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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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홍기대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 조선백자와 80년 홍기대 지음 백자는 청자가 주는 화려함이나 정교함은 없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것 같고 소박하다. 청화나 철사로 그려 낸 문양 그림도 무심하기 이를 데 없다. 백자의 이런 모습은 내 인생과도 닮았다. 그저 늘 걷는 길을 가듯 컬렉터와 미술관, 박물관을 대하며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수십 년을 애용해 온 작고 소박한 백자 술잔처럼 그저 안분지족하며 지내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술잔의 문양에 정이 간다. 철사로 들풀의 꽃잎 한둘을 눌러 찍어 놓은, 어찌 보면 어설퍼 보이는 문양이지만 수십 년 애지중지하며 친한 벗처럼 함께 나이를 먹어 왔다. 이 술잔에는 대포 한 잔 부어 놓고 하루 일의 고단함을 씻어 내거나 또 어느 때에는 작은 만족이나 행복감에 젖기도 했던 내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저자

우당 홍기대 又堂 洪起大

1921년 충북 충주 출생.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만주 망명으로 인해 14살이 되던 해에 당시 지필묵 상점이면서 고미술상을 겸하던 구하산방의 점원으로 들어가 고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해방 후 구하산방을 인수하고 전문적인 고미술 상인의 길을 걸으면서 한국 미술을 사랑한 유명한 컬렉터들과 거래하고, 그들이 체계적인 수집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많은 한 국 도자 명품의 역사적인 거래 현장에 있었던 저자는 한국 미술 시장의 산증인으로 남아 있 다. 우당은 할아버지(노정 홍경식)께서 지어 주신 호이다. 한국 도자, 특히 조선백자에 매료 된 저자는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작은 골동과 고미술품들을 수집하기도 했었다. 현재 구하 산방 경영을 넘겨 주고 일선에서 은퇴하였으나, 도자를 보는 눈을 원하는 많은 이들에게 경 험을 나누어 주고 있다. 기획

한국미술정보개발원

한국미술정보개발원은 한국 미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해 설립되어, 한국 미술 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보존하며, 활용 가능한 콘텐츠 자원으로 가공하여 국내외에 이 를 널리 소개하는 것을 것을 목적으로 활동중이다. 현재 한국 미술 정보 포털사이트 스마트K (http://www.koreanart21.com)를 운영, 미술에 관심있는 일반인, 학생,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국 미술 전문 지식 데이터베이스, 미술계 뉴스, 미술 시장 동향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 홍기대 지음


서문 │

고미술과의 인연, 조선백자와 80년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신 후, 열네 살에 갑자기 집안의 가장이 되어 직업 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때. 만약 내가 구하산 방의 점원이 아닌 설렁탕집 배달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면 내 인생은 어 떻게 되었을까. 그 순간에는 그 일이 나의 인생을 이렇게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아흔넷을 앞둔 이 시간, 80년 전의 기억을 더듬자니 그 긴 세월이 꿈만 같 고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나와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제는 세상을 떠났고, 어디선가 나타나서 나를 매료시키고 흥분시켰던 고미술품도 이제는 명품으로 인정을 받고 자신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거나,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게 되어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그간 나의 골동 인생을 정리하라는 요구가 주변에서 많았지만 과거를 돌이 켜 보는 일에 선뜻 손대지 못했던 것은, 고미술 상인으로서 내 손님들에게 조 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직도 그 걱정은 남 아 있으나, 시간이 많이 흘러 대부분 옛일이 되어 버리기도 했고, 얼어붙은 고미술 시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득 때문에 조심스럽게 펜 을 들었다. 이 책의 앞부분은 내가 어떻게 해서 고미술과 인연을 맺었는지, 어떤 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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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는지에 대한 회고록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 쟁 등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을 미처 다 꺼내 지는 못했다.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일들, 내 손을 거 쳐 간 유명한 명품들, 별의별 사람들과 엮이면서 겪어야만 했던 미술 시장의 사건들을 일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뒷부분에 도록 형식으로 실어 놓은 작은 도자 사진들은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도자들 중 특히 기억나는 것만을 모아 설명한 글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또 세간에서 얘기하는 빼어난 명품은 아니더라도, 한국 도자사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은 물론 나름대로 매력이 있 는 아름다운 작품들이다. 더러는 갈라지고 상처가 있거나 찌그러졌지만 그런 결함을 가진 덕분에 나에게서 오랜 시간 머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컬렉션 을 찬찬히 본 사람들이 미술품의 소장(所藏)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란다. 큰 재산이 있거나 꼭 많이 알아야만 미술품을 소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소신을 가지고 자신만의 소중한 컬렉션을 가지고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소망해 본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글이지만 이 작은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분 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에게 책을 만들 계기를 제공해 준 가나아트 이호 재 회장, 시간을 들여 기억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한국미술정보개발원 윤 철규 대표, 최문선 연구원, 예쁜 책으로 만들어 주신 컬처북스에 감사드린다. 언제나 나를 지원해 주고 나의 골동 사랑을 이해해 주는 큰아들 석원과 며느 리를 비롯해 자식들과 손주들 모두에게 특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4년 1월

