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필인생(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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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정

박 노 수

畵 筆 人 生


남정 박노수 藍丁 朴魯壽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하여 아카데미즘을 수학한 한국화단 1세대 작가이다. 아호인 남정藍丁 은 20대 후반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지어준 것으로 ‘푸른빛’, ‘가람’, ‘변치 않는 마음’ 등의 뜻 을 갖고 있다. 푸른빛이 지닌 상징과 신비는 그의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화폭 안에 서 쪽빛은 신비하고 비현실적이며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릴 정도이다. 그의 그림에는 홀로 선 선 비(소년), 산수, 말, 백로, 사슴 등이 자주 등장하고, 산이나 수목, 괴석 등이 화면 전체를 분할한 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한 선비(소년)는 먼 곳 저편에 시선을 두고 있다. 이러한 선비의 모 습은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선 채 상념에 잠겨 있는, 무언가를 고대하는 작가 내면의 형상화이다. 그의 산수화는, 산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싶어 했던 작가의 마음과 맥이 닿아 있다. 실제로 그의 산수화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색감적 강렬함에 사로잡힌다. 한국화의 전통적 요소를 기본으로 하되 보다 세련되고 강렬한 색감을 사용함으로써 현대적 미감이 느껴진다. 그의 예술 은 현대적 미감, 전통의 세련된 해석, 미美의 추구, 심상의 구현 등 다층적 격조를 품고 있다. 박노수 화백은 1927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으며, 청전 이상범의 화숙에서 사사師事한 후에, 서울대에 입학해 근원 김용준, 월전 장우성에게 배웠다.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에서 국무총리상, 1955년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3・1 문화 상, 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 등을 수훈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되었고, 일본, 스웨덴, 미국 등에서 다수의 국제전 과 10여 차례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2013 년 2월 타계하였다.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박노수 화백은 2011년 작품을 비롯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하고, 40여 년을 거주해 왔던 ‘박노수 가옥’을 비롯해 500여 점의 작품과 수석, 목가구 등 총 1천여 점을 종로구에 기 증을 하였다. 종로구청은 이 뜻을 받들어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건립해 2013년 9월 개 관하였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미술관에는 작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으며, 특히 정원에 는 남정 선생의 취향을 드러내는 다양한 수목과 석물, 석등, 물확 등이 조경되어 있다.


남 정

박 노 수

畵 筆 人 生


일러두기 • 이 책은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분관)에서 열린 ‘봄을 기다리는 소년-박노수 개인전’에 맞춰 출간된 『화필인생』의 개정판입니다. • 이 책은 작가가 1950년대 이후 발표한 글 중에서 선정해 수록했습니다. 수록된 글은 게재 당시 내용 그대로 수 록함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일부 내용이 중복된 부분은 정리를 했습니다. 출처는 글의 끝에 밝혔습니다. •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미술관 추천작과 전시 당시 출품작들이며, 제작 연대 순으로 수록하였습니다. • 도서명은 『 』, 잡지와 신문명은 「 」, 작품명은 < >으로 구분해 표기하였습니다. • 작품 설명은 제목, 제작 연도, 재료, 크기(세로×가로)의 순으로 표기하였습니다. • 한글 표기를 우선적으로 하되, 꼭 필요한 경우 한문을 병기해 의미를 명확히 했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 하여, 한자어를 쉽게 풀기도 했으며, 인명의 경우 한자나 생몰년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주요 인명과 도서명의 한자는 처음 나올 때 병기하는 것으로 원칙으로 하되, 의미에 혼동을 줄 우려가 있는 경우 더 병기했습니다. •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의 표기법과 띄어쓰기,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 등은 현재 기준을 따랐습니다.


작가는 예술의 무한감 즉 무한한 생명감의 파동을 기대하는 것이다.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생명의 불길을 화폭에 담고자 하는 작업에 뜻을 둔다.


차례

008      서문-개정판을 펴내며

013      생각나는 일 몇 가지 020      나의 청춘 시절 024      간원일기 035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반장 배지 039      따사로운 양광의 고향, 충남 연기 045      내 어린 시절의 회억, 산곡의 맑은 햇빛과 색채의 향연  049      청전 이상범 선생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057      자화상 058      나의 80년대, 모든 시간을 오로지 작품에만 060      화필수필 065      나이  066      산수화, 동양철학 위에 펼치는 하나의 창조된 자연 070      진실성 074      형안炯眼 076      동양의 붓    082      시간은 생명의 단편, 목전의 작은 이익에 현혹되지 말고…… 086      무한감 088      화안畵案, 선비의 기상과 풍도 지녀 089      동양회화를 위한 모색, 기운생동의 세계를 누가 먼저 초월하는가 094      벼루 100      뜰에서 얻는 교훈 108     대자연의 기를 보며 눈을 쉬는 즐거움


