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무네요시의 민예·마음·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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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전열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마음・사 람

야나기 무 네요시 의 柳宗悦のもの.こころ.ひと 민예・마음・사 람       김명순

• 번역

김순희

김아선

이혜숙

조영주

• 감수


김명순 金明順 │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일과를 졸업했고,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 번역대학원 한일과 강사로 있다. 김교빈의 『힌국철학 에세이』(日本評論社, 2008), 이화여대출판부의 『전통한복의 멋 노리게』(東方出版, 2010) 등을 일어로 옮겼다.

김순희 金順姬 │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 관세이가쿠인關西學院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본어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일본 도요東洋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대학원 강사 및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통 역번역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문학번역원 아카데미 일본어과 교수로 있다. 저서 로 『겐지모노가타리 연구源氏物語硏究』(三彌井書店, 1995), 『韓日日韓 통역·번역의 세계』(공저, 시사일 본어사, 2003)가 있고, 번역서로 『다도와 일본의 미美』(한림신서, 한림대학과학원 일본연구소, 1996),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효형출판, 2005)이 있다. 법정 스님의 수상집 『무 소유』를 2001년 일본 동방출판東方出版에서 일역본으로 냈다. 이철수 목판화집 『나무에 새긴 마음』 (컬처북스, 2011),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하는 창덕궁』(컬처북스, 2012) 등을 일어로 옮겼다.

김아선 金我宣 │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일과 졸업했으며, 국제회의 통역사로 활동하 고 있다. 현재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일통역번역학과 강사로 있다.

이혜숙 李恵淑 │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일과를 졸업하고, 2004년부터 서울외국어 대학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일통역번역학과 강사로 있으며, 국제회의 통역사로 활동하고 있 다. 번역서로 정환기 수필집 『내 고향은 대한민국』(답게출판사, 2001), 모토야마 히로시의 『내 몸안 의 신』(카피바라북스, 2003), 야기타 아키구니의 『신면역요법으로 암을 소멸시킨다』(카피바라북스, 2003), 정환기의 『세월 속에 성공을 담은 이야기』(멘토프레스, 2007) 등이 있다.

조영주 曺煐主 │ 연세대학교 사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일과를 졸업했다. 일본 도쿄대학 연구 과정과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일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이화여자대 학교 통역번역대학원 조교수이며, 국제회의 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다. Wayne A. Kirkbride의 『板門店 -朝鮮半島の非武装地帯に関する事実情報』(Hollym, 2012),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의 『600年’その歷史を たどる』(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2013) 등을 일어로 번역하였다.

일러두기

- 이 책은 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서 2010~2011년 출간된 『柳宗悅コレクション(전3권)』에서, 야나기의 미학을 엿볼 수 있는 글 20편을 선별해 ‘민예’, ‘마음’, ‘사람’으로 재구성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원서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선별된 원고의 내용을 구분해서 재편집했다. - 한글 쓰기를 원칙으로 하되, 필요한 한자와 외국어는 병기했다. 작가의 이름 등은 한자, 생몰년 등 을 함께 표기해 이해를 도왔다. 도서는 『 』, 논문과 글은 「 」, 판화나 회화 작품은 〈 〉 등으로, 직 접 인용은 “ ”, 강조나 구분은 ‘ ’로 표기하였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마음・사 람


옮긴이 서문

야나기 무네요시는 72년의 생애를 통해 많은 글을 남겼으며, 그 글들은 극히 일 부를 제외하고 전 22권의 전집(치쿠마쇼보筑摩書房, 1980~1992)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야나기 무네요시 전집』은 현재 절판되어 일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2010년 치쿠마쇼보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70주기와 일본민예관 창립 50 주년을 맞아 문고판 출판을 기획하였다. 문고판은 ‘사람ひと’, ‘사물もの’, ‘마음ここ ろ’의

