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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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내 친구에게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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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친구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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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무지개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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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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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시절들 Dann , Lynn

46 커밍아웃 후 , 열네 통의 편지 심이환, 노휘영

64 낯선 상대 박철희, 가가랜덤채팅

108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박종범, 최민영

136 두 친구 서재준, 박현우

150 너의 뒤에서 노하라 쿠로 , 코우타로 ;타케루

170 서평 다제이, 이로 , 이혁상

176 기획의 글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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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절들

Dann, Ly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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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 하루 차이인 Dann과 Lynn은 6년 전 첫 직장의 입사 동기로 만났다. 회사 시절부터 이직 후까지 오랜 시간 서로 많은 것을 함께 나눴다. 그사이 Dann은 군대를 다녀왔고 Lynn은 결혼을 했다. ‘시절들’은 둘이 태어나 따로 겪은, 함께 겪은, 그리고 앞으로 또 같이 겪어나갈 시절들의 이야기다. 서로에게 소중한 추억과 겹치는 기억들, 서로 많이 달랐던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각자의 기억으로, 다른 공간에서, 단어를 써 내려갔다. 언뜻 두 사람만의 이야기 같지만, 그 시절들 속에는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있어 이야기는 때로 겹치고, 나눠지고, 또 만나며 사람 사이를 흐른다. 그러니 어쩌면 이것은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왔고, 지나가고 있으며 앞으로 지나가게 될 시절들의 이야기. 뒤돌아보고, 멈춰 서보고, 그렇게 가만히 그려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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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올림픽이 열리던 그해 한여름, 서울의 빌딩 숲 사이에 뜬금없이 자리한 대학병원에서 첫아이로 태어났다. 이상한 해였다. 시집이 한 해의 출판시장 판매 부수 1위부터 3위를 휩쓴 해, 이상은이 ‘담다디’로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타며 데뷔한 해, 비가 하도 안 내린 탓에 <타임> 지가 올해의 인물 대신 올해의 행성으로 지구를 선정한 괴이한

해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아기 옷을 분홍색 반, 하늘색 반 사놨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아들일지 딸일지 낳을 때까지 모르던 시절이었으니까. 결국 사진들 속의 어린 나는 분홍색 옷도 하늘색 옷도 다 입는 성별 미상의 예쁘장한 아기가 되어 있었다. 2.6kg , 미숙아와 정상의 경계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나 엄마를 만나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지금도 파일에 넣어 가지고 있는 신생아 팔찌에는 ‘왕 울보’라는 글씨가 있다. 왕과 울보의 글씨체가 다른 걸 보면 울보를 써놓고 후에 왕을 다른 간호사가 적은 거겠지. 이미 나는 그때부터 요란스럽게 관심에 목마른 아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신생아 사이에서 목청을 더 높여 나를 봐달라고 울어 젖히던 미숙아. 그 와중에 다행이었는지 어머니의 제자 중에 그 병원 간호사들이 있어서, 매일 어머니의 병실에 꽃을 꽂아주고 또 나를 챙겨주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더 낳는 가족계획을 세우셨지만 어쩐지 나 하나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서른 해가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가족 구성원은 셋이다. 아버지도 외동인지라 집안에 손주도 나 하나다. 그리고 아마도, 여기서 나에게서 족보가 정리될 예정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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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여름의 한가운데, 지방 소도시의 오래된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에 예정대로 된 일이 무엇이 있을까마는, 나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덜컥 생겨버린 둘째였다. 살림이 어려워 지금 둘째를 낳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고 생각한 엄마는 내 존재를 알게 되자 며칠을 고민하다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손가락을 꼭꼭 깨물며 병원 의자에 앉아 있던 스물세 살의 엄마는 집안 어른들에게 차마 알리지 않고 수술을 할 순 없어 집으로 전화를 건다. 그리고 할머니의 엄청난 꾸지람을 듣는다.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이는 어떻게든 키우게 되어 있다는, 어쩌면 누군가 해주기를 기다렸을 말. 엄마는 미안함과 안도감 사이를 오가며 집으로 돌아온다. 이듬해 여름,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서 응아응아 울며 태어났다. 병원을 떠나 도착해보니 앞으로 살게 될 집은 시골 마을에서도 외진 산자락 아래, 조가비처럼 엎드린 오랜 한옥. 이 집에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살게 된다. 글 읽기를 좋아하는 천생 선비인 할아버지와 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 할머니, 농사일보다 약주와 친구들을 좋아하는 한량(…) 아빠, 그런 아빠를 대신해 두 배로 바지런히 살림을 꾸리는 엄마, 그리고 새로 생긴 조그만 동생이 마냥 신기한 두 살 터울의 오빠. 이것이 나의 ‘가족’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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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놀이 우리 집은 1980년대에 지어진 전형적인 서울 집이다. 높은 담장에 돌계단을 오르면 잔디밭이 있고, 2층에는 하얀 난간이 달린 테라스가 있는 주택. 바닥과 계단은 나무로 되어 있어, 어린 내가 돌아다니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숨길 수 없던 나의 서울 집. 담이 높던 우리 동네는 골목대장을 비롯한 동네 놀이문화가 생길 수 없는 조건이었다. 고작해야 위아랫집에 같이 살던 사촌 누나들, 혹은 우리 집 주차장 창고 방에 세 살던 여자애와 잔디밭에서 소꿉놀이하는 게 전부였다. 입에서 거품 나는 개구리 인형을 불어대고, 플라스틱 볼링공을 굴리고, 강아지 미미와 고양이 네로와 마당에서 뒹구는 것들. 그런 것들이 일상이었다. 오래된 사진을 뒤적거리다 생긴 후천적 기억인지 혹은 내 인생의 가장 오래된 선천적 기억인지 알 수 없는, 잊지 못하는 장면이 몇 있다. 앨리스와 토끼가 된 것 마냥 사촌 누나랑 티타임 코스프레를 하면서 장난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장면, 누나의 장난감 화장대에–억지로– 앉은 채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를 묶은 채로 거울을 보던 내 모습, 크리스마스 전날 밤 머리맡에 손수건으로 인형 이불 만들어 덮어준 채 잠이 든 어린 초상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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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놀이 그 시절 아침 풍경은 늘 소란했다. 따라나서는 여동생이 귀찮아서 집에 두고 가려고 냅다 뛰는 오빠와 엉엉 울며 그 뒤를 쫓는 나와, 놀이인 줄 알고 그 뒤를 따라 뛰는 똥개 방울이의 꼬리잡기로 매번 흙길에 먼지가 일었다. 뛰다 보니 오빠 마음이 약해진 탓인지 내가 기어이 따라잡고 말았는지, 결국 우리는 늘 나란히 걸으며 마을 곳곳을 누비었다. 언덕 너머 사는 오빠 친구들과 낮이면 공터에서 비석 치기나 땅따먹기 같은 놀이를 하고, 밤이면 랜턴을 들고 참나무 둥치에 사는 사슴벌레 따위를 잡으러 다녔다. 다른 아이들이 하듯 소꿉놀이나 인형 놀이 같은 걸 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선택의 순간이 오면 매번 오빠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쪽을 택했다. 오빠는 내 어린 시절, 가장 심술궂고 가장 다정한 놀이 친구였다. 여동생이라고 비석 치기나 땅따먹기에서 져주는 법 한 번 없었고, 밤이면 산길에서 랜턴을 끄고 괜히 나를 겁주었다. (당시 마을 어귀에 있던 무서운 할아버지 집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커다란 개가 살았는데, 오빠는 내 손을 잡고 걷다가도 그 집 앞에만 가면 손을 놓고서 혼자 냅다 뛰었다. 커다란 개는 사람이 뛰니 따라 뛰기 시작했고, 나는 매번 눈물범벅이 되어 궁둥이라도 물릴까 봐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치곤 했다) …오빠의 악행(?)은 그 외에도 많았지만, 그러면서도 매번 마당에서 땅따먹기에 쓸 내 돌멩이를 골라주었고, 집까지 데려온 사슴벌레에게 같이 설탕물을 주었다. 오빠를 따라 밤낮없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동안 키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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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스물의 크리스마스는 외로웠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그 자리에 있는데,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깨어난 시절은 생각보다 좋은 시절이었나 보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모여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그곳의 신부님도 수녀님도, 모두 우리 존재를 알고 있는 그런 공동체를 인터넷으로 알아낼 수 있는 시절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빌미로 내가 다시 태어났다.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쉬지 않고 모아두었던 숨을 한 번에 내뱉는 기분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오래된 지하 술집에 앉아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셨다. 노래를 불렀다. 그들에게 커밍아웃했다. 스물셋의 크리스마스도 외로웠다. 애인도 형들도 모두 그 자리에 있는데, 또 나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숨을 오래 참은 것같이 답답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 술자리에서 이야기했던 말이 잊히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커밍아웃하라고.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아들과 친구와 후배와 동생의 삶과 게이의 삶, 두 개의 삶을 따로 짊어지고 걷는 나는 행복한 것일까.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나면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우리의 존재를 다르지 않은 것으로 공감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난다면. 아들과 친구와 후배와 동생과 게이의 삶이 되면, 삶과 시절들이 섞이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녀에게 이야기하고 또 술을 마셨다. 아무렇지 않은 그녀에게 고마워 조금 울었다. 그렇게 그 겨울 그녀에게 커밍아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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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눈이 내렸던 것 같고, 아주 늦은 밤이었던 것 같고, 그 시절 내가 살던 신림동의 어느 흐릿한 주점에서 함께 만났던 것 같다. 집이 가까웠던 내가 먼저 도착했고, 아직 오지 않은 그를 기다렸다. 십 분 정도 늦게 도착한 그는 어딘가 긴장한 얼굴이었다. 늘 그랬듯이 나는 맥주를 시켰을 테고, 그가 무얼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고백이 필요했으니 그도 아마 술을 마셨을까. 그건 이상한 예감이지만, 그날 나가면서 나는 오늘 그가 중요한 얘기를 하리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들어야 할 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고백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던 것 같다. ‘알고 있었어’라고 말한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만 그런 대답으로 그가 이제 긴장을 지우고 마음을 놓길 바랐다. 막상 떠올려보면 그날의 기억은 흐릿하다. 그날의 만남도 여느 날과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는 서운해할까 다행스러워할까. 어쨌든 그랬다. 다만, 나를 믿고 자신을 보여준 것이 고마웠다. 그날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린 지금까지처럼 오래 보진 못했을 것이다. 함께 겪은 즐거웠던 일도, 힘들었던 일도 적당히 잊어가며 ‘그런 한 시절을 나눈 사람도 있었지’하며 추억하게 되었을지도. 그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날 밤늦도록 함께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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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 후, 열네 통의 편지

