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미술을빛낸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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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M a s t e r p i e c e s o f M o d e r n K o r e a n Pa i n t i n g

근대 미술을

빛낸 그림들 정준모 지음


정준모丁俊模

미술 행정, 미술 비평, 시각 문화 정책,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1996~2006)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숭아트센터,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겸 전문위원,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96년부터 2006년 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과 학예 연구실장, 덕수궁미술관장을 지냈으며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을 역임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기무사에 미술관을 원하는 사람 들’이라는 NGO의 상임간사로 기무사에 서울관을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2011년에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총감독으로 10여 년간 방치되었던 옛 청주 연초 제조창 건물을 활용, 전시와 도심 재창조에 신기원을 이뤘다. 이후 이 일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의 계기가 되었다.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초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큐레이터로, 미술 행정가로 시각 문화 정책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시각 문화 저변 확대에 관심이 큰 그는 문화방송(MBC) <문화스페셜>, 한국방송공사(KBS) <문화가 산책>과 기독교방송(CBS) 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인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하며 음악과 미술을 접목시켜 소개했다. 교육방송(EBS)이 25회에 걸쳐 제 작 방영한 <청소년 미술 감상>은 현재 중고등학교 미술 수업의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큐레이팅했던 전시로는 《통痛-1990》(동숭아트센터, 1990), 《한국 현대미술, 격정과 도전의 세대》(토탈미술관, 서울, 1993), 《토 니 크랙》(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97), 《안도 타다오의 건축》(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98), 《영국현대미술》(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998), 《아트&아트웨어-옷, 그 겉과 안》(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루이즈 브루주아》(국립현대미술관, 2000), 《러시아 천년의 삶과 꿈》(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국립광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부산시립미술관, 2000), 《바벨 2002》(국립현대미술관, 2002), 《아트 북 아트》(국립현대미술관, 한국출판협회, 2003) 등이 있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정리하고자 1998년 부터 기획 실행한 《근대를 보는 눈》은 한국 근대 유화 및 수묵채색화, 조소, 공예를 분야별로 최초로 심도 있게 집대성한 전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00년부터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국립현대미술관, 2000)을 시작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전환과 역동 의 시대》(국립현대미술관, 2001),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사유와 감성의 시대》(국립현대미술관, 2002)를 총괄 기획하여 한국 현대 미술사를 처음으로 개괄적으로 정리한 바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 미술의 현대성 규명을 위한 시론」(2000), 「한국 근현대미술관사 연구-국립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모 순의 근원을 중심으로」(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한국 미술 시장의 화랑의 역할과 문제점 그리고 그 대안」(문화예술위원회, 2006), 「문화 예술인 복지 제도에 관한 연구」(문화예술위원회, 2006), 「화가로서의 문신」(한국인물미술사학회, 2006) 외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미술관』(마로니에북스, 2011), 편저서로는 『아트 북 아트』(컬처북스, 2003), 역서로는 『미술관 관람의 길잡이』 (시공사, 1994)가 있다.

일러두기 ●

작가는 ‘가나다’ 순으로 수록했다.

한글 쓰기를 원칙으로 하되,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와 외국어를 함께 표기했다.

외국어와 외래어는 해당어의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다. (동경 제국미술학교▶도쿄 다이고쿠미술학교, 태평양미술학교 ▶다이헤이요미술학교, 동경 문화학원 ▶도쿄 분카학원 등)

미술·음악·영화·방송 작품명은 < >, 저서·신문·잡지 명은 『 』, 낱개의 글 제목 등은 「 」로 묶었다.

전시명은《 》 로 표기했으나, 작가 프로필과 연표에서는 가독성을 고려하여 별도의 기호로 표기하지 않았다.

직접 인용은 “ ”로, 강조하거나 구분이 필요한 경우 ‘ ’로 묶었다.

작품 설명은 작가명, 작품명, 분야(재료), 크기(세로×가로/단위 cm), 제작 연도, 소장처 순으로 표기했다.

도판 수록을 허락해 주신 작가, 유족, 미술관 및 소장처에 감사를 드립니다. 미처 허락을 구하지 못한 분들께는 추후 합당한 절차를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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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빛낸 미술을 그림들 정준모 지음


책을 펴내며

한국 미술사에서 ‘근대’란 존재하는가. 또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그토록 서양 미술의 특정 장르에는 열광하면서, 우리 그림에는 그리도 무관심할까. 미술관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이 왜 스스로 그림을 보려 하지 않고, 도슨트docent의 설 명을 요구할까. 관람객들은 왜 도슨트의 설명이 없으면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할까. 관람객들이 스스로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큐레이 터라는 직업을 가진 필자는 관람객들의 이러한 태도들이 늘 의문이었다.

미술이라는 공간은 독립된 미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공간과 연계된 상징 체계이다. P. 프랑카스텔(1900~1970)은 그의 탁월한 저작 『미술과 사회』에 위와 같이 적었 다. 그는 “원근법은 화가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 사회의 발견이다” 라고 했다. 미술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분석한 그의 탁월한 생각은, 그림이 단순한 미술가의 작 품이 아니라 사회적 의사 소통 체계의 산물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림은 여전히 화가의 천재성에서 비롯된 창조물이거나 미적 쾌 감을 제공하는 장치이며, 계몽주의 시대의 그림처럼 교훈을 담고 있는 교과서와 같 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시험을 보는 수험생처럼 그림을 대한다. 그림을 감상 하기 전에 사전 지식을 먼저 얻고, 지식을 통해 분석하고 감상에 밑줄을 친다. 우리에 게 그림은 암기 과목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감상 방식 때문에 ‘아는 만큼 보이는 것’ 이 아니라 ‘아는 것만 본다’. 눈에 보이는 그림의 ‘형태’만 볼 뿐이고, 그림이 말하고 있는 ‘정신’은 놓치게 된다. 주어진 감상법과 지식에 집착하다 보니, 그림이 말하고 있는 ‘형태’ 이상의 ‘정신’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미술 감상이 더 욱 어렵게만 느껴지고, 도슨트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미술 자체가 너무 어려워진 탓도 크다. 관람객들의 눈높이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기가 벅찬 것도 사실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형상을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 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스스로 찾아보는 것이다. 화가가 그린 그림에는 양식과 기 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시대의 삶 속에서, 현장에서 체험한 것들이 이미지로 재 현된 것이다. 따라서 화가가 그림 위에 표현한 것은 화가의 사유뿐만이 아니라, 화가 가 체험하고 살았던 시대의 이미지인 것이다.


우리의 근대미술도 마찬가지이다. 당대를 살았던 화가들의 세상과 삶, 그가 보고 경 험했던 이미지의 총합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을 ‘시대의 증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근대미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단편적으로 역사적 사 실만을 나열해서는 다난多難했던 우리의 역사를 인식하고 이해하기에 역부족이다. 이 책은 이러한 생각, 우리의 근대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관심의 산물이다. 이 책 의 시작은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출발은 책이 아니라 전시였다. 필자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우리 근대기에 제작된 한국의 근대미술 100점을 선정하여 전시를 한 적이 있었 다. 한국을 이해하려면 한국의 근대, 근대미술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미술관이 기획했던 전시는 《한국 근대회화 100선, 1900~1960》 전이었다. 전 시를 준비하면서, 100년의 역사를 훌쩍 넘긴 우리 근대미술 중 한국을 대표하는 그 림,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림을 선정하기 위해, 2002년 3월 7일부터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은 웹사이트(www.moca.go.kr)를 통해 설문 조사까지 했 다. 이를 위해 전문가들이 모여 1차로 대상 작품을 선정했는데, 이때 참여한 미술사 가들은 이구열, 이규일(2007년 작고), 윤범모, 최열, 최태만, 조은정, 김복기, 김현숙 등 8명이었다. 동시에 미술관의 학예 연구원들은 보존 상태 등을 고려하여 대표 회화 260여 점을 선정하고, 이 중에서 네티즌들의 의견을 듣고 마지막으로 전문가들의 의 견을 종합하여 100점을 선별하는 방식을 택했다. 설문에 참여한 161명의 국민 중 155명이 이중섭의 <흰 소>를 1위로 선정했다. 2위 역시 이중섭의 <황소>(120표)였고,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11표ㆍ3위)과 <독서> (110표ㆍ4위)가 뒤를 이었으며, 김기창의 <가을>, 김관호의 <해질녘>, 장욱진의 <까치>가 차례로 5~7위를 차지했다. 이중섭은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91표ㆍ8위), <소와 어 린이>(90표ㆍ9위)로 10위 안에 네 작품이나 선정되어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규상의 <작품A>, 박고석의 <범일동 풍경>, 윤중식의 <교회와 비둘기>를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작으로 선정했다. 고희동의 <자화상>, 김관호의 <자화 상>,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김주경의 <북악을 등진 풍경>, 이영일의 <시골소녀>, 이 중섭의 <흰 소>는 각 7명의 전문가가 한국 근대회화 100선에 꼭 포함시킬 것으로 추 천했다. 그러나 의견이 다른 것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국민의 생각은 틀린 4 5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의 시각과 다를 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시에 맞춰서 도록 『한국 근대회화 100선, 1900~1960』도 국·영문으로 각 1,000 권씩 펴냈다. 그런데 이 도록이 근 일주일 만에 동이 났다. 여러 가지 여건상 재판을 찍을 수 없었지만, 이때 우리 근대미술에 대한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 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후일을 기약하며, 컬처북스와 한국 근대미술 입문서를 펴내기 로 약속을 한 게 그 즈음이다. 그 후로 10년이 훌쩍 지났다. 몇 번이나 다시 시작했다 접고, 글을 고치고 도판을 구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애꿎은 시간만 흘렀다. 모두가 필자의 게으름과 두려움 탓이다. 그간 우리 근대미술 기획전들도 있었고, 매년 외국 미술가들의 상업 전시도 부침을 거듭했다. 미술계 현장을 뛰어다니다 보니 이런저런 전시의 허실이 들여다보이고, 그 럴수록 우리 근대미술을 제대로 소개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절실해졌다. 그런 마음 으로 당시 전시 도록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다시 작가와 작품을 따져 보고, 그간의 연 구 성과들도 반영하여 이 책을 펴낸다. 수록된 작가는 91명이고 작품은 108점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한국 미술의 근대와 근대성’을 살펴보는 근대미술사 개론과 연 표를 덧붙인다. 조선 왕조 이후, 일본의 교묘하고 악랄한 식민 통치로 피폐해진 조선 에서 국권을 되찾기 위해 애썼던 조선인들의 삶, 그리고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지만 해방 공간에서 계속된 이념적・정치적 갈등과 혼란, 연이은 비극인 한국전쟁……. 이 러한 격동과 혼란의 시대에서 우리 미술인은 어떻게 시대와 상호 작용하며, 삶을 지 켜 나가고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지를 미술사적 맥락에서 간략하게 살폈다.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자 ‘역사의 증인’임을 잊지말자. 이러한 인식과 시각에서 작품을 들여 다보면 작품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전통 미술과 서구의 근대미술이 만나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던 1900년부터 1960년 사이를 주목하고, 한국적 정서 속에 우리 민족 의 정체성이 어떻게 발현되어 조형화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었다. 작품들은 소위 ‘명품’ 위주의 선정보다는 미술사적 ‘맥락’을 이루도록 했다. 물론 책에서는 가나다 순으로 배열했으나 독자들 스스로 시대와 유형을 살펴 나름의 배열을 할 것을 권해 본다. 독자들이 보기에 눈에 익은 작품이 아닌 낯선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1960년 이후 주로 활동한 작가들은 ‘현대’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해 수록하지 않았다.