정원수 이야기     112 초여름 소묘, 단조로운 생활     115 인화人和     119 주실목     131 도시의 때를 씻는다     134 항심恒心     136 성하의 스케치, 뜰     138 겨울의 벗, 청초하고 변함없는 석창     140 도락道樂, 난 1     143 도락, 난 2     152 도락, 난 3     160 도락, 난 4     166 도락, 난 5     170 도락, 수석 1     175 도락, 수석 2     179 도락, 수석 3     183 한국 동양화의 전통정신     190 동양의 서와 화의 기본적 정신     198 전통회화의 장래     204 수필적 동양화론     216

작가 연보     232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241

에필로그-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251


서문

개정판을 펴내며

2010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분관)은 ‘봄을 기다리는

소년-박노수 개인전’을 열었다. 아버님은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셔서 새로운 작업을 많이 하시지는 못했지만, 전시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성황리 에 끝났다. 그리고 전시에 맞춰서 아버님께서 평생에 걸쳐서 집필하셨던 화론 畵論과

일기,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하셨던 수백여 편의 글들 중에서 골라내어

에세이집 『화필인생』을 펴냈는데, 이 책에는 전시 작품들과 아버님 관련 자료 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버님께서 작고하신 지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지난해 봄을 앞둔 2월에 돌아가셨으니, 벌써 두 번째 봄을 보내게 된다. 그간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 어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을 개관하고, 전시를 여느라 동분서주하면서 보냈 다. 감사하게도 미술관은 아버님의 작품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 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지난번에 펴냈던 『화필인생』의 개정판이다. 초판에 비 해 작품을 더 많이 수록하고, 미술관과 관련된 사진 자료들도 수록해서 내용 이 더 풍성해졌다. 아버님의 작품 세계와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책으로 손색 이 없을 것이다. 아버님께서는 10여 년간 병석에 계셨다. 오랫동안 화단畵壇에 나서지 못하 셨지만, 우리 미술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셨을 게다. 2011년 11월 아버님은 어머님과 의논을 하시고는, 작품을 비롯한 사재를 모두 사회에 환원 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종로구청과 기증 협약을 맺으셨다. 당신의 손길이 곳곳 에 배여 있는, 40여 년간 사셨던 자택, 당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 500점, 그리 고 평생을 애써 모으고 늘 곁에 두고 즐기셨던 수석 379점과 고가구 66점, 기 타 애장품 49점 등 총 1천여 점을 기증하셨던 것이다. 종로구는 미술관 설립을 서둘러서, 지난해 9월에 개관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아버님은 미술관의 개관을 화 필 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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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지 못하고 지난해 2월에 돌아가셨다. 아버님께서는 봄을 유독 좋아하셨다. “꿈을 좋아하는 소년 시절은 영 가버 렸는데도 봄을 맞이하려면 되살아오는 소년의 마음…… 봄을 기다리며 초조해 하던 나의 가슴은 신비스런 오색의 꿈으로 찬란하다”시며 봄을 기다리시곤 했 다. 아버님께서 그토록 기다리셨던 봄에 『화필인생』개정판을 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우선, 미술관을 찾아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버 님은 당신의 작품으로 관람객들을 미소 짓게 하고, 그들에게 작은 위안과 행복 을 전하고 계시리라. 관람객 모두가 작고 아름다운 미술관에 머물면서 행복한 추억을 간직하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박노수 가옥’이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거 듭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김영종 종로구청장님과 구청 문화과 식구 들, 그리고 종로문화재단의 식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어려운 출판 현 실에도 개정판을 펴내는 컬처북스 오창준 대표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이 책에는 어머님(장신애)의 정성과 헌신이 담겨 있다. 어머님은 아버 님이 평생 남기신 작품들과 유품, 관련 자료들을 모으고, 동반자로서 조력을 아 끼지 않으셨으며, 미술관을 설립하고 책을 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버님은 떠나셨지만, 우리에게 아름다운 미술관과 청아한 작품들을 남기 셨다. 그리고 아버님의 생각과 소소한 일상들이 담긴 이 책을 올 봄에 다시 펴 내니 기쁜 마음이다.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버님과 함께했던 봄볕같이 따 사롭던 시절이 떠오른다. 평소 아버님과 교유했던 화단의 어르신들과 동료, 후 배, 제자 분들, 그리고 아버님을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미술 애호가 분들과 함 께 이 기쁨을 나누며, 유택幽宅의 아버님께 이 책을 삼가 올린다.

- 2014년 4월, 봄내음 가득한 아름다운 박노수미술관에서 박이선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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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전경