세 가지 관점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생애를 바라보고, 그에 적합한 글들을

전집에서 추려내어 세 권으로 엮은 것인데, 각각 2010년 12월, 2011년 2월, 2011 년 4월에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 권의 문고판에서 특히 조선과 관계가 깊은 글, 야나기 무네요시의 시점을 잘 드러내고 있는 글들을 선별하여 번역해,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 야나 기의 민예民藝 미학을 엿볼 수 있는 ‘사물’ 편에서 골라낸 글들을 묶어서 1부 ‘민 예’로 구성했고, 2부는 야나기의 미학에 대한 생각이 드러난 글들로 ‘마음’을, 3 부는 일본 도자를 중심으로 작가들에 대해 평한 ‘사람’으로 재구성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야나기 무네요시와 관련된 책이 많이 번역, 출판되어 있다. 그러나 출판된 책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전문서적에 가까운 것들이라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데는 적절하겠지만, 야나기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즉 야나기 무네요시의 전체를 야나기의 ‘시점’으로 바 라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의 깊이와 넓이로 야나기 무네요시를 고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젊은 세대나 야나기 무네요시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쉽게 풀어서 번역하 려고 애를 썼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주석도 달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문 장은 장문長文이 많다. 가독성을 위해서 글을 짧은 단문短文으로 나눌 수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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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야나기 무네요시의 문체文體를 존중해 이 부분은 그대로 두었다. 독자 여러분 의 양해를 바란다. 또한 이미 출간된 책들과 글이 겹치치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벗들에 게 보내는 글」은 1920년 동아일보에 이 글의 일부가 번역되어 연재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번역한 것은 문장이 워낙 난해하고 번역 여하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받아들여져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들은 이 글에 담긴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과 그 진정성을 가감 없이 전달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간의 한일 관계를 돌아 보면, 야나기 무네요시가 주장한 ‘민예’가 중요한 역 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게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책을 펴내게 되었다. 먼저 번역의 계기를 만들어 주신 일본민예관의 스기야마 다 카시杉山享司 부장님과 이시이 요리코石井頼子 이사님, 그리고 두 차례나 추천서를 써 주신 세이센清泉 여자대학교의 나카미 마리中見真理 교수님,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 신 치쿠마쇼보의 후지오카 야스유키藤岡泰介 씨, 감수를 맡아 주신 중앙대학교 박전 열 교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출판을 지원해 주신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관계자 여러분과 정성껏 책을 만든 출판사에도 감사드린다. 처음 번역 논의를 시작한 후 2년여 동안, 다섯 명의 번역자들은 각자의 직장이 나 일로 바쁜 와중에도 보다 완벽한 번역을 위해 많은 논의와 공부를 되풀이했 다. 마침내 책이 나오게 되니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독자 여 러분의 사랑과 관심을 기대해 본다. 2014년 2월 번역자 다섯 명의 뜻을 모아

김순희 삼가 적음


차례

옮긴이 서문  • 04

민예

1

거듭 민예에 대하여  • 11 다기의 미와 선禪  • 24 보는 것과 아는 것  • 44 직관의 자유  • 54 もの

조선화를 바라보며  • 57 오쓰에에 대하여  • 61

마음

2

나의 염원  • 77 こころ

범인凡人과 구원  • 97 불이미不二美  • 104


사람

3

조선의 벗에게 보내는 글  •121 무나카타와 나  •147 아사카와 다쿠미에 대하여  •179 버나드 리치에게 보내는 편지  •185 하마다 쇼지의 도자 작업  •206 가와이 간지로의 사람됨과 일  •225 도미모토의 도기  •239 세리자와에 대하여  •245 새로운 마을에 대한 편지  •252 ひと

오키나와인에게 호소하다  •259 아이누를 바라보는 시각  •276



민예

1

もの



거듭 三度民藝について 민예에 대하여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작년 8월 아오모리青森 현에서 열릴 일본민예협회 전국 대회를 앞두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꼭 출석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 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되면 내 건강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는 예상 은 장마철이 되자 어긋나 버렸다. 그렇게 출석하기는 너무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소마相馬 군에게 그러한 사정을 적어 편지를 부치며, 조금 심 적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냉엄한 자연의 섭리는 쉽게 내 소원을 들어 주 지 않았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출석 대신 테이프레코더로 인사를 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 정도라면 침상에서도 가능하리라 생각해 어찌 됐든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여름이 다 가오고 예기치 않게 시작된 무더위로 인해 나는 녹음조차 하기 어려운 몸 상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나같이 병든 자에게 날씨란 지배력 이 매우 큰 법이다. 이번 여름 더위로 인해 세상을 떠난 환자들이 상당히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예협회 동인同人으로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 재인 다나카 시게루田中茂 군이 세상을 떠난 날도 무더운 날이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오른손이 자유로운 데다가 사고력에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에 글로 대신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대회를 기념하여 『민