홍기대 5


차례 │

서문       4

나의 도자기 인생

나와 함께한 평생지기, 조선백자       14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할아버지의 계동시사       18 아버지의 만주 망명으로 구하산방과 인연을 맺다       26 일제강점기의 구하산방과 서화인들, 기억 속의 이당 김은호와 청전 이상범       31 상인 마에다와의 만남, 어깨 너머로 배우며 도자에 눈뜨다       35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를 오가며, 골동 수업을 받다       38 일본인들의 한국 도자 사랑, 아사카와 노리타가의 조선백자 연구       41 해방 전 구하산방 시절의 컬렉터들, 매일 간송 댁을 드나들다       47 해방 무렵의 혼란과 구하산방 인수, 고미술품들이 쏟아져 나오다       58 결혼과 새 가족들, 형제 여덟과 자식 여섯을 건사하다        63


6・25 한국전쟁,

고미술품 모두를 놔두고 피난길에 오르다       67 부산 피난 시절의 컬렉터와 골동 상인들, 전쟁으로 그간 모은 고미술품을 모두 잃다       69 전쟁 속의 명품들, 도천 도상봉과 수화 김환기의 도자 사랑       76 도암 지순탁과 목공예 사업, 아쉽기만 했던 동원 이홍근과의 인연       84 소전 손재형과 인촌 김성수, 취향과 안목에 따라 고미술품 수집        88 인사동 고미술품 거리, 전후 다양한 경력의 상인들이 모여들다       95 네 조각으로 깨졌던 청자 나한좌상, 완전히 복원해 명품으로 재탄생시키다       103 고미술품 거래와 교훈, 권력에 잠시 얽힌 에피소드       109 신사임당 초상화, 여러 사정으로 공인도 못 받고 잃다       113 컬렉터들과의 행복한 만남, 수집품에도 운명과 팔자가 있다        119 도자기 감상, 많이 보고, 공부하고 경험해야 한다       129 도자기 수집과 거래, 미술관과 박물관 컬렉션을 존중하며, 자료적 가치까지 챙겨야 선순환한다       133


나의 도자기 여정에서 만난 작품들

백자 청화매죽문 접시 白磁靑畵梅竹文楪匙       142 토기 마형 각배 土器馬形角杯       146 청자 흑백상감진사연화문 뚜껑 靑磁黑白象嵌辰砂蓮花文蓋       148 분청사기 인물상 粉靑沙器人物像       150 조선 청자 흑상감진사어문 벼루 朝鮮靑磁黑象嵌辰砂魚文硯       152 백자 청화화조현주진준명 각호 白磁靑畵花鳥玄酒盡樽銘角壺       154 분청사기 운학문 병 粉靑沙器雲鶴文甁       156 백자 철화시문 병 白磁鐵畵詩文甁       158 백자 진사수초문 병 白磁辰砂水草文甁       160 백자 철화죽화문 항아리 白磁鐵畵竹花文壺       162 백자 청화시문 접시 白磁靑畵詩文楪匙       164 백자 팔각 제기 白磁八角祭器       166 백자 청화매죽인물문 각병 白磁靑畵梅竹人物文角甁       168 백자 청화 약항아리 白磁靑畵藥壺       170 백자 청화진사괴석초화문 사각 주전자 白磁靑畵辰砂怪石草花文四角注子       172 백자 청화함풍신해칠월명 다각병 白磁靑畵咸豊辛亥七月銘多角甁       174 백자 청화난초문 각병 白磁靑畵蘭草文角甁       176 청자 개구리 靑磁蛙       178 청자 음각모란문 유병 靑磁陰刻牧丹文油甁       180 조선 청자 제기 朝鮮靑磁祭器       182 고려 백자 음각어문 완 高麗白磁陰刻魚文碗       184 분청사기 흑상감어초문 병 粉靑沙器黑象嵌魚草文甁       186 분청사기 흑백상감연화문 접시 粉靑沙器黑白象嵌蓮花文楪匙       188 분청사기 초문 소병 粉靑沙器草文小甁       190 백자 철화수초문 병 白磁鐵畵水草文甁       192 백자 철화난문 병 白磁鐵畵蘭文甁       194 백자 철화죽문 병 白磁鐵畵竹文甁       196 백자 철화난문 병 白磁鐵畵蘭文甁       198 백자 철화죽문 병 白磁鐵畵竹文甁       200 백자 철화죽문시명 항아리 白磁鐵畵竹文詩銘壺        202 백자 청화묘지명 골항아리 白磁靑畵墓誌銘骨壺       204