심이환, 노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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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평범한 사람 둘이 주고받은 편지다. 우리 둘 다 남자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지만, 한 명은 게이고, 한 명은 이성애자다. 어느 날 친구가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고, 그때부터 이 편지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사랑, 고민, 감정, 상처를 주고받으며 어느새 우리는 오랫동안 바라오던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열네 통의 편지가 깨닫게 해준 것은 우리는 다르지만, 또한 닮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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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자, 이환아, 오늘밤은 이환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의미로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잖아. 먼 훗날 돌아보면, 오늘 저녁에 너랑 만나 얘기한 시간이 그중 하나일 거라는 예감이 든다. 12년을 친구로 지내면서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왜 넌 그 얘기를 오늘에서야 하게 된 걸까?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긴 시간을 외롭게 보냈을까? 더 일찍 듣고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고, 또 조금은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가끔 숨을 다시 고르기도 하고 있어. 늘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네가 왜 저렇게 누구와도 짝을 이루지 못하나, 대체 어떤 상대를 기다리는 걸까, 궁금해하던 부분이 해소되면서 조심스레 미소도 떠오르네. 너랑 가까이 지내다 보니 다른 여자 친구들이 너 짝사랑하는 마음을 나한테 털어놓기도 했거든. 혹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다들 놀라겠지?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 너랑 알게 되었을 때 이미, 또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나한텐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그런 나한테도 넌 늘 매력적인 친구였지. 까다롭고 질투 많고 예민한 여자 친구들에게도, 투박하고 단순하고 어리숙한 보통의 남자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들을 너는 잘 이해하며 들어주고 공감해줬으니까.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예술가적 기질과 프리랜서로 사는 삶도 빠질 수 없는 우리 대화의 공통분모였고. 그래서 남자로든 뭐로든 오랜 시간 너를 참 좋아했어. 미국에선 이런 농담을 하곤 했지. 괜찮은 놈들은 둘 중 하나다. 이미 누가 채갔거나 아니면 게이거나. 이거 봐, 내가 믿고 의지했던 몇 안 되는 남자 중 한 사람인 너도 게이잖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잘 이룰 수 없을 것 같네. 오늘 밤은. 잘 자. 어쨌거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을 네가 오늘 밤은, 잘 잤으면 좋겠다.

이게 뭐라고 고맙다 휘영아, 사실 오래전부터 너에게 말하고 싶었어. 내가 게이라는 것을. 그럴 때마다 용기가 안 났던 건, 지금 이렇게 의지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몇 마디만으로 끊어지는 것을 상상했을 때야. 주변 게이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어. 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들, 지인들에게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고. 그런데 친구 대부분이 날 만류했어. 오히려 소중한 것을 잃고 더 큰 상처만 남을 뿐이라고. 그래서 오랫동안 그냥 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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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남자 친구로 네 옆에 있었던 것 같다.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어디서 난 용기인지, 너에게 진짜 나를 이야기한 것 같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말이야. 나는 내가 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에 늘 떳떳지 못한 죄인으로 살아야만 했고,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하나님께 매달려 보기도 했지. 소용없더군. 억지로 이성을 좋아해 보기도 했어. 너도 잘 알겠지만, 주변에 여자가 많았고 나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여자도 적지 않았지. (사실 내가 생각해도 공감력 떨어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퍽퍽한 남자보단 내가 훨씬 낫다고 생각함) 성격과 대화가 잘 맞아 좋은 친구가 될 것만 같은 사람도 어느 순간이 되면 애매한 분위기를 잡곤 했어. 눈감고 딱 사귀어볼까도 생각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 미안해지는 거야. 나는 사랑의 감정이 아닌데, 속이고 싶지가 않아 거절을 몇 번 했더니 어느 순간 나쁜 남자, 어장 관리하는 남자, 간만 보는 남자로 쌍욕을 먹고 있더라. 하하. 그렇게 나를 인정하게 된 것 같아. 난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한다고. 나는 사실 게이로서 어떤 활동을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이것을 데뷔라고 하는데, 고작 2년밖에 안 됐어.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얇고 얕은 인간관계에 치이기도 하고, 소중한 지인 또한 생겼지. 그런 기억이 다 생생해. 아무것도 모를 땐 막연한 질문과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 예를 들자면, “저 사람은 절대 게이가 아니에요. 제가 장담해요. 딱 봐도 스트레이트구먼” “게이 맞고” 이젠 게이다 촉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 오늘도 내가 있는 커뮤니티에서 한 명 발견. 참 좁고 참 많아. 네가 그런 말을 했잖아. “지금까지 내 주변에 게이라는 존재는 늘 있어 왔지만, 그들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에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네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 가까이에도 이런 사람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더는 네가 다른 이유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이 말이 퍽 고맙더라. 그땐 살짝 눈물이 돌더군. 든든한 내 편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무튼, 그랬어. 고마웠어. 앞으로도 고마울 거고, 주변 친구들에게 너를 자랑할 일이 생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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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비밀 하나 이환아, 나는 남자들과 더 잘 대화하고 소통하는 종류의 여자이고, 그래서 남자 사람 친구가 너무나 필요한데 이성끼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없는 걸까. 나는 많은 남자 사람 친구를 그렇게 잃었어. 어느 순간 그들이 친구 이상의 관계를 원하고 그래서 내가 거절하면 아예 친구도 못 되든지, 아니면 받아줬다가 결국은 헤어져서 다시는 얘기도 할 수 없게 돼버리는. 나도 너에게 말 못 할 비밀을 고백하고 싶어. 놀라지 마. 사실은 요즘 유부남을 만나고 있어. 그는 나보다 어리고,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했어. 오랫동안 혼란스럽고 갑갑한 결혼 생활에 힘들어하다 우연히 나를 만나게 된 거지. 그런 그에게 내 존재는 너무나 유혹적이었고, 나 또한 누군가 날 다시 알아봐 준다는 사실이 너무나 유혹적이었지. 아닌 줄 알면서도 틀린 줄 알면서도 왜 멈추지 못하는 걸까? 틀렸다고 아니라고 얘기는 하면서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핑계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네. 도덕과 정의가 10대 20대의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가치였는데, 그런 이유로 지금