거듭 민예에 대 하 여


예』 8월호의 주제를 ‘도호쿠호東北號’로 정했다는 말을 듣고 글 하나를 썼 다. 그 글이 바로 「다시 한 번 민예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었다. ●

대회를 계기로 ‘민예民藝 ’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자 한 것이다. 나는 병중病中이라 혹시 내용에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거듭 반복해서 읽어 보고 여러 군데를 고쳤지만, 무더위로 어지러움이 심해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취지는 틀린 데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반복도 눈 에 띄고 표현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게 수많은 친구들이 일부러 편지를 보내와 내 가 쓴 글이 근래 들어 가장 재미있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편지는 나와 가장 친한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 많았다. 하마다 쇼지浜田庄司를 비롯해 세리자와 게이스케芹沢銈介, 요시다 쇼야吉田璋也, 요시다 고고로吉田小五郞 등이다. 사실 정말 의외였다. 병중에, 그것도 무더위 속에서 이루어진 집 필이라 스스로는 그다지 좋은 글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혼자 글을 읽어 보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틈이 나는 대로 짧은 글을 추가했다. 그런데 그렇게 글을 보충하는 것보다는 글을 새로 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젯밤 내내 생각을 거듭한 끝에,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복도로 걸어 나와 연필을 쥐고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한 시간 동안이나 책상에 기대어 글을 쓸 수 있 었다. 그렇게 쓴 글의 제목은 「거듭 민예에 대해서」라고 붙이기로 했다. 민예에 관한 우리의 활동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운동이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민예 운동’이라고 불리 게 되었다. 덕분에 여러 지역에 지부도 생겨났고 지금은 어느 정도 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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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모습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본 래의 취지가 흐려져 일탈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모든 운동에 수반되는 숙명이라 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외부의 적이라기보다 는 오히려 내부의 적에 있다는 사실이다. 외부의 적은 그다지 성가신 상대가 아니다. 그토록 열성적으로 추구한 끝에 얻어낸 우리들의 신념을 무너뜨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 만 건재하다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고 구체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추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항상 실 질적으로 입증할 만한 것이 있고, 이러한 강점은 다른 운동에서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내가 민예관의 존재와 성장에 힘을 쏟아온 것은 우리의 운동을 안정된 반석 위에 올려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적은 그다지 염려스럽지 않지만 오히려 성가신 존재는 내부의 적이다. 즉 쉽게 말하자면 편애가 오히려 독이 되는, 그러 한 관점에서 민예를 얄팍하게 해석하거나, 만만하게 받아들이거나, 더 나 아가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민예 운동은 내부로부터 병이 생겨 건전하게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공예품을 말한다. 원래는 ‘민중적 공예’의 줄임말. 1925년 야나기기 무네요시(柳宗悦)를 중심으로 도예가인 가와이 간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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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井寬次郎), 하마다 쇼지(濱田庄司) 등에 의해 제창된 조어. 1936년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 운동의 일환으로 도쿄(東京)에 세웠다. 일본을 비롯해 중국, 한국, 영국, 아프리카 등에서 수집한 도자기, 회화, 조각, 직물품, 금속품, 유리작품 등 다양한 민속공예품 1만 7여 점을 소 장하고 있다. 한국 도자 600여 점, 그림 2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거듭 민예에 대 하 여