이들에 관한 저서는 후일을 기약해 본다. 사실 이 책은 전 국립현대미술관 김희대 연구관(1998년 작고)의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그는 필자가 근대미술을 공부하도록 이끌어 주었는데, 너무 젊은 나이에 저서 한 권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근대미술 분야에서 일궈낸 학문적 연구와 성과가 이 책을 펴내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이 책이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 면 한다. 세상에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분들이 너무 많다. 그중에서 특히 한국 근대미술 연구에 일가를 이룬 이구열, 오광수, 윤범모, 김영나, 최열 선생께 고마운 말씀을 드 리고 싶다. 그들의 선행 연구가 없었다면 필자의 공부는 사상누각沙上樓閣에 지나지 않 았을 것이다. 책에 작품 도판을 싣도록 허락해 준 작가와 유가족 분들에게도 깊은 감 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다급한 편집 일정상 미처 허락을 구하지 못한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을 드리며, 향후 합당한 절차를 따를 것이다. 11년을 친구로, 글 빚쟁이로 필자를 채근해 온 컬처북스의 오창준 주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 을 것이다. 그의 기다림이 좋은 성과로 보답되기를 기대해 본다. 책을 마무리하는 과 정에서 고경표 양의 도움이 컸다. 그의 성실함, 꼼꼼함,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이 책은 아직도 서랍 속에 잠자고 있을 것이다. 늘 밖으로 나도는 필자를 이해하고 감싸 안아 준 아내 김태선과 딸 그리미, 아들 진권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가족들의 믿음과 도 움이 이 책의 밑거름이었다. 미술계는 물론이고 세상사 모든 일이 치열한 경쟁으로 힘에 부치겠지만, 다행히도 필자 주변에는 고마운 분들이 많다. 아마도 필자의 무능과 부족함을 세상을 살며 만 난 많은 이들이 채워 주고 보태어 주기 때문일 게다. 이렇듯 여러 사람들의 덕택에 사 는 삶이지만, 이 책에서 혹여 드러날 오류나 잘못은 모두 필자의 몫이다. 끝으로 이 책이 미술 애호가나 공부하는 학생은 물론, 많은 이들에게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3년 12월 브뤼셀 어느 호텔 방에서

정준모 삼가 적음 6 7


차례

책을 펴내며

04

노수현

계산정취谿山情趣

62

도상봉

정물

64

류경채

폐림지 근방

66

문학진

자전거에 부딪힌 운전수

68

박노수

선소운仙蕭韻

70

고희동

자화상

12

박득순

부인상

72

구본웅

친구의 초상

14

박래현

노점

74

권영우

바닷가의 환상

16

박상옥

한일閑日

76

권옥연

고향

18

박성환

한강대교

78

김경

저립佇立

20

박수근

빨래터

80

김규진

총석정 절경도

22

할아버지와 손자

82

김기창

가을

24

박승무

설경雪景

84

보리 타작

26

박영선

파리의 곡예사

86

김병기

가로수

28

박항섭

포도원의 하루

88

김영기

향가일취鄕家逸趣

30

배렴

산수

90

김영주

예술가의 가족

32

배운성

가족도

92

김용주

투계鬪鷄

34

변관식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

94

김용준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

36

내금강 보덕굴內金剛普德窟

96

다알리아와 백일홍

38

농가의 만추晩秋

98

김용진

화훼절지花卉折枝

40

변종하

우화 A

100

김은호

승무

42

성재휴

강변산수

102

김인승

화실

44

손동진

탈춤

104

봄의 가락

46

손응성

회도사자서繪圖四子書

106

김종태

노란 저고리

48

심형구

수변水邊

108

김주경

북악을 등진 풍경

50

안동숙

휴식

110

김중현

무녀도

52

안상철

잔설殘雪

112

김환기

론도

54

전田

114

산월山月

56

안중식

백악춘효白岳春曉

116

김흥수

두 친구

58

영광 풍경

118

무희

60

오일영

하경夏景

120

나혜석


오지호

처의 상

122

장발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

182

남향집

124

장우성

한국의 성모자상

184

작품WORK

126

장욱진

자화상

186

128

까치

188

이규상

작품 A

130

장운상

첼로와 여인

190

이달주

귀로歸路

132

전혁림

192

이대원

134

정규

간이역

194

이마동

사나이(남자)

136

정종여

지리산 조운도智異山朝雲圖

196

이병규

온실일우温室一隅

138

정창섭

공방

198

이봉상

소녀

140

정현웅

소녀

200

이상범

아침朝

142

조병덕

해녀

202

추경산수秋景山水

144

조석진

추경산수秋景山水

204

이성자

달빛 속의 목장

146

조중현

우중구압雨中驅鴨

206

이세득

녹음綠陰

148

천경자

전설

208

이영일

시골 소녀

150

최영림

여인의 일지

210

이용우

계산소림溪山疏林

152

최우석

채소와 과일

212

이유태

화운和韻

154

최재덕

214

이응노

고궁 풍경

156

한묵

흰 그림

216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58

함대정

악사

218

해당화

160

허건

쌍계雙溪

220

이종무

자화상

162

허백련

정청송풍靜聽松風

222

이종우

인형이 있는 정물

164

홍종명

낙랑으로 가는 길

224

이중섭

흰 소

166

황유엽

어부의 꿈

226

소와 어린이

168

투계鬪鷄

170

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72

이쾌대

군상 IV

174

임용련

에르블레의 풍경

176

도판 목록

228

임직순

해바라기와 소녀

178

근대미술사 개론

234

장리석

그늘의 노인

180

근대미술사 연표

276

유영국



고희동

구본웅

권영우

권옥연

김  경

김규진

김기창

김병기

김영기

김영주

김용주

김용준

김용진

김은호

김인승

김종태

김주경

김중현

김환기

김흥수

나혜석

노수현

도상봉

류경채

문학진

박노수

박득순

박래현

박상옥

박성환

박수근

박승무

박영선

박항섭

배  렴

배운성

변관식

변종하

성재휴

손동진

손응성

심형구

안동숙

안상철

안중식

오일영

오지호

유영국

이규상

이달주

이대원

이마동

이병규

이봉상

이상범

이성자

이세득

이영일

이용우

이유태

이응노

이인성

이종무

이종우

이중섭

이쾌대

임용련

임직순

장리석

장  발

장우성

장욱진

장운상

전혁림

정  규

정종여

정창섭

정현웅

조병덕

조석진

조중현

천경자

최영림

최우석

최재덕

한  묵

함대정

허  건

허백련

홍종명

황유엽


고희동 자화상

유화 61×46cm 1915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현존하는 고희동의 자화상 세 점 가운데 하나이다. 화면 왼쪽 상단에 보이는 작가 사인과 함께, 걸치고 있는 의복과 부채 등을 통해 그가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졸업하던 1915년 여름에 완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무더운 여름, 방 안에서 부채로 더위를 식히면서 망중한을 즐기는 자신을 그린 이 자화상은 시원한 모시 적삼을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낸 파격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파격에도 불구하고 수 염을 기른 얼굴 모습은 근엄하다. 데생은 비교적 정확하지만, 기법의 표현상 가슴의 처리 등이 자연스 럽지 못하며, 그 때문인지 얼굴 표정이 다소 굳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뒤쪽 벽에 걸린 서양화 풍의 풍경화와 호화 장정으로 치장한 양서洋書가 꽂힌 책꽂이 등은 주인공의 신분을 가늠하게 해 준다. 이는 당시 개화된 지식인들의 풍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데 아마도 당시에는 서구 취향을 선호한 듯하다. 이 작품에서 사물의 순도純度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밝은 원색과 분할적인 터치는 당시 작가가 인상 파Impressionist 화풍에 관심을 두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을 통해 고희동의 당시 화풍은 물론, 서양 화가 유입되기 시작한 초기의 화풍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반투명한 모시의 질감과 이를 통해 보이는 신체의 표현은 매우 흥미롭다.

1886년 서울에서 태어나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서 프랑스어를 수학했다. 이후

고희동

1903년부터 1908년까지 궁내부 주사宮內府 主事 예식원 예식관禮式院 禮式官 등 관직을 지냈으며 이때부터 취미로

高羲東

서화를 시작하여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과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晉, 1853~1920을 사사했다. 1909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敎 서양화과에 입학하였으며, 1915년 졸업 후 귀국하여 휘문·보성·중동학교에서 유화를 가르쳤다. 국내에 새로운 미술 운동을 전개하고자, 1918년 서화협회를 창설하였다.

춘곡春谷 1886~1965

광복 후 대한미술협회장,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1948년 한민당韓民黨 상임위원, 민주당 고문, 민권수호연맹위원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혁명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약칭 국전國展) 창립과 함께 심사위원장을 맡았고, 1954 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다 이듬해에는 예술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심전과 소림의 화맥을 이었으나 일본 유학 시절 유화를 배워 온 그는,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수묵채색화로 전 환하여 전통적인 남종산수南宗山水 화법畫法에 서양화의 색채와 명암법을 응용하는 감각적인 화풍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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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로운 회화 창출을 위한 노력에 비해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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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친구의 초상

유화 65.5×53cm 1935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구본웅은 작가의 개성을 중시했던 1930년대 한국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us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 다. 〈친구의 초상〉은 요절한 시인 이상李相, 1910~1937의 초상화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반역’과 ‘거부’, ‘부정’의 대명사였던 이상의 파격적인 작품만큼이나 담대한 필치로 그려 낸 이 작품은 푸른색을 기본으 로 선명한 원색조原色調와 대담한 필선筆線의 격렬함이 돋보인다. 또한 대상을 단순화하거나 왜곡함으로 써 나타나는 형태의 파격을 통해 구본웅의 내면에 잠재된 감성의 울부짖음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나아 가 회색을 바탕으로, 그 위에 청색과 검은색을 조화롭게 운용함은 이지적이면서도 한결 우울하고 비탄 에 잠긴 분위기를 연출하여 시인 이상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잘 나타내었다. 이 작품을 통해 미술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1930년대 구본웅과 이상의 친화 관계를 알 수 있다. 새 로운 문화에 심취한 선지자로서 동지애를 나눴던 둘의 우정과 예술관이 작품 속에 녹아 있기에 회화사 이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형태 묘사를 뛰어넘어 전체적인 화면의 분위기를 통해, 문학인 이상의 자의식과 실존적 본 질에 다가가고자 한 태도가 돋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대상의 외면보다는 내면을 투시하고자 했 던 화가 구본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구본웅, 이 둘의 우정은 상호 영향을 주면서 서로의 예술을 심화시키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했 다. 꼽추와 결핵 환자라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아픔으로 승화하면서 황량한 시절을 훈훈한 우정의 온기로 감싸안은 셈이다.