난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하면서도, 이렇게 너에게 말하고 싶었어. 미안해. 왜 어떤 이에겐 복권에 당첨되듯 쉽게 다가오는 일이 어떤 이에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겨우 일어나거나 혹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 되는 걸까?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실패한 관계를 원망하며 새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관계에는 방어적인 자세를 갖게 된 걸까? 특정 나이에 인생의 특정 과정을 걸어가도록 기대되는 이 편협한 사회에서, 한해 한해 나이가 들수록 잘못한 것도 없이 부끄러워지고 숨고 싶어진다. 난 다가온 사랑에 진실하게 반응했고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을 거절하기도 하며 정직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사랑인지 발정인지 휘영아, 네 메일을 받고 여러 생각이 든다. 그중에 하나를 꺼내자면,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말해줘서 고맙다는 것. 내가 의지가 될 수 있는 친구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못 들은 거로 할게. 나는 오늘 멍한 하루를 보냈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보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다. 사실 한 달여 동안 좋은 감정을 갖고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며칠 전에 헤어졌다. 번듯한 직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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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해맑은 남자였는데 내가 지금까지 손꼽던 기준과는 거리가 조금 있던 사람이었지. 그래도 난 좋았어. 오랜만에 좀 설레었거든. 기준이고 취향이고 따지면서 정작 좋은 사람을 놓쳐버리는 바보가 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해준 사람이야. 그런 고마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만났지. 결국은 잘 안 맞아서는 끝났지만. 사귄 것도 아니었고 썸이었고 고작 한 달 가지고 웬 유난을 떠느냐 싶겠지만, 사랑과 사람이 주는 안정감을 하루라도 빨리 갖고 싶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 바람은 잘 이뤄지지 않더라. 대화로 관계를 잘 정리하긴 했지만, 다음 날 밀려오는 회의감으로 견디기 힘들었어. 번번이 찾아오는 관계에서 느끼는 절망은, 겨우 붙잡고 있던 나의 기대마저 상실시켜 버리더라고. 내가 게이 사회에 나와서 몸소 보고 느낀 것은, 게이들의 사랑은 굉장히 쉬우면서도 몹시 어렵다는 거. 금방 사랑의 마법에 빠졌다가 사소한 취향의 차이로 그 마법이 풀려 버리곤 하지. 뭐 게이여서 그렇겠어? 남자라는 동물이 다 그런 거겠지.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타인의 사랑은 만남도, 관계도, 유지도 쉬워 보이는데 나는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이런 생각을 했어. 나는 지금 네가 연락하는 사람의 마음이 목적이 너와의 진실한 사랑이라면, 너를 지지하고 응원할 거야. 우선 그 남자 사진 좀 봐. 남자는 얼굴에 다 쓰여 있다. 사랑인지, 발정인지! 난 정말 네가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품이 넓고 위트에 마음이 깊은 사람. 그리고 외모도 훈훈하면 더 좋겠다. 같이 만날 때를 생각해서 말이지. 하하. 지금까지 네가 만나온 남자들을 생각하면 너도 딱히 외모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별로 기대하게 되진 않는다만.

사람이라는, 사랑이라는 안정감 이환아, 네가 써 보낸 많은 글자 중에 마음에 훅–꽂히는 단어가 있었는데, 바로바로 ‘안정감!’ 안정된 관계가 아니어도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아.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헤어진 뒤에 돌아보면 신기루 같아. 대화하고 싶고, 마음을 나누고 싶은 끊임없는 욕구를 풀 수 있어서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화나고 억울하고 피곤한 일 있어도 하루의 끝에서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믿는 구석이 되고 안정감이 되는 것 같아. 첫 경험 이후에는 섹스에 놀라운 안정감이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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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상대

박철희, 가가랜덤채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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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할까. 나의 수많은 선택으로 인해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진다.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하고 난 뒤 나는 나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었고 나의 두 번째 삶에 크나큰 용기가 되었다. 이러한 행운이 없었더라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호기심으로 시작한 이 대화록은 내 삶의 범주 바깥에 있는 낯선 상대와의 대화를 담고 있다. 인터넷의 랜덤채팅 사이트를 이용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1:1 커밍아웃을 했고, 커밍아웃 이후의 반응을 채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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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남 당신: 게이입니다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ㄵ 당신: 게이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앙큼한 여우 있나요~? ㅎ 당신: 나나나 낯선 상대: 몇살 ? 당신: 28살 꽃게이~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토나온다 낯선 상대: ㅋㅋㅋ 당신: 왜웃어 당신: 이씨 대화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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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당신: 게이다 질문받는다 낯선 상대: 섹스해봣냐 당신: 그럼그럼 낯선 상대: 후장 ? 낯선 상대: 니가박음?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남자 당신: 남자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피팅모델일할 여자찾아 여~~ 당신: ㄱㅇ임 낯선 상대: 어 낯선 상대: ㅎㅇ 당신: 하이요 낯선 상대: 언제부터 낯선 상대: 자기가 낯선 상대: 게이란걸 낯선 상대: 알았음? 당신: 대학교 4학년 낯선 상대: 여자는 낯선 상대: 그냥 낯선 상대: 싫은거임? 당신: 벽돌 당신: 시도해봤는데 안되더라구요 낯선 상대: 남친이씀? 당신: 이씀 당신: 대학교 4학년때 남친만나고 확 실히 정했어요 낯선 상대: ㄷㄷ 낯선 상대: 에이즈 낯선 상대: 조심하셈 당신: 에이즈는 이성애자도 똑같죠 대화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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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대구 32남 당신: 게이 낯선 상대: 아 시발 더러운 새끼 똥꼬 로 박다가 장파열되서 응급실이나 실 려가라 당신: ㅎㅎㅎ 대화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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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ㅎㅇ 당신: 하이 낯선 상대: 여자? 당신: 게이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당신: 난 ㄱㅇ 낯선 상대: ㄱㅇ? 당신: 게이라고 낯선 상대: 아이고 낯선 상대: 힘들것다 낯선 상대: 힘내라 당신: 나 ? 당신: 좋은데 왜 당신: 너도 힘냉 낯선 상대: 그래 열심히 살아 낯선 상대: ㅂㅂ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당신: 게이임 낯선 상대: 게이가 되어가는건가 당신: 오 당신: 뭐해요 게이님 낯선 상대: 아직 완전체 게이는 아닌데 당신: 고민중인가 낯선 상대: 친구가 낯선 상대: 자지빨아달라고해서 빨 아주는데 왜캐좋은건지 몰겟음 당신: ㅋㅋㅋ빨아주는게 좋다구요? 낯선 상대: ㅇㅇ; 당신: 그렇다고 게이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아요ㅎㅎ 낯선 상대: 그렇겟져 아직은 당신: 새로운 맛이라서 좋은걸 수도 있고 당신: 그렇자나요ㅎㅎ 낯선 상대: 너무흥분됨 빠는순간이.. 당신: 우와…근데 친구도 용감한데요 당신: 어떡하면 빨아달라는 상황이 되는거지ㅎㅎ 낯선 상대: 같이살아요 같이 자취해서 당신: 아 ㅎㅎㅎ 낯선 상대: 자취방에서 새벽에 둘이 침대에 앉아서 야한영화보다가 시작 하게된듯 당신: 좋네요… 당신: 좋은 그림… 낯선 상대: 남자끼리라 머 편하니까 보통 런닝에 팬티만입고 지내는데 낯선 상대: 한참영화 잘보다가 친구 가 팬티 밑으로 발기된 귀두 보여주 면서 장난치다가 낯선 상대: 장난스레 빨아볼래라고한 건데 저도 모르게 그만..ㅋㅋ; 당신: 여자랑 할때랑 느낌이 많이 다 르던가요? 쾌감이 더 큰거같아요 낯선 상대: 동성이랑 한다는 느낌 때문에 당신: 스릴? 아니면 꼭맞다는 느낌? 낯선 상대: 스릴도 있고 그리고 저도 남자니까 어디가 좋은지아니까 서로 더잘알고