생각나는 일 몇 가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 선생 댁을 방문한 적이 있

다. 그때가 마침 참의원 의원선거일이 가까워 오던 때인지라 어느 중년 인 사 한 분이 와서 춘곡 선생의 출마를 간곡히 종용하고 있었다. 극구 사양하 고 계시던 선생께서는 그 사람을 보내고 나서 대선배로서 나에게 작가의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는 것이었다.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글귀 하나가 있는데, 이는 선생께서 몹시 강조하시던 것이다. 즉 ‘고예독왕孤詣獨往’이라는 네 글자이다. 이는 작가의 가는 길을 말한 것 으로 선생의 설명을 빌리자면, 작가는 누구나 각자 독특한 자신의 길을 가 야지 친한 친구가 있어 이와 보조를 맞추어 같은 그림을 그린다든지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개성적 표현의 길을 개척하고 이에 매진하는 것이 작가의 취할 바이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외롭게 가고 홀로 가는 작가의 길은 험하고 고독하기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예독왕’의 길을 지켜 왔으니, 후대에 남을 만한 작가로 성장할 것 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지난 누대累代의 대가들과 비견할 만한 격格을 이루었을 때라야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분은 작가가 갖춰야 할 중요 조건을 두 가지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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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도 하였다. 즉 창작이면서 탈속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을 해 놓 고 보면 어찌도 간단하고 쉬운지 어이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 지키려면 그리도 어렵고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있는 길은 아님을 알게 된다. 독특한 작가의 길이란 동서고금을 통틀어 보아서 둘도 없는 자신의 길이 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서구에서 는 이미 시도했던 것이라면 이것은 창작이랄 수 없는 것이다. 진짜 특유의 것이며 격조 높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춘곡 선생을 만나기 훨씬 이전에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선생과 의 관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1945년 봄에 청주에서 5년제 상업학교를 졸 업하고 미술학교(지금의 미술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그때는 태평양전쟁 이 말기에 들어가 도쿄東京 등은 공중폭격이 심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 였다. 그래서 평소에 존경하던 청전 선생을 찾아 화畵의 수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화에 대한 기초 지식이라고는 중학교의 미술, 즉 도화圖畵 시간에 서양화 전공의 선생님께 들은 인상파 이야기 등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붓을 들고 작품이라고 시작하고 보니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그려야 할지 참으로 막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는 단도직입적으로 청전 선생께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그림은 무 엇을 목표로 그려야 하며 어떻게 그려야 합니까?”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한 참 생각하시다가 “그림은 여운餘韻이 있어야 하네” 하시는 것이다. 자, 이런 난처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고작 18~9세의 소년이 여운이 무엇인지 짐작 하기도 어려웠고 너무도 벅찬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매일같이 고민의 연 속인데 이것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참으로 괴롭기까지 하였다. 언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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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심안心眼으로나 읽을 수 있는 기운의 생동 여부를 짐작하게 된 것은 화 론畵論의 연구를 하면서 작화作畵 기량技倆을 연마하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눈이 뜨이게 된 것 같다. 아마도 화畵에 뜻을 둔 지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뒤인 듯싶다. 사실 기운 의 생동이 이루어진 화란 쉽게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흔치 않은 것임도 알 게 됐지만, 이 경지야말로 이루어 놓을 만한 고격高格의 것이며 지극히 어려 운 세계임도 알게 됐다. 즉 신운神韻이 감도는 신품神品을 높이 본다는 것에 동의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혹은 일품逸品의 경지를 내세우는 이도 있지만 일리 없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미대 1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 선생께서 소묘를 지도하셨지만 동양화의 실기實技도 담당하셨다. 하루는 숙제를 제출 토록 하시며 일일이 그에 대한 품평을 하시는 것이다. 주로 운필運筆로 이루어지는 획선劃線에 관해서 이야기하시면서 화畵에 나 타나는 선線의 생사生死를 논의하시는 것이다. 거의가 다 선이 죽었다고 하 신다. 참으로 딱한 것이 아무리 보아도 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별이 서 지 않는 것이다. 무조건 굵고 짙게 그으면 힘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차게 운필하면 힘이 생기는 것일까. 이 역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한참 후에야 선線의 생사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어느 때부터 확연히 알게 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고 서서히 눈이 뜨이게 된 것 같다. 동양의 것은 거의가 다 처음엔 접근하기 어렵게 돼 있어서 학리적學理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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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 생략된 그곳을 각자가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될 깊 은 도량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이 그렇고 의학이나 예술 등이 모두 그렇 다. 지금과 같이 동서가 뒤섞여 있는 때는 쉽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서구의 것들이 눈앞에 즐비하니 눈길이 그곳으로 가기가 쉽게 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동양은 이런 점에서 서양과의 관계는 불리한 쪽이라고 하겠다.

화畵에 있어서 공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 휘종徽宗 조길趙佶, 1082~1135 의 고사가 떠오른다. 약 1천 년 전 북송北宋 말엽의 휘종 황제는 화에 능하 여 역사에 남을 명화名畵이기도 하지만, 일설에는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도군 황제道君皇帝의 별칭도 있었다 한다. 이 분은 궁宮의 화원畵院에서 직접 화사 畵師들을

