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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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pieces of The Joseon Dynasty Painting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

안견에서 장승업까지, 흐름과 작품으로 읽는 조선 시대 미술 이야기

윤철규 지음


윤철규 尹哲圭 1957년생.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중앙일보 문화부에서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1999년에 일본에 유학,

교토 붓쿄佛校 대학과 도쿄 가쿠슈인學習院 대학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17~18세기 일본회화사. 귀국 후 (주)서울옥션의 대표이사,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로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사이트 (koreanart21.com)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이 있으며, 번역서로 『한자의 기원』, 『절대 지식 세계 고전』, 『일본 미술을 창조한 거장들-수묵 인간과 자연을 그리다』, 『교양으로 알아야 할 일본 지식』, 『천지가 다하 니 풍월이 끝이 없네』, 『추사 김정희 연구-청조 문화 동전 연구(이충구, 김규선 공동 번역)』, 『이탈리아-그랜드투어』 등이 있다.

일러두기 ●

조선 회화의 큰 흐름을 알 수 있도록 주요 작품과 작가를 선별해 작품 제작 연대 순으로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한글 쓰기를 원칙으로 하되,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를 함께 표기했습니다.

주요 인명은 한자와 자, 호, 생몰년 등을 함께 표기해 이해를 도왔습니다.

미술·음악·영화 작품명은 〈 〉, 전시명은 《 》, 화첩·저서·잡지 명은 『 』, 논문·낱개의 글 제목 등은 「 」로 묶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일시는 당시 기준인 음력입니다.

직접 인용은 “ ”로, 강조하거나 구분이 필요한 경우 ‘ ’로 묶었습니다.

작품 설명은 작가명, 작품명, 재질(재료), 크기(세로×가로/단위 cm), 제작 연도, 소장처 순으로 표기했습니다.

작품 제작 연도는 확실하게 밝혀진 경우에만 표기했으며, 추정 연도를 개략적으로 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도판 수록을 허락해 주신 미술관, 박물관 등 소장처에 감사를 드립니다. 미처 허락을 구하지 못한 분들께는 추후 합당한 절차를 따르겠습니다.


Mast er pieces of The Joseon Dynasty Painting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

안견에서 장승업까지, 흐름과 작품으로 읽는 조선 시대 미술 이야기

윤철규 지음


책을 펴내며

조선 시대 미술, 오케스트라처럼 보기

그림이 음악에 비유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서양미술 가운데 특히 샤갈이나 브라크, 혹은 미로의 그림에는 감미로운 선율 같은 게 느껴집니다. 꼭 서양을 예로 들 것도 없습니다. 조선 시대 그림 가운데도 얼마든지 음악에 견주어 설명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겸재 정선이 인왕산의 너른 바위를 표현하면서 거칠게 붓을 휘두른 대목을 보면, 장중하고 웅장한 느낌에 마치 베토벤의 <영웅>의 선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또 심사정의 상큼한 초충 도는 모차르트의 경쾌함과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담고 있는 고향 의 정서를 보여 준 김홍도의 그림은 어디선가 비발디의 <사계>가 연주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음악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음악을 잘 알아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조선 시대 그림 전체를 ‘하나 로 묶어 본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조선 시대는 500년이란 긴 역 사만큼 수많은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역대 미술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에는 이 시대 화가로 800명 가까운 이름이 소개돼 있습니다. 이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양식에서 각기 다른 자기만의

개성을 담은 다양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론 이런 내용은 조선 시대 회화사를 다룬 책에서 다 다루고 있습니다. 통사 형식으로 된 이 런 책은 다분히 전문적이어서 일반인에게 버거운 게 사실입니다. 하나하나의 작품을 해설 중심 으로 소개한 책도 있습니다. 이쪽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널리 알려진 유명한 그림 중심이어서 흐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흐름을 짚어 가며 그 속에서 해당 작품도 소개하자는, 즉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체’라 는 가정을 세워 본 것입니다. 여러 파트로 구성돼 있지만 결국은 한 목소리로 화음을 내는 오케 스트라를 떠올려 본 것입니다.

조선 시대 그림을 보면 시대마다 밖에서 전해진 새로운 경향이 있었습니다. 또 사회 내부에 서 요구하는 그림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화가마다 특기가 따로 있어 개성적인 세계를 그려 낸 경 우가 많습니다. 이를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시대별로 어떤 큰 흐름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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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그 가운데 주역이 누구였나를 찾아보았습니다. 각 화가의 그림에서도 시대와 흐름 그리고 개성을 함축적으로 가장 잘 보여 준 그림은 어떤 것인가를 골라 보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도 고려했습니다. 그림은 사회뿐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림 보는 재미나 흥미를 더하는 에피소드가 되는 이런 내용을 담을 수 있는 틀도 생 각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홍도는 중년의 어느 날 당시 나무꾼 시인으로 이름 높았던 정초부의 시를 소재 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이 나무꾼은 양평에 사는 여춘영 집안의 노비였습니다. 그런데 이 집 주인과 친한 사람 중에 지리학자 정상기의 손자인 정수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닮아 여행을 즐겼던 정수영은 54세 때 이 여춘영과 또 다른 친구인 임희하와 함께 임진강과 한강 유 람에 나섰습니다. 물론 이것이 그림으로 그려졌습니다. 조선의 3대 두루마리 그림 중 하나로 손꼽히며 15미터가 넘는 <한강, 임강 유람사경도>입니다. 이때 동행한 임희하는 강세황의 셋째 아들 강관의 동갑 친구였습니다. 김홍도는 잘 알다시피 소년 시절에 강세황의 지도를 받은 제 자였습니다. 흐름과 작품으로 엮어지는 조선 시대 미술에 이런 사적 네트워크 속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들을 담아서 사람 숨소리가 들리는 조선 시대 회화의 전체상을 그려 보고자 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을 다른 책들과 다르게 써 보려고 한 의도입니다.