낯선 상대: 금지된장난하는것같은기 분도 들고 당신: 제대로 경험하셨네요ㅎㅎ제대 로 경험하셨네 이분ㅎㅎㅎ 낯선 상대: ㅎㅎ;; 푹빠져버린거 같아요 당신: 그 이후로 계속해요? 낯선 상대: 계속이아니라 매일해요 당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 친구도 님꺼 해주고? 낯선 상대: 네 제가 빠는경우가 훨씬 많긴한데 낯선 상대: 친구가 해줄떈 거의 69자세로 당신: 오… 당신: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영화보셨나유? 낯선 상대: 아뇨 그게머죠 당신: 게이영환데요. 산에서 양치다 가 둘밖에 없어서 사랑을 하게되는 데…아무튼 아름다운 영화예요. 낯선 상대: 아 한번봐야겠네요 당신: 우정도 아닌것이 사랑도 아니 고 막 그런느낌 있잖아요 당신: 제가 좋아하는 영화예요ㅎㅎㅎ 낯선 상대: 근데 게이영화는 항상 처 음엔 좋은데 낯선 상대: 결말이 대부분 안좋아서 낯선 상대: 실망하게되던데 당신: 근데 그건 잘만든 영화예요 정말 낯선 상대: 봐야겠다 ㅎㅎ 당신: 색계 만든 이안감독이 만든거예용 낯선 상대: ㅎㅎ추천감사 당신: 진짜 특이하다 근데 낯선 상대: 머가요? 당신: 그냥 그렇게 된게요ㅎㅎ 낯선 상대: 친구랑요? 당신: 친구랑 그렇게 되는게 네네 당신: 제 경험상으로는 둘중 하나는 게이인 경우가 좀 많더라구요 낯선 상대: 근데 그친구는 이제와서 고백하는건데 예전부터 저랑 이런관 계가 되고싶었대요 ㅎㅎ 당신: 섹스만 하는? 아니면 고백 인건가

낯선 상대: 어릴때부터 친구였어서 사귀는건 아직좀 창피하고그러네요 대화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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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피팅모델일할 여자 찾아여~~ 당신: ㄱㅇ임 낯선 상대: 어 낯선 상대: ㅎㅇ 당신: 하이요 낯선 상대: 언제부터 낯선 상대: 자기가 낯선 상대: 게이란걸 낯선 상대: 알았음? 당신: 대학교 4학년 낯선 상대: 여자는 낯선 상대: 그냥 낯선 상대: 싫은거임? 당신: 벽돌 당신: 시도해봤는데 안되더라구요 낯선 상대: 남친이씀? 당신: 이씀 당신: 대학교 4학년때 남친만나고 확 실히 정했어요 낯선 상대: ㄷㄷ 낯선 상대: 에이즈 낯선 상대: 조심하셈 당신: 에이즈는 이성애자도 똑같죠 뭐 대화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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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당신: 난 ㄱㅇ 낯선 상대: ㄱㅇ? 당신: 게이라고 낯선 상대: 아이고 낯선 상대: 힘들것다 낯선 상대: 힘내라 당신: 나 ? 당신: 좋은데 왜 당신: 너도 힘냉 낯선 상대: 그래 열심히 살아 낯선 상대: ㅂㅂ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습니 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낯선 상대: 서울/경기 조건녀 구해요. 오래 만날분 찾아요. 당신: 난 ㄱㅇ 대화가 끝났습니다.


랜덤한 사람이 대화방에 입장했 습니다. 편하게 대화하시길 바랍 니다!~ 당신: 28살 꽃게이~ 낯선 상대: 헐. 낯선 상대: 게이라니 당신: 첨보냐 낯선 상대: 응.. 당신: ㅋㅋ 낯선 상대: 몇살이에요 당신: 28살 낯선 상대: 그렇군아.. 당신: 넌? 낯선 상대: 나 20 살이에요 당신: 되게 젊네 낯선 상대: 네 당신: 남자? 낯선 상대: 남자 ;.. 낯선 상대: 남자.. 낯선 상대: 네..남잔데요 당신: 웅웅 당신: 알겠엉 낯선 상대: 힘내세요 당신: ㅋㅋㅋ왜 다들 힘내래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그게 죄는 아니니까 당신: 힘들어 보이나 게이는 낯선 상대: 음..사랑할수있 을ㄲ아ㅛ 낯선 상대: 까요 당신: 너? 낯선 상대: 아뇨; 당신: 나 ? 낯선 상대: 네 당신: 3년째 열애중인데 무슨소리야 낯선 상대: 헐 남자랑요? 당신: 응ㅋㅋ 낯선 상대: 우와 낯선 상대: 신기 당신: 넌 너무 모른댜~ 낯선 상대: 쩐다.. 낯선 상대: 외국은 봤는데 낯선 상대: 한국은 또 첨보네요 당신: 우리나라에도 많아 외국만큼 낯선 상대: ㅇㅎ..

낯선 상대: 일 안하세요? 당신: 이제 점점 드러날꺼야 우리나

라도 당신: 나 곧 퇴근! 낯선 상대: ㅇㅎ 당신: 딴짓좀 하자 낯선 상대: ㅋㅋㅋ 낯선 상대: 심심해서 들어와봤는데 이런 게있었네 당신: 그래 여자 친구는 있어? 낯선 상대: 저 여자 있죠 ㅋㅋ 낯선 상대: 연상이에요 당신: 오낯선 상대: 여기 채팅 질 어떄요? 당신: 그냥 별로… 당신: 난 얘기하고 싶어서 들어온건데 낯선 상대: ㅇㅎ 랜덤이 뭐 다 그렇지.. 당신: 그치그치 낯선 상대: ㅅㅅ할사람..이런거밖에 없던데 당신: 그니까ㅎㅎ 당신: 바로 나가고ㅎㅎ 당신: 넌 왜왔어 당신: 심심해서? 낯선 상대: 친구 기다리고있어요 당신: 아하 낯선 상대: 걍 사이트 돌아댕기다가 낯선 상대: 랜덤채팅 낯선 상대: 뜨길래 당신: ㅋㅋㅋㅋ 낯선 상대: 들어와봤죠 ㅋㅋ 낯선 상대: 올 올만이네 이런거 당신: 근데 딱 나 만난건가ㅋㅋㅋ 낯선 상대: 하고 낯선 상대: ㅇㅇ 당신: 첫? 낯선 상대: 첫 당신: 헐ㅋㅋㅋㅋ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 당신: 웃기네 낯선 상대: 그러게욬ㅋ 당신: 나 게이서점 열었어 최근에 이태원에 낯선 상대: 엥? 낯선 상대: 게이서점이요? 당신: 응 레즈비언이나 게이 이런 책

만 파는곳인데 당신: 막 어두운곳은 아님ㅋㅋ 낯선 상대: ㅋㅋㅋㅋ신기하네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그런게 있군아.. 낯선 상대: 사람 낯선 상대: 오나요? 당신: 응 다들 좋아해 낯선 상대: 왘ㅋㅋㅋ 낯선 상대: 겁나신기 낯선 상대: 이태원에 있다구요? 당신: 응응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게이서점이라고 치면 나와요? 당신: 햇빛서점이라고 검색해봐ㅎㅎ 낯선 상대: 잠만요 ㅋㅋㅋ 당신: ㅋㅋㅋㅋㅋ 당신: 나중에 놀러와라 낯선 상대: 헐 낯선 상대: 진짜네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 ㅋㅋ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와 낯선 상대: 페북도있어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겁나웃기네 당신: 네가 모르는 세계가 열린것 같 은데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아 가고싶진 않네요..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 시발ㅋㅋㅋㅋ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표지판이 낯선 상대: 거기네 낯선 상대: 거기 당신: 표지판 ? 낯선 상대: ㅇㅇ 낯선 상대: 간판 그림이 낯선 상대: 남자거시기네요 당신: 아 응응 내가 그렸지 낯선 상대: 페북감판 낯선 상대: 대박 낯선 상대: ㅋㅋㅋㅋㅋㅋ 낯선 상대: 좋아요도 엄청 나네 당신: 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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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박종범, 최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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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부터 약 두 달간,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에 살기