백자 청화난문 병 白磁靑畵蘭文甁       206 백자 청화진사포도넝쿨문 병 白磁靑畵辰砂葡萄文甁       208 백자 청화모란호접문 병 白磁靑畵牧丹胡蝶文甁       210 백자 청화운룡문 병 白磁靑畵雲龍文甁       212 백자 청화쇄문 병 白磁靑畵鎖文甁       214 백자 장군 白磁俵甁       216 백자 향합 白磁香盒       218 백자 항아리 白磁壺       220 백자 청화수자문 제기 白磁靑畵壽字文祭器       222 백자 청화초화문 접시 白磁靑畵草花文楪匙       224 백자 청화율서문 사각연적 白磁靑畵栗鼠文四角硯滴       226 백자 청채예의염치명 선형연적 白磁靑彩禮義廉恥銘扇形硯滴       228 백자 청화산수문 사각연적 白磁靑畵山水文四角硯滴       230 석제 화문 팔각연적 石製花文八角硯滴       232 백자 청화요즉수명 사각연적 白磁靑畵堯則水銘四角硯滴       234 백자 청화팔보수복명 환형연적 白磁靑畵八寶壽福銘環形硯滴       236 백자 청화시문 환형연적 白磁靑畵詩文環形硯滴       238 백자 청화토용문 사각연적 白磁靑畵兎舂文四角硯滴       240 백자 양각운학송죽매문 사각연적 白磁陽刻雲鶴松竹梅文四角硯滴       242 백자 청채산수형 필가 白磁靑彩山水形筆架       244 백자 청화복숭아모양 소연적 白磁靑畵桃形小硯滴       246 백자 강판 白磁薑板       248 백자 청화죽문 촛대 白磁靑畵竹文燭臺       250 백자 인물상 한 쌍 白磁人物像一雙       252 청자 가사 고리 靑磁袈裟環       254 도제 음각어문 벼루 陶製陰刻魚文硯       256 백자 병 白磁甁       258 백자 청화철화산수문 항아리 白磁靑畵鐵畵山水文壺       260 백자 칠각 항아리 白磁七角壺       262 백자 청화진사봉황문 병 白磁靑畵辰砂鳳凰文甁       264 백자 청화죽문 항아리白磁靑畵竹文壺       266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의 필자, 2013년 12월



나의 도자기 인생

백자의 모습은 내 인생과도 닮았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오래도록 고미술품을 다뤄 왔지만 화려하거나 근사한 업적을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그보다는 늘 걷는 길을 가듯 이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이면 돌아와 술 한 잔 기울이는 단조로운 생활이다.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이런 작은 백자 술잔과 같은 것을 만나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면서 지내왔다고 할 수 있다. 무덤덤하게 지나온 세월이지만 백자와 함께 한 팔십 인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와 함께한 평생지기, 조선백자