기본적인 내용은 조선 회화의 큰 흐름을 따라 구성했습니다. 전기와 중기는 안견에서 비롯되 는 안견 화파와 중국의 영향 아래 시작된 절파 화풍을 소개했습니다. 후기는 다양한 양상 그대 로 우선 중국 남종화의 전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풍속화의 등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 고 겸재 화파에 이어 한국적 서정 실현에 성공한 김홍도와 그의 추종자, 문인 취향의 저변화와 함께 시를 테마로 그림을 그린 시의도詩意圖의 유행, 감상용 화조화의 등장, 서민 의식을 반영한 길상화와 민화의 세계를 포함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사의 일격逸格 문인화파와 중인 화가들 의 이색 화풍도 넣었습니다. 색다르다면 조선 시대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국 영향을 좀 더 분명하게 하고 싶었고, 일본과 이루어진 간헐적인 교류도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또 관심을 가진 대목은 기록화라는 이유로 그다지 거론되지 않던 조선 시대 행사 내용을 그 린 그림입니다. 이들 그림은 대부분 화원들이 그렸습니다. 간혹 작자가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름이 전하지 않습니다. 화원은 문인 화가와 함께 조선 시대 그림 제작을 담당했던 양 대 축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역할을 큰 흐름 속에 넣어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했 습니다. 그리고 개별 작품에는 유명 화가의 대표작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골랐습니다. 눈에 익은 것만 반복하는 데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선 시 대 그림 이해의 지평도 이 기회에 넓혀 보자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런 선택의 대전제로는 언제든지 쉽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공 사립 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하고, 개인 소장은 가급적 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정확한 용 어 이해가 감상을 훨씬 풍부하게 해 준다는 생각에 그때그때마다 가급적 쉽게 풀어 작품 이해 를 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119점의 조선 시대 그림을 장르별, 시대별, 작가별로 오케스트라처럼 짜 맞춘 것이 이 책입니다. 이들이 과연 어떤 화음을 낼지 저 역시 궁금합니다.(짝이 맞지 않는 119란 숫자는 독자 여러분의 몫을 생각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 점 한 점 작품을 추가해 가 며 여러분 자신의 책을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화음에 대해 제 생각을 조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조선 시대 그림들이 빚어 내는 전체적 인 특징은 무리하지 않는 자연주의적 성격에 있지 않나 합니다. 인위적인 과장이나 과대 표현 은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전체에 흐르는 담백하고 조촐한 느낌은 이런 성격에서 연유한 듯합니다. 비슷한 내용이기도 한데 또 다른 하나는 천진성입니다. 기교에 대한 고집이 거의 보 이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회 쪽에서도 이런 요구를 한 흔 적이 거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남의 지시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생각에 따르는 자의성 恣意性과도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엿보이는 것이 보수적 성격입니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연구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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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겠지만 정통성의 권위에 기대거나 전통을 고수하려는 특징이 강합니다. 민화에 보이는 천연덕스러운 상투성은 뿌리가 여기에 있지 않나 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시대 회화의 흐름을 종으로 횡으로 소개해 보고자 했습니다만, 실은 많은 부분이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내용 속에 해당 연구를 구체적으로 밝힌 부분도 있지 만 극히 일부에 그쳤습니다. 나머지 분들의 연구 성과는 권말의 참고 문헌 목록을 통해 대신했 습니다. 일일이 밝히지 못한 점 이 글을 통해 대신 사과드리며 널리 양해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 니다.

그리고 그림 속 글 해석에 언제나 친절하고 정확한 도움을 주신 선문대 김규선 교수와 귀찮 은 자문 등에 많은 도움을 주신 경기도 박물관 이원복 관장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 러 가지 성가신 조사를 마다 않고 늘 도움을 준 최문선 한국미술정보개발원 수석 연구원, 이수 정 연구원, 상명대학교의 박순홍, 권진선, 조우희, 조은비 씨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특별하게 좋은 기회를 준 컬처북스 오창준 대표와 근사한 책을 만들어 준 편집부 직원 여러분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5년 3월