시작한 박종범은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 최민영에게 물리적 거리 때문에 쉽게 갈 수 없는 서울의 게이 플레이스 곳곳을 대신 방문해 사진을 찍고 최민영 본인이 본 것들을 자신에게 말로 설명해 줄 것을 주문했다. 다른 도시를 구글 스트리트 뷰로 간접 체험 할 때, 얻고자 하는 정보와 풍경 이미지는 종종 일부 제한되어 있거나 가려져 있다. 게이인 자신이 가고 싶은 게이 플레이스에 스트레이트 여성을 보내, 그녀의 필터로 걸러져 나온 말과 사진으로 간접 체험을 해보고 싶은 어떤 마음, 혹은 아바타/로봇/게임 캐릭터 조종 호기심의 마음으로, 이 #소통 을 시작하게 되었다. 최민영이 박종범을 대신해 방문한 곳들은 서울에서 게이–장소로 알려진 곳들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번역가 조동섭 님(@ts_cho)을 비롯한 트위터 속, 데이팅 앱 속의 게이들께 여러 장소들을 추천받아 그중 박종범 본인이 예전부터 좋아했거나 방문해보고 싶었던 곳을 기준으로 다시 골랐다. 기본적으로 박종범이 명령하고 최민영이 실행했지만, 두 명이 각자의 생각대로 각각의 공간들을 보는 결과가 되었다. 최민영에게 그 장소에 다녀온 소감을 듣고, 거기에 박종범은 본인의 생각을 끼얹었다. 사진은 박종범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랐다. 참고: SM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된 소녀시대는 2007년 ‘다시 만난 세계(Into The New World)’ 라는 곡으로 데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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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3가 6번 출구 옆 포장마차 개인적으로 안 좋은 경험도 있었고 , 내가 생각했던 종로 3가는 노인이 많고 , 칙칙하고 , 힘없고 , 뭔가 음침한 곳이었는데, 이번에 가 보니깐 젊은 친구들이 진짜 많더라. 종로 3가가 말하자면 게네들의 장소인 거니까 모여서는 쾌활하게 웃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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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튀김을 잘한다는 포장마차에 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일단 종로 3가 골목을 한 바퀴 돌았어. 골목길 구석구석에 게이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는 게 재밌었어. 몇십 분을 돌던 끝에 겨우 자리를 잡았어. 오징어튀김, 진짜 맛있더라! 그리고 포장마차 분위기가 되게 유쾌하고

모든 게 재밌었어. 사진 찍는 것도 그렇고 , 거기 앉아 있다는 그 상황이 재밌었어.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곳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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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드랙쇼 클럽 오랜만에 클럽이란 곳에 놀러 갔다. 난 맨날 북촌에만 있으니까 사람이 한 공간에 그렇게 꽉 찬 모습은 볼 일이 없어서 오랜만에 뭔가 활기를 느꼈다. 사실 클럽에 들어가기 전엔 약간 졸긴 했어. 뭔가 나만 다른 사람일까 봐… 예를 들면 내가 그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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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다거나 어떤 행동으로든 눈치를 받게 되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 근데 아니더라고 .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까 여자도 이미 몇 명 놀고 있었고 , 여자끼리 온 것 같은 무리도 보였어. 여자가 있는 거 보고는 일단 안심했지. 예전에 프랑스에서 클럽에 갔을 때도 그랬거든. 난 처음

겪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 같은 게 있나 봐. 워낙 주목받는 걸 싫어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클럽에 들어가서 짐 맡기고 칵테일을 시켜 마셨는데, 술이 너무 약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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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서재준, 박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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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건 5년 전이었다. 온라인에서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공통의 지인 덕분에 직접 만날 기회가 닿았다. 그리고 1년 정도를 편한 친구로 지내다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둘의 관계는 전과 조금 달라지게 됐다. 그간의 시간을 돌아보며 나눈 대화를 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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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박현우: 재준이를 알게 된 건 한 5년 전쯤? 트위터를 통해 대화를 시작하게 됐지. 그러다가 공통의 지인 덕분에 오프라인 자리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부터 친구로 지냈어. 서재준: 트위터에 쓰는 글을 읽다 보니 이 사람이 점점 궁금해지더라. 그러다가 직접 만났는데 인상도 좋고 대화가 잘 통해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 사실 그전에도 간혹 온라인에서 사진을 봤는데 왠지 호감이 가더라고. 직접 만나기 전 통화도 한 번 했었지. 내용은 잊었는데 뭔가 나한테 부탁할 정보가 있다는 용건이었을 거야.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때 좀 떨렸어. 박현우: 아마 나도 통화를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에 일부러 그런 부탁을 했을 거야. 서재준: 내가 그런 요청을 받으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귀찮아서 얼버무리거든. 하지만 나도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지. 이런저런 계기가 쌓이면서 메신저 친구도 맺고 대화도 자주 하다 보니 서로 잘 맞더라고. 서로의 동네를 번갈아 방문하면서 놀기도 하고. 언제였던가? 술을 마시다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현우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간 적이 있었어. 박현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어. 서재준: 현우는 거실에서, 그리고 나는 내 방에서 잤지. 그때 사실 난 미치는 줄 알았어. 건드리고 싶어서. 하하. 서로가 커밍아웃을 하기 전이었거든. 그래서 괜히 웃통 벗고 기웃거리고 그랬어. 얘 반응을 보려고. 박현우: 사실 난 재준이가 게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은 했어. 하지만 나한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딱히 확신을 못 했고. 서재준: 점점 현우가 궁금해지더라.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말에는 뭘하면서 보내는지… 별 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 알고 싶어졌어. 그렇게 1년 정도를 친구 사이로 보냈지. 슬슬 더워질 무렵이었는데 맥주를 마시다가 휴가 이야기를 하게 됐을 거야. 여행을 가고는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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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좋을지 모르겠다는 둥 그런 내용이었지. 그러다가 둘이 도쿄에 함께 가면 어떨까, 하는 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어. 박현우: 재준이랑 한번 여행을 가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슬슬 분위기를 몰아간 거야. 어디로 갈지는 크게 중요하진 않았어. 그런데 얘는 좀 망설이는 눈치더라고. 서재준: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애인이 있었어. 물론 서로 이미 멀어진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 친구는 유럽으로 장기간 여행을 떠난 상태였지.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혼자 계획을 세워버리더라. 박현우: 결국에는 얘도 가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처음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됐지. 서재준: 첫날에는 그냥 친구 처럼 재미있게 놀았어. 그러다 밤이 돼서 술을 마시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콩닥콩닥, 아니 쿵쾅쿵쾅거리는 거야. 내 마음을 말하고 싶고, 이때를 놓치면 후회할 것만 같더라고. 그리고 내가 고백을 했을 때, 설령 이 친구가 스트레이트라고 할지라도 이해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 그래서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지. 나 사실 게이라고. 좋아하니까 용기가 생기더라. 심장이 터질 뻔했어. 그런데 현우가 조용히 듣고 있더니… 자기도 그렇다고 하는 거야. 박현우: 사실 그 타이밍에 재준이가 커밍아웃할 거라는 예상은 못 했어. 솔직한 이야기인데, 애를 어떻게 해보려고 여행 제안을 한 건 아니야. 그냥 같이 있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마침 이 친구가 먼저 고백을 해주니까 고맙더라.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봤지. 애인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전에도 어느 정도 눈치 채긴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기대를 갖지는 못하겠더라. 그냥 즐겁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서재준: 서로 커밍아웃을 한 뒤 호텔에 돌아와 자려고 누웠지만 당연히 잠이 안 오더라고. 게다가 트윈룸이었지만 침대가 더블처럼 맞붙어 있는 구조였거든. 애써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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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을 하는데 자꾸 건드리고 싶고 두근대고 미치겠는 거야. 그런데 현우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라? 박현우: 야, 아니거든? 난 얌전히 있었어. 네가 다가왔지. 서재준: 둘 다 몸이 근질거렸겠지. 그러다가… 그렇게 된 거지. 난 그날 밤에 좀 놀랐어. 순진한 애인 줄만 알았는데 웬 걸? 장난이 아닌 거야. 너무 좋았어.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현우가 묻더라.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박현우: 왜냐하면 재준이는 애인이 있었으니까. 정리할 생각이 없다면 내가 끝내야겠다고 결심을 했거든. 내 이전 연애는 많이 복잡하고 지치는 경험이었어. 그 스트레스가 심했기 때문에 두번 다시 비슷한 관계를 반복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이 있었지. 물론 깔끔하게 정리가 되기 전에 시작한 것 자체가 잘못이긴 했어. 아무튼 그 상태를 계속 끌고 갈 수는 없겠구나 싶었어. 서재준: 그래서 나도 정리하겠다고 했어. 말했다시피 당시 애인과는 확실하게 매듭만 짓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멀어진 상태였거든. 박현우: 재준이는 정리하겠다고 했지만, 또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거잖아? 돌아와서도 시간이 좀 필요했어. 재준이가 만나던 사람이 귀국하는 일자가 약 한 달 뒤였거든. 그동안은 마음 편하게 연애를 즐기질 못하겠더라고. 서재준: 그런데 결국 어땠는지 알아? 지금은 전 애인이 된 그 친구도 여행 중에 다른 사람을 만났던 거야. 그래서 서로 뒤끝 없이 평화롭게 헤어졌어. 그렇게 초반의 덜컹거리던 일들이 정리가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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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애 박현우: 만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네. 우리는 싸운 적이 거의 없어. 내가 성격상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걸 싫어해서. 서재준: 현우는 그런 게 있어. 처음에 기분 나쁘면 말을 안 하고 꽁해 있는 편이야. 박현우: 나는 그래. 언짢이 일이 생길 때마다 일일이 이야기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싶어. 서재준: 그래야 해. 박현우: 그건 그냥 스타일이 다른 거야. 서재준: 음. 박현우: 아무튼 나는 그래. 서로 바빠서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하는데, 굳이 싸우고 싶지 않은 거지. 어쩔 수 없는 내 성격이야. 난 다른 사람 앞에서 감정을 죄다 드러내는 편이 아니거든. 그런데 재준이는 자기주장이 강해.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털어놓아야 하고. 그런데 오래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맞춰가는 것 같아. 우린 밀당 이런 건 없었어. 나이 든 뒤에 만나면 괜한 에너지 소모는 덜하게 되는 것같아. 서재준: 그런 건 있었어. 누구를 사귀면 자랑도 하고 싶고 그러잖아. 그런데 소수의 지인들 외에는 딱히 이야기할 데가 없는 거야. 스트레이트들은 SNS에도 연애 이야기 올리는 게 자연스럽잖아. 가끔은 갑갑한 생각이 들기도 했어. 박현우: 게다가 나는 드러내는 일에 소극적인 편이야. 나한테는 재준이가 두 번째 연애고, 그전까지 알고 지낸 게이 친구도 없었어. 이른바 커뮤니티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 그래도 재준이를 통해서 좋은 사람을 많이 알게 됐지. 서재준: 나는 완전히 반대였거든. 어릴 때부터 커뮤니티도 경험하고, 클럽도 가고,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 그런데 현우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자연스럽게 안 찾게 되더라고. 나이가 들면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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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우: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른 사람들이야. 하지만 겹쳐지는 취향이 있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떤 면에서는 비슷해서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더 잘 맞는 것 같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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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