내 곁에는 항상 나와 함께 해 온 술잔 하나가 있다. 가까운 일본을 여행할 때에도 꼭 가지고 가는 애착이 큰 술잔이다.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조선 시대에 만든 작은 백자 잔이다. 시대는 조금 앞 선 조선 초기의 것으로 문양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철사(鐵砂)로 들풀의 꽃 잎 한둘을 눌러 찍어 놓은 데 불과하다. 치장이라고 하기에는 본격적이지 도 않을뿐더러 어떻게 보면 어설퍼 보일 정도이다. 실제 잘 모르는 이들은 이런 술잔이 뭐가 그리 대단해 수십 년 동안 애지중지하느냐고도 한다. 이 술잔에는 대포 한 잔을 부어 놓고 하루 일의 고단함을 씻어 내거나 또 어느 때에는 작은 만족이나 행복감에 젖기도 했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술잔을 50년 넘게 애용한 데에는 이 잔에 조선 백자의 멋과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의 도자기라고 하면 크게 고려 시대의 청자와 조선의 백자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도자기가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은 그야말로 정반대 이다. 청자는 공예적 도안을 십분 발휘해 정교하기 그지없다. 반면에 백자 는 도안적 기교보다는 자유롭고 활달한 문양이 특징이다. 백자의 문양에는 일부러 그리고자 하면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의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있다. 내가 백자에 이끌린 매력은 바로 이 점이다. 그것은 내 성격이나 취향과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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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그렇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처음 이 일을 배울 무렵 보고 들었던 분 위기나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열네 살에 구하산방(九霞山 房)에 취직하여 골동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구하산방은 일제 때 경성에서

제일 큰 미술품 재료 가게였다. 당시는 서양화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따라서 그림 하면 당 연히 동양화를 꼽았다. 구하산방은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고급 종이에 서 중국제 먹, 붓, 벼루 등을 다루고 있었다. 자연히 이런 물건들은 서화가 뿐만 아니라 문인, 묵객들의 소용품이어서 가게에는 이들이 자주 드나들었 다. 이들 문인, 묵객 그리고 서화가들은 본격적인 컬렉터들은 아니었으나 간혹 문방구와 관련된 도자기를 구하기도 했다. 대개는 문인 취향이어서 백자의 절제되고 간결한 분위기를 선호했다. 그 무렵 일제 하의 경성에 나와 있던 일본인 가운데 한국 도자기를 수집 하는 컬렉터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 대부분 고려청자를 주로 수집하고 있 었다. 고려청자는 이미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고가의 차 도구로 쓰였으며, 차회(茶會)를 열 때 장식해 놓고 감상하고 즐기는 고급 자기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조선을 합병한 이후로 일본인들이 나와 살면서 수집한 것은 먼저 고려청자였다. 백자가 수집 대상이 된 것은 이보다 훨씬 나중이 었고, 당시 백자 취향의 컬렉터는 소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백자 취향의 컬렉터들이 모이는 곳 중 하나가 구하산방이었다. 그런 곳에서 일 을 하게 되어 나 역시 조선백자에 담긴 푸근하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 그 리고 소탈한 맛을 저절로 익히게 된 것이다. 구하산방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고미술품을 다루면서 실제 청자나 분청사기 쪽보다는 백자 일을 훨씬 더 많이 했다. 백자에는 청 자가 주는 화려함이나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어딘가 비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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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고 또 소박하며 청화가 됐든 철사가 됐든 이를 가지고 그린 문양도 무심하기 이를 데 없다. 백자의 이런 모습은 내 인생과도 닮았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오래도 록 고미술품을 다뤄왔지만 화려하거나 근사한 업적을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그보다는 늘 걷는 길을 가듯이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이면 돌아와 술 한 잔 기울이는 단조로운 생활이다.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이런 작은 백자 술잔과 같은 것 을 만나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면서 지내왔다고 할 수 있다. 무덤덤하게 지 나온 세월이지만 백자와 함께 한 팔십 인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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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할아버지의 계동시사

내 고향은 충청북도 충주의 노은면이라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 살았던 것은 몇 달에 불과하다. 그곳에서 태어나기만 했지 서너 달 있다가 바로 고 향을 떠난 것이다. 나는 상(祥) 자, 희(憙) 자 어른과 어머니 조호선(趙好善) 여사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내가 돌 도 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고 한다.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이것이 1921년의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셨는데 아 마도 할아버지를 설득해 서울로 이주한 듯하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몇 군 데로 이사했다고 하는데, 이 무렵의 일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 처음 기억 나는 것은 서너 살 무렵에 계동 112번지에 기와집을 새로 짓고 이사한 것 이다. 이 집에서는 꽤 오래 살았다. 지금 기억으로는 휘문학교(현 원서동 옛 휘문중학교 자리) 담장이 끝나는 곳에 궁터가 있었고 그 옆 골목 안쪽의 집

