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Road show : 江陵
2015 로드쇼 : 강릉 Road map vol1.
로드맵 vol1. <로드쇼> 기획자 및 참여작가 강릉원주대학교 미술학과
2015 Road show : 江陵 Road map vol1.
index
목차 참여자 소개
4p
기획자의 말_신보슬 (토탈미술관 큐레이터)
6p
워크숍
14p
참여자 일지_허지은 (강릉원주대학교 미술학과)
18p
<로드쇼: 강릉>을 위한 답사 자료
32p
강릉 강릉의 명소
40p
강릉 명칭의 역사
62p
강릉의 인물
63p
참여자 소개
전우치
노세환
매거진 에디터, 음식전문기자, 방송작가, 여
노세환 작가는 회화를 전공한 후 유학을 거
행기자, 영상 디렉터, 프로젝트 디렉터 등
치며 실험적 사진 작업을 해왔다. 배병우 사
메이저와 마이너를 자유스럽게 오가며, 전
진가의 어시스트로 일하기도 했으며 표 갤
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러리, 유중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있는 콘텐츠 제작 전문가다. 현재는 인터내 셔널 크리에이터스 매거진<ELOQUENCE> 의 설립 후, 대표와 편집장을 겸임하며 다양
최윤석
한 형태의 컨텐츠 제작과 프로젝트 기획을
최윤석은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런던 슬레이
진행하고 있다.
드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영상 설치와 퍼포 먼스 작업을 주로 실험해온 작가다. 2015 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진작가로 선정되어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김동형
서준호
김동형은 테이프를 이용한 라인 아트 작업
미술이론을 전공한 후 2011년부터 성북동
을 하는 작가다. <아트스타 코리아>에 출연
에서 스페이스 오뉴월을 운영해왔다. 젊은
해 참신하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이름을 알
작가들의 실험적 작업을 전시하며 지역 커
렸으며 현재 여러 작가 및 기업들과 콜라보
뮤니티와 결합한 공공미술과 아시아 현대미
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술의 현장에 관심이 많다.
이동재
신보슬
이동재 작가는 쌀, 콩 등의 곡물이나 알약,
토탈미술관 큐레이터. 2011년부터 <로드쇼
크리스탈과 작가가 제작한 알파벳 유닛 오
> 프로젝트를 기획해 국내외 작가들과 함께
브제를 픽셀로 인식하여 그 픽셀을 이용해
백령도, 경주 및 인도 등 여러 곳을 여행하
서 작품을 만든다. 가나아트센터 전속 작가
는 아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이며 장흥 아틀리에 입주 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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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말
이것은 (그저 그런) 여행이 아니다. - 로드쇼, 내성천에서 시작하여 강릉까지
신보슬 (토탈미술관 큐레이터)
0. 로드쇼 - 길 떠나는 큐레이터, 길 떠나는 작가 큐레이터 18년 차.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시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 니라, 쇼핑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그럴싸한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 는 작가와 작품을 고르고. 어김없이 아티스트 비용을 제대로 주지 못해 미 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오프닝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도록을 만 들고, 못내 아쉬움을 내비치며 철수하는 사이클. 주제와 작가들은 바뀌지 만 전시장을 채우고 비우는 과정은 언제나 비슷했고 마음은 점점 느슨해 졌다. 생각해보니 작가들과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작업에 대해서, 세상 에 대해서 오랜 시간 토론하고, (가끔은) 언성을 높이기도 하면서 서로의 생각들을 털어놓았던 기억도 가물했다. 예술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창이라면, 작업실에만 있는 작가와 사무실에만 앉아 인터넷 서핑을 하는 큐레이터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은 별로 매력적일 수 없을 것 같았 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로드쇼>의 시작이었다.
1. <로드쇼:대한민국> - 내성천에서 시작된 첫걸음 2011년. 4대강에 대한 갑론을박이 뜨거웠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어 찌 되었던 우리 경제에 새로운 활력이 될 거라는 밀어붙이려는 세력과 허 무맹랑한 기획들을 낱낱이 밝혀내면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맞부딪혔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은 알았지만, 현장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의견을 더하기는 조심스러웠다. 뉴욕 아이빔에 있던 최태윤 작가와 이야기를 나 누다가, 농담처럼 그럼 우리 작가들이랑 함께 가보자고 했다. 마음 같아서 는 4대강을 모두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적, 재정적인 여유가 없으니 하 나의 강이라도 제대로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 첫 번째 <로드 쇼: 대한민국> 낙동강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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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윤 작가는 아이빔에서 Mary Mattingly, Fran Ilich, Nova Jiang, Jon chors 이렇게 4명의 작가들을 초대했고, 박은선, 김화용, 이정민, 노 순택, 연미, 최빛나 등의 일군의 한국 작가들과 기획자들이 함께했다. 스 무 명이 넘는 인원이 일주일동안 관광버스 한 대에 몸을 싣고 여행을 시작 했다. 그리고 그 여행은 낙동강의 지천인 내성천에서 시작하여, 하구에 있 는 을숙도까지 계속되었다.
로드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대부분 무엇을 하는 프로젝트냐는 질문을 한다. 딱히 우리가 뭘 해야겠다는 의지보다는 함께 여행하고, 이야기하면 서 서로를 좀 더 알아가는 것이 목적인 우리로서는 ‘여행을 한다’는 것 외 에 딱히 그럴듯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액티비스트도 아니고, 저항이나 캠페인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여행이 상황을 바꾸기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꼭 뭔가를 해야 하나. 큐레이터와 작가가 함께하는 여행의 결과 물이 당장 새로운 작업으로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빠듯한 일상에서 일주 일가량 일탈하여 함께 이야기하고, 생활하는 경험은 언젠가 좋은 작업으 로 나오리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굳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면, 여행에 집중하고, 우리가 만난 것들과 생각했던 것들, 이야기 나 눈 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후반 작업을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 서 우리는 여행의 끝에 전시가 아닌 책을 만들기로 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함께하는 여행하자고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작가들과 함께했던 낙동강 여행은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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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대강 이슈에 열정적이었던 리슨 투 더 시티의 박은선 작가, 그리고 내 성천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셨던 지율스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저 그런 여행일 수 없었다. 지율스님은 내성천에 왜 오시 게 되었는지, 낙동강의 모래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강을 걸어서 건넌다 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세세히 설명해주시고, 체험하게 해 주셨다. 그리 고 4대강 계획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도 빼놓지 않으셨다. 해 질 무 렵 내성천 모래톱에 앉아 넓디넓은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의 모습을 보며 들었던 이야기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많은 여행이 그렇듯 불편함과 갈등도 있었다. 외국 작가 중에 채식주 의자가 있어 매끼 메뉴를 고르는데 애먹었던 순간도 있었고, 폐교를 개조 한 숙소에서의 그것도 딱딱한 마룻바닥에서의 단체 취침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인터넷이 안되느냐며 매일 인터넷 타령을 하던 외국 작가도 있었 다. 챙겨야 할 것,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만큼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로드쇼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시는 <로드쇼>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 었다. 차라리 전시가 낫다고. 하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이미 다음 해의 로 드쇼를 기획하고 있었다. 서로 바쁜 일상에서 빠져나와 같은 공간에서 같 은 곳을 바라보며 생각을 나눌 수 있었던 일주일은 포기하기에 얻는 것이 너무 많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2. <로드쇼: 제주> - 로드쇼의 몇 가지 규칙들을 만들다 두 번째 <로드쇼>를 기획하면서 첫 번째 <로드쇼: 대한민국>를 돌아보았 다. 즐겁고 좋은 추억이었지만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외국에서 초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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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손님으로는 작가보다 큐레이터가 더 좋을 듯했다. 함께 여행하는 동안 참여한 한국 작가들의 작업도 소개한다면 여행과 홍보 두 마리 토끼를 잡 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큰 차로 스무 명이 넘는 사 람들이 단체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4~5명 단위로 그룹으로 이동하게 된다 면, 여행의 경로도 좀 더 다양해질 수 있고, 같은 그룹에 있는 사람들끼리 는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리고 여행 기간 동안 뭔가 새로 운 작업을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과제는 여행도 부담스럽게 하고, 정작 작 품도 제대로 나오기 어렵기도 하니, 여행이 진행되는 과정에 더욱 집중하 자고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아쉬움을 보완하면서 두 번째 로드쇼의 새로 운 규칙들이 만들어졌다.
