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체험판 무료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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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는 다가올 4월 초, 범죄 심리학자 이수정 박사와 《씨네21》 기자 이다혜, 방송 작가 최세희, 조영주가 네이버에서 일 년간 진행 해 온 교양 팟캐스트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의 단행 본 출간을 준비 중입니다.

저자인 이수정 박사는 그동안 범죄 영화에서 오로지 피해자로 소비돼 온 여성이나 아이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 얼마나 부족한지에 대해 발언하고자 이 프로그램을 시작 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수사가 진행되면서 그 피해의 폭이 너무나 커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는 디 지털 성범죄와 아동 성 착취에 대한 사회적 이해를 넓히고자 도서 본문에 포함된 관련 내용을 무료로 배포하려 합니다.

경제적 수익을 위해 많은 여성과 아동 청소년을 착취하고 학대 한 범죄자들에 대한 수사가 철저히 이뤄져 피해자들의 삶이 제자리 를 찾고, 여성과 아이들이 더 안전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저자 일동과 민음사는 기원합니다.


걸캅스

디지털 성범죄, 왜곡된 성 문화가

감독 정다원 | 한국 | 2019년

낳은 악

왕년에는 전설의 형사였으나 이제는 민원실로 발령받아 해고 일순위에 처한 미영. 다혈질에 주먹이 먼저 나가는 화끈한 성격 때문에 민원실로 밀려난 현직 형사 지혜. 둘은 사실 한 집에 살면서 티격태격하는 올케 시누이 사이다. 그리고 민원실에서 둘 사이에 낀 내숭 10단의 천재 해커 장미.

세 사람은 민원실에 성범죄 신고를 하러 왔다가 그냥 돌아선 한 여성이 차에 치이는 광경을 목격하고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이 여 성의 친구는 그녀가 48시간 후 업로드가 예고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 임을 알리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경찰 내 각 부서는 이 사건을 외면하고, 분노에 찬 세 사람은 비공식 수 사에 나선다. 이태원 문신 가게로, 유흥가와 술집으로, 곳곳을 찾던 미영과 지 혜는 이 사건의 범인들이 데이트 성폭력을 목적으로 한 약을 유통하고 있음을 밝혀내고 그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노리는데…….


이다혜

의미 있는 흥행 기록을 썼던 영화 「걸캅스」를 중심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걸캅스」는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 는 온갖 사회 문화적 문제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디지털 성범죄에 집중해서 이야기 나눕니다. 박사님, 디지털 성범죄 라는 게 뭔가요?

이수정

일단 성범죄의 범위 안에 들어가지만 기존의 성범죄, 즉

신체적 접촉에 의한 성폭력과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사이버 공간 상에서 첨단 기술들을 이용해 일어나고 퍼지는 다양한 성적 침해 행 위를 총칭하는 말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자살까지 부르는 불법 동영상

이다혜

보통은 실제로 접촉이 있어야 범죄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디지털 성범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않고도 범죄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 다르고 또 중요해 보입니다.

이수정

맞습니다. 또한 디지털 성범죄는 끝없이 퍼져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가 막심합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영상들, 그것 도 대부분 극히 사적인 내용의 영상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피해자도 모르는 사이에 퍼져 나가는 거죠. 오프라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본인이 분명히 알겠지만, 유포의 매개가 온라인이다 보니 내가 어디 까지 피해를 입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 누가 나를 알아보는 건 아닌가 하는 공포 때문에 피해자의 심리적인 고통이 엄청납니다. 이런 피해를 당했을 때 강건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지만,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결국은 세상을 등지고 혼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심한 우울증 끝에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디지 털 성범죄가 점점 더 늘어나면서 다양한 피해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피해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반면, 한쪽에서는 불법 동영상을 포함한 디지털 음란물을 제작하거나 유통하는 사람들이 금전적으 로 큰 이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불법 동영상을 사고팔고, 회원 등록 을 받는 식으로 웹하드 업체를 운영하면서 거부가 된 사람들도 실재 하지요. ‘갑질 폭행’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웹하드 업체 회장 양 진호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이다혜

요즘에는 ‘디지털 성범죄 아웃(DSO)’1, 한국 사이버 성폭

력 대응 센터(한사성) 같은 단체들도 있어서 적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

1 ‘디지털

성범죄 아웃(DSO, Digital Sexual crime Out)’은 2015년 10월 28일, 국내

최대 디지털 성폭력 사이트였던 ‘소라넷’ 폐쇄 운동을 위한 ‘소라넷 아웃 프로젝 트’를 시작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공론화하기 위해 설립한 단 체이다.


는 편이지만 아직도 현실적인 대책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관련 인터 뷰 기사들을 읽다 보면, 불법 동영상을 삭제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연락을 취했더니 이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사례가 드물지 않습니다.

이수정

통계상에 집계되지 않은 피해자들입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찍힌 불법 동영상을 자기가 직접 온라인에서 캡처해 증거로 제출해야만 했습니다. 경찰에 신고 하려 해도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겁니다. 어렵게 신고를 해도 누가 그런 불법 동영상을 제작, 유포했는지 경찰이 찾아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경찰은 경찰대로 어려움을 겪다 보니 수사 진행이 안 되고, 그 와중에 피해가 2차, 3차로 계속 번져 나 가니까 피해자는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결국 피해자가 자신이 찍힌 영상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따라서 나는 이 사회에 존재할 수 없 다는 결론에 도달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까지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불법 동영상 중에 ‘리벤지 포르노’라는 것이 있습니다. 옳 은 표현이 아니라서 사용을 지양해야 하는 용어이긴 한데요, 남성이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한 여성에게 앙갚음할 목적으로 과거 연애 시절 에 찍은 사적인 동영상을 불법적으로 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중 에는 예전 여자 친구의 개인 정보를 불법 동영상과 함께 유포하는 바 람에 피해자가 제삼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했던 불법 동영상 사이트로 서버가 해외에 있었던 ‘소 라넷’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소라넷과 흡사한 목적 의 사이트들이 수없이 많고, 현재의 형사 사법 제도 내에서는 이 사 이트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라넷’과 ‘버닝썬’ 사건

이다혜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

한 것이 언제부터인가요?

이수정

언론에서 다룬 사례를 추적해 보면 소라넷이 아마 가장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디지털 성범죄 사이트일 듯합니다. 그러 나 소라넷 이전에도 불법 음란 동영상이 무분별하게 유통됐고, 차단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사이트들에서는 성매매 업소의 유인 동 영상이 팝업창으로 무차별적으로 뜨는 등, 디지털 성범죄의 전조 증 상들은 전부터 많았습니다.

이다혜

그런 것들을 범죄라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듯합

니다.

이수정

우리 사회에 왜 이것이 범죄라는 인식이 없었을까 곰곰

이 생각해 보면,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성을 사고파는 것 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원인으로 보입니다. 불법 동영상 들을 성매매와 연관된 영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성매매는 성폭력 과는 양상이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 불법 동영상을 상업적 목적의 음란물과 구분하지 못하고, 동영상 속 인물이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유행했던 「빨간 마후 라」 같은 불법 촬영물을 그냥 야한 동영상 정도로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고요.


이다혜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 역시 동의한 상태에서 촬영했

을 거라 생각한다는 말씀이시죠?

이수정

그렇습니다. 보통 상업적인 음란물은 배우들이 동의해

야 하니까, 불법 동영상도 그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진 좀 독특한 음 란물, 혹은 아마추어들이 제작한 음란물 정도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예전에는 그게 피해자의 동의 없이 혹은 의사에 반해서 찍힌 영상이 고, 피해자의 자살까지 불러일으키는 범죄와 연관되었다고는 생각 하지 못했던 겁니다.

이다혜

앞서 잠깐 언급하셨던 소라넷 사건에 대해 좀 더 이야

기해 보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성범죄의 심 각성을 인지하게 만든 큰 사건이었습니다. 소라넷 사이트는 지하철 이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일상 공간에서 여성들을 불법적으로 촬영 한 영상, 술이나 약물에 취한 여성을 강간하는 범죄 영상을 올린다 든가, 또는 이런 식의 범죄를 공모하는 글을 올려 물의를 일으켰습 니다. 2015년에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송되었는데, 대부 분의 여성들은 아예 존재 자체도 모르던 사이트가 굉장히 큰 규모로 운영됐다는 사실이 충격을 주었습니다. 소라넷의 가입자 수는 1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999년에 개 설해서 2015년에 폐쇄됐으니까 운영 기간은 16년 정도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업로드된 불법 동영상은 4만 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 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대로 지금은 이것과 비슷한 사이트가 더 많이 생겼단 말이죠. 이런 숫자들이 갖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100만 명이 회원이니까 100만 명만 문제라는 식의 사고는 불


가능할 것 같거든요.