이었다. 집 근처에는 개울도 있었다. 이사 올 무렵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셨는지는 잘 모른다. 아버지에 관련된 기억 중 인상적인 것은 인사동 네거리 모퉁이의 붉은색 3층 건물에서 카페를 하셨던 일이다. 인사동의 카페 이름은 ‘에덴’이었다. 아버지 몰래 동생을 데리고 그 가게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가면 일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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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귀여워해 주면서 붕어 모양으로 생긴 맥주 안주용 과자를 주곤 했 다. 그런데 이 일이 알려지면서 아버지한테 공연한 데를 기웃거린다고 크 게 혼이 났던 기억이 있다. 그런 분이셨으니 원래부터 카페를 하실 분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중에 알고 보니 카페는 다른 용도가 있었다. 카페 2층은 일종의 비밀결사 같은 모임의 장소로 쓰였다. 어쨌든 소학교를 다니기 이전부터 인사동을 들락날 락했으니 평생 인사동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조금 늦은 나이인 아홉 살에 재동소학교(현 재동초등학교)에 입학했 다. 소학교를 다닐 때는 장난을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 아이였다. 공부도 좋 아하기는 했지만 운동을 더 잘 하여 야구나 축구 같은 운동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재동학교에는 야구부가 있어서 야구하는 것을 많이 봤다. 학교 대항 시합에는 응원을 했던 기억도 있다. 라이벌인 교동과 우리 학교가 야구 시 합을 하곤 했는데 지면 다들 울고 그랬다. 야구를 무척 좋아했지만 야구를 할 만한 학년이 되자 야구부가 없어져 아쉽게도 선수가 되어 볼 기회는 없 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집안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로 인해 내 인 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또 운명도 다른 쪽으로 향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2월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면서 평범 하게 학교를 다니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캄캄한 밤중에 문밖에서 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나가서 문을 열 어 주니 건장하게 생긴 사람 셋이 신도 벗지 않고 방 안까지 들어왔다. 그 러고서는 어머니를 몰아세우며 험한 말을 하면서 ‘서방 간 곳을 대라’고 윽 박질렀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에 이어 방에 들어와 큰소리로 떠드는 말에 나도 잠이 깨 있었다. 당시 내 아래로 동생이 넷 있었는데 모두가 정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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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없을 정도로 겁을 먹었다. 이들은 경찰서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어머니께서 영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봉변을 당하시면서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이들에게 ‘일이 있어 고향 충주로 가신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 했다. 당시 충주 고향에는 아버지의 집안 형제 분들이 많이 살고 계셨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충주 간다고 하셨던 모양이다. 고향에는 홍 봉희라고 석유회사를 경영하던 꽤 부자였던 친척도 있었는데 아마 그분을 찾아간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날 새벽 그 소동은 본인이 없는데다 다그쳐도 더 이상은 나올 것이 없 으니 그들은 으름장에 엄포만 놓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 날 그 일로 인해 우리 집은 가장이라는 기둥이 뿌리째 뽑힌 형국이 됐다. 아버지는 충주의 고향 친구, 그리고 친척들과 함께 정치 모임 같은 것을 종종 해 왔던 듯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께서는 충주에 내려가신 것이 아 니었다. 집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한테 고향에 간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 시고 사실은 반대 방향인 만주로 망명을 하셨던 것이다. 한참 뒤에 편지로 그 사정을 전해 주셨다. 아버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아내 도 속이고 나이 드신 부친과 다섯 자식들을 버리고 만주로 떠나신 것이다. 별 불편한 것 없이 즐겁기만 했던 내 어린 시절은 그것으로 뜻하지 않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호는 일운(一雲)이고, 달리 천외(天外)라고도 하셨다. 1903년생 이신 아버지께서는 그때 만주를 거쳐 상해로 가셨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에 합류해 정치 활동을 하셨다. 이런 내용은 해방 전에는 자세히 알지 못했는 데 해방이 되면서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국할 때 아버지도 함께 귀국하시 면서 자연히 알게 됐다. 다만 상해에 가시고 한참이 지난 뒤, 어느 정도 자 리를 잡으셨는지 할아버지께 약간을 돈을 부치셨다. 이때 ‘10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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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원 보냈다’라고 쓴 엽서를 받아 본 기억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상해에 계실 때 새로 작은어머니를 맞이해 동생 넷을 낳 으셨다. 배다른 동생들 넷은 상해에서 귀국할 때 모두 데리고 오셨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기 때문에 이 동생들도 모두 할아 버지 밑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때는 벌써 직업인이 돼 있었던 내가 배다른 동생들까지 돌보게 됐다.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 1888~1968)는 촌수 로는 좀 멀지만 집안끼리는 매우 가까웠다. 아버지와 벽초 두 분은 만주로 가시기 이전부터 무슨 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어린 나로서는 그 당시 아무 런 짐작을 할 수 없었고 이후에도 자세한 얘기는 직접 듣지 못했다. 다만 해방 이후 벽초가 주도한 민주독립당에 아버지께서도 합류해 조직부장 등 을 맡으셨던 것으로 안다. 해방 정국에서 임정(臨政) 출신들은 여러 면에서 정치적 활로를 모색했 으나 여의치 않은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더욱이 아버지께서는 6・25 전 쟁이 일어나면서 어떤 이유로 구속되셨다. 이때 여러 사람과 함께 붙들려 갔는데 결국 풀려 나오지 못하셨다. 당시에 민주독립당원으로 함께 구속되 었던 남상일, 이관구 선생 등은 모두 풀려났으나 우리 아버지만 나오지 못 하셨다. 이관구 선생께서 훗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보살펴 주고 아 껴 주신 것은 아마 당시의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생사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확인할 수 없었다. 상해에서 온 누 이동생 중 하나를 중학교에 보낼 때 학교에 제출하기 위해 호적등본을 떼 어 보니 거기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돼 있었다. 사망일자는 1951 년 11월 5일이었다. 감옥에서 풀려 나오지 못해 돌아가셨을 것이라고는 여 기고 있었으나 이때 비로소 전쟁 중에 감옥에서 돌아가신 사실을 확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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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것이다. 사망일자는 적혀 있지만 정확한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 래서 그 날짜를 기일로 제사를 모실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함자는 경(璟) 자, 식(植) 자를 쓰셨다. 호는 노정(老亭)이셨 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하셨고 시문에도 능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서울에 올라오신 뒤로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신 듯하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상해로 탈출한 뒤로는 올망졸망한 손자들과 며느리와 함께 사시면서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독자여서 형제가 없 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형제는 여러 분이셔서 나이 어린 당숙이 어려서부 터 큰집인 우리 집에 와서 살았다. 이 나이 어린 당숙은 늦게까지 나와 함 께 일을 했는데 내가 구하산방에서 손을 떼면서 당숙이 맡아 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계동에서 한약방을 하셨으나 수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5 전, 10전 하는 약을 심심풀이로 팔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시를 짓고 시인, 묵객들과 어울리는 게 일이셨다. 그러다가 마음이 울적하시면 어머니에게 쌀을 쪄서 말려 가루로 내게 하셨다. 그리고 이를 자루에 넣고 집을 나가셔 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금강산이며 지리산 등을 돌아다니셨다. 시국도 시 국이겠지만 아들도 없이 곤궁한 생활 속에 쌓이는 심화를 이렇게 푸신 듯 하다. 할아버지는 평소에 생활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으시고 문인들과 어울리 셨다. 이때 어울리시던 분들은 스스로를 계동시사(桂洞詩社)라고 불렀다. 할아버지의 한약방과 사랑방은 계동시사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이분들 가운데에는 유명한 분들도 많이 계셨다. 서화가로 이름난 구룡산인 김용진 (九龍山人 金容鎭, 1878~1968) 선생은 할아버지 환갑 때 오셔서 축시를 직