구본웅은 개성을 중시하던 1930년대 한국 표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

구본웅

어났지만, 어렸을 적 유모의 실수로 허리를 크게 다쳐 평생 꼽추로 살아야 했다. 1923년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의

具本雄

이종우李鍾禹, 1899~1981에게 유화의 기초를 배우고 1924년 YMCA에서 김복진井觀 金復鎭, 1901~1940에게 조소를 배웠다. 그리고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약칭 선전鮮展)에서〈머리 습작〉 이라는 조각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했다.

서산西山 1906~1953

1929년 니혼日本대학 미술학과, 1934년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 본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주로 전위적 인 경향을 보였던 이과전二科展과 독립전獨立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과전에 입선 하였으며, 백만양화회(1930)와 신회화예술협회(1934)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목일회牧日 會(후에

목시회로 개칭)를 창립하여 식민 문화에 대한 도전과 이탈을 시도하였다. 미술비평에도 역량을 발휘하였

으나, 나중에 친일적인 글을 발표해 오점을 남겼다. 구본웅은 미술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교과서 편찬에 기여하는 한편, 인쇄소를 경영하며『청색』 이라는 미술전문지를 발간하였고, 1952년에는 서울신문에서 촉탁囑託 직으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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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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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보리 타작

극세밀 채색화로 한국 화단의 기린아로 등장한 운보 김기창은 광복 후 평생의 반려이자 예술적 동지인 우향 박래현을 만나 자기 작업의 면모를 다시 한 번 일 신하게 된다. 광복 후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기풍과 혁신에 눈을 돌린 운보는 분 석적인 방법을 통해 대상을 재구성하는 화풍을 실험하였다. 그는 시정 풍경이나 도회적 일상과 같은 우리 삶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후 활달한 운필을 통 해 대담한 생략과 대상의 특성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포착함으로써 환원적인 입 장에서 추상화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1956년 제작된 〈보리 타작〉은 그가 대상을 분석하고 이를 다시 구성하려는 입 체주의 화풍을 정착시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전까지 그가 다양한 실험으로 인해 신선하지만 다소 산만했던 화풍을 구사했다면 이 작품에서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화풍의 하나인 분석적 입체주의를 완성하게 되었다. 김기창은 객관적인 세계에 치우쳐 사실적인 묘사만을 하거나 혹은 주관적인 세계에 빠져들어 추상

종이에 수묵담채 84×267cm 1956년 개인 소장

적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공존, 이른바 ‘형사形似’와 ‘신사神似’의 겸비가 운


보 예술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대상의 존재가 유의미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세계가 전제되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꾸준히 삶의 주변과 일상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그의 관심이 어려웠던 시절 보리를 추수해서 타작하는 즐겁고 흥겨운 현 장으로 이 작품에 묘사되고 있다. 운보 특유의 활달한 필치로 단순 명쾌하게 드로잉한 후 담채淡彩를 올려 투명하면서도 율동감 넘치는 화면으로 이끈다. 강한 먹선의 윤곽선과 다양한 면의 변화로 빚어진 리듬감을 통해 이 작품은 정적인 전통 화풍에 새로 운 기운을 진작시켰다. 작품 속 동네 아낙들은 보리를 머리에 이고 나르며 한편에서는 열심히 절구질하고 보리 이삭을 훑고있는데 1950년대 후반 우리네 시골 풍경 그대로이다. 철없는 아이들이 아낙들의 뒤에 서 새를 모는 모습이나, 닭들이 이삭을 쪼는 모습에서 노동과 유희, 생존이 모두 어우러지는 한마당이 펼 쳐진다. 아울러 어렵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옛 시절의 정겨운 모습을 떠올리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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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산월山月

유화 130×105cm 195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일본 유학 시절 새로운 미술 운동에 심취하고 그 선봉에 섰던 수화 김환기는, 귀국 후 한국적 모티프를 통해 한국의 전통정신과 문인의 풍류와 감흥이 배어 있는 회화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생각을 담아 한국적인 유화를 그리고자 했다. 김환기는 고아高雅하며 곡진曲盡한 문장으로 한국의 정서와 역사, 미술사에 깊은 이해를 지녔던 김용준과 교우하면서 그의 남다른 안목과 우리 것에 대한 이해와 애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고, 같은 입장으로서 한국적 모티프를 통해 한국미의 원형을 구현하는 것에 힘쓰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김환기의 또 다른 작품 〈산월山月〉은 한국적 풍물로 대변되는 달, 매화, 항 아리, 여인, 산, 학, 나무, 사슴, 구름 등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소재들은 한국의 기와나 도자기에 그려진 장식무늬들이 양식화된 것이다. 김환기는 한국인의 오랜 정서를 통해 다듬어진 대상을 조형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독자적인 회화 세 계를 구축하였다. 이 작품은 스케치풍의 간결한 구도와 담백한 채색이 특징으로 화면에는 첩첩 산과 바 위, 그리고 구름이 있고, 달은 익살스럽게 산 밑에 걸려 있으며 마치 호수 표면에 비친 것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자연의 소재들은 화면 안에서 자유롭게 조형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고, 자연과 교감하고 있는 풍류적인 정서가 물씬 드러난다. 산과 달이 교차하면서 마치 수묵화의 선처럼 서로 여백을 주면서 어우 러지는 율동감은 부드러운 우리 산세와 완만한 형상을 상징한다. 또한 둥근 달은 산과 조화를 이루며 우리 전통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 다른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의 화면은 우울하다기보다는 맑고 투명하여 내면의 심층深層을 드러내 보일 것 같 다. 산이나 달, 조선의 도자와 같은 한국적인 소재는 김환기 회화의 상징과 같은 소재들이다. 그는 전통 문인화의 화제畵題인 산과 달, 매화, 사슴, 학 등을 소재로 하지만 문인정신을 계승하기보다 그 화제를 통해 한국의 풍류와 멋의 원천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환기는 1956년부터 59년까지의 파리 생 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자연의 형태를 더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추상적인 표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대담하고 율동감 있는 구조를 가진 〈산월〉의 화면은 밤하늘을 명상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화면의 극치로 이끌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늘과 바다는 동일하다. 바로 하늘은 우리의 심연을 상징하는 바다이자 자연이다. 우 리는 습관적으로 하늘과 바다는 파란색이라고 생각해 왔다. 누구나 바다를 떠올릴 때면 흔히 파란 바 다, 푸른 바다 그리고 블루를 연상한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남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아! 바다는 푸른 색이 아니라 청록색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가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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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유화 146×98cm 1964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수근 회화의 상징처럼 언급되는 소박한 마티에르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 초반에 들면 일정한 틀과 격을 갖추게 된다. 초기의 절제된 색채와 형태의 단순화를 시도하면서 이때부터 대상 의 외형을 화면에 견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한다. 대상들을 향한 데생은 마치 화강석이나 이끼 낀 자연 석을 연상시키는 마티에르와 함께하면서 평면으로서의 회화가 지니는 눈속임 기법의 한계를 넘어 새 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960년대 초반 평면을 위한 평면화를 위한 시도는 마치 마티에르로 조성된 캔버스의 표면에 종이를 오려 붙인 듯 콜라주 같은 느낌을 준다. 대상과 화면의 마티에르 두 요 소를 모두 존중한 탓으로 견고한 형태는 화면과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유리遊離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 그 가난을 업보처럼 지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그림으로 일관해 온 그의 삶은 너무도 애절하다. 박수근은 서민적인 삶, 우리 이웃의 지난한 시절의 삶의 모습을 가감 없 이 작가 특유의 마티에르를 구축하고 단조로우나 그윽한 깊이가 있는 색채로 표현해 ‘국민의 화가’라는 별호를 얻었으며 실로 이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화가이다. 아기를 업은 단발머리 소녀, 장에 갔다가 종 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아낙과 이를 기다리고자 동구 밖에 나와 선 소녀 등, 어쩌면 그렇게 우리 의 1950~1960년대의 보편적인 삶의 땀내를 이렇듯 생생하게 그려 낼 수 있을까. 〈할아버지와 손자〉는 그의 회화에서 주로 일하는 여성들이 주조를 이루는 데 비해 남성이 주인공으 로 등장하는 비교적 큰 크기의 작품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치 석고상처럼 부동의 자세로 앉아있는 데, 할아버지의 머리 방향과 손자의 머리 방향이 엇갈리는 작은 시도를 통해 동적인 느낌이 강조된 작 품이다. 할아버지의 흰색 한복과 아이의 옷이 통일감을 이루면서 더욱 소박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박 수근이 전형적으로 표현하는 요소인 화면 밖을 향하는 시선은 무언가 희구喜懼하는 듯 소망을 드러낸 다. 언뜻 느끼면 무기력한 듯하지만, 그 안에서 동세가 느껴지는 것은 박수근이 이룩한 화강석에 새긴 듯한 인물의 탄탄한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견고한 회화가 바로 우리 삶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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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 그려진 〈농가의 만추〉는 먹을 덕지덕지 쌓아 가며 화면 이곳저곳을 쥐어 주고 풀어 주는 긴 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짧게 친 검은색 붓질이 겹치면서 암묵暗墨으로 진행되지만 시원하게 뚫린 여백이 주는 강한 흑백 대비는 한국 산수화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장관壯觀이다. 농촌의 늦가을 풍경을 투박하지 만 섬세하게 그려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다. 가을걷이를 끝낸 한반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으 로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난 들녘은 조금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적당하게 여백을 두고 공간감을 주어 시원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정성을 쏟아 한 점 한 점 그린 탓에 변관식 특유의 적묵법積墨法이 가장 효과 적으로 빛을 발한다. 구도 면에서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을 사용하여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 록 배려하였다. 들녘의 세부를 묘사하기 위해 여러 방향에서 본 풍경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다시점 방 식’을 사용하여 정적인 풍경에 역동적인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굼뜬 필선에 다시 점을 찍어 변화를 시도하는 파선破線이 일품으로 기교적이거나 세련되었다기보다는 구수한 향토적 서정미를 물씬