이수정

그렇습니다. 이번에 버닝썬 사건**과 연관된 정준영 사

건**에서도 정준영을 비롯한 몇몇 남자 연예인들이 피해자가 동의 한 적 없는 성관계 동영상을 찍어서 공유했죠. 정준영 사건은 소라 넷 문화의 전형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소라넷의 경우 특정 앱처럼 멤버들끼리 배타적으로 영상이나 정 보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가입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용자로 등 록되는 오픈 마켓 형식입니다. 그러나 소라넷도 1999년에 개설할 당 시에는 몇 명의 소수가 모여 정준영의 카톡방처럼 자극적인 영상을 서로 공유하는 작은 규모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회원이 늘어나 자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목적의 방들이 생기고, 일부는 그곳에 헤어 진 여자 친구를 촬영한 불법 동영상을 올리고, 일부는 여성들의 화 장실 영상만 집중적으로 올리기도 하며 확장되어 갔습니다. 자극적 인 주제를 중심으로 점점 세분화되는 과정 중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 니다. 소라넷의 문제가 2015년에 처음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이삼 년 전부터 실무자들 사이에서 이런 사이트가 있더라는 문제 공유가 있 었고, 이게 불법인지 합법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다혜

실무자란 경찰 쪽 실무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 버닝썬 사건

2018년 11월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나이트클럽 ‘버닝썬’에서 벌어


진 범죄 사건. 클럽 직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김상교 씨의 고 발로 알려졌다. 흔한 폭행 사건인 줄 알았으나 수사가 진행되면서 경찰과의 유착, 마약 유통, 성범죄, 조세 회피, 불법 촬영물 공유 등 의 실태가 드러나며 연예계와 정재계를 아우르는 대형 스캔들로 비화되었다. 그 결과 버닝썬과의 유착 관계가 포착된 강남 경찰서 의 전직 경찰관 강 모 씨가 체포되고, 각종 비위에 연루된 이들을 포함해 현직 경찰관 152명이 대거 전출되었다. VIP들에게 마약을 공급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버닝썬의 공동 대표 이문호는 마약 투 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버닝썬을 방문한 국내외 연예인, 기업가, 재벌가 자제 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가운데, 이들에게 성매매를 알선하고 불법 도박과 탈세 등을 자행한 혐의로 보이 그 룹 ‘빅뱅’의 멤버이자 버닝썬의 운영자 승리(본명 이승헌)와 YG엔터 테인먼트 대표 양현석이 검경의 조사를 받았다. 금품을 대가로 승 리의 뒤를 봐준 혐의로 경찰청 소속 윤 모 총경이 구속되고, 성범 죄 영상을 불법 촬영 및 유포한 혐의로 승리의 지인인 가수 정준영 과 최종훈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에게 성매매를 알선하고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승리의 동업자인 유리 홀딩스 대표 유인석도 조사 를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엄정 수사를 지시하고, 특검과 청문회 를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 청원까지 등장했던 이 거대한 사건은 정 준영, 최종훈, 윤총경, 이문호 등을 구속하는 선에서 흐지부지되었 다. 승리는 2020년 3월 9일 현역 입대했다.

: 정준영 사건

정준영은 2012년 케이블 방송국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데뷔한 가 수다. 버닝썬 사건에 연루돼 수사를 받다가 연예인들이 참여한 카


카오톡 대화방에서 여성들과 성관계한 사실을 밝히며 몰래 촬영 한 영상을 전송하는 등 열한 차례에 걸쳐 불법 촬영물을 유포한 혐 의, 술에 취한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2019년 3월 구속 기소되었다. 그해 11월 29일에 열린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 으나 항소했다.

이수정

경찰 쪽이라기보다 저를 포함해서 문제가 있음을 인지

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당연히 「그것이 알고 싶다」 팀도 있 었습니다. 소라넷이라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가 있다더라 하는 이야 기를 할 때만 해도 이게 범죄로 성립되는지, 안 되는지를 놓고 의견 이 분분했습니다. 한국은 성매매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국가고, 13세 이상이면 성매수를 해도 범죄시하지 않는 나라잖아요. 더군다나 성매매의 처 벌 수위 또한 굉장히 낮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에서 회원 등록 을 해 자기들끼리 음란물을 주고받아도 그것으로 별다른 경제적 이 득만 얻지 않으면 취미 생활 정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이한 생 각이 퍼져 있었던 겁니다. 고백하자면, 저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 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야말로 자살까지 시도하는 피 해자들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게 됐고, 대부분의 공유 영상들이 피 해자의 동의 없이 찍은 불법 촬영물이며, 그 영상과 함께 유포된 개 인 정보로 인해 성폭행 같은 또 다른 2차 범죄가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다혜

최근 버닝썬 사건에서 언급된 것처럼 약물을 이용해 의


식을 잃게 한 후 여성을 강간하는 영상을 찍는 경우가 있어 충격이 었는데요, 그런 수준의 범죄도 상상하기 너무 괴롭지만, 그 외에도 화장실에서 여성이 용변 보는 것을 찍는다든가, 교복 입은 학생의 뒷모습, 스키니진을 입은 여성이 걸어가는 모습까지 불법 촬영되어 유통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그냥 일상이잖아요. 여성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포르노로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너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수정

성을 인격으로부터 분리된 일종의 상품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이성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성적으로 대 상화하는 일종의 병리적 요소들이 온라인에 모여 범죄적 환경이 형 성된 것입니다. 온라인의 익명성 뒤에서 일탈된 성적 욕망들이 분출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성매매 문화와 성범죄율의 연관성

이다혜

박사님 말씀을 듣다 보니, 성매매가 사회적 분위기에 크

게 일조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매매를 한다는 것 자체가 성이라는 것을 한 사람의 인격적이고 온전한 부분에서 떼어 내 별개로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 면 많을수록 이런 불법 동영상 유통을 비롯한 디지털 성범죄의 양상 도 더 많고 복잡해질 듯하고요.

이수정

한국에서는 성폭행을 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돈을 주


고 합의하면 그 사실을 양형 인자로 삼습니다. 실제로 감경 사안 중 에 ‘피해자와의 합의’가 포함됩니다. 이는 곧 피해자와 피해자가 당 한 피해를 떼어 놓고 생각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냥 성관계를 좀 할 수도 있는 건데, 나를 성폭력으로 고소하다 니. 그럼 내가 돈을 주고 너의 성을 산 것으로 하겠다. 그러니 합의해 달라.’ 이런 식의 사고를 하는 가해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법 제도 내에서 합의금을 감경 사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긴 하나 합의 제도 자체를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안 그러 면 피해자에게 마음의 위로라는 형태를 어떻게 입증하겠느냐는 현 실적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다혜

피해자들이 합의할 때 돈을 받는 이유는 이미 발생한 피

해, 그러니까 신체적 혹은 정신적 치료 등에 대한 조치가 필요한데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가해 자가 자신이 야기한 피해에 대해 보상을 하는 차원에서 합의를 하고 금전적 보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수정

자구책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어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꼭 성범죄자만 저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을 물건처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 지어는 법의 테두리 내에도 그런 개념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도 있습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다혜

성범죄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반인들도 불법 동영

상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성에 대한 인식 문제와 관계가 있을까요?