첫째, 여행지는 기획팀과 이전 참여 작가들의 추천에 의해서 선정한다. 둘째, 해외 초청의 경우 가급적 큐레이터를 초청하되, 작가를 초청하는 경우 전시기획이 가능하거나 혹은 이후 프로젝트를 함께 할 수 있는 가 능성을 보고 선택한다. 셋째, 여행 중 작업에 대한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 신작을 해도 좋고, 퍼포먼스를 해도 좋다. 작업과 관련된 사항은 작가에게 맡긴다. 기존 작업을 가져오는 경우, 10분 안에 설치하고, 10분 안에 철수가 가능한 작업을 통한 게릴라형의 전시를 준비한다. 넷째, 작가-기획자-해외 초청자가 골고루 섞이도록 그룹을 재구성한다. 다섯째, 여행지는 기획팀에서 설정하지만, 개별 여행 계획은 그룹 내에 서 상의하여 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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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로드쇼를 ‘제주’로 이끌 었다. 독일, 인도, 스페인에서 온 해외 참가자들은 서울이 아닌 제주도, 그 것도 한국 작가와 기획자와 함께하는 여행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안타깝게 도 로드쇼 기간 동안 세 차례의 태풍이 오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태풍으로 인해 더 많은 추억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낙동강 여행과는 달리 제주에서는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빌려 베이스캠프 로 삼았다. 강정마을과 4.3 제주 평화공원 등은 함께 방문했지만, 팀별로 한라산을 가지고 하고, 아름다운 제주의 해변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여 행 중간 중간에 버스 정거장에서, 둑방에서 퍼포먼스도 하고 게릴라식의 전시도 했다. 그리고 밤이면 다시 베이스캠프에 모여 번갈아가면서 식사 도 준비하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서 프레젠테이션도 하고, 긴 토론을 하 기도 했다.
3. <로드쇼: 백령도>, <로드쇼:경주> ... - 로드쇼는 계속된다. 세 번째 로드쇼는 백령도에서 진행되었다.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는 분 단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곳이다. 북한이 바라다보이고, 연평도 포 격사건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 천안함 피격사건 등 백령도는 여느 섬과 는 다른 히스토리를 갖는 곳이었다. 그곳에 작가들과 루마니아, 스페인, 인도 등지에서 온 기획자(겸 작가)들이 한국 작가들과 함께 찾았다. 섬을 여행하고, 바닷가와 심청각에서 퍼포먼스도 하는가 하면, 가지고 간 사진 을 가지고 설치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작업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질문을 받기도 했다. 전시장에서는 하기 어려운 경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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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9월,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작가와 큐레이터를 초청하여 <로드쇼:경주>를 마쳤다. 경주, 신라 천 년의 고도이자 수학여행 의 단골지, 불국사와 석굴암, 왕릉으로 대변되는 경주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다. 사운드 장비를 가지고 재래시장에서 사운드 채집을 하는가 하면, 방폐장 앞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문무대왕 수중릉 앞에서 모든 참가자 들이 함께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 이름 없는 사찰을 찾아 사진 작업을 하는 작가도 있었다.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경주의 여행은 작가들 덕 분에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5. 그리고, <로드쇼2015:강릉>을 준비하며 그저 여행이나 같이 해볼까 하고 시작되었던 로드쇼가 벌써 여섯 번째 에 피소드를 준비하게 되었다. 동해로 떠나기로 했다. 먹먹하게 펼쳐지는 바 다로 가자고 했다. 동해안 중부에 있는 강릉. 경포대와 오죽헌 같은 관광 지로는 유명하지만, 생각해보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로드쇼의 여정을 안내해줄 가이드가 필요했다. 강릉원주대학교 학생들의 사전 리서치를 바탕으로 한 답사 여행은 짧았지만 유익했다.
강릉은 수로부인과 어는 소 끄는 노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바닷 가 솔밭을 만들었다는 송림처사, 허균과 허난설헌에서부터 율곡과 신사 임당 그리고 조선 초 문인학자였던 매월당 김시습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 물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아름다운 바닷가, 그리고 그 앞 에 펼쳐져 있는 군인들의 초소, 철조망. 뭔가 묘하게 대비를 이루며 과거 와 현재, 자연과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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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이라는 시간은 강릉을 돌아보기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강릉 은 생각했던 것보다 컸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넘쳐났다. 남은 일정들 은 2015년 동남아시아에서 온 큐레이터들과 한국의 작가와 큐레이터, 그 리고 강릉대학교의 학생들이 함께 돌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애써 달래며 서울로 향했다. 이렇게 <로드쇼2015: 강릉>은 이미 시작되었다. 답사에서 만났던 학생 들,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 함께 걸었던 순간들이 로드쇼의 시작이기 때 문이다.
6. 남은 이야기 예술가를 정의하는 많은 말들 중에서는 나는 에즈라 파운드가 했다는 ‘세 상의 안테나로서의 예술가’라는 표현을 제일 좋아한다. 예술가는 모름지 기 촉각을 세워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안테나여야 하며, 그런 예술가들 과 작업을 하는 큐레이터 역시 촉각을 곧추세워야 한다. 그러나 전시가 일 이 되고, 작업이 일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안테나에는 녹이 슬고, 촉 각은 무뎌진다. <로드쇼>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다시 예민하게 작동하는 예술가들의 안테나를 기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작업으로 나 오는 성과보다는 예술가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 을 수 있는 기회를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또 다시, 또, 짐을 싼 다. 그저 그런 여행이 아니라, 알찬 우리들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리고 그리 머지않은 시간에 우리들의 이런 경험은 또 다른 작업으로, 전시로 보 여질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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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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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일지
<로드쇼: 강릉>, 그 이틀 간의 여정 허지은(강릉원주대학교 미술학과)
2014년 11월 6일(목) 강릉에서 로드쇼를 진행하기 위해 사전답사팀이 방문해왔다. 학교에서 하는 많은 행사가 있었지만, 직접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답사팀을 기다렸다. 강릉의 명소와 일정을 짜기 위해 먼저 작 은 강의실에서 마주한 답사팀은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로 느껴졌다. 아마 내 멋대로 미리 예상했을 때 쉽게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라 더 어렵게 생각한 탓이었을 것이다.
유리언니와 로드쇼 사전답사 일정을 위해 며칠 전 강릉에 대한 조사를 했 었다. 사실 학교를 강릉에서 다니면서도 강릉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았던 터라 딱히 아는 곳이라곤 경포대나, 가끔 작업하기 싫으면 놀러 가는 안목 해변이 전부였기 때문에 조사하며 우리도 덩달아 새로운 곳들을 알게 되 었다.
조사한 걸 토대로 강릉에 대한 발표가 끝난 후 답사팀과 이야기를 나누었 는데, 강릉에서 커피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나, 김시습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생각하는 걸 보고, 그동안 이곳에 익숙해진 것도 있겠 지만, 너무 매사에 무관심한 태도여서 강릉에 대한 애착도 없고, 작업을 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 힘든 도시라고 무턱대고 투정을 부린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일정은 답사팀의 작가분들과 큐레이터분들 또 미술관대표 분이 각 자 자신의 작업이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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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슬 큐레이터는 로드쇼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전 시장을 단순히 채우고 비우는 식의 비슷하고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기획 에 대한 열정이 덜해지던 찰나에 변화가 필요한 걸 느끼면서 시작하게 되 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들과 기획자들,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여행 을 하면서, 서로 소통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간단한 작업을 하기도 하 며, 여행지에서 자신들만의 소재를 찾기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작가들 중 가장 재밌고, 관심 갔던 작가는 자신이 제일 좋아서 본인을 관 찰하거나 자신이 하는 행동에서 나오는 것들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최윤 석 작가였다.
근데 사실 나는 이 작가와는 정반대로 살았다. 나를 위해 옷을 사거나, 화 장을 하거나, 심지어 책을 읽을 때도, 가끔은 작업에서까지 내가 좋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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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기보다 남들의 시선을 더 신경 써서 나를 만들어 왔다.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런 걸 알면서도 쉽게 주관이란 것, 자존감이란 것을 잊어버리는 내가 부끄러웠다. 어쩔 땐 나만 아는 가장 이 기적인 인간이 될 때도 있지만, 정작 중요할 땐 잊어버려서인지, 항상 자 신을 사랑하고 관찰한다는 작가가 부러웠다.
