의미의 측면으로만 접근하게 된다면 그것은 나머지의 기능적 구조를 폐기시키는 일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전체적인 체계가 작업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구조화시키는가이다. 때문에 김실비의 예술적 실천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가 세계를 구성하는 형식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그것을 어떻게 재구축하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수면위로 올라오는 이데올로기의 형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형상은 의미로 환원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새로운 형식의 주체다.
024 육십진법에 따른 연애편지와 계시의 나날과 자매(A Sexagesimal Love Letter and Sisters in the Plutocratic Universe), 1채널 4K영상, HD변환, 컬러, 11'3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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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016 〈육십진법에 따른 연애편지〉 〈작고 , 따뜻한 죽음〉 , 2016 〈계시의 나날과 자매〉 는 이중의 레디메이드 알레고리의 한 예시가 된다. 먼저〈작고 따뜻한 죽음〉 을 보자. 디지털 프린트된 이 거대한 이미지는 한스 1533 홀바인의 저 유명한〈대사들〉 에서 메멘토 모리
의 상징과도 같은 해골 모양을 본 딴 듯 바닥과 벽에 걸쳐 왜상anamorphosis으로 설치되어 있다. 불교미술의 한 형식인 만다라를 차용한 둥근 프레임 안에는 종교적 상징을 대체하여 죽은 동물의 내장 기관과 살flesh의 해부학적 이미지가 구성적으로 배치 되어 있다.〈육십진법에 따른 연애 편지〉 의 전경에는 재사용된 영상 이미지가 끊임없이 흐르고, 화면 가운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사용했던 60진법의 기호가 이어진다. 60진법은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수 체계이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하게 현재적 삶을 구속하는 계량화된 시간, 산업 사회의 행동양식을 성립시킨다. 〈계시의 나날과 자매〉 는 두 명의 연기자가 등장하여 서사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알레고리인 연출된 행위와 대화를 드라마로 보여주고, 그린스크린 처리를 한 인물의 몸 위로는 끊임없이 파운드 푸티지가 흐른다. 이 영상의 출처는 두 개인데, 하나는 웹 아카이브에서 찾은 역사적 자료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합성 소스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샘플 영상이다.2 세 작업은 각각이 무수히 많은 알레고리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전시장 안에서 물리적으로 긴밀히 연동된다. Memento Mori
025 2 �MONTHLY REVIEW # 01 : 작가 김실비를 만나다�(www.thestream.kr/?p=2744), 2016. 11.
변형된 만다라 도상은〈계시의 나날과 자매〉 가 영사된 프레임의 모서리에 간섭하면서 또 동시에 음화화 된 화면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고, 디지털 영상의 포맷인 16:9 화면비로 제작된〈계시의 나날과 자매〉와 9:16 비율로 회전된〈육십진법에 따른 연애편지〉 는 관람의 동선에 따라 중첩되어 보이도록 설치되었다. 공간 안에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개입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경계를 지우며 상호 침투하고 확산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세 작업은 한 평면 위에서 중첩될 가능성과 개별적으로 흩어져 분산될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는데, 전시장이라는 공간은 이 상태를 관람의 경험으로 구조화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개념미술의 작가들이 유통의 방식을 예술의 주제, 비평적 지점으로 삼기 위해 전시장이 아닌 대안적 공간을 끊임없이 발명했다면, 김실비는 전시장 그 자체를 형식 알레고리로 재전유한다. 개인전〈엇갈린 2015 신(들)〉 에서의 전시장과〈에밀리 D.: 미분화 상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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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017 협업〉 ,〈레르스타와 관련자들〉 과 같은 작업들도 이러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는 예일 것이다. 전시장은 공간화된 재현이며, 그러한 전시장이 구조화하는 경험이란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이라고 폄하한, 여러 범주들 사이의 틈새를 유동적으로 오가는 그런 운동성일 것이다. 때문에 김실비의 작업이 형식화한 전시장은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와 유사한 모습이 된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정보가 집적된 세계에 대응하는 문화적 재현형식으로, 집합의 항목을 검색하고, 보고, 필터링하거나 합성하는 것이 가능한 장소 말이다.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선원근법을 근대의 상징적 형식 으로 보았다면, 마노비치는 “컴퓨터 시대의 새로운 상징적 형식, 즉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경험을 구조화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데이터베이스’를 전면에 내세운다.3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김실비가
만드는 전시장은 그 자체로 집적된 항목들이 중첩되고 섞여 들어가는 임시적인 상태를 창출한다. 즉 그는 전시장이라는 형식틀을 통해 데이터베이스가 경험과 지각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가시화한다. 때문에 작업이 배치된 공간에서 모든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의 사용에 대해 해석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더러, 작업의 운동성과는 다른 결에 있다. 해석학적 으로 접근한다 하더라도 집중해야 할 곳은 알레고리 자체가 아니라 알레고리가 운용되는 비가시적인 장소 이다. 파노프스키는 “개개의 예술상의 시대나 지역이 원근법을 지니고 있는가의 여부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원근법을 지니고 있는가라는 것이 이들 시대나 지역에게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는다”4라고 말하는데, 김실비의 작업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은 전시장이 하나의 형식적 틀이 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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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금지곡들: 여자란 다 그래〉 의 짧은 뮤직비디오 들은 노래방 화면의 형식을 차용한 것인데, 이처럼 다른 장르 혹은 다른 체계가 작동하는 관습적인 문법을 형식적 틀로 가져와 사용하는 것은 김실비의 작업이 스스로의 위치를 유동적인 것으로 바꾸는 중요한 요소다. 027 3 레프 마노비치, 서정신 역,『뉴미디어의 언어』,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290-295쪽 4 에르빈 파노프스키, 심철민 역,『상징형식으로서의 원근법』, 도서출판 b, 2014, 27쪽
장르의 경계를 침범하며 특히 그가 즐겨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서사형식이다. 총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2014 〈목석과 당나귀들〉 의 전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 사이, 세 번째 장이 끝난 후에 틈입해있는 푸티지다. 교회, 시위의 장소, 모스크와 놀이터, 도서관, 극장, 아고라, 인기가요의 방송용 무대, 절이 맥락 없이 이어지지만 이들은 묘하게 하나의 위상으로 겹쳐 들어간다. 이것이 전체적인 주제를 암시하는 도상 알레고리라면, 아버지가 암살당한 주인공과 세 명의 선지자(장님과 벙어리, 암살자)등 장르 서사에서 볼 법한 인물들은 주제를 형용하는 또 다른 알레고리처럼 보인다.〈목석과 당나귀들〉 은 무협 영화의 서사 형식과 비디오 게임의 서사 전개 구조를 차용한다. 게임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숨겨진 알고리즘은 점철된 알레고리를 맥락화하는 데 이용 되고, 관객은 이 알고리즘에 따라 서사를 비위계적인 방식으로 구조화하게 된다. 여기서 비위계적 서사라는 것이 김실비 작업이 지니는 특이점이다. 마노비치에 따르면 인과성을 만드는 서사라는 형식과 순서가 매겨지지 않은 목록의 데이터베이스라는 형식은 자연스럽게 서로 대립된다.5 그러나 김실비 작업에서 서사는 위계적 인과를 만드는 인터페이스로 사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집적된 알레고리의 항목들을 유통시키는 임시적인 경로, 비틀린 픽션으로 보다 기능적인 것에 가깝다. 즉 그의 작업에서 서사는 그 자체로 독립된 알레고리이기에 집적된 알레고리와 대립하거나 그것을 부연하지 않고 상호적이다.
028 5 레프 마노비치, 앞의 책, 304쪽
029 〈목석과 당나귀들〉, 영상 설치, HD, 색, 소리, 12'06�, 혼합 매체, 가변 크기
이러한 전략이 흥미로운 이유는 우리가 자리한 세계 에서 이데올로기를 순환시키는 형식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되가져온다는 데 있다. 관객은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경험을 구조화하게 되지만, 레디메이드의 급진성이 그러하듯, 그것은 기존의 자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유통된다. 중요한 것은 작업이 기능 하는 방식 그 자체이고 이를 통해 촉구되는 새로운 합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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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가 자기 자신의 체계를 현전시키는 유효한 수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의 근본적인 욕망은 무엇인가? 실제적인 물질과 상태를 이용하여 비가시적인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대안적 시공간을 만드는 전략, 레디메이드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대상을 명료하게 지시하기 위한 시도를 허위로 만들면서 그것을 둘러싼 체계 자체로 논의를 환원시킨 다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계의 형상을 드러 내기 위해 반드시 체계의 요소를 경유한다는 사실이다. 외부자의 위치에서 수행하는 비판은 진정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해석에 가까운 것이며, 세상에 대한 고발이나 비평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비평 하고자 하는 형식 내부에 있어야만 한다는 니꼴라 부리요의 말은 비평 형식으로서의 미술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6 또한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규범적인 비판은 유효하지 않을 때가 많다. 030 6 니꼴라 부리요, 정연심, 손부경 옮김,『포스트프로덕션』, 그레파이트온핑크, 2016, 107쪽
고전적 아방가르드가 스스로를 사회적 형식에서 소외 시킴으로써 충격을 주었다면, 유동성을 무기로 삼는 동시대 자본주의와 상업 미디어 속에서 새로운 아방가르드는 그것의 형식을 껍데기로 빌려 입고 체계 안으로 스며들어 전복적이기를 기도한다. 이데올로기 안의 형식을 재사용하는 것은 그것의 소요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재배치를 실험하는 것으로, 실재성을 발판삼아 체계의 외연과 맞닿는 통로를 확보하는 일 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실비의 작업은 작가적 문제 의식이 반영되고 표현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체계를 짜 보기 위한 실험의 영역에 가깝다. 작가의 욕망과 작품의 욕망은 서로 다른 운동성을 지닌다.
이한범 이한범은 미술이론을 전공하였다. 영상과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글을 쓰고 기획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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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설치 전경, 이미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Installation view at SeMA Biennale Mediacity Seoul 2016, Image courtesy of Seoul Museum of Art
김아영
저지된 텍스트, 부유하는 무대, 불확정성의 구조 �� 방혜진 1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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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0142015 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매혹적인 제목. 이 낯선 명사들의 조합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가리키는가. 현재 3편까지 나온 이 시리즈는 각각의 작품을 어떻게 연결지으며 어디로 향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그러나〈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쉘〉(이하〈제페트〉 로 표기) 시리즈 에만 갇혀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김아영 작가의 작품 전체에 맞닿아 있을 이 질문들에, 그러므로, 단도직입적으로 답을 찾기보다, 때로는 에둘러가고 때로는 비약을 감행하며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태고의 심해로부터 바빌론의 하늘로 비상하는 어느 고래의 여정을 상상하듯이. 혹은 슈퍼메이저 정유 회사로부터 돌연 고생물학으로 이탈했다 불현듯 해변의 서정성을 획득할지 모를 어떤 ‘쉘’의 지층을 더듬어보듯이.
2 시공간의 재구성
〈제페트〉시리즈가 기반하고 있는 한국 근대사 문제는 2011 ‘어느 도시 이야기’2010-2012와〈PH익스프레스〉 에서 부터 본격화되었다. 김아영에게 근대는 무엇보다 시공간의 격차와 힘의 불균형의 관점에서 접근된다. 특히 김아영은 시공간의 재편이 운송 수단의 획기적 발명을 통해 확장되고 확정되어 왔음에 주목한다. 035 1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비주얼Visual》 12호(2015)에 수록된 동명의 원고를 축약한 것입니다.
증기선과 철도 등 근대의 발명품이 초래한 시공간의 압축은 영토 제국주의를 가능케 했으며 한국의 파행적 근대화의 원인이 되었다.〈PH 익스프레스〉 는그 새로운 이동수단이 가져온 지각변동으로서 18851887년 사이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다룬다. 이를 위해 해당 소재와 관련된 공식적, 비공식적 문서를 최대한 리서치한 것으로 알려진 김아영의 집요함과 치밀함은 독보적이다. 하지만 김아영의 탁월함은 철저한 리서치 내용에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PH 익스프레스〉에서 김아영의 놀라운 성과는 심각한 주제에 대한 이토록 치밀한 리서치를 굳이 피터 그리너웨이 풍의 영화로 풀어낸 미적 결단에 있다. 영국식 블랙코미디와 수수께끼식 스릴러가 결합된 극 전개, 연극적 대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탐미적 미장센과 경쾌한 리듬의 편집, 여기에 의도적으로 배치된 마이클 니만 풍의 배경 음악까지, 그 모든 것이 피터 그리너웨이의 스타일을 (드러내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향하고 있을 때, 혹자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왜 애써 리서치한 내용의 신빙성을 스스로 배반하는 코믹 미스터리 양식이어야 하는가.
036 〈PH 익스프레스〉2채널 비디오, 약 31분, 2011
이러한 질문은 근대화의 역사, 보편적으로는 과거 일반으로부터 ‘이야기를 길어내는’ 김아영의 방식 및 태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요컨대 그것은 다큐멘터리 감독의 ‘매체적 윤리’나 연구자의 ‘학문적 윤리’와는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아티스트의 ‘미적 윤리’ 이다. 아티스트는 이 세계에 대한 탐구자이지만 또한 그 주제 및 대상에 함몰되지 않는 미적 형식의 탐구자라는 자의식. 따라서 자신이 발굴하고 응집시킨 ‘도큐먼트’가 한낱 ‘다큐멘터리’에 머물지 않도록 과감하고도 세심하게 무화시키는 윤리. 공들여 준비한 리서치-텍스트의 정보 가치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형식을 구상하는 일은 바로 근대의 시간성과 매개체 문제에 상응하는 예술 형식의 고안 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상응은 오직 접근불가능함의 인식을 통해서만 세계와 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PH 익스프레스〉 의 경우, 한국 근대사의 치명적 순간인 거문도 점령 사건이 사실상 오늘날 역사의 일부로서 엄밀히 기록되고 회자되기 보다는 망각에 가까운 현실일 때, 심지어 이 사건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마저 바로 그 침략의 가해자들의 것들이 다수일 때, ‘이 역사 기록을 어떻게 재-재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대두된다. 미장센의 측면에서 보자면, 가령 거문도에 주둔 중인 영국군을 보여주는 화면과 영국에서 회의 중인 관료들을 보여주는 화면 간에 극명한 차이를 지각할 수 있다. 즉, 후자가 키아로스쿠로 기법이 연상되는 회화적 화면이라면, 전자는 바스트 쇼트로 근접 촬영된 인물이 오늘날
037
거문도의 황량한 원경으로부터 이질적으로 돌출되어 있어 시공간의 불일치가 강조되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외부의 시선에 의한 규정이자 그에 따른 시공간의 재배치였다. 김아영은 그 메울 수 없는 간극을 근대 시기의 또 다른 발명품인 영상 매체에 의거해 풀어내면서 이러한 수단의 한계를 날카롭게 벼린다. 한편,〈PH 익스프레스〉전후로 근대화 이슈를 본격적 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던 ‘어느 도시 이야기’는 현재까지 2012 2010 〈돌아와요 부산항에〉 와 두 편의〈모든 북극성〉 을
산출했다. 3채널 영상의〈돌아와요 부산항에〉 는 급작스럽고 비정상적 방식으로 이뤄진 한국의 근대화를 전진과 후진의 병렬을 통한 시공간의 혼돈으로 요약한다. 아시안 게임같은 국가 홍보성 스포츠 행사의 자료화면이 역방향으로 되감기는 동안, 부두를 배경 으로 힘껏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싱그러운 청년을 보여주던 우측 화면이 결국 마약 밀매에 관한 좌측 매뉴얼 영상과 연결됨으로써, 진보 개념은 목적과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좌절된 방향성을 겨냥하는 것은 친숙한 대중가요의 절절한 외침 ‘돌아와요’이다.) 물론 이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정부가 전횡해온 교육-홍보용 시청각 자료들에 대한 전유이기도 하다. 이로써 후대에게 남겨진 역사 자료라는 것의 독해, 또한 영상이라는 매체의 진실성이 도마에 오른다.
근대의 발명품으로서의 운송 수단에 대한 작가의 2012 지속적 관심은 이후〈트랜스 KMS 레일웨이〉 와 2013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 에서 철도의 도입을 038 통한 시간의 통합과 거리의 단축으로 이어진다.
증기선처럼 기차와 철도는 세계 전역의 시공간을 열강 국가의 통제 하에 놓이도록 만들었으며, 한국은 이러한 식민지 개발의 역사에서 일본으로부터 대륙을 잇는 국제 철도망의 통로로 계획된 바 있다. 역시 세계와 한국의 (비극적) 교차라는 김아영의 일관된 주제. 여기에 분단으로 실현되지 않은 ‘트랜스 코리안 레일 웨이’ 같은 시공간 확장에 대한 상상이 뒤섞인다. (어쩌면 이러한 가상성으로 인하여 시도되었을지 모를) 이 작품의 사운드 설치 형태는〈제페트〉시리즈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운드 작업의 특성상, 파편적 텍스트들의 보다 과감한 중층적 레이어가 시도되는데, 가령, 광고, 신문 등 다양한 소스에서 가져온 텍스트를 혼성적으로 직조하여 녹음한 사운드 형식은 이후〈제페트〉전반과 특별히 2편에서 중요하게 작동한다. 소재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를테면 ‘철도 시리즈’라고 부를 수 있을 작품들을 거친 후,〈제페트〉에서 석유를
039 〈돌아와요 부산항에〉 〈어느 도시 이야기〉중에서 (2010~) 3채널 비디오, 약 5분, 2012
향한 것은 (해당 분야를 남김없이 파헤치며 인접 영역 으로 계속 확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김아영다운’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증기기관이라는 명백한 근대의 발명품과 달리 석유는 고대부터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쓰임새로 존재해 온 천연 자원이다. 근현대는 이 유동적이고 잠재적인 물질을 특정 에너지원으로 전환시키면서 세계 경제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제페트〉 가 지금껏 나온 김아영의 작업 가운데 가장 복합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퍼져나간 것은 이러한 대상 물질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근대가 발명한 것은 단순히 몇 가지 물품이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개념의 시공간 자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근대화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주제와 형식 간의 간극과 각도를 조절하는 데 집중해 온 김아영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선택한 매체의 시공간(의 재편)을 탐색하고 새로운 시공간의 가능성을 모색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실, 매체의 시공간을 조율하는 작업은 작가가 본격적으로 근대화 주제를 다루기 이전부터 주력해온 일이다.
3 무대와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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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은 초기작 ‘이페메랄 이페메라’ 시리즈에서 포토 몽타주 방법론을 변형시켜, 기묘하게 부풀려졌다가 다시 납작하게 눌린 시공간을 창출했다. 우선 일간지 등에서 다룬 바 있는, 대개 죽음과 관련된, 일상의 비범한 사건을 수집하여 이에 근접한 현장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을 오려붙이고 세워 올려서 무대 세트를
만든다. 그리고 이 세트 공간을 다시 사진으로 찍는다. 이렇듯 매개된 정보를 3차원 현장으로 치환하여 이를 2차원으로 포착했다가 다시 3차원으로 팽창하고 또 다시 2차원으로 압축하는 과정을 이행하는 동안, 애초 언론 매체로부터 차용한 제목-텍스트는 정보의 가치와 진위성에서 멀어지며, 사진 매체에 담긴 시공간은 본래의 시공간과 이질적인 기호들로 촘촘히 채워진다. 예컨대〈“템즈강에서 머리없는 시체 발견 2007.4.21.”〉
에서 유연하게 휘어진 건물과 오직 표면으로서만 존재하는 강물의 깊이 없음이 차단하는 비극의 공포. 매끄럽게 가공된 평화.〈“자살소동 20대 경찰과 2009 함께 투신 2008. 6. 5.”〉 에서 노골적인 무대 세트의 공허함과 정지된 시간의 섬뜩함. 투신을 부추키는 각도와 투신할 수 없음의 공간적 조건. ‘이페메랄 이페메라’의 수고롭고 번거로운 작업 과정 중에서도 시공간의 비탈을 위해 일종의 무대를 구축한 단계는 핵심을 꿰찌른다. 우리의 일상은 어쩌면 금세 허물어질 가상의 무대일지 모른다는 깨달음. 따라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이 무대 안에서 모든 것은 덧없는 찰나(이페메랄)이며, 우리가 그러모을 수 있는 과거 정보란 한시적 수명을 무용하게 연장시킨 잡동사니 수집품(이페메라)에 불과하다. 2007
얄팍한 평면으로 세워진 이 가상의 공간, 아마도 그 벽 뒤쪽에선 헛헛한 바람이 휘몰아칠 이 연극 무대를 생각하면, 김아영의 모든 작품은, 그 매체가 사진이든 영화든 사운드설치이든 음악극이든 관계없이, 어떤 연속선 상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말하자면,〈제페트〉 2 Roland Barthes, �Le Théâtre de Baudelaire�, Essais critiques, (Paris: Seuil/Points, 1981 (1954)),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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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가 음악극이라는 공연 형태로 이뤄진 것은 김아영 세계에서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일탈이 아니라, 연극성의 크고 작은 개입 속에 지속적으로 추구되어 온 일관된 흐름의 가시적 분출인 것이다. 여기서 ‘연극성’에 대한 바르트의 발언을 떠올려보는 일은 흥미로운 논의를 가져올 것이다. “연극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연극에서 텍스트를 제거한 것, (…) 무대에 구축된, 두터운 기호들과 감각들이다.” 2 김아영의 작품에 이 문구를 적용하자면, ‘텍스트를 제거’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치열한 텍스트를 수집한 후 이를 독해불가능한 혹은 독해에 실패할 방식으로 직조 해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텍스트가 단순히 특정내용의 전달을 목표삼지 않고, 말하자면 감각의 차원에서 감상되도록 전환시키기. 이러한 감각화가 더욱 치명 적인 것이 되기 위해선, 그 기호의 밀도가 더욱 빽빽해 지기 위해선, 애초부터 감각적인 것을 위한 감각이 아니라, 충실한 정보 가치를 충족시킨 후 이를 파괴 하는 재배열의 단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텍스트 제거’의 정점에 음악극〈제페트〉 시리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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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쌓아올린 형식부터 살펴보자. 하나의 성부로 부터 7성부에 이르는 현대음악 중창. 이 현장음과 겨루듯 공간을 감싸며 출몰하는 중층적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여기에〈제페트 1〉 과〈제페트 3〉 에 등장한 벽면 다이어그램. 이를 대신하는〈제페트 2〉 의 대단히 연극적인 낭독.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들과 시종일관 경쟁하며 충돌하고 화합하다 반목하는가 3 Roland Barthes,�Littérature et signification�, Essais critiques, (Paris: Seuil/Points, 1981 (1963)), p. 258.
하면 이내 가라앉았다 비상하는 텍스트. 이 복합적 층위는, 특히나 현대음악의 가시적 돌출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다성음악의 형식을 연상시킨다. 다시금 흥미롭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 바르트는 또 다른 글에서 이 연극/연극성을 다성음악에 비유하고 있다.3 숱한 감각의 층위들이 동시에 그러나 상이한 리듬으로 ‘정보의 다성음악’을 형성하는 일종의 연극. 그곳에서 텍스트는 중창의 전개, 배우의 낭송, 녹음된 사운드, 다이어그램 등 기타 형식들과 동등한 수준의 정보/ 감각 체계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김아영이 도입한 것이 알고리듬 장치이다. 적절하게도 이 알고리듬 프로그램에 작가가 부여한 이름은 ‘기계 장치의 신Deus ex Machina’이다. 바로, 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드라마의 정합성을 무시하고 서둘러 극을 종결시키기 위해 불러들였던 존재. 우매함과 비논리성의 상징과도 같던 그 허술한 극작술이 이제 김아영에 의해 시적이고 창의적인 문장가로 거듭난다. 그러므로 이 글 도입부에서부터 제기했던 질문의 하나,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이 라는 매혹적이고 수수께끼같은 단어 조합은 이 ‘기계 장치의 신’의 솜씨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감탄의 지점이 존재한다. 첫째. 기계장치의 신을 통해 탄생된 초현실주의적인 시적 도약과 언어의 감각적 아름다움. 둘째. 이것이 석유라는 물질을 다루는 작품의 제목 이라는 것. 즉, ‘제페트, 공중정원, 고래기름, 쉘’이라는 저 낯선 명사들의 조합은,〈제페트〉시리즈가 김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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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지속적 관심사인 근대사의 맥락에 있다는 점 에서 더욱 그 기묘한 빛을 발한다. 말하자면, 석유자본의 이동이라는 20세기 역사를 다루면서 김아영이 조합 하고 파헤치는 자료-대상의 저 가공할 범위를 보라.
4 불확정성의 구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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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페트〉의 텍스트는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 197080년대 중동국가들의 석유자원 독점과 수출 제한, 이에 따른 국내 석유파동과 한국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 정책같은 국제적 석유자본 이동의 공적 역사, 그 중동특수의 대열에 합류하여 타국 생활을 했던 작가의 아버지라는 사적 역사, 여기에 성경과 같은 고대 문헌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석유라는 유동적 물질에 대한 탐구의 축이 교차한다. 이 복잡다단한 내용을 더욱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텍스트를 전달하는 형식의 복합성이다. 우선 미술 분야에서는 낯설 수밖에 없는 현대음악 형식의 도입.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계장치의 신’의 활약이다. 텍스트가 완벽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도록 교묘히 실패를 조장하는 조율법은 이전에도 일관되게 지속된 김아영의 방식이지만,〈제페트〉의 특수성은 이러한 인지불가능성이 작품의 핵심 도구, 곧 알고리듬 프로그램에 의해 조직적으로 구축되었 다는 데 있다. 즉, 리서치 자료에 기반하여 작가가 작성한 리브레토의 문장들이, 알고리듬 장치를 통해 통사와 의미구조 분석을 거쳐 파편화된 후 기존 의미 에서 벗어난 문장으로 재배열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의식의 산물 A와 기계장치에 의한 우연적 산물
B라는 두 개의 병행적 리브레토를, 작곡가 김희라가 자율적으로 쓴 악보 A와 알고리듬을 통한 악보 B와 교차 결합시키는 것이〈제페트 1〉 의 야심찬 기획이다. 비록 ‘기계장치의 신’의 역할과 교차 적용의 엄밀함은 〈제페트〉시리즈가 거듭되고 드라마가 더욱 중요해지 면서 희석되었지만, 혼돈을 조직하는 구조는 본질적이다. 혹자들에게〈제페트〉 는 무엇보다 난해한 음악 형식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제페트〉 의 음악에 사용된 작곡법의 분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알고리듬 방식이 음악에서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것. 1950년대부터 현대음악 작곡에서 사용 되어 온 이 수학적 방법은, 본래 예술가의 영감에서 탈피해 우연성이 작동하게 하려는 의도로 도입되었 지만, 역설적이게도 점점 더 각 작곡가만의 ‘독창적 방법론’을 구상해야 하게끔 흘러왔다는 것. 가령 1954 크세나키스의〈Metastasis〉 에서 61명의 연주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파트를 연주하게 만드는 작곡이란 도리어 ‘도표’를 작성하는 행위가 된다.
045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쉘 3〉6채널 사운드 설치, 40분; 벽 다이어그램, 디지털 프린트, 5mx4m; 보이스 퍼포먼스, 약 20분, 2015
김아영이〈제페트〉에서 시도하는 것 역시 단지 현대음악의 힘을 빌어 극을 만든다거나 알고리듬 장치를 이용하여 방대한 자료 텍스트의 시적 도약을 일으키는 일만은 아니다. 보다 궁극적으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정교하게 조직된 혼란, 치밀하게 계획된 우연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의 도표를 작성하는 일이다. 실제로, (이미〈모든 북극성〉 의 한 축을 담당했던) ‘다이어그램’은〈제페트〉1부와 3부에서 작업의 구조를 도해한 하나의 시각 요소로서 등장한다. 어떤 의미로 이 벽면 다이어그램에 요약된 구조야말로〈제페트〉의 핵심일지 모른다. 다시 말해, 〈제페트〉가 성취한 혁신은, 흔히 오해하듯 현대음악 사운드가 아니며, 그렇다고 단지 알고리듬에 의한 텍스트 치환만이 아니라, 텍스트와 사운드 모두에 알고리듬을 교차, 적용시키는 근본적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만약〈제페트〉 를 비가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면, 이는〈제페트〉가 사운드 위주의 작품이어서가 아니라, 이 비가시적 구조야말로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음악 작곡법에서 시도 되어왔던 대단히 정교한 우연의 구축법은 이제 김아영에 의해 텍스트와 복합 형식으로 확장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5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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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의 작품은 일련의 계열들로 구축되며 각각의 계열을 구성하는 항들은 또 다른 하위‒계열을 번식한다. 이처럼 수직축과 수평축을 구성하며 파생되는 작품들의 관계는 언어학적이며 다성음악적이라 할 수 있다.