접 지어 주시고 그림도 그려 주셨다. 벽초는 항렬로는 할아버지와 숙질 간이었지만 이를 떠나 글 친구로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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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인 김용진 선생이 할아버지의 회갑에 그려 준 작품. 아래는 그 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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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놀러왔다. 벽초는 최남선, 정인보와 함께 당시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할아버지뿐 아니라 아버지와도 인연이 깊었다. 나 역시 훗날 종친회 일을 맡아 보면서 괴산에 있는 벽초 생가를 종친회 이름으로 복원할 때 관여했다. 시는 옛 문인의 당연한 교양이었다. 고향을 떠나 아들 없이 며느리와 어 린 손주들과 함께 생활하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시를 더욱 간절하게 여기셨 다. 그런데 계동시사의 계원들이 모이는 날이면 나로서는 고역이었다. 할 아버지와 함께 방을 썼던 나는 물론 내 동생은 자욱한 담배연기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이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밖에서 기 다려야만 했다.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지은 시는 상당히 많았다. 벽장에 가득이었는데 리 어카로 실어 나르면 하나는 되었을 것이다. 내가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점 은 이 시를 소중하게 간직하지 못한 일이다. 생전에 문집을 만들어 드렸어 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6・25가 터졌다. 허둥지둥 피난을 가면 서 이것까지 챙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할아버지의 시고(詩 稿)는 모두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후회가 막심하고 죄