이 작가 뿐만 아니라 이동재 작가나 김동형 작가, 노세환 작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로, 또는 다양한 소재들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 게 우리와 먼 이야기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꽤나 특별한, 놀라운 소재를 가지고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내 눈에 괴짜(여기서 괴짜는 진짜 괴상한 사람이 아닌, ‘특별한’사람들을 의 미함)로 보인 이유는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부끄럼 없이 예술로 드러내 고 그것을 내보이며 우리와 소통하는 모습에서 그렇게 느꼈던 게 아닐까? 한때 이들의 작품처럼 나만의 이야기를 담고, 사람들과 소통하길 바라며 작가가 되길 원했던 내가, 이분들을 응원하게 됐다.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난 후 답사팀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솔직히 앞 시간에 서준호 대표가 지금까지 해왔던 활동들에 대해 이야기 해준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 식사 때 우연히 옆쪽에 앉게 되었는 데, 덕분에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진 행하는 활동들로 인해 조금씩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 믿음 을 가지고 있다는 서준호 대표의 이야기는, 좀 뜬금없는 예일지 모르지만, ‘티끌 모아 태산’ 같은 의미처럼 가깝고 많은 곳에서 접할 수 있는 말이었 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만큼 실천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의미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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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것이 예술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로 서는 더욱 의미 있는 것 일 것이다. 막상 무슨 일이든 실천하진 않으면서, 요행을 바라고 있던 현재의 나에게 가장 큰 조언이자 충고가 되었다. 또 한 가지, DYD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아, 이분들이 쓰는 무슨 용 언가보다. 무슨 뜻이지?’하고 속으로 잠시 고민했었는데, 그 고민했던 순 간이 무색해질 만큼 생각지 못한 말을 꺼내셨다. 그 뜻은 ‘들이대’. 이것 또한 쿠크다스 심장(잘 부서지는)을 가진 소심한 나에게 앞으로 살아갈 인 생에서 꼭 새겨두어야 할 팁으로 남았다.
이번에는 본 프로젝트가 아닌 답사였지만, < 로드쇼 : 강릉 >의 미리보기 였던 만큼, 짧지만 다양한 작가분들과 소통하고, 내가 모르던 현장을 조금 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프로젝트에 처 음 참여한 나로서는 미리보기 로드쇼 첫날 나름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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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7일(금) < 로드쇼 : 강릉 >의 답사 두 번째 날이다. 아침 10시에 제일 처음 답사팀을 마주했던 곳에서 다시 만나 본격적으로 강릉을 답사할 곳들을 정하고, 전우치 편집장과 김동형 작가의 활동에 대 한 이야기도 같이 듣게 되었다. 매거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리고 사실 나는 김동형 작가가 나온 ‘아트스타코리아’를 실제로 보지 않아서 작가의 작업을 모르고 있었는데, 작가가 말하는 작업방식이 나, 의미 등을 직접 듣고 작업을 보니, 내가 하는 작업에 물론 학교에서 배 우는 과정이라 그런 부분도 있지만 너무 틀에 갇힌 생각을 한다는 걸 느꼈 다. 작가의 작업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대부분 공 사장이나, 철거되기 직전의 건물을 이용해 작업을 하다 보니 지금은 남아 있는 작업이 없다고 해서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아쉽게도 어제저녁부터 비가 내렸던 탓에 강릉의 수많은 곳 중에 서 가보고 싶은 곳을 선정해 둘러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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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솔 향으로 유명한 강릉의 해송과 송정 해변이 어우러진 딴봉마을 산책로였다. 이곳은 하늘 위로 길게 뻗은 소나 무가 가득한 산책로인데, 하도 울창한 소나무들 때문에 종종 어두운 밤이 나 새벽에는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답사팀과 우리 일행은 범죄가 일어나기도 하는 으스스한? 산책로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산책로의 공기는 기분을 좋게 했다. 산책로의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우리 는 뜻밖의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넥타이를 매고 두꺼운 책을 머 리 위에 얹고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기념비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유리언니와 나는 사전답사 전 미리 이곳을 왔었는데, 그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 기념비가 이렇게 일행의 이목 을 집중시킬지는 상상도 못했다. 일행들은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며 한동 안 그 앞에서 머물렀다.
이 기념비는 송림처사라 불리는 경주최씨 봉조 공의 유적을 기념하는 것 으로, 설명을 덧붙이자면 기념비의 내용은 이렇다. 전생 현생 후생이 다하 고도 남을 정성으로 키우고 가꾼 소나무 숲의 유적이 자자손손 끊이지 않 고, 후손에게 크나큰 복 되시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고락을 함께하여 천만 대 후세에 계승하세. 어쨌든 뜬금없지만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송림처사 기념비를 뒤로 한 체 우리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2009년부터 커피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지금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커피 축제가 이루어진 강릉에서, 카페 거리로 유명한 안목해변이 우 리의 두 번째 장소였다. 이곳은 말 그대로 해변인데 그곳을 카페들이 둘러 싸고 있어 유명해진 곳이었다.
이왕 카페 거리에 왔으니, 커피를 맛보고 가야지라며 우리 일행은 거리의 한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솔직히 ‘뭐 그냥 평소에 맛보 던 커피 맛 이네’라고 다들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거리를 구경하다 가, 이번엔 안목해변의 원조 커피라고 할 수 있는 자판기 커피를 발견했 다. 다들 카페의 커피를 들고 있었지만, 그 유명하다는 자판기 커피를 하 나씩 뽑아들었다. 평소 커피를 별로 안 좋아해서 마셔보진 않았지만, 다들 카페의 커피보다 훨씬 저렴한 자판기 커피가 더 맛있다는 평이었다.
생각건대, 이곳의 커피가 맛있고, 유명하다고 하는 이유는 커피의 맛 때문 이 아니라, 아마 좋은 경치 앞에 같이 여행 온 사람과 함께일 때, 또 하필 커피와 함께여서 그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목해변을 벗어나 통일공원을 지나서, 해안도로로 유명한 헌화로로 향했다. 이곳은 절벽 끝에, 바다 위의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우 리는 차에서 내려 해안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아침엔 비가 오는 궂은 날씨 때문에 경치가 별로일 거라 생각했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파도가 평소보 다 세차고, 절벽들과 바위들이 생각보다 멋진 경치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우린 한참을 경치에 빠져 걷다가 계획한 일정을 마치게 되었다.
강릉편 로드쇼 미리보기의 두 번째 날 나에겐 익숙한 장소였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한 짧은 강릉여행은 즐겁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던 지루한 대학생활에 찾아온 특별한 경험이었다.