민예라는 단어 아래 약 반세기에 걸쳐 성장해 온 지금, 우리 스스로 절실 하게 내적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민예’라는 단어를 형용사로 사용하는 일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 ‘민예지’, ‘민예 건축’, ’민예 다도회’ 같은 단어를 종종 듣지만, ‘민예 적’이라는 특수한 것이라면 이미 본줄기에서 벗어난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평범한 ‘보통 종이’가 바로 민예품이 될 수 있는데, ‘민예적’인 종이 라 하면 보통 종이가 아닌 게 되어 어딘지 특별한 종이가 되어 버릴 것 이다. ‘민예 건축’을 예로 들자면, ‘보통 민가民家’가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의미로 다가오는데, ‘민예 건축’이라고 이름 짓는다면 이미 진정한 민가도 아니고 또한 올바른 건축도 될 수 없다. ‘민예적 건축’과 민가는 다르다. 자연 그대로의 민가여야만 좋은 것이지, 민예 취미로 치 우친 건축은 곤란하다. ‘민民’이라는 글자는 ‘평平’이라는 글자와 결합되 어야 좋은 것이지, 민예적이라는 특수한 냄새가 나는 건축이 된다면 뿌 리가 얕아져 더 이상은 ‘보통 사람들의 건물’이 아니며, 오히려 반反민예 적인 성격으로 후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민가로서의 본성조차 상실 하게 된다. 민예는 민예적이기 때문에 민예인 것이 아니라, ‘당연한 물건’ 이기 때문에 민예품인 것이다. ‘민예’는 항상 좌우 없이 중심과 같은 풍취가 있어서 좋으며, 어딘지 다른 것과 차별되어도 좋으나, 차별에서 생겨나는 ‘민예’라면 더 이상 대 단한 내용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민예라면 그러한 차별되는 기질 같은 것에서 해방되어 있지 않겠는가? 진정한 민예라면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민예적’과 같은 차별된 모습이 나온다면 오히려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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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빠질 것이다. 민예품의 아름다움은 민예적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질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 이다. ‘민예 다도회’ 같은 단어도 종종 듣게 되는데 그런 ‘다도회’라면 결국 실패할 것이다. 요컨대 단순히 ‘평범한 다도회’로 충분하다. 그 이상으로 올바른 다도회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평범한 것이 좋다. 그렇기 때문 에 모든 것에 새삼스럽게 ‘민예 다도회’ 같은 강하고 고집스러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상하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평범’을 특별한 성질로 받아들이면 크나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이 점이 상당히 어려운 점이다. 평범이란 정상正常, 무사無事, 더 나아가 쉽게 말하자면 당연한 소박함이 다. 다도회茶道會를 열면서 민예적 취미를 겉으로 드러내면 그 순간 다도 茶道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더 나아가서는 불쾌감을 주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예품 중에서는 참다운 의미의 다기茶器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민예적 취미를 가진 물건에서는 진정한 다기를 보기 어렵다. 평범한 마음으로 차를 만들어야 비로소 진정한 다도의 예법이다. 예사로운 보통 마음이야말로 민예의 마음이다. 너무나도 당연히 자연스러 운 성질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물건이야말로 우리가 다기로 다루어도 좋 은 것이다. 민예적 취미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진짜 다기가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잊고 민예를 얄팍하게 형용사적으로 취급해서는 본말이 전도되어 버린다. 지난번 글에서 인용한 도겐道元선사의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간 다. 고로 일체 불법佛法은 없다.”라는 말을 곱씹어 보고자 한다. 불법 자체 와 동화되면 ‘불법’ 같은 특별한 소유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민예에 대 하 여