변관식 농가의 만추晩秋

종이에 수묵담채 111×264cm 1957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풍기게 한다. 〈농가의 만추〉는 순박하고 서민적인 향취가 넘쳐 나는 소정 회화의 백미白眉이다. 소정은 근대와 현대, 지방과 서울 화단 사이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즉 최후의 어진화사御眞畵師 또는 황실의 벽화를 그렸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이당, 청전, 심산, 묵로 등이 법도와 원칙에 매여 있었다면 소 정은 황소고집으로 부지런하게 자기를 연마硏磨하고 표현했던 작가이다. 따라서 먹이 반복되고 중첩되 면서 드러내는 시커먼 먹색 그림의 ‘적묵’에서 ‘반골정신反骨精神’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그는 느낌보다는 진실을 중시했다. “이 땅 풍광이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라며 현장을 떠돌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지만 통음痛飮으로 세상에 분노하던 그는 전통 회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새로운 세상의 명과 암을 특유의 뚝심 있는 태도로 담아낸 작가이다. 98 99


오지호 남향집

유화 80×65cm 1939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 고도古都의 풍모와 독특한 자연을 가지고 있어 화가 오지호를 매료시켰다. 그는 개성시대만큼 평화롭고 그림에 몰두한 시기는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개성에서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는 이 당시 만주 여행을 통해 광활한 대자연을 흠뻑 느끼고, 옛 동양인들의 허무주의적 상념을 극복하였다. 원시의 자연 그대로인 만주는 초자연의 세계로 그에게 다가왔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인 상주의 화풍을 완성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만주 여행 당시 오지호는 위궤양을 크게 앓아 극단적인 단식을 통해 이를 극복했던 일이 있었는데, < 남향집>이 이때 완성된 작품이었다. 개성시대의 꽃처럼 민족 회화로서의 인상주의적 화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작품은 자신이 살던 개성 집을 그린 것이다. 태양이 빛을 발하는 오후의 일상을 극명하게 그려 내고 있는 이 작품에는 그의 둘째 딸 금희가 문 뒤에 수줍게 서 있고, 한가롭게 집에서 기르던 애 견 ‘삽살이’가 졸고 있다. 이 모습은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작가의 개성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동 시에 그의 인상주의적 회화의 완성을 보여 주는 귀한 작품이다. 청색과 보라로 처리된 나무의 그림자나 축대의 그늘에서 특히 그의 인상주의 미학의 완성을 볼 수 있 다. 색채로 표현된 그늘, 맑은 공기와 투명한 빛으로 구사한 밝고 명랑한 색조 및 자연미의 재인식은 프 랑스 인상주의 미학과 공통되는 것이다. 대상이 되는 초가집을 과감히 좌우로 절단시킨 구도와 원색의 터치를 태양광선의 변화에 따라 적절히 구사한 색채 역시 전형적인 인상주의 수법이다. 한편 작품에 보 이는 청색과 노랑 등의 향토색 짙은 색채는 훗날 호남湖南 지역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색감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인상주의 빛의 효과를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감성으로 전이시켜 우리 자연에 맞는 방법으로 일관해 온 작가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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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작품WORK

유화 38×45cm 1940년 개인 소장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적인 위치에 있는 유영국은 평생 순수추상의 영역을 지켜온 화가이다. 일찍이 일 본 유학 시절부터 추상 세계에 몰입해서 성과를 이룬 그는 1938년 일본 자유미술회우전自由美術會友展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회우會友로 선임되었으며, 1942년 군국주의의 탄압으로 창작협회로 개명될 무렵 까지 5회에 걸쳐 참여했다. 한국의 추상 화가들이 대부분 자연에서 주제를 택해 점진적으로 추상 또는 비구상의 세계로 나아갔던 데 반해 유영국과 이규상 李揆祥, 1918~1967 등은 처음부터 순수 기하학적인 요 소, 즉 원, 면, 선과 같은 조형의 원형적 요소를 통해 직접 비구상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 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환기의 추상과는 또 다른 일면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유영국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일반적인 그림 도구나 물감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판을 이용한 콜라 주collage, 혹은 사진을 이용한 독특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단지 흑백 도판 한두 장으로 전해질 뿐 원작은 망실되고, 현재는 작가의 기억에 의해 1996년에 재현된 작품만이 전할 뿐이다. 〈작품WORK〉은 1940년 당시 유화로 캔버스에 그려진 순수추상화이다. 작은 소품이지만 면과 면이 만 나면서 또 다른 면을 생성하고, 여기에 채색이 가해져 구성적인 화면을 조성한다. 색채와 엄격한 형태 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구성적 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 추상회화의 역사를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오늘의 감성과 지적 수준에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금욕적으로 엄격하고 단순하며, 그 안에서 밀도 높은 조형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경상북도 울진 출생으로 1938년 도쿄분카학원 유화과를 졸업했다. 재학 당시부터 주로 일본의 재야전在野展에 실

유영국

험적인 작품을 출품했다(1937~1942). 일본의 전위작가들과 함께 NBG 양화동인전을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김환

劉永國

기, 이규상, 이중섭 등과 1940년 자유미술전 서울전을 개최한 적도 있다. 그는 비대상적 추상으로 구성적인 화면 과 색조의 변주를 통한 기하학적인 순수추상이나 릴리프 회화Relief Painting를 시도하여 새로운 미술의 길을 개척

1916~2002

했으며, 한국 추상미술에 기여한 바가 크다. 1947년 김환기, 이규상 등 동인들과 신사실파전을 통해 주지주의主知 主義적

모더니즘의 확대를 꾀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3회로 중단되고 말았다. 1957년 황염수, 이규상, 정점식, 정

규, 박고석, 한묵 등과 다시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했다. 이때부터 그의 작업은 산, 길, 나무 등 자연적 소재를 거시 적인 시각으로 분할하여 추상적인 구성 요소로 사용하면서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강렬한 색채를 통해 지적 아 름다움과 음악적 울림을 자아냈다. 1962년 신상회新象會 창립에도 가담해서 일관된 추상미술로의 이상을 표명했고, 현대작가초대전(1958~1962), 한 국 미술대상전 등으로 이어지면서 확고한 추상미술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만년에는 서사적 장대함과 강한 순수 원색의 사용을 통해 보다 장식적인 측면이 강조되기도 하였지만, 강렬한 색채와 엄격한 기하학적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빚어내는 공명은 변함이 없다.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거쳐 196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 수가 되었다.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82년 대한민국문화 예술상, 1984년 보관문화훈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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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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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해당화

유화 228.5×146cm 1944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일제강점기 문화 통치의 한 수단으로 시행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는 1922년에 시작되어 1944년까지 총 23회 계속되었다. 《선전》이 낳은 최고의 화가 이인성이 마지막 《선전》에 출품한 작품이 바로 〈해당화〉이다. 화면 우측 바닷가에 피어 있는 해당화를 중심으로 나이 터울이 있는 자매로 보이는 소녀 셋이 S자 형 태로 화면에 서 있다. 이들은 각자 마주한 대상과 시선을 두면서도, 자세는 그림을 보는 이를 향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당화가 핀 바닷가에는 곧 비가 내릴 듯 먹구름이 몰려오고, 개 한 마리가 시간을 늘어뜨리며 지나간다. 소녀들의 무표정한 시선은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맨 뒤에 손가락을 입에 물 고 있는 소녀는 화병을 옆구리에 끼고 있고, 중간의 소녀는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해당화를 어루만 지듯 측면으로 서 있다. 맨 앞에 앉아 있는 소녀는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면서 더욱 깊은 공간감과 거리 감을 형성하여, 보는 이에게 의미심장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특히 화면 후면의 검은 바다와 먹구름 사이로 간혹 드러나는 햇빛과 맑은 하늘이 대비를 이루면서 화면의 분위기는 더욱 미묘하다. 게 다가 검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돛단배는 매우 생소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이 일제 군국주의軍國主義의 패배 또는 일본의 패망을 암시한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간절히 무언가를 희구希求하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민족 광복의 염원을 읽을 수도 있 다. 이러한 상상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는 황량한 모래사장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붉은 꽃을 피워 낸 해당화의 강인한 생명력이 바로 이 작품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이인성이 평소 구사했던 활달한 곡선의 단속적인 필치를 조각상처럼 단단한 구도로 바꾸 고 인물의 데생력을 증강시킨 후 견고한 색채를 부여함으로써 아카데믹한 방향으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언뜻 봐도 작품에 들인 시간과 공력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제작 시기와 맞물려 매우 독특한 느낌을 준다. 윤희순은 이 작품을 보고 “시끄럽고 열광적인 신흥 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나 냉정 하게 반성하고 고전으로 돌아가려 한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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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

구본웅

권영우

권옥연

김  경

김규진

김기창

김병기

김영기

김영주

김용주

김용준

김용진

김은호

김인승

김종태

김주경

김중현

김환기

김흥수

나혜석

노수현

도상봉

류경채

문학진

박노수

박득순

박래현

박상옥

박성환

박수근

박승무

박영선

박항섭

배  렴

배운성

근대미술사 개론 변관식

변종하

성재휴

손동진

손응성

심형구

안동숙

안상철

안중식

오일영

오지호

유영국

이규상

이달주

이대원

이마동

이병규

이봉상

이상범

이성자

이세득

이영일

이용우

이유태

이응노

이인성

이종무

이종우

이중섭

이쾌대

임용련

임직순

장리석

장  발

장우성

장욱진

장운상

전혁림

정  규

정종여

정창섭

정현웅

조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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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술의 근대와 근대성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국 근대미술의 재활을 위한 시론

┃ 시작하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국과 아시아의 정체성 탐구와 확립, 그리고 근대화와 근대성에 강한 집착을 보여 왔 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근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라고 인식해 왔던 것들이 하 나, 둘 보편성을 상실해 가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는 밖으로는 전통의 상실에서 오는 문제 의식의 발현이며, 세계와의 만남이 빈번해지면서 자신을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자아의 표출이다. 또한 세상의 변방에서 중심으 로 진입하고자 하는 의욕,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뒤쳐지지 않는다는 자존심을 은연중 강조하고자 하는 마음 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체성 혹은 근대성과 관련한 질문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찾아보면 그리 길 지 않다. 한국의 중세 시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에는 중국이나 일본 외의 타국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따라 서 우리의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고 타 문화와의 차이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즉 정체성에 위기를 느 낄 만큼의 문화적 충격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두되고 있는 근대성에 대한 질문은 한국이 더 이상 세 계 속에서 ‘은둔의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의 반영이며, 이와 같은 인식의 확장은 우리의 정체성이 근대화의 진 행과 반비례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그리고 중남미 국가에서는 ‘근대’라는 개념을 진보적이고 실용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다. 이와 동시에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훼손되고 전통이 마멸되어 간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근대화와 산업화를 추구하고 동경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모 순에 빠지는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눈’이자 ‘시대의 거울’인 우리의 근대미술을 통해, 우리에게 상처이자 영광이었던 근대화의 의미와 가치를 들여다보자.