서재준: 그냥 한결같아서 좋아. 같이 있으면 편하고 위안도 되고, 하는 일과 관련해서도 서로 쉽게 공감할 수 있어. 박현우: 똑같이 바쁜 것도 도움이 된 것같아. 서재준: 둘 다 바쁘기 때문에 더 오래 만날 수 있었을 거야. 만일 한쪽이 한가했더라면 상대방을 이해하기 힘들었겠지. 게다가 업무적으로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서로 아이디어를 주기도 해. 박현우: 아까도 말했지만 재준이는 나와 참 다른 사람이야.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신기할 정도로 많고, 굉장히 밝고 구김도 없어. 나는 그렇지 않거든. 무기력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은 게 대단히 많은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재준이한테 영향을 받으면서 혼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걸 경험하는 것 같아. 서로가 너무 달라서 맞추고 따라가는 일이 지치고 힘든 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채워지는 부분이 있어. 나는 나랑 너무 똑같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크게 끌리질 않거든. 서재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섹스가 너무 잘 맞아.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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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뒤에서

노하라 쿠로, 코우타로;타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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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10대 게이를 응원하는 만화를 제안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린 단편 만화가 <네가 있는 곳>입니다. 이번 <너의 뒤에서>는 <네가 있는 곳>에 등장하는 타케루와 코우타로의 다음 이야기이자, 그 이야기의 완결이라고 생각하고 그렸습니다.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만화의 주인공인 타케루처럼 게이임을 터놓을 수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존재가 우리 가까이에,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전작 <네가 있는 곳>에서 코우타로가 타케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야.”

그 말 덕분에 타케루는 마침내 자신이 태어난 마을과 학교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번 <너의 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케루가 자신의 감정을 코우타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게이와 게이가 아닌 남자.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랑 그 이상의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는 관계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세상은 변하는 거야. 보이는 것도, 모든 것이.” 코우타로가 말한 것처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만남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사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이 만화를 읽는 동안, 그리고 이 책을 덮은 그다음에 조금이라도 이 세상이 밝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지방에 사는 고교생 타케루는 자신이 게이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또래 친구들은 아이돌과 성인 잡지에 들떠 있고, 어른이 되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한 것이라 믿고 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털어놓을 만한 친구가 없었던 타케루에게 절친한 친구가 생겼다. 친구 이름은 코우타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갔다가 다시 돌아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타케루는 코우타로 덕분에 조금씩 자신이 태어난 마을과 학교가 좋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코우타로는 같은 반 여자 친구를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타케루는 겉으로밖에 응원할 수밖에 없는데…

번역: 이가림, 의역: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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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타로가 내게 말했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네가 있을 곳이라고.

오오!

아이돌과 야한 잡지에만 관심 있는 친구들.

그들은 어른이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야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어디에도 내가 의지할 곳,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코우타로가 우리 학교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코우타로

わはは: 와하하 マジかよっ: 진짜야

초등학교 3학년때 부모님의 일 때문에 이사 간 코우타로가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응?

정신 차려보니 내 눈은 항상 코우타로를 향하고 있었다.

타케루!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코우타로! 학교에 완전히 적응했네? 인기도 많고

코우타로가 우리 학교로 다시 전학 와서 나는 —

처음에는 적응 안 돼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완전 재밌어

응!

응! 이제 여자 친구만 생기면 딱인데!

아? 어?

타케루 넌 좋아하는 애 없냐?

보기 좋아 축하해~ ドキンッ: 두근

아… 으… 응…

사실 나… 나 우리 반 코지마한테 고백하려고

사실 나는 —

속닥

トクン: 심쿵

ドキンッ: 두근

아…




커밍아웃의 순간‘들’

다제이

<삐라> 편집장

커밍아웃. 먼저, 사적인 이야기를 더듬어야겠다. 나에게도 몇 가지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내가 뱉은 말 한 마디에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탁 하고 바뀌던 찰나. 모든 것이 느리게 각인되던 시간. 계획적이었건, 충동적이었건 간에 그 순간은 곧잘 예비했던 정념 바깥으로 새어나가곤 했다. 어느 정도 예감했던 진부하고 고루한 반응조차 막상 맞닥뜨리는 그 순간만큼은 구체적인 감정으로 빚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대개 사후의 말이나 눈빛, 몸짓, 기척 등에 스며든 채로 불쑥불쑥 연장되곤 했다. 그 순간은 일시적이었지만,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순간‘들’을 경유하며 종종 과정이 되었다.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나뉜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발설의 순간은 결코 최종적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는 그 순간에 잦게 붙들려야 했다. 여기 <여섯>에 모인 이야기들 역시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공개하는 순간에서 시작해 그 순간이 포개지는 또 다른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각기 다른 상황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구성되고 있다. 오랫동안 친밀했던 이들이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두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각자의 글이 하나의 단어를 통과함으로써 공유되기도 한다. 또 익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에 대해 대뜸 밝힘으로써 그 반응을 살피기도 하고, 간접 경험을 통해 서로의 느낌을 중첩시키기도 하며, 관계에 대한 상상이 그림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제각각의 순간‘들’ 사이에서 낯설면서도 동시에 닮은 우리의 어떤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여섯>의 여섯 가지 이야기는 단순히 텍스트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 각 이야기들은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연한 순간들에 맞닿으며 연결되기도 한다. 그토록 믿었던 신이 게이라는 ‘내 존재에 대해 부정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누군가의 고백은 또 다른