윤철규


차례

책을 펴내며

이암, 화조구자도  │  50

조선 시대 미술,

김시, 동자견려도  │  54

오케스트라처럼 보기  │  4

함윤덕, 기려도  │  58 이정근, 미법 산수도  │  61 황집중, 포도도  │  65

작자 미상, 서총대친림사연도  │  69

안견에서 장승업까지,

작자 미상, 기영회도  │  73

흐름과 작품으로 읽는 조선 시대 미술 이야기

이성길, 무이구곡도  │  77

안견, 몽유도원도  │  14

전 이경윤, 산수인물도  │  82

전 안견, 사시팔경도  │  20

이경윤, 시주도  │  86

강희안, 고사관수도  │  24

이정, 묵죽도  │  89

전 이상좌, 송하보월도  │  27

전 이영윤, 목련과 공작・청죽과 백로  │  92

작자 미상, 소상팔경도  │  30

어몽룡, 월매도  │  96

김정, 산초백두도  │  34

윤정립, 관폭도  │  99

작자 미상,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  │  38

이정, 의송관안도  │  102

작자 미상, 호조랑관계회도  │  42

전 김식, 수하모우도  │  105

전 신사임당, 맨드라미와 쇠똥구리・가지와 방아깨비  │  46

이징, 금니산수도  │  108


조속, 금궤도  │  111

정선, 무봉산중도  │  172

이기룡, 남지기로회도  │  115

정선, 인왕제색도  │  175

한시각, 북새선은도  │  119

조영석, 노승문슬도  │  180

김명국, 고사관화도  │  123

김두량, 삽살개  │  184

김창업, 송시열 초상  │  127

이광사, 이씨산방장서도  │  187

맹영광, 계정고사도  │  131

윤용, 월야산수도  │  190

이요, 일편어주도  │  135

장득만, 송하문동자도  │  193

이명욱, 어초문답도  │  138

김윤겸, 장안사도  │  196

작자 미상, 경수연도  │  141

장시흥, 노량진도  │  199

조지운, 매상숙조도  │  144

김희겸, 산정일장도  │  202

작자 미상, 권대운기로연회도  │  147

정황, 양주송추도  │  206

조세걸, 융의연도  │  151

이인상, 송하독좌도  │  210

윤두서, 유하백마도  │  154

강세황, 영대빙희도  │  214

윤두서, 석공도  │  158

강세황, 초옥한담도・강상조어도  │  217

유덕장, 연월죽도  │  161

강세황 외, 균와아집도  │  220

작자 미상, 동문송별도  │  165

심사정, 연지쌍압도  │  224

정선, 금강내산총도  │  169

심사정, 절로도해도  │  228


심사정, 와룡암소집도  │  232

김득신 외, 화성능행도  │  302

허필, 총석정도  │  236

작자 미상, 헌수례도  │  310

최북, 공산무인도  │  239

작자 미상, 요지연도  │  314

김유성, 낙산사도  │  242

전 김득신, 곽분양행락도  │  319

기무라 겐카도, 겸가아집도  │  246

김득신, 밀희투전도  │  323

강희언, 북궐조무도  │  250

김석신, 압구청상도  │  326

김응환, 방겸재금강전도  │  254

신윤복, 주사거배도  │  329

김홍도, 군선도  │  257

작자 미상, 미인도  │  332

김홍도, 행려풍속도병  │  261

유운홍, 부신독서도  │  336

김홍도, 백로횡답  │  268

이명기, 미원장배석도  │  340

이인문, 산정일장도  │  271

변지순, 설중매  │  343

박유성, 군조도  │  277

정수영, 우후조망금강산도  │  347

작자 미상, 후원유연도  │  280

이재관, 송하처사도・파초제시도  │  350

김후신, 통음대쾌도  │  284

이형록, 책가도  │  354

작자 미상, 태평성시도  │  288

작자 미상, 책거리도  │  359

정조, 묵매도  │  296

작자 미상, 문자도  │  362

정조, 국화도  │  299

이수민 외, 기축진찬도  │  366


작자 미상, 동궐도  │  371

이한복, 임모추사동귀도  │  436

변상벽, 묘작도  │  376

허련, 초정춘효도  │  440

임희지, 노모도  │  379

이하응, 석란도  │  444

장한종, 어해도  │  382

정학교, 태호산석도・괴석도  │  447

김양기, 화조도  │  386

죽향, 원추리・연꽃  │  451

남계우, 군접도  │  390

홍세섭, 유압도・매작도  │  454

이방운, 망천별서도  │  394

장승업, 삼인문년도  │  458

윤제홍, 옥순봉도  │  398

장승업, 기명절지도  │  462

임득명, 설리대자도  │  401

신위, 묵죽도  │  405 조희룡, 홍매도  │  409 김수철, 하화도  │  413

조선 미술 개요

전기, 매화서옥도  │  417

조선 시대 미술의 흐름과

신명연, 이화백연도  │  421

이해의 키워드  │  468

유숙, 수계도  │  424 김정희, 선면산수도  │  428 김정희, 불기심란도  │  432

참고 문헌  │  481



안견에서 장승업까지, 흐름과 작품으로 읽는 조선 시대 미술 이야기


안견 몽유도원도 安堅

夢遊桃源圖

‘죽기 전에’라는 말을 가져다 붙인 이색 출판 마케팅이 한때 눈길을 끈 적이 있었습니다. 독자 를 막다른 코너에 몰아넣듯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곳, 죽기 전에 읽어 야 할 책,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등등을 열거하면서 제목을 붙인 것이지요. 좋든 나쁘든 간에 이런 제목의 책들을 보면서 그림에도 이 말의 적용이 가능한가 하고 떠올려 본 적이 있습니다. 못 할 것은 없습니다. 남이 땐 군불에 밥 짓는 것 같아 좀 꺼림직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한 국미술에서 중요한 작품들이 정리가 되고 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나무랄 것도 없을 겁니다. 한국미술에서 죽기 전에 봐야 할 명화 중 첫 번째로 꼽을 그림이 바로 안견의 <몽유도원도> 입니다. 이 <몽유도원도>는 교과서고 어디고 안 나온 데가 없습니다. 이른바 데자뷰입니다. 안 봐도 본 것처럼 여겨지고 몰라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명 한가’ 또는 ‘왜 뛰어난 그림인가’ 라고 꼬집어 물으면 누구라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 입니다. 이 그림이 한국미술 가운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그림의 No.1으로 손꼽혀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조선 전기는 적막강산이라 불러도 좋을 만 큼 자료가 적습니다. 남아 있는 그림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작가가 알려진 그림은 극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대에 이처럼 완벽한 보존 상태를 자랑하는 대작이 존 재하고 있어 그 자체로서 이 시대의 회화사를 구성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전기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그렸다’라 고 하는 그림의 소자출所自出이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옛 그림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소위 그 림을 통해 알고 싶은 제작자나 제작 동기가 불분명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6백 여 년 전에 그린 그림인데도 이런 내용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그림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안평 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1453이 초 여름날 밤 4월 20일에 꿈을 꾸면서 꿈속에서 거닐었던 도원桃源의 풍경을 안견安堅, ?~?을 시켜 그리게 한 것입니다. 도원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유토피아에 해당하는 이상향입니다. 당 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1미터가 넘는 대폭의 화면에 3일에 걸쳐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가 1447년입니다. 한글이 창제돼 반포된 다음 해입니다. 그림 뒤에는 조선 초기의 명필로 유명한

안평 대군이 직접 그림을 그리게 된 유래를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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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을 조금 현대식으로 전하면 이렇습니다. “이제, 가도(안견의 자字)로 하여금 그림을 그 리게 하니, 예전부터 전한다는 그 도원도桃園圖와 같은지 모르겠다. 훗날 보는 사람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한다면 반드시 가타부타 말이 있을 것이다. 꿈이 깬 뒤 3일 만에 그림이 완 성되었기에 이 글을 쓴다.” 물론 제작 동기가 밝혀졌다고 해서 다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이 그림이 중국이 국보 No.1로 손꼽는 곽희의 <조춘도早春圖>(1072)나 프랑스의 국보인 레오나 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에 견주고도 남을 만한 솜씨의 그림이라는 점입니다. 더욱이 <모나리자>보다 먼저 그려진 그림이기도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죽기 전에 꼭’이라는 수식어가 합당한 이유 중의 이유입니다. 일제 때 중국사 의 대가로 손꼽혔던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은 이 그림을 보고 ‘북송 시대의 그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서양의 15,16세기를 르네상스라고 부른다면 북송 시대(960~1126)는 바로 동양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과 귀족 중심의 고대 사회가 막을 내리고 사대부, 문인들이 주류 세력이 되면서 이성적 사고가 사회를 이끈 시대인 것입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현란한 도자기 문화는 이때부터 본격 시작됐고, 먹 한 가지만으로 산수를 표현해 내는 산수화도 이때 최고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앞서 북송 시대 곽희가 그린 <조춘도> 가 중국의 보물 중의 보물로 손꼽히는 것도 그런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서 붙여진 찬사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몽유도원도>를 가리켜 그런 반열에 오르고도 남는 작품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그림을 보면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안견은 꿈의 내용을 몇 부분으로 나눠 그렸습니 다. 우선 왼쪽부터 시작해 꿈속에 말을 타고 들어간 평탄한 도입부가 있습니다. 중간 부분은 도 입부에서 이어지면서 도원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험한 산무더기가 보입니다. 그리고 폭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분지처럼 보이는 곳에 도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안견은 도원으로 가는 과정과 도원의 모습을 이어서 그리면서도 이 두 풍경을 묘사하는 시각 을 달리 했습니다. 즉 왼쪽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보통의 산수화에 보이는 것처럼 정면에서 본 것처럼 그렸습니다. 반면 바위틈을 지나면 펼쳐지는 도원 풍경 부분에는 위에서 내려다본 이 른바 부감법俯瞰法을 쓴 것입니다. 그는 한 그림 속에 이처럼 두 가지 시점을 적용한 것입니다. 몽중夢中, 몽중몽夢中夢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다른 시점을 통해 한눈에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탁월한 솜씨는 또 있습니다. 동굴을 나오면 펼쳐지는 도원의 풍경을 그럴 듯하게 그린 것입니다. 그림 속의 동굴은 그림 중간에 폭포가 시작되는 부분 위쪽으로 오솔길이 끝나는 곳 에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을 지나니 확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 해 오른쪽 끝의 위쪽에 삐죽한 바위를 그려 놓고 그림의 아래쪽 개울에서 오른편에 바위들을 잔뜩 그려 넣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복숭아꽃이 피어 있는 평화로운 도원의 풍경이 마치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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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본담채