이수정

관계가 있죠. 그리고 이 문제가 곧 내 문제일 수 있다는

연대 의식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이 불법 동영상을 보면 피 해자 여성이 자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영상을 볼까요? 아 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동영상을 보지 않는 많은 여성들도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나는 이런 동영상에 노출될 리 없으니까, 나는 안전한 관계만 맺고 있으니까, 하면서 불법 동영상 문제는 그 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동영상을 보는 남성들과 다른 점이 무 엇일까요. 이것은 결코 일부 여성 또는 일부 남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 컨대 안전한 화장실을 사용하고, 안전한 차량을 타고, 안전한 사무 실에서 근무하고, 집에도 보안 장치가 잘 돼 있어서 아무나 집에 들 어올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여성이, 디지털 성범죄에 취약한 환경 에서 사는 여성들에 대해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 간, 사실은 동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하는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 자체가 가해 행위 의 연장선상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무심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들이 오늘날 디지털 범죄의 만연을 조장하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형사 사법 기관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다혜

저는 성범죄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답답한 것 중 하나

가 이른바 ‘그런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런’에는 ‘밤늦게 다닌’, ‘술을 많이 마신’ 등의 의미가 포함될 수 있겠죠. 범죄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입니다. 피해자가 불법 동영상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렇게 됐느냐 며 ‘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왜 영상을 찍었느냐, 왜 그런 곳에 갔 느냐, 왜 그 사람을 만났느냐는 식으로요. 피해자가 피해를 당할 만 했다는 걸 입증하는 데 지나치게 공을 들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수정

결국은 재판에서도 ‘피해자다움’을 따지잖아요. 범죄 피

해를 당하면 그 피해로 고통받으면서 피해자다워야 하는데, 당당하 다든가 울지 않는다든가 하면 피해자답지 않은 걸 보니 너의 책임도 일부 있는 것 아니냐, 가해자만 몰아붙이지 마라, 이런 논리로 빠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다혜

전 ‘몰카’라는 용어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불

법 동영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냥 몰카 영상이라고만 했단 말이죠. 몰카라고 하면 불법적이라기보다는 그 저 짓궂은 장난 같은 느낌이 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 짜고 치 는 고스톱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불법 동영상을 몰카라고 불러 온 것 자체가 범죄에 대한 인식을 희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범죄를 어떻게 명명하는가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야동’이라 는 말도 많이 쓰는데, 야한 동영상이 아니라 성 착취 동영상이라고 표현한다면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야동을 보네, 좋아하네, 이런 말


을 대놓고 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수정

맞습니다. 몰카라는 용어는 피해자에 대한 인권 침해를

유희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 용어의 연장선상에서, 앞서 언급했던 리벤지 포르노도 사실은 포르노가 아니죠. 상업화된 것만 포르노라 부를 수 있는 것인데, 분명한 불법 동영상을 포르노라고 부르는 데 다 그 앞에 리벤지라는 말까지 붙여 버림으로써 사실을 왜곡해 버립 니다. 리벤지라 하면 뭔가 복수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가 는 것인데, 일단 남자와 헤어지는 것은 복수를 당할 만한 일이 아니 지요. 단지 이해가 쉽다는 이유만으로 몰카, 리벤지 포르노 등의 용 어 사용은 지양해야 합니다.

이다혜

이것이 복수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그릇된 인식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자 친구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 나와 헤어지자 고 했다, 그래서 그 여자 친구의 사적인 영상을 유포한다 하면 무슨 정의 구현이라도 되는 듯 반응하거나 댓글을 달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수정

그런 일련의 현상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정준영

사건을 기점으로 불법 동영상 촬영 및 유포죄를 엄중하게 처벌할 경 우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판례가 될 수 있어 예의 주시하고 있 습니다.

이다혜

그 말은 곧, 이번에 불법 동영상 촬영과 유포죄를 저지


른 정준영 일당에게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거나 벌금형밖에 나오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사회가 이 범죄를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 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잖아요.

이수정

그러니까 반드시 엄중 처벌을 해야 하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경찰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공간을 만들어 운영하고 성매매를 알선하는가 하면, 여성의 성을 상납하는 방식으 로 사업을 해 왔던 버닝썬의 대표 승리도 불구속 결정이 나지 않았 습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이나 마찬가지인 당사자가 불 구속이 되고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사회는 역시 이런 곳이다,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냉소와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5월 17일은 강남역 사건 3주년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 났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지금 버닝썬 사건이 흘러가는 과정을 보면서 다들 참 달라진 것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사회가 여성들의 인권을 우습게 생각할 수 있느냐며 참담해 하고 있습니다.

안 잡는 것인가, 못 잡는 것인가

이다혜

2015년에 여성들이 소라넷 폐쇄 청원을 시작하고 본격

적인 사회 문제로 의제화하면서 이듬해에 소라넷 사이트가 폐쇄됐 는데 그때 운영자도 체포됐습니다. 이미 수많은 피해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컸고, 그러면서 경찰이 그동


안 충분히 잡을 수 있었는데 안 잡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걸캅스」의 등장인물 지혜가 말했듯이,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 이 여성의 안전이나 인권을 보호하는 데 너무 안이했던 것 아닌가 하는 분노의 목소리였죠. 실제로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느낌도 있 고, 디지털 성범죄는 수사 방법이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투자나 경찰 조직 내에서의 지원이 필요한데, 그런 자 원도 굉장히 부족해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수정

무척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지

만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디지털 성범죄를 수사하려면 마약 수사 못 지않게 함정 수사를 허용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여전히 함정 수사를 엄격하게 적용해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3세 가출 청 소년입니다. 오늘 잘 곳이 필요합니다.’라고 인터넷에 올렸을 때 그 글 밑에 제안을 다는 사람들은 다 불법 행위를 예비하는 사람들이잖 아요. 그런 사람들 자체를 검거할 수 있는 법이 필요합니다. 많은 국가들에 아동 유인 방지법이 존재합니다. 미성년자들을 유인하는 것 자체가 범죄잖아요. 싱가포르는 유인하는 행위를 상습 적으로 하면 징역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예비적인 행위만 해도 처벌을 받는 분위기니 동영상을 올리면 얼마나 엄중 수사를 하겠습 니까. 그러나 한국에는 현재 그 같은 아동 유인 범죄를 예방할 수 있 는 법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뿐인가요. 한국은 아직 스토킹 방지 법도 없죠. 그러다 보니 그런 법의 빈틈을 틈타 범죄가 곰팡이처럼 마구 번져 나가는 겁니다.


이다혜

과거에는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성만을 거래와

착취의 수단으로 삼았다면, 지금은 아예 만난 적도 없는 일반인 여 성들의 일상생활까지 대상화하고 성애화하는 실정입니다.

이수정

이번에 버닝썬 사건에서 보았듯이, 일반인 여성에게 약

물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후 성적인 착취를 하는 심각한 상황입니 다. 마약은 처벌하지만 약물을 먹여 성폭행한 부분은 현재 처벌을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요.

이다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특성상 범인을 잡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정치 관련 댓글 수사는 굉장히 열심히 수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차이를 볼 때마다 저는 정말 ‘디지털 범죄이기 때문에 수사하기 힘든 것이 맞습니까?’ 하고 묻고 싶어집니다. 더군다나 수사가 잘 이루어지면 그것 자체로 예방 효과가 있지 않나요?

이수정

물론 있습니다. 무심코 댓글을 달았다가 수백 건의 고소

를 당하고 크게 벌금을 문 후에는 조심하게 되니까요. 말씀하신 대 로 경찰이 정치인 댓글 관련 수사 정도의 의지를 가지면 사실 아이 피 주소를 가지고 범인을 찾아내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문제는 취약한 환경에 있는 여성들입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집을 나온 미성년자라면 사건을 해결해 봤자 주목받거나 공적을 인정받 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는 경찰이 많을 수 있는데 그 결과 수사가 제대로 안 이루어지면 그게 범죄자들에게 금 전적 이득이 된단 말이죠. 그래서 양진호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


습니까. 외국이라고 이런 일이 왜 없겠어요. 영국도 아동 유인 방지법이 있습니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유인 행위는 아주 엄격하게 통제 하고 있습니다. 성매매를 목적으로 아이를 유인하는 댓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범죄예요. 영화 「걸캅스」에서도 성매매 업소를 차리고 13 세부터 18세까지의 가출 청소년들은 연락하라고 본인의 휴대폰 번 호를 인터넷에 올려놨잖아요. 그런 식의 행위가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 댓글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습니다. 일전에 영국 시민 단체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 다. 이 단체의 구성원은 대부분 아이를 둔 엄마를 비롯한 여성들입 니다. 영국은 아동 유인 범죄의 경우 경찰이 함정 수사를 할 수 있는 데, 이 민간단체가 하는 일이 함정 수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회원들 이 앱 같은 곳에 ‘13세인데 가출했어요.’ 이런 식으로 거짓 메시지를 올린 후 밑에 죽 달리는 댓글들을 캡처해서 신고합니다. 예컨대 댓 글 한 개당 포상금을 10원씩을 주어도 운영이 됩니다. 이런 식의 신 고 포상금 제도도 예방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온라인상이라도 함부로 아동 유인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죠. 신고 당 할 위험성이 높을수록 사람들은 경계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도 그런 분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아직 범죄를 예방하는 법도 없을 뿐 아니 라 민간인에 의한 함정 수사를 시도했다가는 처벌을 감수해야 합니 다. 그리고 경찰은 또 인력이 부족해서 수사를 못 한다 하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답답한 상황입니다.