글에서 ‘죄를 짓는다는’ ‘두려움’으로 이어지고, 학창 시절 좋아했던 동성 친구에 대한 누군가의 회상은 만화 속 타케루와 코우타로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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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겹쳐지기도 한다. 또 랜덤 채팅 속에선 ‘헐’ ‘진짜네’와 같이 낯선 상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로 언급되지만 누군가의 서술 속에선 게이 친구를 대신해 방문하는 매력적인 ‘게이 스팟’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돈, 여행, 결혼, 섹스, 나이 듦 등등 그들의 이야기들은 수없이 찰나적으로 접촉한다. 이처럼 각 텍스트가 끊임없이 교차됨으로써 <여섯>은 여섯 가지의 커밍아웃 스토리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가운데 우리는 게이와 그들의 친구라는 두 존재 사이로 혹은 낱낱의 이야기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떨어져 나오기를 반복하며 또 다른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함께 벽장 안과 밖을 넘나든다. 바로 이러한 효과가 이 책을 가장 흥미롭게 한다. 마치 일기장을 공유하듯 누군가의 커밍아웃 스토리를 활자로 보는 행위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유쾌함이 있으면서 더불어 현재 한국 사회에서 게이로 혹은 그들의 친구로 살아간다는 동시대성을 새삼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이를 넘어서, 목소리를 듣고픈 또 다른 이들 혹은 여전히 쓰이지 못한 이야기들까지도 가늠해보게 된다. <여섯>을 읽으며 순수하게 재미있어서 소리 내어 웃기도 했고, 어떤

부분에선 놀라기도 했으며, 나의 기억들을 상기하기도 했고, 몇몇 페이지에선 더 고민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커밍아웃 스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많은 커밍아웃 스토리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맞닿음처럼, 커밍아웃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순간‘들’을 통해서만 조우할 수 있는 지점 또한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때론 나의 순간‘들’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섯>은 우선 반갑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이들 또한 평범한 것 같지만 특별한 혹은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흡사한 순간‘들’을 떠올리길 기대해본다. 여섯 빛깔이지만 하나인, 하나이지만 여섯 빛깔인 무지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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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6

이로

유어마인드

① 2013년 종로의 전시장 ‘시청각’에서 열린 <no mountain high enough>전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이게 뭐지? ’라는(칼 나브로의 타이포그래피로 Sasa[44] 작가가 만든) 작업 <a#26-81-v1>(2013)을 마주했다. 한옥 한 채를 이용하고 있지만 전통적이지 않고 순백의 공간이 아니면서 그렇다고 또 순백을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지 않은 시청각에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디자이너에 의해서 진동하듯 그려진 문장을 맞닥뜨린 순간은 나에게 여러 면에서 분기점이 되었다. ② 유튜브를 하염없이 떠도는 걸 굉장한 휴식으로 여긴다. 저 멀리 미국에서 괴성을 질러가며 게임을 리뷰하는 영상을(게임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구독하고, 편의점에 존재하는 모든 음료를 사서 한 방울씩 섞어 만든 괴음료를 마시고 메슥거려 하는 일본 청년이 오늘 또 벌이는 일을 궁금해하고, J.J. 에이브람스의 <스타워즈 에피소드 7> 예고편을 보고 울먹이는 사람들의 리액션 영상을 굳이 찾아본다. 그러다 닐 디그래스 타이슨의 ‘무지에 의한 논증’이라는 짧은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UFO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알 수 없는 물체가 하늘 위에 나타났을 때 그것을 외계인으로 규정하는 논리의 오류에 대해서. 그는 “‘뭔지 알아야 한다’는 열망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고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자’하는 진취적인 방향이 아니라 ‘모르는 존재를 그저 모르는 것으로 둘 수 없는’ 폐쇄적인 방향이다. ③ 얼마 전에는 <굿-즈 2015>라는 시각미술 행사에 다녀왔다. 나에게 그 행사 겸 사건은 위에서 이야기한 ‘이게 뭐지?’의 입체—잠시 한눈팔면 형태가 다르게 흐르는—유연한 덩어리 버전 같은 것이었다. 그들 작가는 직접 대화에 가담할 것처럼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GV식 문답으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현장과 대화로 또 하나의 사적인 퍼포먼스를 완성하는 것이지, “가짜 소를 해체하는 의도가 뭔가요?”에 “아, 그건 말이죠…”라고 의문을 풀어주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이것은 바로 그것입니다’의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바로 그 납득의 세계로 끌고 오려는 것은 누가 편해지고자 함인가. 작가도 멋대로, 독자도 멋대로 자신의 답을 향해 가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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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④ 우리들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분야에서 소수의 영역에 속해 있다. 전 세계의 구도 속에서, 아시아라는 지역 속에서, 수도권이라는 밀집 속에서, 자본의 정도에서, 취향에서, 자신의 얼굴이 현재 미적인 기준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서, 성격에서, 화술에서, 관계에서, 정체성에서, 종교에서, 지능에서, 감각에서, 과거와 미래에서. 그때 자신이 어딘가에서는 분명 소수자라는 사실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걸 인지한 뒤 또 다른 곳/분야의 소수자와 연대하여 소수로 여겨질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계속 이야기하는 방법과, 어떻게든 내가 우위에 있는 지점만 바라보며 사는 방법. 내 지점만을 바라보려 ‘나의 범주’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마치 열등한 것처럼’ 혹은 ‘마치 비상식적인 것처럼’ 대해서 그 주먹질의 에너지로 반등하는 방법을 쓴다.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란에 동성애를 멸시하는 글을 남겨야만 나의 이성애가 당위를 획득한다고 느낀다면, 그 얼마나 허약하고 우스운 방식인가. ⑤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원고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이성애자 남성인 나에겐 무척이나 동떨어진 경험과 감각이다. 미지의 영역이자(나의 역사에서) 무지의 영역이다. 그럴 때는 머릿속에 입력하기만 한다. 입력된 이야기를 반드시 어떤 형태로 직조하여 출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머릿속에 단편단편 겹겹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보면 어떤 순간에 ‘미지의 영역이다’라고 생각한 것 자체도 우스운 선입견이라 생각할 때도 있고, 여전히 혹은 영원히 미지로 남기도 한다. “당신들은 왜”라고 물어서 나도 스스로 모르는 “나는 왜”라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저 인지했기 때문에 지지하고 연대할 수 있지 “아 이게 제가 소수자인 어떤 분야로 치면 이러이러한 것이로군요”라고

대입하여 이해하지도 않는다. ⑥ 여섯 편을 읽는 동안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이들은 전혀 준비되지 못한 순간에 극단적인 단절과 영역 가르기라는 소형의 전투를 매일 겪고 있구나. 더 많은 전투와 폭력이 다가올 걸 알면서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용기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덜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록된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계속 더해질 것이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소리치는 여섯 편의 이야기, 언어가 살아남을 공간을 마련해주는 사람들에게 지지와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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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의 용기, 여섯의 기적

이혁상

영화 감독

게이 커밍아웃 다큐멘터리를 만든 후에도 갈증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더 많은 커밍아웃 이야기와 더 많은 게이 창작자들이 등장하길 바랐다.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된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단비처럼 등장했지만, 목마름은 여전했다. 물론 차별과 혐오 가득한 한국에서 성소수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때때로 그 용기는 또 다시 차별과 혐오를 마주해야 하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 없이 우리를 드러내야 한다. ‘참담한 결과’를 극복하는 실마리는 결국 내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찾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성소수자로서 우리의 삶과 경험은 더욱 시끄럽게 이야기되어야 한다. 여기 ‘게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증명이니까. 우리 삶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막강한 이성애자들의 역사는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성소수자의 역사는 늘 삭제되거나, 오역되었다. 퇴폐와 비정상으로 서술된 피동의 역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끼스럽고 벅차게 현재를 살아갈 당위와 함께, 기갈이 넘쳐 흐르던 과거를 기록할 책임이 있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을 테니까.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니까. 그리고 지금, 여섯 빛깔의 새로운 역사가 발굴되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여섯>이 참 반갑다. <여섯>은 무지개빛처럼 다채롭다. 다르면서도 닮은 두 짝꿍이 손글씨로