〈제페트〉에 이르는 우회와 비약의 여정을 둘러본 이제, 우리가 진정 감상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김아영 작가의 작품 전체에 대한 메타-다이어그램일지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는 김아영의 전 작품을 일련의 계열들과 항들로서, 모듈들의 층위와 조합의 그래픽 으로서 감상할 수 있다. 즉, ‘이페메랄 이페메라’를 구성하는 10편의 사진 작품들. 그 연속선상에서, 그러나 엄연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잘못된 때와 2010 장소에 있지 않도록〉 ; ‘어느 도시 이야기’ 시리즈의
〈모든 북극성〉 과〈돌아와요 부산항에〉 . 그 중〈모든 북극성〉 을 구성하는 영상〈모든 북극성 1, 2〉 와 일련의 다이어그램〈51개월, 12경주〉 ;〈PH 익스프레스〉 의 2채널 영상과 가상의 신문〈PH 익스프레스 저널〉및 포스터〈HMS 라인〉 . 그릐고 그로부터 파생된 설치작품〈등대 1905〉2011;〈트랜스 KMS 레일웨이〉 와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의 느슨한 철도 시리즈; 〈제페트〉계열을 이루는 항으로서의 1, 2, 3부와 텍스트 자료집『제페트, 공중정원, 고래기름, 쉘』 . 이 현란한 계열과 항의 배열이 머릿속에 아름다운 기하학적 도표로 그려지는 순간, 이제 가슴 설레며 고대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신작 자체가 아니라, 어떤 모듈들이 어떤 조합으로 연동될 것이냐로 향하게 된다. 바야흐로 새로운 다성음악적 작품군의 출현이다. 방혜진 비평가. 장르를 가로지르며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 다원예술프로젝트 〈인식장애극장 Hypermetamorphosis Theatres〉(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영상/퍼포먼스 전시〈¡No Dance!: Between Body and Media〉(제로원), 렉처퍼포먼스〈우회공간〉(국립현대무용단, 아르코 대극장) 등을 기획/연출했다. 여러 전시와 공연에 다양한 형태로 비평적 참여를 실천하고 있으며, 확장된 영역으로서의 현대미술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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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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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민, 관계적 공간에서 그를 만나다 �� 민희정 미술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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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민은 1992년 뾰족한 머리를 세운 망치가 TV화면을 뚫고 나올듯한 기세로 브라운관을 내리치는 장면이 인상적인 작품〈TV Hammer〉 를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1980년대 부터 영상을 탐색해 온 그가 미디어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동시대 문화가 요구하는 예술가의 새로운 역할, 즉 문화적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하고 새로운 에너지의 파장을 만드는 일에 대해 숙고한 결과였다. 일찍이 현대예술의 행동적behavioural 경향을 주목한 로이 애스콧Roy Ascott은 예술가, 예술작품, 그리고 관람자가 모두 행동적 맥락에서 연관을 맺는다고 보고 작품의 제작과 작품자체, 그리고 작품을 경험하는 사이의 경계는 더 이상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며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았다. 과거의 미학이 예술가에 의해 규정되고 개체화된 메시지를 수동적인 관객에게 전달하는 결정론적 문화deterministic culture에서 전개되었다면, 현대예술은 미학적 사건을 촉발하는 예술가들과 관객의 참여를 통해 개방적이며 공공화된 담론으로 확장되는 문화적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김해민은 애스콧의 예견을 증명하는 듯 상호작용을 핵심에 둔 경계 해체적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문맥 상 그가 애스콧을 쫒았다고 보이진 않는다. 그는 시대가 낳은 예술가로서 한국 미디어아트의 역사적 흐름에 있어 매우 독특한 위치에 서있다. 그것은 그가 사진이나 영화와 구분되어 왔던 미술의 영역에서 화가라는 이름으로부터 출발한 작가들과 051 달리 붓을 잡지 않고 확고한 예술가의 위치를 얻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김해민은 예술가를 ‘관계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는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인식적 관계를 형성하거나 이러한 문제들의 균형점을 찾음으로써 공동체적 상호 작용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중계자 혹은 변역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더욱이 그는 시간의 퍼즐을 맞추고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하는 편집자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미디어아트가 단순한 미적 체험이나 정보차원의 인식적 논의가 아닌 예술적 담론을 이끌어 내는 방향을 견지한다. 그는 한국에서 미디어아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던 시기, 상징적 차원의 작업이나 관조적 대상으로서의 영상에서 벗어나 실제적 체험이 이루어지고 상호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영상언어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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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민이 중계자로서의 역할을 택한 것은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결코 하나의 사건, 혹은 하나의 개체가 외부와의 관계성 없이 존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2차원의 미디어에 현전감現前感을 불어 넣기 위해 수학적으로 진화되어 온 그림에 접근하기 보다는 오히려 액자를 주목했다. 결국 그는 무수한 짜임으로 구성된 시간적 단면들을 앵글을 통해 공간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나타나는 관계적 구조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자신의 예술적 토양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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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은 중개자로서의 예술가의 역할을 가장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주제이다. 이것은 ‘그때의
거기’와 ‘지금 여기’라는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적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궁금증에 대한 끝없는 질문들이 가능하도록 만들기 1994 때문이다. 작품〈신도안〉 에서 그는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숨어들어 간 문화의 맥락을 전시의 기능만 남은 화이트 큐브로 옮겨 제의祭儀적 의식을 진행함 으로써 수용자에게 낯선 체험을 제공했다. 또한 작품 1991 1994 〈초생달 그믐달〉 ,〈홍백양반〉 으로부터 사건을 새로운 위치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실존적 문제를 고찰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김해민은 가상과 현존의 경계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영상과 마주할 때, 이미 영상 속 공간은 우리의 삶을 품은 공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토양 안에서 시간의 물을 길어 각각의 독립된 공간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세포줄기처럼 생명력 있는 관계로 키워나간다. 이러한 관계는 기계화된 매체를 꺼버린다고 사라지는 관계가 아니다. 우리의 심상은 언제든 영상을 불러들이고 수없이 분절하여 탐색하고 이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는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운동하는 실존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략들을 모색한다. 대표적인 방법은 인터페이스의 안과 밖, 가상과 현존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상세계와 또 다른 가상세계 간의 연결을 통해 다차원적인 네트워크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작품〈發光으로부터의 1999 2008 발광〉1997,〈부조리한 알리바이〉 , 그리고〈구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영상을 연극적 무대로 옮겨 놓은 듯, 영상 간의 상호작용 뿐 아니라 관객의
053
시선이 지속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시스템을 설계한다. 이로서 그의 작품은 새로운 결과물들을 계속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구조를 갖는다. 또 다른 전략은 인터페이스 안에 또 다른 인터페이스를 삽입하거나 분할하여 이중 혹은 다중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인터페이스의 ‘사이 공간’은 단순히 공허한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 내는 중심적 역할을 한다. 특히 이러한 공간의 가변적 특성은 수용자에게 의식의 방향성을 제공하고 새로운 지각을 부여하는 체험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작품 〈접촉 불량〉 에서 그는 사용자가 마주하는 인터페이스 안의 교묘한 위치에 TV 브라운관을 배치함으로써 수용자의 공간을 일보 전진시키며 몰입을 유도한다. 그리고 과거 자신의 공간에 있었을 법한 친숙한 외관의 TV와 채널을 돌리는 누군가의 손을 등장시킴 으로서 수용자로 하여금 스스로가 채널을 조정하고 있는 것 같은 원격 현전감telepresence을 맛보게 한다.
054 접촉 불량(Unorderable Connections), 1채널, 컬러, 6', 2006
반면〈TV Hammer〉 에서는 유리판이라는 두 인터페이스를 중첩하고 밀착시켜 영상과 감상자의 관계적 맥락이 동일한 공간에 놓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수용자의 지각에 교란을 일으킨다. 이처럼 김해민은 적재적소에 영상의 프레임을 위치 시킴으로써 뉴 테크놀로지의 위력 없이도 생동감
있는 상호작용을 끌어낸다. 또한 싱글채널 비디오조차 인터페이스를 분할하여 공간을 구성함 으로써 입체적 기억으로 전환시킨다. 작품〈옛날 옛적의 판문점〉 에서 화자인 노인은 새로운 장소로 안내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이자 원천적 기록매체인 자신의 기억을 재생하는 미디어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김해민은 기표적 조각들이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도록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열어 다층적 공간으로 확장함으로써 수용자의 반응지각을 일깨운다. vividness
3
김해민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공간은 그 만의 독특한 미학적 색채가 더해졌을 때 비로소 상호작용이 가능해지는 관계적 공간이 된다. 그가 정성을 기울이는 특수한 채색작업의 과정은 한국적 원소들을 불러내는 일이다. 그는 언제나 이 원소들을 현대적 장단에 맞추고 해학적 연출을 더해 무대로 옮긴다.
055 옛날 옛적에 판문점(Once Upon a Time in Panmunjom), 1채널, 컬러, 47', 2013
‘장단’은 한자를 빌려 ‘長短’으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순수한 우리말로서 우리 문화예술의 주요한 미학적 요소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박자와 빠르기 등을 의미하는 일종의 리듬형태를 일컫지만 ‘장단(이) 맞다’라는 관용구에서 볼 수 있듯이 비단 음악용어로서 뿐 아니라 ‘잘 조화 된다’는 의미 로서 다양하게 파생되어 사용된다. 또한 ‘얼씨구 절씨구’, ‘에야- 디야-’ 같은 장단에 맞추는 소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함께 하모니를 찾아가는 방식으로서 한국인들의 정서에 깊숙이 스며있는 감각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서구 문화와 기술들이 유입되고 많은 것을 수용하였으나 한국인들의 걸음걸이, 말투와 같은 체화된 원소들, 그리고 놀이문화의 기호들에서 장단은 여전히 숨을 쉰다. 또한 장단은 두 대상의 화합이나 평온함, 완결함 만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립과 갈등이 충돌하는 가운데서도 이루어지는 대화이며 어울림 이요, 우연적이고도 계획적인 흐름으로서 전체를 살펴야만 알 수 있는 맥락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이러한 장단을 핵심적 미학으로 삼은 김해민의 작품세계는 결코 누군가를 타자화하지 않으며 함께 상호작용하되 각각의 요소가 개성을 흩트리지 않는 구조를 가진다. 그는 다양한 장단 구사에 능할 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 시원하게 맞아떨어지는 쾌를 보여 줌으로써 미학적 울림을 만든다. 그의 초기 작품 1994 〈홍백양반〉 으로부터 시작해 몇 해 전 있었던 그의 개인전〈지록위마指鹿爲馬〉에서 발표된 작품들 056 2014 〈삼촌과 이모〉2011,〈타화상〉 , 그리고〈갓 쓴 남녀〉
에 이르기까지 장단은 또한 김해민 특유의 변증법적 논리를 이끌어 가는 기표다. 여기서 장단은 관계적 공간의 구조 찾기를 통해 수용자가 수수께끼를 풀 듯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논리를 만드는 과정을 유도함과 동시에 혼돈스러운 상황으로 몰아버리는 역할을 했다. 2014
그의 작품 전반에서 장단이 기표적인 흐름으로 작용 한다면 해학은 기의적 측면을 만들어 내는 요소다. 해학이란 익살스럽지만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 비평적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선의의 웃음을 유발하는 것 으로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이해, 긍정적 시선을 전재로 한다. 또한 억압이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민중 들의 저항의식이자 고단했던 역사 속에서도 애愛와
락樂을 잃지 않았던 한국의 삶과 정신성을 담은 예술의 형식이다. 제목들에서부터 고스란히 묻어나는 김해민 작품의 해학적 성격은 마술적 효과, 연극적 미장센 에서 찾을 수 있는 문학적 요소, 그리고 농담이나 게임 같은 놀이들이 유희적이면서도 저항적인 측면들을 견고히 한다. 당연한 미덕처럼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붉고, 또 퍼런, 두 시선의 조응은 안과 밖으로 밀고 당기며 입체적 밀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민희정 민희정은 현대미술과 미디어이론을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The Future is Now〉전 (국립현대미술관, 2014),〈Art&Science〉융합 프로젝트《Dynamic Structure & Fluid》(아르코미술관, 2014)에서 학술 및 텍스트를 담당하였고, 최근 발표논문으로는「박현기 미디어 작업에 대한 소고: 1978년부터 1982년까지의 초기 작업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이론학회, 2015),「박현기의 탈 테크놀로지 영상에 관한 고찰: 거울작업을 중심으로」(기초조형학회, 2016),「한국 미디어아트의 초기담론 연구–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용어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학회, 2016)가 있다.
057
무진형제
��
그림 없는 그림책: 사유를 거부하는 사유, 특수자의 폐기로 만들어진 특수자 형상 �� 이수현 1
독립 큐레이터
060 1 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미니마 모랄리아』, 도서출판 길, 2005
��
1
무진형제의 영상은 관념적 허구와 보편적 현실들이 교차하는 화면구성의 서사구조, 그리고 담담한 내레이션이 특징이다. 마치 하나의 모큐멘터리(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킨다. 아마도 그들이 사회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서로 상호작용 하여 해석된 결과물이자 사회적 이야기를 담아내는 예술가의 실천적 내러티브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 속 허구적 관념과 객관적 현실의 구조는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화면 곳곳에 배치된 추상적 존재와 수수께끼 같은 텍스트들은 흥미로운 우화처럼 다가오지만, 그 이면에 내재된 획일적이고 범주화된 사회모습은 흔들리는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야 할 관계가 알 수 없는 사회적 구조와 결합하여 왜곡되고 개인화된 모습으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는 무진형제는 사실과 같은 가상적 이야기 전개와 그 안에 담겨진 이질적이면서도 친근한 장치들을 통해 우리의 사고를 전환시킨다. ‘아도르노’는 사유의 가치는 사유가 친숙한 것의 연속성과 얼마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가를 통해 가늠 된다’ 2 고 전한다. 무진형제는 ‘아도르노’와 같은 사유가 관철되도록 사회적 조건의 틀을 뒤섞어 재구축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이 모든 것은 지금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모색하는 과정의 시작이다. , 미니마 모랄리아』, 도서출판 길, 2005 2 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061
2
당신은 누구인지, 당신은 어떤 부류 안에 분류될 수 있는가?, 당신의 발화는 무엇에 일치하는가?, (중략) 너는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 의심하게 만들어 우리가 존재할 권리 자체가 붕괴된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해야 할 최선은 입 닥치고 내면화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3
062
〈적막의 시대〉 는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작업 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묵묵히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는 ‘1902호 여자’를 만날 수 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기계를 다루고 물건을 제작하는 손길은 흡사 노동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한편, 자신이 만들어낸 물체들을 연결해 자신의 몸 전체에 둘러쓴 모습은 마치 부조리한 현실 구조가 계속해서 순환되고 있는 현상을 암시한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동의 실현이 점점 비인간화 되어가는 현실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1902호 여자’ 는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설명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질서의 함정에 갇혀있다. 무진형제는〈풍경〉의 내러티브를 통해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좀 더 극대화해 나아간다.〈풍경〉은 정감도 출구도 없어 보이는 작업공간에서 무언가 성스러운 것을 보존하고 지키고자 노력하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어떠한 신념에 내재된 듯 움직이는 두 형제와 아버지의 행동규범은 사람들이 바라는 관념적 이고 허구적인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마치 유죄를 선고받은 죄인처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3 펠릭스 가타리/수에리 롤니크, 윤수종 옮김,『미시정치』, 도서출판 b, 2010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나’라는 존재는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역할과 위치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미의 몸과 사자의 얼굴을 한 ‘미르메콜레온’은 그 어떤 위계질서에도 위치시킬 수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개미의 위치에도 사자의 위치에도 자리할 수 없는 ‘미르메콜레온’은 결국 자신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죽어간다. 어느 역할에도 자리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모습으로만 살아갈 수 있었다면 ‘미르메콜레온’의 결말은 어떠했을까? 모든 것이 범주화 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특이성을 가진 개체로는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의 우려로 비춰진다. 〈적막의 시대〉 와〈풍경〉에서 제시된 모든 생명체들은 정해진 규범 안에서 표준화된 삶으로만 살아야 하는 현실적 존재를 대변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타인의 시선과 헤게모니적 정체성이 내면화된 제한적 세계의 형상화인 것이다.
3
〈비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가족은 시어머니에 시달리는 며느리, 병든 아내, 가족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이어진다. 인간의 결핍을 보듬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의 모습은 폭력과 가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마저도 인간의 욕심과 규격화된 가치관으로 인해 점점 비인격화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구렁이 아이‒구아’는 태어났다. 063
구렁이, 구렁이 아이, 땅새와 같은 신화적이고 의인화된 존재는 현실의 모순된 상황의 은유적 표현이다. 세상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못하는 낙오자의 모습이자, 자본과 이성으로 인해 소외된 현대인의 상징적 자화상이다.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이기에 모든 자연을 대상화하여 균열시켰고, 그로 인해 폐허가 된 세상을 돌아보며 그들이 가졌던 모든 위계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관습과 동일성으로 상처받은 자아는 빈곤과 개발이라는 환경에서 또 다시 상실된다. 〈더미〉의 ‘이토이토 할멈’은 폐허와 같은 현실에 저항 하며 살아가는 희망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이토이토 할멈’은 무너진 공동체의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생명을 다스리고 연결하는 소통의 장치로 표현된다. 무술적 존재와 같은 ‘이토이토 할멈’은 보편화된 삶의 모습에서 제외되고 부서진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이자,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형상으로 반영된다. 폐허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 다시 쌓아 올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마치 자본의 논리 속에 자리 잡은 재생산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의미는 현실적 메커니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선순환적인 이치를 따를 뿐이다. 자본에 의해 무너진 현실 앞에서 생산이 아닌 구축, 개발이 아닌 건설을 향한 실천적 행위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표상이다. 064
더미(The Heap), 1채널, 흑백, 8'56'', 2015
065
4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의 사유가 이미 정해진 동일성의 체계에 프로그램화 되어있다고 전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의 논리 자체를 전복하길 권하고 있다. 지금의 정체성을 정면으로 뒤집을 수 있는 저항의 방법으로 우리의 사유와 행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전하는 것이다. 4
066
무진형제는 ‘M’ 이라는 설정을 통해 보편적 정체성을 비판하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다. 어두운 지하터널을 청소하는〈결구〉의 주인공 ‘M’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개인의 모습을 반영한다.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같은 슬로건이 신념이 된 ‘M’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보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알 수 없는 곳에 도달하게 된 ‘M’은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 ‘M’은 모든 것을 깨닫는다. 자신과 다른 삶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해왔던 모든 행동이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지시작용에 불과 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M’은 현실의 구조를 깨닫고 미로와 같은 지도를 살펴본 후 또 다른 어둠의 길로 떠난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떠나는 것으로만 해석될 수 없다. 반복되는 사회적 조건에서는 그 어떤 실천적 행위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동일성의 체계 안에서는 무수히 많은 차이의 담론도 그 안으로 다시 포획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은 지금의 현실 체계는 전복이 필요 하다는 것을 암시하듯 또 다른 어둠속으로 향한다. ‘M’의 행동과 어둠속 장소는 다소 불안해 보인다. 4 슬라보예 지젝, 최영송 옮김,『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그러나 무진형제는 그 불안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메커니즘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과 사유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의 통로에서 〈오드라덱〉과 마주한다. 허구적 존재인 ‘오드라덱’은 잡을 수 없는 신념이자 해결되지 않는 답과 같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삶을 찾는 여정이며, 늘 무언가를 따라가야 하는 강박증 같은 우리의 사고를 그린다. 그렇게 무언가에 강요된 무의식의 세계를 묘사하며, 우리가 진실된 삶이라고 믿는 것들이 빈약한 허구와 같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드라덱’은 잡을 수 없는 가능성임과 동시에 차이와 다양성이 가득한 현실을 돌아보도록 유도하는 해법일 수도 있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M’의 행동과 ‘오드라덱’의 존재는 지금의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염원의 실마리와도 같다.
5
무진형제는 그들의 내면에서 시작된 예술적 시선을 외부로 옮기며 공동체를 바라본다.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공공미술로 구성된〈M의 장〉 은 사회적 규범 속에서 상실해 버린 자아를 찾도록 유도한다. 자신들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장치로서가 아니라, 서로의 다양한 생각을 인정하고 나누기 위한 의도로 위치한다. 그것은 자본의 착취와 억압이 구사하는 힘의 작용을 자신과 타인의 목소리로 듣고자 한 것이며, 그 의지가 세상에 관철 될 수 있도록 공적공간으로 장소를 이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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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목소리들은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한 저항의 행동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우리 자신이 이미 이데올로기의 일부라면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변해야 한다.5 이러한
맥락에서〈M의 장〉 이 갖는 역할은 우리 삶의 가치가 사회적 논리와 헤게모니적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경험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지금의 불편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어떤 권력이나 권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을 인식하고 환대하는 과정 속에서 안정된 사회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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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도록 구성된 사회에 놓여있다. 그 속도는 언제나 우리의 깊이 있는 사유와 관찰을 간과하기에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자문하는 예술가의 역할이 간절해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실의 부조리한 사회적 구조를 견지하는 무진형제의 예술적 시선은 의미가 있다. 영상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맥락은 지금의 현실 모습을 암묵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안에 등장하는 모든 생명체와 오브제들은 사회적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주변의 존재로 표현된다. 보편적 삶의 토대 위에서 파편화된 상처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행위는 사회적 맥락을 짚고자 하는 무진형제의 예술가적 실천이자 노력이다. 068 5 슬라보예 지젝,『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최영송,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호명하여 남다른 의미를 부여 하면서 익숙한 것들을 변형하고 재구성한다. 그렇게 창조된 초현실 같은 실체들은 저항을 위한 사유로 전환된다. 여기서 우리는 ‘아도르노’가 언급한 ‘사유의 가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분석적 능력을 저하시키는 힘의 구조를 밝히는 것으로 예술가의 역할과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무진형제의 예술적 실천은 분명하다. 일반적 사유를 거부하게 만드는 비현실적 존재들과 서사구조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위한 대안적 분석과 지금의 현존성을 진단하는 담론의 역할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미(The Heap), 1채널, 흑백, 8'56'', 2015
이수현 동덕여대에서 큐레이터과 박사수료를 하였다.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시각의 전시를 기획 (2012~2015),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제 큐레이터를 담당하였다. 현재는 글쓰기와 전시기획을 위해 독립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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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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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세대의 놀이: 박병래의 영상작업에 대한 노트 �� 유운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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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떳떳한 놀이란 얼마나 드문 것인가!” Il y a si peu d’amusements qui ne soient pas coupables!
‒ 보들레르,「가난한 사람의 장난감 Le Joujou du Pauvre」 2011년에 미디어아트 채널《앨리스온》 을 통해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병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 지역이나 역사라는 키워드 외에도 […] 우리 세대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7~80년대 유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의 세대. 물질적으로는 여유로움이 있었지만 전 세대와는 다르게 정신적인 상상력이랄까 이상이랄지 이러한 정신적 측면은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세대… 뭔가 일어났는데 다른 것을 통해 그걸 보았던 그러한 세대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뭔가 일어났는데 다른 것을 통해 그걸 보았던 그러한 세대”라는 표현이다. 박병래 작가(1974년 여수 출생)와 같은 또래이며 전라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는 이러한 표현에 담긴 희미한 열망과 아쉬움을 흡사 내 것인 양 쉬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와 나의 세대에게 있어 역사란 어떻게 감지되는 것이었는지, 이전 세대에 비하면 너무 늦게 도착했고 이후 세대에 비하면 너무 급히 떠밀리듯 도착했다는 감각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었는지를 여기서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이 지면에 어울리는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개인적 토로를 일반화 하는 경우 자칫 주제넘은 일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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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지금 당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싶다. 박병래의 영상작업은 유년기를 역사적으로 맥락화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 할 사적 추억의 저장고를 지니지 못한 세대가 유년의 사막에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 비인칭적 기억으로 (탈)구축하는 일에 가깝다고 말이다. 박병래의 영상작품은, 때로 몇몇 영화제에서 상영 되기도 했지만, 주로 전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 이고, 오늘날의 미술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것의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의미나 의의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리뷰되곤 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을 가로지르는 가장 두드러진 주제적 강박이라 할 ‘놀이’(game/play)마저도 곧바로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동기와 연계되어 이야기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기와의 연계가 거의 2014 없어 보이는 놀이의 작업인〈화포異景〉 이,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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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의 박병래의 작업을 포괄하는 중요한 작품임에도 (영화계는 말할 것도 없고 미술계에서조차) 거의 무시 되다시피 했던 것은 대단히 징후적이다. 우리는 저 추억 없는 세대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박병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영상작품에 놀이는 있어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이야기란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혹은 그에게 있어 놀이는 곧 이야기이다. 그가 인터뷰에서 ‘이야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일종의 관습적 화법에 따른 것일 뿐 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말을 “놀이를 하고 싶었다”로 바꿔 읽어야 한다. 기억을
2007 (탈)구축하는 넝마주의의 놀이,〈반달게임〉 에서 2015 최근의〈유틀란디아〉 에 이르는 박병래의 영상작품 들은 바로 이러한 놀이의 조건을 가늠해보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목표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반달게임〉은 1980년대 초반 한국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놀이에 대한 안내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반달’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놀이는 ‘이랑타기’ 혹은 ‘삼팔선놀이’라고 알려져 있던 놀이가 약간 변형된 것이다.) 그리고 북한군을 늑대와 여우로, 김일성을 돼지로 묘사한 반공 애니메이션《똘이장군: 1978 제3땅굴편》 에서 발췌한 영상클립이 이어진다.