지도하였다 한다. 물론 이들의 선발시험에 시구절詩句節로 테마를

삼도록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뛰어난 예술 황제였음 을 짐작할 수 있다. 하루는 화사畵師 하나가 공작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발〔足〕 그리기에 무척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휘종이 이곳에 당도하니 화사는 이 어려움을 고하면서 지도를 앙청仰請하였다. 그때 휘종은 가르치기를 “너는 오직 공작 의 발 그리기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옳게 되지 않는 것이다. 공작의 발걸음 에 우주의 흐름을 담도록 노력하라”라고 했다 한다. 이는 공작의 발 처리에 있어서 화면의 공간 처리 즉 공간 구성에 주력해서 성공했을 때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송대宋代의 묘사력이 뛰어난 많은 작품들을 보면 그 탁월한 솜씨에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대다수가 묘사 위주의 화畵임을 알게 된다.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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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휘종 조길의 화畵는 무한대의 공간에 작용하는 구성적 작위作爲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기운이 싹트도록 하는 경영위치經營位置, 즉 공간 구성으로 생기는 경향성이 엿보인다는 말이다. 동양은 이미 1천 년 전에 무한대의 공 간에 작용하는 여운의 영원한 생동을 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래 서구에 서 앵포르멜이니 공간파空間派니 하는 운동의 이론을 듣고 보면, 1천 년 전 동양이 시작했던 그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30세 당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세계를 초월하여 새 길을 열 수는 없는 것 일까 하는 글을 「동아일보」엔가에 게재한 적이 있다. 그 후 내내 생각해 보 았지만 기운생동의 세계를 뛰어넘는 길보다는 어떻게 개성적이며 독보적 여운의 길을 열 수 있느냐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서울의 동북쪽에 창동이라는 곳이 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곳에 정원 석을 많이 놓고 파는 화원이 여러 곳 있었다. 소설가 유주현柳周鉉, 1921~1982 선생이 건강하게 활동할 때인데, 하루는 그곳에 돌을 구경하러 가자고 하여 둘이 나섰다. 강원도 돌을 많이 파는 곳이 있는가 하면 서산 앞바다의 돌을 주로 파는 곳도 있어 수적으로 굉장하였고 질적으로도 다양하였다. 서산 앞 바다의 돌을 하나 골라서 사기로 하였다. 당시의 돌값으로는 깜짝 놀랄 가 격이었는데 내가 그것을 사게 된 이유인즉, 사철을 뜰에 놓고 감상할 수 있 고 정원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크고 무거워서 도 둑이 함부로 훔쳐 가지도 못할 것이니 더욱 듬직하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고미술古美術 즉 단원檀園, 혜원蕙園, 추사秋史, 오원吾 園

등의 작품 그리고 고려자기 중 명품이나 조선시대의 뛰어난 도자들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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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에 두고 즐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 값이 천문학적 숫자이고 또 거의가 박물관 아니면 유수한 수장가의 손에 있으니 엄두도 내지 못할 일 이다. 그러나 정원에 놓을 돌은 아무리 비싸다 해도 고미술품류는 아니니 염가라고 할 수도 있다. 감상 가치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상당히 많은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생활 환경을 명산 주변 못지않게 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뛰어난 절경의 자연을 그리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크게 능력도 없으면서 이러한 이상이 있다 보니 나를 좀 다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보는 이가 있는 것 같다. 명승지를 찾아가는 것보다 명승지 속에 있고 싶어 하는 심정이라고 하겠 다. 이런 데 관심을 갖다 보니 오래전에 하세下世하신 나의 큰 외숙의 일이 생각난다. 그분은 재산도 많았지만 뒷동산에 정자를 짓고 동리 어귀에 연못 을 파서 잉어를 기르는 등 운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것을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영향인지 혹은 기질의 유전적 발로인지는 몰라도 왠지 나는 자연이 좋고 그 속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어서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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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17일


고행 苦行

1960 ̄화선지에 수묵담채 ̄183×152cm


벼루

수복 직후 명륜동에 있을 때의 일이다. 원래 약한 위胃가

또 말썽을 일으켜 제일 가까운 한약국을 찾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곳의 노老 주인과 알게 된 적이 있다. 하루는 서화書畵 이야기가 나와서 그분이 가지고 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간찰이라든지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필적이라든지 주소백周少白의 매화, 괴석 등등 여러 가지를 보여