한국 미술의 근대성의 의미 우리에게 근대성이라고 하는 단어는 ‘서구화’와 일맥 상통한다. 특히 한·중·일 삼국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권 국가들과 아프리카와 남미 등 제3세계 국가에서 근대화란 ‘서구화’와 ‘산업화’를 의미하고 문화적으로는 ‘서 구 모더니즘의 수용과 전개’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기점을 정한 다음 확실하게 ‘부러뜨릴 수는 없는’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근대의 기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근대란 보는 이와 학문의 영역에 따라 같거나 다를 수 있다. 근대를 다루는 분야마다 저마다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이란 용어도 근대화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대한제국 기까지도 우리 는 ‘서화書畫’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수묵화와 수묵채색 화가 주 를 이루던 전통 회화가 19세기 말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하면서 입체감과 원근법 등 서구 미술의 조형적인 요소들을 수용하고 이를 반영한 그림들이 제작되면서 자연스 럽게 ‘서화’는 ‘미술’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근대의 기점 문제는 한국 미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 로 인한 논쟁은 경우에 따라,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더디게 한다. 하지 만 그러한 논의 가운데서도 부정할 수 없는 점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근 대성이란 주어진 근대이며, 수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에서 한국과 아시아는 독특한 전통문화와 정치, 사회, 경제 등 사회적 요소들과 밀접 한 관계를 통해 근대를 형성해 나간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 치유력을 지니고 적자 생존適者生存을 운위하며 진화하듯이, 한국의 근대화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 게 우리 몸에 맞는 근대화의 틀을 생성하고 체화되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한국이 며 한국 사회인 것이다. 역사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진행형이라는 것을 인 식해야 한다. 근대화란 곧 새로운 것의 상징이며 혁신이고 혁명이었다. 그리고 문명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들이 단계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우리화’ 하는 과정 을 거쳐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근대적 가치와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다. 이는 우리 미술의 근대성에 관한 논의를 다루는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 점과 태도를 바탕으로 한국 근대미술의 진화와 형성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만들어가 기까지의 과정을 한국 미술사에서 명멸해 간 기관, 단체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 한국 미술, 근대로 접어들다

서구의 시민 혁명으로부터 비롯된 계몽주의啓蒙主義와 시민 사상, 인본주의人本主義와 같 은 사상들은 근대화의 상징적인 조건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근대사회적인 사 상들은 간과한 채 단순한 외형 비교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와 한국 미술의 근대화를 이야기해 왔다.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근원은 17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한국 미 술에 있어서는 커다란 변혁기를 이루는 19세기 후반이 실질적으로 외래 문화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문화적 틀을 교호하며 취사 선택하는 과정이자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 를 거치면서 조선의 유구한 문화적 전통은 서양의 종교와 제국주의, 실용과 합리를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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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 과학으로 인해 막을 내리고, 혼란과 치욕의 역사를 경험하기에 이른다. 19세기 초 대외적으로는 서학과 산업화를 앞세운 서양 세력이 밀려오고, 이에 따라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의 관 계로 이어 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내적으로는 양반과 상민의 엄격한 위계 질서와 조 상 숭배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 사회 기반의 갈등이 시작된다. 당시 조선의 뜻있는 이들은 이러한 변화들을 묵과하지 않았다. 위정척사론衛政斥邪論을 근간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전통을 확고하게 수호하며, 조선 침략을 위 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을 포함한 외세에 비장하게 항거하고 대적하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새로운 논리와 사유 체계를 갖춘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전통 사상을 시대적 조류에 편입 시켜 갱신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고, 전통적인 유가 사상은 새로운 해석과 자주적 논의를 통해 새로운 조선 의 사유 체계로의 변모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유학자들 중에 시대적 변화를 간파 하고 준비하는 인사들이 있었다. 더불어 세상이 서서히 바뀌고 상인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며 상업 도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사대부 가운데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원칙으로 하는 실학을 중시하는 이들이 생 겨났고, 의학과 상업 등에 종사하던 중인들은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서화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창조 자이자 소비자로 등장했다. 역관이나 의원과 같은 중인 계급 중에서 직업 화가로 활동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시화를 열어 서로의 창작 의지를 고양시키는 여항閭巷 문인 층이 등장한다.

중인들, 문화의 중심에 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여항 문인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사대부 문인들과 동렬에 이르게 되고, 사대부 문화의 하나였던 감상용 회화의 창작과 향유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그들은 회화의 향유를 확대시켰고, 이에 따 른 회화의 생산과 구조에도 큰 변화가 일며 이러한 흐름은 구한말을 거처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면서 근대 초기 전통 회화의 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와 함께 19세기 여항 문인들과 괘를 같이하는 신감각파 화가들 역시 우리 전통 회화의 근대성 확 보에 크게 기여한다. 새롭게 자라난 이들의 생활 감정과 미의식이야말로 19세기 후반을 관통하는 근대미술 의 정신이며, 한국 근대미술의 중요한 핵심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최한기崔漢 綺,1803~1877는

‘활동운화活動運化’라고 했는데, 이는 ‘살아 움직인다’는 뜻으로 동시대의 역동성을 압축한 개념이

며, 당대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담아낸 정의이다. 한국 전통 회화의 장르 중 특히 채색화는 오랜 동안 궁중과 사원에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종 교화, 장식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허나 18세기 들어 경제가 발달하면서 중산층이 등장하고 이들이 문 화적 소비자로 자리하면서 미술이 대중문화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경제 구조의 변화에 따라 미술 문화의 생산과 소비층이 확대된 것이다. 민간 생활과 그 미의식을 반영하는 당시 채색화는 장식을 최우선시하며, 생 활 속의 신앙을 소재와 주제로 삼는 오늘날의 ‘민화’였다. 하지만 장식적이며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의미를 지닌 탓에 민간으로 널리 퍼져나간 민간 장식화는 20세기 들어 점차 시들해 갔다. 식민 치하에서 장식은 사치였을 것이고, 기독교가 세를 더하면서 생활 속 신앙도 점차 바뀌어 간 때문으로 여겨진다.


서양 미술과의 조우 그런데 19세기 일어났던 변화는 실은 17세기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병자호란으로 청 국의 볼모가 된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는 베이징으로 천도한 청나라의 도르곤多爾 袞, 1612~1650과

함께 베이징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 아담 샬

Adam Schall, 1591~1666을

만나 천문과 역법, 과학과 관련된 지식을 얻었다. 그는 천주교를

접하면서 서양 문명을 경험하고 천주교당의 벽화를 통해 서양 미술의 생생한 원근법 과 명암법을 체험했다. 이후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중국의 화원 화가 맹영 광孟永光,1590~1648의 국내 활동도 한국 미술의 양식적인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 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세기 말 유화 기법이 출현하기 전 내한했던 외국인 화가들의 작품도 새로 운 재료와 조형 기법으로 한국 미술의 본격적인 변화를 유도했다. 세기말 조선을 방 문했던 화가들을 살펴보면, 헨리 사베지 랜드Hanry Savage Lander, 1890~이하 내한연도, 콘스탄스 테일러Constance J.D. Tayler, 1894, 피츄E.H. Fitchew, 1894,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99, 레미옹Remion, 1900, 켐프E.G. Kemp, 1910, 엘스펫 키츠 로버트슨 스코트Mrs. Elspet Keith Robertson Scott, 1919, 엘리자

베스 키츠Elizabeth Keith, 1919 등이 있다. 이후에도 서양 화가들의 내한은 이어졌는데, 폴 자클레Paul Jacoulet, 릴리안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 윌리 세일러Willy Seiler 등이 그들이다. 나아가 이들 서양 화가들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전통 회화의 변혁을 내부에서 꾀한 이들도 있다. 18세기를 살았던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김두량金 斗樑, 1696~1763,

변상벽卞相璧, 생물년 미상, 강희언姜熙彦, 1710~1784,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은

과감한 원근법과 명암법 등을 차용해서 새로운 사경寫景의 세계를 열었다. 천주교 신 자이자 화가로서 다수의 성화를 제작하고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순교한 루 가 이희영李喜英, ? ~1801은 사실적인 대상 묘사와 표현으로 작품에 성가를 더했다. 그리 고 마치 사진처럼 정확한 형태 묘사와 음영 기법으로 대상의 리얼리티에 접근하는 방 식의 초상화를 제작한 채용신蔡龍臣, 1850~1941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때 김홍도의 작 품으로 알려졌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서양의 개를 그린 <맹견도>의 경우도 당시 서양 미술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열기를 알려 주는 자료이다.

┃ 1910년대 - 근대와 국권 상실

조선의 개항을 두고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인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 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다. 아울러 일본은 1904년 다시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대한 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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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적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권리를 획득하고, 대한제국의 국가 통치에도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마침 내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토지와 인력까지 징발당하게 되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재무와 외무 부문에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받아들이게 되고, 사실상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1905년 11월 일본은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 관리 들을 매수하여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맺는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한 이름뿐인 나라로 전락 하고 말았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킨 후 순종을 즉위시키고, 7월 24일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항일운동을 탄압했다. 하지만 조선의 민초들은 굴하지 않고 곳곳에서 무장을 하고 항거를 했다. 일 본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여 항일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후 일 본은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 데라우치는 강압 정책을 실시하기로 하고 무단 통치의 한 방법으로 헌병경찰제를 시행했다. 일본은 전국의 경찰 업무를 장악하고 8월 16일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의 수락을 채근한다. 1910년 8월 22일 8개조 로 된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되었다. 이 조약의 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 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 준다.”는 것이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 전히 상실하고,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미술의 역사와 일반의 역사가 같은 순로를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미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합으로 ‘시대의 거울’이자 ‘역사의 증인’이다. 미술은 시대를 기록 하고 시대성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오늘을 담아 내일에 전하는 타임캡슐 같은 사회적, 역사적 역할을 한다. 미 술이 아름다운 대상을 단순하게 그려서 담아내는 것이라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그럼 점에서 미술은 사회적이 며 역사적이다.