이것이 남북의 대치라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감각을 여러 간접적 매개를 통해 흡수했던 세대의 유년의 사막에 흩어진 파편들 가운데 일부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반달게임〉은 이 파편들로부터 출발해 자기 세대의 무의식을 답사하거나(비판적 회고),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거짓 추억의 대상으로 삼거나 (멜랑콜리), 그것들로부터 현재에 대한 성찰을 끌어내는(알레고리) 등의 쉬이 짐작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한 움직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을 잡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연기한 한 인물은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나무 모양의 백색 구조물들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세트를 배회 한다. 이 추억 없는 텅 빈 유년의 공간에서, 그는 구조물 가운데 난 구멍을 발견하곤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나무에 난 구멍이 다른 세계와 통한다고 여기는 익숙한 유년의 상상.) 그러자 우주공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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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또 다른 텅 빈 공간 속에 놓인 백색 입방체 틀 속에서 조타륜을 다루던 인물이 균형을 잃고 격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조타륜으로 하늘을 나는 배나 우주선의 키를 조종한다는 상상 또한 7~8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이들이 간혹 접하던 만화나 동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일 터이다.)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을 연결하는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 그리고 이러한 건드림을 통해 유발된 흔들림으로부터 균형을 회복하려 드는 것, 이는〈반달게임〉과 〈고무줄놀이〉2008에서 놀이의 리듬이 전개되는 데
있어 동일한 구조적 원리가 되고 있다. 〈고무줄놀이〉의 경우, 역시 텅 빈 검은 공간을 배회하던 인물이 거울에 붙은 고무줄을 발로 건드리 면서 일련의 반복적인 고무줄놀이가 촉발된다. 그의 거울상이 그와 무관하게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놀이를 통해 두 공간을 잇는 선(고무줄)을 다시 조율하려는 그의 반복적 행위는 거듭해서 변주되는 리프riff에 가까운 것이 된다. 반면, 일렬로 쌓인 형형 색색의 장난감 블록들이 거듭 화면에 등장하지만
076 고무줄 놀이(Elastic Cord Playing), 1채널, 컬러, 7'45'', 2008
그 무엇에도 건드려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는〈유틀란디아〉에서 끝내 놀이는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사람 없이 오가는 스키 리프트, 텅 빈 테니스 코트, 바다와 사막과 초원의 풍경을 보게 될 뿐이다. 건드림이 불현듯 유년의 사막에 흩어진 파편들을 불러 들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파편들은 더 이상 그 무엇의 환유도 아니다. ‘빨갱이 돼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은 더 이상 7~80년대 반공교육의 우스꽝스러움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아니다. 그 가면은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가면으로 박병래의 공간으로 들어온다. 조타륜, 거울, 반달 및 고무줄놀이 역시 마찬가지다. 남은 것은 이 파편들로 여전히 놀이가 가능한지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다만 이들 가운데 가면이 모종의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이 2011 〈째보리스키 포인트〉 의 주인공 (박병래 자신이
연기한) 째보의 헬멧과 마찬가지로, 얼굴face마저도 하나의 초-얼굴sur-face로, 아무 것도 환기시키지 않는 표면으로 바꿔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반달게임〉과 〈고무줄놀이〉는 놀이의 도구, 놀이의 공간 그리고 놀이의 주체 모두를 환유가 작동할 수 없는 상태로 까지 환원시킨 다음에 놀이의 리듬 자체를 감지하려는 시도다. 이처럼 놀이의 영도를 가늠해보는 것이야 말로, 추억 없는 세대가 어떤 아쉬움이나 열망도 없이, 자신의 유년이란 정말이지 투명하게 가난한것 이었음을 마음으로 오롯이 긍정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점에서 박병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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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은 그의 작품 속에 담긴 함의나 상징이 아니라 그가 작품을 통해 거듭 수행하는 벌거벗은 놀이의 명랑한 긍정 자체에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박병래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보는 우리 또한 조급하게 놀이로부터 역사로 비약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그의 작업에서 실제의 풍경이 텅 빈 검은 공간을 대체하는 것은〈째보리스키 포인트〉 에 이르러서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군산 지역의 장소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전시 공간이라는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을 역사적으로 맥락화하기엔 유용하겠지만, 정작〈째보리스키 포인트〉 가 놀이와 역사 사이에서 유지하고 있는 팽팽한 긴장을 감지하는 데는 자칫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이 작품에는 황무지, 버려진 건물, 째보가 보거나 만지거나 그러모으는 사물들이 등장하지만, 우리는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그것들을 바라볼 뿐이다. 째보는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무기나 장비랍시고 몸에 걸치고 (어쩌면 역사적인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을지도 모를) 황폐한
078 째보리스키 포인트(Zeboriskie Point), 1채널, 컬러, 9'52'', 2011
장소들을 배회하며 ‘비밀기지’ 따위를 만들며 놀곤 했던 한때의 아이들을 닮았다. 째보의 행위는 순천만 화포갯벌을 배회하며 이런저런 소리(소음)를 만들어낼 사물들을 주워 한 곳에 모으는〈화포異景〉의 즉흥음악가 최준용의 퍼포먼스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사물들을 환유로부터 해방시키면서 그것들이 내는 ‘가난한 소리’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최준용과 유사한 작업을, 째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행하는 중이다. 째보가 등에 메고 있는 장비에는 탐침기 같기도 하고 분무기 같기도 한 튜브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로써 그의 행위는 ‘조사’만이 아니라 ‘소독’ 으로도 읽힐 수 있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째보의 새로운 여행 또한 그의 ‘베이스캠프’(원형으로 배열된 나무말뚝들)를 튜브에서 분사된 액체로 꼼꼼히 소독한 이후에라야 시작되는 것이다. 과거가 폐허가 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것의 존재와 가치를 인지하게 된 이들이 쉽사리 빠져드는 정념은 멜랑콜리다. 때로 그러한 정념은 곧바로 역사의식과 등치되기도 한다. 수집가적인 열정이 거기 뒤따를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박병래가 말한 저 가난한 세대에겐 추억의 저장고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어둡고 텅 빈 임시 스튜디오, 사막과 황무지, 그리고 바다처럼 정주가 불가능한 곳이야말로 그들의 공간이다.) 째보는 아무 것도 수집하지 않는다. 그는 건드리고, 확인하고, 소독하고, 떠나는 자이다. 〈화포異景〉의 최준용 또한 아무 것도 수집하지 않는다. 그가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그러모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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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갯벌 한복판에 있는 그것들은 밀물이 오면 쓸려나가고 말 것이다. 그는 사물들의 소리를 듣고 떠나는 자이다. 아무데도 아닌 곳(nowhere)에서 절대적으로 지금/여기(now/here)에 속하는 움직임을 수행하고 떠나는 최준용의 모습에는 박병래의 영상작업에서 변주되었던 유형의 인물들이 고스란히 겹쳐진다. (최준용이 ‘작곡’하고 실행한 실험적 즉흥음악 공연 가운데 수백 개의 탁구공을 정해진 2011 주기에 따라 떨어뜨리는〈튀어오르다. 떨어지다〉 를 박병래의 영상작업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영상작업의 역설은 이처럼 한시적인 퍼포먼스를 무한히 반복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추억 없는 세대의 기억을 (탈)구축하는 현행現行 적인 놀이를 아카이빙한다는 것, 박병래의 영상작품 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긴장이다. 새로운 여행을 떠날 채비를 마친 째보가 베이스캠프 한가운데서 돌연 자치기 놀이를 할 때, 긴장으로 한껏 팽팽해져 있던〈째보리스키 포인트〉 는 우리에게 일종의 청량감을 선사하면서 (베이스캠프가 형상화 하고 있는) 반복의 원환을 무효화하는 열림으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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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역사적 감각이 만날 수 있을까? 순진하게 놀이를 행하던 과거를 돌이켜보고, 그때의 놀이를 둘러싼 배경들을 회고적으로 돌아보는 방식이 아니라, 놀이를 전적으로 놀이로 수행함으로써 말이다. 〈유틀란디아〉에서 박병래는 이례적으로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다. (덴마크 뮤지션
킴 라르센의 노래 가사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파견되었던 덴마크 국적의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 대해 알려준다.) 박병래가 틈틈이 기록해 온 풍경들이 〈유틀란디아〉곳곳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 파편들로 부터 촉발되는 놀이는 없다. 그저 주기적으로 등장 하는 일렬로 쌓인 회전하는 블록들을 통해, 놀이의 순간이 도래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놀이를 수행할 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조만간 우리는 가면도 헬멧도 없는 째보, 저 가난한 세대의 방랑자가 놀이를 전적으로 놀이답게 수행하면서 마침내 맨얼굴로 역사와 대면하는 진기한 광경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유운성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전문사과정)에서 영화사 및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2001년《씨네 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했으며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2016년에는 미디어버스의 임경용과 함께 계간 영상전문비평지《오큘로》를 창간, 공동발행인을 맡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세대학교, 단국대학교 등에서 영화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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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주
��
게임의 법칙 비틀기 그리고 패러다임의 전환 �� 기혜경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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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사운드, 설치 작업을 주로 하는 안정주는 2010년대 초 어릴적 놀이문화에 근간하여 게임의 법칙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패러다임을 작가의 개입을 통해 전환시키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가 보여준 2013 〈모래성〉2012,〈전우여 잘자라〉 ,〈All for one, one
2013 2013 for all〉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이 이런 작업군에 속한다. 이들 작품은 일정한 나이 이상의 어른이라면 어렸을 적 한 두 번은 해보았음직한 땅따먹기와 고무줄놀이, 술래잡기의 변형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모태로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이들 작업 중,〈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는 벽을 보고 눈을 가린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동안 몰래 다가가 들키지 않고 술래를 치고 도망가는 놀이 이다. 뒤로 돌아 눈을 가린 채 구호를 외치는 사이, 술래는 점점 옥죄며 다가오는 상대를 포로로 잡기위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구호의 빠르기를 조절 하며 상대와 심리적 경쟁을 펼친다. 전통적인 술래잡기 놀이의 변형으로 알려진 이 놀이의 기원에 대해 민속놀이백과는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나라꽃인 무궁화를 놀이 제목에 넣었다고 기술 하고 있다.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다는 구호를 외치는 동안 살며시 다가가 술래에게 타격을 입히거나 아니면 술래에게 잡혀 포로가 된다는 놀이의 구성 방식은 남북이 대치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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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남북 대치국면이 놀이에 반영된 예로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라는 노래 가사에 따라 진행되는 고무줄놀이를 모태로 한〈전우여 잘자라〉에서도 드러난다. 어렸을 적 별 생각없이 행했던 고무줄놀이와 연동된 노래가 동심이나 어린이 놀이의 근간인 유희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장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은 이 놀이를 즐겼던 당시 세대의 어린 시절이 국가 이데올로기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하고 체화해 가는 과정이었음을 살필 수 있게 한다. 영상작업을 통해 동시대의 자화상 탐색을 기획의도로 삼고 있는《Video Portrait》 전에 안정주는 2점의 작업을 출품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다. 민족적·국가적 분단상황을 배경으로 한 놀이를 모태로 한 이 작업이 이번 전시에 포함된 데 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냉전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을 비켜가며 해체하고 있기
086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Blossomed, The Rose of Sharon), 2채널 설치, 컬러, 8'56'', 2013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작업은 동시대 한국이 처한 분단 상황과 그것이 고착화되고 내재화되어 오히려 긴장감을 상실한 채 일상이 된 상황을 묘하게 중첩시켜 드러낸다. 이러한 전환은 작가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친 후 돌아보는 술래의 모습을 화면 전체에 슬로우 모션으로 반복 처리하여 작품 앞에 선 관객이 자연스럽게 놀이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며 관객을 주시하는 것 같은 술래의 시선이 빚어내는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술래는 영원히 술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를 취하게 되며, 결국 관객은 술래만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나게 된다. 이러한 작품의 구조는 놀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두 주체 사이의 긴장관계와 순환구조가 깨지도록 비틀어 놓음으로써 생성된 것이며, 작가는 의도적인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놀이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이다. 이제 술래는 영원한 술래로, 관객은 술래가 될 걱정이 없는 놀이의 참여자로 남게 되며, 놀이 속에서 설정된 양 주체간의 순환의 고리는 끊어진다. 이와 유사한 프레임의 전환은〈전우여 잘가라〉 에서도 드러난다. 고무줄놀이에 기초한 이 작업은 노랫말이 주는 비장함과 엄숙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성인 여성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통해 엄숙하고 비장한 국가주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삶을 지탱하는 유희성 사이에 놓인 넓은 간극을 드러내는 한편 그러한 간극과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동시대 우리들의 삶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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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놀랄 만큼 많은 냉전시대의 잔영이 놀이문화에 드리워져 있음을 주목한 작가는 이어지는 작업 2012 2012 2012 〈국민의례〉 ,〈무궁화〉 ,〈The great absolute〉 등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우리들 속에 내재화된 국가주의를 이미지와 사운드의 상징체계를 통해 반추하게 한다. 넓은 운동장에 열을 맞추어 선 아이 들이 식순에 따라 국민의례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을 시점이나 렌즈 투사거리의 변화없이 롱‒테이크로 처리한〈국민의례〉 , 아직도 흥얼거릴 수 있는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립니다”로 시작되는 노래에 맞추어 게양대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만을 건조하게 비추고 있는〈The great absolute〉같은 작업들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들은 카메라의 각도나 시점, 영상의 투사각도 등을 통해 관객을 작품 속에서 진행되는 의식에 동참시킨다. 하지만 전시장이라는 문맥으로 옮겨진 국민의례 현장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 속에 체화되고 내재된 상징체계의 작동방식에 부합되지 않음으로 인해 각자 수위는 다를지언정 어정쩡한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한편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루어진 국가상징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관객 스스로 재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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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주 작품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는 그가 내러티브와 서사구조를 중시하는 작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작품들 에서도 드러나듯이 작가가 작업하는 방식은 내러티브나 서사구조 보다는 영상 이미지와 사운드 자체가 갖는 힘과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천착함으로써, 작가의
개입이 만들어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살필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시간의 예술인 영상작업은 연속되는 이미지로 인해 쉽게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특성을 갖음에도 불구하고 영상작업을 주로 하는 안정주는 2005 2005 〈Their War〉 시리즈나〈Drill〉 과 같은 초기 작업부터 영상이미지와 사운드의 분절, 재편집 등의 영상과 사운드의 변주를 통해 분쟁지역의 일상을 관통하는 전쟁에 대한 중압감과 일상의 무심함을 드러내거나 혹은 제식훈련이 뿌리내리고 있는 국가 이데올로기와 전체주의적 사고를 유희하게 한다.
한편, 안정주의 작업방식은 점차 확장되어 영상과 사운드의 변주를 통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초래하게 2015 되며, 이번 전시에 출품된〈행운의 편지Chain Letter〉 로 이어진다. 이 작업은 2000년대 초반 세계 여행 도중 촬영한 영상 클립을 9채널의 브라운관 TV를 이용하여 설치한 작업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영상클립 하나 당 작가가 임의로 설정한 단어 하나를 매칭시킨 후, 그 영상 클립을 이용하여 어릴적 누구나 한번쯤은 받아 보았을 법한 행운의 편지를 써 내려간다. 손 글씨를 통해 곱게 써 내려가던 행운의 편지가 시대 변화에 따라 PC를 이용하여 작성되고, 온라인상에서 copy & paste를 통해 확산된 후, 안정주에 이르러서는 영상클립을 이용한 행운의 편지로 재매개remediation된 것이다. 이 영상작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행운의 편지의 구조와 내용에 따라 연결해 놓은 76개의 단어 카드가 있어야 한다. 089
영상클립을 이용하여 새로운 언어 구조를 제시한 이 작업은 카드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업 앞에서 모르는 언어를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막막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작동 방식이 문자 체계의 그것과 다름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재매개가 특정한 시대에 나타나는 특정한 집단의 관행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상 이미지시대를 대변하는 작가의 영상편지 앞에서 관객은 문자체계가 만들어 놓은 소통방식을 넘어 소리와 이미지가 창출해 내는 다양한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안정주의〈행운의 편지〉 는 새로운 영상 세대의 표상양식이자 그들의 문화적 관습이나 경험을 반영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행운의 편지〉 는 기존에 규정된 규칙이 아닌 새로운 규칙의 플랫폼을 제공함으로써 기존 체제를 재고함은 물론 새로운 체제에 대한 대안적 패러다임을 상정할 수 있게 한다.
행운의 편지(Chain Letter), 6채널, 컬러, 5'5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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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이 이제 막 취임하였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이후 맞게 된 대선정국과 개표 결과를 지켜보며, 익히 알고 있었던 대세론을 확인한 것에 대한 안도감 보다는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체화된 이데올로기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결과치가 함의하는 의미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 기존체계 비틀기와 그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 안정주의 작업은 두려움 너머를 살필 여지를 깨우치게 해준 소중한 것이었다.
기혜경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사로 석사와 20세기 중남미 박사를 마쳤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시《 미술》,《신호탄》,《메이드 인 팝랜드: 한중일 삼국의 팝아트�, �올해의 작가상 2012》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현재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 재직중이다. 박사 논문인『대중매체의 확산과 한국현대미술: 1980-1997』을 비롯하여, 80년대 말 이후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의 대응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고찰 및 한국 동시대 미술의 미술사적 정립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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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인콜렉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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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 예술/가의 위치 짓기를 위한 질문하기라는 작전 �� 신보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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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웠다. 지난 가을 무렵부터, 광장에 촛불이 켜졌고. 태극기가 펄럭였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의 외침이 있었고, 연설과 선동이 있었다. 처음엔,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바꿀 수 있을지, 과연 끝은 있을지. 지인들이 텐트를 치고 광화문 광장에서 겨울과 싸울 무렵에도 그 결말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후, 모든 것이 급변했다. 우리는 대통령을 자리에서 내리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으며, 새로운 변화의 길을 조심스레 걷고 있다. 2016년에서 2017년을 넘어오며 우리가 해 낸 일들에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촛불 하나 밝힘이, 그렇게 밝혀진 촛불의 이어짐이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배웠다. 하지만, 그 날도 광화문 그 광장 사거리 40미터 광고탑 위에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인 이인근을 비롯해서 각각 다른 사업장에서 장기 투쟁을 해온 여섯 명의 노동자가 고공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대통령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봄날,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삶을 지속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가야만 했다. 콜트콜텍. 1973년 자본금 200만원으로 시작했던 악기제조사가 세계 악기시장의 30%를 점유하고, 박영호 대표이사는 한국부자순위 120위에까지 올랐다. 이 모든 성장의 배후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호 사장은 싼 임금으로 기타를 만들기 위해 한국 공장을 폐업하고, 중국이나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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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인근 지회장은 한강 망원지구에 있는 송전탑에 올라 한 달 가까이 고공 농성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벌써 10년째다. 그 사이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꿈의 공장〉 이 만들어졌고, 상영회에서 축하공연을 했던 킹스턴 루디스카의 매니저는 노동자들에게 투쟁의 방식으로 밴드를 제안 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밴드 ‘콜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3500일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옥인 콜렉티브는 2010년 무렵 홍대 앞 칼국수집 두리반 철거와 관련된 문화예술인들의 농성과정에서 콜밴(콜트콜텍 해고노동자 밴드)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도 콜밴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왔는데, 2013년 말 혜화동 1번지 소극장에서 이들이 올린〈9일만 햄릿〉 이라는 연극도 그 중에 하나였다. 9일 동안 이어졌던 공연은 밴드 연주자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들이 장기 적인 싸움을 하게 되었는지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096 서울 데카당스-Live, 단채널, HD, 컬러, 55', 2015
그들에게 혹독했다. 연극을 준비하던 중 해고노동자 들이 내었던 해고무효소송파기 환송심에서 이들은 패소했고, 그 결과 햄릿의 주인공들이 무대에 서지 못하는 상황까지 야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옥인 콜렉티브는 콜밴과 그 동안 연대했던 수많은 음악가, 미술가들처럼 이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더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서울 데카당스‒Live〉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서울 데카당스‒Live〉 는 영상작업이 되기 이전에 옥인 콜렉티브가〈9일만 햄릿〉 의 배우였던 해고 노동자 이인근과 임재춘, 그리고 연극의 공동연출이 었던 진동젤리의 권은영과 매운콩을 캐스팅 해서 흡사 연극의 연습 장면과 같은 상황을 연출한 절반은 즉흥으로 이루어진 ‘라이브’ 공연이었다. 공연의 도입이자 공장의 기계소리와도 같은 노이즈가 그치면, 연출가 매운콩이 등장해서 옥상 바닥에 분필가루로 일시적인 무대임을 알리는 네모를 그린다. 그리고 햄릿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역을 맡은 이인근이 자신의 대사를 시작한다. 배우는 연출에게 자신의 어색한 연기를 도울 방법을 묻고 시간이 지날수록 배역 속으로 몰입해 간다. 하지만 연습의 과정에서 실제 삶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어긋나며 현실의 거대한 문제 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며 분투해나가는 예술가의 모습 또한 투영한다. 이어서 오필리어를 맡은 임재춘과 또 다른 연출인 권은영이 등장하여 대화를 이어나간다. 097
관객들은 누가 봐도 전문적인 배우가 아닌 그들이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의 움직임을 개선해나가며 왜 이렇게 열심히 연기 연습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의 연기가 유연하게 되어 가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나쁜 일 인지 모를 희비극의 상황에 놓여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옥인 콜렉티브도 이야기하듯 여기에서 ‘라이브’는 실제로 공연한다는 의미에서의 라이브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어쩌면 오래 전에 도착했을지도 모를(끝나지 않는 악몽과 같은)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라이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실제의 공연과 공연의 기록으로 이루어진 영상 작업은 공연의 부수적인 기록 영상이라기 보다는 공연과 그에 대한 영상이라는 두 개의 다른 작품이면서, 동시에 상보적 으로 서로를 참조하게 되는 하나의 (현재진행형) 영상작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연극연습 이라는 설정, 공연, 그리고 공연을 통해서 공연을 다루는 영상이 만들어 내는 ‘영리한’ 구조를 통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작품 속 인물에게 다가가며 관객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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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싸워온 사람들인데, 작품을 통해 만나는 인물 들은 한결 같이 순박해 보이기만 하다. 연출가가 던지는 질문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기도 하고, 멋쩍게 웃기도 하고. 자분자분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펼쳐간다. 그 어디에서도 ‘과격한 투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럴 것이다. 머리띠 둘러매고 40미터나 되는 광고탑에 올라갔던 그 분 역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신문이나 뉴스의 일면을 차지하는 사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모습에서 느껴지는 괴리감. 옥인 콜렉티브가 던지는 질문이다. 박정근 사건을 다루었던〈서울 데카당스〉 에서도 이와 유사한 ‘작전’이 드러난다. 박정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청년이었다.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사진관에서 가끔 일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인디레이블도 만들면서 차근차근 살아가던 청년. 그런 그가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 웹사이트를 리트윗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재판장에 서게 되고, 삶이 한 순간 달라졌다.〈서울 데카당스〉 는 법정에서의 최후 변론을 위해 전문 배우에게 연기 지도를 받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서울 데카당스‒ Live〉와는 달리 실제 공연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서울 데카당스〉 와 유사한 방식 으로 인물을 드러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에 등장하는 박정근의 말투, 태도는 어이없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서울 데카당스〉 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그가 처한 ‘엄청난’ 상황은 지금 우리사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으며, 그러한 상황이 그저 그런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수 있다는 자각이기도 했다. 099
그것이 옥인 콜렉티브의 작전방식이다. 가볍지만, 진지하게. 따로 또 같이. 답을 찾기보다는 제대로 된 질문하기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들의 어디에서도 투사적인 면모나 행동가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소란스럽지 않은 낮은 목소리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한다. 종종 이들을 액티비스트나 사회적 예술을 하는 팀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실상 이들이 예술을 통해 세상과 맞닿는 방식은 그렇게 과격하지도, 무겁지도 않다. (그래서 오해를 사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지극히 낮은 목소리, 때문에 관객은 더 집중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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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시작부터 그랬다. 옥인 아파트 철거에서 비롯된 옥인 콜렉티브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르네상스 계획을 비판한다던지 젠트리피케이션을 주요 이슈로 잡아서 성토대회를 하기 위해 콜렉티브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이야기하듯이, 옥인아파트에 대한 그들의 ‘흥분은 작업이나 투쟁 이전에 보다 원초적인 죽음, 사라짐과 관계가 있었고’, 기억이자 기록이었다. 그렇게 옥인 아파트와의 송별회처럼 옥인 콜렉티브의 시작인 〈옥인동 바캉스〉 가 만들어졌다. 철거와 재개발이 라는 무거운 주제 앞에서, 옥인 콜렉티브는 (다소 발랄하게)〈옥인동 바캉스〉 를 열면서 사람들을 초대 하고,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기록하였다. 옥인동 아파트와의 이별에 앞서 아파트 옥상에서 벌였던 불꽃놀이는 철없는 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태의 시작은 언제나 ‘정치적’이었지만, 그들의 대응은 ‘시적’이라고 답한다. 그것이 예술가로서 예술을 통해 세상에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한다. 2011년 루프에서 있었던〈작전명-하얗고 차가운 것을 위하여〉 에서 옥인 콜렉티브는 하나의 퍼포먼스를 ‘기획’하였다. 관객의 명단을 미리 준비하여 비상 연락망을 짜고, 특정 문자메시지를 보내어 행동을 지시함으로써 예상치 못했던 퍼포먼스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작전을 위해 동원된 피켓 모양의 오브제는 실제 눈을 쓰는 도구였으며, 정작 작전일은 눈이 오는 날 이었다. 이광석이『옥상의 미학』 에서 잘 설명하고 있듯,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2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적인 대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오가는 작업 이다. 후쿠시마 사태가 벌어졌을 때, 옥인 콜렉티브는 핵 재난과 같은 사태에서 일반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고 했다.
101 작전명-님과 노래를 위하여_건물 안팎에 설치된 방송 시스템을 이용한 사운드와 퍼포먼스_2014
그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안방식을 어이없게도 ‘기체조’에서 찾았다. 퍼포먼스와 영상작업으로 소개되는 작품을 통해 옥인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낯선 이웃(혹은 관객)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의 기체조를 시연한다. 세상 진지하게. 앞서도 언급했듯이, 옥인 콜렉티브는 때론 액티비스트로, 아나키스트로 오해 받기도 하고, 때론 나이브하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옥인 콜렉티브의 작업을 살펴보면, 액티비스트도, 아나키스트도 아니다. 나이브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세상에 예술가로서 어떻게 위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들이다. 무너져 사라질 운명의 옥인 아파트를 보면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자신들에 대한 불안을 감지했다. 예술가로서의 각자의 삶에 성실히 임하면서, 또 함께 하는 예술가로서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작품으로 풀어낸다. 예술이 세상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현대)예술은 세상과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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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펙트럼 2016》 에서 선보였던〈아트 스펙트랄〉 은 그 한 예이다. ‘아트 스펙트랄’이라는 단어는 전시제목 이기도 한 ‘아트 스펙트럼’을 교묘하게 뒤틀어 만들었다. 옥인 콜렉티브는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장면을 보여주는 전시이며, 젊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아트 스펙트럼》 에서
시작하여 ‘한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 예술가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서 질문했다. 늘 그렇듯, 이 작업에 서도 옥인 콜렉티브는 그들만의 스타일로 풀어내었다. 사실《아트 스펙트럼》 에 선정되었다고 했을 때, 그들이 뭔가 다른 퍼포먼스와 영상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삼성’이라는 재벌기업과 그들이 후원하는 ‘예술후원’에 대한 메타적인 비평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정작 옥인 콜렉티브는 새로운 퍼포먼스도 새로운 영상작업도 만들지 않았다. ‘삼성’이라는 기업에 대한 그 어떤 직접적인 언급도 없었다. 대신 가능한 큰 마루를 만드는데 힘을 쏟았다. 상상만해도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만든 그런 ‘권위적인’ 공간에서 작가들이 모여서 마루를 만드느라 낑낑거리는 모습. 그 자체로 반항이 었고, 미술계가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한 도전일 수 있었다. 정작 미술관측에서는 전시장을 둘러보는 노고에 시달리는 관객을 위해 마련된 휴식의 공간이라고 설명
103 Art Spectral_2016
하기를 좋아했지만 실제로는 아트 ‘스펙트랄’, 즉 ‘유령 같은’ 예술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성 미술관과 삼성이라는 기업과의 관계, 자본 중심의 사회 속에서 옴싹달싹하기 힘든 예술과 예술가의 위치에 대한 신랄한 자기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 작업의 중심인 동명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전시장’을 찾아 작품을 보다 지친 관객들이 엎드리거나 누워 쉬어 갈 수 있고, 옥인이 마련해 놓은 책을 볼 수도 안 볼 수도 있다. 책을 보다 눈이 피곤하면, 세심하게 준비된 눈 운동 비디오를 따라 눈 운동을 할 수도 있다. 철저하게 서비스 정신에 입각되어 만들어진 공간에서 관객 역시 작가와 마찬가지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작품은 무엇인가? 마루일까? 책이나 영상일까? 모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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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예술/가의 무엇이고, 누구인가? 예술/가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가는 지금 이 시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은 더 이상 이런 진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운동가로 현장으로 뛰어들고, 누군가는 예술계에서 예술/가로 아무런 갈등 없이 살아간다. 옥인 콜렉티브의 세 작가 역시 각자의 작업을 하며 예술/가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콜렉티브’로서 그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예술/가는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를 통해서 사람들은 바뀔 수 있고, 예술/가를 통해서 잊고 지내던, 애써 보지 않던 것을 볼 수도 있다.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던진 질문들에 관객은 스스로의 답을 찾아갈 수도 있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 속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존재의 당위성을 찾아가는 것 같다.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답하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질문하기라는 ‘작전’이 여전히 유효하고, 우리는 또다시 그들의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신보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석사,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7년부터 전시기획을 시작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아트센터 나비에서 근무했고,《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미디어시티서울)》전시팀장(2003~2005),《의정부디지털 아트페스티벌》큐레이터(2005), 대안공간 루프 책임큐레이터 등을 역임했으며, 2007년부터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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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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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왜 산이고, 물은 왜 물인가?: 이완 론 �� 곽영빈
미술비평가/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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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가 작가로 코디 최와 함께 선정된 이완의 대표작은 ‘메이드 인’ 시리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비디오 포트레이트〉전에 출품된 ‘말레이시아 팜오일’ 편 역시 그 연작인데, 2014년 제 1회 ‘아트 스펙트럼 작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리즈를 위해 작가는 5년 전부터 아시아 12개국을 직접 탐방해 짧게는 3주, 길게는 두 달 넘게 현지에 머무르면서 쌀을 재배하고, 사탕수수를 베 원액을 끓였다 식히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설탕을 추출했으며, 직접 자른 나무로 나무젓가락을 만들었다. 한 끼의 아침식사를 직접 제작해보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한 이 프로젝트는 얼핏 소박해 뵈지만, 이를 통해 12개국에 이르는 아시아의 근대사 전체를 가로지른 다는 의미에서, 무모할 만큼 원대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말대로 몇 천원이면 살 수 있는 쌀을 수확 하려고 그는 휴경지와 트랙터를 빌려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린 후 두 달 반을 기다려 수확하며, 150불, 즉 17만원을 살짝 상회하는 3그램 정도 크기의 금을 추출해내기 위해 수 백 만원의 돈과 3주의 시간을 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109 메이드 인 말레이시아 �팜오일�(Made In Malaysia �PalmOil�), 1채널, 컬러, 13'20'', 2017
도심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금광에서 금을 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울 정도로 이 과정이 힘들었다고 작가는 고백한 바 있지만, 그러한 멜로드라마적 정서는 작품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그런 감정의 자리를 채우는 건 다소 건조한 자막들, 즉 선정된 아이템이 해당 국가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사에 대해 작가가 몇 달간 수행한 조사를 바탕으로 만든 설명문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만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설탕 산업이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발원했다는 것과, 비옥한 캄보디아 땅의 주력산물인 쌀이 자국민의 1/3을 학살한 크메르 루즈 출신 군인에 의해 재배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다소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쓴 모습에 포복절도하는 작가의 이미지로 끝나는 한국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품들은 그 어떤 감정적 반전이나 별다른 정동affect을 동반하지 않고 끝난다. 그는 도대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이토록 무미건조하게 수행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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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왜 산이고, 물은 왜 물인가? 작가는 종종, ‘이게 왜 여기 있지?’, 혹은 ‘내가 왜 이런 걸 좋아하지?’라는 단순한 자문을 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이는 자신 앞에 놓인 아침상의 역사적 계보, 혹은 그 (불)가능성의 조건을 거꾸로 훑는〈메이드 인〉 시리즈를 넘어, 그의 작업 전체를 가능케 하는 질문enabling question이다. ‘이 쌀은 어디서 왔나?’ ‘이 나무젓가락은 어쩌다 이 테이블 위에 놓이게 되었나?’
라는 질문은, ‘이 설탕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놓일 수도 있었다’는 선택지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보면, 작업 초기인 2008년 작품 〈닭고기 야구공〉 에서 시작해 버터로 만든 두개골, 소고기로 만든 거울로 이어지는 작업들은- 다다나 초현실주의보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대답들로 오롯이 솟아오른다. 동일한 ‘감각의 논리’는, 스팸 통과 버터나이프, 세제와 망치, 유리컵 등이 덕지덕지 붙은 일종의 ‘조합’ 혹은 ‘덩어리’가, 5.06㎏ 이라는 동일한 무게를 유지하는 다른 사물들의 또 다른 ‘조합’과 ‘따로 또 같이’ 동일하게 병치되는 〈How to become us〉2011 시리즈를 거쳐, 전자에
못지않게 무질서한 사물의 조합들이 전시장 바닥에서 천장에 이르던〈절대적 기준에 대한 내면의 불가항력적 2012 엔트로피〉 에까지 이어진다. ‘이 쌀은 어디서 왔나?’ 혹은 ‘이 금은 어떻게 만들어지나?’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한 ‘메이드 인’ 시리즈의 고지식하면서도 지극히 역사적인 대답은, 앞의 기이한 조합들이 만드는 변주의 풍경과 사실상 짝패를 이루는 것이다.
물론 ‘쌀은 왜,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쌀이 되었나?’, 혹은 ‘전혀 다른 구성요소로 이루어졌으나 같은 무게를 갖는 대상들은 같은 것인가?’라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자, ‘공동체성’에 대한 질문이 기도 하다. 가브리엘 타르드는 ‘모든 것은 사회다’라는 급진적 명제를 제시한 바 있는데, 이완에게 역시 정체성이란, 이런 의미에서 ‘이미’ 사회이자공동체이다. 하지만 이 ‘사회로서의 정체성’이란, 일반적인 의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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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적인 사회’가 아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모으는 구심력, 혹은 이들을 기저에서 떠받드는 실체적 최소공배수란 작가에게 일종의 허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 그가 출품해 많은 주목을 받은 메인작품인〈고유시 Proper Time〉 , 즉 서로 다른 속도로 가는 668개의 시계들을 통해 압축적으로 형상화된 바 있다. 정체성과 공동체성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탐구는, 그러나 약간 다른 앵글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인터뷰에서 작가는 ‘불가항력’이라는 말로 자신의 작업을 요약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 나무젓가락은 어쩌다 이 테이블 위에 놓이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대해 ‘메이드 인’ 시리즈가 역사적으로 제공하는 응답 방식이기도 하다. 이토록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을 통해 손바닥 위에 놓인 콩알만 한 금과, 한 숟가락도 안 되는 설탕의 클로즈업은 ‘달리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작가가 오랜 기간 수집해온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귀한 자료들과, 황학동에서 5만원을 주고 산 한 남성의 일대기 사진을 의사‒바르부르크 2017 적인 방식으로 뒤섞어 배치한〈Mr. K〉 는, 이렇듯
‘쌀을 쌀로’ ‘나무젓가락을 나무젓가락으로’ 만드는 정체성 중심의 구심력을 매개로 ‘Mr. K'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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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근본적으로 스피노자적인 사유방식과 직결되는데, 그가 보기에 인간에게 자유란,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은 미시적인 차원까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이러한 ‘불가항력’의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고, 실질적으로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무지 속에서만 자유와 자유의지가, 더 정확 하게 말하면 ‘책임’이, 즉 ‘인간’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살인범이 사람을 죽인 후, 모든 것은 예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물론 여기서 책임, 즉 responsibility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응답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이라는 의미
에서 적극적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자신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대답할 필요가 없는- 예를 들어 자신과 아무런 관계없는 타자를 구하기 위한- 부름에도 대답할 수 있는 능력으로까지 정의한 바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자유와 책임이란 스스로 짊어지는 것, 즉 인간은 스스로를 책임 있는/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간주할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역설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고유시〉 와〈Mr. K〉 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차원에서 서로 배치opposed되는, 서로 다른 배치agencement인 것이다.