주시는 끝에 벼루를 가지고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선선히 여러 개를 내보이 면서 가지고 가서 시험해 보라고 하신다. 나는 욕심에 매일 벼루를 하나씩 교체로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도 나에겐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못해도 5~6개는 시험했을 것이다. 다 른 것이 없느냐고 하였더니 골방 구석에 하나 있을 거라면서 먼지가 쾨쾨 묻은 꽤 큰 벼루를 하나 보여 주는데, 웬일인지 이것만은 처음 손에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끌린다. 그리고 소중해 보였다. 노인은 또 시험하려면 해 보 라고 하신다. 원래는 대대로 집에 내려오던 벼루가 돼서 많이 달았다고 하 신다. 사실 벼루 복판이 2센티미터 가량은 푹 달은 것이다. 곧 집으로 가지 고 와서 먼지도 털고 때도 닦아 본 즉, 이것은 자연瓷硯이다. 표면에는 일부 둘레에 용문龍紋(상징적 도안)이 있고 물 넣는 곳과 먹 가는 면의 중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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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水牛를 양각하였다. 배면에는 배를 띄우고 배 위엔 서권書卷과 독서하는 선비를 양각한 것이 근대의 어느 훌륭한 ‘릴리프(부조)’보다도 신운神韻 있 게 정교히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놀란 것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천불애도우노인天不愛道牛魯人 곤불애실물사진坤不愛實物斯珍 징명徵明”이라 고 낙관까지 새겨져 있다. 문징명文徵明이 수석水石을 많이 다뤘다는 말은 전 기에도 있는 말이지만, 명明나라 중엽에 시詩・서書・화畵 삼절로 그 이름이 높았던 선비가 벼루를 만들고서 뒷판에 “하늘이 도를 사랑하지 않는지 나 같은 사람을 세상에 낳게 하고, 땅이 보배로운 것을 사랑하지 않아서인지 왜 이 보배(벼루)를 물건으로 점지하셨는가 애석한 일이로다”라는 뜻의 글 을 썼으니 그 겸손한 마음과 보배로운 벼루를 아끼는 마음 또다시 감탄치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이 벼루를 벌써 수삼 년 애용하다 보니 명주결 같은 촉감의 그윽함과 한번 먹을 갈아 일주야가 지나도 마르지 않는 품이라든지 먹과 벼루의 접촉감의 긴밀함이 나 같은 미련한 사람의 소행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지극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형산거사의 말에 동의하며 다 시 탄복함을 금치 못한다. 말도 없고 능동적인, 그리고 행위라곤 하나도 없 는 물건인 벼루임에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루도 곁을 떠나게 하지 못하던 것이 벌써 수 년이 되고 보니 제대로 벼루 갑을 마련하질 못했다. 마치 아낀다는 것이 옷을 입히지 않고 하대한 양이 되어 요즈음 착실하고 근엄한 공예가 한 분께 갑을 만들어 주십사고 내가 들고 가 부탁을 드리고 왔 으나 항시 벼루의 안부가 염려되어 시시로 불안을 느끼곤 하는 것이 나의 신 경과민에서보다도 벼루가 나에게 베푸는 지극한 마음씨에서인가 생각된다. │

1957년 6월 26일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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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은천 崇山隱天

1970년대 초 ̄화선지에 수묵담채 ̄34.8×34.8cm


만물생광휘萬物生光輝

1974 ̄화선지에 수묵담채 ̄46×69cm


공산무인 空山無人

1974 ̄화선지에 수묵담채 ̄34.5×46cm


수목방성 樹木方盛

1974 ̄화선지에 수묵담채 ̄46.2×69cm


홍매

1970년대 중반 ̄화선지에 수묵담채 ̄45.2×23.7cm


인화 人和

수석水石이나 서화書畵, 고완품古翫品 등을 아끼며 시간 가

는 것을 잊을 때가 즐겁다. 이제는 이러한 감상 생활의 관습도 몸에 배어 위 에 말한 것들이 없는 곳에서는 시선의 처리가 매우 곤란하다. 그리고 몹시 지루하여 단 한 시간을 머무르기에 힘이 든다. 이것을 나는 내 눈의 병이라 고 말하며 웃는 때도 있다. 시각으로 오는 기쁨과 괴로움이 있는데, 즐거움 을 주는 것보다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 오랜 제작 생활로 시각을 연 마하여서 미추에 민감해진 까닭인지도 모른다. 속사俗事에 싫증이 나서 자연 속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있 는 것 같다. 필자 역시 산천경개山川景槪가 그리워서 일요일이면 교외로 나 간다.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이끼 낀 돌 사이로 흐르는 물 그리고 높이 솟은 기봉의 장관 등은 그만 나를 사로잡고 만다.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살면 얼마나 즐거울까.” 친우들은 이런 말을 한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물론 좋기는 하겠지만 혼자서야 단 일주일을 지내기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대꾸한다. 나 또한 이런 곳에서 산다면 하고 생각해 보 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인해서 얻는 괴로움도 많지만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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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지들은 나를 초연하다고 부러워한다. 수석을 주위에 놓고 즐기며 고서 화나 골동 그리고 난과 매梅의 분재 속에 묻혀 살고 있으니 세상사가 뭐 그 리 염두에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취미가 주위의 평온을 절대 조 건으로 하여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수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간사를 잊는 때가 있기는 하다. 그 좋은 점 은 돌의 형상 속에서 산수의 공기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수경석을 좋 아하기 때문에 모아 놓은 것들은 거의 전부가 이런 경치돌들이다. 고완에 취미가 있다 보니 수반 역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안하여 애써 이에 맞는 것을 골라 놓게 된다. 중국제 수반들이 꼭 마음에 드는데, 그것을 얻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서 괴롭다. 물론 고가이고. 그러나 눈의 양식 이라 생각하니 다소 고가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10년이고 20년을 계 속 즐길 수 있으며, 그곳에서 마음의 휴식을 얻는다면 뭐 그리 비싸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조원造園에 차경借景을 말한 대목이 있다. 이것은 돈 안 들이고 경치를 살 수 있는 일이니 그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말이다. 차경이 있다는 것은 자기 정원 외에 내다보이는 좋은 경치를 지닌 집의 조건을 말한 것이다. 어느 면 에서는 썩 중요한 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야말로 인력으로 얻기 어려 운 것이어서 뜻있는 분들은 이에 특별히 유념하게 된다. 차경이 좋은 곳이 란 만금으로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부동산 매매에 있어서 실가實價 이상의 지불은 부당한 손실이라고 하였지 만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척도로 따질 수 없는 면도 많은 것이니 일률적으 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겠다. 이렇게 정신적 분위기의 중요함을 생각하는