마찬가지로 민예와 한 몸이 되면 일일이 ‘민예’라는 간판을 내세울 필 요도 없다. 그러한 간판을 내거는 것은 여전히 민예와 동화되지 못한 증 거일 것이다. 태양은 ‘내가 태양이다. 태양이다.’ 하면서 스스로를 빛내지 않는다. 그냥 태양이란 존재 자체로 충분하며 더 이상의 부속물은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민예품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것 일 때 좋은 것이지, 민예를 뭔가 특별한 것, 이상한 것, 민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민예를 깊이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민예의 미를 본다는 것은 그러한 ‘평범한’ 미를 끝까지 추구하는 것 이다. 그것을 이지적理知的으로 반성해서 이러저러한 성질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이지적인 의식으로 민예가 탄생한 것 도 아니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민예품에는 민예품으로서 하나의 특색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면 민예의 의미를 잃 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너무나도 합리 적인 질문처럼 들리지만, 원래 민예는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지 민예라 는 입장에 입각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자연스럽 게 나타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말하자면 민예의 특색이란 ‘민예 라는 입장’이 아닌 입장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쉽 게 표현하자면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것이 된 것이며, 그 물품 의 강점으로 억지로 외부에서 형태를 부여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대 체로 민예품의 발생은 주의·주장이라든가, 개인적인 취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불교 진종眞宗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아무런 ‘계산’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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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산이다. 호넨法然, 1133~1212스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둔한 몸 이 되어서” 라든가, “무지無知한 사람들과 더불어”라고 말했지만, 대체로 민예품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드는 사람 가운데 학식이 있는 사람이 적 고, 그것을 만든 공인工人들이 의식적으로 어떤 취향을 드러내려는 경우 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곳에서 생겼기 때문에 비로소 진정한 민 예품이 된 것이다. 때문에 미를 노리고 생긴 것이 아니며, 나아가 ‘민예적 인 미’라는 형식에 구속되어 탄생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무지無知가 좋다 고 생각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본래 민예품에는 민예적인 입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 한 입장의 구속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 자유가 민예의 아름다움의 본질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자유가 형태를 띨 때 아름다움이 탄생하는데, 민예품을 보면 그러한 자유를 필연적으로 누리는 경지에 들어가기 쉬 운 물품인 것이다. 여기서 민예품에 왜 자유의 아름다움이 많은지 그 이 유를 알 수 있다. 자유란 첫째, 나 스스로부터의 자유가 근본이며, 둘째, ‘계산’으로부터의 해방이 중요하다. 실생활과 밀접한 실용품은 이 두 가 지를 자연스럽게 갖추게 되는 계기가 미술품에 비해 많다. 민예품은 이 렇게 필연적인 성질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인위적이지 않다. 필연성에 입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아직 자타自他라는 두 개념이 대립하지 않고 ‘계산’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본디 인간은 그러한 성질을 갖 고 있지만 인지人智와 자기自己, 특히 이기심이 그것을 파괴해 버린다. 그 렇기 때문에 나를 넘어 ‘계산’을 벗어날 때 사물은 자연스럽게 건전한 것이 된다. 건전한 것이란 소박한 것이라는 뜻이다. 건전함이란 평상시

거듭 민예에 대 하 여


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무사無事’가 평상시 상태인 것이다. 인지를 보 태거나 의식을 발동시키는 것은 유사有事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쨌 든 일을 성가시게 만든다. 선禪에서는 ‘본래의 진면목眞面目을 보라.’고 말 하지만 본래성本來性이란 무사성無事性과 다르지 않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하지만, 불성은 불생不生 본디 그대로의 성으로서 그것을 ‘여如’라 한다. 본래 민예는 주로 이러한 ‘여심如心’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예적 취미를 발동시키면 진정한 민예가 되지 않는다. 차의 마음은 역 시 ‘여심’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것을 뭔가 특별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여심’을 곱씹고, ‘여미如美’를 직관하는 것이야 말로 차의 정신이며, 민예적이라고 하지만 차별적인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순민예純民藝 는 민예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민예적’이라는 것 조차 더 이상 민예가 아니다. 일체의 냄새에서 해방된 자유가 그 생명이 라 할 수 있다. 이름난 다완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의 예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도’ 의 아름다움은 전혀 다도 취미와는 관련이 없다. 그 아름다움은 그러한 것에서 해방된 곳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은 모두 조선 초기의 것으로 그 무렵 조선에서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끊겨 말차抹茶(가루차)를 마시지 않 았다. 이러한 배경이야말로 오히려 ‘이도’에게 구원이 되었고, 말차의 풍 습에 집착한 ‘라쿠다완樂茶碗’의 아름다움이 이도다완에 한 발짝 뒤지는 원인이 된다. 게다가 이도다완은 말차를 부정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긍정이나 부정과는 무관한 자유로움에서 생겨난 것이다. 말차 다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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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라쿠다완은 아름다움에서 아무래도 이도다완을 이기지 못한다. 그 이 유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라쿠다완은 다도 취미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이도다완은 그러한 것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유야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이도’가 가지고 있는 몇몇 특색에 주목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도’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특징을 의식하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다완 굽을 ‘대나무 마디 모양’이라든지, ‘투구 모양’ 등으로 명 명하여 찬미하지만, 원래는 도공이 전혀 그러한 것에 흥미도 의식도 없 이 그냥 만든 것이다. 이 사실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러한 특징을 의식하고 다기를 만든다 하더라도 결코 이도다완이 지닌 본 연의 아름다움은 생겨나지 않는다. ●