송스런 마음이 가득하다. 집안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언급하면, 홍씨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곳은 경북 풍산이다. 나는 풍산 홍씨 24세손이다. 풍산 홍씨는 시조 할아버지부 터 4세조까지 경북 풍산에 묘소가 있다. 고려 때 풍산 홍씨의 세 파가 모두 혁혁한 벼슬을 하면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면서 모두 개성 을 떠나게 됐다. 두 파는 다시 경북 풍산으로 내려갔으나 그중 한 파는 개 성을 떠나 고양시 근처에 정착을 했다. 고양에 터를 잡으신 분은 낭장(郎 將) 벼슬을 하셨는데 나는 그 직계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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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내내 벼슬을 하지 않고 지내다 9세조 되시는 분이 다시 벼슬 길에 나가 높은 자리에 오르셨다. 이분이 바로 모당 홍이상(慕堂 洪履祥, 1549~1615)이시다. 화가 김홍도가 이분의 일생을 그렸다고 전하는 평생도

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당 평생도> 8폭 병풍인데, 모 당 어른이 과거 급제한 뒤 송도 유수를 거쳐 병조판서에 좌의정에 이른 내 용이 김홍도의 천재다운 솜씨로 그려져 있다. 이 평생도는 집안의 주문으로 그려진 것이라고 하니 우리 집안과 서화와 의 인연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께서 늘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 신 것만 보아도 그렇다. 만일 내가 제대로 학교에 진학을 했더라면 아마 서 화와 관련 있는 쪽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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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자기 여정에서 만났던 작품들입니다. 사진 상태가 안 좋거나   크기나 제작 연대 등을 정확하게 밝힐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나의 도자기 여정에서 만났던 작품들

도자기는 누가 수집을 하든 단순히 개인의 수집 대상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땅속에서 나왔든 수백 년을 전해 내려왔든 오늘날 전해지는 옛 도자기 하나하나에는 각 시대마 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을 수집하고 보존하 는 일은 사회적인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80년 가까운 고미술계 생 활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도 결국은 고객의 수집을 도왔던 물건들이 미술관, 박물관을 통해 일반에게 다시 널리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물건이 언젠가는 우리의 역 사와 문화를 말해 주는 자료로 일반과 만날 날을 기대해 본다.