화 필 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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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감상 생활의 버릇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실은 정신 세계의 즐거움 없 이는 삭막하여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참으로 절실한 것의 하나이다. 사람이란 각기 취향이 다르기 마련인데 제 나름으로 세계를 이루고 그 속 에서 생의 뜻을 찾으려는 것 같다. 필자와 같이 관조적 시각의 세계에 몰입하다 보니 이 테두리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도 숙명인 듯하다. 세인이 실물實物이라고 아끼는 것들은 거의가 미술품임을 우리는 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 미술품을 식별 감상하면서 기 쁨을 누리니 천박한 취미는 아니라고 자위할 수 있다. 수석을 벗 삼아 소일하고 수려한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들을 한다. 언젠가 산에는 가고 싶은데 집의 아이들은 모두 불응이어 서 결국 혼자서 떠났다. 혼자 다니는 것이 홀가분하고 진미眞味를 알 수 있 는 등산이라고 말하는 분도 많다. 그러나 나는 몹시 외로워 어느 만큼 가다 가 그만 돌아오고 말았다. 이렇게 반려 없이는 산천경개를 보는 것도 즐겁 게 여겨지지 않는 기질이다. 사람과의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고 세속적 번잡에 싫증이 나서 자연을 찾 는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현실 도피를 꾀하는 마음이지 자연을 즐기는 자세는 아니다. 마음에 갈등이 있을 때 또는 외로울 때 수석을 대하고 있으 면 마음이 평온해짐과 동시에 즐거움으로 변하여 산천의 공기를 흡족히 음 미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수석이나 산천을 즐기는 데는 주위의 인간 관계가 순탄할 때 이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감흥은 반감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좋은 정 원이나 절묘한 수석 또는 고금의 명화를 보아도 함께 마음을 허락하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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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는 벗이 있어야 더욱 즐거운 것이다. 인화人和 있는 곳에 자연도 제구실을 하고, 인화 있으면 명석名石이나 명화 名畵

또는 절경이 없어도 마음으로 그려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화는 사

랑하는 아내도 좋고 사귀는 벗이라도 좋다. 또 장성한 자녀 또한 좋다 하겠 다. 정신적 감상 세계는 마음이 주인인고로 마음의 융화평온融化平穩 없는 곳 에서는 빛이 감소됨을 어찌할 수 없다. 만사萬事는 인화의 바탕만이 으뜸임 을 재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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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2월호 「세대」


강江

1970년대 후반 ̄화선지에 수묵담채 ̄96×166cm


고사 高士

1970년대 말 ̄화선지에 수묵담채 ̄34.8×46.2cm


고사 高士

1980 ̄화선지에 수묵담채 ̄38.5×73cm


한거삼십재 閑居三十載

1981 ̄화선지에 수묵담채 ̄35×69.1cm


가인여옥보 可人如玉步

1981 ̄화선지에 수묵담채 ̄34.5×68.3cm


산가 山家

1981 ̄화선지에 수묵담채 ̄100×146cm


수하고사 樹下高士

1982 ̄화선지에 수묵담채 ̄34.9×34.4cm


도락, 난2

너무도 난蘭을 좋아하여 그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나를 본

원예가 S씨는 건란建蘭 한 분盆을 나에게 선사하였다. 물론 좋은 중국분에 심어서 내 집에 들고 왔던 것이다. 쭉 뻗은 난엽의 시원스러운 태態는 나의 거실을 밝은 공기로 가득 차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집 근처에 여러 분의 난을 기르는 분이 있어 간간 구경 갔다. 그 댁의 각 종 난은 분이 크고 무성하여 나를 즐겁게 하다 못해 괴롭힌다. 주인은 나의 심정을 알아서인지 옥화玉花 한 분을 나눠 준다. 나로서도 응분의 답례는 잊 지 않았다. 이렇게 모으다 보니 동양란 몇 분을 가지고 아끼는 신분이 된 셈 이다. 원예가 S씨는 나에게 좋은 조언을 한다. 충청도에 대단한 난 수집가가 있 는데 난을 더 구할 의향이면 그분한테 서신을 보내 봄이 좋겠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난의 광인지라 곧 편지를 보냈다. 마침 상대방도 성의가 있어 난의 견본과 서신을 보내 왔다. 그 서신에 왈, 귀중란貴重蘭이니 소용되면 고가를 내야겠고 그렇지 않으면 곧 반송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견본이 아무리 보아도 난 같지가 않다. 잎은 난엽 모양이지만 전혀 난의 기운이 없고 뿌리도 아주 다르다. 곰곰 생