Lee Wan, Mr. K and the Collection of Korean History, 2010-2017. Photographs and assorted archive objects.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the Korean Pavilion, 57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La Biennale di Venezia. Photo by the Artist.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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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과 이면�, 혹은 별자리의 가능성 이 지점에서, 그를 일베에서 소위 ‘갓티스트(God+ artist)’로, 즉 일베의 ‘인준’을 받은 여혐 아티스트로 ‘등극’시켰다는〈한국여자 Korean Female〉관련 논란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이 작품은 소위 ‘명품 브랜드’인 디올의 의뢰를 받아 만든 것이었지만, 결국 ‘한국 여성 전체를 술집여성화 했다’는 댓글에 6천개가 넘는 ‘좋아요’가 눌린 작품으로 알려지며 전시에서 내려지고 말았다. 작가가 레지던시 차원에서 내려가 있던 광주의 실제 번화가 사진을 쓴 것이고, 젊은 여성의 배경으로 작가가 일일이 조합해 만든 11개의 간판들 중 룸싸롱 관련 간판이 특권화된 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해명에도 불구하고,〈한국 여자〉 라는 포괄적이며 단정적인 제목과 프레임 내부의 특정 시각기호들이 만든 강력한 선택적 친화력은, ‘여혐’이라는 혐의로부터 작품을 떼어놓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완이 그간 만들어온 모든 작품을 이 작품 하나에 우겨넣는 건, 작가를 떠나 ‘페미니즘’이 라는 대의 자체에도 비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이 논란의 중앙에 솟아오른 시점은, 2016년 4월, 당시 정의당과 총선 테마송 관련 협약을 맺은 중식이 밴드의 소위 ‘야동’을 기반으로 만든 노래가 ‘여혐’논란 속에서 비난을 받았던 시점인데, 그렇다고 이러한 ‘정황’만 강조하면서 작품에 내재하는 문제점을 주변화시키려는 시도 역시, 사태를 그 중심 에서 직면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 해야 이 논란을 예외적인 것으로 주변화하지 않으면서, 작가와 작품의 중핵, 혹은 그 한계와 마주할 수 있을까? 1《보그》지 2016년 4월 호.
논란의 정중앙을 통과 중이던 2016년 4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작품 중앙에 디올 가방을 들고 선 여성을 설명하면서 “서글프긴 하지만, 디올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서 구매하는 게 아니라 자기 경쟁력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 바 있는데,1 이는 위에서 그가 ‘불가항력’이라고 요약한
사물과 세상의 회로에서 스스로를 끄집어냈을 때에만 가능한 판단이다. 어떤 ‘불가항력’적 과정을 통해 자신이 디올 백을 들게 됐는지 모르는 여성을, 작가는 일종의 ‘신의 시점’을 점유한 시좌에서 ‘내려다본다.’ 그는 이를 “서글프”게 바라보는데, 그건 “디올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서 구매하는 게 아”닌 여성에 비해, 작가인 그는 그녀가 “자기 경쟁력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지식의 ‘낙차’가 문제의 광경을 “서글프”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한국여자〉가 작가 스스로를 작품의 정중앙에 집어넣었던〈메이드 인〉시리즈를 물구나무 세운 작품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앞에서 우리는〈메이드 인〉 시리즈가 “무미건조하다”고 기술한 바 있는데, 그러한 정동의 부재는 작가가 해당 대상의 역사적 위상과 궤적에 대해 지식의 낙차를 갖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방금 인용한 문장(“서글프긴 하지만…”)의 초입에서 작가는 사실 “한국에서는 표면적인 것이 매우 중요해요” 라고 운을 떼는데, 캄보디아 편〈메이드 인〉 시리즈에 서는 몇 천원이면 구할 수 있는 “쌀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몇 천 킬로미터를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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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는 설명이 문자화된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도 그는, 이태리 대리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태리 대리석’이란 이름의 대리석 무늬 시트지로 포장된 기둥과,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무궁화를 전시 했는데, ‘표면과 이면’, 혹은 ‘가짜와 진짜’라는 다분히 전통적인 짝패는, 그의 작업을 그 중핵에서 관통하는 양가적인 의미의 열쇠말로 기능한다. 즉〈한국여자〉가 “서글픈” 것은 이러한 ‘표면’과 ‘이면’의 구조, 즉 가짜와 진짜의 가치구조가 작가에게 명확했기 때문 이고, ‘메이드 인’ 시리즈에 감정이 결부되지 않은 것은 그 둘의 수직적 구분과 위계적 가치판단이 철저하게 괄호쳐지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구더기가 창궐하며 해체되어가는 새의 시체를, 영원할 것처럼 순환하는 각종 상품과 대비시키면서도 밝은 음악으로 감쌌던 2008년 작품〈신의 은총(Dei Gratis)〉이 아이러니하게 웅변했듯, 역사는 진짜나 가짜, ‘발전’이나 ‘퇴보’와 무관하게 (그저) ‘계속된다’는 무정동적 인식이 후자에선 유지되었던 것이다. 즉 나무젓가락은 플라스틱 젓가락으로 대체될 수 있고, 쌀은 식용 곤충으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 “서글프”지 않은 일이라는 것. 벤야민식 으로 말하면, 핵심은 ‘표면과 이면’의, ‘깊이와 너머’의 사고가 아니라, 다양한 별들이 측면에서laterally 만들어
내는 특정한 조합들, 즉 ‘별자리Kon-stellation’의 문제인 것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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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런 엄격한 의미에서〈한국여자〉논란은 작품의 제목과 사진 내부의 시각기호들이 만드는
특정 조합으로서의 별들(aster)의 혼돈과 부서짐(dis-), 즉 일종의 재앙(dis-aster)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완의 작업이 앞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적 무의식에 의해 관통된다는 게 사실이라면, 즉 왜 쌀은 쌀이고, 나무젓가락은 나무젓가락이며, 세상은 이 모양으로 유지되어왔느냐는 질문에 대한 근원적 탐구가 그를 작동시킨 것이라면, 그간의 탐구가 무의식적으로 ‘남성적’인 것이었다는 자각만큼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한 또 다른 탐구야말로 그의 근본적 ‘응답가능성’이자 ‘자유’가 될 것이라는 것, 그것이 우리, 혹은 스피노자의 내기이다.
Lee Wan, Proper Time: Though the Dreams Revolve with the Moon, 2017. 668 clocks.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with For a Better Tomorrow at the Korean Pavilion, 57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La Biennale di Venezia. Photo by the Artist. Courtesy of the Artist.
곽영빈 미술비평가/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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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Wan, Mr. K and the Collection of Korean History, 2010-2017. Photographs and assorted archive objects.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the Korean Pavilion, 57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La Biennale di Venezia. Photo by the Artist. Courtesy of the Artist.
장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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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피부를 만지는 일
Touching the Skin of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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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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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 픽션 예술작품의 ‘신체성’이란 어떤 것일까? 장서영의 2011 〈상자〉2011와〈상자 안에서〉 는 마치 ‘비디오’의 신체성에 관한 한 가지 답변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편의 초기작으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장서영의 작업이 전개된 양상을 들여다보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 혹은 현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눈에 띈다. 그리고 영상이라는 매체의 비물질적 성질은 이런 주제와 잘 어울린다. 지표index나 흔적으로서만 가시화되는 존재에 관한
장서영의 관심은 여러 작업에 나타난다. 짝을 이루는 두 편의 영상〈상자〉와〈상자 안에서〉 는 한겨울 제주도의 외진 과수원 기슭에서 간이 구조물에서 추위를 피하다 사망한 노숙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다. 정상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지워진 어느 노숙자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눈길을 끌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죽은 자의 존재는 오직 시체를 먼저 수습하고 남은 ‘상자’의 이미지로만 전해진다. 죽음을 계기로 알려지는 삶이 라는 서사의 구조는〈이걸 들을 때 쯤 나는 없을 2014 거예요〉 에서 반복된다. 어두운 건물 복도와 층계를 거닐며 ‘이걸 들을 때 쯤 나는 없을 거예요’ 하고 내뱉고 빵 조각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퍼포머를 손전등 조명만이 어슴푸레 비춘다. 이 대사는 자살한 청소년들이 남긴 유서에게 가장 빈번하게 발견되는 표현에서 유래했다. 이미 ‘없어진’ 삶은 유언이라는 흔적을 통해서 새삼스러울 만큼 새롭게 121 환기되고는 한다.
2014 〈아주 중요한 내장을 위한 기념비〉 에서는 질병 (대상)과 통증(지표)의 관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내장과 바깥의 역전을 시도한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의사는 병이 없다고 진단하고, 이에 맞서 환자는 ‘양말을 뒤집듯’ 안팎을 바꾸기로 한다. 내장을 바깥으로, 머리카락과 피부를 안으로. 그러나 뒤집힌 양말이 허공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흑백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변사의 이야기는 곧바로 뒤집어진다. 바깥에는 머리카락과 피부만, 안쪽에는 내장과 더불어 모든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말실수(또는 기준 시점의 갑작스런 변화)의 고의성을 확인하는 것보다 좀 더 흥미로운 건 이런 전환을 통해 벌어진 사태를 목도하는 일일 테다. ‘뒤집기’로 말려들어간 건 머리카락과 피부가 아니라 모든 세계였다는 점. 이때, 뒤집는 신체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영상 매체라고 본다면 어떨까.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영상에 2016 대한 통상적 생각은〈납작한 세계의 구체〉 에서
바뀌게 된다. 덕수궁 출입제한구역의 풍경을 로드뷰로 감상할 수 있게 한 이 작업에서 영상은 다시보기가 아니라 첫인상을 제공한다. 평생 원본을 볼 수 없고 가상만을 접할 수 있을 때, 세계의 모든 것은 이미 영상 안에 있다.
지표 기호는 대상과의 ‘접촉’을 전제로 한다. ‘노숙자‒ 상자’, ‘자살청소년-유언’, ‘질병-통증’은 대상과의 신체적 접촉을 매개로 하는 쌍으로, 영상이나 사진 기록 장치를 매개로 한 ‘출입제한구역-로드뷰’의 경우와 차이가 있지만, 장서영의 작업에서는 전자 역시 다시 122 한 번 영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서 네 가지를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있다. 특히〈납작한 세계의 구체〉2016 에서 영상은 내부를 가상적으로 탐사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가상을 세계의 유일한 원본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영상을 세계의 지표로서 다루는 장서영의 작업을 일종의 ‘내장 픽션’이라 부르면 어떨까. 말 하는 상자 다시 상자 연작으로 돌아가서, 죽은 노숙자의 일화를 소재로 한 이 작업들은 영상이라는 납작한 상자를 빌어 발화한다. 그 중〈상자〉 는 일종의 대본이나 자막 영상으로, 리드미컬한 멜로디의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글이 타이핑되었다 삭제되었다 하는 모습을 2014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어둡고 ( 공허한〉 과〈Keep
2017 Calm and Wait〉 도 각각 맥락과 수법은 다르지만 장서영의 글 영상 작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편, 〈상자 안에서〉 는 묘한 낭독 영상으로, 의미 불명이 될 만큼 순서가 뒤죽박죽 된 파편적인 단어나 구절을 퍼포머가 감정이입할 겨를 없이 기계적으로 읽어내고, 이를 촬영한 후 편집 과정에서 퍼즐 맞추기 하여 온전한 글로 재구성한다.
123 In the Box, 1채널, 컬러, 1'26'', 2011
상자 연작 두 편은 각기 다른 발화 방식을 보여준다. 장서영은 여러 작업에서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이는데,〈상자〉에서도 그렇다. 노숙자 사망 사건에 관한 언론 보도는 초단편 소설이나 모놀로그 시나리오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나리오의 운명이 그렇듯, 자족적인 동시에 상연이나 상영을 요구한다. 여기서 글 영상〈상자〉 는 낭독 영상〈상자 안에서〉에 비해 시나리오의 자족성을 강조한다. 배우의 현전 및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없이도, 시나리오는 몇 가지 장치만으로도 재생될 수 있다. 가령〈상자〉에서는 경쾌하고 빠른 음악이 비극적인 내용과 충돌하며 극적 긴장을 조성한다. 작가는 글이 쉽게 쓰이고 사라지는 모습을 통해 사건과 개인이 쉽게 망각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하지만, 타이핑의 조석 간만은 배경 음악과 결합하여 소리 없는 낭독 극을 연출하는 데 좀 더 기여하는 듯하다. 손쉬운 망각의 문제는 오히려〈상자 안에서〉 에서 발견된다. 촘촘하게 분절된 대본을 읽는 퍼포머는 내용의 인지불능은 물론 몰입의 차단 결과, 사건을 기억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 현대의 망각은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인식 및 반성 능력의 부재에서 오는 게 아니던가. 장서영의 작업에서는 대부분의 발화가 변사의 낭독이나 나레이션, 자막으로 이루어지지만,〈완전한 2014 인간〉 에서는 예외적으로 역할극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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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머는 1인 2역으로 예술가(장서영 역)와 배우 연기를 소화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연기’
개념의 도입이 자아의 ‘분열’과 결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분열은 첫째, 작가 본인과 작가의 페르소나인 퍼포머로, 둘째, 2채널 영상으로 복제된 퍼포머의 1인 2역으로 일어난다. 이런 분열-연기를 통해 제시되는 것은 빈틈없이 봉합된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주체의 분열적 감각이다. 영상을 매개로 한 주체의 자기 인식은 시차가 있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시차는 점점 커질 테고 말이다. 정체성의 혼잡(혼란이 아니라)에 관한 탐구는 2015 〈Lea는 누구인가?〉 에서 극대화된다. 레아라는
인물을 암시하는 사진, 글, 영상을 함께 제시하는 이 작업은 개념미술의 전범이 된 조셉 코수스의 1965 〈세 개의 의자〉 의 전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실물 대상을 영상 퍼포먼스로 대체하는데, 실은 이 영상만으로도 대상과 언어의 개념적 분열이나 불일치를 지시하기 때문에 사진과 글은 장식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이러한 ‘장식성’은 이 작업의 잉여적 요소라기보다 주제에 가까워 보인다. 액자 구조를 이루는 이 영상의 주인공은 전시 도슨트로서 영상 설치 작업과 영상 속의 인물에 관해 설명한다. 도슨트라는 설정으로 인해 Lea의 정체성에 대한 수수께끼는 예술작품의 감상에 관한 수수께끼로 겹쳐진다. 설명하는 언어가 복잡해질수록, 즉 언어의 장식이 증대할수록 수수께끼는 복잡해진다. 이렇게 한 인물의 실체를 추적해나가는 드라마의 외피를 두른 이 작업은 예술작품의 전시에 관한 알레고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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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조각 현전으로부터 (일단) 빗겨선 영상 매체를 주로 이용하여, 실제와 가상 간의 미로 게임을 만들며 유희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가는 의외로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려 했다고 밝힌다. 실체 없음으로서의 가상은 어떻게 현전으로 회귀하고 있을까. 사실, 영상의 비물질적 성질과 조각적 현현의 역설적 공존에 대한 인식은 드물지 않다. 영상의 공간적 기원을 먼저 영화관에서 찾은 후 미술관의 시간적, 공간적 체험 방식을 고민하는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역설을 추구해왔다. 영상-조각의 대략적인 등장 배경은 첫째, 영상 작업의 건축적 설치에 대한 고민과 둘째, 전시 관객의 정신 분산적 감상 방식에 대한 대응에 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전자는 다양한 스크린 건축술로부터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된 설치 미술로의 확장으로 이어지고, 후자는 거의 변화가 없거나 반복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단조로운 쇼트나 시퀀스를 추구하는 방향성을 낳았다. 장서영이 영상에 조각적 성질을 부여하는 이유와 방법은 무엇일까. 러닝타임 내내 퍼포머를 바스트샷으로 고정한〈상자 안에서〉 나 단일 오브제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제시하는〈아주 중요한 내장을 위한 기념비〉 는 후자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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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보다 특수한 방법은〈나를 잊지 마세요〉 와〈납작한 세계의 구체〉201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영상 빛에
다시 빛 쪼이기.〈나를 잊지 마세요〉 는 슬라이드 재생되는 언론 보도 사진 위에 손전등을 밝혀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이 지워지도록 한다.〈납작한 세계의 구체〉에서도 인물의 머리가 지워지는데, 이번에는 백색 원형으로 평면적 이미지를 오려낸다. 이와 같이 영상의 ‘뚫린’ 공간을 암시함으로써, 물리적 실체가 없는 영상의 이미지를 오히려 3차원으로 의식하게 만든다. 이 중〈납작한 세계의 구체〉 는 영상과 함께 대형 백색 풍선을 설치하여 2차원의 영상 속 뚫린 공간이 3차원으로 삐져나온 효과를 연출한다. 2차원의 영상이 3차원의 공간을 뚫고 나왔다고 할 수 있을까. 2016 백색 풍선이 다시 등장하는〈블랙홀바디〉 는 실제와
가상의 전치에 관해 보다 직접적으로 선언한다. “그러니까 내가 내 몸에서 나가야겠어.”
영상이 실제를 모방하고 재현하는 대신, 영상과 실제의 안과 바깥 또는 앞뒤가 뒤집혀 실제가 영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형국. 이런 상황에서 장서영은 작업을 해오는 내내 타인이 특정해낼 수 없는 통증을 호소한다. 영상 매체에 관한 이 글의 모든 분석을 뒤집어 자전적 이야기로 환원해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빛의 피부를 만지는 일의 멜랑콜리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김정현 미술비평가. 동시대미술의 수행적 측면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2015년 동시대 퍼포먼스 미술에 관한 글로 제 1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고, 극장성의 번역에 관한 기획으로 AYAF 시각예술 큐레이터에 선정되었다.《아무것도 바꾸지 마라》(2016),《박정혜 개인전: Dear. Drops》(2016), 《연말연시》(2015),《산책일지》(2014, 공동)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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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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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익숙함, 낡은 낯설음 : 전소정의 영상 작업 �� 김남시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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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하는 습관 전소정 작가가 제작한 일련의 영상작업들 ‒〈노인과 바다〉 〈Something Red〉 〈The King of mask〉 〈마지막 기쁨〉 〈어느 미싱사의 일일〉 〈되찾은 시간〉 〈마이 페어 보이〉 〈보물섬〉 〈열두 개의 방〉 〈따뜻한 돌〉 〈사진〉 〈불의 시〉‒ 을 ‘일상의 전문가’ 시리즈로 한데 묶어 부르는 건 어디까지나 편의적일 뿐이다. 이 제목은 마치 이 작품들이 사라지고 있는 다양한 직업군들을 찾아 보여주는 ‘인간극장’ 류의 다큐멘터리인양 오해하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 시대의 ‘주인공’도, 쇠락해 가는 오래된 직업들의 노스탤지어를 불러내는 ‘사라져가는 장인들’도 아니다. 이 작품의 비다큐멘터리적 성격은 그 형식에서부터 드러난다. 다큐멘터리를 지향하는 영상작업에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일정한 조응이 추구될 것이다. 거기서는 들리는 것, 예를 들어 주인공의 말이나 내레이션은 보이는 것을 설명하거나 부연하며, 보이는 것, 즉 화면은 들리는 것을 확증하거나 증언하는 관계로 맺어져 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화면과 사운드 사이의 이러한 조응을 통해 다큐멘터리는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주장한다. 전소정 작가의 영상들은 이와 다르다. 작가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조응을 의도적으로 파괴시키는 쪽이다. 131
이 영상 작품들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화면에 보이는 인물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나’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설자라 할 만한 누군가가 화면에 등장하는 행위나 장면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작가가 작성한, ‘1인칭 자유 간접화법’이라 칭할만한 그 텍스트는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그렇다고 온전히 작가의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 텍스트를 발화하는 목소리 역시 작가에게도, 화면에 모습을 보이는 인물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비전문인의 낯설고 서투른 내레이션이 언뜻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화면에 어색하게 결합되어 있다. 미싱사, 영화 간판장이, 줄광대, 김치공장 노동자, 인형 제작자, 피아노 조율사, 해녀, 낚시꾼, 박제사, 돌 수집가, 도공, 변검 예능인이 등장하는 건 그들의 진귀한 직업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서 특정한 신체적 움직임, 이를테면 ‘습관’이 일어나고/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2 줄광대가 등장하는〈마지막 기쁨〉 에는 “제일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줄에서는 눈이 없어야 하고 귀가 열리지 않아야 하고 생각이 땅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알고 줄이 나를 호되게 꾸짖을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가면 안에서” 공연을 하는 변검 예능인, 그의 이야기를 다룬 〈The King of Mask〉 의 내레이션은 “눈과 귀가 막힌 상태에서 오직 나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132
2009 〈노인과 바다〉 의 낚시꾼에게 고기를 잡는 방법은 보고, 듣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기술과 시간, 그리고 믿음”이며, “운을 믿으며 기다리는 것, 그것이 2012 전부다.” 영화 간판쟁이 ‒〈되찾은 시간〉 ‒ 에게
“간판 위의 시간은 견고한 두께로 쌓여간다. 볼 수 없어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공중에 매달린 외줄을 타고, 사람들의 눈 앞에서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고, 성질이 급해 “잡은 지 1분도 안돼서 죽는” 청어를 낚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저승길이 왔다갔다”하는 바다 속을 “허위적 허위적 2014 들어나가며” 전복을 따고(〈보물섬〉 ), “인간이 2014 눈으로 들을 수 없는 음”(〈열두 개의 방〉 )을 맞추어 내는 일, 이런 일들은 눈과 귀에만 의존해서는 도무지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보이고 들리는 것을 넘어서는 “눈과 귀가 막힌 상태에서 오직 나 자신 만을 믿는” 어떤 익숙함이 요구된다. 도공의 이야기가 2015 담긴 영상작품〈불의 시〉 는 이를 “마음으로 익히고 몸으로 익히는 것”이라고 칭한다. 작가는 예술도 이러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눈과 귀에 의존하는 대신 마음으로 익히고 몸으로 익히는 것이 예술의 기본이 되어야 2012 한다고 여기는 듯 하다.〈예술하는 습관〉 은 손바닥 위에서 공을 돌리고, 성냥개비로 조심스럽게 탑을 쌓아 올리고, 컵의 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평균대위를 걷고, 불타는 링을 통과하는 등 반복적인 익힘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작품의 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상은 ‘예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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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반복적 연습을 통해 몸과 마음에 침전되는 ‘습관’과 관련시킨다. 이 ‘예술하는 습관’은 우리 삶에 실질적으로 유용한 것을 산출해내지 않는다. 영상에서는, 조심스럽고 끈질기게 지속되는 연습의 장면들이 흔들리는 물에 비친 달을 포착하려 하거나, 구멍 뚫린 독에 물을 길어다 붓는 장면과 함께 흐른다. 애써 쌓은 성냥개비 탑이 ‘어!’ 하는 순간 무너져 내리듯, 예술하는 습관이란 결국 “헛일, 한없는 헛걸음. 아무 곳에도 이르지 않는 한없는 제자리걸음”( 〈어느 미싱사의 일일〉2012)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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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여기서 말하는 ‘예술하는 습관’은 ‘예술을 하기 위한 습관’이 아니다. 그것은 ‘습관으로서의 예술’, ‘예술이라는 습관’이다. 습관이 ‘마음으로 익히고 몸으로 익힘’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살아감 자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한 번의 이벤트를 위해 준비된 헬륨가스 넣은 고무풍선이 아니라, 그런 이벤트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 이며, 그것이 만들어 내는 몸과 마음의 ‘습관’이다. 2010 〈Three Ways to Elis〉 는 우리를 이런 종류의 ‘헛일’로 안내한다. 전소정 작가의 작업 중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가장 강한 이 영상은 핀란드의 숲 한 가운데 집을 짓고 홀로 살던, 한 때 무용수였던 예술가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만든 주거지에 인형과 오브제들을 ‘설치’하고, 숲 한가운데서 홀로 춤을 ‘공연’하며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예술은 삶이라 불리는 그 습관, 결국 ‘아무 곳에도 이르지 않는 한없는 제자리걸음’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술이라면 응당 ‘보이고 들리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곤혹스러운 것은, 그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은 그들의 눈과 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 의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통해 눈과 귀를 넘어서는 것을 열어주어야 한다. 영상이라는 매체 처음 전소정 작가의 영상 작업을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사용하는 영상 매체를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는, 작업들의 메시지나 내용에 해당될만한 것을 그 “속”에서만 찾으려 했었다.
135 Three ways to Elis, 1채널, 2.1채널 사운드, 컬러, 22'14'', 2010
그러다가 곧, 이 작가에게는 영상매체 곧, 소리와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결합 자체가 작품의 내용과 떨어질 수 없이 함께 감각되어야 할 요소임을 알았다. 전소정의 작업에서 영상매체는 그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액자나 틀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표현적 중심이자 핵이다.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영상 매체는 근대 기술적 성취의 결과다. 독일의 매체 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에 의하면, 축음기, 사진/영화와 같은 근대 기술적 매체는 통합되어있던 감각적 경험 들을 서로 분리시켰다. 축음기가 등장하기 전 우리에게 사람이나 사물의 모습은 그 소리와 결합되어 있었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우리는 그 소리의 원천인 사람이나 사물이 가청범위 안에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우리 눈 앞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나 사물의 모습은 반드시 그 소리와 함께 감각되었다. 소리를 저장, 재생하는 축음기는 이런 상황을 변화시켰다. 축음기 덕분에 우리는 자신 곁에 아무도 없어도 누군가의 목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청각적 경험과 시각적 경험이 시공간적으로 서로 독립한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그 소리에서 떼어내 저장, 재생할 수 있게 한 초기 무성영화는 우리에게,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 만을 그 소리 없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분리, 독립된 모습과 소리, 시각과 청각 경험을 유성영화가 다시 결합시켰지만, 이 매체적 결합은 본래 하나이던 소리-모습의 실재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그 둘을 136 상상적으로 봉합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영상매체는 이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소리-모습의 실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원한다면 들리는 것이 보이는 것에 상응하도록, 다시 말해 화면과 사운드를 실제 현실의 그것에 맞추어 결합시킬 수도 있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결합도 가능하다. 전소정 작가는 후자의 방식을 따른다. 그녀는 모습과 소리,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임의적 결합이라는 영상매체의 가능성을 한껏 활용한다. 이 작가의 영상에서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은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둘 사이의 새롭고 다양한 결합을 통해 탁월한 미적 효과를 발휘한다. 연극이라는 쟝르는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통일로 정의된다. 영화와는 달리 연극에서 배우들의 움직임과 소리는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2008 그런데,〈Finale of Story〉 에서 연극 무대와
그 위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본래의 소리로부터 분리된 채 영상의 시각적 재료로만 등장한다. 소리가 없는, 그래서 더 동화적이고 판타지적인 연극무대의 움직임에 낯선 목소리와 효과음들이 결합됨으로써 독특한 상상적 실재가 펼쳐진다.〈꿈의 이야기 2009 순이〉 는 영상매체의 가능성을 최대로 활용한 작품이다. 작가의 드로잉을 훑는 카메라 움직임으로만 구성된 화면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자막 텍스트로 제공하던 무성영화의 기법이 접목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움직이는 이미지에 그 시각적 움직임과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소리(효과음)들이 결합되어 꿈의 137 감각적 경험을 매체적으로 재현한다.