이다혜

한국에서 주차 위반 신고에 대해서는 포상금 제도를 운


영하기도 하잖아요.

이수정

그렇죠. 제가 불법 주차를 했다가 신고를 당해 벌금을

낸 적이 있는데, 사진을 보니 경찰이 찍은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웃 음) 그때 제가 이거 누가 찍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죠.

이다혜

그런 식의 제도를 불법 촬영물 신고에 적용해 운영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조심하게 될 텐데 말이에요. 공유도 죄라는 사실 이 분명해지고 그에 대한 벌금을 낸다면 말입니다.

이수정

그렇게 시민 스스로 경계심을 높이게, 스스로를 관리하

게 만드는 일은 아주 눈곱만 한 아이디어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문제는 의지가 있느냐입니다. 제가 볼 때는 청와대가 의지를 가지면 제일 쉽게 해결될 것 같고, 대통령이 너무 바쁘다면 국회 의원 중 누 군가가 의지를 갖고 개정안을 내든, 새로 입법을 하든 통과되도록 끝 까지 노력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아쉽습니다.

범죄 피해 이후의 인생이 중요하다

이다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해서 스토킹

방지법도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되어 새삼 안타깝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피해자를 어떻게 도울지와 관련된 부분일 것 같아요.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제도와 기관 이 있나요?


이수정

디지털 성범죄 상담 센터 같은 것들이 있기는 한데, 역부

족입니다. 상담 센터가 있어도 피해자의 정신력이 상담을 받을 수 있 는 정도로 회복이 되어야 집에서 나와 상담소까지 갈 수 있잖아요. 그들을 위한 배려가 현실적인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로 보입니다. 또한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다 같이 공감대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는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 사실이 내 인생에 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물 론 인터넷상에 내 성기 사진이나 성관계 동영상이 돌아다니는 건 너 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며, 나 는 불운한 범죄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사실, 내 전체 인생에서 그런 피해는 그저 일부일 뿐이고 내겐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다혜

피해를 입은 개인이 혼자 마음먹는 것을 넘어서 옆에 있

는 사람들도 다 같이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불법 동영상 피해자들이 스스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이건 내 영상이잖아.’라고 우연히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보통은 주변의 누군가가 ‘이거 너야?’라며 캡처 화면이나 동영상을 보여 줘서 자기 도 그제야 그런 영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되는 단계부터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내가 찍힌 불법 동영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면, 사실 피해자 혼자의 힘으로 생각을 바꾸고 넓은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 기란 너무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이수정

제가 피해자들이 좀 더 성숙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디지털 성범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 닙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아주 잘못된 행위이고 엄벌에 처해야 마땅 합니다.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노 빅 딜(no big deal)’, 나의 일 상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니까 별일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해 자들의 남은 인생이 더 중요하다는 것, 변함없이 아침에 일어나고, 일을 하고, 저녁이면 쉬고, 그런 일상이 훨씬 중요합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돌아다니는 나의 화장실 영상이 발견된 다 해서 내 인생이 그날로 멈추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용기를 갖고, 무너지지 말고, 어떻게든 대응을 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는 이야기를 꼭 해 주고 싶어요. 얼마나 아름다울지 알 수 없는 미래 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범죄의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혼자 서 위축되고, 사회를 등지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너무나 안 타까운 일이잖아요. 그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 경찰관 선발 확대의 필요성

이다혜

「걸캅스」에서도 불법 동영상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이

경찰서에서 신고를 하려다가 근처에서 남자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걸 보는 순간 너무 무서운 마음에 급하게 나가다가 사고를 당합니 다. 이 영화는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는 여러 직군의 여성들이 한 사 람의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내용입니다. 지금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일단은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처벌이 확실히 이루어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우선적이긴 한데,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그게 나의 전부를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역 시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수정

이 영화가 갖는 시사점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여성을 구제하는 영화잖아요.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를 비하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제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이 바닥에서 이런 연구를 하며 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여자였기 때문 에 피해자가 당한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 일 을 깊게 해 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이십 년 후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당장은 쉽지 않고, 공포도 느끼고, 어려움도 있지만,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내 딸이 안전하게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결심했던 것이 상 당히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식으로 여성들은 함께 생각하고, 공감대를 느끼고, 자매애를 형성하고, 상호 부조를 해야 합니다. 옆에 있는 여성의 존재 자체가 부조가 된다면, 피해자들이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이다혜

지난해 혜화역에서 불법 동영상 관련 시위가 몇 차례 있

었습니다. 그때 저도 몇 번 나갔는데, 그때 외쳤던 구호들 중에 여성 경찰의 수를 늘리라는 요구도 있었어요. 많은 여성들이 수사 기관에 가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과정 자체를 굉장히 고통 스럽게 느낍니다. 내가 나온 영상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남성 수사관 앞에서 그 영상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하거나, 그 영상을 캡처해 증거로 제출해야 한다면 고통이 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성 관련 범죄들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여자 수사 관이 있으면 피해자 입장에서도 신고하기 훨씬 좋고, 수사 기관 입 장에서도 조사 과정에서 도움이나 협조를 구하기가 훨씬 쉬울 것 같 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수정

맞습니다. 그것을 전문성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강

력 범죄 피해자의 약 90퍼센트가 여자인 현실에서 여성 수사관들은 분명 유용합니다. 여성 경찰관의 수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은 옳은 지적입니다.

이다혜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기존의 법이 기술과 사회의

인식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만큼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 요해 보이거든요. 앞서 말씀해 주신 포상금 제도도 있겠습니다만, 새로운 법이 마련된다면 현행법의 어떤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좋을 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와 관련해 현재 입법 준비 중이거나 예고된 법안이 있나요?

이수정

신고 포상금 제도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온

라인상에서 불법적인 장면을 캡처해 제출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 라, 범인을 검거해서 범인이 기소가 되면 그때 가서 포상금을 줍니 다. 이래서야 누가 신고를 하겠어요. 신고하면 즉시 포상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신고할 것입니다. 신고자 에게 범죄 사실 입증까지 요구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이 부분은 꼭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한국은 의제 강간 연령이 너


무 낮습니다. 미성년자 의제 강간죄에 대한 연령 기준을 상향하고, 아동 유인 행위 단속을 위해 온라인상에서 함정 수사를 허용해야 합 니다. 왜 마약만 함정 수사를 합니까. 이 정도만 우선적으로 개선되 어도 첫 번째 단추는 성공적으로 끼울 수 있습니다.


팔려 가는 소녀들 아동 성매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 미국 | 2017년

원하는가

친구들과 파티에 놀러간 열세 살 M.A.는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접근한 한 여 성의 차에 올라탄 뒤 실종된다. 아이를 찾아 애타게 헤매던 엄마가 마침내 M.A.를 발견한 곳은 미국 거대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진 ‘에스코트 서비스’ 광 고. 에스코트 서비스는 남자와 동행하며 성매매 하는 것을 지칭하는 은어다.

페이지 상단, 위에서 세 번째 링크의 소개말은 ‘어린 신입.’ 엄마는 그 링크를 눌러 딸의 사진을 확인한다. 그리고 폭행, 학대, 약물 투여로 엉망이 된 딸을 270일 만에 집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엄마와 M.A.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M.A.를 납치한 인신 매매범 이 5년 형을 받는 동안, 이 업자가 광고를 올리도록 허용한 인터넷 사이트는 아 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버젓이 영업을 계속한다. 이 사이트는 미국 좌파의 의 견을 대변한다고 갈채를 받아 온 신문 《빌리지 보이스》의 사주가 운영하는 회 사로, 이들은 인터넷 관련 법규 때문에 광고를 제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엄마는 이 거대한 회사가 더 이상 아이들을 사고팔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정의 로운 변호사들과 소송에 돌입한다.


이다혜

2017년에 제작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팔려 가는 소녀

들」을 통해 아동 성매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보통 아동 납 치, 아동 성매매라고 하면, 이른바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로 생각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1세계 중의 1세계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특히 미국은 아동 성범죄에 대해 매우 엄격한 국가로 알려져 있어서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박사님은 이런 실태를 알고 계셨나요?