<로드쇼 강릉>을 위한 답사 자료
1. 강릉 선교장 2. 하슬라아트월드 3. 헌화로 4. 딴봉마을 산책로 5. 안목 해변 A. 강릉 원주대학교 B. 강릉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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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
문의처: (선교장)033-648-5303 (문화예술과)033-640-5119 소재지: 강릉시 운정길 63(운정동) 홈페이지: http://www.knsgj.net/ 이용요금: 일반: 3000원 단체(30이상): 2000원
현재 국가 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로서 300년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한국 최 고의 전통 가옥이다.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사대부의 저택으로 안채, 사랑채(열화당), 별당(동별당, 서별당), 정각(활래정), 행랑채등 민가로서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조선후기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효령대군(세 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 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 다. 한국의 유형 문화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강릉문화를 대표하며 경포 호수 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전통문화 시범도시인 강릉시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 부각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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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아트월드
문의처: 033-644-9411~5 소재지: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33-1 홈페이지: http://www.haslla.kr/ 이용요금: 공원입장권 일반: 6000원, 단체(30이상): 5000원 미술관입장권 일반: 7000원, 단체(30이상): 6000원 공원+미술관 입장권 일반 10000원, 단체(30이상): 9000원
하슬라아트월드는 국내외 작가들과 함께 하는 예술 작업 및 공연 전시 축제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특별한 경험과 행복을 주는 공간이며, 각각 다른 예술품이 전시 되어 있는 뮤지엄 호텔, 3만3천평의 조각공원, 바다카페, 한국 현대미술 200여 점 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과 피노키오 미술관 등, 다양한 예술작품과 수 백개의 유 리로 구성된 웨딩홀이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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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로
문의처: (종합관광안내소) 033-640-4414 (강동면사무소) 033-660-3598 소재지: 금진항에서 심곡항까지 해안도로
정동진 7번 국도를 따라 두런두런 바다와 마주하고 달리다 보면 작은 어촌마을 심 곡이 산의 계곡 사이에 묻혀 드러난다. 동해안의 절경과 바다의 푸름이 한눈에 들 어오며 길과 사람과 파도가 함께 어울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고, 정동-심곡-헌화 로-금진항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절경 중 절경이다. 헌화로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부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노인이 수로 부인에게 꽃을 바쳤다는 헌화가의 장소로 유명한 곳으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안도로의 이름을 따서 헌화로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자전거나 걸어서 감상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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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봉마을 산책로
문의처: (종합관광안내소) 033-640-4414 소재지: 송정해변 근처 소나무 산책로 (송림 산책로, 딴봉 마을 산책로)
송정해변에는 재미난 이름을 가진 산책로가 있다. 딴봉마을 산책로는 솔향 강릉의 대표적인 송림 산책로이다. 솔향기와 해풍이 잘 어우러진 청정해역으로 전패의 삼림욕을 즐길 수 있으며, 해수 욕도 즐길 수 있는 사계절 체험공간으로 해파랑길과 바우길이 중복된 가장 아름다 운 길이다. 딴봉마을이란 예로부터 강문가는 곳으로 외따로 떨어져 있는 봉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해송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는 인간에게 해 를 기치는 병원균,해충, 곰팡이에 저항하기 위해 해송 스스로 발산하는 방향성 물 질로 이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향상되며 아울러 정신적 인 우울증, 불안감 등을 치유하는 데 상당한 개선 효과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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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해변
문의처: (종합관광안내소) 033-640-4414 소재지: 강릉시 견소동 286
백사장 길이가 500m로 가족 단위 피서에 적합한 곳이다. 앞바다는 동해의 다른 바다보다 바위가 많고 바다 속 풍경이 아름다워 스킨스쿠버 동호회 등 많은 사람들 이 바다 속 비경을 보려고 몰려든다. 해수욕장 바로 옆에는 안목 항이 있고 해안가를 따라 다양한 커피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커피거리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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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Road show : 江陵 Road map vol1.
강릉
강릉의 명소 강릉 명칭의 역사 강릉의 인물
강릉 오죽헌
문의처: 오죽헌 / 박물관 033-640-4457 소재지: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홈페이지: https://ojukheon.gangneung.go.kr 관람시간: 08:00~17:30 관람료: 어른 3,000원 해설예약: 033-640-5420 해설시간: 오전 10시, 오후 2시, 3시, 4시
1963년에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오죽헌은 1536년(중종31년) 율곡 이이선생이 탄생한 곳으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 사랑채로 우리나라 주거 건축 중 가장 오 래된 것 중 하나이다. 대학자 율곡 선생은 오천원권 화폐의 주인공이다.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각지붕의 건축물이다. 조선 중종때 건축했 으며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별당 사랑채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처음 오죽헌이 지어 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 년 전이다. 오죽헌을 정면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오른쪽 한 칸은 온돌 방으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 방이 바로 율곡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며, 문성사 는 율곡 이이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며, 어제각에는 율곡 이이선생이 어릴 때 사용하던 벼루가 보관되어 있다. 그 외에도 오죽헌 내의 솔향 명품샵 복도를 따라 향토 민속관으로 이동하여 우리 고유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강릉시립박물관 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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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김시습기념관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288-1 문의처: 대표전화033-2263-9656 홈페이지: http://www.maewd.com/ 입장시간: 09:00~17:00 관람시간: 09:30~18:00 관람료: 무료 정기휴관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개관)
매월당기념관은 매월당 김시습의 문학사상을 통한 정의정신을 계승한 수많은 의병 순절 독립운동 7천만 겨레의 절의의 전당이다. 이곳은 ‘자료의 수집∙보존∙관리 및 전시, 기념관 자료의 전시와 관련된 대국민 교육 실시∙자료 홍보와 각종 간행물의 제작 및 배포’를 통하여 과거 선현들의 절의 정신을 계승하고 왜곡되어 있는 민족 정기를 회복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또한 선현들의 불굴의 절의를 매월당의 문학세 계를 통하여 거듭 나도록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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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대도호부
문의처: (문화예술과) 033-640-5119 소재지: 강릉시 임영로 131번길 6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건 물이 소실되고 임영관 삼문만 남아 있다가 1994.7.11에 ‘강릉 임영관지’로 첫 지정된 후 2011.7.28 복원 사업을 완료하여 ‘강릉 임영관’으로 새단장 하였고, 2014.11.27 ‘강릉 대도호부 관아’로 재탄생 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 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 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 려 있었다. 국보 제51호인 삼문(객사인 임영관의 정문)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손에 꼽히는 목조 건축물이다. 자세히 보면 기둥의 3/1 지점이 위, 아래 부분에 비 해 약간 굵은데 이것이 바로 베흘림 기둥이다. 이러한 특징은 건축물이 전체적으로 안정되게 보이도록 하며, 이 건축물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강릉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국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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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칠사당
문의처: (문화예술과) 033-640-5119 소재지: 강릉시 경강로 2045 (명주동)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관공서 건물로 일곱 가 지 정무(호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 단속)에 관한 일을 베풀었다는 데 서 이름 ‘칠사당’이 유래한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632년(인조10)년과 1726년(영조 2)에 크게 중수 하 였다. 1866년(고종 3)에 진위 병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에 화재로 소실되어 강 릉부사 조명하가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수비대가 있었고 뒤에 강릉 군수의 관사로 쓰이다가 6.25전쟁 때 민사원조 단에서 임시로 사용하였다. 1958 년까지 강릉시장 관사로 기능하다가, 1980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4월 5일 강릉단오제를 시작하는 행사인 신주빚기가 이루 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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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경포대
문의처: (문화예술과) 033-640-5119 소재지: 강릉시 경포로 365 (저동)
강릉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고려말 충숙왕 13년인 1326년 지중추부사 박숙 에 의해 창건된 누정건물로 안축의 「鏡浦臺新亭記」記文에 “옛날 영랑선인이 놀던 곳이며 정자가 없어 비비람이 치는 날 놀러왔던 사람들이 곤욕스럽게 여겨 작은 정 자를 지었다”라고 하여 창건목적을 밝히고 있어 역사성이 높은 곳이다. 정철(1536-1593)의 관동별곡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했으며, 경포대 에 저녁이 되어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님의 눈동자 등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이다. 창건 당시 이전시대의 주춧돌과 장대석이 발견되어 훨씬 이전시대부터 이곳에 정 자형태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강릉지역 누정 기록으로 신라 성 덕왕대 순정공과 관련이 있는 임해정과 술랑선도와 관련이 있는 한송정을 통하여 현존하는 경포대와 더불어 강릉 지역의 누정문화의 시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 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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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수
문의처: (종합관광안내소) 033-640-4414
경포해수욕장
소재지: 강릉시 안현동 산1, 강문동 산1
경포 호수 : 시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약 6km지점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유천 등 의 작은 하천들이 흘러 든다. 본래 주위가 12km에 달하는 큰 호수였다고 하나, 현 재는 토사의 퇴적으로 주위가 4km로 축소되고, 수심도 1~2m 정도로 얕아졌다. 경포호를 둘러싸는 순환 산책로가 있으며 생태 습지공원과 연결되어있다.