화 필 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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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해 보니 언젠가 본 맥문동의 잎과 뿌리 그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맥문동 이지 난은 아니니 난의 견본을 보내라고 또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이 난 수집가란 분이 대단한 아집이어서 난 전시에 발표된 일본인 들의 난분 사진까지 동봉하여, 이런 틀림없는 곳에서 오래전에 고가로 매입 한 것을 모독한다고 노여워한 말투다. 할 수 없이 견본을 반송하고 만 적이 있는데 혼자서 고소를 금치 못하였다. 동양란의 진종眞種을 보지 못한 분들 은 붓꽃까지도 난이라 하고 잎이 가늘고 죽죽 뻗은 것은 모두 난이라고 부 르기를 좋아한다. 원예가 S씨에게 나는 또 졸랐다. 좋은 난을 좀 많이 보자고. 그랬더니 갈 매리 화원을 안내해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벌서 8~9년 전 겨울이다. 동양란 수백 분만이 아니라 그 외의 화초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마침 눈이 펄펄 날리는 일요일이었다. 그 온실 관리는 S씨의 친구가 맡고 있기 때문에 여러 모로 잘 보여 주었다. 청량리 밖으로 30분은 더 가는 곳이어서 완전히 교외 다. 수만 평짜리가 여러 채다. 그중의 한 온실에는 동양란만 꽉 차 있다.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곳에서 여호접余胡蝶이라는 중국 춘란 중 특종이라는 것도 보았다. 난보蘭譜에서 읽고 사진은 보았지만, 실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단히 작은 토분에 잎이라고는 6~7본 그리고 대 부분 영양이 좋지 못하여 노르스름하기까지 하다. 물론 꽃은 없었고. 이 꼴 로 자라 가지고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값을 물어보았다. 관리인 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70만 원이라고 한다. 나는 그만 두 번 놀란 격이 되 고 말았다. 관리인은 안내만 하였지 난의 분양까지는 권한이 없는지 한 촉 도 나누어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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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 눈 내리는 겨울철을 무릅쓰고 간 보람이 없다. 동행한 S씨도 미안 해져서 백방 권고하였으나 전연 반응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난 잎 밑부분에 마늘쪽같이 된 것을 많이 떼어 버린 곳이 있기에 두 쪽을 주워 종이에 싸고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은 버린 것이니 관리인인들 할 말은 없다. 그중 의 하나는 운화관음소심雲華觀音素心이요, 또 하나는 천사보天賜寶라는 건란 의 변종變種이다. 책자에서 익히 보았기 때문에 천한 종자는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나의 이런 집념에 동행한 S씨나 그곳 사람들은 웃었다. 겨울인지라 여러 가지 불편하고 굵은 모래도 얻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뜰의 한구석에서 흙을 파 가지고 체로 쳐서 물에 씻었다. 그리고 또 체로 가려서 분에 넣고 그 마늘쪽 같은 두 개를 각각 심었다. 이것들은 잎도 하나 없고 뿌리는 더 구나 없다. 달랑 마늘쪽같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뿌리가 날 것 같지도 않고 잎은 더구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나의 희망은 뿌리와 잎을 내서 관음소심觀音素心과 천사보天賜寶의 꽃을 볼 심산인 것이다. 한겨울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호강을 시켰지만 아무런 변화 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보려고 하여도 실은 절망 상태임 을 어찌할 수 없다. 해동이 되어 뜰의 얼음이 녹았다. 나는 연구 끝에 대지의 산물이 사람, 동 물은 물론 식물도 그중의 하나임을 생각하여 대지의 힘을 비는 것 외에는 별도리가 없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창 앞의 뜰을 1척 반 정도 깊이 파고 그 마늘쪽 같은 두 개를 묻었 다. 연후에 20여 일 경과하여 허허 실수로 그곳을 파서 살펴보았다. 이것은

화 필 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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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변화가 아닌가. 참으로 기적인 것이다. 뿌리와 잎눈이 튼 것이다.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분에 옮겨 심어 잎을 보았다. 물론 뿌리는 충분히 잘 뻗 었다. S씨는

또 나를 방문하였다. 겨울의 갈매리 이야기가 한창이다. 나의 난분

중에 가해진 두 종류를 발견하고는 전문가 이상이라고 재탄삼탄再嘆三嘆하 는 것이다. 대지는 만물을 화육化育한다는 실증을 난에서도 본 것 같아 즐겁 기 한이 없었다.

1969년 1월 9일 「대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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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적 吹笛

1989 ̄화선지에 수묵담채 ̄112×157.5cm


수변 水邊

1992 ̄화선지에 수묵담채 ̄97×180cm


고사 高士 연대 미상 ̄화선지에 수묵담채 ̄97.5×130cm


무제 無題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화선지에 수묵담채 ̄103×136cm


박노수 朴魯壽 Pak No-soo

당호堂號 : 남정藍丁, 심영실心影室, 월아장粤雅莊, 현동화루玄同畵樓, 간원艮園 1927년 2월 17일(음력 1월 2일) 부친 박상래朴祥來, 모친 김봉금金鳳今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금사리에서 장남으로 출생 2013년 2월 25일 타계

학력

화 필 인 생

1932년(5세)