근대, 근대미술의 기점 1910년대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에게 미술이란 사치이며 현실 도피의 수단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론 우리 고유의 미술을 세우고 전개하는 것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아울러 일제에 저항하는 하나 의 방편으로 인식하는 입장도 있었다.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서양의 근대를 도입 한 점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것과의 공존을 위한 절충과 적용 그리고 보완과 적응을 통 해 스스로 근대와 근대성을 만들어 내고 획득했던 것이다. 한국 미술의 근대기로의 이행은 타율적인 측면이 강하며, 대체적으로 일본 유학을 통해 새로운 미술 양식을 흡수했다. 이에 따라 1915년 춘곡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유화를 익히고 귀국한 시기를 근대 미술의 기점으로 삼는 단선적인 규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시선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현상적인 사실에만 근 거한 것으로 한국 근대미술의 실상을 과도하게 외세 의존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은 개인을 넘어서는 것으로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한반도에서의도 자생적인 탐구와 타


생적인 자극의 총합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 내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이미 우 리 곁에 다가와 있었다. 배운영이 청나라로 유학했던 것과 이종찬이 미국 핑햄미술학 교로 유학했던 사실 들도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게다가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의 미 술을 습득한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을 비롯한 1910년대 활동한 유화가들의 적극적 인 태도와 움직임은 이후 전개되는 한국의 근대미술, 특히 유화의 형성과 흐름에 상 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비록 이들의 화풍이 일본 관학파 화가 들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인상파 또는 일본화된 외광파外光派 화풍을 지니는 한계 가 있더라도 말이다. 게다가 구미로 유학을 떠났던 이종우, 나혜석, 임용련, 백남순, 배운성 등은 일본 유학파들 보다 좀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 독창적인 작 품 세계를 만들어 간다. 특히 이종우 같은 이는 유럽의 아카데믹한 기본기를 구사함 으로써 자칫 새로운 조형적 실험이 지나쳐 난삽해질 수 있는 상황을 잡아 주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화단의 형성 일제의 병탄 속에서도 우리 미술과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문인화가 윤영기尹永基 는 전통 서화의 계승과 후진 양성을 목표로 1911년 서울의 중학동에 ‘서화미술원’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 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서구의 아 틀리에 교육 방식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조선 황실의 지원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완용李完用, 1858~1926에게 운영권이 넘어갔는데, 이완용은 자신의 문화적 기반으로 서화미술원을 활용하며, 명칭도 ‘조선서화미술회강습소’로 변경했다. 학제는 3년 과정으로 4회에 걸쳐 교육생을 배출했는데, 조석진과 안중식 등이 강습을 했고 변관식卞寬植, 김은호金殷鎬, 오일영吳一英, 이용우李用雨, 이상범李象範 등 이 수학했다. 1918년 제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1920년 6월 문을 닫았다. 1918년에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귀국한 고희동의 주도로 선지적인 일군의 서화가들이 ‘서화협회’를 창립했으나, 실제 활동은 1921년에야 시작된다. 3·1만세운 동 후 일제가 탄압을 하면서 활동에 제약이 있었고, 회장 직에 있던 안중식과 조석진이 잇따라 타계하면서 지도층의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화협회는 근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미술 단체이며, 미술인들이 모여 이른바 화단畫壇을 형성한 것만으로도 그 의미 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서화협회는 1936년까지 존속되었는데, 3·1만세운동 등 민족주 의 이념이 강화되면서 조선성이 강조되고, 민족 미술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던 시기에 설립되어 미술을 사회 전반으로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하여 미술 전 시, 미술 도서 간행, 미술 교육 등을 천명했다. 특히 1921년 4월에 열린 창립전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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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전》은 창작과 감상이라는 근대적 제도를 최초로 실현한 것으로,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유의미한 ‘사건’이었다. 나아가 이 전시는 일반인들이 미술을 감상하고 소유할 수 있는 미술 소비 행위의 기회를 제공했다. 드디어 조선 미술이 근대성을 획득하여 만인을 위해 존재하는 미술이라는 문화적 보편성을 갖게 된 것이다.

┃ 1920년대 - 근대미술의 여명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의 무단 통치는 막을 내리고 문화 정치로의 전환을 통해 조선의 정세는 새 국면 을 맞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은 무단 통치의 교묘한 연장에 불과했다. 1919년 8월 3대 조선총독에 임명된 일본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는 ‘문화의 발달과 민 력의 충실’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곧이어 악명 높던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꿨는데, 실제로 이는 경 찰 업무와 군사 업무를 분리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반일 운동을 탄압하고자 경찰과 군대를 점차 강화하여 경찰의 숫자는 배로 늘었고, 헌병 역시 민족 운동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했다. 이런 가운데 언론·출판·집 회·결사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한국어 신문이 창간되었다. 또한 관리나 교원 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인을 관리로 임용하는 한편 교육·산업ㆍ교통·위생·사회 행정의 개선을 통한 국민 생활의 안정과 복리의 도모, 지방 자치를 위한 조사·연구 착수와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는 듯 포장했 다. 하지만 이는 우리 민족을 회유하고 일제의 지배에 따르도록 하려는 교활한 수단에 불과했다. 3·1만세운동은 국민 모두에게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3·1만세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노동·농민· 청년·여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중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고, 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개화자강파開化自 强派의 애국 계몽 운동과 같은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어 1920년대 전반에는 이념과 노선에 따라 분

화되는 양상을 보였던 민족 운동 진영의 통합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다. 그리고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 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국내 민족 유일 당인 신간회가 결성되기에 이른다.

근대적, 자주적 미술 단체의 등장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는 미술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18년 창립하여 1921년 열린 《서화협회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그 기대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꿈속에 있던 조선 서화계를 깨우는 첫 소리-서화협회의 첫 번 서화전람회는 예정과 같이 일일 오전부터 계 동 일번지 중앙학교에서 첫날 열었다. 침쇠하기 거의 극한에 이르렀다 할 우리의 서화계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첫 금을 그으랴 하는 이 새 운동이 과연 어떠한 성적을 보일는지 이 전람회의 성공과 실패는 조선 서화계에 대 하여 중대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 무릇 개인 개인의 작품을 분별하여 세세히 비평을 하려면 장처 단처 가 서로 적지 않겠지마는 진열실의 전체를 통하여 눈에 띄는 색채는 매우 부드러운 감각을 준다 …… 우리의


예술도 아주 쇠하지는 아니했다. 힘만 쓰면 넉넉히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고 오히려 새 광채를 낼 수가 있다는 믿음을 굳게 주는 것이 상쾌하다……(후략)

기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전시회의 수준이 기대 이상으로 높았던 것으로 생각 되는데,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은 ‘빈곤한 시대라고 예술까지 가난해야 한다는 것은 잘 못된 생각’이라는 지적을 통해 일본 화풍에 맞서는 자주적 태도를 힘주어 강조했다. 특 히 당시 기사에서 《서화협회전》에 대해 눈에 띄는 부분은 조선 서화계의 침체가 극에 달했다는 평가를 넘어 이 전시를 통해 조선 서화계가 새로운 출발을 예고하고 기대하 는 모습이다. 또한 서화계의 미래가 이 전시의 성패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데, 전시라 는 새로운 형식이 주는 충격을 넘어 미술계의 미래에 대한 기대도 대단한 것이었다. 언론들은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황량’, ‘침체’, ‘폐허’라는 말로 규정했었다. 동아일 보는 장문의 사설에서 《서화협회전》을 ‘다시 일어나는 첫 금을 그으랴 하는 이 새 운 동’ 또는 ‘황막한 폐허의 일우에 비로소 건설될 소궁전의 설계’ 등으로 규정하면서 기 대를 드러냈다. 《서화협회전》이 성황을 이루자 일제는 다음 해인 1922년 조선총독부의 주최로 일 본의 《제국미술원전(이하 제전)》을 모체로 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를 창설 했다. 《서화협회전》의 경우 순전히 조선인 서화가들의 단체로 회원전의 성격을 지닌 반면 《선전》은 공모전의 형식을 지닌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관호나 나혜석의 개 인전이 열렸지만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시가 열린 것은 《서화협회전》에 이어 《선전》 이 처음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침탈과 발전, 양날의 칼 1922년 문화 정책을 표방하며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선전》은 동양화ㆍ서양화ㆍ조 각ㆍ서예ㆍ사군자 5개 분야에 걸친 최대 규모의 종합 미술 공모전으로 조선의 화가는 물론 내지內地 즉 일본의 화가들까지 참여 가능했다. 운영 방식은 일본의 《제국미술원 전》을 따라 공모 심사의 입선, 낙선 및 시상제를 채택했으며, 그 절차 역시 제전에 준 해 운용했다. 이후 《선전》은 조선 화단의 등용문으로, 근대적인 시각 문화의 소비처로 작동했지 만, 한편으로는 조선인에게 일본의 ‘식민지 근대성’을 효율적으로 내면화시키는 수단 이 되기도 한다. 1922년 제1회 전시를 시작으로 1944년까지 지속되는 동안 한국 화 단의 형성과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한국 미술의 왜색화, 식민지화 그리고 아카데믹한 보수적 미술이 중심이 되는 경향으로 흘러간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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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

구본웅

권영우

권옥연

김  경

김규진

김기창

김병기

김영기

김영주

김용주

김용준

김용진

김은호

김인승

김종태

김주경

김중현

김환기

김흥수

나혜석

노수현

도상봉

류경채

문학진

박노수

박득순

박래현

박상옥

박성환

박수근

박승무

박영선

박항섭

배  렴

배운성

근대미술사 연표 변관식

변종하

성재휴

손동진

손응성

심형구

안동숙

안상철

안중식

오일영

오지호

유영국

이규상

이달주

이대원

이마동

이병규

이봉상

이상범

이성자

이세득

이영일

이용우

이유태

이응노

이인성

이종무

이종우

이중섭

이쾌대

임용련

임직순

장리석

장  발

장우성

장욱진

장운상

전혁림

정  규

정종여

정창섭

정현웅

조병덕

조석진

조중현

천경자

최영림

최우석

최재덕

한  묵

함대정

허  건

허백련

홍종명

황유엽


연도

1900

근대 유화 ˙ 프랑스 도예가 레오포드 레미옹(萊米翁, Leopold Remion) 내한, 관립공예미술학교설립

국내 미술

국외 미술

˙ 채용신, 조석진〈영조대왕 어진〉이모, <고종황제 ˙모네,〈수련〉첫 발표 어진> 제작 ‌ ˙쇠라 회고전 ‌ 프랑스 미술 100년전 ˙ ‌ ˙피카소, 청색시대 시작 ‌ 파리만국박람회 개최 ˙

1901

‌ 안중식, 일본에서 2년 만에 귀국 ˙

‌ 로트렉 사망 ˙ ‌ ˙낭시 화파 결성

1902

‌ ˙조석진·안중식, 고종과 왕세자의 어진 그림 ‌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 남산에 화실 개설 ˙