이수정

자세히는 아니지만 아이들의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벌어

진다, 그리고 마약이 있어 사라진 아이들을 나중에 찾더라도 아이들 이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하기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의제 강간 연령이 16세이기 때 문에 아동 성범죄에 대한 규정이 굉장히 엄격히 적용되고 있습니다.

성매매가 아니라 지속적 강간이다

이다혜

다큐멘터리는 초입부터 ‘아동 성매매를 한다.’라는 표현

대신 ‘아동이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큐멘터리의 분명한 관점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이수정

네, 맞습니다. 유인당한 아동이 자기 발로 나가서 성매

매 조직으로 흘러 들어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틀림없이 피해입니 다. 때문에 피해 아동은 처벌 대상이 아니라 보호 대상이어야만 하 고, 생명권을 보호받아야 하고, 다시 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합 니다. 미국에서는 16세 미만의 경우 아무리 합의된 성관계라 해도 성 폭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한다.’라는 표현 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한국은 의제 강간 연령에 의거해 12세까지만 보호를 하다 보니 13세부터는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성매매 청 소년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미국의 상황은 굉장히 처참하지만, 만 약 이 다큐멘터리의 한국판을 만든다면 아동 성범죄에 대한 ‘문제의 식 없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또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고 비난받고, 아동은 성매매 청소년이 되어 보호 관 찰을 받는 그렇고 그런 사건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이다혜

‘성매매’라는 표현은 아동이라 할지라도 상호간에 뭔가

를 주고받는 관계인 것 같은 의미를 내포하여 더 큰 문제입니다. 지 금 말씀하신 것처럼 동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연령대는 피해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수정

그렇습니다. 다큐멘터리에는 아이들을 납치해서 사고

파는 성매매 조직이 등장하는데, 그야말로 범죄를 저지르는 거대 조 직입니다. 조직의 성인 우두머리는 아이들을 계획적으로 유인, 납치 해서 성매매로 넘깁니다. 이런 사건들이 아동 유인 방지법의 단초가


되었지요. 우리의 경우에도 이런 조직들로부터 성매매업이 탄생했는데, 최 근에는 IT 기술이 발달하며 가출 패밀리 같은 소규모 조직들이 미 성년자를 유인하는 형태로 변모해 그야말로 우후죽순 번성하고 있 습니다. 공공연한 성매매를 방치하고 있는 랜덤 채팅 앱들이 포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한국은 아직도 이 런 것들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성매매에 노출되는 청소년이 나쁘 다고만 생각합니다. 대단히 큰 차이입니다. 아이들을 성매매 현장으 로 유인하면서 그 책임도 아이들에게 떠넘기는 앱 사업을 아이러니 하게도 첨단 IT 산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해자의 타깃 대상이 되는 특징들

이다혜

저희가 미국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사례도 같이 다

루겠지만, 나란히 놓고 보면 의제 강간 연령의 지점에서 한국이 더 처 참한 상황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큐멘터리 속 M. A.라 는 피해자처럼 납치당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가출 청소년 또한 이런 범죄에 쉽게 연루됩니다.

이수정

네. 부모에게서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냉대나 학

대, 방임의 희생자가 된 아이들은 범죄 조직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 습니다. 다만 미국은 아동 학대 범죄에 신체적 학대, 언어적 학대, 정 신적 학대, 방임 유기 외에 착취도 포함되어 아이를 노동으로 착취 하거나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굉장히 강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또한 의제 강간 연령 아래의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부모들이 처 벌받기 때문에 아동 학대에 대한 문제의식도 높습니다. 아이들이 가 출하면 부모가 처벌받으니까 일단 어떻게든 집에 잡아 둡니다. 그 결과 한국의 가출 패밀리처럼 거리의 아이들이 자생하기 위해 소규 모 범죄 조직을 만들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12세만 넘으면, 그러니까 중학생이면 아이들끼리 자생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불법 행위를 해도 부모를 처벌하지 않으 니 학대나 방임이 일상화되어 있고 가출도 많습니다. 위험이 만연해 있어서 위험이라고 인식도 못 하는 나라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결 국 수사의 의지가 없으니 아무도 이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다혜

미국은 조직에서 아이를 유인하는 과정이 굉장히 세분

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일단 전문 모집책이 있고 판매책 이 있습니다. 모집책은 패스트푸드점처럼 아이들이 많은 곳에서 고 개를 잘 못 드는 아이, 시선을 잘 못 마주치는 아이 등 자존감 낮아 보이는 아이를 주로 공략합니다. 저는 이런 선별법 자체도 시사점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이른바 ‘도를 아십니까.’ 가 떠올랐는데요, 일상에서 이런 식의 포교를 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면 주변에서 ‘야, 그러니까 땅 보고 걷지 마.’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다든가, 목적지가 분명한 듯 빠르게 걷는 게 아니라 땅을 보면서 한숨을 짓는다든가, 표정이 어둡다든가, 아니면 목적지 없는 사람처럼 터덜터덜 걸으면 그를 타깃으로 삼아 취약한 부분을 공략합니다.


이수정

사기꾼이 아무에게나 사기 치지는 않으니까요. 취약성

이 있는 사람, 자기들이 보기에 피해자 타입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공략합니다. 범죄 조직의 선별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런데 한국은 패스트푸드점에서 고개를 잘 못 드는 아이, 사람들과 눈을 잘 못 마주치는 아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수준까지도 도달 하지 못했습니다. 학대를 범죄로 보지 않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집에 서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는 거리에서도 착취당하는 셈입니다.

이다혜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가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책임지는 것을 넘어서, 어느 정도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단계까지 가려면 결국 지역사회가 함께 아이들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이수정

아동 학대는 가정과 지역사회를 넘어 국가에서도 지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막기 위한 법과 제도를 타이트하게 운 영해야 합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어린아이들만 집에 두고 마트에 다 녀와도 아동 학대로 신고를 당합니다. 아이들끼리 있는 상황 자체가 방임이고 학대입니다.

이다혜

몇 해 전 괌에서 판사 부부가 아이를 차에 두고 마트에 들

어갔다가 아동 학대로 신고당한 경우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런 행동 이 한국에서는 범죄가 아니라 흔히 있는 일입니다. 심각한 사건이 벌 어지지만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수정

아동 학대에 이 정도로 관대하다는 것은 어른들에게 책


임이 없음을 공인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성 매매 조직에 유입되고 비행을 저질러도 부모 책임이 아니라 당사자 들의 책임이라는 것이죠.

이다혜

부모 책임은커녕 심지어 가해자의 책임도 묻지 않는다

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출 청소년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먹고 자는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일 텐데, 멀끔한 성인이 문제를 해 결해 주겠다고 나타나면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겠지요. 게다가 공포 나 폭력, 관심, 약물까지 이용해서 길들이면 더더욱 한번 발을 들인 후에는 빠져나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수정

그렇습니다. 미성년자를 그루밍하는 모든 행위가 사실

범죄입니다. 예를 들어 랜덤 채팅 앱에서 미성년자 여자아이들이 채 팅을 오래 하면 주는 커피, 케이크 쿠폰 같은 것들이 다 아이들을 착 취하기 위한 미끼이자 매개물이고 불법 요소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있으니 큰 문제라는 겁니다.

‘연예인 시켜 주겠다.’는 사람을 조심하라

이다혜

어른들은 쿠폰 하나를 얻기 위해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듯합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 노출되면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는 점입니다. 커피 쿠폰을 얻기 위해 자신의 노출 사진을 보내거나, 음란 채팅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그 이상의 행동까지 하면서 스스로


를 거래 가치가 있는 물건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수정

커피 쿠폰을 받기 위해 본인의 성기 사진을 찍어서 올리

는 것이 매우 위험한 행위이고, 나중에 자신에게 큰 문제가 될 수도 있 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적습니다. 이처럼 아이들의 성적 자기 결정 권은 아직 미숙하기만 한데, 의제 강간 연령은 12세까지에 불과하죠. 당장 내 성기 사진을 찍어 올려서 오늘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면 아이들은 주저 없이 그쪽을 선택합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커뮤니티 에서는 그런 종류의 거래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니 특별히 위험한 일이거나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이용해 이 득을 취하는 업체들 또한 아무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다혜

아이들이 얻는 이득이라는 것은 몇천 원 혹은 만 원 안

팎의 쿠폰 정도에 불과한데, 사진이나 음란 채팅, 혹은 성매매로 쾌 락을 얻는 상대나 그들을 중개하는 사이트와 앱 운영자들은 사실 막 대한 이득을 얻잖아요. 이 다큐멘터리에서 으스대며 이야기하는 전 직 포주가 무척 인상적인데, 이 사람에게 ‘아이들에게 뭘 조심하라 고 말하고 싶느냐.’고 물어보자,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박사님이라면 같은 질문에 뭐라고 답하시겠어요?