경포 해수욕장 : 해안 최대 해변으로 유명하며 시내에서 북으로 6km, 경포대에서 1km되는 곳에 동해의 창파를 가득 담고 펼쳐진 명사오리(明沙五里) 이다. 모두들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밀려오는 파도, 이를 쓸어 안는 길이1.8km, 면적1.44㎢의 하얀 모래밭과 외부와의 세계를 차단하는 듯 둘러 쳐진 송림병풍 4km는 정(靜)과 동(動)의 조화로 경포해변 특유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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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대도호부
문의처: (문화예술과) 033-640-5119 소재지: 강릉시 임영로 131번길 6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어 있는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건 물이 소실되고 임영관 삼문만 남아 있다가 1994.7.11에 ‘강릉 임영관지’로 첫 지정된 후 2011.7.28 복원 사업을 완료하여 ‘강릉 임영관’으로 새단장 하였고, 2014.11.27 ‘강릉 대도호부 관아’로 재탄생 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 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 까지 남아있는 몇 안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 려 있었다. 국보 제51호인 삼문(객사인 임영관의 정문)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손에 꼽히는 목조 건축물이다. 자세히 보면 기둥의 3/1 지점이 위, 아래 부분에 비 해 약간 굵은데 이것이 바로 베흘림 기둥이다. 이러한 특징은 건축물이 전체적으로 안정되게 보이도록 하며, 이 건축물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강릉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국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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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칠사당
문의처: (문화예술과) 033-640-5119 소재지: 강릉시 경강로 2045 (명주동)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관공서 건물로 일곱 가 지 정무(호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 단속)에 관한 일을 베풀었다는 데 서 이름 ‘칠사당’이 유래한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632년(인조10)년과 1726년(영조 2)에 크게 중수 하 였다. 1866년(고종 3)에 진위 병의 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에 화재로 소실되어 강 릉부사 조명하가 중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수비대가 있었고 뒤에 강릉 군수의 관사로 쓰이다가 6.25전쟁 때 민사원조 단에서 임시로 사용하였다. 1958 년까지 강릉시장 관사로 기능하다가, 1980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4월 5일 강릉단오제를 시작하는 행사인 신주빚기가 이루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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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모래시계 공원
문의처: (정동진 관광안내소) 033-640-4536 소재지: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정동진은 서울 광화문에서 정(正)동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세계에서 바다 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지로 유명해진 정동진 역이 있다. 세계 최대의 모래시계로 상부의 모래는 미래의 시간, 흐르는 모래는 현재의 시간 을, 황금빛 원형의 모습은 정동의 떠오르는 태양을, 평행선의 기차 레일은 시간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모래시계 공원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정동진 시간 박물관
위치: 강릉시 강동면 헌화로 990-1 전화: 033-645-4540 운행시간: 09:00~18:00 입장료: 성인 6.000원
2013년 증기기관차와 객차 7량을 활용해 정동진 해변에 개관한 박물관. 시계의 오 차 극복을 위한 인류의 노력을 볼 수 있는 과학관과 화려하고 섬세한 시계를 감상 할 수 있는 중세관,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현대관 등 시계, 그리고 시간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한눈에 훑을 수 있다. 4.6m에 이르는 세 계 최대 자전거 시계와 모든 부품을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제랄드 존슨의 그랜드우 드기어(Grand Wood Gear Clock) 클락 앞에선 절로 감탄이 나온다. 박물관의 보 물이라면 단연 타이태닉호의 침몰 시각을 알려준 회중시계. 엄마가 딸에게 행운을 기원하는 문구를 새겨 침몰 4일 전에 선물로 준 것으로 다행이 그 딸은 구출되었고 시계는 바다에 빠져 멈추어버렸다고. 박물관 앞에는 정확하게 시간을 가리키는 거 대한 해시계와 8t의 모래로 만들어진 모래시계도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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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허난설헌
문의처: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033-640-4798
생가터와 기념관
(문화예술과) 033-640-5580 소재지: 강릉시 난설헌로 193번길 1-29 (초당동) 기념관 이용시간: 09:00~18:00
경포호를 지나 해변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북쪽으로 약 10여분 가량 가면, 멀리 서 쪽에서 굽이쳐오던 오대산 줄기가 바다 끝에서 잦아지며 만들어놓은 조그만 야산 이 보인다. 여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의 생가 터가 있다. 허균은 1569년 애일당에서 태어난 뒤 강릉 시내 경포호수 옆에 있는 친 가 초당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과 그의 누이이 자 조선시대 유명 여류시인인 허난설헌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허균•허난설헌 기 념관’은 강릉시 초당동 4223m² 터에 지상 1층 연면적 186m² 규모의 목조한옥형 태로 한옥의 장점을 잘 살려 허난설헌 유적공원 근처에 세워졌다. 기념관의 건립으 로 강릉이 배출한 개혁 사상가 허균과 여류 천재시인 허난설헌의 얼을 선양하는 두 남매의 사상과 문학세계를 연구,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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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
문의처: (문화예술과) 033-640-5119 소재지: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11
예로부터 강릉 소금강 또는 명주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빼어나 1970년 명 승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소금강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학자 율곡 이이의 <<청학 산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대산 동쪽 기슭에 있다. 현재는 오대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국립공원 전체 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소나무, 주목, 굴참나무를 비롯한 129종의 식물과 사향노루, 반달곰, 딱따구리, 산 양, 등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생태 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곳이다. 등산로는 관리사무소→청학산장→구룡폭포→만물상→노인봉→진고개에 이르는 약 15km(6시간 소요) / 관리사무소→청학산장→구룡폭포→만물상→관리소에 이 르는 약 6km(4시간 소요) 코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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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박물관 ‘커피커퍼'
위치: 강릉시 왕산면 왕산로 2171-19 전화: 070-8888-0077 개관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7시 (오후 6시 입장종료) 입장료: 성인 5.000원
커피박물관은 5개의 전시관과 2개의 특별관, 1개의 체험관, 교육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커피’가 낯선 이방인의 방문 같이 그저 단발성으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닌 우 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아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문화’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2001년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커피커퍼’는 커피의 도시 강릉에 커 피 박물관 & 농장, 그리고 여섯 개의 직영 커피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 ‘커피커퍼’ 커피 박물관은 전 세계의 다양하고 진귀한 커피유물을 전시하여 세계 각국의 독특한 커피의 역사와 문화를 전한다. 단순히 마시는 음료의 범주를 넘어 우리 생활 속 기호식품으로 자리한 커피를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고, 체험하는 공간입니다. 커피유물 전시와 커피나무 재배에서부터 한 잔의 커피가 탄생하기까 지의 모든 과정을 직접 체험하는 곳이다.
보헤미안
위치: 강원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 181 [새주소] 강원 강릉 시 연곡면 홍질목길 55-11 전화번호: (033) 662-5365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씨가 운영하는 핸드드립 카페로 1988년 개업한 곳으로 직 접 로스팅을 한 핸드드립 커피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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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소리 축음기•에디슨
위치: 강원도 강릉시 저동 35-1, 36번지
박물관
전화: 033-655-1130~2 입장료: 개인 일반 7.000원, 단체(30인 이상) 6.000원
참 소리축음기•에디슨 과학 박물관은, 설립자 손성목관장이, 소년시절 선친으로부터 받은 콜롬비아 축음기 G241호(본 박물관 소장품1호)가 인연이 되고, 그 축음기로부 터 흘러나오는 참 소리에 매료되어, 한평생을 축음기 수집가로서 교통사고, 강도, 피 습 등 십여 차례 거친 목숨을 건 위험 부담 속에 세계 60여 개국을 돌며 수집한 명품 축음기 및 뮤직박스, 라디오, TV그리고 발명왕 에디슨의 발명품 등 5.000여 점이 전 시되는 소리와 과학이 만나는 소장품 규모 면에서 세계 최대의 박물관이다.
강릉향교
위치: 강릉시 교동 233 전화: 033-648-3667
명륜고등학교 옆에 위치한 강릉향교.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립 된 국립 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제사 공간 을 대표하는 중심 건물인 대성전은 지방 향교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특히 우리나라 성현인 설총과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 등은 물론 공자, 맹자, 안자 등의 중국 성현도 봉안하고 있는데 총 136위를 배향해 수적으로도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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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 생태습지공원
위치: 강릉시 초당 동 허균, 허난설헌 생가 근처
허균*허난설헌 생가 앞의 소나무 숲을 지나면 경포생태습지공원에 닿는다. 12㎞에 이르는 경포 호는 현재 4㎞정도로 줄어들었는데 바닷물과 담수가 섞여 다양한 철 새와 야생 동식물이 서식한다. 작년, 습지를 복원하면서 50여 년 만에 발아한 가시 연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밤송이처럼 뾰족하게 피어나는 보랏빛 연꽃은 한여름 개 화 시기를 잘 맞춰야 볼 수 있는 희귀한 식물이다.