‘가라쓰唐津다완’의 미카즈키三日月 굽이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지 만, 그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굽을 깎을 때 다완 을 물레 중앙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서 중심이 빗겨 나가 생겨난 것이 거나, 또는 굽을 깎는 도구의 성질상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었거나(하마 다 쇼지는 주로 후자라고 말한다. 스스로 도구를 사용해 본 결과 두 번째 설을 주장하고 있다.)인데, 여하튼 미카즈키 굽을 의식적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렇게 만든 결과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하다. 여기 서 ‘그냥’이라는 것이 훌륭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이도다완에서 볼 수

다완 굽의 안쪽을 볼 때, 굽의 둘레가 초승달처럼 한쪽으로 치우쳐 있 는 모양.

거듭 민예에 대 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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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가이라기かいらぎ ’, ‘차다마리茶溜まり ’, ‘물레 흔적’은 모두 취향을 반영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본연의 모습에 무한한 아름다움이 약속되는 것이다. 그러 니 당연하게 의식적으로 계산하여 억지로 만들어 낸 라쿠다완 같은 것이 이차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라쿠다완’은 작위적인 것이 눈에 거슬려 언젠가는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이도다완은 싫증이 나지 않는다. 자연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를 구 속하는 것이 없다. 이도다완의 아름다움은 자유의 아름다움이지만 생각 해 보면 보는 사람까지 자유롭게 만드는 아름다움이다. 취향을 노골적으 로 표현한 라쿠다완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이래도, 이래도?’ 라는 식으로 강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듯하며 작위적인 모습이 번잡스럽 게 느껴진다. 이에 반해 이도다완은 고요하다. ‘아무렇지 않은’ 풍취가 자 연스럽게 배어 있다. 이에 비해 라쿠다완은 ‘이런 면이 있다. 이런 면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소란스럽게 보인다. 민예품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아무렇지 않은’ 점에 있다. 그것은 ‘무사 의 미’, ‘평범의 미’다. 이도다완에는 어떠한 입장에 집착한 흔적이 없지 만, 라쿠다완은 집착하는 마음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이래서는 적수 ●●●

가 되지 않는다. 나는 고보리 엔슈小堀遠州, 1579~1647

의 취향에 감탄하

지 않는 한 사람인데, 그는 취향에 집착한 사람이며 결코 자유인이 아니 었다. 자유가 없는데 무슨 아름다움이 보장되겠는가? 어쨌든 취향이 겉 으로 지나치게 표출된 다기는 최상급 다기라고는 할 수 없다. 자기만의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는 괜찮겠지만, 취향이 도를 넘어 그것에 구속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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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면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다인茶人으로서의 자격에 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자기만의 취향을 가진 사람은 취향이 전혀 없는 사람보다 좋을지는 모르지만, 취향에 사로잡혀 있는 한 최상의 아름다움 을 이해하는 사람은 될 수 없다. 민예품은 귀족적 취향의 물건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생각해 보는 것은 민예의 성질을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는 좋지만, 민예품은 결 코 귀족적 취향의 물건에 대항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 다. 그러한 반항적인 성격이 나타나기 이전에 그냥 실용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는 사람은 구별해도 좋지만, 구별하기 위해서만 보게 된다면 민예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라쿠다완의 결점은 의식적으로 사물을 분별하여 미를 탄생시키고자 한 착각에 있다. 혹자는 미에 대하여 의식하고 만든 작품 이 훨씬 더 진보된 상위의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것은 지식 시대에 있어 착각하기 쉬운 견해이며, 최상의 앎最上知이란 지식에 대한 한계를