이수정

‘연예인 시켜 주겠다는 사람을 조심하라.’라고 대답하겠

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청소년 그루밍 성범죄자입니다. 최근에 강 남의 유명한 치과 의사가 검거됐는데, 그 치과 의사가 14~16세 아동 청소년 성매매 상습범이었어요. 그 치과 의사에게 여자아이들을 조달


한 알선업자도 있었는데, 그 업자는 음란물을 유통하는 사람으로, 채 팅을 통해 아이들을 모집했습니다. 강남 경찰서에서 그 치과 의사가 가지고 있던 아동 음란물을 압수했는데, 무려 6000건에 달했습니다. 그 치과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 입구에는 라미네이트나 턱 교정 등의 치과 진료를 받은 수많은 연예인과 아이돌 사진이 붙어 있는 데, 아마도 강남에 있는 기획사에서 아이돌이나 연예인 지망생을 소 개해 그 치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아이 돌 기획사가 성매매와 관련이 있는지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 니다. 경찰이 압수한 음란물 중에 치과 의사 본인이 등장하는 성관 계 동영상도 있었는데, 경찰이 청구한 구속 영장이 기각됐어요. 한 국 법에 따르면 구속할 사안이 아니라는 거죠. 일단 성폭력 범죄가 아닌 겁니다.

이다혜

저는 이렇게 성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단계부

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너무 절망적으로 느껴집니다.

이수정

성범죄가 아니면 무엇이냐 했을 때 그냥 성매매라는 논

리였습니다. 이 치과 의사를 가장 엄벌에 처할 수 있는 죄명은 불법 촬영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합의된 성매매라면 당연히 돈이 오 갔을 테고, 그러면 15~16세인 그 아이들만 보호 관찰 청소년으로 처 벌받습니다. 물론 중간 알선 업자는 성매매 알선 혐의로 처벌을 받 겠지만, 성 매수자는 벌금 정도 내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치과 의사의 주거지가 일정하고, 치과를 계속 영업하 고 있고, 이미 음란물을 다 회수했기 때문에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 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후


에 다시 구속 영장을 청구하니까 법원에서 괘씸하다, 불구속 수사를 해도 되는 사안인데 자꾸 구속 영장을 청구한다며 압수했던 6000건 의 동영상을 그 피의자한테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이다혜

피의자가 아니라 경찰의 영장 재청구가 괘씸하다고요?

맙소사.

이수정

그래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그 음란물이 증발했어

요. 치과 의사가 동생에게 6000건의 증거물 동영상을 넘겼는데 찾 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안에 심지어 주요 아동 피해자들이 등장 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도한 영화 적 음모론인지도 모르겠지만, 강남 경찰서는 버닝썬 사건과도 연관 이 있는데 버닝썬 역시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잖 아요. 남은 것은 윤 총경**뿐인데, 그 사람도 지금 아무것도 입증하 지 못해 불기소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저는 그 관련된 기획사에서 연예인 시켜 준 다고 데려온 여자아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오게 된 것일까도 궁금합 니다. 성매매를 조달한 업자는 순전히 채팅 앱으로 미성년자들을 유 인해 왔을까요? 제가 섣불리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사안들이지만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다혜

대체 어떻게 하면 수사가 가능하고, 어떻게 해야 구속이

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대한민국의 저출산이 문제라지만, 이런 현실을 보면 누가 아이를 낳고 싶을까요. 전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마다 제가 어떻게 별일 없이 자라 성인이 되어서 살고 있는지,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아이들은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마음에 누군가를 믿었을 뿐인데 그 상대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거잖아요. 예컨대 연예인 지망 생에게 치아 모양이 이러저러하니 치료를 받으면 더 좋은 기회를 얻 을 수 있다, 너 지금 돈이 없으니 내가 도와주겠다, 하여 더 좋은 기 회를 주는 듯한 사람, 잠재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사실은 청소년 그루밍 성범죄자일 수 있습니다.

이수정

그런데 그렇게 판단력이 부족한 것 자체가 미성년자들

의 특징이잖아요. 어른을 믿어도 되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여야 하 는데, 어른을 믿으면 폭행 피해를 당하고, 사기를 당하고, 성범죄 피 해자가 되는 사회가 잘못된 것입니다. 치과 의사가 가진 동영상이 6000건이면 6000명의 피해자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인데, 본인의 동영상이 여기저기 유포될 수도 있는 그 6000명은 어떡하나요. 전 모두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검 찰과 경찰이 수사권 조정을 가지고 다투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경찰이 덮으려던 사건들을 검찰이 화끈하게 수사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들의 눈에 여자들이 피해자가 되는 사건들 은 별로 중요한 사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다혜

미성년자인 경우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할 방법도 잘 모

르는 상황이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팔려 가는 소녀들」을 보 는 것이 너무 괴로웠지만, 그나마 부모들이 아이를 찾기 위해 노력 하고, 아이들이 돌아온 다음에도 이후의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가족조차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는 아이들이 더 많다는 점이겠지요. 「팔려 가는 소녀들」 속 인신매매에 약물이 연관되어 있어 다시 한번 버닝썬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매 매 여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시작 단계에서는 약물을 이용한 강간이 있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중독적 마비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이는데, 웹사이트에 올린 영상이나 사진이 성적인 매력을 적극적으로 노출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찍은 영상이나 사진 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수정

약물도 당연히 심각한 문제지만,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내면화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유명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른들과의 성관계도 감수해야 한다고 계속 세뇌한 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십 대 연예인들의 섹시한 춤이나 외양이 아이들의 자발적 결정에 의한 것 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리그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우리는 사 실 잘 모릅니다.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정신적인 마취, 어 린 시절부터 진행된 세뇌가 어쩌면 약물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 다. 그런 문화의 부작용들이 쌓여 결국 터져 버린 것이 버닝썬과 승 리 사건일 수 있습니다.

: 윤 총경

‘버닝썬’ 사건 수사 과정 중, 보이 그룹 ‘빅뱅’의 멤버이자 버닝썬의 운영자 승리(본명 이승헌) 측에 수사 정보를 전달했다는 혐의를 받은


윤규근(49) 총경. 지난 2016년 코스닥 상장 업체인 큐브스 정 모 전 대표의 고소 사건을 무마해 주는 대가로 비상장사 주식 수천만 원 상당을 받았고, 승리와 사업 파트너인 유인석 전 유리 홀딩스 대표 가 운영한 클럽 ‘몽키뮤지엄’ 관련 단속 내용을 담당 경찰 수사관 을 통해 알아봐 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뿐 아니라, 경찰이 버 닝썬 사건 수사에 착수하자 정 씨에게 텔레그램 등 휴대폰 메시지 를 모두 삭제하도록 조언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에 2019년 10월 29일, 검찰이 그를 구속 기소하며 공개한 혐의는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상 알선 수재’, ‘자본 시장법 위반’, ‘직권 남용 권리 행사 방 해’, ‘증거 인멸 교사’다. 2020년 1월 7일, 서울 중앙 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한 그는 상기한 네 가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누구의 인권이 더 중요한가

이다혜

말씀하신 것처럼 오프라인 범죄가 빠르게 온라인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성매매 산업도 마찬가지인데, 다큐멘터리를 보 면 가출 청소년들이 부모와 연락이 끊기고 하루 이틀 사이에 강간을 당한 후 빠르고 효율적으로 온라인에서 팔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과정이 예상보다 너무 빨라서 놀랐습니다.

이수정

성 경험이 없던 청소년이 강간 피해를 당하면 정신적 붕

괴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방어 능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약 물이 제공되고 연이어 성매매에 노출됩니다. 한국의 경우 가출 청소 년 문제가 심각합니다.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1학년 1학기가 되면 학


교마다 약 열 명의 학생들이 학업 중단자로 낙인찍힙니다. 학업 중 단자가 되면 그때부터는 학교 밖 청소년으로 분류되어 교육부의 소 관이 아니게 됩니다.