白磁靑畵梅竹文楪匙

백자 청화매죽문 접시

15세기, 지름 21.3cm


백자 청화매죽문 접시

이 접시는 조선 전기의 접시 중에서도

특별히 아름다운 접시이다. 조선 전기의 청화 백자 접시는 그 수가 많지 않 다. 그래서 귀하지만 이 접시는 그려진 매화와 대나무가 전문 화가의 손을 빌린 최고의 솜씨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이 접시는 뒷면에 팔보문(八寶文) 이 그려져 있다. 뒷면에 이런 문양이 그려진 것은 1990년대 초반에 경매에 나온 것과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접시밖에는 없다. 이 접시와의 인연은 아주 짧았다. 불과 하룻밤도 못 있고 남의 손으로 들 어가 버려 내내 아쉬움이 남는 접시이다. 이 접시는 충무로에서 장사를 잘하 던 신 모 사장이 처음 차지했던 물건이다. 그 집은 나도 잘 아는 부잣집 도련 님 출신의 눈 밝은 서 사장이 시간 보낼 겸해서 자주 놀러와 있던 곳이다. 하 루는 그가 와 있는 자리에 부산의 시골 영감이 찾아와 이 백자 접시를 풀어 보인 것이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신 사장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영감 과 접시를 내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서 사장이 신 사장의 옆 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눈치를 주자 그때서야 마지 못해서 샀다는 것이다. 서 사장과는 자주 저녁 시간을 보내던 사이로 그날도 함께 보신각 뒤에 서 술을 한 잔 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신 사장은 무슨 그런 실수를 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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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며 웃으며 자신의 공을 늘어놓았다. 물건이 걸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서 이튿날 물건이나 구경할 요량으로 신 사장의 가게를 찾았더니 ‘벌써 팔 렸다’고 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더욱 궁금해 졌다. 그의 말인즉슨, 서 사장이 나간 뒤에 바로 한 컬렉터가 와서 좋은 물 건을 찾길래 ‘팔았다’는 것이다. 손님 이름은 함부로 물을 수 없어 ‘얼마냐 팔았냐’고 하니 120만 원이라고 했다. 120만 원이라면 당시 엄청나게 큰돈 이었다. 그런 돈을 낼 만한 당시 국내 컬렉터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아 ‘누구냐’고 재차 묻자 ‘브런디지 부인’이라고 했다. 당시 IOC 위원장이었 던 브런디지(Avery Brundage) 씨는 부인과 함께 원래 중국 도자 컬렉터로 유명했다. 그중에서 명대(明代)의 도자기를 많이 모았는데 이 무렵에 한국 도자기에도 매료돼 한국 물건을 찾고 있었다. 공무로 바쁜 남편 대신 부인 혼자 돌아다니다 우연히 신 사장의 가게에 들러 이를 보게 된 것이다. 부인은 단박에 매료돼 돌아가서 2주일 이내에 대금을 보내겠으니 그동안 물건을 잘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건을 볼 수 있었는데 막상 보니 정말 기막히는 물건이었다. 하지 만 벌써 팔렸다니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나흘 지난 뒤에 신 사장을 다시 만났는데 ‘부인으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다’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나가는 말로 ‘그 값은 불가능하지만 절반쯤에는 안 되겠느냐’고 떠보았다. 물론 그는 고개를 절 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한 열흘 지나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급한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으니 인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쪽도 급하게 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러저리 다니다가 친척 동생을 통해 그의 회사에서 급전을 빌리게 됐다. 빌린 돈으로 무사히 대금 을 치르고 나서 접시를 인수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빌린 돈이었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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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돈을 마련할 때까지 ‘너도 한번 구경해 보아라’ 하는 식으로 접시를 동 생에게 맡겼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려고 해서인지 다음날이 동생 생일 이었다. 동생은 젊은 시절 똑똑하고 일을 잘해 그 회사에 들어간 뒤 사장 눈에 들었고, 그 사장이 나서서 자기 누님의 딸과 결혼을 시켰다. 즉 조카 사위를 만든 것이다. 이튿날 아침 조카 사위의 생일에 초대를 받은 사장이 생일 잔칫상을 먹 으러 동생 집에 왔다가 그 접시를 본 것이다. 사장은 도자기와는 무관한 사 람인데 접시를 보고서 ‘아주 좋은 접시’라고 하며, 자초지종을 듣더니만 ‘무슨 접시가 그렇게 비싸냐’고 하면서도 그냥 가져가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차피 그만한 금액의 물건은 내 것이 아니고 지나갈 물건이었지만 허망했다. 마치 귀한 새가 손 위에 우연히 내 려앉았는데 보드라운 털을 한번 쓰다듬어 볼 틈도 없이 날아가 버린 꼴이 됐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해서인지 한 보름쯤 지나서 이번에는 신 사장 이 다급히 연락을 해 왔다. 브런디지 부인이 미국에서 사람을 보내 돈을 보 내왔으니 ‘죄송하지만 접시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접시는 이미 수중에 없는 지 오래였다. 그에게 전후 사정을 털어놓으며 ‘판 셈이 됐다’고 해도 그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동생을 시켜 돌려달라는 말을 넣었으나 일언지하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신 사장은 미국에서 온 청년에게 미국말로 심한 불평을 들었다고 했다. 나 역시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찍어 놓은 사진 한 장뿐이었다. 이때가 1950년대 후반의 일인데 그 이후로 이 접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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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 器 馬 形 角 杯

토기 마형 각배

삼국 시대, 높이 19cm, 길이 12cm


토기 마형 각배

토기를 좌대 삼아 말이 세워져 있고 그

말 위에 각배가 놓인 토기이다. 이러한 형태의 마형 토기는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 인물이 말을 타고 있는 형태의 기마인물형 토기는 해방 전부터 알 려져 있고 국보 제91호가 유명하지만 이것은 말 위에 사람 대신 각배를 올 린 것이 특이하여 토기 중의 걸작으로 볼 수 있다. 이 토기를 처음 보았던 것은 1960년대 중반으로 당시 이를 보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고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이 토기를 입수하고 얼마 후에 경북의대 이비인후과 과장이던 이양선 교 수가 이와 유사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차림새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소탈했으나 금속과 토기를 전문으로 수집하 는 대수장가였다. 나중에 이 교수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 속에 마형 각배가 3점이나 들어 있었다. 당시 기증 소식을 듣고 기증품들을 살펴보다 마형 각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 다. 그 이후에도 마형 각배는 몇 점 더 세상에 출현해 지금은 삼성에도 유 사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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