2009 〈노인과 바다〉 에는 구름, 갈매기, 비바람, 나무, 돛단배, 정박한 배들, 조깅하는 사람과 물결이 아무 소리도 없이 1분 20초 가까이 움직인다. 소리와 모습을 실재와 다르게 결합함으로써 창조된 이 침묵하는 ‘등장인물’들은 성질 급한 청어를 낚는 낚시꾼의 진득한 기다림을 감각하게 한다. 〈보물섬〉2014의 첫 장면에는 파도 소리가 거꾸로
물러나는 파도의 움직임과 결합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작가는 최근작〈광인들의 배 La nave de 2016 los locos〉 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모습과 파도 소리, 파도의 모습과 스케이트 보드 소리를 결합시켰다. 이로인해 바르셀로나 시내를 가로지르는 스케이트 보드와 위태롭게 지중해를 떠다니는 난민들의 보트가 연결된 채 우리 몸과 마음의 감각에 함께 떠오른다. 말하자면 전소정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임의로 결합할 수 있게 해준 영상매체의 기술적 가능성을 통해,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감각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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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지점에서 영상을 다루는 작가의 매체적 역량과 ‘습관으로서의 예술’이 만난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는 듯 보이는 소리와 모습은 때로 우리를 속이고, 위험에 빠뜨리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을 알지 못하게 한다. 예술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새롭고 낯설게 결합해 보여줌으로써 우리 몸과 마음의 감각을 일깨워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것까지 감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럴 수 있는 예술의 힘은, 눈과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익히고 몸으로 익힌 오래된 인류의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남시 김남시는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과에서 문화이론/미학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본다는 것』(너머학교), 번역서로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그린비),『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자음과 모음),『권력이란 무엇인가』(문학과 지성),『광기, 예술, 글쓰기』(자음과 모음), 등이 있다. 현재 보이스 그로이스의 책을 번역중이며, 비평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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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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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길처럼 �� 타카하시 미즈키 미토 미술관 주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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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꿈과 기억을 재현하려면 일단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정연두의 작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스탄불에서 차茶를 파는 남자의 이야기나 서울의 어느 공원에서 시간을 때우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간혹 그는 자신의 과거 기억을 상기하기도 한다. 정연두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이런 꿈과 기억의 이야기들을 시각화한다. 기억이란 현재 시점에서 떠올린 과거의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가소성可塑性이 매우 높다. 꿈과 바람은
현실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과 꿈, 그리고 바람은 모두 환영이다. 마치 환영을 현실인 양 들이미는 할리우드 3D 영화 들과 달리 정연두는 감상자를 속이지 않는다. 기억과 꿈의 이미지를 재현한 그의 사진과 비디오는 오히려 환영을 환영 그대로 제시한다. 이 모든 이미지가 사실은 가짜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 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매우 솔직하다. 〈일상의 낙원〉 은 정연두가 홈페이지에서 ‘이상적 낙원에 관한 아이디어’를 모집해 만든 작품이다. 싱가포르와 한국 참가자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었다. “죽은 제 라이프가드 친구가 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저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제 중학교 시절 친구를 만났고, 창고에는 어렸을 적에 제가 좋아했던 물건이나 옷들이 가득합니다.” 이 작품은 먼저 서울의 거리나 싱가포르 건물 외관을 보여 준다. 참가자에게 익숙한 일상적 풍경이다. 143
그런데 갑자기 오렌지 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다양한 소품과 무대 장치를 사용해서 그곳을 참가자가 바라던 낙원으로 변신시킨다. 일상의 풍경이 조금씩 낙원으로 바뀌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마침내 ‘이상적 낙원’이 완성되어도, 누구나 그 낙원이 가짜 라는 사실을 안다. 정치인들은 이상과 꿈이 반드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매스미디어는 재난·전쟁·사고의 기록물을 편집해서 이야기를 꾸며내는데, 그 과정을 은폐하고는 순수한 진실을 보도하는 척한다. 정연두 역시 이미지를 편집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정치인이나 매스미디어가 생산하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효과를 거둔다. 그의 작품 철학을 파고들기에 앞서, 작가의 뿌리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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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끝에 한국은 독립했다. 하지만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 했다. 소련과 중국은 북한군을 지원했고, 미국은 남한군을 지원했다. 남한과 북한은 1953년에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남한에서는 곧 군부 독재가 시작되었다. 체제 유지를 위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미디어를 지배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정연두가 태어난 1969년에는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과 독재 정부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발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
진압을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희생되었다. 정연두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기 전 해인 1987년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1988년 2월에는 직접 선거로 노태우가 당선되었으며, 9월에는 서울 올림픽이 개최 되었는데, 이 두 사건 모두 민주 사회로 향하는 돌파구가 되었다. 한국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동안 학생들은 거리와 캠퍼스에서 전투 경찰과 충돌했다. 그해 정연두가 입학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도 운동권에 가담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시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참여하지 않는 학생은 겁쟁이 취급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이 열기를 띠는 한편으로 체제 비판과 사회 변혁을 시도하는 민중 미술 운동이 등장했다. 민중 미술 운동에 몸담은 미술가들은 민중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변화를 포착했고, 비약적인 경제 발전의 이면에서 고통받는 빈곤층이나 도시화로 인해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묘사했다. 그런데 그들의 작업은 점차 정치색이 강해졌으며, 노동 문제나 정치 체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술대학에서 교육하는 보수적 미술과 또렷이 구분되었던 민중 미술은 당대의 전위 미술로서 미대생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나갔다.1
하지만 정연두는 최루탄이 난무하고 기동대나 경찰과 난투하는 ‘운동’의 목적과 실질적 의미에 공감하지 못했다. 대학의 관습적 미술 교육에도 환멸을 느낀 탓에, 그는 등산 동아리에 가입해서 일 년에 백 일 이상을 등산만 하며 보냈다. 이런 일화에서 알 수 있다시피, 1 2014년 12월 5일 작가와의 이메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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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대 한국의 정치 운동과 거리를 뒀으며, 대학의 보수적인 미술 교육이나 민중 미술에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2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치 운동이나 민중 미술에 투신하는 와중에 그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은 당대로서는 오히려 확고한 태도 표명으로 보이기도 한다.3
정연두는 사진이나 비디오 작업을 통해 판타지를 창출 하는 동시에 자기 작품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모순적인 성향을 보인다. 당대 한국의 매스미디어는 군부 독재 정부와 결탁해서, 조작된 정보와 영상을 ‘진실’이라고 보도했고, 사람들은 그게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진실 앞에서 눈감았다. 허위 정보와 이미지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대중을 늘상 관찰해 온 정연두는 결국 이미지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4 그가 만든 작품을 보는 감상자는 자신이 여태껏 이미지들을 수동적으로 대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정연두는 기존의 이미지들을 분석적으로 판단하고, 무비판적으로 이미지를 수용하는 이들의 수동적 감상을 방해한다.
〈B 카메라〉 연작은 각각 사진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사진은 유명한 영화 장면을 재현한 것이고, 둘째 사진은 그것을 촬영하는 광경을 촬영한 것이다. 2 주석 1과 같은 자료 3 독립 큐레이터 정준모는 90년대 젊은이들을 �X 세대�로 일컬었다. 정준모에 따르면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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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대상이 되거나 기존의 위계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며, 정치적 가치보다는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チョン・ジュンモ「韓国の現代美術⸺新しい世代の新しい言語と傾向」、展�会カタログ 『こころの領域』、水�芸術館現代美術センター、1995年、p35) 4《더블 판타지: 한국 현대미술전》전시 카탈로그에서 큐레이터 키타자와 히로미는 2000년대 한국 현대 미술의 공통된 특징이 바로 상충하는 개념들의 공존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감지하기가 어려워진 초(超)픽션화된 현대 사회에서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한 미술가들의 대응 방식이다. (北澤ひろみ「ダブル・ファンタジー」、 『ダブル・ファンタジー: 韓国現代美術展』、 フォイル、2009年、p66-71)
이 작품을 보면 정연두가 감상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작품에서는 정연두의 친구나 지인 들이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두 번째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들 주변의 건물이나 소품이 대부분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감상자는 같은 장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촬영한 두 사진을 자세히 비교하게 된다. 어느새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영화 장면을 재현한 첫째 사진은 여러 겹layers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두 사진을
아무리 비교해 봐도 사진 속 무엇이 실체인지 혼동된다. 〈B 카메라〉시리즈 중 하나인〈태극기 휘날리며 – B 카메라〉 는 한국 전쟁을 다룬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의 한 장면을 재현한 것인데, 실제로 비무장지대(DMZ) 에서 촬영되었다. 또한〈동경 이야기〉 에서 가족이 죽는 장면을 재현한 사진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 지역에서 촬영되었다. 허구 취급을 받던 영화가 현실 세계와 맞닿은 것이다. 이처럼 정연두는 이미지의 허구성을 활용하면서 이미지 조작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조명한다.
147 B camera, 2013 Diptych Photography
정연두는 리얼리즘을 통해 기만적 사회 체제를 고발 하는 목적 지향적 민중 미술 운동에서 거리감을 느꼈지만,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은 민중 미술과 닮은 면이 있다.5 물론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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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미술 작가들처럼 직접적으로 사회에 개입하거나 문제를 고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한국의 사회 문제를 작품 주제로 삼지도 않는다. 그는 사회 체제를 고발할 목적으로 사람들의 기억과 꿈 이야기를 듣고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다. 다만 정연두는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의 소박한 환영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구현해 냄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달래 주고, 이제는 이루지 못할 바람들과 돌이키지 못할 시간들을 애도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꿈과 환영을 실현해 주는 그의 작품에는 희미한 슬픔이 감돈다. 정연두의 작품은 역사와 그 속의 이름 없는 평범한 개인을 화해시킨다. 그런데 타인이나 작가 자신의 개인적 기억과 꿈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결과적으로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특정한 장소와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경우도 있다. 〈보라매 댄스홀〉 은 서울 댄스 교실에서 춤추는 중년 들의 모습이 담긴 벽지를 이용해서 갤러리 공간을 댄스홀로 변모시킨 작품이다. 사교 댄스를 추는 중년 남녀들의 사진이 벽지 무늬patterns로 들어가 있는데, 이 설치 작품에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다. 원래 보라매 공원은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자리 인데 민주화 시기에 학교는 이전되고 그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공군의 상징인 매를 뜻하는 ‘보라매’라는 5 2014년 12월 5일 작가와의 이메일 인터뷰
단어는 그곳이 과거에 공군의 터였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 준다. 원래 전투기 격납고였던 공간이 체육관 으로 바뀌고, 그곳에서 댄스 교실이 열리고 있다. 〈보라매 댄스홀〉 의 벽지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실제로 보라매 댄스 교실에 다니던 사람들이다.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사교 댄스가 금지 되어 있었다. 춤이 풍기를 문란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정연두의 작품 속 중년 남녀들은 젊었을 때 마음껏 사교 댄스를 즐기지 못했다. 이제 한국 사회는 민주화되었고 누구나 이토록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더이상 젊지 않다. 그런데 왠지 낭만적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그들의 젊은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보라매 댄스홀〉 은 그들의 내면을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 렌즈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경계이며, 그 둘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정연두의 작품에서도 개인의 기억이나 바람이 카메라 렌즈를 거쳐 현실과 교차한다.〈내 사랑 지니〉 의 전시 형식은 기억이나 꿈의 이미지가 결국 환영이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정연두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사는 몇몇 사람들의 바람을 묻고, 사진을 통해 그들의 바람을 실현시킨다. 2001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는 현재까지 총 24명이 참여했다. 작가는 우선 참가자가 일상을 살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다음에 그의 바람이 실현되어 새롭게 변화한 모습을 촬영한다. 서울의 어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는 F1레이서가 되고 싶어하고, 아내를 잃고 부족한 연금으로 생활하는 초로의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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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불어 강사로서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하던 한국에서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빔 프로젝터가 우선 현실의 모습을 보여 준다. 현실의 이미지가 천천히 페이드아웃되는 동시에 그들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이 작품은 사진의 허구성과 프로젝터의 환영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참가자의 바람과 현실 사이에 놓인 거리감을 보여 준다. 현대 사회의 현실은 각박하며, 멈추지 않고 매정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누구도 행복한 순간들을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정연두의 작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식스 포인트〉역시 마찬가지 이다. 뉴욕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온 이주민들이 리틀 인디아와 리틀 이탈리아, 차이나타운 같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정연두는 그런 뉴욕의 거리들을 대량의 사진으로 기록한 후에 그 이미지들을 편집해서 비디오 작품을 만든다. 비디오의 중간중간에는 다양한 모국어 악센트(인도, 이탈리아, 중국, 한국, 스페인, 러시아)의 독백들이 삽입되어 있다. 매우 사사로운 독백들이다. 그들은 뉴욕으로 이주한 이유, 뉴욕에 대한 복잡한 양가감정, 일상의 편린들을 들려 준다.
150 Six Points, Dual channel HD video with sound, 28' 44'', 2010
분주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쉽게 소멸되어 버릴 듯한 이야기들이다. 이 독백들은 뉴욕의 소란스러운 풍경과 대비를 이루는데, 그 때문에 그들의 고독감이 한층 더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드라이브 인 시어터〉는 정연두의 듣기 기술을 담은 장치 같다. 갤러리 중앙에는 90년대식 택시가 놓여 있고,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자동차 극장처럼 보인다. 탑승자가 운전석에 앉으면 차내에서 알리시아 데 라로차가 연주하는 모리스 라벨의〈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이 흐른다. 차창 밖에 설치된 비디오 카메라가 운전석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 택시 앞쪽의 거대한 스크린에 상영된다. 차창 안쪽에는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서 탑승자가 말을 하면 스크린 옆에 설치된 스피커로 목소리가 출력된다. 희미한 가로등 불이 비추는 밤 거리의 이미지가 조수석 바깥쪽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스크린 영상으로 보면 마치 자동차가 한밤중에 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탑승자는 스크린 영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지만, 라벨의 음악을 들으며 차창 밖을 스치는 야경을 보고 있노라면 감정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며 여러 가지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 스크린 속에서는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 〈드라이브 인 시어터〉에서 탑승자는 자연스레 배우가 되며,〈내 사랑 지니〉의 참가자나〈식스 포인트〉 의 목소리 연기자는 자신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 반면 정연두는 청자의 역할을 떠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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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표류하는 개개인의 꿈과 기억에 조명을 비춘다. 그는 무대 연출자가 되어 그들의 꿈과 기억을 시각화하고, 그들의 삶을 긍정한다. *** 내가 정연두에게 미토 미술관 개인전을 부탁한 것은 동일본 대지진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2012년 3월 7일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풍경에도 지진의 기억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TV와 거리 광고는 ‘유대きずな’라는 단어를 남발했지만, 구체적인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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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은 제시되지 않았고,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능 유출의 피해 실태는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았다. 정치인들은 ‘일본의 희망찬 재건’을 떠들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울 턱이 없었다.6 기억과 꿈을 주제로 삼는 정연두로서는 지진 피해 지역 중 하나인 미토에서 개인전을 열기가 부담스러 웠을 것이다. 그는 일본에 살지도 않았고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하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 정연두는 미토와 인연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2002년에〈내 사랑 지니〉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본 고등학생이 있는데, 그는 당시 미토 미술관 워크숍에도 자주 찾아왔다. 그때 그 학생이 정연두에게 이야기한 바람은 높은 산에 올라 일출을 보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힘든 산행을 마치고 높은 곳에 오르면 새로운 전망이 활짝 열리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미술대학에 환멸을 느끼고 등산에 빠져 살았던 정연두가 이 학생에게 깊이 공감했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정연두와 이 학생은 무려 6 2011년 9월 13일 국회에서 노다 요시히코 총리(당시)의 소신 표명 연설. (http://www.dpj.or.jp/article/100309)
9시간의 등산 끝에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인 키타다케 산 정상에 올랐고, 결국 정연두는 일출을 배경으로 이 학생의 사진을 찍었다. 돌이켜 보니 정연두에게 개인전을 부탁하던 당시의 나는 저 고등학생을 닮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재난 이후에 미술과 미술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재난이 벌어진 이후 재난 지역에서의 전시’라는 높은 산을 오르면 마침내 새로운 전망이 활짝 열릴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2002년에 고등학생과 함께 키타다케 산을 올랐던 정연두는, 어렵겠지만 이번 산도 올라 보겠다고 결심했다. 공교롭게도 그에게 답장을 받은 날짜 역시 3월 11일이었다. 그로부터 10개월이 흘렀다. 정연두는 어시스턴트 이정철과 함께 미토 미술관 개인전에 필요한 리서치를 하려고 2013년 1월부터 한 달간 미토에 머물렀다. 그는 재난 지역을 답사하기도 하고 미토 출신 작가 들과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연두는 미술관 근처에서 일하는 시각장애인 안마사 시라토리 겐지를 만나게 된다. 시라토리는 집에서 직장으로 출근하는 길을 매일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다. 파인더로 구도를 잡지도 못하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지도 못하지만, 그는 비 오는 날만 빼고 늘 사진을 찍는다. (비가 오면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한 손에는 우산을 들어야 해서 셔터를 누를 수가 없다.) 시라토리의 사진 작업에 흥미를 느낀 정연두는 그에게 새 카메라를 선물했다. 153
그때부터 시라토리는 정연두에게 사진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사진은 무려 8만 장에 달했다. 대부분은 출근길의 일상적 풍경을 포착한 것이었다. 정연두는 시라토리에게 그 방대한 사진 데이터를 받아 오랜 시간에 걸쳐 분석했고, 결국 거기서 영감을 받아 세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사진가이자 비평가인 미나토 치히로의『영상론』 Evgen Bavcar 에서도 시각장애인 사진가 에우겐 바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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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소리와 냄새를 비롯한 여러 감각으로 공간을 체험한다. 하지만 바우차는 정작 자신이 촬영한 사진 속의 공간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진은 오로지 눈으로만 체험할 수 있는 단면 매체이기 때문이다.7 시라토리의 사진 역시 마찬가지 이다. 시라토리의 사진에는 집에서부터 직장까지의 공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그 안에는 공간 뿐만 아니라 그가 걷거나 셔터를 누르는 동작의 흔적이 담겨 있으며, 그가 살았던 시간까지 담겨 있다. 하지만 촬영자인 시라토리 자신은 디지털 데이터로 저장된 사진을 인지할 수 없다. 미나토의 주장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이 찍은 사진은 감상자의 언어를 통해서 과거의 광경을 되살려 낸다.8 시라토리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오조네 마코토의 재즈 피아노 리듬에 맞춰 시라토리가 찍은 사진을 슬라이드 쇼로 빠르게 넘기며 보여 주는〈Wild Goose Chase〉는 그야말로 시라토리의 과거와 인생의 광경 들을 되살린다. ‘Wild Goose Chase’는 오조네의 피아노 곡 제목이기도 한데, 흥미롭게도 이것은 7 港千尋『映像論⸺「光の世紀」から「記憶の世紀」へ』、 日本放送出版協会、1998年、p244-255
8 같은 책
‘붙잡을 수 없는 뭔가를 쫓는다’는 뜻이다. 미나토의『영상론』 은 ‘본다’라는 행위 자체에 관한 통찰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이 부분에서 미나토와 정연두는 생각이 거의 일치한다. 미나토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가만히 앉아 압도적으로 많은 영상 정보를 접하면서, 현대인들은 이제 사회적 맹목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그들은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이상 고민하지 않으며,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어 버린다. 그들은 보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9 가상 현실 헤드셋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를 사용한 정연두의 최근 설치 작품〈블라인드 퍼스펙티브〉는 미나토의 문제 의식을 더 멀리까지 밀고 나간다. 40미터 복도형 갤러리 양편에 산업 폐기물로 만든 조각들이 늘어서 있다. 벽에는 쓰나미의 흔적을 연상 시키는 흙탕물 자국이 사람 키보다 높은 곳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블록이 부착되어 있다. 감상자는 오큘러스 리프트 헤드셋을 착용해야 한다. 그러면 주변 광경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해드셋 내에서 재생되는 3D 영상만 보인다. 눈앞의 현실을 전혀 못 보게 되는 것이다. 감상자는 오큘러스 리프트를 착용한 채 그 복도를 걷게 된다. 헤드셋 안쪽에서는 푸른 삼나무 숲에 꽃이 피고 나비가 춤을 추는 낙원 같은 일본의 자연 경광이 펼쳐진다.10 그리고 이 영상은 현실 속 갤러리에 전시된 산업 폐기물 조각의 배치나 모양에 맞게 반응한다. Rift
9 같은 책 p.252 10 이 3D 영상은 여름에 아키타 현 곳곳에서 촬영한 식물과 풍경 이미지를 소재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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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영상이 놀라울 만큼 리얼해서, 현실 공간에 산업 폐기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게 된다. 감상자들은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된다. 하지만 오큘러스 리프트를 벗으면, 헤드셋을 착용한 다른 감상자들이 맹인처럼 산업 폐기물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현실이다. 시라토리는 현대미술 전시를 보고 싶을 때마다 미토 미술관을 방문한다. 시라토리는 자기 눈으로 작품을 보지 못하기에, 지인이나 미술관 스태프가 그와 함께 전시장을 돌며 전시 작품에 대해 설명해 준다. 어느 날은 정연두가 직접 시라토리의 전시 가이드 역할을 했다. 그에게 작품들을 말로 설명해 주다 보니 “그 작품들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훗날 정연두는 회상했다. 개인전 마지막에 전시된 한 시간짜리 비디오〈마술사의 산책〉 은 그때 시라토리와 함께한 갤러리 투어 경험에 바탕을 둔 작품이며,〈Wild Goose Chase〉 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Wild Goose Chase〉가 시라토리의 통근길 사진을 모은 슬라이드 쇼라면〈마술사의 산책〉 은 그 길을 걷는 마술사의 로드 무비이다. 이 비디오는 실제로
156 Magician's Walk, Single channel HD video with sound, 55' 15'', 2014
시라토리의 집에서부터 그의 직장까지 가는 길에서 촬영된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유명한 마술사 이은결이다. 처음에 마술사는 자신을 촬영하는 카메라 맨뿐 아니라 이 비디오 작품을 보고 있는 우리 감상자 들을 향해 동행을 제안한다. 산책을 하면서 그는 주택가의 모습이나 거리의 간판들을 설명해 주고, 그와 관련된 마술을 보여 주기도 한다. 영상은 롱테이크로 촬영된다. 마술사는 시라토리가 사는 인적 드문 주택가에서 기모노 입고 꽃에 물 주는 여자를 등장시킨다. 또한 ‘방범 카메라 작동 중’이라는 표지판을 해바라기로 변신시키기도 하며, 버스에서 막 내린 커플의 티셔츠 색깔을 마크 로스코의 회화처럼 바꾸기도 하고, 노인 간호 센터 간판 앞에서 섬세한 손가락 동작으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한다. 그는 버스 정류장을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꿈〉속에서 방사능 때문에 거대해진 민들레로 변신시키고서는 버스에 올라탄다. 주택가에서 출발해 미토 중심 시가지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마술사는 10엔짜리 동전을 노르웨이의 크로네 동전으로 변화시킨다. 그러자 버스 차창에 비치는 미토 주택가 풍경도 갑자기 노르웨이의 숲으로 바뀐다. 마술사가 버스에서 내릴 때는 버스 승객들 역시 모두 노르웨이 인들로 바뀌어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시가지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 장면은 미토 시청이 지진 피해 지역의 부흥을 장려 할 목적으로 9월에 개최한 미토 시가지 축제 기간에 촬영된 것이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거리에서 많은 시민들이 노점을 차리거나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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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는 축제 방문자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뻐꾸기 소리를 내주는 신호등이나 노점 앞에서 마술을 부린다. 거리 한복판에서는 흰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80년대 독일 유명 록 밴드 네나의 노래〈99 Luftballons〉 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마술사가 그들 사이에 섞여 춤을 추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들의 흰색 티셔츠가 모두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바뀐다. 부모와 함께 축제에 온 어느 소녀가 마술사에게 빨간 풍선을 건네준다. 마술사는 그 풍선을 들고 시라토리의 직장으로 간다. 시라토리의 직장 앞에서는 재즈 피아니스트 오조네 마코토가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마술사가 피아노 앞에 서서 지휘를 하자 곳곳에서 흰색 풍선을 든 젊은이들이 나타나 피아노 옆에 놓인 삼각대에 풍선을 매단다. 마지막에 마술사는 여태껏 자신을 찍던 카메라맨 시라토리를 부른다. 마술사가 시라토리의 카메라를 삼각대에 올리자, 카메라가 풍선과 함께 하늘로 날아간다. 그리고 카메라가 공중에서 촬영하는 조감도가 스크린을 채운다. 여기까지가〈마술사의 산책〉 의 전체 시퀀스이다. 그런데 이 비디오는 ‘터진 재봉선들’을 일부러 노출시킨다. 카메라 어시스턴트가 ‘컷!’이라고 외치자 이은결이 긴장을 푸는 모습이 그대로 비디오에 나온다. 또한 젊은이들이 삼각대에 풍선을 매달 때 그들의 등장 타이밍을 지시하는 스태프도 보인다. 원래 이런 사람들은 프레임에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런데 이 ‘터진 재봉선들’ 덕분에 감상자는 이 비디오가 허구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통상적인 경우에는 편집될 법한 비하인드 신이나 NG 신을 그대로 넣음으로써 이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마술사의 ‘ 산책〉 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다큐멘터리’ 로서 신뢰성을 얻게 된다.〈B 카메라〉 와 마찬가지로 〈마술사의 산책〉 은 진실과 허구의 피막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마술사의 산책〉 은 정연두의 과거 작품들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정연두는 전에 시도해 보지 못한 새로운 일을 감행했다. 그는 늘 무대 뒤에 숨어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판타지를 구현하는 역할만을 맡아 왔는데, 이번에는 무대 위에 올라 마술사의 목소리를 빌려 처음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11 2013년 1월 정연두는 미토에서 한 달간 체류했고, 그 이후로도 미토를 여러 차례 방문해서 도시 곳곳과 시민들을 관찰했다. 작품 속 마술사의 말들은 모두 그때의 관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마술사의 말들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조심스레 건드리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로 인한 시민들의 불안감, 감시 사회,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긴장 상태, 자연 보호 등. 그런데 마술사는 이 심각한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화려한 마술을 보여 준다. 그리고 감상자는 마술사의 진지한 말들보다는 그가 눈앞에서 선보이는 흥미로운 퍼포먼스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마술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마치 그것이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 신비로운 일인 양 놀라곤 한다.
159 11 오렌지 색 옷을 입고 무대 뒤에서 작업하는 남자가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정연두는 이야기한 바 있다. , , 혹은 가볍거나』(전시 카탈로그), 플라토, 2014) (안소연「눈먼 사랑: 정연두와의 인터뷰」『무겁거나
즉 우리는 속임수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속임수에 속고 마는 것이다. 이 비디오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술사의 산책〉 은 여러 층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비디오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도중에 자꾸 끊어 지는 탓에 마치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보는 기분이 든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인 마술사는 매우 영화적映像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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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을 보인다. 마술사는 감상자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카메라맨 시라토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시라토리는 우리 감상자가 보고 있는 마술을 보지 못한다. 이 복잡한 작품을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이며 누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비非시각장애인이 카메라를 사용할 때는 구도를 짜며, 보고 싶은 부분만 남겨 두고 불필요한 풍경은 잘라 낸다. 이것은 일상적인 ‘보기’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는 육안으로 풍경이나 사물을 볼 때도 우리가 보고 싶은 부분에 무의식적으로 집중한다. 하지만 카메라의 기계적 렌즈는 때때로 우리의 의도를 배반한다. 렌즈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까지 포착하고 기록한다. 구도를 짜지 않고 그냥 찍은 시라토리의 사진들은 그 자체로 그의 삶의 궤적이자, 전혀 작위적이지 않은 풍경 사진인 것이다. 2013년 1월부터 정연두는 미토 복원 과정, 동일본 대지진, 원전 사고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 기복과 심경 변화를 관찰해 왔다. 그런데 시라토리의 사진 속에는 변함없는 평소의 출근길이 ‒ 흔들림 없는 일상이 포착 되어 있다.〈마술사의 산책〉 을 보니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고 있고 도시는 활기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지진이 일어나기 전과 다를 바가 전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카메라 영상이 보여 주는 현실에 기뻐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자꾸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 버린 기분이 들까? 12 〈블라인드 퍼스펙티브〉 에서 오큘러스 리프트의 3D 영상은 산업 폐기물로 가득한 갤러리 공간을 낙원으로 변형시켰고〈마술사의 산책〉 은 평범한 미토 시가지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로 바꿨다. 그런데〈블라인드 퍼스펙티브〉 의 영상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수초 같고, 〈마술사의 산책〉 에서 하늘로 날아간 흰색 풍선은, 아무리 붙잡아 보려고 해도 붙잡지 못할 희생자들의 영혼 같다. 정연두는 진실과 허구의 피막으로 우리를 감싸면서 우리의 기억을 견인한다.〈블라인드 퍼스펙티브〉 와 〈마술사의 산책〉 에서 정연두는 공포, 슬픔, 분노가 섞인 부정적 기억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상기시키면 서도, 그로 인한 아픔은 최대한 경감시키려 한다. 하지만 잊으려는 욕망은 강력하다. 그 강력한 욕망에 저항하기 위해 정연두는〈마술사의 산책〉 에서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 게 아닐까?
12『부흥문화론』에서 후쿠시마 료타는 임신란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전쟁과 자연 재해 이후의 �문화부흥�을 분석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시민들을 외국으로 내몰아 죽게 하고, 핵 폭탄을 맞고, 전통 문화를 상실하고, 신성한 천황이 보통 인간으로 전락하는 모습까지 목격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들을〈고질라〉나 〈우주소년 아톰〉같은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재현한다. �관념과 현실 사이의 격차�가 �전후� 일본 . 만화의 인상을 결정짓고 있다(福嶋亮大 『復興文化論』 青土社、 2014年、p351)이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마술사의 산책〉속 대화와 화려한 배경 이미지 사이의 격차는 전후 일본 문화와 비슷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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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살아 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 내면 영상inner-vision이다. 현재와 미래를 살기 위해,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을 위해 우리는 잊고 싶은 기억과 마주해야 하며, 그것을 애도 하고 천천히 승화시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마술사의 산책〉 에서 정연두는 마크 로스코의 회화 덕분에 인생이 바뀐 친구에 관해 이야기한다. 미술은 정말 그런 힘이 있는 걸까? 미술은 보이지 않는 고통을 나누고, 그 고통을 치유하고, 마침내 살아갈 힘을 주는 걸까?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대학 시절, 정연두 에게 유일한 낙은 등산이었다. 이번 전시 첫머리에 선보인〈사춘기〉는,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등산 풍경을 사진으로 재현한 자전적 작품이다. 산에서 친구들에게 고민을 토로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던 그 나날의 풍경을 재현하고자, 정연두는 미국과 한국의 대학 등산 동아리 학생들과
162 Bewitched #1, 2001 ―, C-print, 120 x 150 cm
함께 산을 올라, 그 학생들의 모습이 자신의 기억 속 광경과 우연히 일치하는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했다. 사진은 특수 종이에 프린트되었는데, 학생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텐트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산의 어둠이 대비되어 극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개인적인 역사화歷史畫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연작 중 하나가 특히 눈에 띈다. 빨간색 재킷을 입은 여학생이 혼자 희미한 빛 속에서 등을 보이고 선 채로, 가만히 숲 속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알 수 없는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 둘 다일까? 어쨌든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곧 그녀는 숲을 향해 발을 내디딜 것이고, 길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타카하시 미즈키 미토 미술관 주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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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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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치명적 매혹의 무대
��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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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정은영의 작품〈정동의 막 Act of Affect〉 은 근대의 해방공간에 10여년 정도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이제는 ‘보존회’를 중심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여성국극(이하 국극으로 표기)을 소재로 한다.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1940년-50년대에 전통적인 판소리에 (서구의) 연극적인 요소—그래서 국극에서의 창을 ‘연극소리’라고도 했다—를 도입한 국극은 한때 근대 대중문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국극은 전쟁 통의 피난지에서도 공연을 했을 정도로 강력했다. 최고 정점을 찍었을 때 하루 4번이나 공연을 했다는 국극은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담았다. 국극은 판소리라는 청각의 문화에서 연극, 영화라는 시각의 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바네사 슈와르츠가『구경꾼의 탄생』 에서 영화의 초기형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예를 들 듯이, 군중 속 개인들은 선정적인 일상생활의 구경거리를 탐욕스럽게 소비했다.『구경꾼의 탄생』 은 집단적 관음을 포함한 시각 문화를 지배계급에 의한 억압이나 통제의 방식으로만 보지 않고 대중적 욕망의 문제로 보았다는 관점이 있다.