이다혜

학교마다 열 명 정도라면 적지 않아 보입니다. 교육 당

국 입장에서 그 정도의 이탈자는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 지만, 제가 성장할 때보다 학생 수가 훨씬 더 줄어든 상황에서 매년 그 정도라면 결코 적지 않은 수입니다. 불안정한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 또한 국가의 일 아니겠습니까?

이수정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가정을 대체할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학교 밖 청소년 지원은 여성 가족부 소관입니다. 그래서 여성 가족부가 지역사회 청소년 상담 복 지 센터와 연계해 ‘위기 청소년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서비스 를 운영하고 있는데, 문제는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가출 청소년들은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기보다는 가출 패밀리에 들어가 성매매로 자생하는 쪽을 택합니다. 또한 가출 청소년들을 호 시탐탐 노리는 사업자들이 먹잇감을 여성 가족부에 넘기지 않고 어 떻게든 유인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다혜

결국 가출 청소년들의 성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적극적

으로 처벌하면 좋을 텐데요. 지금은 가출 청소년들이 눈 돌릴 곳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머물 곳을 찾기도 힘든데 하룻밤 잘 곳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성 매수자들은 스


마트폰 접속 한 번이면 이루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만나게 됩니다.

이수정

성매매 전체를 단속하거나 음란물 전체를 불법으로 만

드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최소한 미성년자 피 해만이라도 줄이기 위해 의제 강간 연령을 높여 최소 16세가 될 때 까지, 세상에 대한 이해가 생길 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말입니다. 수사권 조정 같은 문제는 관심이 큰데, 의제 강간 연령에 대해서는 다들 관심이 없습니다.

이다혜

저희가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을 통해

무언가 한 가지라도 꼭 이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의제 강간 연령 을 현행 13세 미만에서 16세 미만으로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형편을 보면 쉽지 않아 보이니, 본의 아니 게 이토록 오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성매매의 결제 수단이 신용 카드에서 비 트코인 같은 가상 화폐로 이동하면서 범죄를 추적하거나 단속하기 가 더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법과 제도를 구 비한다 해도 기술이 더 빨리 발전하는 상황이다 보니, 어떻게 다 쫓 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수정

기술은 당연히 발전합니다. 원래 나쁜 일에는 머리가 더

잘 돌아가기 마련이라 범죄에는 온갖 혁신적인 기술들이 다 사용되 죠. 그래서 수사가 어렵다, 사건화하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그러니 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것입니다. 그 할 수 있는 일에 의제 강 간 연령을 높이는 것도 포함되고요.


이다혜

다큐멘터리에서 마약은 한 번밖에 팔 수 없지만 아이들

은 팔고 또 팔 수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매매를 시작한 십 대가 이십 대가 되고 삼십 대가 되는 것이기에 어린아이를 성매매로 유인하는 것이 그만큼 범죄자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좋을 것입니다. 반대로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만큼 빠져나오기가 더 어려워지고요.

이수정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만연된 사회에 미래는 없습니다.

옆집 아이를 사고팔아도 우리 집 일이 아니니까 우리 가족은 안전할 까요? 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 용인되어서는 안 될 일 들이 수사하기 어렵다, 접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방임되는 동안 사 회는 썩어 문드러질 것입니다. 현재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고 어떻게든 규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만약 수사가 어 렵다면 부분적으로 함정 수사라도 허용해야 합니다. 인권 침해의 위험이 있다지만, 누군가의 인권만 절대적인 가치 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서 우선적으로 고려 되어야 할 사안이 무엇인지를 따져야겠지요. 사람을 사고파는 것, 더군다나 아이를 사고파는 일이 인권을 이유로 방치되는 것이 옳을 까요. 분명하게 필요한 수사를 인권 침해를 이유로 하지 않는다, 이 것은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일 아닐까요. 6000건의 음 란물을 피의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 니다. 추가 범죄 수사를 위해 그 음란물을 어떻게든 다시 찾아야 한 다고 봅니다.

이다혜

피의자가 구속이 안 되는 것도 놀랍지만, 미성년자들이

찍힌 동영상 증거물을 다시 돌려줬다는 것은 증거를 없애라는 뜻으


로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사회가 문제의 치과 의사에게 아동 성 착취를 다시 해도 괜찮고, 그때도 법적으로 빠져나갈 구멍 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셈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현실을 미성년 피해자들은 잘 모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잘못을 저지른 사람 은 벌을 받는다고 배워 왔는데 현실은 다릅니다.

이수정

그것이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경계 지점 같습니다. 어느

나라나 성범죄는 발생합니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을 중히 여기고 아이를 찾아 나서는 이 다큐멘터리 속 국가는 그 점에서 선진국입니 다. 그저 일부 아이들의 불행이고,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해서 생 긴 일이니, 너희의 불행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사회가 과연 선진 국일 수 있을까요.

이다혜

이 점은 성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탈성

매매한 분이 쓴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저자는 처음에 이른바 2차라고 불리는 성매매를 나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이 분야의 산업 구조가 어떻게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믿음직하게 뭔 가 도와줄 것처럼 접근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결국 저자로 하여 금 성매매를 하게 만드는 일종의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 국 어딘가로 계속 팔려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수정

현실적으로 성매매가 단번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당

위성을 떠나 구현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고죄가 폐지 되었던 과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친고죄는 어느 날 갑자기 순식간에


폐지된 것이 아니고 아동 청소년・장애인・성범죄의 친고죄가 폐지 된 후에 순차적으로 성인 성범죄의 친고죄까지 폐지됐습니다. 그래 서 의제 강간 연령 개정도 필요한 것이고요. 최소한 이런 것들부터 지켜보자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지노선을 설정한다고나 할까요.

이다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안전

을 담보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약자부 터 먼저 배려하는 것인데, 어린아이들조차 지킬 수 없다면 어쩌겠습 니까. 의제 강간 연령이 얼마나 중요한 이슈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다큐멘터리 속 아이들은 구출되어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출을 합니다. 폭력 가정이 아니고 부모 가 아이에게 굉장히 헌신적인 보살핌을 제공하는데도 약물을 구하 기 위해 가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약물이 가출 이유의 전부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수정

이미 성폭력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이 회

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려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고 지레 생 각해 버립니다. 한국은 여전히 순결 의식이 있는 가부장적인 사회라 서 더욱 그렇습니다. 엄마가 자신에게 더 관대하고 신경 쓰는 것을 오히려 상처로 느끼기도 합니다. 피해자의 회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단순히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특히 전문가들의 도움과 심리 치료 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세금을 쓰듯이 피 해자를 지원하는 데도 세금을 써야 합니다. 오늘날엔 ‘회복적 정의’


라는 개념이 등장해 외국의 경우에는 불법 행위로 낸 벌금의 많은 양을 피해자 구조 및 지원에 사용합니다. 한국의 경우 벌금은 국세 에 해당하기 때문에 법무부 예산으로 들어오는데, 이제야 겨우 6퍼 센트 정도를 피해자 지원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

이다혜

그래서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복구

하기 위해 병원을 다니거나 상담을 받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합 의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수정

다행히 친고죄가 폐지되어 합의를 해도 성범죄 사건이

진행되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성의 인권과 관련해 서 친고죄 폐지보다 중요한 이슈도 드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 나 그것만으론 불충분합니다. 가해자들을 처벌한다고 해서 피해자 들의 피해가 저절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이슈는 또 다른 형사 정책적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고민하기 보다 수사권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저는 감시하는 단계가 많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들이 못한 것을 우리가 감시하고, 우리가 못한 것을 저들이 감시하는 공 수처를 만든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중요 한 사건으로 분류되지 못하는 사건들, 이를테면 아동 학대나 가정 폭력처럼 아이나 여자가 피해자인 대다수의 사건들이 수사권 조정 때문에 지금보다 더 사건화되기 어려워질까 봐 우려가 됩니다.


이다혜

버닝썬 사건이 처음으로 알려져 매일 보도되는 뉴스를

볼 때만 해도 사건이 이런 식으로 끝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 니다.