정성 들여 쓴 교환일기 같은 에세이, 서로의 비밀과 고민을 나누며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두 친구의 은밀한 편지, 불특정 다수를 향해 “나 게이”라며 무작정 말 거는 재기발랄한 커밍아웃 채팅 실험, 부산의 게이 친구를 위해 종로와 이태원 거리를 카메라에 담은 여자 사람 친구의 매혹적인 르포르타주, 서로를 ‘일반’이라 생각하며 짝사랑하던 두 이반의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질척이는 하이틴 ‘게이’ 로맨스까지. 하지만 여섯 빛깔로 말을 건네는 여섯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 바로 ‘용기’다. 내가 나임을 드러내는 용감한 커밍아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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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져온 사랑과 우정, 공감과 위로를 기록한 <여섯>은 그래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다. 또한 <여섯>은 게이를 친구로 둔 비성소수자 짝꿍들의 기록이다. 성소수자 인생의 전환점인 커밍아웃은 일반 친구들에게도 고난도의 도전이다. 이제 막 사상 최대의 고백을 마친 친구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무슨 말로 입을 열어야 할까? 앞으로 이 친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커밍아웃의 혼란을 마주한 <여섯>의 짝꿍들은 친구의 특별함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술회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은 비성소수자들에게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전하는 안내서이기도 하다. <여섯> 초고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싸늘한 새벽 웃풍이 방 안을

휘감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은 뜨끈해졌다. 드르렁드르렁,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애인에게 다가가 쪽쪽쪽, 입을 맞췄다. 새삼 고마워졌다. 게이인 내가, 그리고 내 애인이. 또 나의 이 특별함을 받아준 가족과 친구들이. 여섯 빛깔의 용기 덕분에 행복해진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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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색깔 무지개, 여섯 짝꿍, 여섯 이야기

이재영

6699press

“용기는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 위험과 불확실성에 맞서는 선택이다.”

얼마 전 커밍아웃한 영국의 럭비 선수 키건 허스트에게 엠마 왓슨이 보낸 메시지다. 엠마 왓슨은 그의 용기를 도덕적 용기라고 상찬했다. 용기는 잃을 것을 두려워 하지않고, 얻지 못할지라도 나를 인정하고 한 걸음 정진하는 힘과 함께 한다. <여섯>은 그런 용기를 낸 게이 여섯 명과 그들의 친구 여섯 명이 짝꿍이 되어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다. 디자이너, LGBT 서점지기, 소상공인, 사진가, 기자, 작가, 음악가, 만화가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프로젝트의 주제인 ‘게이–친구’를 짝꿍 둘만의 이야기에 담아 다양한 방법과 온도로 표현했다.

주제의 범주가 넓고 모호한 만큼, 주제에 대한 접근법도 각양각색이었고, 보여지는 방식 역시 다종다양했다. 편지를 주고받고, 에세이를 쓰고,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보여지는 방식이 이질적인 모양새를 드러내면서도 이들의 작업은 하나의 동질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게이’ ‘친구’로 양립될 수 없는 두 존재의 가까운 간극에 대한 내적 조명과 외부로 향한 고민과 질문이다. 책을 준비하면서 의아했던 것이 있다. 한국 사회에 수많은 게이 이슈가 있었음에도 게이를 주제로 한 책은 적었고, 읽기 어렵거나 존재 자체를 대상화하여 평범한 삶에서 분리시켜 서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사회에서 게이 이슈와 관련된 콘텐츠는 금기의 조각이며, 음지의 영역으로 낙인되어 있는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꼬인 잣대로 인한 차별은 쉽게 변하지 않고 우스운 이유로서의 혐오 또한 지배적이었다. 이 책은 조각난 사회의 일부를 결련하고, 음지에서 양지로 소통하려는 움직임 중 하나이며, 이 사회에서 다름을 기념하는 중요하면서도 유의미한 걸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소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하나의 결론 혹은 메시지로 매듭지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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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 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오늘의 한국이라는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책의 화자인 여섯 짝꿍, 그리고 이 이야기의 다음을 이어갈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공동의 주제이며 지금 이 시점에서 ‘게이–친구’라는 화두를 꺼냄으로써 끊임없이 상기하고 덧붙여지고 층위가 두터워질, 다양한 이야기의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도 평등과 인권이 일반화될 꿈꾸는 그 날에, 2015년 겨울을 향하는 계절에 여섯 짝꿍이 써 내려간 커밍아웃이라는 ‘시작’으로서의 이야기를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해본다. <여섯>은 당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존재에게,

대상으로서의 게이가 아닌 친구로, 가족으로, 혐오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공존과 존중으로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기나긴 싸움 속에 있는 우리를 읽어주고, 우리와 함께 고민해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당신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당신 가까이,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가까이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와 같이 평범한 모습 그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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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

Dann 서울 한복판에서 태어나 아직도 그 자리에 살고 있다. 마음의 고향을 찾아 자꾸만 여행을 떠났다가도, 사람이 그리워 다시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사람. 시각 작업들을 하면서 때때로 글을 쓰기도 한다. 형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형이 되어버렸다. Lynn 길이 더 갈 데 없어 끊기는 산골 마을 끝집에서 태어나, 내내 길을 반대편 끝을 궁금해하며 자랐다.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끼적이기 시작했던 글이, 지금은 가장 오랜 친구가 되었다. 바람이 있다면 계속 ‘쓰는 사람 ’으로 사는 것, 그리고 세계의 모든 맥주를 마셔볼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간을 유지하는 것.

심이환 스탠과 베어 사이, 미분류. 여러 가지 예술 영역에 걸쳐 있는 언저리. 태어날 때부터 게이. 그리고 이효리를 좋아한다.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꿈이 있다. 단, 강아지나 고양이는 키우고 싶지 않다. 노휘영 음악가. 편지를 주고받는 이환의 13년 여자 사람 친구. 감성과 지성이 조화롭지만, 주변으로부터는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두 번의 불같은 사랑과 이별로 상처 입음. 오랜 유학 생활로 한국 사회와는 정서적, 심리적 거리를 느낌.

박철희 서울에 사는 게이. 28/175/84. 국민대학교 시각 디자인학과 행정조교와 프리랜스 그래픽 디자이너, 그리고 햇빛서점 운영을 동시에 하고 있다. 물론 하나도 제대로 해내고 있지 않다. 가가랜덤채팅 랜덤한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채팅 시작을 위해서는 아래의 ‘랜덤 채팅 시작하기’ 단추를 누르시길 바랍니다.


박종범 개넌한 소상공인. 최민영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고 서울에 살고 있다. 파도와 바람을 좋아한다. 파도에 부숴지기도, 바람에 좋은 모양으로 다듬어 지기도 한다.

서재준 38 세. 그래픽 디자이너. 20 대 초부터 다양한 만남을 활발하게 겪어 왔다. 장기 연애의 기록을 현우와 사귀면서 경신했다. 박현우 38 세. 광고 카피라이터. 20 대를 이렇다 할 사건 없이 보낸 뒤에 서른이 넘어 두 차례의 비교적 긴 연애를 경험. 물론 두 번째 만남은 현재 진행형이다.

노하라 쿠로 1971년 6월 출생. 만화가. 1996년 2월호 <장미족>으로 데뷔했다. < Sweet> 등 여성 잡지를 중심으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도 하고 있다. 현재 월간 <Badi>에서 <하숙집 형>을 연재 중이며, 3권까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코우타로 , 타케루 만화의 주인공이자 우리 가까이 있는 친구들이다.


여섯

기획 6699press 참여 작가 노하라 쿠로, 노휘영, 박종범, 박철희, 박현우, 심이환, 서재준, 최민영, Dann, Lynn

지원 비온뒤무지개재단:

편집과 디자인 이재영

교정 교열 김소희

이반시티 퀴어문화기금, 인천문화재단: 바로 그 지원

일본어 번역 이가림 도움 다제이, 이로, 이혁상 인쇄 및 제책 문성인쇄

초판 1쇄 발행 2015년 11월 11일

6699press 출판 등록 2012년 11월 11일 6699press.tumblr.com 6699press@gmail.com facebook+twitter @6699press 이 책의 저작권은 저자와 6699press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값 12,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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