001

37.8×106.5cm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일본 텐리대학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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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쳐다본 풍경처럼 표현되었습니다. 그 외에 세부적으로 웅장한 느낌의 바위 표현, 집 주 변의 대나무 등에 보이는 치밀한 표현 등도 안견만의 솜씨로 거론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꿈속이라는 상상 속의 풍경 그리고 그것을 설명한 이야기를 듣고서 어디에 선가 실재하는 듯한 풍경으로 그려 낸 점이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몽유도원도> 이후 실제로 이렇게 큰 스케일로 상상 속의 풍경을 박진감 넘치고 웅장하게 표현한 예는 더 이 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몽유도원도>를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그림이라고 했지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몽유도 원도>는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재 이 그림은 일본 나라奈良의 텐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있습니다. 평시에는 일반이든 학자이든 일체 공개하지 않 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대개 임진왜란 이후일 것으로만 추정될 뿐입니다. 그동안 한국 에는 1986년, 1996년, 2009년 딱 세 번만 건너와 전시됐습니다. 다음번 방문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기회를 기다려 볼 뿐입니다.

안견

安堅, ?~?

신라의 솔거率居, ?~?, 고려의 이녕李寧, ?~?과 함께 한국 3대화가로 꼽히는 화원 화가입니다. 그러나 기록 부족으로 구체적인 생 년과 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안견 연구의 대가인 안휘준 교수는 1447년에 이 정도의 대작을 그리기 위해서는 중년의 기 량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 대략 1400년대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뜬 것도 1460년대나 1470년대로 보았습니다. 그의 자字는 가도可度, 득수得守도 있습니다.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입니다. 1987년 서산의 한 향토사학자가 발굴한 자 료에는 그가 지곡池谷 사람으로 돼 있어, 현재 충남 서산 지곡면에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가족은 화원 아들임에도 대과에 급제한 안소희安紹禧가 있었습니다. 안견과 관련해 가장 큰 관심은 안평 대군과 가까웠던 그가 단종을 몰아낸 세조 이후에도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요. 이에 대해 17세기 학자인 윤휴1617~1680는 이런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안평 대군은 안견을 아껴 잠시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안견은 때가 위험스러움을 알고 스스로 떠나려고 했으 나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안평 대군이 북경에서 사온 먹을 꺼내 놓고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시키고 자신은 잠시 안에 들 어갔다가 나왔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 가져온 먹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종들을 다그치자 계집종이 ‘안견 탓’이라고 했 다. 안견이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는 듯 일어나자 품속에서 먹이 떨어졌다. 안평 대군은 이에 크게 노해 그를 꾸짖어 내쫓고는 다시는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다. 이후 조금 있다가 정난靖難이 일어나 안평 대군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모두 연루 돼 죽은 사람이 많았다. 안견만이 홀로 화를 면했는데 이는 식견이 높고 생각이 깊었던 때문일 것이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몽유도원도> 이외에 50여 점에 이르는 안견 그림의 제목이 전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당시 사람들은 안평 대군과의 연관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몽유도원도> 대신 <청산백운도>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습니다. 물론 이 그림은 전하지 않습니다.


전 안견 사시팔경도 傳 安堅

四時八景圖

조선 시대 초기의 옛 그림 사정을 보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가 하나 있습니다. 한국회 화사에서 조선 전기는 1392년에서 1550년 무렵으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 안 그린 사람, 즉 화가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그림은 통틀어 몇 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산 수화의 경우 조선이 세워진 1392년 이후 쭉 없다가 1447년에 안견의 <몽유도원도> 한 점이 삐 죽 나오는 형편입니다. 50년도 지나서 그림 하나가 나온 것인데 이래 가지고는 온전한 미술사는 불가능하겠지요. 산

수화 말고 옛 그림에서 많이 그려진 장르가 화조화인데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전기의 화조화로 손꼽을 만한 그림은 안견에게 배운 화원 안귀생安貴生, ?~?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그림 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정말 안귀생이 그렸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약 합니다. 그러고는 곧장 150년을 건너뛰어 중기로 넘어갑니다. 이런 불가사의로 인해 조선 초기의 회화 연구가 많은 지장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작가 관련 사항을 제외하고 주목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대 그림에 보이는 스타일, 즉 화풍 입니다. 화풍에는 필치와 구도 등이 포함됩니다. 화풍에 주목하니 작가 이름이 전하건 말건 간 에 어느 정도 양식적 체계화가 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런 분석의 첫 번째 대상이 되는 것이 안견 이 그렸다고 전하는 <사시팔경도>입니다. 여덟 폭으로 된 이 그림은 사계절을 각 계절별로 두 폭씩, 말하자면 조춘早春, 만춘晩春이란 식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자연은 흔히 계절마다 천만 가지의 얼굴이 있다고 합니다. 봄이 다 르고 여름이 다른 것인데, 봄도 이른 봄과 늦봄의 차이가 제각각인 것이지요. 북송 시대에 먹으 로 산과 물이라는 자연을 그려 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면서 등장한 테마 중 하나가 계절의 얼 굴을 먹으로 그려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절별로 천변만화하는 대자연의 변화 모습을 시 각적으로 표현이 가능한가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 <사시팔경도> 역시 그와 같은 배경에서 그려 진 테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안견이 그렸다고 하는 것은 이 그림 속에 안견의 화풍이 보 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몽유도원도>에 나온 화풍이라기보다 안견 작으로 전하는 작품 속에 공통 으로 보이는 요소가 반복돼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이 이른 봄과 이른 가을을 그린 두 그림에 보이는 나무 표현 방법입니다. 여기에는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표현 방식이 마치 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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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안견 사시팔경도 만추·초춘