이수정

저는 버닝썬을 즉시 압수 수색하지 않을 때 이미 어느

정도 예견할 수밖에 없었어요. 폐업 처리해서 싹 다 정리하고 증거 가 없는데 어떻게 수사를 하겠습니까. 지자체와 일부 에이전트들에 서 시간을 주며 증거 인멸을 용인해 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다혜

다큐멘터리 「팔려 가는 소녀들」을 보면 어쨌든 미국에

서도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는 않기 때문에, 해결 과정에서 분명 히 어려운 사건임을 알면서 뛰어드는 변호사도 있고, 왜들 이렇게 관심이 없느냐며 더 강력히 밀어붙이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결국 이 것은 피해자 한 사람이 노력해서 될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자칫하면 피해자들이 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 때문에라도 피 해자를 돕는 시스템을 확실히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 니다. 이를테면 다큐멘터리 속 M. A.를 납치한 여자는 과거에 똑같 은 범죄를 당한 피해자였습니다.

이수정

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면서 피해가 반복됩니다. 처음

에 성폭력 피해를 당한 아이들이 나중에는 가출 패밀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더 어린 피해자를 집단 폭행하는 식입니다. 이때 여자 아이들이 일렬로 서서 피 흘리는 피해자에게 주먹질하고 발길질하 는 영상의 선정성 때문에 집단 폭행한 사건만 언론에 보도될 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논의나 진단은 없습니다. 아이들을 전


부 엄벌해라, 구속시켜라, 형사 처벌 연령을 낮추라는 이야기만 나 올 뿐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교도소로 보내면 그곳에서 또 포주를 만나 점점 더 큰 조직이 되기도 하지요.

이다혜

아동을 납치한 사람이나 매매한 사람은 물론이고 아동

을 사고파는 사이트로 돈을 버는 기업과 운영진들도 반드시 처벌해 야 합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언급되는 기업은 백페이지닷컴(backpage. com)입니다.

이곳은 크레이그리스트 다음으로 큰 인터넷 거래 사이

트로, 미국 인터넷 섹스 광고 시장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 다. 미국은 자유로운 인터넷 발전을 보장하기 위해 1990년대에 통신 품위법을 만들었는데 회사는 이 법을 근거로 하여 미성년 여성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업로드한 것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습 니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 아닌가요?

이수정

그렇죠. 그래도 미국은 법을 만들어서 법에 위배되는 것

들은 예외 없이 처벌하고 있는데, 우리는 민간을 제재하는 법률을 만드는 데 항상 논란이 있어서 민간의 자발적 의지, 자율 통제를 우 선으로 합니다. IT 업체에게 로그인할 때 성인 인증을 받아라 하는 종류의 권고만 하는 셈이죠. 그래서 성인 인증을 하긴 하는데, 아이 들이 어른의 주민 등록 번호만 입력하면 그 이상은 확인을 안 합니 다. 많은 부분이 형식적이라는 것이 미국과 가장 다른 점으로 보입 니다. 입법을 하지 않고 자발적인 자유 권한을 주는 바람에 오히려 아무것도 제재되지 않고, 업체는 빠져나갈 구멍만 생긴 셈입니다. 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제재 자체가 불가능합 니다.


이다혜

다큐멘터리 속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것도 바로 그

부분 때문인데요, 거의 매번 패소를 합니다. 재판부가 판단하기에 IT 산업의 발전이 학대받는 아동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어쨌 든 이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상에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소송과 사회적 비난에 직면한 백페이지닷컴의 대처법도 굉장히 교활합니다. 먼저 국립 아동 실종 및 학대 센터와 파트너십을 맺어 아동 보호에 앞장서는 척합니다. 그리고 뭔가 대응해야 할 때는 여 성 관리자를 전면에 내세워 이 업체가 국립 아동 실종 및 학대 센터 와 파트너십을 맺어 일 년에 6800건을 단속했고 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들도 노력하고 있으니 너무 과한 요구는 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행동 자체가 눈 가리고 아웅입니다.

이수정

우리의 경우에는 이 정도만 해도 굉장히 높이 평가받습

니다. 원스토어가 자발적 의지로 앱 업체에 엄격한 성인 인증을 요 구하기 시작해 그 취지를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트너십 이라 하니 떠올랐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치과 의사가 경찰 발전 위 원회의 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영상을 모조리 다시 돌려준 것인 지, 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네요.

이다혜

오히려 뒤에서 숨길 짓을 하는 사람일수록 앞에서 더 적

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척하나 봅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올 공 격이나 비난을 예상하기 쉽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피해 갈 여 지가 생길 테니까요.


정부와 사회가 방관하는 사이에 회사가 벌어들이는 돈은 굉장히 큽니다. 백페이지닷컴의 경우 2015년 수익이 1억 5300만 달러, 한화 로 1780억 정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미성년자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고 책임지지도 않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사라진 아이를 찾기 위해 부모들이 계속 해서 성매매 사이트에서 검색을 합니다. 나이가 어리고 자기 딸과 비슷한 여자아이의 사진이 올라오면 확인하면서 아이의 행방을 추 적합니다. 한쪽에서 애타게 아이를 찾거나 말거나 이런 비슷한 사업 구조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깁니다. 한국도 그런 앱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수정

그렇죠. 그중 한 100개 정도는 악성으로 분류됩니다. 앱

업체들은 그렇게 미성년자 여성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 고 있습니다. 양진호는 처벌받았지만 회사 규모는 훨씬 커졌다고 합 니다.

이다혜

누군가가 체포되고 사건화되어도 충분히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이것이 돈벌이라고 알려 주는 역할에 그치는 듯합니다.

이수정

외국에서는 이런 업체들에 징벌적 손해 배상을 청구해

서 범죄 수익을 몰수할 수 있게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내 아이만 안전한 안전지대는 없다

이다혜

피해자 가족들은 직접 이런 흐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합니다. 자녀의 인신매매 피해를 알아내고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 문제를 공론화하고 가해자를 고발하며 싸움을 시작 한 것이 변화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사회적 진보나 제도적 개선도 결국은 이런 용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수정

미국만의 문화적 특이성도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유

교적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가출한 아이의 부모가 다큐멘터리 속 부 모처럼 피해를 고발하고 아이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요. 그러면 많 은 사람들이 그 부모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목소리를 더해 줄까요. 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자식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비난하겠지요. 가화만사성이라 했는데 집구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사람이 사회가 문제라고 떠들 수 있느냐면서 손가락질 하고요. 그렇게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으면 야금야금 문제가 커져 우리 가족에게도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부모가 모를 뿐입니 다. 닫힌 방 안에서 내 아이가 이런 랜덤 채팅 앱을 하고 있을지 모르 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다혜

이런 피해를 입는 아이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

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해야 그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런 피해를 입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요.


범죄자들이 나쁜 것이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요. 그 피해자들이 미성년자인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다큐멘터리는 마지막에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일 텐데, 지난 2018년 2월 미국 하원은 온 라인 사이트에 성매매를 조장하는 광고나 콘텐츠가 게재될 경우 사 이트도 민형사 처벌을 한다는 내용의 온라인 성매매 퇴치법을 통과 시켰습니다.

이수정

여기에서 형사 처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민사, 손해 배

상 청구 소송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다혜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IT 기업들도 환영의 뜻을

밝혔고, 이 법안이 상원을 통과할 가능성도 높다고 합니다. 한국도 이미 한참 전에 같은 질문을 놓고 사회 전체가 진지하게 논의를 했 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수정

이 법이 미국에서 상원을 통과해 입법이 되면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글에 올라오는 앱 중에도 랜덤 채팅 앱이 많습니다. 여기라도 깨끗해지면 우리한테도 도움되 는 측면이 있으니 반가운 일입니다. 인터넷은 국가의 경계가 없으니 까요.

이다혜

그렇지만 한국인 아동 성 착취 동영상 사이트 운영자 손

정우 씨는 처벌을 약하게 받았습니다. 다운로드 받은 미국인들은 미 국에서 강력 처벌을 받는데 말입니다. 국제 공조를 해 미국으로 보


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한국은 대체 누구를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불법 이득을 취하 는 사람들의 권리와 미래를 보장하는 데 더 열중하고 있는 건 아닐 까요. 특히 이런 미성년자들은 자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충분히 교육받을 기회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저도 성인 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한참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부분들이 많습니 다. 어떤 일들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고,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도 있는 심각한 일이었음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되기도 했는데,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연령대의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보 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수정

맞아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다혜

참 머나먼 이야기 같습니다. 이렇게 우울하게 마무리하

게 되어 안타깝지만, 아직까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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