167 정동의 막(Act of Affect), 1채널, HD, 컬러, 15' 3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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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적이든 해방적이든 소리가 지배했던 전통과 비교해서 근대는 시각성의 문화가 득세한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아닌 돌연변이적 방식은 국극이 부흥하는 원인이자 소멸하는 원인이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혼성의 방식은 오늘날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국극이 여성 예인들의 공동체였다는 점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진다. 그들은 교묘한 전략 보다는 맹목적 열정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전쟁과 해방 공간을 거치고 근대의 가부장적 권력이 정비되기 시작하자 남성중심의 문화계는 여성 국극을 정통성이 없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지배적 권력의 무시 뿐 아니라, 대중문화 차원에서도 영화 같은 좀 더 강력한 스펙터클이 밀려 들어왔다. 국극은 전통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에 전통으로 호출되곤 했다. 이러한 흥미로운 내용을 포함한 작품에 대한 박사논문과 책을 출판할 정도로 정은영의 연구는 깊었지만, 15분 분량의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은 신기한, 때로는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 특정 시대의 문화를 재현하는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가령 작품에는 정작 공연하는 모습이나 관객의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이야기들이 없다. 서사는 은유적으로 전개되고 남아있는 빈칸은 철저히 상상의 몫이다. 물론 정은영은 점차 공연으로 확장되어 갔던 다른 작품들에서 현재 남아있는 여성국극 문화와 그 관계자들에 대한 참여관찰 및 연구에 대한 성과를 반영한다.〈정동의 막〉 은 진기한 소재를 소비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풍부한 은유가 동원된 간접화법이 구사된다. 남자역할을 하는 여성배우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연구가 단지 역사에 대한 호기심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단번에 성(젠더)의 문제를 전면화하기 때문이다. 남성 역할을 위한 변신은 분장에 의한 외모변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가 만난 배우 중 하나는 ‘남성 역할을 할 때 젖가슴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고 말한다. 작가에 의하면 당시의 여성관객은 부드러운 남성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일종의 팬덤 현상까지도 벌어졌다. 공연은 여성주체가 뭔가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작업 이었으며, 당시 여학생이나 양공주를 비롯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안전한 여성공동체 만들어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동성 친밀성 생겨나고 평가한다. 국극 배우 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오묘한 존재에 대한 매력을 가졌다. 낸시 에트코프는『미』 에서 실험적 통계치를 인용하면서, 남녀 모두 과도한 남성적 얼굴을 매력적 이지 않다고 평가한다고 지적한다. 남성적 여성, 여성적 남성 같이 오묘한 이들은 인기는 무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진짜 성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문명 속의 불만』 에서 ‘근본적으로 아름다움과 매력은 성적 대상의 속성이다. 그러나 성기 그자체가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 따라서 아름다움의 속성은 2차 성징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다른 성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의지하는 것은 진짜 성이 아니라, 2차적인 기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장, 가장, 규칙, 의례, 유혹의 연쇄 망을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성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 에게 무대는 무대고 현실은 현실이지만, 양자가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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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국극 배우들의 수행은 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행성을 가지고 있다는 페미니즘의 가설의 예이다. 더구나 한국 최초의 여성 예술인 공동체라는 독특한 역사적 지점도 발견된다. 멋있는 남자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배우의 행동은 만들어진다. 즉 여기서 성(젠더)은 수행적이다. 국극 배우에서 퍼포먼스 되는 젠더, 즉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 에서 이론화한 ‘젠더 수행성gender ’이 발견된다. 배우들의 분장에서 발견되는 기괴한 기표들은 성과 관련된 금기들과 관련지어 읽혀진다. 여성국극에 대한 작가의 10년 가까이 되는 연구와 작업은 영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한 이론적 관심이 없다면 일시적 호기심 이상 더 나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은영은 현대미술 작가이지 역사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위한 역사, 현학적인 관심에 머무는 많은 역사적 연구가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직면한다. 물론 그러한 핵심적이고도 절박한 질문은 한가로운 아카데미의 연구자에게는 면제되지만 말이다. 여성 국극에 대한 관심은 이념적 대립으로 모든 것이 환원되어 버렸던 엄혹한 1980년대를 넘어서 다원주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던 19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작가에게 첨예하게 다가왔던 페미니즘과 관련된 화두를 포함한다. 작가가 여성 국극에서 감지한 것은 젠더의 비규범성(탈규범성)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을 규범으로만 볼 수 없다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 여성 또는 남성이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라,
performati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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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으로 수행되는 성이라는 페미니즘 일파의 주장은 아직도 또는 영원히 답해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답을 향한 서로 다른 사고와 행동의 경쟁이 있기 때문에, 지나간 역사에 대한 연구/작업은 현재적 의미와 생동감을 가질 수 있다. 성을 포함한 몸, 자연을 단지 수행의 문제, 또는 언어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자연/문화의 대립을 재생산한다. 고통과 죽음도 언어적인 것인가? 몸도 다른 모든 것과 같이 단지 텍스트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최소한의 확실성은 여성이 오랫동안 임신과 육아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 예술의 창조에는 참여하기 힘들었고, 기껏해야 소비자로 주변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는 종의 생산과 관련된 두 성의 차이가 깔려 있다. 임신과 출산을 조절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된 현대 이후에나 여성은 자연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유전자가 모두 해독되고 그 기능이 모두 밝혀져 인공적으로 인간이 창조될 수 있는 신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는 이상, 유기체는 그 불투명한 실재를 가진다. 이 ‘본질적 측면’은 억압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권력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마지막 해방구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유전자도 유전자형
이 표현형phenotype으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아직 과학이 파악하지 못한 많은 과정을 거친다. 생물학에서는 개체가 형성되기 위해서 DNA에 잠재되어 있던 정보가 발현revelation되어야 하며, 그것을 표현형이 라고 정의한다.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기 위한 과정 들이 있고, 여기에 자연뿐 아니라 문화의 힘이 가세할 geno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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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물론 자연적 차이는 문화적 차별로 변화할 수 있기에 결국은 섹스가 아닌 젠더가 중요하다. 이반 일리치는『젠더』 에서 (젠더가 아닌)섹스는 극도로 분업화된 근대에만 해당되는 편협한 정체성이 라고 평가한다. 정은영의 작품에서 다른 성을 연기함으로서 생겨나는 남장 배우의 독특한 정체성은 양성을 생물학적 논란이 아니라, 사회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낸다. 작품〈정동의 막〉 은 그러한 복잡한 논의를 깔고는 있지만, 답은커녕 질문조차도 명확히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 깔려 있는 정동Affect 자체가 담담하거나 멜랑콜리하다. 작품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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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현존하는 배우들이 대부분 80대인 것과 달리, 40대의 ‘신예’이며, 여성국극 배우의 제일 막내에 해당된다. 그녀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가 30대에 우연히 국극을 접하고 무대자체도 불확실한 현장에 투신했다. 무대에 비해 초라한 현실에 좌절하여 중간에 국극을 그만두고 ‘경력 단절녀’가 되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녀를 다시 찾아낸 것도 작가의 열성 때문이었다. 이 작품 이후 이 젊은 배우는 간혹 사회에서 ‘전통’으로 호출되는 국극 무대에 참여하면서도, 남성게이 합창단 등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복합적인 무대에 종종 섰다. 젠더 수행성이라는 공통점이 일본과 대만 등 여러 나라에서 행해진 무대들을 관통했다. 이때 정은영은 시나리오 집필자, 연출자, 감독 등이 되어 공동 참여자들과 함께 대화적 상상력을 가동시켜왔다. 대화적 상상력은 소수자들을 타자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한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 종종 축제적인 양상을 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극의 배우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없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이라는 맥락에 있는 복합적인 장은 배우에게도 작가에게도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을 것이다. 싱글채널 비디오로서는 마지막 작품이었던 〈정동의 막〉이후 점차 무대 연출로 확장되어 가는 작품 목록 속에서 작품 속 배우는 국극 보다는 국극이라는 문화를 소재로 한 현대 미술 현장에서 활발할 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작품〈정동의 막〉 은 붉은 커튼 내려진 무대를 바라보는 남장 배우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배우는 어깨 부분 옷매무새를 고치는데, 그것은 남성에 비해 좁은 어깨를 가진 여성이 풍채 좋은 남성의 역할을 위한 행위이다. 그러나 빈 무대와 객석은 배우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게 한다. 그리고 나서 일상복을 입고 동작과 노래 연습을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장면들은 여럿으로 쪼개지며 쪼개진 개별 화면에도 전체가 잡히지는 않는다. 남성역할을 하지만 매우 섬세한 몸매를 가진 배우 몸의 부분들이 인상적이다. 때로 물신적인 시선이 느껴질 만큼. 배우가 국극에 매혹 되어 힘든 길을 가고 있듯이 작가 자신도 그 비슷한 여로에 있다. 정은영은 물론 현대미술 분야에서 각광받는 작가지만, 현대미술이 처한 상황은 빈 무대나 객석같은 환경을 친숙하게 바라 볼 수밖에 없다. 여성국극에 관한 작품에 관한한 그것들이 저 멀리에 있는 객관적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배우와 작가는 여성 예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속한 계의 썰렁함은 현대미술가도 공유하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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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시간은 더욱 가속화되어 국극이 전성기를 구가했던 10년이라도 버틸 수 있는 예술적 문화적 ‘이즘’이라는 것이 있을까도 회의적이다. 실제적 내용이 아니라 이름만 활용됐던 ‘페미니즘’ 또한 이 회의적 항목에 포함될 수 있겠다. 매혹과 실망, 또는 초창기의 매혹을 이어가기 위한 치열한 자기갱신, 선택에 따른 고통과 책임 같은 상황이 겹쳐질 수밖에 없다. 배우의 한숨은 작가의 한숨이며, 그 와중에 미지의 무대가 열리기를 바라며 꾸준히 열정을 불사르는 모습 또한 그러할 것이다. 연습 장면이 부분들로 포착된 장면들이 쪼개져 재연된다. 최대 4개의 장면이 동시에 플레이 되고, 아무 장면 없는 검은 부분도 있다. 사연으로 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음, 예술 형식으로 친다면 총체적으로 재현될 수 없음이다. 이러한 부분적인 재연은 수많은 밤과 낮이 바뀌어도 배우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자기가 해야 할 것들을 해왔음을 암시하는 형식적인 장치로 다가온다. 화면의 3/4가 어둠에 잠겨있을 때도 있고 지친 듯이 누워서 연습하는 모습도 있다. 다중적인 화면에 맞게 소리 역시 일상의 소리와 노래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천하기로 마음조차 천 할 손가. 입은 옷이 더럽기로 이내 청춘 더러우리. 서러워서 못살겠네. 이 내 소원 이루지 못할 바엔 차라리….’하는 노래가사는 배우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수염이나 가슴을 동여매는 천은 상투에 갓, 겹겹이 갖추어 입은 사대부 복장과 더불어 전통적 남성성을 수행하기 위한 소품들이다. 배우가 연기하는 남성역할 또한 유형화된 것이지만, 미묘한 차이는 남는다. 남성성을
연기하기 위한 여러 장면 중에서 가슴을 천으로 처매는 장면은 독특한 ‘정동’을 선사한다. 프로이트는 젖가슴의 상실을 최초의 상실로 본다. 정신분석학은 남성(그리고 여성도) 어른이 되기 위해 젖가슴을 떠나 부성적인 성격을 띄는 상징계의 언어로 돌입하기 위해 이러한 상실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젖가슴 상실은 자신의 주체성을 획득하기까지 겪어야 하는 모든 상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프란세트 팍토는『미인』 에서 프로이트의 해석으로 부터 쾌락과 우울을 동시에 본다. 즉 여성의 젖가슴은 시선의 대상이 잃어버렸던 충만의 경험을 불러일으 키는 한, 보는 행위에 쾌감이 담겨있지만 그 대상이 이미 잃어버렸던 것으로 기억되는 한, 보는 행위의 쾌감에는 모순과 갈망, 그리고 우울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국극 특유의 과장된 눈 화장을 한 배우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잠시 보이면서도, 육중하게 떨어지는 붉은 커튼은 배우를 삼켜버리고 다시 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작품이 종반을 향해 갈 무렵 텅 빈 객석을 둘러보는 카메라는 갑자기 흔들리며 객석과 허공, 무대 막 등을 훑는다. 마치 떠도는 유령처럼. 마지막에 자막이 올라가고 작품이 끝나는가 싶더니 배우가 다시 연습복입고서 무대 이곳저곳을 점검한다. 내일도 설 무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것이 마지막 무대여선지 알 수 없는, 기대라고 하기에도 아쉬움이라고 하기에도 불확실한 감흥이 흐른다. 무대란 여기(현실)과 저기(허구)를 나누지만, 정은영의 작품은 편집을 통해 둘을 섞는다. 거기에는 몰입의 순간과 몰입을 위한 과정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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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산된 시선을 묶어주는 것은 정동이다. 마지막 국극 배우일지도 모를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무대 안팎의 상황은 다소간 멜랑콜리하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 에서 멜랑콜리는 우리를 정동들, 즉 고뇌 공포 혹은 기쁨의 불가사의한 영역으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작품 〈정동의 막〉 은 멜랑콜리를 비롯하여 열정과 회의 같이 주체의 변동하는 에너지가 기록된 작품이다. 멜랑콜리는 ‘살고 싶은 의욕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의사소통 불능의 고통’(크리스테바)이지만, 국극 배우/작가는 그러한 고통을 다시 소통의 장으로 이끌어낸다. 그녀(들)의 말과 노래는 크리스테바가 『현실적 진실』 에서 말한 현진실Vréel이다. 작업은 ‘어떻게 이 현진실에 대한 강박관념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까. 어떤 방법으로 사회 속에 그것을 삽입시킬까. 그것은 조정될 수 있을까’(크리스테바)의 문제가 된다. 작품 속 국극 배우에게서 우리는 또 다른 의미의 여성적 언어를 듣는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적 언어’를 광인의 언어처럼 항상 뭐라 결정지을 수 없는 욕망, 다시 말해 불가능에까지 동요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176 정동의 막(Act of Affect), 1채널, HD, 컬러, 15' 36'', 2013
그것은 현실과 허구가 혼동되기 십상인 경계위의 존재들의 언어인 것이다. 이 언어는 정확한 의미가 아닌 감흥을 전달한다. 정은영은 이 작품에 대해 ‘남역 배우의 고민과 갈등을 끌어안은 채로 분출하는 비언어화 된 어떤 뜨거운 이끌림과 열망/ 정동에 감응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밝힌다. 작품 속 배우는 확실하게 남성을 연기하는 것은 아니다. 대사도 노래도 끝까지 들리는 것은 아니다. 무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열정이 고조되거나 맥 빠지는 상황이 전달될 뿐이다. 거기에는 다른 성이라는 허구가 되어가는, 또는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 중의 주체가 드러난다. 그렇게 함으로서 작가는 사라진 듯 보이는 한 문화에서 현대예술의 핵심적 주제를 찾는다.
이선영 이선영(미술평론가)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1994) 하였으며.《미술과 담론》편집위원(1996-2006)과 《미술평단》(2003-2005) 편집장을 역임했다. 2006년 제1회 정관 김복진 미술 이론상, 2009년 한국 미술평론가 협회(이론부문)상, 2014년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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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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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결핍이 존재의 증명이다 �� 정세라 더 스트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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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시작되는 3월 어느 날, 깊은 슬픔과 무기력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30대의 한 여자가 찾아왔다. 몇 달 전 실어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한 남자와 지냈던 행복했던 시절, 그와의 데이트, 유학생활의 기쁨 등을 얘기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한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필요 이상의 공포를 경험하게 했다. 때론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하고, 때론 어른이 되어 맞서 싸우기도 하고, 어머니처럼 순응하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겪어야 했던 슬픔과 분노가 그녀의 작품 속에 배여 있다.” – 김경숙상담정신치료전문가,〈가볍게 우울한 에피소드〉 2013년 개인전 서문에서 발췌
작가 조영주는 한 때 실어증으로 말을 잃었다. 본래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객관적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언어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는, 말하자면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관계 맺기를 하는 세계이다. 실어의 경험은 이러한 세계 내에서 보편적 질서의 거부나 도피의 형태로 볼 수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부정하고 싶은 심리의 상태가 언어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결핍의 근원과 상태로 부터 조영주의 작품 세계를 쫓다보면 그 시작을 그녀의 초기 유학시절에 생성된 근거들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행위로부터 또 그것을 통해 생겨난다고 했듯이 그녀는 예술 작품의 근원이고 예술 작품은 그녀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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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활에서 그녀는 늘 이방인이었고, 동양에서 온 소수자였다. 여성과 이방인으로서의 삶 속에서 예술을 통한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해 스스로에 대해 더 몰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근까지 보이는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타자화된 시선은 초기 그녀의 작품들에도 고스란히 스며있다. 타인에 의해 혹은 스스로가 이방인으로 규정한 자신의 일상에서 순간의 이미지들을 포착하고 기록한 1년간의 사진 시리즈 2006-2007 작업〈I’m not acceptable〉 과 불특정
남성들의 티셔츠를 빌린 후 그 옷을 입고 하룻밤을 보낸 후 기록하는〈One night with someone’s t-shirt in my bed〉2006-2007가 그렇다. 다시 본래의 주인에게 보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들과 다시 재회를 유도하는 등의 의도 되어진 실행은 아시아 여성으로서 서양 사회에서 갖게 되는 선입견을 전복하려한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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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본인을 포함한 타자화된 여성의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일종의 발언의 도구로 이용한다. 작가의 이러한 시선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련의 작업으로 이양된다.〈유니버셜 콜라보레이터, 서울Universal Collaborators, Seoul 2014 〉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유럽 백인 남성 퍼포머를 고용한 후 함께 전시 오프닝에 방문한다. 한국 여성 작가가 백인 남성과 관계를 가질 때 따라다니는 가십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노출하고 이를 유희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작용들에 대해 되돌아 보는 인터뷰를 비디오에 담는다. 스스로의 여성성을
규명하고자 하기 보다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고정된 범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둔다. 타자화된 여성의 입장에서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를 페미니스트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점이다. 전근대적 시각에서 보면 아시아와 여성은 비가시적 타자로 범주화되며 이는 바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매혹과 위협의 전복성을 내포하고 있는 판타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연구자로서 처음 마주한 조영주의 비디오 작업은 2014 〈꽃가라 로맨스Floral Patterned Romance〉 을 비롯하여
2015 〈그랜드 큐티Grand Cuties〉 ,〈디바들의 외출The Divas go out 2015 2015 〉 ,〈워터리 마담Watery Madams〉 , DMG_Demilitarized Goddesses 2015 〈DMG_비무장 여신들 〉 등 다섯 편의 비디오 댄스 시리즈와〈드레스를 입은 대화 Talking in a dress 2015 〉 이다. 중년 여성들을 모델로 기용하여 제작한 비디오 댄스 작업과 리서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일련의 시리즈는 우리 어머니 세대 혹은 여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작가는 약 1년여 동안 5,60대의 아주머니들 70여명을 만나고, 그녀들을 작품의 모델이자 배우, 퍼포머로 기용했다. 작업에 등장하는 특징적인 중년의 퍼포머들은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이자 소위 아줌마라 불리우는 집단군이며 한 때 그리고 현재의 그녀로 통칭되는 여성들이다.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녀들의 동작은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어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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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관찰하는 우리의 시선이 다소 불편한 이유는 그녀들이 이제는 꽃다운 아가씨가 아니라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여성들이며 그래서 주인공으로 주목받기 보다는 그저 아줌마로 대변되는 주변인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범하고 익숙한 그녀들에게 작가는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꽃무늬 원피스를, 때론 시크한 의상을 입히고 또 어떤 때는 소녀 같은 스커트에 앞치마를 두르게 한 후 화려한 모자를 씌우기도 한다. 마치 어릴 적 인형에게 옷을 갈아입히며 역할 놀이를 하듯이 그녀들을 꾸미고 아름답거나 귀엽게 연출한다.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아줌마라는 대명사 뒤에 숨은 그녀들에게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히고 화장과 헤어 메이크업을 통한 ‘꾸미기 과정’이다. 조영주는 ‘아줌마’로 통칭되는 중년 여성들을 다른 모습으로 혹은 다른 자아로서의 혹은 새로운 ‘되기 ’를 시도하고, 안내하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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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DMG_비무장 여신들(DMG Demilitarized Goddesses), 1채널, 컬러, 8'51'', 2015
그리고 하나의 행동 강령을 제시함으로써 그녀들을 통해 여성들이 느끼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그들이 갖춘 현실과 다른 어떤 판타지로서 표면화한다. 사실 다른 무엇이 ‘되기’는 존재론적 지평 위에 윤리학적 사유로 깃든다. ‘되기’는 어떤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예로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이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그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일찍이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되기는 소수자다all becoming are minoritarian”
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남성, 규범, 다수성을 주체 개념으로 보는 경직된 사고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여성되기’, ‘타자되기’ 등의 ‘되기’ 를 제안하였다.
작가의 모델들이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순간, 그들의 개인적인 행동을 관찰하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그녀들은 웃는 얼굴로 새로운 캐릭터를 즐긴다. 분명 사회적 차원과 관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퍼포먼스에서의 현실 사회는 소거되고 예술 내부로 닫힌다. 마치 극장의 연극처럼 무대화되면서 말이다. 중년의 여성들은 일상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서야 현재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서 ‘되기’를 통해 여느 아줌마들과의 동일성 에서 벗어난 차이를 통한 ‘되기’를 즐긴다. 오래전 입었을 웨딩드레스와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그녀들은 아름답고 귀엽다. 몸매는 바꼈을 지언정 잠시나마 그들에게 주어진 그 상황을 만끽한다. 185
그녀들은 스스로가 묶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어떤 결핍에 대한 대리 보충의 과정을 퍼포먼스를 통해 극복하고 있으며 자기 존재 증명의 여정을 찾아가고 있다. 즉 주변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존재되기를 함으로써 다수 지배자의 시선이나 관점에 안주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유동적이고 창의적인 사유 및 행위를 할 수 있는 힘을 ‘되기’를 통해 얻는 것이다. 그녀들은 프로젝트가 끝난 후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눈물은 몰개성적 용어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잠시나마 새로운 ‘되기’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특별한 ‘나’에 대한 감정이리라. 아줌마로서의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의 과정은 비디오 매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끊임없는 작가의 ‘되기’는 일견 비디오의 매체적 특성을 고려해볼때 매우 타당해 보인다. 무빙이미지라는 형식적 특징은 이러한 사유의 과정 에서 정당성을 확보한다. 왜냐하면 되기의 실천은 자기 증명의 과정으로 나아가는데, ‘상태b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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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being’가 되어야하는 매우 동적인 자기반영적 과정을 비디오카메라는 매우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될 수 없는 순간적인 상황으로 경험되는 그녀들의 모습은 동네 이곳저곳, 컨테이너 공장 한편, 비무장 지대 같은 장소들을 무대로 상호 텍스트적으로 구성된다. 카메라는 일견 하찮게 보이는 공간들을 통과하는through 과정에서 재발견하고 현재화한다. 우리가 마주한 그녀들의 여정moving 처럼 말이다.
이러한 사유는〈아름다운 인연 A beautiful match made in heaven 2013 〉 에서 더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결혼 정보회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 등록하고, 맞선 상대를 소개 받는 일련의 과정을 녹음하고 기록하였다.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만든 현실의 상황을 타자에게 발화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되기’를 시도 하고, 그 인물을 이혼 경력이 있는 한국의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상정한다. 결혼 정보회사에서 위치지우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며, 그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판타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의도는 컨설턴트의 되돌아오는 질문에서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부조리함으로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키와 몸무게, 직업, 연간 수입에 대한 것일 뿐 이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제도일 뿐 사랑의 결실이 아님을 비꼰다. 작가가 끊임없이 판타지를 이용한 ‘되기’를 시도하는 이유는 존재가 존재자로서 정의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 이자 성찰의 여정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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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 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꾼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은 세계 내의 존재로서 타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심리에서 비롯된다. 조영주가 천착하는 아줌마, 동양 여성, 이방인, 소수자 등의 공통점은 단어의 의미 자체가 결핍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상실과 결핍은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수반하며 그에 대한 정의는 존재들로부터의 차이에 기인한다. 여성, 이방인, 소수자는 상대적 결핍(차이)의 존재이지만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즉 스스로가 누군가의 어머니자 아버지이고, 여성이자 남성이며, 다수자인 동시에 소수자라는 사실을 긴 여정 속 끊임없는 ‘되기’ 과정을 통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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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라 한국비디오아트 아카이브《더 스트림www.thestream.kr》의 공동 설립자 이자 디렉터이다. 동명의 영상예술전문비평지 책임 편집을 맡고 있으며 주로 시각예술비평 및 한국비디오아트/무빙이미지의 공공적인 아카이브 연구와 함께 비평적 확장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활동한다. 또한《앨리스온www.aliceon.net》편집위원으로 미디어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소격동 갤러리선컨템포러리, 아라리오서울의 큐레이터, 제8회 주안미디어페스티벌 책임 큐레이터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정보원의 아시아 비디오아트와 실험영화 아카이브 심의위원을 역임 했다. 도어즈 호텔아트페어(2010), 아시아탑갤러리 호텔아트페어 (2011),《화랑미술제》(2013)《미디어아트 특별전: By(e) Nature》를 기획하였다. 홍익대학교, 건국대학교, 서울예술대학, 부산대 대학원 등에서 매체미학, 현대미술이론 등을 강의한다. 저서로는『위대한 게임』(2015, 공저),『일상을 바꾸는 미디어 키트』(2016, 공저),『The Stream Vol.3.5 Screening 2015』(2016, 공저)등이 있다.