견본수묵 각 35.8×28.5cm 국립중앙박물관


만하·초하·만춘 만동·초동·초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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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을 벌린 것처럼 삐쭉삐쭉하다고 해 흔히 해조묘蟹爪描라고 합니다. 이는 안견이 사숙私淑한 북송北宋의 곽희파 그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곽희풍은 복고주의를 표방했던 명나라 초기 에 유행했던 화풍으로 그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산 능선에 작은 바늘처럼 찍어 그린 선도 안견 이 그렸다고 전하는 그림들에 보이는 공통점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구도입니다. 초 춘과 초추를 보면 그림의 오른쪽 절반에 산들이 집중돼 있습니다. 이렇게 중심을 쏠리게 그린 구도를 편파偏頗 구도라고 하는데, 이런 구도법은 조선 중기까지 오래도록 영향을 미칩니다. 또 있습니다. 만춘이나 만추에서 확실히 나타나듯이 산이 한쪽에 몰리면서 다른 한쪽으로 공 간을 넓게 틔워 놓는 구조입니다. 이런 확대 지향형 공간 구도 역시 안견 그림, 나아가 안견파 그림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점이 한쪽으로 몰려 있는 산들 이 실은 두 무더기로 나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여덟 폭 모두에서 나타나는데, 크게 나누면 가깝게 보이는 경치[前景]의 산들과 그 뒤쪽의 중경中景의 주산主山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법을 학계에서는 편파 2단 구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구도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100년 뒤인 16세기에는 편파 3단 구도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렇게 구도와 화법에 대해 약간 설명을 했지만, 이 그림에는 ‘무엇을 왜 그렸는가’ 하는 점 이 잘 드러나 있지 않아 심심한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조선 초기에 그림을 즐기는 목적을 감 상, 오락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는 이른바 수기적修己的 가치에 중점을 둔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 건국의 사대부들은 자기 절제와 수련을 통해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인간으로 완성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어긋남 없이 운행 하는 이치가 그려진 그림을 바라봄으로써 천리天理를 체득하고 감응하면서, 그 속에서 내면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본연의 성性도 기를 수도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다소 어려워졌는데 이렇게 원리적이고 도학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었던만큼 눈을 즐겁게 하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담긴 그림은 그려지기 어려웠던 게 사실인 듯 합니다. 조선 시대 초기 그림의 수요가 적었던 이유로는 이처럼 엄격했던 사회 분위기도 다분히 작용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고려 시대의 회화 조선 초기의 그림은 전하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 찬사를 받는 고려 불화는 그 수가 170~180점에 이르지만 장르로 보면 종교적 목적을 위해 그려진 종교회화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감상 용으로 그려진 회화는 매우 드뭅니다. 470여 년에 이르는 고려 시대는 동양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북송 시대와 겹칠 뿐 아니라 한국의 3대 화가 중 한 사람인 이녕을 배출했음에도 작가 이름이 전하는 그림은 공민왕 그림 두어 점, 이제현의 그림 한 점 정도입니다. 그 외 작자 미상의 작품이 국 내와 일본에 전하고 있는데 이를 모두 합쳐도 10점이 넘을까 말까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가 무혈 혁명에 가까웠고 또 한 조선 초의 도화원이 고려의 화원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점 역시 미스터리 중의 미스터리라 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자 미상 태평성시도

太平城市圖

어느 화려한 성내城內의 모습입니다.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시작된 성내 시가도는 사통팔달로 길이 뚫려 있으며 단층짜리 행랑은 물론 이층 누각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길 위에는 사 람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그야말로 활기 넘치는 성시城市입니다. 이 사람들을 보면 작은 도시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파노라마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네를 타는 사람, 말을 타고 길을 가는 사람,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 거기에 구경 꾼, 장사꾼 등 남녀노소가 모두 뒤섞여 있습니다. 좀 더 들여다보면, 개중에는 낙타를 몰고 가는 사람에 또 말 안장에 호랑이를 걸치고 가는 사 냥꾼 같은 이도 보입니다. 또 볏가리 같은 것을 산처럼 높이 쌓아 운반하는 수레도 보이고, 쇠 사슬로 호랑이를 묶어 놓고 묘기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자 안에서 아예 단을 차려 놓 고 칼춤을 선보이는 연희패도 보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제각각입니다. 술과 음식은 물론이고 책을 파는 가게, 솜을 타는 가게, 과 일 가게, 푸줏간, 광주리 장수, 봇짐 장수, 등짐 장수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집 짓는 공사장에 대장간, 나무켜기 등도 보이고 무언가를 짓고 있는 공사 현장도 있습니다. 아이 들이 발가벗고 개울에서 멱을 감기도 하고, 또 한켠에서는 말을 타고 칼과 창을 가지고 군사 훈 련을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영화나 TV가 없던 시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을 보는 것은 장관이었을 것입니 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림 속 건물들이 모두 기와집에 붉은 기둥입니다. 또 실내 에도 전돌 바닥이 깔려 있습니다. 조선식이 아닙니다. 입고 있는 옷도 모두 중국 복장입니다. 실로 이런 사정 때문에 이 그림은 오랫동안 중국 그림 대접을 받았습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이 베이징에서 구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근래 들어 이 그림이 조선 에서 제작된 것이 확인됐습니다. 1792년 4월 24일 정조가 왕명을 내려 <성시전도城市全圖>를 그리라고 하고 여러 문신들에게

이 그림을 소재로 시를 지으라고 한 기록을 찾아낸 것입니다. 정조는 이보다 십년 전에 이미 평 양성 그림을 그려 오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평양성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병풍에 그린 그림은 이후 큰 관심의 대상이 됐고, 계속해 제작되면서 오늘날에는 판화로 된 <평양성도> 까지 볼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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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왕도 정치가 펼쳐지는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면서 자신이 통치하는 곳곳의 사정을 바 로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본 것처럼 김응환과 김홍도를 보내 강원도 영동 9개 군과 금 강산 일대를 그려 오라 한 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선은 매년 수백 명에 이르는 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청은 명과 달리 조선 사신들이 베이징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보장했습니다. 강세황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들은 이국의 도시에서 겪는 낯선 경험과 볼거리에 대한 관심을 나 타내고 돌아와 이를 전하거나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베이징에서 흥미롭게 보았거나 관심 있게 보았던 내용이 이 <성시전도>에 그대로 묘사돼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패루牌樓입니다. 패루는 홍살문처럼 어 떤 기념물 역할을 했던 데서 시작하지만, 이 시대가 되면 차이나타운의 상징문처럼 거리의 표 시로 바뀌었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6개의 패루가 보이며 그중 한 곳은 건축 중인 모습으로 그 려져 있습니다. 또 사신들은 옷을 만들어 놓고 팔거나 꽃가게가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는데 이것도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당시 베이징에는 시가지 연희가 상당히 성행했는데, 그림 속 에는 정자 안에서 칼춤을 선보이는 연희패와 호랑이 묘기를 보여 주는 사람, 4인용 그네를 타 는 서커스꾼들도 담겨 있습니다. 정조는 이 그림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규장각 문신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테마로 3일 내에 각 각 7언 절구로 된 시구 100운, 즉 200구 1,400자를 지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지어진 시들이 근래 안대회 교수의 연구로 속속 확인되었습니다. 정조는 이 시를 직접 채점을 했는데 당 시 1등을 한 사람은 신광하申光河, 1729~1796였습니다. 그는 최북이 죽었을 때 “그대 보지 못하였 소, 최북이 눈 속에서 얼어 죽는 것을君不見