솔향수목원
위치: 강릉시 구정면 구정중앙로 92-177 전화: 033-660-2322 운영시간: 3~10월 09:00~18:00, 11~2월 09:00~17:00 관람료: 무료
유독 소나무가 많은 강릉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말이 바로 ‘솔향’이다. 2013년에 개원한 솔향 수목원은 국내 최초 소나무를 주제로 한 수목원 이다. 쭉쭉 뻗은 금 강송과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 년을 간다는 주목, 피톤치드가 풍부한 서양측백 등 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산책로를 걷다 보면 몸도 마음도 절로 개운해진다. 입구 에서 40분 정도 걸으면 만날 수 있는 하늘정원은 강릉 시내와 동해를 훤히 내려 다 볼 수 있는 뷰포인트. 비비추원과 원추리원, 약용식물원, 염료식물원 등 다양 한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수목원은 1시간 정도 산책하기 좋은 나무 길도 잘 조 성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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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정
위치: 강릉시 운정길 125 전화: 033-640-4414 운영시간: 09:00~18:00
보물 183호로 조선 상류층 주택의 별당. 중종 25년(1530)에 어촌 심언광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앞면 3칸에 옆면 2칸으로 소박한 규모 의 팔작집인 해운정은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지어져 주변 건물보다 약간 높은 위 치에 있다. 특히 여름에는 대청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 수 있어 바람이 잘 통한 다. 해운정 형판은 조선 후기 문신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고, 율곡 이이와 권진응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이 쓴 시문도 보관되어 있다. 건물 바로 앞에 소담스레 핀 연꽃 이 운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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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공원
위치: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문의처 (통일안보전시관) 033-640-4469 (함정전시관) 033-640-4470 입장료: 성인일반 6.000원 입장시간: 하절기(3월 ~ 10월말) : 오전 9시 ~ 오후 5시 30분 / 동절기(11월 ~ 익년2월말) : 오전9시 ~ 오후 4시 30분 관람시간: 하절기(3월~10월말) : 오후6시까지 / 동절기(11월~익년2월말) : 오후5시까지
1996년 9월, 상어급 잠수함에 25명의 북한간첩을 태우고 동해안에 침투해, 온 국 민에게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안겨준 사건을 계기로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과 안보 의식을 고취 시키고자 조성된 안보공원 이다. 현재, 그때의 북한 잠수함이 전시 중 이며, 그것과 함께2001년 통일공원을 조성 할 때 해군으로부터 무상대여 받은 해 군의 배가 전시되어 대국민 안보체험을 목적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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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위치 : 강원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 544
문화재 자료 제37호, 650년(신라 진덕여왕 4)에 자장율사가 건립했으며, 정면 3칸 측면3칸의 팔작 지붕건물이다. 보현사의 창건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신라시대에 불교 4보살 가운데 한 분인 보현보살이 직접 창건하였다는 설 이며, 신라 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돌로 된 배를 타고 천축 국으로부터 강릉의 동남쪽에 위치한 남항진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문수사가 지금의 한송사지로 알려진 곳이다. 절이 완공되자 보현보살은 말하였다.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새 절터 로 삼아 떠나겠다." 보현보살이 신력으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멀리 날아 현재 의 보현사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으니 이것이 보현사라는 것 이다. 이에 비해 낭원대사의 창건설은 한 고승의 생애가 뒷받침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이 설을 따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창 경내의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 제192호)를 참 고하여 대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절의 창건자는 대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낭원대사는 보현사를 크게 중창하고 참선도량을 이룩하여 이 절을 사굴산문의 대 표적인 선찰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낭원대사의 중창이후 이 절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대관령을 분기점으로 하여 내문수도량 월정사와 함께 외보 현도량의 명성을 이어 수행승의 요람으로 이어 왔다. 비록 자세한 사찰 연혁은 전 하지 않고 있으나 입구에 있는 20여기의 부도가 절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산중사찰의 정적과 자연의 아름다움, 신앙과 수행의 주건을 갖춘 사찰로서 현재 보 현사에는 대웅보전(문화재자료 제37호)을 비롯하여 영산전, 삼성각, 만월당, 범종 각이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제191호 낭원대사오진탑과 보물 제192호 낭 원대사오진탑비가 있다. 이 외에 20여기의 부도와 대웅전앞에 사자모형의 석물과 석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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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락가사
위치: 강릉시 구정면 금평로 314-246 문의처: (종합관광안내소) 033-640-4414 (구정면사무소) 033-640-4603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고 우리나라 정 동쪽에 위치하여 있다. 서생 들이 공부하며 이곳에서 기도하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유래가 있는 곳이다.
오대산 국립공원
위치: 강릉시 연곡면 소금강길 500 문의처: (오대산국립공원 소금강분소) 033-661-4161 (종합관광안내소) 033-640-4414
오대산은 백두대간 중심축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간을 중심으로 오대산지구와 소금 강지구, 계방산지구로 나뉘는데 그 성격이 서로 다르다. 비로봉 정상에서 볼 때 동 대 너머의 청학산 쪽 소금강 지구는 바위산으로 금강산에 견줄 만한 절경이며, 비 로봉에서 평창 쪽으로 내려가는 오대산지구와 계방산지구는 부드러운 흙 산으로서 산수가 아름답고 문화유적이 많다. 이들 산봉우리 대부분이 평평하고, 봉우리 사이 를 잇는 능선 또한 경사가 완만하고 평탄한 편이다. 이렇듯 오대산은 설악산이 날 카로운 기암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장쾌하면서도 듬직한 토산(土山)이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삼신산(금강산, 지리산, 한라산)과 더불어 국내 제일의 명산으 로 꼽던 성산으로써, 일찍이 신라 선덕여왕 때의 자장율사 이래로 1,360여 년 동안 문수보살이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늘 설법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 오대 (동대,서대,남대,북대,중대)에는 각각 1만의 보살이 상주하고 있어 문수신앙의 본 산으로, 오만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의 오대성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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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공원
위치: 강릉시 노암동 일원 문의처: (녹지공원사업단) 033-640-5906
강릉 도심에 위치한 남산은 노암동 남대천 냇가에 솟은 봉으로 조선시대 강릉부 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칠사당)에서 보면 남쪽에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남산 입구에서 190여 계단을 오르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오성정이 있는데 이는 1927년에 정묘생(丁卯生, 1867년생)의 동갑계원들이 회갑기념으로 세운 건물이 다. 또한 이곳은 구한말 국운이 기울었을 때 의병이 집결하여 왜병과 싸운 곳이며, 한국전쟁 시 순국한 한국청년단원 222인을 추모하는 한청순국동지위령탑이 위치 하고 있다. 남산공원은 기존 수림대를 존치하고 농작물 경작지 등을 공원으로 재단 장 하였으며, 계절별 개화하는 다양한 수목이 식재되어 사계절 볼거리가 있고, 남 산 중턱에 남대천과 단오공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현지 지형을 이용하여 조 성된 소공연장,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잔디광장이 있어 녹음 속에서 산책과 운동을 즐기고 야외 공연장에서 다양한 문화행사가 가능한 강릉시민에게 사랑 받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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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양떼목장
위치: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3리 14-104 양떼목장 전 화: 033-336-1966 관람시간: 오전 09:00 ~ 오후 05:00 관 람 료: 대인기준 4.000원
이곳 대관령양떼목장은 대관령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백산맥의 웅장한 자태 와 목장 산책로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특히 봄, 여 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바뀔 때 마다 와 닿는 그 느낌은 마치 유럽의 알프스로 착각할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 건초 먹이주기 체험을 통해서 순한 양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약 40분간 시원하게 탁 트인 환상적인 산책로를 걷다 보면 어느덧 일상의 잡다한 상념들은 저 멀리 사라지고, 내 자신은 이미 대자연의 품속에 동화되어 진정한 호연지기(浩然之 氣)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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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반데기 마을
위 치: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고루포기산 자락
일명 ‘안반덕’ 또는 ‘안반데기’라 불리는 마을로서 마치 ‘떡메로 떡살을 칠 때 밑에 받치는 안반처럼 평평하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안반데기는 선자령 과 대관령을 거쳐 고루포기산, 닭목령, 삽당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고원지대 에 위치한 마을이며, 마을은 고루포기(1238m)중턱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평창군 수하리와 동쪽으로는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에 걸쳐져 있다. 안반데기 마을은 작년에 이어 올 해에도 이곳에서 배추밭을 배경으로 한 전국사 진 대회를 개최 하였다. 이곳은 미국 CNN이 2013년 8월 12일에 발표한 <외국 사진작가들을 매료시키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40선>에 선정되기도 한 곳이다. 안반데기 에서는 화전민 사료전시관, 귀틀집을 복원한 운유촌, 멍에전망대 등을 통 해 화전민들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다. 화전민 사료전시관은 마을회관을 리모델 링해 만들었으며 커피와 간단한 먹을 거리를 판매하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있다. 무성한 잡초와 자갈로 뒤덮인 척박한 땅을 곡괭이 하나로 일구어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한 과정과 1970~80년대 화전민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물론, 구름도 쉬어간다는 말이 나온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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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명칭의 역사 고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 하서라라 불림 639년(신라 선덕여왕 8), 하슬라라 불림, 하슬라주에 북소경을 설치. 757년(신라 경덕왕 16), 명주로 개칭
고려 983년(성종 2), 하서부가 됨. 1260년(원종 1), 경흥도호부로 승격. 1263년(원종 4), 강릉도가 됨. 1308년(충렬왕 34) 강릉부로 개칭.