워터리 마담(Watery Madams), 1채널, 컬러, 11'4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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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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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미디어의 연대기 작가 주연우론 �� 김상용 아트&테크놀로지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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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중-
1 가변적이며 불확실하고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을 담고 있는 인류의 실존을 호명
흔히 산업화 이후의 매체를 소비하는 대중은 ‘지금 이곳에hic et nunc’에 있는 무언가가 미디어라는 매체에 연동될 때, 이른바 뉴미디어 매체와 수용자라는 특수한 권력관계 안에서 각 개별자는 뉴미디어 매체에 반영된 현실을 순진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습관을 길러왔다. 그 믿음은 미디어 매체가 과학적 개발로 생산된 고도의 기술 집약적인 생산물이라는 이면에 스며있는 인간 이성에 대한 기술우위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작가 주연우의 신작, 2016 〈Swarm Circulation〉 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매체의 생산 및 확대를 거친 수용자의 재생산 과정과 더불어 그것에 부여되는 미디어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단편 실험영화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시대별 TV 모니터라는 하드웨어의 생산과정 및 공장의 제조 라인과 미디어의 껍질이라고 은유 할 수 있는 불타는 TV 모니터 쓰레기 더미 속 하드웨어를 헤치고 다니는 낙후된 아프리카 지역의 여러 빈민들의 큰 대비가 보여주는 이른바 ‘미디어 장치의 재활용 recycling of media devices ’이라는 비유를 외피로 입고 있다. 193
하지만, 이 비유 속에서 정작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재활용recycling’이 아니라, ‘순환circulation’이라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미디어 장치의 순환circulation of media devices을 상징적 방법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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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영상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비주얼Key-Visuals은 각 시대별로 생산되고 있는 TV 모니터 브라운관 및 컴퓨터 부품들이 낙후된 어느 현장에서 불타는 폐기물 더미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헤치며 찾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종 종착지가 되고 있는 역설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른바, ‘미디어의 껍질’들이다. 미디어의 껍질 이란, 소용을 다한 하드웨어 자체를 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때는 TV 브라운관 속에서, 혹은 컴퓨터 부품들 사이에서 오고 갔을 수많은 데이터들, 또는 모니터 속을 달구었을 한때의 이미지들 가운데 그것을 수용하거나 소비했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함께 불타고 폐기되는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은유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장치들이 한때 건강했을 때, 수용자, 곧 소비하는 주체들을 현혹케 하거나 경 도시켰던 수많은 ‘사실’과 경이로운 ‘장면’들이 이제 그 소용을 다하고 용도 폐기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믿고 신뢰했던 한때의 경험들이 함께 폐기의 현장에서 무연한 연기를 내며 사라지는 ‘순환’은 생명체의 유기 적인 탄생과정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자연의 현상을 비유적으로 차용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바로 ‘순환circulation’이라는 주제어에서 보여지듯이 미디어 시대의 믿음과 신뢰를 담당했던 매체의 하드웨어 부품들이 한때 선도했거나 담지했던
이른바, 트렌드trend는 이제 찾아볼 길 없이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채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자취를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었지만, 바로 이러한 사라지는 현상 안 에서 역설적으로 아련하게 떠오른 주체는 과연 우리가 한때 믿고 신뢰했던 그것은 고정불변한 진리의 체계가 아니라, 항상 가변적이며 불확실하고 또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을 담고 있는 인류의 실존을 호명한다고 여긴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2 보이지 않는 조형물, 곧 �의미�를 조각하는 작가의 손
작가 주연우가 시도한 작품,〈Swarm Circulation〉 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방식으로 제작된 실험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 파운드 푸티지 영상이란, 다른 사람에 의해 촬영된 영상 및 이미지 등의 자료들을 새로운 맥락으로 끌어내어 예술적으로 전유하는 영화적 실천의 한 분야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 는 파운드 푸티지의 장르적 특성을 다음 세 가지의 요소로 분류한다. 첫째, 기존의 필름이나 영상매체가 찍혀져 편집된 방식에서 새로운 영역으로의 외연확장 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몽타주를 구성해 낸다는 것. 둘째, 아카이브 푸티지archive footage의 필름 혹은 이미지 자체를 수작업을 통한 하나의 물질로서 다룸으로써 갖는 미학. 이것은 마치 조각품을 다루는 조각가가 물질 앞에서 갖는 작가의 구상과 흡사하다. 셋째, 파운드 푸티지는 이미지를 새로운 몽타주를 통하여 자율적으로 의미를 구성해 낸다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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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특히 작가 주연우에게 돋보이는 특이한 점은 이미지 자체를 수작업을 통한 하나의 물질로서 다룸으로써 갖는 미학적 솜씨라고 할 수 있겠다. 첨단 기술의 담론 너머에 존재하는 이른바 ‘작가의 몫’이라고 하는 것은 디지털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숙고의 과정을 요청한다. 기존의 예술적 장인artistic craftsman이 담보하던 ‘손’의 전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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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성에서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는 예술가의 ‘손’이 전유하던 미학적 중요성보다도 ‘데이터’가 갖는 함의는 물론, 복제된 그 데이터의 파생과 전유가 훨씬 중요해진 시대로 전환되어 버렸다. 복제에 의해 파생된 데이터가 다른 맥락에 놓이게 될 때 그 의미는 애초의 그것으로부터 간극이 발생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여전히 ‘손’의 의미 곧, 예술가의 물질을 향한-아름다움으로 향하는 예술 행위의 기본 재료가 되는 물질, 여기서는 바로 이미지 자체라고 봐야한다- 기본적인 응시의 태도를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있다는 데에 바로 작가 주연우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의 초상을 엿보게 한다는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작가 주연우에게 디지털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그 가능성의 여명으로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내는 이른바 ‘데이타’를 물질로 간주하여 다루려는 시도들의 면모를 보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었을까. 필자가 앞서서 언급한 작가의 손은 데이터화된 물질data based materials 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사이버 상의 알고리듬으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미학적 관점을 가지고 심지어 그것을
물질로 ‘다루려는’ 시도를 의미하는 일종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시대의 예술 작품에 있어서 작가의 몫이라고 언급했던 것은 바로 전통적인 예술가의 손에 의존했던 물질을 미학적으로 다루려는 시도의 총체적 면모들이 디지털 시대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진화라고 이해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작가 주연우는 파운드 푸티지라는 장르의 실험영화의 범주를 한 차원 다르게 끌어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데이터 물질을 다루는 장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그곳으로부터 파생되는 미학적 의의, 곧 새롭게 각조 하려는 형태의 본성이 ‘의미’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조형물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예를 들어, 작가의 신작,〈Swarm Circulation〉 는 크게 세 가지 소재로 구성된다. 첫째, 전자제품 제조 공정, 둘째, 텔레비전 및 신문, 광고 영상 그리고 일러스트, 셋째는 전자 폐기물 쓰레기장의 소각 처리 장면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1프레임부터 4~5프레임 사이 사이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제 요소들이 개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서로 다른 장면 들이 짧은 시간 안에 바뀌어 작품이 재생되는 동안 화면은 끊임없이 플리커 효과처럼 깜빡이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바로 프레임 단위로 빠르게 분할된 쇼트shot들과 연속된 쇼트들 간의 관계를 몽타주 기법
으로 조직해 내는 데 그 효과가 있다고 할 것이다. 더불어 플리커 효과가 목표하는 지점은 바로 ‘시간성의 조작’이 가능해진 디지털 시대의 한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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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Swarm Circulation, 1채널, 컬러&흑백, 10'18'', 2016
덧붙여, 앞서서 설명한 ‘미디어의 껍질’이라고 칭할 수 있는 소용을 다한 미디어 부품들이 한때 담지했던 이미지들을 수많은 사람들은 소비했고, 또 그 소비의 형태로 한때나마 신뢰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소용을 다한 미디어들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품들이 그러하듯이 용도폐기 되거나 잊혀 진다. 그 부품들이 수행했을 수많은 이미지들마저도 함께 소진되는 것 이다. 여기에서 작가 주연우의 주제는 다시 살아난다. 죽은 것 같았던 그 부품 더미들의 무연한 연기 속에서 새롭게 각인되는 이미지들이 살아 재생산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은 이미지들의 폐허 사이에서 부품들을 헤치고 다니는 사람들 자신이 이미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the marginalized people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버려진 이미지들과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변증법적 으로 몽타쥬되어 새롭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생산해 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며 영원한 순환과 회귀를 연상케 하는 까닭이다. 쓸쓸히 역사 속으로 묻힐 진실들이 바로 그것을 목격 하는 주변부의 사람들과 동기화되면서 바로 이 순간, 이 짧은 실험영화가 인간학을 담지하고 있는 영상 인류학적인 보고서로 승화되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3 새로운 깊이감으로의 진화를 기대하며 작가 주연우는 그의 작품,〈Swarm Circulation〉 을 통해 분봉하는 벌떼의 집단 움직임이 미디어 주변으로 운집하는 현대사회의 첨단 기술과 하드웨어의 집약적 산업에 경도된 군중들을 소비주체로 은유하는 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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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산 과정 및 소비를 연대기 순으로 짧고 압축적 이되 주제를 동반하는 강렬한 이미지의 연속으로 생물의 유기체적 순환을 그 상징으로 사용하는 세련된 표현을 시도하였다. 속도감 있는 진행과 주제의 병행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라는 새로운 형식미 안에
담기에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판단된다. 기존의 아카이브 푸티지archive footage안에서 수많은 연구와 주제 도출의 시도가 실험을 통해 잘 드러났다고 보이는 이유는 고도의 기획된 이미지의 사용이다. 예컨대, 여러 전자제품의 광고영상들과 그것들이 사라지는 영상의 교차들은 과연 우리가 한때 경도해 마지않았던 이른바, 절대 우위의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찬사를 변증법적인 몽타주 기법을 통해 기술 비판적이며 문명비판적인 시선까지 상상해 낼 수 있는 여지로 주제를 확장해 가며 외연을 넓히고 있는데, 이것은 깊이 있는 주제의 탐구가 아니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적 문명비판사적인 작가의 깊이 있는 태도와 연구는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관객들을 조바심으로 그 기대감을 대체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차후의 그의 작품 세계가 어디로 또 어떠한 깊이감으로 진화해 갈지 자못 궁금한 것은 비평가인 필자 혼자의 몫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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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rm Circulation, 1채널, 컬러&흑백, 10'18'', 2016
김상용 아트&테크놀로지 비평가. 서강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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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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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믹 패러독스 �� 황정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미팅룸》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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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펼쳐진 광활한 풍경. 잠시 후 풍경에 몰입해 있던 눈은 화면의 정 중앙에서 곤충같이 꼬물거리는 작은 점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실제 풍경을 담은 고화질 영상에서부터 디지털 페인팅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이 수평,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제 3의 시선은 얼핏 모든 것을 관조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에 공평한 시선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최성록은 다양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경험하는 오늘날의 시각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식의 문제를 개인의 미시사와 동시대의 사회, 문화, 역사와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미미한, 그러나 거대한 화면의 중앙 혹은 주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작은 존재들,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 이것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돕는 일정한 거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선, 유쾌한 듯 보이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잔혹 동화처럼 세계의 이면을 낱낱이 전하는 영상과 사운드. 최성록의 영상 작업에서 이제는 하나의 선명한 조형언어로 자리 잡은 이러한 특징들은 2000년대 초부터 조각, 회화, 영상을 통해 발표해 온 작업들을 통해 가능했다. 플라스틱 모델plastic model의 조립설명서와 부품들의 쓰임새를 완전히 전복시킨 채 상상 속의 형상들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공중에 띄운 조각들2003-2004, 일상 속에서 너무 미미하여 관심 밖이었던 사물의 생김새를 캠스코프camscope로 확대 촬영하여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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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으로 전환하고, 인물을 그 안에 움직이는 작은 생물처럼 축소하여 배치한 싱글채널 영상작업 〈Microscenic〉연작2005은 기본적으로 그의 작업에서 대상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문제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인간이 만든 법칙이나 관습적인 사고가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동될 수 없다는 점, 인간 중심적 사고가 지닌 한계와 대자연에 대비되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특유의 상상력과 디지털 영상기술을 이용한 조형감각으로 가시화한다. 이것은 2015년 개인전 ‘유령의 높이’에서 소개한 2015 〈A Man with a Flying Camera〉 와〈I Will Drone You〉연작2015, 2016년 개인전《구원자의 길 Savior's Road》 에서 선보인〈Operation Mole2016 Endgame〉 을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대상에 대한 이러한 세계관은 그가 작품에 사용하는 매체와 그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물리적, 광학적 거리감을 통해 구체화되는데, 최근에 작가가 작업의 주 매체이자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 드론은 그 관점을 더욱 정교하게 드러내는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작업에 또 다른 내러티브와 해석적 관점을 덧대고 있다.
206 A Man with a Flying Camera, HD Video, 7' 02'', loop, 2015
구체적인, 그러나 보편적인 뉴미디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포용하는 태도,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시간은 최성록의 작업에서 내러티브를 발전시키고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2006년에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화성탐사
로봇을 소재로 믿음직한 정보를 생산, 재구성, 가시화 하여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공상과학 프로젝트 ‘The Rocver Project’를 소개했다. 이후 작가는 2010년까지 5년간 동명의 프로젝트를 지속해 나간다. 이것은 2000년대 초부터 진행한 회화, 조각, 영상의 형식적 실험, 과학기술에 대한 개인의 관심사를 종합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그의 작업에서 하나의 명확한 내러티브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한 중요한 기점이 된다. 이후 작가는 미국 유학을 통해 이러한 작가적 관심사의 근원을 탐구하고 보다 적극적인 형식 실험을 시도하는데, 대학원 재학시절 발표한 〈Landscape of Chois〉2010는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개인사가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세대 간의 분절된 기억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지 보여준 프로젝트다. 여기서 작가는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까지 약 100년간 삼대에 걸친 세대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전쟁의 기억과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에 풍경화, 초상사진, 인포그래픽을 각각 결합한 영상 설치작업(〈Rainbow Bomb, Vomiting Yellow and M16〉,〈The Portrait of Chois〉 , 〈Historiography of Chois〉,2010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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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개인의 관심사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은 작가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그 안에서 개인과 가족이 경험한 미시사는 세대가 경험한 근현대의 거시사와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작품 속의 이야기 구조를 더욱 단단하게 형성해나간다. 또한 이것은 역사와 사회, 문화에 대한 동시대적 인식과 미디어를 통해 야기되는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 들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 확장되어, 이후〈Daedong River Slayers〉2010에서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으로,
〈Call of Duty: Operations〉2011에서 미디어로 각색된 군사문화에 대한 풍자로,〈Scroll Down 2015 Journey〉 에서 가상적 공간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 들의 모호한 주체성에 대한 고백으로,〈A Man with a Flying Camera〉와〈I Will Drone You〉 연작에서 가상과 실재 공간 사이의 경계를 끊임없이 맴도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확장을 통해 다양해진 주제의식은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한 형식적 특징으로 자리한 회화적 애니메이션과 영상작업, 디지털 매체와 영상기술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208 I Will Drone You, HD Video, 2'34'', loop, 2015
회화적인, 그러나 움직이는 최성록은 본래 회화를 전공했다. 앞서 소개한 대부분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볼 때 영상작업의 형식을 취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지털 페인팅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회화적 전통에서 이야기되는 실재와 환영의 문제, 원근과 착시의 원리, 그리고 평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대상에 대한 완벽한 사실적 묘사에 치중 하지 않고, 이미지의 형상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디지털 환경 속에 벌어지는 이미지 인식의 문제, 그로 인해 대상이 시각화 되는 방식을 애니메이션 효과를 통해 다양하게 실험한다. 대표적으로〈Scroll Down Journey〉는 내비게이션 혹은 디지털 게임이 생산한 디지털 이미지에 익숙한 세대가 가상과 실재 공간에서 이미지와 움직임을 인지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이를 위해 위성사진과 드론촬영으로 수집한 공간이미지를 디지털 페인팅 기법으로 재가공하여 이차원의 가상의 지도를 만들고, 그것에 움직임 효과를 주어, 화면 속에 고정된 위치에 그려진 자동차가 지도 속 공간을 마치 탐험하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다양한 감각적 자극이 존재하는 현실공간을 이차원의 평면세계처럼 인식 하면서 발생하는 기억과 인식체계의 변화, 그리고 직접적인 경험과 기억의 부재로 야기되는 감각의 퇴화, 상실의 문제를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수직, 수평으로 넓고 높은, 그러나 모호한
최성록의 영상작업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다채널 영상투사를 이용해 수평으로 넓은 파노라마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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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나, 드론 촬영기법을 이용한 수직시점의 고화질 영상을 제시하여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제안한다는 점 2012 이다.〈Operation Mole〉 과〈Operation MoleEndgame〉 은 게임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파노라믹뷰에 기초하되,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고 이것이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다가 일정한 시점에서 전체 영상의 기승전결의 구조 안에 다시 맞물리면서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작동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로로 넓게 펼쳐진 파노라믹뷰는 외관상 부분과 전체의 긴밀한 관계를 한 번에 조망이 가능한 상황을 연출하지만, 실제로 그 폭은 인간의 육안으로 한 번에 자세하게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다. 각각의 장면은 단편적인 이야기 구조를 유지하면서 비선형적 전개방식으로 화면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으며, 그 자체로 상징적이고 독립적인 의미를 지닌 채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Operation MoleEndgame〉 의 오른쪽 코너에서 전광판처럼 영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실시간 중계하는 화면은 전체와 부분의 이러한 희미한 연결성을 부각 시킨다. 즉, 고해상도로 구현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파노라마뷰에 의해 생성되는 일정한 거리는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결국 전체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이것은 사회 시스템과 기계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류는 구원받지 못한 채 파괴된 자연과 인간성 상실로 파국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은유적 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의 의도와 그 맥을 같이한다.
한편〈A Man with a Flying Camera〉 와〈I Will Drone You〉 연작은 드론을 이용해 일정한 높이의 시선을 유지하며 작가 자신의 모습을 부감 촬영한 것이다. 영상 속 배경과 인물은 컴퓨터 게임 속 디지털 시뮬레이션 공간과 가상의 캐릭터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실재하는 현실공간이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인 작가 본인이다. 화면 안에서 드론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일정한 위치에서 감시하는 시점을 통해 마치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을 상정할 뿐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가상과 실재 공간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주체의 위치와 그 의미를 반복적으로 치환해가며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았다. ‘인류의 역사를 둘러싼 관조적 기억, 사실의 기록과 함께 환상을 구조화하고, 새로운 역사적, 문화적, 이념적 풍경을 만들기 위해 양극화된 양식과 상태를 흐린 상태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는 작가의 말처럼, 선명한 영상 안에서 초점을 잃은 시점, 주체와 객체의 파악이 모호해진 익명의 상황은 이미지의 표면 위로 관객의 시선이 끊임없이 맴돌도록 유도한다.
211 Scroll Drown Journey, HD Animation, 6'20'', loop, 2015
안타까운, 그러나 숭고한 ‘모두가 보인다panhoran’는 뜻의 파노라마의 어원적 의미를 역설하듯 최성록은 현실에 가까운, 더 나아가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담은 영상과 매체를 적극 이용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험과 인식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을 건넨다. 고도의 디지털 영상기술이 생산하는 정보가 과잉으로 치닫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얻고, 잃으며, 또 기뻐하며 두려워하는가. 흥미롭게도 작가는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 문화 안에서 실재 세계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주체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을 향해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기술문명에 대한 유희적 태도와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디지털 이미지 세계의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 그러한 세계가 안겨줄 감각적 희열을 만끽하되, 그 안에서 유실되거나 퇴화되는 감각들, 빠르게 변화하는 인식의 체계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기술이 안겨준 유희와 이미지의 숭고하고 황홀한 경험, 판단력이 상실되어가는 상황에 대한 고찰이 공존하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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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인 예술학과 문화산업을 공부했다. 사비나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이자《미팅룸》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온라인 큐레이토리얼 리서치 플랫폼《미팅룸》 meetingroom.co.kr과《인덱스룸》indexroom.co.kr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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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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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태도가 곧 작업 최윤석 작가론 �� 고윤정
토탈프레스 객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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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내버려두시오.” (Live in Your Head.) 1969년 하랄드 제만Harald Szeemann이《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 이 내세웠던 부제이다. 화이트큐브를 벗어나 과정적인 예술, 물성을 보여주는 재료들, 받침대가 없이 바닥에 깔려 있거나 늘어진 끈을 보이는 작품들, 각종 서류들이 그대로 작업이 되는 과정을 보이는 이 전시는 이후 개념미술이 정착하는 데에 매우 혁신적인 공을 세웠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의 작업들이 오브제로 이루어진 작품보다 재료나 예술가의 작업 제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면, 최윤석의 작업은 ‘삶의 보잘 것 없는 부분’을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과정 중의 삶’에 주목하여 보다 작가의 자기 탐구적 시각에서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종종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오해를 한다. 상당히 감성적인 성격을 지녔다든지, 그림에 대한 스킬이 뛰어날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217 김씨 연대기(김인근과 협업), (Chronicle of Mr. Kim(In collaboration with Ingeun Kim)), 1채널, 흑백, 9'28'', 2013
그 이유는 예술가의 삶이 오픈되어 있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직접 예술가를 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최윤석은 예술가인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예술가의 삶이 과연 어떤 태도로 일관되어야 하는 지를 되묻는다. 작업의 결과가 파편의 연속이다 보니 언뜻 보기에 최윤석의 예술가로서의 결과물은 ‘재미난 수집가’, ‘퍼포먼스 작가’ 정도의 몇몇 틀거리로 규정되어 있는 장르로 분류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의 파편에 대한 집요한 자기 분석은 예술가가 필히 갖고 있어야 할 ‘예술가의 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관찰자로서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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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석의 작업 과정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관찰자’로서의 태도이다. 학부를 다녔을 당시에는 너무 작은 그림을 그려서 ‘캔버스를 짜라는’ 조언을 듣고, 그의 작업을 보다 크게 그려보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차츰 그는 캔버스나 물성에 몰두하기 보다는 관찰자로서의 태도를 소재로 삼기 시작하였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영수증을 모아 뜨개질을 한〈올해의 질량〉Mass of Year, 2009-2012 작업을 한 동안 진행하였다. 예술가 스스로를 탐구하는 데 그동안 자신의 생활양식을 보여준 영수증이 한 몫 한 것이다. 1년 동안 모은 영수증을 실제 뜨개질실처럼 가느다 랗게 만들어 한 달 반에 걸쳐 마치 섬유 작품과도 같은 태피스트리 작업을 전시하였다. 만약에 작가가 이 작업만 계속 진행했다면 최윤석의 작업은 일종의 편집증적인 수집광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Untitled: 8 Hours 이어서 최윤석은〈무제; 8시간의 드로잉〉 of Drawing, 2011 Chronicle of Mr.Kim, 2013 이나,〈김씨 연대기〉 Particle Diary, 2013 퍼포먼스,〈파티클 다이어리〉 등을 통하여 자기 탐색의 또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 〈파티클 다이어리〉 는〈올해의 질량〉 에서처럼 자신이 수집하거나 간직했던 작은 물건들을 모아 영상으로 만든 작업이다. 사탕껍질, 메모지의 일부 등등은 아주 찰나의 순간으로 스쳐지나가서 어떤 물건인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작가가 평소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삶에 대한 과정이 얼마나 작은 ‘극단들’에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작업이다. 작가 스스로가 짜장면 배달 스티커와 같은 사소한 것들을 개인 아카이브로 평소에 분류를 하는 등의 작은 행동들이 차곡차곡 모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음악에도 관심을 두어 왔는데, 작품 곳곳에 음악적인 요소와 작업들이 결합하는 과정을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김씨 연대기〉 는 작가의 가족,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세대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함께 결합하였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 있는 일상에 대한 탐구를 소리나 리듬과 결합하여 위트있게 펼친 것이다. 어떤 부분은 연습 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즉흥으로 흐르기도 하면서 우리 세대의 아버지, 또 아버지의 아버지를 ‘터덜, 터덜’, ‘쫑쫑’, ‘웅웅’ 등의 사소한 소리들과 만나도록 하였다. 이 작업에서 퍼포먼스 의상의 일부로 쓰인 최윤석 작가의 신발도 오랜 기간 버리지 못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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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자신의 소중한 소장품이다. 또한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하듯 영상은 단순한 소리에서 점점 아침 알람 시간, 직장에서의 일상으로 바뀌어가면서 ‘얼씨구’의 추임새가 덧입혀 진다. 주목하지 않는 일상 언어들이지만, 이는 작가의 소리를 관통하면서 그저 내뱉는 소리라기보다는 리듬감있는 퍼포먼스의 요소로 바뀌어 가는데, 이러한 과정이 사소함, 극단적 일상들을 작업으로 발전시켜 가는 최윤석 작가의 작업의 특성을 은유한다. 예술가의 삶과 일
이렇게 일상, 무엇보다도 예술가 스스로의 일상에 대한 관찰자적인 태도는 그가 작업을 펼칠 때보다 2014 〈생활과 일, 일과 생활〉 이라는 전시를 기획자와 작업자로 참여하면서 극대화된다. 작가는 다른 작가들의 영상을 찍는 역할을 하면서 작가들과 서로 함께 연구하여 예술가의 평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를 진행하였다. 이 전시에서 어떤 작가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제의적인 의식처럼 108배를 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작업을 위해 늘 방산시장을 찾는다.
220 김씨 연대기(김인근과 협업), (Chronicle of Mr. Kim(In collaboration with Ingeun Kim)), 1채널, 흑백, 9'28'', 2013
그저 방산시장을 찾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손목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손끝을 따라가 보니 작가 스스로도 모르게 자주 찾는 아이템이나 손짓들이 발견된다. 또 최윤석 작가가 동행한 어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관찰을 위해 대구까지 찾아가서 풍수지리가 좋다는 부동산 설명을 듣기도 한다. 이 전시의 구성은 예술가가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취하는 여러 가지 리서치 과정과 관찰자, 혹은 참여자의 입장을 두루 살핀 전시라고 할 수 있으면서 최윤석 작가가 취하고 있는 태도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가적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평소의 삶의 모습과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중에서 행해지는 많은 파편들이 모여 한 작업, 한 전시를 이루어 나가게 되는 여정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부동산 목록
최윤석 작가는 역으로 자신이 술에 취해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찍어준 사진들을 모두 찾아내어 〈Sleeping Book〉2004-2015을 만들었다.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찍어준 사진들을 싸이월드나 폴더 휴대폰에서 일일이 수집하여 자신에 대한 아카이브를 만든 것이다. 작가가 잠들어 있는 상황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관람객은 기록된 누군가의 습관이 한 개인을 읽어낼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과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같은 그의 기록적 습관, 관찰자적인 태도, 수집광적인 면모는 모두 한데 모여 2015년〈그의 부동산 목록〉 이라는 제목으로 스페이스 오뉴월에서 개인전으로 선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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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어렸을 때 썼던 편지에서 부터 수집했던 것들을 포함하여 수집된 소리로 작곡된 노래, 유학시절의 기억, 자신의 침대 위에서 모았던 체모나 각질을 모아 가득 채운 벽면 등 작가가 그동안 보내온 날들을 짐작할 수 있는 사소한 찰나들이다. 사실 ‘일상’이라는 주제는 1910년대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예술이라고 할 때부터 모든 예술가에게 매우 도전적인 재료가 되어 왔다. 미니멀리즘 예술가들은 산업재료인 철판의 물성을 연구하였고, 조각은 더 이상 받침대에 올려져 있는 특별한 작품이 아니라 바닥에 놓여 있는 물건들이 되었다. 사각의 액자는 다양한 모양으로 바뀌기도 하고, 하얀색 캔버스에 다시 하얀색 물감을 칠하여 벽색깔과 구분되지 않기도 한다. 또한 관객들은 퍼포먼스의 일부로 참여자가 되기도 하고, 예술가와 공동체는 하나의 작업을 협업하면서 경계를 허물어간다. 특별했던 예술가의 작업 과정이 오늘날에는 일상생활과 연관짓기 위한 과정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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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술가가 더 이상 스튜디오에 갇혀서 하얀 캔버스에 물감을 채우는 것이 아닌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관객과의 거리를 다양한 방면으로 좁히고 있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지금, 최윤석의 작업은 단순하게 ‘산만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주목하지 않은 파편들을 재발견하고, 무관심한 주변부를 주목받을 수 있는 관심 대상으로 위치를 재설정한다. 이는
대지미술에서 지나치게 작품이 거대하여 관객이 스스로 작품 안에 들어갔을 때 작품에 대한 위치 설정에 혼돈을 보이는 과정을 거꾸로 되돌려 지나치게 작은 파편에 주목함으로써 그동안 관객이 가져왔던 ‘일상’에 대한 선입견을 뒤흔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관객이 품어왔던 일상에 대한 편견을 바꾸어나가는 것이 예술가가 시도하고, 도전해야 할 과제라고도 한다면, 최윤석은 그 새로운 시도를 지속적으로 관찰해 내고, 파내어 예술과 일상을 연결하면서, 일상에 대한 왜곡, 변형을 통해 재가공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구축해 나간다. 어딘가에 종속된 삶이 아닌 ‘일상의 실천’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전술과 전략이 교차할 때 창조적 실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여기에 덧붙여 영상작가로서 이를 소리나 화면의 장면으로 새로운 구성을 선보이면서 이 과정들이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있다. 이같이 최윤석 작가는 한 장르로 규정되는 예술가가 아니라. 작가 특유의 ‘관찰자’의 시각을 가진 ‘예술가’로 규정지을 수 있는 단초를 다양한 ‘적용방식’을 통해 제공한다.
고윤정 고윤정은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교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미술교육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갤러리구에서 협력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그레파이트온핑크 미술전문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지낸 바 있다.《GRAVITY EFFECT》미술무크지 1-3호를 펴냈으며, 평소 관심은 동시대 미술 현장, 공공미술, 공동체 예술, 퍼포먼스 등에 두고 있다. 현재 토탈미술관에서 토탈프레스 객원 편집장이면서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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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허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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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생태학에 대하여 �� 가레스 이반스 화이트채플 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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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注意)를 기울인다는 것은, 가장 드물고 순수한 형태의 친절이다. - 시몬 베유 우리가 만든 이 세계에서, 그러니까 이 ‘공적인’ 세계 에서는 친절이 더욱 드물어지고 있다. 어쩌면 원래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사적 영역이나 공적 영역에서 친절한 행동을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예술가는 어떤 방식으로 이런 친절함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존재 방식 으로 진지하게 제시할 수 있으며, 삶의 수단으로 선보일 수 있는가? 작업 의도나 주제적 관심을 공표함 없이, 엘리 허경란은 친절함의 ‘이미지’를 빚어낸다. 그녀의 영상은 키치나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서정적인 터치와 예민한 감각으로 친절함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녀가 제시하는 이미지는 영상 속에서 벌어진 행위 뿐 아니라 미래에 벌어질 행위의 모델이 되며, 개인 에게도 단체에게도 모두 적용된다. (여기서 친절함은 감각적이고 입체적인 성질이며, 윤리적이고 외향적인 개념이고, 공감과 결부된 경향이다. 미국 작가 조지 손더스는 이것을 ‘활짝 열린 의식 상태’라고 일컬었다.) 최근 몇 년간 엘리 허경란은 한국과 런던, 그리고 일본에서 조용히 몇몇 영상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 작품들은 저마다 성격과 지향점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위에 제기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다만 그 응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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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깊이 있고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녀의 영상은 저마다 길이가 다르지만, 그 시선은 늘 한결같고 차분하다. 그녀는 영상이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시각적인 측면과 청각적인 측면에서) 실험하며, ‘공감’을 구축해서 관람객들에게 제시해 준다. 여기서 이 공감이라는 가치(혹은 성향)는 풍경과 그 풍경 속의 생명체들을 통해 드러난다. 단체에 속한 인간, 세계에 속한 인간, 인간을 넘어 개와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생태학’의 한복판에서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엘리 허경란의 웹사이트에 들어 가면 그녀의 날카로운 작가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곳에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놀라운 발견(“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본다”)과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존재의 질문’(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타자’의 얼굴과 대면한다)이 인용되어 있다. 그녀의 영상 작품〈밥 먹었어요?〉 ,〈섬〉 ,〈행성〉 , 〈잔치국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흥미롭게도 작품 제목들 사이에서 스케일 차이가 느껴진다). 이 작품들 에서 그녀는 대상에 주의注意를 기울이는 시선을 통해 윤리적 탐구 의식을 보여 준다. 네 작품에서 우리는 그녀의 작가적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는 영상(혹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견해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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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식탁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한다. 음식은 사회의 핵심이자, 장소와 공동체의 중심을 이룬다. 엘리 허경란의 영상에도 음식이 등장한다. 다만 그녀의 작품은 음식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녀는 음식이 재배되고 소비되는 모습부터 폐기되는 모습까지 보여 주면서, 과연 장소와 공동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다만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질책이라기보다는 선물과도 같다. 우리는 그녀의 선물을 통해 예전에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밥 먹었어요?”는 상대방을 식사에 초대하거나, 기분과 안부를 물을 때 쓰는 친절한 말이다. 이 작품 에서는 절제된 경외감을 갖고 필요에 의해 함께 노동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성격이 드러난다. 또한 그녀는 계절과 영상의 리듬 및 흐름을 포착하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을 작품에 담는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듯한 것들도 사실은 상당히 공을 들여서 구성된 것이다.