崔北雪中死”이라고

만가를 지었던 시인입니다. 그리고

2등은 실학자 박제가였으며 규장각의 사검서 이덕무와 유득공은 공동 5위였습니다. 정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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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미상 태평성시도 8폭 병풍

견본채색 각 113.6×4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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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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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을 한 신광하의 시에 대해 “소리가 있는 시”라고 칭찬을 했고, 박제가의 시에는 “말을 할 줄

아는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박제가 시를 약간만 소개하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자는 무게 잰다고 닭 한 마리를 들고 있고 어떤 자는 꽤꽥 소리 누르며 돼지 두 마리 짊어지고 어떤 자는 땔감 바리 짊어진 소를 고삐 채로 끌고 가고 어떤 자는 말의 나이 본답시고 옆에다 회초리 꽂아 놓고

(번역: 안대회)

그런데 이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사실 원형이랄까, 모델이랄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 의 북송 시대에 번화한 수도 변경의 활기찬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입니 다. 청명절은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교외에 나가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날입 니다. 이 그림은 청명절 무렵 활기가 되살아난 도시 생활을 생생하게 그린 긴 두루마리 그림입 니다. 당시 궁중 화원인 장택단張澤端이 그려 큰 인기를 끌면서 본인도 여러 벌을 그린 것은 물 론 명, 청대 들어 계속해서 많은 모사본들이 제작됐습니다. 이것이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에 전해진 듯합니다. 풍속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조영석도 명대에 그려진 <청명상하도>를 본 내용의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또 박제가의 스 승인 박지원은 무려 9점이나 되는 <청명상하도>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태평성시도>는 사신들이 보고 온 이색적인 중국 풍물만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림 속에는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내용이나 장면도 포함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좌식 위주의 주거 양식, 조선식 상차림, 연회에서의 각상各床 습관, 진흙을 사용한 기와 올리기, 지게와 양다리 방아 등 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것입니다. 이를 보면 이 그림은 단순한 중국 풍물을 그 린 것을 넘어 중국을 넘어서는 어떤 이상 사회를 꿈꾸며 그린 조감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 쉽게도 이 그림을 그린 작자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 수 <태평성시도>에 그려진 인물은 총 2,241명입니다. 각 폭마다 200명 전후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으나 닭장수, 집짓기, 실짜기, 옷 가게 등의 내용이 그려진 제4폭에는 374명이 등장합니다. 반면 농사일이 중심으로 그려진 마지막 폭에는 83명만 그려져 있습 니다. 참고로 조영석은 자신이 본 <청명상하도> 속 사람 숫자가 1,489명이라고 적어 남겼습니다. 원본을 조사한 일본 연구가 노 시마 쓰요시野嶋剛에 따르면 중국의 <청명상하도> 속 인물이 773명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은 요네자와 시 우에쓰기박물관 소장의 <낙중낙외도洛中洛外圖>로 여기에는 2,479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작자 미상 헌수례도

獻酬禮圖

어느 집 대청마루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작은 그림이지만 여간 정교하지 않습니다. 우선 처마를 가로질러 흰 무명 차일이 넓게 쳐 있습니다. 그 안의 아늑한 공간이 잔 치 장소입니다. 흔히 궁중의 연회나 잔치 장면은 평행사선 구도로 그려집니다. 건물의 지붕선이 평행을 달리 면서 동시에 옆에서 비스듬히 본 것처럼 그려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다릅니다. 화면 안에 마름모꼴을 집어넣은 듯 옆으로 비틀어서 바라본 실내를 그렸습니다. 이런 구도는 18세기 들어서 등장합니다. 잔칫집 지붕 구도가 이처럼 바뀐 데는 풍속화의 영향이 큽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평생도와 관련이 깊습니다. 평생도는 사람이면 누구나 바라는 행복한 삶의 상징쯤 되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내용은 돌잔치에서 시작해 결혼식, 과거 합격 그리고 관직 근무에서 나중에 회 혼례를 올리는 장면까지 그려지는 게 보통입니다. 평생도는 그 내용이 말해 주듯이 집안의 행사 장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급제 후 행하 는 거리 퍼레이드나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거리 행차 모습 등이 포함됩니다. 이런 풍경을 묘사 하는 데에는 당연히 실내용의 평행사선 구도가 걸리적거린 것이지요. 그래서 구도의 변화가 일 어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도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어째든 평행사선 구도를 버리고 나니 그림이 훨씬 자연스러워 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풍속의 시대에 걸맞는 구도가 된 것이지요. 대청 안쪽에 큰 주칠 상에 더해 작은 겸상 2개를 받은 늙은 부부가 앉아 있습니 다. 주빈입니다. 그리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듯이 한쪽은 남자들이, 다른 한쪽은 여인네 들이 줄지어 앉았습니다. 결혼 60주년을 맞이한 늙은 부부의 자손들이 매우 번성한 듯합니다. 자세히 보면 두 줄로 앉 은 남녀 가운데 앞줄의 사람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있습니다. 직계라는 뜻입니다. 꽃은 머리에 만 꽂은 것이 아니라 상 위의 음식에도 꽂혀 있습니다. 이런 종이꽃 장식은 궁중 행사에 쓰이던 것이 민간에까지 흘러 전해진 듯합니다. 1795년 무렵의 자료입니다만 머리에 꽂는 종이꽃으로 가지가 둘인 홍도이지화紅桃二枝花는 값이 1냥이며, 가지가 셋인 홍도삼지화는 1냥 5전 했다고 합니다. 상을 장식한 꽃은 이런 복숭아꽃이 아닌 연꽃이었습니다. 궁중용의 대수파련大水波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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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본담채

작자 미상 헌수례도 『회혼례첩』 중

33.5×45.5cm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값이 무려 80냥이나 했다고 합니다. 수파련에는 중수파련, 소수파련도 있었다고 하니 이 잔치 는 아마 격과 비용에 맞는 것을 골라 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청 한가운데는 장남 부부쯤 되어 보이는 남녀 한 쌍이 공손히 술잔을 올리고 있습 니다. 이들의 헌주獻酒가 끝나면 앉아 있는 사람들이 차례대로 술을 올릴 것입니다. 대청 왼쪽 구석에 나이 든 여인 하나가 국자가 꽂혀 있는 큰 청화백자 항아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 마 루 끝에도 큰 항아리 2개가 보입니다. 여러 음식이 풍성하게 마련된 듯 마루 위의 후손과 초대 손님들에게는 모두 독상이 대접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상투도 틀지 않은 동자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늙은 부부 옆에도 어 린 손자, 손녀 한 명씩이 앉아 있습니다. 이런 성대한 잔치에 구경꾼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댓돌 위와 마당에 여러 사람들이 보입니 다. 대개 여자들이고 아이를 업은 여인네도 보입니다. 남정네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집 안 잔치이니만큼 초대객 이외의 남자가 집 안까지 들어와 구경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그림 속 그림이 분명하게 보이는 게 이색적입니다. 주인공 부부 뒤는 물 론 남자들이 앉아 있는 뒤편에도 큰 그림 병풍이 쳐져 있습니다. 부부 뒤쪽은 대나무에 꽃을 그 린 그림으로 보이며, 남자들 뒤쪽은 산수화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그림 속에 또 그림이 등장하는 것을 화중화畵中畵라고 합니다. 정교하고 섬세하다는 인상이 있는 일본 그림에는 시대가 올라가는 그림에도 이런 화중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의 그림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후대에 내려오면 이처럼 행사나 풍속 등을 그린 그림 속 에 이처럼 화중화가 자주 등장합니다. 남자들 뒤쪽에 친 병풍을 보면 먹 점을 많이 찍어 그린 큰 산이 눈에 띕니다. 숲이 무성한 산을 이렇게 잘 표현한 겸재 정선의 화풍처럼 보입니다. 그 옆에는 큰 나무가 있고 강변이 걸쳐 있는