‌ ˙로트렉 회고전 ‌ 오토 바그너,‘디자이트’사옥 건축 ˙

1903

‌ 고갱, 피사로 사망 ˙ ‌ ˙프랑스, 살롱 도톤 창립 ˙ 오스트리아 빈, 공예합동제작소 <비엔나 공방> 결성

1904

˙ 지운영, 유화를 배우기 위해 청국 상해로 떠남 ‌ ‌ ‌‌‌ ‌‌‌‌˙이응노·김용준·박생광 출생

1905

‌ 이종찬, 미국 유학(미국 핑햄미술학교) ˙

‌ 살롱 도톤, 세잔 전시회 ˙

‌ 유길준의『노동야학독본』 에 판화(삽화) 수록 ˙

‌ 살롱 도톤, 야수파 전시회 ˙ ‌ ˙드레스덴에서 다리파(브뤼케) 결성 ‌ 알프래드 스티글리츠, 뉴욕 5번가 291화랑 개설 ˙

1906

1907

‌ 김유탁, 서울 대안동에 수암서화관 개설 ˙ ‌ 양기훈,『대한매일신보』 에 <혈죽도> 발표(판화) ˙

‌ 세잔 사망 ˙ ‌ 살롱 도톤, 러시아 회고전 ˙

‌˙관립농상공학교를 관립공업전습소로 개편 ‌ 김규진, 일본에서 사진술 배워옴 ˙

˙‌ 1906~1909 피카소 흑인미술 시대

‌ ˙평양의 교육서화관, 협성서관으로 개칭 ‌ 이왕가박물관 창설(창덕궁) ˙

‌ ˙세잔 회고전 ‌ 표현파 그룹, 다리파 제1회전 ˙

‌ ‌ 피카소,〈아비뇽의 처녀들〉발표 ˙대한문 파노라마관에서 회전화(전경화)전시 ˙ ‌ 클림트,〈다나에〉발표 ˙ 김규진, 현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천연당 사진관’ ˙ 개설 ‌˙경성박람회 개최

1908

‌ ˙김관호, 일본 유학

˙‌ 조석진, 공업전습소 강사 취임 및 민간 한성서화관 전속 화사(畵師)로 활동 ˙소학교용 교과서『도화임본』(이도영 그림) 발행 ˙한성미술품제작소 설립

‌ ˙입체파 탄생 ˙ 브라크, 칸바일러 화랑에서 개인전(입체파 작품 발표)


국내 일반

국외 일반

‌ 파리만국박람회 정식 참가 ˙ ‌ ˙만국우편연맹 가입

‌ 영국, 여성 해방 운동 ˙ ‌ ˙중국, 북청사변

‌ 한강 철교 기공 ˙

‌ 남아프리카공화국, 보어전쟁 ˙ ‌ ˙제플린, 경식 비행선 발명

국내 문화 ‌ 최초의 양악식 군악대 창설 준비 ˙

국외 문화 ‌ 프로이트,『꿈의 해석』출간 ˙ ‌ ˙앙리 베르그송,『웃음』출간 ‌ 조셉 콘라드,『로드 짐』출간 ˙ ‌ ˙푸치니의 <토스카>, 로마 공연

‌ 미국, 최초의 전신전화 발명 ˙ ‌ 금 본위제의 화폐 조례 공포 ˙

‌ 중국, 11개국과 강화조약 ˙ ‌ ˙러시아, 성-상테부르그 학생 반란

˙ 왕실 군악대 교사로 독일인 에카르트 초빙

‌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 ˙ ‌ ˙마르코니, 최초의 무선전신 발명 ‌ ˙서울-인천 간 장거리 전화 개통 ‌ 하와이 이민 시작(93명) ˙

‌ ˙영·일 공수 동맹 ‌ 프랑스, 전국 가톨릭 학교 폐쇄 ˙

‌ 베르디 사망 ˙

‌ ˙지석영 등 국문학교 설립 ‌ 허가주의 채택한 출판법 공포 ˙

˙ 독일 여성 손탁, 서울 정동에‘손탁호텔’ 건립 운영 ‌ 파나마, 콜롬비아로부터 독립 ˙ ‌ ˙라이트 형제, 첫 비행 성공

‌ 서울 수도 시설 착공 ˙ ‌ ˙황제의 승용차, 미국에서 첫 구입

˙ 퀴리 부인, 라듐 연구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1차 한·일 협약, 외교권, 재정권 ˙세계 상실

‌ 러·일 전쟁 발발(1904~1905) ˙ ‌ ˙암스테르담, 만국사회주의자 대회 ‌ 파블로프, 노벨상 수상 ˙ ‌ ˙오프셋 인쇄 발명

˙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한국 정부 ‌ ˙러시아 혁명 자주권 상실 ‌ ˙노르웨이 독립 ‌ 경부선 개통 ‌ 프랑스, 정교 분리법 재정 ˙ ˙

‌ 통감부 설치 ˙ ‌ 최익현, 대마도에서 단식하다 순국 ˙

‌ ˙앙드레 지드,『배덕자』출간 ˙ 프랑크 베데킨트, 연극〈판도라의 상자〉 공연 ‌ 멜리에스, 영화〈달세계 여행〉제작 ˙

‌ 덴마크와 통상조약 체결 ˙ ˙‌ YMCA 발족

‌ 경부선 완공 ˙ ‌ 세브란스 병원 개축 ˙

‌ ˙토마스 만,『부텐브르크 일기』출간 ‌ ˙라벨,〈물의 유희>, 파리 연주

˙ 선교사 길레트, 평양 숭실학교에 최초로 야구 도입

‌ ˙크로체,『크리티카』창간 ‌ ˙카루소, 뉴욕 공연 ‌ 이사도라 던컨,〈목가적 춤〉 , 파리 공연 ˙

『대한매일신보』 『코리아 , 데일리 뉴스』 ‌ ˙ ˙체홉의〈벗꽃동산〉초연 창간 , 밀라노 스칼라 ˙ 푸치니의〈나비부인〉 좌에서 초연 ˙ 한국 최초로 영미연초회사 창고에서 활동 사진 공개 ‌ 창가 과목이 교과 과정에 채택됨 ˙ ‌ 이용우, 보성전문학교 창설 ˙ 에 ˙ 장지연,『횡성신문』 「是日也放聲大哭」게재

‌ 로맹 롤랑,『장 크리스토프』출간 ˙ ˙ 프로이트,『성 이론에 관한 세 가지 시론』출간

‌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 발표

‌ 김인식, 학도가 작사·작곡 ˙

‌ 드뷔시〈바다〉 , 파리 연주 ˙ ‌ , 비엔나 공연 ˙슈트라우스〈살로메〉

‌ ˙헝가리 총선거 ‌ 영국, 사회복지 법률 제정 ˙

‌ 주시경,『대한국어문법』간행 ˙ ‌‌‌ 이인직 신소설「혈의누」 『만세보』 , 에 ˙ 연재 시작

‌ 릴케,『이미지』출간 ˙ ‌ 라벨,〈스페인 랩소디〉발표 ˙

‌ ‌ ˙토지·가옥 증명 규칙 공포 ˙프랑스, 드레퓌스 복권 ‌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대한도서관 개관 ‌ ˙ ˙파리, 계엄령 선포 ˙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嚴妃), 진명여학교 설립

˙ 월간『가뎡잡지』3호 표지, 2칸 형식의 만화, 현존 최고의 우리 만화

‌ ˙한·일 신협약 ‌ 헤이그 밀사 사건 ˙

‌ ˙노·일 협약 ‌ 삼국협상 ˙

‌ ˙이인직,『혈의누』간행 ‌ 단성사, 연극 광고 ˙

‌ ˙카플링, 노벨문학상 수상 ‌ 베르그송,『창조적 신화』출간 ˙

‌ ˙안창호·이갑, 신민회 조직 ‌ 국채보상운동 ˙

‌ ˙만국평화회의 개최 ‌ 뉴욕, 금융 공황 ˙

˙ 원각사에서 프랑스 파테社, 고몽社의 단편영화 상영

‌ ˙윌리엄 제임스,『실용주의』출간 ‌ 음악가 그리그 사망 ˙

‌ ˙일제, 보안법 공포 ‌ 일제, 조선 군대 강제 해산 ˙

‌ ˙뉴질랜드, 영국에 합병 ‌ 파리, 소득 과세 원칙 채택 ˙

‌ ˙최초의 목사:한석진, 서경조 등 배출

‌ ˙뤼미에르 형제, 컬러 사진 개발

‌ ˙전국에서 항일의병 봉기 ‌ 전보에 한글 사용 ˙

‌ ˙미·일 신사협정 ˙ 보스니아 위기, 제1차 세계대전의 단초가 됨

‌ ˙최남선, 잡지『소년』창간 『노동야학독본』 에 만평 형식의 만화 ˙ 등장

‌ 런던, 여성의 참정권 인정 요구 시위 ˙ ‌ 앙리 파르망, 최초로 선회 비행 성공 ˙

‌ 교과서 도서 검정 규정 공포 ˙ ˙ 최초의 신극, 이인직의「은세계」 원각사에서 공연

‌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 ˙최초로 탱크 개발

˙ 스튜어트 블랙톤, 애니메이션 기법의 영화 <유쾌한 얼굴> 제작

‌ ˙최초의 국립극장 협률사 개장 ‌ 교가 제정 ˙이화학당, 최초로

‌ ˙멜리에스, 영화〈해저2만리〉제작

‌ ˙막심, 고르키,『어머니』출간 ‌ 아폴리네르,『마법사』출간 ˙ ‌ ˙무소르그스키,〈보리스 고두노프〉발표 ‌ 스트라빈스키,〈불꽃〉발표 ˙ ‌ ˙에밀 콜, 최초의 영화 발표

‌ 협률사, 활동사진과 기무(妓舞)상연 ˙

276 277


연도

1909

근대 유화

국내 미술

˙ 고희동, 일본으로 건너가 10월 도쿄미술학교 입학 ‌ ˙덕수궁 석조전 준공 ‌ 이종찬, 미국에서 미술유학 마치고 귀국 ˙ 학부 검정 교과서 도서 종목, 제도교본 ˙ 『중등용기화법 』발행 ‌ 김찬영, 일본으로 건너감 ˙ ‌ ˙한묵사 개업

국외 미술 ‌ 마리네티,‘미래파’선언 ˙ ‌ ˙부르델,〈활 쏘는 헤라클레스〉발표 ‌ 뮌헨, 신미술가협회 창설 ˙

‌ ˙제1회 관립공업전습소 졸업식

1910

˙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 일본인의 상공회의소에서 회화전람회 개최 ‌ ˙이원자, 일본 도쿄에서 여자 수예과 졸업, 귀국 ˙ 한성미술품제작소,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명칭 변경