● 이도다완을

구울 때 소성이 불충분해 굽 부분에 칠한 유약과 흘러내린 유약이 수축되며 자연스럽게 나타난 매화꽃 모양의 유방울. 우리말로 ‘매화피(梅花皮)’ 혹은 ‘위(鰄)’로 표기한다. 일본 무사들은 칼을 쥔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잡이를 오돌토돌하게 만들었는데, 이도다원의 굽 부분이 이를 닮아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도다완의 매력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 차다마리(茶溜まり)는 마시고 남은 차 몇 방울이 고이는 곳이라는 뜻으 로, 다완 안쪽 바닥에 주위보다 얕게 패인 부분. ●●● 고보리 엔슈는 영주(領主)이자 다인(茶人)이며 건축과 조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조용하고 소박한 것 가운데도 밝고 화려하고 면이 있어야 한다는 ‘기레이사비(綺麗寂, 아름다우면서 고적함)’라는 독특한 미의식을 지니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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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다. 의식을 움직인다면 의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까지 의 식을 움직여야 한다. ‘신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신에 대한 마 지막 앎일 것이다. 민예품은 그 성질이 거칠거나 간소하기 때문에 다도인茶道人도 그러한 성질의 아름다움을 ‘거칠고 간소한 모양의 아름다움麤相美’이나, ‘한적한 멋閑味’이라며 칭송했지만, 만든 도공들은 그러한 요소에 특별한 흥미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다. 검소함이 숭고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서 만 든 것은 결코 아니다. 잡기류雜器類를 만드는 사람이었기에 필연적으로 그 저 거칠고 간단하게 만들게 된 것이다. 그 필연성이 있어야만 비로소 거 침이나 간소함이 미와 깊숙이 연결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깊이 성찰해 ●

봐야 한다. 『금강경』에서 나온 ‘즉비即非의 논리 ’는 이러한 점들을 설명하 고 있다. 라쿠다완은 처음부터 말차 다완을 노렸기 때문에 말차 다완으 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갖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다기로서 ‘이도’가 ‘라 쿠’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은 직관적으로도 솔직한 사실이지만, ‘즉비론’으 로 보더라도 논리가 통하는 엄연한 진리다. ‘민예 다도회’라 이름을 붙이 고 특별한 다도회를 추구한다면 비참한 다도회가 되리란 것은 충분히 예 측할 수 있다. 이러한 진리를 알려 주는 것이 민예의 아름다움이라고 나 는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민예 다도회’를 자랑하는 것은 민예 그 자체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A는 A이다, A는 A가 아닌 까닭에’라는 모순이지만 동일하다는 성질을 말하는 논리적 표현 형식의 한 가지. ‘밝다’는 말은 ‘어둡다’라는 말이 있기에 비로소 성립 된다. ‘길다’, ‘많다’는 말은 ‘짧다’, ‘적다’는 말로부터 성립된다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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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 않는다. 민예의 아름다움의 본질을 알고 있다면 민예라는 말을 경솔하게 형용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관점이 조금 이해하기 어렵고 오해를 받기 쉬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만들고자 하는 것을 특별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만 들어 완성했을 때, 미에 대한 의식적인 목표가 최종적인 역할을 하지 않 았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임제선사臨濟禪師가 스승 황벽黃檗, 847~860 스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황벽의 불법이 무다자無多子”라고 술회 述懷했는데,

이 대목이 대단한 깨달음의 순간을 실감 있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함께 ‘민예의 미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참고로 ‘무다자無多子’란 ‘과연,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구나.’라 는 뜻이다. ‘불법佛法, 불법’ 하면서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지만 불법에 사 로잡혀서는 불법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불법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 는 불자佛者야말로 본받을 만하다. 어떤 종교를 믿는 신자가 이래저래 자 유를 잃게 되는 것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다. 신심信心에 집착해 감당 을 하지 못하는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도 없다. 민예협회 동인 들은 이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예가 좋아서라고 말하면 서 그것에 사로잡혀 버린다면 민예를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 서 거듭 민예를 말하는 이유이다. 번역 │ 조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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