(오른쪽) 전안례도 (왼쪽) 교배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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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보아 또 한편으로는 이 시대에 유행한 남종화풍의 산수처럼도 보입니다. 그림 속 그림을 이 정도로 꼼꼼하게 그린 것처럼 다른 부분의 표현도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 울러 서양화풍의 영향도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그림 가장자리에 보이는 지붕은 기왓골에 명암 을 넣어 입체감을 나타냈습니다. 이런 입체적 표현은 붉고 푸른 여인들의 치마에도 시도돼 있 습니다. 마루 위에 앉은 여인들의 치마에 음영을 넣은 것은 물론 댓돌 위에 늘어서 있는 여성들 의 치마에도 주름선 사이로 그림자처럼 음영을 넣었습니다. 이 그림은 원래 5점으로 이뤄진 회혼례 화첩의 일부입니다. 회혼례 화첩도 평생도처럼 이야 기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우선 늙은 신랑이 회혼례를 위해 기럭아범을 앞세우고 신부에게 가 는 장면입니다(<전안례도奠雁禮圖>). 두 번째는 자손과 하객들 앞에서 다시 혼례식을 올리는 장 면입니다(<교배례도交拜禮圖>). 평생도 병풍에는 대개 이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면이 이 그림으로 자손들에게 헌주를 받는 장면입니다(<헌수례도獻酬禮圖>). 그리고 나머지 두 면은 이런 행사 뒤에 집안 사람과 하객,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잔치 장면으로 구성 돼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교한 표현과 색채 구사 등은 상당한 솜씨임 을 알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도화서 화원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에는 민간에서 도화 서 화원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일은 흔히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자랑하고 자 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고 싶어한 것은 세속적 행복과 장수 그리고 높은 관직이었습니 다. 평생도가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 회혼례도는 관직과 무관하게 세속적 행복에 장수를 누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문할 수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에 들면서 그림은 상류 계층에서 아래로 아래로 전파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도 平生圖 높은 벼슬과 장수, 그리고 가내 평안과 같은 세속적 행복을 두루 누린 사람의 일생을 병풍으로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평생도는 대개 8개 장면으로 구성되는 게 보통입니다. 돌잔치, 결혼식, 과거 급제 또는 삼일유가三日遊街, 한림 겸 수찬, 개성 유수 부임, 병 조 판서, 좌의정, 회혼례 등입니다. 풍속화의 한 장르로 평생도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낙관이 된 <모당 홍이상 평생도> 가 처음 공개되며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래서 김홍도가 이 장르의 선구자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이에 대한 이견도 있습니다. 김홍도 화풍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종류의 병풍이 그려지는 것은 훨씬 이후일 것이라는 연구입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 개인의 일생을 그린 것이기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경기 서울 일대의 문벌 가문이 가진 삶의 가치관이나 출 세관에 바탕을 둔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이상화된 사대부의 삶이 일반 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패턴화되었고 이 것이 민화로까지 정착됐다는 것입니다.


장승업 기명절지도 張承業

器皿折枝圖

조선이 완전히 끝나갈 무렵에 이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장르로 등장한 그림이 있습니다. ‘기 명절지도’라는 장르입니다. 이 장르를 처음 시도한 화가로 장승업을 꼽는 경우가 대부분입니 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19세기 마지막 사사분기를 무대로 장승업이 가장 많은 기명절지도를 그렸고 또 누구보다 잘 그린 것은 사실입니다. 이 그림 역시 장승업을 대표하는 기명절지도의 하나입니다. 이 그림에 보이는 맑고 청신한 감각은 과거의 수묵 담채 그림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그린 기명절지 도의 일부에 담긴 상쾌한 느낌은 새 시대를 예고한 신감각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기명절지란 그림에 보이는 것처럼 청동기나 도자기를 배치해 놓고, 그 사이로 상서로운 의 미를 지닌 여러 꽃이나 식물을 그린 것을 말합니다. 기명器皿은 기물을 가리키며 절지折枝란 잘 라 놓은 화훼를 뜻합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절지에 더해 과일이나 문방구 혹은 괴석 등이 그려 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이 장르 역시 중국과 연관이 있지만 흥미롭게도 중국 그림에는 기명절지라는 장르가 없으며, 그와 같은 말을 그림 제목으로도 사용하지 않습니 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 그림을 조금 자세히 보면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장 승업은 어느 그림이든지 한 번 보면 복사기처럼 머릿속에 외워 넣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림의 소재나 테마뿐만 아닙니다. 기법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가 구사한 기법은 선의 묘미를 살리는

(오른쪽) 비색 황금병은 궁중에서 나왔는데, 누가 하늘 향기나는 계수나무 꽃을 꽂았나, 황후의 육궁은 시원한 가을을 좋고만 할 뿐, 푸른빛 감싼 황금 봉황을 거론하지 않구나 秘色金甁(玉色官甁)出內家 天香誰貯月中花 六宮只愛新凉好 不道金鳳(風)捲翠華

(왼쪽) 굴원과 송옥의 문장은 화초에서 드높아, 천추의 난보가 이소경을 압도하네, 지금은 아무렇게나 사람들에게 팔리어, 십자가 거리에서 흥정거리 되었네 屈宋文章草木高 千秋蘭譜壓離(風)騷 如今爛漫(賤)從人賣 十字街頭論擔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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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은 원래 시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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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 기명절지도 쌍폭