1911

‌ 김관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 ˙

‌ 경성서화미술원 창립 ˙ ‌ ˙석굴암 발견 ˙ 야마모토 바이가이(山本梅涯), 현 을지로 5가 오장동에 양화속습회 개설

1912

1913

˙ 김찬영, 고희동과 김관호에 이어 세 번째로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

‌ ˙나혜석, 도쿄여자미술학교 양화 전공 입학

‌ ˙김은호, 서화미술회 입학 ‌ ˙조선서화미술회 창립

‌ ˙뮌헨, 청기사 1회전 ‌ 밀라노, 미래파 1회전 ˙ ˙ 칸딘스키,『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출간 ˙ 피카소·브라크, 종합적 큐비즘 시대 돌입, 파피에 콜레, 콜라주 기법 시도 ‌ ˙파리, 제1회 입체파 전시회 ‌ 들로네, 비객관 미술 창안 ˙

˙ 김규진, 천연당사진관에 서화 매매 영업을 위한 ‘고금서화관’병설

˙ 뉴욕, 미국 최초의 국제 근대미술전, 아머리 쇼 개최

˙ 서화미술회, 남산에 위치한 국취루에서 서화대전람회 개최

‌ ˙라리오노프, 광선주의(Rayonnisme) 선언 ‌ 뒤상, 첫 번째 레디메이드〈자전거 바퀴〉발표 ˙

‌ 기성서화미술회, 평양에서 발족 ˙

1914

‌ ˙칸딘스키, 최초의 추상화 발표 ‌ 앙리 마티스,〈춤〉 〈음악〉 , 발표 ˙

˙ 이용우, 오영일, 서화미술회 제1기생으로 졸업(畵科) ‌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서화미술회 입학 ‌ ˙츠치 히사시(辻永), 경성호텔에서 유화 개인전

‌ ˙오귀스트 마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사 ‌ 일본, 이과회 창립 ˙ ‌ ˙가우디, 바르셀로나의〈구엘공원〉조성

˙ 경성서화미술원, 이완용에 의해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로 개편

1915

‌ ˙고희동, 도쿄미술학교 졸업 ‌ 고희동, 김관호 공진회전람회 출품 ˙

‌ ˙김은호, 서화미술회 제2기생으로 졸업(畵科) ‌ 김규진‘서화연구회’설립 ˙ ˙ 서울의 일본인 양화가들‘조선 미술협회’조직 및 전람회

‌ ˙뒤샹·피카비아, 미국으로 감 ‌ 말레비치,‘절대주의 선언’발표 ˙ ‌ ˙아르프, 콜라주에 의한 작품 발표 ‌ 전위 잡지『291』발간 ˙


국내 일반 ˙ 안중근 의사,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살해 ‌ ˙청·일조약 ‌ 한국은행 설립 ˙

국외 일반 ‌ 상해, 만국아편회의 개최 ˙ ‌ ˙미국과 캐나다, 해상 경계 결정 ˙ 루이 블레리오, 최초의 영불해협 비행 횡단

국내 문화 ‌ ˙창덕궁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공개 『대한민보』 창간호, 이도영 신문만평 ˙ 연재 ‌ 유길준『대한문전』발간 ˙ ‌ ˙출판법 공포

국외 문화 ˙ 셀마 라게를뢰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 ‌ ˙릴케,『말테의 수기』출간 ‌ 레닌,『유물론과 제국주의』출간 ˙ ‌ ˙러시아 발레단, 파리 공연

˙ 최초의 합창단, YMCA 강당에서 〈할렐루야〉공연 ‌ ˙일진회, 원각사에서 국민 대연설회 개최 ˙ 미국인 콜브란, 전기회사 창고에서 활동사진 관람소 개장 ‌ ˙한·일합방 ‌ 일제, 조선총독부 설치 ˙

‌ ˙미국, 록펠러 재단 설립 ‌ 프랑스, 노인연금 설치 ˙

‌ ˙안중근 의사, 여순 감옥에서 사형당함 ‌ 미국에서 '대한민국민회' 조직 ˙

‌ ˙남아프리카연방 성립 ‌ 샤로트, 남극탐험 시도 ˙

‌ ˙최초의 서양식 약국, '인수당' 개업

‌ ˙진공관을 사용한 라디오 발명

‌ ˙주시경,『국어문법』박문서관에서 간행 ‌ ˙톨스토이 사망 「봉선화」 , 「모란병」 , ‌ 클로델,『다섯 개의 장편 시가』출간 ˙ 이해조,「자유종」 ˙ 발표 ˙ 에즈라 파운드『신고전주의 문학 정신』 ‌ 이화학당, 4년제 대학과 신설 출간 ˙ ˙ 최초의 상설영화관, 경성고등연예관 개설

‌ 레이몽 루셀,『아프리카 인상』출간 ˙ ‌ ˙타고르,『서정적 봉헌』출간

‌ 일본인 극장인 남성사 개관 ‌ ˙ ˙크로체,『미학의 제문제』출간 ˙ 우리나라 배경으로 한 단편 활동사진 ˙ 샤를 페기,『잔다르크 자비의 신비』출간 〈한국관〉 이 일본인(吉潭商店) 영사반에 ‌ 스트라빈스키의 발레〈불새〉 , 파리 공연 ˙ 의해 제작됨 ‌ 조선교육령 공포 ˙

‌ 영·일동맹 개정 ˙ ‌ ˙청, 신해혁명 ‌ 외몽고, 독립 선포 ˙ ‌ ˙아문센, 남극 탐험

‌ 일제, 조선 부동산 등기령 제정 ˙ ‌ ˙일제, 장애특수학교 제생원 관제 제정

‌ 발칸전쟁 발발 ˙ ‌ ˙중화민국 수립 ‌ 프랑스와 독일, 국경 협정 조인 ˙ ‌ ˙모르코, 프랑스 보호령이 됨

˙ 재미 한인 독립운동단체‘흥사단’ 조직(L.A) ‌ ˙조선기병대 해체 ‌ ˙토지 소유·전매·조차 금지안 ‌ 최초의 유치원인 경성유치원 설립 ˙

‌ 신파극단‘혁신단’창단 ˙ ˙ YMCA 강당에서 이승만 박사 귀국 환영 음악회

‌ ˙아폴리네르,『동물우화집』출간 ˙ 스트라빈스키, 러시아 발레곡 〈페트루슈카〉발표

‌ 『소년』 지 정간, 폐간(23호) ˙

‌ ˙구스타프 말러 사망

‌ 최찬식,「추월색」발표 ˙ 『매일신보』 , 에 ˙ 최초의 희곡「병자 삼인」 게재

‌ 클로델,『성모영보』출간 ˙ ‌ ˙토마스 만,『베니스에서의 죽음』출간

˙ 활동사진 흥행상설관인 단성사, 고등연예관이 설립됨

‌ 프로이드,『정신분석입문』출간 ˙ ‌ ˙버나드 쇼,『피그말리온』출간

‌ 알렉시스 카렐, 노벨의학상 수상 ˙ ‌ ˙타이타닉호 침몰

, 러시아 ˙ 드뷔시의〈목신의 오후 서곡〉 발레 공연 ˙ 아동 잡지『붉은 저고리』창간호에 ‘다음엇지’최초의 잡지 연재 만화 게재 ‌ 멜리에스, 영화〈북극 정복〉제작 ˙ ‌ 극단‘문수성’창립 ˙

‌ ˙중·노(러) 조약 ‌ 중국, 원세개 대총통 당선 ˙

‌ ˙한용운,「불교유신론」발표 『신한일보』 , 일본의 한·일합방을 ˙ 비판한「한·일협약도」게재

‌ ˙발칸반도 분할 ‌ 디트로이트, 포드자동차 공장 준공 ˙ ‌ ˙롤랑 가로스, 지중해 비행 횡단 ‌ 최초의 가정용 냉장고 개발 ˙

˙ 활동사진 흥행사진관인 대정관· 황금연예관 건립 , ˙ 이상준 저,『신유행창가』 『조선신구잡가』 『보통악전대요』 , 발간

‌ ˙타고르, 노벨문학상 수상 ‌ 프로이드,『토템과 타부』출간 ˙ ˙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출간 ˙ 루이 포이야드, 영화〈판토마〉제작

‌ ˙일제, 한국의 지방 행정 구역 개편 ‌ 총독부, 각급 학교에 교련 과목 신설 ˙

˙‌ 1차 세계대전 발발(1914~1918) ‌ 손문, 일본에서 중화혁명당 조직 ˙

‌ ˙최남선, 잡지『청년』창간 ‌ 최찬식,『안(雁)의 성』출간 ˙

‌ ˙앙드레 지드,『교황청의 지하실』출간 ‌ 제임스 조이스,『더블린 사람들』출간 ˙

‌ ˙호남선, 경원선 개통 ‌ 교포 기관지『한국태평양』창간 ˙

‌ ˙이집트, 영국 보호령이 됨 ‌ 파나마 운하 개통 ˙

‌ ˙유준길, 주시경 사망 ‌ 도쿄 유학생,『학지광』창간 ˙

‌ ˙조선호텔 낙성

‌ ˙암 치료에 라듐 최초로 사용

‌ ˙이화여전에 음악과 설치 ‌ 조선복음 인쇄소,『조선속곡집』출판 ˙

‌ ˙찰리 채플린, 영화〈먹고살기〉제작 ˙ 조반니 파스트로네, 영화〈카비리아〉 제작

˙ 박은식·이상설, 상해에 신한혁명당 조직

‌ ˙이탈리아, 3국 동맹 탈퇴 ‌ 일본, 중국에 21개조 요구서 제출 ˙ ‌ ˙파리 연합군 군사회의

˙ 잡지『새벽』폐간,『창조』정간, 『학지광』발매 금지

‌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 사립학교에 일본 국가를 부르도록 지시 ˙

‌ ˙안국선『공진회』간행 ‌ 개성 최초의 극장인 개성좌 개관 ˙

‌ ˙파라마운트 영화사 설립 ‌ ˙로맹 롤랑, 노벨문학상 수상 ˙서머싯 몸,『인간의 굴레』출간 ˙ 하인리히 뵐플린,『미술사의 기초 개념』 출간

278 279


한국

근대 빛낸 미술을 그림들

Masterpieces of Modern Korean Painting

초판 1쇄 인쇄일 2013년 12월 20일 초판 1쇄 발행일 2014년 1월 10일 글 ̄정준모 펴낸이 ̄오창준 펴낸곳 ̄컬처북스 디자인 ̄민유니 색보정 ̄트리콤 인쇄 ̄해인기획 제본 ̄과성제책 주소 ̄서울 마포구 성산동 633-11 해평빌딩 2층 전화 ̄02-3141-6798 팩스 ̄02-3141-6790 전자우편 ̄culturebooks@hanmail.net 블로그 ̄http://blog.naver.com/culturebooks 출판등록 ̄2003년 7월 14일 제 312-2003-000066호 ⓒ 정준모, 2014

ISBN 978-89-92074-61-2 03600

※값은 뒤표지에 있습니다.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시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지(http://seoji.nl.go.kr)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lisnet)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CIP제어번호 : CIP201302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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