229 밥 먹었어요?(Did you eat rice?), 영상 설치, 컬러, 사운드, 52�, 2017
일상적인 사물들, 사람들, 행위들을 영상 속에 담아냄 으로써 엘리 허경란은 영상(모든 예술)뿐 아니라 영상 외부의 현실(공간)까지도 모두 무無에서부터 구축된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녀는 집요하면서도 폭넓은 시선을 통해 그것을 보여 준다. 긴 시간에 걸친 이러한 ‘응시’를 통해 개별적 공간들(논, 섬, 곤충들의 생태계)은 독립적인 우주들cosmologies로 거듭난다. 그
공간들은 저마다 고유의 의식과 행동 양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동안, 이 공간들은 완벽하고 자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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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인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는 노력과 인내가 무엇보다 귀중하다. 이 사실을 가장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 바로〈행성〉 이다. 인간은 홀로 지구를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계단의 그늘에 숨어서 나비가 쉬고 있다. 분수대에서 말벌이 다른 이를 뗏목처럼 의지하여 매달려 있다. 딱정벌레는 쓰레기더미 속을 헤매고 있다. 진보는 소모가 아니라 지속적인 공존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런 공존의 가능성이 날로 희박해져 가고 있다. 〈잔치국수〉 에서 등장하는 멸치를 비롯해 수많은 존재 들은 자주 우리의 싱크대 속에서 비명도 없이 침묵한 채로 끝난다. 여기서 멸치는 전적으로 온전한 존재로서, 그리고 영상의 틀을 넘어 가까이 다가오는 거대한 위험에 대한 은유로서 존재와 시간을 부여받는다. 그녀의 작업에서, 감추어진 현실에 대한 자각은 소리를 통해서도 현저히 드러난다.〈섬〉에서는 잔잔한 풀밭과 바다를 배경으로 개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 후 갑작스레 찾아오는 무서운 정적은 우리로 하여금 수수께끼 같은 하얀 개의 털 속에 가려진 상처를 발견하게 한다. 이 걸출한 영상을 조금 더 살펴 보자. 희미하게 숨을 내쉬고 있는 개의 핼쑥한 옆구리가 보인다. 마치 최대한 가까이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하듯이 카메라는 점점 개에 가까워진다. 찢어진 상처. 현실에 존재하는 비통함. 다음 화면은 플라스틱 시트의 패인 곳에 떨어지는 빗물이다. 그 빗물은 우리가 (다친 개를 걱정하며) 같은 행성에서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개는 살 것이다. 계속해서, 섬에 비가 내린다. 우리는 넓은 장소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갑자기 작가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그 개를 향해, 마치 뒤쫓는 사나운 개들의 짖어대는 움직임을 넘나들 듯이 튀어 오르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들려주는) 자살에 대한 이야기. 교회 앞 돌무덤의 동그란 잔디로 깊숙이 들어가는 작가의 카메라. 인생의 성쇠盛衰.
231 잔치국수(Banquet Noodles), 1채널, 컬러, 사운드, 4�18'', 2016
죽음과 회복. 이 섬은 철학을 산출한다. 보호의 장막을 제공하고 공감의 빛을 던지는 작가의 시선처럼, 그 섬의 풍화된 밤에는 등불이 켜진다. 이 작품을 보면서 ‘공존’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다름의 공존, 타인과 함께하는 삶, 유쾌함, 그리고 늘 그 중심에서 제기되는 신뢰의 문제. 이러한 담론들을 제기하는 작가의 편집은 지적 수준을 넘어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공존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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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만드는 일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다. 제작 속도와 관계없이, 그것은 인내를 요구하는 정밀한 작업이다. 그녀는 활기차게 움직이며 불안정하고 다양한 존재들을 끊기 있게 담아낸다. 그녀의 작업은 겸손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카메라, 그리고 시간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업은 민주적인 행위이다. 그녀는 변화하는 대상의 상황에 주의하며, 크거나 작은 뜻밖의 상황에 대한 일시적인 목격자를 자임한다. 그녀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즉 그녀는 ‘타자’를 자극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다. 이것은 만드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유쾌하다. 또한 그녀의 작업은 우리를 시간과 세계의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이것은 저항적 행위이다. 그녀의 작업은 사람, 장소, 동물, 사물들이 부지불식간에 주변화되어 가는 상황에 저항하고, 타자와의 간편한 대면에 저항하며, 소멸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 것 인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거친 세상 위에서 고결한
인류와 동식물이 공존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늘과 멈추지 않는 바다를 인식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존재에 대한 의심을 감내하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질문이다. 그녀는 우리가 잘 알면서도 어느새 잊어버린 진실 그야말로 우리를 구해줄지도 모를 진실 - 을 상기시켜 준다. 이 진실은 ‘타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밖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존 버거가 말했듯이 “이제 모든 이야기는 그것이 단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이야기되지 않을 것이다.”
가레스 이반스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Whitechapel Gallery)에서 무빙 이미지 관련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스웨덴보그 필름 페스티발》(Swedenborg Film Festival),《에스터리 페스티발》(Estuary Festival),《위스터블 비엔날레》 (Whitstable Biennale) 등의 협동 큐레이터이며, 프로듀서이자 평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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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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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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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부터 촛불을 든 사람들은 토요일마다 광장에 모였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갔고, 봄이 왔으며, 간절함이 모여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촛불이 모여있던 그 광장 사거리 광고탑에 여섯 명의 노동자가 올라가 고공단식농성을 한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누군가가 대통령을 꿈꾸며 맞이하는 봄날,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삶을 지속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비단 한국사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세상은 그렇다.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와 난민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눈 막고 귀 막고 살고 싶지만, 그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나쁘다고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려운, 살아내기 녹녹치 않은 시절이다. 돌이켜보면 예술은 늘 이런 세상에 반응했다. 변화의 현장에서 함께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현상의 이면을 파고든 작품도 있었다. 세상과 등지고 자신의 내면을 파고든 작품조차도 그 배후에서 세상과 무관할 수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사진은 늘 발 빠르게 현장을 담아 왔다. ‘기록’하는 매체로서든 예술적 ‘표현’을 위한 매체 로서든 사진은 그랬다. 동일한 기록의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비디오는 좀 달랐다. 예술매체로서의 비디오는 사진보다 덜 직접적일 수 있었고, 사진보다 더 다양한 표현과 이야기가 가능할 수 있는 매체였기 때문이었다. 비디오는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시간을 편집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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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와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전이되기도 한다. 비디오는 작품을 보는 데에도 역시 시간이 필요 하며, 관객은 작품과 만나는 그 시간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비추어보기도 한다. 토탈미술관과 더 스트림이 공동 기획한 〈비디오 포트레이트 Video Portrait 1〉은 18명의 작가들이 담아낸 영상을 통해 담아낸 동시대의 초상에 관한 전시이다. 안정주의〈무궁과 꽃이 피었습니다〉 로 시작되는 이 전시에는 분단으로 빚어진 우리의 모습 (조영주〈DMG〉 , 김해민〈옛날 옛적에 판문점〉 )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잊혀져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정은영〈정동의 막〉 ). 그런가 하면 기억하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득함을 담아내기도 하고 (최윤석,〈김씨 연대기〉 ), 타인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기억(무진형제,〈더미〉 )을 담은 이야기도 있다. 박병래의 〈고무줄 놀이〉 는 비디오아트를 통해 보여지는 이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나와 또 다른 나의 변주는 단순한 영상과 영상 인물의 움직임을 통해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정연두의 〈Wild Goose Chase〉는 일본의 맹인 안마사로부터 받은 수천 장의 사진을 편집하고, 그것을 안마사가 좋아하는 ‘Wild Goose Chase’라는 곡에 맞춰 편집한 작품으로, 볼 수 없는 맹인이 만들어낸 시각적 이미지를 ‘본다’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242
이번 전시에는 개인, 기억에 대한 것 외에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올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중 한명인 이완은 토탈미술관 해외 레지던시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작품 팜 오일 농장에서 직접 팜 오일을 제작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Made in Malaysia‒Palm Oil〉 편은 글로벌자본주의 안에서의 정치와 문화, 전통의 변화에 대해서 말한다. 김세진의 〈열망으로의 접근〉 은 좀 더 거대서사에 대해서 말한다. 작가는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주, 이민현상과 그 이면의 개인사와 집단적 유토피아가 어떻게 국가나 사회라는 거대한 제도 안에서 작동되는지에 대한 물음 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철학책이나 논문처럼 어렵지 않다. 12개의 의자, 엔젤섬의 이야기, 또르띠아와 같이 친숙한 소재를 통해 사전 지식이 없는 관객들도 쉽게 이야기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옥인 콜렉티브의〈서울 데카당스‒Live〉 는 콜트콜텍 노동자 연극 ‘구일만 햄릿’의 거울버전으로 1940년대 만들 어진 폐공장에서 이루어진 전시/퍼포먼스를 담은 영상 작품이다. 이 작품은 10여전이 넘는 시간 동안 복직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삶의 변화, 그리고 지금도 그들이 광화문 사거리 40미터 광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라이브라 할 수 있겠다. 이 외에도 이번 전시에는 열 여덟명의 작가로부터 나온 스물 두 개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아니 관객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진다면, 아마 그 이야기는 서른, 여든, 백 가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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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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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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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트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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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예술 매체로서 비디오가 갖는 뜻밖의 가능성에 일찍 눈을 돌린 사람들은 시각 예술가들이었다. 초기 비디오아트의 주요한 전략은 매체를 통한 조형적 실험과 기술적인 처리 과정이 가져온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였다. 이미지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비디오아트/ 무빙이미지는 시공간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유한 문법적인 특성을 갖추게 되면서 시각예술의 중요한 위치로 치환되고 확장되었다. 하나는 단순한 녹화 도구로써 비디오카메라를 사용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 시스템 및 현재의 디지털적 특수한 속성을 이용한 실험적 탐구다. 또한, 청각적이고 연극적인 요소인 영화적 문법들을 시각예술 속에서 주요한 형식적 실험으로 가져온 일련의 과정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현대미술은 단지 ‘영상’이라는 매체를 이용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 내러티브와 이미지 표현기법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의 새로운 예술로서 기능한다. 또한 현대미술과 영화의 개념 영역을 훨씬 복합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초기 비디오아트가 작가의 신체성에 집중하면서 시각적이고 개념적인 독특한 언어를 창조하였다면, 현재의 비디오아트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독창적인 이미지 시퀀스를 만들 뿐만 아니라 관람자를 위해 새로운 상황들을 계속 창조한다는 것이다. 245
이번 전시〈Video Portrait〉 는 18명의 영상 작가들이 21개의 작품을 통해서 개인적 혹은 사회-정치적인 경향의 관점에서 ‘비디오 초상’으로써 초기 비디오 포트레이트의 개념보다 좀 더 확장된 개인의 신체와 기억에 대한 것 외에도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전시 작품들은 신체(행위자/ 제작자, 또는 기계)의 친밀성을 내포한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기술-사회적 문제(공간이나 사회 시스템 자체의 개념)에 근거한 사회적 시대상을 담는 매개로써 비디오를 인식한다. 기존 전통예술에서의 포트레이트의 개념은 대상의 압축과 함축된 한 단면 만을 보여주는 이미지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포트레이트의 기존 법칙은 자칫 그 대상 본질의 한 측면만을 직접 제시하기에 선입견이라는 위험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비디오 매체와 만난 포트레이트는 어떤가. 비디오 포트레이트의 본질은 기술적 장치로서의 특성상 여러 축의 다양성을 담을 수 있고 하나의 상징으로만 귀결될 수 없는 태생적 본질을 가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면한 시대적 상황을 마주하며 시간, 기억, 동시성을 개인 혹은 사회 시스템의 다양성을 근거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의미 작용 같은 더 유용한 접근이 가능하다. 따라서 유의미한 초상과 세계의 환유를 동시에 그려내는 다층적인 예술적 실천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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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아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는 현대 예술의 주요한 흐름이지만, 기존 예술과는 다른 수용 방식으로 인하여 그 한계 또한 분명한 장르이기도 하다.
비디오아트의 경우 내러티브를 전제한 예술 형식이기 때문에 시간을 담보하는 긴 호흡의 관람 형태가 필요 하며,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비평 언어 역시 요구된다. 또한, 영상예술이 비평의 지평에서 한층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영상예술을 감상할 수 있고 작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지평 또한 필요하다. 이는 영상 미디어에 기반을 둔 작품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부족한 동시에 이를 비평적 언어로 분석하는 다양한 채널이 부재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영상 예술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지속적인 창작의 어려움을 부여하며 여타 다른 예술형식과의 타협을 유도하기도 한다. 사실 미술관에서 영화를 튼다는 개념은 실험영화의 궁여지책 같은 것이었다. 틀기 힘든 전위적이고 까다로운 영화들은 마치 난민처럼 미술관 주변을 맴돌았고,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 헤매던 큐레이터들은 이 작품들에 피난처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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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큐브로 들어오면서 검은 방에 들어가서 프로젝션으로 상영되는 방식은 다소 단조로웠고 일반 극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미술가들은 영화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패러디함으로써 순수미술의 영토를 넓혀왔다. 또 영화적 이야기나 촬영 테크닉, 영화세트 디자인과 편집기술 등을 적극적으로 끌어 들인 예술가들도 있다. 미디어아트와 장편 극영화를 넘나들며 작품을 발표해온 감독들도 여럿이다. 싱글 채널로만 구성된 이번 전시는 이러한 측면에서 새로운 전시 형식의 실험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칫 플랫한 전시 형식의 문제로 다른 형식 실험이 요구되는 작가들의 상황을 인지하고, 블랙박스와 모니터만을 이용한 평면적인 싱글 채널의 기존 전시 형식을 넘어 서고자 다채로운 스크린의 방식과 크기로 공간의 형식적 다양성 또한 담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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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미술관과 한국비디오아트 아카이브 [더 스트림]의 협업은 화이트 큐브의 시스템에서 영상예술 콘텐츠에 대한 아카이브 연구가 전시와 비평의 언어로 그 지평을 확장하는 또 다른 큐레토리얼 담론 실천이다. 추후 영상예술의 유통과 배급, 저작권 이슈에 대한 방안 모색 또한 유연하게 이어질 예정이다. 전시와 출판 기획 과정에서 한국비디오아트 작가들의 작품 리서치 과제를 함께 수행하며 같은 비전과 이슈를 공유했던 신보슬 큐레이터와 미술관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한국비디오아트에 대한 중장기 전시-연구프로젝트로 시작하는 첫걸음인 〈비디오 포트레이트 Vol.1〉이 다음 단계로 향하는
즐거운 여정의 시작이자 발판이 되길. 이 작은 일련의 실천이 종국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과제로 남겨 지겠지만 어떤 주어진 힘처럼 작용하여 마술적인 성질을 지닌 인접성과 유사성의 관계로 연결되길, 그리하여 한국의 비디오아트/무빙이미지가 국내외의 현대 예술의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하는 영향력 있는 예술 흐름으로써 인식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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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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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 Sejin KIM 1971년 출생, 서울 거주 sejinkimstudio.com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영상미디어과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영국의 슬레이드 미술대학(UCL)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한 김세진은 영상의 다양한 기법을 이용해 여러 시스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하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개인의 고립과 고독, 불안과 같은 삶의 결핍과 같은 현상에 주목한다. 아트센터 나비, 문화역서울 284등에서 개인전을 국립현대미술관(서울), 발다비아미술관(칠레), Artier Nord(오슬로)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송은미술대상(2016), 블름버그 뉴 컨템포러리즈(2011), 다음작가상(2006)등을 수상했다.
김실비 Sylbee KIM 1981년 출생, 서울, 베를린 거주 sylbeekim.net
김실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졸업 후 베를린 예술대학 에서 미디어아트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05년 이래 베를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영상, 설치, 평면, 퍼포먼스 중심의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현실비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비선형적 서사를 다층적인 시공간으로 구현한다. 인사미술공간, 스페이스 오뉴월,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미디어시티서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시립 미술관, 신 베를린 쿤스트페어라인, 리얼 DMZ 등지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김아영 Ayoung KIM 1979년 출생, 서울 거주 ayoungkim.com
김아영은 시간, 공간, 구조, 통사, 개념을 통튼 모든 종류의 횡단과 이송, 이행, 이조, 호환에 집중하고 요소들간의 새로운 접합과 충돌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는 사운드 설치, 목소리 퍼포먼스, 드라마적 영상, 스크립트, 다이어그램 등 다양한 형식의 네러티브 구조로 표현되며, 읽기, 쓰기, 듣기의 다른 방식을 환기하기 위해 이야기 장치와 수사학을 채용한다. 2017년《멜버른 페스티벌》(멜버른), 2016년 개인전〈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팔레 드 도쿄, 파리), 퍼포먼스〈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파리 오페라극장, 파리), 2015년 제 56회 베니스 비엔날레《모든 세계의 미래》등을 열거나 참여했다. 2015년 문체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고, 2010년 영국 로얄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브리티시 인스티튜션 어워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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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민 Haemin KIM 1957년 출생, 서울 거주 kimhaemin.com
김해민 작가는 1980년대 한국의 미디어아트가 태동하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35년 여에 걸쳐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공간에 드러내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고, 미디어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영상설치 작업들로 주목받아 왔다. (1992),〈신도안〉(1994)은 2016년 그의 대표작인〈TV 해머〉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새롭게 선보이며 재해석되었다.
무진형제 Moojin Brothers 정무진•정효영•정영돈 moojinbrothers.com
무진형제는 정무진(b. 1979), 정효영(b. 1983), 정영돈(b. 1988) 세 명으로 구성된 미디어 작가그룹이다. 각각 문예창작, 조소, 사진을 전공하였다. 무진형제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낯설고 기이한 감각과 이미지를 포착해 우리 삶의 새롭고 낯선 지점을 조명하는 작업을 한다. 노동자, 작가, 청년 등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양한 미술적 방식으로 재구성해 그로부터 다채로운 예술적 의미를 포착한다. 아울러 우리 삶에 깊이 감춰져 있던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역사적 탐색, 고전 텍스트의 재해석 등을 영상언어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개인전으로는〈속인의 밀담〉(스페이스 오뉴월–이주헌, SEMA신진미술인, 2016), 단체전으로는《공감오류 : 기꺼운 만남》 (아트스페이스 풀, 2016),《18th FESTCURTAS BH》(Minas Gerais, 브라질, 2016),《29th European Media Art Festival》 (Osnabrück, 독일) 등에 참여했으며, 2016년 POOLAP과 SEMA신진미술인에 선정, 2015년 NEMAF 참여하였다.
박병래 Byounglae PARK 1974년 출생, 서울 거주 www.byoungl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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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과를 졸업한 후 독일 카셀대학에서 조형예술학을 전공하였다. 시각예술가로 개인을 둘러싼 공간, 기억, 놀이, 무의식의 이미지들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비디오 영상을 통한 분절되고 어긋난 시간과 공간의 레이어들의 서사 형식으로 오늘날 혼재된 이미지와 함께 살아가는 개인의 사(私)적인 이미지들간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탐구한다. 주요 작품으로는〈Elastic Cord Playing〉(2008),〈Zeboriskie Point〉(2011),〈화포異景〉(2014),〈Jutlandia〉(2015) 등이 있다. 현재 국내외 미술전시와 비디오, 필름 페스티발을 통해 개인 작품 활동과 더불어 미디어를 이용한 다양한 교육활동도 함께 겸하고 있다.
옥인콜렉티브 Okin Collective 이정민•진시우•김화용•강신대 http://okin.cc
이정민, 김화용, 진시우, 강신대(객원멤버)로 구성된 옥인 콜렉티브는 2009년에 열린 첫 프로젝트의 장소이자 지금은 철거된 종로구 옥인아파트의 지명을 딴 작가 그룹이다. 이후로 주변에서 쉽사리 발견되는 무수한 �옥인�을 기억하며, 척박한 도시 공간 속의 연구와 놀이, 예술과 사회의 관계, 예술과 향유자의 위치와 다양성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독 전시인〈옥인 오픈 사이트〉(옥인 아파트 2010), 〈안녕 없는 생활들, 모험들〉(부산시립미술관 2011),〈Open Hangar〉(스페인, 2012),〈Truth is Concrete〉(오스트리아, 2012),《Acts of Vocing》(토탈미술관, 2013),《페스티벌 (2014),《아티팩트 페스티벌 봄》(2014),《광주비엔날레》 15》(STUK, 벨기에, 2015),《Rien ne va plus? Faites vos jeux!》(드 아펠 아트센터, 2016) 등 많은 국내외 전시와 프로젝트,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2010년 9월부터 �옥인 콜렉티브 인터넷 라디오 스테이션 STUDIO+82� (http:// okin.cc)를 운영하고 있다.
안정주 Jungju AN 1979년 출생, 서울 거주 www.anjungju.com
안정주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아트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안정주는 영상, 사진, 사운드 등 다양한 미디어 작업을 통해, 사회와 제도 그리고 점차 무감각해지면서 간과하기 쉬운 현실에 주목해왔다. 익숙한 외관을 전혀 다른 감각들로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그의 작업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인식시키는 과정에서 현실을 재발견 하도록 작용한다.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Kunstlerhaus Bethanien GmbH(베를린), International Artists Studio Program(서울), HIAP Artists-In-Residence(헬싱키) 레지던스 작가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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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Wan LEE 1979년 출생, 서울 거주 www.leewanstudio.com
이완은 1979년 서울에서 출생해 동국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 했으며, 2005년 중앙미술대전을 통해 미술계에 데뷔했다. 갤러리 쌈지(2005년), 미로 스페이스(2008년), 토탈미술관 (2009년), 아트스페이스 휴(2010년), 대안공간 풀(2011년), 대구미술관(2013년), 두산갤러리 뉴욕(2014년), 313아트 프로젝트(2015년, 2017년) 등 국내외 다양한 미술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해 왔다. 201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제정한 제1회 �아트스펙트럼 작가상�과 제26회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수상 했으며, 제10회 광주비엔날레《터전을 불태우라》에 참여하며 작가로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되었다.
장서영 Seo Young CHANG 1983년 출생, 서울 거주 www.changseoyoung.com
장서영은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 동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Art in Context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장서영 작가는 조소를 전공했으나 영상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그는 사회나 시스템 같은 구조적인 틀 안에서 개인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또 해체되고 무효화되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개념을 조형적인 재료로 이용하여 비물질적인, 관념적인 조형성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전소정 Sojung JUN 1982년 출생, 서울 거주 junsoj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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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정은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연세대학교 커뮤케이션 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학과를 졸업했다. 작가는 삶 속에서 포착한 시간의 개념과 감정의 경험에 주목하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연극적인 구성과 무대, 퍼포먼스와 설치, 고전 텍스트를 차용한 내러티브 등을 통해 미시적 서사로 그려낸다. 리움 삼성미술관(2012), 서울시립미술관(2015), 광주비엔날레(2016) 등에서 열린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2016년 파리의 빌라 바실리프– 페르노리카 펠로우십, 2016년 광주비엔날레 눈 예술상을 수상했다.
정연두 Yeondoo JUNG 1969년 출생, 서울 거주
정연두는 1969년생으로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인 작가이다. 서울 대학교 조소과와 영국 골드 스미스 컬리지를 졸업하였으며, 대표작은〈보라매 댄스홀〉 〈내 사랑 지니〉 〈원더랜드〉 〈도큐멘터리 노스탈지아〉등이 있다. 주요 참여 전시로는 《2002년 상하이 비엔날레》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2009 플랫폼-기무사》 《Performa 2009》 《2012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등이 있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2002년 �제2회 상하이 비엔날레 아시아 유럽 문화상�과 2007년 국립 현대 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08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이 있다.
정은영 Siren Eun Young JUNG 1974년 출생, 서울 거주 sirenjung.com
정은영은 이화여대와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시각예술과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정은영의 작업언어는 비디오, 공연, 설치 등의 다양한 매체적 시도를 통해 여성주의, 성별정치, 수행성과 정동이론을 가로지른다.〈변칙판타지〉(드라마센터, 남산아트 센터, 서울, 2016),〈틀린색인〉(신도문화공간, 서울, 2016), 〈전환극장〉(아트스페이스 풀, 서울, 2015)등의 6차례 개인전과 《2 or 3 Tigers》(세계 문화의 집, 베를린, 2017),《Polyphonies》 (퐁피두센터, 파리, 2016),《Gestures and Archives of the Present, Genealogies of the Future, 타이페이 비엔날레 2016》(타이페이, 2016),《달은 차고 이지러진다》(국립현대 미술관, 과천, 2016)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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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주 Youngjoo CHO 1978년 출생, 서울 거주 youngjoocho.com
조영주는 파리, 베를린, 서울을 오가며, 프로젝트와 전시기획, 예술연계프로그램등을 동시에 진행하는 작가이자 독립큐레이터 이다. 그동안 다양한 전시를 통해 퍼포먼스, 설치, 사진, 비디오, 사운드, 댄스 등의 작업을 보여왔다. 2001년 성균관대학교 서양화과, 2007년 파리-세르지 국립 고등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그 사이 파리8대학 조형예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학하였다. 2009년 베를린의 골드라우쉬 예술가프로젝트《Goldrausch Künstlerinnenprojekt art IT》를 비롯해, 2010년 경기창작센터, 2008/200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1/2014년 베를린 세나트 (Berlin Senate), 2010년 독일 ifa(Institut für Auslandsbeziehungen),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진작가, 2014년 서울문화재단등의 지원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2005년 부터 국제미술그룹인 글로벌 에일리언(Global Alien)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며, 여러나라에서 프로젝트를 기획/참여하였고, 2014년《루와얄 섬 프로젝트》(주한프랑스문화원,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 문화공장오산 후원), 2013~2014년《Hal할project》 (스페이스 매스 후원, 작가이자 이론가인 Klega와 협업)를 진행한 바 있다.
주연우 Yeonu JU 1984년 출생, 서울 거주
주연우는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을 졸업한 후 �카메라 없이 영화 만들기�를 실천하며 아카이브 푸티지를 활용한 실험 영상을 만든다. 주로 기술과 관련한 사회, 문화적 변화에 관심을 두고 영상 작업을 하고 있다.〈Swarm Circulation〉은 영국 《알케미 영화제》(Alchemy Film & Moving Image Festival), 미국《앨버커키 실험영화제》(Experiments In Cinema),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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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록 SungRok CHOI 1978년 출생, 서울 거주 sungrokchoi.com
최성록은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미국 카네기멜론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였다. 디지털 애니메이션과 비디오 작업을 통해 뉴미디어기술에 의해 보여지는 동시대의 풍경과 사건에 대해 탐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로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계를 바라보며 인간이 어떤 존재로 인식 되는지에 관한 탐구를 이어왔으며, 발달 되어가는 기술과 인간과의 관계 변화에 집중한다. 아트스페이스 휴(2006), 피츠버그 아트센터(2011), 갤러리조선(2015)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난지 창작 스튜디오,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2011년 뉴욕 AHL Foundation 시각예술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2015년 서울시립 미술관 신진작가지원 프로그램, 2017년 VH 어워드에서 최종 3인에 선정되어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최윤석 Yoonsuk CHOI 1981년 출생, 서울 거주 www.yoonsukchoi.com
최윤석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학과를 졸업한 뒤 2011년 런던 소재 University College London의 Slade School of Fine Art,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개인전〈그의 부동산 목록〉 (스페이스오뉴월, 서울, 2015)과《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16》(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6),《Please Return to Busan Port》(베스트포센 미술관, 오슬로, 노르웨이, 2016) 등 국내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한국을 비롯해 영국, 미국, 벨기에 등에서 다수의 단체전과 퍼포먼스, 상영회를 가진 바 있다.
엘리 허경란 Ellie Kyungran HEO 1976년 출생, 서울, 런던 거주 www.elliekyungran.com
엘리 허경란은 주제 대상과의 충돌, 친밀감, 그리고 민감성의 관계 변화를 추적하며 그 대상의 다큐멘터리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실험영상을 만든다. 그를 통해 그 대상과 관람자, 그리고 작가 자신 사이의 윤리적 관계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는 공간 창출을 시도한다. 그녀의 최근 작업은 영국 《위스터블 비엔날레》(Whitstable Biennale), 화이트채플 갤러리(Whitechapel Gallery), 사우스 런던 갤러리(South London Gallery), 그리고 다수의 국제 예술 영화제에서 전시 및 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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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 노준의
발행인 노준의 (토탈미술관 관장)
큐레이터 신보슬 · 정세라
발행처 토탈미술관 프레스 (03004) 서울시 종로구 평창 32길 8
코디네이터 정효섭·이태성·박은영·박민서
02.379.7037
객원편집장 고윤정
참여작가 김세진 · 김실비 · 김아영 · 김해민 · 무진형제 · 박병래 · 안정주 · 옥인콜렉티브 · 이완 · 장서영 · 전소정 · 정연두 · 정은영 · 주연우 · 조영주 · 최성록 · 최윤석 · 허경란
참여필자 고윤정 · 곽영빈 · 기혜경 · 김남시 · 김상용 · 김정현 · 민희정 · 방혜진 · 신보슬 · 유운성 · 이수현 · 이선영 · 이한범 · 정세라 · 황정인 · 홍이지 ·
Gareth Evans · Mizuki Takahashi
번역 이진우
전시장구성 제로랩 · 미지아트 사진 정효섭 디자인 손혜인
인쇄 정원프로세스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서울특별시
TOTAL MUSEUM PRESS
전화 팩스
02.397.0252 홈페이지
www.totalmuseum.org 이메일
total.museum.press@gmail.com 발행일
2017년 6월 15일
이 책은 토탈미술관〈VIDEO PORTRAIT〉 (2017. 4. 27~ 6.1 8)전과 연계하여 발간되었습니다.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라이선스에 따라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ISBN 979-11-85518-20-6 값 15,000원
TOTAL MUSEUM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