조선 1675년(숙종 1), 강릉도호부가 됨. 1782년(정조 6), 강릉현으로 강등되었다가, 곧 강릉도호부로 환원.
근대 1896년, 강릉군이 됨. 1931년, 강릉읍으로 승격되고, 1955년 강릉시로 승격됨.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강릉시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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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인물 김시습, 꿈속에서 살다 죽은 늙은이
방랑의 삶을 살다가 1493년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로 생을 마감한 김시습은 임종 직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我生(아생)」이란 시를 읊는다.
我生旣爲人(아생기위인) 나 이미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胡不盡人道(호불진인도) 어찌 사람 도리를 다하지 않으리. 少歲事名利(소세사명리) 어려서는 명예와 이익을 일삼았고 壯年行顚倒(장년행전도) 젊어서는 뒤집어진 세상을 걸었네. 靜思縱大 恧 (정사종대뉵) 가만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우니 不能悟於早(불능오어조) 일찍부터 깨닫지 못한 탓이라네. 後悔難可追(후회난가추) 후회해도 돌이키기 어려운 법 寤 擗 甚如 擣 (오벽심여도) 깨닫고 보니 가슴만 방망이질하네. 況未盡忠孝(황미진충효) 더구나 충효도 다하지 못했으니 此外何求討(차외하구토) 이 밖에 또 무엇을 찾아 헤매리.
김시습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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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爲一罪人(생위일죄인) 살아서는 죄지은 몸뚱이일 뿐이오 死作窮鬼了(사작궁귀료) 죽어서는 굶주린 귀신이 되리. 更復騰虛名(갱부등허명) 또다시 헛된 이름을 들추니 反顧增憂悶(반고증우민) 돌아보면 근심과 고민만 들어나네. 百歲標余壙(백세표여광) 백 년 뒤 내 무덤 비석을 세우려거든 當書夢死老(당서몽사로 ) 꿈속에서 살다 죽은 늙은이라 적어 주오. 庶幾得我心(서기득아심) 행여나 이내 마음 알아줄까 千載知懷抱(천재지회포) 천년 뒤엔 이내 속을 알아주리.
그러나 ‘꿈속에서 살다 죽은 늙은이’라 새겨달라던 그의 바람과 달리 무량 사에 세워진 그의 부도탑에는 ‘다섯살 신동’을 뜻하는 ‘오세김시습지묘’라 적혀있다. 역사는 그를 다섯살 신동으로 기억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섯살 신동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종 17년인 1435년 서울 반궁리(半宮里, 현재 명륜동 성균관)에서 태어났다. 신라 왕족의 후손이었던 그는 태어 난 지 여덟 달에 이미 글자를 깨우쳤으며, 겨우 서너살 때 지은 한시가 사 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어린 시습은 유모의 맷돌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중, 윗돌과 아랫돌 사이로 곱게 갈려져 떨어지는 보리 가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하처동) 비도 오지 않는데 어느 곳에서 우레 소리 울리나.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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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시적 재능은 세종 임금에게까지 전해졌고 세종은 아이를 불러 시 험을 치르게 했다.
소년의 학문은 흰 두루미가 푸른 소나무 가지 끝에서 춤추는 듯하구나.
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동자지학 백학무청송지말)
그러자 김시습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화답하였다.
임금님의 덕망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서 꿈틀거리는 듯합니다.
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성주지덕 황용번벽해지중)
세종은 이에 감탄하여 아이에게 비단 50필을 하사하였고 “장차 너를 크게 중용하겠다”고 일렀다. 그 때 김시습의 나이가 다섯이었고 이 때문에 그 의 별명은 오세 신동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보다 ‘김오세’라 칭하 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들어 간 내설악의 암자 오세암의 이름도 여기서 연유한다.) 충신의 꿈을 품은 소년 김시습은 열심히 유교 경전을 익혔다. 『논어』의 학이(學而)편에 나오 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 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이라 하는 이름 ‘시습(時習)’처럼 그는 어린 나 이부터 배우고 익힘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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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꿈 그러나 그의 충신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세종이 죽고 이어 즉위한 문종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자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 다. 왕권 장악의 야욕을 키워오던 수양대군의 일파는 1455년 단종을 왕 위에서 쫓아내고 세조를 그 자리에 앉혀 정권을 손에 쥐었다. 이 시기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 중이던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 을 듣고 사흘 동안 목놓아 울었다. 그리고는 공부 중이던 책을 모조리 불 태우고, 울분을 삭힐 수 없어 스스로 뒷간 똥통에 몸을 빠뜨렸다. 그리고 그 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조선 팔도를 떠돌게 되었다. 당시 세조의 왕위찬탈은 유교의 명분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건으로 명분 없는 정 권에 대한 반대는 당대의 사회 체제와 철학을 뒤집는 것이었다. 오세 신동 김시습은 부정한 현실 정치에 분개하여 벼슬길을 버린 채 방랑의 삶을 택 한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그는 자연 속에서 방랑하며 김시습 의 환상세계를 만들어낸다.
기묘한 이야기 『금오신화』 서른 한 살이 되던 해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 내려가 일생을 마치기로 결 심한다. 『금오신화』는 이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최초의 한문소설로 전해 진다. 특히 『금오신화』는 ‘전기(傳奇)’라는 글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기’란 기묘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에서 시작된 소설 의 흐름을 의미한다. 김시습은 명나라 구우의 전기소설 『전등신화(剪燈新 話)』를 읽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세상을 가르치는 일과 맞닿아 있다면 괴상한 이야기라고 괜찮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허무맹랑한 일이라도 즐거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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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적이고 몽유적인 이야기 『금오신화』는 꿈속세계, 저승세계, 천상세 계, 용궁세계 등을 다루고 있다. 김시습은 자신이 만든 환상 세계에서 자 신의 욕망과 이상을 실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그는 이 허무맹 랑하고 기묘한 이야기가 현실 속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서른 일곱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김시습은 마흔 일곱에 아내를 맞이하고 아들을 낳아 평범한 삶을 이어가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는 비극을 경험한다. 마흔 아홉의 나이에 그는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또 다시 방랑의 길에 나선다. 그 후 10년 동안 강릉, 양양 설악 등을 돌아다니다 쉰아홉의 해에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목놓아 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갑자기 고함을 지르거나 이유 없이 실실거려 광인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아야 했다. 보고도 보지 못한 듯, 듣 고도 아니 들은 듯 초야에 묻혀살기를 자처했지만 그가 용납할 수 없었던 불합리한 현실의 울분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소해야했던 것은 아니었을 까. 오세 신동으로 태어나 꿈 속에서 살다간 늙은이로 생을 마감한 김시 습. 어쩌면 그는 육신은 늙었지만 생을 마감하는 시점까지 오세 신동의 마 음으로 살다간 것을 아니었을까. 그가 머물렀던 거처를 따라 그가 남긴 문 장을 읽으며 꿈 속을 거니는 오세 신동 김시습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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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세계최초 화폐모자
화폐의 등장인물로서는 아들이 어머니보다 앞섰다. 율곡 이이의 초상이 그려진 5천원권은 1972년 발행되었다. 당시 5천원권 발행 목적은 경제성 장에 따른 거래 불편 해소였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후 어머니 신사임 당은 5만원권 화폐의 인물로 등장한다. 5만원권의 발행 목적 역시 경제성 장에 따른 거래 불편 해소였다. 단, 아들보다 어머니의 화폐가치가 장당 10배 더 비싸다.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 두 모자가 태어난 곳이 바로 강릉 죽헌동이다. 강릉지역은 신사임당의 외가쪽 생활터전이였는데 당시는 여성의 거주지 중심으로 가족문화가 형성되었던 때였기에 모자의 출생지가 같은 것이 특수한 경우는 아니었다.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글 과 그림에 뛰어나 스승 없이 그림을 터득했고, 세종 때 이름난 화가인 안 견의 그림을 모방해 그리는데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열아홉에 이원수와 혼인하여 평창과 강릉을 오가면서 살던 중, 서른 셋의 나이에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신사임당은 율곡을 낳기 전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 아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런 이유로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 龍室)이라하여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실력 있는 여류화가였던 사임당이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자리잡게 된 것 은 사임당의 사후 백년이 지난 17세기 중엽의 일이다. 율곡이 유학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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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의 대상이 되자 사임당은 위대한 인물을 낳아 기른 모성의 상징으로 칭송 받게 된다.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성리 학자이다. 퇴계 이황이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 은 그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율곡 이이와 김시습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잘 자란 율곡 이이에게 있어 첫 번째 방황과 고민의 시기는 어머니의 죽음 후 생사의 문제에 직면했던 19세 때였다. 그는 그 해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는데,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았 던 조선의 역사에서 입산 경력을 가진 사대부는 김시습과 율곡 이이 두 사 람뿐이다.