지본담채 각 132.6×28.7cm 개인


정교하고 세밀한 공필工筆의 채색 기법인 백묘법白描法, 빠르고 생략된 필치로 대상의 특징만을 캐치하는 감필법減筆法, 그리고 먹이나 담채를 엷게 풀어 헤치면서 수묵화 같은 상큼한 분위기 를 내는 선염渲染 담채법 등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기명절지도를 그릴 때 주로 사용한 것은 바로 선염 담채법입니다. 선염은 순우리말 로 바림이라고 하는데, 점차적으로 색을 짙게 하거나 반대로 옅게 하는 표현법입니다. 이 그림 에는 선염법이 십분 발휘돼 있습니다. 먹뿐만 아니라 청색을 몇 단계로 나눠 색을 내 마치 물에 풀어 칠한 수채화와 같은 느낌을 전해 줍니다. 장승업이 유행시켰다고 하는 이 기명절지도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기명절지도는 중국에서 별개로 존재했던 두 장르의 그림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식으로 하나로 합쳐진 듯합니다. 우선 그 한 가지 갈래는 청대 후반에 중국 상류 사회에 유행했던 ‘세조청공도歲朝清供圖’로 불린 세화歲 畵입니다. 세화란 연하장이나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연말연초에 주고받거나 문 앞에 붙이는 그림

을 말합니다. 세조청공의 세조는 새해의 시작을 뜻하며, 청공은 맑고 깨끗하게 갖춘다는 의미 입니다. 따라서 신년을 맞아 길상을 뜻하고 행운을 기원하는 그림을 주고받으면서, 그 내용으 로 좋은 뜻이 있는 꽃이나 과일을 그려 넣은 것이 세조청공도입니다. 이때 그려진 꽃이나 과일은 수반이나 도자기 또는 청동기에 담긴 것으로 그리는데 이것이 조 선에 전해진 것입니다. 이는 책거리 그림이 확대되는 과정에서도 영향을 미쳐 책과 세조청공도 가 합쳐지면서 독특한 형태의 책거리 그림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추사와도 관련이 깊은 청대 고증학자들이 학문적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박고 도博古圖’ 계통입니다. 박고도는 고대 중국에서 치러진 예악禮樂 행사에 쓰인 옛 청동기를 도록으 로 만들면서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북송 시대에 황제의 명으로 당시 궁중과 민간에 소장돼 있 던 옛 청동기 800여 점을 모아 20종류로 분류하고 이를 모아 『박고도록』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이후 청대 고증학자들이 고대 문자를 연구하는 데 있어 둘도 없는 자료가 됐습니다. 청대 말기의 화가이자 금석학자인 조지겸趙之謙, 1829~1884은 비석과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를 연구하는 한편 화훼와 결합시켜 ‘박고화훼도博古花卉圖’라는 장르를 그려 보였습니다. 학식이 높 고 인품이 뛰어난 그의 화훼 그림은 원래부터 인기가 높았는데, 여기에 박고도를 더한 것이 그려 지자 더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의 박고화훼도는 그 무렵 조선에 나와 있던 청군을 통해 조선 에 알려졌고, 한 번 보면 무엇이든 그려 내는 천재 화가 장승업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기명절지도는 일견 정물화와 닮아 보이지만 실물을 앞에 놓고 그리는 서양의 정물화와는 전 혀 다릅니다. 기명절지도는 금석학의 한 여흥으로 시작된 만큼 그 배경에는 문인적 취향이 자리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생과는 무관하게 머릿속에 든 청동기나 도자기를 자유롭게 배치하거 나 형태를 왜곡하는 것은 물론 상서로운 식물 또는 기물을 임의로 추가, 배치하면서 문인화와 같은 자유로움을 즐길 수 있습니다. 더욱이 먹이나 담채의 구사법, 필치 그리고 새로운 시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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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법 등 자유로운 기법 실험도 가능해 인기를 끌었습니다. 장승업에 의해 새롭게 주목을 받은 기명절지도는 이후 크게 유행하며 민화로도 재창조됐고, 또 오랫동안 여성들의 수본繡本 그림이 됐습니다. 구한말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세조청공도와 박 고도의 영향이 장승업을 통해 토착화되고 또 생활 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감상되어 온 것입니 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그가 단순히 기량만 갖춘 천재라는 단편적인 생각은 바뀌어질 수 있다 고도 생각됩니다. 장승업 그림에 관해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림 속의 글입니다. 그림 속 글은 보통 화제畵題라고 합니다. 글의 내용은 다양해서 시詩와 평도 있고, 또 그림 제작 경위 나 전래 사정을 밝힌 것도 있습니다. 그림에 이런 글이 보이는 것은 문인 화가가 본격적으로 등 장하면서부터입니다. 문인 화가들이 그림 속에 스스럼없이 글을 쓰자 당연히 화원 화가들도 그 뒤를 뒤따랐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조선 회화의 최후를 장식한 대천재인 장승업은 글을 못했습니다. 이미 소 개한 대로 고아가 되어 가난하게 굴러다닌 통에 글을 배울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글은 대부분 주변의 문사들, 후배 그리고 심지어는 제자가 적었습니다. 이 그림에 글을 적은 이는 제자인 안중식安中植, 1861~1919입니다. 벼루 옆에 보이는 ‘吾園 張承業오원 장승업’이라고 쓴 이름만 본인 필치입니다. 대천재 장승업의 그림에 다른 사람이 글을 대필했다는 사실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를 말해 주듯 상징적입니다. 그의 시대는 전통이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그리 고 옛 그림 속의 글 역시 이렇게 상투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 속 시는 명 중기의 문인 관료 장무章懋, 1436~1521가 송나라 휘종이 그린 꽃병 속의 계수 나무 꽃을 그림을 보고 지은 시와 청나라 중기의 문인 화가 정섭鄭燮, 1693~1765의 난을 보고 읊 은 시를 옮겨 적은 것입니다. 착각을 했는지 몇 자 바뀐 곳이 있습니다.

도화서의 최후 장승업이 도화서 화원인지 여부가 오랫동안 문제시됐습니다. 기량에 비해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중 회화 관련 연구자인 김현권 씨는 장승업이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자료를 몇 가지 찾아내 주목을 받 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는 1868년(26세) 경복궁 단청 공사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1879년 37세에는 훗날 순종이 될 세자의 가례처인 안국동 별궁 건영에 참가해 도화서 실관으로 임명된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40대 이후부터 역관 해주 오씨 집안과의 교류로 오세창이 추천하여 1895년 4월 일본에서 열리는 권업박람회에 참관단 일행으로 뽑혔으나 스스로 거절 한 것으로 전합니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그는 감찰이란 관직을 제수받았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의 도화서는 최후의 시기에 해당하던 때였습니다. 도화서는 1894년 갑오경장의 개혁으로 폐지되고, 도화서 가 맡고 있던 업무는 규장각으로 흡수, 통합되었습니다. 30명에 이르던 화원은 이때 모두 해직되고 도화 주사 2명만이 어진 모 사를 위해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계속되는 개혁 조치에 의해 1명으로 줄어들었고, 대한제국이 반포된 뒤에는 장예원 으로 이관됐습니다. 마지막 남은 화원도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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