조모 곽귀수에게 천자문을 학습, 부친으로부터 서예를 배움

1940년(13세)

충남 공주군 정안공립보통학교 졸업

1945년(18세)

충북 청주상업학교(5년제) 졸업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을 사사(종로구 누하동)

1946년(19세)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부 회화1과 입학

1952년(25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1과(동양화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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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1946~56년(19~29세)

동흥중고, 성동중고, 서울사범학교 강사, 상명여자중고 교사 역임

1951~53년(24~26세)

부산 피난지에서 국방부 종군화가 단원

1956~62년(29~35세)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57년(30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 추천작가

1961~75년(34~48세)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1962~82년(35~55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73~74년(46~47세)

국전 동양화분과 심사위원장

1976~79년(49~52세)

국전 운영위원

1981년(54세)

중앙미술대전 운영위원

1983~2013년(56~86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5~91년(58~64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강사

1985년(58세)

제8회 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

1988년(61세)

동아미술제 운영위원, 서울시 미술대전 운영위원회 부회장

중앙미술대전 운영위원

1991~92년(64~65세)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회장

1992년(65세)

92현대미술 초대전 추진위원

1995년(68세)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됨

서울시 문화상 미술부문 심사위원장

1996~98년(69~71세)

3・1 문화상 예술부문 심사위원

2011년(84세)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설립을 위한 기증 협약

2012년(85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2013년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개관(9월)

아내 장신애와 함께, 1988년.

시인 조병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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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1949~81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제1회부터 마지막회까지 출품 1953년

제2회 국전에 <청상부淸想賦> <일식日蝕> <생활生活의 군형群型> 출품

1954년

대한미협전에 <수하樹下> <촉조蜀鳥> <여인麗人> 출품

제3회 국전에 <아雅> <범梵> 출품

1955년

대한미협전에 <이선爾仙의 초상> <수월邃月> 출품

제4회 국전에 <선소운仙簫韻> <무심화無心華> 출품

1956년

제5회 국전에 <월향月響> <삶> 출품

1957년

제6회 국전에 <청담부淸湛賦> <삶> <청향淸響> 출품

미8군 도서관 초대 개인전에 <인생유전人生流轉> 외 79점 출품

미국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기획한 현대한국미술전에 <수하樹下> 외 10점 출품

1958년

제7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출품

동화백화점 화랑과 중앙공보관에서 박노수미술전에 <상매도賞梅圖> 외 120점 출품 1959년

제8회 국전에 <강江> <산山> 출품

1960년

제9회 국전에 <산정도山精圖> <고행苦行> 출품

1961년

제10회 국전에 <수렵도狩獵圖> 출품

1962년

제11회 국전에 <월하月下의 허虛> 출품

1963년

제12회 국전에 <허虛> 출품

청토전靑土展에 출품

1964년

제13회 국전에 <비폭飛瀑> 출품

광주 소품전에 40점 출품

1965년

제8회 도쿄비엔날레에 <산정山精Ⅰ> <산정山精Ⅱ> <허虛> 출품

도쿄 일동화랑 개인전에 <산山> 외 40점 출품

60대 초 국외 전시 중

제자 전람회에서


1965년

도쿄화랑 개인전에 <고사高士> 외 20점 출품

제14회 국전에 <산山> 출품

1966년

신세계화랑 박노수미술전에 <비마飛馬> 외 54점 출품

제15회 국전에 <청로靑鷺> 출품

1967년

제16회 국전에 <백로白鷺> 출품

프랑스예술인협회 초대미전에 <은사> 외 1점 출품

1968년

한국현대동양화10인전에 <고사행려高士行旅> <소년少年> <산山> <강江> 출품

제17회 국전에 <원> 출품

삼보화랑에서 개인전 소품 33점 출품

1969년

제18회 국전에 <신화神話> 출품

1970년

EXPO70(일본 오사카)에 <강상江上> 출품

신세계화랑 초대전 <목단팔곡병牧丹八曲屛>

제19회 국전에 <수하樹下> 출품

신세계화랑 주최, 현대동양화전에 <상매賞梅> <수하樹下> <비마飛馬> 출품 신세계화랑, 박노수미술전에 <연강烟江> <유록游鹿> <비마飛馬> 등 46점 출품 1971년

제2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유록游鹿> 출품

제20회 국전에 <산山> 출품

1972년

신세계화랑, 박노수미술전에 47점 출품

제21회 국전에 <백로> 출품

미국 샌프란시스코 The American Society for Eastern Arts 초대미전에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수하樹下Ⅰ> <수하樹下Ⅱ> <취적吹笛> 출품

1973년

제22회 국전에 <강江> 출품

국립극장 4층 벽화(가로 2.5×세로 56m ) <수렵도狩獵圖>의 원도原圖(1/5) 제작

<육진개척도六鎭開拓圖>(2×2.3m) 제작, 세종대왕기념관 소장

1974년

제23회 국전에 <산山> 출품

신세계미술관, 박노수미술전에 59점 출품

1975년

제24회 국전에 <무심無心> 출품

작가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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