‘공자가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거니와, 어질 고 지혜로운 사람의 기를 기르는 방법은 산과 물을 버리고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이 시기 그가 남긴 글에서 속세의 번뇌를 벗어나기 위해 자연 속 방랑의 삶을 택했던 김시습과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율곡은 훗날 지 은 『김시습전』에서 그의 영특함과 재주를 높이 사며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어 그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고 쓰면서 불운했던 김시습의 삶을 애석해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김시습과 율곡의 차이였을까. 현실적이었던 율곡은 입산한지 1년만에 서울로 돌아 와 유학에 전념하였고, 모두 9번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 (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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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허엽과 교산 허균
경포대를 지나 사천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얕으막한 언덕 교산. 산의 형상이 꾸불꾸불하여 마치 용이 되지 못해 날지 못한 이무기(교,蛟)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이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1569-1618)의 생가이다. 허균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지역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지었다. 교산 허균. 흥미롭게도 그의 생애는 용의 꿈을 꾸던 이무기의 모습과 닮아있다.
아버지 초당 허엽 허균의 집안은 당대 유명한 명가였다. 아버지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으로 오늘날까지도 강릉의 대표음식으로 유명한 초당 순두부의 기원이기도 하 다. 문장력이 뛰어난 그의 집안은 아버진 허엽을 필두로 하여 그의 아들 허성, 허봉, 허균, 그리고 난설헌 허초희까지 허씨 5문장가로 명성을 날렸 다.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에게서 배우고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친 중신이었다.
그가 삼척부사로 부임한 후 본가인 강릉에 자주 들렀는데 어느 날 하인을 불러 이르되, “동해안에서 귀한 천일염을 어렵게 구하려 하지 말고 가까 이 있는 앞바다 물을 길어다 간수로 써보라” 하였다. 허엽의 지시대로 만 든 두부의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허엽은 이 두부의 맛을 널리 맛보게 하 려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도록 권유했다. 이때부터 “초당 순두부”가 탄생 하였으며 마을의 이름도 초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초당 허엽은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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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분으로 영리 행위를 하여 재물을 탐했다는 이유로 삼척부사 자리에 서 파면당한다. ‘짚으로 지은 집’이란 뜻의 초당(草堂)을 호로 삼고 소박하 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던 그에게 이 같은 파면 사유는 반대파의 모략의 결 과라 예상해 볼 수 있겠다.
아들 교산 허균 허균은 무엇이든지 한번 들으면 기억했고 수백 줄의 당나라 시를 며칠 만 에 줄줄 외웠다. 이를 본 사람들은 허균을 귀신이 들렸다 하여 도깨비의 화신이라 불렀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 허엽을 잃은 허균은 스승 이 달을 만난다. 이달은 당나라 시의 대가로 손꼽혔지만 천한 출신 성분으로 인해 출세하지 못하였다. 허균은 스승 이달을 만나면서 그의 사상과 학문 의 방향을 다잡게 된다. 재능만으로는 뜻을 펼칠 수 없는 불합리한 현실을 목격하고 이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오르기가 무섭게 파직되는 처사를 여러 번 겪었다. 그 는 호방하고 자유로운 성격으로 여려 명의 승려들과 교류하였고 출신 성 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어 서자들과 기생과도 친했다. 이러한 행실 은 조정의 언관들에게 매일 같이 보고 되었고 허균을 파직하라는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내 성품이 더럽고 거칠어서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못한 다. 그래서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며 잠시도 참지 못하고, 높은 사람 에게 절을 하려면 몸이 기둥처럼 뻣뻣해진다. 이런 떨떠름한 모습으로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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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사람들을 뵈니 보는 이들이 금방 나를 미워해서 내 무례를 나무라려고 든다.’
결국 허균은 광해군에 대한 반역죄로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능지처참 가 산몰수 형을 선고 받은 후 51세의 나이에 처형당하였다. 처참히 처형당한 후 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 혼만 달래는 초혼장을 치르게 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허균의 묘에도 시신은 없다고 한다.
허균이 본 강릉의 인물평
허균은 저서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강릉 지역의 인물에 대해 언급했다.
‘강릉부는 옛 명주 땅인데, 산수가 아름답기로 조선에서 제일이다. 산천이 정기를 모아 가지고 있어 이인이 가끔 나온다. 국초의 함동원의 사업이 역사에 실려있고, 참판 최치운 부자와 문장과 절개가 또한 동원만 못지 않다. 매월당 김시습은 천고에 동떨어지게 뛰어났으니 온 천하에 찾아보더라도 참으로 찾아볼 수 없다. 요즘 이율 곡 또한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 중씨(둘째 형 허봉을 칭함)와 난설헌 또한 강릉 의 정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최운보 이후에 등과한 사람이 없어, 이인이 나 문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과거를 한 선비는 볼 수 없으니, 또한 극히 성했다가는 쇠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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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처사 최봉조 기념비
송정해변 딴봉마을 산책로를 가다보면 넥타이를 매고 두꺼운 책을 머리 위에 얹고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아있는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이 기념비에는 [송림처사경주최공봉조유적기념]이라고 쓰여있다. 즉, 송 림처사라 불리는 경주 최씨 봉조 공의 유적을 기념하는 비인 것이다. 그리 고 아래 석판에는 ‘전생 현생 후생이 다하고도 남을 정성으로 키우고 가꾼 소나무 숲의 유적이 자자손손 끊이지 않고 후손에게 크나큰 복 되시니 살 아서나 죽어서나 고락을 함께하여 천만대 후세에 계승하세’라는 뜻의 한 시가 새겨져있다.
이 기념비는 1972년 3월 후손들이 아버지 최봉조의 유적을 기념하여 건 립한 것이다. 최봉조라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지만 전 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지역 최씨 부자가 이 숲을 기증하면서 해송은 없애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벼슬이나 속세를 떠나 산골이나 시골에 파묻혀 글읽기를 즐 기며 지내는 선비를 일컬어 ‘산림처사(山林處士)’라 하여 학자와 문인들의 삶을 칭하는 말이 되었는데, 여기에 쓰인 ‘송림처사(松林處士)’는 최봉조 를 가리키는 동시에 세월을 견디며 서있는 해송들을 의미하는 중의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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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로드쇼: 강릉 로드맵 vol 1. 강릉원주대학교 미술학과
프로젝트 기획_토탈미술관 진행_ 신보슬, 서준호 신승철(강릉원주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협력, 편집 및 인쇄_ 스페이스 오뉴월 발행일_ 2015. 2.10 발행처_강릉원주대학교 예술체육대학 미술학과 강원도 강릉시 죽헌길 7 T:033-640-2526 http://knfineart.com
본 프로젝트와 책자는 강릉원주대학교 기초.보호학문 프로그램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